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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331

바우첸을 향하여 (8) - 등 떠밀려 결정된 싸움터 엘베 강변에서 연합군이 후퇴한 경위를 대충 들어보면 결국 비트겐슈타인이 지나치게 소극적이어서 후퇴했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다소 달랐습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프랑스군이 엘베 강을 비텐베르크와 벨게른 등 훨씬 남쪽에서 분산 도강할 것이니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을 다시 합세시켜, 나폴레옹에게 일격을 먹이겠다는 심산이었습니다. 즉 아군은 집결되고 적군은 분산된 상태로 싸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디서 그러는 것이 좋을까요? 연합군의 후퇴 동선을 보면 프로이센군의 경로는 약간 남동쪽으로, 러시아군의 경로는 약간 북동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이들이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다보면 결국 이들은 만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대충 그 위치는 바우첸(Bautzen)이었습니.. 2023. 1. 30.
바우첸을 향하여 (7) - 비트겐슈타인의 결정 밀로라도비치가 프랑스군의 기습 도하 작전을 막지 못하고 쩔쩔 매던 5월 9일, 프로이센군의 총사령관은 블뤼허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부상을 입고 있었던 블뤼허는 이 날 특히 상태가 좋지 않아 병석에 드러누웠고, 지휘권을 다른 사람에게 이양해야 했습니다. 상식적인 관례에 따른다면 프로이센 야전군 내의 서열 2위인 요크 대공이 임시 사령관이 되어야 했는데, 뜻밖에도 일개 참모에 불과한 그나이제나우가 지휘권을 이양받았습니다. 이는 프로이센군 위아래 모두가 블뤼허의 모든 작전은 어차피 그나이제나우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통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고 요크 대공 본인도 새파랗게 아랫것인 그나이제나우로부터 명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무척이나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2023. 1. 23.
바우첸을 향하여 (6) - 나폴레옹보다 뛰어난 포병 불타다 남은 러시아군의 부교를 낚아채간 프랑스군이 그걸 수리하는 모습은 강 건너를 순찰하는 코삭 기병들의 눈에도 잘 보였습니다. 아무리 러시아군이 별 생각이 없다고 해도 당장 그 근처에서 프랑스군이 도강을 시도하리라는 것은 뻔했습니다. 바로 2일 전 비트겐슈타인이 엘베 강변을 지킨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그 작전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논리 중 하나는 '나폴레옹이 마치 A지점에서 강을 건너려는 듯 허장성세를 펼치다 멀리 떨어진 B지점에서 강을 건너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뻔히 보이는 도하 시도를 모른 척 할 수는 없었습니다. 드레스덴 노이슈타트에 남아있던 러시아군 수비대 지휘관인 밀로라도비치는 아침부터 여차하면 위비가우 강변으로 뛰어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프.. 2023. 1. 16.
바우첸을 향하여 (5) - 대충대충 러시아군 엘베 강 동쪽의 연합군이 작전 계획에 대해 아웅다웅 하고 있는 동안, 나폴레옹의 군단들은 속속 엘베 강변에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중앙부인 드레스덴에는 외젠 지휘에 막도날의 제11 군단, 마르몽의 제6 군단과 제1 기병군단이, 그 남쪽 프라이베르크(Freiberg)에는 베르트랑의 제4 군단이, 그리고 그 북쪽 마이센에는 로리스통의 제5 군단이 향했습니다. 나폴레옹은 5월 8일 드레스덴 인근에 도착했는데, 처음에는 뭔가 멋진 정치적 의미를 띤 근사한 입성을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부관에게 지시하여, 드레스덴 시청의 책임자를 자신이 있는 인근 마을로 즉각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드레스덴의 다리는 이미 파괴되어 불타고 있었고 시내 분위기도 어수선한 편이어서 그랬는지, 이후 불려온 시청 대표에게는 아주 차.. 2023. 1. 9.
바우첸을 향하여 (4) - 엘베 강 양쪽의 고민 엘베 강을 건너 한숨 돌린 연합군은 이제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사람은 바로 총사령관 비트겐슈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도 딱히 명확한 계획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당연히 궁극적인 목표야 나폴레옹의 패배였지만, 그를 위해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하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싸우지 않고 이길 방법은 없었으니 당연히 언제 어디서에선가 싸우기는 해야 했는데, 그 언제와 어디서가 문제였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이 엘베 강을 건너 추격해 올 것이 자명했으니, 그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급했습니다. 엘베 강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더 유리한 조건에서 싸울 수 있는 후방으로 더 후퇴해야 하는가가 1차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엘베 강을 버리고 후퇴하는 것은 매우 바보 같은 일이었습.. 2023. 1. 2.
바우첸을 향하여 (3) - 샤른호스트의 빈 자리 5월 6일 아침, 나폴레옹은 스파이들로부터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이 각각 따로 엘베 강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매우 흡족해 했습니다. 특히 프로이센은 북쪽의 마이센(Meissen)으로 향하고 러시아군은 예상대로 남쪽의 드레스덴으로 향한다는 것을 듣고, 나폴레옹은 자신이 토르가우로 네의 군단을 보낸 것에 프로이센군이 베를린이 위협받고 있다고 겁을 집어먹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기분 좋게 그 날 저녁 뷔르젠(Wurzen)까지 도착했지만, 프로이센군 중 일부 1만2천 정도만 마이센으로 갔을 뿐 나머지는 모두 러시아군을 따라 드레스덴으로 갔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이 소식에 놀란 나폴레옹은 정확한 정보를 얻기를 원했고, 프랑스군의 진격은 또 잠시 멈춰야 했습니다. 혹시나 이것들이 결별하지 않으면 어떡.. 2022. 12. 26.
