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번외편으로,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 원인 중 하나로 '원인'님께서 작성해주신 아래 댓글과 함께 거기에 대한 제 짧은 의견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절대 '원인'님 생각이 틀렸고 제 생각이 맞다는 내용이 아니며, 그냥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점을 먼저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원인'님께서 작성해주신 글 중 핵심 부분은 아래 부분입니다.

다부의 작전은 발틱해의 해상운송을 통해서 리보니아에 거점을 만들고 그 리보니아로부터 상트뻬쩨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공격하는 것인데, 나폴레옹이 다부의 건의를 무시하고 바로 육로직공을 선택한 것이 러시아 원정의 패배원인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 대해 몇몇 분이 영국 해군은 그냥 보고만 있었겠느냐는 댓글을 다셨고, 거기에 대해 다시 '원인'님께서 달아주신 댓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리보니아 해상운송은 복잡한 발틱해 연안을 따라서 항해하는 것이지 넓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가 아닙니다. 그걸 먼저 염두에 두셔야죠. 연안항해를 함으로서 영국해군의 능숙한 기동능력이 상대적으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한적으로만 움직이는 게 전제조건입니다. 

또한 이 지역은 30년 전쟁때부터 이미 무수한 스웨덴 해군력의 침공으로 그 방비에 이골이 난 지역이고 해안지역에는 요새와 해안포로 무장한 도시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죠. 슈트랄준트 같은 것은 단지 그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환경에서 최대한 해안에 바짝 붙어서 요새와 해안포의 엄호를 받으면서 연안항해를 할 경우에 독일,폴란드 지역에서는 영국해군이라도 그렇게 쉽게 공격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문제가 되는 발틱해 동쪽의 리보니아쪽은 경제력이 약하고 해안 방비가 잘 안 된 지역이므로 이 쪽이 약점이긴 한데, 그래서 제가 썼듯이 해안항해 + 해안육로행군을 병행해야 할 겁니다. 아마도 리투아니아 가까운 지역부터는 육상보급의 비중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지만 러시아 내륙을 가르지르는 무모한 경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안전하죠.


여기에 대해서 저는 일단 다부가 해상 운송에 의존하여 리보니아(Livonia), 즉 지금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지역을 공격하고 거기로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하자는 의견을 냈다는 이야기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건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원인님께서 이 글을 보신다면 그런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는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혹시 다부가 그런 의견을 개진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저는 그것이 바다 경험이 없는 뭍사람인 다부가 뭘 잘 몰라서 내놓은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다부의 수륙 병진 작전 계획안을 거부한 것은 이집트에 직접 상륙해보고 또 영국 침공 작전을 끝까지 추진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 육상부대가 해안가를 따라 행군하고, 그와 발맞추어 연안에 바짝 붙어 항해하는 수송선단으로부터 보급을 받으면 보급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겠는가 ?

바다는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기 때문에 바람의 방향이나 파도의 세기가 제멋대로 변할 수 있으므로, 수송선단이 육상부대와 연락을 유지하며 병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2. 육상부대와 항상 병진하지 않는다고 해도, 중간중간 적절한 지점에서 랑데부하여 보급품을 하역받으면 되지 않겠는가 ?

접안 시설이 없는 해변이나 작은 어촌 등에 보급품을 내려놓는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말먹이를 빼고도 20만 대군은 하루에 200톤씩의 보급품이 필요했는데, 한번에 1주일치 씩만 보급을 받는다고 해도 1400톤의 물자를 론치(launch) 보트 등의 대형 보트를 이용해 하역해야 합니다.  론치 보트에 3톤의 짐을 실을 수 있다고 가정해도, 1400톤을 내려놓으려면 배와 해안 사이를 467회 왕복을 해야 했습니다.  20척의 수송선단에서 40척의 론치 보트를 이용해서 하역을 한다고 해도, 보트 1척당 12회 왕복해야 합니다.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수송선 선창에 들어있던 3톤의 짐을 보트에 내려놓고, 그걸 다시 해안까지 300~400m를 노를 저어간 뒤 다시 모래톱 해안에 내려놓으려면 2시간은 걸렸을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24시간 쉬지 않고 일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20척이라는 꽤 큼직한 선단이 하루 종일 정지 상태로 해안 근처에 닻을 내리고 있다면 영국 해군이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두었겠습니까 ?  더 큰 문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1200km가 넘는 항로에 걸쳐서, 이 짓거리를 7번 이상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수십 척으로 구성된 대형 선단 대신, 개별적으로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수송선을 하루에 2~3척씩 끊임없이 내보내면 영국 해군의 봉쇄망을 뚫을 수 있지 않겠는가 ?

영국 해군에는 74문짜리 전열함(ship of the line)이나 28문짜리 프리깃(frigate)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룹(sloop)함, 브릭(brig)함, 커터(cutter)함 등 다수의 소형 함선도 잔뜩 거드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형 함선의 주임무가 적국의 연안을 감시하면서 그런 화물선을 나포하는 일이었습니다.  단치히 항구에 프랑스군이 백여 척의 수송선을 모은다는 소식, 그리고 프랑스군이 해안선 쪽으로 집결한다는 소식은 반드시 간첩 등을 통해 영국 해군에게 알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경우 영국 해군은 당연히 단치히 항구 근처에 그런 소형 함선으로 레이드 파티를 짜놓고 군침을 흘리며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4.  해안가에 기마 포병대를 다수 포진시켜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수송선을 지원하게 하면 영국 해군 소형함 정도는 저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

기마 포병대가 수송선을 따라 해안선을 이동해가며 호위해주는 것은 애초에 도로 사정 때문에 불가능했습니다.  기마 포병대가 원활히 이동할 도로가 해안선을 따라 존재한다면, 애초에 굳이 수송선을 띄울 필요없이 그냥 그 도로를 따라 보병대와 치중대를 이동시키면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시 포병 기술로는 수백 m 떨어진 바다에 떠있는 소형 함선을 명중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고, 명중시킨다고 해도 당시 기마 포병대가 사용한 8파운드 포 정도로는 소형 함선조차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국 해군은 뛰어난 속도로 적함에 근접하여 대포를 쏘았기 때문에 적의 군함이나 수송선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지 원거리 포격으로 적의 항복을 받아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5. 어쨌거나 해안선 가까이에 바짝 붙어서 항해한다면 영국 해군을 겁낼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

 

(1807년 이후 본의 아니게 덴마크 해군의 주력함이 된 대포를 장착한 대형 보트, 즉 포함(gun boat)입니다.)

 

 


연안 항해를 한다고 해서 영국 해군으로부터 안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소위 '포함 전쟁'(Gunboat War)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은 1807년의 제2차 코펜하겐 전투 이후, 덴마크와 '포함 전쟁'을 계속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련의 소규모 해전은 1807년 영국에게 당한 이후 대형 함정을 모두 잃은 덴마크 해군이 탑승 인원수 70~80명 정도의 대형 포함(gunboat)를 대량으로 만들어 영국 해군 소속의 브릭(brig)함이나 커터(cutter)함 등 소형 함정들과 싸웠기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전투 중 일부는 거포로 중무장된 해안 요새의 사정거리 안쪽에서 벌어졌는데, 그런 와중에도 영국 해군은 꽤 짭짤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가령 스완(Swan)이라는 이름의 커터함은 원래 정규 영국 해군함정이 아니라 민간에서 임대한, 소위 HMH(His Majesty's Hired) 무장 커터함(armed cutter)이었습니다.  이 배는 12문의 4파운드 포와 2문의 9파운드 캐로네이드 포(carronade, 사정거리가 짧은 대구경 저압포)를 갖춘 배수향 약 130톤 가량의 소형함이었습니다.  스완 호는 1808년 5월 24일 덴마크 보른헬름(Bornholm) 섬 인근에서 덴마크 해군의 130톤짜리 커터 사략선 하벳(Habet) 호와 대결을 벌었는데, 이때 스완 호는 하벳 호 뿐만 아니라 보른헬름 섬의 해안포들로부터도 맹렬한 사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영국 해군의 일방적 승리였습니다.  하벳 호가 폭발과 함께 침몰한 것에 비해, 스완 호는 부상자 한 명 내지 않았습니다.  1809년 8월 12일에는 영국 해군 브릭함인 멍키(HMS Monkey) 호와 대형 론치 보트가 덴마크 무장 소형선박들 3척이 수심이 얕은 해안에 얼쩡거리는 것을 것을 습격했습니다.  덴마크 무장 선박들은 아예 배를 모래 해안에 좌초시키며 육지로 탈출했고, 영국 해군은 3척을 모두 나포했습니다.  

 

 

(물론 반대로 영국 브릭함이 다수의 덴마크 포함들에게 다구리(?)를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물론 위의 그림은 덴마크 측에서 그린 것이지요.)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Gunboat_War
https://en.wikipedia.org/wiki/Hired_armed_cutter_Swan#The_second_Swan


나폴레옹의 기존 작전들의 특징을 동물에 비유하자면 딱 생각나는 것이 바로 문어입니다.  그는 휘하 군단들을 문어발처럼 넓게 펼친채 전진하다가, 적 주력부대의 존재가 그 촉수 중 하나에 걸려들면 정말 먹잇감을 건드린 문어처럼 다른 촉수들이 벼락같이 그 방향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니 뭔가 멋있어 보이지만, 이런 작전 형태에는 본질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분산된 채 전진하다가 강력한 적을 만날 경우 각개격파 당하기 딱 좋았던 것입니다.  이런 작전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넓게 펼쳐진 촉수들이 정말 재빨리 움츠러들 수 있어야 했습니다.  즉, 각 군단들의 기동력이 매우 좋아야 했지요.  원래 나폴레옹 군단들의 행군 속도는 유럽 최고 수준이었습니다만, 그런 그들에게도 이런 작전은 힘에 겨운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나폴레옹이 대승을 거둔 아우스테를리츠나 예나 등의 전투에서도 주요 부대들이 밤새 행군하여 전투 시작 직전에야 전투 현장에 간신히 도착하는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나폴레옹이 그런 약점을 무릅쓰면서 촉수를 펼친 문어처럼 휘하 병력을 넓게 전개한 채 전진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정찰기가 없는 시대에는 적 주력 부대의 위치를 포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았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식량이었습니다.  나폴레옹처럼 식량을 현지조달에 의존하는 것도 아무나 쉽게 흉내낼 수 있는 전법이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주로 활약했던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비교적 농업 생산성이 좋은 동네라서 식량이 풍부했다고 해도, 10만 대군이 한꺼번에 밀려들면 어지간한 동네는 식량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바로 전날 우디노의 군단이 한 동네의 빵과 밀가루를 탈탈 털어먹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빅토르의 군단이 또 밀어닥쳐서 먹을 것이 없나 뒤진다면, 그건 단순히 그 동네 주민들만의 분노로 끝나지 않고 빅토르 군단의 굶주림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각 부대가 거쳐가는 주요 마을과 도시로부터 비교적 손쉽게 식량을 얻을 수 있도록 군단별로 세심하게 진격로를 설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1812년 여름, 러시아 침공에 나선 나폴레옹의 군단들은 예전과는 달리 상당히 뭉쳐진 모습으로 같은 길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대부분의 주요 군단들은 나폴레옹과 함께 중앙군을 형성한 채 무리를 지어 진격했습니다.  그 외에는 단일 군단으로는 가장 컸던 다부(Davout)의 제1 군단 약 7만2천과,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Jérôme)이 이끈 베스트팔렌, 폴란드, 작센 출신의 병사들로 이루어진 4개 보조 군단 총 7만9천이 서로 다른 길로 남쪽 민스크(Minsk)를 향했습니다.  그나마 이들도 결국은 스몰렌스크(Smolensk)부터는 나폴레옹의 중앙군과 합류하게 됩니다.  그 외에는 주로 프로이센 및 바이에른 병사들로 이루어진 막도날(Macdonald)의 제10 군단 3만2천이 좌측 날개를 맡았고,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3만 정도가 우측 날개를 맡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전과 달리 이렇게 밀집된 형태로 행군하게 된 것은 크게 2가지 이유였습니다.  하나는 상대해야 할 적의 주력이 바클레이 드 톨리(Barclay de Tolly)의 제1 서부군과 바그라티온(Bagration)의 제2 서부군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이미 나폴레옹이 파악하고 있던 대로, 어차피 러시아 평원에서는 아무 식량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에 따라 나폴레옹은 병사들이 먹을 식량을 모두 독일과 폴란드에서 마차로 실어올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정말 유명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 궤멸 과정을 시각화시킨 미니아르의 도표 원본입니다.  이 도표는 1896년에 처음 나온 것이지요.  미니아르는 프랑스의 토목 기사로서 현대적인 인포그래픽스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기에 쓰인 프랑스어를 번역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812~1813년의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군 병력의 연속적인 손실에 대한 산술적 지도
1869년 11월 20일, 파리, 교량 및 도로 감사관(은퇴)인 M. 미니아르(M. Miniard)가 작성.

