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징집된 병사들의 사기는 폴란드 내로 진입하기 전까지는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번에 새로 징집된 어린 병사들은 나폴레옹이 장려한 새로운 공립학교 제도 하에서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심을 제도적으로 교육받고 성장한 아이들이다보니 더욱 그랬습니다.  

병사들은 실질적인 혜택(?)도 꽤 쏠쏠히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원정이 이어질 때마다 프랑스 국민들은 남편과 아들들이 (금지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점령지에서 노략질해온 돈과 귀중품을 가져오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운이 좋지 않아 싸움터에서 횡재를 올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전쟁으로 난리가 난 적국의 마을과 도시에서는 꽤 값이 나가는 물품을 헐값에 사들인 뒤에 관세도 물지 않고 고향 마을로 가져와서 꽤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팔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 중 용감하거나 운이 좋은 친구들이 연금이 딸린 레종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을 받거나 진급을 하거나 아예 장교 계급장을 받아오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생-도밍그(Saint-Domingue, 지금의 아이티) 출신의 한 크레올(Creole, 혼혈이라는 뜻이 아니라 현지 태생이라는 뜻) 병사는 다음과 같이 러시아 원정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거기서 난 무공을 세울 기회를 얻을 것이고, 훈장과 진급을 따내어 자랑스럽게 온 세상에 으시대며 보여줄 거다.  1년 안에 난 소령(chef de bataillon)이 될 거고 원정이 끝날 때 즈음엔 대령이 될 거다.  그 다음엔..."


(근위대 엽기병(Chasseurs a cheval) 대령 군복에 달린 레종도뇌르 휘장입니다.  나폴레옹 시절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은 사람은 약 48,000명으로서, 대부분은 군인이었습니다.  1802년 만들어진 이 훈장의 수상자들은 빠르게 늘어나서 생존 수상자 수는 1806년에 13,000명, 1814년에는 거의 2배인 25,000명에 달했습니다.)



이런 들뜬 분위기는 '철없는' 졸병 젊은이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파리의 많은 상류층/부유층 젊은이들, 즉 jeunesse doree(쥬네스 도레, '금칠을 한 젊은이')들이 '빽'을 이용하여 장교로 진급을 하고 부대를 옮겼는데, 주로 멋진 군복과 겉멋 때문에 기병대로 가거나 나폴레옹과 만날 가능성이 있는 참모진으로 배속되었습니다.  이런 젊은 장교들은 한탕주의에 들뜬 졸병들보다 오히려 더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낙천적인 한탕주의는 군인들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은 역대급 규모를 자랑한 것만큼 보조 지원 인력도 많이 필요했는데, 거기에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민간인들이 잔뜩 몰려들었습니다.  원정길에서의 보급품 구매와 징발, 분배 및 수송 등을 책임지는 군 보급관(commissaire)은 비록 군복을 입고 검과 권총 등으로 무장을 하긴 했지만 본래 신분은 어디까지나 민간인이었습니다.  이런 보급관 뿐만 아니라 서기관이나 비서 등 원정군에는 행정일을 하는 민간인이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대부분은 험한 군사 원정길에는 처음 참여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 했습니다.  드 생-샤망(de Saint-Chamans) 대령은 이들에 대해 이렇게 불평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야전군 행정부에는 이렇게 전쟁이라고는 구경도 못해보았지만 한몫 단단히 챙기기 위해 이 원정에 참여했다고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인간들이 가득했다."

야전군에 딸린 민간인이 이런 행정 사무직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제각각 한두 명씩의 하인들을 데리고 참전했습니다.  이런 하찮은 관직의 민간인들이 그랬으니, 장교들은 어떻겠습니까 ?  모든 장교들은 최소한 1대 이상의 짐마차를 대동했습니다.  이런 마차에는 장교가 품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물건들, 즉 여분의 군복과 여분의 무기, 책과 지도, 식료품과 생활 편의품들이 실려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소한 한 명 이상의 하인이 딸려 있었고, 마차를 모는 마부도 따로 있었습니다.  

소위 중위 나부랭이들이 이 모양이었으니 장군 정도 되면 클래스가 달랐습니다.  엄격하기로 소문난 다부(Davout) 원수의 제1 군단 산하 제5 사단의 지휘관은 콩팡(Compans)이라는 이름의 장군이었는데, 이 분은 결코 허영에 물든 쾌락주의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다부의 부하답게 꽤 검소한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분이 개인적으로 원정에 동반한 민간인 식솔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급사장(maitre d'hotel) - 루이(Louis) 
실내 시종(valet de chambre) - 뒤발(Duval)
마부(cocher) - 보(Vaud)
시종(valet) - 시몽(Simon)과 루이(Louis)
경호원(gendarme) - 트루이예(Trouillet)
기타 하인 - 피에르(Pierre), 발렝텡(Valentin), 장비에(Janvier)
승객용 마차를 끄는 말 5마리
사람이 타는 말 6마리
짐말 30여 마리
승객용 마차 1대
짐마차 여러대

장군님께서 원정을 떠날 때 이 정도의 개인 식솔을 거느리는 것은 당시 유럽 사회에서 놀라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796년 이탈리아 원정을 떠날 때의 나폴레옹 휘하 장군들은 이런 호화스러운 살림살이를 끌고 다닌 것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조차 병사들의 빵 수프나 모닥불에 구운 감자를 얻어 먹거나 아예 쫄쫄 굶는 일이 많았으니까요.  항상 가볍게 움직이던 나폴레옹의 부하 장군들이 어쩌다 이렇게 오스트리아 장군이나 프로이센 장군과 별다를 바 없게 되어버렸을까요 ?

일이 이렇게 된 것에는 무엇보다 나폴레옹 본인의 잘못이 가장 컸습니다.  그는 항상 유럽 왕조들의 진짜 왕들 앞에서 코르시카 출신의 벼락 출세꾼 또는 찬탈자라는 컴플렉스가 있었고, 그 때문에라도 황제가 된 이후 부하들에게 '진짜 귀족들처럼' 호화로운 복장 및 우아한 예절과 사치스러운 살림살이를 갖추도록 장려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여관집 아들 채소 가게 아들 출신들이었던 부하들이 좀 창피했던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의 그런 장려책에 대해 마세나나 베르티에, 술트 등과 같은 부하들도 매우 기뻐하며 그런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습니다.  대부분 40대였던 그의 부하 원수들은 파리에서의 우아하고 편안한 생활에 익숙해져 배에 기름도 붙은 상태였습니다.  이제 험란할 것이 뻔한 새로운 원정을 떠난다고 해서 과거처럼 더 승진할 자리도 없어 보였으므로, 이들은 그다지 열의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훗날 나폴레옹 관련 회고록을 남겨 유명해진 펭 남작(Agathon Jean Francois Fain)은 당시 나폴레옹 직속 비서이자 기록관이었는데, 그는 이때 상황에 대해 부하 장군들이 과거와는 달리 내키지 않아하는 태도로 이번 원정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나폴레옹이 꽤 놀랐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펭 남작입니다.  영국 영화배우 제임스 맥어보이와 좀 닮았네요.  그는 기록관답게 은퇴 이후 나폴레옹 관련되어 여러편의 책을 냈는데, 특히 1908년에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Memoires du Baron Fain, Premier Secretaire du Cabinet de l'Empereur, 즉 '황제 내각의 수석 비서관 펭 남작의 회고록'이 매우 유명했습니다.)



특히 이번 원정은 상대가 머나멀 뿐만 아니라 끔찍하게 넓은 러시아였으므로, 정말 장기간 원정이 되리라고 다들 예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들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비축품과 각종 편의시설을 챙겨가려 했습니다.  그건 중위 나부랭이부터 군단장들까지 다 일치된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서는 나폴레옹조차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건 꼭 나폴레옹을 비난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비록 국민의 지지에 기반한 군주이긴 했지만, 어쨌건 독재자였습니다.  근본적으로 독재자의 제1 걱정거리는 권력 유지였고, 나폴레옹처럼 자주 먼 군사 원정길에 나서야 했던 독재자는 항상 권력의 중심인 권력기관, 그러니까 파리와의 연락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원정은 목적지가 러시아였습니다.  언제나처럼 나폴레옹의 이동 사령부와 파리를 연결해줄 쾌속 파발마 네트워크가 촘촘히 연결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이번 원정에는 자신의 궁정 기관 중 핵심 인원을 아예 다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관료 인원들이 원정길에서도 정상적으로 일하고 생활하도록 하려면 필요한 살림살이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러시아 원정을 떠나는 길목인 드레스덴(Dresden)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를 포함한 자신의 동맹국 및 위성국들의 군주들을 모두 소집하여 자신의 위세를 온 유럽에 각인시켰습니다.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라도 나폴레옹의 행차에는 으리으리한 규모의 인원과 짐이 따라다녔습니다.

 

(1812년 5월, 러시아로 향하는 길인 작센 왕국의 수도 드레스덴(Dresden)에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와 황비 루도비카를 만나는 나폴레옹과 마리-루이즈입니다.  당대 최고의 영웅인 나폴레옹의 아내가 된데다 호화로운 파리의 궁정 생활에 아주 흠뻑 빠져 자아가 부풀어 오를대로 올랐던 마리-루이즈는 여기서 아버지인 프란츠 1세를 대하는 것인데도 목에 깁스를 한 것처럼 도도하고 오만하게 굴어 많은 이들의 빈축을 샀다고 합니다.  오른쪽의 남녀는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부부입니다.)

 



나폴레옹의 원정길 살림살이는 바로 직전까지 러시아 대사였다가 돌아온 콜랭쿠르(Caulaincourt)가 마복시(Grand Ecuyer) 직을 맡아 준비했습니다.  나폴레옹의 개인 화물에는 다양한 텐트와 야전 침대, 책상 및 필기류, 옷장, 은식기와 조리 기구, 식료품과 와인류, 각종 상비약 상자 등이 딸려 있었습니다.  이런 짐들의 규모는 그 수송 엔진 규모를 보면 대략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이 짐들은 약 400마리의 짐말과 40여 마리의 노새가 끌거나 실었고, 사람이 타는 말만도 130여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폴레옹의 근위대와는 별도로 순수하게 나폴레옹 개인의 종군 민간인들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결국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지요.  

 

(이건 파리의 군사박물관(Musee de l’Armee)에 전시된 나폴레옹의 개인 텐트 및 책상의 재현품이라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싣고 간 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호화로왔을 것입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원정에서의 편한 생활을 위해 살림살이만 신경쓴 것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백전노장인 그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특히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습니다.  나폴레옹은 각 부대마다 독일어나 폴란드어,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장교들을 배속시키고 또 장교들에게 러시아어 수업을 받도록 독려했습니다.  어차피 러시아군 장교들은 거의 100% 모두 프랑스어를 꽤 잘 했기 때문에 러시아군과의 의사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러시아군 부사관들이나 병사들을 포로로 잡을 경우에 대비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간첩들도 러시아 서부 지역까지 쫙 풀어서 정보망을 넓히고 군수품 담당부(Depot de la Guerre)에게 동부 폴란드는 물론 리투아니아와 러시아 주요 지역의 확대 지도를 대량 인쇄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지도는 철저히 군용으로 만들어 도로와 강, 늪지와 숲 등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나중에 보시겠습니다만 이로 인해 러시아군이 가진 러시아 지도보다 프랑스군이 가진 러시아 지도가 더 정확한, 웃기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나름대로 철저하게 침공 준비를 하는 동안, 러시아군은 과연 어떤 철통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을까요 ?  그게... 또 좀 그랬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Agathon_Jean_Fran%C3%A7ois_Fain
https://en.wikipedia.org/wiki/Legion_of_Honour
http://www.napoleonguide.com/legionorg.htm
https://en.wikipedia.org/wiki/Armand-Augustin-Louis_de_Caulaincourt
https://seetheworld.travelforkids.com/napoleon-bonaparte-paris-with-kids/

https://www.napoleon-histoire.com/1812-napoleon-a-dres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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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9.10.21 07: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새는 지금 출근해서 항상 이시간대에 확인하네요.

    프랑스 혁명전쟁과 비교하셨는데 꽤 맞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도 이미 공화정 시절 혁명군과 제국 대육군의 전투력 저하가 심각하다고 느낀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혁명전쟁 당시 프랑스군은 심지어 소총조차 부족해서 모리스 드 삭스 원수가 주장했던 대기병용 장창을 민간에 50만 자루나 발주할 정도로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플랑드르 전역 이후 연전연승을 거두었는데 이베리아 전역 이후 제국군에는 그런 투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상당히 말이 많았습니다. 혹자는 '혁명전쟁 당시 프랑스군은 앙시엥 레짐에 고통받고 있는 민중들을 위한 새로운 시대의 선봉'이라는 싸울 수 있는 이유를 명확히 제시했기 때문에 강했지만 제국군 시절에는 더 이상 그런게 없었고 상대방에게는 압제자였을 뿐이라고 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지도문제. 프랑스군 같은 경우 이미 17세기부터 국가적 프로젝트로 정밀지도 확보에 공을 기울입니다. 루이 14세가 1660년대부터 시작한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 카시니 가문이 4대 100년에 걸쳐서 만든 1/86400 축적도를 시작으로 이 시기까지 계속 전 유럽지역에 대한 지도 확보를 했으니까요. 반면 러시아군 같은 경우에는 지도에 대해 19세기 후반에서야 어느 정도 체계를 잡습니다. 이러니 러시아 원정 당시 지도 덕분에 그나마 그 병력이라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역사상 지도로 전쟁을 말아먹은 경우가 1차 세계대전과 독소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인데 특히 독소전쟁 시기에는 심각했습니다. 가뜩이나 1차 세계대전 후반 독일군이 획득한 제정러시아 지도 및 관계자료가 많았는데 거기에 항공정찰까지 제대로 되어 스몰렌스크까지는 독일군의 지리정보가 소련군보다 더 정확한 수준이었으니까요.

    여기서는 이야기가 없지만 대량의 위폐를 찍어낸 것도 있습니다. 이건 프랑스가 거쳐간 모든 국가에서 마찬가지였지만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면 가장 먼저 접수한 곳이 바로 조폐창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조폐원판이 있었거든요. 러시아 원정 준비 당시 마음껏 약탈하게 놓아둔(?) 이유 중 하나가 나중에 가지고 있는 원판으로 지폐 찍어서 뿌리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원정 당시 프랑스군이 찍어간 루블이 최소 수천만 단위인데 이거 때문에 원정 이후 러시아 경제가 개판납니다. 프랑스군이 마구잡이로 살포한데다 정화준비는 도저히 이를 맞출 수 없었으니까요. 폴란드는 더 심각했는데 오죽하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제3차 폴란드 분할 당시 획득한 영토를 도저히 경제적으로 맡을 역량이 안 되다보니 러시아에 할양할 정도였습니다. 왜냐고요? 바르샤바 대공국의 조폐원판으로 찍어낸 러시아 원정 비용이 당시 대공국 1년 예산을 한참 뛰어넘었고 이걸 맡을 경제적 역량이 두 나라에는 없었으니까요.

  2. Franken 2019.10.21 15: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및 부하들이 사치향락에 쓸 물품을 빼고 예전모습으로 돌아간다 해서 승률은 별 차이가 없겠지만 그래도 많이 아쉽군요. 뭐 인생 잘 살아볼려 기를 쓰고 올라간 사람들이니 쉽게 포기할리는 없지만...

  3. 흠흠흠 2019.10.21 1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스로 황제 자리까지 올라갔으면 열등감을 가질 게 아니라 자랑스러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면전에서 너희는 무능하고 나는 유능하다고 깔아뭉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카를대공 2019.10.21 2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래는 그래야 하는데 사방팔방이 타고난 금수저들이면 자기도 모르게 쪼그라들고 컴플렉스 생기는게 사람 이치 같더군요.

      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사회적 약소계층한테 노력 안 하냐며 더 윽박지른다 하고,사회적 약자가 성공하면 자신이 속했던 그룹에 더 모질게 군다지 않습니까

      나폴레옹도 성공하고나니 세상 풍경이 다르게 보였던 거겠지요.

    • Playzone 2019.10.22 16: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주원장이 예외적이죠. 명나라 건국 이후 자기 조상을 주희로 조작하려다가 그 후손이 자기 앞에서 벌벌 떠는걸 보고 저런 서생보다 흙수저 거지 탁발승에서 황제가 된 내가 더 뛰어나지않겠냐고 때려치웠거든요.

  4. 카를대공 2019.10.21 2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클은 아닌데 요샌 맥어보이 성씨 쓰던 사람을 매커보이로 표기하더군요.

    토튼햄->토트넘처럼 이런게 표준 문법인가 봅니다.

  5. Wafflegui 2019.10.22 0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튭에 epic history라는 채널에 나폴레옹 전쟁의 주요 전역과 전투만 다룬 영상이 있는데 실시간으로 부대위치가 이동하는 영상화가 수준 높아서 최근에 보고있어요. 주인장님만큼 세세한 일화와 필력은 없지만 머릿속에서 지도로 상상하는것과 달리 전투를 한눈에 볼 수 있어서 한번쯤 보시는것도 재밌겠네요.

  6. arandel 2019.10.22 2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저 약탈이 프랑스인들이 나폴레옹을 지지한 진짜 이유였을까요? (농담^^) 유럽 각지에서귀중품을 털어왔다면 상당했을텐데 으음...글구 보니 프랑스 혁명떄 프랑스 경제도 곤란했고 서민들도 곤궁했는데 설마 저런 식으로 메꿔졌기 때문에 좀 경제가 나아진 걸까요 .

    • Dogswellfish 2019.10.22 2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애초에 프랑스가 공격적으로 나갔던게 파탄난 경제를 약탈 경제로 해결하기 위함이였음

    • nasica 2019.10.23 07: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생각해보면 프랑스 혁명 이후 (초반의 아시냐 지폐 등 바보짓으로 인한 혼란 이후에) 경제 활력이 나쁘지 않았던 것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당시의 빈약한 산업 환경에서 결국 가장 큰 생산 수단은 역시 토지였는데, 대부분의 토지를 쥐고 있던 소수의 귀족과 교회로부터 빼앗아 다수의 부르조아 및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으니까요. 물론 그게 공산당식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아니었고 유혈몰수 유상분배이긴 했습니다.

      저도 그에 대한 통계자료 등은 보지 못했는데, 언젠가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 좋겠네요.

    • reinhardt100 2019.10.23 0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혁명전쟁 이후 프랑스군은 어디를 가든 약탈을 하는 건 기본이었습니다. 북이탈리아 정복전에서 단 베네치아령 롬바르디아에서만 6개월만에 '공식적으로' 2천만 프랑을 무상징발했었으니까요.

      이 당시 프랑스 경제는 말 그대로 거대한 군수경제, 즉 정부지출의 극적인 팽창이 경제성장을 이끄는 한 축이 되고 있었지만 숙련된 노동력 부족이 가시화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시기까지 징병된 소년 및 청년 인구가 이미 150만에 가까웠는데 문제는 주르당법과 후속법률, 각 전선에서의 병력수요 때문에 사회에 복귀하기 어려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시카님 말씀대로 농업생산력이 주된 경제생산의 한 축인 시대에 이 상황은 그대로 생산력 감퇴와 직결되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 당시 프랑스 본토나 북이탈리아 등 제국의 핵심 농업지역은 노동력 부족이 심해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경제적으로 침체가 시작되었다는 보고가 각 데파르트망으로부터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탈레랑이나 푸셰같은 사람들이 괜히 우려한게 아닙니다. 자칫하다 경제가 아작난다는 결론이 날 수 밖에요. 게다가 중농주의의 발상지인 국가니 더욱 그 파급효과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시냐, 이게 의외로 프랑스 내부의 채무관계를 해소시켜준 결과를 낳긴 합니다. 가장 유사한 사례가 1920년대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인데 양자 모두 채무자의 채무부담을 급속하게 감소시켜주었다는 겁니다. 막판에 나시카님 말씀대로 액면가 1/300 수준까지 가는 바람에 총재정부와 통령정부가 발행 초기 약속대로 교회 및 망명한 귀족 소유 토지의 소유권 이전 형식으로 상계 및 소각처리 합니다.

      유혈몰수, 이게 가장 극단화된 동네가 방데였는데 사실 남부 지역 상당수, 특히 프로방스나 랑그도크, 루시옹 같이 교황령 등 외국 제후령이 있는 지역은 방데 수준은 아니더라도 유혈이 꽤나 심각했습니다. 그러니 왕정복고 후 백색테러가 벌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장 자기 땅 찾으려면 뺏아간(?) 소유주를 자력구제(?)로 해결해야 했으니까요.


'곳간에서 인심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건 진짜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명언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들에게서 염치, 질서, 관용, 정의 따위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그들이 군복을 입고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단치히나 기타 주요 군수 창고에 얼마나 많은 군수품이 쌓여 있든 당장 배가 고픈 군대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11 경보병 연대 소속 쥬세페 벤투리니(Giuseppe Venturini)라는 피에몬테(Piemonte) 출신의 중위는 자신이 수행하는 '징발'로 인해 2~3백 가구가 당장 거지꼴이 되었다면서 마음이 아프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징발 결과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장교가 수행하는 징발은 그나마 양반이었습니다.  원래 프랑스군의 현지 조달 및 징발 기술은 예술의 경지에 달한 것이어서, 다들 굶주리고 바쁜 와중에도 효율적으로 식량을 수집하고 적재적소에 분배했을 뿐만 아니라 식량을 빼앗기는 현지 주민들에게 영수증도 꼬박꼬박 써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척박한 폴란드 현지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뒤져도 나오는 것이 거의 없는 현실에 분노하고 짜증이 난 병사들은 죄없는 폴란드 농민들의 집과 창고를 마구 때려부쉈습니다.  특히 이들은 각자의 소속 국가의 깃발 아래가 아니라 그랑다르메라는 다국적 군대의 깃발 아래 움직이는 것이다보니 몰염치가 더욱 심했습니다.  심지어 폴란드군까지도 폴란드 농민들을 마구 약탈했습니다.

제5 폴란드 기마 라이플병 연대의 18세짜리 소년 대위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자기들이 가져가는 것, 심지어 가져가기 원하는 것 이상으로 때려부쉈다.  민가에 들어가서는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박살을 냈다.  창고에는 아예 불을 질렀다.  밀밭이 있을 경우, 그 한가운데로 말을 몰고 들어가 마구 짓밟으며 말에게 설익은 밀을 먹였는데, 먹이는 것 이상으로 많은 밀을 완전히 망쳐놓았다.  이건 불과 두어 시간 뒤에는 뒤따르는 그들의 굶주린 동료들도 거기에 와서 말을 먹여야 한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의미한 파괴행위였다."

일이 이렇게 되다보니 그랑다르메가 집결하는 네만 강 서안 지역은 분명히 아군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길 가의 집들은 모두 창문이 깨지고 울타리는 장작불에 쓰느라 뜯겨졌으며, 많은 집들이 반쯤 무너져버렸습니다.  군복이 보이기만 하면 주민들이 도망치던 폴란드는 그나마 양반이었습니다.  동프로이센에서는 이런 난장판에 민족적 감정까지 더해졌습니다.  발에 물집이 생기는 작은 부상이든 티푸스든 어떤 군대에게나 낙오병은 반드시 생깁니다.  그런 낙오병들은 동프로이센 주민들의 습격을 받고 학살되었습니다.  그랑다르메 소속의 같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병사들도 습격 대상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그랑다르메 병사들도 똑같은 적개심을 가지고 동프로이센 주민들을 대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예프 아빌(Jef Abbeel)이라는 병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숙영하는 마을마다 주민들의 가축을 필요 이상으로 모조리 도살하고 술과 식량을 빼앗는 것은 물론, 꽤 떨어진 인근 도시에 가서 자기들이 주문하는 물건을 구해오라고 주민들을 내몰았습니다.  주문 품목 중 하나라도 못 구해오면 몽둥이 찜질로 교육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심하다고 주민들에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거절할 경우 주민들은 역시 또 흠씬 두들겨 맞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주민들의 감정은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힌덴부르크 장군은 '동프로이센 사람들은 독일인이라기보다는 슬라브인에 가깝다'라며 투덜거린 바 있습니다.  실제로 동프로이센은 독일화가 많이 진행되긴 했지만 원주민인 슬라브인들을 소수의 독일계 튜톤 기사단이 정복해서 만들어진 왕국이므로 힌덴부르크의 말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도 동프로이센이 프로이센 왕국의 발상지인지라 프로이센 왕국에서 동프로이센이 차지하는 상징적인 의미는 컸습니다.  가령 윗그림의 1861년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즉위식은 동프로이센의 수도인 쾨니히스베르크(Konigsberg)에서 열렸습니다.  이 빌헬름 1세가 어린 시절인 1806년 나폴레옹에게 쫓겨 엄마와 함께 메멜까지 도망쳐야 했던 어린 왕자가 맞습니다.  또 임마누엘 칸트도 바로 이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이지요.  지금 쾨니히스베르크는 러시아의 해군 도시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가 되었습니다.)  

 



앞서 나폴레옹이 대규모로 징집된 신병들의 숙련도에 대해 걱정하는 부하의 말에 대해 심리전에 있어서 질보다는 양이 중요하다며 일축했다는 일화를 언급했었지요.  그랬던 나폴레옹도 폴란드의 포즈난(Poznan)에 입성할 때 그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한 폴란드 비스툴라(Vistula) 군단을 실제로 보고는 꽤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이 부대는 최근까지 스페인에 파견되어 있다가 러시아 원정을 위해 막 귀환한 상태였는데, 사상자로 인한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많은 수의 신병들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는 이 군단의 지휘관인 모르티에(Mortier) 원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친구들은 너무 어리군.  내게 필요한 건 전장의 고생을 견딜 만한 병사들일세.  저렇게 어린 친구들은 야전 병원만 가득 채울 뿐이야."

