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트 왕세자와 폰 페르센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도 사태는 험악했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국왕의 역할일텐데, 카알 13세는 정작 거의 아무 역할을 못 했습니다.  이미 1809년 11월 이미 한차례 심장마비를 일으킨 이후 건강 문제로 인해 국정에 거의 참여를 못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스웨덴의 조야는 모두 안정을 원했는데, 이 혼란이 끝나기 위해서는 강력한 후계자를 조속히 선출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했습니다.  


문제는 카알 13세의 왕비 샤를로타(Hedvig Elisabet Charlotta) 왕비였습니다.  살해된 폰 페르센과 함께 구스타프파의 수장 노릇을 해왔던 여걸이던 그녀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구스타프 왕자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공공연히 구스타프 왕자가 왕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민중의 지지를 받는 아우구스트 왕세자가 의문사를 당한 상황에서 구스타프 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될 경우 폭동이 일어날 것이 뻔했습니다.  아마 민중이 참는다고 하더라도 구스타프 4세를 쿠데타로 몰아냈던 스웨덴 군부가 가만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현실을 직면한 샤를로타 왕비도 한발 물러섰습니다.  그녀는 구스타프 왕자가 정 안 된다면 구스타프 집안의 원류인 홀슈타인(Holstein) 가문의 페터(Peter)가 왕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 없었습니다.  새 왕세자를 선출하는 회의는 외레브로(Örebro) 성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회의가 열리는 동안 샤를로타 왕비는 스트룀스홀름(Strömsholm) 궁에 사실상 연금되었습니다.  그녀의 간섭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스트룀스홀름(Strömsholm) 궁입니다.  노르딕 양식이라 그런지 왕궁치고는 상당히 단촐하네요.)




굳이 샤를로타 왕비를 연금시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전통적으로 스웨덴의 왕위는 의회(Riksdag)와 러시아가 결정하는 자리였거든요.  당시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강국인 프랑스의 눈치도 봐야 했습니다.  물론 이 회의에 러시아 대표나 프랑스 대표가 와 있지는 않았습니다만, 참석자들의 마음 속은 어떤 사람을 왕세자로 뽑아야 주변국들의 위협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인지로 복잡했습니다.  1810년 8월 21알 그 결과로 뽑힌 것이 바로 베르나도트였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이름이 스웨덴에 알려진 것은 뤼벡에서 스웨덴 포로들을 친절하게 대해준 사건이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사람들, 특히 군부에게 매우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지요.  칼 뫼르너가 독단으로 그에게 왕세자 자리를 권유한 것은 스웨덴 왕실의 분노를 살 정도로 처음에는 어처구니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만,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의외로 프랑스 군단장이자 당대 최고의 권력자 나폴레옹 황제의 인척인 베르나도트가 매우 합리적인 선택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도 천하의 나폴레옹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에 불과했고 경쟁 관계이던 덴마크도 나폴레옹의 보호를 받는 처지였으니, 나폴레옹의 친척을 왕세자로 뽑는다면 스웨덴도 자연스럽게 나폴레옹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스트룀스홀름 궁에 연금되어 있던 샤를로타 왕비는 베르나도트가 새 왕세자로 선출되었다는 것을 통보한 사람은 아델스바르드( Fredrik August Adelswärd)라는 관료였는데, 그는 평민이 스웨덴 왕위를 잇게 된 것에 대해 왕비께서 언짢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으나, 왕가의 안정을 위해 부디 기쁜 척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에 대해 왕비도 왕국에 안정만 가져올 수 있다면 누가 왕이 되더라도 환영하겠다고 말하며, 그에게 재능과 선량한 마음이 있다면 혈통이 어떤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매우 진보적인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샤를로타 왕비입니다.  이 분이 쓰신 일기는 자신의 사후 50년 이후에 출간해도 좋다는 취지로 씌여졌고, 실제로 1902년부터 조금씩 스웨덴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지금도 귀중한 스웨덴 왕실 역사 자료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스웨덴 왕비가 쓴 일기를 왜 스웨덴어로 번역하냐고요 ?  이 분은 일기를 프랑스어로 쓰셨거든요.  당시 유럽 상류 사회는 다 프랑스어를 쓰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니, 프랑스 사람인 베르나도트를 왕으로 모셔와도 일반 스웨덴 서민과 직접 이야기할 일이 없는 한 신하들과의 언어 소통 문제는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 말 미국 역사가인 슬로안(William Milligan Sloane)이 쓴 나폴레옹 전기(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에 따르면, 이때 베르나도트가 선출된 것은 프랑스에 대한 스웨덴의 정보망이 사실상 마비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대를 살고 계신 여러분과는 달리, 당시 스웨덴 귀족 사회와 군부에서는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의 미묘하면서도 팽팽한 긴장 관계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의심도 듭니다만, 살해된 폰 페르센이 스웨덴에서 높은 직위를 누렸던 이유 중 하나가 그가 마리 앙트와네트를 통해 프랑스 부르봉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폰 페르센은 스웨덴 귀족이면서도 프랑스군에 복무하며 심지어 미국 독립전쟁까지 따라 갔었지요.  왜 스웨덴 귀족이 그렇게 남의 나라 군대에 복무했을까요 ?  아니, 애초에 스웨덴 국왕이 왜 그런 것을 허용했을까요 ?  폰 페르센은 구스타프 4세의 아버지인 구스타프 3세의 심복이었는데, 그가 우연한 기회에 부르봉 왕가에 줄을 댔다는 것은 폰 페르센 개인 뿐만 아니라 스웨덴 전체를 위해서도 크게 이익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폰 페르센을 통해 당대 유럽의 손꼽히는 강국이었던 프랑스의 고급 정보들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나고 마리 앙트와네트가 처형되고, 이어서 폰 페르센까지 어이없이 죽어버리자 프랑스에 대한 스웨덴의 정보망에 큰 구멍이 뚫려 버리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 사이에 어떤 알력과 갈등이 있는지에 대해서 나폴레옹의 기관지나 다름없었던 르 모니퇴르(Le Moniteur Universel)지에서 상세히 있는 그대로 보도할 리가 없었으므로, 당시 나폴레옹의 측근들이 아니라면 그런 사실에 대해 알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 것입니다.



(르 모니퇴르 신문입니다.  1815년 7월 10일 판이니 워털루 전투 이후에 나온 신문입니다.  그래서 국왕(Le Roi)께서 누구누구를 무엇무엇으로 임명하셨다라는 소리가 나오네요.)




이렇게 순진한 스웨덴 사람들이 멋도 모르고 베르나도트를 자신들의 왕세자로 모셔가겠다고 프랑스에 통보해오자, 속이 뒤틀린 것은 당연히 나폴레옹이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그런 속내를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황제의 체면이 있는 걸요 !  그런데 나폴레옹은 체면이 좀 깎일 각오를 하고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세자가 되는 것에 충분히 초를 칠 수 있었습니다.  바로 베르나도트의 시민권 문제였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시민이자 나폴레옹 황제의 신민이었으므로 그가 스웨덴 왕세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프랑스 시민권을 버려야 했는데, 그렇게 시민권을 버리는 행위는 프랑스의 주권자인 황제 나폴레옹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이를 이용하여 베르나도트와 딜을 하나 성사시키려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시민권 포기 신청서를 들고 온 베르나도트에게 조건을 하나 내걸었습니다.  향후 스웨덴이 절대 프랑스에 대해 적대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베르나도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스웨덴 왕세자가 될 경우 자신의 의무는 프랑스가 아니라 스웨덴을 위한 것이 되므로, 그렇게 스웨덴의 국익에 반할 수 있는 약속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나폴레옹도 나름 당대의 영웅이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더 이상 치사하게 질척거리지 않고 쿨하게 이렇게 말하며 베르나도트의 신청서에 서명을 했다고 합니다.  


"가시오, 이제 당신과 나의 운명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지켜봅시다."    


스웨덴 사람들이 프랑스 내부 사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에 대해 이미 상당한 공부를 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스웨덴이 왜 자신을 왕세자로 택했는지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어떤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스웨덴이 당대 최고 권력자 나폴레옹의 부하이자 인척인 자신을 왕세자로 삼은 이유는 나폴레옹의 힘을 빌어 최근 잃었던 것을 되찾으려 함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핀란드였고, 핀란드는 러시아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과연 베르나도트는 이 어려운 퀘스트를 어떻게 수행했을까요 ?  



** 아마 다음 편이 베르나도트 마지막 편이 될 것 같군요.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Hedvig_Elisabeth_Charlotte_of_Holstein-Gottorp

https://en.wikipedia.org/wiki/Union_between_Sweden_and_Nor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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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곰소문 2018.08.20 08: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흥미진진 하네요. 일부러 스포일러 안하게 검색도 안하고 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lol

  2. nashorn 2018.08.20 1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는척 하면 안되겠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나폴레옹이 베르나도트를 좀 더 존중했으면
    나폴레옹한테 더 좋은 결과가 있을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3. 유애경 2018.08.20 14: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나도트가 왕세자가 되기까지 정말 여러가지-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조건과상황(?)이 얽혀 있었네요!
    여러모로 치사한 나폴레옹이 쿨하게 서명했다는것 까지도 ...

  4. 카를대공 2018.08.20 14: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베르나도트편을 읽으며 알게 된것이 의외로 왕세자가 되는 과정이 험난했으며 우연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군요;
    전 정말 스무스하게 된 줄 알았습니다.

    그건 그렇고 베르나도트도 맨 처음 나폴레옹 전쟁을 접했을 무렵엔 단순 배신자인줄 알았습니다만 그게 아니었군요.

    나시카님께서도 수차례 말씀하셨지만 괜히 거물이 아닌가 봅니다.

    이번편에서도 깡다구 보통이 아닌걸 보여주네요.

  5. TheK2017 2018.08.20 16: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과연. 과연. 정말 궁금합니다.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 멋지네요. ^ㅇ^*

  6. 하이텔슈리 2018.08.20 2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친척을 왕세자로 뽑는다면 스웨덴도 자연스럽게 나폴레옹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에서 '아 ... 할 말을 잊었습니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났습니다. 뭐 그게 이유 중에 하나였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서도 참...

    *.해결책이 아마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된다였죠? 그걸 정말 해냈고. (...)

최근에 흥미로운 보험 사기 관련 뉴스가 있었습니다.  길이 100m가 넘는 4천톤급 원양어선에 보험금을 노리고 일부러 화재를 일으킨 뒤, 보험금으로 무려 60억원이 넘는 돈을 받아냈다는 것이었지요.  (https://news.v.daum.net/v/20180809072704748 참조)  거기서 저의 마음을 가장 설레게 했던 것은 애초에 그런 큰 배를 구입하는데 들었던 금액이었습니다.  19억원이더라구요.  비록 낡은 중고어선이라서 많이 내려간 가격이긴 했지만, 그 정도면 서울에 있는 좋은 동네 넓은 아파트 가격이쟎아요 ?  저는 그런 큰 배는 가격이 엄청나게 높아서, 일반인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저 정도면 물론 큰 액수이긴 하지만 로또 한방이면 가능한 금액이라는 점에 마음이 설렜습니다.  


길이 100m 정도의 선박이면 크기가 어떨지 궁금해하시는 분들께서는 망원동 쪽에 정박해서 이젠 공원이 되어 있는 서울함을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서울함은 1985년에 취역하여 30년 사용하다가 퇴역한 울산급 호위함인데, 길이가 100m 정도입니다.  다만 저 원양어선처럼 뚱뚱하지 않고 군함답게 날씬하여 배수량은 약 1500톤 급이라고 하네요.  




(망원동 쪽에 있는 서울함 공원입니다.  3천원인가... 유료입장이긴 한데, 꽤 괜찮습니다.)




이왕 돈 써서 선주가 되는 김에, 시시한 어선 말고 날렵한 군함을 구매해서 대양을 항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  현대에 퇴역 군함으로 대체 뭘 해야 수익을 낼 수 있을지가 걱정이시라면 저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제 블로그의 주제인 나폴레옹 전쟁 당시라면 매우 수지 맞는 장사가 있긴 했습니다.  바로 사략선(privateer)입니다.  


사략선은 해적(pirate)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일종의 민간 해군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략선은 전시에 소속 국가로부터 면허장(letter of marque)을 받아서 합법적으로 적대국의 선박을 공격하여 노획하는 역할을 하는 선박입니다.  일반 군함과 다른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함장을 비롯하여 모든 선원은 민간인입니다.  그러나 해적과는 달리 일반적인 통상적인 교전 수칙을 다 지켜야 했습니다.  가령 탈취한 선박의 민간인, 특히 여성의 안전은 절대 보장해야 했습니다.  


- 합법적으로 교전할 수 있는 선박은 면허장(letter of marque)에 표기된 국가 소속의 민간 및 군용 선박입니다.  만약 교전국이 여러 국가라고 하면, 반드시 면허장을 그 해당 국가별로 다 따로 받아야 합니다.  가령 덴마크가 프랑스의 동맹국이자 영국의 적국이라고 해도, 프랑스와 네덜란드에 대한 면허장 2장만 있다고 하면 절대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 사략선의 주목적은 노획품이었습니다.  따라서 적함의 격침보다는 탈취가 목표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배가 빨라야 했고 또 승선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많은 수의 전투원을 태울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사략선은 대포 무장이 빈약한 작은 배였습니다.  이런 작은 배들이 자신의 2배 정도 크고 대포 수도 더 많은 인도 무역선(Indiaman)에 겁도 없이 덤벼들곤 했습니다.


- 원래 목적도 그랬고 또 무장이 빈약했으므로 사략선은 상선을 만나면 공격하고 적 군함을 만나면 빠른 속력을 이용해 도망쳤습니다.  




(동인도 회사 소속 켄트 Kent 호를 공격 중인 프랑스 사략선 콩피앙스 Confiance 호의 모습입니다.  이 사건은 1800년에 있었는데, 저 그림 속에서 작은 배가 콩피앙스입니다.  저 켄트 호는 무려 40문의 대포를 장착한 무장 상선이었고, 특히 화재가 발생한 다른 배의 승객들을 구출해서 태우고 있었기 때문에 무려 300명의 군인을 포함한 437명의 인원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콩피앙스 호는 15문의 대포에 고작 150명의 선원을 태우고 있을 뿐이었지요.  그런데도 1시간 반의 전투 끝에 콩피앙스 호는 켄트 호를 나포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때 나포 이후 1시간의 약탈이 허락되었는데 여성 승객들은 엄격하게 보호될 정도로, 프랑스 민간 사략선들은 해적과는 달리 신사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영국 해군성은 이 콩피앙스 호의 선장 로베르 쉬르쿠 Robert Surcouf 에게 현상금을 걸기도 했습니다.   쉬르쿠는 1809년 현역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무려 40 척을 나포하는 활약을 했는데, 이후에는 다른 사략선을 무장시켜 내보내는 선주로서 또 많은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영국 해군성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는 등 명예롭게 살다가 1827년 노르망디에서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사략선을 바다에 띄우는 것은 매우 위험이 큰 사업이었습니다.  따라서 돈 많은 상인들이 돈을 대서 배와 장비를 사들이고 유능한 선장과 선원들을 고용하여 사략선을 띄웠습니다.  이런 사략선에 가장 좋은 배는 원래 군용으로 제작되었다가 오랜 취역 생활 후 낡아서 퇴역한 작은 슬룹(sloop) 함이었습니다.  속도가 빠른데다 군함 특성상 전투원들을 많이 태우기도 좋았고, 무엇보다 낡은 중고 선박이라서 유사시 역으로 탈취 당하거나 침몰하더라도 새 배를 잃는 것보다는 손해가 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략선 사업을 하려면 돈이 대략 얼마나 들었을까요 ?  





The Reverse of the Medal by Patrick O'Brian  (배경 : 1812년 영국 ) --------------


(주인공인 영국 해군 함장 잭 오브리가 증권시세 조작 사건에 휘말려 재판을 받게 됩니다.  이 재판에서 유죄로 판결을 받을 경우 돈도 잃지만 무엇보다 해군에서 불명예 전역을 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의 절친인 군의관 스티븐 머투어린은 잭이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에 대비해 잭과 자신이 오랫동안 함께 근무했다가 이제 퇴역하는 영국 해군 소속 낡은 프리깃함인 HMS Surprise를 자신의 돈으로 매입하여 사략선으로 만들 생각을 합니다.  최근 스티븐의 스페인 귀족 대부가 사망하면서, 그에게 엄청난 규모의 금화를 유산으로 남겼거든요.  그에 대해 해군성 관료인 조셉 블레인 경과 스티븐이 대화를 나눕니다.) 


마침내 스티븐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여기 오면서 유죄 판결의 경우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잭 오브리는 해군에서 퇴출당할 경우 정신줄을 놓고 폐인이 될 겁니다.  저도 영국에 남아 있고 싶은 생각이 없고요.  그러니 제가 대신 서프라이즈 호를 구입해서 - 잭의 금전 상황이 어렵게 되었으니까요 -  사략선 면허장을 받고 선원들을 계약해서 사략선으로 출항시킬까 생각합니다.  잭을 그 선장으로 해서요.  그에 대해 생각해보신 뒤 내일 제게 조언을 주십사 간청드려도 될까요 ?"


"물론 이지요.  일단은 매우 훌륭한 계획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보직을 얻지 못한 해군 장교들 여럿도 그렇게 사략선에 자리를 얻어서 자신들의 전쟁을 계속 하면서 가끔씩 적의 통상로에 아주 난리를 일으킴과 동시에 큰 수익도 올리고 있지요.  떠나신다고요 ?"


(중략...)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이 영국 내에 필요한 자금을 가지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런 거래에서는 당장 준비된 자금이 필요하거든요.  만약 없으시다면..."


"있습니다.  군함을 사서 장비를 갖추는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성령과 통상 은행'(the Bank of the Holy Ghost and of Commerce)에서 발행한 쓰레드니들 가(Threadneedle Street - 영국 금융기관이 밀집한 거리의 이름)의 어음 3장이 있습니다."  스티븐은 그 중 한 장을 건네면서 말했다.  "만약 이것들로 부족하다면 더 가져올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는 물론, 지금도 런던의 금융기관이 몰려 있는 지역을 'The City'라고 부릅니다.  사진 속에 보이는 Threadneedle 거리는 그 City에 속한 거리 이름으로서 지금도 많은 금융기관이 있습니다.)




