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06 01:05

1806년 11월,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다부를 돕지 않았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욕을 먹어야 했던 베르나도트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시 상황이었고, 그야말로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도망치던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기 위해 베르나도트를 포함한 프랑스군은 승리를 만끽할 여유도 없이 강행군을 해야 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군단은 뮈라의 예비 기병대 및 술트의 군단과 함께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장군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고 있었지요.  


프랑스군의 맹추격에 퇴로를 끊긴 블뤼허는 11월 5일, 과거 한자 동맹의 주요 항구 도시인 뤼벡(Lübeck)에 입성했습니다.  당시 뤼벡은 프로이센의 영토가 아닌 중립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프로이센의 패잔군 약 1만7천이 성 앞에 나타나자 입성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블뤼허는 막무가내로 성문을 열고 입성했습니다.  중립이고 나발이고 당장 갈 곳이 없었던 것이지요.  블뤼허는 절대 이 도시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이지는 않겠다는 약속을 하며 도시 의회를 달랬습니다.  이는 사실 말이 안 되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도시에서 프로이센군이 순순히 항복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바닷가에 몰린 프로이센군이 도망칠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블뤼허가 그런 약속을 한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뤼벡 시민들에게서 병사들을 먹일 대량의 술과 음식, 말 사료와 함께 병사들의 밀린 급료를 지불하기 위한 거액의 현금을 순순히 받아내려면 뭔가 약속을 해야 했던 것이지요.  아니나다를까, 당장 다음날 새벽 프랑스군이 뤼벡 앞에 나타나자 블뤼허는 이 도시의 성벽에 의지하여 결사 항전을 선언했습니다.  




(오늘날의 뤼벡시 전경입니다.  덴마크 국경 인근에 있습니다.)



(당시 뤼벡 시의 지도입니다.  강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공격하기가 용이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경악하는 사람들은 뤼벡 시민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뤼벡 시내에는 1천8백의 스웨덴군도 있었던 것입니다.  제4차 대불동맹전쟁에서 전혀 존재감없는 동맹국이었던 스웨덴군은 당시 프로이센군과 함께 하노버 지방의 탈환을 위해 발트해 연안에 와 있었는데, 프로이센이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참패를 당하자 허겁지겁 스웨덴 본국으로 후퇴하던 중이었습니다.  원래 이들은 배편을 구해 스웨덴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10월 31일 중립 도시 뤼벡으로 들어왔던 것인데, 바람 방향이 맞지 않아 출항을 못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생각지도 않게 프로이센군과 프랑스군이 중립을 무시하고 이 도시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겠다고 하니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


뤼벡은 트라베(Trave)라는 강의 만곡부에 위치한 도시였고, 비록 낡았지만 과거에는 꽤 튼튼했던 성벽으로 보호된 도시라서 잘 하면 프랑스군의 공격으로부터 적어도 며칠, 어쩌면 몇 주 정도 버틸 수 있다고 블뤼허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침 6시부터 시작된 실제 전투의 결과는 그 기대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튼튼하다고 믿었던 북문이 베르나도트의 강력한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오후 1시경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전투가 장기화될 것이라고 믿고 사령부인 시내 여관에 머물고 있던 블뤼허는 갑자기 프랑스군이 시내까지 들이닥치자 깜짝 놀라 아들과 함께 간신히 몸을 빼 탈출했으나, 그와 함께 있던 샤른호스트(Gerhard von Scharnhorst) 등 참모진은 고스란히 프랑스군의 포로 신세가 되어야 할 정도로 베르나도트의 공격은 훌륭했습니다.  이 곳에서 대략 병력의 절반 정도만 건져서 도망쳤던 블뤼허도 갈 곳은 없었습니다.  결국 다음날 자존심 강한 블뤼허는 체면을 위해 "빵도 탄약도 다 떨어졌기 때문에 항복한다" 라는 문구를 항복 문서에 집어넣는 것으로 만족하고 베르나도트와 뮈라, 술트에게 항복해야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북해의 괴물'로 재탄생하시게 되는 샤른호스트 장군입니다.  평민 출신으로서 승진과도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나, 나폴레옹에게 탈탈 털린 프로이센이 정신을 차리고 개혁을 하면서 빛을 보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때 포로가 되어 고생한 것도 나름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고 하면 좀 무리수겠지요.)



(뤼벡 시장으로 사용되던 광장에서 벌어진 혈투입니다.  뤼벡 시민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을 것입니다.)




