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을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성경 이야기입니다.  저는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하기는 커녕 성경을 완독해본 적도 없는 동네 아저씨에 불과하니 진지한 신학 강론을 쓸 수는 없고, 그냥 가볍게 읽고 웃을 만한 이야기로 쓴 것입니다.  '잘 모르는 평신도들은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는구나'라고 그냥 가볍게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개신교 신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런 나일론 신자입니다.  제 와이프는 이대로 회개하지 않고 죽을 경우 제 가련한 영혼이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무척 염려할 정도지요.  제가 제대로 된 신자로 인정을 못 받는 이유는 성서나 교회에 대해 자꾸 이런저런 의심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12사도 중 절대 베드로 같은 사람은 아니고 의심많은 도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저 같은 사이비가 자신을 도마에 비유한다는 것을 안다면 도마가 펄쩍 뛸 것 같기는 합니다.




(그 유명한 카라바죠의 명화 '성 도마의 의심'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이후 처음 나타나셨을 때 현장에 없었던 도마가 그 부활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 옆구리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다'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정말 손가락을 넣어보게 하신 이야기가 요한복음 20장 24절에 나오지요.  저말고도 기독교에 사이비/나일론 신자들이 많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를 두고 '예수님께 부활의 능력은 있지만 상처 치유 능력은 없다, 예수님은 힐러가 아니라 네크로멘서다'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좀비 창시자' 등등 온갖 우스개 소리를 늘어놓곤 합니다.)





(주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그냥 한번 웃자고 한 짓입니다.)





(의심많은 도마의 이야기는 중세 유럽에서 또다른 전설을 낳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 때 선교 때문에 인도에 있었던 도마는 그 승천 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 도마가 의심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성모 마리아께서 도마에게 증거물로 자신의 허리띠를 떨어뜨려 주었다는 것이지요.  이 베키오의 명화 '성모 승천'에서 도마는 파란 옷 입은 사도의 머리 위쪽 언덕에서 달려오고 있는 중입니다.   영원히 조롱받는 의심많은 도마 T T )




어떤 분들은 성서는 사람이 그냥 쓴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사 한글자 한글자 씌여진 것이기 때문에 (심지어 여러가지 번역본에서조차도) 토씨 하나도 실수로 씌여진 것이 없으니 모든 문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점들 때문에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몹시 어려운 방향으로 성서를 받아들이시는 분도 있습니다.  가령 어느 날 제게 문득 엉뚱한 의문이 들더라고요.  


'흔히 성서에서 어린이들은 죽으면 그대로 천국에 간다고 하던데, 몇 살까지를 어린이로 인정해줄까 ?  그게 만약 만 14세라고 하면, 14번째 생일을 하루 남겨두고 죽은 아이는 천국으로, 하루 넘기고 죽은 아이는 지옥으로 가는 것일까 ?'


이 의문을 제 주변의 독실한 신자께 여쭈어봤더니, 천만뜻밖의 대답이 돌아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린이라고 무조건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천국에 간다는 것이지 어린이라고 무조건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는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다'라고 하시더군요.


마태복음 18:3 KLB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너희가 변화되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거기까지는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제가 '아니 그럼 아직 말도 못하는 아기들이 불행히도 병이나 사고로 죽을 경우, 걔들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인가요 ?' 라고 여쭈니 침통한 표정으로 답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기독교인 부모의 제1 의무는 아이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까지 죽지 않도록 잘 돌보는 것이다"  


저는 아무리 성경이라고 해도 그렇게 글자 하나하나를 문장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신의 뜻은 미물인 인간의 두뇌로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어눌한 인간의 언어로 신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고 보거든요.  성서는 은유와 비유가 가득한 책인지라,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치려 하는 그 본질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은 종파마다 사람마다 매우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로마 치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써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는 당시의 관습과 상식, 그리고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니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성경은 원래 고대 히브리어로 적힌 구약은 말할 것도 없고, 아람어를 쓰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그리스어(헬라어)로 적었다가 나중에 라틴어로 번역된 후, 다시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등을 거쳐서 우리말로 다시 넘어온 것이다 보니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역사학은 물론 히브리어, 헬라어와 라틴어까지도 익혀야 하고, 전통적으로 유럽 사회에서는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신학을 공부했지요.




(영어-헬라어 대역본인 누가복음 16장입니다.  검색엔진도 구글번역기도 없던 중세 시절에 헬라어 원문으로 성서를 자유자재로 인용하시던 분들이 중세 유럽 정신 세계를 지배했던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 16장 1절부터 나오는 이 이야기는 여러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가지 해석이 분분한 구절이라고 하더군요.  



1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에게 재산 관리인 하나가 있었다. 주인은 그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을 듣고

2  그를 불러 물었다. ‘내가 너에 대해서 들은 소문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더 이상 내가 너에게 재산을 맡길 수 없으니 지금까지 네가 맡아 하던 일을 다 정리하라.’

3  그러자 그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일자리를 빼앗기게 생겼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고 … … .

4  옳지, 알았다! 내가 이렇게 하면 쫓겨나더라도 사람들이 나를 자기들의 집으로 반갑게 맞아 주겠지.’

5  그러고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불러다 놓고 먼저 온 사람에게 ‘당신은 우리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하고 물었다.

6  그가 ‘감람기름 100말입니다’ 하자 그 재산 관리인은 그에게 ‘어서 앉아 이 증서에 50이라고 쓰시오’ 하였다.

7  또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 진 빚은 얼마요?’ 하고 묻자 그는 ‘밀 100섬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재산 관리인은 그에게 ‘당신의 이 증서에다 80이라고 쓰시오’ 하였다.

8  주인은 옳지 못한 이 재산 관리인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한 것을 보고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의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자신을 위해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러면 그것이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들일 것이다.

10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성실하고 작은 일에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큰 일에도 정직하지 못하다.

11  너희가 세상 재물을 취급하는 데 성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하늘의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성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든가 아니면 한편에게는 충성을 다하고 다른 편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보통 '부정직한 청지기' 또는 shrewd steward 등으로 불리는 이 재산 관리인 이야기는 정말 이해가 잘 안 가는 구절입니다.  분명히 저 재산 관리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사문서 위조를 저지른 나쁜 사람이자 파렴치 범죄인입니다.  그런데 왜 피해자인 저 주인은 그 관리인을 칭찬한 것일까요 ?  또 왜 예수님께서는 저 이야기를 본받아야 할 좋은 예로 드신 것일까요 ?  이건 마치... 부자들의 재물은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빨갱이 선동으로도 들릴 수 있는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  



찾아보니 여러 신학자들이 여러 견해를 내놓았고, 아직 (어쩌면 영원히) 명확한 정답은 없는 모양입니다.


1.  가장 전통적인 설 : 결과가 중요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관리인이 결국 주인의 평판과 명예를 드높였으니 그 점을 칭찬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들과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요 우리가 우리 재산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저 우리가 잠깐 가지고 있는 것 뿐이다 뭐 그런 설교가 이어집니다.  제일 무난하면서도 제일 지루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2. 금융공학적인 설 : 관리인이 탕감한 것은 자신의 커미션


이 설에 따르면 관리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인의 채권을 부당한 방법으로 탕감해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성경에도 자주 등장하는 직업인 당시 로마 제국의 세리(세금 징수원)에 대해 아셔야 합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이스라엘 같은 속주의 세금 징수를 현지 민간인들에게 위탁하는 방식을 썼습니다.  받아내야 할 세금이 10 데나리온이라면, 임명된 현지 민간 세금 징수원에게 (가령) 7데나리온만 가져오라는 식이었지요.  원래 피점령지 농민들에게서 세금을 받아내는 것이 어렵쟎아요.  그러니 3데나리온은 민간 세금 징수원에게 주는 비용으로 처리하는 셈이었습니다.  그러니 만약 민간 세금 징수원이 원래 세금을 다 받아낼 수록 징수원의 이익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징수원들은 대부분 세금을 난폭한 방법을 써서라도 악착같이 받아냈고 그 때문에라도 동족의 고혈을 짜내 로마제국에 바치는 민족 배신자로 여겨졌습니다.   


이 설에 따르면 주인과 관리인도 이와 비슷한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리인이 채무자들에게 탕감해준 빚은 주인의 계좌로 들어가야 할 원금이라기보다는 관리인의 몫으로 가는 커미션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관리인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며 주인의 명예를 높였으니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많은 개신교 목사님들 뿐만 아니라 (영문 위키에 따르면) 카톨릭에서도 이 설을 주로 채택한다고 합니다.


매우 마음에 드는 해석이기는 한데, 그렇다면 관리인이 자신의 커미션을 포기하는데 왜 채무자들에게 찾아가 대출문서를 새로 작성하는지가 설명이 안 됩니다.  게다가 왜 밀 100석을 꾼 사람에게는 80석로 줄여주고, 올리브유 100말을 꾼 사람에게는 50말로 줄여주는지도 의아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논의를 하다가 나름대로의 이론을 제시했었습니다.  곡식은 보관이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에 원래 커미션으로 20%만 주지만, 올리브유는 깨지기 쉬운 토기 항아리에 담아야 하는 등 취급이 어렵기 때문에 커미션으로 50%를 준 것이라고요.  현대에서도 원유 같은 액체 상품은 보관료가 비싸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을 듣던 사람이 이견을 내더라고요.  "하지만 곡식은 쥐가 파먹는데요 !"  제 이론은 회사원들 술자리에서 나온 반론조차도 감당을 못하더군요.


3. 해학 풍자설 : 관리자를 비꼬는 유쾌한 설교


이 설은 예수님께서 꼼수를 써서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부정직한 관리자를 냉소적으로 풍자하는 설교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다른 책에서도 읽기에, 예수님의 설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엄숙-근엄-진지하지 않았고 풍자와 해학이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그 설교를 듣는 유대인들은 자주 폭소를 터뜨리며 웃었다고 합니다.  


4. 편집 실수설 : 성서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뭔가 실수가 있었다 ?


이건 진짜 소수설로서, 제대로 된 연구에서는 이런 주장하는 것은 못 봤고 인터넷 홈피 등에서만 봤습니다.  다만 저도 이 설이 완전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배운 것 없는 서민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비유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혼동을 일으키는 모호한 설교를 하셨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언어인 아람어로 쓰인 것이 아니라 해외 교포 유대인들을 위해 헬라어로 쓰인 책입니다.  그나마 원본은 (어쩌면 당연히) 분실되었고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누가복음은 복사본의 복사본(third-generation copies)에 근거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복사본들 중 내용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네요.  




(3세기 경에 씌여진 파피루스 종이 위의 누가복음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어느 설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맨 마지막으로 하셨던 말씀은 확실하다고 봅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여러분, 어려운 이웃과 나누고 삽시다.  그것이 크리스마스 정신입니다.  나중에 선거 때가 되면 당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서민들을 위한 복지 확대를 추구하는 쪽에 표를 던져 주세요.  적은 돈이라도 기부도 하시고요.  저도 천국에 갈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지옥에 갈 때의 자기 변호를 위해서 눈곱만큼 정도의 기부는 하고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레미제라블 중에서 미리엘 주교의 일화를 인용하면서 끝냅니다.  저는 저 제보랑씨가 마치 저처럼 느껴져요.  



레미제라블 중에서 -----------


주교의 설교 주제는 자선이었다.  그는 부자들이 지옥을 피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지옥의 끔찍함을 생생하게, 그리고 천국의 아름다움을 달콤하게 묘사했다.  청중 중에는 은퇴한 부유한 상인이 있었는데, 이름은 제보랑이라고 했고 고리대금업자처럼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나사천과 서지(serge) 천, 모직천 등을 제조하여 50만 프랑(현재 가치로 약 50억원)의 거액을 모았는데, 평생 불쌍한 거지에게 단 한 푼도 동냥을 한 적이 없었다.  


그 설교 뒤에, 제보랑씨가 일요일마다 성당 입구에서 가난한 여자 거지들에게 1수(sou, 현재 가치로 약 500원)를 나눠주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 1수를 여섯 명의 거지들이 나눠가져야 했다.  하루는 미리엘 주교가 그가 그런 자선을 베푸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여동생에게 말했다. 


"보려무나.  저기 제보랑씨가 천국을 1수 어치 사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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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하시는 분은 없겠지만 노파심에서 이야기하자면 미리엘 주교는 분명히 냉소적으로 제보랑씨를 비웃고 있는 겁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Thomas_the_Apostle

https://en.wikipedia.org/wiki/Girdle_of_Thomas

https://en.wikipedia.org/wiki/Gospel_of_Luke

https://www.bible.com/ko/bible/86/LUK.16.KLB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html?selectedColls=Expression&category=Report&m201_id=10020367&actionUrl=search/detailView&local_id=10021458&dbGubun=SD&index=&baseUrl=/krmts&reportGubun=RS&metaDataId=&linkingentry=2009-327-A00255&currentGroup=frbr

https://en.wikipedia.org/wiki/Parable_of_the_Unjust_Ste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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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송보송복슬이 2018.12.24 0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경에서 돈을 내라 할 때는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따라야 한다고 하다가
    성경에서 돈을 나누라 할 때는 은유와 비유이니 그대로 따르지 말고 속 뜻을 봐야한다고
    말하시니. 목사님, 목사님이 섬기시는건 하느님입니까 아니면 돈님입니까?

    • nasica 2018.12.24 12: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때그때 달라요 ㅋ

    • 까까님 2018.12.24 13: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먹어야 싸지요 ^^;;
      주께서 세상에 베푸신 모든 은혜들을 누리기 전에 불경스럽게도 죽지 않는 것이 목회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7일이나 쉼 없이 창조하신 은혜들을 헛되이 하고서 어떻게 어린 양들을 이끌겠나이까

  2. 최홍락 2018.12.24 1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 설을 보충하자면 Side Letter를 따로 작성하는 식으로 해결 가능할수도...

    그러니까 주인이 높은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명목상으로는
    빚을 줄여주는 방식으로 감액된 금액만큼 신고를 하고

    관리인은 명목상으로는 주인으로부터 신임을 잃었다고 하는데 실질적으로 주인의 빚을 줄여주는 대가로 사람들에게 얻는 혜택을 다시 주인과 나눠갖는 식의 계산이라면 가능할수도요. (말하자면 In-house broker같은 경우죠.) 이걸 어드레스 커미션(Address Commission)이라고 부르죠. 이런 형식의 계약을 주인과 관리인 사이에 Side letter로 체결하는거고요.

    상기 Address Commission 거래가 현대에도 간혹 있기는 한데, 보통최종 수금인이 회사가 아닌 경영자 개인으로 되는, 이른바 비자금으로 조성이 되서 문제가 되기도 하죠.

  3. reinhart100 2018.12.24 15: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로마 공화정 및 3세기 이전의 제정에서 징세업무를 민간이 완전히 전담한 것은 아닙니다.

    우선, <피스쿠스> 관련된 세금, 즉, 황제 (혹은 독재관, 집정관)이 직접 관할하는 재정으로 들어가는 세금에 대해서 함부로 민간 징세업자들이 멋대로 징수할 수는 없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인두세 개념으로써의 속주세 및 매출 및 소비행위에 대하여 징수하는 간접세 계열의 세금 상당수가 라인, 도나우, 동방 지역 군단 유지비 및 사회간접자본시설 신축 및 개축, 유지,보수 비용으로 상당수 들어가다보니 민간 징수업자들의 무제한적 영리 추구에 제동을 거는 장치가 상당했습니다. 당장, 이걸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총독들 상당수가 로마로 귀환하자마자 당장 재판에 걸려나가면서 정치 생명이 끝장나기 일쑤였습니다. 이런 재판을 통해 명성을 얻은 사람이 공화적 시기만 하더라도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와의 염문으로 유명한 안토니우스의 조부), 키케로, 카이사르 등이 대표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공화정 말기 및 제정 시기 피스쿠스 계열 조세의 중요한 점이 바로 기축통화였던 아우레우스 금화, 데나리우스 은화의 통화가치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한 지금용 재정으로 작용했다는 점입니다. 피스쿠스로 분류되는 재정분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금화 및 은화 증발에 대한 통제가 되지 않으면서 3세기 인플레이션이 미친 듯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원로원 관할 재정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아이라리움 계열 재정'에 관련된 세금을 민간 징세업자들이 무한정으로 영리추구를 할 수 있었냐? 그것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건 말 그대로 서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동화 발행 및 유통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였으니까요. 공화정 및 3세기 이전의 로마에서 '로마시민권을 가진 주권자들의 대표'라는 원로원이 동전만큼은 발행권을 확보하고 있었으니까요. 금화나 은화야 서민들이 직접 만지기 쉽지 않았지만 놋쇠나 황동으로 만들어지는 동화 가치가 평가절하되어 물가 상승이 발생하면 당장 원로원에 불만이 폭발할테니 원로원도 이 문제만큼은 대단히 민감해 했습니다. 당장 동화 발행 및 가치 유지의 주된 재원이 바로 아이라리움 계열 재정인데 이걸 무한정 거둔다는 발상 자체가 말도 안 된다는 건 누가 봐도 명확했으니까요.

    그런데 왜 성경에 나오는 세리들의 행태가 심각해졌냐? 이건 유대지역 같은 제국 내에서 좀 특이한 지역의 특성도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유대(팔레스티나) 속주, 브리타니아 속주 같은 국방상 이유로 합병한 속주들 상당수는 군대 유지비가 일반적인 속주에 비해 속주 운영에 들어가는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높았습니다. 그나마 브리타니아나 라인강, 도나우강 연안 속주들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제국 중앙정부가 뭘 쥐어짜려고 해도 없다는 것은 잘 알다보니 부유한 원로원 관할 속주에서 재정을 이전 및 전용시킬 것을 각오하고 영토로 확장한 경우입니다. 예외적인 경우가 금광 및 은광이 터져나온 다키아 속주인데 이 때문에 271년 포기할 때까지 로마는 끝까지 다키아를 사수하려고 했습니다. 속주 유지비가 자체 충당되는 라인 및 도나우강 연안의 전방지역 거의 유일한 속주인데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웠죠.

    문제는 유대지역이었습니다. 이 동네가 동방지역 속주들 중에서는 상당히 가난했는데도 유지해야 할 군단 병력 수준은 직접적으로 주둔한 2개 군단 및 북방 시리아와 이집트 지역에서의 지원병력까지 적게 잡아도 군단병만 2만이 넘어갔고 보조병까지 계산하면 가볍게 4만은 육박했습니다. 게다가 유대 속주는 이집트 속주와 마찬가지로 '속주 총독'이 주재한 속주가 아니라 '속주 장관'이 주재하는 속주라는 점에서 황제 및 원로원, 속주 총독 모두가 민간 징세업자들의 영리 추구에 제동을 거는데 상당한 사각지대가 존재했다는 점입니다. 흔히 말하는 관리 감독 주체가 애매했다는 겁니다. 이집트 속주야 '황제 개인 소유'라는 점에서 관리 감독 주체는 황제로 명확했고 이집트 속주 자체가 워낙 돈이 많은 동네다 보니 장관이 영리를 추구해도 그 폐해가 크게 터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유대 속주는 도저히 답이 안나올 정도로 심각했다는 겁니다. 당장, 로마에 반란을 터트린 이유가 전부 세금 문제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알 수 있었죠.

    • 최홍락 2018.12.24 20:38  댓글주소  수정/삭제

      유대지역은 헤롯 왕조가 따로 지배하던 곳으로 알고 있는데 속주 조세 관리가 어떻게 정리가 된건지ᆢ그리고 시리아 레반트 지역은 거의 최전선 속주인데 유대 지역과는 달리 불만은 없었는지 궁금하네요

    • reinhardt100 2018.12.25 18: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리아 등 레반트 지역의 속주는 사막 자체가 방어선으로 어느 정도 기능하는데다가 무엇보다도 서방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생겼다는 겁니다.

      로마제정기부터 동방과 서방의 인구 역전이 확실히 일어나게 되는데 특히, 동방지역의 토양쇠퇴가 가시화되는 것과 반대로 서방지역의 경제발전 수준은 꽤나 눈부십니다. 이 덕분에 동방지역은 농업쇠퇴를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는 교역에 점차 집중하게 됩니다. 게다가 로마의 속주민에 대한 세율은 경쟁국가였던 파르티아나 아르메니아, 동방 소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는 이점이 있다보니 속주민의 반발도 적었습니다.

      유대 속주의 경우, 헤로데 대왕 사후에 아우구스투스가 3분할을 했다가 북부 일부만 헤롯 2세 등 헤롯 왕가 계열이 다스리고 나머지는 유대 장관 관할지역으로 통합시켰는데 여기서 이미 미스가 터진 겁니다. 차라리 율리우스 카이사르 처럼 완전 정교일치의 신정국가 체제를 그대로 해주든지 했어야 했는데 죽도 밥도 안 된 사후처리 때문에 엉망이 된 겁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상당히 문제 많은 분입니다만 적어도 이 한 마디만은 맞다고 봅니다. '로마제국도 더 이상 유대인들의 신정국가 창설만은 용납할 수 없는 상태까지 몰리게 되었다.'라고 로마인 이야기에 비슷하게 썼는데 저도 동감입니다.

      속주세 같은 경우, 사실상 유대 속주의 경우에는 군사비로 많이 들어갔고 그 다음으로 무엇보다도 상하수도 유지에 많이 들어갔습니다. 이미 이 시기부터 유대지역 및 시리아 등 레반트 지역 전체의 지력 쇠퇴가 심각해지면서 버려지는 도시가 속출했는데 이걸 막으려면 관개시설에 목숨 걸어야 했으니까요.

    • 최홍락 2018.12.26 2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속주세에는 수입의 10퍼센트 수준인 이른바 성전세도 포함된 수치인가요? 아님 별도인가요? 근거 자료는 에드워드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인지ᆢ

    • reinhardt100 2018.12.26 2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성전세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이 세금은 10% 세율인 속주민에 대한 인두세에 포함되지도 않았고 조세 부과 주체도 속주세가 유대 장관이라면 이 성전세는 예루살렘 성전 및 이를 관리하는
      70인회라서 성격이 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성전세가 서기 70년 종결된 1차 유대전쟁 이후에는 예루살렘 성전 대신 로마의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신전들로 수령 주체가 바뀝니다. 공식적으로는 유대인의 의무면제를 위한 인두세라고 하지만 실은 유대교 종교생활을 영휘하는 대가로 부과하는 종교세였고 이건 성인남성뿐만 아니라 유대교 신도 전부를 대상으로 부과하는 유례가 없는 세금이라는 점에서 이후 '유대인세' 라고 통칭됩니다.

      이거 출처는 로마법 관련 논문들인데 저도 기억이 잘 안 나서요. 학부시절 읽었던 거라 가물가물하세요.

    • Spitfire 2018.12.28 0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레반트 지역이 언제부터 사막이었는지가 관건일듯 합니다. 현지인들의 인식으로는 최소 6세기까지도 중동 지역은 밀림까지는 아니라도 녹지가 상당한 지역이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현대의 우리가 모르는 다른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 reinhardt100 2018.12.28 1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실 북아프리카면 맞는데 레반트는 기원전부터 좀 심각했다고 합니다. 관개에 몰빵한 이유가 수자원부족까지 겹쳤다고 하니까요.

      이슬람이 대규모 관개 시설 혁신을 새로운 수자원을 활용했지만 그 정도로는 지력쇠퇴를 막을 수 없었다는 점과 관개를 통한 토양염화가 촉진된다는 점도 고려해봐야 할 듯 합니다.

  4. 유애경 2018.12.25 0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번 잘읽고 갑니다.
    교회에서는 대개 신앙심이 부족(?)한 사람에게 '의심많은 도마' 란 표현을 많이 하죠.
    그런데 바꿔 생각하면 도마는 아주 신중한 성격에 현실주의자? 내지 합리주의자? 였을수도...

    그나저나 저도 나시카님과 같은 의문을 가진적이 있는데요. 어린아이들은 몇살때까지가 천국에 들어가는 리미트인지,만약 생일을 한시간이라도 넘기게 되면 지옥에 가야하는건지...거기에 대한 해답은 성경에 안나와 있으니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런데,아기들의 생사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생각 했는데 그게 아닌가 보죠?
    예수님를 영접할때까지 죽지 않도록 부모가 잘 돌봐야 한다니요!

  5. Spitfire 2018.12.25 0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메리 크리스마스 입니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도 은유라고 생각합니다. 가진자일수록 더 베풀라는 뜻이겠지요. 돈을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쓰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테구요. 그래서 작은 걸음이나마 실천하려고 매일매일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무작정 서민복지를 위하는 당은 절대 찍지 않을 겁니다. 서민을 돕는 것과 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니까요. 선량한 마음으로 어려운 자를 돕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복지를 늘리는 것은 정치의 문제다보니 우선 예산확보의 타당성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 복지예산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일지가 증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정책의 후폭풍이 얼마나 큰지는 베네주엘라라는 나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nasica 2018.12.25 0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즐거운 성탄 되시길 바랍니다. 마음 먹는 것은 매우 쉬운데, 그걸 실행에 옮기는 것이 정말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더라고요. 적어도 제게는 그렇더군요.

  6. 푸른 2018.12.25 1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크리스마스아침부터 이런 흥미로운 글 감사합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보다 Happy holiday라고 하던데, 어찌되었든 좋은 하루되시길!

  7. reinhardt100 2018.12.25 1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성탄절에서 나시카님께서도 남은 시간 가족과 잘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8. 지나가던 사람 2018.12.26 15: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맹상군과 풍환 이야기와 비슷한 듯도 하네요. 그냥 부자가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정도로 퉁치고 넘어가고 싶어요. ^^

  9. TheK의 추천영화 2018.12.26 19: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왓! 정말 핫한 주제로 싸우고 계시네요.
    대단하십니다.
    추천 꾸욱!~ 누르고 도망갑니다.

  10. 성북천 2018.12.26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어떤 부자는 하나님을 가르킨다는 전통적인 해석이 진부하지만 맞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믿고 싶고 금방 오실 것 같았던 예수님은 아직 안 오시니 재물은 못 놓겠고 또 그런 자신에게 캥기니 이런 저런 변명이 해석이란 이름으로 남발되는 듯 합니다
    정작 오시면 어쩌나 걱정과 겁도 나고

  11. shaind 2019.04.17 0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그 교훈이 70인역의 지혜서나 잠언 같은, 내지는 그 이야기가 풀려나가는 방식이 탈무드의 일화중 하나로 소개될 법한 무언가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컨대 요한복음의 유명한 일화처럼) 편집 실수로 다른 그리스-유대계 지혜문학이 섞여들어간 편집실수나 기억의 혼동이라는 견해도 꽤 신빙성이 있다고 느껴지네요.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마리우스는 가난한 청년이지만, 그의 외할아버지는 부자로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 외할아버지도 대단한 부자는 아닙니다.  영화 속에서, "Look down - Paris" 부분에서 마리우스와 앙졸라가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있을 때 외할아버지가 그 광경을 마차 안에서 지켜보면서 통탄하고 있는 모습이 잠깐 나오지요 ?  하지만 소설 속에서 이 외할아버지는 마차를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시 2인승 작은 마차라도 소유하려면 1달 유지비만도 500프랑 정도로서 엄청나게 비쌌거든요.  이 외할아버지가 마차를 탔다면 현재의 택시 같은 삯마차를 탄 것입니다.  과연 이 외할아버지 질노르망(Gillenormand) 씨는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을까요 ? 