 

 

(모르티에(Édouard Mortier) 원수입니다.  그의 이름은 재미있게도 프랑스어로 박격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훗날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립 왕 밑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냈는데, 루이 필립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1835년의 폭탄 테러에서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루이 필립이 그의 죽음을 무척이나 슬퍼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나이 어린 친구들에게 편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다부 휘하의 제85 전열 보병 연대의 한 소령은 네만 강가에 도착할 때까지 신병의 20%를 잃었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식량도 부족한 상태에서 먼 길을 일정에 맞춰 행군을 하다보니 탈진과 질병, 소소한 부상으로 쓰러진 병사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많았습니다.  당연히 도망병들도 많았고 심지어 자살하는 병사들도 꽤 있었습니다.  말의 경우는 더 심각했습니다.  1812년 봄은 특별히 기온이 낮았습니다.  이로 인해 곡식 뿐만 아니라 풀도 늦게 싹을 틔웠습니다.  나폴레옹이 굳이 6월 말까지 러시아 원정을 기다린 것은 말이 부족한 사료 대신 뜯어 먹을 풀이 충분히 자라길 기다린 것이었는데, 그게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근위 포병대의 불라르(Boulart) 대령은 이렇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린 초지의 풀을 잘라 걷어들였는데, 그게 다 떨어지자 밀과 보리, 귀리를 걷어들여야 했는데, 그것들은 이제 막 싹이 튼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 해 수확을 망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 말들에게 최악의 사료를 주면서 중노동을 시키느라 말들의 죽음을 준비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흔히 말 사료라고 하면 귀리나 옥수수를 떠올리는데, 의외로 말은 세심하게 사료 성분을 조정해주어야 한답니다.  가령 귀리에는 인 성분이 풍부하고 칼슘이 부족한데, 이는 말에게 필요한 비율인 칼슘:인 = 2:1과는 정반대의 비율이라서 귀리 위주로 사료를 줄 때는 반드시 석회가루 같은 것을 추가해서 칼슘 성분을 보완해줘야 한답니다.  또 옥수수 같은 경우 전분이 풍부해서 좋긴 한데 옥수수를 갈아서 준다고 해도 말은 옥수수 성분의 45% 정도 밖에 소화를 못 시킨다고 합니다.  흔히 덩치 큰 말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생존력 자체는 사람이 더 좋은 모양이에요.)  

 

 


실제로 아직 네만 강을 건너지도 않았는데 위에 언급한 이유로 죽은 말들이 꽤 많았습니다.  길가에는 그런 말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고 그것들을 을씨년스럽게 개들과 까마귀떼가 뜯었습니다.  말들이 죽었으니 그 말들이 끌던 짐마차도 당연히 버려졌습니다.  나폴레옹의 의붓아들 외젠 밑에 소속된 바이에른(Bayern) 장교 하나는 죽은 말과 버려진 마차의 수가 많은 것에 놀라 아래와 같이 적었습니다.

"누구든 이 광경을 보면 전진하는 군대가 아니라 허겁지겁 퇴각하는 군대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 장군들과 장교들의 임전 태세는 과거에 비해 크게 태평한 편이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www.paulickreport.com/horse-care-category/which-is-which-matching-feed-ingredients-with-nutrients/

https://en.wikipedia.org/wiki/%C3%89douard_Mortier,_Duke_of_Tr%C3%A9vise

https://en.wikipedia.org/wiki/East_P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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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9.10.14 07: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엘베강 이동의 독일어권은 8세기 말 작센족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공세부터 꾸준히 넓힌 결과입니다.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엘베강에서 오데르 강까지 각종 변경백령들이 세워지지만 983년 벤덴족 대반란 이후 싸그리 날아가버립니다. 이 때 신성로마제국은 이탈리아의 베렝가리오와 분쟁 중이서서 대응하지도 못했고요. 이후 1120년대부터 다시 시작된 동방식민운동 (Ostsiedlung)이 본격화되면서 제대로 공세를 퍼붓기 시작합니다. 북방의 덴마크와 스웨덴, 남부의 작센까지 서방 카톨릭권의 동부 전체가 동방 슬라브권 정복을 개시한 것인데 그 규모는 성지 예루살렘으로 가는 십자군 이상으로 컸고 인력도 지속적으로 공급되었습니다. 엘베강 이동의 뤼베크, 로스토크, 슈테틴, 단치히,리가 등 해상 보급이 용이한 하구에 게르만족 도시가 들어섰고 1140년대 이후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이 대규모 십자군을 구성하여 동방식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이후 덴마크의 발데마르 대왕이 한 때 발트해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구축한 것을 시작으로 덴마크는 외젤(사레마) 및 에스토니아 북부를 스웨덴은 핀란드와 카렐리야, 라플란드를 자신들의 십자군으로 정복하기 시작합니다.

    스칸디나비아와 달리 발트해 및 폴란드 지역은 초기에는 리보니아 수도회(검우기사단) 및 독일계 상인들이 정복전을 개시하지만 프루스족에 대패하면서 주도권은 우트르메르와 트란실바니아에서 철수하기 시작한 독일 기사단에 넘어가고 50년에 걸친 정복전이 시작됩니다. 프루스 족 및 발트해 연안 민족들 또한 헤르쿠스 만타스 등이 이끈 1274년~1281년까지의 대반란으로 저항하지만 1290년까지 리투아니아를 제외한 전역을 정복하는데 성공합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이 때부터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동방 러시아 공국들을 정복하기 시작하였고 비테니스 대공은 백러시아(현 벨라루스), 게디미나스 대공은 키예프 등 드네프르 강 연안과 붉은 러시아(현 갈리치아 및 볼히니아) 등의 루테니아 전역, 알기르다스 대공은 모스크바를 제외한 모든 러시아 공국 및 부크강 연안 및 흑해 일부 해안가까지 확장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때 리투아니아는 막말로 말이 대공국이지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이어진 제국 수준이었습니다. 이 당시 주요 전투만 해도 1362년 키예프 부근의 푸른강 전투, 1399년 제1차 폴타바(보르스클라 강) 전투 등 평균 5만 이상을 동원한 전투들이었고 생존 그 자체가 걸린 리투아니아는 계속해서 싸우면서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상대편인 독일 기사단 역시 1320년대 단치히 획득 및 1346년 덴마크로부터 에스토니아 북부와 외젤과 비크 주교령을 구입하였습니다. 또한 리투아니아를 계속해서 공략해서 1382년에는 빌나우스를 사정권에 두었고 1399년에는 사모기티아 정복, 1402년에는 노이부르크 획득까지 성공해 서로는 브란덴부르크, 동으로는 에스토니아까지 발트해 남부 연안 절반을 육로로 연결한 대국으로 발전합니다.

    1410년 제1차 탄넨베르크(그룬발트) 전투가 대동방 십자군의 절정인데 이 전투에서 독일기사단이 이겼으면 현재 우랄 산맥 이서 전역은 독일민족권으로 확실히 편입되었을 정도로 북방 십자군 역사상 최대 전투였습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승리하면서 50년에 걸친 재정복전이 벌어지고 1453년~1466년의 13년 전쟁으로 독일기사단이 폴란드왕국에 신종하면서 동방식민운동은 마침내 종료됩니다.

    다만, 18세기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볼가강 개발을 위해 독일계가 이주한 적은 있습니다

  2. Franken 2019.10.14 1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영토에 진입도 안했는데 벌써 패망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군요.

  3. 루나미아 2019.10.14 2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 보급이...

  4. 2/28일 입대 2019.10.15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랑다르메라는 다국적군!이라는 표현이 가장 와닿네요. 조별과제가 망하듯이 원정도 초장부터 아주 막장이군요. 마치 스페인에 파견된 프랑스군마냥 필요이상의 학대까지 저지르고 있구요;;

  5. arandel 2019.10.20 08: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원정 다음편이 기다려집니다. 나시카님의 글로 본 러시아 원정기가 기대됩니다.
    아 그리고 나시카님, 양해를 구할까 해서요.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아이티혁명에 대한 글부분에서 아이티 봉기가 부두교 술사의 예언으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제가 제 블로그에 글쓸때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그런 이야기를 읽었다고 인용해도 될까 해서요. 나시카님의 글을 링크와 함께 인용해도 괜찮을까요?

  6. arandel 2019.10.21 1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나시카님 그럼 저도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본 글에서 이 정보얻었다는거 밝히면서 글 쓰겠습니다.


1812년 5월18일, 아직 폴란드 푸오츠크(Płock)에 있던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이자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viceroi)인 외젠 보아르네(Eugène de Beauharnais)가 당시 임신 중이었던 부인 아우구스타(Auguste Amalie Ludovika Georgia von Bayern)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실제로 발발할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는 거 아시오 ?  사람들 말로는 전쟁이 일어날 턱이 없다고 하오.  이유는 양측 모두 전쟁으로 얻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라오.  결국 협상으로 이 상황이 종결될 것이라고 다들 말하고 있소."

 

 

(바이에른 왕국의 공주 아우구스타입니다.   외젠과의 결혼은 순수하게 정략적으로 맺어진 것이었으나, 외젠이나 아우구스타나 서로를 정말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도 외젠은 처가댁에서 후한 대접을 받으며 잘 살았습니다.)

 

 


실제로 중서부 유럽의 프랑스나 독일, 이탈리아 출신 사람들이 볼 때 황량한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머나먼 러시아로 쳐들어간다는 것은 굉장히 뜬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가난하고 낙후된 나라에 쳐들어가서 얻을 것도 없고, 무엇보다 너무 먼 나라인데다 너무 넓은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러시아가 쳐들어온다면 맞서 싸우겠으나, 굳이 그 먼 곳으로 쳐들어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소문이 돈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궁극적 목표야 러시아를 다시 대륙봉쇄령 틀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지만, 나폴레옹 본인조차 이번 전쟁의 전술적 목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큰 전투 두어번이면 러시아와의 평화 조약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큰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공략해야 할지는 본인도 몰랐습니다.  나폴레옹은 한번은 스몰렌스크(Smolensk)를 점령하고 겨울을 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말했다가, 다음 번에는 모스크바야말로 러시아 제국의 진정한 수도이므로 여름이 끝나기 전에 거기를 점령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 본인부터 오락가락하는 판국이니 누가 보더라도 이번 전쟁은 목표가 없는 늪 같아 보였습니다.

 

 

(스몰렌스크까지의 거리도 사실 가까운 편은 아니지만 모스크바까지 가는 것은 더욱 멀었습니다.  당시 비교적 쾌속으로 행군하던 프랑스군도 하루 25km 정도가 평균이었으니, 스몰렌스크까지 가는 것도 전투가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로와도 대략 29일 걸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네만(Nieman) 강 서안으로 집결하라는 나폴레옹의 소집 명령을 받은 프랑스 및 동맹국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과연 어떤 기분으로 고향을 떠났을까요 ?  아마 즐거운 마음으로 군대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특히 남의 나라 전쟁에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들은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나폴레옹이 그들을 위해 준비해놓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채 길을 떠났습니다.  이들에겐 네만(Nieman) 강 서쪽 어딘가였을 최종 집결지의 위치와 집결 목표일은 물론 몇월 며칠에는 어느 마을에, 몇월 며칠에는 어느 도시에 도착하라는 매우 상세한 중간 일정표까지 주어졌습니다만, 정작 어느 나라를 치기 위해서 간다는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황실 근위대 소속 포병대의 불라르(Boulart) 대령이라는 사람도 폴란드에 도착하고 나서도 편지에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앞으로 어떻게 풀릴지 알 방법이 없다.  뭔가 낌새가 보이는 것도 없고 상상력을 자극한 아무 단서가 없으며, 열정을 불러일으킬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소문은 자자했습니다.  원래 지휘부가 비밀을 엄격하게 지킬 수록 아랫것들의 상상력은 나래를 펼치게 되어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치러 간다는 소문이 가장 유력했지만 그럴 리가 없고 모든 것은 인도에 쳐들어가기 위해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가 짜고치는 고스톱이라는 소문도 파다했습니다.  

푸제(Pouget) 장군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인들과 연합하여 러시아 제국의 광활한 사막을 지나 영국놈들의 소유인 인도를 공격하러 간다고 생각했다."

세계 지리에 어두웠던 어떤 병사는 이 소문을 잘못 알아듣고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어서 동네 사람들을 더더욱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우리는 육로를 통해 영국으로 진격하기 위해 러시아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더 배운 것이 있고 이성적인 병사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소문은 더욱 그럴싸 해서,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가 비밀 협약을 맺고 프랑스-러시아 연합군이 오스만 투르크를 공격하기로 했으며, 먼저 투르크의 유럽-아시아 영토를 정복한 뒤에야 인도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습니다.  이 소문은 워낙 그럴 듯하여, 심지어 알렉산드르에게 직접 제출된 스파이들의 첩보 보고서에도 '나폴레옹의 진짜 목적은 러시아를 짧고 거센 공격으로 굴복시킨 뒤 그대로 러시아군 10만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뒤 이어서 이집트를 공략하고, 최종적으로는 벵갈을 침공하는 것'이라고 적힐 정도였습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어쩌면 알렉산드르도 나폴레옹의 의중이 그럴 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야콥 발터(Jakob Walter)는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석공이 원래 직업이었습니다.   그는 1806년에 최초로 징집되어 폴란드 전역에서 복무한 이후 소집과 소집 해제를 반복하다가 1812년 다시 소집되어 러시아로 향했습니다.  러시아로 갈 때 그의 나이는 24세였고, 티푸스에 걸렸으나 다행히 살아남아 회고록도 썼습니다.)

 

 


좀더 스케일이 작은 소문도 있었습니다.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출신의 야콥 발터(Jakb Walter) 일병이 들은 소문은 방향이 정반대였습니다.  그 소문에 따르면 그들은 발트 해변 어딘가의 큰 항구로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스페인으로 가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당수 병사들에게는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병사들의 편지나 기록들은 꽤 낭만적인 전망을 그린 것도 많았습니다.


"이 모든 소문은 사실 내겐 별 상관이 없다.  우리가 오른쪽으로 가든 왼쪽으로 가든 혹은 그냥 가운데로 쭉 가든 뭔 상관이겠는가 ?  내가 진짜 세상 속으로 가고 있다는 것만 중요하다."

"내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 거의 모두가 군대에 모여있었다.  그들은 이미 영광을 차곡차곡 쌓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그냥 있으면 세상의 짐짝 신세인 내가, 그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까지 수줍게 손을 모은 채 기다리고만 있을 수 있었겠는가 ?  난 그때 18살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는 '대인도 제도' 혹은 어쩌면 '에집(Egippe)'으로 간다고 해요.  사실 어느 쪽으로 가든 상관없어요.  저는 우리가 세상 끝까지 가봤으면 해요."

이런 태평한 상상력과 그 해 연말 그들이 처할 운명을 비교해보면 상당히 한심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태어난 동네에서 10km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시골뜨기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영국이 어디 붙은 나라인지 인도라는 곳이 섬인지 육지인지, 러시아와 이집트 사이에 어떤 나라가 있는지 알 방법도 없었고 그저 모든 것이 신기하고 들뜬 모험처럼 느껴진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물론 이런 근거없는 소문들과 억측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정 대상이 러시아라는 것은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 중 절반 정도는 프랑스 출신이 아닌 폴란드,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 다양한 국가 출신이었고 심지어 스페인 출신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병사들과 폴란드 병사들은 워낙 나폴레옹 개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으니 그렇다치고, 다른 나라 출신들은 러시아 원정길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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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멜무지로 2019.09.16 06: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낙천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보니
    그 뒤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워 보이네요

  2. starlight 2019.09.16 1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를 종속시켜 식민지나 위성국으로 두기엔 현실적으로 불가하고, 결국엔 다시 한번 승리해서 (틸지트에서처럼) 프랑스 패권의 강력한 동맹국으로 삼으려 한 것 같습니다. 전략적이기보단 다분히 감정적이고 사사로운 자존심도 반영된 계획이었다 봅니다. 당시로는 사상 최대의 인원과 물자를 투입한 것치곤 확실한 손익 계산이 없다는게, 너무 많은 승리와 성공으로 허황되고 무능력해지기 시작한 나폴레옹의 세계관을 반증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3. 빛둥 2019.09.16 17: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군의 보급도 없고, (폴타바 전투때처럼) 상대 반란세력의 도움도 없고, (아무리 끌어모았어도) 현대적 보급수단도 부족하고, 거대한 대륙 한 가운데의 상대 수도로 무작정 들어가다니... 아무리 후세사람들이 역사를 다 알고 있어서 비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나폴레옹이 너무 무모했습니다.

    "쎄게 한 대 얻어 맞으면(한판 회전에서 크게 지면), 숙이겠지."라는 마음 말고는 해석되지가 않네요. 나폴레옹이 계속 성공가도만 달려왔던 게 결국은 파국을 부른 것.

    그나저나 당시 알렉산드르는 페테르스부르크의 궁정에 있었겠죠? 그 쪽으로는 아예 나폴레옹 군대가 접근도 안 했네요. 어차피 발틱해가 영국의 수중에 있으니, 페테르스부르크 공략은 힘들고, 설사 공략에 성공해도 러시아 왕실을 잡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나 봅니다.

  4. 루나미아 2019.09.17 1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육로로 인도를 공격한다는,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어보이는 발상이 은근 흔했나 보네요. 하긴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례도 있으니까요.

  5. 푸른 2019.09.18 1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원정을 앞두고 돈 소문이나 병사들의 상상이 되게 귀엽고 웃기네요 ㅋㅋ

    그러면서도 당시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도 러시아원정이 오스만이나 이집트 침공보다 더 예상못할 일이었다는게, 앞으로 있을 원정의 비극성을 극대화하네요...

  6. 무명씨13 2019.09.19 1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님의 글을 특히 황제의 러시아 원정 준비 과정 및 실패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이후 발생한 크림전쟁에서 황제가 겪는 고통을 러시아 군대가 그대로 맛보며 허물어져 갔다는데 충격을 받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자기 땅에서 뭘 배우고 사는지?


2002년 3월 15일,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Vilnius) 교외의 공사 현장에서 많은 수의 사람 뼈가 발견되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소련 시절 KGB가 암장을 한 정치범들의 시신이거나 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학살한 포로 또는 유태인들의 시신이 아닐까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발굴을 더 진행해본 결과 나폴레옹 시대의 군복과 머스켓 소총 등이 나오면서 이 3천여 구가 넘는 해골들이 1812년에 죽은 나폴레옹의 병사들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20여 명을 제외하고는 이 해골의 주인은 모두 남성이었고, 대부분은 죽을 때 20대의 나이였습니다.


이 해골들을 연구한 결과, 이 해골들 중 상당수에서 질소 동위원소의 양이 매우 높게 나왔습니다.  질소 동위원소는 단백질과 상관이 많은데, (저는 잘 이해를 못합니다만) 해산물을 많이 먹는 경우에도 늘어나지만 반대로 굶주림에 시달리는 경우에도 늘어난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해골의 주인공들은 해산물 때문이 아니라 굶주려서 질소 동위원소 수치가 높게 나왔던 것 같습니다.  연구진이 해골에서 밝혀낸 것은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시신들 중 1/4 정도는 티푸스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것이 이 병사들에게 티푸스를 옮겼을까요 ?

 

(2002년 리투아니아 빌니우스에서 발견된 프랑스 그랑다르메 병사들의 해골입니다.  이들이 고향을 떠날 때, 100년도 훨씬 뒤에 이런 몰골로 사람들에게 발견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

 



네만 강을 건너기 훨씬 전부터도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독일군이나 이탈리아군은 모두 자신들이 집결한 동부 폴란드와 동프로이센 지역의 색다른 환경에 상당히 놀라고 있었습니다.  다부(Davout)의 제1 군단 산하 제33 경보병 연대 소속의 앙리 에베르(Henri Pierre Everts) 소령은 네덜란드의 로테르담(Rotterdam) 출신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1807년 아일라우 전투나 프리들란트 전투에는 참전한 바가 없어서, 오데르(Oder) 강 동쪽으로는 1812년에야 처음으로 넘어가 보았습니다.  이 양반은 오데르 강 동쪽 폴란드 시골 마을을 처음 보고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난 놀라서 멈춰섰고, 한참 동안을 말 안장 위에 앉은 채로 이 마을을 살펴보았다.  처음 보는 형태의 비참한 나무 오두막들, 역시 목판으로 만든 작고 낮은 교회, 그런 것들 못지 않게 너저분한 모습인 주민들의 불결한 수염과 머리털... 그 중에서도 유태인들은 유별나게 혐오스러운 모습이었다."

원래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은 서부 유럽처럼 넉넉한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서부 유럽인들도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그다지 깨끗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런 서부 유럽인들이 보았을 때 오데르 강 동쪽 폴란드와 동프로이센 사람들은 너무나 지저분했습니다.   이렇게 지저분하면 반드시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벼룩과 이 같은 해충입니다.  DDT가 없던 시절 그런 해충들을 박멸한 뾰족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몸과 옷을 자주 씻고 세탁하는 것이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런 해충들은 옷 솔기 속에 숨어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뜨거운 다리미로 자주 다림질을 해주는 것이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

 

 

(BBC에서 TV 미니시리즈로 만든 숀 빈 주연의 Sharpe 시리즈입니다.  제 눈에는 아무리 봐도 저건 녹색이 아니라 감색인데, 왜 자꾸 소설 속에서는 green jacket이라고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Sharpe's Rifles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09년 1월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 지방) -------------

자원병들의 부인들이 갈색 셔츠들을 자르고 꿰매는 사이, 요새에 있던 루이자 파커는 영국군 라이플병들이 자신들의 녹색 자켓을 수선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  군복은 너덜너덜해지고 찢어지고 헤어져 너덜너덜해진데다 불에 그슬리기도 했지만 이 젊은 아가씨는 바느질 솜씨가 아주 비상했다.  그녀는 샤프의 녹색 자켓을 가져간지 하루 만에 거의 새것처럼 만들어왔다.  "다림질로 벌레까지 다 잡았다고요."  그녀는 신이 나서 말하며 칼라 부분의 솔기를 접어 보이며 정말로 이가 박멸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부러진 군도 조각을 다리미로 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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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도 종류가 많은데 몸니는 옷 솔기에 숨어서 거기에 알을 낳고 번식한다고 합니다.  머릿니는 사람 머리털에 알을 낳지요.)

 



하지만 보통 빈곤과 불결함은 항상 같이 다니는 법이라서 가난한 동네에 특히 벼룩과 이가 많았습니다.  이건 네만 강을 넘어서면서 더 심해졌습니다.  간간이 마주친 러시아 농민들과 그 오두막도 이 투성이었던 것입니다.  네만 강을 넘자 곧 이가 온 군대에 득실거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보급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보급이 충분했다면 굳이 지저분한 러시아 농민들과 접촉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정이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러시아 농민들을 붙잡고 먹을 것을 뒤져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러시아 이들은 프랑스인의 피와 독일인의 피를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출신의 야콥 발터(Jakb Walter) 일병의 수기에 따르면 병사들이나 장교들이나 몸에 이를 수천 마리씩 달고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는 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직접 옮지도 않았습니다.  병사들이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바닥에 까는 짚단 등을 통해서도 옮았습니다.  러시아 농민들도 그런 짚단을 깔고 잤을테니까요.  역시 러시아 원정군에 포함되어 있던 근위대 부사관 부르고뉴(Adrien Jean Baptiste François Bourgogne)의 회고록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중대원 중 하나가 잠자리를 만들라며 내게 짚단을 좀 가져다 주었다.  난 배낭을 베게 삼고 발을 모닥불 쪽으로 한 채 잠들었다.  한 시간 가량 잤을까 ?  난 온몸에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을 느끼고는 일어났다.  놀랍게도 내 몸 전체에 이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  난 벌떡 일어나 2분 안에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옷을 벗어버린 뒤 내 셔츠와 바지를 모닥불 속에 던져 넣었다.  벌레들은 불 속에서 마치 연속 사격과 같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터졌다."

이가 해로운 것은 단지 가려움을 일으키거나 피를 빨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티푸스(typhus)를 일으킵니다.  티푸스는 고열과 붉은 발진을 일으키는 열병으로서, 음식이나 물을 통해 전염되는 장티푸스(typhoid fever)와는 다른 병입니다만, 까딱 잘못하면 죽는 병이라는 점은 동일합니다.  장티푸스의 치사율은 10~20%인데 비해 티푸스는 10~40%이니 티푸스가 더 위험한 병이지요.  티푸스는 지금도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는 무서운 병입니다.  티푸스가 이에 의해 전염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가 사람의 피를 빨 때 옮는 것은 아닙니다.  엉뚱하게도 티푸스를 일으키는 미생물은 이의 입이 아니라 이의 배설물에 존재합니다.  이가 기생하는 사람의 옷과 피부에는 이의 배설물이 묻는 경우가 많을텐데, 가려움 때문에 사람이 피부를 긁을 때 이의 배설물이 피부에 파고들면서 티푸스가 옮는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나 벼룩 등이 질병을 퍼뜨린다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병사들은 러시아의 이 때문에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사태의 심각함을 잘 몰랐으나, 프랑스군의 군의관들은 점점 늘어나는 열병 환자의 수에 기겁을 했습니다.

 

(티푸스는 고열을 일으켜 사람을 혼수상태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 가장 큰 피해인데, 고열과 함께 이런 붉은 발진을 일으키는 것도 주요 증상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널리 퍼져있던 기생충이었습니다.  프랑스나 독일에는 이가 비교적 적은 편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벌레였고, 척탄병 쿠아녜의 수기에도 적혀 있기를 스페인만 하더라도 이가 득실거리는 곳이었습니다.  

"우리의 지정 휴식 장소에 도착한 뒤, 우리 부대 몇몇 병사들은 한 병에 3수(sous - 요즘 가치로는 3수면 대략 1800원) 하는 말라가(Malaga) 와인을 찾아냈다.  그들은 그걸 마치 우유라도 되는 것처럼 마셔댔고, 결국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졌다.  우리는 그들을 마치 송아지처럼 마차에 싣고 다녀야 했다.  1주일이 다 된 다음에도 그들에게 음식을 떠먹여줘야 했는데, 그들은 스푼으로 수프를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와인이 어찌나 독했는지 그들 중 누구도 배식 군량을 먹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마을인 비토리아(Vittoria)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부르고스(Burgos)에 간 뒤에, 또 거기서 다시 크고 멋진 도시인 바야돌리드(Valladolid)로 갔다.  우린 바야돌리드에서 해충에 둘러쌓인 채 꽤 오래 있었다.  병사들은 사실상 이 위에서 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짚단 속에 이가 득실거렸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면 손가락으로 잡아서 땅에 던지며 '널 만든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 피를 빨아라' 라고 말하는 것이 스페인 사람들의 풍습이었다.  정말 더러운 족속이다."

 

(영국 내전 당시 스코틀랜드 던바(Dunbar)에서의 호국경 크롬웰(Cromwell)의 모습입니다.  어떤 전쟁이든 총보다는 질병에 의한 희생자가 항상 더 많습니다.) 

