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징집된 병사들의 사기는 폴란드 내로 진입하기 전까지는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번에 새로 징집된 어린 병사들은 나폴레옹이 장려한 새로운 공립학교 제도 하에서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심을 제도적으로 교육받고 성장한 아이들이다보니 더욱 그랬습니다.  

병사들은 실질적인 혜택(?)도 꽤 쏠쏠히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원정이 이어질 때마다 프랑스 국민들은 남편과 아들들이 (금지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점령지에서 노략질해온 돈과 귀중품을 가져오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운이 좋지 않아 싸움터에서 횡재를 올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전쟁으로 난리가 난 적국의 마을과 도시에서는 꽤 값이 나가는 물품을 헐값에 사들인 뒤에 관세도 물지 않고 고향 마을로 가져와서 꽤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팔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 중 용감하거나 운이 좋은 친구들이 연금이 딸린 레종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을 받거나 진급을 하거나 아예 장교 계급장을 받아오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생-도밍그(Saint-Domingue, 지금의 아이티) 출신의 한 크레올(Creole, 혼혈이라는 뜻이 아니라 현지 태생이라는 뜻) 병사는 다음과 같이 러시아 원정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거기서 난 무공을 세울 기회를 얻을 것이고, 훈장과 진급을 따내어 자랑스럽게 온 세상에 으시대며 보여줄 거다.  1년 안에 난 소령(chef de bataillon)이 될 거고 원정이 끝날 때 즈음엔 대령이 될 거다.  그 다음엔..."


(근위대 엽기병(Chasseurs a cheval) 대령 군복에 달린 레종도뇌르 휘장입니다.  나폴레옹 시절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은 사람은 약 48,000명으로서, 대부분은 군인이었습니다.  1802년 만들어진 이 훈장의 수상자들은 빠르게 늘어나서 생존 수상자 수는 1806년에 13,000명, 1814년에는 거의 2배인 25,000명에 달했습니다.)



이런 들뜬 분위기는 '철없는' 졸병 젊은이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파리의 많은 상류층/부유층 젊은이들, 즉 jeunesse doree(쥬네스 도레, '금칠을 한 젊은이')들이 '빽'을 이용하여 장교로 진급을 하고 부대를 옮겼는데, 주로 멋진 군복과 겉멋 때문에 기병대로 가거나 나폴레옹과 만날 가능성이 있는 참모진으로 배속되었습니다.  이런 젊은 장교들은 한탕주의에 들뜬 졸병들보다 오히려 더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낙천적인 한탕주의는 군인들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은 역대급 규모를 자랑한 것만큼 보조 지원 인력도 많이 필요했는데, 거기에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민간인들이 잔뜩 몰려들었습니다.  원정길에서의 보급품 구매와 징발, 분배 및 수송 등을 책임지는 군 보급관(commissaire)은 비록 군복을 입고 검과 권총 등으로 무장을 하긴 했지만 본래 신분은 어디까지나 민간인이었습니다.  이런 보급관 뿐만 아니라 서기관이나 비서 등 원정군에는 행정일을 하는 민간인이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대부분은 험한 군사 원정길에는 처음 참여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 했습니다.  드 생-샤망(de Saint-Chamans) 대령은 이들에 대해 이렇게 불평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야전군 행정부에는 이렇게 전쟁이라고는 구경도 못해보았지만 한몫 단단히 챙기기 위해 이 원정에 참여했다고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인간들이 가득했다."

야전군에 딸린 민간인이 이런 행정 사무직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제각각 한두 명씩의 하인들을 데리고 참전했습니다.  이런 하찮은 관직의 민간인들이 그랬으니, 장교들은 어떻겠습니까 ?  모든 장교들은 최소한 1대 이상의 짐마차를 대동했습니다.  이런 마차에는 장교가 품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물건들, 즉 여분의 군복과 여분의 무기, 책과 지도, 식료품과 생활 편의품들이 실려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소한 한 명 이상의 하인이 딸려 있었고, 마차를 모는 마부도 따로 있었습니다.  

소위 중위 나부랭이들이 이 모양이었으니 장군 정도 되면 클래스가 달랐습니다.  엄격하기로 소문난 다부(Davout) 원수의 제1 군단 산하 제5 사단의 지휘관은 콩팡(Compans)이라는 이름의 장군이었는데, 이 분은 결코 허영에 물든 쾌락주의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다부의 부하답게 꽤 검소한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분이 개인적으로 원정에 동반한 민간인 식솔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급사장(maitre d'hotel) - 루이(Louis) 
실내 시종(valet de chambre) - 뒤발(Duval)
마부(cocher) - 보(Vaud)
시종(valet) - 시몽(Simon)과 루이(Louis)
경호원(gendarme) - 트루이예(Trouillet)
기타 하인 - 피에르(Pierre), 발렝텡(Valentin), 장비에(Janvier)
승객용 마차를 끄는 말 5마리
사람이 타는 말 6마리
짐말 30여 마리
승객용 마차 1대
짐마차 여러대

장군님께서 원정을 떠날 때 이 정도의 개인 식솔을 거느리는 것은 당시 유럽 사회에서 놀라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796년 이탈리아 원정을 떠날 때의 나폴레옹 휘하 장군들은 이런 호화스러운 살림살이를 끌고 다닌 것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조차 병사들의 빵 수프나 모닥불에 구운 감자를 얻어 먹거나 아예 쫄쫄 굶는 일이 많았으니까요.  항상 가볍게 움직이던 나폴레옹의 부하 장군들이 어쩌다 이렇게 오스트리아 장군이나 프로이센 장군과 별다를 바 없게 되어버렸을까요 ?

일이 이렇게 된 것에는 무엇보다 나폴레옹 본인의 잘못이 가장 컸습니다.  그는 항상 유럽 왕조들의 진짜 왕들 앞에서 코르시카 출신의 벼락 출세꾼 또는 찬탈자라는 컴플렉스가 있었고, 그 때문에라도 황제가 된 이후 부하들에게 '진짜 귀족들처럼' 호화로운 복장 및 우아한 예절과 사치스러운 살림살이를 갖추도록 장려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여관집 아들 채소 가게 아들 출신들이었던 부하들이 좀 창피했던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의 그런 장려책에 대해 마세나나 베르티에, 술트 등과 같은 부하들도 매우 기뻐하며 그런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습니다.  대부분 40대였던 그의 부하 원수들은 파리에서의 우아하고 편안한 생활에 익숙해져 배에 기름도 붙은 상태였습니다.  이제 험란할 것이 뻔한 새로운 원정을 떠난다고 해서 과거처럼 더 승진할 자리도 없어 보였으므로, 이들은 그다지 열의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훗날 나폴레옹 관련 회고록을 남겨 유명해진 펭 남작(Agathon Jean Francois Fain)은 당시 나폴레옹 직속 비서이자 기록관이었는데, 그는 이때 상황에 대해 부하 장군들이 과거와는 달리 내키지 않아하는 태도로 이번 원정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나폴레옹이 꽤 놀랐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펭 남작입니다.  영국 영화배우 제임스 맥어보이와 좀 닮았네요.  그는 기록관답게 은퇴 이후 나폴레옹 관련되어 여러편의 책을 냈는데, 특히 1908년에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Memoires du Baron Fain, Premier Secretaire du Cabinet de l'Empereur, 즉 '황제 내각의 수석 비서관 펭 남작의 회고록'이 매우 유명했습니다.)



특히 이번 원정은 상대가 머나멀 뿐만 아니라 끔찍하게 넓은 러시아였으므로, 정말 장기간 원정이 되리라고 다들 예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들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비축품과 각종 편의시설을 챙겨가려 했습니다.  그건 중위 나부랭이부터 군단장들까지 다 일치된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서는 나폴레옹조차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건 꼭 나폴레옹을 비난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비록 국민의 지지에 기반한 군주이긴 했지만, 어쨌건 독재자였습니다.  근본적으로 독재자의 제1 걱정거리는 권력 유지였고, 나폴레옹처럼 자주 먼 군사 원정길에 나서야 했던 독재자는 항상 권력의 중심인 권력기관, 그러니까 파리와의 연락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원정은 목적지가 러시아였습니다.  언제나처럼 나폴레옹의 이동 사령부와 파리를 연결해줄 쾌속 파발마 네트워크가 촘촘히 연결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이번 원정에는 자신의 궁정 기관 중 핵심 인원을 아예 다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관료 인원들이 원정길에서도 정상적으로 일하고 생활하도록 하려면 필요한 살림살이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러시아 원정을 떠나는 길목인 드레스덴(Dresden)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를 포함한 자신의 동맹국 및 위성국들의 군주들을 모두 소집하여 자신의 위세를 온 유럽에 각인시켰습니다.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라도 나폴레옹의 행차에는 으리으리한 규모의 인원과 짐이 따라다녔습니다.

 

(1812년 5월, 러시아로 향하는 길인 작센 왕국의 수도 드레스덴(Dresden)에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와 황비 루도비카를 만나는 나폴레옹과 마리-루이즈입니다.  당대 최고의 영웅인 나폴레옹의 아내가 된데다 호화로운 파리의 궁정 생활에 아주 흠뻑 빠져 자아가 부풀어 오를대로 올랐던 마리-루이즈는 여기서 아버지인 프란츠 1세를 대하는 것인데도 목에 깁스를 한 것처럼 도도하고 오만하게 굴어 많은 이들의 빈축을 샀다고 합니다.  오른쪽의 남녀는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부부입니다.)

 



나폴레옹의 원정길 살림살이는 바로 직전까지 러시아 대사였다가 돌아온 콜랭쿠르(Caulaincourt)가 마복시(Grand Ecuyer) 직을 맡아 준비했습니다.  나폴레옹의 개인 화물에는 다양한 텐트와 야전 침대, 책상 및 필기류, 옷장, 은식기와 조리 기구, 식료품과 와인류, 각종 상비약 상자 등이 딸려 있었습니다.  이런 짐들의 규모는 그 수송 엔진 규모를 보면 대략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이 짐들은 약 400마리의 짐말과 40여 마리의 노새가 끌거나 실었고, 사람이 타는 말만도 130여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폴레옹의 근위대와는 별도로 순수하게 나폴레옹 개인의 종군 민간인들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결국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지요.  

 

(이건 파리의 군사박물관(Musee de l’Armee)에 전시된 나폴레옹의 개인 텐트 및 책상의 재현품이라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싣고 간 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호화로왔을 것입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원정에서의 편한 생활을 위해 살림살이만 신경쓴 것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백전노장인 그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특히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습니다.  나폴레옹은 각 부대마다 독일어나 폴란드어,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장교들을 배속시키고 또 장교들에게 러시아어 수업을 받도록 독려했습니다.  어차피 러시아군 장교들은 거의 100% 모두 프랑스어를 꽤 잘 했기 때문에 러시아군과의 의사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러시아군 부사관들이나 병사들을 포로로 잡을 경우에 대비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간첩들도 러시아 서부 지역까지 쫙 풀어서 정보망을 넓히고 군수품 담당부(Depot de la Guerre)에게 동부 폴란드는 물론 리투아니아와 러시아 주요 지역의 확대 지도를 대량 인쇄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지도는 철저히 군용으로 만들어 도로와 강, 늪지와 숲 등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나중에 보시겠습니다만 이로 인해 러시아군이 가진 러시아 지도보다 프랑스군이 가진 러시아 지도가 더 정확한, 웃기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나름대로 철저하게 침공 준비를 하는 동안, 러시아군은 과연 어떤 철통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을까요 ?  그게... 또 좀 그랬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Agathon_Jean_Fran%C3%A7ois_Fain
https://en.wikipedia.org/wiki/Legion_of_Honour
http://www.napoleonguide.com/legionorg.htm
https://en.wikipedia.org/wiki/Armand-Augustin-Louis_de_Caulaincourt
https://seetheworld.travelforkids.com/napoleon-bonaparte-paris-with-kids/

https://www.napoleon-histoire.com/1812-napoleon-a-dres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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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9.10.21 07: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새는 지금 출근해서 항상 이시간대에 확인하네요.

    프랑스 혁명전쟁과 비교하셨는데 꽤 맞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도 이미 공화정 시절 혁명군과 제국 대육군의 전투력 저하가 심각하다고 느낀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혁명전쟁 당시 프랑스군은 심지어 소총조차 부족해서 모리스 드 삭스 원수가 주장했던 대기병용 장창을 민간에 50만 자루나 발주할 정도로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플랑드르 전역 이후 연전연승을 거두었는데 이베리아 전역 이후 제국군에는 그런 투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상당히 말이 많았습니다. 혹자는 '혁명전쟁 당시 프랑스군은 앙시엥 레짐에 고통받고 있는 민중들을 위한 새로운 시대의 선봉'이라는 싸울 수 있는 이유를 명확히 제시했기 때문에 강했지만 제국군 시절에는 더 이상 그런게 없었고 상대방에게는 압제자였을 뿐이라고 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지도문제. 프랑스군 같은 경우 이미 17세기부터 국가적 프로젝트로 정밀지도 확보에 공을 기울입니다. 루이 14세가 1660년대부터 시작한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 카시니 가문이 4대 100년에 걸쳐서 만든 1/86400 축적도를 시작으로 이 시기까지 계속 전 유럽지역에 대한 지도 확보를 했으니까요. 반면 러시아군 같은 경우에는 지도에 대해 19세기 후반에서야 어느 정도 체계를 잡습니다. 이러니 러시아 원정 당시 지도 덕분에 그나마 그 병력이라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역사상 지도로 전쟁을 말아먹은 경우가 1차 세계대전과 독소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인데 특히 독소전쟁 시기에는 심각했습니다. 가뜩이나 1차 세계대전 후반 독일군이 획득한 제정러시아 지도 및 관계자료가 많았는데 거기에 항공정찰까지 제대로 되어 스몰렌스크까지는 독일군의 지리정보가 소련군보다 더 정확한 수준이었으니까요.

    여기서는 이야기가 없지만 대량의 위폐를 찍어낸 것도 있습니다. 이건 프랑스가 거쳐간 모든 국가에서 마찬가지였지만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면 가장 먼저 접수한 곳이 바로 조폐창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조폐원판이 있었거든요. 러시아 원정 준비 당시 마음껏 약탈하게 놓아둔(?) 이유 중 하나가 나중에 가지고 있는 원판으로 지폐 찍어서 뿌리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원정 당시 프랑스군이 찍어간 루블이 최소 수천만 단위인데 이거 때문에 원정 이후 러시아 경제가 개판납니다. 프랑스군이 마구잡이로 살포한데다 정화준비는 도저히 이를 맞출 수 없었으니까요. 폴란드는 더 심각했는데 오죽하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제3차 폴란드 분할 당시 획득한 영토를 도저히 경제적으로 맡을 역량이 안 되다보니 러시아에 할양할 정도였습니다. 왜냐고요? 바르샤바 대공국의 조폐원판으로 찍어낸 러시아 원정 비용이 당시 대공국 1년 예산을 한참 뛰어넘었고 이걸 맡을 경제적 역량이 두 나라에는 없었으니까요.

  2. Franken 2019.10.21 15: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및 부하들이 사치향락에 쓸 물품을 빼고 예전모습으로 돌아간다 해서 승률은 별 차이가 없겠지만 그래도 많이 아쉽군요. 뭐 인생 잘 살아볼려 기를 쓰고 올라간 사람들이니 쉽게 포기할리는 없지만...

  3. 흠흠흠 2019.10.21 1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스로 황제 자리까지 올라갔으면 열등감을 가질 게 아니라 자랑스러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면전에서 너희는 무능하고 나는 유능하다고 깔아뭉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카를대공 2019.10.21 2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래는 그래야 하는데 사방팔방이 타고난 금수저들이면 자기도 모르게 쪼그라들고 컴플렉스 생기는게 사람 이치 같더군요.

      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사회적 약소계층한테 노력 안 하냐며 더 윽박지른다 하고,사회적 약자가 성공하면 자신이 속했던 그룹에 더 모질게 군다지 않습니까

      나폴레옹도 성공하고나니 세상 풍경이 다르게 보였던 거겠지요.

    • Playzone 2019.10.22 16: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주원장이 예외적이죠. 명나라 건국 이후 자기 조상을 주희로 조작하려다가 그 후손이 자기 앞에서 벌벌 떠는걸 보고 저런 서생보다 흙수저 거지 탁발승에서 황제가 된 내가 더 뛰어나지않겠냐고 때려치웠거든요.

  4. 카를대공 2019.10.21 2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클은 아닌데 요샌 맥어보이 성씨 쓰던 사람을 매커보이로 표기하더군요.

    토튼햄->토트넘처럼 이런게 표준 문법인가 봅니다.

  5. Wafflegui 2019.10.22 0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튭에 epic history라는 채널에 나폴레옹 전쟁의 주요 전역과 전투만 다룬 영상이 있는데 실시간으로 부대위치가 이동하는 영상화가 수준 높아서 최근에 보고있어요. 주인장님만큼 세세한 일화와 필력은 없지만 머릿속에서 지도로 상상하는것과 달리 전투를 한눈에 볼 수 있어서 한번쯤 보시는것도 재밌겠네요.

  6. arandel 2019.10.22 2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저 약탈이 프랑스인들이 나폴레옹을 지지한 진짜 이유였을까요? (농담^^) 유럽 각지에서귀중품을 털어왔다면 상당했을텐데 으음...글구 보니 프랑스 혁명떄 프랑스 경제도 곤란했고 서민들도 곤궁했는데 설마 저런 식으로 메꿔졌기 때문에 좀 경제가 나아진 걸까요 .

    • Dogswellfish 2019.10.22 2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애초에 프랑스가 공격적으로 나갔던게 파탄난 경제를 약탈 경제로 해결하기 위함이였음

    • nasica 2019.10.23 07: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생각해보면 프랑스 혁명 이후 (초반의 아시냐 지폐 등 바보짓으로 인한 혼란 이후에) 경제 활력이 나쁘지 않았던 것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당시의 빈약한 산업 환경에서 결국 가장 큰 생산 수단은 역시 토지였는데, 대부분의 토지를 쥐고 있던 소수의 귀족과 교회로부터 빼앗아 다수의 부르조아 및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으니까요. 물론 그게 공산당식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아니었고 유혈몰수 유상분배이긴 했습니다.

      저도 그에 대한 통계자료 등은 보지 못했는데, 언젠가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 좋겠네요.

    • reinhardt100 2019.10.23 0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혁명전쟁 이후 프랑스군은 어디를 가든 약탈을 하는 건 기본이었습니다. 북이탈리아 정복전에서 단 베네치아령 롬바르디아에서만 6개월만에 '공식적으로' 2천만 프랑을 무상징발했었으니까요.

      이 당시 프랑스 경제는 말 그대로 거대한 군수경제, 즉 정부지출의 극적인 팽창이 경제성장을 이끄는 한 축이 되고 있었지만 숙련된 노동력 부족이 가시화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시기까지 징병된 소년 및 청년 인구가 이미 150만에 가까웠는데 문제는 주르당법과 후속법률, 각 전선에서의 병력수요 때문에 사회에 복귀하기 어려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시카님 말씀대로 농업생산력이 주된 경제생산의 한 축인 시대에 이 상황은 그대로 생산력 감퇴와 직결되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 당시 프랑스 본토나 북이탈리아 등 제국의 핵심 농업지역은 노동력 부족이 심해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경제적으로 침체가 시작되었다는 보고가 각 데파르트망으로부터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탈레랑이나 푸셰같은 사람들이 괜히 우려한게 아닙니다. 자칫하다 경제가 아작난다는 결론이 날 수 밖에요. 게다가 중농주의의 발상지인 국가니 더욱 그 파급효과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시냐, 이게 의외로 프랑스 내부의 채무관계를 해소시켜준 결과를 낳긴 합니다. 가장 유사한 사례가 1920년대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인데 양자 모두 채무자의 채무부담을 급속하게 감소시켜주었다는 겁니다. 막판에 나시카님 말씀대로 액면가 1/300 수준까지 가는 바람에 총재정부와 통령정부가 발행 초기 약속대로 교회 및 망명한 귀족 소유 토지의 소유권 이전 형식으로 상계 및 소각처리 합니다.

      유혈몰수, 이게 가장 극단화된 동네가 방데였는데 사실 남부 지역 상당수, 특히 프로방스나 랑그도크, 루시옹 같이 교황령 등 외국 제후령이 있는 지역은 방데 수준은 아니더라도 유혈이 꽤나 심각했습니다. 그러니 왕정복고 후 백색테러가 벌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장 자기 땅 찾으려면 뺏아간(?) 소유주를 자력구제(?)로 해결해야 했으니까요.


'곳간에서 인심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건 진짜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명언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들에게서 염치, 질서, 관용, 정의 따위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그들이 군복을 입고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단치히나 기타 주요 군수 창고에 얼마나 많은 군수품이 쌓여 있든 당장 배가 고픈 군대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11 경보병 연대 소속 쥬세페 벤투리니(Giuseppe Venturini)라는 피에몬테(Piemonte) 출신의 중위는 자신이 수행하는 '징발'로 인해 2~3백 가구가 당장 거지꼴이 되었다면서 마음이 아프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징발 결과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장교가 수행하는 징발은 그나마 양반이었습니다.  원래 프랑스군의 현지 조달 및 징발 기술은 예술의 경지에 달한 것이어서, 다들 굶주리고 바쁜 와중에도 효율적으로 식량을 수집하고 적재적소에 분배했을 뿐만 아니라 식량을 빼앗기는 현지 주민들에게 영수증도 꼬박꼬박 써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척박한 폴란드 현지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뒤져도 나오는 것이 거의 없는 현실에 분노하고 짜증이 난 병사들은 죄없는 폴란드 농민들의 집과 창고를 마구 때려부쉈습니다.  특히 이들은 각자의 소속 국가의 깃발 아래가 아니라 그랑다르메라는 다국적 군대의 깃발 아래 움직이는 것이다보니 몰염치가 더욱 심했습니다.  심지어 폴란드군까지도 폴란드 농민들을 마구 약탈했습니다.

제5 폴란드 기마 라이플병 연대의 18세짜리 소년 대위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자기들이 가져가는 것, 심지어 가져가기 원하는 것 이상으로 때려부쉈다.  민가에 들어가서는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박살을 냈다.  창고에는 아예 불을 질렀다.  밀밭이 있을 경우, 그 한가운데로 말을 몰고 들어가 마구 짓밟으며 말에게 설익은 밀을 먹였는데, 먹이는 것 이상으로 많은 밀을 완전히 망쳐놓았다.  이건 불과 두어 시간 뒤에는 뒤따르는 그들의 굶주린 동료들도 거기에 와서 말을 먹여야 한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의미한 파괴행위였다."

