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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첸 전투 (14) - 나폴레옹의 새 그림 5월 2일 밤, 블뤼허의 프로이센 기병대가 4개 마을의 프랑스군 진지를 야습했을 때만 해도 나폴레옹은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 10시가 넘자, 나폴레옹은 좀 더 안전한 후방 뤼첸으로 돌아가 숙소를 정했습니다. 이건 특별히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습니다. 전투 현장은 거의 언제나 피범벅에 시신이 즐비하고 죽어가는 부상병들의 신음소리가 가득했기 때문에 거기서 총사령관이 숙소를 정하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사령관은 전투가 끝난 뒤에도 할 일이 매우 많았는데, 대부분 지도와 문서 작업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하기 위해서는 책상과 촛불이 꼭 필요했고, 따라서 호화롭지는 않더라도 벽과 지붕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4개 마을 전투를 그로스괴르쉔 전투라고 부르지 않고 뤼첸 전투라고 부르는 이유도 나폴레옹의 숙소와 상.. 2022. 12. 5.
뤼첸 전투 (13) - 혼란 속의 퇴각 연합군의 후퇴 결정이 늦게 내려졌기 때문에 당연히 실제 후퇴도 꽤 늦게 이루어졌습니다. 군대가 후퇴를 시작하려면 의외로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립니다. 총사령관이 결정을 내린 뒤에도 정식으로 명령이 구두 또는 서면으로 일선 대대장들에게까지 전달되는데까지 시간이 걸렸고, 천막이나 탄약, 솥단지 등의 짐을 싸는데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가장 시간이 걸리고 또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후퇴 계획의 작성이었습니다. 어느 부대가 어느 경로를 통해 어디로 후퇴하느냐도 중요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별로 달갑지 않은 후방 엄호 임무에 어느 부대를 배치하느냐 하는 결정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후위 임무에 이번 뤼첸 전투에 전혀 참전하지 않고 자이츠(Zeits)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밀로라도비치의 군단을 배치했습니다.. 2022. 11. 28.
뤼첸 전투 (12) - 프로이센의 분노와 아쉬움 양측이 도합 20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했던 뤼첸 전투는 당연히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며 후세의 역사가들이 나름대로 추측한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프랑스군과 연합군이 각각 얼마씩의 병력을 동원했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기록은 없을 정도입니다. 프랑스측은 약 1만5천, 혹은 2만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고 하고, 연합군측은 그보다는 적은 사상자를 냈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론입니다만, 역사가에 따라 연합군의 피해가 더 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참고로 비트겐슈타인은 공식 보고서에서 프랑스군의 피해는 1만5천, 연합군의 피해는 1만으로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연합군 진영에 있던 영국군 장교 캠벨(Neil Campbel.. 2022. 11. 21.
뤼첸 전투 (11) - 이긴 거야, 진 거야? 나폴레옹 시대에는 아직 세균의 존재 자체를 몰랐고 따라서 소독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며 항생제 따위는 물론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전쟁터에 나간 군인은 언제나 전사보다는 병사의 가능성이 훨씬 높았고, 그냥 찰과상에 불과한 가벼운 부상도 재수가 없으면 치명상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연합군 전체의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던 샤른호스트가 바로 그런 희생자였습니다. 그는 이 날 전투에서 유탄에 발에 맞아 부상을 입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가벼운 부상일 뿐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다들 생각했지만, 거의 2달 뒤인 6월 말, 협상을 위해 오스트리아를 방문했을 때 결국 그 부상이 악화되어 숨을 거둡니다. 그러나 최소한 전투 당일 밤이나 그 후 며칠 동안에는 기본적인 사무를 보는 것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 2022. 11. 14.
뤼첸 전투 (10) - "La garde au feu!" 5월 초 라이프치히 인근에서는 7시 30분 경부터 해가 지기 시작합니다. 기습을 위한 위치 확보 때문에 그 전날 밤부터 한숨도 자지 못하고 행군을 해야 했던 연합군은 물론, 아침부터 행군과 전투에 시달렸던 프랑스군도 해가 진 이후 어둠 속에서 싸우기에는 너무 지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아마 그날은 달도 밝지 않은 날이었나 봅니다. 연합군 사령부에서 이 전투를 참관하던 영국군 캐쓰카트(George Cathcart) 장군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밤이 되어 전투가 잦아들 때, 양군은 서로 평행의 위치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보아르네(Beauharnais) 부왕이 도착한 이후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우익을 상당한 정도로 우회 압박하여 페가우(Pegau)를 통한 연합군의 퇴각로를 위협하는 위치를 점거하고 있었다. 그러.. 2022. 11. 7.
뤼첸 전투 (9) - 외젠(Eugène)과 오이겐(Eugen)의 대결 베르트랑이 서쪽에서 힘겹게 스타지들 마을로 접근하고 있을 때, 나폴레옹이 있던 카야 마을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4시 경에 도착한 러시아 예비군단의 일부 병력들이 전장에 투입되면서 프로이센군이 기세를 올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하던 나폴레옹은 4시 반 경에 예비대로 있던 신참 근위대(Jeune Garde) 제1 여단을 투입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의 전술에서는 예비대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예비대는 최후까지 아껴두었다가 이제 전세를 뒤집거나 돌파구를 마련할 때 투입하면 효과가 만점이었거든요.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곰가죽 모자를 쓴 근위대 제1 여단이 라뉘즈(Pierre Lanusse)의 지휘 하에 진격을 시작하자 그 뒤를 따라 네의 제3 군단 병사들도 진격을 시작했고, 이들은 오랜 전투.. 2022. 10. 31.
