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클레이는 엉망진창이었던 러시아군 지휘 체계 안에서 그래도 거의 유일하게 냉정한 두뇌를 유지하고 있던 용의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6월 26일 허둥지둥 빌나 철수를 하는 와중에도 잔뜩 쌓인 군수품에 불을 질렀을 뿐만 아니라 저멀리 떨어져있던 고집불통 제2군 지휘관 바그라티온에게도 전령을 보내어 후퇴하여 자신의 제1군과 합류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잠깐, '부탁'이라고요 ?  군대에서 군사작전을 벌이면서 '부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  어쨌든 바클레이는 그래야 했습니다.  이 어이없는 일은 모두 알렉산드르의 책임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바클레이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짜르가 바그라티온으로부터 보고를 직접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뜩이나 바클레이를 싫어하던 바그라티온은 바클레이를 자신의 상관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클레이가 아니나 다를까 어이없는 편지를 보내왔을 때 바그라티온은 지시에 따르기는 커녕 폭발했습니다.  프랑스군이 드디어 네만 강을 건너 신성한 러시아의 영토를 침공했다는데 날아온 편지 내용이 고작 '후퇴하라'라니 !  바그라티온의 생각에 알렉산드르의 가장 큰 실책은 역시 바클레이에게 제1군을 맡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루지아의 상남자 바그라티온에게는 오직 전진이 있을 뿐 후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바그라티온과 함께 러시아군에서 복무하던 프랑스 망명귀족 랑제론에 따르면 바그라티온은 '시커멓고 못생긴 촌뜨기'였습니다.)

 



그런데 남자라면 굽힐 줄도 알아야 하는 법입니다.  초반의 분노가 김이 빠지자, 아무리 바그라티온이 고집불통이라고 해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자신의 6만 정도 되는 제2군은 삽시간에 프랑스군에게 포위당해 압살당하기 딱 좋다는 것이 훤히 보였습니다.  나폴레옹의 공격은 역시 날카로왔습니다.  그는 이미 러시아 제1군과 제2군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네만 강을 건너자마자 바클레이와 바그라티온 사이에 프랑스군을 쐐기처럼 박아넣어 그 둘을 분리시켰던 것입니다.  병법의 기본인 각개격파를 시전하려 했던 것이지요.  바그라티온이 바클레이 보기를 뭣같이 본다고 해서 그가 무능한 지휘관이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의도를 눈치채고 곧 철수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바그라티온도 그동안 수비가 아니라 공격을 하겠다고 설치기는 했지만 당장은 공격할 준비도, 수비할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저기 장기 주둔을 위해 흩어져 있던 그의 제2군도 철수를 하려면 재집결하는 등 시간이 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가 그렇게 바그라티온이 짐을 쌀 시간을 충분히 줄 리가 없었습니다.

인생은 뜻하지 않은 놀라움의 연속이고 전쟁은 특히 그런 법입니다.  바그라티온은 나폴레옹이 빌나에 입성하던 6월 28일에야 철수를 시작할 수 있었는데, 그때까지 그랑다르메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2군을 그대로 내버려두었습니다.  과연 전격적의 프랑스군이 맞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바그라티온은 무척 의아스럽게 생각했으나 아무튼 다행이라고 여기고 바클레이의 제1군과 합류하기 위해 북북서로 방향을 잡고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곧 프랑스군이 그렇게 제2군을 내버려 두었던 이유가 밝혀지는 듯 했습니다.  철수를 시작한지 6일 후인 7월 4일, 바그라티온은 그의 앞 길을 가로막고 있는 프랑스군이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명성이 자자한 프랑스군의 명장 다부가 직접 거느리는 군단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바그라티온이 바클레이와 합류하기 위해 북북서로 움직일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측하고 미리 거기에 다부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결국 바그라티온은 나폴레옹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럼 그렇지, 이 모든 것이 함정이었어'라고 생각한 바그라티온은 서둘러 방향을 틀어 남서쪽의 민스크(Minsk)로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민스크의 전경입니다.  현재 민스크는 과거 우리가 백(白)러시아라고 부르던 벨라루스의 수도입니다만, 원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소속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은 폴란드와 러시아, 심지어 스웨덴 등이 번갈아가며 점령하다가 폴란드 왕국 소속으로 있었는데, 결국 1793년 제2차 폴란드 분할 때 러시아 영토가 됩니다.  민스크가 도시로 발전한 것은 19세기 중반 경부터였습니다.)

 



그런데 상남자 바그라티온조차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다부를 피해 허둥지둥 남서쪽으로 방향을 휙 틀어 전속력으로 민스크를 향해 달렸는데, 정작 민스크 인근의 니에쉬비에즈(Nieshviezh)까지 와보니 그를 기다리는 것은 민스크를 이미 다부가 점령하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  과연 '축지법을 쓰시는 원수님'이라는 다부의 명성은 고스톱을 쳐서 딴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  이제 바그라티온에게는 그의 뒤를 맹렬히 추격하는 그랑다르메의 대군과 앞을 가로 막은 다부의 군단 사이에서 박살이 나는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바그라티온은 이를 악물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인생과 전쟁은 알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다부에게 가로막혀 멈춰선 바그라티온의 뒤를 곧 따라잡을 줄 알았던 후방의 그랑다르메 대군이 신기하게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 뒤를 프랑스군이 추격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 싶을 정도의 속도였습니다.  바그라티온은 기회를 놓치는 무능한 지휘관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한참 뒤에야 근처의 미르(Mir)에서 그랑다르메 소속 폴란드 창기병들이 나타나서 러시아군의 카자흐 기병들과 교전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는 이미 바그라티온은 다시 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탈출한 뒤였습니다.  그랑다르메가 바그라티온을 손쉽게 요리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탈출에 성공한 바그라티온의 제2군은 스몰렌스크에서 바클레이와 합류할 수 있었고, 결국 이들은 보로디노 전투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냅니다.  만약 이때 바그라티온과 그의 제2군이 민스크 앞에서 요격 궤멸되었다면, 어쩌면 나폴레옹의 1812년 러시아 침공 전체의 판도가 약간 바뀔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이 바그라티온의 뒤를 추격하던 그랑다르메가 예전과 달리 꾸물거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동력 하나로 온 유럽을 제패했던 그랑다르메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  분명히 바그라티온의 뒤를 추격하던 그랑다르메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다름아닌 나폴레옹 본인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의 막내 동생 제롬이었습니다.  

 

 

** PS : 최근에 제가 좀 바빠서 목요일의 잡상편은 이번주에는 못 올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음주 월요일의 제롬 이야기는 어떻게든 올려보겠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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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항상 2019.12.09 07: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어떻게
    해도 이기는 운명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

  2. 흠흠흠 2019.12.09 0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칸나에와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로마군이 참패한 것도, 저렇게 2군 사령관 격에 해당하는 인물이 말을 안 들어서인데, 바그라티온 정말 나라 말아먹으려고 옹졸하고 졸렬하네요.

    설마 2차 세계대전 당시 그 유명한 바그라티온 작전이 저 사람 이름에서 따온 것은 아니겠지요. 바클레이 작전이라고 할 것이지.

    • 하이텔슈리 2019.12.09 2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기서 뻘짓을 하고 있기는 한데, 바그라티온은 분명히 유능하고 용감한 지휘관이죠. 아마 당시 러시아군 상층부에서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걸요.

  3. 푸른 2019.12.09 1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그라티온의 기묘한 모험...

    그와중에 다부는 어떻게 바그라티온보다 먼저 민스크로 갈 수 있었을까요?

  4. 깜구 2019.12.09 19: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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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하이텔슈리 2019.12.09 2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롬이 원정 초기에 놓친 러시아군이 바그라티온의 2군이였군요.

  6. 루나미아 2019.12.09 2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부 진짜;;; 대단하네요
    그리고 제롬은 예전부터 왜 사령관직을 갖고 있었는지 의문이였는데 역시 제역할 못했나 보네요


서양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를 '꿈의 나라'라고 하며 동경합니다.  서양의 문화적 토대가 처음으로 이루어졌고, 또 민주주의의 시발점이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고대 그리스가 그런 꿈의 나라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소리를 들으면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화장실이 어땠을까 ?  간단히 말하면 이나영이나 한예슬도 화장실에 갈까 정도의 생각이지요.

 



답부터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도시 중 그래도 가장 화려하고, 또 가장 잘 발굴된 도시인 아테네에도, 공중 화장실은 없었습니다.  또 집집마다 화장실이라고 할 만한 것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테네인들은 어떻게 용변을 보았을까요 ?  뭐, 뻔하지 않습니까 ?  요강을 썼습니다.  영어로는 chamber pot 이라고 하지요.  헬라어로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요강이라는 편리한 휴대용 변기는 19세기까지도 유럽 전역에서 매우 편리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도 아테네에서는 18세기 유럽처럼, 간밤에 요강에 쌓인 내용물(영어로는 night soil이라고 하더군요)을 길바닥에다가 마구 내다버리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런 것을 수거해다가 정해진 곳에 내다버리는 노예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유아용으로 썼던 요강 겸 좌변기랍니다.  측면의 저 넓은 구멍으로 아이의 다리를 내놓은 듯 해요.)

 



사실 화장실이라는 문화는 상하수도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아테네에는 상하수도 시스템은 없었습니다.  대신 우물보다는 훨씬 세련된, 그러니까 멋진 조각으로 장식된 공공 수도꼭지 비슷한 것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물을 암포라 같은 토기 항아리에 길어서 집집마다 가져가는 것은 (물 항아리가 무척 무거울텐데도) 여자 노예의 몫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서민층은 주부가 직접 길었겠지요.  남자들이요 ?  남자들은 그런 거 안했답니다.  아고라나 장터에 가서 토론이라는 미명하에 수다를 떨었지요.  희안하게도 장보는 것은 또 남자들의 몫이었다고 하네요.  남자들이 시장에 가서 동료 시민들과 만나 실컷 수다를 떨고나서, 손에 생선이나 올리브 같은 것을 들고 오는 광경을 생각해보십시요.  우습나요 ?  전 사실 부럽습니다.

시대가 좀더 흘러 로마시대가 되면, 로마 뿐만 아니라, 웬만한 대도시에는 상하수도 시스템이 생기면서, 수세식 공공 화장실이 생깁니다.  아래 것은 폼페이에서 발견된 공공 화장실인데, 좌변기 아래에 물이 흐르게 되어있어 '투하물'이 흐르는 물에 쓸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터키 해안지방인 사르디스나 에페소스 등에서도 이런 로마식 공중 화장실이 발견됩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는 용변 보는 모습이 서로에게 흉이 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칸막이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이게 원래 서양의 풍습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대 미국의 공공 화장실은 칸막이가 상당히 개방적입니다.  즉 옆자리와 칸막이가 있기는 있으나, 발목이 다 보이도록 아래 쪽이 뻥 뚫려있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서 사용하면, 약간 불안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듣기로는 화장실 칸 안에서의 범죄를 막기 위해서라고도 하더군요.  저도 폼페이에 관광 가서 저 공중 화장실을 봤던 것을 기억나는데, '유로 자전거나라'의 여성 가이드분께서 설명하시길 여기에는 남녀 화장실 구분이 없었고, 시민들의 쾌적한 볼 일을 위해 화장실 가운데에서는 시에서 고용한 가수가 노래를 불렀다고 설명하시더군요.  

각 가정에서는 어땠을까요 ?  물론 부자집과 가난한 집이 사정이 틀렸습니다.  부자집에서는 공공 화장실에서 처럼, 좌변기 아래에 흐르는 물이 있어서 수세식이었고, 그냥 중산층 가정에서는 '투하물'이 웅덩이에 그냥 모이게 했다가 정기적으로 퍼내갔다고 합니다.  비용은 집주인이 부담해야 했다고 합니다.  소위 말하는 '푸세식'이었던 것이지요.

퀴즈 하나.  로마 가정집에서 화장실의 위치는 어디였을까요 ?  다소 충격적입니다.  주방입니다.  주방에 좌변기가 떡 하니 있었습니다.  물과 화장실이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주방의 허드렛물로 '투하물'을 쓸어내리곤 했답니다.  그래도 옆에서 음식을 하고 있는 하녀 옆에서 칸막이도 없는 좌변기에 앉아 응아를 하는 모습은 그리 청결해보이지는 않습니다....

퀴즈 둘.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난 뒤, 휴지는 뭘 썼을까요 ?  고대 아테네의 사정은 잘 모르겠습니다.  로마에서는 스폰지, 즉 해면을 썼습니다.  한 30cm 길이의 막대기 끝에 둥근 해면을 달아놓았는데, 공공 화장실에서는 이걸로 뒤를 닦고 소금물이나 식초물이 든 양동이에 다시 넣어놓았다고 합니다.  그걸 다른 사람이 물로 대충 행궈서 또 뒤를 닦고... 으윽.

 



참고로, 최초의 종이는 AD 105년인가에 한나라에서 발명되었습니다.  또 최초의 종이로 된 화장지도 중국에서 썼다고 합니다.  598년인가에 어떤 중국인 학자가, '성현의 말씀이 적힌 종이는 도저히 화장지로 쓸 수가 없다'라고 적어놓은 것이, 최초의 종이 화장지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하는군요.  또 9세기 당나라를 찾은 이슬람 학자가 써놓은 기록에 보면, '중국인들은 위생관념이 없다.  용변을 보고나서 손과 물로 깨끗이 닦지않고, 종이로 쓰윽 닦고 만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럽에서는 어떤 걸 화장실 대용으로 썼을까요 ?  16세기경에 이미 종이를 화장지로 썼다는 기록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보다는 주로 삼, 헝겊조각, 양털, 짚, 나뭇잎, 풀, 나무껍질, 모래, 물, 눈, 돌, 조개껍질 등등 손에 잡히는 건 아무거나 다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개껍질은 대체....??? 

실베스터 스탤론과 웨슬리 스나입스, 그리고 산드라 블록이 나온 영화 "데몰리션 맨"에서도 이 조개껍질 이야기가 나옵니다.  냉동되었다가 100년 후인가의 미래에서 깨어난 실베스터 스탤론이 화장실에 가는데, 휴지는 없고 대신 "three sea shell"이라고 하는 조개 모양의 물건 세개가 나란히 놓인 것을 보고 난감해하는 장면이 있지요.  그 사용법은 저도 정말 궁금했는데, 영화 맨 마지막 장면이 바로 스탤론이 산드라 블록에게 "대체 그 조개는 어떻게 사용하는거냐" 라고 묻는 것이었지요.

 



일본은 전통적으로 새끼줄을 앞뒤로 잡고 쓱쓱 했다고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조롱을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뭐 그리 우아하지는 않았답니다.  껍질을 벗긴, 얇은 나무 막대기로 뒤처리를 하고 씻어서 뒷간 한쪽에 세워놓았다는데요 ?

로마 제국이 망한 뒤, 중세 암흑기를 거친 유럽은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면서 비로소 요즘 나오는 '뽀스'를 좀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프랑스의 경우 "짐이 곧 국가니라. (L'ete, c'est moi.)"라고 말했다는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세우면서 예술과 문화의 나라로서의 행보가 본격화됩니다.  자, 베르사이유 궁전의 화장실은 또 어땠을까요 ? 

이건 다들 아실 겁니다.  역시 정답은 한마디로 '그런거 없다' 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화장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이지요.  다만 요강, 즉 chamber pot이 있었습니다.   뭐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거기 정원에 있는 덤불 숲이 원래 화장실이다 뭐다 그런 말들이 있는데, 그건 사실과는 좀 다르다고 합니다.  '요강'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루이 14세가 왕권 강화를 위해 매일 밤 무도회를 열었다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요강을 들고 왔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 요강을 들고 왔다고 하더라도, 하인들이 그 내용물을 집에 들고 갔을 것 같지는 않고, 결국 정원 덤불 숲에 버렸을테니, 결국은 그게 그거 같기도 하군요.

 

(이런 예쁜 여성용 요강을 bourdaloue '부르달루'라고 부른답니다.   영어에는 없는 표현이라서 프랑스어 사전을 찾아보니 '드문 남자 이름' 이라는 설명과 함께 '요강'이라는 뜻이 있더군요.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Louis Bourdaloue라는 이름의 유명한 예수회 신부가 하도 설교를 오래 하는 바람에 숙녀분들이 옆 방에서 잠시 용변을 해결할 수 있도록 이런 물건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 물건을 사용하는 모습을 그린 바로크 양식의 유화가 있긴 한데... 너무 노골적이라 전재하지 않습니다.  꼭 보고 싶으신 분은 https://georgianera.wordpress.com/2015/11/10/what-was-a-bourdaloue/ 클릭.)

 



방 안에서 요강에다 응아나 쉬를 하면 당연히 악취가 날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요강에는 뚜껑이 달려있었고, 또 뚜껑을 덮기 전에 천을 덮어서 악취가 새어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주인님이 응아나 쉬를 하고 나면 하인이 곧장 내용물을 내다 버렸습니다.

