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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세나14

드레스덴을 향하여 (10) - 그의 사전에 원수 두 명은 없다 8월 23일 오후, 드레스덴 남쪽 피르나(Pirna)에 주둔하고 있던 생시르 원수로부터 나폴레옹에게 날아든 급보의 내용은 나름 극적이었습니다. 그랑다르메가 지키고 있지 않던 페터스발트(Peterswald) 고개길을 이용하여 러시아군 군단 하나가 쳐들어왔고 그 뒤로는 오스트리아군이 따르고 있는데, 그 규모는 오스트리아군 전체로 보인다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었습니다. 전에 언급한 것처럼 이때 점심을 먹고 있던 나폴레옹은 들고있던 와인잔을 탁자에 내리치며 깨뜨렸다고 전해지지만, 그렇다고 그가 완전 패닉에 빠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드레스덴 방어 계획은 결코 지타우와 럼부르크, 즉 보헤미아에서 작센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철통같이 지킨다는 정적인 것이 아니었거든요. 기본적인 방어는 피르나에 주둔한 생시르의 제1.. 2024. 2. 12.
굶주림과 희생 - 토헤스 베드하스 공방전 후퇴하는 웰링턴의 뒤를 쫓아 리스본으로 달리던 마세나가 1810년 10월 14일 생각지도 못했던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을 직접 육안으로 보고 그 규모에 경악하는 사이, 웰링턴이 사전에 프랑스군 후방에 미리 풀어놓았던 비밀 병기는 이미 작동을 시작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기아였습니다. 애초에 웰링턴은 마세나와 피투성이가 되어 멱살을 쥐고 구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기본 전략은 리스본 북쪽의 황량한 험지에서 마세나의 진격을 틀어막고 마세나에게 굶어죽든지 돌아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웰링턴은 부사쿠 전투를 전후하여 계속 그 일대의 포르투갈 주민들을 방어선 이남으로 피난가라고 강요했던 것입니다. 이는 병력은 부족하지만 물자는 풍부하고 기동력은 느리지만 방어에는 탁.. 2018. 12. 10.
무지막지한 도배질 - 토헤스 베드하스(Torres Vedras) 방어선 10월 5일, 프랑스군 전위 부대에게 사로잡힌 영국군 포로들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보고가 마세나에게 들어왔습니다. 영국군이 서둘러 '방어선 쪽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여태까지 마세나는 웰링턴이 1809년 1월 코루냐로 후퇴하던 무어 장군과 똑같은 신세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최악의 경우라고 해봐야 웰링턴의 영국군을 섬멸하지 못하고 놓치는 정도이고, 리스본 함락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국군 포로 취조 보고서에 따르면 웰링턴의 목적지는 리스본 항구에 정박한 영국 수송선이 아니라 어디엔가 구축해 놓은 방어선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세나는 자신감에 차있었습니다. 부사쿠 능선 같은 천혜의 방어선조차도 (비록 빙 우회하느라 시간은 .. 2018. 12. 3.
급할 수록 돌아가라 - 쿠임브라(Coimbra)의 함락 9월 27일 오전의 이 부사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500의 전사와 3600의 부상, 거기에 400에 가까운 실종자를 냈는데 비해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은 고작 전사 200에 부상 1000, 그리고 50의 실종자를 냈을 뿐이었습니다. 명백한 프랑스군의 참패였고, 그 원인은 마세나의 잘못된 판단이었지요. 마세나는 자신의 작전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에 대해 꽤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우수한 지휘관은 패전의 충격에서 재빨리 빠져나오는 법이지요. 그는 실패의 원인이 생각보다 웰링턴의 방어선이 훨씬 더 길게 늘어져 있어서, 가파른 능선이라는 강력한 방어선을 충분히 우회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잘 이해했습니다. 원인이 나오면 해법도 있기 마련이고, 해법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훨씬 더 크게 우회하면 되.. 2018. 11. 26.
부사쿠(Bussaco) 전투 (2) - 가늘고 긴 선 마세나의 명령대로 이른 아침 부사쿠 능선에 늘어선 영국군 방어선의 측면을 향해 기어오른 레이니에의 제 2군단은 크게 2개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들은 몬데고 계곡에서 피어오르는 자욱한 아침 안개에 가려져 영국군의 관측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안개로 인해 프랑스군도 능선 위의 영국군의 존재를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대오를 맞추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이들은 사단 단위의 질서 정연한 대오가 아니라 기껏해야 대대 단위를 간신히 유지한 엉클어진 모습으로 행군해야 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안개를 뚫고 고지에 오른 프랑스군 눈 앞에 펼쳐진 능선은 텅 비어 있어야 했습니다.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방어진의 측면을 우회하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천만.. 2018. 11. 22.
부사쿠(Bussaco) 전투 (1) - 사자는 방심하지 않는다 탄약고 폭발로 인한 알메이다 요새의 갑작스러운 함락은 웰링턴을 크게 당황시킬만 했습니다. 하지만 웰링턴은 그렇게까지 당황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생각보다 너무 일찍 함락되긴 했지만 어차피 알메이다의 함락은 예견되었던 것이고, 시우다드 로드리고의 스페인군이 분전해준 덕분에 방어 준비는 이미 충분히 되어 있었거든요. 문제는 그 방어 준비라는 것의 본질이었습니다. 웰링턴의 방어전략은 간단했습니다. 후퇴였지요. 그는 기세등등한 프랑스군과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일대의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리고 게속 후퇴했습니다. 군대가 후퇴하면서 주민들에게까지 소개령을 내리는 것은 당시 유럽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웰링턴이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식량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식량을 현지 조달하는 프랑스군의.. 2018. 11. 12.
