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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링턴12

술트(Soult) 원수와 요리사 - Sharpe's Havoc 중 한 장면 아래 발췌 번역된 소설은 영국 작가 Bernard Cornwell이 지은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어느 밑바닥 출신 장교의 모험담을 그린 역사 소설 Sharpe 시리즈 중 'Sharpe's Havoc' 편입니다. 이 장면 중에서, 웰링턴이 이 제2차 포루투(Porto) 전투를 치르고 난 뒤, 프랑스군 사령부의 오븐에서 발견된 따뜻한 요리를 저녁식사로 먹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합니다. 물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작가의 허구입니다. 이 장면에서 프랑스인과 영국인의 요리, 그리고 요리사에 대한 개념과 대우를 엿볼 수 있습니다. Sharpe's Havoc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07년, 포르투갈) ----------------- ( 포르투갈 포르투 시를 점령하고 있는 프랑스군의.. 2021. 2. 18.
나폴레옹 시대의 병참부 이야기 (하편) 웰링턴은 포르투갈에 상륙하자마자 곧 이베리아 반도의 지형적, 그리고 사회적 특수성이 영국은 물론 프랑스나 독일 등 기타 유럽 지역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큰 특징으로, 제대로 된 길이 없었습니다 ! 이는 스페인의 침공 위협 때문에라도 스페인과의 교통로를 적극 개발하지 않았던 포르투갈의 특수성에도 기인했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나 모두 산업과 통상의 발달이 부진했다는 점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지역간에 거래를 할 상품이 없다보니 마차가 다닐 일도 없고, 마차가 다닐 일이 없으니 넓직한 길이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스페인은 지역 감정이 꽤 심한 나라여서 지방 간의 인적 왕래도 그다지 많지 않다보니, 더더욱 내륙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교.. 2019. 2. 18.
나폴레옹 시대의 병참부 이야기 (중편) (흔히 단순한 축성 전문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 분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17세기부터 2백년간 요새와 포병, 병참, 병력 운영 등 모든 전쟁 양상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그야말로 위풍당당 보방(Sébastien Le Prestre de Vauban) 백작입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지의 군사 요충지에 일찌기 보지 못했던 묘한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당대 유럽의 군사 작전 행태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보방(Vauban)식 요새의 등장이었습니다. 대포의 발명과 함께 무용지물이 되었던 중세식의 높고 웅장한 성벽과는 달리, 보방식 요새는 낮고 두꺼운 벽으로 된 보루(redoubt)와 쐐기 모양의 옹벽(ravelin), 그리고 대포알을 튕겨내기 위.. 2019. 2. 11.
굶주림과 희생 - 토헤스 베드하스 공방전 후퇴하는 웰링턴의 뒤를 쫓아 리스본으로 달리던 마세나가 1810년 10월 14일 생각지도 못했던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을 직접 육안으로 보고 그 규모에 경악하는 사이, 웰링턴이 사전에 프랑스군 후방에 미리 풀어놓았던 비밀 병기는 이미 작동을 시작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기아였습니다. 애초에 웰링턴은 마세나와 피투성이가 되어 멱살을 쥐고 구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기본 전략은 리스본 북쪽의 황량한 험지에서 마세나의 진격을 틀어막고 마세나에게 굶어죽든지 돌아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웰링턴은 부사쿠 전투를 전후하여 계속 그 일대의 포르투갈 주민들을 방어선 이남으로 피난가라고 강요했던 것입니다. 이는 병력은 부족하지만 물자는 풍부하고 기동력은 느리지만 방어에는 탁.. 2018. 12. 10.
무지막지한 도배질 - 토헤스 베드하스(Torres Vedras) 방어선 10월 5일, 프랑스군 전위 부대에게 사로잡힌 영국군 포로들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보고가 마세나에게 들어왔습니다. 영국군이 서둘러 '방어선 쪽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여태까지 마세나는 웰링턴이 1809년 1월 코루냐로 후퇴하던 무어 장군과 똑같은 신세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최악의 경우라고 해봐야 웰링턴의 영국군을 섬멸하지 못하고 놓치는 정도이고, 리스본 함락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국군 포로 취조 보고서에 따르면 웰링턴의 목적지는 리스본 항구에 정박한 영국 수송선이 아니라 어디엔가 구축해 놓은 방어선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세나는 자신감에 차있었습니다. 부사쿠 능선 같은 천혜의 방어선조차도 (비록 빙 우회하느라 시간은 .. 2018. 12. 3.
급할 수록 돌아가라 - 쿠임브라(Coimbra)의 함락 9월 27일 오전의 이 부사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500의 전사와 3600의 부상, 거기에 400에 가까운 실종자를 냈는데 비해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은 고작 전사 200에 부상 1000, 그리고 50의 실종자를 냈을 뿐이었습니다. 명백한 프랑스군의 참패였고, 그 원인은 마세나의 잘못된 판단이었지요. 마세나는 자신의 작전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에 대해 꽤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우수한 지휘관은 패전의 충격에서 재빨리 빠져나오는 법이지요. 그는 실패의 원인이 생각보다 웰링턴의 방어선이 훨씬 더 길게 늘어져 있어서, 가파른 능선이라는 강력한 방어선을 충분히 우회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잘 이해했습니다. 원인이 나오면 해법도 있기 마련이고, 해법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훨씬 더 크게 우회하면 되.. 2018. 11. 26.