(이 분이 마리우스의 외할아버지 질노르망 씨입니다.  그는 결코 귀족이 아니라, 그냥 Grand Bourgeois, 즉 앙시앵 레짐 (구 체제)를 지지하는 부유한 시민입니다.  현대어로 하면 보수우익 노친네정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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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내, 두 번째 아내는 그의 재산을 하도 잘 관리해서, 어느 날 그가 홀아비가 되었을 때, 질노르망 씨에게는 꼭 먹고살 만한 재산이 남아 있었는데, 즉 거의 전부를 종신 연금으로 예금함으로써 연수입이 1만 5천 프랑쯤 되었는데, 그 중 3/4은 그의 죽음과 함께 소멸되게 되어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유산을 남기려는 배려는 별로 염두에 없었으니까.  더구나 그는 상속 재산에는 뜻 밖의 일이 일어나는 것을, 예컨대 그것이 '국가 재산'이 되는 것을 보았고, 제3 정리 공채의 변화를 목격했으며, 원장은 별로 믿지 않았다.  "캥캉푸아 거리의 은행 밖에 없지 않은가 !" 라고 그는 말했다.  피유 뒤 칼베르 거리의 집은 앞서 말했 듯이 그의 소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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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또 민음사 번역의 문제가 나옵니다.  아마 저 번역은 구글이 나오기 전인 수십년 전에 해놓은 번역 같아요.  저 제3 정리 공채 (tiers consolidé) 라는 것은 불어를 직역하면 그런 번역이 나오는데, 다른 영문판을 보면 이를 'consolidated three per cents'로 번역했더군요.  즉 원금 상환없이 영구적으로 3%의 이자를 주는 3% 통합 영구 채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통합 영구채인 'Consol'에 해당하는 채권인데, 아마도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지요 ?  또 원장(grand-livre)이라는 것은 Great Book of the Public Debt 로서, 국채 원장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캥캉푸아 거리 (Rue Quincampois)라는 것은 은행이 아니라, 나폴레옹 이전 시대에 파리 증권 거래소(Bourse)가 있던 거리 이름입니다.  즉, 국채 원장이라고 해봐야 증권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유가 증권에 불과하다, 즉 못 믿을 물건이다 라고 비꼬는 것입니다.




(현대의 캥캉푸와 거리입니다.  현대의 파리 증권 거래소는 이곳이 아니라  Palais Brongniart에 있는데, 이는 나폴레옹이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질노르망 씨가 작은 2인승 마차라도 소유했다면, 1년에 6천 프랑을 그 유지비로 써야 했는데 (세금, 말 사료 값, 마차 수리비, 마부 임금 등등) 그건 자신의 1년 연금의 1/3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니까, 당연히 질노르망 씨는 마차를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500프랑이면 어느 정도의 액수이고, 1만 5천 프랑이면 또 어느 정도의 금액이었을까요 ?  현재 우리나라 원화 가치로 따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저는 확실히 속물이겠지요 ?


일단 당시 프랑 화의 가치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해주는 구절을 레미제라블 속에서 모아보았습니다.  가령 가정에 숙식하는 요리사의 월급은 50 프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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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지기 족속 같은 키다리로 거만한 요리사 하나가, 요리의 명수가 나타났다.  "월급은 얼마를 받고 싶은고 ?" 하고 질노르망 씨는 물었다.  "30프랑입니다."  "이름은 무엇인고 ?"  "올랭피라고 합니다."  "50프랑 주겠다.  그리고 이름은 니콜레트라고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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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가 외할아버지 몰래 자기 아버지 퐁메르시 중령의 무덤에 가서 슬퍼하는 장면의 삽화입니다.  마리우스는 결국 생전의 아버지는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죽은 아버지를 도서관에 가서 신문 및 정부 보고서를 통해 찾아보고, 결국 보나파르트주의자가 되어 버리지요.  할아버지는 왕당파, 손자는 보나파르트주의자 내지는 공화주의자라... 요즘 한국 사회와 많이 비슷합니다.)




아버지 퐁메르시 중령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급작스럽게 보나르파트주의자가 된 마리우스는, 보나파르트나 혁명이라면 질색을 하던 보호자이자 외할아버지인 질노르망 씨와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립니다.  마리우스의 변화에 분노한 외할아버지는 마리우스를 집에서 내쫓는데, 그러면서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외손자에 대한 정이 남아 있어서, 마리우스의 이모이자 자신의 딸인 질노르망 양에게 6개월에 60 피스톨을 보내주라고 하지요.  1 피스톨(pistole)은 10 프랑에 해당하는 옛 스페인 금화입니다.  그러니까 한달에 100 프랑, 1년에 1200 프랑을 보내주는 셈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생활비일까요 ?




(앙졸라도 알고 보면 부르조아 계급 출신입니다.)




마리우스가 집을 나와서 사귀게 되는 ABC의 벗들은 경제적으로 어떤지 살펴보면 그 답을 아실 수 있습니다.  일단 앙졸라(Enjolras)는 그냥 부자집 외아들이라는 것 말고는 자세한 신상에 대해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다른 친구들도 대충 먹고 살만 한 중산층 집안의 자제인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먹고 사는 문제로 궁핍한 흔적이 보이지 않거든요.  그 중 바오렐(Bahorel)의 부모는 농부인데, 그래도 꽤 규모가 있는 자작농인 모양입니다.  그 부모는 '법률 공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바오렐에게 1년에 3천 프랑의 생활비를 보내주었는데, 작가인 빅토르 위고는 이에 대해 '꽤 넉넉한 액수'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마리우스와 앙졸라, 그리고 앙졸라와 마주 보고 있는 그랑테르를 빼면 누가 푀이고 누가 쿠르페이락인지 전혀 못 알아보겠어요.)




다만 ABC의 벗들 중 유일한 노동자 계층인 푀이(Feuilly)가 1프랑의 가치를 말해줍니다.  그는 부채를 만드는 노동자인데, 원래 고아 출신으로서 일을 하면서도 독학을 해서 읽고 쓰는 것 뿐만 아니라 역사를 공부한 지식인입니다.  그는 하루에 간신히 3프랑을 벌었습니다.  노동자라고 해도 일요일은 놀았을테니, 기껏해야 한달에 75프랑을 벌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1년이면 900프랑입니다.  놀고 먹는 바오렐의 3000프랑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액수이지요.


더 자세히 보시지요.  마리우스가 출판사 일을 하면서 가난하게 살 때, 그의 가계부를 작성해보았습니다.




(마리우스는 결국 집을 나가서 변호사가 되는데, 정작 변호사로서의 수입은 없고 출판사에 글을 써주면서 돈을 법니다.   애초에 친구인 쿠르페이락이 이 출판사 일을 소개해줄 때 '영어하고 독일어를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인데' 라고 하자, 마리우스는 겁도 없이 '배워서 하지 뭐' 하면서 도전해서, 결국 그 일을 따냅니다.)




대충 이러면 푀이의 생활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혼자서는 그럭저럭 먹고 살아도,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이지요.  참고로 마리우스가 저녁 식사를 루이 식당이라는 곳에 가서 매일 외식을 했다고 해서 그가 아직도 부자 시절을 못 잊고 된장남 생활을 하고 있다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집은 수도는 커녕 (당시 파리에 그런 거 없었습니다) 난로조차 없는 곳이라서 취사가 아예 불가능했거든요.  마리우스가 그 식당에서 어느 정도의 절약을 했는가 하면 '수프는 먹지 않고, 포도주 대신 항상 물을 마셨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리우스가 원작에서도 미남으로 나오냐고요 ?  예, 앙졸라 만큼은 아니지만 지나가는 여자들이 힐끔힐끔 쳐다볼 정도의 아름다운 흑발 청년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는 여자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이유가 자신의 구멍난 셔츠와 팔꿈치가 헤어진 자켓 때문인줄 알고 부끄러워하지요.)




자, 저런 액수가 과연 현재 가치로 어느 정도에 해당할까요 ?  당시 1프랑의 현재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고려해야 할 요소가 금리며 인플레며 구매력 산업 생산성 등등 너무나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그냥 금의 가치는 영원하다고 가정하고 계산해보면 의외로 쉽게 답이 나옵니다.  당시 루이 금화 (Louis d'Or)는 20프랑 짜리였는데, 당시 원칙은 그 금화를 녹였을 때 나오는 금의 양이 실제 그 금화 액면가와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는 국가에서 주조한 금화는 그 신뢰성 때문에 더 높은 가치를 인정해주었습니다만, 여기서는 계산상의 편의를 위해 그냥 생략하겠습니다.)




(이것이 20프랑짜리 나폴레옹 금화입니다.)




당시 프랑스 화폐 단위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프랑스 혁명 이전의 프랑스 화폐 단위는 크게 리브르 (livre = 20 sous), 수 (sou = 12 derniers), 데르니에 (dernier)로 나뉘었습니다.   프랑스어로 livre라고 하면 책이라는 뜻도 있지만 원래 영어의 pound에 해당하는 무게 단위입니다.  즉 1파운드 무게의 은에 해당하는 가치를 1 리브르로 정했던 것이지요.  이는 영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국 파운드화의 기호가 P가 아니라 L 모양인 것입니다.) 




(설마 이 표시가 영국 파운드 스털링 화의 심볼이라는 거 모르시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그러다가 혁명 정부 들어서서 과거의 도량형을 바꾸면서 공식 화폐도 1795년에 프랑(franc = 100 centimes)과 상팀(centime)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회라는 것이 정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지라, 여전히 리브르나 수 라는 단위도 여전히 혼용되어 쓰였는데, 특히 리브르는 원래 프랑보다는 약간 더 큰 단위였습니다만, 그에 상관없이 1리브르 = 1프랑이라는 약간 부정확한 개념이 그대로 통용되었던 모양입니다.  원본에서는 어떤 경우에는 리브르, 어떤 경우에는 프랑이라는 단위를 썼는데, 제가 산 민음사 레미제라블에서는 그런 구분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원본에서는 리브르라고 쓴 경우에도 그냥 무조건 프랑으로 번역을 해버리는 바람에, 1프랑=20수의 개념이 계속 나옵니다.  실제로도 리브르나 프랑이나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니까, 여기서도 그냥 그렇게 1리브르=1프랑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흔히 나폴레옹을 군사적 천재로만 받아들입니다만, 사실 나폴레옹은 오늘날 프랑스, 더 나아가 유럽 전체의 기틀을 닦은 사람으로서, 오늘날 위인전에 올라가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진짜 위인입니다.  아우스터를리츠나 예나, 마렝고 등의 승전보다도 오히려 더 프랑스를 빛낸 나폴레옹의 업적은 바로 나폴레옹 법전의 편찬, 고등학교인 리세(lycee) 제도의 확립, 그리고 프랑스 중앙은행의 설립입니다.  그 중 프랑스 중앙은행은 영국의 영란은행을 본 뜬 것이라서 비록 창의성 면에서는 떨어지므로, 나폴레옹의 2대 업적에서는 빠집니다만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부르봉 왕가가 복위한 이후에도 나폴레옹이 이룩한 이 제도들은 그대로 이어졌던 것을 보더라도, 그의 위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덕분에 총재 정부 시절 아시냐 지폐의 실패로 인해 하이퍼 인플레를 겪던 프랑스의 재정난은 안정을 되찾았고, 프랑스의 인플레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도 매우 안정적이었습니다.  즉, 1810년 경인 나폴레옹 당시의 물가나 1832년 경인 레미제라블 시대의 물가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지요.




(위 표가 연도별 금 1 온스의 가격입니다.  금 가격이 이렇게 상상을 초월하게 뛰게 된 것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대공황 때부터 좀 이상하더니 1970년 경에 미국이 금태환 제도를 포기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때 이후 금값은 그야말로 폭등을 거듭했는데, 사실 금값이 올랐다가 보다는 화폐가치가 떨어진 것이지요.)




덕분에 당시 나폴레옹 금화로부터 쉽게 당시 1프랑의 가치를 현재 대한민국 원화로 환산이 가능합니다.  40프랑짜리 나폴레옹 금화 1개 속에 들어있는 금의 양은 11.614g, 20프랑짜리 나폴레옹 금화 1개 속에 들어있는 금의 양은 5.801g 이었습니다.  현재 금 1g의 가치를 원화로 대략 56,000원이라고 보면, 레미제라블 시대의 1프랑은 현재 우리 원화로 약 16,000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ABC의 벗들 중 푀이의 한달 월급은 약 120만원이고, 바오렐이 넉넉하게 써대던 1년 생활비는 약 4,800만원이었던 것이지요.  더불어, 질노르망 씨가 외손자 마리우스에게 '최저 생계비'로 주려고 했던 돈은 대략 연간 1,920만원 정도였습니다.  아울러, 졸지에 이름이 니콜레트로 바뀌어야 했던 질노르망 씨 요리사의 월급은 80만원인 것이었지요.  (하긴 니콜레트는 그 외에 숙식 제공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마리우스가 가난하게 살 시절 매일 저녁 루이 식당에서 먹었던 조촐하지만 푸짐했던 저녁 식사의 가격은 1만2천8백원 정도였습니다.  조촐했던 빵과 날계란 점심값은 3200원 꼴이었고요.  그러니까 1년에 식비로 584만원을 쓴 것이고, 그에 비해 1년 피복비는 겉옷 속옷 다 합해서 240만원 정도 되는 셈입니다.  현재 여러분의 사정과 비교했을 때 대략 어떤가요 ? 




(이 사진은 본문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앙졸라가 부르는 Red - Black의 가사 중에서 사랑에 빠진 마리우스에게 이런 말을 하는 부분이 있지요.  - Who cares about your lonely soul ? )




자, 그럼 여기서 좀더 속물스러운 분들께서 솔깃해하실 이야기를 해보지요.  질노르망 씨는 살고 있는 집을 제외한 남은 재산 전부를 종신 연금으로, 그것도 본인 사망시 3/4이 소멸되는 '일부 상속형' 연금 상품으로 다 가입해 놓았고, 그래서 연간 15,000 프랑의 수입이 있다고 했습니다.  원화로 따지면 연간 2억 4천만원입니다 !  충분히 부자집인 거지요.  그런데 이렇게 풍족한 연금이 나오려면 대체 원금은 얼마였을까요 ?


그에 대한 설명이, 놀랍게도 레미제라블 본문에서 어느 정도 나옵니다 !  바리케이드 사건이 끝나고, 모두가 화해를 한 뒤에, 질노르망 씨에게 코제트가 장발장과 함께 와서 인사를 하지요.  질노르망 씨는 코제트의 아름다움과 천진함에 반해서 참으로 예쁜 아이라고 칭찬을 하다가, 문득 그녀의 손을 잡고 우울해 합니다. 


"참으로 유감이구나 !  내가 그것을 생각하니 !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반 이상은 종신연금이니,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래도 아직 괜찮겠지만, 내가 죽은 뒤에는, 지금부터 이십 년쯤 후에는, 아 ! 내 가엾은 아이들아, 너희들은 무일푼이 될 것이다 !  당신의 아름다운 흰 손도, 남작 부인, 생활이 궁하여 일을 해야 할 거요."



이때 장발장이 마들렌 시장으로 일하면서 모아두었던 돈 58만4천 프랑을 코제트의 지참금으로 내놓습니다.  현재 가치로 93억4천만원 정도입니다 !!! 




(자기야, 이제 우린 폈어 !  우리 아버지가 나 몰래 감춰두신 재산이 90억이 넘는대 !)




아마도 마리우스는 이 돈으로 자기 외할아버지처럼 종신연금을 넣은 모양이에요.  나중에 장발장이 자신이 사실은 전과자이며, 그래서 떠나겠다고 하자, 마리우스는 못 이기는 척 허락하면서도, 장발장이 준 그 지참금에 대해서도 꺼림직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리우스와 코제트와 한 대화가 코제트의 입을 통해서 나옵니다.  


"코제트, 우리는 3만 리브르의 연금을 가지고 있어.  2만7천은 네가 갖고 있는 것이고, 3천은 할아버지가 주시는 거야.  너는 그 중 3천 리브르만으로 살아갈 용기가 있겠니 ?"


(민음사 레미제라블 제5편 424페이지에는 '너는 이 3만 프랑으로 살아갈 용기가...' 라고 되어 있는데, 이거 오타입니다.  원본을 확인했는데, 3천이 맞습니다.  단위도 리브르이고요.)




(마리우스가 코제트에게 '그 중 3천 리브르만으로 살아갈 용기가 있겠니 ?' 라고 물었을 때 코제트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  "물론.  난 너만 있으면 돼.")




즉 마리우스는 장발장이 준 지참금은 범죄에 연관된 돈이라고 의심하여, 가급적 그 돈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아무튼 여기서 실마리가 나옵니다.  즉, 58만4천 프랑으로 연 2만7천 프랑의 연금이 나오는 것이지요.  원금이 워낙 컸으므로, 아마도 원금은 그대로 보존하는 상품에 가입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연 수익률이 4.62%에 해당하는 연금 상품에 가입한 것입니다.  실제로 1830년대의 프랑스 금리는 대략 4% 정도였으니까, 연금 상품에 가입했다면 저 정도의 금액이 나오는 것이 맞습니다.   


저처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40대 가장의 입장에서는 3만 프랑은 고사하고 1년에 3천 프랑, 그러니까 연간 4800만원의 연금만 있다고 해도 목구멍에서 수건 짜는 소리가 들릴 만큼 부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도 항상 어떻게 돈을 모으고 어떻게 돈을 굴려야 제 가족이 생활비 걱정 안하고 살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고 고민합니다.  물론 그런 고민도 돈이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크게 나누면 수익형 부동산에 투자하느냐 연금을 택하느냐 펀드 같은 것에 투자하느냐 그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질노르망 씨나 마리우스 부부는 종신 연금을 택한 것 같아요. 



 

(근데 자기야... 이거 연 4.6%가 과연 최선일까 ?  인플레 헷지는 어떻게 하려고 ?)




그런데 종신 연금이 답일까요 ?  글쎄요,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질노르망 씨가 살던 시대에는 금본위제도 덕분에 장기적인 측면에서의 인플레가 거의 없거나, 있어도 매우 안정적이었습니다.  즉, 금리보다 물가인상률이 훨씬 낮았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10년 20년 후에도 동일한 금액의 연금이 나온다고 해도, 걱정할 것이 없지요.  그러나, 지금 받는 100만원의 돈 가치가, 10년 20년 후에는 지금 가치의 절반으로 떨어진다고 하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지금 우리나라 금리가 매우 낮은데, 물가는 원유나 곡물 등 원자재 가격 인상으로 인해서 계속 오르고 있지요.  실질적인 마이너스 금리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연금은 아무래도 답이 아닌 것 같아요.  연금이 물가 인상율과 맞물려 계속 증액되는 구조라면 모를까...  그런데 그런 상품은 아직 못 본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욕을 먹는 국민연금 빼고는요.




(물론 단기적인 인플레야 꽤 있었습니다만, 레미제라블 시대인 저 1800 ~ 1840 사이에 실제 인플레는 매우 낮았습니다.  그에 비해 금리는 4~5% 수준이었지요.  저 시대에는 정말 종신 연금이라는 것이 안전한 투자 수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마들렌 시장, 그러니까 장발장에게로 관심을 되돌려보시지요.  장발장은 코제트와 함께 파리에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적선을 하며 '착한 삶'을 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수양 딸인 코제트에게 무려 60만 프랑에 가까운, 즉 90억원이 넘는 거액을 증여해주었네요 !!  이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라는 레미제라블 정신에 좀 어긋나는 것 아닌가요 ?  생각해보면 팡틴느의 비참한 최후도 장발장의 탓이 될 수 있습니다.  애초에 팡틴느에게 충분한 급여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팡틴느는 직장을 잃으면서 곧장 나락으로 추락한 것이니까요.  결국 장발장은 우익 보수층이 더 좋아해야 할 인물 아닐까요 ?




(실제로도 팡틴느는 처음에 장발장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 때 그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자기가 이 모양이 된 것이 장발장이 자기를 내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장발장이 그녀를 불미스러운 사생활을 이유로 내보내면서 규정에도 없는 퇴직금 조로 50프랑을 준 것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글쎄요.  우익이건 좌익이건 다 집어치우고, 이런 점을 생각해보시지요.  장발장은 그 유리 공장을 운영하면서, 라피트 은행에 자기 명의로 무려 63만 프랑의 금액을 예금했습니다.  이 돈이 결국 나중에 코제트에게 돌아가게 되지요.  하지만 장발장은 63만 프랑을 예금하면서 동시에, 지역 사회인 몽트뢰유 시의 빈민들을 위해 무려 100만 프랑 이상을 썼습니다.  일단 빈민을 위한 병원을 세우고, 빈민가 소년 소녀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당시 프랑스에는 아예 그 개념 자체가 희미했던 탁아소를 세우고, 무료 약국을 세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가난했던 그 지역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가장 큰 선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바로 잡는 일 중에는 저렇게 정치 운동을 벌이고 바리케이드를 쌓는 것도 있겠지만, 공장을 세우고 사람을 고용하여 사람들이 누군가의 자선에 의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힘으로 먹고 살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있습니다.)




특히 그런 일자리가 새로운 기술 혁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건 정말 인류 전체에 대한 공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영화에도 잠깐 나옵니다만, 장발장이 죽기 전에 코제트에게 읽어보라고 주는 편지가 나오지요.  영화 속에서는 그 편지가 '증오심으로 살다가 너를 맡게 되면서부터 사랑으로 살게 된 사람의 이야기'라고 나오지요.  뮤지컬의 대사는 '코제트 너를 항상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실제 원작에서는, 그 편지는 코제트에게 주어진 지참금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해명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장발장이 어떤 기술 혁신을 이룩했고, 그로 인한 수익금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그러니까 그 돈은 정직한 것이니 부디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그 돈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들어있었지요.  알고보면 장발장은 스티브 잡스였던 셈이지요.  이 정도 되는 인물이 자기 수양 딸에게 60만 프랑을 물려준다고 해서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  어떻게 보면 정말 장발장이야 말로 진정한 보수 진영의 영웅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부자들에게 세금을 깎아줘야 서민들의 삶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가짜 보수들 말고) 이런 진짜 보수 인사들로 가득 차있다면 정말 우리나라는 행복한 나라가 되겠지요.




(장발장은 므슈 포슐르방으로서 코제트에게 베푼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마들렌 시장으로서 몽트뢰유 시의 빈민들을 위해 베풀었습니다.)




팡틴느의 몰락은 장발장이 박봉을 주었기 때문 아니냐고요 ?  애초에 팡틴느가 몰락했던 것은 사실 팡틴느가 고향 마을에 되돌아 왔을때, 시작부터 가구 등을 들이느라 빚을 지고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마들렌 시장, 그러니까 장발장의 공장에 취직했을 때 생각보다 급료가 괜찮았으므로, 팡틴느도 '이젠 살아갈 수 있겠다' 라고 판단하여 마음을 놓고 과감히 빚을 졌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덜컥 뜻하지 않게 직장을 잃게 되었는데, 빚이 있다보니 그 도시를 떠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 손바닥만한 도시에서 탕녀로 소문이 났으니 다른 일거리를 구하지도 못했지요. 




(사실 팡틴느가 몰락한 것은 같이 일하던 동료 여자들의 시기심과 천박한 호기심이 가장 큰 원인이었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웬만하면 직접 들어가서 살 주택을 구입할 자금 외에는 빚은 지지 마세요.  빚은 부모님이 자유인으로 낳아주신 여러분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못된 것입니다.   특히 갚을 수 없는 빚은 정말 그렇습니다.  요즘 자동차 살 때 할부로 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요 ?  글쎄요... 예전 노예제 시절 사회에서나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중 진정한 자유인이 몇이나 되겠어요 ?  할부금 남은 자동차를 모는 청년은 노예이고, 그냥 버스를 타고 다니는 청년은 자유인인가요 ?  판단은 여러분 각자가 내리셔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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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an 2018.12.20 09: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번 올려주시는 글 재밌게 읽고있습니다

  2. 유애경 2018.12.20 1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이지 우리나라에 장발장 같은 보수인사가 많아졌음 하고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3. 빛둥 2018.12.20 1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0. 항상 재밌게 보고 있고, 이번 글로 인해 당시의 사회상이 수량적으로 더 잘 이해되었습니다.

    1. 1792년부터 1861년까지 금 가격(태환제도이니까 결국 돈의 가격)은 거의 변하지 않았네요.
    70년 가까이 지나면서 기술이 보급되고, 인구가 늘고, 교통이 발달하면서 생산이 늘었을텐데, 금 생산량은 그만큼 늘지 않았을 겁니다.(그래도 조금씩 올라가는 인플레율을 보니, 식민지의 광산 개척 등으로 금 생산량이 늘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경우, 생산량이 늘어도 각 개인의 경우 오히려 인구도 늘었기에 (금전적으로는) 조금씩 가난해지고, 물가가 약간씩 싸져서 생산물 기준으로는 생활수준이 비슷했겠습니다.

    2. 그나저나 당시 마차의 1달 유지비가 500프랑, 약 800만원이니, 현대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편하고 싸게 개인교통수단을 이용하는 호사를 누리는지 실감이 납니다.


    3. 현대의 물가가 원유나 곡물 등 원자재 가격 인상으로 계속 오르는 것은 맞는데, 그 정도는 그렇게 높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원유 가격만 봐도 80년대 이미 배럴당 30달러대였는데, 30년 이상 지난 현재 원유 종류에 따라 배럴당 50달러 전후(투자/투기 대상이 되어 급등락이 심하긴 합니다)입니다. 물론 프랑스가 금태환이었던 시대보다는 원자재 물가 상승률이 더 높다는 것은 맞습니다만... 대신 현대 시대는 고급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32평 아파트라고 해도, 같은 승용차라고 해도, 예전 것과 현재 공급되는 것의 고급화 수준은 상당히 크게 차이가 나고, 사람들의 눈높이는 최신 것에 맞춰집니다.


    4. 당시 인플레 수준을 보니, 금리 4-5%는 매우 좋은 금리인데, 문제는 이자를 주는 은행이나 각종 투자기관이 저렇게 인플레 이상으로 금리를 장기간 줘야 하는 경우 파산하는 경우가 꽤 있었을 겁니다. 고리대금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닌게, 결국은 채무자가 파산하거나 채권추심을 할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가게 되거든요.