블뤼허는 그렇게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세우고 항복하면 끝이었겠지만, 그의 고집 때문에 정작 불벼락을 맞아야 했던 것은 중립이었던 뤼벡 시민들이었습니다.  당시 전쟁의 불문률에 따르면 항복한 도시에 대해서는 약탈이 일체 허가되지 않았지만 공성전 끝에 성문을 깨뜨리고 탈취한 도시는 적어도 하루 정도는 병사들이 마음껏 약탈할 수 있었습니다.  뤼벡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벌어진 약탈과 강간, 살해 사태의 직접적인 책임은 물론 프랑스군에게 있었지만, 블뤼허도 적어도 일부 책임은 져야 했습니다.  베르나도트를 비롯한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뤼벡이 중립 도시이며, 프랑스군에게 저항한 것은 프로이센군일 뿐 뤼벡 시민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름대로는 미쳐 날뛰는 병사들을 제지하기 위해 노력은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중의 일이긴 하지만 맹장 우디노(Oudinot)도 그렇게 약탈에 광분한 병사들을 제지하다가 병사들에게 살해당할 뻔 한 일이 있었을 정도로, 그런 병사들을 말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장교들도 그냥 적당히 말리는 척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름 신사인 척 하려 노력했던 베르나도트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베르나도트에게 색다른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포로로 잡힌 적군 중에 프로이센군 외에 스웨덴군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웨덴군 1천8백은 원치 않았던 전투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는지 거의 전부가 그대로 항복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들 말고도 프로이센군도 약 4~5천 정도가 포로로 잡혔는데, 이들은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 포로들을 마치 선심쓰는 것처럼 스페인 국왕에게 보내며 '농삿일에 쓰시든 건설 현장에 쓰시든 마음대로 하시라'며 마치 노예처럼 취급할 정도였으니까요.  베르나도트는 그런 양심에 찔리는 살육의 현장에서 만난 이 운 나쁜 외국 군인들을 프로이센군처럼 모질게 대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들을 포로가 아니라 마치 조난 당한 선원들처럼 대해주었고, 특히 그 총지휘관인 뫼르너(Carl Carlsson Mörner) 장군을 비롯한 장교들에게는 상당히 친절하게 마치 손님처럼 대해주었습니다.  오쥬로(Augereau)와 란(Jean Lannes)의 부관으로 일했고 나중에 매우 뛰어난 회고록을 남긴 마르보(Jean Baptiste Antoine Marcellin de Marbot) 장군도 그 회고록에서 '베르나도트는 이 이방인들에게 자신이 가정 교육을 잘 받은 사람으로 보이도록 특별히 애를 썼다'라고 다소 비꼬는 투로 기술한 바 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뤼벡 전투의 상황이 그렇게 다소 양심에 찔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지 이 처음 보는 스웨덴인들, 그것도 꾀죄죄한 포로들로부터 나중에 뭔가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베르나도트는 평생 두 번 다시 이 스웨덴 사람들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처참한 전쟁 범죄가 벌어지던 뤼벡에서 이 별 뜻 없이 행한 작은 선의가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되돌아옵니다.



-- To be continured



** 갑자기 여기서 마태복음 25장 35절 ~ 40절 부분이 생각나네요.  우리 모두 곤경에 처한 이웃에게 도움을 베풉시다.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L%C3%BCbeck

https://en.wikipedia.org/wiki/Carl_Carlsson_M%C3%B6rner

https://en.wikipedia.org/wiki/Gebhard_Leberecht_von_Bl%C3%BCcher

http://kcm.co.kr/bible/kor/Mat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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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애경 2018.08.06 0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태복음의 저 구절이야말로 예수님이 설파하신 사랑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전쟁에 죄없이 휘말려 고통당한 뤼벡시민들도 참 안됐네요!
    전쟁으로 피해보는건 항상 엄한 사람들뿐...

    잘보고 갑니다.

  2. 잡지식 2018.08.06 0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심없는 선행은 이자가 큰 법이외다'
    -파우스트-

