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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122

바클레이의 도착 - 스몰렌스크 전투 (3) 스몰렌스크는 인구 1만2천 정도에 건물이 2200 채 정도 있는 작은 도시였고 그 자체로는 특별히 꼭 탈취해야 할 중요한 군사적 가치가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곳은 예카테리나 여제 때에 건설된 민스크-스몰렌스크-모스크바를 잇는 도로의 중간 기점으로서, 그 중간을 가로지르는 드네프르 강을 건널 다리가 2개나 놓여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바클레이의 러시아군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크게 우회한 것은 좋았으나, 이제 바클레이의 뒤를 치기 위해서는 드네프르 강을 건너야했고 그러자면 스몰렌스크를 손에 넣어야 했습니다. (1812년 당시 스몰렌스크의 성벽과 방어탑 위치입니다. 실제로는 방어탑이 30개가 아니라 훨씬 더 많았던 모양입니다.) 이런 군사적 가치가 있었으므로 스몰렌스크는 그 규모치고는 꽤 탄탄.. 2020. 3. 30.
엇갈린 발걸음 - 스몰렌스크 전투 (2) 바클레이가 7일 밤 바그라티온과 플라토프에게 보낸 명령서는 2가지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독일인 특유의 무뚝뚝함 때문인지 원래 바그라티온과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이었는지, 바그라티온은 그냥 '우회전하여 전진'이라는 퉁명스러운 명령만 들어있었을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별 설명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바그라티온은 영문을 몰라 당황했고, 일단 명령에 따르기는 따랐지만 마음 속으로는 바클레이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점점 커졌습니다. 둘째, 그나마 플라토프에게는 아예 명령서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당시 전장에서는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무선 통신도 없고 GPS도 없고 항공 정찰도 없으니 아군끼리도 넓은 지역에서는 상호 교신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담이지만 1815년 워털루 전.. 2020. 3. 23.
울며 겨자 먹기 - 스몰렌스크 전투 (1) 7월 27일 밤 비텝스크에서 철수한 바클레이의 러시아 제1군은 약 130km 떨어진 스몰렌스크에 8월 1일에 도착했습니다. 하루 약 32km씩 행군한 셈인데, 당시 군대의 하루 평균 행군 거리가 20km이던 것을 생각하면 꽤 강행군이었습니다. 스몰렌스크는 당시 인구 1만5천 정도의 작은 도시였는데, 무엇보다 튼튼한 벽돌로 쌓은 성벽과 총탑으로 무장된 요새 도시였습니다. 게다가 폭이 거의 100m에 달하고 꽤 깊은 드네프르(Dnieper) 강을 북쪽에 끼고 있어서 방어에 크게 유리했습니다. 드네르프 강은 러시아에서 시작하여 우크라이나를 거쳐 남쪽의 흑해로 흘러들어가는 큰 강인데, 스몰렌스크에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렀고, 스몰렌스크는 강의 좌안, 즉 남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있는 비텝스크는 스.. 2020. 3. 19.
각자의 할 일 - 모스크바에서의 알렉산드르 잠시 시선을 나폴레옹으로부터 알렉산드르에게로 돌려보겠습니다. 모스크바를 향해 말을 달리던 알렉산드르의 마음은 당연히 좋지 못했습니다. 1709년 카알 12세(Karl XII)가 이끄는 스웨덴군이 폴타바(Poltava) 전투에서 박살이 난 이후, 러시아 영토 깊숙이 외국군이 쳐들어온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러시아 국민들을 다독이고 장병들을 통솔하여 침략군을 막아내는 것이 짜르가 할 일인데, 일단 알렉산드르는 장병들을 통솔하는데는 처참하게 실패한 뒤였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국민들을 다독여 군에 보낼 보충병들과 보급품을 마련하는 것이었는데, 풀이 죽은 알렉산드르에게는 그것조차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러시아 귀족들과 시민 계급에게는 나폴레옹의 침공이 걱정했던 것보다는 긍정적인 .. 2020. 3. 9.
멈추지 못한 발걸음 (2) - 나폴레옹, 스스로를 속이다 당시 그랑다르메 소속 병참장교(commisaire de guerre)였던 벨로 드 케르고르(Alexandre Bellot de Kergorre)에 따르면, 나폴레옹이 비텝스크에 도착했을 즈음 이미 그랑다르메는 네만 강을 넘었을 때에 비해 2/3로 줄어있었습니다. 이는 전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강행군과 식량 부족, 불결한 식수 등으로 인한 질병과 부상, 낙오, 탈영 등으로 인한 비전투 손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일개 민간 계약자에 불과한 병참장교가 과연 전체 그랑다르메의 인원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을까요 ?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전체 그랑다르메의 정확한 인원수나 전투 준비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조차,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제 나폴레옹 본인만큼은 그랑다르메의 실제 상태에.. 2020. 2. 17.
멈추지 못한 발걸음 (1) - 1812, 시즌 오버? 바이에른군의 에라스무스 드로이(Erasmus Deroy) 장군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병사들의 군화는 물론 군복 코트, 바지, 각반 등이 모두 누더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군대가 요즘에 비해 지나치게 화려한 군복을 고집했던 것이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입는 옷에 따라 거동이 달라지는 동물이라서, 절도 있는 군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으면 그만큼 더 군기있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복장을 입고 있으면 반대로 군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문제가 있지요. 상황이 딱 그랬습니다. 드로이 장군도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일 뿐만 아니라 불만과 명령 불복종이 위험 수준에 달했다며 보고서에서 개탄했습니다. 게다가 뷔르템베르크 출신 칼 폰 수코프(Carl von Suckow)의 기록에 따르면 이.. 2020. 2. 10.
