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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더 개발 이야기 (45) - 레이더 깎는 노인, 아니 영국 공군 H2S 공대지 레이더는 테스트를 거치면 거칠 수록 점점 더 개선됨. 1942년 4월, H2S를 테스트하던 항법장교 E. Dickie 중위는 '지도는 언제나 북쪽이 위인데, H2S 레이더 스코프는 폭격기 기수 방향이 위로 되어 있어서 헷갈린다'라고 불평. 이게 딱히 틀린 말은 아닌데다, 속성 훈련만 받고 살 떨리는 독일 야간 폭격에 투입되는 항법사들의 질적 문제를 생각할 때 조금이라도 덜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되어 그에 대한 개선 작업이 이루어짐. H2S의 PPI scope 화면을 폭격기의 자이로컴패스(gyrocompass)와 서버(servo) 모터를 통해 동기화시켜 항상 위가 북쪽을 향하도록 회전시킨 것. (Anschütz 자이로컴패스의 단면도. 안슈츠는 1905년 독일 Kiel에서 설립된.. 2023. 8. 31.
휴전 (9) - 우리한테 병력이 없지 돈이 없겠나? 오스트리아의 이런 움직임은 연합군 사령부에 와 있던 영국인들에게도 결국 포착되었습니다. 주프로이센 대사 자격으로 현장에 있던 스튜어트 장군은 6월 6일, 이런 상황을 알리는 편지를 본국에 보냈고, 외무부 장관인 캐슬레이는 한참 말을 달려 북부 독일의 항구를 통해 전달된 이 편지를 6월 22일에야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제3대 런던데리(Londonderry) 후작 스튜어트(Charles William Stewart)의 초상화입니다. 1813년 이후 프로이센 주재 영국 대사로서, 이후 오스트리아 주재 영국 대사로 활약하며 나폴레옹의 몰락에 한몫 했습니다.) (윗 그림 속 스튜어트가 입고 있는 자켓은 영화 MI7 Dead Reckoning에서 맨티스가 입고 설친 자켓이기도 합니다. 이 자켓을 부르는 일반 명.. 2023. 8. 28.
레이더 개발 이야기 (44) - 기술 강국 독일의 허상 독일애들도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처웰 경이 염려했던 것을 즉각 생각해냄. 즉, 로열 에어포스 폭격기들에 장착된 H2S 레이더가 쏘아대는 전자파를 추적하면 루프트바페의 야간 전투기가 쉽게 폭격기들을 사냥할 수 있겠다는 것. 그래서 Telefunken사에게 H2S 전파 수신기를 주문함. 그런데 해보니 이게 쉽지 않음. 독일은 전파의 존재를 세계 최초로 실험으로 입증한 헤르츠 박사의 나라일 뿐만 아니라 당시 물리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나라였지만, 전자 소재 산업을 등한히 했던 것이 이제 와서 뼈저린 후회거리가 됨. 당시 H2S는 GHz 단위의 microwave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독일은 고작 수백 MHz의 UHF, VHF를 사용하고 있었음. 근데 GHz 단위의 H2S 전파를 수신하고 추적하려면 당.. 2023. 8. 24.
휴전 (8) - 대(大)외교관 메테르니히 원래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1813년 춘계 작전을 벌이면서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애걸복걸할 때, 오스트리아는 짐짓 점잖은 척 하면서 뒷짐을 지고 있으면서 기묘한 요구를 했었습니다. 나폴레옹과 평화 협상을 할 때는 반드시 오스트리아의 중재를 통해서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칼리쉬 조약을 맺고 반(反)나폴레옹 전쟁을 시작할 때 양국은 절대 개별적으로 나폴레옹과 협상을 벌이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라는 제3국을 중재국으로 두는 것은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으로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으므로 그에 동의한 바 있었습니다. 이건 당대의 외교계의 거물이었던 메테르니히의 절묘한 한수였습니다. 그가 그런 독특한 요구를 관철시킨 것은 그가 프랑스 못지 않게 러시아를 견제해야 한다고 정.. 2023. 8. 21.