  3. TheK2017 2018.08.06 08: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오늘 그 계기가 되는 암시가 열린
    느낌인데 맞겠죠. ^ㅇ^*

  4. Park Sang yeoul 2018.08.06 2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덕분에 잘 보고있습니다!

  5. reinhardt100 2018.08.06 2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뤼허의 총참모장이었던 샤른호르스트에 대해서 흔히들 '아버지가 빈농인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출신으로써 독일영방 소국에서 사병부터 진급하여 장성계급까지 진급한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이건 붉은 프로이센군을 추구했던 동독 국가인민군과 동독정부의 선전 때문입니다. 사실, 샤른호르스트의 아버지는 '융커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소지주급의 부농 출신에다 프로이센군의 고참 하사관으로써 장기 복무까지 했던 지역 유지급이었던 사람'입니다. 왜? 동독군이 붉은 프로이센군을 추구했냐고요? 동독의 영역 상당수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핵심 지역이었던데다가 무엇보다도 서독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통성만을 계승하며 독일제국의 정통성은 모두 포기한다.'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련의 괴뢰 같다는 이미지가 있던 동독으로써는 프로이센에 대한 향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이러다보니 동독은 군의 사상적 본류는 에스파냐 내전 당시 공화국 측으로 참전했던 '에른스트 텔만 대대'로 하였지만 막상 운용의 본류는 프로이센군으로 채택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샤른호르스트가 하노버 같은 독일영방 소국을 돌아다니면서 복무하다가 프로이센군에 지원할 때 이력서 말미가 꽤나 당시에 센세이셔널 했습니다. 일개 중령밖에 안 된 사람이 내건 조건이 워낙 파격적이었으니까요. '본인의 지원서를 접수 후 채택해주실 경우, 귀족작위를 수여해 줄 것과 군의 총참모장 자리를 약속해주시기 바랍니다'였으니까요. 그런데 당시 프로이센 국왕은 오히려 이를 다 받아주었죠. 샤른호르스트가 나름 학자 군인으로써 꽤나 날렸거든요.

    샤른호르스트가 의외로 간과되는게 프리드리히 2세 시절, 음지의 총참모장으로써 활약했던 안할트의 뒤를 이어 프로이센 참모부를 재건하였다는 것과 프로이센 상층부 관료들과 왕족들을 윽박질러 장교단의 개방화 및 농노 해방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겁니다. 전자야 워낙 유명해서 넘어가더라도 후자는 꽤나 중요합니다. 프리드리히 2세가 희대의 전술가로써 대승을 몇차례나 거두었지만 하나 큰 실수를 했던 게 장교단을 귀족 출신들로만 채우게 하는 일을 저질렀다는 겁니다. 이 때문에 프로이센 장교단은 '유능하지만 계급 고정성 때문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평가를 이미 7년 전쟁 이전부터 들을 정도로 경직성이 심각했었는데 장교단 개방을 통해 일거에 해소해 버린 겁니다. 흔히, 1807년 농노해방령이 관료계급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샤른호르스트가 꽤나 이를 강경하게 주장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병력 부족 해소 때문입니다. 인구 절반이 날아가 버린 상황에서 국민 개병제를 대거 확장하지 않으면 병력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으니까요.

  6. 2018.08.07 0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그늘버섯꽃 2018.08.07 09: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지식들은 다 어디서...와~
    감탄하고 갑니다

  8. 투팍아마르 2018.08.07 16: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유럽계 백인들은 정작 성경에 나오는 저 좋은 구절을 행할 흉내조차 내지는 않았다는것이 에러죠...^^

    • ㄴㄴ 2018.08.23 2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건 너무 인종주의에 치우친 말처럼 들릴 수 있네요. 동서양사 모두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행태는 결국 똑같습니다. 차이는 그때그때 얼만큼의 힘을 갖고 있었냐의 것 뿐이었죠.

  9. 카를대공 2018.08.07 2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렇게 베르나도트가 왕이 되는 밑밥이 깔리는군요.

    그런데 나폴레옹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프로이센을 개무시 했을까요?
    이전에도 그렇고 이후에도 멸시에 가까운 감정을 일관되게 보여주던데 이유가 있나요?

  10. 석공 2018.08.07 2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은 본문보다 마지막 성경구절이 더 마음에 와 닿네요...^^