 



왜 그런데 오직 1812년 러시아에서만 티푸스가 맹위를 떨쳤을까요 ?  실은 티푸스가 러시아에서만 날 뛴 것은 아니었고, 티푸스와 전쟁은 일반적으로 함께 다녔습니다.  17세기 초반 영국 의회와 왕당파 간의 내전 때도, 또 독일 30년 전쟁 때도 티푸스는 어김없이 발발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이는 세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전시에는 병사들이건 일반 농민들이건 평상시보다 목욕과 세탁을 더 못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이는 왕성하게 번식합니다.  두번째, 평상시에는 농민들이든 도시 거주민들이든 한 방에서 수십 명이 같은 짚더미 위에서 자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군대, 특히 야전 작전 중인 군대에서는 매일매일 그렇게 잡니다.  그렇게 밀집된 집단 생활에서는 이가 새로운 숙주를 찾는 것이 매우 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에 물린다고 누구나 다 티푸스에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은 마릿수의 이를 몸에 달고 다녀도 어떤 사람은 티푸스에 걸리고 어떤 사람은 멀쩡합니다.  개인차가 있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잘 먹고 잘 쉬어서 건강한 사람은 면역력도 좋아서 병에 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먹지도 잘 쉬지도 못하는 사람은 티푸스 뿐만 아니라 온갖 병에 쉽게 걸립니다.  특히, 잘 먹지도 못하는데다 오염된 물을 마시고 이질설사에 시달리는 병사라면 아주 쉽게 티푸스에 걸립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병사들의 처지가 딱 그랬습니다.  왜 러시아군에서는 티푸스가 발생하지 않았을까요 ?  발생했습니다.  러시아군에서도 수만 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그만큼 많이 죽었습니다.  프랑스군보다 사정이 좀 나았을 뿐이었지요.

 

(미니아르 도표의 원본 사본입니다.  컴퓨터도 없던 시절 저걸 다 손으로 그렸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

 

 


전에 소개해드린 미니아르의 도표를 보면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는 추위는 커녕 여름부터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계기 없이도, 네만 강을 건넌 순간부터 꾸준히 줄어들었습니다.  굶주림과 티푸스, 탈영 등으로 인해 그랑다르메는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러시아 땅에서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이걸 막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었을까요 ?  글쎄요, 수송용 헬리콥터로 PET병에 든 생수를 일선 전투 부대에게도 일인당 하루 4리터씩 공급해주는 현대의 미군이라면 가능할까, 당시의 기술로는 사실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러시아 원정은 그냥 시작을 안하는 것이 정답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1812년 봄, 나폴레옹은 물론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 끌려온 일반 졸병들도 자신들의 앞길에 어떤 난관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부름을 받고 네만 강 서쪽에 속속 모여들던 그랑다르메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  다음 편에서는 몇몇 사례를 통해 그 속사정을 살펴보시겠습니다.




Source : 
http://www.montana.edu/historybug/napoleon/typhus-russia.html
https://en.wikipedia.org/wiki/Typhus
https://www.warhistoryonline.com/napoleon/real-reason-napoleons-invasion-russia-failed-mm.html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www.smh.com.au/world/study-shows-napoleons-army-was-ravaged-by-lice-20060104-gdmq6c.html
https://www.spiegel.de/international/zeitgeist/crawling-death-how-lice-thwarted-napoleon-s-invasion-of-russia-a-638751.html
https://www.forbes.com/sites/kristinakillgrove/2015/07/25/skeletons-of-napoleons-soldiers-in-mass-grave-show-signs-of-starvation/#105e5b143743

https://www.healthlinkbc.ca/health-topics/tp12788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Memoirs of Sergeant Bourgogne, 1812-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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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내마음속댕댕이 2019.09.09 0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린 시절 본 위인전에선 나폴레옹이 실패한 이유는 병사들의 군복 주석단추가 겨울철에 얼어붙고 깨져 코트를 여미지 못해 얼어죽어서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현실은 그런 코믹한(?) 헤프닝과는 많이 떨어져있었나봅니다. 저런 끔찍한 환경으로 수십만을 밀어넣은 나폴레옹은 대단한 능력자인건지 터무늬없는 도박꾼인건지...

  3. 유애경 2019.09.09 09: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사들이나 장교들이나 이를 수천마리씩...
    그냥 과장된 표현을 한건지 아님 실제로 그랬다는건지, 어찌됐든 끔찍하네요!
    읽으면서 몸이 근질근질 해졌습니다.
    이런저런 악재속에서 참 고생했을 병사들이 가엾게 느껴집니다.

  4. 돌격대장 2019.09.09 0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퇴했을때 대치한
    러시아 프랑스 양군의 숫자가 얼추 둘다 4만정도
    됬다는 글을봤었는데,이글이 진짜면
    러시아군은 무었때문에 그리 녹은걸까요

  5. 까까님 2019.09.09 0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염병이야 전쟁터가 아니어도 유럽 도시에서는 일상 다반사였다고 알고있습니다만 특히 러시아전역에서 물 문제가 직간접적으로 매우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얘기였습니다
    전염병 문제의 이면에도 물 부족 사태가 깔려있었던 것이로군요
    혜안이 담긴 글에 다시 감사드립니다

  6. 웃자웃어 2019.09.09 1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은 유럽에서 좋은소리 듣기 힘든 사람이라고 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러시아로 끌고가 개죽음으로 몰아 넣었으니.

  7. 수비니우스 2019.09.09 12: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어렸을때 세계사 보면 러시아원정 패배는 추위때문! 이랬는데 이런 복잡한 이면이 있는것 보면 역사에도 정론은 없는것 같습니다.

  8. 강가딘 2019.09.09 15: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는데 전염병에 시달리기까지 했군요.

  9. 오렌지훈 2019.09.09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이면이군요
    잘 보고 갑니다^^
    좋은 한주 보내세요~

  10. 카를대공 2019.09.09 2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고고학적 조사를 보면 궁금한게,사람 뼈가 저렇게 오래 보존되는 특별한 조건이 있나요?

    나폴레옹 전쟁은 200년 전,중국에선 장평대전 유적(?)을 발굴한다는데 거긴 무려 기원전 발생한 사건입니다.

    공룡뼈를 보면 사람뼈도 비슷하게 가능하겠구나 싶긴한데 어떤 조건이 있어야 기원전 뼈가 보존이 되는건지......

    • reinhardt100 2019.09.10 1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토양 때문입니다.

      토양에 따라 공기 및 미생물, 수분 등이 침투할 수 있는 공간 정도가 차이 납니다. 조건이 잘 맞아 완전 밀봉 수준으로 유지되면 원형에 가깝게 보전되기도 합니다.

  11. 2/28일 입대 2019.09.09 2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우 간지럽고 찝찝해~~가 오늘의 감상입니다ㅎㅎ저 외에 풍토병도 있었을 것만 같은데 정말 highway to hell이네요

  12. Franken 2019.09.10 07: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 조금 살아보니 운칠기삼이란 말이 왜 생겼는지 이해되네요. 아무리 머릴 굴려도 인간두뇌의 한계상 파악 못하는 것들이 수두룩한데 그렇다 해서 일안할 수도 없고 하니 이런 건 운에 맡기고 추진해야 하니 말입니다.

  13. reinhardt100 2019.09.10 1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외출장 갔다와서 처음 보네요.

    러시아 원정 당시 티푸스 종류가 하필이면 전염력 및 치사율이 가장 큰 발진티푸스였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했죠. 네만 강 도하 시점부터 단 3주만에 13만 비전투손실이 발생했는데 가장 큰 원인이 바로 티푸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환경은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이 녹색사막이라고 부를 정도로 척박했죠. 물도 엉망이고 남아있는건 그저 넓은 지평선뿐이었으니까요. 거기에 45만 병력을 밀어넣어봤자 양동이에 물 한컵 붓는 수준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네만강에서 출발할수록 땅의 넓이는 커지기만 하면서 병력 밀집도는 얇아지고 보급은 급박해지기만 하는 말 그대로 최악의 전장 중 하나이니까요

  14. 루나미아 2019.09.10 19: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위생과 질병!
    진짜 고난이네요ㅠ

  15. starlight 2019.09.11 0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참혹해서 말을 잃게 됩니다.빌뉴스에서 발견된 나폴레옹 병사들의 주검은 다큐로도 제작되어 있죠. 이들은 철수하다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은걸로 아는데요. 보르디노 전투와 모스크바 점령. 아비규환이었던 베레지나 도하까지 겪어낸 병사들이었지만, 끝내 집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비참히 숨을 거둬 안타깝습니다.

  16. 키케로 2019.09.11 1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데르강 동쪽이 왜 이렇게 가난한 걸까요? 서유럽 보다 억압적인 농노와 사회구조 때문에 그럴까요? 나시카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 nasica 2019.09.11 23: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견이랄 것은 없고, 일단 잘 모르겠습니다. 제 얕은 지식으로는, 아무래도 유럽 문명의 발상지이자 이후 르네상스가 일어난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또 괜찮은 항구가 없어서 서부 유럽과의 교류가 부족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농업만 해도 기술 발전이 있어야 번영할 수 있습니다. 가령 17세기부터 영국은 농업 혁명을 거쳤는데, 여기에는 윤작이나 신형 쟁기 같은 기술적 발전도 큰 역할을 했고 자유 시장이나 엔클로저 활동 같은 사회제도의 변화도 큰 몫을 했습니다.

      제가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일 수도 있으나, 폴란드나 루마니아 등지의 동부 유럽에서는 서유럽과의 교류 부족으로 그런 발전이 전파되지 못한 것이 점차 경제적으로 뒤지기 시작한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17. Eugen 2019.09.11 1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이전 글에 그만 싸우겠다고 한 이후로 댓글을 단 적이 없는데 누가 제 닉네임으로 위장해서 댓글을 달았습니다. 댓글조작만큼 제가 싫어한 게 없는데 화나내요. 회원제 사이트가 아니라서 그런 듯해요.

    • Eugen 2019.09.11 1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타리무 이 사람이 제 닉네임을 위조해서 댓글조작을 하는 것같네요.

    • Eugen 2019.09.11 1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분명히 저는 정치병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앞서 썻다시피 세상을 보수진보가 아니라 기득권과 도전자로 보라했었죠. 그래서 이유없이 한 쪽으로 몰아가는 댓글은 댓글조작입니다.

    • Eugen 2019.09.11 13: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금까지 폰을 이용해서 댓글을 달았기 때문에 문단나누기가 잘 되있는 댓글은 조작된 겁니다.

    • Eugen 2019.09.11 15:09  댓글주소  수정/삭제

      Nasica님 블로그에 E****라는 닉네임으로 댓글을 달았는데 그만 싸우자고 쓰고 말 싸움을 끝냈습니다.

      그런데 알***로 추정되는 제 닉네임을 사칭한 ♪♫♩♫가 갑자기 전두환을 꺼내면서 댓글조작을 하더니

      제 논리와는 아주 상반된 논리로 댓글을 이어가면서 논쟁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제가 생활이 있는 사람이라 그만 한다면 진짜 그만하는 건데 진짜 화납니다. 그게 댓글조작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냐면 그 때 저는 폰으로 댓글을 달아서 문단나누기가 잘 안되있는데 댓글조작된 건 데스크톱에서 써서 그런지 잘 나뉘어져 있고 무엇보다 전 정치병자라 아니라서(세상을 보수 진보가 아니라 기득권과 도전자로 보라고 댓글을 썻 듯이)정치를 간접적으로 언급했는데(논쟁의 주제가 아니도록 씀) 갑자기 전두환 이야기가 나오면서 상대방을 아무 이유없이 몰아가는 댓글은 100% 댓글조작된 겁니다.

      지금은 대학도서관 데스크톱으로 썻는데 보다시피 데스크톱으로 쓰면 폰으로 쓰는 것보다 문단나누기가 쉬워서 티가 납니다. 이 블로그에서 보수 정치병자면 알타리무밖에 없는데 화나내요. 드루킹같은 짓거릴하면 좋나요?

  18. Eugen 2019.09.11 1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군진 모르겠지만 댓글조작하는 놈년 천벌 받아야 됩니다.

  19. 이타카 2019.09.13 0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대단한 나폴레옹 마저도 예측을 못한건가요..ㅜㅜ 하긴 사실 이만한 규모를 이끌고 러시아로 들어간 선례가 없어서 하다하다 이정도까지일꺼라고는 생각을 못했나봅니다ㅜㅜ
    근데 우크라이나쪽이 유명한 곡창 지대라고 알고있었는데 의외로 부유하다던가 인구밀도가 높지는 않았나보네요? 우크라이나 쪽에 들어가서 배후지로 삼고 모스크바를 도모할수는 없었던 걸까요?
    물론 속전속결의 나폴레옹 스타일과는 안맞겠습니다만..

  20. ㅇㅇ 2019.09.18 2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어... 이런상태로 모스크바 딴게 신기하네요

  21. ㄷㄷㄷ 2019.10.01 10: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끔 예전에 프랑스인의 키가 유럽기준 작은 이유로 여기서 나왔던 말이 생각나더군요. 중근세때만해도 삼총사 등장인물들 마냥 다른 유럽인 기준으로 충분히 거칠고 호전적이고 전사적인 프랑스인이 달달한 와인이나 빵이나 먹는 사람처럼 이미지가 바뀐것도. 하도 전쟁에 나갈만한 사람이 죄다 전쟁 끌려나가서 이른나이에 병마에 시달리다 죽거나 전사해버리니 유전자 풀에 변형이 왔다고.(물론 웃자고 하는 소리였겠지만 ㅋㅋ;)


1812년 러시아 원정에 나서던 당시의 나폴레옹은 당대의, 아니 그 이후의 누구보다도 당시 상황과 군사 전략 등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였습니다.  훗날 그가 러시아 원정 작전 중 저지른 실수와 오판 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왈가왈부 떠들지만 그 당시의 지식과 기술로는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이번에 다룰 문제도 정말 어쩔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흔히 나폴레옹이 보급 문제를 등한시해서 혹은 러시아의 추위를 대비하지 않아서 참패했다고 하지만 여태까지 보셨다시피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나폴레옹의 준비가 어느 정도로 철저했는가를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부교병 연대(régiment des Pontonniers)까지 철저히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러시아는 언듯 보면 광활한 초원으로 된 나라 같지만 주요 요리 중 하나가 생선일 정도로 여기저기 강과 시냇물이 가로세로로 엮여있는 곳입니다.  나폴레옹은 그런 점까지 고려하여 에블레(Jean-Baptiste Eblé) 장군 휘하에 부교병들로 구성된 연대 단위의 전문 부대까지 편성하여 신속한 전진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라인 강변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있는 국제 부교병 학교(Lycée international des Pontonniers)의 모습입니다.  에블레 장군의 부교병들도 원래는 여기에 주둔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명성을 빛내준 일화가 전진 때가 아니라 베레지나 강에서의 비참한 후퇴 때 이루어졌다는 것은 비극이었습니다만, 그들의 이야기는 발자크(Honoré de Balzac)의 소설 '시골 의사'(Le Médecin de campagne)를 통해 불멸의 것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저 학교가 진짜 고등학교로 사용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발자크의 '시골 의사'입니다.  저는 읽어보긴 했는데... 썩 재미있다고는 차마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그런 강과 냇물의 나라 러시아에서 마실 물이 없을 것이라고는 나폴레옹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네만 강을 건너 불과 4일 만에 아무 저항도 만나지 않고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나(Vilna, Wilna, 지금의 Vilnius)에 입성했지만, 그 사이에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가 물 부족으로 인해 겪은 고생과 그로 인한 피해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원래 병사 1인당 하루에 필요한 물은 대략 5리터가 좀 넘습니다.  요즘 큰 생수병이 2리터니까 2.5병 정도 되는 것이지요.  사막도 아닌데 1인당 5리터를 못 구하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1개 사단 약 8천명의 병사들만 생각해봐도, 4만 리터입니다.  대형 유조차가 실을 수 있는 물의 양이 대략 2만 리터니까, 하루에 이런 대형 유조차 2대 분량의 물을 1개 사단이 마셔야 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이건 요리에 필요한 물이나 세면, 세탁을 위한 물은 감안하지 않은, 마시는 물만 센 것입니다.  

 

(이 유조차가 2대 있어야 1개 보병 사단이 하루에 마실 물에 불과합니다.)

 



러시아 평원에서는 이 정도의 물을 매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는 눈에 보이는 곳마다 농장이 있었고, 농장에는 당연히 우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대평원에는 농장은 커녕 오두막조차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우물도 없습니다. 인구 밀도가 적은 지역을 행군하는 군대는 당연히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사막도 아닌데 물을 찾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어찌나 더웠는지 !  러시아는 추운 나라라는 말이 거짓말이었나 봅니다.  1812년 여름은 유난히 더웠습니다.  병사들은 사정없이 내리쬐는 태양, 그리고 메마른 길에서 수만의 병사들이 행군하며 일으키는 빽빽한 먼지 속에서 무자비한 갈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래도 당연히 러시아에도 농부들이 있었으므로, 숫자가 많지는 않더라도 우물이 여기저기에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물은 어디까지나 우물일 뿐 강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시골 마을의 손으로 판 우물이라면 크기가 꽤 큰 편이고 물이 꽤 그득히 들어있다고 하더라도 3천 리터 정도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1개 사단 병력이 수통을 채우기는 커녕 1인당 375ml, 즉 콜라 1캔 정도의 양만 마시면서 지나간다고 해도 물이 다 말라버릴 지경이었습니다.  우물이 있는데 물이 충분치 않은 경우가 많을까 싶습니다만, 꽤 많았습니다.  전에 소개드린 척탄병 쿠아녜(Coignet)의 회고록에도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1808년 스페인 마드리드 인근의 어떤 성에 배치된 쿠아녜의 근위대만 하더라도 그 성의 우물에서 하루에 퍼낼 수 있는 물의 양이 충분치가 않아서 물을 찾아 인근 지역을 헤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물을 찾아 나간 패거리들이 물은 찾지 못하고 포도주로 가득찬 가죽부대를 실은 노새 2백 마리를 찾아서 돌아오는 바람에, 그 다음날 아침 근위대는 포도주로 면도를 해야 했다고 합니다.

 

특히 같은 경로로 수만 명의 군대가 이동할 때는 더욱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러시아로 진입한 부대들 중 맨 앞 줄에 섰던 부대의 병사들은 제일 위험한 역할을 맡았다고 투덜댔을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이 가장 고생을 덜 했습니다.  뒤따라 오는 부대들은 먹을 것은 커녕 마실 물도 부족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목마른 병사들이 물을 충분히 마시고 수통도 채우려면 시냇물을 찾아야만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손으로 판 우물의 일반적인 구조입니다.)



문제가 더 심각해진 것은 당시 군인들의 수통 크기였습니다.  1808년 1월에 부르고스(Burgos)에 주둔한 7만의 프랑스군을 위한 보급품 목록을 보면 4만7천 켤레의 군화, 1만2천5백 개의 탄약통과 벨트, 그리고 6천 개의 남비 등이 있습니다.  거기에 재미있는 물건이 더해지는데, 1.5파인트짜리 수통(petit bidon) 3만 개와 큰 물통(bidon) 6천 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양은(주석과 구리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이 수통에는 식초를 탄 물을 넣게 되어 있었습니다.  1 파인트(pint)는 약 473ml니까 1.5 파인트면 요즘 생수 작은 것보다는 조금 더 큰 셈이지요.  이 정도 물로는 고된 행군을 하는 병사들의 갈증을 해소하기엔 턱이 없었고, 적어도 3시간 간격으로는 우물이든 개울물이 나와줘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소 건조한 지역인 스페인만 하더라도 항상 그러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스페인 주둔 프랑스군을 위한 보급품 중에 큰 물통 6천 개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보병 대대가 행군을 할 때, 그 뒤에는 탄약과 물통을 실은 마차나 노새가 따라다녀야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러시아의 극악한 도로 사정 때문에 물통을 실은 마차가 따라올 수가 없었습니다.  

 

러시아군도 동일한 지역에 있었으니 프랑스군과 동일하게 물 부족으로 고통받아야 했습니다만, 생각해보면 그래도 러시아군 사정은 프랑스군보다는 나았습니다.  일단 러시아군의 숫자가 프랑스군보다 훨씬 적었고, 또 러시아군은 이미 어디에 우물이 있고 어디에 개울이 있는지는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러시아군은 원래 방어가 아니라 공격을 염두에 두고 빌나 인근에 포진하고 있었던지라 물과 식량 등을 고려하여 여러 곳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으니 집단으로 신속히 이동하던 프랑스군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았습니다.

병사들도 물이 없어서 고생을 했지만, 병사들보다 훨씬 더 심하게 고생한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말이었습니다.  네만 강을 넘은 나폴레옹의 군대에겐 40만의 인간들 외에 약 15만 마리 이상의 말도 있었습니다.  인간 병사는 하루에 5리터의 물을 마셔야 한다지만 말은 30리터 넘게 마셔야 합니다.  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인간 병사들이 자신이 마실 물을 말에게 양보하겠습니까 ?  러시아 원정 초반에 목이 말라 고생한 병사는 많아도 그로 인해 죽은 병사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네만 강을 넘은지 불과 1주일 만에 3~4만 마리의 말이 죽었습니다.  이는 100% 물 부족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장 먹일 사료가 없어서 들판의 덜 익은 보리와 귀리를 먹고 배탈이 난 데다 물이 부족하여 쇠약해진 말들이, 빌나 인근에서 겪은 하룻밤 폭풍우에 떼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들이 죽어넘어지자 상황은 기하급수적으로 나빠졌습니다.  식량과 물을 실어나르려면 말이 꼭 필요했는데, 원정 초반에 이렇게 식량과 물 사정으로 인해 말들이 대량으로 죽어넘어지자 식량과 물 사정이 더욱 나빠진 것입니다.  



(사람만 목이 마른 것이 아닙니다.  말은 갈증에 더 취약합니다.) 



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따금 내리는 비는 그나마 병사들의 갈증을 풀어주었을 것 같은데, 사실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습니다.  비가 내리면 여기저기 물 웅덩이가 생겼는데, 목마른 병사들은 이런 웅덩이에 고인 물도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했습니다.  이런 물 웅덩이에는 죽은 사람이나 말의 시체가 들어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사실 그런 시체가 없었다고 해도 이런 물 웅덩이는 결코 깨끗한 물이 아니었습니다.  흙바닥에 고였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40만의 인간과 15만의 말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발생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분변입니다 !   말 1마리가 하루에 생산(?)하는 말똥과 오줌은 각각 약 16kg과 9.3 리터입니다.  인간의 배설물은... 지저분하니 그냥 넘어가시지요.  야전을 행군하는 군대가 뒷처리를 잘 하고 다닐 턱이 없습니다.  이들이 지나간 자리는 당연히 온갖 오염 물질이 잔뜩 쌓였고, 이런 오염 물질은 인근의 물 웅덩이는 물론 우물과 냇물까지도 오염시켰습니다.  이렇게 오염된 물을 마신 인간과 말은 쉽게 배탈을 일으켰고, 이는 곧 설사로 이어졌습니다.  설사를 일으킨 군대가 방출(?)하는 오염 물질은 다시 주변을 오염시켰습니다.  

당시엔 아직 콜레라가 유럽에 상륙하기 전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 만약 당시 콜레라도 있었다면 나폴레옹의 군대는 정말 삽시간에 녹아내렸을 것입니다.  19세기 초의 유럽인들은 아직 병이 세균에 의해 유발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전염병의 개념은 있었지만, 병을 전염시키는 것은 '나쁜 공기' 내지는 '나쁜 기운'이라는 뜻의 미아즈마(miasma)라는 존재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전염병이 물 속의 미생물에 의해 전염된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따라서 물을 끓여마시기만 해도 이질 설사는 물론 많은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긴, 그걸 알고 있었다고 해도 황량한 러시아 평원에서 행군으로 지치고 배고프고 목마른 병사들이 땔감을 구해다 가뜩이나 부족했던 물을 끓여마셨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건 현대적인 군대에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좀 적나라한 그림이긴 합니다만, 이건 "F-diagram"이라고 해서, feces(배설물), fingers(손가락), flies(파리), fields(밭), fluids(물), food(음식)의 오염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Fecal-oral 경로, 즉 인간 배설물이 결국 다시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의외로 많은 질병의 원인이고, 대표적인 것이 콜레라입니다.  21세기인 오늘날도 전세계적으로 보면 윗 그림의 내용이 통제가 안 되어 고통받는 인구가 상당합니다.  위생 화장실의 건설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물을 끓여마시기만 해도 문제의 상당 부분이 해결됩니다만, 그게 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콜레라는 원래 인도가 원산지인 질병인데 흔히 영국 선원들에 의해 유럽에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들 하지만 의외로 유럽에 전파된 것은 1817년 러시아를 통해서였습니다.  이후 빠른 속도로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 1846년~1860년 사이의 유럽 콜레라 대유행은 이미 3번째 대유행으로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그 와중인 1854년 존 스노우(John Snow, 왕좌의 게임에서의 존 스노우가 아닙니다)라는 런던 의사가 최초로 콜레라는 물에 의해 전염되며 이는 사람이 마시는 물이 환자의 분변 속에 존재하는 미생물로 인해 오염되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존 스노우는 콜레라가 발생한 런던 시내 가옥들의 위치를 통계학적으로 분석하여 그 중심에 어떤 우물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그 이론을 세웠습니다.  다만 그 이론을 화학 실험이나 현미경으로 그를 증명하지는 못했고, 그 때문인지 당시 대부분의 의사들과 학자들은 존 스노우의 발표를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질병이 미생물에 의해 전염된다는 것은 1860년대에 들어서야 파스퇴르의 연구에 의해 입증되었습니다.  윗 사진은 존 스노우입니다.)



(이 펌프가 존 스노우의 발견의 실마리가 된 우물의 펌프입니다.  존 스노우의 발견을 기념하여 아직도 보존되고 있다고 합니다.)



