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3209 라이프치히 전투 (마지막편) - 3개월만의 재회 나폴레옹과 함께 라이프치히에 집결했던 그랑다르메 병사들은 이미 과거 아우스테를리츠나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싸웠던 정예병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연합군의 추격에 매우 끈질기게 저항했습니다. '내가 대체 왜 프랑스를 위해 싸워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던 약 4만 정도의 독일계 병사들 대부분은 그때 즈음해서는 이미 연합군에 투항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로흘리츠(Friedrich Rochlitz)라는 이름의 프로이센 장교의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 및 폴란드 병사들의 저항은 매우 완강하여, 일부는 가슴까지 차는 물 속에 들어간 상태에서도 연합군을 향해 총을 쏘았고 심지어 재장전까지 했다고 합니다. (전장식 머스켓 소총의 장전 방법입니다. 설령 .. 2026. 4. 27. 라이프치히 전투 (43) - 영웅, 강에 지다 엘스터교가 폭파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습지대인 북서쪽으로 방향을 튼 병사들은 먼저 라이헬 정원(Reichels Garten)과 루돌프 정원(Rudolphs Garten)이라는 공원들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정원이니 공원이니 하니까 잘 가꿔진 산책로를 통해 편하게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곳 라이프치히 북서쪽의 평원은 우기에 주기적으로 홍수가 나는 범람원이었습니다. 이 커다란 정원들을 만들 때도, 먼저 대규모 배수 작업을 하고 여러 수로들을 파는 등의 많은 노력을 들여야 했습니다. 즉, 이 공원들 내부에도 수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공원 안의 수로라고 하면 그냥 아담한 도랑 같은 것을 기대할 수도 있으나, 이 수로들은 갈 길이 급한 병사들에.. 2026. 4. 20. 라이프치히 전투 (42) - 대령과 상병 지난 번에 언급한 대로, 라이프치히 서쪽 엘스터강에 놓인 다리, 즉 엘스터교(Elsterbrücke)를 폭파하는 임무는 그랑다르메 수석 공병대의 수석 참모 몽포르(Joseph Monfort) 대령에게 떨어졌습니다. 그는 10월 19일 아침부터 미리 엘스터교에 폭약을 설치하고 다리 동쪽편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오후가 되면서 본격적인 후퇴가 시작되자 상황은 곧장 혼란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라이프치히 시내에서는 요란한 총성과 함께 고함소리,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철수하는 아군은 이미 부대 단위의 통제가 무너진 채로 무질서하게 좁은 다리를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식이면 아직 아군이 다 빠져나오기 전에 언제라도 적군이 불쑥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몽포르 대.. 2026. 4. 13. 라이프치히 전투 (40) - 19개의 성문 10월 19일 연합군의 라이프치히 시내로의 공격은 아침 7시~8시 사이에 시작되었습니다. 라이프치히를 둘러싼 연합군은 워낙 긴 전선에 걸쳐 늘어져 있었고, 각각의 부대가 당면한 전선 상황도 달랐기 때문에 이 공격은 제 시간에 맞춰 일제히 시작되지 않았고, 드문드문 시간차를 두고 개시되었습니다. 가령 베르나도트 휘하의 뷜로는 아침 7시부터 공격을 시작했으나, 블뤼허의 북부 방면군의 공격은 시작이 매우 늦어 오전 8시경에나 파르터 강을 건넜고, 오전 10시반 경에나 제대로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느리기 짝이 없던 베르나도트의 공격이 가장 빨랐고, 반면에 베르나도트는 프랑스와 내통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근거 없는 비방을 늘어놓던 블뤼허의 공격이 가장 느리고 부실하게 진행된 것입니다... 2026. 3. 30. 라이프치히 전투 (39) - 서로 말 안 섞는 사이 10월 18일 저녁 7시경, 요크 장군은 블뤼허로부터 '나폴레옹이 서쪽으로 탈출한다는 정보가 있으니 당장 출발하여 할러(Halle)와 메르제부르크(Merseburg)에서 잘러(Saale) 강을 건너는 다리들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와 함께, 블뤼허는 요크에게 '후퇴하는 적군에게 가능한 한 많은 피해를 끼치되, 현장에서의 상황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작전해도 좋다'는 허락도 받았습니다. 블뤼허는 이 작전에 나서는 요크의 프로이센 군단에게 자켄(Sacken)의 러시아 군단 소속 코삭 기병들과 함께 그날 투항한 작센 기병여단을 붙여주어 보강해 주었습니다. 이것만 보면 요크는 꽤 꿀보직을 맡은 것처럼 보입니다. 당장 내일 벌어질 라이프치히 시가전의 혈전으로 부하들을 내몰지 않아도 되었고, 또 상관.. 2026. 3. 16. 라이프치히 전투 (38) - 간절했던 1승 10월 18일 낮의 전투는 블뤼허가 담당한 북쪽 전선을 제외하고 모든 방면에서 매우 치열했습니다. 블뤼허가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이유는 자신의 4개 주력 군단 중 가장 강력했던 랑제론의 러시아 군단을 베르나도트에게 떼어주었고, 또 요크의 프로이센 군단은 16일의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전투는 전체 전선에서 치열했지만 슈바르첸베르크의 보헤이마 방면군이 담당했던 남쪽 전선에서는 연합군이 큰 전진을 하지는 못했고, 정작 돌파구가 뚫린 곳은 베르나도트와 베니히센이 함께 공격한 라이프치히 북동쪽 쇤너펠트였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남쪽 전선도 18일 새벽과 크게 다르지 않게 코네비츠(Connewitz) - 프롭스트하이다(Probstheida).. 2026. 3. 9. 라이프치히 전투 (37) - 어두운 거리 이렇게 그랑다르메의 퇴각 작전 세부안에 대해 명령서를 발부한 나폴레옹은 그 뒤에도 바빴습니다. 