2018.05.14 07:25

1776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프로이센 왕립 과학 학회(Königlich-Preuß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의 회원이 된 프로이센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의 이름은 아카르트(Franz Karl Achard)였습니다.  이름을 보면 순수 독일인 같지 않다고 느끼실 수 있는데, 제대로 보신 것입니다.  아카르트라는 집안은 원래 프랑스에서는 아샤르라고 발음되던 위그노(Huguenot, 프랑스 내의 개신교도) 집안으로서, 박해를 피해 독일로 이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이렇게 전도 유망한 이공계 인재는 대기업에 입사를 하든 스타트업 기업을 창업하여 주식으로 대박을 터뜨렸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에는 그런 학회 회원이 되었다는 것이 출세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청년은 평민 목사의 아들로서, 귀족 위주로 돌아가던 프로이센 사회에서는 그저 좀 잘 나가는 땜쟁이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카르트의 초상화입니다.  근사한 유채화로 된 초상화가 남아있지 않을 것을 보면 이 분의 최후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학회 회원이 된지 불과 6년 만에 후원인격이었던 학자 마르그라프(Andreas Sigismund Marggraf)의 사망 뒤 그 뒤를 이어 학회 내 물리학 분과의 감독관이 될 정도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마르그라프도 그렇고 아카르트도 그렇습니다만, 정작 이 분들의 이름은 현대의 물리학이나 화학 교과서에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당시 유럽의 선진국이었던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과학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며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나 달턴(John Dalton), 라브와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와 앙페르(André-Marie Ampère) 등 요즘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장식하는 기라성 같은 과학자들이 트럭 분량으로 쏟아져 나오던 것에 비해 프로이센의 과학 기술은 약간 초라한 편이었습니다.  당시 프로이센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라면 훔볼트(Friedrich Wilhelm Heinrich Alexander von Humboldt)가 있었습니다만, 훔볼트의 성장은 아버지가 군 장교라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을 대부로 둘 정도로 비교적 유복했던 살림살이 덕분이 컸습니다.  그는 남북 아메리카를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당대 유럽 최고의 지리학자가 되었으니까요.   그나마 이 양반이 그렇게 유명해진 것도 미국 등 해외가 먼저였고, 훔볼트가 프로이센 왕립 과학 학회의 회원이 된 것은 그의 나이 36세였던 1805년이 되어서였습니다.





(훔볼트에 대해서 저는 중고등학교 때 해류에 대해서 배울 때 그 이름을 들었습니다.  전에 EBS 특집 방송을 보니, 이 분의 위대함은 해류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더군요.  당대 학계의 수퍼스타급 인물이셨습니다.  유익한 여행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프로이센의 과학 기술 토대가 부족했지만, 그래도 아카르트가 넉넉치 않은 집안 형편에도 과학자로서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프로이센의 걸물인 프리드리히 대왕 덕분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저 전쟁질에만 뛰어난 군인 왕은 아니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1740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베를린의 프로이센 왕립 과학 학회를 다시 오픈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Friedrich Wilhelm I)는 '예산만 낭비할 뿐 명성은 런던이나 파리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는' 학회를 폐쇄한 바 있었거든요.  덕분에 칸트나 오일러(Leonhard Euler) 같은 학자들이 활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 정도의 명성은 없었지만, 아카르트도 말년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총애를 받던 젊은 과학자였습니다.  그는 2주일에 한 번 대왕을 직접 알현하고 그 동안의 연구 결과를 보고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다만 눈에 띌 만한 대단한 업적은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업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독일 풍토에 적합한 담배 농사법 개발에 성공했다는 것이었고, 그 덕분에 연간 500 탈러(thaler)의 연금도 받게 되었습니다.  아마 500 탈러의 가치가 궁금하실텐데, 당시 1 탈러는 은 14분의 1 쾰른 마르크(Cologne Mark, 1 쾰른 마르크는 233.856g)의 무게를 가지는 은화였습니다.  은의 가치로 환산해보면, 대략 1만600원 정도입니다.  그냥 1 탈러 = 1만원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500 탈러라고 해도, 대단한 거금은 아니었던 셈이지요.