병력 수는 색칠된 구역선의 폭, 즉 10만명당 1mm로 표시했으며, 구역선 가로질러서도 명기했다.  붉은 색은 러시아에 진입한 병력 수를 뜻하고 검은 색은 빠져나온 수를 뜻한다.  이 지도를 그리는데 사용된 정보는 M. M. Thiers, de Ségur, de Fezensac, de Chambray 및 10월 28일부터 프랑스군 약제사로 일한 야콥(Jacob)의 미출간 일지 등에서 얻었다.   원정군의 궤멸 과정을 눈으로 좀더 잘 파악하기 위해, 제롬(Jérôme) 대공과 다부(Davout) 원수의 병력은 실제로는 민스크(Minsk)와 모길레프(Mogilev)에서 갈라졌다가 오르샤(Orsha)와 비텝스크(Vitebsk) 인근에서 재합류했지만, 항상 주력 부대와 함께 행군한 것으로 가정했다.)

 

(위 지도는 미니아르의 도표와 실제 지도를 합성한 것입니다.  미니아르의 도표도 실제 나폴레옹 원정군의 위도 경도를 반영하여 만든 것이므로 잘 들어맞는 편입니다.) 

 




그러나 이미 전편에서 설명드렸다시피, 나폴레옹의 수송 계획은 기술의 한계와 열악한 도로 사정 때문에 처음부터 빗나갈 운명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수송 엔진은 말이었으므로 그 연료는 사료였는데, 나폴레옹은 도저히 계산이 나오지 않는 말 사료 문제에 대해서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도 러시아의 겨울이 무섭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겨울이 오기 전에 여유있게 작전을 하려면 봄부터 러시아 침공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6월 하순까지 기다렸던 것은 사람이 먹을 곡물 뿐만 아니라 말이 뜯어먹을 풀이 무성하게 자라기를 기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콩이나 곡물도 아니고 그냥 풀이라면 말은 깜짝 놀랄 만큼의 양을 뜯어먹어야 했습니다.  프랑스군 부대가 지나간 자리는 정말 메뚜기떼가 지나간 흔적처럼, 사람이 먹을 것은 물론 말이 먹을 풀도 금세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던 후속 프랑스군의 사람과 말은 정말 그냥 굶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나폴레옹이 예전처럼 병력의 진격로를 좀더 넓게 분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쟎아도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치중부대에 의한 보급이 어려웠는데, 그렇게 병력을 분산시키면 보급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 뻔했습니다.  게다가 집결된 적의 주력 야전군을 바싹 추격하는 마당에 병력을 분산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실패했던 러시아 정복을 너무나 간단히 해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투가 이끈 몽골군이었지요.  믿을 만한 상세한 기록은 부족하지만 당시 몽골군은 대략 4~5만의 순수 기병으로 러시아 전역을 평정했습니다.  이들은 나폴레옹처럼 마차를 주요 운송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고, 식량은 함께 몰고다니는 가축에 의존했습니다.  원정군 전원이 유목민 출신 기병이다보니 넓은 지역에 걸쳐 가축들과 말에게 풀을 뜯게 하면서 장기간 작전을 펼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건 나폴레옹이 흉내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흉내낼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했습니다.  바로 소수 정예로 러시아 원정길에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몽골군이 무서운 이유는 그 활이 강력함보다도 기동력과 보급에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군대가 저런 활동량을 따라할 수 있겠습니까 ?)

 



만약 나폴레옹이 병력의 수를 확 줄여서 러시아 침공을 개시했다면 어땠을까요 ?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는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이후 유럽 최강의 무적 군대로 이름을 날렸지만 어쩔 수 없이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조금씩 질적으로 하향되어갔습니다.  특히 1807년 2월 아일라우 전투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낸 이후로는 그 질적 하향세가 매우 뚜렸했습니다.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는 패배한 오스트리아군 못지 않게 프랑스군의 피해도 엄청나게 컸는데 이것은 오스트리아군의 질적 향상 외에 프랑스군의 질적 저하도 원인이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받고 휘하 병력의 대부분이 어린 신병으로 이루어져 있던 부대 전체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자 분개한 마세나가 '저 풋내기들에게 브랜디를 잔뜩 마시게 하고 군기를 보여줘라' 라고 외친 것은 유명한 일입니다.  겁에 질렸던 신병들이 마세나의 그런 지휘에 결국 혼란을 수습하고 오스트리아군에게 반격을 가해 결국 승리한 것도 정말 대단한 일이었지요.  

이제 40만이 넘는 대군이 된 러시아 침공군은 과연 어떤 병사들로 이루어졌을까요 ?  상당수는 다년간의 경험을 쌓은 노련한 병사들이었지만, 이렇게 많은 대군을 끌어모으다보니 아무래도 신병들의 비율도 매우 높았습니다.  게다가 프랑스 내의 인적 자원도 많이 고갈되어, 키나 건강 상태, 나이 등에서 1805년이라면 탈락시켰을 젊은이들까지도 마구 입대시켜 충당한 신병들에 대해 많은 지휘관들이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무엇보다 이 40만 대군 중에는 많은 수의 외국인들이 섞여 있었는데, 이 중에는 폴란드인처럼 나폴레옹에게 충성하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프로이센인들처럼 죽지 못해 끌려나온 병사들도 많았습니다.  같은 이탈리아인들 중에서도 북부인 이탈리아 왕국 병사들은 상당히 우수한 자원으로 평가받았지만 뮈라의 신민들인 나폴리인들은 프랑스 지휘관들으로부터 '애초에 군인으로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라는 악평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먹을 것과 마실 것만 축낼 뿐 실제 전투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병력은 제외시키고 알짜배기 정예병력만 투입했다면 보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안될 일이었습니다.  일단 바투가 상대해야 했던 러시아는 그야말로 동구의 후진국으로서 인구 8~9백만에 무장 병력도 5만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알고보면 바투도 소수 정예로 다수의 러시아군을 무찌른 것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의 러시아는 인구 4천만이 넘고 20만이 넘는 야전군을 거느린 강대국이었습니다.  바투의 몽골군은 전원이 경기병이라는 특색이라도 있었지만,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는 남들 다 쓰는 머스켓 소총과 그리보발식 야포를 사용하는 평범한 군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총검의 숫자가 승패를 판가름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과거에 거두었던 승리는 거의 언제나 전투 현장에 더 많은 병력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 기기묘묘한 전법을 사용하는 소수 정예로 얻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소수 정예에 의한 결전은 나폴레옹의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폴레옹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러시아의 기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애초에 러시아와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처럼 광활한 영토를 가진 나라는 정복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그런 황량한 나라를 정복해봐야 딱히 얻을 것도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로부터 원하는 것은 딱 하나, 대륙 봉쇄령에 다시 참여하여 영국 상품에 대해 문을 닫아걸라는 것이었지요.  그런 목적을 위해서는 굳이 모스크바를 점령할 필요도 없었고 러시아 야전군과 피투성이 살육전을 벌여 쌍방간에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낼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냥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에게 겁을 먹고 협상을 하도록 강요만 하면 되는 것이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러시아가 상황을 오판하지 않도록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을 한꺼번에 동원하여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훈련이 얼마나 되어있건 충성심이 있건 없건 동원가능한 병력은 다 동원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4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한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그런 대군을 먹여살리기에는 자신의 보급망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원정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개전 이후 3주 안에 러시아군을 크게 꺾어놓고 평화 협상을 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원정군에게는 24일치의 식량을 지급하여 3일치는 병사들이 몸에 지니고 나머지 21일치는 마차에 싣고 가도록 하되, 네만 강을 건너기 전에는 절대 그 식량을 먹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와 러시아인들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병참 준비에는 그 중요성에 비해 너무나 완전히 배제되어 있던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됩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pdfs.semanticscholar.org/1d6e/96fd09126a40dca06ef01e8c9b13785e8379.pdf
https://warandsecurity.com/2013/02/11/why-napoleons-1812-russian-campaign-failed/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invasion_of_Russia
https://www.stolenhistory.org/threads/1812-french-invasion-of-russia-vs-logistics.1167/
https://www.bbc.co.uk/news/magazine-16929522
http://www.historyofwar.org/Maps/maps_russia_1812_to_moscow.html
https://www.reddit.com/r/dataisbeautiful/comments/26jy3t/a_rework_of_minards_map_the_first_data/
https://www.awesomestories.com/asset/view/A-Map-of-the-Great-Retreat-from-Russia//1
http://www.historyhome.co.uk/c-eight/france/moscow.htm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Joseph_Minard
https://patrimoine.enpc.fr/document/ENPC01_Fol_10975?image=54#bibnum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Paul Lindsay Dawson


대체 이렇게 병참을 막대한 규모로 세심하게 준비했는데도 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보급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일까요 ?  이것도 흔히 말하는 가짜 뉴스 때문에 나폴레옹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것일까요 ?  일단 지난 편에서 보셨다시피 나폴레옹이 여태까지 해오던 것처럼 보급을 무시하다가 큰 코 다쳤다는 이야기는 억울한 누명이 맞습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준비에 있어서 무엇보다 보급에 정말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다부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필요한 보급품을 모두 다 가져가야 한다."

 

그렇다면 혹시 보급품 쌓아놓을 생각만 했지 운송 수단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한 것이 아니냐고요 ?  여러분도 생각하시는 것을 나폴레옹이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  그는 의붓아들인 외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습니다.

 

"폴란드 전쟁(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제2차 폴란드 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은 오스트리아 전쟁과는 완전히 다르다.  운송 수단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없어진다."

 

그런데 왜 망했냐고요 ?  결국은 기술의 문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단치히에 쌓아놓았다는 식량이 말을 위한 사료를 제외하고도 40만 대군이 50일간 먹을 분량이라고 했지요.  즉 2천만 명분의 식량을 비축해놓은 셈이었는데, 이게 과연 어느 정도의 분량이었을까요 ?  원래 원정 작전에 나선 병사들에게 제대로 보급이 안되는 것은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보급이 잘 된다는 영국군에게조차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1인분에 대해서 규정은 당연히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경우 원래 하루에 건빵 550g, 쌀 30g (또는 건조 채소 60g 여기서 건조 채소란 주로 콩류), 염장 고기 200g, 그리고 포도주 1/4리터 (또는 브랜디 1/6 리터)를 지급받게 되어있었습니다.  요즘 식당 기준으로 삼겹살 1인분이 200g 정도지만 실제로는 어느 누구의 배도 채우지 못해서 결국 1인분 더 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결코 많은 양은 아닙니다.  요즘 식빵 1봉지가 대략 450g이니, 바싹 말린 건빵 550g이면 그걸로 배는 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포도주까지 생각하면 병사 한명이 먹이기 위해서는 대략 하루 1kg의 물자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즉, 단치히 항구에만 2만 톤의 건빵과 밀가루, 염장 고기 및 포도주가 보관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건 미국 남북전쟁 병사들의 모습입니다만, 건빵, 그러니까 비스킷(biscuit)의 모양새나 맛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비스킷을 먹으며 웃고 있는 병사들의 얼굴 표정이 비현실적이네요.  그림 출처는 https://www.artofmanliness.com/articles/how-to-make-civil-war-era-hardtack/ 입니다.  여기 보면 비스킷을 어떻게 굽는지 레시피가 나와있습니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수송하느냐인데, 러시아에 아우토반 같은 고속도로가 포장되어 있고 강력한 디젤 엔진을 갖춘 트럭들이 즐비하다면 별 문제가 안 될 수 있었습니다만, 당연히 당시엔 그러지 못했습니다.  실은 트럭과 고속도로가 있다고 해도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냥 단순 계산을 하면 2만 톤의 식량을 한꺼번에 수송하기 위해서는 현대자동차의 3.5톤 마이티 트럭이 5,714대 필요합니다.  이 트럭의 길이는 대략 6.7m인데 앞뒤 차간 거리를 1.3m씩 유지한 채로 움직인다고 해도 이 트럭들이 주욱 한 줄로 주욱 늘어서면 맨 앞차부터 맨 뒷차까지의 거리는 거의 46km에 달합니다.  당연히 이 트럭들을 위한 디젤 연료 보급도 생각해야 하고 또 당연히 있게 마련인 고장에 대비해서 수리 차량도 끌고 가야 합니다.  현대 기술로도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더군다나 아스팔트 고속도로가 아니라 진흙구덩이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군대에게는 정말 현대 3.5톤 트럭이 있다고 해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현대 마이티 3.5톤 트럭입니다.  디젤 엔진을 장착했습니다.)

