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퇴하는 웰링턴의 뒤를 쫓아 리스본으로 달리던 마세나가 1810년 10월 14일 생각지도 못했던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을 직접 육안으로 보고 그 규모에 경악하는 사이, 웰링턴이 사전에 프랑스군 후방에 미리 풀어놓았던 비밀 병기는 이미 작동을 시작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기아였습니다.  애초에 웰링턴은 마세나와 피투성이가 되어 멱살을 쥐고 구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기본 전략은 리스본 북쪽의 황량한 험지에서 마세나의 진격을 틀어막고 마세나에게 굶어죽든지 돌아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웰링턴은 부사쿠 전투를 전후하여 계속 그 일대의 포르투갈 주민들을 방어선 이남으로 피난가라고 강요했던 것입니다.  


이는 병력은 부족하지만 물자는 풍부하고 기동력은 느리지만 방어에는 탁월한 영국군에게 딱 어울리는 매우 효율적인 전략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웰링턴의 자화자찬에 불과했습니다.  포르투갈 입장에서 보면 이런 작전은 웰링턴이 영국군의 전투 손실을 막기 위해 포르투갈 민간인들을 희생시키자는 수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10월 중순부터 우기가 시작되는데, 식량이나 주택이나 영국군은 아무 것도 책임져주지 않으면서 무조건 집을 떠나 남쪽으로 가라는 것은 사실상 길바닥에서 굶어죽거나 얼어죽으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주민들은 피난 가기를 거부했고 영국군은 집에 남은 주민들에게 '떠나지 않을 경우 무력을 행사하겠다' 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전쟁은 비참한 것입니다.  영국군의 명령에 순종하여 정처없이 길을 떠난 주민들도, 명령을 거부하고 집에 남은 주민들도 모두 전쟁의 참혹함에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프랑스군에게도 인정은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집에 남은 주민들은 그야말로 프랑스군에게 가진 식량과 주택을 모두 빼앗기고 여성들은 성폭행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그에 저항하던 주민들은 가차없이 살해되었습니다.  가령 쿠임브라(Coimbra) 시의 주민들 중 끝내 피난가지 않고 남은 주민들 약 2만명 중 5% 정도인 1천명 정도가 쿠임브라가 함락될 때의 무질서한 약탈 와중에 살해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영국군의 총칼에 떠밀려 길바닥에 나선 주민들의 처지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동맹군이라지만 난폭하기로는 프랑스군 못지 않았던 영국군의 약탈과 폭행, 굶주림과 추위였습니다.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뒤로 후퇴할 때 연합군과 함께 집을 버리고 피난가도록 강요된 포르투갈 주민들의 비참함에 대해서는 로열 스코틀랜드 제1 연대 3대대의 존 더글라스(John Douglas)라는 부사관이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불쌍한 주민들은 가족마다 앞에 어린 것들을 앞세우고 걸었는데, 이 어린 것들은 매일, 아니 거의 매시간 줄어들었다.  그러나 난파선의 선원들이 물 위에 뜬 마지막 나무조각에 매달리듯 이들은 계속 어디론가 걸어가야 했다.  이들을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적이나 아군이나 모두 이들의 소지품을 약탈했다.  결국 이들 대부분은 영국군 포병 진지 뒤편에서 땡전 한푼 없이 참혹한 겨울을 보내야 했다.  이 글을 읽는 영국인들이여, 생각해보라.  내가 여러분에게 이런 사실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고, 또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잠시 동안이라도 그 불쌍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도 쉬운 일이리라.  그러나 전쟁의 참혹한 손아귀로부터 이 축복받은 섬 주민들(영국인들을 지칭: 영국)을 지켜주신 주님께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Los desastres de la guerra, 즉 '전쟁의 참상'이라는 고야(Goya)의 시리즈 판화물 중 'No hay quien los socorra' (그들을 도울 자는 없다)라는 그림입니다.  세 명의 여인이 죽어 쓰러져 있고, 한 명이 서서 울고 있습니다.)




(역시 '전쟁의 참상' 시리즈 중 'De qué sirve una taza?' (컵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라는 그림입니다.  두 명의 굶주린 여인이 쓰러져 있는데 다른 여자 하나가 그 중 죽어가는 한 명에게 뭔가가 담긴 컵을 권하고 있습니다.)




결국 1810년 10월부터 1811년 봄까지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동안 무려 5만명의 포르투갈 주민들이 아사 및 병사, 동사해야 했습니다.  5만이라는 숫자는 당시 포르투갈 전체 인구의 2%로서 정말 막대한 피해였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남한 인구가 약 2천만명이었는데 그 끔찍했던 3년 전쟁 동안 남한 민간인 사망자만 약 38만명으로 약 2%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포르투갈은 약 5개월 동안 전체 인구의 2%가 사망했으니 얼마나 참혹한 광경이었는지 상상이 가실 것입니다.


포르투갈 민간인들에게 이토록 참담한 희생을 강요한 결과 프랑스군도 큰 피해를 입었을까요 ?  예, 당연히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상대적으로 매우 작았습니다.  1810년 9월 기세 좋게 포르투갈 국경을 넘은 프랑스군은 총 6만5천으로 시작했으나 다음해 2월 결국 프랑스군이 철수할 때 살아서 돌아간 것은 4만이었습니다.  그 중 전투에 의한 사상자는 부사쿠 전투 때의 약 4500 정도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굶주림과 그로 인한 합병증에 의해 희생된 것이었습니다.  또 알게 모르게 굶주림에 지쳐 탈영한 프랑스군도 꽤 많았겠지요.  무려 2만이나 되는 적을 총 한방 쏘지 않고 무찔렀으니 웰링턴은 기뻐했을까요 ?


웰링턴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포르투갈 주민들에게 끼친 피해에 대한 자책감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세나는 불과 2~3주도 버티지 못하고 스페인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그때 굶주리고 지친 채 후퇴하는 마세나의 군대를 추격하여 격파할 생각이었습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약 1년 전인 1809년 5월, 포르투(Porto)에서 퇴각하는 술트의 군단을 추격하며 기세를 올렸던 신나던 순간이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놀랍게도 마세나는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바로 코 앞에서 무려 1달을 버텼습니다.  웰링턴의 예상대로 프랑스군의 굶주림은 극심했습니다.  불과 2주만인 11월 초 이미 식량 부족으로 인한 프랑스군의 비전투 병력 손실은 5천에 달했으니까요.  수백 명의 프랑스군이 굶주림에 견디지 못하고 영국군 측에 투항해왔습니다.  그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마세나는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확실히 노련한 적수였습니다.  짙은 안개가 끼었던 11월 14일 밤, 프랑스군은 군복을 입고 군모까지 쓴 허수아비들을  감시 초소에 남겨둔 뒤 조용히 철수해버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10시가 넘어 안개가 다 걷히고도 몇 시간이 더 지나서야 영국군은 프랑스군이 모조리 철수했다는 것을 눈치챌 정도의 기민함이었습니다.  


포르투에서 술트를 결국 놓쳤듯이 마세나도 놓치게 되었다고 생각한 웰링턴이 느림보 영국군을 닥달하여 부랴부랴 그 뒤를 쫓았으나 영국군 전위부대가 프랑스군을 따라잡은 것은 무려 2일이 지난 11월 17일이 되어서였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프랑스군은 기가 죽어 걸음아 날살려라 도망치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쫄쫄 굶은 군대치고는 엄청난 속도인 하루 28km의 행군을 2일간 강행한 프랑스군은 어느 틈에 테주(Tejo) 강 북안에 면한 강변 도시 산타렝(Santarém)에 겨울 숙영지를 마련하고 든든한 방어진지까지 구축해놓은 상태였습니다.  마세나는 식량 부족으로 인해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앞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 식량 사정이 그나마 나았던 이 곳에 진지를 구축한 뒤 포병대와 야전 병원 등 이동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부대부터 미리 이동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산타렝에는 레이니에(Jean Reynier)의 제2 군단이 자리잡았고 나머지 부대들은 역시 먹을 것이 있는 더 북쪽 지역으로 분산되어 있었지만 웰링턴은 감히 프랑스군을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엔 닭쫓던 개 신세가 된 영국군을 프랑스군이 든든한 방어진지 안에서 비웃는 상황이 된 셈이지요.  




(마세나가 원래 대치하던 곳은 토헤스 베드하스가 아니라 소브랄이라는 마을 근처였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산타렝까지는 대략 55km 정도 걸리는 곳이었습니다.  하루에 28km씩 걸었다는 이야기지요.)




이렇게 양군은 지루한 대치 상황에 들어갔습니다.  웰링턴은 프랑스군이 여기서도 굶주리다 결국 몇 주 버티지 못하고 철수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놀랍게도 마세나의 프랑스군은 정말 뛰어난 식량 수집 기술을 발휘하여 다음해 3월까지 무려 3개월이 넘는 기간을 버텼습니다. 


대체 프랑스군은 어떻게 이렇게 먹을 것도 없이 버틸 수 있었을까요 ?  결국 웰링턴의 초토화 작전은 그다지 완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찰스 콕스(Charles Cocks)라는 영국군 정보 장교가 11월 4일 기록한 일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 병참 장교들을 동원해서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앞 10 리그(league, 1리그는 약 5.5km)에 걸친 전 지역에서 모든 식량을 다 사들였더라면 적은 식량 부족으로 훨씬 더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페니슈(Peniche) 지방의 총독인 블런트(Blunt) 장군이 얼마전 포르투갈 민병대장들(Capitao Mors)에게 레이리아(Leiria)와 방어선 사이에 있는 전체 곡물을 다 치우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는지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답변은 6주였으나, 지난 달 우리가 후퇴할 때 실제로 그들에게 통보가 갔을 때는 불과 며칠의 여유 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많은 양의 식량이 적의 손에 떨어졌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니까 원래 계획은 토헤스 베드하스 북쪽 100km 넘게 떨어진 레이리아까지 초토화 작전을 펼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정말 철저히 수행되었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죽어야 했을까요 ?)




그래도 물론 먹을 것은 부족했습니다.  마세나가 그렇게 먹을 것도 별로 없는 곳에서 버틴 이유는 웰링턴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서 서투른 공격을 해오는 것을 역공하든가, 아니면 스페인에서 드루에(Drouet)의 제9 군단이 지원을 위해 이동해오면 합세하여 웰링턴을 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웰링턴의 조심성은 바닥을 몰랐고, 레이니에의 제2 군단이 완전히 고립된 상태로 굶주리고 있었는데도 공격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세나는 다음 해인 1811년 2월, 실패를 인정하고 포르투갈을 떠나 스페인으로 후퇴했습니다.  그 때 즈음에는 먹이찾기의 귀재 프랑스군조차도 더 이상 먹을 것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일대가 탈탈 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웰링턴은 '영국군이라면 한달도 버티지 못할 곳에서 프랑스군은 무려 3달을 버텼다'라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결국 1810년~1811년 봄까지 이어진 마세나의 침공과 그에 맞선 웰링턴의 작전은 수만 명의 무고한 민간인 사망자만 낸 채 양측에게 아무 의미도 없이 끝났습니다.  전쟁, 특히 외국군에게 국토를 맡긴 전쟁이란 이렇게 참혹하고 무의미한 것입니다.  






Source :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massena_portugal.html

https://www.lifeofwellington.co.uk/commentary/chapter-twenty-three-torres-vedras-october-1810-to-february-1811/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peninsular.html

https://en.wikipedia.org/wiki/Lines_of_Torres_Vedras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lines_of_torres_vedras.html

http://samilitaryhistory.org/vol102sm.html

https://www.voakorea.com/a/article----625----124496254/1348359.html

https://en.wikipedia.org/wiki/The_Disasters_of_War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밥돌이 2018.12.10 08: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때 프랑스군은 나폴레옹 없어도 웰링턴쯤은 두어달 묶어둘수 있는 역전의 용사들이었는데 말이죠...

  2. 투팍아마르 2018.12.10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말이 가슴에 와 닿는군요. 임진왜란과 청일전쟁 시기, 그리고 한국전쟁때 한반도에 살았던 백성들의 삶이 오버랩되는게 저뿐만이 아니지 싶습니다..

  3. Nasica팬 2018.12.10 1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엇습니다

    참고로 한국전쟁의 민간인 피해는 학자마다 추정치가 다르며 남북한 합쳐 최대 수백만명 단위까지 보는 경우도 잇습니다

    본문의 38만명은 수많은 추정치 중 하나일뿐입니다

  4. franken 2018.12.10 1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앞으로의 전개가 예상되는 게 프랑스군은 몇 번 이런 식으로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앞까지 왔다가우주방어선을 뚫을 자신이 없어 머뭇거리며 몇달간 머물렀고 웰링턴은 뚝심있게 본국이 뭐라 하든 포르투칼이 뭐라 하든 요지부동... 결국 프랑스군이 재풀에 다시 후퇴... 그러다가 러시아원정으로 스페인의 프랑스군까지 불러들였다 대패하여 자연히 균형이 깨지고 기회를 포착한 웰링턴이 드디어 진격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그림이 보이는군요.

    • 애독자 2018.12.11 0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미 벌어진 일인 역사에서 전개를 예상한다는 말은 좀 이상하긴하네요

  5. reinhardt100 2018.12.10 17: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몇달간의 대치 속에서 양군이 모두 식량 부족에 시달렸군요.

    저번에 한 번 다른 글에서 댓글을 달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나폴레옹이 직접 20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하여 밀어붙였어야 했다고 생각이 더욱 강해집니다. 방어선 자체가 일단 길더라도 20만 대군의 공성포탄 탄막에 단 한군데만 뚫려도 영국군은 리스본까지 후퇴해야 하는데 리스본까지 간다는건 이미 무조건 철수해야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20만 대군의 보급 문제가 있지만 어떻게 해서든 보급이 끊어지지 않게 한다면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을 뚫을 수 있었을 테니까요.

    19세기판 참호전이 되었을수도 있다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보여지는게 5만의 병력으로 솔직히 40km에 육박하는 방어선 전체에 균일한 밀도의 탄막을 펼친다는 건 당시 군사기술상 불가능했습니다. 당장, 웰링턴도 10km 이상은 기존의 성채 및 자연적 장애물을 활용했는데 프랑스군 입장에서는 일부러 저런 지역을 제외하고 나머지 중 아무데나 단 한군데만 집중해서 화력을 투사해버리면 방어선이 돌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18세기 전반 모리스 삭스 원수가 유능한 사령관이 지휘하기에 최적,최대의 병력 규모는 당시 기술상 4만 5천명이 한도라고 했는데 웰링턴은 여기에 20% 정도 더 많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자기 병력의 4배를 동원해서 단번에 밀어붙인다면? 막을 방법따위는 이미 없어진다는 답이 나옵니다.

    • franken 2018.12.10 19:23  댓글주소  수정/삭제

      프랑스가 제해권이 없었다는 게 근본적인 이유죠. 육상으로는 시대한계상 20만 대군을 먹일 보급을 유지한다는 게 불가능했고 북아프리카와 비슷한 건조기후를 지닌 이베리아 반도서 징발로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니 말이죠. 그럼 답은 목표인 리스본이 해안도시이겠다 대서양 연안이나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해군으로 보급 및 공략을 하는 게 답인데 재해권이 영국에게 있으니 천하의 나폴레옹이라고 답이 있을 리가 없지요ㅎㅎㅎ

      평소 나폴레옹이 영국을 "상점주인들의 나라"라고 비웃었다는데 그 상점주인들이 다른 건 몰라도 돈줄 하나는 아주 두둑했으니 얕잡아본 댓가를 톡톡히 치뤘군요

    • reinhardt100 2018.12.11 0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무리를 해서라도 했어야 했다는게 제 솔직한 의견입니다. 일단 프랑스 본토와 이베리아반도는 육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이용해서 융단폭격하듯이 반도 전체를 진압할 가능성은 있으니까요.

      보급문제 중요하죠. 다만, 보급선을 다양하게 하고 20만 이외에도 보급로 경비병력 확충 및 게릴라 토벌작전 같은 것도 병행해서 아예 저항의 싹을 잘라버리는 식으로 나가는 것도 고려할 수 있겠죠.

  6. 루나미아 2018.12.10 1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레스 베드라스의 위엄을 기대하며 글을 열었다가 민간인들의 희생을 보고 씁쓸해지네요...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에서 이런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폴란드는 굶었을망정 강제 이주나 굶주림으로 사망까지 이르렀단 얘기는 못 들어서;)

    그리고 러시아 원정에 비하면 이건 티저영상 정도밖에 안 되는게 더 안타깝네요

  7. 유애경 2018.12.10 2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여간 전쟁은 만악의 근원 같습니다.

    • 애독자 2018.12.11 0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 마인드로 2차 세계대전을 막은 위대한 위인 네빌 체임벌린에 대해 아십니까?

    • 유애경 2018.12.11 0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2차 세계대전을 막았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 0_- 2018.12.12 2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프로불편러가 유행하더니, 요새는 프로시비러가 유행하나 봅니다?

      전쟁이 만악의 근원이라고 만 했지, 무슨 돈으로 평화를 사자고 하는 투로 이야기 한 적도 없는 분에게 대뜸 체임벌린 수상 이야기를 왜 꺼내고 있는거죠? 뭐 하나 배웠다고 얄랑궂은 지식자랑 하는 겁니까? 거의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수준으로 뜬금없이 뭐시기 저시기를 아느냐고 묻는데, 수준이 딱 외국인 기자회견장에서 질문하랬더니 "두유노 뭐시기저시기" 하는 기레기 수준 내지는,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하는 "도를 아십니까?" 수준이네요.

