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사 요새에 도착한 이후 5일 간이나 시간을 허비한 뒤 러시아군이 마침내 비텝스크를 향해 철수를 시작한 것은 7월 16일이었습니다.  5일이면 잘 닦인 포장 도로에서 완전무장한 보병 사단이 160km를, 험한 길이라고 해도 100km는 행군할 수 있는 시간이고, 무리한 강행군이라면 200km를 갈 수 있는 시간입니다.  빌나(Vilna, 현재는 Vilnius)에서 드리사(Drissa, 벨라루스어로 Vierchniadzvinsk)까지의 거리는 불과 240km 정도 밖에 안 되었고, 뒤를 쫓는 것은 전쟁을 총이 아니라 발로 하는 것으로 유명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빌나에 입성한 것은 알렉산드르가 황급히 빌나에서 철수한지 48시간이 지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불과 2일의 리드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던 러시아군이 무려 5일이나 낭비하다니 이건 큰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제1군은 비텝스크에 거의 도달할 때까지 프랑스군으로부터 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순조롭게 후퇴를 할 수 있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

일단 러시아에서의 행군은 도로 사정 때문에 의외로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것을 감안하셔야 합니다.  러시아군도 프랑스군 못지 않게 강행군에 꽤 익숙한 부대였고 바클레이가 군을 잘 통솔했음에도 불구하고 빌나에서 철수를 시작한 6월 26일 이후 무려 15일이나 걸려서야 드리사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240km라면 당시 프랑스 보병 사단의 평균적인 이동 속도로 12일 걸릴 거리였는데, 러시아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음을 감안하고 또 많은 야포와 군수품을 함께 가지고 이동한 것을 생각하면 꽤 괜찮은 성적이었습니다.  


(현대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나에서 드리사까지의 거리입니다.)



하지만 그 뒤를 쫓는 것은 당대 유럽 최고의 기병이라는 뮈라가 지휘하는 약 4만의 기병 예비군단이었습니다.  대포와 짐마차, 보병 사단들이 뒤섞인 러시아군은 도저히 프랑스군 기병대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뮈라가 직접 선두에 서서 돌격하는 기병대의 공격에 러시아군은 산산조각이 나서 거미새끼들처럼 흩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뮈라의 기병 군단은 바람처럼 달리기는 커녕 러시아군의 후미를 제대로 집적거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결국 현실 세계에 용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와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정도 덩치의 괴물을 지탱할 수준의 먹이가 없어서였지요.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 전체가 네만 강을 건넌 이후, 아니 사실은 네만 강을 건너기 전부터도 식량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것은 말못하는 불쌍한 짐승인 말이었습니다.  네만 강을 넘자마자 불과 1주일 만에 3~4만 마리의 말이 죽어야 했는데, 이는 6월말에 갑자기 쏟아진 하룻밤 폭풍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사료와 물 부족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4만의 기병 군단이라면 말이 하루에 9kg의 사료를, 사람이 하루에 대략 1kg의 식량을 먹어야 하니 하루에 400톤의 보급품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그냥 알아서 먹을 것을 찾아가며 러시아군을 추격해야 했는데, 러시아군이 굳이 초토화 작전을 한답시고 적극적으로 파괴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들이 달려야 하는 길 주변은 이미 러시아군이 샅샅이 뒤져먹고 간 뒤여서 말이 뜯을 풀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뮈라 본인이었습니다.  평범한 근위대 장교 군복 위에 수수한 회색 코트를 즐겨 입었던 나폴레옹과는 달리 뮈라는 절대 제식 군복을 입지 않고 항상 스스로 디자인한 폴란드나 투르크식의 이국적인 복장을 입고 다녔는데, 이번 원정도 예외가 아니어서 마차 하나에 그런 이상한 족보도 없는 옷상자와 함께 각종 남성 화장품 및 향수를 잔뜩 채워서 끌고 올 정도로 허세를 부렸습니다.  그렇게 쓸데없는 것에 허세를 부리던 뮈라는 최고의 기병 사령관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러울 정도로 정작 군마의 보존에 대해서는 관심이 1도 없는 비정한 동물 학대자였습니다.  최고위층의 이런 태도는 중간 지휘관들에게도 분명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반적인 프랑스 기병대 장군들의 태도는 '말이란 승리와 영광을 위해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라는 것이었고, 더더욱 군마를 먹이고 돌보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극한의 상황으로 군마들을 내몰았습니다.



(조아생 뮈라입니다.  안장 밑의 호랑이 가죽이 예사롭지 않지요 ?  동시대 사람이 그의 외관에 대해서 써놓은 것은 읽어볼 만 합니다.  "그는 언제나 화려하고 때론 기괴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주로 폴란드나 무슬림들의 전통 복장에서 따온 것으로서, 화려한 색상의 값비싼 옷감과 털가죽, 자수, 진주, 다이아몬드 등이 결합된 것이었다.  그의 넓은 어깨에는 풍성하고 긴 곱슬머리가 늘어뜨려져 있었고 굵고 검은 구레나룻과 번쩍이는 큰 눈은 보는 사람을 매료시켰다.  그런 외모로 인해 사람들은 그에게서 사기꾼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결론은 사기꾼이네요.)



프랑스군은 누가 봐도 러시아군에 비하면 선진적인 조직이었습니다.  프랑스군에서는 대부분의 장교들이 출신 가문이 아니라 실력과 전공에 의해 승진한 사람들이었고 사병들 상당수가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체벌도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선진 프랑스군도 러시아군에 비해 안 좋은 점이 있긴 했습니다.  일단 사병들의 군복이 실용적이지 못했습니다.  러시아군은 농노들을 차출하여 만든 군대답게 병사들의 자부심보다는 그저 실용성에 중점을 두어 투박하지만 움직이기 편하고 넉넉한 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17~18세기 왕정 시대 군대의 전통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프랑스군은 무엇보다 사기를 중시하여, 움직이는데는 좀 불편하더라도 보기에 멋져보이는 꽉 끼는 바지와 코트를 입혔습니다.  그래서 평소 행군할 때는 프랑스군도 정복은 배낭 속에 둘둘 말아두고 헐렁한 작업복을 입고 행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꽤 불필요해보이는 전통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라 디안느(la Diane)라는 일일 행사가 있었는데, 디안느라는 단어는 달의 여신 다이아나(그리스식으로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어로 '기상나팔'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행사는 특히 기병대에게 상당히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제1군의 뒤를 쫓는 뮈라의 기병 군단처럼 보병의 지원없이 단독으로 움직이는 기병 부대는 원래 야습에 특히 취약했습니다.  기병대의 모든 강점은 스피드에서 나왔는데, 밤에 안장을 풀어놓고 야영하는 상황에서 적의 기습이라도 받았다가는 그야말로 박살이 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기병 단독으로 움직일 때는 야영시에 사방 먼 곳까지 초계 임무를 띤 기병 소대들을 배치하여 야간 경계를 세웠습니다.  원래 초계 소대의 임무 본질상, 이렇게 밤새 고생한 초계 대원들이 아침이 되어 본진 병력들이 전투 태세를 완전히 갖추고 난 뒤, 본진에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은 뒤에야 본진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라 디안느'라는 일일 점호가 특히 괴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즉 기상 시간이 되어 전체 기병 연대나 사단 병력이 불편한 잠자리에서 일어나 군장을 챙기고 안장을 얹는 등 출격 준비를 끝낸 뒤에도, 보통 1시간 떄로는 2시간 가까이나 초계 소대들이 다 돌아올 때까지 대오를 갖춘 채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가뜩이나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어서 힘든데 이렇게 무의미하게 1~2시간을 출격 대기 상태로 기다려야 했던 본진 병력만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밤새도록 안장을 벗기지도 못하고 경계 근무를 서야 했던 초계 소대들은 더 힘들었습니다.  


(Chasseurs à Cheval, 즉 엽기병 부대입니다.  엽기병은 기본적으로 경기병으로서 기본 무장은 얇은 군도였고 사실 다른 기병들과 딱히 다른 점은 군복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화려한 펠리즈와 털가죽 모자로 유명했습니다.  펠리즈는 정말 화려함 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허세 뿐인 복장이었지만 저 털가죽 모자는 의외로 방호력이 좋아서 군도의 타격을 견디는데는 흉갑 기병들이 쓰는 강철 투구보다 더 우수했다고 합니다.)



당시 뮈라 휘하에서 러시아 제1군의 뒤를 추격하던 제16 엽기병(Chasseurs à Cheval) 연대의 한 대위가 그때 겪었던 일화에 대해 적은 기록이 있습니다.

"비아스마(Viasma)에서 전투를 치렀던 날 저녁에 난 휘하의 기병 중대 100명과 함께 초계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  난 지정된 초계 장소를 고수하라는 명령과 함께 절대 안장을 벗기지 말라는 엄격한 지시도 전달받았는데,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본진으로의 귀환 명령을 받았다.  내 중대의 말들은 그 전날 오전 6시에 안장을 얹은 이후 한번도 안장을 벗을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에겐 아무런 식량과 사료도 주어지지 않았고 근처에 마실 물도 없었다.  그날 밤 나는 휘하 장교 하나를 장군께 보내 우리 중대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병사들을 위한 빵과, 무엇보다 말들에게 먹일 귀리를 좀 보내주실 것을 요청했다.  그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내 임무는 너희들을 싸우게 만드는 것이지 너희들을 먹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말들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로 무려 30시간을 버텨야 했다.  그렇게 기진맥진한 상태로 본진에 돌아왔는데, 그때는 이미 부대 전체가 출발할 시간이었다.  우리 중대에게는 휴식 시간이 딱 1시간 주어졌고, 그 뒤에는 먼저 출발한 본진을 따라잡기 위해 속보로 달려야 했다.  결국 나는 말이 더 이상 걷을 수 없었던 대원 12명을 뒤에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

이렇게 학대당하는 불쌍한 짐승들로 과연 러시아군을 얼마나 추격할 수 있었을까요 ?  성경에도 씌여있듯이 모든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위의 증언에서도 나오듯이, 프랑스 기병대는 평상시에는 속보가 아니라 걸어서 러시아군을 추격해야 했습니다.  바로 직전까지 주러시아 프랑스 대사였다가 복귀하여 나폴레옹의 마복시 역할을 하던 콜랭쿠르(Caulaincourt)는 이때 즈음해서 프랑스군 기병대가 러시아군의 후위 부대와 교전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프랑스 기병대원들은 적진에 돌격한 뒤 되돌아올 때, 놀랍게도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걸어왔습니다.  말들이 너무 지쳐서, 만약 러시아군이 반격을 해온다면 기병대원들은 자기 다리로 뛰어서 도망치는 것이 더 빨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 기병대는 엉망진창 상태였지만, 그래도 보급품이 없었기 때문에 짐은 가벼웠고 덕분에 결국 러시아 제1군을 따라잡기는 했습니다.  비텝스크 약 15km 서쪽, 오스트로브노(Ostrovno)에서였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Chasseurs_%C3%A0_Cheval_de_la_Garde_Imp%C3%A9riale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카피카피캣 2020.01.13 09: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렇게 서서히 나폴레옹의 몰락이 시작됐군요. 잘 읽었습니다. ` ^^

  2. reinhardt100 2020.01.13 14: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필 소모가 장난 아니었네요.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이 2주만에 13만 5천명의 병력 손실이 발생했지만 군마 손실의 비율은 인적 손실보다 더 크다고 들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총 7백만 필의 군용 마필 손실을 기록했는데 이 때는 화차를 이용해서 주 전선 근처까지 마필을 이동시켰는데도 저 정도 손실이 났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이 겪은 체감 소모도는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보다 더 심각했을 겁니다.

  3. ㅇㅇ 2020.01.14 0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런거 보면 몽골군은 정말 대단했던거 같네요

    • Franken 2020.01.14 17:1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니 한반도에서 지중해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을 세운 거 아니겠습니까?

  4. [][] R.F.[][] 2020.01.14 1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네요, 말을 운용함으로서 발생하는 문제점은 비슷했을텐데 말입니다.

    물론 몽골 말이 다소 작고 볼품없게 생기긴 했지만 지구력이 우수하다고 들었고, 몽골인들은 말을 다루는 법부터 적절히 관리하는 방법까지 아주 능숙했을테니 가능한 일이었겠지만요 ^^
    확실히 보병0%에 기병100%로 구성되어 있으면 당시로선 거의 전군 기계화에 성공했다고 봐야겠지요ㅎㅎ

  5. MADRUSH 2020.01.14 16: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6. 푸른 2020.01.15 14: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겨울이 추웠다라는 간단한 이유말고도 많은 이유들이 있었네요. 이렇게 하나하나 톺아보니 나폴레옹이 질만했네요...

  7. 웃자웃어 2020.01.17 19: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질문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영국군이 당시에 실탄 훈련을 한 유일한 군대라고 알고 있습니다. 다른 군대는 연습용 총알을 쓴걸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습용 총알은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 nasica 2020.01.18 20: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연습용 탄환이라는 것은 못 들어봤고요, 프랑스군의 경우엔 부싯돌과 탄약을 아끼기 위해 부싯돌 대신 나무조각을 dog head에 끼우고 탄환과 화약은 넣는 시늉만 하며 사격 연습을 했답니다.

  8. 이타카 2020.01.19 2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의 글을 계속 보면서 의아스러웠던게
    그럼 러시아군은 매번 어떻게 러시아에서 나와서 싸울 수 있었던건가요? 나폴레옹이 걸어들어간 길이랑 러시아군이 걸어나온 길은 같을텐데요?


일반적으로 후퇴하는 군대는 비록 작전상 후퇴라고 할지라도 사기가 매우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특히 자국 내에서 영토를 내주며 후퇴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1808년 말 자국 영토도 아닌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탈출하기 위해 코루냐 항구로 후퇴하던 존 무어 경(Sir John Moore)의 영국군이 추위와 와인 속에서 그야말로 녹아내리던 것을 상기해보면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또 후퇴할 때는 사기 뿐만 아니라 부상자와 환자, 쌓아놓았던 각종 보급품의 처분 등 온갖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당장 후방 걱정은 하지 않고 날랜 부대들로 쫓아가기만 하면 되는 추격군의 입장과, 부상병과 보급품을 수습해서 움직여야 하는 후퇴군의 입장은 다를 수 밖에 없고, 보통 그런 문제들 때문에 결국은 후퇴하는 군대는 추격하는 군대에게 따라잡히기 마련입니다.  그런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후퇴하는 군대의 사기는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에 빠져들 수 밖에 없습니다.  1812년, 유럽 사상 최강의 군대였던 그랑다르메에게 쫓기는 러시아군의 후퇴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랑다르메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유럽 사상, 아니 지금도 인류 역사상 최고의 장군 중 하나라는 나폴레옹이었으니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1808년 말~1809년 초의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 지방의 매서운 겨울 바람 속에서 후퇴하는 영국군의 후위부대였던 제95 라이플 연대의 후퇴 모습입니다.  이 그림은 영국에서 그린 것이니 그나마 꽤 질서정연하게 나옵니다만, 실제 벌어졌던 아비규환에 대해서는 http://blog.daum.net/nasica/6862633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의외로 빌나에서 후퇴하던 러시아군의 사기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먼저 여기에는 제1군 사령관 바클레이 드 톨리의 유능함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번 후퇴의 의미와 목적을 잊지 않았고 빠른 후퇴보다는 군의 응집과 규율 관리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었습니다.  뛰어난 행정가였던 그는 각 부대의 후퇴 순서와 경로 등을 세심하게 지휘하며 질서있는 후퇴를 위해 안간힘을 다 했고, 덕분에 러시아 제1군의 후퇴는 놀라울 정도로 순조로왔습니다.  바클레이는 몰랐지만 여기에는 나폴레옹의 실책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제1군과 제2군 중 더 약한 제2군을 먼저 요격하려 했고, 제2군의 앞길을 막는 역할에 축지법의 대가 다부를 투입했었습니다.  거기까지는 매우 좋은 판단이었지만 그 뒤를 추격하는 임무를 자기 동생 철부지 제롬에게 맡기는 바람에 모든 것이 망쳐진 것이지요.

아무튼 제1군의 뒤를 쫓는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의 후퇴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고 있었습니다.  먼저, 당연히 러시아군이 후퇴하는 길 위에 많은 수의 마차와 군수품을 버리고 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그 수가 매우 적었습니다.  애초에 욕심부리지 않고 가지고 갈 군수품과 버리고 갈 군수품을 철저하게 나누었고, 버리고 가는 군수품은 일찌감치 불을 질러 적의 손에 떨어지지 않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건 100% 바클레이의 공적이었습니다.  덕분에 후퇴하는 러시아군보다 추격하는 프랑스군이 버리고 가는 짐마차가 더 많을 정도였습니다.  또 러시아군 사병들의 탈영률이 허겁지겁 이루어지는 후퇴치고는 매우 낮았습니다.  이는 당시 그들이 있던 곳이 러시아 땅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러시아 본토라기 보다는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땅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군 사병들에게는 낯선 외국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대신 바클레이가 현지에서 새로 징집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계 병사들 약 1만 명 정도가 후퇴 과정 중에 탈영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그랑다르메 소속 폴란드군에게 합류했지만 많은 수는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러시아군 고위층은 매우 태평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7월 4일 스웨덴 왕세자 베르나도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볼가 강변에서 싸우는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난 이 전쟁을 몇 년간 끌고 갈 작정이오'라는 내용이 있을 정도로 러시아군 수뇌부는 (불과 십여 일 전까지만 해도 전진하여 공세로 나가자고 아우성 치던 사람들이었는데도) 후퇴를 당연하게 생각했고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보면 러시아 장교들의 반응은 잘 모르겠고 주로 외국 출신 고위층들이 특히 태평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외교관으로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짜르를 따라다니던 궁정 인사 중 하나였던 네슬로더는 후퇴 길에 다음과 같은 태평한 편지를 아내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 편지는 프랑스어로 씌여졌는데, 독일계 귀족이 러시아 짜르를 위해 일하면서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당시 사회상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우리의 후퇴에 대해 걱정하지 마시오.  On n'a recoulé que pour mieux sauter.  (후퇴하는 것은 더 잘 뛰어오르기 위해서라오.)"



(네슬로더 Karl Robert Reichsgraf von Nesselrode-Ehreshoven 입니다.  그는 원래 신성로마제국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아버지가 주 포르투갈 러시아 대사로 부임하느라 리스본 항구 인근 바다 위에서 출생하는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계속 러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고, 1807년 아일라우 전투 때도 현장에 있었습니다.  1812년 당시 32세의 젊은 나이였던 그는 1816년 러시아 외무장관이 되어 비엔나 체제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이쯤에서 도저히 빠질 수가 없는 명짤입니다...  존경합니다 김성모 화백님.)

