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링턴은 포르투갈에 상륙하자마자 곧 이베리아 반도의 지형적, 그리고 사회적 특수성이 영국은 물론 프랑스나 독일 등 기타 유럽 지역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큰 특징으로, 제대로 된 길이 없었습니다 !  이는 스페인의 침공 위협 때문에라도 스페인과의 교통로를 적극 개발하지 않았던 포르투갈의 특수성에도 기인했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나 모두 산업과 통상의 발달이 부진했다는 점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지역간에 거래를 할 상품이 없다보니 마차가 다닐 일도 없고, 마차가 다닐 일이 없으니 넓직한 길이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스페인은 지역 감정이 꽤 심한 나라여서 지방 간의 인적 왕래도 그다지 많지 않다보니, 더더욱 내륙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교통망에 더해,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건조한 편이라서 농업 생산량이 그렇게 풍요롭지는 않았습니다.  이탈리아나 독일의 농가들은 어지간한 농가의 창고문만 걷어차도 밀과 보리, 달걀이 쏟아져 나왔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포르투갈은 척박한 스페인과 대비했을 때조차도 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원래 현지 조달에 의존했던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도 쫄쫄 굶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온 지역이 이렇게 가난하다보니,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어려웠지요.  




(보시다시피 이베리아 반도의 상당 부분이 산지이거나 메마른 지대라서, 농업에 적절한 곳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지금도 스페인은 올리브유 생산이 매우 활발한 나라입니다만, 그건 반대로 곡물 농사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지대라는 반증입니다.)




현지 조달이 어려우면 본국에서 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베리아 반도의 열악한 내륙 교통망이 발목을 잡습니다.  가뜩이나 프랑스 본토와 스페인 사이에 피레네 산맥이 있는 것도 장애가 되었는데, 해안길을 통해서라도 수송대가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한 뒤부터가 진짜 고생길이었던 것입니다.  세계 지도에서 보면 스페인은 프랑스나 독일에 비하면 별로 큰 땅덩어리처럼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건 메르카토르 도법의 특성상 남쪽에 있는 땅이 좁아보이는 것입니다.  프랑스가 64만 평방 km인 것에 비해 스페인이 50만 평방 km으로서, 스페인은 굉장히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탄한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 높은 산맥과 언덕이 많은 땅이지요.  길도 제대로 없는 그런 땅을 가로질러 20만 대군이 먹을 식량을 마차로 수송한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그런 도전은 스페인의 게릴라들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경우, 이베리아 땅이 반도이니만큼 그냥 해상으로 수송한 뒤 내륙으로 운송하면 훨씬 일이 쉬워질 것입니다.  문제는 영국의 저 망할 로열 네이비 때문에 그게 불가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온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현지 조달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는 수탈당하는 스페인 민중들에게도 큰 비극이었지만 약탈하는 프랑스군에게도 무척 고단한 일이었습니다.  만명 단위의 대군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 그 일대의 식량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게 됩니다.  프랑스군이 먹어치우는 것도 있지만, 그 일대의 농민들이 식량을 감추거나 떠나버리기 때문이었지요.  결국 프랑스군은 한 곳에서 1주일 이상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굶지 않으려고 먹을 것을 찾아 끊임없이 유랑하는 거지떼 내지는 떼강도 신세가 된 것이지요.  군사 작전이라는 것에서 이동이 잦을 수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적을 압박하거나 반대로 피하기 위해서이지 굶지 않기 위해서 이동하는 군대에게는 작전의 유연성이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스페인에 투입된 근 20만에 가까운 프랑스군 대부분은 먹을 것을 찾아 이동 중이거나, 분산되어 먹을 것을 약탈 중이거나, 혹은 신기루 같은 게릴라들의 뒤를 쫓아 산 속을 헤매면서 세월을 낭비해야 했고, 실제로 영국군이나 스페인군과의 전투에 투입되는 프랑스군은 그 1/4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웰링턴은 유능한 지휘관답게, 이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영국군이 10만 단위의 대군으로 되어 있는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군량 조달을 가장 유용한 무기로 삼아야 한다고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조건은 비슷했습니다.  길이 형편 없는 것도 똑같았고, 바닷길을 이용할 수 없는 것도 같았습니다.  스페인의 주요 항구들이 대부분 프랑스군 손아귀에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식량을 수송해올 거리는 영국 측이 훨씬 멀었습니다.  영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거리가 프랑스와 스페인의 거리보다 멀었고, 그나마 영국 본토도 대륙 봉쇄령으로 인해 식량난이 심해져서 밀과 빵값이 오르는 등 난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규모로 식량을 포르투갈에 보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미국과 남미, 오스만 투르크, 심지어 북아프리카 모로코 등지에서 식량을 구매하여 포르투갈로 실어날랐습니다.




(혼블로워 시리즈 중에서 (실제 소설이 씌여진 순서는 아니지만) 첫번째 편인 Mr. Midmanship Hornblower는 혼블러워의 사관후보생 시절을 그린 옴니버스식 소설입니다.  그 중 한 에피소드가, 식량으로 소를 사러 북아프리카 이슬람 지역에 들어갔다가 전염병에 휘말려 격리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영국군 병참부에게 진짜 고난은 포르투갈 해변에 온갖 보급품이 잔뜩 쌓이는 바로 그 순간부터였습니다.  1808년 8월, 당시 쥐노가 점거하고 있던 포르투갈을 탈환하기 위해 웰슬리가 포르투갈 마세이라(Maceira) 만에 상륙했을 때, 전에 언급한 샤우만(August Friedrich Ludolph Schaumann)이라는 이름의 독일 출신 병참 장교에게 주어진 임무는 터무니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조수도 부하도 없이 혼자서, 그저 공책 한권을 주고는 해변 여기저기에 야적된 수많은 보급품 더미를 조사하여 목록을 작성한 뒤 이제 내륙으로 진격할 영국군 부대를 따라 수송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샤우만이 그런 업무에 숙련된 병참 장교였는가 하면 그게 또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랑스군의 하노버 침공 이전에 하노버 군에서 몇년 장교로 복무했다가 퇴역한 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 장부 작성 등의 업무를 좀 해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영국군 소속 독일군 전투 부대인 KGL 제7 연대 소속의 평범한 장교였고, KGL 장교로서는 승진과 연금의 비전이 없다고 보고 일당 7.5 실링(현재 가치로 대략 9만5천원)의 급여를 위해 병참 장교로 자리를 옮긴 아마추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아무런 지침이나 교본이 없었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The British Commissary'(영국 병참부)라는 멋대가리없는 제목의 책이 한권 있었는데, 이는 메서리어(Havilland le Mesurier)라는 이름의 영국인이 쓴 것으로서, 당시 영국군 병참부 직원들에게는 수학의 정석이나 다름없는 책이었습니다.  메서리어는 원래 해외 무역업자였다가 프랑스 혁명정부와 영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1793년부터 네덜란드 방면 영국군 원정대에 딸린 병참 장교 역할을 했습니다.  1794년에서 그 다음해까지 벌어진 이 방면 전투에서 영국군은 형편없는 성과만 냈을 뿐이었지만, 정말 아무 준비도 안 되어있던 영국군 병참부는 이 난리통 속에서 그나마 나름 경험과 수완을 쌓았던 모양입니다.  그 이후에도 메서리어는 병참부 장교직을 사직했다 복직했다 했는데, 영국군 병참부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은 저 'The British Commissary'라는 책을 저술한 것이었습니다.  




(메서리어의 'The British Commissary'입니다.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책입니다만, 저는 못 읽어보았습니다.)




그런 교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포르투갈에서의 영국군 병참부는 초기에 극심한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참부는 힘만 들고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노동일을 하는 부서라는 인식이 강하고 실제로도 그랬던 것만큼, 빛나는 전통이고 뭐고가 없었던 것입니다.  달랑 책 한 권을 손에 든 경험 없는 병참부 장교들도 막대한 보급품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사실은 병참부 소속 장교들은 진짜 장교도 아니었습니다.  병참부는 군의 일부가 아니라, 재무부의 감독과 지시를 받는 파견직 민간인들이었거든요.  따라서 deputy commissary-general이니 assistant deputy commissary-general이니 하는 것들은 진짜 장군이 아닌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말단 사병들이 경례를 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민간인 정부 관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장교들과 엇비슷한, 그러나 분명히 차이가 나는 군복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권총과 군도와 같은 무기도 휴대했습니다.  병사들은 '저것들은 장교 비슷한 군복은 입었지만 장교가 아니며,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와 함께 싸우지 않고 후방으로 도망친다'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전투가 벌어지면 적지 않은 경우 무기를 들고 프랑스군과의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이처럼 아군에게 저평가되었지만, 사실 이들의 업무는 제1선 장교들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우며 개인적인 창의성과 수완, 용기와 기지를 발휘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전투 현장에서 대포알과 머스켓 탄환에 노출된 채 병사들을 이끌고 전진할 때, 멋진 붉은 제복을 입은 장교가 부릴 수 있는 재주는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저 운이 좋은 자는 살아서 전진할 수 있는 것이고, 운이 나쁜 자는 대포알에 두동강이 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흙탕 길에 바퀴가 빠진 무거운 수레를 어떻게 빼낼 것인지, 수송에 3일 걸리는 건빵 자루 더미들을 어떻게 2일 안에 최전방까지 나를 것인지, 가진 돈은 50쉴링 밖에 없는데 일당 1쉴링을 요구하는 노새 30마리를 어떻게 3일 동안 빌릴 것인지 등은 그야말로 담당 직원의 역량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성공과 실패에 따라 전투의 승패가 뒤바뀔 수 있는 일이었지요.  그런데도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밀가루 자루를 실은 노새들을 끌고 최전선 부대에 도착한 병참부 장교에게 주어지는 것은 '왜 이리 늦게 왔냐' '왜 보급품이 이것 밖에 없는가' 등의 핀잔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병참부는 체계화가 꼭 필요한, 나름대로 무척 섬세하고 정밀한 병과입니다.  가령 포르투갈을 통해 상륙하는 영국군 병사들의 행군에 대해 웰링턴이 병참감(Commissary General)인 케네디(Sir Robert Hugh Kennedy)에게 보낸 지시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들어있습니다.


"상륙하는 부대는 각자 4일치의 빵과 2일치의 고기를 휴대한다.  병사들이 휴대하는 빵 외에, 1만 명의 3일치 빵을 수송해야 하는데, 가능하다면 노새를 이용해 날라야 한다.  각 노새에는 2개의 자루, 즉 224파운드의 짐을 실을 수 있으므로 전체를 위해서는 130마리의 노새가 필요하다."


이 계산은 꽤 합리적입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의 배식량은 하루에 빵 1파운드였는데, 1만 명의 3일치라면 3만 파운드입니다.  224파운드를 실을 수 있는 노새를 130마리 동원한다면 224 * 130 = 29,120 파운드이므로, 1인당 0.97 파운드씩의 빵을 3일간 보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계산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노새가 먹을 사료는 계산에 넣지 않았쟎습니까 ?  노새는 하루에 10파운드의 곡물을 먹어야 했고, 병사들이 3일 행군하는 것을 따라 나섰다가 다시 보급품이 쌓여있는 항구로 되돌아오려면 왕복에 6일이 걸렸으므로, 노새 1마리가 싣는 224 파운드 중 최소 60파운드의 곡물은 노새가 먹어치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즉, 130마리의 노새의 실제 수송량은 29,120 파운드가 아니라 21,320 파운드였고, 병사들은 3일간 0.97 파운드가 아닌 0.7 파운드라는 부실한 양의 빵을 받아야 했습니다.




(도로망이 형편없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노새들을 이용한 보급품 수송이 정말 최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미숙하기 짝이 없었던 영국군 병참부도 2년 정도에 걸쳐 노새꾼들과 노새들을 고용하여 운용을 하면서 경험이 쌓여, 그 고용 및 활용, 급여 지급 등 온갖 자질구레한 잡무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실은 총사령관인 웰링턴 장군이 이런 노새 한마리가 몇 파운드의 짐을 싣을 수 있으며 그래서 몇 마리의 노새가 필요한지에 대해 계산하여 병참감에게 보내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한 일이기는 합니다.  이런 편지는 오히려 반대로 병참감이 원정군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형태로 보내는 것이 맞겠지요.  당시 웰링턴은 병참부 장교들과 서기들의 무능력에 대해 짜증이 잔뜩 난 상황이었는데,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샤우만을 포함한 대부분의 병참 장교들이 별다른 병참 업무 경험도 없이 새로 채용된 사람들이다보니 워낙 아는 것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군 병참부는 웰링턴 하에서 혁혁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총사령관 웰링턴이 직접 나서서 '가장 신경써야 하는 부서'라고 지목하면서, 저렇게 노새 몇 마리가 필요하다는 계산까지 세세히 해줄 정도였으니 당연히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특히 1810년 10월부터 다음해 초까지의 대치 끝에 토헤스 베드하스(Torres Vedras) 방어선 앞에 마세나의 프랑스군을 후퇴시킨 승리는 사전에 충분한 군량을 비축해놓은 영국군 병참부가 아니었다면 절대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아무도 병참부의 공로를 알아주지 않았지요.  이 사실은 웰링턴 휘하 어지간한 장군들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 등의 인터넷 사이트에 많은 정보가 있는 것에 비해, 웰링턴 휘하의 전체 병참부 책임자였던 케네디(Sir Robert Hugh Kennedy)에 대해서는 정말 정보가 없다는 것으로도 반증됩니다.  오히려 영국군 병참부의 위력과 중요성을 잘 알고 두려워했던 것은 적군인 프랑스군이었습니다.  1812년 웰링턴과 대치했던 마르몽(Marmont) 원수는 나폴레옹에게 이와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웰링턴은 제게 보급품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광활한 척박함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마르몽은 유난히 영국군의 노새 부대에 대해 넋두리를 많이 늘어놓았습니다.  1811년에도 그는 나폴레옹의 참모장 베르티에에게 편지를 써서 '영국군은 노새 1만2천 마리를 이용하여 너무나 쉽게 이동한다, 그러니 내게 단 1천2백 마리라도 노새를 좀 공급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개성을 가지고 사람과 소통하는 용들이 등장하는 나오미 노빅의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 '테메레르'에 대해 전에 언급했던 적이 있지요.  대포의 시대라고 해도 그런 거대한 용들 수백 마리로 구성된 군대가 있다면 아마 천하무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용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거대한 용들에게 먹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도 일종의 용이었습니다.  그 대군을 일거에 밀어넣으면 스페인 정도야 순식간에 휩쓸어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군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에 대한 답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지요.  영국군이 소수로도 내노라하는 나폴레옹의 부하들을 차례로 꺾고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낸 것은 바로 그 문제를 잘 해결했기 때문이었고, 그 핵심에는 영국의 병참부가 있었습니다.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https://en.wikipedia.org/wiki/Glacis

https://en.wikipedia.org/wiki/Havilland_Le_Mesur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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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ithel 2019.02.18 0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샤프가 텐트 노새 계산하던게 생각나네요.
    아참, 테메레르의 작가는 나오미 노빅입니다.

  2. TheK의 추천영화 2019.02.18 0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하편이네요. 지금 버스에서 내려야 해서 쟁여놓았다 봐야겠네요. ^ㅇ^*

  3. 카를대공 2019.02.18 1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길이 없다,산지,건조한 기후
    이거 남 얘기 같지가 않군요.

    대대로 한반도의 기후나 지형이 풍요로운 땅과는 거리가 멀었죠.
    알면 알수록 왜 옆나라들에 치이고 살았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 Spitfire 2019.02.26 1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반도가 곡창지대에 비하면 살기가 어려웠겠지만 주변국가들에 비해 풍요롭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의 국가들이 자주 침입을 한 것이지요. 도둑은 부잣집을 털지, 거지를 털지 않습니다.ㅎㅎ

  4. TheK의 추천영화 2019.02.18 1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랬군요. 영국이 승리한 이유가.
    역시 전쟁에선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끔 알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ㅇ^*

  5. 인간늑대 2019.02.18 1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재미있는 글.
    감사합니다.

  6. 지나가다 2019.02.18 21: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들은 항상 전투의 화려함에 주목하지만 그 뒤에서 스폿 라이트도 받지 못하고 개고생 하면서 물자를 날라주는 보급부대에는 대부분 관심이 없지요.
    사실 어느 회사에서 근무하던지간에 영업과 같은 일선부서 직원들이 평가나 급여 및 상여에서 항상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방면 지원부서는 돈한푼 못벌고 쓰기만 한다며 갈굼당하기 일쑤인 것 같습니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린다고, 유사시를 대비해서 지원부서도 항상 적정한 유지및 관리가 들어가야 될텐데 말이죠...쩝.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7. 인퀴지터 2019.02.18 2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나 한심한 책이라 나폴레옹 매니아께서 거론할줄 예상도 못했습니다. 테메레르는.

  8. 유애경 2019.02.18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뭔가, 식량을 바닥내고 지나가는 프랑스군 에게서 , 머문자리를 초토화 시키고 지나가는 메뚜기떼를 연상하게 되네요.


  9. reinhardt100 2019.02.19 0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 저번에 한 번 언급했지만 20만 대군을 일거에 쏟아부어서 전선을 정리했어야 했다는 제 개인의 의견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복수의 보급선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프랑스 제국 단독으로 하기는 어려울거고 라인동맹이나 이탈리아 왕국 등의 실질적인 속국의 여력을 모두 동원해야 가능하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또한, 실질적으로 20만 대군을 영국군과의 전장에 투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만한 보급선 경비 병력이 또 필요하다는 것인데 사실 나시카님 말씀대로 이 정도 병력을 이베리아반도에 쏟아붓는 것은 다른 속국들을 방기하다 시피해야 한다는 점에서 도박인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할 건 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승산이 없는건 아니고 하나의 문제만 해결되면 절반 이상의 확률로 전쟁 전체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이베리아 전쟁을 승산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분리독립주의가 강했던 바스크, 아스투리아스, 갈리시아, 카탈루냐등을 전방 보급을 위한 배후지역으로 확보한 후 이 지역들에서 출발하는 간선도로망을 모두 확보합니다. 이후, 카탈루냐에서는 아라곤 및 발렌시아, 바스크-아스투리아스-갈리시아 전역을 석권한 후 카탈루냐-타라코나 및 사라고사-발렌시아 축선에서는 무르시아-카르타헤나를 공략 후, 지브롤터를 고립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카디스 혹은 리스본까지 지중해 연안 및 주변 내륙 전역을 점령해야 한다는 겁니다. 반면, 북부에서 출발하는 프랑스군은 부르고스-바야돌리드-살라망카까지 1차적으로 공략한 후, 마드리드를 고립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후, 메리다를 공략, 메리다-바다호스-리스본 공략을 순차적으로 이어가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점령하는 방식으로 갔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작전에서 전체 총병력은 프랑스군 공격군으로 24만 이상, 보급선 경비병력 최소 12만이며 이외 동맹군인 이탈리아왕국군, 라인동맹군, 스위스군 등을 합쳐 최소 10만 이상을 투입하며 작전 기간은 총3년, 동원 각종 야포 및 공성포 총 2천 문, 각 부대별 상비 비상식량을 최소 한 달분(러시아원정기 나폴레옹이 준비한 비상식량분 기준) 등의 보급역량을 갖추고 임한다는 가정하에 생각해본 겁니다.

  10. Spitfire 2019.02.19 1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베리아 반도의 척박하고 험준함을 들으니 일생의 목표인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고 싶어지네요~ 저길 걸었던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을지 궁금합니다.ㅎㅎ

  11. 웃자웃어 2019.02.19 2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급의 중요성이 입증되는 글이군요.

  12. 리틀락 2019.03.08 11: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은 경제력으로 하는거군요. 그렇게 무역을 중시했던 영국이 브렉시트 하는걸 보면 웃음이 납니다 ㅋㅋㅋ 대영제국의 영광을 되찾자는 자들이 경제관념은 바닥이네요



(흔히 단순한 축성 전문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 분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17세기부터 2백년간 요새와 포병, 병참, 병력 운영 등 모든 전쟁 양상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그야말로 위풍당당 보방(Sébastien Le Prestre de Vauban) 백작입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지의 군사 요충지에 일찌기 보지 못했던 묘한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당대 유럽의 군사 작전 행태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보방(Vauban)식 요새의 등장이었습니다.  대포의 발명과 함께 무용지물이 되었던 중세식의 높고 웅장한 성벽과는 달리, 보방식 요새는 낮고 두꺼운 벽으로 된 보루(redoubt)와 쐐기 모양의 옹벽(ravelin), 그리고 대포알을 튕겨내기 위한 경사방벽(glacis) 등을 갖춘, 한마디로 방탄벽을 갖춘 요새였습니다.  이런 별모양의 보방식 요새는 17세기 프랑스의 공병 전문가 보방(Sebastien Le Prestre de Vauban, Seigneur de Vauban)에 의해 획기적으로 개선된 뒤 17세기에 걸쳐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가면서, 군사 작전의 형태가 군사작전의 형태가 대규모 회전보다는 요새를 둘러싼 포위전으로 변질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경사방벽이란 요새방벽을 둘러싼 해자 바로 바깥쪽에 흙으로 두툼하게 쌓아놓은 방벽이었습니다.  포위군이 요새방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쏘아대는 포탄 상당수가 이 경사방벽에 튕겨져 나갔습니다.)


(경사방벽이 포위군의 포병들에게 얼마나 미치고 환장할 방어수단인지 보여주는 구조도입니다.  포위군은 요새방벽을 대포알로 때려 무너뜨리길 원하겠지만, 요새방벽은 깊은 해자와 경사방벽으로 인해 공성포에게는 지극히 작은 표적이 되었고, 맞추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방벽 위의 수비군은 적군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고요.)



(레만 Lehman 호수 서쪽 끝부분에 위치한 제네바 Geneva를 둘러싼 보방식 방벽의 모습입니다.  이 지도는 1841년의 모습인데, 지금 저 방벽은 헐리고 없습니다.)




전쟁의 형태가 장기간의 포위전이 되어버리자, 당장 문제가 발생한 것이 군대의 식량 조달이었습니다.  아무리 종군상인들이 부지런히 왔다갔다 한다고 해도, 종군 상인 몇몇에게 전부대가 먹을 밀가루와 빵을 의존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또 너무 비쌌습니다.  결국 군량 중 상당부분은 주변 농가들로부터 징발을 하거나 약탈을 통해 구해야 했는데, 수만 명의 포위군이 적 요새를 둘러싸고 근처에 몇 달 버티면 그 주변 일대의 식량은 씨가 말라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식량을 더 구할 수 없으면 포위를 유지할 수 없었고, 이는 곧 포위전의 패배를 뜻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제를 개편한 나라는 역시 유럽의 육군 강국이자 가장 많은 침공 전쟁을 치른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가장 많은 보방식 요새를 구축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적 요새를 가장 많이 공격한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17세기 중반에 삼총사에 나오는 유명한 추기경이자 정치인인 마자랭(Jules Mazarin)의 부하인 국방장관 르 틀리에(Michel Le Tellier)는 근대 유럽 세계 거의 최초로 국가 차원에서 병참 업무 개혁을 손보기 시작했니다.  기존에는 각 연대장들의 재량에 따라 그때그때 제멋대로 맺어졌던 종군상인들과의 계약을 표준화하여 좀더 체계적이고 원활하게 보급이 이루어지도록 했고, 여태까지 하찮고 천하게 여기던 수송 업무에도 신경을 써서 짐수레 부대도 상설화했습니다.  무엇보다 전투 지역 인근에 보급창을 세워 군량을 미리 축적하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이 분이 르 틀리에입니다.  이 분은 리셜리외의 뒤를 이은 추기경+재상인 마자랭에게 평생 충성했고, 또 루이 14세를 꼬드겨 프랑스 내의 신교도인 위그노들을 탄압하는데도 앞장섰습니다.  덕분에 프랑스의 국가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는데 꽤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르 틀리에 본인은 끝까지 잘 살았고, 아들인 루부아 Louvois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방장관직에 올랐습니다.)



