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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13

바이에른의 배신 (1) - 고래 싸움에 터지는 새우 등 러시아 원정에서 참패한 뒤 1813년 수세에 몰린 나폴레옹이 오히려 공세로 나아가 작센으로 진출한 이유는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의 침공을 받는 최전선이었던 작센의 이탈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정작 나폴레옹의 등에 가장 먼저 칼을 꽂은 것은 가장 친불적인 성향을 보이던 바이에른 왕국이었습니다.  작센에 비하면 전선 저 멀리 후방에 있던 바이에른은 대체 왜 가장 먼저 나폴레옹을 배신했을까요?  실은 그걸 이해하려면 엄연히 독일권 공국이었던 바이에른은 애초에 왜 가장 친불적인 성향을 보였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1812년 당시의 라인연방 지도입니다.  바이에른 왕국이 Königreich Bayern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보시다시피 프로이센과는 아니지만 오스트리아와는 그대로 국경을 접하고 .. 2024. 8. 12.
덴너비츠 전투 (3) - 남자가 한을 품으면 잔나(Zahna)를 지나 위터보그(Jüterbog)로 가는 길은 작센과 브란덴부르크 즉 프로이센의 국경 지대였는데, 이 일대는 그야말로 평야 지대로서 간간히 나타나는 낮은 언덕, 시냇물과 습지 외에는 거의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습니다.  원래 군대가 행군할 때는 소규모 정찰대를 앞세워 지형과 함께 적의 출현을 경계하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찰대로 쓰라고 존재하는 것이 바로 기병대였습니다.  그런데 위터보그를 향해 진격하던 네의 베를린 방면군은 희한하게도 그런 정찰기병대를 두지 않고 행군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이유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아마 당시 공포의 대상이었던 코삭 기병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소규모 기병대를 앞세웠다가 혹시라도 코삭들과 마주치.. 2024. 7. 22.
새로운 전쟁의 준비 (5) - 러시아군의 상황 지난 편에서 프로이센군의 상황을 대충 보셨습니다만, 러시아군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국가는 덩치가 깡패라고, 러시아는 대국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러시아군은 나폴레옹의 침공이 시작된 1812년 8월부터 1813년 8월까지의 1년 동안 대략 65만 명을 징집했습니다. 당시 러시아 인구가 대략 3천만이었으니 전체 인구의 거의 2.2%에 해당하는 엄청난 비율이었습니다. 덕분에 휴전 기간 중 러시아군은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수준의 병력 보충과 보급품, 그리고 장비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러시아군이 충분한 병력과 장비를 갖추지 못한 것은 본국 러시아와의 거리 때문이었지 본국의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었거든요. 휴전 직전만 하더라도 바클레이는 탄약이 부족.. 2023. 11. 13.
새로운 전쟁의 준비 (3) - 국민방위군(Landwehr)의 실상 여기서 잠깐, 국민방위군이란 정규군에 징집될 청년보다는 나이가 좀 더 많지만 중산층의 시민들이 자비로 무기와 군복을 마련하여 자발적으로 편성된 부대라고 하지 않았나요? 원래는 그랬습니다만 그건 평화시에 향토 방위 임무나 주어질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애초에 프로이센에 자비로 무기와 군복을 마련할 정도의 중산층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지만, 이제 머나먼 타향으로 떠나 무시무시한 나폴레옹군의 총검 앞에 총알받이로 뛰어들어야 할 판국인데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 하고 자원하는 중산층의 중년 남자가 많을 리도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편성된 국민방위군은 자원병도 아니었고 중산층도 아니었으며, 자비로 마련한 군복과 무기도 없었습니다. 현실의 이들은 그냥 누더기 같은 작업복을 입고 손에는 보병용 창을 든 .. 2023. 10. 30.
진격의 러시아, 뒤쳐진 프로이센 - 갈등의 작은 시작 당시 연합군의 최고 권력자는 당연히 짜르 알렉산드르였습니다. 그리고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을 다 통틀어서 최고의 브레인은 바로 샤른호스트였습니다. 적어도 알렉산드르가 볼 때는 그랬습니다. 누가 봐도 멍게, 즉 멍청하고 게으른 성향의 지휘관인 쿠투조프에게 질렸던 알렉산드르는 샤른호스트와 만나서 이야기해본 뒤 그의 성실과 명석, 치밀한 논리에 홀딱 넘어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 대한 칭송을 늘어 놓았습니다. 평민 출신의 직업 군인 주제에, 군무에 필요하다 싶으면 가끔씩 국왕을 무시하는 듯한 행동까지 서슴치 않는 샤른호스트에 대해 내심 벼르고 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감히 샤른호스트를 어쩌지 못한 것은 사실 알렉산드르의 그런 호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나.. 2022. 6. 6.
지도와 공약(空約) - 프로이센 장교들의 이탈 안실리온(Friedrich Ancillon)의 조언은 꽤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국적에 상관없이 귀족이나 신사라면 모두가 프랑스어를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당대의 지식인답게, 야만스러운 러시아보다는 문명국인 프랑스 친화적인 노선을 취하기를 권고하며 러시아 장군들의 무능력 등을 비난하기도 하고, 스페인 민중과는 달리 프로이센 국민들에게는 종교적인 광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스페인식 민중 투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등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도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그럴싸한 이유도 내놓았습니다. 바로 러시아와 프랑스의 지리적 위치였습니다. 기동력이 좋은 군대를 가진 프랑스는 바로 지척에 있는데 러시아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었지요. 또한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는 전투에서 승리해도 유럽 .. 2022. 3. 28.
