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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디노 전투 (3) - 쿠투조프는 대체 왜 그랬을까 나폴레옹은 자신의 방식대로 러시아군 좌익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걸리적 거리는 러시아군 진지였던 셰바르디노 보루를 먼저 걷어내기로 합니다. 보로디노 진지를 발견했던 9월 5일 바로 그날 저녁 5시, 거기까지 걸어오느리 지쳤을 다부의 군단에게 나폴레옹은 휴식이고 뭐고 없이 당장 공격을 지시했습니다. 콩팡(Compans) 장군의 사단이 그 작은 진지를 공격했는데, 여기는 워낙 작고 고립된 진지이다보니 쉽게 함락되었습니다. (콩팡(Jean Dominique Compans) 장군입니다. 나폴레옹과 동갑이었던 그는 란, 그리고 나중에는 술트 밑에서 지휘관을 했고 마렝고와 아우스테를리츠 등에서 공훈을 세웠습니다. 1815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때는 나폴레옹 편에 붙었으나 현역 군 지휘관으로는 뛰지 않아 부르봉 왕가로부.. 2020. 8. 10.
보로디노 전투 (2) - 나폴레옹은 대체 왜 그랬을까 9월 5일 이른 아침, 콜로츠코예(Kolotskoie)의 작은 수도원에 도착한 뮈라의 정찰대는 나지막한 구릉 위에서 전투 준비를 갖추고 있는 러시아군을 발견했습니다. 뮈라는 당연히 나폴레옹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러시아군이 후퇴를 멈추고 땅을 파고 있다는 소식에 나폴레옹은 어깨춤을 들썩이며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나폴레옹이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 무렵이었고 마침 수도원의 점심 식사 시간이었습니다. 작고 초라한 식당에 모여있던 늙은 러시아 수도승들에게 엉터리 폴란드어로 '식사 맛있게 하세요'(불어로 Bon appetit)라고 아무렇게나 서둘러 인사를 한 나폴레옹은 곧장 말을 달려 러시아군의 진지를 멀찍이서 관찰했습니다. 시리아에서 프로이센까지, 그리고 스페인에서 폴란드까지 온갖 전장을 경험해 본 나폴.. 2020. 8. 6.
보로디노 전투 (1) - 러시아군의 방어선 구축 9월 3일, 톨의 안내를 받으며 보로디노 현장에 도착한 쿠투조프의 눈에도 이 지역이 나폴레옹과 맞서 싸우기에는 최적의 장소라고 판단되었습니다. 여태까지 러시아군이 철수해온 지역은 탁 트인 전형적인 러시아 평야지대였고, 특히나 나폴레옹이 진격하는데 사용하고 있던 스몰렌스크-모스크바 대로는 당연히 평탄한 지대를 따라서 흐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수적 열세에 고심하던 러시아군은 당연히 방어전을 펼치기를 원했는데, 그러자면 높은 고지나 넓고 깊은 강을 끼고 싸우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그렇다고 스몰렌스크-모스크바 대로에서 멀리 떨어진 산악 지대에 들어가 진을 칠 수도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들을 감시할 부대를 붙여놓고 그대로 모스크바로 진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보로디노 .. 2020. 7. 27.
쿠투조프의 고민 - 보로디노(Borodino)로 가는 길 쿠투조프는 왜 전임자인 바클레이가 온 나라로부터 욕을 먹었고, 왜 자신이 그 후임자로 지명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궁극적으로야 나폴레옹을 무찌르는 것이었습니다만 1차 목표는 모스크바를 지키는 것이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후퇴를 했다가는 자신도 바클레이와 다를 바가 없게 되는 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정치적 상황은 그렇다치고, 군사적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과 엄청난 물자와 비용을 희생시켜가며 싸우는 이유는 승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승리하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싸운다는 것은 무능을 떠나 국가에 대한 반역 행위에 가까운 일입니다. 쿠투조프가 나폴레옹과 싸우려고 보니, .. 2020. 7. 20.
쿠투조프의 마성적 매력 쿠투조프가 상트 페체르부르그에서 알렉산드르로부터 정식으로 야전군 총사령관의 임명장을 받은 것은 1812년 8월 20일이었습니다만, 하루가 급한 전시 상황에서도 쿠투조프는 당장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임명장을 받고 나와서 한 최초의 일은 카잔 성당(Kazanskiy Kafedralniy Sobor, the Cathedral of Our Lady of Kazan)에 가서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제복 코트를 벗고 성스러운 성모 마리아의 성상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한참 동안 기도를 올렸습니다. 다음 날도 출발하지 않고, 이번에는 와이프까지 데리고 상트 블라디미르(St. Vladimir) 성당에 가서 역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임명장을 받은.. 2020. 7. 6.
두 도시의 분위기 - 쿠투조프의 등장 전방에서 프랑스군과 러시아군, 나폴레옹과 바클레이 등이 뒤엉켜 몸과 마음이 다 고생하는 동안, 후방의 러시아인들도 적어도 마음은 큰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수도이자 황실 가족들이 모여 살던 서구적 도시 상트 페체르부르크는 상류층이나 서민층이나 모두 '이 전쟁은 이미 진 것'이라는 패배주의가 주도적이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자금과 인력을 모집하는데 성공하고 8월 초 상트 페체르부르그로 돌아온 알렉산드르가 보니, 심지어 자기 모친인 황태후조차도 각종 귀중품을 이미 도시 밖으로 빼돌려 놓고 자신도 언제든 피난갈 수 있도록 마차를 준비시켜 놓은 상태였습니다. 다른 귀족 가문들도 모두 말과 마차를 즉시 출발 가능 상태로 대기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트 페체르부르그와는 달리 모스크바는 적어도.. 2020. 6. 1.
