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보면 온 유럽이 휩쓸리게 되는 1812년 러시아 침공이라는 난리통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를 이간질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벌어지게 되자 오스트리아는 한발짝 물러나는 얌체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당연했는데,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러시아를 두들겨 패는 동안 떨어지는 콩고물, 즉 발칸 반도 분할에서 좀더 많은 땅을 땅을 주워먹으려 했을 뿐 뭔가 숭고하고 원대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것은 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주사위 놀음이라서, 제아무리 나폴레옹이라고 해도 프랑스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체는 애초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측에 가담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의 사위라는 인척 관계로 맺어진 관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초에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를 이간질한 실제 이유, 즉 영토 문제도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좋든싫든 프랑스측에 가담하도록 압박했습니다.  당장 흑해로 흘러가는 도나우강 하류 지역, 그러니까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 중에서 오스트리아가 자기 것이라고 침을 발라놓았던 몰도바-루마니아 방면으로 러시아군이 진격해오자 오스트리아의 입장은 무척 초조해졌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을 위해 편성하는 야전군의 규모가 무려 40만이 넘는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자, 그 정도라면 프랑스군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보고 오스트리아도 1812년 3월 나폴레옹 진영에 합류합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끝까지 얌체처럼 그야말로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정도인 3만의 병력을 제공하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했습니다.  

스웨덴도 끝까지 어느 쪽에 붙을까 저울질을 하며 눈치를 보던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어찌 보면 북구의 스웨덴은 프랑스의 진격로와는 발트해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서 지리상으로 크게 중요하지 않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꽤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당장 러시아령 핀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언제든지 당장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나라였거든요.  게다가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해협, 즉 외레순(Öresund, 영어로는 The Sound) 해협이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다는 점도 중요했습니다.  이미 프랑스 측에 붙은 덴마크의 헬싱고르(Helsingor) 요새와 스웨덴의 헬싱보리(Helsingborg) 요새 사이의 해협은 특히 좁았는데, 거리가 10km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해안포로 사용되던 36파운드 대포의 최대 사거리가 3.7km 정도였고, 유효 사거리는 고작 600~700m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두 요새 사이를 통과하는 영국 수송선이나 전열함이 크게 손상을 입을 염려는 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당시 범선들의 열악한 항행 능력을 생각하면, 특히 스웨덴 군함들이 이 해협을 가로막기라도 한다면 영국 선박들로서는 상당히 부담을 느낄 만한 일이었습니다.  

 

(덴마크 측의 헬싱보르그와 스웨덴 측의 헬싱보리 위치입니다.   저 해협만 틀어막으면 발트해는 사실상 호수가 됩니다.  코펜하겐이 위치한 덴마크의 큰 섬인 젤란트의 반대쪽 해협도 물론 항행은 가능합니다만, 그 쪽은 얕은 바다 등이 많아서 훨씬 항행에 불리하다고 하네요.)

 

(이건 함포로 사용되는 36 파운더 포이긴 합니다만, 해안 요새에서도 주로 이 36 파운드 포를 해안포로 썼습니다.  해안 요새에서는 좀 높은 위치인 성벽 위에 이런 대포를 놓았기 때문에 해수면에 위치한 전열함보다는 조금 더 멀리 포탄을 날려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1812년을 앞두고 스웨덴의 인기는 상종가를 치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노르웨이를 주겠다며 스웨덴을 유혹했고, 나폴레옹은 핀란드를 주겠다며 호객행위를 했습니다.  우스운 점은 이 모든 땅들이 결국 남의 땅이라는 점이었지요.  당시 노르웨이는 프랑스의 굳건한 동맹국인 덴마크의 영토였고, 핀란드는 바로 몇 년 전에 알렉산드르가 스웨덴으로부터 빼앗은 영토였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르나 나폴레옹이나 자기 것은 내주기 싫고 상대편의 땅을 내주겠다는 공수표를 남발한 셈이었으므로, 스웨덴은 국제 외교전에서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무척 냉철하게 판단을 해야 했습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스웨덴은 딱 적임자를 실권자로 두는 행운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스웨덴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국왕 카알 13세(Karl XIII)도 아니요 뿌리 깊은 스웨덴의 귀족 세력 연합체인 의회도 아닌, 바로 나폴레옹의 껄끄러운 친척이자 전직 프랑스군 원수, 현직 스웨덴 왕세자였던 베르나도트(Bernadotte)였습니다.  

 

 

(오늘날 스웨덴 왕가의 시조이신 베르나도트, 아니 카알 15세 전하이십니다.)

 



애초에 스웨덴이 프랑스 장군이자 나폴레옹의 친척인 베르나도트를 굳이 모셔와서 왕세자로 삼은 것은 러시아에게 상실한 옛 영토 핀란드를 나폴레옹의 위세를 등에 업고 되찾아보려는 스웨덴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도 그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웨덴 사람들만 몰랐을 뿐, 베르나도트는 애초에 나폴레옹과 좋은 관계가 아니었고, 그래서인지 아니면 정말 그의 냉철한 두뇌로 주변 정세를 정확히 분석 파악해서인지 스웨덴의 살 길은 러시아와 넓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쪽 핀란드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서쪽 노르웨이를 손에 넣는 것이라고 이미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판단이 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측에 붙느냐 러시아 측에 붙느냐는 고민은 베르나도트로서도 다시 한번 전체 상황을 되짚어 보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때 어느 쪽에 붙느냐 하는 것이 국가 전체의 흥망성쇠를 판가름지을 도박이었으니까요.  그러는 사이에 프랑스도 러시아도 애간장이 탔고, 베르나도트는 이렇게 인기가 급상승한 스웨덴의 위치를 한참 동안이나 즐겼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가 너무 질질 끌어서였는지 아니면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스웨덴의 협조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아서였는지, 베르나도트로 하여금 별다른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엘베(Elbe) 강 일대의 프랑스 동맹군을 지휘하던 다부(Davout)가 러시아 침공을 위한 사전 작전의 일환으로, 1812년 1월 발트해 남쪽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Pomerania)를 침공해버린 것입니다.  애초에 스웨덴은 이 지역을 방어할 능력도 의지도 전혀 없었으므로 프랑스군은 이 지역을 무혈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베르나도트는 운명이라는 듯이 러시아와 동맹을 맺습니다.  

이런 외교전에서 막차를 탄 것은 오스만 투르크였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로에서 멀리 떨어진, 겉으로 봐서는 직접 개입할 여지가 없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야말로 프랑스와 연합할 이유가 충분한 나라였고 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시까지 러시아와 계속 전쟁을 벌어고 있는 교전 국가였거든요.  나폴레옹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나 아일라우 전투를 치를 때에도 러시아군 주력 부대의 상당수는 저 남쪽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장에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비록 지리적 위치 때문에 프랑스군과 합류하여 공동 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지만, 러시아의 남쪽 국경의 전선을 계속 유지하기만 해도 나폴레옹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투르크군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더라도 러시아로서는 그 넓은 전선에 적어도 수 만의 병력을 유지시키고 있어야 했으니까요.  러시아로서는 나폴레옹과의 일전을 앞두고 어떻게 해서든 오스만 투르크와의 교전 상태를 종식시켜야 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라는 뻘짓으로 한동안 프랑스와의 관계가 틀어지긴 했지만, 전통적으로 프랑스편이었고 또 나폴레옹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오스만 투르크는 마지막까지 어느 쪽에 붙는 것이 유리한가를 놓고 고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동안 오스만 투르크가 잃었던 많은 것들, 즉 이집트와 발칸 반도 등의 영토를 모두 회복시켜주겠다며 10만의 군대를 동원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망해가던 오스만 투르크에게 10만군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나폴레옹이 얼마나 허세가 가득한 인간인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에게는 나폴레옹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약속보다는 당장 코 앞에서 대포를 들이대고 협박을 해대는 러시아와 영국이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영국 지중해 함대는 러시아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이스탄불을 폭격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었고, 도나우 강 하류 지역에 집결한 러시아군은 몰도바를 집어삼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1812년 5월, 오스만 투르크는 오늘날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국경인 프루트(Prut) 강을 경계로 하는 평화 협정을 러시아와 맺습니다.  이로써 러시아는 오랫동안 오스만 투르크와의 남쪽 국경에 묶여있던 대군을 북쪽으로 불러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루트 강의 위치입니다.  오늘날 루마니아와 몰도바, 우크라이나 사이를 흐르는 강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외교전에서는 나폴레옹의 완승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온 유럽이 나폴레옹 편에 선 것에 비해, 러시아 편에서 함께 싸워줄 국가는 유럽 전체에서 영국과 스웨덴 정도 밖에 없었는데, 사실 스웨덴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나라였고 영국도 유럽의 반대편인 스페인에서의 공세로도 숨을 헐떡이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 침공을 결코 쉽게 보지 않았습니다.  1807년 폴란드 지역에서의 작전을 통해 광활하고 삭막한 동구의 평원을 침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무나 뼈저리게 잘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보급 문제에 있어 기존에 없던 규모의 준비를 시작합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Prut
https://en.wikipedia.org/wiki/36-pounder_long_gu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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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후니74 2019.07.22 06: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온 러시아 침공에 있어 시대상을 잘 알게 되었네요.

  2. 유애경 2019.07.22 06: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도 프랑스도 남의땅을 가지고 스웨덴에게 호객행위...표현이 참 재미있어서 웃고 and 잘보고 갑니다.

  3. 메뚝 2019.07.22 0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한주 쉬었다 오셔서 더 반갑네요~

  4. 2/28일 입대 2019.07.22 1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파륜이 보급 준비라니! 결말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읽을수록 빠져드는 느낌이네요♡

  5. LOL 2019.07.22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단 잘 읽었습니다, 한가지 최근에 있었던 흥미로운 사건에 관련하여 이렇게 서양사에 해박하신 나시카님의 고견을 여쭙고자 합니다.

    베르나도트가 다시 등장해서 드리는 질문으로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인들의 핀란드 수복숙원이 민족의 잘못된 욕망이라고 평가했다고 여기서 두번째로 언급하셨습니다. 저는 上편 댓글서 이런 내용을 봤는데요.

    한국의 상황에서 자기보다 손도 안닿을만큼 강한 전범국의 역사적 사죄를 받아내려는 한국인의 의지는 여기 치이고 저기치이던 허섭스레기 스웨덴인들의 숙원과 같다고 블로그 주인장님도 여기시는지, 그리고 이 문제에서 베르나도트와 동일한 시각을 가지시는지 많이 궁금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스웨덴왕이 된 프랑스인 단원을 연재할 때는 베르나도트의 스웨덴인의 대러시아 역사숙원을 위험한 욕망이란 평가와 핀란드를 포기해야 한다는 시각을 정확하다고 묘사하셨구요

    또한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단원을 연재할땐 나폴레옹의 전략상 베이직 요소를 나시카님은 다음같이 적으셨던걸 기억합니다, 이건 제가 드리고자 싶은 질문인데 당시 그것을 나시카님은 이길 수 없는 승리를 쥐는 영웅적 행위보다 이길 수 있는 상황에만 싸워서 백전백승을 얻어낸다는 내용으로 설명을 하셨습니다.

    이길 수 있는 싸움만 싸운다. 최근에 있었던 재밌는 일이란게 이겁니다 바로

    최근에 sbs 방송인 원일희가 나라 구한게 의병이 아니다, 정권차원에서 이순신, 죽창가, 의병모집 운운하면서 선동술을 일삼는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해서 이겨야 한다고 말을 하고 결국 짤렸습니다.

    15일 오후 방송된 프로그램 마지막 부분에 ‘[원일희의 직설] 반일 감정 자극이 해법은 아닙니다’라는 클로징멘트를 했다.
    원 앵커는 “1910년 국채보상운동, 1997년 IMF 금 모으기 운동 기억하자, 이순신 장군은 단 12척의 배로 나라를 구했다, 의병 일으킬 사안이다, 동학 농민운동 때 ‘죽창가’ 불렀다. 대통령, 민정수석, 안보차장, 여당의원, 같은 맥락의 발언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원 앵커는 “청와대와 여당의 방향이 엿보인다”며 “싸움, 필요하다면 해야죠”라고 했다. 이어 그는 “그러나 전쟁은 이길 전쟁만 해야 한다”며 “질 싸움에 끌려 들어가는 거, 재앙”

    출처 :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

    ㄴ 이런 발언인데 질싸움은 안해야 한다, 이길 싸움만 해야한다, 이 말대로라면 나폴레옹의 기본강령과 원일희의 발언은 일치합니다. 원일희가 잘못된 말을 한 걸까요, 어떻게 보세요?

    • nasica 2019.07.23 08: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에도 한번 적은 바가 있었는데... 저는 제 아이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싸움이란 일단 안 하는게 좋지만, 꼭 싸워야 할 때가 있다. 그건 우리가 정의로운 편일 때도 아니고, 이길 수 있는 때도 아니고, 지든 이기든 싸워서 얻을 것이 있을 때이다."

      답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 고로 2019.07.23 08:42  댓글주소  수정/삭제

      흠 일본이 대한제국 잡아먹고 대동아공영권 외칠때도 nasica님과 동일한 논리 펼쳤을듯요..

    • LOL 2019.07.23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nasica/의문형 종결을 하신걸 보면 알고하신 응답일거 같습니다만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응답을 받아서 감사한것하곤 별개로 말씀대로 답변으로 만족할 응답은 아닙니다,

      본질문 2가지는 구체적인데 해주신 응답은 그냥 형이상학적인 나시카님의 신좁니다, 추상적이고. 이렇게 말씀들 드리는걸 무례하다고 여기지는 말아주십시오, 이렇게 딱딱하게 표현을 하는건 응답이 의문만 더 남겨서 그렇습니다 --

      나시카님같이 준프로께서 이렇게 형이하적인 질문에 형이상으로 시같이 대답을 하셨단건 추상적이어도 이 질문에 답변으로 삼기에 아귀가 딱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하셨다든가. 추상적인 심리를 생각으로 형태화하고 언어로 한번 더 구체화하면 심리, 그러니까 나시카님이 지니신 욕망하고 그걸 답변용으로 치환한 언어사이에 인지부조화가 발생, 그게 양방간 쉽게 융합이 안된단 걸로 분석하면 제 망상이겠죠?

      이 두 개 경우수중 해당되는게 전자라면 의문만 더 남긴다 드린 말처럼 새 의문이 생깁니다,
      대일분쟁을 시속의 싸움으로 보신다면 대일분쟁이 한국에 -를 상쇄해서 순이익으로 +를 남기는가, 그 +는 계측가능하고 실체적인가 아니면 표현이나 인식은 해도 실체가 없거나 아예 형체 이전에 고정된 형태가 없는 무언가인가(ex:국민감정),
      거기다가 굳이 ‘정의로운 편이 아닐 때도’라는 전제가 있다면, 그리고 적합타 여기셔서 이 시로 답변을 삼으셨다면 나시카님의 생각 속 이 문제에서 한국은 악인가, 적어도 불의하단걸 의미하나

      나폴레옹사상 베르나도트의 판단이 한국 사례에 적용이 가능할까, 동시에 나폴레옹의 강령이 적절하다면 원일희의 발언은 마찬가지로 적절한가. 의사표현을 예 아니오로 해도 될 내용이거든요. 그런데 약간 당혹스럽게 아드님까지 거론하심서 우리가 얻는게 있다면 이기지 못해도 우리가 악당이어도 싸워야한단 말씀은 들으니까 이걸 읽은 기억이 날만큼 멋지긴 합니다만 화법이 우주적인데요

    • LOL 2019.07.23 2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치.시사성이 내포된 질문을 게시한데 이유가 있다면 하필 스웨덴왕 베르나도트가 연관이 돼있고, 그리고 앵커 원일희 사건도 연상시키는 뭔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SBS 관계 방송인이라고 부러 관계라는 형용사를 넣은건 원일희가 SBS가 아니라 SBS랑 분리경영되는 CNBC, 다시말해서 본사차원 지상파 네임드도 아니라 어느정도 쩌라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프로이센 전쟁에 불을 댕기는데 일조한 사건이 있었잖습니까, 인쇄공장 사장을 나폴레옹이 친히 잡아다 죽여서 프로이센의 국민감정을 건드린 그 사건 말씀입니다

      원일희 하차사건은 또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원일희 하차건을 꺼낸 이유기도 합니다. 경제정책실장 김수현이 뻘소릴 뻥뻥하다 3진 아웃으로 잘리고 공정위에서 그 자리로 대신 간 김상조도 대통령이랑 초근거리 관계도상에 있으면서 섣부른 소리 하다가 총리한테 입조심하라고 경고받곤 깨갱한게 이번 달 일입니다.

      그리고 민정수석이고 차기 법무장관 내정자 아니면 킹크랩으로 도장찍힌 김경수 대신 총선나갈 조국, 대통령의 총애를 쓸어가는 조국이 저런 의병, 죽창, 이적 이런 막가는 말들을 쏟아내는데, 원일희가 디스한 조국이 저렇게 파격으로는 몇갑절이나 되는 개인플레이를 하고도 당정청의 일치단결한 지원을 받는단건 이건 조국이 조국이 아니라 대통령 문재인을 대리해서 하는 발언들이란 거잖아요? 그렇죠?

      원일희는 방송인 나부랭이가 대통령이 하달하는 지령에 개기고 짤린 겁니다, 이런걸로 보면 트럼프가 저 발광을 하는데도 언로가 안막히는 미국은 확실히 민주주의 최첨단 국가입니다.

      [원일희 / 앵커 : 오늘 제가 직설의 마이크를 내려놓습니다. 일본의 경제보복, 잘못됐고 철회돼야 한다, 그러나 대응은 외교 협상이어야 한다. 문맥, 취지, 의도, 명확했음에도 의병 비하했다, 친일파다, 익명의 청와대 고위관계자 멘트까지 동원된 친일 공세는 집요했고, 어둠속 칼날과 손은 보이질 않습니다. 다르면 너 빨갱이구나, 프레임 씌우던 시절처럼 다르면 넌 친일파다, 언론에 씌운 굴레입니다.]

      ㄴ 이게 당사자 클로징 멘튼데
      청와대가 동원된 압박까지 있었다고 그대로 믿자면 왕정시대 기준 베르나도트가 말년에 언론탄압을 자행하고 나폴레옹이 인쇄소 사장을 납치해 죽인거랑 차원이 비슷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저게 저럴 급의 멘튼가, 고민해 볼 수 있지 않겠어요?

    • nasica 2019.07.24 08: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LOL// 아 저런... 제가 아이에게 '정의롭지 않더라도 이익이 생기면 싸우라'고 가르친 건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편이 정의라면 이기든 지든 어떤 희생이 나더라도 무조건 싸우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다들 자신이 정의의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정의를 위해서는 무조건 싸워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세상에는 싸움 그칠 날이 없을 것 같습니다.

    • 엌ㅋㅋ 2019.11.29 18: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낙베 토착왜구가 가암히 협상안을 제시했다네요. 지켜야 하는 가치가 이낙베의 명줄이 아니라면 기꺼이 촛불을 들고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6. unit_inv 2019.07.22 2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흔히 생각하는것처럼 보급 무시하고 러시아 들어갔다가 당한게 아니라 나름 준비를 했었군요.

  7. reinhardt100 2019.07.22 2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담이지만 18세기부터 오스트리아는 도나우강부터 테살로니카까지 자기들이 가져야 할 영토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러시아의 국가적 사명이었던 콘스탄티노플 수복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1877년 러시아가 터키를 말 그대로 묵사발내버리고 콘스탄티노플 근방까지 진격하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나라가 오스트리아였죠. 자칫하다가 발칸에서 그대로 날아가 버릴 판이었으니까요.

    프루트강과 드니스트르 강 사이가 현재 유럽 최빈국인 몰도바인데 여기도 꽤나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드니스트르 강과 프루트 강 사이는 평아지대라 방어선 구축이 안 되는 지역이니까요. 어떻게 해서든 드니스트르 강을 국경선으로 해야 그나마 방어가 가능했는데 여기가 뚫려버리면서 더 이상 터키는 발칸에서 안정적인 방어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실제로 1877년 전쟁 때 터키의 프루트 강 방어선을 개전이후 단 일주일도 못 되어 붕괴시킨 러시아군은 그대로 불가리아 프레베까지 진격할 수 있었죠. 프레베 요새 공성전이 5개월이나 끌었기에 망정이지 프레베가 일찍 낙성되었다면 정말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사태가 터질 뻔합니다.

    나폴레옹 전쟁과 60년 차이나지만 1877년 전쟁이 꽤나 중요한 이유가 이 전쟁은 터키 군사력의 척추를 말 그대로 꺾어버려 다시는 러시아를 상대로 단독으로 전면전을 걸 생각을 못 하게 만들었고 발칸이 더 이상 터키의 안마당이 아님을 누가 봐도 확실하게 했다는 겁니다.

