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6년, 상황 판단 능력이 떨어지던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가 겁도 없이 나폴레옹에게 도전한 제4차 대불동맹전쟁에서 프로이센은 건국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 했습니다.  특히 10월 14일은 아마 프로이센 역사상 최악의 날이었을 것입니다.  프로이센 전체 야전군이라고 할 수 있는 12만 대군이 예나와 아우어슈타트에서 하루 아침에 산산조각 났거든요.  프로이센에게는 특히 아우어슈테트 전투가 뼈 아픈 상처가 되었습니다.  6만의 프로이센 대군이 불과 2만7천 밖에 안 되는 다부(Louis Nicolas Davout) 원수의 프랑스군 제3 군단에게 박살이 났으니까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박살낸 나폴레옹이 베를린에 입성할 때, 놀랍게도 베를린 시민들은 이 정복자에게 환호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프로이센의 귀족들은 물론, 프랑스군조차도 놀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우어슈테트 전투를 언짢게 생각한 것은 꼭 프로이센 사람들만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날 예나에서 호헨로헤 대공이 지휘한 프로이센군을 격파한 나폴레옹도 이 전투가 내심 불쾌했습니다.  먼저, 나폴레옹은 영광을 부하들과 나눠 갖는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필 같은 날, 자신의 심복인 다부가 더 적은 병력으로 더 빛나는 승리를 거둔 것이 기쁘면서도 그리 상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다부가 1대2의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야 했다는 자체가 자신의 큰 판단 미스를 그대로 드러내보이는 일이다보니, 나폴레옹은 체면이 서지가 않았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의 스타일은 결코 여포처럼 일당백의 용기를 발휘하여 더 적은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때려부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전체 병력 수는 적이 더 많다고 하더라도, 면밀한 정보 수집과 냉철한 상황 판단, 그리고 현란한 풋워크를 통해 정작 실제 전투에 참여하는 병력은 언제나 프랑스군이 조금 더 많도록 만드는 것이 나폴레옹의 장기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그가 지휘하는 전투에서 1대2의 수적 열세를 안고 프랑스군이 전투에 돌입해야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명성에 흠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나 전투를 완승으로 마무리한 그 다음날 새벽까지도, 자신이 호헨로헤 대공의 지원군이 아니라 프로이센군 주력 전체와 맞붙어 싸워이긴 줄 알고 우쭐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아침 다부로부터 온 전령이 빌헬름 3세 본인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 6만을 다부의 제3 군단 혼자서 무찔렀다는 아우어슈테트 전투의 승전보를 가져오자, 나폴레옹은 "자네 원수께서 헛것을 보신 모양"이라고 비웃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곧 사실이 드러나자, 나폴레옹의 입장은 몹시까지는 아니어도 살짝 난처해졌습니다.  부하들에게 체면이 서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곧 그의 실책을 뒤집어 씌울 희생양을 찾아냅니다.  바로 제1 군단장 베르나도트였습니다.  원래 전투 직전, 다부와 베르나도트는 함께 나움부르크(Naumburg) 근처까지 진격해있었습니다.  그때 나폴레옹에게 호헨로헤의 프로이센군이 포착되자, 이를 프로이센군 본대라고 착각했던 나폴레옹은 다부와 베르나도트에게 각각 별도의 명령서를 내립니다.  다부에게 호헨로헤의 퇴로를 끊기 위해 예나의 북서쪽인 아폴다(Apolda)로 내려와 포위망을 틀어막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베르나도트에게 내린 명령이 약간 애매모호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다부와 함께 나움부르크에 있다면 다부와 함께 아폴다로 가되, 만약 도른부르크에 있다면 뮈라와 합류하여 예나 방향으로 내려오라.  내가 선호하는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미 도른부르크에 도달한 상태라서, 예나에서 곧 벌어질 란의 전투를 지원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었지요.  이미 도른부르크에 주둔하고 있던 베르나도트는 성실히 그 명령에 따라 10월 14일 아침에 예나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아우어슈테트 방향에서 맹렬한 포격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베르나도트를 포함한 제1 군단 전체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이 적과 조우하여 명렬한 전투에 들어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아마 베르나도트는 약간 고민했을 것입니다.  무선통신이 없던 당시 군대에서는 현장 지휘관의 융통성이 무척 중시되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베르나도트는 전군에게 '뒤로 돌아' 명령을 내린 뒤 포격 소리를 향해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나폴레옹으로부터 '예나로 오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 본대의 위치를 포착했고 이를 포위섬멸하겠다고 무척 흥분한 상태였습니다.  당시로서는 나폴레옹의 판단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또 베르나도트로서는 뒤에서 들리는 포성이 다부와 맞붙어 싸우느라 포성을 울리고 있는 적이 2~3만 정도 규모라서 다부 혼자서도 충분히 싸울 수 있는 상황인지 아니면 다부에게 도움이 절실한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의 판단대로 예나에 있던 적이 10만에 달하는 프로이센 본대가 맞고 따라서 프랑스군도 모든 병력을 다 끌어모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다부의 싸움을 조금 더 쉽게 해주느라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의 명령을 어기고 아우어슈테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면 프랑스군 본대를 위태롭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베르나도트의 입장이라면 어떤 판단을 내리셨겠습니까 ?  더군다나 나폴레옹이 '내가 선호하는 것... 예나의 전투를 지원해주는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인 명령서가 주머니에 들어있는 상황이었는데 말입니다.  아마 대부분은 나폴레옹의 명령대로 그냥 그대로 예나로 진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르나도트도 같은 결정을 내리고는, 등 뒤에서 들리는 맹렬한 포성을 애써 무시하고 예나로 행군을 계속 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이 결정이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  결과적으로 보면 잘못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베르나도트는 아우어슈테트 전투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고, 예나 전투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베르나도트가 결과적으로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를 말아먹을 뻔 한 것은 그가 나폴레옹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베르나도트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은 베르나도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나폴레옹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하들 앞에서 난처한 상황에 빠진 나폴레옹에게 그런 점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원래 그런 면이 다분했습니다만) 특히 황제가 된 이후로 모든 공은 자신의 몫이고, 모든 과오는 부하들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부쩍 강해졌습니다.  그는 다부의 제3 군단이 당한 봉변에 대해 베르나도트를 맹비난했고, 까딱하면 그 자리에서 베르나도트의 지휘권을 박탈할 기세였습니다만,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어쨌건 그는 최초 명령서를 보낸 이후, 곧 새 명령서를 보내서 '상황이 발생하면 그에 따라 다부를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명령서는 대육군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아마 억울해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뭐 어쩌겠습니까 ?  자신의 제1 군단 전체가 예나에서도 아우어슈테트에서도 총 한 방 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상대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었는걸요.  베르나도트가 역사 속에서 두고두고 욕을 먹지만 정작 본인은 세상 억울하게 생각할 일은 이것 하나 뿐이 아니었습니다.  3년 뒤인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재현됩니다.


1809년 도나우 강변 바그람(Wagram)에서 오스트리아 카알 대공과 맞붙은 나폴레옹은 7월 5일 밤 프랑스군의 전선을 짜면서,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을 아더클라(Arderklaa) 마을에 배치했습니다.  이 마을은 고지 위에 위치한 오스트리아군에게 가장 가까운 지점이자 ㄴ자로 꺾어진 전체 전선의 돌출부에 해당하는 전선 중앙부로서 전체 프랑스군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다음날 새벽 공격을 가해온다면 가장 치열한 공격을 받을 곳이 바로 여기였고, 또 절대 무너져서는 안 되는 곳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역시 주요 전투에서 믿을 사람은 인척이자 경험도 많고 침착한 베르나도트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였을까요 ?  그건 확실히 아니었습니다.  당시 베르나도트가 맡고 있던 제9 군단은 프랑스 병사들이 아니라 대부분 작센(Sachen) 출신의 독일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던, 2진급 부대였습니다.  이들은 7월 5일 밤에 감행되었던 야습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큰 피해를 입어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고, 그나마 그 중 가장 정예라고 할 수 있던 뒤파(Pierre-Louis Dupas) 장군의 사단은 뚝 떼어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인 외젠의 이탈리아 방면군에게 배정해놓은 상태라서 도저히 치열한 전투에 투입될 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허약한 군단을 가장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는 아더클라에 배치했다 ?  이건 좀 이상했습니다.  게다가 이 아더클라 마을 전체는 바그람 고지 위에 늘어선 오스트리아군의 중포 사정거리 내에 있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이 배치에 대해서 의혹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에 베르나도트는 이번 원정 시작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2진급 군단인 제9 군단의 지휘를 맡긴 것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그나마 원정 준비를 시작하자 나폴레옹의 심복이자 참모장인 베르티에가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습니다.  원래 원정을 준비하는데는 군수품을 사들이고 보충병을 모집하는 등 엄청난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행정 업무에서 베르티에의 장난질이 분명한 방해 공작이 집요하게 제9 군단을 괴롭히자 베르나도트는 그만 폭발하여 나폴레옹에게 이번 원정에서 빠지겠다는 사임서를 보낼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 사임서에서 '보이지 않는 세력이 제9 군단의 원정 준비를 방해하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라며, 베르티에의 이름만 안 적었을 뿐 베르티에에 대한 노골적인 고자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의 사임 요청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베르티에를 견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그람 전투 전날 밤, 이젠 누가 봐도 '오스트리아 대포알에 맞아 두동강이나 나거라'라는 식의 전선 배치를 당한 것입니다.  




(1809년 7월 5일 밤 ~ 6일 새벽 사이 나폴레옹과 그의 부하 원수들간의 회의 장면입니다.  이 장소에 베르나도트는 없었습니다.  그의 불복종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제9 군단이 몇 시간 전의 야습 작전에서 큰 피해를 입고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베르나도트는 그의 병사들을 재규합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어려운 과제는 회의에 불참한 사람에게 떨어진다더니, 그래서 그의 제9 군단이 아더클라에 배치된 것일까요 ?  설마요.)




베르나도트는 여기서 진짜 거물다운 결정을 내립니다.  아더클라 마을을 사수하라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아예 그 마을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2~3km 물러나버린 것입니다.  베르나도트로서는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지휘였습니다.  7월 5일 밤의 야습 실패로 남쪽 방향으로 뿔뿔이 흩어진 그의 제9 군단 병사들을 재집결시키기 위해서는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유리했고, 또 오스트리아군의 습격이 뻔한 상황에서 차라리 아더클라를 먼저 내준 뒤 반격을 가해 탈취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이 그의 자기 합리화였습니다.  더 최악인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 사실을 나폴레옹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나폴레옹의 의도는 두동강 난 자기의 시체를 보는 것인 모양이니, 차라리 알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그런 일탈 행위 덕분에 7월 6일 새벽 바그람 전투는 프랑스군의 대위기로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베르나도트를 비롯한 제9 군단의 작센 병사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후방으로 도주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대노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나폴레옹의 사령부 쪽으로 부하들과 함께 무질서하게 도망쳐 오는 베르나도트를 보고 분통이 터진 나폴레옹이 현장에서 그를 군단장직에서 해임했다고 합니다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베르나도트는 그의 원래 전략(?)처럼 일단 아더클라를 내준 뒤 탈환하기 위해 노력을 했고, 오히려 전투 후에 다시 한번 사임서를 내며 나폴레옹의 부당한 지휘에 대해서 항의까지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의 군단장직 사임서를 승인한 것은 전투 며칠 후였는데, 이유는 베르나도트가 뻔뻔하게도 이번 바그람 전투 승리는 그의 작센 병사들의 활약 덕분이었다고 제멋대로 발표한 성명서를 보고 나폴레옹도 폭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베르나도트와 나폴레옹의 불화는 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심해졌다가, 바그람 전투에서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더 깊은 상처를 받은 것은 베르나도트였습니다.  나폴레옹에 대한 그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가 바그람에서 쫓겨난 직후 지휘를 맡은 벨기에 전선에서 드러납니다.  바그람에서 혈투를 벌이던 오스트리아군을 돕기 위해, 영국군은 오랜만에 몸소 유럽 대륙에 상륙합니다.  장소는 벨기에였고, 영국 측에서는 이 작전을 월체른(Walcheren) 원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력부대가 바그람에 가있어서 속수무책이던 프랑스 측은 마침 실직자로 파리에 와 있던 베르나도트를 현장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2진급 부대를 이끌고 안트베르펜(Antwerpen, 영어로는 Antwerp) 방어에 나서게 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여기서 병사들에게 연설을 할 때 벨기에 해안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영국군에게 유린된 것은 나폴레옹 탓이라며 대역무도스러운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덕분에 그는 급한 불을 끈 뒤에 결국 다시 이 사령관직에서도 물러나야 했지요.  


여기서도 쫓겨난 베르나도트는 스페인 카탈루냐로 발령이 났습니다.  스페인 전선은 당시 아무 전공이나 영광을 기대할 수 없는 진흙탕이 되어 있었고, 그나마 카탈루냐는 스페인 전선 중에서도 비교적 후방으로 대표적 한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물을 먹은 베르나도트는 이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이 발령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아직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나폴레옹에게 소환되었고, 그와 별로 달갑지 않은 면담을 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도 베르나도트에 대해서는 거부감과 동시에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세상 이목도 있으니 그러지 말고 폼도 적당히 나고 지내기도 좋은 로마 총독으로 가라'라고 제안했고, 뭐 더 싸워봐야 얻을 것도 없었던 베르나도트도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는 결국 로마에 갈 수 없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로마에 가지 못한 이유는 다시 시간을 거슬러, 1806년 11월, 베르나도트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온갖 욕을 다 먹고 분루를 삼키며 내달렸던 북부 독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Jena%E2%80%93Auerstedt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L%C3%BCb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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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웃자웃어 2018.08.02 08: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차라리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집권하지 않는게 프랑스에겐 차라리 이득이였을 지도 모르겠군요.

  2. ㅇㅇ 2018.08.02 0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우한 남자...ㅠㅠ

  3. 안토 2018.08.02 1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뒤통수 칠 만한 처우였네요...
    그런데 작성자님, 장 란 원수 이야기는
    예전 블로그에 있는 5편으로 마지막인가요?

    • nasica 2018.08.05 2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베르나도트는 뒤통수 안 쳤다니깐요.

      2. 장 란이 전사하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4. pms3278 2018.08.02 1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배신할만 했네요...

  5. 루나미아 2018.08.02 14: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시 생각해보니 다부가 위험한 상황인지 알 수 없는데 황제가 '적 주력은 내 쪽에 있다'고 하면, 굳이 어기고 다부에게 갔는데 별일 아니라면 그 후폭풍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겠네요. 예니-아우어슈테트 편 읽을땐 베르나도트가 너무 몸을 사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글 보니 새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는군요.

  6. 유애경 2018.08.03 0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여러모로 '치사한'나폴레옹 이네요!
    결국 부하들이 자신을 등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건 자업자득 이라고 해야겠죠!

  7. 방랑자 2018.08.04 08: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인트헬레나에서 난 부하들에게 배신당한 게 아니라 버려진 거라고 말했던 게 정말 많이 순화한 거네요. 이러고도 막판에 가서야 배신자가 나왔으니 나폴레옹이 대단한 건지 당시, 의리가 대단했던 건지...


    추신 : 오타 하나 신고. "23년 -> 3년"

  8. reinhardt100 2018.08.04 09: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당시, 다부가 정말 대단했던건 프로이센군이 처음부터 강습으로 나왔는데도 전열이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는겁니다. 특히 포병전력에서 4배 이상의 격차를 보였는데도 말이죠.

    사실, 프로이센군이 저렇게 병력 배치를 한 이유가 두 전투 중 한 곳에서 프랑스군 일부 병력을 격파한 후, 전병력을 끌어모아 프랑스군 잔여병력을 격파한다는 거였습니다. 전열보병 시대 최대의 기동전이었던 로이텐전투를 참고한 건데, 당시 3만 6천의 병력으로 8만의 오스트리아-바이에른 연합군을 기동전으로 대파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하고
    싶었던 겁니다. 1806년은 그 때보다 사정이 훨씬 좋다보니 기동전으로 프랑스군을 격파하겠다는 거였습니다만 문제는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나 바이에른 군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1분당 80보 걷던 군대랑 120보 걷던 군대가 같을리 없었죠.