레이더 개발 이야기 (43) - 독일의 대응 괴링을 경악시킨 항법용 공대지 레이더 H2S의 실체를 알게 된 독일군은 그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절치부심. 여태껏 거의 3년 동안 영국과 독일은 서로의 전파 항법 시스템에 대해 jamming을 주거니 받거니 한 사이였으므로, 이번에도 jamming을 시도. 일단 제일 먼저 시도한 것은 decoy. 얇은 금속판을 접합하여 삼각뿔 등의 다면체를 만들고 이를 교외의 공터나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건물 등 폭탄이 떨어져도 괜찮은 곳에 잔뜩 배치. 이는 직각으로 맞닿은 금속판이 레이더 신호를 가장 강력하고 선명하게 반사하기 때문임. 그런 금속판으로 만든 다면체를 보통 radar reflector라고 하는데, 이런 것을 그럴싸하게 설치해놓으면 영국 폭격기는 엉뚱한 곳에서 엉뚱하게 큰 물체를 보게 되므로 '여기는 어디.. 2023. 8. 17.
휴전 (7) - 메테르니히의 조건 아직 정식 휴전 조약이 맺어지기 전인 6월 3일부터 나흘 동안, 러시아 외교관 네셀로더(Karl Robert Reichsgraf von Nesselrode-Ehreshoven)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프란츠 1세(Franz I)와 메테르니히, 그리고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인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와 일련의 회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이 인물들과의 회의를 마치고 연합군 사령부로 되돌아간 네셀로더는 짜르 알렉산드르에게 오스트리아가 참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고 전달했습니다. 그 조건이란 나폴레옹과 연합군 사이에서 중재역을 맡고 있던 오스트리아가 먼저 나폴레옹에게 다음 조건들을 제시하며 종전 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 2023. 8. 14.
레이더 개발 이야기 (42) - 로테르담에서 온 장치 로열 에어포스 폭격기들이 밤길을 못 찾아 여태껏 삽질만 하고 있었다는 것이 폭로된 Butt 보고서 파문 이후, 항법사들의 밤눈이 되어줄 공대지 레이더 H2S에 대한 영국 정부의 기대는 하늘을 찔렀고 그에 비례하여 개발진에 대한 압박도 대단했음. 1942년 7월, 처칠은 직접 10월 중순까지 H2S 레이더 200 세트를 준비해놓으라고 명령하여 레이더 개발팀을 깜놀시킴. 모든 지원이 다 집중되었으나, 결국 이 마감일은 지키지 못함. 1943년 1월까지도 고작 12대의 Stirling 폭격기와 12대의 Halifax 폭격기에만 H2S가 장착됨. 그리고 이들은 당장 실전에 투입됨. 바로 1943년 1월 30일의 함부르크 폭격. (함부르크 상공의 랭카스터 폭격기. 이 사진이 바로 최초의 H2S를 이용한 폭격이 있.. 2023. 8. 10.
휴전 (6) - 캐스팅 보트(Casting vote) 훗날인 1814년, 나폴레옹이 폐위되고 아직 엘바 섬에 있을 무렵, 러시아군의 랑제론은 프랑스 파리에서 베르티에를 만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르티에는 이 때의 휴전협정에 대해 '그 휴전협정은 모조리 나폴레옹의 잘못이었다, 나폴레옹이 모든 것을 혼자 결정했다, 1812년 이후 나폴레옹은 결코 자신들과 함께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싸우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확실히 나폴레옹이 나이가 들면서 사람이 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휴전협정을 맺은 것은 나폴레옹 혼자의 결정이었고 그로 인한 결과는 모조리 나폴레옹의 잘못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당시 나폴레옹이 휴전을 제의할 때 나폴레옹의 부하들 중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고 그건 베르티에 본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휴전협정이 .. 2023. 8. 7.