일이 이렇게 되다보니 그랑다르메가 집결하는 네만 강 서안 지역은 분명히 아군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길 가의 집들은 모두 창문이 깨지고 울타리는 장작불에 쓰느라 뜯겨졌으며, 많은 집들이 반쯤 무너져버렸습니다.  군복이 보이기만 하면 주민들이 도망치던 폴란드는 그나마 양반이었습니다.  동프로이센에서는 이런 난장판에 민족적 감정까지 더해졌습니다.  발에 물집이 생기는 작은 부상이든 티푸스든 어떤 군대에게나 낙오병은 반드시 생깁니다.  그런 낙오병들은 동프로이센 주민들의 습격을 받고 학살되었습니다.  그랑다르메 소속의 같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병사들도 습격 대상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그랑다르메 병사들도 똑같은 적개심을 가지고 동프로이센 주민들을 대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예프 아빌(Jef Abbeel)이라는 병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숙영하는 마을마다 주민들의 가축을 필요 이상으로 모조리 도살하고 술과 식량을 빼앗는 것은 물론, 꽤 떨어진 인근 도시에 가서 자기들이 주문하는 물건을 구해오라고 주민들을 내몰았습니다.  주문 품목 중 하나라도 못 구해오면 몽둥이 찜질로 교육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심하다고 주민들에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거절할 경우 주민들은 역시 또 흠씬 두들겨 맞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주민들의 감정은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힌덴부르크 장군은 '동프로이센 사람들은 독일인이라기보다는 슬라브인에 가깝다'라며 투덜거린 바 있습니다.  실제로 동프로이센은 독일화가 많이 진행되긴 했지만 원주민인 슬라브인들을 소수의 독일계 튜톤 기사단이 정복해서 만들어진 왕국이므로 힌덴부르크의 말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도 동프로이센이 프로이센 왕국의 발상지인지라 프로이센 왕국에서 동프로이센이 차지하는 상징적인 의미는 컸습니다.  가령 윗그림의 1861년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즉위식은 동프로이센의 수도인 쾨니히스베르크(Konigsberg)에서 열렸습니다.  이 빌헬름 1세가 어린 시절인 1806년 나폴레옹에게 쫓겨 엄마와 함께 메멜까지 도망쳐야 했던 어린 왕자가 맞습니다.  또 임마누엘 칸트도 바로 이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이지요.  지금 쾨니히스베르크는 러시아의 해군 도시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가 되었습니다.)  

 



앞서 나폴레옹이 대규모로 징집된 신병들의 숙련도에 대해 걱정하는 부하의 말에 대해 심리전에 있어서 질보다는 양이 중요하다며 일축했다는 일화를 언급했었지요.  그랬던 나폴레옹도 폴란드의 포즈난(Poznan)에 입성할 때 그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한 폴란드 비스툴라(Vistula) 군단을 실제로 보고는 꽤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이 부대는 최근까지 스페인에 파견되어 있다가 러시아 원정을 위해 막 귀환한 상태였는데, 사상자로 인한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많은 수의 신병들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는 이 군단의 지휘관인 모르티에(Mortier) 원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친구들은 너무 어리군.  내게 필요한 건 전장의 고생을 견딜 만한 병사들일세.  저렇게 어린 친구들은 야전 병원만 가득 채울 뿐이야."

 

 

(모르티에(Édouard Mortier) 원수입니다.  그의 이름은 재미있게도 프랑스어로 박격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훗날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립 왕 밑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냈는데, 루이 필립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1835년의 폭탄 테러에서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루이 필립이 그의 죽음을 무척이나 슬퍼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나이 어린 친구들에게 편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다부 휘하의 제85 전열 보병 연대의 한 소령은 네만 강가에 도착할 때까지 신병의 20%를 잃었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식량도 부족한 상태에서 먼 길을 일정에 맞춰 행군을 하다보니 탈진과 질병, 소소한 부상으로 쓰러진 병사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많았습니다.  당연히 도망병들도 많았고 심지어 자살하는 병사들도 꽤 있었습니다.  말의 경우는 더 심각했습니다.  1812년 봄은 특별히 기온이 낮았습니다.  이로 인해 곡식 뿐만 아니라 풀도 늦게 싹을 틔웠습니다.  나폴레옹이 굳이 6월 말까지 러시아 원정을 기다린 것은 말이 부족한 사료 대신 뜯어 먹을 풀이 충분히 자라길 기다린 것이었는데, 그게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근위 포병대의 불라르(Boulart) 대령은 이렇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린 초지의 풀을 잘라 걷어들였는데, 그게 다 떨어지자 밀과 보리, 귀리를 걷어들여야 했는데, 그것들은 이제 막 싹이 튼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 해 수확을 망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 말들에게 최악의 사료를 주면서 중노동을 시키느라 말들의 죽음을 준비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흔히 말 사료라고 하면 귀리나 옥수수를 떠올리는데, 의외로 말은 세심하게 사료 성분을 조정해주어야 한답니다.  가령 귀리에는 인 성분이 풍부하고 칼슘이 부족한데, 이는 말에게 필요한 비율인 칼슘:인 = 2:1과는 정반대의 비율이라서 귀리 위주로 사료를 줄 때는 반드시 석회가루 같은 것을 추가해서 칼슘 성분을 보완해줘야 한답니다.  또 옥수수 같은 경우 전분이 풍부해서 좋긴 한데 옥수수를 갈아서 준다고 해도 말은 옥수수 성분의 45% 정도 밖에 소화를 못 시킨다고 합니다.  흔히 덩치 큰 말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생존력 자체는 사람이 더 좋은 모양이에요.)  

 

 


실제로 아직 네만 강을 건너지도 않았는데 위에 언급한 이유로 죽은 말들이 꽤 많았습니다.  길가에는 그런 말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고 그것들을 을씨년스럽게 개들과 까마귀떼가 뜯었습니다.  말들이 죽었으니 그 말들이 끌던 짐마차도 당연히 버려졌습니다.  나폴레옹의 의붓아들 외젠 밑에 소속된 바이에른(Bayern) 장교 하나는 죽은 말과 버려진 마차의 수가 많은 것에 놀라 아래와 같이 적었습니다.

"누구든 이 광경을 보면 전진하는 군대가 아니라 허겁지겁 퇴각하는 군대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 장군들과 장교들의 임전 태세는 과거에 비해 크게 태평한 편이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www.paulickreport.com/horse-care-category/which-is-which-matching-feed-ingredients-with-nutrients/

https://en.wikipedia.org/wiki/%C3%89douard_Mortier,_Duke_of_Tr%C3%A9vise

https://en.wikipedia.org/wiki/East_P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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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9.10.14 07: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엘베강 이동의 독일어권은 8세기 말 작센족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공세부터 꾸준히 넓힌 결과입니다.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엘베강에서 오데르 강까지 각종 변경백령들이 세워지지만 983년 벤덴족 대반란 이후 싸그리 날아가버립니다. 이 때 신성로마제국은 이탈리아의 베렝가리오와 분쟁 중이서서 대응하지도 못했고요. 이후 1120년대부터 다시 시작된 동방식민운동 (Ostsiedlung)이 본격화되면서 제대로 공세를 퍼붓기 시작합니다. 북방의 덴마크와 스웨덴, 남부의 작센까지 서방 카톨릭권의 동부 전체가 동방 슬라브권 정복을 개시한 것인데 그 규모는 성지 예루살렘으로 가는 십자군 이상으로 컸고 인력도 지속적으로 공급되었습니다. 엘베강 이동의 뤼베크, 로스토크, 슈테틴, 단치히,리가 등 해상 보급이 용이한 하구에 게르만족 도시가 들어섰고 1140년대 이후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이 대규모 십자군을 구성하여 동방식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이후 덴마크의 발데마르 대왕이 한 때 발트해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구축한 것을 시작으로 덴마크는 외젤(사레마) 및 에스토니아 북부를 스웨덴은 핀란드와 카렐리야, 라플란드를 자신들의 십자군으로 정복하기 시작합니다.

    스칸디나비아와 달리 발트해 및 폴란드 지역은 초기에는 리보니아 수도회(검우기사단) 및 독일계 상인들이 정복전을 개시하지만 프루스족에 대패하면서 주도권은 우트르메르와 트란실바니아에서 철수하기 시작한 독일 기사단에 넘어가고 50년에 걸친 정복전이 시작됩니다. 프루스 족 및 발트해 연안 민족들 또한 헤르쿠스 만타스 등이 이끈 1274년~1281년까지의 대반란으로 저항하지만 1290년까지 리투아니아를 제외한 전역을 정복하는데 성공합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이 때부터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동방 러시아 공국들을 정복하기 시작하였고 비테니스 대공은 백러시아(현 벨라루스), 게디미나스 대공은 키예프 등 드네프르 강 연안과 붉은 러시아(현 갈리치아 및 볼히니아) 등의 루테니아 전역, 알기르다스 대공은 모스크바를 제외한 모든 러시아 공국 및 부크강 연안 및 흑해 일부 해안가까지 확장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때 리투아니아는 막말로 말이 대공국이지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이어진 제국 수준이었습니다. 이 당시 주요 전투만 해도 1362년 키예프 부근의 푸른강 전투, 1399년 제1차 폴타바(보르스클라 강) 전투 등 평균 5만 이상을 동원한 전투들이었고 생존 그 자체가 걸린 리투아니아는 계속해서 싸우면서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상대편인 독일 기사단 역시 1320년대 단치히 획득 및 1346년 덴마크로부터 에스토니아 북부와 외젤과 비크 주교령을 구입하였습니다. 또한 리투아니아를 계속해서 공략해서 1382년에는 빌나우스를 사정권에 두었고 1399년에는 사모기티아 정복, 1402년에는 노이부르크 획득까지 성공해 서로는 브란덴부르크, 동으로는 에스토니아까지 발트해 남부 연안 절반을 육로로 연결한 대국으로 발전합니다.

    1410년 제1차 탄넨베르크(그룬발트) 전투가 대동방 십자군의 절정인데 이 전투에서 독일기사단이 이겼으면 현재 우랄 산맥 이서 전역은 독일민족권으로 확실히 편입되었을 정도로 북방 십자군 역사상 최대 전투였습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승리하면서 50년에 걸친 재정복전이 벌어지고 1453년~1466년의 13년 전쟁으로 독일기사단이 폴란드왕국에 신종하면서 동방식민운동은 마침내 종료됩니다.

    다만, 18세기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볼가강 개발을 위해 독일계가 이주한 적은 있습니다

  2. Franken 2019.10.14 1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영토에 진입도 안했는데 벌써 패망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군요.

  3. 루나미아 2019.10.14 2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 보급이...

  4. 2/28일 입대 2019.10.15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랑다르메라는 다국적군!이라는 표현이 가장 와닿네요. 조별과제가 망하듯이 원정도 초장부터 아주 막장이군요. 마치 스페인에 파견된 프랑스군마냥 필요이상의 학대까지 저지르고 있구요;;

  5. arandel 2019.10.20 08: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원정 다음편이 기다려집니다. 나시카님의 글로 본 러시아 원정기가 기대됩니다.
    아 그리고 나시카님, 양해를 구할까 해서요.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아이티혁명에 대한 글부분에서 아이티 봉기가 부두교 술사의 예언으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제가 제 블로그에 글쓸때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그런 이야기를 읽었다고 인용해도 될까 해서요. 나시카님의 글을 링크와 함께 인용해도 괜찮을까요?

  6. arandel 2019.10.21 1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나시카님 그럼 저도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본 글에서 이 정보얻었다는거 밝히면서 글 쓰겠습니다.

 

전에 다양한 기준으로 구별되는 유럽의 이모저모 중에서, 술의 종류로 구별되는 유럽은 크게 3조각이라는 자료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남부 유럽은 와인, 북서부 유럽은 맥주, 북동부 유럽은 보드카입니다.

(전체 20개로 구분되는 지도의 소스는 여기 https://www.reddit.com/r/MapPorn/comments/21nt0m/20_maps_of_prejudice_in_europe_1280_x_1920 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13번 즉 맛있는 유럽과 맛없는 유럽의 구분에 공감이 갑니다.  이유는 그게 거의 5번 즉 토마토 유럽과 감자 유럽의 경계선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토마토는 감칠맛을 내는 글루탐산이 듬뿍 포함된 천연 조미료거든요.)

 

(저 위의 지도에서 덴마크가 보드카 지역으로 분류된 것은 좀 뜻 밖이었습니다.  저는 덴마크가 칼스버그(Carlsberg) 같은 훌륭한 맥주 브랜드를 보유한 맥주 지역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보드카 벨트를 파란색으로 표시한 윗 지도를 보면 확실히 덴마크는 보드카 지역이 아니라 맥주 지역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지역이 스웨덴과 노르웨이, 덴마크를 뜻하는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덴마크에서도 보드카를 많이 마시긴 할 것 같아요.)

 



나폴레옹의 지시에 따라 네만 강 서안에 집결하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병사들도 그 차이를 명확하게 느꼈습니다.  독일에서 폴란드로 넘어가면서 매 끼니 때마다 마시던 맥주가 보드카로 바뀌었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맥주가 보드카로 바뀌었다는 점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독일을 지날 때만 해도 비록 질기더라도 고기와 감자를 맥주로 씻어넘겼는데, 폴란드에 들어오니 맛대가리 없는 보드카와 함께 주어진 음식이 기껏해야 메밀 죽이었습니다.  그나마 질이 나쁜 보드카라도 꾸준히 주어지면 다행이었는데 종종 빵을 발효시켜 만든 약알콜 음료인 크바스(kwas, kvass, 러시아어로는 квас)가 보드카 대신 주어졌습니다.  크바스의 알코올 함량은 대략 1% 정도로서, 중서부 유럽 사람들에게는 보리차나 다름없는 싸구려 스몰 비어(small beer)에 해당하는 음료였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습니다.  가난한 동네로 진입해서 먹고 마시는 사정이 안 좋아졌다는 것이었습니다.  


(크바스는 원래 빵을 발효시켜 만든 슬라브 음료로서,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및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에서도 즐겨마시는 음료입니다.  다만 다른 유럽 지역에서는 명성보다는 악명이 자자한 모양입니다.  맛은 그냥 신맛이 난다고 하는데, 원래 어원인 러시아어의 квасить '크바시트'라는 단어가 시게 만든다는 뜻이랍니다.)

(러시아 식음료를 파는 온라인 몰에서의 크바스 가격입니다.  2리터 짜리 크바스가 4천원 정도네요.  운송비와 관세 등을 생각하면... 확실히 싸군요.)



제8 엽기병(Chasseur a Cheval) 연대 소속의 줄리앙 콩브(Julien Combe) 중위는 폴란드에 들어서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전까지의 행군은 유람길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랑다르메(Grande Armee)의 행군길 분위기가 갑자기 바뀐 것은 당연히 폴란드와 동(東)프로이센이 가난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이 지역이 가난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서유럽에서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멀다보니 서유럽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은 물론 농업 혁명조차 제대로 전파되지 못한 것이 컸겠지요.  분명한 것은 원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17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북서부 유럽에 곡물을 수출하던 곡창지대였다는 것입니다.  단치히(Danzig, 즉 그단스크 Gdansk)는 그때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잉여 곡물을 북서부 유럽으로 수출하며 흥성했던 항구도시였거든요.  다만 17세기 중반, 폴란드-리투아니아 의회에 만장일치제도가 도입되면서 정치적 혼란에 따른 내분과 외세 침략이 겹쳤고, 덕분에 인구 증가율도 떨어지고 곡물 생산량도 대폭 줄어들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가난하던 이 지역을 더 가난하게 만든 것은 바로 다름아닌 나폴레옹 자신이었습니다.  


(17세기 중반 이후 폴란드 곡물 수출의 급감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윗 그림은 '곡물이 돈이 된다'라는 뜻이고 아랫 그림은 '곡물이 돈이 안된다'라는 뜻이랍니다.  두 그림에서 뭐가 다른가 유심히 보니 윗 그림에서는 바다 위에 떠있는 배에 곡물이 잔뜩 실려 있고 서유럽인들이 폴란드 귀족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아랫 그림은 정 반대네요.  여기서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단치히에 폴란드산 곡물을 실으러 온 배는 모두 네덜란드나 영국 등 외국 배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폴란드의 상공업 발전이 뒤쳐졌다는 것이지요.  이는 또 폴란드의 사회 구조가 그냥 그 상태를 고수하려 했던 소수 귀족과 다수의 배운 것 없는 농노들로 구성되어 상공업 발전이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17~18세기의 폴란드 곡물 수출량입니다.  17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엄청난 양이던 곡물 수출이 이후 뚝 떨어져서 회복을 못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폴란드인들의 열망을 철저하게 이용하여 바르샤바 공국으로부터 사람과 돈을 무자비하게 착취했습니다.  당시 바르샤바 공국은 9만5천의 병력을 이 원정에 참여시켰는데, 이는 프랑스를 제외하면 동맹군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고, 조그마한 바르샤바 공국이 부담할 수 있는 적정 병력의 2배에 가까운 숫자였습니다.  바로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댄 북부 이탈리아 왕국도 고작 4만5천 정도였으니까요.  부유하고 인구도 많은 바이에른군도 2만4천에 불과했습니다.  이 원정 때문에 바르샤바 공국은 거의 파산지경이었습니다.  공무원들은 1811년 말부터 아무도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1812년 6월 이후로는 군대조차 봉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몇년 전부터 시행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은 폴란드 뿐만 아니라 동프로이센 지역의 경제에도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 지역은 산업 발전이 더디어 주로 곡물과 삼(hemp), 목재와 같은 농산물과 함께 탄산칼륨(potash) 같은 광물을 영국으로 수출하여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대륙봉쇄령이 시행되니 이런 1,2차 산업 생산물을 팔 곳이 없어져 버렸고 덕분에 많은 농지가 경작되지 않고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이라더니 그런 상황에 1811년은 보기 드문 가뭄이 들었습니다.  이젠 수출은 고사하고 농민들이 먹을 곡물은 물론 1812년 봄에 밭에 뿌릴 종곡조차 부족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원정 직전인 1812년 3월 말, 바르샤바 도지사의 아내가 친구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곤궁은 너무 심해서 사정이 이보다 더 악화될 수는 없을 것 같았어.  하지만 더 나빠질 수도 있더군.  아주 바닥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더 나빠졌어."

더 나빠진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이미 농민들이 도토리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빵을 먹고 지붕의 초가를 헐어 가축들에게 사료로 주고 있는 마당에 수십만의 프랑스군, 이탈리아군, 독일군이 쏟아져들어와 감자와 보드카를 요구한 것입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de.wikipedia.org/wiki/Kwas
https://www.russianfoodusa.com/kvas-monasturski/
https://en.wikipedia.org/wiki/Polish%E2%80%93Lithuanian_Commonwealth#Econ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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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ranken 2019.10.07 0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폴란드가 곡물수출 열심히 했던 건 곡물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라 공산품 및 사치품 살 돈은 필요한데 변변한 수출품이 없어 농노들을 착취한 거죠. 이 쪽은 밭에 씨앗 1을 뿌리면...2를 거둘 정도로 농토도 기술도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구요. 자국민들을 이렇게 개돼지 취급했으니 폴란드란 나라가 공중분해된 것도 남탓할 게 못되는 거고요.

  2. 스티븐김 2019.10.07 1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항상 감사드립니다 ^^
    개인적으로 며칠후에 폴란드 방문하는데
    나시카님 글을 참고로 잘 보고 오겠습니다~

  3. 카를대공 2019.10.07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글을 오래 읽다보면 어릴적 위인전을 보며 형성된 나폴레옹의 이미지가 다 깨지는거 같습니다.
    능력을 떠나서 타국에게,심지어 본인 부하에게 하는 짓을 보면 망한게 당연하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날 잡아서 나폴레옹 개인의 인격,파렴치한 짓을 모은 글을 쓰시면 재밌는 기획이 될 것 같습니다.

  4. 웃자웃어 2019.10.07 2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은 인성과 능력은 별개인것 같아요.

  5. reinhardt100 2019.10.07 2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5세기 이후 서구권을 이메뉴얼 월러스틴의 세계경제체제 이론대로 본다면 나폴레옹 전쟁기까지 프랑스는 단 한번도 핵심부에서 탈락한 적이 없었고 영국이 17세기 말부터 핵심부에 진입하는데 성공했죠. 반면 에스파냐, 북이탈리아는 핵심부에서 반핵심부 혹은 주변부로 떨어졌고 북독일 지역은 반핵심부에서 맴돌고 있었죠. 의외로 스웨덴이 주변부에서 반핵심부로 올라가는데 성공하긴 합니다.

    문제는 러시아와 폴란드, 리투아니아 같은 동유럽권인데 이들 지역은 주변부에서도 상당히 위치기 안 좋았죠. 러시아는 그나마 주물, 아마 등에서 나름대로 생산력을 유지했지만 폴란드 리투아니아에는 정말 있는게 농산물뿐일 정도엿습니다. 왜 이 판국이 되었냐? 바로 막장 농노제도 한 몫하고 무엇보다도 크림한국의 인간 사냥 때문이기도 합니다. 크림 타타르인들의 백인 노예 사냥이 얼마나 심각했냐면 16~18세기 동안 약 200만의 노예를 잡아갔다고 할 정도였고 가장 극심했던 16세기 말~17세기 후반까지 폴란드 리투아니아, 러시아 국경지대는 아예 사람이 살지 못하는 막장 지역이 되어버립니다. 이들의 노예 사냥에 끌려가 노예로 되느니 차라리 막장 농노제가 더 낫다고 농노들이 생각할 지경이 되었으니 국가 전체 발전이 될 리가 없었죠.

    그리고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곡물 수출이 개판이 난 이유 중 하나가 주요 곡물 수입지역이던 네덜란드, 북이탈리아, 이베리아 반도 지역의 경제가 엉망이 된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네덜란드와 북이탈리아는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럽 제일의 공업력을 자랑했지만 전자는 프랑스, 잉글랜드, 후자는 터키 제국과의 전면전과 이에 따른 경제 붕괴로 핵심부에서 탈락, 반핵심부 혹은 주변부로 떨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에스파냐는 17세기 내내 전쟁에서 연전연패한 데다가 신대륙 개척이 정체를 맞이한 여파까지 겹쳐 내내 경제가 개판나버렸죠. 게다가 그 판국에 무어인 수십만을 모조리 쫒아내는 자폭(?)까지 저질러버려 경제가 파탄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카를로스 2세 치하 에스파냐 궁정에 있는건 오직 채무문서 뿐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들 지역들의 곡물 수요를 충족해주던 곳이 폴란드 리투아니아였는데 이들이 수입대체(?)노선을 걷기 시작하면서 경제가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경제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립니다.