영국이 나폴레옹을 상대로 힘겨운 전쟁을 꾸려나갈 때, 그 전쟁 자금을 대주었다는 로스차일드의 집무실에도, 따로 화장실이 없었던 것이 확실한 모양입니다.  어느 책에서 보았는데, 로스차일드 집무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집사가 거만한 표정으로 요강을 들고 나오자, 그 앞에 진을 치고 앉아있던 많은 청원자들이 마치 성물이라도 본 것처럼 경외하는 눈빛으로 그 요강을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당시의 군함이나 상선의 경우, 난간에 간단한 구멍뚫린 좌석이 있었고, 그게 화장실이었습니다.  영어로는 그런 화장실을 'head'라고 불렀습니다.  왜 화장실을 하필 head라고 불렀는지는 간단히 설명됩니다.  당시 범선의 원리상, 당연히 바람은 배의 뒤쪽에서 불어왔으므로 선원들이 응아한 것이 배의 측면에 불러붙는 끔찍한 사태를 피하려면 화장실이 이물, 즉 배의 앞쪽에 있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냥 '뱃머리에 간다'라는 말이 화장실 간다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면서 화장실을 head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선장실에는 따로 화장실이 있었는데, 역시 '투하물'은 그대로 바다로 떨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히, 환자들을 위한 방에는 역시 화장실이 따로 있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추운 밤에 환자보고 난간에 매달려 용변을 보라는 건 좀 잔인했기 때문이었지요.  일반 여객선의 경우, 대개 '난간 화장실'을 쓰지 않고 역시 요강을 썼습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선원들 앞에서 용변을 볼 수는 없었겠지요.  남자 승객들도 파도가 심한 날에 '난간 화장실'을 쓰는 경우 바다에 추락할 위험이 많았습니다.

위와 같이 선박인 경우는 드넓은 바다가 '투하물'을 처리해주었으니 차라리 위생적이었습니다.  문제는 대도시인 경우, 요강의 '내용물'을 어디다 버리느냐입니다.  답은 다들 아시지요 ?  그냥 길바닥에 버렸습니다.

1807년, 나폴레옹 전쟁의 복잡한 국제 관계로 인해, 영국은 엉뚱하게도 나폴레옹과 대립하던 덴마크 왕국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덴마크 왕국에게는 아담한 규모의 멋진 함대가 있었는데, 트라팔가 해전에서 함대를 모두 말아드신 나폴레옹께서 그 함대를 탐냈습니다.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힘없는 덴마크가 나폴레옹에게 함대를 빼앗길 것 같다는 판단을 한 영국은, 덴마크에게 매우 거만한 요구를 하게 됩니다.  '그 함대를 내놓아라.  그러면 우리가 잘 보관했다가 좋은 시절이 오면 되돌려주마.'

덴마크도 엄연한 주권국가인데, '예, 그러시지요' 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를 거부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영국 육해군이 코펜하겐을 포위하고는 바다와 육지에서 곡사포로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소위 '자위적 선제 공격'으로도 유명하고, 또 백인들끼리의 전쟁에서 최초로 민간인 거주 지역에 무차별 포격을 가한 최초의 사건으로도 유명한 일입니다.

 



이때 코펜하겐에는 Eckersberg라는 화가가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의 집에도 곡사포에서 발사된 폭탄 하나가 지붕을 뚫고 날아들어왔습니다.  이 화가는 급한 김에 요강을 들어 그 내용물로 폭탄의 도화선에 붙은 불을 껐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 화가는 1807년의 코펜하겐 폭격 사건을 목판화로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위의 그림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나폴레옹 블로그인데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화장실 일화가 하나는 있어야겠지요 ?  나폴레옹이 퐁텐블로에서 퇴위 조서에 서명한 뒤 1차로 폐위되어 엘바 섬에 유폐되었지요.  사실 거기에 간 형태는 엘바 섬에 죄수로 간 것은 아니고 엘바 섬의 군주로 봉해져서 것이었습니다.  20년 넘게 파리에서 권좌를 누리다가 간 나폴레옹의 눈에 엘바 섬과 같은 촌동네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습니까 ?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도착해서 배에 내린 뒤 처음 내린 명령이 '이 동네에 화장실을 만들라, 악취가 난다' 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만, 저는 그게 사실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유럽 대도시는 어디나 다 요강 내용물의 냄새가 났을테니까요. 

 

 

 

Source :  https://eaglesanddragonspublishing.com/tag/sponge-on-a-stick/

https://www.pinterest.jp/pin/535717318145424968/

https://en.wikipedia.org/wiki/Chamber_pot

https://georgianera.wordpress.com/2015/11/10/what-was-a-bourdalo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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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강여호 2019.12.05 07: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화장실 이야기 재밌게 읽었습니다.

  2. Nasca 2019.12.05 1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헬레스폰트 연재 다시 해주세요

  3. j 2019.12.05 2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먹는것만큼 중요한게 싸는(!)일이죠ㅎㅎㅎ 재밌게 읽고 갑니다!

  4. Kulnev 2019.12.06 1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옛 글이지만 언제 읽어도 유익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5. 이타카 2019.12.06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럼 하인들은 어디에 용무를 봤을까요..?


네만 강을 건너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나(Vilna, Wilna, Vilnius)에 입성하기까지 총 한 방 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겉으로 보기에는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프랑스군이 빌나에 입성할 때, 빌나 주민들의 반응을 봐도 그랬습니다.  당시 빌나는 러시아의 직접 통치 하에 들어간지 약 20년이 채 안 된 상태였었는데, 러시아계 관료들이나 러시아 측에 붙었던 폴란드계 귀족들은 러시아군이 철수할 때 그 뒤를 따라 함께 피난을 가버린 뒤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남아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계 주민들은 프랑스군을 해방군으로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당시 폴란드 창기병 부대를 이끌고 빌나에 거의 처음으로 입성했던 로만 솔틱(Roman Soltyk) 백작의 목격담에 따르면 거리와 광장은 환영 인파로 가득했고 창문들에는 여인들이 상반신을 내밀고 손수건을 흔들며 기뻐했습니다.  꽃다발과 함성이 난무했고요.

 

(1812년 당시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인 외젠 보아르네 휘하 참모진에 있던 알브레히트 아담(Albrecht Adam)이라는 종군화가가 스케치한 그랑다르메 보병들의 행군 모습입니다.  알브레히트 아담은 바이에른 출신의 독일인으로서, 1809년 전쟁 때 보아르네에게 종군 화가로 채용되어 이후 계속 바이에른 궁정 화가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 분은 스케치 뿐만 아니라, 나중에 전쟁이 끝난 뒤 이런 스케치와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여러 석판화와 유화도 그려 꽤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그 그림 중 일부는 지금도 유럽 곳곳의 박물관에 걸려 있다고 합니다.  사진은 제가 요즘 거의 베끼다시피 하고 있는 아담 자모이스키의 책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에 포함된 그림입니다.  당시 알브레히트 아담은 주로 이탈리아인들로 편성된 제4군을 따라다녔다고 하니까 저 그림 속 병사들도 아마 이탈리아군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군이 빌나에서 찾아낸 것은 다 타버린 러시아 군수품의 잿더미 뿐이었습니다.  빌나와 그 인근 지대는 러시아군이 이미 수개월에 걸쳐 장기 주둔하며 먹을 것을 박박 긁어먹고 간 뒤였기 떄문에 식량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박박 긁어모았던 식량은 러시아군이 철수할 때 용의주도한 바클레이가 모두 불태워 버렸고요.  그런 상황은 원래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후방지대에 엄청난 양의 군수품을 잔뜩 쟁여놓았습니다.  그러나 네만 강을 건너자마자, 정확히 이야기하면 네만 강을 건너기 전부터도 말들이 사료 부족과 형편없는 도로에서 기진맥진하여 빠르게 죽어쓰러지기 시작했고, 특히 네만 강을 건넌지 얼마 안되어 불어닥친 폭풍우 속에서 수만 마리의 말이 죽어버린 것이 상황을 정말 악화시켰습니다.  진흙구덩이와 물웅덩이 속에서 말들이 허우적거리다 죽어버리자, 식량을 후방에서 새로 실어오기는 커녕 그나마 이미 싣고 오던 것조차도 버리고 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버려야 했던 짐 중에는 말들의 먹이인 귀리도 잔뜩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곧 더 많은 말들이 영양 실조로 죽게 되었고 상황은 기하급수적으로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랑다르메를 덮친 폭풍우로 인해 진흙탕이 된 도로에서 고생하는 포병대를 그린 모습입니다.  이 그림도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에 포함된 것입니다.  Christian Wilhelm von Faber du Faur라는 분이 그린 석판화입니다.  이 분도 남부 독일인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화가인데,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에 배속된 종군 화가였습니다.)

 



그렇게 빌나로 반입되는 식량은 전혀 없던 반면, 먹여살려야 하는 입들은 삽시간에 깜짝 놀랄 정도로 잔뜩 몰려들었습니다.  후방 뿐만 아니라 전방에서도 많은 그랑다르메 병사들이 절뚝거리며 빌나로 몰려든 것입니다.  낙오병과 환자, 부상병들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40만 그랑다르메 중 상당수는 단련된 병사들이 아니라 단시간에 긁어모은 어린 신병들이 많았는데, 특히 그런 신병들은 부족한 식량과 열악한 도로 및 위생 환경에 버티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총상이 아닌 강행군에 의해 발과 다리에 생긴 부상과 함께 온갖 질병으로 인해 빌나에 차려진 야전 병원에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네만 강을 건넌지 1주일 만에, 아무 전투가 없었는데도 놀랍게도 이들의 숫자는 3만 명에 달했습니다.  전체 병력의 7~8%에 해당하는 인원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빌나 및 인근 지역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주민들의 기쁨도 삽시간에 식어버렸습니다.  주민들은 나폴레옹이 과거 영광을 누리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복원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어렵더라도 최소한 러시아의 농노제라는 신분의 예속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은 곧 나폴레옹에겐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령 7월 3일, 나폴레옹은 리투아니아 정부 수립을 발표했는데, 이는 바르샤바 공국과의 합병을 원천 봉쇄하고 그저 리투아니아 지역에서의 징병과 식량 징발을 실행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 명백했습니다.  열의에 찬 빌나 대학의 학생들이 일종의 정치 모임을 만들어 프랑스군 점령 지역은 물론 러시아군 점령 지역에서도 농민들에게 러시아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선전하겠다는 뜻을 전하자, 나폴레옹은 '사회 정치적 소요를 원치 않는다'며 그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또 빌나 대학의 학장인 얀 스나이데츠키(Jan Sniadecki)와 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이야기가 나오자 '그 사람은 굉장히 뛰어난 황제요 !' 라며 노골적으로 알렉산드르의 편을 들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바르샤바 공국에서 일단의 폴란드 애국자들이 먼 길을 찾아와 폴란드 왕국의 부활을 건의하자 '내 통치 하에는 이해가 서로 충돌하는 많은 집단이 있고 나는 그들의 충돌을 조절해야 한다'라며 그들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이 전쟁이 벌어진 주요 원인은 크게 2가지, 영국-러시아 간의 무역 그리고 폴란드 왕국의 부활에 대한 러시아의 반발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러시아 항구를 영국으로부터 닫아야 했고 또 폴란드인들의 충성이 꼭 필요했습니다.  애초에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은 도저히 상존할 수 없는 서로의 이해 관계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의 팔을 비틀어서라도 어떻게든 러시아와의 동맹을 다시 끌어내려 했습니다.  즉, 나폴레옹이 이 전쟁에서 바라는 것은 알렉산드르와의 화해였고, 그 때문에라도 나폴레옹은 끝끝내 농노 해방령이나 폴란드 왕국의 부활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주민들의 민심을 이반시킨 것은 그런 민족주의에 대한 배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배고픈 병사들은 어떻게든 먹을 것을 구해야 했고, 당연히 곳곳에서 난폭한 약탈이 자행되었습니다.  그랑다르메의 제1진은 언제나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했지만, 그들이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을 다 훑어먹으며 지나가자, 제2진을 맞이하는 것은 텅빈 마을들과 버려진 농토 뿐이었습니다.  농민들은 그랑다르메를 산적떼로 인식하게 되었고, 프랑스군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농민들은 얼마 안되는 식량과 가축을 몰고 깊은 숲 속으로 피난을 떠나버렸습니다.  농민들은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프랑스놈들은 우리의 족쇄를 풀어주러 왔다는데, 우리 신발까지 벗겨가더라."

그랑다르메의 병사들도 그에 대응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계 주민들을 사실상 적으로 대했습니다.  요제프 에즈몬트(Jozef Eysmont)라는 시골 신사는 빌나 인근에 있던 자기 장원으로 들어오는 프랑스 기병대를 전통에 따라 빵과 소금으로 환대하려 했으나, 그들은 곧 그의 창고와 마굿간을 탈탈 털더니 더 나아가 아직 익지도 않은 밀과 보리를 다 베어버리고 집안까지 쳐들어와 구석구석을 뒤집어 귀중품을 빼앗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들고가지 못하는 모든 가구를 아무 의미 없이 때려부수고 창문도 하나하나 다 깨어버렸습니다.  그의 마을 전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물론 무덤까지도 프랑스군의 약탈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한 폴란드 장교는 그에게 빵 한조각을 구걸하며 다가오는 거지를 밀어내려다 그 거지가 그의 친구이던 폴란드계 귀족인 것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폴레옹도 이런 약탈에 대한 보고를 당연히 들었고 대노했습니다.  그는 약탈자들에 대해서 일체의 관용을 베풀지 말고 즉결 처분에 처하도록 엄명을 내렸습니다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식량을 공급받지 못하는 군대는 약탈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병사들은 굶어죽으나 총에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절망과 체념이 섞인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병사들이 취할 행동은 딱 하나였습니다.  탈영이었지요.  탈영은 광범위하게 일어났습니다.  특히 고향에서 너무나 먼 리투아니아 현지에서 탈영병들은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떼를 지어 산적떼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곳곳에서 현지 주민들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 장교나 관료들까지 습격했는데, 이들 때문에 나폴레옹의 명령서를 전달하는 파발마들의 활동이 제약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탈영병들의 숫자는 최소 3만에서 최대 9만까지 되었다고 하는데, 탈영병의 숫자가 이렇게 너무 많다보니 이들을 체포하는 대로 다 처형할 수도 없었습니다.  간혹 이들을 잡아들일 경우 일부만 처형하고 대부분은 다시 부대에 편입시켰는데, 이들은 대부분 다시 탈영했습니다.

결국 네만 강을 건넌 뒤 나폴레옹에게 들어오는 것은 온통 나쁜 소식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나쁜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불시에 네만 강을 건너 빌나를 들어친 것은 확실히 기습 효과가 있었고, 그로 인해 러시아군을 궤멸시킬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Albrecht_Adam

https://en.wikipedia.org/wiki/Christian_Wilhelm_von_Faber_du_Fa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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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ranken 2019.12.02 0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군에서 군복무한 병사들이 하나같이 하소연하는 게 행군이 생각이상으로 힘들고 부실한 전투화 땜에 발바닥 및 발목에 물집,상처까지 생겨 이중으로 힘들었다는 건데 인프라가 없다시피한 당시엔 3만여명의 부상자는 평범한 수준이었겠죠. 군납비리가 한국군 이상으로 만연해서 군화 재질도 좋지 못했던 것도 감안하면 선방했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매사 꼼꼼했던 나폴레옹이 이걸 몰랐을 리는 없으니 이런 낙오병도 계산에 넣어 대군을 꾸린 거겠죠.

    • reinhardt100 2019.12.02 1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군화문제 이거 꽤나 중요합니다.

      독소전 당시 소련군이 심각하게 직면한 문제 중 하나가 군화문제입니다. 가장 심각했던 공업용 소금과 비타민 섭취보다 후순위이긴 하지만 군화가 없어서 병력충원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이걸 해결해준게 미국의 랜드리스인데 최소 1500만 켤레의 군화가 소련에 급송됩니다.

      냉전기 소련군이 기계화에 집착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군화문제입니다. 소련식 발싸개나 우샨카 같은 신발 아니면 인민군이 쓰는 지하족 같은 운동화로 진격하다간 며칠만에 발이 아작나니 최대한 기계화해야 후유증이 덜할 거니까요. 농담으로 들으실지 모르지만 이게 현실이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군이 발싸개 퇴출한게 2010년대였으니까요.

    • 기리스 2019.12.02 14: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발싸개를 자신들의 전통, 자존심 같은 걸로 여기면서 옹호하는 러시아인들이 꽤 되더군요. 것도 신발 나름이고, 민간이나 군에서도 해군 같이 구두 많이 신는 곳은 옛날부터 양말이 보급되었죠.

    • 카를대공 2019.12.02 1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군대에서 인상 깊게 읽은 책의 구절 중 하나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베트남 군인들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베트남 군인들은 폐타이어로 된 신발을 신고 행군을 했다"
      그당시에도 기겁을 했는데 나시카님 이번주 글을 보니 그때가 떠오르네요.

    • [][] R.F.[][] 2019.12.06 1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reinhardt100: 러시아식 전통 펠트 방한화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우샨카가 아니라 '발렌끼' 입니다.
      우샨카는 소련 및 러시아군 특유의 방한모죠 ^^

    • reinhardt100 2019.12.06 14:14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제가 잘못 적었네요. ^^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흠흠흠 2019.12.02 0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력이 솜사탕처럼 녹아내리고 있네요. 약탈행위를 전혀 못 잡는 것으로 보아 나폴레옹이 대노했다는 것도 그냥 연기인 것 같습니다. 진짜 잡으려고 마음 먹었으면 웰링턴처럼 약탈행위 잡았겠죠. 저렇게 본국에서 멀리 떨어질 수록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소속 군부대 밖에 없을텐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현지에서 산적떼를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죠? 못 배운 사람들이라서 그러나.

