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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7.01 1812년 - 왜 나폴레옹은 러시아로 갔을까 (하) (25)
2019.07.01 06:30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는 독일 출신 할머니와 독일 출신 어머니를 둔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 할머니는 처녀적 이름이 안할트-제릅스트(Anhalt-Zerbst) 출신의 소피(Sophie)로서 나중에 예카테리나(Екатерина) 대제로 알려진 러시아의 여황입니다.  알렉산드르의 어머니는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공주였지요.  다른 유럽 왕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는 이렇게 계속 외국 특히 독일 출신의 공주들을 왕비로 맞아들이다보니 러시아 왕가는 일반 러시아 국민들은 물론 러시아 귀족들에 비해서도 서구의 발전된 문물과 사상에 대해 좀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춥고 먼 동쪽 구석의 러시아를 서구화시키는 노력은 대개 국왕을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혁신이 위주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귀족들과 국민들은 그런 서구 사상의 침투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반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 전통은 알렉산드르에게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스위스 출신의 공화주의자인 라 아르프(Frédéric-César de La Harpe)를 가정교사로 하여 루소 등의 프랑스 계몽사상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당연히 그는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랐습니다.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지독한 전제 군주 집안에 태어난 왕자로서 계몽사상에 젖어든 어린 손자 알렉산드르를 보고 예카테리나 대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꼬마는 자기 모순의 매듭덩어리 같구먼."


(라 아르프입니다.  그는 30대를 러시아에서 알렉산드르의 가정교사로 보낸 뒤, 베른의 귀족 정권에 시달리던 고향 스위스 보(Vaud) 지방을 해방시키고 더 나아가 스위스에 헬베티카 공화국(République Helvétique)을 만들었습니다.  혁명의 폭풍 속에서 그는 추방을 당하는 등 시련을 겪었으나, 나폴레옹이 패망한 이후 그는 옛제자 알렉산드르의 도움으로 그의 고향 보 지방의 권익을 지키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물려받은 전제 군주 짜르의 왕좌는 결코 절대 권력이 보장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그의 할아버지 표트르 3세(Pyotr III )는 그의 홀대에 불만을 품은 근위부대의 반란으로 황비인 예카테리나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결국 암살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파벨 1세(Pavel I) 또한 귀족 출신의 해직 장교들에 의해 아주 간단히 암살되었습니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연이어 암살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만 표트르 3세나 파벨 1세나 모두 농노들의 처지를 향상시키고 귀족들의 권리를 제한한다는 공통적인 개혁 조치를 취한 바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먼 동구의 대국으로서 소수의 전근대적인 귀족들이 노예 상태의 국민들을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가령 표트르 3세의 개혁 이전까지만 해도 귀족들은 자기 농노를 죽여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나름대로의 그런 전통과 특성을 무시하고 귀족들의 이익을 해친다면, 아무리 동로마 제국 황제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주장하는 짜르라고 해도 야밤에 한낱 개처럼 살해될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의 평민 출신 고문 스페란스키입니다.  그는 알렉산드르를 따라 에르푸르트 회담장까지 가서 직접 나폴레옹과 환담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귀족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그는 결국 친프랑스파이자 불온사상을 가진 자로 낙인찍혀 1812년 초에 고문직에서 해직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시베리아에 유배를 간 것은 아니고, 핀란드 대학의 학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비록 알렉산드르가 서구 계몽사상으로 훈련된 개혁적 군주라고 해도 실제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시골 마을 신부의 아들인 스페란스키(Mikhail Speransky)를 고문으로 등용하여 당시 계몽사상가들이 꿈꾸던 입헌 군주국으로 러시아를 탈바꿈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는 짜르가 스스로의 권력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  또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처럼 선진 교육을 받은 귀족 및 시민들이 많아야 한다는 판단으로 당시 그 넓은 러시아에 딱 3개 있던 대학 수를 6개로 늘리는 등 교육 제도 개선에도 힘을 많이 썼습니다.  물론 개혁은 쉽지 않았고 알렉산드르도 주변 왕족 및 귀족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런 개혁에 대한 열의는 점점 옅어져 갔습니다.  가령 스페란스키가 제시했던 의회, 즉 러시아어로 두마(дума, '생각'이라는 뜻)로 불리는 기구는 거의 1백년이 지난 뒤 노일전쟁의 패전 결과로 발생한 1905년 러시아 혁명을 겪고서야 간신히 설립될 지경이었습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러일 전쟁 패배의 여파로 들끓던 사회적 불만이 '피의 일요일' 사건이 계기가 되어 촉발된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포템킨 호의 반란 사건도 이때의 사건입니다.)