 



기술이 없다면 물량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지난 편에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대규모의 치중대를 편성하여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총 20개 치중대대의 7,848대 마차(문헌에 따라서는 26개 대대 약 9,300대)를 편성했습니다.  당시 4마리의 말이 끄는 대형 마차의 경우 대략 1.36톤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이 7~8천대의 마차가 모두 대형은 아니었지만 그냥 모두 4두 대형 마차라고 가정하고, 또 준비된 마차도 7,848대가 아니라 9,300대라고 가정하고 계산하면 이 치중대가 실어나를 수 있는 무게는 총 12,648톤에 이릅니다.  40만 대군이 50일 먹을 식량의 최소치인 2만톤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대략 필요량의 60%에 달하는 막대한 수송량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러시아가 척박한 땅이라고 해도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틀림없이 식량을 일부라도 현지 조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6월 24일에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 침공을 시작한 것에는 날씨에 대한 고려도 있었지만 러시아의 곡물 추수기가 대략 8월~10월이라는 것도 고려된 것입니다.  이 정도면 여전히 프랑스군 병사들은 배가 많이 고팠겠지만 그래도 굶주림으로 궤멸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산에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연료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현대 마이티 3.5톤 트럭의 경우 연료 탱크에 150리터의 경유가 들어가고, 연비는 (적재량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빈 차인 경우 대략 7km/리터이니, 무거운 짐을 실은데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조건이면 대략 4km/리터로 잡겠습니다.  그러니 프랑스군이 쾌속으로 하루 30km씩 진군한다고 하면 하루 8리터의 연료를 써야 합니다.  연료 탱크에 들어있는 연료만으로도 18일간 작전이 가능하고, 나폴레옹이 진격을 시작한지 83일 만에 모스크바에 입성했으니, 5번의 연료 보급를 더 받으면 됩니다. 이 5번의 보급을 위해서는 약 3560톤의 디젤유를 수송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트럭이 1,017대 더 필요합니다.  전체 트럭 5714대의 18%에 해당하는 오버헤드입니다.  생각보다 많기는 해도, 감당이 안 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디젤을 먹는 트럭 대신 풀과 곡물을 먹는 말의 경우로 계산해보면, 화석 연료의 강력함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말은 하루에 대략 9kg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9,300대의 마차에 딱 4마리씩 37,200마리의 말만 필요하다고 가정해보시지요.  (현실적으로는 예비마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의 말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의 치중대에는 4두 마차 외에도 2두 마차가 꽤 있어서 전체 마차 수는 9,336대, 말은 약 32,500마리가 있었고 예비마가 6천마리 더 있었습니다.)  이 말들은 하루에 335톤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83일 동안이라고 생각하면 27,788톤의 사료입니다.  잠깐만요.  이 마차들이 실어나를 보급품의 총량이 얼마라고 했지요 ?  예, 맞습니다.  12,648톤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들은 자신이 실어날라야 하는 무게의 2배가 훨씬 넘는 무게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이건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는 과제입니다.  게다가 기억하셔야 할 것이, 저 12,648톤의 보급품은 병사들이 필요로 하는 정량의 60%에 불과한 양입니다.  물론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식량이라는 짐은 사람이나 말이나 계속 먹어치우는 것이므로 여행을 가면 갈 수록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현대적인 디젤 엔진으로는 비교적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를 사료를 먹는 말로 해결하려 할 경우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인용했던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 Sharpe 시리즈 중의 한 장면을 읽어보시면 더욱 공감이 가실 겁니다.

 

Sharpe's Honour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3년 스페인) ---------------

하지만 이 뜻하지 않게 사령부에서 도착한 텐트는 쓸데없는 문제거리를 만들어냈다.  대대 전체의 텐트를 움직이려면 노새가 5마리 필요했다.  노새 한마리는 200 파운드의 짐을 싣고, 거기에 추가로 자기가 먹을 6일치 사료 30 파운드를 더 실을 수 있었다.  작년 여름 작전처럼 행군을 한다면 사료가 부족해지니까 추가 사료를 싣기 위해 추가의 노새가 필요했는데, 그 추가된 노새도 먹어야 하니까 그 추가된 노새가 먹을 사료를 실어나를 노새가 또 필요했다.  샤프가 6주간의 행군을 한다면 900 파운드의 추가 사료가 필요했는데, 이 사료를 실은 노새만도 4~5 마리가 필요했고, 이 노새들이 6주간 먹을 사료만도 700 파운드가 필요했으므로 추가로 4마리의 노새가 필요했다.  이 추가된 4마리 노새도 또 사료를 먹어야 했으므로, 이 웃기지만 정확한 계산을 끝마치고나니 5마리의 텐트 수송용 노새를 6주간 먹여살리기 위해 추가로 14마리의 노새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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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나고 말 났지 말 나고 사람 났냐 ?"라며 말 사료는 대폭 줄이고 사람이 먹을 식량을 더 가져가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들 하시겠지만, 그것도 정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강한 짐승입니다.  인간 병사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해도 쉽게 죽지 않고, 원래 걸어야 할 거리의 2배를 무리해서 행군해도 잘 버팁니다.  그러나 말은 먹이 부족과 과로에 견디지 못하고 픽픽 죽어 넘어집니다.  보통 전쟁에 나서는 인간은 지든 이기든 80% 이상이 살아 돌아오지만, 말은 60% 정도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인간과는 달리 말은 그냥 들판에 널린 풀을 뜯어먹으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겨울을 피해 훨씬 이른 시기인 봄에 작전을 시작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풀이 잘 자란 여름에 작전을 해야 말의 사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지요.  또 모든 기병대원에게는 말 먹이 풀을 벨 수 있도록 낫이 지급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은 원래 풀을 뜯어먹는 짐승이니 풀밭에 풀어놓으면 된다는 생각은 말이 하루종일 정말 풀만 뜯을 때나 통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강제로 걷게 하다가 길가의 풀을 약간 뜯게 하는 것은 사람으로 따지면 하루 종일 중노동 시킨 뒤에 얇은 식빵 2조각 던져주고 '사람은 원래 빵을 먹는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일입니다.  그나마 수만 마리의 말이 통과하는 길이라면, 그 길가의 풀은 순식간에 씨가 마르게 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네만 강을 건넌지 1달 만에 별다른 큰 전투도 없었는데 나폴레옹은 1만 마리의 말을 잃었습니다.  

 

(프랑스 포병대 소속의 마부 병사와 말입니다.  병사도 불쌍하지만 말은 더 불쌍했습니다.)

 



게다가 그나마 도로 사정이 괜찮은 편이라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도 치중부대는 언제나 진흙탕이나 다름 없는 도로 사정 때문에 보병 부대를 따라잡는데 항상 애를 먹었습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그리고 러시아로 이어지는 광활한 동부 유럽은 사정이 훨씬 나빴습니다.  역사가 리엔(Richard K. Riehn)에 따르면 이런 수준이었답니다.

"24일의 폭풍우는 폭우로 바뀌었다.  덕분에 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리투아니아의 통행로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진창으로 변해버렸다.  짐마차는 진창 속에 너무 깊게 빠져 바퀴 축이 땅에 닿을 정도였고, 말들은 지쳐 쓰러졌으며 병사들은 군화를 잃었다.  이렇게 퍼져버린 짐마차들로 인해 길이 막히자 병사들은 그 둘레를 빙 돌아가야 했고 보급품 마차와 포병대는 아예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날이 개어 해가 나왔는데, 진흙구덩이 속의 바퀴자국들은 햇빛에 바싹 마르자 아주 단단한 계곡으로 변해버렸다.  이런 울퉁불퉁한 도로 때문에 말들의 다리가 부러졌고 짐마차들의 바퀴가 깨졌다."

 

(영어로는 이런 진창 길에 난 바퀴 자국은 rut이라고 하던데, 한자어에 나오는 '전철을 밟는다'라는 단어의 전철(前轍)이 바로 앞서 간 마차의 바퀴 자국을 뜻하는 것이지요.  왠지 130년 뒤에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았던 어떤 오스트리아 화가 지망생 생각이 나는 한자어네요.)

 

 

이런 진흙탕 도로 위에 1.36톤의 짐을 싣는 4두 마차를 끌고 가면 결과는 뻔했습니다.  나폴레옹도 좀더 가벼운 2두 마차를 더 많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두 마차의 수송량은 4두 마차의 절반이 아니라 그보다 크게 더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두당 수송량이 떨어지면 그렇지않아도 답이 안 나오는 사료 문제는 더욱 답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나폴레옹도 이게 답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2두 마차 대신 4두 마차 위주로 마차를 준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의 말과 마차, 사료를 다 끌어모았다고 하더라도 치중부대가 나폴레옹의 배고픈 보병부대에게 건빵을 제때 전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나폴레옹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pdfs.semanticscholar.org/1d6e/96fd09126a40dca06ef01e8c9b13785e8379.pdf
https://warandsecurity.com/2013/02/11/why-napoleons-1812-russian-campaign-failed/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invasion_of_Russia
https://www.stolenhistory.org/threads/1812-french-invasion-of-russia-vs-logistics.1167/
https://www.bbc.co.uk/news/magazine-16929522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Paul Lindsay Dawson

 


1810년 마지막 날에 영국 상품의 입항을 허용하고 반대로 프랑스 상품에 대한 고율의 관세를 부가하는 짜르 알렉산드르의 칙령(ukaz)이 내려지자, 이제 전쟁은 거의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유럽 전체가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폴란드 문제로 1810년 중반부터 아웅다웅하고 있던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는 말로만 툭탁거리지 않았고, 서로 병력을 바르샤바 공국 접경 지역으로 증강 배치하면서 상호간의 긴장감을 키워나갔습니다.  나폴레옹은 1806년 전쟁 때 점령한 뒤 계속 움켜쥐고 있던 슈테틴(Stettin)과 단치히(Danzig) 등 프로이센의 주요 요새들에 병력을 추가 배치하고, 더 나아가 프랑스 내의 병력들도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등 동부 지대로 조금씩 이동시켰습니다.  

 

(오늘날 폴란드 영토가 된 슈테틴, 폴란드어로는 슈체친입니다.  오데르 강에 접하고 있는 도시로서, 베를린으로부터는 140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도시이며 원래 프로이센 영토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에게 동부 영토를 빼앗긴 폴란드에게 보상 형식으로 주어졌지요.)

 



1811년에 접어들자 본격적인 전쟁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1811년 4월에는 긴 꼬리가 달린 혜성이 관측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혜성은 큰 전쟁과 기아, 전염병 등 좋지 않은 대사건의 전조로 받아들여졌는데, 모스크바부터 마르세이유까지 유럽 전역에서 이 불길한 혜성을 보면서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알렉산드르 본인도 이 혜성에 대해 '어디까지나 과학에 대한 흥미 때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미국 대사와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혜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이, 나폴레옹은 정말 바빴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러시아와의 전쟁이 기존의 전쟁과는 규모와 성격면에서 완전히 다를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만큼 철저한 준비를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이 남긴 편지를 보면, 나폴레옹은 연대 번호만 들어도 그 부대의 지휘관이 누구고 어디에 배치되어있으며 편성된 전력이 어떤 수준인지 또 그 과거 전적이 어땠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이런 세세한 점까지 신경을 쓰면서 새로 병력을 뽑고 새 부대를 편성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로 무척 바빴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을 위해 준비한 병력은 대략 68만, 그 중에서 실제로 네만(Nieman) 강을 건너 러시아로 동진할 인원은 (학자들에 따라 이견이 분분합니다만) 대략 40만에 달헸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런 준비를 하면서 러시아군을 무찌를 신무기나 새로운 전술 등을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신기할 정도로 새로운 군사 기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신 그가 이번 전쟁 준비에 있어서 가장 관심을 둔 것은 바로 병참이었습니다.  그는 1807년 삭막한 폴란드 땅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면서 동부 유럽은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독일이나 이탈리아와는 확연하게 다른 곳이라서 기존처럼 현지 조달에 의존해서 싸우다가는 굶어죽기 딱 좋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역대급의 보급망을 준비했습니다.

먼저, 나폴레옹은 1811년부터 1812년까지 폴란드를 가로지르는 비스툴라(Vistula, 폴란드어로는 Wisła 비스와) 강을 따라 대규모의 보급창을 건설했습니다.   비스툴라 강은 바르샤바는 물론 모들린(Modlin)과 토른(Thorn) 등의 주요 요새 및 도시를 거쳐 항구 도시 단치히(Danzig, 현재의 그단스크 Gdansk)에서 발트 해로 흘러가는 폴란드의 대표적 수로였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영토와 직접 맞닿아 있는 라인 강과 이 비스툴라 강 사이에 총 5개의 수송로를 설정하고 프랑스와 독일 지역에서 긁어모은 물자를 실어날랐습니다.  

 

(유럽 대륙의 주요 하천입니다.  템즈 강 같은 것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지만, 비스툴라 강은 당당히 표시될 정도로 꽤 중요한 강입니다.)

 

(브레슬라우, 즉 보르츠와프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오데르 강에 접한 도시입니다.)

 

 

 

그 결과, 1812년 1월까지 나폴레옹은 단치히에만 40만 명의 병사들과 5만 마리의 말이 50일 간 먹을 식량과 사료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40만 명 x 50일 = 2000만 명분의 식량을 쌓아놓은 것이지요.  이 외에도 오데르(Oder) 강에 접한 프로이센의 도시 퀴스트린(Küstrin, 폴란드어로는 Kostrzyn 코스트신)과 슈테틴(Stettin, 폴란드어로는 Szczecin 슈체친)에도 별도로 수백만 명분의 식량을 축적했습니다.  역시 오데르 강에 접한 프로이센 도시 브레슬라우(Breslau, 폴란드어로는 Wrocław 브로츠와프)와 비스툴라 강에 면한 프오츠크(Płock) 및 비소그루트(Wyszogród) 등에는 거대한 곡물 창고와 제분소가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생산된 밀가루는 비스툴라 강을 통해 배 편으로 토른에 보내져 하루에 6만개씩의 큼직한 야전용 건빵이 구워졌습니다.   그 외에도 각 부대의 뒤를 따라 가도록 걸어다니는 푸줏간인 가축떼를 5만마리나 모아두었습니다.  