    • 2/28일 입대 2019.07.23 1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오오...정말 늘 댓글에서 배웁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급 궁금해진 게 있어요! 오스트리아는 도대체 뭘까요? 인종의 단위? 민족적 단위?? 대체 얼기설기 얽힌 조각보 같은 국가(?)가 어떻게 그렇게 커졌던건지...

    • Spitfire 2019.07.23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국 그렇게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누가 발칸의 주인이냐를 놓고 수십년을 더 투닥투닥 하다가 큰 일이 터지고 말았지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왕가가 유럽의 중심이었던 시절에는 사실 민족이나 인종이 지금처럼 국가의 정체성을 정하는 것이 아니었지요. 왕가나 귀족이 전쟁, 외교, 결혼, 상속으로 일정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 영토였으니까요. 다양한 민족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신하로 지내다가, 30년 전쟁 터지면서 한번 분열되고 민족주의가 생기면서 너덜너덜해졌지요.

      나시카님이 영국 해군에 대해서 이야기하실 때 이미 언급하셨지만, 영국 선원은 ‘영국인’이 아니라 단지 ‘영국해군에서 근무하는 자’입니다. 물론 그렇게 바다밥 먹으면서 영어 배우고, 운이 좋아 그동안 모은 돈으로 영국령 어딘가 정착하면 영국인이 되는거지요. 그당시에 무슨 영주권이나 비자가 있지도 않았다 보니...

    • reinhardt100 2019.07.24 2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답변 드렸어야했는데 Spitfire님이 다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저한테 배울게 별로 없는데 좋게 봐주시니 고맙네요.

  8. Spitfire 2019.07.22 2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웨덴이 핀란드를 얻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할 수 없었던건 베르나도트를 왕으로 추대해서였다기보단, 폴타바 이후로 북방의 패권이 러시아로 넘어가는 바람에 스웨덴의 국력으로 러시아를 침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베르나도트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누구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면 정말 바보가 아닌 이상 그정도 사리판단은 하지요. 물론 그런 사리판단을 전혀 못하거나 단순히 분위기와 감정만으로 정확한 판단을 무시할 경우에 닥쳤던 끔찍한 결과도 역사에 무수히 많긴 합니다만...

  9. 고로 2019.07.23 08: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와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는데.. 에르도안이 이슬람신앙과 반미정신 등에 엎고 이번에 러시아랑 손을 잡으니... 결과가 궁금함..

    • 터키는 강하다 2019.07.23 1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러시아와 터키가 친해진 것처럼 보여도 러시아가 계속 아르메니아를 후원하고,터키가 계속 아제르바이잔을 후원하는 이상 결국은 양국이 서로 적대할수밖에는 없다고 봅니다.시리아 내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일시적으로 협력한다고 봐야지요.시리아와 맞닿아있는 터키 동부는 쿠르드족 극좌 테러단체 쿠르디스탄 노동당의 봉기와 IS,알 카에다 등의 이슬람 테러분자들의 침투로 시리아랑 별 차이 없는 수준입니다.시리아 사태 초기부터 반정부군을 지원한 대가긴 한데,아무튼 치안이 굉장히 악화되었지요. 에르도안이 정말로 친러로 가고 싶다고 해도 터키는 그게 가능한 나라가 아닙니다.우리나라보다 영토도 훨씬 넒고,이슬람교도 국가답게 젊은 인구도 많은데다가 NATO에서 미국 다음가는 대군을 가지고 있으니 강해보여도, 내실은 훨씬 작은데다가 고령화되고 있는 극동의 대한민국만도 못해요.터키 군대는 한국군과 규모와 질적 측면에서 비슷한데 터키 경제는 규모에서 유럽이나 일본은커녕 우리나라만 못합니다.따라서 그 거대한 군대를 운영하려면 미국의 원조가 반드시 필요하죠.미국과 결정적으로 척을 지게 되면 당장 터키가 자랑하는 군대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겁니다. 뭐 사실 에르도안도 표 때문에 이슬람 원리주의자 코스프레하는 세속주의자에 가까운지라 터키의 호메이니는 결코 되지 못할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국민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 즉 러시아로부터 핀란드를 되찾아오는 임무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건 북구의 촌뜨기 스웨덴 사람들이 국제 사정을 몰라서 가진 소원일 뿐,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웨덴 사람들의 소망을 처리하는데 있어, 자신이 그저 지시받은 목표를 무조건 수행해내는 단순무식한 장군이 아니라 목표 설정 자체부터 재검토하는 진정한 국가 지도자급 인물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증명해보입니다.


그는 떠오르는 강대국 러시아로부터 핀란드를 되찾아오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설령 나폴레옹의 힘을 빌어 일시적으로 되찾아온다고 해도 그건 일시적인 만족감을 줄 뿐, 결국 반드시 러시아와 끝없는 전쟁을 불러올 뿐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러시아는 끊임없이 서방으로 진출하려는 나라였고, 또 핀란드와는 넓은 국경선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핀란드인들은 스웨덴의 통치를 좋아하지도 않았으니 핀란드인들의 지지도 없이 러시아로부터 핀란드를 지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스웨덴 사람들에게 '꿈 깨라, 너희들은 씹지도 못할 고깃덩이를 탐내고 있다'라고 핀잔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이 진정한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핀란드가 아니라 노르웨이를 손에 넣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노르웨이를 보유하고 있는 덴마크는 러시아에 비하면 매우 허약한 상대였고, 또 지정학적으로도 노르웨이만 손에 넣으면 스칸디나비아 반도 내에서 스웨덴은 외적의 침입을 우려하지 않고 단단한 천연 국경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핀란드와 러시아 사이의 국경은 무려 1340km나 됩니다.  지금도 핀란드는 러시아의 간섭과 영향을 끊임없이 받고 있지요.  Finlandization이라는 말이 사전에 실릴 정도니까요.   위 지도에서 붉은색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게 빼앗긴 핀란드 영토입니다.)




(베르나도트의 구상처럼 노르웨이를 손에 넣으면, 스웨덴은 바다에 의해 유럽과 분리되어 국방에 있어 매우 안전한 상태가 됩니다.)




나폴레옹이 베르나도트에게 프랑스에 대한 적대 행위 금지 약속을 받아내려 했던 것처럼, 베르나도트도 나폴레옹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노르웨이였습니다.  아마 자신의 퇴직금조로 생각했던 것일까요 ?  아마 이때가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의 뒤틀린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것입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그에 응하지 않고 그 기회를 뻥 차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눌지도 모르는 스웨덴에게 줄 선물을 프랑스 말을 잘 따르는 착실한 동맹국인 덴마크로부터 뜯어낼 수는 없기 떄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만 놓고 생각해보면 이때 베르나도트에게 노르웨이를 선물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덴마크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노르웨이를 양보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받는다고 해도 프랑스로부터 떨어져 나갈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노르웨이를 선물함으로써 스웨덴을 확실한 프랑스 동맹으로 끌어들였다면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의 패배가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노르웨이를 선물꾸러미에 넣어오지는 못했지만, 베르나도트는 1810년 11월 2일 스톡홀름에 도착하여 엄청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는 여기서 이름을 스웨덴식 카알 요한(Karl Johan)으로 바꾸고 또 스웨덴 법률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종교도 카톨릭에서 개신교인 루터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는 스톡홀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단히 좋은 인상을 주며 재빨리 인기와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심지어 평민인 그가 왕세자로 책봉된 것을 내심 못마땅히 여기고 있던 국왕 카알 13세와 그의 왕비 샤를로타도 베르나도트를 각각 따로 만나보고는 그의 사람됨과 군주로서의 그릇에 크게 호감을 느꼈습니다.  카알 13세는 베르나도트를 처음 만나 본 뒤,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왕세자 책봉에 있어서) 난 꽤 큰 도박을 벌였는데, 결국 내가 이긴 것 같구만."


샤를로타도 베르나도트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신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가 스톡홀름에 도착하자마자 인기를 독차지하며 대세남이 된 것은 결코 그의 사교성이나 예의범절이 훌륭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잘 준비된 군주였는지는 도착 3일 뒤인 1810년 11월 5일 스웨덴 의회(Riksdag)에서 행한 다음 연설 내용을 직접 읽어보시면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간만에 불어 공부하는 셈 치고 불어 원문과 대조 번역했습니다.  물론 구글 번역기 도움을 크게 받았습니다.)



« J'ai vu la guerre de près, j'en connais tous les fléaux ; il n'est point de conquête qui puisse consoler la patrie du sang de ses enfants, versé sur une terre étrangère. J'ai vu le grand Empereur des Français, tant de fois couronné des lauriers de la victoire, entouré de ses armées invincibles, soupirer après l'olivier de la paix. Oui, Messieurs, la paix est le seul but glorieux d'un gouvernement sage et éclairé ; ce n'est point l'étendue d'un Etat qui en constitue la force et l'indépendance : ce sont ses lois, son commerce, son industrie, et par-dessus tout, son esprit national. »


"나는 전쟁을 가까운 거리에서 봐왔습니다.  나는 그 모든 참상을 잘 압니다.  외국 땅에 뿌려진 그 자식들의 피에 대해 조국이 위로받을 정도의 정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토록 많은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또 그 무적의 군대에 둘러싸인 위대한 프랑스 황제가 평화의 올리브 가지 뒤에서 한숨을 내쉬는 것을 봐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평화야말로 현명하고 계몽된 정부의 유일하게 영광스러운 목표입니다.  국력과 독립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국가의 영토 넓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국가의 법과, 통상과, 산업과, 그리고 무엇보다 그 국민 정신입니다."



어떻습니까 ?  어느 현대 국가에서 대통령이 하는 연설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현대적인 명문 아닌가요 ?  제가 베르나도트에 대해 이렇게 따로 긴 시리즈를 쓰게 된 것도 이 연설문을 보고 너무나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군인이었으나 결코 총칼의 힘으로 스웨덴을 부강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고, 나폴레옹의 부하였음에도 나폴레옹의 지시에 따를 생각이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핀란드를 바라는 스웨덴 사람들의 욕망 때문에 스웨덴 왕세자로 선출되었으면서도 결코 그 위험한 욕망을 채워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샤를로타 왕비가 끈질기게 구스타프 왕자를 지지했던 것은 그녀가 속절없는 보수 혈통주의자이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처음 아우구스트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덴마크인도, 러시아인도, 프랑스인도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스웨덴인이고 싶다'라고 말한 바 있었습니다.  즉, 스웨덴은 더 이상 러시아와 같은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독립국가가 되는 것을 무엇보다 바랐던 것입니다.  


베르나도트는 스톡홀름에 오자마자 정말 스웨덴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으며, 자신이 결코 나폴레옹의 강아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핀란드에 대한 스웨덴인들의 욕망이 얼마나 위험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향한 것인지를 설득했고, 대신 노르웨이를 손에 넣는 것이 스웨덴이 영원히 스웨덴으로 남을 수 있는 길이라는 점을 조야에 알렸습니다.  그는 이런 진정성과 뛰어난 식견에 바탕을 둔 리더쉽을 통해서, 비록 강력한 의회에 의해 선출된 외국 태생의 왕세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실질적인 모든 권력을 손에 넣었습니다.  특히 의회는 분열되어 있었고 국왕 카알 13세는 건상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베르나도트의 권력은 자연스럽게 굳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현실론자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곧 스웨덴에 대해 대륙봉쇄령에 참여할 것과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영국과의 교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던 스웨덴 경제에 큰 타격을 주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에 대해 이를 갈면서도, 그의 요구에 마지못해 응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프랑스의 무력에 굴복할 수 밖에 없어서 영국에 선전포고한다는 제스처를 뚜렷히 드러냈기 때문에, 영국도 사실상 스웨덴을 중립국으로 간주했습니다.  비록 교역량은 1/10 수준으로 급감할 수 밖에 없기는 했지만 영국과의 무역도 암암리에 계속 되었습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베르나도트가 오늘날 프랑스에서 배신자 취급을 받는 것은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편이 아니라 동맹국 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베르나도트의 잘못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폴레옹의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차후 러시아 침공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813년 10월의 라이프치히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프랑스어로 Bataille des Nations, 즉 여러 나라들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거의 모든 유럽국가들이 참전한 대전투였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빠졌지만, 이탈리아와 나폴리까지 참전했으니까요.  여기서 패배하면서 나폴레옹의 몰락이 결정됩니다.)




카알 13세가 베르나도트의 왕위 계승에 대해 '도박에서 이겼다'라고 표현한 것은 정말 제대로 된 표현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베르나도트가 운수대통하여 평민 하사관에서 시작하여 왕위에 올랐다고들 이야기하지만, 그의 업적을 보면 로또를 맞은 것은 베르나도트가 아니라 스웨덴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위대한 왕이었다는 점은 오늘날 스웨덴의 중립노선을 확고히 닦았다는 점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과거 17세기 북구의 사자라고 불리며 30년 전쟁에서 맹활약했던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Gustavus Adolphus)는 스웨덴을 강국으로 이끌었다고는 하지만 반면에 스웨덴을 기나긴 전쟁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많은 스웨덴 청년들이 외국 땅에서 싸우지 않아도 될 전쟁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지요.  


그러나 베르나도트는 제6차 대불동맹전쟁에 참전한 것과 스웨덴과의 합병을 반대하는 노르웨이에 대한 군사작전 외에는 전혀 전쟁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무조건 항복을 받아낼 수도 있었던 노르웨이 전쟁에서도 노르웨이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등 매우 관대한 협상 조건을 내걸어 최대한 전쟁을 빨리 끝냈지요.  스웨덴 역사상 이 1814년 노르웨이 작전이 스웨덴이 참전했던 마지막 전쟁이었습니다.  스웨덴의 중립과 그에 따른 안정과 평화가 오늘날 스웨덴의 발전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북구의 사자 구스타프 아돌프입니다.  비록 멋있는 별명을 달아서 폼은 나겠지만, 그런 멋진 별명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스웨덴 병사들이 죽어야 했을까요 ?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불멸의 영광을 누리고 있지만, 그의 전쟁으로 상처입은 많은 국가들 중 가장 많은 젊은이들을 잃은 국가가 바로 프랑스입니다.)




또 그는 경제왕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가 국민 경제에 대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와 함께 일했던 스웨덴 귀족인 트롤-바흐트마이스터(Trolle-Wachtmeister)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가 왕세자 시절, 스웨덴 궁정에서 통치에 대한 실무 교육을 받을 때  베르나도트는 다른 것은 몰라도 경제 부분에 대해서만은 자신을 가르칠 사람이 없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스웨덴에 나보다 더 휼륭한 군인이 300명이 있다고 해도 뭐라고 반박하지 않겠네.  하지만 난 경제 부문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 특별한 수업을 거쳤으므로, 그 부문에 대해서만은 내가 스웨덴 내에서 최고 전문가라고 자신하네."   


베르나도트는 말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이 경제왕임을 증명해보였습니다.  그는 내륙 교통 통신망에 투자하고 통상을 장려하며, 민법과 형법을 정비 반포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등 나폴레옹의 프랑스 통치를 상당히 모방하여 내치에 매우 열정적으로 힘을 썼습니다.  그 결과, 그의 26년 통치 기간 동안 인구가 크게 늘었습니다.  그의 노년기에는 노르웨이를 제외한 스웨덴 국내의 인구만 해도 구스타프 4세가 핀란드를 잃기 직전 스웨덴과 핀란드의 인구를 다 합한 것보다 더 많았습니다.  밖에서 잃은 것은 안에서 찾은 셈이지요.   그도 왕위에 오르고 난 뒤 점차 우클릭하여 언론 검열을 하는 등 욕을 먹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로 그는 스웨덴 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국민들로부터도 사랑받는 인기왕이었습니다.  




(그의 검열 정책 등으로 인해 인기가 추락했을 때 일부에서는 그를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는 평생 국민들로부터 상당한 인기를 누리는 행복한 왕이었습니다.  물론 가장 큰 것은 평화와 번영을 목표로 하는 그의 통치가 훌륭했기 때문입니다만, 일개 사병에서 출발하여 나폴레옹 휘하 원수까지 올랐다가 왕이 된 그의 경력에 대해, 국민들이 '어때 우리 왕 쩔지?' 라며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로써 1810년의 주요 사건이었던 베르나도트의 스웨덴 왕세자 책봉건이 끝났습니다.  마무리는 카더라 통신으로 끝내겠습니다.  흔히 베르나도트는 젊은 시절 열혈 자코뱅으로서 가슴에 'Mort aux Rois' (Death to the Kings, 왕들에게 죽음을)라는 문신을 새겼고, 이로 인해 왕이 된 이후 절대 사람들에게 옷을 벗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의 사후에 그의 시신을 검시한 궁정 관료들에 의해 그것이 사실로 드러났다는 이야기를 (기억은 안나지만) 저도 어딘가에서 읽었습니다.  그러나 영어판 Wikipedia에 따르면 그런 문신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는 소문이며, 그런 소문이 나게 된 것은 1833년 공연된 'Le Camarade de lit' (잠자리 친구)라는 프랑스 연극에서 어떤 늙은 척탄병이 '지금은 스웨덴 왕이 된 베르나도트가 그런 문신을 새겨가지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연극 속에서도 나중에 그 문신은 흔히 알려진 대로 'Mort aux Rois'가 아니라 'Vive la république' (공화국 만세)라는 문구인 것으로 나옵니다.  실제로 그런 문신이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된 바가 없다고 합니다만, 확실한 것은 분명히 젊은 시절 베르나도트는 열혈 공화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1797년 남긴 기록에 '원칙과 확신에 의한 공화주의자로서, 나는 왕당파놈들과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다짐하는 문구가 있다고 합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fr.wikipedia.org/wiki/Charles_XIV_Jea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Hedvig_Elisabeth_Charlotte_of_Holstein-Gottorp

https://en.wikipedia.org/wiki/Union_between_Sweden_and_Nor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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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애경 2018.08.27 07: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은 없겠죠! 그래도 베르나도트는 확실히 안팎으로 훌륭한 왕이었던것 같습니다.

  2. 석총 2018.08.27 0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외젠 보아르네와 사돈을 맺을 칼 요한 그러고보니 조세핀은 유럽의 1대 할머니네요

  3. 웃자웃어 2018.08.27 0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헌데, 베르나도트가 연합국에 참전하지 않더라도, 나폴레옹의 몰락은 사실상 기정사실이 아닌가요?

    • Dogswellfish 2018.08.27 15:2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그나마 팽팽하던 전세를 연합군 쪽으로 돌려놓은 것은 스웨덴 군의 도착때문이었습니다.

    • 웃자웃어 2018.08.27 2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즉 스웨덴이 연합군으로 참전한게 나폴레옹의 몰락을 앞당겼단 이야기군요. 나폴레옹의 몰락 자체는 스웨덴이 참전하지 않아도 피할수 없겠지만.

  4. 곰소문 2018.08.27 1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대한 영웅담, 드디어 마치셨군요. 수고하셨습니다.

  5. TheK의 추천영화 2018.08.27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6년간이었군요.
    훌륭하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6. 카를대공 2018.08.28 0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0편에 걸친 이야기를 통해 저도 단순한 배신자 이미지였던 베르나도트를 조금이나마 새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워낙 오래된 인상이라 아직 얄밉긴 합니다ㅋㅋ)

    예전에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에 대해 경쟁심을 불태우며 특히 경제에 대해 잘 안다고 호언장담 했던 나시카님 블로그의 장면이 생각 납니다.
    그 땐 잘 몰랐는데 오늘 보니까 그게 허언이 아니었군요.

    오히려 내치만 보면 나폴레옹보다 나을 수도?


    그리고 10편에 걸친 이야기를 보며 또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예전에 봤던 굉장히 인상적인 문장이 생각납니다.

    베르나도트 이야기를 하시며 진정한 영웅은 배신을 당하지 않는다고 칭기스칸을 예시로 드셨었지요.
    (그게 본문인지 댓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찾아보니 칭기스칸은 놀랍게도 그 넓은 영토를 운영하면 정말 한 번도 배신을 안 당했더군요.깜짝 놀랐습니다.

    확실히 나폴레옹은 성격적인 결함 때문인지 베르나도트에게 너무 어정쩡한 자세로 대한거 같습니다.

    처리할거면 확실히 처리하거나(모로 장군처럼) 아니면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어야지요......

  7. 카를대공 2018.08.28 0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두에 러시아-핀란드 관계를 보니 문득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가 떠오르네요.

    인터넷하다 주워들은 얘기지만 미국쪽 싱크탱크에선 한국이 결국 러시아 간섭을 받는 핀란드 꼴이 될 것이다,이리 예상하는 곳도 있다더군요.