뭐 콜레라도 아직 없었던 시절이니 오염된 물을 마시고 기껏해야 이질 설사 정도에 걸리는 것이 전부라면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전에서의 이질 설사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유는 탈수로 인해 사람을 더욱 쇠약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쇠약해진 병사들은 예전 같으면 걸리지 않았을 병에도 쉽게 걸립니다.  그리고 러시아 땅에는 그런 쇠약해진 병사들을 노리는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그 존재들에 의해 그야말로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Source : 
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lifestyle/wellness/2003/04/08/in-iraq-a-mighty-thirst/0fb42cf3-a463-41d4-93da-7eff54db4c1d/
https://www.thespruce.com/how-big-is-olympic-size-pool-2737098
https://extension.psu.edu/how-much-drinking-water-does-your-horse-need
https://lpelc.org/stall-waste-production-and-management/
https://fr.wikipedia.org/wiki/Lyc%C3%A9e_international_des_Pontonniers
https://en.wikipedia.org/wiki/John_Snow
https://akvopedia.org/wiki/Traditional_hand-dug_wells
https://en.wikipedia.org/wiki/Well
http://www.montana.edu/historybug/napoleon/typhus-russia.html
https://en.wikipedia.org/wiki/1854_Broad_Street_cholera_outbreak
https://en.wikipedia.org/wiki/Germ_theory_of_disease
https://en.wikipedia.org/wiki/Typhus
https://www.warhistoryonline.com/napoleon/real-reason-napoleons-invasion-russia-failed-mm.html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www.smh.com.au/world/study-shows-napoleons-army-was-ravaged-by-lice-20060104-gdmq6c.html
https://www.spiegel.de/international/zeitgeist/crawling-death-how-lice-thwarted-napoleon-s-invasion-of-russia-a-638751.html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by Paul Lindsay Dawson

The Note-Books of Captain Coi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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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규규 2019.09.02 08: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감사합니다

  2. 이그리트 2019.09.02 09: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존스노우 유 노 낫씽

  3. reinhardt100 2019.09.02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럽 전체적으로 수질 문제가 심한 편이긴 합니다. 그나마 스칸디나비아 반도나 아이슬란드 정도가 덜한 편인데 라인강 이동 지역은 이서지역보다 더 심각합니다. 석회질 문제 때문인데 이 때문에 한국에 온 유럽 지질학자들이 충북과 강원도 일대 석회암 지대에서 한국인들이 우물물 그대로 먹는거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자기들 기준에서는 이건 그대로 병원행이니까요.

    독소전쟁 당시, 양군에서 겪은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식수문제였는데 양군의 비전투손실 중 절반 가까이가 수인성질병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무장친위대와 소련군은 정수설비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상황이 더욱 심각했고 약물에 의존한 치료가 남용되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야나기 작전 당시 독일이 일본에 가장 급히 요청했던 원조 중 하나가 이시이식 정수기 설계도 및 기자재였을 정도였습니다.

  4. 유애경 2019.09.02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물부족에 식량부족에 비위생적인 환경...읽기만 해도 뭔가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한 상황이네요!!

  5. 마마 2019.09.02 1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땅바닥에 고인 물까지 마셔야 했다니...

  6. 2019.09.02 1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Franken 2019.09.02 1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에 물문제는 전혀 생각지 못했군요. 사막도 아닌 땅에 식량도 아닌 물이 부족할 줄이야 뒷통수 제대로 맞은 느낌이네요.

  8. 하이텔슈리 2019.09.02 1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물 문제는 정말 생각 못했습니다. 오히려 대군을 동원한 게 역효과였던 거네요. 문득 물량전보다 정예병만 보내는 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 2/28일 입대 2019.09.02 2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고 다소 더럽게(?) 읽었습니다!ㅎㅎ감사합니다. 하루종일 행군하면서 수통이 500미리도 안된다니 진짜 끔찍하네요.

  10. 카를대공 2019.09.02 2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물 문제는 정말 상상을 못 했네요.

    말 1마리가 하루에 생산(?)하는 말똥과 오줌은 각각 약 16kg과 9.3 리터입니다. <- 여기서 나시카님이 물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얼마나 자료조사를 꼼꼼히 하셨는지 느껴졌습니다ㅎㅎ

  11. 빅터 2019.09.02 2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쉬운 일어없네요.. 보급장교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겠네요...

  12. 이정도면 2019.09.02 2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히려 모스크바까지 간게 놀라운 일이었네요.

    이번에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13. 제이슨 2019.09.04 23: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를 녹색의 사막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었군요.
    지금이야 패트병이 있어서 보관과 운송이 용이했지만, 옛날 나무로 만든 통은 자체로 무겁고, 조금만 충격을 주면 바로 물이새고
    그리고 의외로 물이 무겁지요.
    갈증에 의한 고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14. starlight 2019.09.05 0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사크 기병이 저글링처럼 덤벼들어 물고 할퀴고 낙오자들을 도륙하는 모습이 상상되네요.

  15. 구와아앍 2019.09.05 2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먹이 사람먹이도 환장하겠는데 물까지 모자란다니....이쯤되면 어떡게 모스크바까지 갈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네요

  16. nashorn 2019.09.06 0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장 큰 문제는 동유럽의 흔한 질병때문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t..

  17. Eugen 2019.09.06 0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2차대전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면 전혀 새로울 것 없는 현상이죠. 근본적으로 지리적 문제인데 대표적으론 모스크바로 갈 수록 전선이 길어져서 병력의 숫자가 조금이라도 모자라면 러시아의 우월한 인력동원력으로 넓게 퍼진 적군을 많은 수의 병력으로 포위섬멸해버릴 수 있죠. 그래서 히틀러도 패배한 거고요.

  18. 들꽃향기 2019.09.09 0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대장정 관한 책을 읽을 때 마지막으로 마오쩌둥의 군대를 괴롭힌 것은 사막도 아닌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대초원의 물과 식량의 부족이라고 읽었던게 인상깊었는데. 나폴레옹에게도 초원지대에서의 물이 그러했군요;;;;


오늘은 번외편으로,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 원인 중 하나로 '원인'님께서 작성해주신 아래 댓글과 함께 거기에 대한 제 짧은 의견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절대 '원인'님 생각이 틀렸고 제 생각이 맞다는 내용이 아니며, 그냥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점을 먼저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원인'님께서 작성해주신 글 중 핵심 부분은 아래 부분입니다.

다부의 작전은 발틱해의 해상운송을 통해서 리보니아에 거점을 만들고 그 리보니아로부터 상트뻬쩨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공격하는 것인데, 나폴레옹이 다부의 건의를 무시하고 바로 육로직공을 선택한 것이 러시아 원정의 패배원인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 대해 몇몇 분이 영국 해군은 그냥 보고만 있었겠느냐는 댓글을 다셨고, 거기에 대해 다시 '원인'님께서 달아주신 댓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리보니아 해상운송은 복잡한 발틱해 연안을 따라서 항해하는 것이지 넓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가 아닙니다. 그걸 먼저 염두에 두셔야죠. 연안항해를 함으로서 영국해군의 능숙한 기동능력이 상대적으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한적으로만 움직이는 게 전제조건입니다. 

또한 이 지역은 30년 전쟁때부터 이미 무수한 스웨덴 해군력의 침공으로 그 방비에 이골이 난 지역이고 해안지역에는 요새와 해안포로 무장한 도시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죠. 슈트랄준트 같은 것은 단지 그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환경에서 최대한 해안에 바짝 붙어서 요새와 해안포의 엄호를 받으면서 연안항해를 할 경우에 독일,폴란드 지역에서는 영국해군이라도 그렇게 쉽게 공격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문제가 되는 발틱해 동쪽의 리보니아쪽은 경제력이 약하고 해안 방비가 잘 안 된 지역이므로 이 쪽이 약점이긴 한데, 그래서 제가 썼듯이 해안항해 + 해안육로행군을 병행해야 할 겁니다. 아마도 리투아니아 가까운 지역부터는 육상보급의 비중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지만 러시아 내륙을 가르지르는 무모한 경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안전하죠.


여기에 대해서 저는 일단 다부가 해상 운송에 의존하여 리보니아(Livonia), 즉 지금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지역을 공격하고 거기로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하자는 의견을 냈다는 이야기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건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원인님께서 이 글을 보신다면 그런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는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혹시 다부가 그런 의견을 개진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저는 그것이 바다 경험이 없는 뭍사람인 다부가 뭘 잘 몰라서 내놓은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다부의 수륙 병진 작전 계획안을 거부한 것은 이집트에 직접 상륙해보고 또 영국 침공 작전을 끝까지 추진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 육상부대가 해안가를 따라 행군하고, 그와 발맞추어 연안에 바짝 붙어 항해하는 수송선단으로부터 보급을 받으면 보급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겠는가 ?

바다는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기 때문에 바람의 방향이나 파도의 세기가 제멋대로 변할 수 있으므로, 수송선단이 육상부대와 연락을 유지하며 병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2. 육상부대와 항상 병진하지 않는다고 해도, 중간중간 적절한 지점에서 랑데부하여 보급품을 하역받으면 되지 않겠는가 ?

접안 시설이 없는 해변이나 작은 어촌 등에 보급품을 내려놓는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말먹이를 빼고도 20만 대군은 하루에 200톤씩의 보급품이 필요했는데, 한번에 1주일치 씩만 보급을 받는다고 해도 1400톤의 물자를 론치(launch) 보트 등의 대형 보트를 이용해 하역해야 합니다.  론치 보트에 3톤의 짐을 실을 수 있다고 가정해도, 1400톤을 내려놓으려면 배와 해안 사이를 467회 왕복을 해야 했습니다.  20척의 수송선단에서 40척의 론치 보트를 이용해서 하역을 한다고 해도, 보트 1척당 12회 왕복해야 합니다.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수송선 선창에 들어있던 3톤의 짐을 보트에 내려놓고, 그걸 다시 해안까지 300~400m를 노를 저어간 뒤 다시 모래톱 해안에 내려놓으려면 2시간은 걸렸을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24시간 쉬지 않고 일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20척이라는 꽤 큼직한 선단이 하루 종일 정지 상태로 해안 근처에 닻을 내리고 있다면 영국 해군이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두었겠습니까 ?  더 큰 문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1200km가 넘는 항로에 걸쳐서, 이 짓거리를 7번 이상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수십 척으로 구성된 대형 선단 대신, 개별적으로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수송선을 하루에 2~3척씩 끊임없이 내보내면 영국 해군의 봉쇄망을 뚫을 수 있지 않겠는가 ?

영국 해군에는 74문짜리 전열함(ship of the line)이나 28문짜리 프리깃(frigate)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룹(sloop)함, 브릭(brig)함, 커터(cutter)함 등 다수의 소형 함선도 잔뜩 거드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형 함선의 주임무가 적국의 연안을 감시하면서 그런 화물선을 나포하는 일이었습니다.  단치히 항구에 프랑스군이 백여 척의 수송선을 모은다는 소식, 그리고 프랑스군이 해안선 쪽으로 집결한다는 소식은 반드시 간첩 등을 통해 영국 해군에게 알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경우 영국 해군은 당연히 단치히 항구 근처에 그런 소형 함선으로 레이드 파티를 짜놓고 군침을 흘리며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4.  해안가에 기마 포병대를 다수 포진시켜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수송선을 지원하게 하면 영국 해군 소형함 정도는 저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

기마 포병대가 수송선을 따라 해안선을 이동해가며 호위해주는 것은 애초에 도로 사정 때문에 불가능했습니다.  기마 포병대가 원활히 이동할 도로가 해안선을 따라 존재한다면, 애초에 굳이 수송선을 띄울 필요없이 그냥 그 도로를 따라 보병대와 치중대를 이동시키면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시 포병 기술로는 수백 m 떨어진 바다에 떠있는 소형 함선을 명중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고, 명중시킨다고 해도 당시 기마 포병대가 사용한 8파운드 포 정도로는 소형 함선조차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국 해군은 뛰어난 속도로 적함에 근접하여 대포를 쏘았기 때문에 적의 군함이나 수송선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지 원거리 포격으로 적의 항복을 받아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5. 어쨌거나 해안선 가까이에 바짝 붙어서 항해한다면 영국 해군을 겁낼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

 

(1807년 이후 본의 아니게 덴마크 해군의 주력함이 된 대포를 장착한 대형 보트, 즉 포함(gun boat)입니다.)

 

 


연안 항해를 한다고 해서 영국 해군으로부터 안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소위 '포함 전쟁'(Gunboat War)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은 1807년의 제2차 코펜하겐 전투 이후, 덴마크와 '포함 전쟁'을 계속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련의 소규모 해전은 1807년 영국에게 당한 이후 대형 함정을 모두 잃은 덴마크 해군이 탑승 인원수 70~80명 정도의 대형 포함(gunboat)를 대량으로 만들어 영국 해군 소속의 브릭(brig)함이나 커터(cutter)함 등 소형 함정들과 싸웠기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전투 중 일부는 거포로 중무장된 해안 요새의 사정거리 안쪽에서 벌어졌는데, 그런 와중에도 영국 해군은 꽤 짭짤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가령 스완(Swan)이라는 이름의 커터함은 원래 정규 영국 해군함정이 아니라 민간에서 임대한, 소위 HMH(His Majesty's Hired) 무장 커터함(armed cutter)이었습니다.  이 배는 12문의 4파운드 포와 2문의 9파운드 캐로네이드 포(carronade, 사정거리가 짧은 대구경 저압포)를 갖춘 배수향 약 130톤 가량의 소형함이었습니다.  스완 호는 1808년 5월 24일 덴마크 보른헬름(Bornholm) 섬 인근에서 덴마크 해군의 130톤짜리 커터 사략선 하벳(Habet) 호와 대결을 벌었는데, 이때 스완 호는 하벳 호 뿐만 아니라 보른헬름 섬의 해안포들로부터도 맹렬한 사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영국 해군의 일방적 승리였습니다.  하벳 호가 폭발과 함께 침몰한 것에 비해, 스완 호는 부상자 한 명 내지 않았습니다.  1809년 8월 12일에는 영국 해군 브릭함인 멍키(HMS Monkey) 호와 대형 론치 보트가 덴마크 무장 소형선박들 3척이 수심이 얕은 해안에 얼쩡거리는 것을 것을 습격했습니다.  덴마크 무장 선박들은 아예 배를 모래 해안에 좌초시키며 육지로 탈출했고, 영국 해군은 3척을 모두 나포했습니다.  

 

 

(물론 반대로 영국 브릭함이 다수의 덴마크 포함들에게 다구리(?)를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물론 위의 그림은 덴마크 측에서 그린 것이지요.)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Gunboat_War
https://en.wikipedia.org/wiki/Hired_armed_cutter_Swan#The_second_S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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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ㅇ 2019.08.15 0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럼 결국 모스크바로 직행한 것이 그나마 가장 가망이 있는 길이였기 때문이었다는 뜻인가요...?

    • 원인 2019.08.15 13: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모스크바 직행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시나리오 입니다.
      이 시나리오는 나폴레옹의 "빨리 성과를 보고 싶다."는 조급함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심사숙고해서 나온 거라고는 볼 수 없죠.

      첫째 보급문제 + 코사크 기병의 습격문제

      둘째로는 전쟁의 기본원칙인 원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싸운다에 위배되기 때문이죠.

  2. ㅇㅇㅇ 2019.08.15 09: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을 안하는게 가장 좋은 길이었겠지요. 비스마르크하고 빌헬름2세가 지금 독일에서 각각 어떤 대접을 받을까 생각해보면...

    • Spitfire 2019.08.15 1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러시아 침공을 안했으면 다시 대불동맹의 무한 반복이죠. 러시아가 떨어져나가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도 언제든 등돌릴 수 있는거고, 제국은 지속되는 전쟁으로 불안정이 계속되었을 겁니다. 황제 입장에서는 시범케이스로 러시아를 굴복시키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도 좋은 최선책이라 여겼다고 생각됩니다.

  3. nasica 2019.08.15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폴레옹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만은, 저 개인적으로는 그냥 러시아 원정을 안 떠나는 것이 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꼭 쳐들어가야만 했다면, 차라리 그냥 리가(Riga)와 레발(Revel, 오늘날의 탈린) 등의 항구도시들만 정복한 뒤에 장기적으로 눌러앉기를 시도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합니다.

    • 원인 2019.08.15 1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리가, 탈린에 눌러앉는 방법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여기가 개발된 곳이라고는 해도 경제력이 독일-폴란드처럼 풍족하진 않기 때문에, 눌러앉을 만큼 보장해 주진 않죠.

      그래서 독일-폴란드에서 해상보급을 해 줘야 오랜 시간동안 작전이 가능합니다. 만약에 해상보급이 안 되면 리보니아의 경제력 한도내에서 한 차례 정도만 작전을 수행해야 됩니다.
      즉 볼가강을 따라 모스크바까지 진격해서 짜르잡기를 시도하고 그 시도가 실패하면 리보니아는 재편성용으로만 쓰고 즉시 철수해야 되는 거죠.

      해상보급에 성공하면 다시 2차 3차로 짜르잡기를 시도할 수 있겠지만, 가능하다고 해도 시도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뭐냐면
      너무 오래 있으면 본국을 비운 사이에 반란이 일어나거나 대불동맹이 다시 발생하기 때문에 신속하게 돌아가는 게 맞죠.

    • nasica 2019.08.15 14: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인// 예,상책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만, 그래도 중책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요새화된 주요 항구 도시를 점령하면 비교적 소수 병력으로도 지킬 수 있을테니 최소한 영국과의 교역은 방해할 수 있을테니 차라리 리가와 레발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그러나 지킨다고 해도 해마다 봄이면 그거 탈환하려고 포위 공격하는 러시아군과의 소모전이 벌어질테니 그것도 결코 상책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결국 상책은 안 쳐들어가는 것이 역시...

  4. 빅터 2019.08.15 1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편적인 지식만 알고있는저는 참 궁금한게.
    러시아도 사람사는데고, 그래서 군대도 있는데 - 즉, 수비군이 있다면 그 수비군이 먹을게 있다는 소리이고,
    먹을게 없다면 수비군도 그만큼 많이 없을건데
    먹을건없지만 (수십만 대군이 필요할 만큼) 수비군이 있다라는 역사적 결론이 있어 신기합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과 싸우러 군대를 보낼 수 는 있지만 나폴레옹은 그 러시아군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보낼 수 없는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 원인 2019.08.15 1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물론 러시아군도 인간이라 먹지 못하면 아사하고 겨울에 동사도 합니다.

      문제는 2가지에서 옵니다.

      첫째는 러시아군은 퇴각중이라 보급선이 짧아집니다. 프랑스군이 보급선이 길어지는 것과 반대인 거죠.

      러시아군이 어려움을 겪지 않은 게 아닙니다.
      러시아군도 상황이 그렇게 좋은 게 아니었죠.

      1차대전 때에도 러시아군이 식량부족으로 애를 먹다가 결국 러시아혁명이 터진 게 식량생산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라 식량수송이 안 되어서 발생한 겁니다.
      여기는 굶주리고 있어도 어딘가는 식량이 풍족한 곳이 있게 마련인데, 이걸 빨리 연결하기란 어렵죠.
      기차가 발명된 1차대전때에도 이 지경인데, 나폴레옹 전쟁때는 보급로의 길이차이가 치명적입니다.


      둘째는 러시아는 단순히 농경민족만 다뤄 온 게 아니라 기마술에 뛰어난 유목민족도 다루어 온 노하우가 많기 때문에, 시베리아쪽으로 철수하더라도 그들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지만, 프랑스는 그런 게 전혀 없죠.

      실제로 러시아원정에서 나폴레옹을 실질적으로 격파한 건 러시아군이 아니라 코사크기병입니다. 코사크 기병 때문에 보급이 차단되고, 전초진지가 계속 습격당하고 정찰병이 계속 소모되면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워지고 , 철수중에도 재편성을 할 수가 없었고, 피해가 급격히 불어났죠.

      그래서 코사크 기병에 대한 대책이 최우선시 되어야 되는데, 모스크바 직공 시나리오 자체가 코사크 기병이 활동하기 가장 좋은 시나리오죠.

      만약에 이 시기가 폴란드가 좀 잘나가던 시기였다면 폴란드가 가진 코사크 지배력을 이용해서 포니아토프스키가 맹활약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때는 이미 우크라이나 전체가 러시아에 넘어간 시대라서 코사크는 일단 러시아의 전력이 된 상태죠.

    • nasica 2019.08.15 14: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인님 말씀처럼 자국 영토 안쪽으로 후퇴하는 군대의 유일한 장점이 보급선이 짧아진다는 것입니다.

      왜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쳐들어가는 것은 어려운데 러시아가 프랑스로 쳐들어가는 것은 쉬운가라는 점은, 2가지로 설명됩니다.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로 진격할 때처럼 인구가 밀집된 곡창지대로 진격할 때는 현지 보급(징발)이 쉽습니다. 또한 러시아가 프랑스로 쳐들어가는 것도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때도, 아일라우 전투 때도 러시아군은 중부 유럽으로 전진할 때 언제나 너무 느렸습니다. 결국 보급이 모든 군대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5. 원인 2019.08.15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부의 건의는 예전에 폴란드 역사학자와 이야기 할 때 들은 이야기 입니다.
    포니아토프스키의 기록에 아마 나와 있었던 듯 한데 다부가
    포니아토프스키와 친분이 있어서 최대한 폴란드와 밀착된 작전을 짜서
    포니아토프스키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쪽 헤게모니를 찾는 방향과
    러시아원정의 성공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방향을 찾았다고 하더군요.

    당시에 프랑스 원수들 중에서 폴란드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게 다부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징발도 다부가 지시하는 쪽이 폴란드인들도 거부감이 적었을 테고,
    우크라이나로 진격해서 우크라이나 코사크를 다시 폴란드 휘하로 가져오는 것보단
    훨씬 가능성 있는 제안이었을 듯 합니다.( 주민들의 심리적 저항의 강도가 다름 )
    다부는 다부대로 자기 나와바리(?)였던 독일-폴란드를 최대한 이용하고 싶었을 것이고
    이게 포니아토프스키의 자기 계산과 맞은 거죠.

    그리고 "병진"의 의미를 잘 이해를 못 하고 제 의견을 왜곡시키는 듯 한데..
    병진이란 나란히 같이 동기화 된 상태로 진격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육운은 육운대로 하고 해운은 해운대로 비동기화된 상태로 이동하는 거죠.
    해운이 실패하면 육운으로 하고 해운이 성공하면 해운으로 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놓은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리투아니아부터는 아무래도 육운의 비중이 커질 거라고 했는데,
    이 말은 리투아니아 근처에서 죄다 육운으로 바꾼다는 이야기가 아니죠.
    육운으로 가야 될 상황이 아무래도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이야기구요.
    실제로 어떤 상황이 발생할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리고 영국해군이라고 해서 항상 나포작전에 우세하다?
    이것도 지휘관이 누구냐에 따라서 변수는 항상 달라집니다.
    넬슨 이외의 다른 사람이 아부키르만에서 똑같이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죠.


    뭐 백번양보해서 영국해군 지휘관이 죄다 우수하다 해도 그 전제는
    이 시나리오에서 치명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왜냐면 리보니아 시나리오에서 해운이 치명적으로 필수 불가격한 요소는 아니기 때문이죠.
    물론 해운이 있어야 비교할 수 없이 편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없어도 아예 안 되는 문제는 아니죠.
    그 대신에 병력수를 더 줄이고 작전가능한 시기가 줄어드니까 매우 불리하기는 합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수로보급은 리보니아-발틱볼가운하-볼가강 경로를 말하는 겁니다.
    독일-폴란드-리보니아 경로도 물론 아주 필요하긴 하지만 없다고 해서 원정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죠. 대신에 한 번 원정으로 끝내고 철수해야 할 겁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해상보급인데, 영국해군이라는 변수가 반드시 치명타를 가할 지 아닐지는 실제 상황에 닥쳐 봐야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해안을 따라 육운에 대해서도 이해를 잘 못하신 듯 한데,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이유는 포병대로 수송선을 엄호하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이유는 마차보급의 최대적인 경기병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기병의 전투력은 돌격할 때의 속도에서 나오고 최대한 습지를 따라 이동해야
    경기병이 속도를 내지 못하도록 제한된 환경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마차도 습지에서는 애를 먹지만 그 대신에 속도를 크게 낼 수 없는 경기병들을
    마차 호위병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저격할 수가 있죠.

    키르홀름 전투에서도 스웨덴군이 습지를 따라 이동중에는 폴란드군이 공격하지 않았죠
    물론 이 경우는 대규모 전투기동인 경우지만, 불과 해안에서 조금만 떨어진 곳으로
    유인된 그 순간에 스웨덴군이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 걸 생각해 보면
    습지의 상태와 기병의 속도간에 상관관계가 얼마나 강한 지를 알 수 있죠.

    중요한 것은 리보니아 그 자체이지, 해운으로 연결하는 것 자체도 부차적이고
    해운실패시에 육운으로 연결하는 것조차도 사실은 부차적입니다.
    리보니아 현지보급까지 다 생각한 이후의 작전이죠.

    그래서 리보니아 일시부양 경제력에 맞게 다부가 생각했던 병력수인 20만 정도로 줄여야
    되는데, 러시아의 총병력이 많으니까 프랑스도 그에 맞게 45만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은 틀린말입니다. 이건 나시카 님이 언급한 대로 정치적인 의도가 들어간 숫자이고
    (이른바 위세보여주기) 애초에 모스크바 진공이라는 시나리오 자체의 한계때문에
    발생한 숫자이지, 시나리오 자체를 바꾸면 필요없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로 진격한 것이 패착인 이유의 핵심은 전쟁의 기본원칙에
    위배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기본원칙 =>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적을 상대한다.
    병자호란때 조선이 털린 것도 바로 이 이유때문이죠.
    남한산성이라는 조선이 원치 않는 장소로 갔기 때문에 근왕병들이 국왕을 구조하기 위해
    서둘러야 했고, 근왕병들 역시 원치 않는 시간 장소에서 격파당했죠.
    물론 금화전투처럼 끈기있게 원하는 시간, 장소를 선점한 경우에는 승리했죠.

    러시아 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스크바로 진격하면 짜르는 당연히 시베리아쪽으로
    철수할 것이고 그 상황에서 원하는 시간과 장소를 소유한 건 짜르 쪽이죠
    짜르가 시베리아로 철수할 경우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시나리오가 애초에 성립한 겁니다

    반면에 리보니아로 진격하면 안전한 근거지를 배후에 두고 뻬쩨르부르크를 공략할 수
    있는데, 뻬쩨르부르크가 러시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해도 여기는 수도이고
    러시아군이 어떻게든 그냥 멀뚱히 보고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처럼 침공군쪽이 방어포지션을 갖고 침공당한 쪽의 공세를 앉아서
    적은 병력으로 효율적으로 요격할 수 있는 위치가 되어 모스크바 때와는 상황이 달라지죠.

    괜히 쓸데없이 병력이 많아 봐야 오히려 나폴레옹의 작전술은 무뎌집니다.
    적은 병력으로 원하는 시나리오에서 적을 요격했던 6일전투를 보면 알 수 있죠.