레이더 개발 이야기 (41) - 죽 쒀서 괴링 줄 일 있냐? H2S 레이더의 성능과 효용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음. 하지만 이걸 폭격기에 달아 독일로 보내는 것에 대해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음. 이유는 폭격기가 하는 일은 2가지, 하나는 폭탄을 투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사포든 적 전투기든 적의 방공망에 걸려 적지에 추락하는 것이기 때문. 전파 항법 장치 Gee 수신기를 장착한 폭격기들이 독일에서 격추되었고, 거기서 수거된 Gee 수신기들을 독일이 수리하여 역이용하고 있는 상황이다보니, H2S 레이더를 장착한 폭격기를 독일에 보내면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염려했던 것. 특히나 문제가 되었던 것은 H2S에는 Gee에 없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 달려 있었다는 점. 바로 cavity magnetron. 강력한 고주파 microwave를 쉽게 만들.. 2023. 8. 3.
휴전 (5) - 차가운 남자의 함박웃음 휴전이 되자 바클레이는 즉각 오데르 강을 넘어 후퇴할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그런데도 바클레이는 재빨리 슈바이트니츠에서 더 서쪽인 상(上) 슐레지엔의 슈트렐렌(Strehlen, 폴란드어로는 스첼린 Strzelin)으로 이동하려 했습니다. 프로이센군은 휴전까지 되었는데 뭐가 무서워 자꾸 도망치려고 드냐고 거세게 항의했지만, 바클레이는 절대 나폴레옹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휴전은 시간 벌기용 위장일 뿐이고, 나폴레옹이 그 사이에 오데르 강 상류쪽으로 행군하여 러시아군의 퇴로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바클레이가 워낙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알렉산드르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모두 후퇴에 동의해야 했습니다. 그는 아직 정식 조약이 서명되기도 전인 6월 3일 즉각 부대를 동쪽으로 행군시.. 2023. 7. 31.
레이더 개발 이야기 (40) - 공대지 레이더와 금주법 원래 초창기 레이더는 Chain Home 지대공 radar나 해양 초계기에 장착했던 ASV 공대함 radar처럼 그냥 일련의 쇠막대기로 이루어져서, 요즘 사람들이 보기엔 전혀 레이더스럽지 않았음. 게다가 그 스코프 화면도 수평선에 가끔씩 삐빅하고 위로 치솟는 지점이 나타나는 정도로서, 레이더라기보다는 마치 심장박동수 화면처럼 보였음. 게다가 스코프로는 거리만 측정 가능했고, 방향은 Bellini–Tosi direction finder 코일의 다이얼을 이리저리 틀어서 간신히 찾을 수 있었음. 그러다 1942년 즈음해서 화면 중앙에 레이더 자체가 위치한 PPI (plan position indicator) 디스플레이가 고안되면서 모든 것이 확 좋아짐. 특히 이 디스플레이는 cavity magnetron의 발.. 2023. 7. 27.
휴전 (4) - 땅을 치고 후회할 결정 그나이제나우는 5월 31일 이같은 생각을 바클레이에게 펼쳐놓고는, 자기가 생각해봐도 완벽한 자신의 논리와 작전안에 스스로 감동하여 바클레이가 이 작전안에 찬성할 수 밖에 없다고 확신하고는 자신의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곧 전투가 벌어진다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클레이의 대답은 단호하게 일관적이었습니다. 즉, 러시아군은 결코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이번 기회에 오데르 강을 건너 후퇴해야 한다는 주장만 되풀이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짜르의 명령 때문에 슈바이트니츠에 발이 묶인 상태이다보니, 바클레이가 내세운 계획은 최대한 버티면서 시간을 끌되, 만약 나폴레옹이 공격해오면 그 일대의 구릉 지대에서 메뚜기 뛰듯 옮겨다니며 계속 농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클레이는 나.. 2023.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