    • 카를대공 2018.08.07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부는 정말 보면 볼수록 대단한 남자네요.
      오스트리아 전역 때고 그렇고 불리한 상황에서 절대 안 지는 점은 나폴레옹 휘하 원수 중 으뜸인거 같습니다.

    • reinhardt100 2018.08.09 2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부의 경우, 나폴레옹의 26원수 중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정도로만 따지면 가장 높은 축입니다. 그러다보니 나폴레옹 역시 '가장 위험한 전선의 소방수'로써 잘 활용했던 휘하 원수이기도 했습니다.

      마세나, 다부, 슐트, 베르티에가 군사적 능력이 가장 뛰어난 편이었는데 이 중에서도 마세나와 다부가 두각을 나타낸다고 봐도 될 듯 합니다.

  9. 석공 2018.08.04 2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

  10. TheK의 추천영화 2018.08.05 07: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정말 사수 잘못 만나 고생이 많았네요.
    다음 편이 기대 됩니다.

  11. 샤르빌 2018.08.05 12: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가족들과 최측근들은 죄다 배신을 때렸는데 피 안섞인 의붓자녀나 군단장, 근위병들은 마지막까지 따랐단게 참 묘합니다..

  12. 카를대공 2018.08.07 2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나도트가 정말 거물은 거물이네요.거기서 깔끔하게 황제의 명령을 씹고 물러난다라;
    괜히 왕이 된게 아닌거 같습니다.

2012년, 휴 잭맨 주연의 레미제라블 영화 중에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를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입니다.  은접시에 퍼주는 음식을 굶주린 장발장이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대체 저 음식이 무엇인지가 궁금했습니다.  화면을 보면 뭔가 고기도 좀 들어있는데 말입니다. 





그 음식이 당연히 원작 소설에 나오는 내용 그대로는 아닙니다만, 어떤 음식이 나왔는지는 원작 소설에 묘사가 되긴합니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할 때 가정부 할머니인 마글루아 부인이 내놓는 미리엘 주교의 평범한 저녁 식사 메뉴가 나열됩니다.


Cependant madame Magloire avait servi le souper. Une soupe faite avec de l'eau, de l'huile, du pain et du sel, un peu de lard, un morceau de viande de mouton, des figues, un fromage frais, et un gros pain de seigle. Elle avait d'elle-même ajouté à l'ordinaire de M. l'évêque une bouteille de vieux vin de Mauves.


그러는 동안 마글루아 부인은 저녁을 차렸다.  물에 기름, 빵과 소금을 넣고 만든 수프, 돼지비계 조금, 양고기 한조각, 무화과, 생치즈, 그리고 큰 호밀 빵 한 덩어리였다.  마글루아 부인은 주교의 그런 평상시 식사에 모브 와인 한병을 보탰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프랑스에서 주교는 매우 높은 직책이고, 또 상당히 고액 연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미리엘 주교는 거의 대부분의 급료를 빈민구제에 써버리고, 정작 본인은 무척 소박한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기 때문에 저런 음식을 먹었던 것이지요.  저 소박한 음식 중에 특히 저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저 수프였습니다.  빵과 기름과 소금과 물만으로 만든 수프라니 ?  그게 무슨 괴이한 음식이란 말입니까 ?


그런데 그 빵 수프를 연상시키는 이야기가 레미제라블 속 장면보다 약 10년 전인 1809년, 나폴레옹 관련 기록에도 나옵니다.  1809년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점령한 뒤 그는 휘하 병사들 중 상당수를 비엔나 시내에 주둔시킵니다.  통상 이런 경우 병사들은 민간인들의 가정 주택에서 먹고 잤습니다.  그렇다고 병사들이 산적처럼 마음대로 아무 집에나 쳐들어간 것은 아니고, 병참 장교가 미리 조사한 결과에 따라 주택의 크기와 가정 형편, 그리고 그 집 가장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어떤 집은 3~4명, 어떤 집은 10여명 씩 배정되었습니다.  이 점령군 병사들이 점잖은 비엔나 중산층 시민의 가정에서 깽판을 쳤을까요 ?  그런 일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럴 일은 없었습니다.  귀족이나 부유한 중산층 시민의 저택은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고 또 그런 집에는 장교들이 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비엔나 시민들도 대부분은 서민이었고, 그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사회적 계급 출신인 프랑스 병사들을 먹이고 재웠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런 병사들과 피점령 시민들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비엔나식 돈가쓰인 슈니첼입니다.  드셔본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냥 우리나라 돈까스가 더 맛있다고...)



문제는 비엔나 시민들이 병사들에게 뭘 먹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잣집에 할당된 병사들은 유명한 비엔나식 돈까스(Wiener Schnitzel)와 맥주를 대접받고 가난한 집에 할당된 병사들은 말라비틀어진 빵과 물을 먹어야 했을까요 ?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현지 조달의 달인이라고 불리는데는 다 이유가 있고, 달인은 일을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병참부는 배고픈 병사들을 떠맡은 비엔나 시민들에게 '적어도 1인당 이 정도씩을 먹여야 한다'라고 의무 배식량을 정해서 통보했습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빵 1.33 파운드 그리고 추가로 수프에 넣을 빵 0.33 파운드

고기 1 파운드

쌀 0.125 파운드 (2 온스)

말린 채소 0.25 파운드 (4 온스)



여기서 눈에 확 띄는 부분이 바로 저 매일 먹을 빵 1.33 파운드 이외에 추가로 수프에 넣을 빵 0.33 파운드라는 부분입니다.  그냥 먹는 빵과 수프에 넣을 빵이 따로 있었을까요 ?  그리고 저 말린 채소라는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요 ?  게다가 비엔나에서 쌀을 요구했다고요 ?  그것도 고작 2온스, 즉 56그램 정도의 쌀로 뭘 해먹었을까요 ?  요즘 한국인들이 먹는 쌀밥 1공기를 짓기 위해 들어가는 쌀이 약 90그램인데, 한공기도 안되는 쌀인데 말입니다.  


저기서 말린 채소라는 것이 사실은 말린 콩을 뜻한다는 것을 아시면 대략 견적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냥 먹는 빵을 제외한 저 모든 재료는 결국 끓는 물 속에 들어가 뭔가 걸죽한 스튜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전에 올렸던 포스팅에서, 쿠아녜(Coignet)의 회고록 중 일부를 다시 보시면 좀더 분명해질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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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에서 일하던 소년인 쿠아녜는 징집 명령을 받고 입대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나는 작은 꾸러미를 겨드랑이 밑에 끼고 출발하여, 첫번째 군사 주둔지인 로조이(Rozoy)에 도착하여 밤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숙사 할당 명령서(ordre de cantonnement)를 받아다 집 주인에게 제시했는데, 집 주인은 날 본 척 만 척 하며 홀대했다.  그러고 난 뒤 난 뭔가 스튜를 만들 재료를 사러 밖에 나갔고, 푸주간에서 고기를 받았다.  내 손바닥 위에 올려진 고기 조각을 보니 몹시 처량했다.  그것을 들고와서 내 숙사로 정해진 집의 안주인에게 주며 스튜를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한 뒤, 스튜에 넣을 채소거리를 구하러 다시 밖으로 나왔다.  마침내 약간의 스튜가 만들어졌고, 그때 즈음에는 그 집 주인 식구들도 나를 어느 정도 좋게 봐주어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여보려고 했다.  하지만 난 그들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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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에서 보면, 고기는 분명히 돈을 내고 사왔는데, 양배추나 당근 등 채소류는 돈을 내고 사왔다는 것인지 밭에서 그냥 뽑아왔다는 것인지 불분명합니다.  로마 시대부터,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배급 식량 목록에는 빵과 밀가루, 와인과 식초는 기록되어도 배추나 양파 등 진짜 채소는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이유는 그런 부식거리는 그냥 '구하는' 것이지 주요 보급품 목록에 넣을 정도로 중요 물품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있으면 넣고 없으면 말고 식이었지요.  또 당시 사람들은 채소를 그다지 많이 먹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전에 회사 교육 문제로 유쾌한 멕시코 친구 2명을 만나서 며칠간 잡담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 이야기가 멕시코는 원래부터 가난한 나라여서, 어디서 친구가 방문하러 오겠다는 전화가 오면 저녁을 만들던 와이프에게 이렇게 말을 하곤 했다고 반농담반진담으로 이야기를 하더군요.  


"여보, 콩 수프에 물을 더 부어야겠는걸 ?"


이렇게, 원래 수프라는 것은 적은 재료로 여럿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요리입니다.  게다가 솥 하나만 있으면 여럿을 위한 요리도 적은 연료로 쉽고 빨리 할 수 있었으므로 그야말로 군대를 위한 요리였지요.  그렇게 배고픈 사람들을 위한 요리가 콩소메(consommé)처럼 멀건 국물이라면 무척 실망스러웠겠지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나 병사들은 국물을 뻑뻑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가지 부재료를 넣었습니다.  있기만 하다면 하얀 밀가루가 제일 좋았겠지만 밀가루는 빵을 만들기에도 부족한 것이었고, 쌀이 가장 좋은 재료였습니다.   




(콩소메입니다.  요즘 고급 식당의 요리사들은 저런 콩소메의 국물을 맑게 하려고 계란 흰자를 쓰는 등 갖은 노력을 한다고 합니다.  정작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질색을 했겠지요.)



쌀은 국물을 잘 흡수하여 그 자체로도 맛이 풍부한 건데기가 될 뿐만 아니라, 전분을 국물에 풀어내어 국물을 진하게 만들어줬거든요.  지금도 치킨 수프 등에는 짧은 국수를 넣기도 하지만 쌀을 넣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삼계탕이 해외에 소개될 때는 스튜가 아니라 chicken soup으로 소개되는데, 닭과 쌀이 든 국물 요리이다보니 서양의 치킨 수프와 동일시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들식의 간단한 chicken soup인줄 알고 삼계탕을 시켰다가 닭 한마리가 통째로 들어간 요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는 외국인들도 있다고 합니다.  





(Chicken soup with rice는 이런 거...)




원래 유럽에서 쌀을 가장 많이 먹는 지역이 스페인과 함께 북부 이탈리아 지역이지요.  덕분에 남부 프랑스에서도 쌀 요리를 꽤 먹었다는데, 아마 비엔나도 북부 이탈리아에서 멀지 않았으므로 쌀을 쉽게 구할 수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굶주린 병사들을 맞이한 비엔나 시민들에게 '쌀을 내놓으라'는 명령이 떨어졌겠지요.  


하지만 쌀은 유럽 전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곡물은 아니었습니다.  쌀이 없을 때 대용으로 사용되던 것이 바로 오래되어 딱딱해진 빵이었습니다.  당시 빵은 버터나 쇼트닝이 들어가지 않은, 갓 구운 상태에서도 꽤 딱딱한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구운지 2~3주가 지나거나 잘라 먹다 껍질부분이 남은 빵조각 남은 것들은 정말 딱딱했을 겁니다.  레미제라블 후반부에, 마리우스의 하숙방에서 노닥거리던 에포닌이 방을 나가면서 마리우스의 찬장에 놓여있던 마른 빵조각을 허락도 받지 않고 냉큼 입에 넣고 씹다가 너무 딱딱해서 이빨이 부러졌다고 투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꼭 과장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2012년 영화 속에 나온 에포닌은 아주 건강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레미제라블 원작 소설 속의 에포닌은 어린 나이에 이빨도 한두 개 빠진, 정말 헐벗고 병약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게 훨씬 더 현실적인 이야기지요.)




그렇게 마르고 굳은 오래된 빵을 그나마 잘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수프에 넣어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빵 수프 요리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발달했습니다. 리볼리타(Ribollita)라든가 아콰코타(Acquacotta) 등이 모두 빵을 넣고 끓인 수프 요리이며, 하나같이 가난한 농부들이 먹던 음식이었습니다.  





(아콰코타입니다.  이탈리아식 빵 수프입니다.)



마른 빵보다 더 나쁜 것이 원양 항해나 군대에서 많이 먹던 비스킷, 즉 건빵이었습니다.  비스킷을 부수기 위해 돌로 내리치면 가끔씩 비스킷 대신 돌이 부서졌다는 그 공포의 비스킷으로도 수프를 만들어 먹었을까요 ?  예, 그렇게 많이 먹었습니다.  버구(burgoo)라는 것은 염장쇠고기와 잘게 부순 비스킷으로 만든 대표적인 영국 해군 요리(?)입니다.  그나마 부유한 함장인 잭 오브리(Jack Aubrey)를 주인공으로 한 Aubrey & Maturin 시리즈에서는 이 버구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가난뱅이 함장이 주인공인 Hornblower 시리즈에서는 수병들 뿐만 아니라 함장실에서 혼블로워가 혼자 앉아 버구를 먹고 있는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결국 미리엘 주교가 먹던 저 빵 수프라는 것은 결코 주교님이 드실 만한 음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소설 원작에서도 장발장이 '동네 짐마차꾼들이 이거보다는 더 잘 먹는다'라고 말할 정도지요.  미리엘 주교는 '그 사람들 일이 더 힘드니까요'라고 웃으며 말하는데, 장발장은 눈치도 없이 '그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돈이 더 많은 것 같은데요' 라고 팩트 폭력을 행사하지요.


이 빵 수프 이야기는 나폴레옹 이야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1809년 7월 7일 밤, 바그람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하고 지친 나폴레옹은 사령부로 마련한 농가 앞 짚단 위에 앉아 졸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장면은 당대 어느 유럽 군대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만, 당시 프랑스 군대에서는 종종 벌어지던 일이고, 그것이 바로 나폴레옹의 군대를 강군으로 만들었던 문화이기도 했습니다.  그 앞을 지나가던 어느 유격병(voltigeur) 상병 하나가 황제가 그렇게 지쳐 떨어진 것을 보고는 아무의 제재도 받지 않고 감히 말을 걸었습니다.  


"폐하, 우리가 끓인 수프라도 좀 드시겠습니까 ?"


그러자 잠에서 깬 나폴레옹도 짜증내지도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물었지요.  "잘 익었나 ?"


이 상병은 나폴레옹을 자기와 그 동료들이 끓여놓은 수프 남비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거기에는 잘게 부순 마른 빵조각(crouton)까지 넣어 아주 걸죽한 수프가 은으로 된 작은 단지에서 끓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걸 보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대체 어디서 흰빵과 은단지를 구했나 ?  훔쳤나 ?"


그때 나폴레옹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서 까딱 잘못하면 그 상병은 약탈죄로 즉결처분에 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병은 아주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빵은 의무 마차에서 샀고, 은단지는 어느 죽은 장교의 몸에서 찾은 겁니다."


나폴레옹은 그 죽은 장교가 프랑스군이었는지 오스트리아군이었는지 묻지 않았고, 그렇게 나폴레옹과 상병 및 그 동료들은 고된 하루 끝에 든든한 저녁을 함께 즐겼다고 합니다.  





(보통 시저스 샐러드에 딸려 나오는 사각형 튀긴 빵조각을 크루통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원래 croûton이라는 단어의 뜻은 긴 빵의 껍질이 많은 양쪽 끝부분 또는 굳은 빵조각을 뜻하는 것입니다.) 




Source : Napoleon Conquers Austria: The 1809 Campaign for Vienna By James R. Arnold

Les cahiers du capitaine Coignet by Jean-Roch Coignet

Les Miserables by Victor Hugo

https://en.wikipedia.org/wiki/Acquacotta

https://en.wikipedia.org/wiki/Riboll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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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암 2017.10.29 18: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 님의 글을 처음 접한 계기가 장발장이 감옥에 갈만 했네란 글 때문이었죠^^
    군사와 음식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글에 감탄하며 하트 날립니다~

  2. 뱀장수 2017.10.29 23: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역시 주말엔 음식얘기가 머릿속에 잘 들어오네요^^

  3. Seek 2017.10.30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들게 일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일용할 양식을 위한것이라고 생각하면 이런음식 이야기가 가볍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4. 유애경 2017.10.30 14: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뜬금없는 얘기지만,보기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데 돈까스나 빵스프나 뭔가 비쥬얼이 별로네요(죄송&웃음)!