    모스크바 시나리오에서 조차도 보로디노 전투를 피할 수가 없었는데, 리보니아 시나리오
    에서는 당연히 그에 준하거나 이상의 회전으로 붙을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 경우에는 전장을 프랑스쪽에서 고를 수 있기 때문에 보로디노처럼 무승부에 가까운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만약에 실패할 경우에는 리보니아로 돌아가서 재편성한 뒤에 철수하면 그만입니다.
    짜르를 잡지 못해도 대육군이 살아있으면 "다음 차례의 대불동맹"이 오판한 사이에
    다시 한번 나폴레옹의 작전술로 격파하면 되는 수순이니까요.

    나폴레옹 전쟁을 대국적으로 보면 대영제국의 경제포위망 때문에 질 수 밖에 없었다.
    ==> 남이 해 놓은 걸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건 쉽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뭘까요? 결국 적극적으로 세상의 이치를 알아서
    내가 발전하기 위함이죠. 숙명론적인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숙명론을 넘은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 nasica 2019.08.15 14: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원인님 의견의 원래 뜻을 곡해했다면 사과드립니다.

      그와는 무관하게, 해안을 따라 진격하는 이유가 적의 경기병 습격으로부터 치중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저로서는 고개를 좀 갸우뚱거리게 하네요. 진격할 때 보급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도로 사정 그 자체 때문이지 적의 경기병 때문은 아니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 콩콩이 2019.08.15 15:54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뭘까요? 결국 적극적으로 세상의 이치를 알아서
      내가 발전하기 위함이죠. 숙명론적인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숙명론을 넘은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물론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진짜 싸나이라면, 본인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고, 더 나아가서 '적당한 타협책'도 과감히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차라리 누르하치가 그랬듯 때를 기다려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 '때'가 영영 오지 않더라도 러시아 원정보다 손실은 덜하지 않겠습니까. 꼭 완벽한 승리, 완벽한 유럽 제패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그냥 좀 어중간한 승리나 적당한 성과에 만족하는 것도 사람 사는 방법입니다.

      사실 근본적으로, 말씀해 주신 모든 방안은 '전술적'인 측면이 짙습니다. 그런데 전략 단위의 불리함을 전술 단위에서 극복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카지노의 도박사라면 결코 선택하지 않을 길입니다. 하물며 나폴레옹은 '다수로 소수를 치기 위한 작전술과 전략'에 뛰어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대불동맹전쟁의 무한반복을 수용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프랑스 제국의 영토를 방어하는 수준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또 나폴레옹의 몰락에서 드러나듯, 이빨이 반쯤 꺾인 상황인데도 동맹군은 평화 협정을 제안했습니다. 단지 프랑스 영토의 원상복귀를 나폴레옹이 거부했을 뿐이지요. 결코 동맹군도 전쟁을 좋아한 것이 아닙니다.

  6. 진충보국 2019.08.16 0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개인적으로는 해상보급안은 좋은것 같습니다, 예전에 화물 혹은 보급품의 적화 및 양하는 선박이 묘박하고 부선을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보급품의 적양하에 시간과 노력이 상당했습니다, 하지만 해상운송의 기본은 대량의 화물을 저렴한 비용으로 한번에 수송이 가능합니다, 또한 하역시설이 완비된 항구의 안벽이나 부두에 선박이 접안한다면 하역 작업은 더욱 신속하게 이뤄집니다 이러한 거점 항구의 확보와 물자집적소, 보급창들의 적극적 운용으로 육군의 진군에 맞는 보급 수송선대의 운용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됩니다 하지만 정책이나 전략이든 결정권자의 의견이 젤 중요합니다 나팔륜의 경우 오로지 육전 지휘관이고 또 아부키르, 트라팔가등의 해전에서 박살난 경험이 있기에 해상 병진은 처음부터 채택되는것이 어렵지 않았나 추측 합니다 첨언하면 이러한 작전수행과 보급, 전략차원에서 국가자원의 운송을 신속하고 숙련되게 하기 위하여 국적상선대를 보유해야하고 자국 선원들을 유지해야 된다고 할 것입니다, 영국의 경우 아직도 자국 상선대를 Merchant Navy라고 부르고, 전통적인 해운/해군강국들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해군예비원제도를 운영하는 이유이기도 할것입니다.

  7. 흠흠흠 2019.08.16 0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00만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과,
    5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말고 그냥 스페인으로 진격해서,
    스페인 잔당과 웰링턴 아주 요절을 내버리고,
    반항은 꿈도 못 꿀 만큼 완전히 장악한 다음,
    적당히 영국과 휴전하면 되는 거 아닐까요?
    아일라우, 하일스베르크, 아슬린 아스페른, 바그람, 보로디노...
    사람들이 하도 대포알에 요절나다 보니 글만 읽어도,
    나폴레옹 뭐 하는 인간인가 싶네요.

    • 0_- 2019.08.16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냥 유럽이라는 체스판에 놓인 기물 1, 2, ... , N 정도 아니었을까요?
      거대 군사쿠데타 CEO가 창립 멤버도 아닌 임원이 모가지가 날아가건 말건 신경을 쓰겠습니까? 그나마 다리를 자르니 죽으니 할때 울었다는 장란 정도 되어야 사람대 사람이었겠죠...

  8. 바다에산다 2019.08.16 1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번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가장 좋은 대안은 전쟁을 안 하는 거였다는 말에 백번 공감합니다.

  9. starlight 2019.08.16 14: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든 경우의 수를 산정하며 여러 가정을 해볼수 있고 각각의 경우가 타당성과 가능성. 논리적으로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나폴레옹의 강점은 신속한 기동.개별 기동후 결정타를 날릴 대회전에서 한번에 제때 집결해 전력 극대화. 현지 보급을 통한 작전의 수월성. 황제가 직접 원정을 함께하는 무형의 사기 진작. 빠른 의사결정. 전략 거점을 정복해 대외에 성공을 과시하는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 모든 요인들이 한계 효용에 다다른게 러시아 원정의 패착이었다 봅니다. 차라리 스몰렌스크 정도까지 영토 확장을 해놓고 상당한 병력을 폴란드에서 차출해 명분과 실리를 쌓고 보급도 충당했다면 어땠을까요? 나폴레옹은 항상 전쟁을 조속히 끝내려는 조급함과 조바심이 보이는데, 러시아만큼은 장기전을 도모해봤다면 권좌를 잃는 비극은 막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해로를 통한 보급은 저는 사실 상상도 못했네요.이래서 사람은 견문을 넓혀야하나 봅니다.

  10. 포세이돈 2019.08.16 2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상보급이 당대 기술력으론 제일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그러기엔 두 가지 조건이 미비하지않나요?
    첫번째는 나폴레옹의 해상보급에 대한 신뢰
    둘째는 발트해 제해권이요.
    나폴레옹 일생의 프로젝트인데 해상보급은 트라팔가르 해전 악몽이 있는 나폴레옹으로서는 쓰기 두려운 카드였을거고, 해상보급을 1이라도 생각했다면 나폴레옹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스웨덴을 포섭했어야합니다. 그러나 나시카님 지난번 글을 되짚어보면 프랑스는 스웨덴 포섭에 실패했죠. 베르나도트 에게 자기 약점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을겁니다.

  11. k886860 2019.08.17 1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지하게 책을 출판하셔야 될것 같은데요... 지금까지 쓰신글 묶으면 분량이 충분히 될듯... 저는 그중에서도 장 란 원수의 일대기가 정말 감명깊었습니다.

  12. 샤르빌 2019.08.18 0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웨덴이 동맹군 편에 붙어버린 것도 좀 곤란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또 결과를 놓고보는 웹상에서야 다들 내가 나폴레옹이고 제갈공명이라 이런저런 훈수를 두지만 뭐 원균급의 인물이라면 몰라도 누가 되었든 당시의 지도자들 보다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적은 없습니다 달리 '역사에 만약은 없다' 라는 말이 있는게 아니니까용


나폴레옹의 기존 작전들의 특징을 동물에 비유하자면 딱 생각나는 것이 바로 문어입니다.  그는 휘하 군단들을 문어발처럼 넓게 펼친채 전진하다가, 적 주력부대의 존재가 그 촉수 중 하나에 걸려들면 정말 먹잇감을 건드린 문어처럼 다른 촉수들이 벼락같이 그 방향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니 뭔가 멋있어 보이지만, 이런 작전 형태에는 본질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분산된 채 전진하다가 강력한 적을 만날 경우 각개격파 당하기 딱 좋았던 것입니다.  이런 작전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넓게 펼쳐진 촉수들이 정말 재빨리 움츠러들 수 있어야 했습니다.  즉, 각 군단들의 기동력이 매우 좋아야 했지요.  원래 나폴레옹 군단들의 행군 속도는 유럽 최고 수준이었습니다만, 그런 그들에게도 이런 작전은 힘에 겨운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나폴레옹이 대승을 거둔 아우스테를리츠나 예나 등의 전투에서도 주요 부대들이 밤새 행군하여 전투 시작 직전에야 전투 현장에 간신히 도착하는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나폴레옹이 그런 약점을 무릅쓰면서 촉수를 펼친 문어처럼 휘하 병력을 넓게 전개한 채 전진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정찰기가 없는 시대에는 적 주력 부대의 위치를 포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았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식량이었습니다.  나폴레옹처럼 식량을 현지조달에 의존하는 것도 아무나 쉽게 흉내낼 수 있는 전법이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주로 활약했던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비교적 농업 생산성이 좋은 동네라서 식량이 풍부했다고 해도, 10만 대군이 한꺼번에 밀려들면 어지간한 동네는 식량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바로 전날 우디노의 군단이 한 동네의 빵과 밀가루를 탈탈 털어먹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빅토르의 군단이 또 밀어닥쳐서 먹을 것이 없나 뒤진다면, 그건 단순히 그 동네 주민들만의 분노로 끝나지 않고 빅토르 군단의 굶주림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각 부대가 거쳐가는 주요 마을과 도시로부터 비교적 손쉽게 식량을 얻을 수 있도록 군단별로 세심하게 진격로를 설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1812년 여름, 러시아 침공에 나선 나폴레옹의 군단들은 예전과는 달리 상당히 뭉쳐진 모습으로 같은 길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대부분의 주요 군단들은 나폴레옹과 함께 중앙군을 형성한 채 무리를 지어 진격했습니다.  그 외에는 단일 군단으로는 가장 컸던 다부(Davout)의 제1 군단 약 7만2천과,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Jérôme)이 이끈 베스트팔렌, 폴란드, 작센 출신의 병사들로 이루어진 4개 보조 군단 총 7만9천이 서로 다른 길로 남쪽 민스크(Minsk)를 향했습니다.  그나마 이들도 결국은 스몰렌스크(Smolensk)부터는 나폴레옹의 중앙군과 합류하게 됩니다.  그 외에는 주로 프로이센 및 바이에른 병사들로 이루어진 막도날(Macdonald)의 제10 군단 3만2천이 좌측 날개를 맡았고,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3만 정도가 우측 날개를 맡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전과 달리 이렇게 밀집된 형태로 행군하게 된 것은 크게 2가지 이유였습니다.  하나는 상대해야 할 적의 주력이 바클레이 드 톨리(Barclay de Tolly)의 제1 서부군과 바그라티온(Bagration)의 제2 서부군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이미 나폴레옹이 파악하고 있던 대로, 어차피 러시아 평원에서는 아무 식량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에 따라 나폴레옹은 병사들이 먹을 식량을 모두 독일과 폴란드에서 마차로 실어올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정말 유명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 궤멸 과정을 시각화시킨 미니아르의 도표 원본입니다.  이 도표는 1896년에 처음 나온 것이지요.  미니아르는 프랑스의 토목 기사로서 현대적인 인포그래픽스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기에 쓰인 프랑스어를 번역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812~1813년의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군 병력의 연속적인 손실에 대한 산술적 지도
1869년 11월 20일, 파리, 교량 및 도로 감사관(은퇴)인 M. 미니아르(M. Miniard)가 작성.

병력 수는 색칠된 구역선의 폭, 즉 10만명당 1mm로 표시했으며, 구역선 가로질러서도 명기했다.  붉은 색은 러시아에 진입한 병력 수를 뜻하고 검은 색은 빠져나온 수를 뜻한다.  이 지도를 그리는데 사용된 정보는 M. M. Thiers, de Ségur, de Fezensac, de Chambray 및 10월 28일부터 프랑스군 약제사로 일한 야콥(Jacob)의 미출간 일지 등에서 얻었다.   원정군의 궤멸 과정을 눈으로 좀더 잘 파악하기 위해, 제롬(Jérôme) 대공과 다부(Davout) 원수의 병력은 실제로는 민스크(Minsk)와 모길레프(Mogilev)에서 갈라졌다가 오르샤(Orsha)와 비텝스크(Vitebsk) 인근에서 재합류했지만, 항상 주력 부대와 함께 행군한 것으로 가정했다.)

 

(위 지도는 미니아르의 도표와 실제 지도를 합성한 것입니다.  미니아르의 도표도 실제 나폴레옹 원정군의 위도 경도를 반영하여 만든 것이므로 잘 들어맞는 편입니다.) 

 




그러나 이미 전편에서 설명드렸다시피, 나폴레옹의 수송 계획은 기술의 한계와 열악한 도로 사정 때문에 처음부터 빗나갈 운명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수송 엔진은 말이었으므로 그 연료는 사료였는데, 나폴레옹은 도저히 계산이 나오지 않는 말 사료 문제에 대해서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도 러시아의 겨울이 무섭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겨울이 오기 전에 여유있게 작전을 하려면 봄부터 러시아 침공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6월 하순까지 기다렸던 것은 사람이 먹을 곡물 뿐만 아니라 말이 뜯어먹을 풀이 무성하게 자라기를 기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콩이나 곡물도 아니고 그냥 풀이라면 말은 깜짝 놀랄 만큼의 양을 뜯어먹어야 했습니다.  프랑스군 부대가 지나간 자리는 정말 메뚜기떼가 지나간 흔적처럼, 사람이 먹을 것은 물론 말이 먹을 풀도 금세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던 후속 프랑스군의 사람과 말은 정말 그냥 굶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나폴레옹이 예전처럼 병력의 진격로를 좀더 넓게 분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쟎아도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치중부대에 의한 보급이 어려웠는데, 그렇게 병력을 분산시키면 보급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 뻔했습니다.  게다가 집결된 적의 주력 야전군을 바싹 추격하는 마당에 병력을 분산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실패했던 러시아 정복을 너무나 간단히 해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투가 이끈 몽골군이었지요.  믿을 만한 상세한 기록은 부족하지만 당시 몽골군은 대략 4~5만의 순수 기병으로 러시아 전역을 평정했습니다.  이들은 나폴레옹처럼 마차를 주요 운송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고, 식량은 함께 몰고다니는 가축에 의존했습니다.  원정군 전원이 유목민 출신 기병이다보니 넓은 지역에 걸쳐 가축들과 말에게 풀을 뜯게 하면서 장기간 작전을 펼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건 나폴레옹이 흉내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흉내낼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했습니다.  바로 소수 정예로 러시아 원정길에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몽골군이 무서운 이유는 그 활이 강력함보다도 기동력과 보급에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군대가 저런 활동량을 따라할 수 있겠습니까 ?)

 



만약 나폴레옹이 병력의 수를 확 줄여서 러시아 침공을 개시했다면 어땠을까요 ?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는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이후 유럽 최강의 무적 군대로 이름을 날렸지만 어쩔 수 없이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조금씩 질적으로 하향되어갔습니다.  특히 1807년 2월 아일라우 전투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낸 이후로는 그 질적 하향세가 매우 뚜렸했습니다.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는 패배한 오스트리아군 못지 않게 프랑스군의 피해도 엄청나게 컸는데 이것은 오스트리아군의 질적 향상 외에 프랑스군의 질적 저하도 원인이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받고 휘하 병력의 대부분이 어린 신병으로 이루어져 있던 부대 전체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자 분개한 마세나가 '저 풋내기들에게 브랜디를 잔뜩 마시게 하고 군기를 보여줘라' 라고 외친 것은 유명한 일입니다.  겁에 질렸던 신병들이 마세나의 그런 지휘에 결국 혼란을 수습하고 오스트리아군에게 반격을 가해 결국 승리한 것도 정말 대단한 일이었지요.  

이제 40만이 넘는 대군이 된 러시아 침공군은 과연 어떤 병사들로 이루어졌을까요 ?  상당수는 다년간의 경험을 쌓은 노련한 병사들이었지만, 이렇게 많은 대군을 끌어모으다보니 아무래도 신병들의 비율도 매우 높았습니다.  게다가 프랑스 내의 인적 자원도 많이 고갈되어, 키나 건강 상태, 나이 등에서 1805년이라면 탈락시켰을 젊은이들까지도 마구 입대시켜 충당한 신병들에 대해 많은 지휘관들이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무엇보다 이 40만 대군 중에는 많은 수의 외국인들이 섞여 있었는데, 이 중에는 폴란드인처럼 나폴레옹에게 충성하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프로이센인들처럼 죽지 못해 끌려나온 병사들도 많았습니다.  같은 이탈리아인들 중에서도 북부인 이탈리아 왕국 병사들은 상당히 우수한 자원으로 평가받았지만 뮈라의 신민들인 나폴리인들은 프랑스 지휘관들으로부터 '애초에 군인으로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라는 악평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먹을 것과 마실 것만 축낼 뿐 실제 전투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병력은 제외시키고 알짜배기 정예병력만 투입했다면 보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안될 일이었습니다.  일단 바투가 상대해야 했던 러시아는 그야말로 동구의 후진국으로서 인구 8~9백만에 무장 병력도 5만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알고보면 바투도 소수 정예로 다수의 러시아군을 무찌른 것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의 러시아는 인구 4천만이 넘고 20만이 넘는 야전군을 거느린 강대국이었습니다.  바투의 몽골군은 전원이 경기병이라는 특색이라도 있었지만,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는 남들 다 쓰는 머스켓 소총과 그리보발식 야포를 사용하는 평범한 군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총검의 숫자가 승패를 판가름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과거에 거두었던 승리는 거의 언제나 전투 현장에 더 많은 병력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 기기묘묘한 전법을 사용하는 소수 정예로 얻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소수 정예에 의한 결전은 나폴레옹의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폴레옹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러시아의 기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애초에 러시아와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처럼 광활한 영토를 가진 나라는 정복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그런 황량한 나라를 정복해봐야 딱히 얻을 것도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로부터 원하는 것은 딱 하나, 대륙 봉쇄령에 다시 참여하여 영국 상품에 대해 문을 닫아걸라는 것이었지요.  그런 목적을 위해서는 굳이 모스크바를 점령할 필요도 없었고 러시아 야전군과 피투성이 살육전을 벌여 쌍방간에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낼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냥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에게 겁을 먹고 협상을 하도록 강요만 하면 되는 것이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러시아가 상황을 오판하지 않도록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을 한꺼번에 동원하여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훈련이 얼마나 되어있건 충성심이 있건 없건 동원가능한 병력은 다 동원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4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한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그런 대군을 먹여살리기에는 자신의 보급망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원정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개전 이후 3주 안에 러시아군을 크게 꺾어놓고 평화 협상을 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원정군에게는 24일치의 식량을 지급하여 3일치는 병사들이 몸에 지니고 나머지 21일치는 마차에 싣고 가도록 하되, 네만 강을 건너기 전에는 절대 그 식량을 먹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와 러시아인들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병참 준비에는 그 중요성에 비해 너무나 완전히 배제되어 있던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됩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pdfs.semanticscholar.org/1d6e/96fd09126a40dca06ef01e8c9b13785e8379.pdf
https://warandsecurity.com/2013/02/11/why-napoleons-1812-russian-campaign-failed/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invasion_of_Russia
https://www.stolenhistory.org/threads/1812-french-invasion-of-russia-vs-logistics.1167/
https://www.bbc.co.uk/news/magazine-16929522
http://www.historyofwar.org/Maps/maps_russia_1812_to_moscow.html
https://www.reddit.com/r/dataisbeautiful/comments/26jy3t/a_rework_of_minards_map_the_first_data/
https://www.awesomestories.com/asset/view/A-Map-of-the-Great-Retreat-from-Russia//1
http://www.historyhome.co.uk/c-eight/france/moscow.htm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Joseph_Minard
https://patrimoine.enpc.fr/document/ENPC01_Fol_10975?image=54#bibnum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Paul Lindsay Daw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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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유민주주의 2019.08.12 06: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 공산주의적 계획경제를 미화한 사회적 경제를 구현하겠답시고 눈감아도 눈꺼풀 위를 뚫고 들어오는 태양빛같은 시장의 완벽함을 무시한채 국가주도로 뭐든 추친하는 선단독재경영을 꿈꾸다 그런 공산독재로 인한 각 경제주체들의 좌절로 실패하지 않았을지

  2. keiway 2019.08.12 1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흥미진진하군요.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주실 때까지 기다리는데 한달은 좀 가혹하긴 합니다만 ㅎㅎ

  3. 바다에산다 2019.08.12 1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상보급이 가능한 구간으로 작전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제해권 탓일까요?
    나팔륜이 생각하기에 불가능하니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은 듭니다만 이유가 궁금하네요.

  4. reinahrdt100 2019.08.12 12: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몽골군의 경우, 유럽 정복을 위한 준비기간이 당장 프랑스군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유럽 정복을 결정한 1235년 경부터 진격로 주변에는 유목행위를 금지했고 1237년과 1238년에 걸쳐 볼가 불가르 족을 격파 이들을 강제징병하였습니다. 이 때 강제로 동원된 볼가 불가르 족과 주변 제민족이 투멘으로 편성된 몽골굴과 거의 비슷한 수였다고 합니다. 즉, 흔히 말하는 10만~12만, 좀 과장되면 20만 몽골군 중에서 몽골 본토에서 파견된 투멘 편제의 몽골군은 약 6만~7만 정도였고 나머지는 진격 도중에 합류시킨 유목민족들이었다고 합니다.

    볼가 불가르 족을 격파한 후, 마침 헝가리에서 볼가 불가르 족을 머저르 평원으로 초빙하기 위해 도착해있던 율리아누스 수도사에서 최후통첩을 했죠. 자신들의 향도 및 병력 지원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유럽 공격에 지원하면 대칸에게 종속된 칸국의 지도적 위치를 보장함과 동시에 전리품의 어느 정도를 할당해주겠다고요

    약간 예전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몽골군은 1235년경부터 계산한다고 해도 1241년까지 약 6년 동안 유럽 공격을 위한 제반 준비를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아무리 길게 잡아도 2년 이상이 아닌 점에서 차원이 달랐죠. 물론, 몽골 본국과의 거리를 계산한다면 비슷하다고 보실 수 있겠지만 그래도 준비의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몽골군이 모두 경기병인 건 아닙니다. 물론 전원이 경기병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몽골군의 편제에서 '중장기병 2:경기병 5' 이상의 비율로 중장기병 편제가 나름 충실했습니다. 이건 금나라와의 전투 경험상 몽골굴의 지속성과 금군의 충격력이 서로를 두려워할 정도로 무서웠다는 경험 때문입니다. 금군이 몽골군을 기병전에서 이긴 경우가 꽤 되는데 대표적으로 완완진화상이 이끈 금나라 최후의 전략부대격인 충효군은 대체적으로 경기병과 중기병 모두를 중시한 편제였다고 합니다. 몽골군 역시, 충효군에게 몇번이나 박살날 정도로 겪어보다보니 초기 칭기즈칸 시절과 달리 나름 중장기병 전력을 충실하게 갖춘 군대로 변모하게 됩니다.

    물론, 몽골군의 경우, 중장기병이든 경기병인든 간에 기병 1기당 평균 5~6필의 마필을 지급했다는 것입니다. 즉, 그 정도면 마필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렵게 되면서 몽골군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 쇠퇴하게 됩니다. 몇몇 예를 들면 1285년~1286년의 몽골-헝가리 전쟁에서 3만의 헝가리 군에 맞서 몽골은 최소 10만이 넘는 기병을 동원했지만 이 시기 몽골군은 예전과 달리 기병 1기당 기껏해야 평균 1~3필 수준의 말을 지급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13세기 중엽과 달리 13세기 중후반 내내 헝가리는 전국을 말 그대로 요새화 했죠. 북한의 4대 군사노선 중 '전 국토의 요새화'를 정말 실천했죠. 막말로 100개 이상의 서유럽식 성채를 전국토에 깔아버린 겁니다. 몽골과 헝가리가 격전을 벌인 결과는? 헝가리군이 압승을 했습니다. 이 전쟁 이후 다시는 몽골은 헝가리나 폴란드는 생각도 못하고 좀 약체라고 생각했던 러시아와 리투아니아를 건드립니다만 그것도 리투아니아가 거대해지면서 계속 두들겨 맞아댔고 보르스쿨라 전투 (제1차 폴타바 전투)에서 겨우 리투아니아의 거센 공세를 꺾어버리는 수준으로 몰리게 됩니다.

    좀 길게 썼습니다만, 당시 몽골군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5. 나무꾼 2019.08.12 14: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
    -> 동계 피복 아닐까요 ?

    전쟁을 빨리 끝내버리면 동계 작전 준비가 필요없을테고...
    실제로는 겨울 추위에 시달렸고...

  6. 루나미아 2019.08.13 15: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니아토프스키가 모스크바 아닌 우크라이나 쪽으로 진군하는 걸 제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나폴레옹은 러시아도 프오처럼 주력을 격파해서 금방 제압될거라 믿었기때문에 안 그랬지만, 그쪽으로 천천히 갔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쪽엔 식량이 풍부했고, 오스만이 이스탄불을 확실히 막아준다면 다뉴브~흑해~드네프르&돈강이란 안정적인 수상보급로도 가능했을 테니까요.

    • 원인 2019.08.13 1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인이니까 폴란드의 세력권이었던 우크라이나를 지나는 쪽을 선택했겠죠. 폴란드 애국주의자의 발상입니다.

      포니아토프스키가 오스트리아군과 대결했을 때에도 최대한 많은 도시를 확보해서 전역이 마무리 될 때 점령지를 폴란드 세력권으로 인정받게 만드는 걸 우선시한 것처럼, 러시아 원정에서도 폴란드 지주들의 영향력이 남아있던 우크라이나를 일단 점령지로 확보하게 만들면 나중에 전선이 고착될 경우 우크라이나를 폴란드의 세력권으로 인정하도록 조약에 넣는다거나 하는 가능성까지 생각했을 겁니다.
      그야말로 나폴레옹의 힘을 빌어서 폴란드를 부활시키는 계략이죠.