    사실, 대동란시대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모스크바 점령까지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러시아를 무자비하게 약탈해서 싹쓸어버린 귀금속 및 영지를 무자비하게 수탈해서 단치히에서 곡물 팔아 벌어들인 돈 덕분에 전쟁을 할 수 있었죠. 이 전쟁이 과소평가되서 그렇지 말 그대로 북쪽으로는 카렐리아, 남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남부까지 말 그대로 독소전쟁와 맞먹는 전역, 아니 동쪽의 투시노까지 포함해야 하니 더 넓은 전쟁터를 자랑합니다.

    • 검정필 2019.10.11 0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라인하르트님도 글을 한번 써보시는건 어떤가요? 가끔은 님의 댓글을 읽기 위해 글들을 다시보기도 합니다.

    • reinhardt100 2019.10.11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고야. 제가 그 정도 실력이 되질 않습니다. 그저 댓글로 간신히 다는 수준에서 할 수 있어서요.

      제가 쓰는 댓글들이 상당히 긴 편이라 보기 쉽지 않은데..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6. ㅁㅁ 2019.10.07 23: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일하면 맥주의 나라다 하는 이미지가 있지만 독일인들이 맥주만큼 많이 마시는게 슈납스라는 담금주더군요. 동쪽으로 갈수록 맥주보다 이런 스피릿 종류의 술을 많이 마신다고 합니다


일단 프랑스나 폴란드는 물론, 나폴레옹의 오랜 동맹국이었던 바이에른이나 바덴, 뷔르템베르크, 작센 등 독일 출신 병사들은 나폴레옹과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으므로 이번에도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원래 독일은 신구교간의 종교 차이도 있고 해서 남북간 지역 감정이 심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남부 독일 출신들은 딱히 프랑스인들을 매우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프랑스에 대한 미움보다는 프로이센에 대한 혐오감이 더 심했습니다.  반면에 주로 헤센(Hessen)과 옛 프로이센 영토로 새로 편성된 베스트팔렌 왕국 병사들, 즉 북부 독일 출신의 병사들은 이렇게 프랑스군에 편입되어 전쟁터로 나갈 때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1812년 1월, 베스트팔렌의 총리는 전쟁 준비에 대해 프랑스의 외무장관 마레(Maret)에게 보고하는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우려했습니다.

"병사들의 충성심은 믿을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오히려 먼 타국으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더 싫어합니다.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전쟁 초기에 그들의 그런 감정이 일으킬 말썽은 주로 대규모 탈영의 형태로 나오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옛 프로이센 영토 출신의 독일인들의 감정이 이런 상황이었으니, 현직 프로이센 병사들의 심정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을 혐오했습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의 적이 패배한다는 것은 프로이센에게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싸움에서 자신들이 피를 흘려가며 나폴레옹을 도와야 한다는 사실은 매우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조차 반란이나 대규모 탈영같은 저항 행위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는 크게 2가지 때문이었는데, 하나는 '야만스러운 러시아인들을 유럽 무대에서 완전히 쫓아내버린다'라는 나폴레옹의 빅 픽처가 중서부 유럽 출신 병사들에게 어느 정도 공감을 샀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군인의 긍지' 때문이었습니다.  프로이센 경기병대의 지텐(Ziethen)이라는 대령이 어느 폴란드 장교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싸울 전쟁은 프로이센의 국익과 상충한다는 것을 잘 안다오.  그래도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 몸이 산산조각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 옆에서 싸울거요."

베스트팔렌이나 프로이센 출신보다 더 대규모 탈영이 우려되는 부대는 나폴레옹의 매제 뮈라(Murat)가 꽤 오래 다스린 이탈리아 남부 지방 '나폴리 왕국'군이었습니다.  이미 그때도 이탈리아는 남북간의 격차 및 지역 감정이 꽤 심했나 봅니다.  나폴레옹이 직접 국왕으로 있던 북부 이탈리아 지방의 '이탈리아 왕국'군은 매우 우수한 부대로 인정받았고 병사들이나 장교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고대 로마 제국의 진정한 후손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나폴리 왕국군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프랑스 지휘관들이 '군인으로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도 이렇게 억지로 머릿수만 잔뜩 채운 군대가 최고의 전쟁 기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확실히 전쟁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병대원들의 상당수가 말도 제대로 탈 줄 모르는 미숙련 기수라는 것을 보고하는 부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병대 4만을 편성할 때 그렇게 많은 기병대원들이 모두 훌륭한 기수일 수는 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알아.  내가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숫자가 적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야.  적군은 스파이든 소문이든 신문 기사이든 무슨 방법으로든 내게 기병대가 4만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거든."

 

(요즘 운전을 할 줄 아는 젊은이들 수자보다 당시에 말을 탈 줄 아는 젊은이들 수자가 훨씬 더 적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새로 징집된 기병들 중 상당수는 칼춤을 추기는 커녕 그저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붙어만 있어도 다행이었습니다.  이런 미숙련 기병들이 당장 만들어내는 문제는 안장 밑의 상처(saddle sore)였습니다.   말을 제대로 돌볼 줄도 모르고 말 위에서 제대로 자세를 잡지도 못한 채로 장시간 말을 탔으니, 기병의 엉덩이도 아팠지만 말도 안장에 쓸려 등에 저런 상처와 부종 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처와 부종을 제때 돌봐주지 않으면 결국 피도 나고 곪아서 더 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적군에게나 아군에게나 사기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는 바로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참모로 배속되었던 독일 출신 장교인 폰 펑크(Karl von Funck)에 따르면 이랬습니다.

"자신들이 무적이라는 믿음 자체가 그들을 무적으로 만들었다.  어떻게 되든 결국 끝에는 그들이 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적군의 사기가 제풀에 꺾이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제9 폴란드 창기병 연대에 배속되었던 독일 장교인 폰 베델(Count von Wedel) 중위도 나폴레옹의 존재 자체가 마법과 같은 효과를 낸다고 적었습니다.

"이 원정에 참여하는 나라들 중 3/4은 이 전쟁을 결정한 사람들과는 정면으로 이해가 충돌되는 관계에 있었다.  실제로 상당수의 사람들은 러시아가 이기기를 속으로 바라고 있었지만 실제로 위험이 닥치자 마치 다들 자기 집을 지키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싸웠다.  황제에 대한 각자의 개인적인 감정들이 전에는 어떤 것이었든간에, 나폴레옹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유능한 지휘관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의 재능과 판단에는 모두가 확신을 가졌다.  그의 위대함이 뿜어내는 아우라에는 나도 저절로 감화가 되어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열정과 경외의 감정을 담아 '황제 폐하 만세(Vive l'Empereur) !'를 외쳤다."

 

나폴레옹을 멀리서 쳐다보기만 해도 이런 감정이 치솟는데, 나폴레옹이 자기에게 말이라도 걸어준 적이 있다면, 혹은 나폴레옹이 자기와 같은 솥단지에서 수프를 먹었다면,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습니다.  피에몬테(Piemonte) 출신의 칼로소(Calosso)라는 이탈리아인 기병 장교는 나폴레옹이 사열을 하다가 그의 앞에 멈춰 서서 그에게 (아마도 나폴레옹의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몇마디를 건네는 영광을 누리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날 그 사건 이전에는 난 그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것처럼 나폴레옹을 존경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영원히 변치 않는 열정으로 그에게 내 목숨을 바쳤다.  그 점에 있어서 난 딱 한가지가 후회스러웠는데, 그건 황제께 바칠 목숨이 하나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저 멀리서 보고만 있어도 자기가 쥔 머스켓 소총이 7.62mm 기관총으로 변하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 !)

 



이에 대해서는 러시아 측에서도 인정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나 봅니다.  한 러시아 장교에 따르면 당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나폴레옹이 동시대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던 정신적 지배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며, 적이건 아군이건 마치 어떤 요술처럼 그의 이름 자체에서 무한정의 힘이 있는 것처럼 느꼈다고 합니다.

게다가 프랑스군은 물론, 이탈리군이나 독일군이나 원주둔지를 떠나 네만 강 서쪽으로의 행군길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각 부대는 통과하는 지역의 지형에 따라 어떤 경우는 하루에 15km, 어떤 경우엔 35km까지도 주파했습니다.  다년간의 원정 경험을 가진 프랑스군 병참부의 일처리는 매우 뛰어나서, 각 부대에게는 어느 날짜에 출발해서 언제까지 어디에 도착해야 하는지의 일정표가 상세히 주어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주어진 날짜에 주어진 도시나 마을에 도착해야 했고, 도착하면 정해진 절차와 체계화된 서류 작업을 통해 숙소를 배정 받았습니다.  대개의 경우 일반 시민들의 집에 각 가정의 사정에 따라 병사들을 2~3명씩 혹은 5~6명씩 숙영(billeting)시켰지요.  병사들의 식량은 계약된 종군 상인들에 의해 미리 준비되어 있다가 각 부대의 부사관 등이 전표를 들고오면 지급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꽤 체계적이었습니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잇는 알프스의 고갯길인 브레너패스(Brennerpass) 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순조롭다보니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엘바(Elba) 섬 출신의 체사레 데 로지에(Cesare de Laugier)라는 군인의 기록에 따르면 브레너(Brenner) 고갯길을 넘어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 쪽으로 넘어가는 행군은 마치 명랑하고 즐거운 군사 행렬 같았다고 합니다.  작센 출신의 폰 미어하임(von Meerheimb) 중위에 따르면 그는 고향 땅을 떠나게 되어 처음에는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슬퍼했지만, 일단 행군 대열에 합류해보니 부대 전체 분위기는 흥겹고 가벼운 농담이 넘쳐났으며, 심지어 들르는 마을이나 도시에서 만난 아가씨들과의 짧은 연애도 꽤 흔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낙천적 분위기는 폴란드에 진입하자 싹 바뀌었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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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애경 2019.09.23 07: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 뿐만이 아니겠지만 이기기 위해선 심리전도 역시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것 같네요.

    • nasica 2019.09.23 07: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저는 나폴레옹이 필요 이상의 대군을 모은 진짜 이유도 실제로 러시아를 침공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 정도의 대군을 모으면 러시아가 겁을 먹고 미리 굴복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전쟁은 결국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고 저는 믿는데, 나폴레옹도 결국은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 유애경 2019.09.23 09: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천재,영웅 등으로 미화되는 부분도 있지만 그 역시 하나의 인간으로서 완벽할수는 없었겠지요!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2. 아나는평범한사람이었구나 2019.09.23 0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재미있게 보고있습니다. 행복한 한주 되세요~

  3. Vladimir 2019.09.23 09: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때도 러시아인들은 유럽인들에게 '위협' 내지는 준 야만족 취급을 받았나보군요.독소전쟁때 가장 극단적으로 배출된 유럽인의 러시아인 혐오는 바로 지금 이 순간도 돈바스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 정규군의 일부이자 네오나치 집단인 아조프 대대 등이 표출하고 있답니다.

    • 2월28일 입대 2019.09.24 2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격하게 동의합니다. 영국이 이끄는 서유럽 세력과 러시아의 갈등은 세대를 뛰어넘는 전통(?)인 것 같습니다. 러시아가 서유럽이나 중근동으로 진출할 때면 어느때고 앵글로색슨들이 막았고, 길이 막혀 동방으로 진출하려면 앵글로색슨의 수하(?)들에게 막혔죠. 크리미아에서 해밀턴 요새까지 그 갈등구조는 아마 사람들의 인식구조에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4. 샤르빌 2019.09.23 09: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존재 자체가 사기진작 효과가 있다니.. 갑자기 토탈워 게임이 연상되네요ㅋㅋ

    • 2월28일 입대 2019.09.24 2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폴레옹 머리 위에 별이 어찌나 찬란하게 많이 뜨던지요 ㅎㅎㅎ부대가 망가지면 파리가 아니라, 아작시오에 스폰되는 것도 소소하게 웃겼어요

  5. Franken 2019.09.23 1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출생연도 등 의외로 공통점이 많은데 즉흥적이었던 히틀러완 달리 나폴레옹은 전쟁의 신답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하고 갔군요.

    러시아와 안 싸우는 게 답이란 건 나폴레옹 본인 역시 잘 인지하고 있었겠지만 어차피 유럽대륙을 완전 재패할려면 러시아를 굴복시켜야 했으니 전쟁은 불가피였죠.

  6. 이타카 2019.09.23 14: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부 유럽ㅜㅜㅜ

  7. 냠냠 2019.09.23 16: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재밋게 보고있어요!! 질문이 있어요 : 젊은이들 ‘수자’?? 제 담임선생님도 그렇게 쓰시던데 원래 옛날엔 그런 맞춤법이었나요?

    • nasica 2019.09.23 2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으억 아니요, 솔직히 기억이 안납니다. 요즘 맞춤법이 바뀌어 여러가지가 변한 것은 맞는데 그 중에 제가 극혐으로 여기는 것이 단어 붙여쓸 때 사이 시옷 쓰는 것입니다.
      가령 소고기 뭇국 같은 거요. (저 때는 쇠고기 무우국이었지요.) 그런데 한자어끼리 붙여쓸 때는 사이 시옷이 없어도 된다고 하길래, 숫자가 아니라 수자가 요즘 맞는 맞춤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군요.

    • 2월28일 입대 2019.09.24 2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Nascia님의 설명대로, 명사들로 이루어진 합성어의 사이에 'ㅅ'이 낑겨들어가는 것을 '사이시옷 현상'이라고 합니다.

      끔찍하리만큼 많은 예외가 존재하지만, 기본적인 룰은 보통 1) 두 명사의 결합이 있을 것 그리고 2) 그 두 명사중의 하나는 최소한 순우리말일 것 입니다.
      따라서, 수자는 수(數)와 자(字)가 결합되었으므로 사이시옷이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만....

      국립국어원에서는 '곳간, 셋방, 숫자, 찻간, 툇간, 횟수' 이 6가지의 합성어에 대해 예외를 인정합니다. 즉, 순 우리말이 없어도 사이시옷을 쓰는 것입니다.

  8. ㅇㅇ 2019.09.23 18: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런 분위기가 바로 나폴레옹에게 사실을 바로 볼수 있는 눈을 빼앗아 갔다고 감히 말하고 싶네요. 모든 권력자들은 주변을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합니다

  9. 웃자웃어 2019.09.23 1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은 러시아 원정은 하지 말아야 했었네요.

  10. 하하하하 2019.09.23 2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대로 저 병력을 이끌고 스페인으로 가서 웰링턴을 때려잡았어야

  11. 차라리 2019.09.24 14: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로 어느정도 진격한 시점에서, 보급선 유지가 가능은 한 선에서 떨거지 부대를 세워놓고 소수 정예로만 휘젓는 방식으로 러시아에 피해를 입히는 걸 반복했음 어땠을지...
    결전을 피하고 몇몇 주요 도시만 점령하고 대규모 유격전으로 피난 간 짜르와 귀족들이 지치게 만들면 러시아 쪽에서 서쪽으로 진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싶네요
    요즘처럼 총력전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니니 러시아 권력층이 피난생활을 그리 오래 감내하진 못했을 것 같습니다

  12. 2월28일 입대 2019.09.24 23: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저도 저게 가장 궁금했어요! 집단탈영이나 반란문제요. 나폴레옹의 카리스마는 인정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외국인'부대의 통제가 보장됬는지...왜 작은 단위로 나눠서 믿을 수 있는 순수(?) 그랑다르메에 낑겨넣는 방식은 쓰이지 않았을까요?


1812년 5월18일, 아직 폴란드 푸오츠크(Płock)에 있던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이자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viceroi)인 외젠 보아르네(Eugène de Beauharnais)가 당시 임신 중이었던 부인 아우구스타(Auguste Amalie Ludovika Georgia von Bayern)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실제로 발발할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는 거 아시오 ?  사람들 말로는 전쟁이 일어날 턱이 없다고 하오.  이유는 양측 모두 전쟁으로 얻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라오.  결국 협상으로 이 상황이 종결될 것이라고 다들 말하고 있소."

 

 

(바이에른 왕국의 공주 아우구스타입니다.   외젠과의 결혼은 순수하게 정략적으로 맺어진 것이었으나, 외젠이나 아우구스타나 서로를 정말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도 외젠은 처가댁에서 후한 대접을 받으며 잘 살았습니다.)

 

 


실제로 중서부 유럽의 프랑스나 독일, 이탈리아 출신 사람들이 볼 때 황량한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머나먼 러시아로 쳐들어간다는 것은 굉장히 뜬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가난하고 낙후된 나라에 쳐들어가서 얻을 것도 없고, 무엇보다 너무 먼 나라인데다 너무 넓은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러시아가 쳐들어온다면 맞서 싸우겠으나, 굳이 그 먼 곳으로 쳐들어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소문이 돈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궁극적 목표야 러시아를 다시 대륙봉쇄령 틀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지만, 나폴레옹 본인조차 이번 전쟁의 전술적 목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큰 전투 두어번이면 러시아와의 평화 조약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큰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공략해야 할지는 본인도 몰랐습니다.  나폴레옹은 한번은 스몰렌스크(Smolensk)를 점령하고 겨울을 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말했다가, 다음 번에는 모스크바야말로 러시아 제국의 진정한 수도이므로 여름이 끝나기 전에 거기를 점령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 본인부터 오락가락하는 판국이니 누가 보더라도 이번 전쟁은 목표가 없는 늪 같아 보였습니다.

 

 

(스몰렌스크까지의 거리도 사실 가까운 편은 아니지만 모스크바까지 가는 것은 더욱 멀었습니다.  당시 비교적 쾌속으로 행군하던 프랑스군도 하루 25km 정도가 평균이었으니, 스몰렌스크까지 가는 것도 전투가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로와도 대략 29일 걸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네만(Nieman) 강 서안으로 집결하라는 나폴레옹의 소집 명령을 받은 프랑스 및 동맹국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과연 어떤 기분으로 고향을 떠났을까요 ?  아마 즐거운 마음으로 군대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특히 남의 나라 전쟁에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들은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나폴레옹이 그들을 위해 준비해놓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채 길을 떠났습니다.  이들에겐 네만(Nieman) 강 서쪽 어딘가였을 최종 집결지의 위치와 집결 목표일은 물론 몇월 며칠에는 어느 마을에, 몇월 며칠에는 어느 도시에 도착하라는 매우 상세한 중간 일정표까지 주어졌습니다만, 정작 어느 나라를 치기 위해서 간다는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황실 근위대 소속 포병대의 불라르(Boulart) 대령이라는 사람도 폴란드에 도착하고 나서도 편지에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앞으로 어떻게 풀릴지 알 방법이 없다.  뭔가 낌새가 보이는 것도 없고 상상력을 자극한 아무 단서가 없으며, 열정을 불러일으킬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소문은 자자했습니다.  원래 지휘부가 비밀을 엄격하게 지킬 수록 아랫것들의 상상력은 나래를 펼치게 되어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치러 간다는 소문이 가장 유력했지만 그럴 리가 없고 모든 것은 인도에 쳐들어가기 위해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가 짜고치는 고스톱이라는 소문도 파다했습니다.  

푸제(Pouget) 장군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인들과 연합하여 러시아 제국의 광활한 사막을 지나 영국놈들의 소유인 인도를 공격하러 간다고 생각했다."

세계 지리에 어두웠던 어떤 병사는 이 소문을 잘못 알아듣고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어서 동네 사람들을 더더욱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우리는 육로를 통해 영국으로 진격하기 위해 러시아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더 배운 것이 있고 이성적인 병사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소문은 더욱 그럴싸 해서,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가 비밀 협약을 맺고 프랑스-러시아 연합군이 오스만 투르크를 공격하기로 했으며, 먼저 투르크의 유럽-아시아 영토를 정복한 뒤에야 인도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습니다.  이 소문은 워낙 그럴 듯하여, 심지어 알렉산드르에게 직접 제출된 스파이들의 첩보 보고서에도 '나폴레옹의 진짜 목적은 러시아를 짧고 거센 공격으로 굴복시킨 뒤 그대로 러시아군 10만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뒤 이어서 이집트를 공략하고, 최종적으로는 벵갈을 침공하는 것'이라고 적힐 정도였습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어쩌면 알렉산드르도 나폴레옹의 의중이 그럴 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야콥 발터(Jakob Walter)는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석공이 원래 직업이었습니다.   그는 1806년에 최초로 징집되어 폴란드 전역에서 복무한 이후 소집과 소집 해제를 반복하다가 1812년 다시 소집되어 러시아로 향했습니다.  러시아로 갈 때 그의 나이는 24세였고, 티푸스에 걸렸으나 다행히 살아남아 회고록도 썼습니다.)

 

 


좀더 스케일이 작은 소문도 있었습니다.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출신의 야콥 발터(Jakb Walter) 일병이 들은 소문은 방향이 정반대였습니다.  그 소문에 따르면 그들은 발트 해변 어딘가의 큰 항구로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스페인으로 가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당수 병사들에게는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병사들의 편지나 기록들은 꽤 낭만적인 전망을 그린 것도 많았습니다.


"이 모든 소문은 사실 내겐 별 상관이 없다.  우리가 오른쪽으로 가든 왼쪽으로 가든 혹은 그냥 가운데로 쭉 가든 뭔 상관이겠는가 ?  내가 진짜 세상 속으로 가고 있다는 것만 중요하다."

"내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 거의 모두가 군대에 모여있었다.  그들은 이미 영광을 차곡차곡 쌓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그냥 있으면 세상의 짐짝 신세인 내가, 그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까지 수줍게 손을 모은 채 기다리고만 있을 수 있었겠는가 ?  난 그때 18살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는 '대인도 제도' 혹은 어쩌면 '에집(Egippe)'으로 간다고 해요.  사실 어느 쪽으로 가든 상관없어요.  저는 우리가 세상 끝까지 가봤으면 해요."