"맙소사, 머투어린."  조셉 경이 말했다.  "이거 하나로도 내구 연한이 지난(past mark of mouth) 소형 중고 프리깃함은 말할 것도 없이 74문짜리 신규 전열함을 건조하고 선원과 장비를 갖출 수 있겠소."


"서프라이즈 호는 선수 돛을 좀 특별히 달면 정말 민첩하게 내달립니다.  그리고 그 냄새와 낮은 천정, 하갑판의 좁은 공간에 다들 결국 익숙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배는 아주 멋진 사략선이 될 겁니다.  서프라이즈호를 뿌리칠 정도로 빠르거나 화력 대결을 벌여 이길 정도로 중무장한 상선은 많지 않지요.  하지만 이미 아시다시피 먼저 사략 먼허장을 받아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그냥 해적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교전국인 국가들 하나하나에 대해 각각 면허장을 받아야 합니다.  제 친구들 중 하나는 프랑스 선박에 대한 면허장만 가지고 있었는데도 전쟁 초기에 네덜란드 선박을 하나 나포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만난 눈치 빠른 영국 해군 함정 하나가 그의 면허장을 보고는 나포된 네덜란드 선박을 몰수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선원들 중 절반을 강제 징발(press)하여 해군에 입대시켰지요.  하지만 제게도 아직 해군성 한 구석에 영향력이 좀 있으니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적대국에 대한 면허장을 오늘 오후에 받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했지만, 서프라이즈 호에 대한 경매가 잭 오브리 함장의 공판 바로 하루 전으로 정해졌답니다.  그게 당신에게 어떤 문제가 될까요 ?"





(HMS Surprise는 실제로 존재했던 군함입니다.  원래 프랑스 해군이 1793년에 건조한 32문짜리 위니떼(Unité) 호였는데, 1796년 영국이 나포한 뒤 36문짜리 HMS Surprise로 바뀌었습니다.)




(중략 ...)


조셉 경이 말했다.  "토마스 풀링스라면, 오브리 함장의 선임 부관으로 근무하다가 최근에 준함장(commander)으로 승진한 그 장교를 말씀하시는 거지요 ?"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친구 말로는 (비록 함장으로 승진했지만) 자신이 해군 함정을 배정받아 출격할 가능성은 이미 매우 낮은데, 만약 오브리 함장이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그 가능성은 더더욱 낮아진다고 하더군요.  정말 그런가요 ?"


"안 됐지만 그럴 겁니다.  아무 배경이 없는 준함장이, 더군다나 불명예 전역한 정규 함장과 해군 생활을 했다고 하면, 아무리 그 불명예가 누명에 불과하다고 해도 남은 여생을 육지에서 보내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의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요."


"그렇다면 서프라이즈 호를 매입해서 정비하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그의 제안을 제가 받아들인다고 해서 제 양심이 찔릴 이유는 없겠군요 ?"


"예,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정말 아주 잘 되었군요 !  실은 저도 경매 현장에서 당신을 도와줄 경험있는 뱃사람을 소개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렇지 않을 경우 철저히 사기를 당해서 서프라이즈 호는 뱃바닥의 구리판을 다 뜯기고 아예 진흙뻘에나 어울리는 평저선으로 개조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풀링스가 모든 면에서 훨씬 더 뛰어난 사람입니다."


(중략 ...  항구에서 머투어린은 마침 정박해 있는 유러디시 호의 함장이자 오브리의 친구인 던다스 함장의 면회를 요청합니다.)


던다스는 그의 함장실에서 사복 차림으로 허겁지겁 뛰어나와 외쳤다.  "오 세상에 머투어린, 제가 늦은 것이, 딱 5분 늦은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마침 시내로 나가기 직전이었거든요."  


그는 머투어린을 그의 선실로 안내하고 걱정스럽게 잭 오브리의 안부에 대해 물었다.  던다스는 걱정하는 머투어린에게 해군 관례인 허위 복무 기록(false muster)에 대한 오브리의 문제는 전혀 무관한 내용이니 걱정말라고 안심시키고는 이 공판에 대해 머투어린의 예상은 어떤지 물었다.  민간인의 관점에서 정말 위험한 재판이 될 것이라고 보는지 ?


"제3자 관점에서 보면 유죄 판결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문의 얼굴을 보고 정치적으로 연루된 재판이 과거에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돌이켜 보면, 저는 그 재판 결과가 걱정스럽습니다.  제가 공판에 참석하지 못하고 서프라이즈 호 경매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라 더욱 그래요."


"당신이요 ?  맙소사 !"  던다스는 놀라 외쳤다.  그는 스티븐을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서프라이즈 호는 값이 꽤 나갈 겁니다... 민간용 군함이니 가격이 정말 높을텐데요."


"해군성의 높은 분도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하지만 그래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배를 셀머스턴 항구로 옮겨갈 수 있도록 선원 한두 명을 좀 빌려줄 수 있으실런지요 ?  빌려주시는 선원들은 본덴 및 제 하인과 함께 합승마차를 타고 오면 됩니다.  그 동안에 저와 톰 풀링스는 경매 참석을 위해 무개마차를 타고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당장 승조원 팀을 꾸며 드리겠습니다.  경매는 내일이지요 ?  오 맙소사.  당신에겐 정말 시간이 없군요.  오늘 밤 안으로 거기 도착하려면 당장 출발하셔야 합니다.  제가 부둣가에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제 바지선이 유러디시 호 바로 옆에 떠 있거든요.  승조원 팀에 대한 명령을 제가 내리는 대로 출발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경매에 늦으시면 안 되지요.  톰 풀링스가 당신과 함께 간다니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가신다고 했다면 저라도 따라갔을 겁니다.  선박 경매에 따라 붙는 암초와 상어들로부터 당신을 보호해야 하거든요.  그것들은 다리 하나 쯤은 - 아마 두 개 다 - 가볍게 뜯어가거든요.  그런데 제가 더란트네에서 전에 말씀드렸던 젊은 친구와 만나기로 시내에 약속이 잡혀 있어서 -"


"함장님 형님네가 아니고요 ?"


"아니요.  멜빌과 저는 요즘 말 안 섞고 지냅니다.  제 아이들과 그 엄마를 모욕하고도 걷어 차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인 거지요 - "


(중략...  머투어린은 풀링스와 함께 경매에 참석합니다.  그는 경매장에서 지금은 스웨덴에 있는 아름다운 그의 아내 다이애나 생각에 빠져듭니다.)


비록 그는 사전 경매들과 풀링스의 초기 입찰에 대해 기계적인 관심을 좀 주기는 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곧 다이애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버렸다.  다이애나가 크리스티 경매장의 문 안쪽에 서서 고개를 높이 들고 낙찰의 기쁨에 입을 벌리던 모습은 경매 진행자가 단호하게 내리치는 망치 소리에 날아갔고, 풀링스가 낙찰에 대해 축하 인사를 했다.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군의관 선생님.  이제 서프라이즈 호의 선주이십니다 !"  형식적인 절차가 끝나고 그들이 다시 서프라이즈 호의 갑판에 서게 되자 기쁨의 목소리로 풀링스가 말했다.


"아주 엄숙한 일이지."  스티븐이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이 배를 오래 소유하지 않기를 바라네.  내일 재판이 잘 진행되어, 오브리 함장이 기쁜 마음으로 내 손에서 이 배를 빼앗아 갔으면 좋겠어.  물론 난 이 배를 아주 사랑해.  내게 이 배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집이자 피난 방주라네."


"거기 당신 !(You, sir)" 풀링스는 밧줄걸이(belayingpin)에 손을 올리며 외쳤다.  "그 꼬인 밧줄에서 손을 떼."


"전 그냥 보기만 했는데요."  항만 노동자 하나가 말했다.


"자넨 당장 판자 다리를 건너 배에서 내려."  풀링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뱃전으로 가서 나룻배를 향해 외쳤다.  "조스핀, 수고스럽겠지만 자네 형을 불러오게."  그는 스티븐에게 말했다.  "이 배의 삭구와 돛대까지 다 도둑맞기 전에 배를 빨리 항구 가운데의 계류장(moorings)으로 끌고 나가야겠습니다.  본덴이 여기 선원들과 함께 이미 와있다면 정말 좋았겠네요.  조류 저쪽의 계류장에 있는 중에도 제겐 감시할 눈이 한 쌍 뿐이거든요."  그는 양동이를 하나 붙잡더니 놀라운 손재주로 그 속에 든 물을 뱃전 아래의 꼬마들에게 뿌렸다.  그 아이들은 훔친 널빤지로 만든 뗏목을 타고 이물 쪽으로 접근해서 프리깃 함체의 구리판을 뜯어가려 하고 있었다.  "야 이 거지같은 못된 꼬마들아(실제 표현은 어머니와 성매매와 기타 아주 험악한 표현이 많이 쓰였습니다.  참고로 당시엔 fXXXer 대신 bugger라는 표현이 많이 쓰였답니다.  남색꾼이라는 뜻입니다 - 역주), 다음 번에 또 그러면 체포해서 교수형에 처할 거야 !  아뇨, 선생님, 이제 경매사의 조수들이 하선했으니 저것들은 우리 배를 아주 정당한 사냥감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계류장으로 끌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거기서도..."


"계류장이라는 것은 부둣가에서 이동시킨다는 뜻인 모양이지 ? 부두나 선창에서 멀리 ?"


"맞습니다.  항구 내의 가운데로요."




(당시 목조 범선들의 바닥에는 구리판을 촘촘히 입혔습니다.  이는 뱃바닥에 달라붙는 따깨비 등의 해양 생물이 목판을 침식하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구리는 비쌌으므로 이렇게 바닥에 구리판을 입히는 것은 군함이나 재정이 튼튼한 큰 해운 회사 소속의 상선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copper-bottomed'라는 형용사는 '구리판을 바닥에 댄'이라는 뜻 외에 '재정이 든든한'이라는 뜻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림은 미해군 대형 프리깃함 USS Constitution에 구리판을 다시 덧대는 모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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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기억으로는 이 소설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시리즈 후편들 속에서도 머투어린이 상속 받은 금액이 얼마인지, 그리고 머투어린이 얼마에 서프라이즈 호를 낙찰받았는지에 대한 정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직접 그 책을 읽지는 못 했으나) E.H.H Archibald라는 분이 쓰신 "The Fighting Ship of the Royal Navy"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등급별 군함 건조 비용이 나옵니다.  아래 나오는 비용에는 대포 및 각종 삭구류 등의 비용은 들어가 있지 않은, 순수 함체 건조 비용입니다.



대포 수        배수량        건조 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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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문           2220톤        67,600파운드

 98문           1920톤         57,120파운드

 74문           1660톤         43,820파운드

 64문           1390톤         35,920파운드

 50문           1050톤         25,700파운드

 44문             890톤        21,400파운드

 32문             700톤         15,080파운드

 28문             600톤         12,420파운드

 24문             530톤         10,550파운드

 20문             440톤          9,100파운드

Sloop함         300톤          6,260파운드



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당시의 1파운드가 대략 25만원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당시 물가를 고려할 때 그건 꼭 맞는 계산법은 아닐 것이겠지요.  당시 해군 위관급 장교의 일당이 3실링(20실링=1파운드) 즉 월급이 약 4.5파운드이고, 현재 한국 해군 중위의 월급여가 대략 230만원 정도라고 하면, 당시 1파운드는 대략 51만원입니다.  이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저 소설속 HMS Surprise는 36문의 대포를 갖춘 약 650톤급 프리깃함이므로 건조 비용이 대략 1만5천 파운드 정도이고 현재 가치로는 약 77억원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서프라이즈 호는 잭 오브리 함장이 어린 소년 시절 사관생도(midshipman) 생활을 했을 정도로 낡은 군함으로 나옵니다.  진수된지 약 30년 정도가 된 배라고 봐야지요.  중고 선박이 얼마나 가격이 내려갈지 모르겠습니다만, 설마 1/10로 떨어지지는 않을 것 같으니, 대략 1/3 가격, 즉 5천 파운드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현재 가치로 26억원 정도입니다.  스티븐 머투어린이 물려받은 금화가 대체 몇 톤이나 되었던 것일까요 ?


기록을 찾아보니 불가리아 해군이 벨기에로부터 2300톤 짜리 빌링겐(Wielingen)급 중고 구축함을 2005년에 2천3백만 유로에 구매한 사례가 있군요.  약 300억원에 산 셈입니다.  화물선 같은 경우, 뒤져보니 대략 선체 길이 100미터에 배수량 2500톤급의 35년 묵은 화물선 가격이 대략 145만불, 즉 16억원 정도하더군요.  여러분도 그 정도 돈만 모으면 선주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럴 돈이 있다면 낡은 화물선보다는 서울에 아파트 사놓는 것이 재테크 측면에서는 더 좋아 보입니다.






Source : The Reverse of the Medal by Patrick O'Brian

http://www.twcenter.net/forums/showthread.php?294049-Cost-of-British-naval-vessals-in-1789

https://forums.civfanatics.com/threads/cost-of-ships-in-the-age-of-sail-cost-compared-to-today.281532/

https://en.wikipedia.org/wiki/HMS_Surprise_(1796)

https://www.yachtworld.com/boats/1984/Custom-Geared-RoRo-Cargo-Ships-3123789/Russia?refSource=browse%20listing#.W3Fv5CgzZ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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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산이아닌가벼 2018.08.16 1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은 쉽지 않지만 지금까지는 운송시장에 있어서 특히 배는 호황과 불황을 자주 겪다보니 20년된-2년이 아닙니다- 배가 금융위기 전에 신배보다 더 비싸기도 했습니다. 람보르기니로 열심히 택시 영업을 하고 중고로 팔았더니 새람보르기니보다 더 비싼 경우죠. 누가 압니까 20년뒤에 또 거대 호황이 올지요 ㅋ

  2. 보헤미아 2018.08.16 15: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 다이애나가 머투린과 다시 이어지나요? HMS 서프라이즈 호에선 미국인 부자 존슨과 눈 맞아가지고 달아난 것으로 아는데..

  3. 유애경 2018.08.16 17: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험사기 기사 보니까 적자 메꾸려고 그랬다는데, 배 불질러서 태워버리고 사기가 발각나서 구속되고 보험금은 물론 반환 당하겠죠? 죄지으면 안되지만 빚때문에 그랬다니까 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4. OSHenry 2018.08.16 18: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네요ㅎㅎ

  5. keiway 2018.08.16 18: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은 목요일에 올라왔는데도 새로 쓰신 글이네요? (제가 예전에 못 본 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기쁘게 잘 읽었습니다. 항상 수고가 많으세요.

    요즘도 부자의 끝은 요트이지 않습니까? (자가용 비행기던가요?)
    군함은 가격보다 거기 들어갈 사람을 채우는게 큰일이겠네요 ㅎㅎ

  6. 와플구이 2018.08.16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고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나시카님이 이번글에도 인용한 잭오브리 시리즈의 마스터 앤 커맨더를 최근에 봤는데 말씀하신대로 정말 재밌었습니다 ㅎㅎ
    당시 함선이나 해군생활 뿐만아니라 일반적인 묘사와 전투장면도 디테일하게 잘 그려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어요. 하지만 그런 디테일과 용어때문에 함선묘사와 전투기동묘사가 머리속에 잘 그려지않아서 쫌 이해가 힘든부분도 있었네요. 한글로도 힘든데 영어로는 어떻게 읽나 싶었습니다 ㅎㅎ
    현재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것들이 당시로선 당연하게 여겼던 관습들도 흥미로웠구요.
    특히 마지막 추격전에서 적 함선이 포도탄으로 배를 찢어버리려고 하다가도 항복하니까 용감한 저항을 극찬하면서 환대하는 장면이 패배때문에 씁쓸하긴하지만 흐믓하기도 했었어요.
    예전 포스팅에서 한글로는 이것밖에 출판이 안됐었다고 하셨던것 같은데 더 읽을수 없어서 아쉽네요.
    나시카님이 번역해서 올리셨던것 중에는 샤프 시리즈가 제일 재밌었는데 이것도 한글 출판은 안됐겠죠?

  7. 석공 2018.08.16 19: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빚도 능력이죠..ㅎㅎ

  8. 효혜 2018.08.17 0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엄청 재밌어요!!

  9. Spitfire 2018.08.17 16: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예전에 아는분께 들은 내용이지만, 종종 소규모 해운사들은 불황이 오면 배를 '자침'시킨다고 합니다. 운임이 마이너스면 차라리 침몰시키고 보험료받는게 훨씬 이득이라 그렇다네요~ㅜㅜ
    어떤 경우에는 완전범죄를 위해서 한명을 희생양으로 삼고 '그놈이 술먹고 홧김에 엔진실에 불지르고 배를 침몰시켰다' 스토리로 간다고 합니다. 범인도 배도 바다밑에 있으니, 돈들여 인양하지 않는 이상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침몰시키는 배에는 무거운 화물을 가득 실어야 보험료가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사고내고 한 2년 '모히또'에서 '몰디브' 마시며 놀고 있으면 보험금이 들어오고, 그때쯤이면 시장이 호전되어서 다시 배를 사서 출동한다고 합니다..;; 뱃사람들의 이야기는 가끔 육지의 범인이 상상도 하지 못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 Spitfire 2018.10.18 18: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글에 답글을 어떻게 다는지 몰라서 이제서야 답을 합니다. 제 글을 다시 보니 일반적인 사례인 것처럼 쓴거 같은데, 결코 일반적인 사례는 아님을 밝힙니다.

      사기를 치는건 당연히 쉽지 않지요. 쉬웠다면 너도나도 했을테니까요. 하지만 무슨 일이든 허점은 존재하는 것이고, 지금 시점에 보험이나 사고처리에 대해 비교적 완벽한 체계가 잡힌 것은 그간 수많은 시행착오와 헛점을 보완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치 한국의 세법이 삼성의 회피기동을 경험하면서 완성되었듯이요~ㅎㅎ

      제가 저 이야기를 들은게 10년이 넘은 이야기이고 실제 발생한 건 더 오래된 일인데, 그 당시의 시스템이 현재와 같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보험업계나 해운업계에서 저런 사기가 통용된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몇몇 없을거구요.