      우크라이나로 진군시에 기대되는 지원전력은 오스만투르크, 크림타타르,코사크 총 3가지인데...
      오스만 투르크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동맹이라곤 하지만 이미 슐레이만 이후에 구조적인 한계에 도달해서 술탄의 친정군 조차도 믿을 게 못 되는 상황인데다가, 이미 몇년전에 러시아한테 박살나기도 했으니 그 이전부터 항상 그랬듯이 크림타타르나 코사크를 대타로 내세울 가능성이 높은데,

      우선 크림타타르는 약삭빠르고 기회주의적인 성향이라 전역이 유리하게 돌아갈 경우에는 협조적이지만 전역이 조금만 불리하다 싶으면 즉시 배신하던 전력이 있죠. 그리고 코사크는 근시안적인 이합집산이라는 고질병이 있어서 전부터 그래왔듯이 최소한 2개이상의 세력으로 쪼개져서 러시아편, 폴란드편, 그 외 타타르나 오스만 편 등등으로 나뉘어 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예카쩨리나2세 즈음 가면 이미 러시아의 통치체계가 견고해 져서 자유코사크의 범주에 들어가는 코사크들도 많이 줄어서 그닥 기대할 여지가 없죠.

      돈강으로 북상하면 상대적으로 반러시아성향이 강한 돈 코사크들의 "협조적이지는 않아도 방관적인 태도"에 힘입어서 큰 위협을 당하지 않고 모스크바 아래의 툴라까지 수로로 진격할 수 있긴 한데, 문제는 프랑스에서 돈강까지 가는 길이 확보가 안 되어 있는 게 문제죠.

      발틱해 쪽으로 가는 경우에는 이미 독일과 폴란드가 나폴레옹에게 제압당한 상태이고, 리보니아 지역도 독일,덴마크,스웨덴, 폴란드, 러시아가 돌아가면서 지배하던 곳이라서 현지세력이 배신할 경우에도 큰 문제가 안 되지만...
      프랑스에서 돈강으로 가려면 우선 다뉴브강을 따라서 흑해로 들어가는 게 상책입니다. 문제는 이 다뉴브 강변이 아직도 주로 오스만 세력권이 대부분인 상태인데, 오스만이 꺾였다고는 해도 여전히 강대국이라서 유사시에 러시아와 협정을 맺고 프랑스의 뒤통수를 칠 경우에 문제가 심각해 지죠.
      오스트리아가 오스만을 막아주면 좋겠지만 이 시점에서 오스트리아의 최대적은 프랑스인지라 오히려 둘이 합세해서 발칸반도 지리에 어두운 프랑스군을 협공할 가능성마저 있습니다.
      그래서 수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발틱해-볼가강 경로가 다뉴브강-흑해-돈강 경로보다는 낫다는 거죠.

      무엇보다도 알렉상드르1세를 잡지 못했을 경우에 안전하게 퇴각해서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는 다뉴브강-흑해-돈강 경로는 길이도 길고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 reinhardt100 2019.08.13 1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인) 제가 해 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써 주셨네요.

      볼가강이나 우크라이나 루트로 진격한 사례가 실제로 있긴 있었습니다. 1571년 및 1572년에 오스만 제국군이 드네프르강과 볼가강을 따라 진격했는데 당시 러시아는 이반 뇌제의 원조 대숙청으로 나라가 개판나버린 상태였습니다. 나라 제2, 제3 도시인 노브고르드, 프스코프에서 학살이 벌어진데다가 오프리치니크들의 전횡, 잇따른 황후 교체 및 고두노프, 로마노프, 슈이스키 등 보야르 가문의 점진적인 대두까지 겹치면서 개판이었죠.

      1572년 8월에 오스만 제국군과 모스크바 대공국 군이 모스크바 남쪽 교외인 몰로니에서 격돌했는데 이 때 오스만군이 대패했습니다. 전년에 모스크바를 약탈해서 최소 수만의 노예를 끌고 갈 때와 정반대 결과를 낳았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이 이 전훈을 고려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7. 제이슨 2019.08.13 2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간 집적소가 아니였을까요?
    많은 수의 병사들이 돌아오다 아사했다는데
    실제로 어디까지 가면 음식과 술이있다고 말해 좀비처럼 갔는데
    거기도 텅 비어었다고 하지요
    그럼 희망을 잃은 병사들은 무수히 죽어나가고
    그리고 계속 그런일이 반복되고...

  8. 2019.08.14 1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하고 동맹맺어서 양 방향으로
    진격했으면 승산이있지않았을까 그런
    궁금증도 생깁니다.


대체 이렇게 병참을 막대한 규모로 세심하게 준비했는데도 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보급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일까요 ?  이것도 흔히 말하는 가짜 뉴스 때문에 나폴레옹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것일까요 ?  일단 지난 편에서 보셨다시피 나폴레옹이 여태까지 해오던 것처럼 보급을 무시하다가 큰 코 다쳤다는 이야기는 억울한 누명이 맞습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준비에 있어서 무엇보다 보급에 정말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다부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필요한 보급품을 모두 다 가져가야 한다."

 

그렇다면 혹시 보급품 쌓아놓을 생각만 했지 운송 수단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한 것이 아니냐고요 ?  여러분도 생각하시는 것을 나폴레옹이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  그는 의붓아들인 외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습니다.

 

"폴란드 전쟁(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제2차 폴란드 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은 오스트리아 전쟁과는 완전히 다르다.  운송 수단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없어진다."

 

그런데 왜 망했냐고요 ?  결국은 기술의 문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단치히에 쌓아놓았다는 식량이 말을 위한 사료를 제외하고도 40만 대군이 50일간 먹을 분량이라고 했지요.  즉 2천만 명분의 식량을 비축해놓은 셈이었는데, 이게 과연 어느 정도의 분량이었을까요 ?  원래 원정 작전에 나선 병사들에게 제대로 보급이 안되는 것은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보급이 잘 된다는 영국군에게조차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1인분에 대해서 규정은 당연히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경우 원래 하루에 건빵 550g, 쌀 30g (또는 건조 채소 60g 여기서 건조 채소란 주로 콩류), 염장 고기 200g, 그리고 포도주 1/4리터 (또는 브랜디 1/6 리터)를 지급받게 되어있었습니다.  요즘 식당 기준으로 삼겹살 1인분이 200g 정도지만 실제로는 어느 누구의 배도 채우지 못해서 결국 1인분 더 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결코 많은 양은 아닙니다.  요즘 식빵 1봉지가 대략 450g이니, 바싹 말린 건빵 550g이면 그걸로 배는 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포도주까지 생각하면 병사 한명이 먹이기 위해서는 대략 하루 1kg의 물자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즉, 단치히 항구에만 2만 톤의 건빵과 밀가루, 염장 고기 및 포도주가 보관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건 미국 남북전쟁 병사들의 모습입니다만, 건빵, 그러니까 비스킷(biscuit)의 모양새나 맛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비스킷을 먹으며 웃고 있는 병사들의 얼굴 표정이 비현실적이네요.  그림 출처는 https://www.artofmanliness.com/articles/how-to-make-civil-war-era-hardtack/ 입니다.  여기 보면 비스킷을 어떻게 굽는지 레시피가 나와있습니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수송하느냐인데, 러시아에 아우토반 같은 고속도로가 포장되어 있고 강력한 디젤 엔진을 갖춘 트럭들이 즐비하다면 별 문제가 안 될 수 있었습니다만, 당연히 당시엔 그러지 못했습니다.  실은 트럭과 고속도로가 있다고 해도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냥 단순 계산을 하면 2만 톤의 식량을 한꺼번에 수송하기 위해서는 현대자동차의 3.5톤 마이티 트럭이 5,714대 필요합니다.  이 트럭의 길이는 대략 6.7m인데 앞뒤 차간 거리를 1.3m씩 유지한 채로 움직인다고 해도 이 트럭들이 주욱 한 줄로 주욱 늘어서면 맨 앞차부터 맨 뒷차까지의 거리는 거의 46km에 달합니다.  당연히 이 트럭들을 위한 디젤 연료 보급도 생각해야 하고 또 당연히 있게 마련인 고장에 대비해서 수리 차량도 끌고 가야 합니다.  현대 기술로도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더군다나 아스팔트 고속도로가 아니라 진흙구덩이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군대에게는 정말 현대 3.5톤 트럭이 있다고 해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현대 마이티 3.5톤 트럭입니다.  디젤 엔진을 장착했습니다.)

 



기술이 없다면 물량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지난 편에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대규모의 치중대를 편성하여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총 20개 치중대대의 7,848대 마차(문헌에 따라서는 26개 대대 약 9,300대)를 편성했습니다.  당시 4마리의 말이 끄는 대형 마차의 경우 대략 1.36톤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이 7~8천대의 마차가 모두 대형은 아니었지만 그냥 모두 4두 대형 마차라고 가정하고, 또 준비된 마차도 7,848대가 아니라 9,300대라고 가정하고 계산하면 이 치중대가 실어나를 수 있는 무게는 총 12,648톤에 이릅니다.  40만 대군이 50일 먹을 식량의 최소치인 2만톤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대략 필요량의 60%에 달하는 막대한 수송량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러시아가 척박한 땅이라고 해도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틀림없이 식량을 일부라도 현지 조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6월 24일에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 침공을 시작한 것에는 날씨에 대한 고려도 있었지만 러시아의 곡물 추수기가 대략 8월~10월이라는 것도 고려된 것입니다.  이 정도면 여전히 프랑스군 병사들은 배가 많이 고팠겠지만 그래도 굶주림으로 궤멸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산에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연료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현대 마이티 3.5톤 트럭의 경우 연료 탱크에 150리터의 경유가 들어가고, 연비는 (적재량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빈 차인 경우 대략 7km/리터이니, 무거운 짐을 실은데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조건이면 대략 4km/리터로 잡겠습니다.  그러니 프랑스군이 쾌속으로 하루 30km씩 진군한다고 하면 하루 8리터의 연료를 써야 합니다.  연료 탱크에 들어있는 연료만으로도 18일간 작전이 가능하고, 나폴레옹이 진격을 시작한지 83일 만에 모스크바에 입성했으니, 5번의 연료 보급를 더 받으면 됩니다. 이 5번의 보급을 위해서는 약 3560톤의 디젤유를 수송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트럭이 1,017대 더 필요합니다.  전체 트럭 5714대의 18%에 해당하는 오버헤드입니다.  생각보다 많기는 해도, 감당이 안 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디젤을 먹는 트럭 대신 풀과 곡물을 먹는 말의 경우로 계산해보면, 화석 연료의 강력함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말은 하루에 대략 9kg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9,300대의 마차에 딱 4마리씩 37,200마리의 말만 필요하다고 가정해보시지요.  (현실적으로는 예비마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의 말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의 치중대에는 4두 마차 외에도 2두 마차가 꽤 있어서 전체 마차 수는 9,336대, 말은 약 32,500마리가 있었고 예비마가 6천마리 더 있었습니다.)  이 말들은 하루에 335톤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83일 동안이라고 생각하면 27,788톤의 사료입니다.  잠깐만요.  이 마차들이 실어나를 보급품의 총량이 얼마라고 했지요 ?  예, 맞습니다.  12,648톤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들은 자신이 실어날라야 하는 무게의 2배가 훨씬 넘는 무게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이건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는 과제입니다.  게다가 기억하셔야 할 것이, 저 12,648톤의 보급품은 병사들이 필요로 하는 정량의 60%에 불과한 양입니다.  물론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식량이라는 짐은 사람이나 말이나 계속 먹어치우는 것이므로 여행을 가면 갈 수록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현대적인 디젤 엔진으로는 비교적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를 사료를 먹는 말로 해결하려 할 경우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인용했던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 Sharpe 시리즈 중의 한 장면을 읽어보시면 더욱 공감이 가실 겁니다.

 

Sharpe's Honour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3년 스페인) ---------------

하지만 이 뜻하지 않게 사령부에서 도착한 텐트는 쓸데없는 문제거리를 만들어냈다.  대대 전체의 텐트를 움직이려면 노새가 5마리 필요했다.  노새 한마리는 200 파운드의 짐을 싣고, 거기에 추가로 자기가 먹을 6일치 사료 30 파운드를 더 실을 수 있었다.  작년 여름 작전처럼 행군을 한다면 사료가 부족해지니까 추가 사료를 싣기 위해 추가의 노새가 필요했는데, 그 추가된 노새도 먹어야 하니까 그 추가된 노새가 먹을 사료를 실어나를 노새가 또 필요했다.  샤프가 6주간의 행군을 한다면 900 파운드의 추가 사료가 필요했는데, 이 사료를 실은 노새만도 4~5 마리가 필요했고, 이 노새들이 6주간 먹을 사료만도 700 파운드가 필요했으므로 추가로 4마리의 노새가 필요했다.  이 추가된 4마리 노새도 또 사료를 먹어야 했으므로, 이 웃기지만 정확한 계산을 끝마치고나니 5마리의 텐트 수송용 노새를 6주간 먹여살리기 위해 추가로 14마리의 노새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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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나고 말 났지 말 나고 사람 났냐 ?"라며 말 사료는 대폭 줄이고 사람이 먹을 식량을 더 가져가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들 하시겠지만, 그것도 정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강한 짐승입니다.  인간 병사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해도 쉽게 죽지 않고, 원래 걸어야 할 거리의 2배를 무리해서 행군해도 잘 버팁니다.  그러나 말은 먹이 부족과 과로에 견디지 못하고 픽픽 죽어 넘어집니다.  보통 전쟁에 나서는 인간은 지든 이기든 80% 이상이 살아 돌아오지만, 말은 60% 정도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인간과는 달리 말은 그냥 들판에 널린 풀을 뜯어먹으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겨울을 피해 훨씬 이른 시기인 봄에 작전을 시작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풀이 잘 자란 여름에 작전을 해야 말의 사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지요.  또 모든 기병대원에게는 말 먹이 풀을 벨 수 있도록 낫이 지급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은 원래 풀을 뜯어먹는 짐승이니 풀밭에 풀어놓으면 된다는 생각은 말이 하루종일 정말 풀만 뜯을 때나 통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강제로 걷게 하다가 길가의 풀을 약간 뜯게 하는 것은 사람으로 따지면 하루 종일 중노동 시킨 뒤에 얇은 식빵 2조각 던져주고 '사람은 원래 빵을 먹는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일입니다.  그나마 수만 마리의 말이 통과하는 길이라면, 그 길가의 풀은 순식간에 씨가 마르게 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네만 강을 건넌지 1달 만에 별다른 큰 전투도 없었는데 나폴레옹은 1만 마리의 말을 잃었습니다.  

 

(프랑스 포병대 소속의 마부 병사와 말입니다.  병사도 불쌍하지만 말은 더 불쌍했습니다.)

 



게다가 그나마 도로 사정이 괜찮은 편이라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도 치중부대는 언제나 진흙탕이나 다름 없는 도로 사정 때문에 보병 부대를 따라잡는데 항상 애를 먹었습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그리고 러시아로 이어지는 광활한 동부 유럽은 사정이 훨씬 나빴습니다.  역사가 리엔(Richard K. Riehn)에 따르면 이런 수준이었답니다.

"24일의 폭풍우는 폭우로 바뀌었다.  덕분에 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리투아니아의 통행로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진창으로 변해버렸다.  짐마차는 진창 속에 너무 깊게 빠져 바퀴 축이 땅에 닿을 정도였고, 말들은 지쳐 쓰러졌으며 병사들은 군화를 잃었다.  이렇게 퍼져버린 짐마차들로 인해 길이 막히자 병사들은 그 둘레를 빙 돌아가야 했고 보급품 마차와 포병대는 아예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날이 개어 해가 나왔는데, 진흙구덩이 속의 바퀴자국들은 햇빛에 바싹 마르자 아주 단단한 계곡으로 변해버렸다.  이런 울퉁불퉁한 도로 때문에 말들의 다리가 부러졌고 짐마차들의 바퀴가 깨졌다."

 

(영어로는 이런 진창 길에 난 바퀴 자국은 rut이라고 하던데, 한자어에 나오는 '전철을 밟는다'라는 단어의 전철(前轍)이 바로 앞서 간 마차의 바퀴 자국을 뜻하는 것이지요.  왠지 130년 뒤에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았던 어떤 오스트리아 화가 지망생 생각이 나는 한자어네요.)

 

 

이런 진흙탕 도로 위에 1.36톤의 짐을 싣는 4두 마차를 끌고 가면 결과는 뻔했습니다.  나폴레옹도 좀더 가벼운 2두 마차를 더 많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두 마차의 수송량은 4두 마차의 절반이 아니라 그보다 크게 더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두당 수송량이 떨어지면 그렇지않아도 답이 안 나오는 사료 문제는 더욱 답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나폴레옹도 이게 답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2두 마차 대신 4두 마차 위주로 마차를 준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의 말과 마차, 사료를 다 끌어모았다고 하더라도 치중부대가 나폴레옹의 배고픈 보병부대에게 건빵을 제때 전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나폴레옹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pdfs.semanticscholar.org/1d6e/96fd09126a40dca06ef01e8c9b13785e8379.pdf
https://warandsecurity.com/2013/02/11/why-napoleons-1812-russian-campaign-failed/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invasion_of_Russia
https://www.stolenhistory.org/threads/1812-french-invasion-of-russia-vs-logistics.1167/
https://www.bbc.co.uk/news/magazine-16929522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Paul Lindsay Daw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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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타카 2019.08.05 0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러시아는 말도 안되는 곳이군요ㅜㅜ 말이 작전하기 이리 어려운 동네에서 도대체 그럼 몽골군은 어떻게 러시아 정벌을 해낸 걸까요??

    • nasica 2019.08.05 07: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 ? 그 이야기는 간단하게라도 다음 편에 나올 예정입니다만... (누가 보면 짜고치는 고스톱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다 ㅋ)

    • reinhardt100 2019.08.05 0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단합니다. 나시카님께서 쓰실테니 이쯤에서 ㅋ

    • 원인 2019.08.05 1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단하죠.
      몽고군은 땅이 굳기 전에 공격해서 라스푸티챠에 당한 것이 아니라 땅이 굳은 뒤인 겨울에 공격해 와서 오히려 러시아를 빠른 속도로 파고들었죠. 추위는 몽고가 더 심하기 때문에 몽고군에게 겨울이 더 알맞은 계절이라고 할 수 있죠.

      라스푸티챠는 몽고군도 두려워 하는 무서운 지리조건이죠.
      몽고군이 헝가리 침공때에도 때마침 다뉴브강이 범람해서 늪지대가 되는 바람에
      헝가리에 결정타를 먹이지 못하고 결국 철수했죠.
      역사책에는 우구데이칸이 죽어서 철수했다고 하지만 다뉴브강 범람의 원인이 큽니다.

      만약에 다뉴브강이 범람하지 않았다면 ? 여전히 몽고군은 기동에 제약이 없었을 것이고..
      설사 우구데이칸이 죽었다고 해도 2선급 부대를 남겨놔서 헝가리를 초토화 시켰겠죠.
      마치 훌레구가 키트부카를 시켜서 맘루크를 공격하게 한 것처럼 행동했겠지만
      현실은 늪지대라는 가혹한 환경에서 더 이상 작전하는 게 무익했던 겁니다.

    • 이타카 2019.08.05 2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독자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이해하시면서 글을 쓰시는군요! 저는 지금 유럽 여행 중인데 내일 파리로 이동합니다ㅎㅎ 나시카님 애독자로서 앵발리드를 다녀오면 느낌이 유별날거 같네요 :)

  2. 고로 2019.08.05 0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 나폴레옹 지시대로 그 많은 보급물자가 진짜로 구축되었을까?? 분명 허수가 많았을거라 본다.. 그리고 러시아 땅이 너무 넓은게 문제지.. 거리만 가까우면 어케든 해결이 되는데..

  3. 2/28일 입대 2019.08.05 1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광복군의 최후의 비밀병기 무다구치 렌야 장군이 떠오르는 이유는 왜일까요ㅎㅎㅎ

  4. 원인 2019.08.05 1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는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다부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 이 대목에 나와 있듯이 나폴레옹은 작전에 있어서 다부와 상담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러시아 원정 건에 있어서도 다부와 함께 할 때
    보급의 중요성은 동의했지만 다부의 건의는 받아들이지 않았죠.

    다부의 작전은 발틱해의 해상운송을 통해서 리보니아에 거점을 만들고
    그 리보니아로부터 상트뻬쩨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공격하는 것인데,
    나폴레옹이 다부의 건의를 무시하고 바로 육로직공을 선택한 것이
    러시아 원정의 패배원인 중 하나입니다.

    • 원인 2019.08.05 1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마도 정서의 차이가 크겠죠.
      다부는 소심하고 걱정이 많아서 사소한 인명,물자 손실에도 민감한 성격인 반면에
      나폴레옹은 대담하고 자신만만해서 상당한 인명, 물자 손실을 아랑곳하지 않았죠.
      그러다 보니 러시아 원정에서 "보급선상의 손실"을 "머리속에서 체감하는 가상적인 고통의 크기"가 달랐을 겁니다.

      다부의 가상체감으로는 사소한 인명,물자손실도 심각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나폴레옹의 가상체감으로는 상당한 인명,물자손실도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겠죠
      전쟁이라는 게 생각외로 수행하는 주체의 정서적인 차이에 따라서도 많이 갈리거든요

    • 빅터 2019.08.05 22:38  댓글주소  수정/삭제

      해상은 영국이 잡고 있지 않나요?

    • 카를대공 2019.08.07 14: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로를 통한 보급,거점을 만든다는 생각은 과연 탁월한 전략안이네요.
      그런데 윗분들 말씀처럼 영국이 해상은 꽉 잡고 있는데 보급이 가능 했을까요?
      2차 대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롬멜한테 물자 대주려다 수많은 배들이 가라앉았었죠.

    • 원인 2019.08.07 15: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빅터, 알타리무,카를대공

      리보니아 해상운송은 복잡한 발틱해 연안을 따라서 항해하는 것이지 넓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가 아닙니다. 그걸 먼저 염두에 두셔야죠. 연안항해를 함으로서 영국해군의 능숙한 기동능력이 상대적으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한적으로만 움직이는 게 전제조건입니다.

      또한 이 지역은 30년 전쟁때부터 이미 무수한 스웨덴 해군력의 침공으로 그 방비에 이골이 난 지역이고 해안지역에는 요새와 해안포로 무장한 도시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죠. 슈트랄준트 같은 것은 단지 그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환경에서 최대한 해안에 바짝 붙어서 요새와 해안포의 엄호를 받으면서 연안항해를 할 경우에 독일,폴란드 지역에서는 영국해군이라도 그렇게 쉽게 공격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문제가 되는 발틱해 동쪽의 리보니아쪽은 경제력이 약하고 해안 방비가 잘 안 된 지역이므로 이 쪽이 약점이긴 한데, 그래서 제가 썼듯이 해안항해 + 해안육로행군을 병행해야 할 겁니다. 아마도 리투아니아 가까운 지역부터는 육상보급의 비중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지만 러시아 내륙을 가르지르는 무모한 경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안전하죠.

  5. 원인 2019.08.05 1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애초에 러시아인들이 몽고인들을 몰아낼 때 자주 사용한 수법이 바로
    수로를 이용한 우회공격이었음을 생각하면 러시아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은 바로 강을 따라서 기동하는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죠.
    공격부대뿐 아니라 보급부대도 강을 따라서 기동시켜야 되는 거죠.
    러시아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생각외로 강이 크고 숫자도 많아서 활용의 여지가 크죠.
    러시아인들이 몽고군을 수로기동으로 후방기습을 자주한 것도 이런 지리적인 유리함 때문입니다.

    수로를 사용한 공격, 수로를 사용한 보급을 1차적으로 고려했어야
    러시아 원정이 성공할 수 있는 겁니다.
    똑같은 러시아 땅에서 러시아인이 침공군을 물리치는 거나 침공군이 러시아인들을 물리치는 거나 원리는 같은 법인데,
    왜 러시아인들이 몽고군을 몰아낼 때 사용한 수단인 수로공격, 수로보급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았던 것일까 싶네요.

  6. 원인 2019.08.05 1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로를 이용한 우회공격으로 유명한 것이 바로 로마제국VS게르만족이죠.
    토이토부르크에서 게르만족의 기습으로 개박살난 로마제국이 보복공격으로
    처음에 육로직공을 선택했으나 늪지대로 변한 게르마니아에서 다시 박살났죠.
    그 다음에는 라인강을 따라 수로공격을 했고 결국 성공했습니다.

    라인강 깊숙히 들어올 때까지 게르만족이 로마군을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급로에서 손실이 전혀 없었고 아울러 기습의 효과까지 누릴 수 있었죠.
    서유럽에서 조차도 이럴진데, 더욱 광대하고 습한 동유럽에서는 당연히 수로를
    위주로 작전을 짜는 게 맞는데, 로마 매니아인 나폴레용이 왜 이건 참고하지 않았을까?

    나폴레옹의 주요 정책, 군략은 로마역사에서 가져온 것이 많은데, 왜 이 대목은 참고하지 않았을까 ? 의문이 듭니다.

  7. 수비니우스 2019.08.05 1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에 사극 엑스트라 알바 했을때 말이 길바닥에 똥을 싸대는걸 자주 봤는데 엄청 많이 싸더군요 ㄷㄷ 그만큼 많이 먹었다는 얘기겠죠

  8. 2019.08.05 14: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삑! 정답!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혹시 아닙니까? 물론 해군을 맨땅에서 건설하는 것도 방법이고, 기술 개발도 방법이고, 길을 닦아도 해결은 가능하고, 방법 자체야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능성, 효율성, 기대 편익, 기대 손실을 고려할 때 뭘 어떻게 해도 그 '한정된 자원'으로 다른 무언가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원래 체면값, 자존심값이라는 게 생각보다 비싸잖습니까? 프랑스 상공인의 이익을 조금 덜 지켜도 나폴레옹의 권좌 자체는 괜찮을 거라고 봅니다. 아마 위신이 떨어지고 참 견디기 힘들 수 있고 이런저런 머리 아픈 문제가 생기겠지요. 하지만 단언컨대 '묻지 마 러시아 원정'보다는 덜 나쁜 선택이었을 거라고 굳게 확신합니다.

    • nasica 2019.08.05 22: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 개돼지조무사 2019.08.06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고, 장구벌레님, nasica님이 아드님한테도 주입한다던 하이쿠를 여기서 들으면 민망하시겠습니다, 그렇게 딱잘라 돌려드리면 너무 뼈아프시지 않겠어요? :-)

  9. 2019.08.05 14: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손자병법을 보면,

    "적이 승리하지 못할 상황은 내게 있다. 내가 승리할 상황은 적에게 있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지지 않을 상황은 직접 만들기 쉬워도, 나폴레옹이 이길 가능성은 실수든 근본적 한계든 다른 무엇이든, 꼭 자의가 아니더라도 러시아 쪽에서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갈량도 북벌의 조건 중 하나를 대강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방 유목민의 침략이든 내분이든 다른 무엇이든)위나라의 상황이 어지러울 때 치고 올라간다."

