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941 라이프치히 전투 (38) - 간절했던 1승 10월 18일 낮의 전투는 블뤼허가 담당한 북쪽 전선을 제외하고 모든 방면에서 매우 치열했습니다. 블뤼허가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이유는 자신의 4개 주력 군단 중 가장 강력했던 랑제론의 러시아 군단을 베르나도트에게 떼어주었고, 또 요크의 프로이센 군단은 16일의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전투는 전체 전선에서 치열했지만 슈바르첸베르크의 보헤이마 방면군이 담당했던 남쪽 전선에서는 연합군이 큰 전진을 하지는 못했고, 정작 돌파구가 뚫린 곳은 베르나도트와 베니히센이 함께 공격한 라이프치히 북동쪽 쇤너펠트였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남쪽 전선도 18일 새벽과 크게 다르지 않게 코네비츠(Connewitz) - 프롭스트하이다(Probstheida).. 2026. 3. 9. 보스포러스 해협 이야기 (5) - 모든 것을 바꾼 나무틀 프랑스 혁명 발발 4년째이던 1783년 생인 펙상(Henri-Joseph Paixhans)은 프랑스 혁명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해에 프랑스 국민공회의 지원으로 수학자 가스파르 몽쥬(Gaspard Monge)가 만들었다가 나폴레옹이 일종의 사관학교로 변모시킨 에콜 폴리테크닉(École polytechnique)에서 교육을 받고 포병 장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범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던 펙상은 혁명이 아니었다면 결코 장교 계급장을 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포병 장교로 만들어준 나폴레옹을 따라 아우스테를리츠, 예나, 아일라우 등 대부분의 주요 전투에 참전했고, 1812년 뼈아픈 러시아 원정에 참여하여 보로디노 전투에서도 싸웠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2026. 3. 5. 라이프치히 전투 (37) - 어두운 거리 이렇게 그랑다르메의 퇴각 작전 세부안에 대해 명령서를 발부한 나폴레옹은 그 뒤에도 바빴습니다. 린더나우에서 귤라이의 포위망을 뚫고 바이센펠스 방면으로 미리 진출한 베르트랑 및 에르푸르트(Erfurt),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등의 수비대 사령관에게도 명령서를 보내 식량 준비 등 추가적인 지시를 내렸습니다. 작전 명령서 내용이 식량 준비라니 약간 의아할 수 있으나, 러시아 원정 내내 식량 부족에 시달렸던 나폴레옹에겐 작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라이프치히에서도 그랑다르메는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묵었던 프로이센 호텔에서조차 나폴레옹의 시종들은 나폴레옹이 늦은 저녁으로 먹을 빵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더 나아가 마인츠(Main.. 2026. 3. 2. 보스포러스 해협 이야기 (4) - 쇠구슬과 폭탄 17~18세기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영화를 보면, 흔히 대포알이 명중할 때 폭발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장면입니다. 당시 대포(cannon)는 대개 그냥 커다란 쇠구슬 같은 대포알(cannonball)을 쏘았지만, 박격포(mortar)는 속에 흑색화약이 든 폭발탄(shell, bomb)을 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박격포는 포신이 매우 짧고 폭탄을 하늘 높이 던져올리는 형태로 포구가 45도 이상 하늘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바퀴가 달린 포가 위에 얹은 상태로 쏘면 그 반동으로 인해 바퀴 축이 부러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박격포는 대개 땅에 고정시켜놓고 쏘았고, 기동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박격포는 야전보다는 공성전에서나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습.. 2026. 2. 26. 라이프치히 전투 (36) - 악마는 디테일에 흔히 작은 실수 하나로 인해 큰 재앙이 찾아올 수도 있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이야기하면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큰 재앙은 작은 실수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실수가 겹쳐진 결과이고, 그렇게 많은 실수가 겹쳐질 때까지 상황이 방치된다는 것은 그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의 제국이 무너진 것은 상병(corporal) 하나의 실수가 아니라, 러시아 원정 때부터, 아니 어쩌면 1807년 아일라우 전투 때부터 쌓여온 피로로 인해 빚어진, 나폴레옹 제국의 피로 골절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보시게 될 과정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피로 골절은 운동선수에게 곧잘 일어나는 골절입니다. 뼈가 부러지려면 10이라는 충격이 가해져야 할 때, 1이라는.. 2026. 2. 23. 보스포러스 해협 이야기 (3) - 넬슨의 명언 1853년 6월 러시아가 왈라키아-몰다비아 공국들을 침공하여 점령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부추김을 받은 오스만 투르크가 그에 맞서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크림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반 년 이상,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투르크를 돕기 위한 병력과 함대를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으로 흑해는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나 나오는 머나먼 미지의 영역이었으므로, 그들은 처음부터 실제 전투에 참전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흑해가 지리적으로 너무 먼 지역이었으므로 자국의 이익에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가 오스만 투르크를 통째로 점령하거나, 특히 이스탄불 일대를 점령하여 러시아 흑해 함대가 지중해로 자유롭게 드나들게 되는 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이익은 물론 안보에도 크게.. 2026. 2. 19. 