    5. 팡틴느를 불미스러운 사생활을 이유로 퇴사시킨 것 자체가 현대 관점으로는 문제네요. 사생활과 회사생활을 구분해서 보는 생각이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없었기에 어쩔 수 없긴 하지만, 현대의 프랑스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 eithel 2018.12.21 1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2. 따지고보면 마차는 기사 딸린 고급차지요. 현대에도 그 정도 들 것 같습니다.

      3. 저 시대에 비하면 물가 상승률이 높은 건 반박할 수 없지요. 일단 금태환 시대와는 다르게 돈에 실체가 없지 않습니까?

      4. 사실 별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저 시절의 유럽은 여기저기서 은과 금을 긁어모으던 시기기는 합니다만...

  4. 즐거운 우리집 2018.12.20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 날씨는 괜찮은데 미세먼지가 안좋다고 하네요.
    마스크 챙기시고 건강도 챙기세요~^^

  5. Spitfire 2018.12.20 1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인장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부유한 사람들의 책무는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돕는 것이고, 올바른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올바른 방법으로 돈을 벌어도 가난한 자들보다 더 많이 벌 수 있습니다. 그냥 욕심이 과한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선과 사회공헌을 독려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와 분위기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고,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자들은 엄중하게 처벌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떻게든 있는자를 등쳐먹으려는 자들이 득시글거리고, 분식회계 해도 망하지 않는 회사가 있지요.. 사람의 마음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안되면 제도라도 만들어서 인식개선을 하는 것이 위정자들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위정자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탐욕과 이념에 사로잡혀 삽질만 할 뿐이니,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향은 언제쯤에나 올 수 있을지.. 감도 안잡히네요..ㅜㅜ

  6. mip 2018.12.20 1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ㅋㅋㅋㅋㅋ 자기야 이제 우린 폈어 ㅋㅋㅋㅋㅋ

  7. 푸른 2018.12.21 1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갑니다. 중간중간 코제트랑 마리우스 사진의 캡션 덕에 평소보다 재밌는 글이네요. 물론 평소 게시물도 재밌지만요.ㅎㅎㅎ

  8. 펱로스 2018.12.22 1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빚은 부모님이 자유인으로 낳아주신 여러분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못된 것입니다.'

    이 구절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 최홍락 2018.12.22 1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팡틴과 같이 사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학자금 대출이나 주택을 구입하기 위한 대출이 아니면 부채를 죄악시하는 건 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미래의 리스크 발생가능성과 상환 계획만 잘 짜여있다면 말입니다.

    • 펱로스 2018.12.27 0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갚을수 있는 부채는 레버리지

      갚을수 없는 부채는 빚

      ㅎㅎㅎ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용.

  9. gx9000 2018.12.23 1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알타리무님은 제발 블로그 하나 새로 파서 주장하세요 거기서 진정한 보수 우익이랑 같이 어울리시는 건 어떨까요?

    • 아즈라엘 2018.12.29 2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럴 정신머리가 있으면 안온다고 했을때 발길 끊었겟죠
      저렇게 뻔뻔한 인간은 처음봅니다
      지구상에 비브라늄재고가 없다 했더니 저양반 쌍판때기 바른다고 다 떨어진듯

  10. 파사데나 2018.12.23 1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어쩐지 질노르망이 분명 마리우스 코제트 결혼식에서 자신이 연금수령자이고 죽고나면 퐁메르시 남작부인의 섬섬옥수가 거칠어진다고 안타까워하는 이유가 이제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ㅋㅋ)

    그나저나, 질노르망이 고용한 요리의 명수는 뭔 깡으로 일급도 아닌 월급 30프랑을 부른 걸까요... ㅋ 노동자 푀이도 월급 75프랑으로 근근히 살아간다는데 질노르망 네에서 같이 숙식은 해결한다쳐도 요리의 명수로 소개되는 것치곤 좀 박봉 아닌가 싶습니다 ㅋ

    • eithel 2018.12.25 1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숙식 제공인데다가 원래가 저택 고용인들은 가외수입이 꽤 있습니다. 그런걸 보고 부른거겠지요?

  11. 까까님 2018.12.24 09: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금 많이 내게 하면 부자가 되고싶어하는 사람이 줄어들 거라니... 참신하고도 인간의 본성에 완전히 배치되는 얘기네요
    100원 벌어 99원을 떼가도 전 일단 100원 벌고싶습니다
    그래야 탈세냐 납세냐 선택할 기회라도 주어지니까요
    다른 분들도 당연히 대개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말도 안되는 전망보다는 부를 일구는 과정의 난이도와 시간의 투입량이 증가할 것에 대한 우려가 더 크실 거고, 가급적 쉽고 빠르게 벌어서 혼자 누리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말이겠지요
    욕심 자체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도가 지나치면 뭐든 추한 법이에요
    제 아무리 잘난 짭쓰라도 남아공 흑인으로 태어났으면 손바닥만한 기계를 조립해서 세상을 뒤집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겠죠... 그냥 동네에서 물소떼를 제일 잘 모는 똘망한 깜댕이로 살다 갔을지도
    잡스가 공부하고 연구하고 투자를 받아 사업을 일으킬 수 있게 해준 그 모든 사회제도는 잡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살았던 누군가가 낸 세금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회간접자본의 혜택을 논외로 하고 내가 잘나서 혼자 벌었으니 혼자 써야한다는 사고방식은 그냥 철없음을 고백하는 것 밖에 안되지 않을런지...
    감성은 제외하고 계산으로만 따져도 인풋을 했는데 이자가 안붙는다면 그 은행은 강도 아닙니까?
    사회가 많던 적던 넣어준 것은 좀 돌려주면 어떨까싶네요

  12. 까까님 2018.12.24 09: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채가 죄는 아니죠
    다만 그 어떤 면밀한 계획도 성공을 보장한다고는 할 수 없는 게 인간 능력의 한계인지라...
    빚에는 어느 정도의 무모함 내지는 절망감... 좋게 말하면 모험심이 내포되있는 것이겠지요

  13. 몽생 2018.12.24 16: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무님께서 가져오신 글에도 아래처럼 써져 있는데요.
    '7. 스스로 돌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고 나는 믿는다'

    • 아즈라엘 2018.12.26 1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삼인지 뭔지 하는 그양반 제가 숙제 해왔냐고 물어보면 맨날 도망가더군요
      스스로 돌아보라고 숙제내줬더니만 ㅋㅋㅋ

  14. 얼씨구 2019.02.07 0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는 내용이네요 ㅎㅎ

    개인적으로 너무 재미있게 읽은 막장 드라마(?) "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도 돈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 내용을 참고하면서 다시 읽어보면 이해가 더 깊어지겠습니다 ㅋㅋㅋㅋ

    (참고로 작중 유언장을 쓰면서 나온 백작의 재산은 무려 8천만 프랑 이상...쿨럭;;)

전에 인터넷 게시판에 유머 글이 하나 올라온 걸 봤습니다.  '장발장이 훔친 빵' 또는 '장발장이 잘못했네' 라는 것이었지요.





(저도 이 게시물 보고 엄청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웃기쟎아요.)



(하지만 레미제라블에 원래 실렸던 삽화에 실린 그림은 위와 같습니다.  원작 소설에도 쇠창살이 쳐진 빵집 진열장의 유리를 깨고 빵을 훔쳤다고 되어 있으니 빵이 저 인터넷 그림처럼 클 리가 없지요.)




사실 장발장이 어떤 빵을 훔쳤는지는 레미제라블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혹시나 싶어 원문을 찾아봐도, 그냥 pain(빵)을 훔쳤다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저 영화 속 한장면의 사진 속에 나와 있는 빵은 설명 그대로, 깡파뉴 빵, 즉 pain de campagne가 맞아 보입니다.  불어로 pain이 빵이고 campagne는 country니까, 영어로 하면 그냥 country bread, 즉 시골 빵 정도가 되겠습니다. 





이 빵의 특징은 크다는 것입니다.  대략 무게가 작은 것은 4 파운드 (1.8kg), 큰 것은 12 파운드 (5.4kg)까지 나가니까 엄청나게 큰 빵입니다.  보통 식빵 1봉지가 500g 정도되니까, 왠만한 가족 하나가 며칠을 먹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코스트코에서 파는 로만 밀 브레드....  설명을 읽어보니 '고대 로마군 병사들이 하루에 1파운드의 밀빵을 먹고 건강을 유지했다'는 이야기에 따라, 통밀과 잡곡을 섞어 만든 1파운드짜리 빵이라고 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맛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집 식구들은 저 빼고는 그냥 흰 식빵을 더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당시 사람들은 왜 이렇게 큰 빵을 구웠을까요 ?  바로 오븐 때문이었습니다.




전에 연재하던 야매요리라는 네이버 만화 저도 즐겨보던 편인데, 거기 주인공인 야매토끼는 집에 오븐이 없어서 항상 '야매'로 전기밥솥이나 마이크로웨이브 오븐을 이용하지요.  제대로 된 가스 오븐은 부자집에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저 빵이 커진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 유럽 사람들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븐이라는 물건은 만드는데도 돈이 많이 들었고, 또 뭔가 구울라치면 연료가 우라지게 많이 들어가는 물건이었거든요.  옛날에는 휘발유나 가스, 전기를 쓴 것이 아니라 숲에서 나는 나무를 장작으로 썼으니까 공짜 아니냐고요 ?  유럽은 중세부터, 숲을 엄격하게 관리했습니다.  그래서, 영주의 허락없이 숲에서 잔나무가지라도 하나 꺾었다가 숲지기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아주 엄벌에 처해졌습니다.  그건 사실 이해가 가는 일인 것이, 그러지 않았다가는 순식간에 숲이 벌거숭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중세 영주들이 숲에서 허락없이 장작을 해가는 백성들을 처형하고 고문했던 것은, 숲보다는 그 숲에 사는 사냥감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주들은 숲에서 사냥을 하는 것이 낙이었는데, 숲이 망가지면 짐승들도 사라지거든요.   아무튼 그러다보니 연료를 아껴써야 하는 것은 당시가 요즘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습니다.




(중세가 아닌 1868년의 어느 영국 숲 입구에 걸린 검비 공작님의 경고문입니다.  밀렵꾼은 즉결 처분으로 총살에 처한답니다...)




그러다보니, 자기 집에서 빵을 구울 수 있는 집은 상당한 부자집이었습니다.  대개의 가정에서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발효까지 시킨 뒤, 그걸 마을에 있는 빵집에 가서 구워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중세 시대에 마을에 있는 빵집(bakery)은 빵을 파는 가게가 아니라, 빵을 구울 오븐만 제공하는 마을 공동 오븐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다가 점차 도시가 형성되면서, 아예 빵집에서 완제품 빵을 팔기 시작하면서 빵집이 진짜 빵가게가 된 것입니다. 




(이런 마을에 빵집은 몇군데 ?)




근대 유럽 시대까지도, 도시가 아닌 다음에야 마을에 빵집은 1개 혹은 2개 정도 있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과거 중세 시대부터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 것인가 봅니다.  경쟁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폭리를 취하는 것도 아니었던 좋은 시절이었나 봐요.  그러다보니, 만약 동네 빵집에 뭔가 문제라도 생기면 마을 전체에 난리가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쌩떽쥐베리가 2차 세계대전 초반에 정찰기 조종사를 할 때 경험을 바탕으로 쓴 수필 '전시 조종사' (Flight to Arras, Pilote de guerre)에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나옵니다.  독일군이 침공해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순박한 시골 마을 사람들이 피난을 가야 할지 마을에 남아야 할지 의논을 하는데, 의외로 쉽게 결판이 나게 됩니다.  어떤 농부 아저씨가 토론장에 들어서면서 이렇게 외친 것이지요.


  "다들 피난을 가는 수 밖에 없게 되었어 !  빵집 주인이 피난을 가버렸거든 !"




(이 정찰기가 생떽쥐베리가 프랑스의 항복 전까지 몰았던 정찰기 Bloch 174 입니다.)




아무튼, 오븐을 빌려서 빵을 굽던 시절, 비싼 연료비 때문에 빵은 매일 구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또, 보통 한번 구울 때 여러집의 빵을 한꺼번에 구워야 했기 때문에, 작은 빵을 여러개 굽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같은 오븐에 집어넣은 다른 집들의 빵과 뒤섞이기 쉽쟎아요.   그러다보니, 되도록이면 크고 알흠다운 빵을 한번에 구워 며칠씩 두고 먹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 빵 3개는 순이네 꺼고, 저 빵 2개는 철수네 꺼고... 아니 저 빵이 철수네 꺼고 이 빵이 호섭이네 꺼든가 ?)




이렇게 구운 커다란 깡파뉴 빵, 즉 시골 빵은 대개 단단하고 수분도 적은 편이었습니다.  특히 며칠씩 두고 먹다보니 빵이 말라서 더욱 딱딱해졌지요.  가끔 옛날 영화보면 오븐에서 '갓 구운 빵'을 오븐에서 꺼내면 식구들이 좋아라하는 모습이 나오지요.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런 시골 빵에는 버터나 쇼트닝 같은 것을 안 썼고, 또 비닐 봉지도 없고 냉장고도 없었기 때문에, 하루만 지나도 빵이 마르고 딱딱해지기 쉽상이었기 때문에, 부드러운 빵을 먹을 수 있는 기회는 오븐에서 막 꺼냈을 때 뿐이었습니다.




(맛있어 보이나요 ?  강남 김영모 빵집의 비싼 빵과는 좀 맛이 다를 것 같습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저렇게 빵을 무식하게 크게 구울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빵집에서 제일 큰 빵이라고 해봐야 바게뜨 정도인데, 사실 바게뜨도 저런 시골 빵에 비하면 엄청나게 작은 것입니다.  실은, 바게뜨 빵이 나온 이유에 대해서 재미있는 전설(?)도 있습니다. 



(중국집 솜씨를 보려면 짜장면을, 빵집 솜씨를 보려면 바게뜨를 먹어보면 됩니다.)




전설치고는 너무 최근의 일인데, 1920년 전후로 프랑스의 노동법이 바뀌어 밤 10시부터 새벽 4시 사이에는 제빵사가 일을 해서는 안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저 깡파뉴 빵처럼 크고 둥근 빵을 새벽 4시부터 굽기 시작해서는 도저히 도시인들의 아침 식사 시간 때까지 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길쭉하지만 굵기는 얇은 바게뜨라는 것입니다.  저런 법이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바게뜨처럼 길쭉한 빵은 19세기 후반에 이미 널리 먹고 있었다고 하니까 이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에 불과합니다.  그나저나 프랑스의 저 노동법이 아직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같은 임금 노동자 입장에서는 정말 부러운 법이네요.  국내 도입이 시급합니다 !  





** 목요일엔 예전 다음 블로그에 썼던 글을 티스토리로 옮기고 있습니다.  이건 2013년에 썼던 글인데, 맨 마지막의 국내 도급이 시급하다는 말이 당시엔 절실했는데, 어느덧 주 52시간 근무제가 현실화되었네요.  세상은 발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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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8.10.11 08: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럽에서 제빵업자나 제분업자들이 중세 내내 경쟁에 시달리지 않은 대신 골치 아픈게 좀 많았습니다. 우선, 장원의 영주나 성당의 직접 통제가 꽤나 심했습니다. 심하면 이들이 직영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다음으로는 이들이 실제로도 꽤 그랬지만 '밀가루를 빼돌려 자기 뱃속을 채운다'는 인상이 강해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면 가장 먼저 분풀이 대상이 되곤 했고, 심지어는 이들 때문에 반란이 터질 정도였습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독일인들의 동방식민운동 당시, 프로이센이나 리블란트 지역의 발트 제민족들이 들고 일어난 이유 중 하나가 독일인 제분업자들이나 제빵업자들의 사리사욕 추구가 있었을 정도였고 지배자이던 독일기사단이나 덴마크계 영주들도 민족주의 성격이 비교적 옅은 이런 민란(?)에 대해서는 처벌을 비교적 관대하게 해주려고 했습니다. 물론 민족주의 성격이 강한 반란이나 독일인 학살이 벌어지면 그건 엄벌로 일관했습니다만.

    프랑스 노동법 변경은 사실 전시경제체제 해제의 성격이 강합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선으로 가는 빵 아니 식료품의 적어도 60%는 프랑스에서 공급했는데 특히 빵은 보관문제나 벨기에군 수요 때문에 상당량을 프랑스 군납업자들이 공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전시경제라 해도 노동법이 있는 이상 근무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이걸 바꾸려면 결국 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 3공화국 이래로 쓰이던 독립명령제도를 동원, 노동법을 바꿉니다. 한 마디로 24시간 풀가동해도 좋다는 겁니다. 전쟁에서 이겼으니 다시 평시로 바꾸어야 하는데 전후 수요가 확 줄어버리면서 회사들이 조업 시간의 제한을 통한 수요 조절을 원했고 이걸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저 노동법 개정이 나온 겁니다. 임금 부담이 전후에 꽤나 심각했으니까요. 당장 금본위제 복귀도 못 하는데 인플레이션은 아직 잡히지 않으니 저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부도날 회사 꽤 있었으니까요.

    • ㅇㅇ 2018.10.11 12:17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글에 좋은 댓글이네요. 지식이 늘어갑니다

    • reinhardt100 2018.10.11 14:11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저도 예전에 공부했던 것들을 복기하는 기분으로 댓글을 달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분석이나 컨설팅 하는데 도움이 되거든요.

      제 댓글이 길어질수밖에 없는게 아무래도 복기하는 기분으로 쓰면서 확실히 생각이 정리되고 그러다보니 이것저것 붙어서 그렇게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 2/28일 입대 2018.10.12 0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빛 소금 nasica님 reinhardt100님....

  2. PAIN 2018.10.11 08: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랑스 사람들은 하드코어해,그들은 고통(pain)을 먹거든.(French people were hardcore,They ate Pain for lunch.)라는 언어유희 짤방이 돌아다니더군요.

    • 신구석기시대 2018.10.11 16: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앤트맨과 와스프' 라는 영화에서, 주인공과 딸이 노는 장면에서 딸이 하는 말 'I eat fear for breakfast' 를 '나는 겁이 없어' 로 번역된 것을 봤는데요,
      비슷한 맥락에서 'They ate Pain for lunch'는 '그들은 고통을 몰라' 라고 해석을 해도 되겠군요.

  3. ㅇㅇ 2018.10.12 1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타깝게도 요즘은 빵집에서 바게트를 내지 않더군요..ㅡㅡ;

    빵집의 실력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죠;;;;

  4. reinhardt100 2018.10.13 1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숲의 문제. 이건 전 세계를 괴롭힌 문제입니다. 특히 중세 이후 이슬람권과 중앙아시아, 지나 문명을 괴롭힌 최대 이유 중 하나죠.

    17세기 이전에는 사실상 나무가 화력 에네르기의 원천이었는데 숲이 자꾸만 변경으로 후퇴하다보니 문명의 중심지에서는 연료부족이 심각해집니다. 게다가 각종 공업제품의 1차 원료 및 원자재가 나무다보니 이건 산업경쟁력에서도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서구에서 14세기 이후 내내 동방 정교권이나 이슬람권에 비해 서방 가톨릭권이 제조업 및 군사력에서 우위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목재 공급의 우위에 있었기 때문인데 결정타를 날린게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국가들은 시베리아 및 북아메리카에서 무한정으로 목재를 들여올 수 있게 되면서 석탄으로의 에네르기 전환을 뒷받침할 기반을 얻었다는 겁니다. 특히, 프랑스가 17세기 내내 서구권 최강국의 지위를 가진 이유가 캐나다라는 목재산지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 당시만 해도 잉글랜드는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목재보다 당장 먹고 사는게 급해서 플렌테이션에 치우쳐 있었고 주요 목재는 아일랜드를 박살내버리면서 얻고 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청교도 혁명, 즉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파가 한 최악의 일이 아일랜드 공략전인데 이게 목재 공급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시 북아메리카 목재는 누벨 프랑스라 해서 프랑스 무역회사들이 상당부분 독점하고 있었고 발트 해의 동방 목재는 네덜란드 회사들이 자기네 영역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잉글랜드는? 장궁 만든답시고 전국의 주목을 비롯해서 목재가 거진 다 작살난 판이었죠. 이판국에 아일랜드가 왕당파가 되었으니 잘 되었다 싶어서 그대로 아일랜드 공략을 한 건데 이 때 아일랜드 주민 1/3이 죽고 일부는 서부 늪지대인 코노트나 신대륙에 계약하인형식으로 대거 쫒겨났죠. 덤으로 17세기 내내 잉글랜드의 목재 수요는 아일랜드의 숲으로 충당했고요.

    • 최홍락 2018.10.13 1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영국의 경우 17세기 들어서 삼림의 비율이 16%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상당수의 목재 수입을 스웨덴과 러시아에서 충당을 했고, 1666년 런던 대화재 당시 시가지 재건을 위해 목재의 대부분을 노르웨이에서 수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외에도 폴란드나 덴마크로부터 막대한 목재를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북미지역을 확보한 상황일지라도 영국 정부 입장에서는 항상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덴마크 사이의 해협의 안전 확보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고 하고요.

      영국의 경우 13세기부터 석탄을 사용하였는데, 주로 난방용 연료로 이용을 했습니다. 17세기 전반에는 1세기 전 대비 석탄 소비량이 7배 이상 증가할 정도였고요.

      정작 영국의 목재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 것은 난방이나 에너지 수요보다는 철의 생산에 기인하는 바가 컸습니다. 무적함대와의 전쟁 전부터 영국은 사정거리가 긴 주철을 이용한 대포를 주 무장으로 삼았는데, 이를 위해 목탄을 대량으로 소비해야 했기 때문에 결국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영국 내 목재로는 선박 건설과 주철 대포의 생산 두 개를 커버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한동안 철을 스웨덴으로부터 수입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산업 혁명 초기 코크스 제련법이 등장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하네요.

      사실 캐나다의 목재산지에서 들여오는 목재의 경우 발트해에서 수입해오는 것에 비해 수송비가 엄청나게 비싸다는 단점이 있어서 목재 구입 단가 측면으로 따진다면 프랑스보다는 영국이 더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나 합니다.

    • reinhardt100 2018.10.13 1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그랬군요. 제가 잘못 알았네요. ㅎㅎ

  5. 2018.10.16 16: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6. 2019.05.29 2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번역 문구 찾다가 넋놓고 다 읽었네요; 흥미로운 글입니다. 잘 봤습니다. 사족이지만 조금이라도 대단한 사람한테는 꼭 안티가 붙는 것 같네요; 힘내세요.

** 목요일은 예전 다음 블로그의 글을 옮겨놓고 있고, 이건 2011년 2월의 글입니다.  유튜브에 '일부' 개신교 일당이 가짜 뉴스 풀어놓는 것은 이때부터 횡행했던 일이었군요 !



2011년 2월 경에 흥미로운 유튜브 비디오를 하나 보았습니다.  유럽 및 북미에서의 이슬람 인구의 폭발적 증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방금 틀어보니 아직도 이 비디오 클립은 버젓이 온라인 상태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EksbSKw6YY


원래 영어로 제작된 이 비디오는, 지도나 그림, 음악도 무척 정성들여 만들었더군요.  그리고 한국어로 번역된 것도, 전문 성우같은 목소리의 한국어로 더빙되었고, 각종 도표도 모두 깔끔한 전문가의 솜씨로 한글화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누군가 꽤 돈을 들여서 만든 것이고, 또 그 덕분에, 상당히 신뢰성있는 자료라는 인상을 줍니다.  마치 BBC나 KBS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라는 느낌이 드니까요.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은 지금 매우 빠른 속도로 이슬람화되고 있으며, 이대로 가면 불과 20~30년 안에 유럽은 더 이상 우리가 아는 유럽이 아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현재 프랑스의 20세 미만 인구의 30%는 이미 이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반 프랑스 가정의 가구당 출산률은 1.8명인데, 프랑스 내의 무슬림 출산률은 무려 8.1명이나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프랑스 남부에서는 교회보다 이슬람 모스크가 더 많다고 덧붙입니다.





또한 네덜란드는 15년 내에 전체 인구의 절반이 무슬림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벨기에 신생아의 50%는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나고 있다고 하고요.  또 유럽의 기독교도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도 덧붙입니다.  몇년 안에, 러시아군의 40%는 무슬림 병사들로 채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러시아군의 절반 가까이가 이슬람교도라니 !






결정적인 증거도 들이댑니다.  바로 독일 통계청입니다.  여기서, 독일은 2050년에는 무슬림 국가가 될 것이라는 정부 발표를 인용합니다.






염장지르는 소리도 곁들입니다.  서구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중동권 국가 지도자인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의 어록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슬람은 폭탄 테러 없이도 유럽에서 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유럽내 이슬람 인구 폭발을 통해서요.






이 비디오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은 사실일까요 ?  한마디로 말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무슨 사람이 토끼나 돼지도 아니고 가구당 8명이 넘는 자녀를 평균적으로 낳을 수 있겠습니까 ?  일단 프랑스에서는 종교별로 인구 조사를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엄청난 돈을 들여서 (국가만이 할 수 있다는) 인구 통계 조사를 사적으로 진행한 것이 아니라면, 프랑스내 무슬림 가정의 평균 출산률이 8.1명이라는 신뢰성 있는 결과는 낼 수 없습니다.  참고로, 프랑스에 가장 많은 무슬림 이민을 보내고 있는 북아프리카의 알제리나 모로코의 가구당 출산률은 2.38명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낭만적인 프랑스로 이민갔다고 해서 갑자기 3배 넘는 출산률을 보여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인구 중 이슬람 인구는 5%에 불과합니다.  벨기에에서는 6%에 불과하고요.  이들이 순식간에 그렇게 많은 신생아를 낳을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독일 통계청이 발표했다는 예측, 즉 2050년까지 독일은 무슬림 공화국이 된다는 것은 새빨간 날조입니다.  독일 연방 통계청의 부청장인 발터 라데르마허(Walter Radermacher)에 따르면, 독일의 인구가 감소 추세라는 발표를 한 것은 맞지만, 2050년 무슬림 어쩌고 한 발언은 독일 통계청에서는 나오지 않은 말이라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종교적으로 민감한 그런 문제를 정부 기관에서 섣불리 발표한다는 사실 자체가 애초에 믿을 수 없는 일이지요.  (이 비디오에 대한 반론은 모두 영국 BBC의 보도를 인용한 것입니다.  Source는 http://news.bbc.co.uk/2/hi/8189231.stm 를 참조하십시요.)


카다피의 발언도 그렇습니다.  카다피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어디 뉴스의 해외 토픽에 반드시 보도가 되었을텐데, 전혀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아울러, 제가 카다피라면 유럽 내에서 반 이슬람 운동에 유용하게 인용될 그런 민감한 발언을 서방 언론에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허위 정보를 담은 비디오를 비용을 들여가며 만들어 올렸을까요 ?  그것이 누구이든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원작 비디오는 전세계적으로 약 1천만번 접속되었습니다.  국내용으로 한글 더빙된 버전은 다행히 약 1,200회 정도만 접속되었습니다. 이 원작 비디오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어 비디오를 유튜브에 올린 분은 (이 분이 만드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기독교 신자이신 것 같습니다.  (올리신 다른 비디오를 보니 교회 관련 내용이 주종이더군요.)