(르 틀리에의 병참 개혁이 큰 도움이 되었던 1658년 덩케르크 Dinkirk 포위 작전도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고 스페인 및 영국 왕당파 연합군이 점거한 덩케르크를 포위 공격한 전투입니다.  결국 영불 연합군이 덩케르크를 함락시켰습니다.)




물론 이런 개선은 여전히 미흡했고, 전선의 많은 부대들은 계속 약탈과 현지 징발에 의존했으며, 덕분에 프랑스군은 여전히 배가 고팠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여 프랑스군의 병참 능력은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우수해졌고, 이는 결국 나폴레옹의 기동전과 맞물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패하는데 큰 힘이 됩니다.  나폴레옹 기동전의 근원은 식량의 현지 조달이었는데, 이는 유능한 병참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809년 제5차 대불동맹전쟁 때는 오스트리아군도 프랑스군의 흉내를 내어 식량의 현지 조달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 병참부의 역량이 프랑스군보다 훨씬 뒤떨어졌던 것이지요.  '현지 조달'이라는 것이 꼭 약탈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무자비한 약탈로 당장 먹을 것을 손에 쥔 굶주린 병사들이 자기들 몇몇끼리만 배부르게 먹고 마시는 것을 막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수집한 식량을 재빠르게 계량하고 보관하고 수송하여 넓은 곳에 분산된 아군 병력에게 효율적이고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질구레한 실무 능력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마 나폴레옹이 말단 병참부 서기들을 모아놓고 그렇게 밀가루와 와인 항아리를 다루는 법을 일일이 가르쳤겠습니까 ?  프랑스군 병참부는 르 틀리에 시절부터 근 100년 넘게 다른 나라 군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실무 능력을 쌓아왔었고, 나폴레옹이 그 혜택을 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바다 건너 영국은 나폴레옹 시대 100년 전부터 유럽 대륙은 물론 아프리카와 아시아, 북미와 카리브해 등 전세계를 지역구로 활발한 침략 전쟁과 식민지 운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원거리에 걸친 병력과 장비, 식량과 탄약의 수송에 있어 굉장히 전문화된 체계를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해군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육군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그런 병참 업무의 체계화가 보잘 것 없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1808년 포르투갈에 상륙한 웰링턴이 상륙 1주일 후 국방부 장관인 캐슬레이 경(Lord Castlereagh)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장 불평한 것이 병참 업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진격시 제가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은 바로 병참부(Commissariat)의 체계화입니다.  이 부서는 장관님의 심각한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이 병참부는 웰링턴의 사령부에 있던 다른 지원 부서들, 즉 의무부(Medical Department), 조달부(Purveyor's Department, 이름과는 달리 병원기자재와 사망자 처리를 담당), 경리부(Paymaster-General), 자재부(Storekeeper-General, 역시 이름과는 달리 주로 장비와 텐트 등의 수송을 담당) 등과 함께 민간인으로 구성된 부서였습니다.  다만, 병참부는 다른 지원 부서들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이들 부서 중에서 유일하게 그 부서장이 런던의 재무부(His Majesty’s Treasury)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차이는 웰링턴이 보낸 편지에 나오는 것과 같이, 모든 지원 부서 중에서 병참부의 업무가 군사 작전의 성패에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리스본으로 선적된 건빵 한 개가 최전선의 병사의 입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전체 과정을 상세히 보살피고 추적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수행될 수 있는 군사 작전은 하나도 없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이 나폴레옹을 격파하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이 둘의 군사적 역량 차이는 누가 봐도 나폴레옹이 두 단계는 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웰링턴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밀어낼 수 있었던 것은 웰링턴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실속있는' 스타일의 지휘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웰링턴이 이렇게 병참부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랬습니다.  원래 웰링턴이 병참 업무가 주특기였기 떄문에 그랬을까요 ?  웰링턴은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하기 전에는 인도와 덴마크에서 활약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도 이렇게 병참부를 중시했을까요 ?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웰링턴이 뜬금없이 병참부의 열성팬이 된 것은 이베리아 반도의 특수성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그 특수성이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



(이번에는 좀 너무 짧군요.  분량 조절 실패로 병참부 이야기는 3부에 걸쳐 늘어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T T)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https://en.wikipedia.org/wiki/Glac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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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석총 2019.02.11 0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떻게 깨달았을까?

  2. 지나가던 사람 2019.02.11 1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삼총사에 마자랭이 나오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철가면이라면 등장할 시기이긴 합니다만... 삼총사의 악역 비슷한 포지션이면 마자랭의 전임자인 리슐리외 추기경입니다.

  3. 루나 2019.02.11 16: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방식 요새가 전쟁 양상을 변화시키는 데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끼쳤네요

  4. 수비니우스 2019.02.11 17: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덕분에 프랑스의 국가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는데 꽤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에서 뻥터졌습니다 ㅋㅋㅋㅋ

  5. 카를대공 2019.02.11 2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길어져도 생각보다 병참 이야기가 무척 흥미진진한데요?
    역시 나시카님 글빨(?) 덕이 아닐까 합니다ㅎㅎ

    중간에 실무 능력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요즘 들어 이쪽에 대해 많이 생각 합니다.

    언젠가부터 여기저기서 큰 그림에 대해 강조하는데 오히려 실무 능력에 대해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눈 앞에 것만 잘 해결해도 자연히 큰 그림이 잘 그려지는 경우가 많던데 이쪽을 강조하는 사람이 없는건 아쉽더군요.

  6. ㅇㅇ 2019.04.17 1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 점이 몇가지 있습니다.
    1. 현지조달 그러니까 약탈이 병참부의 발전과 어떻게 연관이 있나요?
    2. 보방형 요새가 나폴레옹이 보여준 화려한 야전으로 바뀌어간 이유가 무엇인가요?



샤우만(August Friedrich Ludolph Schaumann)이라는 분이 쓴 회고록이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영국군 작전에 대한 귀중한 사료로 곧잘 인용됩니다.  이 샤우만이라는 분은 1778년 독일 하노버(Hanover)에서 태어난 순수 독일인으로서, 귀족 가문 출신의 신사였습니다.  영국 왕의 개인 영지이자 독립국이었던 하노버 공국의 군대에서 16세부터 21세까지 장교로 근무했던 샤우만은 원래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은 모르티에(Adolphe Edouard Casimir Joseph Mortier)의 1803년 하노버 점령을 계기로, 영국군 산하 왕립 독일군(The King's German Legion, KGL)에 가담하여 프랑스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1816년 나폴레옹 전쟁이 완전히 끝난 뒤 고향 하노버로 금의환향하는 KGL 병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분의 회고록을 보면 묘한 부분이 나옵니다.  그는 원래 KGL 제7 대대 소속의 장교였다가 병참부(commissariat)으로 일했습니다.  제7 대대에는 개인 사정으로 일종의 휴가를 낸 상태로요.  병참부에서는 그의 일처리 솜씨가 마음에 들었던지 병참감 대리(Acting Commisary-General)로의 승진을 제시했는데, 샤우만은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제7 대대에 사직서를 내고 정식으로 병참부 소속으로 이직하는 것이 어떨까 하고 고민합니다.  샤우만의 고민은 일종의 외인부대인 KGL 부대 소속의 장교직은 영국군 입장에서는 정규 장교직이 아닌지라, 제대 후에도 영국 정부로부터 연금(half-pay)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직업 군인의 최대 장점은 연금이었던 모양입니다.  친구들도 그렇게 권유했기 때문에, 결국 샤우만은 KGL 제7 대대에 사직서를 내고 영국군 병참부에 정식으로 자리를 얻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운칠기삼이라고, 샤우만의 이 결정은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정식으로 취업을 하고나자, 병참부에서는 말을 바꾸어 전에 제시했던 승진을 걷어들이고 샤우만이 병참감 보조 대리(Deputy-Assistant Commisary-General)라는 말단직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결정 사항을 통보했습니다.  게다가 더 나중의 일이긴 했지만 영국 의회에서는 KGL의 모든 장교들에게 영국 정규 장교들과 동일한 연금을 지급하기로 의결하여, 샤우만으로 하여금 자신의 결정에 땅을 치며 후회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점이 있습니다.  병참부도 군대 아니던가요 ?  왜 KGL이라는 전투부대에서 병참부라는 수송부대로 자리를 옮기는데 사직서를 제출하고 계급이 바뀌는 등의 일이 일어나야 했을까요 ?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현대적인 군대와는 달리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만 해도 병참 장교들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 신분이었습니다.  고대로부터 군의 보급은 군이 직접 수행하지 않았거든요.  정규군 장교가 병참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의 일입니다.  


원래 무기가 없는 군대는 존재해도 군량이 없는 군대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3일 이상 굶으면 모두 탈영해버리거나 죽어버릴테니까요.  이처럼 군대의 식량 보급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는데도 병참은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업무로 취급되어 등한시되었고 상당히 원시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모두들 번쩍이는 갑옷과 날카로운 칼을 들고 깃발을 펄럭이는 일을 하고 싶어했으며, 냄새나는 농부들로부터 밀과 보리를 사들이거나 빼앗고 소와 돼지를 몰고 다니는 것은 창피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업무는 고귀한 귀족 출신 군인들이 하지 않고 천한 장사치들, 즉 민간에게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시적인 화승총(matchlock musket)을 들고 16세기 유럽 전장을 누비던 병사들의 식사 시간은 요즘 군대와는 꽤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군함에서나 육상 부대에서나, 병사들이 조를 짜서 스스로 취사를 했다는 것은 이미 다들 아실 겁니다.  문제는 그 취사 재료로 쓰일 밀가루와 콩, 고기 등을 누구에서 받느냐 하는 것인데, 이걸 민간인 군납업자에게서 샀습니다.  군에서는 병사들에게 급료를 지불할 뿐, 식량은 그 돈으로 알아서 사먹어야 했던 것입니다.  대포알이 날아다니고 기병대가 칼을 꼬나들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전장에 민간인 장사꾼이 따라다녔다고요 ?  예, 돈이 된다면 그 정도의 위험은 얼마든지 감수할 장사꾼들이 많았습니다.  




(종군상인 하면 아마 만화영화 '에어리어 88'의 무기상인 맥코이 영감님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에도 맥코이 영감님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종군상인의 취급 품목은 빵과 술, 군화와 의류, 종이, 잉크 등의 잡다한 생필품류가 대부분이었고, 정작 탄약과 포탄 등 무기류의 보급은 당시에도 민간 병참부가 아니라 정부 기관인 군수위원회(Board of Ordnance)에서 담당했습니다.  빵과 럼주는 그렇다쳐도 대포와 탄약류를 민간인에게 맡길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당시 민간인이 식량을 잔뜩 실은 마차를 끌고 전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은 사자떼 옆에서 돼지가 어슬렁거리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습니다.  가뜩이나 난폭하고 배고픈데다 약탈과 살인을 밥먹듯이 저지르는 병사들이 그 마차 주인에게 공손하게 가격을 흥정한 뒤 돈을 지불하고 먹을 것을 받아갈 확률보다는, 주인을 흠씬 두들겨패고 마차 통째로 빼앗아갈 확률이 훨씬 더 컸습니다.  


그러나 군대에게 식량과 기타 생활용품을 팔고 싶어하는 민간업자들을 그렇게 험하게 다룬다면 그 부대는 머지 않아 굶어죽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어떤 장사꾼도 그 부대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런 일은 실제로 종종 발생했습니다.  가령 제7차 십자군을 이끌고 1249년 이집트에 상륙하여 다이에타(Damietta)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프랑스왕 루이 9세(Louis IX)도 이탈리아나 레반트 등지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상인들의 협조를 받아가며 원정의 보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미에타 점령 이후 불시에 일어난 (사실 예정되어 있었으나 십자군 지휘부의 무지함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나일강의 범람으로 몇 개월간 진격로가 막히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술과 연회를 벌이며 지루함을 달래던 기사들이 원정 초기의 긴장감이 풀리자 상인들을 함부로 학대하고 물건을 갈취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자 하나둘씩 종군 상인들이 십자군 캠프 주변을 빠져나가버렸고, 결국 십자군은 보급에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결국 다음 해에 루이 9세가 이슬람의 포로가 되는 참패로 이어집니다.  




(이집트에서 투르크군의 포로가 된 프랑스왕 루이 9세의 모습입니다.  자고로 상인 세력을 함부로 건드리고 무사한 군주가 없었습니다.  그건 현대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런 종군 상인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는 (비록 소설 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고골리(Nikolai Vasilievich Gogol)의 명작 소설 대장 불리바(Taras Bulba) 속에 나옵니다.  다른 지역의 카자흐 부족이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장터의 카자흐들이 분노하여 소란을 일으키는데, 가장 만만한 것이 장터에서 장사를 하던 유태인들이었습니다.  카자흐들은 저주받은 족속이지만 가진 것이 많은 유태인 장사꾼들을 두들겨패고 물건과 돈을 빼앗고 심지어 죽이기도 하는데, 이때 자신의 형과 친분이 있다고 주장하는 얀켈(Yankel)이라는 이름의 유태인 장사꾼이 불리바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렸고, 불리바는 일단 그를 보호해주었습니다.  아래 장면은 그 소란이 가라앉은 뒤, 그 자리에서 즉각 보복 원정을 결의한 카자흐 부대들이 열을 지어 출정하는 부분입니다.




(대장 불리바는 처음에 출간되었을 때 '너무 우크라이나적인 이야기 아니냐'라며 러시아 당국의 거센 비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덕분에 고골리는 1835년의 초판이 나온지 7년 뒤에 러시아 국민주의를 잔뜩 버무려넣은 개정판을 새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저도 제가 읽은 소설이 1835년판인지 1842년판인지 모르겠네요.)




대장 불리바 by 고골리 (배경 : 17세기 중반 우크라이나) ------------------


불리바가 외곽 지역을 통과할 때, 아까 그가 살려준 얀켈이라는 유태인이 이미 차양까지 갖춘 가판대를 차려놓고 카자흐 기병들에게 부싯돌과 나사 드라이버, 화약 등의 온갖 군용품은 물론 빵까지 팔고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정말 유태인들은 지독하구나 !" 불리바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그에게 말을 몰아 다가갔다.  "이 바보, 자네 여기 앉아서 뭘 하는 건가 ?  까마귀처럼 총에 맞아 죽고 싶은 건가 ?"


얀켈은 대답 대신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 두 손으로 뭔가 손짓을 하며 가까이 왔다.  "고귀하신 나으리, 부디 조용히 해주시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십시요.  저기 카자흐 마차들 중 한대는 사실 제 것입니다요.  저는 카자흐분들께서 필요하신 온갖 물건을 가져가고 있읍지요.  어떤 유태인도 제시한 바 없는 낮은 가격으로, 카자흐분들의 원정길에 필요한 모든 종류의 보급품을 제공해드릴 예정입니다요.  정말입니다, 하늘에 맹세코 진짜에요 !"


타라스 불리바는 유태인들의 장삿속에 질려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캠프를 향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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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역사에서도 전쟁터를 누비며 적이든 아군이든 군대에게 물건을 팔려고 위험을 무릅쓰는 유태인 장사꾼들의 이야기는 꽤 나옵니다.  나폴레옹이 무척 고전했던 1807년 2월 아일라우(Eylau) 전투 직후, 식량과 의약품 부족으로 비참한 상태였던 프랑스군을 구원한 것은 놀랍게도 바르샤바 출신의 어떤 유태인 장사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유태인답게, 돈을 벌려면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를 해야 하며, 또 프랑스군처럼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는 군대를 상대로 돈을 벌려면 빵이 아니라 술을 팔아야 한다고 판단을 했나 봅니다.  전투 바로 다음날인 2월 9일 정오 즈음, 나폴레옹 휘하 프랑스 장군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를 때, 기적처럼 이 유태인 상인이 4통(tun)의 브랜디를 실은 마차들을 몰고 아일라우에 나타났습니다.  Tun이라는 큰 발효통은 대략 252 갤론을 담는다고 하니까, 리터로 환산하면 이날 아일라우에 배달된 브랜디는 무려 3800 리터가 넘었고, 살아남은 병사들이 약 5만5천명이라고 하면 일인당 70ml씩 돌아갈 정도로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이때 이 브랜디가 없었다면 엄동설한에 수천 명의 부상병들이 그대로 얼어죽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상 나폴레옹의 패전이나 다름없었던 아일라우 전투의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다섯번째 남자는 뭔가 짐승 가죽을 안장 밑에 깔고 등을 보인 채 기병도를 뽑아들고 있습니다.  이 쾌남아가 누구이겠습니까 ?  예, 물론 당대 유럽 제1의 기병 뮈라입니다.  당시엔 베르크-클레브스(Berg-Cleves) 대공이었다가 다음 해에 나폴리 국왕에 등극하지요.  이 전투에서 위기에 빠진 프랑스군을 하드캐리로 구해낸 장본인이라고 하면 약간 과장된 말이긴 합니다만 뮈라가 대단한 활약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민간 종군 상인들의 존재는 부대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었으므로, 부대 지휘관은 종군 상인들이 안심하고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뭔가 유인 장치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독점 면허제였습니다.  부대 지휘관은 몇몇 상인들과 독점 계약을 맺고 안전통행증(safe conduct, passport)을 발부했습니다.  그래야 부대 병사들이 으슥한 숲길에서 그런 종군 상인의 짐마차를 만나더라도 그 상인 얼굴 또는 그 상인이 제시하는 안전통행증을 보고 보호해주거나, 최소한 약탈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이는 반대로 다른 문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사방 10리 이내에 먹을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황량한 전장에서 병사들이 먹을 것을 구할 유일한 구매처가 이 독점권을 가진 종군 상인의 수송마차인데, 정상적인 상인이라면 그런 절대적인 이점을 120% 활용하려고 들 것이고, 그런 경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 뻔했거든요.  한여름 설악산 꼭대기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1개에 5천원이 비싼 가격이 아닌 것과도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어떤 선에서 적정 가격이 형성되었을 것 같긴 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전쟁터는 큰 마을이나 도시 근처였으니 먹을 것을 구할 곳이 상인의 수송마차 뿐인 경우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아무리 면허장이 있는 종군 상인이라고 해도 당장 3일을 굶어 살기가 등등한 중무장 병사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 쉽진 않았을 것 같거든요. 




(함락된 마을에서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묘사한 14세기의 그림입니다.  당시 전쟁은 영주들과 용병들의 사업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와중에 불쌍한 농노들과 시민들만 죽어났습니다.)




이런 주먹구구식의 병참이 다소나마 체계화된 형태로 발전한 것은 17세기 들어서면서부터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병참의 발전 원인은 역시 이 시기에 나온 중대한 기술 혁신에 있었습니다.  그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  


(원래 한편으로 끝내려던 포스팅이었는데 분량 조절 실패로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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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늘누리 2019.02.04 2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등! 잘 보고 갑니다.

  2. 용가리 2019.02.05 0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옷 기다리던 글이네요. 다음 화가 엄청나게 기다려집니다.

  3. ㅇㅇ 2019.02.05 14: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시대 글을 읽으면서 상당히 궁금했던 내용인데 설 연휴에도 쉬지 않고 올려주시니 매우 고맙습니다.

    전근대 시절에 상인들의 행렬이 군대와 함께 다닌건 알고 있었는데 따로 병참이 군대의 영역에 들어선것도 오래된 일이 아니군요.

    제 삼촌이 군수특기로 지금은 장군진급까지 하셨지만 사실 보병과 같은 주류특기보다 진급에서 밀려 고생하셨는데 군수분야가 왜 군에서 비주류 특기인지 알것 같기도 합니다.

    • reinhardt100 2019.02.05 2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국시대 말기 도요토미 정권이 의외로 간과되긴 합니다만 군수분야 출신들이 야전분야보다 더 잘 나가서 문제가 된 경우입니다.

      흔히 말하는 세키가하라 전투란게 군수분야 담당인 이시다 미쓰나리와 야전분야를 담당한 오와리 국 출신의 도요토미 가신단의 분쟁적 성격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터진 측면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도요토미 정권은 야전출신들보다 군관료, 그것도 군수담당 관료들의 발언권이 워낙 막강한 특이한 경우라는 점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 최홍락 2019.02.06 09:0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우는 군수담당이 이시다 미쓰나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일이 그지경까지 갔을까 했을 정도로 이시다가 적을 많이 만들어놓는 바람에ᆢ이걸 군수담당 라인 대 야전 라인의 갈등이라기보다는 이시다파와 반 이시다파의 대결이라고 봐야겠지요.

    • 수비니우스 2019.02.10 17: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도요토미 정권의 야전출신들: 도요토미 히데나가(히데요시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츠구(히데요시의 조카), 시즈가타카의 칠본창(주로 오와리 국 출신들), 쿠로다 칸베이(주요 모사)
      도요토미 정권의 군관료(특히 군수담당): 이시다 미츠나리, 오오타니 요시츠구

      히데나가는 도요토미의 일본통일 직후 사망, 히데츠구는 히데요시가 늦둥이한테 정권 물려주겠다고 제거당하고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은 조선침략의 선봉으로 일본을 떠나거나 크게 안키워지고, 칸베이는 히데요시한테 견제당하는 등의 일이 있어서였지 딱히 군수담당의 발언권이 셌던것 같지는 않은데요

      정작 도요토미 이후 도쿠가와도 통일 이후 야전출신보다 군관료를 더 중시했고.

  4. 0_- 2019.02.05 14: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내는 설인가 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뭐 다 아시리라 봅니다만, 고골(Гоголь) 의 불바(Ъульба) 입니다. ь는 묵음이지요.
    고골리(ゴーゴリ, 고-고리)니 불리바(ブーリバ, 부-리바)니는 전부 일어중역에서 온 오류입니다...
    http://minumsa.com/booklife/20572/

    그런데, 북쪽 동네도 저 희한한 표기는 똑같나 봅니다? "문화어: 니꼴라이 고골리"라고 버젓이 씌여 있네요.
    https://ko.wikipedia.org/wiki/%EB%8B%88%EC%BD%9C%EB%9D%BC%EC%9D%B4_%EA%B3%A0%EA%B3%A8

    • reinhardt100 2019.02.05 2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 작품의 원래 배경이 <1594~1596년 셰몬 날레바이코 반란>입니다. 흔히, 1646년 흐미엘니츠키의 코사크 대반란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이 반란도 사실 만만치 않았습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에 소속된 코사크들이 사실상 최초로 연방을 탈퇴하려는 시초로 일어난 날레바이코 반란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휩쓸어 버렸는데 이 반란 당시 연방 입장에서 다행스럽게도 러시아와 터키 제국은 각각 스웨덴과 신성로마제국과 전쟁에 돌입해서 날레바이코 반란을 지원할 수가 없었죠. 이 반란동안 우크라이나는 개판났었죠. 이 반란이 실패한 후 폴란드는 '코사크들이 날뛸 외부 전역'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하게되었고 이 덕분에 코사크들이 대동란시기의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진격해서 엄청난 약탈을 벌입니다.