    • ㅋㅋㅋ 2019.12.02 14: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쉿. 매일 격노만 하시는 그분 지지자들이 뜨끔합니다

    • ㅇㅇ 2019.12.02 2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 멀어서 돌아가기에도 막막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싶습니다. 빌뉴스에서 바이에른까지 1000km, 파리나 북이탈리아까진 1500km에 가까우니까요

  3. 리순센 2019.12.02 1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직 본격적인 시작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정신이 아득해지네요.

  4. 장웅진 2019.12.02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째 <알기 쉬운 제2차 세계대전사 제3권 - 대초원의 불꽃>을 다시 읽는 기분입니다. 나치독일군을 해방군이라며 환영했던, 스탈린에 의한 인공대기근을 겪어야 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나치독일군이 집단농장을 해체하기는커녕 그걸 계속 이용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을 수탈하고 괴롭히자 파르티잔으로 변해갔더라는...

    • reinhardt100 2019.12.02 1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크라이나나 백러시아, 발트 3국, 심지어 폴란드조차도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을 환영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일단 제국의 괴뢰국이긴 해도 독립을 약속했던 것도 있습니다. 하나 더 1917년 이후 철도 전격전 당시 약 150만 독일 동방 점령군이 제정 러시아보다 훨씬 공정한 점령통치를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독소전쟁 초기 독일군에 대한 환상이 있던 이들 지역 주민들이 모두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볼 수 밖에 없었죠. 심지어 우크라이나에서는 나시카님이 쓰신대로 빵과 소금을 뿌리면서 열렬히 환영했죠.

    • Franken 2019.12.02 19: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만일 나치독일이 점령지 주민들을 인간 대우 해주었다면 독소전쟁의 향방 자체가 달라졌을 겁니다. 파르티잔 퇴치하는 데만 30여만명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니 일개 야전군 수준의 이 병력이 소비에트 전선에 투입되고 주민의 협조까지 얻으면 소련으로썬 매우 난감한 상황이 되었을 테죠.

    • reinhardt100 2019.12.03 1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독소 전쟁 당시 독일군이 투입한 후방 치안 병력만 30만이 넘었지만 실제로는 더 투입했다고 봐야 합니다. 우선, 상당수 동맹국 병력이 고려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특히 루마니아나 헝가리군의 경우, 심하면 1/4 이상이 자국 근처의 점령지에 주둔하고 있던 군정통치용 병력이라 막상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죠. 루마니아가 대표적인데 80만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는데도 전선에 전개한 병력은 약 50만 선에서 왔다갔다 했습니다.

      하나 더 고려한다면 각 지역의 민병대 병력이나 독일 본토에서 급파된 경찰 출신 혹은 무장친위대 제8사단 플로리안 가이거 같은 병력도 꽤 됩니다.

      이런 병력들까지 고려한다면 최소 40만은 넘어가야 한다고 전 봅니다.

  5. keiway 2019.12.02 16: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수록 당시의 생활/기술 수준으로는 러시아 원정 실패는 필연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폴레옹도 그걸 모르지는 않아서 러시아와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화평을 맺으려 했지요... 그래도 결국은 '내가 한방 쎄게 빡 치면 나한테 항복하겠지' 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나폴레옹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나폴레옹의 실책과 그로인한 몰락이 참 아쉽게 느껴집니다.

    • 카를대공 2019.12.02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술 수준이라는 말씀이 딱인거 같습니다.
      뭐랄까 대자연이 "하지마라"고 강요하는 느낌?
      사실 나폴레옹과 당시 프랑스니까 당시 수준으로 모스크바까지라도 갔다고 생각합니다.

  6. 카를대공 2019.12.02 1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원정 당시 비전투 손실이야 유명하지만 네만강 건너자마자 꼴이 무척 심각했네요.정말 상상 이상입니다.
    항상 좋은 정보로 재미난 글 써주셔서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7. 웃자웃어 2019.12.03 2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게 있는데 당시의 기병과 포병은 모병인가요? 아니면 강제징집 인가요?

    • nasica 2019.12.04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질문인데 답을 잘 모르겠군요. 그러나 기병과 특히 포병이 보병보다 급료가 좀더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자원병들로 충원되었을 것 같습니다.

    • Franken 2019.12.05 14:50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병은 말을 다루어야 한다는 특성상 아무나 못하여 어렸을 때부터 타본 경험 있는 부유층 자제들이 주로 지원했고 군에서도 선호했습니다. 포병 역시 당시 대포가 직접사격 위주였다지만 그래도 탄도학 같은 산수능력은 있어야 명중율이 나왔기에 학식을 갖춘 중산층 이상 자제를 선호했지만 뽀대가 기병보다 안 나고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단점 때문에 지원자가 적어 급하면 일반 서민도 받는 등 상대적으로 문이 열려 있었죠.

    • 웃자웃어 2019.12.05 2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병과 포병이 숙련도를 요구하기 때문인가요? 그렇다면 일반 보병과 비교했을때 복무기간은 어느정도 되나요?


6월 23일 아침, 나폴레옹은 미리 준비해둔 감동스러운 연설을 통해 '제2차 폴란드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이 전쟁을 통해 지난 50년 간 러시아가 유럽에 보여주었던 오만한 영향력을 분쇄할 것이라고 병사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당연히 병사들은 'Vive l'Empeurer !'를 외치며 호응했고, 나폴레옹을 속으로 싫어하던 장교들과 병사들마저도 그 광경에는 감탄해마지 않았습니다.  그 날 저녁부터 나폴레옹은 소수의 부하들만 데리고 네만 강가를 달리며 적절한 도하 장소를 물색했고, 마침내 밤 10시에 제13 경보병 연대가 보트를 이용하여 어둠 속에 조용히 강을 도하했습니다.  네만 강 동쪽 강변을 장악한 이들의 엄호 속에서 에블레(Jean Baptiste Eblé) 장군의 공병대가 3가닥의 부교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에블레 장군입니다.  이 분이 유명한 것은 네만 강을 건널 때보다는 베레지나 강을 건널 때의 공적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니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이 분이 시작해서 이 분이 끝냈군요.)

 



프랑스군과 대치하고 있던 러시아군은 평소에도 주기적으로 네만 강변을 정찰하며 프랑스군의 도하를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작업이 한창인 어둠 속에서, 마침내 한 무리의 러시아 경기병 정찰대가 제13 경보병 연대의 경계선 앞에 나타났습니다.  앞에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의 군부대가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러시아군의 지휘 장교는 프랑스어로 수하를 했습니다.

"Qui vive ?"  (직역하면 Who lives ? 정도이지만 '앞에 누구냐?' 정도의 질문입니다.)

거기에 대해 프랑스 장교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France !" (글자 그대로 '프랑스다 !' 네요.  왠지 멋있는 답변인데요?)

연이어서 욕지꺼리들과 함께 프랑스군이 일제 사격을 하면서 이 짧은 만남은 끝나버렸습니다.  나폴레옹도 이 머스켓 일제 사격 소리를 듣고 짜증을 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가능한 한 조용히 강을 건너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더 이상의 소란 없이 작업은 착착 진행되었고, 나폴레옹은 다시 막사로 돌아가 2시간 정도 토막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새벽 무렵 이 부교들이 완성되자, 나폴레옹이 주변 언덕에 올라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다른 한 손으로 쥔 망원경을 통해 바라보는 가운데 다부 휘하의 사단들이 제일 먼저 이 부교들을 통해서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그랑다르메가 3량의 다리들을 통해 강을 건너 러시아 땅으로, 좀 더 정확하게는 러시아령 리투아니아 영토로 행군해 들어가는 모습은 대단히 장엄한 모습이었습니다.  원래 프랑스군의 정장 군복은 멋있기는 해도 그다지 편한 옷은 아니었기 때문에, 긴 행군에 나설 때면 정장 군복은 돌돌 말아 배낭 속에 집어넣고 좀더 편하고 헐렁한 셔츠 및 회색 바지와 가벼운 모자 차림으로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 극적인 날을 위해 병사들은 전투에 나설 때처럼 정장 군복을 차려입고 다리를 건넜기 때문에 그랑다르메의 도하는 더욱 볼 만한 광경이었습니다.

 

 

(프랑스 근위대의 군복입니다.  도저히 활동성이 좋은 의복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그래도 전투에 나설 때 저런 복장으로 나서면 확실히 사기는 좀 오를 것 같기는 합니다.)

 

 

(네만 강을 건너는 그랑다르메의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의 목표는 당연히 러시아 제1 군의 총사령부이자 알렉산드르의 임시 행궁이 있던 빌나(Vilna)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전쟁 시작 전에 '목표는 일단 스몰렌스크다, 거기서 러시아의 식량을 먹으며 러시아 비용으로 겨울을 나면서 알렉산드르를 압박하겠다' 라고 했다가 다음 번에는 '목표는 모스크바다,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심장이다' 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도 오락가락 했던 것은 러시아가 워낙 넓은데다 아무래도 수비적인 태세였던 알렉산드르가 결전을 회피하고 계속 후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5월 들어 나폴레옹에게 들어온 정보 중에 아주 좋은 것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빌나에 왔다는 것입니다.  이건 분명히 러시아가 국경에서 물러나지 않고 그랑다르메의 침공에 맞서 싸우려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빌나라면 네만 강을 건너 불과 2~3일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기습적으로 강을 건너 빌나를 들이친다면, 잘 하면 러시아 제1 군을 격파하고 아우스테를리츠에서 그랬던 것처럼 알렉산드르를 다시 한번 무릎 꿇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40만 대군이 강을 건너는데 러시아군이 눈치를 채지 못할 리가 없었습니다.  6월 23일 밤의 일제 사격은 결국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고 미친 듯이 말을 달린 러시아군 전령이 빌나에 들어온 것은 24일 밤 자정이 넘은 뒤였습니다.  하필 이 날 밤은 빌나에 있던 베니히센(Levin August von Bennigsen)의 저택에서 알렉산드르를 위한 무도회가 있던 밤이었습니다.  이 날 짜르는 베니히센의 와이프 및 바클레이의 와이프 등과 인사치레의 춤을 같이 춘 뒤 빌나 사교계 최고의 미인 몇 명과 춤을 추고 기분이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조용히 신하가 접근하여 귓속말을 전했고, 알렉산드르는 무도회 분위기를 깨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비웠습니다.

 

(나폴레옹이 정확하게 네만 강 어디를 건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빌나와 네만 강은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당장 새벽부터 주요 참모들과 장관들이 새벽잠을 설치고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습니다만, 급히 소집된 회의에서 아무도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이건 사실상의 총사령관 역할을 자임하고 있던 알렉산드르의 잘못이었습니다.  여태까지 여러가지 안을 손에 쥔 채 아무 것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것이 바로 그였으니까요.  장기 주둔을 위한 식량과 물, 숙소 등의 문제 때문에 러시아 제1 군은 네만 강변 곳곳의 마을에 넓게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군은 당장 벌어진 프랑스군의 침공에 제대로 대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방어든 공격이든 뭐라도 해보려면 당장 병력을 집결시켜야 했는데, 그러려면 적어도 며칠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당장 이틀 안에 빌나 코 앞에 나타날 거리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군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후퇴였습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네만 강을 건넜다는 소식은 빌나 시내에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젊은 러시아 장교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전쟁이다 !'를 외치며 기뻐했습니다.  이들은 당장이라도 프랑스군과 결전을 벌이고 빛나는 승리를 거둘 것 같은 기세였습니다.  하지만 당장 이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퇴각'이었습니다.  장교들의 낙담과 분노는 가히 짐작할 만 했습니다.  그들 중 아무도 자신들이 전투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조차 제대로 이해를 못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이틀이면 빌나에 나타날 거라고들 했지만, 당장 그 다음날인 6월 26일 아침 일찍, 프랑스군 기병대가 빌나 인근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당장 알렉산드르의 용기는 어디론가 날아가버렸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약간 창피할 정도로 서둘러 빌나를 빠져나갔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빌나는 일대 공포와 혼란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와중에 그래도 침착함을 유지한 것은 바클레이였습니다.  그는 질서있게 부대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리고 빌나에 접한 네리스(Neris) 강에 놓인 다리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 몇 달간 빌나 시내로 열심히 끌어모았던 군수품과 식량에도 불을 질렀습니다.  

 

 

(빌나, 아니 빌니우스(Vilnius)의 모습입니다.  꽤 아담하면서도 아름다운 도시같네요.)

 



2일 후인 6월 28일, 나폴레옹이 빌나에 입성했을 때까지도 바클레이가 군수품에 질렀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과 함께 빌나에 들어온 다부는 애처가였습니다.  그는 다음날 부인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은 총 한방 쏘지 않고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리투아니아를 정복한 것에 대해 무척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수선한 빌나에 들어와 불과 48시간 전에 알렉산드르가 숙소로 쓰던 주교관에 자리를 잡은 나폴레옹의 생각은 다부와는 달랐습니다.  그는 낙담하거나 실망했다기 보다는 굉장히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르와 러시아군이 이렇게 허겁지겁 도망가버린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군이 대군을 빌나까지 전진배치했을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르가 최전선까지 나와 군을 통솔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자신과 대회전을 벌일 각오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는데, 막상 다가가니 러시아군은 어이없게 줄행랑을 쳐버린 것입니다.  많은 군수품에 불까지 지른 것을 보면 뭔가 계획적으로 퇴각을 한 것 같지도 않고 서둘러 도망을 친 것 같았습니다.  그로서는 러시아군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직도 러시아가 어떻게 돌아가는 나라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Jean_Baptiste_Ebl%C3%A9
https://en.wikipedia.org/wiki/Levin_August_von_Bennig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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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9.11.25 07: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 네만 강, 네무나스 강을 넘어 도하했네요.

    만약이지만 프랑스군이 빌나우스까지의 거리만 행군하면서 러시아군과 결전을 벌였다면 꽤나 재미있는 결과를 낳았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두 배 가까운 병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밀어붙이는 프랑스군의 공세를 러시아군이 막이낸다? 무리라고 봅니다.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과 추축국 지원병력은 브레스트, 민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등에서 연이어 소련군 주력을 붕괴시키는데 성공했는데 비슷한 결과가 나왔을 거라고 봅니다.

    또한 숫적 우세도 우세지만 더 큰 이유가 독소전쟁 당시 소련은 '180개 사단이 섬멸된 뒤 360개 사단을 전선에 내보낸다.', '모스크바가 함락되어도 우랄산맥을 넘어서 싸운다'는 등 의 전쟁지도가 가능했지만 이 당시 러시아는 그럴 수 없었거든요. 국가 주력농업지역인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 모스크바 주변 평원 지대 전부가 프랑스군에 넘어가면 폴란드-모스크바 전쟁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났을 테니까요. 즉, 파탄난 전시경제로 전쟁지속? 무리입니다.

  2. JS Choi 2019.11.25 0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도 그런 뉘앙스의 문장이 종종 나오죠.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점령 후 러시아에서 취했던 여러 조치들이 사실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개화되고 훌륭하고 합리적인 것들이었다는...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나폴레옹도 결국 합리적인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남들도 자기처럼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라고 짐작하는 비합리적인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었나 봅니다.

  3. 하이텔슈리 2019.11.25 0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갑자기 든 생각인데, 프랑스군답지 않게 더 천천히 진군했다면 러시아가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는 시간이 생겨서 나폴레옹이 원했던 결전을 벌일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모 책에서 봤던 유머 하나가 생각납니다. 1차대전 한 독일 장군의 불만 "러시아놈들의 통신은 방수하기 쉬워서 그놈들이 언제 어디로 올지 쉽게 알았다. 그런데 그때 거기로 가보면 언제나 그놈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세웠던 계획이 엉망이 됐다!")

    • 유애경 2019.11.25 08: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재미있는 유머네요!

      에블레장군의 이름이 애벌레랑 겹쳐서 조금 웃었습니다.

  4. 푸른 2019.11.25 1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너무나도 철저히 준비하는 바람에 알렉산드르가 정신차리고 후퇴한거 같네요.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인가 봅니다

  5. spitfire 2019.11.25 1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알렉상드르가 도망가는게, 자료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사장님 주재 미팅이 잡혀 황급히 도피성 외근을 나가는 팀장의 모습 같네요~

    러시아 원정의 실패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고만고만한 사이즈의 나라들이 대국의 마인드를 이해하지 못한 것도 한가지 이유라 생각합니다. 확실히 BRICs 같은 대국의 인간들은 경험이나 상식 자체가 다른거 같더라고요.

    • reinhardt100 2019.11.25 14: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동감입니다.

      사실, 한국에서 러시아를 보는 눈이 '이빨빠진 불곰국(?)'으로 보는 경향이 최근 30년간 무척 강해진 듯 합니다.

      18세기 후반 이미 서방권에서는 중국이 크게 쇠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대신 러시아제국이 미래의 패권국 중 하나가 된다고 이미 식자층에서는 다들 하나의 정론이 된 상황이었죠. 이걸 확실히 각인시켜준 전쟁이 바로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이기도 합니다.