(비슷한 시기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통용되던 탈러(Thaler) 은화입니다.  미국의 달러화 이름도, 비록 스페인 돈 이름을 거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영웅은 현자를 아끼고 존중하지요.  병석에서 볼테르를 처음으로 영접하는 프리드리히 대왕입니다.  볼테르는 당대 유럽 전체의 수퍼스타였지요.  볼테르는 편지에서 프리드리히를 '나의 트라야누스 황제'라고 불렀고 프리드리히는 볼테르를 '나의 소크라테스여'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닭살 돋는 편지들의 끝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볼테르는 프리드리히의 궁정에서 염치없는 식객 노릇을 꽤 오래 했고, 볼테르가 마침내 떠날 때 프리드리히는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카르트의 진가는 프르드리히 대왕이 서거한 지 3년 후인 1789년부터 터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순수 과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종목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사탕무였지요.  그의 스승이자 후원자 격이었던 마르그라프는 1747년 경에 사탕무(sugar beet)에도 설탕 성분이 들어있다는 것을 밝힌 바 있었고, 거기서 설탕을 뽑아내는 공법에 대해서도 연구한 바 있었습니다.  아카르트는 설탕을 척박한 독일 땅에서도 생산하고자 하는 무척 실용적인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설탕은 공격적인 해외 침공과 비인간적인 노예 노동을 통해 카리브 해에 설탕 농장을 구축한 영국과 프랑스가 휘어잡고 있는 하얀 황금이었습니다.  유럽의 후발 주자였던 프로이센은 이들로부터 비싼 가격에 설탕을 사먹는 수 밖에 없었고, 프로이센 농민들과 공장 노동자들이 땀흘려 번 돈은, 노예 노동으로 생산된 설탕을 사는데 헛되이 소비되어야 했습니다.  나중에 프랑스 혁명이 터지고 생 도밍그(아이티)에 흑인 반란이 일어나면서 유럽 대륙의 설탕 공급은 그야말로 영국에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아카르트의 노력은 베를린 근처 그의 농장에서 여러가지 식물을 재배하는 것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설탕 함량이 높았던 것은 역시 사탕무였고, 그는 여러가지 사탕무 종자에 다양한 비료를 줘가며 재배를 계속 했습니다.  사탕무는 열대 기후에서는 잘 자라지 않고, 북유럽 기후에서 오히려 높은 당도를 내는 식물이었습니다.  도중에 그의 농장에 불이 나는 바람에 쫄딱 망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지만, 그는 슐레지엔으로 거점을 옮겨 연구(...라 쓰고 농사라고 읽습니다)를 계속 했습니다.


그는 곧 성과를 냈습니다.  여기에는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과학자(...라 쓰고 농부라고 읽습니다)에 대한 지원을 계속한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나폴레옹에게 털리는 그 사람 맞습니다)의 후원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국왕의 자금 지원에 힘입어 1801년 그는 슐레지엔의 쿠네른(Kunern)에 세계 최초의 사탕무 정제 공장을 세웠습니다.  바로 다음 해 이 공장에서는 400톤의 사탕무를 가공하여 16톤의 설탕을 생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독일 땅에서 설탕이 나온다 !  이건 마치 북한 땅에 석유가 난다는 것과 거의 동일한 충격이었습니다.  구미가 당긴 빌헬름 3세의 지원에 힘입어 아카르트의 제자들은 프로이센 여기저기에 사탕무 정제소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산유국, 아니 산당국(産糖國)의 꿈이 손에 닿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To be continued...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Franz_Karl_Achard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von_Humboldt

https://en.wikipedia.org/wiki/Sugar_beet

https://en.wikipedia.org/wiki/Prussian_Academy_of_Sciences

https://en.wikipedia.org/wiki/Frederick_the_Great

https://en.wikipedia.org/wiki/Prussian_Academy_of_Sciences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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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산이아닌가벼 2018.05.14 0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북한에도 석유가 있더라... 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중국에서 서해안을 탐사하다보니 기름이 있더라라는 말이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사탕무로 설탕을 뽑아낸느 것을 보니 마치 석탄에서 석유를 뽑아내는 노력꾼들의 모습이 비치네요.

    아주 특수한 상황을 빼고는 경제성이란 아주 중요한 요소고 결국... 이 성과는 히틀러가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2. 박종필 2018.05.14 1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테르는 유럽학계의 슈퍼스타이면서 키보드 워리어에 독설가였죠. 전제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진 요즘말로 하면 '♫♫♬♬ 좌빨' 취급받았죠. 그럼에도 프리드리히 대왕은 비록 오래같이 있진 못했지만 그와 우정을 유지한 거 보면 참 희한하죠. ㅋㅋㅋ

    • nasica 2018.05.14 2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 식충이 색희 당장 쫓아내!" 라기엔 이미 벌여놓은 것도 많고 보는 눈도 너무 많아서... 체면이라는게 뭔지 참 ㅋ

  3. ㅇㅇ 2018.05.14 2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비록 충돌이 있어서 볼테르가 떠나긴 했지만 그래도 서로 편지는 보내는 사이라고 들었는데 틀린건가요?

  4. franken 2018.05.15 08: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탕무에서 설탕 뽑는 건 문제없어졌지만 사탕무 대량 재배에서 사단이 난 모양이군요. 개인적으로 이 좋은 작물 왜 한국선 안 기르는지 궁금해지네요.

2018.04.04 19:30

1807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굴복을 받아낸 프리틀란트는 동부 프로이센의 주도인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근처에 있는 지역입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독일어로 '왕의 산'이라는 뜻이고,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였습니다.  지금 이 도시는 러시아 발트 함대의 모항인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라는 이름의 러시아 도시가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유서 깊은 독일 도시가 러시아 영토가 되었을까요 ?  예전에 독일 도시였다면 그곳에 살던 독일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또, 지금 독일이 다시 매우 강대국이 되어 있는데, 독일 내에서 이렇게 잃어버린 옛영토를 되찾자는 움직임은 없을까요 ?