 

(베를린과 슈테틴, 즉 슈체친과의 거리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원래 슈테틴은 독일 영토일 때 베를린의 외항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아울러 비스툴라 강변을 따라 늘어선 폴란드의 주요 도시들과의 거리를 봐두시기 바랍니다.)

 

 

(나폴레옹의 주요 물자 수송로 역할을 한 비스툴라 강, 즉 비스와 강입니다.  폴란드의 주요 도시들은 이 강을 따라 늘어서 있습니다.) 

 



이렇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잔뜩 쌓아만 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아니었습니다.  이것들을 쾌속으로 진군하는 부대들의 속도에 맞춰 러시아 내륙으로 수송을 해야 했지요.  나폴레옹은 이를 위해 치중대대(train battalion) 20개를 편성했습니다.  여기에는 7,848대의 마차가 배속되어 배고픈 병사들을 먹일 식량을 실어나르도록 했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의 규모인가하면, 스페인 전역을 위해 나폴레옹이 조직한 치중대대의 규모를 보시면 됩니다.  1810년 10월, 나폴레옹은 총 12개 치중대대를 편성했는데, 여기에 포함된 마차의 수가 1,700대 정도였습니다.  그 중에서 스페인 방면군에는 5개 대대를, 포르투갈 방면군에는 2개 대대를, 그리고 프랑스 국내에서 5개 대대가 배치되었습니다.  1810년 당시에는 스페인에 배치된 프랑스군의 수가 20만을 훌쩍 넘었는데, 거기에 고작 5개 대대 약 710대의 마차가 할당된 것입니다.  그런데 40만의 러시아 방면군을 위해 10배가 넘는 수의 마차를 준비한 것을 보면, 확실히 나폴레옹은 여태까지와는 다른 각오를 가지고 수송에도 매우 신경을 쓴 것입니다.  

 

 

(한번도 하일라이트를 받지 못한 부대가 바로 치중대이지요.  하지만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것은 보병과 포병, 기병일지 몰라도, 전쟁을 이기는 것은 바로 이 치중대였습니다.)

 



나폴레옹이 평소에 등한시하던 식량 문제에도 이렇게 신경을 썼으니 탄약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더욱 철저한 준비가 이루어졌습니다.  현지 조달을 중시하던 나폴레옹조차도 무기와 탄약은 항상 본국으로부터의 수송에 의존했었거든요.  바르샤바에는 큼직한 무기고가 건설되어 각종 탄약과 무기가 집적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주요 식량 집적소인 단치히, 슈테틴, 퀴스트린 등에는 식량 뿐만 아니라 각종 야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제3차 대불동맹전쟁 때 동원된 나폴레옹의 7개 군단이 보유했던 대포의 수는 총 300문을 넘지 않았고,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당일날은 훨씬 더 적은 수의 대포가 동원되었습니다.  러시아 원정 이전까지는 유럽 최대의 전투였다는 바그람 전투에 동원된 프랑스군의 전체 대포 수는 488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센의 마그데부르크(Madeburg)에 집결시킨 탄약과 포병대의 규모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이 곳의 무기고에는 135톤의 화약과 함꼐 200만발의 머스켓 탄약포가 축적되었을 뿐만 아니라, 야포 462문과 공성용 중포 100문이 집결되어 있었습니다.  슈테틴에는 263문의 야포, 100만발의 머스켓 탄약포, 90톤의 화약을, 퀴스트린에는 108문의 야포와 100만발의 탄약포를, 그리고 글로가우(Glogau)에도 108문의 야포와 100만발의 탄약포, 45톤의 화약을 축적해놓았습니다.  1812년 5월, 러시아를 향해 출발하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는 806문의 야포와 761,801발의 포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야포 1문당 거의 1,000발에 가까운 포탄을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사상 최대이기도 하고 또 유례없이 격렬한 포병전이었던 바그람 전투 40시간 동안 프랑스군 포병대의 488문은 약 10만발을 발사했는데,  이는 1문당 200발 정도를 쏘아댄 것이었습니다.  이런 격렬하고 대규모였던 전투는 나폴레옹 인생 전체에서도 흔치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정말 충분한 양의 탄약을 준비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막대한 준비를 했지만, 아시다시피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결국 병참 문제로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pdfs.semanticscholar.org/1d6e/96fd09126a40dca06ef01e8c9b13785e8379.pdf
https://warandsecurity.com/2013/02/11/why-napoleons-1812-russian-campaign-failed/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invasion_of_Russia
https://www.stolenhistory.org/threads/1812-french-invasion-of-russia-vs-logistics.1167/
https://www.bbc.co.uk/news/magazine-16929522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Paul Lindsay Dawson


어떻게 보면 온 유럽이 휩쓸리게 되는 1812년 러시아 침공이라는 난리통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를 이간질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벌어지게 되자 오스트리아는 한발짝 물러나는 얌체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당연했는데,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러시아를 두들겨 패는 동안 떨어지는 콩고물, 즉 발칸 반도 분할에서 좀더 많은 땅을 땅을 주워먹으려 했을 뿐 뭔가 숭고하고 원대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것은 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주사위 놀음이라서, 제아무리 나폴레옹이라고 해도 프랑스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체는 애초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측에 가담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의 사위라는 인척 관계로 맺어진 관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초에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를 이간질한 실제 이유, 즉 영토 문제도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좋든싫든 프랑스측에 가담하도록 압박했습니다.  당장 흑해로 흘러가는 도나우강 하류 지역, 그러니까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 중에서 오스트리아가 자기 것이라고 침을 발라놓았던 몰도바-루마니아 방면으로 러시아군이 진격해오자 오스트리아의 입장은 무척 초조해졌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을 위해 편성하는 야전군의 규모가 무려 40만이 넘는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자, 그 정도라면 프랑스군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보고 오스트리아도 1812년 3월 나폴레옹 진영에 합류합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끝까지 얌체처럼 그야말로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정도인 3만의 병력을 제공하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했습니다.  

스웨덴도 끝까지 어느 쪽에 붙을까 저울질을 하며 눈치를 보던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어찌 보면 북구의 스웨덴은 프랑스의 진격로와는 발트해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서 지리상으로 크게 중요하지 않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꽤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당장 러시아령 핀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언제든지 당장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나라였거든요.  게다가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해협, 즉 외레순(Öresund, 영어로는 The Sound) 해협이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다는 점도 중요했습니다.  이미 프랑스 측에 붙은 덴마크의 헬싱고르(Helsingor) 요새와 스웨덴의 헬싱보리(Helsingborg) 요새 사이의 해협은 특히 좁았는데, 거리가 10km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해안포로 사용되던 36파운드 대포의 최대 사거리가 3.7km 정도였고, 유효 사거리는 고작 600~700m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두 요새 사이를 통과하는 영국 수송선이나 전열함이 크게 손상을 입을 염려는 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당시 범선들의 열악한 항행 능력을 생각하면, 특히 스웨덴 군함들이 이 해협을 가로막기라도 한다면 영국 선박들로서는 상당히 부담을 느낄 만한 일이었습니다.  

 

(덴마크 측의 헬싱보르그와 스웨덴 측의 헬싱보리 위치입니다.   저 해협만 틀어막으면 발트해는 사실상 호수가 됩니다.  코펜하겐이 위치한 덴마크의 큰 섬인 젤란트의 반대쪽 해협도 물론 항행은 가능합니다만, 그 쪽은 얕은 바다 등이 많아서 훨씬 항행에 불리하다고 하네요.)

 

(이건 함포로 사용되는 36 파운더 포이긴 합니다만, 해안 요새에서도 주로 이 36 파운드 포를 해안포로 썼습니다.  해안 요새에서는 좀 높은 위치인 성벽 위에 이런 대포를 놓았기 때문에 해수면에 위치한 전열함보다는 조금 더 멀리 포탄을 날려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1812년을 앞두고 스웨덴의 인기는 상종가를 치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노르웨이를 주겠다며 스웨덴을 유혹했고, 나폴레옹은 핀란드를 주겠다며 호객행위를 했습니다.  우스운 점은 이 모든 땅들이 결국 남의 땅이라는 점이었지요.  당시 노르웨이는 프랑스의 굳건한 동맹국인 덴마크의 영토였고, 핀란드는 바로 몇 년 전에 알렉산드르가 스웨덴으로부터 빼앗은 영토였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르나 나폴레옹이나 자기 것은 내주기 싫고 상대편의 땅을 내주겠다는 공수표를 남발한 셈이었으므로, 스웨덴은 국제 외교전에서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무척 냉철하게 판단을 해야 했습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스웨덴은 딱 적임자를 실권자로 두는 행운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스웨덴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국왕 카알 13세(Karl XIII)도 아니요 뿌리 깊은 스웨덴의 귀족 세력 연합체인 의회도 아닌, 바로 나폴레옹의 껄끄러운 친척이자 전직 프랑스군 원수, 현직 스웨덴 왕세자였던 베르나도트(Bernadotte)였습니다.  

 

 

(오늘날 스웨덴 왕가의 시조이신 베르나도트, 아니 카알 15세 전하이십니다.)

 



애초에 스웨덴이 프랑스 장군이자 나폴레옹의 친척인 베르나도트를 굳이 모셔와서 왕세자로 삼은 것은 러시아에게 상실한 옛 영토 핀란드를 나폴레옹의 위세를 등에 업고 되찾아보려는 스웨덴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도 그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웨덴 사람들만 몰랐을 뿐, 베르나도트는 애초에 나폴레옹과 좋은 관계가 아니었고, 그래서인지 아니면 정말 그의 냉철한 두뇌로 주변 정세를 정확히 분석 파악해서인지 스웨덴의 살 길은 러시아와 넓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쪽 핀란드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서쪽 노르웨이를 손에 넣는 것이라고 이미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판단이 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측에 붙느냐 러시아 측에 붙느냐는 고민은 베르나도트로서도 다시 한번 전체 상황을 되짚어 보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때 어느 쪽에 붙느냐 하는 것이 국가 전체의 흥망성쇠를 판가름지을 도박이었으니까요.  그러는 사이에 프랑스도 러시아도 애간장이 탔고, 베르나도트는 이렇게 인기가 급상승한 스웨덴의 위치를 한참 동안이나 즐겼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가 너무 질질 끌어서였는지 아니면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스웨덴의 협조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아서였는지, 베르나도트로 하여금 별다른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엘베(Elbe) 강 일대의 프랑스 동맹군을 지휘하던 다부(Davout)가 러시아 침공을 위한 사전 작전의 일환으로, 1812년 1월 발트해 남쪽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Pomerania)를 침공해버린 것입니다.  애초에 스웨덴은 이 지역을 방어할 능력도 의지도 전혀 없었으므로 프랑스군은 이 지역을 무혈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베르나도트는 운명이라는 듯이 러시아와 동맹을 맺습니다.  