      이거 하는 꼴 보니 댓글란에 자주 출몰하는 누구누구가 딱 연상되네요. 또 동일인이 아니라 발뺌은 하겠으나 단어선정수준, 문장력이나 논리전개수준이 딱 그꼴이라서 설령 자아가 동일인이 아니더라도 똑같이 취급하면 좋긴 하겠더라고요.

    • 애독자 2018.12.13 1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눈물닦고 침착하게 좀 말해보세요

    • 푸른 2018.12.18 1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애독자님 뼈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센척하는거 너무 웃기네요ㅋㅋㅋㅋ 불쌍하기도하고ㅋㅋ

    • 애독자 2018.12.18 16:1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닥 진지하게 대꾸할 필요를 못느껴서요 글 한줄로 아주 일생이 담긴 소설을 쓰고 자빠졌는데 뭐하러 초를 칩니까

  8. Starlight 2018.12.11 0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통신과 보급. 각 지역을 통제할 병력까지 합해 대육군은
    스페인에서만 평균 20만명이 주둔했었습니다.
    끊임없는 게릴라전으로 통신선 유지조차 어려워
    각 부대가 와해된 상태로 각개격파되며 계속 소모되는데,
    이런 스페인을 배후로 두고 포르투갈에서 일시에 20만명을 동원하려면 이건 군역량을 총동원해야겠죠.
    여전히 오스트리아는 강하고, 프로이센은 부활하고 있고,
    러시아는 꼬장꼬장하니 이때쯤 1810년에는 대외적으로는 최상의 국력이지만 내부적으로는 프랑스의 군사력도 이미 임계점에 다다른 상태라 생각합니다. 나폴레옹이 온전히 이런 시대 흐름을 직관하고 통찰했어도 결국엔 몰락할 운명이란 생각입니다. 서부전선엔 스페인과 포르투갈, 동부전선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북쪽 바다 너머엔 영국.
    북동쪽엔 거인인 러시아. 그리고 베르나도트의 스웨덴까지. 완전히 고립무원입니다. 라인연방과 폴란드.나폴리는 나폴레옹에게 국면을 전환할 큰 도움이 될수는 없었지요.

  9. 먹탱이 2018.12.11 15: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금 심도 있는 글이라 찬찬히 읽었어요^^;; 그리고 과연 의미있는 전쟁이 있었던 적이 있나? 생각해보니 전 잘 모르겠어요. 갖다붙이면 다 대의가 있었다 하겠지만..

  10. 어이가없네요 2018.12.14 0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에 눈물닦고 침착하게 말씀해보시라는분, 체임벌린 운운하신게 어거지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에 대한 지적에 응수하는 태도가 실로 수준떨어지네요. 눈물닦고 천천히 말씀해보라니,참 궁색하기도 합니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때엔 상대방을 무시하라고 어디선가 배웠나보지요?

  11. 인퀴지터 2019.02.22 19: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계절이 지나서 하는 거론입니다만 좋은 본문에 어째서 이렇게 철딱서니없이 머저리같은 댓글들이 빈번히 달리는지는 글쓴이님도 모르지시 않지 않습니까, 글쓴이님은 논쟁성 화두에 급진적인 정치관을 자주 단언조로 표시해서 ♪♩♫들이 꼬이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되도록 하시고 계신다고 여길 부류가 적지 않겠죠, 적어도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

10월 5일, 프랑스군 전위 부대에게 사로잡힌 영국군 포로들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보고가 마세나에게 들어왔습니다.  영국군이 서둘러 '방어선 쪽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여태까지 마세나는 웰링턴이 1809년 1월 코루냐로 후퇴하던 무어 장군과 똑같은 신세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최악의 경우라고 해봐야 웰링턴의 영국군을 섬멸하지 못하고 놓치는 정도이고, 리스본 함락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국군 포로 취조 보고서에 따르면 웰링턴의 목적지는 리스본 항구에 정박한 영국 수송선이 아니라 어디엔가 구축해 놓은 방어선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세나는 자신감에 차있었습니다.  부사쿠 능선 같은 천혜의 방어선조차도 (비록 빙 우회하느라 시간은 걸렸지만) 간단히 돌파했는데, 영국군이 리스본 앞에 무슨 병정놀이 방어선을 구축한다고 해봐야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프랑스군이 그 방어선이라는 것의 실체를 처음 접한 것은 그로부터 또 일주일이 지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10월 11일, 소브랄(Sobral)이라는 작은 마을에 영국군 1개 중대 정도가 전초 진지를 마련하고 있는 것을 몽브렁(Montbrun) 장군의 기병대가 발견했습니다.  문제는 이 마을도, 그 마을에 들어앉은 영국군 부대도 아니었습니다.  그 마을 뒤에는 낮고 긴 언덕이 병풍처럼 늘어져 있었는데, 그 언덕 위에 일련의 요새들이 주르르 늘어서 있는 것이 프랑스군 기병대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음날 현장에 도착한 쥐노(Junot)의 보병 사단이 소브랄 마을의 영국군을 간단히 내쫓았으나, 이들이 도망쳐 들어간 언덕 위의 요새들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현장에 도착해 직접 이 영국군의 방어선을 본 마세나는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언덕 위의 영국군 방어선이라는 것은 하나의 길고 높은 벽이 아니었고 일련의 보루(redoubt)와 옹벽(ravelin), 강화진지(blockhouse) 등으로 이루어진 느슨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런 각각 독립된 보루들은 상호 지원이 가능한 거리 내에 위치하여 어느 하나를 돌파하기가 쉽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바로 10여일 전에 부사쿠 능선에 자리 잡은 영국군의 철벽 방어를 경험한 마세나로서는 저렇게 대포와 참호, 옹벽으로 도배질 이 된 방어선 뒤에 틀어박힌 영국군을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젊음을 스타크래프트에 바쳤던 저로서는 그 느낌 알지요.)





(제가 옹벽이라고 번역해놓은 ravelin은 윗 그림과 사진에서 성벽 앞에 위치한 쐐기 모양의 낮은 외벽을 뜻합니다.  성벽 본체 앞에 저런 쐐기 모양의 벽을 배치하고 거기에 대포와 수비병을 보강하여 성벽 본체를 더 강화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윗 사진은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의 일부는 아니고, 다른 지역의 요새 사진입니다.)




(제가 강화진지라고 번역해놓은 blockhouse의 모습입니다.  보통 여기에 대포도 장착하여 적은 병력으로도 다수의 적에 대항하여 버틸 수 있도록 한 작은 요새라고 보시면 됩니다.   당시 영국 해변에 많이 설치된 마르텔로(Martello) 탑도 blockhouse의 일종입니다.)




마세나는 두가지 점에서 크게 놀랐습니다.  먼저 영국군 방어 진지의 규모와 견고함에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렇게 길고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것은 프랑스군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무엇보다 기동성을 중시하고 적 야전군의 격파를 노리는 프랑스군이라면 저렇게 막대한 예산을 들여 오랜 시간 삽질을 하느니 차라리 그 예산으로 총과 대포, 수송용 말과 노새를 더 구입하여 병력을 더 충원하고 훈련시켰을 것입니다.  저 방어선은 정말 영국군처럼 돈과 물자가 풍부한 대신 병력이 부족한데다 방어전에 특화된 군대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었고, 또 영국군에게만 가능한 물건이었습니다.


마세나가 놀란 이유는 하나 더 있었습니다.  실은 놀랐다기 보다는 어이가 없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일이었지요.  바로 10여일 전 부사쿠 능선을 우회하여 돌파한 것처럼 저 방어선도 굳이 돌파하지 않고 그냥 우회하면 간단히 해결될텐데, 웰링턴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무식한 방어선을 구축해놓은 것일까요 ?  설마 저 방어선이 테주(Tejo) 강부터 바다까지 연결된 것도 아닐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 방어선은 테주 강부터 시작하여 바다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  이 방어선을 우회할 길을 찾기 위해 방어선의 양측면으로 출동한 기병대는 가도 가도 저 방어선이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를 했길래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방어선을 구축해놓았던 것일까요 ?  




(저 지도에서 점선으로 되어 있는 것이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입니다.  보시다시피 1차선과 2차선, 최종적으로 3차선까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마세나는 저 1차선조차도 돌파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마세나가 만난 방어선은 약 1년 전인 1809년 11월부터 건설에 들어갔었고, 영국-포르투갈 측에서는 이 방어선을 토헤스 베드하스(Torres Vedras) 방어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최북방의 거점 마을이 토헤스-베드하스라는 이름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이 엄청난 시설물은 1809년 7월 스페인 탈라베라(Talavera) 전투에서 웰링턴이 승리하고도 허겁지겁 도망쳐야 했던 쓰라린 기억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당시 웰링턴의 영국군은 주르당의 프랑스군의 공세를 잘 막아냈으나, 측면에서 술트가 예상보다 큰 규모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온다는 첩보를 접하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하면서 내빼야 했지요.  그때의 경험에서, 웰링턴은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결국 야전으로는 승산이 없고 방어전을 펼쳐야 하는데, 그러자면 영국과의 보급선 기지인 리스본을 사수하기 위한 굳건한 진지가 꼭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 방어선의 초안을 만든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랑스군이었습니다.  1807년 쥐노(Junot)가 이끈 제1차 포르투갈 정복 때, 쥐노의 부하 중 벵상(Vincent)이라는 대령이 리스본 주변의 지형을 관찰한 뒤 이런 방어선이 가능하겠다는 초안을 만들어 쥐노에게 제출한 바 있었습니다.  물론 쥐노에게는 그런 방어선을 만들 필요도 시간도 재원도 없었지요.  그런데 그 보고서가 돌고 돌아 결국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손에 들어갔고, 네바 코스타(Neves Costa)라는 포르투갈군 소령에 의해 좀더 구체화된 뒤에 웰링턴에게 채택된 것이었습니다.  




(리스본 일대의 지형입니다.  보시다시피 리스본은 사실상 작은 반도의 남쪽 끝에 붙어 있었으므로, 테호 강과 대서양 사이에 철통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은 어렵긴 해도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 방어선은 리스본 북쪽의 지형이 꽤 험하다는 점과, 테주 강이 바다와 만날 때 거의 큰 만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넓은 하구를 구성한다는 점, 그리고 영국 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리스본은 그 거대한 테주 강 하구의 북쪽 강안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작은 반도의 남쪽 끝에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북쪽의 험한 지형의 언덕들을 잘 이어 붙이면 테주 강부터 대서양 연안까지 이어지는 30~40km 정도 길이의 방어진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부사쿠 전투 때 웰링턴이 요새도 없이 그냥 능선에 의지하여 펼쳤던 방어선의 길이가 약 10km 남짓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요새와 옹벽 등으로 강화한 방어선을 40km 정도 펼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돈과 시간이 남아도는데다 주도면밀하기까지 했던 웰링턴은 한줄의 방어선으로는 안심이 안 되어 약 10km 후방에 더 견고한 제2 방어선을 또 구축했고, 또 리스본 서쪽 강가에의 사오 줄리오(São Julião)에는 작은 규모로 제3의 방어선까지 구축했습니다.  게다가 리스본의 남쪽을 가로막은 테주 강 하구는 거의 바다라고 생각될 정도로 넓어서, 제해권을 장악하지 않는 이상 도하가 불가능했습니다.  




(현재의 토헤스-베드하스 방어선은 윗 사진과 같은 주요 성채와 보루 등만 일부 남아 있습니다.)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의 일부로 편입된 기존 성채의 모습입니다.  토헤스 베드하스는 이렇게 기존 시설과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그렇다고 웰링턴이 자신의 군사적 무능함을 돈과 물자로 때우려는 무식한 작전에만 의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먼저, 이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든 시간은 고작 11개월, 비용은 10만 파운드(현재 가치로 대략 250억원)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웰링턴이 포르투갈 주재 영국 대사인 존 빌리어스(John Villiers)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영국군이 포르투갈에서 작전하기 위해 필요한 예산이 매달 20만 파운드라고 했으니 저 정도 예산이면 정말 합리적인 비용으로 극강의 효과를 보여준 방어선을 구축한 셈이었습니다.  이는 지형 지물을 매우 효율적으로 활용한 영국군 공병대의 기술적 우수성과 함께 나라를 지키겠다는 포르투갈 노동자들의 열정이 낳은 결과였습니다.  특히 1년 간이나 이 정도의 대공사를 진행하면서도 프랑스 측에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은 것은 정말 경탄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실은 프랑스 측 뿐만 아니라 영국군 병사들과 포르투갈 시민들조차도 리스본 북쪽에 그렇게 거대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고 하니, 보안에 정말 철저했던 모양입니다.  덕분에 마세나도 이 벽에 부딪힌 뒤 어쩔 줄 몰라했던 것이지요.


또한 웰링턴이 마세나를 위해 준비한 것은 이 토헤스-베드하스 방어선 하나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벽은 벽일 뿐, 벽으로 적을 몰살시킬 수는 없었지요.  마세나의 프랑스군을 궤멸시킬 웰링턴의 비장의 무기는 별도로 준비되어 있었고, 마세나가 이 방어선 앞에서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사이 이미 작동을 개시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바다까지 이어지는 철통 방어의 선구자는 아테네와 피라에우스 항구를 연결하는 아테네의 장성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 벽의 길이는 6km에 달했지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일찌기 '벽 뒤에 숨는 자는 결국 진다' 라고 말한 바가 있었고, 결국 아테네는 스타르타에게 패배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말한 나폴레옹 자신도 생-장-다크레의 성벽 뒤에 숨은 투르크군에게 패배당하기는 했습니다.)







Source :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massena_portugal.html

https://www.lifeofwellington.co.uk/commentary/chapter-twenty-three-torres-vedras-october-1810-to-february-1811/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peninsular.html

https://en.wikipedia.org/wiki/Lines_of_Torres_Vedras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lines_of_torres_vedras.html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아즈라엘 2018.12.03 07: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료가쿠??

  2. Sir.John French 2018.12.03 09: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웰링턴이 구축한 방어진지는 1차 세계대전을 연상시키네요.

  3. 투팍아마르 2018.12.03 1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헤스 베드하스라고 쓴걸 보니 일전에 동일인의 이름을 어떻게 표기해야 하는지로 골머리 썩이셨을 나시카님이 생각나는군요. 이 벌칙(?)은 지명에도 고스란히 적용이 되는군요...ㅋㅋ. 테호강이란 표기도 테구스(타구스)강을 말씀하신거죠?

  4. 이삼 2018.12.03 1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이번 편도 수고하셨습니다.

  5. 샤르빌 2018.12.03 15: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세나: 저게 만들어 질 동안 왜 여태까지 보고하지 않았나!

    부관: 그게.. 웰링턴이
    만들었나 봅니다..

    마세나: 야이 새끼야! 당연히 웰링턴이 만들었겠지! 그럼 놈이 산을 창조했겠냐!

  6. 하이텔슈리 2018.12.03 2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벽 뒤에서 무릎꿇고만 있다면 지겠지만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야기가 다르겠고 웰링턴이 딱 그 경우일듯.

  7. 석총 2018.12.04 07: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포 우호조약 아편전쟁때 마카오가 영국군 거점이였죠

  8. 필명 2018.12.04 2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타 스샷을 보니 옛날맵이 아닌데요 ㅋㅋㅋ eud맵 한국좀비침공인거 같은데. 나시카님 지금도 스타 하시나요?

  9. Eugen 2018.12.05 14: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새랑 성채를 보니까 카이사르의 디라키움 공방전하고 알레시아 전투가 생각나네요. 실제로 저것과 비슷하게 카이사르가 만든 적이 있어요. 그 때는 화약무기가 없었긴 했지만요.

  10. KTn 2018.12.05 15: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벙커링이라니....! 공격군은 피눈물 흘렸겠습니다.

  11. Starlight 2018.12.08 15: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하드라마 나폴레옹에선 탈레랑으로 출연했던 존 말코비치가 웰링턴으로 출연한 (Linhas de Wellington, 2012
    토레스 전투) 영화가 이 전투를 묘사한걸로 알고있는데
    정확하게 고증한건지 잘 모르겠네요.

  12. 석총 2019.01.23 13: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오사카 겨울전투때 사나다마루로 인해서 악전고투를 했죠

9월 27일 오전의 이 부사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500의 전사와 3600의 부상, 거기에 400에 가까운 실종자를 냈는데 비해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은 고작 전사 200에 부상 1000, 그리고 50의 실종자를 냈을 뿐이었습니다.  명백한 프랑스군의 참패였고, 그 원인은 마세나의 잘못된 판단이었지요.  마세나는 자신의 작전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에 대해 꽤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우수한 지휘관은 패전의 충격에서 재빨리 빠져나오는 법이지요.  그는 실패의 원인이 생각보다 웰링턴의 방어선이 훨씬 더 길게 늘어져 있어서, 가파른 능선이라는 강력한 방어선을 충분히 우회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잘 이해했습니다.  원인이 나오면 해법도 있기 마련이고, 해법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훨씬 더 크게 우회하면 되는 것이었지요.


그 날 오후에 패전의 상처를 추스린 마세나는 다음날 아침 기병대를 출격시켰습니다.  능선에 자리잡은 웰링턴의 방어선을 우회할 도로를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병대는 곧 쉽게 우회로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불과 15km 정도 북쪽으로 올라가면 부사쿠 능선이 끝나는 지점이 나오고, 거기서 부사쿠 능선 뒤쪽을 돌아 쿠임브라(Coimbra) 시까지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부사쿠 능선을 넘는 것에 비해 30km 정도를 우회하는 것이니 거의 하루 더 행군해야 한다는 문제는 있었지만, 하루의 행군으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도 적군을 몰아낼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요.  마세나는 '진작 이럴걸'이라는 후회를 마음 한구석에 품은 채 즉시 군을 이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왜 진작 저렇게 간단한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까요 ?  원래 프랑스군의 강점은 화력이 아니라 기동력에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마세나의 3개 군단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부사쿠 능선 위의 영국군에게도 훤히 내려다 보였습니다.  웰링턴에게도 그 의미는 명백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군이 부사쿠 능선 전체를 우회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웰링턴에게는 3가지 옵션이 있었습니다.   첫번째가 추격 및 섬멸, 두번째가 대응 행군, 세번째가 후퇴였습니다.