 



짜르는 오히려 기분이 좋은 편에 속했습니다.  그때 즈음해서 러시아군 진영에 프로이센 장교 하나가 나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레오폴트 폰 뤼초프(Leopold Wichard Heinrich von Lützow)로서 훗날 독일 해군 순양함에도 이름이 붙여진 그 유명한 다른 뤼초프와는 또 다른 인물이었고, 제4차 대불동맹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참패한 이후 군에서 강제 예편된 불만 많은 젊은 장교였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하여 1809년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서 싸웠으나 결국 바그람 전투에서 또 패배했는데, 그에 굴하지 않고 이번에는 당시 유럽 대륙에서 유일하게 나폴레옹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스페인으로 가서 거기서 다시 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1812년 1월 스페인 남부 발렌시아에서 결국 프랑스군에게 포로가 되어 남부 프랑스로 끌려갔는데, 뤼초프는 거기서 탈출하여 걸어서 스위스-독일-폴란드를 거쳐 러시아로 넘어온 것입니다.  바그람 전투 때만 해도 소위에 불과했던 당시 26세의 이 프로이센 청년은 '나폴레옹에게 저항하는 유럽 문명 사회의 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짜르에게 대환영을 받았고, 당장 러시아군 육군 중령의 계급이 부여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뤼초프는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여 다시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다시 프로이센군에 입대하여 리뉘(Ligny)와 워털루에서 또 나폴레옹과 싸우는 근성을 보여주었고, 결국 프로이센군 고위 장성이 됩니다.



(위 사진은 Leopold von ützow가 아니라 Ludwig Adolf Wilhelm Freiherr von Lützow 입니다.  일반적으로 뤼초프라고 하면 레오폴트 폰 뤼초프가 아니라 위 초상화의 주인공인 루드비히 아돌프 폰 뤼초프를 말합니다.  이 유명한 뤼초프도 프로이센 출신 장교로서, 뤼초프 자유군단(Lützow Freikorps)이라는 유격부대를 만들어 나폴레옹에게 저항한 군인입니다.  훗날 이 분의 이름을 따서 독일 해군 순양함이 만들어졌는데, 불행히도 그 순양함은 1916년 유틀란트 해전에서 대파되어 자침되었습니다.)



사실 러시아 군영 내에는 나폴레옹을 미워하는 프로이센 출신 장교들이 그렇잖아도 차고 넘쳤습니다.  알렉산드르가 후퇴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그렇게 나폴레옹을 미워한다는 것 외에는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데 괜히 러시아군으로부터 급여만 타 먹는 프로이센 장교 하나가 더 늘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알렉산드르를 포함한 러시아군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퓰의 기획안 하에 드리사(Drissa)에 구축되고 있던 든든한 방어기지였습니다.  

하지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제9권에서도 자세히 묘사되었듯이, 1812년 6~7월 당시 러시아군 전체 작전 계획의 사실상의 총기획자인 퓰에 대해서는 러시아군 내부에서 반목과 불신이 팽배해있었고, 드리사 요새의 쓸모 여부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습니다.  짜르는 드리사로 향하면서도 믿을 만한 기술적 전문 지식을 가진 참모 하나를 먼저 보내 드리사 요새의 완성도 여부를 평가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장교들 중에서는 그런 평가 작업을 수행할 정도의 권위 있는 군사 전문가가 없었는지, 결국 그런 임무를 맡게 된 사람은 또 다른 프로이센 출신 장교이자 훗날 전쟁론을 써서 불후의 명성을 얻은 클라우제비츠(Carl Philipp Gottfried von Clausewitz)였습니다.  34세의 젊은 클라우제비츠는 당시 소령 계급을 달고 있었는데, 사실 퓰의 가까운 친구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클라우제비츠를 보냈다는 것은 알렉산드르가 어떤 평가 결과물을 받고 싶어하는지 의도가 다분히 엿보이는 행위였지요.  그런데 젊은 클라우제비츠의 평가 수행은 처음부터 생각치 못했던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de.wikipedia.org/wiki/Leopold_von_L%C3%BCtzow
https://en.wikipedia.org/wiki/Karl_Nesselrode
https://en.wikipedia.org/wiki/Carl_von_Clausewitz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ranken 2019.12.30 0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운칠기삼이라더니 러시아군에 바클레이가 없었다면 십중팔구 존 무어경 꼴이 됐을 텐데ㅎㅎㅎ한 인물이 역사의 물줄기를 틀었군요.

  2. reinhardt1000 2019.12.30 09: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동안 주7일 근무하느라고 바빠서 확인도 못했네요.

    '불가 강변에서도 전쟁한다.' 이런 방식은 독소전쟁에서도 그대로 나오죠. 독소전쟁 초기 소련이 한창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하루에 사단이 몇개씩 날아가던 상황에서 미국 특사가 모스크바를 찾아갔는습니다. 누가 봐도 당시 나치 독일의 거센 공세 앞에 '소련이 8월 말까지 버티냐?' 질문하면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대답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강철의 대원수 스탈린이 딱 한마디로 미국 특사를 안심시킵니다.

    '모스크바가 점령되면 우랄 산맥을 넘어서라도 끝까지 싸웁니다.'

    이 말을 들은 미국 특사는 곧장 본국으로 가서 소련에 대한 원조가 '미국이 전쟁준비를 완료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F. 루즈벨트에게 강조하고 곧바로 랜드리스가 소련에도 전달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줍니다.

    실제로 17세기 폴란드-모스크바 전쟁 이후, 러시아군 혹은 소련군은 항상 거대한 공간을 내주면서 주력을 보전하는 방식으로 전쟁 수행을 하였습니다. 다만, 상대적인 국력 차이가 벌어지지 않아야 러시아군의 전쟁 수행에서 '주력 보전'이 가능했는데 양 세계대전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당시에는 '주력 보전'에 꽤 성공한 축에 들어갑니다.

    2019넌도 다 가고 2020년 경자년 신년인데 나시카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3. 푸른 2019.12.31 15: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디선가 들어본 인물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네요! 다음편 빨리... 현기증납니다ㅋㅋㅋ

  4. 흠흠흠 2020.01.02 1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같은 프로이센 장군들이 지휘하는데 프로이센은 나폴레옹과 싸웠다 하면 졸전 끝에 참패하고, 러시아는 피터지는 영혼의 맞짱 끝에 최소 무승부까지는 가는 이유가 뭘까요. 러시아 병사들이 훨씬 더 용맹해서?


제롬 보나파르트(Jérôme-Napoléon Bonaparte)는 1784년 생으로서 나폴레옹에게는 15살 어린 정말 아들 같은 막내 동생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1793년 툴롱(Toulon) 포위전을 통해 중위에서 장군까지 일사천리의 승진 가도를 달리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9살이었습니다.  이 툴롱 포위전이 한창일 때만 해도 보나파르트 일가는 고향 코르시카에서 쫓겨나 집도 절도 없이 마르세이유의 월세방을 전전하던 신세였지만 나폴레옹의 출세 덕분에 그 이후로는 생활에 기름칠이 잘 된 편이었습니다.  즉, 제롬은 형의 후광에 힘입어 아주 어릴 때 빼고는 그다지 세상살이가 어려운 줄 모르고 자라났다는 이야기지요.


(베스트팔렌 국왕 제롬 보나파르트 전하이십니다.  가만히 보면 이목구비가 확실히 나폴레옹의 동생처럼 생겼네요.)



그는 역시 위대한 형을 배경으로 해서 프랑스 해군에 이름만 올려놓고 경력을 쌓다가, 청소년 시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자유로운 미국 물을 먹게 되었습니다.  조기 미국 유학이 적어도 제롬에게는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는지, 1803년 당시 19살이던 제롬은 부유한 가문의 18살짜리 미국 아가씨 엘리자베스 '벳시' 패터슨(Elizabeth "Betsy" Patterson)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자기 마음대로 결혼까지 해버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이미 프랑스에서 절대 권력자의 위치를 공고히 했던 나폴레옹은 노발대발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이혼이 쉽지 않은 지라, 나폴레옹은 애꿎은 교황 비오 7세(Pius VII)를 윽박질러 미국에 있는 제롬의 결혼을 무효화 하려 애썼으나 고지식한 비오 7세가 굽히지 않자 황제로 즉위한 다음 해인 1805년 3월에 칙령을 내려 자기 멋대로 동생의 결혼을 무효화 시켜버렸습니다.  마침 그때 제롬은 프랑스 황제가 된 형에게 이 결혼을 인정 받겠다고 당시 임신 중이던 와이프 벳시를 데리고 유럽행 항해길에 올라 있었습니다.  당시 중립국이던 포르투갈에 상륙한 제롬이 먼저 형을 만나 설득을 시도하는 동안, 그 벳시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입항하려고 했습니다.  이것도 나름 이유가 있었는데, 어떻게든 빨리 프랑스 땅에 들어가서 아이를 낳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막으려는 비정한 형 나폴레옹은 아예 그 미국 선박의 암스테르담 입항을 금지해버렸습니다.  결국 벳시는 적국인 영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고, 제롬의 첫아들은 영국 땅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제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Jérôme Napoléon Bonaparte)라는 으리으리한 이름을 갖게 되었지만 결국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 부유한 미국 지주가 되었습니다.  결국 제롬도 지엄한 형의 명령에 굴복하여 이혼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모르긴 해도 이때부터 형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제롬 보나파르트를 사로잡았던 미국 아가씨 엘리자베스 '벳시' 패터슨입니다.  1804년에 그려진 것이니 19살 때의 모습이네요.)



그래도 자신의 여자를 버리고 형을 따른 대가는 짭짤했습니다.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의 공주님 카타리나(Catharina Frederica)를 새신부로 맞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왕이 되었거든요.  1806년 프로이센을 격파한 나폴레옹은 다음해인 1807년 프로이센으로부터 빼앗은 영토와 이런저런 독일 소공국들을 모아 베스트팔렌(Westphalen) 왕국을 새로 만들었고, 그 왕으로는 제롬을 임명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새로 왕이 된 막내 동생 제롬에게 선물로 매우 모범적인 헌법과 근대적인 관료 체계를 내려주며 베스트팔렌 왕국이 자신이 유럽에 제시할 새 질서의 모범이 되기를 바랬습니다만, 제롬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제롬은 자기 여자를 버리고 얻은 왕국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어려운 것 모르고 커서 그랬는지 아무튼 다소 흥청망청 돈을 써대며 겉멋을 부리는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스트팔렌 왕국의 수도는 카셀(Kassel)이었는데, 제롬이 국왕으로서 위풍당당하게 입성한 카셀은 원래 작은 도시에 불과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이 휩쓸고 간 모든 곳이 그랬듯이 역시 탈탈 약탈을 당한 뒤라서 꽤 황폐해진 상태였습니다.  제롬은 패전 직후 새로운 왕국으로 편성된 영토의 흉흉한 민심을 보살필 생각보다는 이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왕궁을 멋지게 꾸며 보겠다는 의욕이 앞섰습니다.  그는 기존의 빌헬름궁(Wilhelmshöhe)을 나폴레옹궁(Napoleonshöhe)으로 개명하고 이런저런 개보수 공사와 화려한 은식기 사치스러운 가구 값비싼 그림 등을 주문하며 바쁘게 지냈습니다.  덕분에 그 일대의 예술가들과 장인들은 때 아닌 호황을 맞이했지만 신생 베스트팔렌 왕국은 곧장 재정난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나폴레옹의 튈르리 궁전과 비슷한 규모의 비용을 제롬이 써댔으니까요.  돈이 떨어지자 여태까지 해오던 것처럼 제롬은 형에게 손을 벌렸지만 동생의 철없는 방탕질에 화가 난 나폴레옹은 그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고, 그렇잖아도 빗나가기 시작한 형제 사이는 더욱 비틀어졌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여전히 막내 동생 제롬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1812년 러시아 원정을 시작하면서 진지하게 폴란드 왕국의 재건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는데, 당장 떠오른 문제는 누구를 폴란드 왕으로 삼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적임자로 오랫동안 그 지역에서 활동했고 또 폴란드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던 다부 원수를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스웨덴의 왕세자가 되자마자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려버린 베르나도트의 경우를 보고, 나폴레옹은 역시 누가 뭐래도 믿을 것은 핏줄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폴란드 왕국을 재건한다면 그 왕으로는 제롬을 생각했던 것이지요.  나중에 세인트 헬레나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회고록을 구술하던 나폴레옹은 그때서야 '생각해보면 폴란드 왕으로는 누구보다도 폴란드 왕족 출신이자 뛰어난 지휘관이었던 포니아토프스키(Józef Antoni Poniatowski)가 적입자였는데, 당시엔 그럴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라며 후회했습니다만, 아무튼 일이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아무리 나폴레옹이라고 해도 혈기왕성한 폴란드인들 위에 자기 동생을 왕으로 세우자면 자기 동생에게 뭔가 그럴 싸한 공을 세우도록 해야 했습니다.  어차피 이제 곧 폴란드인들의 원수인 러시아로 쳐들어가는 마당에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나폴레옹은 카셀에서 왕놀이에 열중하고 있던 제롬을 소환하여 무려 3개 군단의 지휘권을 주며 왕이 되기에 부끄럽지 않은 뛰어난 전공을 세우도록 지시했습니다.  형의 소환을 받은 제롬은 베스트팔렌군을 이끌고 바르샤바에 화려하게 입성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동생을 구경하러 몰려든 폴란드인들에게 '폴란드를 러시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피를 흘리겠다'라며 연설을 했으나, 정작 그의 거만하고 사치스러운 행동은 폴란드인들의 경멸과 증오만 불러 일으켰습니다.  나중에는 바르샤바의 폴란드인들 사이에서는 제롬에 대해 '매일 저녁마다 럼주와 우유로 목욕을 한다'라는 헛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기도 했습니다.  그가 끌고 온 베스트팔렌군은 당연히 독일인들로 구성된 부대였는데, 이들도 폴란드인들을 마구 대하며 폴란드인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나폴레옹은 어쩌자고 그랬는지 몰라도 하필 제롬에게 방담(Dominique-Joseph René Vandamme) 장군을 실질적인 지휘관으로 붙여주었는데, 방담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프라첸(Pratzen) 고지를 점령하는데 선봉을 서는 등 전투 지휘에는 무척 용감했지만 난폭한 성질머리와 함께 부끄러운 줄 모르는 약탈 행위로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었습니다.  같은 프랑스 장군들 사이에서도 불화가 끊이지 않았던 방담은 제롬보다 더 폴란드인들의 원성을 살 뿐이었습니다.  훨씬 이전의 일이기는 합니다만, 오죽 했으면 나폴레옹이 방담의 면전에 대고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

"자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네가 2명 있는 걸세.  그랬다면 방담 2명 중 1명에게 다른 방담을 교수형에 처하도록 했을 거야."


(방담입니다.  그는 1813년 쿨름(Kulm) 전투에서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그는 짜르 알렉산드르 앞으로 압송되어 그의 약탈 행위에 대해 추궁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대범하게도 알렉산드르에게 '최소한 나는 내 아버지를 죽였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다 !' 라고 외쳐 파벨 1세의 암살에 공모했다고 의심받던 알렉산드르의 안색을 변하게 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그는 포로 생활 당시 장군이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혹한 대접을 받으며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젊은 시절 오스트리아군과 프로이센군, 러시아군 등을 연파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의 천재성이 빛났기 떄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상대인 적군 지휘관들이 프랑스군처럼 실력이 아니라 신분에 의해 지휘권을 얻은 무능한 인간들이었다는 점도 크게 기여를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제국의 운명이 달린 이 중요한 러시아 원정에, 그의 적들이 발목을 잡았던 바로 그 약점을 스스로 만들어서 달고 간 것은 정말 나폴레옹도 예전의 나폴레옹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그가 믿고 쓰는 다부에게 '제롬을 잘 보필하라'라고 지시해두긴 했지만, 문제는 역시 제롬이었습니다.  이 철없는 28살짜리 청년 왕은 '내가 나폴레옹의 동생이자 3개 군단 지휘관인데 누구 명령을 따르라는 말이냐'라며 정말 자기가 엄청난 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누구의 말도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  이 모든 것이 막내 동생을 버르장머리 없이 키운 나폴레옹 본인의 책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체감한 것은 바그라티온의 제2군을 함정에 빠뜨린 뒤 그 포위망을 좁히는 작전에 제롬의 군대를 투입한 뒤에, 제롬으로부터 그 첫 보고서를 받아보았을 때였습니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군 작전 보고서에 당연히 있어야 할 내용들, 즉 적의 위치와 군세, 이동 방향 등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심지어 아군의 위치와 상황에 대한 정보조차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주절주절 두서 없이 쓴 보고서의 내용은 주로 제롬 본인이 겪고 있는 온갖 어려움에 대한 불평불만 뿐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직감했습니다.  "망했다."  아니나 다를까, 제롬은 밤잠을 자지 않고 강행군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내가 왕인데 숙소가 이게 뭐냐' 따위의 불평불만과 투정만 일삼으며 전군의 추격 속도를 떨어뜨렸고, 결국 다부가 애써 가로 막은 바그라티온의 러시아 제2군을 제때 덮치지 못했습니다.  결국 바그라티온은 남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이때 탈출한 러시아군은 보로디노 전투를 사실상 무승부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며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수렁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대노했습니다.  자기 동생이 그렇게 무능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는 다부에게 이제 제롬의 지휘권을 박탈하여 다부의 지휘권 아래 두라고 뒤늦게 명했습니다.  이렇게 껄끄러운 명령을 받은 다부는 무척 난처해하며 이 소식을 제롬에게 전했습니다.  아마 다부로서도 무능할 뿐만 아니라 부담만 되는 부하를 거느리게 된 것이 굉장히 난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부의 전언을 받은 제롬은 이 원정 내내 내린 결정 중 프랑스군을 위해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결정을 내립니다.  "내가 국왕인데 한낱 원수 따위의 지휘를 받으라는 말인가 ?"라며 벌컥 화를 내고는 직속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냥 베스트팔렌 카셀로 돌아가버린 것입니다.  다부는 물론 아무도 제롬의 이탈을 아쉬워하지 않았고 비로소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너무 악화된 뒤였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J%C3%A9r%C3%B4me_Bonaparte
https://en.wikipedia.org/wiki/Dominique_Vandamme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ranken 2019.12.16 08: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서고금 막론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초를 치는 철부지 높으신 분들이 있네요. 뭐 어릴 때부터 고생을 안 겪은 사람이 갑자기 잘할 수도 없긴 하지만 분통이 터지는 건 어쩔 수 없군요.