      불리바 영화가 1962년 헐리우드 판이 있고 2008년 러시아판이 있습니다. 둘다 비교해보시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 nasica 2019.02.06 09: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 !

  5. 칸몬드 2019.02.05 1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6. reinhardt100 2019.02.05 2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도 기해년 신년에 하시는 일 다 잘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좋은 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7. ㅋㅋ 2019.02.05 2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답! 병조림이요!

  8. 맥테비쉬 소프 병장 2019.02.06 0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어리어 88 !!!

  9. 2/28일 입대 2019.02.06 16: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늘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받으십시오! 작년보다 더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기술혁신이라니 두근두근하네요ㅎㅎ17세기 스타일의 엑셀이라도 발명된걸까요

  10. Spitfire 2019.02.07 0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배움으로 가득한 글은 따로 답글을 안쓰는데, 생각해보니 설 인사도 안드렸더군요~ 나시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항상 유익한 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11. 펱로스 2019.02.08 14: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글에서

    정의로운 투쟁이든 교활한 정쟁이든

    결국 우리네 먹고사는 생활에서 멀리 떨어질수 없음을 배워갑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오래 전부터 꿈꿔오시던 일들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12. TheK의 추천영화 2019.02.08 2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추천 꾸욱!~ 하고 다음 글을 기다립니다! ^ㅇ^*

  13. 웃자웃어 2019.02.09 17: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작 러시아 원정 당시의 프랑스군은..........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있어 드물게 조용한 한 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에서는 계속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지기는 했습니다만, 1809년 바그람 전투 이후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뛰어들 만큼 큰 전쟁은 없었지요.  그리고 1810년은 그의 제국이 최대 규모로 팽창했던 시기였습니다.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 공국들을 병합하여 프랑스의 영토가 사상 최대의 크기로 늘어난 것이지요.  게다가 유서깊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혼인을 맺고 정권의 영속성을 위한 아들까지 얻었으니, 정말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절정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숙적 영국과의 전쟁도 매우 잘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웰링턴을 스페인에서 몰아낸 것에 이어 마세나가 영국의 발판인 포르투갈까지 침공해들어갔고 (물론 이는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싸움인 대륙 봉쇄령으로 인한 영국의 곤경이 슬슬 한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곡물 가격은 대륙 봉쇄령 이후 60%나 치솟았고 이로 인해 영국 국민들의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대륙 봉쇄령에도 불구하고 수출은 표면적으로는 잘 되고 있었습니다.  1805년 5110만 파운드이던 수출액이 1808년에는 4970만으로 떨어지더니 1810년에는 다시 6220만 파운드로 늘어났거든요.  이는 유럽 대륙으로의 수출이 막히자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수출을 크게 늘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밀수 등을 통해 여전히 유럽에도 많은 상품을 팔고 있었지요.  그러나 1810년 중순 이후 나폴레옹의 밀수 단속이 강화된데다,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수출 특성상 대금의 상당 부분을 현금 대신 원자재나 채권을 받아야 했던 것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들어오는 돈은 부족한데 유럽 대륙의 전쟁 자금은 금화나 은화로 된 경화로 지급해야 했으니, 아무리 영국이 부자 나라라고 해도 돈이 마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1809년 한 해에만 무려 4420만 파운드를 전비로 지출해야 했으니까요.  결국 의심쩍은 지폐만 넘쳐날 뿐 경화가 부족해지자 영국에서는 극심한 인플레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사재기가 발생하여 더욱 물가가 오르는 악순환에 빠진데다, 금본위제 재도입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은행들도 재무 안정성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문제로 인해 1811년에는 금융 불안정과 함께 수출액도 4390만 파운드로 뚝 떨어져 버렸습니다.  유럽 대륙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당시 영국처럼 산업과 금융이 발달한 나라가 없었으니, 그 타격은 당연히 영국이 가장 크게 입었습니다.  




('템즈 강에서의 선적'이라는 Samuel Scott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폴레옹에게 승기가 막 보이려는 시기인 1810년 마지막 날, 이 모든 것의 방향을 확 돌려놓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1810년 12월 31일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 1세의 칙령이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영국과의 공공연한 무역 재개 및 나폴레옹에 대한 사실상의 도전장이었거든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


이미 다룬 내용입니다만, 기억 전환을 위해 잠깐 정리를 해보면 이렇습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정복을 위해서는 영국을 먼저 굴복시켜야 한다고 나름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상품들은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큰 유혹인지라 유럽 각국은 대륙 봉쇄령을 위반하고 밀수를 계속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가 다스리는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나폴레옹 본인도 '면허제'라는 이름 하에 몇몇 상인들에게 영국 상품을 공식적으로 수입할 수 있도록 해줄 정도였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 유럽의 주요 해안가를 아예 프랑스 영토로 병합해버렸습니다.  그것이 네덜란드 및 발트해에 면한 함부르크(Hamburg), 브레멘(Bremen), 뤼벡(Lubeck) 등 북서부 독일 소공국들의 병합이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프랑스의 영토는 사상 최대로 확장되었고, 영국의 재정난이 더 심해지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대륙 봉쇄령의 이런 강압적인 실행은 영국 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의 고통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동맹국들의 불신과 반발심도 키웠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의 체면을 무시하고, 알렉산드르가 가장 아끼는 누이동생 예카테리나의 남편이 다스리는 올덴부르크(Oldenburg) 공국까지 병합해버린 것은 당시 유럽 대륙의 양대 세력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싸늘한 적대감을 키우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아, 프랑스가 이토록 크고 아름다운 적이 있었던가 ??)




나폴레옹의 관점에서 이런 병합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동의 적국인 영국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나폴레옹은 올덴부르크의 병합에 대한 충분한 보상도 제시했습니다.  즉, 2년 전 알렉산드르와 아름다운 우정을 쌓았던 회담 장소였던 에르푸르트(Erfurt)를 보상으로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모욕으로 받아들인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의 보상안을 거부했고, 1810년 12월 31일 러시아 황제 칙령(ukase)으로 대응했습니다.  이 칙령은 어쩌면 사소할 수 있는 내용으로서, 크게 2가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1) 프랑스산 비단과 와인에 높은 관세를 부과

2) 중립국 선박의 상품이 "명확히" 영국산이 아닌 경우 러시아 항구에 입항 허용


이는 대표적인 프랑스 상품을 배척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국 상품에 대해 환영하는 초대장을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냥 허술하게라도 가짜 서류만 만들어 제출하면 되었으니까요.  아는 나폴레옹의 패권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장이었고 이는 전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도발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자의식 과잉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라는 것을 알렉산드르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아무리 여동생이 가엾다고 해도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까요 ?


당연히 그런 결정까지는 크고 작은 많은 다른 요소들이 관여했습니다만, 가장 큰 것은 역시 폴란드와 영국이었습니다.


서방 진출을 국가 정책으로 삼는 러시아에게 있어 폴란드는 서쪽에 확보한 소중한 발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르샤바 공국은, 아무리 독립국이 아니라 작센 왕의 개인 영지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러시아에게 눈엣가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조그마한 공국에 불과할지라도 폴란드인들의 독립 정권이 있다는 것은 러시아령 폴란드인들에게 독립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1809년 제5차 대불동맹전쟁시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맞서 꽤 선전했을 뿐만 아니라 바그람 전투의 결과 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혹시라도 폴란드가 정식으로 독립 왕국으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러시아에게 주었습니다.  


러시아의 이런 불안감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영리하게도 부지런히 조장했습니다.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메테르니히는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를 비밀리에 이간질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목표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폴레옹의 패망이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 때문이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와 국경을 접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당시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오스만 투르크의 발칸 반도를 빼앗고 싶어 했는데, 그 강력한 경쟁자가 러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 관계라면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의 맹약인 틸지트(Tilsit) 조약을 깨뜨리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해서 폴란드를 수단으로 정했습니다.  즉,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독립시키려 한다'라는 소문을 빈과 바르샤바에 꾸준히 퍼뜨린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1810년판 가짜 뉴스였던 셈인데, 메테르니히의 비밀 선동에 홀딱 넘어간 순진한 폴란드인들은 독립 열망에 부풀었고, 바르샤바 신문들은 독립이라는 희망찬 뉴스를 꾸준히 찍어댔습니다.  이런 상황은 빈과 바르샤바에 있던 러시아인들에 의해 그대로 알렉산드르에게 들어갔고, 그의 우려와 분노는 파리 주재 러시아 대사 쿠라킨(Alexander Borisovich Kurakin, Александр Борисович Куракин)을 통해 나폴레옹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화려한 옷차림으로 파리 사교계를 사로잡아 '다이아몬드 대공'으로 불렸던 쿠라킨 대사입니다.  그는 음식이 한꺼번에 나오지 않고 코스별로 차례차례 서빙되는 러시아식 정찬 방식(service à la russe)을 프랑스에 전해 오늘날의 프랑스 코스 요리를 완성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을 막아보려 많은 애를 썼습니다.)




나폴레옹은 나폴레옹대로 화를 냈습니다.  나폴레옹이 바로 작년 오스트리아와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었을 때, 틸지트 조약에 따르면 알렉산드르는 즉각 병력을 파견하여 나폴레옹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쳐부수어야 했습니다.  그런 편의를 바라고 나폴레옹은 폴란드 애인의 애원도 뿌리치고 폴란드 독립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핀란드까지 러시아에게 던져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모두 잊고 러시아는 교활하게도 러시아령 폴란드 인근에 병력만 배치해두고 어느 쪽이든 승리하는 쪽에 붙기 위해 눈치만 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군의 공세를 분쇄하자 오스트리아령 폴란드로 침입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건 황제들끼리 우정을 나눈 동맹국의 처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꾹 참고 우방국 대우를 해주었더니 나폴레옹은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던 폴란드 독립에 대해 항의해온다 ?  이런 뻔뻔스럽고 무례한 행동에 대해 공손하게 대응할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처가집인 오스트리아는 메테르니히의 획책 하에 끊임없이 러시아군의 이동 및 요새 강화에 대해 나폴레옹에게 고자질을 하며 이런 위기를 부추겼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과 이런 험악한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알렉산드르는 각지의 요새를 강화하고 군대를 정비하는 등 전쟁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 것은 역시 폴란드 건이 컸습니다.  알렉산드르는 교황을 잡아가둔 나폴레옹의 폭거가 독실한 카톨릭인 폴란드 국민들에게 공분을 샀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좀더 많은 자치권과 좀더 관대한 헌법을 약속하며 폴란드인들에게 18세기때처럼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남는 것이 폴란드에게 유리하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지만, 바르샤바에 그가 심어둔 밀사들은 바르샤바의 분위기를 솔직하게 그대로 전해왔습니다.  폴란드는 나폴레옹이 결국 폴란드에게 자유를 가져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를 접한 알렉산드르는 결국 프랑스와의 전쟁을 결국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폴란드인들에게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것도 역시 메테르니히의 획책이었습니다.  실제로는 나폴레옹은 냄새나는 폴란드인들을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외교관인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Nepomuk Lothar, Prince von Metternich-Winneburg zu Beilstein)입니다.  가짜 뉴스를 정치 외교에 활용하는데 있어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르에게 전쟁을 결심하게 만든 것은 폴란드 외에도 또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전쟁의 근본 원인이었지요.  그것은 물론 영국, 좀더 정확하게는 영국과의 무역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드넓은 평원을 가진 대농업 국가였습니다.  그런 러시아가 홍차와 설탕, 면직물, 비단, 강철 등의 물품을 수입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남아도는 자국산 밀과 아마 등의 농산물을 수출하는 것 뿐이었는데, 원래 그 가장 큰 고객이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 때문에 영국과의 교역이 막히자 러시아의 귀족들은 돈줄이 막혔고, 그 불만은 짜르 알렉산드르의 정권을 위태롭게 할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알렉산드로서는 그런 불만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거기에 뻔뻔스럽기 그지 없는 나폴레옹이 여동생 시댁인 올덴부르크를 제멋대로 병합해버리고 (이건 가짜 뉴스에 의한 오해였지만) 폴란드까지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더 이상 참을 이유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1810년 12월 31일, 그는 나폴레옹의 따귀를 갈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칙령을 발표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1811년 4월 2일자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미 러시아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태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전쟁은 발발할 것이오.  나와 알렉산드르가 아무리 그를 막기 위해 노력하거나 프랑스와 러시아의 국익이 아무리 해를 입는다고 해도 말이오.  난 이런 상황을 자주 보았고, 내 과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전쟁이 발발할 거라는 것은 마치 오페라의 줄거리가 펼쳐지는 것과 같이 뻔한 이야기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바로 영국이오."


이제 나폴레옹의 제국은 몰락을 향한 폭풍 속으로 휘말려들어갑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istory of the Expedition to Russia Undertaken by the Emperor Napoleon  by Philippe-Paul Comte de Segur

https://www.britannica.com/event/Napoleonic-Wars/The-Continental-System-and-the-blockade-1807-11

https://georgianera.wordpress.com/2015/04/16/the-port-of-london-in-the-18th-century/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Kura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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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까까님 2019.01.28 0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짜뉴스가 힘을 갖는 건 불신이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빙판길에 출근 잘 하시고 곧 설인데 복 많이 받으시고 건필하십시오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2. 석총 2019.01.28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헬게이트가 열리는 군요

  3. 웃자웃어 2019.01.28 1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나폴레옹도 이미 러시아 본토로 깊숙히 진군하면 패배할수밖에 없단걸 아일라우 전투때 알게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러시아에 쳐들어 갔을까요?

    • 하이텔슈리 2019.01.28 2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폴레옹은 러시아 본토 깊숙히 진군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쳐들어가서 빨리 러시아 주력을 격파하고 차르를 협상장으로 불러내 굴복시키려는 게 전쟁의 목적이었죠. 문제는 러시아군이 안싸우고 계속 도망치고 이걸 쫓아가다보니 모스크바까지 가버린 것일 뿐이에요. 모스크바 함락 시점에서 이미 나폴레옹의 계획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시점이었던 거죠.

    • 다부 2019.01.30 0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가 러시아를 육로로 직공하는 건 위험하니
      발트해안 도시들을 동원해서 리보니아에 해상보급망을 설치하고
      리보니아의 거점으로부터 모스크바를 노린다는 계책을 나폴레옹에게 건의를 했는데,

      나폴레옹이 "그런 성가시고 시간 걸리는 방법 아니라도 내 작전술로 간단히 쳐 없앨 수 있어"
      라고 판단해서 바로 육로로 직공했죠.

      나폴레옹은 천재지만 자신의 재능을 너무 과신해서 일이 잘 못 되었을 때를 대비하지 않고
      작전술에 너무 의존함으로서 원정에 실패했죠.
      만약에 루이 니콜라 다부의 계책대로 신중하게 러시아를 리보니아에서 압박하는 작전을 썼다면
      당시 러시아도 상황이 어려웠던 만큼 "보급문제가 해결된 대육군"을 상대로 패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보로디노 전투때에도 루이 니콜라 다부가 러시아군의 측면을
      우회기동해서 쳐야 된다고 건의했는데 역시 나폴레옹에게 묵살당했죠.
      이 때에도 나폴레옹이 루이 니콜라 다부의 건의대로 했다면 전투의 결과는 달랐을 수도 있죠.

    • 웃자웃어 2019.01.30 0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이텔슐리님, 애초에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서도 비슷한 전술을 썼는데도 러시아군에게 고전했습니다. 폴란드에서도 크게 고전했는데, 그보다 더 광활한 러시아라면 얼마나 더 고전하겠습니까? 그걸 모를리가 없는데도 러시아를 공격했고, 현지조달을 바탕으로 하는 전술을 유지했다는것 자체가 미친짓이죠.

  4. 카를대공 2019.01.28 2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나폴레옹 전쟁의 절정(?)인 러시아 원정의 길이 시작되는군요.
    예나 전투 때부터 그랬습니다만,전성기에 비해 한물 간 판단력의 나폴레옹이 어떻게 그려질지 흥미진진 합니다.

  5. 안드레이 2019.01.29 1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메테르니히의 활약이 돋보이네요 비스마르크도 그렇고 역시 외교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은 후세에서 보면 어떻게 저런 생각이 가능한가 신기하기만 합니다

  6. nashorn 2019.01.30 0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마지막..

  7. 샤르빌 2019.01.30 2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막연하게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에 비협조적으로 나와서 홧김에 전쟁이 터진줄 알았더니 역시 온갖 원인과 전조로 전운이 감돌고 있었네요.. 메테르니히의 공작과 폴란드 문제..

  8. starlight 2019.02.02 2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러시아 원정은 그 역사가 만약이 없다라는
    명확한 반증이죠. 2000km가 넘는 전역을 보급도 수송도
    병력 충원도 지연되고 끊어지고 소멸되고,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통신도 분절되고 병력 통제도 안되고, 자연사하듯 군마는 끊임없이 고꾸라지고, 병력들은 이탈하고 와해되고 이질에 쓰러지고 전투에서 소모되고,
    눈발에 얼어 동상으로 죽고 탈진과 아사로 학살아닌 학살같은 참상이죠. 아비규환입니다.

  9. 알키비아데스 2019.02.08 15: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헨리 키신저가 메테르니히 숭상할만 하네요



모든 전쟁에는 돈이 아주 많이 들어갑니다.  흔히 미국이 30년대의 대공황에서 빠져나온 것이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 때문이라기 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왜 불황이 생길 때마다 네바다 사막이든 태평양 한가운데든 가상 표적을 세우고 거기에 병력과 함대를 동원해서 맹폭격을 가하지 않겠습니까 ?  결국 그렇게 전쟁하느라 쓴 돈은 누군가 갚아야 하는 법이고, 미국도 전후 20년 정도 최고 세율 90% 정도의 엄청난 소득세를 부과하여 그 비용을 충당해야 했습니다.




(1913-2008 기간 중 미국 소득세 최고 세율의 역사입니다.)




나폴레옹 전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국이든 프랑스든 모두 누군가는, 정확하게는 결국 국민 전체가 전쟁 비용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전쟁 비용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매우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영국은 빚을 더 냈고, 프랑스는 세금을 더 걷었다"



그냥 이렇게만 놓고 보면 프랑스 측이 훨씬 더 건실한 재정 정책을 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도 국채를 발행하여 전쟁 비용을 처리하고 싶었으나 신용불량의 전력 때문에 할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세금만으로 전쟁을 치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쟁에는 돈이 과다하게 많이 들어가는데, 그걸 모조리 세금으로 충당하려면 국민들에 대한 세금 부담이 너무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국민들이라고 해도 세금을 4~5배로 올려버리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거든요.  자동차가 꼭 필요하긴 한데 당장 그럴 돈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  보통 카드 할부로 구입합니다.  말이 좋아서 할부지 사실은 카드사에게 비싼 이자를 내고 빚을 지는 것이지요.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전선의 부대들과 바다 위의 함대들, 그리고 동맹국들이 돈을 달라고 아우성칠 때는 그렇게 빚을 내야 합니다.  


대대로 유럽의 모든 정부들은 전쟁을 위해 빚을 냈습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처음 설립된 중앙은행인 스웨덴 중앙은행 릭스방크(Riksbank)도 러시아와의 전쟁에 들어가는 군자금을 빌리기 위해 만들어진 은행이었고, 나폴레옹 전쟁 기간 전후에 세워진 여러 유럽 국가들의 중앙은행들도 모두 전쟁 자금을 충당하거나 그로 인해 생긴 빚을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인 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도 독립전쟁으로 인한 빚을 처리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이지요.  이렇게 중앙은행이라는 것의 기원은, 정부가 민간으로부터 전쟁 자금을 안정적으로 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럽 각국 중앙은행의 설립과 연관된 전쟁들입니다.)




영국은 이미 100년도 전인 17세기 말에 영란은행(Bank of England)를 설립하여 전쟁 비용을 충당할 정도로 전쟁 금융에 매우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국채 발행이 잘 되었던 것은 금융 관료들의 유능함보다는 기본적으로 영국 정부가 꼬박꼬박 채권 상환을 잘 하여 신용을 쌓아왔던데다, 결정적으로 왕실이 아닌 의회가 국채 발행과 상환을 책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정이야 언제 무슨 정변이 나서 뒤집어질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토지와 무역회사 등 주요 자산을 소유하고 있던 대주주들로 구성된 의회는 글자 그대로 주식회사 영국 그 자체였거든요.  따라서 의회가 책임지고 상환하겠다는 채권은 전쟁치고는 꽤 낮은 이자로도 잘 팔렸습니다.  덕분에 영국은 7년 전쟁의 경우 전체 전비의 51%를, 그리고 패전으로 끝난 미국 독립전쟁의 경우 81%를 국채 발행으로 메꿀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국민들의 세금 부담은 전시에도 급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영국 국채의 신용도가 괜찮았던 것은 영국 재무부에게 결정적인 여유를 주었습니다.  잠정적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여 금본위제에서 벗어남으로써, 채권 뿐만 아니라 지폐도 추가로 찍어내어 자금조달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즉, 일정 수준의 인플레를 유발시킴으로써 기존 국채 가치를 떨어뜨렸던 것입니다.  이걸 인플레 세금(inflation tax)라고 합니다.  국민에게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통화 팽창을 통해 지폐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 비용을 국민들이 부담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Lieutenant Hornblower by C.S. Forester (배경: 1803년 영국) --------------------


(아미앵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 간에 짧은 평화가 있던 시기에, 무일푼이던 혼블로워 중위는 보직 해임 상태가 되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집니다.  결국 혼블로워는 고급 장교들이 드나드는 클럽에서 4명이서 하는 카드 게임 때 부족한 머리 숫자를 채워주는, 일종의 타짜 노릇을 해서 먹고 삽니다.)


그는 혼블로워가 가슴 안주머니로 지폐를 쑤셔 넣는 것을 보았다.


패리 제독이 말했다. "예전 화폐를 다시 부활시킨다면 더 좋지 않겠소 ?  정부가 이런 지저분한 지폐를 없애고 예전의 멋진 기니 금화로 되돌아간다면 말이오."


"그거 정말 좋겠군요." 대령이 말했다.


램버트가 말했다.  "그 놈의 육지 상어(순진한 뱃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들)들은 해외에서 들어오는 배들은 모조리 상대한다오.  1기니당 23실링 6펜스를 주니, 틀림없이 실제로는 그보다 더 받을 수 있을거요."  (원래 1기니는 21실링에 해당합니다: 역주)


패리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에 탁자에 내려놓았다.


"보니(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비칭:역주)는 옛날 프랑스 화폐를 부활시켰소.  보시오." 그는 말했다.  "이 금화를 나폴레옹라고 부른다오. 그 친구가 이제 종신 제1통령이니 말이오.  이 금화 한닢에 20 프랑이라오.  예전에는 우린 이걸 루이 금화(louis d'or)라고 불렀지요."


"나폴레옹, 제1통령," 대령은 호기심을 가지고 금화를 보며 읽고는, 뒷면을 돌려 읽었다. "프랑스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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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남자라면 모양 빠지게 지폐 같은 것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나폴레옹의 얼굴이 새겨진 40 프랑짜리 금화 정도는 누구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 아니겠습니까 ?  무게 12.91g, 순도 90%입니다.  그러나 이런 남자의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눈물을 흘려야 했는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빚으로는 소도 잡아먹는다고 하지만, 모든 빚은 결국 누군가가 갚아야 하는 법입니다.  카드 할부로 자동차를 산 경우에 몇 년에 걸쳐 월급 절약하여 계속 갚아나가야 하는 것과 똑같이, 국가도 세금을 좀 더 걷든가 나라 살림을 좀 줄이든가 해서 국채를 결국 갚아야 합니다.  영국 정부는 감채기금(sinking fund, 장기 채무 상환을 목적으로 별도로 적립해두는 기금)을 설립하여, 전쟁이 끝난 뒤에 세수 잉여분을 여기에 적립함으로써 국채를 꾸준히 상환했습니다.  