    나시카님과 댓글에 나타나시는 많은 고수분들 고견이 궁금합니다.정말 한국 미래는 그쪽에 가까운걸까요?

    (베르나도트 마지막편에 느끼는게 많다보니 주절주절 말이 많아졌네요.양해 부탁드립니다)

    • nasica 2018.08.28 2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러시아는 좀 뜬금없네요 ?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미 중국 경제권에 어느 정도 얽혀있다고 생각합니다. 반가운 일은 아니지만 중국과의 장사가 돈이 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reinhardt100 2018.08.28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실상, 구소련 혹은 러시아의 간섭을 받는 핀란드 꼴이 벌써 되어 가는 중입니다. 지금 정권 하는 짓 보면 답 나옵니다.

      사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핀란드는 구소련의 위성국가나 다름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소련연방의 17번째 준가맹국이라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고, 실제로 코메콘의 준회원국이었으니까요. 심지어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핀란드를 (준)회원국으로 가맹시키려고 했었습니다. 게다가 핀란드에서는 케코넨 시절에 반소행위금지법까지 알아서(?) 제정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대신 이 정도로 기어줬으니(?) 소련이 핀란드에게 경제적인 혜택을 좀 주긴 했습니다. 구 소련이 필요로 하는 서방제 물자가 코콤(대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의 통제에 걸리지 않기 위해 핀란드 기업들을 통해 우회적으로 수입하면서 꽤 바가지를 일부러 씌워주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석유파동 당시, 소련은 핀란드에 수출하는 탄화수소류에 대해서만큼은 '사회주의 형제국에 적용하는 가격'을 동일하게 적용해주어 핀란드 경제가 석유파동에서 꽤나 자유롭게 해주기도 합니다.

      지금도 핀란드는 러시아 의존도가 꽤나 높은 편입니다. 당장 러시아가 핀란드에 탄화수소류 수출하지 않으면 겨울에 난방도 못할 수준이고 노키아가 박살나버린 상황에서 핀란드는 더더욱 러시아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니까요. 러시아 경제가 제재 때문에 어려워지면서 상대적으로 핀란드까지 어려워지면서 핀란드 경제도 연일 추락하고 있는게 현실이니까요.

      한국이 '러시아(구소련) 간섭을 받는 핀란드'가 되지 않으려면 방법은 딱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일본-미국의 해양 3각동맹을 전방위적으로 굳건하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 방법밖에는 현재로써는 보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영구분단을 선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 웃자웃어 2018.08.29 14:31  댓글주소  수정/삭제

      현 정부는 한국이 대중무역의존도가 높아서 살살기는 것일뿐 100% 친중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 예로 중국이 미국의 관세폭탄에 맞서 한국에게 무역동맹을 제안했는데 거절당했죠.

    • reinhardt100 2018.08.29 17:52  댓글주소  수정/삭제

      웃자웃어) 무역동맹 제안했는데 이걸 덥석 물었으면 그냥 미국이 금융공세 제대로 걸었을 겁니다. 사실, 한국정부의 경제정책 중 가장 미국이 격분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환율조작의심인데 참여정부-실용정부 내내 이 문제 때문에 대립이 꽤 있었습니다. 환율 가지고 공세를 걸기 시작하면 지금 막을 방법이 전혀 없다시피합니다.

      장구벌레) 친중이 단순한 모토는 아닌 듯 싶습니다. 솔직히 미국이 보기에는 '중국몽'이라는 걸 대놓고 추종하는 듯이 보였던 거는 사실이니까요. 다만, 최근 중국이 미국한테 아작날 상황이라는 걸 좀 보면서 정신 차렸을려나 모르겠습니다.

    • 수비니우스 2018.08.29 18: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번정권 들어서 한미일 동맹이 약화됐다는 소리는 못들어본것 같은데... 설마 또 전승절 참가한다는줄 ㄷㄷ 남북한이 영구분단 까짓거 할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네덜란드하고 벨기에하고 영영 갈라섰듯이)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 대중국 무역을 확 줄여보는건 어떨까요?

    • 웃자웃어 2018.08.29 19:21  댓글주소  수정/삭제

      현 정부가 외교는 미국과 중국 양쪽을 대놓고 자극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대놓고 어느 한쪽을 자극했다간 대한민국경제가 2015년 부터 급격히 침체되기 시작했는데, 그 침체된경제에 치명타를 입으면, 국민들이 생계난에 시달리게 될테니까요.

  8. 투팍아마르 2018.08.28 1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회 연설문만 봐도 베르나도트의 영민함이 보이는것 같군요. 중급규모의 나라인 스웨덴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여 거기에 맞는 최선의 선택을 하므로써 전후 스웨덴이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큰 보상을 움켜쥔 뛰어난 왕인것 같습니다. 저 당시의 스웨덴에서 4강국에 둘러싸인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이 오버랩 되는건 저뿐만이 아니겠지요..

  9. reinhardt100 2018.08.28 2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 스웨덴이 노르웨이를 합병하는 것으로 핀란드를 대체하는게 국방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도 유리했다? 시대에 따라서는 그렇게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12세기부터 스웨덴은 핀란드라는 내부 식민지를 얻음으로써 덴마크나 러시아 같은 자신들보다 인구가 더 많은 국가를 상대로 비교적 대등하게 싸워왔습니다. 16세기 북방 7년전쟁부터 스웨덴-핀란드는 주변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자신들의 국력에 비해 훨씬 강력한 군사력을 투사하기 시작했는데 그 절정기가 17세기와 18세기 초반의 연이어 나온 전사군주들의 시대였습니다. '북방의 사자왕'구스타프 아돌프 2세-'전사왕'카를 10세-'유성왕'카를 12세 이 3명의 군주 휘하 스웨덴은 자신들의 본래 국력보다 훨씬 막강한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30년 전쟁 후반기부터 폴란드,러시아,덴마크를 연속적으로 공격하던 1631년부터 1660년까지 스웨덴은 30년 동안 말 그대로 전시체제로 돌아갔습니다. 더 올려잡으면 1563년의 북방 7년 전쟁 시절부터였으니까 100년간 전쟁이 일상화된 나라였습니다. 100년간 스웨덴-핀란드의 인구는 150만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때는 스웨덴-핀란드 인들로만 10만 병력을 동원할 정도였습니다. 왜 당시 이 나라가 그토록 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했는가? 북방의 2류 국가였던 스웨덴-핀란드에게는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거대한 군사력이 필수였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스웨덴-핀란드가 확장한 영토는 당시 인구 150만 국가 치고는 굉장히 넓었습니다. 당장, 켁스홀름(남부 및 서부 카렐리야), 잉게르만란트(에스토니아 북부), 리브란트(에스토니아 남부와 라트비아), 동부 포메른, (슈트랄준트 등의) 메클렌부르크 일부, 브레멘, 트뢰넬라그(트론헤임), 스코네 등이었고 전사왕 카를 10세 때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 절반을 확보했을 정도였는데 그 이유는 네덜란드 등의 차관에 의해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던 17세기 스웨덴 경제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거대한 군사력에 의한 주변국가의 부를 획득하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전사왕 카를 10세 같은 경우에는 스웨덴-핀란드-덴마크-노르웨이 모두를 통합한 스칸디나비아 반도 제국을 건설한 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러시아까지 모두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그 정도의 제국이면 스웨덴-핀란드의 경제를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스웨덴-핀란드가 사실상 유럽 2위 혹은 3위권 내의 군사대국으로써 중부 및 동부 유럽을 제패했던 시절, 스웨덴-핀란드 경제는 말 그대로 욱일승천의 기세였습니다. 인구 150만의 국가로써는 도저히 도달 불가능할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니까요. 30년 전쟁 당시에는 독일과 체코, 폴란드와 러시아 침공 당시에는 해당 점령지역에서 엄청난 부를 약탈해왔고 이걸 바탕으로 스웨덴이 자랑하던 구리와 철, 타르, 목재 등에 기반한 군수공업력을 갖추는데 성공했습니다. 실제로 스웨덴은 인구 만 단위의 도시가 그 전에는 없었지만 1660년대 이후 군수공업 등의 제조업이 급격하게 자리를 잡아가면서 만 단위의 도시가 등장, 급속한 발전을 17세기 내내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걸 맛본 스웨덴인들이 자신들의 경제 발전에 있어 동반자로써의 핀란드가 없어지는 것을 단순히 감정적으로만 봐야 할지? 의문입니다.

    참고로,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사왕 카를 10세는 대단히 유능했습니다. 북방의 사자왕 구스타프 아돌프 2세가 구축한 스웨덴군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것도 유명하지만, 이 왕이 했던 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해협 행진'이라는 전대미문의 작전을 실시했기 때문입니다. 1658년 초반에 발트 해가 얼어붙자 전투병력 8천명과 지원병력 4천명을 대놓고 발트 해에 밀어넣어 덴마크군의 방어선을 전부 붕괴시킨 작전이었는데 당시, 유럽 군사학계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죠. '더 이상 바다가 천혜의 방어선이 될 수 없다.'는 명제가 현실화된 것이었으니까요.

    • 카를대공 2018.08.29 14:14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데 현 정부가 정말 친중쪽 정권이 맞나요?요즘 인터넷을 보면 그렇게 비판하는 의견이 많긴 하던데요.

      경제적으로 친해지는거야 어쩔 수 없긴한데 궁극적으로는 저도 친미가 답이라고 보거든요.

    • 수비니우스 2018.08.29 1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17세기에야 잘나갔지만 18세기 초에 러시아한테 털리고 이후 국력이 러시아하고 비교할수 없게 된 스웨덴이 핀란드를 되찾기 위해 러시아하고 계속 척지는 행동을 하는게 19세기 초 스웨덴의 국익에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겠네요.

  10. 카를대공 2018.08.28 2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럴수가!제가 중국을 그만 러시아라고 잘못 쓰고 말았군요;;

    정신 못 차리고 혼동 일으킨 점 죄송합니다ㅠㅠ

    나시카님 관심 있으시다면 러시아 간섭 받는 핀란드,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낀 폴란드와 같은 우리나라 상황에 대한 포스팅도 가능하실지요?

    어떤 미국 석학은 세계에서 지정학적으로 가장 불운한 나라를 한국과 폴란드로 꼽더군요. . . . . .

  11. nashorn 2018.08.29 1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정학적으로 가장 불운한 국가는 20세기 중반전인..
    벨기에가 아닐지..
    통일된 한국이 오길 빨리 기다려봅니다

  12. 수비니우스 2018.08.29 1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여러분, 평화야말로 현명하고 계몽된 정부의 유일하게 영광스러운 목표입니다. "
    정말 현대 국가에서 대통령이 하는 연설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현대적인 명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앞뒤의 말도 굉장히 훌륭하네요.

  13. 나삼 2018.08.30 0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현 정부가 친중 친북을 어서 버리고 친미 로 돌아서서 한미일 동맹을 강화하는 쪽으로 돌아왔으면 합니다.

아우구스트 왕세자와 폰 페르센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도 사태는 험악했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국왕의 역할일텐데, 카알 13세는 정작 거의 아무 역할을 못 했습니다.  이미 1809년 11월 이미 한차례 심장마비를 일으킨 이후 건강 문제로 인해 국정에 거의 참여를 못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스웨덴의 조야는 모두 안정을 원했는데, 이 혼란이 끝나기 위해서는 강력한 후계자를 조속히 선출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했습니다.  


문제는 카알 13세의 왕비 샤를로타(Hedvig Elisabet Charlotta) 왕비였습니다.  살해된 폰 페르센과 함께 구스타프파의 수장 노릇을 해왔던 여걸이던 그녀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구스타프 왕자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공공연히 구스타프 왕자가 왕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민중의 지지를 받는 아우구스트 왕세자가 의문사를 당한 상황에서 구스타프 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될 경우 폭동이 일어날 것이 뻔했습니다.  아마 민중이 참는다고 하더라도 구스타프 4세를 쿠데타로 몰아냈던 스웨덴 군부가 가만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현실을 직면한 샤를로타 왕비도 한발 물러섰습니다.  그녀는 구스타프 왕자가 정 안 된다면 구스타프 집안의 원류인 홀슈타인(Holstein) 가문의 페터(Peter)가 왕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 없었습니다.  새 왕세자를 선출하는 회의는 외레브로(Örebro) 성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회의가 열리는 동안 샤를로타 왕비는 스트룀스홀름(Strömsholm) 궁에 사실상 연금되었습니다.  그녀의 간섭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스트룀스홀름(Strömsholm) 궁입니다.  노르딕 양식이라 그런지 왕궁치고는 상당히 단촐하네요.)




굳이 샤를로타 왕비를 연금시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전통적으로 스웨덴의 왕위는 의회(Riksdag)와 러시아가 결정하는 자리였거든요.  당시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강국인 프랑스의 눈치도 봐야 했습니다.  물론 이 회의에 러시아 대표나 프랑스 대표가 와 있지는 않았습니다만, 참석자들의 마음 속은 어떤 사람을 왕세자로 뽑아야 주변국들의 위협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인지로 복잡했습니다.  1810년 8월 21알 그 결과로 뽑힌 것이 바로 베르나도트였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이름이 스웨덴에 알려진 것은 뤼벡에서 스웨덴 포로들을 친절하게 대해준 사건이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사람들, 특히 군부에게 매우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지요.  칼 뫼르너가 독단으로 그에게 왕세자 자리를 권유한 것은 스웨덴 왕실의 분노를 살 정도로 처음에는 어처구니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만,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의외로 프랑스 군단장이자 당대 최고의 권력자 나폴레옹 황제의 인척인 베르나도트가 매우 합리적인 선택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도 천하의 나폴레옹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에 불과했고 경쟁 관계이던 덴마크도 나폴레옹의 보호를 받는 처지였으니, 나폴레옹의 친척을 왕세자로 뽑는다면 스웨덴도 자연스럽게 나폴레옹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스트룀스홀름 궁에 연금되어 있던 샤를로타 왕비는 베르나도트가 새 왕세자로 선출되었다는 것을 통보한 사람은 아델스바르드( Fredrik August Adelswärd)라는 관료였는데, 그는 평민이 스웨덴 왕위를 잇게 된 것에 대해 왕비께서 언짢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으나, 왕가의 안정을 위해 부디 기쁜 척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에 대해 왕비도 왕국에 안정만 가져올 수 있다면 누가 왕이 되더라도 환영하겠다고 말하며, 그에게 재능과 선량한 마음이 있다면 혈통이 어떤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매우 진보적인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샤를로타 왕비입니다.  이 분이 쓰신 일기는 자신의 사후 50년 이후에 출간해도 좋다는 취지로 씌여졌고, 실제로 1902년부터 조금씩 스웨덴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지금도 귀중한 스웨덴 왕실 역사 자료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스웨덴 왕비가 쓴 일기를 왜 스웨덴어로 번역하냐고요 ?  이 분은 일기를 프랑스어로 쓰셨거든요.  당시 유럽 상류 사회는 다 프랑스어를 쓰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니, 프랑스 사람인 베르나도트를 왕으로 모셔와도 일반 스웨덴 서민과 직접 이야기할 일이 없는 한 신하들과의 언어 소통 문제는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 말 미국 역사가인 슬로안(William Milligan Sloane)이 쓴 나폴레옹 전기(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에 따르면, 이때 베르나도트가 선출된 것은 프랑스에 대한 스웨덴의 정보망이 사실상 마비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대를 살고 계신 여러분과는 달리, 당시 스웨덴 귀족 사회와 군부에서는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의 미묘하면서도 팽팽한 긴장 관계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의심도 듭니다만, 살해된 폰 페르센이 스웨덴에서 높은 직위를 누렸던 이유 중 하나가 그가 마리 앙트와네트를 통해 프랑스 부르봉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폰 페르센은 스웨덴 귀족이면서도 프랑스군에 복무하며 심지어 미국 독립전쟁까지 따라 갔었지요.  왜 스웨덴 귀족이 그렇게 남의 나라 군대에 복무했을까요 ?  아니, 애초에 스웨덴 국왕이 왜 그런 것을 허용했을까요 ?  폰 페르센은 구스타프 4세의 아버지인 구스타프 3세의 심복이었는데, 그가 우연한 기회에 부르봉 왕가에 줄을 댔다는 것은 폰 페르센 개인 뿐만 아니라 스웨덴 전체를 위해서도 크게 이익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폰 페르센을 통해 당대 유럽의 손꼽히는 강국이었던 프랑스의 고급 정보들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나고 마리 앙트와네트가 처형되고, 이어서 폰 페르센까지 어이없이 죽어버리자 프랑스에 대한 스웨덴의 정보망에 큰 구멍이 뚫려 버리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 사이에 어떤 알력과 갈등이 있는지에 대해서 나폴레옹의 기관지나 다름없었던 르 모니퇴르(Le Moniteur Universel)지에서 상세히 있는 그대로 보도할 리가 없었으므로, 당시 나폴레옹의 측근들이 아니라면 그런 사실에 대해 알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 것입니다.



(르 모니퇴르 신문입니다.  1815년 7월 10일 판이니 워털루 전투 이후에 나온 신문입니다.  그래서 국왕(Le Roi)께서 누구누구를 무엇무엇으로 임명하셨다라는 소리가 나오네요.)




이렇게 순진한 스웨덴 사람들이 멋도 모르고 베르나도트를 자신들의 왕세자로 모셔가겠다고 프랑스에 통보해오자, 속이 뒤틀린 것은 당연히 나폴레옹이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그런 속내를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황제의 체면이 있는 걸요 !  그런데 나폴레옹은 체면이 좀 깎일 각오를 하고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세자가 되는 것에 충분히 초를 칠 수 있었습니다.  바로 베르나도트의 시민권 문제였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시민이자 나폴레옹 황제의 신민이었으므로 그가 스웨덴 왕세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프랑스 시민권을 버려야 했는데, 그렇게 시민권을 버리는 행위는 프랑스의 주권자인 황제 나폴레옹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이를 이용하여 베르나도트와 딜을 하나 성사시키려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시민권 포기 신청서를 들고 온 베르나도트에게 조건을 하나 내걸었습니다.  향후 스웨덴이 절대 프랑스에 대해 적대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베르나도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스웨덴 왕세자가 될 경우 자신의 의무는 프랑스가 아니라 스웨덴을 위한 것이 되므로, 그렇게 스웨덴의 국익에 반할 수 있는 약속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나폴레옹도 나름 당대의 영웅이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더 이상 치사하게 질척거리지 않고 쿨하게 이렇게 말하며 베르나도트의 신청서에 서명을 했다고 합니다.  


"가시오, 이제 당신과 나의 운명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지켜봅시다."    


스웨덴 사람들이 프랑스 내부 사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에 대해 이미 상당한 공부를 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스웨덴이 왜 자신을 왕세자로 택했는지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어떤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스웨덴이 당대 최고 권력자 나폴레옹의 부하이자 인척인 자신을 왕세자로 삼은 이유는 나폴레옹의 힘을 빌어 최근 잃었던 것을 되찾으려 함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핀란드였고, 핀란드는 러시아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과연 베르나도트는 이 어려운 퀘스트를 어떻게 수행했을까요 ?  



** 아마 다음 편이 베르나도트 마지막 편이 될 것 같군요.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Hedvig_Elisabeth_Charlotte_of_Holstein-Gottorp

https://en.wikipedia.org/wiki/Union_between_Sweden_and_Nor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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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곰소문 2018.08.20 08: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흥미진진 하네요. 일부러 스포일러 안하게 검색도 안하고 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lol

  2. nashorn 2018.08.20 1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는척 하면 안되겠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나폴레옹이 베르나도트를 좀 더 존중했으면
    나폴레옹한테 더 좋은 결과가 있을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3. 유애경 2018.08.20 14: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나도트가 왕세자가 되기까지 정말 여러가지-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조건과상황(?)이 얽혀 있었네요!
    여러모로 치사한 나폴레옹이 쿨하게 서명했다는것 까지도 ...

  4. 카를대공 2018.08.20 14: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베르나도트편을 읽으며 알게 된것이 의외로 왕세자가 되는 과정이 험난했으며 우연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군요;
    전 정말 스무스하게 된 줄 알았습니다.

    그건 그렇고 베르나도트도 맨 처음 나폴레옹 전쟁을 접했을 무렵엔 단순 배신자인줄 알았습니다만 그게 아니었군요.

    나시카님께서도 수차례 말씀하셨지만 괜히 거물이 아닌가 봅니다.

    이번편에서도 깡다구 보통이 아닌걸 보여주네요.

  5. TheK의 추천영화 2018.08.20 16: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과연. 과연. 정말 궁금합니다.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 멋지네요. ^ㅇ^*

  6. 하이텔슈리 2018.08.20 2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친척을 왕세자로 뽑는다면 스웨덴도 자연스럽게 나폴레옹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에서 '아 ... 할 말을 잊었습니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났습니다. 뭐 그게 이유 중에 하나였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서도 참...