      선박은 차입금으로 구매하는 것이 맞습니다만, 용선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용선은 보통 1년이상 장기로 하다보니,현 시점에서 용선료보다 운임이 훨씬 싸다면 침몰시키고 보험처리하는게 손실을 회피하는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자도 있을 겁니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영세한 규모로 용선 뛰는 이들 중 일부는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게 이 이야기를 해주신 분은 선박관리를 하시던 분인데, 관리하던 배가 두번이나 같은 해역에서 충돌사고를 겪더니 세번째에는 기어이 침몰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선박사고의 여러 에피소드들도 두루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혹시 보험업계에 계시면서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신다면 좀 우려스럽습니다. 보험이란게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하는 건데, 너무 확신에 차서 말씀하시면 누가 보험에 가입할까요?

  10. 119.75 2018.08.18 1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 머투어린이 다이애나와 결혼을 하긴 하나보네요..번역판밖에 못봐서 슬픕니다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지나가다 2018.08.22 1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본문과 스핏파이어님의 댓을에 일부 오류가 있어 관련 업계 종사자 입장에서 설명 드립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해상보험에서 사기를 치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해상보험은 선박의 손해를 보상하는 선박보험과 적하의 손해를 보상하는 적하보험으로 나누게 되는데 이는 가입대상자가 선사(선주)와 화물소유자로 나누어 집니다.
      스핏파이어님은 사기치기가 쉽다고 들으신 듯 하지만 다음과 같은 문제로 쉽지 않습니다.
      1. 보험은 기본적으로 손해입은만큼만 보상하는 '실손보상'원칙에 따라 작동됩니다. 그래서, 보험사에서 인수 심사 시 해당 선박의 가액 증빙을 까다롭게 요구합니다. 이번 사기 건의 경우 인수심사의 맹점을 이용해서(자세히 설명하면 좀 문제가 되서 부득이 생략합니다) 실제 구입가의 약 3배 정도로 가입했는데, 업계 담당자들도 어이없고 실무에서도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부분입니다.
      2. 고의적으로 먼 바다에서 선박을 침몰시키기 어렵습니다. 단순히 선박이 침몰한다고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전문 조사자(surveyor)들이 사고경위 등 제반 사항을 조사해서 보험사에게 보고(report)를 하고 이를 면밀히 검토한 후 보험금을 지급합니다. 그런데, 자살하고자 하는 경우가 아닌 한 선박이 침몰하면 선원 자신도 무사히 빠져나와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군대와 마찬가지로 당직자들이 있기 때문에 고의 침몰은 쉽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모든 선원들이 작당을 한다고 해도 침몰 시 그 경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증언이 어긋나거나 의심되는 정황이 반드시 나오게 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기 건이 그렇듯이 기대만큼 이익을 보지 못한 누군가는 반드시 보험사나 경찰에게 일러바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참고로, 나시카님이 주로 연재하시는 19세기 20세기에는 가능할 지 몰라도 요즘처럼 통신이 발달하고 위성에서 실시간으로 선박을 추적하는 환경 하에서는 어렵습니다. 예를들어 선박들은 의무적으로 침몰사고 시 자동으로 발사되서 구조신호를 발신하는 장치를 탑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신호가 발신되면 인접 국가 및 선박이 소속된 국가의 관계 당국에 위성신호가 자동으로 날아갑니다.
      3. 아울러, 해운업은 전형적인 금융을 기반으로하는 차입금으로 이루어지는 사업이며, 대부분 선주들은 전체 선박가격의 약 10%만 부담하고 나머지 금액은 10~20년의 상환기간을 갖고 대출을 일으켜서 사업을 통한 운임수입으로 이를 갚아나가는 구조입니다. 따라서, 왠만한 가치를 가진 선박을 선주가 자기 비용으로 매입하지 않는 한 보험금을 받아도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얼마 안됩니다. 이번 사기 건의 경우 매입가격이 16억원 정도밖에 안되고 이를 자기 돈으로 부담한 뒤 보험가입은 약 3배로 부풀려서 했기에 수익성(?)이 높은 사기이지만 현재의 보험 시스템으로는 성사되기 어려운 사례입니다. 어쩌면 어려운데 성공할 뻔 했기에 뉴스가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두서없지만 잘못 알고계시는 부분들을 한번 정리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nasica 2018.08.23 18: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나가다// 자세한 댓글 감사합니다. 저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보험금 타내기가..' 라고 생각했더랬습니다.

  11. 2018.08.23 1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머투린이 생각하는 다이애나가 3부 서프라이즈에서 머투린을 쥐었다 놨다하다가 총까지 맞게하고 결국은 차버린 다이애나 빌러스인가요?

    영어가 짧아서 원서는 읽다가 처박아둬서 3부이후는 내용을 하나도 모릅니다..

** 이번 목요일은 'PX병과 취사병을 없앤다'라는 군 개혁안을 기념하여 올리는 재탕글입니다.


제가 카투사로 군 생활을 했던 미군 부대에는 식당(mess hall)이 2개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미군 애들 중 취사가 주특기인 애들이 요리도 하고 식당 관리도 했습니다만, 다른 하나에서는 한국인 아저씨들이 미국인 민간 군속 아저씨의 관리 하에 그런 주방일을 했습니다.  즉, 식당이 거의 민영화되어 있더라고요. 


카투사에 가게 되면 미군에서만 사용하는 희한한 용어들을 몇개 배우게 되는데, 그 중 kitchen polic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주방을 감시하는 경찰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방에서 (요리 외에) 하는 청소 및 설거지 같은 잡역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Police up 이라는 단어는 동사로서 뭔가를 청소하다 라는 뜻이 있거든요.  미군의 역사를 보면 예전에는 뭔가 가벼운 죄를 저지른 병사들에게 처벌로 이런 kitchen police를 시켰습니다.  감자껍질 깎기나 바닥 청소 뭐 그런 것들이지요.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안 나는데, 2017년 6월 25일 일요일에 강경화 장관이 미 제2사단을 찾아 성명을 발표하며, '내가 이렇게 주말에 방문하는 바람에 미군 병사들이 니들 말로 'police up'을 해야 하는 등 내가 민폐를 끼쳤을 거다, 그래도 한미 연합의 중요성은...' 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한국 외교부 장관이 'police up'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보고 미군들도 웃었을 것 같습니다.  외교에서 해당 외국어를 잘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원래 미군은 주방에서 일하는 것을 약간 천하게 여기는 모양입니다.  한국군에서는 취사병을 천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미군은 취사특기병을 뭐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벌로 일반 전투병을 주방 허드렛일을 시키기도 하는 것이고, 또 카투사 초창기에는 카투사를 주로 취사병으로 활용했다고 합니다.  영화 진주만을 보더라도 흑인인 쿠바 구딩 주니어는 전함에서 멸시받는 주방일을 하면서, 백인 병사들의 존중을 끌어내기 위해 권투를 하는 것으로 나오지요.  한국 전쟁 때만 하더라도 미군은 백인 부대 속에 흑인을 따로 집어 넣지 않았고,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아예 유색 인종에게는 전투 임무를 주지 않았습니다.  열등한 유색 인종을 믿을 수 없다는 의미도 있고 또 흑인들에게 무장 훈련을 시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속셈도 있었지요.




(Beetle Bailey라고, 미군 신문인 Stars & Stripes에 연재되던 군대 코미디 만화입니다.  지금도 연재되지는 않겠지요.  보시다시피 베일리 이병은 주로 주방에서 감자 껍질 벗기는 벌을 자주 받습니다.)




이렇게 천대 받는 취사병은 그다지 오랜 역사를 가진 병과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불과 제1차 세계대전 초창기만 하더라도 취사병이라는 병과가 없었다고 합니다.  군대에서의 모든 식사는 그냥 중대 단위로 알아서들 해먹는 것이 상식이었고, 군 지휘부에서는 오직 식재료와 취사도구의 배급만 책임졌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독립 전쟁 때나 나폴레옹 전쟁 때나,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도 군 병력에 대한 식량 보급은 항상 다음과 같이 쇠고기 몇 파운드, 밀가루 몇 파운드 등 재료에 대해서만 기록될 뿐, 점심은 빵과 로스트 비프, 저녁은 파스타와 치킨 등 요리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래는 1776년 미국 독립 전쟁 중에 펜실바니아 의회에서 병력을 동원하면서 그 병력들에게 지급할 식량 목록을 규정한 내용입니다.  원래 당시에도 미국이 유럽보다 식량 형편이 좋은 것으로 유명했습니다만, 현대적 기준으로 보기에도 무척 푸짐해 보입니다.


1인당 정량


. 하루 쇠고기 1파운드, 또는 돼지고기 3/4파운드, 또는 염장 생선 1파운드

. 하루 빵 1파운드 또는 밀가루 1파운드

. 일주일에 완두 또는 콩 3파인트, 또는 그에 상응하는 채소 1부셸 당 1달러

. 하루 우유 1파인트, 또는 그에 상응하는 1/72 달러

. 일주일에 쌀 1/2파인트, 또는 옥수수 가루 1파인트,

. 하루 스프루스 비어 (spruce beer, 가문비나무의 수액을 발효시켜 만든 술) 1 쿼트 또는 사과주 1 쿼트


(다른 주의 메뉴를 보면 몰트 비어가 들어가기도 하고 버터가 1주일에 6온스씩 들어가기도 합니다.)




(사진은 영국 해군의 요일별 배식 품목입니다.  맥주를 매일 4.5리터나 !!)





이런 배급과 요리 등은 중대 혹은 대대 단위로 이루어졌고, 그 안에서 병사들이 순번을 정해 요리를 했습니다.  이렇게 순번을 정해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귀찮은 의무'였으므로, 나중에 이 일만 전문적으로 하는 취사병이라는 병과가 생겼을 때 병사들이 취사병을 어떤 시선으로 봤을지는 뻔합니다.  아마도 그런 역사 때문에 미군을 포함한 유럽 문화권의 군대에서는 취사병을 불명예스러운 병과로 취급했나 봅니다.


이렇게 배급된 날재료로 병사들은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었을까요 ?  그야 말로 제각각이었습니다.  병사들에게 좋은 오븐이나 화력 좋은 가스 레인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들은 주로 남비에 끓여 먹는 요리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븐 없이 병영에서 빵을 구워 먹을 수는 없었으므로, 대대에서 일괄적으로 구워서 배급되는 빵이 없다면 이들은 배급된 밀가루를 이용해 밀가루 죽을 쑤어 먹거나 요령껏 마련한 돌판이나 철판에서 얇은 전병을 구워 먹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족적이지만 아마추어적인 배식 제도는 로마 군단 시절부터 무려 제1차 세계대전 초기까지 아무 문제 없이 잘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이런 배식 제도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 도전이란 바로 기나긴 참호전이었습니다.  1914년 마른 (Marne) 강 전투 이후 기관총과 대포를 피해 프랑스군과 독일군 양측이 깊고 체계적인 참호를 파고 참호전에 들어가게 되자, 당장 병사들에게 배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양측 수뇌부 모두에게 있어, 전투란 보병의 전열이 전진하고 기병이 그 틈새를 파고들어 돌격하는 그런 장엄한 것이었지, 이렇게 수많은 병사들이 물구덩이나 다름 없는 참호 속에서 두더쥐처럼 웅크리고 수주 동안을 버티는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후방으로 물러나 여유있게 넓은 공간에서 장작을 패고 물을 끓여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상하수도 시설도 없고 좁은데다 위험하기까지 한 곳에서 밥까지 해먹으라는 것은 무리지요.)




고대 로마군 시절부터 병사들을 따라다녔던 지겨운 건빵(biscuit, hardtack)은 참호전에서도 유용한 지겨운 식량이었습니다.  다행히 이때 즈음에는 나폴레옹 시대에 첫선을 보인 통조림이 보편적으로 유통되던 시절이라 참호 속에서 차가운 통조림을 뜯어먹도록 하는 방안도 있었으나, 아무래도 통조림을 그렇게 대량으로 생산 공급하는 것도 어려웠고, 또 먹을 것이 곧 사기로 이어지는 암울한 전장에서 맛대가리 없는 차가운 통조림만으로 하루 세끼를 때우도록 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의 대표적 군용 식량으로 알려진 Maconochie(머카너키)는 묽은 고기 수프에 감자, 순무와 당근이 둥둥 떠있는 통조림 스튜였는데,  이걸 먹어본 병사들은 이런 소감을 남겼습니다.


"따뜻할 때 먹으면  Maconochie도 먹을만 하지만, 차가운 채로 먹으면 man-killer다."




(숙명의 머카너키 깡통입니다.)




결국 양측 수뇌부는 일반 전투병들이 순번제로 자신들이 먹을 음식을 스스로 조리하는 관례를 버리고, 중대 혹은 대대 단위로 조리만 담당하는 병사들을 따로 지정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적의 포탄이 날아오지 않는 후방에서 스튜 같은 음식을 만들어 전방 참호 속으로 보내주기로 한 것입니다.  가령 영국군 같은 경우 대대마다 엄청난 크기의 솥 2개씩이 지급되었고, 여기서 수백명 분량의 음식이 끓여져 전방 참호로 보내졌습니다. 


문제는 솥 2개에서 모든 음식을 하다보니 홍차에서도 말고기 맛이 난다는 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음식은 뜨거울 때 먹어야 하는데, 이는 춥고 축축한 벨기에의 참호 속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데 포탄이 닿지 않는 저 먼 후방에서 끓여서 양동이나 심지어 석유통 속에 담아서 가져오는 음식은 차갑게 식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서부 전선을 배경으로 한 레마르크(Remarque)의 소설 '서부 전선 이상없다' 초반부에 보면, 주인공 파울이 소속된 중대 취사병은 그렇지 않지만 옆 중대의 취사병은 위험을 무릅쓰고 참호 가까운 곳에까지 접근하여 음식을 만들기 때문에 병사들이 더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잠깐 나오기도 하지요.



(제가 읽은 어떤 소설에서도 이 '서부전선 이상없다'처럼 군대밥과 취사병에 대해 생생하고도 감칠맛 나는 묘사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식은 음식에 대한 해결책은 간단했습니다.  참호 속에 작은 난로를 배급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이런 난로는 공식 배급 물품에는 포함되지 않았고, 병사들 개개인이 몇명씩 돈을 모아 구매하여 참호 속에 들어갈 때 가지고 들어가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난로를 사가지고 참호에 들어간 병사들은 왜 군 당국이 중대 단위로 난로를 배급하지 않았는지 곧 깨닫게 됩니다.  연료가 충분치 않았던 것입니다. 


유럽 서부 전선이 사막도 아닌데 장작으로 쓸 나무가 없다는 것은 이해하시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숲이 있다고 해서 거기서 연료를 얻는 것이 그렇게까지 쉽지만은 않습니다.  작은 난로에서 물을 끓일 정도로 충분한 화력을 내기 위해서는 잘게 쪼개진, 잘 마른 장작이 필요한데, 이건 수중에 작은 손도끼가 있고 옆에 숲이 있다고 해서 당장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충분히 마르지 않은 생나무를 연료로 썼다가는 연기가 심하게 나서 독일군의 포격 목표가 되기 딱 좋았습니다. 


전에 인용했던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의 근위대로 활약했던 '척탄병 쿠아녜 (Coignet)'의 회고록을 보면,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직후 장작을 구하러 산 반대편에 있는 마을로 밤을 새서 걸어가는 장면도 나오고, 또 1807년 폴란드에서 장작을 못 구해 적이 버리고 간 대포의 포가를 끌고 와서 불을 피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체코나 폴란드에 숲이 없어서 장작을 못 구했던 것이 아닙니다.  아마 도끼도 없는 상황에서는, 주변이 숲으로 둘러 쌓인 곳이라고 해도 당장 불을 피울 장작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쿠웨이트 현지라고 해서 땅에 구멍을 파면 당장 자동차에 넣은 가솔린이 펑펑 나오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군 당국도 병사들의 고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고체 알콜 연료와 빈 깡통 형식으로 구성된 간단한 휴대용 풍로를 만들어 보급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토미의 조리기 (Tommy's Cooker)라는 물건이었습니다.  이는 연기가 나지 않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콜라 1캔 정도의 물을 끓이는데 2시간이 걸릴 정도로 비효율적이라서 병사들로부터 욕을 먹기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겠지요.





(토미 쿠커로 참호에서 요란한 연기를 내지 않고 안전하게 차를 끓이는 영국군 병사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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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heK2017 2018.08.09 08: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야. 차까지 끓여 먹는 여유라.
    좀 부럽네요. ^ㅇ^*

  2. 헤비웨폰가이 2018.08.09 14: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머카너키 깡통 안에 뭐가 들어있나 구글링해봤더니 그냥 고기 스튜네요?

  3. 유애경 2018.08.09 17: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에글 맥주와 전쟁에서 본 전투기 연료탱크에 담아 나르는 맥주나 이번글의 석유통에 담아 나르는 음식이나,당시엔 참 절박한 상황이었을텐데도 문장으로만 읽고 상상을 하니 죄송한 얘기지만 웃음이...

    • 최홍락 2018.08.09 2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게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파일럿들이 동료 파일럿이
      격추되어 사망할 경우 그 동료 비행기가 사용하던 드롭탱크(기체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외부에 장착된 연료 통)에 냄비요리를 해먹으며 동료의 죽음을 애도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걸 도무라이 나베라고 했습니다. 일본어로 とむらい(弔い)가 애도의 뜻이 있지요. 전쟁사에서 가장 많이 통하는 격언 중 하나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 간다.'인데 확실히 먹는것도 그런거 같습니다.

  4. 헝글 2018.08.09 2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자도 군대가자

    • 유애경 2018.08.10 0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본문 내용은 여자도 군대가야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본문 잘 읽으셨나요?

  5. 이동뎅 2018.08.09 21: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좋은 포스트 잘 읽고 있습니다.
    음식 이야기 좀 더 써주시면..^^
    유래없이 무더운 요즘 건강하세요.