영국도 마냥 빚만 낸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세금도 더 걷었습니다.  당시 영국 수상이던 소(小) 피트(William Pitt the Younger)는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근대 역사상 처음으로 소득세(income tax)를 도입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세금이란 사람 머릿수에 따라 내는 인두세와 토지 등의 재산에 따라 내는 재산세, 그리고 관세와 부가세, 소비세 등의 형태였거든요.  사람이 일을 해서 번 소득 자체에 대해 세금을 낸다는 것은 근대 유럽 사회에 없던 개념이었습니다.  소 피트가 도입한 소득세는 누진세(progressive tax)라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 합니다.  즉 소득이 더 많을 수록 더 높은 세율의 세금이 부과되는, 꽤 현대적인 개념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60파운드 이하의 소득에 대해서는 세금이 면제되었고, 60 파운드 이상의 소득에 대해서는 0.83%부터 시작하여, 200 파운드가 넘는 소득에 대해서는 최대 10%까지 세율이 올라갔습니다.   이는 나폴레옹이 국민들에게 부과했던 세금은 모두 단일 세율의 재산세와 소비세 등이었다는 것에 비하면 굉장히 진보적인 조세 정책이었습니다.  




(피트 수상의 소득세에 대한 당시의 풍자 만화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금 좋아하는 국민은 없지요.)




한편, 프랑스에서는 상황이 상당히 달랐습니다.  의회가 권력을 가지고 있고 이미 산업 혁명을 시작했던 영국과는 국가 권력 구조와 산업 구조 뿐만 아니라 역사까지 달랐으니까요.  부르봉 왕정 시절, 아직 중앙은행도 없던 프랑스는 그냥 정부가 민간에게 직접 국채를 판매하는 형태로 7년 전쟁과 미국 독립전쟁을 치렀습니다.  국가 자산 중 상당 부분을 귀족과 교회가 쥐고 있었는데 정작 그들은 면세 혜택을 받았으니 그때 쌓였던 빚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세금을 늘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설프게 삼부회를 소집했다가 터진 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었습니다.  새로 들어선 국민공회는 몰수한 귀족과 교회의 토지 자산을 담보로 1789년 12월 5% 이자의 공채를 발행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아시냐(Assignat) 지폐가 됩니다.  즉, 처음에는 채권이었으나, 나중에는 0% 금리의 지폐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보통 돈은 태환지폐라고 해서, 금과 바꿀 수 있는 증서같은 것이었는데, 금이 없으니 금 대신 토지와 바꿀 수 있는 증서를 발행한 것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대표적인 실패작 아시냐 지폐입니다.)




아시냐라는 저 프랑스어 스펠링을 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저건 정부가 강제로 지정한(assigned) 돈으로서, 태생부터가 자연스러운 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이미 파탄난 경제로 인해 돈이 궁해진 국민회의는 이듬해인 1790년부터는 애당초 몰수된 토지의 총가치를 훨씬 넘어서는 아시냐 지폐를 찍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하이퍼 인플레였습니다.  특히 정부가 인플레를 잡는답시고 생필품 가격 상한제를 강제하자, 생필품이 시장에서 싹 사라지고 암시장에서만 거래되는 등, 역효과에 역효과만 불러일으켰고, 결국 수차례의 폭동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시냐 지폐는 가뜩이나 혁명으로 어수선한 프랑스 사회를 경제적으로 다시 한번 뒤흔들어놓고 7년만에 불명예스럽게 퇴장합니다.  퇴장할 때 정부는 이 지폐를 액면가의 3.33%에 해당하는 토지와 교환해줍니다.  투자 손실율 96.67%...  더군다나 투자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프랑스는 1720년대에도, 존 로 (John Law)라는 스코틀랜드인이 일으킨, 미국의 부동산에 투자하는 미시시피 사(社)라는 대규모 투자 거품 사건으로 인해서 지폐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있었습니다.  미시시피 거품 사건은, 한줄로 요약하면 존 로가 미국 땅을 담보로 프랑스에 지폐 발권력이 있는 금융회사를 차렸다가 거품으로 끝난 것입니다.  이때 프랑스인들은 지폐는 종이 쪼가리일 뿐 결코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었지요.  이 아시냐 지폐 사건은 프랑스에서의 지폐의 위치에 대해, '관 뚜껑에 못질을 한'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국채와 지폐에 대한 국민들의 신용이 이렇게 바닥을 친 상태인지라, 총재정부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으로서는 부르봉 왕가나 국민공회처럼 채권이나 지폐를 찍어 재정난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프랑스 영토였던 루이지애나(이름 자체가 프랑스 왕 '루이의 땅'이지요)를 미국 정부에게 매각하여 돈을 마련하기도 하고, 정권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지는 프랑스 중앙은행(Banque de France)을 설립하는 등 시장의 통화와 정부 재정을 안정화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기본적으로는 금은 복본위제(bimetallic standard)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내 통치 기간 중에는 절대 새로운 지폐를 추가로 발행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한 나폴레옹의 발언으로 대표됩니다.  실제로 1800년 나폴레옹의 통령 정부는 기존 정권에서 발행했던 채권에 대해 (이미 기존 채권의 가치를 크게 절하시킨 뒤이기는 했지만) 이자를, 그것도 금화나 은화로 지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함께 나폴레옹은 영국처럼 감채기금을 마련하여 장기 국채의 상환을 위한 안정성을 갖추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영국처럼 프랑스도 국가 신용을 끌어올려, 전쟁 비용을 빚으로 충당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Bimetallic standard를 보통 복본위제라고 합니다.  금본위제와는 달리 복본위제에서는 은도 지폐의 교환 대상이 되는데, 다만 금과 은의 교환비를 정부가 지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유럽은 금의 많이 나는 대륙이 아니라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전통적으로 은본위제를 사용했었지요.)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국채를 대규모로 발행할 정도로 신용을 끌어올릴 수 없었습니다.  무너지기는 쉬워도 쌓기는 어려운 것이 바로 신용이거든요.  결국 나폴레옹은 전쟁 비용을 세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결코 전제군주가 아니었고 국민들의 지지에 권력의 근거를 둔 황제였습니다.  전비 충당을 위해 세금을 지나치게 올렸다가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잃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 세수 확대를 위해 길거리에서 채소와 생선을 파는 가판대에 대해서도 세금을 부과하자는 제안이 나오자,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광장은 물처럼 무료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소금과 와인에 소비세를 부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  서민들의 가판대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보다는, 곡물 시장을 중흥시키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더 파리에 어울리는 조치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영국과는 달리 돈을 구할 다른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전쟁은 스스로 비용을 충당해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바로 전쟁 배상금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부터,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패전국에게 무거운 전쟁 배상금을 뜯어냈습니다.  1807년 프로이센을 격파한 뒤에는 무려 1억2천만 프랑을 배상금으로 요구하여 프로이센을 나락으로 빠드렸고, 1809년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킨 뒤에는 그나마 좀 양보하여 8천5백만 프랑의 배상금을 뜯어냈습니다.  나폴레옹과 같은 군사 천재에게는 매우 수지맞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좌절을 안겨준 것은 바로 스페인이었습니다.  분명히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모두 무찌르고 거의 모든 영토를 정복했지만, 대체 이것들이 항복을 하지 않으니 배상금을 뜯어낼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스페인에서의 전쟁에 막대한 돈을 퍼부었는데도 그 비용을 충당할 방법이 없다보니 나폴레옹으로서는 무척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또다른 돈줄은 이탈리아와 폴란드, 네덜란드와 독일 소공국 등 위성국가들로부터의 세금이었습니다.  이들은 동네 양아치에게 보호비조로 돈을 바치는 것처럼 나폴레옹에게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과중한 배상금과 세금으로 인해 나폴레옹은 유럽 전체에게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늘어난 전쟁 비용으로 프랑스 국민들까지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게 되어 지지율이 떨어졌으니까요.  결국 1815년 워털루 전투 이후 최종적으로 맺은 파리 조약에서, 프랑스는 무려 7억 프랑의 배상금을 연합국에게 물어내야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이러니컬한 부분은 그 배상금은 연리 5%의 프랑스 국채로 지불했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이 연전연승할 때는 못하던 것을, 패배 후에는 해낸(?) 것입니다.  






Source :  British and French finance during the Napoleonic wars by Michael D. Bordo & Eugene N. White 

https://www.businessinsider.com/history-of-tax-rates

https://en.wikipedia.org/wiki/Progressive_tax

https://fr.wikipedia.org/wiki/Aspects_%C3%A9conomiques_et_logistiques_des_guerres_napol%C3%A9oniennes

https://en.wikipedia.org/wiki/Treaty_of_Paris_(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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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eltro 2019.01.14 05: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등!

  2. 푸른 2019.01.14 1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이 특히 더 재밌는 글이네요ㅋㅋ

  3. 아즈라엘 2019.01.14 17: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국은 국채를 팔아서 전쟁비용을 충당했죠
    퍼스트어벤저스 보면 캡틴이 국채팔려고 쇼하러 다니는 장면이 나오죠

    • reinhardt100 2019.01.14 22: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반은 맞고 반은 맞지 않다고 보는게 좀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총 전비가 3240억 달러였는데 이 중 전시 국공채로 발행하여 충당한 비용이 약 2천억 달러 조금 넘습니다. 나머지는? 그대로 세금으로 충당했습니다.

      그나마 미국은 나았죠. 영국만 해도 국공채 발행할 능력을 이미 상실했고 결국에는 미국의 무기대여법으로 겨우 전쟁을 치르는 판이었고 독일은 전유럽을 쥐어짜서 전쟁을 수행했죠. 일본은 그럴 여건도 안되어서 점령지 각지의 중앙은행의 조폐기 돌린 것과 군표 발행으로 전쟁을 수행하다가 그대로 인플레로 전시경제가 개판났었으니까요.

    • 최홍락 2019.01.15 0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은 러일전쟁때부터 시작하여 태평양전쟁까지 카드빚 돌려막기식으로 전쟁을 벌려놔서 그 분야에 있어서 끝판왕인지도요. 러일전쟁때 채무를 80년대 되서야 다 상환했다고 하니까요.

      태평양 전쟁때 빚이 아직 남아있기도 하죠. 일본 정부의 일반회계의 부채 항목에 구 임시군사비 차입금이라는 명목으로 잡혀있는 금액이 414억엔 정도라는군요. (45년 기준 일본 국가예산이 214억엔.)

      이 방법이 재미있는게 위장거래와 분식회계를 통한 부채라는거죠. 우선 베이징을 중심으로 괴뢰정부인 중화민국임시정부를 수립, 중국연합준비은행권(연은권)을 발행하도록하고 조선은행 베이징지점이 중국연합준비은행과 각각 상대측 은행에 예금계좌를 개설합니다. 관동군이 군사비를 요구해오면, 조선은행 베이징지점은 보유중인 연은 명의의 일본 엔화 예금계좌에 해당 금액을 지출한 것으로 기재하고 이 예금계좌에는 앞에서 얘기한 임시군사비특별회계에서 지출한 엔화 자금이 입금된 것으로 기록하죠. 이를 담보로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조선은행 베이징지점 명의의 연은권 예금계좌에 같은 금액을 지출한 것으로 적은 후 이에 상당하는 연은권을 찍어 군사비로 내주는 방식이죠.

      그러나 당초 이 임시군사비특별회계에서 지출한 엔화 자금은 실제로는 중국으로 송금되지 않은 채 조선은행과 연은의 예금계좌에 금액만 기재될 뿐인 가짜 예금이었습니다. 연은권의 발권 담보가 된 엔화 자금은 모두 조선은행 도쿄지점에 고스란히 남았다가 일본 국채를 구입하는데 사용되서 다시 일본은행의 국고로 되돌아갔다. 그러니까, 일본군의 군사비 지출인데도 일본 엔화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조선은행을 앞세워 무제한으로 현지통화를 발행해 군자금을 충당한 거죠. 414억엔은 그야말로 액면가치일텐데 이를 당시 기준으로 환산했으면 꽤 큰 금액이고요.

    • reinhardt100 2019.01.17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도 일본은 연은권, 남발권, 대은권, 조은권, 일은권, 몽강권,만은국폐 간의 대차거래를 패전 직전에 금으로 청산했다는 겁니다. 단, 제대로 깡(?)을 쳐서 발행고로 최소 당시 금액으로 수백억엔 어치를 단 십수톤의 금으로 했다는게 문제죠.

      특히 조선은행권이 심각했는데 총독부나 조선은행 간부들이 이걸 청산할 때 그냥 금으로라도 변제를 했어야 했는데 이건 제대로 하지도 않고 그냥 발행준비금이었던 일본국채를 더 매입하는 방식으로 조폐기 돌려서 증발하는 바람에 전후 인플레이션이 미친듯이 나타났죠.

  4. 웃자웃어 2019.01.14 1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나폴레옹의 군대가 외국에서 징발한 물자들의 액수로만 따지면 7억프랑은 가볍게 뛰어넘지 않나요? 배상금 액수가 꽤 관대하네요.

    • reinhardt100 2019.01.14 2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1797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하기 직전 프랑스의 이탈리아방면군이 베네치아의 본토 속주에서 징발할 수 있다고 예측한 금액이 매달 평균 100만 프랑 이상이었다고 하고 실제로 캄포포르미오 조약 이후 구 베네치아 공화국령에서 뽑아낸 금액이 정화만 최소 1천만 프랑 단위였다고 합니다.

      7억 프랑으로 집계된 것들 중 일부는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미술품류 등을 반환하는 것이었던데다가 혁명 이전에 프랑스 영토였던 알자스의 란다우같은 도시들의 할양까지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정화로 지불할 부분은 꽤 줄어듭니다. 결정적으로 왜 국채로 받았냐면 각국이 프랑스 정치권에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할 것을 노리고 국채로 수령한 것도 있습니다. 복고된 부르봉 왕정도 이걸 인지하고 있어서 서둘러서 배상금을 변제하죠. 다만, 상당수 배상금으로 지급된 국채는 영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반출되지는 않고 그대로 파리와 리옹의 금융시장에서 거래됩니다.

  5. 웃자웃어 2019.01.14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저는 세금과 배상금 말고도 무지비한 징발또한 유럽에서 미움을 받은 원인이라고 봅니다.

  6. 웃자웃어 2019.01.14 1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꿔말하자면 위의 내용은 프랑스가 국채발행을 하고싶어도 하지 못해 세금을 올렸단 거군요.

  7. 달콤아빠 2019.01.15 1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재미있게 잘읽고 공감드리고 갑니다.

  8. 펱로스 2019.01.15 16: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한테는 이 부분이 제일 무시무시하네요.

    '국민에게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통화 팽창을 통해 지폐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 비용을 국민들이 부담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

    국가가 국민 상대로 할수있는 장난질이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건 완전 조삼모사 네요.

    • raa 2019.01.16 0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몇년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도 고환율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대놓고 하고 있었죠. 약간 다른 건 국민들의 돈을 대기업들에게 퍼주는 방향이었다는거..

  9. 수비니우스 2019.01.15 2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전쟁하느라 쓴 돈은 누군가 갚아야 하는 법 "
    저는 이 부분이 제일 인상 깊네요. 쉽게 외면당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10. TheK의 추천영화 2019.01.16 1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선생님의 명 강의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ㅇ^*

  11. Eugen 2019.01.16 1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건 다 좋은데 미국이 왜 전쟁으로 경기부양을 하지 않느냐에 대해선 제가 할 말이 있는데요. 전쟁이란게 생산이 아닌 순수한 소비이기 때문에 전쟁해봤자 정치적,지리적,군사적,외교적 이득이 생기지 않는 이상 하지 않는게 더 낫습니다. 만약에 전쟁해서 불황을 탈출하고 경기를 부양시킬 수 있다면 2008년 경제위기때 오바마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을 철수하려했을까요?그리고 왜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에서 철군을 하려는 것인가 생각해봐요.

    • Eugen 2019.01.16 1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 사람과 달리 저는 전쟁이 비인도적이라서 하지 말아야한다는 사람이 아니고 전쟁을 하면 손해라고 생각해서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병사한명 만드는데 10개월의 임신기간 20년의 양육기간이 있고 사람 한 명 초중고 대학교육을 마치면 1억 이상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귀한 교육받은 병사가 전쟁때문에 불구가 되거나 죽으면 엄청난 손해가 아닐까요?

  12. Eugen 2019.01.16 17: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으로 경기를 부양시킬 수 있다면 세계대전은 몇번이고 더 낫겠죠.

  13. Eugen 2019.01.16 17: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정부부채규모로 볼때 뉴딜로 인한 정부지출액수보다 2차대전으로 발생한 지출이 5배는 더 많다고 본 적이 있습니다. 결론은 뉴딜해서 대공황을 탈출했는지 세계대전때문인지는(세계대전 중 생산을 아예 안한건아니니까) 쉽게 생각가능할 만한 주제가 아닌 것같습니다.

  14. 석총 2019.01.23 13: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영국은 과두정에 가까운 체제였죠


고대 국가와 근대적 국가의 뚜렷한 차이점 중 하나가 바로 정교 분리입니다.  마치 무협지에서 관은 무림의 일에 관여치 않고 무림도 관의 일에 관여치 않는 것이 불문률인 것처럼, 종교는 정치에, 반대로 정치도 종교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정교 분리입니다.  하지만 무림과 관이 서로 상대의 일에 관여치 않기로 한 것은 서로의 영역이 겹치는 부분이 무척 많기 때문입니다.  가령 좌랭선의 숭산파가 중원 제패의 야심을 품고 타 문파를 무력으로 공격하는 것이 관에서 볼 때는 산적떼들의 난동과 종이 한장 차이일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종교와 정치는 엄격히 구분된 것처럼 말은 하지만 사실은 겹치는 영역이 매우 많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반란죄로 십자가형에 처해지셨고, 마호멧은 스페인부터 북아프리카, 중동, 중앙 아시아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과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개신교 지도부는 법에도 없는 사실상 면세 특혜를 받고 있지요.  이는 그 종교인들이 뻔뻔스러움 뿐만 아니라 선거 때 정치인들의 당락을 좌지우지할 만큼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종교가 진화론 같은 과학에까지 종교적 논리를 들이대며 참견하면 그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우주 창조 이론인 빅뱅 이론을 최초로 제시한 것이 카톨릭 신부이자 천문학자인 조르쥬 르메트르(Georges Lemaître)이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 고대 시절에는 종교와 정치가 사실상 일체화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사장이 곧 우두머리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요.  가령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으로 유대인들을 이끌고 나온 세계 최초의 대량 난민 리더인 모세가 대표적인 종교 수장이 국가 수장인 경우입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모세의 아들이 아닌 여호수아라는 점도 초기 고대 사회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즉 아직 수장의 권세가 충분히 강하지 못해 그 신분이 세습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차기 수장도 종교 지도자임과 동시에 군사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사사(士師) 시대에도 사사는 일종의 부족장임과 동시에 종교 및 군사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사사를 영어로는 judge라고 합니다만 이는 고대 히브리어 직위를 번역하다보니 이렇게 된 것일 뿐이고, 사사를 문약한 재판관 정도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가령 천하장사 삼손도 사사거든요.  




(삼손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사들도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많은 군사적 업적을 쌓은 사람들입니다.  가령 이 그림 속의 삼갈(Shamgar)은 소떼를 모는 막대기만 들고 혼자서 불레셋 전사 600명을 때려죽인 무시무시한 무공의 소유자입니다.  동방불패도 그 정도의 무공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중세의 삽화에서는 막대기는 그래도 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소잡는 칼 같은 것으로 마구 살륙을 벌이고 있군요.)



(생각해보니 무협지에서도 일월신교 교주 임아행이나 명교 교주 장무기, 소림사 방장 등 종교 지도자가 가장 강력한 무공을 갖춘 경우가 정말 많은데요 !  사진 속 인물은 영화 동방불패에 나오는 흡성대법의 창시자 임아행입니다.  실제 소설 소오강호에 나오는 임아행은 저런 미치광이가 아니라 정말 문무에 모두 통달한 무림 대종사로 나오는데 참 아쉽더군요.)




그러다 어느 정도 사회가 발전하면 결국 세속 권력이 발달하면서 종교 권력을 밀어내고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잠깐 신앙심을 접어놓고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그런 갈림길이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사무엘 상편(1 Samuel)입니다.  


사사라는 직위는 그 역할이 약간 불분명하긴 합니다만 제사장이기도 하고 군사 지도자이기도 하면서 또 원칙적으로는 신분이 세습되었던 모양입니다.  사무엘의 전임자인 엘리는 처음에는 제사장(삼상 1:9)이라고 소개되지만 죽을 때는 사사라고(삼상 4:18) 설명되는 인물인데, 그 두 아들은 무척 부패한 인물이었으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엘리는 그들에게 사사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두 아들은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모두 전사해버리지요.   그 뒤를 이은 사무엘은 무척 공정하고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사무엘의 아들들도 사무엘과는 달리 무척 부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그 전임자 엘리처럼 또 그 아들들을 사사로 임명하여 세습을 시도했습니다.  (아, 세습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에 반발하여 다른 선진국들처럼 우리도 왕정을 세우자고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는 사사로부터 군사권과 사법권, 행정권 등 많은 권력을 빼앗아 왕에게 주는 일이었으므로 사무엘이 이에 대해 (잠시 신앙심을 완전히 접어두고 읽으면) 신의 뜻을 저버리는 일이라며 매우 불쾌해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8:1 사무엘은 나이가 들어 자기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았습니다. 

8:2 사무엘의 두 아들 이름은 요엘과 아비야였습니다. 요엘과 아비야는 브엘세바에서 사사로 있었습니다. 

8:3 그러나 사무엘의 아들들은 사무엘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직하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모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남몰래 돈을 받고 공정하지 않은 재판을 했습니다. 

8:4 그래서 장로들이 모두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왔습니다. 

8:5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늙었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처럼 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다른 나라들처럼 우리를 다스릴 왕을 세워 주십시오.” 

8:6 사무엘은 장로들의 이 말을 기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 기도드렸습니다.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이 너에게 말하는 것을 다 들어 주어라. 백성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 내가 그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8:8 백성들이 하는 일은 언제나 똑같다. 내가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올 때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은 나를 버렸고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런데 그들은 똑같은 일을 너에게도 하고 있다. 

8:9 이제 백성의 말을 들어 주어라. 그러나 그들에게 경고하여라. 그들을 다스릴 왕이 어떤 일을 할지 일러 주어라.” 

...중략...

8:19 그러나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다스릴 왕이 필요합니다. 