  5. 까까님 2017.10.31 07: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로 치면 밥짓고 나오는 누룽지를 끓여먹는 정도에 해당되겠군요
    근데 주교님 상차림이. . . 저건 요리가 아니라 그냥 모아 담은 거 아닌가요?
    '무화과랑 치즈로 어떻게 양념해서 만든 양고기 요리' 가 아니라 그냥 각각을 늘어놓은 건데
    비교하자면 불고기를 해먹는 게 아니라 그냥 간장 발라 구운 고기 옆에 양파 당근 등등 채소를 늘어놓고 다진 마늘 같은 거 발라서 먹는 식이잖습니까
    같은 재료로 왜 저렇게 먹는지 궁금하더라구요
    고급진 분들은 또 달랐겠지만 양념이란 개념이 희박한 이유가 가끔 궁금하더라구요
    나시카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여쭙고싶습니다

    • nasica 2017.10.31 1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서양식 요리의 특성이 원래 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긴 합니다만,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관련 포스팅을 올려보겠습니다.

  6. 수비니우스 2017.10.31 1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의 나폴레옹 이야기는 진짜 쇼킹하네요. 우리나라는 해방과 함께 민주주의가 도입되고 70년이 지나서야 21세기에 힘든 시간 끝에 조금씩 정착되고 있는 문화가 19세기 초반 프랑스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니...

  7. ㅂㄷㄱ 2017.10.31 1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본적으로 그런 병사들과 피점령 시민들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병사들 손에 총이 들려 있는데 나쁘게 대할 리 없겠죠.

  8. 별의 여행 2017.11.17 15: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크루똥은 워낙에 오래된 빵을 썰어 말린 것 때에 따라서는 그걸 튀겨 낸 것이지요. 오래된 빵을 잘 활용하는 것 뿐 아니라 실제로도 쫄깃하거나 아삭하니 씹을 거리를 제공해 줘서 좋더라고요. 그리고 비너슈니첼은 실제로 한국돈가스보다 맛있습니다.
    튀김옷 반죽이 다르고요. 여기에 베리류잼을 살짝 묻혀 먹으면 아주 좋아요.

나폴레옹은 우익에서의 다부의 성공적인 진격을 보면서 '막도날의 기둥'만을 출격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막도날의 기둥이 웅장한 모습으로 적과 충돌한 뒤, 그 뒤를 이어 우디노와 외젠 등 다른 부대들도 일제히 전면 공세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루스바흐 고지 위에서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카알 대공의 심정은 처참 그 자체였습니다.  막도날의 기둥이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진을 들이받고 혼전을 벌이고 있던 오후 2시경, 카알 대공은 다부의 공격에 의해 무너지고 있던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수습하기 위해 호헨촐레른의 오스트리아군 제2 군단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전체 전선에 걸쳐 쇄도해오는 프랑스 그랑다르메의 모습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 마을 인근에 여유있게 집결해있는 꽤 큼직한 예비 병력들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자명했습니다.  카알 대공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클레나우의 제6 군단의 아스페른-에슬링 공격이 실패했거나, 최소한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었지요.  클레나우의 공격이 성공했다면 지금 나폴레옹 사령부에 저렇게 많은 예비대가 남아 있을 턱이 없었으니까요.  


그에 비해 오스트리아군에게는 더 이상 예비대가 없었으므로 해볼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패배가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카알 대공이 후퇴 명령을 내리지 않고 버텼던 것은 아직 한가지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동생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이었습니다.  


실제로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던 오후 4시 30분 경, 요한 대공의 전위대를 구성하는 일단의 기병대가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바로 동쪽인 운터지벤브룬(Untersiebenbrunn)에 나타났습니다.  이들의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인마가 일으키는 먼지와 총포의 화약 연기로 인해 사방이 뿌옇게 흐려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 보이는 마르히펠트 평원에는 프랑스군이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모두가 두려워하던 요한의 군대가 도착한 것을 목격하고 대경실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라스도르프의 나폴레옹의 사령부도 난데 없이 동쪽 평원에서 벌어지는 소란 소리에 발칵 뒤집혔습니다.  젊은 참모 장교들은 물론이고 나폴레옹 본인까지도 임시 사령부 밖으로 튀어나와 망원경을 들고 요한 대공의 병력을 포착하기 위해 두리번거렸습니다.  다 잡은 줄 알았던 이번 전투의 승리가 요한 대공의 도래로 인해 막판에 패배로 둔갑하는 것이었을까요 ?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아실 겁니다.  전투 막판의 이 소동에는 꽤 긴 스토리가 있습니다. 





(요한 대공이 주둔하고 있던 브라티슬라바는 윗 그림 속에서 보시는 것과 같이, 1741년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사가 즉위식을 올린 유서깊은 도시입니다.  저 그림 속의 성은 브라티슬라바 성, 독일어로 Pressburger Schloss라는 곳인데, 아래 사진처럼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건물입니다.)




(브라티슬라바 성의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1809년, 요한 대공의 뒤를 추격한 외젠의 군대가 결국 이 성에 포격을 가하는 등 이 성은 프랑스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1811년, 이 성에서 부주의로 인한 화재 사고가 나는 바람에 이 성은 폐허가 되었지요.  지금의 이 모습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건한 것입니다.)




전투가 벌어지기 하루 전인 7월 4일 아침 7시경, 드디어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고 확신한 카알 대공은 서둘러 브라티슬라바(슬로바키아의 수도인 Bratislava, 독일어로는 프레스부르크 Pressburg)에 주둔하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 오스트리아 내부군을 이끌고 서둘러 마르헤크(Marchegg)로 달려올 것을 지시했습니다.  특히 그는 상황이 급하므로 무거운 짐마차 등은 다 버려두고 최소한의 군장으로 강행군을 하라고 지시했지요.  마르헤크는 바그람으로부터 동쪽으로 대략 7시간 정도의 행군거리에 있는 마을이었고, 바그람으로부터 브라티슬라바는 사람이 (쉬지 않고) 걸어서 가도 10시간 정도면 닿는 거리였습니다.  카알 대공은 그 정도면 충분히 일찍 전령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특별히 전령으로 제4 군단장 로젠베르크의 아들을 골라 보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입니다.  




(요한 대공이 있던 브라티슬라바부터 도이치-바그람까지의 거리는 현대적 도로를 따라 걸을 때 약 10시간 거리입니다.  물론 이건 전혀 쉬지 않고 빈 몸으로 가볍게 걸을 때의 이야기지요.)




그러나 전쟁에서는 별의별 희한한 일이 다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나폴레옹이 도나우 강을 넘던 7월 4일 밤 엄청난 폭풍우가 쏟아졌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프랑스군은 그런 악천후에 대해 '잘 됐다 ! 오스트리아군이 모르는 사이에 건널 수 있게 되었다 !'라며 재빨리 수만 명이 불안한 부교를 건넜지요.  그러나 로젠베르크의 아들은 같은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날 저녁 무렵엔 도착할 것으로 기대했던 그 소환 명령은 카알 대공이 전령을 보낸지 무려 23시간 후인 7월 5일 아침 6시, 이미 나폴레옹의 대군이 마르히펠트 평원에 전개한 다음에야 요한 대공의 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문제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에 흠뻑 젖은 초라한 몰골로 나타난 로젠베르크의 아들이 자신의 늦은 명령서 전달로 인해 초조해하는 것과는 딴판으로, 요한 대공은 그 급보를 받아들고도 반응이 무척이나 심드렁했습니다.  그가 보인 첫번째 반응은 '아니 뭐야, 뭐 브라티슬라바를 견제하고 있는 이탈리아 방면군 잔존부대를 공격하라더니...'라는 불평이었습니다.  실제로 카알 대공은 바로 전에 전달한 명령서에서 가만히 있지 말고 외젠이 남겨두고 떠난 이탈리아 방면군 잔존부대, 즉 엔가라우(Engerau)에 주둔한 세베롤리(Severoli) 장군을 공격하라고 지시한 바 있었고, 요한 대공은 지엄하신 형님의 명령을 집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코 앞에 위치한 적을 습격하는 것과 먼 지역으로 행군하는 것은 분명히 준비할 것이 다르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준비 변경이 하루 종일 걸릴 일은 분명히 아닐 것 같은데, 요한 대공의 부대가 드디어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진영 밖으로 걸어나간 것은 무려 19시간 후인 7월 6일 새벽 1시경이었습니다.  이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의 느린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 대공에게는 다 설명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세베롤리 장군을 공격하기 위해 도나우 강 여기저기에 배치시켜 놓았던 부대를 다시 다 불러들이고, 밤새 공격 대기를 기다리며 야전에서 대기한 병사들에게 행군용 배낭을 챙기게 하고, 긴 행군에 대비하여 병사들을 먹이고 하는 일에는 다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부대가 백주대로에 보무도 당당하게 마르헤크로 출정하면 자신과 대치하고 있던 세베롤리가 그걸 목격하고는 재빨리 나폴레옹에게 전령을 보내 '요한이 움직이니 대비하십쇼'라고 알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  그래서 그는 칠흑같은 어둠이 찾아든 새벽 1시까지 기다렸다가 살금살금 행군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긴 그 덕분에, 나폴레옹은 감시를 붙여놓았다고 생각했던 요한 대공의 군대가 7월 6일 저녁 무렵 사전 통보도 없이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깜짝 놀라기는 했습니다.  


그렇게 출발이 늦었다고 해도,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무거운 짐도 다 놓아둔 채 결연한 의지로 야간 행군을 했다면 7월 6일 오후 12시 경에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에 도착하여 다부의 뒤통수를 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대공 옆에서 함께 말을 몰았던 로젠베르크의 아들이 보기에, 요한 대공의 부대는 빨리 행군하려는 의지도, 싸움에 도움이 되려는 각오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무 긴박감 없이, 그저 시키니까 움직인다는 식의 천하태평한 행군이었던 모양입니다.  왜 요한 대공이 이렇게까지 한심한 태도를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프랑스군이었다면 요한 대공은 군법회의에 회부감이었다는 것입니다. 





(브라티슬라바에서 마르헤크까지는 불과 4시간 반이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요한 대공의 군대는 무려 9시간 반이나 걸렸네요.)



결국 사방에서 몰려드는 프랑스군을 막아내느라 안간힘을 쓰며 초조하게 요한 대공의 군대를 기다리던 카알 대공에게, 오후 2시경 날아온 소식은 정말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10시 30분에 씌여진 요한 대공의 편지가 카알 대공의 손에 들어왔는데, 그 내용은 강행군을 한 끝에 명령대로 마르헤크에 도착했고, 지친 병사들을 좀 쉬게 한 뒤에 다시 오후 1시경에 행군을 다시 시작할테니 늦어도 오후 5시까지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에서 남동쪽으로 좀 떨어진 마을인 레오폴즈도르프(Leopoldsdorf)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후 5시라니 !  그것도 바그람도 아니고 레오폴즈도르프라니 !  새벽 1시에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이번엔 핑계를 댈 폭풍우도 없었으니 정상적으로 행군을 해도 아침 7시에는 마르헤크에 무리없이 도착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느릿느릿 도착한 뒤에도 쉬었다가 점심 먹고 오후 1시에 출발하겠다 ?  그래서 오후 5시에 도착할 것 같다 ?  오후 5시까지는 아직 3시간이나 남았는데, 그 시간이면 프랑스군이 저항하는 오스트리아군을 둘러싸고 몰살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희망이 없어진 카알 대공은 2시 30분경 결국 후퇴 명령서를 작성하여 각 군단장에게 뿌렸습니다.


각지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며 조금씩 밀려나던 오스트리아 군단장들에게는 이 후퇴 명령서가 꼭 가뭄 끝에 단비 같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전투에서 승리 다음으로 어려운 것이 달려드는 적군과 싸우면서 무너지지 않고 병력을 안전하게 후퇴시키는 것입니다.  후퇴로 인해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이 자칫하면 공포에 질려 진형을 깨고 무질서하게 패주해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럴 경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적의 기병대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기 쉽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카알 대공이 지난 3년간 개혁해놓은 오스트리아군은 확실히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대부분의 군단들이 그 어려운 것을 해낸 것입니다.  후퇴하는 오스트리아군 뒤에 바짝 붙은 프랑스군 보병과 기병, 포병들이 쉴 틈을 주지 않고 괴롭혔으나, 대부분의 부대는 포탄과 총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속에서도 끝내 대오를 유지한 채 질서정연하게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프랑스군 배후 깊숙이 침투했던 클레나우의 제6 군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히려 그 뒤를 추격하던 프랑스 기병대의 용감무쌍 광기병 라살(Antoine Charles Louis de Lasalle) 장군이 오스트리아 보병 방진을 공격하다 머스켓 총탄을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그대로 즉사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쓰러진 라살의 뒤를 이어 기병대를 지휘하던 마륄라즈(Marulaz)도 치열한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에 부딪혀 저녁 8시 경 그의 말이 죽고 자신도 부상을 입으면서 전장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로 오스트리아군은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광기병 라살 장군입니다.  그는 정말 무서운 줄 모르고 항상 기병대의 선두에서 말을 달렸는데, 종종 검이 아닌 긴 파이프 담배를 손에 쥐고 돌격을 지휘하곤 했답니다.  이 그림에서도 큼직한 파이프를 쥐고 있지요.  그런 라살도, 이번 전투에서는 뭔가 군인 특유의 직감이 있었나 봅니다.  로바우 섬에서 도강할 때, 주변 인물들에게 이번 전투에서 아무래도 죽을 것 같다고 두려움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양군이 혈투를 벌이며 전선은 조금씩 북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원래의 전장이던 마르히펠트와 루스바흐 언덕에는 전사자들의 시신, 신음하는 부상병들과 낙오병들, 그리고 그들을 약탈하려는, 또는 도우려는 종군 상인들 및 군인 가족 등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게 되었지요.  요한 대공의 선두 부대에 딸린 정찰 기병들이 현장에 나타난 것이 바로 그때, 즉 오후 4시 30분 경이었습니다.  서쪽에서 새로운 오스트리아군이 나타나자, 이제 전투는 사실상 끝났다고 생각했던 프랑스군 낙오병들과 가족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오스트리아 정찰병들의 눈에 들어온 대혼란은 바로 이 모습이었습니다.  


현장 상황이 한눈에 잘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찰병들은 저 멀리 북서쪽에서 들려오는 포성과 총성 소리를 통해, 이미 전선은 저 먼 쪽으로 밀려난 상황이고, 뜨거웠던 전투 현장에 프랑스군 낙오병들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종결된 것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대로 돌아가 요한 대공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요한 대공은 카알 대공과 연락도 할 수 없는 처지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쿨하게 그냥 마르헤크로 되돌아가버렸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되돌아가면서 요한 대공의 머리 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  조금 더 서두를 걸 하는 후회였을까요 ?  이제 패전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합스부르크 왕가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었을까요 ?  다 아니었습니다.  참모진들에게 투덜거린 요한 대공의 푸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카알 형님은 이 패배의 원인을 내게 뒤집어 씌우시겠구만."


이 소동에 놀란 것은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폴레옹 주변을 지키고 있던 근위대가 전투 태세를 취했고, 즉각 여러 장교들이 요한 대공의 정세를 탐지하러 말을 달렸습니다.  하지만 곧 튀렌느(Henri Amedee Mercure de Turrenne)라는 장교가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왔습니다.  요한 대공의 군대가 도착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폴레옹이 우려했던 것처럼 2~3만의 병력이 아니라 고작 1만 몇천의 수준이고, 그나마 마르헤크 쪽으로 후퇴 중이라는 것이 보고 내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굳이 그들을 추격하려들지 않았고, 그것으로 사실상 바그람 전투는 종결되었습니다.


다음에는 바그람 전투의 에필로그 편이 이어집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1809 Thunder On The Danube: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 by Jack Gill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s://en.wikipedia.org/wiki/Wagram_order_of_battl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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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웬리 2017.10.21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랑스군이 이기긴 했지만 일방적이라곤 할 수 없었군요.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2. jager 2017.10.21 23: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바그람 전투 이후 '갑'질을 하지 못한 이유는 전보다 오스트리아 군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직접 확인한 점도 있겠네요.

  3. 허어 2017.10.22 0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단탈주-무단교전-적의 군마약탈이라는 에피소드로 기억에 남았던 라살이 바그람에서 전사했군요.
    하도 인상깊었던터라 이런 사람이라면 전쟁통에서도 잘 살겠네 싶었었는데 역시 전쟁의 총탄은 어떤 사람도 피해갈 수 없나 봅니다.

    연재 언제나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4. 지크레이 2017.10.22 06: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시험 기간에도 읽게되는 힘이란 ㅎㅎ
    필력이 좋으세요!!