    근데 사회생활 좀 해보니 왜 전근대 왕들이 무능력을 감수하고 가족들을 우선시했는지 알겠더군요. 세상 일 추진하는데 능력도 필요하지만 그보단 신뢰가 더 중요한데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은...필요관계에 의해 만났으니 위험부담이 예상외로 크더군요.

  2. ㅇㅇ 2019.12.16 08: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등! 러시아 원정이 시작부터 너무나 삐걱거리네요. 요즘 나시카님 연재글을 2회차 정주행하던 중 이탈리아 원정으로 접어들었는데, 그때 나폴레옹에게 있었던 건 원투펀치 오주로와 마세나, 겨우 4만의 훈련 덜 된 프랑스군이었지만 이탈리아군을 탈탈 털었는데...극명하고 안타까운 대조네요.

  3. keiway 2019.12.16 1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래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죠. 자신의 성공에 대한 자만과 얻은 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오만, 그리고 성공으로 이끌어준 (오래된) 방식 에 대한 고집 때문에. 그런데 기존 성공 방식조차도 지키지 못했으니 졸부 나폴레옹의 몰락은 그 내부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스페인 내전과 러시아 원정은 그걸 명확하게 보여준 거고요. 이런 식이라면 두 전쟁이 성공했어도 결국 몰락은 필연이 아니었을까요.

  4. 까까님 2019.12.16 12: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톨스토이의 전쟁과평화에 잘 나오는 부분이네요
    그 책을 읽을 때는 배경상황을 몰라서 '킹왕짱쎈 나파륜' 때문에 러시아군이 패닉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분전하면서 어려운 후퇴를 성공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5. 에휴 2019.12.16 1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니아토프스키 ㅋㅋ 깜빡한척 하기 ㅋㅋㅋ 나폴레옹 진짜 망하려고 별 수를 다쓰는거 같아요

  6. 페미나치란? 2019.12.16 15: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여가부 페미들 국가 주요요직에 앉히는게 수십명의 제롬을 양상하는 것인데 그런 제롬은 객관적으로 보실 줄 아시면서 ♩♫♪♫들에겐 찬성하시는 주인장님의 뇌구조가 조금 궁금하긴 합니다

    직접 그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할때쯤엔 후회해도 늦으실건데 좌파란 참으로 신기하군요

    • 아스날면도기 2019.12.16 18: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쯧쯧쯧......

    • JS Choi 2019.12.16 1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남의 개인블로그 들어와서는 (등장인물 이름 빼놓고는) 본문 내용과 아무 상관없이 여가부 페미 댓글 달면서 개인적인 의견에 딴죽걸고 있는 사람이 더 이해가 안됩니다.
      게다가 고생해서 글 올려주신 주인장께 뇌구조가 어쩌고... 무례하기도 짝이 없군요.

    • keiway 2019.12.17 1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ㅉㅉㅉ...
      관종에겐 먹이를 주면 안됩니다.

    • Franken 2019.12.17 1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 데서 하세요. 알타리무씨ㅡㅡ

    • 더마 2019.12.19 1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가 주세요.

    • 정암 2019.12.27 1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박근혜-최순실 사건은 잊어버린듯한 님의 뇌구조가 전 더 신비롭습니다 ㅎㅎ 좌파 좌파 하는데 그럼 우파는 뭐 그리 잘났나요? ㅋㅋ (우파도 아닌 수구꼴통이지만)

  7. 하이텔슈리 2019.12.17 2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제프도 뤼시앵도 루이도 나름대로의 생각과 그에 의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이었는데, 제롬은 진짜 답이 없었네요...

  8. 나삼 2019.12.18 15: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롬은 나폴레옹 연재 초기 오스트리아 왕족 처럼 초치는 역할을 하네요.

  9. 루나미아 2019.12.18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루이는 네덜란드에서 선정을 펼쳤기에 말할 것도 없고, 조제프도 스페인에서 중요할 때 이런저런 결정들을 잘 내렸다고 알고 있어요.
    근데 제롬은 참...

    그리고 폴란드 군주감은 당연히 포니아토프스키인데 다부가 나와서 띠용했네요.
    나폴레옹이 몰랐을 리가 없죠. 원래부터 제대로 해 줄 생각 없다가, 자기가 몰락할 때도 끝까지 남아줬다가 전사한 거 보고 그제서야 정신차린 거겠죠.후...

  10. 알키비아데스 2019.12.18 21: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인트 헬레나에서 모든 결과를 다 알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나폴레옹 개털되는 상황에서도 본인한테 헌신적이라는걸 알았으니 포니아토프스키를 폴란드왕 시켜줬어야 했다고 한탄하는거지 1812년 이전에 그런 판단을 못한건 나폴레옹의 한계였을 뿐

  11. 알키비아데스 2019.12.18 22: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빌어먹을 형제 누이들은 마치 내가 아버지한테 황제 자리를 물려받은거 처럼 행동한단 말이야'
    여기서 제롬, 캐롤라인은 무조건 포함될거 같은데 뤼지앵과 앨리자도 들어갈까요?

  12. 웃자웃어 2019.12.20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게 있는데요, 당시에 병사 1명을 유지하는데 얼마만큼의 돈이 드나요?

    • nasica 2019.12.21 1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제게는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죄송합니다.

    • 웃자웃어 2019.12.21 2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면 질문의 일부 항목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머스켓 소총의 이야기 편에서 당시에 화약값이 비쌌다고 했는데 어느정도로 비쌌나요?

    • nasica 2019.12.22 22: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니 대략 1파운드에 0.5실링 했던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 돈으로는 대략 6~7천원 정도입니다. 그리고 브라운베스 머스켓 소총 1발에는 대략 0.09 파운드의 화약이 필요했으니, 1파운드의 화약으로 11발 정도의 사격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발에 대략 500~600원인 셈이네요.

      http://forums.sjgames.com/showthread.php?t=31920


바클레이는 엉망진창이었던 러시아군 지휘 체계 안에서 그래도 거의 유일하게 냉정한 두뇌를 유지하고 있던 용의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6월 26일 허둥지둥 빌나 철수를 하는 와중에도 잔뜩 쌓인 군수품에 불을 질렀을 뿐만 아니라 저멀리 떨어져있던 고집불통 제2군 지휘관 바그라티온에게도 전령을 보내어 후퇴하여 자신의 제1군과 합류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잠깐, '부탁'이라고요 ?  군대에서 군사작전을 벌이면서 '부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  어쨌든 바클레이는 그래야 했습니다.  이 어이없는 일은 모두 알렉산드르의 책임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바클레이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짜르가 바그라티온으로부터 보고를 직접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뜩이나 바클레이를 싫어하던 바그라티온은 바클레이를 자신의 상관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클레이가 아니나 다를까 어이없는 편지를 보내왔을 때 바그라티온은 지시에 따르기는 커녕 폭발했습니다.  프랑스군이 드디어 네만 강을 건너 신성한 러시아의 영토를 침공했다는데 날아온 편지 내용이 고작 '후퇴하라'라니 !  바그라티온의 생각에 알렉산드르의 가장 큰 실책은 역시 바클레이에게 제1군을 맡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루지아의 상남자 바그라티온에게는 오직 전진이 있을 뿐 후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바그라티온과 함께 러시아군에서 복무하던 프랑스 망명귀족 랑제론에 따르면 바그라티온은 '시커멓고 못생긴 촌뜨기'였습니다.)

 



그런데 남자라면 굽힐 줄도 알아야 하는 법입니다.  초반의 분노가 김이 빠지자, 아무리 바그라티온이 고집불통이라고 해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자신의 6만 정도 되는 제2군은 삽시간에 프랑스군에게 포위당해 압살당하기 딱 좋다는 것이 훤히 보였습니다.  나폴레옹의 공격은 역시 날카로왔습니다.  그는 이미 러시아 제1군과 제2군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네만 강을 건너자마자 바클레이와 바그라티온 사이에 프랑스군을 쐐기처럼 박아넣어 그 둘을 분리시켰던 것입니다.  병법의 기본인 각개격파를 시전하려 했던 것이지요.  바그라티온이 바클레이 보기를 뭣같이 본다고 해서 그가 무능한 지휘관이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의도를 눈치채고 곧 철수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바그라티온도 그동안 수비가 아니라 공격을 하겠다고 설치기는 했지만 당장은 공격할 준비도, 수비할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저기 장기 주둔을 위해 흩어져 있던 그의 제2군도 철수를 하려면 재집결하는 등 시간이 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가 그렇게 바그라티온이 짐을 쌀 시간을 충분히 줄 리가 없었습니다.

인생은 뜻하지 않은 놀라움의 연속이고 전쟁은 특히 그런 법입니다.  바그라티온은 나폴레옹이 빌나에 입성하던 6월 28일에야 철수를 시작할 수 있었는데, 그때까지 그랑다르메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2군을 그대로 내버려두었습니다.  과연 전격적의 프랑스군이 맞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바그라티온은 무척 의아스럽게 생각했으나 아무튼 다행이라고 여기고 바클레이의 제1군과 합류하기 위해 북북서로 방향을 잡고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곧 프랑스군이 그렇게 제2군을 내버려 두었던 이유가 밝혀지는 듯 했습니다.  철수를 시작한지 6일 후인 7월 4일, 바그라티온은 그의 앞 길을 가로막고 있는 프랑스군이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명성이 자자한 프랑스군의 명장 다부가 직접 거느리는 군단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바그라티온이 바클레이와 합류하기 위해 북북서로 움직일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측하고 미리 거기에 다부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결국 바그라티온은 나폴레옹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럼 그렇지, 이 모든 것이 함정이었어'라고 생각한 바그라티온은 서둘러 방향을 틀어 남서쪽의 민스크(Minsk)로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민스크의 전경입니다.  현재 민스크는 과거 우리가 백(白)러시아라고 부르던 벨라루스의 수도입니다만, 원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소속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은 폴란드와 러시아, 심지어 스웨덴 등이 번갈아가며 점령하다가 폴란드 왕국 소속으로 있었는데, 결국 1793년 제2차 폴란드 분할 때 러시아 영토가 됩니다.  민스크가 도시로 발전한 것은 19세기 중반 경부터였습니다.)

 



그런데 상남자 바그라티온조차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다부를 피해 허둥지둥 남서쪽으로 방향을 휙 틀어 전속력으로 민스크를 향해 달렸는데, 정작 민스크 인근의 니에쉬비에즈(Nieshviezh)까지 와보니 그를 기다리는 것은 민스크를 이미 다부가 점령하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  과연 '축지법을 쓰시는 원수님'이라는 다부의 명성은 고스톱을 쳐서 딴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  이제 바그라티온에게는 그의 뒤를 맹렬히 추격하는 그랑다르메의 대군과 앞을 가로 막은 다부의 군단 사이에서 박살이 나는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바그라티온은 이를 악물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인생과 전쟁은 알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다부에게 가로막혀 멈춰선 바그라티온의 뒤를 곧 따라잡을 줄 알았던 후방의 그랑다르메 대군이 신기하게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 뒤를 프랑스군이 추격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 싶을 정도의 속도였습니다.  바그라티온은 기회를 놓치는 무능한 지휘관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한참 뒤에야 근처의 미르(Mir)에서 그랑다르메 소속 폴란드 창기병들이 나타나서 러시아군의 카자흐 기병들과 교전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는 이미 바그라티온은 다시 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탈출한 뒤였습니다.  그랑다르메가 바그라티온을 손쉽게 요리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탈출에 성공한 바그라티온의 제2군은 스몰렌스크에서 바클레이와 합류할 수 있었고, 결국 이들은 보로디노 전투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냅니다.  만약 이때 바그라티온과 그의 제2군이 민스크 앞에서 요격 궤멸되었다면, 어쩌면 나폴레옹의 1812년 러시아 침공 전체의 판도가 약간 바뀔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이 바그라티온의 뒤를 추격하던 그랑다르메가 예전과 달리 꾸물거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동력 하나로 온 유럽을 제패했던 그랑다르메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  분명히 바그라티온의 뒤를 추격하던 그랑다르메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다름아닌 나폴레옹 본인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의 막내 동생 제롬이었습니다.  

 

 

** PS : 최근에 제가 좀 바빠서 목요일의 잡상편은 이번주에는 못 올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음주 월요일의 제롬 이야기는 어떻게든 올려보겠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항상 2019.12.09 07: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어떻게
    해도 이기는 운명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

  2. 흠흠흠 2019.12.09 0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칸나에와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로마군이 참패한 것도, 저렇게 2군 사령관 격에 해당하는 인물이 말을 안 들어서인데, 바그라티온 정말 나라 말아먹으려고 옹졸하고 졸렬하네요.

    설마 2차 세계대전 당시 그 유명한 바그라티온 작전이 저 사람 이름에서 따온 것은 아니겠지요. 바클레이 작전이라고 할 것이지.

    • 하이텔슈리 2019.12.09 2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기서 뻘짓을 하고 있기는 한데, 바그라티온은 분명히 유능하고 용감한 지휘관이죠. 아마 당시 러시아군 상층부에서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걸요.

  3. 푸른 2019.12.09 1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그라티온의 기묘한 모험...

    그와중에 다부는 어떻게 바그라티온보다 먼저 민스크로 갈 수 있었을까요?

  4. 깜구 2019.12.09 19: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스팅잘봤습니다^ㅇ^ (blogshare.co.kr)에서 수익형 블로그 '티스토리'와 애드센스 정보를 알려드리고 있어요~ 모든 정보는 무료로 이용 할 수 있다는 점! 블로그 유입도 가능하시니 한번 놀러와주세요~!

  5. 하이텔슈리 2019.12.09 2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롬이 원정 초기에 놓친 러시아군이 바그라티온의 2군이였군요.

  6. 루나미아 2019.12.09 2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부 진짜;;; 대단하네요
    그리고 제롬은 예전부터 왜 사령관직을 갖고 있었는지 의문이였는데 역시 제역할 못했나 보네요

  7. 웃자웃어 2019.12.11 0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당시에 러시아에서 귀족들은 사병이 있었나요?

  8. ㅇㅇ 2019.12.12 1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롬이 재롱이라도 부려서 늦은건가요


네만 강을 건너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나(Vilna, Wilna, Vilnius)에 입성하기까지 총 한 방 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겉으로 보기에는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프랑스군이 빌나에 입성할 때, 빌나 주민들의 반응을 봐도 그랬습니다.  당시 빌나는 러시아의 직접 통치 하에 들어간지 약 20년이 채 안 된 상태였었는데, 러시아계 관료들이나 러시아 측에 붙었던 폴란드계 귀족들은 러시아군이 철수할 때 그 뒤를 따라 함께 피난을 가버린 뒤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남아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계 주민들은 프랑스군을 해방군으로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당시 폴란드 창기병 부대를 이끌고 빌나에 거의 처음으로 입성했던 로만 솔틱(Roman Soltyk) 백작의 목격담에 따르면 거리와 광장은 환영 인파로 가득했고 창문들에는 여인들이 상반신을 내밀고 손수건을 흔들며 기뻐했습니다.  꽃다발과 함성이 난무했고요.

 

(1812년 당시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인 외젠 보아르네 휘하 참모진에 있던 알브레히트 아담(Albrecht Adam)이라는 종군화가가 스케치한 그랑다르메 보병들의 행군 모습입니다.  알브레히트 아담은 바이에른 출신의 독일인으로서, 1809년 전쟁 때 보아르네에게 종군 화가로 채용되어 이후 계속 바이에른 궁정 화가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 분은 스케치 뿐만 아니라, 나중에 전쟁이 끝난 뒤 이런 스케치와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여러 석판화와 유화도 그려 꽤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그 그림 중 일부는 지금도 유럽 곳곳의 박물관에 걸려 있다고 합니다.  사진은 제가 요즘 거의 베끼다시피 하고 있는 아담 자모이스키의 책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에 포함된 그림입니다.  당시 알브레히트 아담은 주로 이탈리아인들로 편성된 제4군을 따라다녔다고 하니까 저 그림 속 병사들도 아마 이탈리아군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군이 빌나에서 찾아낸 것은 다 타버린 러시아 군수품의 잿더미 뿐이었습니다.  빌나와 그 인근 지대는 러시아군이 이미 수개월에 걸쳐 장기 주둔하며 먹을 것을 박박 긁어먹고 간 뒤였기 떄문에 식량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박박 긁어모았던 식량은 러시아군이 철수할 때 용의주도한 바클레이가 모두 불태워 버렸고요.  그런 상황은 원래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후방지대에 엄청난 양의 군수품을 잔뜩 쟁여놓았습니다.  그러나 네만 강을 건너자마자, 정확히 이야기하면 네만 강을 건너기 전부터도 말들이 사료 부족과 형편없는 도로에서 기진맥진하여 빠르게 죽어쓰러지기 시작했고, 특히 네만 강을 건넌지 얼마 안되어 불어닥친 폭풍우 속에서 수만 마리의 말이 죽어버린 것이 상황을 정말 악화시켰습니다.  진흙구덩이와 물웅덩이 속에서 말들이 허우적거리다 죽어버리자, 식량을 후방에서 새로 실어오기는 커녕 그나마 이미 싣고 오던 것조차도 버리고 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버려야 했던 짐 중에는 말들의 먹이인 귀리도 잔뜩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곧 더 많은 말들이 영양 실조로 죽게 되었고 상황은 기하급수적으로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랑다르메를 덮친 폭풍우로 인해 진흙탕이 된 도로에서 고생하는 포병대를 그린 모습입니다.  이 그림도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에 포함된 것입니다.  Christian Wilhelm von Faber du Faur라는 분이 그린 석판화입니다.  이 분도 남부 독일인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화가인데,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에 배속된 종군 화가였습니다.)