원래 전투에서 적의 사상자를 극대화하려면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적의 등 뒤에 총알을 박아넣거나 기병대의 군도로 내리찍는 것은 모든 지휘관들이 꿈꾸는 바였지요.  그러나 비록 전날 부사쿠 전투가 연합군의 승리라고 해도, 저 아래 행군을 시작한 프랑스군은 절대 패주하는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 옵션은 선택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경우, 연합군으로서는 프랑스군보다 더 빨리 이동하여 그 우회로의 요지를 장악하고 더 강력한 방어선을 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웰링턴은 이 두번째 옵션 대신 후퇴를 택했습니다.  사실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아무 미련없이 후퇴를 택했지요.  


웰링턴이 후퇴하기로 결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그는 마세나의 침공에 맞서 그냥 계속 후퇴할 생각이었거든요.  부사쿠 전투가 벌어진 것도, 마세나가 넘으려던 부사쿠 능선이 방어전에 너무 좋은 위치이다보니, 마세나와 한판 붙어보고자 하는 욕망을 이기지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마세나가 부사쿠에 미련을 갖지 않고 우회한다 ?  그러면 웰링턴도 미련을 갖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부사쿠 능선 위에 모닥불을 평소처럼 피워 연합군의 후퇴를 프랑스군이 눈치 못 채도록 하고 거기에 후위대까지 남겨두는 치밀함을 보여주며 후퇴했습니다.


하지만 웰링턴의 결정에 대해 많은 이들, 특히 포르투갈 측에서는 비난이 빗발쳤습니다.  부사쿠를 포기한다는 것은 유서깊은 도시인 쿠임브라를 포기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도 전날 부사코 능선으로부터 들려오는 포성에 불안해 하던 쿠임브라 시민들은 웰링턴의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에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위기가 달아오르기도 전에 '연합군은 남쪽으로 철수하니 쿠임브라 주민들도 남김없이 피난을 가라'는 통보가 날아오자 주민들의 낙심은 그만큼 컸습니다.  




(몬데고 강 북안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도시 쿠임브라입니다.)




실은 웰링턴은 애초에 쿠임브라를 사수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이미 쿠임브라에 대해 강제 주민 소개령을 내린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민들에게 집과 상점, 농장과 창고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나라 625 전쟁 때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때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한국을 지원해주고 있었으니 집과 논밭을 버리고 부산이나 경남으로 피난가더라도 미군이 주는 옥수수가루라도 먹고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810년 오만한 매부리코 영국군 장군의 명령에 따라 고향집을 버리고 떠나는 포르투갈 주민들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에게 맞아죽기 전에 굶어죽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부사쿠 전투가 끝나고 마세나의 군대가 북쪽 우회로로 이동하고 있던 9월 29일 밤에도 아직 쿠임브라 시민 80% 정도는 그대로 시내에 남아 있었습니다.  9월 29일 밤 이 사실을 알게된 웰링턴은 인정사정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장 쿠임브라를 떠나지 않으면 병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쫓아내겠다'라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쿠임브라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앞서 웰링턴이 쿠임브라를 비롯한 각지의 주민들에게 강제 소개령을 내린 이유는 프랑스군에게 식량을 넘겨주지 않기 위함이라고 했지요.  과연 그런 소개령이 효과가 있었을까요 ?  적어도 약간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사쿠 전투 직전인 9월 24일 웰링턴이 마세나에게 프랑스어로 보낸 답장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구글 번역기 썼습니다.  저 프랑스어 잘 모릅니다.)



"Je suis fâché que votre Excellence sent quelques inconvéniens personnels de ce que les Portugais quittent leurs foyers à l'approche de l'armée Française. Il est de mon devoir de faire retirer ceux que je n'ai pas les moyens de défendre ; et j'observe que les ordres que j'ai donné là-dessus n'étaient presque pas nécessaires. Car ceux qui se ressouvenaient de l'invasion de leur pays en 1807, et de l'usurpation du Gouvernement de leur Prince en tems de paix, quand il n'y avait pas un seul Anglais dans le pays, pouvaient à peine croire aux déclarations que vous faites la guerre aux Anglais seuls ; et ils pouvaient à peine trouver la conduite des soldats de l'armée Française, même sous vos ordres, envers leurs propriétés, leurs femmes et eux-mêmes, conformes aux déclarations de votre Excellence."


"프랑스군의 진격을 피해 포르투갈인들이 집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것 때문에 각하께서 개인적인 불편함을 좀 겪고 계신다니 유감입니다.  제가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피난시키는 것이 제 의무인데, 사실 제가 내린 소개령은 거의 불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나라에 영국인이 단 한 명도 없던 1807년에 벌어진 프랑스군의 침략과 선전포고도 없이 왕정을 찬탈당했던 것을 잘 기억하는 주민들은 각하께서 배포한 포고문, 즉 각하께서는 포르투갈이 아니라 영국군만을 적대시한다는 말씀을 거의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민들은 각하께서 내리신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재산과 여인들과 자기 자신들에 대한 프랑스군의 행실이 각하의 포고령과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아마 마세나가 웰링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군이 주민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바람에 식량을 못 구해서 불편하다, 이건 신사들의 통상적인 전쟁 규칙에 어긋난다'라고 불평을 했었나 봅니다.  과연 영국군은 집을 떠나기 싫어하는 포르투갈 주민들에게 총검을 들이대고 피난을 떠나도록 강제했을까요 ?  설마 끝내 소개령에 응하지 않을 경우 민간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을까요 ?  글쎄요.  근거가 무엇이든 간에 최소한 프랑스군은 실제로 그랬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사쿠 전투 약 1주일 전인 9월 20일, 마세나가 나폴레옹의 참모장인 베르시에(Berssier)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Monseigneur, nous ne marchons qu’à travers du désert; pas une âme nulle part; tout est abandonné. Les Anglais poussent la barbarie jusqu’à faire fusiller le malheureux qui resterait chez lui; femmes, enfants, vieillards, tout fuit. Enfin on ne peut trouver nulle part un guide. Nos soldats trouvent des pommes de terre, et d’autres légumes; ils sont fort contents, et ne respirent qu’après le moment de rencontrer l’ennemi. Les marches nous ont fort peu donné de malades”.


"각하, 우리의 행군은 마치 사막을 횡단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버려진 상태입니다.  영국놈들의 야만성은 극에 달하여 자기 집에 남아있던 불행한 주민들에게 총을 쏠 정도입니다.  여자, 아이, 노인, 모두가 도망쳤습니다.  결국 이젠 길잡이를 구할 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 병사들은 감자와 기타 채소류를 찾았습니다.  병사들의 사기는 좋은 편이고 적과 만날 때까지 쉬지 않을 기세입니다.  강행군으로 인한 환자는 매우 적은 편입니다."  




포르투갈인들에 대한 존중이 거의 없었던 웰링턴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영국군 병사들이 그다지 점잖게 굴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은 범죄자까지 포함된 사회 최하류층 출신이 대부분이었거든요.  그런 사실은 부사쿠에서 남쪽의 리스본 쪽으로 후퇴하는 길에서도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곳곳의 마을에서 영국군에 의한 약탈이 벌어졌습니다.  웰링턴이 비록 인정머리 없는 오만한 귀족이지만, 공정하다는 점에서만은 인정받을 만 했습니다.  그는 포르투갈인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병사들, 심지어는 장교들조차 철저히 불신하고 잔혹할 정도로 엄격하게 대했습니다.  그는 약탈 행위를 주도하다 잡힌 병사들을 현장에서 교수형에 처했고 일부 부대, 특히 픽튼(Piction) 장군 휘하의 제3 사단의 경우는 후퇴 길에 마을을 만날 경우 아예 먼길로 빙 돌아가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부대는 부사쿠 전투에서 수훈을 세운 부대였지만 후퇴 길에 일부 마을에서 약탈 행위를 벌였다는 이유로 이런 수모와 불편함을 준 것입니다.  




(마세나의 침공 불과 19년 뒤인 1839년에 그려진 쿠임브라 시 외곽의 전경입니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은 영국군의 이런 부랑자같은 행동들 때문에 웰링턴은 마세나가 우회로를 택했다는 정보를 접하자마자 미련을 두지 않고 후퇴를 했던 것입니다.  1809년 1월 코루냐 철수 작전에서 영국군은 (비록 승리라고 주장했지만) 꽁무니를 바짝 추격해오는 프랑스군 앞에서 후퇴할 때 어떤 식으로 무너지는지 매우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바 있었지요.  웰링턴은 비록 전략적인 철수라고 하더라도 후퇴는 후퇴이므로 코루냐 꼴을 되풀이하는 것에 대해 거의 강박관념 수준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포르투갈에서는 10월 중순부터 우기가 시작되므로 행군하는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지겠지만 무엇보다 도로 사정이 엉망진창이 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군이 부사쿠 능선을 우회하는 동안 연합군을 일찌감치 앞서서 후퇴시킨 것입니다.  


드디어 10월 1일, 프랑스군이 쿠임브라 외곽에 나타났습니다.  그때까지 주민들은 다 도시를 비웠을까요 ?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유가 있던 상류층 주민 대부분은 이미 도시를 버린 뒤였지만 영국군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주민들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당장 피난 길을 떠나면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가난한 주민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영국군이 소개령에 따르지 않는 주민들에 대해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도 꼭 믿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프랑스놈들이 나타났다'라는 비명소리가 거리 한쪽에서 터져나오자, 맹수같은 프랑스 병사들의 난폭함이 갑자기 무서워진 일부 주민들이 마지막 순간에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은 전염성이 짙은 것입니다.  일부 주민들이 거리를 가로질러 피난길을 서두르는 모습을 보자 나머지 주민들도 공포에 사로잡혀 앞서거니 뒷서거니 무작정 피난길에 나섰습니다.  곧 거리가 가득 찼고 몬데고(Mondego) 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하는 다리는 교통 제층이 생겨 길이 꽉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다행히 아직 우기가 시작되지 않아 몬데고 강에는 1m~1.5m 정도로 얕은 여울이 곳곳에 있어 주민들은 이 여울들을 통해 피난에 나섰습니다.  아무 준비없이 공포에 사로잡혀 떠나는 피난길 광경은 주민들의 비명과 울음소리로 매우 참혹했다고 합니다.  




(현재의 쿠임브라 시와 몬데고 강의 전경입니다.)




이렇게 허둥지둥 나서는 피난이라면 겨우내 먹으려 저장해두었던 곡물과 저장식품 등을 다 싸들고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민들이 남기고 간 식량은 고스란히 프랑스군의 손아귀에 들어가 웰링턴의 혀를 차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쿠임브라는 웰링턴의 후퇴 작전에 나름대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 동안의 고달픈 행군길에 배가 고팠던 프랑스군은 먹을 것이 있는 도시에 들어가자마자 군기가 문란해져 식량, 특히 와인을 약탈하며 행군을 멈춰 버린 것입니다.  마세나로서도 굶주리고 지친 병사들이 좀 쉴 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국군이 일찌감치 총퇴각에 들어가서 어차피 따라잡기도 힘든 마당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지요.  프랑스군 주력은 이 도시에 4일간이나 머물렀고, 10월 5일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추격에 나섰습니다.  마세나는 리스본 정복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10월 5일, 추격에 나섰던 선발 부대가 잡은 영국군 낙오병은 천만뜻밖의 정보를 불었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Bussaco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bussaco.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massena_portugal.html

https://www.napoleon-series.org/research/miscellaneous/c_Tojal8.html

https://www.lifeofwellington.co.uk/commentary/chapter-twenty-three-torres-vedras-october-1810-to-february-1811/

http://www.wtj.com/archives/wellington/1810_09c.htm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ㅇㅇ 2018.11.26 0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끊기신공이 너무 절묘하네요...ㅎㅎ

  2. 성북천 2018.11.26 1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구글번역기가 저렇게 좋았나요? ㅎㅎ

    주인장께서 다 하신 것 같은데.ㅎㅎ

    매번 감탄하며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3. 샤르빌 2018.11.26 2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진왜란때도 지원온 명군더러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란 말이 유명하죠.. 존재감 하나와 전투력은 확실했지만 군기는..

    • ㅇㅇ 2018.11.27 06:49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실 명군은 병참문제로 군량을 조선에서 사먹으려고 은자를 잔뜩 가져왔는데 조선이 화폐경제가 아닌 물물교환 사회라 조선인들이 은자를 받으려 하지않고 식량을 팔지않아 쫄쫄굶다 눈이 뒤집힌것이고 뒤늦게 명나라 본토에서 식량을 조달하기 시작했을땐 조선에 쌀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마세나의 명령대로 이른 아침 부사쿠 능선에 늘어선 영국군 방어선의 측면을 향해 기어오른 레이니에의 제 2군단은 크게 2개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들은 몬데고 계곡에서 피어오르는 자욱한 아침 안개에 가려져 영국군의 관측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안개로 인해 프랑스군도 능선 위의 영국군의 존재를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대오를 맞추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이들은 사단 단위의 질서 정연한 대오가 아니라 기껏해야 대대 단위를 간신히 유지한 엉클어진 모습으로 행군해야 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안개를 뚫고 고지에 오른 프랑스군 눈 앞에 펼쳐진 능선은 텅 비어 있어야 했습니다.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방어진의 측면을 우회하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천만 뜻밖에도 프랑스군을 반갑게 맞이한 것은 연합군의 포병대와 머스켓 일제 사격이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이었을까요 ?


마세나의 상식으로는 웰링턴도 프랑스군 본진의 위치가 어디인지 보았으니, 능선을 방어한다고 해도 적당한 길이, 즉 4~5km 정도에 걸쳐 방어선을 펼칠 것으로 보았습니다.  마세나도 참전했던 바그람 전투 때, 막도날이 프랑스군 제5 군단을 기둥 모양으로 편성해서 오스트리아군의 전선을 들이받을 때도 그 기둥 앞면의 폭과 길이는 550m x 800m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프랑스군 3개 군단 약 6만5천보다 약간 작은 5만 정도로 알려진 영국군의 경우도 적절한 규모의 예비대를 대기시킬 것을 생각하면 최대 5km 이상 펼치는 것은 무리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웰링턴은 정말 가늘고 긴 방어선 매니아였습니다.  예비대 ?  그런 건 겁쟁이나 준비해두는 것이었지요.  그는 예비대도 없이 거의 8~9km에 걸쳐 5만의 영국-포르투갈 사단들을 최대한 펼쳐서 가늘고 길게 늘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마세나가 '이 정도면 연합군 방어선의 왼쪽 측면 너머겠지'라고 생각한 부분이, 놀랍게도 연합군 방어선의 거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곳이었습니다 !




(영국군 방어선의 오른쪽으로 충분히 우회했다고 생각했는데 영국군 우익은 커녕 거의 중앙부로 돌격해들어간 프랑스군의 공격 방향을 보십시요.)




웰링턴의 이 가늘고 긴 방어선은 마세나를 포함한 프랑스 지휘관들의 상식을 크게 벗어나는 진형이었습니다.  이렇게 방어선이 가늘고 길면 그 중 어느 한 곳이 적의 집중 공격에 돌파될 가능성이 너무 높았고, 그럴 경우 뚫린 곳을 틀어막을 예비대조차 없다면 방어선이 전면적으로 붕괴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웰링턴은 이렇게 무모한 방어선을 펼쳤을까요 ?  레이니에 휘하의 2개 사단, 즉 외들레(Étienne Heudelet de Bierre)와 메를르(Pierre Hugues Victoire Merle)가 이끄는 사단들은 각각 그 이유를 몸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일단 외들레 사단의 공격은 너무나도 치열한 연합군의 사격과 포격을 받고 그만 딱 멈춰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머스켓 소총의 사격 속도는 최대 분당 2발 정도였는데, 혼란스럽고 숨도 가쁘기 마련인 실전에서는 1분에 1발 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영국군은 정말 최대 사격 속도를 꾸준히 유지하며 프랑스군의 2배에 가까운 속도로 머스켓 볼을 날려댔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은 얇고 넓은 횡대로 부대원 전원이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아래 쪽의 프랑스군을 향해 침착하게 총을 쏘아대는 영국군에 비해, 프랑스군의 반격은 빈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영국군과는 달리 프랑스군은 높고 가파른 경사로를 헥헥거리며 올라와 지친 상태인데다, 진격을 위해 대대 단위의 좁고 긴 종대를 이루고 있던 프랑스군 병사들은 맨 앞 열 500여명 정도만 발포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도 사격전에 유리한 횡대로 대오를 변경하려 허둥대었지만, 연병장에서도 잘 안 되던 것이 영국군의 총탄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매끄럽게 잘 될 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외들레 사단은 얼마동안 버티다 많은 사상자만 낸 채 서둘러 경사면을 뛰어내려가야 했습니다.