      지나사변, 흔히 말하는 중일전쟁 역시 대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전면전이기도 합니다. 일본이 1890년대 이후 계속 중국에 대해 우세한 입장을 취하다보니 중국의 잠재적 국력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선제공격으로 전면전을 개시했는데 막상 중국의 잠재적 국력이 모두 투사되기 시작한 남경함락 이후부터는 전쟁 자체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이왕 말이 나온김에 계속 쓰지만 중일전쟁은 결코 일본의 일방적인 우세로 진행된 전쟁이 아니고 주력 또한 장개석 영도하의 국민당군이 처음부터 끝까지 100만 지나파견군 및 40만 이상의 관동군, 주몽군 병력을 상시 전개를 시키게 만들면서 싸운 전쟁이었습니다.

      의외로 간과된 사실이 중일전쟁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화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더 많은 정화준비 및 국채상환능력을 보유하냐?' 이 점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죠. '중국 국민당 정권의 법폐냐? 일본의 조선은행권 및 왕조명정권의 중앙준비은행권 등 기타 엔계 은행권이냐?' 이 질문하나로 전쟁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것인데 이것 하나를 이해하지 못한 일본에게는 이미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대 한국에서 유달리 강해지는 타국 경시 문화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 ㅋㅋㅋ 2019.11.25 2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 단군 정신으로 4천만 총옥쇄를 한다면 다시는 KRW가 JPY한테 지지 않을 겁니다

    • 나삼 2019.11.25 2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번 반일선동과 그에 휩쓸린 일부 국민들을 볼때면 타국.....;; 세계 최상의 경제대국을 우숩게 보는 관점에 소름이 돋기도 합니다. 구한말 조선의 모습이나 1820의 러시아 장교들 이 오버랩된달까요..

    • ㅇㅇ 2019.11.29 0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한일 관계를 걱정하고 있지요.
      그런데 저 위의 4천만 총옥쇄 주장하시는 윗분 같은 사람들은 좀...
      중국의 사드 보복때 한 중국 인사가 소국이 대국에 덤비면 안된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죠.
      이번 한일 관계에서마저 '소국인 한국이 대국인 일본에 덤비면 안 된다'는 식의 사대주의를 표하는 분들이 당시의 친중파들이거나 그들의 맥을 잇는 분들로 보여 유감스럽습니다

    • ㅋㅋㅋ 2019.11.30 0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국이 대국에게 덤비면 안되는게 아니라
      이길 수 없는 상황에 덤비면 안되는 거랍니다.

      단결된 의지로 국력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요?암요.

      토착양키 야마모토 이소로쿠같은 노망 난 노인이나 감히 야마토 정신을 부정하지, 75년 전 히로시마는 야마토 정신이 부족해서 우라늄 따위한테 졌던 거라구요.

      굽시니스트 표현처럼 유니클로 사장 싸대기를 맛깔나게 때리면 아베가 도게자 한다는 걸 전략으로 들고와선 토착왜구니 사대주의니 ㅋㅋㅋ

    • ㅇㅇ 2019.11.30 1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상대가 공격을 했으면 버티거나, 빌거나 둘 중 하나인데 덤비긴 뭘 덤벼요?
      누가 보면 한국이 일본 수출규제에 속수무책이라서 망하기 전에 일본에 선전포고해서 쳐들어가려는 건 줄 알겠네 ㅋㅋㅋ

    • ㅋㅋㅋ 2019.11.30 1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거북선 횟집에서 죽창가를 부르면 아베가 도게자를 한다?

      약관 못지켜서 VIP멤버쉽 강등된거 가지고 공격이니 규제니 부들대는 것도 웃기지만, 그래서 다시는 지지 않겠다니, 거북선 횟집에서 회식하니 하는 양반들이 무슨 도움이 됬어요?

      토착왜구 이낙베가 일본에 제시한 안이라는 것도 웃기던데 ㅋㅋ

    • ㅇㅇ 2019.11.30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베한테 도게자? ㅋㅋㅋㅋㅋㅋㅋ 이 분은 진짜 대한민국이 일본에 선전포고해서 쳐들어간 걸로 알고있나보네

    • ㅋㅋㅋ 2019.12.04 0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은하제국의 전제적 전체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이 성전에 반대하는 자는 모두 국가를 해하는 자들이라고. 영예로운 동맹의 국민 될 자격이 없는 자들이라고! 자유로운 사회와 이를 보장하는 국가체제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않고 싸우는 자만이 진정한 동맹국민이라고. 그 각오가 없는 비겁자들은 영령 앞에서 부끄러워하라고! 이 나라는 우리의 선조가 세운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조가 피로 자유를 쟁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역사를 가진 우리 조국! 자유로운 우리 조국! 마땅히 지켜야 할 유일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일어나 싸워야만 합니다. 싸우자, 조국을 위해! 동맹 만세! 공화국 만세! 제국을 타도하라!"


      대저 욥 트류니히트 의장각하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양웬리야말로 토착제국민 아니겠습니까.

  6. spitfire 2019.11.26 1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reinhardt100/ 한국인들이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이 못사는 나라라고 무시하는 거 보면 정말 실소가 나올 뿐입니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잘 나가니 이제 다른걸로 까긴 합니다만...

    타국/타민족/타문화/타경제 경시 문화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가 상대방보다 낫다라는 이분법적인 생각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구조가 지속된다면 십수년 내에 큰 전란이 발생하지 않을까 항상 걱정하고 대비하며 살고 있습니다.

    • reinhardt100 2019.11.27 0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쟁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악화되는 환경과 경제인데 어떤 결론이 나오긴 할 겁니다.

      한국이 저들 국가보다 기초과학기술이 뛰어난지? 국력이 압도적인지? 답 나오지 않습니까? 저도 그냥 실소하면서 속으로 절망밖에 없습니다. 왜 베네치아 공화국을 제외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16세기 이탈리아 전쟁기를 거치면서 정치적 독립을 잃고 합스부르크 제국에 종속되었는지 생각해보면 답은 나옵니다.

  7. keiway 2019.11.27 16: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일부'가 아닌 전체의 '한국인'을 얘기하면서 본인은 한국인이 아닌 것 처럼 가볍게 비판하는 것을 보면 일단 반감이 먼저 듭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이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비판하는 거라면 자신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처럼 진지한 자세로 임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그 집단에서 탈출한 뒤에 비웃는 거라면 할 말 없지만요.

    • ㅋㅋㅋ 2019.11.28 19: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저 모든 게르만들이 자기 집단을 위해 총통의 영도 아래 있어야 하는 것처럼요?ㅋ

    • ㅇㅇ 2019.11.29 08:35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 이 분은 중도란 게 뭔질 모르나
      공동체의 가치도 소중히 하자는 말에 전체주의자냐고 몰아가는 건 무슨 심보일까요?

    • ㅋㅋㅋ 2019.11.29 15:43  댓글주소  수정/삭제

      공동체니 우리 민족이니 하는 소리 떠드는 사람 치고 믿을 만큼 언행일치 하는 사람이 워낙 없어서요.

      98년에 남들 금모으기 한다고 돌반지 내놓을 시절 경매로 강남 방배아파트 입성하신 분이 좋은 예죠.

    • ㅇㅇ 2019.11.29 1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 : 금모으기 운동 하는데 감히 집을 사?
      소비, 시장경제, 주택시장, 경제활동의 자유 이런거 다 모르겠으니 주택 거래하면 안 돼!

  8. 펱로스 2019.11.29 0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 글 잘 보고 갑니다.

  9. 주연공대생 2019.12.01 04: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구독할게요!

엘리자베스 워런은 사회주의자인가 ?

잡상 2019. 11. 21. 06:30 Posted by nasica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이 미국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면서, 미국에서도 워런을 '사회주의자'라거나 '시장경제 파괴자' 등으로 매도하는 움직임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또 엘리자베스 워런의 선거팀이 올린 글을 읽었는데, 이번에는 미국의 농가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를 읽고 제가 느낀 것을 요약하면 2가지입니다.

1) 워런은 결코 사회주의자가 아니며 오히려 '시장경제의 핵심은 경쟁'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는 진짜 시장주의자입니다.  (웃기게도, 그 부분이 대기업들이 싫어하는 부분입니다.)

2) 미국 농업의 경쟁력이 세계 최고라고들 하지만, 결국 수익은 미국 농가들을 쥐어짜는 대형 농업 관련 기업들이 다 가져가며 미국의 가족농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여러분도 짧게 읽어보시도록 원문 중 주요 부분을 발췌 번역했습니다.  


미국 가족농을 위한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만들자 (Leveling the Playing Field for America’s Family Farmers)


대대로 미국의 가족농들은 성실한 노동과 독립이라는 전통을 이어왔습니다.  현대의 가족농들도 같은 핵심 가치를 공유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점점 더 미약해지고 있습니다.  작년의 경우, 미국인들이 음식에 소비하는 1달러 당 미국 농부가 가져가는 돈은 불과 15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이는 농무부가 그 숫자를 추적하기 시작한 1993년 이래 가장 낮은 비율입니다.

 

(우리나라 농산물 가격 중 농부가 가져가는 비용이 얼마인지 찾아보려고 했는데, 이 논문에서는 위와 같이 나오네요. 보통 뉴스에서 듣던 식으로 소비자는 4천원에 사는데 농촌 현지에서는 500원에 판다는 말이 사실이 아닌 걸까요, 아니면 위 표에서 말하는 농가수취라는 용어가 농가가 가져가는 액수가 아닌 걸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위 표의 출처는 http://www.kfma.ne.kr/studydata/네번째논문.pdf 입니다.)

 



오늘날 농부들은 열심히 일하고 모든 것을 제대로 하고, 심지어 날씨까지 도와준다고 해도 수지타산을 맞출 수가 없습니다.  그건 오늘날의 농부들이 그 아버지나 할아버지 세대보다 끈기나 사업가 기질이 부족하거나 덜 헌신적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된 것은 워싱턴에서 결정된 나쁜 정책이 일관적으로 가족농의 이익보다는 다국적 기업과 대기업 로비스트들의 이익을 더 챙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합병 저지 (Tackling Consolidation)

먼저, 우리는 농업 부문에서의 합병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족농들에게 훨씬 더 적은 선택권과 더 박한 이익, 그리고 대기업에 대한 의존성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방 규제위원들은 다국적 기업들이 경쟁 구도를 분쇄하고 주요 시장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도록 허용했습니다.  지난 수십년에 걸쳐, 거대 농업 관련 기업들은 점점 더 대형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여태까지 다우-듀퐁(Dow-Dupont)과 신젠타-켐차이나(Syngenta-ChemChina)의 경우처럼 수평적 합병을 해왔습니다.  이제 그들은 수직적으로도 확장했습니다.

타이슨(Tyson) 사를 예로 들어보지요.  타이슨 사는 닭을 시장에 내놓기까지의 닭의 사료, 도축, 배송 등 모든 과정을 통제합니다.  예외가 되는 것은 딱 하나, 농장을 직접 소유하는 것 뿐입니다.  양계업자들은 결국 '계약 양계' 체계 속에 갇히게 되는데, 이 속에서 그들은 양계 시설을 짓고 업그레이드하는 것에 대출을 얻는 등의 큰 위험 부담을 떠앉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병아리를 받고 사료를 구입하고 다 큰 육계를 판매하는 등의 모든 측면에 있어서 타이슨 사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합병과 확장의 결과는 엄청난 시장 장악력입니다.  육가공 업종 상위 4개사가 전체 시장의 53%를 점유합니다.  3개 대형 치킨 회사의 시장 점유율은 90%에 달합니다.  상위 2개 종자 회사, 즉 몬산토(Monsanto)와 듀퐁(DuPont)은 2015년 기준으로 곡물 종자 시장의 71%를 점유했습니다.  이건 몬산토가 바이엘(Bayer)과 합병하고 듀퐁이 다우(Dow)와 합병하기 전인데도 그랬습니다.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새로 합병된 바이엘-몬산토(Bayer-Monsanto) 혼자서도 미국 전역의 채소 종자 시장 전체의 37% 이상을, 그리고 일부 채소 시장의 50% 이상을 장악하게 됩니다. 

 

(미국 농부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93%의 농부들이 바이엘-몬산토 합병에 대해 우려한다고 설문조사에 답했습니다.)

 



"인수합병은 농부들이 사고 파는 것에 대한 선택의 범위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 수직적 통합은 공급 사슬 전체에 걸쳐 대형 농업 관련 기업들의 경쟁이 더 적어지고 그에 따라 이익은 더 늘어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결과 미국인들이 음식에 소비하는 1달러 당 농부들이 받는 돈은 기록적으로 낮아지게 되는데도 음식물 가격은 내려가지 않으며, 농업 관련 기업들의 CEO와 기타 이사진들은 그 수익을 긁어들이고 있습니다.  대형 육가공 업체인 스미스필드(Smithfield)를 소유한 차이니즈(Chinese) 그룹의 CEO는 2017년 한 해에만 2억9천1백만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저는 농업 분야에서의 합병를 정면으로 저지하고 몇몇 기업들이 시장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분쇄하겠습니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저는 반(反)트러스트법 단속관(trustbuster)들을 임명하여 경쟁을 감소시키는 인수합병을 검토하고 필요시 불허하겠습니다.  거기에는 결코 승인되어서는 안되는 딜이었던 최근의 바이엘-몬산토(Bayer-Monsanto) 합병도 포함됩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 인수합병건에 반대했으며 트럼프 행정부가 올해 초에 이를 승인한 것에 대해 깊이 실망했습니다.  저는 경쟁이 치열한 시장을 조성하기 위해 현존하는 도구를 진지하게 사용할 뿐만 아니라 최근 농업 분야에서 있었던 인수합병을 검토하여 경쟁을 감소시킨 합병을 취소하는데 헌신할 규제위원들을 연방통상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와 법무부(Department of Justice)에 임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저의 팀은 수직으로 통합되어 시장을 점점 더 장악해가고 있는 대형 농업 관련 기업들을 쪼개도록 하겠습니다.  법무부는 지난 35년 간 수직적 인수합병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기에 우리는 농업 부문 공급 사슬의 모든 측면에 걸쳐 합병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저는 다른 부문들에서도 닭고기 부문과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제 행정부에서는 수직 통합건들을 재검토하여 쪼개도록 하겠습니다.

농업에서의 합병은 가족농의 수익성을 해친 더 넓은 범위의 합병 트렌드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수송 부문에서의 합병은 농부들이 그 농산물을 배송하고 농촌이 경제적으로 경쟁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은행 부문의 합병은 지역 은행에 타격을 입혀 영세기업과 농장들이 대출을 받는 것을 어렵게 했습니다.  의료 분야의 합병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고품질 치료로부터 많은 농촌 지역을 배제시켰습니다.  제 행정부는 경쟁을 촉진시키고 이런 트렌드를 뒤바꿔 놓겟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농업 부문에서의 합병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가족농들에게 더 많은 선택권과 시장에서의 더 많은 협상력을 주어 경제적 안정을 쌓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규제 개혁(Un-Rigging the Rules)

합병이 가족농들의 목을 조르고 있습니다만, 대기업들이 가족농의 이익을 뽑아먹도록 규제를 악용하는 방법은 아주 많습니다.  저는 이런 규제를 바꾸도록 투쟁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많은 농부들은 농기구 수리에 있어 승인된 업체에게 의존하도록 강요받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농기계에 진단용 소프트웨어를 심어놓았기 때문에 승인된 업체로부터의 코드가 없으면 아예 수리가 불가능하도록 만들어놓았습니다.  이는 곧 더 높은 가격과 손해가 발생하는 수리 연체로 이어집니다.

이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농부들은 자신의 농기계를 직접 수리하거나 여러개의 수리점 중에서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전국적 '수리 권리' 법안(right-to-repair law)을 지지하는 이유입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농부들은 농기계 수리를 위해 승인된 업체에만 가야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전국적 '수리 권리' 법안은 농기계 제조업체들에게 진단용 도구와 매뉴얼, 그리고 기타 수리 관련 자재들을 그들 자신의 대리점과 승인 업체 뿐만 아니라 개인과 기업에게 제공하도록 합니다.  이로써 개인이 자신의 농기계를 직접 수리하여 수리가 연체되는 일이 없도록 할 뿐만 아니라 대리점들과 독립적 수리점들이 경쟁하도록 만들어 전반적인 가격이 떨어지게 됩니다.

연방정부 행정부의 공제(checkoff) 프로그램도 가족농에게 불리하게 조작되어 있습니다.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달걀과 곡물 등 일부 품목의 생산자들은 그 매출액의 일부를 연방 공제 프로그램에 납부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전국 광고 캠페인의 비용을 대는데 사용됩니다.  하지만 공제 프로그램은 경쟁을 압살하는데도 사용되어 왔습니다.  가령 달걀 위원회는 어느 작은 마요네즈 회사에 대항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 기금 프로그램을 감독하는 위원회는 프로그램을 잘못 관리하여 대형 농업 관련 기업에 이익이 되는 로비성 캠페인에 돈을 댄 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공제 프로그램을 개혁하여 부패를 뿌리째 뽑아야 합니다.  저는 공제 프로그램이 강제가 아닌 자발성으로 전환되도록 하는 법안을 지지하며 위원회가 반경쟁 행위 및 대정부 로비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계약 양계업(contract chicken farming)은 이미 농가들을 파산 직전까지 몰아붙였습니다.  이런 거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저는 남용적인 계약 농업을 축산업에서는 금지하도록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농부들이 받는 대접은 지금보다는 더 나아야 합니다.