  6. reinhardt100 2018.08.09 2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외로 취사병과가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중세 혹은 근대의 군대에는 다수의 비전투요원들이 항상 따라다녔다는 것 때문입니다. 흔히, 동양에서는 병농일치제가 기본적으로 작동한 시대가 길었기 때문에 비전투요원이 항상 따라다닌다는 개념 자체가 그리 익숙치 않을 수도 있지만 서양에서는 달랐습니다. 로마제국 아니 공화국 후반기부터 이미 제한적 지원병제가 정착되기 시작하면서 동방제국에서의 테마제도 같은 예외가 있지만 이조차도 몇백년만에 프로니아제도로 바뀌는 등 상당기간 내내 용병이 주력인 시대가 됩니다. 흔히, 절대왕정의 상징이라단 상비군을 국민개병제로 운용한 국가가 18세기에 봐도 프로이센을 제외하고 별로 많지 않았고, 프로이센조차도 7년 전쟁 당시에는 병력의 7할을 용병으로 운용해야 했습니다. 안 그랬다가는 당장 굶어죽기 싶상이었으니까요.

    서양 군대에서 비전투요원들의 구성은 다양했죠. 장교단 혹은 부사관단의 하인이나 그 가족들부터 해서 비전투용품을 공급해주는 행상들과 그 수하 하인들, 심지어는 군대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여성들까지 꽤나 많았습니다. 이유는? 군대가 뿌리는 돈이 꽤나 짭짤했으니까요. 일례로 백년전쟁 내내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경제는 '흑사병'이라는 치명타를 입었는데도 오히려 꽤나 경제성장율 자체는 건실했는데 이유가 전국토가 전장화되었다고 하지만 잉글랜드군의 약탈행렬과 이를 추격하는 프랑스군의 이동이 워낙 빈발해서 오히려 유통망이 급성장하면서 흑사병의 피해를 빠르게 복구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좀 각설이 길었는데, 전투식량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시점은 나폴레옹전쟁시기부터입니다. 니콜라 아페르가 개발한 병조림이 등장하면서 당장은 대량사용이 어려웠지만 꾸준히 개량되었으니까요. 의외로 간과되는 사실입니다만, 러일전쟁이 전투식량의 페러다임을 확 바꾼 전쟁이긴 합니다. 러시아군이나 일본군 모두 당대로써는 유래가 없는 긴 보급거리를 두고 전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인데 당시 양측 관전무관단 모두 전투식량을 어떻게 해결하는지에 따라서 향후 전쟁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는 것을 본국에 보고했습니다. 보고 당시에는 무시되었지만 막상 1차 세계대전 터지니까 잊어버렸던 보고서 꺼내서 나시카님께서 말씀하신 마카너키 통조림 같은 것들 만드느라고 바빴죠.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은 빈약한 공업력 때문에 전투용품과 달리 식량 같은 것은 북만주에서 자체 해결하는 방식이었지만 일본군의 경우에는 야마토니 쇠고기 통조림 같은 통조림을 러시아군보다는 비교적 적극적으로 활용하긴 합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통조림이 전투식량으로써 대거 활용되었는데, 특히 부자군대인 미군은 참전 후 참호에 비가 차니까 아예 먹고 남은 통조림을 바닥에 깔아서 비가 새도 발이 안 젖게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많이 썼죠. 의외로 공업대국이던 독일은 통조림을 많이 활용하지 못하는데 이유는 통조림 만들 설비가 없어서가 아니라 통조림에 들어갈 재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괜히 1916년 당시 순무의 계절이 나온게 아닐 정도로 식량사정이 정말 다급했으니까요.

  7. 하모니 2018.08.10 0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량을 현지조달 하지 않고 전부 보급에 의지하는 작전능력을 최초로 갖춘게 2차대전의 미군이었음

  8. 소화낭자 2018.08.10 14: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엔지니어 분이, 이렇듯 훌륭한 글솜씨와 탁월한 식견, 박학다식 하기까지,

    존경하고 있습니다.

  9. 사모작(思慕鵲) 2018.08.10 18: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75년도에 제가 중학생때 보이스카웃 캠핑을 갔을때 고체연료로 밥을 해 먹던 기억이 납니다.
    밥이 꽤 잘 되었던 걸로 기억이 나는데, 2차 대전 때 보다는 화력이 많이 좋아졌었나 봅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

  10. police 2018.08.10 21: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olish up! 이지요, 갑자기 왠 경찰

  11. 501 2018.08.10 2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90년 11월 카투사 평시인가 기준
    CP L@@@에 키투사 취사병 TO가 있었고
    그게 마지막 COOK입니다

    제가 듣기론 87년 이후론 배치는 없었구요

    그나저나
    Police call 을 가서
    휴지 줍던 기억은 나네요

  12. 2/28일 입대 2018.08.11 2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먹는 얘기를 읽어서 문득 드는 생각인데, 사치품이었던 담배가 어떤 경로로 일반 사병들한테까지 보급이 되게 된 건가요?

    콰니히그라쯔 전투에서 몰트케가 신선한 담배를 골라서 피는 것을 보고 비스마르크가 안심했다는 야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요, '신선하지 않은' 담배가 있을 정도라면 이미 그때정도 되면 담배의 품질이나 종류가 다양했을까요? 마지막 사진에 병사가 담배를 물고 있는 것을 보니 급 궁금해지네요ㅎㅎ
    (그나저나 갑자기 담배가 다시 땡기는 무서운 느낌이....)

  13. 유애경 2018.08.14 0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부전선 이상없다.'라는 책을 고등학교 일학년 때였나, 읽은적이 있습니다. 물론 열일곱살짜리 교교생이 이해할만한 내용은 아니었는데,지금까지도 기억나는 구절(장면?)이 두개가 있는데요.

    주인공이 방금전까지도 친하게 얘기를 나누던 고향친구?전우?가 어디선가 날아온 저격수의 총탄에 맞아 죽었는데 본인은 그 현실을 이해하기 힘들어 주위를 돌아보면서 -하늘이며 숲이며...-묘사한 장면,
    내 친구가 죽었는데 -사람이 죽었는데-그어디를 둘러봐도 변한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사람이 하나 죽었을뿐이다 .

    또하나는,고향에서 같이 입대했다가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 돌아간 상황에서 죽은 친구의 어머니한테 '내아들은 죽었는데 왜 너희들은 살아있지?라는 자조적인 질문(질책)을 받는 장면...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생 이었던 그들을 '조국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자진입대 하게 선동하던 교사가 그자신도 징집당해 결국은 제자한테 갈굼 당하던...여기서는 솔직히 꼬시다라는 느낌 이었습니다.

    어찌됐던 전쟁이란건 이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줬으면 싶네요!

1806년 11월,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다부를 돕지 않았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욕을 먹어야 했던 베르나도트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시 상황이었고, 그야말로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도망치던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기 위해 베르나도트를 포함한 프랑스군은 승리를 만끽할 여유도 없이 강행군을 해야 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군단은 뮈라의 예비 기병대 및 술트의 군단과 함께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장군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고 있었지요.  


프랑스군의 맹추격에 퇴로를 끊긴 블뤼허는 11월 5일, 과거 한자 동맹의 주요 항구 도시인 뤼벡(Lübeck)에 입성했습니다.  당시 뤼벡은 프로이센의 영토가 아닌 중립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프로이센의 패잔군 약 1만7천이 성 앞에 나타나자 입성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블뤼허는 막무가내로 성문을 열고 입성했습니다.  중립이고 나발이고 당장 갈 곳이 없었던 것이지요.  블뤼허는 절대 이 도시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이지는 않겠다는 약속을 하며 도시 의회를 달랬습니다.  이는 사실 말이 안 되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도시에서 프로이센군이 순순히 항복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바닷가에 몰린 프로이센군이 도망칠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블뤼허가 그런 약속을 한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뤼벡 시민들에게서 병사들을 먹일 대량의 술과 음식, 말 사료와 함께 병사들의 밀린 급료를 지불하기 위한 거액의 현금을 순순히 받아내려면 뭔가 약속을 해야 했던 것이지요.  아니나다를까, 당장 다음날 새벽 프랑스군이 뤼벡 앞에 나타나자 블뤼허는 이 도시의 성벽에 의지하여 결사 항전을 선언했습니다.  




(오늘날의 뤼벡시 전경입니다.  덴마크 국경 인근에 있습니다.)



(당시 뤼벡 시의 지도입니다.  강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공격하기가 용이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경악하는 사람들은 뤼벡 시민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뤼벡 시내에는 1천8백의 스웨덴군도 있었던 것입니다.  제4차 대불동맹전쟁에서 전혀 존재감없는 동맹국이었던 스웨덴군은 당시 프로이센군과 함께 하노버 지방의 탈환을 위해 발트해 연안에 와 있었는데, 프로이센이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참패를 당하자 허겁지겁 스웨덴 본국으로 후퇴하던 중이었습니다.  원래 이들은 배편을 구해 스웨덴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10월 31일 중립 도시 뤼벡으로 들어왔던 것인데, 바람 방향이 맞지 않아 출항을 못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생각지도 않게 프로이센군과 프랑스군이 중립을 무시하고 이 도시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겠다고 하니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


뤼벡은 트라베(Trave)라는 강의 만곡부에 위치한 도시였고, 비록 낡았지만 과거에는 꽤 튼튼했던 성벽으로 보호된 도시라서 잘 하면 프랑스군의 공격으로부터 적어도 며칠, 어쩌면 몇 주 정도 버틸 수 있다고 블뤼허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침 6시부터 시작된 실제 전투의 결과는 그 기대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튼튼하다고 믿었던 북문이 베르나도트의 강력한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오후 1시경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전투가 장기화될 것이라고 믿고 사령부인 시내 여관에 머물고 있던 블뤼허는 갑자기 프랑스군이 시내까지 들이닥치자 깜짝 놀라 아들과 함께 간신히 몸을 빼 탈출했으나, 그와 함께 있던 샤른호스트(Gerhard von Scharnhorst) 등 참모진은 고스란히 프랑스군의 포로 신세가 되어야 할 정도로 베르나도트의 공격은 훌륭했습니다.  이 곳에서 대략 병력의 절반 정도만 건져서 도망쳤던 블뤼허도 갈 곳은 없었습니다.  결국 다음날 자존심 강한 블뤼허는 체면을 위해 "빵도 탄약도 다 떨어졌기 때문에 항복한다" 라는 문구를 항복 문서에 집어넣는 것으로 만족하고 베르나도트와 뮈라, 술트에게 항복해야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북해의 괴물'로 재탄생하시게 되는 샤른호스트 장군입니다.  평민 출신으로서 승진과도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나, 나폴레옹에게 탈탈 털린 프로이센이 정신을 차리고 개혁을 하면서 빛을 보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때 포로가 되어 고생한 것도 나름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고 하면 좀 무리수겠지요.)



(뤼벡 시장으로 사용되던 광장에서 벌어진 혈투입니다.  뤼벡 시민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을 것입니다.)




블뤼허는 그렇게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세우고 항복하면 끝이었겠지만, 그의 고집 때문에 정작 불벼락을 맞아야 했던 것은 중립이었던 뤼벡 시민들이었습니다.  당시 전쟁의 불문률에 따르면 항복한 도시에 대해서는 약탈이 일체 허가되지 않았지만 공성전 끝에 성문을 깨뜨리고 탈취한 도시는 적어도 하루 정도는 병사들이 마음껏 약탈할 수 있었습니다.  뤼벡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벌어진 약탈과 강간, 살해 사태의 직접적인 책임은 물론 프랑스군에게 있었지만, 블뤼허도 적어도 일부 책임은 져야 했습니다.  베르나도트를 비롯한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뤼벡이 중립 도시이며, 프랑스군에게 저항한 것은 프로이센군일 뿐 뤼벡 시민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름대로는 미쳐 날뛰는 병사들을 제지하기 위해 노력은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중의 일이긴 하지만 맹장 우디노(Oudinot)도 그렇게 약탈에 광분한 병사들을 제지하다가 병사들에게 살해당할 뻔 한 일이 있었을 정도로, 그런 병사들을 말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장교들도 그냥 적당히 말리는 척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름 신사인 척 하려 노력했던 베르나도트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베르나도트에게 색다른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포로로 잡힌 적군 중에 프로이센군 외에 스웨덴군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웨덴군 1천8백은 원치 않았던 전투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는지 거의 전부가 그대로 항복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들 말고도 프로이센군도 약 4~5천 정도가 포로로 잡혔는데, 이들은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 포로들을 마치 선심쓰는 것처럼 스페인 국왕에게 보내며 '농삿일에 쓰시든 건설 현장에 쓰시든 마음대로 하시라'며 마치 노예처럼 취급할 정도였으니까요.  베르나도트는 그런 양심에 찔리는 살육의 현장에서 만난 이 운 나쁜 외국 군인들을 프로이센군처럼 모질게 대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들을 포로가 아니라 마치 조난 당한 선원들처럼 대해주었고, 특히 그 총지휘관인 뫼르너(Carl Carlsson Mörner) 장군을 비롯한 장교들에게는 상당히 친절하게 마치 손님처럼 대해주었습니다.  오쥬로(Augereau)와 란(Jean Lannes)의 부관으로 일했고 나중에 매우 뛰어난 회고록을 남긴 마르보(Jean Baptiste Antoine Marcellin de Marbot) 장군도 그 회고록에서 '베르나도트는 이 이방인들에게 자신이 가정 교육을 잘 받은 사람으로 보이도록 특별히 애를 썼다'라고 다소 비꼬는 투로 기술한 바 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뤼벡 전투의 상황이 그렇게 다소 양심에 찔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지 이 처음 보는 스웨덴인들, 그것도 꾀죄죄한 포로들로부터 나중에 뭔가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베르나도트는 평생 두 번 다시 이 스웨덴 사람들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처참한 전쟁 범죄가 벌어지던 뤼벡에서 이 별 뜻 없이 행한 작은 선의가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되돌아옵니다.



-- To be continured



** 갑자기 여기서 마태복음 25장 35절 ~ 40절 부분이 생각나네요.  우리 모두 곤경에 처한 이웃에게 도움을 베풉시다.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L%C3%BCbeck

https://en.wikipedia.org/wiki/Carl_Carlsson_M%C3%B6rner

https://en.wikipedia.org/wiki/Gebhard_Leberecht_von_Bl%C3%BCcher

http://kcm.co.kr/bible/kor/Mat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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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애경 2018.08.06 0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태복음의 저 구절이야말로 예수님이 설파하신 사랑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전쟁에 죄없이 휘말려 고통당한 뤼벡시민들도 참 안됐네요!
    전쟁으로 피해보는건 항상 엄한 사람들뿐...

    잘보고 갑니다.

  2. 잡지식 2018.08.06 0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심없는 선행은 이자가 큰 법이외다'
    -파우스트-

  3. TheK2017 2018.08.06 08: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오늘 그 계기가 되는 암시가 열린
    느낌인데 맞겠죠. ^ㅇ^*

  4. Park Sang yeoul 2018.08.06 2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덕분에 잘 보고있습니다!

  5. reinhardt100 2018.08.06 2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뤼허의 총참모장이었던 샤른호르스트에 대해서 흔히들 '아버지가 빈농인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출신으로써 독일영방 소국에서 사병부터 진급하여 장성계급까지 진급한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이건 붉은 프로이센군을 추구했던 동독 국가인민군과 동독정부의 선전 때문입니다. 사실, 샤른호르스트의 아버지는 '융커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소지주급의 부농 출신에다 프로이센군의 고참 하사관으로써 장기 복무까지 했던 지역 유지급이었던 사람'입니다. 왜? 동독군이 붉은 프로이센군을 추구했냐고요? 동독의 영역 상당수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핵심 지역이었던데다가 무엇보다도 서독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통성만을 계승하며 독일제국의 정통성은 모두 포기한다.'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련의 괴뢰 같다는 이미지가 있던 동독으로써는 프로이센에 대한 향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이러다보니 동독은 군의 사상적 본류는 에스파냐 내전 당시 공화국 측으로 참전했던 '에른스트 텔만 대대'로 하였지만 막상 운용의 본류는 프로이센군으로 채택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샤른호르스트가 하노버 같은 독일영방 소국을 돌아다니면서 복무하다가 프로이센군에 지원할 때 이력서 말미가 꽤나 당시에 센세이셔널 했습니다. 일개 중령밖에 안 된 사람이 내건 조건이 워낙 파격적이었으니까요. '본인의 지원서를 접수 후 채택해주실 경우, 귀족작위를 수여해 줄 것과 군의 총참모장 자리를 약속해주시기 바랍니다'였으니까요. 그런데 당시 프로이센 국왕은 오히려 이를 다 받아주었죠. 샤른호르스트가 나름 학자 군인으로써 꽤나 날렸거든요.

    샤른호르스트가 의외로 간과되는게 프리드리히 2세 시절, 음지의 총참모장으로써 활약했던 안할트의 뒤를 이어 프로이센 참모부를 재건하였다는 것과 프로이센 상층부 관료들과 왕족들을 윽박질러 장교단의 개방화 및 농노 해방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겁니다. 전자야 워낙 유명해서 넘어가더라도 후자는 꽤나 중요합니다. 프리드리히 2세가 희대의 전술가로써 대승을 몇차례나 거두었지만 하나 큰 실수를 했던 게 장교단을 귀족 출신들로만 채우게 하는 일을 저질렀다는 겁니다. 이 때문에 프로이센 장교단은 '유능하지만 계급 고정성 때문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평가를 이미 7년 전쟁 이전부터 들을 정도로 경직성이 심각했었는데 장교단 개방을 통해 일거에 해소해 버린 겁니다. 흔히, 1807년 농노해방령이 관료계급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샤른호르스트가 꽤나 이를 강경하게 주장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병력 부족 해소 때문입니다. 인구 절반이 날아가 버린 상황에서 국민 개병제를 대거 확장하지 않으면 병력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으니까요.

