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까지 보셨다시피, 당시 러시아군에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수의 외국인들, 특히 주로 독일인들이 많이 종군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외국인들이 러시아군에서 일을 하자면 당장 언어 문제가 큰 장벽이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군 내부의 표준어는 프랑스어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독일인 장교들도 프랑스어에 대부분 익숙했거든요.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때 즈음의 일입니디만, 니에쉬비에즈(Nieshviezh) 인근에서 벌어진 프랑스와 러시아 양측 기병대끼리의 소규모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전투의 혼전 중에 러시아군의 무카노프(Mukhanov) 대령이라는 사람이 부하 장교에게 큰 소리로 명령을 외쳤는데, 그 다음 순간 옆에서 달려든 휘하 카자흐 기병의 칼을 맞고 죽었습니다.  이 대령님이 외친 명령어가 프랑스어였기 때문에 카자흐 기병은 먼지 가득한 혼란 속에서 이 대령을 프랑스군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장교들끼리는 프랑스어로 소통이 잘 되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다수인 병사들과 부사관들도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모든 장교들이 다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가령 프랑스 옆나라인 영국만 하더라도 프랑스어를 잘못하는 장교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 스페인에 파병된 영국군 장교들은 급박한 상황에서 프랑스군에게 항복할 때  Je me rends (즈 므 랑, I return myself, 항복한다)이라는 프랑스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그냥 Jemmy Round(제미 라운(드))라고 외치라는 반농담 반진담을 주고 받곤 했습니다.

드리사 기지를 검수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한 클라우제비츠 소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딱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러시아어를 몰랐고 가진 증빙서류라고는 퓰 장군이 서명한 명령서 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프랑스어로 쓰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당장 '수상한 외국 스파이'로 간주되어 드리사 기지의 초병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물론 크고 넓은 드리사 기지에는 당연히 프랑스어가 되는 러시아 장교들이 있었기 때문에 곧 풀려나긴 했지요.  클라우제비츠는 퓰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만, 그런 그가 둘러보아도 드리사 기지의 군사적 효용성에 대해서는 많은 점이 불투명했습니다.  기지의 어떤 점이 문제였는지 자세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지만, 가장 큰 문제는 거기서 농성한다면 러시아 제1군은 프랑스군에게 포위당한 채 아무것도 못해보고 전멸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가 알렉산드르에게 보고한 내용은 전혀 직설적이지 않은, 굉장히 이리저리 둘러댄 변명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행인 것은 알렉산드르가 바보는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도 퓰의 친구인 클라우제비츠가 저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엉망진창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마침내 드리사 기지에 도착한 것은 7월 8일이었습니다.  퓰은 짜르를 모시고 기지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방어 태세에 대해 자화자찬을 늘어놓았으나, 짜르가 그 주장에 대해 동의하느냐는 눈빛으로 주변 장군들을 둘러보면 다들 짜르와 눈을 마주치기를 피했습니다.  이건 짜르 주변이 다 독일인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군이 총 한 방 쏘아보지 못하고 후퇴하는 치욕을 겪은 것이 다 '퓰의 계획대로 드리사로 철수한다'라는 짜르의 결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드리사에 와서 보니 방어기지라는 것이 사실상 무덤을 파놓은 것이다 ?  이건 짜르의 위신을 크게 해치는 일이었습니다.  독일인들은 퓰의 입장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짜르의 눈치 때문에 아무도 말을 못했는데, 결국 제3 외국인인 사르데냐 왕국 출신의 알렉상드르 미쇼(Alexandre Michaud)라는 대령이 큰 소리로 이 기지에서 농성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진언을 올렸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이때 결국 알렉산드르는 한쪽 구석에서 울었다고 합니다.  

 

 

(1709년 우크라이나 폴타바에서 벌어졌던 러시아와 스웨덴 간의 전투입니다.  이 전투로 북구의 제왕이던 스웨덴을 꺾고 비로소 러시아가 북구의 강자가 됩니다.  스웨덴으로서도 이 전투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 맛없는 음식으로 악명 높은 스웨덴의 전통 요리에 유일한 별미인 미트볼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카알 12세가 퇴로를 찾아 일단 오스만 투르크로 피신하여 거기서 몇 년을 보내는데, 그후 귀국하면서 미트볼 요리법이 스웨덴에 전파된 것입니다.)  

 



러시아 제1군 본진은 3일 뒤인 7월 11일에서야 드리사 진입을 완료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대체 왜 우리가 프랑스군 앞에서 꼬리를 말아쥐고 이렇게 2주간이나 도망을 쳐야 했는가 ? 이럴거라면 대체 빌나까지는 왜 갔던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의아함과 분노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힘이 없을 뿐 가오가 없지는 않았던 알렉산드르는 도저히 이들 앞에서 다시 또 후퇴를 해야하는데 이번에는 특별한 목적지도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제1군 병사들에게 포고문을 내려 1709년 표트르 1세가 스웨덴의 카알 12세를 격파한 폴타바(Poltava) 전투 못지 않은 대승리를 여기서 거두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래도 알렉산드르는 꽤 이성적인 짜르였습니다.  고된 후퇴에 지쳤던 병사들의 환호소리를 들을 때는 기분이 좋았지만, 그래도 하룻밤을 자고난 뒤에는 알렉산드르의 머리 속에서 다시 계산이 체면에 대한 미련을 억눌렀습니다.  그는 조용히 드리사 포기를 선언하고, 장군들의 조언에 따라 프랑스군에 대항하기 좀더 적절한 장소였던 비텝스크(Vitebsk)로 후퇴하기로 했습니다.  


(드리사(Drissa, 벨라루스어로는 Vierchniadzvinsk)에서 비텝스크(Vitebsk, 벨라루스어로는 Viciebsk)까지의 거리입니다.)


(드리사와 비텝스크는 모두 서(西) 드비나 강(Western Dvina)의 강변에 있는 마을 및 도시입니다.)


(19세기 초반 비텝스크의 모습을 그린 풍경화입니다.)



애초에 별 대단한 요충지도 아니었던 드리사에 방어기지를 구축했던 것은 의외로 단순한 이유에서였습니다.  빌나에서 출발할 때 페체르부르그와 모스크바로 갈라지는 길목인데다 서(西) 드비나 강(Western Dvina, 러시아아로는 드비나 강이고 라트비아어로는 Daugava 강)에 접한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강을 끼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19세기 초의 근대전에서는 강이라는 요소가 뭐 그렇게까지 결정적인 장벽이 되지는 못했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것은 좁고 험한 지형의 포르투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지 드넓은 벨라루스(Belarus) 평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새로 후퇴할 목표 지점이 비텝스크로 지정되었는데, 여기는 어떤 이유로 목표 지점이 되었을까요 ?  여기에도 뭐 대단한 군사 철학이 담겨있지는 않았습니다.  애초에 드리사를 방어기지로 선택했던 이유인 서 드비나 강은 원래 동쪽에서 흘러올 때 남쪽으로 크게 휜 만곡부를 그리며 서쪽으로 흘러가는데, 드리사에서 동쪽으로 후퇴하다보면 다시 만나게 되는 서 드비나 강변의 도시가 비텝스크였던 것입니다.  결국 비텝스크에 뭐 꿀단지를 묻어놓은 것도 아니고 '일단 후퇴' 외에는 별다른 묘책이 없었다는 이야기지요.  
그렇게 비텝스크도 방어상에 별 이점이 없는 곳이었다면 차라리 그냥 드리사에서 결판을 내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  아닙니다.  비텝스크 자체에는 별 의미가 없었지만, 후퇴에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바로 바그라티온의 제2군과 합류하는 것이었습니다.  제1군만으로 나폴레옹의 본진과 붙었다가는 각개격파를 당하기 딱 좋았으므로 어쩔 수 없이 후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무질서한 패퇴가 아니라 질서있는 후퇴에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어느 부대가 어느 루트로 어떤 순서대로 이동할지 계획안을 짜는데만도 시간이 걸렸고, 장기간 농성을 위해 준비했던 군수품도 파괴를 하든 수송을 하든 처리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다보니 러시아군이 드리사에서 철수를 시작한 것은 알렉산드르가 후퇴를 결심하고나서도 무려 4일이나 지난 7월 16일이었습니다.  

이 모든 난리는 알고보니 쥐뿔도 없었던 방구석 제갈공명 퓰을 믿었던 알렉산드르 본인의 책임이었습니다.  군에서 가장 나쁜 지휘관은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는 지휘관이 아니라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는 지휘관입니다.  또 가장 나쁜 군 조직은 어리석은 인간을 지휘관으로 앉혀놓은 조직이 아니라, 누가 지휘관인지 불분명한 조직입니다.  당시 러시아군이 딱 이랬습니다.  총사령관도 없고, 제1군 사령관 바클레이는 짜르 알렉산드르와 아무 보직도 없이 짜르를 따라다니는 높으신 분 때문에 사실상 지휘관 노릇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짜르가 바로 옆에 붙어 앉아 감놔라 배놔라 하며 (대문호 톨스토이의 표현대로) '조언이라는 이름의 명령'을 남발하니 모든 지휘 체계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애초에 장병들과 함께 하겠다며 편안한 황궁을 떠나 빌나의 거칠고 불편한 사령부로 찾아온 짜르는 나름대로 선의를 다한 것이었지만, 결국 러시아군을 위기로 몰아넣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을 뿐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군 사령부와 함께 하겠다며 페체르부르그를 떠날 때 그가 총애하던 여동생 예카테리나 공주가 그토록 말렸는데, 그 말을 듣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알렉산드르가 사령부를 떠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랬다가는 이 모든 실패의 책임이 알렉산드르에게 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건 알렉산드르에게는 정말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는데, 그건 곧 러시아군 전체의 피해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알렉산드르의 존재 자체가 재앙이었는데,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면서 알렉산드르가 군 사령부에 계속 뭉개고 앉아있을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군이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누군가가 구국의 용단을 내려 총대를 매고 짜르에게 '꺼져'라고 충언을 올려야 했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용기는 필마단기로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에 돌격하기 위해 필요한 것보다 더 큰 것이었습니다.  아마 상남자 바그라티온에게도 그런 용기는 없었을 것입니다.


(쉬시코프(Aleksandr Semyonovich Shishkov)입니다.  그는 원래 해군 제독이었는데 알렉산드르의 개혁안에 반대하여 예편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러시아어를 더럽히고 있는 외국어, 특히 프랑스어를 추방하자는 학회 활동을 하는 등 러시아 민족주의 운동의 선구자였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자신이 쫓아낸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그의 민족주의 운동에 깊은 인상을 받고 다시 그를 국무부 장관으로 임명한 바 있습니다.)


(발라쇼프(Alexander Balashov)입니다.  이 사람도 원래 군 장성 출신으로, 당시 경찰청장 직위를 가지고 짜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아락체예프(Alexey Andreyevich Arakcheyev)입니다.  그는 1810년에 이미 국방부 장관직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백의종군한 것은 아니었고 국무회의 위원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짜르의 명령을 글자 그대로 충실히 수행하는 충신이었고, 아마 그래서 감히 짜르에게 직언을 올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문관 중에서도 진정한 용기를 가진 남자들은 있습니다.  당시 국무부 장관이던 쉬시코프(Aleksandr Semyonovich Shishkov)가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주도 하에, 경찰청 장관 발라쇼프(Alexander Balashov)와 전직 국방부 장관 아락체예프(Alexey Andreyevich Arakcheyev or Arakcheev)가 연명으로 알렉산드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는 그 편지를 쓴 이들도 감히 알렉산드르에게 직접 이 편지를 전달하지는 못하고 드리사에서의 짜르 집무실 책상 위 여러 서류들 사이에 올려만 놓았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드르는 드리사에서 철수할 때도 대체 그 편지를 읽었는지 어쨌는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이 용감한 삼총사는 애간장이 끓었습니다.  그런데 비텝스크에 거의 다 도달한 곳인 폴로츠크(Polotsk)까지 다 와서는, 갑자기 짜르가 아락체예프에게 툭 한마디 말을 던졌습니다.  "당신들 메모를 읽어 보았소."  아마 아락체예프의 심장이 덜컹 했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르는 나름대로 용기있는 군주였습니다.  그는 그 길로 말을 타고 바클레이의 숙소로 갔습니다.  거기서 초라한 저녁을 먹고 있다가 짜르의 급작스러운 방문을 받고 놀란 바클레이와 1시간 정도 회담을 한 뒤,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군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습니다.

"안녕히 계시오. (이때도 나폴레옹보다 더 유창한 프랑스어 발음으로 Au revoir 라고 했답니다).  내 군대를 장군에게 일임하겠소.  이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군대라는 점을 잊지 말아주시오."

이것이 러시아가 패배에서 승리로 전환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즉, 무능한 재벌 2세가 경영에서 손을 떼고 유능한 전문가에게 경영권을 맡기는 순간이었지요.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1812년 러시아를 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다고 모든 기업이 흥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자비한 경쟁자 나폴레옹이 드리사에서 삽질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던 러시아군을 그대로 내버려둘 턱이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Shishkov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Aleksandr-Semyonovich-Shishkov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Balashov
https://en.wikipedia.org/wiki/Aleksey_Arakchey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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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20.01.06 08: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리사에서 결전을 치렀으면 백전백패였죠. 35만 프랑스군의 전력이 약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20만 약간 넘는 러시아 제1군만으로 전투를 속행했다면 포병전력 때문에라도 붕괴될 가능성이 높았거든요.

    폴타바 전투, 폴타바는 항상 중요 요충지로 전투가 자주 벌어졌죠. 1399년 보르스쿨라 강 전투(제 1차 폴타바 전투), 1709년 제2차 폴타바 전투 모두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분수령이었는데 재미있게도 모두 동방의 군대가 서방권 군대를 격파했고 향후 역사를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1399년 전투가 매우 중요한 것이 이 당시 리투아니아가 이겼다면 오늘날 비스툴라 강부터 아무르강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차지했을지도 모르죠.
    1709년도 마찬가지인게 이 때 스웨던이 이겼다면 발트해와 북해부터 아무르강까지 스웨덴 제국이 들어섰을지도 모를 정도였죠.

    • 흥부 2020.01.07 05:06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 자꾸 러시아를 동방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유럽인들은 자꾸 그러던데 이제 한국인들도 따라함.
      게다가 프랑스나 스웨덴은 러시아에 비해 서방일지 모르지만 폴란드는 러시아하고 똑같다는(폴란드인들은 러시아인에 비해 자기네가 더 유럽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 reinhardt100 2020.01.07 0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단합니다. 서방 카톨릭-프로테스탄트 계열 종파와 다른 동방 정교의 최후 보루가 모스크바 대공국이었고 그 직계가 러시아니까요. 러시아 스스로도 우리는 서방권의 신성로마제국 같은 참칭(?)제국과 다른 제3의 로마로써 진정한 로마제국의 후예는 자기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721년 러시아 제국이 공식적으로 들어설 때 제국 선포의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거였죠.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를 추진했다고 하지만 실체는 어느 정도 '러시아판 중체서용, 동도서기, 화혼양재'였습니다.

      이러니 로마 제국의 유럽 본토 상당부분을 가진 서방권 국가들이 러시아를 볼 때 동방권으로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폴란드 같은 경우, 서슬라브족인데도 초창기부터 신성로마제국의 봉신국이었다가 로마교황으로부터 직접 국왕으로 책봉받아 독립한 국가다보니 서방권이라고 스스로 여길 이유가 있었습니다. 중세에는 '서방 로마 총대주교(교황)과 동방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중 누가 교구 관할권을 가지고 있냐?'가 동방과 서방을 구분하는 주된 기준 중 하나였는데 보헤미아, 모라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불가리아 등과 달리 폴란드,헝가리와 러시아는 건국 당시부터 서방 총대주교와 동방 총대주교의 교구관할권에서 단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분명 이유는 있습니다. 반대로 현재 분명 서방권이지만 중세에는 동방권이었던 지역이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입니다. 이들 교구 관할권이 레오왕조 시절 성상파괴운동 할때 교황이 황제한테 들고 일어나면서 격분한 동방제국이 멋대로 교구관할권을 자기네 총대주교쪽으로 이전시킨 적이 있었거든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중세 당시 가장 특이한 지역이 베네치아입니다. 분명 중세 기준에서 서방권은 확실한데 정치적으로는 특이하게 동방권이었거든요. 누가 봐도 건국 당시부터 봉지권 등을 수여한 주체가 서방 로마 총대주교나 서방제국 황제가 아닌 동방제국 황제였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서방권도 동방권도 베네치아는 자기네 영역이라고 확언할 수 없었습니다. 이 덕분에 중세 이탈리아에서 격심했던 교황파와 황제파 간 다툼에서 자유로웠고 제4차 십자군에서 '동방제국의 3/8의 주권자' 같은 지분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 흥부 2020.01.07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건 이론적인 거구요...
      예를들어 러시아는 몽골이네 또는 피레네 남쪽은 아프리카네등등.
      한국인은 아마 러시아인 독일인 같이 있으면 구별도 못할텐데 러시아는 동방 또 어디는 어디 그러는거 보면 좀 그렇다구요.
      러시아가 어디를 봐서 동방인지.

  2. 롬. 2020.01.06 17: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막연히 몇 줄로서
    ‘나폴레옹이 겨울에 러시아로 쳐들어갔고, 모스크바를 함락시켰으나 청야전술로 인해 대패하였고 몰락하였다.’ 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막연히 청야전술을 썼다 라고만 알고 있었던 러시아도 사정을 알고보니 위태위태했었군요. 자존심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대단하다 싶습니다. 나폴레옹마저도 자기 실수 부분은 신문기사에서 슬쩍 빼거나 부하에게 슬쩍 떠넘기고 했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3. 롬. 2020.01.06 17: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유명한 클라우제비츠 마저 요새를 둘러보곤 차마 개판이라 말 못 하고 장황한 딴 소리로 둘러댔다니... 현대인의 입장에 비춰 이해해봐도 참 난감한 상황이다 싶군요. 클라우제비츠 눈에 헛점이 안보일리는 없고, 그렇다고 직언 하기엔 관계가 좀 그렇고... 역시 중간 관리자란.. ㅠ 아 역시 역사는 알고보면 사람 사는 이야기다 싶습니다 ㅎㅎ

  4. 카를대공 2020.01.06 17: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0년의 세월을 넘어 알렉산드르2세의 성향은 진모씨 같았다는 진실이 밝혀졌군요ㅎㅎ

  5. 샤르빌 2020.01.07 0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쿠투조프는 언제쯤 재등장 할까요?

  6. 네시오 2020.01.07 1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볍게 알고 있던 내용을 이렇게 세세하게 보게되네요. 잘 봤습니다.

  7. 별이네 가족 2020.01.07 15: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정말 대단한 나라죠 ^^ 잘보고가요!!하트꾹^^★가끔 별이네 가족이야기 방문 부탁드려요!!

  8. 2/28일 입대 2020.01.07 19: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소 느리고 돌아가는 길을 택하기는 하지만, 알렉산드르가 황제로서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이 보이네요...다만 그게 다 남의 피와 땀이란 건 함정;;

  9. 웃자웃어 2020.01.09 2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질문하고 싶은게 있습니다. 왜 유럽국가들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국민개병제를 도입하지 못하고,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도입한 건가요?

    • nasica 2020.01.09 2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게 큰 규모의 군대가 필요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클 것입니다. 군인의 숫자가 많을 수록 비용은 많이 나가는데 세금은 적게 걷게 되니 좋을 턱이 없지요.