(하략)

이하로도 2개 문단이 더 있습니다만 미국 국내 문제라서 우리에게는 크게 의미가 있지 않아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원문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서 읽어보세요.

https://medium.com/@teamwarren/leveling-the-playing-field-for-americas-family-farmers-823d1994f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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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eiway 2019.11.21 1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유시장경제의 요체는 첫째도 둘째도 '경쟁' 이고
    자유로운 경쟁의 가장 큰 적은 '독점' 이며,
    혁신과 급변의 시대가 끝나고 경제가 안정될 수록 독점의 가능성은 높아지는 상황에서
    시장 조정자로서 정부의 역할이 '반독점' 에 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미 거대화된 자본은 이걸 '규제' 라고 하면서 극렬히 저항하죠.

    버니 샌더스에 이어 엘리자베스 워런이 지지받는 걸 보니
    미국 사회에서도 이러한 목소리가 커지는 걸로 보이는데
    과연 강고한 기득권의 카르텔을 깰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겠지요.

  2. keiway 2019.11.21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나저나 우리 사회는 저런 목소리는 커녕
    아직까지도 재벌이 죄를 지었을 때 벌을 받을지 말지가 걱정되는 수준이니
    앞으로도 갈길이 참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있는게 맞기는 하겠죠..?

    • 푸른 2019.11.21 15:19  댓글주소  수정/삭제

      걱정이라도 되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은 발전한거 아닐까요..ㅎㅎ 전 막연하게나마 희망을 가져봅니다

    • 나삼 2019.11.22 15:57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국은 기업규제가 심한 국가인 편입니다. 재벌에게 없는 굴레까지 씌어가며 옥죄는 형국이죠. 조양호 회장이 수십차례 털려가며 없는 병까지 얻어 죽게 만든 나라입니다. 죄를 받을지 말지 걱정해야 하지 말고 경제법을 느슨하게 하고 기업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3. 카를대공 2019.11.21 13: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엘리자베스 워런이 과연 미국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을까요?
    나시카님이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4. 루나미아 2019.11.21 1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생각나네요. 셔먼 반독점법으로 독점기업들을 해체했는데, 현재에도 미국인이 좋아하는 대통령이죠

  5. 고로 2019.11.22 08: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북유럽이 철저한 자본주의 국가라고 하믄 화들짝 반박하고 성공한 사회주의 국가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워런을 사회주의자라고 하믄 이상하게도 아니라고 함 ㅋㅋ

  6. 아스날면도기 2019.11.22 15: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농산물 가격 중 생산자의 몫이 얼마인지를 산정하는 데 있어 다양한 기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미국과 한국의 자료를 비교(15% vs 56%)하기에는, 생산원가가 포함되었는지 아닌지, 최종 가격이 소매 판매가격인지 식당(의 요리) 가격인지 아닌지까지 확인이 되어야겠군요.

    https://www.fb.org/newsroom/fast-facts

    https://www.denverpost.com/2018/05/02/farming-share-of-consumer-food-spending/

  7. 유애경 2019.11.22 15: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감 버튼이 안눌러 지네요🥺
    잘 보고 갑니다.

  8. 오푸스 2019.11.24 0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워렌 이름만 들어봤는데 이런 주장을 했군요
    다음 선거에 누가될지 흥미롭네요. 절대 막으려 할텐데 ㅋ

  9. 민주시민 2019.12.07 2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산주의자죠, 오바마조차 당내 극좌파가 민주당을 패배로 귀착시킨다면서 우려한

  10. 민주시민 2019.12.07 2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으로선 트럼프가 탄핵되어야 좋을 판국임에도 이런 공산당이 설치니 재선이 확실시되고요


그런데 놀랍게도 러시아군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네만 강을 따라 늘어선 여러 마을에 분산되어 숙영 중이었는데, 주로 사열과 분열 같은 제식 훈련만 죽어라고 했습니다.  장교들은 자기들끼리 무도회와 파티를 벌이며 시골 아가씨들과의 연애 모험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짜르 알렉산드르를 따라 빌나에 와있던 국무부 장관 쉬시코프(Aleksandr Semyonovich Shishkov)는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마치 적군이 수천 km 먼 곳에 떨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너무나도 근심걱정이 없는 듯 했다.  심지어 적군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들어오지 않았다."

적군에 대한 소식은 커녕 아군인 러시아군으로부터도 아무 뉴스가 없었습니다.  러시아군이 정말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의 배치와 이동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노력도, 전쟁 발발시 어디로 진격해올지에 대한 예측 노력도 없었습니다.  러시아군은 자기들이 주둔 중이던 그 일대 리투아니아 지역의 지도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전략도 계획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긴 네만 강을 따라 뿔뿔이 분산 배치된 러시아군으로서는 만약 당장 내일이라도 프랑스군이 어느 한 곳에 집결하여 도하를 한다면 속수무책으로 돌파당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군이 이런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짜르 알렉산드르의 결정 장애와 오지랍이었습니다.   총사령관을 임명하지도 않고, 공격인지 수비인지도 분명히 하지 않고, 부하들에게 일임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닌 정말 어정쩡한 그의 태도 때문에 러시아군은 방향성을 잃고 뭘 어찌해야 할 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습니다.  가장 활발했던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던 많은 참모 장교들이었습니다.  사실 그런 참모들이야말로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도 없고 책임지는 것도 없이 그저 번쩍번쩍 화려한 군복만 차려 입은 군더더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일 수록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 머릿 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말이나 마구 던지는 법입니다.  그렇쟎아도 전략을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알렉산드르는 그런 아무말 대잔치 속에서 더욱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냉철한 머리와 뚝심을 가지고 전략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 역할을 맡은 것이 퓰(Karl Ludwig von Phull 혹은 Pfuel) 장군이었습니다.  이 분도 원래 프로이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1806년 예나 전투에서 빌헬름 3세의 수석 참모로 있다가 프로이센의 참패 이후 러시아에서 살 길을 찾은 많은 프로이센 장교들 중 하나였습니다.  비록 예나 전투에서 환상적인 참패를 빚어내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전통 있는 프로이센군에서 국왕 직속 수석 참모를 할 정도였으니 실력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알렉산드르는 그에게 중장 계급을 주며 역시 자신의 참모진에 배속시켜 전략안을 짜게 했습니다.

 

(퓰 장군입니다.  러시아군이 그의 제안대로 후퇴를 시작하자 러시아군 내에서 그의 인기는 바닥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결국 모스크바까지 나폴레옹에게 함락되자, 군 내에서 저 프로이센놈을 쳐죽이라는 아우성이 터져나왔고, 결국 그는 스웨덴을 거쳐 영국까지 도망쳐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실 후퇴 작전 자체를 그의 공로(?)로 돌리는 것 자체도 여러가지 이견이 존재하는데, 1813년에 짜르 알렉산드르가 영국에 있던 퓰에게 보낸 편지에는 러시아군의 후퇴 전략을 짠 공로를 퓰에게 돌리는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어이없게도 후퇴안이었습니다 !  나폴레옹과 총검을 맞대본 퓰의 눈에, 나폴레옹 쯤은 문제 없다고 큰 소리 쳐대는 러시아군은 절대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정면 대결은 신속한 참패를 부를 뿐이라고 판단한 퓰은 과감한 후퇴로 프랑스군의 예봉을 누그러뜨린 뒤, 후방 깊숙한 곳 어딘가의 요새를 거점으로 프랑스군에게 반격하는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후방 요새로의 후퇴만으로는 부족하며, 바그라티온의 제2 군을 측면에 남겨두었다가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의 주력인 바클레이의 제1 군을 쫓아 깊숙히 들어오면 그 후방을 치도록 권고했습니다.

이건 러시아 장교들이 보기에 말도 안되는 전략이었습니다.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거느린 러시아군이 (실제로는 러시아군이 더 적었습니다) 소중한 영토를 적에게 내주며 후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퓰이 제시하는 이유, 즉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평가는 러시아 장교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략을 정하지 못하던 알렉산드르의 마음에는 일찌감치 이 전략이 꽤 솔깃하게 들렸습니다.  그 이유는 역시 선진국 성공 사례였습니다.  바로 영국 웰링턴 공작이 포르투갈에서 토헤스 베드하스(Torres Vedras) 방어선을 이용한 초토화 전략으로 프랑스군의 백전노장 마세나를 물리쳤다는 소식은 러시아에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https://nasica1.tistory.com/210 참조)  이렇게 웰링턴이 코딱지만한 포르투갈에서도 후퇴 전략으로 성공했으니 드넓은 러시아에서는 당연히 성공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퓰의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엇습니다.  무엇보다, 비록 후퇴라고는 해도 오만한 영국 귀족 웰링턴이 썼던 전략이라면 러시아군이 써도 체면이 상하는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퓰은 참모 전공자답게 세부적인 요새 구축 후보지도 뽑아놓고 있었습니다.  바로 드리사(Drissa, Drysa)였습니다.  퓰이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드리사를 요새 구축 후보지로 뽑은 것은 그 곳이 빌나에서 후퇴할 때 모스크바와 상트-페체르부르그로 갈라지는 길 딱 중간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러시아군으로서는 만약 후퇴를 한다고 해도 모스크바와 상트-페체르부르그 이 두 도시를 모두 지킬 수 있는 곳까지만 후퇴해야 했는데, 드리사를 거점으로 방어선을 펼친다면 그 목적에 딱 맞는 위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퓰은 역시 세계적인 명장보다는 그냥 여러가지 안을 내놓는 참모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세운 전략은 실행에 옮기기에는 너무 빈틈이 많았습니다.  일단 웰링턴이 포르투갈에서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으로 재미를 본 것은 포르투갈이 바다와 산맥으로 가로 막힌 좁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처럼 드넓은 평원 지대에서 프랑스군을 요새로 저지해보겠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공성전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짜르 알렉산드르에게 평화조약을 강요한다는 목표가 분명했던 나폴레옹은 드리사 요새에 부딪힐 경우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우회해서 모스크바를 들이쳤을 것입니다.  또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영국 공병대와 나라를 지키겠다는 포르투갈 주민들의 전폭적인 협조, 그리고 무엇보다 영국 정부의 풍부한 군자금 덕분이었습니다.  러시아군에게는 드리사에 갑자기 거창한 요새를 구축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퓰의 작전 계획에 따라 1811년 말부터 드리사에는 대규모 토목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그 진척 상황은 매우 한심한 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퓰의 후퇴안이나 바그라티온의 공격안이나, 모두 알렉산드르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하는 사이에 시간은 속절없이 계속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의 생각보다는 훨씬 더 빨리 들이닥쳤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Karl_Ludwig_von_Phull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Aleksandr-Semyonovich-Shishkov
https://en.wikipedia.org/wiki/Ludwig_von_Wolzo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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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ranken 2019.11.18 0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소전쟁 발발 직전하고 상황이 많이 비슷하네요. 당시 스탈린은 서방 및 각지의 스파이들이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단 정보를 보내옴에도 끝까지 히틀러는 미치지 않는 이상 양면전선을 열진 않을 거라고 굳게 신념을 지키는 바람에 소련군은 폴란드, 에스토니아 등 나치와의 협상으로 얻어낸 영토에 방어선을 제대로 구축 못하고 어영부영한 상태서 바르바로사 작전당시 제대로 손 써보지도 못하고 쓸려나가죠.

    • nasica 2019.11.18 21: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렉산드르의 경우가 좀더 어이없는 것 같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이 반드시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2. 푸른 2019.11.18 16: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번 글에서 기대를 하게 만들고는 첫 문장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ㅋㅋㅋㅋ

    나날이 글빨이 늘어나시네요ㅋㅋ

  3. 지나가던 2019.11.18 1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지랍->오지랖

  4. 루나미아 2019.11.18 2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기서 웰링턴이 생각치도 못한 기여를 ㅋㅋㅋ

  5. reinhardt100 2019.11.18 2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늦게 진격한 것이 문제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라스푸티차가 끝나는 5월 중순에 바로 공격했으면 러시아 주력군을 스몰렌스크나 드라사에서 포착 후 섬멸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거든요.

    실제로 독소전쟁이나 러시아 원정 당시 소련이나 러시아측의 후퇴속도가 꽤나 느린 편이었죠. 물론 초토화작전 수행딱문에 그런게 있습니다만 특히 후자는 너무 느리다보니 오히려 나폴레옹의 판단을 흐리게 한 측면도 있습니다.

  6. 웃자웃어 2019.11.19 2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가 그렇다고 예비전력까지 총동원해 공세전략을 폈다간 80~90% 졌을 겁니다.

  7. 중2병 2019.11.20 0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과 정면승부 하자는 러시아 장교들은 200년 뒤
    유니클로 때려잡고 정면승부로 무역분쟁 하자는 분들이랑 겹쳐보이네요.

  8. 영국나치처칠 2019.11.20 09: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간의 결이 같은 자들 끼리는 사이좋게 지내는 법입니다.
    테베, 타타르, 프랑스남부(+ 나폴에옹가족 몰살하려던 코스시카놈들 이새귀들 히트러에게 걸렸으면 싸그리 몰살인데 운좋게도 나폴롱에게 걸려서), 일본우익 윤적윤아베토착

  9. 영국나치처칠 2019.11.20 0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일본은 이제와서 한국제품 불매운동한다고 하지만
    이제까지 현대자동차 일본국가적으로 1년에 10대 구매했고 ㅎㄷㄷㄷㄷㄷ
    스마트폰, 가전제품은 한국이 더 잘만드는데도 불매...
    D램도 한국이 전세계 석권하는데도 대만제품만 구해하고 한국제품 불매...
    도대체 무슨 한국제품을 이제부터 불매하겠다는 건지...

  10. 샤르빌 2019.11.20 2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대육군이랑 정면승부라니.. 정말 패기로라도 그랬다면 러시아 원정의 결과가 크게 바뀌었겠네요..

  11. 허허허 2019.11.24 2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보병들 짱 쎄지 않나요? 아일라우나 하일스베르크를 생각해보면, 정면대결 해도 꿀릴 게 없어 보이는데 다들 러시아군에게 승산이 없다고 보시는군요.

    러시아 군이 그래도 프러시아 군 같은 추태는 부린 적이 없는데, 싸움 제일 못 하는 프러시아 군의 장교가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상대가 될 수 없음.' 이런 말 하면 누가 안 열받나요. 저 멀리 폴란드까지 원정가서 나폴레옹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준 러시아 군인데,

    홈그라운드에서 카알 대공식 영혼의 맞짱 한 번 떴으면, 프랑스군이 이긴다 해도 서로 걸레짝이 되버려서 진격도 후퇴도 못 하고 둘 다 바닥을 뒹굴었을 것 같아요.


맨 처음 이 노래를 대충 들었을 때, 뭔가 연인 사이에서 불러지는 노래인가 싶었습니다.  다만 '네가 영원이 젊었으면 좋겠구나'라는 부분이 좀 이상했어요.  연인 사이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쟎아요 ?  무슨 불로초를 바라는 진시황의 노래도 아니고 말이지요.

좀더 가사를 들어보고 제가 내린 결론은, 이건 자기 아이를 위한 축복 노래라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넷에서 이 노래의 배경을 뒤져 보니, 역시 밥 딜런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지은 노래더군요.  다시 들어봐도, 자신의 아이를 위해 이보다 더 나은 축복의 가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종교가 무엇이든, 아이의 장래 희망이 무엇이든, 아이가 공부를 잘하든 운동을 잘하든 혹은 어떤 것에든 뛰어난 점이 없더라도, 모든 경우에 잘 어울리는 가사에요.  인간이 항상 젊을 수는 없지만, 자기 아이들이 영원히 어린 상태로 자기 곁에 남아있기를 바라는 건 모든 부모가 마찬가지일 것 같거든요.  아이가 자라나는 것은 기쁘기도 하지만 정말 아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부모 마음이 어떻든, 결국 아이는 자라서 자기 만의 길과 자기만의 짝을 찾아 부모 곁을 떠나는 것은 정해진 일입니다.  아쉽더라도 놓아주어야지요.

이 노래의 가사는 한소절 한소절이 너무나 좋은 의미라서 어느 부분이 특히 좋다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May you have a strong foundation When the winds of changes shift' 이 부분은 아이 뿐만 아니라 우리 어른들에게도 꼭 필요한 부분이지요.  그래도 꼭 뽑으라면 저는 무엇보다 'see the lights surrounding you'라는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어요.  제 아이도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수능시험을 보는 어린 학생들에게 이 노래를 불러주고 싶네요.  제가 좋아하는 조합인 밥 딜런 작사 존 바에즈 노래 버전으로 들어보시지요.