(외들레 장군은 반도 전쟁에서 활약한 것 외에는 큰 활약은 없었습니다.  그는 1812년 러시아 침공 때 다행히 후방 예비대를 맡아 러시아 땅에 진입하지는 않았었고, 1813년 단치히 포위전 끝에 연합군에 항복했습니다.  그도 나폴레옹 몰락 후에 일단 루이 18세에게 충성했으나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 쪽에 붙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메를르 사단은 좀더 운이 좋았습니다.  이들이 안개를 뚫고 올라선 능선은 하필 영국군 제88 연대와 제45 연대 사이의 큰 빈틈이었던 것입니다.  이 곳은 정말 지키는 병력이 없었습니다.  뒤늦게 안개 속에서 프랑스군의 군화 소리를 들은 영국군 제 45연대와 포르투갈군 제8 연대가 그 빈 공간을 메꾸기 위해 서둘러 달려왔습니다만, 역시 때가 늦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먼저 도착했던 것입니다.  역시 지나치게 가늘고 길었던 웰링턴의 방어선이 돌파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반대 방향에서 영국군 제88 연대까지 몰려든 것입니다.  능선에 도달하자마자 숨고를 사이도 없이 양방향에서 몰려든 연합군에게 측면을 찔린 메를르 사단은 크게 휘청거리다 결국 물러났습니다.  다만 비탈길을 구르듯 내달려 도망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던 영국군도 더 아래 쪽에 대기 중이던 프랑스군 포병대의 공격을 받고 다시 기어올라 후퇴해야 했습니다.  




(포이 장군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종전 후 반도 전쟁에 대한 역사서를 썼습니다.  거기서 그는 영국군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정착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의 습성은 행군하는 병사에게 딱 들어맞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전장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덕목을 갖추고 있다.  바로 전투 현장에서의 침착함이다.  영국 육군의 영광의 기반은 그 뛰어난 군기 및 그 민족적인 침착성과 굳건함에 있다.  실제로 그들보다 더 군기가 엄정한 군대는 찾기 어렵다...")




추격하던 영국군이 물러나자 레이니에는 군단 내 예비대로 대기시켜 두었던 포이(Maximilien Sébastien Foy)의 여단을 투입하여 아까 공격했던 바로 그 부분을 다시 들이쳤습니다.  가늘고 긴 방어선은 한 곳을 집중해서 뚫는 것이 정석이었으니까요.  과연 반복된 공격에 지친 연합군도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정말 긴 방어선에 구멍이 뚫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의 우측, 그러니까 프랑스군의 좌측에서 새로운 영국군 병력, 즉 제9 연대가 쏟아져 나오며 포이 여단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결국 포이 여단도 이 새로운 영국군 증원 병력에 밀려 후퇴해야 했고, 이것으로 레이니에 군단의 공격은 최종적으로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레이니에 군단은 총 2천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고, 그 사상자 중에는 메를르 장군과 포이 장군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연합군의 사상자는 587명에 불과했습니다.  


한편, 레이니에 군단이 능선에서 뜻하지 않은 연합군 방어선을 만나 악전고투를 벌이며 울리는 총성이 들리자마자, 레이니에의 측면 우회 공격이 성공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판단한 네(Michel Ney) 원수는 저 위의 영국군 방어선 중앙부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실제로 네가 공격한 곳은 영국군 중앙부가 아니라 좌익에 가까왔습니다.  네의 공격은 레이니에의 공격처럼 루아송(Louis Henri Loison)과 마르샹(Jean Gabriel Marchand)이 각각 이끄는 2개 사단을 앞세웠고, 예비대로 메르메(Julien Augustin Joseph Mermet)의 사단을 예비대로 대기시켰습니다.  




(루아송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전부터 네의 휘하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는 언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어떤 전투에서 한쪽 손을 잃은 듯 합니다.  그는 1807년 쥐노를 따라 포르투갈을 점령한 지휘관 중 하나였는데, 현지 주민들을 학살하는 바람에 포르투갈 주민들은 그를 Maneta, 즉 '한손이 없는 자'라고 부르며 증오했습니다.  나중인 1809년 술트의 포르투갈 침공 때 포르투갈 주민들에게 포이 장군이 사로잡힌 적이 있었는데, 그때 포이가 루아송인 줄 알고 그를 살해하려던 주민들에게 포이가 두 손을 들어보이며 자신은 '마네타'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목숨을 건진 일도 있다고 합니다.  루아송의 군 생활은 잘 풀린 편이 아니라서, 그는 1812년 러시아 침공 때 후발대로서 주로 독일 및 이탈리아에서 강제징집한 소년병들로 구성된 1만5천의 병력을 이끌고 리투아니아 인근에서 야영을 하다가 섭씨 영하 35도의 혹한에 거의 전병력을 하룻밤 사이에 동사시키는 참극을 낳기도 했습니다.)




고지를 향해 헐떡거리며 올라간 루아송의 사단이 능선 인근에서 마주친 것은 1300여 명의 대규모 유격병들이었습니다.  알메이다 요새 때부터 프랑스군을 견제하던 크로퍼드 장군의 경보병 사단 전체가 유격병으로 나와 프랑스군을 견제한 것입니다.  이들을 쫓아내느라 시간을 쓰는 사이 능선 위의 영국군의 포병들이 준비를 갖추고 프랑스군에게 대포알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루아송 사단은 당연히 이 포대들을 새로운 목표로 삼고 진격했습니다.  겉으로 볼 때 프랑스군과 영국군 포대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루아송 사단이 이 포대 근처에 도달했을 때, 포대와 경사면 사이에는 움푹 들어간 도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더 나쁜 것은 그 숨겨진 도로 안에 제43연대와 52연대, 총 1700여 명의 영국 보병이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군이 지근거리까지 다가오자 즉각 뛰어나와 당황하는 루아송 사단에게 일제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이들은 꽤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뛰어나오자마자 프랑스군 종대의 머리 부분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집중 사격을 가하는 능숙함까지 보여주었습니다.   얇은 영국군의 방어선 중 한 곳을 공격으로 뚫으려던 프랑스군의 종대가 오히려 역으로 집중 공격을 당한 셈이었습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후퇴한 루아송 사단은 총 6500의 병력 중 무려 1200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군 43연대와 52연대는 23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이었습니다.  그 옆의 마르샹의 사단도 사상자만 냈을 뿐, 영국군의 얇은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왼쪽이 영국군, 오른쪽이 프랑스군입니다.  종대로 올라온 프랑스군을 약간 반원형으로 펼쳐진 영국군의 횡대가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요.)




어째서 마세나의 예상과는 달리 가늘고 길게 늘어진 영국군의 방어선이 프랑스군의 집중된 공격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일까요 ?  특히 메를르 사단이나 포이 여단은 분명히 취약한 영국군 방어선을 거의 돌파했었습니다.  그럴 경우 프랑스군의 승리가 확정되어야 했는데, 오히려 영국군은 측면에서 프랑스군을 압박하여 몰아냈지요.  원래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능선이라는 험한 산악 지형에서 그 측면의 수비군들이 그렇게 빨리 이동해오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요.  


영국군이 부사쿠에서 승리했던 이유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영국군의 머스켓 재장전 속도가 프랑스군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 간단히 말해서 모병제인 영국군의 훈련 정도가 징집된지 얼마 안 된 프랑스군보다 훨씬 더 좋았습니다.  발사 속도가 2배 빠르다는 것은 실질적인 병력 수가 2배라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가령 패퇴한 메를르 사단의 병사들은 자신들보다 3배가 많은 영국군에게 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만, 실제로는 당시 전투 현장의 영국군의 숫자는 프랑스군의 절반에 불과했습니다.


2) 확실히 고지를 방어하는 측이 훨씬 유리했습니다.

: 공격군은 고지를 기어오르느라 기진맥진하고 진격 속도도 느려진다는 핸디캡을 지고 갔습니다.  또한, 방어군은 공격군의 이동 방향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다는 결정적인 이점이 있었습니다.


3) 웰링턴은 부사쿠 능선을 따라 긴 교통로를 구축해 놓았습니다.

: 길고 가늘게 늘어진 방어선의 약점은 웰링턴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를 보완하려면 능선 위의 수비군이 좌우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고, 그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미리 능선을 따라 긴 도로를 닦아놓았던 것입니다.  이 도로 덕분에 메를르 사단이나 포이 여단이 방어선을 돌파했을 때 신속하게 그 옆쪽 영국군이 이동하여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43연대와 52연대가 그 움푹 꺼진 도로 속에 매복해 있다가 루아송 사단을 기습했던 것은 보너스라고 할 수 있었지요.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영국군의 장점과 한계가 명확하게 보입니다.  이런 전술들은 모두 방어전에서나 요긴하게 통하는 것이고 공격에서는 전혀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한편, 능선 아래의 마세나는 이 황당한 패배에 크게 낙심했지만 그렇다고 패배를 인정하고 후퇴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과연 마세나는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Bussaco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bussaco.html

http://www.peninsularwar.org/bucaco.htm

https://en.wikipedia.org/wiki/%C3%89tienne_Heudelet_de_Bierre

https://en.wikipedia.org/wiki/Maximilien_S%C3%A9bastien_Foy

https://en.wikipedia.org/wiki/Louis_Henri_Loison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푸푸냐옹 2018.11.22 06: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기다리던 2편이 드디어 나왔네요
    너무 재밌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2. OBI-WAN KENOBI 2018.11.22 08: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왠지 스타워즈 에피소드 3가 오버랩되는군요

    웰링턴:다 끝났어 마세나! 내가 고지를 점령했다!

    마세나:넌 내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어!

  3. keiway 2018.11.22 1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근데 "그 사상자 중에는 메를르 장군과 포이 장군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후에 마테타가 아니라고 주장해서 목숨을 건진 포이 장군과는 다른 인물인건가요? 아니면 전후가 바뀐건지.

    • nasica 2018.11.22 2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상자는 전사자와 부상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포이 장군이 포로가 되었던 것은 신트라 협정 이전의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부사쿠에서 부상도 입었던 것이고요.

  4. keiway 2018.11.22 15: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읽다보면 웰링턴의 전술은 참 제한이 많다고 느껴지는데요, 청야전술에 이은 방어전이 거의 전부니까요. 하지만 당대 최강의 전쟁 기계인 프랑스군에 맞서 자신이 이길 수 있는 단 하나의 전술을 다듬고, 그리고 그걸 사용할 수 있도록 전략을 짜는 그 능력이 승리를 이끈 거겠죠.

  5. 하이텔슈리 2018.11.22 1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Command&Colors Napoleonic 시나리오 번역하면서 다른 전투에는 프랑스가 공격하면 연합군의 빈틈을 노려지던 상황이 자주 났는데 왜 영국군에게는 공격하면 언제나 정면이었는가 궁금했는데 (부사코 전투는 공격하면 밀려나고의 반복) 오늘에야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전 전선에 걸쳐서 방어선을 펴서었군요. 좋은 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6. 역시 2018.11.23 0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워털루 전투도 그렇고 부사쿠도 그렇고 웰링턴이 역시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안목이 정말 대단하네요.
    사실 나폴레옹도 그렇고 항상 프랑스군이 압도적인 승리만 거둔 것은 아니죠.
    나폴레옹은 인류 역사상 TOP5에 항상 들어가는 역대 최고의 명장이고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한 독재자이지만 역시 인간은 어쩔수 없는 한계가 있네요.
    이런거 보면 삼국지의 제갈량이 왜 그 오랜 세월동안 존경받았는지 알 것만 같네요. 개인적 사심없이 그야말로 나라를 위해서 죽을때까지 국궁진췌 사이후이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나폴레옹을 보면서도 새삼 느끼게 되네요. 나폴레옹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만 않았어도 또 자신의 야망을 내세우지만 않았어도 프랑스의 역사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네요.

    • keiway 2018.11.23 08:1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제갈량도 무리한 북벌로 나라를 어려움에 빠뜨렸다는 비판이 있는 걸 보면 (연의/정사 다르긴 합니다만) 결국은 결과가 모든걸 말해주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스페인 전역도 승리로 이끌고 대륙봉쇄령 성공을 통해 영국까지 무릎꿇렸다면 (실제로 영국도 굉장히 힘들었었죠) 그 평가가 다르지 않을까요?

  7. Spitfire 2018.11.23 09: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사쿠에서도 우구몽에서도 워털루에서도 로크스 드리프트에서도.. 영국군은 항상 저런식으로 이기는군요~

  8. ㅇㅇ 2018.11.23 16: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근래 가장 재밌었던 부분이네요
    극적인 역사적 순간이 나시카님의 필력과 만나 흥미진진했습니다

탄약고 폭발로 인한 알메이다 요새의 갑작스러운 함락은 웰링턴을 크게 당황시킬만 했습니다.  하지만 웰링턴은 그렇게까지 당황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생각보다 너무 일찍 함락되긴 했지만 어차피 알메이다의 함락은 예견되었던 것이고, 시우다드 로드리고의 스페인군이 분전해준 덕분에 방어 준비는 이미 충분히 되어 있었거든요.  문제는 그 방어 준비라는 것의 본질이었습니다.


웰링턴의 방어전략은 간단했습니다.  후퇴였지요.  그는 기세등등한 프랑스군과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일대의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리고 게속 후퇴했습니다.  군대가 후퇴하면서 주민들에게까지 소개령을 내리는 것은 당시 유럽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웰링턴이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식량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식량을 현지 조달하는 프랑스군의 약점은 보급이고 프랑스군이 제풀에 꺾이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진격 예상지에서 밀가루 한줌도 남겨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민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식량이 있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는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농민이었던 주민들에게 삶의 터전인 농토와 집을 버리고 알아서 어디로든 사라지라는 것은 웰링턴의 깔끔한 사령부 탁자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집을 버리지 않았고, 당연히 자신들이 먹을 식량도 마루바닥 밑에 감춰둔 상태였습니다.  포르투갈 농부들의 소박한 기대와는 달리 프랑스군은 그렇게 농민들이 감춰둔 식량을 찾아내는데는 도사였고, 프랑스군은 그런 식량들을 먹어치우며 계속 전진했습니다.




(알메이다에서 쿠임브라로 향하는 길입니다.  쿠임브라 서쪽에 늘어선 산맥이 보이십니까 ?  현대의 지도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위의 크게 우회하는 도로가 아래의 두 도로보다 별로 오래 걸리지 않는 것을 보면 저 산맥이 상당히 험하다는 것을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손자병법에도 원정군은 보급 문제 때문에 전투를 서두를 수 밖에 없다는 말이 있지요.  따라서 손자병법을 읽지도 않은 웰링턴이 그런 후퇴 및 초토화 전략을 생각해낸 것은 무척 칭찬할 만한 일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중국이 아니었고 러시아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좁은 포르투갈에서 언제까지고 후퇴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수도이자 주요 항구였던 리스본 북쪽 어디에선가는 프랑스군을 저지해야 했습니다.  웰링턴은 나폴레옹 못지 않은 지도 매니아였고, 그는 알메이다에서 리스본으로 갈 수 있는 길목을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퇴각로와 프랑스군의 추격로는 기본적으로 몬데고(Mondego) 강 계곡을 따라 서진하는 것이었는데, 몬데고 강의 북안보다는 남안의 지형이 훨씬 좋았습니다.  따라서 웰링턴은 남안의 길목 중에서 알바(Alva) 강이 몬데고 강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1차 저지를 시도해야겠다고 미리 방어진지 준비를 해놓고 있었습니다.  




(지도 좌하단에 있는 도시가 쿠임브라(Coimbra)입니다.  쿠임브라 남단을 끼고 도는 강이 몬데고(Mondego) 강이고요.  언듯 봐도 상당히 거친 지형이네요.)




하지만 마세나는 적의 예상대로 움직이는 바지저고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웰링턴이 '포르투갈 왕국 전체에서 최악의 도로'라고 평가하고 있던 몬데고 강 북쪽 경로를 택했습니다.  알메이다의 함락에도 당황하지 않았던 웰링턴도 이번에는 당황했습니다.  마세나는 대체 왜 이 경로를 택했을까요 ?  그 결정의 이유에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만 웰링턴의 당혹감 속에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는 기쁨도 가득했습니다.  특히 이 경로를 택할 경우, 중간 경유지인 대도시 쿠임브라(Coimbra) 시로 가기 위해서는 부사쿠(Buçaco, Bussaco) 능선을 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웰링턴으로 하여금 애초 전략에서 다소 어긋난 결심을 하게 합니다.  이 부사쿠 능선에서 마세나의 프랑스군과 한판 싸움을 벌이기로 한 것입니다.


애초에 피를 흘리지 않고 마세나의 침공을 저지하려 했던 웰링턴의 결심이 흔들린 것은 부사쿠의 지형이 지키는 입장에서 너무나 유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사쿠 능선은 몬데고 강에서부터 급경사로 시작되어 북서쪽으로 뻗은 산맥인데, 최고 높이는 560m에 달하는 꽤 높은 산맥이었습니다.  관악산이 대략 630m니까 상당한 높이지요.  높이보다 더 나쁜 것이 그 급경사였습니다.  쿠임브라로 향하는 고갯길의 최고 높이도 400m 정도로서, 남산(260m)이나 인왕산(340m)보다 더 높고, 경사도 여전히 급했습니다.  덕분에 그 고갯길은 능선을 똑바로 넘지 못하고 정상 근처에서 크게 오른쪽으로 틀어져서 비스듬히 올라가야 했습니다.  즉, 바로 좌측 위의 근거리 능선에서 적군이 빗발치듯 날려대는 총탄과 포탄을 측면에 뒤집어 쓴 채로 비스듬이 전진해야 했던 것이지요.  이런 매혹적인 능선 위에 올라서서 저 밑을 낑낑대며 기어 오르는 나폴레옹 제국의 제2인자 마세나에게 총질을 해댈 기회를 날려버리기에는 웰링턴의 자제력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에게 포르투갈 방위를 책임진 전체 야전군 5만이 고스란히 다 휘하에 있는 상황에서 말이지요.




