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링턴은 포르투갈에 상륙하자마자 곧 이베리아 반도의 지형적, 그리고 사회적 특수성이 영국은 물론 프랑스나 독일 등 기타 유럽 지역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큰 특징으로, 제대로 된 길이 없었습니다 !  이는 스페인의 침공 위협 때문에라도 스페인과의 교통로를 적극 개발하지 않았던 포르투갈의 특수성에도 기인했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나 모두 산업과 통상의 발달이 부진했다는 점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지역간에 거래를 할 상품이 없다보니 마차가 다닐 일도 없고, 마차가 다닐 일이 없으니 넓직한 길이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스페인은 지역 감정이 꽤 심한 나라여서 지방 간의 인적 왕래도 그다지 많지 않다보니, 더더욱 내륙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교통망에 더해,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건조한 편이라서 농업 생산량이 그렇게 풍요롭지는 않았습니다.  이탈리아나 독일의 농가들은 어지간한 농가의 창고문만 걷어차도 밀과 보리, 달걀이 쏟아져 나왔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포르투갈은 척박한 스페인과 대비했을 때조차도 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원래 현지 조달에 의존했던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도 쫄쫄 굶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온 지역이 이렇게 가난하다보니,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어려웠지요.  




(보시다시피 이베리아 반도의 상당 부분이 산지이거나 메마른 지대라서, 농업에 적절한 곳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지금도 스페인은 올리브유 생산이 매우 활발한 나라입니다만, 그건 반대로 곡물 농사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지대라는 반증입니다.)




현지 조달이 어려우면 본국에서 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베리아 반도의 열악한 내륙 교통망이 발목을 잡습니다.  가뜩이나 프랑스 본토와 스페인 사이에 피레네 산맥이 있는 것도 장애가 되었는데, 해안길을 통해서라도 수송대가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한 뒤부터가 진짜 고생길이었던 것입니다.  세계 지도에서 보면 스페인은 프랑스나 독일에 비하면 별로 큰 땅덩어리처럼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건 메르카토르 도법의 특성상 남쪽에 있는 땅이 좁아보이는 것입니다.  프랑스가 64만 평방 km인 것에 비해 스페인이 50만 평방 km으로서, 스페인은 굉장히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탄한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 높은 산맥과 언덕이 많은 땅이지요.  길도 제대로 없는 그런 땅을 가로질러 20만 대군이 먹을 식량을 마차로 수송한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그런 도전은 스페인의 게릴라들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경우, 이베리아 땅이 반도이니만큼 그냥 해상으로 수송한 뒤 내륙으로 운송하면 훨씬 일이 쉬워질 것입니다.  문제는 영국의 저 망할 로열 네이비 때문에 그게 불가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온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현지 조달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는 수탈당하는 스페인 민중들에게도 큰 비극이었지만 약탈하는 프랑스군에게도 무척 고단한 일이었습니다.  만명 단위의 대군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 그 일대의 식량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게 됩니다.  프랑스군이 먹어치우는 것도 있지만, 그 일대의 농민들이 식량을 감추거나 떠나버리기 때문이었지요.  결국 프랑스군은 한 곳에서 1주일 이상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굶지 않으려고 먹을 것을 찾아 끊임없이 유랑하는 거지떼 내지는 떼강도 신세가 된 것이지요.  군사 작전이라는 것에서 이동이 잦을 수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적을 압박하거나 반대로 피하기 위해서이지 굶지 않기 위해서 이동하는 군대에게는 작전의 유연성이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스페인에 투입된 근 20만에 가까운 프랑스군 대부분은 먹을 것을 찾아 이동 중이거나, 분산되어 먹을 것을 약탈 중이거나, 혹은 신기루 같은 게릴라들의 뒤를 쫓아 산 속을 헤매면서 세월을 낭비해야 했고, 실제로 영국군이나 스페인군과의 전투에 투입되는 프랑스군은 그 1/4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웰링턴은 유능한 지휘관답게, 이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영국군이 10만 단위의 대군으로 되어 있는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군량 조달을 가장 유용한 무기로 삼아야 한다고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조건은 비슷했습니다.  길이 형편 없는 것도 똑같았고, 바닷길을 이용할 수 없는 것도 같았습니다.  스페인의 주요 항구들이 대부분 프랑스군 손아귀에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식량을 수송해올 거리는 영국 측이 훨씬 멀었습니다.  영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거리가 프랑스와 스페인의 거리보다 멀었고, 그나마 영국 본토도 대륙 봉쇄령으로 인해 식량난이 심해져서 밀과 빵값이 오르는 등 난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규모로 식량을 포르투갈에 보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미국과 남미, 오스만 투르크, 심지어 북아프리카 모로코 등지에서 식량을 구매하여 포르투갈로 실어날랐습니다.




(혼블로워 시리즈 중에서 (실제 소설이 씌여진 순서는 아니지만) 첫번째 편인 Mr. Midmanship Hornblower는 혼블러워의 사관후보생 시절을 그린 옴니버스식 소설입니다.  그 중 한 에피소드가, 식량으로 소를 사러 북아프리카 이슬람 지역에 들어갔다가 전염병에 휘말려 격리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영국군 병참부에게 진짜 고난은 포르투갈 해변에 온갖 보급품이 잔뜩 쌓이는 바로 그 순간부터였습니다.  1808년 8월, 당시 쥐노가 점거하고 있던 포르투갈을 탈환하기 위해 웰슬리가 포르투갈 마세이라(Maceira) 만에 상륙했을 때, 전에 언급한 샤우만(August Friedrich Ludolph Schaumann)이라는 이름의 독일 출신 병참 장교에게 주어진 임무는 터무니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조수도 부하도 없이 혼자서, 그저 공책 한권을 주고는 해변 여기저기에 야적된 수많은 보급품 더미를 조사하여 목록을 작성한 뒤 이제 내륙으로 진격할 영국군 부대를 따라 수송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샤우만이 그런 업무에 숙련된 병참 장교였는가 하면 그게 또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랑스군의 하노버 침공 이전에 하노버 군에서 몇년 장교로 복무했다가 퇴역한 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 장부 작성 등의 업무를 좀 해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영국군 소속 독일군 전투 부대인 KGL 제7 연대 소속의 평범한 장교였고, KGL 장교로서는 승진과 연금의 비전이 없다고 보고 일당 7.5 실링(현재 가치로 대략 9만5천원)의 급여를 위해 병참 장교로 자리를 옮긴 아마추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아무런 지침이나 교본이 없었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The British Commissary'(영국 병참부)라는 멋대가리없는 제목의 책이 한권 있었는데, 이는 메서리어(Havilland le Mesurier)라는 이름의 영국인이 쓴 것으로서, 당시 영국군 병참부 직원들에게는 수학의 정석이나 다름없는 책이었습니다.  메서리어는 원래 해외 무역업자였다가 프랑스 혁명정부와 영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1793년부터 네덜란드 방면 영국군 원정대에 딸린 병참 장교 역할을 했습니다.  1794년에서 그 다음해까지 벌어진 이 방면 전투에서 영국군은 형편없는 성과만 냈을 뿐이었지만, 정말 아무 준비도 안 되어있던 영국군 병참부는 이 난리통 속에서 그나마 나름 경험과 수완을 쌓았던 모양입니다.  그 이후에도 메서리어는 병참부 장교직을 사직했다 복직했다 했는데, 영국군 병참부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은 저 'The British Commissary'라는 책을 저술한 것이었습니다.  




(메서리어의 'The British Commissary'입니다.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책입니다만, 저는 못 읽어보았습니다.)




그런 교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포르투갈에서의 영국군 병참부는 초기에 극심한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참부는 힘만 들고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노동일을 하는 부서라는 인식이 강하고 실제로도 그랬던 것만큼, 빛나는 전통이고 뭐고가 없었던 것입니다.  달랑 책 한 권을 손에 든 경험 없는 병참부 장교들도 막대한 보급품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사실은 병참부 소속 장교들은 진짜 장교도 아니었습니다.  병참부는 군의 일부가 아니라, 재무부의 감독과 지시를 받는 파견직 민간인들이었거든요.  따라서 deputy commissary-general이니 assistant deputy commissary-general이니 하는 것들은 진짜 장군이 아닌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말단 사병들이 경례를 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민간인 정부 관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장교들과 엇비슷한, 그러나 분명히 차이가 나는 군복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권총과 군도와 같은 무기도 휴대했습니다.  병사들은 '저것들은 장교 비슷한 군복은 입었지만 장교가 아니며,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와 함께 싸우지 않고 후방으로 도망친다'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전투가 벌어지면 적지 않은 경우 무기를 들고 프랑스군과의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이처럼 아군에게 저평가되었지만, 사실 이들의 업무는 제1선 장교들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우며 개인적인 창의성과 수완, 용기와 기지를 발휘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전투 현장에서 대포알과 머스켓 탄환에 노출된 채 병사들을 이끌고 전진할 때, 멋진 붉은 제복을 입은 장교가 부릴 수 있는 재주는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저 운이 좋은 자는 살아서 전진할 수 있는 것이고, 운이 나쁜 자는 대포알에 두동강이 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흙탕 길에 바퀴가 빠진 무거운 수레를 어떻게 빼낼 것인지, 수송에 3일 걸리는 건빵 자루 더미들을 어떻게 2일 안에 최전방까지 나를 것인지, 가진 돈은 50쉴링 밖에 없는데 일당 1쉴링을 요구하는 노새 30마리를 어떻게 3일 동안 빌릴 것인지 등은 그야말로 담당 직원의 역량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성공과 실패에 따라 전투의 승패가 뒤바뀔 수 있는 일이었지요.  그런데도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밀가루 자루를 실은 노새들을 끌고 최전선 부대에 도착한 병참부 장교에게 주어지는 것은 '왜 이리 늦게 왔냐' '왜 보급품이 이것 밖에 없는가' 등의 핀잔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병참부는 체계화가 꼭 필요한, 나름대로 무척 섬세하고 정밀한 병과입니다.  가령 포르투갈을 통해 상륙하는 영국군 병사들의 행군에 대해 웰링턴이 병참감(Commissary General)인 케네디(Sir Robert Hugh Kennedy)에게 보낸 지시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들어있습니다.


"상륙하는 부대는 각자 4일치의 빵과 2일치의 고기를 휴대한다.  병사들이 휴대하는 빵 외에, 1만 명의 3일치 빵을 수송해야 하는데, 가능하다면 노새를 이용해 날라야 한다.  각 노새에는 2개의 자루, 즉 224파운드의 짐을 실을 수 있으므로 전체를 위해서는 130마리의 노새가 필요하다."


이 계산은 꽤 합리적입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의 배식량은 하루에 빵 1파운드였는데, 1만 명의 3일치라면 3만 파운드입니다.  224파운드를 실을 수 있는 노새를 130마리 동원한다면 224 * 130 = 29,120 파운드이므로, 1인당 0.97 파운드씩의 빵을 3일간 보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계산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노새가 먹을 사료는 계산에 넣지 않았쟎습니까 ?  노새는 하루에 10파운드의 곡물을 먹어야 했고, 병사들이 3일 행군하는 것을 따라 나섰다가 다시 보급품이 쌓여있는 항구로 되돌아오려면 왕복에 6일이 걸렸으므로, 노새 1마리가 싣는 224 파운드 중 최소 60파운드의 곡물은 노새가 먹어치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즉, 130마리의 노새의 실제 수송량은 29,120 파운드가 아니라 21,320 파운드였고, 병사들은 3일간 0.97 파운드가 아닌 0.7 파운드라는 부실한 양의 빵을 받아야 했습니다.




(도로망이 형편없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노새들을 이용한 보급품 수송이 정말 최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미숙하기 짝이 없었던 영국군 병참부도 2년 정도에 걸쳐 노새꾼들과 노새들을 고용하여 운용을 하면서 경험이 쌓여, 그 고용 및 활용, 급여 지급 등 온갖 자질구레한 잡무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실은 총사령관인 웰링턴 장군이 이런 노새 한마리가 몇 파운드의 짐을 싣을 수 있으며 그래서 몇 마리의 노새가 필요한지에 대해 계산하여 병참감에게 보내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한 일이기는 합니다.  이런 편지는 오히려 반대로 병참감이 원정군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형태로 보내는 것이 맞겠지요.  당시 웰링턴은 병참부 장교들과 서기들의 무능력에 대해 짜증이 잔뜩 난 상황이었는데,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샤우만을 포함한 대부분의 병참 장교들이 별다른 병참 업무 경험도 없이 새로 채용된 사람들이다보니 워낙 아는 것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군 병참부는 웰링턴 하에서 혁혁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총사령관 웰링턴이 직접 나서서 '가장 신경써야 하는 부서'라고 지목하면서, 저렇게 노새 몇 마리가 필요하다는 계산까지 세세히 해줄 정도였으니 당연히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특히 1810년 10월부터 다음해 초까지의 대치 끝에 토헤스 베드하스(Torres Vedras) 방어선 앞에 마세나의 프랑스군을 후퇴시킨 승리는 사전에 충분한 군량을 비축해놓은 영국군 병참부가 아니었다면 절대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아무도 병참부의 공로를 알아주지 않았지요.  이 사실은 웰링턴 휘하 어지간한 장군들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 등의 인터넷 사이트에 많은 정보가 있는 것에 비해, 웰링턴 휘하의 전체 병참부 책임자였던 케네디(Sir Robert Hugh Kennedy)에 대해서는 정말 정보가 없다는 것으로도 반증됩니다.  오히려 영국군 병참부의 위력과 중요성을 잘 알고 두려워했던 것은 적군인 프랑스군이었습니다.  1812년 웰링턴과 대치했던 마르몽(Marmont) 원수는 나폴레옹에게 이와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웰링턴은 제게 보급품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광활한 척박함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마르몽은 유난히 영국군의 노새 부대에 대해 넋두리를 많이 늘어놓았습니다.  1811년에도 그는 나폴레옹의 참모장 베르티에에게 편지를 써서 '영국군은 노새 1만2천 마리를 이용하여 너무나 쉽게 이동한다, 그러니 내게 단 1천2백 마리라도 노새를 좀 공급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개성을 가지고 사람과 소통하는 용들이 등장하는 나오미 노빅의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 '테메레르'에 대해 전에 언급했던 적이 있지요.  대포의 시대라고 해도 그런 거대한 용들 수백 마리로 구성된 군대가 있다면 아마 천하무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용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거대한 용들에게 먹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도 일종의 용이었습니다.  그 대군을 일거에 밀어넣으면 스페인 정도야 순식간에 휩쓸어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군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에 대한 답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지요.  영국군이 소수로도 내노라하는 나폴레옹의 부하들을 차례로 꺾고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낸 것은 바로 그 문제를 잘 해결했기 때문이었고, 그 핵심에는 영국의 병참부가 있었습니다.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https://en.wikipedia.org/wiki/Glacis

https://en.wikipedia.org/wiki/Havilland_Le_Mesurier



(흔히 단순한 축성 전문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 분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17세기부터 2백년간 요새와 포병, 병참, 병력 운영 등 모든 전쟁 양상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그야말로 위풍당당 보방(Sébastien Le Prestre de Vauban) 백작입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지의 군사 요충지에 일찌기 보지 못했던 묘한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당대 유럽의 군사 작전 행태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보방(Vauban)식 요새의 등장이었습니다.  대포의 발명과 함께 무용지물이 되었던 중세식의 높고 웅장한 성벽과는 달리, 보방식 요새는 낮고 두꺼운 벽으로 된 보루(redoubt)와 쐐기 모양의 옹벽(ravelin), 그리고 대포알을 튕겨내기 위한 경사방벽(glacis) 등을 갖춘, 한마디로 방탄벽을 갖춘 요새였습니다.  이런 별모양의 보방식 요새는 17세기 프랑스의 공병 전문가 보방(Sebastien Le Prestre de Vauban, Seigneur de Vauban)에 의해 획기적으로 개선된 뒤 17세기에 걸쳐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가면서, 군사 작전의 형태가 군사작전의 형태가 대규모 회전보다는 요새를 둘러싼 포위전으로 변질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경사방벽이란 요새방벽을 둘러싼 해자 바로 바깥쪽에 흙으로 두툼하게 쌓아놓은 방벽이었습니다.  포위군이 요새방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쏘아대는 포탄 상당수가 이 경사방벽에 튕겨져 나갔습니다.)