  5. Guillaumet 2017.10.22 1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읽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침공하면서 프랑스의 손실도 어마어마 하네요. 지휘관도 다수가 죽고

  6. 웃자웃어 2017.10.24 2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스트리아 군이 강해진 이유가 뭐죠? 훈련을 많이 시켜서 그런가?

  7. keiway 2017.10.25 09: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알면 알수록 국력이나 장군,병사들의 자질 등에서 프랑스가 월등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의 역량을 끌어내주는 사회라는건 이만한 힘을 갖고 있는 거겠죠. 나폴레옹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요.

  8. 만토이펠 2017.10.25 18: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있읍니다

  9. 순한개 2017.10.31 0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저는 나폴레옹 전쟁사보다 이렇게 먹는얘기가 더 좋습니다

  10. 넬슨 2018.02.19 1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한의 측면 기습이 또다시 거대한 변수를 만들줄 알았는데 실상은 허무하군요

  11. 전령자 2019.03.28 2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륵(강증산)을 기다리는 카페

    [ http://cafe.daum.net/MKingGood ]


    진(震)방에서 성인이 나온다- 갑을(甲乙)로써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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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증산(강증산)님의 일꾼(건달)을 받습니다

    ♣ 2018년 3월 25일부터 - 건달(일꾼) 미션을 진행합니다

    [ http://cafe.daum.net/MMMMM ]

    乾達(건달)이라는 뜻은 강증산 상제님을 만나는 사람을 뜻합니다

    乾達(건달)이란 하늘과 통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만나다)



    - 참조경전 -
    [ http://cafe.daum.net/MKingGood/dUGZ/37 ]

막도날의 제5 군단에는 원래 완편과는 거리가 먼 허약한 보병 2개 사단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라마르크(Jean Maximilien Lamarque) 장군이, 다른 하나는 브루지에(Jean-Baptiste Broussier) 장군이 지휘했지요.  거기에 나폴레옹이 붙여준 제6 군단 소속 모로 장군이 지휘하는 스라 장군의 사단까지 붙여서 총 1만1천 정도의 병력이 있었는데, 특히 모로 장군의 사단은 방금 지휘권을 받은 것이다보니 아무래도 모로와 그의 사단에 대해서는 믿음이 덜 가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로 장군과 긴밀하게 작전 회의를 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막도날에게는 정답이 적혀있는 문제 풀이집도 없었습니다만, 특히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갑자기 명령을 받은 그가 어떤 대형을 짜느냐에 따라 적진을 시원하게 돌파하여 등 뒤에서 망원경으로 보고 있을 나폴레옹의 입이 귓가에 걸리게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만, 반대로 자신을 포함한 전군이 몰살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잠깐 고민하던 막도날은 여태껏 그 누구도 해보지 않은 진형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적군은 물론 아군까지도 눈을 휘둥그레 커지게 만든 혼종이었습니다.




(그의 고향인 생-스베에 있는 라마르크 장군의 동상입니다.  그는 부르봉 왕정 복귀 이후에도 앙시앵-레짐을 반대하고 인권 보호, 심지어 폴란드 독립 운동 지원에도 찬성하는 등 정말 진보적인 인물이어서 민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1832년 6월 봉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요.  어디서 들어본 소리 같다고요 ?  예, 맞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이름만 등장하는 라마르크 장군이 바로 이 분입니다.)




막도날은 라마르크와 브루지에의 사단을 좌우로 어깨를 나란히 하여 앞에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모양이 매우 특이했습니다.   먼저, 각 사단마다 4개씩의 대대를 2줄로 늘어세워 총 8개 대대로 이루어진 긴 전면 횡대를 구성하도록 했습니다.  그 뒤를 따르는 잔여 대대들의 진형이 아주 걸작이었는데, 이 대대들은 이 긴 전면 횡대의 양쪽 끝부분 뒤로 긴 종대를 이루도록 했습니다.  즉, 거대한 ㄷ자 모양을 만들어 진격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나마 왼쪽을 맡은 라마르크의 사단에 병력이 더 많았으므로 왼쪽 측면에는 8개 대대가 늘어섰고, 오른쪽 측면에는 불과 4개 대대만 있어서, 좌우 대칭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나폴레옹 전쟁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진형인 '막도날의 기둥'(la colonne de Macdonald)입니다.  


막도날은 그렇게 밑변이 열린 사각형의 뒤를 왈더(Frédéric Henri Walther)가 지휘하는 근위 기병총(carabiniers-à-cheval) 연대에게 맡겼습니다.  이 중기병 연대는 막도날의 기둥이 오스트리아군 전선에 커다란 구멍을 뚫으면 그 속으로 파고 들어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오스트리아군의 뒤를 쫓으며 무자비한 칼탕을 먹여줄 임무를 띠고 있었습니다.  모로의 보병 사단은 돌파가 제대로 안 될 경우 예비대로 쓰기 위해 이 ㄷ자 진형에 포함시키지 않고 따로 집단을 이룬채 뒤를 따르도록 했습니다.





(Column은 기둥이라기보다는 종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막도날의 기둥이라기보다는 막도날의 방진(Macdonald's square)라고 부르는 것이 제대로 된 묘사일 것입니다.)




막도날이 이런 희한한 진형을 만든 목적은 간단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포병과 기병의 위협으로부터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가장 빨리 거친 전장을 가로질러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 바로 이런 ㄷ자 진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면이 약 550m, 측면이 약 800m로 길쭉한 이 장방형 진형은 횡대의 장점과 종대의 장점을 가장 잘 결합한 물건이었습니다.  단 하나의 단점이라면 그 크기가 몹시 커서 적의 포병에게 빗맛추기도 어려운 타겟을 제공한다는 점이었습니다만, 어차피 속이 텅 비어있었으므로 한방의 포탄에 여러명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나가 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또 측면을 노리는 적의 기병들의 돌격에 대해서도 촘촘한 방어망으로 맞설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지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장점은 그냥 좌우로 긴 횡대보다 훨씬 더 탄탄한 진형을 유지하면서도 훨씬 더 빨리 진격할 수 있다는 점이었지요.  이건 적의 기병에 맞서기 위한 보병 방진의 모바일 버전이라고 칭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방진과의 차이점이라고 하면, 굳이 방진의 밑변에 보병 전열을 배치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공격을 위한 대오였으므로 후면에도 긴 보병 전열을 배치하는 것은 낭비였고, 또 후면을 노리는 적의 기병은 그 뒤를 따르는 아군 기병대가 요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혹자는 막도날이 이런 변종 방진, 횡대와 종대의 끔찍한 혼종으로 전진한 것이 과거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때와는 달리 질적으로 저하된 프랑스 보병들이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해 전장에서 복잡한 전열 기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택한 꼼수였다고 평가절하합니다만, '1809: Thunder on the Danube -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라는 책을 쓴 Jack Gill이라는 National Defense University 교수님의 평가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판에 박힌 전술만을 고집하지 않고 당면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전술을 채택할 수 있고 또 그런 임기응변을 유연하게 수행해낼 수 있었던 막도날과 그의 이탈리아 방면군은 매우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막도날이 지휘하던 이탈리아 방면군 병사들이 과거 아우스테를리츠의 프라첸 언덕을 기어오르던 병사들만큼 잘 훈련된 병사들이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막도날이 목표했던 것은 대부분 이루어냈습니다.  그런 사실은 오스트리아군의 대포알이 날아오기 시작하자 곧 드러났습니다.


이 거대한 방진이 오스트리아군 제3 군단과 1군단 사이의 연결부를 향해 진격을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스트리아군의 대포가 불을 뿜었고,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바람처럼 달려나와 이 방진의 측면을 노렸습니다.  대포알에는 아무도 견딜 수 없습니다.  막도날의 방진은 곧 이빠진 참빗처럼 여기저기 구멍이 뻥뻥 뚫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병사 1~2명이 대포알에 직격되어 나가 떨어지면서 생긴 그런 구멍은 곧 뒤따르던 병사들이 걸음을 빨리 하여 곧 메워졌습니다.  시퍼런 검을 뽑아들고 측면으로 달려들던 오스트리아 기병들도 기세만 좋았을 뿐이었습니다.  침착하게 기다리다 확실한 유효사거리 내로 들어오자마자 일제 사격을 퍼붓는 막도날의 병사들은 기병들이 파고들 빈틈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척척 걸어들어가는 막도날의 방진은 분명히 납으로 만든 머스켓볼과 무쇠로 만든 대포알이 회오리치는 무시무시한 화약 연기 속으로 진격하는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오스트리아군은 루스바흐 고원이라는 결정적인 지리적 우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막도날이 희한한 ㄷ자로 병력을 배치하며 진격할 준비를 하는 것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포에 포탄을 쟁여두고 기다렸습니다.  특히 전체 전선에서 오직 막도날의 부대만 망치 역할을 하기 위해 다른 프랑스군 전선 앞으로 유별나게 튀어나오는 것이니, 그쪽으로 오스트리아군의 화력이 집중되었습니다.  막도날의 병사들은 끝까지 침착하게 진격했지만 그들이 큰 피해를 피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특히 막도날 부대의 임무를 눈치챈 콜로브라트 장군이 자신의 좌익 전선을 살짝 뒤로 빼서 오스트리아 제3 군단과 제1군단 사이에 텅 빈 공간을 일부러 만들어주면서 막도날드 군단의 피해가 더욱 커졌습니다.  그 빈 공간으로 밀고들어가자마자 양 측면을 에워싼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불벼락같은 십자 사격이 날아와 좁은 공간에 갇힌 막도날의 병사들을 쓰러뜨렸던 것입니다.  제84 연대의 라코르드(Larcorde) 중위라는 사람이 남긴 기록에는 "우리가 줄지어 선 곳, 특히 방진을 구성한 곳에서는 우리 병사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 씌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도날의 병사들은 버텨냈습니다.  동료들이 포탄과 탄환에 쓰러질 때마다 남은 병사들이 그 빈자리를 서둘러 메웠고, 기진맥진한 이 방진을 깨뜨리려는 오스트리아 기병들의 돌격을 침착한 일제 사격으로 좌절시켰습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이제 적과 머스켓 사격을 주고받을 거리까지 왔으니 막도날의 변형 방진의 임무는 끝난 것인데, 오스트리아군도 끝까지 돌파되지 않고 버텼습니다.  오히려 막도날의 방진은 3면이 포위된 상태로 그야말로 불과 납의 세례를 받고 있었지요.  이런 와중에 당연히 오스트리아군에게도 혼란과 빈틈이 생겼습니다.  가령 이렇게 3면이 포위되기 직전, 막도날의 눈에는 우측 오스트리아 제1 군단 전열에 25~30문의 대포가 버려진 채 방치된 것이 보였고, 왼쪽 제3 군단 쪽도 엉망진창의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막도날의 방진이 끔찍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전진했던 것이었고, 이제 기병대들이 그 벌어진 틈으로 칼을 꼬나쥐고 달려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도끼가 적진을 쪼개다가... 박힌 채로 그만 멈춰버린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때 프랑스군의 기병들은 희한할 정도로 굼뜨고 소극적이었습니다.  막도날이 만들어놓은 오스트리아 전열의 빈틈은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순간적인 것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프랑스 기병대는 돌격하지 않고 머뭇거리다 기회를 날려먹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건 급작스럽게 결정된 공격의 본질적인 문제였습니다.  막도날의 진격이 시작될 때, 그 후방을 따라오는 기병대는 왈더 장군이 이끄는 기병총 연대 일부 뿐이었고, 낭수티 장군 휘하 기병 예비대 및 기타 타 군단 소속의 기병대들은 ;막도날이 공격을 시작하니 그 뒤를 지원하라'는 긴급 명령서를 받고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막도날의 기묘한 ㄷ자 전열이 서서히 진격을 시작하고 그 뒤로 여기저기 사방에서 프랑스군 기병대가 뒤늦게 모여드는 모습은 아마 루스바흐 언덕 위의 오스트리아군 눈에 꽤 장관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급하게 띄엄띄엄 모여든 기병대들은 빽빽히 늘어서서 멱살을 쥐고 뒹굴고 있는 막도날과 오스트리아군의 전투 현장에 선뜻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때 이렇게 모여든 여러 기병대의 주도권을 쥐고 본보기를 보이는 역할은 근위 기병총 연대를 이끌고 처음부터 뒤를 따랐던 왈더 장군이 맡아야 했습니다.  막도날도 나중에 왈더 장군을 콕 찍어 '왜 돌격하지 않았느냐'라며 비난했으나, 왈더는 막도날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면서도 '제가 공격하려면 반드시 베시에르 원수의 명령이 있거나 황제 폐하께서 직접 명을 받아야 합니다'라며 어이없는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당시 베시에르는 기절한 상태로 실려나간 뒤였지요.  애초에 그런 제약 조건이 있다면 왜 막도날의 방진 뒤를 졸졸 따라왔단 말입니까 ?  




(이름만 보면 발터라고 읽어야 할 것 같은 이 분은 역시 알자스 출신입니다만, 그래도 프랑스 분이기 때문에 왈더라고 읽어야 합니다.  이 분은 계속 나폴레옹 근위대에 계시다가, 1813년 무너져 내리는 제국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중 티푸스에 감염되어 사망합니다.) 




결국 막도날과 그의 병사들이 보여준 이 장관은 뜻하는 목표, 즉 오스트리아 전열 돌파 후 추격 섬멸에는 실패한 채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된 비난은 기병대에 떨어졌습니다.  사바리(Savary) 장군은 '그토록 막강한 기병대는 단 하나의 포로도 잡지 못했다'라고 한탄했고, 나폴레옹 본인도 오후 2시경 망원경으로 이 상황을 보면서 '기병대가 나를 이렇게 실망시킨 적이 없었는데 ! 저것들 때문에 오늘 아무 전과가 없을 지경인 걸 !'이라고 격분했습니다.  


물론 이건 과장이자, 모든 잘못을 부하들 탓으로 돌리는 나폴레옹의 못된 버릇일 뿐이었습니다.  정작 나폴레옹 본인도 신참 근위대를 지휘하는 라이유(Honoré Charles Reille) 장군에게 막도날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릴 때, '이제 남은 것이 고참 근위대 2개 연대 뿐이니 너무 위험을 무릅쓰지는 말게'라며 소극적인 지시를 내린 바 있었습니다.  사실 다부의 우측 공격으로 인해 승패는 이미 결정난 것이었으니, 어쩌면 막도날의 방진은 많은 포로를 잡겠다는 나폴레옹의 과욕에서 나온 쓸데없는 희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나기 전엔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지요.  아직 오스트리아 측에는 판세를 뒤집을 비장의 카드 하나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카드로 인해 불과 2~3시간 뒤에 나폴레옹의 참모진 전체가 발칵 뒤집히게 됩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1809 Thunder On The Danube: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 by Jack Gill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s://en.wikipedia.org/wiki/Wagram_order_of_battl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s://en.wikipedia.org/wiki/Fr%C3%A9d%C3%A9ric_Henri_Walther

https://en.wikipedia.org/wiki/Jean_Maximilien_Lamar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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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와1등 2017.10.06 12: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날도 오네요!!

  2. 수비니우스 2017.10.06 14: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헉 예상치 못한 추석선물 :D

  3. 지크레이 2017.10.06 15: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____^

  4. Guillaumet 2017.10.07 0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여기 나오는 모로장군이 미국으로 망명갔던 모로인가요?

  5. 카를대공 2017.10.07 10: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바그람 전투편은 물고 물리는 반격이 장난 아니군요.

    그만큼 프랑스에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고 오스트리아군이 성장 했으며,
    명장인 카를 대공의 역량도 대단했단 뜻이겠죠.

    • nasica 2017.10.07 12: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저는 나폴레옹이 고전한 아스페른-에슬링이나 바그람 전투에서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유럽 각국의 전력 상향 평준화라고 봅니다.

