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만 강을 건너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나(Vilna, Wilna, Vilnius)에 입성하기까지 총 한 방 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겉으로 보기에는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프랑스군이 빌나에 입성할 때, 빌나 주민들의 반응을 봐도 그랬습니다.  당시 빌나는 러시아의 직접 통치 하에 들어간지 약 20년이 채 안 된 상태였었는데, 러시아계 관료들이나 러시아 측에 붙었던 폴란드계 귀족들은 러시아군이 철수할 때 그 뒤를 따라 함께 피난을 가버린 뒤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남아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계 주민들은 프랑스군을 해방군으로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당시 폴란드 창기병 부대를 이끌고 빌나에 거의 처음으로 입성했던 로만 솔틱(Roman Soltyk) 백작의 목격담에 따르면 거리와 광장은 환영 인파로 가득했고 창문들에는 여인들이 상반신을 내밀고 손수건을 흔들며 기뻐했습니다.  꽃다발과 함성이 난무했고요.

 

(1812년 당시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인 외젠 보아르네 휘하 참모진에 있던 알브레히트 아담(Albrecht Adam)이라는 종군화가가 스케치한 그랑다르메 보병들의 행군 모습입니다.  알브레히트 아담은 바이에른 출신의 독일인으로서, 1809년 전쟁 때 보아르네에게 종군 화가로 채용되어 이후 계속 바이에른 궁정 화가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 분은 스케치 뿐만 아니라, 나중에 전쟁이 끝난 뒤 이런 스케치와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여러 석판화와 유화도 그려 꽤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그 그림 중 일부는 지금도 유럽 곳곳의 박물관에 걸려 있다고 합니다.  사진은 제가 요즘 거의 베끼다시피 하고 있는 아담 자모이스키의 책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에 포함된 그림입니다.  당시 알브레히트 아담은 주로 이탈리아인들로 편성된 제4군을 따라다녔다고 하니까 저 그림 속 병사들도 아마 이탈리아군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군이 빌나에서 찾아낸 것은 다 타버린 러시아 군수품의 잿더미 뿐이었습니다.  빌나와 그 인근 지대는 러시아군이 이미 수개월에 걸쳐 장기 주둔하며 먹을 것을 박박 긁어먹고 간 뒤였기 떄문에 식량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박박 긁어모았던 식량은 러시아군이 철수할 때 용의주도한 바클레이가 모두 불태워 버렸고요.  그런 상황은 원래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후방지대에 엄청난 양의 군수품을 잔뜩 쟁여놓았습니다.  그러나 네만 강을 건너자마자, 정확히 이야기하면 네만 강을 건너기 전부터도 말들이 사료 부족과 형편없는 도로에서 기진맥진하여 빠르게 죽어쓰러지기 시작했고, 특히 네만 강을 건넌지 얼마 안되어 불어닥친 폭풍우 속에서 수만 마리의 말이 죽어버린 것이 상황을 정말 악화시켰습니다.  진흙구덩이와 물웅덩이 속에서 말들이 허우적거리다 죽어버리자, 식량을 후방에서 새로 실어오기는 커녕 그나마 이미 싣고 오던 것조차도 버리고 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버려야 했던 짐 중에는 말들의 먹이인 귀리도 잔뜩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곧 더 많은 말들이 영양 실조로 죽게 되었고 상황은 기하급수적으로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랑다르메를 덮친 폭풍우로 인해 진흙탕이 된 도로에서 고생하는 포병대를 그린 모습입니다.  이 그림도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에 포함된 것입니다.  Christian Wilhelm von Faber du Faur라는 분이 그린 석판화입니다.  이 분도 남부 독일인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화가인데,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에 배속된 종군 화가였습니다.)

 



그렇게 빌나로 반입되는 식량은 전혀 없던 반면, 먹여살려야 하는 입들은 삽시간에 깜짝 놀랄 정도로 잔뜩 몰려들었습니다.  후방 뿐만 아니라 전방에서도 많은 그랑다르메 병사들이 절뚝거리며 빌나로 몰려든 것입니다.  낙오병과 환자, 부상병들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40만 그랑다르메 중 상당수는 단련된 병사들이 아니라 단시간에 긁어모은 어린 신병들이 많았는데, 특히 그런 신병들은 부족한 식량과 열악한 도로 및 위생 환경에 버티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총상이 아닌 강행군에 의해 발과 다리에 생긴 부상과 함께 온갖 질병으로 인해 빌나에 차려진 야전 병원에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네만 강을 건넌지 1주일 만에, 아무 전투가 없었는데도 놀랍게도 이들의 숫자는 3만 명에 달했습니다.  전체 병력의 7~8%에 해당하는 인원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빌나 및 인근 지역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주민들의 기쁨도 삽시간에 식어버렸습니다.  주민들은 나폴레옹이 과거 영광을 누리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복원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어렵더라도 최소한 러시아의 농노제라는 신분의 예속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은 곧 나폴레옹에겐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령 7월 3일, 나폴레옹은 리투아니아 정부 수립을 발표했는데, 이는 바르샤바 공국과의 합병을 원천 봉쇄하고 그저 리투아니아 지역에서의 징병과 식량 징발을 실행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 명백했습니다.  열의에 찬 빌나 대학의 학생들이 일종의 정치 모임을 만들어 프랑스군 점령 지역은 물론 러시아군 점령 지역에서도 농민들에게 러시아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선전하겠다는 뜻을 전하자, 나폴레옹은 '사회 정치적 소요를 원치 않는다'며 그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또 빌나 대학의 학장인 얀 스나이데츠키(Jan Sniadecki)와 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이야기가 나오자 '그 사람은 굉장히 뛰어난 황제요 !' 라며 노골적으로 알렉산드르의 편을 들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바르샤바 공국에서 일단의 폴란드 애국자들이 먼 길을 찾아와 폴란드 왕국의 부활을 건의하자 '내 통치 하에는 이해가 서로 충돌하는 많은 집단이 있고 나는 그들의 충돌을 조절해야 한다'라며 그들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이 전쟁이 벌어진 주요 원인은 크게 2가지, 영국-러시아 간의 무역 그리고 폴란드 왕국의 부활에 대한 러시아의 반발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러시아 항구를 영국으로부터 닫아야 했고 또 폴란드인들의 충성이 꼭 필요했습니다.  애초에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은 도저히 상존할 수 없는 서로의 이해 관계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의 팔을 비틀어서라도 어떻게든 러시아와의 동맹을 다시 끌어내려 했습니다.  즉, 나폴레옹이 이 전쟁에서 바라는 것은 알렉산드르와의 화해였고, 그 때문에라도 나폴레옹은 끝끝내 농노 해방령이나 폴란드 왕국의 부활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주민들의 민심을 이반시킨 것은 그런 민족주의에 대한 배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배고픈 병사들은 어떻게든 먹을 것을 구해야 했고, 당연히 곳곳에서 난폭한 약탈이 자행되었습니다.  그랑다르메의 제1진은 언제나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했지만, 그들이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을 다 훑어먹으며 지나가자, 제2진을 맞이하는 것은 텅빈 마을들과 버려진 농토 뿐이었습니다.  농민들은 그랑다르메를 산적떼로 인식하게 되었고, 프랑스군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농민들은 얼마 안되는 식량과 가축을 몰고 깊은 숲 속으로 피난을 떠나버렸습니다.  농민들은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프랑스놈들은 우리의 족쇄를 풀어주러 왔다는데, 우리 신발까지 벗겨가더라."

그랑다르메의 병사들도 그에 대응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계 주민들을 사실상 적으로 대했습니다.  요제프 에즈몬트(Jozef Eysmont)라는 시골 신사는 빌나 인근에 있던 자기 장원으로 들어오는 프랑스 기병대를 전통에 따라 빵과 소금으로 환대하려 했으나, 그들은 곧 그의 창고와 마굿간을 탈탈 털더니 더 나아가 아직 익지도 않은 밀과 보리를 다 베어버리고 집안까지 쳐들어와 구석구석을 뒤집어 귀중품을 빼앗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들고가지 못하는 모든 가구를 아무 의미 없이 때려부수고 창문도 하나하나 다 깨어버렸습니다.  그의 마을 전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물론 무덤까지도 프랑스군의 약탈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한 폴란드 장교는 그에게 빵 한조각을 구걸하며 다가오는 거지를 밀어내려다 그 거지가 그의 친구이던 폴란드계 귀족인 것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폴레옹도 이런 약탈에 대한 보고를 당연히 들었고 대노했습니다.  그는 약탈자들에 대해서 일체의 관용을 베풀지 말고 즉결 처분에 처하도록 엄명을 내렸습니다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식량을 공급받지 못하는 군대는 약탈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병사들은 굶어죽으나 총에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절망과 체념이 섞인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병사들이 취할 행동은 딱 하나였습니다.  탈영이었지요.  탈영은 광범위하게 일어났습니다.  특히 고향에서 너무나 먼 리투아니아 현지에서 탈영병들은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떼를 지어 산적떼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곳곳에서 현지 주민들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 장교나 관료들까지 습격했는데, 이들 때문에 나폴레옹의 명령서를 전달하는 파발마들의 활동이 제약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탈영병들의 숫자는 최소 3만에서 최대 9만까지 되었다고 하는데, 탈영병의 숫자가 이렇게 너무 많다보니 이들을 체포하는 대로 다 처형할 수도 없었습니다.  간혹 이들을 잡아들일 경우 일부만 처형하고 대부분은 다시 부대에 편입시켰는데, 이들은 대부분 다시 탈영했습니다.

결국 네만 강을 건넌 뒤 나폴레옹에게 들어오는 것은 온통 나쁜 소식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나쁜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불시에 네만 강을 건너 빌나를 들어친 것은 확실히 기습 효과가 있었고, 그로 인해 러시아군을 궤멸시킬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Albrecht_Adam

https://en.wikipedia.org/wiki/Christian_Wilhelm_von_Faber_du_Fa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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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ranken 2019.12.02 0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군에서 군복무한 병사들이 하나같이 하소연하는 게 행군이 생각이상으로 힘들고 부실한 전투화 땜에 발바닥 및 발목에 물집,상처까지 생겨 이중으로 힘들었다는 건데 인프라가 없다시피한 당시엔 3만여명의 부상자는 평범한 수준이었겠죠. 군납비리가 한국군 이상으로 만연해서 군화 재질도 좋지 못했던 것도 감안하면 선방했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매사 꼼꼼했던 나폴레옹이 이걸 몰랐을 리는 없으니 이런 낙오병도 계산에 넣어 대군을 꾸린 거겠죠.

    • reinhardt100 2019.12.02 1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군화문제 이거 꽤나 중요합니다.

      독소전 당시 소련군이 심각하게 직면한 문제 중 하나가 군화문제입니다. 가장 심각했던 공업용 소금과 비타민 섭취보다 후순위이긴 하지만 군화가 없어서 병력충원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이걸 해결해준게 미국의 랜드리스인데 최소 1500만 켤레의 군화가 소련에 급송됩니다.

      냉전기 소련군이 기계화에 집착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군화문제입니다. 소련식 발싸개나 우샨카 같은 신발 아니면 인민군이 쓰는 지하족 같은 운동화로 진격하다간 며칠만에 발이 아작나니 최대한 기계화해야 후유증이 덜할 거니까요. 농담으로 들으실지 모르지만 이게 현실이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군이 발싸개 퇴출한게 2010년대였으니까요.

    • 기리스 2019.12.02 14: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발싸개를 자신들의 전통, 자존심 같은 걸로 여기면서 옹호하는 러시아인들이 꽤 되더군요. 것도 신발 나름이고, 민간이나 군에서도 해군 같이 구두 많이 신는 곳은 옛날부터 양말이 보급되었죠.

    • 카를대공 2019.12.02 1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군대에서 인상 깊게 읽은 책의 구절 중 하나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베트남 군인들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베트남 군인들은 폐타이어로 된 신발을 신고 행군을 했다"
      그당시에도 기겁을 했는데 나시카님 이번주 글을 보니 그때가 떠오르네요.

    • [][] R.F.[][] 2019.12.06 1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reinhardt100: 러시아식 전통 펠트 방한화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우샨카가 아니라 '발렌끼' 입니다.
      우샨카는 소련 및 러시아군 특유의 방한모죠 ^^

    • reinhardt100 2019.12.06 14:14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제가 잘못 적었네요. ^^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흠흠흠 2019.12.02 0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력이 솜사탕처럼 녹아내리고 있네요. 약탈행위를 전혀 못 잡는 것으로 보아 나폴레옹이 대노했다는 것도 그냥 연기인 것 같습니다. 진짜 잡으려고 마음 먹었으면 웰링턴처럼 약탈행위 잡았겠죠. 저렇게 본국에서 멀리 떨어질 수록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소속 군부대 밖에 없을텐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현지에서 산적떼를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죠? 못 배운 사람들이라서 그러나.

    • ㅋㅋㅋ 2019.12.02 14: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쉿. 매일 격노만 하시는 그분 지지자들이 뜨끔합니다

    • ㅇㅇ 2019.12.02 2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 멀어서 돌아가기에도 막막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싶습니다. 빌뉴스에서 바이에른까지 1000km, 파리나 북이탈리아까진 1500km에 가까우니까요

  3. 리순센 2019.12.02 1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직 본격적인 시작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정신이 아득해지네요.

  4. 장웅진 2019.12.02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째 <알기 쉬운 제2차 세계대전사 제3권 - 대초원의 불꽃>을 다시 읽는 기분입니다. 나치독일군을 해방군이라며 환영했던, 스탈린에 의한 인공대기근을 겪어야 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나치독일군이 집단농장을 해체하기는커녕 그걸 계속 이용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을 수탈하고 괴롭히자 파르티잔으로 변해갔더라는...

    • reinhardt100 2019.12.02 1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크라이나나 백러시아, 발트 3국, 심지어 폴란드조차도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을 환영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일단 제국의 괴뢰국이긴 해도 독립을 약속했던 것도 있습니다. 하나 더 1917년 이후 철도 전격전 당시 약 150만 독일 동방 점령군이 제정 러시아보다 훨씬 공정한 점령통치를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독소전쟁 초기 독일군에 대한 환상이 있던 이들 지역 주민들이 모두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볼 수 밖에 없었죠. 심지어 우크라이나에서는 나시카님이 쓰신대로 빵과 소금을 뿌리면서 열렬히 환영했죠.

    • Franken 2019.12.02 19: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만일 나치독일이 점령지 주민들을 인간 대우 해주었다면 독소전쟁의 향방 자체가 달라졌을 겁니다. 파르티잔 퇴치하는 데만 30여만명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니 일개 야전군 수준의 이 병력이 소비에트 전선에 투입되고 주민의 협조까지 얻으면 소련으로썬 매우 난감한 상황이 되었을 테죠.

    • reinhardt100 2019.12.03 1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독소 전쟁 당시 독일군이 투입한 후방 치안 병력만 30만이 넘었지만 실제로는 더 투입했다고 봐야 합니다. 우선, 상당수 동맹국 병력이 고려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특히 루마니아나 헝가리군의 경우, 심하면 1/4 이상이 자국 근처의 점령지에 주둔하고 있던 군정통치용 병력이라 막상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죠. 루마니아가 대표적인데 80만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는데도 전선에 전개한 병력은 약 50만 선에서 왔다갔다 했습니다.

      하나 더 고려한다면 각 지역의 민병대 병력이나 독일 본토에서 급파된 경찰 출신 혹은 무장친위대 제8사단 플로리안 가이거 같은 병력도 꽤 됩니다.

      이런 병력들까지 고려한다면 최소 40만은 넘어가야 한다고 전 봅니다.

  5. keiway 2019.12.02 16: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수록 당시의 생활/기술 수준으로는 러시아 원정 실패는 필연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폴레옹도 그걸 모르지는 않아서 러시아와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화평을 맺으려 했지요... 그래도 결국은 '내가 한방 쎄게 빡 치면 나한테 항복하겠지' 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나폴레옹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나폴레옹의 실책과 그로인한 몰락이 참 아쉽게 느껴집니다.

    • 카를대공 2019.12.02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술 수준이라는 말씀이 딱인거 같습니다.
      뭐랄까 대자연이 "하지마라"고 강요하는 느낌?
      사실 나폴레옹과 당시 프랑스니까 당시 수준으로 모스크바까지라도 갔다고 생각합니다.

  6. 카를대공 2019.12.02 1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원정 당시 비전투 손실이야 유명하지만 네만강 건너자마자 꼴이 무척 심각했네요.정말 상상 이상입니다.
    항상 좋은 정보로 재미난 글 써주셔서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7. 웃자웃어 2019.12.03 2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게 있는데 당시의 기병과 포병은 모병인가요? 아니면 강제징집 인가요?

    • nasica 2019.12.04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질문인데 답을 잘 모르겠군요. 그러나 기병과 특히 포병이 보병보다 급료가 좀더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자원병들로 충원되었을 것 같습니다.

    • Franken 2019.12.05 14:50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병은 말을 다루어야 한다는 특성상 아무나 못하여 어렸을 때부터 타본 경험 있는 부유층 자제들이 주로 지원했고 군에서도 선호했습니다. 포병 역시 당시 대포가 직접사격 위주였다지만 그래도 탄도학 같은 산수능력은 있어야 명중율이 나왔기에 학식을 갖춘 중산층 이상 자제를 선호했지만 뽀대가 기병보다 안 나고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단점 때문에 지원자가 적어 급하면 일반 서민도 받는 등 상대적으로 문이 열려 있었죠.

    • 웃자웃어 2019.12.05 2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병과 포병이 숙련도를 요구하기 때문인가요? 그렇다면 일반 보병과 비교했을때 복무기간은 어느정도 되나요?


그런데 놀랍게도 러시아군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네만 강을 따라 늘어선 여러 마을에 분산되어 숙영 중이었는데, 주로 사열과 분열 같은 제식 훈련만 죽어라고 했습니다.  장교들은 자기들끼리 무도회와 파티를 벌이며 시골 아가씨들과의 연애 모험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짜르 알렉산드르를 따라 빌나에 와있던 국무부 장관 쉬시코프(Aleksandr Semyonovich Shishkov)는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마치 적군이 수천 km 먼 곳에 떨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너무나도 근심걱정이 없는 듯 했다.  심지어 적군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들어오지 않았다."

적군에 대한 소식은 커녕 아군인 러시아군으로부터도 아무 뉴스가 없었습니다.  러시아군이 정말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의 배치와 이동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노력도, 전쟁 발발시 어디로 진격해올지에 대한 예측 노력도 없었습니다.  러시아군은 자기들이 주둔 중이던 그 일대 리투아니아 지역의 지도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전략도 계획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긴 네만 강을 따라 뿔뿔이 분산 배치된 러시아군으로서는 만약 당장 내일이라도 프랑스군이 어느 한 곳에 집결하여 도하를 한다면 속수무책으로 돌파당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군이 이런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짜르 알렉산드르의 결정 장애와 오지랍이었습니다.   총사령관을 임명하지도 않고, 공격인지 수비인지도 분명히 하지 않고, 부하들에게 일임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닌 정말 어정쩡한 그의 태도 때문에 러시아군은 방향성을 잃고 뭘 어찌해야 할 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습니다.  가장 활발했던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던 많은 참모 장교들이었습니다.  사실 그런 참모들이야말로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도 없고 책임지는 것도 없이 그저 번쩍번쩍 화려한 군복만 차려 입은 군더더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일 수록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 머릿 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말이나 마구 던지는 법입니다.  그렇쟎아도 전략을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알렉산드르는 그런 아무말 대잔치 속에서 더욱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냉철한 머리와 뚝심을 가지고 전략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 역할을 맡은 것이 퓰(Karl Ludwig von Phull 혹은 Pfuel) 장군이었습니다.  이 분도 원래 프로이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1806년 예나 전투에서 빌헬름 3세의 수석 참모로 있다가 프로이센의 참패 이후 러시아에서 살 길을 찾은 많은 프로이센 장교들 중 하나였습니다.  비록 예나 전투에서 환상적인 참패를 빚어내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전통 있는 프로이센군에서 국왕 직속 수석 참모를 할 정도였으니 실력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알렉산드르는 그에게 중장 계급을 주며 역시 자신의 참모진에 배속시켜 전략안을 짜게 했습니다.

 

(퓰 장군입니다.  러시아군이 그의 제안대로 후퇴를 시작하자 러시아군 내에서 그의 인기는 바닥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결국 모스크바까지 나폴레옹에게 함락되자, 군 내에서 저 프로이센놈을 쳐죽이라는 아우성이 터져나왔고, 결국 그는 스웨덴을 거쳐 영국까지 도망쳐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실 후퇴 작전 자체를 그의 공로(?)로 돌리는 것 자체도 여러가지 이견이 존재하는데, 1813년에 짜르 알렉산드르가 영국에 있던 퓰에게 보낸 편지에는 러시아군의 후퇴 전략을 짠 공로를 퓰에게 돌리는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어이없게도 후퇴안이었습니다 !  나폴레옹과 총검을 맞대본 퓰의 눈에, 나폴레옹 쯤은 문제 없다고 큰 소리 쳐대는 러시아군은 절대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정면 대결은 신속한 참패를 부를 뿐이라고 판단한 퓰은 과감한 후퇴로 프랑스군의 예봉을 누그러뜨린 뒤, 후방 깊숙한 곳 어딘가의 요새를 거점으로 프랑스군에게 반격하는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후방 요새로의 후퇴만으로는 부족하며, 바그라티온의 제2 군을 측면에 남겨두었다가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의 주력인 바클레이의 제1 군을 쫓아 깊숙히 들어오면 그 후방을 치도록 권고했습니다.