(경사방벽이 포위군의 포병들에게 얼마나 미치고 환장할 방어수단인지 보여주는 구조도입니다.  포위군은 요새방벽을 대포알로 때려 무너뜨리길 원하겠지만, 요새방벽은 깊은 해자와 경사방벽으로 인해 공성포에게는 지극히 작은 표적이 되었고, 맞추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방벽 위의 수비군은 적군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고요.)



(레만 Lehman 호수 서쪽 끝부분에 위치한 제네바 Geneva를 둘러싼 보방식 방벽의 모습입니다.  이 지도는 1841년의 모습인데, 지금 저 방벽은 헐리고 없습니다.)




전쟁의 형태가 장기간의 포위전이 되어버리자, 당장 문제가 발생한 것이 군대의 식량 조달이었습니다.  아무리 종군상인들이 부지런히 왔다갔다 한다고 해도, 종군 상인 몇몇에게 전부대가 먹을 밀가루와 빵을 의존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또 너무 비쌌습니다.  결국 군량 중 상당부분은 주변 농가들로부터 징발을 하거나 약탈을 통해 구해야 했는데, 수만 명의 포위군이 적 요새를 둘러싸고 근처에 몇 달 버티면 그 주변 일대의 식량은 씨가 말라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식량을 더 구할 수 없으면 포위를 유지할 수 없었고, 이는 곧 포위전의 패배를 뜻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제를 개편한 나라는 역시 유럽의 육군 강국이자 가장 많은 침공 전쟁을 치른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가장 많은 보방식 요새를 구축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적 요새를 가장 많이 공격한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17세기 중반에 삼총사에 나오는 유명한 추기경이자 정치인인 마자랭(Jules Mazarin)의 부하인 국방장관 르 틀리에(Michel Le Tellier)는 근대 유럽 세계 거의 최초로 국가 차원에서 병참 업무 개혁을 손보기 시작했니다.  기존에는 각 연대장들의 재량에 따라 그때그때 제멋대로 맺어졌던 종군상인들과의 계약을 표준화하여 좀더 체계적이고 원활하게 보급이 이루어지도록 했고, 여태까지 하찮고 천하게 여기던 수송 업무에도 신경을 써서 짐수레 부대도 상설화했습니다.  무엇보다 전투 지역 인근에 보급창을 세워 군량을 미리 축적하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이 분이 르 틀리에입니다.  이 분은 리셜리외의 뒤를 이은 추기경+재상인 마자랭에게 평생 충성했고, 또 루이 14세를 꼬드겨 프랑스 내의 신교도인 위그노들을 탄압하는데도 앞장섰습니다.  덕분에 프랑스의 국가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는데 꽤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르 틀리에 본인은 끝까지 잘 살았고, 아들인 루부아 Louvois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방장관직에 올랐습니다.)



(르 틀리에의 병참 개혁이 큰 도움이 되었던 1658년 덩케르크 Dinkirk 포위 작전도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고 스페인 및 영국 왕당파 연합군이 점거한 덩케르크를 포위 공격한 전투입니다.  결국 영불 연합군이 덩케르크를 함락시켰습니다.)




물론 이런 개선은 여전히 미흡했고, 전선의 많은 부대들은 계속 약탈과 현지 징발에 의존했으며, 덕분에 프랑스군은 여전히 배가 고팠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여 프랑스군의 병참 능력은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우수해졌고, 이는 결국 나폴레옹의 기동전과 맞물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패하는데 큰 힘이 됩니다.  나폴레옹 기동전의 근원은 식량의 현지 조달이었는데, 이는 유능한 병참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809년 제5차 대불동맹전쟁 때는 오스트리아군도 프랑스군의 흉내를 내어 식량의 현지 조달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 병참부의 역량이 프랑스군보다 훨씬 뒤떨어졌던 것이지요.  '현지 조달'이라는 것이 꼭 약탈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무자비한 약탈로 당장 먹을 것을 손에 쥔 굶주린 병사들이 자기들 몇몇끼리만 배부르게 먹고 마시는 것을 막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수집한 식량을 재빠르게 계량하고 보관하고 수송하여 넓은 곳에 분산된 아군 병력에게 효율적이고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질구레한 실무 능력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마 나폴레옹이 말단 병참부 서기들을 모아놓고 그렇게 밀가루와 와인 항아리를 다루는 법을 일일이 가르쳤겠습니까 ?  프랑스군 병참부는 르 틀리에 시절부터 근 100년 넘게 다른 나라 군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실무 능력을 쌓아왔었고, 나폴레옹이 그 혜택을 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바다 건너 영국은 나폴레옹 시대 100년 전부터 유럽 대륙은 물론 아프리카와 아시아, 북미와 카리브해 등 전세계를 지역구로 활발한 침략 전쟁과 식민지 운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원거리에 걸친 병력과 장비, 식량과 탄약의 수송에 있어 굉장히 전문화된 체계를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해군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육군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그런 병참 업무의 체계화가 보잘 것 없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1808년 포르투갈에 상륙한 웰링턴이 상륙 1주일 후 국방부 장관인 캐슬레이 경(Lord Castlereagh)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장 불평한 것이 병참 업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진격시 제가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은 바로 병참부(Commissariat)의 체계화입니다.  이 부서는 장관님의 심각한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이 병참부는 웰링턴의 사령부에 있던 다른 지원 부서들, 즉 의무부(Medical Department), 조달부(Purveyor's Department, 이름과는 달리 병원기자재와 사망자 처리를 담당), 경리부(Paymaster-General), 자재부(Storekeeper-General, 역시 이름과는 달리 주로 장비와 텐트 등의 수송을 담당) 등과 함께 민간인으로 구성된 부서였습니다.  다만, 병참부는 다른 지원 부서들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이들 부서 중에서 유일하게 그 부서장이 런던의 재무부(His Majesty’s Treasury)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차이는 웰링턴이 보낸 편지에 나오는 것과 같이, 모든 지원 부서 중에서 병참부의 업무가 군사 작전의 성패에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리스본으로 선적된 건빵 한 개가 최전선의 병사의 입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전체 과정을 상세히 보살피고 추적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수행될 수 있는 군사 작전은 하나도 없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이 나폴레옹을 격파하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이 둘의 군사적 역량 차이는 누가 봐도 나폴레옹이 두 단계는 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웰링턴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밀어낼 수 있었던 것은 웰링턴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실속있는' 스타일의 지휘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웰링턴이 이렇게 병참부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랬습니다.  원래 웰링턴이 병참 업무가 주특기였기 떄문에 그랬을까요 ?  웰링턴은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하기 전에는 인도와 덴마크에서 활약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도 이렇게 병참부를 중시했을까요 ?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웰링턴이 뜬금없이 병참부의 열성팬이 된 것은 이베리아 반도의 특수성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그 특수성이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



(이번에는 좀 너무 짧군요.  분량 조절 실패로 병참부 이야기는 3부에 걸쳐 늘어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T T)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https://en.wikipedia.org/wiki/Glacis




후퇴하는 웰링턴의 뒤를 쫓아 리스본으로 달리던 마세나가 1810년 10월 14일 생각지도 못했던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을 직접 육안으로 보고 그 규모에 경악하는 사이, 웰링턴이 사전에 프랑스군 후방에 미리 풀어놓았던 비밀 병기는 이미 작동을 시작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기아였습니다.  애초에 웰링턴은 마세나와 피투성이가 되어 멱살을 쥐고 구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기본 전략은 리스본 북쪽의 황량한 험지에서 마세나의 진격을 틀어막고 마세나에게 굶어죽든지 돌아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웰링턴은 부사쿠 전투를 전후하여 계속 그 일대의 포르투갈 주민들을 방어선 이남으로 피난가라고 강요했던 것입니다.  


이는 병력은 부족하지만 물자는 풍부하고 기동력은 느리지만 방어에는 탁월한 영국군에게 딱 어울리는 매우 효율적인 전략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웰링턴의 자화자찬에 불과했습니다.  포르투갈 입장에서 보면 이런 작전은 웰링턴이 영국군의 전투 손실을 막기 위해 포르투갈 민간인들을 희생시키자는 수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10월 중순부터 우기가 시작되는데, 식량이나 주택이나 영국군은 아무 것도 책임져주지 않으면서 무조건 집을 떠나 남쪽으로 가라는 것은 사실상 길바닥에서 굶어죽거나 얼어죽으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주민들은 피난 가기를 거부했고 영국군은 집에 남은 주민들에게 '떠나지 않을 경우 무력을 행사하겠다' 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전쟁은 비참한 것입니다.  영국군의 명령에 순종하여 정처없이 길을 떠난 주민들도, 명령을 거부하고 집에 남은 주민들도 모두 전쟁의 참혹함에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프랑스군에게도 인정은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집에 남은 주민들은 그야말로 프랑스군에게 가진 식량과 주택을 모두 빼앗기고 여성들은 성폭행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그에 저항하던 주민들은 가차없이 살해되었습니다.  가령 쿠임브라(Coimbra) 시의 주민들 중 끝내 피난가지 않고 남은 주민들 약 2만명 중 5% 정도인 1천명 정도가 쿠임브라가 함락될 때의 무질서한 약탈 와중에 살해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영국군의 총칼에 떠밀려 길바닥에 나선 주민들의 처지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동맹군이라지만 난폭하기로는 프랑스군 못지 않았던 영국군의 약탈과 폭행, 굶주림과 추위였습니다.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뒤로 후퇴할 때 연합군과 함께 집을 버리고 피난가도록 강요된 포르투갈 주민들의 비참함에 대해서는 로열 스코틀랜드 제1 연대 3대대의 존 더글라스(John Douglas)라는 부사관이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불쌍한 주민들은 가족마다 앞에 어린 것들을 앞세우고 걸었는데, 이 어린 것들은 매일, 아니 거의 매시간 줄어들었다.  그러나 난파선의 선원들이 물 위에 뜬 마지막 나무조각에 매달리듯 이들은 계속 어디론가 걸어가야 했다.  이들을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적이나 아군이나 모두 이들의 소지품을 약탈했다.  결국 이들 대부분은 영국군 포병 진지 뒤편에서 땡전 한푼 없이 참혹한 겨울을 보내야 했다.  이 글을 읽는 영국인들이여, 생각해보라.  내가 여러분에게 이런 사실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고, 또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잠시 동안이라도 그 불쌍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도 쉬운 일이리라.  그러나 전쟁의 참혹한 손아귀로부터 이 축복받은 섬 주민들(영국인들을 지칭: 영국)을 지켜주신 주님께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Los desastres de la guerra, 즉 '전쟁의 참상'이라는 고야(Goya)의 시리즈 판화물 중 'No hay quien los socorra' (그들을 도울 자는 없다)라는 그림입니다.  세 명의 여인이 죽어 쓰러져 있고, 한 명이 서서 울고 있습니다.)




(역시 '전쟁의 참상' 시리즈 중 'De qué sirve una taza?' (컵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라는 그림입니다.  두 명의 굶주린 여인이 쓰러져 있는데 다른 여자 하나가 그 중 죽어가는 한 명에게 뭔가가 담긴 컵을 권하고 있습니다.)




결국 1810년 10월부터 1811년 봄까지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동안 무려 5만명의 포르투갈 주민들이 아사 및 병사, 동사해야 했습니다.  5만이라는 숫자는 당시 포르투갈 전체 인구의 2%로서 정말 막대한 피해였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남한 인구가 약 2천만명이었는데 그 끔찍했던 3년 전쟁 동안 남한 민간인 사망자만 약 38만명으로 약 2%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포르투갈은 약 5개월 동안 전체 인구의 2%가 사망했으니 얼마나 참혹한 광경이었는지 상상이 가실 것입니다.


포르투갈 민간인들에게 이토록 참담한 희생을 강요한 결과 프랑스군도 큰 피해를 입었을까요 ?  예, 당연히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상대적으로 매우 작았습니다.  1810년 9월 기세 좋게 포르투갈 국경을 넘은 프랑스군은 총 6만5천으로 시작했으나 다음해 2월 결국 프랑스군이 철수할 때 살아서 돌아간 것은 4만이었습니다.  그 중 전투에 의한 사상자는 부사쿠 전투 때의 약 4500 정도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굶주림과 그로 인한 합병증에 의해 희생된 것이었습니다.  또 알게 모르게 굶주림에 지쳐 탈영한 프랑스군도 꽤 많았겠지요.  무려 2만이나 되는 적을 총 한방 쏘지 않고 무찔렀으니 웰링턴은 기뻐했을까요 ?