    • 알키비아데스 2020.01.10 2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국민개병제가 먼저냐 민주주의가 먼저냐는 닭이냐 달걀이냐 문제입니다. 아테네가 중장보병을 동원하면서 귀족정치가 깨졌죠

  10. 롬. 2020.01.10 1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좌 격인 nasica님이 계신 이곳에 댓글을 다는게 조심스럽습니다만... 웃자웃어님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늘상 존재하는 상비군은 정말 돈 먹는 하마 입니다.
    국가의 존재에 있어 군대란 필수불가결한 존재입니다만 다만 그 규모와 형태에 있어 역사적으로 다양하지요. 우리 일상생활에 비교하자면 상비군은 화재보험이랄까?
    아예 안들순 없고,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위협에 대한 대비인데 과연 보험료를 얼마나 낼지 보험금은 얼마나 맞춰둘지는 사람마다 다르지요. 발생할지 안할지 모르는 위협에 대한 대비란 측면에서 보면 가정집의 보험료는 상비군에, 보험금액은 유사시 동원 예비군 수에 비교하면 될겁니다. 보험료에 얼마를 쏟으시나요? 다른데 돈 들어갈 곳은 쌓이고 쌓였는데 말이지요. 국가재정도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11. 롬. 2020.01.10 18: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대란 기본적으로 별다른 생산활동 없이 소비만하는 집단입니다. 의외로 상비군이란게 돈이 굉장히 많이 나가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군인들 월급만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인건비에, 사람만 모아 놓은다고 되는게 아니라 훈련하는 훈련비에, (오늘날 21C 군대에서도 합동훈련 한다고 전투기 띄우면 제트유 값이 1대당 시간당 대략 2천만원 이져... 미사일이라도 쏘면 + 알파로 몇천만원... 비싼건 1억이요. 그래서 우리나라 경공격기가 인기 있는... 국가대 국가간 전면전엔 유지비고 뭐고 젤 센 애를 써야 하는데.. 전면전이 드문 요새는 저격수 한명 잡자고 시간당 2천만원 짜리 전투기 띄워서 발당 1억 짜리 미사일 뿌리기가.. 좀.. 훈련소에서도 입으로 빵빵 하다가 사격훈련 때나 쏴 보는거고 입총은 나폴레옹시절에도 썼던 유서깊은 훈련법..당시 영국이나 실탄 쏘며 훈련 했죠..)창, 칼, 화살등 전투용품도 다 소비재인데다 이게 한번 사서 창고에 쳐박아 두고 땡이 아니라 녹이 안슬게 계속 관리를 해야죠. 유지비, 유지인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군마, 말도 군마로 쓰는 혈통 좋고 우람한게 있고 그냥 마차나 끄는 짐말이 있고.. 자동차도 배기량 좋은게 잘 나가듯이 군마가 더 비싸고 관리비도 더 나가죠. 보통 일반적인 말이 현 시세로 2천만원정도 거진 중형차 한대값. 그리고 얘들 근육을 유지하려면 사료도 질좋은 고급으로 먹어야 하고 주기적으로 뛰어서 근육량도 관리해야하고 오늘날 차계부 쓰는거보다 더 손이 많이 갑니다.

    이렇게 정성들여 돈 들여 관리해도 적이 안 쳐들어오면... 군대는 딱히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소비집단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공장은 돌리면 물품이 나오는데 군대는 유지관리해도 전란이 아닌 평상시엔 딱히 쓸 일이 없지요. 그래서 돈 먹는 하마입니다.

    이러니 상비군을 적게 둘 수 밖에 없는 거죠.

    다만 프랑스는 나폴레옹 때 거진 전유럽에 다굴(?)을 맞았고 상비군만으로 감당이 안되는 상황에서 민족주의의 결합 및 징집병제와 함께 국가총동원전이 되었지요.

    근데 사실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인 바스티유 감옥 습격부터 나폴레옹이 뜨기 전까지 내부 혼란•외세 침입을 기존의 상비군으로 다 막았....
    다 루이 14세 때부터 빚을 내서라도 부지런히 여기저기 때리고 다니며 유지하던 상비군 때문...


최근에 조선일보에서 조선일보답게 유명 와인 브랜드인 Moët & Chandon 관련된 기사를 냈더군요.  프랑스 샹파뉴(Champagne) 지방의 에페르네(Épernay) 현지 취재 기사였는데, 그냥 Moët & Chandon 사의 광고 이하도 이상도 아닌 그런 기사였습니다.

https://m.chosun.com/news/article.amp.html?sname=news&contid=2019122000173

제가 이 기사를 클릭한 것은 어떤 포털에서 '나폴레옹이 사랑한 술, 승리의 순간마다 삼켰다'라는 제목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나폴레옹이 진짜 좋아해서 항상 챙겼던 와인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의 샹베르텡(Chambertin) 와인이었기 때문에, 아마 그 와인 이야기인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 Moët & Chandon 이야기더라고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나왔습니다.

"프랑스 황제 루이 15세가 이곳 와인을 마셨고, 1801년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곳에 직접 와서 모엣&샹동 창립자의 손자인 장 레미 모엣에게서 샴페인을 사갔다. 이후 황제가 된 보나파르트는 전쟁에서 이기거나 기쁨을 만끽하고 싶은 때마다 모엣의 샴페인을 사들였다. 부인 조제핀 황후가 대관식을 치를 때도 이곳 술을 사용했다."

솔까말 나폴레옹이 뭐 동네 아저씨도 아니고 자신이 직접 와인 쇼핑이나 하러 다녔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폴레옹 대관식이면 나폴레옹 대관식이지 조제핀 황후가 대관식을 치른다는 이야기도 좀 이상하고요.  저는 나폴레옹 관련 책이나 블로그 등을 꽤 많이 본 사람 중 하나라고 자부하는데, 나폴레옹이 Moët & Chandon을 좋아했다는 소리는 처음 들었거든요.  

근데 어차피 확인할 방법도 없는 그런 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제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모엣&샹동이라는 표기였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제2 외국어로 불어를 택했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 내세울 것이 없는 저로서는 여태까지 Moët et Chandon을 모에-떼-샹동이라고 읽어왔었거든요.  (원래 불어에서는 거의 대부분 끝부분의 s나 t는 발음하지 않으니 모에-에-샹동이 되겠습니다만, 연음법칙에 의해 끝부분의 t가 그 다음 단어 et와 연음되어 모에-떼-샹동이라고 읽습니다.)  이걸 저 기사를 쓴 기자분이 프랑스어를 몰라서 저렇게 적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프랑스 현지에서 취재한 건데 저 상표의 발음을 몰라서 저렇게 적었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와인을 즐기지 않으시는 분들이라도 (저도 와인 안 좋아합니다, 저는 서민답게 맥주 좋아합니다) 팝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모에-떼-샹동은 한번쯤 들어보셨을 만한 와인 브랜드입니다.  영국 락그룹 퀸(Queen)의 초기 명곡 중 하나인 Killer Queen의 첫부분에도 나오는 와인이거든요.

She keeps her Moet et Chandon
In her pretty cabinet
"Let them eat cake", she says
Just like Marie Antoinette

그녀는 모에-에-샹동을 따로 보관한다네
예쁜 캐비넷에 말이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라고 해" 라고 말하지
정말 마리 앙투아네뜨 같다니까

 

 

 



저는 이 기사의 모엣&샹동이라는 표기를 보고 Killer Queen 가사가 생각났는데, 생각해보니 이 노래에서 프레디 머큐리가 Moet et Chandon을 뭐라고 발음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더군요.  저는 막연히 모에-에-샹동으로 들린다고 생각했는데, 원래는 모에-떼-샹동이라고 읽어야 하거든요.  다시 두번 세번 들어보니, 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모엣-에-샹동' 이라고도 들리는데 제가 영어 리스닝에 서툴러서 잘 모르겠더라고요.

 

미국인들이나 영국인들도 프랑스어로 된 이름들은 발음하기가 고민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영국과 프랑스는 교류가 잦다보니 편지나 신문, 책 등이 서로 오가면서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데 프랑스어 스펠링으로 된 것이 영국식 발음으로 굳어진 것들이 꽤 많습니다.  가령 Nicolas는 프랑스에서는 니꼴라지만 영국에서는 니콜라스입니다.  Bourbon은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가의 이름이지만 미국에서는 버번 위스키입니다.  모에-떼-샹동은 샴페인(Champagne)의 일종인데, 샴페인이라는 것도 영국식 발음일 뿐이고 본고장인 프랑스에서는 상파뉴라고 읽습니다.  이건 프랑스 이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고 독일 이름이나 이탈리아 이름 등에도 영어식 표기와 영어식 발음이 따로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지 헷갈리기도 하고 고민도 됩니다.  가령 프랑스 이름 Louis(루이)가 영국으로 건너오면서 루이스로 읽히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스펠링까지 Lewis로 바뀌었는데, 동일한 이 이름을 독일에서는 루드비히(Ludwig)라고 부릅니다.  더 헷갈리는 것은 역사적 인물을 다룰 때는 아예 자기식으로 스펠링까지 바꿔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 (Francois I)를 표기할 때는 아예 프랜시스 1세 (Francis I)로 해버리는 식이지요.  우리가 류페이를 '유비'로, 또요또미 히데요시를 '풍신수길'로 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극장에서 본 영화가 있는데 대니얼 크레이그 주연의 '나이브즈 아웃'(Knives Out)이라는 추리물이었습니다.  크리스 에반스와 크리스토퍼 플럼머 등 유명한 배우들이 잔뜩 출연하는 이 영화에서 대니얼 크레이그는 사설 탐정으로 나오는데, 극중 이름이 Benoit Blanc 입니다.  이걸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베누아 블랑'(사실은 블랑보다는 블롱에 가까운 발음이 납니다)이고 영어식으로 읽으면 '벤노잇 블랑크'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 대사를 유심히 들어보면 대략 '비누와 블랑(ㅋ)'라고 Blanc의 끝에 붙은 c를 완전히 묵음 처리하지 않고 약간 k 발음을 내는 것이 들립니다.  등장 인물 중 하나는 아예 이 이름을 '블랭크(Blank)'라고 발음을 하는데, 그러자 대니얼 크레이그가 다소 곤란하다는 듯한 미소를 띠면서 '블랑(ㅋ)'라고 읽어달라고 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결국 프랑스 이름이지만 미국식으로 읽긴 하는데, 완전히 미국식도 아닌 셈입니다.  아래의 짧은 비디오 클립을 보면 '미스터 블랑(ㅋ)'이라는 발음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s://www.facebook.com/KnivesOutOfficial/videos/422982011707870/

왜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 속의 미국인 탐정이 프랑스식 이름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영화 속에서는 설명이 없지만,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인 라이언 존슨(Rian Johnson)이 어떤 매체와 인터뷰를 한 것을 보면 정답이 나옵니다.  

질문) 이 영화 속 등장 인물 이름 중에는 아주 굉장한 것들이 있더군요.  그 중 어느 것이 가장 자랑스러우신지요 ?

답) 음, 비누와 블랑은 확실히 괜찮다고 생각해요.  예전 프랑스어 강사의 이름이 베누와였는데,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거기에 미국인들이 좀 골치 아파할 성을 붙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치 포와로(Poirot :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 소설 속 벨기에 국적의 탐정 이름)처럼요.

 

 

 

Rachel Weisz라는 정말 우아하게 아름다운 여배우가 있습니다.  이 배우의 남편이 대니얼 크레이그더라고요.  대니얼 크레이그처럼 레이첼도 영국 사람입니다.  저는 처음 미이라 시리즈와 콘스탄틴에서 이 여배우를 봤을 때만 해도, 이 배우 이름이 레이첼 와이즈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스펠링이 어떻게 되는지도 몰랐고요.  그런데, 최근에서야 이 사람의 이름은 와이즈가 아니라 바이스라고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못 알고 있던 것이 저 뿐만은 아니고 미국인들도 많이 그렇게 잘못 알고 있었더군요.  다들 스펠링을 보고, 또 이 배우가 영국 출신이니까 그냥 영어식으로 '와이즈'라고 읽은 것이지요.  많은 경우, 외국식 스펠링을 가진 가문에서도 미국이든 프랑스든 타국에 정착했을 때 해당 타국식 발음으로 아예 이름을 바꿔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 연예계 기자들이 저걸 독일어식으로는 '바이스'라고 발음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와이즈'로 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뭐라고 읽어야 하는지는 오로지 본인의 선택입니다.  레이첼 바이스도 처음에 미국에 왔을 때는 사람들이 '미즈 와이즈'라고 부를 때 예의상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합니다.  무려 8년 동안이나요.  그러다가 이제 좀 정착한 뒤에는 자기 이름을 되찾아야겠다면서 사람들에게 '와이즈'가 아니라 '바이스'라고 그때그때 수정을 해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다시 Moët & Chandon의 발음 문제로 돌리지요.  비록 저 기사를 쓴 기자분이 프랑스 현지 샤또에 가서 취재를 했다고 해도, 아마 저 취재는 영어로 했을 것 같습니다.  외국에서 온 기자들을 위해 언론 담당 직원이 프랑스어를 고집했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러니까 제 처음 짐작으로는 저 기자분은 현지 직원이 영어식 발음인 모엣-앤-샹동이라고 발음하는 것을 듣고 쓴 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실제로 국내에서는 모엣-샹동이라는 한글 표기와 모에-샹동이라는 한글 표기가 모두 사용됩니다.  프랑스식으로 읽어야만 유식하고 영어식으로 읽으면 무식한 것은 아닐테니 어떤 표기이건 둘 다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도 글자만 보고는 고유한 이름의 발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가령 레미제라블의 주요 등장 인물인 Enjolras를 '앙졸라스'라고 읽어야 하는지 '앙졸라'라고 읽어야 하는지는 오래된 논쟁입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그 이름의 주인에게 뭐라고 읽어야 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니 물을 수 없지만 Moët & Chandon은 번창하는 회사이니 당연히 한글 홈페이지가 있을 것입니다.  찾아보니... 좋아해야 할 일인지 자존심 상해야 할 일인지 한글판 페이지는 없더군요 !  그런데 일본어 홈페이지는 있습니다 !

https://www.lvmh.co.jp/%E3%83%A1%E3%82%BE%E3%83%B3/%e3%83%af%e3%82%a4%e3%83%b3-%e3%82%b9%e3%83%94%e3%83%aa%e3%83%83%e3%83%84/moet-chandon/

 


보시다시피 일본어 표기는 '모에-에-샨돈'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 뒤져보니 프랑스 국가 홍보 웹 사이트에서 Moët & Chandon에 대해 한글로 표기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또 '모엣샹동' 이라고 표기하더군요.  그런데 더 희한한 것은 다음과 같이 모엣샹동이라고 표기하면서도 사람 이름은 '모에'라고 프랑스식으로 쓴다는 것입니다.

"모엣샹동의 설립자들인 모에와 샹동, 메르시에를 만든 유진 메르시에 등, 거리 이름마저 샴페인 명인들의 이름으로 가득한 에페르네의 땅 밑은 또 다른 샴페인 왕국이다."

어쩌면 여기서도 한국에서는 워낙 모엣샹동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니 그냥 모엣샹동이라고 쓴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설명이 있습니다.  모에(Moët)는 분명히 프랑스 국적의 가문이지만 원래 이 가문은 프랑스가 아니라 네덜란드 출신 가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원래 이름을 모에가 아니라 모웻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건 Moët 가문 사람을 직접 인터뷰한 기사에서 읽은 것은 아니고, Moët & Chandon 뉴질랜드 지사의 PR 담당자인 Helen Vause라는 분과 인터뷰한 기사에 나온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으로, 또 프랑스인들조차도 많은 사람들이 그냥 모에라고 읽는 것이 현실인 모양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많은 경우 프랑스에 정착한 외국인들이 가문 이름의 발음을 그냥 프랑스식 발음으로 택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 본인입니다.  원래 이탈리아식 이름인 부오나파르떼(Buonaparte)를 프랑스식 보나빠르뜨로 바꿨지요.  나폴레옹의 근위 기병대를 이끌었던 Frédéric Henri Walther 장군은 독일계인 알사스 지방 사람이었지만 발터가 아니라 왈더라고 불렸습니다.  

 

결론적으로... 모에-샹동인지 모에-떼-샹동인지 모엣-샹동인지 그냥 내키시는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뭐라고 불러도 프랑스인이든 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다 알아들을 것이 틀림없거든요.  중요한 것은 남이 뭐라고 읽든 간에 함부로 지적질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저처럼 달랑 고등학교 때 배운 불어로 아는 척 하면 큰일나겠습니다.


P.S.  모에-떼-샹동과 나폴레옹과의 관계를 찾아보느라고 이것저것 웹사이트를 뒤지다 읽은 나폴레옹의 명언이 있습니다.  정말 나폴레옹이 한 말인지는 굉장히 의심스럽습니다만, 말이 그럴싸해서 여기에 옮깁니다.

“Champagne! In victory one deserves it, in defeat one needs it.”
샴페인이라 !  승자에겐 마실 자격이 있고, 패자에겐 마실 필요가 있지.

 

 






Source : 
https://kr.france.fr/ko/champagne/article/118417
https://www.winemonopole.com/blogs/newsletter/7129320-napoleon-and-chambertin#
https://vinepair.com/booze-news/pronounce-moet-chandon-complicated/
https://en.m.wikipedia.org/wiki/Knives_Out_(film)
https://vinepair.com/articles/napoleon-moet-a-secret-history/
https://screencrush.com/rian-johnson-knives-out-interview/    

http://socialvignerons.com/2019/06/17/how-to-pronounce-moet-chandon-explained/

http://nymag.com/intelligencer/2009/05/rachel_weisz_is_going_to_star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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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메뚝 2019.12.26 1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휴일 내내 자료를 찾고 글을 다듬으셨을 글쓴이를 생각하니 빙그레 웃음이 납니다.
    덕분에 즐겁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명언?도 재밌네요~

  2. ㅇㅇ 2019.12.26 15: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어요 ㅋㅋ

  3. 카오스크 2019.12.26 16: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Zendaya 라는 성을 가진 여배우가 있는데 스스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설명해주더군요 대부분 젠다야라고 발음 하는데 젠-데이-아라고 불러 달라고 하더군요

  4. keiway 2019.12.27 15: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랫만에 한가한 김에 나폴레옹 시대사를 처음부터 다시 찬찬히 보고 있는데요, Daum 블로그 글은 순서대로 보기가 쉬운데, Tistory 블로그는 예전 글을 분류별로 보는 게 굉장히 불편하군요... 제가 기능을 잘 모르는 건지?

    예전 글을 보다보니 제가 그때부터 댓글을 하나씩 꽤나 많이 남겼었네요. 오랜 기간 꾸준히 좋은 글 써주시는 Nasica 님께 새삼스럽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고 내년도 좋은 한 해가 되시길.

  5. 삐숑 랄롱드 2019.12.28 1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견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 소재도 맛깔나게 글로 써내시는 필력이 부럽습니다~^^

  6. agintiger 2019.12.28 14: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잘 보고 있습니다.

  7. MADRUSH 2019.12.29 0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올려주시는 글들 늘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 드리겠습니다.

  8. 지식센터 2019.12.29 1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나폴레옹의 명언이 너무 기가막힌 표현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9. 2/28 입대 2019.12.29 21: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재치있는 글 감사드립니다! 벌써 몇년째 '재치와 상식'에서 큰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올해 마무리 잘 하시고, 내년에는 '들숨에 재물이, 날숨에 행복이' 넘치는 한 해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10. durandal 2020.01.03 06: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웠기에 어떤 글을 읽을 때나 프랑스어 표기에 관심이 가더군요.
    댓글에 분탕질 치는 종자 때문에 한 동안 댓글 안 읽고 안 썼는데 새해 좋은 일만 있으시기 바라며 글 남깁니다.
    올 한해 기쁜 일로만 모에 떼 샹동이나 돔 페리뇽 따는 일만 생기세요.


제롬 보나파르트(Jérôme-Napoléon Bonaparte)는 1784년 생으로서 나폴레옹에게는 15살 어린 정말 아들 같은 막내 동생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1793년 툴롱(Toulon) 포위전을 통해 중위에서 장군까지 일사천리의 승진 가도를 달리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9살이었습니다.  이 툴롱 포위전이 한창일 때만 해도 보나파르트 일가는 고향 코르시카에서 쫓겨나 집도 절도 없이 마르세이유의 월세방을 전전하던 신세였지만 나폴레옹의 출세 덕분에 그 이후로는 생활에 기름칠이 잘 된 편이었습니다.  즉, 제롬은 형의 후광에 힘입어 아주 어릴 때 빼고는 그다지 세상살이가 어려운 줄 모르고 자라났다는 이야기지요.


(베스트팔렌 국왕 제롬 보나파르트 전하이십니다.  가만히 보면 이목구비가 확실히 나폴레옹의 동생처럼 생겼네요.)