이런 태평한 상상력과 그 해 연말 그들이 처할 운명을 비교해보면 상당히 한심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태어난 동네에서 10km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시골뜨기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영국이 어디 붙은 나라인지 인도라는 곳이 섬인지 육지인지, 러시아와 이집트 사이에 어떤 나라가 있는지 알 방법도 없었고 그저 모든 것이 신기하고 들뜬 모험처럼 느껴진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물론 이런 근거없는 소문들과 억측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정 대상이 러시아라는 것은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 중 절반 정도는 프랑스 출신이 아닌 폴란드,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 다양한 국가 출신이었고 심지어 스페인 출신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병사들과 폴란드 병사들은 워낙 나폴레옹 개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으니 그렇다치고, 다른 나라 출신들은 러시아 원정길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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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멜무지로 2019.09.16 06: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낙천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보니
    그 뒤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워 보이네요

  2. starlight 2019.09.16 1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를 종속시켜 식민지나 위성국으로 두기엔 현실적으로 불가하고, 결국엔 다시 한번 승리해서 (틸지트에서처럼) 프랑스 패권의 강력한 동맹국으로 삼으려 한 것 같습니다. 전략적이기보단 다분히 감정적이고 사사로운 자존심도 반영된 계획이었다 봅니다. 당시로는 사상 최대의 인원과 물자를 투입한 것치곤 확실한 손익 계산이 없다는게, 너무 많은 승리와 성공으로 허황되고 무능력해지기 시작한 나폴레옹의 세계관을 반증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3. 빛둥 2019.09.16 17: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군의 보급도 없고, (폴타바 전투때처럼) 상대 반란세력의 도움도 없고, (아무리 끌어모았어도) 현대적 보급수단도 부족하고, 거대한 대륙 한 가운데의 상대 수도로 무작정 들어가다니... 아무리 후세사람들이 역사를 다 알고 있어서 비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나폴레옹이 너무 무모했습니다.

    "쎄게 한 대 얻어 맞으면(한판 회전에서 크게 지면), 숙이겠지."라는 마음 말고는 해석되지가 않네요. 나폴레옹이 계속 성공가도만 달려왔던 게 결국은 파국을 부른 것.

    그나저나 당시 알렉산드르는 페테르스부르크의 궁정에 있었겠죠? 그 쪽으로는 아예 나폴레옹 군대가 접근도 안 했네요. 어차피 발틱해가 영국의 수중에 있으니, 페테르스부르크 공략은 힘들고, 설사 공략에 성공해도 러시아 왕실을 잡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나 봅니다.

  4. 루나미아 2019.09.17 1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육로로 인도를 공격한다는,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어보이는 발상이 은근 흔했나 보네요. 하긴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례도 있으니까요.

  5. 푸른 2019.09.18 1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원정을 앞두고 돈 소문이나 병사들의 상상이 되게 귀엽고 웃기네요 ㅋㅋ

    그러면서도 당시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도 러시아원정이 오스만이나 이집트 침공보다 더 예상못할 일이었다는게, 앞으로 있을 원정의 비극성을 극대화하네요...

  6. 무명씨13 2019.09.19 1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님의 글을 특히 황제의 러시아 원정 준비 과정 및 실패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이후 발생한 크림전쟁에서 황제가 겪는 고통을 러시아 군대가 그대로 맛보며 허물어져 갔다는데 충격을 받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자기 땅에서 뭘 배우고 사는지?


2002년 3월 15일,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Vilnius) 교외의 공사 현장에서 많은 수의 사람 뼈가 발견되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소련 시절 KGB가 암장을 한 정치범들의 시신이거나 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학살한 포로 또는 유태인들의 시신이 아닐까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발굴을 더 진행해본 결과 나폴레옹 시대의 군복과 머스켓 소총 등이 나오면서 이 3천여 구가 넘는 해골들이 1812년에 죽은 나폴레옹의 병사들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20여 명을 제외하고는 이 해골의 주인은 모두 남성이었고, 대부분은 죽을 때 20대의 나이였습니다.


이 해골들을 연구한 결과, 이 해골들 중 상당수에서 질소 동위원소의 양이 매우 높게 나왔습니다.  질소 동위원소는 단백질과 상관이 많은데, (저는 잘 이해를 못합니다만) 해산물을 많이 먹는 경우에도 늘어나지만 반대로 굶주림에 시달리는 경우에도 늘어난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해골의 주인공들은 해산물 때문이 아니라 굶주려서 질소 동위원소 수치가 높게 나왔던 것 같습니다.  연구진이 해골에서 밝혀낸 것은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시신들 중 1/4 정도는 티푸스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것이 이 병사들에게 티푸스를 옮겼을까요 ?

 

(2002년 리투아니아 빌니우스에서 발견된 프랑스 그랑다르메 병사들의 해골입니다.  이들이 고향을 떠날 때, 100년도 훨씬 뒤에 이런 몰골로 사람들에게 발견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

 



네만 강을 건너기 훨씬 전부터도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독일군이나 이탈리아군은 모두 자신들이 집결한 동부 폴란드와 동프로이센 지역의 색다른 환경에 상당히 놀라고 있었습니다.  다부(Davout)의 제1 군단 산하 제33 경보병 연대 소속의 앙리 에베르(Henri Pierre Everts) 소령은 네덜란드의 로테르담(Rotterdam) 출신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1807년 아일라우 전투나 프리들란트 전투에는 참전한 바가 없어서, 오데르(Oder) 강 동쪽으로는 1812년에야 처음으로 넘어가 보았습니다.  이 양반은 오데르 강 동쪽 폴란드 시골 마을을 처음 보고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난 놀라서 멈춰섰고, 한참 동안을 말 안장 위에 앉은 채로 이 마을을 살펴보았다.  처음 보는 형태의 비참한 나무 오두막들, 역시 목판으로 만든 작고 낮은 교회, 그런 것들 못지 않게 너저분한 모습인 주민들의 불결한 수염과 머리털... 그 중에서도 유태인들은 유별나게 혐오스러운 모습이었다."

원래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은 서부 유럽처럼 넉넉한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서부 유럽인들도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그다지 깨끗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런 서부 유럽인들이 보았을 때 오데르 강 동쪽 폴란드와 동프로이센 사람들은 너무나 지저분했습니다.   이렇게 지저분하면 반드시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벼룩과 이 같은 해충입니다.  DDT가 없던 시절 그런 해충들을 박멸한 뾰족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몸과 옷을 자주 씻고 세탁하는 것이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런 해충들은 옷 솔기 속에 숨어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뜨거운 다리미로 자주 다림질을 해주는 것이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

 

 

(BBC에서 TV 미니시리즈로 만든 숀 빈 주연의 Sharpe 시리즈입니다.  제 눈에는 아무리 봐도 저건 녹색이 아니라 감색인데, 왜 자꾸 소설 속에서는 green jacket이라고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Sharpe's Rifles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09년 1월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 지방) -------------

자원병들의 부인들이 갈색 셔츠들을 자르고 꿰매는 사이, 요새에 있던 루이자 파커는 영국군 라이플병들이 자신들의 녹색 자켓을 수선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  군복은 너덜너덜해지고 찢어지고 헤어져 너덜너덜해진데다 불에 그슬리기도 했지만 이 젊은 아가씨는 바느질 솜씨가 아주 비상했다.  그녀는 샤프의 녹색 자켓을 가져간지 하루 만에 거의 새것처럼 만들어왔다.  "다림질로 벌레까지 다 잡았다고요."  그녀는 신이 나서 말하며 칼라 부분의 솔기를 접어 보이며 정말로 이가 박멸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부러진 군도 조각을 다리미로 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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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도 종류가 많은데 몸니는 옷 솔기에 숨어서 거기에 알을 낳고 번식한다고 합니다.  머릿니는 사람 머리털에 알을 낳지요.)

 



하지만 보통 빈곤과 불결함은 항상 같이 다니는 법이라서 가난한 동네에 특히 벼룩과 이가 많았습니다.  이건 네만 강을 넘어서면서 더 심해졌습니다.  간간이 마주친 러시아 농민들과 그 오두막도 이 투성이었던 것입니다.  네만 강을 넘자 곧 이가 온 군대에 득실거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보급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보급이 충분했다면 굳이 지저분한 러시아 농민들과 접촉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정이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러시아 농민들을 붙잡고 먹을 것을 뒤져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러시아 이들은 프랑스인의 피와 독일인의 피를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출신의 야콥 발터(Jakb Walter) 일병의 수기에 따르면 병사들이나 장교들이나 몸에 이를 수천 마리씩 달고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는 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직접 옮지도 않았습니다.  병사들이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바닥에 까는 짚단 등을 통해서도 옮았습니다.  러시아 농민들도 그런 짚단을 깔고 잤을테니까요.  역시 러시아 원정군에 포함되어 있던 근위대 부사관 부르고뉴(Adrien Jean Baptiste François Bourgogne)의 회고록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중대원 중 하나가 잠자리를 만들라며 내게 짚단을 좀 가져다 주었다.  난 배낭을 베게 삼고 발을 모닥불 쪽으로 한 채 잠들었다.  한 시간 가량 잤을까 ?  난 온몸에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을 느끼고는 일어났다.  놀랍게도 내 몸 전체에 이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  난 벌떡 일어나 2분 안에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옷을 벗어버린 뒤 내 셔츠와 바지를 모닥불 속에 던져 넣었다.  벌레들은 불 속에서 마치 연속 사격과 같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터졌다."

이가 해로운 것은 단지 가려움을 일으키거나 피를 빨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티푸스(typhus)를 일으킵니다.  티푸스는 고열과 붉은 발진을 일으키는 열병으로서, 음식이나 물을 통해 전염되는 장티푸스(typhoid fever)와는 다른 병입니다만, 까딱 잘못하면 죽는 병이라는 점은 동일합니다.  장티푸스의 치사율은 10~20%인데 비해 티푸스는 10~40%이니 티푸스가 더 위험한 병이지요.  티푸스는 지금도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는 무서운 병입니다.  티푸스가 이에 의해 전염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가 사람의 피를 빨 때 옮는 것은 아닙니다.  엉뚱하게도 티푸스를 일으키는 미생물은 이의 입이 아니라 이의 배설물에 존재합니다.  이가 기생하는 사람의 옷과 피부에는 이의 배설물이 묻는 경우가 많을텐데, 가려움 때문에 사람이 피부를 긁을 때 이의 배설물이 피부에 파고들면서 티푸스가 옮는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나 벼룩 등이 질병을 퍼뜨린다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병사들은 러시아의 이 때문에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사태의 심각함을 잘 몰랐으나, 프랑스군의 군의관들은 점점 늘어나는 열병 환자의 수에 기겁을 했습니다.

 

(티푸스는 고열을 일으켜 사람을 혼수상태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 가장 큰 피해인데, 고열과 함께 이런 붉은 발진을 일으키는 것도 주요 증상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널리 퍼져있던 기생충이었습니다.  프랑스나 독일에는 이가 비교적 적은 편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벌레였고, 척탄병 쿠아녜의 수기에도 적혀 있기를 스페인만 하더라도 이가 득실거리는 곳이었습니다.  

"우리의 지정 휴식 장소에 도착한 뒤, 우리 부대 몇몇 병사들은 한 병에 3수(sous - 요즘 가치로는 3수면 대략 1800원) 하는 말라가(Malaga) 와인을 찾아냈다.  그들은 그걸 마치 우유라도 되는 것처럼 마셔댔고, 결국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졌다.  우리는 그들을 마치 송아지처럼 마차에 싣고 다녀야 했다.  1주일이 다 된 다음에도 그들에게 음식을 떠먹여줘야 했는데, 그들은 스푼으로 수프를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와인이 어찌나 독했는지 그들 중 누구도 배식 군량을 먹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마을인 비토리아(Vittoria)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부르고스(Burgos)에 간 뒤에, 또 거기서 다시 크고 멋진 도시인 바야돌리드(Valladolid)로 갔다.  우린 바야돌리드에서 해충에 둘러쌓인 채 꽤 오래 있었다.  병사들은 사실상 이 위에서 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짚단 속에 이가 득실거렸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면 손가락으로 잡아서 땅에 던지며 '널 만든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 피를 빨아라' 라고 말하는 것이 스페인 사람들의 풍습이었다.  정말 더러운 족속이다."

 

(영국 내전 당시 스코틀랜드 던바(Dunbar)에서의 호국경 크롬웰(Cromwell)의 모습입니다.  어떤 전쟁이든 총보다는 질병에 의한 희생자가 항상 더 많습니다.) 

 



왜 그런데 오직 1812년 러시아에서만 티푸스가 맹위를 떨쳤을까요 ?  실은 티푸스가 러시아에서만 날 뛴 것은 아니었고, 티푸스와 전쟁은 일반적으로 함께 다녔습니다.  17세기 초반 영국 의회와 왕당파 간의 내전 때도, 또 독일 30년 전쟁 때도 티푸스는 어김없이 발발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이는 세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전시에는 병사들이건 일반 농민들이건 평상시보다 목욕과 세탁을 더 못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이는 왕성하게 번식합니다.  두번째, 평상시에는 농민들이든 도시 거주민들이든 한 방에서 수십 명이 같은 짚더미 위에서 자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군대, 특히 야전 작전 중인 군대에서는 매일매일 그렇게 잡니다.  그렇게 밀집된 집단 생활에서는 이가 새로운 숙주를 찾는 것이 매우 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에 물린다고 누구나 다 티푸스에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은 마릿수의 이를 몸에 달고 다녀도 어떤 사람은 티푸스에 걸리고 어떤 사람은 멀쩡합니다.  개인차가 있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잘 먹고 잘 쉬어서 건강한 사람은 면역력도 좋아서 병에 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먹지도 잘 쉬지도 못하는 사람은 티푸스 뿐만 아니라 온갖 병에 쉽게 걸립니다.  특히, 잘 먹지도 못하는데다 오염된 물을 마시고 이질설사에 시달리는 병사라면 아주 쉽게 티푸스에 걸립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병사들의 처지가 딱 그랬습니다.  왜 러시아군에서는 티푸스가 발생하지 않았을까요 ?  발생했습니다.  러시아군에서도 수만 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그만큼 많이 죽었습니다.  프랑스군보다 사정이 좀 나았을 뿐이었지요.

 

(미니아르 도표의 원본 사본입니다.  컴퓨터도 없던 시절 저걸 다 손으로 그렸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

 

 


전에 소개해드린 미니아르의 도표를 보면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는 추위는 커녕 여름부터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계기 없이도, 네만 강을 건넌 순간부터 꾸준히 줄어들었습니다.  굶주림과 티푸스, 탈영 등으로 인해 그랑다르메는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러시아 땅에서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이걸 막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었을까요 ?  글쎄요, 수송용 헬리콥터로 PET병에 든 생수를 일선 전투 부대에게도 일인당 하루 4리터씩 공급해주는 현대의 미군이라면 가능할까, 당시의 기술로는 사실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러시아 원정은 그냥 시작을 안하는 것이 정답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1812년 봄, 나폴레옹은 물론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 끌려온 일반 졸병들도 자신들의 앞길에 어떤 난관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부름을 받고 네만 강 서쪽에 속속 모여들던 그랑다르메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  다음 편에서는 몇몇 사례를 통해 그 속사정을 살펴보시겠습니다.




Source : 
http://www.montana.edu/historybug/napoleon/typhus-russia.html
https://en.wikipedia.org/wiki/Typhus
https://www.warhistoryonline.com/napoleon/real-reason-napoleons-invasion-russia-failed-mm.html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www.smh.com.au/world/study-shows-napoleons-army-was-ravaged-by-lice-20060104-gdmq6c.html
https://www.spiegel.de/international/zeitgeist/crawling-death-how-lice-thwarted-napoleon-s-invasion-of-russia-a-638751.html
https://www.forbes.com/sites/kristinakillgrove/2015/07/25/skeletons-of-napoleons-soldiers-in-mass-grave-show-signs-of-starvation/#105e5b143743

https://www.healthlinkbc.ca/health-topics/tp12788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Memoirs of Sergeant Bourgogne, 1812-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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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내마음속댕댕이 2019.09.09 0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린 시절 본 위인전에선 나폴레옹이 실패한 이유는 병사들의 군복 주석단추가 겨울철에 얼어붙고 깨져 코트를 여미지 못해 얼어죽어서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현실은 그런 코믹한(?) 헤프닝과는 많이 떨어져있었나봅니다. 저런 끔찍한 환경으로 수십만을 밀어넣은 나폴레옹은 대단한 능력자인건지 터무늬없는 도박꾼인건지...

  3. 유애경 2019.09.09 09: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사들이나 장교들이나 이를 수천마리씩...
    그냥 과장된 표현을 한건지 아님 실제로 그랬다는건지, 어찌됐든 끔찍하네요!
    읽으면서 몸이 근질근질 해졌습니다.
    이런저런 악재속에서 참 고생했을 병사들이 가엾게 느껴집니다.

  4. 돌격대장 2019.09.09 0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퇴했을때 대치한
    러시아 프랑스 양군의 숫자가 얼추 둘다 4만정도
    됬다는 글을봤었는데,이글이 진짜면
    러시아군은 무었때문에 그리 녹은걸까요

  5. 까까님 2019.09.09 0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염병이야 전쟁터가 아니어도 유럽 도시에서는 일상 다반사였다고 알고있습니다만 특히 러시아전역에서 물 문제가 직간접적으로 매우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얘기였습니다
    전염병 문제의 이면에도 물 부족 사태가 깔려있었던 것이로군요
    혜안이 담긴 글에 다시 감사드립니다

  6. 웃자웃어 2019.09.09 1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은 유럽에서 좋은소리 듣기 힘든 사람이라고 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러시아로 끌고가 개죽음으로 몰아 넣었으니.

  7. 수비니우스 2019.09.09 12: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어렸을때 세계사 보면 러시아원정 패배는 추위때문! 이랬는데 이런 복잡한 이면이 있는것 보면 역사에도 정론은 없는것 같습니다.

  8. 강가딘 2019.09.09 15: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는데 전염병에 시달리기까지 했군요.

  9. 오렌지훈 2019.09.09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이면이군요
    잘 보고 갑니다^^
    좋은 한주 보내세요~

  10. 카를대공 2019.09.09 2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고고학적 조사를 보면 궁금한게,사람 뼈가 저렇게 오래 보존되는 특별한 조건이 있나요?

    나폴레옹 전쟁은 200년 전,중국에선 장평대전 유적(?)을 발굴한다는데 거긴 무려 기원전 발생한 사건입니다.

    공룡뼈를 보면 사람뼈도 비슷하게 가능하겠구나 싶긴한데 어떤 조건이 있어야 기원전 뼈가 보존이 되는건지......

    • reinhardt100 2019.09.10 1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토양 때문입니다.

      토양에 따라 공기 및 미생물, 수분 등이 침투할 수 있는 공간 정도가 차이 납니다. 조건이 잘 맞아 완전 밀봉 수준으로 유지되면 원형에 가깝게 보전되기도 합니다.

  11. 2/28일 입대 2019.09.09 2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우 간지럽고 찝찝해~~가 오늘의 감상입니다ㅎㅎ저 외에 풍토병도 있었을 것만 같은데 정말 highway to hell이네요

  12. Franken 2019.09.10 07: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 조금 살아보니 운칠기삼이란 말이 왜 생겼는지 이해되네요. 아무리 머릴 굴려도 인간두뇌의 한계상 파악 못하는 것들이 수두룩한데 그렇다 해서 일안할 수도 없고 하니 이런 건 운에 맡기고 추진해야 하니 말입니다.

  13. reinhardt100 2019.09.10 1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외출장 갔다와서 처음 보네요.

    러시아 원정 당시 티푸스 종류가 하필이면 전염력 및 치사율이 가장 큰 발진티푸스였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했죠. 네만 강 도하 시점부터 단 3주만에 13만 비전투손실이 발생했는데 가장 큰 원인이 바로 티푸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환경은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이 녹색사막이라고 부를 정도로 척박했죠. 물도 엉망이고 남아있는건 그저 넓은 지평선뿐이었으니까요. 거기에 45만 병력을 밀어넣어봤자 양동이에 물 한컵 붓는 수준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네만강에서 출발할수록 땅의 넓이는 커지기만 하면서 병력 밀집도는 얇아지고 보급은 급박해지기만 하는 말 그대로 최악의 전장 중 하나이니까요

  14. 루나미아 2019.09.10 19: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위생과 질병!
    진짜 고난이네요ㅠ

  15. starlight 2019.09.11 0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참혹해서 말을 잃게 됩니다.빌뉴스에서 발견된 나폴레옹 병사들의 주검은 다큐로도 제작되어 있죠. 이들은 철수하다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은걸로 아는데요. 보르디노 전투와 모스크바 점령. 아비규환이었던 베레지나 도하까지 겪어낸 병사들이었지만, 끝내 집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비참히 숨을 거둬 안타깝습니다.

  16. 키케로 2019.09.11 1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데르강 동쪽이 왜 이렇게 가난한 걸까요? 서유럽 보다 억압적인 농노와 사회구조 때문에 그럴까요? 나시카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 nasica 2019.09.11 23: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견이랄 것은 없고, 일단 잘 모르겠습니다. 제 얕은 지식으로는, 아무래도 유럽 문명의 발상지이자 이후 르네상스가 일어난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또 괜찮은 항구가 없어서 서부 유럽과의 교류가 부족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농업만 해도 기술 발전이 있어야 번영할 수 있습니다. 가령 17세기부터 영국은 농업 혁명을 거쳤는데, 여기에는 윤작이나 신형 쟁기 같은 기술적 발전도 큰 역할을 했고 자유 시장이나 엔클로저 활동 같은 사회제도의 변화도 큰 몫을 했습니다.

      제가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일 수도 있으나, 폴란드나 루마니아 등지의 동부 유럽에서는 서유럽과의 교류 부족으로 그런 발전이 전파되지 못한 것이 점차 경제적으로 뒤지기 시작한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17. Eugen 2019.09.11 1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이전 글에 그만 싸우겠다고 한 이후로 댓글을 단 적이 없는데 누가 제 닉네임으로 위장해서 댓글을 달았습니다. 댓글조작만큼 제가 싫어한 게 없는데 화나내요. 회원제 사이트가 아니라서 그런 듯해요.

    • Eugen 2019.09.11 1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타리무 이 사람이 제 닉네임을 위조해서 댓글조작을 하는 것같네요.

    • Eugen 2019.09.11 1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분명히 저는 정치병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앞서 썻다시피 세상을 보수진보가 아니라 기득권과 도전자로 보라했었죠. 그래서 이유없이 한 쪽으로 몰아가는 댓글은 댓글조작입니다.