(쾨니히스베르크의 모습입니다.  아마 19세기 말 정도의 모습인가봐요 ?)




전에도 다룬 바 있습니다만, 독일 통일의 주역이었던 프로이센 왕국은 원래 유럽 북동부, 즉 현재의 폴란드 북동쪽과 러시아 땅에 자리잡았던 종교적 군사 단체인 튜톤 기사단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먼 동쪽 끝 변방의 공국이 혼인 관계에 의해 독일 중부의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공국과 합쳐지면서 프로이센 왕국의 기초가 다져집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프로이센이 브란덴부르크를 먹었다기 보다는 브란덴부르크가 프로이센을 먹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신하 관계 때문에, 왕국이 될 때의 이름은 프로이센 왕국이 되었지요.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프로이센은 유럽 중부와 동부에 따로 분리된 두 덩어리의 영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점차 프로이센 왕국의 국력이 강성해지면서, 이 두 영토 사이의 땅을 차지하여 두 영토를 합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지요.  이런 노력 중에 희생된 것이 바로 폴란드였습니다.  이렇게 프로이센 땅이 된 옛 폴란드 지역에는 여전히 많은 폴란드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나, 주요 도시 지역에는 이주해온 독일인들의 인구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나폴레옹이 아일라우(Eylau) 전투 이후 제대로 된 공세를 위해 포위 공격하여 마침내 점령했던 단치히(Danzig)는 처음부터 프로이센 공국에 속해 있던, 주민 대부분이 독일인인 독일계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분열된 독일 공국들간의 알력들 속에서, 중세 자유 도시들이 흔히 그러했듯이 어느 왕에게 완전히 종속되는 것이 싫었던 단치히 시는 16세기 때만 해도 나름 강력했던 폴란드 왕국의 야기엘로(Jagiello) 왕조에게 손을 뻗쳤습니다.  폴란드 왕의 주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단치히 시는 자치권을 허락받은 것이지요.  사실 프로이센 공국도 초기에는 폴란드 왕의 종주권 하에 있을 정도로 폴란드 왕국의 세력이 강성했거든요. 




(17세기 초반 단치히 항구의 모습입니다.)




나중에 프로이센 왕국이 강성해지면서 단치히 시는 자치권을 빼앗기고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로 편입됩니다.  그러나 1807년 포위 공격 끝에 단치히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이 중요한 발트해의 항구 도시를 프로이센에게 돌려주기 싫어서, 단치히에게 다시 자유 도시라는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단치히 자유시는 그 댓가로 나폴레옹에게 많은 세금을 바쳐야 했고,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다시 프로이센 왕국으로 편입되어야 했습니다. 


진짜 큰 문제는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에 벌어졌습니다.  1919년 베르이사이유 조약에 의해 폴란드 공화국이 재건되면서, 근 100년간 독일 제국의 땅이었던 영토가 다시 폴란드 땅이 된 것입니다.  이 지역들은 100년 전에는 폴란드 땅이었으므로 당연히 많은 폴란드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나, 100년 간이나 독일 땅으로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독일인들도 적지 않게 이주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독일인들은 졸지에 자신들이 경멸하던 폴란드 국민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불만이었으나, 가진 재산과 생업 기반을 버리고 갈 수 없었으므로 결국 불만을 품은 채 일단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폴란드 식으로 그단스크(Gdansk) 자유도시가 된 단치히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했습니다.  당시 통계로는 전체 주민의 90% 정도가 독일계였던 이 도시가, 폴란드가 주권을 가지는 자유 도시라는 어정쩡한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단치히 주민들은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단스크 시민으로 살던가, 아니면 가진 재산을 모두 놔두고 몸만 빠져 나가 독일에 가서 독일 시민으로 살던가를 택하라고 강요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독일은 패망하여 피폐해진 상태였으므로, 단치히의 독일계 주민들은 대부분 잔류를 택했습니다.  




(단치히, 아니 그단스크의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아주 멋진데요 !!)