 



그렇게 서구 사회에 긍정적이었던 그는 처음에는 프랑스 시민 계급을 대표하는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에 대해 흠모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나폴레옹의 앙기앵 공작 납치 사법 살인이라는 비도덕적 범죄 행위를 보고는 기대만큼 큰 실망을 하여 반-나폴레옹파로 급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제3차 대불동맹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나폴레옹의 손에 참담한 패배의 맛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렉산드르는 젊은 낭만파 몽상가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1807년 틸지트 회담에서 나폴레옹이라는 대인물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보고는 나폴레옹의 매력에 젖어든 정도가 아니라 그 속에 첨벙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역시 낭만파 몽상가이자 지략가였던 나폴레옹이 제시한 프랑스와 러시아가 힘을 합해 유럽을 양분하고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출발하여 인도까지 점령하자는 말도 안되는 소리에도 전율했습니다.  그 결과, 분명히 바로 직전까지 영국의 금융 지원을 받으며 피튀기게 싸우던 적수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엉뚱하게도 여태까지의 돈 줄이자 중요 경제 파트너였던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틸지트 회담에서 알렉산드르는 무엇보다 남쪽의 숙적 오스만 투르크가 차지했던 발칸 반도 등지를 빼앗기를 원했지만, 실질적으로 러시아가 얻은 것은 핀란드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오스만 투르크는 영국의 근동 지방 전략에 저항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동맹이었고 또 나폴레옹이 구워삶아야 하는 다른 강국인 오스트리아도 오스만 투르크의 땅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얻은 것에 비해 영국과 척을 진 대가는 컸습니다.  러시아는 토지 귀족의 나라였고, 토지 귀족의 돈벌이는 자신의 장원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영국에 수출하고 대신 영국제 공산품을 수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호기 있게 맺은 틸지트 조약은 러시아 토지 귀족의 이익에 크게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곧장 여기저기서 볼멘 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물론 불만 세력들은 모양새 없게 '돈벌이가 안된다'라는 것을 나폴레옹과의 동맹 반대 이유로 대지는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나폴레옹은 신이 내려주신 왕위를 뺴앗은 찬탈자이고 불온한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야만인이므로, 동로마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로마노프 왕조는 그 코르시카놈과 동맹을 맺을 것이 아니라 정벌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짜르 알렉산드르의 모후인 마리아 페오도로브나(Maria Feodorovna)까지 나서서 나폴레옹이 소집한 에르푸르트 회담에 출석하지 말라고 종용할 지경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자신을 둘러싼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야밤에 칼로 찔러 죽인 자들이 가득찬 왕궁에서 그들의 불만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옳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알렉산드르도 나폴레옹이 결코 자신과 유럽을 공유할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어디까지나 전제 왕정의 군주였지, 결코 낭만적인 친구들로 둘러싸인 젊은 독일 대학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 기반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그 계기가 된 것은 나폴레옹이 바르샤바 공국을 독립 폴란드 왕국으로 부활시키려고 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건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 오스만 투르크의 분할에 있어서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메테르니히가 빚어낸 가짜 뉴스였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1810년 12월 31일 발표된 짜르의 칙령은 프랑스산 제품에 대해서는 관세를 부과하고, 반대로 영국 상품에 대해서는 입항 허가를 내주는 내용이었고, 이를 계기로 나폴레옹와 알렉산드르 사이의 전쟁은 거의 기정 사실화되었습니다.  사실 이건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제 벌어질 전쟁은 유럽 산업화의 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영국 시민 계급과 프랑스 시민 계급의 싸움이었습니다.  이미 산업 혁명이 시작된데다 강력한 로열 네이비를 보유한 영국과 싸울 방법이 궁했던 프랑스가 꺼내든 대륙 봉쇄령이라는 무역 전쟁은 결국 동방의 대국 러시아를 싸움판에 끌어들였고, 결국 영국 대신 러시아가 프랑스를 상대로 대리전을 치르게 된 것이었지요.  