(현재의 부사쿠 능선입니다.  뭔가 궁전 같은 건물은 Palácio Hotel do Buçaco라고 19세기 말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한편, 왜 굳이 이 경로를 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부사쿠 능선 앞에 6만5천의 침공군을 이끌고 온 마세나도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와 스위스, 독일과 체코 등 다양한 지역 다양한 상황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이었습니다.  능선 아래에서 망원경을 뽑아든 마세나의 눈에 들어온 모습은 능선 위에 옹기종기 배치된 포대들과 프랑스군을 역시 망원경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영국군 장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세나의 눈에 그들은 한마디로 병정놀이에나 어울리는 풋내기 애송이들에 불과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높고 험한 능선에 방어진을 친 상대를 상대하는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건너기 힘든 긴 장애물이라는 점에서 높은 능선과 강은 유사했는데, 마세나는 나폴레옹 휘하에서 긴 강을 방어선으로 삼았던 적들을 여러 차례 아주 쉽게 요리한 적이 있었지요.  강이든 능선이든 그런 것을 방어선으로 삼는 것은 나폴레옹이나 마세나와 같은 명장들에게는 하책에 불과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연전연승했던 비결은 빠른 기동력을 이용해 적을 분산시키고 아군을 집중시키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이나 능선에 기대려는 적군은 필연적으로 그 긴 강이나 능선에 걸쳐 병력을 주욱 늘어뜨려 놓을 수 밖에 없었으므로, 이쪽에서 기만 기동을 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 미리 병력 분산시키는 셈이었습니다.  따라서 남은 일은 이렇게 얇아진 적의 긴 방어선 중 적당한 어느 한 곳을 골라 송곳으로 구멍을 뚫듯이 집중 공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세나는 자신있게 공격 작전 계획을 하달했습니다.  그에게는 총 3개 군단이 모두 집결해 있었습니다.  레이니에(Jean Reynier)의 제2 군단, 네(Michel Ney)의 제6 군단, 그리고 쥐노(Jean-Andoche Junot)의 제8 군단이었지요.  흔히 부사쿠 전투에서 마세나가 고지에 자리잡은 영국군을 과소평가하고 무식하게시리 정면 공격을 고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사자는 사냥할 때 새끼 영양 한마리도 과소평가하지 않는 법이고 마세나는 진짜 사자였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나폴레옹이 공통적으로 즐겨 사용하던 고전적 모루와 망치 전법을 변형해서 적용했습니다.  먼저, 레이니에가 영국군 방어선의 좌측 측면(영국군 쪽에서는 우익)을 멀찌감치 우회하여 고지를 기어오른 뒤 영국군의 측면을 찌르면, 네의 제6 군단이 영국군의 정면을 들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작전에서 필수적인 시간 동기화는 쉬웠습니다.  저 좌측 능선 위 어디선가 요란한 총성이 들리기 시작하면 네가 진격을 시작하면 되었으니까요.  그 총성이 영국군 베스 브라운 소총에서 나오는 것인지 프랑스군 샤를빌르 소총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마세나는 영국군을 과소평가하기는 커녕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었습니다.  예상 외로 영국군이 억세게 저항하여 레이니에와 네의 공격을 모두 격파할 수도 있다고 보고, 그런 상황에 대비하여 쥐노의 제8 군단을 예비대로 대기시켰습니다.  




(레이니에 장군입니다.  그는 나폴레옹과 함께 이집트 원정에도 갔었으나 나폴레옹이 조기 귀국할 때 따라가지 못하고 므누 장군과 함께 뒤에 남겨진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나폴레옹의 심복 부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그람 전투 때 클레나우의 진격을 저지했던 로바우 섬의 포격을 지휘한 로바우 섬의 책임자였습니다.)




하지만 마세나는 쥐노의 예비대까지 실제 전투에 동원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저 능선을 따라 길게 분산되어 있을 영국군은 그 자체로 이미 패배한 셈이었으니까요.  마세나가 보기에 영국군이 가진 유일한 이점은 고지에서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자세히 볼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프랑스군의 공격 방향에 대응하여 영국군이 서둘러 재배치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산 위는 당연히 길이 험했으니 능선을 따라 포병대와 탄약차량은 커녕 경보병 대대를 이동시키는 것조차 쉽지 않았으니까요.  그나마 때마침 공격이 시작되던 9월 27일 이른 아침에 부사쿠 능선 아래는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습니다.  덕분에 산 위의 영국군은 아래 쪽의 프랑스군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꼭 우연만은 아니었습니다.  근처에 몬데고 강이 흐르는 계곡 아래 쪽이니, 가을철 이른 아침에는 안개가 낄 가능성이 꽤 많았던 것이지요.  마세나는 애송이 웰링턴의 실수를 비웃으며 레이니에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마세나는 아직 웰링턴이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Bussaco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bussaco.html

http://www.peninsularwar.org/bucaco.htm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석총 2018.11.12 2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엔 공작이 아니라 자작작위 웰링턴으로 한시점엔 백작의 작위를 받고나서였죠 살라망카에선 후작작위를 받았죠

  2. 웃자웃어 2018.11.12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에 프랑스군도 잘싸운 편이었군요.

  3. reinhardt100 2018.11.12 2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력분산을 했다고 판단했을거고 단 한번의 공세로 붕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공격을 가했을 겁니다. 틀린 건 아닙니다만 화력밀도가 예상보다 더 강했다는게 문제였을 겁니다.

    프랑스군이 총검돌격으로 적 전열을 붕괴시키는 전술로 싸우는 편임을 잘 아는 러시아군을 제외한 상대방측은 최대화력을 투사하여 프랑스군의 총검돌격을 돈좌시키는 식으로 싸웠습니다. 러시아군은 같이 총검돌격으로 맞서는 편이었으니까요. 씬 레드라인의 영국군조차도 화력으로 프랑스군의 총검돌격을 막아낼 수 없게 되어 총검돌격전이 되어버리면 그대로 쓸려나가는게 일상이었죠. 웰링턴이 대단한 건 그 화력밀도를 어떻게든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게 가장 확실하게 발현된 전투가 워털루전투이고요

  4. 카를대공 2018.11.13 19: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오 드디어 나폴레옹 제국의 제2인자와 대불동맹 최고 명장이 격돌하는군요.

    그런데 혹시 나시카님 취미가 등산이신가요?산 높이를 줄줄이 꿰고 계시는걸보니 ㅎㅎ

  5. keiway 2018.11.16 1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주를 엄청 기대하게 만드는 마지막 문장이로군요.
    나시카님 글로 보고 싶어서 일부러 스페인 전역 관련된 내용은 찾아보지 않고 있습니다. ㅎㅎ

  6. 샤르빌 2018.11.16 19: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반도전쟁 때문에 마세나가 좌천당했다던데.. 그 과정을 살펴볼 수 있겠네요.. 뒤퐁도 그렇고 반도전쟁 때문에 잘 나가다 물먹은 장군이 참 많은 것 같네요..

마세나는 나폴레옹으로부터 포르투갈 침공의 명령을 받자, 제대로 된 지휘관답게 지도부터 펼쳤습니다.  원래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스페인으로부터 포르투갈로 진입하기 위한 교통로가 험준한 국경 지형으로 인해 제약되어 있었다는 점이었지요.  기억들하시겠습니다만, 탈라베라(Talavera) 전투 이후 웰링턴이 술트의 측면 기습을 피해 재빨리 포르투갈로 퇴각한 경로가 대표적인 포르투갈로의 진입로였습니다.   그 경로는 아래 지도와 같이, 살라망카에서 알메이다(Almeida)와 쿠임브라(Coimbra)를 차례로 거친 뒤 리스본으로 향하는 길이었지요.




(프랑스-독일에 비하면 스페인-포르투갈은 험준한 산맥이 꽤 많은 편이고, 군대가 대포를 끌고 이동할 수 있는 경로는 꽤 제한적이었습니다.)



(시우다드 로드리고는 저 남쪽의 바다호스(Badajoz)와 함께 포르투갈-스페인 사이의 교통로를 지키는 스페인 측의 양대 관문입니다.)




마세나는 정공법대로 나가기로 했습니다.  포르투갈 침공의 첫 관문은 알메이다(Almeida) 요새가 될 것인데, 그를 위해서는 인근 스페인 국경 내에 있는 시우다드 로드리고(Ciudad Rodrigo)를 쳐야 했습니다.  스페인의 침공에 대비한 포르투갈의 관문이 알메이다 요새라면, 반대로 포르투갈의 침공에 대비한 스페인측 관문이 바로 시우다드 로드리고였거든요.  이 도시는 아직 스페인군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침공하든 반대로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침공하든 하나의 관문을 넘어야 하는 법인데, 마세나의 경우는 두 개의 인접한 관문을 한꺼번에 넘어야 했던 것이지요.


시우다드 로드리고는 비교적 작지만 별 모양으로 축성된 견고한 근대식 요새도시였습니다.  모든 요새는 함락시키기 어려웠지만, 특히 기동성을 중시하는 프랑스군에게는 공성전이 익숙하지도 않았고 즐겨하지도 않았지요.  공성전에 필요한 많은 중포와 탄약, 포탄 등을 수송하는 것도 어려웠고 장기간 대규모 병력이 한 지역에 묶여있어야 하니 식량 조달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세나는 꼼수를 부릴 생각하지 않고 그 어려운 도전에 정석으로 돌입합니다.  마세나군의 선봉에 선 것은 네(Michel Ney) 원수였습니다.  




(현대의 시우다드 로드리고 요새입니다.  이 요새의 남서쪽은 아구에다(Agueda) 강에 접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시우다드 로드리고 북서쪽에 훨씬 더 넓은 신시가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구글맵의 거리 풍경을 통해 현지의 골목골목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정보화 세상은 탈도 많지만 확실히 이로운 면이 더 많습니다.)




네 원수는 자신의 제6군단 전체 뿐만 아니라 다른 3개 보병 사단과 2개 기병 연대를 더해 총 4만2천의 대군과 60문의 대포를 이끌고 4월 26일 시우다드 로드리고 앞에 나타났습니다.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지키고 있던 것은 에라스티(Don Andrés Perez de Herrasti)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군 5천5백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의 병력이 워낙 압도적이었으므로 승산이 없었고 요새 함락은 오로지 시간 문제였으나, 에라스티 장군은 프랑스군의 비교적 관대한 조건의 항복 권유를 거부했습니다.  이유는 나폴레옹이 의심하던 대로 믿는 구석, 즉 영국군의 지원이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전에, 웰링턴은 늘 그렇듯이 스페인 게릴라들이 프랑스 연락장교들을 죽이고 탈취해온 문서들 중에서 술트가 조제프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그 편지를 보고 프랑스군이 곧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들이칠 것이라는 것을 안 웰링턴은 서둘러 병력을 알메이다 쪽으로 전개했고, 특히 크로퍼드(Robert Craufurd) 장군의 경보병 사단 5천을 시우다드 로드리고 인근으로 보내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4월 말이 되어 실제로 몰려온 프랑스군을 보니, 도저히 크로퍼드의 경보병 사단 하나 가지고 뭘 어떻게 해볼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규모를 알게 된 웰링턴은 그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보고, 전형적인 영국인다운 얌체같은 결정을 합니다.  즉,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이고 자신들이 지킬 영역은 포르투갈이지 스페인이 아니므로 시우다드 로드리고는 스페인군에게 맡긴다는 것이었지요.  그런 지시를 받은 크로퍼드의 경보병 사단은 이후 네의 프랑스군과 접촉만 계속 유지할 뿐 적극적으로 싸움을 걸지 않았습니다.




(그 험악하고 엄한 성격 때문에 부하들로부터 검은 밥(Black Bob)으로 불리던 크로퍼드 장군입니다.  오만한 성격이었던 웰링턴은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릴 때 결코 왜 그런 명령을 내리는지 설명하는 법이 없었는데, 오직 베레스포드와 힐, 그리고 이 크로퍼드 장군에게만 자세한 설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존중하고 신뢰하는 부하였던 것이지요.  웰링턴은 특히 크로퍼드 장군에게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건 항상 조언을 구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런 크로퍼드는 이렇게 주변만 맴돌아야 했던 시우다드 로드리고 요새를 2년 후인 1812년 프랑스군의 손에서 빼앗기 위해 포위 공격하던 중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시우다드 로드리고 성벽 바로 바깥에 있는 해자와 방어물 일부입니다.  굉장히 튼튼해 보이지요 ?)




영국군의 지원을 믿고 있던 에라스티의 스페인군은 졸지에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워낙 성이 튼튼하고 비축해놓은 보급품이 충분했으므로 스페인군은 프랑스군의 가열찬 포격에도 잘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집중 공격에 떨어지지 않는 요새는 없는 법입니다.  무려 10주간에 걸친 프랑스군은 별 모양의 보방(Vauban)식 성곽을 공격하는 교과서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그재그로 참호를 파서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로를 만든 뒤, 참호와 토벽으로 보호된 포대를 구축하여 포격을 가하는 것이었지요.  이런 집중 포격에 마침내 성벽 일부가 무너지고 보병들이 돌격 가능한 구멍(이를 전문 용어로 practical breach라고 합니다)이 뚫리자, 더 저항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에라스티 장군은 그 무너진 성벽 아래에 직접 나가, 역시 직접 나온 네 원수를 만나 협상을 했습니다.  그 결과로 맺은 항복 조건은 10주 전의 조건보다는 나빴지만, 여전히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즉, 시우다드 로드리고 시민들의 집과 재산에 대한 약탈은 일체 금지되지만, 수비에 참여했던 군인들과 일종의 자치 정부라고 할 수 있는 명사회(junta, 훈타) 소속의 관료들은 전쟁 포로로서 프랑스로 압송된다는 것이었습니다.  


10주 간에 걸친 시우다드 로드리고 요새 공방전이 마침내 7월 10일 종료되었을 때 스페인군의 인명 피해는 461명 전사에 994명 부상, 그리고 포로 4천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180명 전사에 1천여 명의 부상자를 냈지요.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길고 지루한데다 사상자도 많았던 이 요새 공방전에 짜증이 나있던 프랑스군은 네 원수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시우다드 로드리고 시내에 들어가자마자 약탈을 벌여 스페인 시민들을 경악시켰습니다.  


네 원수도 난감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명예를 알던 군인인 네는 약탈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도 부끄러웠지만, 이 요새 하나를 빼앗는데 무려 10주간이나 걸렸다는 것도 당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쉬운 상대였던 스페인군이 지키던 요새 하나 빼앗는데도 10주가 걸렸다면, 윌리엄 콕스(Willian Cox) 장군의 영국군이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지키고 있을 포르투갈 알메이다 요새를 빼앗는데는 얼마나 걸릴지 눈 앞이 캄캄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시우다드 로드리고 포위전 내내 주변을 알짱거리며 신경을 거스르던 크로퍼드의 영국군 경보병 사단이 알메이다에서는 본격적으로 네의 제6 군단을 괴롭힐테니, 알메이다 요새 포위에 앞서 먼저 영국군 경보병 사단부터 요절을 내놔야 했습니다.  병력 차이가 워낙 컸으니 결국 요절을 내기는 하겠지만 시간이 문제였지요.  


그러나 전쟁에서는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 법입니다.  상황은 네와 크로퍼드, 콕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시우다드 로드리고로부터 알메이다 요새는 걸어서 하루 거리였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Ciudad_Rodrigo_(1810)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Craufurd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투팍아마르 2018.10.15 08: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첫번째 지도 바로 밑에 오타가 의심스런 글이 있어 올립니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나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서" 가 아니라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서" 가 맞지 않나요? 나시카님께서 쓰신 글은 문맥상 독일을 제외한 세 나라가 험준한 산이 많다는 걸 뜻하는것 같은데 나시카님도 잘 아시다시피 프랑스란 나라는 비유하신 네 나라중 험준한 산과는 가장 담쌓은 나라 아닌가요?. 원래 하시고자 했던 말은 포르투칼과 스페인은 산이 많고 프랑스와 독일은 평야가 많다는 거였던것 같습니다만~~

    • nasica 2018.10.15 17: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예 제가 그냥 막 쓰다보니 제가 봐도 이상한 표현이 되었네요. "프랑스-독일에 비하면 스페인-포르투갈은" 이라고 고쳤습니다. 고맙습니다.

  2. 웃자웃어 2018.10.15 09: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게다가 당시에 프랑스군이 현지 징발 위주로 군량을 조달하다 보니 스페인에서는 보급을 하기가 시원찮았던 것도 있지 않나요?

    • nasica 2018.10.15 17: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지요. 나폴레옹이 '군대는 뱃힘으로 행군한다'라고 말한 것은 '그러니 잘 먹여야 한다'라는 뜻의 권고로 말한 것이 아니라 '안 먹이니까 걷질 못하더라'라는, 좀 섬뜩한 실패 경험담인 것이지요.

  3. 석총 2018.10.15 1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제부터 벙커를 지을 차례군요

    • nasica 2018.10.15 18: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벙커+터렛 도배질 라인과 부딪히는 것은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 ㅇㅇㅈ 2018.10.17 0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터렛 벙커도배하니 스타가 생각나는군요. 제기억으론 나폴레옹을 소재로한 맵이 있던걸로 아는데 한때 재밌게 했었는데 말이죠 하하

  4. 샤르빌 2018.10.15 16: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산악지대+수성전은 정말 최고이면서 최악의 조합이지요.. 수 많은 중국왕조와 북방민족들, 임진왜란때의 일본군이 끝내 한반도를 정복하지 못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물론 이렇게 지형과 요새에 의존하는 전략만 믿다가 병자호란때 처럼 기동력으로 역이용 당하면 그것만큼 답도 없다는게 치명적인 단점이지요..

  5. reinhardt100 2018.10.16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방식 요새가 사진으로 나오네요.