웰링턴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포르투갈 주민들에게 끼친 피해에 대한 자책감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세나는 불과 2~3주도 버티지 못하고 스페인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그때 굶주리고 지친 채 후퇴하는 마세나의 군대를 추격하여 격파할 생각이었습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약 1년 전인 1809년 5월, 포르투(Porto)에서 퇴각하는 술트의 군단을 추격하며 기세를 올렸던 신나던 순간이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놀랍게도 마세나는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바로 코 앞에서 무려 1달을 버텼습니다.  웰링턴의 예상대로 프랑스군의 굶주림은 극심했습니다.  불과 2주만인 11월 초 이미 식량 부족으로 인한 프랑스군의 비전투 병력 손실은 5천에 달했으니까요.  수백 명의 프랑스군이 굶주림에 견디지 못하고 영국군 측에 투항해왔습니다.  그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마세나는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확실히 노련한 적수였습니다.  짙은 안개가 끼었던 11월 14일 밤, 프랑스군은 군복을 입고 군모까지 쓴 허수아비들을  감시 초소에 남겨둔 뒤 조용히 철수해버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10시가 넘어 안개가 다 걷히고도 몇 시간이 더 지나서야 영국군은 프랑스군이 모조리 철수했다는 것을 눈치챌 정도의 기민함이었습니다.  


포르투에서 술트를 결국 놓쳤듯이 마세나도 놓치게 되었다고 생각한 웰링턴이 느림보 영국군을 닥달하여 부랴부랴 그 뒤를 쫓았으나 영국군 전위부대가 프랑스군을 따라잡은 것은 무려 2일이 지난 11월 17일이 되어서였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프랑스군은 기가 죽어 걸음아 날살려라 도망치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쫄쫄 굶은 군대치고는 엄청난 속도인 하루 28km의 행군을 2일간 강행한 프랑스군은 어느 틈에 테주(Tejo) 강 북안에 면한 강변 도시 산타렝(Santarém)에 겨울 숙영지를 마련하고 든든한 방어진지까지 구축해놓은 상태였습니다.  마세나는 식량 부족으로 인해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앞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 식량 사정이 그나마 나았던 이 곳에 진지를 구축한 뒤 포병대와 야전 병원 등 이동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부대부터 미리 이동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산타렝에는 레이니에(Jean Reynier)의 제2 군단이 자리잡았고 나머지 부대들은 역시 먹을 것이 있는 더 북쪽 지역으로 분산되어 있었지만 웰링턴은 감히 프랑스군을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엔 닭쫓던 개 신세가 된 영국군을 프랑스군이 든든한 방어진지 안에서 비웃는 상황이 된 셈이지요.  




(마세나가 원래 대치하던 곳은 토헤스 베드하스가 아니라 소브랄이라는 마을 근처였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산타렝까지는 대략 55km 정도 걸리는 곳이었습니다.  하루에 28km씩 걸었다는 이야기지요.)




이렇게 양군은 지루한 대치 상황에 들어갔습니다.  웰링턴은 프랑스군이 여기서도 굶주리다 결국 몇 주 버티지 못하고 철수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놀랍게도 마세나의 프랑스군은 정말 뛰어난 식량 수집 기술을 발휘하여 다음해 3월까지 무려 3개월이 넘는 기간을 버텼습니다. 


대체 프랑스군은 어떻게 이렇게 먹을 것도 없이 버틸 수 있었을까요 ?  결국 웰링턴의 초토화 작전은 그다지 완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찰스 콕스(Charles Cocks)라는 영국군 정보 장교가 11월 4일 기록한 일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 병참 장교들을 동원해서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앞 10 리그(league, 1리그는 약 5.5km)에 걸친 전 지역에서 모든 식량을 다 사들였더라면 적은 식량 부족으로 훨씬 더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페니슈(Peniche) 지방의 총독인 블런트(Blunt) 장군이 얼마전 포르투갈 민병대장들(Capitao Mors)에게 레이리아(Leiria)와 방어선 사이에 있는 전체 곡물을 다 치우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는지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답변은 6주였으나, 지난 달 우리가 후퇴할 때 실제로 그들에게 통보가 갔을 때는 불과 며칠의 여유 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많은 양의 식량이 적의 손에 떨어졌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니까 원래 계획은 토헤스 베드하스 북쪽 100km 넘게 떨어진 레이리아까지 초토화 작전을 펼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정말 철저히 수행되었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죽어야 했을까요 ?)




그래도 물론 먹을 것은 부족했습니다.  마세나가 그렇게 먹을 것도 별로 없는 곳에서 버틴 이유는 웰링턴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서 서투른 공격을 해오는 것을 역공하든가, 아니면 스페인에서 드루에(Drouet)의 제9 군단이 지원을 위해 이동해오면 합세하여 웰링턴을 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웰링턴의 조심성은 바닥을 몰랐고, 레이니에의 제2 군단이 완전히 고립된 상태로 굶주리고 있었는데도 공격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세나는 다음 해인 1811년 2월, 실패를 인정하고 포르투갈을 떠나 스페인으로 후퇴했습니다.  그 때 즈음에는 먹이찾기의 귀재 프랑스군조차도 더 이상 먹을 것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일대가 탈탈 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웰링턴은 '영국군이라면 한달도 버티지 못할 곳에서 프랑스군은 무려 3달을 버텼다'라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결국 1810년~1811년 봄까지 이어진 마세나의 침공과 그에 맞선 웰링턴의 작전은 수만 명의 무고한 민간인 사망자만 낸 채 양측에게 아무 의미도 없이 끝났습니다.  전쟁, 특히 외국군에게 국토를 맡긴 전쟁이란 이렇게 참혹하고 무의미한 것입니다.  






Source :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massena_portugal.html

https://www.lifeofwellington.co.uk/commentary/chapter-twenty-three-torres-vedras-october-1810-to-february-1811/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peninsular.html

https://en.wikipedia.org/wiki/Lines_of_Torres_Vedras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lines_of_torres_vedras.html

http://samilitaryhistory.org/vol102sm.html

https://www.voakorea.com/a/article----625----124496254/1348359.html

https://en.wikipedia.org/wiki/The_Disasters_of_War

10월 5일, 프랑스군 전위 부대에게 사로잡힌 영국군 포로들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보고가 마세나에게 들어왔습니다.  영국군이 서둘러 '방어선 쪽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여태까지 마세나는 웰링턴이 1809년 1월 코루냐로 후퇴하던 무어 장군과 똑같은 신세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최악의 경우라고 해봐야 웰링턴의 영국군을 섬멸하지 못하고 놓치는 정도이고, 리스본 함락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국군 포로 취조 보고서에 따르면 웰링턴의 목적지는 리스본 항구에 정박한 영국 수송선이 아니라 어디엔가 구축해 놓은 방어선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세나는 자신감에 차있었습니다.  부사쿠 능선 같은 천혜의 방어선조차도 (비록 빙 우회하느라 시간은 걸렸지만) 간단히 돌파했는데, 영국군이 리스본 앞에 무슨 병정놀이 방어선을 구축한다고 해봐야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프랑스군이 그 방어선이라는 것의 실체를 처음 접한 것은 그로부터 또 일주일이 지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10월 11일, 소브랄(Sobral)이라는 작은 마을에 영국군 1개 중대 정도가 전초 진지를 마련하고 있는 것을 몽브렁(Montbrun) 장군의 기병대가 발견했습니다.  문제는 이 마을도, 그 마을에 들어앉은 영국군 부대도 아니었습니다.  그 마을 뒤에는 낮고 긴 언덕이 병풍처럼 늘어져 있었는데, 그 언덕 위에 일련의 요새들이 주르르 늘어서 있는 것이 프랑스군 기병대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음날 현장에 도착한 쥐노(Junot)의 보병 사단이 소브랄 마을의 영국군을 간단히 내쫓았으나, 이들이 도망쳐 들어간 언덕 위의 요새들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현장에 도착해 직접 이 영국군의 방어선을 본 마세나는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언덕 위의 영국군 방어선이라는 것은 하나의 길고 높은 벽이 아니었고 일련의 보루(redoubt)와 옹벽(ravelin), 강화진지(blockhouse) 등으로 이루어진 느슨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런 각각 독립된 보루들은 상호 지원이 가능한 거리 내에 위치하여 어느 하나를 돌파하기가 쉽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바로 10여일 전에 부사쿠 능선에 자리 잡은 영국군의 철벽 방어를 경험한 마세나로서는 저렇게 대포와 참호, 옹벽으로 도배질 이 된 방어선 뒤에 틀어박힌 영국군을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젊음을 스타크래프트에 바쳤던 저로서는 그 느낌 알지요.)





(제가 옹벽이라고 번역해놓은 ravelin은 윗 그림과 사진에서 성벽 앞에 위치한 쐐기 모양의 낮은 외벽을 뜻합니다.  성벽 본체 앞에 저런 쐐기 모양의 벽을 배치하고 거기에 대포와 수비병을 보강하여 성벽 본체를 더 강화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윗 사진은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의 일부는 아니고, 다른 지역의 요새 사진입니다.)




(제가 강화진지라고 번역해놓은 blockhouse의 모습입니다.  보통 여기에 대포도 장착하여 적은 병력으로도 다수의 적에 대항하여 버틸 수 있도록 한 작은 요새라고 보시면 됩니다.   당시 영국 해변에 많이 설치된 마르텔로(Martello) 탑도 blockhouse의 일종입니다.)




마세나는 두가지 점에서 크게 놀랐습니다.  먼저 영국군 방어 진지의 규모와 견고함에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렇게 길고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것은 프랑스군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무엇보다 기동성을 중시하고 적 야전군의 격파를 노리는 프랑스군이라면 저렇게 막대한 예산을 들여 오랜 시간 삽질을 하느니 차라리 그 예산으로 총과 대포, 수송용 말과 노새를 더 구입하여 병력을 더 충원하고 훈련시켰을 것입니다.  저 방어선은 정말 영국군처럼 돈과 물자가 풍부한 대신 병력이 부족한데다 방어전에 특화된 군대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었고, 또 영국군에게만 가능한 물건이었습니다.


마세나가 놀란 이유는 하나 더 있었습니다.  실은 놀랐다기 보다는 어이가 없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일이었지요.  바로 10여일 전 부사쿠 능선을 우회하여 돌파한 것처럼 저 방어선도 굳이 돌파하지 않고 그냥 우회하면 간단히 해결될텐데, 웰링턴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무식한 방어선을 구축해놓은 것일까요 ?  설마 저 방어선이 테주(Tejo) 강부터 바다까지 연결된 것도 아닐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 방어선은 테주 강부터 시작하여 바다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  이 방어선을 우회할 길을 찾기 위해 방어선의 양측면으로 출동한 기병대는 가도 가도 저 방어선이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를 했길래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방어선을 구축해놓았던 것일까요 ?  




(저 지도에서 점선으로 되어 있는 것이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입니다.  보시다시피 1차선과 2차선, 최종적으로 3차선까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마세나는 저 1차선조차도 돌파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마세나가 만난 방어선은 약 1년 전인 1809년 11월부터 건설에 들어갔었고, 영국-포르투갈 측에서는 이 방어선을 토헤스 베드하스(Torres Vedras) 방어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최북방의 거점 마을이 토헤스-베드하스라는 이름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이 엄청난 시설물은 1809년 7월 스페인 탈라베라(Talavera) 전투에서 웰링턴이 승리하고도 허겁지겁 도망쳐야 했던 쓰라린 기억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당시 웰링턴의 영국군은 주르당의 프랑스군의 공세를 잘 막아냈으나, 측면에서 술트가 예상보다 큰 규모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온다는 첩보를 접하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하면서 내빼야 했지요.  그때의 경험에서, 웰링턴은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결국 야전으로는 승산이 없고 방어전을 펼쳐야 하는데, 그러자면 영국과의 보급선 기지인 리스본을 사수하기 위한 굳건한 진지가 꼭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 방어선의 초안을 만든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랑스군이었습니다.  1807년 쥐노(Junot)가 이끈 제1차 포르투갈 정복 때, 쥐노의 부하 중 벵상(Vincent)이라는 대령이 리스본 주변의 지형을 관찰한 뒤 이런 방어선이 가능하겠다는 초안을 만들어 쥐노에게 제출한 바 있었습니다.  물론 쥐노에게는 그런 방어선을 만들 필요도 시간도 재원도 없었지요.  그런데 그 보고서가 돌고 돌아 결국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손에 들어갔고, 네바 코스타(Neves Costa)라는 포르투갈군 소령에 의해 좀더 구체화된 뒤에 웰링턴에게 채택된 것이었습니다.  




(리스본 일대의 지형입니다.  보시다시피 리스본은 사실상 작은 반도의 남쪽 끝에 붙어 있었으므로, 테호 강과 대서양 사이에 철통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은 어렵긴 해도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 방어선은 리스본 북쪽의 지형이 꽤 험하다는 점과, 테주 강이 바다와 만날 때 거의 큰 만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넓은 하구를 구성한다는 점, 그리고 영국 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리스본은 그 거대한 테주 강 하구의 북쪽 강안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작은 반도의 남쪽 끝에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북쪽의 험한 지형의 언덕들을 잘 이어 붙이면 테주 강부터 대서양 연안까지 이어지는 30~40km 정도 길이의 방어진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부사쿠 전투 때 웰링턴이 요새도 없이 그냥 능선에 의지하여 펼쳤던 방어선의 길이가 약 10km 남짓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요새와 옹벽 등으로 강화한 방어선을 40km 정도 펼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돈과 시간이 남아도는데다 주도면밀하기까지 했던 웰링턴은 한줄의 방어선으로는 안심이 안 되어 약 10km 후방에 더 견고한 제2 방어선을 또 구축했고, 또 리스본 서쪽 강가에의 사오 줄리오(São Julião)에는 작은 규모로 제3의 방어선까지 구축했습니다.  게다가 리스본의 남쪽을 가로막은 테주 강 하구는 거의 바다라고 생각될 정도로 넓어서, 제해권을 장악하지 않는 이상 도하가 불가능했습니다.  




(현재의 토헤스-베드하스 방어선은 윗 사진과 같은 주요 성채와 보루 등만 일부 남아 있습니다.)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의 일부로 편입된 기존 성채의 모습입니다.  토헤스 베드하스는 이렇게 기존 시설과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그렇다고 웰링턴이 자신의 군사적 무능함을 돈과 물자로 때우려는 무식한 작전에만 의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먼저, 이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든 시간은 고작 11개월, 비용은 10만 파운드(현재 가치로 대략 250억원)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웰링턴이 포르투갈 주재 영국 대사인 존 빌리어스(John Villiers)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영국군이 포르투갈에서 작전하기 위해 필요한 예산이 매달 20만 파운드라고 했으니 저 정도 예산이면 정말 합리적인 비용으로 극강의 효과를 보여준 방어선을 구축한 셈이었습니다.  이는 지형 지물을 매우 효율적으로 활용한 영국군 공병대의 기술적 우수성과 함께 나라를 지키겠다는 포르투갈 노동자들의 열정이 낳은 결과였습니다.  특히 1년 간이나 이 정도의 대공사를 진행하면서도 프랑스 측에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은 것은 정말 경탄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실은 프랑스 측 뿐만 아니라 영국군 병사들과 포르투갈 시민들조차도 리스본 북쪽에 그렇게 거대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고 하니, 보안에 정말 철저했던 모양입니다.  덕분에 마세나도 이 벽에 부딪힌 뒤 어쩔 줄 몰라했던 것이지요.