뤼첸 전투 (8) - 짜르가 지휘하는 포병대 베르트랑이 이끄는 제4 군단 전력의 절반인 약 9천은 제12 사단 소속으로서, 바로 이들이 선봉에 서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이끌고 있던 것은 모랑(Charles-Antoine Morand) 장군이었는데, 타우차에서 스타지들 마을 사이의 중간 정도 지점인 포블스(Pobles)까지 가자 그의 앞을 가로 막는 것이 있었습니다. 베르트랑이 서쪽 측면에서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비트겐슈타인이 4개 마을의 전투 현장 대신 부랴부랴 이쪽에 펼쳐놓은 빈칭게로더의 러시아 예비 기병군단 약 1만으로서, 거기에는 골리친(Dmitry Vladimirovich Golitsyn) 장군이 지휘하는 흉갑기병대와 수십문의 기마포병대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다른 사단들이 3km 후방에 따라오고는 있었지만, 비교적 평탄한.. 2022. 10. 24.
뤼첸 전투 (6) - 나폴레옹의 속셈 볼콘스키 대공은 원래 게으른 쿠투조프를 감시하고 독촉하기 위해 짜르가 쿠투조프의 참모로 알박기를 해놓은 짜르의 심복으롯, 누구보다 짜르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짜르가 지금은 자제하고 있지만 나중에 승리가 확실해지면 짜르 본인이 직접 러시아 예비군단의 선두에 서서 나폴레옹에게 막타를 쳐서 승리의 주역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 토르마소프가 지휘하는 러시아 예비군단의 선두 부대의 지휘관은 코노브니친(Petr Petrovich Konovnitsin)으로서, 원래 쿠투조프의 참모였다가 볼콘스키 대공에 의해 교체된 인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코노브니친은 볼콘스키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코노브니친도 쿠투조프 못지.. 2022. 10. 10.
뤼첸 전투 (5) - 뜻하지 않은 부자상봉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고 4개 마을로 달려가던 네의 제3 군단 휘하에는 총 5개 사단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연합군과 4개 마을 및 스타지들에서 교전 중이던 수암 사단과 지라르 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3개 사단에게 명령을 내렸는데, 네는 뛰어난 지휘관답게 무작정 4개 마을에 3개 사단 전체를 돌격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그 중 마르샹(Marchand) 사단은 아이스도르프(Eisdorf)로 배치했고, 브레니에(Antoine François Brenier de Montmorand) 사단과 리카르(Étienne Pierre Sylvestre Ricard) 사단은 카야 마을 남쪽으로 진격시켰습니다. 그렇게 지시한 뒤 참모들과 함께 먼저 4개 마을로 달려간 네는 현장에 있던 수암 사단과 지라르 사단을 지휘하여 반격에 .. 2022. 10. 3.
뤼첸 전투 (4) - 바타이옹 카레(bataillon carré)란 무엇인가 비록 카야 마을로 내몰리기는 했지만, 원래 수암 사단의 병력 수가 프로이센군 2개 여단에 비해 크게 열세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지에 몰린 것은 수암 사단 대부분이 신병으로 이루어져 경험이 부족한데다 프로이센군이 2개 방향에서 공격해왔고, 결정적으로 포병 전력에서 크게 열세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안되는 수암 사단의 포병대는 전투 초기에 프로이센 포병대와의 대결에서 밀려 파괴되었으므로 프로이센 포병들은 프랑스 보병들에게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정적으로 우월했던 포병 전력을 4개 마을 안쪽으로 전개시켰다면 수암 사단은 거기서 끝장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 지휘부는 노장 블뤼허부터가 그저 용감할 뿐 엉성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처음 그로스괴르쉔 마을을 공격할 때 적극 활용.. 2022. 9. 26.
뤼첸 전투 (3) - 불안한 시작, 소극적인 전개 원래 비트겐슈타인의 기본적인 작전은 나폴레옹의 주력부대가 뤼첸을 지나 라이프치히 쪽으로 충분히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가, 프랑스군 우익의 뒤통수를 후려갈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면 당연히 프랑스군 주력부대가 저 멀리 지나간 뒤에 공격을 개시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탁 트인 평야지대인 라이프치히 일대에서 정찰을 해보니, 저 멀리 프랑스군 주력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행군해가는 것이 분명히 보였습니다. 기병대들이 잡아온 프랑스군 포로들을 취조해보아도, 5월 2일 아침에 나폴레옹의 사령부도 뤼첸을 떠나 라이프치히로 출발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작은 4개 마을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군기 빠진 후위부대 2천여명임을 참모 뮐링 대령 본인이 직접 정찰을 해보고 확인했습니다. 그러니 .. 2022. 9. 19.
뤼첸 전투 (2) - 계획대로 전개되는 전투란 없다 비트겐슈타인이 그로스괴르쉔 등 4개 마을에 주둔한 프랑스군 후위 부대를 공격하려 했던 것은 꼭 짜르와 프로이센 국왕에게 눈요깃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인근에 블뤼허와 빈칭게로더, 요크와 베르크 등 주요 부대들을 모두 집결시켜 놓고 있었고, 이제 오후 3시쯤 도착하게 되어 있는 토르마소프의 러시아군 본대만 오면 이번 작전에 투입할 병력을 거의 다 전투 위치에 가져다 놓는 셈이었습니다. 따라서 더 미룰 이유도 없었습니다. 프랑스군 우익의 후위 부대임이 분명한 눈 앞의 저 2천 병력을 제거한 뒤에는, 후방을 털린 프랑스군 우익을 뒤쪽으로 완전히 우회하여 바이센펠스-뤼첸 일대의 탁 트인 평원에서 자신들의 우월한 기병 전력을 투입하여 프랑스군 우익에게 결정적 한방을 먹일 작전이었습니다... 2022. 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