    *.해결책이 아마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된다였죠? 그걸 정말 해냈고. (...)

이야기를 다시 1809년 초 스웨덴으로 돌리겠습니다.  구스타프 4세를 쿠데타로 축출하고 카알 13세를 새 국왕으로 새운 스웨덴은 이미 노쇠한 카알 13세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카알 13세의 아들들은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기 때문에 카알 13세가 서거하고 나면 왕가 후손이 끊어질 판이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유럽 왕가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고, 보통 제일 가까운 외국 왕가나 외국 귀족의 자제를 데려와 왕으로 삼는 일이 많았습니다.  딱히 불화가 일어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스웨덴은 새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이냐를 놓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대체 그 후보자들이 누구누구였길래 이런 갈등이 생겼을까요 ?  아마 베르나도트를 데려오는 것에 대해 반대가 심해서 갈등이 생겼나보다 라고 짐작하실 수 있겠지만, 놀랍게도 베르나도트는 아직 유력한 후보자 명단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정작 카알 13세의 왕비 샤를로타(Hedvig Elisabet Charlotta)를 비롯한 스웨덴 귀족들 중 상당수가 쫓겨난 구스타프 4세의 아들 구스타프 왕자(Gustaf Gustafsson von Holstein-Gottorp)를 차기 왕세자로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을 스웨덴에서는 구스타프파(Gustavianerna)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정확하게는 구스타프 왕자나 그 아버지 구스타프 4세에 대해 충성한다기 보다는, 1792년 암살된 구스타프 3세에 대해 충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스타프 왕자는 그의 손자이니, 당연히 그의 핏줄인 구스타프 왕자가 스웨덴 왕세자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카알 13세와 그 왕비 샤를로타에게는 조카 손자였던 구스타프 왕자는 겸손하고 똑똑하여 그의 아버지 구스타프 4세와는 꽤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으므로 샤를로타를 비롯한 구스타프파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었습니다.  




(못난이 구스타프 4세의 아들 구스타프 왕자입니다.  그는 1810년 당시 만 10세의 나이였고, 쿠데타 직후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습니다.  나중에 국외로 추방되어 오스트리아에서 Prinz von Wasa, 즉 바사 대공이라는 작위를 받고 원수 직위에도 올랐습니다.)




그러나 구스타프 왕자가 개차반이건 천재이건 쿠데타로 그의 아버지를 쫓아냈던 스웨덴 군부는 그를 왕세자로 세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스웨덴의 군부와 성직자들과 중산층 시민계급 그리고 농민들, 즉 사실상 스웨덴 전체가 모두 덴마크 공작의 아들이자 노르웨이 총독이었던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Christian August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Augustenborg)을 차기 왕세자로서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젊은 덴마크 귀족은 쿠데타를 주동했던 아들러스파르Georg Adlersparre) 장군 등 스웨덴 군부가 끌어들인 인물이었습니다.  스웨덴 군부는 처음엔 당시 덴마크 국왕이었던 프레데릭 6세(Frederick VI)를 차기 스웨덴 왕세자로 추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나폴레옹의 편에 섰던 프레데릭 6세가 프랑스의 적국인 스웨덴 국왕직을 겸직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거절하자, 꿩 대신 닭으로 당시 노르웨이 총독이던 아우구스트를 추대한 것이었습니다.  아우구스트는 꿩 대신 닭 치고는 매우 훌륭한 후보였습니다.  그는 노르웨이를 꽤 잘 통치하고 있어서 노르웨이 국민들로부터 평판이 매우 좋았습니다.  또 바로 최근에 있었던 스웨덴-러시아 간의 핀란드 전쟁에서 프랑스의 동맹이던 덴마크는 당연히 스웨덴의 적국이었는데, 당시 덴마크의 식민지이던 노르웨이는 스웨덴의 위기를 틈타 서쪽에서 스웨덴을 공격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아우구스트의 인기는 스웨덴에서도 높았습니다.  




(비운의 왕세자였던 칼 아우구스트(Carl August)입니다.  그는 원래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였다가 스웨덴 왕세자가 되면서 이름을 칼 아우구스트로 바꿨습니다.)



(아들러스파르Georg Adlersparre) 장군입니다.  자유주의 신봉자였고, 따라서 구스타프파와는 대립 관계에 있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위치는 어땠느냐고요 ?  그는 정말 어쩌다 우연히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가 뤼벡에서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스웨덴군 포로들의 지휘관이 뫼르너 장군이었는데, 아마도 그의 친척인 듯한 칼 뫼르너(Carl Otto Mörner)라는 20대 후반의 젊은 귀족이 베르나도트를 만나러 왔다가, 대체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자기 멋대로 '당신, 왕이 되고 싶지 않소 ?' 라며 스웨덴 왕세자 자리를 제안한 것입니다.  이 어처구니 없는 행동에 대해 스웨덴 왕가는 뫼르너를 체포함으로써 분노를 표시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이름은 그렇지 않아도 팽팽하던 스웨덴 내의 갈등 관계를 악화시키는 결과만 낳았습니다.  베르나도트도 스웨덴 왕세자 자리에 대해 관심이 있더라는 이야기를 아들러스파르 장군이 샤를로타 왕비에게 전하자 샤를로타 왕비는 구스타프 왕자에 대한 지지를 아들러스파르 장군의 면전에서 표명했고, 아들러스파르 장군도 스웨덴 군부는 그 누구도 구스타프 4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왕비에게 대드는 등 분위기가 험악해졌던 것입니다.  




(칼 뫼르너의 초상입니다.  그가 뤼벡 전투에서 베르나도트에게 은혜를 입은 뫼르너(Carl Carlsson Mörner) 장군과는 무슨 관계였는지는 찾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친척 관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 양반은 젊은 시절 이렇게 저지른 사고의 중요성에 비해, 나중에 크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장 무난한 후보가 왕세자로 책봉되는 것이 순리였고, 그 적임자는 바로 노르웨이 총독 아우구스트였습니다.  그는 1809년 말 왕세자로 결정되어 이듬해 1월 온 스웨덴 국민들의 환영 속에 스웨덴에 입국했습니다.  물론 구스타프파 귀족들은 그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구스타프파의 수장은 바로 명작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남자 주인공이자 실제로도 마리 앙투와네트와 가까운 친구였던 폰 페르센(Hans Axel von Fersen) 백작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왕국의 총리이자 원수(Marshal of the Realm)으로서 국왕 카알 13세에 이은 왕국 서열 2위의 권력자였습니다.  이런 권력자가 새로 책봉된 왕세자에 대해 '제발 확 죽어버려라'라고 속으로 바라고 있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들 설마 왕국의 제2인자가 감히 왕세자의 목숨을 노리겠는가 라고 생각했지요.





(폰 페르센 백작입니다.  이 양반이 베르사이유의 장미라는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미남자였냐고요 ?  예, 그랬던 것 같습니다.  1793년 3월 네덜란드 니어빈든(Neerwinden) 전투 직전에 폰 페르센은 주프랑스 러시아 대사와 함께 프랑스군 사령관 뒤무리에(Charles Dumouriez) 장군을 만났는데, 폰 페르센 백작이 이름을 밝히며 자기 소개를 하자, 두무리에 장군은 '당신의 잘 생긴 얼굴을 보고 당신이 누군지 짐작을 했었어야 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폰 페르센은 뒤무리에 장군이 전형적인 프랑스인답게 허풍이 심하고 자신감이 가득차 있으며, 똑똑하지만 조심성도 없고 판단력도 없다고 평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왕국에 들어온지 불과 4달만인 5월 28일 갑자기 아우구스트 왕세자가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부대 사열 중 난데없이 말에서 떨어진 뒤 사망했는데, 부검 결과 그는 갑작스런 뇌졸증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스웨덴 국민들에게는 그런 설명보다는 구스타프파 귀족들이 왕세자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스웨덴 국민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이 모든 일의 배후로 의심받던 폰 페르센에게 집중되었습니다.


6월 20일, 아우구스트 왕세자의 국장이 있던 날 스톡홀름 시내의 민중은 술렁거렸습니다.  왕국의 원수였던 폰 페르센이 기마 근위대와 함께 운구 행렬을 선두에서 이끌었는데, 불운했던 왕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민중들은 그 모습을 보고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탄 마차에 처음에는 동전 같은 것들이 날아오더니, 곧 이어 돌맹이가 하나둘씩 날아들었습니다.  곧 우박처럼 쏟아지는 돌팔매 세례에 마차 유리창이 깨졌고, 흥분한 시민들이 달려들어 마차에서 말을 떼어내고 폰 페르센을 끌어냈습니다.  이런 만행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무장한 근위대원들은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구스타프파를 견제하는 스웨덴 군부가 뭔가 지시를 해놓은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병사들이 자신을 구해줄 생각이 1도 없다는 것을 눈치챈 폰 페르센은 자신의 멱살을 잡은 민중들을 밀어내고 거리의 아무 집에나 뛰어들어 몸을 피했으나 곧 뒤쫓아 온 군중들에게 끌려나와 참혹하게 밟혀 죽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한때 마리 앙투와네트의 연인이라는 소문이 났던 미남자 폰 페르센 백작의 최후였습니다.




(폰 페르센 백작이 살해되는 장면입니다.  그를 밟아죽인 스웨덴인은 평범한 평민이었는데, 투옥되었다가 나중에 왕이 된 베르나도트에 의해 사면되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합니다.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는 마리 앙투와네트의 처형에 충격을 받은 폰 페르센이 냉혹한 정치가가 되었다가 민중의 손에 살해되는 것으로 짧게 묘사됩니다.)

 



이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폰 페르센과 함께 구스타프파의 지도급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던 샤를로타 왕비의 목숨까지도 분노한 시민들의 폭력으로 위협받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아우구스투스 왕세자가 죽었다고 해서 유력한 2인자였던 구스타프 왕자가 다시 왕세자로 들어올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정말 군소 후보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베르나도트가 정말 강력한 왕세자 후보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August,_Crown_Prince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Hedvig_Elisabeth_Charlotte_of_Holstein-Gottorp

https://en.wikipedia.org/wiki/Carl_Otto_M%C3%B6r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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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석총 2018.08.13 1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극적인 인생역전극

  2. nashorn 2018.08.13 18: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쉽게 된줄 알았는데..
    참 이세상에 쉬운일이 없나보군요
    어쨋건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 시대의
    최후의 승자군요..
    빈의 그재상과 함께 말이죠

  3. 석공 2018.08.13 2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더위 조심하세요.^^

  4. 유애경 2018.08.15 06: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페르센 백작의 젊은시절 초상화는 정말 미소년으로 그려져 있더군요!
    그가 민중에게 학살당한 이유는
    앙트와네트 왕비의 처형으로 인해 민중을 증오하게 된것이 직접적인 원인인가 했는데 그러한 정치적인 배경도 있었네요!

    잘보고 갑니다.

  5. 2018.08.15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6. 효혜 2018.08.17 09: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베르사이유의 장미라는 갓띵작을 알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글 엄청 재밌어요. 학교 친구들한테도 추했어욬ㅋㅋㅋ. 저희 세계사나 경제나 사회문화나 윤리 선생님이셨으면 좋겠어요

1806년 11월,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다부를 돕지 않았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욕을 먹어야 했던 베르나도트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시 상황이었고, 그야말로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도망치던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기 위해 베르나도트를 포함한 프랑스군은 승리를 만끽할 여유도 없이 강행군을 해야 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군단은 뮈라의 예비 기병대 및 술트의 군단과 함께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장군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고 있었지요.  


프랑스군의 맹추격에 퇴로를 끊긴 블뤼허는 11월 5일, 과거 한자 동맹의 주요 항구 도시인 뤼벡(Lübeck)에 입성했습니다.  당시 뤼벡은 프로이센의 영토가 아닌 중립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프로이센의 패잔군 약 1만7천이 성 앞에 나타나자 입성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블뤼허는 막무가내로 성문을 열고 입성했습니다.  중립이고 나발이고 당장 갈 곳이 없었던 것이지요.  블뤼허는 절대 이 도시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이지는 않겠다는 약속을 하며 도시 의회를 달랬습니다.  이는 사실 말이 안 되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도시에서 프로이센군이 순순히 항복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바닷가에 몰린 프로이센군이 도망칠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블뤼허가 그런 약속을 한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뤼벡 시민들에게서 병사들을 먹일 대량의 술과 음식, 말 사료와 함께 병사들의 밀린 급료를 지불하기 위한 거액의 현금을 순순히 받아내려면 뭔가 약속을 해야 했던 것이지요.  아니나다를까, 당장 다음날 새벽 프랑스군이 뤼벡 앞에 나타나자 블뤼허는 이 도시의 성벽에 의지하여 결사 항전을 선언했습니다.  




(오늘날의 뤼벡시 전경입니다.  덴마크 국경 인근에 있습니다.)



(당시 뤼벡 시의 지도입니다.  강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공격하기가 용이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경악하는 사람들은 뤼벡 시민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뤼벡 시내에는 1천8백의 스웨덴군도 있었던 것입니다.  제4차 대불동맹전쟁에서 전혀 존재감없는 동맹국이었던 스웨덴군은 당시 프로이센군과 함께 하노버 지방의 탈환을 위해 발트해 연안에 와 있었는데, 프로이센이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참패를 당하자 허겁지겁 스웨덴 본국으로 후퇴하던 중이었습니다.  원래 이들은 배편을 구해 스웨덴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10월 31일 중립 도시 뤼벡으로 들어왔던 것인데, 바람 방향이 맞지 않아 출항을 못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생각지도 않게 프로이센군과 프랑스군이 중립을 무시하고 이 도시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겠다고 하니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


뤼벡은 트라베(Trave)라는 강의 만곡부에 위치한 도시였고, 비록 낡았지만 과거에는 꽤 튼튼했던 성벽으로 보호된 도시라서 잘 하면 프랑스군의 공격으로부터 적어도 며칠, 어쩌면 몇 주 정도 버틸 수 있다고 블뤼허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침 6시부터 시작된 실제 전투의 결과는 그 기대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튼튼하다고 믿었던 북문이 베르나도트의 강력한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오후 1시경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전투가 장기화될 것이라고 믿고 사령부인 시내 여관에 머물고 있던 블뤼허는 갑자기 프랑스군이 시내까지 들이닥치자 깜짝 놀라 아들과 함께 간신히 몸을 빼 탈출했으나, 그와 함께 있던 샤른호스트(Gerhard von Scharnhorst) 등 참모진은 고스란히 프랑스군의 포로 신세가 되어야 할 정도로 베르나도트의 공격은 훌륭했습니다.  이 곳에서 대략 병력의 절반 정도만 건져서 도망쳤던 블뤼허도 갈 곳은 없었습니다.  결국 다음날 자존심 강한 블뤼허는 체면을 위해 "빵도 탄약도 다 떨어졌기 때문에 항복한다" 라는 문구를 항복 문서에 집어넣는 것으로 만족하고 베르나도트와 뮈라, 술트에게 항복해야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북해의 괴물'로 재탄생하시게 되는 샤른호스트 장군입니다.  평민 출신으로서 승진과도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나, 나폴레옹에게 탈탈 털린 프로이센이 정신을 차리고 개혁을 하면서 빛을 보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때 포로가 되어 고생한 것도 나름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고 하면 좀 무리수겠지요.)



(뤼벡 시장으로 사용되던 광장에서 벌어진 혈투입니다.  뤼벡 시민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을 것입니다.)




블뤼허는 그렇게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세우고 항복하면 끝이었겠지만, 그의 고집 때문에 정작 불벼락을 맞아야 했던 것은 중립이었던 뤼벡 시민들이었습니다.  당시 전쟁의 불문률에 따르면 항복한 도시에 대해서는 약탈이 일체 허가되지 않았지만 공성전 끝에 성문을 깨뜨리고 탈취한 도시는 적어도 하루 정도는 병사들이 마음껏 약탈할 수 있었습니다.  뤼벡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벌어진 약탈과 강간, 살해 사태의 직접적인 책임은 물론 프랑스군에게 있었지만, 블뤼허도 적어도 일부 책임은 져야 했습니다.  베르나도트를 비롯한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뤼벡이 중립 도시이며, 프랑스군에게 저항한 것은 프로이센군일 뿐 뤼벡 시민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름대로는 미쳐 날뛰는 병사들을 제지하기 위해 노력은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중의 일이긴 하지만 맹장 우디노(Oudinot)도 그렇게 약탈에 광분한 병사들을 제지하다가 병사들에게 살해당할 뻔 한 일이 있었을 정도로, 그런 병사들을 말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장교들도 그냥 적당히 말리는 척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름 신사인 척 하려 노력했던 베르나도트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베르나도트에게 색다른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포로로 잡힌 적군 중에 프로이센군 외에 스웨덴군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웨덴군 1천8백은 원치 않았던 전투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는지 거의 전부가 그대로 항복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들 말고도 프로이센군도 약 4~5천 정도가 포로로 잡혔는데, 이들은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 포로들을 마치 선심쓰는 것처럼 스페인 국왕에게 보내며 '농삿일에 쓰시든 건설 현장에 쓰시든 마음대로 하시라'며 마치 노예처럼 취급할 정도였으니까요.  베르나도트는 그런 양심에 찔리는 살육의 현장에서 만난 이 운 나쁜 외국 군인들을 프로이센군처럼 모질게 대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들을 포로가 아니라 마치 조난 당한 선원들처럼 대해주었고, 특히 그 총지휘관인 뫼르너(Carl Carlsson Mörner) 장군을 비롯한 장교들에게는 상당히 친절하게 마치 손님처럼 대해주었습니다.  오쥬로(Augereau)와 란(Jean Lannes)의 부관으로 일했고 나중에 매우 뛰어난 회고록을 남긴 마르보(Jean Baptiste Antoine Marcellin de Marbot) 장군도 그 회고록에서 '베르나도트는 이 이방인들에게 자신이 가정 교육을 잘 받은 사람으로 보이도록 특별히 애를 썼다'라고 다소 비꼬는 투로 기술한 바 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뤼벡 전투의 상황이 그렇게 다소 양심에 찔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지 이 처음 보는 스웨덴인들, 그것도 꾀죄죄한 포로들로부터 나중에 뭔가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베르나도트는 평생 두 번 다시 이 스웨덴 사람들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처참한 전쟁 범죄가 벌어지던 뤼벡에서 이 별 뜻 없이 행한 작은 선의가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되돌아옵니다.



-- To be continured



** 갑자기 여기서 마태복음 25장 35절 ~ 40절 부분이 생각나네요.  우리 모두 곤경에 처한 이웃에게 도움을 베풉시다.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L%C3%BCbeck

https://en.wikipedia.org/wiki/Carl_Carlsson_M%C3%B6rner

https://en.wikipedia.org/wiki/Gebhard_Leberecht_von_Bl%C3%BCcher

http://kcm.co.kr/bible/kor/Mat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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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애경 2018.08.06 0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태복음의 저 구절이야말로 예수님이 설파하신 사랑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전쟁에 죄없이 휘말려 고통당한 뤼벡시민들도 참 안됐네요!
    전쟁으로 피해보는건 항상 엄한 사람들뿐...

    잘보고 갑니다.

  2. 잡지식 2018.08.06 0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심없는 선행은 이자가 큰 법이외다'
    -파우스트-

  3. TheK의 추천영화 2018.08.06 08: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오늘 그 계기가 되는 암시가 열린
    느낌인데 맞겠죠. ^ㅇ^*

  4. Park Sang yeoul 2018.08.06 2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덕분에 잘 보고있습니다!

  5. reinhardt100 2018.08.06 2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뤼허의 총참모장이었던 샤른호르스트에 대해서 흔히들 '아버지가 빈농인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출신으로써 독일영방 소국에서 사병부터 진급하여 장성계급까지 진급한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이건 붉은 프로이센군을 추구했던 동독 국가인민군과 동독정부의 선전 때문입니다. 사실, 샤른호르스트의 아버지는 '융커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소지주급의 부농 출신에다 프로이센군의 고참 하사관으로써 장기 복무까지 했던 지역 유지급이었던 사람'입니다. 왜? 동독군이 붉은 프로이센군을 추구했냐고요? 동독의 영역 상당수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핵심 지역이었던데다가 무엇보다도 서독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통성만을 계승하며 독일제국의 정통성은 모두 포기한다.'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련의 괴뢰 같다는 이미지가 있던 동독으로써는 프로이센에 대한 향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이러다보니 동독은 군의 사상적 본류는 에스파냐 내전 당시 공화국 측으로 참전했던 '에른스트 텔만 대대'로 하였지만 막상 운용의 본류는 프로이센군으로 채택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샤른호르스트가 하노버 같은 독일영방 소국을 돌아다니면서 복무하다가 프로이센군에 지원할 때 이력서 말미가 꽤나 당시에 센세이셔널 했습니다. 일개 중령밖에 안 된 사람이 내건 조건이 워낙 파격적이었으니까요. '본인의 지원서를 접수 후 채택해주실 경우, 귀족작위를 수여해 줄 것과 군의 총참모장 자리를 약속해주시기 바랍니다'였으니까요. 그런데 당시 프로이센 국왕은 오히려 이를 다 받아주었죠. 샤른호르스트가 나름 학자 군인으로써 꽤나 날렸거든요.