또한 웰링턴이 마세나를 위해 준비한 것은 이 토헤스-베드하스 방어선 하나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벽은 벽일 뿐, 벽으로 적을 몰살시킬 수는 없었지요.  마세나의 프랑스군을 궤멸시킬 웰링턴의 비장의 무기는 별도로 준비되어 있었고, 마세나가 이 방어선 앞에서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사이 이미 작동을 개시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바다까지 이어지는 철통 방어의 선구자는 아테네와 피라에우스 항구를 연결하는 아테네의 장성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 벽의 길이는 6km에 달했지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일찌기 '벽 뒤에 숨는 자는 결국 진다' 라고 말한 바가 있었고, 결국 아테네는 스타르타에게 패배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말한 나폴레옹 자신도 생-장-다크레의 성벽 뒤에 숨은 투르크군에게 패배당하기는 했습니다.)







Source :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massena_portugal.html

https://www.lifeofwellington.co.uk/commentary/chapter-twenty-three-torres-vedras-october-1810-to-february-1811/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peninsular.html

https://en.wikipedia.org/wiki/Lines_of_Torres_Vedras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lines_of_torres_vedras.html

9월 27일 오전의 이 부사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500의 전사와 3600의 부상, 거기에 400에 가까운 실종자를 냈는데 비해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은 고작 전사 200에 부상 1000, 그리고 50의 실종자를 냈을 뿐이었습니다.  명백한 프랑스군의 참패였고, 그 원인은 마세나의 잘못된 판단이었지요.  마세나는 자신의 작전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에 대해 꽤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우수한 지휘관은 패전의 충격에서 재빨리 빠져나오는 법이지요.  그는 실패의 원인이 생각보다 웰링턴의 방어선이 훨씬 더 길게 늘어져 있어서, 가파른 능선이라는 강력한 방어선을 충분히 우회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잘 이해했습니다.  원인이 나오면 해법도 있기 마련이고, 해법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훨씬 더 크게 우회하면 되는 것이었지요.


그 날 오후에 패전의 상처를 추스린 마세나는 다음날 아침 기병대를 출격시켰습니다.  능선에 자리잡은 웰링턴의 방어선을 우회할 도로를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병대는 곧 쉽게 우회로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불과 15km 정도 북쪽으로 올라가면 부사쿠 능선이 끝나는 지점이 나오고, 거기서 부사쿠 능선 뒤쪽을 돌아 쿠임브라(Coimbra) 시까지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부사쿠 능선을 넘는 것에 비해 30km 정도를 우회하는 것이니 거의 하루 더 행군해야 한다는 문제는 있었지만, 하루의 행군으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도 적군을 몰아낼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요.  마세나는 '진작 이럴걸'이라는 후회를 마음 한구석에 품은 채 즉시 군을 이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왜 진작 저렇게 간단한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까요 ?  원래 프랑스군의 강점은 화력이 아니라 기동력에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마세나의 3개 군단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부사쿠 능선 위의 영국군에게도 훤히 내려다 보였습니다.  웰링턴에게도 그 의미는 명백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군이 부사쿠 능선 전체를 우회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웰링턴에게는 3가지 옵션이 있었습니다.   첫번째가 추격 및 섬멸, 두번째가 대응 행군, 세번째가 후퇴였습니다.


원래 전투에서 적의 사상자를 극대화하려면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적의 등 뒤에 총알을 박아넣거나 기병대의 군도로 내리찍는 것은 모든 지휘관들이 꿈꾸는 바였지요.  그러나 비록 전날 부사쿠 전투가 연합군의 승리라고 해도, 저 아래 행군을 시작한 프랑스군은 절대 패주하는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 옵션은 선택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경우, 연합군으로서는 프랑스군보다 더 빨리 이동하여 그 우회로의 요지를 장악하고 더 강력한 방어선을 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웰링턴은 이 두번째 옵션 대신 후퇴를 택했습니다.  사실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아무 미련없이 후퇴를 택했지요.  


웰링턴이 후퇴하기로 결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그는 마세나의 침공에 맞서 그냥 계속 후퇴할 생각이었거든요.  부사쿠 전투가 벌어진 것도, 마세나가 넘으려던 부사쿠 능선이 방어전에 너무 좋은 위치이다보니, 마세나와 한판 붙어보고자 하는 욕망을 이기지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마세나가 부사쿠에 미련을 갖지 않고 우회한다 ?  그러면 웰링턴도 미련을 갖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부사쿠 능선 위에 모닥불을 평소처럼 피워 연합군의 후퇴를 프랑스군이 눈치 못 채도록 하고 거기에 후위대까지 남겨두는 치밀함을 보여주며 후퇴했습니다.


하지만 웰링턴의 결정에 대해 많은 이들, 특히 포르투갈 측에서는 비난이 빗발쳤습니다.  부사쿠를 포기한다는 것은 유서깊은 도시인 쿠임브라를 포기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도 전날 부사코 능선으로부터 들려오는 포성에 불안해 하던 쿠임브라 시민들은 웰링턴의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에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위기가 달아오르기도 전에 '연합군은 남쪽으로 철수하니 쿠임브라 주민들도 남김없이 피난을 가라'는 통보가 날아오자 주민들의 낙심은 그만큼 컸습니다.  




(몬데고 강 북안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도시 쿠임브라입니다.)




실은 웰링턴은 애초에 쿠임브라를 사수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이미 쿠임브라에 대해 강제 주민 소개령을 내린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민들에게 집과 상점, 농장과 창고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나라 625 전쟁 때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때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한국을 지원해주고 있었으니 집과 논밭을 버리고 부산이나 경남으로 피난가더라도 미군이 주는 옥수수가루라도 먹고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810년 오만한 매부리코 영국군 장군의 명령에 따라 고향집을 버리고 떠나는 포르투갈 주민들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에게 맞아죽기 전에 굶어죽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부사쿠 전투가 끝나고 마세나의 군대가 북쪽 우회로로 이동하고 있던 9월 29일 밤에도 아직 쿠임브라 시민 80% 정도는 그대로 시내에 남아 있었습니다.  9월 29일 밤 이 사실을 알게된 웰링턴은 인정사정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장 쿠임브라를 떠나지 않으면 병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쫓아내겠다'라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쿠임브라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앞서 웰링턴이 쿠임브라를 비롯한 각지의 주민들에게 강제 소개령을 내린 이유는 프랑스군에게 식량을 넘겨주지 않기 위함이라고 했지요.  과연 그런 소개령이 효과가 있었을까요 ?  적어도 약간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사쿠 전투 직전인 9월 24일 웰링턴이 마세나에게 프랑스어로 보낸 답장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구글 번역기 썼습니다.  저 프랑스어 잘 모릅니다.)



"Je suis fâché que votre Excellence sent quelques inconvéniens personnels de ce que les Portugais quittent leurs foyers à l'approche de l'armée Française. Il est de mon devoir de faire retirer ceux que je n'ai pas les moyens de défendre ; et j'observe que les ordres que j'ai donné là-dessus n'étaient presque pas nécessaires. Car ceux qui se ressouvenaient de l'invasion de leur pays en 1807, et de l'usurpation du Gouvernement de leur Prince en tems de paix, quand il n'y avait pas un seul Anglais dans le pays, pouvaient à peine croire aux déclarations que vous faites la guerre aux Anglais seuls ; et ils pouvaient à peine trouver la conduite des soldats de l'armée Française, même sous vos ordres, envers leurs propriétés, leurs femmes et eux-mêmes, conformes aux déclarations de votre Excellence."


"프랑스군의 진격을 피해 포르투갈인들이 집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것 때문에 각하께서 개인적인 불편함을 좀 겪고 계신다니 유감입니다.  제가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피난시키는 것이 제 의무인데, 사실 제가 내린 소개령은 거의 불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나라에 영국인이 단 한 명도 없던 1807년에 벌어진 프랑스군의 침략과 선전포고도 없이 왕정을 찬탈당했던 것을 잘 기억하는 주민들은 각하께서 배포한 포고문, 즉 각하께서는 포르투갈이 아니라 영국군만을 적대시한다는 말씀을 거의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민들은 각하께서 내리신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재산과 여인들과 자기 자신들에 대한 프랑스군의 행실이 각하의 포고령과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아마 마세나가 웰링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군이 주민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바람에 식량을 못 구해서 불편하다, 이건 신사들의 통상적인 전쟁 규칙에 어긋난다'라고 불평을 했었나 봅니다.  과연 영국군은 집을 떠나기 싫어하는 포르투갈 주민들에게 총검을 들이대고 피난을 떠나도록 강제했을까요 ?  설마 끝내 소개령에 응하지 않을 경우 민간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을까요 ?  글쎄요.  근거가 무엇이든 간에 최소한 프랑스군은 실제로 그랬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사쿠 전투 약 1주일 전인 9월 20일, 마세나가 나폴레옹의 참모장인 베르시에(Berssier)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Monseigneur, nous ne marchons qu’à travers du désert; pas une âme nulle part; tout est abandonné. Les Anglais poussent la barbarie jusqu’à faire fusiller le malheureux qui resterait chez lui; femmes, enfants, vieillards, tout fuit. Enfin on ne peut trouver nulle part un guide. Nos soldats trouvent des pommes de terre, et d’autres légumes; ils sont fort contents, et ne respirent qu’après le moment de rencontrer l’ennemi. Les marches nous ont fort peu donné de malades”.


"각하, 우리의 행군은 마치 사막을 횡단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버려진 상태입니다.  영국놈들의 야만성은 극에 달하여 자기 집에 남아있던 불행한 주민들에게 총을 쏠 정도입니다.  여자, 아이, 노인, 모두가 도망쳤습니다.  결국 이젠 길잡이를 구할 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 병사들은 감자와 기타 채소류를 찾았습니다.  병사들의 사기는 좋은 편이고 적과 만날 때까지 쉬지 않을 기세입니다.  강행군으로 인한 환자는 매우 적은 편입니다."  




포르투갈인들에 대한 존중이 거의 없었던 웰링턴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영국군 병사들이 그다지 점잖게 굴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은 범죄자까지 포함된 사회 최하류층 출신이 대부분이었거든요.  그런 사실은 부사쿠에서 남쪽의 리스본 쪽으로 후퇴하는 길에서도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곳곳의 마을에서 영국군에 의한 약탈이 벌어졌습니다.  웰링턴이 비록 인정머리 없는 오만한 귀족이지만, 공정하다는 점에서만은 인정받을 만 했습니다.  그는 포르투갈인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병사들, 심지어는 장교들조차 철저히 불신하고 잔혹할 정도로 엄격하게 대했습니다.  그는 약탈 행위를 주도하다 잡힌 병사들을 현장에서 교수형에 처했고 일부 부대, 특히 픽튼(Piction) 장군 휘하의 제3 사단의 경우는 후퇴 길에 마을을 만날 경우 아예 먼길로 빙 돌아가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부대는 부사쿠 전투에서 수훈을 세운 부대였지만 후퇴 길에 일부 마을에서 약탈 행위를 벌였다는 이유로 이런 수모와 불편함을 준 것입니다.  




(마세나의 침공 불과 19년 뒤인 1839년에 그려진 쿠임브라 시 외곽의 전경입니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은 영국군의 이런 부랑자같은 행동들 때문에 웰링턴은 마세나가 우회로를 택했다는 정보를 접하자마자 미련을 두지 않고 후퇴를 했던 것입니다.  1809년 1월 코루냐 철수 작전에서 영국군은 (비록 승리라고 주장했지만) 꽁무니를 바짝 추격해오는 프랑스군 앞에서 후퇴할 때 어떤 식으로 무너지는지 매우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바 있었지요.  웰링턴은 비록 전략적인 철수라고 하더라도 후퇴는 후퇴이므로 코루냐 꼴을 되풀이하는 것에 대해 거의 강박관념 수준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포르투갈에서는 10월 중순부터 우기가 시작되므로 행군하는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지겠지만 무엇보다 도로 사정이 엉망진창이 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군이 부사쿠 능선을 우회하는 동안 연합군을 일찌감치 앞서서 후퇴시킨 것입니다.  


드디어 10월 1일, 프랑스군이 쿠임브라 외곽에 나타났습니다.  그때까지 주민들은 다 도시를 비웠을까요 ?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유가 있던 상류층 주민 대부분은 이미 도시를 버린 뒤였지만 영국군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주민들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당장 피난 길을 떠나면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가난한 주민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영국군이 소개령에 따르지 않는 주민들에 대해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도 꼭 믿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프랑스놈들이 나타났다'라는 비명소리가 거리 한쪽에서 터져나오자, 맹수같은 프랑스 병사들의 난폭함이 갑자기 무서워진 일부 주민들이 마지막 순간에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은 전염성이 짙은 것입니다.  일부 주민들이 거리를 가로질러 피난길을 서두르는 모습을 보자 나머지 주민들도 공포에 사로잡혀 앞서거니 뒷서거니 무작정 피난길에 나섰습니다.  곧 거리가 가득 찼고 몬데고(Mondego) 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하는 다리는 교통 제층이 생겨 길이 꽉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다행히 아직 우기가 시작되지 않아 몬데고 강에는 1m~1.5m 정도로 얕은 여울이 곳곳에 있어 주민들은 이 여울들을 통해 피난에 나섰습니다.  아무 준비없이 공포에 사로잡혀 떠나는 피난길 광경은 주민들의 비명과 울음소리로 매우 참혹했다고 합니다.  




(현재의 쿠임브라 시와 몬데고 강의 전경입니다.)