이건 러시아 장교들이 보기에 말도 안되는 전략이었습니다.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거느린 러시아군이 (실제로는 러시아군이 더 적었습니다) 소중한 영토를 적에게 내주며 후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퓰이 제시하는 이유, 즉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평가는 러시아 장교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략을 정하지 못하던 알렉산드르의 마음에는 일찌감치 이 전략이 꽤 솔깃하게 들렸습니다.  그 이유는 역시 선진국 성공 사례였습니다.  바로 영국 웰링턴 공작이 포르투갈에서 토헤스 베드하스(Torres Vedras) 방어선을 이용한 초토화 전략으로 프랑스군의 백전노장 마세나를 물리쳤다는 소식은 러시아에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https://nasica1.tistory.com/210 참조)  이렇게 웰링턴이 코딱지만한 포르투갈에서도 후퇴 전략으로 성공했으니 드넓은 러시아에서는 당연히 성공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퓰의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엇습니다.  무엇보다, 비록 후퇴라고는 해도 오만한 영국 귀족 웰링턴이 썼던 전략이라면 러시아군이 써도 체면이 상하는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퓰은 참모 전공자답게 세부적인 요새 구축 후보지도 뽑아놓고 있었습니다.  바로 드리사(Drissa, Drysa)였습니다.  퓰이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드리사를 요새 구축 후보지로 뽑은 것은 그 곳이 빌나에서 후퇴할 때 모스크바와 상트-페체르부르그로 갈라지는 길 딱 중간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러시아군으로서는 만약 후퇴를 한다고 해도 모스크바와 상트-페체르부르그 이 두 도시를 모두 지킬 수 있는 곳까지만 후퇴해야 했는데, 드리사를 거점으로 방어선을 펼친다면 그 목적에 딱 맞는 위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퓰은 역시 세계적인 명장보다는 그냥 여러가지 안을 내놓는 참모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세운 전략은 실행에 옮기기에는 너무 빈틈이 많았습니다.  일단 웰링턴이 포르투갈에서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으로 재미를 본 것은 포르투갈이 바다와 산맥으로 가로 막힌 좁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처럼 드넓은 평원 지대에서 프랑스군을 요새로 저지해보겠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공성전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짜르 알렉산드르에게 평화조약을 강요한다는 목표가 분명했던 나폴레옹은 드리사 요새에 부딪힐 경우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우회해서 모스크바를 들이쳤을 것입니다.  또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영국 공병대와 나라를 지키겠다는 포르투갈 주민들의 전폭적인 협조, 그리고 무엇보다 영국 정부의 풍부한 군자금 덕분이었습니다.  러시아군에게는 드리사에 갑자기 거창한 요새를 구축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퓰의 작전 계획에 따라 1811년 말부터 드리사에는 대규모 토목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그 진척 상황은 매우 한심한 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퓰의 후퇴안이나 바그라티온의 공격안이나, 모두 알렉산드르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하는 사이에 시간은 속절없이 계속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의 생각보다는 훨씬 더 빨리 들이닥쳤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Karl_Ludwig_von_Phull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Aleksandr-Semyonovich-Shishkov
https://en.wikipedia.org/wiki/Ludwig_von_Wolzo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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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ranken 2019.11.18 0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소전쟁 발발 직전하고 상황이 많이 비슷하네요. 당시 스탈린은 서방 및 각지의 스파이들이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단 정보를 보내옴에도 끝까지 히틀러는 미치지 않는 이상 양면전선을 열진 않을 거라고 굳게 신념을 지키는 바람에 소련군은 폴란드, 에스토니아 등 나치와의 협상으로 얻어낸 영토에 방어선을 제대로 구축 못하고 어영부영한 상태서 바르바로사 작전당시 제대로 손 써보지도 못하고 쓸려나가죠.

    • nasica 2019.11.18 21: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렉산드르의 경우가 좀더 어이없는 것 같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이 반드시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2. 푸른 2019.11.18 16: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번 글에서 기대를 하게 만들고는 첫 문장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ㅋㅋㅋㅋ

    나날이 글빨이 늘어나시네요ㅋㅋ

  3. 지나가던 2019.11.18 1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지랍->오지랖

  4. 루나미아 2019.11.18 2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기서 웰링턴이 생각치도 못한 기여를 ㅋㅋㅋ

  5. reinhardt100 2019.11.18 2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늦게 진격한 것이 문제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라스푸티차가 끝나는 5월 중순에 바로 공격했으면 러시아 주력군을 스몰렌스크나 드라사에서 포착 후 섬멸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거든요.

    실제로 독소전쟁이나 러시아 원정 당시 소련이나 러시아측의 후퇴속도가 꽤나 느린 편이었죠. 물론 초토화작전 수행딱문에 그런게 있습니다만 특히 후자는 너무 느리다보니 오히려 나폴레옹의 판단을 흐리게 한 측면도 있습니다.

  6. 웃자웃어 2019.11.19 2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가 그렇다고 예비전력까지 총동원해 공세전략을 폈다간 80~90% 졌을 겁니다.

  7. 중2병 2019.11.20 0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과 정면승부 하자는 러시아 장교들은 200년 뒤
    유니클로 때려잡고 정면승부로 무역분쟁 하자는 분들이랑 겹쳐보이네요.

  8. 영국나치처칠 2019.11.20 09: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간의 결이 같은 자들 끼리는 사이좋게 지내는 법입니다.
    테베, 타타르, 프랑스남부(+ 나폴에옹가족 몰살하려던 코스시카놈들 이새귀들 히트러에게 걸렸으면 싸그리 몰살인데 운좋게도 나폴롱에게 걸려서), 일본우익 윤적윤아베토착

  9. 영국나치처칠 2019.11.20 0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일본은 이제와서 한국제품 불매운동한다고 하지만
    이제까지 현대자동차 일본국가적으로 1년에 10대 구매했고 ㅎㄷㄷㄷㄷㄷ
    스마트폰, 가전제품은 한국이 더 잘만드는데도 불매...
    D램도 한국이 전세계 석권하는데도 대만제품만 구해하고 한국제품 불매...
    도대체 무슨 한국제품을 이제부터 불매하겠다는 건지...

  10. 샤르빌 2019.11.20 2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대육군이랑 정면승부라니.. 정말 패기로라도 그랬다면 러시아 원정의 결과가 크게 바뀌었겠네요..

  11. 허허허 2019.11.24 2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보병들 짱 쎄지 않나요? 아일라우나 하일스베르크를 생각해보면, 정면대결 해도 꿀릴 게 없어 보이는데 다들 러시아군에게 승산이 없다고 보시는군요.

    러시아 군이 그래도 프러시아 군 같은 추태는 부린 적이 없는데, 싸움 제일 못 하는 프러시아 군의 장교가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상대가 될 수 없음.' 이런 말 하면 누가 안 열받나요. 저 멀리 폴란드까지 원정가서 나폴레옹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준 러시아 군인데,

    홈그라운드에서 카알 대공식 영혼의 맞짱 한 번 떴으면, 프랑스군이 이긴다 해도 서로 걸레짝이 되버려서 진격도 후퇴도 못 하고 둘 다 바닥을 뒹굴었을 것 같아요.


이미 1811년부터 러시아는 프랑스와 언제 한판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1812년 6월 경 러시아는 거의 1년 넘게 전쟁 준비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나폴레옹을 맞이할 러시아의 준비 상태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요 ?  한줄 요약하자면 머리 수만 따지면 프랑스군의 그랑다르메에 비해 그다지 나쁘지 않았습니다.

원래 1805년 당시 러시아의 징집 제도는 일종의 지역 차출제로서, 지역 농노들 500명 중에서 4명의 장정을 병정으로 차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차출된 운 나쁜 젊은이에게는 25년의 병역 의무가 주어졌는데, 당시엔 전화는 커녕 우편도 변변치 않았는데다 어차피 본인이나 가족이나 모두 문맹인 경우가 많아서 가족과 연락을 주고 받을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25년 간의 병역을 다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면 사실상 가족이나 친구들이나 다 남남이 되어 있었고, 그걸 잘 아는 제대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마을에서 차출된 청년이 군대로 떠나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이 청년을 배웅했는데, 이건 사실상 일종의 장례식 같은 행사였다고 합니다.  아무도 이 청년이 살아서 가족에게 되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사정은 영국군도 비슷했습니다.  다만 영국군은 모병제라서 급여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는 점만 달랐지요.  여러 모로 영국군과 러시아군은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댓글에 '궁금'님이 알려주신 러시아 징집 장정의 배웅 모습입니다.  분위기가 장례식인 이유가 다 있습니다.)

  



러시아는 아우스테를리츠에서의 뼈 아픈 참패 이후, 나폴레옹과의 긴 전쟁을 예감하고 징집율을 500명 중에서 5명으로 20% 증강시켰습니다.  그 결과, 1806년부터 1811년 사이 기간에 새로 징집된 러시아군 병사의 수는 50만 명에 달했습니다.  게다가 1811년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대 했으나 아직 현역 복무에 적합한 나이와 신체 조건을 가진 제대 군인 약 6만을 재입대 시켰고, 1812년에는 당장 임박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징집률을 500명 중 7명으로 한시적으로 늘렸습니다.  덕분에 1807년 아일라우 전투 때는 러시아군 전체 숫자가 50만이 채 안되었으나, 1812년 9월 경에는 무려 90만이 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땅이 넓었고 사방에 적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1812년 5월 나폴레옹의 위협에 대적하기 위해 리투아니아에 집결한 러시아 야전군은 바클레이 드 톨리의 제1군 약 16만과 바그라티온의 제2 군 약 6만이 전부였습니다.  저 남쪽 오스트리아와의 접경 지대에는 토르마소프(Tormasov) 장군의 제3 군 약 5만이 있었고 후방에도 2개의 예비 군단 총 11만 정도가 대기하고 있긴 했습니다.  이런 지원부대까지 다 합하면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와 맞설 러시아군 야전군은 총 39만에 달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보시겠지만 당시 나폴레옹의 침공에 맞선 러시아 야전군은 크게 3개로서, 북쪽부터 바클레이, 바그라티온, 토르마소프가 각각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르마소프의 부대는 나머지 부대과 광활한 핀스크(Pinsk, 혹은 Pripet) 습지로 격리되어 있어서 사실상 협동 작전은 불가능했습니다.  애초에 토르마소프의 제3 군은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와 루마니아 쪽으로부터 직접 침공해올 것에 대비한 부대였습니다.)


(핀스크(Pinsk, 혹은 Pripet) 습지는 제1,2차 세계대전 때도 주요 장애물 역할을 했습니다.  그 때문에 나찌 독일군은 이 지역에서 모조리 물을 빼고 독일 주민들을 대거 이동시켜 식민지화할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윗 그림은 19세기 화가 이반 쉬시키(Ivan Shishkin)이 그린 핀스크 습지의 풍경입니다.)



이 정도면 나폴레옹에게 일방적으로 밀릴 수 밖에 없는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공세로 나갈 수도 있을 정도의 군세였지요.  게다가 당시 러시아 측은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의 군세를 실제보다 깎아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바클레이 드 톨리는 러시아로 침공해올 그랑다르메의 병력을 20~25만으로 보았고, 바그라티온은 20만, 베니히센은 19만 정도로 보았습니다.  러시아 측에서 가장 높게 평가한 숫자도 후방의 지원부대까지 다 합해서 35만을 넘지 않았습니다.  사실 지금도 과연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로 진격해 들어간 나폴레옹 휘하의 병력이 몇 만인가에 대해서 정확한 기록이 없긴 합니다.  많은 역사가들이 실제로 네만 강을 건넌 병력의 수를 대략 40만이라고는 하지만, 아마 당시 나폴레옹은 물론 그 누구도 실제로 몇 명이나 네만 강을 건넜는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네만 강 서안에 집결하여 최종 점검을 할 당시, 나폴레옹은 휘하 군단장들에게 "제발 솔직하게 각 예하 부대의 정확한 병력 숫자와 군수품 준비 상태를 파악하여 보고하라"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거짓말을 합니다.  나폴레옹의 요구는 끝이 없었고 그에 비해 사람과 돈과 물자는 부족해서 도저히 매뉴얼과 명령서대로 전체 부대의 편성을 완벽하게 해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장군들은 그냥 휘하 부대원의 수를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고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또 정확하게 보고하려고 해도, 당시 행정반에는 최신 데이터베이스와 고속 통신망은 커녕 전자계산기조차 없었으니 정확한 현황 파악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러시아 측에서는 후퇴 작전 따위는 애초에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여론은 러시아군이 네만 강을 건너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공격파의 논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러시아군이 공세를 펼쳐 먼저 폴란드를 정복하고 프로이센까지 진격한다면 프로이센은 물론 나폴레옹에게 짓눌려있던 오스트리아나 폴란드 내의 친러파들이 봉기할 것이므로 훨씬 더 유리하게 전쟁을 이끌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아우성은 저 멀리 후방의 상트-페체르부르그나 모스크바에서 더 요란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선에서의 거리와 용기는 정비례하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꼭 후방에서 편히 먹고 마시는 신사숙녀들만 공격하자고 아우성을 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장 총성이 울리고 옆 전우의 창자가 쏟아져 흙바닥에 뒹구는 것이 아니다보니, 최전선의 장교들도 나폴레옹 따위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며 당장 쳐들어가자고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젊은 장교들 뿐만 아니라 바그라티온도 당장 공세로 나가자고 짜르 알렉산드르에게 집요하게 매달렸습니다.  

특히 바그라티온은 오스만 투르크와의 접경에서 쿠투조프(Kutuzov) 장군 밑에서 복무하고 있던 러시아 해군제독 치차고프(Pavel Vasilievich Chichagov)가 내놓은 공격안에 열광했고, 알렉산드르도 거기에 상당히 혹해 있었습니다.   이 공격안에 따르면 이제 오스만 투르크와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니 발칸반도를 관통하여 프랑스령 일리리아(Illyria), 즉 현재의 크로아티아 지역을 공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쪽이 프랑스 제국의 '취약한 아랫배'라는 것이었지요.  여기를 들이치면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도 들썩거릴 수 밖에 없으니 후방이 불안해진 나폴레옹은 도저히 러시아 내부로 진격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에도 냉정한 두뇌들은 많았습니다.  치차고프 공격안을 그대로 수행한다면 오히려 오스만 투르크와 오스트리아가 화들짝 놀라 반-러시아 진영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졌고 이 공격안은 최종적으로 기각되었습니다. 


(치차고프 제독입니다.  그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복무한 이후 20대에 영국 해군 대학에서 공부를 했는데, 거기서 Elizabeth Proby라는 영국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29세의 나이로 귀국한 그는 즉각 엘리자베스와의 결혼 승인을 요청했는데, 당시 짜르이던 파벨 1세는 "러시아에도 신부감이 넘쳤는데 웬 영국 여자?"라며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이 겁없는 청년은 난동을 부렸고 당연히 즉각 투옥되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의 패기 넘치는 사랑에는 죄가 없었는지, 그는 또 금새 석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와의 결혼도 허락을 받았고 더 나아가 해군 준장으로 승진까지 했습니다.  불행히도 엘리자베스는 1811년 사망했고, 치차고프는 베레지나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빠져나가도록 해줬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1813년 이후 군을 떠나 프랑스로 가버렸고 두번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1849년 파리에서 죽었습니다.)



제1군 사령관이자 국방부 장관으로서, 실질적인 총사령관이었던 바클레이 드 톨리의 기본 계획은 무엇이었을까요 ?  그는 1807년 아일라우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뒤 병상에 누운 채로 '이제 나폴레옹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러시아 내부로 깊숙이 프랑스군을 유인하여 종심이 길어지게 만든 뒤 프랑스군이 분산되고 소모되면 그때서야 결전을 벌여야 한다'라는 전략 계획서를 만든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일라우에서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군의 사정을 반영한 계획서였고, 바클레이가 1812년에도 그런 후퇴안부터 고려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도 들뜬 러시아인들처럼 선제 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그가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던 짜르 알렉산드르는 선제 공격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입장이었는데, 이는 알렉산드르의 성격이 신중해서가 아니라 이 전쟁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촉발된 침략전이 아니라 외적의 침공으로부터 러시아의 성스러운 영토를 수호하기 위한 수호전이라는 인상을 대내외적으로 주고 싶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짜르가 그런 성향이다보니 당연히 바클레이는 그저 병력을 네만 강을 따라 주욱 펼쳐놓고 '프랑스군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강을 천연 장애물로 활용하여 방어전을 펼친다'라는 소극적인 대처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수비 위주의 전략 때문에 바클레이는 주전파 러시아 장교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알고보면 비웃음을 당해야 하는 것은 바클레이가 아니라 알렉산드르였지요.  그런데 알렉산드르는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몰라도, 바클레이를 총사령관으로 명확하게 임명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가장 크고 중요한 제1 군 사령관인데다 국방부 장관이기까지 하니까 따로 총사령관이라는 겉멋이 든 직위를 새로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는지, 혹은 총사령관은 당연히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그렇게 총사령관 임명을 빼먹은 것도 문제였는데, 더 나쁜 것은 짜르 알렉산드르가 제1 군 사령부인 빌나까지 직접 찾아와서 휘하에 온갖 참모진을 줄줄 달고 다니면서 감놔라 배놔라 참견이 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조직에서 원래 그러면 안된다는 것은 상식이었고, 알렉산드르도 그런 점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곧 반성하고 '앞으로는 절대 군 명령 체계에 관여하지 않겠다'라는 약속을 바클레이에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마차 1대에 실어야 하는 짐의 적정량에 대해서 이런저런 제안을 내놓으며 간섭을 재개했습니다.  더 나쁜 것은 짜르가 이렇게 현장에 상주하며 참견질을 하다보니, 바클레이를 무시하고 짜르에게 직접 보고를 하는 버릇없는 장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바그라티온이었습니다.  그는 수비 위주의 작전을 선호하는 바클레이를 의도적으로 투명인간 취급하고 짜르에게만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이 모든 혼란이 궁극적으로는 알렉산드르 개인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래도 결국 어떤 작전으로 나폴레옹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뭔가 준비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  국가 존망이 걸린 이런 중대 위기를 앞두고 설마 이렇게 우왕좌왕 하면서 시간을 까먹고 있지는 않았겠지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Pavel_Chichagov
https://en.wikipedia.org/wiki/Pinsk_Marshes
http://napoleonistyka.atspace.com/Invasion_of_Russia_181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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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니666 2019.11.11 07: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면서 처음 첫 댓글 달아봅니다. 이번 한주도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2. 궁금 2019.11.11 0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일리야 레핀이 러시아 군으로 징집된 청년을 배웅하는 가족들을 그린 그림을 보고 매우 인상깊었던 기억이 있는데, 아예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것이어서 그런 것이었군요...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eeing_off_a_recruit_(Repin).jpg

    그런데 그림을 보면서 징집당한 장정을 안아주는 사람이 부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가혹한 군역을 운영하면서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징집한건가요? 궁금합니다!

    • 메뚝 2019.11.11 1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그림 감사합니다.
      분위기가 참... 슬프네요.
      어머니인지 부인인지 저도 궁금하네요.

    • nasica 2019.11.11 2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림이 하도 좋아서 본문에도 집어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향 마을 사람들도 생각이란 것이 있었다면 기혼자를 저런 병역의 의무로 몰아넣지는 않겠지요. 참고로 프랑스에서는 기혼자는 병역에서 면제되었습니다.

    • 유애경 2019.11.12 04:3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림이 궁금 했는데 마침 넣어 주셨네요!
      정말 보기만 해도 침통해지는 분위기에다25년의 복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본인은 물론 그 가족들의 슬픔은 어땠을까요...
      그와중에 함께 그려진 개의 뒷모습도 뭔가 (전체적인 분위기 탓인지 ) 침통해 보여서 조금 웃고 말았네요!


  3. 흠흠흠 2019.11.11 0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파르타쿠스. 마물루크. 러시아 농노... 노예들이 거칠고 힘든 삶을 살아서 그런지 전투를 잘하나 보네요.

  4. Franken 2019.11.11 16: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력수를 보니 러시아군은 훈련은 둘째치고 머스킷 같은 무기를 제대로 공급받은 상태였는지 심히 의문이 가네요. 나름 공업이 있었던 프랑스도 신병들에게 줄 머스킷 생산에 애를 먹었는데 후진국이었던 러시아가 90만정 이상의 머스킷 생산능력이 있을 리 없으니...

    • nasica 2019.11.11 21: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대부분은 후방 대기소에서 죽어라고 제식 훈련과 삽질 노동만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 하이텔슈리 2019.11.11 2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영국이 퍼준 물자의 양도 장난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게 필요량을 전부 채울 수는 없었지만 큰 도움이 되는 양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 reinhardt100 2019.11.11 2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의외로 러시아의 당시 공업력은 서방권에서 나름 수위권이었습니다. 산업혁명에 막 접어들기 시작한 유럽에서 아직까지는 기술력차이가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고 영국조차도 중공업 생산력에서 프랑스와 서로 순위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초반 러시아의 금속공업 생산량은 전체 유럽 대비 15% 이상이었는데 이는 영국과 프랑스와 비견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적어도 야포는 국산화가 꽤 이루어졌고 소총 역시 상당수 자급자족했습니다.

      러시아 공업력이 급속히 약화된 시점이 1820년대말부터 1861년까지인데 1차 산업혁명을 놓치면서 후진국 이미지가 고착화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 Franken 2019.11.12 0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라인하르트//현대국가에서도 90만정은 만만치 않은 숫자인데 러시아가 공업력이 좀 있었다 한들 1년 남직한 기간 안에서 생산하는 건...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총열을 일일이 손으로 두들기고 다듬어서 만들어야 했던 당시로써는요.

    • reinhardt100 2019.11.12 0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Franken) 아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러시아 공업력이 생각외로 강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1년 내로 90만정 전부를 생산하는건 당시로써 불가능합니다. 90만정을 당시에 전부 신형으로 생산했다면 슈페어의 기적 저리가라 수준이죠.

      18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는 일단 서구권 군대 대부분이 플린트식 머스켓을 사용했기 때문에 내구도만 좋다면 몇십년전에 생산된 구형소총이라도 쥐어줘도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습니다. 일단 원리는 거진 다 비슷했으니까요. 혁명전쟁 초창기 프랑스군이 100만 이상을 징집하는 바람에 한동안 소총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오죽 급하다보니 창을 50만 자루 생산하기 시작했으니까요. 당시 파리 조병창의 한달 소총 생산량이 600정 하던 시절인데 막상 전쟁 돌입한 후 생산공정을 바꾸는 등의 개혁을 통해 한달만에 소총을 9천정 생산했던 일도 있습니다. 이 덕분에 소총부족이 한결 덜해진 적도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조면기를 개발한 휘트니가 당대에 유명해진 사건이 바로 1만정 소총생산 사건입니다. 미국이 막 독립하고 나서 기존 사제 사냥총(?)인 수준의 켄터키 소총류를 대체할 신형소총 1만정을 발주했는데 이 당시에는 1년만에 소총 1만정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성공했습니다. 막 소개된 아담 스미스의 '분업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기에 가능했습니다.

    • Hedgehog 2019.11.12 0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유튜브에서 colonial gunsmith라는 영상에서 말하기로는 라이플 1 정을 만드는데 300인시가 든다고 하더군요... 라이플이 없는 활강총신이라고 해도 280인시는 걸렸을것 같은데....

    • Franken 2019.11.12 0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씀대로 군수창고 및 민간의 총을 긁어다가 지급한다 해도 90만정의 1/3도 충족했을지 모르겠군요. 거기다 진공포장도 없었으니 창고에서 말그대로 썪은 총기의 질이야 뻔할 뻔자겠구요. 이와 상관없이 양질의 좋은 댓글 잘 읽었습니다.

    • [][] R.F.[][] 2019.11.12 18: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전에 들었던 거라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러시아군 소속 일부 소수민족(?) 부대에서는 궁병(!)을 운용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머스킷의 연사력을 보면, 보다 양성과 숙련이 어려워서 그렇지 궁병도 나름 쓸만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

    • reinahrdt100 2019.11.12 2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R.F) 네 맞습니다. 칼미크 기병대가 러시아 원정 당시 투입된 적이 있습니다.

      칼미크 족은 17세기부터 러시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볼가강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했었는데 18세기 중후반 청의 중가리아 정벌 이후 비어버린 신장 서부로 일부가 탈출한 후 잔류한 오이라트 부족의 일파입니다. 이들은 현재까지 남아있기도 합니다.

  5. reinhardt100 2019.11.11 2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소전쟁 당시에도 프리피아트 늪지는 공격자나 방어자 모두에게 장애였지만 특히 방어자에게 엄청난 곤란을 주었죠. 독일군은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집단군 3개 및 항공군 2개를 동원했는데 그래도 주력을 어디에 두냐?가 문제였습니다. 모스크바 때문에 중부집단군이 주력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프리피야트 늪지 북쪽주변에 독일군 전체 30% 이상이 집중 배치되어 상대적으로 남서쪽에 주력이 배치된 소련군을 그대로 포위섬멸전으로 붕괴시키기도 합니다.