    아쉽게도 완벽한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지요. 그럭저럭 괜찮았던 기회도 안타깝게 날려 버렸고요. 하지만 정답이 안 보인다고 해서 일부러 오답을 택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폴레옹도 러시아가 기회를 만들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안 만들어 주면 그냥 원정 자체를 때려치워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10. reinhardt100 2019.08.05 2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로를 이용하는건 사실 무리였습니다.

    우선, 수로의 연속성이 없다는 겁니다. 네만강, 드네프르강, 돈강, 볼가강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거든요. 하천 구간까지는 하천용 선박을 운용하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그 사이가 문제였죠. 18세기 내내 러시아도 인구가 증가하면서 대규모 경작지 확대가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고대와 키예프 루시 시대만 해도 광활하게 펼쳐졌던 늪지와 습지들이 상당부분 개간되어 사라졌죠.

    선박도 문제입니다. 45만 대군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최소 수백척의 상선단 및 그만한 수의 하천용 선박이 필요한데 프랑스군은 그걸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18세기 중엽에 영국과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해 톤수로 전열함급 수준의 상선이 수백척 이상 날아가버리면서 해운력의 기초까지 완벽히 박살난게 이 시대까지 복구가 안 되었습니다. 또한 스웨덴이나 덴마크가 적극적으로 프랑스에 가담했다고 해도 양국의 해운력은 도저히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독소전쟁 당시, 독일 국방군은 24개 대대의 철도 대대를 운용했지만 보급은 항상 부족했습니다. 철도 설비도 심각했지만 더 큰 문제는 보급품 집적지로부터 전선까진 대체적으로 6두 마차로 수송했는데 이게 엄청나게 문제였죠. 소련 파르티잔도 문제였지만 속도가 너무 느렸거든요.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143개 사단에 배속된 수송용 마필이 총 60만두였는데 작전 개시 2달만에 50%이상의 손실이 발생해서 태풍작전과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시간이 안 맞는 사태가 벌어졌죠.

    • 원인 2019.08.05 2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육로운송보다는 수로 운송이 맞는 선택이죠. 러시아 침공에 필요한 건 볼가강 하나뿐이니까 나머지 수로의 연속성은 필요 없습니다. 주요목표는 리보니아와 상트뻬쩨르부르크, 모스크바이지 그 외의 내륙지역이 아니니까요.

      설령 육로로 대군을 들여 보내고 육로보급에 어느정도 의존한다 해도 수로보급은 반드시 해 놔야 원정군의 편의를 보장할 수 있죠.
      2차대전때 미군이 200만대군을 상륙시킨 뒤에 노르망디 보급선에 의존해서 개고생하다가 앤트워프 항구를 확보해서 원정군의 부담을 크게 덜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물론 프랑스군이 2차대전 미군처럼 해운력을 가진 건 아니라 해도 마필운송에 의존하다가 차례차례 죽어가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겁니다. (다부는 원정군 규모 45만은 너무 크고 20만 정도가 적당하다고 봄. )

      스웨덴이 영국과 결탁해서 영국해군을 발틱해로 들여보낼 경우에 영국해군의 위협도 있을 수 있으니 해상운송, 해군력이동은 당연히 연안항해를 해야겠죠. 넬슨이 아부키르 만에서 연안방어태세에 있던 프랑스해군을 격파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니까요. 또한 병력수송은 선박승선과 해안선 행군 이동을 병행합니다.

      단순무식하게 공세만 따져 봤을 때.. 우선 리보니아를 확실하게 장악하는 것에 전력을 집중하고 나서...
      우선 뻬쩨르 부르크는 리보니아로부터 바로 바다에서 접근 가능합니다. 물론 요새화 되어 있으니까 바로 도시에 상륙할 수는 없고 그 옆에 상륙해서 일단 교두보를 구축해서 유리한 위치를 장악한 뒤에 해안선을 따라 육로로 보낸 전력을 증원해서 공략해야 되겠죠.
      해안선을 따라서 육로로 접근하는 것도 허허벌판에 가까운 내륙경로에 비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전합니다. 스웨덴-폴란드 전쟁때도 스웨덴 군이 이런 식으로 습한 해안땅으로 병력을 이동시켜서 폴란드군의 기습을 피했죠. ( 물론 괜히 폴란드군의 도발에 넘어가서 선빵날리다가 결국 털렸지만 )
      그 다음 모스크바가 문제인데,
      발틱-볼가 수로가 나폴레옹 침공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어서 뻬쩨르부르크쪽에서 모스크바 북쪽으로 흐르는 볼가로 진입할 수 있죠. 물론 이 때에도 강을 따라서 하천선박운송과 강기슭을 따라서 행군하기를 병행합니다. 강기슭의 습한 토질로 코사크 기병의 기습에 대한 안전함과 유사시 식량, 목초등의 확보에도 황량한 내륙지역 행군과는 비교가 안 되게 유리하죠
      물론 볼가강으로 들어가는 수로를 토목공사로 파괴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모스크바 방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죠. (이미 만든 운하를 매립해 봐야 주민들 동원해서 다시 파내면 됨 )

      해운선박은 예전 한자동맹 도시가 주류였던 발틱해 연안 도시에서 징발해서 씁니다. 선박 손실율은 그 당시 마비저( 말에 감염되는 박테리아 질명)으로 국경선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 마필손실에 비할 바가 아니죠.
      또한 선박이 부족하다 해도 마필수송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죠. 현대기술로도 열차수송과 선박수송이 말도 안 되게 차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원정이라는 본래 전략 목표에 좀 더 입각해서 고찰하자면...
      리보니아를 해상보급으로 연결하는 것은 단순히 원정군의 최초 공세만을 위한 게 아닙니다.

      로마군단이 원정에서 대부분 성공한 근본 원인이 바로 최전선 바로 뒤에 근거지 구축을 먼저 하고 최초 공세가 실패한 뒤에도 궤멸적인 타격을 받지 않고 재차 공세를 가하거나 퇴각할 경우에도 손실을 최소화 시키고 퇴각했기 때문이죠.
      하물며 리보니아는 로마군 보급진지처럼 허허벌판도 아니고 수백년 동안 독일과 덴마크, 스웨덴의 식민통치로 개발이 된 곳이죠.
      모스크바에서 철퇴하더라도 리보니아에 근거지를 구축해 놨다면 정신없이 쫓기다가 동사,병사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스웨덴이 북방전쟁에서 개털린 이유도 칼 12세가 리보니아에서 재보급하자는 신하의 말을 무시하고 육로직공을 했기 때문이죠.
      실제로 스웨덴이 북방전쟁으로 개털리기 전까지 계속적으로 유럽대륙에 힘을 투사하고 러시아를 통제하는 데 성공한 건 바로 리보니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는 또한 동아시아에서 만주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요동반도를 갖고있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위상입니다.

      물론 나폴레옹의 침공이 무모한 건 맞지만 일단 원정을 성공시키기로 결심했다면 B플랜, C플랜까지도 철저히 준비하는 게 맞죠. 그리고 B플랜의 1순위는 수로운송과 리보니아 확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러시아원정의 진짜 의미가 러시아를 굴복시키지 못했다는 사실 보다는 프랑스제국의 전쟁수행역량 그 자체에 치명타를 주어 결국 대불동맹의 압박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렉산드르1세를 잡지 못했을 때 손실을 최소화 시키고 안전하게 퇴각하는 것이 극히 중요했다는 겁니다.

  11. Spitfire 2019.08.05 2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병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역사의 if가 가능했을까 기대했는데, 말 사료 이야기 나오는 순간 ‘아..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드네요. 돌아보니 표트르 대제의 발트해 진출과 서구화는 어찌보면 유럽의 역사를 바꾸는 업적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정말 대제로 불릴만한거 같아요.

  12. apils 2019.08.07 02: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이 먹는 거 무시하면 안되지요. 예전에 동호회 분들이 말 몰고 다니다 오셨는데, 말 세마리가 수백평 잔디밭을 30분 안에 아작을 내놓더군요. 다행히 뿌리까지 파먹지는 않았지만 왜 말먹이 건초가 필요한 지 생생히 보고 느꼈습니다.

  13. 카를대공 2019.08.07 14: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 건초가 부족했다 <-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 자주 언급되는 구절이긴한데 이렇게 자세하게 써놓으시니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가 새삼 실감이 되네요.
    이래서 화석연료가 짱입니다.

  14. 롬. 2019.08.07 18: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흔히 그냥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해서 몰락했다 책 한줄로만 알았고 우연히 본 화학책에서 단추 소재 때문에 금방 떨어져서 외투를 여밀 수가 없었다 라고만 알았는데.. 정말 철저하게 준비했었군요.

    인터넷인가 다큐멘터리에서 줏어듣기로 러시아원정을 하느냐 마냐도 몇달동안 심각하게 내린 번복을 하며 고민 끝에 결정했다고 들었었는데.. 아 준비과정이 생각보다 굉장히 치밀했고 그럼에도 불구, 그 치밀한 준비로도 안된거였네요. 현대의 트럭 기술로도 아슬아슬한 거였다니... 어마어마했네요...

  15. 롬. 2019.08.07 18: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머니께서 어렸을 때 소에게 먹이를 주셨기에 소도 말이랑 먹는량 비슷하겠지 싶어서 여쭈어봤더니

    소가 풀을 먹는다지만 그건 소를 풀 많은 곳에 아침에 등교하며 풀어두고 나중에 하교하며 찾는등 정말 소가 일도 안하고 하루종일 제발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풀.만. 뜯었을 때나 그렇다 하시더군요...

    또 농번기엔 일을 많이 시키니까 하루종일 풀 뜯도록 놔둘 수가 없어서 여물을 먹이는데 이것도 그냥 지푸라기 막 주는게 아니라, 현대 군인들이 고칼로리 음식으로 식단을 채우듯 콩잎이나 호박잎 등등

    소취향에 맞는+소가 먹고 탈 안나는 종류의 + 그러면서 내가 구하기 쉬운 종류의 + 고칼로리의 풀을 섞어야 하는데다, 소화 되기 쉽게 끓여야 하는등 (그냥 풀이면 막 다먹는게 아니라 의외로 소도 취향이 있다 하시던...하긴 개•고양이도 사료 취향이 있는데 소라고 없을까 싶습니다...)

    말 그대로 고칼로리+소화가 잘되는 쑨 죽은 말그대로 요리 과정이더군요...

    하루종일 노동하는 말이 먹을 고칼로리의 풀을 자연에서 그것도 몇 천 마리가 동시에, 오늘도 먹고 내일도 먹고 모레도 먹을 양을 구하기란 당연히 불가능이고... 싸들고 간다친들 어마어마하겠네요

    한 마리가 말려서 가볍디 가벼운 그 풀을 킬로그램단위로 먹던데.... 무게도 무게지만 가벼운 풀을 킬로, 톤 단위로 모아야 하니 그 부피가 정말...

  16. 샤르빌 2019.08.08 14: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대 보급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하게 다수의 사람들한테 나눠줄 물품이나 먹을것 등등 계획하고 계산하는데도 환장할 정도로 머리아프더라고요.. 변수도 워낙 많아 아주그냥 난리 납니다..

  17. ㅁㄴㅁㄴ 2019.08.10 2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상보급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나 크림반도 깨부시는거 외엔 러시아원정은 당시 기술론 불가능의 영역이군요

  18. PANDA 2019.08.29 1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에 차관을 빌려줘서 포장도로를 깔수 있도록 해 주면 됩니다


1810년 마지막 날에 영국 상품의 입항을 허용하고 반대로 프랑스 상품에 대한 고율의 관세를 부가하는 짜르 알렉산드르의 칙령(ukaz)이 내려지자, 이제 전쟁은 거의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유럽 전체가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폴란드 문제로 1810년 중반부터 아웅다웅하고 있던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는 말로만 툭탁거리지 않았고, 서로 병력을 바르샤바 공국 접경 지역으로 증강 배치하면서 상호간의 긴장감을 키워나갔습니다.  나폴레옹은 1806년 전쟁 때 점령한 뒤 계속 움켜쥐고 있던 슈테틴(Stettin)과 단치히(Danzig) 등 프로이센의 주요 요새들에 병력을 추가 배치하고, 더 나아가 프랑스 내의 병력들도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등 동부 지대로 조금씩 이동시켰습니다.  

 

(오늘날 폴란드 영토가 된 슈테틴, 폴란드어로는 슈체친입니다.  오데르 강에 접하고 있는 도시로서, 베를린으로부터는 140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도시이며 원래 프로이센 영토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에게 동부 영토를 빼앗긴 폴란드에게 보상 형식으로 주어졌지요.)

 



1811년에 접어들자 본격적인 전쟁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1811년 4월에는 긴 꼬리가 달린 혜성이 관측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혜성은 큰 전쟁과 기아, 전염병 등 좋지 않은 대사건의 전조로 받아들여졌는데, 모스크바부터 마르세이유까지 유럽 전역에서 이 불길한 혜성을 보면서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알렉산드르 본인도 이 혜성에 대해 '어디까지나 과학에 대한 흥미 때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미국 대사와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혜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이, 나폴레옹은 정말 바빴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러시아와의 전쟁이 기존의 전쟁과는 규모와 성격면에서 완전히 다를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만큼 철저한 준비를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이 남긴 편지를 보면, 나폴레옹은 연대 번호만 들어도 그 부대의 지휘관이 누구고 어디에 배치되어있으며 편성된 전력이 어떤 수준인지 또 그 과거 전적이 어땠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이런 세세한 점까지 신경을 쓰면서 새로 병력을 뽑고 새 부대를 편성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로 무척 바빴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을 위해 준비한 병력은 대략 68만, 그 중에서 실제로 네만(Nieman) 강을 건너 러시아로 동진할 인원은 (학자들에 따라 이견이 분분합니다만) 대략 40만에 달헸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런 준비를 하면서 러시아군을 무찌를 신무기나 새로운 전술 등을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신기할 정도로 새로운 군사 기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신 그가 이번 전쟁 준비에 있어서 가장 관심을 둔 것은 바로 병참이었습니다.  그는 1807년 삭막한 폴란드 땅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면서 동부 유럽은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독일이나 이탈리아와는 확연하게 다른 곳이라서 기존처럼 현지 조달에 의존해서 싸우다가는 굶어죽기 딱 좋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역대급의 보급망을 준비했습니다.

먼저, 나폴레옹은 1811년부터 1812년까지 폴란드를 가로지르는 비스툴라(Vistula, 폴란드어로는 Wisła 비스와) 강을 따라 대규모의 보급창을 건설했습니다.   비스툴라 강은 바르샤바는 물론 모들린(Modlin)과 토른(Thorn) 등의 주요 요새 및 도시를 거쳐 항구 도시 단치히(Danzig, 현재의 그단스크 Gdansk)에서 발트 해로 흘러가는 폴란드의 대표적 수로였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영토와 직접 맞닿아 있는 라인 강과 이 비스툴라 강 사이에 총 5개의 수송로를 설정하고 프랑스와 독일 지역에서 긁어모은 물자를 실어날랐습니다.  

 

(유럽 대륙의 주요 하천입니다.  템즈 강 같은 것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지만, 비스툴라 강은 당당히 표시될 정도로 꽤 중요한 강입니다.)

 

(브레슬라우, 즉 보르츠와프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오데르 강에 접한 도시입니다.)

 

 

 

그 결과, 1812년 1월까지 나폴레옹은 단치히에만 40만 명의 병사들과 5만 마리의 말이 50일 간 먹을 식량과 사료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40만 명 x 50일 = 2000만 명분의 식량을 쌓아놓은 것이지요.  이 외에도 오데르(Oder) 강에 접한 프로이센의 도시 퀴스트린(Küstrin, 폴란드어로는 Kostrzyn 코스트신)과 슈테틴(Stettin, 폴란드어로는 Szczecin 슈체친)에도 별도로 수백만 명분의 식량을 축적했습니다.  역시 오데르 강에 접한 프로이센 도시 브레슬라우(Breslau, 폴란드어로는 Wrocław 브로츠와프)와 비스툴라 강에 면한 프오츠크(Płock) 및 비소그루트(Wyszogród) 등에는 거대한 곡물 창고와 제분소가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생산된 밀가루는 비스툴라 강을 통해 배 편으로 토른에 보내져 하루에 6만개씩의 큼직한 야전용 건빵이 구워졌습니다.   그 외에도 각 부대의 뒤를 따라 가도록 걸어다니는 푸줏간인 가축떼를 5만마리나 모아두었습니다.  

 

(베를린과 슈테틴, 즉 슈체친과의 거리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원래 슈테틴은 독일 영토일 때 베를린의 외항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아울러 비스툴라 강변을 따라 늘어선 폴란드의 주요 도시들과의 거리를 봐두시기 바랍니다.)

 

 

(나폴레옹의 주요 물자 수송로 역할을 한 비스툴라 강, 즉 비스와 강입니다.  폴란드의 주요 도시들은 이 강을 따라 늘어서 있습니다.) 

 



이렇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잔뜩 쌓아만 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아니었습니다.  이것들을 쾌속으로 진군하는 부대들의 속도에 맞춰 러시아 내륙으로 수송을 해야 했지요.  나폴레옹은 이를 위해 치중대대(train battalion) 20개를 편성했습니다.  여기에는 7,848대의 마차가 배속되어 배고픈 병사들을 먹일 식량을 실어나르도록 했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의 규모인가하면, 스페인 전역을 위해 나폴레옹이 조직한 치중대대의 규모를 보시면 됩니다.  1810년 10월, 나폴레옹은 총 12개 치중대대를 편성했는데, 여기에 포함된 마차의 수가 1,700대 정도였습니다.  그 중에서 스페인 방면군에는 5개 대대를, 포르투갈 방면군에는 2개 대대를, 그리고 프랑스 국내에서 5개 대대가 배치되었습니다.  1810년 당시에는 스페인에 배치된 프랑스군의 수가 20만을 훌쩍 넘었는데, 거기에 고작 5개 대대 약 710대의 마차가 할당된 것입니다.  그런데 40만의 러시아 방면군을 위해 10배가 넘는 수의 마차를 준비한 것을 보면, 확실히 나폴레옹은 여태까지와는 다른 각오를 가지고 수송에도 매우 신경을 쓴 것입니다.  

 

 

(한번도 하일라이트를 받지 못한 부대가 바로 치중대이지요.  하지만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것은 보병과 포병, 기병일지 몰라도, 전쟁을 이기는 것은 바로 이 치중대였습니다.)

 



나폴레옹이 평소에 등한시하던 식량 문제에도 이렇게 신경을 썼으니 탄약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더욱 철저한 준비가 이루어졌습니다.  현지 조달을 중시하던 나폴레옹조차도 무기와 탄약은 항상 본국으로부터의 수송에 의존했었거든요.  바르샤바에는 큼직한 무기고가 건설되어 각종 탄약과 무기가 집적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주요 식량 집적소인 단치히, 슈테틴, 퀴스트린 등에는 식량 뿐만 아니라 각종 야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제3차 대불동맹전쟁 때 동원된 나폴레옹의 7개 군단이 보유했던 대포의 수는 총 300문을 넘지 않았고,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당일날은 훨씬 더 적은 수의 대포가 동원되었습니다.  러시아 원정 이전까지는 유럽 최대의 전투였다는 바그람 전투에 동원된 프랑스군의 전체 대포 수는 488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센의 마그데부르크(Madeburg)에 집결시킨 탄약과 포병대의 규모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이 곳의 무기고에는 135톤의 화약과 함꼐 200만발의 머스켓 탄약포가 축적되었을 뿐만 아니라, 야포 462문과 공성용 중포 100문이 집결되어 있었습니다.  슈테틴에는 263문의 야포, 100만발의 머스켓 탄약포, 90톤의 화약을, 퀴스트린에는 108문의 야포와 100만발의 탄약포를, 그리고 글로가우(Glogau)에도 108문의 야포와 100만발의 탄약포, 45톤의 화약을 축적해놓았습니다.  1812년 5월, 러시아를 향해 출발하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는 806문의 야포와 761,801발의 포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야포 1문당 거의 1,000발에 가까운 포탄을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사상 최대이기도 하고 또 유례없이 격렬한 포병전이었던 바그람 전투 40시간 동안 프랑스군 포병대의 488문은 약 10만발을 발사했는데,  이는 1문당 200발 정도를 쏘아댄 것이었습니다.  이런 격렬하고 대규모였던 전투는 나폴레옹 인생 전체에서도 흔치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정말 충분한 양의 탄약을 준비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막대한 준비를 했지만, 아시다시피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결국 병참 문제로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pdfs.semanticscholar.org/1d6e/96fd09126a40dca06ef01e8c9b13785e8379.pdf
https://warandsecurity.com/2013/02/11/why-napoleons-1812-russian-campaign-failed/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invasion_of_Russia
https://www.stolenhistory.org/threads/1812-french-invasion-of-russia-vs-logistics.1167/
https://www.bbc.co.uk/news/magazine-16929522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Paul Lindsay Daw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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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웃자웃어 2019.07.29 1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국 육군의 병력대비 전쟁비용이 프랑스군보다 높은 이유가 보급을 직접하거나 현지조달을 해도 현찰로 따박따박 지급해서 라고 알고있습니다. 그렇다면 러시아 원정도 병력대비 전쟁비용이 많이 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러시아 원정의 전쟁비용은 얼마이며 이는 비유적으로 어느정도의 규모인가요?

  2. 동겸좀비 2019.07.29 14: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차대전 독일군의 병참한계선도 드리나-드네프르 강까지 였는데, 나폴레옹이라고 무슨 재주가 있었을까요.
    독일은 침공군의 규모가 400만이었으니 나폴레옹의 러시아 방면군 보다 10배나 많았네요.

  3. 터키는 강하다 2019.07.29 18: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굉장한 양의 화약과 포탄을 저장했군요.아무래도 밀이나 감자랑 다르게 포탄과 화약은 러시아 농촌을 약탈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저리 준비한걸까요.

  4. 웃자웃어 2019.07.29 1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러시아군이 보로디노에서 프랑스군을 고전시킨 이유가 뭘까요?

    • 원인 2019.07.30 2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폴레옹이 몸이 좋지 않아서 적극적으로 지휘를 하지 못했죠.
      다부가 크게 우회기동하자고 건의했는데, 나폴레옹이 각하시킴.
      프랑스군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이 바로 나폴레옹이죠.
      나폴레옹이 몸이 아프면 패하는 경우가 많죠. 보로디노, 워털루 등.

    • reinhardt100 2019.07.30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로디노 전투가 중요한 이유가 소련식 군사학의 특징이라고 해도 좋을 포병전을 쌍방이 한치의 실수 없이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포병전력에서 프랑스군 587문, 러시아군 640문이었는데 쌍방의 공세 상당부분을 포병으로 틀어막아버리면서 격전이 되어 버린 겁니다. 후반부 양군의 포병 화력 밀도에서 프랑스군이 앞서버리면서 전투가 프랑스측으로 전세가 기울어버렸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담이지만 이 때 경험부터 러시아 및 소련은 포병사단, 포병군단 개념을 자신들의 군사학에 도입했고 냉전기 서방권이 가장 무서워한 동구권의 재래식 전력인 포병전력이 적극적으로 확충됩니다. 절대 기갑전력이 아닙니다. 서방권이 MLRS니 통합화력이니 하는 거로 막으려던 건 어디서 쏟아질지 모르는 동구권의 압도적인 포병전력에서 쏟아질 '전선 그 자체를 뭉개버릴 수준의 화력'이었습니다. 그걸 막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이상의 화력으로 맞불 놓는 것이었으니까요.

  5. 프로이센 2019.07.29 2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봤습니다. 말이 먹을 건초가 부족했던 걸까요

  6. 동장군 2019.07.30 0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의 수호신인 그 분을 너무 얕본것 아닐가요.
    주석페스트도 있고

    • 비우 2019.08.29 2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표적으로 잘못알려진 사실 입니다 나폴레옹은 겨울이 되기전에 모스크바를 점령하였고 겨울이 되기전에 떠났습니다 이때까지만 봐도 프랑스군의 비전투 손실은 엄청난 규모 였습니다

  7. 돌격대장 2019.07.30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보자면
    보급선이 길어짐에 따라 수송에 어려움이생긴것
    아닐까요.러시아군의 청야전술에 현지조달도
    어려워져서 병참이 터졌을거같군요.

  8. 원인 2019.07.30 0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원정 실패는 몇가지 원인이 있죠.
    (1) 육로보급 그 자체
    (2) 군마의 마비저 박테리아 감염
    (3) 인간의 티푸스 감염
    (3) 주석으로 된 외투단추가 추위에 파쇄

  9. reinhardt100 2019.07.30 23: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평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라스푸티차가 끝나는 5월초부터 9월까지 얼마나 진격하냐?' 입니다. 물론 보급이 더 중요하죠.

    역사상 러시아 평원전에서 유일하게 러시아를 장기전으로 이긴 나라는 폴란드 하나입니다. 대동란 시절, 즉 1605년~1618년 전쟁기인데 이 시기 폴란드군을 나폴레옹이 꽤 참고했다는 알 수 있습니다. 폴란드군은 당시 핵심 전력인 윙드후사르는 보로디노 전투와 같은 수준의 중요한 쿠쉰 전투 같은 전투에서 주력으로 활용했고, 스몰렌스크 공성전 같은 경우는 포병전력이 상대적으로 충실했던 서유럽 출신의 용병대를 주로 활용했습니다. 나폴레옹 역시 보로디노 전투에서 최정예인 제국근위대는 일단 한번 더 쓰기 위해(?) 아꼈지만 그 외 주전력은 모조리 쏟아부었죠. 즉, 폴란드군처럼 단 한번의 결전으로 러시아군 주력을 붕괴, 알렉산드르 1세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보급이 뒷받침되야 이게 가능한데 폴란드군은 가능했지만 프랑스군은 불가능했다는 겁니다. 당시 폴란드 정규군은 모스크바에서 퇴각한 1612년부터 연방 역사상 최대 콘페라데치아(이익을 위한 연맹집단)을 결성해서 세임(연방 의회)와 국왕인 지그문트 3세에게 반란을 일으켰죠. 이 때문에 용병대인 '묵시록의 기사들'인 리소브치치가 국가 방위 및 러시아 침공전을 도맡았죠. 이들은 보급은 '당연히 러시아에서 현지조달한다'였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가 리소브치치는 소수 기병(6개 부대 약 2만)이었다는 점, 러시아 서부 전역을 보급조달지역으로 보고 무차별적인 약탈로 충분한 보급을 할 수 있었다는 거죠.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모스크바 단 하나만 노린 40만 이상의 공격군이 리소브치치처럼 광역 원정을 할 수 없었고 현지조달이 이미 불가능했다는 겁니다.