 



그렇게 빌나로 반입되는 식량은 전혀 없던 반면, 먹여살려야 하는 입들은 삽시간에 깜짝 놀랄 정도로 잔뜩 몰려들었습니다.  후방 뿐만 아니라 전방에서도 많은 그랑다르메 병사들이 절뚝거리며 빌나로 몰려든 것입니다.  낙오병과 환자, 부상병들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40만 그랑다르메 중 상당수는 단련된 병사들이 아니라 단시간에 긁어모은 어린 신병들이 많았는데, 특히 그런 신병들은 부족한 식량과 열악한 도로 및 위생 환경에 버티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총상이 아닌 강행군에 의해 발과 다리에 생긴 부상과 함께 온갖 질병으로 인해 빌나에 차려진 야전 병원에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네만 강을 건넌지 1주일 만에, 아무 전투가 없었는데도 놀랍게도 이들의 숫자는 3만 명에 달했습니다.  전체 병력의 7~8%에 해당하는 인원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빌나 및 인근 지역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주민들의 기쁨도 삽시간에 식어버렸습니다.  주민들은 나폴레옹이 과거 영광을 누리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복원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어렵더라도 최소한 러시아의 농노제라는 신분의 예속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민들은 곧 나폴레옹에겐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령 7월 3일, 나폴레옹은 리투아니아 정부 수립을 발표했는데, 이는 바르샤바 공국과의 합병을 원천 봉쇄하고 그저 리투아니아 지역에서의 징병과 식량 징발을 실행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 명백했습니다.  열의에 찬 빌나 대학의 학생들이 일종의 정치 모임을 만들어 프랑스군 점령 지역은 물론 러시아군 점령 지역에서도 농민들에게 러시아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선전하겠다는 뜻을 전하자, 나폴레옹은 '사회 정치적 소요를 원치 않는다'며 그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또 빌나 대학의 학장인 얀 스나이데츠키(Jan Sniadecki)와 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이야기가 나오자 '그 사람은 굉장히 뛰어난 황제요 !' 라며 노골적으로 알렉산드르의 편을 들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바르샤바 공국에서 일단의 폴란드 애국자들이 먼 길을 찾아와 폴란드 왕국의 부활을 건의하자 '내 통치 하에는 이해가 서로 충돌하는 많은 집단이 있고 나는 그들의 충돌을 조절해야 한다'라며 그들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이 전쟁이 벌어진 주요 원인은 크게 2가지, 영국-러시아 간의 무역 그리고 폴란드 왕국의 부활에 대한 러시아의 반발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러시아 항구를 영국으로부터 닫아야 했고 또 폴란드인들의 충성이 꼭 필요했습니다.  애초에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은 도저히 상존할 수 없는 서로의 이해 관계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의 팔을 비틀어서라도 어떻게든 러시아와의 동맹을 다시 끌어내려 했습니다.  즉, 나폴레옹이 이 전쟁에서 바라는 것은 알렉산드르와의 화해였고, 그 때문에라도 나폴레옹은 끝끝내 농노 해방령이나 폴란드 왕국의 부활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주민들의 민심을 이반시킨 것은 그런 민족주의에 대한 배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배고픈 병사들은 어떻게든 먹을 것을 구해야 했고, 당연히 곳곳에서 난폭한 약탈이 자행되었습니다.  그랑다르메의 제1진은 언제나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했지만, 그들이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을 다 훑어먹으며 지나가자, 제2진을 맞이하는 것은 텅빈 마을들과 버려진 농토 뿐이었습니다.  농민들은 그랑다르메를 산적떼로 인식하게 되었고, 프랑스군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농민들은 얼마 안되는 식량과 가축을 몰고 깊은 숲 속으로 피난을 떠나버렸습니다.  농민들은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프랑스놈들은 우리의 족쇄를 풀어주러 왔다는데, 우리 신발까지 벗겨가더라."

그랑다르메의 병사들도 그에 대응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계 주민들을 사실상 적으로 대했습니다.  요제프 에즈몬트(Jozef Eysmont)라는 시골 신사는 빌나 인근에 있던 자기 장원으로 들어오는 프랑스 기병대를 전통에 따라 빵과 소금으로 환대하려 했으나, 그들은 곧 그의 창고와 마굿간을 탈탈 털더니 더 나아가 아직 익지도 않은 밀과 보리를 다 베어버리고 집안까지 쳐들어와 구석구석을 뒤집어 귀중품을 빼앗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들고가지 못하는 모든 가구를 아무 의미 없이 때려부수고 창문도 하나하나 다 깨어버렸습니다.  그의 마을 전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물론 무덤까지도 프랑스군의 약탈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한 폴란드 장교는 그에게 빵 한조각을 구걸하며 다가오는 거지를 밀어내려다 그 거지가 그의 친구이던 폴란드계 귀족인 것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폴레옹도 이런 약탈에 대한 보고를 당연히 들었고 대노했습니다.  그는 약탈자들에 대해서 일체의 관용을 베풀지 말고 즉결 처분에 처하도록 엄명을 내렸습니다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식량을 공급받지 못하는 군대는 약탈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병사들은 굶어죽으나 총에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절망과 체념이 섞인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병사들이 취할 행동은 딱 하나였습니다.  탈영이었지요.  탈영은 광범위하게 일어났습니다.  특히 고향에서 너무나 먼 리투아니아 현지에서 탈영병들은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떼를 지어 산적떼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곳곳에서 현지 주민들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 장교나 관료들까지 습격했는데, 이들 때문에 나폴레옹의 명령서를 전달하는 파발마들의 활동이 제약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탈영병들의 숫자는 최소 3만에서 최대 9만까지 되었다고 하는데, 탈영병의 숫자가 이렇게 너무 많다보니 이들을 체포하는 대로 다 처형할 수도 없었습니다.  간혹 이들을 잡아들일 경우 일부만 처형하고 대부분은 다시 부대에 편입시켰는데, 이들은 대부분 다시 탈영했습니다.

결국 네만 강을 건넌 뒤 나폴레옹에게 들어오는 것은 온통 나쁜 소식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나쁜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불시에 네만 강을 건너 빌나를 들어친 것은 확실히 기습 효과가 있었고, 그로 인해 러시아군을 궤멸시킬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Albrecht_Adam

https://en.wikipedia.org/wiki/Christian_Wilhelm_von_Faber_du_Faur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ranken 2019.12.02 0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군에서 군복무한 병사들이 하나같이 하소연하는 게 행군이 생각이상으로 힘들고 부실한 전투화 땜에 발바닥 및 발목에 물집,상처까지 생겨 이중으로 힘들었다는 건데 인프라가 없다시피한 당시엔 3만여명의 부상자는 평범한 수준이었겠죠. 군납비리가 한국군 이상으로 만연해서 군화 재질도 좋지 못했던 것도 감안하면 선방했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매사 꼼꼼했던 나폴레옹이 이걸 몰랐을 리는 없으니 이런 낙오병도 계산에 넣어 대군을 꾸린 거겠죠.

    • reinhardt100 2019.12.02 1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군화문제 이거 꽤나 중요합니다.

      독소전 당시 소련군이 심각하게 직면한 문제 중 하나가 군화문제입니다. 가장 심각했던 공업용 소금과 비타민 섭취보다 후순위이긴 하지만 군화가 없어서 병력충원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이걸 해결해준게 미국의 랜드리스인데 최소 1500만 켤레의 군화가 소련에 급송됩니다.

      냉전기 소련군이 기계화에 집착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군화문제입니다. 소련식 발싸개나 우샨카 같은 신발 아니면 인민군이 쓰는 지하족 같은 운동화로 진격하다간 며칠만에 발이 아작나니 최대한 기계화해야 후유증이 덜할 거니까요. 농담으로 들으실지 모르지만 이게 현실이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군이 발싸개 퇴출한게 2010년대였으니까요.

    • 기리스 2019.12.02 14: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발싸개를 자신들의 전통, 자존심 같은 걸로 여기면서 옹호하는 러시아인들이 꽤 되더군요. 것도 신발 나름이고, 민간이나 군에서도 해군 같이 구두 많이 신는 곳은 옛날부터 양말이 보급되었죠.

    • 카를대공 2019.12.02 1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군대에서 인상 깊게 읽은 책의 구절 중 하나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베트남 군인들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베트남 군인들은 폐타이어로 된 신발을 신고 행군을 했다"
      그당시에도 기겁을 했는데 나시카님 이번주 글을 보니 그때가 떠오르네요.

    • [][] R.F.[][] 2019.12.06 1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reinhardt100: 러시아식 전통 펠트 방한화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우샨카가 아니라 '발렌끼' 입니다.
      우샨카는 소련 및 러시아군 특유의 방한모죠 ^^

    • reinhardt100 2019.12.06 14:14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제가 잘못 적었네요. ^^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흠흠흠 2019.12.02 0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력이 솜사탕처럼 녹아내리고 있네요. 약탈행위를 전혀 못 잡는 것으로 보아 나폴레옹이 대노했다는 것도 그냥 연기인 것 같습니다. 진짜 잡으려고 마음 먹었으면 웰링턴처럼 약탈행위 잡았겠죠. 저렇게 본국에서 멀리 떨어질 수록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소속 군부대 밖에 없을텐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현지에서 산적떼를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죠? 못 배운 사람들이라서 그러나.

    • ㅇㅇ 2019.12.02 2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 멀어서 돌아가기에도 막막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싶습니다. 빌뉴스에서 바이에른까지 1000km, 파리나 북이탈리아까진 1500km에 가까우니까요

  3. 리순센 2019.12.02 1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직 본격적인 시작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정신이 아득해지네요.

  4. 장웅진 2019.12.02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째 <알기 쉬운 제2차 세계대전사 제3권 - 대초원의 불꽃>을 다시 읽는 기분입니다. 나치독일군을 해방군이라며 환영했던, 스탈린에 의한 인공대기근을 겪어야 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나치독일군이 집단농장을 해체하기는커녕 그걸 계속 이용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을 수탈하고 괴롭히자 파르티잔으로 변해갔더라는...

    • reinhardt100 2019.12.02 1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크라이나나 백러시아, 발트 3국, 심지어 폴란드조차도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을 환영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일단 제국의 괴뢰국이긴 해도 독립을 약속했던 것도 있습니다. 하나 더 1917년 이후 철도 전격전 당시 약 150만 독일 동방 점령군이 제정 러시아보다 훨씬 공정한 점령통치를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독소전쟁 초기 독일군에 대한 환상이 있던 이들 지역 주민들이 모두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볼 수 밖에 없었죠. 심지어 우크라이나에서는 나시카님이 쓰신대로 빵과 소금을 뿌리면서 열렬히 환영했죠.

    • Franken 2019.12.02 19: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만일 나치독일이 점령지 주민들을 인간 대우 해주었다면 독소전쟁의 향방 자체가 달라졌을 겁니다. 파르티잔 퇴치하는 데만 30여만명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니 일개 야전군 수준의 이 병력이 소비에트 전선에 투입되고 주민의 협조까지 얻으면 소련으로썬 매우 난감한 상황이 되었을 테죠.

    • reinhardt100 2019.12.03 1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독소 전쟁 당시 독일군이 투입한 후방 치안 병력만 30만이 넘었지만 실제로는 더 투입했다고 봐야 합니다. 우선, 상당수 동맹국 병력이 고려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특히 루마니아나 헝가리군의 경우, 심하면 1/4 이상이 자국 근처의 점령지에 주둔하고 있던 군정통치용 병력이라 막상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죠. 루마니아가 대표적인데 80만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는데도 전선에 전개한 병력은 약 50만 선에서 왔다갔다 했습니다.

      하나 더 고려한다면 각 지역의 민병대 병력이나 독일 본토에서 급파된 경찰 출신 혹은 무장친위대 제8사단 플로리안 가이거 같은 병력도 꽤 됩니다.

      이런 병력들까지 고려한다면 최소 40만은 넘어가야 한다고 전 봅니다.

  5. keiway 2019.12.02 16: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수록 당시의 생활/기술 수준으로는 러시아 원정 실패는 필연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폴레옹도 그걸 모르지는 않아서 러시아와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화평을 맺으려 했지요... 그래도 결국은 '내가 한방 쎄게 빡 치면 나한테 항복하겠지' 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나폴레옹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나폴레옹의 실책과 그로인한 몰락이 참 아쉽게 느껴집니다.

    • 카를대공 2019.12.02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술 수준이라는 말씀이 딱인거 같습니다.
      뭐랄까 대자연이 "하지마라"고 강요하는 느낌?
      사실 나폴레옹과 당시 프랑스니까 당시 수준으로 모스크바까지라도 갔다고 생각합니다.

  6. 카를대공 2019.12.02 1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원정 당시 비전투 손실이야 유명하지만 네만강 건너자마자 꼴이 무척 심각했네요.정말 상상 이상입니다.
    항상 좋은 정보로 재미난 글 써주셔서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7. 웃자웃어 2019.12.03 2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게 있는데 당시의 기병과 포병은 모병인가요? 아니면 강제징집 인가요?

    • nasica 2019.12.04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질문인데 답을 잘 모르겠군요. 그러나 기병과 특히 포병이 보병보다 급료가 좀더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자원병들로 충원되었을 것 같습니다.

    • Franken 2019.12.05 14:50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병은 말을 다루어야 한다는 특성상 아무나 못하여 어렸을 때부터 타본 경험 있는 부유층 자제들이 주로 지원했고 군에서도 선호했습니다. 포병 역시 당시 대포가 직접사격 위주였다지만 그래도 탄도학 같은 산수능력은 있어야 명중율이 나왔기에 학식을 갖춘 중산층 이상 자제를 선호했지만 뽀대가 기병보다 안 나고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단점 때문에 지원자가 적어 급하면 일반 서민도 받는 등 상대적으로 문이 열려 있었죠.

    • 웃자웃어 2019.12.05 2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병과 포병이 숙련도를 요구하기 때문인가요? 그렇다면 일반 보병과 비교했을때 복무기간은 어느정도 되나요?


6월 23일 아침, 나폴레옹은 미리 준비해둔 감동스러운 연설을 통해 '제2차 폴란드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이 전쟁을 통해 지난 50년 간 러시아가 유럽에 보여주었던 오만한 영향력을 분쇄할 것이라고 병사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당연히 병사들은 'Vive l'Empeurer !'를 외치며 호응했고, 나폴레옹을 속으로 싫어하던 장교들과 병사들마저도 그 광경에는 감탄해마지 않았습니다.  그 날 저녁부터 나폴레옹은 소수의 부하들만 데리고 네만 강가를 달리며 적절한 도하 장소를 물색했고, 마침내 밤 10시에 제13 경보병 연대가 보트를 이용하여 어둠 속에 조용히 강을 도하했습니다.  네만 강 동쪽 강변을 장악한 이들의 엄호 속에서 에블레(Jean Baptiste Eblé) 장군의 공병대가 3가닥의 부교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에블레 장군입니다.  이 분이 유명한 것은 네만 강을 건널 때보다는 베레지나 강을 건널 때의 공적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니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이 분이 시작해서 이 분이 끝냈군요.)

 



프랑스군과 대치하고 있던 러시아군은 평소에도 주기적으로 네만 강변을 정찰하며 프랑스군의 도하를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작업이 한창인 어둠 속에서, 마침내 한 무리의 러시아 경기병 정찰대가 제13 경보병 연대의 경계선 앞에 나타났습니다.  앞에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의 군부대가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러시아군의 지휘 장교는 프랑스어로 수하를 했습니다.

"Qui vive ?"  (직역하면 Who lives ? 정도이지만 '앞에 누구냐?' 정도의 질문입니다.)

거기에 대해 프랑스 장교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France !" (글자 그대로 '프랑스다 !' 네요.  왠지 멋있는 답변인데요?)

연이어서 욕지꺼리들과 함께 프랑스군이 일제 사격을 하면서 이 짧은 만남은 끝나버렸습니다.  나폴레옹도 이 머스켓 일제 사격 소리를 듣고 짜증을 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가능한 한 조용히 강을 건너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더 이상의 소란 없이 작업은 착착 진행되었고, 나폴레옹은 다시 막사로 돌아가 2시간 정도 토막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새벽 무렵 이 부교들이 완성되자, 나폴레옹이 주변 언덕에 올라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다른 한 손으로 쥔 망원경을 통해 바라보는 가운데 다부 휘하의 사단들이 제일 먼저 이 부교들을 통해서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그랑다르메가 3량의 다리들을 통해 강을 건너 러시아 땅으로, 좀 더 정확하게는 러시아령 리투아니아 영토로 행군해 들어가는 모습은 대단히 장엄한 모습이었습니다.  원래 프랑스군의 정장 군복은 멋있기는 해도 그다지 편한 옷은 아니었기 때문에, 긴 행군에 나설 때면 정장 군복은 돌돌 말아 배낭 속에 집어넣고 좀더 편하고 헐렁한 셔츠 및 회색 바지와 가벼운 모자 차림으로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 극적인 날을 위해 병사들은 전투에 나설 때처럼 정장 군복을 차려입고 다리를 건넜기 때문에 그랑다르메의 도하는 더욱 볼 만한 광경이었습니다.

 

 

(프랑스 근위대의 군복입니다.  도저히 활동성이 좋은 의복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그래도 전투에 나설 때 저런 복장으로 나서면 확실히 사기는 좀 오를 것 같기는 합니다.)

 

 

(네만 강을 건너는 그랑다르메의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의 목표는 당연히 러시아 제1 군의 총사령부이자 알렉산드르의 임시 행궁이 있던 빌나(Vilna)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전쟁 시작 전에 '목표는 일단 스몰렌스크다, 거기서 러시아의 식량을 먹으며 러시아 비용으로 겨울을 나면서 알렉산드르를 압박하겠다' 라고 했다가 다음 번에는 '목표는 모스크바다,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심장이다' 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도 오락가락 했던 것은 러시아가 워낙 넓은데다 아무래도 수비적인 태세였던 알렉산드르가 결전을 회피하고 계속 후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5월 들어 나폴레옹에게 들어온 정보 중에 아주 좋은 것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빌나에 왔다는 것입니다.  이건 분명히 러시아가 국경에서 물러나지 않고 그랑다르메의 침공에 맞서 싸우려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빌나라면 네만 강을 건너 불과 2~3일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기습적으로 강을 건너 빌나를 들이친다면, 잘 하면 러시아 제1 군을 격파하고 아우스테를리츠에서 그랬던 것처럼 알렉산드르를 다시 한번 무릎 꿇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40만 대군이 강을 건너는데 러시아군이 눈치를 채지 못할 리가 없었습니다.  6월 23일 밤의 일제 사격은 결국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고 미친 듯이 말을 달린 러시아군 전령이 빌나에 들어온 것은 24일 밤 자정이 넘은 뒤였습니다.  하필 이 날 밤은 빌나에 있던 베니히센(Levin August von Bennigsen)의 저택에서 알렉산드르를 위한 무도회가 있던 밤이었습니다.  이 날 짜르는 베니히센의 와이프 및 바클레이의 와이프 등과 인사치레의 춤을 같이 춘 뒤 빌나 사교계 최고의 미인 몇 명과 춤을 추고 기분이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조용히 신하가 접근하여 귓속말을 전했고, 알렉산드르는 무도회 분위기를 깨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비웠습니다.