이 비디오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목적은 대략 짐작이 갑니다.  유럽의 이슬람 이민 및 그 2세들에 대한 공포심과 혐오감,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적일 것입니다.  실제로 프랑스 남부 및 대도시에는 북아프리카에서 온 아랍계 이민들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뉴스를 종종 본 것 같습니다.  특히 프랑스의 극우파들이 그런 무슬림 이민들이 프랑스의 정체성을 뒤흔들고 기존 프랑스인들의 직업 안정성과 치안을 위협한다고 선동하며 자신들의 정치 세력을 늘이려고 하고 있고, 실제로 많은 프랑스인들이 그에 공감하고 있는 편이라는 우려섞인 뉴스도 읽었습니다.  아마 이 비디오는 그런 감정을 더욱 조장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특히 '기존 교회 중 많은 수가 이슬람 모스크로 이미 바뀌었다'라든가, 카다피의 어록, 그리고 그렇잖아도 위협적인 러시아군을 (잠재적 테러리스트일 수도 있는) 무슬림들이 장악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는 멀쩡한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겁에 질리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비디오를 기독교 세력이 만들었는지, 아니면 그냥 반아랍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만들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아무튼 공격 대상을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으로 삼은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 구조를 끌어내려고 노력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이 비디오 내용은 너무나 뜻 밖인 것들이 많아서, 저도 처음에 이 비디오를 볼 때 반신반의했습니다.  게다가 공격받는 대상인 무슬림들의 반발은 더욱 강했지요.  덕택에 이 비디오에서 주장되는 바를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유튜브 비디오도 올라왔습니다.  물론 공격 비디오에 비하면 조회수가 별로 많지 않습니다만, 실은 이런 반박 비디오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그 공격 비디오 원작자의 의도에 놀아나는 행위 같습니다. 





(반박하면 할 수록, 점점 더 갈등의 올가미는 조여들어 옵니다.)




그 원작 비디오의 목적은 갈등 조장입니다.  이렇게 반박 자료를 만들어 올리면, 그에 대해 다시 혐오성 댓글이 달리면서, 무슬림과 기독교인들 (혹은 국수주의자들)의 갈등이 점점 더 깊어지는 형태가 되지요.  가령 이 반박 비디오에는 '좋은 자료다'라는 감사 댓글도 있지만, '우리 무슬림들은 더 단결하여 백인 기독교인들이 우리를 무시 못하게 해야 한다'라는 무슬림 수구꼴통의 의견도 달리고, 또 다음과 같은 무슬림 이민들에 대한 혐오 댓글도 달렸습니다.


Just another fag who wants whites gone so his brown friends can rape and pillage.  

백인들을 다 쫓아내고 그의 갈색 피부 친구들이 강간과 약탈을 저지르길 바라는 쓰레기가 또 있구만.


저는 사실 무슬림에 대해 잘 모릅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요.  그저 뉴스나 책, 인터넷 댓글에서 읽은 것이 전부지요.  무슬림들이 정말 안 좋은 족속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비디오가 기독교 정신에 크게 어긋난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인용한 BBC 보도처럼, 이 비디오의 상당 부분은 날조 및 허위입니다.  성경의 십계명 중에 동성애 하지 말라는 계명은 없지만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계명은 있습니다.  이 비디오를 만든 사람이 기독교적 신앙을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하면, 스스로 기독교 신앙을 저버리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저는 기독교 정신의 본질은 박애와 믿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종교를 가졌다,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오 및 혐오를 일으키려는 것은 전혀 기독교스럽지 못한 일입니다.    


사실 오늘날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 예수님이 본다면 (이건 불교도들과 부처님의 관계도 비슷할 것 같은데) 예수님이 크게 슬퍼하실 것 같지 않으십니까 ?





The Letter of Marque by Patrick O'Brian  (배경: 1813년 지중해) -------------------------------------


(잭의 사략선에서 군의관 및 군의관 보조로 일하는 스티븐과 마틴이, 200여명의 승무원들 중 한명의 악마 숭배교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정말, 글자 그대로, 공공연하게 악마를 숭배한단 말인가 ?"


"그렇다네.  그 친구는 악마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살짝 이야기해주는데, 그 이름은 공작새라고 하더군.  그들의 사원에 가면 공작새의 초상이 있다네."


"그렇게 괴이한 관점을 가진 친구가 누구인지 물어보면 부적절하려나 ?"


"괜찮다네.  그 친구는 비밀스럽게 이야기한 게 아니거든.  선장의 요리사인 아디(Adi)가 바로 그 친구야."


"난 그 친구가 아르메니아인으로서 그레고리파 기독교도인줄 알았는데."


"나도 그런 줄 알았지.  하지만 실제로는 그 친구는 다스니(Dasni) 인으로서, 아르메니아와 쿠르디스탄 사이에 걸친 지역 출신이라네."


"그럼 그 친구는 신을 전혀 믿지 않나 ?"


"아냐, 믿어.  그 친구와 그 동족들은 신이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과, 신의 성스러운 본질을 믿는다네.  그리고 마호멧을 예언자로서 인정하고 아브라함과 선지자들을 인정해.  하지만 그들 말에 따르면, 신께서는 타락한 천사인 사탄을 용서하고 그를 원래 자리로 복위시켜 주었다는 거야.  그들의 관점에 따르면, 그러므로 이 세계의 속된 일들은 악마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거지.  그러니까 다른 존재를 섬기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거야."


"하지만 그 친구는 온순하고 성격 좋은 친구처럼 보이던데.  게다가 확실히 요리 솜씨도 끝내주고 말일세."


"그렇지. 그 친구가 내게 자신의 종교에 대해 친절하게 말해주면서, 진짜 터키 과자 로쿰(lokum, 영어로는 Turkish Delight)를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줬었어.  성서에 나오는 데보라(Deborah)는 정말 죄가 될 정도로 그 과자에 탐닉했었다는군.  그리고 또 자신의 출신지인 다스니 지방의 황량한 산악에 대해서도 말해주었지.  거기서는 사람들이 반지하식 주택에 사는데, 한편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핍박받고, 다른 한쪽에서는 쿠르드족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거야.  하지만 그 가족들끼리는 서로 사랑하고 화합이 잘되는데다, 아주 먼 친척에게까지 강한 애정으로 결속되어 있다는군.  분명한 건 다스니 인들은 자기들의 교리처럼 (악마스럽게) 생활하지는 않는다는 거지."


"사실 누가 그러겠나 ?  만약 아디가 우리 기독교인들이 따르는 믿음에 대해 정확히 알고, 우리가 실제로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 비교를 해 본다면, 우리가 그 친구를 쳐다보는 것처럼 그 친구도 우리의 종교 생활에 대해 크게 놀라게 될 걸세."






(Turkish delight...  나니아 연대기에서 마녀가 그 꼬마를 처음 만났을 때 주었던 그 허연 가루가 잔뜩 묻은 젤리같은 과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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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열심히 재미있게 보았던 허영만 화백의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의 한장면입니다.  테무진이 흉악범 마을에 사람을 모집하러 갔다가, 사실은 이들이 죄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이야기해주는 장면입니다.  이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악마교라는 것이 서로 미워하고 죽이고 하는 가르침이라면, 사람들이 모여서 종교를 만들수는 없겠지요.  아마 몇몇 사이코들이 개인적으로 섬기는 컬트 정도로 끝날 것입니다.)




저 위 인용 소설 속의 대화 내용처럼, 성서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가진 재물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했지만, 제가 아는 기독교인들 중에는 그런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아, 교회에 정말 많은 돈을 헌금하는 사람들은 듣거나 보았습니다.  그러면 교회에서는 그 돈으로 크고 호화로운 교회 건물을 짓거나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여 무슬림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며 찬송가를 부르게 하더군요.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눠주라고 한 것은 아닐텐데요.  또 원수가 뺨을 때리거든 반대쪽 빰을 내밀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미국은 쌍동이 빌딩이 공격당했을 때, 왜 저들이 미국을 공격했는지에 대해서 진지한 성찰은 별로 하지 않은 것같고, 기다렸다는 듯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들이쳤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인 조지 부시는 정말 기독교를 열심히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응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같지는 않고, 그냥 세계 유일의 강대국 지도자답더군요.   그래서 더욱 더 많은 죽음과 비극이 반복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공격했으니 우리는 더 강하게 보복하겠다 !!!  이건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함무라비 법전의 가르침이지요.)




예수님의 가르침이 인간의 이해 관계를 거치면서 매우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노예 제도지요.  17~18세기 당시 노예 무역이 한창일 때, 천만뜻밖에도 노예제 찬성론자들은 기독교적인 이론으로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와 노예로 부려먹는 것을 합리화했습니다.  성경에서도 노예제에 대해 부정적인 말씀이 없고, 오히려 노예는 주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나와 있을 뿐더러, 아프리카에서 예수님을 모르고 이교도로 살다가 그 영혼이 영원히 저주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백인 농장주의 농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기독교로 전도시키는 것이 흑인들의 영혼을 위해 더 나은 조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세상을 사는 방법인가요 ?  하지만 결국 노예제 폐지도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행동하는 기독교 단체들의 노력이 큰 몫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




TV 뉴스를 보니 어떤 대형 교회 목사님은 시가 3억원 짜리 외제차를 (아마 벤틀리였던 것 같은데) 타고 다닌다고 해서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흥분된 인터뷰를 잠깐 들어보니 이건 선물을 받은 것인데, 자기가 이 차를 교회에 봉헌했다고 하더군요.  그 인터뷰를 들으니 저도 덩달아 흥분이 되던데요.  그러면서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 중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 by Victor Higo  (배경 : 1810년대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 ----------------------


(디뉴 지방의 담당 주교가 교구에서 이런저런 구제 활동을 벌이다보니, 비용이 쪼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활이 어렵다고 한탄을 하니, 주교의 식모인 마글로아 부인이 예전 왕정 시대 때는 주교에게 마차 및 여행 경비를 정부에서 보조해주었다고 맞장구를 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주교는 정부에 마차 및 여행 경비 보조를 신청합니다.  정부에서는 토의 끝에, 주교에게 마차, 우편, 여행 경비로 3천 프랑의 예산을 배정해줍니다.)


이것이 그 지역 시민 사회에 상당한 격분을 불러 일으켰다.  또, 예전 혁명 시절에 500인 위원회의 의원이었고 뷔르메르 18일 사건 (나폴레옹의 쿠데타)을 지지했던, 현직 원로원 의원으로서 그 주교의 관할지인 디뉴 근처에서 멋진 원로원석을 차지하고 있는 거물급 인사도 이 움직임에 동조하여, 다음과 같은 분노의 편지를 비고 드 프레므뉴(Bigot de Premeneu) 씨에게 보냈다.


(역주 : 500원 위원회는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해산시킨 의회입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지지한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요. 이 원로원 의원은 그저 권력만을 좇아 움직이는 지조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비고 드 프레므뉴라는 사람은 실존 인물로서, 나폴레옹 민법전의 편저자이자 나폴레옹 밑에서 종교성 장관을 지낸 사람입니다.)


"마차 비용이라고요 ?  주민이 4천명 밖에 안되는 좁은 마을에서 무슨 마차가 필요합니까 ?  우편요금과 설교 여행 경비라고요 ?  이런 여행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  길도 없는 산간 마을에서 편지를 나르느라 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  이 지방 사람들은 말 등에 올라타고 여행을 합니다.  샤토-아르누의 듀랑스에 있는 다리는 황소가 끄는 달구지 하나가 겨우 통과할 정도입니다.  이 성직자라는 사람들은 모두 똑같습니다.  탐욕스럽고 구두쇠이지요.  이 주교라는 사람도 처음에는 도덕적인 인물처럼 시작하고는 결국 다른 성직자들과 똑같이 행동하는군요.  이 주교는 유개 마차와 멋진 이륜 마차를 갖고 싶다는거지요.  예전 시절의 주교들이 가진 모든 사치품을 다 가지고 싶다는 겁니다.  이런 비공식적인 성직자들이라니 !  백작 각하, 황제 폐하께서 이런 협잡꾼들을 다 제거해버리지 않으신다면 일이 제대로 처리된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황은 물러가라 !  (이 시절에는 나폴레옹과 교황과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등등



다른 한편으로 주교관 식모 마담 마글로아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녀는 주교의 여동생인 밥티스틴 양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주 좋아요. 이제 주교님께서 비록 다른 사람 생각만 하시는 것으로 시작은 했지만, 결국 자신 생각도 하셔야 하거든요.  그분이 자선활동에 모든 돈을 다 써버리셨지만 이제 우리를 위한 3천 프랑이 있으니, 고생이 끝난거지요 !"


하지만 그날 저녁, 주교는 다음과 같은 노트를 적어서 여동생에게 전달했습니다.


마차 및 여행 경비 내역


구제 병원의 환자들을 위한 고기 수프                 1500 프랑

엑스(Aix) 지방의 어머니회                               250 프랑

드라귀냥(Draguignan) 지방의 어머니회              250 프랑

버려진 아이들 비용                                         500 프랑

고아들 비용                                                  500 프랑


이것이 미리엘 주교의 개인 비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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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미리엘 주교가 나중에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건네주는 그 착한 신부님입니다...  원래 서양 속담에 as poor as church mouse 라는 말이 있지요.  신도들이 헌금을 안 내서 교회 쥐가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따라, 돈될 만 한 것은 모두 내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때문에 교회에 돈이 없는 것이지요.  부디 그 대형 교회 목사님도 레미제라블의 이 장면은 좀 읽어보셨으면 해요.  이미 읽어보셨을까요 ?  그렇다면 약간 비극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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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HE RED 2018.10.04 08: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지 워커 부시의 이라크 침공은 명백히 실수였고 재난이었지요.

  2. THE RED 2018.10.04 08: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작정 두려워하지 말자는 나시카님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이란 회교혁명이나 무슬림 형제단,ISIS등의 극우적 종교 정치운동이 유독 이슬람권에만 만연해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nasica 2018.10.04 0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 식이면 왜 한국에서 사기 사건과 성범죄가 압도적으로 많은가 ? 라는 질문에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 어디까지나 사람은 개인으로 평가해야지 집단의 특성으로 개인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중동처럼 기독교 세력에 오랜 세월 침탈된 지역이라면 증오로 뒤틀린 사람도 많이 생겼을 것 같군요.

    • Pinko 2018.10.04 08:49  댓글주소  수정/삭제

      생각해보니 그럴수도 있을 것 같군요

    • ㅇㅋㅂㄹ 2019.01.15 23:49  댓글주소  수정/삭제

      특정 프레임에 의해 이슬람권만 부각되어서 그렇지 미국의 일부 기독교계열들도 징난아닙니다. 또 미국에서는 무신론자임을 밝히면 정치생활 못 한다고 할 정도로 기독교 중심의 문화잖아요? 이건 종교의 특징, 종교권력과 정치적 극단주의에 의한 것이지, 이슬람권에서 더 나타난다고 해도 본질적으로는 정도의 차이일 뿐 꼭 이슬람의 특성과 결부되는 것은 아닙니다.

  3. THE RED 2018.10.04 0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종교로서의 이슬람은 좋아하지 않지만 무슬림 개개인들은 좋아합니다.제가 사는 동네가 공단 근처라 자주 봅니다.맘X터치를 애용하는 사람들이더군요.

  4. ㅇㅇ 2018.10.04 0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슬람은 악이 맞습니다. 이슬람 믿는 국가중에 선진국이 있습니까

    • 신구석기시대 2018.10.04 09:23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고 선진 문명이었지요
      박물관 안 가 보신 분이네

    • 까까님 2018.10.04 1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선진국이 아니면 악인 건가요?
      선진국을 구분하는 기준은 당연히 현재의 경제력일 거구요?
      장발장이 김우중 보다 더 악인이었던 거군요...
      이슬람과 기독교는 같은 아버지의 이복자식 같은 종교들입니다
      뭐... 워크래프트 세계관을 빌린 짝퉁게임 같은 차이라고 할까요?

    • ㅇㅋㅂㄹ 2019.01.15 2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장발장 부자되지 않았나요? ㅋㅋ

  5. 까까님 2018.10.04 1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은 개인의 개성도 있지만 사회의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여러 개성들이 공통된 자연, 인문 환경 아래서 비슷한 반응을 택하게 되면 그게 문화가 되기도 하고 종교가 될 수도 있는 거겠지요
    이슬람 지역, 특히 중동에 누적된 갈등과 모순이 물리력이라는 탈출구를 찾는 과정이 IS나 자살테러 같은 것일 테고, 한국에 ♬♬♪들이 많은 것은 잡질을 단속하거나 자제할 수 있는 생존환경이 만들어진 지 얼마 안되서 그런 것일 테지요
    그러니 사람을 개인의 개성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고, 어떤 기준에 의해 나뉘어진 집단 단위로 보는 게 틀렸다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전 종교도 없는 데다 이슬람에 대해 아는 게 없고 자주 접하지 못해서 그런지 몰라도 기독교에 비해서는 악감정이 적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지만 이슬람을 포함한 외국인을 난민이든 뭐든 받아들이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깝게는 경력직이 무제한으로 증가하면서 회사 문화가 바뀌는 과정을 직접 보았구요, 100만인지 몇인지 알 수 없는 중국산 불체자 문제도 그렇구요, 유럽의 사례는 간접적으로 봐왔죠
    그 사회가 소화할 수 없는 속도로 진행되는 변화는 아무리 선한 동기가 선한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이라 할지라도 그 구성원에게는 스트레스일 수 밖에 없잖아요

  6. 아즈라엘 2018.10.04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멘 청년들중에도 무슬림 근본주의에 학을떼고 도망나오는 친구들도 좀 있더군요

  7. ㅇㅇ 2018.10.04 1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지금 기독교인입니다.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말씀하신 것들이 사실이긴 합니다. 단편적인 사례들이 나열되고, 기독교계에서 하고 있는 많은 좋은 일 들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것이 글의 주제는 아니니 뭐라고 할 순 없겠지요. 다만 일개 교인으로서는 주변에 개인적인 영향만 줄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8. 웃자웃어 2018.10.04 16: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슬람 국가들중 세속주의 국가들 빼고는 문제가 많은 나라 밖에 없다고 봅니다. 물론 종교국가중 문제없는 나라가 없지만.

  9. 와플구이 2018.10.04 1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설사 그 주장에 일부 사실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공포, 궁극적으로 혐오를 조장한다는 점에서 그들이 비난하고 있는 대상보다 더 못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1년전 쯤에 '이슬람 전사의 탄생'이라는 중동 무슬림들 중 일부(또는 상당수)가 현대에 와서 극단적으로 변하고 근본주의에 의지하게 됐는지 자세하게 서술하는 국내 도서를 읽었습니다. 이슬람 자체의 폐쇄성도 한몫하지만 서구가 어떻게 그들을 그 길로 몰아갔는지 나오는데 감명깊게 읽었어요. 이슬람에서 테러단체들이 유독 많이 나오고 이런 이미지를 가지게 됐는지, 중동의 현대 역사와 변화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보시길 추천드려요.

  10. 이산이아닌가벼 2018.10.04 2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슬람이 중세 때는 기독교보다 오히려 수용적이고 관용적인 면이 많았지만 근대에 와서는 전근대적인 모습이 만연한 종교로 사람들의 인식속에 있습니다. 저는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사람이 자리를 만들기도 한다는 두가지 측면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슬람은 덮어놓고 전근대적이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종교 증에서 유독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전세계에서 많은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은 총체적인 문제가 분명히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낙인을 찍어서 범죄나 테러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또 그 종교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나 요소가 현대사회나 타믄화권과 많은 충돌을 일으킬 스도 있다는 것이죠.

    뭐 아내를 태형에 처하고 도둑놈의 손을 자르는 처벌을 그 나라에서만 하면야, 비인륜적이고 반인도적이라 하더라도 전근대적인 문화고 문명이니 어쩔 수 없다고 그곳으로만 가지 않으면 되지만, 한국에 오려는 사람들 중에 혹은 정착하려는 사람들 중에 그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도 있어 좀 많이 우려스럽더라고요.

    이웃집 @@이란 프로그램인데 어떤 가족은 예멘에서 - 얼마전 제주도 난민들의 고향이 맞습니다- 왔는데 그 나라에서는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불가능하고 또 억압도 받기 때문에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어도 부족하지만 열심히 배워서 잘하고 잘 정착해서 사는 모습보니까 자유를 원해서 온 사람들을 한국에서 받아줘야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에비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어떤 가족은 여성 촬영 불가, 남녀 분리, 이슬람적인 생활 고수, 8년차인데도 한국어 불가.

    이런 사람들을 받으면 진짜 나중에 문화충돌을 일으키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수가 얼마인되니 지금은 조용하지만 수백 수천이면 진짜 무슨 일을 할까... 한국어도 못해 이슬람식 삶을 고수해... 한국에 왔으면 한국에 적응해서 살 생각을 해야지... 우리도 마음을 열고 받아주지.

    문제는 무슬림들은 종교와 삶이 분리가 안되기 때문에(배교는 죽음) 포기하지 않는 이상... 타 문화와 동화되기 힘들고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심히 우려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다른 종교들은 한국의 세속성을 받아들이며 융화되고 동화되었죠.

    불교 죽이지 마세요! -> 살생유택
    천주교 우상숭배 금지! -> 즐거운 설, 추석 보내세요!
    기독교 복음주의 ?

    이렇게 한국에선 세속화되고 동화되었는데 이슬람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만약 원리주의적 해석을 고집한다면 한국에 한국 사회에 엄청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 유애경 2018.10.05 1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충분히 공감되는 얘깁니다.
      무조건 무슬림들을 경계하고 의심하고 배척해서도 안되겠지만 이미 독일이나 프랑스가 이민정책의 실패를 인정한 예도 있고...진정한 자유를 찾아 목숨걸고 탈출하여 이민국가에서 잘 정착하는 사람들이야 문제 없지만 로마에서 로마법을 따르지 않겠다는 이민자들까지 끌어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아즈라엘 2018.10.05 1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금이나 안산등지에 외국인들 타운 가보면 진짜 마굴이 따로 없습니다. 지들끼리 우글우글 뭉쳐서 무법지대를 저그 크립마냥 슬금슬금 넓히는데 숫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치안문제나 사회문제가 대두 될겁니다. 일본처럼 아예 안받는게 최선이겠지만

  11. Spitfire 2018.10.05 15: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민자 문제는 정부의 인구정책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민자를 받기 싫으면 현 단일민족(에 가까운) 상태에서 출산율을 높여야 하는데, 그건 난망하니 이민자를 받는 정책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저도 무슬림 난민이나 이민자가 지역사회에 들어오는게 탐탁스럽지는 않지만, 출산율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하던가 이민자를 받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이민자를 받는 문제는 시한부인게, 이미 경제 동력이 떨어진 이후에 받으면 경제인구를 증가시킨다는 본래 취지가 약해질 뿐더러 소수를 다수의 문화에 동화시키기도 어려워 사실상 새로운 사회문제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그게 싫으면 열심히 애를 낳아야죠~ 그러나 현실은....ㅜㅜ

  12. reinhardt100 2018.10.06 23: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슬람교 문제 사실 이거 심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코란이나 카눈 같은거 다 읽어본 사람으로써 내리는 평가는 학자적 양심으로써 이야기 합니다. '상업에 특화된 종교'라는 것입니다. 농담조로 이야기 하는게 아니고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선지자) 무하마드의 원래 직업 자체가 쉽게 이야기 하면 사막의 대상단 지배인이었다는 겁니다. 현대식으로 이야기하면 상사 비등기임원(?), 직급으로 치면 이사 혹은 상무이사급까지 승진했다가 여사장과 결혼해서 지참금으로 상사를 받은 분이라는 겁니다. 추가로 개인적으로 불교를 믿는 사람으로써 불교에 대한 평가는 '수학 및 공학적 사고가 가장 강한 종교'이고 기독교에 대한 평가는 '도그마틱이 강해서 법학에 강한 종교'라는 겁니다.

    중세,근세 아니 현대 이슬람권의 또 하나의 특징이 제조업에 극도로 취약하다는 겁니다. 흔히 중세 이슬람권이 문명의 전달을 담당하는 일익이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간과되기 쉬운게 이슬람권이 '학문연구로써의 화학연구'에는 어느 정도 공적이 있지만 막상 '제조업으로써의 화학공업'에는 발전이 거의 없다시피했다는 겁니다. 오히려 이슬람권에서 발전한 것은 '원거리 교역망 및 신용거래의 개념 발전'과 더불어 '노예무역'이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슬람권에서 제조업 역량은 후대로 갈수록 오히려 퇴보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물론 이는 십자군 전쟁에 의한 자체적인 제조업 기반 파괴, 티무르 제국의 침공 당시 그나마 레반트 및 아프리카 이슬람권의 제조업 중심지 중 하나였던 다마스쿠스 장인들의 사마르칸트로의 집단 강제이주, 동시대 제조업 역량이 동방을 마침내 역전하는데 성공한 서방권의 대규모 수출 개시 등이 겹친 것도 있지만 이슬람권은 서방권 혹은 동방 로마제국보다 규모의 경제가 실현 가능했던 8-9세기 후반에도 이상하게 제조업 발전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습니다. 철저하게 상업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여왔다는 겁니다.

    흔히, 로마제국의 쇠퇴 원인 중 하나가 노예공급의 감소로 인한 임금 상승이 하나의 주요 원인으로 꼽힙니다만 이슬람권 역시 이 문제가 사실은 꽤 <심각할 뻔>했습니다. 다만, 이슬람권은 산업혁명 개시까지 이 문제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노예 공급이 꽤나 원활했다는 겁니다. 당장, 북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카프카스, 발칸 및 폴란드까지 노예 사냥을 다니던 크림반도의 타타르족이 있었고 해상에서는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단, 남쪽으로는 오만제국과 모르코의 노예 사냥꾼들이 돌아다녔고 이들이 공급하는 노예는 연간 최소 백만이 넘었습니다. 당시, 인구 5억이 안되던 지구 전체로 본다면 말도 안 되는 수치죠. 게다가 매년 그 정도 노예를 쓰고도 모자라서 오스만 제국이나 모르코 왕국 시절에는 노예 사냥 한계선이 점차 확장되다가 제국 자체가 서방권의 집중공격을 받기 시작, 노예 공급이 끊어지면서 고대 로마 후반기 시즌 2 찍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제조업 역량이 가뜩이나 열세인데 노예가 경제에서 차지하던 비중이 서방권에 비해 말도 안 되게 높던 이슬람권에서는 이 문제는 '당장 경제가 안 돌아가는 사태'가 되어 버린 겁니다.