그는 역시 위대한 형을 배경으로 해서 프랑스 해군에 이름만 올려놓고 경력을 쌓다가, 청소년 시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자유로운 미국 물을 먹게 되었습니다.  조기 미국 유학이 적어도 제롬에게는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는지, 1803년 당시 19살이던 제롬은 부유한 가문의 18살짜리 미국 아가씨 엘리자베스 '벳시' 패터슨(Elizabeth "Betsy" Patterson)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자기 마음대로 결혼까지 해버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이미 프랑스에서 절대 권력자의 위치를 공고히 했던 나폴레옹은 노발대발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이혼이 쉽지 않은 지라, 나폴레옹은 애꿎은 교황 비오 7세(Pius VII)를 윽박질러 미국에 있는 제롬의 결혼을 무효화 하려 애썼으나 고지식한 비오 7세가 굽히지 않자 황제로 즉위한 다음 해인 1805년 3월에 칙령을 내려 자기 멋대로 동생의 결혼을 무효화 시켜버렸습니다.  마침 그때 제롬은 프랑스 황제가 된 형에게 이 결혼을 인정 받겠다고 당시 임신 중이던 와이프 벳시를 데리고 유럽행 항해길에 올라 있었습니다.  당시 중립국이던 포르투갈에 상륙한 제롬이 먼저 형을 만나 설득을 시도하는 동안, 그 벳시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입항하려고 했습니다.  이것도 나름 이유가 있었는데, 어떻게든 빨리 프랑스 땅에 들어가서 아이를 낳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막으려는 비정한 형 나폴레옹은 아예 그 미국 선박의 암스테르담 입항을 금지해버렸습니다.  결국 벳시는 적국인 영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고, 제롬의 첫아들은 영국 땅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제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Jérôme Napoléon Bonaparte)라는 으리으리한 이름을 갖게 되었지만 결국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 부유한 미국 지주가 되었습니다.  결국 제롬도 지엄한 형의 명령에 굴복하여 이혼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모르긴 해도 이때부터 형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제롬 보나파르트를 사로잡았던 미국 아가씨 엘리자베스 '벳시' 패터슨입니다.  1804년에 그려진 것이니 19살 때의 모습이네요.)



그래도 자신의 여자를 버리고 형을 따른 대가는 짭짤했습니다.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의 공주님 카타리나(Catharina Frederica)를 새신부로 맞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왕이 되었거든요.  1806년 프로이센을 격파한 나폴레옹은 다음해인 1807년 프로이센으로부터 빼앗은 영토와 이런저런 독일 소공국들을 모아 베스트팔렌(Westphalen) 왕국을 새로 만들었고, 그 왕으로는 제롬을 임명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새로 왕이 된 막내 동생 제롬에게 선물로 매우 모범적인 헌법과 근대적인 관료 체계를 내려주며 베스트팔렌 왕국이 자신이 유럽에 제시할 새 질서의 모범이 되기를 바랬습니다만, 제롬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제롬은 자기 여자를 버리고 얻은 왕국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어려운 것 모르고 커서 그랬는지 아무튼 다소 흥청망청 돈을 써대며 겉멋을 부리는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스트팔렌 왕국의 수도는 카셀(Kassel)이었는데, 제롬이 국왕으로서 위풍당당하게 입성한 카셀은 원래 작은 도시에 불과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이 휩쓸고 간 모든 곳이 그랬듯이 역시 탈탈 약탈을 당한 뒤라서 꽤 황폐해진 상태였습니다.  제롬은 패전 직후 새로운 왕국으로 편성된 영토의 흉흉한 민심을 보살필 생각보다는 이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왕궁을 멋지게 꾸며 보겠다는 의욕이 앞섰습니다.  그는 기존의 빌헬름궁(Wilhelmshöhe)을 나폴레옹궁(Napoleonshöhe)으로 개명하고 이런저런 개보수 공사와 화려한 은식기 사치스러운 가구 값비싼 그림 등을 주문하며 바쁘게 지냈습니다.  덕분에 그 일대의 예술가들과 장인들은 때 아닌 호황을 맞이했지만 신생 베스트팔렌 왕국은 곧장 재정난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나폴레옹의 튈르리 궁전과 비슷한 규모의 비용을 제롬이 써댔으니까요.  돈이 떨어지자 여태까지 해오던 것처럼 제롬은 형에게 손을 벌렸지만 동생의 철없는 방탕질에 화가 난 나폴레옹은 그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고, 그렇잖아도 빗나가기 시작한 형제 사이는 더욱 비틀어졌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여전히 막내 동생 제롬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1812년 러시아 원정을 시작하면서 진지하게 폴란드 왕국의 재건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는데, 당장 떠오른 문제는 누구를 폴란드 왕으로 삼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적임자로 오랫동안 그 지역에서 활동했고 또 폴란드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던 다부 원수를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스웨덴의 왕세자가 되자마자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려버린 베르나도트의 경우를 보고, 나폴레옹은 역시 누가 뭐래도 믿을 것은 핏줄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폴란드 왕국을 재건한다면 그 왕으로는 제롬을 생각했던 것이지요.  나중에 세인트 헬레나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회고록을 구술하던 나폴레옹은 그때서야 '생각해보면 폴란드 왕으로는 누구보다도 폴란드 왕족 출신이자 뛰어난 지휘관이었던 포니아토프스키(Józef Antoni Poniatowski)가 적입자였는데, 당시엔 그럴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라며 후회했습니다만, 아무튼 일이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아무리 나폴레옹이라고 해도 혈기왕성한 폴란드인들 위에 자기 동생을 왕으로 세우자면 자기 동생에게 뭔가 그럴 싸한 공을 세우도록 해야 했습니다.  어차피 이제 곧 폴란드인들의 원수인 러시아로 쳐들어가는 마당에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나폴레옹은 카셀에서 왕놀이에 열중하고 있던 제롬을 소환하여 무려 3개 군단의 지휘권을 주며 왕이 되기에 부끄럽지 않은 뛰어난 전공을 세우도록 지시했습니다.  형의 소환을 받은 제롬은 베스트팔렌군을 이끌고 바르샤바에 화려하게 입성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동생을 구경하러 몰려든 폴란드인들에게 '폴란드를 러시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피를 흘리겠다'라며 연설을 했으나, 정작 그의 거만하고 사치스러운 행동은 폴란드인들의 경멸과 증오만 불러 일으켰습니다.  나중에는 바르샤바의 폴란드인들 사이에서는 제롬에 대해 '매일 저녁마다 럼주와 우유로 목욕을 한다'라는 헛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기도 했습니다.  그가 끌고 온 베스트팔렌군은 당연히 독일인들로 구성된 부대였는데, 이들도 폴란드인들을 마구 대하며 폴란드인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나폴레옹은 어쩌자고 그랬는지 몰라도 하필 제롬에게 방담(Dominique-Joseph René Vandamme) 장군을 실질적인 지휘관으로 붙여주었는데, 방담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프라첸(Pratzen) 고지를 점령하는데 선봉을 서는 등 전투 지휘에는 무척 용감했지만 난폭한 성질머리와 함께 부끄러운 줄 모르는 약탈 행위로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었습니다.  같은 프랑스 장군들 사이에서도 불화가 끊이지 않았던 방담은 제롬보다 더 폴란드인들의 원성을 살 뿐이었습니다.  훨씬 이전의 일이기는 합니다만, 오죽 했으면 나폴레옹이 방담의 면전에 대고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

"자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네가 2명 있는 걸세.  그랬다면 방담 2명 중 1명에게 다른 방담을 교수형에 처하도록 했을 거야."


(방담입니다.  그는 1813년 쿨름(Kulm) 전투에서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그는 짜르 알렉산드르 앞으로 압송되어 그의 약탈 행위에 대해 추궁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대범하게도 알렉산드르에게 '최소한 나는 내 아버지를 죽였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다 !' 라고 외쳐 파벨 1세의 암살에 공모했다고 의심받던 알렉산드르의 안색을 변하게 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그는 포로 생활 당시 장군이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혹한 대접을 받으며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젊은 시절 오스트리아군과 프로이센군, 러시아군 등을 연파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의 천재성이 빛났기 떄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상대인 적군 지휘관들이 프랑스군처럼 실력이 아니라 신분에 의해 지휘권을 얻은 무능한 인간들이었다는 점도 크게 기여를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제국의 운명이 달린 이 중요한 러시아 원정에, 그의 적들이 발목을 잡았던 바로 그 약점을 스스로 만들어서 달고 간 것은 정말 나폴레옹도 예전의 나폴레옹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그가 믿고 쓰는 다부에게 '제롬을 잘 보필하라'라고 지시해두긴 했지만, 문제는 역시 제롬이었습니다.  이 철없는 28살짜리 청년 왕은 '내가 나폴레옹의 동생이자 3개 군단 지휘관인데 누구 명령을 따르라는 말이냐'라며 정말 자기가 엄청난 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누구의 말도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  이 모든 것이 막내 동생을 버르장머리 없이 키운 나폴레옹 본인의 책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체감한 것은 바그라티온의 제2군을 함정에 빠뜨린 뒤 그 포위망을 좁히는 작전에 제롬의 군대를 투입한 뒤에, 제롬으로부터 그 첫 보고서를 받아보았을 때였습니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군 작전 보고서에 당연히 있어야 할 내용들, 즉 적의 위치와 군세, 이동 방향 등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심지어 아군의 위치와 상황에 대한 정보조차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주절주절 두서 없이 쓴 보고서의 내용은 주로 제롬 본인이 겪고 있는 온갖 어려움에 대한 불평불만 뿐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직감했습니다.  "망했다."  아니나 다를까, 제롬은 밤잠을 자지 않고 강행군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내가 왕인데 숙소가 이게 뭐냐' 따위의 불평불만과 투정만 일삼으며 전군의 추격 속도를 떨어뜨렸고, 결국 다부가 애써 가로 막은 바그라티온의 러시아 제2군을 제때 덮치지 못했습니다.  결국 바그라티온은 남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이때 탈출한 러시아군은 보로디노 전투를 사실상 무승부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며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수렁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대노했습니다.  자기 동생이 그렇게 무능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는 다부에게 이제 제롬의 지휘권을 박탈하여 다부의 지휘권 아래 두라고 뒤늦게 명했습니다.  이렇게 껄끄러운 명령을 받은 다부는 무척 난처해하며 이 소식을 제롬에게 전했습니다.  아마 다부로서도 무능할 뿐만 아니라 부담만 되는 부하를 거느리게 된 것이 굉장히 난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부의 전언을 받은 제롬은 이 원정 내내 내린 결정 중 프랑스군을 위해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결정을 내립니다.  "내가 국왕인데 한낱 원수 따위의 지휘를 받으라는 말인가 ?"라며 벌컥 화를 내고는 직속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냥 베스트팔렌 카셀로 돌아가버린 것입니다.  다부는 물론 아무도 제롬의 이탈을 아쉬워하지 않았고 비로소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너무 악화된 뒤였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J%C3%A9r%C3%B4me_Bonaparte
https://en.wikipedia.org/wiki/Dominique_Vandam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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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ranken 2019.12.16 08: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서고금 막론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초를 치는 철부지 높으신 분들이 있네요. 뭐 어릴 때부터 고생을 안 겪은 사람이 갑자기 잘할 수도 없긴 하지만 분통이 터지는 건 어쩔 수 없군요.

    근데 사회생활 좀 해보니 왜 전근대 왕들이 무능력을 감수하고 가족들을 우선시했는지 알겠더군요. 세상 일 추진하는데 능력도 필요하지만 그보단 신뢰가 더 중요한데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은...필요관계에 의해 만났으니 위험부담이 예상외로 크더군요.

  2. ㅇㅇ 2019.12.16 08: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등! 러시아 원정이 시작부터 너무나 삐걱거리네요. 요즘 나시카님 연재글을 2회차 정주행하던 중 이탈리아 원정으로 접어들었는데, 그때 나폴레옹에게 있었던 건 원투펀치 오주로와 마세나, 겨우 4만의 훈련 덜 된 프랑스군이었지만 이탈리아군을 탈탈 털었는데...극명하고 안타까운 대조네요.

  3. keiway 2019.12.16 1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래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죠. 자신의 성공에 대한 자만과 얻은 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오만, 그리고 성공으로 이끌어준 (오래된) 방식 에 대한 고집 때문에. 그런데 기존 성공 방식조차도 지키지 못했으니 졸부 나폴레옹의 몰락은 그 내부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스페인 내전과 러시아 원정은 그걸 명확하게 보여준 거고요. 이런 식이라면 두 전쟁이 성공했어도 결국 몰락은 필연이 아니었을까요.

  4. 까까님 2019.12.16 12: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톨스토이의 전쟁과평화에 잘 나오는 부분이네요
    그 책을 읽을 때는 배경상황을 몰라서 '킹왕짱쎈 나파륜' 때문에 러시아군이 패닉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분전하면서 어려운 후퇴를 성공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5. 에휴 2019.12.16 1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니아토프스키 ㅋㅋ 깜빡한척 하기 ㅋㅋㅋ 나폴레옹 진짜 망하려고 별 수를 다쓰는거 같아요

  6. 페미나치란? 2019.12.16 15: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여가부 페미들 국가 주요요직에 앉히는게 수십명의 제롬을 양상하는 것인데 그런 제롬은 객관적으로 보실 줄 아시면서 ♩♫♪♫들에겐 찬성하시는 주인장님의 뇌구조가 조금 궁금하긴 합니다

    직접 그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할때쯤엔 후회해도 늦으실건데 좌파란 참으로 신기하군요

    • 아스날면도기 2019.12.16 18: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쯧쯧쯧......

    • JS Choi 2019.12.16 1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남의 개인블로그 들어와서는 (등장인물 이름 빼놓고는) 본문 내용과 아무 상관없이 여가부 페미 댓글 달면서 개인적인 의견에 딴죽걸고 있는 사람이 더 이해가 안됩니다.
      게다가 고생해서 글 올려주신 주인장께 뇌구조가 어쩌고... 무례하기도 짝이 없군요.

    • keiway 2019.12.17 1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ㅉㅉㅉ...
      관종에겐 먹이를 주면 안됩니다.

    • Franken 2019.12.17 1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 데서 하세요. 알타리무씨ㅡㅡ

    • 더마 2019.12.19 1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가 주세요.

    • 정암 2019.12.27 1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박근혜-최순실 사건은 잊어버린듯한 님의 뇌구조가 전 더 신비롭습니다 ㅎㅎ 좌파 좌파 하는데 그럼 우파는 뭐 그리 잘났나요? ㅋㅋ (우파도 아닌 수구꼴통이지만)

  7. 하이텔슈리 2019.12.17 2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제프도 뤼시앵도 루이도 나름대로의 생각과 그에 의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이었는데, 제롬은 진짜 답이 없었네요...

  8. 나삼 2019.12.18 15: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롬은 나폴레옹 연재 초기 오스트리아 왕족 처럼 초치는 역할을 하네요.

  9. 루나미아 2019.12.18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루이는 네덜란드에서 선정을 펼쳤기에 말할 것도 없고, 조제프도 스페인에서 중요할 때 이런저런 결정들을 잘 내렸다고 알고 있어요.
    근데 제롬은 참...

    그리고 폴란드 군주감은 당연히 포니아토프스키인데 다부가 나와서 띠용했네요.
    나폴레옹이 몰랐을 리가 없죠. 원래부터 제대로 해 줄 생각 없다가, 자기가 몰락할 때도 끝까지 남아줬다가 전사한 거 보고 그제서야 정신차린 거겠죠.후...

  10. 알키비아데스 2019.12.18 21: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인트 헬레나에서 모든 결과를 다 알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나폴레옹 개털되는 상황에서도 본인한테 헌신적이라는걸 알았으니 포니아토프스키를 폴란드왕 시켜줬어야 했다고 한탄하는거지 1812년 이전에 그런 판단을 못한건 나폴레옹의 한계였을 뿐

  11. 알키비아데스 2019.12.18 22: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빌어먹을 형제 누이들은 마치 내가 아버지한테 황제 자리를 물려받은거 처럼 행동한단 말이야'
    여기서 제롬, 캐롤라인은 무조건 포함될거 같은데 뤼지앵과 앨리자도 들어갈까요?

  12. 웃자웃어 2019.12.20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게 있는데요, 당시에 병사 1명을 유지하는데 얼마만큼의 돈이 드나요?

    • nasica 2019.12.21 1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제게는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죄송합니다.

    • 웃자웃어 2019.12.21 2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면 질문의 일부 항목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머스켓 소총의 이야기 편에서 당시에 화약값이 비쌌다고 했는데 어느정도로 비쌌나요?

    • nasica 2019.12.22 22: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니 대략 1파운드에 0.5실링 했던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 돈으로는 대략 6~7천원 정도입니다. 그리고 브라운베스 머스켓 소총 1발에는 대략 0.09 파운드의 화약이 필요했으니, 1파운드의 화약으로 11발 정도의 사격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발에 대략 500~600원인 셈이네요.

      http://forums.sjgames.com/showthread.php?t=31920


서양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를 '꿈의 나라'라고 하며 동경합니다.  서양의 문화적 토대가 처음으로 이루어졌고, 또 민주주의의 시발점이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고대 그리스가 그런 꿈의 나라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소리를 들으면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화장실이 어땠을까 ?  간단히 말하면 이나영이나 한예슬도 화장실에 갈까 정도의 생각이지요.

 



답부터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도시 중 그래도 가장 화려하고, 또 가장 잘 발굴된 도시인 아테네에도, 공중 화장실은 없었습니다.  또 집집마다 화장실이라고 할 만한 것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테네인들은 어떻게 용변을 보았을까요 ?  뭐, 뻔하지 않습니까 ?  요강을 썼습니다.  영어로는 chamber pot 이라고 하지요.  헬라어로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요강이라는 편리한 휴대용 변기는 19세기까지도 유럽 전역에서 매우 편리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도 아테네에서는 18세기 유럽처럼, 간밤에 요강에 쌓인 내용물(영어로는 night soil이라고 하더군요)을 길바닥에다가 마구 내다버리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런 것을 수거해다가 정해진 곳에 내다버리는 노예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유아용으로 썼던 요강 겸 좌변기랍니다.  측면의 저 넓은 구멍으로 아이의 다리를 내놓은 듯 해요.)

 



사실 화장실이라는 문화는 상하수도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아테네에는 상하수도 시스템은 없었습니다.  대신 우물보다는 훨씬 세련된, 그러니까 멋진 조각으로 장식된 공공 수도꼭지 비슷한 것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물을 암포라 같은 토기 항아리에 길어서 집집마다 가져가는 것은 (물 항아리가 무척 무거울텐데도) 여자 노예의 몫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서민층은 주부가 직접 길었겠지요.  남자들이요 ?  남자들은 그런 거 안했답니다.  아고라나 장터에 가서 토론이라는 미명하에 수다를 떨었지요.  희안하게도 장보는 것은 또 남자들의 몫이었다고 하네요.  남자들이 시장에 가서 동료 시민들과 만나 실컷 수다를 떨고나서, 손에 생선이나 올리브 같은 것을 들고 오는 광경을 생각해보십시요.  우습나요 ?  전 사실 부럽습니다.

시대가 좀더 흘러 로마시대가 되면, 로마 뿐만 아니라, 웬만한 대도시에는 상하수도 시스템이 생기면서, 수세식 공공 화장실이 생깁니다.  아래 것은 폼페이에서 발견된 공공 화장실인데, 좌변기 아래에 물이 흐르게 되어있어 '투하물'이 흐르는 물에 쓸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터키 해안지방인 사르디스나 에페소스 등에서도 이런 로마식 공중 화장실이 발견됩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는 용변 보는 모습이 서로에게 흉이 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칸막이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이게 원래 서양의 풍습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대 미국의 공공 화장실은 칸막이가 상당히 개방적입니다.  즉 옆자리와 칸막이가 있기는 있으나, 발목이 다 보이도록 아래 쪽이 뻥 뚫려있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서 사용하면, 약간 불안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듣기로는 화장실 칸 안에서의 범죄를 막기 위해서라고도 하더군요.  저도 폼페이에 관광 가서 저 공중 화장실을 봤던 것을 기억나는데, '유로 자전거나라'의 여성 가이드분께서 설명하시길 여기에는 남녀 화장실 구분이 없었고, 시민들의 쾌적한 볼 일을 위해 화장실 가운데에서는 시에서 고용한 가수가 노래를 불렀다고 설명하시더군요.  

각 가정에서는 어땠을까요 ?  물론 부자집과 가난한 집이 사정이 틀렸습니다.  부자집에서는 공공 화장실에서 처럼, 좌변기 아래에 흐르는 물이 있어서 수세식이었고, 그냥 중산층 가정에서는 '투하물'이 웅덩이에 그냥 모이게 했다가 정기적으로 퍼내갔다고 합니다.  비용은 집주인이 부담해야 했다고 합니다.  소위 말하는 '푸세식'이었던 것이지요.

퀴즈 하나.  로마 가정집에서 화장실의 위치는 어디였을까요 ?  다소 충격적입니다.  주방입니다.  주방에 좌변기가 떡 하니 있었습니다.  물과 화장실이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주방의 허드렛물로 '투하물'을 쓸어내리곤 했답니다.  그래도 옆에서 음식을 하고 있는 하녀 옆에서 칸막이도 없는 좌변기에 앉아 응아를 하는 모습은 그리 청결해보이지는 않습니다....