    흔히 말하는 보방식 요새. 이건 근대 공성전 및 축성술의 완성가라고 해도 될 보방 후작의 업적이죠. 근대 축성술의 기초는 사실, 콘스탄티노플 공성전과 1463~1477년 터키-베네치아 전쟁 및 1494년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전부터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근대 축성술은 베네치아-네덜란드를 거쳐 프랑스에서 완성되었는데 이 보방식 요새가 얼마나 막강했냐면 에스파냐 왕위 계승전쟁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중후반기 내내 프랑스군은 야전에서 영국의 말버러 공작, 오스트리아의 오이겐 공 등이 이끄는 연합군에게 연전연패를 당하면서 전선이 미친듯이 밀려댈 상황이었음에도 국경선만큼은 끝까지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가 루이 14세가 국고를 말아먹어가면서까지 만든 300개 가까운 보방식 요새들 덕분이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루이 14세가 사치도 심각했고 전쟁도 정말 많이 해서 국고를 거덜냈다는 평가가 있고 일부는 맞지만 정말 심각하게 국고를 거덜낸 정책은 건함정책과 국경선 요새 건축이었거든요. 여기에 비하면 베르사유 궁전 건축은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차라리 베르사유 궁전 건축은 파리의 유휴노동력 활용을 위한 전근대적 공공사업의 성격이라도 강했고 실제로 이 덕분에 파리 및 일 드 프랑스 지역의 경제력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으며, 건함 정책 역시 200년 가까이 뒤쳐져있던 프랑스의 해운력을 단숨에 한때나마 유럽 최강의 해운력으로 만들어 준 기초가 되어 프랑스 해외무역 및 식민지 개척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국경선 전부에 걸친 보방식 요새 라인 건설은 정말로 답이 안 나올 정도로 예산을 잡아먹었다고 합니다. 요새 하나 짓는데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십만 리브르가 들어가는데 이걸 몇 백개씩 지어댔고 거점요새같은 경우는 기본 만 단위의 수성군을 수용해야 했기 때문에 수백만 리브르는 그냥 허공에 날아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이 정도 요새를 지으려면 기술력이 있는 특정 집단에 어느 정도 불하를 주어야 했는데 이게 징세청부업자들이 결성한 조합들에게 상당수 공사가 넘어갔다는 겁니다. 당시, 징세청부업자들이 징세권을 국가로부터 일정기간 대행하기 위해서는 각종 관계 관청에 어느 정도 선납을 했어야 했고, 대신 징수가 어려워지면 정부가 지급 보증을 해주는 체계였습니다. 문제는 17세기가 유례없는 소빙하기가 있다보니 징수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이에 따라 정부는 지급 보증 대신에 이들 요새라인 건설공사권을 어느 정도 넘겨주어 손해를 보전해주는 식으로 정책운용을 했다는 겁니다. 물론 군이 감독을 했고, 루이 14세와 보방 후작이 때때로 직접 검열을 했기 때문에 '태양왕 앞에서 감히 부실공사 할 간 부은 징세청부업자 따위'는 없었지만 대신 공사비용을 최대한 부풀리는 방식 등으로 어느 정도 삥땅(?)을 쳤는데 이 금액이 복마전 수준으로 나갔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징세청부업자들의 세력이 강해졌고 루이 14세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가 기강이 흐트러져있던 앙시엥 레짐 체제의 프랑스에 꽤나 부담이 가게 됩니다.

    • 최홍락 2018.10.18 2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방에 의해 건설된 요새의 수는 학자의 시각에 따라 매우 다양한데, 어떤 학자는 60개, 어떤 학자는 100여개, 볼테르의 경우는 150개라고 단정하더군요. 연구가 계속될 수록 추정치는 300개를 넘어가고요. 이는 과거에 이미 존재했던 요새들을 개조한 것까지 다 포함한 개수인데, 실제 보방에 의해 새로 건축된 요새의 수는 많이 잡아도 30여개 정도라고 합니다. 그 요새들 중의 대부분은 지역 민병대와 주민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고요. 또한 보방의 요새 설계들 중에 상당수는 당대에는 설계로만 남아있다가 후대에 들어 착공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계획된 요새들 중에는 전략적인 요충지였던 곳이 상황이 바뀌면서 중요도가 감소하는 바람에 건설이 보류된 곳도 있었고요. 아예 보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그냥 이름만 빌린 요새들도 있었다고 하니까, 그런 여러가지 측면을 감안한다면 300개가 넘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요새의 건설에 들어간 비용과 별개로 말년의 보방은 프랑스 왕정의 고질적인 앙시엥 레짐, 불공평한 조세제도 등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베르사유 건설의 경우 언젠가는 체제 전복으로 이어지고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이러한 태도는 루이14세의 총애를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고요.

      p.s. 보방식 요새를 수직으로 관찰하면 과거 주월 한국군이 구축했던 중대전술기지와 유사함이 나타나는데, 그만큼 보방의 아이디어는 시대를 관통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reinhardt100 2018.10.19 08: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보방 후작이 말년에는 체제 비판의 선봉에 선 거는 꽤나 유명하죠. 그 자신이 앙시엠 레짐의 수혜자지만 그만큼 폐해를 직접 보니 이거 아니다 싶었던 겁니다.

      중대전술기지와 보방식 요새 라인의 가장 큰 유사점은 지원병 도착 가능 거리 및 화력 배분을 고려한 축성이었다는 겁니다. 특히, 요새 근처에 지원병이 근처에 있다는 것 자체가 양측에 주는 무게감이 다르니까요.

여태까지 1810년에 있었던 이런저런 사건들, 즉 나폴레옹의 새장가, 사탕무 설탕 공장의 건설, 베르나도트의 스웨덴 왕세자 책봉 등을 보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1810년은 피와 화약 연기로 점철되었던 황제 나폴레옹의 나날 중 드물게 평화로운 시절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도 비교적 그랬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1810년 들어 스페인 민중들의 대프랑스 항쟁은 그 기세가 더 격렬해졌습니다.  이는 반나폴레옹 봉기가 곳곳에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은 정반대로서, 웰링턴의 영국군이 탈라베라(Talavera) 전투 이후 포르투갈로 물러가자 무능력한 스페인 봉기군은 차근차근 프랑스군에게 격파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러면 스페인 민중들은 용기를 잃고 굴복할 만도 할텐데, 왜 오히려 더 격렬하게 저항을 했을까요 ?


상황은 나폴레옹이 본의 아니게 더 악화시켰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1810년 나폴레옹은 저항을 그치지 않는 스페인에 대해 질려버린 상태였습니다.  스페인 국왕이자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가 파리에 파견한 외무장관인 산타페 공작 아산사(Miguel José de Azanza, duque de Santa Fe)가 나폴레옹의 튈르리 궁을 찾았을 때, 그에게 들이밀어진 것은 조제프의 퇴위 조서 초안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조제프 보고 거기에 서명을 하라고 요구할 셈이었습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동생 루이를 국왕으로 앉혀 놓았던 네덜란드를, 나폴레옹은 1810년 7월 실제로 침공하여 루이를 강제 폐위시키고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시켜버립니다.  그는 스페인에 대해서도 왕정을 아예 폐지해버리고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해버릴 계획었습니다.  


문제는 그 계획안 문서를 가지고 마드리드로 가던 연락 장교가 스페인 게릴라들에게 요격당해 살해되고 아직 암호화 되지 않았던 시절의 그 문서가 게릴라들을 거쳐 영국 손에 들어가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영국은 그 문서를 친절하게 스페인어로 번역까지 해서 곳곳에 뿌려댔고, 이는 그렇쟎아도 프랑스에 대해 이를 갈던 스페인 민중들을 더욱 들끓게 했습니다.  




(산타페 공작 아산사입니다.  그는 군인 출신의 외교관으로서, 1790년대 후반에는 멕시코 총독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나폴레옹 정권에 협력했고 조제프는 그를 산타페 공작에 봉했습니다만,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 뻔 했습니다.  부르봉 왕가의 복귀와 함께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는 조제프가 프랑스로 도주할 때 함께 프랑스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는 1826년 빈곤 속에서 외롭게 죽었습니다.  친일파, 아니 친불파에게 알맞는 최후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고 그런 문서 유출 때문에 나폴레옹이 조제프를 루이처럼 폐위 시키는 것을 주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발표를 하려면 스페인 전역을 손에 넣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하찮은 스페인 따위가 프랑스의 그랑 다르메에 대해 이렇게 질기게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저주스러운 영국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트라팔가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넬슨에게 궤멸된 이후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이 된 영국에 대해, 나폴레옹은 더 큰 규모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대륙 봉쇄령이었지요.  그런데 이 대륙 봉쇄령은 좀처럼 승기가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습니다.  명색이 위성국가라는 것들이 나폴레옹의 빅 픽처에 협력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돈에 눈이 멀어 영국 상품을 사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이 취한 조치는 더 강력한 그물망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과의 밀무역을 가장 활발하게 벌이던 네덜란드와 옛 한자 동맹 지역들, 즉 북부 독일 해안 지대의 소공국들의 정권을 폐위시켜 버리고 모두 프랑스의 일부로 편입시켜버린 것이지요.   1810년은 나폴레옹 제국이 가장 넓어진 해이기도 합니다만, 그 배경은 영국과의 경제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다는 초조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스페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 과격한 해결책은 필연적으로 또다른 문제를 낳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당시엔 별로 대단치 않게 여겼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이것이 결국 그의 제국 전체를 몰락시키는 단초가 됩니다.  나폴레옹이 그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일방적으로 쫓아낸 소공국들 중에는 올덴부르크(Oldenburg) 공작령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올덴부르크 공작의 작은 아들이 바로 러시아 짜르 알렉산드르 1세가 애지중지하던 여동생 예카테리나(Ekaterina Pavlovna) 공주의 남편 게오르그(Georg of Oldenburg)였던 것입니다.  


알렉산드르는 여러차례에 걸친 편지를 통해 자신의 매제에 대한 폭압적인 강탈 조치를 항의했으나 나폴레옹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어쩌면 이건 나폴레옹이 지나치게 오만하여 무심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가 지나치게 졸장부처럼 옹졸하게 나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2년 전인 1808년 에르푸르트 회담에서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에게 여동생을 자신의 새 신부로 달라고 은근히 메시지를 던졌으나, 알렉산드르는 오히려 그 아끼는 여동생을 볼썽 사나울 정도로 서둘러 다른 귀족에게 시집 보내버린 적이 있었지요.  그때 그 여동생이 바로 예카테리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그것을 큰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식으로 앙갚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에르푸르트 회담 때만 해도 세상 둘도 없는 친구 사이 같았던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는 이 사건을 계기로 상호간의 불신과 반목이 점점 심해졌고, 이는 결국 1812년 러시아 침공과 그에 따른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대체 예카테리나 공주가 얼마나 아름다웠길래 이 난리가 났는가를 궁금해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다시 보여드립니다.  두 그림 모두 동일 인물인데, 글쎄요, 아래 그림을 그린 화가는 아마 능지처참을 당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어느 쪽이 더 실물에 가까운지는 모르겠습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이렇게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려 했던 웰링턴의 영국군도 마냥 룰루랄라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에 있어서 영국의 기본적 전략은 크게 2가지 방향 사이에서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캐닝(George Canning)이 주도하는 대륙내 동맹국에 대한 보조금 위주의 전략이었고, 다른 하나는 캐슬레이(Robert Stewart, Viscount Castlereagh)가 과감히 밀어붙인 직접 대륙으로 원정군을 파견하는 것이었습니다.  1806년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왕국 및 시실리 섬으로의 원정이나, 1809년 네덜란드로의 월체런(Walcheren) 원정,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 원정 등이 그 대표적인 원정들인데, 이것들은 1805년부터 1809년까지 캐슬레이가 국방부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War and the Colonies)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결과가 다 신통치 않았다는 것이지요.  나폴리 왕국에 대한 원정은 1806년 가에타(Gaeta) 포위전의 패전과 함께 결국 뮈라(Joachim Murat)를 나폴리 왕으로 만들어주면서 끝나버렸고, 이베리아 원정도 무어(John Moore) 경이 1809년 1월 코루냐(Corunna) 전투에서 전사하며 간신히 영국군 대부분이 탈출시킨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가장 최근의 1809년 월체런 원정도 사실상 참패로 끝나버렸지요.  이로 인해 영국 내에서는 대체 영국 육군은 뭐하는 종자들인가에 대한 비난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외무장관 조지 캐닝입니다.  이 양반이 보조금 위주의 전략을 썼다고 해서 결코 평화주의자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가령 1807년 덴마크 해군 함대를 보관해주겠다며 덴마크를 침공한 것도 이 양반이 주도한 작전이었습니다.)



(국방장관 캐슬레이 자작입니다.  외모로 보면 대머리 캐닝과의 대결에서 완승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는 나폴레옹 전쟁 내내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으나, 이후 비엔나 회담에서 유럽 대륙이 반동 체제로 회귀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여러가지 우클릭 정책을 옹호하여 크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가령 피털루 학살 관련해서도 욕을 잔뜩 먹었지요.)




특히 월체런 원정의 실패는 외무장관 캐닝과 국방장관 캐슬레이 사이에 심각한 불화를 일으켰습니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의 부당한 간섭 또는 부실한 전략 비전 등으로 작전을 망쳤다고 비난해댄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갈등은 아직 월체런에 비실비실한 영국군이 상당수 남아 있던 1809년 9월, 이 둘 사이의 결투로 이어집니다.  둘 다 군인은 아니었고 특히 캐닝은 이 결투 이전에는 총을 한번도 쏘아본 적 없을 정도로 순한 사람이었는데, 캐슬레이의 도전에 캐닝은 꼬리를 말아넣을 수가 없어서 응한 것이지요.  결국 캐닝의 탄환은 저 멀리 빗나갔고 캐슬레이의 탄환은 캐닝의 넓적다리에 명중하는 정도로 이 결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명성이 자자하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장관들이 서로 총질을 해댄 이 결투 사건에 대해 비난이 들끓었고, 결국 이 둘은 모두 사임을 해야 했습니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의 영국군 원정대는 본국에서의 지지 발판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웰링턴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캐닝의 후임은 웰링턴의 형 리처드 웰슬리(Richard Wellesley, 1st Marquess Wellesley)가 맡게 되었습니다.  안 좋게 흘러가던 상황이 역전되어 웰링턴에게는 든든한 배경이 생긴 셈이었지요.  과연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웰슬리 후작은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웰링턴의 작전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특히 대륙 봉쇄령에 의해 영국의 무역 상황이 갈 수록 안 좋아지는 상황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통한 무역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것을 내각에 설득하여 이베리아 원정대에 점차 병력을 증강하도록 했습니다.  웰링턴이 탈라베라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허겁지겁 포르투갈로 후퇴해야 했던 이유는 술트의 측면 위협 때문이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프랑스군보다 영국군 병력이 너무 작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웰링턴은 힐(Rowland Hill, 1st Viscount Hill) 장군이 영국에서 데리고 온 증원군을 받아 거의 5만에 가까운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5만이면 병력수가 부족했던 영국 육군에서는 물론 엄청난 대군이었고, 프랑스 그랑 다르메에서조차도 거의 1개 군(armee) 수준의 큰 병력이었습니다. 




(롤랜드 힐 장군입니다.  그는 롤리사 전투와 비메이루 전투 때부터 웰링턴을 따라 종군했고, 나중에 워털루 전투에도 참전했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부질없이 저항하던 황실 근위대에게 항복을 권유한 것도 롤랜드 힐 장군이라고 합니다.)




한편, 나폴레옹도 그냥 대륙 봉쇄령이 계획대로 작용하여 영국 중앙은행의 지하 금고에서 마지막 기니 금화 한닢까지 다 털려 나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 곳곳은 여전히 반란군 손에 있었고, 특히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전체가 스페인군 수중에 있는 상태였습니다만, 나폴레옹은 안달루시아 정복보다 오히려 포르투갈에 웅크리고 앉은 웰링턴의 영국군을 격파하는 것이 스페인 완전 정복에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술트(Soult)로 하여금 안달루시아를 치게 하고는, 네(Ney), 쥐노(Junot), 레이니에(Reynier)의 3개 군단을 모아 포르투갈로 진격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병력은 서류상으로는 8만, 실제로는 약 5만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3개 군단장을 통솔할 포르투갈 원정군 사령관으로 자신의 휘하에 있는 지휘관 중 최고의 능력자를 임명하여 그 무게를 더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나폴레옹 제국의 제2인자, 바로 위풍당당 마세나(Andre Massena)였습니다.  


여태까지 웰링턴이 상대했던 프랑스군 지휘관은 누가 봐도 1진이라고는 할 수 없던 쥐노, 주르당, 세바스티아니, 빅토르 정도였습니다.  (술트와의 제2차 포르투 전투는 제대로 된 대결이라고 하긴 곤란했지요.)  하지만 마세나는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1진급 지휘관으로서 나폴레옹의 오른팔격 원수였고, 다부는 물론 전사해버린 장 란보다도 더 뛰어난 지휘관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과연 웰링턴은 마세나를 상대로 해서도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까요 ?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Miguel_Jos%C3%A9_de_Azanza,_Duke_of_Santa_Fe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Stewart,_Viscount_Castlereagh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Canning

https://en.wikipedia.org/wiki/Richard_Wellesley,_1st_Marquess_Wellesley

https://en.wikipedia.org/wiki/Walcheren_Campaign

https://en.wikipedia.org/wiki/Rowland_Hill,_1st_Viscount_Hill

https://en.wikipedia.org/wiki/Duke_George_of_Oldenburg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Gaeta_(1806)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스티븐 2018.10.08 07: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일 새글이 언제 올라오나 기다렸는데
    막상 올라오니 편하게 읽는 제가 미안할 정도입니다.
    좋은 글 항상 감사드립니다 ^^

  2. reinhardt100 2018.10.08 0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사실상 나폴레옹 전쟁의 둉부전선급이 되버린 시기가 1810년 이후인데 이 때 러시아 전선이 훨씬 더 양호했을 정도로 전쟁이 잔혹해졌죠.