    • Eugen 2019.09.11 13: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금까지 폰을 이용해서 댓글을 달았기 때문에 문단나누기가 잘 되있는 댓글은 조작된 겁니다.

    • Eugen 2019.09.11 15:09  댓글주소  수정/삭제

      Nasica님 블로그에 E****라는 닉네임으로 댓글을 달았는데 그만 싸우자고 쓰고 말 싸움을 끝냈습니다.

      그런데 알***로 추정되는 제 닉네임을 사칭한 ♪♫♩♫가 갑자기 전두환을 꺼내면서 댓글조작을 하더니

      제 논리와는 아주 상반된 논리로 댓글을 이어가면서 논쟁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제가 생활이 있는 사람이라 그만 한다면 진짜 그만하는 건데 진짜 화납니다. 그게 댓글조작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냐면 그 때 저는 폰으로 댓글을 달아서 문단나누기가 잘 안되있는데 댓글조작된 건 데스크톱에서 써서 그런지 잘 나뉘어져 있고 무엇보다 전 정치병자라 아니라서(세상을 보수 진보가 아니라 기득권과 도전자로 보라고 댓글을 썻 듯이)정치를 간접적으로 언급했는데(논쟁의 주제가 아니도록 씀) 갑자기 전두환 이야기가 나오면서 상대방을 아무 이유없이 몰아가는 댓글은 100% 댓글조작된 겁니다.

      지금은 대학도서관 데스크톱으로 썻는데 보다시피 데스크톱으로 쓰면 폰으로 쓰는 것보다 문단나누기가 쉬워서 티가 납니다. 이 블로그에서 보수 정치병자면 알타리무밖에 없는데 화나내요. 드루킹같은 짓거릴하면 좋나요?

  18. Eugen 2019.09.11 1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군진 모르겠지만 댓글조작하는 놈년 천벌 받아야 됩니다.

  19. 이타카 2019.09.13 0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대단한 나폴레옹 마저도 예측을 못한건가요..ㅜㅜ 하긴 사실 이만한 규모를 이끌고 러시아로 들어간 선례가 없어서 하다하다 이정도까지일꺼라고는 생각을 못했나봅니다ㅜㅜ
    근데 우크라이나쪽이 유명한 곡창 지대라고 알고있었는데 의외로 부유하다던가 인구밀도가 높지는 않았나보네요? 우크라이나 쪽에 들어가서 배후지로 삼고 모스크바를 도모할수는 없었던 걸까요?
    물론 속전속결의 나폴레옹 스타일과는 안맞겠습니다만..

  20. ㅇㅇ 2019.09.18 2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어... 이런상태로 모스크바 딴게 신기하네요

  21. ㄷㄷㄷ 2019.10.01 10: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끔 예전에 프랑스인의 키가 유럽기준 작은 이유로 여기서 나왔던 말이 생각나더군요. 중근세때만해도 삼총사 등장인물들 마냥 다른 유럽인 기준으로 충분히 거칠고 호전적이고 전사적인 프랑스인이 달달한 와인이나 빵이나 먹는 사람처럼 이미지가 바뀐것도. 하도 전쟁에 나갈만한 사람이 죄다 전쟁 끌려나가서 이른나이에 병마에 시달리다 죽거나 전사해버리니 유전자 풀에 변형이 왔다고.(물론 웃자고 하는 소리였겠지만 ㅋㅋ;)


1812년 러시아 원정에 나서던 당시의 나폴레옹은 당대의, 아니 그 이후의 누구보다도 당시 상황과 군사 전략 등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였습니다.  훗날 그가 러시아 원정 작전 중 저지른 실수와 오판 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왈가왈부 떠들지만 그 당시의 지식과 기술로는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이번에 다룰 문제도 정말 어쩔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흔히 나폴레옹이 보급 문제를 등한시해서 혹은 러시아의 추위를 대비하지 않아서 참패했다고 하지만 여태까지 보셨다시피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나폴레옹의 준비가 어느 정도로 철저했는가를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부교병 연대(régiment des Pontonniers)까지 철저히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러시아는 언듯 보면 광활한 초원으로 된 나라 같지만 주요 요리 중 하나가 생선일 정도로 여기저기 강과 시냇물이 가로세로로 엮여있는 곳입니다.  나폴레옹은 그런 점까지 고려하여 에블레(Jean-Baptiste Eblé) 장군 휘하에 부교병들로 구성된 연대 단위의 전문 부대까지 편성하여 신속한 전진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라인 강변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있는 국제 부교병 학교(Lycée international des Pontonniers)의 모습입니다.  에블레 장군의 부교병들도 원래는 여기에 주둔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명성을 빛내준 일화가 전진 때가 아니라 베레지나 강에서의 비참한 후퇴 때 이루어졌다는 것은 비극이었습니다만, 그들의 이야기는 발자크(Honoré de Balzac)의 소설 '시골 의사'(Le Médecin de campagne)를 통해 불멸의 것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저 학교가 진짜 고등학교로 사용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발자크의 '시골 의사'입니다.  저는 읽어보긴 했는데... 썩 재미있다고는 차마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그런 강과 냇물의 나라 러시아에서 마실 물이 없을 것이라고는 나폴레옹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네만 강을 건너 불과 4일 만에 아무 저항도 만나지 않고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나(Vilna, Wilna, 지금의 Vilnius)에 입성했지만, 그 사이에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가 물 부족으로 인해 겪은 고생과 그로 인한 피해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원래 병사 1인당 하루에 필요한 물은 대략 5리터가 좀 넘습니다.  요즘 큰 생수병이 2리터니까 2.5병 정도 되는 것이지요.  사막도 아닌데 1인당 5리터를 못 구하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1개 사단 약 8천명의 병사들만 생각해봐도, 4만 리터입니다.  대형 유조차가 실을 수 있는 물의 양이 대략 2만 리터니까, 하루에 이런 대형 유조차 2대 분량의 물을 1개 사단이 마셔야 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이건 요리에 필요한 물이나 세면, 세탁을 위한 물은 감안하지 않은, 마시는 물만 센 것입니다.  

 

(이 유조차가 2대 있어야 1개 보병 사단이 하루에 마실 물에 불과합니다.)

 



러시아 평원에서는 이 정도의 물을 매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는 눈에 보이는 곳마다 농장이 있었고, 농장에는 당연히 우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대평원에는 농장은 커녕 오두막조차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우물도 없습니다. 인구 밀도가 적은 지역을 행군하는 군대는 당연히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사막도 아닌데 물을 찾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어찌나 더웠는지 !  러시아는 추운 나라라는 말이 거짓말이었나 봅니다.  1812년 여름은 유난히 더웠습니다.  병사들은 사정없이 내리쬐는 태양, 그리고 메마른 길에서 수만의 병사들이 행군하며 일으키는 빽빽한 먼지 속에서 무자비한 갈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래도 당연히 러시아에도 농부들이 있었으므로, 숫자가 많지는 않더라도 우물이 여기저기에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물은 어디까지나 우물일 뿐 강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시골 마을의 손으로 판 우물이라면 크기가 꽤 큰 편이고 물이 꽤 그득히 들어있다고 하더라도 3천 리터 정도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1개 사단 병력이 수통을 채우기는 커녕 1인당 375ml, 즉 콜라 1캔 정도의 양만 마시면서 지나간다고 해도 물이 다 말라버릴 지경이었습니다.  우물이 있는데 물이 충분치 않은 경우가 많을까 싶습니다만, 꽤 많았습니다.  전에 소개드린 척탄병 쿠아녜(Coignet)의 회고록에도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1808년 스페인 마드리드 인근의 어떤 성에 배치된 쿠아녜의 근위대만 하더라도 그 성의 우물에서 하루에 퍼낼 수 있는 물의 양이 충분치가 않아서 물을 찾아 인근 지역을 헤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물을 찾아 나간 패거리들이 물은 찾지 못하고 포도주로 가득찬 가죽부대를 실은 노새 2백 마리를 찾아서 돌아오는 바람에, 그 다음날 아침 근위대는 포도주로 면도를 해야 했다고 합니다.

 

특히 같은 경로로 수만 명의 군대가 이동할 때는 더욱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러시아로 진입한 부대들 중 맨 앞 줄에 섰던 부대의 병사들은 제일 위험한 역할을 맡았다고 투덜댔을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이 가장 고생을 덜 했습니다.  뒤따라 오는 부대들은 먹을 것은 커녕 마실 물도 부족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목마른 병사들이 물을 충분히 마시고 수통도 채우려면 시냇물을 찾아야만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손으로 판 우물의 일반적인 구조입니다.)



문제가 더 심각해진 것은 당시 군인들의 수통 크기였습니다.  1808년 1월에 부르고스(Burgos)에 주둔한 7만의 프랑스군을 위한 보급품 목록을 보면 4만7천 켤레의 군화, 1만2천5백 개의 탄약통과 벨트, 그리고 6천 개의 남비 등이 있습니다.  거기에 재미있는 물건이 더해지는데, 1.5파인트짜리 수통(petit bidon) 3만 개와 큰 물통(bidon) 6천 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양은(주석과 구리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이 수통에는 식초를 탄 물을 넣게 되어 있었습니다.  1 파인트(pint)는 약 473ml니까 1.5 파인트면 요즘 생수 작은 것보다는 조금 더 큰 셈이지요.  이 정도 물로는 고된 행군을 하는 병사들의 갈증을 해소하기엔 턱이 없었고, 적어도 3시간 간격으로는 우물이든 개울물이 나와줘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소 건조한 지역인 스페인만 하더라도 항상 그러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스페인 주둔 프랑스군을 위한 보급품 중에 큰 물통 6천 개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보병 대대가 행군을 할 때, 그 뒤에는 탄약과 물통을 실은 마차나 노새가 따라다녀야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러시아의 극악한 도로 사정 때문에 물통을 실은 마차가 따라올 수가 없었습니다.  

 

러시아군도 동일한 지역에 있었으니 프랑스군과 동일하게 물 부족으로 고통받아야 했습니다만, 생각해보면 그래도 러시아군 사정은 프랑스군보다는 나았습니다.  일단 러시아군의 숫자가 프랑스군보다 훨씬 적었고, 또 러시아군은 이미 어디에 우물이 있고 어디에 개울이 있는지는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러시아군은 원래 방어가 아니라 공격을 염두에 두고 빌나 인근에 포진하고 있었던지라 물과 식량 등을 고려하여 여러 곳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으니 집단으로 신속히 이동하던 프랑스군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았습니다.

병사들도 물이 없어서 고생을 했지만, 병사들보다 훨씬 더 심하게 고생한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말이었습니다.  네만 강을 넘은 나폴레옹의 군대에겐 40만의 인간들 외에 약 15만 마리 이상의 말도 있었습니다.  인간 병사는 하루에 5리터의 물을 마셔야 한다지만 말은 30리터 넘게 마셔야 합니다.  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인간 병사들이 자신이 마실 물을 말에게 양보하겠습니까 ?  러시아 원정 초반에 목이 말라 고생한 병사는 많아도 그로 인해 죽은 병사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네만 강을 넘은지 불과 1주일 만에 3~4만 마리의 말이 죽었습니다.  이는 100% 물 부족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장 먹일 사료가 없어서 들판의 덜 익은 보리와 귀리를 먹고 배탈이 난 데다 물이 부족하여 쇠약해진 말들이, 빌나 인근에서 겪은 하룻밤 폭풍우에 떼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들이 죽어넘어지자 상황은 기하급수적으로 나빠졌습니다.  식량과 물을 실어나르려면 말이 꼭 필요했는데, 원정 초반에 이렇게 식량과 물 사정으로 인해 말들이 대량으로 죽어넘어지자 식량과 물 사정이 더욱 나빠진 것입니다.  



(사람만 목이 마른 것이 아닙니다.  말은 갈증에 더 취약합니다.) 



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따금 내리는 비는 그나마 병사들의 갈증을 풀어주었을 것 같은데, 사실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습니다.  비가 내리면 여기저기 물 웅덩이가 생겼는데, 목마른 병사들은 이런 웅덩이에 고인 물도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했습니다.  이런 물 웅덩이에는 죽은 사람이나 말의 시체가 들어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사실 그런 시체가 없었다고 해도 이런 물 웅덩이는 결코 깨끗한 물이 아니었습니다.  흙바닥에 고였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40만의 인간과 15만의 말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발생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분변입니다 !   말 1마리가 하루에 생산(?)하는 말똥과 오줌은 각각 약 16kg과 9.3 리터입니다.  인간의 배설물은... 지저분하니 그냥 넘어가시지요.  야전을 행군하는 군대가 뒷처리를 잘 하고 다닐 턱이 없습니다.  이들이 지나간 자리는 당연히 온갖 오염 물질이 잔뜩 쌓였고, 이런 오염 물질은 인근의 물 웅덩이는 물론 우물과 냇물까지도 오염시켰습니다.  이렇게 오염된 물을 마신 인간과 말은 쉽게 배탈을 일으켰고, 이는 곧 설사로 이어졌습니다.  설사를 일으킨 군대가 방출(?)하는 오염 물질은 다시 주변을 오염시켰습니다.  

당시엔 아직 콜레라가 유럽에 상륙하기 전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 만약 당시 콜레라도 있었다면 나폴레옹의 군대는 정말 삽시간에 녹아내렸을 것입니다.  19세기 초의 유럽인들은 아직 병이 세균에 의해 유발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전염병의 개념은 있었지만, 병을 전염시키는 것은 '나쁜 공기' 내지는 '나쁜 기운'이라는 뜻의 미아즈마(miasma)라는 존재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전염병이 물 속의 미생물에 의해 전염된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따라서 물을 끓여마시기만 해도 이질 설사는 물론 많은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긴, 그걸 알고 있었다고 해도 황량한 러시아 평원에서 행군으로 지치고 배고프고 목마른 병사들이 땔감을 구해다 가뜩이나 부족했던 물을 끓여마셨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건 현대적인 군대에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좀 적나라한 그림이긴 합니다만, 이건 "F-diagram"이라고 해서, feces(배설물), fingers(손가락), flies(파리), fields(밭), fluids(물), food(음식)의 오염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Fecal-oral 경로, 즉 인간 배설물이 결국 다시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의외로 많은 질병의 원인이고, 대표적인 것이 콜레라입니다.  21세기인 오늘날도 전세계적으로 보면 윗 그림의 내용이 통제가 안 되어 고통받는 인구가 상당합니다.  위생 화장실의 건설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물을 끓여마시기만 해도 문제의 상당 부분이 해결됩니다만, 그게 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콜레라는 원래 인도가 원산지인 질병인데 흔히 영국 선원들에 의해 유럽에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들 하지만 의외로 유럽에 전파된 것은 1817년 러시아를 통해서였습니다.  이후 빠른 속도로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 1846년~1860년 사이의 유럽 콜레라 대유행은 이미 3번째 대유행으로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그 와중인 1854년 존 스노우(John Snow, 왕좌의 게임에서의 존 스노우가 아닙니다)라는 런던 의사가 최초로 콜레라는 물에 의해 전염되며 이는 사람이 마시는 물이 환자의 분변 속에 존재하는 미생물로 인해 오염되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존 스노우는 콜레라가 발생한 런던 시내 가옥들의 위치를 통계학적으로 분석하여 그 중심에 어떤 우물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그 이론을 세웠습니다.  다만 그 이론을 화학 실험이나 현미경으로 그를 증명하지는 못했고, 그 때문인지 당시 대부분의 의사들과 학자들은 존 스노우의 발표를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질병이 미생물에 의해 전염된다는 것은 1860년대에 들어서야 파스퇴르의 연구에 의해 입증되었습니다.  윗 사진은 존 스노우입니다.)



(이 펌프가 존 스노우의 발견의 실마리가 된 우물의 펌프입니다.  존 스노우의 발견을 기념하여 아직도 보존되고 있다고 합니다.)



뭐 콜레라도 아직 없었던 시절이니 오염된 물을 마시고 기껏해야 이질 설사 정도에 걸리는 것이 전부라면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전에서의 이질 설사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유는 탈수로 인해 사람을 더욱 쇠약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쇠약해진 병사들은 예전 같으면 걸리지 않았을 병에도 쉽게 걸립니다.  그리고 러시아 땅에는 그런 쇠약해진 병사들을 노리는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그 존재들에 의해 그야말로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Source : 
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lifestyle/wellness/2003/04/08/in-iraq-a-mighty-thirst/0fb42cf3-a463-41d4-93da-7eff54db4c1d/
https://www.thespruce.com/how-big-is-olympic-size-pool-2737098
https://extension.psu.edu/how-much-drinking-water-does-your-horse-need
https://lpelc.org/stall-waste-production-and-management/
https://fr.wikipedia.org/wiki/Lyc%C3%A9e_international_des_Pontonniers
https://en.wikipedia.org/wiki/John_Snow
https://akvopedia.org/wiki/Traditional_hand-dug_wells
https://en.wikipedia.org/wiki/Well
http://www.montana.edu/historybug/napoleon/typhus-russia.html
https://en.wikipedia.org/wiki/1854_Broad_Street_cholera_outbreak
https://en.wikipedia.org/wiki/Germ_theory_of_disease
https://en.wikipedia.org/wiki/Typhus
https://www.warhistoryonline.com/napoleon/real-reason-napoleons-invasion-russia-failed-mm.html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www.smh.com.au/world/study-shows-napoleons-army-was-ravaged-by-lice-20060104-gdmq6c.html
https://www.spiegel.de/international/zeitgeist/crawling-death-how-lice-thwarted-napoleon-s-invasion-of-russia-a-638751.html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by Paul Lindsay Dawson

The Note-Books of Captain Coi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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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규규 2019.09.02 08: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감사합니다

  2. 이그리트 2019.09.02 09: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존스노우 유 노 낫씽

  3. reinhardt100 2019.09.02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럽 전체적으로 수질 문제가 심한 편이긴 합니다. 그나마 스칸디나비아 반도나 아이슬란드 정도가 덜한 편인데 라인강 이동 지역은 이서지역보다 더 심각합니다. 석회질 문제 때문인데 이 때문에 한국에 온 유럽 지질학자들이 충북과 강원도 일대 석회암 지대에서 한국인들이 우물물 그대로 먹는거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자기들 기준에서는 이건 그대로 병원행이니까요.

    독소전쟁 당시, 양군에서 겪은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식수문제였는데 양군의 비전투손실 중 절반 가까이가 수인성질병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무장친위대와 소련군은 정수설비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상황이 더욱 심각했고 약물에 의존한 치료가 남용되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야나기 작전 당시 독일이 일본에 가장 급히 요청했던 원조 중 하나가 이시이식 정수기 설계도 및 기자재였을 정도였습니다.

  4. 유애경 2019.09.02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물부족에 식량부족에 비위생적인 환경...읽기만 해도 뭔가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한 상황이네요!!

  5. 마마 2019.09.02 1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땅바닥에 고인 물까지 마셔야 했다니...

  6. 2019.09.02 1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Franken 2019.09.02 1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에 물문제는 전혀 생각지 못했군요. 사막도 아닌 땅에 식량도 아닌 물이 부족할 줄이야 뒷통수 제대로 맞은 느낌이네요.

  8. 하이텔슈리 2019.09.02 1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물 문제는 정말 생각 못했습니다. 오히려 대군을 동원한 게 역효과였던 거네요. 문득 물량전보다 정예병만 보내는 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 2/28일 입대 2019.09.02 2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고 다소 더럽게(?) 읽었습니다!ㅎㅎ감사합니다. 하루종일 행군하면서 수통이 500미리도 안된다니 진짜 끔찍하네요.

  10. 카를대공 2019.09.02 2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물 문제는 정말 상상을 못 했네요.

    말 1마리가 하루에 생산(?)하는 말똥과 오줌은 각각 약 16kg과 9.3 리터입니다. <- 여기서 나시카님이 물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얼마나 자료조사를 꼼꼼히 하셨는지 느껴졌습니다ㅎㅎ

  11. 빅터 2019.09.02 2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쉬운 일어없네요.. 보급장교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겠네요...

  12. 이정도면 2019.09.02 2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히려 모스크바까지 간게 놀라운 일이었네요.

    이번에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13. 제이슨 2019.09.04 23: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를 녹색의 사막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었군요.
    지금이야 패트병이 있어서 보관과 운송이 용이했지만, 옛날 나무로 만든 통은 자체로 무겁고, 조금만 충격을 주면 바로 물이새고
    그리고 의외로 물이 무겁지요.
    갈증에 의한 고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14. starlight 2019.09.05 0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사크 기병이 저글링처럼 덤벼들어 물고 할퀴고 낙오자들을 도륙하는 모습이 상상되네요.

  15. 구와아앍 2019.09.05 2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먹이 사람먹이도 환장하겠는데 물까지 모자란다니....이쯤되면 어떡게 모스크바까지 갈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네요

  16. nashorn 2019.09.06 0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장 큰 문제는 동유럽의 흔한 질병때문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t..

  17. Eugen 2019.09.06 0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2차대전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면 전혀 새로울 것 없는 현상이죠. 근본적으로 지리적 문제인데 대표적으론 모스크바로 갈 수록 전선이 길어져서 병력의 숫자가 조금이라도 모자라면 러시아의 우월한 인력동원력으로 넓게 퍼진 적군을 많은 수의 병력으로 포위섬멸해버릴 수 있죠. 그래서 히틀러도 패배한 거고요.

  18. 들꽃향기 2019.09.09 0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대장정 관한 책을 읽을 때 마지막으로 마오쩌둥의 군대를 괴롭힌 것은 사막도 아닌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대초원의 물과 식량의 부족이라고 읽었던게 인상깊었는데. 나폴레옹에게도 초원지대에서의 물이 그러했군요;;;;

전에 신문에서 읽었는데, 중국의 CCTV에는 중국 각지의 소수 민족을 찾아다니며 각 민족 고유의 풍습과 생활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에서 꼭 나오는 장면이, 그 소수 민족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취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장면이 꼭 나온다고 하네요.  그 글을 쓴 필자는, 그것이 소수 민족이 흥겹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있지만,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들에게, '소수 민족들은 대개 음주가무에 빠져 지내는 열등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의도도 있는 것 같다고 씁쓸해했습니다.

