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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불청객 - 2주간의 로드 무비 12월 11일 새벽, 꾸벅꾸벌 졸며 썰매를 달리던 나폴레옹은 콜랭쿠르에게 마치 우연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현재 지나고 있는 소도시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워비치(Łowicz)라는 대답을 듣고는, 마치 정말 우연히 생각났다는 듯이 나폴레옹은 '여기서 머지 않은 곳에 마리아 발레프스카의 집이 있다'라며 잠깐 거기에 들러 옛 연인에게 안부인사(?)나 전하면 어떨까라며 콜랭쿠르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은 바르샤바를 떠난 뒤 워비치까지의 거리와 소요 시간을 그 비상한 머리로 암산하면서 딱 그 시간대에 콜랭쿠르에게 '여기가 어디인가?'라고 물으려고 벼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남자였고, 나폴레옹은 마리아 발레프스카를 한때 정말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워비치(Łowicz)는 나폴레옹이 드레스덴을 거.. 2022. 1. 31.
번외편 - 나폴레옹은 영국 호텔에서 왜 목욕을 안 했을까? 지난 편에서 나폴레옹이 바르샤바의 '영국 호텔'(Hôtel d'Angleterre)에 투숙했을 때 목욕은 하지 않고 식사 및 회담만 한 뒤 2~3시간 만에 떠났다고 말씀드렸지요. 기억나시겠습니다만, 그랑다르메의 패잔병들이 길고 고통스러운 행군 끝에 빌나에 입성했을 때, 그 중 재빨리 호텔에 방을 잡았던 사람 중 하나인 그리와(Charles-Pierre-Lubin Griois) 대령도 목욕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배불리 먹고 따뜻한 침대로 기어 들어갈 때, 비로소 장화를 벗었는데 그게 6주만에 처음 그 장화를 벗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발톱 몇 개가 양말과 함께 떨어져 나왔지요. 그렇게 더러운 몸으로 깨끗한 침대에 누웠으니 호텔에서는 매우 싫어했을 것입니다. 왜 나폴레옹도 그리와 대령.. 2022. 1. 24.
영국 호텔의 귀빈 - 바르샤바의 나폴레옹 12월 5일 스모르곤에서 그랑다르메를 떠나 파리로 향한 나폴레옹은 12월 7일 코브노를 거쳐 네만 강을 건넜습니다. 처음에는 바퀴 달린 마차를 타고 달렸으나, 도중에 썰매 위에 낡은 마차 객실을 얹은 엉성한 썰매 마차로 바꿔탔는데, 이 조악한 차량은 문짝도 잘 맞지 않아 차가운 외풍이 가혹하게 들이쳤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기분을 가장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같은 마차칸에 타고 있던 유일한 사람인 콜랭쿠르였고, 그는 생생한 기록을 남겨놓았습니다. 당연히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기분이 착 가라앉아 거의 말을 하지 않았으나, 네만 강을 건너고나자 점점 기분이 좋아져서 콜랭쿠르를 상대로 예전처럼 온갖 이야기를 지치지 않고 떠들어댔습니다. 다만 그 이야기의 내용은 과히 바람직하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았습.. 2022. 1. 17.
연쇄 반응 - 타우로겐 조약 개전 초기부터 막도날은 약 3만 규모의 제10 군단을 이끌고 오늘날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Riga) 방면을 포위 공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2월 초, 그랑다르메 본진이 빌나를 넘어 네만 강 너머로 철수하고 있다면 이제 리가 함락이 문제가 아니라 퇴로가 끊길 것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후퇴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의 제10 군단 중 절반은 요크(Ludwig Yorck von Wartenburg) 장군의 프로이센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한 것입니다. 막도날의 참모들은 프로이센놈들이 배신하려 한다며 불안해 했습니다. 막도날도 처음부터 높지 않았던 프로이센군의 열의가 요즘 확연히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긍지 높은 프로.. 2022. 1. 10.
전쟁의 끝은 어디인가? - 러시아의 고민과 해결책 코브노의 다리를 건너 네만 강을 건넌 그랑다르메의 장병들은 이제 살았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야말로 최후방을 지키며 직접 러시아군에게 마지막 머스켓 소총을 쏜 뒤 그 소총을 강바닥에 집어던진 뒤 돌아선 네 원수의 행동도, 이제 전쟁은 끝났으며 러시아군의 추격은 여기까지라는 철석같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유있는 발걸음으로 쾨니히스베르크를 향하던 그랑다르메 병사들은 코삭 기병들이 얼어붙은 네만 강을 대규모로 건너 추격해오자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코삭들은 국경에 대한 개념도 없고 존중할 의사도 없었거든요. 그들은 그저 저항할 수 없는 패잔병들을 습격해서 노략질을 하고 포로를 잡을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 정규군이 대거 침공하는 것도 아니었.. 2022. 1. 3.
"문송합니다" - 낙오된 자들의 운명 메이야르(Jean Pierre Maillard)라는 스위스 제2 연대의 하사관은 10월 18일 폴로츠크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어느 수도원에 차려진 임시 병원에서 다른 수백 명의 부상병들과 함께 수용되었습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던 그랑다르메는 메이야르를 포함한 그 수백의 부상병들에게 의료 처치는 커녕 물과 빵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0월 20일 프랑스군이 물러나고 러시아군이 그 수도원을 접수했을 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상병들에게 물과 먹을 것을 주는 대신 누워있는 부상병들을 약탈하기 바빴습니다. 러시아군은 가진 것이 별로 없던 메이야르로부터도 군복 소매에 붙은 하사관 계급장을 뜯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러시아군들은 양반이었습니다. 며칠 뒤 .. 2021. 12. 27.
