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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첸트랄 이야기 (3) - 혁명과 주택난 대체 당시 빈의 주택 사정이 얼마나 나빴길래, 커피 한 잔 값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난했던 트로츠키까지 카페 첸트랄로 출근을 했던 것일까요? 이야기는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가 뒤늦게서야 터져나왔던 1848년 유럽 대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8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으로 오를레앙 왕가가 끝장 나자, 그에 고무된 유럽 각국에서는 너도 나도 혁명이 일어났고 오스트리아 빈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체코, 헝가리, 이탈리아 등 다민족으로 구성된 제국이었으므로 상황이 더욱 복잡했습니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30년 넘게 유럽의 낡은 질서를 지켜왔던 빈 체제의 설계자 메테르니히조차 빈에서 일어난 3월 혁명으로 여장을 한 채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 2026. 8. 27.
나폴레옹의 겨울 (10) - 요새와 보물함대 1576년의 헨트 평화협정은 급여 체불에 불만을 품고 저지대 도시들을 약탈하기 시작한 스페인군에 대한 공동 대응을 위해 급히 맺어진 것으로서, 사실 완전한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모든 갈등과 폭력의 근본 원인에는 돈이 있는 법인데, 돈 때문에 싸운다고 하면 너무 품위가 없어 보이니 보통 사람들이 대는 전쟁의 핑계가 자유와 종교입니다. 여기서도 딱 그랬습니다. 일단 스페인에서 파견된 저지대 총독이자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이복 형제였던 돈 후안(Juan de Austria)도 헨트 협정을 추인했고 그에 따라 스페인군을 이탈리아로 철수시키긴 했지만, 헨트 평화협정은 스페인군 철수 외에도 중요한 것 2가지를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의회(Staten-Generaal)의 상설화와 카톨릭 .. 2026. 8. 24.
카페 첸트랄(Cafe Central) 이야기 (2) - SNS와 공유 오피스 트로츠키가 가난한 망명객 주제에 고급 카페였던 카페 첸트랄에 출근도장을 찍으며 하루 종일 거기 죽치고 앉아 있을 수 있던 이유는 (1) 당시 빈의 카페는 그럴 수 있는 분위기였다는 점과 (2) 트로츠키의 유명세 자체가 있었고 (3) 트로츠키는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했다는 3가지로 요약됩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빈의 카페는 요즘의 SNS 역할을 했습니다. 인간이란 집단 생활을 하는 짐승이라서, 언제나 남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남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것도 그런 본능이 이끈 것입니다. 요즘은 인터넷과 SNS가 있어서 굳이 얼굴을 마주대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지구 반대편 사람들 소식도 들을 수 있습니다만,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신문.. 2026. 8. 20.
나폴레옹의 겨울 (9) - 은화와 모기 전투 현장의 병사들이 급여를 못 받을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현대적인 상식으로는 어차피 전투 현장에서 돈 쓸 일도 없으니 당장은 아무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병사들의 급여와 배식 체계는 오늘날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기본적으로 당시 스페인 테르시오 일반 병사들은 당시 미숙련 노동자 정도, 혹은 그보다 살짝 높은 수준의 급여를 받았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인데도 그렇게 급여가 낮은 수준이라니 약간 의외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으나,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현대 미군에 이르기까지 그 정도 수준이 일관적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물론 현대 미군은 대학 교육비 지원이라든가 시민권 획득이라든가 하는 부차적인 당근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멀쩡한 중산층 가정 출신에 대학도 나온 백인 청년이 군.. 2026. 8. 17.
카페 첸트랄(Cafe Central) 이야기 (1) - 죽돌이 혁명가 작년 가을 튀르키예-이탈리아-오스트리아 여행을 준비하면서 제가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사실 아야 소피아나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이 아니라 바로 빈의 카페 첸트랄(Cafe Central)이얶습니다. 대딩 때 읽었던 세계사 책에서, 20세기 초 빈의 카페 '센트랄'에는 트로츠키와 레닌 등 혁명론자들이 죽치고 앉아 혁명과 사상을 논했다는 구절을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사실 저는 트로츠키 얼굴도 잘 몰랐습니다만 아무튼 그런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앉아 음모를 꾸미던 빈의 카페라니 뭔가 좀 멋지게 들렸습니다. (아마 사람들 생각이 다 비슷한지 카페 첸트랄은 전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한번쯤 가보겠다고 저렇게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진 속에는 줄이 좀 짧아 보이는데, 실제로는 사진 프레임 밖에 더 길었습니.. 2026. 8. 13.
나폴레옹의 겨울 (8) - 제해권과 환어음 지난 편에서 말씀드린 대로, 영국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어진 판 데르 마르크의 바다 거지 6백여 명을 실은 25척의 함대는 처음엔 블리싱언(Vlissingen)으로 가려고 했으나 바람의 방향이 맞지 않아 역풍에 밀려 남부 홀란드(Holland) 앞바다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식량이 다 떨어져 뭐든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판 데르 마르크는 이 해안 일대에서 노략질이라도 하려고 했었습니다. 사실 바다 거지들은 스페인 선박들만 털던 것이 아니라 저지대 해안 마을들을 터는 경우도 꽤 많았거든요. 그렇게 또 바이킹처럼 해안 마을을 약탈하러 슬금슬금 해변으로 접근하고 있을 때, 작은 고기잡이 보트 하나가 겁도 없이 이 바다 거지 함대에게 접근했습니다. 거기엔 흥분한 늙은 어부가 타고 있었는데, 그가.. 2026. 8. 10.