이렇게 허둥지둥 나서는 피난이라면 겨우내 먹으려 저장해두었던 곡물과 저장식품 등을 다 싸들고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민들이 남기고 간 식량은 고스란히 프랑스군의 손아귀에 들어가 웰링턴의 혀를 차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쿠임브라는 웰링턴의 후퇴 작전에 나름대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 동안의 고달픈 행군길에 배가 고팠던 프랑스군은 먹을 것이 있는 도시에 들어가자마자 군기가 문란해져 식량, 특히 와인을 약탈하며 행군을 멈춰 버린 것입니다.  마세나로서도 굶주리고 지친 병사들이 좀 쉴 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국군이 일찌감치 총퇴각에 들어가서 어차피 따라잡기도 힘든 마당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지요.  프랑스군 주력은 이 도시에 4일간이나 머물렀고, 10월 5일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추격에 나섰습니다.  마세나는 리스본 정복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10월 5일, 추격에 나섰던 선발 부대가 잡은 영국군 낙오병은 천만뜻밖의 정보를 불었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Bussaco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bussaco.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massena_portugal.html

https://www.napoleon-series.org/research/miscellaneous/c_Tojal8.html

https://www.lifeofwellington.co.uk/commentary/chapter-twenty-three-torres-vedras-october-1810-to-february-1811/

http://www.wtj.com/archives/wellington/1810_09c.htm

마세나의 명령대로 이른 아침 부사쿠 능선에 늘어선 영국군 방어선의 측면을 향해 기어오른 레이니에의 제 2군단은 크게 2개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들은 몬데고 계곡에서 피어오르는 자욱한 아침 안개에 가려져 영국군의 관측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안개로 인해 프랑스군도 능선 위의 영국군의 존재를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대오를 맞추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이들은 사단 단위의 질서 정연한 대오가 아니라 기껏해야 대대 단위를 간신히 유지한 엉클어진 모습으로 행군해야 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안개를 뚫고 고지에 오른 프랑스군 눈 앞에 펼쳐진 능선은 텅 비어 있어야 했습니다.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방어진의 측면을 우회하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천만 뜻밖에도 프랑스군을 반갑게 맞이한 것은 연합군의 포병대와 머스켓 일제 사격이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이었을까요 ?


마세나의 상식으로는 웰링턴도 프랑스군 본진의 위치가 어디인지 보았으니, 능선을 방어한다고 해도 적당한 길이, 즉 4~5km 정도에 걸쳐 방어선을 펼칠 것으로 보았습니다.  마세나도 참전했던 바그람 전투 때, 막도날이 프랑스군 제5 군단을 기둥 모양으로 편성해서 오스트리아군의 전선을 들이받을 때도 그 기둥 앞면의 폭과 길이는 550m x 800m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프랑스군 3개 군단 약 6만5천보다 약간 작은 5만 정도로 알려진 영국군의 경우도 적절한 규모의 예비대를 대기시킬 것을 생각하면 최대 5km 이상 펼치는 것은 무리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웰링턴은 정말 가늘고 긴 방어선 매니아였습니다.  예비대 ?  그런 건 겁쟁이나 준비해두는 것이었지요.  그는 예비대도 없이 거의 8~9km에 걸쳐 5만의 영국-포르투갈 사단들을 최대한 펼쳐서 가늘고 길게 늘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마세나가 '이 정도면 연합군 방어선의 왼쪽 측면 너머겠지'라고 생각한 부분이, 놀랍게도 연합군 방어선의 거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곳이었습니다 !




(영국군 방어선의 오른쪽으로 충분히 우회했다고 생각했는데 영국군 우익은 커녕 거의 중앙부로 돌격해들어간 프랑스군의 공격 방향을 보십시요.)




웰링턴의 이 가늘고 긴 방어선은 마세나를 포함한 프랑스 지휘관들의 상식을 크게 벗어나는 진형이었습니다.  이렇게 방어선이 가늘고 길면 그 중 어느 한 곳이 적의 집중 공격에 돌파될 가능성이 너무 높았고, 그럴 경우 뚫린 곳을 틀어막을 예비대조차 없다면 방어선이 전면적으로 붕괴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웰링턴은 이렇게 무모한 방어선을 펼쳤을까요 ?  레이니에 휘하의 2개 사단, 즉 외들레(Étienne Heudelet de Bierre)와 메를르(Pierre Hugues Victoire Merle)가 이끄는 사단들은 각각 그 이유를 몸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일단 외들레 사단의 공격은 너무나도 치열한 연합군의 사격과 포격을 받고 그만 딱 멈춰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머스켓 소총의 사격 속도는 최대 분당 2발 정도였는데, 혼란스럽고 숨도 가쁘기 마련인 실전에서는 1분에 1발 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영국군은 정말 최대 사격 속도를 꾸준히 유지하며 프랑스군의 2배에 가까운 속도로 머스켓 볼을 날려댔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은 얇고 넓은 횡대로 부대원 전원이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아래 쪽의 프랑스군을 향해 침착하게 총을 쏘아대는 영국군에 비해, 프랑스군의 반격은 빈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영국군과는 달리 프랑스군은 높고 가파른 경사로를 헥헥거리며 올라와 지친 상태인데다, 진격을 위해 대대 단위의 좁고 긴 종대를 이루고 있던 프랑스군 병사들은 맨 앞 열 500여명 정도만 발포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도 사격전에 유리한 횡대로 대오를 변경하려 허둥대었지만, 연병장에서도 잘 안 되던 것이 영국군의 총탄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매끄럽게 잘 될 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외들레 사단은 얼마동안 버티다 많은 사상자만 낸 채 서둘러 경사면을 뛰어내려가야 했습니다.




(외들레 장군은 반도 전쟁에서 활약한 것 외에는 큰 활약은 없었습니다.  그는 1812년 러시아 침공 때 다행히 후방 예비대를 맡아 러시아 땅에 진입하지는 않았었고, 1813년 단치히 포위전 끝에 연합군에 항복했습니다.  그도 나폴레옹 몰락 후에 일단 루이 18세에게 충성했으나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 쪽에 붙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메를르 사단은 좀더 운이 좋았습니다.  이들이 안개를 뚫고 올라선 능선은 하필 영국군 제88 연대와 제45 연대 사이의 큰 빈틈이었던 것입니다.  이 곳은 정말 지키는 병력이 없었습니다.  뒤늦게 안개 속에서 프랑스군의 군화 소리를 들은 영국군 제 45연대와 포르투갈군 제8 연대가 그 빈 공간을 메꾸기 위해 서둘러 달려왔습니다만, 역시 때가 늦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먼저 도착했던 것입니다.  역시 지나치게 가늘고 길었던 웰링턴의 방어선이 돌파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반대 방향에서 영국군 제88 연대까지 몰려든 것입니다.  능선에 도달하자마자 숨고를 사이도 없이 양방향에서 몰려든 연합군에게 측면을 찔린 메를르 사단은 크게 휘청거리다 결국 물러났습니다.  다만 비탈길을 구르듯 내달려 도망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던 영국군도 더 아래 쪽에 대기 중이던 프랑스군 포병대의 공격을 받고 다시 기어올라 후퇴해야 했습니다.  




(포이 장군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종전 후 반도 전쟁에 대한 역사서를 썼습니다.  거기서 그는 영국군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정착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의 습성은 행군하는 병사에게 딱 들어맞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전장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덕목을 갖추고 있다.  바로 전투 현장에서의 침착함이다.  영국 육군의 영광의 기반은 그 뛰어난 군기 및 그 민족적인 침착성과 굳건함에 있다.  실제로 그들보다 더 군기가 엄정한 군대는 찾기 어렵다...")




추격하던 영국군이 물러나자 레이니에는 군단 내 예비대로 대기시켜 두었던 포이(Maximilien Sébastien Foy)의 여단을 투입하여 아까 공격했던 바로 그 부분을 다시 들이쳤습니다.  가늘고 긴 방어선은 한 곳을 집중해서 뚫는 것이 정석이었으니까요.  과연 반복된 공격에 지친 연합군도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정말 긴 방어선에 구멍이 뚫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의 우측, 그러니까 프랑스군의 좌측에서 새로운 영국군 병력, 즉 제9 연대가 쏟아져 나오며 포이 여단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결국 포이 여단도 이 새로운 영국군 증원 병력에 밀려 후퇴해야 했고, 이것으로 레이니에 군단의 공격은 최종적으로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레이니에 군단은 총 2천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고, 그 사상자 중에는 메를르 장군과 포이 장군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연합군의 사상자는 587명에 불과했습니다.  


한편, 레이니에 군단이 능선에서 뜻하지 않은 연합군 방어선을 만나 악전고투를 벌이며 울리는 총성이 들리자마자, 레이니에의 측면 우회 공격이 성공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판단한 네(Michel Ney) 원수는 저 위의 영국군 방어선 중앙부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실제로 네가 공격한 곳은 영국군 중앙부가 아니라 좌익에 가까왔습니다.  네의 공격은 레이니에의 공격처럼 루아송(Louis Henri Loison)과 마르샹(Jean Gabriel Marchand)이 각각 이끄는 2개 사단을 앞세웠고, 예비대로 메르메(Julien Augustin Joseph Mermet)의 사단을 예비대로 대기시켰습니다.  




(루아송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전부터 네의 휘하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는 언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어떤 전투에서 한쪽 손을 잃은 듯 합니다.  그는 1807년 쥐노를 따라 포르투갈을 점령한 지휘관 중 하나였는데, 현지 주민들을 학살하는 바람에 포르투갈 주민들은 그를 Maneta, 즉 '한손이 없는 자'라고 부르며 증오했습니다.  나중인 1809년 술트의 포르투갈 침공 때 포르투갈 주민들에게 포이 장군이 사로잡힌 적이 있었는데, 그때 포이가 루아송인 줄 알고 그를 살해하려던 주민들에게 포이가 두 손을 들어보이며 자신은 '마네타'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목숨을 건진 일도 있다고 합니다.  루아송의 군 생활은 잘 풀린 편이 아니라서, 그는 1812년 러시아 침공 때 후발대로서 주로 독일 및 이탈리아에서 강제징집한 소년병들로 구성된 1만5천의 병력을 이끌고 리투아니아 인근에서 야영을 하다가 섭씨 영하 35도의 혹한에 거의 전병력을 하룻밤 사이에 동사시키는 참극을 낳기도 했습니다.)




고지를 향해 헐떡거리며 올라간 루아송의 사단이 능선 인근에서 마주친 것은 1300여 명의 대규모 유격병들이었습니다.  알메이다 요새 때부터 프랑스군을 견제하던 크로퍼드 장군의 경보병 사단 전체가 유격병으로 나와 프랑스군을 견제한 것입니다.  이들을 쫓아내느라 시간을 쓰는 사이 능선 위의 영국군의 포병들이 준비를 갖추고 프랑스군에게 대포알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루아송 사단은 당연히 이 포대들을 새로운 목표로 삼고 진격했습니다.  겉으로 볼 때 프랑스군과 영국군 포대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루아송 사단이 이 포대 근처에 도달했을 때, 포대와 경사면 사이에는 움푹 들어간 도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더 나쁜 것은 그 숨겨진 도로 안에 제43연대와 52연대, 총 1700여 명의 영국 보병이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군이 지근거리까지 다가오자 즉각 뛰어나와 당황하는 루아송 사단에게 일제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이들은 꽤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뛰어나오자마자 프랑스군 종대의 머리 부분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집중 사격을 가하는 능숙함까지 보여주었습니다.   얇은 영국군의 방어선 중 한 곳을 공격으로 뚫으려던 프랑스군의 종대가 오히려 역으로 집중 공격을 당한 셈이었습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후퇴한 루아송 사단은 총 6500의 병력 중 무려 1200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군 43연대와 52연대는 23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이었습니다.  그 옆의 마르샹의 사단도 사상자만 냈을 뿐, 영국군의 얇은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왼쪽이 영국군, 오른쪽이 프랑스군입니다.  종대로 올라온 프랑스군을 약간 반원형으로 펼쳐진 영국군의 횡대가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요.)




어째서 마세나의 예상과는 달리 가늘고 길게 늘어진 영국군의 방어선이 프랑스군의 집중된 공격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일까요 ?  특히 메를르 사단이나 포이 여단은 분명히 취약한 영국군 방어선을 거의 돌파했었습니다.  그럴 경우 프랑스군의 승리가 확정되어야 했는데, 오히려 영국군은 측면에서 프랑스군을 압박하여 몰아냈지요.  원래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능선이라는 험한 산악 지형에서 그 측면의 수비군들이 그렇게 빨리 이동해오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요.  


영국군이 부사쿠에서 승리했던 이유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영국군의 머스켓 재장전 속도가 프랑스군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 간단히 말해서 모병제인 영국군의 훈련 정도가 징집된지 얼마 안 된 프랑스군보다 훨씬 더 좋았습니다.  발사 속도가 2배 빠르다는 것은 실질적인 병력 수가 2배라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가령 패퇴한 메를르 사단의 병사들은 자신들보다 3배가 많은 영국군에게 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만, 실제로는 당시 전투 현장의 영국군의 숫자는 프랑스군의 절반에 불과했습니다.


2) 확실히 고지를 방어하는 측이 훨씬 유리했습니다.

: 공격군은 고지를 기어오르느라 기진맥진하고 진격 속도도 느려진다는 핸디캡을 지고 갔습니다.  또한, 방어군은 공격군의 이동 방향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다는 결정적인 이점이 있었습니다.


3) 웰링턴은 부사쿠 능선을 따라 긴 교통로를 구축해 놓았습니다.

: 길고 가늘게 늘어진 방어선의 약점은 웰링턴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를 보완하려면 능선 위의 수비군이 좌우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고, 그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미리 능선을 따라 긴 도로를 닦아놓았던 것입니다.  이 도로 덕분에 메를르 사단이나 포이 여단이 방어선을 돌파했을 때 신속하게 그 옆쪽 영국군이 이동하여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43연대와 52연대가 그 움푹 꺼진 도로 속에 매복해 있다가 루아송 사단을 기습했던 것은 보너스라고 할 수 있었지요.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영국군의 장점과 한계가 명확하게 보입니다.  이런 전술들은 모두 방어전에서나 요긴하게 통하는 것이고 공격에서는 전혀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한편, 능선 아래의 마세나는 이 황당한 패배에 크게 낙심했지만 그렇다고 패배를 인정하고 후퇴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과연 마세나는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Bussaco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bussaco.html

http://www.peninsularwar.org/bucaco.htm

https://en.wikipedia.org/wiki/%C3%89tienne_Heudelet_de_Bierre

https://en.wikipedia.org/wiki/Maximilien_S%C3%A9bastien_Foy

https://en.wikipedia.org/wiki/Louis_Henri_Loison

탄약고 폭발로 인한 알메이다 요새의 갑작스러운 함락은 웰링턴을 크게 당황시킬만 했습니다.  하지만 웰링턴은 그렇게까지 당황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생각보다 너무 일찍 함락되긴 했지만 어차피 알메이다의 함락은 예견되었던 것이고, 시우다드 로드리고의 스페인군이 분전해준 덕분에 방어 준비는 이미 충분히 되어 있었거든요.  문제는 그 방어 준비라는 것의 본질이었습니다.