린더나우에서 귤라이의 포위망을 뚫고 바이센펠스 방면으로 미리 진출한 베르트랑 및 에르푸르트(Erfurt),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등의 수비대 사령관에게도 명령서를 보내 식량 준비 등 추가적인 지시를 내렸습니다. 작전 명령서 내용이 식량 준비라니 약간 의아할 수 있으나, 러시아 원정 내내 식량 부족에 시달렸던 나폴레옹에겐 작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라이프치히에서도 그랑다르메는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묵었던 프로이센 호텔에서조차 나폴레옹의 시종들은 나폴레옹이 늦은 저녁으로 먹을 빵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더 나아가 마인츠(Main.. 2026. 3. 2. 라이프치히 전투 (36) - 악마는 디테일에 흔히 작은 실수 하나로 인해 큰 재앙이 찾아올 수도 있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이야기하면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큰 재앙은 작은 실수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실수가 겹쳐진 결과이고, 그렇게 많은 실수가 겹쳐질 때까지 상황이 방치된다는 것은 그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의 제국이 무너진 것은 상병(corporal) 하나의 실수가 아니라, 러시아 원정 때부터, 아니 어쩌면 1807년 아일라우 전투 때부터 쌓여온 피로로 인해 빚어진, 나폴레옹 제국의 피로 골절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보시게 될 과정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피로 골절은 운동선수에게 곧잘 일어나는 골절입니다. 뼈가 부러지려면 10이라는 충격이 가해져야 할 때, 1이라는.. 2026. 2. 23. 라이프치히 전투 (35) - 후퇴의 핑계 작센군의 집단 이탈이 다국적군 그랑다르메에게 꽤 큰 충격을 주기는 했습니다만, 그것으로 인해 전황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그랑다르메는 파운스도르프에서 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핑계와 자랑거리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는 했습니다. 작센군의 집단 이탈에 대해 가장 먼저 생색을 내기 시작한 것은 영국 로켓여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무기에 혼이 빠진 작센군 수천 명이 불과 200명도 안 되는 자신들에게 항복했다고 본국에 보고했습니다. 물론 이건 전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작센군은 로켓 사격을 직접 받은 부대도 아니었고 로켓과는 무관하게 그날 오전에 이미 연합군으로의 이탈을 모의하고 있었으며, 분명히 스트로가노프의 러시아군에게 전향 .. 2026. 2. 16. 라이프치히 전투 (34) - 나폴레옹이 만든 유행어 원래 유럽 전장에서는 항복이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고 불명예스러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쟁쟁한 부하들인 뮈라나 란 등도 한 번씩 적에게 항복하여 포로 신세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작센군의 경우는 항복이라기보다는 적군에게 전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전향도 원래 큰 수치는 아니었습니다. 몇 개월 전에 프랑스측에서 연합군측으로 넘어온 조미니의 경우도 있었고, 당장 프로이센군의 요크 장군만 하더라도 1812년 러시아 원정 말미인 12월 30일 타우로겐(Tauroggen) 조약을 맺고 그랑다르메에서 러시아군으로 전향했습니다. (타우로겐 조약을 기념하는 비석입니다. 타우로겐(Tauroggen)은 독일식 지명이고, 지금 그곳은 리투아니아 도시입니다. 리투아니아어로는 토라게(Tauragė)라.. 2026. 2. 9. 라이프치히 전투 (33) - 작센인들의 결단 레이니에의 제7군단은 베르나도트를 놓친 김에 베를린으로 가겠다는 나폴레옹의 즉흥적인 결정 탓에 엘베강을 건너 로슬라우(Rosslau)까지 갔었기 때문에, 라이프치히에 가장 늦게, 바로 그 전날인 10월 17일 오후 늦게서야 도착한 부대였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매우 지친 상태였는데,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파운스도르프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곳은 북서쪽에서 쳐들어오는 블뤼허와 동쪽에서 쳐들어올 베니히센의 딱 중간 지점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면 당일 전선 중에서 전투가 가장 느슨할 것 같은 지점이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이 레이니에를 거기에 배치한 것은 제7군단이 지친 몸이라는 것을 배려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그들의 위치가 마침 거기였기 때문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그쪽으로 베르나도트.. 2026. 2. 2. 라이프치히 전투 (32) - 유럽 최고 미남의 죽음 1813년 8월 8일, 그러니까 나폴레옹과 연합군 간에 약속된 휴전 기간이 끝나기 2일 전, 여태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만 싸울 뿐 나폴레옹 전쟁의 주무대이던 독일 지역에는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던 영국군이 드디어 함부르크 바로 동쪽인 비스마(Wismar)에 상륙했습니다. 나폴레옹 체제에 저항하여 연합군 최후의 병사 1명이 쓰러질 때까지 싸우자고 가장 크게 외치면서도 얌체처럼 돈과 물자만 보낼 뿐 병력은 파견하지 않던 영국이 드디어 1개 여단의 지상군을 보낸다고 하니 연합군에서는 기대가 꽤 컸습니다. 그러나 정작 상륙한 영국군은 달랑 140명 정도였습니다. 그게 로열 로켓 여단(Royal Rocket Brigade) 전체 병력이었습니다. 전에 언급한 대로, 프로이센군이나 러시아군과는 달리 영국군에서는.. 2026. 1. 26. 이전 1 2 3 4 ··· 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