8:20 왕이 있으면 우리도 다른 모든 나라들과 같게 됩니다.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릴 것입니다. 왕이 우리와 함께 나가서 우리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결국 백성들에게 등떠밀려 왕을 옹립하게 된 사무엘이 하필이면 가장 빈약한 세력을 가진 벤야민 지파 중에서도 매우 별볼일 없던 가문 출신의 사울(Saul)을 왕으로 세운 것은 (물론 하나님의 뜻이라고 씌여있긴 합니다만) 새로 생긴 왕정을 견제하려는 종교 권력의 절박함을 잘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덕분에 사울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음에도 일부 더 강력한 가문들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삼상 10:27) 한동안 평소 하던 대로 직접 황소로 쟁기질을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삼상 11:5)  사울이 왕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한 것은 암몬 왕 나하스(Nahash)가 길르앗 야베스(Jabesh Gilead)를 침공했을 때 뛰어난 군사적 역량으로 그를 격파한 뒤의 일이었습니다.  (삼상 11:15)  이건 고대 국가 세속 권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군사 지도자 역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확고해진 왕권도 종교 권력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사울과 그를 세운 사무엘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사울이 사무엘의 권한인 번제를 직접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전투란 신의 마음에 그 결과가 달린 무척 중요한 종교적 이벤트였습니다.  따라서 전투 직전에 제사를 드리고 신의 은총을 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제사를 드리기 전에는 전투를 벌일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적군이 눈 앞까지 쳐들어와 우리 편 병사들을 마구 쳐죽이는 상황에서도 제사를 드리지 못하면 싸워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는 꼭 이스라엘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흔히 있던 일입니다.  가령 페르시아 전쟁 중인 기원전 479년 벌어진 플라타에아(Plataea)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섭정이자 총지휘관이었던 파우사니아스는 신에게 바치는 희생물의 내장에서 좋은 징조를 얻지 못하자, 좋은 징조가 나올 때까지 계속 희생물을 바치느라 전투 개시를 계속 미루었습니다.  페르시아군의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와 아군 병사들이 픽픽 쓰러지는 상황에서도 좋은 징조가 나올 때까지 진격을 허락하지 않고 계속 희생물만 바치고 있었지요. 




(결국 희생물의 내장에서 좋은 징조가 나왔기 때문인지 플라타에아 전투에서 스파르타를 비롯한 그리스 연합군은 마르도니우스의 페르시아군을 완전 궤멸시킵니다.)




사울도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무엘 상 13장에는 사울이 불레셋과 전투를 앞두고 무척 불리한 상황에서 불레셋군과 대치한 상황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7일 간이나 기다렸는데도 번제를 드리기 위해 온다던 사무엘이 전투 현장에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번제를 지내지 않으면 싸울 수가 없는데, 불레셋 군은 언제라도 쳐들어올 수 있는 위기일발의 상황이 이어지자, 불안해진 이스라엘 병사들은 개죽음을 피해 대거 탈영에 나섰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울은 오지 않는 사무엘을 언제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뭐 사무엘이 스위스 차장이 운행하는 기차를 타고 오는 것도 아니고, 도중에 산적을 만나 죽었는지 불레셋 척후병의 습격을 받았는지 혹은 노령에 병이 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요.  제 생각에 어떤 군사 지휘관이라고 해도 사울과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 같은데, 사울은 사무엘 대신 자신이 직접 번제를 드리기로 합니다.  결과는 사무엘의 분노였지요.  제 상식으로는 지각을 한 사무엘에게 사울이 화를 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13:8 사울은 칠 일 동안,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이 그 곳에 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길갈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3:9 사울이 말했습니다. “나에게 태워 드리는 제물인 번제물과 화목 제물을 가지고 오시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태워 드리는 제물인 번제물을 바쳤습니다. 

13:10 사울이 막 태워 드리는 제물인 번제물을 바쳤을 때, 사무엘이 도착하였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13:11 사무엘이 물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을 하였소?” 사울이 대답했습니다. “군인들은 하나 둘씩 떠나가고 당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또 블레셋 사람들은 믹마스에 모여 있었습니다. 

13:12 블레셋 사람들이 길갈로 와서 나를 공격할 것인데, 나는 아직 여호와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태워 드리는 제물인 번제물을 바쳤습니다.” 

13:13 사무엘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바보 같은 짓을 하였소.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소. 당신이 하나님께 순종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당신의 나라를 영원토록 세우셨을 것이오. 

13:14 하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제 이어지지 않을 것이오. 여호와께서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내셨소. 여호와께서는 그 사람을 자기 백성의 통치자로 임명하셨소.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당신이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13:15 이 말을 하고 나서 사무엘은 길갈을 떠나 베냐민 땅 기브아로 갔습니다. 나머지 군인은 사울을 따라 싸움터에 나갔습니다. 사울이 남아 있는 사람들을 세어 보니 육백 명 가량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의 저주와 직무 유기에도 불구하고, 사사가 아닌 왕이 바친 번제도 효험이 있었는지 결국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용맹에 힘입어, 사울은 제대로 무장도 못한 600명의 병력으로 불레셋의 대군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둡니다.  이후로도 수십년 간 굳건한 왕정을 이어갑니다.  결국 사무엘은 최후의 사사가 되었고, 사사라는 직위는 왕정에 밀려 사라지게 됩니다.  (신앙심을 완전히 접어두고 읽으면) 누가 봐도 이 사건은 명확히 종교 권력에 대한 세속 권력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종교 권력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종교 권력과 불화한 사울이 결국 불레셋에게 패배하여 죽고 다윗이 그 뒤를 잇게 된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의 뒤를 이은 다윗은 사울과는 달리 종교 권력의 권위를 인정하고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그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가령 사무엘로 하여금 다윗을 택하게 만든 사울의 죄라고 해봐야 (1) 사울이 사무엘의 권한을 침범하여 직접 번제를 드린 것과, (2) 아말렉인들을 토벌할 때 사무엘의 명령에 따라 남녀노소는 물론 가축들까지 모조리 쳐죽이라 했지만 가축들은 죽이지 않고 백성들과 나누어 가진 것 정도였습니다.  이건 분명히 종교적 의무 대신 백성들의 경제적 이익을 중시한 정당한 통치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사무엘은 사울을 저주하고 다윗을 대신 왕으로 세웠으며, 결국 사울은 본인 뿐만 아니라 아들들까지 모두 죽어야 했습니다.

그에 비해 다윗의 죄는 '위력에 의한 성폭행' 뿐만 아니라 부하의 미녀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충직한 부하를 함정에 밀어넣어 살해한 것으로서, 현대 기준으로 볼 때도 천인공노할 범죄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선지자 나단(Nathan) 앞에서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미녀 밧세바(Bathsheba)를 정식으로 인정받고 그 사이에서 난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까지 물려줄 수 있었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는 결국 세속 권력도 종교 권력의 협조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는 종교 세력의 경고로 볼 수 있습니다.  고대~중세 시절에는 당연히 그랬을 것입니다.  과연 근대라고 할 수 있는 나폴레옹 시대에도 그런 관례가 이어졌을까요 ?




(블레셋군에게 패배한 뒤 이교도 블레셋인들에게 당할 치욕을 피하기 위해 검 위에 엎어져 자살하기 직전인 사울 왕입니다.  그 옆에 선 시종도 같은 방법으로 자살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구약에서는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가르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신약에도 직접적으로 자살을 금한 구절은 없더군요.)



(유명한 다윗 왕과 밧세바의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입니다.  가만 보면 성경은 정말 19금으로 지정해야 하는 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야한 부분이 많습니다.)




나폴레옹은 자타가 공인하는 비종교적 인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에서 구술한 회고록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평생 진정으로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브리엔 사관학교에서 소년 시절을 보낼 때, 학교에서의 미사 시간에 카토나 케사르 같은 고대 로마의 영웅들이 하나님이나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지옥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훌륭한 위인들이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종교를 갖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불에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  나는 그때 이후로 종교를 갖지 않았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역사서를 많이 읽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만, 그의 성향으로 볼 때 성경을 열심히 탐독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나폴레옹은 종교 권력에 대해 다윗과 같은 겸허함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울의 길을 택했지요.  


프랑스 대혁명은 왕정과 귀족에 대한 혁명이기도 했지만 많은 특권과 부를 누려온 카톨릭 사제 계급에 대한 혁명이기도 했습니다.  대혁명 기간 중 카톨릭은 많은 재산을 잃었고 많은 사제들이 감옥에 쳐박혔습니다.  그런 소동 후에 나폴레옹과 교황 비오 7세(Pius VII) 사이에 이루어진 1801년 정교협약(Concordat)은 세속 권력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던 카톨릭으로서는 간신히 체면을 차릴 정도의 협정이었습니다.   카톨릭이 프랑스의 주요 종교로 공식 선포되기는 했으나 국교로서의 지위는 상실했고, 프랑스 내 사제들의 급여는 프랑스 정부가 지급하게 되었지만 정작 그 많던 프랑스 내 카톨릭 자산은 모두 상실했으며, 바티칸에게도 프랑스의 주교를 해임할 권한은 주어졌으나 정작 주교 임명권은 프랑스 정부, 정확하게는 나폴레옹에게 주어졌습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멀고 나폴레옹의 총검은 가까왔으니까요.  


이는 분명히 세속 권력이 종교 권력의 영역에 부당하게 침입하는 모양새였습니다.  나폴레옹 같은 세속적인 인간이 카톨릭 사제를 임명하다니요 !  그러나 비오 7세도 분명히 세속 권력의 영역에 발을 딛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 세계의 수장이도 했지만 동시에 세속 권력을 가진 군주이기도 했습니다.  교황령(Papal States, Stato Pontificio)이라고 해서 교황이 세속 군주로서 직접 통치하는 영토가 꽤 상당했거든요.  물론 이 영토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침공으로 쉽사리 점령당했습니다.  비오 7세의 전임자인 비오 6세는 나폴레옹의 1차 침공 때 로마가 함락되면서 포로로 프랑스에 잡혀가 거기서 죽기까지 했지요.  1801년 정교협약에 의해 이런 영토 중 일부는 다시 바티칸에 반환되었습니다.




(교황이 영적인 세계 뿐만 아니라 지상의 세계에서도 군주로 통치했던 교황령의 지도입니다.  생각보다 꽤 넓습니다.  교황령이 사라진 것은 1861년 가리발디의 정복 전쟁에 의해서였고, 공식적으로 로마까지 함락된 것은 1870년 이탈리아 왕국군이 포격전을 벌이며 쳐들어온 다음이었습니다.  어차피 아무 승산이 없는 전투였는데도 당시 교황 비오 9세의 고집으로 필요 이상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수십 명이 전사했습니다.)  



(교황령이 이렇게 넓은 이유 중 하나는 16세기 초반 이탈리아 중부에서 갑옷을 입고 직접 전투를 벌이며 영토 확장에 나섰던 율리오 2세(Julius II) 덕분입니다.  이 사진은 1965년 미켈란젤로의 일대기를 그린 The Agony and the Ecstasy 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중무장한 율리오 2세입니다.  당시 이탈리아 일대는 당연히 모두 카톨릭이었을텐데, 전투 현장에서 갑옷을 입은 교황과 칼을 맞대게 된 적군 병사는 정말 황당했을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과 비오 7세의 사이가 다시 나빠진 것은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직전이었습니다.  영국군의 상륙을 막는다는 핑계 하에 나폴레옹이 교황령 주요 항구인 안코나(Ancona)를 점령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교황령 내에서 나폴레옹의 적국인 영국과 러시아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긴 했습니다.  교황은 편지를 보내 나폴레옹에게 즉각 철수를 요구하며 강력히 항의를 했고, 나폴레옹도 교황이 '교회의 장자'인 프랑스의 등 뒤에 칼을 꽂는다고 노발대발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나폴레옹은 교황령을 조금씩 잠식해들어가며 자신이 왕으로 있는 이탈리아 왕국령으로 편입시켰고, 이런 강탈행위에 대해 교황은 나폴레옹이 임명한 주교들을 승인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 반항으로 대응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교황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돌+아이였습니다.  틸지트 조약으로 러시아 쪽까지 대략 정리한 나폴레옹은 1808년 2월 다시 로마를 점령해버리고 이어서 문제의 안코나를 포함한 굵직한 교황령 몇 개를 또 이탈리아 왕국으로 편입시켜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음 해인 1809년에는 아예 로마까지 프랑스령으로 선언해버렸지요.  교황의 세속 영토를 모조리 빼앗아버린 것이지요.  이 정도면 아무리 비오 7세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고 해도 참기 어려웠습니다.  교황은 나폴레옹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 일괄적인 파문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카톨릭 교회에서 가장 심각한 징벌이었지요.  물론 하나님의 벼락이 당장 나폴레옹 머리 위에 떨어지지는 않았고, 나폴레옹은 당시 나폴리 왕이던 매제 뮈라(Joachim Murat)에게 편지를 휘갈겨 '교황을 가두어버려야 한다'라고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물론 이는 명령이 아니라 그냥 분풀이용 편지였는데 문제는 그 편지를 받은 뮈라는 상상력이 부족한 대신 실행력은 뛰어난 불꽃남자였다는 점이었습니다.  뮈라는 야밤에 병력을 보내 정말 비오 7세를 체포해왔습니다.  




(뮈라의 부하 라데(Radet) 장군에게 체포되는 비오 7세입니다. 라데는 훗날 비오 7세를 체포할 때의 순간에 대해 'Dès ce moment là, ma première communion m'est apparue !' (그 순간 내 첫번째 성찬식 장면이 눈 앞에 아른거리더라 !) 라고 언급했습니다.)




이 소식에 나폴레옹은 또 복장이 터졌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뮈라에 대해서였지요.  "아니 그걸 시킨다고 진짜 하냐 !!"  그러나 생각해보니 뭐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이제 와서 교황에게 사과한다고 좋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는 교황을 바티칸에 돌려보내지 않고 북부 이탈리아의 사보나(Savona)에서 3년 간 가택 연금시켰고, 1812년부터는 교황을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로 끌고 와 퐁텐블로(Fontainbleau) 성에 연금시켰습니다.  특히 퐁텐블로로 교황을 데려올 때 교황은 열병과 변비 등으로 건강 상태가 극히 안 좋았는데도 나폴레옹이 보낸 의사 한명만 동승시킨 채 야간에만 마차로 강행군을 시켜 교황이 거의 요단강을 건널 뻔 했다고 합니다.  야간에만 이동시킨 것은 물론 아직 신앙심이 강한 편이었던 프랑스 남부 주민들이 교황이 그렇게 험하게 끌려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이 사람 좋게 생기신 분이 바로 비오 7세이십니다.  그림이 매우 명작으로 보이신다면 눈썰미가 있으신 겁니다.  나폴레옹 전속 화가 다비드가 그린 것이거든요.)




교황의 이런 시련은 1814년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패퇴하던 1814년 5월에야 오스트리아군 소속 헝가리 라데츠키 경기병 연대(5th Radetzky Hussars)가 교황을 구출하여 로마까지 호송했습니다.  이때 교황이 감사의 표시로 이 경기병 연대에게 하사한 복잡한 라틴어가 수놓인 군기는 지금은 군사박물관으로 쓰이는 오스트리아 빈의 무기고에 아직도 전시되어있습니다.


결국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처럼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귀양살이를 떠나야 했고, 비오 7세는 영국 정부에게 편지를 써 나폴레옹이 그 섬에서라도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선처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이 위암으로 죽은 뒤 2년 뒤 사망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보다 먼저 죽었고, 또 죽은 뒤에 혼백으로 사울 앞에 나타났을 때조차도 사울에게 저주를 퍼부은 것(삼상 28:16)과는 꽤 다른 결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성경에서도 해석에 일부 논란이 있는 사무엘 상 28장에 나오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the witch of Endor)을 통해 사무엘의 영혼과 사울이 만나는 부분입니다.  과연 죽은 사람의 영혼을 영매를 통해 불러낼 수 있는가가 핵심인데, 특히 사무엘 정도의 선지자는 당연히 천국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현재 주된 해석은 진짜 사무엘의 영혼이 불려온 것이 아니라 마녀의 거짓말에 의해 사울이 속는 장면이라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nocr.net/index.php?document_srl=23948&mid=koreasy

https://en.wikipedia.org/wiki/Pope_Pius_VII

https://en.wikipedia.org/wiki/Napoleon_and_the_Catholic_Church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napoleon-and-the-pope-from-the-concordat-to-the-excommun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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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캡틴남아메리카 2019.01.07 1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은혜로운 첫 번째. ㅎ
    항상 챙겨 읽고 있습니다.

  2. 카를대공 2019.01.07 15: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릴적 친구손에 이끌려 따라갔던 교회에서 구약 내용을 배울 때 참 불만이 많았더랬습니다.
    아니 뭔 남의 나라 역사를 이렇게 꼼꼼하게 배우지?
    그것도 영 교훈될 것도 없는 내용 같은데......이런 생각이 초등학생 마음에도 자연스레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신약 얘기를 할 때도 영 시큰둥 했습니다.

    나중에 나이를 먹고보니 신약에서 예수님 말씀은 비신자인 제가 봐도 좋은 말씀이 무척 많더군요.

  3. 카를대공 2019.01.07 15: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년도 새해가 밝았는데 늘 그랬던것처럼 나시카님도 건승하시길!

  4. 못내밍 2019.01.07 16: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 너무재밌네용ㅎ.ㅎ

  5. 못내밍 2019.01.07 19: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정말 고맙다뇨 제가더고맙쥬

  6. starlight 2019.01.08 1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늦었지만 새해 다복하시고 늘 건강하시고 이루고자하는 모든 소망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늘 잘보고 있습니다^^

  7. 유애경 2019.01.08 15: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성경에서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구절을 본적이 없는것 같네요!

    전에 지금은 이름이 바뀐 큰○음 교회에 다니시던 분이 우리나라에 북한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들이 엄청 많이 들어와있고 기독교도 위협을 받고 있다는 말을 심심찮게 하시던데 뭔가 위화감,이질감을 느꼈더랬습니다. 기독교인 이라고 빨갱이란 단어를 못쓸 이유도 없지만 교회에서 그런 설교도 하나 싶어 기분이 좀 그렇던데요...

    항상 잘보고 갑니다.

    • 나삼 2019.01.08 1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국 기독교 역사는 북괴의 탄압과 박해로 엑소더스를 한 경험이 있다보니 아무래도 좌파 에게 시선이 곱지 않은 경향이 있는것 같습니다

  8. ㅁㅁ 2019.01.08 2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나폴레옹전쟁사의 신스틸러 뮈라...

  9. reinhardt100 2019.01.08 2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의 관계에 따라서 문명 그 자체의 발전 방향도 달라지고는 했습니다. 지나문명권에서는 세속권력이 제자백가를 중심으로 종교를 상당히 포섭하면서 세속권력이 압도적 우위를 가집니다. 반면 구주의 기독교 및 중동 이슬람교 등의 아브라함 계열 종교는 종교가 한때 세속권력을 압도했습니다. 그 반동이 중상주의, 절대왕권, 계몽주의 같은 것들이죠. 특히 서방 카톨릭 권역은 종교개혁까지 거치면서 발전행정의 기반이 15세기부터 내내 닦여지게 되었고 이게 제대로 터진게 나폴레옹 전쟁기였죠.

    사실 산업혁명이 급속하게 진행된 것도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데 동시대 동아시아권이나 인도, 중앙아시아는 '내전이 있었지 국제전이 없었다.' 이 차이가 19세기 이후 국력의 역학 관계를 결정한 겁니다.

    종교가 세속에 관여하는 것은 사회복지의 사각지대를 보충하는 것 그 이상은 절대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법인의 재산은 말 그대로 국고의 예비금적 성격이 있다는 것을 항상 인지해야하고 국체수호에 반하는 반국가적인 성직자에 대해서는 엄히 처벌해야할 겁니다. 우리는 국가인이고 신자이지 성직자는 결코 아니니까요.

    본문에도 언급되었지만 프랑스혁명이 프랑스 카톨릭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습니다. 아시냐 발행준비금이랍시고 교회 토지 전부를 혁명정부가 홀라당 다 가져갔고 게다가 반혁명적인 사제들 때문에 도매금으로 혁명 지지하는 성직자들이 주재하던 성당들조차 박살난 데가 널렸죠. 이런 반카톨릭 분위기를 그나마 제어한게 나폴레옹인데 정교협약으로 카톨릭에 그나마 체제에 순응하면 혁명기처럼 막나가지 않는다고 명확히 해주었죠. 복귀한 부르봉 왕정 역시 나폴레옹의 종교정책을 이어받았습니다. 문제는 제2제정과 제3공화국에서 심각해졌는데 극렬 반카톨릭주의자들이 연속해서 정권 수뇌부를 차지하게 되면서 카톨릭의 세속적 영향력 제거가 마치 국체수호의 한 방편이 되는 상황까지 사태가 심각해집니다. 카톨릭 역시 가만히 당하진 않아서 초등교육을 두고 공화국 정부와 격렬한 대립을 이어갔고 드레퓌스 사건에서도 극렬하게 정부와 대립했습니다.

    왜 정부와 카톨릭이 대립을 멈추었냐? 정부의 주교임명권 포기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성왕 루이 9세 이후, 갈리아교회주의가 국가의 정신적 사류 중 하나였던 프랑스에서 세속권력이 당연히 성직자를 임명할 권한이 있다고 여겼지만 혁명 이후 더 이상 세속권력이 그런 걸 하면 안된다고 인식한 카톨릭과 종교계 통제의 방편을 포기하기 싫었던 정부가 미친듯이 대립할 수밖에 없었는데 1905년 마침내 공화국정부가 주교임명권을 포기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카톨릭 역시 모든 반공화국 활동을 금지하며 프랑스 내 카톨릭 성직자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선서를 의무화하는 것으로 화답합니다. 갈리아교회주의를 새로 해석한 거죠.

    대한민국에서도 국체수호의 면이 강했던 불교 및 개신교 계열의 세가 강한 이유도 프랑스와 비슷합니다. 건국 초기 극렬 반공주의 성향이 강해서 가장 국체수호적인 면이 강했던 카톨릭이 1970년대 이후 국체수호에서 상대적으로 멀어지면서 가뜩이나 밀리던 세가 더욱 밀리면서 신자수 3위에서 성장할 동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렸죠. 프란체스코 교황 예하 방한 이전까지 카톨릭은 계속 현상유지에 급급했죠. 반면 불교나 개신교는 10.27 법란이니 다른 대립이 있었지만 국체수호에 있어서는 제3,4,5공화국 및 이후의 제6공화국 역대 정부에 거의 순응일변도로 나갔습니다. 덕분일지는 몰라도 지금은 양대종교가 사실상 압도하고 있죠.

    좀 말이 많았고 반복하는 겁니다만 국체수호에 있어서만큼은 종교권력이 세속권력에 순종하는게 옳다고 봅니다.

  10. 까까님 2019.01.10 07: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공지능 파파고 번역기가 모든 외부세계의 정보를 번역통역 해주는 세상
    다른 잡번역 어플 쓰면 이단 쩌리
    그러나 사실 파파고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먹고 싸야 살아가는 인간이 컴퓨터 안에 앉아있는 거였던 거죠
    전 여러 종교 여러 단체를 기웃거려봤지만 결국 무교로 살고있죠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걸 원치 않는 사람이 꽤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11. 아리 2019.01.10 19: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독교인인데 사무엘, 사울, 다윗의 이야기를 이런 방향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군요 ㅋㅋ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12. 목탁 2019.02.27 0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어, 거 참...옛날에 읽었던 어린이용 성경에선 사울을 '사무엘과 야훼를 개무시하고, 다윗을 시기질투하고, 고집불통인 천하의 개♪♪♬'으로 묘사해 놨길래 그게사실인 줄 알았었는데...오늘 나시카님 글을 읽고 나니 실상은 정반대였던 것 같네요.

    그리고 오늘 나폴레옹에 대해 1마디 하자면...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폴레옹 당신이 한 소리잖소? 당신이 까라면 뮈라도 까야지,별 수 있겠어? 그 양반한테도 변명의 여지 정도는 있단 말이다!