퀴즈 둘.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난 뒤, 휴지는 뭘 썼을까요 ?  고대 아테네의 사정은 잘 모르겠습니다.  로마에서는 스폰지, 즉 해면을 썼습니다.  한 30cm 길이의 막대기 끝에 둥근 해면을 달아놓았는데, 공공 화장실에서는 이걸로 뒤를 닦고 소금물이나 식초물이 든 양동이에 다시 넣어놓았다고 합니다.  그걸 다른 사람이 물로 대충 행궈서 또 뒤를 닦고... 으윽.

 



참고로, 최초의 종이는 AD 105년인가에 한나라에서 발명되었습니다.  또 최초의 종이로 된 화장지도 중국에서 썼다고 합니다.  598년인가에 어떤 중국인 학자가, '성현의 말씀이 적힌 종이는 도저히 화장지로 쓸 수가 없다'라고 적어놓은 것이, 최초의 종이 화장지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하는군요.  또 9세기 당나라를 찾은 이슬람 학자가 써놓은 기록에 보면, '중국인들은 위생관념이 없다.  용변을 보고나서 손과 물로 깨끗이 닦지않고, 종이로 쓰윽 닦고 만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럽에서는 어떤 걸 화장실 대용으로 썼을까요 ?  16세기경에 이미 종이를 화장지로 썼다는 기록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보다는 주로 삼, 헝겊조각, 양털, 짚, 나뭇잎, 풀, 나무껍질, 모래, 물, 눈, 돌, 조개껍질 등등 손에 잡히는 건 아무거나 다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개껍질은 대체....??? 

실베스터 스탤론과 웨슬리 스나입스, 그리고 산드라 블록이 나온 영화 "데몰리션 맨"에서도 이 조개껍질 이야기가 나옵니다.  냉동되었다가 100년 후인가의 미래에서 깨어난 실베스터 스탤론이 화장실에 가는데, 휴지는 없고 대신 "three sea shell"이라고 하는 조개 모양의 물건 세개가 나란히 놓인 것을 보고 난감해하는 장면이 있지요.  그 사용법은 저도 정말 궁금했는데, 영화 맨 마지막 장면이 바로 스탤론이 산드라 블록에게 "대체 그 조개는 어떻게 사용하는거냐" 라고 묻는 것이었지요.

 



일본은 전통적으로 새끼줄을 앞뒤로 잡고 쓱쓱 했다고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조롱을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뭐 그리 우아하지는 않았답니다.  껍질을 벗긴, 얇은 나무 막대기로 뒤처리를 하고 씻어서 뒷간 한쪽에 세워놓았다는데요 ?

로마 제국이 망한 뒤, 중세 암흑기를 거친 유럽은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면서 비로소 요즘 나오는 '뽀스'를 좀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프랑스의 경우 "짐이 곧 국가니라. (L'ete, c'est moi.)"라고 말했다는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세우면서 예술과 문화의 나라로서의 행보가 본격화됩니다.  자, 베르사이유 궁전의 화장실은 또 어땠을까요 ? 

이건 다들 아실 겁니다.  역시 정답은 한마디로 '그런거 없다' 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화장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이지요.  다만 요강, 즉 chamber pot이 있었습니다.   뭐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거기 정원에 있는 덤불 숲이 원래 화장실이다 뭐다 그런 말들이 있는데, 그건 사실과는 좀 다르다고 합니다.  '요강'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루이 14세가 왕권 강화를 위해 매일 밤 무도회를 열었다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요강을 들고 왔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 요강을 들고 왔다고 하더라도, 하인들이 그 내용물을 집에 들고 갔을 것 같지는 않고, 결국 정원 덤불 숲에 버렸을테니, 결국은 그게 그거 같기도 하군요.

 

(이런 예쁜 여성용 요강을 bourdaloue '부르달루'라고 부른답니다.   영어에는 없는 표현이라서 프랑스어 사전을 찾아보니 '드문 남자 이름' 이라는 설명과 함께 '요강'이라는 뜻이 있더군요.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Louis Bourdaloue라는 이름의 유명한 예수회 신부가 하도 설교를 오래 하는 바람에 숙녀분들이 옆 방에서 잠시 용변을 해결할 수 있도록 이런 물건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 물건을 사용하는 모습을 그린 바로크 양식의 유화가 있긴 한데... 너무 노골적이라 전재하지 않습니다.  꼭 보고 싶으신 분은 https://georgianera.wordpress.com/2015/11/10/what-was-a-bourdaloue/ 클릭.)

 



방 안에서 요강에다 응아나 쉬를 하면 당연히 악취가 날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요강에는 뚜껑이 달려있었고, 또 뚜껑을 덮기 전에 천을 덮어서 악취가 새어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주인님이 응아나 쉬를 하고 나면 하인이 곧장 내용물을 내다 버렸습니다.

영국이 나폴레옹을 상대로 힘겨운 전쟁을 꾸려나갈 때, 그 전쟁 자금을 대주었다는 로스차일드의 집무실에도, 따로 화장실이 없었던 것이 확실한 모양입니다.  어느 책에서 보았는데, 로스차일드 집무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집사가 거만한 표정으로 요강을 들고 나오자, 그 앞에 진을 치고 앉아있던 많은 청원자들이 마치 성물이라도 본 것처럼 경외하는 눈빛으로 그 요강을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당시의 군함이나 상선의 경우, 난간에 간단한 구멍뚫린 좌석이 있었고, 그게 화장실이었습니다.  영어로는 그런 화장실을 'head'라고 불렀습니다.  왜 화장실을 하필 head라고 불렀는지는 간단히 설명됩니다.  당시 범선의 원리상, 당연히 바람은 배의 뒤쪽에서 불어왔으므로 선원들이 응아한 것이 배의 측면에 불러붙는 끔찍한 사태를 피하려면 화장실이 이물, 즉 배의 앞쪽에 있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냥 '뱃머리에 간다'라는 말이 화장실 간다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면서 화장실을 head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선장실에는 따로 화장실이 있었는데, 역시 '투하물'은 그대로 바다로 떨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히, 환자들을 위한 방에는 역시 화장실이 따로 있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추운 밤에 환자보고 난간에 매달려 용변을 보라는 건 좀 잔인했기 때문이었지요.  일반 여객선의 경우, 대개 '난간 화장실'을 쓰지 않고 역시 요강을 썼습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선원들 앞에서 용변을 볼 수는 없었겠지요.  남자 승객들도 파도가 심한 날에 '난간 화장실'을 쓰는 경우 바다에 추락할 위험이 많았습니다.

위와 같이 선박인 경우는 드넓은 바다가 '투하물'을 처리해주었으니 차라리 위생적이었습니다.  문제는 대도시인 경우, 요강의 '내용물'을 어디다 버리느냐입니다.  답은 다들 아시지요 ?  그냥 길바닥에 버렸습니다.

1807년, 나폴레옹 전쟁의 복잡한 국제 관계로 인해, 영국은 엉뚱하게도 나폴레옹과 대립하던 덴마크 왕국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덴마크 왕국에게는 아담한 규모의 멋진 함대가 있었는데, 트라팔가 해전에서 함대를 모두 말아드신 나폴레옹께서 그 함대를 탐냈습니다.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힘없는 덴마크가 나폴레옹에게 함대를 빼앗길 것 같다는 판단을 한 영국은, 덴마크에게 매우 거만한 요구를 하게 됩니다.  '그 함대를 내놓아라.  그러면 우리가 잘 보관했다가 좋은 시절이 오면 되돌려주마.'

덴마크도 엄연한 주권국가인데, '예, 그러시지요' 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를 거부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영국 육해군이 코펜하겐을 포위하고는 바다와 육지에서 곡사포로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소위 '자위적 선제 공격'으로도 유명하고, 또 백인들끼리의 전쟁에서 최초로 민간인 거주 지역에 무차별 포격을 가한 최초의 사건으로도 유명한 일입니다.

 



이때 코펜하겐에는 Eckersberg라는 화가가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의 집에도 곡사포에서 발사된 폭탄 하나가 지붕을 뚫고 날아들어왔습니다.  이 화가는 급한 김에 요강을 들어 그 내용물로 폭탄의 도화선에 붙은 불을 껐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 화가는 1807년의 코펜하겐 폭격 사건을 목판화로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위의 그림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나폴레옹 블로그인데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화장실 일화가 하나는 있어야겠지요 ?  나폴레옹이 퐁텐블로에서 퇴위 조서에 서명한 뒤 1차로 폐위되어 엘바 섬에 유폐되었지요.  사실 거기에 간 형태는 엘바 섬에 죄수로 간 것은 아니고 엘바 섬의 군주로 봉해져서 것이었습니다.  20년 넘게 파리에서 권좌를 누리다가 간 나폴레옹의 눈에 엘바 섬과 같은 촌동네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습니까 ?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도착해서 배에 내린 뒤 처음 내린 명령이 '이 동네에 화장실을 만들라, 악취가 난다' 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만, 저는 그게 사실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유럽 대도시는 어디나 다 요강 내용물의 냄새가 났을테니까요. 

 

 

 

Source :  https://eaglesanddragonspublishing.com/tag/sponge-on-a-stick/

https://www.pinterest.jp/pin/535717318145424968/

https://en.wikipedia.org/wiki/Chamber_pot

https://georgianera.wordpress.com/2015/11/10/what-was-a-bourdalo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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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강여호 2019.12.05 07: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화장실 이야기 재밌게 읽었습니다.

  2. Nasca 2019.12.05 1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헬레스폰트 연재 다시 해주세요

  3. j 2019.12.05 2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먹는것만큼 중요한게 싸는(!)일이죠ㅎㅎㅎ 재밌게 읽고 갑니다!

  4. Kulnev 2019.12.06 1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옛 글이지만 언제 읽어도 유익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5. 이타카 2019.12.06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럼 하인들은 어디에 용무를 봤을까요..?

  6. spitfire 2019.12.10 2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최소한 고대에는 서서쏴는 아니었네요~ 문제는 근세로 넘어오면서 (남녀 구분없이) 서서쏴가...


네만 강을 건너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나(Vilna, Wilna, Vilnius)에 입성하기까지 총 한 방 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겉으로 보기에는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프랑스군이 빌나에 입성할 때, 빌나 주민들의 반응을 봐도 그랬습니다.  당시 빌나는 러시아의 직접 통치 하에 들어간지 약 20년이 채 안 된 상태였었는데, 러시아계 관료들이나 러시아 측에 붙었던 폴란드계 귀족들은 러시아군이 철수할 때 그 뒤를 따라 함께 피난을 가버린 뒤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남아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계 주민들은 프랑스군을 해방군으로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당시 폴란드 창기병 부대를 이끌고 빌나에 거의 처음으로 입성했던 로만 솔틱(Roman Soltyk) 백작의 목격담에 따르면 거리와 광장은 환영 인파로 가득했고 창문들에는 여인들이 상반신을 내밀고 손수건을 흔들며 기뻐했습니다.  꽃다발과 함성이 난무했고요.

 

(1812년 당시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인 외젠 보아르네 휘하 참모진에 있던 알브레히트 아담(Albrecht Adam)이라는 종군화가가 스케치한 그랑다르메 보병들의 행군 모습입니다.  알브레히트 아담은 바이에른 출신의 독일인으로서, 1809년 전쟁 때 보아르네에게 종군 화가로 채용되어 이후 계속 바이에른 궁정 화가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 분은 스케치 뿐만 아니라, 나중에 전쟁이 끝난 뒤 이런 스케치와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여러 석판화와 유화도 그려 꽤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그 그림 중 일부는 지금도 유럽 곳곳의 박물관에 걸려 있다고 합니다.  사진은 제가 요즘 거의 베끼다시피 하고 있는 아담 자모이스키의 책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에 포함된 그림입니다.  당시 알브레히트 아담은 주로 이탈리아인들로 편성된 제4군을 따라다녔다고 하니까 저 그림 속 병사들도 아마 이탈리아군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군이 빌나에서 찾아낸 것은 다 타버린 러시아 군수품의 잿더미 뿐이었습니다.  빌나와 그 인근 지대는 러시아군이 이미 수개월에 걸쳐 장기 주둔하며 먹을 것을 박박 긁어먹고 간 뒤였기 떄문에 식량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박박 긁어모았던 식량은 러시아군이 철수할 때 용의주도한 바클레이가 모두 불태워 버렸고요.  그런 상황은 원래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후방지대에 엄청난 양의 군수품을 잔뜩 쟁여놓았습니다.  그러나 네만 강을 건너자마자, 정확히 이야기하면 네만 강을 건너기 전부터도 말들이 사료 부족과 형편없는 도로에서 기진맥진하여 빠르게 죽어쓰러지기 시작했고, 특히 네만 강을 건넌지 얼마 안되어 불어닥친 폭풍우 속에서 수만 마리의 말이 죽어버린 것이 상황을 정말 악화시켰습니다.  진흙구덩이와 물웅덩이 속에서 말들이 허우적거리다 죽어버리자, 식량을 후방에서 새로 실어오기는 커녕 그나마 이미 싣고 오던 것조차도 버리고 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버려야 했던 짐 중에는 말들의 먹이인 귀리도 잔뜩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곧 더 많은 말들이 영양 실조로 죽게 되었고 상황은 기하급수적으로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랑다르메를 덮친 폭풍우로 인해 진흙탕이 된 도로에서 고생하는 포병대를 그린 모습입니다.  이 그림도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에 포함된 것입니다.  Christian Wilhelm von Faber du Faur라는 분이 그린 석판화입니다.  이 분도 남부 독일인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화가인데,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에 배속된 종군 화가였습니다.)

 



그렇게 빌나로 반입되는 식량은 전혀 없던 반면, 먹여살려야 하는 입들은 삽시간에 깜짝 놀랄 정도로 잔뜩 몰려들었습니다.  후방 뿐만 아니라 전방에서도 많은 그랑다르메 병사들이 절뚝거리며 빌나로 몰려든 것입니다.  낙오병과 환자, 부상병들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40만 그랑다르메 중 상당수는 단련된 병사들이 아니라 단시간에 긁어모은 어린 신병들이 많았는데, 특히 그런 신병들은 부족한 식량과 열악한 도로 및 위생 환경에 버티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총상이 아닌 강행군에 의해 발과 다리에 생긴 부상과 함께 온갖 질병으로 인해 빌나에 차려진 야전 병원에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네만 강을 건넌지 1주일 만에, 아무 전투가 없었는데도 놀랍게도 이들의 숫자는 3만 명에 달했습니다.  전체 병력의 7~8%에 해당하는 인원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빌나 및 인근 지역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주민들의 기쁨도 삽시간에 식어버렸습니다.  주민들은 나폴레옹이 과거 영광을 누리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복원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어렵더라도 최소한 러시아의 농노제라는 신분의 예속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은 곧 나폴레옹에겐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령 7월 3일, 나폴레옹은 리투아니아 정부 수립을 발표했는데, 이는 바르샤바 공국과의 합병을 원천 봉쇄하고 그저 리투아니아 지역에서의 징병과 식량 징발을 실행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 명백했습니다.  열의에 찬 빌나 대학의 학생들이 일종의 정치 모임을 만들어 프랑스군 점령 지역은 물론 러시아군 점령 지역에서도 농민들에게 러시아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선전하겠다는 뜻을 전하자, 나폴레옹은 '사회 정치적 소요를 원치 않는다'며 그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또 빌나 대학의 학장인 얀 스나이데츠키(Jan Sniadecki)와 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이야기가 나오자 '그 사람은 굉장히 뛰어난 황제요 !' 라며 노골적으로 알렉산드르의 편을 들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바르샤바 공국에서 일단의 폴란드 애국자들이 먼 길을 찾아와 폴란드 왕국의 부활을 건의하자 '내 통치 하에는 이해가 서로 충돌하는 많은 집단이 있고 나는 그들의 충돌을 조절해야 한다'라며 그들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이 전쟁이 벌어진 주요 원인은 크게 2가지, 영국-러시아 간의 무역 그리고 폴란드 왕국의 부활에 대한 러시아의 반발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러시아 항구를 영국으로부터 닫아야 했고 또 폴란드인들의 충성이 꼭 필요했습니다.  애초에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은 도저히 상존할 수 없는 서로의 이해 관계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의 팔을 비틀어서라도 어떻게든 러시아와의 동맹을 다시 끌어내려 했습니다.  즉, 나폴레옹이 이 전쟁에서 바라는 것은 알렉산드르와의 화해였고, 그 때문에라도 나폴레옹은 끝끝내 농노 해방령이나 폴란드 왕국의 부활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주민들의 민심을 이반시킨 것은 그런 민족주의에 대한 배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배고픈 병사들은 어떻게든 먹을 것을 구해야 했고, 당연히 곳곳에서 난폭한 약탈이 자행되었습니다.  그랑다르메의 제1진은 언제나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했지만, 그들이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을 다 훑어먹으며 지나가자, 제2진을 맞이하는 것은 텅빈 마을들과 버려진 농토 뿐이었습니다.  농민들은 그랑다르메를 산적떼로 인식하게 되었고, 프랑스군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농민들은 얼마 안되는 식량과 가축을 몰고 깊은 숲 속으로 피난을 떠나버렸습니다.  농민들은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프랑스놈들은 우리의 족쇄를 풀어주러 왔다는데, 우리 신발까지 벗겨가더라."

그랑다르메의 병사들도 그에 대응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계 주민들을 사실상 적으로 대했습니다.  요제프 에즈몬트(Jozef Eysmont)라는 시골 신사는 빌나 인근에 있던 자기 장원으로 들어오는 프랑스 기병대를 전통에 따라 빵과 소금으로 환대하려 했으나, 그들은 곧 그의 창고와 마굿간을 탈탈 털더니 더 나아가 아직 익지도 않은 밀과 보리를 다 베어버리고 집안까지 쳐들어와 구석구석을 뒤집어 귀중품을 빼앗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들고가지 못하는 모든 가구를 아무 의미 없이 때려부수고 창문도 하나하나 다 깨어버렸습니다.  그의 마을 전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물론 무덤까지도 프랑스군의 약탈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한 폴란드 장교는 그에게 빵 한조각을 구걸하며 다가오는 거지를 밀어내려다 그 거지가 그의 친구이던 폴란드계 귀족인 것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폴레옹도 이런 약탈에 대한 보고를 당연히 들었고 대노했습니다.  그는 약탈자들에 대해서 일체의 관용을 베풀지 말고 즉결 처분에 처하도록 엄명을 내렸습니다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식량을 공급받지 못하는 군대는 약탈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병사들은 굶어죽으나 총에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절망과 체념이 섞인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병사들이 취할 행동은 딱 하나였습니다.  탈영이었지요.  탈영은 광범위하게 일어났습니다.  특히 고향에서 너무나 먼 리투아니아 현지에서 탈영병들은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떼를 지어 산적떼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곳곳에서 현지 주민들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 장교나 관료들까지 습격했는데, 이들 때문에 나폴레옹의 명령서를 전달하는 파발마들의 활동이 제약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탈영병들의 숫자는 최소 3만에서 최대 9만까지 되었다고 하는데, 탈영병의 숫자가 이렇게 너무 많다보니 이들을 체포하는 대로 다 처형할 수도 없었습니다.  간혹 이들을 잡아들일 경우 일부만 처형하고 대부분은 다시 부대에 편입시켰는데, 이들은 대부분 다시 탈영했습니다.

결국 네만 강을 건넌 뒤 나폴레옹에게 들어오는 것은 온통 나쁜 소식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나쁜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불시에 네만 강을 건너 빌나를 들어친 것은 확실히 기습 효과가 있었고, 그로 인해 러시아군을 궤멸시킬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Albrecht_Adam

https://en.wikipedia.org/wiki/Christian_Wilhelm_von_Faber_du_Fa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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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ranken 2019.12.02 0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군에서 군복무한 병사들이 하나같이 하소연하는 게 행군이 생각이상으로 힘들고 부실한 전투화 땜에 발바닥 및 발목에 물집,상처까지 생겨 이중으로 힘들었다는 건데 인프라가 없다시피한 당시엔 3만여명의 부상자는 평범한 수준이었겠죠. 군납비리가 한국군 이상으로 만연해서 군화 재질도 좋지 못했던 것도 감안하면 선방했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매사 꼼꼼했던 나폴레옹이 이걸 몰랐을 리는 없으니 이런 낙오병도 계산에 넣어 대군을 꾸린 거겠죠.

    • reinhardt100 2019.12.02 1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군화문제 이거 꽤나 중요합니다.

      독소전 당시 소련군이 심각하게 직면한 문제 중 하나가 군화문제입니다. 가장 심각했던 공업용 소금과 비타민 섭취보다 후순위이긴 하지만 군화가 없어서 병력충원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이걸 해결해준게 미국의 랜드리스인데 최소 1500만 켤레의 군화가 소련에 급송됩니다.