  6. 쿠투조프 2017.10.07 2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연휴동안 BBC에서 방영했던 전쟁과평화를 정주행 했는데 나시카님의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를 참고하며 보니 재밌더군요. 러시아원정 얘기도 정말 기대됩니다. 아직 1809년이니 쫌 걸리겠지만요ㅎㅎ. 항상 연재 감사합니다^^

  7. ㅇㅇ 2019.09.18 18: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이거 재있네요 너무 잘보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투 내내 전장 한가운데 위치인 라스도르프(Raasdorf)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위치한 마르히펠트 평원보다 높은 곳인 루스바흐 고원 위에 있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에서의 전황을 양군의 전열이 뿜어내는 머스켓 소총의 화약 연기를 보며 파악하고 있었지요.  그 연기의 긴 횡대가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의 높은 석탑을 통과하는 보고, 그는 이제 승리의 때가 왔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다부를 돕기 위해 일제히 전체 전선에 걸쳐 총공격을 명했습니다.  마세나는 남쪽 에슬링에서 클레나우를, 우디노는 고원 위의 호헨촐레른을 공격하면 되었지요.  그리고 막도날에게는 특별히 따로 명령서를 보냈습니다.




(바그람 전투 현장을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나폴레옹입니다.  무전기가 없던 당시 전투는 현장 지휘관의 재량권이 매우 큰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장군들이 적탄이 빗발치는 곳까지 직접 나가 현장을 지켜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원래 막도날은 전날 밤에 공격했던 바그람을 공격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바그람 마을에 대한 공격은 외젠이 그르니에(Paul Grenier) 장군의 제6 군단을 이끌고 공격하도록 하고, 막도날에게는 새로운 임무를 주었습니다.  아더클라(Aderklaa)와 브라이텐리(Breitenlee) 사이 공간, 즉 서쪽 방향으로의 진격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무단 이탈에 이어, 마세나를 아스페른 쪽으로 이동시키는 바람에 텅 비게 된 이 공간을, 나폴레옹은 일단 대포병단을 동원하여 무지막지한 화력으로 틀어막아 놓은 바 있었지요.  그러나 포병만으로 적진에 돌격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포병 화력전으로 대혼란에 빠진 오스트리아군의 중앙부에도 쐐기를 박아넣을 묵직한 한방이 필요했는데, 거기에 막도날을 투입하기로 한 것입니다.  막도날에게 이 임무가 맡겨진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마세나가 에슬링 쪽으로 이동하고나자, 아더클라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군단이 바로 막도날의 제5 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날 밤에 막도날이 공격했던 바그람을 지키던 부대가 바로 지금 아더클라를 점거한 벨가르드 장군의  제1 군단의 일부였으니, 어제 못 끝낸 승부를 마저 끝내는 주인공이 막도날인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르니에 장군입니다.  하급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사병으로 군에 입대했던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도 프랑스 대혁명이었지요.  그는 막도날보다 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결국 원수 계급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과 만나기 전에 모로의 휘하에서 주로 싸웠고 호헨린덴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나폴레옹파로 분류되지 못했던 것이 원수로 진급을 못한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다만,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전날 밤에는 거기 없던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군 제3 군단이 브라이텐리를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막도날이 지휘하는 제5 군단은 바그람 전투가 시작될 때 고작 7천의 병력을 가진 사실상 사단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워낙 빈약했기 때문에 전날 밤 바그람을 공격할 때도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으로부터 뒤파의 사단을 빌려 병력을 충원한 다음에야 공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뒤파 사단도 원대 복귀한 마당에 막도날의 병력만으로 2개 군단이 포진한 적 진형 한 가운데로 뛰어들라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었지요.  그걸 이해했던 나폴레옹은 같은 이탈리아 방면군 소속 그르니에 장군의 제6 군단 휘하 2개 사단 중 스라(Seras) 사단을 떼어 막도날에게 임시로 붙여주었습니다.  그나마 스라 장군 자신은 부상 중이어서 모로(Moreau) 장군이 대신 지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봐야 막도날이 지휘할 병력은 보병 1만1천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이 막도날에게 진격을 명한 것은 승산이 있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공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알단, 이 공격은 적의 집단군 정면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기보다는 벨가르드와 콜로브라트의 2개 오스트리아 군단의 이음새를 공략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포병단과 다부의 활약으로 적 진영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그 약한 이음새를 공략하면 오스트리아군 전선에 구명을 뚫을 수 있고, 그렇게 뚫린 구멍으로 프랑스 기병대가 우르르 쏟아져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요.  실제로, 비록 막도날의 지휘권 밑에 직접 붙여주지는 않았으나, 나폴레옹이 아끼고 아끼던 황실 근위대의 기병총(carabiniers-à-cheval) 연대 약 3800기를 딸려보냈습니다.  이 기병총 연대는 흉갑기병보다 더 덩치 큰 병사들을 더 키 큰 말에 골라태운, 최정예 기병대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번 전투의 승부는 다부의 라이트 훅으로 결판짓되, 적의 숨통을 끊는 타격, 즉 패퇴하는 적군을 추격 섬멸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 끝장을 보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어떤 기록에는 막도날의 병력 뒤를 따르던 부대가 기마 척탄병 연대라고 되어 있고, 어떤 기록에는 기병총 부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마 척탄병이라면 곰가죽 모자를 쓰고 있었을 것이고 기병총 부대라면 흉갑 기병과 크게 다른 모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위의 그림은 기병총 부대원의 모습인데, 사실 기병총을 주무기로 삼는 부대는 아니었습니다.  하긴, 척탄병도 수류탄을 휴대하지는 않았지요.)




그러나 기병총 연대가 지리멸렬 후퇴하는 오스트리아군의 등 뒤에 칼을 내리치기 위해서는 먼저 오스트리아군이 뒤돌아 도망치게 만들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군의 전선에 큰 구멍을 뚫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대하고 어려운 임무는 바로 막도날의 어깨 위에 떨어진 것이었고요.  막도날은 무척 흥분되고도 긴장되었을 것입니다.  모로와의 관계 때문에 지난 5년간 좌천당해 실의의 나날을 보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 중대한 임무가 자신의 몫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입신양명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으나 그 성공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훨씬 더 우세한 적을 향해 먼 거리를 진격해야 했는데, 그렇게 진격하는 동안 오스트리아군은 가지고 있는 모든 화력을 동원하여 막도날의 공격부대를 두들겨 팰 것이 뻔했습니다.  막도날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부족한 병력이 적과 총검을 맞댈 때까지 어떻게 하면 적군의 대포와 총격으로부터 입을 피해를 최소화하느냐였습니다.  이건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였고, 막도날에게는 기술적인 선택지가 여러개 있었는데, 정답이 무엇인지는 당시 아무도 몰랐습니다.


일반적으로 적진을 향해 공격할 때는 적절한 두께, 즉 3열 또는 4열의 긴 횡대(line)를 이루어 공격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정면으로부터 날아오는 적의 무자비한 대포알로부터 입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고, 또 반대로 한꺼번에 적에게 최대한의 머스켓 화력을 쏟아부어 반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공격과 방어 모두에 있어 가장 뛰어난 대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형으로 먼거리를 진격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개의 전장은 넓직한 평원에서 벌어졌지만, 그런 평원도 크고작은 나무와 바위, 도랑과 관목 등의 크고 작은 장애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런 장애물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제각각 걷는 속도가 다르다보니 긴 직선 횡대로 출발한다고 해도 걷다보면 결국 일부는 앞으로 튀어나오고 일부는 뒤로 쳐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먼거리를 그렇게 횡대로 진격하면 적 앞에 도착할 때 긴 횡대는 토막토막 끊긴 흐트러진 모습이 되곤 했습니다.  그래서는 밀집된 형태로 기다리는 적군에게 먹잇감이 되기 딱 좋았지요.  뛰어난 장교들과 부사관들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면 긴 횡대가 직선을 유지하며 진격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필연적으로 전체 횡대의 진격이 느려질 수 밖에 없었는데, 그건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적의 일방적인 사격을 뒤집어써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횡대의 이런 단점을 매우 잘 극복할 수 있는 대형이 있긴 했습니다.  바로 종대(column)였습니다.  대략 5~6열의 종대로 진격하면 거친 지형에도 불구하고 부대 전체가 한덩어리를 유지하면서도 비교적 빠른 속도로 진격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대신 횡대가 가지는 모든 장점을 깡그리 날려먹는 것이 바로 이 종대였습니다.  적의 대포알 단 한 발에도 수십명의 허리와 발목이 부러질 수 밖에 없었고, 어렵게 적의 코 앞에 당도한다고 해도 그 상태로는 적에게 사격할 수 있는 인원은 맨 앞줄의 2열 10~12명 정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야 빠른 속도로 이동함으로써 얻는 잇점을 다 날려 먹는 셈이었지요.  가장 좋은 것은 가변 대형이었습니다.  즉, 먼거리를 이동할 때는 종대로 이동하다가 머스켓 유효사거리에 근접해서는 대형을 횡대로 변경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이게 말은 쉬워도 적의 대포알과 탄환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화약연기가 자욱한 상태에서 대오를 바꾸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까딱하다간 적의 코 앞에서 우왕좌왕하다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떤 방식을 택해도 잇점과 단점이 명백한 상황에서, 과연 막도날의 선택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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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ㅇ 2017.10.01 09: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제가 1등인가요 ㅎ 기가막힌 부분에서 또 끊으셨네요 ㅎㅎ

  2. 구국군사위원회 2017.10.01 1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장 흥미로운 부분에서 다음회라 아쉽네요.

    추석 연휴인데 글도 올리시고 수고하시네요. 추석연휴 잘보네세요.


  3. 양웬리 2017.10.01 16: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석 선물 감사합니다.

    막도날의 선택은 추석 뒤에 확인하겠네요.

  4. 최홍락 2017.10.01 17: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절 연휴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5. ㅇㅇㅈ 2017.10.17 1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나폴레옹덕후라 이런글 너무 좋아하는데요.. 나폴레옹에시대에 대한 관심히 상당하신거 같은데( 특히 전투쪽으로....)나폴레옹 토탈워라는 게임도 하시는지 궁금하네요!

  6. 에스클린차 2018.05.01 17: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너무 감사합니다. 저도 나폴레옹 전쟁에 관심이 많아서 연구했었는데, 정말 생생하게 설명해주는 필력과 세세한 부분까지 기술하는 열정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 중간에 carabinier 기병대의 모습이 나왔는데 사실 바그람 전투 당시 카라비니어 기병대는 척탄기병대(Guard Cavalry)처럼 곰가죽 모자를 쓰고 있었고 흉갑을 입고 있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또 전체인원은 아니더라도 대부분 카빈과 머스킷을 휴대했는데 1809년 바그람 전투 때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나서부터 잘 알려진 금빛흉갑을 착용했고, 소수병력만 카빈.머스킷을 휴대한 검기병이었다고 합니다.

    또 바그람 전투 때 척탄기병대를 대신해 카라비니어 기병대가 나폴레옹을 호위했다고 하는 기록도 있어서 막도날을 따라갔던 기병대가 척탄기병대였는지 카라비니어 기병대였는지 의견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당시엔 두 기병대 모두 곰가죽 모자를 쓰고 있었으니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7. ㅇㅇ 2019.09.18 1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퍄 잘보고감니다

로리스통의 대규모 포병단이 오스트리아 제3 군단을 갈아엎는 동안, 마세나도 쉴 틈 없이 바빴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새벽에 저 남쪽 아스페른 쪽에서 힘들게 행군해 올라온 뒤, 베르나도트가 구멍을 낸 아더클라를 탈환하기 위해 혈투를 벌이고 있었지요.  그런데 불과 몇 시간 만에, 나폴레옹은 그에게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 그 쪽으로 침투해온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 제6 군단을 쫓아내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이때가 대략 오전 11시 경이었습니다.


당시 병사들에게 이렇게 의미를 알 수 없는 행군과 애써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역행군이 흔한 일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더 험난한 행군길이 예약되어 있었습니다.  걸아가야 하는 길이 무려 8km 정도로서 정상적인 행군으로는 거의 2시간 거리였는데, 문제는 그 길이 정상적인 행군이 불가능한 환경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낭수티의 기병대가 목숨을 던져가며 벌어들인 시간을 쓰는 것이니 만큼, 신속한 행군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신속하게 행군을 하려면 보병 방진을 짜고 행군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고, 어쩔 수 없이 느슨하고 긴 종대로 행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긴 행군 길의 오른쪽 측면, 즉 서쪽 측면에는 오스트리아군이 득실거렸습니다.  프랑스군에게는 다행히도 콜로브라트가 지휘하는 이 오스트리아군은 무척 소극적인 태도이긴 했지만, 그들의 포병대와 기병대가 그의 취약한 종대 행렬을 2시간 내내 두들길 것이 뻔했습니다.


마세나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남쪽 아스페른으로의 행군을 명령받자, 그 명령의 어려움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 인근으로 몰려온 도망병들을 포함한 자신의 군단병들에게 먼저 화끈하게 브랜디(brandy)부터 쫙 돌렸습니다.  그는 니스의 채소가게 아들 출신답게 노동자-농민 출신의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데는 번지르르한 연설보다는 술이 최고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목구멍이 화끈해진 병사들을 이끌고 아스페른을 향한 위험한 행군길을 떠났습니다.





(프랑스의 전성시대(?)였다는 박통 루이14세 치하에서 채소가게 아들 마세나가 사회 탓을 하지 않고 정말 뼈를 깎는 노오오오력을 했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  아마 대대 행보관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사회가 바뀐다고 모든 개인이 잘 살게 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개인의 노오오력만으로는 이룰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세나는 며칠 전에 낙마 사고를 겪는 바람에 발을 다쳐 원래 전장에 나설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감하게도 '마차를 타고 진격하면 된다'라며 눈처럼 새하얀 2인승 무개마차를 타고 전장에 나섰고, 나폴레옹은 그런 그를 칭찬하며 '자네 옆에 탄 마부가 프랑스군 내에서 가장 용감한 병사'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당시 오스트리아군은 눈 앞에 줄지어 행군해 내려가는 프랑스군의 대오 중에서 눈에 확 띄는 새하얀 2인승 마차에 탄 사람이 유명한 마세나라는 것을 몰랐나 봅니다.  그의 흰색 마차를 향해서 오스트리아군의 대포알이 집중적으로 날아왔다는 기록은 없거든요.  그러나 탁 트인 벌판에서 측면이 훤히 노출된 이 긴 종대에 대해, 오스트리아군은 예상대로 띄엄띄엄 연습하듯이 포격을 가해 프랑스군 병사들을 한두명씩 피떡으로 만들며 쓰러뜨렸습니다.  마세나의 흰색 마차는 아주 공평하게 병사들과 똑같이 적의 포탄에 노출된 채로, 측면에서 날아오는 포탄이 나 말고 내 옆 친구를 쓰러뜨리기를 속으로 기도하며 천천히 행군했습니다.


일렬 종대로 행군 중인 보병은 사실 포병보다는 기병들의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 제3 군단과 행동을 같이 하던 리히텐슈타인 대공의 기병대는 호시탐탐 이들의 측면을 따라오다 기회다 싶은 순간이 오면 바람처럼 달려들어 아장아장 걷는 프랑스 보병들에게 칼탕을 선물하고는 다시 우르르 물러서곤 했습니다.   그렇게 프랑스군을 괴롭히던 오스트리아군 소속 헝가리 기병대에 호기심 많은 지휘관이 있었는지, 한번은 그런 헝가리 기병대의 공격이 마세나의 흰색 마차를 향해 돌진해왔고 거의 마차에 닿을 거리까지 접근했다고 합니다.  화들짝 놀란 마세나의 부관들이 군도를 뽑아들었는데, 다행히 측면을 스크린하는 역할을 하던 프랑스 기병대가 제때 앞을 가로 막아 요격해주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도 마세나의 행군길이 오스트리아군 기병대 때문에 무척 험난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생-술피스(St. Sulpice) 장군의 흉갑기병대를 추가로 붙여줘 측면을 보호하도록 했거든요.


브랜디와 프랑스 기병대의 보호에 힘입어, 마세나의 제4 군단 병사들은 1시간 반만에 아스페른-에슬링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마세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스페른은 물론 에슬링에서도 밀려나 힘겹게 고전 중인 부데(Boudet) 장군의 사단이었습니다.  다행히도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 제 6군단은 에슬링을 점거한 이후 그냥 로바우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에 포격을 가하는 등의 소극적 공격 외에는 별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클레나우가 이렇게 소극적으로 주저주저하는 것에도 다 사정이 있고 이유가 있었습니다.  양측이 각각 십만 단위로 포진한 이런 거대한 장기판에서 자기들처럼 불과 1만5천 정도되는 작은 군단 하나만 너무 적진 깊숙히 들어와 버리고 나니 클레나우로서는 불안해지는 것이 당연했던 것입니다.  