    후대 독소전쟁이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참고해 3개 집단군으로 분리, 광역 섬멸전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을 진행했지만 이 판국에도 후방 정리가 안 되서 개판된 걸 보면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이미 무리수가 여기저기서 보였던 겁니다.


어떻게 보면 온 유럽이 휩쓸리게 되는 1812년 러시아 침공이라는 난리통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를 이간질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벌어지게 되자 오스트리아는 한발짝 물러나는 얌체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당연했는데,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러시아를 두들겨 패는 동안 떨어지는 콩고물, 즉 발칸 반도 분할에서 좀더 많은 땅을 땅을 주워먹으려 했을 뿐 뭔가 숭고하고 원대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것은 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주사위 놀음이라서, 제아무리 나폴레옹이라고 해도 프랑스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체는 애초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측에 가담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의 사위라는 인척 관계로 맺어진 관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초에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를 이간질한 실제 이유, 즉 영토 문제도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좋든싫든 프랑스측에 가담하도록 압박했습니다.  당장 흑해로 흘러가는 도나우강 하류 지역, 그러니까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 중에서 오스트리아가 자기 것이라고 침을 발라놓았던 몰도바-루마니아 방면으로 러시아군이 진격해오자 오스트리아의 입장은 무척 초조해졌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을 위해 편성하는 야전군의 규모가 무려 40만이 넘는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자, 그 정도라면 프랑스군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보고 오스트리아도 1812년 3월 나폴레옹 진영에 합류합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끝까지 얌체처럼 그야말로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정도인 3만의 병력을 제공하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했습니다.  

스웨덴도 끝까지 어느 쪽에 붙을까 저울질을 하며 눈치를 보던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어찌 보면 북구의 스웨덴은 프랑스의 진격로와는 발트해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서 지리상으로 크게 중요하지 않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꽤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당장 러시아령 핀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언제든지 당장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나라였거든요.  게다가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해협, 즉 외레순(Öresund, 영어로는 The Sound) 해협이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다는 점도 중요했습니다.  이미 프랑스 측에 붙은 덴마크의 헬싱고르(Helsingor) 요새와 스웨덴의 헬싱보리(Helsingborg) 요새 사이의 해협은 특히 좁았는데, 거리가 10km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해안포로 사용되던 36파운드 대포의 최대 사거리가 3.7km 정도였고, 유효 사거리는 고작 600~700m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두 요새 사이를 통과하는 영국 수송선이나 전열함이 크게 손상을 입을 염려는 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당시 범선들의 열악한 항행 능력을 생각하면, 특히 스웨덴 군함들이 이 해협을 가로막기라도 한다면 영국 선박들로서는 상당히 부담을 느낄 만한 일이었습니다.  

 

(덴마크 측의 헬싱보르그와 스웨덴 측의 헬싱보리 위치입니다.   저 해협만 틀어막으면 발트해는 사실상 호수가 됩니다.  코펜하겐이 위치한 덴마크의 큰 섬인 젤란트의 반대쪽 해협도 물론 항행은 가능합니다만, 그 쪽은 얕은 바다 등이 많아서 훨씬 항행에 불리하다고 하네요.)

 

(이건 함포로 사용되는 36 파운더 포이긴 합니다만, 해안 요새에서도 주로 이 36 파운드 포를 해안포로 썼습니다.  해안 요새에서는 좀 높은 위치인 성벽 위에 이런 대포를 놓았기 때문에 해수면에 위치한 전열함보다는 조금 더 멀리 포탄을 날려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1812년을 앞두고 스웨덴의 인기는 상종가를 치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노르웨이를 주겠다며 스웨덴을 유혹했고, 나폴레옹은 핀란드를 주겠다며 호객행위를 했습니다.  우스운 점은 이 모든 땅들이 결국 남의 땅이라는 점이었지요.  당시 노르웨이는 프랑스의 굳건한 동맹국인 덴마크의 영토였고, 핀란드는 바로 몇 년 전에 알렉산드르가 스웨덴으로부터 빼앗은 영토였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르나 나폴레옹이나 자기 것은 내주기 싫고 상대편의 땅을 내주겠다는 공수표를 남발한 셈이었으므로, 스웨덴은 국제 외교전에서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무척 냉철하게 판단을 해야 했습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스웨덴은 딱 적임자를 실권자로 두는 행운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스웨덴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국왕 카알 13세(Karl XIII)도 아니요 뿌리 깊은 스웨덴의 귀족 세력 연합체인 의회도 아닌, 바로 나폴레옹의 껄끄러운 친척이자 전직 프랑스군 원수, 현직 스웨덴 왕세자였던 베르나도트(Bernadotte)였습니다.  

 

 

(오늘날 스웨덴 왕가의 시조이신 베르나도트, 아니 카알 15세 전하이십니다.)

 



애초에 스웨덴이 프랑스 장군이자 나폴레옹의 친척인 베르나도트를 굳이 모셔와서 왕세자로 삼은 것은 러시아에게 상실한 옛 영토 핀란드를 나폴레옹의 위세를 등에 업고 되찾아보려는 스웨덴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도 그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웨덴 사람들만 몰랐을 뿐, 베르나도트는 애초에 나폴레옹과 좋은 관계가 아니었고, 그래서인지 아니면 정말 그의 냉철한 두뇌로 주변 정세를 정확히 분석 파악해서인지 스웨덴의 살 길은 러시아와 넓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쪽 핀란드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서쪽 노르웨이를 손에 넣는 것이라고 이미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판단이 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측에 붙느냐 러시아 측에 붙느냐는 고민은 베르나도트로서도 다시 한번 전체 상황을 되짚어 보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때 어느 쪽에 붙느냐 하는 것이 국가 전체의 흥망성쇠를 판가름지을 도박이었으니까요.  그러는 사이에 프랑스도 러시아도 애간장이 탔고, 베르나도트는 이렇게 인기가 급상승한 스웨덴의 위치를 한참 동안이나 즐겼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가 너무 질질 끌어서였는지 아니면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스웨덴의 협조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아서였는지, 베르나도트로 하여금 별다른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엘베(Elbe) 강 일대의 프랑스 동맹군을 지휘하던 다부(Davout)가 러시아 침공을 위한 사전 작전의 일환으로, 1812년 1월 발트해 남쪽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Pomerania)를 침공해버린 것입니다.  애초에 스웨덴은 이 지역을 방어할 능력도 의지도 전혀 없었으므로 프랑스군은 이 지역을 무혈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베르나도트는 운명이라는 듯이 러시아와 동맹을 맺습니다.  

이런 외교전에서 막차를 탄 것은 오스만 투르크였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로에서 멀리 떨어진, 겉으로 봐서는 직접 개입할 여지가 없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야말로 프랑스와 연합할 이유가 충분한 나라였고 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시까지 러시아와 계속 전쟁을 벌어고 있는 교전 국가였거든요.  나폴레옹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나 아일라우 전투를 치를 때에도 러시아군 주력 부대의 상당수는 저 남쪽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장에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비록 지리적 위치 때문에 프랑스군과 합류하여 공동 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지만, 러시아의 남쪽 국경의 전선을 계속 유지하기만 해도 나폴레옹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투르크군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더라도 러시아로서는 그 넓은 전선에 적어도 수 만의 병력을 유지시키고 있어야 했으니까요.  러시아로서는 나폴레옹과의 일전을 앞두고 어떻게 해서든 오스만 투르크와의 교전 상태를 종식시켜야 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라는 뻘짓으로 한동안 프랑스와의 관계가 틀어지긴 했지만, 전통적으로 프랑스편이었고 또 나폴레옹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오스만 투르크는 마지막까지 어느 쪽에 붙는 것이 유리한가를 놓고 고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동안 오스만 투르크가 잃었던 많은 것들, 즉 이집트와 발칸 반도 등의 영토를 모두 회복시켜주겠다며 10만의 군대를 동원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망해가던 오스만 투르크에게 10만군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나폴레옹이 얼마나 허세가 가득한 인간인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에게는 나폴레옹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약속보다는 당장 코 앞에서 대포를 들이대고 협박을 해대는 러시아와 영국이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영국 지중해 함대는 러시아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이스탄불을 폭격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었고, 도나우 강 하류 지역에 집결한 러시아군은 몰도바를 집어삼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1812년 5월, 오스만 투르크는 오늘날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국경인 프루트(Prut) 강을 경계로 하는 평화 협정을 러시아와 맺습니다.  이로써 러시아는 오랫동안 오스만 투르크와의 남쪽 국경에 묶여있던 대군을 북쪽으로 불러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루트 강의 위치입니다.  오늘날 루마니아와 몰도바, 우크라이나 사이를 흐르는 강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외교전에서는 나폴레옹의 완승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온 유럽이 나폴레옹 편에 선 것에 비해, 러시아 편에서 함께 싸워줄 국가는 유럽 전체에서 영국과 스웨덴 정도 밖에 없었는데, 사실 스웨덴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나라였고 영국도 유럽의 반대편인 스페인에서의 공세로도 숨을 헐떡이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 침공을 결코 쉽게 보지 않았습니다.  1807년 폴란드 지역에서의 작전을 통해 광활하고 삭막한 동구의 평원을 침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무나 뼈저리게 잘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보급 문제에 있어 기존에 없던 규모의 준비를 시작합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Prut
https://en.wikipedia.org/wiki/36-pounder_long_gu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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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후니74 2019.07.22 06: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온 러시아 침공에 있어 시대상을 잘 알게 되었네요.

  2. 유애경 2019.07.22 06: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도 프랑스도 남의땅을 가지고 스웨덴에게 호객행위...표현이 참 재미있어서 웃고 and 잘보고 갑니다.

  3. 메뚝 2019.07.22 0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한주 쉬었다 오셔서 더 반갑네요~

  4. 2/28일 입대 2019.07.22 1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파륜이 보급 준비라니! 결말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읽을수록 빠져드는 느낌이네요♡

  5. LOL 2019.07.22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단 잘 읽었습니다, 한가지 최근에 있었던 흥미로운 사건에 관련하여 이렇게 서양사에 해박하신 나시카님의 고견을 여쭙고자 합니다.

    베르나도트가 다시 등장해서 드리는 질문으로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인들의 핀란드 수복숙원이 민족의 잘못된 욕망이라고 평가했다고 여기서 두번째로 언급하셨습니다. 저는 上편 댓글서 이런 내용을 봤는데요.

    한국의 상황에서 자기보다 손도 안닿을만큼 강한 전범국의 역사적 사죄를 받아내려는 한국인의 의지는 여기 치이고 저기치이던 허섭스레기 스웨덴인들의 숙원과 같다고 블로그 주인장님도 여기시는지, 그리고 이 문제에서 베르나도트와 동일한 시각을 가지시는지 많이 궁금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스웨덴왕이 된 프랑스인 단원을 연재할 때는 베르나도트의 스웨덴인의 대러시아 역사숙원을 위험한 욕망이란 평가와 핀란드를 포기해야 한다는 시각을 정확하다고 묘사하셨구요

    또한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단원을 연재할땐 나폴레옹의 전략상 베이직 요소를 나시카님은 다음같이 적으셨던걸 기억합니다, 이건 제가 드리고자 싶은 질문인데 당시 그것을 나시카님은 이길 수 없는 승리를 쥐는 영웅적 행위보다 이길 수 있는 상황에만 싸워서 백전백승을 얻어낸다는 내용으로 설명을 하셨습니다.

    이길 수 있는 싸움만 싸운다. 최근에 있었던 재밌는 일이란게 이겁니다 바로

    최근에 sbs 방송인 원일희가 나라 구한게 의병이 아니다, 정권차원에서 이순신, 죽창가, 의병모집 운운하면서 선동술을 일삼는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해서 이겨야 한다고 말을 하고 결국 짤렸습니다.

    15일 오후 방송된 프로그램 마지막 부분에 ‘[원일희의 직설] 반일 감정 자극이 해법은 아닙니다’라는 클로징멘트를 했다.
    원 앵커는 “1910년 국채보상운동, 1997년 IMF 금 모으기 운동 기억하자, 이순신 장군은 단 12척의 배로 나라를 구했다, 의병 일으킬 사안이다, 동학 농민운동 때 ‘죽창가’ 불렀다. 대통령, 민정수석, 안보차장, 여당의원, 같은 맥락의 발언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원 앵커는 “청와대와 여당의 방향이 엿보인다”며 “싸움, 필요하다면 해야죠”라고 했다. 이어 그는 “그러나 전쟁은 이길 전쟁만 해야 한다”며 “질 싸움에 끌려 들어가는 거, 재앙”

    출처 :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

    ㄴ 이런 발언인데 질싸움은 안해야 한다, 이길 싸움만 해야한다, 이 말대로라면 나폴레옹의 기본강령과 원일희의 발언은 일치합니다. 원일희가 잘못된 말을 한 걸까요, 어떻게 보세요?

    • 돌로레스 2019.07.23 0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끼어들 깜냥은 안됩니다만...개인적으로는 역사에 공짜는 없다, 어느 나라든 민족, 종교 등의 명분하에 집단주의에 푹 쩔었다가 뼈저리게 망하는 경험이 있어야 진정한 개인주의로 진화하는구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영국, 미국 정도만 예외일까요? 아, 네덜란드가 있군요....그래도 제 예상보다는 덜하긴 합니다...제 주변에 개인주의자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보니 제가 초등학교,중학교 다니던 시절은 이른바 독재정권 시절인데요. 그때 교과서에 전시 영국의 어느 일간지가 용감하게 당국의 보도 통제를 뚫고 영국이 지고 있거나 잘못하고 있는 사실을 보도했다가 당국은 물론 국민들에게도 맹렬한 비난에 시달렸으나 결국 자신들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이런 내용이 실리기도 했는데...세월 무상하네요.

    • nasica 2019.07.23 08: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에도 한번 적은 바가 있었는데... 저는 제 아이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싸움이란 일단 안 하는게 좋지만, 꼭 싸워야 할 때가 있다. 그건 우리가 정의로운 편일 때도 아니고, 이길 수 있는 때도 아니고, 지든 이기든 싸워서 얻을 것이 있을 때이다."

      답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 고로 2019.07.23 08:42  댓글주소  수정/삭제

      흠 일본이 대한제국 잡아먹고 대동아공영권 외칠때도 nasica님과 동일한 논리 펼쳤을듯요..

    • LOL 2019.07.23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nasica/의문형 종결을 하신걸 보면 알고하신 응답일거 같습니다만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응답을 받아서 감사한것하곤 별개로 말씀대로 답변으로 만족할 응답은 아닙니다,

      본질문 2가지는 구체적인데 해주신 응답은 그냥 형이상학적인 나시카님의 신좁니다, 추상적이고. 이렇게 말씀들 드리는걸 무례하다고 여기지는 말아주십시오, 이렇게 딱딱하게 표현을 하는건 응답이 의문만 더 남겨서 그렇습니다 --

      나시카님같이 준프로께서 이렇게 형이하적인 질문에 형이상으로 시같이 대답을 하셨단건 추상적이어도 이 질문에 답변으로 삼기에 아귀가 딱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하셨다든가. 추상적인 심리를 생각으로 형태화하고 언어로 한번 더 구체화하면 심리, 그러니까 나시카님이 지니신 욕망하고 그걸 답변용으로 치환한 언어사이에 인지부조화가 발생, 그게 양방간 쉽게 융합이 안된단 걸로 분석하면 제 망상이겠죠?

      이 두 개 경우수중 해당되는게 전자라면 의문만 더 남긴다 드린 말처럼 새 의문이 생깁니다,
      대일분쟁을 시속의 싸움으로 보신다면 대일분쟁이 한국에 -를 상쇄해서 순이익으로 +를 남기는가, 그 +는 계측가능하고 실체적인가 아니면 표현이나 인식은 해도 실체가 없거나 아예 형체 이전에 고정된 형태가 없는 무언가인가(ex:국민감정),
      거기다가 굳이 ‘정의로운 편이 아닐 때도’라는 전제가 있다면, 그리고 적합타 여기셔서 이 시로 답변을 삼으셨다면 나시카님의 생각 속 이 문제에서 한국은 악인가, 적어도 불의하단걸 의미하나

      나폴레옹사상 베르나도트의 판단이 한국 사례에 적용이 가능할까, 동시에 나폴레옹의 강령이 적절하다면 원일희의 발언은 마찬가지로 적절한가. 의사표현을 예 아니오로 해도 될 내용이거든요. 그런데 약간 당혹스럽게 아드님까지 거론하심서 우리가 얻는게 있다면 이기지 못해도 우리가 악당이어도 싸워야한단 말씀은 들으니까 이걸 읽은 기억이 날만큼 멋지긴 합니다만 화법이 우주적인데요

    • LOL 2019.07.23 2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치.시사성이 내포된 질문을 게시한데 이유가 있다면 하필 스웨덴왕 베르나도트가 연관이 돼있고, 그리고 앵커 원일희 사건도 연상시키는 뭔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SBS 관계 방송인이라고 부러 관계라는 형용사를 넣은건 원일희가 SBS가 아니라 SBS랑 분리경영되는 CNBC, 다시말해서 본사차원 지상파 네임드도 아니라 어느정도 쩌라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프로이센 전쟁에 불을 댕기는데 일조한 사건이 있었잖습니까, 인쇄공장 사장을 나폴레옹이 친히 잡아다 죽여서 프로이센의 국민감정을 건드린 그 사건 말씀입니다

      원일희 하차사건은 또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원일희 하차건을 꺼낸 이유기도 합니다. 경제정책실장 김수현이 뻘소릴 뻥뻥하다 3진 아웃으로 잘리고 공정위에서 그 자리로 대신 간 김상조도 대통령이랑 초근거리 관계도상에 있으면서 섣부른 소리 하다가 총리한테 입조심하라고 경고받곤 깨갱한게 이번 달 일입니다.

      그리고 민정수석이고 차기 법무장관 내정자 아니면 킹크랩으로 도장찍힌 김경수 대신 총선나갈 조국, 대통령의 총애를 쓸어가는 조국이 저런 의병, 죽창, 이적 이런 막가는 말들을 쏟아내는데, 원일희가 디스한 조국이 저렇게 파격으로는 몇갑절이나 되는 개인플레이를 하고도 당정청의 일치단결한 지원을 받는단건 이건 조국이 조국이 아니라 대통령 문재인을 대리해서 하는 발언들이란 거잖아요? 그렇죠?

      원일희는 방송인 나부랭이가 대통령이 하달하는 지령에 개기고 짤린 겁니다, 이런걸로 보면 트럼프가 저 발광을 하는데도 언로가 안막히는 미국은 확실히 민주주의 최첨단 국가입니다.

      [원일희 / 앵커 : 오늘 제가 직설의 마이크를 내려놓습니다. 일본의 경제보복, 잘못됐고 철회돼야 한다, 그러나 대응은 외교 협상이어야 한다. 문맥, 취지, 의도, 명확했음에도 의병 비하했다, 친일파다, 익명의 청와대 고위관계자 멘트까지 동원된 친일 공세는 집요했고, 어둠속 칼날과 손은 보이질 않습니다. 다르면 너 빨갱이구나, 프레임 씌우던 시절처럼 다르면 넌 친일파다, 언론에 씌운 굴레입니다.]

      ㄴ 이게 당사자 클로징 멘튼데
      청와대가 동원된 압박까지 있었다고 그대로 믿자면 왕정시대 기준 베르나도트가 말년에 언론탄압을 자행하고 나폴레옹이 인쇄소 사장을 납치해 죽인거랑 차원이 비슷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저게 저럴 급의 멘튼가, 고민해 볼 수 있지 않겠어요?

    • nasica 2019.07.24 08: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LOL// 아 저런... 제가 아이에게 '정의롭지 않더라도 이익이 생기면 싸우라'고 가르친 건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편이 정의라면 이기든 지든 어떤 희생이 나더라도 무조건 싸우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다들 자신이 정의의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정의를 위해서는 무조건 싸워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세상에는 싸움 그칠 날이 없을 것 같습니다.

    • 돌로레스 2019.07.24 09:53  댓글주소  수정/삭제

      평소에 토 많이 달던 저지만 이 말씀 만큼은 백퍼센트 지지합니다. 나와 의견이 다른 상대도 스스로를 정의롭게 생각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럴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게 개인주의의 시작이죠.

  6. unit_inv 2019.07.22 2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흔히 생각하는것처럼 보급 무시하고 러시아 들어갔다가 당한게 아니라 나름 준비를 했었군요.

  7. reinhardt100 2019.07.22 2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담이지만 18세기부터 오스트리아는 도나우강부터 테살로니카까지 자기들이 가져야 할 영토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러시아의 국가적 사명이었던 콘스탄티노플 수복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1877년 러시아가 터키를 말 그대로 묵사발내버리고 콘스탄티노플 근방까지 진격하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나라가 오스트리아였죠. 자칫하다가 발칸에서 그대로 날아가 버릴 판이었으니까요.

    프루트강과 드니스트르 강 사이가 현재 유럽 최빈국인 몰도바인데 여기도 꽤나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드니스트르 강과 프루트 강 사이는 평아지대라 방어선 구축이 안 되는 지역이니까요. 어떻게 해서든 드니스트르 강을 국경선으로 해야 그나마 방어가 가능했는데 여기가 뚫려버리면서 더 이상 터키는 발칸에서 안정적인 방어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실제로 1877년 전쟁 때 터키의 프루트 강 방어선을 개전이후 단 일주일도 못 되어 붕괴시킨 러시아군은 그대로 불가리아 프레베까지 진격할 수 있었죠. 프레베 요새 공성전이 5개월이나 끌었기에 망정이지 프레베가 일찍 낙성되었다면 정말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사태가 터질 뻔합니다.

    나폴레옹 전쟁과 60년 차이나지만 1877년 전쟁이 꽤나 중요한 이유가 이 전쟁은 터키 군사력의 척추를 말 그대로 꺾어버려 다시는 러시아를 상대로 단독으로 전면전을 걸 생각을 못 하게 만들었고 발칸이 더 이상 터키의 안마당이 아님을 누가 봐도 확실하게 했다는 겁니다.

    • 2/28일 입대 2019.07.23 1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오오...정말 늘 댓글에서 배웁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급 궁금해진 게 있어요! 오스트리아는 도대체 뭘까요? 인종의 단위? 민족적 단위?? 대체 얼기설기 얽힌 조각보 같은 국가(?)가 어떻게 그렇게 커졌던건지...

    • Spitfire 2019.07.23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국 그렇게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누가 발칸의 주인이냐를 놓고 수십년을 더 투닥투닥 하다가 큰 일이 터지고 말았지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왕가가 유럽의 중심이었던 시절에는 사실 민족이나 인종이 지금처럼 국가의 정체성을 정하는 것이 아니었지요. 왕가나 귀족이 전쟁, 외교, 결혼, 상속으로 일정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 영토였으니까요. 다양한 민족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신하로 지내다가, 30년 전쟁 터지면서 한번 분열되고 민족주의가 생기면서 너덜너덜해졌지요.

      나시카님이 영국 해군에 대해서 이야기하실 때 이미 언급하셨지만, 영국 선원은 ‘영국인’이 아니라 단지 ‘영국해군에서 근무하는 자’입니다. 물론 그렇게 바다밥 먹으면서 영어 배우고, 운이 좋아 그동안 모은 돈으로 영국령 어딘가 정착하면 영국인이 되는거지요. 그당시에 무슨 영주권이나 비자가 있지도 않았다 보니...

    • reinhardt100 2019.07.24 2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답변 드렸어야했는데 Spitfire님이 다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저한테 배울게 별로 없는데 좋게 봐주시니 고맙네요.

  8. Spitfire 2019.07.22 2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웨덴이 핀란드를 얻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할 수 없었던건 베르나도트를 왕으로 추대해서였다기보단, 폴타바 이후로 북방의 패권이 러시아로 넘어가는 바람에 스웨덴의 국력으로 러시아를 침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베르나도트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누구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면 정말 바보가 아닌 이상 그정도 사리판단은 하지요. 물론 그런 사리판단을 전혀 못하거나 단순히 분위기와 감정만으로 정확한 판단을 무시할 경우에 닥쳤던 끔찍한 결과도 역사에 무수히 많긴 합니다만...

  9. 고로 2019.07.23 08: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와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는데.. 에르도안이 이슬람신앙과 반미정신 등에 엎고 이번에 러시아랑 손을 잡으니... 결과가 궁금함..

    • 터키는 강하다 2019.07.23 1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러시아와 터키가 친해진 것처럼 보여도 러시아가 계속 아르메니아를 후원하고,터키가 계속 아제르바이잔을 후원하는 이상 결국은 양국이 서로 적대할수밖에는 없다고 봅니다.시리아 내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일시적으로 협력한다고 봐야지요.시리아와 맞닿아있는 터키 동부는 쿠르드족 극좌 테러단체 쿠르디스탄 노동당의 봉기와 IS,알 카에다 등의 이슬람 테러분자들의 침투로 시리아랑 별 차이 없는 수준입니다.시리아 사태 초기부터 반정부군을 지원한 대가긴 한데,아무튼 치안이 굉장히 악화되었지요. 에르도안이 정말로 친러로 가고 싶다고 해도 터키는 그게 가능한 나라가 아닙니다.우리나라보다 영토도 훨씬 넒고,이슬람교도 국가답게 젊은 인구도 많은데다가 NATO에서 미국 다음가는 대군을 가지고 있으니 강해보여도, 내실은 훨씬 작은데다가 고령화되고 있는 극동의 대한민국만도 못해요.터키 군대는 한국군과 규모와 질적 측면에서 비슷한데 터키 경제는 규모에서 유럽이나 일본은커녕 우리나라만 못합니다.따라서 그 거대한 군대를 운영하려면 미국의 원조가 반드시 필요하죠.미국과 결정적으로 척을 지게 되면 당장 터키가 자랑하는 군대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겁니다. 뭐 사실 에르도안도 표 때문에 이슬람 원리주의자 코스프레하는 세속주의자에 가까운지라 터키의 호메이니는 결코 되지 못할거라고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