    나폴레옹에 맞서는 러시아군의 입장에서는 일단 공간을 이용한 후퇴밖에 답이 없었습니다. 러시아 주력군이 네만 강을 도하해서 프랑스군과 정면대결하면 이길 방법이 없다시피했습니다. 22만의 주력군이 강변 한 지점에 일거에 도하해서 프랑스군을 분단, 그 중 한 부분을 붕괴시켜야 확실한 승산이 보이는데 그럴 기동력은 20세기 중반, 바그라티온 작전때나 가능했으니까요. 이건 기술의 문제이지 의지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만일 러시아군이 네만강을 도하한 후 주력군이 섬멸당했다면 나폴레옹의 성격상 토르마소프의 제3군을 섬멸한 후 스몰렌스크까지 진격해서 후방의 2개 군까지 연속해서 격멸한다는 계획을 짜고 진격했을 겁니다. 다만 9월 30일까지 스몰렌스크 점령 및 러시아 주력군 완전 섬멸을 해야 러시아 평원에서의 월동이 그나마 편해지는데 과연 가능했을지? 저도 의문입니다.

    • 2월28일 입대 2019.11.13 1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라인하르트님 늘 감사드립니다!
      프리파야트라는 동네가, 설마 lef'tenant 프라이스와 맥밀란 대위가 기어다니던 그 동네는 아니겠죠??

      선생님 설명덕분에 Nasica님의 노고가 더 빛을 발하는군요.

    • reinhardt100 2019.11.13 2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프리피야트 늪지 맞습니다.

      제가 무슨 선생님입니까? 이거야 원 제가 다 부끄럽습니다.

  6. 영국나치처칠 2019.11.12 18: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의 떵침을 놔줄 오스만의 실권자가 조세핀의 언니인데
    폴란드는 조세핀 밀어내고 내사전의 불능은 없다에게 아들을 안겨줄 백작부인을 들이미는데 이것도 러시아의 설계인걸까요?

  7. reinhardt100 2019.11.12 20: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로 핸드폰으로 접속했는데 이상하게 닫혀있네요? 티스토리 가입해야 하려나요?

  8. freewizard 2019.11.13 13: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는 역사네요ㅋㅋ 좋은 정보 감사해요

  9. kyw0277@naver.com 2019.11.13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랫만에 댓글 남깁니다.

    이런 자세한 글들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10. Sarada 2019.11.17 19: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Nasica 님이 소개해주신 혼블로워의 전투장면을 읽고 너무 인상깊어서 얼마전 10권을 전부 구해서 읽었습니다. 덕분에 출퇴근 시간에 너무 즐겁게 읽었습니다.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혹시 Nasica 님이나 다른 분들이 답해주실수 있으실까 해서 글 올립니다. 2권(Nasica 님이 소개해주신 요새상륙작전이 나온 권)에서 사관들을 괴롭히던 함장이 밤에 실족하여 의식불명의 중상을 입었는데, 이 사고에 대해서 다른 장교가 "혼블로워 군이 이 사건에 대해서 더 얘기해줄 것은 없는가?"라고 반복적으로 물어봅니다. 혼블로워는 당연히 "함장님이 실수로 떨어지신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는 모른다"라고만 대답하고요. 이때 혹시 혼블로워가 무슨 짓을 한 거 일까요? 작가가 혼블로워가 이런 짓을 저짓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암시를 준 거 일까요? 너무 궁금해서 글 남겨봅니다.
    항상 Nasica 님의 좋은 글과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 nasica 2019.11.17 21: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작가가 명확하게 밝힌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C.S. Forester의 의도는 '사실 혼블로워가 사다리에서 함장을 밀었다' 라고 독자들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혼블로워는 소심한 사람이긴 하지만 교수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인 자기 당번병을 놓아주는 일이라든가 무인도에서 굶어죽어가는 프랑스군 포로들에게 식량을 나눠준다든가 하는 일화들로 보아,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가끔 법과 규칙을 어기는 일도 종종 저지르는 캐릭터로 보이거든요.

  11. sarada 2019.11.18 0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답변 감사합니다.
    만약 혼블로워가 정말로 손을 댔다면, 혼블로워의 성격도 굉장히 무서운 면이 있네요. 조직에 충성하지만, 조직 내부의 지나친 부조리함이 내부적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부조리에 희생될 지경에 이르면, 가만히 앉아서 죽느니 과감하게 움직이는... 감탄이 나옵니다. 이걸 용기라고 해야할지, 대담함이라고 해야할지 잘은 모르겠는데, 혼블로워가 확실히 남다른 냉정함과 과감함이 있네요.
    빽도 라인도 없이 제독까지 올라간 사람은 역시 뭔가가 다르네요.
    다시한번 답변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좋은 글 부탁드려요^^

  12. sarada 2019.11.18 2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린다고 쑬려다가 오타났습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총사령관 바클레이 드 톨리가 러시아 귀족들로 이루어진 부하들로부터 미움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이 양반이 실력파 인물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그의 할아버지가 오늘날 라트비아(Latvia)의 수도인 리가(Riga)의 시장을 보낼 정도로 보통 집안은 아니었지만, 정작 러시아 귀족으로 편입된 것은 군인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최초일 정도로, 러시아 귀족층 입장에서는 그다지 전통있는 명문가는 아니었습니다.  바클레이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입대하여 2년 뒤 소위로 승진했고, 그 이후로 오스만 투르크나 스웨덴 등 전통적인 러시아의 적들과의 전쟁 속에서 직업 군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착실히 쌓았습니다.  그는 똑똑할 뿐만 아니라 전투의 광기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일라우(Eylau)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후퇴를 커버하며 싸우다 중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전형적인 유능한 군인이었습니다.

 

 

(미하일 바클레이 드 톨리(Michael Andreas Barclay de Tolly)의 초상입니다.  1812년 당시 그는 51세로서, 총사령관 하기에 딱 좋은 나이였습니다.)

 



프랑스군에서라면 이런 바클레이 드 톨리가 그다지 두드러진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활약했던 조직은 러시아군이었고, 러시아군 장교들은 유능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가령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러시아군 지휘관 중 하나였던 북스게브덴 (Friedrich Wilhelm von Buxhoeveden 러시아 식으로는 Fyodor Fyodorovich Booksgevden, 이 분도 알고보면 독일계 러시아 귀족이지요) 장군은 전투 내내 술에 취해 있었고 그의 주정뱅이 지휘 덕분에 참패를 겪었지만, 그 이후에도 주요 요직을 맡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가령 1808년 핀란드 침공 작전 때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이 바로 이 북스게브덴 장군이었고, 바클레이 드 톨리는 그 밑에서 복무했습니다.

 

(오랜만에 보시는 북스게브덴 장군의 복스러운 얼굴입니다.  그런 역적질에 가까운 지휘를 하고도 군법회의는 커녕 계속 해서 고위 지휘관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와이프가 러시아의 권문세가 오를로프(Orlov) 가문 출신의 공녀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Natalia Alexeyeva)였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북스게브덴의 경우처럼 러시아군 장교들의 자질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슬라브 특유의 민족성... 따위가 아니라 결국 사회 구조적인 문제였습니다.  가령 러시아군 소위의 급여는 유럽 전체에서 가장 적은 편이었습니다.  심지어 장교로서 부대에 의무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식비가 급여보다 더 많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러시아의 전반적인 경제력이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굳이 급여 따위에 생계를 의존하는 사람은 장교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 인간이라는 고정 관념이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직장 생활하면서 돈을 쓰기만 하고 벌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 그런 적자 인생을 탈출하려면 빨리 승진을 해야 했는데, 그 승진이라는 것이 실력이나 실적 순이 아니라 철저하게 배경과 연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같은 귀족들 중에서도 하급 귀족들은 도무지 승진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러시아의 유명 시인 푸쉬킨(Alexander Pushkin)의 소설 '대위의 딸'(Kapitanskaya dochka)에서 쉽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반 미로노프(Ivan Mironov)는 10대 후반의 딸을 둘 정도의 나이인데, 계급이 고작 대위입니다.  또 맡은 보직도 어느 황량한 시골 마을의 수비 대장이지요.  

 

 

(제 나이대의 사람들에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라는 싯귀로 유명한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입니다.  제가 중학생일 때 이 분의 소설 '대위의 딸'이 학생 필독서 중 하나여서 읽었는데, 솔직히 이게 왜 필독서까지나 선정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본인의 싯귀와는 반대로, 이 분은 와이프와 러시아 근위대 소속 어느 프랑스인 장교와 불륜 문제가 발생하자 그 프랑스인 장교와 결투를 벌인 끝에 37세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이렇게 장교들을 귀족들 중에서만 선발하는데다, 그나마 능력이 아니라 연줄 위주로 승진을 시키다보니, 지휘관 중에 정말 일 잘하는 장교는 찾기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소수일 수 밖에 없는 고위 귀족층 자제 중에서만 후보를 뽑다보니 당연히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미 가진 것도 많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고위 귀족 출신 장교가 열심히 할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아마 제 블로그를 오래 출입하셨던 분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영국군도 똑같지 않았던가?'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영국 육군도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영국 육군도 여러모로 러시아군과 비슷한 문제, 즉 무능하고 항상 술에 쩔어지내는 장교들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사병들을 죽도록 채찍질을 하는 체벌 문화가 팽배한 군대가 유럽에서 영국과 러시아 정도였다는 것도 공통점이었지요.  왜 영국에서만 웰링턴과 같은 명장이 나왔는지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도 있을텐데, 그건 잘못된 궁금증입니다.  영국에서만 그런 특별한 인재가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거든요.  제2차 대불동맹전쟁에서 러시아의 혁혁한 전과를 책임졌던 수보로프(Alexander Vasilyevich Suvorov) 장군 같은 경우가 그 예입니다.  웰링턴은 영국이라는 막강한 조국의 버프를 많이 받아서 유명해진 인물이고, 실제 군사적 역량은 수보로프가 훨씬 뛰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1799년 이탈리아 밀라노에 입성하는 수보로프입니다.  이렇게 밀라노에 입성하기 전까지 수보로프는 모로, 막도날, 주베르 등 쟁쟁한 프랑스 혁명군의 장군들을 모조리 무찔러 그의 명성을 드높였습니다.)



그런 장교들 중에서 냉정하고 지적이며 부지런하고 유능한데다 용감하기까지한 바클레이 드 톨리는 짜르 알렉산드르의 눈에 단연 두드러지게 보였습니다.  알렉산드르도 평화 시기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폴레옹과의 갈등이 높아지자 이 51세의 실력파 독일인을 아예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해버렸습니다.  원래대로 하면 그냥 '누군가는 소를 키워야 하지 않겠나' 정도의 인식으로 승진시켜준 독일계 귀족에 불과했는데, 갑자기 짜르의 눈에 들어 쑥쑥 승진한 바클레이 드 톨리는 주변 러시아 장군들의 질투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이렇게 다른 러시아 장군들이 자신의 승진을 질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바클레이는 다른 장군들의 협조를 구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관리 감독했는데, 원래부터 강직하고 차가운 성격에 그런 꼼꼼한 관리 감독까지 더해지니 그를 미워하는 분위기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이 그를 무시하게 된 결정적인 것은 짜르 알렉산드르 탓이었습니다.  과연 알렉산드르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것일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Michael_Andreas_Barclay_de_Tolly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Suvorov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Push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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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9.11.04 07: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정 러시아군의 장교단이 개판이 된 이유 중 하나가 사실 병력충원체계와도 연계됩니다. 이 당시 러시아군은 다른 국가와 달리 농노, 코사크 및 일부 서방 출신 기술병을 중심으로 구성된 병력충원체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중 전열보병 상당수는 주로 농노였습니다. 그런데 이 농노들을 잘 부리려면(?) 당연히 귀족, 그것도 '권위있는 고위귀족'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당장 예전에 쓰셨던 바그라티온만 해도 사산조 페르시아의 신하였던 이베리아(현재의 사카르트벨로)의 숨바툼 바그라투니의 방계 후손이던 바그라티온왕가의 직계다보니 귀족 중에서는 명함 내밀 사람이 거의 없었고 과감한 작전지휘 및 무리한 명령이라도 일단 순진했던 병사들이 잘 듣는 편이었습니다.

    <대위의 딸>, 이 책이 필독서인 이유가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로마노프 황가를 '간접적이나마 비판한 책'이었다는 것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던 예밀리아 푸가초프의 반란을 농노들과 하급귀족의 입장에서 쓰면서 전제군주정에 머무는 채로 데카브리스트를 진압하던 로마노프 황가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의미가 어마했습니다. 게다가 이 책을 본 나로드니키들부터 후대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들까지 모두가 농민해방과 제정타도 및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는 기폭제로써 작용했으니 필독서로써의 가치는 충분히 있는 책입니다.

    • nasica 2019.11.04 08: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대위의 딸에 그런 의미가 있군요. 저는 소설 끝부분에 예카테리나의 자비에 호소하여 주인공이 사면되는 부분을 보고 결국 로마노프 왕가에 대한 찬양이라고 생각했더랬습니다. 하도 오래 전에 읽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 reinhardt100 2019.11.04 0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게 검열 피하는 장치였습니다. 겉으로 보면 황제폐하께서 자비를 내려줌으로써 신민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것으로 보여주었어야 하니까요. 나중에 톨스토이나 투르게네프 같은 제정 러시아 후기 문학가들도 이런 식으로 검열을 피하기도 합니다. 특히 톨스토이가 대표적이죠

  2. Franken 2019.11.04 14: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유럽 문화권 자체가 술에 절여 사는 동네 아닌가요? 수질 문제 때문에 물 대신 술이 필수 음료수가 되어 하층민들 역시 입에서 술이 떨어지는 날이 없다 보니 음주 문제가 당대엔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진 않았을 거 같네요. 물론 본문의 저 장군은 때와 장소를 못 가렸으니 비판받아야 마땅하죠.

  3. hg 2019.11.04 18: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보로프는 웰링턴과 비교하면 서유럽군과 싸운 커리어가 비교적 적다고 들었는데 전과 내용을 비교하면 그렇지만도 않은거군요..하긴 나이만 비교해도 40이 나기도 하고..

  4. 흠흠흠 2019.11.04 1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웰링턴도 웬만한 나폴레옹 원수들 다 때려잡지 않았나요? 게다가 웰링턴은 마세나와 나폴레옹까지 때려잡았으니, 수보타이, 나폴레옹, 웰링턴은 동급인 것으로 ㅎ

  5. 지나가다 2019.11.04 19: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위의 딸이 러시아에서 인기 있는 이유 중하나는 매우 재미있다는 겁니다...그게 뭐냐 랄수 있는데...그때 농노와 주인의 관계 그리고 고위 귀족청년과 하급 귀족 딸의 러브스토리, 푸카쵸프의 반란 (주인공은 푸카쵸프와 밥까지 먹은 사이) 그리고 러시아 군과 반란군과의 전투 등이 매우 생동감 있게 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이어지는 굉장히 재밌는 소설이죠

  6. 지나가다 2019.11.04 1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특히 러시아 전통이 잘드러나는데 승리자에게 빵과 소금을 주는 장면, 전투가 시작되나 투니카(전통의상, 장례식때나 결혼식때 입힌다)를 딸에게 입히는 장면, 러시아 군의 훈련과 편성 등이 자세히 나와 있고 그때 충격이 빠졌던데 푸카쵸프가 점령지에서 공정하고 인자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7. 지나가다 2019.11.04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한 러시아군의 내부 문제도 드러나고 그들의 무능과 암투(사랑 문제로 장교끼리 결투 벌이다 부상) 장교의 진급 등(주인공은 아무 훈련도 없이 장교 소위로 임관...그리고 도박하다 재산 탕진...늙은 농노는 그래도 끝까지 주인공과 함께 생사 고락...)

  8. 영국나치처칠 2019.11.04 2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기... 히틀러랑 조조는 독서량이 도서관 한개 분량이라고들 하시던데요.
    나폴레옹은 걔내들보다 한수 위라고 합니다.

  9. 하이텔슈리 2019.11.04 2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클라이가 유능하다는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유능함이 신뢰받지 못한 이유라니 뭔가 할 말이 없네요... (영국 육군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지만 적어도 유능하다고 견제받는 조직은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진짜 수보로프나 쿠투조프 같이 인망받으면서 능력있는 인물이 존재하는 게 신기한...

    ps.저도 웰링턴과 수보로프를 누가 더 뛰어나다고 보기 힘들다에 한표. 능력의 1대1 비교라는게 극히 상대적인 것이고, 세운 공적을 보면 누가 더 뛰어나다고 하기 힘들지 않을지요.

  10. Hofer 2019.11.04 2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톨리가 전투를 피하고 물러서기만 한다고 내부의 많은 공격을 받았지만..
    적군의 강점 및 아군의 유리한 점을 냉철히 파악하고 지연전을 펼친 걸 보면 우수한 지휘관이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웰링턴이냐 수보로프냐 누가 더 명장이냐 말은 많지만.. 개인적으로 수보로프가 위대한 장군이었던 건 일말의 여지가 없는 거 같습니다.

    • reinhardt100 2019.11.05 2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보로프의 전역은 제정 러시아 이후 역대 러시아 군사학에서 반드시 가르치는 전역이 될 정도로 수보로프의 군사적 재능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당시 서방권에서 사실상 접촉할 수 있는 모든 군대와 싸워본 지휘관은 수보로프가 사실상 유일했습니다. 그나마 나폴레옹이 근접했고요.

      수보로프의 경우, 냉전기 소련군이 서방과의 전면전을 가정하고 꽤나 연구를 많이 했는데 '동쪽에서 진군해서 알프스를 넘는 기동을 성공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냉전기 서방권 주력인 서독군과 미군, 영국군은 알프스 이북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 배치가 혁명전쟁 당시 프랑스군과 비슷합니다. 쌍방의 주력이 알프스 이북에 배치되어 있지만 숫적 우세를 살리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 측면을 찌르기 위한 공세를 펼치기 위한 교본의 기초가 바로 수보로프의 제2차 대불동맹 전역이었으니 당연했습니다.

  11. 2/28일 입대 2019.11.05 1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에ㅋㅋ갑자기 대위의 딸이라는 소설이 읽어보고 싶어졌어요ㅎㅎ댓글의 순기능이네요. 감사합니다~!!

  12. 정암 2019.11.05 15: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것까지 아시는 라인하르트님..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ㅎㅎ

    • reinhardt100 2019.11.05 2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금 KTX 타고 서울로 퇴근 중에 있습니다. ㅋ 요새는 주중에 매일 대전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 때문에 KTX 타고 통근 중이거든요.

      저야 매일 그저 박봉(?)에 시달리는 직장인이니까요. 매일 '5급공채 못 붙은 죄값 치르고 있다' 외치면서 다니고 있어요 ㅠ

      그래도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13. 영국나치처칠 2019.11.05 2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명량해전 스토리를 보면 배 12척을 배달하신 분이 있다든디...

  14. 낄낄 2019.11.06 1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가 말아먹고 계속 해먹는 북스게브덴 장군 비웃을 위치는 아닌것 같습니다.

  15. 샤르빌 2019.11.09 1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웰링턴도 능력있는 장군이지만 영국이라는 든든한 물주가 있었기에 보급이나 물자같은 부분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지만 수보로프의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수십만 대군이 온갖 말썽과 이야기꺼리 속에 착착 네만 강 서쪽에 집결하는 동안, 알렉산드르와 러시아군은 뭘하고 있었을까요 ?  나폴레옹의 침공에 대비하여 모스크바의 성벽을 강화하고 있었을까요 ?  

일단, 로마노프 왕가의 왕궁은 모스크바가 아니라 상트-페체르부르크(Sankt-Peterburg, Санкт-Петербу́рг)에 있었습니다.  1712년 표트르(Pyotr) 대제가 모스크바였던 수도를 상트-페체르부르크로 바꾼 것이었지요.  당시 인구수도 모스크바와 상트-페체르부르크가 각각 30~40만 정도로 비슷비슷했습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최종 목표로 삼은 것은 거기가 러시아의 수도이거나 가장 큰 도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역사적인 지위와 함께 모스크바의 지리적 위치가 러시아 제국의 심장부에 해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노프 왕가를 모조리 사로잡고 싶다면 모스크바가 아니라 상트-페체르부르크로 가야 했습니다만, 거긴 제국의 북쪽 한구석에 불과했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점령할 때, 로마노프 왕가 사람들도 바리바리 봇짐을 머리에 얹고 피난을 떠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저 북쪽의 상트-페체르부르크에 있는 왕궁에서 아주 편안하게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모스크바의 위치를 보시면 왜 나폴레옹이 상트-페체르부르그가 아니라 모스크바로 향했는지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하고 안전한 상트-페체르부르크의 카잔 성모 성당(Cathedral of Our Lady of Kazan, Kazanskiy Kafedralniy Sobor)에서 1812년 4월 9일 예배를 드린 알렉산드르는 남쪽으로 길을 떠납니다.  목적지는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나(Vilna, Vilnius)였습니다.  빌나에는 러시아 야전군의 총사령부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과 대치한 러시아 야전군은 크게 2개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주력부대는 바클레이 드 톨리(Michael Andreas Barclay de Tolly) 장군이, 그리고 더 남쪽의 보조부대는 그루지아의 상남자 바그라티온 장군이 지휘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좀 묘한 일이긴 했습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이라는 대영웅이 유럽 역사 통틀어 사상 최대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기 직전이라는 백척간두의 위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러시아를 지켜낼 군대의 우두머리가 하나는 독일계 장군이고, 다른 하나는 그루지아계 장군이었던 것입니다.  바그라티온은 러시아 공녀와 결혼하여 러시아화된 사람이라고 치고,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독일계인 바클레이 드 톨리였습니다.

 

(상트-페체르부르그의 카잔 성모 성당입니다.  왜 하필 카잔이라는 지방 도시 이름이 붙었는지 찾아보니, 원래 콘스탄티노플에서 왔다는 전설 속의 성모 마리아의 성상(icon)과 관계가 있더군요.  카잔의 성모 마리아는 러시아 전체의 수호 여신에 해당하는 그런 위치라고 합니다.)

 

(모스크바에 보존된 카잔 성모 성상의 복제본입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왔다는 원본은 사라졌다고 하네요.)

 



정확하게 보자면 바클레이 드 톨리는 독일계는 아니었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스코틀랜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쨌거나 꽤 오랜 시간 동안에 걸쳐 발트 해 연안 독일계 귀족들 사이에 정착하면서 바클레이 드 톨리도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바클레이 드 톨리가 사실상의 러시아군 총사령관을 맡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유럽 귀족들이 전통적으로 다 그렇긴 했지만, 특히 러시아 귀족층은 교육 따위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어떤 분야든 좀 전문성이 필요하고 잉크와 펜대를 쥐어야 하는 일에는 오늘날 발트해 연안의 에스토니아-라트비아 지방에 정착하여 로마노프 왕가에 충성하면서 살아온 독일계 귀족들이 많이 등용되었습니다.  군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러시아군 장교직은 100% 귀족층에게만 주어졌는데 특히 독일계 귀족들의 비중이 매우 컸습니다.  가령 나폴레옹에게 사실상의 첫 패배를 안겨주었던 1807년 2월 아일라우(Eylau) 전투를 지휘했던 베니히센(Levin August von Bennigsen)은 아예 중부 독일인 하노버(Hanover)에서 태어난 독일계 귀족이었습니다.