  6. 2018.08.07 0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그늘버섯꽃 2018.08.07 09: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지식들은 다 어디서...와~
    감탄하고 갑니다

  8. 투팍아마르 2018.08.07 16: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유럽계 백인들은 정작 성경에 나오는 저 좋은 구절을 행할 흉내조차 내지는 않았다는것이 에러죠...^^

    • ㄴㄴ 2018.08.23 2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건 너무 인종주의에 치우친 말처럼 들릴 수 있네요. 동서양사 모두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행태는 결국 똑같습니다. 차이는 그때그때 얼만큼의 힘을 갖고 있었냐의 것 뿐이었죠.

  9. 카를대공 2018.08.07 2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렇게 베르나도트가 왕이 되는 밑밥이 깔리는군요.

    그런데 나폴레옹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프로이센을 개무시 했을까요?
    이전에도 그렇고 이후에도 멸시에 가까운 감정을 일관되게 보여주던데 이유가 있나요?

  10. 석공 2018.08.07 2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은 본문보다 마지막 성경구절이 더 마음에 와 닿네요...^^

1806년, 상황 판단 능력이 떨어지던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가 겁도 없이 나폴레옹에게 도전한 제4차 대불동맹전쟁에서 프로이센은 건국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 했습니다.  특히 10월 14일은 아마 프로이센 역사상 최악의 날이었을 것입니다.  프로이센 전체 야전군이라고 할 수 있는 12만 대군이 예나와 아우어슈타트에서 하루 아침에 산산조각 났거든요.  프로이센에게는 특히 아우어슈테트 전투가 뼈 아픈 상처가 되었습니다.  6만의 프로이센 대군이 불과 2만7천 밖에 안 되는 다부(Louis Nicolas Davout) 원수의 프랑스군 제3 군단에게 박살이 났으니까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박살낸 나폴레옹이 베를린에 입성할 때, 놀랍게도 베를린 시민들은 이 정복자에게 환호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프로이센의 귀족들은 물론, 프랑스군조차도 놀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우어슈테트 전투를 언짢게 생각한 것은 꼭 프로이센 사람들만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날 예나에서 호헨로헤 대공이 지휘한 프로이센군을 격파한 나폴레옹도 이 전투가 내심 불쾌했습니다.  먼저, 나폴레옹은 영광을 부하들과 나눠 갖는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필 같은 날, 자신의 심복인 다부가 더 적은 병력으로 더 빛나는 승리를 거둔 것이 기쁘면서도 그리 상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다부가 1대2의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야 했다는 자체가 자신의 큰 판단 미스를 그대로 드러내보이는 일이다보니, 나폴레옹은 체면이 서지가 않았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의 스타일은 결코 여포처럼 일당백의 용기를 발휘하여 더 적은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때려부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전체 병력 수는 적이 더 많다고 하더라도, 면밀한 정보 수집과 냉철한 상황 판단, 그리고 현란한 풋워크를 통해 정작 실제 전투에 참여하는 병력은 언제나 프랑스군이 조금 더 많도록 만드는 것이 나폴레옹의 장기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그가 지휘하는 전투에서 1대2의 수적 열세를 안고 프랑스군이 전투에 돌입해야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명성에 흠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나 전투를 완승으로 마무리한 그 다음날 새벽까지도, 자신이 호헨로헤 대공의 지원군이 아니라 프로이센군 주력 전체와 맞붙어 싸워이긴 줄 알고 우쭐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아침 다부로부터 온 전령이 빌헬름 3세 본인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 6만을 다부의 제3 군단 혼자서 무찔렀다는 아우어슈테트 전투의 승전보를 가져오자, 나폴레옹은 "자네 원수께서 헛것을 보신 모양"이라고 비웃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곧 사실이 드러나자, 나폴레옹의 입장은 몹시까지는 아니어도 살짝 난처해졌습니다.  부하들에게 체면이 서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곧 그의 실책을 뒤집어 씌울 희생양을 찾아냅니다.  바로 제1 군단장 베르나도트였습니다.  원래 전투 직전, 다부와 베르나도트는 함께 나움부르크(Naumburg) 근처까지 진격해있었습니다.  그때 나폴레옹에게 호헨로헤의 프로이센군이 포착되자, 이를 프로이센군 본대라고 착각했던 나폴레옹은 다부와 베르나도트에게 각각 별도의 명령서를 내립니다.  다부에게 호헨로헤의 퇴로를 끊기 위해 예나의 북서쪽인 아폴다(Apolda)로 내려와 포위망을 틀어막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베르나도트에게 내린 명령이 약간 애매모호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다부와 함께 나움부르크에 있다면 다부와 함께 아폴다로 가되, 만약 도른부르크에 있다면 뮈라와 합류하여 예나 방향으로 내려오라.  내가 선호하는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미 도른부르크에 도달한 상태라서, 예나에서 곧 벌어질 란의 전투를 지원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었지요.  이미 도른부르크에 주둔하고 있던 베르나도트는 성실히 그 명령에 따라 10월 14일 아침에 예나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아우어슈테트 방향에서 맹렬한 포격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베르나도트를 포함한 제1 군단 전체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이 적과 조우하여 명렬한 전투에 들어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아마 베르나도트는 약간 고민했을 것입니다.  무선통신이 없던 당시 군대에서는 현장 지휘관의 융통성이 무척 중시되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베르나도트는 전군에게 '뒤로 돌아' 명령을 내린 뒤 포격 소리를 향해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나폴레옹으로부터 '예나로 오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 본대의 위치를 포착했고 이를 포위섬멸하겠다고 무척 흥분한 상태였습니다.  당시로서는 나폴레옹의 판단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또 베르나도트로서는 뒤에서 들리는 포성이 다부와 맞붙어 싸우느라 포성을 울리고 있는 적이 2~3만 정도 규모라서 다부 혼자서도 충분히 싸울 수 있는 상황인지 아니면 다부에게 도움이 절실한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의 판단대로 예나에 있던 적이 10만에 달하는 프로이센 본대가 맞고 따라서 프랑스군도 모든 병력을 다 끌어모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다부의 싸움을 조금 더 쉽게 해주느라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의 명령을 어기고 아우어슈테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면 프랑스군 본대를 위태롭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베르나도트의 입장이라면 어떤 판단을 내리셨겠습니까 ?  더군다나 나폴레옹이 '내가 선호하는 것... 예나의 전투를 지원해주는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인 명령서가 주머니에 들어있는 상황이었는데 말입니다.  아마 대부분은 나폴레옹의 명령대로 그냥 그대로 예나로 진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르나도트도 같은 결정을 내리고는, 등 뒤에서 들리는 맹렬한 포성을 애써 무시하고 예나로 행군을 계속 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이 결정이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  결과적으로 보면 잘못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베르나도트는 아우어슈테트 전투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고, 예나 전투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베르나도트가 결과적으로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를 말아먹을 뻔 한 것은 그가 나폴레옹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베르나도트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은 베르나도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나폴레옹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하들 앞에서 난처한 상황에 빠진 나폴레옹에게 그런 점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원래 그런 면이 다분했습니다만) 특히 황제가 된 이후로 모든 공은 자신의 몫이고, 모든 과오는 부하들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부쩍 강해졌습니다.  그는 다부의 제3 군단이 당한 봉변에 대해 베르나도트를 맹비난했고, 까딱하면 그 자리에서 베르나도트의 지휘권을 박탈할 기세였습니다만,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어쨌건 그는 최초 명령서를 보낸 이후, 곧 새 명령서를 보내서 '상황이 발생하면 그에 따라 다부를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명령서는 대육군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아마 억울해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뭐 어쩌겠습니까 ?  자신의 제1 군단 전체가 예나에서도 아우어슈테트에서도 총 한 방 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상대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었는걸요.  베르나도트가 역사 속에서 두고두고 욕을 먹지만 정작 본인은 세상 억울하게 생각할 일은 이것 하나 뿐이 아니었습니다.  3년 뒤인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재현됩니다.


1809년 도나우 강변 바그람(Wagram)에서 오스트리아 카알 대공과 맞붙은 나폴레옹은 7월 5일 밤 프랑스군의 전선을 짜면서,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을 아더클라(Arderklaa) 마을에 배치했습니다.  이 마을은 고지 위에 위치한 오스트리아군에게 가장 가까운 지점이자 ㄴ자로 꺾어진 전체 전선의 돌출부에 해당하는 전선 중앙부로서 전체 프랑스군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다음날 새벽 공격을 가해온다면 가장 치열한 공격을 받을 곳이 바로 여기였고, 또 절대 무너져서는 안 되는 곳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역시 주요 전투에서 믿을 사람은 인척이자 경험도 많고 침착한 베르나도트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였을까요 ?  그건 확실히 아니었습니다.  당시 베르나도트가 맡고 있던 제9 군단은 프랑스 병사들이 아니라 대부분 작센(Sachen) 출신의 독일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던, 2진급 부대였습니다.  이들은 7월 5일 밤에 감행되었던 야습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큰 피해를 입어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고, 그나마 그 중 가장 정예라고 할 수 있던 뒤파(Pierre-Louis Dupas) 장군의 사단은 뚝 떼어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인 외젠의 이탈리아 방면군에게 배정해놓은 상태라서 도저히 치열한 전투에 투입될 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허약한 군단을 가장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는 아더클라에 배치했다 ?  이건 좀 이상했습니다.  게다가 이 아더클라 마을 전체는 바그람 고지 위에 늘어선 오스트리아군의 중포 사정거리 내에 있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이 배치에 대해서 의혹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에 베르나도트는 이번 원정 시작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2진급 군단인 제9 군단의 지휘를 맡긴 것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그나마 원정 준비를 시작하자 나폴레옹의 심복이자 참모장인 베르티에가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습니다.  원래 원정을 준비하는데는 군수품을 사들이고 보충병을 모집하는 등 엄청난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행정 업무에서 베르티에의 장난질이 분명한 방해 공작이 집요하게 제9 군단을 괴롭히자 베르나도트는 그만 폭발하여 나폴레옹에게 이번 원정에서 빠지겠다는 사임서를 보낼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 사임서에서 '보이지 않는 세력이 제9 군단의 원정 준비를 방해하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라며, 베르티에의 이름만 안 적었을 뿐 베르티에에 대한 노골적인 고자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의 사임 요청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베르티에를 견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그람 전투 전날 밤, 이젠 누가 봐도 '오스트리아 대포알에 맞아 두동강이나 나거라'라는 식의 전선 배치를 당한 것입니다.  




(1809년 7월 5일 밤 ~ 6일 새벽 사이 나폴레옹과 그의 부하 원수들간의 회의 장면입니다.  이 장소에 베르나도트는 없었습니다.  그의 불복종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제9 군단이 몇 시간 전의 야습 작전에서 큰 피해를 입고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베르나도트는 그의 병사들을 재규합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어려운 과제는 회의에 불참한 사람에게 떨어진다더니, 그래서 그의 제9 군단이 아더클라에 배치된 것일까요 ?  설마요.)




베르나도트는 여기서 진짜 거물다운 결정을 내립니다.  아더클라 마을을 사수하라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아예 그 마을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2~3km 물러나버린 것입니다.  베르나도트로서는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지휘였습니다.  7월 5일 밤의 야습 실패로 남쪽 방향으로 뿔뿔이 흩어진 그의 제9 군단 병사들을 재집결시키기 위해서는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유리했고, 또 오스트리아군의 습격이 뻔한 상황에서 차라리 아더클라를 먼저 내준 뒤 반격을 가해 탈취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이 그의 자기 합리화였습니다.  더 최악인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 사실을 나폴레옹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나폴레옹의 의도는 두동강 난 자기의 시체를 보는 것인 모양이니, 차라리 알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그런 일탈 행위 덕분에 7월 6일 새벽 바그람 전투는 프랑스군의 대위기로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베르나도트를 비롯한 제9 군단의 작센 병사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후방으로 도주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대노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나폴레옹의 사령부 쪽으로 부하들과 함께 무질서하게 도망쳐 오는 베르나도트를 보고 분통이 터진 나폴레옹이 현장에서 그를 군단장직에서 해임했다고 합니다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베르나도트는 그의 원래 전략(?)처럼 일단 아더클라를 내준 뒤 탈환하기 위해 노력을 했고, 오히려 전투 후에 다시 한번 사임서를 내며 나폴레옹의 부당한 지휘에 대해서 항의까지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의 군단장직 사임서를 승인한 것은 전투 며칠 후였는데, 이유는 베르나도트가 뻔뻔하게도 이번 바그람 전투 승리는 그의 작센 병사들의 활약 덕분이었다고 제멋대로 발표한 성명서를 보고 나폴레옹도 폭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베르나도트와 나폴레옹의 불화는 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심해졌다가, 바그람 전투에서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더 깊은 상처를 받은 것은 베르나도트였습니다.  나폴레옹에 대한 그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가 바그람에서 쫓겨난 직후 지휘를 맡은 벨기에 전선에서 드러납니다.  바그람에서 혈투를 벌이던 오스트리아군을 돕기 위해, 영국군은 오랜만에 몸소 유럽 대륙에 상륙합니다.  장소는 벨기에였고, 영국 측에서는 이 작전을 월체른(Walcheren) 원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력부대가 바그람에 가있어서 속수무책이던 프랑스 측은 마침 실직자로 파리에 와 있던 베르나도트를 현장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2진급 부대를 이끌고 안트베르펜(Antwerpen, 영어로는 Antwerp) 방어에 나서게 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여기서 병사들에게 연설을 할 때 벨기에 해안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영국군에게 유린된 것은 나폴레옹 탓이라며 대역무도스러운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덕분에 그는 급한 불을 끈 뒤에 결국 다시 이 사령관직에서도 물러나야 했지요.  


여기서도 쫓겨난 베르나도트는 스페인 카탈루냐로 발령이 났습니다.  스페인 전선은 당시 아무 전공이나 영광을 기대할 수 없는 진흙탕이 되어 있었고, 그나마 카탈루냐는 스페인 전선 중에서도 비교적 후방으로 대표적 한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물을 먹은 베르나도트는 이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이 발령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아직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나폴레옹에게 소환되었고, 그와 별로 달갑지 않은 면담을 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도 베르나도트에 대해서는 거부감과 동시에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세상 이목도 있으니 그러지 말고 폼도 적당히 나고 지내기도 좋은 로마 총독으로 가라'라고 제안했고, 뭐 더 싸워봐야 얻을 것도 없었던 베르나도트도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는 결국 로마에 갈 수 없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로마에 가지 못한 이유는 다시 시간을 거슬러, 1806년 11월, 베르나도트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온갖 욕을 다 먹고 분루를 삼키며 내달렸던 북부 독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Jena%E2%80%93Auerstedt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L%C3%BCb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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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웃자웃어 2018.08.02 08: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차라리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집권하지 않는게 프랑스에겐 차라리 이득이였을 지도 모르겠군요.

  2. ㅇㅇ 2018.08.02 0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우한 남자...ㅠㅠ

  3. 안토 2018.08.02 1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뒤통수 칠 만한 처우였네요...
    그런데 작성자님, 장 란 원수 이야기는
    예전 블로그에 있는 5편으로 마지막인가요?

    • nasica 2018.08.05 2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베르나도트는 뒤통수 안 쳤다니깐요.

      2. 장 란이 전사하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4. pms3278 2018.08.02 1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배신할만 했네요...

  5. 루나미아 2018.08.02 14: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시 생각해보니 다부가 위험한 상황인지 알 수 없는데 황제가 '적 주력은 내 쪽에 있다'고 하면, 굳이 어기고 다부에게 갔는데 별일 아니라면 그 후폭풍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겠네요. 예니-아우어슈테트 편 읽을땐 베르나도트가 너무 몸을 사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글 보니 새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는군요.

  6. 유애경 2018.08.03 0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여러모로 '치사한'나폴레옹 이네요!
    결국 부하들이 자신을 등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건 자업자득 이라고 해야겠죠!

  7. 방랑자 2018.08.04 08: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인트헬레나에서 난 부하들에게 배신당한 게 아니라 버려진 거라고 말했던 게 정말 많이 순화한 거네요. 이러고도 막판에 가서야 배신자가 나왔으니 나폴레옹이 대단한 건지 당시, 의리가 대단했던 건지...


    추신 : 오타 하나 신고. "23년 -> 3년"

  8. reinhardt100 2018.08.04 09: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당시, 다부가 정말 대단했던건 프로이센군이 처음부터 강습으로 나왔는데도 전열이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는겁니다. 특히 포병전력에서 4배 이상의 격차를 보였는데도 말이죠.

    사실, 프로이센군이 저렇게 병력 배치를 한 이유가 두 전투 중 한 곳에서 프랑스군 일부 병력을 격파한 후, 전병력을 끌어모아 프랑스군 잔여병력을 격파한다는 거였습니다. 전열보병 시대 최대의 기동전이었던 로이텐전투를 참고한 건데, 당시 3만 6천의 병력으로 8만의 오스트리아-바이에른 연합군을 기동전으로 대파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하고
    싶었던 겁니다. 1806년은 그 때보다 사정이 훨씬 좋다보니 기동전으로 프랑스군을 격파하겠다는 거였습니다만 문제는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나 바이에른 군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1분당 80보 걷던 군대랑 120보 걷던 군대가 같을리 없었죠.

    • 카를대공 2018.08.07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부는 정말 보면 볼수록 대단한 남자네요.
      오스트리아 전역 때고 그렇고 불리한 상황에서 절대 안 지는 점은 나폴레옹 휘하 원수 중 으뜸인거 같습니다.

    • reinhardt100 2018.08.09 2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부의 경우, 나폴레옹의 26원수 중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정도로만 따지면 가장 높은 축입니다. 그러다보니 나폴레옹 역시 '가장 위험한 전선의 소방수'로써 잘 활용했던 휘하 원수이기도 했습니다.

      마세나, 다부, 슐트, 베르티에가 군사적 능력이 가장 뛰어난 편이었는데 이 중에서도 마세나와 다부가 두각을 나타낸다고 봐도 될 듯 합니다.

  9. 석공 2018.08.04 2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

  10. TheK2017 2018.08.05 07: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정말 사수 잘못 만나 고생이 많았네요.
    다음 편이 기대 됩니다.

  11. 샤르빌 2018.08.05 12: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가족들과 최측근들은 죄다 배신을 때렸는데 피 안섞인 의붓자녀나 군단장, 근위병들은 마지막까지 따랐단게 참 묘합니다..