웰링턴의 방어전략은 간단했습니다.  후퇴였지요.  그는 기세등등한 프랑스군과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일대의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리고 게속 후퇴했습니다.  군대가 후퇴하면서 주민들에게까지 소개령을 내리는 것은 당시 유럽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웰링턴이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식량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식량을 현지 조달하는 프랑스군의 약점은 보급이고 프랑스군이 제풀에 꺾이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진격 예상지에서 밀가루 한줌도 남겨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민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식량이 있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는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농민이었던 주민들에게 삶의 터전인 농토와 집을 버리고 알아서 어디로든 사라지라는 것은 웰링턴의 깔끔한 사령부 탁자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집을 버리지 않았고, 당연히 자신들이 먹을 식량도 마루바닥 밑에 감춰둔 상태였습니다.  포르투갈 농부들의 소박한 기대와는 달리 프랑스군은 그렇게 농민들이 감춰둔 식량을 찾아내는데는 도사였고, 프랑스군은 그런 식량들을 먹어치우며 계속 전진했습니다.




(알메이다에서 쿠임브라로 향하는 길입니다.  쿠임브라 서쪽에 늘어선 산맥이 보이십니까 ?  현대의 지도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위의 크게 우회하는 도로가 아래의 두 도로보다 별로 오래 걸리지 않는 것을 보면 저 산맥이 상당히 험하다는 것을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손자병법에도 원정군은 보급 문제 때문에 전투를 서두를 수 밖에 없다는 말이 있지요.  따라서 손자병법을 읽지도 않은 웰링턴이 그런 후퇴 및 초토화 전략을 생각해낸 것은 무척 칭찬할 만한 일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중국이 아니었고 러시아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좁은 포르투갈에서 언제까지고 후퇴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수도이자 주요 항구였던 리스본 북쪽 어디에선가는 프랑스군을 저지해야 했습니다.  웰링턴은 나폴레옹 못지 않은 지도 매니아였고, 그는 알메이다에서 리스본으로 갈 수 있는 길목을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퇴각로와 프랑스군의 추격로는 기본적으로 몬데고(Mondego) 강 계곡을 따라 서진하는 것이었는데, 몬데고 강의 북안보다는 남안의 지형이 훨씬 좋았습니다.  따라서 웰링턴은 남안의 길목 중에서 알바(Alva) 강이 몬데고 강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1차 저지를 시도해야겠다고 미리 방어진지 준비를 해놓고 있었습니다.  




(지도 좌하단에 있는 도시가 쿠임브라(Coimbra)입니다.  쿠임브라 남단을 끼고 도는 강이 몬데고(Mondego) 강이고요.  언듯 봐도 상당히 거친 지형이네요.)




하지만 마세나는 적의 예상대로 움직이는 바지저고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웰링턴이 '포르투갈 왕국 전체에서 최악의 도로'라고 평가하고 있던 몬데고 강 북쪽 경로를 택했습니다.  알메이다의 함락에도 당황하지 않았던 웰링턴도 이번에는 당황했습니다.  마세나는 대체 왜 이 경로를 택했을까요 ?  그 결정의 이유에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만 웰링턴의 당혹감 속에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는 기쁨도 가득했습니다.  특히 이 경로를 택할 경우, 중간 경유지인 대도시 쿠임브라(Coimbra) 시로 가기 위해서는 부사쿠(Buçaco, Bussaco) 능선을 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웰링턴으로 하여금 애초 전략에서 다소 어긋난 결심을 하게 합니다.  이 부사쿠 능선에서 마세나의 프랑스군과 한판 싸움을 벌이기로 한 것입니다.


애초에 피를 흘리지 않고 마세나의 침공을 저지하려 했던 웰링턴의 결심이 흔들린 것은 부사쿠의 지형이 지키는 입장에서 너무나 유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사쿠 능선은 몬데고 강에서부터 급경사로 시작되어 북서쪽으로 뻗은 산맥인데, 최고 높이는 560m에 달하는 꽤 높은 산맥이었습니다.  관악산이 대략 630m니까 상당한 높이지요.  높이보다 더 나쁜 것이 그 급경사였습니다.  쿠임브라로 향하는 고갯길의 최고 높이도 400m 정도로서, 남산(260m)이나 인왕산(340m)보다 더 높고, 경사도 여전히 급했습니다.  덕분에 그 고갯길은 능선을 똑바로 넘지 못하고 정상 근처에서 크게 오른쪽으로 틀어져서 비스듬히 올라가야 했습니다.  즉, 바로 좌측 위의 근거리 능선에서 적군이 빗발치듯 날려대는 총탄과 포탄을 측면에 뒤집어 쓴 채로 비스듬이 전진해야 했던 것이지요.  이런 매혹적인 능선 위에 올라서서 저 밑을 낑낑대며 기어 오르는 나폴레옹 제국의 제2인자 마세나에게 총질을 해댈 기회를 날려버리기에는 웰링턴의 자제력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에게 포르투갈 방위를 책임진 전체 야전군 5만이 고스란히 다 휘하에 있는 상황에서 말이지요.




(현재의 부사쿠 능선입니다.  뭔가 궁전 같은 건물은 Palácio Hotel do Buçaco라고 19세기 말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한편, 왜 굳이 이 경로를 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부사쿠 능선 앞에 6만5천의 침공군을 이끌고 온 마세나도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와 스위스, 독일과 체코 등 다양한 지역 다양한 상황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이었습니다.  능선 아래에서 망원경을 뽑아든 마세나의 눈에 들어온 모습은 능선 위에 옹기종기 배치된 포대들과 프랑스군을 역시 망원경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영국군 장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세나의 눈에 그들은 한마디로 병정놀이에나 어울리는 풋내기 애송이들에 불과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높고 험한 능선에 방어진을 친 상대를 상대하는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건너기 힘든 긴 장애물이라는 점에서 높은 능선과 강은 유사했는데, 마세나는 나폴레옹 휘하에서 긴 강을 방어선으로 삼았던 적들을 여러 차례 아주 쉽게 요리한 적이 있었지요.  강이든 능선이든 그런 것을 방어선으로 삼는 것은 나폴레옹이나 마세나와 같은 명장들에게는 하책에 불과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연전연승했던 비결은 빠른 기동력을 이용해 적을 분산시키고 아군을 집중시키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이나 능선에 기대려는 적군은 필연적으로 그 긴 강이나 능선에 걸쳐 병력을 주욱 늘어뜨려 놓을 수 밖에 없었으므로, 이쪽에서 기만 기동을 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 미리 병력 분산시키는 셈이었습니다.  따라서 남은 일은 이렇게 얇아진 적의 긴 방어선 중 적당한 어느 한 곳을 골라 송곳으로 구멍을 뚫듯이 집중 공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세나는 자신있게 공격 작전 계획을 하달했습니다.  그에게는 총 3개 군단이 모두 집결해 있었습니다.  레이니에(Jean Reynier)의 제2 군단, 네(Michel Ney)의 제6 군단, 그리고 쥐노(Jean-Andoche Junot)의 제8 군단이었지요.  흔히 부사쿠 전투에서 마세나가 고지에 자리잡은 영국군을 과소평가하고 무식하게시리 정면 공격을 고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사자는 사냥할 때 새끼 영양 한마리도 과소평가하지 않는 법이고 마세나는 진짜 사자였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나폴레옹이 공통적으로 즐겨 사용하던 고전적 모루와 망치 전법을 변형해서 적용했습니다.  먼저, 레이니에가 영국군 방어선의 좌측 측면(영국군 쪽에서는 우익)을 멀찌감치 우회하여 고지를 기어오른 뒤 영국군의 측면을 찌르면, 네의 제6 군단이 영국군의 정면을 들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작전에서 필수적인 시간 동기화는 쉬웠습니다.  저 좌측 능선 위 어디선가 요란한 총성이 들리기 시작하면 네가 진격을 시작하면 되었으니까요.  그 총성이 영국군 베스 브라운 소총에서 나오는 것인지 프랑스군 샤를빌르 소총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마세나는 영국군을 과소평가하기는 커녕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었습니다.  예상 외로 영국군이 억세게 저항하여 레이니에와 네의 공격을 모두 격파할 수도 있다고 보고, 그런 상황에 대비하여 쥐노의 제8 군단을 예비대로 대기시켰습니다.  




(레이니에 장군입니다.  그는 나폴레옹과 함께 이집트 원정에도 갔었으나 나폴레옹이 조기 귀국할 때 따라가지 못하고 므누 장군과 함께 뒤에 남겨진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나폴레옹의 심복 부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그람 전투 때 클레나우의 진격을 저지했던 로바우 섬의 포격을 지휘한 로바우 섬의 책임자였습니다.)




하지만 마세나는 쥐노의 예비대까지 실제 전투에 동원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저 능선을 따라 길게 분산되어 있을 영국군은 그 자체로 이미 패배한 셈이었으니까요.  마세나가 보기에 영국군이 가진 유일한 이점은 고지에서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자세히 볼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프랑스군의 공격 방향에 대응하여 영국군이 서둘러 재배치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산 위는 당연히 길이 험했으니 능선을 따라 포병대와 탄약차량은 커녕 경보병 대대를 이동시키는 것조차 쉽지 않았으니까요.  그나마 때마침 공격이 시작되던 9월 27일 이른 아침에 부사쿠 능선 아래는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습니다.  덕분에 산 위의 영국군은 아래 쪽의 프랑스군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꼭 우연만은 아니었습니다.  근처에 몬데고 강이 흐르는 계곡 아래 쪽이니, 가을철 이른 아침에는 안개가 낄 가능성이 꽤 많았던 것이지요.  마세나는 애송이 웰링턴의 실수를 비웃으며 레이니에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마세나는 아직 웰링턴이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Bussaco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bussaco.html

http://www.peninsularwar.org/bucaco.htm

여태까지 1810년에 있었던 이런저런 사건들, 즉 나폴레옹의 새장가, 사탕무 설탕 공장의 건설, 베르나도트의 스웨덴 왕세자 책봉 등을 보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1810년은 피와 화약 연기로 점철되었던 황제 나폴레옹의 나날 중 드물게 평화로운 시절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도 비교적 그랬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1810년 들어 스페인 민중들의 대프랑스 항쟁은 그 기세가 더 격렬해졌습니다.  이는 반나폴레옹 봉기가 곳곳에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은 정반대로서, 웰링턴의 영국군이 탈라베라(Talavera) 전투 이후 포르투갈로 물러가자 무능력한 스페인 봉기군은 차근차근 프랑스군에게 격파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러면 스페인 민중들은 용기를 잃고 굴복할 만도 할텐데, 왜 오히려 더 격렬하게 저항을 했을까요 ?


상황은 나폴레옹이 본의 아니게 더 악화시켰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1810년 나폴레옹은 저항을 그치지 않는 스페인에 대해 질려버린 상태였습니다.  스페인 국왕이자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가 파리에 파견한 외무장관인 산타페 공작 아산사(Miguel José de Azanza, duque de Santa Fe)가 나폴레옹의 튈르리 궁을 찾았을 때, 그에게 들이밀어진 것은 조제프의 퇴위 조서 초안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조제프 보고 거기에 서명을 하라고 요구할 셈이었습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동생 루이를 국왕으로 앉혀 놓았던 네덜란드를, 나폴레옹은 1810년 7월 실제로 침공하여 루이를 강제 폐위시키고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시켜버립니다.  그는 스페인에 대해서도 왕정을 아예 폐지해버리고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해버릴 계획었습니다.  


문제는 그 계획안 문서를 가지고 마드리드로 가던 연락 장교가 스페인 게릴라들에게 요격당해 살해되고 아직 암호화 되지 않았던 시절의 그 문서가 게릴라들을 거쳐 영국 손에 들어가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영국은 그 문서를 친절하게 스페인어로 번역까지 해서 곳곳에 뿌려댔고, 이는 그렇쟎아도 프랑스에 대해 이를 갈던 스페인 민중들을 더욱 들끓게 했습니다.  




(산타페 공작 아산사입니다.  그는 군인 출신의 외교관으로서, 1790년대 후반에는 멕시코 총독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나폴레옹 정권에 협력했고 조제프는 그를 산타페 공작에 봉했습니다만,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 뻔 했습니다.  부르봉 왕가의 복귀와 함께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는 조제프가 프랑스로 도주할 때 함께 프랑스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는 1826년 빈곤 속에서 외롭게 죽었습니다.  친일파, 아니 친불파에게 알맞는 최후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고 그런 문서 유출 때문에 나폴레옹이 조제프를 루이처럼 폐위 시키는 것을 주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발표를 하려면 스페인 전역을 손에 넣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하찮은 스페인 따위가 프랑스의 그랑 다르메에 대해 이렇게 질기게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저주스러운 영국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트라팔가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넬슨에게 궤멸된 이후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이 된 영국에 대해, 나폴레옹은 더 큰 규모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대륙 봉쇄령이었지요.  그런데 이 대륙 봉쇄령은 좀처럼 승기가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습니다.  명색이 위성국가라는 것들이 나폴레옹의 빅 픽처에 협력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돈에 눈이 멀어 영국 상품을 사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이 취한 조치는 더 강력한 그물망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과의 밀무역을 가장 활발하게 벌이던 네덜란드와 옛 한자 동맹 지역들, 즉 북부 독일 해안 지대의 소공국들의 정권을 폐위시켜 버리고 모두 프랑스의 일부로 편입시켜버린 것이지요.   1810년은 나폴레옹 제국이 가장 넓어진 해이기도 합니다만, 그 배경은 영국과의 경제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다는 초조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스페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 과격한 해결책은 필연적으로 또다른 문제를 낳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당시엔 별로 대단치 않게 여겼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이것이 결국 그의 제국 전체를 몰락시키는 단초가 됩니다.  나폴레옹이 그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일방적으로 쫓아낸 소공국들 중에는 올덴부르크(Oldenburg) 공작령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올덴부르크 공작의 작은 아들이 바로 러시아 짜르 알렉산드르 1세가 애지중지하던 여동생 예카테리나(Ekaterina Pavlovna) 공주의 남편 게오르그(Georg of Oldenburg)였던 것입니다.  