자신의 전쟁에 제3자를 끌어들인 것은 영국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도 혼자서 러시아와 싸울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가 굴복시킨 독일과 이탈리아 등지의 위성국가들에게 병력과 물자, 자금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유럽 거의 전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 거대한 전쟁에 휩쓸려야 했습니다.  과연 이 전쟁을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시선은 어떠했을까요 ?  물론 대부분은 황제가 또 전쟁을 한다면서 불만이었습니다만, 지식인들 대부분은 이 전쟁을 계기로 유럽의 근대화가 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의 점령군 뒤에는 예외없이 무자비한 병참장교와 세관원들이 따라와 점령지의 고혈을 짜내는 것으로 악명 높았지만, 나폴레옹의 정복지에는 프랑스 대혁명 정신을 계승한 헌법과 나폴레옹 법전도 항상 따라오기 마련이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군이 이례적으로 잔혹하게 난동을 부렸던 스페인에서조차, 지식인들은 나폴레옹이 세운 허수아비 왕 조제프의 정권이 기존 부르봉 왕정보다 스페인을 훨씬 더 근대화시켰다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최소한 헌법이 제정되었고, 중세시절부터 계속 내려오던 고문으로 악명 높은 스페인 종교재판도 폐지되었으니까요.  나중에 나폴레옹이 패망한 뒤 스페인 종교재판은 다시 부활했다가 1834년에야 간신히 폐지되었습니다.  괴테 등 당대의 지성인들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일주의에 대해 분개하면서도 나폴레옹이 동방으로 끌고 갈 그랑다르메(Grande Armee)의 전진과 함께, 신분제 폐지와 천부인권 등의 계몽사상이 저 동방까지 전달될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종교재판 = 이단심문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와 나무가지, 그리고 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Yo, Say Love"를 선창하시는데 이들은 떼창으로 "No Mercy"를 외쳤군요.)

 



이제 유럽은 누가 영국과 러시아 편에 설 것이고 누가 프랑스 편에 설 것인지, 과연 중립이란 것이 가능할지 외교적인 머리를 굴려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I_of_Russia
https://en.wikipedia.org/wiki/Mikhail_Speransky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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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_- 2019.07.01 06: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주일의 시작을 새 글과 함께! 매번 포스팅이 월요일 6시 30분이네요.
    주말동안 글 정리 해 놓으시고 월요일 새벽 포스팅 예약 걸어놓으시는 건가 보군요?
    잘 보고 갑니다 :)

  2. 보니666 2019.07.01 1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항상 좋은글 너무 잘 읽고 있습니다. 제가 궁금한 점을 여쭤보고 싶은데, 나시카님께서 보시기에는 결국 나폴레옹의 패망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지난 글에서 1810년의 나폴레옹은 더이상 전쟁을 개인적으로 원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는데...

    1. 그렇다면 나폴레옹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끝까지 회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는 대륙봉쇄령 포기와 영국정복을 완전 포기한다는 뜻이고...유럽 다른 나라들도 프랑스를 만만하게 여기고 부르봉 왕가의 복귀를 위해 다시 침략했을 것 같고...그렇게 되어도 결국 전쟁을 피할 수 없었을 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만약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에서 승리하여 러시아까지 대륙봉쇄령에 강제로 다시 참여시키는 데 성공했더라도...결국에는, 언젠가는, 코르시카 촌놈 출신이자 전쟁의 승리로 권력을 유지했던 황제인 나폴레옹은...전쟁으로 패망할 운명이었는가요?