 

(나폴레옹이 정확하게 네만 강 어디를 건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빌나와 네만 강은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당장 새벽부터 주요 참모들과 장관들이 새벽잠을 설치고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습니다만, 급히 소집된 회의에서 아무도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이건 사실상의 총사령관 역할을 자임하고 있던 알렉산드르의 잘못이었습니다.  여태까지 여러가지 안을 손에 쥔 채 아무 것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것이 바로 그였으니까요.  장기 주둔을 위한 식량과 물, 숙소 등의 문제 때문에 러시아 제1 군은 네만 강변 곳곳의 마을에 넓게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군은 당장 벌어진 프랑스군의 침공에 제대로 대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방어든 공격이든 뭐라도 해보려면 당장 병력을 집결시켜야 했는데, 그러려면 적어도 며칠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당장 이틀 안에 빌나 코 앞에 나타날 거리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군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후퇴였습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네만 강을 건넜다는 소식은 빌나 시내에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젊은 러시아 장교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전쟁이다 !'를 외치며 기뻐했습니다.  이들은 당장이라도 프랑스군과 결전을 벌이고 빛나는 승리를 거둘 것 같은 기세였습니다.  하지만 당장 이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퇴각'이었습니다.  장교들의 낙담과 분노는 가히 짐작할 만 했습니다.  그들 중 아무도 자신들이 전투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조차 제대로 이해를 못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이틀이면 빌나에 나타날 거라고들 했지만, 당장 그 다음날인 6월 26일 아침 일찍, 프랑스군 기병대가 빌나 인근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당장 알렉산드르의 용기는 어디론가 날아가버렸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약간 창피할 정도로 서둘러 빌나를 빠져나갔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빌나는 일대 공포와 혼란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와중에 그래도 침착함을 유지한 것은 바클레이였습니다.  그는 질서있게 부대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리고 빌나에 접한 네리스(Neris) 강에 놓인 다리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 몇 달간 빌나 시내로 열심히 끌어모았던 군수품과 식량에도 불을 질렀습니다.  

 

 

(빌나, 아니 빌니우스(Vilnius)의 모습입니다.  꽤 아담하면서도 아름다운 도시같네요.)

 



2일 후인 6월 28일, 나폴레옹이 빌나에 입성했을 때까지도 바클레이가 군수품에 질렀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과 함께 빌나에 들어온 다부는 애처가였습니다.  그는 다음날 부인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은 총 한방 쏘지 않고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리투아니아를 정복한 것에 대해 무척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수선한 빌나에 들어와 불과 48시간 전에 알렉산드르가 숙소로 쓰던 주교관에 자리를 잡은 나폴레옹의 생각은 다부와는 달랐습니다.  그는 낙담하거나 실망했다기 보다는 굉장히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르와 러시아군이 이렇게 허겁지겁 도망가버린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군이 대군을 빌나까지 전진배치했을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르가 최전선까지 나와 군을 통솔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자신과 대회전을 벌일 각오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는데, 막상 다가가니 러시아군은 어이없게 줄행랑을 쳐버린 것입니다.  많은 군수품에 불까지 지른 것을 보면 뭔가 계획적으로 퇴각을 한 것 같지도 않고 서둘러 도망을 친 것 같았습니다.  그로서는 러시아군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직도 러시아가 어떻게 돌아가는 나라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Jean_Baptiste_Ebl%C3%A9
https://en.wikipedia.org/wiki/Levin_August_von_Bennigsen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reinhardt100 2019.11.25 07: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 네만 강, 네무나스 강을 넘어 도하했네요.

    만약이지만 프랑스군이 빌나우스까지의 거리만 행군하면서 러시아군과 결전을 벌였다면 꽤나 재미있는 결과를 낳았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두 배 가까운 병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밀어붙이는 프랑스군의 공세를 러시아군이 막이낸다? 무리라고 봅니다.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과 추축국 지원병력은 브레스트, 민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등에서 연이어 소련군 주력을 붕괴시키는데 성공했는데 비슷한 결과가 나왔을 거라고 봅니다.

    또한 숫적 우세도 우세지만 더 큰 이유가 독소전쟁 당시 소련은 '180개 사단이 섬멸된 뒤 360개 사단을 전선에 내보낸다.', '모스크바가 함락되어도 우랄산맥을 넘어서 싸운다'는 등 의 전쟁지도가 가능했지만 이 당시 러시아는 그럴 수 없었거든요. 국가 주력농업지역인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 모스크바 주변 평원 지대 전부가 프랑스군에 넘어가면 폴란드-모스크바 전쟁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났을 테니까요. 즉, 파탄난 전시경제로 전쟁지속? 무리입니다.

  2. JS Choi 2019.11.25 0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도 그런 뉘앙스의 문장이 종종 나오죠.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점령 후 러시아에서 취했던 여러 조치들이 사실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개화되고 훌륭하고 합리적인 것들이었다는...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나폴레옹도 결국 합리적인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남들도 자기처럼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라고 짐작하는 비합리적인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었나 봅니다.

  3. 하이텔슈리 2019.11.25 0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갑자기 든 생각인데, 프랑스군답지 않게 더 천천히 진군했다면 러시아가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는 시간이 생겨서 나폴레옹이 원했던 결전을 벌일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모 책에서 봤던 유머 하나가 생각납니다. 1차대전 한 독일 장군의 불만 "러시아놈들의 통신은 방수하기 쉬워서 그놈들이 언제 어디로 올지 쉽게 알았다. 그런데 그때 거기로 가보면 언제나 그놈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세웠던 계획이 엉망이 됐다!")

    • 유애경 2019.11.25 08: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재미있는 유머네요!

      에블레장군의 이름이 애벌레랑 겹쳐서 조금 웃었습니다.

  4. 푸른 2019.11.25 1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너무나도 철저히 준비하는 바람에 알렉산드르가 정신차리고 후퇴한거 같네요.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인가 봅니다

  5. spitfire 2019.11.25 1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알렉상드르가 도망가는게, 자료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사장님 주재 미팅이 잡혀 황급히 도피성 외근을 나가는 팀장의 모습 같네요~

    러시아 원정의 실패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고만고만한 사이즈의 나라들이 대국의 마인드를 이해하지 못한 것도 한가지 이유라 생각합니다. 확실히 BRICs 같은 대국의 인간들은 경험이나 상식 자체가 다른거 같더라고요.

    • reinhardt100 2019.11.25 14: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동감입니다.

      사실, 한국에서 러시아를 보는 눈이 '이빨빠진 불곰국(?)'으로 보는 경향이 최근 30년간 무척 강해진 듯 합니다.

      18세기 후반 이미 서방권에서는 중국이 크게 쇠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대신 러시아제국이 미래의 패권국 중 하나가 된다고 이미 식자층에서는 다들 하나의 정론이 된 상황이었죠. 이걸 확실히 각인시켜준 전쟁이 바로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이기도 합니다.

      지나사변, 흔히 말하는 중일전쟁 역시 대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전면전이기도 합니다. 일본이 1890년대 이후 계속 중국에 대해 우세한 입장을 취하다보니 중국의 잠재적 국력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선제공격으로 전면전을 개시했는데 막상 중국의 잠재적 국력이 모두 투사되기 시작한 남경함락 이후부터는 전쟁 자체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이왕 말이 나온김에 계속 쓰지만 중일전쟁은 결코 일본의 일방적인 우세로 진행된 전쟁이 아니고 주력 또한 장개석 영도하의 국민당군이 처음부터 끝까지 100만 지나파견군 및 40만 이상의 관동군, 주몽군 병력을 상시 전개를 시키게 만들면서 싸운 전쟁이었습니다.

      의외로 간과된 사실이 중일전쟁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화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더 많은 정화준비 및 국채상환능력을 보유하냐?' 이 점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죠. '중국 국민당 정권의 법폐냐? 일본의 조선은행권 및 왕조명정권의 중앙준비은행권 등 기타 엔계 은행권이냐?' 이 질문하나로 전쟁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것인데 이것 하나를 이해하지 못한 일본에게는 이미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대 한국에서 유달리 강해지는 타국 경시 문화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 나삼 2019.11.25 2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번 반일선동과 그에 휩쓸린 일부 국민들을 볼때면 타국.....;; 세계 최상의 경제대국을 우숩게 보는 관점에 소름이 돋기도 합니다. 구한말 조선의 모습이나 1820의 러시아 장교들 이 오버랩된달까요..

    • ㅇㅇ 2019.11.29 0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한일 관계를 걱정하고 있지요.
      그런데 저 위의 4천만 총옥쇄 주장하시는 윗분 같은 사람들은 좀...
      중국의 사드 보복때 한 중국 인사가 소국이 대국에 덤비면 안된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죠.
      이번 한일 관계에서마저 '소국인 한국이 대국인 일본에 덤비면 안 된다'는 식의 사대주의를 표하는 분들이 당시의 친중파들이거나 그들의 맥을 잇는 분들로 보여 유감스럽습니다

    • ㅇㅇ 2019.11.30 1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상대가 공격을 했으면 버티거나, 빌거나 둘 중 하나인데 덤비긴 뭘 덤벼요?
      누가 보면 한국이 일본 수출규제에 속수무책이라서 망하기 전에 일본에 선전포고해서 쳐들어가려는 건 줄 알겠네 ㅋㅋㅋ

    • ㅇㅇ 2019.11.30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베한테 도게자? ㅋㅋㅋㅋㅋㅋㅋ 이 분은 진짜 대한민국이 일본에 선전포고해서 쳐들어간 걸로 알고있나보네

  6. spitfire 2019.11.26 1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reinhardt100/ 한국인들이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이 못사는 나라라고 무시하는 거 보면 정말 실소가 나올 뿐입니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잘 나가니 이제 다른걸로 까긴 합니다만...

    타국/타민족/타문화/타경제 경시 문화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가 상대방보다 낫다라는 이분법적인 생각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구조가 지속된다면 십수년 내에 큰 전란이 발생하지 않을까 항상 걱정하고 대비하며 살고 있습니다.

    • reinhardt100 2019.11.27 0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쟁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악화되는 환경과 경제인데 어떤 결론이 나오긴 할 겁니다.

      한국이 저들 국가보다 기초과학기술이 뛰어난지? 국력이 압도적인지? 답 나오지 않습니까? 저도 그냥 실소하면서 속으로 절망밖에 없습니다. 왜 베네치아 공화국을 제외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16세기 이탈리아 전쟁기를 거치면서 정치적 독립을 잃고 합스부르크 제국에 종속되었는지 생각해보면 답은 나옵니다.

  7. keiway 2019.11.27 16: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일부'가 아닌 전체의 '한국인'을 얘기하면서 본인은 한국인이 아닌 것 처럼 가볍게 비판하는 것을 보면 일단 반감이 먼저 듭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이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비판하는 거라면 자신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처럼 진지한 자세로 임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그 집단에서 탈출한 뒤에 비웃는 거라면 할 말 없지만요.

    • ㅇㅇ 2019.11.29 08:35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 이 분은 중도란 게 뭔질 모르나
      공동체의 가치도 소중히 하자는 말에 전체주의자냐고 몰아가는 건 무슨 심보일까요?

    • ㅇㅇ 2019.11.29 1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 : 금모으기 운동 하는데 감히 집을 사?
      소비, 시장경제, 주택시장, 경제활동의 자유 이런거 다 모르겠으니 주택 거래하면 안 돼!

  8. 펱로스 2019.11.29 0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 글 잘 보고 갑니다.

  9. 주연공대생 2019.12.01 04: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구독할게요!


그런데 놀랍게도 러시아군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네만 강을 따라 늘어선 여러 마을에 분산되어 숙영 중이었는데, 주로 사열과 분열 같은 제식 훈련만 죽어라고 했습니다.  장교들은 자기들끼리 무도회와 파티를 벌이며 시골 아가씨들과의 연애 모험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짜르 알렉산드르를 따라 빌나에 와있던 국무부 장관 쉬시코프(Aleksandr Semyonovich Shishkov)는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마치 적군이 수천 km 먼 곳에 떨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너무나도 근심걱정이 없는 듯 했다.  심지어 적군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들어오지 않았다."

적군에 대한 소식은 커녕 아군인 러시아군으로부터도 아무 뉴스가 없었습니다.  러시아군이 정말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의 배치와 이동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노력도, 전쟁 발발시 어디로 진격해올지에 대한 예측 노력도 없었습니다.  러시아군은 자기들이 주둔 중이던 그 일대 리투아니아 지역의 지도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전략도 계획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긴 네만 강을 따라 뿔뿔이 분산 배치된 러시아군으로서는 만약 당장 내일이라도 프랑스군이 어느 한 곳에 집결하여 도하를 한다면 속수무책으로 돌파당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군이 이런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짜르 알렉산드르의 결정 장애와 오지랍이었습니다.   총사령관을 임명하지도 않고, 공격인지 수비인지도 분명히 하지 않고, 부하들에게 일임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닌 정말 어정쩡한 그의 태도 때문에 러시아군은 방향성을 잃고 뭘 어찌해야 할 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습니다.  가장 활발했던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던 많은 참모 장교들이었습니다.  사실 그런 참모들이야말로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도 없고 책임지는 것도 없이 그저 번쩍번쩍 화려한 군복만 차려 입은 군더더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일 수록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 머릿 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말이나 마구 던지는 법입니다.  그렇쟎아도 전략을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알렉산드르는 그런 아무말 대잔치 속에서 더욱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냉철한 머리와 뚝심을 가지고 전략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 역할을 맡은 것이 퓰(Karl Ludwig von Phull 혹은 Pfuel) 장군이었습니다.  이 분도 원래 프로이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1806년 예나 전투에서 빌헬름 3세의 수석 참모로 있다가 프로이센의 참패 이후 러시아에서 살 길을 찾은 많은 프로이센 장교들 중 하나였습니다.  비록 예나 전투에서 환상적인 참패를 빚어내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전통 있는 프로이센군에서 국왕 직속 수석 참모를 할 정도였으니 실력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알렉산드르는 그에게 중장 계급을 주며 역시 자신의 참모진에 배속시켜 전략안을 짜게 했습니다.

 

(퓰 장군입니다.  러시아군이 그의 제안대로 후퇴를 시작하자 러시아군 내에서 그의 인기는 바닥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결국 모스크바까지 나폴레옹에게 함락되자, 군 내에서 저 프로이센놈을 쳐죽이라는 아우성이 터져나왔고, 결국 그는 스웨덴을 거쳐 영국까지 도망쳐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실 후퇴 작전 자체를 그의 공로(?)로 돌리는 것 자체도 여러가지 이견이 존재하는데, 1813년에 짜르 알렉산드르가 영국에 있던 퓰에게 보낸 편지에는 러시아군의 후퇴 전략을 짠 공로를 퓰에게 돌리는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어이없게도 후퇴안이었습니다 !  나폴레옹과 총검을 맞대본 퓰의 눈에, 나폴레옹 쯤은 문제 없다고 큰 소리 쳐대는 러시아군은 절대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정면 대결은 신속한 참패를 부를 뿐이라고 판단한 퓰은 과감한 후퇴로 프랑스군의 예봉을 누그러뜨린 뒤, 후방 깊숙한 곳 어딘가의 요새를 거점으로 프랑스군에게 반격하는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후방 요새로의 후퇴만으로는 부족하며, 바그라티온의 제2 군을 측면에 남겨두었다가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의 주력인 바클레이의 제1 군을 쫓아 깊숙히 들어오면 그 후방을 치도록 권고했습니다.

이건 러시아 장교들이 보기에 말도 안되는 전략이었습니다.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거느린 러시아군이 (실제로는 러시아군이 더 적었습니다) 소중한 영토를 적에게 내주며 후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퓰이 제시하는 이유, 즉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평가는 러시아 장교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략을 정하지 못하던 알렉산드르의 마음에는 일찌감치 이 전략이 꽤 솔깃하게 들렸습니다.  그 이유는 역시 선진국 성공 사례였습니다.  바로 영국 웰링턴 공작이 포르투갈에서 토헤스 베드하스(Torres Vedras) 방어선을 이용한 초토화 전략으로 프랑스군의 백전노장 마세나를 물리쳤다는 소식은 러시아에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https://nasica1.tistory.com/210 참조)  이렇게 웰링턴이 코딱지만한 포르투갈에서도 후퇴 전략으로 성공했으니 드넓은 러시아에서는 당연히 성공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퓰의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엇습니다.  무엇보다, 비록 후퇴라고는 해도 오만한 영국 귀족 웰링턴이 썼던 전략이라면 러시아군이 써도 체면이 상하는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퓰은 참모 전공자답게 세부적인 요새 구축 후보지도 뽑아놓고 있었습니다.  바로 드리사(Drissa, Drysa)였습니다.  퓰이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드리사를 요새 구축 후보지로 뽑은 것은 그 곳이 빌나에서 후퇴할 때 모스크바와 상트-페체르부르그로 갈라지는 길 딱 중간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러시아군으로서는 만약 후퇴를 한다고 해도 모스크바와 상트-페체르부르그 이 두 도시를 모두 지킬 수 있는 곳까지만 후퇴해야 했는데, 드리사를 거점으로 방어선을 펼친다면 그 목적에 딱 맞는 위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퓰은 역시 세계적인 명장보다는 그냥 여러가지 안을 내놓는 참모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세운 전략은 실행에 옮기기에는 너무 빈틈이 많았습니다.  일단 웰링턴이 포르투갈에서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으로 재미를 본 것은 포르투갈이 바다와 산맥으로 가로 막힌 좁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처럼 드넓은 평원 지대에서 프랑스군을 요새로 저지해보겠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공성전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짜르 알렉산드르에게 평화조약을 강요한다는 목표가 분명했던 나폴레옹은 드리사 요새에 부딪힐 경우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우회해서 모스크바를 들이쳤을 것입니다.  또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영국 공병대와 나라를 지키겠다는 포르투갈 주민들의 전폭적인 협조, 그리고 무엇보다 영국 정부의 풍부한 군자금 덕분이었습니다.  러시아군에게는 드리사에 갑자기 거창한 요새를 구축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퓰의 작전 계획에 따라 1811년 말부터 드리사에는 대규모 토목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그 진척 상황은 매우 한심한 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퓰의 후퇴안이나 바그라티온의 공격안이나, 모두 알렉산드르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하는 사이에 시간은 속절없이 계속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의 생각보다는 훨씬 더 빨리 들이닥쳤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Karl_Ludwig_von_Phull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Aleksandr-Semyonovich-Shishkov
https://en.wikipedia.org/wiki/Ludwig_von_Wolzogen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ranken 2019.11.18 0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소전쟁 발발 직전하고 상황이 많이 비슷하네요. 당시 스탈린은 서방 및 각지의 스파이들이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단 정보를 보내옴에도 끝까지 히틀러는 미치지 않는 이상 양면전선을 열진 않을 거라고 굳게 신념을 지키는 바람에 소련군은 폴란드, 에스토니아 등 나치와의 협상으로 얻어낸 영토에 방어선을 제대로 구축 못하고 어영부영한 상태서 바르바로사 작전당시 제대로 손 써보지도 못하고 쓸려나가죠.