알렉산드르는 여러차례에 걸친 편지를 통해 자신의 매제에 대한 폭압적인 강탈 조치를 항의했으나 나폴레옹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어쩌면 이건 나폴레옹이 지나치게 오만하여 무심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가 지나치게 졸장부처럼 옹졸하게 나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2년 전인 1808년 에르푸르트 회담에서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에게 여동생을 자신의 새 신부로 달라고 은근히 메시지를 던졌으나, 알렉산드르는 오히려 그 아끼는 여동생을 볼썽 사나울 정도로 서둘러 다른 귀족에게 시집 보내버린 적이 있었지요.  그때 그 여동생이 바로 예카테리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그것을 큰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식으로 앙갚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에르푸르트 회담 때만 해도 세상 둘도 없는 친구 사이 같았던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는 이 사건을 계기로 상호간의 불신과 반목이 점점 심해졌고, 이는 결국 1812년 러시아 침공과 그에 따른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대체 예카테리나 공주가 얼마나 아름다웠길래 이 난리가 났는가를 궁금해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다시 보여드립니다.  두 그림 모두 동일 인물인데, 글쎄요, 아래 그림을 그린 화가는 아마 능지처참을 당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어느 쪽이 더 실물에 가까운지는 모르겠습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이렇게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려 했던 웰링턴의 영국군도 마냥 룰루랄라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에 있어서 영국의 기본적 전략은 크게 2가지 방향 사이에서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캐닝(George Canning)이 주도하는 대륙내 동맹국에 대한 보조금 위주의 전략이었고, 다른 하나는 캐슬레이(Robert Stewart, Viscount Castlereagh)가 과감히 밀어붙인 직접 대륙으로 원정군을 파견하는 것이었습니다.  1806년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왕국 및 시실리 섬으로의 원정이나, 1809년 네덜란드로의 월체런(Walcheren) 원정,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 원정 등이 그 대표적인 원정들인데, 이것들은 1805년부터 1809년까지 캐슬레이가 국방부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War and the Colonies)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결과가 다 신통치 않았다는 것이지요.  나폴리 왕국에 대한 원정은 1806년 가에타(Gaeta) 포위전의 패전과 함께 결국 뮈라(Joachim Murat)를 나폴리 왕으로 만들어주면서 끝나버렸고, 이베리아 원정도 무어(John Moore) 경이 1809년 1월 코루냐(Corunna) 전투에서 전사하며 간신히 영국군 대부분이 탈출시킨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가장 최근의 1809년 월체런 원정도 사실상 참패로 끝나버렸지요.  이로 인해 영국 내에서는 대체 영국 육군은 뭐하는 종자들인가에 대한 비난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외무장관 조지 캐닝입니다.  이 양반이 보조금 위주의 전략을 썼다고 해서 결코 평화주의자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가령 1807년 덴마크 해군 함대를 보관해주겠다며 덴마크를 침공한 것도 이 양반이 주도한 작전이었습니다.)



(국방장관 캐슬레이 자작입니다.  외모로 보면 대머리 캐닝과의 대결에서 완승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는 나폴레옹 전쟁 내내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으나, 이후 비엔나 회담에서 유럽 대륙이 반동 체제로 회귀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여러가지 우클릭 정책을 옹호하여 크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가령 피털루 학살 관련해서도 욕을 잔뜩 먹었지요.)




특히 월체런 원정의 실패는 외무장관 캐닝과 국방장관 캐슬레이 사이에 심각한 불화를 일으켰습니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의 부당한 간섭 또는 부실한 전략 비전 등으로 작전을 망쳤다고 비난해댄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갈등은 아직 월체런에 비실비실한 영국군이 상당수 남아 있던 1809년 9월, 이 둘 사이의 결투로 이어집니다.  둘 다 군인은 아니었고 특히 캐닝은 이 결투 이전에는 총을 한번도 쏘아본 적 없을 정도로 순한 사람이었는데, 캐슬레이의 도전에 캐닝은 꼬리를 말아넣을 수가 없어서 응한 것이지요.  결국 캐닝의 탄환은 저 멀리 빗나갔고 캐슬레이의 탄환은 캐닝의 넓적다리에 명중하는 정도로 이 결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명성이 자자하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장관들이 서로 총질을 해댄 이 결투 사건에 대해 비난이 들끓었고, 결국 이 둘은 모두 사임을 해야 했습니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의 영국군 원정대는 본국에서의 지지 발판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웰링턴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캐닝의 후임은 웰링턴의 형 리처드 웰슬리(Richard Wellesley, 1st Marquess Wellesley)가 맡게 되었습니다.  안 좋게 흘러가던 상황이 역전되어 웰링턴에게는 든든한 배경이 생긴 셈이었지요.  과연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웰슬리 후작은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웰링턴의 작전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특히 대륙 봉쇄령에 의해 영국의 무역 상황이 갈 수록 안 좋아지는 상황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통한 무역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것을 내각에 설득하여 이베리아 원정대에 점차 병력을 증강하도록 했습니다.  웰링턴이 탈라베라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허겁지겁 포르투갈로 후퇴해야 했던 이유는 술트의 측면 위협 때문이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프랑스군보다 영국군 병력이 너무 작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웰링턴은 힐(Rowland Hill, 1st Viscount Hill) 장군이 영국에서 데리고 온 증원군을 받아 거의 5만에 가까운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5만이면 병력수가 부족했던 영국 육군에서는 물론 엄청난 대군이었고, 프랑스 그랑 다르메에서조차도 거의 1개 군(armee) 수준의 큰 병력이었습니다. 




(롤랜드 힐 장군입니다.  그는 롤리사 전투와 비메이루 전투 때부터 웰링턴을 따라 종군했고, 나중에 워털루 전투에도 참전했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부질없이 저항하던 황실 근위대에게 항복을 권유한 것도 롤랜드 힐 장군이라고 합니다.)




한편, 나폴레옹도 그냥 대륙 봉쇄령이 계획대로 작용하여 영국 중앙은행의 지하 금고에서 마지막 기니 금화 한닢까지 다 털려 나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 곳곳은 여전히 반란군 손에 있었고, 특히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전체가 스페인군 수중에 있는 상태였습니다만, 나폴레옹은 안달루시아 정복보다 오히려 포르투갈에 웅크리고 앉은 웰링턴의 영국군을 격파하는 것이 스페인 완전 정복에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술트(Soult)로 하여금 안달루시아를 치게 하고는, 네(Ney), 쥐노(Junot), 레이니에(Reynier)의 3개 군단을 모아 포르투갈로 진격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병력은 서류상으로는 8만, 실제로는 약 5만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3개 군단장을 통솔할 포르투갈 원정군 사령관으로 자신의 휘하에 있는 지휘관 중 최고의 능력자를 임명하여 그 무게를 더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나폴레옹 제국의 제2인자, 바로 위풍당당 마세나(Andre Massena)였습니다.  


여태까지 웰링턴이 상대했던 프랑스군 지휘관은 누가 봐도 1진이라고는 할 수 없던 쥐노, 주르당, 세바스티아니, 빅토르 정도였습니다.  (술트와의 제2차 포르투 전투는 제대로 된 대결이라고 하긴 곤란했지요.)  하지만 마세나는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1진급 지휘관으로서 나폴레옹의 오른팔격 원수였고, 다부는 물론 전사해버린 장 란보다도 더 뛰어난 지휘관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과연 웰링턴은 마세나를 상대로 해서도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까요 ?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Miguel_Jos%C3%A9_de_Azanza,_Duke_of_Santa_Fe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Stewart,_Viscount_Castlereagh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Canning

https://en.wikipedia.org/wiki/Richard_Wellesley,_1st_Marquess_Wellesley

https://en.wikipedia.org/wiki/Walcheren_Campaign

https://en.wikipedia.org/wiki/Rowland_Hill,_1st_Viscount_Hill

https://en.wikipedia.org/wiki/Duke_George_of_Oldenburg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Gaeta_(1806)

프랑스군 2개 사단을 위기에서 구출해준 것은 전선 중앙부에서처럼 영국군 자신들의 경험 부족과 무지였습니다.  페인(Fane)과 앤슨(Anson)의 영국군 기병대가 프랑스군을 위협하여 방진을 이루게 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협박만 했으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그렇게 방진을 이룬 프랑스군을 메데진 언덕 위의 영국군 포병대가 계속 갉아먹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고슴도치처럼 총검을 촘촘히 내밀고 방진을 이룬 프랑스군 정면을 향해 영국군 기병대는 겁도 없이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돌격은 기병대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서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영국군은 용감했습니다.


하지만 영국군 기병대를 격파한 것은 프랑스군의 총검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닥치고 돌격'을 감행하던 중, 선두를 달리던 영국군 기병대 제1파가 비명과 함께 한꺼번에 증발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들과 프랑스군 사이에 깊이 3m, 폭 4.5m의 깊게 움푹 파인 도랑 같은 지형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쪽에서는 교묘하게 눈에 잘 보이지 않던 이 도랑 속에 놀랍게도 영국군 기병대 제1파의 절반 정도가 빠져버렸고, 많은 병사들과 말이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영국군 기병대의 멍청함을 비웃을 처지가 될까요 ?  위 그림은 1815년 워털루에서 프랑스군 기병대가 돌격하다 똑같은 운명에 처하는 장면입니다.  실제로 저런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립니다만, 빅토르 위고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불후의 명작 레미제라블에서도 저 장면을 세밀히 묘사했습니다.  덕분에 이런 그림도 그려졌지요.)




이건 정말 코미디 같기도 하고 비극 같기도 한 어이없는 사고였습니다.  제대로 된 지휘관의 기본 중 기본이 지형 숙지였는데, 메데진 언덕이라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점하고도 그런 도랑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영국군의 미숙함을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군 지휘부는 미숙할 뿐만 아니라 실리보다는 체면을 더 중시하는 고집불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바로 이어서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사고로 큰 낭패를 당했을 경우, 아무리 창피하더라도 물러서서 재정비를 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페인과 앤슨은 굴하지 않고 그대로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제대로 된 공격을 했어도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컸는데, 그렇게 엉망진창인 상태로 보병 방진을 공격했으니 그 결과는 뻔했습니다.  영국군 기병대는 거의 절반에 달하는 병력을 잃고 보기 흉하게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프랑스군이 이 틈을 타 진격을 재개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메데진 언덕에는 영국군과 스페인군 보병 사단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영국제 포탄이 계속 날아왔습니다.  게다가 이때 즈음엔 다른 방면에서의 프랑스군도 다 패퇴한 상태라는 소식이 전해졌으므로, 루팽과 빌라트도 영국군 기병대가 박살이 난 틈을 타 재빨리 후퇴해버렸습니다.  이것이 탈라베라 전투의 실질적인 마무리였습니다.



(영국 화가인 William Heath가 그린 탈라베라 전투입니다.  진 쪽은 그림 같은 거 그리지 않습니다.)




전투 과정은 길고 잡다했습니다만, 짧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영국군이 스페인군과 연합하여 스페인 내부로의 침공길에 나섰는데, 그를 막으러 온 프랑스군과 탈라베라에서 마주치자 정작 공격한 측은 프랑스군이었고 영국-스페인군은 방어에만 치중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의 공격이 좌절된 것이 결과였지요.  공격했는데 성공하지 못한 것이 곧 패배일까요 ?


빅토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세 번 공격하여 다 실패했지만, 한 번 더 들이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프랑스군의 피해도 컸으나 영국군도 꽤 큰 피해를 입었고, 조제프와 주르당의 약 5000 규모의 예비대는 아직 총 한 방 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제프와 주르당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세 번이나 두드렸는데 안 열리는 문은 네 번 두드린다고 열릴 것 같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지금 남의 집 문 따고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비워두고 온 마드리드의 본진이 베네가스에게 털리게 생긴 상황이었으니, 마음이 조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조제프는 주르당의 조언대로 철수를 명령했고, 세바스티아니의 제4 군단도 그 명령에 복종하여 28일 밤부터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탈라베라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실질적인 총지휘관 노릇을 하던 빅토르는 분통이 터졌습니다.  어찌나 분통이 터졌는지 아무 대책없이 철수를 거부하고 29일 새벽 3시까지 그 자리를 고수했습니다.  그러나 전체 프랑스군의 2/3가 다 철수하는데 그의 제1 군단 혼자 남아있다가는 영국-스페인 연합군의 먹잇감이 될 뿐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조제프와 주르당에 대한 욕설을 지껄이면서 그도 결국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는 그 뒤에도 조제프와 주르당만 없었다면 프랑스군이 4번째 공격에서 마침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피해가 더 크긴 했지만, 당시 전투에서의 승리란 누가 더 많은 적을 죽였는가가 아니라 누가 물러났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거든요.  영국군은 약 6천이 넘는 사상자를 냈고, 프랑스군은 7천이 넘는 사상자를 냈습니다.  전체 병력 대비 사상자 비율로 보면 영국군 측이 더 높은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약간 의아한 것은 별로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던 스페인군도 1천2백이나 되는 사상자를 보고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쿠에스타는 영국군이 많은 사상자를 냈는데 스페인군에는 사상자가 거의 없다고 하면 스페인군의 체면이 구겨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사상자를 많이 낸 것은 치열한 전투를 치루었다는 증거로서 당시 지휘관에게 일종의 영광처럼 여겨졌습니다.  물론 이겼을 때의 이야기지요.  그리고 이 전투의 승자는 분명히 영국-스페인 연합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건 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전투를 치르는 것은 그저 지휘관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세를 유리하게 바꾸어 도시를 탈환한다든지 적의 항복을 받아낸다든지 하는 승리의 열매를 거두기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탈라베라 전투는 쓰라린 희생만 있었을 뿐, 영국-스페인 연합군에게 열매가 전혀 없었습니다.  마드리드로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베네가스의 라 만차 군과 합류하는 것이 정상적인 작전 흐름이었을텐데, 영국군은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왜 그랬냐고요 ?  영국군이거든요 !  산더미 같은 염장쇠고기와 럼주가 함께 따라다니지 않는 이상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런 고기통 술통은 옮기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웰슬리가 이렇게 보급품 문제로 꾸물거린 것이 어떻게 보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웰슬리는 이때까지도 북쪽에서 술트 원수가 약 3만명 규모로 충원된 제2 군단을 끌고 자신의 후방을 끊기 위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3일 뒤인 8월 1일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웰슬리는 처음에 술트의 제2 군단 규모가 약 1만5천이라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추가로 전달된 정보에 의해 병력 규모가 3만에 달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한 그의 결정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그는 마드리드로의 진격을 재빨리 포기하고 타호 강을 따라 포르투갈 국경 너머로 후퇴해버렸습니다.  웰슬리에게는 포르투갈로부터의 보급선이 차단될 경우 발생할 문제가 극복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웰슬리는 그야말로 혼비백산하여 예비 탄약과 보급 물자 대부분은 물론, 탈라베라 전투에서 노획했던 십여 문의 프랑스군 대포도 모두 버리고 허둥지둥 퇴각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이었다면 이렇게 빅토르-세바스티아니 군단들에 이어 술트의 군단을 각개격파할 기회가 생긴 것에 매우 기뻐하며 그의 군을 오히려 북쪽으로 진격시켜 술트를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웰슬리는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탈라베라에서 철수한 프랑스군은 원래의 철수 목적을 매우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조제프와 주르당은 빈정이 상할대로 상한 빅토르에게 뒤에 남아 웰슬리와 쿠에스타의 연합군을 감시하는 한직을 주고는, 세바스티아니의 제4 군단과 함께 베네가스의 라 만차 군을 상대하러 달려갔습니다.  이들은 8월 11일, 마침내 톨레도(Toledo) 인근 알모나시드(Almonacid) 전투에서 베네가스와 만나 매우 쉽게 라 만차 군을 격파하고, 마드리드의 안전을 확보했습니다.  