중국인들이 술에 취하는 것을 좋아하느냐 안하느냐는 일단 생각하지 말고,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정말 음주가무를 즐기는 민족도 드뭅니다.  사실 제가 볼 때는 조금 상황이 심각할 정도로 많이 즐깁니다.  우리 스스로가 못느낄 뿐이지, 우리나라는 음주 문제가 사실 심각한 나라입니다.  제가 카투사 시절에 (당연히 미군들하고 사이가 안좋았지요 !)  미군애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들었는데, 우리나라의 1인당 소주 소비량이 1주일에 1병이던가 2병이던가라면서, 한국인들은 모두 알콜중독자라고 씨부렁거리던 것이 기억납니다.  사실 갓난아기까지 포함한 평균 수치가 정말 그렇다면 큰일이다 싶었는데, 찾아보니까 정말 한 1.8병 정도였습니다.  그것에 추가로 맥주도 한 2.3병 정도 소비하더군요.  대체 이 술을 다 누가 마시는 겁니까 ?   

 

(우리나라는 오른쪽 하단 부분에 있습니다.  순수 알콜의 섭취량인데, 우리나라는 딱 아일랜드와 동일하군요.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단연 탑입니다.)

 



세계적으로는 어떤가 하고 찾아보니까, 우리나라의 1인당 술 소비량은 아시아권에서는 단연 탑이고 세계적으로도 많은 편에 속합니다만, 의외로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고 그냥 유럽 중간 정도 갑니다.  다만 유럽인들보다 우리가 체구가 좀 작은 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꽤 취하도록 마시는 편이라는 점은 이해가 갑니다.  특히 유럽인들은 식사 때마다 맥주나 와인 1~2잔을 항상 곁들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알콜 섭취량이 많은 것이지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나라 음주 문화가 다소 폭음 쪽으로 잘못 형성되었다는 생각은 듭니다.  따지고 보면, 낮에는 멀쩡하게 직장에서 일 잘하고 집에서는 평범한 가장인 사람이, 밤에 만취해서 길바닥에 쓰러져 자는 것이 별로 크게 이상하지 않게 여겨지는 나라가... 적어도 OECD 국가 중에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폭력 행위를 저질렀을 때 경찰이 오기 전에 소주를 벌컥벌컥 마셔두는 것이 변호사를 부르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법적 대응이라는 소리를 어디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 음주에 대해 이렇게 관대한 나라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법 만드는 국회의원들과 사법부 검찰 등에 계신 분들이 술을 좋아하셔서 그런 것일까요 ?  저로서는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서양인들은 술의 맛과 향을 즐기려고 마시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취하기 위해서 마신다고 하지요.  제 생각에는, 경제 수준과도 상관있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 사회에 대한 책에서 읽었는데, 우리나라 유치원에서는 전통적으로 노래 연습을 많이 시키는 것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미술 교육을 많이 시킨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분석해놓은 것이 약간 뜨아하면서도 그럴싸 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만, 노래 교육은 상대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것에 비해, 미술은 소모성 재료가 많이 들어가므로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국민 소득이 낮은 국가일 수록 미술 교육보다는 노래 연습을 많이 시킨다고 하네요.  동의하십니까 ?  아무튼, 비슷한 이유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척박한 사회 환경에서 가장 저비용의 쾌락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술, 그것도 소주이기 때문에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뭐 스포츠를 하려고 해도 돈이 많이 들고, 미국 애들처럼 집에서 뭔가 뚝딱뚝딱 만들어보려고 해도 차고와 각종 연장, 넓은 공간이 필요하쟎아요.  그러다보니 할 게 술마시는 것 외에는 별로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사정은, 지금은 그렇게까지 마셔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18~19세기 영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온 나라가  술에 쩔어 살았습니다.  물론 사회 최고위층 인사들이야 주정뱅이가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소위 상류계층인 군 장교들만 하더라도, 주정뱅이가 많았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군 사병은 하루에 1파인트 (0.56리터)의 포도주나 1/3 파인트의 럼주를 배급받게 되어있다고 했었습니다.  우습게도, 많은 수의 사람들이, 단순히 '매일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페인 비토리아(Vittoria)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웰링턴 공작은 부하 병사들의 약탈 행위에 화가 났을 때, 공개적으로 자기 병사들을 '술이나 퍼마시러 입대한 땅거지 색히들'이라고 욕을 해댔다고 하지요.  


 

(1813년의 비토리아 전투입니다.  이 전투로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은 완전히 철수하게 됩니다.  스페인에서 약탈한 온갖 귀중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철수하던 프랑스군을 영국군이 따라잡아 공격한 이 전투는 특히 나폴레옹 전쟁 중의 전투 중에서 가장 많은 액수의 노획물이 발생한 것으로 유명한데, 웰링턴이 화가 났던 이유는 그런 값진 노획물 중 상당수가 병사들의 배낭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 해군 이야기를 그린 Hornblower 시리즈에서도, "Flying Colors" 편을 보면, Hornblower 함장은 긴 항해 끝에 식수가 다 떨어져 가지만, 혼블로워 함장은 물보다도 럼주가 다 떨어져 가는 것을 더 걱정합니다.  수병들은 럼주만 계속 배급이 되면, 식수가 다 떨어져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단, 맥주는 술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챨스 디킨즈의 "Great Expectations"라는 작품을 보더라도, 12살 정도의 어린 주인공에게 식사꺼리가 제공되는데, 물 대신 독한 ale이 주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워낙 식수 사정이 안좋아서, 영국인들은 대개 물은 잘 마시지 않았습니다. 당시 런던의 주 식수원은 템즈 강이었는데, 여기서 물을 길어오면, 인간의 분뇨는 약과이고, 온갖 독성 물질과 가축의 분뇨 등이 다 나왔다고 합니다. 중산층은 샘에서 길어온 물을 사 마셨지만, 대부분의 서민들은 이 강물을 식수로 썼습니다. 서머셋 모옴의 "인간의 굴레"를 보더라도, 템즈강에 투신 자살을 시도한 남자가, 빠져죽지는 않았지만 그때 마시게 된 템즈강 물로인해 장티푸스에 걸려 죽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때는 이미 1900년이었는데요 !   그래서 대신 맥주를 마셨고, 차가 널리 보급된 이후로는, 차를 마셨습니다.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단어가 "영국인이 차와 흰빵을 먹는 동안, 아일랜드인은 물과 감자를 먹었다" 라는 것으로 표현이 됩니다.

이야기가 겉돌았는데, 본론으로 돌아와서, 영국군에게 주어지는 술은 거의 100% 럼주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지금도 그렇지만) 포도주로 유명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날씨가... OTL) 그러므로 제일 값싼 술은 gin 이었습니다.  그러나, 호밀로 만드는 증류주인 진 이라는 술은, 그야말로 최하층 빈민들이 마시는 술이라는 인상이 워낙 강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챨스 디킨즈도 "진을 마시는 것은 영국의 큰 해악이다."라고 썼겠습니까 ?  1730~1740년대에 발전한 진 문화는, 거의 현대 미국 도시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는 마약 문제와도 맞먹었을 정도였습다.  진이 하류층에서 크게 유행하고, 또 사회악으로 번진 이유는, 너무 가격이 쌌기 때문이었습니다.  "1페니면 취할 수 있고, 2페니면 죽을 정도"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통계치가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만, 1740년대에 런던 인구가 마시는 진의 평균치가 1주일에 2파인트(1.12 리터)였습니다. 남자, 여자, 갓난아기 다 합해서요. 이 정도면 요즘 우리나라의 소주 소비량은 저리 가라지요 ?   당시 런던 시내 8가구마다 1곳씩 진을 파는 술집이 있었고, 시내 곳곳마다 진에 취해 쓰러진 사람들이 즐비했답니다.  정부에서도 사태가 너무 심각하다고 생각하여 진 금지법을 1743년에 제정하려고 했는데, 폭동이 일어나서 결국 실패했다고 합니다.  극작가인 헨리 필딩은 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진이야말로, 대도시 인구 수십만명을 해치는 해악이다. 이 독한 술에 접한 사람들은, 지독한 주정뱅이가 되어, 이 술을 다시 사기 위한 돈조차 제대로 벌 수 없게 된다. 게다가 모든 수치심과 공포심도 없애버려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죄와 뻔뻔스러움을 낳게 한다."

 

 

(윌리엄 호가쓰(William Horgath)의 유명한 1751년 그림입니다.  'Beer Street & Gin Lane'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음주에 찌든 영국 하층민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는 군대에도 진을 공급하는 것이 적당했겠지만, 정부는 이 지긋지긋한 술을 도저히 군대에 공급할 수가 없었나 봅니다.  다행히, 당시 영국은 카리브해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활발하게 경영하고 있었으므로, 사탕수수 찌꺼기로 만드는 증류주인 럼주의 생산과 유통이 활발했습니다.  그래서, 육군이나 해군이나, 대부분 럼주를 공식 주류로 공급했습니다. 

 



럼주는 도수가 최고 75도까지 갑니다. (저는 한때 이게 알코올 농도를 말하는 것인줄 알았습니다만 그런 건 아니더군요.)  엄청난 독주지요.  당시 공급되었던 럼주가 이렇게까지 정제된 것은 아니었겠습니다만, 아뭏든 너무 독주였으므로, 당시 해군 제독이던 에드워드 버논(Edward Vernon, 별명 Old Grog)은 수병들에게 배급하는 럼주에 물을 절반 섞어서 주도록 했습니다.  이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그록(grog)입니다.  권투에서 말하는 그로기(groggy) 상태라는 단어도, 바로 이 그록을 잔뜩 마신 상태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는 영국 해군 내에서 럼주와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영국 해군에도, 육군과 마찬가지로 채찍질 체벌이 있었습니다만, 이와 비슷한 레벨의 체벌은 바로 'grog 배급 중단'이었습니다.  육군은 육군이라는 특성상, 어떻게든 술을 손에 넣을 방법이 꽤 많았습니다만, 해군에서는 배라는 특성상, 배급되는 것 외에는 술을 구할 방법이 진짜 없었거든요.

 

(그록의 창시자이신 Edward Vernon 제독이십니다.  그는 평상시 그로그램(grogram)이라는 천으로 만들어진 코트를 자주 입어 '늙은 그록(Old Grog)'이라는 별명으로 수병들 사이에서 불렸는데, 그로 인해 럼반-물반의 희석 럼주 이름도 그록으로 굳어버렸습니다.) 



럼주는 Hornblower의 입을 빌리면, 그야말로 영국 육해군의 "Life Blood"였습니다. 어떤 인도 세포이 병사의 회고에 따르면, 영국군은 틀림없이 럼주 속에 뭔가 마법약을 집어넣는 것이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럼주만 마시면 영국군은 매우 사나와져서 두려움을 모르고 싸웠고, 또 심한 부상을 입고 다 죽어가는 병사도 럼주를 조금 마시면 금방 되살아난다고 했습니다.  다만, 그 '마법약'을 너무 많이 집어넣으면 병사들이 너무 흥분해서 제풀에 죽어버린다고도 '아주 잘' 관찰했더군요.

1780년에 런던에서, 로마 교황에 반대하는 군중이 가톨릭 수도원을 습격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고든 폭동이라는 이 사건의 하일라이트는 바로 가톨릭 수도원 부속 진 증류장 습격이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군중들은 수도원보다는 이 진 증류장을 노리고 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폭도들은 재빨리 이 증류장의 문을 부수고, 그 중에서 더욱 생각없는 일부 인간이 불을 질렀는데, 이 불길 속을 목숨을 무릅쓰고 뛰어들어갔다고 합니다.  손에는 양동이와 주전자, 심지어 말구유를 들고서요. 곧 뜨거워진 증류기가 터지면서, 진 원액이 길바닥에 쏟아져 나와 하수 도랑으로 흘러들었는데, 군중들은 술에 만취하여 쓰러질 때까지, 이를 땅에 엎드려서 입을 대고 마셨습니다. 나중에 민병대가 출동해서 상황을 정리했는데, 이때 만취해서 쓰러진 사람들 중 4명의 여자를 포함해서 총 20명의 사람들이 과음으로 즉사했다고 하네요.  이 정도면 막장 인정입니까 ?

 

 

(제 글에서 인용된 영국의 당시 음주 행태 사례는 Mark Adkin이라는 현역 영국군 소령이 지은 'Sharpe Companion'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Sharpe 시리즈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 해설서입니다.)

 

# 목요일에 올리는 과거 재탕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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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손님 2019.08.29 1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1등이라니ㅠ 영광입니다~^^

  2. 수비니우스 2019.08.29 1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술하면 정조대왕입죠. 정조대왕께서 정약용에게 보드카를 맥주잔에 부어주고 원샷하라고 시켜서 정약용이 속으로 으악 난 죽었다 했는데 마시고 살아서 다행이었다고 자식들에게 편지로 쓴바 있습니다. 물론 보드카와 맥주잔은 비유로 붓담는 커다란 필통에 40~50도 하는 삼중소주를 부어줬다고 하네요. 이렇게 술을 좋아하던 뎡됴대왕은 담배 또한 온몸의 기운을 뚫어준다고 예찬하실 정도였으니 50이 못되어 죽은게 절대 이상한게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쌀통에 담아서 보내버렸으니 술담배에 쩔어살수밖에 없긴 했지만요...

  3. ㅇㅇ 2019.08.29 12: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에 20명이나 과음으로 즉사했다니 정말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네요 ㄷㄷ

  4. 2/28일 입대 2019.08.29 13: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술하니까 저희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온 친구들이 생각나네요. 마리화나인가 위드인가가 합법인 나라여서 그런 얘기를 자주 했지요. 스위스, 미국, 프랑스 다 국적이 다른데 입을모아 말하더군요.
    한국에서 금지하는 약들은 문제를 안 일으키는데(그들 주장으로는 저걸 피면 그냥 주저앉아서 공상에 빠진답디다.담배보다 건강하다고ㅎㅎ), 그렇게 문제가 많은 술은 왜 무제한 허용이냐구요. (9시 지나면 아예 술을 못 산다던데요).
    음주감경 판결을 얘기할때마다 아주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겠더군요.

    • nasica 2019.08.29 19: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 ? 그 외국학생들 말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네요 ?

    • reinhardt100 2019.08.30 0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의외로 조선총독부 시절부터 아편문제에 워낙 민감하다보니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 일본제국이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군수품 중 하나가 아편이었는데 일단 화북 등 중국에서 쓰는건 좋은데 이게 내지로 들어오면 골 때리는 겁니다. 아편중독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요. 이걸 막으려면 조선반도, 관동주부터 철저히 단속한다는 것은 상식이었죠. 이 때문에 총독부는 아편 등 마약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하게 나가게 되었고 이게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 카를대공 2019.08.31 2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실제로 저 말이 마리화나 합법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담배보다 중독성이 약하고 술보다 사회적 해악이 덜한데 왜 막냐는거죠.

  5. ㄹㄹ 2019.08.29 1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주의 진짜 문제는 18세기 영국해군이 마시던 럼보다 더 저질 알콜로 만든 쓰레기 술이라는데 있습니다. 100퍼센트 주정에 물타서 만든거고 이 더러운 맛을 숨기려고 아스파탐이라는 감미료를 섞었는데 이게 해독을 방해하는 효과가 있죠. 위정자들은 값싼 소주로 인한 사회적 해악을 알면서도 못본체 하는데에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는거 보면 이 나라는 막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 카를대공 2019.08.31 2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소주 맛있게 드시는 분들한테는 죄송하지만 근본이 질 나쁜 술인거 부정할 수는 없죠.
      똑똑한 엘리트 계층들이 이걸 모를리가 없는데 사실상 장기간 방치중인 대한민국의 병폐입니다.

  6. 수비니우스 2019.08.29 17: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술을 잘 못하고 기껏해야 가끔 혼자 1리터 한병에 2280원하는 값싼 벨기에 밀맥주를 마시는 정도인데,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거다"라며 소주 아니면 안된다는 사람들 보면 정말 보기 안좋더군요.

  7. reinhardt100 2019.08.30 0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밀로 된 진이 미친듯이 공급된 이유가 몇 가지 있지만 대표적으로 동유럽, 특히 폴란드-리투이나아연방의 재판농노제 강화 및 경제와도 연결됩니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연방은 네덜란드, 잉글랜드, 베네치아 등을 대상으로 하는 잉여곡물 수출로 어느 정도 경제가 돌아갔지만 17세기 중반 대홍수 때문에 국가 경제가 제대로 박살나버립니다. 가뜩이나 재판농노제가 판치던 농촌에 불을 질러버린 겁니다. 마그나트건 슐라흐타건 간에 영지가 있던 7천명의 귀족들이 300만 농노를 효율적으로 쥐어짜야 하는데 기존의 곡물 수출로는 한계가 보이다보니 호밀 등을 원료로 하는 진을 대규모로 주조하여 수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만이면 다행인데 이 인간들이 더 벌자고 각 영지별로 1년에 1인당 몇십리터씩 강제구매 후 작업용 반주로 사용하게 하는 방법까지 동원하다보니 개판이 벌어집니다. 농노들이 술 먹고 일하니 당연히 효율이 떨어지는 겁니다.

    주류문제, 이 문제는 국가재정과도 직결 되어 있죠. 역사도 꽤 오래됩니다. 조선총독부 시절부터 주요 수입 중 하나가 조선반도 철도운영수입과 주류세였던 건데 지나사변 이후 군사비 증액을 감당하려고 대규모 전시국공채 발행 및 주세율 증강을 감행합니다. 여기에 더해서 내지와 동시에 양조장 면허제까지 도입시켜버린건데 이 때문에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죠. 그나마 일본은 나았습니다. 적어도 강제주류소비제만큼은 도입하진 않았거든요.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이 짓까지 해서 욕을 바가지로 들어먹었죠. 한 때 인도지나 연방 연간 세수의 1/4을 주세가 차지할 정도로 개판이 났었습니다.

    해방이후 정부가 가장 확실하게 뽑을 수 있는 세원이 바로 토지세와 주세다 보니 주류에 대해서는 정말 관대해질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쓰게 만들어야 정부수입이 늘어나니까요. 게다가 윗분들이 쓰신대로 물자 아끼려다보니 소주가 장려되는 것까지 겹치면서 말 그대로 술독에 전국민이 빠져사는 사태가 지금까지 이어진 겁니다.

  8. 샤르빌 2019.08.31 01: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도 이젠 맥주 정도는 약간 술 취급 안하는 분위기가 된 것 같아요.. 소주는 품질도 너무 저질인데 그걸 죽을때까지 마시니 사람들 위장이고 간이고 남아날리가..

  9. 카를대공 2019.08.31 2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거 혹시 예전 블로그에 쓰셨던 글 아닌가요?
    중간에 프랑스 얘기를 보니 기억나네요.

    당시에 쓰셨던 기준으론 확실히 맞는 말씀이지만 최근 3년?정도 기준으로 하면 한국도 1인당 소득이 많이 올라서 꼭 옳은 얘기는 아닌거 같습니다.
    특히 대한민국 수도권 정도면 세계적으로도 즐길거리 놀거리가 무척 많은 문화권이라서요.

  10. 카를대공 2019.08.31 2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한민국의 폭음,만취 문화는 근본적인 면에서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는 문제임은 분명한거 같습니다.
    저도 술 남들 정도는 마시고 술자리도 좋아하지만 술의 폐해는 부정할 수가 없네요.

    담배의 폐해는 끊임없이 강조되는데 술은 상대적으로 훨씬 덜하죠.

    제가 볼 때 담배보다 개개인 삶을 좀먹고 국가 전체적으로 사회를 악화시키는게 술입니다.

  11. 바다에산다 2019.09.07 17: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난 글 항상 잘 보고 갑니다.
    음주가 주는 즐거움도 있지만, 해군에게는 멀미 치료약으로써도 기능했으리라 봅니다.
    해군 시절 원/상사 침실에 숨겨져 있던 커다란 소주 페트병들이 생각이 납니다.
    담배와 술이 전통적인 멀미 특효약이라고 하네요

  12. 라흐마니노프 2019.09.09 09: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럼의 최대 도수가 75라고 하셨고, 이게 알코올 농도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무섭게도 절반은 원래 알고계시던게 맞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뭔가 와전된건지 그렇게 하기로 정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도수가 농도 백분위인거 처럼 쓰이고 있지만요, 영미권에서 사용하는 도수(proof)는 대략 1도=0.5%입니다. 표기도 그 각도 단위에 쓰는 작은 동그라미(모바일이라 직접 적기 어렵네요)죠. 지금 유통되는 럼 중에 제일 독한게 바카디 151도(75.5%)인걸로 알고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식으로 75도가 대충 맞습니다. 당연히 그냥 마시라고 만든게 아니라 칵테일이나 불쇼, 객기부리기용으로 의도적으로 독하게 만든 종류구요, 전통적인 럼은 진이나 위스키 같은 다른 증류주처럼 40%내외에 많이 높으면 50%조금 넘는 정도에요. 제가 알기론 그로그 비율이 절반(대충 우리 희석식 소주 수준)까지는 아니고 물4 럼1 정도(와인 맥주 막걸리 수준)라는데 뭐가 맞는지 모르겠네요. 배마다 달랐으려나...