    3. 결국 전쟁의 승리로 벼락출세한 식민지 코르시카 출신인 나폴레옹이 새로운 왕조를 창시하고 제위를 아들에게 물려주며 죽는...해피엔딩은 애당초 불가능한 이야기인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나시카님의 생각이 정말 궁금합니다. 고견 부탁드려요~^^

    • nasica 2019.07.01 19: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그렇다면 나폴레옹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끝까지 회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러시아와 전쟁 회피는 결국 대륙봉쇄령의 붕괴로 이어졌겠습니다만, 그래도 나폴레옹 정권은 유지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자신은 없습니다.


      2. 만약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에서 승리하여 러시아까지 대륙봉쇄령에 강제로 다시 참여시키는 데 성공했더라도...결국에는, 언젠가는, 코르시카 촌놈 출신이자 전쟁의 승리로 권력을 유지했던 황제인 나폴레옹은...전쟁으로 패망할 운명이었는가요?

      --> 러시아가 굴복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대륙봉쇄령으로 인한 경제적인 불만은 터져나왔을 것이고, 그때문에 전쟁이 반복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총칼은 절대 황금을 이기지 못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3. 결국 전쟁의 승리로 벼락출세한 식민지 코르시카 출신인 나폴레옹이 새로운 왕조를 창시하고 제위를 아들에게 물려주며 죽는...해피엔딩은 애당초 불가능한 이야기인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 저는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습니다. 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요 ? 고매한 왕가의 선조도 따지고 보면 힘깨나 쓰는 조폭단 두목일 뿐입니다.

  3. 푸른 2019.07.01 1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종일관 진지한 글이다가, 마지막에 "yo, say love"하는 예수님과 "No nercy~"하는 사람들을 상상하게 만드시네요ㅋㅋ 그 장면을 상상할수록 웃음이 나오네요ㅋㅋㅋ

  4. 최홍락 2019.07.01 1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서구 사상에 관용적인 왕과 그렇지 못한 귀족들의 구도로 보기에는 당시 18세기 러시아 상류사회의 언어가 프랑스어었다는 사실과는 배치가 되는 듯 합니다. 표트르1세의 친서구정책도 한몫했지만 그래서 성공을 거뒀다”고 말했다. 리슐리외 추기경이 1635년 언어 표준을 만들고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프랑스 아카데미를 창설한 이래 프랑스어는 통일된 표준이라는 개념이 발생한 첫 언어라는 인식이 러시아 상류사회에 널리 퍼졌거든요. 프랑스어가 서서히 라틴어를 몰아내고 외교가에서 널리 쓰인것도 이를 반영한 것이고요. 프랑스 대혁명 직후 프랑스를 탈출한 프랑스 귀족을 불러 과외교사로 삼는 러시아 귀족들 덕분에 프랑스 망명귀족들의 인기가 치솟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나마 러시아의 것을 지키고 러시아어를 쓰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나폴레옹 전쟁 때가 되서야 가능해진 일이라고 합니다. 일반 민중들이 러시아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귀족들을 백안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할정도로 말이지요.

    2. 러시아의 황제와 귀족 간의 대립은 미국의 남북전쟁의 배경과 유사하게 경제적인 갈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8세기 들어 영국과 러시아 간의 자유무역협정 체결 이래 러시아의 대외교역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육박할 정도였습니다. 영국의 해군력을 뒷받침하는 아마, 철광석, 석탄 그리고 러시아의 농노들이 생산하는 밀이 러시아의 주요 수출품이었으며, 영국은 면직물을 포함한 귀족들의 사치품을 수출했죠. 문제는 교역이 확대됨에 따라 러시아의 제조업자들이 성장하면서 이러한 불공정무역이 시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것입니다.