(세바스티아니 장군입니다.  이 분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외교관 역할을 더 많이 했고, 사실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스페인 전역에서는 알모나시드 전투에서의 승리가 이 양반의 가장 큰 승리일 것입니다.  이 분은 안달루시아 침공 이후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 사령부를 차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혹자는 그가 알함브라 궁전의 일부를 파괴한 것을 비난하고, 또 다른 이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황폐화시켜놓은 알함브라를 다시 복원시킨 것이 그였다고 칭찬하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탈라베라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 2만의 영국군이 무려 4만이 넘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거의 단독으로 버텨내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후퇴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지엽적이고 전술적인 승리일 뿐, 전략적으로는 프랑스군이 모든 목표를 달성한 프랑스 측의 전략적 승리였습니다.  영국군의 스페인 침공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베네가스의 라 만차 군처럼 분산된 스페인군을 각개격파할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1809년 11월 마드리드 인근 오카냐(Ocana)의 전투에서 술트가 4만5천 규모의 스페인군을 완파한 것이 매우 뼈아픈 패배였습니다.  이 전투 결과 스페인 중부를 완전히 장악한 프랑스군은 바일렌 전투 이후 감히 넘보지 못하던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침공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웰슬리의 영국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웰슬리는 스페인 측이 '오기만 하면 식량까지 모두 공급할테니 일단 오시라'고 여러차례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 다음해인 1810년 2월말까지도 포르투갈 국경을 절대 넘지 않았습니다.  그는 '탈라베라에서 보니 스페인군은 믿을 수 없는 작자들이더라, 그들의 협력을 기대하고 스페인으로 진격했다가는 큰일 나겠더라'는 입장을 고수했지요.  그게 꼭 틀린 평가는 아닐지 몰라도, 영국군이 스페인에게 있어 그다지 좋은 연합군이 아니었던 점은 확실했습니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탈라베라 전투는 웰슬리 본인에게는 무척 뜻깊은 승리였습니다.  어쨌거나 마침내 스페인에 진격하여 프랑스 2개 군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어 경의 코로나 전투 이후 침체되었던 영국 육군에게는 단비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약 1달 뒤인 8월 26일, 마침내 꿈꾸던 그대로 귀족이 되어 웰링턴 자작(Viscount Wellington of Talavera and of Wellington)이 되었습니다.  약 3년 후인 1812년 살라망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드리드를 탈환한 그는 웰링턴 백작(Earl of Wellington)이 됩니다.



* 사족 :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세바스티아니 장군과의 관계는 아래 편을 참조...


http://nasica1.tistory.com/30







Source : http://lamejortierradecastilla.com/la-batalla-de-talavera-y-2-la-sangre-corre-en-la-portina/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1809년 5월 16일 폰트 다 미사헬라(Ponte da Mizarela)에서 술트의 프랑스군을 놓친 웰슬리의 영국군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1차 목표인 포르투갈 탈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성공일 뿐이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접경 지역 곳곳에는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 등이 이끄는 프랑스 군단들이 호시탐탐 포르투갈을 위협하고 있었으니, 이들을 격파하기 전에는 포르투갈이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웰슬리는 정말 이들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웰슬리의 영국군은 고작 2만명 수준이었습니다.  영국군에게는 이 정도면 굉장히 큰 규모의 야전군이었지만 스페인 내에서는 그리 인상적인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을 점거 중이던 프랑스군은 최소 7개 군단이었고 10만이 넘었으니까요.  그런 스페인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은 혹시 불꽃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 같은 짓이 아니었을까요 ?


웰슬리도 나름 정보와 생각이 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 내 프랑스군의 상태는 웰슬리의 진격에 대해 그다지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생 시르(St. Cyr)의 제7 군단은 이베리아 반도 동쪽의 카탈루냐 지방에 있었고, 수셰(Suchet)의 제3 군단은 그 바로 옆 아라곤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모르티에(Mortier)의 제5 군단도 마드리드 북쪽 바야돌리드(Valladolid)에 주둔하고 있었고, 네(Ney)의 제6 군단은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 갈리시아(Galicia)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Sebastiani)의 제4 군단은 마드리드 남동쪽에 위치해 있었고, 술트의 제2 군단은 웰슬리의 영국군에 의해 포르투갈에서 거지꼴로 막 쫓겨난 뒤 재정비를 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빅토르의 제1 군단은 포르투갈 접경 지역의 구아디아나(Guadiana)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1809년 5월말, 스페인 내 프랑스 7개 군단의 위치입니다.  전년도에 있었던 바일렌에서의 뒤퐁의 대패 덕분에, 아직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는 프랑스군이 발을 못 붙이고 있었고, 안달루시아의 주도인 세비야가 스페인 저항군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도 속의 붉은색 지점 표시 부분이 바로 탈라베라입니다. )




웰링턴에게 주어진 공격 루트는 크게 2가지였습니다.  도우루(Douro) 강을 따라 술트를 추격하여 마무리짓는 것과, 훨씬 남쪽인 타호(Tajo, 포르투갈어로는 테주 Tejo, 영어로는 타거스 Tagus) 강을 따라 빅토르를 격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다 강을 따라 가냐고요 ?  스페인에 비해 작고 약한 포르투갈이 독립국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스페인-포르투갈 국경지대의 지형이 무척 험하여 교통이 불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갈 수 있는 전통적인 교통로는 저 두 강을 따라 형성된 계곡들이었습니다.  특히 리스본부터 타호 강가를 따라 가면 탈라베라(Talavera)와 톨레도(Toledo)를 거쳐 마드리드 인근의 아랑후에스(Aranjuez)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타호 강과 그 주변 강역도입니다. )




어떻게 생각하면 대포를 모두 잃은데다 만신창이가 되었고, 또 바로 발 뒤꿈치까지 따라잡은 술트의 뒤를 계속 추격하는 것이 상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웰슬리는 과감히 방향을 선회하여, 저 남쪽의 타호 강을 따라 진격하여 빅토르를 격파하기로 합니다.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아무래도 2만 정도의 병력만으로 스페인 내부로 진격하는 것은 무척 버거운 일이었는데, 스페인 쿠에스타(Cuesta) 장군이 협동 작전을 요청해온 것입니다.  쿠에스타에게는 약 3만의 병력이 있었으니 영국군에게 이 제안은 무척이나 솔깃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상황을 보니 만약 빅토르만 성공적으로 격파한다면, 마드리드까지 일사천리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잘 하면 분산된 프랑스군의 의표를 찔러 마드리드를 기습 점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점령한 뒤 과연 마드리드를 지켜낼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그래도 그런 승리는 큰 상징성이 있었습니다.  특히 웰슬리는 출세욕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아일랜드 모닝턴(Earl of Mornington) 백작의 3남에 불과했으므로 철저한 장자 상속권을 따르는 영국 귀족 사회의 전통에 따라 그는 백작도 자작도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번도 자신을 아일랜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개인적 목표는 잉글랜드 내의 어느 근사한 영지에 대해 작위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웰슬리는 야심찬 행군을 시작했으나, 군사작전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듯이 작전이 생각했던 것대로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빅토르의 군단이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웰슬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현지 조달에 의존하는 프랑스군 특성상, 빅토르가 주둔하고 있던 에스트레마두라(Estremadura) 지방의 구아디나아에서는 식량이 바닥났던 것입니다.  쿠에스타의 스페인군도 견제할 겸 식량도 구할 겸, 빅토르의 제1 군단은 마드리드 쪽에 좀더 가까운 탈라베라(Talvera)로 이동했습니다.


여전히 상황은 영국-스페인 연합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빅토르의 제1 군단은 1만9천 정도에 불과한 것에 비해, 연합군은 영국군 2만에 스페인군 3만이라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정보력에서도 영국-스페인 연합군은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민간 게릴라들이 주요 도로와 시골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군단 간에 전통문을 주고 받는 것도 쉽지 않았고 소규모 정찰대를 운영하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빅토르를 비롯한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스페인 진입을 7월 9일까지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68세이던 쿠에스타 장군에 대해 겁장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돈키호테 같은 아집과 오만, 그리고 외국인 혐오증은 매력적인 연합군 파트너가 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질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엉뚱한 오해가 영국-스페인 연합군의 발목을 잡습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주도인 세비야(Sevilla) 지방 정부격인 훈타(Junta)에서 영국군을 좀더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자 웰슬리를 스페인군 전체의 통합 사령관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입니다.  정작 웰슬리 본인은 오직 잉글랜드 작위에만 관심이 있었던지라, 무능하고 믿을 수 없는 스페인군의 총사령관직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쿠에스타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원래 영국과 스페인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대국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 해적왕 드레이크 이야기에서 짐작하시듯 아메리카 대륙과 네덜란드 등지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죽어라 싸우던 사이로서, 그 민족 감정은 꽤 뿌리가 깊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더 큰 적 나폴레옹에 맞서기 위해 연합을 맺은 관계라고 해도, 오만하고 재수없는 영국 장군이 스페인군에게 지휘관 노릇을 하며 이래라저래라 명령질을 하는 모습은 스페인 장군들로서는 참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웰슬리에게 합동 작전을 펼치자고 먼저 손을 내밀었던 쿠에스타가 웰슬리에게 갑자기 퉁명스럽게 대하며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습니다.  덕분에 웰슬리와 쿠에스타 사이에 구체적 합동 작전 계획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일을 망친 것은 쿠에스타의 질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항상 산더미같은 염장 쇠고기와 럼주를 끼고 다녀야 했던 영국군의 특성 때문에 영국군의 진격은 너무 느렸습니다.  6월 8일 포르투갈 내 타호 강 계곡 지역인 아브란치스(Abrantes)에 도착한 영국군은 거의 3주간 그 지역에서 허송세월했는데, 이는 쿠에스타의 딴지 때문만은 아니었고 영국군을 위한 염장 쇠고기와 럼주 등 군량 창고를 짓고 물자를 집적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웰슬리는 6월 28일에야 아브란치스를 떠나 7월 3일에야 스페인으로 진입했습니다.


이렇게 포르투 전투 이후 거의 2달이 지나서야 이렇게 스페인에 진입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빅토르는 영국군의 진입을 모른 채 쿠에스타와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웰슬리는 여전히 빅토르의 옆구리를 기습할 기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전에는 없던 변수가 생겼습니다.  빅토르가 위치를 잡은 탈라베라는 전보다 훨씬 마드리드에 가까운 곳이었고, 더 나쁜 것은 세바스티아니의 프랑스군 제4 군단과도 더 가까와졌다는 것입니다.  웰슬리가 꿈꿨던 것은 쿠에스타와 빅토르가 서로의 멱살을 쥐고 뒹구는 사이에 살짝 다가가 빅토르의 옆구리에 연장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세바스티아니가 바로 옆에 서있다면 현장 분위기가 그다지 친영국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페인 귀족들로 구성된 스페인군 수뇌부의 모든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베네가스 장군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스페인군이 제시했습니다.  세바스티아니와 대치 중이던 베네가스(Francisco Javier Venegas) 장군의 라 만차 군(Ejército de La Mancha)이 세바스티아니를 적절히 견제하여 서쪽의 빅토르를 지원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쉬운 군사 작전이 서면 상의 작전이었습니다.  베네가스는 스페인 귀족다운 풍모와 위엄을 갖추고는 있었으나 귀족이 갖춘 것 그것 뿐이었습니다.  군사적 재능이라고는 1도 없었던 그는 이미 그 해 1월에 벌어진 우클레스(Uclés) 전투에서 고작 1만 조금 넘는 병력을 가지고 아무 상황 판단을 못 한 채 1만5천의 우세한 병력을 가진 빅토르에게 달려들었다가 1천의 사상자와 6천의 포로를 내는 참패를 겪은 바 있었습니다.  만약 스페인이 제대로 돌아가는 나라였다면,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그저 귀족의 체면을 위해 돌격했다가 1만군을 통째로 전멸시킨 베네가스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페인은 철저한 귀족 중심 사회였고, 제대로 돌아가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베네가스가 받은 것은 군법회의 출두명령서 대신 2만3천의 병력을 갖춘 라 만차 군 사령관 임명장이었습니다.


베네가스에게 주어진 명령은 2만 병력의 프랑스 제4 군단을 공격하여 분쇄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섣부른 전투를 피하되 세바스티아니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빅토르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잘 대치하고 있으라는 간단한 명령이었지요.  그러나 베네가스는 그 간단한 명령조차 완수하지 못하는 신박함을 보여주었습니다.  7월 초, 마침내 웰슬리의 영국군이 탈라베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프랑스군이 조제프 왕과 마드리드 수비대까지 다 이끌고 탈라베라로 달려갈 때, 베네가스 앞에 있던 세바스티아니도 서둘러 탈라베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베네가스는 그 뒷 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베네가스에게 완전히 또다른 기회를 주었습니다.  마드리드가 바로 코 앞인데, 그의 앞을 가로 막을 인근의 프랑스군이 모조리 탈라베라로 가버린 것입니다.  베네가스는 이때 2가지 꽃놀이 패를 쥐고 있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의 뒤를 쫓아 탈라베라로 이동한 뒤 쿠에스타 및 웰슬리와 연합하여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는데 일조할 수도 있었고, 또는 아예 텅 빈 마드리드로 진격하여 수도를 탈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네가스는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대체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었습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약 1달 뒤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다른 부대들과 합동 작전을 펼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베네가스는 후퇴하라는 쿠에스타의 명령을 거부하고 굳이 세바스티아니와 전투를 벌였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는 다음 기회에 보도록 하시고 일단은 탈라베라 전투에 집중하겠습니다.


이렇게 베네가스가 삽질을 해주는 덕분에 프랑스군은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 뿐만 아니라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그의 보좌관 주르당(Jourdan) 원수가 이끄는 마드리드 수비대 및 2개 용기병 사단 총 1만1천까지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탈라베라에서의 힘의 균형은 영국-스페인 연합군 5만5천에 프랑스군 4만6천으로,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게 된 셈이었으나 여전히 영국-스페인 연합군이 분명한 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영국-스페인은 불신과 반목으로 얼룩진 어설픈 연합군이었습니다.  스페인 국왕 조제프가 직접 지휘하는 프랑스 단일 정예군과의 대결에서는 불리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또 꼭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Tagus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https://en.wikipedia.org/wiki/Francisco_Javier_Venegas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lmonac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