두 요새 (1) - 시우다드 로드리고(Ciudad Rodrigo) 공방전 마세나는 나폴레옹으로부터 포르투갈 침공의 명령을 받자, 제대로 된 지휘관답게 지도부터 펼쳤습니다. 원래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스페인으로부터 포르투갈로 진입하기 위한 교통로가 험준한 국경 지형으로 인해 제약되어 있었다는 점이었지요. 기억들하시겠습니다만, 탈라베라(Talavera) 전투 이후 웰링턴이 술트의 측면 기습을 피해 재빨리 포르투갈로 퇴각한 경로가 대표적인 포르투갈로의 진입로였습니다. 그 경로는 아래 지도와 같이, 살라망카에서 알메이다(Almeida)와 쿠임브라(Coimbra)를 차례로 거친 뒤 리스본으로 향하는 길이었지요. (프랑스-독일에 비하면 스페인-포르투갈은 험준한 산맥이 꽤 많은 편이고, 군대가 대포를 끌고 이동할 수 있는 경로는 꽤 제한적이었습.. 2018. 10. 15.
1810년 포르투갈 침공의 서막 - 봉쇄와 결투 여태까지 1810년에 있었던 이런저런 사건들, 즉 나폴레옹의 새장가, 사탕무 설탕 공장의 건설, 베르나도트의 스웨덴 왕세자 책봉 등을 보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1810년은 피와 화약 연기로 점철되었던 황제 나폴레옹의 나날 중 드물게 평화로운 시절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도 비교적 그랬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1810년 들어 스페인 민중들의 대프랑스 항쟁은 그 기세가 더 격렬해졌습니다. 이는 반나폴레옹 봉기가 곳곳에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은 정반대로서, 웰링턴의 영국군이 탈라베라(Talavera) 전투 이후 포르투갈로 물러가자 무능력한 스페인 봉기군은 차근차근 프랑스군에게 격파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러면 스페인 민중들은 용기를 잃고 굴복할 만도 할.. 2018. 10. 8.
바그람 전투 (제13편) - 마세나의 8km 로리스통의 대규모 포병단이 오스트리아 제3 군단을 갈아엎는 동안, 마세나도 쉴 틈 없이 바빴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새벽에 저 남쪽 아스페른 쪽에서 힘들게 행군해 올라온 뒤, 베르나도트가 구멍을 낸 아더클라를 탈환하기 위해 혈투를 벌이고 있었지요. 그런데 불과 몇 시간 만에, 나폴레옹은 그에게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 그 쪽으로 침투해온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 제6 군단을 쫓아내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이때가 대략 오전 11시 경이었습니다. 당시 병사들에게 이렇게 의미를 알 수 없는 행군과 애써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역행군이 흔한 일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더 험난한 행군길이 예약되어 있었습니다. 걸아가야 하는 길이 무려 8km 정도로서 정상적인 행군으로는 거의 2시간 거.. 2017. 9. 4.
바그람 전투 (제8편) - 아더클라의 혈전 새벽부터 동쪽의 포성을 듣고 혹시 요한 대공의 군대가 쳐들어온 것인가 깜짝 놀라 병력을 이끌고 다부의 전선으로 달려갔던 나폴레옹은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는 동쪽의 소란이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엔 중앙부에서 들려오는 포성에 이건 또 뭔가 싶어 말을 달렸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그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대노했습니다. "어제 밤부터 베르나도트 저 허풍선이는 병신짓만 골라 하는구나 !" 다행히 그는 어제 밤 베르나도트 없이 열었던 작전 회의에서 베르나도트를 지원하기 위해 마세나의 병력을 좌익에서 중앙부로 이동시킨 바 있었습니다. 해가 밝아오는 상황에서, 그의 눈에 마세나의 병력이 현장에 도착하는 것이 보였고, 곧 이어 마세나의 눈처럼 하얀 색의 무개마차도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마세나는 베르나도트 못지 않게 돈 욕심.. 2017. 7. 30.
바그람 전투 (제7편) - 베르나도트의 사정 7월 6일 새벽, 카알 대공이 정한 공격 개시 시간을 제대로 지킨 것은 로젠베르크 대공 뿐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카알 대공이 위치한 도이치-바그람 마을 인근에 있던 부대들도 제때에 작전 명령을 받았고, 그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1 군단도 벨가르드(Heinrich Joseph Johannes, Graf von Bellegarde) 백작의 지휘 하에 오전 3시부터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공격 목표는 바로 코 앞에 있는 아더클라(Aderklaa) 마을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의 이 날 공격의 진짜 펀치는 오스트리아군의 우익, 즉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의 2개 군단이었으나, 벨가르드 백작이 맡은 이 아더클라 공격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 작은 마을이 전체 전선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므로, 이 곳을.. 2017. 7. 23.
아스페른-에슬링 9편 - "질서있는 퇴진" 군인의 목표는 승리와 전진이며, 이는 이룩하기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 바로 패배 수습과 질서있는 후퇴입니다. 나폴레옹도 '모든 문제는 승리하면 다 저절로 해결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만, 패배할 경우 없던 문제까지 수없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5월 22일 11시, 부교가 수리 불가 상태까지 붕괴된 것이 확인되자, 나폴레옹은 공세에 나섰던 병력을 철수시키기로 합니다. 그 명령에 의해 가장 곤란해진 것은 바로 란의 제2 군단이었습니다. 마세나의 제4 군단은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았습니다. 그들은 벌판으로 진격하지 않고 아스페른 마을 안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일단 현 상황을 유지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란의 제2 군단은 중앙 전선을 .. 2017. 4.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