    • nasica 2019.11.18 21: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렉산드르의 경우가 좀더 어이없는 것 같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이 반드시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2. 푸른 2019.11.18 16: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번 글에서 기대를 하게 만들고는 첫 문장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ㅋㅋㅋㅋ

    나날이 글빨이 늘어나시네요ㅋㅋ

  3. 지나가던 2019.11.18 1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지랍->오지랖

  4. 루나미아 2019.11.18 2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기서 웰링턴이 생각치도 못한 기여를 ㅋㅋㅋ

  5. reinhardt100 2019.11.18 2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늦게 진격한 것이 문제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라스푸티차가 끝나는 5월 중순에 바로 공격했으면 러시아 주력군을 스몰렌스크나 드라사에서 포착 후 섬멸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거든요.

    실제로 독소전쟁이나 러시아 원정 당시 소련이나 러시아측의 후퇴속도가 꽤나 느린 편이었죠. 물론 초토화작전 수행딱문에 그런게 있습니다만 특히 후자는 너무 느리다보니 오히려 나폴레옹의 판단을 흐리게 한 측면도 있습니다.

  6. 웃자웃어 2019.11.19 2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가 그렇다고 예비전력까지 총동원해 공세전략을 폈다간 80~90% 졌을 겁니다.

  7. 중2병 2019.11.20 0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과 정면승부 하자는 러시아 장교들은 200년 뒤
    유니클로 때려잡고 정면승부로 무역분쟁 하자는 분들이랑 겹쳐보이네요.

  8. 샤르빌 2019.11.20 2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대육군이랑 정면승부라니.. 정말 패기로라도 그랬다면 러시아 원정의 결과가 크게 바뀌었겠네요..

  9. 허허허 2019.11.24 2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보병들 짱 쎄지 않나요? 아일라우나 하일스베르크를 생각해보면, 정면대결 해도 꿀릴 게 없어 보이는데 다들 러시아군에게 승산이 없다고 보시는군요.

    러시아 군이 그래도 프러시아 군 같은 추태는 부린 적이 없는데, 싸움 제일 못 하는 프러시아 군의 장교가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상대가 될 수 없음.' 이런 말 하면 누가 안 열받나요. 저 멀리 폴란드까지 원정가서 나폴레옹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준 러시아 군인데,

    홈그라운드에서 카알 대공식 영혼의 맞짱 한 번 떴으면, 프랑스군이 이긴다 해도 서로 걸레짝이 되버려서 진격도 후퇴도 못 하고 둘 다 바닥을 뒹굴었을 것 같아요.


이미 1811년부터 러시아는 프랑스와 언제 한판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1812년 6월 경 러시아는 거의 1년 넘게 전쟁 준비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나폴레옹을 맞이할 러시아의 준비 상태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요 ?  한줄 요약하자면 머리 수만 따지면 프랑스군의 그랑다르메에 비해 그다지 나쁘지 않았습니다.

원래 1805년 당시 러시아의 징집 제도는 일종의 지역 차출제로서, 지역 농노들 500명 중에서 4명의 장정을 병정으로 차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차출된 운 나쁜 젊은이에게는 25년의 병역 의무가 주어졌는데, 당시엔 전화는 커녕 우편도 변변치 않았는데다 어차피 본인이나 가족이나 모두 문맹인 경우가 많아서 가족과 연락을 주고 받을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25년 간의 병역을 다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면 사실상 가족이나 친구들이나 다 남남이 되어 있었고, 그걸 잘 아는 제대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마을에서 차출된 청년이 군대로 떠나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이 청년을 배웅했는데, 이건 사실상 일종의 장례식 같은 행사였다고 합니다.  아무도 이 청년이 살아서 가족에게 되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사정은 영국군도 비슷했습니다.  다만 영국군은 모병제라서 급여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는 점만 달랐지요.  여러 모로 영국군과 러시아군은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댓글에 '궁금'님이 알려주신 러시아 징집 장정의 배웅 모습입니다.  분위기가 장례식인 이유가 다 있습니다.)

  



러시아는 아우스테를리츠에서의 뼈 아픈 참패 이후, 나폴레옹과의 긴 전쟁을 예감하고 징집율을 500명 중에서 5명으로 20% 증강시켰습니다.  그 결과, 1806년부터 1811년 사이 기간에 새로 징집된 러시아군 병사의 수는 50만 명에 달했습니다.  게다가 1811년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대 했으나 아직 현역 복무에 적합한 나이와 신체 조건을 가진 제대 군인 약 6만을 재입대 시켰고, 1812년에는 당장 임박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징집률을 500명 중 7명으로 한시적으로 늘렸습니다.  덕분에 1807년 아일라우 전투 때는 러시아군 전체 숫자가 50만이 채 안되었으나, 1812년 9월 경에는 무려 90만이 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땅이 넓었고 사방에 적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1812년 5월 나폴레옹의 위협에 대적하기 위해 리투아니아에 집결한 러시아 야전군은 바클레이 드 톨리의 제1군 약 16만과 바그라티온의 제2 군 약 6만이 전부였습니다.  저 남쪽 오스트리아와의 접경 지대에는 토르마소프(Tormasov) 장군의 제3 군 약 5만이 있었고 후방에도 2개의 예비 군단 총 11만 정도가 대기하고 있긴 했습니다.  이런 지원부대까지 다 합하면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와 맞설 러시아군 야전군은 총 39만에 달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보시겠지만 당시 나폴레옹의 침공에 맞선 러시아 야전군은 크게 3개로서, 북쪽부터 바클레이, 바그라티온, 토르마소프가 각각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르마소프의 부대는 나머지 부대과 광활한 핀스크(Pinsk, 혹은 Pripet) 습지로 격리되어 있어서 사실상 협동 작전은 불가능했습니다.  애초에 토르마소프의 제3 군은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와 루마니아 쪽으로부터 직접 침공해올 것에 대비한 부대였습니다.)


(핀스크(Pinsk, 혹은 Pripet) 습지는 제1,2차 세계대전 때도 주요 장애물 역할을 했습니다.  그 때문에 나찌 독일군은 이 지역에서 모조리 물을 빼고 독일 주민들을 대거 이동시켜 식민지화할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윗 그림은 19세기 화가 이반 쉬시키(Ivan Shishkin)이 그린 핀스크 습지의 풍경입니다.)



이 정도면 나폴레옹에게 일방적으로 밀릴 수 밖에 없는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공세로 나갈 수도 있을 정도의 군세였지요.  게다가 당시 러시아 측은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의 군세를 실제보다 깎아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바클레이 드 톨리는 러시아로 침공해올 그랑다르메의 병력을 20~25만으로 보았고, 바그라티온은 20만, 베니히센은 19만 정도로 보았습니다.  러시아 측에서 가장 높게 평가한 숫자도 후방의 지원부대까지 다 합해서 35만을 넘지 않았습니다.  사실 지금도 과연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로 진격해 들어간 나폴레옹 휘하의 병력이 몇 만인가에 대해서 정확한 기록이 없긴 합니다.  많은 역사가들이 실제로 네만 강을 건넌 병력의 수를 대략 40만이라고는 하지만, 아마 당시 나폴레옹은 물론 그 누구도 실제로 몇 명이나 네만 강을 건넜는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네만 강 서안에 집결하여 최종 점검을 할 당시, 나폴레옹은 휘하 군단장들에게 "제발 솔직하게 각 예하 부대의 정확한 병력 숫자와 군수품 준비 상태를 파악하여 보고하라"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거짓말을 합니다.  나폴레옹의 요구는 끝이 없었고 그에 비해 사람과 돈과 물자는 부족해서 도저히 매뉴얼과 명령서대로 전체 부대의 편성을 완벽하게 해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장군들은 그냥 휘하 부대원의 수를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고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또 정확하게 보고하려고 해도, 당시 행정반에는 최신 데이터베이스와 고속 통신망은 커녕 전자계산기조차 없었으니 정확한 현황 파악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러시아 측에서는 후퇴 작전 따위는 애초에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여론은 러시아군이 네만 강을 건너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공격파의 논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러시아군이 공세를 펼쳐 먼저 폴란드를 정복하고 프로이센까지 진격한다면 프로이센은 물론 나폴레옹에게 짓눌려있던 오스트리아나 폴란드 내의 친러파들이 봉기할 것이므로 훨씬 더 유리하게 전쟁을 이끌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아우성은 저 멀리 후방의 상트-페체르부르그나 모스크바에서 더 요란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선에서의 거리와 용기는 정비례하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꼭 후방에서 편히 먹고 마시는 신사숙녀들만 공격하자고 아우성을 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장 총성이 울리고 옆 전우의 창자가 쏟아져 흙바닥에 뒹구는 것이 아니다보니, 최전선의 장교들도 나폴레옹 따위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며 당장 쳐들어가자고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젊은 장교들 뿐만 아니라 바그라티온도 당장 공세로 나가자고 짜르 알렉산드르에게 집요하게 매달렸습니다.  

특히 바그라티온은 오스만 투르크와의 접경에서 쿠투조프(Kutuzov) 장군 밑에서 복무하고 있던 러시아 해군제독 치차고프(Pavel Vasilievich Chichagov)가 내놓은 공격안에 열광했고, 알렉산드르도 거기에 상당히 혹해 있었습니다.   이 공격안에 따르면 이제 오스만 투르크와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니 발칸반도를 관통하여 프랑스령 일리리아(Illyria), 즉 현재의 크로아티아 지역을 공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쪽이 프랑스 제국의 '취약한 아랫배'라는 것이었지요.  여기를 들이치면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도 들썩거릴 수 밖에 없으니 후방이 불안해진 나폴레옹은 도저히 러시아 내부로 진격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에도 냉정한 두뇌들은 많았습니다.  치차고프 공격안을 그대로 수행한다면 오히려 오스만 투르크와 오스트리아가 화들짝 놀라 반-러시아 진영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졌고 이 공격안은 최종적으로 기각되었습니다. 


(치차고프 제독입니다.  그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복무한 이후 20대에 영국 해군 대학에서 공부를 했는데, 거기서 Elizabeth Proby라는 영국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29세의 나이로 귀국한 그는 즉각 엘리자베스와의 결혼 승인을 요청했는데, 당시 짜르이던 파벨 1세는 "러시아에도 신부감이 넘쳤는데 웬 영국 여자?"라며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이 겁없는 청년은 난동을 부렸고 당연히 즉각 투옥되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의 패기 넘치는 사랑에는 죄가 없었는지, 그는 또 금새 석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와의 결혼도 허락을 받았고 더 나아가 해군 준장으로 승진까지 했습니다.  불행히도 엘리자베스는 1811년 사망했고, 치차고프는 베레지나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빠져나가도록 해줬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1813년 이후 군을 떠나 프랑스로 가버렸고 두번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1849년 파리에서 죽었습니다.)



제1군 사령관이자 국방부 장관으로서, 실질적인 총사령관이었던 바클레이 드 톨리의 기본 계획은 무엇이었을까요 ?  그는 1807년 아일라우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뒤 병상에 누운 채로 '이제 나폴레옹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러시아 내부로 깊숙이 프랑스군을 유인하여 종심이 길어지게 만든 뒤 프랑스군이 분산되고 소모되면 그때서야 결전을 벌여야 한다'라는 전략 계획서를 만든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일라우에서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군의 사정을 반영한 계획서였고, 바클레이가 1812년에도 그런 후퇴안부터 고려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도 들뜬 러시아인들처럼 선제 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그가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던 짜르 알렉산드르는 선제 공격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입장이었는데, 이는 알렉산드르의 성격이 신중해서가 아니라 이 전쟁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촉발된 침략전이 아니라 외적의 침공으로부터 러시아의 성스러운 영토를 수호하기 위한 수호전이라는 인상을 대내외적으로 주고 싶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짜르가 그런 성향이다보니 당연히 바클레이는 그저 병력을 네만 강을 따라 주욱 펼쳐놓고 '프랑스군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강을 천연 장애물로 활용하여 방어전을 펼친다'라는 소극적인 대처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수비 위주의 전략 때문에 바클레이는 주전파 러시아 장교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알고보면 비웃음을 당해야 하는 것은 바클레이가 아니라 알렉산드르였지요.  그런데 알렉산드르는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몰라도, 바클레이를 총사령관으로 명확하게 임명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가장 크고 중요한 제1 군 사령관인데다 국방부 장관이기까지 하니까 따로 총사령관이라는 겉멋이 든 직위를 새로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는지, 혹은 총사령관은 당연히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그렇게 총사령관 임명을 빼먹은 것도 문제였는데, 더 나쁜 것은 짜르 알렉산드르가 제1 군 사령부인 빌나까지 직접 찾아와서 휘하에 온갖 참모진을 줄줄 달고 다니면서 감놔라 배놔라 참견이 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조직에서 원래 그러면 안된다는 것은 상식이었고, 알렉산드르도 그런 점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곧 반성하고 '앞으로는 절대 군 명령 체계에 관여하지 않겠다'라는 약속을 바클레이에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마차 1대에 실어야 하는 짐의 적정량에 대해서 이런저런 제안을 내놓으며 간섭을 재개했습니다.  더 나쁜 것은 짜르가 이렇게 현장에 상주하며 참견질을 하다보니, 바클레이를 무시하고 짜르에게 직접 보고를 하는 버릇없는 장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바그라티온이었습니다.  그는 수비 위주의 작전을 선호하는 바클레이를 의도적으로 투명인간 취급하고 짜르에게만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이 모든 혼란이 궁극적으로는 알렉산드르 개인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래도 결국 어떤 작전으로 나폴레옹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뭔가 준비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  국가 존망이 걸린 이런 중대 위기를 앞두고 설마 이렇게 우왕좌왕 하면서 시간을 까먹고 있지는 않았겠지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Pavel_Chichagov
https://en.wikipedia.org/wiki/Pinsk_Marshes
http://napoleonistyka.atspace.com/Invasion_of_Russia_1812.htm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보니666 2019.11.11 07: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면서 처음 첫 댓글 달아봅니다. 이번 한주도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2. 궁금 2019.11.11 0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일리야 레핀이 러시아 군으로 징집된 청년을 배웅하는 가족들을 그린 그림을 보고 매우 인상깊었던 기억이 있는데, 아예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것이어서 그런 것이었군요...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eeing_off_a_recruit_(Repin).jpg

    그런데 그림을 보면서 징집당한 장정을 안아주는 사람이 부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가혹한 군역을 운영하면서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징집한건가요? 궁금합니다!

    • 메뚝 2019.11.11 1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그림 감사합니다.
      분위기가 참... 슬프네요.
      어머니인지 부인인지 저도 궁금하네요.

    • nasica 2019.11.11 2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림이 하도 좋아서 본문에도 집어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향 마을 사람들도 생각이란 것이 있었다면 기혼자를 저런 병역의 의무로 몰아넣지는 않겠지요. 참고로 프랑스에서는 기혼자는 병역에서 면제되었습니다.

    • 유애경 2019.11.12 04:3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림이 궁금 했는데 마침 넣어 주셨네요!
      정말 보기만 해도 침통해지는 분위기에다25년의 복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본인은 물론 그 가족들의 슬픔은 어땠을까요...
      그와중에 함께 그려진 개의 뒷모습도 뭔가 (전체적인 분위기 탓인지 ) 침통해 보여서 조금 웃고 말았네요!


  3. 흠흠흠 2019.11.11 0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파르타쿠스. 마물루크. 러시아 농노... 노예들이 거칠고 힘든 삶을 살아서 그런지 전투를 잘하나 보네요.

  4. Franken 2019.11.11 16: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력수를 보니 러시아군은 훈련은 둘째치고 머스킷 같은 무기를 제대로 공급받은 상태였는지 심히 의문이 가네요. 나름 공업이 있었던 프랑스도 신병들에게 줄 머스킷 생산에 애를 먹었는데 후진국이었던 러시아가 90만정 이상의 머스킷 생산능력이 있을 리 없으니...

    • nasica 2019.11.11 21: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대부분은 후방 대기소에서 죽어라고 제식 훈련과 삽질 노동만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 하이텔슈리 2019.11.11 2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영국이 퍼준 물자의 양도 장난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게 필요량을 전부 채울 수는 없었지만 큰 도움이 되는 양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 reinhardt100 2019.11.11 2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의외로 러시아의 당시 공업력은 서방권에서 나름 수위권이었습니다. 산업혁명에 막 접어들기 시작한 유럽에서 아직까지는 기술력차이가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고 영국조차도 중공업 생산력에서 프랑스와 서로 순위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초반 러시아의 금속공업 생산량은 전체 유럽 대비 15% 이상이었는데 이는 영국과 프랑스와 비견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적어도 야포는 국산화가 꽤 이루어졌고 소총 역시 상당수 자급자족했습니다.

      러시아 공업력이 급속히 약화된 시점이 1820년대말부터 1861년까지인데 1차 산업혁명을 놓치면서 후진국 이미지가 고착화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 Franken 2019.11.12 0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라인하르트//현대국가에서도 90만정은 만만치 않은 숫자인데 러시아가 공업력이 좀 있었다 한들 1년 남직한 기간 안에서 생산하는 건...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총열을 일일이 손으로 두들기고 다듬어서 만들어야 했던 당시로써는요.

    • reinhardt100 2019.11.12 0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Franken) 아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러시아 공업력이 생각외로 강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1년 내로 90만정 전부를 생산하는건 당시로써 불가능합니다. 90만정을 당시에 전부 신형으로 생산했다면 슈페어의 기적 저리가라 수준이죠.