이런 외교전에서 막차를 탄 것은 오스만 투르크였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로에서 멀리 떨어진, 겉으로 봐서는 직접 개입할 여지가 없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야말로 프랑스와 연합할 이유가 충분한 나라였고 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시까지 러시아와 계속 전쟁을 벌어고 있는 교전 국가였거든요.  나폴레옹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나 아일라우 전투를 치를 때에도 러시아군 주력 부대의 상당수는 저 남쪽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장에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비록 지리적 위치 때문에 프랑스군과 합류하여 공동 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지만, 러시아의 남쪽 국경의 전선을 계속 유지하기만 해도 나폴레옹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투르크군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더라도 러시아로서는 그 넓은 전선에 적어도 수 만의 병력을 유지시키고 있어야 했으니까요.  러시아로서는 나폴레옹과의 일전을 앞두고 어떻게 해서든 오스만 투르크와의 교전 상태를 종식시켜야 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라는 뻘짓으로 한동안 프랑스와의 관계가 틀어지긴 했지만, 전통적으로 프랑스편이었고 또 나폴레옹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오스만 투르크는 마지막까지 어느 쪽에 붙는 것이 유리한가를 놓고 고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동안 오스만 투르크가 잃었던 많은 것들, 즉 이집트와 발칸 반도 등의 영토를 모두 회복시켜주겠다며 10만의 군대를 동원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망해가던 오스만 투르크에게 10만군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나폴레옹이 얼마나 허세가 가득한 인간인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에게는 나폴레옹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약속보다는 당장 코 앞에서 대포를 들이대고 협박을 해대는 러시아와 영국이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영국 지중해 함대는 러시아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이스탄불을 폭격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었고, 도나우 강 하류 지역에 집결한 러시아군은 몰도바를 집어삼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1812년 5월, 오스만 투르크는 오늘날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국경인 프루트(Prut) 강을 경계로 하는 평화 협정을 러시아와 맺습니다.  이로써 러시아는 오랫동안 오스만 투르크와의 남쪽 국경에 묶여있던 대군을 북쪽으로 불러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루트 강의 위치입니다.  오늘날 루마니아와 몰도바, 우크라이나 사이를 흐르는 강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외교전에서는 나폴레옹의 완승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온 유럽이 나폴레옹 편에 선 것에 비해, 러시아 편에서 함께 싸워줄 국가는 유럽 전체에서 영국과 스웨덴 정도 밖에 없었는데, 사실 스웨덴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나라였고 영국도 유럽의 반대편인 스페인에서의 공세로도 숨을 헐떡이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 침공을 결코 쉽게 보지 않았습니다.  1807년 폴란드 지역에서의 작전을 통해 광활하고 삭막한 동구의 평원을 침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무나 뼈저리게 잘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보급 문제에 있어 기존에 없던 규모의 준비를 시작합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Prut
https://en.wikipedia.org/wiki/36-pounder_long_gu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이제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유럽 각국은 이 세기의 대결을 놓고 어느 편에 붙을 것인지 판단하느라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면 굳이 힘센 제국들끼리 싸움질을 하는데 굳이 다른 나라들이 꼭 끼어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나쁜 평화가 가장 좋은 전쟁보다 더 낫다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분들이 많겠지만, 그건 편하게 후방에서 입으로 떠들 때나 통하는 거부감입니다.  당장 바로 옆의 전우들이 내장을 쏟아내며 고꾸라지고 나도 바로 다음 순간 언제든지 팔다리가 끊어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특히 그런 희생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 손자일 경우에는  누구나 어떻게든 당장 휴전 조약을 바라는 법입니다.  물론, 1812년 당시 유럽 각국에서 어느 쪽에 붙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람들은 자기나 자기의 아들이 적의 대포알에 노출될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건 현대에서도 대부분 마찬가지네요.

 

애초에 나폴레옹 덕분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주도권 하에서 벗어나 땅도 넓히고 왕국이 될 수 있었던 라인연방(Confédération du Rhin, 독일어로는 Rheinbund) 소속의 독일 소국들은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이들 국가 소속의 독일 시민들은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의 대결, 좀더 근본적으로 보면 프랑스의 부르조아 계급과 영국의 부르조아 계급간의 투쟁에 끼어들어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지배하던 왕과 대공(Fürsten, 영어로는 Prince)들 중 상당수는 나폴레옹 못지 않은 열정을 가지고 러시아 원정에 협조했습니다.  먼저 나폴레옹이 미개한 독일인들에게 프랑스식 입헌 군주국의 모델을 보여주겠다며 만든 베스트팔렌(Westphalen) 왕국의 국왕은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Jerome)이었습니다.  또 베르크(Berg) 공국의 지배자는 나폴레옹의 매제이자 나폴리 왕국 국왕인 뮈라(Murat)였고요.  이런 친인척들 외에도 나폴레옹에게 진정으로 협조적인 독일 소국왕들은 생각보다 꽤 많았습니다.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헤세 등의 국왕들과 대공들은 어쩔 수 없이 나폴레옹에게 굴복한 군주들이 아니라, 스스로 프랑스 계몽주의가 근대화를 위한 옳은 방향이라고 믿고 나폴레옹과의 협력을 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믿음의 배경에는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Grande Armee)가 가진 무력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요. 

 

 

(1812년 당시 라인연방의 소속 국가들입니다.  라인연방의 주요국가는 지도에서의 영토 크기로만 보면 베스트팔렌과 작센, 그리고 바이에른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온나라가 친프랑스-친나폴레옹 정서를 가진 진짜 동맹국은 바이에른과 바덴, 뷔르템베르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두 남부 독일의 카톨릭 국가들이군요.)

 



영국의 경우는 뭐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당연히 러시아와 함께 반프랑스 전선의 최선봉에 나설 의지가 충만했습니다.  원래 영국은 자신은 피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입만 털면서 지갑이나 여는 것으로 전쟁을 대신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로부터 원망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812년 당시에는 영국도 꽤 당당하게 자신도 피를 흘리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전선에 당시 영국으로서는 꽤 큰 야전군인 3만 정도의 병력을 파견하여 그야말로 혈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만이라고 하면 프랑스 그랑다르메(Grande Armee)로서는 고작 1개 군단에 해당하는 소규모 병력이었겠지만, 인구가 많지 않고 육군이 미약했던 영국으로서는 동원 가능한 전체 야전군을 다 동원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국은 이 소중한 병력을 아끼느라 당장 온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있던 스페인 현지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얌체처럼 몸을 사리긴 했습니다.  하지만 1814년 전쟁이 끝난 뒤에 집계를 해보면 영국군의 사망자는 총 3만5천이 넘었습니다.  그러니까 스페인-포르투갈 전장은 부족했던 영국 육군의 인원과 물자를 끊임없이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그 중에서 2만5천은 전투가 아닌 각종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만 이건 당시 위생 상황으로서는 정상적인 수치로서 다른 전장 다른 나라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812년 바다호스 요새 포위전입니다.  이 전투에서 4천5백의 프랑스군이 지키는 바다호스 요새를 2만7천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이 3주간 포위 공격 끝에 함락시켰습니다.  프랑스군은 1천5백의 사상자를 냈고 나머지는 거의 모두 포로로 잡혔는데, 영국-포르투갈 연합군도 거의 5천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함락 후에 영국군은 바다호스 시내를 잔혹하게 약탈하여, 최소 2백명에서 최대 4천명의 스페인 민간인 사상자를 냈습니다.  스페인이 영국의 동맹국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1812년은 영국군이 지나치게 몸을 사린다고 비난하던 스페인 사람들이 입을 다물 정도로 영국군도 공세적으로 나온 첫 해였습니다.  이 해 1월, 웰링턴은 드디어 군수품 창고 및 물자 집적 등을 끝내고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의 진군을 개시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이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쳐들어갈 통로가 뻔했던 것처럼, 역방향의 침공도 루트가 뻔했습니다.  웰링턴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도 1810년 프랑스의 포르투갈 침공 때 마세나가 밟았던 경로를 정확하게 역순으로 밟아야 했습니다.  1812년 1월 시우다드 로드리고(Ciudad Rodrigo) 요새부터 함락시킨 웰링턴은 이어서 4월에는 바다호스(Badajoz)를 엄청난 혈투 끝에 함락시켰습니다.  이 두 요새를 함락시킴으로써 이제 스페인으로의 진격로가 활짝 열린 셈이 된 것이지요.

이때 놀랍게도 나폴레옹으로부터 영국 측에게 평화 협상을 하자는 제안이 날아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영국과의 협상은 불가능하다고 공언하던 나폴레옹으로서는 굉장히 놀라운 입장 변화를 취한 것이었는데, 그만큼 당시 나폴레옹은 러시아 침공을 앞두고 후방 정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원래 러시아 침공을 하게 된 근본 원인이 영국과의 전쟁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어떻게 보면 본말이 전도된 셈이었지요.  어쨌거나 나폴레옹의 평화 협상 조건은 영국으로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미 영국군이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던 포르투갈 왕국을 원래의 왕가인 브라간사(Braganza) 왕정에게 반환하는 대신 스페인은 조제프를 국왕으로 하는 보나파르트 왕가 소유임을 인정해달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거든요.  그 외에 시실리 섬은 부르봉 왕가 출신의 사르데냐 국왕 페르디낭이 계속 보유하되, 나폴리 왕국의 소유권은 현행대로 나폴레옹의 매제 뮈라(Murat)가 계속 유지하게 해달라는 것이 딸려 있었습니다.  혹시 웰링턴이 시우다드 로드리고와 바다호스를 함락시키기 전에 이런 조건의 평화 협정을 제안했다면 영국이 받아들였을까요 ?  아마 영국은 그래도 거부했을 것입니다.  하물며 이제 스페인으로의 침공길이 활짝 열린 마당에 그런 조건을 수용할 이유가 없었지요.  영국은 단칼에 나폴레옹의 평화 제의를 거부하고 스페인으로의 침공 작전을 계속 했습니다.  웰링턴은 7월에 살라망카(Salamanca) 전투에서 마르몽(Marmont)의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8월에 조제프는 수도 마드리드를 내주고 피난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살라망카 전투에서 프랑스 보병들을 공격하는 영국군의 모습입니다.   한창 이기고 있는데 휴전하자고 하면 통할 리가 없지요.) 

 



초지일관 당당했던 영국과는 달리, 프로이센의 입장은 좀 딱했습니다.  나폴레옹으로부터 처음부터 푸대접을 당하던 프로이센은 당연히 처음에는 러시아 측에 붙으려 했습니다.  심지어 전운이 감돌던 1811년에는 국왕 빌헬름이 러시아 자르 알렉산드르에게 밀사를 보내 10만의 프로이센군을 보태줄테니 선제 공격에 나서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러시아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막강 프랑스군과 같은 조건으로 정면 충돌해서는 승산이 전혀 없다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프로이센의 선제 공격 요청을 거절하고, 프랑스군을 러시아 국내로 깊숙이 끌어들여 방어전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건 프로이센처럼 조그마한 나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전략이었지요.  러시아가 저렇게 후퇴 일변도의 희한한 전략을 택한다는 것은, 프로이센으로서는 전국이 프랑스군에게 일방적으로 유린당하게 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게다가 1812년 들어 오스트리아까지 프랑스군에 가담하기로 결정을 내리자, 이제 대세는 기울었다는 체념으로 뒤늦게 프랑스측에 가담하기로 합니다.  사실 이미 때늦은 결정이었습니다.  훨씬 더 일찍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맹세했어도 프로이센에 대한 대접은 신통치 않았을텐데, 이렇게 모든 것이 결정되고 난 뒤에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가담한 프로이센에 대해 나폴레옹이 보내는 시선은 싸늘했습니다.  결국 프로이센은 2만의 야전군을 러시아 침공에 동원해야 했고, 그 외에도 4만2천의 추가 병력을 후방 수비 임무를 위해 프랑스군에 제공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자국 영토를 프랑스군 및 그 동맹군이 자유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그 행군길에 프랑스군이 먹고 마시는데 소비하는 물자는 프로이센 국민들로부터 징발하여 충당했는데, 그 비용은 1806년 패전 당시 부과되었다가 아직 갚지 못하고 있던 전쟁 배상금을 상각해주는 형식으로 처리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냥 공짜로 다 털렸다는 말이지요.

 

...To be continued...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Peninsular_War#Allied_campaign_in_Spain
https://en.wikipedia.org/wiki/Confederation_of_the_Rhine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는 독일 출신 할머니와 독일 출신 어머니를 둔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 할머니는 처녀적 이름이 안할트-제릅스트(Anhalt-Zerbst) 출신의 소피(Sophie)로서 나중에 예카테리나(Екатерина) 대제로 알려진 러시아의 여황입니다.  알렉산드르의 어머니는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공주였지요.  다른 유럽 왕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는 이렇게 계속 외국 특히 독일 출신의 공주들을 왕비로 맞아들이다보니 러시아 왕가는 일반 러시아 국민들은 물론 러시아 귀족들에 비해서도 서구의 발전된 문물과 사상에 대해 좀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춥고 먼 동쪽 구석의 러시아를 서구화시키는 노력은 대개 국왕을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혁신이 위주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귀족들과 국민들은 그런 서구 사상의 침투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반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 전통은 알렉산드르에게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스위스 출신의 공화주의자인 라 아르프(Frédéric-César de La Harpe)를 가정교사로 하여 루소 등의 프랑스 계몽사상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당연히 그는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랐습니다.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지독한 전제 군주 집안에 태어난 왕자로서 계몽사상에 젖어든 어린 손자 알렉산드르를 보고 예카테리나 대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꼬마는 자기 모순의 매듭덩어리 같구먼."