    앨리자베타 여제부터 알렉산드르 2세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황실은 농노제를 없애고 농노들을 공장의 노동자로 변환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지요. 그리고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관세율을 높이고 영국에 치중한 무역루트를 다변화시키려고도 하고요. 물론 농토를 가진 지주 계층들은 반발하게 되는데, 이들은 기존 제도의 유지, 자유무역의 고수를 주장하게 되고요. 마치 남북 전쟁 전의 북부와 남부처럼 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은 북부가 전쟁을 통해 남부를 제압한 반면, 러시아는 황제(파벨1세의 죽음에는 그의 교역 다변화 정책이라는 배경도 존재합니다.)가 암살되는 등 저항이 상당히 거셌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 제품의 수요처로서 영국을 대신할 수 있었다면 대륙봉쇄령이 의외로 오래갔을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고 이는 러시아 왕실과 귀족 모두 프랑스에 적대적으로 변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3. 스페란스키가 평민 출신의 입지전적인 인물이고 황제의 최측근인 것과는 별개로 그의 정책이 러시아에 미친 영향은 그다지ᆢ 앞에서 언급한 교역 다변화 정책의 일환으로 1811년 중립국 무역에 관한 규정을 공포하여 미국과의 교역 확대를 시도했으나 이는 결론적으로 미국을 통해 우회하여 영국과의 무역을 시도한 것으로 해석되어 나폴레옹의 진노를 사서 러시아 원정을 촉발하게 되지요. 그가 친프랑스파가 아니었더라도 이런 외교 상태를 가져온 정책의 책임을 물을 사람이 필요했던 상황이 스페란스키의 고문 해촉이 된 것이고요.

    스페란스키는 나중에 니콜라이1세 (알렉산드르1세의 동생으로 형 다음 왕위를 계승합니다.)에 의해 재기용되는데 이때 러시아의 법전을 재정비하게 됩니다. 이는 일정한 규범 없이 수행 되어온 국가 통치 질서에 명확한 기준과 원칙을 제공함으로써, 법에 의한 국정 운영을 가능케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광무개혁의 러시아 버전. 즉, 그 질서의 목포가 전제정 및 기존 봉건질서를 강화한 것이라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근대적인 기술 투자, 교육제도, 화페 통일 등이 이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강화되 러시아의 군사력은 유럽의 헌병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유럽에서 불거진 각종 혁명을 진압하는데 쓰이고 맙니다.

  5. 궁금한 사람 2019.07.01 1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혹시 알렉산드르의 아버지 파벨 1세의 사망원인은 뭔가요?

    어디서는 목이 졸려 죽었다
    어디서는 칼에 찔려 죽었다
    어디서는 금속상자에 맞아죽었다 하는 데 정확한 사인을 명시한 곳은 없네요

    죽은 건 확실한 거 같은데..

  6. 백군파 2019.07.01 2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통치에 긍정적인 점이 많았다는건 알고 있었지만,스페인 지식인들까지 거기에 동의할줄은 상상도 못했네요.오스트리아군이 나폴레옹 군대에 쓴맛을 본 이후 프랑스식으로 군제개혁을 해 부분적인 성공을 거둔 것처럼,러시아군은 나폴레옹의 침공 전에 정편과 개편을 통한 근대화를 추진한 적이 없나요?

    • 수비니우스 2019.07.01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이부분 관해서 아는게 없는데 추측으로는 웬지 없었을것 같네요. 오스트리아하고 프로이센이 본진을 몇번 탈탈 털리고서야 프랑스식으로 개혁했던걸 생각하면, 러시아 원정 전에는 본진이 당한 적은 없고 원정 때 모스크바는 함락됐지만 이후에 승리를 거듭했으니까 원정 전후로 딱히 개혁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했을것 같습니다. 러시아 근대화 추진이 크림전쟁때 털린 뒤지 않나요?? 언제 들어도 좋은 나시카님의 자세한 설명이 기다려집니다.