러시아의 마지막 프랑스인, 네만 강을 건너다 빌나에서 코브노까지는 약 3일 행군거리였습니다. 그 기간 내내 기온은 계속 추워서 영하 30도 이하를 유지했습니다. 만약 날씨가 갑자기 따뜻해졌다면 네만 강이 녹아서 베레지나에서처럼 임시 교량을 놓아야 했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실은 코브노에는 네만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으므로 굳이 날씨가 추워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당시 3일 동안 영하의 강추위 속에서 미끄러운 눈길을 걸어야 했던 병사들에게 추위는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비오네(Louis Joseph Vionnet, Vicomte de Maringone) 소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동상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손이나 손가락에서 뼈가 드러난 병사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훗날 부르봉 왕가로부터 마링고네 자.. 2021. 12. 20.
뮈라, 모래, 그리고 금화 - 빌나에서의 후퇴 모든 군사 작전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것이 후퇴입니다. 빵집 솜씨는 바게뜨를, 중국집 솜씨는 짜장면을 맛보면 알 수 있듯이, 지휘관의 역량은 후퇴 작전을 시켜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서든 스몰렌스크에서든 철수할 때마다 어느 부대가 앞장 서서 후퇴를 시작하고, 첫 부대가 다 떠난 뒤 간격을 얼마나 두고 두번 째 부대가 후퇴를 시작하는지 등등에 대해 꼼꼼한 명령서를 베르티에를 통해 발부했습니다. 그러나 남아대장부 뮈라는 달랐습니다. 그는 베르티에 따위는 찾지도 않고 그냥 '전군, 코브노로 후퇴'라는 짧고 간결한 명령만 날린 뒤, 병사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지체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앞장 서서 후퇴에 나섰습니다. 덕분에 빌나에서 철수한다는 명령은 매우 아마추어스럽게 전달되었습니.. 2021. 12. 13.
커피 한 잔과 케익 한 조각 - 약속의 도시 빌나 나폴레옹이 마차의 말을 교체한 뒤 떠나버린 다음 날인 12월 7일 오후, 좁은 빌나 성문을 통해 터벅터벅 걸어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 뜯어지고 꾀죄죄한 옷차림에 적어도 몇 주간은 씻지 않은 것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는데, 마치 야만인들이 문명인 세계로 온 것처럼 번화한 거리를 두리번거렸습니다. 몇몇 시민들이 이들의 몰골을 보고 놀라서 수군거렸지만 이들은 영업 중인 카페를 발견하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다 카페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아 커피와 케익을 주문했습니다. 그 일행 중 하나가 펠레(Jean-Jacques Germain Pelet-Clozeau) 대령이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그 경험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에겐 모든 것이 차분하게 정돈된 도시를 보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사치.. 2021. 12. 6.
12월 6일의 비극 - 사람이 이렇게도 죽는다 나폴레옹과 그랑다르메가 베레지나에서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 약 250km, 그러니까 6~7일 정도 행군거리에 있던 빌나는 꽤 평온했습니다. 빌나에 있던 마레와 호겐도르프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병력과 보급품과 말을 보내라는 독촉을 계속 받고 있었지만 그거야 나폴레옹이 떠난 이후 계속 된 것이었고, 그들은 나폴레옹이 적절한 겨울 숙영지를 찾아 약간 후퇴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상황이 어느 정도로 나빠졌는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기념일인 12월 2일에는 성대한 만찬과 함께 무도회도 열렸습니다. 베레지나에서 간신히 강을 건넌 나폴레옹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의 편지를 들고 온 아브라모비츠(Abramowicz)라는 빌나 거주 폴란드 귀족이 마레를 찾아온 것도.. 2021. 11. 29.
떠나는 자와 남는 자 - 빌나 앞에서 나폴레옹이 12월 5일 스모르곤(Smarhonʹ 또는 Smorgon)에 도착하여 어떤 농가에서 잠깐 숨을 돌리고 있을 때, 그를 찾아 서쪽에서 온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동프로이센과 리투아니아의 주지사로서 빌나에서 각종 행정 업무를 보고 있던 호겐도르프(Dirk van Hogendorp)였습니다. 호겐도르프는 나폴레옹이 빌나의 마레(Maret)에게 주문했던 사항, 즉 10만 병력이 3달간 먹을 식량과 5만 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머스켓 소총과 탄약, 군복, 군화, 기타 장비류는 물론, 많지는 않지만 보충용 군마들도 준비되어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더 반가운 소식도 있었습니다. 호겐도르프는 독일에서 새로 편성된 2개 사단이 막 빌나에 도착했는데, 이들을 빌나 외곽에 부채 모양으로 전개.. 2021. 11. 22.
러시아군의 사정 - '똑게' 쿠투조프 나폴레옹은 강추위에 무너져 내리는 자신의 군대를 보며 무척이나 화를 냈습니다. 그는 나름 잘 싸웠던 빅토르에게도 '형편없는 소극적 태도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라며 화를 냈고 자신이 무관심과 혹사로 기병대를 날려먹어 놓고서는 폴란드인들에게 '폴란드에도 코삭 기병이 있던데 왜 그들을 대규모로 미리 준비해놓지 않았는가'라며 화를 냈습니다. 당연히 자신을 배신하고 혼자서 도망친 슈바르첸베르크 대공과 그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 그리고 강추위에 대해서도 화를 냈습니다. 보통 남탓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원하는 바는 '그러니까 내 잘못은 아니야'라고 강조하는 것인데, 이 점에 있어서 쿠투조프는 나폴레옹급의 인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일부러 저런다는 티가 날 정도로 천천히, 정말 천천히 추격해오느라 나폴레옹의 뒤꿈치.. 2021.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