(라 아르프입니다.  그는 30대를 러시아에서 알렉산드르의 가정교사로 보낸 뒤, 베른의 귀족 정권에 시달리던 고향 스위스 보(Vaud) 지방을 해방시키고 더 나아가 스위스에 헬베티카 공화국(République Helvétique)을 만들었습니다.  혁명의 폭풍 속에서 그는 추방을 당하는 등 시련을 겪었으나, 나폴레옹이 패망한 이후 그는 옛제자 알렉산드르의 도움으로 그의 고향 보 지방의 권익을 지키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물려받은 전제 군주 짜르의 왕좌는 결코 절대 권력이 보장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그의 할아버지 표트르 3세(Pyotr III )는 그의 홀대에 불만을 품은 근위부대의 반란으로 황비인 예카테리나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결국 암살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파벨 1세(Pavel I) 또한 귀족 출신의 해직 장교들에 의해 아주 간단히 암살되었습니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연이어 암살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만 표트르 3세나 파벨 1세나 모두 농노들의 처지를 향상시키고 귀족들의 권리를 제한한다는 공통적인 개혁 조치를 취한 바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먼 동구의 대국으로서 소수의 전근대적인 귀족들이 노예 상태의 국민들을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가령 표트르 3세의 개혁 이전까지만 해도 귀족들은 자기 농노를 죽여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나름대로의 그런 전통과 특성을 무시하고 귀족들의 이익을 해친다면, 아무리 동로마 제국 황제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주장하는 짜르라고 해도 야밤에 한낱 개처럼 살해될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의 평민 출신 고문 스페란스키입니다.  그는 알렉산드르를 따라 에르푸르트 회담장까지 가서 직접 나폴레옹과 환담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귀족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그는 결국 친프랑스파이자 불온사상을 가진 자로 낙인찍혀 1812년 초에 고문직에서 해직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시베리아에 유배를 간 것은 아니고, 핀란드 대학의 학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비록 알렉산드르가 서구 계몽사상으로 훈련된 개혁적 군주라고 해도 실제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시골 마을 신부의 아들인 스페란스키(Mikhail Speransky)를 고문으로 등용하여 당시 계몽사상가들이 꿈꾸던 입헌 군주국으로 러시아를 탈바꿈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는 짜르가 스스로의 권력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  또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처럼 선진 교육을 받은 귀족 및 시민들이 많아야 한다는 판단으로 당시 그 넓은 러시아에 딱 3개 있던 대학 수를 6개로 늘리는 등 교육 제도 개선에도 힘을 많이 썼습니다.  물론 개혁은 쉽지 않았고 알렉산드르도 주변 왕족 및 귀족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런 개혁에 대한 열의는 점점 옅어져 갔습니다.  가령 스페란스키가 제시했던 의회, 즉 러시아어로 두마(дума, '생각'이라는 뜻)로 불리는 기구는 거의 1백년이 지난 뒤 노일전쟁의 패전 결과로 발생한 1905년 러시아 혁명을 겪고서야 간신히 설립될 지경이었습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러일 전쟁 패배의 여파로 들끓던 사회적 불만이 '피의 일요일' 사건이 계기가 되어 촉발된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포템킨 호의 반란 사건도 이때의 사건입니다.)

 



그렇게 서구 사회에 긍정적이었던 그는 처음에는 프랑스 시민 계급을 대표하는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에 대해 흠모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나폴레옹의 앙기앵 공작 납치 사법 살인이라는 비도덕적 범죄 행위를 보고는 기대만큼 큰 실망을 하여 반-나폴레옹파로 급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제3차 대불동맹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나폴레옹의 손에 참담한 패배의 맛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렉산드르는 젊은 낭만파 몽상가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1807년 틸지트 회담에서 나폴레옹이라는 대인물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보고는 나폴레옹의 매력에 젖어든 정도가 아니라 그 속에 첨벙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역시 낭만파 몽상가이자 지략가였던 나폴레옹이 제시한 프랑스와 러시아가 힘을 합해 유럽을 양분하고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출발하여 인도까지 점령하자는 말도 안되는 소리에도 전율했습니다.  그 결과, 분명히 바로 직전까지 영국의 금융 지원을 받으며 피튀기게 싸우던 적수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엉뚱하게도 여태까지의 돈 줄이자 중요 경제 파트너였던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틸지트 회담에서 알렉산드르는 무엇보다 남쪽의 숙적 오스만 투르크가 차지했던 발칸 반도 등지를 빼앗기를 원했지만, 실질적으로 러시아가 얻은 것은 핀란드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오스만 투르크는 영국의 근동 지방 전략에 저항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동맹이었고 또 나폴레옹이 구워삶아야 하는 다른 강국인 오스트리아도 오스만 투르크의 땅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얻은 것에 비해 영국과 척을 진 대가는 컸습니다.  러시아는 토지 귀족의 나라였고, 토지 귀족의 돈벌이는 자신의 장원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영국에 수출하고 대신 영국제 공산품을 수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호기 있게 맺은 틸지트 조약은 러시아 토지 귀족의 이익에 크게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곧장 여기저기서 볼멘 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물론 불만 세력들은 모양새 없게 '돈벌이가 안된다'라는 것을 나폴레옹과의 동맹 반대 이유로 대지는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나폴레옹은 신이 내려주신 왕위를 뺴앗은 찬탈자이고 불온한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야만인이므로, 동로마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로마노프 왕조는 그 코르시카놈과 동맹을 맺을 것이 아니라 정벌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짜르 알렉산드르의 모후인 마리아 페오도로브나(Maria Feodorovna)까지 나서서 나폴레옹이 소집한 에르푸르트 회담에 출석하지 말라고 종용할 지경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자신을 둘러싼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야밤에 칼로 찔러 죽인 자들이 가득찬 왕궁에서 그들의 불만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옳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알렉산드르도 나폴레옹이 결코 자신과 유럽을 공유할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어디까지나 전제 왕정의 군주였지, 결코 낭만적인 친구들로 둘러싸인 젊은 독일 대학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 기반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그 계기가 된 것은 나폴레옹이 바르샤바 공국을 독립 폴란드 왕국으로 부활시키려고 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건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 오스만 투르크의 분할에 있어서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메테르니히가 빚어낸 가짜 뉴스였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1810년 12월 31일 발표된 짜르의 칙령은 프랑스산 제품에 대해서는 관세를 부과하고, 반대로 영국 상품에 대해서는 입항 허가를 내주는 내용이었고, 이를 계기로 나폴레옹와 알렉산드르 사이의 전쟁은 거의 기정 사실화되었습니다.  사실 이건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제 벌어질 전쟁은 유럽 산업화의 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영국 시민 계급과 프랑스 시민 계급의 싸움이었습니다.  이미 산업 혁명이 시작된데다 강력한 로열 네이비를 보유한 영국과 싸울 방법이 궁했던 프랑스가 꺼내든 대륙 봉쇄령이라는 무역 전쟁은 결국 동방의 대국 러시아를 싸움판에 끌어들였고, 결국 영국 대신 러시아가 프랑스를 상대로 대리전을 치르게 된 것이었지요.  

자신의 전쟁에 제3자를 끌어들인 것은 영국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도 혼자서 러시아와 싸울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가 굴복시킨 독일과 이탈리아 등지의 위성국가들에게 병력과 물자, 자금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유럽 거의 전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 거대한 전쟁에 휩쓸려야 했습니다.  과연 이 전쟁을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시선은 어떠했을까요 ?  물론 대부분은 황제가 또 전쟁을 한다면서 불만이었습니다만, 지식인들 대부분은 이 전쟁을 계기로 유럽의 근대화가 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의 점령군 뒤에는 예외없이 무자비한 병참장교와 세관원들이 따라와 점령지의 고혈을 짜내는 것으로 악명 높았지만, 나폴레옹의 정복지에는 프랑스 대혁명 정신을 계승한 헌법과 나폴레옹 법전도 항상 따라오기 마련이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군이 이례적으로 잔혹하게 난동을 부렸던 스페인에서조차, 지식인들은 나폴레옹이 세운 허수아비 왕 조제프의 정권이 기존 부르봉 왕정보다 스페인을 훨씬 더 근대화시켰다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최소한 헌법이 제정되었고, 중세시절부터 계속 내려오던 고문으로 악명 높은 스페인 종교재판도 폐지되었으니까요.  나중에 나폴레옹이 패망한 뒤 스페인 종교재판은 다시 부활했다가 1834년에야 간신히 폐지되었습니다.  괴테 등 당대의 지성인들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일주의에 대해 분개하면서도 나폴레옹이 동방으로 끌고 갈 그랑다르메(Grande Armee)의 전진과 함께, 신분제 폐지와 천부인권 등의 계몽사상이 저 동방까지 전달될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종교재판 = 이단심문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와 나무가지, 그리고 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Yo, Say Love"를 선창하시는데 이들은 떼창으로 "No Mercy"를 외쳤군요.)

 



이제 유럽은 누가 영국과 러시아 편에 설 것이고 누가 프랑스 편에 설 것인지, 과연 중립이란 것이 가능할지 외교적인 머리를 굴려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I_of_Russia
https://en.wikipedia.org/wiki/Mikhail_Speransky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이제 우리는 1812년, 그 고통스러운 행군을 향해 출발합니다.  모든 사건은 뭔가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터집니다.  왜 나폴레옹은 자신의 파멸을 향해서 그 춥고 머나먼 땅으로 행군을 해야만 했었을까요 ?  이유는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주된 이유는 두가지, 폴란드와 영국이었지요.  그 두가지 때문에, 지난 편에서 우리는 1810년 12월 31일, 알렉산드르가 프랑스산 비단과 와인에 관세를 부과하고 반대로 영국산 제품의 입항을 실질적으로 허락하는 칙령을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이라는 바보짓을 피할 수 없었을까요 ?  제 블로그를 출입하시는 분들께서는 느끼셨겠습니다만, 나폴레옹은 원래부터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전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일으킨 전쟁은 대부분 방어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과 싸웠던 것도, 바그람에서 오스트리아와 싸웠던 것도 알고보면 모두 상대측이 먼저 선전포고를 한 것이었지요.  1811년 당시의 나폴레옹은 특히나 전쟁을 굳이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제 40대에 접어든 그는 뇌하수체 이상 때문이라는 설이 있듯이 뭔가 건강이 좋지 않아 눈에 띄게 몸이 비대해졌고, 그 때문인지 부하들은 모두 나폴레옹이 전에 비해 결단력이 떨어지고 사람이 유순해진 것을 눈치채고 놀라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들 '로마왕'을 낳고 나서는 이렇게 말할 정도로 기뻐하며 이제 자신이 이룬 제국의 보존을 우선 순위에 두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제국은 칼로 건설되고 상속에 의해 유지된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 기반이 무력보다는 민중의 지지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독수리 깃발을 앞세운 승리의 영광은 단지 그런 민중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격파한 뒤 거기서 빼앗은 영토 등으로 만든 베스트팔렌 왕국의 왕좌에 막내 동생 제롬을 앉히면서 아래와 같은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독일인들이 초조하게 기대하는 것은 귀족 태생이 아니더라도 재능만 있다면 너에게 발탁될 공평한 기회를 갖는 것과, 왕국 내의 가장 비천한 자들과 국왕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신분 장벽과 예속 상태가 철폐되는 거야... 나폴레옹 법전의 혜택, 통치 절차의 투명성, 그리고 배심원 제도가 네 왕정과 기존 왕정을 구별하는 특성이 되어야 해.  너에게 완전히 터놓고 이야기한다면 말이다, 네 왕정의 확장과 통합에는 나의 더 위대한 승리보다는 그런 것들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난 기대하고 있단다.  너의 백성들은 다른 왕정 하의 독일인들이 누리지 못하는 자유와 평등, 복지를 누려야 한다."

귀족들, 심지어 당시 부르조아 계급으로 불리던 시민 계급, 즉 요즘말로 중산층도 가끔은 돈 때문에 전쟁을 환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사회 대부분을 차지하는 민중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적의 총탄과 대포알을 몸으로 받아내며 산산조각 나야하는 것들이 바로 자신들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나폴레옹도 그걸 잘 알고 있었고, 그는 민중이 싫어하는 전쟁을 굳이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보자면,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은 민중의 국가라기보다는 부르조아 계급, 즉 시민 계급이 이끌고 나가던 나라였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즉 구체제를 뒤엎은 시민 계급은 이제 신분이 아니라 재산과 실력에 의해 대우받고 기회가 주어지는 체제를 지지했습니다.  따라서 투표권도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가진 국민에게만 주어졌지요.  나폴레옹도 집권 기간 내내 사회 대부분을 차지하는 민중 세력보다는 교육을 제대로 받고 재산을 갖춘 중산층 소수 엘리트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시민 계급이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 경제적 번영과 그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 안정이었습니다.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에 가장 해로운 것이 전쟁입니다.  그런데도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원정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러시아 원정이 시민 계급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빌렘 Willem이 명예 혁명에 의해 영국왕 윌리엄 3세가 되면서, 그 전에도 좋지 않았던 프랑스와의 관계가 급격히 나빠집니다.  쫓겨난 영국왕 제임스 2세는 카톨릭으로서, 전통적 카톨릭 군주인 프랑스 루이 14세와의 관계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영국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은 제2의 100년 전쟁이라고 지칭되는 시대 속에 있었습니다.  1688년 명예 혁명에 의해 개신교였던 네덜란드의 윌리엄 공이 영국 왕위에 오르면서 시작된 영국과 프랑스의 본격적인 갈등 관계는 처음에는 개신교와 카톨릭의 종교적인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곧 아메리카 및 인도를 둘러싼 식민지 확보 경쟁, 즉 경제적인 갈등으로 전개되었습니다.  1756년부터 시작된 7년 전쟁과 1775년부터 시작된 미국 독립 전쟁에서 서유럽을 주도하던 이 두 나라의 경제적 이해 충돌은 매우 뜨거워졌습니다.  특히 과거의 전쟁처럼 어느 나라가 유럽 내 어느 특정 지역의 영토를 더 많이 차지하느냐 하는 것보다 누가 더 많은 생산 기지와 소비 시장을 확보하느냐로 관점이 옮겨가면서 이 두 나라의 갈등은 거의 공존 불가 수준으로 달아올랐습니다.  