  13. 무명씨13 2019.09.10 1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가볍게 맥주 1~2 잔 마시는 것으로 끝내는 문화가 더 확산되었으면 합니다


Uncharted 라는 영어 단어가 있습니다.  차트라고 하는 단어는 여러가지 뜻으로 사용됩니다.  가령 의사들도 환자 기록을 보면서 '차트'라고 부르고, 저같은 직장인은 프리젠테이션용 도면이나 표를 차트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원래 차트라는 단어의 첫번째 뜻은 해도라는 뜻입니다.  즉, 육지에서의 지도는 map이라고 부르지만, 바다에서의 지도는 chart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uncharted라는 말의 뜻은 '해도가 작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흔히 미지의 영역을 뜻할 때 uncharted waters라고 합니다.  해도가 작성되지 않은 바다라... 상당히 매혹적으로 들리고, 어떻게 생각하면 경쟁이 전혀 없는 블루 오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uncharted라는 형용사는 기본적으로 '위험한'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다는 겉에서 보면 그냥 끝없는 소금물로 이루어진, 평면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길도 없어 보이고, 당연히 지도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보통 바닷물이 푸르다고 하지만, 사실 지역이나 날씨에 따라서 바닷물의 색깔은 다 다릅니다.  영어로 된 해양 소설을 보면, 바다를 표현할 때 grey sea (잿빛 바다)라든가 wine dark sea (검붉은 바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뜻하는 바는, 대부분의 바다는 몰디브같은 특수한 곳을 빼고는, 그 바닥을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바다 속이 다 저렇게 훤히 들여다보인다면 해도는 필요없겠지요)



위에서 말한 차트, 그러니까 해도에는, 해안이나 섬의 모습 뿐만 아니라, 주요 항로의 바닷속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나 중국처럼 해양 활동이 왕성하지 않은 곳에서는 이렇게 바닷속 깊이가 묘사된 해도가 거의 없습니다.  (혹은 있는데 제가 모르는 거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대부분의 경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많이 사용하는 평저선(바닥이 평평한 배)은 기껏해야 수면 아래 깊이가 1~2미터 정도입니다.  이 정도로라면, 굳이 해도가 없어도 어떤 곳은 위험한 항로인지 대략 눈으로 확인 가능합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유럽의 대양 항해선은 그보다 더 깊은 홀수선 아래의 깊이가 더 깊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의 가장 일반적인 전함인 74문의 함포를 장착한 3급 전함의 경우, 홀수선 아래 깊이가 약 7~9m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간혹 가다 있을 수 있는 암초나 얕은 모래톱이 선박의 항해에 큰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1913년에 최초로 특허 등록된 바 있는 음향 수심측정기(echo sounding) 등의 신기술을 이용하여 해도가 매우 정밀하게 작성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GPS를 이용해서 선박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요즘의 대형 상용 선박이 얕은 모래톱에 덜컥 좌초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18~19세기의 군함에서는 어떻게 해도에도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미지의 바다를 헤쳐나갔을까요 ?



(원래 echo sounding이라는 기법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비극을 막기 위해 독일에서 개발된 것인데, 결국 빙산 탐지에는 무용지물이었지만 수심 측정에는 탁월한 효과가 있음이 증명되었고, 이미 1920년대에 대서양 해저 지도 작성에 이용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인간 수심측정기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름하여 leadsman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lead는 리드라고 읽는 것이 아니고 레드라고 읽습니다.  즉, 납덩어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수심측정원, 측연수(測鉛手)라고 번역됩니다.  이 leadsman은 힘든 군함 생활에서도 매우 힘든 역할이었습니다.  항해 중에 항상 수심 측정이 필요하지는 않았으므로, 따로 leadsman의 역할만 수행하는 병사가 따로 있지는 않았고, 주로 midshipman 같은 초급 장교나 믿을만한 수병 중에서 돌아가며 이 고역을 수행했습니다.

이 측연수라는 역할이 왜 고역인지는 혼블로워 시리즈 중 'The Commodore' 편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Commodore 초판본의 표지입니다)

 


Commodre by C.S. Forester (배경 1812년 발틱해) --------------

"깊은 14 (By the deep fourteen) !" 측연수가 외쳤다.

혼블로워는 측연수가  쇠사슬에 매달린 채 숙련된 강도로 납덩이를 저 앞으로 던지고는, 전함이 그 위를 통과하면서 거기에 달린 줄이 수직으로 될 때 깊이를 읽어내고, 줄을 끌어당겨 다시 새로 던질 준비를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작업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고, 쉴 틈 없이 계속되는 고된 노동이었다.  게다가 측연수라는 직책은 100피트 (약 30m) 길이의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밧줄을 계속 당겨야 했으므로, 온몸이 흠뻑 젖기 마련이었다.  

혼블로워는 하갑판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저 남자는 옷을 말릴 기회가 거의 없을 것이었다.  그는 펠류 함장의 프리깃함 인디퍼티거블(Indefatigable)호가 비스케이(Biscay, 스페인의 대서양 쪽 만입니다 : 역주) 만의 거친 파도 속을 뚫고 들어가 프랑스 군함 드롸 드 롬므 (Driots de l'homme, 인권이라는 뜻입니다 : 역주) 호를 파괴하던 날 밤, 당시 사관후보생이던 자신이 수심 측정 작업을 하던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날 밤 그는 뼈 속까지 얼어붙어 손가락에 감각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기 때문에, 측정 밧줄에 묶어놓은 표시의 감촉, 그러니까 하얀 캘리코 면포나 구멍 뚫인 가죽, 그 밖의 직물들의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젠 해보려고 해도 저렇게 납덩이를 던질 수 없을 것 같았고, 밧줄에 묶어놓은 표시의 임의적인 순서를 기억해낼 수 없는 것은 확실했다.

그는 부시 함장에게 측연수를 적절한 간격으로 교대시켜 주고, 그들이 옷을 말릴 수 있도록 특별한 시설을 배려해 줄 정도의 인간미와 상식이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코모도어(임시 제독 정도의 계급입니다 역주)인 그가 그런 일에 직접 간섭할 수는 없었다.  그 전함의 내부 살림은 부시 함장의 개인적인 책임이었고, 누구라도 간섭한다면 부당하게 여길 것이 당연했다.  코모도어의 직책도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정확히 10 (By the mark ten) !" 측연수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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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프리깃함에서의 측연수의 작업. 1844년의 그림입니다)



당시에 측연수가 수심을 측정하는 방법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항해 중인 배에서, 끝에 큼직한 납추를 매단 긴 밧줄을 배의 진행 방향으로 힘껏 집어던지고는 다시 슬슬 잡아 당겨 팽팽함을 유지시킵니다.  배가 앞으로 전진하면서, 바닥에 가라앉은 납추에 달린 밧줄이 측연수의 손에서 수직이 되는 순간, 밧줄에 표시된 길이를 읽는 것입니다. 간단해 보이지요 ?  하지만 몇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바닷속 지형은 뭐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으므로, 저렇게 던지고 읽고 당기고 하는 중노동을 쉴 틈 없이 계속 해야 했습니다.  괜히 뱃밥 먹는게 힘들다는 것이 아니지요.

둘째, 밧줄이 수직이 되는 순간에 밧줄의 어디까지가 물에 잠겼는지 순간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줄자처럼 밧줄에 길이가 눈금과 숫자로 표시된 것도 아니고, 또 표시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칠흑처럼 어두운 야간에는 읽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저 위에 혼블로워 회상 속에서 처럼, 길이 표시는 밧줄 중간중간에 특색있는 직물을 묶어서 했습니다.  즉 가죽, 캘리코 면포(calico), 서지(serge, 능직물의 일종)를 2, 3, 5, 7, 10, 13, 15, 17, 20 패덤(fathom, 약 1.83m)의 일정한 간격으로 묶어두어,  밧줄을 당기면서 표시 매듭을 만져보고 그 촉각으로 무슨 직물이 몇번째 간격으로 묶여 있는지만 알면, 지금의 깊이가 몇 패덤인지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면 그 직물의 순서와 그 각각의 간격을 외우고 있어야 했습니다.  혼블로워가 지금은 못 외운다고 혼자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순서입니다.

 



그렇게 측정할 때, 만약 수심이 정확히 10 패덤이면 "By the mark 10 !" 이라고 외치고, 만약 13과 15 사이면 "By the deep 14 !" 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니까 측연수는 몸도 힘들고, 젖고, 손바닥도 아픈데다 목청까지 아팠겠지요.  정말 고된 작업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 만화 기억들 나시는지... 저 뒤의 미시시피 강을 운항하는 독특한 페리선에서도 수심 측정을 해야 했습니다.)



이야기가 약간 옆으로 샙니다만, 미국 미시시피 강을 운항하는 배에서는 이렇게 외치는 수심의 깊이 중 일부 숫자는 나름대로 전통적으로 색다르게 불렀습니다.  마치 테니스 점수에서 0을 love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 숫자 2는 two라고 부르지 않고 twain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수심이 정확히 2 패덤 (약 3.6m)일 경우, "By the mark twain")하고 외치는 소리가 강변까지 들렸습니다.  톰 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쓴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 필명이라는 것은 많이들 알고 계실 겁니다.  이제 그 이름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도 아셨지요 ?



(우리가 양키 소년 문학 작가라고 무시하기 쉬운 마크 트웨인... 그러나 세계 문학사에서 정말 존경받는 인물이고, 또 다시 읽어봐도 정말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측연수가 나서야 할 때는 물론 바다 깊이가 얕다고 알려진 곳을 조심조심 통과할 때 이야기입니다.  그러자면 그래도 어느 정도 바다의 깊고 얕음이 표시된 해도가 있어야 했습니다.  물론 드넓고 깊은 바다의 모든 곳에 대해 이런 식으로 해도를 만들 필요는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항구 주변이나 해협 주변, 강의 입구 등에 대해서는 세심한 해도 작성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인공위성도 컴퓨터도 없는 시절에 그런 해도가 정확할리 만무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바로 수로안내인, 영어로는 파일럿(pilot), 요즘 명칭으로는 도선사입니다.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곳인 항구는 당연히 바닥이 얕고, 또 당연히 조석 간만의 차이가 있고, 또 언제 어느 정도까지 물이 차고 빠지는지도 항구마다 특색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이야기지요.  여러분이 자동차 운전을 배우실 때도, 큰 대로를 운전하는 것보다 주차할 때가 더 위험하고 어렵다는 것을 느끼셨을 겁니다.  특히나 자기가 차를 세우려는 공간의 바로 옆에 엄청나게 비싼 마이바흐 같은 차가 주차되어 있다면 정말 주차할 때 식은 땀이 날 것 같습니다.  선박, 특히 큰 선박도 그렇습니다.  사실 망망대해에서야 바닥이건 다른 배건 걱정할 것 없이 그냥 항해만 하면 되지만, 항구에서는 바닥도 얕고, 예상치 못한 거센 해류가 있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다른 커다란 배들이 (망망대해에 비하면) 엄청난 밀도로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모인 배들은 무척 비싼 것들이고, 배라는 물건에는 브레이크도 없고 선회도 쉽지 않으니까 까딱 잘못하면 대형 사고, 즉 엄청난 금전적 손실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각 항구에서는 그런 사고를 막기 위해, 배가 항내에 들어올 때는 의무적으로 수로안내인을 승선시켜 배를 안내하도록 했습니다.  이 수로안내인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아무나 시킬 수는 없었고, 그 항구에서 매우 긴 시간을 보내어 정말 항구 바닥을 '손바닥처럼' 꿰고 있는 익숙한 뱃사람에게 면허를 주어 활동하게 했습니다.  수로안내인, 파일럿, 또는 도선사라고 불리는 직업은 자신이 담당하는 항구에 대해 전문가이기도 했지만, 항구를 드나드는 커다란 선박의 운항에 대해서도 전문가여야 했습니다.  작은 어선의 움직임과 커다란 전함의 움직임은 다를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보통 그 항구에서 잔뼈가 굵은 선장에게 그런 일을 맡겼다고 합니다.



(정작 도선사 본인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움직이는 작은 보트에서 움직이는 거대한 선박으로 재주껏 올라타는 일이라고 하네요.  이는 18세기나 21세기나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즘 가끔 신문에 나오는 직업을 보면, 의사나 변호사가 연봉 킹이 아니고, 항상 변리사, 관세사들과 함께 도선사가 연봉 최상위 직업으로 나옵니다.  물론 이것은 영업을 하는 해당 사무소 전체의 연봉일 뿐 그 사무소에 고용된 변리사/관세사/도선사 개개인의 연봉은 아니라고 합니다만, 어쨌거나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은 맞는 모양입니다. 

나폴레옹 시대에도 도선사의 연봉이 그렇게 높았을까요 ?  죄송합니다.  제목은 낚시였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개 도선사는 전직 선장, 그것도 경험 많은 선장 중에서 선발되었으므로, 일단 분명히 신사 계급에 들어가는 중산층이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콧대높은 영국 로열 네이비도 어느 항구건 외국 항구에 들어갈 때는 항상 해당 항구의 도선사의 지시를 따라야 했고, 또 영국 해군 함장도 도선사에게 예의를 다해야 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 시대에도 상당히 존경받는 직업이었던 것은 맞는 모양입니다.

끝으로 도선사에 대해서는 아주 유명한 만화, 즉 캐리커쳐가 하나 있습니다.  이런저런 역사책이나 심지어는 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만화입니다.



이 만화는 영국의 전통있는 잡지인 펀치(Punch) 지에 실린 것으로, 기사 작위도 받은 정치 만화가인 존 테니엘(Sir  John Tenniel) 경이 그린 것입니다.  보시면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바로 프러시아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황제 빌헬름 2세와 불화를 일으킨 끝에 재상직을 사임하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선장인 빌헬름 1세를 도와 독일 제국이라는 거함을 만들고 운항해온 도선사인 비스마르크가, 철부지 신임 선장 빌헬름 2세의 지휘를 도저히 참지 못해 배에서 내리는 것으로 묘사되었지요.  도선사가 없는 배가 과연 어찌 되었는지는 제1차 세계대전 결과를 보시면 아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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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무재밌어욧!! 2019.08.22 17: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탄

  2. hispe 2019.08.23 1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이제는 잊혀진 과거의 향취가 나는 생활, 문화사를 담은 이야기가 참 재밌단 말이죠. 뭔가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상상만으로 막연히 그리운 느낌이 난달까요. 오늘도 잘 봤습니다.

    Uncharted water하면 대항해시대 시리즈의 영문명..ㅎㅎ 미지의 바다라...어울리는 타이틀이었네요.

  3. 루나미아 2019.08.24 0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측연수... 상상만 해도 힘들어보이네요

  4. 최홍락 2019.08.25 07: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데, 음향 측심기는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처음 고안하고, 1922년 프랑스의 Pierre Langevin이 처음으로 개발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빙산 탐지까지는 모르겠으나 해상교통량이 많은 해협, 교차점 등에서 상대선박의 식별을 용이하게 한다는 점에서 GPS를 이용하는 지금도 중요하게 쓰이는 장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나폴레옹 시대에도 도선사가 연봉킹이었을지는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지금이야 1987년 제정된 영국 도선 업무 조례 등으로 진입 장벽 자체가 워낙 넘사벽이어서 그렇지, 19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무면허로 템즈 강에서 도선 업무를 하던 사람들이 많아서....영국의 경우 헨리8세 당시 Trinity House (일종의 선원, 선장 공제회 내지는 조합)에 도선사 관리 업무를 맡기긴 했는데, 선장이나 선주의 절대적인 복종을 도출할 수 없었고 따라서 무면허도선사에 의한 불법 도선은 계속 되어왔다고 합니다.

    여기에 1800년부터 1914년 사이, 증기선의 출현, 선박 안정성의 발달, propeller 추진선의 출현으로 선박조선시의 안전성이 향상되면서 도선사들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감소하여 그 시기가 도선사들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합니다.

    3. 그리고 도선사 연봉이 높은 것은 알려진 사실인데,(그중 40~50% 정도는 비용이 공제되서 순 연봉은 1억 5천 정도 된다고 하는데 정확한 내역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힘든 업종입니다. 24시간 밤낮없이 악천후건 뭐건 선박의 안전한 입출항을 위해 선장의 도선요구가 있으면 항만외항까지 밤중에도 달려 나가야 하고. 조그만 Tug Boat는 파도와 풍랑에 언제 전복될 수 있으며 선박 본선 접안후 사다리를 타고 선박에 올라 가는 것도 빡세죠. 이 과정에서 안전사고로 강풍과 파도로 재해 사망하는 도선사들이 속출합니다. 무엇보다도 생사를 무릎쓰고 일하고 난후 작업시간 밤낮이 불규칙하고 업무의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은퇴한 도선사들의 30%가 암으로 사망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선박 충돌 사고가 나면 함장과 더불어 도선사가 책임을 뒤집어쓰는 경우도 많이 있고요.

  5. 유애경 2019.08.25 1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원에서 환자 진료 기록부를 일컫는 '차트'가 원래 그런 의미였군요!

    최홍락님//선박 충돌사고에 선장과 함께 책임을 뒤집어 쓰다니 도선사도 참 극한 스트레스에다 극한 직업 같네요!


오늘은 번외편으로,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 원인 중 하나로 '원인'님께서 작성해주신 아래 댓글과 함께 거기에 대한 제 짧은 의견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절대 '원인'님 생각이 틀렸고 제 생각이 맞다는 내용이 아니며, 그냥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점을 먼저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원인'님께서 작성해주신 글 중 핵심 부분은 아래 부분입니다.

다부의 작전은 발틱해의 해상운송을 통해서 리보니아에 거점을 만들고 그 리보니아로부터 상트뻬쩨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공격하는 것인데, 나폴레옹이 다부의 건의를 무시하고 바로 육로직공을 선택한 것이 러시아 원정의 패배원인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 대해 몇몇 분이 영국 해군은 그냥 보고만 있었겠느냐는 댓글을 다셨고, 거기에 대해 다시 '원인'님께서 달아주신 댓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리보니아 해상운송은 복잡한 발틱해 연안을 따라서 항해하는 것이지 넓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가 아닙니다. 그걸 먼저 염두에 두셔야죠. 연안항해를 함으로서 영국해군의 능숙한 기동능력이 상대적으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한적으로만 움직이는 게 전제조건입니다. 

또한 이 지역은 30년 전쟁때부터 이미 무수한 스웨덴 해군력의 침공으로 그 방비에 이골이 난 지역이고 해안지역에는 요새와 해안포로 무장한 도시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죠. 슈트랄준트 같은 것은 단지 그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환경에서 최대한 해안에 바짝 붙어서 요새와 해안포의 엄호를 받으면서 연안항해를 할 경우에 독일,폴란드 지역에서는 영국해군이라도 그렇게 쉽게 공격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문제가 되는 발틱해 동쪽의 리보니아쪽은 경제력이 약하고 해안 방비가 잘 안 된 지역이므로 이 쪽이 약점이긴 한데, 그래서 제가 썼듯이 해안항해 + 해안육로행군을 병행해야 할 겁니다. 아마도 리투아니아 가까운 지역부터는 육상보급의 비중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지만 러시아 내륙을 가르지르는 무모한 경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안전하죠.


여기에 대해서 저는 일단 다부가 해상 운송에 의존하여 리보니아(Livonia), 즉 지금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지역을 공격하고 거기로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하자는 의견을 냈다는 이야기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건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원인님께서 이 글을 보신다면 그런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는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혹시 다부가 그런 의견을 개진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저는 그것이 바다 경험이 없는 뭍사람인 다부가 뭘 잘 몰라서 내놓은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다부의 수륙 병진 작전 계획안을 거부한 것은 이집트에 직접 상륙해보고 또 영국 침공 작전을 끝까지 추진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 육상부대가 해안가를 따라 행군하고, 그와 발맞추어 연안에 바짝 붙어 항해하는 수송선단으로부터 보급을 받으면 보급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겠는가 ?

바다는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기 때문에 바람의 방향이나 파도의 세기가 제멋대로 변할 수 있으므로, 수송선단이 육상부대와 연락을 유지하며 병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2. 육상부대와 항상 병진하지 않는다고 해도, 중간중간 적절한 지점에서 랑데부하여 보급품을 하역받으면 되지 않겠는가 ?

접안 시설이 없는 해변이나 작은 어촌 등에 보급품을 내려놓는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말먹이를 빼고도 20만 대군은 하루에 200톤씩의 보급품이 필요했는데, 한번에 1주일치 씩만 보급을 받는다고 해도 1400톤의 물자를 론치(launch) 보트 등의 대형 보트를 이용해 하역해야 합니다.  론치 보트에 3톤의 짐을 실을 수 있다고 가정해도, 1400톤을 내려놓으려면 배와 해안 사이를 467회 왕복을 해야 했습니다.  20척의 수송선단에서 40척의 론치 보트를 이용해서 하역을 한다고 해도, 보트 1척당 12회 왕복해야 합니다.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수송선 선창에 들어있던 3톤의 짐을 보트에 내려놓고, 그걸 다시 해안까지 300~400m를 노를 저어간 뒤 다시 모래톱 해안에 내려놓으려면 2시간은 걸렸을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24시간 쉬지 않고 일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20척이라는 꽤 큼직한 선단이 하루 종일 정지 상태로 해안 근처에 닻을 내리고 있다면 영국 해군이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두었겠습니까 ?  더 큰 문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1200km가 넘는 항로에 걸쳐서, 이 짓거리를 7번 이상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수십 척으로 구성된 대형 선단 대신, 개별적으로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수송선을 하루에 2~3척씩 끊임없이 내보내면 영국 해군의 봉쇄망을 뚫을 수 있지 않겠는가 ?

영국 해군에는 74문짜리 전열함(ship of the line)이나 28문짜리 프리깃(frigate)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슬룹(sloop)함, 브릭(brig)함, 커터(cutter)함 등 다수의 소형 함선도 잔뜩 거드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형 함선의 주임무가 적국의 연안을 감시하면서 그런 화물선을 나포하는 일이었습니다.  단치히 항구에 프랑스군이 백여 척의 수송선을 모은다는 소식, 그리고 프랑스군이 해안선 쪽으로 집결한다는 소식은 반드시 간첩 등을 통해 영국 해군에게 알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경우 영국 해군은 당연히 단치히 항구 근처에 그런 소형 함선으로 레이드 파티를 짜놓고 군침을 흘리며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4.  해안가에 기마 포병대를 다수 포진시켜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수송선을 지원하게 하면 영국 해군 소형함 정도는 저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

기마 포병대가 수송선을 따라 해안선을 이동해가며 호위해주는 것은 애초에 도로 사정 때문에 불가능했습니다.  기마 포병대가 원활히 이동할 도로가 해안선을 따라 존재한다면, 애초에 굳이 수송선을 띄울 필요없이 그냥 그 도로를 따라 보병대와 치중대를 이동시키면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시 포병 기술로는 수백 m 떨어진 바다에 떠있는 소형 함선을 명중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고, 명중시킨다고 해도 당시 기마 포병대가 사용한 8파운드 포 정도로는 소형 함선조차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국 해군은 뛰어난 속도로 적함에 근접하여 대포를 쏘았기 때문에 적의 군함이나 수송선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지 원거리 포격으로 적의 항복을 받아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5. 어쨌거나 해안선 가까이에 바짝 붙어서 항해한다면 영국 해군을 겁낼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

 

(1807년 이후 본의 아니게 덴마크 해군의 주력함이 된 대포를 장착한 대형 보트, 즉 포함(gun boat)입니다.)