  13. MB18NOM 2019.06.28 0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가 정치까지 하는 세상은 대체로 비이성적인 시기였던거 같습니다. 그럴수밖에 없는게 신의 뜻을 전달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법위에서 정치와 사회를 좌지우지 하다보면 정의와 평등, 이성 따위는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기마련이지요.

    현재까지도 이슬람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종교 자체는 훌륭하나 언제나 사람이 문제이고 따라서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하는데 ... 대한민국에서는 무려 특별시를 누구에게 봉헌하겠다는 분이 대통령하는 일도 있었죠. 결말은 아직도 진행형이구요

제가 좋아하는 3대 나폴레옹 전쟁 소설 시리즈인 혼블로워, 샤프, 잭 오브리 시리즈들 중에서 아침식사 장면만 몇몇 번역을 해보았습니다.  그냥 심심풀이로 읽어보세요.  다만, 출출한 야밤에 읽으시면 좀 곤란하겠네요.  





Mr. Midshipman Hornblower by C.S.Forester (배경 : 1795년 프랑스) ---------------------

(프랑스 망명귀족들이 영국 해군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퀴베롱 지역에 상륙합니다.  사관후보생 혼블로워는 통역으로 이들과 동행합니다.)

그들은 번쩍이는 구리 냄비가 벽에 걸린 커다란 주방으로 들어갔고, 말이 없는 여자가 커피와 빵을 내왔다.  그녀는 애국자로서 열정적인 반혁명주의자일 수도 있었겠지만, 최소한 그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녀의 감정은 이 귀족 패거리들이 자신의 집을 멋대로 점거하고는 자신의 음식을 돈도 내지 않고 마음대로 먹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쉽게 영향을 받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망명 귀족들의 군대가 징발한 마차나 말들 중에는 그녀 소유의 것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어제밤에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주민들 중 몇몇이 그녀의 친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커피를 내왔고, 참모진들은 박차를 단 장화를 신은 채 커다란 주방 여기저기에 서서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혼블로워는 그의 컵과 빵 한조각을 손에 들었다.  이 순간 이전에는 4달 동안이나 건빵 외에는 빵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맛이 좋은지 나쁜지 뭐라고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는 전에 커피를 겨우 3~4번 정도 밖에 마셔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컵을 두번째 들어올렸을 때, 그는 마시지 않았다.  마시기 직전에 저 멀리 어디선가 대포 소리가 울렸기 때문에, 그는 컵을 내려 놓고 얼어붙은 듯 굳어 버렸던 것이었다.  대포 소리는 두번, 세번 반복되었고, 그에 이어 더 가까이서 더 날카로운 포성이 울렸다.  둑방길에 설치되었던 사관후보생 브레이스거들의 6파운드 포의 포성이었다.

주방에서는 즉각 난리법석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컵을 엎질러 검은 액체의 시냇물이 테이블을 가로질러 흘렀다.  다른 누군가는 서둘러 나가다 박차가 서로 엉켜 다른 사람의 품 안에 쓰러졌다.  모든 사람이 일시에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혼블로워도 다른 사람들처럼 몹시 흥분되었다.  그도 당장 뛰어나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아보려 했지만, 그 순간 자신이 소속된 HMS 인디퍼티거블 호가 전투 직전에 보여주었던 군기잡힌 차분함을 생각해냈다.  그는 이런 부류의 프랑스 사람이 아니었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 컵을 들어올려 차분히 마셨다.  이미 대부분의 참모진들은 말을 대령하라고 외치면서 밖으로 뛰어나간 상태였다.  안장을 채우는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그는 주방을 서성이는 푸조쥬와 눈길이 마주쳤는데도, 차분히 커피를 주욱 다 마셨다.  비록 좀 뜨겁긴 했지만 뭔가 폼나는 행동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빵도 있었기 때문에, 식욕이 전혀 없었지만 억지로 씹어삼켰다.  이제 야전에 하루 종일 있을 거라면, 다음번 식사가 언제일지 전혀 알 길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먹다남은 반덩어리의 빵은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Master and Commander by Patrick O'Brian (배경: 1800년, 스페인 부근 마요르카 섬)------------------

사실 목공장의 때이른 열성은 바로 이 때문이었고, 또 장교 식당의 급사가 전임 함장인 앨런 함장의 변함없는 아침식사 메뉴였던 스몰 비어(옥수수 죽(hominy grits), 그리고 차가운 쇠고기를 들고 서성거렸던 이유이기도 했다. 





Lieutenant Hornblower by C.S.Forester (배경 : 1801년 대서양 HMS Renown 선상) ---------------------

장교실에 아침식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평상시보다는 더 조용하고 활기가 없는 아침식사였다.  항법장, 사무장, 해병 대위가 평소와 같은 '굿 모닝' 인사를 하고는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앉아 먹기 시작했다.  그들도 전함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함장의 의식이 깨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배 현창으로 두 줄기의 긴 햇살이 들어와 그 비좁고 사람이 빽빽히 앉은 선실을 비추면서, 배의 부드러운 움직임에 따라 장교실 바닥을 앞뒤로 흔들거렸다.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무역풍의 신선하고 상쾌한 공기가 열린 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커피는 뜨거웠고, 배에 실린지 3주 밖에 안된 건빵은 바구미가 전혀 없는 것이, 배에 실리기 전에도 창고에 보관된 것이 겨우 1~2달 밖에 안되었던 모양이었다.  장교실 요리사는 눈치좋게 좋은 날씨의 기분을 내려고 지난 밤의 염장 돼지고기와 배에서 점점 줄어가는 저장 양파를 볶아 내놓았다.  채를 썰어 양파와 함께 볶은 염장 돼지고기에, 뜨거운 커피와 오래 되지 않은 건빵에, 신선한 공기와 햇살에 좋은 날씨라면, 장교실은 아주 활기찬 장소여야 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근심과 걱정,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Lieutenant Hornblower by C.S.Forester (배경 : 1802년 런던 혼블로워의 하숙집) ---------------------

(방세를 못내 구박받던 혼블로워가 지난 밤 도박장에서 큰 돈을 따서 밀린 방세를 내고 그 동안 당했던 설움에 방을 옮기겠다고 하자, 하숙집 주인인 메이슨 부인이 서둘러 근사한 아침식사를 올려보내줍니다.)

어린 수지가 케이블이 올려질 때 절단기를 들고 뛰어다니는 소년들처럼 두 테이블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식탁을 차렸다.  커피 포트와 토스트, 버터와 잼, 설탕과 밀크, 양념병과 뜨거운 접시, 그리고 넓은 접시가 혼블로워 앞에 놓여졌다.  그녀가 뚜껑을 들어올리자 접시에 놓인 멋진 챱스 요리에서 맛있는 냄새가 피어올라 방안을 채웠다.

"아!" 혼블로워가 스푼과 포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너 아침은 먹었니, 수지 ?"
"저요, 중위님?  아니오, 아직이요."
혼블로워는 손에 스푼과 포크를 든 채 멈춰 챱스와 수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스푼을 내려놓고는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이런 챱스 요리를 니가 먹을 방법이 전혀 없겠지 ?"  그가 말했다.
"저요, 중위님 ?  물론 안되요."
"이제 여기 반 크라운(half-crown. 2.5 실링짜리 은화. 현재 가치로 약 3만2천원 : 역주)이 있단다."
"반 크라운이라고요 !"
그건 노동자 하루 일당의 절반이 넘는 금액이었다.
"너에게서 약속을 받아야겠다, 수지."
"중위님 - 중위님 - !"
수지의 손은 등 뒤로 사라졌다.
"이걸 받고, 시간이 나는 대로, 메이슨 부인이 너를 나가도 좋다고 하자마자, 당장 나가서 뭔가 먹을 걸 사거라.  너의 그 불쌍하고 조그마한 배를 채우라고.  패것(faggot.  잘게 썬 고기를 빵과 섞어 구운 것: 역주)이나 완두 푸딩, 돼지 족발 (pig's trotters), 니가 먹고 싶은 건 모조리.  약속해."
"하지만 중위님 -"
반 크라운, 거의 무제한의 음식, 이런 것은 사실이기엔 너무나 환상적인 것들이었다.
"아, 받으라고." 혼블로워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예, 중위님."
수지는 그녀의 바짝 마른 손에 은화를 꽉 움켜쥐었다.
"약속했다는 거 잊지 말라고."
"예, 중위님, 정말, 고맙습니다, 중위님."






Sharpe's Fortress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03년 인도) -----------------------------

(샤프는 영국군 기병대의 아는 친구를 찾아 갑니다.)

록하트 중사는 연기 자욱한 아침부터 찾아온 불청객 이야기에 궁시렁거렸으나, 그 방문자가 샤프인 것을 알아보고는 씨익 웃었다.
"아마 싸움거리가 생긴 모양이다, 얘들아."  그는 소리쳤다. "망할 보병이 왔네 그려.  좋은 아침입니다, 소위님.  저희 도움이 또 필요하신가요 ?"
"아침 좀 먹었으면 하는데."  샤프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홍차부터 시작하시지요.  스미더스 ! 포크 챱스를 가져와 !  데이비스 ! 니가 나 몰래 숨겨 놓은 빵 좀 가져와 !  당장 움직여 !"  록하트는 다시 샤프를 돌아보았다.
"포크 챱스가 어디서 생긴 건지는 묻지 마세요.  물으시면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그는 양철 머그잔에 침을 뱉고는 담요 끝으로 그 내부를 닦아내고, 거기에 차를 따랐다.
(...중략...)
포크 챱스와 빵을 먹고나자, 중사는 샤프를 인도인 기병대 진지를 가로질러 제7 인도 기병대의 지휘관의 텐트로 데려갔다.  그 지휘관이 전체 원정군의 기병대를 책임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분 이름은 허들스톤이고요,"  록하트가 말했다. "그리고 괜찮은 양반이에요.  아마 우리에게 두번째 아침식사를 권할 겁니다."
허들스톤 대령은 정말 록하트와 샤프에게 쌀과 달걀로 된 아침식사를 권했다.






Sharpe's Trafalgar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05년 인도양 무역선 상) -----------------------------

아침식사는 매일 오전 8시였다.  3등실의 승객들은 종종 그룹으로 나뉘어, 각 그룹 내에서 당번을 정해 앞갑판(forecastle) 쪽에 있는 주방으로부터 버구(burgoo) 한단지를 가져왔다.  버구라는 것은 오트밀 죽에 밤새 주방 난로에서 고기를 삶을 때 나온 쇠고기 기름 조각을 섞은 것이었다.  점심은 정오에 있었는데, 이 때의 메뉴도 역시 버구였다.  다만 점심 때의 버구에는 좀더 큰 고기 조각 또는 질긴 말린 생선 조각이 좀 탄데다 덩어리진 오트밀에 섞여 나왔다.  일요일에는 소금에 절인 생선과 돌처럼 딱딱한 건빵이 나왔는데, 건빵은 바구미 투성이어서 탁탁 두들겨 벌레를 빼내야 했다. 
비스킷은 끊임없이 씹어야 했는데, 마치 벽돌을 으깨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건빵을 두들길 때 빠져나오지 못한 벌레가 이따금씩 씹혀서 색다른 맛을 내기도 했다.  차는 오후 4시에 제공되었으나, 이는 배 고물 쪽의 1등실 승객들에게만 제공되었고, 3등실 승객들은 저녁 때가 되기를 기다려야 했는데, 그 메뉴도 그저 말린 생선에 비스킷, 그리고 벌레 구멍이 숭숭 뚫린 딱딱한 치즈였다.

(...중략...)

1등실의 승객들에게는 아침식사로 3등실에는 절대 나오지 않는 사치품인 달걀과 커피가 제공되었는데, 샤프는 이 VIP 승객들과의 아침식사에는 초대받지 못했다.

(...중략...  샤프는 무역선에서 영국 군함 HMS Pucelle로 옮겨 탑니다.)

체이스 함장은 샤프를 반겼다.  체이스의 함장모는 그의 턱에서 매듭을 진 캔버스 천으로 묶여 있었다.  "아침은 들었나 ?"

"예, 함장님."  푸셀 호에는 보급품이 떨어져가고 있었으므로 아침식사는 변변치 못한 편이었다.  장교들도 수병들처럼 부실한 배급량의 쇠고기와 건빵, 그리고 스캇치 (Scotch) 커피로 때우고 있었는데, 스캇치 커피란 태운 빵부스러기를 뜨거운 물에 풀고 설탕으로 단 맛을 낸 꺼림직한 액체였다.





Sharpe's Prey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07년 덴마크) -----------------------------

(덴마크군의) 장군은 차가운 청어, 치즈와 빵으로 된 아침식사를 새벽이 되기 훨씬 전에 이미 먹었다.  이제 부대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행군 준비를 시작했다.  민병대 대령 한명이 목사의 집에 와서 자기 부대원들이 맞지 않는 구경의 탄약을 공급받았다는 우울한 보고를 했다.  "구경은 맞을 겁니다." 대령은 보고했다.  "하지만 총강 내에서 총알이 튀어다닙니다.  이런 걸 두고 유극(windage, 총강과 탄환 사이의 간격: 역주)이 너무 크다고 하더군요."  민병대 대령은 보르딩보르그 출신의 치즈 제조업자였는데, 사실 목제 나막신을 신은 그의 병사들을 영국군 정규병들 앞에 내모는 것이 영 탐탁치 않았다.







Sharpe's Havoc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09년 포르투갈) -----------------------------

새벽녁에 그들은 나무가 우거진 언덕에 다다랐다.  그들은 시냇물가에 멈춰서 오래된 빵과 너무 딱딱해서 구두 밑창으로 써야겠다고 농담들을 해댄 훈제 고기로 아침을 먹었다.  병사들은 샤프가 불을 피워 홍차를 끓이는 것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궁시렁거렸다.

(...중략...)

궁전 복도의 시계가 11시를 알릴 때, 술트 원수가 중앙의 대형 계단을 내려왔다.  그는 바지와 셔츠 위에 비단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아침식사는 준비되었나 ?"  그가 물었다.
"청색 리셉션 룸에 준비되었습니다, 장군님."  부관이 대답했다.  "손님들께서도 오셨고요."
"좋아, 좋아 !"  그는 시종들이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렸다 방으로 들어가며 방문자들을 활짝 웃으며 반겼다.  "앉으시지요, 앉으세요. 아, 우리가 공식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군요."  이 마지막 말은 아침 식사가 긴 옆 테이블에 풍로가 달린 은제 식탁 냄비(chafing dishes 역주: 부페에 가면 볼 수 있는 그릇)에 차려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술트 원수는 그 뚜껑을 열어보며 긴 식탁을 따라 걸었다.  "햄 ! 멋지군. 삶은 콩팥, 굉장해 !  쇠고기 ! 혀 요리, 좋군, 좋아, 그리고 간 요리.  아주 맛있어 보이는군.  좋은 아침이요, 대령 !"  이 인사는 크리스토퍼에게 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숙임으로써 답했다.






Sharpe's Rifles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09년 스페인) -----------------------------

새로 부임한 중위는 지금 시간이 정오 2시간 전 쯤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전투 후퇴는 오후 일찍 끝날 것이고, 그러고나면 그는 서둘러 하들이 밤을 보낼 만한 외양간이나 교회 같은 곳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는 병참 장교가 밀가루 한포대를 들고 나타나기를 고대했다.  그걸 물로 반죽해서 쇠똥으로 피운 불 위에 구우면 저녁거리와 그 다음날 아침거리로는 충분했다.  재수가 좋으면 죽은 말에서 고기를 좀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Sharpe's Sword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12년 스페인) -----------------------------

"아, 좋아 !  공작님께 알려드려야지.  자네 아침 먹었나 ?"
"예, 소령님."
"그럼 한번 더 들게 !  내가 하인을 시켜서 자네 말을 마굿간에 넣도록 하지."  그는 가다 멈춰서 샤프를 돌아다 보았다.  "힘들었나 ?"
"예."
호간 소령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유감이군.  하지만 자네 일이 제대로 되었다면 말일세, 리처드..."
"압니다."
그의 일이 제대로 되었다면 전투가 있을 것이었다.  마을 남쪽 언덕 둘레의 드넓고 건조한 평원은, 벼락이 치던 날 밤의 배신과 사랑에서 싹이 튼 살륙의 현장이 될 것이었다.  샤프는 두번째 아침 식사를 하러 갔다.




Sharpe's Enemy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2년, 포르투갈)----------------------------------------

웰링턴이 외지로 떠나고 난 뒤라서, 장교들은 아침시간을 침대에서 보내든가, 아니면 바로 옆 여관에 딸린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이 포르투갈 여관 주인은 제대로 된 아침 식사를 만드는 법을 배운 모양이었다. 포크 찹스, 계란 프라이, 튀긴 콩팥, 베이컨, 토스트, 클라레 포도주, 더 많은 토스트, 버터, 그리고 화약찌꺼기가 늘러붙은 곡사포의 포구를 씻어내릴 정도로 강하게 끓인 티가 준비되어 있었다.







Clarissa Oakes by Patrick O'Brian (배경: 1813년, 남태평양 영국 군함 선상)------------------

"그럼 가서 첫번째 아침식사를 나와 함께 들겠는지 머투어린 박사께 여쭙게."
잭 오브리는 우람한 체구를 유지하기 위해, 아침을 두번 먹었다.  아침 해가 뜰 무렵 토스트 약간과 커피를 들었고, 8번 타종 (역주: 오전 8시) 직후에 훨씬 더 든든한 식사, 즉 어쩌다 잡힌 신선한 생선, 달걀, 베이컨, 가끔씩은 양고기 챱스(chops)를 아침에 당직을 섰던 장교 및 사관후보생(midshipman)과 종종 함께 들곤 했다.





Sharpe's Honour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13년 스페인 내 프랑스 요새) -----------------------------

(샤프는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혀 매우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문이 열렸고, 그가 그냥 누워있는 동안 프랑스 당번병이 베리뉴이 장군이 보내준 아침식사를 테이블에 차려졌다.  메뉴가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뜨거운 코코아, 빵, 버터, 치즈였다.  "메르시(고맙네)."  최소한 프랑스어를 좀 배우고는 있구만 하고 그는 생각했다.





Sharpe's Revenge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14년 프랑스 내 영국군 점령지) -----------------------------

(샤프는 이른 아침에 들판에서 결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프레데릭슨은 다시 회중 시계를 꺼내 들었다.  "6시 반."
"춥구만."  샤프는 처음으로 온도를 느끼는 것 같았다.
프레데릭슨이 말했다.  "한 시간 후면 우리는 포크 챱스와 완두콩 푸딩으로 아침을 먹고 있을 거에요."
"자네는 그렇겠지."
"우리 둘다 그럴 겁니다."  프레데릭슨은 참을성있게 주장했다.

(...중략...)

그 후에, 기름걸레로 검을 닦아 칼집에 넣은 뒤, 그는 네언 장군의 텐트로 갔다. 그 텐트 밖에서 그 스코틀랜드 출신의 노인(네언 장군)이 빵과 차가운 염장 쇠고기, 그리고 강하게 끓인 홍차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중략...)  샤프는 웃었다.  그는 네언 맞은 편에 앉았고, 두번 구운 빵을 한조각 집으려 손을 뻗으면서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는지 스스로 궁금했다.  버터는 약간 상한 맛이 났지만 염장 쇠고기의 짠 맛이 그 신 맛을 없애 주었다.





Sharpe's Revenge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14년 프랑스) ---------------------------------------

네언 장군은 토스트용 포크를 샤프에게 건네주고, 검게 그을린 빵에 버터를 듬뿍 바르기 시작했다. "차 들겠나 ?"
"죄송합니다, 장군님." 샤프가 미리 차를 따라놓아야 했었다. 그는 네언이 토스트에 겨자를 듬뿍 바른 엄청난 크기의 햄을 얹는 동안 차 두잔을 따랐다. 네언 장군은 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챗츠워드는 천국에서나 맛볼만한 차를 끓일 줄 안단말이야. 결혼하면 여자를 아주 훌륭한 아내로 만들거야." 그는 샤프가 빵조각을 토스트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거보다 더 검게 태우는게 낫지 않나 ?"
"아닙니다, 장군님." 샤프는 약하게 익힌 토스트를 더 좋아했다. 그는 빵을 뒤집었다.






Hornblower and the Hotspur by C.S.Forester (배경 : 1802년 런던 혼블로워의 하숙집) ---------------------

(혼블로워는 촌스럽지만 착한 하숙집 딸 마리아와 결혼합니다.  이제 결혼 후 첫 출항을 앞둔 아침입니다.)

주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요리 냄새가 흘러들어왔고, 뭔가 팬에서 지글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마리아와 나이든 아주머니와의 대화가 터져나오더니, 마리아가 들어왔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몹시 빠른 것으로 보아, 손에 든 접시가 꽤 뜨거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접시를 혼블로워 앞에 내려 놓았는데, 그 위에는 아직도 지글거리는 거대한 스테이크 덩어리가 놓여있었다.

"여기 있어요, 여보." 그녀는 말하면서 식사의 나머지 부분들을 그의 손이 닿는 곳에 차려 놓았다.  그 동안 혼블로워는 낙담하여 스테이크를 내려다 보았다. 
"제가 어제 특별히 당신을 위해 고른 거에요." 그녀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배에 가 있는 동안 푸줏간에 걸어갔었어요."
혼블로워는 해군 장교의 부인이 '배에 가 있는' 것에 관해 말하는 것에 대해 움찔거리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또 그는 스테이크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침식사에 스테이크를 먹게 된 상황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사실 그는 오늘처럼 흥분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그는 미래를 엿볼 수가 있었다.  그가 만약 무사히 이번 임무에서 돌아온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가 가정 생활에 정착한다면, 무슨 특별한 순간마다 스테이크가 식탁에 올라올 것 같았다.  그 생각에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입도 먹지 못할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마리아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없었다.

"당신 것은 어디있지 ?" 그는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
"오, 저는 스테이크를 먹으면 안돼요." 마리아가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어떻게 아내가 감히 남편과 똑같이 잘 먹을 수가 있겠느냐는 투였다.  혼블로워는 고개를 돌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이, 거기 !" 그는 소리쳤다.  "거기 주방 ! 접시 하나 더 가져 오시오.  뜨거운 걸로."
"오, 안돼요, 여보."  마리아가 부산 떨며 말했지만, 혼블로워는 아예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를 그녀 자리에 앉혔다.
"자, 거기 앉아."  혼블로워가 말했다. "말은 더 필요없어. 우리 가족 내에 반란자는 있을 수 없으니까.  아 !"
접시가 하나 더 왔다. 혼블로워는 스테이크를 반으로 잘라 더 큰 덩어리를 마리아의 접시에 담아주었다.
"하지만 여보-"
"내가 우리 팀에 반란자는 필요없다고 했지." 그는 자신이 군함에서 으르렁거리던 것을 스스로 흉내냈다.
"오, 호리 (혼블로워의 이름이 호레이쇼입니다. :역주), 여보, 당신은 정말 제게 잘 해주시네요, 너무 잘 해주세요." 순간적으로 마리아는 손과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쌌다.  혼블로워는 이 여자가 우는 거 아닌가 하고 두려웠지만 다행히 손을 무릎에 내려놓고 등을 곧게 편 다음, 정말 영웅적으로 감정을 추스렸다.  혼블로워는 그러는 그녀에게 호감이 갔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가 내미는 손을 꽉 쥐었다.