    샤른호르스트가 의외로 간과되는게 프리드리히 2세 시절, 음지의 총참모장으로써 활약했던 안할트의 뒤를 이어 프로이센 참모부를 재건하였다는 것과 프로이센 상층부 관료들과 왕족들을 윽박질러 장교단의 개방화 및 농노 해방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겁니다. 전자야 워낙 유명해서 넘어가더라도 후자는 꽤나 중요합니다. 프리드리히 2세가 희대의 전술가로써 대승을 몇차례나 거두었지만 하나 큰 실수를 했던 게 장교단을 귀족 출신들로만 채우게 하는 일을 저질렀다는 겁니다. 이 때문에 프로이센 장교단은 '유능하지만 계급 고정성 때문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평가를 이미 7년 전쟁 이전부터 들을 정도로 경직성이 심각했었는데 장교단 개방을 통해 일거에 해소해 버린 겁니다. 흔히, 1807년 농노해방령이 관료계급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샤른호르스트가 꽤나 이를 강경하게 주장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병력 부족 해소 때문입니다. 인구 절반이 날아가 버린 상황에서 국민 개병제를 대거 확장하지 않으면 병력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으니까요.

  6. 2018.08.07 0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그늘버섯꽃 2018.08.07 09: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지식들은 다 어디서...와~
    감탄하고 갑니다

  8. 투팍아마르 2018.08.07 16: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유럽계 백인들은 정작 성경에 나오는 저 좋은 구절을 행할 흉내조차 내지는 않았다는것이 에러죠...^^

    • ㄴㄴ 2018.08.23 2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건 너무 인종주의에 치우친 말처럼 들릴 수 있네요. 동서양사 모두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행태는 결국 똑같습니다. 차이는 그때그때 얼만큼의 힘을 갖고 있었냐의 것 뿐이었죠.

  9. 카를대공 2018.08.07 2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렇게 베르나도트가 왕이 되는 밑밥이 깔리는군요.

    그런데 나폴레옹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프로이센을 개무시 했을까요?
    이전에도 그렇고 이후에도 멸시에 가까운 감정을 일관되게 보여주던데 이유가 있나요?

  10. 석공 2018.08.07 2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은 본문보다 마지막 성경구절이 더 마음에 와 닿네요...^^

1806년, 상황 판단 능력이 떨어지던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가 겁도 없이 나폴레옹에게 도전한 제4차 대불동맹전쟁에서 프로이센은 건국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 했습니다.  특히 10월 14일은 아마 프로이센 역사상 최악의 날이었을 것입니다.  프로이센 전체 야전군이라고 할 수 있는 12만 대군이 예나와 아우어슈타트에서 하루 아침에 산산조각 났거든요.  프로이센에게는 특히 아우어슈테트 전투가 뼈 아픈 상처가 되었습니다.  6만의 프로이센 대군이 불과 2만7천 밖에 안 되는 다부(Louis Nicolas Davout) 원수의 프랑스군 제3 군단에게 박살이 났으니까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박살낸 나폴레옹이 베를린에 입성할 때, 놀랍게도 베를린 시민들은 이 정복자에게 환호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프로이센의 귀족들은 물론, 프랑스군조차도 놀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우어슈테트 전투를 언짢게 생각한 것은 꼭 프로이센 사람들만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날 예나에서 호헨로헤 대공이 지휘한 프로이센군을 격파한 나폴레옹도 이 전투가 내심 불쾌했습니다.  먼저, 나폴레옹은 영광을 부하들과 나눠 갖는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필 같은 날, 자신의 심복인 다부가 더 적은 병력으로 더 빛나는 승리를 거둔 것이 기쁘면서도 그리 상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다부가 1대2의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야 했다는 자체가 자신의 큰 판단 미스를 그대로 드러내보이는 일이다보니, 나폴레옹은 체면이 서지가 않았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의 스타일은 결코 여포처럼 일당백의 용기를 발휘하여 더 적은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때려부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전체 병력 수는 적이 더 많다고 하더라도, 면밀한 정보 수집과 냉철한 상황 판단, 그리고 현란한 풋워크를 통해 정작 실제 전투에 참여하는 병력은 언제나 프랑스군이 조금 더 많도록 만드는 것이 나폴레옹의 장기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그가 지휘하는 전투에서 1대2의 수적 열세를 안고 프랑스군이 전투에 돌입해야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명성에 흠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나 전투를 완승으로 마무리한 그 다음날 새벽까지도, 자신이 호헨로헤 대공의 지원군이 아니라 프로이센군 주력 전체와 맞붙어 싸워이긴 줄 알고 우쭐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아침 다부로부터 온 전령이 빌헬름 3세 본인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 6만을 다부의 제3 군단 혼자서 무찔렀다는 아우어슈테트 전투의 승전보를 가져오자, 나폴레옹은 "자네 원수께서 헛것을 보신 모양"이라고 비웃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곧 사실이 드러나자, 나폴레옹의 입장은 몹시까지는 아니어도 살짝 난처해졌습니다.  부하들에게 체면이 서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곧 그의 실책을 뒤집어 씌울 희생양을 찾아냅니다.  바로 제1 군단장 베르나도트였습니다.  원래 전투 직전, 다부와 베르나도트는 함께 나움부르크(Naumburg) 근처까지 진격해있었습니다.  그때 나폴레옹에게 호헨로헤의 프로이센군이 포착되자, 이를 프로이센군 본대라고 착각했던 나폴레옹은 다부와 베르나도트에게 각각 별도의 명령서를 내립니다.  다부에게 호헨로헤의 퇴로를 끊기 위해 예나의 북서쪽인 아폴다(Apolda)로 내려와 포위망을 틀어막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베르나도트에게 내린 명령이 약간 애매모호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다부와 함께 나움부르크에 있다면 다부와 함께 아폴다로 가되, 만약 도른부르크에 있다면 뮈라와 합류하여 예나 방향으로 내려오라.  내가 선호하는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미 도른부르크에 도달한 상태라서, 예나에서 곧 벌어질 란의 전투를 지원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었지요.  이미 도른부르크에 주둔하고 있던 베르나도트는 성실히 그 명령에 따라 10월 14일 아침에 예나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아우어슈테트 방향에서 맹렬한 포격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베르나도트를 포함한 제1 군단 전체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이 적과 조우하여 명렬한 전투에 들어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아마 베르나도트는 약간 고민했을 것입니다.  무선통신이 없던 당시 군대에서는 현장 지휘관의 융통성이 무척 중시되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베르나도트는 전군에게 '뒤로 돌아' 명령을 내린 뒤 포격 소리를 향해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나폴레옹으로부터 '예나로 오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 본대의 위치를 포착했고 이를 포위섬멸하겠다고 무척 흥분한 상태였습니다.  당시로서는 나폴레옹의 판단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또 베르나도트로서는 뒤에서 들리는 포성이 다부와 맞붙어 싸우느라 포성을 울리고 있는 적이 2~3만 정도 규모라서 다부 혼자서도 충분히 싸울 수 있는 상황인지 아니면 다부에게 도움이 절실한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의 판단대로 예나에 있던 적이 10만에 달하는 프로이센 본대가 맞고 따라서 프랑스군도 모든 병력을 다 끌어모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다부의 싸움을 조금 더 쉽게 해주느라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의 명령을 어기고 아우어슈테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면 프랑스군 본대를 위태롭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베르나도트의 입장이라면 어떤 판단을 내리셨겠습니까 ?  더군다나 나폴레옹이 '내가 선호하는 것... 예나의 전투를 지원해주는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인 명령서가 주머니에 들어있는 상황이었는데 말입니다.  아마 대부분은 나폴레옹의 명령대로 그냥 그대로 예나로 진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르나도트도 같은 결정을 내리고는, 등 뒤에서 들리는 맹렬한 포성을 애써 무시하고 예나로 행군을 계속 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이 결정이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  결과적으로 보면 잘못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베르나도트는 아우어슈테트 전투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고, 예나 전투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베르나도트가 결과적으로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를 말아먹을 뻔 한 것은 그가 나폴레옹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베르나도트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은 베르나도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나폴레옹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하들 앞에서 난처한 상황에 빠진 나폴레옹에게 그런 점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원래 그런 면이 다분했습니다만) 특히 황제가 된 이후로 모든 공은 자신의 몫이고, 모든 과오는 부하들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부쩍 강해졌습니다.  그는 다부의 제3 군단이 당한 봉변에 대해 베르나도트를 맹비난했고, 까딱하면 그 자리에서 베르나도트의 지휘권을 박탈할 기세였습니다만,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어쨌건 그는 최초 명령서를 보낸 이후, 곧 새 명령서를 보내서 '상황이 발생하면 그에 따라 다부를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명령서는 대육군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아마 억울해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뭐 어쩌겠습니까 ?  자신의 제1 군단 전체가 예나에서도 아우어슈테트에서도 총 한 방 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상대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었는걸요.  베르나도트가 역사 속에서 두고두고 욕을 먹지만 정작 본인은 세상 억울하게 생각할 일은 이것 하나 뿐이 아니었습니다.  3년 뒤인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재현됩니다.


1809년 도나우 강변 바그람(Wagram)에서 오스트리아 카알 대공과 맞붙은 나폴레옹은 7월 5일 밤 프랑스군의 전선을 짜면서,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을 아더클라(Arderklaa) 마을에 배치했습니다.  이 마을은 고지 위에 위치한 오스트리아군에게 가장 가까운 지점이자 ㄴ자로 꺾어진 전체 전선의 돌출부에 해당하는 전선 중앙부로서 전체 프랑스군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다음날 새벽 공격을 가해온다면 가장 치열한 공격을 받을 곳이 바로 여기였고, 또 절대 무너져서는 안 되는 곳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역시 주요 전투에서 믿을 사람은 인척이자 경험도 많고 침착한 베르나도트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였을까요 ?  그건 확실히 아니었습니다.  당시 베르나도트가 맡고 있던 제9 군단은 프랑스 병사들이 아니라 대부분 작센(Sachen) 출신의 독일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던, 2진급 부대였습니다.  이들은 7월 5일 밤에 감행되었던 야습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큰 피해를 입어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고, 그나마 그 중 가장 정예라고 할 수 있던 뒤파(Pierre-Louis Dupas) 장군의 사단은 뚝 떼어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인 외젠의 이탈리아 방면군에게 배정해놓은 상태라서 도저히 치열한 전투에 투입될 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허약한 군단을 가장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는 아더클라에 배치했다 ?  이건 좀 이상했습니다.  게다가 이 아더클라 마을 전체는 바그람 고지 위에 늘어선 오스트리아군의 중포 사정거리 내에 있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이 배치에 대해서 의혹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에 베르나도트는 이번 원정 시작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2진급 군단인 제9 군단의 지휘를 맡긴 것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그나마 원정 준비를 시작하자 나폴레옹의 심복이자 참모장인 베르티에가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습니다.  원래 원정을 준비하는데는 군수품을 사들이고 보충병을 모집하는 등 엄청난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행정 업무에서 베르티에의 장난질이 분명한 방해 공작이 집요하게 제9 군단을 괴롭히자 베르나도트는 그만 폭발하여 나폴레옹에게 이번 원정에서 빠지겠다는 사임서를 보낼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 사임서에서 '보이지 않는 세력이 제9 군단의 원정 준비를 방해하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라며, 베르티에의 이름만 안 적었을 뿐 베르티에에 대한 노골적인 고자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의 사임 요청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베르티에를 견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그람 전투 전날 밤, 이젠 누가 봐도 '오스트리아 대포알에 맞아 두동강이나 나거라'라는 식의 전선 배치를 당한 것입니다.  




(1809년 7월 5일 밤 ~ 6일 새벽 사이 나폴레옹과 그의 부하 원수들간의 회의 장면입니다.  이 장소에 베르나도트는 없었습니다.  그의 불복종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제9 군단이 몇 시간 전의 야습 작전에서 큰 피해를 입고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베르나도트는 그의 병사들을 재규합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어려운 과제는 회의에 불참한 사람에게 떨어진다더니, 그래서 그의 제9 군단이 아더클라에 배치된 것일까요 ?  설마요.)




베르나도트는 여기서 진짜 거물다운 결정을 내립니다.  아더클라 마을을 사수하라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아예 그 마을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2~3km 물러나버린 것입니다.  베르나도트로서는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지휘였습니다.  7월 5일 밤의 야습 실패로 남쪽 방향으로 뿔뿔이 흩어진 그의 제9 군단 병사들을 재집결시키기 위해서는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유리했고, 또 오스트리아군의 습격이 뻔한 상황에서 차라리 아더클라를 먼저 내준 뒤 반격을 가해 탈취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이 그의 자기 합리화였습니다.  더 최악인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 사실을 나폴레옹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나폴레옹의 의도는 두동강 난 자기의 시체를 보는 것인 모양이니, 차라리 알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그런 일탈 행위 덕분에 7월 6일 새벽 바그람 전투는 프랑스군의 대위기로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베르나도트를 비롯한 제9 군단의 작센 병사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후방으로 도주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대노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나폴레옹의 사령부 쪽으로 부하들과 함께 무질서하게 도망쳐 오는 베르나도트를 보고 분통이 터진 나폴레옹이 현장에서 그를 군단장직에서 해임했다고 합니다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베르나도트는 그의 원래 전략(?)처럼 일단 아더클라를 내준 뒤 탈환하기 위해 노력을 했고, 오히려 전투 후에 다시 한번 사임서를 내며 나폴레옹의 부당한 지휘에 대해서 항의까지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의 군단장직 사임서를 승인한 것은 전투 며칠 후였는데, 이유는 베르나도트가 뻔뻔하게도 이번 바그람 전투 승리는 그의 작센 병사들의 활약 덕분이었다고 제멋대로 발표한 성명서를 보고 나폴레옹도 폭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베르나도트와 나폴레옹의 불화는 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심해졌다가, 바그람 전투에서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더 깊은 상처를 받은 것은 베르나도트였습니다.  나폴레옹에 대한 그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가 바그람에서 쫓겨난 직후 지휘를 맡은 벨기에 전선에서 드러납니다.  바그람에서 혈투를 벌이던 오스트리아군을 돕기 위해, 영국군은 오랜만에 몸소 유럽 대륙에 상륙합니다.  장소는 벨기에였고, 영국 측에서는 이 작전을 월체른(Walcheren) 원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력부대가 바그람에 가있어서 속수무책이던 프랑스 측은 마침 실직자로 파리에 와 있던 베르나도트를 현장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2진급 부대를 이끌고 안트베르펜(Antwerpen, 영어로는 Antwerp) 방어에 나서게 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여기서 병사들에게 연설을 할 때 벨기에 해안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영국군에게 유린된 것은 나폴레옹 탓이라며 대역무도스러운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덕분에 그는 급한 불을 끈 뒤에 결국 다시 이 사령관직에서도 물러나야 했지요.  


여기서도 쫓겨난 베르나도트는 스페인 카탈루냐로 발령이 났습니다.  스페인 전선은 당시 아무 전공이나 영광을 기대할 수 없는 진흙탕이 되어 있었고, 그나마 카탈루냐는 스페인 전선 중에서도 비교적 후방으로 대표적 한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물을 먹은 베르나도트는 이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이 발령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아직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나폴레옹에게 소환되었고, 그와 별로 달갑지 않은 면담을 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도 베르나도트에 대해서는 거부감과 동시에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세상 이목도 있으니 그러지 말고 폼도 적당히 나고 지내기도 좋은 로마 총독으로 가라'라고 제안했고, 뭐 더 싸워봐야 얻을 것도 없었던 베르나도트도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는 결국 로마에 갈 수 없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로마에 가지 못한 이유는 다시 시간을 거슬러, 1806년 11월, 베르나도트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온갖 욕을 다 먹고 분루를 삼키며 내달렸던 북부 독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Jena%E2%80%93Auerstedt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L%C3%BCb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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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웃자웃어 2018.08.02 08: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차라리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집권하지 않는게 프랑스에겐 차라리 이득이였을 지도 모르겠군요.

  2. ㅇㅇ 2018.08.02 0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우한 남자...ㅠㅠ

  3. 안토 2018.08.02 1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뒤통수 칠 만한 처우였네요...
    그런데 작성자님, 장 란 원수 이야기는
    예전 블로그에 있는 5편으로 마지막인가요?

    • nasica 2018.08.05 2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베르나도트는 뒤통수 안 쳤다니깐요.

      2. 장 란이 전사하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4. pms3278 2018.08.02 1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배신할만 했네요...

  5. 루나미아 2018.08.02 14: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시 생각해보니 다부가 위험한 상황인지 알 수 없는데 황제가 '적 주력은 내 쪽에 있다'고 하면, 굳이 어기고 다부에게 갔는데 별일 아니라면 그 후폭풍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겠네요. 예니-아우어슈테트 편 읽을땐 베르나도트가 너무 몸을 사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글 보니 새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는군요.

  6. 유애경 2018.08.03 0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여러모로 '치사한'나폴레옹 이네요!
    결국 부하들이 자신을 등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건 자업자득 이라고 해야겠죠!

  7. 방랑자 2018.08.04 08: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인트헬레나에서 난 부하들에게 배신당한 게 아니라 버려진 거라고 말했던 게 정말 많이 순화한 거네요. 이러고도 막판에 가서야 배신자가 나왔으니 나폴레옹이 대단한 건지 당시, 의리가 대단했던 건지...


    추신 : 오타 하나 신고. "23년 -> 3년"

  8. reinhardt100 2018.08.04 09: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당시, 다부가 정말 대단했던건 프로이센군이 처음부터 강습으로 나왔는데도 전열이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는겁니다. 특히 포병전력에서 4배 이상의 격차를 보였는데도 말이죠.

    사실, 프로이센군이 저렇게 병력 배치를 한 이유가 두 전투 중 한 곳에서 프랑스군 일부 병력을 격파한 후, 전병력을 끌어모아 프랑스군 잔여병력을 격파한다는 거였습니다. 전열보병 시대 최대의 기동전이었던 로이텐전투를 참고한 건데, 당시 3만 6천의 병력으로 8만의 오스트리아-바이에른 연합군을 기동전으로 대파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하고
    싶었던 겁니다. 1806년은 그 때보다 사정이 훨씬 좋다보니 기동전으로 프랑스군을 격파하겠다는 거였습니다만 문제는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나 바이에른 군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1분당 80보 걷던 군대랑 120보 걷던 군대가 같을리 없었죠.

    • 카를대공 2018.08.07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부는 정말 보면 볼수록 대단한 남자네요.
      오스트리아 전역 때고 그렇고 불리한 상황에서 절대 안 지는 점은 나폴레옹 휘하 원수 중 으뜸인거 같습니다.

    • reinhardt100 2018.08.09 2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부의 경우, 나폴레옹의 26원수 중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정도로만 따지면 가장 높은 축입니다. 그러다보니 나폴레옹 역시 '가장 위험한 전선의 소방수'로써 잘 활용했던 휘하 원수이기도 했습니다.

      마세나, 다부, 슐트, 베르티에가 군사적 능력이 가장 뛰어난 편이었는데 이 중에서도 마세나와 다부가 두각을 나타낸다고 봐도 될 듯 합니다.

  9. 석공 2018.08.04 2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

  10. TheK의 추천영화 2018.08.05 07: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정말 사수 잘못 만나 고생이 많았네요.
    다음 편이 기대 됩니다.

  11. 샤르빌 2018.08.05 12: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가족들과 최측근들은 죄다 배신을 때렸는데 피 안섞인 의붓자녀나 군단장, 근위병들은 마지막까지 따랐단게 참 묘합니다..

  12. 카를대공 2018.08.07 2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나도트가 정말 거물은 거물이네요.거기서 깔끔하게 황제의 명령을 씹고 물러난다라;
    괜히 왕이 된게 아닌거 같습니다.