    좀 길게 썼습니다만, 이슬람교 문제는 이런 배경지식을 좀 깔고 이야기 해야 합니다. '왜 유독 이슬람권 이민자들이나 난민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지?'에 대한 근본원인은 이슬람교의 이런 특성이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슬람교도 절대 이상한 종교 아닙니다. 그건 명확히 하고 넘어가야 하는 겁니다. 다만, 불교나 기독교, 힌두교 같은 다른 주류 종교와 달리 <상업에 특화되어 있다보니 거래 대상의 폭이 '다른 종교들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라고 지정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서는 경향>이 강했고 이를 천 년 이상 지속하다보니 이런 문제가 터지게 되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겁니다.

  13. 0_- 2018.10.07 0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가리 빻은 좋교인들 참 많네요. 머리는 사람의 것을 달았으되 도대체가 사람답게 쓰지 못하고 동물처럼 쓰고 있으니 정진정명 대가리라 불러줘야 하겠네요.
    무종교인(무신론 아닙니다, 사실상 무신론적 불가지론자이긴 하지만) 입장에선 원론적으로 보자면 존재하는지 하지않는지도 (자기네들도 확실히는) 모르는 것을 파는 약팔이나 봉이김선달 부류일 뿐이며, 교단이라는 집단 단위로 보자면 일종의 마약 카르텔일 뿐이지요. 이쪽 마약 카르텔 들어간 사람이 저쪽 카르텔 보고 쟤네들 어떻네 품평하는 꼴 참 보기 좋습니다. 다들 뭐 대가리 수 모자라면 평화 가장하며 다른 카르텔 교묘히 돌려까고 아무 카르텔에 속하지 않은사람 들여오려고 난리치고, 쪽수가 어느수준 넘었다 싶으면 모리배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다른 카르텔 핍박하고 다니지요? 카르텔 밖에서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냥 다 없어졌으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이런 소리 하면 불경죄니, 죽어서 지옥간다고 하겠죠. 그런데 생각 해 보라고요? 당신네들 득시글 대는 그놈의 천국, 당신네 카르텔 소속도 아닌데 미쳤다고 가겠어요? 게다가 영생한다? 이승에서도 벌써 지긋지긋한데, 그놈의 처-언-국에 가면 당신네들 영원히 보겠네요? 어지간히 지겨울 것 같으니 그냥 관두렵니다 ^^

  14. 나삼 2018.10.07 1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슬람이 테러리스트는 아닙니다. 허나 테러리스트의 대다수는 이슬람 입니다

    • 와플구이 2018.10.09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남자가 모두 성범죄자는 아닙니다. 허나 성범죄자의 대다수는 남자입니다.
      응? 어디서 많이 듣던 논리가?

  15. 최홍락 2018.10.07 19: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까놓고 말해 한국처럼 돼지고기 음식이 많고 주류소비가 많은 곳에서 엥간히 독실한 친구들 아니고서는 신앙 제대로 지킬 무슬림이 몇이나 될지ᆢ 코란이고 성경이고 나발이고 눈앞에 미식이 더 우월한 법이죠. 슬럼지역의 범죄율 높은거야 어느나라 어느 문화권에도 있는 일이라 딱히 종교 문제로 보면 답 안나오죠.

    • 최홍락 2018.10.08 0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내가 답글 달면 어떻게 하나 봤더니만 파블로프의 개마냥 또 혓바닥 긴 모습을 보여주네요ㅋㅋㅋ 낚시 걸리니까 기분 좋죠?ㅋ 이 헛바닥만 긴게 당신 한계에요. 정규재 TV 내용 갖다가 붙인 유사지식인 주제에 무슨 MBTI 운운해요?ㅋㅋㅋ시험해봤는데 바로 글을 3개나 써갈기니ㅋㅋㅋ높게 평가해주시는 reinherdt님께 부끄러운줄 아세요.

  16. ㅇㅇ 2018.10.10 2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실인듯 합니다. 붕어가 이리도 많으니^^ 베드로가 사람을 낚는 어부뿐만 아니라 그냥 물고기도 많이도 낚는군요

  17. 석총 2018.10.17 2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종교가 아니라 종교집단이죠

  18. 알타리무님 2018.10.22 1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넘어가려다가 좀 적습니다.
    범죄율이라는건 단순히 종교가 문제가 아니라 생각보다 많은 요소들이 영향을 끼칩니다. 치안, 경제수준, 교육수준(단순히 학력의 고저가 아니라 어떤 교육과정을 거치고 어떤 교육이념을 따르는가), 시민의식수준, 환경 등등 뭐 다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의 요인들에 모두 영향을 받는데 그걸 그냥 특정 인종, 종교 같은 단순한 프레임으로 나누는건 무슨 쌈빡한 논리인지 모르겠네요. 덧붙여 전문 용어를 글 전체에 그럴싸하게 흩뿌리듯 어질러 놓는 건 좋은 글이 아닙니다. 본인이 말하려는 바만 명확히 말하세요. 이리저리 본인도 주체 못할 얕은 지식만 늘어놓지 마시고.

  19. soha님 2018.10.23 08: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위에 알타리무란 사람이요.

    • soha 2018.10.23 1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상 대로 군요... 저분은, 왜 남의 블로그서 분란을 일으키는지 몰겠네요. 정확한 근거도 없이.....

한 십여년 전에, 집에서 National Geographic 잡지를 구독한 적이 있었습니다.  와이프가 어찌어찌하다가 구독하게 된 것이었는데, 영문판이었습니다...  그렇쟎아도 내용이 심오한 잡지였는데 영문판이니 더욱 읽기가 어려워 결국 대부분 읽지도 않은채 구독이 끝나버렸지요.  그런데 그 얼마 안 되는 읽은 기사 중에 곡물의 역사에 대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상 깊게 기억되는 부분이, "만약 콩이 없었다면 인류는 결코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진화하지 못 했을 것이다"라는 문구였습니다.  즉, 최초의 인류가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태어났을 때 아프리카 평원에 콩류가 없었다면 인류가 큰 뇌를 발달시키는데 필요한 단백질과 지방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콩은 지금도 인류에게 값싼 단백질과 기름을 선물하는 매우 귀한 작물입니다.  최근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 때 대두(soy bean)를 둘러싸고 치열한 신경전과 수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콩이 가격이 저렴하고 구하기도 쉬운 것에 비해 영양과 건강 측면에서는 고기보다 오히려 더 낫다는 것은 성경책에도 나옵니다.  구약 다니엘서 1장 12절~15절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부분의 배경은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정벌하고 다니엘을 비롯한 유대인 귀족 청년들을 인질로 잡아간 뒤 바빌로니아 궁전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당시 그 지방의 풍습에 따라 이렇게 인질로 잡혀간 타민족 귀족 청년들은 노예치고는 좋은 대접과 교육을 받고 바빌로니아 왕국에 충성하도록 육성되었지요.  그런데 다니엘은 유대인인지라 돼지고기나 토끼고기등 먹는 것에 가리는 것이 많았고,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먹는 고기를 먹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기와 와인을 먹이려는 느부갓네살 왕의 환관과 협상을 하지요.


(단 1:12)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단 1:13)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단 1:14)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단 1:15)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다니엘이 바빌론 왕이 내리는 음식을 거부하는 장면입니다.)




요즘 상식으로 생각하면 고기와 술 대신에 채소와 물을 먹고 마시면 피부가 더 좋아지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정말 배추나 시금치 같은 채소만 먹고 다니엘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  아마 체중이 많이 줄었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고기를 먹는 다른 노예 소년들에 비해 다니엘과 유대 소년들은 살이 빠져 비리비리한 모습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체 무슨 채소를 먹었던 것일까요 ?  바로 콩이었습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  킹 제임스 버전의 영문판 성경을 읽어보면 나옵니다.  



Daniel 1:12 Prove thy servants, I beseech thee, ten days; and let them give us pulse to eat, and water to drink. 



여기서 pulse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저도 이번에 사전 뒤져보고 알았습니다만 이 pulse는 심장 박동이라는 뜻이 아니라 콩류를 뜻하는 단어더군요.  이렇게 종교적 이유로 미심쩍은 육류를 피하는 주민들을 위해 콩을 공급한 사례는 비교적 최근에도 있었습니다.  전에 미군이 9.11 사태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기 위해 준비 중일 때,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에 대한 사전 공작의 일환으로 주민들에게 일종의 전투 식량 같은 레토르트 포장의 식품을 수송기를 이용해 대량으로 공중 살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사악한 미국놈들이 음식에 돼지고기를 섞었을 수도 있다고 주민들이 생각하면 곤란하니까, 아예 육류는 철저하게 빼고 100% 식물성으로 된 음식을 뿌렸습니다.  전투 식량처럼 휴지와 사탕, 포크 등이 포함된 그 식량 팩 메뉴 중 주식으로 넣은 것이 '식초로 맛을 낸 콩'이었지요.  저는 그때 그 기사를 읽으면서 과연 그 콩 요리는 어떤 맛일지 정말 궁금했는데, 불행히도 아직까지 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요리 이름도 모르겠어요.


실제로 콩류는 지금도 곡물(grain)이 아니라 채소(vegetable)에 속하는 콩류(legume)으로 분류됩니다.  이건 나폴레옹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일일 배식 품목을 보면 특이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건조 채소입니다.  


빵 1.5 파운드

고기 1.1 파운드

건조 채소 0.25 파운드

브랜디 0.0625 파인트

와인 0.25 파인트

식초 0.05 파인트


건조 채소가 나온다고 해서 '역시 프랑스는 영국과는 달리 영양의 균형을 생각하는 미식가의 나라'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여기서 건조 채소라는 것은 영국군도 자주 배식하던 말린 완두콩을 뜻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거든요.  1800년의 제2차 이탈리아 침공 때부터 나폴레옹 밑에서 사병으로 복무했던 쿠아녜(Coignet)의 회고록에도 '아마 천지창조 때 함께 창조된 것처럼 오래된 말린 콩'이 배급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병사들은 이렇게 말린 콩으로 어떤 요리를 해먹었을까요 ?  여기에 대해서는 영국 해군이 아주 좋은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바로 완두콩 수프(pea soup)입니다.  군대, 특히 군함에서는 말린 완두콩이 매우 좋은 식품으로 무척 각광받았습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일단 싸고, 잘 말리면 아주 오래 보존이 가능한데다 부피도 작고, 특히 알갱이가 작다보니 헐렁한 자루에 넣어서 보관하면 건빵과는 달리 좁은 뱃바닥 구석진 공간에도 비집고 들어가기 딱 좋은 형태로 구겨져서 보관 공간도 적게 차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점은 푹 삶기만 하면 맛도 괜찮고 아주 든든한 수프가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수병들도 매주 똑같이 주어지는 염장고기와 건빵, 오트밀 등의 단조로운 식사 중에서 오직 불평하지 않은 것은 럼주와 이 완두콩 수프였다고 합니다.  


영국 해군에서는 이렇게 하도 완두콩 수프를 많이 먹다보니, '완두콩 수프 진급'(pea-soup promotion)이라는 용어까지 나왔습니다.  이건 우리나라 군대의 '짬밥'과 똑같은 의미로서, 복무 기간이 길어서 연공 서열에 이루어지는 진급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책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했던 영국 해군 Frank H Shaw 대령이 쓴 "The Navy of Tomorrow"의 일부입니다.  책 아래 부분을 보면 pea-soup promotion이라는 단어와 그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소스는 http://www.godfreydykes.info/PROPER%20NAVAL%20RESEARCH.htm )





(완두콩 수프입니다.)



(이건 핀란드식 완두콩 수프라는데, 수프라기보다는 죽에 가깝군요 !)




완두콩 수프는 당시 농부/노동자 계급 가정에서도 일상적으로 먹던 음식이었습니다.  결코 비싼 음식은 아니었습니다.  또 요즘 수퍼 푸드라고 각광받는 렌틸콩(lentils) 같은 경우, 고대시절부터 빵조차 마음대로 못 먹는 가난한 농민들의 주식으로 애용된 매우 저렴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싼 콩도 있었을까요 ?  제가 어릴 때 어린이 문고판 버전의 레미제라블을 읽고 뭔가 환상을 가지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푸른콩'에 대한 것이었어요.  지금은 그 구절 하나하나가 잘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대략 선량한 빈민으로 변장한 테나르디에가 자선 활동을 하던 장발장을 공범들과 함께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묶어놓은 뒤, '푸른 콩을 먹는 너희 같은 부자들은 우리 같은 빈민들의 사정을 모른다'라며 화를 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어린 저는 그 구절을 읽으면서 '아, 푸른콩은 비싼 음식인 모양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제가 푸른콩이 뭔지 잘 모른다는 점이었는데, 처음에는 완두콩을 말하는 것인가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완두콩이 뭐 그렇게까지 비싼 콩은 아니쟎아요 ?  그러다 나중에, 직장 다니면서 미국에 출장갔다가 줄기콩이라는 채소를 먹어보게 되었습니다.  저로서는 콩깍지 채로 먹는 신기한 채소를 본 셈인데, 나중에 그 채소 이름이 green bean(string bean이라고도 하지요)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고 어렸을 때 읽었던 푸른콩이 아마 이 채소인 모양이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요즘에는 국내에서도 줄기콩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접할 수 있는 채소가 되었지요.  일반 콩보다는 약간 비싼 가격으로 팔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어판 레미제라블을 찾아서 (물론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읽어보니, 의외로 어렸을 때 읽은 '푸른콩'은 줄기콩이 아니라 그냥 완두콩이더라구요 ?



"Vous mangez des truffes, vous mangez des bottes d'asperges a quarante francs au mois de Janvier, des petits pois, vous vous gavez, et, quand vous voulez savoir s'il fait froid, vous regardez dans le journal ce que marque le thermometre.


너희들은 송로버섯을 먹고, 1월달에 한 단에 40프랑 하는 아스파라거스와 완두콩(petits pois)을 실컷 먹고, 얼마나 추운지 알고 싶을 땐 신문에서 온도계 눈금이 얼마인지를 찾아보지."



당시 40프랑이면 현재 우리 돈으로 약 40만원 정도인데, 비닐하우스도 없던 당시 아스파라거스를 1월에 먹으려면 이렇게 무척 비쌀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로마시대에는 겨울 축제 때 아스파라거스를 쓰려고 알프스 산맥 높은 곳에 쌓인 눈 속에 묻어서 냉동 보관하기도 했다지요.  




(이건 흰 아스파라거스입니다.  저도 신입사원 즈음에 외국 출장 나갔다가 처음 아스파라거스를 먹어보고는, 무슨 채소인진 몰라도 옥수수 비슷한 맛이 나서 신기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궁금함을 못 참고 그 외국 host에게 이게 무슨 채소냐라고 물었더니 그 외국인이 아니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아스파라거스라고 알려주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때의 경험 때문에, 저도 애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닐 때마다 좀 색다른 재료로 만든 색다른 음식을 다양하게 맛보게 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애는 그런 제 노력을 그냥 잔소리로 거부하여 그만 FAIL...)




그러나 완두콩은 대체 왜 비싼 음식으로 여기에 나열되었을까요 ?  처음에는 저는 pois가 완두고 petit는 작다는 뜻이니, 아마 완전히 자란 완두콩 말고 아직 어려서 부드럽고 작은 완두콩은 더 비싼 음식이었나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을 뒤져보니 (아, 정보화 세상 정말 좋습니다) 그것도 아니더군요.  Pois는 그냥 식물로서의 완두를 말하는 것이고, 사람이 먹는 완두콩은 보통 petit pois라고들 부른답니다.  가령 안델센 동화 중에서 20장의 매트리스와 20장의 오리털 이불 밑에 넣어둔 완두콩이 배겨서 잠을 못자는 여자를 진짜 공주로 인정했다는 '공주와 완두콩' 이야기의 불어 번역도 'La Princesse au petit pois'라고 petit를 붙인 pois를 씁니다.




('공주와 완두콩' 이야기에 나오는 20장의 매트리스와 20장의 오리털 이불이 있는 침대 위에 누운 공주의 모습입니다.  관광객 유치용으로 덴마크에 만든 것이래요.)




결국 왜 레미제라블의 테나르디에가 완두콩을 전형적인 부자들의 음식으로 지칭했는지는 아직까지도 모르겠습니다.  완두콩이 일반 대두나 강낭콩 같은 것보다 더 비싼가 싶어서 외국 인터넷 쇼핑몰에서 콩 가격을 살펴보았는데 의외로 콩 종류에 따라 가격 차이가 거의 없더라구요.  완두콩이라고 더 비싼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카투사로 미군에 복무할 때, 한번은 평택 지역에 가서 야전 훈련을 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 대부분의 식사는 맛없는 MRE(Meal Ready to Eat)를 뜯어먹는데, 마지막 날은 평택의 Camp Humphreys에서 대형 금속제 용기에 더운 밥을 실어다 먹여주더군요.  그때 메뉴는 잘 기억이 안나는데, 그 중 더운 채소, 즉 hot vegetable로 나온 것이 리마콩(lima beans)이었습니다.   보통 콩보다 한 2배는 더 큼직하고 납작한 연두색 콩을 뭔가 닭이나 돼지 육수 같은 것과 함께 삶은, 간단한 요리였어요.  나름 맛있더군요.  저는 그때 그렇게 큰 콩은 처음 보는 것이어서, 옆의 미군에게 '야 이 콩은 이름이 뭐냐' 라고 물으니 '라이마 빈즈'라고 답을 하면서 '그거 비싼 콩이야'라고 답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번 기회에 외국 인터넷 쇼핑몰에서 가격을 보니... 비싸긴 개뿔, 그냥 완두콩이나 대두나 리마콩이나 다 가격은 비슷비슷하던데요 ?




(제가 그때 야외 훈련장에서 먹었던 리마콩이 딱 저렇게 생겼습니다.  다만 이 사진 속의 콩은 너무 삶아서 콩이 물러터진 것처럼 보이네요. 스파게티 면이나 콩이나 알덴테(al dente)로 약간 씹는 맛이 있어야 좋은데 말이지요.)




영국 해군 수병들이나 나폴레옹의 병사들이나 미군이나 콩은 기본적으로 삶아서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동양에서는 좀더 복잡하게 가공해서 먹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콩을 그냥 삶아서 먹는 건 소나 말 여물 줄 때나 그렇게 하는 것이었지요.   가령 김성한 작가의 소설 '임진왜란'을 보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조선 조정은 명군의 요구대로 그들에게 일정한 급식을 약속하였다.  장군들에 대해서는 각각 접반사가 따라붙어 특별한 대접을 하는 외에 천총, 파총 등 장교 이하 사병에 이르기까지 질서정연한 식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 장교들에 대해서는 천자호반(天字號飯)이라 하여 고기, XX, 채소, 자반 각 한접시, 밥 한그릇, 술 석 잔.

. 각 관아에서 파송되어 온 연락관에 대해서는 지자호반(地字號飯)이라 하여 고기, XX, 채소 각 한접시에 밥 한그릇.

. 일반 병사들에 대해서는 인자호반(人字號飯)이라 하여 XX와 소금에 절인 새우 각 한접시에 밥 한 그릇.

. 그들이 타는 말에 대해서도 규정이 있어 한끼에 콩 소두 한말, 풀 한단씩.  단 점심에는 삶은 콩을 소두로 4되.



여기서 명나라 군대의 장교부터 말단 졸병까지 모두의 식단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저 XX라는 음식은 무엇이었을까요 ?  두부였습니다.  명군의 말까지도 콩을 꼭 먹이도록 되어있었으니 사람이나 짐승이나 결국 다 콩을 필수적으로 먹었던 셈입니다.  다시 한번 콩의 식품으로서의 우수성이 드러나는 부분이지요.  




(저는 두부를 그냥 부쳐먹는 거 좋아합니다.)



(한국의 콩 요리 중에서 최고봉은 메주로 만든 된장이지요.  메주치고는 너무 예쁘지요 ?  어느 식당 벽에 걸린 플라스틱 장식품을 제가 사진으로 찍어온 거에요.)




오늘의 콩 이야기도 나폴레옹의 일화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나폴레옹이 콩 종류를 좋아하는 편이었습니다.  아침은 버터에 부친 달걀 프라이와 함께 콩 샐러드를 먹었다고 하지요.  그 외에도 원정 때 전쟁터 근처 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던 식량인 감자와 함께 콩과 렌틸콩 같은 것도 매우 좋아했다지요.   이집트 원정 때도 카이로를 향해 진격할 때, 병사들은 '이집트 농민들을 약탈하지 말라'는 그의 명령을 무시하고 재주껏 닭 같은 것을 훔쳐다 먹었지만, 그는 끝까지 굳건하게 나일 강변의 농가에 잔뜩 쌓여 있던 파바(fava) 콩 삶은 것만 줄기차게 먹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그의 참모들도 카이로를 점령할 때까지 지겹게 콩만 먹어야 했다고 하지요.  그렇게 콩을 좋아하던 나폴레옹이 유일하게 절대 식탁에 올리지 못하게 한 콩이 있었으니 바로 줄기콩(불어로는 haricot vert, 푸른 콩이라는 뜻인데 깍지 채로 먹습니다)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줄기콩 맛이나 식감을 딱히 싫어했던 것은 아니었답니다.  다만 깍지 채 먹는 채소이다보니, 필연적으로 깍지에 딸려있는 긴 심지 같은 섬유질이 미처 제거되지 못하고 딸려올 수 있는데, 나폴레옹은 그런 것이 입 안에 들어오면 마치 사람 머리카락처럼 느껴져서 구역질을 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그 정도로 음식에 들어간 머리카락을 싫어했던 것이지요.




(줄기콩 요리입니다.  저도 이거 매우 좋아합니다.)




그런 나폴레옹이 한번은 어느 전투 현장을 시찰하며 병사들의 생활 환경을 검열하는 중에, 병사들이 마침 끓이고 있던 수프를 한 접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렇게 병사들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으며 병사들과의 유대감을 높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먹다보니 수프에서 그만 머리카락이 나왔습니다 !  나폴레옹이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니, 근위대 병사가 나폴레옹에 대한 외경심으로 바짝 얼은 채 보고 있더랍니다.  이런 와중에 'ㅆㅂ 나 안 먹어'라고 수프를 내동댕이치면 병사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  나폴레옹은 진짜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침착하게 머리카락을 건져내고 그 수프를 싹싹 긁어먹은 뒤, 한 접시 더 달라는 호기까지 부렸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집사였던 콩스탕(Constant)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 두번째 수프 그릇에서도 그만 머리카락이 나왔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과연 그 두번째 접시까지 다 비웠는지는 기록이 없네요.






Source : Les Miserables by Victor Hugo

http://www.foodtimeline.org/foodcolonial.html

http://www.godfreydykes.info/PROPER%20NAVAL%20RESEARCH.htm

https://www.harmonyhousefoods.com/Bean-Legume-Family-Pack-8-Varieties-Gallon-Size_p_1849.html

http://www.piratesurgeon.com/pages/surgeon_pages/pork2.html

http://www.godfreydykes.info/THE_GOODNESS_IN_PEA_SOUP.htm

http://www.naturalhub.com/natural_food_guide_grains_beans_seeds.htm

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Daniel+1%3A12-15&version=AKJV

https://fr.wikipedia.org/wiki/La_Princesse_au_petit_pois

https://www.epicurious.com/recipes/food/views/haricots-verts-with-herb-butter-240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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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메에헤 2018.09.03 0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콩하고 두부 좋아해서 자주 먹는데 이 글 읽으니까 더 좋아졌어요

  2. 까까님 2018.09.03 17: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깍지콩으로 알고있었는데 줄기콩이 널리 쓰이는 이름인가보네요
    맛있기는 한데 저렇게 접시에 줄기콩만 가득 담아준다면... 글쎄요... 그건 정말 글쎄요일 것 같습니다 ^^;;
    근데 예전에 어디선가 콩의 원산지가 만주쪽이라고 본 기억이 나는데 그건 아닌가보네요?
    품종마다 원산지가 다를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우리가 주로 먹는 일부 품종에 한해서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구요
    퇴근 시간 임박해서 비는 퍼지게 오고 배는 고픈데... 오늘은 퇴근길 지하상가의 유혹을 어찌 견뎌낼지 걱정입니다
    안전하게 퇴근하시고 맛난 저녁 드십시오~

  3. 카를대공 2018.09.03 19: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콩이 건강에 좋은건 알겠지만 전 정말 못 먹겠더군요.
    특히 콩밥은 어휴ㅠㅠ

  4. 밥동뎅 2018.09.03 2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얘기 넘 좋아요.
    자주 올려주세염~~^^

  5. 유애경 2018.09.04 06: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다이어트한다고 읽은 책 몇권중에 있던 내용인데요.
    원래 인간의 몸은 야채,곡물,과일을 먹기에적합한 구조로 만들어졌고 인간의 치아도 육식이 아닌 초식(?)에 적합한 구조래요.
    단백질은 콩종류 등을 통해서 충분히 섭취할수 있기 때문에 굳이 육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니엘들이 채식을 하고도 건강할수 있었던건 그런 맥락에서도 생각해 볼만하네요.

    • 이산이아닌가벼 2018.09.04 16:49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요? 여러 학설이 있겠지만, 영양학적으로는 인간과 비슷한 구조로 된 것들이 섭취효율이 높다고 해요. 식물 단백질보다는 동물 단백질이 섭취효율성이 높고, 동물 단백질 중에서 최고봉은...

    • 0_- 2018.09.06 15: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마도 채식주의 종교신자인 저자가 썼을 것이라 추측되는 책 하나에서 그런다고 완전히 믿으시다니, 큰일나실 분이네요...

      인간(및 그 유인원 조상)이 농경생활 한 기간이 길었겠습니까, 수렵생활이 길었겠습니까? 수렵을 못하는 시기에도 뭔가를 먹어야 하기에 채집에서도 영양소를 얻을 수 있게 진화 한 정도의 사실을 무슨 야채/곡물/과일을 먹기에 적합한 구조라니, 호도도 이런 호도가 없네요. 애초에 인간이 정말 채식에 적합하다면 소나 양 같이 풀에도 많이 들어있는 섬유소도 에너지원으로 써야겠지요? 그럴거면 저런 동물들 처럼 되새김질 및 반추위가 존재해야 하는데, 실상은 어떤가요? 장이 좀 길다 뿐, 그냥 다른 육식동물 같이 일자로 쭉- 나가는 소화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섬유소를 열량전환을 못 시키고, 부산물 처리의 보조용으로만 사용(=변비치료)되고 있지요. ^^

    • 유애경 2018.09.06 15: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런 저런 내용도 있더라는 얘기지 그걸 완전히 믿고 그걸 남한테 강요하는게 아닌데요? 그런 얘기도 있으니 그렇게 생각해 볼수도 있지 않냐는 말입니다!

    • 유애경 2018.09.07 0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나저나 뭘 근거로 채식주의 종교 신자라고 추측하시는지?