  12. 카를대공 2018.08.07 2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나도트가 정말 거물은 거물이네요.거기서 깔끔하게 황제의 명령을 씹고 물러난다라;
    괜히 왕이 된게 아닌거 같습니다.

1798년은 베르나도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던 해였습니다.  데지레와 결혼하여 나폴레옹의 인척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운도 잘 트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군인에게 관운이 트인다는 것은 전쟁이 났다는 뜻이지요.  그 해 연말 경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과 스위스에서의 시민 혁명이 촉매가 되어 제2차 대불동맹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에 따라 11월, 그는 1개 감시군(l'armée d'observation)의 총사령관이 되어 라인강을 넘어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ürttemberg)의 필립스부르크(Philippsburg)로 진격하라는 임무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드디어 나폴레옹이나 모로, 오슈처럼 1개 군의 총사령관이 될 수 있던 이 기회는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애초에 아무 준비도 없이 시작한 전쟁이다보니 북부 이탈리아와 독일 전선에서 프랑스군은 연전연패를 이어갔기 때문에 베르나도트가 지휘할 감시군은 아예 편성조차 되지 못했고, 라인강을 넘을 기회도 없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1799년 7월, 베르나도트에게 더 큰 기회가 왔습니다.  일개 방면군 사령관보다 훨씬 더 높은 국방부 장관(ministre de la Guerre)이 된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군은 제2차 대불동맹전쟁에서 연전연패하고 있었는데, 이는 주로 형편없는 보급과 병력 충원 때문이었습니다.  제2차 대불동맹전쟁이 시작되면서 스위스 방면 감시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던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이 조사 보고한 바와 같이, 각 방면군들의 상태는 도저히 전쟁을 벌일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제1차 대불동맹전쟁 때 프랑스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의 활약 외에도 국방부 장관으로 있던 카르노(Lazare Carnot)의 뛰어난 활약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군대에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전국 교회의 종을 압류하여 녹이고 화학자들을 불러모아 질산칼륨을 제조하고 새로운 무두질 방법을 개발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여 병력과 물자를 전선으로 보냈고, 덕분에 승리의 조직자(L'Organisateur de la Victoire)라는 칭송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프랑스군이 1798년 말에는 왜 이 모양이 되었느냐고요 ?  나폴레옹과 총재들이 1798년 9월의 프릭튀도르 친위 쿠테타를 일으켜 쫓아낸 인물 중에 카르노도 있었거든요.  




(카르노입니다.  열역학에 나오는 카르노는 이 양반이 아니라 이 양반의 아들인 Sadi Carnot 입니다만, 이 양반도 당대의 저명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습니다.  이 양반은 프릭튀도르 쿠데타로 쫓겨난 바로 그 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la métaphysique du calcul infinitésimal, 즉 무한 미적분의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조차 어려운 수학책을 발표했습니다.  상황이 안 돼서 공부를 못한다는 말을 부끄럽게 만드는 아주 잔인한 양반입니다.)




어찌 보면 베르나도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은 현장에서 용맹과 지략을 발휘하는 현장 지휘관보다는 이런 행정가로서의 역할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의욕을 가지고 프랑스군 보급 및 충원을 위한 조치들을 취해 나가며 카르노의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내지도 않은 사임서가 신문에 게재되었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베르나도트는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진짜 장관직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이는 총재 정부의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ès)와 뒤코(Pierre Roger Ducos)가 꾸민 음모였는데, 궁극적으로는 여기에도 나폴레옹이 간접적으로 관여되어 있었습니다.   사실상 실패한 이집트 원정군을 내팽개치고 나폴레옹이 홀몸으로 프랑스에 귀국하자, 이미 현정권으로는 죽도 밥도 안되겠다고 생각했던 시에예스 등의 총재들은 나폴레옹을 이용하여 다시 한번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면 국방부 장관의 협조도 필요했는데, 파리 정계에서 베르나도트가 어울리는 인물들이 자코뱅파 사람들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열혈 자코뱅이 친위 쿠데타에 협조할 리가 없다'라고 판단을 내리고 베르나도트를 미리 뽑아내 버린 것이었습니다.   





(시에예스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세계사 시간에 프랑스 대혁명 관련하여 이 사람이 지은 다음의 명문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물론 사람 자체는 쓰레기에 가깝습니다만, 쓰레기가 지은 문장이라고 해도 정말 뛰어난 문장입니다.

Qu’est-ce que le Tiers-État ? Tout.   제3 계급은 무엇인가 ?  모든 것이다.

Qu’a-t-il été jusqu’à présent dans l’ordre politique ? Rien.   여태까지 정치 체계에서 그것은 어떤 것이었나 ?  아무 것도 아니었다. 

Que demande-t-il ? À y devenir quelque chose.   그것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  무언가가 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물론 시에예스 따위의 정치 협잡꾼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바지저고리가 아니었습니다.  브뤼메르 쿠데타는 그런 썩어빠진 총재 정부의 잔당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꿈꾸던 나폴레옹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는데, 나폴레옹도 쿠데타를 위해서 직접 베르나도트의 협조를 구했습니다.  그는 브뤼메르 쿠데타가 시작되던 브뤼메르 18일 (1799년 11월 9일) 아침에도 베르나도트를 불러 최소한 중립을 유지해줄 것을 정중하게 부탁했으나, 베르나도트의 답변은 '당신의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겠다... 하지만 의회가 너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난 그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라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습니다.  확실히 베르나도트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코뱅 원칙주의자일 뿐,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와 동서지간이었던 자신의 형 조제프에게 '그와 식사라도 하며 하루 종일 그를 감시해달라'고 부탁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자, 베르나도트와의 관계는 그날 아침의 답변처럼 정말 애매모호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분명히 쿠데타에 협조한 공신록에 이름을 올릴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폴레옹 본인과 혼인 관계로 얽힌 인척인데다 최소한 쿠데타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인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그의 답변처럼 애매모호한 임무를 주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일개 군의 총사령관, 즉 서부 방면군(l' armée de l'Ouest) 사령관으로 임명하되, 너무 참혹한 학살과 보복으로 점철되어 다들 꺼리는 분위기였던 방데(Vendée) 지방 반란 진압의 임무를 준 것이었지요.  그런데 베르나도트는 이 임무를 약 1년에 걸쳐 또 매우 훌륭하게 잘 수행해냈습니다.  하긴 왕당파의 깃발을 올리고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을 잔혹하게 숙청하는 것에 대해, 가슴에 '왕들에게 죽음을(Mort aux rois)'이라는 문신까지 간직한 열혈 자코뱅 베르나도트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을 것 같긴 합니다.  




(이 그림은 1793년 낭트(Nantes)가 함락된 이후 자코뱅 혁명군이 카톨릭을 신봉하는 왕당파 시민들을 물에 빠뜨려 죽이는 장면입니다.  원래는 포로로 잡힌 시민들을 구석에 몰아넣고 그냥 마구잡이 사격으로 사살했는데, 기관총이 아닌 관계로 그 사살 속도가 시원스럽지 않자 대형 보트에 시민들을 잔뜩 싣고 강 한 가운데로 가서 보트들을 통째로 침몰시켰다고 합니다.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도 가리지 않고 학살하기도 했으며, 저 그림에서 묘사된 것처럼 여성들의 옷을 벗기고 다른 남성과 함께 묶은 채 길거리에서 조리돌림을 하다가 죽이기도 하는 등, 방데에서는 그야말로 끔찍한 제노사이드(genocide)의 전쟁 범죄가 횡행했습니다.  이런 야만적 진압은 결국 반작용을 낳아 방데 지방에서는 이후로도 계속 크고 작은 반란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껄끄러운 측근으로 비교적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할 때 임명한 18명의 초대 육군 원수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엄청난 전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폴레옹의 충신도 아닌데 원수로 임명된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18명의 원수들 중에는 그런 어정쩡한 위치의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가령 뚜렷한 전공도 없이 허명만 요란한 주르당의 경우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쿠데타 때 근위대 병사들에게 두들겨 맞으며 생 끌뤼(Saint Cloud)에서 쫓겨난 의원들 중 하나일 정도로 나폴레옹과는 대립각이 있는 사람이었는데도 이 명단에 들어갔습니다.  또 오쥬로(Pierre Augereau)의 경우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침공 당시 마세나와 함께 나폴레옹의 필승 원투펀치로 활약했지만, 정치적으로 철저한 자코뱅이라서 결국 나폴레옹의 심복이 되지는 못한 사람이었는데 그도 명단에 올라갔지요.  반면 나폴레옹의 초창기부터의 심복이자 전공도 많았던 마르몽(Auguste de Marmont)은 1809년에나 원수가 됩니다.  즉, 당시 누가 원수가 되느냐는 단지 얼마나 잘 싸우고 나폴레옹과 얼마나 친하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군과 정계에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 인물인가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독재 권력을 추구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전제군주가 아니라 국민의 지지에 의해 즉위한 황제였으므로 그런 사회 각계 각층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크게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총재정부 시절 나폴레옹 밑에서 크게 활약했던 오쥬로가 정작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은 이후에는 별 활약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오쥬로의 철저한 자코뱅 성향 때문이라고도 하고 그냥 오쥬로의 그릇이 딱 거기까지일 뿐 더 뛰어난 장군들에게 밀린 결과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만 저는 오쥬로가 나폴레옹에게 물을 먹은 것은 이 그림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이 그림은 테브냉 Charles Thevenin이라는 화가가 총재정부의 위임을 받아 그린 '아르콜레 다리에서의 오쥬로'(AUGEREAU AU PONT D’ARCOLE) 라는 그림인데, 이 그림에서는 아르콜레 다리를 앞장 서서 돌파한 사람이 나폴레옹이 아니라 오쥬로로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저렇게 깃발을 들고 자살 공격대의 맨 앞에 서지 않았지요.  이 그림은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은 뒤 그로 및 베르네 등의 더 뛰어난 화가들의 그림으로 신속하게 교체되었습니다.  나폴레옹 같은 거물이 그렇게 치사했겠냐고요 ? 치사했습니다.)




(윗그림은 유명한 그로(Antoine-Jean Gros)의 '아르콜레 다리에서의 나폴레옹'이고 아래 그림은 베르네(Horace Vernet)의 같은 제목의 그림입니다.)




그렇게 나폴레옹 치하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베르나도트는 하노버(Hanover) 등 주로 독일 북부 지방에서 총독으로 근무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평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워낙 뛰어난 행정가였던데다 합리적이고 중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프랑스 제국의 압제 하에 신음하는 처지였던 하노버 지방 사람들은 큰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그의 통치에 순종하는 편이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권위도 그에 따라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또는 데지레 때문인지 그는 1805년 12월의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주로 예비대로 있다가 전투 막판에 투입되어 상대적으로 전공이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폰테 코르보 대공(1st Sovereign Prince of Ponte Corvo)이 되어 드디어 귀족의 반열에 오르는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있어 베르나도트는 여전히 껄끄러운, 상전같은 부하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껄끄러운 관계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곧 벌어집니다.  




** 다음 편은 많이들 짐작하시다시피 과거에 이미 다룬 유명 전투들 이야기가 됩니다.  제 블로그에 처음 오시는 분도 있을 것이고 또 내용 전개상 건너 뛰고 갈 수는 없어서 다루긴 다뤄야 하는데, 아무래도 과거에 썼던 글의 재탕이라고 느끼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해서, 다음 편인 제6편은 원래 재탕글을 올리는 목요일 아침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로서는 다음 편은 날로 먹으려고 했는데 잘 안 되는군요...)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D%C3%A9sir%C3%A9e_Clary

https://fr.wikipedia.org/wiki/Charles_XIV_Jean

https://en.wikipedia.org/wiki/Lazare_Carnot

https://www.napoleon.org/histoire-des-2-empires/iconographie/augereau-au-pont-darcole-15-novembre-1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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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ANNES 2018.07.30 1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글 잘읽고 갑니다~
    근데 다음편 아우슈테트 전투 재탕 하실꺼죠? 흑흑..ㅜㅜ
    무더위 조심하세요~~ㅋ

    • nasica 2018.07.30 1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억 어떻게 알았지...?) 말씀하신 대로 써놓고 보니 사실상 재탕이라 저로서는 날로 먹는 겁니다. 그렇다고 내용 흐름상 빼고 갈 수는 없으니, 대신 다음편은 원래 재탕을 올리는 목요일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 한글맨 2018.07.30 1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윽 2등

    애매모호하다는 '모호하다'로 쓰는 게 낫다는 이야기가 있네요
    아랫 글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
    '말이나 태도가 흐리터분해 분명하지 않다'는 뜻으로 쓰는 단어들로 '모호하다''애매하다''애매모호하다'가 있다.

    한자어 '모호(模糊)'와 '애매(曖昧)'는 같은 뜻이며, 우리나라에서는 '분명하지 않음'의 뜻으로 원래 '모호'만 사용하고 '애매'는 쓰지 않았다.

    우리와 달리 일본에서는 '애매'와 '애매모호'도 '모호'와 같은 뜻으로 쓰고 있다. 이것을 다시 우리가 받아들여 사용함으로써 '모호하다' 외에 '애매하다''애매모호하다'가 함께 쓰이고 있으며, 지금은 국어사전에도 모두 올라 있다. 그러나 같은 의미의 단어인데 굳이 일본식인 '애매하다''애매모호하다'를 쓸 필요가 없다. '애매모호'는 더구나 같은 뜻을 가진 단어의 중복 형태다.

    더 큰 문제는 한자어 '애매(曖昧)하다'와 별개로 순 우리말 '애매하다'가 있어 혼란스럽다는 점이다. 순 우리말로서의 '애매하다'는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아 억울하다'는 뜻이다. "애매하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다" "애매한 사람을 죽이려 들지 마라" 등에서처럼 쓰인다.
    출처 : 중앙일보, 우리말 바루기

  3. 유애경 2018.07.30 1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끊임없이 나폴레옹의 경계와 견제를 받았지만 진정한 승리자는 베르나도트 였을것 같다는...

    항상 여러가지 글 잘보고 갑니다.

  4. 찐빵 2018.07.30 18: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랑스인들도 상당히 잔인하네요.방데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했건 잊어서는 안 될 사건 같습니다.

  5. 방랑자 2018.07.30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805년 12월 이후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이라면,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의 말을 따르기만 했다가 짐승이 말도 안되는 공적을 세우게 만든 그거겠군요.

  6. reinhardt100 2018.07.30 2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데가 드디어 나오네요. 이 방데반란이 꽤나 요인이 복잡하죠.

    혁명 초기 의외로 교계는 혁명에 동조적이었습니다. 이들 역시 사회하층민들과 직접 동고동락했으니까요. 교계 재산을 국유화한 재원으로 아시냐 지폐를 발행하는 거도 교계에서 동의한 데 다 이유가 있습니다. 당장 성경에도 이웃을 살피라는데 하물며 교구의 민중들이 다들 굶주리는데 자신들의 재산으로 이를 구원하겠다는데 반대할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요. 방데 지방은 이런 일반적인 프랑스 지역과 달랐다는게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방데 지방은 다른 지방과 달리 자작농 비율이 높았고 교회 재산이라는 것도 '교회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가 공유하는 재산을 교회가 관리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걸 혁명정부가 갑자기 아시냐 만든다고 몰수하겠다고 하니 다들 눈이 돌아버릴 상황이 된 겁니다.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게 혁명전쟁 발발 후 30만 징병령이 내려진겁니다. 그것도 방데에서 가장 먼저 징병이 시작된 겁니다. 가장 후방인데 가장 먼저 징병한다고 하니 주민들이 격분한 건데 이걸 본 혁명정부는 일벌백계로 때려잡으려다보니 방데를 박살내기로 작정했고 진압이 극단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겁니다. 이 당시 방데 인구가 70만 좀 넘었는데 최소 10만 단위로 학살이 이루어졌죠.

    이 때문에 방데는 부르봉 왕정 복고를 가장 열광적으로 지지했고 나폴레옹의 제2제국 시절까지만 해도 대놓고 삼색기를 거부했고 이 때문에 중앙정부와 충돌하는게 다반사였습니다. 보불전쟁이 프랑스에 미친 가장 긍정적인 영향이 무엇이냐고요? 방데지방이 혁명 이후 처음으로 공화국을 지원하면서 어느정도 혁명을 인정했다는 겁니다. 조국 프랑스가 위기에 빠졌고 더 이상 부르봉 왕정복고도 불가능한 현실을 인정하고 공화국과 화해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겁니다. 제3공화국 정부 역시 이즈음부터는 방데에 대하여 지원을 어느 정도 늘려주어 민심을 다독였고요. 방데조차도 삼색기를 인정했으니 이제 다시는 왕정복고 따위는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자신감이 넘치게 된 거니까요. 이 시기부터 혁명기념일이 단지 파리와 혁명에 동조했던 북부 일부만의 축제가 아닌 전국민이 제3공화국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시켜주면서 국민 모두가 즐기는 진정한 국경일이 된 것도 덤입니다.

    • 2/28일 입대 2018.07.31 23: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와 저렇게 긴 내용을 이렇게 짧게 다 커버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방데 내전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봤어도 그 전개과정은 처음 보네요

    • reinhardt100 2018.08.09 2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이제서야 확인했습니다. 답글이 늦었는데 이 방데 문제는 꽤나 복잡합니다. 책으로 보시는게 더 정확할 겁니다.

  7. 투팍아마르 2018.07.30 2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날로 드시든 회쳐 드시든 상관없습니다. 자주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베르나도트 이 양반도 어지간히 꼬장꼬장한 성질인것 같습니다. 이 정도 인물이 살짝만 숙여도 나폴레옹처럼 허세 있는 타입은 입이 헤벌레해서 막 퍼줬지 싶은데 끝까지 긴장관계가 유지된걸로 봐선 한 성미 한다고 봐야겠죠? 그리고 방데지방을 지도에서 찾아보니 주변 도시가 낭트, 라로셀등이 있는데 옛날 위그노의 본거지인 동네더군요. 독립운동가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부류가 일본인보다는 오히려 한국인 앞잡이들이었던 것처럼 방데 역시 위그노의 본진에서 카톨릭으로 전향한 동네라 오히려 카톨릭에 대한 혁명정부의 억압에 더 반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8. ...... 2018.07.31 0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무원 수험 헌법, 사법시험 헌법쪽에서는 시에예스의 국민주권론과 루소의 인민주권론을 죽어라 배웁니다.
    매년 40문제 5지선다 중 최소 한두지문은 나왔거든요.

