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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도트21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11) - 지질학자 베르나도트 블뤼허와 그나이제나우 등 프로이센측 기록만 보면 베르나도트처럼 겁이 많고 비협조적이며 이기적인 지휘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연합군이 실력이 아니라 신분으로 사령관을 뽑는 것이 관례라고 할지라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서는 그런 관례 없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평민 출신의 부사관 출신으로서, 자신의 능력만으로 프랑스군 원수봉을 손에 쥔 인물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입니다.  생각해보면 장군 자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따냈지만 원수봉을 따낸 것은 나폴레옹의 인척이라는 것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군요.  17세의 나이로 사병으로 입대한 그는 5년만에 부사관이 되었고, 다시 5년만에 부사관으로서는 최고 계급인 특무상사(Adjutant-Major)로 승진했습니다.  이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증거입니.. 2025. 1. 6.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10) - 들켜 버린 편지 타우엔치언이 블뤼허에게 전한 소식은 애써 놓았던 엘스터의 다리가, 불과 몇 개 대대의 그랑다르메가 엘베 강 건너 바르텐부르크에 나타났다는 소식에 놀란 베르나도트의 명령에 의해 해체되었다는 매우 복장 터지는 소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타우엔치언은 여태까지 베르나도트의 지휘에서 벗어나 블뤼허와 작전을 함께 하겠다고 큰 소리를 뻥뻥 쳤지만, 얼굴을 맞대고 나서 하는 소리는 베르나도트의 명령에 따라 그의 제4군단 전체를 북서쪽인 예센(Jeßen)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네의 위협을 받은 베르나도트가 모든 부대를 로슬라우(Roßlau) 일대로 불러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슐레지엔 방면군이 도강 지점으로 찍어놓았던 뮐베르크(Mühlberg)에도 타우엔치언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2024. 12. 30.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9) - 막상막하 적군이 삽질을 하면 아군에게는 기회가 생기기 마련이었습니다.  네가 엘스터-바르텐부르크 방면에서 연달아 잘못된 판단을 내리며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은 단지 연합군에게 피해를 입힐 기회가 사라졌다는 뜻만은 아니었습니다.  네의 베를린 방면군이 막아야 할 적군, 그러니까 베르나도트의 본진은 데사우(Dessau) 일대에서 무인지경으로 활개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베르나도트의 본진과 대치하고 있는 것은 드프랑스(Jean-Marie Defrance) 장군의 중기병 사단 하나와 다보로프스키(Jan Henryk Dąbrowski)의 폴란드 보병사단 하나 뿐이었습니다. (드프랑스 장군입니다.  그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평민이지만 나름 중산층의 삶을 살았는데, 천성이 군인이었는지 혁명 이전에 이미 사병으로 카리브해의.. 2024. 12. 23.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7) - 강들과 다리들 도강 작전 자체도 어렵지만 도강했다가 패배했을 때 재빨리 다시 강을 건너 후퇴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어려운 작전을 위해 그나이제나우가 나름 머리를 써서 만든 작전의 기본 얼개는 입구와 출구를 분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강을 건너 진격하기 전에 먼저 퇴로부터 확보했는데, 토르가우 하류 48km 지점이자 비텐베르크 상류 16km 지점의 우안에 위치한 엘스터(Elster) 마을 근처에 참호로 보호된 강화 진지를 구축하고 거기에 다리를 놓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강을 건너는 것은 토르가우 상류 24km 지점에 있는 뮐베르크(Mühlberg)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뮐베르크에서 강을 건너면 나폴레옹은 당연히 퇴각도 그 쪽으로 하리라고 생각하고 포위망을 펼칠 생각이겠지만, 만.. 2024. 12. 9.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2) - 왕세자에 대한 고자질 블뤼허는 베르나도트가 9월 6일 덴너비츠에서 네를 격파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뻤습니다만, 곧 이어 별도로 날아든 뷜로(Friedrich Wilhelm Freiherr von Bülow)의 편지를 읽고는 무척 복잡한 심경이 되었습니다.  뷜로는 베르나도트 밑에서 북부 방면군 산하 프로이센 제3군단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베르나도트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옛 적군인 그에 대해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같은 프로이센 사람인 블뤼허에게는 별도의 편지를 보내 '베르나도트를 믿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뷜로는 덴너비츠에서 열심히 싸운 것은 자신과 타우엔치언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 제3,4군단 뿐이었으며, 베르나도트는 온갖 핑계를 대며 진격을 미루다 승부가 판가름난 이후인.. 2024. 11. 4.
덴너비츠 전투 (4) - 습관성 삽질 덴너비츠 전투가 한창 진행되던 오후 3시~4시까지의 전황은, 하나의 경로로 3개 군단을 움직이겠다는 네의 약간 비상식적인 계획이 결과적으로는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했습니다.  후방에서 레이니에의 군단이 조금씩 도착하여 투입되면서 프랑스군은 좌익을 점점 더 넓고 강하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각 군단들이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 움직이다가 이렇게 뜻하지 않게 벌어진 전투에 다른 군단들이 제때 현장에 투입되지 못했다면 상황은 제2의 그로스비어런 전투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오후 4시경이 되어 우디노의 군단이 현장에 다 도착하자, 우디노도 현장에서 상황을 파악하고는 바로 코 앞에 있는 레이니에의 좌익으로 병력을 투입하여 프랑스군의 좌익을 더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중과부적인 .. 2024. 7. 29.