중세 시절이라면 이런 두 나라의 경쟁은 당연히 더 크고 비옥한 영토를 가진 프랑스가 우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백년전쟁에서 영국이 초반에 우세했던 것도 알고 보면 당시엔 영국이 프랑스 내에 꽤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그 영토에서 나온 병력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프랑스에게 밀려 유럽 내의 영토를 다 잃을 수 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대포로 무장한 전열함이 큰 역할을 했던 해외 식민지 경쟁에서는 섬나라 영국이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결국 프랑스는 인도와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를 대부분 잃어야 했지요.

 

(7년 전쟁의 여러 전장의 모습입니다.   7년 전쟁은 가히 세계 전쟁이라 할 수 있어서, 그 전장은 유럽 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 인도, 북부 아프리카, 심지어 필리핀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서로에게 상처만 주었던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뒤 이 두 나라 사이에는 잠깐 공존의 분위기가 무르익기도 했습니다.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을 물먹이느라 재정을 탕진한 프랑스가 당장 농산물을 수출해야 하는 필요성과, 북미 식민지를 상실하는 바람에 자국산 공산품을 위한 새 수출 시장을 급히 찾아야 하는 영국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1786년 이 두 국가 사이에 관세를 대폭 낮추자는 에덴 조약 (Eden Treaty)이 맺어졌던 것입니다.  이때 프랑스 측의 책임자는 중농주의자였던 베르겐 백작(Charles Gravier, comte de Vergennes)이었고, 영국측 책임자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Wealth of Nations, 1776년 출간)에 잔뜩 영향을 받은 오클랜드 남작 에덴(William Eden, 1st Baron Auckland)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영국산 공산품의 프랑스 시장에 대한 진입 장벽이 크게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측에서 보면 이 조약은 프랑스 토지 귀족들의 이익만 대변할 뿐, 주로 부르조아 시민 계급으로 구성된 프랑스의 대형 제조업자 및 상인들에게는 매우 불리한 것이었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에덴 조약으로 손해를 본 프랑스 부르조아 계급의 불만이 결국 프랑스 대혁명으로 분출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신분제 철폐와 천부적 인권이라는 숭고한 이상 뒤에는 프랑스와 영국의 돈 싸움 문제가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베르겐 백작 샤를 그라비에입니다.  이 분은 자신이 뭔 짓을 저지른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1787년에 fat & happy 상태로 편히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경제 전쟁에서 프랑스가 내놓은 회심의 일격이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도 인간인 이상 날아서 도버 해협을 건널 수는 없었고 트라팔가에서 쓴 맛을 볼 수 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나폴레옹이 내놓은 해법이 바로 진짜 무역 전쟁, 즉 대륙 봉쇄령이었습니다.  대륙 봉쇄령이 성공하려면 유럽 전역이 나폴레옹의 직접적인 영향력 하에 있어야 했었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나폴레옹도 서부 유럽의 황제였을 뿐이었지요.  동부 유럽의 황제는 바로 로마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는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 1세였습니다.  대륙 봉쇄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유럽 대륙 서부 뿐만 아니라 동부까지 전체가 영국 상품에 대해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나폴레옹도 그런 사정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처음부터 러시아와는 싸우기 보다는 협력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1807년의 틸지트(Tilsit) 조약이었습니다.  이 조약에서 젋은 알렉산드르를 구워삶은 나폴레옹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던 러시아로 하여금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영국 상품에 대해 문을 닫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입은 패배를 통쾌하게 뒤집는 나폴레옹의 멋진 승리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와는 협력을, 영국과는 전쟁을 원했던 것은 위에서 보셨다시피 궁극적으로는 나폴레옹 개인의 야망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상공업과 무역을 발전시키려는 프랑스 시민 계급의 입장에 있어서 제해권을 장악한데다 산업 혁명을 막 시작한 영국에게는 말살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고, 농업 대국 러시아와는 협력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프랑스 시민 계급의 욕망을 그대로 유럽 권력 세계에 투영해준 것이 바로 나폴레옹이었고요.  따지고 보면 나폴레옹 자신이 토지에 기반을 둔 귀족이 아니라 본인의 실력으로 부를 쌓아가는 시민 계급 출신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귀족 출신이라고는 해도 프랑스에서는 집도 절도 없는 한낱 외국 출신 하급 장교에 불과했으니까요.  실제로 나폴레옹은 패전 국가에게 전쟁 배상금을 뜯어낼 때 항상 토지보다는 정금(specie), 즉 금화와 은화를 요구했고, 비엔나를 점령하고서는 왜 기회에 오스트리아에 프랑스산 비단과 도자기 같은 상품을 무관세로 판매하지 않느냐고 관료들을 닥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황제에 등극할 때 공식 칭호를 과거 부르봉 왕가가 Roi de France (프랑스의 국왕)이라고 했던 것처럼 Empereur de France (프랑스의 황제)라고 하지 않고 Empereur des Français (프랑스인들의 황제)라고 했지요.  이는 프랑스라는 국가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왕이라는 개념보다는,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통치자라는 뜻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속성을 보면 Empereur des Bourgeois Français (프랑스 시민 계급의 황제)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황제라고는 해도 절대 권력자가 아니었듯이, 알렉산드르로 전제군주이긴 했으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는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뒤에 시민 계급이 있었듯이, 짜르 알렉산드르의 뒤에도 서있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농노제에 기반을 둔 러시아의 토지 귀족들이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Second_Hundred_Years%27_War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폴란드는 아침거리일 뿐이다... 러시아가 저녁을 먹을 곳은 어디일까 ?"
-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 이후 당시 영국 의회 의원이었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점점 서쪽을 밀고 나오는 러시아에 대해 한 말

"이 꼬마는 자기 모순의 매듭덩어리 같구먼."
- 전제 군주 집안에 태어난 왕자로서, 스위스 출신 가정교사에게서 계몽사상으로 교육을 받은 어린 손자 알렉산드르를 보고 예카테리나 대제가 평한 말

"난 무책임한 게으름뱅이이고 진실된 생각과 말, 행동을 할 능력이 없다.  난 이기적 사람인데 그 주된 이유는 허영심 때문이다."
- 1789년, 당시 12살이던 알렉산드르가 적은 일기 중에서   

"내 계획은 와이프와 함께 라인 강변에 정착하여, 평범한 사람으로서 친구들과 함께 자연 철학을 공부하며 행복을 찾는 것이다."
- 1796년 당시 19세이던 왕자 알렉산드르가 친구에게 한 말

"이 황태자가 성당에 들어갈 때보니 자기 할아버지를 살해한 자들이 앞장서서 들어가고, 황태자를 둘러싼 자들은 자기 아버지를 시해한 자들이고, 황태자를 시해할 준비가 된 자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가더군요."
- 알렉산드르의 비자발적 묵인 하에 아버지 파벨 1세가 암살된 이후 알렉산드르의 대관식에 참석했던 어느 프랑스 망명 귀족의 편지 중에서

"제 아버지를 암살한 귀족들을 처벌하지 않고 여전히 고위직에 두고 있는 러시아 짜르가 이런 비난을 하다니 매우 희한한 일이다."  
 - 1804년 앙기엥(Enghien) 공작을 납치하여 사법살인한 나폴레옹의 행위를 알렉산드르가 맹비난하자 그에 대해 대외적으로 발표한 프랑스 외무부의 반응.  알렉산드르는 괜히 나섰다며 크게 후회했다고 전해짐.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보다 짜르 알렉산드르 개인이 훨씬 더 철저히 패배했다."   
-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이후 프랑스 외교관 Joseph de Maistre의 편지에서    


"완전히 새로운 체제가 현재까지의 체제를 교체해야 합니다.  만약 내가 나폴레옹 황제와 직접 만나 담판 짓는다면 그런 체제에 대해 매우 쉽게 합의에 도달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 1807년 틸지트(Tilsit) 회담 직전 프랑스 측에 보낸 알렉산드르의 편지 중에서

 



"내가 보나파르트와 단 둘이서 마주 앉아 하루에 몇 시간씩 대화를 하며 며칠을 보냈다는 것을 상상해보거라.  정말 꿈 같은 일이 아니냐 ?"
- 1807년 틸지트 회담 이후 여동생 예카테리나에게 보낸 알렉산드르의 편지 중에서

"폐하, 조심하소서 !  선황 폐하의 전철을 밟을까 두렵사옵니다."  
- 틸지트 회담 이후 어느 알렉산드르의 심복 중 하나가

"폐하와의 동맹, 특히 영국과의 전쟁은 이 나라에서의 자연스러운 사고 방식 자체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이건 마치 완전한 개종과 같은 수준의 일입니다."
- 틸지트 회담의 결과로 러시아의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가 이루어진 뒤 상트 페체르부르그 주재 프랑스 대사가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에서 

"러시아군과 프랑스군, 그리고 일부 오스트리아군으로 이루어진 5만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발하여 아시아로 출정한다면, 단지 유프라테스 강까지만 진격해도 영국은 벌벌 떨며 대륙의 발 밑에 무릎 꿇을 것입니다."
- 1808년 2월 알렉산드르에게 보낸 나폴레옹의 편지 중에서

"이게 바로 틸지트에서 사용되는 언어야 !"
- 위의 나폴레옹의 편지를 읽으며 흥분한 알렉산드르가 내뱉은 찬탄

"알렉산드르, 너의 몰락을 스스로 자초해서는 안 된다 !  백성들의 존경은 잃기는 쉽지만 되찾기는 어렵단다.  그 회의에 참석한다면 넌 그걸 잃을 것이고 결국 제국을 잃고 가족들도 파멸시킬 거란다."
- 1808년 9월 나폴레옹이 소집한 에르푸르트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하려는 알렉산드르에게 보낸 모후의 편지 

"우리가 공공연하게 군비를 확충하고 무장 병력을 과시하거나, 요란하게 나폴레옹를 비난하는 것은 나폴레옹을 몰락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는 오로지 심오한 침묵 속에서만 준비를 해야 합니다."
- 위의 모후의 편지에 대한 알렉산드르의 답장

"나폴레옹은 내가 그저 바보라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웃는 자가 가장 오래 웃는 법이지. (중략) 유럽은 우리 둘이 공존할 수 있을 정도로 넓지 않단다.  둘 중 하나는 조만간 무릎을 꿇어야 할 거야."
- 위의 편지와 함께 따로 여동생 예카테리나에게 보낸 알렉산드르의 답장

 

"두 황제는 서로의 조치에 대해 비교적 만족한 상태로 헤어졌다.  그러나 기저에는 서로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었다."

- 에르푸르트 조약 직후 러시아 주재 프랑스 대사 콜랭쿠르의 관측

"유럽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폐하 뿐입니다.  폐하께서 그러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폴레옹에게 반기를 드시는 것입니다."
- 에르푸르트 조약 기간 중 알렉산드르와 몰래 접촉한 프랑스 전직 외무장관 탈레랑이 알렉산드르에게 한 말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나폴레옹 시대의 복사기

나폴레옹의 시대 2019.06.13 06:30 Posted by nasica


Hornblower and the Atropos by C.S.Forester (배경: 1805년 영국 근해 HMS Atropos 함상) ----------------

(아트로포스 호의 함장인 혼블로워는 밤늦도록 그날 있었던 프랑스 사략선 나포건에 대한 보고서 작성을 막 끝내고 보고서 내용에 나름 흡족해하며 다시 읽어보고 있는 중입니다.)

함장실 문에 노크가 있었다.  대체 방해받지 않을 순간이 전혀 없단 말인가 ?

"들어와."  그가 말했다.

들어온 사람은 선임사관인 존스였다.  그는 혼블로워의 손에 들려져 있는 깃털펜과 테이블에 놓인 잉크병과 종이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실례합니다, 함장님."  존스가 말했다.  "제가 너무 늦게 온 게 아니었으면 합니다."

"무슨 일인가 ?" 혼블로워가 물었다.  그는 존스 중위에 대한 동정심이 별로 없었고, 그의 어정쩡한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군성에 보고서를 보내실 생각이셨다면 말입니다, 그러실 생각이셨던 것 같습니다만, 함장님..."

"그래, 물론 그럴 생각이네."

"혹시 제 이름을 언급하실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함장님... 그러실 것인지 여쭈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함장님... 감히 제멋대로 생각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만약 존스가 해군성에 보낼 보고서에다 자신에 대해 특별히 잘 언급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라면 그런 부탁은 절대 들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가, 미스터 존스 ?"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그저 제 이름이 너무 흔한 것이라서 말입니다, 함장님, 존 존스라는 이름 말입니다.  현재 중위 명부에 오른 것만도 12명의 존 존스가 있습니다, 함장님.  알고 계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9번 존 존스 (John Jones the Ninth)입니다.  해군성에서는 저를 그렇게 지칭합니다, 함장님.  만약 함장님 보고서에 그렇게 씌여있지 않다면, 아마도..."

"잘 알겠네, 미스터 존스.  무슨 말인지 이해하네.  제대로 처리가 될 거라고 믿어도 되네."