"이제 든든한 아침을 먹는 걸 보여줘."  그가 말했다.  그는 아직도 수병들을 다루는 투로 이야기했지만, 그가 느꼈던 부드러움은 아직도 분명했다.  마리아는 나이프와 포크를 잡았고 그도 그렇게 했다.  그는 몇 입 먹고는, 나머지 스테이크에 난도질을 가해 너무 많이 남기지는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해놓았다.  그는 그의 맥주잔을 들이켰다.  아침에 맥주를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 이렇게 도수가 낮은 스몰 비어(small beer, 알코올이 거의 들어 있지 않은 저렴한 보리차 수준의 맥주)조차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일어나 있는 저 나이든 하숙집 하녀는 홍차 상자를 넣어둔 찬장의 열쇠가 없을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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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항상웃자구 2018.12.27 06: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 새글이 있어서 급하게 클릭했는데...
    갑자기 더 배고프네요... 크흑

  2. ㅁㅁ 2018.12.27 22: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식 사진 한번 기가 막히게 찾아서 올리시네요 ㄷㄷ

  3. 2/28일 입대 2018.12.27 2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혼블로워는 참 뭐랄까 사장님으로써는 괜찮은데, 상대적으로 가까이서 봐야하는 부장님이면 엄청 불편한 사람인것 같아요ㅎㅎ 올바른 친구지만 썩 친절하지는 않고 신경질적인데다가 짜증도 많고ㅎㅎㅎ

  4. keiway 2018.12.28 16: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혼블로워는 잔정도 많고 (애들과 가족에 마음을 많이 쓰죠. 바람은 핍니다만 ㅡㅡ;)
    부하들도 엄청 챙기는 데다가 (승진 시켜주려고 애쓰죠)
    과한 체벌도 하지 않고 (그당시 기준으로는)
    무엇보다 능력이 있으니 (상사와 같이 쭉쭉 커나가는 아름다운 직장 생활!)
    가까운 상사로 같이 일하면 굉장히 행운이겠네요 (작중 부시 처럼)

  5. 밥동뎅 2018.12.30 16: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에서 예전 본건데도 볼때마다 재밌네요.
    역시 나시카님.

  6. 까까님 2019.01.02 14: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게 부인과의 마지막 식사였던가요?
    전 직장 상사 이전에 참 나쁜 가장이라고 생각되네요 ^^

어느 병사의 주석 스푼 이야기

잡상 2018. 11. 5. 06:30 Posted by nasica

화제의 영화였던 마블 스튜디오의 '어벤저스 3 : 인피니티 워'에서 묘한 소품이 있었습니다.  토르가 우주 공간에서 떠돌다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이하 가오갤) 일당의 우주선에 구출해낸 뒤, 뭔가 음식을 먹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토르는 상당히 조그만 구리 사발 같은 것에서 뭔가 수프 같은 것을 스푼으로 먹고 있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타노스가 가오갤 일당 중 가모라를 붙잡은 뒤에, 가모라에게 '너 배고프지 않냐?' 라며 뭔가 먹을 것을 건네는데, 그게 토르가 먹던 것과 똑같이 생긴 조그만 구리 사발 같은 것이었어요.  




(유튜브를 열심히 검색해서 간신히 찾은 화면입니다.  원래도 좀 작은 사이즈의 사발인데 타노스의 손에 쥐니 거의 컵이네요.  토르가 먹던 사발 장면은 아무리 검색해도 안 나옵니다.)



(인피니티 워의 명장면이지요.  우주 전체에 천둥의 신을 코 앞에 두고 당당히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고 '영화 관계자들이 소품에 신경을 별로 안 썼나 보다, 타노스네 집이나 가오갤 우주선에서나 똑같은 사발과 스푼을 쓰는게 말이나 되나' 라는 생각도 했지만, 동시에 '서양애들은 사발에 그냥 입대고 마시는 것을 진짜 싫어하는 모양이다'라고도 생각했습니다.  타노스-가모라 신에서, 가모라는 그 사발을 받아들자마자 집어던졌는데, 그때 보니 어차피 사발 속에 든 수프에는 건데기도 없어서 그냥 사발째 들고 마시면 되는 거였는데, 타노스는 친절하게도 그 사발에 스푼도 담아서 건넸었거든요.


그 장면을 보니 히틀러의 마지막 순간을 그린 독일 영화 '몰락'(Der Untergang)의 끝부분에서 역시 굉장히 인상 깊었던 부분이 생각났습니다.  히틀러가 자살한 뒤 남은 총통부 소속 병력들과 비서 등의 직원들이 도망을 치는 와중이었는데, 밤이 되어 어느 폐가에서 일행이 통조림을 따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죽은 줄 알았던 다른 독일 관리가 나타나자 반갑게 맞으면서 '일단 뭐 좀 먹어둬라'라며 개봉한 통조림을 내미는데, 스푼도 딱 꽂아서 함께 주더라고요.  그걸 보고 '야, 저 독일놈들은 소련군으로부터 허겁지겁 도망치는 중에도 저렇게 깡통 1개당 스푼 1개씩을 꼭 챙겨서 왔나보다'라며 감탄했었습니다.



(제가 감탄했던 그 장면들입니다.  통조림과 함께 건네는 저 스푼을 보십시요.)



(여러가지 패러디로 유명해진 이 '몰락'이라는 영화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은 저 히틀러의 마지막 식사 장면이었습니다.  채식주의자이던 히틀러가 먹던 저 마지막 요리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  영화 속에서는 토마토 소스를 넣은 파르팔레(farfalle)나 라비올리(ravioli) 형태의 파스타처럼 보였는데, 검색해보니 실제로 토마토 소스 파스타를 마지막으로 먹었다고 합니다.  저 장면에서 히틀러는 식사를 마치고 “Danke, das war sehr gut, Fräulein Manziarly" (고맙네, 아주 맛있었어, 미스 만치알리)라고 말하지요.)




병사들에게 스푼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카투사로 입대했을 때 먼저 논산 훈련소에서 10주간 훈련을 받았는데,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식사를 할 때 젓가락은 없고 그냥 포카락(포크 + 숟가락) 1개만 받았거든요.  식판은 공용이었지만 그 포카락은 개인 소지품이었습니다.  훈련병에게는 그게 사실 총보다도 더 중요한 장비였지요.  미군 부대에 배치를 받은 뒤에도 스푼의 중요성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미군도 표준 장비 중에 mess kit라고 해서 스텐리스 반합과 스푼, 포크, 나이프 같은 것을 받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으로 식사를 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제가 있던 부대는 야전 전투부대가 아니라서 1년에 1번 정도 FTX라고 야전 훈련을 3박4일인가 4박5일인가 했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식사는 MRE로 했는데, 그 속에 플라스틱 스푼이 들어었었거든요.  플라스틱 포크나 나이프는 없고 그냥 플라스틱 스푼만 들어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병사들이 야전에서 먹는 음식은 어차피 스푼 1개만 있으면 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야전에서 스테이크를 썰 일도 없고 우아하게 완두콩을 포크로 찍어 먹을 할 일도 없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맛이 없었던 MRE... 그래도 저 속에 가끔 들어있던 오트밀 쿠키바(oatmeal cookie bar)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병사들에게는 포크나 나이프 따위는 필요없고 오로지 스푼만 있으면 된다는 것은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15년 초 벨기에의 워털루 전투 현장에서 건축 공사를 하던 중 한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워털루 전투 당일 사망한 영국 병사의 것이었습니다.  흉부에 프랑스제 샤를빌르(Charleville) 머스켓 소총 구경에 딱 맞는 납탄이 박힌 채 발견된데다, 휴대하고 있던 2개의 예비 부싯돌도 영국군이 사용하던 브라운 베스(Brown Bess) 소총에 딱 맞는 크기의 암회색 부싯돌이었거든요.  프랑스군은 주로 노란색의 부싯돌을 썼습니다.  이 병사의 시신은 건설 현장의 불도저에 의해 두개골 부분이 날아가는 등 일부 훼손되기는 했으나, 전반적으로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았습니다.  키가 158 cm 정도로서, 당시 기준으로도 다소 작은 편이었던 이 병사의 주머니에서는 22개의 여러 나라 동전과 함께, 스푼 1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시신에 대해 소개한 기사에는 이 스푼이 어떤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었는지는 나오지 않았으나, 혹시 이 스푼에 이 병사가 소속되었던 연대 마크가 있지 않을까 싶어 엑스레이 촬영을 해본 사진을 보니 금속제는 확실합니다.  아마 당시 식기를 만드는데 많이 사용되던 백랍(pewter, 보통 주석이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대략 95%의 주석과 약간의 구리 및 안티몬으로 만들어진 합금)으로 만들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래도 이 병사가 금속제 스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서 그나마 따뜻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혹시 이 병사의 스푼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저 불쌍한 시신의 갈비뼈 부분에 작고 둥근 회색 구체 하나가 보이시나요 ?  프랑스제 머스켓 볼입니다.)



(이 병사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스푼과 그 엑스레이 사진입니다.)




의외로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의 금속 생산량이 그렇게까지 풍부하지는 않아서, 금속 대신 나무를 써도 되는 물건들은 나무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폴레옹 당시 유럽 전역의 머스켓 소총 숫자와 농기구 숫자 전체를 비교해보면 소총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고 합니다.  청동기 시대부터 금속은 주로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되었고, 농부들의 괭이나 쟁기는 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런 전통이 놀랍게도 19세기 초반까지도 이어졌던 것이지요.  심지어 레미제라블의 미리엘 주교님도 은접시를 장발장이 훔쳐가는 바람에 나무 접시로 음식을 먹어야 했쟎습니까 ?   19세기 중반인 미국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명작 서부 영화 '황야의 무법자'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처음 장면에서 '나쁜놈'으로 나오는 리 밴클리프가 멕시코 농부와 눈싸움을 벌이며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도 두 사람은 나무로 만든 스푼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 당시의 영국 병사들은 최소한 스푼만큼은 백랍으로 만든 것을 가지고 있었으니, 농부보다는 더 나은 대우를 받았던 셈이지요.  






사족 1)


동양 삼국에서는 희한하게도 한국에서만 숟가락이 중요하게 사용되는 편입니다.  식사를 할 때, 특히 주식인 쌀밥을 숟가락으로 먹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니까요.  일본은 원래 젓가락으로만 식사를 하지요.  국은 그냥 그릇을 입에 대고 마십니다.  중국도 스푼은 국물을 떠먹을 때만 사용하고, 쌀밥을 먹을 때는 밥그릇을 입에 대고 젓가락으로 쓸어넣는 편입니다.  특히 중국식 숟가락은 조그만 국자 모양의 깊고 평평한 바닥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입 안에 집어 넣는 것은 부적절하고, 숟가락에 입술을 대고 숟가락을 기울여 그 안의 국물을 입으로 흘려넣어야 합니다.  보통은 거기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빨아먹게 되지요.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일본이나 중국이나 별로 점잖지 않은 습관을 가진 셈입니다.   


병사들 말고 점잖은 서양인들의 스푼 사용법은 굳이 따지자면 중국인들에게 좀더 가까운 편입니다.  정찬에 있어서 스푼은 수프를 먹을 때만 사용되는데, 제대로 예절을 지키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밥이나 국을 먹을 때처럼 스푼 전체를 입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중국식 숟가락을 쓸 때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고 수프 국물을 스푼의 옆면으로부터 받아 마셔야 합니다.  이때 절대로 후루룩 소리가 나면 안 됩니다.  예전에 영국 드라마 채널에서 방영한 Hornblower 시리즈를 볼 때, 주인공 혼블로워가 오찬에 초대되어 수프를 먹을 때 입술을 삐죽 내밀고 스푼으로부터 수프를 먹는 모습을 보고 '참 보기 흉하게 먹는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제대로 된 방식이라고 해서 놀랐던 것이 기억납니다.




(중국식 스푼입니다.)



(양식에서 점잖게 수프를 먹는 방식이라고 하네요.  사실 후루룩 쩝쩝 소리만 안 내면 되지 뭐 이렇게까지 먹어야 하나 싶습니다.)




사족 2)


병사들의 스푼 사랑은 이라크 전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저로서는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인데, 이라크에서 어느 집 안에 잠복해있던 반군들과 뒤엉켜 육박전을 벌이던 미육군 레인저 병사가 처음에는 대검을 뽑아 상대를 찌르려 했으나 손이 닿지 않아, 마침 군장 탄띠에 꽂아두었던 플라스틱 MRE 스푼을 뽑아들고 상대를 찔러 죽였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 https://www.ebay.com/itm/US-Army-Mess-Kit-Wyott-Complete-/283196753881 )  비록 confirm 된 이야기라고 제목을 달았지만 이건 정식 뉴스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믿지 못할 전형적인 가짜 뉴스 같습니다.  심지어 존 윅도 연필로 사람을 죽였지 플라스틱 MRE 스푼으로 사람을 죽이진 않았쟎습니까 ?




(그 병사가 스푼을 꽂아두었다는 MOLLE(몰리라고 읽습니다)입니다.  MOLLE는 Modular Lightweight Load-carrying Equipment의 약자입니다.  그냥 군장 탄띠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전투기나 탱크 사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병사 개개인의 장구류도 중요하지요.  특히 야시경은 매우 중요한 장비같은데...)



사족3)


지금도 그렇지만,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중동 지방에서는 전통적으로 스푼이나 포크같은 식기를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도 맨손으로 음식을 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포함한 중동 사람들은 어떻게 국물있는 음식을 먹었을까요 ?  차라리 묽은 국같은 것은 (일본 사람들이 하듯) 그릇을 들고 마시면 되겠지만, 스튜같은 어정쩡한 음식은 스푼이 없다면 정말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  예수님께서 손에 소스를 잔뜩 묻힌 채로 손가락을 쪽쪽 빨아가며 스튜를 먹었다 ?  그건... 점잖지만 믿음이 약한 신도들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장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즉, 당시 사람들은 스푼 없이도, 우아하게 스튜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즉, 중동에서 주로 먹는 얇고 넓적한 피타 빵이 스푼 대용 역할도 했습니다.  피타 빵을 뜯어서, 알맞게 접으면 스푼처럼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빵에 국물을 묻혀서 먹어야 피타도 먹을 만 했다고 하네요.  스튜같은 국물있는 음식이 없을 때도, 피타에 하다못해 물이라도 꼭 찍어서 먹었답니다.  생각해보니 멜 깁슨 주연의 스코틀랜드 독립 투쟁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도, 치마(퀼트)를 입은 멜 깁슨과 그 일당이 들판에서 그런 식으로 뻑뻑한 빵을 주걱 삼아 뭔가 스튜 같은 음식을 퍼먹던 장면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피타 빵을 굽는 모습입니다.)



사족4)


본문에는 저 워털루 현장의 병사가 나무 스푼이 아니라 주석 스푼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써놨습니다만, 꼭 금속제 스푼이 나무 스푼보다 더 비싼 것만은 아닙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암살당하고 난 뒤에 안경과 시계 하나, 샌달 한 켤레 등 매우 조촐한 소지품만을 유품으로 남겼습니다.  그렇게 가진 것이 없었던 간디도 식기류는 개인 물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렇게 남긴 유품 중에는 금속제 사발 하나와 나무로 만든 스푼 2개와 포크 1개가 있었답니다.  그것들이 2016년 경매에 붙여진다는 뉴스를 봤는데, 시작가가 22,900 파운드(약 3천3백만원)이라고 씌여있네요.  실제로는 얼마에 낙찰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것들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스푼일 것 같기는 합니다.  인도에서는 맨손으로 식사를 한다고 들었는데, 간디가 스푼과 포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네요.  영국 유학파라서 그랬을까요 ?





(진짜 간디가 쓰던 사발과 스푼, 포크랍니다.)





Source :  https://www.archaeology.org/issues/79-1303/features/535-waterloo-british-soldier-dominique-bosquet

https://www.mreinfo.com/mres/

https://tribunist.com/news/report-army-ranger-gets-confirmed-kill-with-mre-spoon/

https://en.wikipedia.org/wiki/MOLLE

https://www.youtube.com/watch?v=po5F65mrjn4&vl=en

https://www.youtube.com/watch?v=s9oviaIumJM&index=15&list=PLgXs8EKlGi7C8iNJdAWGbYZgPVnNZraPL

https://nypost.com/2017/11/24/this-was-hitlers-final-meal/

https://www.wikihow.com/Eat-Soup

https://www.youtube.com/watch?v=fX7zVa19Iqw

https://en.wikipedia.org/wiki/Pita

https://www.easterneye.biz/gandhis-food-bowl-wooden-spoons-a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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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지 2018.11.05 1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석으로 만들어진 미니어처를 솥 안에 넣고 삶았더니 녹아버렸다는 글을 봤는데,끓는 수프에 주석제 숫가락을 넣어도 괜찮았나보군요.재미난 글 감사합니다.

  2. 수비니우스 2018.11.05 1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존 윅 ㅋㅋㅋㅋ 내년 5월에 존 윅 3편 나온다는 것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3. 지나가던 2018.11.05 2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시신에 박힌 머스켓 총알크기보니 확실히 지금이랑 과거의 기술차가 보이긴하네요. 옛날에는 저렇게 무식하게 큰 총알을 날려서 사람을 죽였다면 지금은 저것보다 더 작은 총알로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으니깒요.

  4. ㅇㅇ 2018.11.10 18: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야시경은 중요한 장비인것 같습니다. 미군이 우리의 ktct에 참가해 대항군과 모의전을 하면 특히나 야간전에서 실력차이가 난다고 하더군요.

  5. 동경좀비 2018.11.17 1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워털루 전투의 158cm 병사가 작은 키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오스프리사의 솜전투에서 1차세계대전 영국군에 자원입대하던 병사들을
    156cm 에 45킬로 하한선을 간신히 넘긴 영양실조 상태의 빈민가 젊은이가 대부분 이었다.
    라고 표현 하더군요.

여태까지 1810년에 있었던 이런저런 사건들, 즉 나폴레옹의 새장가, 사탕무 설탕 공장의 건설, 베르나도트의 스웨덴 왕세자 책봉 등을 보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1810년은 피와 화약 연기로 점철되었던 황제 나폴레옹의 나날 중 드물게 평화로운 시절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도 비교적 그랬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1810년 들어 스페인 민중들의 대프랑스 항쟁은 그 기세가 더 격렬해졌습니다.  이는 반나폴레옹 봉기가 곳곳에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은 정반대로서, 웰링턴의 영국군이 탈라베라(Talavera) 전투 이후 포르투갈로 물러가자 무능력한 스페인 봉기군은 차근차근 프랑스군에게 격파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러면 스페인 민중들은 용기를 잃고 굴복할 만도 할텐데, 왜 오히려 더 격렬하게 저항을 했을까요 ?


상황은 나폴레옹이 본의 아니게 더 악화시켰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1810년 나폴레옹은 저항을 그치지 않는 스페인에 대해 질려버린 상태였습니다.  스페인 국왕이자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가 파리에 파견한 외무장관인 산타페 공작 아산사(Miguel José de Azanza, duque de Santa Fe)가 나폴레옹의 튈르리 궁을 찾았을 때, 그에게 들이밀어진 것은 조제프의 퇴위 조서 초안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조제프 보고 거기에 서명을 하라고 요구할 셈이었습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동생 루이를 국왕으로 앉혀 놓았던 네덜란드를, 나폴레옹은 1810년 7월 실제로 침공하여 루이를 강제 폐위시키고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시켜버립니다.  그는 스페인에 대해서도 왕정을 아예 폐지해버리고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해버릴 계획었습니다.  


문제는 그 계획안 문서를 가지고 마드리드로 가던 연락 장교가 스페인 게릴라들에게 요격당해 살해되고 아직 암호화 되지 않았던 시절의 그 문서가 게릴라들을 거쳐 영국 손에 들어가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영국은 그 문서를 친절하게 스페인어로 번역까지 해서 곳곳에 뿌려댔고, 이는 그렇쟎아도 프랑스에 대해 이를 갈던 스페인 민중들을 더욱 들끓게 했습니다.  




(산타페 공작 아산사입니다.  그는 군인 출신의 외교관으로서, 1790년대 후반에는 멕시코 총독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나폴레옹 정권에 협력했고 조제프는 그를 산타페 공작에 봉했습니다만,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 뻔 했습니다.  부르봉 왕가의 복귀와 함께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는 조제프가 프랑스로 도주할 때 함께 프랑스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는 1826년 빈곤 속에서 외롭게 죽었습니다.  친일파, 아니 친불파에게 알맞는 최후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고 그런 문서 유출 때문에 나폴레옹이 조제프를 루이처럼 폐위 시키는 것을 주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발표를 하려면 스페인 전역을 손에 넣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하찮은 스페인 따위가 프랑스의 그랑 다르메에 대해 이렇게 질기게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저주스러운 영국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트라팔가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넬슨에게 궤멸된 이후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이 된 영국에 대해, 나폴레옹은 더 큰 규모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대륙 봉쇄령이었지요.  그런데 이 대륙 봉쇄령은 좀처럼 승기가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습니다.  명색이 위성국가라는 것들이 나폴레옹의 빅 픽처에 협력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돈에 눈이 멀어 영국 상품을 사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이 취한 조치는 더 강력한 그물망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과의 밀무역을 가장 활발하게 벌이던 네덜란드와 옛 한자 동맹 지역들, 즉 북부 독일 해안 지대의 소공국들의 정권을 폐위시켜 버리고 모두 프랑스의 일부로 편입시켜버린 것이지요.   1810년은 나폴레옹 제국이 가장 넓어진 해이기도 합니다만, 그 배경은 영국과의 경제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다는 초조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스페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 과격한 해결책은 필연적으로 또다른 문제를 낳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당시엔 별로 대단치 않게 여겼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이것이 결국 그의 제국 전체를 몰락시키는 단초가 됩니다.  나폴레옹이 그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일방적으로 쫓아낸 소공국들 중에는 올덴부르크(Oldenburg) 공작령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올덴부르크 공작의 작은 아들이 바로 러시아 짜르 알렉산드르 1세가 애지중지하던 여동생 예카테리나(Ekaterina Pavlovna) 공주의 남편 게오르그(Georg of Oldenburg)였던 것입니다.  