  9. 메에용 2018.08.01 06: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재밌어요

  10. ㅇㅇ 2018.08.01 18: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부 제대로 하는 사람은 정말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무슨 시련이 오든간에 알아서 하는군요

  11. TheK2017 2018.08.02 06: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네요. 다음 이야기 기대하겠습니다. ^-^0*

  12. 석공 2018.08.04 2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더위 조심 하세요.

요즘 기후 온난화의 위기를 다들 온몸으로 느끼시고 계실 겁니다.  전에 제가 조선시대 임금님보다도 요즘 서민이 더 호화로운 삶을 사는 편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미국이나 유럽 사회에서도 1950년대의 서민들에게 19세기 말의 귀족들의 생활을 하게 한다면 불편해서 못 견딜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건 특히 여름철에 그렇습니다.  전기와 냉장고, 에어컨이 정말 대단한 차이를 만들어내거든요.  이렇게 날씨가 더워지면 뭔가 찬 음료수를 찾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전기도 냉장고도 없던 나폴레옹 시대, 유럽인들은 여름철에 어떤 음료를 주로 마셨을까요 ?





Hornblower in the West Indies by C.S. Forester (배경: 1821년 자메이카) -----------------


(혼블로워 제독이 자메이카 함대 사무실 건물에 막 출근해서 비서 및 부관의 인사를 받습니다.)


"아침이구만."  (원문에서는 Good morning 대신 그냥 Morning이라고 했습니다.)

혼블로워가 다소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아직 아침 커피를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가 아니었다면 '아침'이라는 말 앞에 '좋은'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말했을 것이다.


그가 책상에 앉자 부관인 제라드가 아침 보고를 시작했고, 비서 스펜들러브가 서류 뭉치를 들고 그의 어깨 너머로 다가왔다.


(...중략...  혼블로워가 부하들에게 짜증을 부리며 보고를 받습니다.)


그는 어깨너머로 비서를 쳐다보았다.  "자넨 보고거리로 뭘 가지고 있나, 스펜들러브 ?"


스펜들러브는 서둘러 손에 든 서류를 정리했다.  혼블로워의 커피는 이제 막 어느 순간에라도 도착하기 직전이었는데, 스펜들러브는 그의 상사가 최소한 그 커피의 절반 정도를 마시기 전에는 내놓고 싶지 않은 보고거리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여기 석월 (ultimo) 31일자의 조선소 통계 보고서가 있습니다, 남작님." 스펜들러브가 말했다.


"그냥 지난달 (last month) 말일이라고 하면 안되나 ?" 혼블로워는 보고서를 받으며 땍땍거렸다.


"알겠습니다, 남작님." 스펜들러브는 커피가 빨리 도착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말했다.


"이 보고서에 뭐 특별한 내용은 ?" 혼블러워가 서류를 훑어보며 물었다.


"남작님이 특별히 신경쓰셔야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뭐하러 내게 이걸 들이미나 ?  다음은 ?"


"콜린다 호의 새 포술장(gunner)과 조선소 통목장(cooper)의 준위 임명장입니다, 남작님."


"남작님, 커피가 왔습니다." 제라드가 이때 말했는데, 그의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넘쳐 흘렀다.


"아예 안오는 것보다야 늦는 게 낫지." 혼블로워가 쏘아붙였다.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내 주변에서 법석떨지 말게. 내가 따를테니까."


스펜들러브와 제라드는 서둘러 혼블로워의 책상에 커피 쟁반을 내려놓을 공간을 만들고 있었는데, 혼블로워의 말에 스펜들러브는 커피 포트의 손잡이에서 잽싸게 손을 치웠다.


"젠장 너무 뜨겁군." 혼블로워가 한모금 마시며 말했다. "항상 너무 빌어먹게 뜨겁단 말이야."


바로 지난주부터 절차가 새로 바뀌었는데, 그에 따르면 커피는 혼블로워가 사무실에 도착하고 난 뒤에 가져오게 되어 있었다.  그전처럼 혼블로워가 사무실에 오기 전에 먼저 가져다 놓으면, 커피가 식어버려 혼블로워가 그에 대해 불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펜들러브나 제라드 모두 지금 이 상황에서 그 사실을 혼블로워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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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자메이카는 더운 곳입니다.  그런데도 주인공 혼블로워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이건 혼블로워의 개인적인 취향이라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당시 사람들에게는 차가운 음료라는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요 ?  


여기서 잠깐, 그냥 차나 커피를 차갑게 식혀서 마시면 안되었던 것일까요 ?





Sharpe's Waterloo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5년 벨기에) ----------------


(샤프 중령이 워털루 전투 며칠전, 혼자 말을 타고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정찰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도를 조심스럽게 펴고는 탄약주머니에서 몽당연필 하나를 꺼내 적 기병대를 목격한 장소에 X 표시를 했다.  사실 아직 그가 샤를롸(Charleroi)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확실치 않았으므로, 그가 표시한 위치는 대략적인 것이었다.

그는 지도를 치우고, 그의 수통 뚜껑을 열어 차가운 홍차(cold tea)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는 모자를 벗었는데, 그러자 감지 않아 떡진 그의 머리칼에 모자테 자국이 뚜렷이 남았다.  그는 얼굴을 문지르고, 하품을 한 뒤, 다시 모자를 눌러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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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십쇼.  여기서 주인공이 차가운 홍차를 마시고 있쟎습니까 ?  아시다시피 워털루 전투는 6월에 일어났으니까, 이미 저때면 어느 정도 더울 때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인 샤프도 차가운 음료를 마시는 것 같습니다...만 실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 장면에서 샤프가 마시는 차가운 홍차(cold tea)라는 단어에서, cold라는 형용사의 의미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또 제 카투사 시절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미군 식당에 가보면 배급하는 음식마다 다 이름을 친절하게 써놓았더군요.  그런데 사과가 놓인 곳을 보니, 'fresh apples'라고 씌여 있더군요.  저는 그때 속으로 '별로 신선해보이지도 않는구만 뭘 저렇게 신선한 사과라고 생색을 내서 써놓았을까' 라고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누가 vegetable과 salad의 차이를 아냐고 물으면서 알려주더군요.  기본적으로 식당에서 vegetable이라고 하면, 굽거나 삶은 것을 뜻하고, salad라고 하면 그냥 날로 먹는 것을 뜻한다고요.  그러고보니, 사과든 채소든 앞에 'fresh'라고 써놓은 것은, '신선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익히거나 드레싱을 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라는 뜻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건 샐러드가 아닙니다.  베지터블입니다.)




저 위 소설 속에서 샤프가 마시던 'cold' tea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즉 이는 '차갑게 식힌 홍차'가 아니라, 그냥 '식은 홍차'라는 뜻입니다.  이 샤프 시리즈를 읽다보면 흔히 나오는 음식이 'cold chicken'이나 'cold beef' 같은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도 일부러 차갑게 식혔다는 뜻이 아니라, 원래는 뜨거웠지만 식어버린 음식을 뜻합니다.  지금 저 소설 속의 상황을 보면 샤프는 말을 타고 최전선에 나가 정찰을 하고 있거든요.  저 상황에서 우아하게 뜨거운 차를 마실 여유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냥 뜨거운 차를 수통에 넣어왔으나, 그냥 식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일부러 차갑게 서빙하는 고기 요리나 수프도 있긴 합니다.  사진은 대표적인 스페인식 토마토 수프인 가스파초 Gazpacho인데, 차갑게 먹는 수프입니다.  스페인에 여행 갔을 때 꼭 먹어봐야지 하고 벼르다가 어느 식당에서 파는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시켰는데, 저는 윗 사진 같은 것을 기대했는데 어이없게도 아래 사진처럼 플라스틱 컵에 주더군요 !  맛은 뭐 그냥그냥 그랬습니다.)




사실 대표적인 차가운 음료가 있기는 했습니다.  바로 와인과 맥주지요.  좀더 서민적인 찬 음료로는 스몰 비어(Small Beer)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맥주는 주로 영국이나 독일 등 북부 유럽에서나 많이 마시던 술이었고, 또 와인은 그냥 더위를 식히려고 마시기에는 다소 알코올 농도가 높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와인은 가격이 좀 부담이 된다는 문제도 있었지요.




(화이트 와인은 차게 마신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더위 식히려고 마시기에는 알코올이 좀 센 편이지요 ?)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아주 좋은 음료수가 있긴 했습니다.  더운 중동지방에서는 일찍부터 셔벳을 마셨고 17~18세기 경부터 유럽에도 이 음료가 일부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셔벳(sherbet)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중세 아랍어인 sharâb 으로서, 뜻은 그냥 '마실 것(drink)'입니다.  이것이 약간 변형되어 shabât가 되면서 무알콜성 음료수를 뜻하게 되면서, 인도와 페르시아 등지로 펴져 나가면서 sharbat가 되었고, 투르크어에서는 sherbet으로 불리다가, 그 발음 그대로 영어의 sherbet이 된 것입니다.  프랑스어로는 sorbet(소르베)이라고 전해졌지요.  한마디로, 저 위 소설 속에 묘사된 것처럼, 셔벳은 중동의 음료입니다.  더운 지방에서는 뭔가 차갑고 시원한 것이 환영 받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당시 이집트나 투르크 등은 이슬람 국가로서, 알콜성 음료가 (적어도 겉으로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지요.  그래서 다른 종류의 음료, 즉 차나 커피 같은 것들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셔벳입니다.  당시 중동에서 마시던 셔벳에는 우유 등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냥 과일 쥬스 정도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설탕물에 과일즙을 넣고 꽃잎, 허브 등의 추출액으로 향을 더한 마실 것이 바로 셔벳입니다.  당연히 시원하게 만들어서 마셨지요.  




(라임 사르밧, 즉 라임 셔벳입니다.)




중동 출신의 셔벳 말고도, 유럽에서 시작된 차가운 음료가 있지요.  바로 상그리아(sangria)입니다.  역시 추운 북부 유럽이 아니라, 유럽에서는 더운 지방에 속하는 스페인이 원산지입니다.




Blue at the mizzen by Patrick O'Brian (배경: 1815년 지브랄타 영국 해군 기지) ---------


잭은 가끔씩 병사들의 경례를 받으며 조용한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비록 먼 곳에는 아직 화재가 타오르고 있었고 폭도들의 소음이라기보다는 먼 곳의 천둥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고는 있었지만)  고맙게도 이제 지브랄타에 질서가 강림한 것 같았다.  게다가 측량관 사무실의 몇 명의 문지기와 하급 서기들에 따르면 지난 3시간 동안은 상급 관리들이 아무도 건물에 나타나지 않았다니, 거의 완벽했다.  병원도 아주 질서정연한 모습이었다.  잭은 병원 바깥의 벤치에 앉아 차갑게 식힌(iced) 와인과 오렌지 쥬스, 레몬 쥬스를 섞은 음료를 빨대로 마시며 대각성 (Arcturus)이 점점 더 뚜렷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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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대로 음료를 빨아마시는 잭의 모습이 조금 생소하십니까 ?  사실 저시대의 밀짚 빨대는 그다지 낯선 물건이 아닙니다.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의 장군이던 크세노폰의 기록에도, 맥주를 밀짚 빨대로 빨아마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여기서 말하는 와인과 오렌지 쥬스, 레몬 쥬스를 섞은 찬 음료가 바로 상그리아입니다.  지금도 스페인 등지에서 매우 즐겨 마시는 알코올성 음료인 상그리아는 사실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단어인데요, 이유가 미국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음료라서 그렇습니다.  유럽에서는 17세기 이후로 꽤 인기있는 음료여서 파티, 특히 여름철 파티에서 자주 제공되었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엠마' 등에서도 클라레 펀치(Claret Cup Punch) 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클라레 펀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 음료가 주로 클라레 와인, 그러니까 보르도 (Bourdeaux)산 레드 와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인데, 사실 뭐 꼭 보르도산 와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화이트 와인으로도 만들었습니다.  물론 오렌지나 레몬 쥬스 뿐만 아니라 라즈베리나 블루베리, 사과 등의 과일을 넣기도 했고요. 




(솔까말 제인 오스틴 소설은 별로 공감도 가지 않고 재미도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위에서 보면 이 상그리아에 얼음을 넣었다(iced)고 되어 있는데요, 냉장고도 없던 당시에도 과연 여름철에 얼음을 구할 수 있었을까요 ?  사실 있었습니다.  Ice house라고 해서, 우리나라 석빙고 같은 얼음 저장고가 꽤 많았습니다.  페르시아에서는 기원전 4세기부터, 영국에서는 약 17세기부터 이런 ice house가 건설되기 시작했지요.  물론 이런 것은 상당히 많은 비용이 들었고 양도 많지 않았으므로 여름철 얼음은 상당히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조선 시대에 임금이 여름철에 대신들에게 얼음을 하사하기도 할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지요.  하지만 19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는 이런 얼음 산업이 꽤 발전하면서 이런 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업자도 생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Yazd 지방에 아직도 서있는 yakh-chāl 입니다. 이 yakh-chāl은 겨울철 인근 높은 산에서 가져온 얼음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구조물입니다. 기본적으로 얼음은 땅 밑에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저장하되, 그 위에는 진흙과 모래, 계란 흰자위, 석회, 염소털 등 희안한 재료를 섞어만든 sārooj 라는 특수 단열재 벽돌로 원뿔형 탑을 만들어, 그 밑에 있는 얼음이 녹지 않도록 단열을 하고, 또 바람의 힘으로 조금이라도 온도를 낮추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잘 났다는 앵글로 색슨들이 17세기부터 짓기 시작한 것을, 아이큐도 낮고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는 이란 사람들은 기원전 4세기부터 지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 있는 ice house의 모습입니다.)



(1825년에 미국에서 문을 열어 냉장고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 영업을 했던 Jamaica Pond Ice Company의 위엄)




하지만 저 위 소설의 배경인 19세기 초반, 그것도 스페인 반도 남쪽 끝인 지브랄타에서는 윗 장면의 배경인 6~7월달에 얼음을 구할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설마 군사 기지인 지브랄타에서 ice house를 지어놓고 얼음을 저장하고 있지도 않았을테니까요.  이건 제 짐작입니다만, cold라는 단어는 원래는 뜨거운 것이 식은 것을 뜻하는 것이고, 일부러 더 차갑게 식힌 것은 iced라고 부르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요.  생각해보면 미군 식당에 항상 준비되어 있던 음료가 바로 콜라 같은 탄산음료와 함께, 뜻 밖에도 몸에 좋은 아이스 티 (iced tea)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스 티를 담은 투명 용기 (fountain) 속을 보면 정작 얼음은 안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이스 티라고 불렀지요.  같은 맥락인 것 같습니다.




(정말 뜻 밖에도, 미군 식당의 아이스티는 달지 않더군요 !  그래서 저는 콜라만 마셨지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아이스 티 이야기로 끝을 마치지요.  원래 차는 뜨거운 것이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미국에서 1904년 세인트 루이스의 세계 박람회 때, 블레친든(Richard Blechynden)이라는 영국인 홍차 상인이 더운 날씨로 인해 뜨거운 홍차가 잘 팔리지 않자, 얼음을 넣어 차갑게 했더니 불티나듯 팔린 것에서 시작된 것이 아이스 티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이미 19세기 중반에 미국의 가정용 요리책에 티 펀치 (tea punch)라는 이름의 아이스 티 요리법이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초기 아이스 티의 특징은 2가지인데, 하나는 홍차가 아닌 녹차를 베이스로 한다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엄청나게 많은 설탕을 써서 달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원래 미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원래 차보다는 커피를 많이 마시긴 했지만) 홍차만큼 녹차도 많이 마셨다고 하네요.  그런데 2차 세계대전 때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해오던 녹차 공급이 끊기면서, 인도에서 들여오는 홍차가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사실 미국은 커피를 많이 소비하지만 녹차건 홍차건 사실 차는 잘 마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아이스티는 정말 많이 마신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소비되는 차의 80%는 아이스티 형태로 마신다고 하니까, 정말 대단한 불균형이지요.  (제가 미군 식당에서 본 아이스티도 이런 연유로 식당의 터줏대감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현상은 남부에서 특히 더한데, 특히 남부의 아이스티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달게 만든다고 합니다.  미국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아이스티는 무척 인기라서 많이들 마시는데, 정작 차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과 중국에서는 아직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아이스티의 인기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아이스티는 인기가 별로지요 ?




(Bill Waterson의 Calvin & Hobbes 의 한 장면입니다.  이 만화에서는 이렇게 영어 단어를 가지고 말장난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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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몽골로이드 2018.07.26 1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란인들도 영국인이랑 똑같은 코카소이드 백인들 아닌가요? IQ가 떨어진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에서도 페르시아계 여자의 벽안이 아름다웠다는 언급이 나오지 않습니까.

    • nasica 2018.07.26 1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반적으로 중동지방 사람들의 IQ가 좀 낮은 것으로 나옵니다. 이란은 평균 IQ가 80점대 후반... IQ가 진짜 지능의 척도가 맞냐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아마 교육 문화의 문제 아닐까 싶어요.

  2. 뱀장수 2018.07.26 1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거의 매일 가스파초를 해서 먹거나 마트에서 사서 먹거나 하는데 나시카님이 드신 건 색감이 좀 많이 누렇네요. 조명때문에 그럴까요...
    그리고 말씀대로 원래 그릇에 담아 서빙하는게 보통인데 잘못 걸리신 듯 하네요

    사족이지만 스페인에서 젊은층이 가장 많이 마시는 음료수는 틴토 베라노죠. 상그리아는 거의 관광객들만 마시고 현지인들은 잘 안마십니다.