(클레나우 장군입니다.  이 분은 1795년 프랑스 혁명군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대령으로 승진한 이후, 불과 4년만인 1799년 역시 전공에 의해 합스부르크 육군 역대 최연소 중장으로 승진할 정도로 나름 실력파였으며, 바그람 전투 당시 51세였습니다.)




카알 대공도 클레나우에게 측면 돌파를 명했을 뿐, 이렇게 성공적인 돌파가 되리라 예상은 하지 못해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라고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이건 무전 통신이나 항공 정찰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전장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전투 상황에서, 전날 밤 작성되는 작전 명령서에 '몇 시에 출발해서 몇 시까지 어디까지 돌파한 뒤, 몇 시에 어느 위치에 있을 프랑스 XX 군단을 격파하라'는 식으로 세부적인 지시를 적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현장 지휘관의 융통성과 자율성이 중시되는 것이 당시의 전장이었는데, 그런 점에서 귀족 위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군 지휘부는 역시 실력으로 승진한 프랑스군 지휘부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보헤미아 귀족 출신이었던 클레나우는 합스부르크 왕가 역사상 최연소 중장으로 승진할 만큼 나름 뛰어난 인재였으나, 그건 합스부르크 왕가에 충성하는 귀족들 중에서 그렇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출신 신분이나 학력에 상관없이 오로지 전과와 실력만으로 장교를 선발하고 승진시키다보니 마세나처럼 채소가게 아들 출신도 원수가 될 수 있는 프랑스군 앞에서, 오스트리아군 지휘부의 한계는 뚜렷했습니다.


포탄이나 기병 군도에 얻어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세나의 지휘 하에, 프랑스군은 신속하게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을 쫓아냈습니다.  사실 마세나의 병력이나 클레나우의 병력이나 수적 우위가 크게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비슷했고, 오히려 장시간 행군에 지친 것은 프랑스군 측이었을텐데도 오스트리아군의 후퇴는 마치 '내 이럴 줄 알고 후퇴 준비를 다 해놓았지롱~'하는 식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불과 2시간 정도만에 마세나는 에슬링에 이어 아스페른까지 탈환하고 클레나우를 서쪽 저 멀리 쫓아보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전투가 종료된 이후, 클레나우는 보고서에 자기 쪽으로 지옥처럼 무시무시한 종대(la colonne infernale)가 접근하는 것을 보았기에 후퇴했다고 적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세나에 의해 프랑스군 좌익에서의 위기가 정리되는 동안, 정반대쪽 프랑스군 우익에서는 다부의 환상적인 무브먼트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en.wikipedia.org/wiki/Johann_von_Klenau

https://en.wikipedia.org/wiki/Andr%C3%A9_Mass%C3%A9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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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9.04 12: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재미난글 감사합니다. 선댓글 후감상...

  2. keiway 2017.09.04 13: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전히 잘 보고 있습니다.
    시대사 음식사도 참 좋지만
    그래도 역시 전투 부분이 제일 즐겁네요.
    한주도 안쉬고 꾸준히 쓰시는 수고에
    응원을 보냅니다.

  3. 석공 2017.09.04 2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기 뒤에 기회라고~~ 좌익의 위기를 꾸역꾸역 막아내니 이제 나폴레옹의 라이트훅 다부의 차례군요...^^ 늘 좋은 글 감사합니다.^^

  4. 오리오리 2017.09.05 2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짐승 다부가 어떤 무브먼트를 ㄷㄷㄷ

  5. 카를대공 2017.09.06 15: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가장 중요한 순간엔 항상 다부가 있군요.

  6. bluewing 2017.09.07 1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장에서 기회를 눈앞에 보면서도 우물쭈물한 모습을 보니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군하고 비교도네요.
    이거다 싶으니까 그냥 중앙에서의 지시 기다리지
    않고 부아악 달려버린... 어어어 하는 사이에 거대한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에 손아귀에 떨어졌죠.

  7. 에어메딕 2017.10.01 16: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질맛 나서 몇주 참다가 오랜만에 들어와서 정주행 중입니다. 소설을 방불케 하는 재밌는 글 덕에 즐거운 연휴 보내네요. 메리추석되시길! 감사합니다.

  8. 넬슨 2018.02.19 15: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부와 장 란 가장 마음에 드는 원수들

기세 좋게 달려들어간 낭수티의 제1 중기병사단이 첫번째로 맞이한 난관은 그 지대가 너무 평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병이 달리는데는 평평한 것이 좋지 않냐고요 ?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완만하게 오르내림이 있는 평원이 기병 돌격에는 더 좋았습니다.  여기 아더클라 앞마당처럼 너무 평평하면 저 멀리서 달려오는 기병대가 그대로 적의 시선과 대포에 노출되면 기병대에게 불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낭수티의 기병들이 번쩍이는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동안, 오스트리아 보병들은 침착하게 방진(square)을 구성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기병에 대항하여 보병 방진을 구성한 오스트리아군의 모습입니다.   1788년의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 때의 모습입니다.  머스켓 소총과 함께 총검이 개발되고 대포의 기동성이 향상되면서부터는, 기병은 어디까지나 보조적 위치로 전락하게 됩니다.  아마 징기스칸의 몽골기병들이 와도 이젠 보병을 당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기병으로는 보병 방진을 '절대' 깰 수 없다는 것이 상식 중의 상식이었습니다.  계산 방법은 이렇습니다.  돌격하는 기병들은 좌우로 최소 약 1.2미터의 폭이 필요했습니다.  그에 비해 방진의 보병들은 60cm의 폭만 있으면 되었고, 또 방진의 보병들은 대개 4열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즉, 한자루의 기병 군도에 대해, 4 x 2 = 8발의 총탄과 8자루의 긴 총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보병의 총에 총알이 들어있지 않다고 해도, 말은 영리한 동물이라서 대개 그 빽빽한 총검의 숲으로는 돌격해들어가지 않고 끝에는 반드시 옆으로 머리를 돌리곤 했습니다.  물론 간혹 기병대가 보병 방진을 깨뜨리는 경우가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그 기병대가 우수해서가 아니라, 미숙한 보병들이 엉성하게 보병 방진을 짰기 때문이거나 뭔가 사고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포병들을 침묵시킬 정도로 압도적인 화력과 정확도를 자랑하던 오스트리아 포병대도 저 멀리서 칼을 꼬나쥐고 달려오는 프랑스군 기병대를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원거리에서 날아오는 쇳덩어리 포탄에 낭수티의 건장한 기병들이 픽픽 나가 떨어지며 그 대오에 뻥뻥 구멍이 뚫렸지만 프링스 기병들은 그저 성모 마리아를 입 속에 되뇌이며 계속 달리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포병들에게 큰 피해를 입으며 헐레벌떡 달려들어간 곳에 기다리는 것은 총검을 고슴도치처럼 세우고 기다리는 오스트리아군 보병 방진이었습니다.  이들을 향한 기병 돌격은 당연히 실패했습니다.  낭수티의 기병들은 보병들의 일제 사격에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지요.  당연히 낭수티는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물러서는 기병대원들을 규합하여 다시 돌격을 감행했고 마침내 집단 전술 훈련이 가장 뒤떨어진 그렌츠(Grenz) 대대의 방진 하나를 깨뜨리는 쾌거를 이뤄냅니다.





(그렌츠 보병은 오스만 투르크와의 접경지대에서 차출된 발칸 반도 출신 보병들로서 주로 프랑스군의 볼티저(voltigeur)처럼 산개하여 싸우는 유격병 역할을 주로 했습니다.  전열 보병처럼 싸우는 것은 원래 그들의 몫이 아니었지요.  그림 속의 2번 병사가 그렌츠 보병입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좌우로 빽빽히 들어선 오스트리아 척탄병 대대들의 방진은 도저히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낭수티는 당혹감과 혼란, 무엇보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도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하여 우왕좌왕하는 기병들을 이끌고 보병 방진 사이를 뚫고 오스트리아군 후방으로 나온 뒤, 방향을 휙 틀어 자신들을 괴롭힌 오스트리아 포병대를 향해 돌격했고, 포대 하나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대공의 오스트리아군 기병대가 뛰어나와 지친 이들을 공격해 왔습니다.  기병대의 무기는 사실 칼도 창도 권총도 아닌 속도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기병대는 현대의 공군과 비슷했습니다.  아무리 공군이 강력해도, 공군으로 전장을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연료가 떨어지면 현장에서 물러가야 하니까요.  아무리 강력한 전폭기라고 해도, 지상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야말로 쉬운 먹잇감에 불과합니다.  당시 낭수티의 기병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여러차례 전력 질주를 하여 말도 사람도 지친 기병대로는 전선을 틀어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프랑스군 기병대는 이제 완전히 붕괴되어 무질서하게 우르르 본진으로 후퇴했고, 이 와중에 오스트리아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낭수티는 아무 부상을 입지 않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으나, 그와 함께 출격했던 2800명의 기병 중 되돌아온 것은 고작 1600명으로서, 무려 42%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궤멸적 타격이었습니다.


여기서 베시에르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그도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낭수티를 먼저 보낸 뒤, 서둘러 황실 근위 기병들을 편성한 뒤 낭수티가 그렌츠 보병 대대의 방진을 깨뜨릴 즈음해서는 2천의 근위 기병들을 이끌고 막 돌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란에게 당한 모욕도 떨쳐낼 겸, 정말 맨 앞에 나서서 오스트리아군을 향해 달려 나갔습니다.  특히 바로 뒤에서 나폴레옹이 그의 돌격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더욱 비장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운이 좋다고 해야할지 나쁘다고 해야할지, 얼마 가지도 못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군의 대포알 하나가 그를 향해 똑바로 날아왔습니다.  그 대포알은 그의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뒤 그가 탄 말의 엉덩이를 강타했습니다.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던 그는 덕분에 땅바닥에 엄청난 세기로 처박히며 정신을 잃었고, 그의 뒤를 따르던 부하들은 모두 그가 전사했다고 생각하여 크게 놀랐습니다.  근위 기병대 지휘관을 역임하며 근위대 병사들과 가까운 사이였던 그가 쓰러지자 많은 근위대 병사들이 통곡을 하며 슬퍼했는데, 이 모습을 나폴레옹이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전투가 끝난 뒤 나폴레옹은 정신을 차린 그에게 '근위대 병사들을 울게 만들다니 대단하네.  그러나 전과는 왜 그 모양인가 ?'라며 칭찬과 조롱을 함께 보냈다고 합니다.


쫓겨온 낭수티는 이제 지휘관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근위 기병대까지 합해 3천이 넘는 기병들을 모으게 되었으나, 이제 다시 돌격한다고 해도 도저히 눈 앞의 오스트리아군을 깨뜨릴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풀이 죽은 채로 큰 피해를 입은 기병대를 이끌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낭수티의 악전고투 덕분에 마세나는 무사히 남쪽으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세나가 떠난 빈자리는 텅 빈 마르히펠트 평원 뿐이었습니다.  그 곳으로 오스트리아군이 몰려 나올텐데, 낭수티의 기병대까지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물러났으니 그걸 틀어막을 부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체 나폴레옹은 어쩌자고 이런 식의 작전 명령을 내린 것이었을까요 ?  설마 나폴레옹처럼 경험 많은 지휘관이 기병 사단 하나면 적의 군단 하나쯤 충분히 패퇴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일까요 ?  물론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가 낭수티에게 바랐던 것은 오직 하나 시간을 버는 것 뿐이었고, 실제로 그것을 얻은 셈이었습니다.  낭수티가 물러난 빈자리로 오스트리아군이 몰려오자,  나폴레옹은 그들을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깜짝 선물을 내놓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http://www.histoire-empire.fr/articles/item/grande-batterie-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Bessi%C3%A8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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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8.20 16: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나스호른 2017.08.20 1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장의 무기가 뭘까요?
    외젠군 다부군 알수가 없네요

  3. 하하 2017.08.20 18: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진짜 너무 재밌아요. 한달 내내 홈지기님의 티스토리 글 읽으면서 세계사 공부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어쩜 이리 박학다식하신지... 역사 속 뒷이야기를 훔쳐보는 듯한 착각이 일었어요. 하나하나 보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글까지 다 봤네요..ㅠㅜ
    보다가 정말 뜬금없는 궁금증이... 웨스트민스터가 화재로 불타고 홀과 성당 정도만 남았는데 재건이 되기 전까지 영국 의회는 어디서 독회를 하고 법안 처리를 했던걸까요??

    • nasica 2017.08.20 19: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우 답변을 술술 드리면 좋겠으나 모르겠네요. 뭐 런던 인근에 이런저런 궁전이 꽤 있으니 그런 곳에서 하지 않았을까요?

  4. 석공 2017.08.20 2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

  5. pangpang 2017.08.20 2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보병 방진의 정면이 아니라 꼭지점 방향, 그러니까 방진을 향해 대각선으로 돌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송곳형태의 횡대로 돌격하면 물론 총알세례를 좀 받긴 하겠지만, 기병대와 접하게 되는 총검 든 병사의 수가, 꼭지점 부분이라
    몇 안 될 것이므로 돌파가 될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네요.

  6. 수비니우스 2017.08.21 0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전쟁은 못할 일입니다. 저기에 뛰어드는 것도 저기서 버텨내는 것도... 으으

  7. IserveGodofJew 2017.09.17 0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종대의 둘쨰나 셋째 줄부터는 (근육이 진 짜는데 잘 훈련되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총이 아니라 창을 들고 진을 짜도 꽤 괜찮았을것 같습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군이 모처럼 맞은 절호의 기회를 지휘부의 처절한 무능함 속에서 날려버리는 가운데, 나폴레옹의 머리도 바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나폴레옹의 천재성은 이미 끝났다고들 말했지만, 그의 클래스는 살아 있었습니다.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가 주저하며 오스트리아군의 승리를 망치고 있다는 것을 아직 몰랐을텐데도, 그는 이런 위기 속에서 침착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보통의 지휘관이라면 후방으로 침입한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를 막기 위해 모든 병력을 동원하는 등 허둥거렸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아직 교전하지 않은 병력이 아주 많았습니다.  최우익의 다부 외에도 우디노와 막도날, 외젠과 근위대 등 어제 밤에 장전해둔 탄약이 머스켓 약실에 그대로 들어 있는 병력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도 나폴레옹의 가장 큰 관심은 다부의 우익이었습니다.  이번 전투의 승패는 어떻게 적의 공격을 막아내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적의 이 기습 공격을 분쇄한다고 해도 그건 현상 유지일 뿐, 전쟁을 끝내려면 이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야 했고 그러자면 원래 의도했던대로 우익의 다부가 제대로 된 묵직한 공격을 퍼부어야 했습니다.  이번 전투의 정수는 다부 쪽에 있었습니다.  이런 뜻하지 않은 위기 상황 속에서도 큰 그림을 잃지 않고 초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나폴레옹의 클래스를 보여주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침착하게 다부에게 전령을 보내 '공격을 서두르라'고 명령한 뒤, 놀랍게도 다른 모든 군단장들 대신 아더클라에서 악전고투 중인 마세나의 제4 군단에게 남쪽으로 이동하여, 그쪽을 돌파해 들어온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다른 군단들은 그대로 현 위치를 지키게 했습니다.


마세나의 제4 군단은 아더클라에서 벨가르드의 부대와 교전 중이라서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남쪽으로 후퇴하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이었습니다.  왜 이런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을까요 ?  가장 단순한 이유는 마세나가 클레나우와 가장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의 침착성과는 별도로, 상황은 정말 위급했습니다.  그러니 더 동쪽에 있던 우디노나 막도날의 군단을 이동시키는 것은 너무 시간이 걸렸습니다.  게다가 그들을 이동시키면 그 빈자리는 무엇으로 메꾼단 말입니까 ?  궁극의 예비대인 그의 근위대는 정말 최후의 순간까지 예비대로 아껴두어야 했는데, 나폴레옹은 현 상황이 그렇게까지 급박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남는 옵션은 마세나로 하여금 아더클라에 집착하지 말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클레나우를 제압하도록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분명히 이미 교전 중인 적으로부터 떨어져나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질서있는 전술적 후퇴가 까딱 잘못하다간 진짜 패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솜씨 있는 지휘관이 숙련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아더클라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성공적으로 떨쳐내고 후퇴한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마세나는 새벽에 행군해 온 그 길을 다시 되짚어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는데, 그 길목에는 새벽에는 없었던 것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바로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 제3 군단이었지요.  이들과 엉겨붙으면 또 끝장이었고, 또 이들을 어떻게든 신속하게 제압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아무 대책없이 마세나가 그대로 남쪽으로 달려가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맞붙는다면, 마세나와 아더클라 사이는 또 뼝 뚫린 구멍이 생기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구멍으로 콜로브라트가 밀고 들어오면 그것 또한 큰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여기에 대해서 간단한, 그러나 무책임한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바로 대규모 기병대를 오스트리아군 얼굴에 냅다 집어던져 시간을 벌자는 것이었지요. 


