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12 바우첸을 향하여 (9) - 바우첸 방어선 설계 (캐쓰카트 백작입니다. 귀족 집안에 태어나 이튼 스쿨에서 교육받은 전형적인 영국 귀족인데 1771년 그가 16살일 때 러시아 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상트 페체르부르그에 가면서 러시아와 연을 맺었습니다. 그는 불과 26세에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작위를 물려받은 뒤, 27세라는 늦은 나이에 군 장교직을 구매하여 군에 투신하여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전했습니다. 1807년 제2차 코펜하겐 원정에 육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하여 덴마크의 항복을 받아낸 공로로 자작이 된 그는 1812년 4성 장군으로 승진하면서 주러시아 대사로 임명되어 1814년까지 짜르의 사령부에서 행동을 같이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폐위되면서 전쟁이 끝나자 그는 1814년 백작 작위를 받았고, 그런 뒤에도 1820년까지 주러시아 대사로서 상트 페체르.. 2023. 2. 6. 바우첸을 향하여 (7) - 비트겐슈타인의 결정 밀로라도비치가 프랑스군의 기습 도하 작전을 막지 못하고 쩔쩔 매던 5월 9일, 프로이센군의 총사령관은 블뤼허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부상을 입고 있었던 블뤼허는 이 날 특히 상태가 좋지 않아 병석에 드러누웠고, 지휘권을 다른 사람에게 이양해야 했습니다. 상식적인 관례에 따른다면 프로이센 야전군 내의 서열 2위인 요크 대공이 임시 사령관이 되어야 했는데, 뜻밖에도 일개 참모에 불과한 그나이제나우가 지휘권을 이양받았습니다. 이는 프로이센군 위아래 모두가 블뤼허의 모든 작전은 어차피 그나이제나우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통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고 요크 대공 본인도 새파랗게 아랫것인 그나이제나우로부터 명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무척이나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2023. 1. 23. 바우첸을 향하여 (4) - 엘베 강 양쪽의 고민 엘베 강을 건너 한숨 돌린 연합군은 이제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사람은 바로 총사령관 비트겐슈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도 딱히 명확한 계획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당연히 궁극적인 목표야 나폴레옹의 패배였지만, 그를 위해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하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싸우지 않고 이길 방법은 없었으니 당연히 언제 어디서에선가 싸우기는 해야 했는데, 그 언제와 어디서가 문제였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이 엘베 강을 건너 추격해 올 것이 자명했으니, 그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급했습니다. 엘베 강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더 유리한 조건에서 싸울 수 있는 후방으로 더 후퇴해야 하는가가 1차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엘베 강을 버리고 후퇴하는 것은 매우 바보 같은 일이었습.. 2023. 1. 2. 바우첸을 향하여 (3) - 샤른호스트의 빈 자리 5월 6일 아침, 나폴레옹은 스파이들로부터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이 각각 따로 엘베 강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매우 흡족해 했습니다. 특히 프로이센은 북쪽의 마이센(Meissen)으로 향하고 러시아군은 예상대로 남쪽의 드레스덴으로 향한다는 것을 듣고, 나폴레옹은 자신이 토르가우로 네의 군단을 보낸 것에 프로이센군이 베를린이 위협받고 있다고 겁을 집어먹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기분 좋게 그 날 저녁 뷔르젠(Wurzen)까지 도착했지만, 프로이센군 중 일부 1만2천 정도만 마이센으로 갔을 뿐 나머지는 모두 러시아군을 따라 드레스덴으로 갔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이 소식에 놀란 나폴레옹은 정확한 정보를 얻기를 원했고, 프랑스군의 진격은 또 잠시 멈춰야 했습니다. 혹시나 이것들이 결별하지 않으면 어떡.. 2022. 12. 26. 뤼첸 전투 (11) - 이긴 거야, 진 거야? 나폴레옹 시대에는 아직 세균의 존재 자체를 몰랐고 따라서 소독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며 항생제 따위는 물론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전쟁터에 나간 군인은 언제나 전사보다는 병사의 가능성이 훨씬 높았고, 그냥 찰과상에 불과한 가벼운 부상도 재수가 없으면 치명상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연합군 전체의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던 샤른호스트가 바로 그런 희생자였습니다. 그는 이 날 전투에서 유탄에 발에 맞아 부상을 입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가벼운 부상일 뿐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다들 생각했지만, 거의 2달 뒤인 6월 말, 협상을 위해 오스트리아를 방문했을 때 결국 그 부상이 악화되어 숨을 거둡니다. 그러나 최소한 전투 당일 밤이나 그 후 며칠 동안에는 기본적인 사무를 보는 것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 2022. 11. 14. 뤼첸 전투 (3) - 불안한 시작, 소극적인 전개 원래 비트겐슈타인의 기본적인 작전은 나폴레옹의 주력부대가 뤼첸을 지나 라이프치히 쪽으로 충분히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가, 프랑스군 우익의 뒤통수를 후려갈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면 당연히 프랑스군 주력부대가 저 멀리 지나간 뒤에 공격을 개시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탁 트인 평야지대인 라이프치히 일대에서 정찰을 해보니, 저 멀리 프랑스군 주력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행군해가는 것이 분명히 보였습니다. 