라이프치히 전투 (35) - 후퇴의 핑계 작센군의 집단 이탈이 다국적군 그랑다르메에게 꽤 큰 충격을 주기는 했습니다만, 그것으로 인해 전황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그랑다르메는 파운스도르프에서 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핑계와 자랑거리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는 했습니다. 작센군의 집단 이탈에 대해 가장 먼저 생색을 내기 시작한 것은 영국 로켓여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무기에 혼이 빠진 작센군 수천 명이 불과 200명도 안 되는 자신들에게 항복했다고 본국에 보고했습니다. 물론 이건 전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작센군은 로켓 사격을 직접 받은 부대도 아니었고 로켓과는 무관하게 그날 오전에 이미 연합군으로의 이탈을 모의하고 있었으며, 분명히 스트로가노프의 러시아군에게 전향 .. 2026. 2. 16. 보스포러스 해협 이야기 (2) - Make France Great Again! 러시아가 보스포러스-다다넬즈 해협을 뚫고 지중해로 나가기 위해 호시탐탐 오스만 투르크를 노리던 1850년 대, 프랑스에서는 희대의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1848년 '유럽의 봄', 즉 대혁명의 해에 유일하게 혁명에 성공하여 루이 필립의 오를레앙 왕조를 엎어버리고 다시 공화정이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그 대통령이 문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수많은 프랑스 젊은이들을 독일과 러시아에서 개죽음 시키고 폭망한 뒤 세인트 헬레나에서 죽은 지 27년이나 지났건만, 유럽 제1의 나라라는 허영심에 가득차있던 프랑스인들은 뜻밖에도 그 조카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던 것입니다. 뜻밖이라고 말한 것은 루이 나폴레옹은 삼촌으로부터 명석한 두뇌나 미래에 대한 비전 등은 쏙 빼고 허영심만 두 배로.. 2026. 2. 12. 라이프치히 전투 (34) - 나폴레옹이 만든 유행어 원래 유럽 전장에서는 항복이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고 불명예스러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쟁쟁한 부하들인 뮈라나 란 등도 한 번씩 적에게 항복하여 포로 신세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작센군의 경우는 항복이라기보다는 적군에게 전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전향도 원래 큰 수치는 아니었습니다. 몇 개월 전에 프랑스측에서 연합군측으로 넘어온 조미니의 경우도 있었고, 당장 프로이센군의 요크 장군만 하더라도 1812년 러시아 원정 말미인 12월 30일 타우로겐(Tauroggen) 조약을 맺고 그랑다르메에서 러시아군으로 전향했습니다. (타우로겐 조약을 기념하는 비석입니다. 타우로겐(Tauroggen)은 독일식 지명이고, 지금 그곳은 리투아니아 도시입니다. 리투아니아어로는 토라게(Tauragė)라.. 2026. 2. 9. 보스포러스 해협 이야기 (1) - 유럽의 경찰, 러시아 나폴레옹의 몰락 때까지 유럽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마치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들의 원흉 같지만, 실은 나폴레옹의 등장 이전에도 유럽에서는 7년 전쟁이다 30년 전쟁이다 무슨 왕위계승 전쟁이다 해서 항상 사람이 죽고 건물이 불탔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쫓겨나자마자, 신기할 정도로 전쟁이 딱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Wien) 체제였습니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이라는 열병을 겪고난 유럽의 왕가들과 귀족들은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뜻을 모아 유럽의 구질서를 지키자는 체제 유지 연맹체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빈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모습입니다. 1번이 영국의 웰링.. 2026. 2. 5. 라이프치히 전투 (33) - 작센인들의 결단 레이니에의 제7군단은 베르나도트를 놓친 김에 베를린으로 가겠다는 나폴레옹의 즉흥적인 결정 탓에 엘베강을 건너 로슬라우(Rosslau)까지 갔었기 때문에, 라이프치히에 가장 늦게, 바로 그 전날인 10월 17일 오후 늦게서야 도착한 부대였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매우 지친 상태였는데,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파운스도르프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곳은 북서쪽에서 쳐들어오는 블뤼허와 동쪽에서 쳐들어올 베니히센의 딱 중간 지점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면 당일 전선 중에서 전투가 가장 느슨할 것 같은 지점이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이 레이니에를 거기에 배치한 것은 제7군단이 지친 몸이라는 것을 배려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그들의 위치가 마침 거기였기 때문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그쪽으로 베르나도트.. 2026. 2. 2. 이스탄불 여행 (12) - 이집트인을 위한 이집트 유럽을 다 정복할 기세였던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결국 러시아의 저력 앞에 무릎을 꿇자, 나폴레옹에게 기대어 러시아 견제를 노리던 오스만 투르크의 신세는 글자 그대로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습니다. 한 때 오스만 투르크의 호수 같았던 흑해는 이제 완전히 러시아에게 주도권이 넘어갔고, 오스만 투르크와 맺은 협약에 따라 러시아 상선은 흑해의 각종 산물을 실은 상선들을 보스포러스 해협을 통해 지중해로 자유롭게 왕래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썩어도 준치라고, 오스만 투르크는 그리스부터 도나우강 유역을 거쳐 시리아와 이집트까지 이어지는 대제국을 명목상으로는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명목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도나우강 유역의 왈라키아 및 몰다비아 등의 공국은 러시아를 등에 업고 사실상 독립국 행세를 이미.. 2026. 1. 29. 이전 1 2 3 4 ··· 7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