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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첸트랄(Cafe Central) 이야기 (6) - 붉은 빈의 몰락 붉은 빈의 몰락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짚어야 할 것은 공공임대주택 제도에는 본질적 한계가 많았다는 점입니다. 이 사업의 재원은 빈의 토지와 주택을 독점하다시피 하던 극소수 대부호들에게서 뜯어낸 세금이었습니다만, 사업이 진행되면서 대부호의 부동산이 줄어들자 자연스럽게 세수도 줄어들었고, 따라서 사업은 점점 느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다 사회당의 계산 범위 안에 있던 바이긴 했지만 사업이 느려지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결과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920년대 후반이 되어서도 여전히 빈 시민들의 80% 이상이 여전히 민간 임대주택에 살고 있었고, 붉은 빈이 자랑하던 공공 임대주택 즉 게마인더바우에 거주하는 비율은 10%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세금을 뜯기며 고통 받던 부유층.. 2026. 9. 17.
벨기에 이야기 (10) - 안트베르펜의 다리 이렇게 플랑드르와 브라반트의 도시들을 하나씩 접수해나가던 파르네제 앞에, 마침내 최종 보스가 등장했습니다. 안트베르펜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함락시킨 브뤼허, 헨트, 브뤼셀 등도 물론 유서 깊고 부유한 도시들이었지만, 안트베르펜은 급이 달랐습니다. 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인 16세기 중반만 해도, 안트베르펜은 인구가 10만이 넘는 수준으로서 당시 유럽에서 5~6위 수준의 대도시였고, 20만이 넘던 파리보다야 작은 도시였지만 합스부르크 스페인 최대 도시인 세비야보다도 더 컸습니다. 단순 인구뿐만 아니라 부의 측면에서 보면 단연코 당시 유럽 제1위로서, 당대 유럽의 뉴욕 같은 위상을 가진 도시였습니다. 당시 안트베르펜과 부유함을 다투던 도시로는 스페인 최대 무역항 세비야나 유럽 최대의 금융도시 제노바 등이 .. 2026. 9. 14.
카페 첸트랄 (Cafe Central) 이야기 (5) - 노동자들의 궁전 결국 붉은 빈의 공공임대주택 정책은 간단했습니다. 먼저 임대료를 동결시킨 뒤, 빈의 주택 시장을 사실상 완전 장악하고 있던 2%의 극소수 대부호들에게서 무자비한 세금을 뜯어내어 주택 가격을 폭락시킨 뒤, 그렇게 뜯어냈던 세금으로 그렇게 폭락한 부호들의 임대 주택을 사들여 그 돈과 토지로 노동자들을 위한 공공임대주택, 즉 게마인더바우(Gemeindebau, 지자체(Gemeinde) + 건물(Bau))를 지었던 것입니다. (당시 지어진 게만인더바우 중 하나인 라살 호프( Lassalle-Hof)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과거 서울 팽창시 많은 국유지가 있었습니다만, 토지공사 등이 그런 토지를 택지화한 뒤 민간 건설사에 팔아서 거기에 아파트를 짓는 형태로 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토지는 있으나 돈이.. 2026. 9. 10.
벨기에 이야기 (9) - 브레다(Breda)의 목마 파르마 공작 파르네제가 왈롱 지역을 설득하여 아라스 동맹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왈롱 지역에 상공업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6세기 후반 저지대에서는 이미 봉건적 질서가 많이 무너진 상태였지만, 여전히 귀족들은 전통적인 토지 기반 경제권을 쥐고 있었고, 도시에서 상업과 공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부호들은 평민 출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왈롱 지역, 즉 에노(Hainaut), 아르투와(Artois) 등지에도 발랑시엔(Valenciennes)과 몬스(Mons), 아라스(Arras) 등의 도시들이 있었지만, 더 북쪽의 플랑드르, 브라반트 등의 안트베르펜 (Antwerpen, Antwerp), 헨트 (Ghent), 브뤼허(Brugge, Bruges), 브뤼셀(Brussels), 루.. 2026. 9. 7.
카페 첸트랄 (Cafe Central) 이야기 (4) - "빨갱이 비엔나" 1914년부터 4년 넘게 이어진 WW1은 참전국 중에서도 특히 다민족 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근본부터 파괴했습니다. 전쟁 막바지, 체코와 헝가리, 남슬라브 지역이 차례로 독립을 선언하며 떨어져 나갔고, 1918년 11월 카를 1세 황제를 끝으로 600년 넘게 이어져온 합스부르크 왕조는 허무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한때 5천만 인구를 거느렸던 다민족 제국이 하루아침에 독일어를 쓰는 650만 인구의 작은 내륙국으로 쪼그라들었는데, 그 폐허 위에 세워진 것이 바로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 훗날의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었습니다. 전쟁은 많은 목숨을 앗아가고 재산을 파괴하며 이렇게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왕조를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산불이 휩쓸어 잿더미가 된 숲에서도 새로운 생태계가 시작.. 2026. 9. 3.
벨기에 이야기 (8) - 손자의 수제자 1577년 가을, 나뮈르 요새에서 농성하던 돈 후안에게 스페인군을 이끌고 온 사람은 당시 32세의 한창 나이의 이탈리아 귀족 파르네제(Alessandro Farnese)였습니다. 그는 돈 후안보다 2살 연상으로서, 어릴 때부터 스페인 왕실에서 함께 자랐을 뿐만 아니라 돈 후안 최대의 업적이었던 오스만 투르크와의 레판토 해전에도 함께 참전했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습니다. 이탈리아인인 파르네제는 어쩌다 스페인 왕실에서 어린 시절을 돈 후안과 함께 보냈던 것일까요? 실은 그 둘은 모두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친척 사이였습니다. 돈 후안은 펠리페 2세의 아버지인 카를로스 5세의 서자로서 펠리페 2세와 이복형제 사이였고, 파르네제의 어머니도 카를로스 5세의 서녀로서 펠리페 2세는 파르네제의 외삼촌이었습니.. 2026. 8. 31.