    • 0_- 2018.09.09 1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정의하는 종교란 다음과 같습니다; 근거없는 믿음 및 이 믿음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체계.
      "원래 인간의 몸은..."
      읽으셨다는 글에서 "원래"라는 소리가 있었다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근거가 없을 수 밖에요. 과학으로는 도저히 밝힐 수 없는, 역사 이전 인간의 원류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댓글 잘 읽어보세요. 님이 채식주의 종교 믿는다고 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읽으셨다는 글이 채식주의 종교신자로 의심된다고 쓴 글이지요.

    • 유애경 2018.09.09 15: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무슨 근거로 그책의 저자가 채식주의 종교신자라고 추측 하셨냐는 질문 이었습니다. 그 저자가 흔한 채식주의 종교인 이었다면 저도 무시 했을겁니다!
      논쟁을 벌일 정도로 저는 똑똑하지 못해서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는 못하겠는데요.
      이 세상에는 과학적인 증거를 제시못하지만 그렇다고 과학적으로 해명할수 없는일도 많지 않나요?
      전 어디까지나,그 내용이 인상적이었기에 이렇게도 생각해 볼수가 있지않나는 걸 얘기하고 싶었던것 뿐입니다. 거기에 대고 큰일날 사람이라느니 사실을 호도 한다느니...
      좀 과잉반응 아닌가요?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피력히는건 자유지만 특히나 대댓글 다실때는 상대방이 불쾌하지 않도록 신경좀 써주세요.

  6. 2018.09.05 0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석공 2018.09.05 04: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8. Aaa 2018.09.05 1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에 아프가니스탄 얘기가 나와서 반갑네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soy bean이 자연적으로 나지 않아서 식물성 단백질 섭취가 어렵다고 합니다. 게다가 전쟁통이니 동물 섭취도 어렵구요. 단백질 섭취가 부족해서 유아들의 성장도 더디고 특히 여성 출산이 많이 위험하다고 해서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 환경에 맞는 soy bean 개발과 두유 및 아프가니스탄 일반 식습관에 맞는 식단 개발에 힘쓰는 NEI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후원하고 있는데요 참 콩은 여러 사람을 돕는 유용한 식물인 것 같습니다.

  9. 2018.09.06 1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미국이 잦은 총기 난사 사건을 겪으면서도 총기 규제를 하지 않는 표면적인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헌법 수정 제2조(The Second Amendment)입니다.  대개 이 조항이 미국 시민이 총기를 소유할 수 있는 불가침적인 권리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준다고 하지요.  그런데 최근 그런 해석은 틀린 것이며, 헌법 수정 제2조는 시민들에게 총기 소유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실린 기사를 읽었습니다.


https://www.marketwatch.com/story/what-americas-gun-fanatics-wont-tell-you-2016-06-14


원래 수정 제2조는 아래와 같습니다.  


"A well regulated Militia, being necessary to the security of a free State, the right of the people to keep and bear Arms, shall not be infringed."

(잘 정비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 정부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인민이 무기를 소지하고 휴대할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



위 기사의 주장에 따르면, 헌법 수정 제2조에서 보장하는 것은 주 정부의 안보일 뿐 개인의 총기 소지가 아니며, 그 핵심은 연방 내에서의 각 주 정부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well regulated Militia'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해당하는 현대적 조직인 National Guard가 이미 주 정부마다 유지되고 있으므로 개인의 총기 소지는 규제할 수 있다는 것이고요.   여기서 말하는 National Guard는 보통 주방위군이라고 번역되는데, 이는 예비군과는 또 다른 개념으로서 우리나라에는 없는 개념입니다.  미국의 National Guard는 대부분 따로 생업이 있으나 파트타임으로 급여를 받고 주방위군에서 복무하는, 일종의 민병대 병사들이니까요.  미국 주방위군의 경우 대부분은 민간 생업에 종사하지만 5년 복무 기간 중 1년은 현장에 배치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하더군요.


National Guard라고 불리는 이런 희한한 조직의 시초는 프랑스 대혁명 때 만들어진 'Garde Bourgeoise'(시민방위군)입니다.  이는 원래  국민을 탄압하는 국왕의 군대에 대항하여 시민들이 만든 무장 경비대로 탄생한 것이었는데, 곧 혁명과는 무관하게 다른 유럽 국가로도 전파됩니다.  국민 개병제에 의해 전례없이 대규모의 병력이 동원되던 나폴레옹 전쟁 동안 프랑스의 압도적인 병력에 고전하던 오스트리아 등 다른 유럽 국가들이 그 제도를 본떠 Landwehr 등의 이름으로 유사 조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유럽에서의 National Guard는 국민방위군이라고 보통 번역하는데, 레미제라블 소설에도 나옵니다.  




2012년 영화 레미제라블에서는 일부 생략된 부분입니다만, 흔히 'ABC Cafe'라고 불리는 노래에서 앙졸라가 친구들과 무장봉기를 모의하며 부르는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 time is near

So near it's stirring the blood in their veins!


때가 가까왔다

혈관 속에 피가 들끓을 정도야


And yet beware

Don't let the wine go to your brains!


하지만 신중해야해

아직 승리에 도취할 때는 아니지


For the army we fight is a dangerous foe

With the men and the arms that we never can match


우리가 싸울 군대는 위험한 적수야

그들의 병력과 무기는 우리가 상대할 수조차 없어


It is easy to sit here and swat 'em like flies

But the national guard will be harder to catch.


여기 앉아서 말로만 그들을 파리처럼 때려잡는 건 쉽지

하지만 '국민방위군'은 파리보다는 잡기 어려워


We need a sign

To rally the people

To call them to arms

To bring them in line!


우리에겐 필요해

민중들을 모을,

그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설,

그들을 규합할 신호가 !




(Red & Black 바로 전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이 노래 가사를 들어보면, 앙졸라와 그의 친구들이 무력으로 맞싸울 상대는 경찰도 프랑스 육군도 아닌 '국민방위군'라는 존재입니다.  대체 국민방위군이라는 것은 어떤 군대였을까요 ?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 장발장이 마리우스와 앙졸라가 있는 바리케이드로 찾아갈 때, 길바닥에 쓰러진 정부군 병사의 옷을 벗겨 그 옷을 입고 정부군의 포위망을 뚫고 가는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약간 다르게 나옵니다.  즉, 원래 장발장이 '국민방위군' (la Garde Nationale, National Guard) 소속인 관계로, 집에 있던 자기 군복을 입고 자기 소총을 들고 바리케이드로 찾아가는 것으로 나오지요.  또 당시 나이가 60대였고 도망자 신분이라서 주민등록번호도 없었을 장발장이 국민방위군 소속이라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  이건 빅토르 위고가 설정상의 실수를 한 것 아닐까요 ?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예,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이후, 외국과의 전쟁을 위해 1798년 징집제를 실시한 것이 근대 유럽 사회에서 최초의 징집제였습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은 군 입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니를 뽑는 등 온갖 방법을 다써서 군대를 빠지려고 했지요.  당시 머스켓 소총을 장전할 때는 종이 탄약포를 앞니로 물어 뜯어야 했으므로 앞니가 없으면 병사 노릇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징집제가 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르봉 왕가가 복위한 이후 전쟁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징집제는 철폐되었고, 다시 혁명전처럼 모병제에 의한 지원병들 그리고 스위스 및 독일 용병들로 군대를 채웠습니다.  그래서 마리우스나 앙졸라 등 당시 프랑스 젊은이들은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당시 그런 정규군 사단은 시내, 특히 파리 시내에 주둔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차피 군대라는 것은 외국군에 맞서기 위한 것이니까 국경 부근에 주둔하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파리 시내에는 주로 외국 용병들로 이루어진 왕실 근위대 정도만 있었지요.  하지만 파리 등 주요 도시에서도 경찰력만으로는 감당이 안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폭동과 혁명이었지요.  그런 사태를 대비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국민방위군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국민방위군이란 일종의 예비군 같은 것으로서, 평소에는 민간인 생활을 하다가 폭동이나 내란 같은 비상 사태에 소집되어 질서를 유지시키고 지역을 방위하는 군대였습니다.  원래는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때의 무질서를 제어하기 위해, 주로 중산층 시민들이 자원병으로 나서서 결성된 조직이었습니다.  민병대와는 달리 제대로 된 군복도 갖추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이 겉으로 봐서는 정규군과 크게 구분되지 않는 군대였지요.  이런 국민방위군에도 장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국왕이나 시장에 의해 임관되는 것이 아니라 동료 방위대원에 의해 선출되었습니다.  이런 국민방위군은 평상시 해당 지역의 방위에만 활용되었고 또 평상시 집에서 먹고 자고 생업에 종사했습니다.  주로 하는 일은 순번을 정하여 시청 등 공공 건물에서 경비를 서는 일이었습니다.  왜 중산층들만 이 조직에 끼워주었냐고요 ?  원래 하층민들은 사실 지킬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중산층 이상되는 양반들만 사실 지켜야 할 재산이 있으므로 스스로 총을 들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또 중산층 이상만 끼워줄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총과 군복도 자비로 마련했기 때문에, 애초에 재산이 어느 정도 있지 않으면 참가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또 그렇게 자비로 마련한 소총이다보니, 평소 그 보관도 무기고가 아니라 각자 자기 집에 보관했습니다.  이 점이 나중에 격동기 프랑스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위는 레미제라블 당시 인물인 르느와르 (Philippe Lenoir, 1785-1867, 그 유명한 르느와르 아님)라는 화가의 국민방위군복을 입은 모습입니다.  아래는 1870년 당시의 국민방위군의 모습입니다.)




이미 노년이었던 장발장이 국민방위군에 들어가게 된 사연도 레미제라블 원작 소설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1831년 파리에서 인구 조사를 실시했는데, 플뤼메(Plumet) 거리에 살고 있던 장발장도 거기에는 응해야 했던 것입니다.  장발장은 이때 이미 60세가 넘었으므로 법적으로 면제될 수 있었으나, 장발장은 나이를 50대로 속이고 국민방위군의 소집에 일부러 자원합니다.  국민방위군 소속이라는 것은 건실한 중산층 시민이라는 반증이 되는 것이었거든요.  그 댓가로는 1년에 3~4번 소집되어 시청에서 보초를 서는 것이었으니 도망자 신분으로서 최대한 자신을 일반인으로 꾸며야 했던 장발장으로서는 남는 장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앙졸라가 무장 봉기를 일으켰을 때, 장발장은 국민방위군 소집령에 응하여 그를 진압하러 가야 했습니다.  물론 이때는 테나르디에의 습격을 경찰로 오인한 장발장이 이미 플뤼메 거리의 집을 버리고 도망친 상태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소집 영장이 닿지 않았겠지요. 




(이보게 친구들, 진정하게. 영화와는 달리 사실 이거 내 군복에 내 총이라네.  훔친 것이 아니라네.)



프랑스 정규군의 주력 부대는 대부분 지방에 주둔했기 때문에, 루이 필립 시대에 잦았던 폭동과 무장 봉기를 진압하는 것은 주로 이 국민방위군의 몫이었습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그 구성원들의 출신 때문에라도, 국민방위군은 서민들의 편이라기보다는 주로 중산층 시민 계급(부르조아)의 편이었습니다.  가령 1793년, 총재 정부가 선거법을 교묘히 조작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굳히려 하자, 1795년 10월 5일, 약 3만명에 달하는 파리 시내의 국민방위군은 이에 반발하여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왕당파 편으로 돌아섭니다.  이때 파리 시내에서 총재 정부를 지지하는 정규군 병력은 고작 5천에 불과했습니다.  이 6대1의 불리함을 간단히 극복하고 국민방위군을 포병대로 산산조각낸 불세출의 영웅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지요.  




(미친개에게는 몽둥이를 !  반란군들에게는 대포알을 !   보나파르트 장군에게 자비란 없습니다.)




나폴레옹과 국민방위군의 관계는 이렇게 시작부터 좋지가 않았습니다.  당연히 나폴레옹은 국민방위군을 믿지 않았지요.  나중에 1809년과 1814년에 잠깐 소집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르봉 왕가가 복위하면서 징집제를 폐지한 뒤에는 부족한 병력을 보완하기 위해 이 국민방위군 제도가 재활성화되었습니다.  하지만 부르봉 왕가의 정치가 점점 '절대 왕정'으로 퇴보하는 방향으로 향하자, 부르조아 시민층의 왕정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었고, 이런 움직임은 샤를 10세로 하여금 국민방위군이 유사시 왕정에 대한 강력한 위협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그래서 1827년, 샤를 10세는 국민방위군을 해체시켜 버립니다.  하지만 이때 샤를 10세는 실수를 하나 저지릅니다.  국민방위군 조직만 해체했을 뿐 국민방위군이 가지고 있던 무기류는 압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은 압수할 근거가 없었던 것이, 그 소총과 탄약 등은 국가에서 지급한 정부 자산이 아니라 중산층 출신인 국민방위군 병사 개인이 사비로 구입한 사유물이었던 것이지요.  결국 불과 3년 뒤 터져나온 1830년 7월 혁명에서, 거리로 뛰어나온 수많은 부르조아 시민들의 손에는 국민방위군 시절 사용하던 머스켓 소총이 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1830년 7월 혁명 당시 전투 모습입니다.  "여기가 미국도 아닌데 민간인들에게 왜 이렇게 총이 많은거냐 ?")



1830년 7월 혁명 이후 세워진 오를레앙 가문의 루이 필립 1세는 그러니까 사실 온건한 입헌 군주제를 원했던 부르조아 시민들이 세운 왕이었습니다.  따라서 앙졸라가 이끄는 'ABC의 벗들', 즉 과격 공화파가 일으킨 1832년 6월 봉기는 부르조아 시민들이 그다지 원하지 않는 사건이었고, 따라서 국민방위군은 이 봉기를 적극적으로 진압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루이 필립의 정치가 점점 도시 부르조아 시민들의 이익에서 멀어지게 되자, 결국 터져나온 1848년 2월 혁명 때는 국민방위군은 혁명을 지지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19세기 초반 혁명의 시대에는 국민방위군의 민심이 프랑스의 왕권을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병사들이 진압은 안하고 'Do you hear people sing' 노래를 부르면서 시위대와 함께 행진하면 독재자에게는 큰일 나는 거에요.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도 그렇게 죽었지요.)




제 지난 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저는 항상 모병제보다는 징집제를 지지하는 편입니다.  (다만 현재의 노예같은 군대 생활은 결사 반대입니다.  징집된 군인들의 생활 환경과 급료는 미군 수준까지는 아닐지라도, 지금보다는 대폭 향상되어야 합니다.)  그 주된 이유는 제가 진보 좌익인 척 하는 보수 우익이기 때문입니다.  군대는 반드시 국민 대다수와 이해 관계가 같아야 합니다.  스파르타나 로마가 강했던 것은 소규모 자작농이 곧 정규군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사회주의적 경제체계가 무너지고 그에 따라 스파르타 시민들이 부자와 빈민으로 나뉘게 되면서, 또 로마 공화정의 군대가 마리우스나 술라, 케사르나 폼페이우스 개인을 따르는 직업 군대로 변모하면서부터 그 몰락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군단병들은 원래 자작농들로 구성된 시민병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직업 군인화되면서 특정 장군을 따르는 사병화되는데, 그런 변질의 시초는 일반적으로 킴브리족을 격파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사 개혁이었습니다.)




당장은 더 훈련이 잘되어 있고 더 전문적인 전투원으로 구성된 모병제가 더 효율적이고 더 강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병제는 필연적으로 그 사회 중산층과 군대의 사이를 벌어지게 합니다.  중산층 출신 자제 중에서 군대로 가는 비율은 매우, 매우 적은 것이 정상이니까요.  그리고 그런 점은 그 사회의 정치 안정성을 크게 떨어지게 합니다.  지켜야 할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로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게 하는 것이 그다지 현명한 일 같지는 않거든요.  미국이나 유럽처럼 민주주의 제도가 확고히 자리잡은 나라에서는 어떨런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박통에 의한 쿠데타나 전땅크에 의한 쿠데타가 그리 오랜 옛날 이야기가 아닌 사회, 그리고 광주사태가 아직도 북괴의 공작에 의한 무장 반란 사건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벌여질 정도로 성숙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모병제는 아직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대한민국처럼 사회 지도자 계층에서 군대 제대로 마치고 온 아들 찾기가 매우 어려운 현실은  정말 우려스럽습니다.  그런 거 보면 진짜 우리나라에는 보수는 거의 없어요.  그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욕심꾸러기들을 사회 지도층으로 모시고 사는 것 같습니다.




(길거리에 젊은이들이 뛰쳐나오는 것이 문제라고요 ?  아닙니다.  그들이 뛰쳐나오도록 만든 사회 지도층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처럼 노인분들이 이스라엘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오는 것을 보니 측은하기도 하고... 기분이 묘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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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기 2018.03.21 2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보적 인사로 불리던 촘스키 아저씨도 무력의 사회적 통제, 혹은 소수 지배계층이나 자본가에 이익을 위한 침략 전쟁을 막기 위해서 징집제를 주장하던 것 같습니다.... ㅠㅠ 다만 한국은 징집제인데.... 민주적 의사결정이랑은 전혀 거리가 먼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ㅠㅠ

  2. 유애경 2018.03.22 0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의 의견,주장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힘없는 서민들한테 애국이나 희생을 강요하기 전에 지도층이란 자들이 먼저 솔선해서 모범을 보였으면 해요!
    독재자 들에게는 챠우셰스쿠 같은 결말이 당연하지요!

    그나저나 정치병 좋아하는 나 뭐시기 라는 분, 또와서 궤변 풀게 생겼네...


  3. 아즈라엘 2018.03.22 05: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쭉정이무 달려올시간입니다

    • 0_- 2018.03.24 05:29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사람은 드디어 블로그 만들어서 열심히 허수아비 공격하고 있던데, 괜히 또 여기에 소환해서 분란 일으키려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리 그 사람이 보고싶으시면 직접 찾아가시면 되는 것 아닌가요.

  4. 수비니우스 2018.03.22 07: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이 수백년을 이어온 로마의 군제와 정치구조 그리고 통념과 정반대임에도 통과된 것은 군제개혁 몇년전의 전투에서 게르만족에게 수만의 로마군이 몰살당한 충격이 로마를 지배했던 것과 동시에 그 대패의 원인이 로마 중산층의 몰락에 있다는 것을 로마 사회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한니발 전쟁 이후 백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지중해 전체로 로마의 세력이 확장되어 얻은 단물은 로마 원로원이 다 빨아먹고 로마 중산층은 처절하게 몰락해갔으며 이걸 막으려고 했던 그라쿠스 형제는 원로원이 대놓고 쳐죽였으니, 제정을 불러와서 공화정을 무너뜨린건 원로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독재를 반대하고 군주정(왕정이든 제정이든)에 반대하고 나시카님의 징병제론에 절대적으로 찬성하는데도, 제가 카이사르의 쿠데타 시점의 로마 시민이었다면 150년 동안 원로원이 보인 행태로 인해 열이 뻗쳐서 카이사르를 지지했을 겁니다. 한니발 전쟁 이후의 원로원은 이전의 원로원의 자손이었거나 정신적 계승자지만 실제 행동은 전혀 달랐죠. 해외에서 쏟아지는 부로 원로원 계층의 힘이 너무 강해져 견제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요. 다시는 카이사르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나오지 않게끔 공화정을 건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원로원에 해당되는 조직이나 계층을 충분히 견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 nasica 2018.03.22 07: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씀처럼 부의 집중과 그에 따른 중산층의 몰락은 반드시 그 사회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문제는 현대처럼 국가간 통상이 활발하고 자본 이동이 쉬운 세상에서는 그저 기업을 규제하고 세금을 더 걷어 복지를 확대하는 것으로는 국가 경쟁력 유지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피케티 말대로 국제적 연대 외에는 따로 대책이 없는데, 그것도 사실 실현이 어려운 이야기지요.

  5. reinhardt100 2018.03.22 08: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국 인터넷 기사 잘 읽었습니다. 저거 쓴 기자가 암묵적 전제를 무시하고 쓴 기사입니다.

    미국 수정헌법 2조에 의해 '(연방정부의 불법적인 정책에 대하여) 민병대 무력에 의한 저항권을 주정부에게 보장했으니 개인의 총기소지를 제한해도 된다는 논리'는 나올 수 없습니다. 저걸 그대로 저 의미대로 해석했다가 뭔 사단이 났는지? 바로 남북전쟁입니다. 흔히 노예인권? 보호무역과 자유무역? 그거도 있지만 결정타를 날린 것 중 하나가 남부연합의 6개주가 연방탈퇴를 운운하자 격분한 연방정부는 해당 각 주의 민병대원들의 무장, 특히 탄약을 일제히 전수조사 및 압류하려들었죠. 이게 남부인들을 격분시켰고 텍사스 등의 일부 주지사들조차도 반대했던 '연방탈퇴, 남부연합 가맹'로 몰고 나가게 됩니다. 한 마디로 '연방정부가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냐?'가 된 겁니다.

    또 하나, 유타 주 문제도 있습니다. 유타 같은 경우, 모르몬 교도들이 실제로 저 조항 등을 근거로 하여 연방정부의 통제를 거부했는데 연방정부는 '유타준주의 모르몬 교도들이 저 조항을 근거로 해서 무력을 발동하면 연방정부군을 동원, 무력으로라도 모르몬 교도들을 강경 진압한다'는 것을 천명했습니다. 남부연합조차도 남북전쟁으로 어떻게든 재가맹시킨 연방인데 그깟 유타쯤이야 충분히 박살내버릴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모르몬 교도 항복합니다. 게릴라전으로 버티는것도 한계가 있고, 당시 이미지도 안 좋았으니까요. 결정적으로 정말 연방정부군이 유타로 진격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자칫하면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 시즌 2 찍을 판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저 조항은 저런 식으로 해석할 때마다 반드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연방정부의 무력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저 조항이 의미하는 개인이란 현대 시민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곤란한 것도 있고요. 즉, '납세 등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 투표권을 가진 남(여)가 연방정부 및 주정부의 자신의 안전권적 기본권 및 자유권적 기본권을 침해하는 정책에 불복종하기 위한' 수단 중 '모든 비폭력적수단을 다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개선의 여지가 없으며 수인한도를 넘어선 경우'에 한한 '최후의 무력적 수단으로써의 총기를 사용할 (제한적인) 가능성'을 제시한 예시조항이라고 봐야 합니다. 어디서 개인의 총기 소유를 제한? 그런거 나올 수 없습니다.

    민병대나 주방위군의 구성 및 의의는 '전술한 자격요건을 구비한 법적 주체들이 자신들의 결정에 의해 구성한 자유 수호의 무력적 기반'인데 그 법적주체들의 총기소유를 제한하면 민병대나 주방위군 같은 것들은 성립 자체가 맞지 않게 됩니다. 저 기사는 그걸 무시하고 있더군요.

  6. reinhardt100 2018.03.22 0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국의 민병대 및 주방위군의 원조가 프랑스 국민위병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미국, 즉 뉴잉글랜드 및 버지니아등에 17세기부터 이미 인디언부족들과의 전쟁이 몇 차례나 있었고, 이 시기에는 뉴스웨덴, 뉴암스테르담, 아카디아 및 누벨프랑스등에서 밀어붙이는 타국 세력들과의 전쟁에서 잉글랜드 식민지들은 열세에 처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7년 전쟁, 프렌치-인디언 전쟁 전반기 뒤켄 요새(현 피츠버그)까지 밀리면서 자칫하면 본국에서 지원군이 오기도 전에 프랑스 정규군에 항복 직전까지 몰린 상황도 있고요. 이 판국에 민병대나 주방위군 없이 안전보장? 꿈에서나 나올 소리죠.

    독립 이후에도 한동안 미합중국은 뉴잉글랜드지역의 민병대 및 주방위군을 주축으로 국가방위를 해왔습니다. 특히, 미영전쟁이 중요한데 초반 뉴잉글랜드지역 민병대가 불참하면서 백악관이 불타는 수준까지 몰립니다. 다만 해군은 예외긴 합니다. 컨스티투션같은 프리깃 건조시 연방정부 자금으로 건조했으니까요.

    미합중국에서 연방정부가 제대로 무력투사를 시작한 때는 미국-멕시코 전쟁기부터입니다. 이 시점부터는 대륙단위로 국가방위를 해야 하다보니 더 이상 민병대나 주방위군에 의존할 수 없었고 즉, 민병대등은 서부개척시 소규모 자위무력화 하게 됩니다.

    프랑스 국민위병이 미국 민병대 및 주방위군에 끼친 영향은 주로 법적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외로 미국이 불문법,보통법 국가라고 하지만 그거 헛소리입니다. 민병대나 주방위군 존립기반 근거에 관한 법률들이 거진 다 프랑스 국민위병법을 번역해서 가져다 쓴 수준이거든요. 이걸 2백년 가까이 쓴 게 문제인 겁니다.

  7. 메뚜기 2018.03.22 1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8. ㅋㅋㅋ 2018.03.22 17: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밑에댓글 엄청웃었네요

  9. ㅋㅋㅋ 2018.03.22 1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쭉정이무ㅋㅋ

  10. 최홍락 2018.03.22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국이나 유럽처럼 민주주의 제도가 확고히 자리잡은 나라에서는 어떨런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박통에 의한 쿠데타나 전땅크에 의한 쿠데타가 그리 오랜 옛날 이야기가 아닌 사회, 그리고 광주사태가 아직도 북괴의 공작에 의한 무장 반란 사건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벌여질 정도로 성숙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모병제는 아직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 군부독재를 이유로 뭐만 하면 쿠데타와 연관을 짓는 주장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ᆢᆢ정권교체가 민주적으로 두 번 일어나면 민주정이 공고화된 거라는 주장은 정치학에서 오래된 고전인데ㅎ 한국만이 예외적인 케이스이며 우리는 서구와 다르다는 믿음은 지나치게 쉽고 나이브한 것인데...마치 40년전에 누군가가 주장한 한국식 민주주의처럼말이지요.

    징병제든 모병제든 병역제도는 그 체제의 안보환경이나 경제조건에 부합되도록 설계되어야 할 문제이지 여기에 사회 통합의 문제와 같은 모호한 이슈를 끼워넣는게 바람직한거냐라는 생각이 드네요. 마치 교육정책에 있어서 사회 불평등 해결 등의 이슈를 끌어들여 엉망진창의 제도를 들여놓는 것처럼.

    • ㅁㅁ 2018.03.24 19:01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회 통합의 문제가 모호한 이슈인지는 모르겠지만, 군의 구성원들의 이해관계와 그 국가,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과 이해관계가 따로 놀게 될때 그 나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세계역사에 무수히 많은 사례가 있죠. 병역제도는 그러한 차이를 가져오게 되는 시발점이 되는 부분이고요.