1798년은 베르나도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던 해였습니다.  데지레와 결혼하여 나폴레옹의 인척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운도 잘 트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군인에게 관운이 트인다는 것은 전쟁이 났다는 뜻이지요.  그 해 연말 경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과 스위스에서의 시민 혁명이 촉매가 되어 제2차 대불동맹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에 따라 11월, 그는 1개 감시군(l'armée d'observation)의 총사령관이 되어 라인강을 넘어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ürttemberg)의 필립스부르크(Philippsburg)로 진격하라는 임무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드디어 나폴레옹이나 모로, 오슈처럼 1개 군의 총사령관이 될 수 있던 이 기회는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애초에 아무 준비도 없이 시작한 전쟁이다보니 북부 이탈리아와 독일 전선에서 프랑스군은 연전연패를 이어갔기 때문에 베르나도트가 지휘할 감시군은 아예 편성조차 되지 못했고, 라인강을 넘을 기회도 없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1799년 7월, 베르나도트에게 더 큰 기회가 왔습니다.  일개 방면군 사령관보다 훨씬 더 높은 국방부 장관(ministre de la Guerre)이 된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군은 제2차 대불동맹전쟁에서 연전연패하고 있었는데, 이는 주로 형편없는 보급과 병력 충원 때문이었습니다.  제2차 대불동맹전쟁이 시작되면서 스위스 방면 감시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던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이 조사 보고한 바와 같이, 각 방면군들의 상태는 도저히 전쟁을 벌일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제1차 대불동맹전쟁 때 프랑스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의 활약 외에도 국방부 장관으로 있던 카르노(Lazare Carnot)의 뛰어난 활약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군대에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전국 교회의 종을 압류하여 녹이고 화학자들을 불러모아 질산칼륨을 제조하고 새로운 무두질 방법을 개발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여 병력과 물자를 전선으로 보냈고, 덕분에 승리의 조직자(L'Organisateur de la Victoire)라는 칭송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프랑스군이 1798년 말에는 왜 이 모양이 되었느냐고요 ?  나폴레옹과 총재들이 1798년 9월의 프릭튀도르 친위 쿠테타를 일으켜 쫓아낸 인물 중에 카르노도 있었거든요.  




(카르노입니다.  열역학에 나오는 카르노는 이 양반이 아니라 이 양반의 아들인 Sadi Carnot 입니다만, 이 양반도 당대의 저명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습니다.  이 양반은 프릭튀도르 쿠데타로 쫓겨난 바로 그 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la métaphysique du calcul infinitésimal, 즉 무한 미적분의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조차 어려운 수학책을 발표했습니다.  상황이 안 돼서 공부를 못한다는 말을 부끄럽게 만드는 아주 잔인한 양반입니다.)




어찌 보면 베르나도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은 현장에서 용맹과 지략을 발휘하는 현장 지휘관보다는 이런 행정가로서의 역할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의욕을 가지고 프랑스군 보급 및 충원을 위한 조치들을 취해 나가며 카르노의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내지도 않은 사임서가 신문에 게재되었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베르나도트는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진짜 장관직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이는 총재 정부의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ès)와 뒤코(Pierre Roger Ducos)가 꾸민 음모였는데, 궁극적으로는 여기에도 나폴레옹이 간접적으로 관여되어 있었습니다.   사실상 실패한 이집트 원정군을 내팽개치고 나폴레옹이 홀몸으로 프랑스에 귀국하자, 이미 현정권으로는 죽도 밥도 안되겠다고 생각했던 시에예스 등의 총재들은 나폴레옹을 이용하여 다시 한번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면 국방부 장관의 협조도 필요했는데, 파리 정계에서 베르나도트가 어울리는 인물들이 자코뱅파 사람들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열혈 자코뱅이 친위 쿠데타에 협조할 리가 없다'라고 판단을 내리고 베르나도트를 미리 뽑아내 버린 것이었습니다.   





(시에예스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세계사 시간에 프랑스 대혁명 관련하여 이 사람이 지은 다음의 명문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물론 사람 자체는 쓰레기에 가깝습니다만, 쓰레기가 지은 문장이라고 해도 정말 뛰어난 문장입니다.

Qu’est-ce que le Tiers-État ? Tout.   제3 계급은 무엇인가 ?  모든 것이다.

Qu’a-t-il été jusqu’à présent dans l’ordre politique ? Rien.   여태까지 정치 체계에서 그것은 어떤 것이었나 ?  아무 것도 아니었다. 

Que demande-t-il ? À y devenir quelque chose.   그것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  무언가가 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물론 시에예스 따위의 정치 협잡꾼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바지저고리가 아니었습니다.  브뤼메르 쿠데타는 그런 썩어빠진 총재 정부의 잔당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꿈꾸던 나폴레옹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는데, 나폴레옹도 쿠데타를 위해서 직접 베르나도트의 협조를 구했습니다.  그는 브뤼메르 쿠데타가 시작되던 브뤼메르 18일 (1799년 11월 9일) 아침에도 베르나도트를 불러 최소한 중립을 유지해줄 것을 정중하게 부탁했으나, 베르나도트의 답변은 '당신의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겠다... 하지만 의회가 너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난 그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라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습니다.  확실히 베르나도트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코뱅 원칙주의자일 뿐,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와 동서지간이었던 자신의 형 조제프에게 '그와 식사라도 하며 하루 종일 그를 감시해달라'고 부탁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자, 베르나도트와의 관계는 그날 아침의 답변처럼 정말 애매모호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분명히 쿠데타에 협조한 공신록에 이름을 올릴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폴레옹 본인과 혼인 관계로 얽힌 인척인데다 최소한 쿠데타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인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그의 답변처럼 애매모호한 임무를 주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일개 군의 총사령관, 즉 서부 방면군(l' armée de l'Ouest) 사령관으로 임명하되, 너무 참혹한 학살과 보복으로 점철되어 다들 꺼리는 분위기였던 방데(Vendée) 지방 반란 진압의 임무를 준 것이었지요.  그런데 베르나도트는 이 임무를 약 1년에 걸쳐 또 매우 훌륭하게 잘 수행해냈습니다.  하긴 왕당파의 깃발을 올리고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을 잔혹하게 숙청하는 것에 대해, 가슴에 '왕들에게 죽음을(Mort aux rois)'이라는 문신까지 간직한 열혈 자코뱅 베르나도트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을 것 같긴 합니다.  




(이 그림은 1793년 낭트(Nantes)가 함락된 이후 자코뱅 혁명군이 카톨릭을 신봉하는 왕당파 시민들을 물에 빠뜨려 죽이는 장면입니다.  원래는 포로로 잡힌 시민들을 구석에 몰아넣고 그냥 마구잡이 사격으로 사살했는데, 기관총이 아닌 관계로 그 사살 속도가 시원스럽지 않자 대형 보트에 시민들을 잔뜩 싣고 강 한 가운데로 가서 보트들을 통째로 침몰시켰다고 합니다.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도 가리지 않고 학살하기도 했으며, 저 그림에서 묘사된 것처럼 여성들의 옷을 벗기고 다른 남성과 함께 묶은 채 길거리에서 조리돌림을 하다가 죽이기도 하는 등, 방데에서는 그야말로 끔찍한 제노사이드(genocide)의 전쟁 범죄가 횡행했습니다.  이런 야만적 진압은 결국 반작용을 낳아 방데 지방에서는 이후로도 계속 크고 작은 반란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껄끄러운 측근으로 비교적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할 때 임명한 18명의 초대 육군 원수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엄청난 전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폴레옹의 충신도 아닌데 원수로 임명된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18명의 원수들 중에는 그런 어정쩡한 위치의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가령 뚜렷한 전공도 없이 허명만 요란한 주르당의 경우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쿠데타 때 근위대 병사들에게 두들겨 맞으며 생 끌뤼(Saint Cloud)에서 쫓겨난 의원들 중 하나일 정도로 나폴레옹과는 대립각이 있는 사람이었는데도 이 명단에 들어갔습니다.  또 오쥬로(Pierre Augereau)의 경우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침공 당시 마세나와 함께 나폴레옹의 필승 원투펀치로 활약했지만, 정치적으로 철저한 자코뱅이라서 결국 나폴레옹의 심복이 되지는 못한 사람이었는데 그도 명단에 올라갔지요.  반면 나폴레옹의 초창기부터의 심복이자 전공도 많았던 마르몽(Auguste de Marmont)은 1809년에나 원수가 됩니다.  즉, 당시 누가 원수가 되느냐는 단지 얼마나 잘 싸우고 나폴레옹과 얼마나 친하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군과 정계에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 인물인가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독재 권력을 추구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전제군주가 아니라 국민의 지지에 의해 즉위한 황제였으므로 그런 사회 각계 각층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크게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총재정부 시절 나폴레옹 밑에서 크게 활약했던 오쥬로가 정작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은 이후에는 별 활약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오쥬로의 철저한 자코뱅 성향 때문이라고도 하고 그냥 오쥬로의 그릇이 딱 거기까지일 뿐 더 뛰어난 장군들에게 밀린 결과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만 저는 오쥬로가 나폴레옹에게 물을 먹은 것은 이 그림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이 그림은 테브냉 Charles Thevenin이라는 화가가 총재정부의 위임을 받아 그린 '아르콜레 다리에서의 오쥬로'(AUGEREAU AU PONT D’ARCOLE) 라는 그림인데, 이 그림에서는 아르콜레 다리를 앞장 서서 돌파한 사람이 나폴레옹이 아니라 오쥬로로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저렇게 깃발을 들고 자살 공격대의 맨 앞에 서지 않았지요.  이 그림은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은 뒤 그로 및 베르네 등의 더 뛰어난 화가들의 그림으로 신속하게 교체되었습니다.  나폴레옹 같은 거물이 그렇게 치사했겠냐고요 ? 치사했습니다.)




(윗그림은 유명한 그로(Antoine-Jean Gros)의 '아르콜레 다리에서의 나폴레옹'이고 아래 그림은 베르네(Horace Vernet)의 같은 제목의 그림입니다.)




그렇게 나폴레옹 치하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베르나도트는 하노버(Hanover) 등 주로 독일 북부 지방에서 총독으로 근무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평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워낙 뛰어난 행정가였던데다 합리적이고 중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프랑스 제국의 압제 하에 신음하는 처지였던 하노버 지방 사람들은 큰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그의 통치에 순종하는 편이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권위도 그에 따라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또는 데지레 때문인지 그는 1805년 12월의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주로 예비대로 있다가 전투 막판에 투입되어 상대적으로 전공이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폰테 코르보 대공(1st Sovereign Prince of Ponte Corvo)이 되어 드디어 귀족의 반열에 오르는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있어 베르나도트는 여전히 껄끄러운, 상전같은 부하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껄끄러운 관계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곧 벌어집니다.  




** 다음 편은 많이들 짐작하시다시피 과거에 이미 다룬 유명 전투들 이야기가 됩니다.  제 블로그에 처음 오시는 분도 있을 것이고 또 내용 전개상 건너 뛰고 갈 수는 없어서 다루긴 다뤄야 하는데, 아무래도 과거에 썼던 글의 재탕이라고 느끼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해서, 다음 편인 제6편은 원래 재탕글을 올리는 목요일 아침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로서는 다음 편은 날로 먹으려고 했는데 잘 안 되는군요...)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D%C3%A9sir%C3%A9e_Clary

https://fr.wikipedia.org/wiki/Charles_XIV_Jean

https://en.wikipedia.org/wiki/Lazare_Carnot

https://www.napoleon.org/histoire-des-2-empires/iconographie/augereau-au-pont-darcole-15-novembre-1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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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ANNES 2018.07.30 1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글 잘읽고 갑니다~
    근데 다음편 아우슈테트 전투 재탕 하실꺼죠? 흑흑..ㅜㅜ
    무더위 조심하세요~~ㅋ

    • nasica 2018.07.30 1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억 어떻게 알았지...?) 말씀하신 대로 써놓고 보니 사실상 재탕이라 저로서는 날로 먹는 겁니다. 그렇다고 내용 흐름상 빼고 갈 수는 없으니, 대신 다음편은 원래 재탕을 올리는 목요일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 한글맨 2018.07.30 1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윽 2등

    애매모호하다는 '모호하다'로 쓰는 게 낫다는 이야기가 있네요
    아랫 글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
    '말이나 태도가 흐리터분해 분명하지 않다'는 뜻으로 쓰는 단어들로 '모호하다''애매하다''애매모호하다'가 있다.

    한자어 '모호(模糊)'와 '애매(曖昧)'는 같은 뜻이며, 우리나라에서는 '분명하지 않음'의 뜻으로 원래 '모호'만 사용하고 '애매'는 쓰지 않았다.

    우리와 달리 일본에서는 '애매'와 '애매모호'도 '모호'와 같은 뜻으로 쓰고 있다. 이것을 다시 우리가 받아들여 사용함으로써 '모호하다' 외에 '애매하다''애매모호하다'가 함께 쓰이고 있으며, 지금은 국어사전에도 모두 올라 있다. 그러나 같은 의미의 단어인데 굳이 일본식인 '애매하다''애매모호하다'를 쓸 필요가 없다. '애매모호'는 더구나 같은 뜻을 가진 단어의 중복 형태다.

    더 큰 문제는 한자어 '애매(曖昧)하다'와 별개로 순 우리말 '애매하다'가 있어 혼란스럽다는 점이다. 순 우리말로서의 '애매하다'는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아 억울하다'는 뜻이다. "애매하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다" "애매한 사람을 죽이려 들지 마라" 등에서처럼 쓰인다.
    출처 : 중앙일보, 우리말 바루기

  3. 유애경 2018.07.30 1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끊임없이 나폴레옹의 경계와 견제를 받았지만 진정한 승리자는 베르나도트 였을것 같다는...

    항상 여러가지 글 잘보고 갑니다.

  4. 찐빵 2018.07.30 18: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랑스인들도 상당히 잔인하네요.방데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했건 잊어서는 안 될 사건 같습니다.

  5. 방랑자 2018.07.30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805년 12월 이후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이라면,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의 말을 따르기만 했다가 짐승이 말도 안되는 공적을 세우게 만든 그거겠군요.

  6. reinhardt100 2018.07.30 2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데가 드디어 나오네요. 이 방데반란이 꽤나 요인이 복잡하죠.

    혁명 초기 의외로 교계는 혁명에 동조적이었습니다. 이들 역시 사회하층민들과 직접 동고동락했으니까요. 교계 재산을 국유화한 재원으로 아시냐 지폐를 발행하는 거도 교계에서 동의한 데 다 이유가 있습니다. 당장 성경에도 이웃을 살피라는데 하물며 교구의 민중들이 다들 굶주리는데 자신들의 재산으로 이를 구원하겠다는데 반대할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요. 방데 지방은 이런 일반적인 프랑스 지역과 달랐다는게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방데 지방은 다른 지방과 달리 자작농 비율이 높았고 교회 재산이라는 것도 '교회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가 공유하는 재산을 교회가 관리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걸 혁명정부가 갑자기 아시냐 만든다고 몰수하겠다고 하니 다들 눈이 돌아버릴 상황이 된 겁니다.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게 혁명전쟁 발발 후 30만 징병령이 내려진겁니다. 그것도 방데에서 가장 먼저 징병이 시작된 겁니다. 가장 후방인데 가장 먼저 징병한다고 하니 주민들이 격분한 건데 이걸 본 혁명정부는 일벌백계로 때려잡으려다보니 방데를 박살내기로 작정했고 진압이 극단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겁니다. 이 당시 방데 인구가 70만 좀 넘었는데 최소 10만 단위로 학살이 이루어졌죠.

    이 때문에 방데는 부르봉 왕정 복고를 가장 열광적으로 지지했고 나폴레옹의 제2제국 시절까지만 해도 대놓고 삼색기를 거부했고 이 때문에 중앙정부와 충돌하는게 다반사였습니다. 보불전쟁이 프랑스에 미친 가장 긍정적인 영향이 무엇이냐고요? 방데지방이 혁명 이후 처음으로 공화국을 지원하면서 어느정도 혁명을 인정했다는 겁니다. 조국 프랑스가 위기에 빠졌고 더 이상 부르봉 왕정복고도 불가능한 현실을 인정하고 공화국과 화해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겁니다. 제3공화국 정부 역시 이즈음부터는 방데에 대하여 지원을 어느 정도 늘려주어 민심을 다독였고요. 방데조차도 삼색기를 인정했으니 이제 다시는 왕정복고 따위는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자신감이 넘치게 된 거니까요. 이 시기부터 혁명기념일이 단지 파리와 혁명에 동조했던 북부 일부만의 축제가 아닌 전국민이 제3공화국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시켜주면서 국민 모두가 즐기는 진정한 국경일이 된 것도 덤입니다.

    • 2/28일 입대 2018.07.31 23: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와 저렇게 긴 내용을 이렇게 짧게 다 커버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방데 내전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봤어도 그 전개과정은 처음 보네요

    • reinhardt100 2018.08.09 2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이제서야 확인했습니다. 답글이 늦었는데 이 방데 문제는 꽤나 복잡합니다. 책으로 보시는게 더 정확할 겁니다.

  7. 투팍아마르 2018.07.30 2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날로 드시든 회쳐 드시든 상관없습니다. 자주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베르나도트 이 양반도 어지간히 꼬장꼬장한 성질인것 같습니다. 이 정도 인물이 살짝만 숙여도 나폴레옹처럼 허세 있는 타입은 입이 헤벌레해서 막 퍼줬지 싶은데 끝까지 긴장관계가 유지된걸로 봐선 한 성미 한다고 봐야겠죠? 그리고 방데지방을 지도에서 찾아보니 주변 도시가 낭트, 라로셀등이 있는데 옛날 위그노의 본거지인 동네더군요. 독립운동가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부류가 일본인보다는 오히려 한국인 앞잡이들이었던 것처럼 방데 역시 위그노의 본진에서 카톨릭으로 전향한 동네라 오히려 카톨릭에 대한 혁명정부의 억압에 더 반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8. ...... 2018.07.31 0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무원 수험 헌법, 사법시험 헌법쪽에서는 시에예스의 국민주권론과 루소의 인민주권론을 죽어라 배웁니다.
    매년 40문제 5지선다 중 최소 한두지문은 나왔거든요.

  9. 메에용 2018.08.01 06: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재밌어요

  10. ㅇㅇ 2018.08.01 18: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부 제대로 하는 사람은 정말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무슨 시련이 오든간에 알아서 하는군요

  11. TheK의 추천영화 2018.08.02 06: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네요. 다음 이야기 기대하겠습니다. ^-^0*

  12. 석공 2018.08.04 2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더위 조심 하세요.

비록 임무가 보충병력의 인솔이라고는 해도, 한겨울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는 꽤 힘든 일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뛰어난 지휘력이 아니었다면 신병들로 구성된 이 보충병력에서는 아마 탈영이나 부상 등으로 인해 많은 비전투 손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게 이탈리아로 들어온 베르나도트가 향한 곳은 롬바르디아의 주도인 밀라노(Milan)였는데, 여기서 나폴레옹과의 악연이 시작됩니다.  당시 밀라노 주둔 프랑스군 지휘관은 뒤퓌(Dominique Martin Dupuy) 장군이었는데, 당시 나폴레옹이 이끄는 이탈리아 방면군 전체는 기타 방면군의 졸전과 대비된 자신들의 연전연승으로 인해 정말 기고만장한 상태였습니다.  그건 뒤퓌 장군도 마찬가지였고, 풋내기들로 이루어진 보충병들을 끌고 겨울 행군을 강행하느라 초라한 행색을 하고 나타난 베르나도트를 대하는 태도가 매우 불손했던 모양입니다.  