카페 첸트랄 (Cafe Central) 이야기 (3) - 혁명과 주택난 대체 당시 빈의 주택 사정이 얼마나 나빴길래, 커피 한 잔 값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난했던 트로츠키까지 카페 첸트랄로 출근을 했던 것일까요? 이야기는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가 뒤늦게서야 터져나왔던 1848년 유럽 대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8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으로 오를레앙 왕가가 끝장 나자, 그에 고무된 유럽 각국에서는 너도 나도 혁명이 일어났고 오스트리아 빈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체코, 헝가리, 이탈리아 등 다민족으로 구성된 제국이었으므로 상황이 더욱 복잡했습니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30년 넘게 유럽의 낡은 질서를 지켜왔던 빈 체제의 설계자 메테르니히조차 빈에서 일어난 3월 혁명으로 여장을 한 채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 2026. 8. 27.
벨기에 이야기 (7) - 요새와 보물함대 1576년의 헨트 평화협정은 급여 체불에 불만을 품고 저지대 도시들을 약탈하기 시작한 스페인군에 대한 공동 대응을 위해 급히 맺어진 것으로서, 사실 완전한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모든 갈등과 폭력의 근본 원인에는 돈이 있는 법인데, 돈 때문에 싸운다고 하면 너무 품위가 없어 보이니 보통 사람들이 대는 전쟁의 핑계가 자유와 종교입니다. 여기서도 딱 그랬습니다. 일단 스페인에서 파견된 저지대 총독이자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이복 형제였던 돈 후안(Juan de Austria)도 헨트 협정을 추인했고 그에 따라 스페인군을 이탈리아로 철수시키긴 했지만, 헨트 평화협정은 스페인군 철수 외에도 중요한 것 2가지를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의회(Staten-Generaal)의 상설화와 카톨릭 .. 2026. 8. 24.
카페 첸트랄(Cafe Central) 이야기 (2) - SNS와 공유 오피스 트로츠키가 가난한 망명객 주제에 고급 카페였던 카페 첸트랄에 출근도장을 찍으며 하루 종일 거기 죽치고 앉아 있을 수 있던 이유는 (1) 당시 빈의 카페는 그럴 수 있는 분위기였다는 점과 (2) 트로츠키의 유명세 자체가 있었고 (3) 트로츠키는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했다는 3가지로 요약됩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빈의 카페는 요즘의 SNS 역할을 했습니다. 인간이란 집단 생활을 하는 짐승이라서, 언제나 남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남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것도 그런 본능이 이끈 것입니다. 요즘은 인터넷과 SNS가 있어서 굳이 얼굴을 마주대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지구 반대편 사람들 소식도 들을 수 있습니다만,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신문.. 2026. 8. 20.
벨기에 이야기 (6) - 은화와 모기 전투 현장의 병사들이 급여를 못 받을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현대적인 상식으로는 어차피 전투 현장에서 돈 쓸 일도 없으니 당장은 아무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병사들의 급여와 배식 체계는 오늘날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기본적으로 당시 스페인 테르시오 일반 병사들은 당시 미숙련 노동자 정도, 혹은 그보다 살짝 높은 수준의 급여를 받았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인데도 그렇게 급여가 낮은 수준이라니 약간 의외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으나,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현대 미군에 이르기까지 그 정도 수준이 일관적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물론 현대 미군은 대학 교육비 지원이라든가 시민권 획득이라든가 하는 부차적인 당근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멀쩡한 중산층 가정 출신에 대학도 나온 백인 청년이 군.. 2026. 8. 17.
카페 첸트랄(Cafe Central) 이야기 (1) - 죽돌이 혁명가 작년 가을 튀르키예-이탈리아-오스트리아 여행을 준비하면서 제가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사실 아야 소피아나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이 아니라 바로 빈의 카페 첸트랄(Cafe Central)이얶습니다. 대딩 때 읽었던 세계사 책에서, 20세기 초 빈의 카페 '센트랄'에는 트로츠키와 레닌 등 혁명론자들이 죽치고 앉아 혁명과 사상을 논했다는 구절을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사실 저는 트로츠키 얼굴도 잘 몰랐습니다만 아무튼 그런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앉아 음모를 꾸미던 빈의 카페라니 뭔가 좀 멋지게 들렸습니다. (아마 사람들 생각이 다 비슷한지 카페 첸트랄은 전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한번쯤 가보겠다고 저렇게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진 속에는 줄이 좀 짧아 보이는데, 실제로는 사진 프레임 밖에 더 길었습니.. 2026. 8. 13.
벨기에 이야기 (5) - 제해권과 환어음 지난 편에서 말씀드린 대로, 영국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어진 판 데르 마르크의 바다 거지 6백여 명을 실은 25척의 함대는 처음엔 블리싱언(Vlissingen)으로 가려고 했으나 바람의 방향이 맞지 않아 역풍에 밀려 남부 홀란드(Holland) 앞바다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식량이 다 떨어져 뭐든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판 데르 마르크는 이 해안 일대에서 노략질이라도 하려고 했었습니다. 사실 바다 거지들은 스페인 선박들만 털던 것이 아니라 저지대 해안 마을들을 터는 경우도 꽤 많았거든요. 그렇게 또 바이킹처럼 해안 마을을 약탈하러 슬금슬금 해변으로 접근하고 있을 때, 작은 고기잡이 보트 하나가 겁도 없이 이 바다 거지 함대에게 접근했습니다. 거기엔 흥분한 늙은 어부가 타고 있었는데, 그가.. 2026. 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