1813년, 러시아군을 맞이하는 나폴레옹의 마스터 플랜 병력과 물자, 그리고 돈 문제를 해결한 나폴레옹은 이제 구체적인 작전 방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이건 나폴레옹과 같은 군사 천재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빌나와 폴란드를 거쳐 후퇴하면서 이미 모든 전략을 머릿 속에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813년, 폴란드를 거쳐 독일을 침공해올 러시아군을 상대하기 전에, 먼저 과거 나폴레옹이 주로 어떤 전략을 써서 적군을 요리했는지 살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1807년 예나-아우어슈테트, 1809년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를 보면 대충 나폴레옹의 수법을 예측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보시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점이 3가지 있습니다. 1) 최선의 방어는 공격 모든 경우에 있어 천만뜻밖에도, 나폴레옹은 먼저 전쟁을 시작.. 2022. 3. 14.
연쇄 반응 - 타우로겐 조약 개전 초기부터 막도날은 약 3만 규모의 제10 군단을 이끌고 오늘날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Riga) 방면을 포위 공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2월 초, 그랑다르메 본진이 빌나를 넘어 네만 강 너머로 철수하고 있다면 이제 리가 함락이 문제가 아니라 퇴로가 끊길 것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후퇴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의 제10 군단 중 절반은 요크(Ludwig Yorck von Wartenburg) 장군의 프로이센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한 것입니다.  막도날의 참모들은 프로이센놈들이 배신하려 한다며 불안해 했습니다.  막도날도 처음부터 높지 않았던 프로이센군의 열의가 요즘 확연히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긍지.. 2022. 1. 10.
전쟁의 끝은 어디인가? - 러시아의 고민과 해결책 코브노의 다리를 건너 네만 강을 건넌 그랑다르메의 장병들은 이제 살았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야말로 최후방을 지키며 직접 러시아군에게 마지막 머스켓 소총을 쏜 뒤 그 소총을 강바닥에 집어던진 뒤 돌아선 네 원수의 행동도, 이제 전쟁은 끝났으며 러시아군의 추격은 여기까지라는 철석같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유있는 발걸음으로 쾨니히스베르크를 향하던 그랑다르메 병사들은 코삭 기병들이 얼어붙은 네만 강을 대규모로 건너 추격해오자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코삭들은 국경에 대한 개념도 없고 존중할 의사도 없었거든요. 그들은 그저 저항할 수 없는 패잔병들을 습격해서 노략질을 하고 포로를 잡을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 정규군이 대거 침공하는 것도 아니었.. 2022. 1. 3.
1812년 - 누구 편에 붙어야 하나 (상) 이제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유럽 각국은 이 세기의 대결을 놓고 어느 편에 붙을 것인지 판단하느라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면 굳이 힘센 제국들끼리 싸움질을 하는데 굳이 다른 나라들이 꼭 끼어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나쁜 평화가 가장 좋은 전쟁보다 더 낫다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분들이 많겠지만, 그건 편하게 후방에서 입으로 떠들 때나 통하는 거부감입니다. 당장 바로 옆의 전우들이 내장을 쏟아내며 고꾸라지고 나도 바로 다음 순간 언제든지 팔다리가 끊어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특히 그런 희생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 손자일 경우에는 누구나 어떻게든 당장 휴전 조약을 바라는 법입니다. 물론, 1812년 당시 유럽 각국에서.. 2019. 7. 8.
스톡홀름의 프랑스 왕 (7편) -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 1806년 11월,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다부를 돕지 않았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욕을 먹어야 했던 베르나도트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시 상황이었고, 그야말로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도망치던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기 위해 베르나도트를 포함한 프랑스군은 승리를 만끽할 여유도 없이 강행군을 해야 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군단은 뮈라의 예비 기병대 및 술트의 군단과 함께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장군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고 있었지요. 프랑스군의 맹추격에 퇴로를 끊긴 블뤼허는 11월 5일, 과거 한자 동맹의 주요 항구 도시인 뤼벡(Lübeck)에 입성했습니다. 당시 뤼벡은 프로이센의 영토가 아닌 중립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프로이센의 패잔군 약 1만7천이 성 앞에.. 2018. 8. 6.
달콤한 프로이센 - 설탕과의 전쟁 (2편) 1776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프로이센 왕립 과학 학회(Königlich-Preuß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의 회원이 된 프로이센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의 이름은 아카르트(Franz Karl Achard)였습니다. 이름을 보면 순수 독일인 같지 않다고 느끼실 수 있는데, 제대로 보신 것입니다. 아카르트라는 집안은 원래 프랑스에서는 아샤르라고 발음되던 위그노(Huguenot, 프랑스 내의 개신교도) 집안으로서, 박해를 피해 독일로 이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이렇게 전도 유망한 이공계 인재는 대기업에 입사를 하든 스타트업 기업을 창업하여 주식으로 대박을 터뜨렸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에는 그런 학회 회원이 되었다는 것이 출세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2018. 5.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