(뒤퓌 장군의 흉상입니다.  1798년 10월 카이로 폭동 때 가장 먼저 살해된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는 벼락 출세한 얼치기 정치 장군이 아니었습니다.  차가운 엘리트였던 그는 명령 불복종 죄목으로 현장에서 뒤퓌 장군을 체포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뒤퓌로서는 깜짝 놀랄 일이기도 했으나 몹시 분한 일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뒤퓌가 그렇게 건방진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도 믿는 빽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바로 나폴레옹의 최측근인 참모장 베르티에(Louis-Alexandre Berthier)가 그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첫인상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베르나도트는 바그람 전투 때까지 향후 12년 간 두고두고 베르티에의 견제와 방해를 받게 됩니다.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을 직접 만난 것은 만토바(Mantua)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면접해보고는 소장이라는 그의 지위에 맞게 사단 하나의 지휘를 맡겼는데, 이미 리볼리(Rivoli) 전투 등 주요 전투는 다 정리가 된 상태였지만 이탈리아 북동부인 프리울리(Friuli) 침공 등에서 베르나도트는 선봉장으로서 훌륭히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결국 나폴레옹과 대립각을 세우는 입장이었습니다.  그 해 9월, 총재 정부의 친위 쿠데타였던 프릭튀도르(Fructidor) 사건이 벌어지자 그에 협조하는 입장이었던 나폴레옹은 휘하 사단장들에게 이 쿠데타를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도록 지시했는데, 베르나도트는 전혀 상반된 내용의 성명서를, 그것도 나폴레옹이 아니라 파리의 총재 정부로 곧장 보내버렸던 것입니다.  이로써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의 관계는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프릭튀도르 쿠데타는 왕당파가 세력을 잡아가던 의회에 대해 1797년 총재 정부가 일으킨 친위 쿠데타입니다.  이 사건에는 나폴레옹이 총재 정부에게 파견해준 나폴레옹의 원투 펀치 중 한명인 오쥬로 장군도 활약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곧 행동에 나섰습니다.  10월에 캄포 포르미오(Campo Formio) 조약으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종료되자, 나폴레옹은 곧 베르나도트를 프랑스 본국으로 전출시켜버렸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가 애초에 나폴레옹에게 뻣뻣하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총재 정부의 당시 제1인자였던 폴 바라스(Paul Barras)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라스도 비록 자신이 키워준 인물이긴 하지만 나폴레옹의 인기와 권력이 자신을 넘어선다고 느끼자 불안을 느꼈고, 나폴레옹을 누를 경쟁자로 베르나도트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으로부터 물을 먹고 파리로 돌아오자, 바라스는 오히려 그를 나폴레옹을 대체하여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이미 외무장관 탈레랑(Charles 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을 포섭해놓은 나폴레옹은 선수를 쳐서, 바라스의 의도와는 반대로 베르나도트를 캄포 포르미오 조약으로 인해 새로 신설된  빈(Wien)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로 발령 내버렸습니다.  권력 싸움에서 나폴레옹에게 패배를 거듭한 베르나도트는 분한 마음을 안고 빈으로 향했는데, 그나마 거기서도 오래 있지는 못했습니다.  빈 대사관에 자랑스럽게 혁명의 상징이자 국기인 삼색기를 게양했는데, 최근의 패배로 인한 상처가 아물지 않은 오스트리아인들의 심기를 건드려 소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베르나도트는 결국 파리로 되돌아와 실업자 대열에 동참해야 했습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총재 정부의 상징인 폴 바라스입니다.  그런 그도 젊은 시절 귀족 출신의 군 장교 후보생으로 프랑스령 인도로 가는 길에 난파를 당해 죽을 뻔 하는 등 꽤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총재 정부 시절 부정한 방법으로 많은 돈을 긁어모은 그는 나폴레옹에 의해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거나 로마 등지로 정치적 추방을 당한 상태에서 아주 호화롭게 살았고, 결국 1829년 파리의 사이요(Chailllot, 에펠탑 앞에 있는 그 궁전 맞습니다)에서 잘 먹고 잘 살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에게는 나폴레옹과 만난 1797년이 삼재가 꼈던 마지막 해였나 봅니다.  다음해인 1798년 베르나도트에게는 그의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귀인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데지레 클라리(Eugénie Bernardine Désirée Clary)였습니다.  데지레 클라리는 원래 나폴레옹과 약혼을 했던 여자였는데, 이 둘이 결혼을 한 것은 어느 한 측의 정략적인 의도라기 보다는 그냥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애초에 데지레가 처음 만났던 것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였습니다.  원래 그녀의 집안은 부유한 비단 상인이었는데, 서슬퍼런 대혁명 초기에 그녀의 남동생이 반혁명분자로 몰려 체포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동생을 구하고자 이리저리 줄을 댔는데, 그러다 만난 것이 조제프였습니다.  그러나 조제프는 그녀보다는 그녀의 언니였던 줄리 클라리에게 끌렸고, 결국 조제프와 줄리가 결혼을 합니다.  대신 이러면서 나폴레옹과 데지레가 만나게 되었고, 이 둘도 1795년 약혼을 했지요.   그러나 하필 약혼을 하자마자 나폴레옹은 운명의 여인을 또 만납니다.  바로 조세핀이었지요.  정열의 크레올 여인에게 얌전한 데지레는 상대가 되지 못했고 나폴레옹은 불과 5개월만에 데지레와 파혼을 선언합니다.  생각해보면 데지레는 주로 나이 많은 여자들에게 밀리는 스타일이었나 봅니다.




(비교적 젊은 시절인 1807년의 데지레 클라리입니다.  대단한 미인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나폴레옹은 변치않는 사랑을 간직하는 순정파 남자는 아닐지 몰라도 의리와 체면을 중요시하는 지중해 남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파혼한 데지레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데지레에게 좋은 남편감을 소개해주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었는데, 그 결과 중 하나가 뒤포(Mathurin-Léonard Duphot) 장군과의 약혼이었습니다.  뒤포는 사실 좋은 남편감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애까지 둔 사람이었거든요.  그러나 부잣집 딸 데지레에게는 두둑한 지참금이 있었고 특히 나폴레옹과 동서가 된다는 점은 매우 탐나는 결혼 조건이었기 때문에 뒤포는 그 약혼에 응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뒤포는 1797년 12월, 결혼식 전날 밤에 로마에서 일어난 반프랑스 폭동에 휘말려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남자 복이 없는 여자라고 할 수 있었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나폴레옹은 더더욱 데지레에게 미안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데지레는 언니 줄리와 매우 친하게 지냈으므로 보나파르트 집안에서는 거의 식구나 다름없는 사이였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조세핀을 매우 싫어했던 보나파르트 집안 사람들은 조세핀에 대한 반감 때문에 얌전하고 순진무구한 데지레에게 더욱 친절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이런 식구들 때문에라도 나폴레옹은 데지레에게 빨리 좋은 혼처를 구해줘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러다 나선 것이 나폴레옹의 심복인 폭풍우 쥐노(Jean-Andoche Junot)였습니다.  쥐노도 보나파르트 집안에 자주 들락거리다 데지레에게 반했는지, 아니면 나폴레옹의 인척이 되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서였는지 데지레에게 청혼을 하기는 했는데, 그만 퇴짜를 맞았습니다.  사실 쥐노는 나폴레옹의 초기 심복이었으나 능력치가 많이 떨어지는 편이라서 나폴레옹도 중용하는 편이 아니었는데다, 그나마 남자답게 하트 모양으로 구성한 촛불 진열 속에서 장미꽃을 들고 청혼한 것이 아니라 마르몽(Auguste de Marmont)을 통해서 '저 말이죠, 쥐노가 그러는데 댁과 결혼하고 싶답니다'라고 청혼을 했기 때문이었답니다.   아무래도 쥐노에겐 여러 모로 문제가 있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데지레를 만나 결혼에 성공한 것은 바로 베르나도트였습니다.  생각해보면 베르나도트야말로 데지레에게 있어 최고의 배우자였습니다.  베르나도트도 데지레처럼 부르조아 집안 출신이었고, 지위 뿐만 아니라 교양도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젊은 시절 별명이 '각선미 하사'(Sergeant Belle-Jambe)일 정도로 외모도 준수한 편이었거든요.  게다가 베르나도트와 나폴레옹 두 사람은 서로 화해를 해야 하는 관계였습니다.  화해를 하는데 있어 가장 좋은 것은 결혼을 통해 인척이 되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떠난 직후인 1798년 8월 이 두사람은 모든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바로 다음해 외아들 오스카(Joseph François Oscar Bernadotte)를 낳게 됩니다.  베르나도트의 외아들의 이름이 정해진 과정만 봐도 베르나도트 가족과 보나파르트 가족의 복잡한 관계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앞서 말했듯이 언니 줄리와의 사이가 돈독했던 데지레는 애초에 이 아이의 이름을 형부의 이름을 따서 조제프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데지레의 부탁으로 이 아이의 대부가 된 나폴레옹은 이 아이의 이름으로 자신이 읽던 아일랜드의 음유시인 오시앙(Ossian)의 영웅 서사시 주인공들 중 하나인 프랑수와 오스카(François Oscar)로 정하자고 했고, 그 이름도 그대로 붙여졌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그렇게 긴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아이가 나중에 스웨덴 국왕 오스카 1세(Oscar I)가 되리라고는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상상 못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중무장(?)한 오스카 베르나도트입니다.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세자로 책봉되기 몇 년 전에 그려진 그림이라고 하니까 대략 7~8세 정도에 그려진 그림 아닐까 합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자주 등장하네요.  오스칼이라는 이름은 Oscar를 일본식으로 표기하다보니 잘못 발음되어 전해지는 이름이고, 이 남장 여걸의 이름은 Oscar François de Jarjayes, 즉 오스카 프랑수와 드 자르제입니다.  참고로 오스카라는 이름의 어원은 아일랜드 계통으로서, '사슴을 사랑하는'이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영어 고어로서 '신의 창'이라는 뜻이라고도 합니다.  희한하게도 이 이름은 스웨덴에서 남자 이름으로 3번째로 많이 쓰이는 이름입니다.)




이로써 베르나도트와 나폴레옹의 화해는 완성되었고, 나폴레옹은 향후 그의 야심을 이루는데 베르나도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베르나도트라는 남자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oup_of_18_Fructidor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Oscar_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D%C3%A9sir%C3%A9e_Clary

https://en.wikipedia.org/wiki/Oscar_(given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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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ashorn 2018.07.23 06: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질긴 인연이군요..

  2. 석총 2018.07.23 2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루이 18세의 잔소리 하는 데시데리아왕비 루이 18세에게 곤란한 청을 하였죠 언니를 귀국시키라고

  3. 레미 2018.07.25 2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나도트... 나폴레옹에겐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철천지 원쑤...

  4. 0_- 2018.07.25 2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옛날에 어느 높으신 분이 주어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이래서 주어가 중요합니다.

    젊어서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왕에게 죽음을!
    군인시절: (다른 나라의) 왕에게 죽음을!
    왕이되어: (프랑스 보나파르트) 왕에게 죽음을!
    임종직전: (자기자신이기도 한 스웨덴) 왕에게 죽음을!

    이렇게 놓고보면 그냥 베르나도트가 베르나도트 했을 뿐이네요 ^_-;

  5. reinhardt100 2018.07.25 2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사이유의 장미. 저 만화가 한국에서 정식발매된게 1988년인데 꽤나 사연이 많은 만화라고 합니다. 이케다 리요코의 작품들 중 저 작품이 최대 히트작인데 정작 본인은 만화를 배우는 습작에서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 작품이 원래 1971년에 일본에서 완판된 이후 바로 당시 저작권 개념조차 별로 없던 한국에서 전례없이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고 들여오려고 했던 찰나 그대로 16년동안 수입 및 판매 금지처분을 받았던 희대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왜 저 순정만화가 저런 처분을 받았냐고요? 하필이면 발매시점으로 예정되었던 1972년 10월 당시,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들어섰으니까요. 한창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의 여학생들한테 저딴걸(?) 그대로 정발했다가 학생들이 투사가 되면 골치아프다고 판단했던 문공부,교육부와 관련기관들이 그대로 저작권 계약 엎어버리라고 행정지도를 내려버린 겁니다. 사실, 관련기관들이 걱정했던게 괜한 우려가 아니었던 이유가 하필이면 일본 경시청의 분석때문이었죠.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한창 발매되던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전공투가 과격화되면서 사회불안이 꽤나 심각했었으니까요. 특히 여대생들이 학생운동 하는데 있어서 저 만화가 매우 큰 영향을 발휘한다고 경시청이 분석했고, 실제로 어느 정도 맞는거로 드러났다는 것을 당시 주일대사관이 입수, 본국에 급송했다고 하더군요. 이걸 보고 관련기관들의 입장이 급선회해서 당시 출판업계에서도 말이 꽤나 많았다고 합니다.

    이케다 리요코 여사의 작품중에 오르페우스의 창이란게 있습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비슷하면서도 훨씬 내용이 심각한 게 많이 나오죠. 한 번 두 작품 비교하면서 읽어보시면 아실겁니다.

  6. 웃자웃어 2018.07.26 0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에는 인구대비 어느정도의 비율을 전시에 군인으로 동원했나요?

여기서 시간과 장소를 다시 혁명 직전의 프랑스로 되돌려 보겠습니다.  1763년, 소위 남자들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남부 가스코뉴(Gascogne)의 소도시 포(Pau)에서 검사로 일하던 장 알리 베르나도트(Jean Henri Bernadotte)에게 아들이 태어납니다.   당시 52이세이던 베르나도트 검사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마 생각지도 않은 늦둥이였을 것입니다.  이 아이에게는 형과 같은 이름인 장(Jean)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곧 형과 구별하기 위해 장-밥티스트(Jean-Baptiste)라는 이름으로 살짝 바뀌었습니다.  지금도 포 시에는 장-밥티스트 베르나도트가 태어난 집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도심 한복판의 골목 속에 있는 집이라 으리으리한 저택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큼직한 기둥과 2개의 박공까지 딸린 중산층의 주택입니다.  





(베르나도트의 생가는 지금은 베르나도트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입장료 3유로입니다.)




어린 장은 꽤 똘똘한 아이였습니다.  거기다 집안 형편도 안정적이었지요.  그는 아버지의 연줄을 이용하여 14세의 나이에 그 소도시의 검사가 되기 위한 수습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이때만 해도 그의 인생은 아름다운 가스코뉴의 소도시에서 똑똑하고 근면한 검사로 평온하고 안정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진로에는 애초부터 내재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디딤돌이 되어줄 아버지의 나이가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결국 장이 17세 되던 해 3월, 그만 아버지가 69세의 나이로 사망해버립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귀족이나 대상인이 아닌 이상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의 죽음은 그 집안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방 소도시 검사라는 직업이 고액 연봉도 아니었거든요.  이렇게 되자 아버지의 연줄로 들어갔던 수습 검사의 자리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당시 가진 것이라고는 건강한 몸과 야망 밖에 없던 젊은이들이 갈 곳은 두 군데 뿐이었습니다.  바다에 나가서 선원이 되거나 군에 입대하는 것이었지요.  그 중에서도 바다보다는 군이 훨씬 더 점잖고 안전한 직업이었고, 3월에 아버지 장례식을 치른 17세의 젊은 베르나도트는 그 해 9월에 왕실 해병 연대(Regiment Royal?La Marine)에 이등병으로 입대합니다.  아마 바다에서 가까운 가스코뉴 지방이라서 그랬나 봅니다.




(1771년~1791년 동안의 왕립 해병연대의 군복입니다.  베르나도트도 이 군복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거친 군에 들어간 베르나도트는 해병대 특성상 얼마 전에 프랑스 땅으로 복속된 코르시카 섬으로 배치되어 거기서 첫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께서는 시가지를 순찰하는 베르나도트 이등병에게 몰래 돌을 던졌다가 붙잡혀 얻어맞은 나폴레옹... 등의 이야기를 기대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때는 그 섬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이 11살이라서 그는 이미 브리엔(Brienne-le-Chateau)에 있는 예비사관학교에 입교해 있을 때였습니다.  점령군 베르나도트 이등병과 프랑스에 대한 반감으로 불타는 열혈 소년 나폴레옹이 멀리서라도 마주칠 일은 없었던 것이지요.  


그 이후로도 베르나도트는 브상콩(Besancon), 그르노블(Grenoble), 마르세유(Marseille) 등을 전전하며 군 생활을 계속 했습니다.  당시 부르봉 왕정 하에서의 프랑스군은 채찍질 처벌이 존재하는 등 거친 곳이었고 급여가 많은 곳도 물론 아니었으니, 어린 나이에 군 생활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름 군 생활을 충실하게 잘 했던 것 같습니다.  하긴 당시 프랑스군 졸병들 중에 글을 능숙하게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테니, 어리지만 배운 것도 많고 천성적으로 똘똘한 두뇌를 가졌던 베르나도트는 상관들의 눈에 띌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덕분에 그는 입대 5년 만에 하사(sergeant, 정확하게는 우리나라 병장에 해당)로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미군도 그렇지만 당시 모병제였던 프랑스군에서는 병사가 부사관으로 승진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는데, 베르나도트는 그걸 해냈습니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군대에서도 아는 것 많고 똑똑한 것도 중요했지만, 사실 외모도 꽤 중요합니다.  상관이든 부하든 남에게 호감을 주는 외모가 유리하지요.  또 외모는 타고나는 것 외에도 옷차림이나 청결 측면에서 잘 가꾸는 것이 중요한데, 당시 베르나도트의 별명이 '각선미 하사'(Sergeant Belle-Jambe)였던 것으로 보아, 그는 외모 측면에서도 꽤 신경을 쓰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들 때문에 그는 비록 부사관이었지만 승승장구 승진을 거듭 했습니다.  불과 5년 만인 1790년, 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특무상사(Adjutant-Major)로 승진하는데, 이는 당시 병으로 승진할 수 있는 최고 지위였습니다.  




(그러고보니 베르나도트의 다리가 길고 매끈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젊은 시절 베르나도트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베르나도트는 현재 프랑스에서는 일종의 기피 인물로서, 그와 연관된 기록 등은 별로 정리 발표된 것이 없거든요.  한번은 지금도 가스코뉴 포에서 베르나도트 박물관을 운영 중인 베르나도트 가문 사람이 파리 시장에게 편지를 써서 '왜 베르나도트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은 없는가?' 라고 문의를 하자 짧게 '라이프치히(Leipzig, 1813년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의 적으로 싸운 전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할 정도니까요.  덕분에 그가 언제부터 열렬한 공화주의자 자코뱅이 되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아마 한때 쁘띠-부르조아(petit bourgeois, 소시민 중산층)로서 안락한 삶이 예정되어 있다 서민층인 부사관 계급으로 떨어진 뒤,  자신보다 아는 것도 실력도 별로 없으면서 으시대며 군림하는 귀족 출신 장교들을 보며 그런 신분제 사회의 불합리성에 대해 조용히 분노를 키우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그가 죽을 뻔한 것은 그가 그르노블에 주둔할 당시 거기서 벌어진 '타일의 날'(Journée des Tuiles) 폭동에서 시민들의 손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폭동에서는 3명이 죽고 20여명이 다쳤는데, 그 부상자들 중 하나가 폭동 진압에 동원되었던 해병들 중의 그였습니다.  여기서 부상을 입고 쓰러졌던 그를 살려준 것은 빌라르(Dominique Villars)라는 식물학자 겸 의사였습니다.  나중에 스웨덴의 왕세자가 된 베르나도트는 이 때의 은혜를 갚고자 빌라르를 자신의 어전 의사로 데려가고자 했으나 빌라르가 사양했다고 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1788년 그르노블의 타일의 날 폭동은 바로 그 다음 해인 프랑스 대혁명의 전조 정도였습니다.  그림 속에서 그르노블 시가지에서 시민들의 공격을 받는 흰 군복의 병사들이 보이는데, 그들이 왕립 해병연대입니다.  베르나도트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장교로 임관되었는지도 그 과정이 불분명한데,  당시 흔히 그랬듯이 아마 그가 속했던 연대도 혁명 진행 과정에서 붕괴되어 버리고 국민 공회에 호응하는 새로운 부대들이 조직될 때 동료 병사들에 의해 장교로 선출된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입니다.  어린 시절 법률 공부를 하여 장교들 못지 않은 실력을 가진데다 키도 키고 외모도 멋지며, 게다가 정치적으로도 열혈 자코뱅다웠던 베르나도트가 신분제가 폐지된 사회에서 병사들의 지지를 받아 장교로 선출되는 것은 꽤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같은 가스코뉴 출신의 프랑스 원수 장 란도 원래 사병 출신의 제대 병사였다가 1791년 그런 과정을 거쳐 동료 병사들에 의해 장교로 선출된 바 있었지요.  어쩌면 베르나도트의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는 “Mort aux rois!” (Death to the kings, 왕들에게 죽음을)라는 문신도 이때 즈음 새겼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베르나도트에게 자코뱅 정신이 아주 활활 불타고 있을 때였지요.


그런 베르나도트는 혁명 초기의 혼란을 타고 진급에 진급을 거듭했습니다.  27세에 특무상사였던 그가 벨기에 쪽에 주둔했던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 장군의 상브레-므즈(Sambre-et-Meuse) 방면군에서 준장으로 승진한 것이 불과 4년 뒤인 31세였을 때니까요.  같은 해에 관측용 기구가 최초로 작전에 활용된 전투였던 플레뤼스(Fleurus) 전투가 있었고, 이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를 거두자 그도 사단장, 즉 소장으로 한번 더 승진을 했습니다.  1790년~1794년 사이 그의 활약이 어땠길래 이렇게 고속 승진을 했는지는 역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는 나폴레옹 같은 군사적 천재는 아닐지 몰라도 매우 유능한 실무 지휘관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령 2년 뒤인 1796년 9월 주르당이 카알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에게 대패를 당할 때, 상브레-므즈 방면군이 전멸당하지 않고 무사히 라인 강을 건너 철수할 수 있었던 것은 베르나도트의 탁월한 지휘 덕분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벨기에 방면군을 상브레-므즈(Sambre-et-Meuse) 방면군이라고 불렀던 것은 벨기에 한복판에 위치한 이 지역이 상브르 강과 므즈 강이 합류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있는 도시가 위 1838년 그림에 묘사된 나뮈르(Namur)입니다.  당연히 두 강이 합쳐지는 곳이므로 산업과 통상이 발달한 곳입니다.)