    • 최홍락 2018.03.25 1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경제적인 피폐함과 잘못된 정치에 따른 사회혼란이 발생한다면 제아무리 군의 구성원과 사회 구성원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한들 그걸로 체제는 끝입니다. 모병제든 징병제든 정부가 더이상 존속하기 힘들다고 판단되면 병사들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지가 않겠지요.

      그래도 미군이 모병제를 채택하면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군대에 가게 되고 부유층은 빠지게 되지 않느냐라고 물으신다면 MIT공대 크리스천 애피 교수의 연구가 그에 대한 반론이 될수도 있겠네요.

      베트남전쟁 시기 징병연령에 해당되는 미국 젊은이 수는 총 2,700만명으로 그가운데 250만명이 참전. 이중 노동자 또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 80%였습니다.

      사상자로 보자면 가구당 소득이 5,000달러 이하인 가정 출신의 사상자가 15,000달러 이상 출신자의 4배였으며 흑인사망률 전체 사망자의 20%에 이르렀고요.(당시 전체인구에서 흑인비율은 10%)

오스트리아 대사 슈바르첸베르크 대공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폴레옹의 아들에게 바친 '로마 왕'(Roi de Rome)이라는 칭호는 단지 신성로마제국의 정통성을 나폴레옹에게 공치사로서만 넘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이미 로마는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넘어온 상태였습니다.  


로마 및 그 주변은 원래 세속 군주로서의 로마 교황이 가지는 교황국(the Papal States)에 속하는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지배자 나폴레옹 눈 앞에는 고양이는 커녕 생쥐만도 못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비오 7세(Pius VII)는 1804년 나폴레옹의 대관식에도 참석하는 등 나폴레옹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다 소용없었습니다.  이미 1809년 5월 17일, 나폴레옹은 빈에서 칙령을 내려 로마 교황의 세속 군주로서의 자격을 박탈한다고 발표한 바 있었습니다.  당연히 비오 7세는 거부했지만, 뮈라가 파견한 프랑스군을 막을 힘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교황에게는 영적인 지도자로서 휘두를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무기가 있었습니다.  파문이었지요.



(비오 7세입니다.  비오 7세의 전임자인 비오 6세가 나폴레옹에게 시달리다 죽을 정도였으니, 비오 7세는 일평생 나폴레옹에게 시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폴레옹을 언제나 '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말을 안 듣는 아들이지만, 그래도 아들'이라고 했다는군요.)




프랑스 점령군이 로마를 점거하고 교황의 지배권을 몰수한다고 발표한 6월 10일 밤, 교황은 나폴레옹과 그 추종자들을 카톨릭 교회로부터 파문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건 과거 카노사의 굴욕을 이끌어낼 정도로 카톨릭 세계에서는 매우 무시무시한 처벌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는 11세기가 아니라 19세기였습니다.  비오 7세는 '이 파문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것이며 이 파문이 육신의 공격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라고 소심하게 덧붙였습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교황이 누굴 파문하건말건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으니까요.  이미 프랑스 내에서의 카톨릭 교회에 대한 인사권은 모두 나폴레옹에게 넘어간 뒤였거든요.  레미제라블 제1장을 보면,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선물한 미리엘 주교가 우연히 나폴레옹을 만나게 되고 그 짧은 만남에서 나폴레옹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 주교로 승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미 정교협약(Concordat)에서 그렇게 협의가 되었기 떄문에 교황이 아니라 나폴레옹이 카톨릭 신부를 임명하고 해임했던 것이지요.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 좀 더 정확하게는 조세핀과의 이혼은 나폴레옹과 로마 사이에 더 심각한 갈등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카톨릭에서 이혼은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모세도 허락했던 이혼을 예수님께서는 '시대가 바뀌었다'라시며 명시적으로 금지하셨으니까요.  이혼 문제 때문에 영국이 카톨릭에서 떨어져나와 영국 국교회를 따로 세울 정도였지요.  나폴레옹은 권력자답게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했는데, 이미 로마에서 체포되어 사보나(Savona) 등지를 전전하며 연금 상태에 놓여 있던 비오 7세는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식에는 무엄하게도 추기경들이 모두 불참하여 나폴레옹을 격분시키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덕분에 비오 7세의 비서였던 콘살비(Consalvi) 추기경을 포함한 13명의 추기경들이 모두 파면되어 유럽 여기저기에서 빈곤 속의 유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콘살비 추기경입니다.  나폴레옹이 그를 파리로 산 채로 잡아오게 한 뒤 직접 만난 자리에서 '연금 3만 프랑을 줄 테니 자신에게 협력하라'고 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랭스로 귀양을 갔다고 합니다.  그는 나폴레옹 폐위 때까지 빈곤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김에, 나폴레옹은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원래 교황의 소유였던 로마와 그 주변 영토는 이미 나폴레옹이 왕으로 있는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된 상태였습니다만, 1810년 2월에 아예 프랑스의 일부로 편입시켜 버린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그렇게 한 이유는 바로 나폴레옹의 미래의 황태자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에게 로마 왕이라는 작위를 주려면 로마가 프랑스 영토인 것이 모양새가 좋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나폴레옹의 제국은 날로 넓어지고 있었습니다만 여전히 나폴레옹에게는 골치거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 이후로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Blocus Continental)을 통한 영국 말려죽이기에 들어갔었지요.  그런데 이게 그렇게 잘 돌아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영국도 대륙과의 통상이 약 50% 정도 줄어 고통을 겪고는 있었습니다만, 영국은 대신 제해권을 바탕으로 미국과 남아메리카에 대한 통상을 증가시켜 버티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강력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중립국 상선과 밀무역을 통해 대륙과 여전히 50%의 통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대륙봉쇄령 하에서도 영국의 연간 통상액은 무려 2천5백만 스털링 파운드(sterling pound)에 달했습니다.  현재 가치로 우리 돈 6조3천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1809년 쇤브룬 조약에서 결정된 오스트리아의 전쟁 배상금이 8천5백만 굴덴, 현재 가치로 6300억원이었던 것과 비교할 때, 당시 영국이 얼마나 큰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굽시니스트 굽본좌가 justoon.co.kr에서 수요일에 연재 중인 웹툰 '한중일 이웃나라 흥망사'에서 다룬 영국 산업혁명 과정입니다.  출처  http://www.justoon.co.kr/content/home/09qh02k1cc6e/viewer/09rf2ms1bbd7 )




하지만 1810년 당시 가장 많은 밀무역을 하던 곳은 네덜란드와 독일 북부 한자 동맹 도시들이었습니다.  과거부터 대서양을 통한 무역이 활발했던 그 도시들의 번영은 전적으로 해외 무역에 의존한 바가 컸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와 영국 간의 무역 전쟁으로 인해 영국과는 물론이고 아메리카 대륙과의 통상마저 어렵게 되자, 이 상인들의 도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결코 정부의 명령에 따라 순순히 시들어 죽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살 길을 찾지요.  이 도시들은 그 살 길로 밀무역을 택했고, 도시의 번영과 무관할 수 없는 공무원들은 그런 밀무역을 애써 외면했습니다.  심지어 나폴레옹의 친동생이자 네덜란드 왕이었던 루이 보나파르트조차도 펄펄 뛰는 형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번영을 위해 그런 밀무역을 어느 정도 용인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네덜란드와 독일 항구를 통해 들어온 영국 제품들은 유럽 전역에서 아주 잘 팔렸습니다.  워낙 값이 싸고 질이 좋았거든요.  심지어 프랑스군의 군복도 영국산 직물로 만들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요.  


뿐만 아니었습니다.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은 나폴레옹에게 유서 깊은 합스부르크라는 근사한 브랜드를 가져다 주었지만, 반대로 러시아의 분노도 갖다 주었습니다.  1810년부터 러시아는 대륙 봉쇄령에서 사실상 이탈하게 되었습니다.  영국과의 교역이 끊겨 경제가 어려워지자, 짜르 알렉산드르로서도 더 이상 국내의 불만을 무시하기가 어려웠던 상태였는데,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가 혼인 관계를 맺자 더 이상 강력한 항구 단속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얄미운 중립국, 특히 미국 국적의 상선들이 영국산 제품을 유럽으로 실어나르는 것도 얄미웠지만, 러시아의 항구로는 아예 영국 화물선들이 활발하게 화물을 실어날랐습니다.  


이런 통상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당장 뾰족한 방안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프랑스의 산업 생산성은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던 영국의 공업력을 당해낼 수 없었으니까요.  그는 영국의 통상을 격멸하기 위해서, 당장 손에 닿는 영국부터 때려잡기로 합니다.  즉, 쥐노가 정복했다가 영국군이 탈환하여 주둔하고 있는 포르투갈을 재정복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한 노력은 이미 1809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그람 전투 준비에 한창이던 1809년 6월 중순,  나폴레옹은 술트와 네, 그리고 모르티에의 군단(corps)들을 하나로 합쳐 약 5~6만 병력의 하나의 군(armee)을 편성하도록 했습니다.  이 포르투갈 방면군의 목적은 단 하나, 영국군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대군의 지휘관으로 그 3명의 군단장 중 가장 선임자였던 술트를 지명하며, 절대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움직이지 말고 반드시 한덩어리로 뭉쳐서 전진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내륙 교통망이 형편없었던 스페인-포르투갈 지형의 특성상 부대간의 통신을 유지할 방법은 그것 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여러 모로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먼저, 현지 조달에 의존하는 프랑스군의 특성상, 그리고 척박한 포르투갈-스페인 특성상 그런 대군이 한 곳에 집결하여 한꺼번에 활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국군은 그게 가능했는데, 그건 수천마리씩 동원 가능했던 막강한 노새 수송 부대 덕분이었습니다.  가난한 프랑스군은 그런 호사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또, 이베리아 반도는 영국산 제품이 쏟아져 들어오는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가난하고 내륙 수송망이 한심한 수준이었던 이 지역은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영국산 제품을 대량으로 수입하기보다는, 오히려 와인이나 올리브유 정도를 수출하는 곳에 불과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나폴레옹의 명령은 완전히 잘못된 정보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모르고 있었으나, 무어 경의 영국군을 축출하고 정비를 마친 술트 군단은 이미 포르투갈 북부의 주요 항구도시인 오포르토(Oporto)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잔혹한 약탈로 쑥대밭을 만든 뒤였습니다.  거기까지였다면 좋았겠으나, 이야기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만의 영국군을 끌고 포르투갈로 돌아온 웰슬리(Arthur Wellesley) 장군이 방심하고 있던 오포르토의 술트를 기습, 프랑스군을 산산조각내버린 뒤였던 것입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Pope_Pius_VII

https://en.wikipedia.org/wiki/Continental_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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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ip 2018.01.07 2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는 영국의 통상을 격멸하기 위해서, 당장 손에 닿는 영국부터 때려잡기로 합니다.

    이 부분 표현이 너무 맛깔나고 좋아요! 잘 읽었습니다!

  2. 카를대공 2018.01.08 05: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는 영국의 통상을 격멸하기 위해서, 당장 손에 닿는 영국부터 때려잡기로 합니다

    이 부분 보고 과연 나폴레옹답다,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 그다운 판단이라 생각 했는데
    이거 패착이었군요;;

  3. reinhardt100 2018.01.08 08: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로운 글이 나왔습니다.

    흔히 말하는 '스털링 파운드'라는 것은 이 당시에는 '영란은행이 직접 발행한 파운드'에 한정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스코틀랜드나 웨일스, 아일랜드가 모두 자체 파운드화를 발행하고 있었으니까요. 즉, 이 당시 집계된 무역량은 '스털링 파운드로 합계된 가공된 수치'라는 것입니다. 특히, 1800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아일랜드 합병은 사실 파운드화 가치 유지를 위한 정화준비를 마음껏 쓰려고 했을 정도로 이 당시 영국은 급박한 상황이긴 했습니다.

    미국과 남미, 인도등 아시아와의 통상 확대로 영국이 대륙봉쇄령에 맞서긴 했지만, 각 지역에 대해 영국이 한 짓은 급하다고 해도 욕먹기 딱 좋은 짓이었죠. 미국을 상대로는 '영란은행이 발행한 것이 아닌 아일랜드나 웨일스, 스코틀랜드에서 발행한 파운드화 지폐나 주면서 무역을 해서 대금 지불 자체에 대한 의지가 있기나 한 것인지?'하는 태도로 일관해서 뉴잉글랜드 지역의 여론을 한껏 격앙시켰습니다. 남미의 에스파냐 혹은 포르투칼 식민지에 대해서는 아예 대놓고 영국산 공업제품을 있는대로 뿌려댔고, 게다가 식민지 상층부에 대하여 독립해서 우리와 직접 교역하면 너네가 본국 눈치 볼거 없이 마음껏 하층민들과 노예들을 쥐어짤 수 있다고 충동질하는 '동맹국들 등 뒤에 총질'하기도 했습니다.

    인도와 동남아, 일본에서는 날강도 수준이었죠. 인도에서 동인도회사가 정부에서 대부를 받는 상황에서도 무리해가면서까지 인도의 토후국, 네덜란드령 자바 및 말레이, 몰루카군도 정벌에 열을 올린 이유가 '각 토후국이 저장해놓은 정화준비용 지금,지은을 확보, 본국 정부에 대하여 우리에게 대부를 해주지 않으면 확보한 정화를 본국에 운송해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기 위함도 있었고 덤으로 노스법안이 발안된 1784년도에 이미 논의가 시작된 대중,대인도무역 독점권도 유지하려는 발악적 성격도 있었습니다. 본국 정부도 동인도회사의 이 따위 억지(?)에 대해 비위를 맞추어주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대놓고 네덜란드 데지마를 공격하려했다가 막부에 찍힌 적도 있으니까요.

  4. 유애경 2018.01.08 0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을 안듣는 아들이지만 그래도 아들이다'
    「종교인」으로서의 무한한 자비심과 사랑 이었을까요? 아님 「종교인」으로서의 대외적인 명분이나 허세같은 거였을까요?(웃음)

    재밌게 보고 갑니다.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5. 수비니우스 2018.01.08 1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양질의 글을 블로그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D
    " 영국군은 그게 가능했는데, 그건 수천마리씩 동원 가능했던 막강한 노새 수송 부대 덕분이었습니다. " ...역시 전쟁은 돈이죠 ㄷㄷㄷ

  6. unik519 2018.01.09 18: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국에 비하면 그 프랑스조차 빈곤한 군대를 가진 나라가 되어버리니 역시 돈만으로 강한 군대를 만들 수 없지만, 돈 없이는 강한 군대를 만들기가 또한 힘들군요ㅠ
    늘 좋은 글을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7. sarada 2018.01.09 2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본문내용과 직접 상관은 없은데 나폴레옹의 문양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는데 하나 질문 드려도 될까요?

    나폴레옹 황제의 가문 문장은 꿀벌인데요. 보통 가문, 왕가의 상징, 문양은 사자, 호랑이, 독수리 같은 맹수를 쓰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나폴레옹은 왜 꿀벌을 자신의 상징 문양으로 삼았던 건가요? 꿀벌이 존경, 위험, 힘 같은 것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여서 그게 좀 의아해서요. 구글에서 "Napoleon bee" 로 검색해봐도 딱히 이유는 잘 못 찾겠네요. 나폴레옹이 개인적으로 꿀벌과 무슨 연관이 있거나(예를 들어서 나폴레옹 집안이 양봉을 했다던지..) 아니면 당시에는 꿀벌의 이미지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뭔가 달랐던 건가요?

    궁금한데 검색을 해봐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나시카님에게 물어봐 봅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 nasica 2018.01.09 2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꿀벌은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문장으로서 풍요와 근면을 상징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부르봉 왕조의 문장인 백합보다 더 오래되고 더 뜻깊은 것을 찾다가 학자들의 권고에 따라 꿀벌을 택했답니다.

    • sarada 2018.01.10 1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변 감사합니다. 궁금했던 내용인데 알게 되서 너무 즐겁네요.

      저는 혼자 머리속으로 소년 나폴레옹이 코르시카 섬에서 양봉을 하면서 "내가 나중에 황제가 되면 이 꿀벌을 내 상징으로 삼아야지" 라고 다짐하는 훈훈한 광경을 상상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재미있는 글 부탁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8. 넬슨 2018.02.20 1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당시 영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었던듯


(코렝트 주점 앞에 바리케이드를 친 앙졸라와 그의 친구들)




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작, 배경 1832년 파리 --------------------


6월 5일 아침, 항상 같이 지내는 친구들인 레글과 졸리는 코렝트(Corinthe) 주점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갔다.  졸리는 지독한 코감기가 걸려 코가 막힌 상태였는데, 레글에게 막 옮기 시작한 상태였다.  레글은 닳아 헤진 옷을 입고 있었지만 졸리는 잘 차려 입고 있었다.


그들이 코렝트 주점의 문을 밀고 들어간 것은 대략 오전 9시 경이었다.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갔다.


마틀로트와 지블로트가 그들을 맞이했다.


"굴, 치즈와 햄 (Huîtres, fromage et jambon)."  레글이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주점은 비어 있었다.  그들 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졸리와 레글을 잘 알고 있던 지블로트는 식탁 위에 와인 한 병을 갖다 놓았다.


그들이 처음 나온 굴을 먹고 있을 때, 계단으로 올라오는 바닥의 햇치문에서 머리가 하나 나타나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나가다 거리에서 냄새를 맡았지, 브리 치즈의 맛있는 냄새말이야.  들어가겠네."


그랑테르였다.  그랑테르는 등받이 없는 의자를 집어들고는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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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문학 작품에서 감동보다는 먹을 것 관련 이야기를 즐겨 찾는 편입니다.  레미제라블에서도 위에 인용한 부분을 읽고 무척 인상이 깊었습니다.  이 짧은 인용 구절에서 여러가지 궁금한 점이 나왔거든요.  





1) 생굴인가 요리한 굴인가 ?


저 구절을 읽을 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저 굴이 생굴이었을까, 아니면 뭔가 튀기거나 삶는 등 요리한 것이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당시엔 냉장고도 고속버스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굴의 보존을 위해서라도 훈제 굴을 만들어 놓았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더랬습니다.  실제로 훈제 굴이라는 음식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결국 저는 저 굴이 생굴이라고 나름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당시에도 굴은 생으로 먹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용 구절에서처럼 레글이 그냥 '굴'이라고만 이야기했으므로, 저 굴은 익힌 것이 아니라 생굴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유럽인들은 원래 해산물을 날로 먹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거부감을 느끼지만 굴만은 예외입니다.  참 의이한 일이지요.  심지어는 생선 외에의 해산물을 거의 먹지 않는다는 러시아인들조차도 굴은 날 것으로 먹습니다.  체호프(Chekhov)의 소설 '굴'에서는 19세기 후반, 모스크바 길거리의 어느 불쌍한 구걸 소년이 굴이 뭔가 집게 달린 갑각류라고 생각하면서도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굴이라도 먹겠다고 하자, 신사들이 '꼬마가 생굴을 먹는다고 ?  그거 참 재미있겠네'라며 꼬마에게 굴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짧은 소설은 제가 (요즘 휴가인지라) 번역해서 올려 볼게요.


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그 감독인 퍼거슨 경 관련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퍼거슨 경의 엄격한 식단 관리 중 하나로 경기 전에는 절대 조개 종류를 못 먹게 한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조개 종류는 쉽게 상해서 식중독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렇다고 하더군요.  퍼거슨 경의 방침은 결코 무시할 사항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익히지도 않은 생굴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을까요 ?


비결은 간단합니다.  반드시 살아 있는 굴을 먹으면 됩니다.  그러자면 먹을 때 반드시 아직 살아 있는 굴의 껍질을 자기 눈 앞에서 까서 즉석에서 먹어야 하고요.  아마 레글과 졸리가 주문한 굴도 껍질 째로 나왔을 것입니다. 


제가 '그들이 처음 나온 굴을 먹고 있을 때' 라고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번역한 원문 구절은 'Comme ils étaient aux premières huîtres' 입니다.  이걸 영어로 번역하자면 'as they were at the first oysters' 입니다.  저는 저 aux (à + les = aux), 영어로 at을 '먹고 있을 때'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굴 껍질을 까느라 애를 쓰고 있을 때'라고 봐도 크게 흠은 없을 듯 합니다.  즉, 껍질 속에 살아있는 생굴을 까먹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굴을 까먹기 위해서는 그냥 일반적인 칼을 써도 되지만 끝이 가늘고 짧은 굴까기 전용 칼을 쓰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굴 껍질의 뾰족한 쪽이 경첩이인데, 그 곳을 잘 더듬어 보면 좁은 홈 같은 것이 있으니 거기로 칼 끝을 밀어넣고 껍질의 아래 위를 연결하는 관자 힘줄을 끊고 칼을 비틀어 껍질을 열라는 것이지요.  그러고 난 다음이 아주 중요한데, 굴 껍질에 아주 가볍게 입을 대고 굴을 먹어야 하는데, 굴 껍질 안에 있는 액체도 놓치지 말고 다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굴의 체액은 그냥 바닷물만이 아니라 굴의 피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인데, 그것도 마셔야 제대로 굴을 먹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파상의 단편 소설 '쥴 아저씨' (Mon oncle Jules)에 그런 부분이 아주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문득 아버지는 우아하게 차려 입은 두 숙녀에게 두 신사가 굴을 권하는 장면을 보았다.  누더기를 걸친 늙은 선원 하나가 칼로 굴을 따서 신사들에게 건네주면, 그 신사들이 다시 숙녀들에게 그걸 건넸다.  그 숙녀들은 고운 손수건으로 굴껍데기를 잡고 국물이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입술을 약간 삐죽 내밀어 굴을 아주 우아하게 먹었다.  그리고는 재빠르고 작은 동작으로 국물을 마시고는 껍질을 뱃전 밖으로 던졌다."


문제는 저 '쥴 아저씨' 속의 굴은 항구의 배 위에서 직접 까먹는 것이지만, 레 미제라블 속의 굴은 한참 내륙인 파리 시내에서 까먹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대체 냉장고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파리까지 생굴을 날랐을까요 ? 





2) 어촌에서 파리까지 생굴 운송이 가능했나 ?


레미제라블 시대는 아직 철도가 프랑스 전역에 상용화되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따라서 파리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 어촌이라고 할 수 있는 디에프(Dieppe)까지의 거리인 170km를 마차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당시 마차가 사람이 걷는 것보다 빠르다고 해도, 기껏해야 짐마차인데 사람보다 2배 이상 빨랐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즉, 시속 8km 정도가 한계였을텐데, 쉬지 않고 달려도 26시간, 하루에 8시간씩 달린다고 해도 3일 이상 가야 하는 거리였습니다.  게다가 어선에서 굴을 하역하고 분류해서 마차에 싣는 것에도 시간이 걸릴 것이고, 또 파리 시장에서 하역하고 판매해서 식당에 가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니, 아무리 빨리 먹는다고 해도 레글과 조이가 먹었던 굴은 바닷물에서 건져진 지 최소 5일, 아마 7일은 지난 것이었을 것입니다.  얼음도 없던 시절, 이게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


가능했습니다 !  구글링을 해보니 대합이나 홍합은 빨리 죽어 쉽게 상해버리지만 의외로 굴은 물 밖에 나온 뒤에도 꽤 오래, 심지어 시원한 곳에서 습기만 잘 유지해주면 2~3주 동안이라도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껍질은 안 깐 상태에서의 이야기이지요.   현대 미국에서도 굴은 기차 등으로 장거리 수송할 때 얼음을 쓰지 않고 그냥 물에 적신 신문지로 덮어서 층층이 상자에 넣어 수송한다고 합니다.  얼음을 쓸 경우 수돗물을 얼려 만든 얼음이 녹으면서 흘러 들어가는 물 속의 염소 때문에 굴이 죽는다는 거에요.  아직 비행기나 고속 열차 등이 발명되기 훨씬 전인 19세기 후반에도 이런 식으로 해서 미국 동부 해안 체셔피크 만에서 잡은 굴을 증기 기관차를 통해 미국 중서부 콜로라도 주의 덴버까지도 운반했다고 하네요.


실제로 19세기 후반에 포르투갈로부터 영국으로 선박을 통해 살아있는 생굴을 대량으로 수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화물선이 증기선이었을지 범선이었을지 불확실한데, 포르투갈 북쪽의 대표적 항구인 오포르토(Oporto)로부터 런던까지의 약 1600km 항로를 시속 16km의 증기선이라고 해도 4일, 평균 시속 9km의 속도를 내는 범선일 경우 거의 7일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항구에서의 통관 절차 및 상하역, 판매를 위한 대기 시간 등을 고려하면 적어도 2주간은 굴이 살아있어야 그런 무역이 이루어졌겠지요.  그런 생굴 무역이 의외의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1868년, 포르투갈산 생굴 60만개를 싣고 영국으로 가던 화물선 르 모를레지엥(Le Morlaisien) 호가 프랑스 지롱드(Gironde) 강 하구에서 폭풍을 만나 대피하고 있었습니다.  폭풍 때문에 발이 묶인 화물선에서는 며칠이 지나자 일부 굴이 죽어 썩기 시작했지요.  화물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하자 남은 굴이라도 건져야겠다고 생각한 선장은 프랑스 보르도(Bordeaux) 지방 당국의 허가를 받고 죽은 굴 상자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중 일부는 살아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자, 기존의 프랑스산 토종 굴 대신 더 생명력이 좋았던 이 포르투갈산 굴이 해안에 크게 번성했는데, 처음에는 프랑스 어부들이 외래종이라고 이를 매우 싫어했답니다.  그러나 먹어보니 이 포르투갈산 굴이 맛도 좋고 번식력도 좋아서, 1910년대까지 프랑스 굴 산업을 이끄는 주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묘사한 것처럼 레글과 졸리는 마차로 디에프에서 파리까지 1주일 걸려 운송한 굴을 별 거리낌 없이 신선하게 먹을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3) 19세기 전반 당시 굴의 가격은 ?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마리우스는 가난하여 아침은 자기 방에서 빵과 날달걀 1개로 때웁니다.  저녁에 식사할 때도 와인 대신 물을 마시지요.  그 친구인 졸리와 레글은 시골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로 넉넉하게 사는 편입니다.  가난한 친구들이라면 아침을 멀쩡한 자기 집 놔두고 저런 주점에 가서 먹지는 않겠지요.  그렇다고 아침부터 굴을 먹다니요 !  굴 양식이 대량으로 이루어지는 지금도 굴은 비교적 비싼 음식입니다.  특히 생굴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는 오히려 굴이 상대적으로 싼 음식이라고 하고, 유럽에서는 생굴은 매우 비싼 음식이라고 하지요.  레미제라블 시대인 19세기 전반은 과연 어땠을까요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반적으로 비쌌습니다만, 저 1832년 당시에는 조금 쌌을 수도 있습니다.  육지에서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해서 키울 수 있는 곡물과 육류와는 달리, 바다에서 잡아들이는 어패류는 잡는 사람이 임자였으므로 아무런 절제 없이 모든 이들이 마구 남획을 했습니다.  가령 어떤 기록에 보면 대구라는 물고기는 먹성이 좋아서 한마리의 뱃속에서 고등어와 가자미가 너댓 마리, 게와 조개가 수십 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게 상상이 가십니까 ?  대구가 비록 큰 물고기이긴 하지만 그렇게 크진 않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렇게 컸다고 합니다.  인간이 바다에서 원양 어업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네덜란드 사람들이 북미 뉴펀들랜드 등에서 대구 어장을 발견한 이래 엄청난 남획이 이루어지면서 대구가 완전히 다 자라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요즘 대구가 작아졌을 뿐, 원래는 2m까지도 자라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참조기를 너무 많이 잡아서 지금은 어장이 사실상 황폐화되어 버렸지만, 과거 전라도 해안 지방에는 번식기가 되면 참조기들이 바다 속에서 우는 소리에 잠을 설칠 정도로 고기가 많았다고 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굴도 딱 그랬습니다.  굴은 일라이드(Illiad)에서 파트로클루스가 언급할 정도로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사람이 즐겨 먹던 조개류입니다.  게다가 한번 바위 등에 달라 붙으면 전혀 이동하지 않고 평생을 거기서 지내는 생물이지요.  그러다보니 남획되기 딱 좋았고, 실제로 씨가 마를 정도로 남획되었습니다.  그런 남획에 일조를 한 것이 프랑스 부르봉 왕가였습니다.  이들은 굴을 아주 좋아해서 많이 먹었고, 특히 지금도 질이 좋기로 유명한 컹칼(Cancale) 지방의 굴을 즐겨 찾았습니다.  그러나 덕분에 18세기 초 프랑스부터는 굴을 구경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급기야 1760년대에는 심지어 베르사이유에서조차 캉칼 굴을 구하기가 어렵게 되어 귀족들도 남획의 폐해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부족해지면 비싸집니다.  굴 가격은 엄청나게 뛰었을 것입니다.