알렉산드르는 여러차례에 걸친 편지를 통해 자신의 매제에 대한 폭압적인 강탈 조치를 항의했으나 나폴레옹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어쩌면 이건 나폴레옹이 지나치게 오만하여 무심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가 지나치게 졸장부처럼 옹졸하게 나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2년 전인 1808년 에르푸르트 회담에서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에게 여동생을 자신의 새 신부로 달라고 은근히 메시지를 던졌으나, 알렉산드르는 오히려 그 아끼는 여동생을 볼썽 사나울 정도로 서둘러 다른 귀족에게 시집 보내버린 적이 있었지요.  그때 그 여동생이 바로 예카테리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그것을 큰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식으로 앙갚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에르푸르트 회담 때만 해도 세상 둘도 없는 친구 사이 같았던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는 이 사건을 계기로 상호간의 불신과 반목이 점점 심해졌고, 이는 결국 1812년 러시아 침공과 그에 따른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대체 예카테리나 공주가 얼마나 아름다웠길래 이 난리가 났는가를 궁금해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다시 보여드립니다.  두 그림 모두 동일 인물인데, 글쎄요, 아래 그림을 그린 화가는 아마 능지처참을 당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어느 쪽이 더 실물에 가까운지는 모르겠습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이렇게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려 했던 웰링턴의 영국군도 마냥 룰루랄라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에 있어서 영국의 기본적 전략은 크게 2가지 방향 사이에서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캐닝(George Canning)이 주도하는 대륙내 동맹국에 대한 보조금 위주의 전략이었고, 다른 하나는 캐슬레이(Robert Stewart, Viscount Castlereagh)가 과감히 밀어붙인 직접 대륙으로 원정군을 파견하는 것이었습니다.  1806년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왕국 및 시실리 섬으로의 원정이나, 1809년 네덜란드로의 월체런(Walcheren) 원정,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 원정 등이 그 대표적인 원정들인데, 이것들은 1805년부터 1809년까지 캐슬레이가 국방부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War and the Colonies)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결과가 다 신통치 않았다는 것이지요.  나폴리 왕국에 대한 원정은 1806년 가에타(Gaeta) 포위전의 패전과 함께 결국 뮈라(Joachim Murat)를 나폴리 왕으로 만들어주면서 끝나버렸고, 이베리아 원정도 무어(John Moore) 경이 1809년 1월 코루냐(Corunna) 전투에서 전사하며 간신히 영국군 대부분이 탈출시킨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가장 최근의 1809년 월체런 원정도 사실상 참패로 끝나버렸지요.  이로 인해 영국 내에서는 대체 영국 육군은 뭐하는 종자들인가에 대한 비난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외무장관 조지 캐닝입니다.  이 양반이 보조금 위주의 전략을 썼다고 해서 결코 평화주의자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가령 1807년 덴마크 해군 함대를 보관해주겠다며 덴마크를 침공한 것도 이 양반이 주도한 작전이었습니다.)



(국방장관 캐슬레이 자작입니다.  외모로 보면 대머리 캐닝과의 대결에서 완승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는 나폴레옹 전쟁 내내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으나, 이후 비엔나 회담에서 유럽 대륙이 반동 체제로 회귀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여러가지 우클릭 정책을 옹호하여 크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가령 피털루 학살 관련해서도 욕을 잔뜩 먹었지요.)




특히 월체런 원정의 실패는 외무장관 캐닝과 국방장관 캐슬레이 사이에 심각한 불화를 일으켰습니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의 부당한 간섭 또는 부실한 전략 비전 등으로 작전을 망쳤다고 비난해댄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갈등은 아직 월체런에 비실비실한 영국군이 상당수 남아 있던 1809년 9월, 이 둘 사이의 결투로 이어집니다.  둘 다 군인은 아니었고 특히 캐닝은 이 결투 이전에는 총을 한번도 쏘아본 적 없을 정도로 순한 사람이었는데, 캐슬레이의 도전에 캐닝은 꼬리를 말아넣을 수가 없어서 응한 것이지요.  결국 캐닝의 탄환은 저 멀리 빗나갔고 캐슬레이의 탄환은 캐닝의 넓적다리에 명중하는 정도로 이 결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명성이 자자하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장관들이 서로 총질을 해댄 이 결투 사건에 대해 비난이 들끓었고, 결국 이 둘은 모두 사임을 해야 했습니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의 영국군 원정대는 본국에서의 지지 발판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웰링턴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캐닝의 후임은 웰링턴의 형 리처드 웰슬리(Richard Wellesley, 1st Marquess Wellesley)가 맡게 되었습니다.  안 좋게 흘러가던 상황이 역전되어 웰링턴에게는 든든한 배경이 생긴 셈이었지요.  과연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웰슬리 후작은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웰링턴의 작전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특히 대륙 봉쇄령에 의해 영국의 무역 상황이 갈 수록 안 좋아지는 상황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통한 무역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것을 내각에 설득하여 이베리아 원정대에 점차 병력을 증강하도록 했습니다.  웰링턴이 탈라베라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허겁지겁 포르투갈로 후퇴해야 했던 이유는 술트의 측면 위협 때문이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프랑스군보다 영국군 병력이 너무 작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웰링턴은 힐(Rowland Hill, 1st Viscount Hill) 장군이 영국에서 데리고 온 증원군을 받아 거의 5만에 가까운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5만이면 병력수가 부족했던 영국 육군에서는 물론 엄청난 대군이었고, 프랑스 그랑 다르메에서조차도 거의 1개 군(armee) 수준의 큰 병력이었습니다. 




(롤랜드 힐 장군입니다.  그는 롤리사 전투와 비메이루 전투 때부터 웰링턴을 따라 종군했고, 나중에 워털루 전투에도 참전했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부질없이 저항하던 황실 근위대에게 항복을 권유한 것도 롤랜드 힐 장군이라고 합니다.)




한편, 나폴레옹도 그냥 대륙 봉쇄령이 계획대로 작용하여 영국 중앙은행의 지하 금고에서 마지막 기니 금화 한닢까지 다 털려 나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 곳곳은 여전히 반란군 손에 있었고, 특히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전체가 스페인군 수중에 있는 상태였습니다만, 나폴레옹은 안달루시아 정복보다 오히려 포르투갈에 웅크리고 앉은 웰링턴의 영국군을 격파하는 것이 스페인 완전 정복에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술트(Soult)로 하여금 안달루시아를 치게 하고는, 네(Ney), 쥐노(Junot), 레이니에(Reynier)의 3개 군단을 모아 포르투갈로 진격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병력은 서류상으로는 8만, 실제로는 약 5만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3개 군단장을 통솔할 포르투갈 원정군 사령관으로 자신의 휘하에 있는 지휘관 중 최고의 능력자를 임명하여 그 무게를 더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나폴레옹 제국의 제2인자, 바로 위풍당당 마세나(Andre Massena)였습니다.  


여태까지 웰링턴이 상대했던 프랑스군 지휘관은 누가 봐도 1진이라고는 할 수 없던 쥐노, 주르당, 세바스티아니, 빅토르 정도였습니다.  (술트와의 제2차 포르투 전투는 제대로 된 대결이라고 하긴 곤란했지요.)  하지만 마세나는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1진급 지휘관으로서 나폴레옹의 오른팔격 원수였고, 다부는 물론 전사해버린 장 란보다도 더 뛰어난 지휘관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과연 웰링턴은 마세나를 상대로 해서도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까요 ?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Miguel_Jos%C3%A9_de_Azanza,_Duke_of_Santa_Fe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Stewart,_Viscount_Castlereagh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Canning

https://en.wikipedia.org/wiki/Richard_Wellesley,_1st_Marquess_Wellesley

https://en.wikipedia.org/wiki/Walcheren_Campaign

https://en.wikipedia.org/wiki/Rowland_Hill,_1st_Viscount_Hill

https://en.wikipedia.org/wiki/Duke_George_of_Oldenburg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Gaeta_(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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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티븐 2018.10.08 07: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일 새글이 언제 올라오나 기다렸는데
    막상 올라오니 편하게 읽는 제가 미안할 정도입니다.
    좋은 글 항상 감사드립니다 ^^

  2. reinhardt100 2018.10.08 0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사실상 나폴레옹 전쟁의 둉부전선급이 되버린 시기가 1810년 이후인데 이 때 러시아 전선이 훨씬 더 양호했을 정도로 전쟁이 잔혹해졌죠.

    다른 댓글에 달았지만 영국은 내부 사정이 꽤나 심각했고 이 때문에 병력 상당수가 본국 및 아일랜드 치안유지에 동원되어야 했습니다. 1810년 웰링턴 원정군이 정말 마지막 기회였는데 이 윈정군마저 실패하면 더 이상 대륙으로의 무력 투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국민 모두 인지하고 있었고 프랑스와의 어느 정도 양보하는 화해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다시 한 번 20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해 직접 에스파냐 원정을 단행했다면 무슨 수를 써도 웰링턴의 원정군이 이긴다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야전은 당연히 불가능하고 그나마 가능한 방법이 해안가 요새방어선에 들어가는건데 5만의 병력이 나중에 웰링턴이 구축한 방어선에 들어가 아크레 공성전 시즌 2를 찍겠다고 해도 20만 이상의 병력으로 포위 및 공성전을 진행했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아무리 무한정의 해상 탄약보급으로 탄막을 펼치더라도 20만 병력의 공성포탄의 탄막에 밀릴건 뻔한 결론이었습니다.실제로 서구 군사학상 10만 이상의 공성전은 크림전쟁의 세바스토폴 공성전인데 이때 나폴레옹이 직접 원정을 감행했다면 여기서 볼 수 있었을 겁니다.

    • nasica 2018.10.08 08: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나폴레옹이 결코 판단 착오 또는 게으름 때문에 1810년 스페인에 대군을 이끌고 직접 원정을 하지 않은 거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용이 나오는 판타지 나폴레옹 전쟁 소설 “테메레르”에서는 청나라에서 파견한 대규모 용부대가 나폴레옹의 용부대를 격파하고 1812년 러시아를 구원하는 것으로 나옵니다만, 거기서도 청나라 원군이 도중에 돌아가는 이유가 명확하게 나옵니다.

      “이 대군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

      척박한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 reinhardt100 2018.10.08 0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척박해도 보급을 하게 만들었어야 했고 이 보급망을 바탕으로 직접 원정을 단행했어야 한다는 겁니다. 20만 대군의 보급이 어렵지만 원정에서 이기면 영국과의 전쟁을 끝냴 수 있으니까요.

      한 번 나중에 시간나면 나폴레옹의 20만 대군 원정을 가정하고 보급계획을 짜 보면 어떤 결론이 나올지도 궁금해집니다.

    • 최홍락 2018.10.08 1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 전 스페인에 발묶일 경우 주변국들의 상황이 우려되서 20만명을 장기간 빼내는건 위험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역시 근본적인 문제를 캐치하셨네요.

  3. 키스세븐 2018.10.08 09: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로그가 매우 특이해요. 유럽 문화/역사 이야기가 가득이네요. 여러 글을 읽다가 가요. 재미있었어요!

  4. keiway 2018.10.08 1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랫만의 나폴레옹 시대 글이로군요.
    항상 응원합니다.

  5. 소화낭자 2018.10.08 2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다리다 지칠 뻔 했습니다....
    ㅎㅎㅎㅎ 정말 감사합니다

  6. 웃자웃어 2018.10.08 2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제 슬슬 러시아 원정이 다가오는군요.

  7. 유애경 2018.10.08 2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카테리나 공주의 초상화, 어쩜 동일인물인데 저렇게 다르게 그려졌을까요!

  8. 석총 2018.10.08 2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테란 디펜스를 뚫지 못하는 프랑스

  9. 머대긘 2018.10.09 16: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캐닝은 총을 한발밖에 쏘지 못했다죠? 그는 '두발'이 없었으니까요.

  10. Playzone 2018.10.10 14: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가장 실수한 건 분수에도 맞지않은 야심가였던 동생 카롤린을 등에 업은 뮈라를 스페인으로 보낸게 아닐까 싶네요. 무능한 스페인 부르봉 왕가를 꼭두각시로만 삼은채로 막후정치를 했다면 그의 위장을 더 쓰리게 했던 이베리아 전역이 저정도로 격화되진 않았을거 같습니다.

  11. 석공 2018.10.10 2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



Desolation Island by Patrick O'Brien (배경 : 1811년 HMS Leopard 함상) ------


(워건 부인은 군함 뱃바닥에 있는 영창에 갇혀 오스트레일리아의 유형지로 가는 신세입니다.  군의관인 머투어린이 이 여자를 검진합니다.)


"그렇게 절망하여 외톨이 노릇을 고집하시면 틀림없이 건강을 해치게 될 겁니다."


그녀는 미소를 쥐어짜 보이고는 말했다.  "어쩌면 이건 그냥 나폴리 비스킷(Naples biscuits) 때문일거에요.  최소한 1천개는 먹었거든요."


"줄곧 나폴리 비스킷만 드셨다고요 ?  이 군함에서 식사를 제공하지 않던가요 ?"


"주긴 하지요.  곧 그런 식사도 맛있게 먹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불평한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제대로 된 식사를 하신 것이 언제였나요 ?"


"글쎄요, 정말 오래 전이긴 한데... 클라지스(Clarges) 가에서였을거에요."


머투어린은 그 클라지스 가에서 제대로 정신차린 사람이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클라지스 가에 살았던 유명 인사로는 넬슨 제독과 염문을 일으킨 레이디 해밀턴이 있습니다 - 역주)  "나폴리 비스킷만 드셔가지고는... 아마 안색이 노랗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말린 카탈로니아 소시지를 하나 꺼내어 수술용 메스로 끄트머리의 껍질을 벗겨내고는 말했다.  "이젠 시장하신가요 ?"


"아 그럼요 !  아마 바닷 바람 때문인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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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해군의 모습을 잘 그려낸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오브리-머투어린(Aubrey-Maturin) 시리즈에는 여러가지 음식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히 그 배경 때문에 긴 항해 중에 선상에서 먹는 음식에 대한 묘사가 많습니다.  그 중 무척 독특한 것으로 인상에 남았던 것이 저 나폴리 비스킷(Naples biscuits)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게으름 때문에 이 과자가 대체 어떤 것인지 또 무엇으로 만든 것이길래 긴 항해를 떠날 때 1천개 넘개 가져갈 정도로 보존성이 좋은지 찾아볼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회사 내의 카페에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카운터에 놓인 과자 포장지를 멍하니 보다가 Napolitaner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이 과자 이름을 보고 몇 년전에 읽었던 저 소설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혹시 그 과자가 이 웨하스 과자인가 ?  아니, 웨하스가 보존성이 좋은가 ??





(비싼 이탈리아제 웨하스라고 해서 뭐 딱히 더 맛있는 것은 아닌 것 같더라구요.)




실은 저 과자 이름을 보고 나서, 제가 몇 년 전에 읽은 저 나폴리 비스킷의 정확한 스펠링도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Neapolitan biscuit으로 기억했더랬어요.  맨 처음 저 Neapolitan이라는 형용사를 보고는, 대체 저게 무슨 나라 이름인지 짐작을 못 했습니다.  제가 Sharpe 시리즈나 Hornblower 시리즈 등을 읽을 때, 모르는 단어가 하도 많아서 도저히 영어 사전을 일일이 뒤져 가면서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거든요.  Naples는 딱 보고 아, 저게 나폴리의 영어식 표현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Neapolitan이라는 것이 그 Naples의 형용사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나폴리의 역사에 대해 제가 좀 더 알았다면 저 Neapolitan이라는 단어가 Naples의 형용사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을 것입니다.  원래 나폴리(Napoli)라는 이탈리아어는 Neápolis (Νεάπολις)라는 헬라어/라틴어에서 나온 것으로서, 새로운 (nea-, neo-) 도시 (polis)라는 뜻입니다.  로마가 융성하기 전,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진출했던 그리스인들이 세운 식민도시였거든요.  역설적으로, 현재 나폴리는 그 원래 이름과는 달리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귀찮으시더라도 이 그리스 식민도시들 중에서 나폴리를 찾아 BoA요)





(나폴리 항구의 모습입니다.)




이탈리아는 원래부터 남부와 북부 간의 빈부격차가 큰 나라였고, 그런 경향이 근래에는 더욱 커졌다고 하던데, 당연히 나폴리도 남부에 속하고 있고 또 경제적으로 많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폴리는 로마 시대부터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매우 존중받는 도시였고, 그런 경향은 중세 이후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서 더욱 커졌습니다.  15~17세기에 나폴리에서 왔다, 나폴리제다 라고 하면 굉장히 고급품이고 우아한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영국에서도 선진 나폴리의 명성은 마찬가지였는데, 정말로 나폴리에서 온 것인지는 의심스럽지만 영국 튜더(Tudor) 왕조 시대부터 이미 '나폴리에서 온 비스킷'이라면서 유행한 과자가 바로 Naples biscuit이었습니다.  나폴리 비스킷의 레시피를 보면 그냥 우유와 설탕, 그리고 특히 계란을 많이 넣은 과자입니다.  계란 거품을 이용하여 부풀려 구웠기 때문에 과자 속에 공기가 많이 들어 있어 먹기에 훨씬 부드럽고 달콤했지요.  비슷한 시기에 유래된 비슷한 과자로 레이디핑거(Ladyfinger) 또는 사보이 비스킷(Savoy biscuit)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이는 15세기 후반에 사보이 공작의 궁정을 방문한 프랑스 왕을 접대하기 위해 특별히 구워진 과자라고 하고, 그 과자 자체에 대한 묘사는 재료나 모양이 나폴리 비스킷과 똑같습니다.  아마 당시 많은 유럽 사람들에게는 나폴리나 사보이나 다 이탈리아의 잘 나가는 화려한 동네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나폴리 비스킷이라고 알려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계란과 설탕을 많이 넣어 구운 비스킷이 보존성이 좋을까요 ?  특히 나폴리 비스킷에 대해 뒤지면서 약간 헷갈렸던 것이, '나폴리 비스킷은 레이디핑거 같은 것인데, 레이디핑거는 스폰지 케익이다' 라고 설명된 포스팅이 많더라고요.  대체 어떻게 스폰지 케익의 보존성이 좋을 수 있단 말인가요 ?  그런데도 이 나폴리 비스킷은 저 오브리-머투어린 소설 속에 나온 것처럼 보존성이 좋아서 좀 여유있는 승객들이 항해에 나설 때 꼭 챙겨가는 음식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  한참을 고민하며 비스킷의 보존성에 대해 별의별 사이트를 뒤져 보았는데, 한참 만에야 그럴싸한 답을 아래 사이트에서 찾았습니다.


https://www.janeausten.co.uk/naples-bisket-or-sponge-cake/


여기서 인용된 유명 작가 제인 오스틴의 일기 중 하나가 있습니다.  제인이 언니인 카산드라에게 한 말입니다.


"스폰지 케익을 사는 것이 내게는 얼마나 흥미진진한 일인지 잘 알지 ?"  (1808년 6월 15일 수요일)


여기서 말하는 스폰지 케익이라는 것은 요즘 우리가 흔히 먹는 부드러운 스폰지 케익과는 다소 다른 것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빵이나 과자를 부풀리기 위해서는 당연히 천연 이스트를 썼는데, 17세기 중반이 되면서 이스트 대신 계란 거품을 이용해서 과자를 부풀리는 요리 기법이 주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계란 거품을 이용해 부풀린 과자류에도 당연히 기포 공간이 많아서 뻑뻑한 비스킷보다는 훨씬 부드러웠고, 그래서 그런 과자류를 스폰지 케익이라고 불렀다는군요.  다만, 이 시대의 스폰지 케익은 요즘의 스폰지 케익보다는 쿠키에 더 가까운 물건이었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아직 비닐 포장지도 없고 냉장고도 없는 시절에는 오래 두고 먹을 과자를 구우려면 바싹 구워 수분을 제거하는 것이 상식이었겠지요. 




(이건 Ladyfingers의 사진입니다.  나폴리 비스킷의 모양새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당시 나폴리 비스킷이라는 것은 뻑뻑하고 맛없는 당시의 선원용 비스킷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맛있는 쿠키에 가까운 과자라서, 패스트리 같은 빵과자에 비하면 보존성이 좋아서 중산층 승객이 먼 항해에 나설 때 챙겨가지 딱 좋은 과자였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제게 이 포스팅을 올리게 한 저 Napolitaner라는 웨하스는 나폴리 비스킷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물건일까요 ?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웨하스(wafer) 과자는 1898년, 오스트리아의 Mann이라는 제과 회사에서 만든 초콜릿 크림을 넣은 웨하스인데, 여기에 나폴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나폴리 지역에서 재배된 헤이즐넛만을 써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 속에 든 초콜릿 크림의 대부분은 초콜릿이 아니라 헤이즐넛으로 만든 것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저 로아커(Loaker) 사의 Napolitaner라는 과자의 성분표를 보면 헤이즐넛 9%에 코코아 성분도 약간 들어가기는 합니다.  저는 그 설명을 보고 로아커 사도 오스트리아 회사인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로아커는 남부 티롤에 근거를 둔 이탈리아 회사로서, 1925년에 남부 티롤 출신인 알폰스 로아커라는 사람이 만든 제과점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아마 독일계 오스트리아 주민이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하는 바람에 졸지에 이탈리아인이 된 사람이었나 봅니다.  저 Napolitaner 라는 단어는 독일어도 아니고, 이탈리아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고, 프랑스어도 아닌, 묘한 단어입니다.  어쩌다 저런 무국적 이름이 붙었는지는 누가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솨요.




(잘 익은 헤이즐넛 열매입니다.  누텔라 같은 경우도 사실 카카오 열매보다는 팜 오일과 헤이즐넛이 더 많이 사용된 스프레드입니다.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지방에는 원래 헤이즐넛을 많이 재배했는데, 전쟁 직후 카카오가 귀하던 1940년대 후반에 이탈리아 사업가가 카카오 대신 이 남아도는 헤이즐넛을 이용해서 뭔가 만들어보자 라고 해서 만든 것이 페레로 로쉐 초콜렛과 누텔라라고 합니다.)




추가) 나폴리라는 도시 이름이 혼란을 일으킨 건 제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나폴리의 형용사는 영어로는 Neapolitan이지만 불어로는 Napolitain 입니다.  이건 누가 봐도 나폴레옹의 Napoleon과 헷갈리기 딱 좋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헷갈렸다고 합니다.  그 좋은 예가 밀푀유(Mille-feuille, 불어로 천개의 잎사귀라는 뜻)라는 프랑스식 크림 패스트리의 이름입니다.  이 크림 패스트리가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에서 유래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으나, 대략 16세기부터 만들어진 빵과자인데, 이것도 나폴리식 과자(gateau napolitain)라고 소개되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일부 사람들은 이것을 나폴리식 과자가 아니라 나폴레옹식 과자로 오해를 해버렸고, 그래서 실제로 지금도 밀푀유는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답니다.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의 러시아식 밀푀유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 밀푀유 과자는 엉뚱하게 러시아에서 Наполеон(키릴 문자로 나폴레옹이라는 스펠링을 쓴 것입니다.  저 대학 다닐때 러시아어 1학기 들었습니다ㅋ)이라는 이름으로 큰 명성을 얻었고, 거기에 덧붙여 이런저런 의미를 많이 부여 받았습니다.  밀푀유 특유의 겹겹이 쌓인 많은 층들은 프랑스의 그랑 다르메(Grande Armee) 대군을 뜻하는 것이고, 삼각형으로 자른 과자 모양은 나폴레옹의 이각모(bicorne)을 뜻하는 것이고 (모든 케익은 자르면 삼각형이 되지 않나요 ?), 또 이 과자 위에 뿌려진 패스트리 가루는 나폴레옹을 물리치는데 큰 기여를 한 러시아의 눈을 뜻하는 것이다 등등입니다.  엉뚱한 착각이 로맨틱한 이야기를 낳습니다.  해로울 건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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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ㅇ 2018.09.27 0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ㅎㅎ

  2. 랴균 2018.09.27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 과자 군대에서 얼마나 많이 먹었던지...ㅎㅎ

    반갑네요

    먹기만 했을뿐 이름의 유래는 생각해본적도 없는데 말이죠.

  3. 나폴레타나 2018.09.27 1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흥미진진한 연재들 잘 보고 있습니다.
    다른 분야긴하지만 남자들의 수트도 최고급, 최고의 제품들은 나폴리에서 제작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패션하면 밀라노를 떠올리지만 남성복의 정점인 수트만큼은 아직 나폴리의 몇몇 브랜드들이 세계최고급으로 인정받고 있으니까요
    르네상스 시기 나폴리의 명성을 아직 잇고 있는 유일한 분야가 아닐까 싶습니다.
    출장 땜에 몇 번 이 곳을 가본 결과, 밀라노같은 도시에 비해 낙후된 것은 사실이지만 자연경관만큼은 감탄이 나오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