(베니히센입니다.  그는 바클레이 드 톨리 같은 발트해 연안 지역의 독일계 귀족이 아니라, 독일 본토인 하노버에서 태어난 그냥 독일인이었습니다.  하노버 군에서 대위 계급까지 장교 경력을 쌓은 그는 28세이던 1773년에 러시아군에 '채용'되어 터키와의 전쟁 때문에 유능한 장교가 필요하던 러시아군에서 복무하게 됩니다.  5년 후인 1778년에 겨우 중령으로 승진한 것을 보면 독일 귀족 출신이라고 아주 각별한 특별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독일계 지휘관에 대해서 러시아계 부하들이 잘 따라준다면 문제가 없었겠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았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침공이라는 미증유의 위기를 맞이하여 반프랑스 감정이 들끓고 있었고 그에 따라 전에 없던 민족 감정이라는 것이 새록새록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역시 외국인임에 틀림없는 독일인들이 장군이네 지휘관이네 하며 군을 통솔하고 있는 것이 러시아군 장교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특히 언어적인 문제가 아주 컸습니다.  러시아군에는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러시아로 망명한 프랑스 망명귀족 출신의 장교들도 꽤 많았습니다만, 적국 출신이던 이들에 대한 반발심은 오히려 없었습니다.  일단 이 프랑스 망명귀족들이 나폴레옹과 혁명 프랑스군에 대해 이를 갈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언어 문제가 컸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프랑스어가 귀족층의 국제 관계에 있어서 사실상의 표준어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 경향은 유럽의 중심인 파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러시아에서 특히 강해서, 러시아 귀족들은 집집마다 프랑스 출신의 가정교사를 두었고 아이들이 가끔 집에서 러시아어로 이야기할 경우 야단을 치는 경우조차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거의 모든 러시아 장교들은 프랑스어를 매우 유창하게 할 줄 알았습니다.  1807년 나폴레옹과 틸지트(Tilsit) 회담을 하며 며칠 동안 나폴레옹과 꼭 붙어지냈던 알렉산드르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자신의 프랑스어 발음이 (코르시카 출신이었던) 나폴레옹의 프랑스어 발음보다 더 완벽했다는 것일 정도였습니다.  


(랑게론(Louis Alexandre Andrault de Langeron) 백작입니다.  그는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귀족으로서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러시아로 피난갔다가 러시아군에서 복무한 전형적인 망명귀족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프랑스군보다는 주로 투르크군과 싸웠습니다.  그는 부르봉 왕정 복고 이후에도 크림 반도의 오데사(Odessa) 주지사로 오래 있었고, 결국 러시아에서 콜레라로 죽었습니다.)



상황이 그러니 프랑스 망명귀족들과 러시아 귀족 출신 장교들은 말도 잘 통하고 정치적인 이익도 딱 일치해서 정말 이야기가 잘 되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 망명 귀족이 많아봐야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  소수인 프랑스 망명 귀족들은 당연히 러시아 장교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문제는 오히려 독일계였지요.  러시아군 내에 발트해 연안 출신 독일계 장교들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프로이센 출신 장교들이 1809년 이후 대거 러시아군에 투신했습니다.  원래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의 참패 이후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프로이센군이 군축에 들어가면서 많은 프로이센 장교들이 장교직을 잃고 쫓겨난 바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나폴레옹에게 이를 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장 급여를 줄 고용주를 찾고 애타게 찾고 있었는데, 1809년 이후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의 동맹이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고 러시아가 군병력을 증강하면서 새롭게 경력직 장교를 많이 필요로 하게 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었지요.  나중에 전쟁론(Vom Kriege, 영어로는 On War)을 써서 불멸의 이름을 남긴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도 그런 프로이센 출신의 러시아 장교였습니다.  더 나쁜 것은 이들은 같은 독일계 귀족인 부대 지휘관 직속의 참모진으로 주로 등용되었는데, 거기서 눈치도 안 보고 자기들끼리 독일어로 떠들어댔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장교들과 이 독일계 장교들은 언어 문제 때문에라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총사령관 바클레이 드 톨리에 대해서도 러시아군 장교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 분은 클라우제비츠가 아니라 당시 프로이센군의 혁신 과업을 진행 중이던 그나이제나우(August Neidhardt von Gneisenau)입니다.  이 분도 나폴레옹의 압력에 의해 곧 프로이센군에서 쫓겨났고, 1812년 당시 비밀 임무를 띠고 러시아군에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분들은 이 분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유명한 독일해군 전함으로 그나이제나우라는 이름을 기억할 겁니다.)

 



설마 독일계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총사령관을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클레이 드 톨리는 부하 장교들 뿐만 아니라 제2군 사령관인 바그라티온으로부터도 지휘관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거의 무시당하다시피 했습니다.  대체 러시아 장교들은 왜 바클레이 드 톨리를 이렇게 무시하고 있었을까요 ?  알렉산드르가 빌나로 향한 것과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Saint_Petersburg
https://en.wikipedia.org/wiki/Kazan_Cathedral,_Saint_Petersburg
https://en.wikipedia.org/wiki/Our_Lady_of_Kazan
https://chekhitout.files.wordpress.com/2012/04/800px-population_development_moscow.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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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9.10.28 07: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4세기 이후 블라디미르 대공위가 '하나님께서 영윈한 왕권을 부여한 류리크 왕가가 선택하신' 모스크바로 넘어간 이후, 모든 러시아인들에게는 모스크바가 심장부가 되었습니다. 단순한 위상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가장 안전한 편이었거든요. 모스크바가 심장이 된 이후 모든 외부세력이 보기에 모스크바를 점령해서 통치해야 진정한 러시아 정복이 완료된다고 생각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17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 19세기 프랑스, 20세기 나치 독일 모두 모스크바를 정복 및 통치해야 러시아 정복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전쟁 계획을 짜고 실행했습니다.

    러시아의 카잔의 성모, 폴란드의 검은 마리아, 양국의 상징이 같은 동방에서 온 이콘인 것이 특징인데 양국 모두 이 성모상의 기적으로 나라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모두 17세기 때의 일인데 러시아는 대동란시대, 폴란드는 대홍수시대죠. 국가멸망 직전에 성모가 발현했다는 것으로 외세를 물리친 것입니다.

    특히 폴란드 쳉스토호바의 검은 마리아, 일명 '폴란드 왕국의 영원한 여왕'으로까지 숭배받는 성모상인데 나치 독일 점령기 및 공산주의 정권조차도 감히 이 성모는 건드리지조차 못했습니다. 건드리면 교황청까지 들고 일어날 정도로 위상이 대단했으니까요.

    카잔의 성모도 비슷한 위치였지만 1904년 갑자기 실종되었는데 우연이지만 바로 그 다음해 피의 일요일사건까지 겹치면서 러시아인들의 마음이 로마노프 황가로부터 완전히 떠나게 됩니다. 신께서 영원한 왕권을 거두어가셨다고 보여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쳉스토호바의 검은 마리아, 17세기 야스나 고라 수도원 공방전에서 단 400명의 수도사 및 패잔병들이 8배의 스웨덴군을 상대로 2달간 버티면서 국민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상징입니다. 1635년 이후 유럽 최강의 육군력으로 전승 불패를 자랑하던 신교도 스웨덴군이 처음으로 패전했다는 엄청난 위업을 성모 마리아께서 보여주셨다니까 가톨릭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신이 나라를 버리지 않았다는 믿음을 준 사건입니다. 나중에 폴란드에 가시면 꼭 보시면 좋다고 추천드립니다.

    • nasica 2019.10.28 08: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항상 흥미로운 댓글 고맙습니다.

    • reinhardt100 2019.10.28 0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슨 말씀을요.
      요새 매일 서울에서 대전까지 출퇴근 중이라 시간이 좀 생겨서 쓸 수 있습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나시카님.

      지금도 KTX에서 댓글 쓰고 있습니다.

    • 2/28일 입대 2019.10.30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의 시야를 넓혀주시는 댓글 저도 늘 감사하고있습니다!
      물론 nasica님께도 감사드리구요!!

    • reinhardt100 2019.10.30 22:25  댓글주소  수정/삭제

      2월 28일 입대) 서로 지식을 전파하고 수용한다는 것이 인터넷의 장점 아니겠습니까? ^^
      부족한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2. 영국나치처칠 2019.10.28 2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각종 예언에 의하면 유럽은 이슬람에게 점령당하게 된다던데...
    이슬람은 그 성모상을 어떻게 할지...
    그리고 그 이후에 결과는 어떻게 될런지...

  3. 알키비아데스 2019.10.29 2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럽 전쟁사에선 독일계가 참 먹어주는 인종인거 같네요.

    4세기 이후 로마군의 주력은 독일계(게르만계열)
    중세에 먹어주던 용병은 스위스 용병과 란츠크네히트인데 둘다 독일계
    전열보병 전투의 교과서를 쓴건 프러시아
    나폴레옹전쟁시절 영국의 정예부대는 하노버 출신
    러시아군의 중추도 발트3국쪽 독일계
    양차대전 메인빌런은 독일
    양차대전을 정리한 미군의 주력은 독일계 미국인

    독일군이 당나라군대가 된 오늘날엔 상상이 안가는 이야기입니다

    • reinhardt100 2019.10.30 2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유럽 중앙에 있다보니 아무래도 전쟁이 빈번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겁니다. 다만, 독일의 한계는 일찍부터 중앙집권이 이루어지지 못해 19세기까지 제대로 잠재력을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냉전 당시에도 서방 나토군 육상전력의 주력은 미군과 서독군이었는데 당시 서독은 재래식 육군과 공군력만 따지면 미군과 소련군을 잇는 실질적인 세계 3위였죠. 동구 바르샤바 조약군의 동독군 역시 최소 25만의 병력으로 서독군 전력의 6할 이상은 항상 보유하고 있었으니 군사적 역량은 어마하죠. 이쪽 역시 조약군 최정예로 소련식 제파전술의 최선봉이었고요.

  4. Hofer 2019.10.30 1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보로프가 십 수년을 더 오래 살았더라면 과연 어떤 광경이 펼쳐졌을 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 reinhardt100 2019.10.30 2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단합니다. 한 번 영혼의 대결이 벌어졌을 겁니다. 보로디노 전투가 하루만에 끝났지만 이번에는 최소 3일은 넘기는 라이프치히는 애들 장난 수준으로 보일 혈전이 되었을 겁니다. 양측이 서로 20만 이상이 동원 하였을 거고 양측 모두 포병화력을 쏟아부어 전선을 틀어막는 사이 기동력으로 돌파구를 뚫는 식의 전투 수행방식을 선호했으니 정말 우열판단이 어렵겠네요. 게다가 수보로프의 성격상 병기창이 있을 스몰렌스크 부근에서 결전을 치르려고 했을거고 상대적으로 나폴레옹의 대육군 역시 소모가 덜한 상태에서 싸울 수 있었으니까요.

  5. 루나미아 2019.10.30 2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요 길들이 모스크바로 향하고 있는 걸 보니 왜 모스크바로 가는지 이해되네요. 나폴레옹이 지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의 전쟁처럼 지나간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더라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점령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줬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실상은 면은 커녕 선 조차도 제대로 장악한 건지 불안불안해서 이 점이 안 와닿았었네요.
    똑같이 중심부로 쳐들어가도 어떤 공격은 적의 심장부를 움켜쥔 셈이고, 어떤 공격은 포위당하기 딱 좋은 위치에 자처해서 들어간 셈이 되는데 나폴레옹은 전자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후자였나봐요


일단 프랑스나 폴란드는 물론, 나폴레옹의 오랜 동맹국이었던 바이에른이나 바덴, 뷔르템베르크, 작센 등 독일 출신 병사들은 나폴레옹과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으므로 이번에도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원래 독일은 신구교간의 종교 차이도 있고 해서 남북간 지역 감정이 심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남부 독일 출신들은 딱히 프랑스인들을 매우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프랑스에 대한 미움보다는 프로이센에 대한 혐오감이 더 심했습니다.  반면에 주로 헤센(Hessen)과 옛 프로이센 영토로 새로 편성된 베스트팔렌 왕국 병사들, 즉 북부 독일 출신의 병사들은 이렇게 프랑스군에 편입되어 전쟁터로 나갈 때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1812년 1월, 베스트팔렌의 총리는 전쟁 준비에 대해 프랑스의 외무장관 마레(Maret)에게 보고하는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우려했습니다.

"병사들의 충성심은 믿을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오히려 먼 타국으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더 싫어합니다.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전쟁 초기에 그들의 그런 감정이 일으킬 말썽은 주로 대규모 탈영의 형태로 나오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옛 프로이센 영토 출신의 독일인들의 감정이 이런 상황이었으니, 현직 프로이센 병사들의 심정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을 혐오했습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의 적이 패배한다는 것은 프로이센에게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싸움에서 자신들이 피를 흘려가며 나폴레옹을 도와야 한다는 사실은 매우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조차 반란이나 대규모 탈영같은 저항 행위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는 크게 2가지 때문이었는데, 하나는 '야만스러운 러시아인들을 유럽 무대에서 완전히 쫓아내버린다'라는 나폴레옹의 빅 픽처가 중서부 유럽 출신 병사들에게 어느 정도 공감을 샀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군인의 긍지' 때문이었습니다.  프로이센 경기병대의 지텐(Ziethen)이라는 대령이 어느 폴란드 장교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싸울 전쟁은 프로이센의 국익과 상충한다는 것을 잘 안다오.  그래도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 몸이 산산조각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 옆에서 싸울거요."

베스트팔렌이나 프로이센 출신보다 더 대규모 탈영이 우려되는 부대는 나폴레옹의 매제 뮈라(Murat)가 꽤 오래 다스린 이탈리아 남부 지방 '나폴리 왕국'군이었습니다.  이미 그때도 이탈리아는 남북간의 격차 및 지역 감정이 꽤 심했나 봅니다.  나폴레옹이 직접 국왕으로 있던 북부 이탈리아 지방의 '이탈리아 왕국'군은 매우 우수한 부대로 인정받았고 병사들이나 장교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고대 로마 제국의 진정한 후손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나폴리 왕국군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프랑스 지휘관들이 '군인으로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도 이렇게 억지로 머릿수만 잔뜩 채운 군대가 최고의 전쟁 기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확실히 전쟁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병대원들의 상당수가 말도 제대로 탈 줄 모르는 미숙련 기수라는 것을 보고하는 부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병대 4만을 편성할 때 그렇게 많은 기병대원들이 모두 훌륭한 기수일 수는 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알아.  내가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숫자가 적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야.  적군은 스파이든 소문이든 신문 기사이든 무슨 방법으로든 내게 기병대가 4만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거든."

 

(요즘 운전을 할 줄 아는 젊은이들 수자보다 당시에 말을 탈 줄 아는 젊은이들 수자가 훨씬 더 적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새로 징집된 기병들 중 상당수는 칼춤을 추기는 커녕 그저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붙어만 있어도 다행이었습니다.  이런 미숙련 기병들이 당장 만들어내는 문제는 안장 밑의 상처(saddle sore)였습니다.   말을 제대로 돌볼 줄도 모르고 말 위에서 제대로 자세를 잡지도 못한 채로 장시간 말을 탔으니, 기병의 엉덩이도 아팠지만 말도 안장에 쓸려 등에 저런 상처와 부종 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처와 부종을 제때 돌봐주지 않으면 결국 피도 나고 곪아서 더 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적군에게나 아군에게나 사기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는 바로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참모로 배속되었던 독일 출신 장교인 폰 펑크(Karl von Funck)에 따르면 이랬습니다.

"자신들이 무적이라는 믿음 자체가 그들을 무적으로 만들었다.  어떻게 되든 결국 끝에는 그들이 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적군의 사기가 제풀에 꺾이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제9 폴란드 창기병 연대에 배속되었던 독일 장교인 폰 베델(Count von Wedel) 중위도 나폴레옹의 존재 자체가 마법과 같은 효과를 낸다고 적었습니다.

"이 원정에 참여하는 나라들 중 3/4은 이 전쟁을 결정한 사람들과는 정면으로 이해가 충돌되는 관계에 있었다.  실제로 상당수의 사람들은 러시아가 이기기를 속으로 바라고 있었지만 실제로 위험이 닥치자 마치 다들 자기 집을 지키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싸웠다.  황제에 대한 각자의 개인적인 감정들이 전에는 어떤 것이었든간에, 나폴레옹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유능한 지휘관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의 재능과 판단에는 모두가 확신을 가졌다.  그의 위대함이 뿜어내는 아우라에는 나도 저절로 감화가 되어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열정과 경외의 감정을 담아 '황제 폐하 만세(Vive l'Empereur) !'를 외쳤다."

 

나폴레옹을 멀리서 쳐다보기만 해도 이런 감정이 치솟는데, 나폴레옹이 자기에게 말이라도 걸어준 적이 있다면, 혹은 나폴레옹이 자기와 같은 솥단지에서 수프를 먹었다면,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습니다.  피에몬테(Piemonte) 출신의 칼로소(Calosso)라는 이탈리아인 기병 장교는 나폴레옹이 사열을 하다가 그의 앞에 멈춰 서서 그에게 (아마도 나폴레옹의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몇마디를 건네는 영광을 누리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날 그 사건 이전에는 난 그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것처럼 나폴레옹을 존경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영원히 변치 않는 열정으로 그에게 내 목숨을 바쳤다.  그 점에 있어서 난 딱 한가지가 후회스러웠는데, 그건 황제께 바칠 목숨이 하나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저 멀리서 보고만 있어도 자기가 쥔 머스켓 소총이 7.62mm 기관총으로 변하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 !)

 



이에 대해서는 러시아 측에서도 인정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나 봅니다.  한 러시아 장교에 따르면 당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나폴레옹이 동시대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던 정신적 지배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며, 적이건 아군이건 마치 어떤 요술처럼 그의 이름 자체에서 무한정의 힘이 있는 것처럼 느꼈다고 합니다.

게다가 프랑스군은 물론, 이탈리군이나 독일군이나 원주둔지를 떠나 네만 강 서쪽으로의 행군길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각 부대는 통과하는 지역의 지형에 따라 어떤 경우는 하루에 15km, 어떤 경우엔 35km까지도 주파했습니다.  다년간의 원정 경험을 가진 프랑스군 병참부의 일처리는 매우 뛰어나서, 각 부대에게는 어느 날짜에 출발해서 언제까지 어디에 도착해야 하는지의 일정표가 상세히 주어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주어진 날짜에 주어진 도시나 마을에 도착해야 했고, 도착하면 정해진 절차와 체계화된 서류 작업을 통해 숙소를 배정 받았습니다.  대개의 경우 일반 시민들의 집에 각 가정의 사정에 따라 병사들을 2~3명씩 혹은 5~6명씩 숙영(billeting)시켰지요.  병사들의 식량은 계약된 종군 상인들에 의해 미리 준비되어 있다가 각 부대의 부사관 등이 전표를 들고오면 지급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꽤 체계적이었습니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잇는 알프스의 고갯길인 브레너패스(Brennerpass) 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순조롭다보니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엘바(Elba) 섬 출신의 체사레 데 로지에(Cesare de Laugier)라는 군인의 기록에 따르면 브레너(Brenner) 고갯길을 넘어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 쪽으로 넘어가는 행군은 마치 명랑하고 즐거운 군사 행렬 같았다고 합니다.  작센 출신의 폰 미어하임(von Meerheimb) 중위에 따르면 그는 고향 땅을 떠나게 되어 처음에는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슬퍼했지만, 일단 행군 대열에 합류해보니 부대 전체 분위기는 흥겹고 가벼운 농담이 넘쳐났으며, 심지어 들르는 마을이나 도시에서 만난 아가씨들과의 짧은 연애도 꽤 흔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낙천적 분위기는 폴란드에 진입하자 싹 바뀌었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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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애경 2019.09.23 07: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 뿐만이 아니겠지만 이기기 위해선 심리전도 역시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것 같네요.

    • nasica 2019.09.23 07: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저는 나폴레옹이 필요 이상의 대군을 모은 진짜 이유도 실제로 러시아를 침공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 정도의 대군을 모으면 러시아가 겁을 먹고 미리 굴복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전쟁은 결국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고 저는 믿는데, 나폴레옹도 결국은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 유애경 2019.09.23 09: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천재,영웅 등으로 미화되는 부분도 있지만 그 역시 하나의 인간으로서 완벽할수는 없었겠지요!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2. 아나는평범한사람이었구나 2019.09.23 0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재미있게 보고있습니다. 행복한 한주 되세요~

  3. Vladimir 2019.09.23 09: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때도 러시아인들은 유럽인들에게 '위협' 내지는 준 야만족 취급을 받았나보군요.독소전쟁때 가장 극단적으로 배출된 유럽인의 러시아인 혐오는 바로 지금 이 순간도 돈바스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 정규군의 일부이자 네오나치 집단인 아조프 대대 등이 표출하고 있답니다.

    • 2월28일 입대 2019.09.24 2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격하게 동의합니다. 영국이 이끄는 서유럽 세력과 러시아의 갈등은 세대를 뛰어넘는 전통(?)인 것 같습니다. 러시아가 서유럽이나 중근동으로 진출할 때면 어느때고 앵글로색슨들이 막았고, 길이 막혀 동방으로 진출하려면 앵글로색슨의 수하(?)들에게 막혔죠. 크리미아에서 해밀턴 요새까지 그 갈등구조는 아마 사람들의 인식구조에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4. 샤르빌 2019.09.23 09: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존재 자체가 사기진작 효과가 있다니.. 갑자기 토탈워 게임이 연상되네요ㅋㅋ

    • 2월28일 입대 2019.09.24 2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폴레옹 머리 위에 별이 어찌나 찬란하게 많이 뜨던지요 ㅎㅎㅎ부대가 망가지면 파리가 아니라, 아작시오에 스폰되는 것도 소소하게 웃겼어요

  5. Franken 2019.09.23 1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출생연도 등 의외로 공통점이 많은데 즉흥적이었던 히틀러완 달리 나폴레옹은 전쟁의 신답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하고 갔군요.

    러시아와 안 싸우는 게 답이란 건 나폴레옹 본인 역시 잘 인지하고 있었겠지만 어차피 유럽대륙을 완전 재패할려면 러시아를 굴복시켜야 했으니 전쟁은 불가피였죠.

  6. 이타카 2019.09.23 14: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부 유럽ㅜㅜㅜ

  7. 냠냠 2019.09.23 16: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재밋게 보고있어요!! 질문이 있어요 : 젊은이들 ‘수자’?? 제 담임선생님도 그렇게 쓰시던데 원래 옛날엔 그런 맞춤법이었나요?

    • nasica 2019.09.23 2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으억 아니요, 솔직히 기억이 안납니다. 요즘 맞춤법이 바뀌어 여러가지가 변한 것은 맞는데 그 중에 제가 극혐으로 여기는 것이 단어 붙여쓸 때 사이 시옷 쓰는 것입니다.
      가령 소고기 뭇국 같은 거요. (저 때는 쇠고기 무우국이었지요.) 그런데 한자어끼리 붙여쓸 때는 사이 시옷이 없어도 된다고 하길래, 숫자가 아니라 수자가 요즘 맞는 맞춤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군요.