(지도 왼쪽에 붉은 표식이 있는 지점이 컹칼입니다.  파리에서 꽤 머네요.)



그 결과, 여태까지는 아무런 법규가 없던 굴 채집에 규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1759년, 굴이 알을 낳는 시기인 여름철을 낀 6개월, 즉 4월 말부터 10월 말까지는 굴의 채집을 금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어져서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R-달, 즉 영어 이름에 R이 들어가지 않는 달에는 굴을 먹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뒤에서 더 이야기하겠습니다만) 굴은 배란기에 독성을 띠므로 굴을 먹지 않는 것이 좋긴 한데, 그보다는 '이런 식으로 잡아 먹으면 굴 씨가 마르겠다'라는 절박함이 저렇게 '굴을 먹으면 안되는 달'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굴 관련 기사들을 찾다보니 나폴레옹이 굴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전투에 임하기 전에 항상 생굴을 후루룩 까먹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건 잘못된 이야기 같습니다.  나폴레옹의 식습관을 묘사한 비서들, 즉 부리엔이나 콩스탕의 회고록에 나폴레옹이 굴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 전술 특성상 기동전을 펼치다보니 전투 직전에는 항상 식량 부족에 시달려서 나폴레옹 본인도 감자 한 알도 제대로 못 먹고 전투에 임하는 일이 많았는데 내륙인 아우스테를리츠나 예나 등지에서 생굴을 까먹었다 ?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나폴레옹이 굴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는 나폴레옹 본인이 아니라 그 조카인 나폴레옹 3세 때문에 비롯된 이야기 같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유별나게 굴을 좋아했다고 하며, 심지어 보불 전쟁에 패해 폐위되어 영국으로 망명한 뒤에도 굴을, 그것도 가급적 프랑스산 굴을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저 먹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나폴레옹 1세와 3세는 둘 다 프랑스 굴 산업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바가 큽니다.  삼촌인 나폴레옹 1세가 잦은 전쟁과 과도한 징집으로 어촌에 남자 씨를 말려버린 결과 굴을 채집할 사람이 부족해졌고, 덕분에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에는 프랑스 해안에 굴이 어느 정도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의 레글과 졸리도 아침부터 굴을 주문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1830년대 들어 다시 남획이 시작되면서 굴의 씨가 또 마르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이 좋아하는 굴을 좀더 싸게 많이 먹기 위해 당시 유명한 생물학 교수였던  코스트(Jean Jacques Marie Cyprien Victor Coste)를 불러 굴 양식 방안을 모색하게 했고, 그 연구비를 지원했습니다.  그 결과 코스트는 현대적 굴 양식의 아버지로 우뚝 서게 되었으니, 나폴레옹 3세도 프랑스 역사에 긍정적으로 남긴 것이 오페라 가르니에 외에도 또 있긴 한 셈입니다.



(근대 굴 양식의 아버지 빅토르 코스트입니다.)




한편,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상대적으로 굴 열풍이 늦게 부는 바람에, 19세기 후반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굴을 많이들 먹었다고 합니다.  1842년 미국 뉴욕을 방문한 영국의 문호 찰스 디킨즈는 거리 곳곳에 가장 흔한 길거리 음식으로 생굴을 파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대략 12가구 당 하나 꼴로 굴 가판대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어서, 뉴욕 시민들은 정말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주 거리로 나가 생굴을 까먹었습니다.  특히 한밤중에 출출한 사람들이 즐겨찾는 야식으로 인기가 있었다고 하네요.  한밤 중에 차가운 굴이라 !  저도 굴은 좋아합니다만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륙인 시카고의 풀턴 시장에도 굴 가판대가 성행했답니다.)



  

4) 분명히 6월인데 굴을 먹을 수 있나 ?


자,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1832년 6월 봉기는 분명 6월 5일에 시작되었고, 소설 본문에도 레글과 졸리가 굴을 주문한 날이 6월 5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히 6월은 R이 안 들어가는 달입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프랑스어로도 R이 안 들어가는 달은 영어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6월에 생굴을 먹을 수 있었을까요 ?  빅토르 위고가 글을 쓰다보니 실수한 것일까요 ?


불어     영어

janvier     January

février     February

mars     March

avril     April

mai     May

juin     June

juillet     July

août     August

septembre     September

octobre        October

novembre       November

décembre       December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빅토르 위고가 실수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산란기에는 굴에 독성이 생기므로 R이 안 들어가는 이름의 달에는 굴을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은 사실 근거가 모호한 말이라고 합니다.  단지 산란기에 굴은 살이 빠지고 마르므로 먹기에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여름철에는 바닷물의 수온이 올라 적조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고, 그 때문에 그 물 속에서 사는 굴에도 사람에게 병을 일으킬 수 있는 병균이 붙어있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도 사실이고요.  또 무엇보다 생굴을 먹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여름철에는 세균 번식이 더 왕성하게 잘 되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저 'R이 없는 달에는 굴을 먹으면 안 된다'라는 전설은 굴의 독 보다는 굴의 생육과 번식을 보호하려는 법령에서 비롯된 바가 더 크다고 합니다.  가령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각 지방마다 다릅니다만) 원래 금지령은 4월 말부터 10월 말까지였습니다.  9월이나 10월에는 R이 들어가는데도 먹지 말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누군가 머리 좋은 공무원이 '그냥 R이 안 들어간 달에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 기억에 오래 남겠다'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홍보를 한 모양입니다.


특히 저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32년에는 굴 보호를 위해 4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굴을 잡지 말라는 규제의 감독과 집행이 느슨해진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레글과 졸리가 비교적 싼 가격에 굴을 먹었나 봅니다.  결과적으로 빅토르 위고의 위대함에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Source : 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작

쥴 아저씨, 모파상 작

http://www.telegraph.co.uk/food-and-drink/features/why-we-need-to-celebrate-british-native-oysters/

https://www.pinterest.co.kr/pin/106045766202394053/

https://www.theguardian.com/lifeandstyle/2011/sep/07/guide-to-eating-oysters

https://www.chowhound.com/post/raw-oysters-long-die-504718

https://ephemeralnewyork.wordpress.com/2017/01/05/everyone-in-19th-century-new-york-loved-oysters/

http://www.oysters.us/history1-usa.html

http://blog.michaelscateringsb.com/cooking_on_the_american_r/2009/12/charles-dickens-on-oysters.html

https://www.thekitchn.com/myth-busting-what-time-of-year-is-it-safe-to-eat-oysters-22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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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occhi 2017.12.27 1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소에도 재미있지만 오늘은 더욱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2. 유애경 2017.12.27 19: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나폴레옹이 굴을 아주 좋아 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나폴레옹이나 카사노바나 남성을 튼튼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굴을 즐겨 먹었었다고 책에서 읽은적이 있거든요.
    개인적으로 저도 생굴은 참 좋아합니다.
    굴은 역시 날로 먹어야 제일 맛있는것 같아요!(개인적인 취향입니다)
    R이 들어가는 달에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도 독성 보다는 보호차원 이라는 또다른 사정이 있었군요! ^_^
    여러가지 배우고 갑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3. nasica 2017.12.27 2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체호프의 '굴'이라는 작품은 아래 URL에서 잘 번역된 것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Yz8sdODDOqcC&pg=PT6&lpg=PT6&dq=%EC%B2%B4%ED%98%B8%ED%94%84+%EA%B5%B4&source=bl&ots=OYVgqFoJMm&sig=3XBvC1kTBQInAneL-NTSkHfeNNA&hl=ko&sa=X&ved=0ahUKEwjo_JPylqrYAhVILpQKHct8AZIQ6AEIUzAJ#v=onepage&q&f=false

  4. ㅎㅎ 2017.12.28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외국요리사가 한국 수산시장에 들렀다가 아지매들이 귀한 생굴을 산처럼 쌓아놓고 반은 까서 담고 반은 까서 먹는걸 보고 기겁했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자기들 나라에선 몇십만원어치를 그냥ㅎㅎ

  5. durandal 2017.12.30 09: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곳곳에 포장마차가 많던 시절. 겨울 야근 마치고 지하철 내리면 역 입구에 큰 석화를 쌓아놓고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습니다.
    의자도 없이 다들 서서 간단히 소주랑 한두개 먹는 분위기(그땐 잔술도 팔던 시절이었죠)가격은 기억 안나는데 소주 반병에 굴 네다섯개 먹어도 큰 부담은 없었네요.
    유난히 추운 이번해 12월 그때 먹던 굴이 생각나네요. 굴은 뭐니뭐니해도 겨울에 먹어야 제맛이죠.

2012년, 휴 잭맨 주연의 레미제라블 영화 중에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를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입니다.  은접시에 퍼주는 음식을 굶주린 장발장이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대체 저 음식이 무엇인지가 궁금했습니다.  화면을 보면 뭔가 고기도 좀 들어있는데 말입니다. 





그 음식이 당연히 원작 소설에 나오는 내용 그대로는 아닙니다만, 어떤 음식이 나왔는지는 원작 소설에 묘사가 되긴합니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할 때 가정부 할머니인 마글루아 부인이 내놓는 미리엘 주교의 평범한 저녁 식사 메뉴가 나열됩니다.


Cependant madame Magloire avait servi le souper. Une soupe faite avec de l'eau, de l'huile, du pain et du sel, un peu de lard, un morceau de viande de mouton, des figues, un fromage frais, et un gros pain de seigle. Elle avait d'elle-même ajouté à l'ordinaire de M. l'évêque une bouteille de vieux vin de Mauves.


그러는 동안 마글루아 부인은 저녁을 차렸다.  물에 기름, 빵과 소금을 넣고 만든 수프, 돼지비계 조금, 양고기 한조각, 무화과, 생치즈, 그리고 큰 호밀 빵 한 덩어리였다.  마글루아 부인은 주교의 그런 평상시 식사에 모브 와인 한병을 보탰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프랑스에서 주교는 매우 높은 직책이고, 또 상당히 고액 연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미리엘 주교는 거의 대부분의 급료를 빈민구제에 써버리고, 정작 본인은 무척 소박한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기 때문에 저런 음식을 먹었던 것이지요.  저 소박한 음식 중에 특히 저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저 수프였습니다.  빵과 기름과 소금과 물만으로 만든 수프라니 ?  그게 무슨 괴이한 음식이란 말입니까 ?


그런데 그 빵 수프를 연상시키는 이야기가 레미제라블 속 장면보다 약 10년 전인 1809년, 나폴레옹 관련 기록에도 나옵니다.  1809년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점령한 뒤 그는 휘하 병사들 중 상당수를 비엔나 시내에 주둔시킵니다.  통상 이런 경우 병사들은 민간인들의 가정 주택에서 먹고 잤습니다.  그렇다고 병사들이 산적처럼 마음대로 아무 집에나 쳐들어간 것은 아니고, 병참 장교가 미리 조사한 결과에 따라 주택의 크기와 가정 형편, 그리고 그 집 가장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어떤 집은 3~4명, 어떤 집은 10여명 씩 배정되었습니다.  이 점령군 병사들이 점잖은 비엔나 중산층 시민의 가정에서 깽판을 쳤을까요 ?  그런 일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럴 일은 없었습니다.  귀족이나 부유한 중산층 시민의 저택은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고 또 그런 집에는 장교들이 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비엔나 시민들도 대부분은 서민이었고, 그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사회적 계급 출신인 프랑스 병사들을 먹이고 재웠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런 병사들과 피점령 시민들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비엔나식 돈가쓰인 슈니첼입니다.  드셔본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냥 우리나라 돈까스가 더 맛있다고...)



문제는 비엔나 시민들이 병사들에게 뭘 먹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잣집에 할당된 병사들은 유명한 비엔나식 돈까스(Wiener Schnitzel)와 맥주를 대접받고 가난한 집에 할당된 병사들은 말라비틀어진 빵과 물을 먹어야 했을까요 ?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현지 조달의 달인이라고 불리는데는 다 이유가 있고, 달인은 일을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병참부는 배고픈 병사들을 떠맡은 비엔나 시민들에게 '적어도 1인당 이 정도씩을 먹여야 한다'라고 의무 배식량을 정해서 통보했습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빵 1.33 파운드 그리고 추가로 수프에 넣을 빵 0.33 파운드

고기 1 파운드

쌀 0.125 파운드 (2 온스)

말린 채소 0.25 파운드 (4 온스)



여기서 눈에 확 띄는 부분이 바로 저 매일 먹을 빵 1.33 파운드 이외에 추가로 수프에 넣을 빵 0.33 파운드라는 부분입니다.  그냥 먹는 빵과 수프에 넣을 빵이 따로 있었을까요 ?  그리고 저 말린 채소라는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요 ?  게다가 비엔나에서 쌀을 요구했다고요 ?  그것도 고작 2온스, 즉 56그램 정도의 쌀로 뭘 해먹었을까요 ?  요즘 한국인들이 먹는 쌀밥 1공기를 짓기 위해 들어가는 쌀이 약 90그램인데, 한공기도 안되는 쌀인데 말입니다.  


저기서 말린 채소라는 것이 사실은 말린 콩을 뜻한다는 것을 아시면 대략 견적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냥 먹는 빵을 제외한 저 모든 재료는 결국 끓는 물 속에 들어가 뭔가 걸죽한 스튜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전에 올렸던 포스팅에서, 쿠아녜(Coignet)의 회고록 중 일부를 다시 보시면 좀더 분명해질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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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에서 일하던 소년인 쿠아녜는 징집 명령을 받고 입대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나는 작은 꾸러미를 겨드랑이 밑에 끼고 출발하여, 첫번째 군사 주둔지인 로조이(Rozoy)에 도착하여 밤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숙사 할당 명령서(ordre de cantonnement)를 받아다 집 주인에게 제시했는데, 집 주인은 날 본 척 만 척 하며 홀대했다.  그러고 난 뒤 난 뭔가 스튜를 만들 재료를 사러 밖에 나갔고, 푸주간에서 고기를 받았다.  내 손바닥 위에 올려진 고기 조각을 보니 몹시 처량했다.  그것을 들고와서 내 숙사로 정해진 집의 안주인에게 주며 스튜를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한 뒤, 스튜에 넣을 채소거리를 구하러 다시 밖으로 나왔다.  마침내 약간의 스튜가 만들어졌고, 그때 즈음에는 그 집 주인 식구들도 나를 어느 정도 좋게 봐주어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여보려고 했다.  하지만 난 그들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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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에서 보면, 고기는 분명히 돈을 내고 사왔는데, 양배추나 당근 등 채소류는 돈을 내고 사왔다는 것인지 밭에서 그냥 뽑아왔다는 것인지 불분명합니다.  로마 시대부터,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배급 식량 목록에는 빵과 밀가루, 와인과 식초는 기록되어도 배추나 양파 등 진짜 채소는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이유는 그런 부식거리는 그냥 '구하는' 것이지 주요 보급품 목록에 넣을 정도로 중요 물품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있으면 넣고 없으면 말고 식이었지요.  또 당시 사람들은 채소를 그다지 많이 먹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전에 회사 교육 문제로 유쾌한 멕시코 친구 2명을 만나서 며칠간 잡담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 이야기가 멕시코는 원래부터 가난한 나라여서, 어디서 친구가 방문하러 오겠다는 전화가 오면 저녁을 만들던 와이프에게 이렇게 말을 하곤 했다고 반농담반진담으로 이야기를 하더군요.  


"여보, 콩 수프에 물을 더 부어야겠는걸 ?"


이렇게, 원래 수프라는 것은 적은 재료로 여럿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요리입니다.  게다가 솥 하나만 있으면 여럿을 위한 요리도 적은 연료로 쉽고 빨리 할 수 있었으므로 그야말로 군대를 위한 요리였지요.  그렇게 배고픈 사람들을 위한 요리가 콩소메(consommé)처럼 멀건 국물이라면 무척 실망스러웠겠지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나 병사들은 국물을 뻑뻑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가지 부재료를 넣었습니다.  있기만 하다면 하얀 밀가루가 제일 좋았겠지만 밀가루는 빵을 만들기에도 부족한 것이었고, 쌀이 가장 좋은 재료였습니다.   




(콩소메입니다.  요즘 고급 식당의 요리사들은 저런 콩소메의 국물을 맑게 하려고 계란 흰자를 쓰는 등 갖은 노력을 한다고 합니다.  정작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질색을 했겠지요.)



쌀은 국물을 잘 흡수하여 그 자체로도 맛이 풍부한 건데기가 될 뿐만 아니라, 전분을 국물에 풀어내어 국물을 진하게 만들어줬거든요.  지금도 치킨 수프 등에는 짧은 국수를 넣기도 하지만 쌀을 넣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삼계탕이 해외에 소개될 때는 스튜가 아니라 chicken soup으로 소개되는데, 닭과 쌀이 든 국물 요리이다보니 서양의 치킨 수프와 동일시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들식의 간단한 chicken soup인줄 알고 삼계탕을 시켰다가 닭 한마리가 통째로 들어간 요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는 외국인들도 있다고 합니다.  





(Chicken soup with rice는 이런 거...)




원래 유럽에서 쌀을 가장 많이 먹는 지역이 스페인과 함께 북부 이탈리아 지역이지요.  덕분에 남부 프랑스에서도 쌀 요리를 꽤 먹었다는데, 아마 비엔나도 북부 이탈리아에서 멀지 않았으므로 쌀을 쉽게 구할 수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굶주린 병사들을 맞이한 비엔나 시민들에게 '쌀을 내놓으라'는 명령이 떨어졌겠지요.  


하지만 쌀은 유럽 전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곡물은 아니었습니다.  쌀이 없을 때 대용으로 사용되던 것이 바로 오래되어 딱딱해진 빵이었습니다.  당시 빵은 버터나 쇼트닝이 들어가지 않은, 갓 구운 상태에서도 꽤 딱딱한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구운지 2~3주가 지나거나 잘라 먹다 껍질부분이 남은 빵조각 남은 것들은 정말 딱딱했을 겁니다.  레미제라블 후반부에, 마리우스의 하숙방에서 노닥거리던 에포닌이 방을 나가면서 마리우스의 찬장에 놓여있던 마른 빵조각을 허락도 받지 않고 냉큼 입에 넣고 씹다가 너무 딱딱해서 이빨이 부러졌다고 투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꼭 과장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2012년 영화 속에 나온 에포닌은 아주 건강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레미제라블 원작 소설 속의 에포닌은 어린 나이에 이빨도 한두 개 빠진, 정말 헐벗고 병약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게 훨씬 더 현실적인 이야기지요.)




그렇게 마르고 굳은 오래된 빵을 그나마 잘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수프에 넣어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빵 수프 요리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발달했습니다. 리볼리타(Ribollita)라든가 아콰코타(Acquacotta) 등이 모두 빵을 넣고 끓인 수프 요리이며, 하나같이 가난한 농부들이 먹던 음식이었습니다.  





(아콰코타입니다.  이탈리아식 빵 수프입니다.)



마른 빵보다 더 나쁜 것이 원양 항해나 군대에서 많이 먹던 비스킷, 즉 건빵이었습니다.  비스킷을 부수기 위해 돌로 내리치면 가끔씩 비스킷 대신 돌이 부서졌다는 그 공포의 비스킷으로도 수프를 만들어 먹었을까요 ?  예, 그렇게 많이 먹었습니다.  버구(burgoo)라는 것은 염장쇠고기와 잘게 부순 비스킷으로 만든 대표적인 영국 해군 요리(?)입니다.  그나마 부유한 함장인 잭 오브리(Jack Aubrey)를 주인공으로 한 Aubrey & Maturin 시리즈에서는 이 버구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가난뱅이 함장이 주인공인 Hornblower 시리즈에서는 수병들 뿐만 아니라 함장실에서 혼블로워가 혼자 앉아 버구를 먹고 있는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결국 미리엘 주교가 먹던 저 빵 수프라는 것은 결코 주교님이 드실 만한 음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소설 원작에서도 장발장이 '동네 짐마차꾼들이 이거보다는 더 잘 먹는다'라고 말할 정도지요.  미리엘 주교는 '그 사람들 일이 더 힘드니까요'라고 웃으며 말하는데, 장발장은 눈치도 없이 '그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돈이 더 많은 것 같은데요' 라고 팩트 폭력을 행사하지요.


이 빵 수프 이야기는 나폴레옹 이야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1809년 7월 7일 밤, 바그람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하고 지친 나폴레옹은 사령부로 마련한 농가 앞 짚단 위에 앉아 졸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장면은 당대 어느 유럽 군대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만, 당시 프랑스 군대에서는 종종 벌어지던 일이고, 그것이 바로 나폴레옹의 군대를 강군으로 만들었던 문화이기도 했습니다.  그 앞을 지나가던 어느 유격병(voltigeur) 상병 하나가 황제가 그렇게 지쳐 떨어진 것을 보고는 아무의 제재도 받지 않고 감히 말을 걸었습니다.  


"폐하, 우리가 끓인 수프라도 좀 드시겠습니까 ?"


그러자 잠에서 깬 나폴레옹도 짜증내지도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물었지요.  "잘 익었나 ?"


이 상병은 나폴레옹을 자기와 그 동료들이 끓여놓은 수프 남비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거기에는 잘게 부순 마른 빵조각(crouton)까지 넣어 아주 걸죽한 수프가 은으로 된 작은 단지에서 끓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걸 보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대체 어디서 흰빵과 은단지를 구했나 ?  훔쳤나 ?"


그때 나폴레옹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서 까딱 잘못하면 그 상병은 약탈죄로 즉결처분에 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병은 아주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빵은 의무 마차에서 샀고, 은단지는 어느 죽은 장교의 몸에서 찾은 겁니다."


나폴레옹은 그 죽은 장교가 프랑스군이었는지 오스트리아군이었는지 묻지 않았고, 그렇게 나폴레옹과 상병 및 그 동료들은 고된 하루 끝에 든든한 저녁을 함께 즐겼다고 합니다.  





(보통 시저스 샐러드에 딸려 나오는 사각형 튀긴 빵조각을 크루통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원래 croûton이라는 단어의 뜻은 긴 빵의 껍질이 많은 양쪽 끝부분 또는 굳은 빵조각을 뜻하는 것입니다.) 




Source : Napoleon Conquers Austria: The 1809 Campaign for Vienna By James R. Arnold

Les cahiers du capitaine Coignet by Jean-Roch Coignet

Les Miserables by Victor Hugo

https://en.wikipedia.org/wiki/Acquacotta

https://en.wikipedia.org/wiki/Riboll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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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암 2017.10.29 18: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 님의 글을 처음 접한 계기가 장발장이 감옥에 갈만 했네란 글 때문이었죠^^
    군사와 음식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글에 감탄하며 하트 날립니다~

  2. 뱀장수 2017.10.29 23: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역시 주말엔 음식얘기가 머릿속에 잘 들어오네요^^

  3. Seek 2017.10.30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들게 일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일용할 양식을 위한것이라고 생각하면 이런음식 이야기가 가볍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4. 유애경 2017.10.30 14: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뜬금없는 얘기지만,보기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데 돈까스나 빵스프나 뭔가 비쥬얼이 별로네요(죄송&웃음)!

  5. 까까님 2017.10.31 07: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로 치면 밥짓고 나오는 누룽지를 끓여먹는 정도에 해당되겠군요
    근데 주교님 상차림이. . . 저건 요리가 아니라 그냥 모아 담은 거 아닌가요?
    '무화과랑 치즈로 어떻게 양념해서 만든 양고기 요리' 가 아니라 그냥 각각을 늘어놓은 건데
    비교하자면 불고기를 해먹는 게 아니라 그냥 간장 발라 구운 고기 옆에 양파 당근 등등 채소를 늘어놓고 다진 마늘 같은 거 발라서 먹는 식이잖습니까
    같은 재료로 왜 저렇게 먹는지 궁금하더라구요
    고급진 분들은 또 달랐겠지만 양념이란 개념이 희박한 이유가 가끔 궁금하더라구요
    나시카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여쭙고싶습니다

    • nasica 2017.10.31 1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서양식 요리의 특성이 원래 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긴 합니다만,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관련 포스팅을 올려보겠습니다.

  6. 수비니우스 2017.10.31 1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의 나폴레옹 이야기는 진짜 쇼킹하네요. 우리나라는 해방과 함께 민주주의가 도입되고 70년이 지나서야 21세기에 힘든 시간 끝에 조금씩 정착되고 있는 문화가 19세기 초반 프랑스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니...

  7. ㅂㄷㄱ 2017.10.31 1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본적으로 그런 병사들과 피점령 시민들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병사들 손에 총이 들려 있는데 나쁘게 대할 리 없겠죠.

  8. 별의 여행 2017.11.17 15: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크루똥은 워낙에 오래된 빵을 썰어 말린 것 때에 따라서는 그걸 튀겨 낸 것이지요. 오래된 빵을 잘 활용하는 것 뿐 아니라 실제로도 쫄깃하거나 아삭하니 씹을 거리를 제공해 줘서 좋더라고요. 그리고 비너슈니첼은 실제로 한국돈가스보다 맛있습니다.
    튀김옷 반죽이 다르고요. 여기에 베리류잼을 살짝 묻혀 먹으면 아주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