큰 기대 큰 실망 - 비텝스크 (Vitebsk) 전투 러시아 제1군의 뒤를 추격하던 뮈라는 최소한 러시아군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는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뮈라의 보고를 통해 러시아 제1군이 드리사의 방어진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는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쾌재를 올렸습니다. 드디어 러시아군과 결전을 벌일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태까지 빌나에서 여러가지 행정 업무에 발목이 잡혀 있던 그는 제롬의 바보짓 때문에 바그라티온을 놓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직접 군을 지휘하기로 했고, 당장 말에 올라 드리사를 향해 달렸습니다. 나폴레옹의 기본 계획은 퓰과 알렉산드르의 실수를 100%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드리사의 러시아 제1군의 남동쪽으로 우회하여 바그라티온의 러시아 제2군과의 합류를 원천적으로 봉쇄함과 동시에 러시아군의 보급로를 막고 내친 김에 러.. 2020. 1. 20.
드리사에서 비텝스크로 - 러시아의 구원은 짜르에게서 온다 여태까지 보셨다시피, 당시 러시아군에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수의 외국인들, 특히 주로 독일인들이 많이 종군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외국인들이 러시아군에서 일을 하자면 당장 언어 문제가 큰 장벽이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군 내부의 표준어는 프랑스어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독일인 장교들도 프랑스어에 대부분 익숙했거든요.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때 즈음의 일입니디만, 니에쉬비에즈(Nieshviezh) 인근에서 벌어진 프랑스와 러시아 양측 기병대끼리의 소규모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전투의 혼전 중에 러시아군의 무카노프(Mukhanov) 대령이라는 사람이 부하 장교에게 큰 소리로 명령을 외쳤는데, 그 다음 순간 옆에서 달려든 휘하 카자흐 기병의 칼을 맞고 죽었습니.. 2020. 1. 6.
나폴레옹은 모에-샹동을 마셨을까 모엣-샹동을 마셨을까 ? 최근에 조선일보에서 조선일보답게 유명 와인 브랜드인 Moët & Chandon 관련된 기사를 냈더군요. 프랑스 샹파뉴(Champagne) 지방의 에페르네(Épernay) 현지 취재 기사였는데, 그냥 Moët & Chandon 사의 광고 이하도 이상도 아닌 그런 기사였습니다. https://m.chosun.com/news/article.amp.html?sname=news&contid=2019122000173 제가 이 기사를 클릭한 것은 어떤 포털에서 '나폴레옹이 사랑한 술, 승리의 순간마다 삼켰다'라는 제목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나폴레옹이 진짜 좋아해서 항상 챙겼던 와인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의 샹베르텡(Chambertin) 와인이었기 때문에, 아마 그 와인 이야기인 모양이라고.. 2019. 12. 26.
제롬 이야기 - 나폴레옹의 일시적 실수 ? 본질적 문제 ! 제롬 보나파르트(Jérôme-Napoléon Bonaparte)는 1784년 생으로서 나폴레옹에게는 15살 어린 정말 아들 같은 막내 동생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1793년 툴롱(Toulon) 포위전을 통해 중위에서 장군까지 일사천리의 승진 가도를 달리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9살이었습니다. 이 툴롱 포위전이 한창일 때만 해도 보나파르트 일가는 고향 코르시카에서 쫓겨나 집도 절도 없이 마르세이유의 월세방을 전전하던 신세였지만 나폴레옹의 출세 덕분에 그 이후로는 생활에 기름칠이 잘 된 편이었습니다. 즉, 제롬은 형의 후광에 힘입어 아주 어릴 때 빼고는 그다지 세상살이가 어려운 줄 모르고 자라났다는 이야기지요. (베스트팔렌 국왕 제롬 보나파르트 전하이십니다. 가만히 보면 이목구비가 확.. 2019. 12. 16.
화장실 이야기 - 고대 그리스에서 나폴레옹까지 서양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를 '꿈의 나라'라고 하며 동경합니다. 서양의 문화적 토대가 처음으로 이루어졌고, 또 민주주의의 시발점이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고대 그리스가 그런 꿈의 나라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소리를 들으면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화장실이 어땠을까 ? 간단히 말하면 이나영이나 한예슬도 화장실에 갈까 정도의 생각이지요. 답부터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도시 중 그래도 가장 화려하고, 또 가장 잘 발굴된 도시인 아테네에도, 공중 화장실은 없었습니다. 또 집집마다 화장실이라고 할 만한 것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테네인들은 어떻게 용변을 보았을까요 ? 뭐, 뻔하지 않습니까 ? 요강을 썼습니다. 영어로는 chamber pot 이라고 하지요. 헬라어로는 .. 2019. 12. 5.
잘못된 시작 - 빌나(Vilna)에서의 프랑스군 네만 강을 건너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나(Vilna, Wilna, Vilnius)에 입성하기까지 총 한 방 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겉으로 보기에는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프랑스군이 빌나에 입성할 때, 빌나 주민들의 반응을 봐도 그랬습니다. 당시 빌나는 러시아의 직접 통치 하에 들어간지 약 20년이 채 안 된 상태였었는데, 러시아계 관료들이나 러시아 측에 붙었던 폴란드계 귀족들은 러시아군이 철수할 때 그 뒤를 따라 함께 피난을 가버린 뒤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남아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계 주민들은 프랑스군을 해방군으로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당시 폴란드 창기병 부대를 이끌고 빌나에 거의 처음으로 입성했던 로만 솔틱(Roman Soltyk) 백작의 목격담에 따르면 거리와 광장은 환영 인파로 가득했고 창.. 2019. 1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