바우첸을 향하여 (2) - 민병대의 의미 뤼첸에서 후퇴할 때 드레스덴으로 향한 러시아군과는 달리 프로이센군은 마이센으로 향했으나, 정작 프로이센 국왕은 물론 프로이센군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샤른호스트는 러시아군과 함께 드레스덴으로 향했습니다. 이는 프로이센 수뇌부가 당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뤼첸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소극적으로 행동했다고 하더라도, 이 전쟁의 주역은 러시아군이었고 프로이센군은 러시아군을 보조하는 역할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서 베를린을 지킨답시고 러시아군과 갈라선다면 프로이센은 베를린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 전체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매우 컸습니다. 샤른호스트는 불안해하는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다독거리며 엄청난 분량의 서류를 처리하며 프로이센군의 재편성에 돌입했습니다. 뤼첸 전투에서 잃은 병력을 보.. 2022. 12. 19.
바우첸을 향하여 (1) - 나폴레옹의 꽃놀이패 아무리 잘 싸운 뒤에 수행된 전략적 후퇴이고 아무리 추격자가 없다고 해도, 후퇴하는 군대의 사기가 드높다면 매우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뤼첸 전투로부터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던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잘 싸운 뒤에 하는 후퇴라서 두 나라 군대는 더욱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잘 싸웠는데 왜 후퇴를 하는 것이냐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보통 누군가 남탓을 하기 마련입니다. 보통은 사회의 소수 약자가 그런 비난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습니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유태인 탓을 했고 1812년 후퇴하던 러시아군에서는 러시아군 내의 발트 연안 독일계 장교들 탓을 했지요. 이 경우에는 비난 대상을 찾는 것이 아주.. 2022. 12. 12.
뤼첸 전투 (14) - 나폴레옹의 새 그림 5월 2일 밤, 블뤼허의 프로이센 기병대가 4개 마을의 프랑스군 진지를 야습했을 때만 해도 나폴레옹은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 10시가 넘자, 나폴레옹은 좀 더 안전한 후방 뤼첸으로 돌아가 숙소를 정했습니다. 이건 특별히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습니다. 전투 현장은 거의 언제나 피범벅에 시신이 즐비하고 죽어가는 부상병들의 신음소리가 가득했기 때문에 거기서 총사령관이 숙소를 정하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사령관은 전투가 끝난 뒤에도 할 일이 매우 많았는데, 대부분 지도와 문서 작업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하기 위해서는 책상과 촛불이 꼭 필요했고, 따라서 호화롭지는 않더라도 벽과 지붕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4개 마을 전투를 그로스괴르쉔 전투라고 부르지 않고 뤼첸 전투라고 부르는 이유도 나폴레옹의 숙소와 상.. 2022. 12. 5.
뤼첸 전투 (13) - 혼란 속의 퇴각 연합군의 후퇴 결정이 늦게 내려졌기 때문에 당연히 실제 후퇴도 꽤 늦게 이루어졌습니다. 군대가 후퇴를 시작하려면 의외로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립니다. 총사령관이 결정을 내린 뒤에도 정식으로 명령이 구두 또는 서면으로 일선 대대장들에게까지 전달되는데까지 시간이 걸렸고, 천막이나 탄약, 솥단지 등의 짐을 싸는데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가장 시간이 걸리고 또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후퇴 계획의 작성이었습니다. 어느 부대가 어느 경로를 통해 어디로 후퇴하느냐도 중요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별로 달갑지 않은 후방 엄호 임무에 어느 부대를 배치하느냐 하는 결정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후위 임무에 이번 뤼첸 전투에 전혀 참전하지 않고 자이츠(Zeits)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밀로라도비치의 군단을 배치했습니다.. 2022. 11. 28.
뤼첸 전투 (12) - 프로이센의 분노와 아쉬움 양측이 도합 20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했던 뤼첸 전투는 당연히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며 후세의 역사가들이 나름대로 추측한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프랑스군과 연합군이 각각 얼마씩의 병력을 동원했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기록은 없을 정도입니다. 프랑스측은 약 1만5천, 혹은 2만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고 하고, 연합군측은 그보다는 적은 사상자를 냈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론입니다만, 역사가에 따라 연합군의 피해가 더 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참고로 비트겐슈타인은 공식 보고서에서 프랑스군의 피해는 1만5천, 연합군의 피해는 1만으로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연합군 진영에 있던 영국군 장교 캠벨(Neil Campbel.. 2022. 11. 21.
뤼첸 전투 (11) - 이긴 거야, 진 거야? 나폴레옹 시대에는 아직 세균의 존재 자체를 몰랐고 따라서 소독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며 항생제 따위는 물론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전쟁터에 나간 군인은 언제나 전사보다는 병사의 가능성이 훨씬 높았고, 그냥 찰과상에 불과한 가벼운 부상도 재수가 없으면 치명상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연합군 전체의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던 샤른호스트가 바로 그런 희생자였습니다. 그는 이 날 전투에서 유탄에 발에 맞아 부상을 입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가벼운 부상일 뿐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다들 생각했지만, 거의 2달 뒤인 6월 말, 협상을 위해 오스트리아를 방문했을 때 결국 그 부상이 악화되어 숨을 거둡니다. 그러나 최소한 전투 당일 밤이나 그 후 며칠 동안에는 기본적인 사무를 보는 것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 2022. 1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