아야 소피아 (Hagia Sophia) 이야기 (2) - 원과 삼각형 사각형 건물 위에 거대한 돔을 얹는다는 역학적 난제를 숙제로 받은 것은 뜻밖에도 건축가가 아니라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던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Isidore of Miletus)와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Anthemius of Tralles)였습니다. 이들은 건축가로 훈련받은 적이 없는 순수 과학자였으나, 수학자답게 이시도로스는 알렉산드리아의 헤로(Hero)가 쓴 '볼팅(Vaulting, 천정곡면/아치)에 대하여'라는 책에 주석을 달기도 하는 등 기본적인 건축 이론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솔루션으로 고안해낸 기법은 펜던티브(pendantive)였습니다. (아야 소피아의 건축가 중 하나인 이시도로스입니다. 그러나 이 석상은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것으로서, 실제 인.. 2026. 8. 6.
나폴레옹의 겨울 (7) - 저지대의 개방(丐幫) 알바 공작의 '10분의 1세(Tiende Penning)' 때문에 저지대 전역에서는 반스페인 감정이 들끓었습니다만, 온갖 소극적 저항이 난무하는 가운데에도 무장봉기는 쉽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1568년 빌렘 오라녜의 반군이 저지대 침공을 시도해보았으나 그들 대부분은 독일 등지에서 모집한 용병에 불과했고, 아니나 다를까 이들은 알바 공작의 강력한 테르시오 부대에게 대번에 박살이 나서 흩어져버렸습니다. 왜 저지대 사람들은 무장봉기에 소극적이었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저지대의 돈줄을 꽉 쥐고 있던 암스테르담이나 안트베르펜 등 저지대 대도시들의 지배층이 모두 철저한 친스페인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지대가 반란에 휘말린 계기는 분명히 필리페 2세의 가혹한 신교 탄압 때문이긴 했습니.. 2026. 8. 3.
아야 소피아 (Hagia Sophia) 이야기 - 폭동과 돔(dome) 이번에는 이스탄불에서 본 성소피아 대성당 이야기를 짧게 두 편 정도로 정리할까 합니다. 제가 학생 때는 이 대성당을 성소피아 대성당이라는 이름으로 배웠지만, 튀르키예 현지식으로는 아야 소피아라고 부르고, 표기도 아예 Ayasofya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은 저 성당의 원래 이름은 비잔틴 제국의 공식 언어인 그리스어로 'Αγία Σοφία', 즉 Hagia Sophia입니다. 맨 앞이 '하'가 아니라 '아'임을 보실 수 있는데, 이건 그리스어 원어에는 단어 앞에 강한 기식 부호(rough breathing, ʽ)가 있는데, 이것이 로마자로 옮겨질 때 h로 표기되어 Hagia가 된다고 합니다. 뜻은 영어로는 Holy Wisdom,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입니다. 이걸 튀르키예어로 읽으면 다시 아.. 2026. 7. 30.
나폴레옹의 겨울 (6) - '엘 카미노 에스파뇰' 펠리페 2세가 저지대에 대해 유독 가혹하게 대했던 것은 그의 성격이 잔인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펠리페 2세는 무척 차분하고 냉정한 성격을 가진 일중독자로서, 스페인의 최전성기를 이끈 뛰어난 통치자였습니다. 가령 1571년, 스페인, 교황청, 베네치아, 제네바 등의 카톨릭 신성동맹이 그리스 서해안인 레판토(Lepanto)에서 오스만 투르크 함대를 격파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지킨 것은 그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다만 그는 약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경건하고 열성적인 카톨릭 신자로서, 유럽을 휩쓸던 종교 개혁으로부터 카톨릭을 지켜야 한다는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령 1588년,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으로 무적함대(Spanish Armada)를 보내 영국 정복을 꾀했던 것도, 드레이크의 .. 2026. 7. 27.
남티롤(Südtirol) 이야기 (10) - 미봉된 갈등 1969년의 남티롤 패키지 협약(독일어로 파켓(Paket))이 이루어져 남티롤의 세수 90%를 남티롤 내에서 집행하게 되었다고 해도, 그 세수 자체가 보잘 것 없으면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었습니다. 가령 세수 100%를 시칠리아 섬에서 집행하기로 했던 시칠리아 광역주의 경우, 그 세수로도 부족하여 결국 중앙정부에서 보조금을 받아야 광역주 자치정부가 유지될 수 있는 형편입니다. 1969년 당시 남티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산악지대에서 농업이 잘 될 턱이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랬지만, 당시 남티롤은 부유한 지역이 아니라 오히려 이탈리아 평균보다 가난한 산악 농업지대였습니다. 그러나 행운은 외부에서 오기도 합니다. 1960년대 서독,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독일어권 경제.. 2026. 7. 23.
나폴레옹의 겨울 (5) - 합스부르크 제국의 노른자위 '사울(바울)의 회개'는 대략 AD 34년 경에 벌어진 매우 인상적인 사건입니다. 전형적인 바리새인이자 유대인들의 종교 기득권 세력인 산헤드린(Sanhedrin)의 대리인인 사울이, 예수 추종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 하늘에서 비춰진 강력한 빛을 맞고 쓰러졌고, 동시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울은 여태까지의 태도를 180도로 전환하여,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합니다. 전에 뉴스위크인가 어딘가 하는 잡지사에서 세계 석학들에게 설문 조사를 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뽑은 바 있었습니다. 그떄 1위는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멧이었고, 2위가 예수, 3위가 바울.. 2026. 7.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