휴전 (14) - 베르나도트의 운수 좋은 날 원래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나폴레옹과의 싸움에 있어서 스웨덴의 도움이 절실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스웨덴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전장에서 승리는 결국 누가 더 많은 총검과 대포를 동원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었는데,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구가 많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구가 각각 3천만에 육박했던 프랑스와 러시아에 비하면 인구가 240만 정도에 불과했던 스웨덴은 초라한 수준의 병력만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영토를 절반 이상 빼앗긴 프로이센은 인구가 975만에서 450만으로 줄어드는 봉변을 당했지만, 그래도 스웨덴의 2배에 달하는 인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장 자신의 영토와 바로 인접한 작센에서 전투가 벌어지다 보니 일종의 .. 2023. 10. 2.
1812년 - 누구 편에 붙어야 하나 (하) 어떻게 보면 온 유럽이 휩쓸리게 되는 1812년 러시아 침공이라는 난리통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를 이간질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벌어지게 되자 오스트리아는 한발짝 물러나는 얌체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당연했는데,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러시아를 두들겨 패는 동안 떨어지는 콩고물, 즉 발칸 반도 분할에서 좀더 많은 땅을 땅을 주워먹으려 했을 뿐 뭔가 숭고하고 원대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것은 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주사위 놀음이라서, 제아무리 나폴레옹이라고 해도 프랑스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체는 애초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측에 가담하는 것은 시간 문.. 2019. 7. 22.
스톡홀름의 프랑스 왕 (10편) - 로또를 맞은 것은 누구인가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국민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 즉 러시아로부터 핀란드를 되찾아오는 임무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건 북구의 촌뜨기 스웨덴 사람들이 국제 사정을 몰라서 가진 소원일 뿐,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웨덴 사람들의 소망을 처리하는데 있어, 자신이 그저 지시받은 목표를 무조건 수행해내는 단순무식한 장군이 아니라 목표 설정 자체부터 재검토하는 진정한 국가 지도자급 인물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증명해보입니다. 그는 떠오르는 강대국 러시아로부터 핀란드를 되찾아오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설령 나폴레옹의 힘을 빌어 일시적으로 되찾아온다고 해도 그건 일시적인 만족감을 줄 뿐, 결국 반드시 러시아와 끝없는 전쟁을 불러올 뿐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러시.. 2018. 8. 27.
스톡홀름의 프랑스 왕 (9편) - 알았다면 뽑지 않았을 왕세자 아우구스트 왕세자와 폰 페르센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도 사태는 험악했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국왕의 역할일텐데, 카알 13세는 정작 거의 아무 역할을 못 했습니다. 이미 1809년 11월 이미 한차례 심장마비를 일으킨 이후 건강 문제로 인해 국정에 거의 참여를 못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스웨덴의 조야는 모두 안정을 원했는데, 이 혼란이 끝나기 위해서는 강력한 후계자를 조속히 선출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했습니다. 문제는 카알 13세의 왕비 샤를로타(Hedvig Elisabet Charlotta) 왕비였습니다. 살해된 폰 페르센과 함께 구스타프파의 수장 노릇을 해왔던 여걸이던 그녀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구스타프 왕자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2018. 8. 20.
스톡홀름의 프랑스 왕 (8편) - 왕세자와 백작의 죽음 이야기를 다시 1809년 초 스웨덴으로 돌리겠습니다. 구스타프 4세를 쿠데타로 축출하고 카알 13세를 새 국왕으로 새운 스웨덴은 이미 노쇠한 카알 13세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카알 13세의 아들들은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기 때문에 카알 13세가 서거하고 나면 왕가 후손이 끊어질 판이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유럽 왕가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고, 보통 제일 가까운 외국 왕가나 외국 귀족의 자제를 데려와 왕으로 삼는 일이 많았습니다. 딱히 불화가 일어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스웨덴은 새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이냐를 놓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대체 그 후보자들이 누구누구였길래 이런 갈등이 생겼을까요 ? 아마 베르나도트를 데려오는 것에 대해 반대가 심해서 갈등이 생겼나.. 2018. 8. 13.
스톡홀름의 프랑스 왕 (7편) -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 1806년 11월,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다부를 돕지 않았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욕을 먹어야 했던 베르나도트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시 상황이었고, 그야말로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도망치던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기 위해 베르나도트를 포함한 프랑스군은 승리를 만끽할 여유도 없이 강행군을 해야 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군단은 뮈라의 예비 기병대 및 술트의 군단과 함께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장군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고 있었지요. 프랑스군의 맹추격에 퇴로를 끊긴 블뤼허는 11월 5일, 과거 한자 동맹의 주요 항구 도시인 뤼벡(Lübeck)에 입성했습니다. 당시 뤼벡은 프로이센의 영토가 아닌 중립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프로이센의 패잔군 약 1만7천이 성 앞에.. 2018. 8.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