    • 2월28일 입대 2019.09.24 2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Nascia님의 설명대로, 명사들로 이루어진 합성어의 사이에 'ㅅ'이 낑겨들어가는 것을 '사이시옷 현상'이라고 합니다.

      끔찍하리만큼 많은 예외가 존재하지만, 기본적인 룰은 보통 1) 두 명사의 결합이 있을 것 그리고 2) 그 두 명사중의 하나는 최소한 순우리말일 것 입니다.
      따라서, 수자는 수(數)와 자(字)가 결합되었으므로 사이시옷이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만....

      국립국어원에서는 '곳간, 셋방, 숫자, 찻간, 툇간, 횟수' 이 6가지의 합성어에 대해 예외를 인정합니다. 즉, 순 우리말이 없어도 사이시옷을 쓰는 것입니다.

  8. ㅇㅇ 2019.09.23 18: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런 분위기가 바로 나폴레옹에게 사실을 바로 볼수 있는 눈을 빼앗아 갔다고 감히 말하고 싶네요. 모든 권력자들은 주변을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합니다

  9. 웃자웃어 2019.09.23 1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은 러시아 원정은 하지 말아야 했었네요.

  10. 하하하하 2019.09.23 2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대로 저 병력을 이끌고 스페인으로 가서 웰링턴을 때려잡았어야

  11. 차라리 2019.09.24 14: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로 어느정도 진격한 시점에서, 보급선 유지가 가능은 한 선에서 떨거지 부대를 세워놓고 소수 정예로만 휘젓는 방식으로 러시아에 피해를 입히는 걸 반복했음 어땠을지...
    결전을 피하고 몇몇 주요 도시만 점령하고 대규모 유격전으로 피난 간 짜르와 귀족들이 지치게 만들면 러시아 쪽에서 서쪽으로 진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싶네요
    요즘처럼 총력전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니니 러시아 권력층이 피난생활을 그리 오래 감내하진 못했을 것 같습니다

  12. 2월28일 입대 2019.09.24 23: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저도 저게 가장 궁금했어요! 집단탈영이나 반란문제요. 나폴레옹의 카리스마는 인정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외국인'부대의 통제가 보장됬는지...왜 작은 단위로 나눠서 믿을 수 있는 순수(?) 그랑다르메에 낑겨넣는 방식은 쓰이지 않았을까요?


1812년 5월18일, 아직 폴란드 푸오츠크(Płock)에 있던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이자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viceroi)인 외젠 보아르네(Eugène de Beauharnais)가 당시 임신 중이었던 부인 아우구스타(Auguste Amalie Ludovika Georgia von Bayern)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실제로 발발할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는 거 아시오 ?  사람들 말로는 전쟁이 일어날 턱이 없다고 하오.  이유는 양측 모두 전쟁으로 얻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라오.  결국 협상으로 이 상황이 종결될 것이라고 다들 말하고 있소."

 

 

(바이에른 왕국의 공주 아우구스타입니다.   외젠과의 결혼은 순수하게 정략적으로 맺어진 것이었으나, 외젠이나 아우구스타나 서로를 정말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도 외젠은 처가댁에서 후한 대접을 받으며 잘 살았습니다.)

 

 


실제로 중서부 유럽의 프랑스나 독일, 이탈리아 출신 사람들이 볼 때 황량한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머나먼 러시아로 쳐들어간다는 것은 굉장히 뜬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가난하고 낙후된 나라에 쳐들어가서 얻을 것도 없고, 무엇보다 너무 먼 나라인데다 너무 넓은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러시아가 쳐들어온다면 맞서 싸우겠으나, 굳이 그 먼 곳으로 쳐들어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소문이 돈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궁극적 목표야 러시아를 다시 대륙봉쇄령 틀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지만, 나폴레옹 본인조차 이번 전쟁의 전술적 목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큰 전투 두어번이면 러시아와의 평화 조약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큰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공략해야 할지는 본인도 몰랐습니다.  나폴레옹은 한번은 스몰렌스크(Smolensk)를 점령하고 겨울을 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말했다가, 다음 번에는 모스크바야말로 러시아 제국의 진정한 수도이므로 여름이 끝나기 전에 거기를 점령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 본인부터 오락가락하는 판국이니 누가 보더라도 이번 전쟁은 목표가 없는 늪 같아 보였습니다.

 

 

(스몰렌스크까지의 거리도 사실 가까운 편은 아니지만 모스크바까지 가는 것은 더욱 멀었습니다.  당시 비교적 쾌속으로 행군하던 프랑스군도 하루 25km 정도가 평균이었으니, 스몰렌스크까지 가는 것도 전투가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로와도 대략 29일 걸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네만(Nieman) 강 서안으로 집결하라는 나폴레옹의 소집 명령을 받은 프랑스 및 동맹국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과연 어떤 기분으로 고향을 떠났을까요 ?  아마 즐거운 마음으로 군대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특히 남의 나라 전쟁에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들은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나폴레옹이 그들을 위해 준비해놓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채 길을 떠났습니다.  이들에겐 네만(Nieman) 강 서쪽 어딘가였을 최종 집결지의 위치와 집결 목표일은 물론 몇월 며칠에는 어느 마을에, 몇월 며칠에는 어느 도시에 도착하라는 매우 상세한 중간 일정표까지 주어졌습니다만, 정작 어느 나라를 치기 위해서 간다는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황실 근위대 소속 포병대의 불라르(Boulart) 대령이라는 사람도 폴란드에 도착하고 나서도 편지에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앞으로 어떻게 풀릴지 알 방법이 없다.  뭔가 낌새가 보이는 것도 없고 상상력을 자극한 아무 단서가 없으며, 열정을 불러일으킬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소문은 자자했습니다.  원래 지휘부가 비밀을 엄격하게 지킬 수록 아랫것들의 상상력은 나래를 펼치게 되어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치러 간다는 소문이 가장 유력했지만 그럴 리가 없고 모든 것은 인도에 쳐들어가기 위해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가 짜고치는 고스톱이라는 소문도 파다했습니다.  

푸제(Pouget) 장군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인들과 연합하여 러시아 제국의 광활한 사막을 지나 영국놈들의 소유인 인도를 공격하러 간다고 생각했다."

세계 지리에 어두웠던 어떤 병사는 이 소문을 잘못 알아듣고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어서 동네 사람들을 더더욱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우리는 육로를 통해 영국으로 진격하기 위해 러시아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더 배운 것이 있고 이성적인 병사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소문은 더욱 그럴싸 해서,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가 비밀 협약을 맺고 프랑스-러시아 연합군이 오스만 투르크를 공격하기로 했으며, 먼저 투르크의 유럽-아시아 영토를 정복한 뒤에야 인도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습니다.  이 소문은 워낙 그럴 듯하여, 심지어 알렉산드르에게 직접 제출된 스파이들의 첩보 보고서에도 '나폴레옹의 진짜 목적은 러시아를 짧고 거센 공격으로 굴복시킨 뒤 그대로 러시아군 10만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뒤 이어서 이집트를 공략하고, 최종적으로는 벵갈을 침공하는 것'이라고 적힐 정도였습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어쩌면 알렉산드르도 나폴레옹의 의중이 그럴 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야콥 발터(Jakob Walter)는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석공이 원래 직업이었습니다.   그는 1806년에 최초로 징집되어 폴란드 전역에서 복무한 이후 소집과 소집 해제를 반복하다가 1812년 다시 소집되어 러시아로 향했습니다.  러시아로 갈 때 그의 나이는 24세였고, 티푸스에 걸렸으나 다행히 살아남아 회고록도 썼습니다.)

 

 


좀더 스케일이 작은 소문도 있었습니다.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출신의 야콥 발터(Jakb Walter) 일병이 들은 소문은 방향이 정반대였습니다.  그 소문에 따르면 그들은 발트 해변 어딘가의 큰 항구로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스페인으로 가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당수 병사들에게는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병사들의 편지나 기록들은 꽤 낭만적인 전망을 그린 것도 많았습니다.


"이 모든 소문은 사실 내겐 별 상관이 없다.  우리가 오른쪽으로 가든 왼쪽으로 가든 혹은 그냥 가운데로 쭉 가든 뭔 상관이겠는가 ?  내가 진짜 세상 속으로 가고 있다는 것만 중요하다."

"내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 거의 모두가 군대에 모여있었다.  그들은 이미 영광을 차곡차곡 쌓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그냥 있으면 세상의 짐짝 신세인 내가, 그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까지 수줍게 손을 모은 채 기다리고만 있을 수 있었겠는가 ?  난 그때 18살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는 '대인도 제도' 혹은 어쩌면 '에집(Egippe)'으로 간다고 해요.  사실 어느 쪽으로 가든 상관없어요.  저는 우리가 세상 끝까지 가봤으면 해요."

이런 태평한 상상력과 그 해 연말 그들이 처할 운명을 비교해보면 상당히 한심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태어난 동네에서 10km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시골뜨기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영국이 어디 붙은 나라인지 인도라는 곳이 섬인지 육지인지, 러시아와 이집트 사이에 어떤 나라가 있는지 알 방법도 없었고 그저 모든 것이 신기하고 들뜬 모험처럼 느껴진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물론 이런 근거없는 소문들과 억측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정 대상이 러시아라는 것은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 중 절반 정도는 프랑스 출신이 아닌 폴란드,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 다양한 국가 출신이었고 심지어 스페인 출신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병사들과 폴란드 병사들은 워낙 나폴레옹 개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으니 그렇다치고, 다른 나라 출신들은 러시아 원정길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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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멜무지로 2019.09.16 06: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낙천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보니
    그 뒤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워 보이네요

  2. starlight 2019.09.16 1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를 종속시켜 식민지나 위성국으로 두기엔 현실적으로 불가하고, 결국엔 다시 한번 승리해서 (틸지트에서처럼) 프랑스 패권의 강력한 동맹국으로 삼으려 한 것 같습니다. 전략적이기보단 다분히 감정적이고 사사로운 자존심도 반영된 계획이었다 봅니다. 당시로는 사상 최대의 인원과 물자를 투입한 것치곤 확실한 손익 계산이 없다는게, 너무 많은 승리와 성공으로 허황되고 무능력해지기 시작한 나폴레옹의 세계관을 반증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3. 빛둥 2019.09.16 17: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군의 보급도 없고, (폴타바 전투때처럼) 상대 반란세력의 도움도 없고, (아무리 끌어모았어도) 현대적 보급수단도 부족하고, 거대한 대륙 한 가운데의 상대 수도로 무작정 들어가다니... 아무리 후세사람들이 역사를 다 알고 있어서 비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나폴레옹이 너무 무모했습니다.

    "쎄게 한 대 얻어 맞으면(한판 회전에서 크게 지면), 숙이겠지."라는 마음 말고는 해석되지가 않네요. 나폴레옹이 계속 성공가도만 달려왔던 게 결국은 파국을 부른 것.

    그나저나 당시 알렉산드르는 페테르스부르크의 궁정에 있었겠죠? 그 쪽으로는 아예 나폴레옹 군대가 접근도 안 했네요. 어차피 발틱해가 영국의 수중에 있으니, 페테르스부르크 공략은 힘들고, 설사 공략에 성공해도 러시아 왕실을 잡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나 봅니다.

  4. 루나미아 2019.09.17 1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육로로 인도를 공격한다는,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어보이는 발상이 은근 흔했나 보네요. 하긴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례도 있으니까요.

  5. 푸른 2019.09.18 1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원정을 앞두고 돈 소문이나 병사들의 상상이 되게 귀엽고 웃기네요 ㅋㅋ

    그러면서도 당시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도 러시아원정이 오스만이나 이집트 침공보다 더 예상못할 일이었다는게, 앞으로 있을 원정의 비극성을 극대화하네요...

  6. 무명씨13 2019.09.19 1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님의 글을 특히 황제의 러시아 원정 준비 과정 및 실패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이후 발생한 크림전쟁에서 황제가 겪는 고통을 러시아 군대가 그대로 맛보며 허물어져 갔다는데 충격을 받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자기 땅에서 뭘 배우고 사는지?


2002년 3월 15일,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Vilnius) 교외의 공사 현장에서 많은 수의 사람 뼈가 발견되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소련 시절 KGB가 암장을 한 정치범들의 시신이거나 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학살한 포로 또는 유태인들의 시신이 아닐까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발굴을 더 진행해본 결과 나폴레옹 시대의 군복과 머스켓 소총 등이 나오면서 이 3천여 구가 넘는 해골들이 1812년에 죽은 나폴레옹의 병사들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20여 명을 제외하고는 이 해골의 주인은 모두 남성이었고, 대부분은 죽을 때 20대의 나이였습니다.


이 해골들을 연구한 결과, 이 해골들 중 상당수에서 질소 동위원소의 양이 매우 높게 나왔습니다.  질소 동위원소는 단백질과 상관이 많은데, (저는 잘 이해를 못합니다만) 해산물을 많이 먹는 경우에도 늘어나지만 반대로 굶주림에 시달리는 경우에도 늘어난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해골의 주인공들은 해산물 때문이 아니라 굶주려서 질소 동위원소 수치가 높게 나왔던 것 같습니다.  연구진이 해골에서 밝혀낸 것은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시신들 중 1/4 정도는 티푸스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것이 이 병사들에게 티푸스를 옮겼을까요 ?

 

(2002년 리투아니아 빌니우스에서 발견된 프랑스 그랑다르메 병사들의 해골입니다.  이들이 고향을 떠날 때, 100년도 훨씬 뒤에 이런 몰골로 사람들에게 발견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

 



네만 강을 건너기 훨씬 전부터도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독일군이나 이탈리아군은 모두 자신들이 집결한 동부 폴란드와 동프로이센 지역의 색다른 환경에 상당히 놀라고 있었습니다.  다부(Davout)의 제1 군단 산하 제33 경보병 연대 소속의 앙리 에베르(Henri Pierre Everts) 소령은 네덜란드의 로테르담(Rotterdam) 출신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1807년 아일라우 전투나 프리들란트 전투에는 참전한 바가 없어서, 오데르(Oder) 강 동쪽으로는 1812년에야 처음으로 넘어가 보았습니다.  이 양반은 오데르 강 동쪽 폴란드 시골 마을을 처음 보고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난 놀라서 멈춰섰고, 한참 동안을 말 안장 위에 앉은 채로 이 마을을 살펴보았다.  처음 보는 형태의 비참한 나무 오두막들, 역시 목판으로 만든 작고 낮은 교회, 그런 것들 못지 않게 너저분한 모습인 주민들의 불결한 수염과 머리털... 그 중에서도 유태인들은 유별나게 혐오스러운 모습이었다."

원래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은 서부 유럽처럼 넉넉한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서부 유럽인들도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그다지 깨끗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런 서부 유럽인들이 보았을 때 오데르 강 동쪽 폴란드와 동프로이센 사람들은 너무나 지저분했습니다.   이렇게 지저분하면 반드시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벼룩과 이 같은 해충입니다.  DDT가 없던 시절 그런 해충들을 박멸한 뾰족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몸과 옷을 자주 씻고 세탁하는 것이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런 해충들은 옷 솔기 속에 숨어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뜨거운 다리미로 자주 다림질을 해주는 것이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

 

 

(BBC에서 TV 미니시리즈로 만든 숀 빈 주연의 Sharpe 시리즈입니다.  제 눈에는 아무리 봐도 저건 녹색이 아니라 감색인데, 왜 자꾸 소설 속에서는 green jacket이라고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Sharpe's Rifles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09년 1월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 지방) -------------

자원병들의 부인들이 갈색 셔츠들을 자르고 꿰매는 사이, 요새에 있던 루이자 파커는 영국군 라이플병들이 자신들의 녹색 자켓을 수선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  군복은 너덜너덜해지고 찢어지고 헤어져 너덜너덜해진데다 불에 그슬리기도 했지만 이 젊은 아가씨는 바느질 솜씨가 아주 비상했다.  그녀는 샤프의 녹색 자켓을 가져간지 하루 만에 거의 새것처럼 만들어왔다.  "다림질로 벌레까지 다 잡았다고요."  그녀는 신이 나서 말하며 칼라 부분의 솔기를 접어 보이며 정말로 이가 박멸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부러진 군도 조각을 다리미로 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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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도 종류가 많은데 몸니는 옷 솔기에 숨어서 거기에 알을 낳고 번식한다고 합니다.  머릿니는 사람 머리털에 알을 낳지요.)

 



하지만 보통 빈곤과 불결함은 항상 같이 다니는 법이라서 가난한 동네에 특히 벼룩과 이가 많았습니다.  이건 네만 강을 넘어서면서 더 심해졌습니다.  간간이 마주친 러시아 농민들과 그 오두막도 이 투성이었던 것입니다.  네만 강을 넘자 곧 이가 온 군대에 득실거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보급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보급이 충분했다면 굳이 지저분한 러시아 농민들과 접촉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정이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러시아 농민들을 붙잡고 먹을 것을 뒤져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러시아 이들은 프랑스인의 피와 독일인의 피를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출신의 야콥 발터(Jakb Walter) 일병의 수기에 따르면 병사들이나 장교들이나 몸에 이를 수천 마리씩 달고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는 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직접 옮지도 않았습니다.  병사들이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바닥에 까는 짚단 등을 통해서도 옮았습니다.  러시아 농민들도 그런 짚단을 깔고 잤을테니까요.  역시 러시아 원정군에 포함되어 있던 근위대 부사관 부르고뉴(Adrien Jean Baptiste François Bourgogne)의 회고록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중대원 중 하나가 잠자리를 만들라며 내게 짚단을 좀 가져다 주었다.  난 배낭을 베게 삼고 발을 모닥불 쪽으로 한 채 잠들었다.  한 시간 가량 잤을까 ?  난 온몸에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을 느끼고는 일어났다.  놀랍게도 내 몸 전체에 이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  난 벌떡 일어나 2분 안에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옷을 벗어버린 뒤 내 셔츠와 바지를 모닥불 속에 던져 넣었다.  벌레들은 불 속에서 마치 연속 사격과 같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터졌다."

이가 해로운 것은 단지 가려움을 일으키거나 피를 빨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티푸스(typhus)를 일으킵니다.  티푸스는 고열과 붉은 발진을 일으키는 열병으로서, 음식이나 물을 통해 전염되는 장티푸스(typhoid fever)와는 다른 병입니다만, 까딱 잘못하면 죽는 병이라는 점은 동일합니다.  장티푸스의 치사율은 10~20%인데 비해 티푸스는 10~40%이니 티푸스가 더 위험한 병이지요.  티푸스는 지금도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는 무서운 병입니다.  티푸스가 이에 의해 전염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가 사람의 피를 빨 때 옮는 것은 아닙니다.  엉뚱하게도 티푸스를 일으키는 미생물은 이의 입이 아니라 이의 배설물에 존재합니다.  이가 기생하는 사람의 옷과 피부에는 이의 배설물이 묻는 경우가 많을텐데, 가려움 때문에 사람이 피부를 긁을 때 이의 배설물이 피부에 파고들면서 티푸스가 옮는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나 벼룩 등이 질병을 퍼뜨린다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병사들은 러시아의 이 때문에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사태의 심각함을 잘 몰랐으나, 프랑스군의 군의관들은 점점 늘어나는 열병 환자의 수에 기겁을 했습니다.

 

(티푸스는 고열을 일으켜 사람을 혼수상태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 가장 큰 피해인데, 고열과 함께 이런 붉은 발진을 일으키는 것도 주요 증상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널리 퍼져있던 기생충이었습니다.  프랑스나 독일에는 이가 비교적 적은 편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벌레였고, 척탄병 쿠아녜의 수기에도 적혀 있기를 스페인만 하더라도 이가 득실거리는 곳이었습니다.  

"우리의 지정 휴식 장소에 도착한 뒤, 우리 부대 몇몇 병사들은 한 병에 3수(sous - 요즘 가치로는 3수면 대략 1800원) 하는 말라가(Malaga) 와인을 찾아냈다.  그들은 그걸 마치 우유라도 되는 것처럼 마셔댔고, 결국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졌다.  우리는 그들을 마치 송아지처럼 마차에 싣고 다녀야 했다.  1주일이 다 된 다음에도 그들에게 음식을 떠먹여줘야 했는데, 그들은 스푼으로 수프를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와인이 어찌나 독했는지 그들 중 누구도 배식 군량을 먹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마을인 비토리아(Vittoria)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부르고스(Burgos)에 간 뒤에, 또 거기서 다시 크고 멋진 도시인 바야돌리드(Valladolid)로 갔다.  우린 바야돌리드에서 해충에 둘러쌓인 채 꽤 오래 있었다.  병사들은 사실상 이 위에서 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짚단 속에 이가 득실거렸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면 손가락으로 잡아서 땅에 던지며 '널 만든 사람에게 가서 그 사람 피를 빨아라' 라고 말하는 것이 스페인 사람들의 풍습이었다.  정말 더러운 족속이다."

 

(영국 내전 당시 스코틀랜드 던바(Dunbar)에서의 호국경 크롬웰(Cromwell)의 모습입니다.  어떤 전쟁이든 총보다는 질병에 의한 희생자가 항상 더 많습니다.) 

 



왜 그런데 오직 1812년 러시아에서만 티푸스가 맹위를 떨쳤을까요 ?  실은 티푸스가 러시아에서만 날 뛴 것은 아니었고, 티푸스와 전쟁은 일반적으로 함께 다녔습니다.  17세기 초반 영국 의회와 왕당파 간의 내전 때도, 또 독일 30년 전쟁 때도 티푸스는 어김없이 발발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이는 세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전시에는 병사들이건 일반 농민들이건 평상시보다 목욕과 세탁을 더 못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이는 왕성하게 번식합니다.  두번째, 평상시에는 농민들이든 도시 거주민들이든 한 방에서 수십 명이 같은 짚더미 위에서 자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군대, 특히 야전 작전 중인 군대에서는 매일매일 그렇게 잡니다.  그렇게 밀집된 집단 생활에서는 이가 새로운 숙주를 찾는 것이 매우 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에 물린다고 누구나 다 티푸스에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은 마릿수의 이를 몸에 달고 다녀도 어떤 사람은 티푸스에 걸리고 어떤 사람은 멀쩡합니다.  개인차가 있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잘 먹고 잘 쉬어서 건강한 사람은 면역력도 좋아서 병에 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먹지도 잘 쉬지도 못하는 사람은 티푸스 뿐만 아니라 온갖 병에 쉽게 걸립니다.  특히, 잘 먹지도 못하는데다 오염된 물을 마시고 이질설사에 시달리는 병사라면 아주 쉽게 티푸스에 걸립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병사들의 처지가 딱 그랬습니다.  왜 러시아군에서는 티푸스가 발생하지 않았을까요 ?  발생했습니다.  러시아군에서도 수만 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그만큼 많이 죽었습니다.  프랑스군보다 사정이 좀 나았을 뿐이었지요.

 

(미니아르 도표의 원본 사본입니다.  컴퓨터도 없던 시절 저걸 다 손으로 그렸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

 

 


전에 소개해드린 미니아르의 도표를 보면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는 추위는 커녕 여름부터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계기 없이도, 네만 강을 건넌 순간부터 꾸준히 줄어들었습니다.  굶주림과 티푸스, 탈영 등으로 인해 그랑다르메는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러시아 땅에서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이걸 막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었을까요 ?  글쎄요, 수송용 헬리콥터로 PET병에 든 생수를 일선 전투 부대에게도 일인당 하루 4리터씩 공급해주는 현대의 미군이라면 가능할까, 당시의 기술로는 사실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러시아 원정은 그냥 시작을 안하는 것이 정답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1812년 봄, 나폴레옹은 물론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 끌려온 일반 졸병들도 자신들의 앞길에 어떤 난관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부름을 받고 네만 강 서쪽에 속속 모여들던 그랑다르메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  다음 편에서는 몇몇 사례를 통해 그 속사정을 살펴보시겠습니다.