이는 완전히 새로운 전술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일라우(Eylau)에서도 위기에 처하자 뮈라의 대규모 기병대를 돌격시켜 러시아군을 상대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뮈라의 기병대는 빽빽히 늘어선 러시아군 보병 대오를 관통하여 뚫고 들어갔다가 말을 돌려 다시 뚫고 돌아오는 장관을 연출하기는 했었으나, 정작 그 돌격으로 적에게 입힌 피해는 정신적 충격 외에는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소중한 시간을 벌긴 했지요.  이번에도 나폴레옹은 같은 목적으로 기병대를 냅다 집어던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무작정 기병 돌격은 기병들의 큰 피해를 수반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연히 이 기병대를 맡을 지휘관도 적의 대포알과 머스켓 총탄에 그대로 노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늘이 내린 기병 지휘관이었던 불꽃 남자 뮈라는 이런 위험천만한 돌격을 언제나 선두에서 지휘했고, 하일스베르크 전투의 경우 뮈라는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대포의 산탄에 말을 잃고 낙마하면서 장화 한짝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위험을 우습게 여기며 미친 듯한 돌격을 여러번 이끌면서도 부상은 거의 입지 않았지요.  그러나 뮈라는 이 자리에 없었습니다.  이번에 이 위험천만한 임무를 담당할 사람은 예비 기병대 사령관인 베시에르(Jean-Baptiste Bessières)였습니다.




(베시에르입니다.  사실 그가 얌체에 기회주의자일지는 몰라도 결코 겁쟁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절친이었다가 원수로 변한 란과 결국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베시에르는 분명히 뛰어난 기병 지휘관이기는 했습니다.  다만 언제부터인가 전쟁터 최전선보다는 나폴레옹 주변을 알짱거리며 권력에 대한 욕심을 부리다 란(Lannes) 원수로부터 '전투 현장에서는 코빼기도 볼 수 없더니 폐하를 뵈려하니까 떡 나타나네 ?'라는 팩트폭력을, 그것도 나폴레옹 코 앞에서 당하고는 그와 결투 직전까지 갔던 바 있었습니다.  물론 열혈남아 란에 비할 수야 없겠으나 베시에르도 위험 앞에서 꼬리를 말아쥐는 겁쟁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앞에서 그런 모욕을 당한 바로 그 다음날 란이 최전선에서 지휘를 하다 적 포탄에 희생되는 일이 발생하자, 베시에르가 아무리 스스로 떳떳하다고 해도 뭔가 찜찜한 느낌이 없을 수는 없었습니다.  


베시에르가 이 명령을 받은 것은 오전 11시 경이었습니다.  그가 맡았던 프랑스군 예비 기병대에는 기병 사단이 3개 있었으나, 그 중 생-쉴피스(Saint-Sulpice)의 사단은 마세나를 지원하러 차출되었고, 아리기(Arrighi)의 사단은 새벽에 로젠베르크가 일으킨 소동 탓에 다부의 우익을 지원하러 간 상태였습니다.  남은 것은  제1 중기병 사단 하나 뿐이었는데, 그나마 여기에는 총 3개 여단 중 생-제르맹(Saint-Germain) 장군의 기병 여단이 후방으로 빠져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부족한 기병대의 머리수를 채우기 위해 아끼고 아끼던 근위 기병대까지 차출해주었으나, 그 준비에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시간을 벌려고 기병대가 돌격을 하는데, 그 준비에 시간이 걸려서야 되겠습니까 ?  결국 베시에르는 제1 중기병 사단의 2개 여단 2800명을 그 지휘관인 낭수티(Nansouty)의 지휘 하에 돌격시켰습니다.  본인은 일단 뒤에 남았습니다.  어쩌면 란의 영혼이 이 모습을 보며 '내 그럴 줄 알았다'라며 비웃었을지도 모르지요.




(낭수티 장군입니다.  그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서, 나폴레옹의 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전장에서 약탈 등으로 개인주머니를 채우지 않은 몇 안되는 청렴한 장군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청렴했을 뿐 청빈하지는 않아서, 씀씀이는 계속 귀족처럼 살았기 때문에, 나폴레옹 패망 이후 루이 18세 치하에서 급료가 많이 깎이자, 말년에는 경제적으로 무척 쪼들렸다고 합니다.)




낭수티가 돌격해 들어간 곳은 아더클라를 점령한 오스트리아 예비 군단과, 그 바로 남서쪽에 자리를 잡은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 제3 군단 사이의 공간이었습니다.  이 넓은 공간에는 프로하스카(Prochaska) 중장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사단 1개만 얇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기병대 수가 부족하다고 해도, 큰 말에 올라탄 덩치 큰 기병들로 구성된 중기병대가 큼직한 군도를 뽑아들고 두두두 달려들어가면 그 정도의 보병들은 쉽사리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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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jor 2017.08.15 15: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흥미진진하네요

  2. 수비니우스 2017.08.15 15: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댓글 후읽기... 오늘 비가 많이 내렸지만 지금 이 글이 가장 단비로군요

  3. 수비니우스 2017.08.15 16: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득 드는 생각인데요, 나폴레옹이면 한니발이나 한신 알렉산더대왕 등과 함께 세계사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난 초S급 지휘관이라고 생각하는데, 한니발도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의 소모전을 못뚫고 십수년을 보내고 결국 패배했지만 한니발의 천재성이 어느순간 즈음에는 끝나있었다고는 하지 않는것 같은데요. 다른 뛰어난 지휘관들도 그렇고요. 그런데 왜 유독 나폴레옹만 1809년 즈음엔 그의 천재성이 꺽여있었다고 표현될까요? 나시카님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많이 그런것 같은데, 소모전 끝에 적국의 역량이 상승하고 자국의 역량이 소모되고 결국 지는 경우는 왕왕 있지만 나폴레옹만 그렇게 자주 표현되는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nasica 2017.08.15 16: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마 아스페른-에슬링 패전의 탓이 클 겁니다. 바그람에서도 인적 피해가 컸고요. 사실 이는 나폴레옹이 멍청해져서가 아니라 오스트리아군이 변모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4. pangpang 2017.08.15 17: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생각이긴 하지만, 당대의 천재라도 새로운 '패러다임'앞에서는 그 천재성도 제한될 수 밖에 없었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니발이 예상치 못했던 로마의 소모전이란 나름 신개념 전략도 그렇고, 나폴레옹이 폴란드 진창에서 일종의 맛보기 경험을 했음에도 러시아의 혹독한 환경과 그걸 잘 이용한 초토화작전이란 낯선 패러다임의 전략을 예상하지 못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과, 13세기 후반에 소위 최강이라던 몽골 장군들이 교지(북베트남)와 참파(남베트남)의 밀림 환경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정복에 실패한 사례 등이 있겠네요. 미국의 베트남전 실패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극복하는 데 실패한 대표적 사례가 되겠네요.
    알렉산더가 계속 인도내륙으로 진격했다면 결국 패배했을 거란 예상이 많이 나오는 이유도, 그런 낯선개념과의 충돌에서 찾아야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나폴레옹의 경우는, 나시카님 말씀처럼 아스페른-에슬링과 바그람의 막대한 피해탓도 있을 것이고 또한 나중의 보로디노 전투에서 정면 대결로 인한 가공할 만한 인적피해가 발생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기에 후대인들이 '이렇게 된 원인의 기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하고 시간을 거슬러 그 시작점을 찾아 고심한 결과가 바로 1809년 캠페인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5. 폴리틱스 2017.08.16 12: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습니다 ^^

  6. 2/28입대 2017.08.16 14: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초심을 지킨다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닌 경우도 많죠. 어느 상황에서나 초심을 지킨다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본인의 아집에 갇혀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주위의 다양한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기도 해야하고 그들의 경험에서 배우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죠.

    나폴레옹은 뛰어난 직관과 치밀함으로 연전연승을 거둬왔지만 결국 그 한계가 오는 모양이네요. 동원하는 군사의 규모의 차이, 적의 질적 성장 그리고 주변 인재 pool의 고갈등 상황이 너무 많이 변한 것 같은데, 황제 혼자 볼로뉴 시절에서 지휘하시는 것 같아요.

    • nasica 2017.08.16 2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제 제대하진지 몇년째지요? 입대하시던 때가 기억납니다.

    • 2/28입대 2017.08.17 2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5년이 다 되어가네요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닉을 바꿀만한게 없어서....모든 포스팅들 다 감격스럽게 읽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7. 웃자웃어 2017.08.16 2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이 느끼기에 프랑스군은 무엇때문에 당시의 유럽최강의 군대가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능력위주의 인사제도로 인해 유능한 장교와 지휘관들이 등용되어 징병제의 단점을 보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8. 웃자웃어 2017.08.16 22: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생각에 징병제는 자국및 국경에서의 전쟁엔 유리하지만, 대외원정에는 불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징병제는 수많은 병력을 동원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훈련도 미숙이나 사기문제등등의 단점이 있죠. 자국에서의 전쟁에선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사기를 올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할수있지만, 대외원정에선 이러한 동기부여도 못하고, 오히려 먼거리에서 전쟁한다는 병참및 기타등등의 페널티를 가지게 되니 불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당나라가 초기에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유도 징병제의 단점을 보완할수있는 유능한 지휘관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이러한 지휘관들이 죽거나 은퇴한 시점인 무측천시기에는 농민층의 분화+귀족들의 대토지소유심화+잦은전쟁+부병에게 지급되는 토지감소등으로 농민층의 몰락이 발생하여 부병의 질하락에 징병제의 단점을 보완할 지휘관들이 줄어들었으니 돌궐,토번,대조영과의 전쟁에서 모두 대패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대조영과의 전쟁은 수십만명씩 동원가능한 고구려와는 비교도 못할정도로 세력이 약한 대조영과의 전쟁에서 대패했으니 얼마나 당군이 약해졌는지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비유하자면 당나라 군이 한동안 전투력 측정기로 전락했다고 표현할수 있겠군요.)

  9. 웃자웃어 2017.08.16 2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고로 자국에서 싸울시에 부여되는 동기는 자기의 고향이나 가족 재산을 지킨다는 의미의 동기부여 입니다.

  10. 석공 2017.08.17 0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11. ㅅㄴ 2017.08.19 10: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시대에 대한 저의 지식적 갈망을 매주 채우고 갑니다.

전날 밤 카알 대공도 나폴레옹과 생각하는 것이 거의 비슷했습니다.  좌익과 중앙에서 잽을 날리며 적의 시선을 끈 뒤, 강력한 우익의 우회 진격을 통해 적의 측면을 관통하여 끝장을 본다는 것이었지요.  차이는 바로 시간이었습니다.  공격자였던 나폴레옹은 방어자 입장인 오스트리아 측이 먼저 선제 공격을 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사이, 카알 대공이 한두 시간 먼저 공격을 해들어온 것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 것이 베르나도트의 아더클라 무단 이탈과 마세나가 지휘하는 제4 군단의 아더클라 쪽으로의 이동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준비한 회심의 라이트 훅, 클레나우의 진격 방향이 파란색 화살표로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와 직각을 이루며 북쪽으로 올라가는 붉은색 화살표가 프랑스군 마세나의 제4 군단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을 이루고 있던 것은 전날 낮에 프랑스군 앞에서 후퇴하느라 고생이 많았던 클레나우(Klenau)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이었습니다.  이들은 비삼베르크(Bisamberg)로 이어지는 고지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카알 대공의 새벽 작전에 대한 지시를 너무 늦게 통보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출격은 카알 대공이 의도한 것보다 무려 3시간이나 늦게 시작되어, 공격 시작점에 도착한 것은 거의 아침 8시가 되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늦어진 것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아버렸습니다.  이때 즈음 마세나의 주력 사단들은 모두 아더클라 방면으로 몰려간 뒤였던 것입니다.  특히 르그랑(Legrand)의 사단은 아더클라로의 행군 도중 측면에서 들이닥친 콜로브라트의 오스트리아군 제3 군단의 습격을 받고 대경실색 했습니다.


하지만 르그랑의 사단보다 더 큰일이 난 것은 마세나가 아스페른과 에슬링의 두 마을을 지키라고 남겨두고 간 부데(Boudet)의 사단이었습니다.  마세나는 '뭐 어차피 이쪽은 별 일이 없을테니까'라며 태평하게 달랑 부데의 1개 사단만 남겨두고 갔고, 어쩌면 그렇게 뒤에 남겨진 부데와 그의 부하들은 속으로 은근히 기뻐했을지도 몰랐겠습니다.  부데 사단은 약 한달 전의 에슬링 전투에서 에슬링의 곡물 창고를 지키며 그야말로 혈전을 벌여 많은 희생자를 낸 바 있었고, 그 수도 고작 5천명 정도로 매우 허약해진 상태였습니다.  이번 전투에서는 아마 한숨 돌리고 싶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운명은 얄궃게도, 부데의 사단을 다시 그 곡물 창고로 쳐박아 넣게 됩니다.


아스페른으로 진격을 개시한 클레나우의 제6 군단 약 1만4천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이 나아갔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포병대를 전개시켜 포격을 가하자 부데도 10문의 포병대를 동원하여 반격을 하려 했으나, 기다렸다는 듯이 오스트리아 경기병대가 바람처럼 달려나와 프랑스 포병들을 베어넘기고 대포들을 나포했습니다.  이대로 대포들을 잃을 수 없었던 프랑스 보병들이 우르르 물려나와 오스트리아 기병들을 쫓아내고 이 대포들을 다시 탈환했지만, 그 사이에 방열을 마친 오스트리아 포병대가 우왕좌왕하는 프랑스군에게 포격을 가해 다시 프랑스군의 대포들을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전으로 시작된 부데의 방어전은 결국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대포들을 잃고 버티기가 어려웠던 부데는 결국 아스페른을 포기하고 정들었던(?) 에슬링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에슬링으로 물러난다고 해서 뭐 딱히 사정이 더 좋아질 것도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허둥지둥 도망치는 프랑스군의 뒤를 아주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집요하게 추격해왔고, 에슬링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막아내려 애쓰던 부데는 결국 오전 10시 경, 거기서도 밀려나야 했습니다.




(부데 사단에 딸린 프랑스군 포병대를 유린하는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모습입니다.)



도나우 강변을 따라 후퇴하는 부데의 사단이 밀려난 곳은 그로스-엔저스도르프(Gross-Enzersdorf)였습니다.  여기 다음은 어제 새벽 프랑스군이 대거 도나우강을 건넌 교두보였습니다.  즉, 여기에서마저 밀려나면 이제 16만 프랑스군은 퇴로가 끊기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대포를 방열하고 로바우섬으로부터 보급품을 나르고 있던 종군 민간 상인들을 향해 포격을 가하자 일대 혼란이 벌어졌으나, 그러나 병력도 화력도 미약했던 부데 사단은 뭘 해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쩔 줄 모르고 전전긍긍하던 부데 사단을 향해 마침내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바그람 전투 내내 프랑스군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북쪽 아더클라에서는 전선 중앙을 돌파당한데다, 남쪽 그로스-엔저스도르프의 교두보가 함락되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뜻 밖의 방향으로부터 왔습니다.  도나우 강변을 따라 보무도 당당하게 행군해 들어오던 오스트리아군을 향해 로바우 섬으로부터 불벼락이 날아온 것입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겪은 이후 약 1달 넘게 나폴레옹은 다음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었지요.  그 준비 중 하나가 로바우 섬 전체의 요새화였습니다.  덕분에 로바우 섬에는 약 124문의 각종 대포 및 박격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강력한 1급 전함 1척이 강변에 닻을 내린 것 같은 효과였습니다.  아니, 전함은 양측에 포를 나눠 설치해야 했으므로 그에 비해 모든 포를 북쪽 강변으로 향해 놓을 수 있었던 로바우 섬은 1급 전함 2척이 나란히 강변에 정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막강한 화력의 포병대가 일제히 오스트리아군을 강타했습니다.  아무리 당시의 대포가 조잡한 화력만을 낼 수 있다고 해도, 탁 트인 강변에 아주 먹음직스러운 밀집 대형으로 행군하는 보병대에게 날아든 무지막지한 대포알들은 끔찍한 살육을 일으켰습니다.  로바우 섬의 포병대는 신나게 대포알을 날려보냈고,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군은 공포에 질려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밀려난 클레나우는 일단 숨을 돌리고 다음 행동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로바우 섬의 프랑스 포병대가 막강하다고 하더라도, 재빨리 진격하여 몇 천 밖에 안 되는 프랑스 보병들을 밀어낸다면 최소한 프랑스군의 소중한 다리들을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또는 방향을 이제 북쪽으로 틀어 프랑스군의 노출된 후방을 타격하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클레나우는 두가지 방안 모두 택하지 않고, 일단 여기서 멈추기로 결정합니다.  왜 이렇게 오스트리아군은 자꾸 결정적인 순간에 멈추는 것이었을까요 ?