      냉전기 소련군이 기계화에 집착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군화문제입니다. 소련식 발싸개나 우샨카 같은 신발 아니면 인민군이 쓰는 지하족 같은 운동화로 진격하다간 며칠만에 발이 아작나니 최대한 기계화해야 후유증이 덜할 거니까요. 농담으로 들으실지 모르지만 이게 현실이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군이 발싸개 퇴출한게 2010년대였으니까요.

    • 기리스 2019.12.02 14: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발싸개를 자신들의 전통, 자존심 같은 걸로 여기면서 옹호하는 러시아인들이 꽤 되더군요. 것도 신발 나름이고, 민간이나 군에서도 해군 같이 구두 많이 신는 곳은 옛날부터 양말이 보급되었죠.

    • 카를대공 2019.12.02 1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군대에서 인상 깊게 읽은 책의 구절 중 하나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베트남 군인들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베트남 군인들은 폐타이어로 된 신발을 신고 행군을 했다"
      그당시에도 기겁을 했는데 나시카님 이번주 글을 보니 그때가 떠오르네요.

    • [][] R.F.[][] 2019.12.06 1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reinhardt100: 러시아식 전통 펠트 방한화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우샨카가 아니라 '발렌끼' 입니다.
      우샨카는 소련 및 러시아군 특유의 방한모죠 ^^

    • reinhardt100 2019.12.06 14:14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제가 잘못 적었네요. ^^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흠흠흠 2019.12.02 0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력이 솜사탕처럼 녹아내리고 있네요. 약탈행위를 전혀 못 잡는 것으로 보아 나폴레옹이 대노했다는 것도 그냥 연기인 것 같습니다. 진짜 잡으려고 마음 먹었으면 웰링턴처럼 약탈행위 잡았겠죠. 저렇게 본국에서 멀리 떨어질 수록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소속 군부대 밖에 없을텐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현지에서 산적떼를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죠? 못 배운 사람들이라서 그러나.

    • ㅇㅇ 2019.12.02 2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 멀어서 돌아가기에도 막막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싶습니다. 빌뉴스에서 바이에른까지 1000km, 파리나 북이탈리아까진 1500km에 가까우니까요

  3. 리순센 2019.12.02 1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직 본격적인 시작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정신이 아득해지네요.

  4. 장웅진 2019.12.02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째 <알기 쉬운 제2차 세계대전사 제3권 - 대초원의 불꽃>을 다시 읽는 기분입니다. 나치독일군을 해방군이라며 환영했던, 스탈린에 의한 인공대기근을 겪어야 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나치독일군이 집단농장을 해체하기는커녕 그걸 계속 이용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을 수탈하고 괴롭히자 파르티잔으로 변해갔더라는...

    • reinhardt100 2019.12.02 1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크라이나나 백러시아, 발트 3국, 심지어 폴란드조차도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을 환영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일단 제국의 괴뢰국이긴 해도 독립을 약속했던 것도 있습니다. 하나 더 1917년 이후 철도 전격전 당시 약 150만 독일 동방 점령군이 제정 러시아보다 훨씬 공정한 점령통치를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독소전쟁 초기 독일군에 대한 환상이 있던 이들 지역 주민들이 모두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볼 수 밖에 없었죠. 심지어 우크라이나에서는 나시카님이 쓰신대로 빵과 소금을 뿌리면서 열렬히 환영했죠.

    • Franken 2019.12.02 19: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만일 나치독일이 점령지 주민들을 인간 대우 해주었다면 독소전쟁의 향방 자체가 달라졌을 겁니다. 파르티잔 퇴치하는 데만 30여만명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니 일개 야전군 수준의 이 병력이 소비에트 전선에 투입되고 주민의 협조까지 얻으면 소련으로썬 매우 난감한 상황이 되었을 테죠.

    • reinhardt100 2019.12.03 1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독소 전쟁 당시 독일군이 투입한 후방 치안 병력만 30만이 넘었지만 실제로는 더 투입했다고 봐야 합니다. 우선, 상당수 동맹국 병력이 고려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특히 루마니아나 헝가리군의 경우, 심하면 1/4 이상이 자국 근처의 점령지에 주둔하고 있던 군정통치용 병력이라 막상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죠. 루마니아가 대표적인데 80만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는데도 전선에 전개한 병력은 약 50만 선에서 왔다갔다 했습니다.

      하나 더 고려한다면 각 지역의 민병대 병력이나 독일 본토에서 급파된 경찰 출신 혹은 무장친위대 제8사단 플로리안 가이거 같은 병력도 꽤 됩니다.

      이런 병력들까지 고려한다면 최소 40만은 넘어가야 한다고 전 봅니다.

  5. keiway 2019.12.02 16: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수록 당시의 생활/기술 수준으로는 러시아 원정 실패는 필연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폴레옹도 그걸 모르지는 않아서 러시아와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화평을 맺으려 했지요... 그래도 결국은 '내가 한방 쎄게 빡 치면 나한테 항복하겠지' 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나폴레옹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나폴레옹의 실책과 그로인한 몰락이 참 아쉽게 느껴집니다.

    • 카를대공 2019.12.02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술 수준이라는 말씀이 딱인거 같습니다.
      뭐랄까 대자연이 "하지마라"고 강요하는 느낌?
      사실 나폴레옹과 당시 프랑스니까 당시 수준으로 모스크바까지라도 갔다고 생각합니다.

  6. 카를대공 2019.12.02 1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원정 당시 비전투 손실이야 유명하지만 네만강 건너자마자 꼴이 무척 심각했네요.정말 상상 이상입니다.
    항상 좋은 정보로 재미난 글 써주셔서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7. 웃자웃어 2019.12.03 2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게 있는데 당시의 기병과 포병은 모병인가요? 아니면 강제징집 인가요?

    • nasica 2019.12.04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질문인데 답을 잘 모르겠군요. 그러나 기병과 특히 포병이 보병보다 급료가 좀더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자원병들로 충원되었을 것 같습니다.

    • Franken 2019.12.05 14:50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병은 말을 다루어야 한다는 특성상 아무나 못하여 어렸을 때부터 타본 경험 있는 부유층 자제들이 주로 지원했고 군에서도 선호했습니다. 포병 역시 당시 대포가 직접사격 위주였다지만 그래도 탄도학 같은 산수능력은 있어야 명중율이 나왔기에 학식을 갖춘 중산층 이상 자제를 선호했지만 뽀대가 기병보다 안 나고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단점 때문에 지원자가 적어 급하면 일반 서민도 받는 등 상대적으로 문이 열려 있었죠.

    • 웃자웃어 2019.12.05 2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병과 포병이 숙련도를 요구하기 때문인가요? 그렇다면 일반 보병과 비교했을때 복무기간은 어느정도 되나요?


6월 23일 아침, 나폴레옹은 미리 준비해둔 감동스러운 연설을 통해 '제2차 폴란드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이 전쟁을 통해 지난 50년 간 러시아가 유럽에 보여주었던 오만한 영향력을 분쇄할 것이라고 병사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당연히 병사들은 'Vive l'Empeurer !'를 외치며 호응했고, 나폴레옹을 속으로 싫어하던 장교들과 병사들마저도 그 광경에는 감탄해마지 않았습니다.  그 날 저녁부터 나폴레옹은 소수의 부하들만 데리고 네만 강가를 달리며 적절한 도하 장소를 물색했고, 마침내 밤 10시에 제13 경보병 연대가 보트를 이용하여 어둠 속에 조용히 강을 도하했습니다.  네만 강 동쪽 강변을 장악한 이들의 엄호 속에서 에블레(Jean Baptiste Eblé) 장군의 공병대가 3가닥의 부교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에블레 장군입니다.  이 분이 유명한 것은 네만 강을 건널 때보다는 베레지나 강을 건널 때의 공적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니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이 분이 시작해서 이 분이 끝냈군요.)

 



프랑스군과 대치하고 있던 러시아군은 평소에도 주기적으로 네만 강변을 정찰하며 프랑스군의 도하를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작업이 한창인 어둠 속에서, 마침내 한 무리의 러시아 경기병 정찰대가 제13 경보병 연대의 경계선 앞에 나타났습니다.  앞에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의 군부대가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러시아군의 지휘 장교는 프랑스어로 수하를 했습니다.

"Qui vive ?"  (직역하면 Who lives ? 정도이지만 '앞에 누구냐?' 정도의 질문입니다.)

거기에 대해 프랑스 장교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France !" (글자 그대로 '프랑스다 !' 네요.  왠지 멋있는 답변인데요?)

연이어서 욕지꺼리들과 함께 프랑스군이 일제 사격을 하면서 이 짧은 만남은 끝나버렸습니다.  나폴레옹도 이 머스켓 일제 사격 소리를 듣고 짜증을 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가능한 한 조용히 강을 건너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더 이상의 소란 없이 작업은 착착 진행되었고, 나폴레옹은 다시 막사로 돌아가 2시간 정도 토막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새벽 무렵 이 부교들이 완성되자, 나폴레옹이 주변 언덕에 올라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다른 한 손으로 쥔 망원경을 통해 바라보는 가운데 다부 휘하의 사단들이 제일 먼저 이 부교들을 통해서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그랑다르메가 3량의 다리들을 통해 강을 건너 러시아 땅으로, 좀 더 정확하게는 러시아령 리투아니아 영토로 행군해 들어가는 모습은 대단히 장엄한 모습이었습니다.  원래 프랑스군의 정장 군복은 멋있기는 해도 그다지 편한 옷은 아니었기 때문에, 긴 행군에 나설 때면 정장 군복은 돌돌 말아 배낭 속에 집어넣고 좀더 편하고 헐렁한 셔츠 및 회색 바지와 가벼운 모자 차림으로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 극적인 날을 위해 병사들은 전투에 나설 때처럼 정장 군복을 차려입고 다리를 건넜기 때문에 그랑다르메의 도하는 더욱 볼 만한 광경이었습니다.

 

 

(프랑스 근위대의 군복입니다.  도저히 활동성이 좋은 의복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그래도 전투에 나설 때 저런 복장으로 나서면 확실히 사기는 좀 오를 것 같기는 합니다.)

 

 

(네만 강을 건너는 그랑다르메의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의 목표는 당연히 러시아 제1 군의 총사령부이자 알렉산드르의 임시 행궁이 있던 빌나(Vilna)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전쟁 시작 전에 '목표는 일단 스몰렌스크다, 거기서 러시아의 식량을 먹으며 러시아 비용으로 겨울을 나면서 알렉산드르를 압박하겠다' 라고 했다가 다음 번에는 '목표는 모스크바다,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심장이다' 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도 오락가락 했던 것은 러시아가 워낙 넓은데다 아무래도 수비적인 태세였던 알렉산드르가 결전을 회피하고 계속 후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5월 들어 나폴레옹에게 들어온 정보 중에 아주 좋은 것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빌나에 왔다는 것입니다.  이건 분명히 러시아가 국경에서 물러나지 않고 그랑다르메의 침공에 맞서 싸우려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빌나라면 네만 강을 건너 불과 2~3일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기습적으로 강을 건너 빌나를 들이친다면, 잘 하면 러시아 제1 군을 격파하고 아우스테를리츠에서 그랬던 것처럼 알렉산드르를 다시 한번 무릎 꿇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40만 대군이 강을 건너는데 러시아군이 눈치를 채지 못할 리가 없었습니다.  6월 23일 밤의 일제 사격은 결국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고 미친 듯이 말을 달린 러시아군 전령이 빌나에 들어온 것은 24일 밤 자정이 넘은 뒤였습니다.  하필 이 날 밤은 빌나에 있던 베니히센(Levin August von Bennigsen)의 저택에서 알렉산드르를 위한 무도회가 있던 밤이었습니다.  이 날 짜르는 베니히센의 와이프 및 바클레이의 와이프 등과 인사치레의 춤을 같이 춘 뒤 빌나 사교계 최고의 미인 몇 명과 춤을 추고 기분이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조용히 신하가 접근하여 귓속말을 전했고, 알렉산드르는 무도회 분위기를 깨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비웠습니다.

 

(나폴레옹이 정확하게 네만 강 어디를 건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빌나와 네만 강은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당장 새벽부터 주요 참모들과 장관들이 새벽잠을 설치고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습니다만, 급히 소집된 회의에서 아무도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이건 사실상의 총사령관 역할을 자임하고 있던 알렉산드르의 잘못이었습니다.  여태까지 여러가지 안을 손에 쥔 채 아무 것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것이 바로 그였으니까요.  장기 주둔을 위한 식량과 물, 숙소 등의 문제 때문에 러시아 제1 군은 네만 강변 곳곳의 마을에 넓게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군은 당장 벌어진 프랑스군의 침공에 제대로 대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방어든 공격이든 뭐라도 해보려면 당장 병력을 집결시켜야 했는데, 그러려면 적어도 며칠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당장 이틀 안에 빌나 코 앞에 나타날 거리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군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후퇴였습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네만 강을 건넜다는 소식은 빌나 시내에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젊은 러시아 장교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전쟁이다 !'를 외치며 기뻐했습니다.  이들은 당장이라도 프랑스군과 결전을 벌이고 빛나는 승리를 거둘 것 같은 기세였습니다.  하지만 당장 이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퇴각'이었습니다.  장교들의 낙담과 분노는 가히 짐작할 만 했습니다.  그들 중 아무도 자신들이 전투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조차 제대로 이해를 못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이틀이면 빌나에 나타날 거라고들 했지만, 당장 그 다음날인 6월 26일 아침 일찍, 프랑스군 기병대가 빌나 인근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당장 알렉산드르의 용기는 어디론가 날아가버렸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약간 창피할 정도로 서둘러 빌나를 빠져나갔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빌나는 일대 공포와 혼란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와중에 그래도 침착함을 유지한 것은 바클레이였습니다.  그는 질서있게 부대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리고 빌나에 접한 네리스(Neris) 강에 놓인 다리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 몇 달간 빌나 시내로 열심히 끌어모았던 군수품과 식량에도 불을 질렀습니다.  

 

 

(빌나, 아니 빌니우스(Vilnius)의 모습입니다.  꽤 아담하면서도 아름다운 도시같네요.)

 



2일 후인 6월 28일, 나폴레옹이 빌나에 입성했을 때까지도 바클레이가 군수품에 질렀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과 함께 빌나에 들어온 다부는 애처가였습니다.  그는 다음날 부인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은 총 한방 쏘지 않고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리투아니아를 정복한 것에 대해 무척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수선한 빌나에 들어와 불과 48시간 전에 알렉산드르가 숙소로 쓰던 주교관에 자리를 잡은 나폴레옹의 생각은 다부와는 달랐습니다.  그는 낙담하거나 실망했다기 보다는 굉장히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르와 러시아군이 이렇게 허겁지겁 도망가버린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군이 대군을 빌나까지 전진배치했을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르가 최전선까지 나와 군을 통솔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자신과 대회전을 벌일 각오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는데, 막상 다가가니 러시아군은 어이없게 줄행랑을 쳐버린 것입니다.  많은 군수품에 불까지 지른 것을 보면 뭔가 계획적으로 퇴각을 한 것 같지도 않고 서둘러 도망을 친 것 같았습니다.  그로서는 러시아군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직도 러시아가 어떻게 돌아가는 나라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Jean_Baptiste_Ebl%C3%A9
https://en.wikipedia.org/wiki/Levin_August_von_Bennig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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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9.11.25 07: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 네만 강, 네무나스 강을 넘어 도하했네요.

    만약이지만 프랑스군이 빌나우스까지의 거리만 행군하면서 러시아군과 결전을 벌였다면 꽤나 재미있는 결과를 낳았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두 배 가까운 병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밀어붙이는 프랑스군의 공세를 러시아군이 막이낸다? 무리라고 봅니다.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과 추축국 지원병력은 브레스트, 민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등에서 연이어 소련군 주력을 붕괴시키는데 성공했는데 비슷한 결과가 나왔을 거라고 봅니다.

    또한 숫적 우세도 우세지만 더 큰 이유가 독소전쟁 당시 소련은 '180개 사단이 섬멸된 뒤 360개 사단을 전선에 내보낸다.', '모스크바가 함락되어도 우랄산맥을 넘어서 싸운다'는 등 의 전쟁지도가 가능했지만 이 당시 러시아는 그럴 수 없었거든요. 국가 주력농업지역인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 모스크바 주변 평원 지대 전부가 프랑스군에 넘어가면 폴란드-모스크바 전쟁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났을 테니까요. 즉, 파탄난 전시경제로 전쟁지속? 무리입니다.

  2. JS Choi 2019.11.25 0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도 그런 뉘앙스의 문장이 종종 나오죠.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점령 후 러시아에서 취했던 여러 조치들이 사실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개화되고 훌륭하고 합리적인 것들이었다는...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나폴레옹도 결국 합리적인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남들도 자기처럼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라고 짐작하는 비합리적인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었나 봅니다.

  3. 하이텔슈리 2019.11.25 0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갑자기 든 생각인데, 프랑스군답지 않게 더 천천히 진군했다면 러시아가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는 시간이 생겨서 나폴레옹이 원했던 결전을 벌일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모 책에서 봤던 유머 하나가 생각납니다. 1차대전 한 독일 장군의 불만 "러시아놈들의 통신은 방수하기 쉬워서 그놈들이 언제 어디로 올지 쉽게 알았다. 그런데 그때 거기로 가보면 언제나 그놈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세웠던 계획이 엉망이 됐다!")

    • 유애경 2019.11.25 08: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재미있는 유머네요!

      에블레장군의 이름이 애벌레랑 겹쳐서 조금 웃었습니다.

  4. 푸른 2019.11.25 1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너무나도 철저히 준비하는 바람에 알렉산드르가 정신차리고 후퇴한거 같네요.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인가 봅니다

  5. spitfire 2019.11.25 1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알렉상드르가 도망가는게, 자료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사장님 주재 미팅이 잡혀 황급히 도피성 외근을 나가는 팀장의 모습 같네요~

    러시아 원정의 실패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고만고만한 사이즈의 나라들이 대국의 마인드를 이해하지 못한 것도 한가지 이유라 생각합니다. 확실히 BRICs 같은 대국의 인간들은 경험이나 상식 자체가 다른거 같더라고요.

    • reinhardt100 2019.11.25 14: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동감입니다.

      사실, 한국에서 러시아를 보는 눈이 '이빨빠진 불곰국(?)'으로 보는 경향이 최근 30년간 무척 강해진 듯 합니다.

      18세기 후반 이미 서방권에서는 중국이 크게 쇠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대신 러시아제국이 미래의 패권국 중 하나가 된다고 이미 식자층에서는 다들 하나의 정론이 된 상황이었죠. 이걸 확실히 각인시켜준 전쟁이 바로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이기도 합니다.

      지나사변, 흔히 말하는 중일전쟁 역시 대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전면전이기도 합니다. 일본이 1890년대 이후 계속 중국에 대해 우세한 입장을 취하다보니 중국의 잠재적 국력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선제공격으로 전면전을 개시했는데 막상 중국의 잠재적 국력이 모두 투사되기 시작한 남경함락 이후부터는 전쟁 자체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이왕 말이 나온김에 계속 쓰지만 중일전쟁은 결코 일본의 일방적인 우세로 진행된 전쟁이 아니고 주력 또한 장개석 영도하의 국민당군이 처음부터 끝까지 100만 지나파견군 및 40만 이상의 관동군, 주몽군 병력을 상시 전개를 시키게 만들면서 싸운 전쟁이었습니다.

      의외로 간과된 사실이 중일전쟁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화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더 많은 정화준비 및 국채상환능력을 보유하냐?' 이 점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죠. '중국 국민당 정권의 법폐냐? 일본의 조선은행권 및 왕조명정권의 중앙준비은행권 등 기타 엔계 은행권이냐?' 이 질문하나로 전쟁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것인데 이것 하나를 이해하지 못한 일본에게는 이미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대 한국에서 유달리 강해지는 타국 경시 문화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 나삼 2019.11.25 2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번 반일선동과 그에 휩쓸린 일부 국민들을 볼때면 타국.....;; 세계 최상의 경제대국을 우숩게 보는 관점에 소름이 돋기도 합니다. 구한말 조선의 모습이나 1820의 러시아 장교들 이 오버랩된달까요..