스몰렌스크에서 모스크바로 - 러시아 측의 사정 러시아군의 상황도 당연히 좋지는 못했습니다. 물리적으로도 러시아군은 정말 걸음아 날살려라 도망치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전쟁 초기, 병사들의 노숙에 대해 항상 시적으로 기술하던 젊은 독일계 에스토니아 귀족 출신의 러시아 기마근위대 장교 욱스퀄(Boris von Uxkull)도 8월 21일 철수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겁먹은 토끼처럼 달아나야 했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죽어라 도망치는 처지이다보니 보급도 프랑스군에 비해 별로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도 부족했지만 먹을 것이 있다고 해도 그걸 조리해 먹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후위부대는 코노브니친(Petr Petrovich Konovnitsin) 장군이 이끌고 있었는데, 이들은 스몰렌스크에서 출발한 이후 2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냅다 뛰.. 2020. 5. 18.
스몰렌스크에서 모스크바로 - 프랑스 측의 사정 나폴레옹은 스몰렌스크를 점령한 뒤 부하들에게 신이 나서 러시아군의 비겁함을 비웃으며 이제 러시아 본토에 발판을 마련했으니 러시아의 돈과 자원을 이용해서 병력을 쉬게 하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추가 병력을 모집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의 마복시였던 콜랭쿠르에게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계획까지 말했습니다. "러시아의 신성한 도시 중 하나인 스몰렌스크를, 그것도 러시아 백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렇게 포기했으니 러시아군의 입장은 정말 난처해졌어. 이제 우리는 러시아군을 조금 더 편안한 거리로 쫓아내기만 한 뒤에 통합 작업을 시작하면 돼. 이 요충지를 이용해서 병력을 쉬게 하면서 이 지방을 조직화하겠어. 알렉산드르의 기분이 아주 좋아질 일이지. 그러면 이제 내 군단들은 더욱 강해질 거야. 난 비텝스크에 .. 2020. 5. 11.
쥐노, 러시아군을 구해내다 - 스몰렌스크 전투 (6) 바클레이는 8월 17~18일에 벌어진 스몰렌스크 전투 동안 프랑스군이 강 북안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는 것에 집중하며 탈출로를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스몰렌스크에서 전투가 벌어진 이유는 스몰렌스크를 통과하는 민스크-모스크바 간의 군사도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고민할 것 없이 그냥 그 군사도로를 따라 모스크바 방향으로 탈출하면 그만이었지요.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스몰렌스크에서 출발하는 모스크바로 향하는 군사도로는 초반 4~5km가 드네프르 강변을 따라 나있었던 것입니다. 스몰렌스크를 폭격하던 프랑스군 포병대가 이 길을 따라 후퇴하는 러시아군을 1~2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두들겨 팰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지도상에 노란색 원으로 표시된 부분이 발루티노(Valutino, Валути.. 2020. 4. 27.
화염 속의 얼음 - 스몰렌스크 전투 (5) 웅장한 성벽을 둘러싸고 벌어진 스몰렌스크 전투는 낮에도 장관이었으나 밤이 되자 더욱 장엄한, 어떻게 보면 무시무시한 광경을 연출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낮부터 박격포를 이용하여 좁은 스몰렌스크 시내에 계속 폭발탄을 쏘아넣고 있었습니다. 스몰렌스크 시내의 건물들은 대부분 나무로 지어진 것들이라서, 이 포격은 곳곳에서 화재를 일으켰고 밤이 되자 온 시내가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성 밖에서 포병들을 지휘하던 프랑스군 불라르(Boulart) 대령의 시선에는, 시커먼 성벽 위에서 불바다를 배경으로 총을 들고 움직이는 러시아군 병사들의 모습이 지옥불을 속에서 움직이는 꼬마 악마들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프랑스군의 팡텡 데 조두와르(Fantin des Odoards) 대위는 '단테도 지옥에 대한 묘사를 할 때 이 광경에서.. 2020. 4. 20.
바클레이의 도착 - 스몰렌스크 전투 (3) 스몰렌스크는 인구 1만2천 정도에 건물이 2200 채 정도 있는 작은 도시였고 그 자체로는 특별히 꼭 탈취해야 할 중요한 군사적 가치가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곳은 예카테리나 여제 때에 건설된 민스크-스몰렌스크-모스크바를 잇는 도로의 중간 기점으로서, 그 중간을 가로지르는 드네프르 강을 건널 다리가 2개나 놓여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바클레이의 러시아군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크게 우회한 것은 좋았으나, 이제 바클레이의 뒤를 치기 위해서는 드네프르 강을 건너야했고 그러자면 스몰렌스크를 손에 넣어야 했습니다. (1812년 당시 스몰렌스크의 성벽과 방어탑 위치입니다. 실제로는 방어탑이 30개가 아니라 훨씬 더 많았던 모양입니다.) 이런 군사적 가치가 있었으므로 스몰렌스크는 그 규모치고는 꽤 탄탄.. 2020. 3. 30.
엇갈린 발걸음 - 스몰렌스크 전투 (2) 바클레이가 7일 밤 바그라티온과 플라토프에게 보낸 명령서는 2가지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독일인 특유의 무뚝뚝함 때문인지 원래 바그라티온과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이었는지, 바그라티온은 그냥 '우회전하여 전진'이라는 퉁명스러운 명령만 들어있었을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별 설명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바그라티온은 영문을 몰라 당황했고, 일단 명령에 따르기는 따랐지만 마음 속으로는 바클레이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점점 커졌습니다. 둘째, 그나마 플라토프에게는 아예 명령서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당시 전장에서는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무선 통신도 없고 GPS도 없고 항공 정찰도 없으니 아군끼리도 넓은 지역에서는 상호 교신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담이지만 1815년 워털루 전.. 2020. 3.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