클레나우가 멈추기로 결정한 것은 전통적인 오스트리아군의 경직성에 비추어볼 때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카알 대공은 물론이고 클레나우 본인도 이렇게 쉽게 프랑스군 교두보까지 일사천리로 돌파해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이기고 있는 편이 약간 당황한 것도 이해는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운좋게 적의 중앙부 뒤쪽까지 잘 뚫고 왔다고 해도, 클레나우의 제6 군단은 고작 1만4천의 병력 뿐이었습니다.   10만 단위의 대군이 밀집한 적진 한 가운데에 막상 뛰어들고나니, 불안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렇게 불안해할 거라면 애초에 왜 달랑 1개 군단을 적진 뒤쪽으로 찔러 넣었느냐고요 ?  그러지 않았습니다.  카알 대공은 분명히 클레나우와 콜로브라트의 2개 군단을 찔러 넣었거든요.  클레나우도 바로 콜로브라트의 제3 군단의 위치가 파악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콜로브라트의 제3 군단은 어디에 간 것일까요 ?  


클레나우보다 좀더 북쪽에서 진격을 시작했던 콜로브라트는 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더클라를 향해 북진하던 르그랑의 프랑스 사단과 딱 마주쳤습니다.  군단 대 사단의 만남인데다 공격 준비를 갖춘 오스트리아군에 비해 프랑스군은 행군 중에 생각하지 않은 내습을 당한 셈이어서 상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크게 유리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콜로브라트의 행동은 복장이 터질 정도로 굼뜨고 느린데다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는 본인의 임무가 프랑스군 후방으로의 기습 침투라는 것을 이해한 건지 못한 건지 헷갈릴 정도의 행동을 보여줬습니다.  일단 원래의 진지인 비삼베르크 언덕에 1개 여단을 뚝 떼어놓고 출발했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상황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르그랑 사단을 가볍게 밀어내고 로바우 섬이건 마세나의 뒤통수이건 심지어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까지도 별 저항 없이 달려갈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전면은 탁 트인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르그랑 사단과 마주치자 콜로브라트가 첫번째로 내린 명령은 공격 명령이 아니라 후방 퇴로 확보였습니다.  그나마 빈약한 르그랑 사단에게조차 과감한 공격을 가하지 않고 먼저 포병대를 내세워 대포알만 날려보내는 소극적인 지휘로 초지일관 했습니다.  




(이 분이 콜로브라트 백작 Johann Karl, Graf von Kolowrat-Krakowsky 이십니다.  이분은 오스트리아의 주요 패전인 호헨린덴 전투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등에서 모두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은 그의 빛나는 승리가 100% 자신의 천재성에 기인한 것이라고는 말 못 했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이 분의 무능함은 빛났는데, 그럼에도 이 분이 연달아 주요 군단의 지휘권을 거머쥐었다는 것이 오스트리아가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병사들에도 불구하고 왜 매번 패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양반이 혁혁한(?) 활약을 한 바그람 전투 직후, 이 60이 넘은 노장은 무려 원수(Feldmarschall)로 승진합니다.)




아무리 카알 대공이 작전이 훌륭하다고 해도 무엇하겠습니까 ?  그의 작전을 수행할 장군들은 여전히 낡은 교리에 묶인, 귀한 집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 외에는 별볼일 없던 무능한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런 무능한 귀족들이 핵심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패인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오스트리아군은 운 좋게 손에 들어온 승리의 기회를 날려 먹고 말았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battleofwagram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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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잡지식 98 2017.08.06 17: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포스팅에서 처음으로 프랑스군의 허를 찌른, 하지만 지휘부의 경직성으로 기회를 날리는 안습의 오스트리아군 이군요.
    그때 다 이기다 귀족들의 뻘짓으로 승리를 날린 사병들은 어떤 생각을 했으려나요?

  2. 객몽 2017.08.06 17: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헐 2등 ~ 늘 열독하고 있습니다
    작금의 현실을 보면.. 콜브라이트같은 장군이 우리군에도 많을것 같네요

  3. 석공 2017.08.06 1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4. Mavs 2017.08.06 1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정적인 순간에 멈추는 것이 꼭 태평양전쟁 당시의 일본해군 같군요.

  5. 딸기맛농약 2017.08.06 2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세한 내용을 보니 다른전투때 보다 훨씬더 쫄깃한 상황이였네요. ㅎㅎㅎ 다음회가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6. 역시 2017.08.07 0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능한 간부가 주적이네요

  7. 에어메딕 2017.08.07 19: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오늘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다음 편이 기다려지네요! 역시 무능한 간부가 진짜 적이네요

  8. 나삼 2017.08.08 0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스트리아군은 항상 은영전의 귀족 반란군 스러운 작태를 보이네요 ㅋㅋ

  9. 부릉부릉 2017.08.09 2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은영전을 보면서 늘 저렇게 지휘관이 무능할 수 있나 싶었는데 거기 졸장들은 양반이었네요. 충격과 공포입니다.

  10. pangpang 2017.08.09 2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그람 전투에 대한 기존의 서술들을 보면, 보나파르트가 그 동안에 자신의 성공을 가져왔던 기동전을 선택하지 않고, 큰 피해가 수반되는 대규모 포격전에 치중한 결과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이는 보나파르트의 천재성이 쇠퇴하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뉘앙스의 글들이 많았던 걸로 아는데, 나시카님 글들을 보니 '단순무식한 살인적인 포격전' 위주였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세세한 부면들과 우연들이 흥미롭게 겹치는 다이나믹한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을 맡고 있던 로젠베르크(Franz Seraph von Orsini-Rosenberg) 대공의 제4 군단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기만을 위한 미끼였습니다.  카알 대공의 주공은 어디까지나 우익, 즉 게라스도르프(Gerasdorf) 쪽의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이었지요.  그러나 미끼도 너무 작으면 큰 고기를 낚을 수 없는 법이었으므로 로젠베르크의 군단도 총 1만8천의 꽤 큰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저녁 무렵에 만신창이가 되어 합류한 노르드만(Nordmann)의 전위대 6천, 그리고 노스티즈(Nostitz)의 기병대 3천이 합류해 있었으므로 총 2만7천의 강력한 군세였습니다.   




(로젠베르크는 당시 49세로서, 작위는 Reichsfürst 였습니다.  왕보다는 밑, 공작보다는 위인 대공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로젠베르크는 이들을 총 3개부대로 편성하여 고지 아래의 프랑스군을 들이치기로 했습니다.  1개 부대는 6개 대대로 작게 편성되어 프랑스군 수중에 있던 그로스호펜(Grosshofen) 마을을 공격하기로 했고, 무려 16개 대대로 강력하게 편성된 다른 1개 부대는 글린첸도르프(Glinzendorf)를 들이치기로 했습니다.  글린첸도르프로 향하는 부대에는 나중에 요한 스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음악사에 영원한 이름을 남기게 되는 라데츠키 백작(Joseph Radetzky von Radetz)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머지 1개 부대는 모두 기병대로 되어 있었고 이들은 프랑스군의 우측으로 멀찍이 우회하여 프랑스군의 후방이라고 할 수 있는 레오폴즈도르프(Leopoldsdorf)를 습격하기로 했습니다.  나름 굉장히 머리를 쓴 작전이었고, 전날 헛된 공격으로 지치고 사기가 떨어진 프랑스군에게 대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로젠베르크의 공세에는 무려 60문의 대포가 딸려 있었으므로, 새벽 하늘에 엄청난 포성을 울려 나폴레옹의 시선을 잡아 끌게 되어 있었습니다.




(붉은색 원은 프랑스군이 주둔한 지역이고, 푸른색 원은 오스트리아군 주요 거점입니다.  푸른색 화살표가 로젠베르크의 공세 방향입니다.)



그러나 로젠베르크에게는 재수가 없게도, 그의 앞에 있던 부대는 바로 프랑스군 최고의 지장이라고 할 수 있던 다부(Davout)였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은 무려 3만2천의 보병과 6천2백의 기병, 그리고 무려 120문의 대포를 갖추고 있어서 프랑스군 최강의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고, 로젠베르크의 공세를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기습이라도 성공했으면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다부는 전날의 야간 공격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고 나폴레옹의 의도와는 달리 일찌감치 공격을 걷어들인 바 있었지요.  덕분에 프랑스군은 별로 지치지도 않았고, 새벽에 오히려 오스트리아군을 기습 공격을 하겠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로젠베르크는 공세에 나서면서 '절대 엄숙'을 지시했으나, 이 군단에는 반쯤은 민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방위군(Landwehr) 부대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상당히 많은 소음을 내며 행군을 했습니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기습을 당해 무척 놀라긴 했으나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새벽 5시 경, 라데츠키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 선봉대가 그로스호펜을 습격하여 프랑스군을 밀어냈고, 이어서 글린첸도르프에도 오스트리군의 강력한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불과 1개 연대의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던 그로스호펜은 곧장 오스트리아군 수중에 넘어갔으나, 다부는 당황하지 않고 곧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로스호펜에서 밀려난 프랑스군의 퓌토(Puthod) 장군이 그로스호펜을 탈환하기 위해 정면 공격을 하는 동안 구댕(Gudin) 장군의 강력한 사단이 그 측면을 들이쳤습니다.  프리앙 장군과 모랑 장군의 2개 사단이 주둔하고있던 글린첸도르프 마을은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에 맞서 잘 버텨주었고, 그루시(Grouchy) 장군과 몽브렁(Montbrun) 장군의 프랑스군 기병대는 측면을 돌아 레오폴즈도르프를 노리던 오스트리아군의 기병대를 오히려 다시 우회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로젠베르크와 다부가 새벽에 혈투를 벌이며 낸 포성과 총성은 새벽 하늘을 가로질러 라스도르프(Raasdorf)에서 이른 아침식사 중이던 나폴레옹의 귀에도 똑똑히 들려왔습니다.  그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다부가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먼저 공격을 시작했을리도 없으니, 그쪽에서 포성이 들린다는 것은 그가 두려워하던 것이 도착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요한 대공의 오스트리아 내부군이었지요.  당시 프레스부르크에 웅크리고 있던 요한 대공에게는 고작 1만3천 정도의 병력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대치하고 있던 외젠이 좀 부풀려 보고를 했는지, 나폴레옹은 요한 대공의 군세를 약 3만 정도로 보고 있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병력의 우위를 지키고 있는 마당에 적에게 3만이 더 가세한다는 것은 악몽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당장 예비 기병대로부터 낭수티(Nansouty)와 아리기(Arrighi) 장군의 중장 기병대를 다부 쪽으로 파견했고, 이어서 황실 근위대까지 그쪽으로 투입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태연하게 아침 식사를 마저 끝낼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낭수티 장군의 기병대 중에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기마 포병대가 로젠베르크 군단에게 첫 포탄을 발사할 때 즈음에는 이미 나폴레옹도 현장에 도착하여 다부와 함께 반격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기습을 해온 오스트리아군 측이었습니다.  작전 상황을 면밀히 보고 있던 카알 대공은 어차피 프랑스군의 시선을 동쪽으로 돌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쪽 전선에서 더 얻을 것이 없다고 보고는 로젠베르크에게 후퇴를 명했습니다.  말이 후퇴이지 한창 열을 올리며 싸우고 있는 적으로부터 등을 보이고 후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하는 순간이 바로 이렇게 어느 한쪽이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순간이었거든요.  이 때 병력 통제가 안 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고, 후퇴를 기술적으로 잘 해내는 것은 뛰어난 지휘관과 잘 훈련되고 기강이 잡힌 병사들만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군은 이것을 해냈습니다.  순식간에 전위대에서 후위대로 임무가 바뀐 라데츠키 장군의 부대는 로젠베르크의 제4 군단이 원래 출발선이었던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로 퇴각할 때까지 추격하는 프랑스군을 잘 억눌렀고, 결국 아침 6시가 되어 후퇴가 완료될 때까지 오스트리아군의 피해는 1천1백명 정도로 심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말년의 라데츠키입니다.  그는 원래 보헤미아, 즉 체코의 귀족이었습니다.  요한 스트라우스가 라데츠키 행진곡을 그의 이름으로 헌정한 것은 그가 이탈리아 독립 전쟁 당시 1848년 쿠스토자(Custoza) 전투에서 이탈리아 독립군을 격파한 공로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자신이 두려워했던 것, 즉 요한 대공의 군대가 도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맥없이 후퇴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걱정한 것은 그가 의도했던 기습이 이 새벽의 전투로 인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다부의 공격이 그의 주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잃어보린 기습 효과를 어느 정도 벌충하기 위해 다부에게 일부 병력을 더 동쪽으로 우회시켜 적의 후방으로부터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을 공격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덕분에 다부의 공격은 더 지체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다부에게 이렇게 감놔라 배놔라 참견을 하는 동안, 나폴레옹의 가슴을 정말로 철렁하게 만드는 사건이 전선 중앙부 아더클라(Aderklaa)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With Napoleon's Guns by Jean-Nicolas-Auguste Noe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wagram.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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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민성 2017.07.16 2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바그람에서도 한몫하는 다부 원수로군요 그 같은 지휘관과 전장에 함께 있다면 정말 든든할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활약도 기대가 되네요. 오늘도 유익한 글 잘읽고 가겠습니다.

  2. 잡지식 2017.07.17 01: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부가 지시를 어기고 먼저 공격을 했을리가 없음으로' 그야말로 무한 신뢰군요. 나폴레옹 정도 되는 사람에게 이런 기대를 받았던 다부는 정말..

  3. 푸푸냐옹 2017.07.17 05: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괜히최상급이 붙는게 아니군요 ㅎㅎ

  4. 카를대공 2017.07.17 1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오스트리아측 또 다른 명장 라데츠키 장군도 나오는군요.
    라데츠키 행진곡 하면 전세계에서도 가장 유명한 노래 중 하나 아닐까요?
    곡 제목은 몰라도 도입부는 다 들어봤을겁니다.


    다부는 보면 볼수록 정말 대단하네요.
    전략상 일군을 따로 지휘했던 마세나를 제외 한다면 그야말로 나폴레옹 휘하 장군들 중 최고가 아닌가 합니다.

    워털루에서도 장 란,(전성기 기량을 보유한)마세나,베시에르,베르티에 갈 거 없이 다부만 데려 갔어도 승리 했을거란 생각이 많이 듭니다.

  5. pangpang 2017.07.20 1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나도트의 퇴출이 눈앞에 다가오는군요. 녀석을 처형해버렸으면 1813년에 한결 편했을 텐데...

    • 구릉구릉 2017.07.23 0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요. 명령불복종으로 처형하기에는 황제 권위로는 부족했나봐요? 해임하고 작위 빼앗는것도 무리였는지...

    • 유애경 2017.07.23 09: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베르나도트 장군이 나폴레옹의 옛애인인 데지레의 남편 이기도 했고 형수가 데지레의 언니이기도 했고...그런것도 베르나도트의 처분을 꺼리게 만든 하나의 요인 이었을지도요...

    • 수비니우스 2017.07.25 0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리 황제라도 원수를 처형하기는 부담스럽죠

  6. 석공 2017.08.06 19: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