    • ㅇㅇ 2019.11.29 0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한일 관계를 걱정하고 있지요.
      그런데 저 위의 4천만 총옥쇄 주장하시는 윗분 같은 사람들은 좀...
      중국의 사드 보복때 한 중국 인사가 소국이 대국에 덤비면 안된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죠.
      이번 한일 관계에서마저 '소국인 한국이 대국인 일본에 덤비면 안 된다'는 식의 사대주의를 표하는 분들이 당시의 친중파들이거나 그들의 맥을 잇는 분들로 보여 유감스럽습니다

    • ㅇㅇ 2019.11.30 1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상대가 공격을 했으면 버티거나, 빌거나 둘 중 하나인데 덤비긴 뭘 덤벼요?
      누가 보면 한국이 일본 수출규제에 속수무책이라서 망하기 전에 일본에 선전포고해서 쳐들어가려는 건 줄 알겠네 ㅋㅋㅋ

    • ㅇㅇ 2019.11.30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베한테 도게자? ㅋㅋㅋㅋㅋㅋㅋ 이 분은 진짜 대한민국이 일본에 선전포고해서 쳐들어간 걸로 알고있나보네

  6. spitfire 2019.11.26 1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reinhardt100/ 한국인들이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이 못사는 나라라고 무시하는 거 보면 정말 실소가 나올 뿐입니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잘 나가니 이제 다른걸로 까긴 합니다만...

    타국/타민족/타문화/타경제 경시 문화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가 상대방보다 낫다라는 이분법적인 생각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구조가 지속된다면 십수년 내에 큰 전란이 발생하지 않을까 항상 걱정하고 대비하며 살고 있습니다.

    • reinhardt100 2019.11.27 0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쟁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악화되는 환경과 경제인데 어떤 결론이 나오긴 할 겁니다.

      한국이 저들 국가보다 기초과학기술이 뛰어난지? 국력이 압도적인지? 답 나오지 않습니까? 저도 그냥 실소하면서 속으로 절망밖에 없습니다. 왜 베네치아 공화국을 제외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16세기 이탈리아 전쟁기를 거치면서 정치적 독립을 잃고 합스부르크 제국에 종속되었는지 생각해보면 답은 나옵니다.

  7. keiway 2019.11.27 16: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일부'가 아닌 전체의 '한국인'을 얘기하면서 본인은 한국인이 아닌 것 처럼 가볍게 비판하는 것을 보면 일단 반감이 먼저 듭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이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비판하는 거라면 자신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처럼 진지한 자세로 임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그 집단에서 탈출한 뒤에 비웃는 거라면 할 말 없지만요.

    • ㅇㅇ 2019.11.29 08:35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 이 분은 중도란 게 뭔질 모르나
      공동체의 가치도 소중히 하자는 말에 전체주의자냐고 몰아가는 건 무슨 심보일까요?

    • ㅇㅇ 2019.11.29 1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 : 금모으기 운동 하는데 감히 집을 사?
      소비, 시장경제, 주택시장, 경제활동의 자유 이런거 다 모르겠으니 주택 거래하면 안 돼!

  8. 펱로스 2019.11.29 0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 글 잘 보고 갑니다.

  9. 주연공대생 2019.12.01 04: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구독할게요!


나폴레옹의 수십만 대군이 온갖 말썽과 이야기꺼리 속에 착착 네만 강 서쪽에 집결하는 동안, 알렉산드르와 러시아군은 뭘하고 있었을까요 ?  나폴레옹의 침공에 대비하여 모스크바의 성벽을 강화하고 있었을까요 ?  

일단, 로마노프 왕가의 왕궁은 모스크바가 아니라 상트-페체르부르크(Sankt-Peterburg, Санкт-Петербу́рг)에 있었습니다.  1712년 표트르(Pyotr) 대제가 모스크바였던 수도를 상트-페체르부르크로 바꾼 것이었지요.  당시 인구수도 모스크바와 상트-페체르부르크가 각각 30~40만 정도로 비슷비슷했습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최종 목표로 삼은 것은 거기가 러시아의 수도이거나 가장 큰 도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역사적인 지위와 함께 모스크바의 지리적 위치가 러시아 제국의 심장부에 해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노프 왕가를 모조리 사로잡고 싶다면 모스크바가 아니라 상트-페체르부르크로 가야 했습니다만, 거긴 제국의 북쪽 한구석에 불과했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점령할 때, 로마노프 왕가 사람들도 바리바리 봇짐을 머리에 얹고 피난을 떠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저 북쪽의 상트-페체르부르크에 있는 왕궁에서 아주 편안하게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모스크바의 위치를 보시면 왜 나폴레옹이 상트-페체르부르그가 아니라 모스크바로 향했는지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하고 안전한 상트-페체르부르크의 카잔 성모 성당(Cathedral of Our Lady of Kazan, Kazanskiy Kafedralniy Sobor)에서 1812년 4월 9일 예배를 드린 알렉산드르는 남쪽으로 길을 떠납니다.  목적지는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나(Vilna, Vilnius)였습니다.  빌나에는 러시아 야전군의 총사령부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과 대치한 러시아 야전군은 크게 2개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주력부대는 바클레이 드 톨리(Michael Andreas Barclay de Tolly) 장군이, 그리고 더 남쪽의 보조부대는 그루지아의 상남자 바그라티온 장군이 지휘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좀 묘한 일이긴 했습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이라는 대영웅이 유럽 역사 통틀어 사상 최대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기 직전이라는 백척간두의 위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러시아를 지켜낼 군대의 우두머리가 하나는 독일계 장군이고, 다른 하나는 그루지아계 장군이었던 것입니다.  바그라티온은 러시아 공녀와 결혼하여 러시아화된 사람이라고 치고,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독일계인 바클레이 드 톨리였습니다.

 

(상트-페체르부르그의 카잔 성모 성당입니다.  왜 하필 카잔이라는 지방 도시 이름이 붙었는지 찾아보니, 원래 콘스탄티노플에서 왔다는 전설 속의 성모 마리아의 성상(icon)과 관계가 있더군요.  카잔의 성모 마리아는 러시아 전체의 수호 여신에 해당하는 그런 위치라고 합니다.)

 

(모스크바에 보존된 카잔 성모 성상의 복제본입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왔다는 원본은 사라졌다고 하네요.)

 



정확하게 보자면 바클레이 드 톨리는 독일계는 아니었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스코틀랜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쨌거나 꽤 오랜 시간 동안에 걸쳐 발트 해 연안 독일계 귀족들 사이에 정착하면서 바클레이 드 톨리도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바클레이 드 톨리가 사실상의 러시아군 총사령관을 맡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유럽 귀족들이 전통적으로 다 그렇긴 했지만, 특히 러시아 귀족층은 교육 따위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어떤 분야든 좀 전문성이 필요하고 잉크와 펜대를 쥐어야 하는 일에는 오늘날 발트해 연안의 에스토니아-라트비아 지방에 정착하여 로마노프 왕가에 충성하면서 살아온 독일계 귀족들이 많이 등용되었습니다.  군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러시아군 장교직은 100% 귀족층에게만 주어졌는데 특히 독일계 귀족들의 비중이 매우 컸습니다.  가령 나폴레옹에게 사실상의 첫 패배를 안겨주었던 1807년 2월 아일라우(Eylau) 전투를 지휘했던 베니히센(Levin August von Bennigsen)은 아예 중부 독일인 하노버(Hanover)에서 태어난 독일계 귀족이었습니다.


(베니히센입니다.  그는 바클레이 드 톨리 같은 발트해 연안 지역의 독일계 귀족이 아니라, 독일 본토인 하노버에서 태어난 그냥 독일인이었습니다.  하노버 군에서 대위 계급까지 장교 경력을 쌓은 그는 28세이던 1773년에 러시아군에 '채용'되어 터키와의 전쟁 때문에 유능한 장교가 필요하던 러시아군에서 복무하게 됩니다.  5년 후인 1778년에 겨우 중령으로 승진한 것을 보면 독일 귀족 출신이라고 아주 각별한 특별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독일계 지휘관에 대해서 러시아계 부하들이 잘 따라준다면 문제가 없었겠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았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침공이라는 미증유의 위기를 맞이하여 반프랑스 감정이 들끓고 있었고 그에 따라 전에 없던 민족 감정이라는 것이 새록새록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역시 외국인임에 틀림없는 독일인들이 장군이네 지휘관이네 하며 군을 통솔하고 있는 것이 러시아군 장교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특히 언어적인 문제가 아주 컸습니다.  러시아군에는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러시아로 망명한 프랑스 망명귀족 출신의 장교들도 꽤 많았습니다만, 적국 출신이던 이들에 대한 반발심은 오히려 없었습니다.  일단 이 프랑스 망명귀족들이 나폴레옹과 혁명 프랑스군에 대해 이를 갈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언어 문제가 컸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프랑스어가 귀족층의 국제 관계에 있어서 사실상의 표준어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 경향은 유럽의 중심인 파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러시아에서 특히 강해서, 러시아 귀족들은 집집마다 프랑스 출신의 가정교사를 두었고 아이들이 가끔 집에서 러시아어로 이야기할 경우 야단을 치는 경우조차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거의 모든 러시아 장교들은 프랑스어를 매우 유창하게 할 줄 알았습니다.  1807년 나폴레옹과 틸지트(Tilsit) 회담을 하며 며칠 동안 나폴레옹과 꼭 붙어지냈던 알렉산드르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자신의 프랑스어 발음이 (코르시카 출신이었던) 나폴레옹의 프랑스어 발음보다 더 완벽했다는 것일 정도였습니다.  


(랑게론(Louis Alexandre Andrault de Langeron) 백작입니다.  그는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귀족으로서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러시아로 피난갔다가 러시아군에서 복무한 전형적인 망명귀족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프랑스군보다는 주로 투르크군과 싸웠습니다.  그는 부르봉 왕정 복고 이후에도 크림 반도의 오데사(Odessa) 주지사로 오래 있었고, 결국 러시아에서 콜레라로 죽었습니다.)



상황이 그러니 프랑스 망명귀족들과 러시아 귀족 출신 장교들은 말도 잘 통하고 정치적인 이익도 딱 일치해서 정말 이야기가 잘 되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 망명 귀족이 많아봐야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  소수인 프랑스 망명 귀족들은 당연히 러시아 장교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문제는 오히려 독일계였지요.  러시아군 내에 발트해 연안 출신 독일계 장교들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프로이센 출신 장교들이 1809년 이후 대거 러시아군에 투신했습니다.  원래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의 참패 이후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프로이센군이 군축에 들어가면서 많은 프로이센 장교들이 장교직을 잃고 쫓겨난 바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나폴레옹에게 이를 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장 급여를 줄 고용주를 찾고 애타게 찾고 있었는데, 1809년 이후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의 동맹이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고 러시아가 군병력을 증강하면서 새롭게 경력직 장교를 많이 필요로 하게 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었지요.  나중에 전쟁론(Vom Kriege, 영어로는 On War)을 써서 불멸의 이름을 남긴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도 그런 프로이센 출신의 러시아 장교였습니다.  더 나쁜 것은 이들은 같은 독일계 귀족인 부대 지휘관 직속의 참모진으로 주로 등용되었는데, 거기서 눈치도 안 보고 자기들끼리 독일어로 떠들어댔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장교들과 이 독일계 장교들은 언어 문제 때문에라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총사령관 바클레이 드 톨리에 대해서도 러시아군 장교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 분은 클라우제비츠가 아니라 당시 프로이센군의 혁신 과업을 진행 중이던 그나이제나우(August Neidhardt von Gneisenau)입니다.  이 분도 나폴레옹의 압력에 의해 곧 프로이센군에서 쫓겨났고, 1812년 당시 비밀 임무를 띠고 러시아군에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분들은 이 분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유명한 독일해군 전함으로 그나이제나우라는 이름을 기억할 겁니다.)

 



설마 독일계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총사령관을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클레이 드 톨리는 부하 장교들 뿐만 아니라 제2군 사령관인 바그라티온으로부터도 지휘관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거의 무시당하다시피 했습니다.  대체 러시아 장교들은 왜 바클레이 드 톨리를 이렇게 무시하고 있었을까요 ?  알렉산드르가 빌나로 향한 것과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Saint_Petersburg
https://en.wikipedia.org/wiki/Kazan_Cathedral,_Saint_Petersburg
https://en.wikipedia.org/wiki/Our_Lady_of_Kazan
https://chekhitout.files.wordpress.com/2012/04/800px-population_development_moscow.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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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9.10.28 07: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4세기 이후 블라디미르 대공위가 '하나님께서 영윈한 왕권을 부여한 류리크 왕가가 선택하신' 모스크바로 넘어간 이후, 모든 러시아인들에게는 모스크바가 심장부가 되었습니다. 단순한 위상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가장 안전한 편이었거든요. 모스크바가 심장이 된 이후 모든 외부세력이 보기에 모스크바를 점령해서 통치해야 진정한 러시아 정복이 완료된다고 생각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17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 19세기 프랑스, 20세기 나치 독일 모두 모스크바를 정복 및 통치해야 러시아 정복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전쟁 계획을 짜고 실행했습니다.

    러시아의 카잔의 성모, 폴란드의 검은 마리아, 양국의 상징이 같은 동방에서 온 이콘인 것이 특징인데 양국 모두 이 성모상의 기적으로 나라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모두 17세기 때의 일인데 러시아는 대동란시대, 폴란드는 대홍수시대죠. 국가멸망 직전에 성모가 발현했다는 것으로 외세를 물리친 것입니다.

    특히 폴란드 쳉스토호바의 검은 마리아, 일명 '폴란드 왕국의 영원한 여왕'으로까지 숭배받는 성모상인데 나치 독일 점령기 및 공산주의 정권조차도 감히 이 성모는 건드리지조차 못했습니다. 건드리면 교황청까지 들고 일어날 정도로 위상이 대단했으니까요.

    카잔의 성모도 비슷한 위치였지만 1904년 갑자기 실종되었는데 우연이지만 바로 그 다음해 피의 일요일사건까지 겹치면서 러시아인들의 마음이 로마노프 황가로부터 완전히 떠나게 됩니다. 신께서 영원한 왕권을 거두어가셨다고 보여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쳉스토호바의 검은 마리아, 17세기 야스나 고라 수도원 공방전에서 단 400명의 수도사 및 패잔병들이 8배의 스웨덴군을 상대로 2달간 버티면서 국민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상징입니다. 1635년 이후 유럽 최강의 육군력으로 전승 불패를 자랑하던 신교도 스웨덴군이 처음으로 패전했다는 엄청난 위업을 성모 마리아께서 보여주셨다니까 가톨릭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신이 나라를 버리지 않았다는 믿음을 준 사건입니다. 나중에 폴란드에 가시면 꼭 보시면 좋다고 추천드립니다.

    • nasica 2019.10.28 08: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항상 흥미로운 댓글 고맙습니다.

    • reinhardt100 2019.10.28 0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슨 말씀을요.
      요새 매일 서울에서 대전까지 출퇴근 중이라 시간이 좀 생겨서 쓸 수 있습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나시카님.

      지금도 KTX에서 댓글 쓰고 있습니다.

    • 2/28일 입대 2019.10.30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의 시야를 넓혀주시는 댓글 저도 늘 감사하고있습니다!
      물론 nasica님께도 감사드리구요!!

    • reinhardt100 2019.10.30 22:25  댓글주소  수정/삭제

      2월 28일 입대) 서로 지식을 전파하고 수용한다는 것이 인터넷의 장점 아니겠습니까? ^^
      부족한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2. 알키비아데스 2019.10.29 2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럽 전쟁사에선 독일계가 참 먹어주는 인종인거 같네요.

    4세기 이후 로마군의 주력은 독일계(게르만계열)
    중세에 먹어주던 용병은 스위스 용병과 란츠크네히트인데 둘다 독일계
    전열보병 전투의 교과서를 쓴건 프러시아
    나폴레옹전쟁시절 영국의 정예부대는 하노버 출신
    러시아군의 중추도 발트3국쪽 독일계
    양차대전 메인빌런은 독일
    양차대전을 정리한 미군의 주력은 독일계 미국인

    독일군이 당나라군대가 된 오늘날엔 상상이 안가는 이야기입니다

    • reinhardt100 2019.10.30 2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유럽 중앙에 있다보니 아무래도 전쟁이 빈번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겁니다. 다만, 독일의 한계는 일찍부터 중앙집권이 이루어지지 못해 19세기까지 제대로 잠재력을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냉전 당시에도 서방 나토군 육상전력의 주력은 미군과 서독군이었는데 당시 서독은 재래식 육군과 공군력만 따지면 미군과 소련군을 잇는 실질적인 세계 3위였죠. 동구 바르샤바 조약군의 동독군 역시 최소 25만의 병력으로 서독군 전력의 6할 이상은 항상 보유하고 있었으니 군사적 역량은 어마하죠. 이쪽 역시 조약군 최정예로 소련식 제파전술의 최선봉이었고요.

  3. Hofer 2019.10.30 1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보로프가 십 수년을 더 오래 살았더라면 과연 어떤 광경이 펼쳐졌을 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 reinhardt100 2019.10.30 2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단합니다. 한 번 영혼의 대결이 벌어졌을 겁니다. 보로디노 전투가 하루만에 끝났지만 이번에는 최소 3일은 넘기는 라이프치히는 애들 장난 수준으로 보일 혈전이 되었을 겁니다. 양측이 서로 20만 이상이 동원 하였을 거고 양측 모두 포병화력을 쏟아부어 전선을 틀어막는 사이 기동력으로 돌파구를 뚫는 식의 전투 수행방식을 선호했으니 정말 우열판단이 어렵겠네요. 게다가 수보로프의 성격상 병기창이 있을 스몰렌스크 부근에서 결전을 치르려고 했을거고 상대적으로 나폴레옹의 대육군 역시 소모가 덜한 상태에서 싸울 수 있었으니까요.

  4. 루나미아 2019.10.30 2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요 길들이 모스크바로 향하고 있는 걸 보니 왜 모스크바로 가는지 이해되네요. 나폴레옹이 지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의 전쟁처럼 지나간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더라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점령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줬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실상은 면은 커녕 선 조차도 제대로 장악한 건지 불안불안해서 이 점이 안 와닿았었네요.
    똑같이 중심부로 쳐들어가도 어떤 공격은 적의 심장부를 움켜쥔 셈이고, 어떤 공격은 포위당하기 딱 좋은 위치에 자처해서 들어간 셈이 되는데 나폴레옹은 전자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후자였나봐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징집된 병사들의 사기는 폴란드 내로 진입하기 전까지는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번에 새로 징집된 어린 병사들은 나폴레옹이 장려한 새로운 공립학교 제도 하에서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심을 제도적으로 교육받고 성장한 아이들이다보니 더욱 그랬습니다.  

병사들은 실질적인 혜택(?)도 꽤 쏠쏠히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원정이 이어질 때마다 프랑스 국민들은 남편과 아들들이 (금지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점령지에서 노략질해온 돈과 귀중품을 가져오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운이 좋지 않아 싸움터에서 횡재를 올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전쟁으로 난리가 난 적국의 마을과 도시에서는 꽤 값이 나가는 물품을 헐값에 사들인 뒤에 관세도 물지 않고 고향 마을로 가져와서 꽤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팔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 중 용감하거나 운이 좋은 친구들이 연금이 딸린 레종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을 받거나 진급을 하거나 아예 장교 계급장을 받아오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생-도밍그(Saint-Domingue, 지금의 아이티) 출신의 한 크레올(Creole, 혼혈이라는 뜻이 아니라 현지 태생이라는 뜻) 병사는 다음과 같이 러시아 원정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거기서 난 무공을 세울 기회를 얻을 것이고, 훈장과 진급을 따내어 자랑스럽게 온 세상에 으시대며 보여줄 거다.  1년 안에 난 소령(chef de bataillon)이 될 거고 원정이 끝날 때 즈음엔 대령이 될 거다.  그 다음엔..."


(근위대 엽기병(Chasseurs a cheval) 대령 군복에 달린 레종도뇌르 휘장입니다.  나폴레옹 시절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은 사람은 약 48,000명으로서, 대부분은 군인이었습니다.  1802년 만들어진 이 훈장의 수상자들은 빠르게 늘어나서 생존 수상자 수는 1806년에 13,000명, 1814년에는 거의 2배인 25,000명에 달했습니다.)



이런 들뜬 분위기는 '철없는' 졸병 젊은이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파리의 많은 상류층/부유층 젊은이들, 즉 jeunesse doree(쥬네스 도레, '금칠을 한 젊은이')들이 '빽'을 이용하여 장교로 진급을 하고 부대를 옮겼는데, 주로 멋진 군복과 겉멋 때문에 기병대로 가거나 나폴레옹과 만날 가능성이 있는 참모진으로 배속되었습니다.  이런 젊은 장교들은 한탕주의에 들뜬 졸병들보다 오히려 더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낙천적인 한탕주의는 군인들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은 역대급 규모를 자랑한 것만큼 보조 지원 인력도 많이 필요했는데, 거기에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민간인들이 잔뜩 몰려들었습니다.  원정길에서의 보급품 구매와 징발, 분배 및 수송 등을 책임지는 군 보급관(commissaire)은 비록 군복을 입고 검과 권총 등으로 무장을 하긴 했지만 본래 신분은 어디까지나 민간인이었습니다.  이런 보급관 뿐만 아니라 서기관이나 비서 등 원정군에는 행정일을 하는 민간인이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대부분은 험한 군사 원정길에는 처음 참여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 했습니다.  드 생-샤망(de Saint-Chamans) 대령은 이들에 대해 이렇게 불평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야전군 행정부에는 이렇게 전쟁이라고는 구경도 못해보았지만 한몫 단단히 챙기기 위해 이 원정에 참여했다고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인간들이 가득했다."