 

 


연안 항해를 한다고 해서 영국 해군으로부터 안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소위 '포함 전쟁'(Gunboat War)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은 1807년의 제2차 코펜하겐 전투 이후, 덴마크와 '포함 전쟁'을 계속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련의 소규모 해전은 1807년 영국에게 당한 이후 대형 함정을 모두 잃은 덴마크 해군이 탑승 인원수 70~80명 정도의 대형 포함(gunboat)를 대량으로 만들어 영국 해군 소속의 브릭(brig)함이나 커터(cutter)함 등 소형 함정들과 싸웠기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전투 중 일부는 거포로 중무장된 해안 요새의 사정거리 안쪽에서 벌어졌는데, 그런 와중에도 영국 해군은 꽤 짭짤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가령 스완(Swan)이라는 이름의 커터함은 원래 정규 영국 해군함정이 아니라 민간에서 임대한, 소위 HMH(His Majesty's Hired) 무장 커터함(armed cutter)이었습니다.  이 배는 12문의 4파운드 포와 2문의 9파운드 캐로네이드 포(carronade, 사정거리가 짧은 대구경 저압포)를 갖춘 배수향 약 130톤 가량의 소형함이었습니다.  스완 호는 1808년 5월 24일 덴마크 보른헬름(Bornholm) 섬 인근에서 덴마크 해군의 130톤짜리 커터 사략선 하벳(Habet) 호와 대결을 벌었는데, 이때 스완 호는 하벳 호 뿐만 아니라 보른헬름 섬의 해안포들로부터도 맹렬한 사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영국 해군의 일방적 승리였습니다.  하벳 호가 폭발과 함께 침몰한 것에 비해, 스완 호는 부상자 한 명 내지 않았습니다.  1809년 8월 12일에는 영국 해군 브릭함인 멍키(HMS Monkey) 호와 대형 론치 보트가 덴마크 무장 소형선박들 3척이 수심이 얕은 해안에 얼쩡거리는 것을 것을 습격했습니다.  덴마크 무장 선박들은 아예 배를 모래 해안에 좌초시키며 육지로 탈출했고, 영국 해군은 3척을 모두 나포했습니다.  

 

 

(물론 반대로 영국 브릭함이 다수의 덴마크 포함들에게 다구리(?)를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물론 위의 그림은 덴마크 측에서 그린 것이지요.)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Gunboat_War
https://en.wikipedia.org/wiki/Hired_armed_cutter_Swan#The_second_S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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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ㅇ 2019.08.15 0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럼 결국 모스크바로 직행한 것이 그나마 가장 가망이 있는 길이였기 때문이었다는 뜻인가요...?

    • 원인 2019.08.15 13: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모스크바 직행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시나리오 입니다.
      이 시나리오는 나폴레옹의 "빨리 성과를 보고 싶다."는 조급함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심사숙고해서 나온 거라고는 볼 수 없죠.

      첫째 보급문제 + 코사크 기병의 습격문제

      둘째로는 전쟁의 기본원칙인 원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싸운다에 위배되기 때문이죠.

  2. ㅇㅇㅇ 2019.08.15 09: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을 안하는게 가장 좋은 길이었겠지요. 비스마르크하고 빌헬름2세가 지금 독일에서 각각 어떤 대접을 받을까 생각해보면...

    • Spitfire 2019.08.15 1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러시아 침공을 안했으면 다시 대불동맹의 무한 반복이죠. 러시아가 떨어져나가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도 언제든 등돌릴 수 있는거고, 제국은 지속되는 전쟁으로 불안정이 계속되었을 겁니다. 황제 입장에서는 시범케이스로 러시아를 굴복시키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도 좋은 최선책이라 여겼다고 생각됩니다.

  3. nasica 2019.08.15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폴레옹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만은, 저 개인적으로는 그냥 러시아 원정을 안 떠나는 것이 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꼭 쳐들어가야만 했다면, 차라리 그냥 리가(Riga)와 레발(Revel, 오늘날의 탈린) 등의 항구도시들만 정복한 뒤에 장기적으로 눌러앉기를 시도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합니다.

    • 원인 2019.08.15 1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리가, 탈린에 눌러앉는 방법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여기가 개발된 곳이라고는 해도 경제력이 독일-폴란드처럼 풍족하진 않기 때문에, 눌러앉을 만큼 보장해 주진 않죠.

      그래서 독일-폴란드에서 해상보급을 해 줘야 오랜 시간동안 작전이 가능합니다. 만약에 해상보급이 안 되면 리보니아의 경제력 한도내에서 한 차례 정도만 작전을 수행해야 됩니다.
      즉 볼가강을 따라 모스크바까지 진격해서 짜르잡기를 시도하고 그 시도가 실패하면 리보니아는 재편성용으로만 쓰고 즉시 철수해야 되는 거죠.

      해상보급에 성공하면 다시 2차 3차로 짜르잡기를 시도할 수 있겠지만, 가능하다고 해도 시도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뭐냐면
      너무 오래 있으면 본국을 비운 사이에 반란이 일어나거나 대불동맹이 다시 발생하기 때문에 신속하게 돌아가는 게 맞죠.

    • nasica 2019.08.15 14: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인// 예,상책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만, 그래도 중책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요새화된 주요 항구 도시를 점령하면 비교적 소수 병력으로도 지킬 수 있을테니 최소한 영국과의 교역은 방해할 수 있을테니 차라리 리가와 레발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그러나 지킨다고 해도 해마다 봄이면 그거 탈환하려고 포위 공격하는 러시아군과의 소모전이 벌어질테니 그것도 결코 상책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결국 상책은 안 쳐들어가는 것이 역시...

  4. 빅터 2019.08.15 1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편적인 지식만 알고있는저는 참 궁금한게.
    러시아도 사람사는데고, 그래서 군대도 있는데 - 즉, 수비군이 있다면 그 수비군이 먹을게 있다는 소리이고,
    먹을게 없다면 수비군도 그만큼 많이 없을건데
    먹을건없지만 (수십만 대군이 필요할 만큼) 수비군이 있다라는 역사적 결론이 있어 신기합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과 싸우러 군대를 보낼 수 는 있지만 나폴레옹은 그 러시아군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보낼 수 없는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 원인 2019.08.15 1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물론 러시아군도 인간이라 먹지 못하면 아사하고 겨울에 동사도 합니다.

      문제는 2가지에서 옵니다.

      첫째는 러시아군은 퇴각중이라 보급선이 짧아집니다. 프랑스군이 보급선이 길어지는 것과 반대인 거죠.

      러시아군이 어려움을 겪지 않은 게 아닙니다.
      러시아군도 상황이 그렇게 좋은 게 아니었죠.

      1차대전 때에도 러시아군이 식량부족으로 애를 먹다가 결국 러시아혁명이 터진 게 식량생산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라 식량수송이 안 되어서 발생한 겁니다.
      여기는 굶주리고 있어도 어딘가는 식량이 풍족한 곳이 있게 마련인데, 이걸 빨리 연결하기란 어렵죠.
      기차가 발명된 1차대전때에도 이 지경인데, 나폴레옹 전쟁때는 보급로의 길이차이가 치명적입니다.


      둘째는 러시아는 단순히 농경민족만 다뤄 온 게 아니라 기마술에 뛰어난 유목민족도 다루어 온 노하우가 많기 때문에, 시베리아쪽으로 철수하더라도 그들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지만, 프랑스는 그런 게 전혀 없죠.

      실제로 러시아원정에서 나폴레옹을 실질적으로 격파한 건 러시아군이 아니라 코사크기병입니다. 코사크 기병 때문에 보급이 차단되고, 전초진지가 계속 습격당하고 정찰병이 계속 소모되면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워지고 , 철수중에도 재편성을 할 수가 없었고, 피해가 급격히 불어났죠.

      그래서 코사크 기병에 대한 대책이 최우선시 되어야 되는데, 모스크바 직공 시나리오 자체가 코사크 기병이 활동하기 가장 좋은 시나리오죠.

      만약에 이 시기가 폴란드가 좀 잘나가던 시기였다면 폴란드가 가진 코사크 지배력을 이용해서 포니아토프스키가 맹활약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때는 이미 우크라이나 전체가 러시아에 넘어간 시대라서 코사크는 일단 러시아의 전력이 된 상태죠.

    • nasica 2019.08.15 14: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인님 말씀처럼 자국 영토 안쪽으로 후퇴하는 군대의 유일한 장점이 보급선이 짧아진다는 것입니다.

      왜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쳐들어가는 것은 어려운데 러시아가 프랑스로 쳐들어가는 것은 쉬운가라는 점은, 2가지로 설명됩니다.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로 진격할 때처럼 인구가 밀집된 곡창지대로 진격할 때는 현지 보급(징발)이 쉽습니다. 또한 러시아가 프랑스로 쳐들어가는 것도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때도, 아일라우 전투 때도 러시아군은 중부 유럽으로 전진할 때 언제나 너무 느렸습니다. 결국 보급이 모든 군대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5. 원인 2019.08.15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부의 건의는 예전에 폴란드 역사학자와 이야기 할 때 들은 이야기 입니다.
    포니아토프스키의 기록에 아마 나와 있었던 듯 한데 다부가
    포니아토프스키와 친분이 있어서 최대한 폴란드와 밀착된 작전을 짜서
    포니아토프스키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쪽 헤게모니를 찾는 방향과
    러시아원정의 성공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방향을 찾았다고 하더군요.

    당시에 프랑스 원수들 중에서 폴란드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게 다부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징발도 다부가 지시하는 쪽이 폴란드인들도 거부감이 적었을 테고,
    우크라이나로 진격해서 우크라이나 코사크를 다시 폴란드 휘하로 가져오는 것보단
    훨씬 가능성 있는 제안이었을 듯 합니다.( 주민들의 심리적 저항의 강도가 다름 )
    다부는 다부대로 자기 나와바리(?)였던 독일-폴란드를 최대한 이용하고 싶었을 것이고
    이게 포니아토프스키의 자기 계산과 맞은 거죠.

    그리고 "병진"의 의미를 잘 이해를 못 하고 제 의견을 왜곡시키는 듯 한데..
    병진이란 나란히 같이 동기화 된 상태로 진격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육운은 육운대로 하고 해운은 해운대로 비동기화된 상태로 이동하는 거죠.
    해운이 실패하면 육운으로 하고 해운이 성공하면 해운으로 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놓은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리투아니아부터는 아무래도 육운의 비중이 커질 거라고 했는데,
    이 말은 리투아니아 근처에서 죄다 육운으로 바꾼다는 이야기가 아니죠.
    육운으로 가야 될 상황이 아무래도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이야기구요.
    실제로 어떤 상황이 발생할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리고 영국해군이라고 해서 항상 나포작전에 우세하다?
    이것도 지휘관이 누구냐에 따라서 변수는 항상 달라집니다.
    넬슨 이외의 다른 사람이 아부키르만에서 똑같이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죠.


    뭐 백번양보해서 영국해군 지휘관이 죄다 우수하다 해도 그 전제는
    이 시나리오에서 치명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왜냐면 리보니아 시나리오에서 해운이 치명적으로 필수 불가격한 요소는 아니기 때문이죠.
    물론 해운이 있어야 비교할 수 없이 편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없어도 아예 안 되는 문제는 아니죠.
    그 대신에 병력수를 더 줄이고 작전가능한 시기가 줄어드니까 매우 불리하기는 합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수로보급은 리보니아-발틱볼가운하-볼가강 경로를 말하는 겁니다.
    독일-폴란드-리보니아 경로도 물론 아주 필요하긴 하지만 없다고 해서 원정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죠. 대신에 한 번 원정으로 끝내고 철수해야 할 겁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해상보급인데, 영국해군이라는 변수가 반드시 치명타를 가할 지 아닐지는 실제 상황에 닥쳐 봐야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해안을 따라 육운에 대해서도 이해를 잘 못하신 듯 한데,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이유는 포병대로 수송선을 엄호하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이유는 마차보급의 최대적인 경기병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기병의 전투력은 돌격할 때의 속도에서 나오고 최대한 습지를 따라 이동해야
    경기병이 속도를 내지 못하도록 제한된 환경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마차도 습지에서는 애를 먹지만 그 대신에 속도를 크게 낼 수 없는 경기병들을
    마차 호위병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저격할 수가 있죠.

    키르홀름 전투에서도 스웨덴군이 습지를 따라 이동중에는 폴란드군이 공격하지 않았죠
    물론 이 경우는 대규모 전투기동인 경우지만, 불과 해안에서 조금만 떨어진 곳으로
    유인된 그 순간에 스웨덴군이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 걸 생각해 보면
    습지의 상태와 기병의 속도간에 상관관계가 얼마나 강한 지를 알 수 있죠.

    중요한 것은 리보니아 그 자체이지, 해운으로 연결하는 것 자체도 부차적이고
    해운실패시에 육운으로 연결하는 것조차도 사실은 부차적입니다.
    리보니아 현지보급까지 다 생각한 이후의 작전이죠.

    그래서 리보니아 일시부양 경제력에 맞게 다부가 생각했던 병력수인 20만 정도로 줄여야
    되는데, 러시아의 총병력이 많으니까 프랑스도 그에 맞게 45만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은 틀린말입니다. 이건 나시카 님이 언급한 대로 정치적인 의도가 들어간 숫자이고
    (이른바 위세보여주기) 애초에 모스크바 진공이라는 시나리오 자체의 한계때문에
    발생한 숫자이지, 시나리오 자체를 바꾸면 필요없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로 진격한 것이 패착인 이유의 핵심은 전쟁의 기본원칙에
    위배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기본원칙 =>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적을 상대한다.
    병자호란때 조선이 털린 것도 바로 이 이유때문이죠.
    남한산성이라는 조선이 원치 않는 장소로 갔기 때문에 근왕병들이 국왕을 구조하기 위해
    서둘러야 했고, 근왕병들 역시 원치 않는 시간 장소에서 격파당했죠.
    물론 금화전투처럼 끈기있게 원하는 시간, 장소를 선점한 경우에는 승리했죠.

    러시아 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스크바로 진격하면 짜르는 당연히 시베리아쪽으로
    철수할 것이고 그 상황에서 원하는 시간과 장소를 소유한 건 짜르 쪽이죠
    짜르가 시베리아로 철수할 경우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시나리오가 애초에 성립한 겁니다

    반면에 리보니아로 진격하면 안전한 근거지를 배후에 두고 뻬쩨르부르크를 공략할 수
    있는데, 뻬쩨르부르크가 러시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해도 여기는 수도이고
    러시아군이 어떻게든 그냥 멀뚱히 보고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처럼 침공군쪽이 방어포지션을 갖고 침공당한 쪽의 공세를 앉아서
    적은 병력으로 효율적으로 요격할 수 있는 위치가 되어 모스크바 때와는 상황이 달라지죠.

    괜히 쓸데없이 병력이 많아 봐야 오히려 나폴레옹의 작전술은 무뎌집니다.
    적은 병력으로 원하는 시나리오에서 적을 요격했던 6일전투를 보면 알 수 있죠.

    모스크바 시나리오에서 조차도 보로디노 전투를 피할 수가 없었는데, 리보니아 시나리오
    에서는 당연히 그에 준하거나 이상의 회전으로 붙을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 경우에는 전장을 프랑스쪽에서 고를 수 있기 때문에 보로디노처럼 무승부에 가까운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만약에 실패할 경우에는 리보니아로 돌아가서 재편성한 뒤에 철수하면 그만입니다.
    짜르를 잡지 못해도 대육군이 살아있으면 "다음 차례의 대불동맹"이 오판한 사이에
    다시 한번 나폴레옹의 작전술로 격파하면 되는 수순이니까요.

    나폴레옹 전쟁을 대국적으로 보면 대영제국의 경제포위망 때문에 질 수 밖에 없었다.
    ==> 남이 해 놓은 걸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건 쉽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뭘까요? 결국 적극적으로 세상의 이치를 알아서
    내가 발전하기 위함이죠. 숙명론적인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숙명론을 넘은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 nasica 2019.08.15 14: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원인님 의견의 원래 뜻을 곡해했다면 사과드립니다.

      그와는 무관하게, 해안을 따라 진격하는 이유가 적의 경기병 습격으로부터 치중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저로서는 고개를 좀 갸우뚱거리게 하네요. 진격할 때 보급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도로 사정 그 자체 때문이지 적의 경기병 때문은 아니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 콩콩이 2019.08.15 15:54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뭘까요? 결국 적극적으로 세상의 이치를 알아서
      내가 발전하기 위함이죠. 숙명론적인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숙명론을 넘은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물론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진짜 싸나이라면, 본인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고, 더 나아가서 '적당한 타협책'도 과감히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차라리 누르하치가 그랬듯 때를 기다려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 '때'가 영영 오지 않더라도 러시아 원정보다 손실은 덜하지 않겠습니까. 꼭 완벽한 승리, 완벽한 유럽 제패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그냥 좀 어중간한 승리나 적당한 성과에 만족하는 것도 사람 사는 방법입니다.

      사실 근본적으로, 말씀해 주신 모든 방안은 '전술적'인 측면이 짙습니다. 그런데 전략 단위의 불리함을 전술 단위에서 극복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카지노의 도박사라면 결코 선택하지 않을 길입니다. 하물며 나폴레옹은 '다수로 소수를 치기 위한 작전술과 전략'에 뛰어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대불동맹전쟁의 무한반복을 수용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프랑스 제국의 영토를 방어하는 수준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또 나폴레옹의 몰락에서 드러나듯, 이빨이 반쯤 꺾인 상황인데도 동맹군은 평화 협정을 제안했습니다. 단지 프랑스 영토의 원상복귀를 나폴레옹이 거부했을 뿐이지요. 결코 동맹군도 전쟁을 좋아한 것이 아닙니다.

  6. 진충보국 2019.08.16 0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개인적으로는 해상보급안은 좋은것 같습니다, 예전에 화물 혹은 보급품의 적화 및 양하는 선박이 묘박하고 부선을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보급품의 적양하에 시간과 노력이 상당했습니다, 하지만 해상운송의 기본은 대량의 화물을 저렴한 비용으로 한번에 수송이 가능합니다, 또한 하역시설이 완비된 항구의 안벽이나 부두에 선박이 접안한다면 하역 작업은 더욱 신속하게 이뤄집니다 이러한 거점 항구의 확보와 물자집적소, 보급창들의 적극적 운용으로 육군의 진군에 맞는 보급 수송선대의 운용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됩니다 하지만 정책이나 전략이든 결정권자의 의견이 젤 중요합니다 나팔륜의 경우 오로지 육전 지휘관이고 또 아부키르, 트라팔가등의 해전에서 박살난 경험이 있기에 해상 병진은 처음부터 채택되는것이 어렵지 않았나 추측 합니다 첨언하면 이러한 작전수행과 보급, 전략차원에서 국가자원의 운송을 신속하고 숙련되게 하기 위하여 국적상선대를 보유해야하고 자국 선원들을 유지해야 된다고 할 것입니다, 영국의 경우 아직도 자국 상선대를 Merchant Navy라고 부르고, 전통적인 해운/해군강국들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해군예비원제도를 운영하는 이유이기도 할것입니다.

  7. 흠흠흠 2019.08.16 0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00만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과,
    5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말고 그냥 스페인으로 진격해서,
    스페인 잔당과 웰링턴 아주 요절을 내버리고,
    반항은 꿈도 못 꿀 만큼 완전히 장악한 다음,
    적당히 영국과 휴전하면 되는 거 아닐까요?
    아일라우, 하일스베르크, 아슬린 아스페른, 바그람, 보로디노...
    사람들이 하도 대포알에 요절나다 보니 글만 읽어도,
    나폴레옹 뭐 하는 인간인가 싶네요.

    • 0_- 2019.08.16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냥 유럽이라는 체스판에 놓인 기물 1, 2, ... , N 정도 아니었을까요?
      거대 군사쿠데타 CEO가 창립 멤버도 아닌 임원이 모가지가 날아가건 말건 신경을 쓰겠습니까? 그나마 다리를 자르니 죽으니 할때 울었다는 장란 정도 되어야 사람대 사람이었겠죠...

  8. 바다에산다 2019.08.16 1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번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가장 좋은 대안은 전쟁을 안 하는 거였다는 말에 백번 공감합니다.

  9. starlight 2019.08.16 14: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든 경우의 수를 산정하며 여러 가정을 해볼수 있고 각각의 경우가 타당성과 가능성. 논리적으로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나폴레옹의 강점은 신속한 기동.개별 기동후 결정타를 날릴 대회전에서 한번에 제때 집결해 전력 극대화. 현지 보급을 통한 작전의 수월성. 황제가 직접 원정을 함께하는 무형의 사기 진작. 빠른 의사결정. 전략 거점을 정복해 대외에 성공을 과시하는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 모든 요인들이 한계 효용에 다다른게 러시아 원정의 패착이었다 봅니다. 차라리 스몰렌스크 정도까지 영토 확장을 해놓고 상당한 병력을 폴란드에서 차출해 명분과 실리를 쌓고 보급도 충당했다면 어땠을까요? 나폴레옹은 항상 전쟁을 조속히 끝내려는 조급함과 조바심이 보이는데, 러시아만큼은 장기전을 도모해봤다면 권좌를 잃는 비극은 막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해로를 통한 보급은 저는 사실 상상도 못했네요.이래서 사람은 견문을 넓혀야하나 봅니다.

  10. 포세이돈 2019.08.16 2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상보급이 당대 기술력으론 제일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그러기엔 두 가지 조건이 미비하지않나요?
    첫번째는 나폴레옹의 해상보급에 대한 신뢰
    둘째는 발트해 제해권이요.
    나폴레옹 일생의 프로젝트인데 해상보급은 트라팔가르 해전 악몽이 있는 나폴레옹으로서는 쓰기 두려운 카드였을거고, 해상보급을 1이라도 생각했다면 나폴레옹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스웨덴을 포섭했어야합니다. 그러나 나시카님 지난번 글을 되짚어보면 프랑스는 스웨덴 포섭에 실패했죠. 베르나도트 에게 자기 약점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을겁니다.

  11. k886860 2019.08.17 1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지하게 책을 출판하셔야 될것 같은데요... 지금까지 쓰신글 묶으면 분량이 충분히 될듯... 저는 그중에서도 장 란 원수의 일대기가 정말 감명깊었습니다.

  12. 샤르빌 2019.08.18 0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웨덴이 동맹군 편에 붙어버린 것도 좀 곤란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또 결과를 놓고보는 웹상에서야 다들 내가 나폴레옹이고 제갈공명이라 이런저런 훈수를 두지만 뭐 원균급의 인물이라면 몰라도 누가 되었든 당시의 지도자들 보다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적은 없습니다 달리 '역사에 만약은 없다' 라는 말이 있는게 아니니까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