기병대들이 잡아온 프랑스군 포로들을 취조해보아도, 5월 2일 아침에 나폴레옹의 사령부도 뤼첸을 떠나 라이프치히로 출발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작은 4개 마을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군기 빠진 후위부대 2천여명임을 참모 뮐링 대령 본인이 직접 정찰을 해보고 확인했습니다. 그러니 .. 2022. 9. 19. 뤼첸 전투 (1) - 군주들의 언덕에서 흔히 장군들이 아무렇게나 구술하면 그에 따라 병사들은 밤새도록 행군을 하며 고생한다고들 하지만, 적어도 5월 1일 밤 ~ 5월 2일 새벽 비트겐슈타인에게 그건 억울한 비난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거의 한숨도 못자고 상세한 병력 이동 명령을 작성해서 각 부대에 전달했고, 자신도 나폴레옹을 빠뜨릴 함정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이동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밤 늦게까지 들어오는 최신 정보를 파악한 뒤 특유의 꼼꼼함을 살려, 각 주요 지휘관마다 부대를 어느 장소로 몇시까지 이동시키도록 세세한 명령서를 따로따로 작성했습니다. GPS나 무선통신은 커녕 항공지도나 타자기도 없던 시절, 거위 깃털과 잉크 그리고 거친 종이만으로 지휘관의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어두운 등불 밑.. 2022. 9. 5. 뤼첸 전투 하루 전 상황 - 나폴레옹, 퍽치기 위기 일발 나폴레옹은 4월 24일 마인츠를 떠나 약 250km의 길을 밤에도 쉬지 않고 마차로 달려 그 다음 날인 25일 저녁 9시에 에르푸르트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 집결한 근위대와 합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동쪽 약 20km 지점에 있는 바이마르(Weimar) 주변에는 4만5천의 막강 병력을 자랑하는 네 원수의 제3 군단이 포진해 있었고, 에르푸르트 남동쪽 약 50km 지점의 잘펠트(Saalfeld) 일대에는 베르트랑(Henri Gatien Bertrand)의 1만8천에 달하는 제4 군단이 있었습니다. 2만4천이 배속된 우디노의 제12 군단도 에르푸르트 남쪽 90km 지점인 코부르크(Coburg)에 주둔했고, 역시 2만4천인 마르몽의 제6 군단은 에르푸르트 서쪽 약 25km 지점인 고타(Gotha)에 도착해 .. 2022. 8. 29. 누가 비트겐슈타인을 괴롭히나 - 손무의 일화 비트겐슈타인의 작전안은 매우 뛰어난 분석과 예측에 기반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 핵심은 현재까지 포착된 프랑스군의 이동 및 집결 상황으로 볼 때, 나폴레옹의 의도는 라이프치히를 거쳐 토르가우(Torgau)로 진격하여 그 곳의 포위를 푸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아마도 베를린으로 진격하여 프로이센을 굴복시키려 할 것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보았습니다. 프로이센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갈지 연합군의 근거지인 슐레지엔의 브레슬라우로 갈지는 사실 당시 나폴레옹도 결심을 굳히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적어도 나폴레옹의 진격 방향이 라이프치히라는 것은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1650년 경의 토르가우의 전경입니다. 엘베 강변의 주요 요새도시 중 하나로서, 그 앞의 다리를 장악하고 있으므로 여기를 장악하면 엘.. 2022. 8. 22. 인사가 만사 - 쿠투조프의 후임 1813년 4월 25일, 러시아군 사령부와 동행 중이던 영국군 윌슨 장군은 일지에 연합군 총사령관 쿠투조프의 병세에 대해 차가운 어조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원수께서는 적군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거리에 당도하자 아주 시의적절하게도 병석에 드러누우셨다. 아마도 이건 카멘스키 전략(Kamenski stratagem)일 것이다." 여기서 카멘스키 전략이라는 것은 제4차 대불동맹전쟁 때인 1806년 12월, 나폴레옹과 대치한 러시아군의 지휘권을 부여받은 뒤 부대를 점검해본 결과 도저히 대책이 서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령관직에서 사임한 카멘스키 백작(Mikhail Fedotovich Kamenski)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마 윌슨 장군은 사흘 뒤에 쿠투조프가 정말 죽어버리자 '어? 꾀병이 아니었어?' 라.. 2022. 8. 15. 베레지나의 동쪽 - 비극과 투지 빅토르의 제9군단은 비교적 최근에 편성되어 보로디노 전투 이후인 9월 초에야 네만 강을 건넜던 약 3만 규모의 군단으로서, 대부분 바덴(Baden), 헤센(Hessen), 작센(Sachsen) 등 독일인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거기에 일부 폴란드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들도 물론 척박한 러시아 땅에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베레지나 강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1만2천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추격을 뿌리치고 스투지엔카 외곽으로 달려온 빅토르 휘하엔 불과 8천명의 병력 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 4천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이들은 파르투노(Louis Partouneaux) 장군 휘하의 1개 사단이었는데 이들은 나폴레옹의 명에 따라 일종의 미끼로서 며칠 전부터 보리소프의.. 2021. 10. 4. 상트 페체르부르그를 향하여 ? - 고민 속의 나폴레옹 모스크바로 돌아온 나폴레옹이 구상한 기본 방향은 다음 목표를 찾아 전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물은 바로 알렉산드르의 궁전이 있는 러시아의 공식 수도 상트 페체르부르그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랑다르메의 주력 군단들은 모스크바에 그대로 두고, 외젠의 제4 군단만 차출하여 상트 페체르부르그로 진격할 생각이었습니다. 주력 군단들을 모스크바에 주둔시키는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외젠의 군단만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되었고, 둘째, 남쪽으로 후퇴한 쿠투조프의 러시아 야전군으로부터 모스크바를, 정확하게는 모스크바의 보급품 창고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상트 페체르부르그는 군사적 방비가 든든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군의 쓸만한 병력은 모두 쿠투조프의 휘하에 있었으므로, 상트 페체르부르그와 나.. 2021. 1. 4.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