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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369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8) - 나사가 빠진 원수 뷜로가 엘베강에 놓은 다리는 우안에 엘스터(Elster) 마을을 끼고 있었습니다만, 강의 좌안에도 뭔가 교두보를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프로이센군은 엘스터 마을 건너편의 바르텐부르크(Wartenburg)를 점령하고 거기에 소규모 병력을 배치해놓고 있었습니다.  9월 22일, 네의 명령을 받은 모랑 사단이 들이친 곳은 바로 바르텐부르크 마을이었습니다.  여기엔 헬빅(Hellwig)이라는 이름의 소령이 거느리는 소규모 프로이센군 밖에 없었으므로, 모랑은 손쉽게 바르텐부르크 마을을 점령했습니다만, 헬빅의 부대는 동쪽의 뺵뺵한 숲 속에 들어가 계속 머스켓 소총을 쏘며 저항했습니다. (엘스터 마을과 바르텐부르크 마을은 보시다시피 걸어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저 북서쪽에 포위된 프랑스군의 요새 비텐베.. 2024. 12. 16.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7) - 강들과 다리들 도강 작전 자체도 어렵지만 도강했다가 패배했을 때 재빨리 다시 강을 건너 후퇴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어려운 작전을 위해 그나이제나우가 나름 머리를 써서 만든 작전의 기본 얼개는 입구와 출구를 분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강을 건너 진격하기 전에 먼저 퇴로부터 확보했는데, 토르가우 하류 48km 지점이자 비텐베르크 상류 16km 지점의 우안에 위치한 엘스터(Elster) 마을 근처에 참호로 보호된 강화 진지를 구축하고 거기에 다리를 놓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강을 건너는 것은 토르가우 상류 24km 지점에 있는 뮐베르크(Mühlberg)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뮐베르크에서 강을 건너면 나폴레옹은 당연히 퇴각도 그 쪽으로 하리라고 생각하고 포위망을 펼칠 생각이겠지만, 만.. 2024. 12. 9.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6) - 트라헨베르크 의정서의 결함 나폴레옹이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우유부단함에 빠져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블뤼허는 트라헨베르크 의정서에 알고 보니 큰 결함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 취지에 따르면 연합군의 3개 방면군은 곰을 둘러싼 3마리의 사냥개처럼 어느 하나가 곰의 정면을 상대하는 동안 나머지 두 마리가 곰의 뒷다리를 물어 뜯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곰이 공격 방향을 휙 바꿔 뒷다리를 무는 사냥개를 공격하면, 그 사냥개는 재빨리 후퇴해야 했고요.   그런데, 지형지물로 인해 재빨리 후퇴를 못한다면 그 사냥개의 운명은 끝장나는 것이었습니다.  블뤼허는 자신의 슐레지엔 방면군의 신세가 바로 그 끝장난 운명의 사냥개와 같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바로 엘베강 때문이었습니다.  엘베강을 도강하여 이제 등 뒤에 강을 끼게 되면, .. 2024. 12. 2.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5) - 우유부단 블뤼허가 이렇게 그로스엔하인의 뮈라를 기습하기 위해 공을 들였으나, 9월 21일 날아온 그로스엔하인에 대한 정찰 보고서는 블뤼허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뮈라가 그로스엔하인을 버리고 남서쪽으로 물러났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 여태까지 후퇴만 거듭하던 막도날로부터 전에 없이 강력한 총공세가 시작되어 블뤼허를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블뤼허가 이렇게 뮈라를 들이칠 계획을 짜고 있는 동안, 나폴레옹이라고 그냥 앉아서 멍하니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역으로 그로스엔하임의 뮈라를 쾨니히스브뤽으로 진격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응하느라 블뤼허의 전선이 어지러울 때 막도날이 다시 바우첸을 탈환하도록 하는 것이 나폴레옹의 기본 계획이었.. 2024. 11. 25.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4) - 포로가 된 아들 9월 중순, 블뤼허의 슐레지엔 방면군은 다소 갑갑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일단 당장 대치하고 있는 막도날의 보버 방면군을 계속 몰아치고는 있었으나, 베르나도트를 치려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보버 방면군이 전선을 지키지 못하면 모든 계획이 흐트러진다'라는 닥달을 받은 막도날도 결사적으로 블뤼허에게 저항하고 있어서 서쪽 드레스덴으로의 진군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막도날의 등 뒤에는 엘베강과 드레스덴이 있었고 막도날은 여차하면 드레스덴의 견고한 성벽 뒤로 숨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주력군이 도사리고 있는 드레스덴에 블뤼허 혼자서 접근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중에야 그것이 밀가루 수송선단 호위를 위한 병력 전개라는 것을 알았지만) 엘베강 우안인 그로스엔하.. 2024. 11. 18.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3) - 엘베강의 밀가루 9월 들어 나폴레옹의 상황은 무척이나 난처한 것이 되어 버렸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로스비어런과 덴너비츠에서 연달은 패배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드레스덴의 나폴레옹을 남북동쪽에서 둘러싼 3개군 중에서 나폴레옹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베르나도트의 북부 방면군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건 매우 뜻밖의 결과였습니다.  애초에 연합군의 3개 방면군 중에서 주력은 누가 뭐래도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의 3대 군주들이 총집합한 보헤미아 방면군이었고, 가장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다크 호스가 블뤼허와 그나이제나우가 이끄는 슐레지엔 방면군이었습니다.  