"감사합니다, 함장님."

존스가 나간 뒤, 혼블로워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보고서를 들여다 보고는, 새 종이를 한장 꺼냈다.  존스의 이름 뒤에다 '9번 (the Ninth)'이라는 글자를 읽을 만하게 삽입할 방법은 도저히 없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새 종이 위에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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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인용한 소설 한 구절에서 무엇을 느끼시나요 ?  저는 아, 워드 프로세서는 신의 축복 (또는 빌 게이츠의 축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워드 프로세서가 없었던 나폴레옹 시대의 문서 작업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지요.

군인이라는 직업에서 성공하려면, 꼭 적군을 많이 죽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자기가 이러이러한 지휘력을 발휘하여 이러이러한 전과를 올렸다는 것을 상부에 제대로 알리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사실 이건  꼭 군인이라는 직종에서 뿐만 아니라, 조직화 되어 있어서 상관이라는 작자들이 존재하는 모든 직장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이야기지요.  제대로 된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보고서 내용이 가장 중요합니다.  일단 그 보고 내용이 패전보다는 승전 쪽에 가까운 것이 좋을 것이고, 또 문체가 간결하면서도 자연스러워, 읽는 사람이 요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조리있게 쓰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우리 교육에서 영어 교육보다는 국어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문장력 때문입니다.  대학도 나오고 직장생활도 할 만큼 한 사람들이 쓴 보고서나 메일을 읽어보면, 대체 이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뭔지 도통 알 수 없는 경우도 많거든요.  어떤 사람은 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영어도 잘한다고 하던데, 거기에도 동의합니다.  결국 언어라는 것은 의사 소통 수단이고, 의사 소통이 원활하려면 생각과 사실을 언어로 조리있게 정리해서 조합해야 하는 것이쟎습니까 ?  결국 한국말로 또이또이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영어로도 (발음은 둘째치고) 또이또이하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Band of Brothers의 한 장면이지요.  딕 윈터스 대위, 승진을 위해서는 M1 소총보다 타자기를 더 잘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다 !)



보고 내용도 승전보이고, 문장도 조리있게 잘 작성되었다고 하면, 그 다음엔 글씨가 문제가 됩니다.  요즘이야 타자기를 거쳐 워드 프로세서에서 대부분의 보고서가 작성되니까, 작성자는 어떤 폰트를 고를지만 생각하면 됩니다.  (대개의 경우 아예 폰트도 미리 지정해두지요.)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처럼 아직도 이게 보고서인지 문학 작품인지 헷갈려하는 시대에는, 그 내용 못지 않게 우아한 글씨체도 중요했습니다.  우아한 글씨체가 정말 중요한 이유는,  알파벳 문화권에는 인쇄체와 필기체라는 것의 차이가 꽤 컸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아동 문학인 '보물섬'의 한 장면을 보시지요.



보물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작  (배경 : 18세기 후반 영국) ---------------------------------------

그래서 몇 주가 지난 뒤, 마침내 어느날 닥터 리브지께 편지가 한 통 날아들었다.  그 편지에는 '닥터의 부재시에는 톰 레드루쓰 또는 젊은 호킨스가 개봉할 것' 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 조건에 따라 우리는, 사실 우리라기 보다는 나는 -- 왜냐하면 산지기 레드루쓰는 인쇄된 것 외에는 잘 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다음과 같은 중요한 소식을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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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도 산지기 톰 레드루쓰처럼 필기체의 알파벳은 잘 읽지 못합니다.  제가 국민학교 때 저 위 문장을 읽고는, '나는 저런 무식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에, 중학교에 진학하여 영어를 배울 때 필기체 쓰는 연습도 나름 열심히 했었습니다만 (요즘도 학교에서 필기체 읽고쓰는 것을 따로 배우나요 ?) 여전히 필기체 문장은 읽기가 힘들더군요.  그래서 가끔씩 볼 수 있는 나폴레옹 시대의 그림이나 편지에 씌인 글을 읽는데 애를 많이 먹습니다.  글쎄요, 아마 저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 당시 사람들 중에도 (저 레드루쓰처럼) 남이 필기체로 쓴 편지를 읽기 힘들어 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특히 원래 쓴 글씨가 개발새발이라면 더더욱 그랬겠지요.  그래서 글씨를 예쁘고 신속하게 써줄 수 있는 서기(clerk)이라는 직업이 있었지요.  나폴레옹도 자기가 직접 펜대를 굴리며 글을 쓴 경우가 (특히 나중에 황제가 된 이후에는)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대개 몇명의 서기들에게 둘러 싸여 속사포처럼 빠르게 구술을 하면, 서기들이 진땀을 흘리며 받아 적었지요.  

이 시대의 서기들은 글씨를 예쁘게 쓰는 것 외에도 독특한 할 일이 더 있었습니다.  모래질이었습니다.  


'아르마다', 개럿 매팅리 작, 박상이 옮김, 가지않은 길 출판 (배경 : 1589년 스페인의 무적함대 사건 당시) --------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침착성에 대한 일화입니다.)

그 비서는 익숙하지 않은 일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왕에게 금방 쓴 문서를 받아들자 그것을 모래로 문지르는 대신 그만 잉크병을 쏟아버렸다.  왕이 진노하리라는 생각에 몸을 움찔하던 비서는 이런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것은 잉크라네.  이것이 모래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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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방금 쓴 문서를 모래로 문질렀을까요 ?  짐작하시다시피, 잉크를 말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잉크는 매염제(gall, 일종의 진딧물 벌레집), 검댕, 황산철, 고무질 등을 섞어만든 것으로서, 요즘의 잉크처럼 종이에 잘 흡수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깃털펜에 이런 잉크를 묻혀서 정성껏 쓴 다음에, 곧장 종이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가는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가 종이에 그대로 찍혀 일종의 데칼코마니가 되기 쉽상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잉크를 말리는 작업을 해야 했는데, 불에 종이를 쬐다가는 자칫 불이 붙어버릴 위험도 있었고, 또 종이가 누렇게 말라비틀어질 수도 있었으므로 불로 말리는 것은 그리 좋지 않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바로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 위에 고운 모래를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고운 모래는 잉크를 순식간에 흡수해버릴 수 있는데다가, 고운 모래로 문지른 종이면은, 당시 품질이 그리 좋지 못한 종이면을 곱게 갈아주어 표면의 느낌을 맨질맨질하게 해주는 효과까지 내주었습니다.



(사진 속 편지 위의 작은 후추병 같은 것이 sand shaker 입니다.  저것으로 고운 모래를 편지 위에 뿌렸습니다.)



이렇게 금방 쓴 잉크 위에 모래를 뿌리던 관습과 나폴레옹에게 연관된 이야기도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휘하 장군들 중 가장 일찍부터 나폴레옹을 섬기기 시작했던 사람은 바로 '폭풍우'라는 별명을 가진 쥐노(Jean-Andoche Junot)였습니다.  그는 1795년 툴롱 포위전 때 나폴레옹을 만났는데, 당시 나이가 겨우 2살 많았던 나폴레옹이 이미 대위 계급이었던 것에 비해 일개 하사관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그래도 혁명 전에는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는 미지수...) 법학도였던지라, 나폴레옹의 서기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툴롱 포위전이 한창일 때, 나폴레옹이 전선에서 뭔가를 구술하여 쥐노에게 받아쓰게한 직후였습니다.  바로 옆에 영국군의 포탄이 떨어져 흙먼지가 나폴레옹과 쥐노에게 우수수 떨어졌는데, 쥐노는 전혀 놀라지 않고 나폴레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덕택에 편지에 모래를 뿌리지 않아도 되겠네요."

이 용기와 재치가 넘치는 애드립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폴레옹은 이때부터 쥐노를 진정한 부관으로 생각했고, 그 결과 쥐노의 인생이 확 변하게 되었지요.  

 


(실제 전공에서나 사람들의 비망록에서나, 쥐노는 그다지 능력있는 사람으로 부각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그의 젊은 와이프를 나폴레옹이 무척 좋아했다고...)



나폴레옹 시대에 서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하는 주요 업무는 구술 받은 편지나 문서를 쓰고, 거기에 모래 뿌리는 것 외에도 또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인간 복사기 !  당시에는 타자기는 커녕, 아직 먹지(carbon paper)가 발명되지 않았던 때라서, 편지든 뭐든 문서라는 것을 하나 만든 다음에는 그 복사본을 손으로 일일이 베껴써야 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가 인류 문명을 바꾸어 놓기는 했습니다만, 아직 서기의 일상 업무를 바꾸지는 못했거든요.  따라서 나폴레옹의 참모 본부에 있던 서기들은 정말 눈알이 빠져라 열심히 서류들을 써대고, 베껴대야 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처럼 말이 많고 편지도 많이 썼던 사령관 밑에 있던 서기들은 정말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나폴레옹 시대에 이미 복사기가 이미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발발 전이던 1785년 조지 워싱턴과 벤자민 프랭클린 등이 독립선언문을 (손으로) 작성할 때, 이미 복사기를 이용하여 여러 본의 독립선언문을 동시에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복사기는 과연 어떤 물건이고,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을까요 ?

미국인들에게는 자존심 상하게도, 미국 독립선언문을 복사한 복사기는 영국제였습니다.  제조사는 James Watt & Co. 사였습니다.  예, 바로 증기 기관을 발명했던 바로 그 제임스 와트가 맞습니다.  이 복사기는 1780년에 제임스 와트가 특허를 받은 것으로서, 제임스 와트가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서 만들었습니다.  와트는 사업상 하도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는지 일일이 정확히 기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쓸 때마다 최소한 한통씩 복사본을 만들어 두어야 했었는데, 와트는 나폴레옹이 아닌지라 서기들로 둘러 싸이지 않아서, 자기가 직접 베껴야 했었나 봅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바로 습식 복사기였습니다.  



(이건 강릉 경포대 바로 옆에 있는 참소리 박물관이라는 곳에 전시된 진짜 James Watt 의 복사기입니다.  전 세계에 원본이 이거 딱 1대 남았는데, 그것이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이 박물관에 있다고 하네요.  이 박물관은 한마디로 말하면 에디슨 박물관인데, 처음에는 비싼 입장료 (대인 7천원)에 놀라고, 다음에는 전시품들의 알참과 진귀함에 놀라고, 박물관 직원들의 재미있는 해설에 또 놀랐습니다.  한마디로 강릉 관광가실 때 강추.  돈이 별로 아깝지 않았습니다.)



이 습식 복사기의 원리는 나름 간단했습니다.  잉크도 좀더 진하고 특수하게 만들고, 종이를 아주 얇은 종이를 골라서 문서를 쓴 뒤, 그 원본 문서와 복사지를 맑은 물에 적신 뒤 압착 롤러로 눌러서, 원본 문서의 잉크가 복사지에게도 묻어나도록 한 것입니다.  글쎄요, 이렇게 하면 원본 문서의 품질에도 악영향이 좀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이 습식 복사기는 나름 꽤 인기가 있어서, 제임스 와트에게 상업적 성공, 즉 돈다발을 안겨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작은 나무 상자에 쏙 들어가도록 설계된 휴대용 복사기까지 개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습식 복사기는 20세기 초까지도 일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초기의 이 습식 복사기를 이용하여 제대로 복사를 하려면, 종이를 무려 12시간이나 적셔야 했기 때문에, 성질 급한 나폴레옹의 참모부에서는 결코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 형태의 복사기는 문학 작품에서도 나옵니다.  그리고 '원본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까지도 그대로 묘사됩니다.  바로 발자크의 '관료주의'라는 소설에서입니다.



(사실 저는 이 책 아직 못 읽어보았고, 이 복사기 이야기가 이 책에 나온다는 사실도 참소리 박물관에 전시된 저 Watt 복사기의 설명판을 보고 알았습니다.)



Bureaucracy by Honore de Balzac  (배경 : 1830년대 파리) ------------------------------------

세바스티앙이 절실한 마음으로 그의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속에는 메모와 함께 그가 마저 베껴쓰지 못한 복사본이 순서대로 들어있었고, 그는 그것들을 라부르뎅이 지시한 대로 즉시 책상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12월말 즈음의 이 사무실들은 아침에도 꽤 어두웠고, 실제로 아침 10시까지도 램프를 켜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결과, 세비스티앙은 종이에 남겨진 복사기의 눌린 자국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9시 30분 경에 라부르뎅이 그의 메모를 보았을 때, 그는 즉각 이 문서에 복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그는 복사 담당 서기들의 일을 이런 수기(手記) 압착식 복사기로 대체할 수 없을까 하고 고려 중이었으므로 더욱 쉽게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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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반에도, 이미 과학 기술이 사람들, 주로 저임금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일이 아주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것을 보실 수 있지요 ?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요.  오늘날 프랑스나 영국은 선진국으로서 국민 대부분이 잘 살지 않습니까 ?  확실히 그런 나라들이 실업률이 높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최소한 서류를 베껴쓰는 복사 담당 서기라는 것이 그다지 매력적인 직업은 아닌 것은 확실하지요.

 

** 목요일 재탕글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