    • 최홍락 2019.07.01 2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스페란스키의 개혁이 반쪽짜리라고 평한 것과 연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요. 인적 자원 측면에 있어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귀족과 관리의 자녀들로 제한됐고 법률학교와 기술전문학교 등 중등교육기관은 꽤 늘었으나, 초등학교가 없었던 관계로 농민 내지 농노의 자녀들이 부모와 마찬가지로 문맹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군대나 산업이나 전술 내지 기술을 소화해낼 수 있는 실력있는 하사관이나 초급장교들이 충분한 숫자가 확보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됬던거죠. 시위 진압이나 약탈은 가능했을지 몰라도 동시대의 서구 국가의 정규군과 상대하는건 역부족이지 않았나 싶네요. 여기에 기술력이 뒷받침이 안되다보니 크림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도 도입했던 강선식 야포 대신 청동제 활강포를 쓸 정도였던 것도 한몫을 했고ᆢ

    • nasica 2019.07.02 19: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딱히 뚜렷한 것은 없었다고 저도 알고 있습니다. 1810~1812년 사이 드 톨리(de Tolly)와 볼콘스키(Volkonskii) 등의 주도 하에 프랑스식 편제를 도입했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만, 나폴레옹의 군단 편제처럼 획기적인 것은 없었습니다.

    • 최홍락 2019.07.04 08:1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볼콘스키 공작이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의 안드레이 볼콘스키의 모티브가 된 농민공작 세르게이 볼콘스키가 맞는지요?

    • nasica 2019.07.04 1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홍락// 말씀하시는 세르게이 볼콘스키는 당시 계급이 아직 대위인가 그래서 아닐 것이고, 이 양반이 그 양반일 겁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yotr_Mikhailovich_Volkonsky

  7. 웃자웃어 2019.07.02 0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그런데 나폴레옹이 아일라우 전투를 통해 광활한 동유럽에서는 자신의 전술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는데도 쳐들어간 이유가 뭐죠?

    • nasica 2019.07.02 19: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서 그때 경험을 되살려 엄청난 군수품을 준비하고 치중대를 편성했습니다. 문제는 그 당시 기술로는 그런 대군에게 장기간 군수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지요. 특히 한가지, 꼭 필요하지만 전혀 준비할 수가 없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다다음번에 본편으로 다루겠습니다.

  8. 중산 2019.07.02 2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재밌게 구독하고있습니다. 나시카님 혹시 괜찮다면 나시카님의 글을 퍼가도 될까요? 출저는 꼭 명시해 놓겠습니다

  9. 알타리무 2019.07.03 2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총칼은 황금을 이기지 못한다고 믿으시는데,

    왜 규제와 제도는 황금을 이긴다고 믿으시는지....?

    • 수비니우스 2019.07.04 0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박근혜보다 수준이 높지않아서 비판 안하셨던 우리 알타리무님! 시간이 없어서 자신의 블로그도 방치하고 공부도 못하시는데 여기서 길게 쓰실 시간은 있으시다는 점 십분 이해합니다.
      출처는 제시못하지만 저 사람이 공산주의자라는 모습은 마치 조지프 매카시가 환생한듯 했습니다. 참 멋지십니다. 일본어 기초는 떼셨나요? 10년쯤 지나면 아카사타는 아실까 모르겠습니다.

    • 0_- 2019.07.06 15:54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기저기 댓글창에서 열일하시는 알타리무님, 어디서나 까이시는게 참 보기 좋습니다 ^^
      https://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34894

    • ㅠㅠ 2019.07.06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억만년만에 날카로운 지적을 했네요
      ㅋㅋㅋ
      근데 평소 적을 많이 만들어 놔서인지 호응이 없군요.

      어쨋건 알타리무님이 정곡을 찌르는 건 처음 봅니다.

      그 질문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답은..
      제가 볼 땐 여기 주인장도 바로 님처럼 교조주의자이기 때문이죠.

      님은 시장만능교조주의자이자 본인의견과 다르면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주인장은 진보라고 이름 붙은 것은 절대선이요 신성불가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10. 웃자웃어 2019.07.14 16: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러시아가 절대왕정체제의 전제군주정 이라곤 해도 귀족 여러명 족치는건 가능해도 귀족집단 전체를 족치는건 불가능하단겁니까?

    • nasica 2019.07.14 18: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요, 그게 그때그때 달랐겠지요. 확실한 것은 알렉산드르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귀족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