 



"Forever Young" by Joan Baez

https://youtu.be/ALmN9y7LL0E


May God's blessing keep you always
May your wishes all come true
May you always do for others
And let others do for you

신의 축복이 항상 너를 지켜주시길
너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길
항상 남을 위해 일하기를
그리고 남들도 너를 위해 일해주기를

May you build a ladder to the stars
And climb on every rung
May you stay
Forever young

별나라로 가는 사다리를 만들기를
그 한단계 한단계를 기어오르기를
무엇보다 네가
영원히 나이들지 않기를 

May you grow up to be righteous
May you grow up to be true
May you always know the truth
And see the lights surrounding you

정의로운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진실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언제나 진실을 알고
너를 둘러싼 빛을 알아보기를 

May you always be courageous
Stand upright and be strong
And may you stay
Forever young

항상 용기를 잃지 않기를
굽히지 않고 굳세게 일어서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영원히 나이들지 않기를 

Forever young
Forever young
May you stay
Forever young

영원히 나이들지 않기를

영원히 나이들지 않기를
무엇보다 네가
영원히 나이들지 않기를

May your hands always be busy
May your feet always be swift
May you have a strong foundation
When the winds of changes shift

너의 손은 항상 바쁘기를
너의 발은 항상 경쾌하기를
변화의 바람이 옳겨갈 때에도
너의 기반이 튼튼하기를

May your heart always be joyful
May your song always be sung
And may you stay
Forever young

마음에는 항상 기쁨이 넘치길
너의 노래가 항상 불려지길
무엇보다 네가
영원히 나이들지 않기를 

Forever young
Forever young
May you stay
Forever young

영원히 나이들지 않기를
영원히 나이들지 않기를
무엇보다 네가
영원히 나이들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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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ㅇ 2019.11.14 17: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2. 영국나치처칠 2019.11.16 14: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만화의 시조새인 호쿠사이가 소귀나물을 먹고 90살 넘게 살았다던데...


이미 1811년부터 러시아는 프랑스와 언제 한판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1812년 6월 경 러시아는 거의 1년 넘게 전쟁 준비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나폴레옹을 맞이할 러시아의 준비 상태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요 ?  한줄 요약하자면 머리 수만 따지면 프랑스군의 그랑다르메에 비해 그다지 나쁘지 않았습니다.

원래 1805년 당시 러시아의 징집 제도는 일종의 지역 차출제로서, 지역 농노들 500명 중에서 4명의 장정을 병정으로 차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차출된 운 나쁜 젊은이에게는 25년의 병역 의무가 주어졌는데, 당시엔 전화는 커녕 우편도 변변치 않았는데다 어차피 본인이나 가족이나 모두 문맹인 경우가 많아서 가족과 연락을 주고 받을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25년 간의 병역을 다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면 사실상 가족이나 친구들이나 다 남남이 되어 있었고, 그걸 잘 아는 제대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마을에서 차출된 청년이 군대로 떠나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이 청년을 배웅했는데, 이건 사실상 일종의 장례식 같은 행사였다고 합니다.  아무도 이 청년이 살아서 가족에게 되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사정은 영국군도 비슷했습니다.  다만 영국군은 모병제라서 급여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는 점만 달랐지요.  여러 모로 영국군과 러시아군은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댓글에 '궁금'님이 알려주신 러시아 징집 장정의 배웅 모습입니다.  분위기가 장례식인 이유가 다 있습니다.)

  



러시아는 아우스테를리츠에서의 뼈 아픈 참패 이후, 나폴레옹과의 긴 전쟁을 예감하고 징집율을 500명 중에서 5명으로 20% 증강시켰습니다.  그 결과, 1806년부터 1811년 사이 기간에 새로 징집된 러시아군 병사의 수는 50만 명에 달했습니다.  게다가 1811년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대 했으나 아직 현역 복무에 적합한 나이와 신체 조건을 가진 제대 군인 약 6만을 재입대 시켰고, 1812년에는 당장 임박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징집률을 500명 중 7명으로 한시적으로 늘렸습니다.  덕분에 1807년 아일라우 전투 때는 러시아군 전체 숫자가 50만이 채 안되었으나, 1812년 9월 경에는 무려 90만이 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땅이 넓었고 사방에 적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1812년 5월 나폴레옹의 위협에 대적하기 위해 리투아니아에 집결한 러시아 야전군은 바클레이 드 톨리의 제1군 약 16만과 바그라티온의 제2 군 약 6만이 전부였습니다.  저 남쪽 오스트리아와의 접경 지대에는 토르마소프(Tormasov) 장군의 제3 군 약 5만이 있었고 후방에도 2개의 예비 군단 총 11만 정도가 대기하고 있긴 했습니다.  이런 지원부대까지 다 합하면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와 맞설 러시아군 야전군은 총 39만에 달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보시겠지만 당시 나폴레옹의 침공에 맞선 러시아 야전군은 크게 3개로서, 북쪽부터 바클레이, 바그라티온, 토르마소프가 각각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르마소프의 부대는 나머지 부대과 광활한 핀스크(Pinsk, 혹은 Pripet) 습지로 격리되어 있어서 사실상 협동 작전은 불가능했습니다.  애초에 토르마소프의 제3 군은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와 루마니아 쪽으로부터 직접 침공해올 것에 대비한 부대였습니다.)


(핀스크(Pinsk, 혹은 Pripet) 습지는 제1,2차 세계대전 때도 주요 장애물 역할을 했습니다.  그 때문에 나찌 독일군은 이 지역에서 모조리 물을 빼고 독일 주민들을 대거 이동시켜 식민지화할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윗 그림은 19세기 화가 이반 쉬시키(Ivan Shishkin)이 그린 핀스크 습지의 풍경입니다.)



이 정도면 나폴레옹에게 일방적으로 밀릴 수 밖에 없는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공세로 나갈 수도 있을 정도의 군세였지요.  게다가 당시 러시아 측은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의 군세를 실제보다 깎아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바클레이 드 톨리는 러시아로 침공해올 그랑다르메의 병력을 20~25만으로 보았고, 바그라티온은 20만, 베니히센은 19만 정도로 보았습니다.  러시아 측에서 가장 높게 평가한 숫자도 후방의 지원부대까지 다 합해서 35만을 넘지 않았습니다.  사실 지금도 과연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로 진격해 들어간 나폴레옹 휘하의 병력이 몇 만인가에 대해서 정확한 기록이 없긴 합니다.  많은 역사가들이 실제로 네만 강을 건넌 병력의 수를 대략 40만이라고는 하지만, 아마 당시 나폴레옹은 물론 그 누구도 실제로 몇 명이나 네만 강을 건넜는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네만 강 서안에 집결하여 최종 점검을 할 당시, 나폴레옹은 휘하 군단장들에게 "제발 솔직하게 각 예하 부대의 정확한 병력 숫자와 군수품 준비 상태를 파악하여 보고하라"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거짓말을 합니다.  나폴레옹의 요구는 끝이 없었고 그에 비해 사람과 돈과 물자는 부족해서 도저히 매뉴얼과 명령서대로 전체 부대의 편성을 완벽하게 해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장군들은 그냥 휘하 부대원의 수를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고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또 정확하게 보고하려고 해도, 당시 행정반에는 최신 데이터베이스와 고속 통신망은 커녕 전자계산기조차 없었으니 정확한 현황 파악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러시아 측에서는 후퇴 작전 따위는 애초에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여론은 러시아군이 네만 강을 건너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공격파의 논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러시아군이 공세를 펼쳐 먼저 폴란드를 정복하고 프로이센까지 진격한다면 프로이센은 물론 나폴레옹에게 짓눌려있던 오스트리아나 폴란드 내의 친러파들이 봉기할 것이므로 훨씬 더 유리하게 전쟁을 이끌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아우성은 저 멀리 후방의 상트-페체르부르그나 모스크바에서 더 요란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선에서의 거리와 용기는 정비례하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꼭 후방에서 편히 먹고 마시는 신사숙녀들만 공격하자고 아우성을 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장 총성이 울리고 옆 전우의 창자가 쏟아져 흙바닥에 뒹구는 것이 아니다보니, 최전선의 장교들도 나폴레옹 따위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며 당장 쳐들어가자고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젊은 장교들 뿐만 아니라 바그라티온도 당장 공세로 나가자고 짜르 알렉산드르에게 집요하게 매달렸습니다.  

특히 바그라티온은 오스만 투르크와의 접경에서 쿠투조프(Kutuzov) 장군 밑에서 복무하고 있던 러시아 해군제독 치차고프(Pavel Vasilievich Chichagov)가 내놓은 공격안에 열광했고, 알렉산드르도 거기에 상당히 혹해 있었습니다.   이 공격안에 따르면 이제 오스만 투르크와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니 발칸반도를 관통하여 프랑스령 일리리아(Illyria), 즉 현재의 크로아티아 지역을 공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쪽이 프랑스 제국의 '취약한 아랫배'라는 것이었지요.  여기를 들이치면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도 들썩거릴 수 밖에 없으니 후방이 불안해진 나폴레옹은 도저히 러시아 내부로 진격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에도 냉정한 두뇌들은 많았습니다.  치차고프 공격안을 그대로 수행한다면 오히려 오스만 투르크와 오스트리아가 화들짝 놀라 반-러시아 진영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졌고 이 공격안은 최종적으로 기각되었습니다. 


(치차고프 제독입니다.  그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복무한 이후 20대에 영국 해군 대학에서 공부를 했는데, 거기서 Elizabeth Proby라는 영국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29세의 나이로 귀국한 그는 즉각 엘리자베스와의 결혼 승인을 요청했는데, 당시 짜르이던 파벨 1세는 "러시아에도 신부감이 넘쳤는데 웬 영국 여자?"라며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이 겁없는 청년은 난동을 부렸고 당연히 즉각 투옥되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의 패기 넘치는 사랑에는 죄가 없었는지, 그는 또 금새 석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와의 결혼도 허락을 받았고 더 나아가 해군 준장으로 승진까지 했습니다.  불행히도 엘리자베스는 1811년 사망했고, 치차고프는 베레지나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빠져나가도록 해줬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1813년 이후 군을 떠나 프랑스로 가버렸고 두번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1849년 파리에서 죽었습니다.)



제1군 사령관이자 국방부 장관으로서, 실질적인 총사령관이었던 바클레이 드 톨리의 기본 계획은 무엇이었을까요 ?  그는 1807년 아일라우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뒤 병상에 누운 채로 '이제 나폴레옹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러시아 내부로 깊숙이 프랑스군을 유인하여 종심이 길어지게 만든 뒤 프랑스군이 분산되고 소모되면 그때서야 결전을 벌여야 한다'라는 전략 계획서를 만든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일라우에서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군의 사정을 반영한 계획서였고, 바클레이가 1812년에도 그런 후퇴안부터 고려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도 들뜬 러시아인들처럼 선제 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그가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던 짜르 알렉산드르는 선제 공격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입장이었는데, 이는 알렉산드르의 성격이 신중해서가 아니라 이 전쟁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촉발된 침략전이 아니라 외적의 침공으로부터 러시아의 성스러운 영토를 수호하기 위한 수호전이라는 인상을 대내외적으로 주고 싶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짜르가 그런 성향이다보니 당연히 바클레이는 그저 병력을 네만 강을 따라 주욱 펼쳐놓고 '프랑스군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강을 천연 장애물로 활용하여 방어전을 펼친다'라는 소극적인 대처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수비 위주의 전략 때문에 바클레이는 주전파 러시아 장교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알고보면 비웃음을 당해야 하는 것은 바클레이가 아니라 알렉산드르였지요.  그런데 알렉산드르는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몰라도, 바클레이를 총사령관으로 명확하게 임명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가장 크고 중요한 제1 군 사령관인데다 국방부 장관이기까지 하니까 따로 총사령관이라는 겉멋이 든 직위를 새로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는지, 혹은 총사령관은 당연히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그렇게 총사령관 임명을 빼먹은 것도 문제였는데, 더 나쁜 것은 짜르 알렉산드르가 제1 군 사령부인 빌나까지 직접 찾아와서 휘하에 온갖 참모진을 줄줄 달고 다니면서 감놔라 배놔라 참견이 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조직에서 원래 그러면 안된다는 것은 상식이었고, 알렉산드르도 그런 점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곧 반성하고 '앞으로는 절대 군 명령 체계에 관여하지 않겠다'라는 약속을 바클레이에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마차 1대에 실어야 하는 짐의 적정량에 대해서 이런저런 제안을 내놓으며 간섭을 재개했습니다.  더 나쁜 것은 짜르가 이렇게 현장에 상주하며 참견질을 하다보니, 바클레이를 무시하고 짜르에게 직접 보고를 하는 버릇없는 장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바그라티온이었습니다.  그는 수비 위주의 작전을 선호하는 바클레이를 의도적으로 투명인간 취급하고 짜르에게만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이 모든 혼란이 궁극적으로는 알렉산드르 개인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래도 결국 어떤 작전으로 나폴레옹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뭔가 준비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  국가 존망이 걸린 이런 중대 위기를 앞두고 설마 이렇게 우왕좌왕 하면서 시간을 까먹고 있지는 않았겠지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Pavel_Chichagov
https://en.wikipedia.org/wiki/Pinsk_Marshes
http://napoleonistyka.atspace.com/Invasion_of_Russia_181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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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니666 2019.11.11 07: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면서 처음 첫 댓글 달아봅니다. 이번 한주도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2. 궁금 2019.11.11 0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일리야 레핀이 러시아 군으로 징집된 청년을 배웅하는 가족들을 그린 그림을 보고 매우 인상깊었던 기억이 있는데, 아예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것이어서 그런 것이었군요...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eeing_off_a_recruit_(Repin).jpg

    그런데 그림을 보면서 징집당한 장정을 안아주는 사람이 부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가혹한 군역을 운영하면서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징집한건가요? 궁금합니다!

    • 메뚝 2019.11.11 1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그림 감사합니다.
      분위기가 참... 슬프네요.
      어머니인지 부인인지 저도 궁금하네요.

    • nasica 2019.11.11 2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림이 하도 좋아서 본문에도 집어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향 마을 사람들도 생각이란 것이 있었다면 기혼자를 저런 병역의 의무로 몰아넣지는 않겠지요. 참고로 프랑스에서는 기혼자는 병역에서 면제되었습니다.

    • 유애경 2019.11.12 04:3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림이 궁금 했는데 마침 넣어 주셨네요!
      정말 보기만 해도 침통해지는 분위기에다25년의 복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본인은 물론 그 가족들의 슬픔은 어땠을까요...
      그와중에 함께 그려진 개의 뒷모습도 뭔가 (전체적인 분위기 탓인지 ) 침통해 보여서 조금 웃고 말았네요!


  3. 흠흠흠 2019.11.11 0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파르타쿠스. 마물루크. 러시아 농노... 노예들이 거칠고 힘든 삶을 살아서 그런지 전투를 잘하나 보네요.

  4. Franken 2019.11.11 16: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력수를 보니 러시아군은 훈련은 둘째치고 머스킷 같은 무기를 제대로 공급받은 상태였는지 심히 의문이 가네요. 나름 공업이 있었던 프랑스도 신병들에게 줄 머스킷 생산에 애를 먹었는데 후진국이었던 러시아가 90만정 이상의 머스킷 생산능력이 있을 리 없으니...

    • nasica 2019.11.11 21: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대부분은 후방 대기소에서 죽어라고 제식 훈련과 삽질 노동만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 하이텔슈리 2019.11.11 2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영국이 퍼준 물자의 양도 장난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게 필요량을 전부 채울 수는 없었지만 큰 도움이 되는 양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 reinhardt100 2019.11.11 2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의외로 러시아의 당시 공업력은 서방권에서 나름 수위권이었습니다. 산업혁명에 막 접어들기 시작한 유럽에서 아직까지는 기술력차이가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고 영국조차도 중공업 생산력에서 프랑스와 서로 순위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초반 러시아의 금속공업 생산량은 전체 유럽 대비 15% 이상이었는데 이는 영국과 프랑스와 비견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적어도 야포는 국산화가 꽤 이루어졌고 소총 역시 상당수 자급자족했습니다.

      러시아 공업력이 급속히 약화된 시점이 1820년대말부터 1861년까지인데 1차 산업혁명을 놓치면서 후진국 이미지가 고착화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 Franken 2019.11.12 0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라인하르트//현대국가에서도 90만정은 만만치 않은 숫자인데 러시아가 공업력이 좀 있었다 한들 1년 남직한 기간 안에서 생산하는 건...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총열을 일일이 손으로 두들기고 다듬어서 만들어야 했던 당시로써는요.

    • reinhardt100 2019.11.12 0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Franken) 아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러시아 공업력이 생각외로 강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1년 내로 90만정 전부를 생산하는건 당시로써 불가능합니다. 90만정을 당시에 전부 신형으로 생산했다면 슈페어의 기적 저리가라 수준이죠.

      18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는 일단 서구권 군대 대부분이 플린트식 머스켓을 사용했기 때문에 내구도만 좋다면 몇십년전에 생산된 구형소총이라도 쥐어줘도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습니다. 일단 원리는 거진 다 비슷했으니까요. 혁명전쟁 초창기 프랑스군이 100만 이상을 징집하는 바람에 한동안 소총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오죽 급하다보니 창을 50만 자루 생산하기 시작했으니까요. 당시 파리 조병창의 한달 소총 생산량이 600정 하던 시절인데 막상 전쟁 돌입한 후 생산공정을 바꾸는 등의 개혁을 통해 한달만에 소총을 9천정 생산했던 일도 있습니다. 이 덕분에 소총부족이 한결 덜해진 적도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조면기를 개발한 휘트니가 당대에 유명해진 사건이 바로 1만정 소총생산 사건입니다. 미국이 막 독립하고 나서 기존 사제 사냥총(?)인 수준의 켄터키 소총류를 대체할 신형소총 1만정을 발주했는데 이 당시에는 1년만에 소총 1만정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성공했습니다. 막 소개된 아담 스미스의 '분업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기에 가능했습니다.