이렇게 갈등의 요소가 많았던 그단스크 시 안에서는 민족 갈등이 꽤 심했습니다.  특히, 독일에서 나찌가 정권을 잡으면서는 노골적으로 폴란드계와 유태계를 차별하고 박해하는 일이 늘어났지요.  나찌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체코로부터 수데텐란트(Sudetenland)를 빼앗은 뒤, 이제는 그단스크, 아니 단치히를 내놓을 것을 폴란드에게 요구했습니다.  단치히는 원래 독일 영토이고 동부 프로이센과 중부 독일을 연결하는 전략적인 지역이라는 이유였지요.  결국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단치히는 독일 땅으로 편입되었고, 도시 주민들은 나찌 독일군을 열광적으로 환영했습니다.




(단치히는 독일이다 ! 라는 나찌의 포스터입니다.)




(아래 사진은 1933년에 독일로의 귀속을 주장하고 지지하는 단치히 독일계 주민들의 집회입니다.)




이런 전과가 있다보니, 1945년 독일의 패망이 눈 앞에 다가오고 소련군의 진격이 코 앞에 닥치자, 독일은 단치히로부터 대규모로 민간인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진격하는 소련군이 독일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다룬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때와는 달리, 독일계 주민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무조건 서쪽으로 도망치기에 바빴지요.  그렇지만 항상 예외는 있기 마련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서쪽으로 탈출할 수는 없었지요.  1945년 6월, 종전 직후 기록을 보면 단치히 시내에는 약 12만명의 독일인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은 민간인 신분이었으나 1949년까지 사실상 포로 상태로서 소련군의 감독 하에 가혹한 노예 노동을 해야 했는데, 그나마 1950년까지 대부분의 생존자들이 동독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이 사진은 1945년 전쟁 말기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독일 군함을 타고 필사적으로 탈출하는 독일 주민들의 모습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제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된 동독은 스탈린의 주문대로 동부 영토를 다 할양해야 했습니다.  이때 독일은 옛 프로이센 공국 지역을 완전히 상실합니다.  동독이야 그렇다치고, 서독은 이런 국경 변화를 인정했을까요 ?  물론 당시 서독 수상 아데나워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마치 북한이 함경도 전체를 뚝 떼어 중국에게 넘겨주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러나 19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는 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을 맺고 당시의 동독-폴란드 국경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폴란드로서도 이익이라고 할 수는 없었던 것이, 종전 직후 스탈린 마음대로 폴란드 동부 지역을 소련 땅으로 떼어가고, 대신 독일 동부 지역을 폴란드 땅으로 떼어준 것이었거든요.  역사적으로 보면 폴란드 땅은 원래 전반적으로 현재보다 좀더 동쪽에 있었으나,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20세기 들어 많이 서쪽으로 이동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아무튼, 과거 동부 독일 지역은 이런 식으로 독일 역사에서 영원히 상실되었습니다.




(폴란드 영토가 전반적으로 서쪽으로 옆걸음질치는 모습이 보이십니까 ?)




영토야 그렇다치고, 그 땅에 살던 독일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대부분은 단치히 시민들처럼 종전이 되기 전에 서쪽으로 도주하기도 했고, 일부 남은 사람들도 1950년 이전까지 독일로 추방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서 폴란드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된 독일인들도 꽤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독일인들을 독일 정부는 여전히 자기 국민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들이 만약 지금이라도 독일로 귀국하여 독일 시민권을 취득하기를 원할 경우 그것을 인정하는 법안을 만든 것입니다.  이런 권리를 Aussiedler(이주민)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귀환한 사람들 중 여러분들이 최근에 본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미로슬라프 클로제, 즉 독일 축구 국가 대표 선수이자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누적골을 기록한 사나이입니다.  클로제는 옛 독일 영토인 실레지아(Silesia)의 도시 오폴레(Opole)에서 폴란드인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가 과거 폴란드 땅에 남은 옛 독일인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 요제프 클로제(Josef Klose)도 축구 선수였는데, 그는 처음에는 폴란드 팀에서 뛰다가 나중에 프랑스 프로 축구팀 오세르(AJ Auxerre)에서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외 생활을 하여 발전된 서구에 눈을 뜨게 된 아버지 클로제는 역시 공산주의 폴란드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고국에 남아 있던 가족들까지 모두 독일로 불러들여 Aussiedler로서 독일 시민권을 신청했던 것이지요.  이때 클로제의 나이 8살이었고, 이때 클로제가 아는 독일어는 단 두 단어 뿐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Ja와 Nein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렇게 독일 시민권을 취득한 옛 폴란드인들은 여전히 폴란드 국적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젊은 축구선수 클로제가 두각을 나타내자, 폴란드 국대팀에서 코치를 파견하여 '자네 폴란드 국가 대표로 뛰지 않겠는가'라는 제안을 했으나, 클로제는 '현재대로라면 독일 국대도 가능하겠다' 라며 거절했고, 결국 오늘날의 클로제로 대성할 수 있었습니다.  클로제는 '폴란드 대신 독일을 택한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라고 밝혔는데, 그도 그럴 것이 지금도 그는 집에서 와이프와는 물론 아이들과도 폴란드어로 이야기할 정도로 스스로를 폴란드인으로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포돌스키입니다.  지금은 은퇴했나 모르겠네요.)