Source : 
http://www.montana.edu/historybug/napoleon/typhus-russia.html
https://en.wikipedia.org/wiki/Typhus
https://www.warhistoryonline.com/napoleon/real-reason-napoleons-invasion-russia-failed-mm.html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www.smh.com.au/world/study-shows-napoleons-army-was-ravaged-by-lice-20060104-gdmq6c.html
https://www.spiegel.de/international/zeitgeist/crawling-death-how-lice-thwarted-napoleon-s-invasion-of-russia-a-638751.html
https://www.forbes.com/sites/kristinakillgrove/2015/07/25/skeletons-of-napoleons-soldiers-in-mass-grave-show-signs-of-starvation/#105e5b143743

https://www.healthlinkbc.ca/health-topics/tp12788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Memoirs of Sergeant Bourgogne, 1812-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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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내마음속댕댕이 2019.09.09 0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린 시절 본 위인전에선 나폴레옹이 실패한 이유는 병사들의 군복 주석단추가 겨울철에 얼어붙고 깨져 코트를 여미지 못해 얼어죽어서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현실은 그런 코믹한(?) 헤프닝과는 많이 떨어져있었나봅니다. 저런 끔찍한 환경으로 수십만을 밀어넣은 나폴레옹은 대단한 능력자인건지 터무늬없는 도박꾼인건지...

  3. 유애경 2019.09.09 09: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사들이나 장교들이나 이를 수천마리씩...
    그냥 과장된 표현을 한건지 아님 실제로 그랬다는건지, 어찌됐든 끔찍하네요!
    읽으면서 몸이 근질근질 해졌습니다.
    이런저런 악재속에서 참 고생했을 병사들이 가엾게 느껴집니다.

  4. 돌격대장 2019.09.09 0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퇴했을때 대치한
    러시아 프랑스 양군의 숫자가 얼추 둘다 4만정도
    됬다는 글을봤었는데,이글이 진짜면
    러시아군은 무었때문에 그리 녹은걸까요

  5. 까까님 2019.09.09 0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염병이야 전쟁터가 아니어도 유럽 도시에서는 일상 다반사였다고 알고있습니다만 특히 러시아전역에서 물 문제가 직간접적으로 매우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얘기였습니다
    전염병 문제의 이면에도 물 부족 사태가 깔려있었던 것이로군요
    혜안이 담긴 글에 다시 감사드립니다

  6. 웃자웃어 2019.09.09 1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은 유럽에서 좋은소리 듣기 힘든 사람이라고 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러시아로 끌고가 개죽음으로 몰아 넣었으니.

  7. 수비니우스 2019.09.09 12: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어렸을때 세계사 보면 러시아원정 패배는 추위때문! 이랬는데 이런 복잡한 이면이 있는것 보면 역사에도 정론은 없는것 같습니다.

  8. 강가딘 2019.09.09 15: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는데 전염병에 시달리기까지 했군요.

  9. 오렌지훈 2019.09.09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이면이군요
    잘 보고 갑니다^^
    좋은 한주 보내세요~

  10. 카를대공 2019.09.09 2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고고학적 조사를 보면 궁금한게,사람 뼈가 저렇게 오래 보존되는 특별한 조건이 있나요?

    나폴레옹 전쟁은 200년 전,중국에선 장평대전 유적(?)을 발굴한다는데 거긴 무려 기원전 발생한 사건입니다.

    공룡뼈를 보면 사람뼈도 비슷하게 가능하겠구나 싶긴한데 어떤 조건이 있어야 기원전 뼈가 보존이 되는건지......

    • reinhardt100 2019.09.10 1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토양 때문입니다.

      토양에 따라 공기 및 미생물, 수분 등이 침투할 수 있는 공간 정도가 차이 납니다. 조건이 잘 맞아 완전 밀봉 수준으로 유지되면 원형에 가깝게 보전되기도 합니다.

  11. 2/28일 입대 2019.09.09 2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우 간지럽고 찝찝해~~가 오늘의 감상입니다ㅎㅎ저 외에 풍토병도 있었을 것만 같은데 정말 highway to hell이네요

  12. Franken 2019.09.10 07: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 조금 살아보니 운칠기삼이란 말이 왜 생겼는지 이해되네요. 아무리 머릴 굴려도 인간두뇌의 한계상 파악 못하는 것들이 수두룩한데 그렇다 해서 일안할 수도 없고 하니 이런 건 운에 맡기고 추진해야 하니 말입니다.

  13. reinhardt100 2019.09.10 1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외출장 갔다와서 처음 보네요.

    러시아 원정 당시 티푸스 종류가 하필이면 전염력 및 치사율이 가장 큰 발진티푸스였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했죠. 네만 강 도하 시점부터 단 3주만에 13만 비전투손실이 발생했는데 가장 큰 원인이 바로 티푸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환경은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이 녹색사막이라고 부를 정도로 척박했죠. 물도 엉망이고 남아있는건 그저 넓은 지평선뿐이었으니까요. 거기에 45만 병력을 밀어넣어봤자 양동이에 물 한컵 붓는 수준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네만강에서 출발할수록 땅의 넓이는 커지기만 하면서 병력 밀집도는 얇아지고 보급은 급박해지기만 하는 말 그대로 최악의 전장 중 하나이니까요

  14. 루나미아 2019.09.10 19: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위생과 질병!
    진짜 고난이네요ㅠ

  15. starlight 2019.09.11 0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참혹해서 말을 잃게 됩니다.빌뉴스에서 발견된 나폴레옹 병사들의 주검은 다큐로도 제작되어 있죠. 이들은 철수하다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은걸로 아는데요. 보르디노 전투와 모스크바 점령. 아비규환이었던 베레지나 도하까지 겪어낸 병사들이었지만, 끝내 집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비참히 숨을 거둬 안타깝습니다.

  16. 키케로 2019.09.11 1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데르강 동쪽이 왜 이렇게 가난한 걸까요? 서유럽 보다 억압적인 농노와 사회구조 때문에 그럴까요? 나시카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 nasica 2019.09.11 23: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견이랄 것은 없고, 일단 잘 모르겠습니다. 제 얕은 지식으로는, 아무래도 유럽 문명의 발상지이자 이후 르네상스가 일어난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또 괜찮은 항구가 없어서 서부 유럽과의 교류가 부족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농업만 해도 기술 발전이 있어야 번영할 수 있습니다. 가령 17세기부터 영국은 농업 혁명을 거쳤는데, 여기에는 윤작이나 신형 쟁기 같은 기술적 발전도 큰 역할을 했고 자유 시장이나 엔클로저 활동 같은 사회제도의 변화도 큰 몫을 했습니다.

      제가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일 수도 있으나, 폴란드나 루마니아 등지의 동부 유럽에서는 서유럽과의 교류 부족으로 그런 발전이 전파되지 못한 것이 점차 경제적으로 뒤지기 시작한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17. Eugen 2019.09.11 1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이전 글에 그만 싸우겠다고 한 이후로 댓글을 단 적이 없는데 누가 제 닉네임으로 위장해서 댓글을 달았습니다. 댓글조작만큼 제가 싫어한 게 없는데 화나내요. 회원제 사이트가 아니라서 그런 듯해요.

    • Eugen 2019.09.11 1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타리무 이 사람이 제 닉네임을 위조해서 댓글조작을 하는 것같네요.

    • Eugen 2019.09.11 1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분명히 저는 정치병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앞서 썻다시피 세상을 보수진보가 아니라 기득권과 도전자로 보라했었죠. 그래서 이유없이 한 쪽으로 몰아가는 댓글은 댓글조작입니다.

    • Eugen 2019.09.11 13: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금까지 폰을 이용해서 댓글을 달았기 때문에 문단나누기가 잘 되있는 댓글은 조작된 겁니다.

    • Eugen 2019.09.11 15:09  댓글주소  수정/삭제

      Nasica님 블로그에 E****라는 닉네임으로 댓글을 달았는데 그만 싸우자고 쓰고 말 싸움을 끝냈습니다.

      그런데 알***로 추정되는 제 닉네임을 사칭한 ♪♫♩♫가 갑자기 전두환을 꺼내면서 댓글조작을 하더니

      제 논리와는 아주 상반된 논리로 댓글을 이어가면서 논쟁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제가 생활이 있는 사람이라 그만 한다면 진짜 그만하는 건데 진짜 화납니다. 그게 댓글조작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냐면 그 때 저는 폰으로 댓글을 달아서 문단나누기가 잘 안되있는데 댓글조작된 건 데스크톱에서 써서 그런지 잘 나뉘어져 있고 무엇보다 전 정치병자라 아니라서(세상을 보수 진보가 아니라 기득권과 도전자로 보라고 댓글을 썻 듯이)정치를 간접적으로 언급했는데(논쟁의 주제가 아니도록 씀) 갑자기 전두환 이야기가 나오면서 상대방을 아무 이유없이 몰아가는 댓글은 100% 댓글조작된 겁니다.

      지금은 대학도서관 데스크톱으로 썻는데 보다시피 데스크톱으로 쓰면 폰으로 쓰는 것보다 문단나누기가 쉬워서 티가 납니다. 이 블로그에서 보수 정치병자면 알타리무밖에 없는데 화나내요. 드루킹같은 짓거릴하면 좋나요?

  18. Eugen 2019.09.11 1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군진 모르겠지만 댓글조작하는 놈년 천벌 받아야 됩니다.

  19. 이타카 2019.09.13 0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대단한 나폴레옹 마저도 예측을 못한건가요..ㅜㅜ 하긴 사실 이만한 규모를 이끌고 러시아로 들어간 선례가 없어서 하다하다 이정도까지일꺼라고는 생각을 못했나봅니다ㅜㅜ
    근데 우크라이나쪽이 유명한 곡창 지대라고 알고있었는데 의외로 부유하다던가 인구밀도가 높지는 않았나보네요? 우크라이나 쪽에 들어가서 배후지로 삼고 모스크바를 도모할수는 없었던 걸까요?
    물론 속전속결의 나폴레옹 스타일과는 안맞겠습니다만..

  20. ㅇㅇ 2019.09.18 2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어... 이런상태로 모스크바 딴게 신기하네요

  21. ㄷㄷㄷ 2019.10.01 10: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끔 예전에 프랑스인의 키가 유럽기준 작은 이유로 여기서 나왔던 말이 생각나더군요. 중근세때만해도 삼총사 등장인물들 마냥 다른 유럽인 기준으로 충분히 거칠고 호전적이고 전사적인 프랑스인이 달달한 와인이나 빵이나 먹는 사람처럼 이미지가 바뀐것도. 하도 전쟁에 나갈만한 사람이 죄다 전쟁 끌려나가서 이른나이에 병마에 시달리다 죽거나 전사해버리니 유전자 풀에 변형이 왔다고.(물론 웃자고 하는 소리였겠지만 ㅋㅋ;)


대체 이렇게 병참을 막대한 규모로 세심하게 준비했는데도 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보급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일까요 ?  이것도 흔히 말하는 가짜 뉴스 때문에 나폴레옹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것일까요 ?  일단 지난 편에서 보셨다시피 나폴레옹이 여태까지 해오던 것처럼 보급을 무시하다가 큰 코 다쳤다는 이야기는 억울한 누명이 맞습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준비에 있어서 무엇보다 보급에 정말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다부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필요한 보급품을 모두 다 가져가야 한다."

 

그렇다면 혹시 보급품 쌓아놓을 생각만 했지 운송 수단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한 것이 아니냐고요 ?  여러분도 생각하시는 것을 나폴레옹이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  그는 의붓아들인 외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습니다.

 

"폴란드 전쟁(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제2차 폴란드 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은 오스트리아 전쟁과는 완전히 다르다.  운송 수단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없어진다."

 

그런데 왜 망했냐고요 ?  결국은 기술의 문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단치히에 쌓아놓았다는 식량이 말을 위한 사료를 제외하고도 40만 대군이 50일간 먹을 분량이라고 했지요.  즉 2천만 명분의 식량을 비축해놓은 셈이었는데, 이게 과연 어느 정도의 분량이었을까요 ?  원래 원정 작전에 나선 병사들에게 제대로 보급이 안되는 것은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보급이 잘 된다는 영국군에게조차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1인분에 대해서 규정은 당연히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경우 원래 하루에 건빵 550g, 쌀 30g (또는 건조 채소 60g 여기서 건조 채소란 주로 콩류), 염장 고기 200g, 그리고 포도주 1/4리터 (또는 브랜디 1/6 리터)를 지급받게 되어있었습니다.  요즘 식당 기준으로 삼겹살 1인분이 200g 정도지만 실제로는 어느 누구의 배도 채우지 못해서 결국 1인분 더 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결코 많은 양은 아닙니다.  요즘 식빵 1봉지가 대략 450g이니, 바싹 말린 건빵 550g이면 그걸로 배는 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포도주까지 생각하면 병사 한명이 먹이기 위해서는 대략 하루 1kg의 물자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즉, 단치히 항구에만 2만 톤의 건빵과 밀가루, 염장 고기 및 포도주가 보관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건 미국 남북전쟁 병사들의 모습입니다만, 건빵, 그러니까 비스킷(biscuit)의 모양새나 맛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비스킷을 먹으며 웃고 있는 병사들의 얼굴 표정이 비현실적이네요.  그림 출처는 https://www.artofmanliness.com/articles/how-to-make-civil-war-era-hardtack/ 입니다.  여기 보면 비스킷을 어떻게 굽는지 레시피가 나와있습니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수송하느냐인데, 러시아에 아우토반 같은 고속도로가 포장되어 있고 강력한 디젤 엔진을 갖춘 트럭들이 즐비하다면 별 문제가 안 될 수 있었습니다만, 당연히 당시엔 그러지 못했습니다.  실은 트럭과 고속도로가 있다고 해도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냥 단순 계산을 하면 2만 톤의 식량을 한꺼번에 수송하기 위해서는 현대자동차의 3.5톤 마이티 트럭이 5,714대 필요합니다.  이 트럭의 길이는 대략 6.7m인데 앞뒤 차간 거리를 1.3m씩 유지한 채로 움직인다고 해도 이 트럭들이 주욱 한 줄로 주욱 늘어서면 맨 앞차부터 맨 뒷차까지의 거리는 거의 46km에 달합니다.  당연히 이 트럭들을 위한 디젤 연료 보급도 생각해야 하고 또 당연히 있게 마련인 고장에 대비해서 수리 차량도 끌고 가야 합니다.  현대 기술로도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더군다나 아스팔트 고속도로가 아니라 진흙구덩이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군대에게는 정말 현대 3.5톤 트럭이 있다고 해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현대 마이티 3.5톤 트럭입니다.  디젤 엔진을 장착했습니다.)

 



기술이 없다면 물량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지난 편에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대규모의 치중대를 편성하여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총 20개 치중대대의 7,848대 마차(문헌에 따라서는 26개 대대 약 9,300대)를 편성했습니다.  당시 4마리의 말이 끄는 대형 마차의 경우 대략 1.36톤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이 7~8천대의 마차가 모두 대형은 아니었지만 그냥 모두 4두 대형 마차라고 가정하고, 또 준비된 마차도 7,848대가 아니라 9,300대라고 가정하고 계산하면 이 치중대가 실어나를 수 있는 무게는 총 12,648톤에 이릅니다.  40만 대군이 50일 먹을 식량의 최소치인 2만톤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대략 필요량의 60%에 달하는 막대한 수송량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러시아가 척박한 땅이라고 해도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틀림없이 식량을 일부라도 현지 조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6월 24일에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 침공을 시작한 것에는 날씨에 대한 고려도 있었지만 러시아의 곡물 추수기가 대략 8월~10월이라는 것도 고려된 것입니다.  이 정도면 여전히 프랑스군 병사들은 배가 많이 고팠겠지만 그래도 굶주림으로 궤멸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산에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연료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현대 마이티 3.5톤 트럭의 경우 연료 탱크에 150리터의 경유가 들어가고, 연비는 (적재량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빈 차인 경우 대략 7km/리터이니, 무거운 짐을 실은데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조건이면 대략 4km/리터로 잡겠습니다.  그러니 프랑스군이 쾌속으로 하루 30km씩 진군한다고 하면 하루 8리터의 연료를 써야 합니다.  연료 탱크에 들어있는 연료만으로도 18일간 작전이 가능하고, 나폴레옹이 진격을 시작한지 83일 만에 모스크바에 입성했으니, 5번의 연료 보급를 더 받으면 됩니다. 이 5번의 보급을 위해서는 약 3560톤의 디젤유를 수송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트럭이 1,017대 더 필요합니다.  전체 트럭 5714대의 18%에 해당하는 오버헤드입니다.  생각보다 많기는 해도, 감당이 안 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디젤을 먹는 트럭 대신 풀과 곡물을 먹는 말의 경우로 계산해보면, 화석 연료의 강력함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말은 하루에 대략 9kg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9,300대의 마차에 딱 4마리씩 37,200마리의 말만 필요하다고 가정해보시지요.  (현실적으로는 예비마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의 말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의 치중대에는 4두 마차 외에도 2두 마차가 꽤 있어서 전체 마차 수는 9,336대, 말은 약 32,500마리가 있었고 예비마가 6천마리 더 있었습니다.)  이 말들은 하루에 335톤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83일 동안이라고 생각하면 27,788톤의 사료입니다.  잠깐만요.  이 마차들이 실어나를 보급품의 총량이 얼마라고 했지요 ?  예, 맞습니다.  12,648톤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들은 자신이 실어날라야 하는 무게의 2배가 훨씬 넘는 무게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이건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는 과제입니다.  게다가 기억하셔야 할 것이, 저 12,648톤의 보급품은 병사들이 필요로 하는 정량의 60%에 불과한 양입니다.  물론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식량이라는 짐은 사람이나 말이나 계속 먹어치우는 것이므로 여행을 가면 갈 수록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현대적인 디젤 엔진으로는 비교적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를 사료를 먹는 말로 해결하려 할 경우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인용했던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 Sharpe 시리즈 중의 한 장면을 읽어보시면 더욱 공감이 가실 겁니다.

 

Sharpe's Honour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3년 스페인) ---------------

하지만 이 뜻하지 않게 사령부에서 도착한 텐트는 쓸데없는 문제거리를 만들어냈다.  대대 전체의 텐트를 움직이려면 노새가 5마리 필요했다.  노새 한마리는 200 파운드의 짐을 싣고, 거기에 추가로 자기가 먹을 6일치 사료 30 파운드를 더 실을 수 있었다.  작년 여름 작전처럼 행군을 한다면 사료가 부족해지니까 추가 사료를 싣기 위해 추가의 노새가 필요했는데, 그 추가된 노새도 먹어야 하니까 그 추가된 노새가 먹을 사료를 실어나를 노새가 또 필요했다.  샤프가 6주간의 행군을 한다면 900 파운드의 추가 사료가 필요했는데, 이 사료를 실은 노새만도 4~5 마리가 필요했고, 이 노새들이 6주간 먹을 사료만도 700 파운드가 필요했으므로 추가로 4마리의 노새가 필요했다.  이 추가된 4마리 노새도 또 사료를 먹어야 했으므로, 이 웃기지만 정확한 계산을 끝마치고나니 5마리의 텐트 수송용 노새를 6주간 먹여살리기 위해 추가로 14마리의 노새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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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나고 말 났지 말 나고 사람 났냐 ?"라며 말 사료는 대폭 줄이고 사람이 먹을 식량을 더 가져가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들 하시겠지만, 그것도 정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강한 짐승입니다.  인간 병사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해도 쉽게 죽지 않고, 원래 걸어야 할 거리의 2배를 무리해서 행군해도 잘 버팁니다.  그러나 말은 먹이 부족과 과로에 견디지 못하고 픽픽 죽어 넘어집니다.  보통 전쟁에 나서는 인간은 지든 이기든 80% 이상이 살아 돌아오지만, 말은 60% 정도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인간과는 달리 말은 그냥 들판에 널린 풀을 뜯어먹으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겨울을 피해 훨씬 이른 시기인 봄에 작전을 시작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풀이 잘 자란 여름에 작전을 해야 말의 사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지요.  또 모든 기병대원에게는 말 먹이 풀을 벨 수 있도록 낫이 지급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은 원래 풀을 뜯어먹는 짐승이니 풀밭에 풀어놓으면 된다는 생각은 말이 하루종일 정말 풀만 뜯을 때나 통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강제로 걷게 하다가 길가의 풀을 약간 뜯게 하는 것은 사람으로 따지면 하루 종일 중노동 시킨 뒤에 얇은 식빵 2조각 던져주고 '사람은 원래 빵을 먹는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일입니다.  그나마 수만 마리의 말이 통과하는 길이라면, 그 길가의 풀은 순식간에 씨가 마르게 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네만 강을 건넌지 1달 만에 별다른 큰 전투도 없었는데 나폴레옹은 1만 마리의 말을 잃었습니다.  

 

(프랑스 포병대 소속의 마부 병사와 말입니다.  병사도 불쌍하지만 말은 더 불쌍했습니다.)

 



게다가 그나마 도로 사정이 괜찮은 편이라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도 치중부대는 언제나 진흙탕이나 다름 없는 도로 사정 때문에 보병 부대를 따라잡는데 항상 애를 먹었습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그리고 러시아로 이어지는 광활한 동부 유럽은 사정이 훨씬 나빴습니다.  역사가 리엔(Richard K. Riehn)에 따르면 이런 수준이었답니다.

"24일의 폭풍우는 폭우로 바뀌었다.  덕분에 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리투아니아의 통행로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진창으로 변해버렸다.  짐마차는 진창 속에 너무 깊게 빠져 바퀴 축이 땅에 닿을 정도였고, 말들은 지쳐 쓰러졌으며 병사들은 군화를 잃었다.  이렇게 퍼져버린 짐마차들로 인해 길이 막히자 병사들은 그 둘레를 빙 돌아가야 했고 보급품 마차와 포병대는 아예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날이 개어 해가 나왔는데, 진흙구덩이 속의 바퀴자국들은 햇빛에 바싹 마르자 아주 단단한 계곡으로 변해버렸다.  이런 울퉁불퉁한 도로 때문에 말들의 다리가 부러졌고 짐마차들의 바퀴가 깨졌다."

 

(영어로는 이런 진창 길에 난 바퀴 자국은 rut이라고 하던데, 한자어에 나오는 '전철을 밟는다'라는 단어의 전철(前轍)이 바로 앞서 간 마차의 바퀴 자국을 뜻하는 것이지요.  왠지 130년 뒤에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았던 어떤 오스트리아 화가 지망생 생각이 나는 한자어네요.)