부사쿠(Bussaco) 전투 (2) - 가늘고 긴 선 마세나의 명령대로 이른 아침 부사쿠 능선에 늘어선 영국군 방어선의 측면을 향해 기어오른 레이니에의 제 2군단은 크게 2개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들은 몬데고 계곡에서 피어오르는 자욱한 아침 안개에 가려져 영국군의 관측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안개로 인해 프랑스군도 능선 위의 영국군의 존재를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대오를 맞추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이들은 사단 단위의 질서 정연한 대오가 아니라 기껏해야 대대 단위를 간신히 유지한 엉클어진 모습으로 행군해야 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안개를 뚫고 고지에 오른 프랑스군 눈 앞에 펼쳐진 능선은 텅 비어 있어야 했습니다.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방어진의 측면을 우회하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천만.. 2018. 11. 22.
부사쿠(Bussaco) 전투 (1) - 사자는 방심하지 않는다 탄약고 폭발로 인한 알메이다 요새의 갑작스러운 함락은 웰링턴을 크게 당황시킬만 했습니다. 하지만 웰링턴은 그렇게까지 당황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생각보다 너무 일찍 함락되긴 했지만 어차피 알메이다의 함락은 예견되었던 것이고, 시우다드 로드리고의 스페인군이 분전해준 덕분에 방어 준비는 이미 충분히 되어 있었거든요. 문제는 그 방어 준비라는 것의 본질이었습니다. 웰링턴의 방어전략은 간단했습니다. 후퇴였지요. 그는 기세등등한 프랑스군과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일대의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리고 게속 후퇴했습니다. 군대가 후퇴하면서 주민들에게까지 소개령을 내리는 것은 당시 유럽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웰링턴이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식량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식량을 현지 조달하는 프랑스군의.. 2018. 11. 12.
1810년 포르투갈 침공의 서막 - 봉쇄와 결투 여태까지 1810년에 있었던 이런저런 사건들, 즉 나폴레옹의 새장가, 사탕무 설탕 공장의 건설, 베르나도트의 스웨덴 왕세자 책봉 등을 보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1810년은 피와 화약 연기로 점철되었던 황제 나폴레옹의 나날 중 드물게 평화로운 시절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도 비교적 그랬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1810년 들어 스페인 민중들의 대프랑스 항쟁은 그 기세가 더 격렬해졌습니다. 이는 반나폴레옹 봉기가 곳곳에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은 정반대로서, 웰링턴의 영국군이 탈라베라(Talavera) 전투 이후 포르투갈로 물러가자 무능력한 스페인 봉기군은 차근차근 프랑스군에게 격파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러면 스페인 민중들은 용기를 잃고 굴복할 만도 할.. 2018. 10. 8.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다 - 탈라베라 전투 (제6편) 프랑스군 2개 사단을 위기에서 구출해준 것은 전선 중앙부에서처럼 영국군 자신들의 경험 부족과 무지였습니다. 페인(Fane)과 앤슨(Anson)의 영국군 기병대가 프랑스군을 위협하여 방진을 이루게 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협박만 했으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그렇게 방진을 이룬 프랑스군을 메데진 언덕 위의 영국군 포병대가 계속 갉아먹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고슴도치처럼 총검을 촘촘히 내밀고 방진을 이룬 프랑스군 정면을 향해 영국군 기병대는 겁도 없이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돌격은 기병대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서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영국군은 용감했습니다. 하지만 영국군 기병대를 격파한 것은 프랑스군의 총검이 아니었습니다... 2018. 4. 1.
계곡의 연합군 - 탈라베라(Talavera) 전투 (1편) 1809년 5월 16일 폰트 다 미사헬라(Ponte da Mizarela)에서 술트의 프랑스군을 놓친 웰슬리의 영국군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1차 목표인 포르투갈 탈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성공일 뿐이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접경 지역 곳곳에는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 등이 이끄는 프랑스 군단들이 호시탐탐 포르투갈을 위협하고 있었으니, 이들을 격파하기 전에는 포르투갈이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웰슬리는 정말 이들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웰슬리의 영국군은 고작 2만명 수준이었습니다. 영국군에게는 이 정도면 굉장히 큰 규모의 야전군이었지만 스페인 내에서는 그리 인상적인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을 점거 중이던 프랑스군은 최소 7개 .. 2018. 2. 25.
빵과 금화 - 나폴레옹 시대의 징발 이야기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직전이던 1805년 11월, 린츠(Linz)로부터 빈(Wien)을 향해 전진하던 란의 제5 군단은 (전투 현장에서는 언제나 그랬습니다만) 심각한 보급 부족으로 큰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진흙투성이 길로 강행군을 하는데다 추운 늦가을에 노숙을 하는 것도 고달픈데, 먹을 것까지 부족하니 장교들이나 병사들이나 모두 지치고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지요. 그때 란의 개인적인 형편은 더욱 안 좋았습니다. 아팠거든요. 란은 아픈 상태에서도 부하들이 겪고 있던 보급 부족에 대해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내린 명령이 이런 것이었지요. "어떤 병사 또는 부대라도, 약탈, 사사로운 싸움 및 위협을 하다가 적발되거나 장교를 구타할 경우 즉각 총살될 것이다. 집행 권한은 사단장이 행사한다." 이에 .. 2016. 1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