    • Hedgehog 2019.11.12 0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유튜브에서 colonial gunsmith라는 영상에서 말하기로는 라이플 1 정을 만드는데 300인시가 든다고 하더군요... 라이플이 없는 활강총신이라고 해도 280인시는 걸렸을것 같은데....

    • Franken 2019.11.12 0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씀대로 군수창고 및 민간의 총을 긁어다가 지급한다 해도 90만정의 1/3도 충족했을지 모르겠군요. 거기다 진공포장도 없었으니 창고에서 말그대로 썪은 총기의 질이야 뻔할 뻔자겠구요. 이와 상관없이 양질의 좋은 댓글 잘 읽었습니다.

    • [][] R.F.[][] 2019.11.12 18: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전에 들었던 거라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러시아군 소속 일부 소수민족(?) 부대에서는 궁병(!)을 운용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머스킷의 연사력을 보면, 보다 양성과 숙련이 어려워서 그렇지 궁병도 나름 쓸만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

    • reinahrdt100 2019.11.12 2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R.F) 네 맞습니다. 칼미크 기병대가 러시아 원정 당시 투입된 적이 있습니다.

      칼미크 족은 17세기부터 러시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볼가강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했었는데 18세기 중후반 청의 중가리아 정벌 이후 비어버린 신장 서부로 일부가 탈출한 후 잔류한 오이라트 부족의 일파입니다. 이들은 현재까지 남아있기도 합니다.

  5. reinhardt100 2019.11.11 2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소전쟁 당시에도 프리피아트 늪지는 공격자나 방어자 모두에게 장애였지만 특히 방어자에게 엄청난 곤란을 주었죠. 독일군은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집단군 3개 및 항공군 2개를 동원했는데 그래도 주력을 어디에 두냐?가 문제였습니다. 모스크바 때문에 중부집단군이 주력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프리피야트 늪지 북쪽주변에 독일군 전체 30% 이상이 집중 배치되어 상대적으로 남서쪽에 주력이 배치된 소련군을 그대로 포위섬멸전으로 붕괴시키기도 합니다.

    나폴레옹에 맞서는 러시아군의 입장에서는 일단 공간을 이용한 후퇴밖에 답이 없었습니다. 러시아 주력군이 네만 강을 도하해서 프랑스군과 정면대결하면 이길 방법이 없다시피했습니다. 22만의 주력군이 강변 한 지점에 일거에 도하해서 프랑스군을 분단, 그 중 한 부분을 붕괴시켜야 확실한 승산이 보이는데 그럴 기동력은 20세기 중반, 바그라티온 작전때나 가능했으니까요. 이건 기술의 문제이지 의지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만일 러시아군이 네만강을 도하한 후 주력군이 섬멸당했다면 나폴레옹의 성격상 토르마소프의 제3군을 섬멸한 후 스몰렌스크까지 진격해서 후방의 2개 군까지 연속해서 격멸한다는 계획을 짜고 진격했을 겁니다. 다만 9월 30일까지 스몰렌스크 점령 및 러시아 주력군 완전 섬멸을 해야 러시아 평원에서의 월동이 그나마 편해지는데 과연 가능했을지? 저도 의문입니다.

    • 2월28일 입대 2019.11.13 1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라인하르트님 늘 감사드립니다!
      프리파야트라는 동네가, 설마 lef'tenant 프라이스와 맥밀란 대위가 기어다니던 그 동네는 아니겠죠??

      선생님 설명덕분에 Nasica님의 노고가 더 빛을 발하는군요.

    • reinhardt100 2019.11.13 2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프리피야트 늪지 맞습니다.

      제가 무슨 선생님입니까? 이거야 원 제가 다 부끄럽습니다.

  6. 영국나치처칠 2019.11.12 18: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의 떵침을 놔줄 오스만의 실권자가 조세핀의 언니인데
    폴란드는 조세핀 밀어내고 내사전의 불능은 없다에게 아들을 안겨줄 백작부인을 들이미는데 이것도 러시아의 설계인걸까요?

  7. reinhardt100 2019.11.12 20: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로 핸드폰으로 접속했는데 이상하게 닫혀있네요? 티스토리 가입해야 하려나요?

  8. freewizard 2019.11.13 13: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는 역사네요ㅋㅋ 좋은 정보 감사해요

  9. kyw0277@naver.com 2019.11.13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랫만에 댓글 남깁니다.

    이런 자세한 글들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10. Sarada 2019.11.17 19: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Nasica 님이 소개해주신 혼블로워의 전투장면을 읽고 너무 인상깊어서 얼마전 10권을 전부 구해서 읽었습니다. 덕분에 출퇴근 시간에 너무 즐겁게 읽었습니다.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혹시 Nasica 님이나 다른 분들이 답해주실수 있으실까 해서 글 올립니다. 2권(Nasica 님이 소개해주신 요새상륙작전이 나온 권)에서 사관들을 괴롭히던 함장이 밤에 실족하여 의식불명의 중상을 입었는데, 이 사고에 대해서 다른 장교가 "혼블로워 군이 이 사건에 대해서 더 얘기해줄 것은 없는가?"라고 반복적으로 물어봅니다. 혼블로워는 당연히 "함장님이 실수로 떨어지신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는 모른다"라고만 대답하고요. 이때 혹시 혼블로워가 무슨 짓을 한 거 일까요? 작가가 혼블로워가 이런 짓을 저짓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암시를 준 거 일까요? 너무 궁금해서 글 남겨봅니다.
    항상 Nasica 님의 좋은 글과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 nasica 2019.11.17 21: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작가가 명확하게 밝힌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C.S. Forester의 의도는 '사실 혼블로워가 사다리에서 함장을 밀었다' 라고 독자들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혼블로워는 소심한 사람이긴 하지만 교수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인 자기 당번병을 놓아주는 일이라든가 무인도에서 굶어죽어가는 프랑스군 포로들에게 식량을 나눠준다든가 하는 일화들로 보아,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가끔 법과 규칙을 어기는 일도 종종 저지르는 캐릭터로 보이거든요.

  11. sarada 2019.11.18 0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답변 감사합니다.
    만약 혼블로워가 정말로 손을 댔다면, 혼블로워의 성격도 굉장히 무서운 면이 있네요. 조직에 충성하지만, 조직 내부의 지나친 부조리함이 내부적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부조리에 희생될 지경에 이르면, 가만히 앉아서 죽느니 과감하게 움직이는... 감탄이 나옵니다. 이걸 용기라고 해야할지, 대담함이라고 해야할지 잘은 모르겠는데, 혼블로워가 확실히 남다른 냉정함과 과감함이 있네요.
    빽도 라인도 없이 제독까지 올라간 사람은 역시 뭔가가 다르네요.
    다시한번 답변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좋은 글 부탁드려요^^

  12. sarada 2019.11.18 2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린다고 쑬려다가 오타났습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저는 제가 나름대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성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 자신이 아무 의심을 갖지 않고 목사님 말씀 잘 따르는 성도라고는 자신있게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 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새로 옮긴 교회에서 '새신자 교육'이라는 것을 받고 있는데, 수업 중에 목사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제 주변에 어떤 독실한 신자분이 계신데, 그 분 말씀에 따르면 요한복음 14장 6절에 이르기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즉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되어 있으므로, 갓난 아이나 천진한 어린이라고 할 지라도 예수님을 알고 영접하기 전에 죽는다면 죽어서 지옥으로 간다고 주장하십니다.  정말 그런가요?"

저는 사실 그 교리상의 답을 대략 알고 있었습니다.  답은 Yes,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원래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는 천국에 간다라고 말씀하셨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런 말씀을 해준 분이 지적하기를 마태복음 18장 3절을 다시 제대로 읽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즉, 어린 아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어린 아이가 천국에 간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게 신학적인 정답은 맞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아기들이 지옥에 가야 한다는 것은 비신자들로서는 매우 황당한 이야기이겠지만, 기독교적인 관념으로 보면 모든 인간은 애초에 원죄를 타고 났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 정확하게는 열 분 정도 계신 부목사님 중에서 가장 막내이신 그 목사님 답변은 제 예상을 좀 빗나갔습니다.  

"신학적으로는 그 말씀이 맞습니다.  고신이나 예장합동 같은 보수파 교회에서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런 분께서 원죄를 가졌다고 해도 아직 본인이 죄도 짓지 않은 어린 아이들을 지옥으로 보내셨을 거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 대답은 신학적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실 대답입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이단심판이라도 해야 하는 발언입니다.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길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긴 예전에는 성경의 문장 하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니가 이단이네 내가 정통이네 하며 많이들 서로 죽이고 죽였지요.

제게 '아기일 때 죽으면 모두 지옥 간다'라고 말씀하신 분은 결코 이단이 아니고 매우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신데, 이 분이 제게 해주신 충격적인 말씀이 또 있습니다.  그 분 말씀에 따르면 성경은 인간이 편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누가 되었든 성경을 쓸 때는 그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손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여 한글자 한글자 모두 하나님의 뜻 그대로 쓰인 것이므로 오탈자는 물론 단 한글자도 의미가 없거나 잘못된 것이 없으며 글자 하나하나를 그대로 다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지요.  저는 다소 어이가 없어서 '번역할 때는 그래도 좀 변형이 되지 않았을까요?' 라고 물었는데 그 분은 단호하게 '모든 번역이 이루어질 때도 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저는 원래 성경은 M source니 Q source니 하는 문헌들에서 신학자들이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가지고 고르고 골라서 편찬한 것이고, 그 원전들도 고대 유대교 성직자들이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쓴 것이므로 당연히 당시의 사회 및 정치 환경, 그리고 작성자와 편찬자 개인들의 믿음과 이해 관계가 일부 섞여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령 디도서 2장 5절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이나 로마서 13장 1~2절에 '모든 세속 권세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니 권세에 저항하지 말고 복종하라'고 쓰인 것이 다 그렇다고 봅니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피를 먹지 말라, 동성애를 하지 말라는 것도 다 같은 맥락에서 저는 봅니다. 

그런데 그런 해석 없이 다 하나님이 직접 불러주신 것이므로 시대와 사회에 상관없이 무조건 글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하면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가령 돼지고기와 돼지피로 소시지나 순대를 만들어먹는 자들은 모두 그 자손까지 멸망당하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런 것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신약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본 환상 장면을 인용하며 '이제는 먹어도 된다'라고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엄밀히 보면 '이방인에게도 포교하라'는 명령의 암시일 뿐, 직접 그런 부정한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외에도 신약에서 명시적으로 풀어주지 않은 말도 안되는 계율도 많습니다.  가령 레위기 21장에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안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22장에는 만약 아내가 알고보니 처녀가 아니라면 돌로 쳐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더 웃긴 것은 신명기 22장에 약혼하지 않은 여자를 성폭행한 남자는 그 벌로 그 여자의 아버지에게 은 50세겔을 주고 그 여자와 결혼하라는 계율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하나님은 이렇게 장애인을 차별하거나 여성을 비하하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그저 당시 유대 사회의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측면을 반영하는 구절일 뿐, 하나님의 정의나 사랑과는 전혀 상관없는 계율입니다.

성경을 문자 하나하나 그대로 다 진실이라고 믿으려는 마음은 이해가 갑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징표 중에 거의 유일하게 손에 잡히는 증거물이니까요.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무래도 이 부분은 좀 이상하다'라는 부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첫부분부터 이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셋째 날 '풀과 씨를 맺는 식물과 씨가 든 열매를 맺는 과일나무'를 만드십니다.  그런데 태양과 달은 넷째 날 만드십니다.  이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과 달은 지구 주변을 돈다는 믿음이 있던 시절에나 통하는 이야기이지 현대적인 상식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통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 열왕기 하 20장에서 징표를 바라는 히스기야를 위해 태양을 10도 뒤로 물리는 부분도 지동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중세 교회에서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을 종교 재판에 회부하며 탄압했던 것입니다.

 

(천동설을 Ptolemaic System이라고 하지요.   그걸 보여주는 1550년 경의 인쇄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쨋 날 식물을 만드시고 넷째 날에서야 태양과 달을 만드신 것을 어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런 설명이 있더군요.  궁금하신 분은 https://answersingenesis.org/days-of-creation/did-god-really-create-plants-before-sun/ 에 들어가서 읽어보세요.  저는 읽어보았는데 받은 느낌은 억지로 꿰어 맞추려 노력하다보면 이런 글도 나오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광신자들의 시대가 아니니 그렇게 성경 구절 때문에 멀쩡한 사람들을 탄압하는 일은 없지 않냐고요 ?  지금도 있습니다.  바로 동성애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입니다.  교회는 성경에서 분명히 금지했으니 시대가 변했다고 동성애자들을 용납할 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교회에서 희한하게도 처녀가 아닌 미혼 여성이나 불륜을 저지른 기혼자들에 대해서는 (성경에 따르면 동성애와 동일하게 처벌해야 하는데도) 별 말이 없습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이는 동성애자들이 소수의 외부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내부 결속을 위해서 외부의 만만한 소수를 골라 증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건 결코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욕하던 창녀들과 세리들을 가까이 하시고 당시 유대인들이 적대시하던 사마리아인을 예로 들며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가르치셨지 증오를 조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욕하시고 때린 대상은 엄숙한 척 잘난 척 하던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를 이용해서 돈을 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은 인공위성에서 찍어준 사진으로 이제 믿지 않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The Flat Earth Society 회원들 빼고요...)  하지만 여전히 성경에 쓰여있다는 이유로 과학을 부정하고 심지어 학교에서 가르쳐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지요.  바로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은 매우 잘못된 이론일 뿐 인간은 원숭이 따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반드시 흙을 재료로 해서 '하나님의 모습과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습과 형상대로'라며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지칭하셨다는 점도 이상한데 그건 천사들의 존재를 가리키는 거라고 설명하더군요) 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진화론이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원래 그 까마득한 옛날, 무식한 유목민들에게 DNA가 어쩌고 유성 생식이 어쩌고 돌연변이가 어쩌고 하는 것을 이해시키기가 어려우니까 그냥 외우기 쉽게 '흙으로 빚어서 코로 숨을 불어넣어 남자를 만드셨다'라고 가르쳤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진화론을 부정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말씀들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원숭이나 물고기와 같은 그저 수많은 동물 중에 하나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소중한 생명이기 때문에 진화론 같은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그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진화론에 따르면, 아니 그냥 우리가 눈으로 자연을 보면 모든 동물은 약한 것은 먹히고 강한 것은 먹는 살벌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짐승이 아니며, 인간은 사랑을 받아야 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굳이 성경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소중한 존재라고 가르친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3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잘났던 못났건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른 점보다는 닮은 점이 많습니다.  아무리 남들보다 재주가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해도 모든 인간은 소중하며,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동성애자들을 미워하고 사회주의를 막으라고 성경을 내려보내셨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심지어 성경에는 사회주의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고, 오히려 공산당처럼 부자들은 천국에 갈 수 없으며 부자들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최근에 모정당에서 영입한 분이 "65살이 돼 기초연금을 받게 된다면 인생을 잘 못 사신 것"이라는 말씀을 과거에 하셔서 구설수에 올랐더군요.   아마 성경에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존재로 묘사한 것은 과학을 부정하라고 그런 것이 아니라, 아무리 가진 것 없더라도 인간을 멸시하지 말라는 뜻에서 적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PS.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카톨릭은 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60년대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The Second Ecumenical Council of the Vatican)에서도 다음과 같이 공표하여, 카톨릭이 아닌 개신교인은 물론 무슬림 및 유대교인, 심지어 아무 믿음이 없지만 선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http://maria.catholic.or.kr/dictionary/doctrine/doctrine_view.asp?menu=concil&kid=2&seq=2508&level1=3&level2=0&level3=2&level4=0&level5=0&level6=8&level7=&lang=ko&keyword=%EA%B5%90%ED%9A%8C%EB%B0%96%EC%9D%98

16. 교회와 비그리스도인

...그러나 구원 계획은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며, 그 가운데에는 특히 무슬림도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흠숭하고 있다. 어둠과 그림자 속에서 미지의 신을 찾고 있는 저 사람들에게서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멀리 계시지 않으신다....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또한 하느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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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군파 2019.11.07 08: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성애자도 인간이니 박해나 탄압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건 자명합니다.그런데 자칭 동성애자(양성애자 등 포함)들이 퀴어 퍼레이드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공연음란을 밥먹듯이 하는건 정말 싫습니다.해외에서는 게이프라이드라는 이름으로 알몸 퍼레이드를 하는 동성애자(양성애자거나)들을 비동성애자,특히 기독교인이 조금만 비판해도 감옥에 집어넣거나,해고하거나, 벌금을 먹인다는데 이건 종교와 사상의 자유의 침해 아닐까요? 사람에 따라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일 수도 있다고는 보긴 하는데, 좌파 정치인들과 학자들의 비호를 등에 업고는 폐를 끼치는 일부 동성애자들의 행보는 문제있다고 봐요.