    다른 댓글에 달았지만 영국은 내부 사정이 꽤나 심각했고 이 때문에 병력 상당수가 본국 및 아일랜드 치안유지에 동원되어야 했습니다. 1810년 웰링턴 원정군이 정말 마지막 기회였는데 이 윈정군마저 실패하면 더 이상 대륙으로의 무력 투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국민 모두 인지하고 있었고 프랑스와의 어느 정도 양보하는 화해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다시 한 번 20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해 직접 에스파냐 원정을 단행했다면 무슨 수를 써도 웰링턴의 원정군이 이긴다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야전은 당연히 불가능하고 그나마 가능한 방법이 해안가 요새방어선에 들어가는건데 5만의 병력이 나중에 웰링턴이 구축한 방어선에 들어가 아크레 공성전 시즌 2를 찍겠다고 해도 20만 이상의 병력으로 포위 및 공성전을 진행했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아무리 무한정의 해상 탄약보급으로 탄막을 펼치더라도 20만 병력의 공성포탄의 탄막에 밀릴건 뻔한 결론이었습니다.실제로 서구 군사학상 10만 이상의 공성전은 크림전쟁의 세바스토폴 공성전인데 이때 나폴레옹이 직접 원정을 감행했다면 여기서 볼 수 있었을 겁니다.

    • nasica 2018.10.08 08: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나폴레옹이 결코 판단 착오 또는 게으름 때문에 1810년 스페인에 대군을 이끌고 직접 원정을 하지 않은 거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용이 나오는 판타지 나폴레옹 전쟁 소설 “테메레르”에서는 청나라에서 파견한 대규모 용부대가 나폴레옹의 용부대를 격파하고 1812년 러시아를 구원하는 것으로 나옵니다만, 거기서도 청나라 원군이 도중에 돌아가는 이유가 명확하게 나옵니다.

      “이 대군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

      척박한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 reinhardt100 2018.10.08 0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척박해도 보급을 하게 만들었어야 했고 이 보급망을 바탕으로 직접 원정을 단행했어야 한다는 겁니다. 20만 대군의 보급이 어렵지만 원정에서 이기면 영국과의 전쟁을 끝냴 수 있으니까요.

      한 번 나중에 시간나면 나폴레옹의 20만 대군 원정을 가정하고 보급계획을 짜 보면 어떤 결론이 나올지도 궁금해집니다.

    • 최홍락 2018.10.08 1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 전 스페인에 발묶일 경우 주변국들의 상황이 우려되서 20만명을 장기간 빼내는건 위험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역시 근본적인 문제를 캐치하셨네요.

  3. 키스세븐 2018.10.08 09: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로그가 매우 특이해요. 유럽 문화/역사 이야기가 가득이네요. 여러 글을 읽다가 가요. 재미있었어요!

  4. keiway 2018.10.08 1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랫만의 나폴레옹 시대 글이로군요.
    항상 응원합니다.

  5. 소화낭자 2018.10.08 2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다리다 지칠 뻔 했습니다....
    ㅎㅎㅎㅎ 정말 감사합니다

  6. 웃자웃어 2018.10.08 2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제 슬슬 러시아 원정이 다가오는군요.

  7. 유애경 2018.10.08 2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카테리나 공주의 초상화, 어쩜 동일인물인데 저렇게 다르게 그려졌을까요!

  8. 석총 2018.10.08 2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테란 디펜스를 뚫지 못하는 프랑스

  9. 머대긘 2018.10.09 16: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캐닝은 총을 한발밖에 쏘지 못했다죠? 그는 '두발'이 없었으니까요.

  10. Playzone 2018.10.10 14: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가장 실수한 건 분수에도 맞지않은 야심가였던 동생 카롤린을 등에 업은 뮈라를 스페인으로 보낸게 아닐까 싶네요. 무능한 스페인 부르봉 왕가를 꼭두각시로만 삼은채로 막후정치를 했다면 그의 위장을 더 쓰리게 했던 이베리아 전역이 저정도로 격화되진 않았을거 같습니다.

  11. 석공 2018.10.10 2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로리스통의 대규모 포병단이 오스트리아 제3 군단을 갈아엎는 동안, 마세나도 쉴 틈 없이 바빴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새벽에 저 남쪽 아스페른 쪽에서 힘들게 행군해 올라온 뒤, 베르나도트가 구멍을 낸 아더클라를 탈환하기 위해 혈투를 벌이고 있었지요.  그런데 불과 몇 시간 만에, 나폴레옹은 그에게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 그 쪽으로 침투해온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 제6 군단을 쫓아내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이때가 대략 오전 11시 경이었습니다.


당시 병사들에게 이렇게 의미를 알 수 없는 행군과 애써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역행군이 흔한 일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더 험난한 행군길이 예약되어 있었습니다.  걸아가야 하는 길이 무려 8km 정도로서 정상적인 행군으로는 거의 2시간 거리였는데, 문제는 그 길이 정상적인 행군이 불가능한 환경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낭수티의 기병대가 목숨을 던져가며 벌어들인 시간을 쓰는 것이니 만큼, 신속한 행군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신속하게 행군을 하려면 보병 방진을 짜고 행군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고, 어쩔 수 없이 느슨하고 긴 종대로 행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긴 행군 길의 오른쪽 측면, 즉 서쪽 측면에는 오스트리아군이 득실거렸습니다.  프랑스군에게는 다행히도 콜로브라트가 지휘하는 이 오스트리아군은 무척 소극적인 태도이긴 했지만, 그들의 포병대와 기병대가 그의 취약한 종대 행렬을 2시간 내내 두들길 것이 뻔했습니다.


마세나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남쪽 아스페른으로의 행군을 명령받자, 그 명령의 어려움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 인근으로 몰려온 도망병들을 포함한 자신의 군단병들에게 먼저 화끈하게 브랜디(brandy)부터 쫙 돌렸습니다.  그는 니스의 채소가게 아들 출신답게 노동자-농민 출신의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데는 번지르르한 연설보다는 술이 최고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목구멍이 화끈해진 병사들을 이끌고 아스페른을 향한 위험한 행군길을 떠났습니다.





(프랑스의 전성시대(?)였다는 박통 루이14세 치하에서 채소가게 아들 마세나가 사회 탓을 하지 않고 정말 뼈를 깎는 노오오오력을 했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  아마 대대 행보관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사회가 바뀐다고 모든 개인이 잘 살게 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개인의 노오오력만으로는 이룰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세나는 며칠 전에 낙마 사고를 겪는 바람에 발을 다쳐 원래 전장에 나설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감하게도 '마차를 타고 진격하면 된다'라며 눈처럼 새하얀 2인승 무개마차를 타고 전장에 나섰고, 나폴레옹은 그런 그를 칭찬하며 '자네 옆에 탄 마부가 프랑스군 내에서 가장 용감한 병사'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당시 오스트리아군은 눈 앞에 줄지어 행군해 내려가는 프랑스군의 대오 중에서 눈에 확 띄는 새하얀 2인승 마차에 탄 사람이 유명한 마세나라는 것을 몰랐나 봅니다.  그의 흰색 마차를 향해서 오스트리아군의 대포알이 집중적으로 날아왔다는 기록은 없거든요.  그러나 탁 트인 벌판에서 측면이 훤히 노출된 이 긴 종대에 대해, 오스트리아군은 예상대로 띄엄띄엄 연습하듯이 포격을 가해 프랑스군 병사들을 한두명씩 피떡으로 만들며 쓰러뜨렸습니다.  마세나의 흰색 마차는 아주 공평하게 병사들과 똑같이 적의 포탄에 노출된 채로, 측면에서 날아오는 포탄이 나 말고 내 옆 친구를 쓰러뜨리기를 속으로 기도하며 천천히 행군했습니다.


일렬 종대로 행군 중인 보병은 사실 포병보다는 기병들의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 제3 군단과 행동을 같이 하던 리히텐슈타인 대공의 기병대는 호시탐탐 이들의 측면을 따라오다 기회다 싶은 순간이 오면 바람처럼 달려들어 아장아장 걷는 프랑스 보병들에게 칼탕을 선물하고는 다시 우르르 물러서곤 했습니다.   그렇게 프랑스군을 괴롭히던 오스트리아군 소속 헝가리 기병대에 호기심 많은 지휘관이 있었는지, 한번은 그런 헝가리 기병대의 공격이 마세나의 흰색 마차를 향해 돌진해왔고 거의 마차에 닿을 거리까지 접근했다고 합니다.  화들짝 놀란 마세나의 부관들이 군도를 뽑아들었는데, 다행히 측면을 스크린하는 역할을 하던 프랑스 기병대가 제때 앞을 가로 막아 요격해주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도 마세나의 행군길이 오스트리아군 기병대 때문에 무척 험난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생-술피스(St. Sulpice) 장군의 흉갑기병대를 추가로 붙여줘 측면을 보호하도록 했거든요.


브랜디와 프랑스 기병대의 보호에 힘입어, 마세나의 제4 군단 병사들은 1시간 반만에 아스페른-에슬링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마세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스페른은 물론 에슬링에서도 밀려나 힘겹게 고전 중인 부데(Boudet) 장군의 사단이었습니다.  다행히도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 제 6군단은 에슬링을 점거한 이후 그냥 로바우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에 포격을 가하는 등의 소극적 공격 외에는 별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클레나우가 이렇게 소극적으로 주저주저하는 것에도 다 사정이 있고 이유가 있었습니다.  양측이 각각 십만 단위로 포진한 이런 거대한 장기판에서 자기들처럼 불과 1만5천 정도되는 작은 군단 하나만 너무 적진 깊숙히 들어와 버리고 나니 클레나우로서는 불안해지는 것이 당연했던 것입니다.  





(클레나우 장군입니다.  이 분은 1795년 프랑스 혁명군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대령으로 승진한 이후, 불과 4년만인 1799년 역시 전공에 의해 합스부르크 육군 역대 최연소 중장으로 승진할 정도로 나름 실력파였으며, 바그람 전투 당시 51세였습니다.)




카알 대공도 클레나우에게 측면 돌파를 명했을 뿐, 이렇게 성공적인 돌파가 되리라 예상은 하지 못해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라고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이건 무전 통신이나 항공 정찰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전장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전투 상황에서, 전날 밤 작성되는 작전 명령서에 '몇 시에 출발해서 몇 시까지 어디까지 돌파한 뒤, 몇 시에 어느 위치에 있을 프랑스 XX 군단을 격파하라'는 식으로 세부적인 지시를 적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현장 지휘관의 융통성과 자율성이 중시되는 것이 당시의 전장이었는데, 그런 점에서 귀족 위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군 지휘부는 역시 실력으로 승진한 프랑스군 지휘부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보헤미아 귀족 출신이었던 클레나우는 합스부르크 왕가 역사상 최연소 중장으로 승진할 만큼 나름 뛰어난 인재였으나, 그건 합스부르크 왕가에 충성하는 귀족들 중에서 그렇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출신 신분이나 학력에 상관없이 오로지 전과와 실력만으로 장교를 선발하고 승진시키다보니 마세나처럼 채소가게 아들 출신도 원수가 될 수 있는 프랑스군 앞에서, 오스트리아군 지휘부의 한계는 뚜렷했습니다.


포탄이나 기병 군도에 얻어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세나의 지휘 하에, 프랑스군은 신속하게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을 쫓아냈습니다.  사실 마세나의 병력이나 클레나우의 병력이나 수적 우위가 크게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비슷했고, 오히려 장시간 행군에 지친 것은 프랑스군 측이었을텐데도 오스트리아군의 후퇴는 마치 '내 이럴 줄 알고 후퇴 준비를 다 해놓았지롱~'하는 식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불과 2시간 정도만에 마세나는 에슬링에 이어 아스페른까지 탈환하고 클레나우를 서쪽 저 멀리 쫓아보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전투가 종료된 이후, 클레나우는 보고서에 자기 쪽으로 지옥처럼 무시무시한 종대(la colonne infernale)가 접근하는 것을 보았기에 후퇴했다고 적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세나에 의해 프랑스군 좌익에서의 위기가 정리되는 동안, 정반대쪽 프랑스군 우익에서는 다부의 환상적인 무브먼트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en.wikipedia.org/wiki/Johann_von_Klenau

https://en.wikipedia.org/wiki/Andr%C3%A9_Mass%C3%A9na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2017.09.04 12: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재미난글 감사합니다. 선댓글 후감상...

  2. keiway 2017.09.04 13: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전히 잘 보고 있습니다.
    시대사 음식사도 참 좋지만
    그래도 역시 전투 부분이 제일 즐겁네요.
    한주도 안쉬고 꾸준히 쓰시는 수고에
    응원을 보냅니다.

  3. 석공 2017.09.04 2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기 뒤에 기회라고~~ 좌익의 위기를 꾸역꾸역 막아내니 이제 나폴레옹의 라이트훅 다부의 차례군요...^^ 늘 좋은 글 감사합니다.^^

  4. 오리오리 2017.09.05 2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짐승 다부가 어떤 무브먼트를 ㄷㄷㄷ

  5. 카를대공 2017.09.06 15: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가장 중요한 순간엔 항상 다부가 있군요.

  6. bluewing 2017.09.07 1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장에서 기회를 눈앞에 보면서도 우물쭈물한 모습을 보니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군하고 비교도네요.
    이거다 싶으니까 그냥 중앙에서의 지시 기다리지
    않고 부아악 달려버린... 어어어 하는 사이에 거대한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에 손아귀에 떨어졌죠.

  7. 에어메딕 2017.10.01 16: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질맛 나서 몇주 참다가 오랜만에 들어와서 정주행 중입니다. 소설을 방불케 하는 재밌는 글 덕에 즐거운 연휴 보내네요. 메리추석되시길! 감사합니다.

  8. 넬슨 2018.02.19 15: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부와 장 란 가장 마음에 드는 원수들

새벽부터 동쪽의 포성을 듣고 혹시 요한 대공의 군대가 쳐들어온 것인가 깜짝 놀라 병력을 이끌고 다부의 전선으로 달려갔던 나폴레옹은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는 동쪽의 소란이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엔 중앙부에서 들려오는 포성에 이건 또 뭔가 싶어 말을 달렸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그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대노했습니다.  "어제 밤부터 베르나도트 저 허풍선이는 병신짓만 골라 하는구나 !"


다행히 그는 어제 밤 베르나도트 없이 열었던 작전 회의에서 베르나도트를 지원하기 위해 마세나의 병력을 좌익에서 중앙부로 이동시킨 바 있었습니다.  해가 밝아오는 상황에서, 그의 눈에 마세나의 병력이 현장에 도착하는 것이 보였고, 곧 이어 마세나의 눈처럼 하얀 색의 무개마차도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마세나는 베르나도트 못지 않게 돈 욕심 많고 터무니없이 부풀어오른 자아를 가진 사람이었으나 베르나도트와는 달리 군사적 자질은 자신에 버금가는 실력자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마세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즉각 아더클라를 탈환하도록 했습니다.


마세나는 생-시르(Saint-Cyr)의 사단을 선두로 아더클라로 돌격해 들어갔습니다.  이들의 공격에 대해 오스트리아군도 꽤 솜씨있게 대응했습니다.  슈투터하임(Stutterheim)의 오스트리아 보병들이 마을 앞에 있던 도랑에 매복해 있다가 생-시르의 병사들이 지근거리에 근접하자 일제히 고개를 들고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그 정도의 반격에 흔들리지 않았고, 전투는 곧 아더클라 마을의 벽과 가옥을 끼고 골목마다 벌어지는 혼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프랑스군의 공격에 오스트리아군은 아더클라에서 밀려났습니다.  




(아더클라 마을 안으로 쳐들어가는 생-시르 사단 휘하 제4 전열보병 연대 병사들의 모습입니다.)



아더클라 외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베르나도트는 아마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예측대로, 아더클라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는 그 마을을 비워놓고 있다가 반격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 입증된 셈이었으니까요.  문제는 그 영광의 순간에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휘하 작센 병사들을 이 공격에 가담시켰습니다.  특히 막도날에게 빌려주었던,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던 뒤파(Dupas)의 사단도 오스트리아군의 동쪽 측면울 공격하기 시작했으므로, 베르나도트는 기세를 타고 작센 병사들을 규합하여 기세 좋게 밀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생-시르와 베르나도트의 병력이 아더클라를 관통하여 더 북쪽으로 뚫고 나가려하자, 아더클라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던 벨가르드의 예비 병력이 또 반격을 해온 것입니다.  게다가 이 반격에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카알 대공이 직접 참여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사기가 매우 높았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포격에 리히텐슈타인 대공의 기병대까지 쳐들어오자 생-시르와 베르나도트의 병력은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특히 베르나도트의 작센군은 어제부터 패전을 거듭하여 사기가 형편없었는데, 이번에 또 이런 역경을 맞이하자 후퇴가 아니라 그야말로 무너져내려 우르르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생-시르의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몰리토르(Molitor)의 사단에게 진격 명령을 내린 마세나는 눈 앞에 벌어진 상황이 무척 난감했습니다.  몰리토르가 진격해야 할 길을 이 작센 패잔병들이 가로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별로 인품이 좋지 않고 오만하고 몰인정했던 마세나는 이 하찮은 방애물들에게 주저하지 않고 발포를 명했고, 어제 밤에 이어 백주대로에 아군으로부터 총격을 받은 작센군은 그야말로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마르히펠트 평원을 가로질러 흩어졌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어지럽게 도주하던 작센 병사들은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 외곽까지 도망쳐왔고, 이들의 선두에는 베르나도트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라스도르프 외곽에서 이 몰골의 베르나도트와 딱 마주친 나폴레옹은 그동안 쌓였던 분노가 폭발하여 '이것이 네가 말하던 반석같은 지휘력이냐 !'라고 고함을 지르며 현장에서 그를 군단장의 보직에서 해임해버렸다고 합니다.  