야전군에 딸린 민간인이 이런 행정 사무직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제각각 한두 명씩의 하인들을 데리고 참전했습니다.  이런 하찮은 관직의 민간인들이 그랬으니, 장교들은 어떻겠습니까 ?  모든 장교들은 최소한 1대 이상의 짐마차를 대동했습니다.  이런 마차에는 장교가 품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물건들, 즉 여분의 군복과 여분의 무기, 책과 지도, 식료품과 생활 편의품들이 실려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소한 한 명 이상의 하인이 딸려 있었고, 마차를 모는 마부도 따로 있었습니다.  

소위 중위 나부랭이들이 이 모양이었으니 장군 정도 되면 클래스가 달랐습니다.  엄격하기로 소문난 다부(Davout) 원수의 제1 군단 산하 제5 사단의 지휘관은 콩팡(Compans)이라는 이름의 장군이었는데, 이 분은 결코 허영에 물든 쾌락주의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다부의 부하답게 꽤 검소한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분이 개인적으로 원정에 동반한 민간인 식솔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급사장(maitre d'hotel) - 루이(Louis) 
실내 시종(valet de chambre) - 뒤발(Duval)
마부(cocher) - 보(Vaud)
시종(valet) - 시몽(Simon)과 루이(Louis)
경호원(gendarme) - 트루이예(Trouillet)
기타 하인 - 피에르(Pierre), 발렝텡(Valentin), 장비에(Janvier)
승객용 마차를 끄는 말 5마리
사람이 타는 말 6마리
짐말 30여 마리
승객용 마차 1대
짐마차 여러대

장군님께서 원정을 떠날 때 이 정도의 개인 식솔을 거느리는 것은 당시 유럽 사회에서 놀라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796년 이탈리아 원정을 떠날 때의 나폴레옹 휘하 장군들은 이런 호화스러운 살림살이를 끌고 다닌 것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조차 병사들의 빵 수프나 모닥불에 구운 감자를 얻어 먹거나 아예 쫄쫄 굶는 일이 많았으니까요.  항상 가볍게 움직이던 나폴레옹의 부하 장군들이 어쩌다 이렇게 오스트리아 장군이나 프로이센 장군과 별다를 바 없게 되어버렸을까요 ?

일이 이렇게 된 것에는 무엇보다 나폴레옹 본인의 잘못이 가장 컸습니다.  그는 항상 유럽 왕조들의 진짜 왕들 앞에서 코르시카 출신의 벼락 출세꾼 또는 찬탈자라는 컴플렉스가 있었고, 그 때문에라도 황제가 된 이후 부하들에게 '진짜 귀족들처럼' 호화로운 복장 및 우아한 예절과 사치스러운 살림살이를 갖추도록 장려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여관집 아들 채소 가게 아들 출신들이었던 부하들이 좀 창피했던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의 그런 장려책에 대해 마세나나 베르티에, 술트 등과 같은 부하들도 매우 기뻐하며 그런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습니다.  대부분 40대였던 그의 부하 원수들은 파리에서의 우아하고 편안한 생활에 익숙해져 배에 기름도 붙은 상태였습니다.  이제 험란할 것이 뻔한 새로운 원정을 떠난다고 해서 과거처럼 더 승진할 자리도 없어 보였으므로, 이들은 그다지 열의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훗날 나폴레옹 관련 회고록을 남겨 유명해진 펭 남작(Agathon Jean Francois Fain)은 당시 나폴레옹 직속 비서이자 기록관이었는데, 그는 이때 상황에 대해 부하 장군들이 과거와는 달리 내키지 않아하는 태도로 이번 원정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나폴레옹이 꽤 놀랐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펭 남작입니다.  영국 영화배우 제임스 맥어보이와 좀 닮았네요.  그는 기록관답게 은퇴 이후 나폴레옹 관련되어 여러편의 책을 냈는데, 특히 1908년에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Memoires du Baron Fain, Premier Secretaire du Cabinet de l'Empereur, 즉 '황제 내각의 수석 비서관 펭 남작의 회고록'이 매우 유명했습니다.)



특히 이번 원정은 상대가 머나멀 뿐만 아니라 끔찍하게 넓은 러시아였으므로, 정말 장기간 원정이 되리라고 다들 예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들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비축품과 각종 편의시설을 챙겨가려 했습니다.  그건 중위 나부랭이부터 군단장들까지 다 일치된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서는 나폴레옹조차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건 꼭 나폴레옹을 비난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비록 국민의 지지에 기반한 군주이긴 했지만, 어쨌건 독재자였습니다.  근본적으로 독재자의 제1 걱정거리는 권력 유지였고, 나폴레옹처럼 자주 먼 군사 원정길에 나서야 했던 독재자는 항상 권력의 중심인 권력기관, 그러니까 파리와의 연락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원정은 목적지가 러시아였습니다.  언제나처럼 나폴레옹의 이동 사령부와 파리를 연결해줄 쾌속 파발마 네트워크가 촘촘히 연결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이번 원정에는 자신의 궁정 기관 중 핵심 인원을 아예 다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관료 인원들이 원정길에서도 정상적으로 일하고 생활하도록 하려면 필요한 살림살이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러시아 원정을 떠나는 길목인 드레스덴(Dresden)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를 포함한 자신의 동맹국 및 위성국들의 군주들을 모두 소집하여 자신의 위세를 온 유럽에 각인시켰습니다.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라도 나폴레옹의 행차에는 으리으리한 규모의 인원과 짐이 따라다녔습니다.

 

(1812년 5월, 러시아로 향하는 길인 작센 왕국의 수도 드레스덴(Dresden)에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와 황비 루도비카를 만나는 나폴레옹과 마리-루이즈입니다.  당대 최고의 영웅인 나폴레옹의 아내가 된데다 호화로운 파리의 궁정 생활에 아주 흠뻑 빠져 자아가 부풀어 오를대로 올랐던 마리-루이즈는 여기서 아버지인 프란츠 1세를 대하는 것인데도 목에 깁스를 한 것처럼 도도하고 오만하게 굴어 많은 이들의 빈축을 샀다고 합니다.  오른쪽의 남녀는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부부입니다.)

 



나폴레옹의 원정길 살림살이는 바로 직전까지 러시아 대사였다가 돌아온 콜랭쿠르(Caulaincourt)가 마복시(Grand Ecuyer) 직을 맡아 준비했습니다.  나폴레옹의 개인 화물에는 다양한 텐트와 야전 침대, 책상 및 필기류, 옷장, 은식기와 조리 기구, 식료품과 와인류, 각종 상비약 상자 등이 딸려 있었습니다.  이런 짐들의 규모는 그 수송 엔진 규모를 보면 대략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이 짐들은 약 400마리의 짐말과 40여 마리의 노새가 끌거나 실었고, 사람이 타는 말만도 130여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폴레옹의 근위대와는 별도로 순수하게 나폴레옹 개인의 종군 민간인들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결국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지요.  

 

(이건 파리의 군사박물관(Musee de l’Armee)에 전시된 나폴레옹의 개인 텐트 및 책상의 재현품이라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싣고 간 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호화로왔을 것입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원정에서의 편한 생활을 위해 살림살이만 신경쓴 것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백전노장인 그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특히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습니다.  나폴레옹은 각 부대마다 독일어나 폴란드어,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장교들을 배속시키고 또 장교들에게 러시아어 수업을 받도록 독려했습니다.  어차피 러시아군 장교들은 거의 100% 모두 프랑스어를 꽤 잘 했기 때문에 러시아군과의 의사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러시아군 부사관들이나 병사들을 포로로 잡을 경우에 대비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간첩들도 러시아 서부 지역까지 쫙 풀어서 정보망을 넓히고 군수품 담당부(Depot de la Guerre)에게 동부 폴란드는 물론 리투아니아와 러시아 주요 지역의 확대 지도를 대량 인쇄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지도는 철저히 군용으로 만들어 도로와 강, 늪지와 숲 등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나중에 보시겠습니다만 이로 인해 러시아군이 가진 러시아 지도보다 프랑스군이 가진 러시아 지도가 더 정확한, 웃기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나름대로 철저하게 침공 준비를 하는 동안, 러시아군은 과연 어떤 철통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을까요 ?  그게... 또 좀 그랬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Agathon_Jean_Fran%C3%A7ois_Fain
https://en.wikipedia.org/wiki/Legion_of_Honour
http://www.napoleonguide.com/legionorg.htm
https://en.wikipedia.org/wiki/Armand-Augustin-Louis_de_Caulaincourt
https://seetheworld.travelforkids.com/napoleon-bonaparte-paris-with-kids/

https://www.napoleon-histoire.com/1812-napoleon-a-dres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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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9.10.21 07: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새는 지금 출근해서 항상 이시간대에 확인하네요.

    프랑스 혁명전쟁과 비교하셨는데 꽤 맞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도 이미 공화정 시절 혁명군과 제국 대육군의 전투력 저하가 심각하다고 느낀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혁명전쟁 당시 프랑스군은 심지어 소총조차 부족해서 모리스 드 삭스 원수가 주장했던 대기병용 장창을 민간에 50만 자루나 발주할 정도로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플랑드르 전역 이후 연전연승을 거두었는데 이베리아 전역 이후 제국군에는 그런 투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상당히 말이 많았습니다. 혹자는 '혁명전쟁 당시 프랑스군은 앙시엥 레짐에 고통받고 있는 민중들을 위한 새로운 시대의 선봉'이라는 싸울 수 있는 이유를 명확히 제시했기 때문에 강했지만 제국군 시절에는 더 이상 그런게 없었고 상대방에게는 압제자였을 뿐이라고 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지도문제. 프랑스군 같은 경우 이미 17세기부터 국가적 프로젝트로 정밀지도 확보에 공을 기울입니다. 루이 14세가 1660년대부터 시작한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 카시니 가문이 4대 100년에 걸쳐서 만든 1/86400 축적도를 시작으로 이 시기까지 계속 전 유럽지역에 대한 지도 확보를 했으니까요. 반면 러시아군 같은 경우에는 지도에 대해 19세기 후반에서야 어느 정도 체계를 잡습니다. 이러니 러시아 원정 당시 지도 덕분에 그나마 그 병력이라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역사상 지도로 전쟁을 말아먹은 경우가 1차 세계대전과 독소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인데 특히 독소전쟁 시기에는 심각했습니다. 가뜩이나 1차 세계대전 후반 독일군이 획득한 제정러시아 지도 및 관계자료가 많았는데 거기에 항공정찰까지 제대로 되어 스몰렌스크까지는 독일군의 지리정보가 소련군보다 더 정확한 수준이었으니까요.

    여기서는 이야기가 없지만 대량의 위폐를 찍어낸 것도 있습니다. 이건 프랑스가 거쳐간 모든 국가에서 마찬가지였지만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면 가장 먼저 접수한 곳이 바로 조폐창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조폐원판이 있었거든요. 러시아 원정 준비 당시 마음껏 약탈하게 놓아둔(?) 이유 중 하나가 나중에 가지고 있는 원판으로 지폐 찍어서 뿌리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원정 당시 프랑스군이 찍어간 루블이 최소 수천만 단위인데 이거 때문에 원정 이후 러시아 경제가 개판납니다. 프랑스군이 마구잡이로 살포한데다 정화준비는 도저히 이를 맞출 수 없었으니까요. 폴란드는 더 심각했는데 오죽하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제3차 폴란드 분할 당시 획득한 영토를 도저히 경제적으로 맡을 역량이 안 되다보니 러시아에 할양할 정도였습니다. 왜냐고요? 바르샤바 대공국의 조폐원판으로 찍어낸 러시아 원정 비용이 당시 대공국 1년 예산을 한참 뛰어넘었고 이걸 맡을 경제적 역량이 두 나라에는 없었으니까요.

  2. Franken 2019.10.21 15: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및 부하들이 사치향락에 쓸 물품을 빼고 예전모습으로 돌아간다 해서 승률은 별 차이가 없겠지만 그래도 많이 아쉽군요. 뭐 인생 잘 살아볼려 기를 쓰고 올라간 사람들이니 쉽게 포기할리는 없지만...

  3. 흠흠흠 2019.10.21 1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스로 황제 자리까지 올라갔으면 열등감을 가질 게 아니라 자랑스러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면전에서 너희는 무능하고 나는 유능하다고 깔아뭉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카를대공 2019.10.21 2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래는 그래야 하는데 사방팔방이 타고난 금수저들이면 자기도 모르게 쪼그라들고 컴플렉스 생기는게 사람 이치 같더군요.

      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사회적 약소계층한테 노력 안 하냐며 더 윽박지른다 하고,사회적 약자가 성공하면 자신이 속했던 그룹에 더 모질게 군다지 않습니까

      나폴레옹도 성공하고나니 세상 풍경이 다르게 보였던 거겠지요.

    • Playzone 2019.10.22 16: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주원장이 예외적이죠. 명나라 건국 이후 자기 조상을 주희로 조작하려다가 그 후손이 자기 앞에서 벌벌 떠는걸 보고 저런 서생보다 흙수저 거지 탁발승에서 황제가 된 내가 더 뛰어나지않겠냐고 때려치웠거든요.

  4. 카를대공 2019.10.21 2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클은 아닌데 요샌 맥어보이 성씨 쓰던 사람을 매커보이로 표기하더군요.

    토튼햄->토트넘처럼 이런게 표준 문법인가 봅니다.

  5. Wafflegui 2019.10.22 0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튭에 epic history라는 채널에 나폴레옹 전쟁의 주요 전역과 전투만 다룬 영상이 있는데 실시간으로 부대위치가 이동하는 영상화가 수준 높아서 최근에 보고있어요. 주인장님만큼 세세한 일화와 필력은 없지만 머릿속에서 지도로 상상하는것과 달리 전투를 한눈에 볼 수 있어서 한번쯤 보시는것도 재밌겠네요.

  6. arandel 2019.10.22 2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저 약탈이 프랑스인들이 나폴레옹을 지지한 진짜 이유였을까요? (농담^^) 유럽 각지에서귀중품을 털어왔다면 상당했을텐데 으음...글구 보니 프랑스 혁명떄 프랑스 경제도 곤란했고 서민들도 곤궁했는데 설마 저런 식으로 메꿔졌기 때문에 좀 경제가 나아진 걸까요 .

    • Dogswellfish 2019.10.22 2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애초에 프랑스가 공격적으로 나갔던게 파탄난 경제를 약탈 경제로 해결하기 위함이였음

    • nasica 2019.10.23 07: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생각해보면 프랑스 혁명 이후 (초반의 아시냐 지폐 등 바보짓으로 인한 혼란 이후에) 경제 활력이 나쁘지 않았던 것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당시의 빈약한 산업 환경에서 결국 가장 큰 생산 수단은 역시 토지였는데, 대부분의 토지를 쥐고 있던 소수의 귀족과 교회로부터 빼앗아 다수의 부르조아 및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으니까요. 물론 그게 공산당식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아니었고 유혈몰수 유상분배이긴 했습니다.

      저도 그에 대한 통계자료 등은 보지 못했는데, 언젠가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 좋겠네요.

    • reinhardt100 2019.10.23 0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혁명전쟁 이후 프랑스군은 어디를 가든 약탈을 하는 건 기본이었습니다. 북이탈리아 정복전에서 단 베네치아령 롬바르디아에서만 6개월만에 '공식적으로' 2천만 프랑을 무상징발했었으니까요.

      이 당시 프랑스 경제는 말 그대로 거대한 군수경제, 즉 정부지출의 극적인 팽창이 경제성장을 이끄는 한 축이 되고 있었지만 숙련된 노동력 부족이 가시화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시기까지 징병된 소년 및 청년 인구가 이미 150만에 가까웠는데 문제는 주르당법과 후속법률, 각 전선에서의 병력수요 때문에 사회에 복귀하기 어려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시카님 말씀대로 농업생산력이 주된 경제생산의 한 축인 시대에 이 상황은 그대로 생산력 감퇴와 직결되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 당시 프랑스 본토나 북이탈리아 등 제국의 핵심 농업지역은 노동력 부족이 심해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경제적으로 침체가 시작되었다는 보고가 각 데파르트망으로부터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탈레랑이나 푸셰같은 사람들이 괜히 우려한게 아닙니다. 자칫하다 경제가 아작난다는 결론이 날 수 밖에요. 게다가 중농주의의 발상지인 국가니 더욱 그 파급효과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시냐, 이게 의외로 프랑스 내부의 채무관계를 해소시켜준 결과를 낳긴 합니다. 가장 유사한 사례가 1920년대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인데 양자 모두 채무자의 채무부담을 급속하게 감소시켜주었다는 겁니다. 막판에 나시카님 말씀대로 액면가 1/300 수준까지 가는 바람에 총재정부와 통령정부가 발행 초기 약속대로 교회 및 망명한 귀족 소유 토지의 소유권 이전 형식으로 상계 및 소각처리 합니다.

      유혈몰수, 이게 가장 극단화된 동네가 방데였는데 사실 남부 지역 상당수, 특히 프로방스나 랑그도크, 루시옹 같이 교황령 등 외국 제후령이 있는 지역은 방데 수준은 아니더라도 유혈이 꽤나 심각했습니다. 그러니 왕정복고 후 백색테러가 벌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장 자기 땅 찾으려면 뺏아간(?) 소유주를 자력구제(?)로 해결해야 했으니까요.

  7. lemon 2019.10.23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참 오다가 댓글 흐리는 달랑무인지 뭐인지 보기 싫어 안 오다가 우연히 와봤는데 이제 없어졌군요 이제 자주 오렵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건 진짜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명언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들에게서 염치, 질서, 관용, 정의 따위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그들이 군복을 입고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단치히나 기타 주요 군수 창고에 얼마나 많은 군수품이 쌓여 있든 당장 배가 고픈 군대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11 경보병 연대 소속 쥬세페 벤투리니(Giuseppe Venturini)라는 피에몬테(Piemonte) 출신의 중위는 자신이 수행하는 '징발'로 인해 2~3백 가구가 당장 거지꼴이 되었다면서 마음이 아프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징발 결과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장교가 수행하는 징발은 그나마 양반이었습니다.  원래 프랑스군의 현지 조달 및 징발 기술은 예술의 경지에 달한 것이어서, 다들 굶주리고 바쁜 와중에도 효율적으로 식량을 수집하고 적재적소에 분배했을 뿐만 아니라 식량을 빼앗기는 현지 주민들에게 영수증도 꼬박꼬박 써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척박한 폴란드 현지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뒤져도 나오는 것이 거의 없는 현실에 분노하고 짜증이 난 병사들은 죄없는 폴란드 농민들의 집과 창고를 마구 때려부쉈습니다.  특히 이들은 각자의 소속 국가의 깃발 아래가 아니라 그랑다르메라는 다국적 군대의 깃발 아래 움직이는 것이다보니 몰염치가 더욱 심했습니다.  심지어 폴란드군까지도 폴란드 농민들을 마구 약탈했습니다.

제5 폴란드 기마 라이플병 연대의 18세짜리 소년 대위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자기들이 가져가는 것, 심지어 가져가기 원하는 것 이상으로 때려부쉈다.  민가에 들어가서는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박살을 냈다.  창고에는 아예 불을 질렀다.  밀밭이 있을 경우, 그 한가운데로 말을 몰고 들어가 마구 짓밟으며 말에게 설익은 밀을 먹였는데, 먹이는 것 이상으로 많은 밀을 완전히 망쳐놓았다.  이건 불과 두어 시간 뒤에는 뒤따르는 그들의 굶주린 동료들도 거기에 와서 말을 먹여야 한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의미한 파괴행위였다."