 

 

이런 진흙탕 도로 위에 1.36톤의 짐을 싣는 4두 마차를 끌고 가면 결과는 뻔했습니다.  나폴레옹도 좀더 가벼운 2두 마차를 더 많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두 마차의 수송량은 4두 마차의 절반이 아니라 그보다 크게 더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두당 수송량이 떨어지면 그렇지않아도 답이 안 나오는 사료 문제는 더욱 답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나폴레옹도 이게 답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2두 마차 대신 4두 마차 위주로 마차를 준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의 말과 마차, 사료를 다 끌어모았다고 하더라도 치중부대가 나폴레옹의 배고픈 보병부대에게 건빵을 제때 전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나폴레옹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pdfs.semanticscholar.org/1d6e/96fd09126a40dca06ef01e8c9b13785e8379.pdf
https://warandsecurity.com/2013/02/11/why-napoleons-1812-russian-campaign-failed/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invasion_of_Russia
https://www.stolenhistory.org/threads/1812-french-invasion-of-russia-vs-logistics.1167/
https://www.bbc.co.uk/news/magazine-16929522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Paul Lindsay Daw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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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타카 2019.08.05 0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러시아는 말도 안되는 곳이군요ㅜㅜ 말이 작전하기 이리 어려운 동네에서 도대체 그럼 몽골군은 어떻게 러시아 정벌을 해낸 걸까요??

    • nasica 2019.08.05 07: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 ? 그 이야기는 간단하게라도 다음 편에 나올 예정입니다만... (누가 보면 짜고치는 고스톱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다 ㅋ)

    • reinhardt100 2019.08.05 0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단합니다. 나시카님께서 쓰실테니 이쯤에서 ㅋ

    • 원인 2019.08.05 1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단하죠.
      몽고군은 땅이 굳기 전에 공격해서 라스푸티챠에 당한 것이 아니라 땅이 굳은 뒤인 겨울에 공격해 와서 오히려 러시아를 빠른 속도로 파고들었죠. 추위는 몽고가 더 심하기 때문에 몽고군에게 겨울이 더 알맞은 계절이라고 할 수 있죠.

      라스푸티챠는 몽고군도 두려워 하는 무서운 지리조건이죠.
      몽고군이 헝가리 침공때에도 때마침 다뉴브강이 범람해서 늪지대가 되는 바람에
      헝가리에 결정타를 먹이지 못하고 결국 철수했죠.
      역사책에는 우구데이칸이 죽어서 철수했다고 하지만 다뉴브강 범람의 원인이 큽니다.

      만약에 다뉴브강이 범람하지 않았다면 ? 여전히 몽고군은 기동에 제약이 없었을 것이고..
      설사 우구데이칸이 죽었다고 해도 2선급 부대를 남겨놔서 헝가리를 초토화 시켰겠죠.
      마치 훌레구가 키트부카를 시켜서 맘루크를 공격하게 한 것처럼 행동했겠지만
      현실은 늪지대라는 가혹한 환경에서 더 이상 작전하는 게 무익했던 겁니다.

    • 이타카 2019.08.05 2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독자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이해하시면서 글을 쓰시는군요! 저는 지금 유럽 여행 중인데 내일 파리로 이동합니다ㅎㅎ 나시카님 애독자로서 앵발리드를 다녀오면 느낌이 유별날거 같네요 :)

  2. 고로 2019.08.05 0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 나폴레옹 지시대로 그 많은 보급물자가 진짜로 구축되었을까?? 분명 허수가 많았을거라 본다.. 그리고 러시아 땅이 너무 넓은게 문제지.. 거리만 가까우면 어케든 해결이 되는데..

  3. 2/28일 입대 2019.08.05 1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광복군의 최후의 비밀병기 무다구치 렌야 장군이 떠오르는 이유는 왜일까요ㅎㅎㅎ

  4. 원인 2019.08.05 1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는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다부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 이 대목에 나와 있듯이 나폴레옹은 작전에 있어서 다부와 상담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러시아 원정 건에 있어서도 다부와 함께 할 때
    보급의 중요성은 동의했지만 다부의 건의는 받아들이지 않았죠.

    다부의 작전은 발틱해의 해상운송을 통해서 리보니아에 거점을 만들고
    그 리보니아로부터 상트뻬쩨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공격하는 것인데,
    나폴레옹이 다부의 건의를 무시하고 바로 육로직공을 선택한 것이
    러시아 원정의 패배원인 중 하나입니다.

    • 원인 2019.08.05 1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마도 정서의 차이가 크겠죠.
      다부는 소심하고 걱정이 많아서 사소한 인명,물자 손실에도 민감한 성격인 반면에
      나폴레옹은 대담하고 자신만만해서 상당한 인명, 물자 손실을 아랑곳하지 않았죠.
      그러다 보니 러시아 원정에서 "보급선상의 손실"을 "머리속에서 체감하는 가상적인 고통의 크기"가 달랐을 겁니다.

      다부의 가상체감으로는 사소한 인명,물자손실도 심각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나폴레옹의 가상체감으로는 상당한 인명,물자손실도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겠죠
      전쟁이라는 게 생각외로 수행하는 주체의 정서적인 차이에 따라서도 많이 갈리거든요

    • 빅터 2019.08.05 22:38  댓글주소  수정/삭제

      해상은 영국이 잡고 있지 않나요?

    • 카를대공 2019.08.07 14: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로를 통한 보급,거점을 만든다는 생각은 과연 탁월한 전략안이네요.
      그런데 윗분들 말씀처럼 영국이 해상은 꽉 잡고 있는데 보급이 가능 했을까요?
      2차 대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롬멜한테 물자 대주려다 수많은 배들이 가라앉았었죠.

    • 원인 2019.08.07 15: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빅터, 알타리무,카를대공

      리보니아 해상운송은 복잡한 발틱해 연안을 따라서 항해하는 것이지 넓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가 아닙니다. 그걸 먼저 염두에 두셔야죠. 연안항해를 함으로서 영국해군의 능숙한 기동능력이 상대적으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한적으로만 움직이는 게 전제조건입니다.

      또한 이 지역은 30년 전쟁때부터 이미 무수한 스웨덴 해군력의 침공으로 그 방비에 이골이 난 지역이고 해안지역에는 요새와 해안포로 무장한 도시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죠. 슈트랄준트 같은 것은 단지 그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환경에서 최대한 해안에 바짝 붙어서 요새와 해안포의 엄호를 받으면서 연안항해를 할 경우에 독일,폴란드 지역에서는 영국해군이라도 그렇게 쉽게 공격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문제가 되는 발틱해 동쪽의 리보니아쪽은 경제력이 약하고 해안 방비가 잘 안 된 지역이므로 이 쪽이 약점이긴 한데, 그래서 제가 썼듯이 해안항해 + 해안육로행군을 병행해야 할 겁니다. 아마도 리투아니아 가까운 지역부터는 육상보급의 비중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지만 러시아 내륙을 가르지르는 무모한 경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안전하죠.

  5. 원인 2019.08.05 1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애초에 러시아인들이 몽고인들을 몰아낼 때 자주 사용한 수법이 바로
    수로를 이용한 우회공격이었음을 생각하면 러시아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은 바로 강을 따라서 기동하는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죠.
    공격부대뿐 아니라 보급부대도 강을 따라서 기동시켜야 되는 거죠.
    러시아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생각외로 강이 크고 숫자도 많아서 활용의 여지가 크죠.
    러시아인들이 몽고군을 수로기동으로 후방기습을 자주한 것도 이런 지리적인 유리함 때문입니다.

    수로를 사용한 공격, 수로를 사용한 보급을 1차적으로 고려했어야
    러시아 원정이 성공할 수 있는 겁니다.
    똑같은 러시아 땅에서 러시아인이 침공군을 물리치는 거나 침공군이 러시아인들을 물리치는 거나 원리는 같은 법인데,
    왜 러시아인들이 몽고군을 몰아낼 때 사용한 수단인 수로공격, 수로보급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았던 것일까 싶네요.

  6. 원인 2019.08.05 1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로를 이용한 우회공격으로 유명한 것이 바로 로마제국VS게르만족이죠.
    토이토부르크에서 게르만족의 기습으로 개박살난 로마제국이 보복공격으로
    처음에 육로직공을 선택했으나 늪지대로 변한 게르마니아에서 다시 박살났죠.
    그 다음에는 라인강을 따라 수로공격을 했고 결국 성공했습니다.

    라인강 깊숙히 들어올 때까지 게르만족이 로마군을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급로에서 손실이 전혀 없었고 아울러 기습의 효과까지 누릴 수 있었죠.
    서유럽에서 조차도 이럴진데, 더욱 광대하고 습한 동유럽에서는 당연히 수로를
    위주로 작전을 짜는 게 맞는데, 로마 매니아인 나폴레용이 왜 이건 참고하지 않았을까?

    나폴레옹의 주요 정책, 군략은 로마역사에서 가져온 것이 많은데, 왜 이 대목은 참고하지 않았을까 ? 의문이 듭니다.

  7. 수비니우스 2019.08.05 1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에 사극 엑스트라 알바 했을때 말이 길바닥에 똥을 싸대는걸 자주 봤는데 엄청 많이 싸더군요 ㄷㄷ 그만큼 많이 먹었다는 얘기겠죠

  8. 2019.08.05 14: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삑! 정답!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혹시 아닙니까? 물론 해군을 맨땅에서 건설하는 것도 방법이고, 기술 개발도 방법이고, 길을 닦아도 해결은 가능하고, 방법 자체야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능성, 효율성, 기대 편익, 기대 손실을 고려할 때 뭘 어떻게 해도 그 '한정된 자원'으로 다른 무언가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원래 체면값, 자존심값이라는 게 생각보다 비싸잖습니까? 프랑스 상공인의 이익을 조금 덜 지켜도 나폴레옹의 권좌 자체는 괜찮을 거라고 봅니다. 아마 위신이 떨어지고 참 견디기 힘들 수 있고 이런저런 머리 아픈 문제가 생기겠지요. 하지만 단언컨대 '묻지 마 러시아 원정'보다는 덜 나쁜 선택이었을 거라고 굳게 확신합니다.

    • nasica 2019.08.05 22: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 개돼지조무사 2019.08.06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고, 장구벌레님, nasica님이 아드님한테도 주입한다던 하이쿠를 여기서 들으면 민망하시겠습니다, 그렇게 딱잘라 돌려드리면 너무 뼈아프시지 않겠어요? :-)

  9. 2019.08.05 14: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손자병법을 보면,

    "적이 승리하지 못할 상황은 내게 있다. 내가 승리할 상황은 적에게 있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지지 않을 상황은 직접 만들기 쉬워도, 나폴레옹이 이길 가능성은 실수든 근본적 한계든 다른 무엇이든, 꼭 자의가 아니더라도 러시아 쪽에서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갈량도 북벌의 조건 중 하나를 대강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방 유목민의 침략이든 내분이든 다른 무엇이든)위나라의 상황이 어지러울 때 치고 올라간다."

    아쉽게도 완벽한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지요. 그럭저럭 괜찮았던 기회도 안타깝게 날려 버렸고요. 하지만 정답이 안 보인다고 해서 일부러 오답을 택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폴레옹도 러시아가 기회를 만들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안 만들어 주면 그냥 원정 자체를 때려치워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10. reinhardt100 2019.08.05 2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로를 이용하는건 사실 무리였습니다.

    우선, 수로의 연속성이 없다는 겁니다. 네만강, 드네프르강, 돈강, 볼가강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거든요. 하천 구간까지는 하천용 선박을 운용하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그 사이가 문제였죠. 18세기 내내 러시아도 인구가 증가하면서 대규모 경작지 확대가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고대와 키예프 루시 시대만 해도 광활하게 펼쳐졌던 늪지와 습지들이 상당부분 개간되어 사라졌죠.

    선박도 문제입니다. 45만 대군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최소 수백척의 상선단 및 그만한 수의 하천용 선박이 필요한데 프랑스군은 그걸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18세기 중엽에 영국과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해 톤수로 전열함급 수준의 상선이 수백척 이상 날아가버리면서 해운력의 기초까지 완벽히 박살난게 이 시대까지 복구가 안 되었습니다. 또한 스웨덴이나 덴마크가 적극적으로 프랑스에 가담했다고 해도 양국의 해운력은 도저히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독소전쟁 당시, 독일 국방군은 24개 대대의 철도 대대를 운용했지만 보급은 항상 부족했습니다. 철도 설비도 심각했지만 더 큰 문제는 보급품 집적지로부터 전선까진 대체적으로 6두 마차로 수송했는데 이게 엄청나게 문제였죠. 소련 파르티잔도 문제였지만 속도가 너무 느렸거든요.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143개 사단에 배속된 수송용 마필이 총 60만두였는데 작전 개시 2달만에 50%이상의 손실이 발생해서 태풍작전과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시간이 안 맞는 사태가 벌어졌죠.

    • 원인 2019.08.05 2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육로운송보다는 수로 운송이 맞는 선택이죠. 러시아 침공에 필요한 건 볼가강 하나뿐이니까 나머지 수로의 연속성은 필요 없습니다. 주요목표는 리보니아와 상트뻬쩨르부르크, 모스크바이지 그 외의 내륙지역이 아니니까요.

      설령 육로로 대군을 들여 보내고 육로보급에 어느정도 의존한다 해도 수로보급은 반드시 해 놔야 원정군의 편의를 보장할 수 있죠.
      2차대전때 미군이 200만대군을 상륙시킨 뒤에 노르망디 보급선에 의존해서 개고생하다가 앤트워프 항구를 확보해서 원정군의 부담을 크게 덜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물론 프랑스군이 2차대전 미군처럼 해운력을 가진 건 아니라 해도 마필운송에 의존하다가 차례차례 죽어가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겁니다. (다부는 원정군 규모 45만은 너무 크고 20만 정도가 적당하다고 봄. )

      스웨덴이 영국과 결탁해서 영국해군을 발틱해로 들여보낼 경우에 영국해군의 위협도 있을 수 있으니 해상운송, 해군력이동은 당연히 연안항해를 해야겠죠. 넬슨이 아부키르 만에서 연안방어태세에 있던 프랑스해군을 격파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니까요. 또한 병력수송은 선박승선과 해안선 행군 이동을 병행합니다.

      단순무식하게 공세만 따져 봤을 때.. 우선 리보니아를 확실하게 장악하는 것에 전력을 집중하고 나서...
      우선 뻬쩨르 부르크는 리보니아로부터 바로 바다에서 접근 가능합니다. 물론 요새화 되어 있으니까 바로 도시에 상륙할 수는 없고 그 옆에 상륙해서 일단 교두보를 구축해서 유리한 위치를 장악한 뒤에 해안선을 따라 육로로 보낸 전력을 증원해서 공략해야 되겠죠.
      해안선을 따라서 육로로 접근하는 것도 허허벌판에 가까운 내륙경로에 비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전합니다. 스웨덴-폴란드 전쟁때도 스웨덴 군이 이런 식으로 습한 해안땅으로 병력을 이동시켜서 폴란드군의 기습을 피했죠. ( 물론 괜히 폴란드군의 도발에 넘어가서 선빵날리다가 결국 털렸지만 )
      그 다음 모스크바가 문제인데,
      발틱-볼가 수로가 나폴레옹 침공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어서 뻬쩨르부르크쪽에서 모스크바 북쪽으로 흐르는 볼가로 진입할 수 있죠. 물론 이 때에도 강을 따라서 하천선박운송과 강기슭을 따라서 행군하기를 병행합니다. 강기슭의 습한 토질로 코사크 기병의 기습에 대한 안전함과 유사시 식량, 목초등의 확보에도 황량한 내륙지역 행군과는 비교가 안 되게 유리하죠
      물론 볼가강으로 들어가는 수로를 토목공사로 파괴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모스크바 방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죠. (이미 만든 운하를 매립해 봐야 주민들 동원해서 다시 파내면 됨 )

      해운선박은 예전 한자동맹 도시가 주류였던 발틱해 연안 도시에서 징발해서 씁니다. 선박 손실율은 그 당시 마비저( 말에 감염되는 박테리아 질명)으로 국경선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 마필손실에 비할 바가 아니죠.
      또한 선박이 부족하다 해도 마필수송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죠. 현대기술로도 열차수송과 선박수송이 말도 안 되게 차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원정이라는 본래 전략 목표에 좀 더 입각해서 고찰하자면...
      리보니아를 해상보급으로 연결하는 것은 단순히 원정군의 최초 공세만을 위한 게 아닙니다.

      로마군단이 원정에서 대부분 성공한 근본 원인이 바로 최전선 바로 뒤에 근거지 구축을 먼저 하고 최초 공세가 실패한 뒤에도 궤멸적인 타격을 받지 않고 재차 공세를 가하거나 퇴각할 경우에도 손실을 최소화 시키고 퇴각했기 때문이죠.
      하물며 리보니아는 로마군 보급진지처럼 허허벌판도 아니고 수백년 동안 독일과 덴마크, 스웨덴의 식민통치로 개발이 된 곳이죠.
      모스크바에서 철퇴하더라도 리보니아에 근거지를 구축해 놨다면 정신없이 쫓기다가 동사,병사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스웨덴이 북방전쟁에서 개털린 이유도 칼 12세가 리보니아에서 재보급하자는 신하의 말을 무시하고 육로직공을 했기 때문이죠.
      실제로 스웨덴이 북방전쟁으로 개털리기 전까지 계속적으로 유럽대륙에 힘을 투사하고 러시아를 통제하는 데 성공한 건 바로 리보니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는 또한 동아시아에서 만주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요동반도를 갖고있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위상입니다.

      물론 나폴레옹의 침공이 무모한 건 맞지만 일단 원정을 성공시키기로 결심했다면 B플랜, C플랜까지도 철저히 준비하는 게 맞죠. 그리고 B플랜의 1순위는 수로운송과 리보니아 확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러시아원정의 진짜 의미가 러시아를 굴복시키지 못했다는 사실 보다는 프랑스제국의 전쟁수행역량 그 자체에 치명타를 주어 결국 대불동맹의 압박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렉산드르1세를 잡지 못했을 때 손실을 최소화 시키고 안전하게 퇴각하는 것이 극히 중요했다는 겁니다.

  11. Spitfire 2019.08.05 2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병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역사의 if가 가능했을까 기대했는데, 말 사료 이야기 나오는 순간 ‘아..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드네요. 돌아보니 표트르 대제의 발트해 진출과 서구화는 어찌보면 유럽의 역사를 바꾸는 업적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정말 대제로 불릴만한거 같아요.

  12. apils 2019.08.07 02: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이 먹는 거 무시하면 안되지요. 예전에 동호회 분들이 말 몰고 다니다 오셨는데, 말 세마리가 수백평 잔디밭을 30분 안에 아작을 내놓더군요. 다행히 뿌리까지 파먹지는 않았지만 왜 말먹이 건초가 필요한 지 생생히 보고 느꼈습니다.

  13. 카를대공 2019.08.07 14: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 건초가 부족했다 <-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 자주 언급되는 구절이긴한데 이렇게 자세하게 써놓으시니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가 새삼 실감이 되네요.
    이래서 화석연료가 짱입니다.

  14. 롬. 2019.08.07 18: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흔히 그냥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해서 몰락했다 책 한줄로만 알았고 우연히 본 화학책에서 단추 소재 때문에 금방 떨어져서 외투를 여밀 수가 없었다 라고만 알았는데.. 정말 철저하게 준비했었군요.

    인터넷인가 다큐멘터리에서 줏어듣기로 러시아원정을 하느냐 마냐도 몇달동안 심각하게 내린 번복을 하며 고민 끝에 결정했다고 들었었는데.. 아 준비과정이 생각보다 굉장히 치밀했고 그럼에도 불구, 그 치밀한 준비로도 안된거였네요. 현대의 트럭 기술로도 아슬아슬한 거였다니... 어마어마했네요...

  15. 롬. 2019.08.07 18: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머니께서 어렸을 때 소에게 먹이를 주셨기에 소도 말이랑 먹는량 비슷하겠지 싶어서 여쭈어봤더니

    소가 풀을 먹는다지만 그건 소를 풀 많은 곳에 아침에 등교하며 풀어두고 나중에 하교하며 찾는등 정말 소가 일도 안하고 하루종일 제발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풀.만. 뜯었을 때나 그렇다 하시더군요...

    또 농번기엔 일을 많이 시키니까 하루종일 풀 뜯도록 놔둘 수가 없어서 여물을 먹이는데 이것도 그냥 지푸라기 막 주는게 아니라, 현대 군인들이 고칼로리 음식으로 식단을 채우듯 콩잎이나 호박잎 등등

    소취향에 맞는+소가 먹고 탈 안나는 종류의 + 그러면서 내가 구하기 쉬운 종류의 + 고칼로리의 풀을 섞어야 하는데다, 소화 되기 쉽게 끓여야 하는등 (그냥 풀이면 막 다먹는게 아니라 의외로 소도 취향이 있다 하시던...하긴 개•고양이도 사료 취향이 있는데 소라고 없을까 싶습니다...)

    말 그대로 고칼로리+소화가 잘되는 쑨 죽은 말그대로 요리 과정이더군요...

    하루종일 노동하는 말이 먹을 고칼로리의 풀을 자연에서 그것도 몇 천 마리가 동시에, 오늘도 먹고 내일도 먹고 모레도 먹을 양을 구하기란 당연히 불가능이고... 싸들고 간다친들 어마어마하겠네요

    한 마리가 말려서 가볍디 가벼운 그 풀을 킬로그램단위로 먹던데.... 무게도 무게지만 가벼운 풀을 킬로, 톤 단위로 모아야 하니 그 부피가 정말...

  16. 샤르빌 2019.08.08 14: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대 보급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하게 다수의 사람들한테 나눠줄 물품이나 먹을것 등등 계획하고 계산하는데도 환장할 정도로 머리아프더라고요.. 변수도 워낙 많아 아주그냥 난리 납니다..

  17. ㅁㄴㅁㄴ 2019.08.10 2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상보급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나 크림반도 깨부시는거 외엔 러시아원정은 당시 기술론 불가능의 영역이군요

  18. PANDA 2019.08.29 1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에 차관을 빌려줘서 포장도로를 깔수 있도록 해 주면 됩니다


어떻게 보면 온 유럽이 휩쓸리게 되는 1812년 러시아 침공이라는 난리통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를 이간질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벌어지게 되자 오스트리아는 한발짝 물러나는 얌체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당연했는데,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러시아를 두들겨 패는 동안 떨어지는 콩고물, 즉 발칸 반도 분할에서 좀더 많은 땅을 땅을 주워먹으려 했을 뿐 뭔가 숭고하고 원대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것은 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주사위 놀음이라서, 제아무리 나폴레옹이라고 해도 프랑스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체는 애초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측에 가담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의 사위라는 인척 관계로 맺어진 관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초에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를 이간질한 실제 이유, 즉 영토 문제도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좋든싫든 프랑스측에 가담하도록 압박했습니다.  당장 흑해로 흘러가는 도나우강 하류 지역, 그러니까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 중에서 오스트리아가 자기 것이라고 침을 발라놓았던 몰도바-루마니아 방면으로 러시아군이 진격해오자 오스트리아의 입장은 무척 초조해졌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을 위해 편성하는 야전군의 규모가 무려 40만이 넘는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자, 그 정도라면 프랑스군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보고 오스트리아도 1812년 3월 나폴레옹 진영에 합류합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끝까지 얌체처럼 그야말로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정도인 3만의 병력을 제공하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했습니다.  