  2. 백군파 2019.11.07 0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이견과는 별개로 오늘도 재미있는 글 감사합니다.저도 나시카님만큼 흥미롭게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글을 쓰실때 성서를 자주 인용하시는데 언제 봐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시네요."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게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3. 카리우스 2019.11.07 14: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막상 퀴어축제라고 가보면 이성애자들이 그런거 했다간 다 공연음란죄로 잡아갈 수준입니다 그런데 그걸 동성애탄압이라고 볼수있나요? 공연음란죄가 그럼 이성애탄압이겠네요

  4. 영국나치처칠 2019.11.07 2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갖지 못한자의 광끼
    이게 역사상 성공한 적이...

  5. 유애경 2019.11.07 2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경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의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라고 배웠는데 천사라는 얘기도 있군요? 성경은 어렵네요...
    항상 잘보고 갑니다.

  6. 세상에 2019.11.08 07: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만히 읽다보니 우리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란 말 속에 너무 많은 의미를 넣는 건 아닌가 생각하네요. 사실 독실한 유학자 / 이슬람교도 하면 의미가 약간 달라지는 건 제 마음속의 편견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냥 다들 옛날글에 신념을 과도하게 부여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죠.

  7. 끄랙 2019.11.09 1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글에 댓글을 자주 쓰지는 않습니다만,
    이해에 도움이 될까 하여 몇 자 남깁니다.

    1) 인간이 창조될 때 야웨께서 "우리" 라고 자칭하는것은 장엄복수형입니다, 나시카님께서도 빅토리아여왕 시대의 명언(?)인 We are not amused. 를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2) 현대 주류 교단의 입장은, 바울이 말한 동성애는 그 자체로 인간성을 해치는 행위 였던 성인 남성이 미소년 노예를 사서 동성애 행위를 하는 것을 비판한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당하는 소년의 의사와 상관 없이, 강제로 삽입하는 것을 남자다운 행위로 보던 세태가 있었다고 하네요(Moore, 2017) 당시 사회의 문헌들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8. 끄럒 2019.11.09 1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하여, 구원의 확신이라는 개념은 18-19세기 경 독일 출신 미국이민자들 사이에서 나온 개념이라고 하네요.
    역시 주류신학적으로 맞는 개념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존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기 때문에 나의 구원은 몰라도 남의 구원을 가타부타 할 능력은 인간에겐 없습니다.

  9. 영국나치처칠 2019.11.10 1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군요. 스키피오 2대째인 나시카님의 첫패배인 시저가 있었고...
    어제밤에는 마틴루터킹목사님 영화인 셀마가 방영되었네요. 깜디2 시즌인것처럼 참으로 스펙따끌했습니다. 백인목사님이 순교도 하시고 ㅎㄷㄷ

  10. KMD 2019.11.22 1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11. 오푸스 2019.11.24 06: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유튜브로 도올 선생의 마가복음 강의를 듣고 있는데 평소 가졌던 의문점이 많이 해소되고 있습니다. 20년째 비슷한 의문을 가진 사람으로서 추천드립니다 ㅋ


총사령관 바클레이 드 톨리가 러시아 귀족들로 이루어진 부하들로부터 미움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이 양반이 실력파 인물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그의 할아버지가 오늘날 라트비아(Latvia)의 수도인 리가(Riga)의 시장을 보낼 정도로 보통 집안은 아니었지만, 정작 러시아 귀족으로 편입된 것은 군인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최초일 정도로, 러시아 귀족층 입장에서는 그다지 전통있는 명문가는 아니었습니다.  바클레이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입대하여 2년 뒤 소위로 승진했고, 그 이후로 오스만 투르크나 스웨덴 등 전통적인 러시아의 적들과의 전쟁 속에서 직업 군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착실히 쌓았습니다.  그는 똑똑할 뿐만 아니라 전투의 광기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일라우(Eylau)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후퇴를 커버하며 싸우다 중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전형적인 유능한 군인이었습니다.

 

 

(미하일 바클레이 드 톨리(Michael Andreas Barclay de Tolly)의 초상입니다.  1812년 당시 그는 51세로서, 총사령관 하기에 딱 좋은 나이였습니다.)

 



프랑스군에서라면 이런 바클레이 드 톨리가 그다지 두드러진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활약했던 조직은 러시아군이었고, 러시아군 장교들은 유능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가령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러시아군 지휘관 중 하나였던 북스게브덴 (Friedrich Wilhelm von Buxhoeveden 러시아 식으로는 Fyodor Fyodorovich Booksgevden, 이 분도 알고보면 독일계 러시아 귀족이지요) 장군은 전투 내내 술에 취해 있었고 그의 주정뱅이 지휘 덕분에 참패를 겪었지만, 그 이후에도 주요 요직을 맡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가령 1808년 핀란드 침공 작전 때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이 바로 이 북스게브덴 장군이었고, 바클레이 드 톨리는 그 밑에서 복무했습니다.

 

(오랜만에 보시는 북스게브덴 장군의 복스러운 얼굴입니다.  그런 역적질에 가까운 지휘를 하고도 군법회의는 커녕 계속 해서 고위 지휘관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와이프가 러시아의 권문세가 오를로프(Orlov) 가문 출신의 공녀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Natalia Alexeyeva)였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북스게브덴의 경우처럼 러시아군 장교들의 자질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슬라브 특유의 민족성... 따위가 아니라 결국 사회 구조적인 문제였습니다.  가령 러시아군 소위의 급여는 유럽 전체에서 가장 적은 편이었습니다.  심지어 장교로서 부대에 의무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식비가 급여보다 더 많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러시아의 전반적인 경제력이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굳이 급여 따위에 생계를 의존하는 사람은 장교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 인간이라는 고정 관념이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직장 생활하면서 돈을 쓰기만 하고 벌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 그런 적자 인생을 탈출하려면 빨리 승진을 해야 했는데, 그 승진이라는 것이 실력이나 실적 순이 아니라 철저하게 배경과 연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같은 귀족들 중에서도 하급 귀족들은 도무지 승진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러시아의 유명 시인 푸쉬킨(Alexander Pushkin)의 소설 '대위의 딸'(Kapitanskaya dochka)에서 쉽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반 미로노프(Ivan Mironov)는 10대 후반의 딸을 둘 정도의 나이인데, 계급이 고작 대위입니다.  또 맡은 보직도 어느 황량한 시골 마을의 수비 대장이지요.  

 

 

(제 나이대의 사람들에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라는 싯귀로 유명한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입니다.  제가 중학생일 때 이 분의 소설 '대위의 딸'이 학생 필독서 중 하나여서 읽었는데, 솔직히 이게 왜 필독서까지나 선정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본인의 싯귀와는 반대로, 이 분은 와이프와 러시아 근위대 소속 어느 프랑스인 장교와 불륜 문제가 발생하자 그 프랑스인 장교와 결투를 벌인 끝에 37세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이렇게 장교들을 귀족들 중에서만 선발하는데다, 그나마 능력이 아니라 연줄 위주로 승진을 시키다보니, 지휘관 중에 정말 일 잘하는 장교는 찾기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소수일 수 밖에 없는 고위 귀족층 자제 중에서만 후보를 뽑다보니 당연히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미 가진 것도 많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고위 귀족 출신 장교가 열심히 할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아마 제 블로그를 오래 출입하셨던 분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영국군도 똑같지 않았던가?'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영국 육군도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영국 육군도 여러모로 러시아군과 비슷한 문제, 즉 무능하고 항상 술에 쩔어지내는 장교들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사병들을 죽도록 채찍질을 하는 체벌 문화가 팽배한 군대가 유럽에서 영국과 러시아 정도였다는 것도 공통점이었지요.  왜 영국에서만 웰링턴과 같은 명장이 나왔는지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도 있을텐데, 그건 잘못된 궁금증입니다.  영국에서만 그런 특별한 인재가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거든요.  제2차 대불동맹전쟁에서 러시아의 혁혁한 전과를 책임졌던 수보로프(Alexander Vasilyevich Suvorov) 장군 같은 경우가 그 예입니다.  웰링턴은 영국이라는 막강한 조국의 버프를 많이 받아서 유명해진 인물이고, 실제 군사적 역량은 수보로프가 훨씬 뛰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1799년 이탈리아 밀라노에 입성하는 수보로프입니다.  이렇게 밀라노에 입성하기 전까지 수보로프는 모로, 막도날, 주베르 등 쟁쟁한 프랑스 혁명군의 장군들을 모조리 무찔러 그의 명성을 드높였습니다.)



그런 장교들 중에서 냉정하고 지적이며 부지런하고 유능한데다 용감하기까지한 바클레이 드 톨리는 짜르 알렉산드르의 눈에 단연 두드러지게 보였습니다.  알렉산드르도 평화 시기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폴레옹과의 갈등이 높아지자 이 51세의 실력파 독일인을 아예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해버렸습니다.  원래대로 하면 그냥 '누군가는 소를 키워야 하지 않겠나' 정도의 인식으로 승진시켜준 독일계 귀족에 불과했는데, 갑자기 짜르의 눈에 들어 쑥쑥 승진한 바클레이 드 톨리는 주변 러시아 장군들의 질투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이렇게 다른 러시아 장군들이 자신의 승진을 질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바클레이는 다른 장군들의 협조를 구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관리 감독했는데, 원래부터 강직하고 차가운 성격에 그런 꼼꼼한 관리 감독까지 더해지니 그를 미워하는 분위기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이 그를 무시하게 된 결정적인 것은 짜르 알렉산드르 탓이었습니다.  과연 알렉산드르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것일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Michael_Andreas_Barclay_de_Tolly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Suvorov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Push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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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9.11.04 07: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정 러시아군의 장교단이 개판이 된 이유 중 하나가 사실 병력충원체계와도 연계됩니다. 이 당시 러시아군은 다른 국가와 달리 농노, 코사크 및 일부 서방 출신 기술병을 중심으로 구성된 병력충원체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중 전열보병 상당수는 주로 농노였습니다. 그런데 이 농노들을 잘 부리려면(?) 당연히 귀족, 그것도 '권위있는 고위귀족'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당장 예전에 쓰셨던 바그라티온만 해도 사산조 페르시아의 신하였던 이베리아(현재의 사카르트벨로)의 숨바툼 바그라투니의 방계 후손이던 바그라티온왕가의 직계다보니 귀족 중에서는 명함 내밀 사람이 거의 없었고 과감한 작전지휘 및 무리한 명령이라도 일단 순진했던 병사들이 잘 듣는 편이었습니다.

    <대위의 딸>, 이 책이 필독서인 이유가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로마노프 황가를 '간접적이나마 비판한 책'이었다는 것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던 예밀리아 푸가초프의 반란을 농노들과 하급귀족의 입장에서 쓰면서 전제군주정에 머무는 채로 데카브리스트를 진압하던 로마노프 황가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의미가 어마했습니다. 게다가 이 책을 본 나로드니키들부터 후대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들까지 모두가 농민해방과 제정타도 및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는 기폭제로써 작용했으니 필독서로써의 가치는 충분히 있는 책입니다.

    • nasica 2019.11.04 08: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대위의 딸에 그런 의미가 있군요. 저는 소설 끝부분에 예카테리나의 자비에 호소하여 주인공이 사면되는 부분을 보고 결국 로마노프 왕가에 대한 찬양이라고 생각했더랬습니다. 하도 오래 전에 읽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 reinhardt100 2019.11.04 0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게 검열 피하는 장치였습니다. 겉으로 보면 황제폐하께서 자비를 내려줌으로써 신민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것으로 보여주었어야 하니까요. 나중에 톨스토이나 투르게네프 같은 제정 러시아 후기 문학가들도 이런 식으로 검열을 피하기도 합니다. 특히 톨스토이가 대표적이죠

  2. Franken 2019.11.04 14: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유럽 문화권 자체가 술에 절여 사는 동네 아닌가요? 수질 문제 때문에 물 대신 술이 필수 음료수가 되어 하층민들 역시 입에서 술이 떨어지는 날이 없다 보니 음주 문제가 당대엔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진 않았을 거 같네요. 물론 본문의 저 장군은 때와 장소를 못 가렸으니 비판받아야 마땅하죠.

  3. hg 2019.11.04 18: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보로프는 웰링턴과 비교하면 서유럽군과 싸운 커리어가 비교적 적다고 들었는데 전과 내용을 비교하면 그렇지만도 않은거군요..하긴 나이만 비교해도 40이 나기도 하고..

  4. 흠흠흠 2019.11.04 1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웰링턴도 웬만한 나폴레옹 원수들 다 때려잡지 않았나요? 게다가 웰링턴은 마세나와 나폴레옹까지 때려잡았으니, 수보타이, 나폴레옹, 웰링턴은 동급인 것으로 ㅎ

  5. 지나가다 2019.11.04 19: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위의 딸이 러시아에서 인기 있는 이유 중하나는 매우 재미있다는 겁니다...그게 뭐냐 랄수 있는데...그때 농노와 주인의 관계 그리고 고위 귀족청년과 하급 귀족 딸의 러브스토리, 푸카쵸프의 반란 (주인공은 푸카쵸프와 밥까지 먹은 사이) 그리고 러시아 군과 반란군과의 전투 등이 매우 생동감 있게 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이어지는 굉장히 재밌는 소설이죠

  6. 지나가다 2019.11.04 1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특히 러시아 전통이 잘드러나는데 승리자에게 빵과 소금을 주는 장면, 전투가 시작되나 투니카(전통의상, 장례식때나 결혼식때 입힌다)를 딸에게 입히는 장면, 러시아 군의 훈련과 편성 등이 자세히 나와 있고 그때 충격이 빠졌던데 푸카쵸프가 점령지에서 공정하고 인자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7. 지나가다 2019.11.04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한 러시아군의 내부 문제도 드러나고 그들의 무능과 암투(사랑 문제로 장교끼리 결투 벌이다 부상) 장교의 진급 등(주인공은 아무 훈련도 없이 장교 소위로 임관...그리고 도박하다 재산 탕진...늙은 농노는 그래도 끝까지 주인공과 함께 생사 고락...)

  8. 영국나치처칠 2019.11.04 2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기... 히틀러랑 조조는 독서량이 도서관 한개 분량이라고들 하시던데요.
    나폴레옹은 걔내들보다 한수 위라고 합니다.

  9. 하이텔슈리 2019.11.04 2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클라이가 유능하다는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유능함이 신뢰받지 못한 이유라니 뭔가 할 말이 없네요... (영국 육군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지만 적어도 유능하다고 견제받는 조직은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진짜 수보로프나 쿠투조프 같이 인망받으면서 능력있는 인물이 존재하는 게 신기한...

    ps.저도 웰링턴과 수보로프를 누가 더 뛰어나다고 보기 힘들다에 한표. 능력의 1대1 비교라는게 극히 상대적인 것이고, 세운 공적을 보면 누가 더 뛰어나다고 하기 힘들지 않을지요.

  10. Hofer 2019.11.04 2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톨리가 전투를 피하고 물러서기만 한다고 내부의 많은 공격을 받았지만..
    적군의 강점 및 아군의 유리한 점을 냉철히 파악하고 지연전을 펼친 걸 보면 우수한 지휘관이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웰링턴이냐 수보로프냐 누가 더 명장이냐 말은 많지만.. 개인적으로 수보로프가 위대한 장군이었던 건 일말의 여지가 없는 거 같습니다.

    • reinhardt100 2019.11.05 2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보로프의 전역은 제정 러시아 이후 역대 러시아 군사학에서 반드시 가르치는 전역이 될 정도로 수보로프의 군사적 재능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당시 서방권에서 사실상 접촉할 수 있는 모든 군대와 싸워본 지휘관은 수보로프가 사실상 유일했습니다. 그나마 나폴레옹이 근접했고요.

      수보로프의 경우, 냉전기 소련군이 서방과의 전면전을 가정하고 꽤나 연구를 많이 했는데 '동쪽에서 진군해서 알프스를 넘는 기동을 성공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냉전기 서방권 주력인 서독군과 미군, 영국군은 알프스 이북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 배치가 혁명전쟁 당시 프랑스군과 비슷합니다. 쌍방의 주력이 알프스 이북에 배치되어 있지만 숫적 우세를 살리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 측면을 찌르기 위한 공세를 펼치기 위한 교본의 기초가 바로 수보로프의 제2차 대불동맹 전역이었으니 당연했습니다.

  11. 2/28일 입대 2019.11.05 1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에ㅋㅋ갑자기 대위의 딸이라는 소설이 읽어보고 싶어졌어요ㅎㅎ댓글의 순기능이네요. 감사합니다~!!

  12. 정암 2019.11.05 15: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것까지 아시는 라인하르트님..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ㅎㅎ

    • reinhardt100 2019.11.05 2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금 KTX 타고 서울로 퇴근 중에 있습니다. ㅋ 요새는 주중에 매일 대전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 때문에 KTX 타고 통근 중이거든요.

      저야 매일 그저 박봉(?)에 시달리는 직장인이니까요. 매일 '5급공채 못 붙은 죄값 치르고 있다' 외치면서 다니고 있어요 ㅠ

      그래도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13. 영국나치처칠 2019.11.05 2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명량해전 스토리를 보면 배 12척을 배달하신 분이 있다든디...

  14. 낄낄 2019.11.06 1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가 말아먹고 계속 해먹는 북스게브덴 장군 비웃을 위치는 아닌것 같습니다.

  15. 샤르빌 2019.11.09 1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웰링턴도 능력있는 장군이지만 영국이라는 든든한 물주가 있었기에 보급이나 물자같은 부분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지만 수보로프의 러시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