      18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는 일단 서구권 군대 대부분이 플린트식 머스켓을 사용했기 때문에 내구도만 좋다면 몇십년전에 생산된 구형소총이라도 쥐어줘도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습니다. 일단 원리는 거진 다 비슷했으니까요. 혁명전쟁 초창기 프랑스군이 100만 이상을 징집하는 바람에 한동안 소총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오죽 급하다보니 창을 50만 자루 생산하기 시작했으니까요. 당시 파리 조병창의 한달 소총 생산량이 600정 하던 시절인데 막상 전쟁 돌입한 후 생산공정을 바꾸는 등의 개혁을 통해 한달만에 소총을 9천정 생산했던 일도 있습니다. 이 덕분에 소총부족이 한결 덜해진 적도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조면기를 개발한 휘트니가 당대에 유명해진 사건이 바로 1만정 소총생산 사건입니다. 미국이 막 독립하고 나서 기존 사제 사냥총(?)인 수준의 켄터키 소총류를 대체할 신형소총 1만정을 발주했는데 이 당시에는 1년만에 소총 1만정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성공했습니다. 막 소개된 아담 스미스의 '분업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기에 가능했습니다.

    • Hedgehog 2019.11.12 0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유튜브에서 colonial gunsmith라는 영상에서 말하기로는 라이플 1 정을 만드는데 300인시가 든다고 하더군요... 라이플이 없는 활강총신이라고 해도 280인시는 걸렸을것 같은데....

    • Franken 2019.11.12 0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씀대로 군수창고 및 민간의 총을 긁어다가 지급한다 해도 90만정의 1/3도 충족했을지 모르겠군요. 거기다 진공포장도 없었으니 창고에서 말그대로 썪은 총기의 질이야 뻔할 뻔자겠구요. 이와 상관없이 양질의 좋은 댓글 잘 읽었습니다.

    • [][] R.F.[][] 2019.11.12 18: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전에 들었던 거라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러시아군 소속 일부 소수민족(?) 부대에서는 궁병(!)을 운용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머스킷의 연사력을 보면, 보다 양성과 숙련이 어려워서 그렇지 궁병도 나름 쓸만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

    • reinahrdt100 2019.11.12 2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R.F) 네 맞습니다. 칼미크 기병대가 러시아 원정 당시 투입된 적이 있습니다.

      칼미크 족은 17세기부터 러시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볼가강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했었는데 18세기 중후반 청의 중가리아 정벌 이후 비어버린 신장 서부로 일부가 탈출한 후 잔류한 오이라트 부족의 일파입니다. 이들은 현재까지 남아있기도 합니다.

  5. reinhardt100 2019.11.11 2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소전쟁 당시에도 프리피아트 늪지는 공격자나 방어자 모두에게 장애였지만 특히 방어자에게 엄청난 곤란을 주었죠. 독일군은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집단군 3개 및 항공군 2개를 동원했는데 그래도 주력을 어디에 두냐?가 문제였습니다. 모스크바 때문에 중부집단군이 주력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프리피야트 늪지 북쪽주변에 독일군 전체 30% 이상이 집중 배치되어 상대적으로 남서쪽에 주력이 배치된 소련군을 그대로 포위섬멸전으로 붕괴시키기도 합니다.

    나폴레옹에 맞서는 러시아군의 입장에서는 일단 공간을 이용한 후퇴밖에 답이 없었습니다. 러시아 주력군이 네만 강을 도하해서 프랑스군과 정면대결하면 이길 방법이 없다시피했습니다. 22만의 주력군이 강변 한 지점에 일거에 도하해서 프랑스군을 분단, 그 중 한 부분을 붕괴시켜야 확실한 승산이 보이는데 그럴 기동력은 20세기 중반, 바그라티온 작전때나 가능했으니까요. 이건 기술의 문제이지 의지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만일 러시아군이 네만강을 도하한 후 주력군이 섬멸당했다면 나폴레옹의 성격상 토르마소프의 제3군을 섬멸한 후 스몰렌스크까지 진격해서 후방의 2개 군까지 연속해서 격멸한다는 계획을 짜고 진격했을 겁니다. 다만 9월 30일까지 스몰렌스크 점령 및 러시아 주력군 완전 섬멸을 해야 러시아 평원에서의 월동이 그나마 편해지는데 과연 가능했을지? 저도 의문입니다.

    • 2월28일 입대 2019.11.13 1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라인하르트님 늘 감사드립니다!
      프리파야트라는 동네가, 설마 lef'tenant 프라이스와 맥밀란 대위가 기어다니던 그 동네는 아니겠죠??

      선생님 설명덕분에 Nasica님의 노고가 더 빛을 발하는군요.

    • reinhardt100 2019.11.13 2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프리피야트 늪지 맞습니다.

      제가 무슨 선생님입니까? 이거야 원 제가 다 부끄럽습니다.

  6. reinhardt100 2019.11.12 20: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로 핸드폰으로 접속했는데 이상하게 닫혀있네요? 티스토리 가입해야 하려나요?

  7. freewizard 2019.11.13 13: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는 역사네요ㅋㅋ 좋은 정보 감사해요

  8. kyw0277@naver.com 2019.11.13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랫만에 댓글 남깁니다.

    이런 자세한 글들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9. Sarada 2019.11.17 19: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Nasica 님이 소개해주신 혼블로워의 전투장면을 읽고 너무 인상깊어서 얼마전 10권을 전부 구해서 읽었습니다. 덕분에 출퇴근 시간에 너무 즐겁게 읽었습니다.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혹시 Nasica 님이나 다른 분들이 답해주실수 있으실까 해서 글 올립니다. 2권(Nasica 님이 소개해주신 요새상륙작전이 나온 권)에서 사관들을 괴롭히던 함장이 밤에 실족하여 의식불명의 중상을 입었는데, 이 사고에 대해서 다른 장교가 "혼블로워 군이 이 사건에 대해서 더 얘기해줄 것은 없는가?"라고 반복적으로 물어봅니다. 혼블로워는 당연히 "함장님이 실수로 떨어지신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는 모른다"라고만 대답하고요. 이때 혹시 혼블로워가 무슨 짓을 한 거 일까요? 작가가 혼블로워가 이런 짓을 저짓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암시를 준 거 일까요? 너무 궁금해서 글 남겨봅니다.
    항상 Nasica 님의 좋은 글과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 nasica 2019.11.17 21: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작가가 명확하게 밝힌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C.S. Forester의 의도는 '사실 혼블로워가 사다리에서 함장을 밀었다' 라고 독자들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혼블로워는 소심한 사람이긴 하지만 교수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인 자기 당번병을 놓아주는 일이라든가 무인도에서 굶어죽어가는 프랑스군 포로들에게 식량을 나눠준다든가 하는 일화들로 보아,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가끔 법과 규칙을 어기는 일도 종종 저지르는 캐릭터로 보이거든요.

  10. sarada 2019.11.18 0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답변 감사합니다.
    만약 혼블로워가 정말로 손을 댔다면, 혼블로워의 성격도 굉장히 무서운 면이 있네요. 조직에 충성하지만, 조직 내부의 지나친 부조리함이 내부적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부조리에 희생될 지경에 이르면, 가만히 앉아서 죽느니 과감하게 움직이는... 감탄이 나옵니다. 이걸 용기라고 해야할지, 대담함이라고 해야할지 잘은 모르겠는데, 혼블로워가 확실히 남다른 냉정함과 과감함이 있네요.
    빽도 라인도 없이 제독까지 올라간 사람은 역시 뭔가가 다르네요.
    다시한번 답변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좋은 글 부탁드려요^^

  11. sarada 2019.11.18 2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린다고 쑬려다가 오타났습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총사령관 바클레이 드 톨리가 러시아 귀족들로 이루어진 부하들로부터 미움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이 양반이 실력파 인물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그의 할아버지가 오늘날 라트비아(Latvia)의 수도인 리가(Riga)의 시장을 보낼 정도로 보통 집안은 아니었지만, 정작 러시아 귀족으로 편입된 것은 군인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최초일 정도로, 러시아 귀족층 입장에서는 그다지 전통있는 명문가는 아니었습니다.  바클레이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입대하여 2년 뒤 소위로 승진했고, 그 이후로 오스만 투르크나 스웨덴 등 전통적인 러시아의 적들과의 전쟁 속에서 직업 군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착실히 쌓았습니다.  그는 똑똑할 뿐만 아니라 전투의 광기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일라우(Eylau)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후퇴를 커버하며 싸우다 중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전형적인 유능한 군인이었습니다.

 

 

(미하일 바클레이 드 톨리(Michael Andreas Barclay de Tolly)의 초상입니다.  1812년 당시 그는 51세로서, 총사령관 하기에 딱 좋은 나이였습니다.)

 



프랑스군에서라면 이런 바클레이 드 톨리가 그다지 두드러진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활약했던 조직은 러시아군이었고, 러시아군 장교들은 유능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가령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러시아군 지휘관 중 하나였던 북스게브덴 (Friedrich Wilhelm von Buxhoeveden 러시아 식으로는 Fyodor Fyodorovich Booksgevden, 이 분도 알고보면 독일계 러시아 귀족이지요) 장군은 전투 내내 술에 취해 있었고 그의 주정뱅이 지휘 덕분에 참패를 겪었지만, 그 이후에도 주요 요직을 맡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가령 1808년 핀란드 침공 작전 때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이 바로 이 북스게브덴 장군이었고, 바클레이 드 톨리는 그 밑에서 복무했습니다.

 

(오랜만에 보시는 북스게브덴 장군의 복스러운 얼굴입니다.  그런 역적질에 가까운 지휘를 하고도 군법회의는 커녕 계속 해서 고위 지휘관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와이프가 러시아의 권문세가 오를로프(Orlov) 가문 출신의 공녀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Natalia Alexeyeva)였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북스게브덴의 경우처럼 러시아군 장교들의 자질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슬라브 특유의 민족성... 따위가 아니라 결국 사회 구조적인 문제였습니다.  가령 러시아군 소위의 급여는 유럽 전체에서 가장 적은 편이었습니다.  심지어 장교로서 부대에 의무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식비가 급여보다 더 많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러시아의 전반적인 경제력이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굳이 급여 따위에 생계를 의존하는 사람은 장교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 인간이라는 고정 관념이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직장 생활하면서 돈을 쓰기만 하고 벌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 그런 적자 인생을 탈출하려면 빨리 승진을 해야 했는데, 그 승진이라는 것이 실력이나 실적 순이 아니라 철저하게 배경과 연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같은 귀족들 중에서도 하급 귀족들은 도무지 승진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러시아의 유명 시인 푸쉬킨(Alexander Pushkin)의 소설 '대위의 딸'(Kapitanskaya dochka)에서 쉽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반 미로노프(Ivan Mironov)는 10대 후반의 딸을 둘 정도의 나이인데, 계급이 고작 대위입니다.  또 맡은 보직도 어느 황량한 시골 마을의 수비 대장이지요.  

 

 

(제 나이대의 사람들에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라는 싯귀로 유명한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입니다.  제가 중학생일 때 이 분의 소설 '대위의 딸'이 학생 필독서 중 하나여서 읽었는데, 솔직히 이게 왜 필독서까지나 선정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본인의 싯귀와는 반대로, 이 분은 와이프와 러시아 근위대 소속 어느 프랑스인 장교와 불륜 문제가 발생하자 그 프랑스인 장교와 결투를 벌인 끝에 37세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이렇게 장교들을 귀족들 중에서만 선발하는데다, 그나마 능력이 아니라 연줄 위주로 승진을 시키다보니, 지휘관 중에 정말 일 잘하는 장교는 찾기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소수일 수 밖에 없는 고위 귀족층 자제 중에서만 후보를 뽑다보니 당연히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미 가진 것도 많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고위 귀족 출신 장교가 열심히 할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아마 제 블로그를 오래 출입하셨던 분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영국군도 똑같지 않았던가?'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영국 육군도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영국 육군도 여러모로 러시아군과 비슷한 문제, 즉 무능하고 항상 술에 쩔어지내는 장교들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사병들을 죽도록 채찍질을 하는 체벌 문화가 팽배한 군대가 유럽에서 영국과 러시아 정도였다는 것도 공통점이었지요.  왜 영국에서만 웰링턴과 같은 명장이 나왔는지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도 있을텐데, 그건 잘못된 궁금증입니다.  영국에서만 그런 특별한 인재가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거든요.  제2차 대불동맹전쟁에서 러시아의 혁혁한 전과를 책임졌던 수보로프(Alexander Vasilyevich Suvorov) 장군 같은 경우가 그 예입니다.  웰링턴은 영국이라는 막강한 조국의 버프를 많이 받아서 유명해진 인물이고, 실제 군사적 역량은 수보로프가 훨씬 뛰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1799년 이탈리아 밀라노에 입성하는 수보로프입니다.  이렇게 밀라노에 입성하기 전까지 수보로프는 모로, 막도날, 주베르 등 쟁쟁한 프랑스 혁명군의 장군들을 모조리 무찔러 그의 명성을 드높였습니다.)



그런 장교들 중에서 냉정하고 지적이며 부지런하고 유능한데다 용감하기까지한 바클레이 드 톨리는 짜르 알렉산드르의 눈에 단연 두드러지게 보였습니다.  알렉산드르도 평화 시기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폴레옹과의 갈등이 높아지자 이 51세의 실력파 독일인을 아예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해버렸습니다.  원래대로 하면 그냥 '누군가는 소를 키워야 하지 않겠나' 정도의 인식으로 승진시켜준 독일계 귀족에 불과했는데, 갑자기 짜르의 눈에 들어 쑥쑥 승진한 바클레이 드 톨리는 주변 러시아 장군들의 질투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이렇게 다른 러시아 장군들이 자신의 승진을 질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바클레이는 다른 장군들의 협조를 구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관리 감독했는데, 원래부터 강직하고 차가운 성격에 그런 꼼꼼한 관리 감독까지 더해지니 그를 미워하는 분위기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이 그를 무시하게 된 결정적인 것은 짜르 알렉산드르 탓이었습니다.  과연 알렉산드르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것일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Michael_Andreas_Barclay_de_Tolly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Suvorov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Pushkin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reinhardt100 2019.11.04 07: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정 러시아군의 장교단이 개판이 된 이유 중 하나가 사실 병력충원체계와도 연계됩니다. 이 당시 러시아군은 다른 국가와 달리 농노, 코사크 및 일부 서방 출신 기술병을 중심으로 구성된 병력충원체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중 전열보병 상당수는 주로 농노였습니다. 그런데 이 농노들을 잘 부리려면(?) 당연히 귀족, 그것도 '권위있는 고위귀족'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당장 예전에 쓰셨던 바그라티온만 해도 사산조 페르시아의 신하였던 이베리아(현재의 사카르트벨로)의 숨바툼 바그라투니의 방계 후손이던 바그라티온왕가의 직계다보니 귀족 중에서는 명함 내밀 사람이 거의 없었고 과감한 작전지휘 및 무리한 명령이라도 일단 순진했던 병사들이 잘 듣는 편이었습니다.

    <대위의 딸>, 이 책이 필독서인 이유가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로마노프 황가를 '간접적이나마 비판한 책'이었다는 것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던 예밀리아 푸가초프의 반란을 농노들과 하급귀족의 입장에서 쓰면서 전제군주정에 머무는 채로 데카브리스트를 진압하던 로마노프 황가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의미가 어마했습니다. 게다가 이 책을 본 나로드니키들부터 후대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들까지 모두가 농민해방과 제정타도 및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는 기폭제로써 작용했으니 필독서로써의 가치는 충분히 있는 책입니다.

    • nasica 2019.11.04 08: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대위의 딸에 그런 의미가 있군요. 저는 소설 끝부분에 예카테리나의 자비에 호소하여 주인공이 사면되는 부분을 보고 결국 로마노프 왕가에 대한 찬양이라고 생각했더랬습니다. 하도 오래 전에 읽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 reinhardt100 2019.11.04 0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게 검열 피하는 장치였습니다. 겉으로 보면 황제폐하께서 자비를 내려줌으로써 신민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것으로 보여주었어야 하니까요. 나중에 톨스토이나 투르게네프 같은 제정 러시아 후기 문학가들도 이런 식으로 검열을 피하기도 합니다. 특히 톨스토이가 대표적이죠

  2. Franken 2019.11.04 14: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유럽 문화권 자체가 술에 절여 사는 동네 아닌가요? 수질 문제 때문에 물 대신 술이 필수 음료수가 되어 하층민들 역시 입에서 술이 떨어지는 날이 없다 보니 음주 문제가 당대엔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진 않았을 거 같네요. 물론 본문의 저 장군은 때와 장소를 못 가렸으니 비판받아야 마땅하죠.

  3. hg 2019.11.04 18: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보로프는 웰링턴과 비교하면 서유럽군과 싸운 커리어가 비교적 적다고 들었는데 전과 내용을 비교하면 그렇지만도 않은거군요..하긴 나이만 비교해도 40이 나기도 하고..

  4. 흠흠흠 2019.11.04 1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웰링턴도 웬만한 나폴레옹 원수들 다 때려잡지 않았나요? 게다가 웰링턴은 마세나와 나폴레옹까지 때려잡았으니, 수보타이, 나폴레옹, 웰링턴은 동급인 것으로 ㅎ

  5. 지나가다 2019.11.04 19: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위의 딸이 러시아에서 인기 있는 이유 중하나는 매우 재미있다는 겁니다...그게 뭐냐 랄수 있는데...그때 농노와 주인의 관계 그리고 고위 귀족청년과 하급 귀족 딸의 러브스토리, 푸카쵸프의 반란 (주인공은 푸카쵸프와 밥까지 먹은 사이) 그리고 러시아 군과 반란군과의 전투 등이 매우 생동감 있게 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이어지는 굉장히 재밌는 소설이죠

  6. 지나가다 2019.11.04 1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특히 러시아 전통이 잘드러나는데 승리자에게 빵과 소금을 주는 장면, 전투가 시작되나 투니카(전통의상, 장례식때나 결혼식때 입힌다)를 딸에게 입히는 장면, 러시아 군의 훈련과 편성 등이 자세히 나와 있고 그때 충격이 빠졌던데 푸카쵸프가 점령지에서 공정하고 인자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7. 지나가다 2019.11.04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한 러시아군의 내부 문제도 드러나고 그들의 무능과 암투(사랑 문제로 장교끼리 결투 벌이다 부상) 장교의 진급 등(주인공은 아무 훈련도 없이 장교 소위로 임관...그리고 도박하다 재산 탕진...늙은 농노는 그래도 끝까지 주인공과 함께 생사 고락...)