스웨덴도 끝까지 어느 쪽에 붙을까 저울질을 하며 눈치를 보던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어찌 보면 북구의 스웨덴은 프랑스의 진격로와는 발트해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서 지리상으로 크게 중요하지 않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꽤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당장 러시아령 핀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언제든지 당장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나라였거든요.  게다가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해협, 즉 외레순(Öresund, 영어로는 The Sound) 해협이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다는 점도 중요했습니다.  이미 프랑스 측에 붙은 덴마크의 헬싱고르(Helsingor) 요새와 스웨덴의 헬싱보리(Helsingborg) 요새 사이의 해협은 특히 좁았는데, 거리가 10km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해안포로 사용되던 36파운드 대포의 최대 사거리가 3.7km 정도였고, 유효 사거리는 고작 600~700m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두 요새 사이를 통과하는 영국 수송선이나 전열함이 크게 손상을 입을 염려는 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당시 범선들의 열악한 항행 능력을 생각하면, 특히 스웨덴 군함들이 이 해협을 가로막기라도 한다면 영국 선박들로서는 상당히 부담을 느낄 만한 일이었습니다.  

 

(덴마크 측의 헬싱보르그와 스웨덴 측의 헬싱보리 위치입니다.   저 해협만 틀어막으면 발트해는 사실상 호수가 됩니다.  코펜하겐이 위치한 덴마크의 큰 섬인 젤란트의 반대쪽 해협도 물론 항행은 가능합니다만, 그 쪽은 얕은 바다 등이 많아서 훨씬 항행에 불리하다고 하네요.)

 

(이건 함포로 사용되는 36 파운더 포이긴 합니다만, 해안 요새에서도 주로 이 36 파운드 포를 해안포로 썼습니다.  해안 요새에서는 좀 높은 위치인 성벽 위에 이런 대포를 놓았기 때문에 해수면에 위치한 전열함보다는 조금 더 멀리 포탄을 날려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1812년을 앞두고 스웨덴의 인기는 상종가를 치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노르웨이를 주겠다며 스웨덴을 유혹했고, 나폴레옹은 핀란드를 주겠다며 호객행위를 했습니다.  우스운 점은 이 모든 땅들이 결국 남의 땅이라는 점이었지요.  당시 노르웨이는 프랑스의 굳건한 동맹국인 덴마크의 영토였고, 핀란드는 바로 몇 년 전에 알렉산드르가 스웨덴으로부터 빼앗은 영토였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르나 나폴레옹이나 자기 것은 내주기 싫고 상대편의 땅을 내주겠다는 공수표를 남발한 셈이었으므로, 스웨덴은 국제 외교전에서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무척 냉철하게 판단을 해야 했습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스웨덴은 딱 적임자를 실권자로 두는 행운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스웨덴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국왕 카알 13세(Karl XIII)도 아니요 뿌리 깊은 스웨덴의 귀족 세력 연합체인 의회도 아닌, 바로 나폴레옹의 껄끄러운 친척이자 전직 프랑스군 원수, 현직 스웨덴 왕세자였던 베르나도트(Bernadotte)였습니다.  

 

 

(오늘날 스웨덴 왕가의 시조이신 베르나도트, 아니 카알 15세 전하이십니다.)

 



애초에 스웨덴이 프랑스 장군이자 나폴레옹의 친척인 베르나도트를 굳이 모셔와서 왕세자로 삼은 것은 러시아에게 상실한 옛 영토 핀란드를 나폴레옹의 위세를 등에 업고 되찾아보려는 스웨덴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도 그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웨덴 사람들만 몰랐을 뿐, 베르나도트는 애초에 나폴레옹과 좋은 관계가 아니었고, 그래서인지 아니면 정말 그의 냉철한 두뇌로 주변 정세를 정확히 분석 파악해서인지 스웨덴의 살 길은 러시아와 넓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쪽 핀란드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서쪽 노르웨이를 손에 넣는 것이라고 이미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판단이 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측에 붙느냐 러시아 측에 붙느냐는 고민은 베르나도트로서도 다시 한번 전체 상황을 되짚어 보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때 어느 쪽에 붙느냐 하는 것이 국가 전체의 흥망성쇠를 판가름지을 도박이었으니까요.  그러는 사이에 프랑스도 러시아도 애간장이 탔고, 베르나도트는 이렇게 인기가 급상승한 스웨덴의 위치를 한참 동안이나 즐겼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가 너무 질질 끌어서였는지 아니면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스웨덴의 협조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아서였는지, 베르나도트로 하여금 별다른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엘베(Elbe) 강 일대의 프랑스 동맹군을 지휘하던 다부(Davout)가 러시아 침공을 위한 사전 작전의 일환으로, 1812년 1월 발트해 남쪽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Pomerania)를 침공해버린 것입니다.  애초에 스웨덴은 이 지역을 방어할 능력도 의지도 전혀 없었으므로 프랑스군은 이 지역을 무혈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베르나도트는 운명이라는 듯이 러시아와 동맹을 맺습니다.  

이런 외교전에서 막차를 탄 것은 오스만 투르크였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로에서 멀리 떨어진, 겉으로 봐서는 직접 개입할 여지가 없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야말로 프랑스와 연합할 이유가 충분한 나라였고 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시까지 러시아와 계속 전쟁을 벌어고 있는 교전 국가였거든요.  나폴레옹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나 아일라우 전투를 치를 때에도 러시아군 주력 부대의 상당수는 저 남쪽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장에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비록 지리적 위치 때문에 프랑스군과 합류하여 공동 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지만, 러시아의 남쪽 국경의 전선을 계속 유지하기만 해도 나폴레옹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투르크군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더라도 러시아로서는 그 넓은 전선에 적어도 수 만의 병력을 유지시키고 있어야 했으니까요.  러시아로서는 나폴레옹과의 일전을 앞두고 어떻게 해서든 오스만 투르크와의 교전 상태를 종식시켜야 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라는 뻘짓으로 한동안 프랑스와의 관계가 틀어지긴 했지만, 전통적으로 프랑스편이었고 또 나폴레옹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오스만 투르크는 마지막까지 어느 쪽에 붙는 것이 유리한가를 놓고 고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동안 오스만 투르크가 잃었던 많은 것들, 즉 이집트와 발칸 반도 등의 영토를 모두 회복시켜주겠다며 10만의 군대를 동원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망해가던 오스만 투르크에게 10만군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나폴레옹이 얼마나 허세가 가득한 인간인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에게는 나폴레옹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약속보다는 당장 코 앞에서 대포를 들이대고 협박을 해대는 러시아와 영국이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영국 지중해 함대는 러시아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이스탄불을 폭격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었고, 도나우 강 하류 지역에 집결한 러시아군은 몰도바를 집어삼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1812년 5월, 오스만 투르크는 오늘날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국경인 프루트(Prut) 강을 경계로 하는 평화 협정을 러시아와 맺습니다.  이로써 러시아는 오랫동안 오스만 투르크와의 남쪽 국경에 묶여있던 대군을 북쪽으로 불러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루트 강의 위치입니다.  오늘날 루마니아와 몰도바, 우크라이나 사이를 흐르는 강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외교전에서는 나폴레옹의 완승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온 유럽이 나폴레옹 편에 선 것에 비해, 러시아 편에서 함께 싸워줄 국가는 유럽 전체에서 영국과 스웨덴 정도 밖에 없었는데, 사실 스웨덴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나라였고 영국도 유럽의 반대편인 스페인에서의 공세로도 숨을 헐떡이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 침공을 결코 쉽게 보지 않았습니다.  1807년 폴란드 지역에서의 작전을 통해 광활하고 삭막한 동구의 평원을 침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무나 뼈저리게 잘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보급 문제에 있어 기존에 없던 규모의 준비를 시작합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Prut
https://en.wikipedia.org/wiki/36-pounder_long_gu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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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후니74 2019.07.22 06: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온 러시아 침공에 있어 시대상을 잘 알게 되었네요.

  2. 유애경 2019.07.22 06: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도 프랑스도 남의땅을 가지고 스웨덴에게 호객행위...표현이 참 재미있어서 웃고 and 잘보고 갑니다.

  3. 메뚝 2019.07.22 0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한주 쉬었다 오셔서 더 반갑네요~

  4. 2/28일 입대 2019.07.22 1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파륜이 보급 준비라니! 결말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읽을수록 빠져드는 느낌이네요♡

  5. LOL 2019.07.22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단 잘 읽었습니다, 한가지 최근에 있었던 흥미로운 사건에 관련하여 이렇게 서양사에 해박하신 나시카님의 고견을 여쭙고자 합니다.

    베르나도트가 다시 등장해서 드리는 질문으로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인들의 핀란드 수복숙원이 민족의 잘못된 욕망이라고 평가했다고 여기서 두번째로 언급하셨습니다. 저는 上편 댓글서 이런 내용을 봤는데요.

    한국의 상황에서 자기보다 손도 안닿을만큼 강한 전범국의 역사적 사죄를 받아내려는 한국인의 의지는 여기 치이고 저기치이던 허섭스레기 스웨덴인들의 숙원과 같다고 블로그 주인장님도 여기시는지, 그리고 이 문제에서 베르나도트와 동일한 시각을 가지시는지 많이 궁금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스웨덴왕이 된 프랑스인 단원을 연재할 때는 베르나도트의 스웨덴인의 대러시아 역사숙원을 위험한 욕망이란 평가와 핀란드를 포기해야 한다는 시각을 정확하다고 묘사하셨구요

    또한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단원을 연재할땐 나폴레옹의 전략상 베이직 요소를 나시카님은 다음같이 적으셨던걸 기억합니다, 이건 제가 드리고자 싶은 질문인데 당시 그것을 나시카님은 이길 수 없는 승리를 쥐는 영웅적 행위보다 이길 수 있는 상황에만 싸워서 백전백승을 얻어낸다는 내용으로 설명을 하셨습니다.

    이길 수 있는 싸움만 싸운다. 최근에 있었던 재밌는 일이란게 이겁니다 바로

    최근에 sbs 방송인 원일희가 나라 구한게 의병이 아니다, 정권차원에서 이순신, 죽창가, 의병모집 운운하면서 선동술을 일삼는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해서 이겨야 한다고 말을 하고 결국 짤렸습니다.

    15일 오후 방송된 프로그램 마지막 부분에 ‘[원일희의 직설] 반일 감정 자극이 해법은 아닙니다’라는 클로징멘트를 했다.
    원 앵커는 “1910년 국채보상운동, 1997년 IMF 금 모으기 운동 기억하자, 이순신 장군은 단 12척의 배로 나라를 구했다, 의병 일으킬 사안이다, 동학 농민운동 때 ‘죽창가’ 불렀다. 대통령, 민정수석, 안보차장, 여당의원, 같은 맥락의 발언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원 앵커는 “청와대와 여당의 방향이 엿보인다”며 “싸움, 필요하다면 해야죠”라고 했다. 이어 그는 “그러나 전쟁은 이길 전쟁만 해야 한다”며 “질 싸움에 끌려 들어가는 거, 재앙”

    출처 :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

    ㄴ 이런 발언인데 질싸움은 안해야 한다, 이길 싸움만 해야한다, 이 말대로라면 나폴레옹의 기본강령과 원일희의 발언은 일치합니다. 원일희가 잘못된 말을 한 걸까요, 어떻게 보세요?

    • nasica 2019.07.23 08: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에도 한번 적은 바가 있었는데... 저는 제 아이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싸움이란 일단 안 하는게 좋지만, 꼭 싸워야 할 때가 있다. 그건 우리가 정의로운 편일 때도 아니고, 이길 수 있는 때도 아니고, 지든 이기든 싸워서 얻을 것이 있을 때이다."

      답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 고로 2019.07.23 08:42  댓글주소  수정/삭제

      흠 일본이 대한제국 잡아먹고 대동아공영권 외칠때도 nasica님과 동일한 논리 펼쳤을듯요..

    • LOL 2019.07.23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nasica/의문형 종결을 하신걸 보면 알고하신 응답일거 같습니다만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응답을 받아서 감사한것하곤 별개로 말씀대로 답변으로 만족할 응답은 아닙니다,

      본질문 2가지는 구체적인데 해주신 응답은 그냥 형이상학적인 나시카님의 신좁니다, 추상적이고. 이렇게 말씀들 드리는걸 무례하다고 여기지는 말아주십시오, 이렇게 딱딱하게 표현을 하는건 응답이 의문만 더 남겨서 그렇습니다 --

      나시카님같이 준프로께서 이렇게 형이하적인 질문에 형이상으로 시같이 대답을 하셨단건 추상적이어도 이 질문에 답변으로 삼기에 아귀가 딱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하셨다든가. 추상적인 심리를 생각으로 형태화하고 언어로 한번 더 구체화하면 심리, 그러니까 나시카님이 지니신 욕망하고 그걸 답변용으로 치환한 언어사이에 인지부조화가 발생, 그게 양방간 쉽게 융합이 안된단 걸로 분석하면 제 망상이겠죠?

      이 두 개 경우수중 해당되는게 전자라면 의문만 더 남긴다 드린 말처럼 새 의문이 생깁니다,
      대일분쟁을 시속의 싸움으로 보신다면 대일분쟁이 한국에 -를 상쇄해서 순이익으로 +를 남기는가, 그 +는 계측가능하고 실체적인가 아니면 표현이나 인식은 해도 실체가 없거나 아예 형체 이전에 고정된 형태가 없는 무언가인가(ex:국민감정),
      거기다가 굳이 ‘정의로운 편이 아닐 때도’라는 전제가 있다면, 그리고 적합타 여기셔서 이 시로 답변을 삼으셨다면 나시카님의 생각 속 이 문제에서 한국은 악인가, 적어도 불의하단걸 의미하나

      나폴레옹사상 베르나도트의 판단이 한국 사례에 적용이 가능할까, 동시에 나폴레옹의 강령이 적절하다면 원일희의 발언은 마찬가지로 적절한가. 의사표현을 예 아니오로 해도 될 내용이거든요. 그런데 약간 당혹스럽게 아드님까지 거론하심서 우리가 얻는게 있다면 이기지 못해도 우리가 악당이어도 싸워야한단 말씀은 들으니까 이걸 읽은 기억이 날만큼 멋지긴 합니다만 화법이 우주적인데요

    • LOL 2019.07.23 2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치.시사성이 내포된 질문을 게시한데 이유가 있다면 하필 스웨덴왕 베르나도트가 연관이 돼있고, 그리고 앵커 원일희 사건도 연상시키는 뭔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SBS 관계 방송인이라고 부러 관계라는 형용사를 넣은건 원일희가 SBS가 아니라 SBS랑 분리경영되는 CNBC, 다시말해서 본사차원 지상파 네임드도 아니라 어느정도 쩌라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프로이센 전쟁에 불을 댕기는데 일조한 사건이 있었잖습니까, 인쇄공장 사장을 나폴레옹이 친히 잡아다 죽여서 프로이센의 국민감정을 건드린 그 사건 말씀입니다

      원일희 하차사건은 또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원일희 하차건을 꺼낸 이유기도 합니다. 경제정책실장 김수현이 뻘소릴 뻥뻥하다 3진 아웃으로 잘리고 공정위에서 그 자리로 대신 간 김상조도 대통령이랑 초근거리 관계도상에 있으면서 섣부른 소리 하다가 총리한테 입조심하라고 경고받곤 깨갱한게 이번 달 일입니다.

      그리고 민정수석이고 차기 법무장관 내정자 아니면 킹크랩으로 도장찍힌 김경수 대신 총선나갈 조국, 대통령의 총애를 쓸어가는 조국이 저런 의병, 죽창, 이적 이런 막가는 말들을 쏟아내는데, 원일희가 디스한 조국이 저렇게 파격으로는 몇갑절이나 되는 개인플레이를 하고도 당정청의 일치단결한 지원을 받는단건 이건 조국이 조국이 아니라 대통령 문재인을 대리해서 하는 발언들이란 거잖아요? 그렇죠?

      원일희는 방송인 나부랭이가 대통령이 하달하는 지령에 개기고 짤린 겁니다, 이런걸로 보면 트럼프가 저 발광을 하는데도 언로가 안막히는 미국은 확실히 민주주의 최첨단 국가입니다.

      [원일희 / 앵커 : 오늘 제가 직설의 마이크를 내려놓습니다. 일본의 경제보복, 잘못됐고 철회돼야 한다, 그러나 대응은 외교 협상이어야 한다. 문맥, 취지, 의도, 명확했음에도 의병 비하했다, 친일파다, 익명의 청와대 고위관계자 멘트까지 동원된 친일 공세는 집요했고, 어둠속 칼날과 손은 보이질 않습니다. 다르면 너 빨갱이구나, 프레임 씌우던 시절처럼 다르면 넌 친일파다, 언론에 씌운 굴레입니다.]

      ㄴ 이게 당사자 클로징 멘튼데
      청와대가 동원된 압박까지 있었다고 그대로 믿자면 왕정시대 기준 베르나도트가 말년에 언론탄압을 자행하고 나폴레옹이 인쇄소 사장을 납치해 죽인거랑 차원이 비슷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저게 저럴 급의 멘튼가, 고민해 볼 수 있지 않겠어요?

    • nasica 2019.07.24 08: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LOL// 아 저런... 제가 아이에게 '정의롭지 않더라도 이익이 생기면 싸우라'고 가르친 건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편이 정의라면 이기든 지든 어떤 희생이 나더라도 무조건 싸우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다들 자신이 정의의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정의를 위해서는 무조건 싸워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세상에는 싸움 그칠 날이 없을 것 같습니다.

    • 엌ㅋㅋ 2019.11.29 18: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낙베 토착왜구가 가암히 협상안을 제시했다네요. 지켜야 하는 가치가 이낙베의 명줄이 아니라면 기꺼이 촛불을 들고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6. unit_inv 2019.07.22 2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흔히 생각하는것처럼 보급 무시하고 러시아 들어갔다가 당한게 아니라 나름 준비를 했었군요.

  7. reinhardt100 2019.07.22 2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담이지만 18세기부터 오스트리아는 도나우강부터 테살로니카까지 자기들이 가져야 할 영토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러시아의 국가적 사명이었던 콘스탄티노플 수복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1877년 러시아가 터키를 말 그대로 묵사발내버리고 콘스탄티노플 근방까지 진격하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나라가 오스트리아였죠. 자칫하다가 발칸에서 그대로 날아가 버릴 판이었으니까요.

    프루트강과 드니스트르 강 사이가 현재 유럽 최빈국인 몰도바인데 여기도 꽤나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드니스트르 강과 프루트 강 사이는 평아지대라 방어선 구축이 안 되는 지역이니까요. 어떻게 해서든 드니스트르 강을 국경선으로 해야 그나마 방어가 가능했는데 여기가 뚫려버리면서 더 이상 터키는 발칸에서 안정적인 방어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실제로 1877년 전쟁 때 터키의 프루트 강 방어선을 개전이후 단 일주일도 못 되어 붕괴시킨 러시아군은 그대로 불가리아 프레베까지 진격할 수 있었죠. 프레베 요새 공성전이 5개월이나 끌었기에 망정이지 프레베가 일찍 낙성되었다면 정말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사태가 터질 뻔합니다.

    나폴레옹 전쟁과 60년 차이나지만 1877년 전쟁이 꽤나 중요한 이유가 이 전쟁은 터키 군사력의 척추를 말 그대로 꺾어버려 다시는 러시아를 상대로 단독으로 전면전을 걸 생각을 못 하게 만들었고 발칸이 더 이상 터키의 안마당이 아님을 누가 봐도 확실하게 했다는 겁니다.

    • 2/28일 입대 2019.07.23 1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오오...정말 늘 댓글에서 배웁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급 궁금해진 게 있어요! 오스트리아는 도대체 뭘까요? 인종의 단위? 민족적 단위?? 대체 얼기설기 얽힌 조각보 같은 국가(?)가 어떻게 그렇게 커졌던건지...

    • Spitfire 2019.07.23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국 그렇게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누가 발칸의 주인이냐를 놓고 수십년을 더 투닥투닥 하다가 큰 일이 터지고 말았지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왕가가 유럽의 중심이었던 시절에는 사실 민족이나 인종이 지금처럼 국가의 정체성을 정하는 것이 아니었지요. 왕가나 귀족이 전쟁, 외교, 결혼, 상속으로 일정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 영토였으니까요. 다양한 민족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신하로 지내다가, 30년 전쟁 터지면서 한번 분열되고 민족주의가 생기면서 너덜너덜해졌지요.

      나시카님이 영국 해군에 대해서 이야기하실 때 이미 언급하셨지만, 영국 선원은 ‘영국인’이 아니라 단지 ‘영국해군에서 근무하는 자’입니다. 물론 그렇게 바다밥 먹으면서 영어 배우고, 운이 좋아 그동안 모은 돈으로 영국령 어딘가 정착하면 영국인이 되는거지요. 그당시에 무슨 영주권이나 비자가 있지도 않았다 보니...

    • reinhardt100 2019.07.24 2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답변 드렸어야했는데 Spitfire님이 다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저한테 배울게 별로 없는데 좋게 봐주시니 고맙네요.

  8. Spitfire 2019.07.22 2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웨덴이 핀란드를 얻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할 수 없었던건 베르나도트를 왕으로 추대해서였다기보단, 폴타바 이후로 북방의 패권이 러시아로 넘어가는 바람에 스웨덴의 국력으로 러시아를 침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베르나도트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누구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면 정말 바보가 아닌 이상 그정도 사리판단은 하지요. 물론 그런 사리판단을 전혀 못하거나 단순히 분위기와 감정만으로 정확한 판단을 무시할 경우에 닥쳤던 끔찍한 결과도 역사에 무수히 많긴 합니다만...

  9. 고로 2019.07.23 08: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와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는데.. 에르도안이 이슬람신앙과 반미정신 등에 엎고 이번에 러시아랑 손을 잡으니... 결과가 궁금함..

    • 터키는 강하다 2019.07.23 1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러시아와 터키가 친해진 것처럼 보여도 러시아가 계속 아르메니아를 후원하고,터키가 계속 아제르바이잔을 후원하는 이상 결국은 양국이 서로 적대할수밖에는 없다고 봅니다.시리아 내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일시적으로 협력한다고 봐야지요.시리아와 맞닿아있는 터키 동부는 쿠르드족 극좌 테러단체 쿠르디스탄 노동당의 봉기와 IS,알 카에다 등의 이슬람 테러분자들의 침투로 시리아랑 별 차이 없는 수준입니다.시리아 사태 초기부터 반정부군을 지원한 대가긴 한데,아무튼 치안이 굉장히 악화되었지요. 에르도안이 정말로 친러로 가고 싶다고 해도 터키는 그게 가능한 나라가 아닙니다.우리나라보다 영토도 훨씬 넒고,이슬람교도 국가답게 젊은 인구도 많은데다가 NATO에서 미국 다음가는 대군을 가지고 있으니 강해보여도, 내실은 훨씬 작은데다가 고령화되고 있는 극동의 대한민국만도 못해요.터키 군대는 한국군과 규모와 질적 측면에서 비슷한데 터키 경제는 규모에서 유럽이나 일본은커녕 우리나라만 못합니다.따라서 그 거대한 군대를 운영하려면 미국의 원조가 반드시 필요하죠.미국과 결정적으로 척을 지게 되면 당장 터키가 자랑하는 군대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겁니다. 뭐 사실 에르도안도 표 때문에 이슬람 원리주의자 코스프레하는 세속주의자에 가까운지라 터키의 호메이니는 결코 되지 못할거라고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