이와 비슷한 처지의 선수로는 현재 아스널에서 뛰고 있는 포돌스키(Lukas Podolski)가 있습니다.  거의 비슷한 과정을 거쳐 독일인이 된 포돌스키는 한때 클로제와 함께 바이에른 뮌헨에서 선수 생활을 했는데, 이때 이 둘은 상대팀 선수들이 자기들 말을 알아듣지 못하도록 필드 위에서는 폴란드어로 대화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요즘 점점 강성해지는 통일 독일에서, 혹시라도 나중에 '상실한 옛 프로이센 영토를 되찾자'라는 움직임이 벌어지면 어쩌나 하는 우려지요.  위에서 언급했듯이, 1970년 브란트 총리가 바르샤바 조약을 맺고 옛 영토를 완전히 포기한다고 선언했을 때, 독일 내 보수파들은 민족에 대한 배신 운운하며 격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만난 어떤 독일 영감님 말씀을 들어보니, 현재로서는 그럴 염려, 즉 옛 영토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생길 우려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스탈린이 나름 철저하게 그럴 가능성에 대비하여, 옛 독일 영토에 있던 독일계 주민을 철저하게 추방했기 때문에, 과거 영토에 남아 있는 독일계 주민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 옆의 섬나라 인간들과는 달리, 독일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독일의 영광은 영토의 크기가 아니라 이웃 국가들과 공존하는 리더쉽에서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르지요.  우리나라처럼 작고 힘없는 나라에서도 세계 제2위의 강대국 중국으로부터 거의 천년 전에 잃어버린 만주 벌판을 되찾아야 한다고 떠벌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중에 독일에 또 미치광이들이 나오지 말란 법은 없겠지요.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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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쇼펜하우어 2018.04.04 2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과 상관 없지만... nasica의 뜻이 뭐죠?

    • nasica 2018.04.05 07: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Scipio 가문 인물 중 하나의 별칭인데, 저도 정말 뜻을 몰라서 그렇게 적은 것입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코가 길거나 크거나 뾰족하다는 뜻이더군요.

  2. 잡지식 2018.04.05 0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혹시 스키피오 나시카인가요?

  3. 김똑딱 2018.04.05 0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돌스키는 현재 빗셀 고베에서 뛰고 있습니다.

  4. 수비니우스 2018.04.05 07: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키피오 나시카라는 사람이 누굴까 하고 찾아봤더니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라는 이름을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 4대가 같이 썼네요 ㄷㄷ 로마는 왜 이리 이름 돌려쓰기가 많았는지 참...

  5. 에로준 2018.04.08 08: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공개된 nasica의 뜻이...

  6. 하락장숏스탑 2018.04.08 2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만주국토 회복해야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아웃사이더인거 같죠? 학계에선 아싸더라도 국회강연하는 사람 문화부에서 방귀좀 끼는 사람중에 황당고기 신봉자들이 많습니다.

  7. 하락장숏스탑 2018.04.08 2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폴란드ㅡ독일 문제로 만주고토 회복론을 가볍게 논파하셔서 놀랍습니다. 남북 통일문제와 독일-오스트리아 통일문제를 비교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도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은 잡히지만 나시카님 만한 필력이 나오질 않습니다.

  8. Dd 2018.04.23 1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Nasica님의 글을 늘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만 잊을만하면 나오는 한국 약소국 소리가 영 이해가 안가네요. 총 gdp 순위 11번째 국가가 약소국이면 약소국 아닌 나라가 세상에 몇이나 되는건가요

    • ㅇㅋㅂㄹ 2019.02.01 1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다면, 그 11위의 경제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지요? 한국은 국제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물론 그 입지조차도 좁지 않나요

  9. 만주개장수 2018.08.29 2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Dd//님 말처럼 절대적 평가로 생각하니 위에 만주 문제처럼 주장하는 사람이 생기는가봅니다..

    전쟁날수 있는 우리 주위나라들과 비교해야지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약소국 얘들 하고 전쟁할건 아니 잖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