(프랑스군 원수 복장의 베르나도트입니다.  원래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시작될 때 병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별로 탐탁치 않은 작센인들로 구성된 제9 군단장으로 임명되고, 나폴레옹의 심복이자 참모장인 베르티에가 자신의 군단의 출정 준비에 대해 이런저런 눈에 보이지 않는 방해를 한다는 느낌을 받자 전장에 나서기 전부터 보직을 사임하겠다고 나폴레옹에게 청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원치 않는 베르나도트를 부득부득 전장으로 끌고 나갔고, 결국은 사단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일 뒤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긴 합니다.)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가 이렇게 마주쳤다는 이야기는 너무 극적이라서 100% 믿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설에 따르면 베르나도트가 먼저 사의를 표시했다고 합니다.  이 설에 따르면 이날 공격을 위해 자신의 군단 소속이었던 뒤파(Dupas) 장군의 프랑스 사단에게 자신의 공격을 지원하도록 명령했으나, 뜻 밖에도 뒤파는 '황제로부터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직접 명령을 받았다'라며 거부했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공격이 돈좌되고 많은 작센 병사들이 희생되자, 격분한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을 만나자마자 '왜 지휘 체계를 무시하고 자신의 사단을 마음대로 묶어 두었는가'를 따지며 이럴 바에야 사직하겠다고 선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정말 베르나도트가 정말 이날 현장에서 해임되어 귀국 조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끌던 제9 군단의 지휘권은 어떻게 되냐고요 ?  어차피 그의 제9 군단은 이미 다 녹아내려서 5천명 이하의 뿔뿔이 흩어진 패잔병만 남아 있었으므로, 후임이고 뭐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 척탄병들이 몰리토르의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쓰고 있는 저 독특한 모자는 오스트리아군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 등 대부분의 유럽 군대에서 척탄병들만이 쓸 수 있는 모자로서, 높이 솟은 모양에 털가죽이 달려 있었습니다.  당시 척탄병 부대는 수류탄 휴대 여부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냥 키가 큰 병사들을 뽑아 편성했는데, 키 큰 병사들이 그런 모자를 쓰면 더욱 덩치가 커보이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아무튼 아더클라는 이렇게 생-시르가 탈환했다가 다시 잃었다가 오전 10시 경 다시 몰리토르가 재탈환하는 등 혈전의 현장이 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카알 대공이 직접 이끈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이 더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리 프랑스군이 용감하고 숙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숫자에는 당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정오 가까이 즈음해서는 혈전 끝에 결국 몰리토르의 사단도 오스트리아군에게 밀려났고, 프랑스군은 중앙을 돌파당하는 일대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기세가 오른 오스트리아군은 루스바흐 언덕 위의 전선 전체에 걸쳐 일제히 포격을 개시하여 언덕 아래에 있던 프랑스군을 강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지 위에서 내리 쏘는 포격은 확실히 프랑스군을 압도했습니다.  어차피 전장의 병사들은 언제든 대포밥이 될 수 있는 신세였으므로 그 정도의 포격에 흔들리는 일은 없었습니다만, 전선 중앙부가 관통당해 자신들의 등 뒤에 펼쳐진 평원 위로 작센군과 프랑스군 패잔병들이 우르르 도망치는 모습은 프랑스군의 사기를 바닥으로 떨어뜨렸습니다.   병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나폴레옹은 전체 전선을 따라 말을 달려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병사들을 진정시켜야 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찢어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 모든 재앙이 베르나도트가 마음대로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꼭 맞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가장 약한 부대를 거느린 가장 못 믿을 부하를 가장 중요한 위치에 배치한 것은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또 아더클라가 나폴레옹에게 가장 중요한 위치도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 작전의 핵심은 다부가 공격 준비를 하던 동쪽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방면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자기가 공격할 생각만 했지 카알 대공이 먼저 치고 나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가 오스트리아군에게 선수를 빼앗기는 바람에 모든 작전이 엉망으로 꼬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무너지는 아더클라의 바로 동쪽 측면에는 우디노와 막도날, 외젠 등의 군단이 대기 중이었으므로 어떻게든 이 구멍만 틀어막으면 저 동쪽 끝에서 다부가 준비하던 나폴레옹의 진짜 주먹이 날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것을 믿고 있었으므로 아직 패배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장의 주먹을 준비 중인 것은 오스트리아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알 대공에게도 아더클라는 그저 견제구 또는 잽에 불과 했고, 그의 진짜 한방인 강력한 훅은 저 남서쪽 아스페른 쪽에서 날아들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1등?? 2017.07.30 20: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광입니다 하하하

  2. 그런남자 2017.07.30 2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첫 댓글의 영애가...ㅋㅋ
    재밌네요. 비엔나에 가보니 칼대공의 기마상이 있던데 나폴레옹이랑 맞짱떠서 저 정도 싸울 정도면 자격이 있을 듯하네요

  3. pangpang 2017.07.30 2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나도트 녀석. 오래도 살았던데 사진 한 장이라도 남겨뒀으면 좋았을 것을...
    위키백과 영문판을 보니, 데지레 클라리의 유일한(?) 사진이 있더군요. 죽어서 침대에 누워있는 사진 한 장이었는데, 실제로 본다는 것이 상당히 놀라웠던지라 한참을 보고 있었죠. 1860년에 사망했는데 사진이 한 장밖에 검색되지 않았다는 게 아쉬웠습니다.

  4. gg9811 2017.08.01 04: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 블로그 글에서부터 며칠을 걸쳐서 정주행한 끝에 가장 최신 글까지 읽었네요. 음식 관련 이야기 때문에 블로그 보게 됬는데 어느 순간 장기 연재 중이신 나폴레옹 글을 읽으면서 근대의 기묘한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꾸준히 이렇게 재밌는 글을 열심히 연재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5. 유애경 2017.08.01 05: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의 인연(?)은 재밌게(?)얽혀 있는것 같아요.후에 스웨덴 왕이 되는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을 배신(?)하게 되지만 이미 스웨덴의 왕인 그가 자기 나라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건 어쩔수 없는것 같구요...
    그나저나 하트가 안눌러 지네요!
    일시적인건가...
    잘보고 갑니다.

  6. 잘 보았습니다^^ 2017.08.01 1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기와 군율이 떨어지는 군대라면 물러났다 공격하기보다는 안전한 수비벽에 의지하며 수비하기가 나았을 것 같은데 베르나토트는 병사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네요.ㅎㅎ
    써주시는 연재 언제나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7. 카를대공 2017.08.01 16: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그렇지만 이번 편도 한창 흥미진진 할 때 딱!끊으시는군요.

    지난편부터 나폴레옹의 베르나도트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신게 저런 이유가 있어서였군요.

    이렇게 군단장 자리를 잃고도 왕까지 되는거 보면 될놈될입니다.

  8. 에어메딕 2017.08.01 19: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잘 보고 있습니다! 점점 클라이막스로 향해가네요!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9. 구릉구릉 2017.08.05 1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나도트가 자신이 반석같은 지휘력을 가졌다고 자찬한적이 있나보죠?

  10. 석공 2017.08.06 1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7월 6일 새벽, 카알 대공이 정한 공격 개시 시간을 제대로 지킨 것은 로젠베르크 대공 뿐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카알 대공이 위치한 도이치-바그람 마을 인근에 있던 부대들도 제때에 작전 명령을 받았고, 그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1 군단도 벨가르드(Heinrich Joseph Johannes, Graf von Bellegarde) 백작의 지휘 하에 오전 3시부터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공격 목표는 바로 코 앞에 있는 아더클라(Aderklaa) 마을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의 이 날 공격의 진짜 펀치는 오스트리아군의 우익, 즉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의 2개 군단이었으나, 벨가르드 백작이 맡은 이 아더클라 공격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 작은 마을이 전체 전선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므로, 이 곳을 빼앗는다면 프랑스군 전선이 두동강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이 발생하도록 나폴레옹이 놔둘리가 없었으므로 강력한 저항이 예상되었고, 이 곳을 향하는 벨가르드 백작의 마음은 무척이나 비장했습니다.




(벨가르드 백작이십니다.  이 분 성씨는 누가 봐도 프랑스식인데, 그 이유는 이 분 가문이 사보이(Savoy) 귀족 출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정작 이 분은 작센 태생입니다만, 이렇게 독일에 정착한 프랑스식 성씨를 가진 분들은 자기 성을 프랑스식으로 읽는지 독일식으로 읽는지 궁금합니다.)




약속한 공격 개시 시간인 새벽 4시가 되자, 벨가르드 백작은 슈투터하임(Stutterheim) 소장의 지휘 하에 3개 보병 대대와 3개 기병 대대를 조심스럽게 아더클라로 진격시켰습니다.  오스트리아군 선봉대는 아더클라 마을 주변에 구축된 토루 너머에서 언제라도 적군이 고개를 내밀고 일제 사격을 퍼부을 것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고 어둠 속을 걸어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벨가르드 백작의 귀에 총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천만뜻밖에도, 이 요충지가 텅 비어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예상 밖의 일이어서 오스트리아군은 아더클라 마을로 선듯 진입하지 못하고 먼저 탐색조를 투입하여 이게 혹시 뭔가 함정이 아닌지 확인부터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마을이 비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오스트리아군은 신이 나서 마을을 점령하고 제1 군단의 나머지 대대들도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대공의 기병대도 마을 바로 뒤 편에 자리를 잡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벨가르드 백작은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아더클라 마을을 점령하는데 몇 시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불과 10여분 만에 점령이 끝나자 이제 뭘 해야 하는지가 불분명했던 것입니다.  이때 그냥 진격하여 프랑스군 후방으로 돌파해들어갔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만, 벨가르드 백작은 역시 구시대의 인물로서 카알 대공의 전체 작전 방향을 바꿔 놓을 수도 있는 행동을 독단적으로 취하지 못하고 그냥 '일단 임무 완수'를 선언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습니다.  그가 받은 명령서에는 일단 마을을 점령하면 예비 병력이 후방에서 도착하기를 기다리라고 되어 있었거든요.  카알 대공의 주공은 어디까지나 우익의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였으므로, 카알 대공은 벨가르드 백작의 공격도 이들과 보조를 같이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런 명령은 내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예상 밖의 횡재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오스트리아군 지휘부의 경직성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프랑스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원래 이 곳을 지켜야 하지만 독단적으로 후퇴했던 베르나도트도 바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후퇴에는 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단 그의 변명대로 그가 맡은 제9 군단은 병력도 적고 훈련도도 떨어지는데다, 결정적으로 사기가 낮았습니다.  대부분이 작센인이었던 그의 병사들은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다니는 처지였으니 사기가 높다면 이상한 일이었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어제밤의 패배는 충격이 컸고, 게다가 패배의 원인이 아군인 프랑스군에게 당한 총질 때문이었으니 사기는 더욱 바닥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뿔뿔히 흩어져 후방으로 도망친 병력들을 재규합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후퇴할 수 밖에 없었던 점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아더클라를 텅텅 비워두고 전체 군단을 다 뒤로 뺄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베르나도트는 니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더클라가 너무 적진에 바싹 붙어 있는데다, 전체 프랑스 전열에서 아더클라만 너무 앞으로 튀어 나와 있기 때문에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었지요.  그런 위험 지역에서 적의 공격을 견뎌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위치를 비워놓았다가 적이 습격해올 경우 역습을 가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건 물론 어이없는 변명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아더클라는 전체 프랑스군 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드루와 드루와'하는 식으로 벌어진 집게 모양의 오스트리아군 전선 안을 쐐기 모양으로 파고 들어간 프랑스군 중에서도, 쐐기의 뾰족한 끝 부분이 바로 아더클라였으니까요.  


당연히 아더클라를 잘 지키는 것이 전체 프랑스군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막중한 책임을 지는 자리에 하필이면 베르나도트를 배치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남겨진 이야기가 없습니다.  나폴레옹이 이 곳에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을 배치한 것은 누가 봐도 석연치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배치해야 하는 자리에 가장 믿을 수 없고 미운 털이 박힌 군단장을 배치한 셈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은 당시 현장에서 가장 약한 군단 중 하나였습니다.  총 3개 사단 중 뒤파(Dupas) 장군의 사단만 프랑스군이었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작센군이었고 전체적으로는 약 1만7천의 병력 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하필 뒤파 장군의 프랑스 사단은 막도날드 쪽으로 차출되어야 했으니, 베르나도트가 심통이 날 만도 했었지요.  그런 제9 군단을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곳에 배치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나폴레옹은 이번 기회에 베르나도트를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더클라는 바그람 고지 언저리와 약 1km 조금 더 넘게 떨어진 곳으로서, 그 고지에 배치된 오스트리아군의 중포의 사거리 안에 들어가는 위치였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오스트리아군의 큼지막한 대포알이 아더클라를 향해 빗발처럼 날아들테니, 그 중 하나가 베르나도트의 허리를 두동강 내지 말라는 법도 없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방어 진지를 무단 이탈하여 후방에서 대기한 것도 어쩌면 나폴레옹의 그런 속셈을 간파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베르나도트도 아더클라 바로 1km 남서쪽의 어둠 속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텅 빈 마을로 좋다고 쏟아져 들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공언한 대로, '이제야 말로 나의 선견지명이 옳았음을 보여주마'라는 각오로 아더클라 탈환을 위한 역습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병력은 고작 6천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으므로 감히 무작정 돌격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먼저 포병대를 앞세워 포격을 퍼붓기로 했습니다.  그에게는 총 26문의 꽤 강력한 포병대가 있었거든요.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의 포병대는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바그람 고지 위에 방열된 중포를 이용해 베르나도트의 포병대와 포격 대결을 시작했는데, 구경에 있어서나 고지를 점유했다는 위치 선정에 있어서나 베르나도트의 작센 포병대는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작센 포병대의 26문의 대포 중 무려 15문이 직격탄을 맞고 포가가 부서지는 큰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한편, 이러는 사이 구조대가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마세나의 제4 군단이었지요.  마세나는 전날 밤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아더클라 방면을 지원하기 위해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자신이 맡았던 프랑스군의 좌익, 그러니까 도나우 강변 쪽 아스페른 마을에는 부데(Boudet)의 1개 사단만 남겨둔 채였습니다.  마세나는 특이하게도 눈처럼 흰색의 무개마차(phaeton)를 타고 있었습니다.  바그람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마세나는 사고로 말에서 낙마하는 바람에 다리를 크게 다친 바 있었습니다.  걷는 것은 커녕 말도 못 탈 정도의 중상이었는데, 마세나는 후방으로 물러나는 대신 마차를 타고 현장 지휘를 하겠다는 기개를 보여주어 나폴레옹을 기쁘게 했었지요.  아무튼 이들은 아더클라 쪽에서 들려오는 맹렬한 포성 소리에 어리둥절하여 더욱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 왔습니다.  아더클라 인근에 이들이 도착한 것은 이제 해가 훤히 뜬 아침 7시 30분 정도였는데, 말 위에 올라탄 누군가가 마세나의 눈에 잘 띄는 흰색 마차를 알아보고 마세나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뜻 밖에도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 그냥 뚜껑이 없는 무개마차이지만, 이 그림에 보이는 것은 파에톤이라는 형태의 마차이고 어떤 것은 로드스터이고, 뭐 아무튼 다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jager 2017.07.23 2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나도트가 무책임하게 명령을 무시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름 이유가 있었고(타당한지는 별론으로), 무엇보다 이 시점에는 나폴레옹과 서로 거의 신뢰가 없었네요.

    • 카를대공 2017.07.28 2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즈음엔 둘 사이에 신뢰란게 아예 없었던거 같습니다.
      어떤식으로든 파탄은 예고되어 있었던거 같네요.

  2. 괴도뤼팽2 2017.07.24 0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토탈워 했었는데 사실 자세한 이야기는 잘 몰랐었.. 글을 정주행해봐야겠네요 ㅎㅎ

  3. pangpang 2017.07.24 2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막스갈로의 나폴레옹을 봤는데, 바그람 전투 후 베르나도트가 '내가 지휘했다면 현명한 작전을 구사해, 큰 피해가 없이 승리했을 텐데.'라는 식의 주장을 했고, 분노한 보나파르트가 '저 놈을 군에서 추방하라!!'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나왔던 게 기억나네요.
    실제 바그람 전투에서 녀석이 얼마나 현명했는지 곧 드러나겠네요. 기대됩니다~

  4. 폴리틱스 2017.07.25 11: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필력이 엄청나시군요. 빠르게 읽어버렸습니다. 모르던 내용들 하나씩 읽어가는 재미가 있네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

  5. 최홍락 2017.07.25 1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phaeton이라는 마차는 꽤 비싼 수준의 마차인 듯 하네요. 폭스바겐 차량인 phaeton같은 경우 임원급 손님 오실 때 동원되는 수준의 차인데 그 이미지와 흡사해 보입니다.

  6. 오리오리 2017.07.25 2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맥도날드를 프랑스선 마크도날이라고 한거처럼 벨가르드 역시 독일식으로 읽지 않았을까요?

  7. 석공 2017.08.06 19: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