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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클레이7

스몰렌스크에서 모스크바로 - 러시아 측의 사정 러시아군의 상황도 당연히 좋지는 못했습니다. 물리적으로도 러시아군은 정말 걸음아 날살려라 도망치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전쟁 초기, 병사들의 노숙에 대해 항상 시적으로 기술하던 젊은 독일계 에스토니아 귀족 출신의 러시아 기마근위대 장교 욱스퀄(Boris von Uxkull)도 8월 21일 철수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겁먹은 토끼처럼 달아나야 했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죽어라 도망치는 처지이다보니 보급도 프랑스군에 비해 별로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도 부족했지만 먹을 것이 있다고 해도 그걸 조리해 먹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후위부대는 코노브니친(Petr Petrovich Konovnitsin) 장군이 이끌고 있었는데, 이들은 스몰렌스크에서 출발한 이후 2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냅다 뛰.. 2020. 5. 18.
화염 속의 얼음 - 스몰렌스크 전투 (5) 웅장한 성벽을 둘러싸고 벌어진 스몰렌스크 전투는 낮에도 장관이었으나 밤이 되자 더욱 장엄한, 어떻게 보면 무시무시한 광경을 연출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낮부터 박격포를 이용하여 좁은 스몰렌스크 시내에 계속 폭발탄을 쏘아넣고 있었습니다. 스몰렌스크 시내의 건물들은 대부분 나무로 지어진 것들이라서, 이 포격은 곳곳에서 화재를 일으켰고 밤이 되자 온 시내가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성 밖에서 포병들을 지휘하던 프랑스군 불라르(Boulart) 대령의 시선에는, 시커먼 성벽 위에서 불바다를 배경으로 총을 들고 움직이는 러시아군 병사들의 모습이 지옥불을 속에서 움직이는 꼬마 악마들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프랑스군의 팡텡 데 조두와르(Fantin des Odoards) 대위는 '단테도 지옥에 대한 묘사를 할 때 이 광경에서.. 2020. 4. 20.
맨손과 성벽 - 스몰렌스크 전투 (4) 나폴레옹이 눈 앞의 스몰렌스크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도하 지점을 찾기 위해 드네프르 강 상류로 병력을 파견한 것은 매우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다만 그 지휘관으로 쥐노(Jean-Andoche Junot)를 선정했다는 것이 일단 좋지 않았습니다. 쥐노는 무명이던 나폴레옹의 출세 계기가 되었던 1793년 툴롱 포위 작전에서 만난 첫 부하이자 친구로서, 누구보다도 오래 나폴레옹의 측근으로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오랜 기간 함께 동고동락했던 쥐노에게 주요 보직을 맡기지 않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쥐노에게 뛰어난 재능이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침공 작전 때, 로나토(Lonato) 전투에서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는데, 그때 이후로 성격이 변하여 성급하고 자제력이 떨.. 2020. 4. 13.
바클레이의 도착 - 스몰렌스크 전투 (3) 스몰렌스크는 인구 1만2천 정도에 건물이 2200 채 정도 있는 작은 도시였고 그 자체로는 특별히 꼭 탈취해야 할 중요한 군사적 가치가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곳은 예카테리나 여제 때에 건설된 민스크-스몰렌스크-모스크바를 잇는 도로의 중간 기점으로서, 그 중간을 가로지르는 드네프르 강을 건널 다리가 2개나 놓여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바클레이의 러시아군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크게 우회한 것은 좋았으나, 이제 바클레이의 뒤를 치기 위해서는 드네프르 강을 건너야했고 그러자면 스몰렌스크를 손에 넣어야 했습니다. (1812년 당시 스몰렌스크의 성벽과 방어탑 위치입니다. 실제로는 방어탑이 30개가 아니라 훨씬 더 많았던 모양입니다.) 이런 군사적 가치가 있었으므로 스몰렌스크는 그 규모치고는 꽤 탄탄.. 2020. 3. 30.
엇갈린 발걸음 - 스몰렌스크 전투 (2) 바클레이가 7일 밤 바그라티온과 플라토프에게 보낸 명령서는 2가지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독일인 특유의 무뚝뚝함 때문인지 원래 바그라티온과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이었는지, 바그라티온은 그냥 '우회전하여 전진'이라는 퉁명스러운 명령만 들어있었을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별 설명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바그라티온은 영문을 몰라 당황했고, 일단 명령에 따르기는 따랐지만 마음 속으로는 바클레이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점점 커졌습니다. 둘째, 그나마 플라토프에게는 아예 명령서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당시 전장에서는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무선 통신도 없고 GPS도 없고 항공 정찰도 없으니 아군끼리도 넓은 지역에서는 상호 교신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담이지만 1815년 워털루 전.. 2020. 3. 23.
울며 겨자 먹기 - 스몰렌스크 전투 (1) 7월 27일 밤 비텝스크에서 철수한 바클레이의 러시아 제1군은 약 130km 떨어진 스몰렌스크에 8월 1일에 도착했습니다. 하루 약 32km씩 행군한 셈인데, 당시 군대의 하루 평균 행군 거리가 20km이던 것을 생각하면 꽤 강행군이었습니다. 스몰렌스크는 당시 인구 1만5천 정도의 작은 도시였는데, 무엇보다 튼튼한 벽돌로 쌓은 성벽과 총탑으로 무장된 요새 도시였습니다. 게다가 폭이 거의 100m에 달하고 꽤 깊은 드네프르(Dnieper) 강을 북쪽에 끼고 있어서 방어에 크게 유리했습니다. 드네르프 강은 러시아에서 시작하여 우크라이나를 거쳐 남쪽의 흑해로 흘러들어가는 큰 강인데, 스몰렌스크에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렀고, 스몰렌스크는 강의 좌안, 즉 남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있는 비텝스크는 스.. 2020. 3. 19.
큰 기대 큰 실망 - 비텝스크 (Vitebsk) 전투 러시아 제1군의 뒤를 추격하던 뮈라는 최소한 러시아군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는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뮈라의 보고를 통해 러시아 제1군이 드리사의 방어진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는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쾌재를 올렸습니다. 드디어 러시아군과 결전을 벌일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태까지 빌나에서 여러가지 행정 업무에 발목이 잡혀 있던 그는 제롬의 바보짓 때문에 바그라티온을 놓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직접 군을 지휘하기로 했고, 당장 말에 올라 드리사를 향해 달렸습니다. 나폴레옹의 기본 계획은 퓰과 알렉산드르의 실수를 100%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드리사의 러시아 제1군의 남동쪽으로 우회하여 바그라티온의 러시아 제2군과의 합류를 원천적으로 봉쇄함과 동시에 러시아군의 보급로를 막고 내친 김에 러.. 2020. 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