이런 활약은 총재 정부에서도 주목받았습니다.  비록 상브레-므즈 방면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주르당은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베르나도트는 몇 개월 뒤인 1797년 1월, 무려 2만 명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새롭게 떠오르던 전선인 이탈리아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가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은 물론 아니었고, 거기서 연전연승을 이어가던 떠오르는 수퍼스타 사령관에게 보충 병력을 끌고 가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아마 이 곳에서 자기보다 더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사단장에 올라 으쓱하던 그보다 무려 6살이나 더 젊은데도 그의 상관으로서 일개 군(armee) 전체를 지휘하던 사람은 물론 다름 아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둘의 만남은 출발이 전혀 상쾌하지 못 했습니다.


To be continued...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histoire.online/index.php/2017/05/05/le-tatouage-de-bernadotte/

https://www.sudouest.fr/2010/08/28/bernadotte-le-roi-republicain-170917-4344.php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www.tripadvisor.co.kr/Attraction_Review-g187087-d6121622-Reviews-Musee_Bernadotte-Pau_Communaute_d_Agglomeration_Pau_Pyrenees_Bearn_Basque_Country.html

https://fr.wikipedia.org/wiki/Dominique_Villars

https://fr.wikipedia.org/wiki/Journ%C3%A9e_des_Tui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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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a 2018.07.09 17: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문과는 상관없는 질문이지만 혹시 탈라베라 전투에서 KGL의 활약에 대해 서술한 글을 혹시 아시나요? 탈라베라 전투 6편은 매우 재밌었습니다만 이때 올리브밭 총격전에 대한 글을 어디선가 본거같은데 불과 한두달만에 기억이 안나서 찾질 못해 질문 드립니다. KGL 여단장인가 연대장이 라피스와 총격전을 벌이다가 세바스티아니군이 들이닥치자 부상당했고 몇시간만에 전사했다는 글이 적혀있었는데 찾기가 매우 어렵네요....도움 부탁드립니다.

  2. da 2018.07.09 1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억이 너무 가물가물해서 탈라베라 전투가 아닐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KGL이 아닐수도...

  3. 뱀장수 2018.07.09 18: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니 저 상브레-므즈 연대의 연대가가 아주 유명하지 않던가요 ㅎㅎㅎ

  4. 웃자웃어 2018.07.10 0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질문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전쟁을 많이 했다고 주장하시던데, 전쟁을 한 해하고 전쟁을 하지 않은 해하고 프랑스의 군비지출이 어느정도 차이가 나죠? 예를들어 1802년~1804년사이에는 어느정도 군사비를 지출했나요?

  5. 석공 2018.07.10 0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6. 안토 2018.07.10 1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템포조절 기막히게 하시네요 ㄷㄷ
    다음 화 엄청 궁금함 ㅠ

  7. Charlie 2018.07.11 14: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책좀 읽었다고 자부해왔지만, 이 정도의 글을 계속 연재 하시는 능력 정말 놀랍습니다. 정말 뭐하시는 분이지, 이런 자료들은 어디서 구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주변에 나름 똑똑하다고 하는 친구들이 있는 회사에 있지만 식견있는 대화를 나눌 동료가 없어 외로울 때가 많습니다. 제 주변에는 자신의 의견을 조리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1도 없습니다. 혹 하시는 모임등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그 모임에 한번 참석하여도 될런지요 ?

  8. TheK의 추천영화 2018.07.22 12: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드디어 만났네요 ^ㅇ^*

이제 여러분은 약 4~5회의  포스팅에 걸쳐 나폴레옹의 껄끄러운 부하이자 인척이었던 장 베르나도트(Jean-Baptiste Jules Bernadotte)가 어떻게 현대 스웨덴 왕가의 초대 왕인 카알 14세(Karl XIV Johan)이 되었는지를 보시게 됩니다.  여러분들 대부분께서도 평민 하사관 출신의 프랑스 원수인 베르나도트가 프로이센과의 전쟁 때 포로로 잡힌 스웨덴 군인들을 잘 대우해준 덕분에 스웨덴에 좋은 인상을 남겼고, 때마침 스웨덴 왕에게 후사가 없자 후계자로 지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의문이 남습니다.  스웨덴 왕가에 설마 친척이 하나도 없었을 것 같지 않은데, 인척인 덴마크나 독일 귀족도 아니고 대체 왜 뜬금없이 프랑스의 장군을 왕으로 받아들였을까요 ?  그리고 기존 스웨덴 왕가에서는 왕족은 커녕 귀족도 아닌 베르나도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  가스코뉴 출신의 일개 사병에 불과했던 그가 어떻게 프랑스의 원수를 거쳐 뜬금없이 스웨덴의 왕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시작은 뜻 밖에도 18세기 초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됩니다.  


1709년 7월 우크라이나의 폴타바(Poltava)에서 스웨덴의 카알 12세(Karl XII)와 흔히 표트르 대제로 불리는 러시아의 표트르 1세(Pyotr I)가 맞붙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 대륙 북동부의 패권을 쥔 것은 전통의 강자 스웨덴이었고, 러시아는 낙후된 유럽의 변방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쾌승을 거둔 것은 표트르 1세였고, 이 전투를 통해 표트르 1세는 표트르 대제로 향후 추앙받는 미래를 닦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카알 12세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지배하는 몰다비아(Moldavia) 지방으로 도주해야 했고, 거기서 오스만 투르크에게 5년간 억류되었다가 1715년에야 풀려나게 됩니다.  




(폴타바 전투 장면입니다.)



(폴타바 전투 이후, 동맹이었던 우크라이나 카자흐 귀족 마제파(Ivan Mazepa)와 드네프르 강변에서 퇴각로를 논의하는 카알 12세입니다.)




이 폴타바 전투를 계기로 스웨덴은 1700년~1721년 사이에 치러진 대북방전쟁에서 북방의 패권을 러시아에게 빼앗기고 점차 몰락하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스웨덴은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특히 간신히 스웨덴으로 돌아온 카알 12세는 1718년 11월 당시 덴마크 영토이던 노르웨이의 요새를 공격하다가 어디선가 날아온 탄환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고 즉사했는데, 이때 그는 자식은 커녕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빈자리가 된 스웨덴 왕위에 대한 계승권은 그의 여동생 울리카(Ulrika Eleonora) 뿐만 아니라 홀슈타인-고톱(Holstein-Gottorp) 가문의 카알 프레드릭(Karl Fredrik)에게도 있었습니다.  거듭된 패전에 이런 사정까지 있다보니 결국 여왕이 된 울리카는 즉위의 댓가로 스웨덴 의회(Riksdag of the Estates, 스웨덴어로는 Riksens stander)에게 1719년 정부 기구법(Instrument of Government of 1719 스웨덴어로는 1719 ars regeringsform)이라는 문서에 서명을 해줘야 했습니다.  이 법안은 일종의 스웨덴 헌법으로 작용했고, 주된 내용은 그 이전까지 전제적 권력을 쥐고 있던 스웨덴 국왕의 권력을 대폭 제한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르웨이의 전장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카알 12세의 후송 장면입니다.)



(1917년에 이루어진 카알 12세의 부검 때 찍힌 사진입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노르웨이 요새에서 발사된 총알에 의한 것이다 아니다 포도탄이었다 아니다 그의 지휘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이 옆에서 쏜 것이다 등 별의별 소문이 많았습니다.   그런 괴소문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그의 시신은 1746년, 1859년, 1917년에 무려 3번이나 부검되었는데, 그 결과 밝혀진 것은 느린 속도의 탄환에 저격당한 것이고, 따라서 근거리의 부하가 아니라 노르웨이 요새에서 날아온 탄환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스웨덴에게는 잘 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패권은 잃었어도 입헌 군주국으로서 근대화의 길을 닦은 셈이니까요.  또한 카알 12세가 오스만에 머물던 동안 투르크인들에게 배워온 커피와 미트볼은 맛없기로 유명한 스웨덴의 식생활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최근에 스웨덴 정부가 공식적으로 '스웨덴의 대표 음식인 미트볼은 사실 카알 12세가 오스만 투르크에서 배워온 것이다'라고 밝히면서 스웨덴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요.




(스웨덴 정부 공식 트위터 계정에서 발표한, '스웨덴 대표 요리인 미트볼은 카알 12세가 터키에서 가져온 것이다 사실을 직시합시다'라는 트윗은 스웨덴 우익들에게 꽤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저 스웨덴 미트볼은 이케아 매장의 카페테리아에 가시면 드실 수 있습니다.  맛이요 ?  그냥 X뚜기 3분 미트볼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미트볼이 평범한 맛일지 몰라도 이런 딱딱한 호밀빵을 먹고 살던 바이킹의 후예들에게는 '드넓은 드네프르 강변 초원에서 살찐 암소들이 뛰노는 맛'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고양 이케아에 갔다가 이 knackerbrod(비스킷 스타일의 딱딱한 호밀빵)을 파는 것을 보고 찍은 사진입니다.  원래 페북에 올렸었는데, 한 분이 저 왼쪽 표지를 보고 댓글에서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니, 첫줄부터 거짓말 !'이라고 쓰신 것을 보고 빵터졌습니다.  김한솔님 고맙습니다.)




울리카 여왕은 처음에는 남편 헤세-카셀 백작(Landgrave of Hesse-Kassel)을 왕으로 승격시키고 남편과의 공동 통치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스웨덴 의회(Riksdag)과의 갈등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결국 1년 뒤인 1720년 남편에게 아예 양위를 해버렸습니다.  이로써 17세기 중반부터 스웨덴을 통치해온 팔라틴-츠바이브뤼켄(Palatinate-Zweibrucken) 왕가의 혈통은 끊어지고 독일계인 헤세-카셀 가문이 스웨덴 왕가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와이프를 잘 둔 덕분에 스웨덴 국왕에 오른 프레드릭 1세(Fredrik I)도 자식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1751년 그의 친척이었던 독일계 홀슈타인-고톱(Holstein-Gottorp) 가문의 아돌프 프리드리히(Adolf Friedrich)가 스웨덴 국왕 아돌프 프레드릭(Adolf Fredrik)이 되어 홀슈타인-고톱 가문의 치세가 시작되었습니다.  


헤세-카셀 가문이 스웨덴 국왕이 된 것도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을 패배시킨 러시아와 1719년 정부 기구법을 강요하여 통과시킨 스웨덴 의회였듯이, 홀슈타인-고톱 가문의 아돌프 프레드릭을 스웨덴 왕위에 올린 것도 결국 러시아와 스웨덴 의회였습니다.  1741–43년의 스웨덴-러시아 전쟁에서 이번에는 러시아의 여걸 엘리자베타(Elizaveta Petrovna) 대제에게 패배한 스웨덴에서는 당시 의회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모자당(the Hats, 스웨덴어로는 Hattarna)이 패전의 책임추궁을 피하기 위해 왕위 계승권 문제를 이슈화시켰습니다.  여기에 러시아 엘리자베타 대제가 끼어들었습니다.  패배한 스웨덴과 종전 협상을 하던 엘리자베타는 과연 여걸답게, 스웨덴으로부터 빼앗은 핀란드 영토 대부분을 되돌려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대신 그녀의 후계자인 표트르 3세(Pyotr III)의 삼촌인 홀슈타인 공 아돌프 프리드리히를 스웨덴 국왕 후계자로 지명하라는 것이었지요.  핀란드 땅을 돌려주는 대신 아예 스웨덴 전체를 쥐고 흔들겠다는 통큰 구상이었습니다.  국가보다는 당장 세금이 나올 영토와 자신들의 특권이 가장 중요했던 스웨덴 의회는 그 미끼를 덜컥 물어버렸습니다.  




(아돌프 프레드릭입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지 20년만인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의 사인은 과식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먹었던 식사는 랍스터, 캐비어, 사우어크라우트, 훈제 청어와 샴페인이었고, 거기에 덧붙여 그가 끔찍하게 좋아했던 스웨덴식 달콤한 푸딩인 셈라(Semla)를 뜨거운 우유에 적신 것을 무려 14인분을 먹었다고 합니다.) 



(아돌프 프레드릭을 사망에 이르게 한 헤트베크(Hetvägg)는 셈라(Semla)에 뜨거운 우유를 부어먹는 디저트입니다.  부먹을 즐기는 것을 보니 스웨덴 사람들 야만인이네요.  찍먹이여 영원하라 !)




이렇게 의회와 러시아 덕분에 왕위에 오른 아돌프 프레드릭은 그들의 기대대로 유약한 왕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권력이 의회에 있고 나라 전체가 러시아 눈치를 보던 상황에서, 허울 뿐인 왕이었던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당시 유행하던 코담배갑(snuffbox)를 만들며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 그도 의회로부터 권력을 다시 가져오려고 간간히 노력을 하긴 했습니다.  그의 왕비인 루이자 울리카(Louisa Ulrika)가 의회에 대적하여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왕비는 폐위되고, 국왕 아돌프 프레드릭은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있을 경우 퇴위하겠다'라는 서약을 해야 했습니다.  1768년에는 아돌프가 의회 권력에 저항하여 칙령에 서명을 거부하는 12월 위기(스웨덴어로 Decemberkrisen)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만, 그 결과로 의회로부터 받아낸 것은 그야말로 용돈 인상 정도였습니다.


그런 권력 없는 스웨덴 국왕이 권력을 되찾은 것은 그의 아들 구스타프 3세(Gustav III)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디저트를 너무 많이 드셔서 돌아가신 1771년 왕위에 오른 구스타프 3세는 바로 다음해인 1772년 과격한 방법으로 다시 전제 군주가 됩니다.  1718년 카알 12세의 전사 이래, 1719년 정부 기구법을 통해 실권을 장악했던 스웨덴 의회의 권력을 친위 쿠데타를 통해 끝장낸 것입니다.  정작 이렇게 귀족들로부터 무력으로 권력을 되찾은 구스타프 3세는 자신이 계몽 군주임을 표방하여, 볼테르와 교류를 가지면서 여러가지 개혁 작업을 실시했습니다.  또한 1790년 쌍방에서 500척의 군함을 동원한 엄청난 규모의 스벤스크순드(Svensksund)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을 대파하는 기염을 토하며 스웨덴이 아직 무시당할 수준으로 찌그러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보였습니다. 



 

(구스타프 3세입니다.  이 양반의 자코뱅에 대한 증오심은 살짝 지나쳤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등장하는 페르젠의 실제 모델인 악셀 폰 페르센이 프랑스군과 함께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었습니다.  폰 페르센이 그 공로로 조지 워싱턴으로부터 훈장을 받자, 구스타프 3세는 폰 페르센에게 '국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준 훈장은 패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대승리로 인해 스웨덴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자칭 계몽 군주였던 그는 이런 위험한 혁명분자들, 즉 자코뱅(jacobin)들에 대한 격렬한 증오에 사로잡혀 자유 언론을 탄압하고 별 직접적인 상관도 없는 프랑스를 적대시하며 유럽 각국의 왕족들과 연합하여 반프랑스 동맹의 열혈 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쿠데타로 권력을 빼앗은 왕을 미워하던 스웨덴 귀족들은 쓸데없이 남의 나라 일에 배놔라 감놔라 하며 국가와 귀족들을 위험에 몰아넣는 구스타프 3세에 대해 더욱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반감은 결국 1792년, 스웨덴 왕립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가장 무도회에 참석했던 구스타프에 대한 암살로 터져나옵니다.  근거리에서 등 뒤에 권총을 맞은 구스타프 3세는 총을 맞는 순간 다음과 같이 완벽한 프랑스어로 외쳤다고 합니다.


Ah! Je suis blessé, tirez-moi d'ici et arrêtez-le  (아 !  난 부상을 입었다, 날 여기서 끌고나가고 저 자를 체포하라 )


그는 이랗게 암살범들을 진압하였으나, 총을 맞은지 13일만에 패혈증으로 결국 사망했는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다행히도 스웨덴어였다고 합니다.


Jag känner mig sömnig, några ögonblicks vila skulle göra mig gott  (졸립구나, 조금 자고 나면 괜찮아질거야)


그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아들 구스타프 4세 아돌프(Gustav IV Adolf)였습니다.  당시 14살로 아직 미성년이었던 그는 삼촌 카알(Karl) 공작의 섭정 하에 성장했는데,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은 그가 숙적이자 무시할 수 없는 힘센 이웃 러시아의 대공녀인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Alexandra Pavlovna)와의 결혼을 거절했던 사건이었습니다.  1796년, 섭정인 카알 공작은 이제 막 성인이 되기 직전이었던 구스타프 4세의 미래를 위해 러시아와의 정략 결혼을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구스타프 4세는 독실한 루터파 개신교 신자였고, 자신의 왕비가 러시아 정교를 버리고 루터파로 개종하지 않는다면 결혼할 수 없다고 버티어 이 혼사를 망쳐놓았습니다.  이것을 본 스웨덴 귀족들은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드디어 스웨덴에 검소하며 신앙심이 독실한 평범한 왕이 왕좌에 앉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To be continued...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Instrument_of_Government_(1809)

https://en.wikipedia.org/wiki/Instrument_of_Government_(1719)

https://en.wikipedia.org/wiki/Gustav_IV_Adolf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Gustav_III_of_Swe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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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웃자웃어 2018.06.25 08: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질문있습니다. 당시(나폴레옹 전쟁시기)에 전쟁배상금은 어떠한 방식으로 갚나요?
    1)한번에 갚나요? 몇년에 걸쳐서 갚나요?
    2)국채를 발행해서 갚기도 합니까?
    3)국민들에게 걷는 세금을 대폭 인상해서 갚기도 합니까?

    • nasica 2018.06.25 1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당연히 할부입니다.
      2) Yes.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에게서 배상금 일부로 받은 약속어음을 바르샤바 공국에게 할인가에 떠넘기기도 했습니다.
      3)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패전 직후에 설마 세금 대폭 인상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2번에서 나폴레옹이 프로이센 어음을 할인가에 바르샤바에 떠넘긴 것도 사실상 받아내기 어려운 불량 채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웃자웃어 2018.06.25 08: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각해보면 한국도 5호 16국 시기에 중국의 문화가 중국의 난민들을 통해서 많이 유입되었죠.

  3. 2/28일 입대 2018.06.25 14: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매번 좋은 글 과분하게 누리고 갑니다. 문득 궁금해졌는데요, 평민 병사가 아무리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베테랑이라고 해도 그 경험만으로 원수가 된건 아닐 것 같은데요, 저때도 간부후보생(맞나요? 그 병사가 장교가 되는 것) 과정 같은 제도가 있었나요?

    • nasica 2018.06.25 2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혁명 초기 자원병들로 구성된 부대들은 놀랍게도 병사들 중에서 선출로 장교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기다리시면 나옵니다만 베르나도트는 장교가 될 자질과 기초 교육이 충분했습니다.

  4. 석공 2018.06.25 2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찍먹이여 영원하라~~ ^^

  5. 카를대공 2018.06.28 09: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일계 왕족이 동유럽,중부유럽,북유럽까지 광범위하게도 왕자리 해먹었네요.

    그러고보니 지금 영국 왕가도 독일계였죠.

  6. 샤르빌 2018.07.01 01: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야 역시 유럽왕가들은..

  7. 엠마 넬슨 2018.07.01 05: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스트리아와 섞이지 않은 유럽왕가는 있으려나요? ㅋㅋ

  8. TheK의 추천영화 2018.07.22 11: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흥미진진합니다. ^^*

  9. 목탁 2019.02.27 1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오~구스타프 3세의 암살에 저런 뒷사정이...참고로 먼 훗날 '메리메'란 프랑스의 소설가가 저 암살 사건을 소재로 단편
    호러 소설 하나를 썼었는데, 정작 소설 주인공은 그보다 훨씬 전 시대 왕인 칼 9세 (사자왕의 아부지)...대략적인 줄거리는 칼 9세가 본인 생일날에 뜬금없이 궁전에서 몇몇 괴기현상들을 겪은 끝에, 급기야
    어느 홀에서 '생전 처음 보는 옷차림의 군중들'이 '목 없는 누군가'의 장례를 치르는 환영과, '어떤 젊은이'가 참수당하는 환영을 보게 되고, 환영 중 1명으로부터 '넌 별 탈 없겠지만, 한 5대쯤 후의 왕한테는 재앙이 닥칠 거야'라는 경고까지 듣는다는 내용입니다. 소설 말미에 저 괴현상들이 구스타프 3세의 암살에 대한 예언일 거라고 추측하는 형식으로 작가가 해설을
    덧붙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