  8. 하이텔슈리 2019.11.04 2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클라이가 유능하다는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유능함이 신뢰받지 못한 이유라니 뭔가 할 말이 없네요... (영국 육군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지만 적어도 유능하다고 견제받는 조직은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진짜 수보로프나 쿠투조프 같이 인망받으면서 능력있는 인물이 존재하는 게 신기한...

    ps.저도 웰링턴과 수보로프를 누가 더 뛰어나다고 보기 힘들다에 한표. 능력의 1대1 비교라는게 극히 상대적인 것이고, 세운 공적을 보면 누가 더 뛰어나다고 하기 힘들지 않을지요.

  9. Hofer 2019.11.04 2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톨리가 전투를 피하고 물러서기만 한다고 내부의 많은 공격을 받았지만..
    적군의 강점 및 아군의 유리한 점을 냉철히 파악하고 지연전을 펼친 걸 보면 우수한 지휘관이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웰링턴이냐 수보로프냐 누가 더 명장이냐 말은 많지만.. 개인적으로 수보로프가 위대한 장군이었던 건 일말의 여지가 없는 거 같습니다.

    • reinhardt100 2019.11.05 2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보로프의 전역은 제정 러시아 이후 역대 러시아 군사학에서 반드시 가르치는 전역이 될 정도로 수보로프의 군사적 재능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당시 서방권에서 사실상 접촉할 수 있는 모든 군대와 싸워본 지휘관은 수보로프가 사실상 유일했습니다. 그나마 나폴레옹이 근접했고요.

      수보로프의 경우, 냉전기 소련군이 서방과의 전면전을 가정하고 꽤나 연구를 많이 했는데 '동쪽에서 진군해서 알프스를 넘는 기동을 성공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냉전기 서방권 주력인 서독군과 미군, 영국군은 알프스 이북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 배치가 혁명전쟁 당시 프랑스군과 비슷합니다. 쌍방의 주력이 알프스 이북에 배치되어 있지만 숫적 우세를 살리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 측면을 찌르기 위한 공세를 펼치기 위한 교본의 기초가 바로 수보로프의 제2차 대불동맹 전역이었으니 당연했습니다.

  10. 2/28일 입대 2019.11.05 1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에ㅋㅋ갑자기 대위의 딸이라는 소설이 읽어보고 싶어졌어요ㅎㅎ댓글의 순기능이네요. 감사합니다~!!

  11. 정암 2019.11.05 15: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것까지 아시는 라인하르트님..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ㅎㅎ

    • reinhardt100 2019.11.05 2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금 KTX 타고 서울로 퇴근 중에 있습니다. ㅋ 요새는 주중에 매일 대전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 때문에 KTX 타고 통근 중이거든요.

      저야 매일 그저 박봉(?)에 시달리는 직장인이니까요. 매일 '5급공채 못 붙은 죄값 치르고 있다' 외치면서 다니고 있어요 ㅠ

      그래도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12. 낄낄 2019.11.06 1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가 말아먹고 계속 해먹는 북스게브덴 장군 비웃을 위치는 아닌것 같습니다.

  13. 샤르빌 2019.11.09 1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웰링턴도 능력있는 장군이지만 영국이라는 든든한 물주가 있었기에 보급이나 물자같은 부분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지만 수보로프의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수십만 대군이 온갖 말썽과 이야기꺼리 속에 착착 네만 강 서쪽에 집결하는 동안, 알렉산드르와 러시아군은 뭘하고 있었을까요 ?  나폴레옹의 침공에 대비하여 모스크바의 성벽을 강화하고 있었을까요 ?  

일단, 로마노프 왕가의 왕궁은 모스크바가 아니라 상트-페체르부르크(Sankt-Peterburg, Санкт-Петербу́рг)에 있었습니다.  1712년 표트르(Pyotr) 대제가 모스크바였던 수도를 상트-페체르부르크로 바꾼 것이었지요.  당시 인구수도 모스크바와 상트-페체르부르크가 각각 30~40만 정도로 비슷비슷했습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최종 목표로 삼은 것은 거기가 러시아의 수도이거나 가장 큰 도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역사적인 지위와 함께 모스크바의 지리적 위치가 러시아 제국의 심장부에 해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노프 왕가를 모조리 사로잡고 싶다면 모스크바가 아니라 상트-페체르부르크로 가야 했습니다만, 거긴 제국의 북쪽 한구석에 불과했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점령할 때, 로마노프 왕가 사람들도 바리바리 봇짐을 머리에 얹고 피난을 떠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저 북쪽의 상트-페체르부르크에 있는 왕궁에서 아주 편안하게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모스크바의 위치를 보시면 왜 나폴레옹이 상트-페체르부르그가 아니라 모스크바로 향했는지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하고 안전한 상트-페체르부르크의 카잔 성모 성당(Cathedral of Our Lady of Kazan, Kazanskiy Kafedralniy Sobor)에서 1812년 4월 9일 예배를 드린 알렉산드르는 남쪽으로 길을 떠납니다.  목적지는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나(Vilna, Vilnius)였습니다.  빌나에는 러시아 야전군의 총사령부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과 대치한 러시아 야전군은 크게 2개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주력부대는 바클레이 드 톨리(Michael Andreas Barclay de Tolly) 장군이, 그리고 더 남쪽의 보조부대는 그루지아의 상남자 바그라티온 장군이 지휘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좀 묘한 일이긴 했습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이라는 대영웅이 유럽 역사 통틀어 사상 최대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기 직전이라는 백척간두의 위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러시아를 지켜낼 군대의 우두머리가 하나는 독일계 장군이고, 다른 하나는 그루지아계 장군이었던 것입니다.  바그라티온은 러시아 공녀와 결혼하여 러시아화된 사람이라고 치고,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독일계인 바클레이 드 톨리였습니다.

 

(상트-페체르부르그의 카잔 성모 성당입니다.  왜 하필 카잔이라는 지방 도시 이름이 붙었는지 찾아보니, 원래 콘스탄티노플에서 왔다는 전설 속의 성모 마리아의 성상(icon)과 관계가 있더군요.  카잔의 성모 마리아는 러시아 전체의 수호 여신에 해당하는 그런 위치라고 합니다.)

 

(모스크바에 보존된 카잔 성모 성상의 복제본입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왔다는 원본은 사라졌다고 하네요.)

 



정확하게 보자면 바클레이 드 톨리는 독일계는 아니었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스코틀랜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쨌거나 꽤 오랜 시간 동안에 걸쳐 발트 해 연안 독일계 귀족들 사이에 정착하면서 바클레이 드 톨리도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바클레이 드 톨리가 사실상의 러시아군 총사령관을 맡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유럽 귀족들이 전통적으로 다 그렇긴 했지만, 특히 러시아 귀족층은 교육 따위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어떤 분야든 좀 전문성이 필요하고 잉크와 펜대를 쥐어야 하는 일에는 오늘날 발트해 연안의 에스토니아-라트비아 지방에 정착하여 로마노프 왕가에 충성하면서 살아온 독일계 귀족들이 많이 등용되었습니다.  군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러시아군 장교직은 100% 귀족층에게만 주어졌는데 특히 독일계 귀족들의 비중이 매우 컸습니다.  가령 나폴레옹에게 사실상의 첫 패배를 안겨주었던 1807년 2월 아일라우(Eylau) 전투를 지휘했던 베니히센(Levin August von Bennigsen)은 아예 중부 독일인 하노버(Hanover)에서 태어난 독일계 귀족이었습니다.


(베니히센입니다.  그는 바클레이 드 톨리 같은 발트해 연안 지역의 독일계 귀족이 아니라, 독일 본토인 하노버에서 태어난 그냥 독일인이었습니다.  하노버 군에서 대위 계급까지 장교 경력을 쌓은 그는 28세이던 1773년에 러시아군에 '채용'되어 터키와의 전쟁 때문에 유능한 장교가 필요하던 러시아군에서 복무하게 됩니다.  5년 후인 1778년에 겨우 중령으로 승진한 것을 보면 독일 귀족 출신이라고 아주 각별한 특별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독일계 지휘관에 대해서 러시아계 부하들이 잘 따라준다면 문제가 없었겠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았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침공이라는 미증유의 위기를 맞이하여 반프랑스 감정이 들끓고 있었고 그에 따라 전에 없던 민족 감정이라는 것이 새록새록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역시 외국인임에 틀림없는 독일인들이 장군이네 지휘관이네 하며 군을 통솔하고 있는 것이 러시아군 장교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특히 언어적인 문제가 아주 컸습니다.  러시아군에는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러시아로 망명한 프랑스 망명귀족 출신의 장교들도 꽤 많았습니다만, 적국 출신이던 이들에 대한 반발심은 오히려 없었습니다.  일단 이 프랑스 망명귀족들이 나폴레옹과 혁명 프랑스군에 대해 이를 갈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언어 문제가 컸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프랑스어가 귀족층의 국제 관계에 있어서 사실상의 표준어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 경향은 유럽의 중심인 파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러시아에서 특히 강해서, 러시아 귀족들은 집집마다 프랑스 출신의 가정교사를 두었고 아이들이 가끔 집에서 러시아어로 이야기할 경우 야단을 치는 경우조차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거의 모든 러시아 장교들은 프랑스어를 매우 유창하게 할 줄 알았습니다.  1807년 나폴레옹과 틸지트(Tilsit) 회담을 하며 며칠 동안 나폴레옹과 꼭 붙어지냈던 알렉산드르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자신의 프랑스어 발음이 (코르시카 출신이었던) 나폴레옹의 프랑스어 발음보다 더 완벽했다는 것일 정도였습니다.  


(랑게론(Louis Alexandre Andrault de Langeron) 백작입니다.  그는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귀족으로서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러시아로 피난갔다가 러시아군에서 복무한 전형적인 망명귀족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프랑스군보다는 주로 투르크군과 싸웠습니다.  그는 부르봉 왕정 복고 이후에도 크림 반도의 오데사(Odessa) 주지사로 오래 있었고, 결국 러시아에서 콜레라로 죽었습니다.)



상황이 그러니 프랑스 망명귀족들과 러시아 귀족 출신 장교들은 말도 잘 통하고 정치적인 이익도 딱 일치해서 정말 이야기가 잘 되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 망명 귀족이 많아봐야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  소수인 프랑스 망명 귀족들은 당연히 러시아 장교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문제는 오히려 독일계였지요.  러시아군 내에 발트해 연안 출신 독일계 장교들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프로이센 출신 장교들이 1809년 이후 대거 러시아군에 투신했습니다.  원래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의 참패 이후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프로이센군이 군축에 들어가면서 많은 프로이센 장교들이 장교직을 잃고 쫓겨난 바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나폴레옹에게 이를 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장 급여를 줄 고용주를 찾고 애타게 찾고 있었는데, 1809년 이후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의 동맹이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고 러시아가 군병력을 증강하면서 새롭게 경력직 장교를 많이 필요로 하게 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었지요.  나중에 전쟁론(Vom Kriege, 영어로는 On War)을 써서 불멸의 이름을 남긴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도 그런 프로이센 출신의 러시아 장교였습니다.  더 나쁜 것은 이들은 같은 독일계 귀족인 부대 지휘관 직속의 참모진으로 주로 등용되었는데, 거기서 눈치도 안 보고 자기들끼리 독일어로 떠들어댔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장교들과 이 독일계 장교들은 언어 문제 때문에라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총사령관 바클레이 드 톨리에 대해서도 러시아군 장교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 분은 클라우제비츠가 아니라 당시 프로이센군의 혁신 과업을 진행 중이던 그나이제나우(August Neidhardt von Gneisenau)입니다.  이 분도 나폴레옹의 압력에 의해 곧 프로이센군에서 쫓겨났고, 1812년 당시 비밀 임무를 띠고 러시아군에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분들은 이 분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유명한 독일해군 전함으로 그나이제나우라는 이름을 기억할 겁니다.)

 



설마 독일계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총사령관을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클레이 드 톨리는 부하 장교들 뿐만 아니라 제2군 사령관인 바그라티온으로부터도 지휘관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거의 무시당하다시피 했습니다.  대체 러시아 장교들은 왜 바클레이 드 톨리를 이렇게 무시하고 있었을까요 ?  알렉산드르가 빌나로 향한 것과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Saint_Petersburg
https://en.wikipedia.org/wiki/Kazan_Cathedral,_Saint_Petersburg
https://en.wikipedia.org/wiki/Our_Lady_of_Kazan
https://chekhitout.files.wordpress.com/2012/04/800px-population_development_moscow.png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reinhardt100 2019.10.28 07: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4세기 이후 블라디미르 대공위가 '하나님께서 영윈한 왕권을 부여한 류리크 왕가가 선택하신' 모스크바로 넘어간 이후, 모든 러시아인들에게는 모스크바가 심장부가 되었습니다. 단순한 위상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가장 안전한 편이었거든요. 모스크바가 심장이 된 이후 모든 외부세력이 보기에 모스크바를 점령해서 통치해야 진정한 러시아 정복이 완료된다고 생각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17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 19세기 프랑스, 20세기 나치 독일 모두 모스크바를 정복 및 통치해야 러시아 정복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전쟁 계획을 짜고 실행했습니다.

    러시아의 카잔의 성모, 폴란드의 검은 마리아, 양국의 상징이 같은 동방에서 온 이콘인 것이 특징인데 양국 모두 이 성모상의 기적으로 나라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모두 17세기 때의 일인데 러시아는 대동란시대, 폴란드는 대홍수시대죠. 국가멸망 직전에 성모가 발현했다는 것으로 외세를 물리친 것입니다.

    특히 폴란드 쳉스토호바의 검은 마리아, 일명 '폴란드 왕국의 영원한 여왕'으로까지 숭배받는 성모상인데 나치 독일 점령기 및 공산주의 정권조차도 감히 이 성모는 건드리지조차 못했습니다. 건드리면 교황청까지 들고 일어날 정도로 위상이 대단했으니까요.

    카잔의 성모도 비슷한 위치였지만 1904년 갑자기 실종되었는데 우연이지만 바로 그 다음해 피의 일요일사건까지 겹치면서 러시아인들의 마음이 로마노프 황가로부터 완전히 떠나게 됩니다. 신께서 영원한 왕권을 거두어가셨다고 보여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쳉스토호바의 검은 마리아, 17세기 야스나 고라 수도원 공방전에서 단 400명의 수도사 및 패잔병들이 8배의 스웨덴군을 상대로 2달간 버티면서 국민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상징입니다. 1635년 이후 유럽 최강의 육군력으로 전승 불패를 자랑하던 신교도 스웨덴군이 처음으로 패전했다는 엄청난 위업을 성모 마리아께서 보여주셨다니까 가톨릭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신이 나라를 버리지 않았다는 믿음을 준 사건입니다. 나중에 폴란드에 가시면 꼭 보시면 좋다고 추천드립니다.

    • nasica 2019.10.28 08: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항상 흥미로운 댓글 고맙습니다.

    • reinhardt100 2019.10.28 0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슨 말씀을요.
      요새 매일 서울에서 대전까지 출퇴근 중이라 시간이 좀 생겨서 쓸 수 있습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나시카님.

      지금도 KTX에서 댓글 쓰고 있습니다.

    • 2/28일 입대 2019.10.30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의 시야를 넓혀주시는 댓글 저도 늘 감사하고있습니다!
      물론 nasica님께도 감사드리구요!!

    • reinhardt100 2019.10.30 22:25  댓글주소  수정/삭제

      2월 28일 입대) 서로 지식을 전파하고 수용한다는 것이 인터넷의 장점 아니겠습니까? ^^
      부족한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2. 알키비아데스 2019.10.29 2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럽 전쟁사에선 독일계가 참 먹어주는 인종인거 같네요.

    4세기 이후 로마군의 주력은 독일계(게르만계열)
    중세에 먹어주던 용병은 스위스 용병과 란츠크네히트인데 둘다 독일계
    전열보병 전투의 교과서를 쓴건 프러시아
    나폴레옹전쟁시절 영국의 정예부대는 하노버 출신
    러시아군의 중추도 발트3국쪽 독일계
    양차대전 메인빌런은 독일
    양차대전을 정리한 미군의 주력은 독일계 미국인

    독일군이 당나라군대가 된 오늘날엔 상상이 안가는 이야기입니다

    • reinhardt100 2019.10.30 2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유럽 중앙에 있다보니 아무래도 전쟁이 빈번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겁니다. 다만, 독일의 한계는 일찍부터 중앙집권이 이루어지지 못해 19세기까지 제대로 잠재력을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냉전 당시에도 서방 나토군 육상전력의 주력은 미군과 서독군이었는데 당시 서독은 재래식 육군과 공군력만 따지면 미군과 소련군을 잇는 실질적인 세계 3위였죠. 동구 바르샤바 조약군의 동독군 역시 최소 25만의 병력으로 서독군 전력의 6할 이상은 항상 보유하고 있었으니 군사적 역량은 어마하죠. 이쪽 역시 조약군 최정예로 소련식 제파전술의 최선봉이었고요.

  3. Hofer 2019.10.30 1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보로프가 십 수년을 더 오래 살았더라면 과연 어떤 광경이 펼쳐졌을 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 reinhardt100 2019.10.30 2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단합니다. 한 번 영혼의 대결이 벌어졌을 겁니다. 보로디노 전투가 하루만에 끝났지만 이번에는 최소 3일은 넘기는 라이프치히는 애들 장난 수준으로 보일 혈전이 되었을 겁니다. 양측이 서로 20만 이상이 동원 하였을 거고 양측 모두 포병화력을 쏟아부어 전선을 틀어막는 사이 기동력으로 돌파구를 뚫는 식의 전투 수행방식을 선호했으니 정말 우열판단이 어렵겠네요. 게다가 수보로프의 성격상 병기창이 있을 스몰렌스크 부근에서 결전을 치르려고 했을거고 상대적으로 나폴레옹의 대육군 역시 소모가 덜한 상태에서 싸울 수 있었으니까요.

  4. 루나미아 2019.10.30 2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요 길들이 모스크바로 향하고 있는 걸 보니 왜 모스크바로 가는지 이해되네요. 나폴레옹이 지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의 전쟁처럼 지나간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더라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점령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줬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실상은 면은 커녕 선 조차도 제대로 장악한 건지 불안불안해서 이 점이 안 와닿았었네요.
    똑같이 중심부로 쳐들어가도 어떤 공격은 적의 심장부를 움켜쥔 셈이고, 어떤 공격은 포위당하기 딱 좋은 위치에 자처해서 들어간 셈이 되는데 나폴레옹은 전자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후자였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