아무도 베르나도트가 큰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은 베르나도트가 뭐 대단한 리더쉽을 발휘하거나 과감한 작전을 펼친 것은 아니었.. 2024. 11. 11.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2) - 왕세자에 대한 고자질 블뤼허는 베르나도트가 9월 6일 덴너비츠에서 네를 격파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뻤습니다만, 곧 이어 별도로 날아든 뷜로(Friedrich Wilhelm Freiherr von Bülow)의 편지를 읽고는 무척 복잡한 심경이 되었습니다.  뷜로는 베르나도트 밑에서 북부 방면군 산하 프로이센 제3군단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베르나도트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옛 적군인 그에 대해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같은 프로이센 사람인 블뤼허에게는 별도의 편지를 보내 '베르나도트를 믿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뷜로는 덴너비츠에서 열심히 싸운 것은 자신과 타우엔치언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 제3,4군단 뿐이었으며, 베르나도트는 온갖 핑계를 대며 진격을 미루다 승부가 판가름난 이후인.. 2024. 11. 4.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1) - 명령 불복종 여태까지 왜 바이에른이 10월 8일 오스트리아와 리드(Ried) 조약을 맺고 나폴레옹을 배신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보셨습니다.  이제 다시 시선을 나폴레옹과 슈바르첸베르크, 블뤼허와 베르나도트에게 돌려보시겠습니다.  9월 6일 덴너비츠(Dennewitz) 전투에서 베르나도트가 네를 완패시킨 뒤, 과연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먼저 나폴레옹은 8월 29~30일의 쿨름 전투 이후에도 보헤미아로 쳐들어가 슈바르첸베르크의 보헤미아 방면군과 결전을 벌이려고 시도는 해보았습니다.  그는 생시르의 제14군단을 선두로 빅토르의 제2군단과 근위대, 그리고 와해된 방담의 제1군단 잔존 병력까지 보헤미아로 넘어가는 얼츠거비어거(Erzgebirge) 산맥 일대에 투입했습니다.  실제로 생시르의 제14군단의 선두는 9월.. 2024. 10. 28.
바이에른의 배신 (11) - 제롬의 무기고 바이에른이 오스트리아와 전향 협상을 한창 진행 중이던 9월 중순, 제1선인 작센 저 후방에서 사건이 하나 벌어집니다.  당시 27세이던 러시아의 체르니셰프(Alexandre Ivanovich Chernyshev) 장군은 베르나도트의 북부방면군 소속이었는데, 달랑 3천의 기병들, 즉 코삭 기병 5개 연대(각 연대는 대략 500명)와 정규 기병 6 개 대대(squadron, 각 squadron은 대략 120명)에 1개 기마포병대(4문)만 이끌고 9월 14일 엘베 강을 건넌 것입니다.  이렇게 코삭 기병대가 주축이 된 러시아군 부대가 프랑스군 후방에 침투하여 온갖 노략질로 후방 통신과 보급을 위협하는 일은 늘상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천 단위의 부대가 하나로 뭉쳐서 움직이는 일은 드물었고, .. 2024. 10. 21.
바이에른의 배신 (10) - 두 개의 봉인이 풀리다 막시밀리안 1세의 맏아들인 루드비히는 1809년 당시 23세 한창 나이였는데, 당연히 실전에서 사단장 노릇을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의 성향은 원래부터 반(反)프랑스, 친(親)오스트리아이자 낭만적인 민족주의였습니다.  그는 특히 독일 중세 시대에 대한 매니아로서 나중에 왕이 된 이후 상(上) 바이에른(Oberbayern), 하(下) 바이에른(Niederbayern), 슈바벤(Schwaben), 프랑켄(Franken) 등의 옛 지방명을 복원하고 자신의 호칭도 '바이에른 국왕이자, 프랑켄 공작, 슈바벤 공작, 팔츠 백작' 등으로 고치기도 했습니다.  좀 오버스러운 이런 성향은 그가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장애에 가까울 정도로 귀가 잘 들리지 않고 말더듬이 심했다는 점에 대한.. 2024. 10. 14.
바이에른의 배신 (8) - 외젠의 결혼 (하) 아우스테를리츠의 대승의 결과로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로부터 몇몇 영토를 할양받아 덩치가 더 커질 뿐만 아니라, 공국에서 벗어나 이제 왕국으로 인정받기로 이야기가 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걸 확정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참여하는 프레스부르크(Pressburg) 협약이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 날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1805년 뮌헨의 크리스마스 이브는 어느 때보다 기쁜 날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 분위기는 완전 초상집 분위기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심복인 뒤록(Duroc)이 의전을 갖추고 나타나 공식적으로 외젠과 아우구스타의 혼약을 요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장 그날은 억지춘향으로 이 공식 사절을 접대해야 했으나, 바로 다음날인 크리스마스에 막시밀리안은 병을 .. 2024. 9. 30.
바이에른의 배신 (7) - 외젠의 결혼 (중) 이 혼담의 주인공인 아우구스타 공주는 1804년 하반기부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매우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1805년 4월, 그녀는 꽤 가까운 사이였던 2살 연상의 친오빠 루드비히(Ludwig Karl August von Pfalz-Birkenfeld-Zweibrücken)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시 루드비히는 그 시절 유럽 귀족가문 자제들 사이에 유행이던 소위 '그랜드 투어'(grand tour)를 위해 이탈리아 여행 중이었거든요. "...아빠가 카알과의 약혼을 바라지만, 프랑스를 두려워 하는 것 같아.  내 생각엔 주바이에른 프랑스 대사 오토(Otto)는 나를 외젠 보아르네에게 시집 보내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모양이야.  카알 왕자와의 약혼이 확실히 매듭지어지지 않은 .. 2024. 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