일이 이렇게 되다보니 그랑다르메가 집결하는 네만 강 서안 지역은 분명히 아군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길 가의 집들은 모두 창문이 깨지고 울타리는 장작불에 쓰느라 뜯겨졌으며, 많은 집들이 반쯤 무너져버렸습니다.  군복이 보이기만 하면 주민들이 도망치던 폴란드는 그나마 양반이었습니다.  동프로이센에서는 이런 난장판에 민족적 감정까지 더해졌습니다.  발에 물집이 생기는 작은 부상이든 티푸스든 어떤 군대에게나 낙오병은 반드시 생깁니다.  그런 낙오병들은 동프로이센 주민들의 습격을 받고 학살되었습니다.  그랑다르메 소속의 같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병사들도 습격 대상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그랑다르메 병사들도 똑같은 적개심을 가지고 동프로이센 주민들을 대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예프 아빌(Jef Abbeel)이라는 병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숙영하는 마을마다 주민들의 가축을 필요 이상으로 모조리 도살하고 술과 식량을 빼앗는 것은 물론, 꽤 떨어진 인근 도시에 가서 자기들이 주문하는 물건을 구해오라고 주민들을 내몰았습니다.  주문 품목 중 하나라도 못 구해오면 몽둥이 찜질로 교육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심하다고 주민들에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거절할 경우 주민들은 역시 또 흠씬 두들겨 맞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주민들의 감정은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힌덴부르크 장군은 '동프로이센 사람들은 독일인이라기보다는 슬라브인에 가깝다'라며 투덜거린 바 있습니다.  실제로 동프로이센은 독일화가 많이 진행되긴 했지만 원주민인 슬라브인들을 소수의 독일계 튜톤 기사단이 정복해서 만들어진 왕국이므로 힌덴부르크의 말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도 동프로이센이 프로이센 왕국의 발상지인지라 프로이센 왕국에서 동프로이센이 차지하는 상징적인 의미는 컸습니다.  가령 윗그림의 1861년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즉위식은 동프로이센의 수도인 쾨니히스베르크(Konigsberg)에서 열렸습니다.  이 빌헬름 1세가 어린 시절인 1806년 나폴레옹에게 쫓겨 엄마와 함께 메멜까지 도망쳐야 했던 어린 왕자가 맞습니다.  또 임마누엘 칸트도 바로 이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이지요.  지금 쾨니히스베르크는 러시아의 해군 도시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가 되었습니다.)  

 



앞서 나폴레옹이 대규모로 징집된 신병들의 숙련도에 대해 걱정하는 부하의 말에 대해 심리전에 있어서 질보다는 양이 중요하다며 일축했다는 일화를 언급했었지요.  그랬던 나폴레옹도 폴란드의 포즈난(Poznan)에 입성할 때 그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한 폴란드 비스툴라(Vistula) 군단을 실제로 보고는 꽤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이 부대는 최근까지 스페인에 파견되어 있다가 러시아 원정을 위해 막 귀환한 상태였는데, 사상자로 인한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많은 수의 신병들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는 이 군단의 지휘관인 모르티에(Mortier) 원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친구들은 너무 어리군.  내게 필요한 건 전장의 고생을 견딜 만한 병사들일세.  저렇게 어린 친구들은 야전 병원만 가득 채울 뿐이야."

 

 

(모르티에(Édouard Mortier) 원수입니다.  그의 이름은 재미있게도 프랑스어로 박격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훗날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립 왕 밑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냈는데, 루이 필립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1835년의 폭탄 테러에서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루이 필립이 그의 죽음을 무척이나 슬퍼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나이 어린 친구들에게 편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다부 휘하의 제85 전열 보병 연대의 한 소령은 네만 강가에 도착할 때까지 신병의 20%를 잃었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식량도 부족한 상태에서 먼 길을 일정에 맞춰 행군을 하다보니 탈진과 질병, 소소한 부상으로 쓰러진 병사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많았습니다.  당연히 도망병들도 많았고 심지어 자살하는 병사들도 꽤 있었습니다.  말의 경우는 더 심각했습니다.  1812년 봄은 특별히 기온이 낮았습니다.  이로 인해 곡식 뿐만 아니라 풀도 늦게 싹을 틔웠습니다.  나폴레옹이 굳이 6월 말까지 러시아 원정을 기다린 것은 말이 부족한 사료 대신 뜯어 먹을 풀이 충분히 자라길 기다린 것이었는데, 그게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근위 포병대의 불라르(Boulart) 대령은 이렇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린 초지의 풀을 잘라 걷어들였는데, 그게 다 떨어지자 밀과 보리, 귀리를 걷어들여야 했는데, 그것들은 이제 막 싹이 튼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 해 수확을 망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 말들에게 최악의 사료를 주면서 중노동을 시키느라 말들의 죽음을 준비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흔히 말 사료라고 하면 귀리나 옥수수를 떠올리는데, 의외로 말은 세심하게 사료 성분을 조정해주어야 한답니다.  가령 귀리에는 인 성분이 풍부하고 칼슘이 부족한데, 이는 말에게 필요한 비율인 칼슘:인 = 2:1과는 정반대의 비율이라서 귀리 위주로 사료를 줄 때는 반드시 석회가루 같은 것을 추가해서 칼슘 성분을 보완해줘야 한답니다.  또 옥수수 같은 경우 전분이 풍부해서 좋긴 한데 옥수수를 갈아서 준다고 해도 말은 옥수수 성분의 45% 정도 밖에 소화를 못 시킨다고 합니다.  흔히 덩치 큰 말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생존력 자체는 사람이 더 좋은 모양이에요.)  

 

 


실제로 아직 네만 강을 건너지도 않았는데 위에 언급한 이유로 죽은 말들이 꽤 많았습니다.  길가에는 그런 말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고 그것들을 을씨년스럽게 개들과 까마귀떼가 뜯었습니다.  말들이 죽었으니 그 말들이 끌던 짐마차도 당연히 버려졌습니다.  나폴레옹의 의붓아들 외젠 밑에 소속된 바이에른(Bayern) 장교 하나는 죽은 말과 버려진 마차의 수가 많은 것에 놀라 아래와 같이 적었습니다.

"누구든 이 광경을 보면 전진하는 군대가 아니라 허겁지겁 퇴각하는 군대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 장군들과 장교들의 임전 태세는 과거에 비해 크게 태평한 편이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www.paulickreport.com/horse-care-category/which-is-which-matching-feed-ingredients-with-nutrients/

https://en.wikipedia.org/wiki/%C3%89douard_Mortier,_Duke_of_Tr%C3%A9vise

https://en.wikipedia.org/wiki/East_P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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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9.10.14 07: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엘베강 이동의 독일어권은 8세기 말 작센족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공세부터 꾸준히 넓힌 결과입니다.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엘베강에서 오데르 강까지 각종 변경백령들이 세워지지만 983년 벤덴족 대반란 이후 싸그리 날아가버립니다. 이 때 신성로마제국은 이탈리아의 베렝가리오와 분쟁 중이서서 대응하지도 못했고요. 이후 1120년대부터 다시 시작된 동방식민운동 (Ostsiedlung)이 본격화되면서 제대로 공세를 퍼붓기 시작합니다. 북방의 덴마크와 스웨덴, 남부의 작센까지 서방 카톨릭권의 동부 전체가 동방 슬라브권 정복을 개시한 것인데 그 규모는 성지 예루살렘으로 가는 십자군 이상으로 컸고 인력도 지속적으로 공급되었습니다. 엘베강 이동의 뤼베크, 로스토크, 슈테틴, 단치히,리가 등 해상 보급이 용이한 하구에 게르만족 도시가 들어섰고 1140년대 이후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이 대규모 십자군을 구성하여 동방식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이후 덴마크의 발데마르 대왕이 한 때 발트해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구축한 것을 시작으로 덴마크는 외젤(사레마) 및 에스토니아 북부를 스웨덴은 핀란드와 카렐리야, 라플란드를 자신들의 십자군으로 정복하기 시작합니다.

    스칸디나비아와 달리 발트해 및 폴란드 지역은 초기에는 리보니아 수도회(검우기사단) 및 독일계 상인들이 정복전을 개시하지만 프루스족에 대패하면서 주도권은 우트르메르와 트란실바니아에서 철수하기 시작한 독일 기사단에 넘어가고 50년에 걸친 정복전이 시작됩니다. 프루스 족 및 발트해 연안 민족들 또한 헤르쿠스 만타스 등이 이끈 1274년~1281년까지의 대반란으로 저항하지만 1290년까지 리투아니아를 제외한 전역을 정복하는데 성공합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이 때부터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동방 러시아 공국들을 정복하기 시작하였고 비테니스 대공은 백러시아(현 벨라루스), 게디미나스 대공은 키예프 등 드네프르 강 연안과 붉은 러시아(현 갈리치아 및 볼히니아) 등의 루테니아 전역, 알기르다스 대공은 모스크바를 제외한 모든 러시아 공국 및 부크강 연안 및 흑해 일부 해안가까지 확장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때 리투아니아는 막말로 말이 대공국이지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이어진 제국 수준이었습니다. 이 당시 주요 전투만 해도 1362년 키예프 부근의 푸른강 전투, 1399년 제1차 폴타바(보르스클라 강) 전투 등 평균 5만 이상을 동원한 전투들이었고 생존 그 자체가 걸린 리투아니아는 계속해서 싸우면서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상대편인 독일 기사단 역시 1320년대 단치히 획득 및 1346년 덴마크로부터 에스토니아 북부와 외젤과 비크 주교령을 구입하였습니다. 또한 리투아니아를 계속해서 공략해서 1382년에는 빌나우스를 사정권에 두었고 1399년에는 사모기티아 정복, 1402년에는 노이부르크 획득까지 성공해 서로는 브란덴부르크, 동으로는 에스토니아까지 발트해 남부 연안 절반을 육로로 연결한 대국으로 발전합니다.

    1410년 제1차 탄넨베르크(그룬발트) 전투가 대동방 십자군의 절정인데 이 전투에서 독일기사단이 이겼으면 현재 우랄 산맥 이서 전역은 독일민족권으로 확실히 편입되었을 정도로 북방 십자군 역사상 최대 전투였습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승리하면서 50년에 걸친 재정복전이 벌어지고 1453년~1466년의 13년 전쟁으로 독일기사단이 폴란드왕국에 신종하면서 동방식민운동은 마침내 종료됩니다.

    다만, 18세기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볼가강 개발을 위해 독일계가 이주한 적은 있습니다

  2. Franken 2019.10.14 1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영토에 진입도 안했는데 벌써 패망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군요.

  3. 루나미아 2019.10.14 2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 보급이...

  4. 2/28일 입대 2019.10.15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랑다르메라는 다국적군!이라는 표현이 가장 와닿네요. 조별과제가 망하듯이 원정도 초장부터 아주 막장이군요. 마치 스페인에 파견된 프랑스군마냥 필요이상의 학대까지 저지르고 있구요;;

  5. arandel 2019.10.20 08: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원정 다음편이 기다려집니다. 나시카님의 글로 본 러시아 원정기가 기대됩니다.
    아 그리고 나시카님, 양해를 구할까 해서요.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아이티혁명에 대한 글부분에서 아이티 봉기가 부두교 술사의 예언으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제가 제 블로그에 글쓸때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그런 이야기를 읽었다고 인용해도 될까 해서요. 나시카님의 글을 링크와 함께 인용해도 괜찮을까요?

  6. arandel 2019.10.21 1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나시카님 그럼 저도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본 글에서 이 정보얻었다는거 밝히면서 글 쓰겠습니다.


1812년 5월18일, 아직 폴란드 푸오츠크(Płock)에 있던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이자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viceroi)인 외젠 보아르네(Eugène de Beauharnais)가 당시 임신 중이었던 부인 아우구스타(Auguste Amalie Ludovika Georgia von Bayern)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실제로 발발할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는 거 아시오 ?  사람들 말로는 전쟁이 일어날 턱이 없다고 하오.  이유는 양측 모두 전쟁으로 얻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라오.  결국 협상으로 이 상황이 종결될 것이라고 다들 말하고 있소."

 

 

(바이에른 왕국의 공주 아우구스타입니다.   외젠과의 결혼은 순수하게 정략적으로 맺어진 것이었으나, 외젠이나 아우구스타나 서로를 정말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도 외젠은 처가댁에서 후한 대접을 받으며 잘 살았습니다.)

 

 


실제로 중서부 유럽의 프랑스나 독일, 이탈리아 출신 사람들이 볼 때 황량한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머나먼 러시아로 쳐들어간다는 것은 굉장히 뜬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가난하고 낙후된 나라에 쳐들어가서 얻을 것도 없고, 무엇보다 너무 먼 나라인데다 너무 넓은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러시아가 쳐들어온다면 맞서 싸우겠으나, 굳이 그 먼 곳으로 쳐들어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소문이 돈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궁극적 목표야 러시아를 다시 대륙봉쇄령 틀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지만, 나폴레옹 본인조차 이번 전쟁의 전술적 목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큰 전투 두어번이면 러시아와의 평화 조약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큰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공략해야 할지는 본인도 몰랐습니다.  나폴레옹은 한번은 스몰렌스크(Smolensk)를 점령하고 겨울을 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말했다가, 다음 번에는 모스크바야말로 러시아 제국의 진정한 수도이므로 여름이 끝나기 전에 거기를 점령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 본인부터 오락가락하는 판국이니 누가 보더라도 이번 전쟁은 목표가 없는 늪 같아 보였습니다.

 

 

(스몰렌스크까지의 거리도 사실 가까운 편은 아니지만 모스크바까지 가는 것은 더욱 멀었습니다.  당시 비교적 쾌속으로 행군하던 프랑스군도 하루 25km 정도가 평균이었으니, 스몰렌스크까지 가는 것도 전투가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로와도 대략 29일 걸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네만(Nieman) 강 서안으로 집결하라는 나폴레옹의 소집 명령을 받은 프랑스 및 동맹국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과연 어떤 기분으로 고향을 떠났을까요 ?  아마 즐거운 마음으로 군대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특히 남의 나라 전쟁에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들은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나폴레옹이 그들을 위해 준비해놓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채 길을 떠났습니다.  이들에겐 네만(Nieman) 강 서쪽 어딘가였을 최종 집결지의 위치와 집결 목표일은 물론 몇월 며칠에는 어느 마을에, 몇월 며칠에는 어느 도시에 도착하라는 매우 상세한 중간 일정표까지 주어졌습니다만, 정작 어느 나라를 치기 위해서 간다는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황실 근위대 소속 포병대의 불라르(Boulart) 대령이라는 사람도 폴란드에 도착하고 나서도 편지에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앞으로 어떻게 풀릴지 알 방법이 없다.  뭔가 낌새가 보이는 것도 없고 상상력을 자극한 아무 단서가 없으며, 열정을 불러일으킬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소문은 자자했습니다.  원래 지휘부가 비밀을 엄격하게 지킬 수록 아랫것들의 상상력은 나래를 펼치게 되어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치러 간다는 소문이 가장 유력했지만 그럴 리가 없고 모든 것은 인도에 쳐들어가기 위해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가 짜고치는 고스톱이라는 소문도 파다했습니다.  

푸제(Pouget) 장군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인들과 연합하여 러시아 제국의 광활한 사막을 지나 영국놈들의 소유인 인도를 공격하러 간다고 생각했다."

세계 지리에 어두웠던 어떤 병사는 이 소문을 잘못 알아듣고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어서 동네 사람들을 더더욱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우리는 육로를 통해 영국으로 진격하기 위해 러시아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더 배운 것이 있고 이성적인 병사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소문은 더욱 그럴싸 해서,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가 비밀 협약을 맺고 프랑스-러시아 연합군이 오스만 투르크를 공격하기로 했으며, 먼저 투르크의 유럽-아시아 영토를 정복한 뒤에야 인도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습니다.  이 소문은 워낙 그럴 듯하여, 심지어 알렉산드르에게 직접 제출된 스파이들의 첩보 보고서에도 '나폴레옹의 진짜 목적은 러시아를 짧고 거센 공격으로 굴복시킨 뒤 그대로 러시아군 10만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뒤 이어서 이집트를 공략하고, 최종적으로는 벵갈을 침공하는 것'이라고 적힐 정도였습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어쩌면 알렉산드르도 나폴레옹의 의중이 그럴 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야콥 발터(Jakob Walter)는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석공이 원래 직업이었습니다.   그는 1806년에 최초로 징집되어 폴란드 전역에서 복무한 이후 소집과 소집 해제를 반복하다가 1812년 다시 소집되어 러시아로 향했습니다.  러시아로 갈 때 그의 나이는 24세였고, 티푸스에 걸렸으나 다행히 살아남아 회고록도 썼습니다.)

 

 


좀더 스케일이 작은 소문도 있었습니다.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출신의 야콥 발터(Jakb Walter) 일병이 들은 소문은 방향이 정반대였습니다.  그 소문에 따르면 그들은 발트 해변 어딘가의 큰 항구로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스페인으로 가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당수 병사들에게는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병사들의 편지나 기록들은 꽤 낭만적인 전망을 그린 것도 많았습니다.


"이 모든 소문은 사실 내겐 별 상관이 없다.  우리가 오른쪽으로 가든 왼쪽으로 가든 혹은 그냥 가운데로 쭉 가든 뭔 상관이겠는가 ?  내가 진짜 세상 속으로 가고 있다는 것만 중요하다."

"내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 거의 모두가 군대에 모여있었다.  그들은 이미 영광을 차곡차곡 쌓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그냥 있으면 세상의 짐짝 신세인 내가, 그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까지 수줍게 손을 모은 채 기다리고만 있을 수 있었겠는가 ?  난 그때 18살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는 '대인도 제도' 혹은 어쩌면 '에집(Egippe)'으로 간다고 해요.  사실 어느 쪽으로 가든 상관없어요.  저는 우리가 세상 끝까지 가봤으면 해요."

이런 태평한 상상력과 그 해 연말 그들이 처할 운명을 비교해보면 상당히 한심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태어난 동네에서 10km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시골뜨기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영국이 어디 붙은 나라인지 인도라는 곳이 섬인지 육지인지, 러시아와 이집트 사이에 어떤 나라가 있는지 알 방법도 없었고 그저 모든 것이 신기하고 들뜬 모험처럼 느껴진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물론 이런 근거없는 소문들과 억측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정 대상이 러시아라는 것은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 중 절반 정도는 프랑스 출신이 아닌 폴란드,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 다양한 국가 출신이었고 심지어 스페인 출신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병사들과 폴란드 병사들은 워낙 나폴레옹 개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으니 그렇다치고, 다른 나라 출신들은 러시아 원정길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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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멜무지로 2019.09.16 06: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낙천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보니
    그 뒤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워 보이네요

  2. starlight 2019.09.16 1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를 종속시켜 식민지나 위성국으로 두기엔 현실적으로 불가하고, 결국엔 다시 한번 승리해서 (틸지트에서처럼) 프랑스 패권의 강력한 동맹국으로 삼으려 한 것 같습니다. 전략적이기보단 다분히 감정적이고 사사로운 자존심도 반영된 계획이었다 봅니다. 당시로는 사상 최대의 인원과 물자를 투입한 것치곤 확실한 손익 계산이 없다는게, 너무 많은 승리와 성공으로 허황되고 무능력해지기 시작한 나폴레옹의 세계관을 반증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3. 빛둥 2019.09.16 17: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군의 보급도 없고, (폴타바 전투때처럼) 상대 반란세력의 도움도 없고, (아무리 끌어모았어도) 현대적 보급수단도 부족하고, 거대한 대륙 한 가운데의 상대 수도로 무작정 들어가다니... 아무리 후세사람들이 역사를 다 알고 있어서 비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나폴레옹이 너무 무모했습니다.

    "쎄게 한 대 얻어 맞으면(한판 회전에서 크게 지면), 숙이겠지."라는 마음 말고는 해석되지가 않네요. 나폴레옹이 계속 성공가도만 달려왔던 게 결국은 파국을 부른 것.

    그나저나 당시 알렉산드르는 페테르스부르크의 궁정에 있었겠죠? 그 쪽으로는 아예 나폴레옹 군대가 접근도 안 했네요. 어차피 발틱해가 영국의 수중에 있으니, 페테르스부르크 공략은 힘들고, 설사 공략에 성공해도 러시아 왕실을 잡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나 봅니다.

  4. 루나미아 2019.09.17 1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육로로 인도를 공격한다는,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어보이는 발상이 은근 흔했나 보네요. 하긴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례도 있으니까요.

  5. 푸른 2019.09.18 1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원정을 앞두고 돈 소문이나 병사들의 상상이 되게 귀엽고 웃기네요 ㅋㅋ

    그러면서도 당시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도 러시아원정이 오스만이나 이집트 침공보다 더 예상못할 일이었다는게, 앞으로 있을 원정의 비극성을 극대화하네요...

  6. 무명씨13 2019.09.19 1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님의 글을 특히 황제의 러시아 원정 준비 과정 및 실패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이후 발생한 크림전쟁에서 황제가 겪는 고통을 러시아 군대가 그대로 맛보며 허물어져 갔다는데 충격을 받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자기 땅에서 뭘 배우고 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