  3. reinhardt100 2018.07.26 2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cold 관련해서 전 좀 생각이 다릅니다. '납'이 있기 때문이죠.
    대항해시대 초기 포르투갈인들이 인도나 동남아시아 지역에 가서 가장 놀란 것 중 하나가 부유층이나 귀족등 신분 높은 지역 주민들이 히말라야 산맥이나 힌두쿠시 산맥, 파미르고원 지역에서 채취된 만년설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포르투갈인들이 어떻게 구했냐고 물어보자 이들은 '납으로 된 상자에 넣어서 바닷길 혹은 육상 무역을 통해 수입해왔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게 가능한게 납의 특성상, 상자로 만드는게 유리하다는 겁니다 괜히 고대 로마에서 대량의 수도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납을 쓴게 아닙니다. 연성이 뛰어나니까요.

    개인적 생각인데 아마, 지브롤터 같은데 빙고가 없었더라도 납으로 밀폐된 얼음상자 몇 개 정도는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대신, 이런 식으로 저장된 얼음을 계속 먹었다가는 납중독 걸릴 확률을 높아졌을 겁니다.

    • eithel 2018.07.26 2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납 상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납은 그다지 단열이 잘 되는 재료가 아닙니다. 철보다야 낫지만 나무보다는 열전도율이 10배는 높아요.

    • reinhardt100 2018.07.26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그렇군요. 단열 문제 때문에 그래서 수송단가가 미친듯이 비쌌을 수도 있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4. spitfire 2018.07.26 2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우리나라를 제외하곤 상당수의 국가가 cold water라고 하면 우리 기준에서의 식은 물을 주는거 같습니다. with ice라고 해야지 한국인 기준에서 찬물이 나오더라구요. 특히 중국에서는 기본으로 제공하는 물이 뜨거운 물이라 생각없이 마시다 낭패를 본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ㅜㅜ

  5. TheK2017 2018.07.28 0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차가운 아이스티를 즐겨 먹는 저로서는
    상당이 재밌는 이야기 였습니다.
    오늘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6. JPM 2018.07.28 1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국 남부살다와서 sweet tea 이야기 나오니 반갑네요. 미국 남부에선 대개 저 아이스티를 스윗티 달라고 하면 흔히들 생각하는 비쥬얼에 레몬 꽃아서(패스트푸드는 아니구요) 나옵니다. 저 달달한 스윗티에 중독되더라구요. 남부에서만 저걸 sweet tea라고 부르는거 같기도 합니다. 보스턴에서 sweet tea 달라고 했더니, 남부에서 왔냐고 물어보더라구요. 재밌게 읽고 갑니다

  7. 카를대공 2018.07.29 17: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얼음 창고라는게 북송 배경의 <천룡팔부>에도 나와서 놀랐는데 기원전 4세기경까지도 올라가는 물건이군요?놀랍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허죽은 저기서 만리장성도 쌓고 절기도 전수 받는 행운을......ㅎㅎ

    IQ라는 것도 동북아 국가들이 대체로 높게 나온다고 하더군요.
    한국,중국,대만,일본이 대체로 상위권 싹쓸이라나요

  8. 찰싹이 2019.02.24 16: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씀처럼 이슬람 국가 출신 애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게 사실이 아니라는데 공감합니다. 대학시절 터키애들이 술은 안되지만 와인은 괜찮다며 (도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시고 취하는걸 자주 봤었고 이란 유학생들도 술 좋아하는 이들이 꽤 있었으며 그 엄격한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 출신중에도 술 좋아하는 이들이 꽤 있었지요.
    또 그 잘난 앵글로 색슨이라고 하시니 정말 영국에서 늘 느끼는 점이 떠오르네요. 자신들이 가장 깨어있는 민족 또는 국민이란 그 우월감이 너무 뿌리가 깊어서 해외관련된 모든 뉴스는 이런 우월감에 기반하지요. 믿기지 않을정도로 우월감에 기반한 언론기사들이 다른 언론도 아니고 BBC나 FT등에 늘 올라오는걸 보면 참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비록 임무가 보충병력의 인솔이라고는 해도, 한겨울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는 꽤 힘든 일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뛰어난 지휘력이 아니었다면 신병들로 구성된 이 보충병력에서는 아마 탈영이나 부상 등으로 인해 많은 비전투 손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게 이탈리아로 들어온 베르나도트가 향한 곳은 롬바르디아의 주도인 밀라노(Milan)였는데, 여기서 나폴레옹과의 악연이 시작됩니다.  당시 밀라노 주둔 프랑스군 지휘관은 뒤퓌(Dominique Martin Dupuy) 장군이었는데, 당시 나폴레옹이 이끄는 이탈리아 방면군 전체는 기타 방면군의 졸전과 대비된 자신들의 연전연승으로 인해 정말 기고만장한 상태였습니다.  그건 뒤퓌 장군도 마찬가지였고, 풋내기들로 이루어진 보충병들을 끌고 겨울 행군을 강행하느라 초라한 행색을 하고 나타난 베르나도트를 대하는 태도가 매우 불손했던 모양입니다.  




(뒤퓌 장군의 흉상입니다.  1798년 10월 카이로 폭동 때 가장 먼저 살해된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는 벼락 출세한 얼치기 정치 장군이 아니었습니다.  차가운 엘리트였던 그는 명령 불복종 죄목으로 현장에서 뒤퓌 장군을 체포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뒤퓌로서는 깜짝 놀랄 일이기도 했으나 몹시 분한 일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뒤퓌가 그렇게 건방진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도 믿는 빽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바로 나폴레옹의 최측근인 참모장 베르티에(Louis-Alexandre Berthier)가 그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첫인상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베르나도트는 바그람 전투 때까지 향후 12년 간 두고두고 베르티에의 견제와 방해를 받게 됩니다.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을 직접 만난 것은 만토바(Mantua)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면접해보고는 소장이라는 그의 지위에 맞게 사단 하나의 지휘를 맡겼는데, 이미 리볼리(Rivoli) 전투 등 주요 전투는 다 정리가 된 상태였지만 이탈리아 북동부인 프리울리(Friuli) 침공 등에서 베르나도트는 선봉장으로서 훌륭히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결국 나폴레옹과 대립각을 세우는 입장이었습니다.  그 해 9월, 총재 정부의 친위 쿠데타였던 프릭튀도르(Fructidor) 사건이 벌어지자 그에 협조하는 입장이었던 나폴레옹은 휘하 사단장들에게 이 쿠데타를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도록 지시했는데, 베르나도트는 전혀 상반된 내용의 성명서를, 그것도 나폴레옹이 아니라 파리의 총재 정부로 곧장 보내버렸던 것입니다.  이로써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의 관계는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프릭튀도르 쿠데타는 왕당파가 세력을 잡아가던 의회에 대해 1797년 총재 정부가 일으킨 친위 쿠데타입니다.  이 사건에는 나폴레옹이 총재 정부에게 파견해준 나폴레옹의 원투 펀치 중 한명인 오쥬로 장군도 활약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곧 행동에 나섰습니다.  10월에 캄포 포르미오(Campo Formio) 조약으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종료되자, 나폴레옹은 곧 베르나도트를 프랑스 본국으로 전출시켜버렸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가 애초에 나폴레옹에게 뻣뻣하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총재 정부의 당시 제1인자였던 폴 바라스(Paul Barras)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라스도 비록 자신이 키워준 인물이긴 하지만 나폴레옹의 인기와 권력이 자신을 넘어선다고 느끼자 불안을 느꼈고, 나폴레옹을 누를 경쟁자로 베르나도트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으로부터 물을 먹고 파리로 돌아오자, 바라스는 오히려 그를 나폴레옹을 대체하여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이미 외무장관 탈레랑(Charles 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을 포섭해놓은 나폴레옹은 선수를 쳐서, 바라스의 의도와는 반대로 베르나도트를 캄포 포르미오 조약으로 인해 새로 신설된  빈(Wien)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로 발령 내버렸습니다.  권력 싸움에서 나폴레옹에게 패배를 거듭한 베르나도트는 분한 마음을 안고 빈으로 향했는데, 그나마 거기서도 오래 있지는 못했습니다.  빈 대사관에 자랑스럽게 혁명의 상징이자 국기인 삼색기를 게양했는데, 최근의 패배로 인한 상처가 아물지 않은 오스트리아인들의 심기를 건드려 소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베르나도트는 결국 파리로 되돌아와 실업자 대열에 동참해야 했습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총재 정부의 상징인 폴 바라스입니다.  그런 그도 젊은 시절 귀족 출신의 군 장교 후보생으로 프랑스령 인도로 가는 길에 난파를 당해 죽을 뻔 하는 등 꽤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총재 정부 시절 부정한 방법으로 많은 돈을 긁어모은 그는 나폴레옹에 의해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거나 로마 등지로 정치적 추방을 당한 상태에서 아주 호화롭게 살았고, 결국 1829년 파리의 사이요(Chailllot, 에펠탑 앞에 있는 그 궁전 맞습니다)에서 잘 먹고 잘 살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에게는 나폴레옹과 만난 1797년이 삼재가 꼈던 마지막 해였나 봅니다.  다음해인 1798년 베르나도트에게는 그의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귀인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데지레 클라리(Eugénie Bernardine Désirée Clary)였습니다.  데지레 클라리는 원래 나폴레옹과 약혼을 했던 여자였는데, 이 둘이 결혼을 한 것은 어느 한 측의 정략적인 의도라기 보다는 그냥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애초에 데지레가 처음 만났던 것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였습니다.  원래 그녀의 집안은 부유한 비단 상인이었는데, 서슬퍼런 대혁명 초기에 그녀의 남동생이 반혁명분자로 몰려 체포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동생을 구하고자 이리저리 줄을 댔는데, 그러다 만난 것이 조제프였습니다.  그러나 조제프는 그녀보다는 그녀의 언니였던 줄리 클라리에게 끌렸고, 결국 조제프와 줄리가 결혼을 합니다.  대신 이러면서 나폴레옹과 데지레가 만나게 되었고, 이 둘도 1795년 약혼을 했지요.   그러나 하필 약혼을 하자마자 나폴레옹은 운명의 여인을 또 만납니다.  바로 조세핀이었지요.  정열의 크레올 여인에게 얌전한 데지레는 상대가 되지 못했고 나폴레옹은 불과 5개월만에 데지레와 파혼을 선언합니다.  생각해보면 데지레는 주로 나이 많은 여자들에게 밀리는 스타일이었나 봅니다.




(비교적 젊은 시절인 1807년의 데지레 클라리입니다.  대단한 미인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나폴레옹은 변치않는 사랑을 간직하는 순정파 남자는 아닐지 몰라도 의리와 체면을 중요시하는 지중해 남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파혼한 데지레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데지레에게 좋은 남편감을 소개해주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었는데, 그 결과 중 하나가 뒤포(Mathurin-Léonard Duphot) 장군과의 약혼이었습니다.  뒤포는 사실 좋은 남편감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애까지 둔 사람이었거든요.  그러나 부잣집 딸 데지레에게는 두둑한 지참금이 있었고 특히 나폴레옹과 동서가 된다는 점은 매우 탐나는 결혼 조건이었기 때문에 뒤포는 그 약혼에 응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뒤포는 1797년 12월, 결혼식 전날 밤에 로마에서 일어난 반프랑스 폭동에 휘말려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남자 복이 없는 여자라고 할 수 있었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나폴레옹은 더더욱 데지레에게 미안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데지레는 언니 줄리와 매우 친하게 지냈으므로 보나파르트 집안에서는 거의 식구나 다름없는 사이였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조세핀을 매우 싫어했던 보나파르트 집안 사람들은 조세핀에 대한 반감 때문에 얌전하고 순진무구한 데지레에게 더욱 친절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이런 식구들 때문에라도 나폴레옹은 데지레에게 빨리 좋은 혼처를 구해줘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러다 나선 것이 나폴레옹의 심복인 폭풍우 쥐노(Jean-Andoche Junot)였습니다.  쥐노도 보나파르트 집안에 자주 들락거리다 데지레에게 반했는지, 아니면 나폴레옹의 인척이 되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서였는지 데지레에게 청혼을 하기는 했는데, 그만 퇴짜를 맞았습니다.  사실 쥐노는 나폴레옹의 초기 심복이었으나 능력치가 많이 떨어지는 편이라서 나폴레옹도 중용하는 편이 아니었는데다, 그나마 남자답게 하트 모양으로 구성한 촛불 진열 속에서 장미꽃을 들고 청혼한 것이 아니라 마르몽(Auguste de Marmont)을 통해서 '저 말이죠, 쥐노가 그러는데 댁과 결혼하고 싶답니다'라고 청혼을 했기 때문이었답니다.   아무래도 쥐노에겐 여러 모로 문제가 있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데지레를 만나 결혼에 성공한 것은 바로 베르나도트였습니다.  생각해보면 베르나도트야말로 데지레에게 있어 최고의 배우자였습니다.  베르나도트도 데지레처럼 부르조아 집안 출신이었고, 지위 뿐만 아니라 교양도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젊은 시절 별명이 '각선미 하사'(Sergeant Belle-Jambe)일 정도로 외모도 준수한 편이었거든요.  게다가 베르나도트와 나폴레옹 두 사람은 서로 화해를 해야 하는 관계였습니다.  화해를 하는데 있어 가장 좋은 것은 결혼을 통해 인척이 되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떠난 직후인 1798년 8월 이 두사람은 모든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바로 다음해 외아들 오스카(Joseph François Oscar Bernadotte)를 낳게 됩니다.  베르나도트의 외아들의 이름이 정해진 과정만 봐도 베르나도트 가족과 보나파르트 가족의 복잡한 관계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앞서 말했듯이 언니 줄리와의 사이가 돈독했던 데지레는 애초에 이 아이의 이름을 형부의 이름을 따서 조제프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데지레의 부탁으로 이 아이의 대부가 된 나폴레옹은 이 아이의 이름으로 자신이 읽던 아일랜드의 음유시인 오시앙(Ossian)의 영웅 서사시 주인공들 중 하나인 프랑수와 오스카(François Oscar)로 정하자고 했고, 그 이름도 그대로 붙여졌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그렇게 긴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아이가 나중에 스웨덴 국왕 오스카 1세(Oscar I)가 되리라고는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상상 못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중무장(?)한 오스카 베르나도트입니다.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세자로 책봉되기 몇 년 전에 그려진 그림이라고 하니까 대략 7~8세 정도에 그려진 그림 아닐까 합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자주 등장하네요.  오스칼이라는 이름은 Oscar를 일본식으로 표기하다보니 잘못 발음되어 전해지는 이름이고, 이 남장 여걸의 이름은 Oscar François de Jarjayes, 즉 오스카 프랑수와 드 자르제입니다.  참고로 오스카라는 이름의 어원은 아일랜드 계통으로서, '사슴을 사랑하는'이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영어 고어로서 '신의 창'이라는 뜻이라고도 합니다.  희한하게도 이 이름은 스웨덴에서 남자 이름으로 3번째로 많이 쓰이는 이름입니다.)




이로써 베르나도트와 나폴레옹의 화해는 완성되었고, 나폴레옹은 향후 그의 야심을 이루는데 베르나도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베르나도트라는 남자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oup_of_18_Fructidor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Oscar_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D%C3%A9sir%C3%A9e_Clary

https://en.wikipedia.org/wiki/Oscar_(given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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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ashorn 2018.07.23 06: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질긴 인연이군요..

  2. 석총 2018.07.23 2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루이 18세의 잔소리 하는 데시데리아왕비 루이 18세에게 곤란한 청을 하였죠 언니를 귀국시키라고

  3. 레미 2018.07.25 2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나도트... 나폴레옹에겐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철천지 원쑤...

  4. 0_- 2018.07.25 2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옛날에 어느 높으신 분이 주어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이래서 주어가 중요합니다.

    젊어서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왕에게 죽음을!
    군인시절: (다른 나라의) 왕에게 죽음을!
    왕이되어: (프랑스 보나파르트) 왕에게 죽음을!
    임종직전: (자기자신이기도 한 스웨덴) 왕에게 죽음을!

    이렇게 놓고보면 그냥 베르나도트가 베르나도트 했을 뿐이네요 ^_-;

  5. reinhardt100 2018.07.25 2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사이유의 장미. 저 만화가 한국에서 정식발매된게 1988년인데 꽤나 사연이 많은 만화라고 합니다. 이케다 리요코의 작품들 중 저 작품이 최대 히트작인데 정작 본인은 만화를 배우는 습작에서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 작품이 원래 1971년에 일본에서 완판된 이후 바로 당시 저작권 개념조차 별로 없던 한국에서 전례없이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고 들여오려고 했던 찰나 그대로 16년동안 수입 및 판매 금지처분을 받았던 희대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왜 저 순정만화가 저런 처분을 받았냐고요? 하필이면 발매시점으로 예정되었던 1972년 10월 당시,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들어섰으니까요. 한창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의 여학생들한테 저딴걸(?) 그대로 정발했다가 학생들이 투사가 되면 골치아프다고 판단했던 문공부,교육부와 관련기관들이 그대로 저작권 계약 엎어버리라고 행정지도를 내려버린 겁니다. 사실, 관련기관들이 걱정했던게 괜한 우려가 아니었던 이유가 하필이면 일본 경시청의 분석때문이었죠.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한창 발매되던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전공투가 과격화되면서 사회불안이 꽤나 심각했었으니까요. 특히 여대생들이 학생운동 하는데 있어서 저 만화가 매우 큰 영향을 발휘한다고 경시청이 분석했고, 실제로 어느 정도 맞는거로 드러났다는 것을 당시 주일대사관이 입수, 본국에 급송했다고 하더군요. 이걸 보고 관련기관들의 입장이 급선회해서 당시 출판업계에서도 말이 꽤나 많았다고 합니다.

    이케다 리요코 여사의 작품중에 오르페우스의 창이란게 있습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비슷하면서도 훨씬 내용이 심각한 게 많이 나오죠. 한 번 두 작품 비교하면서 읽어보시면 아실겁니다.

  6. 웃자웃어 2018.07.26 0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에는 인구대비 어느정도의 비율을 전시에 군인으로 동원했나요?

여러분이 나폴레옹 시대로 타임 워프를 한다고 하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까 ?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장 생활 편의품의 부족 때문에 몹시 불편할 것입니다.  냉장고나 에어컨, 수세식 화장실과 형광등 따위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 것 말고도 당장 여러분들은 TV와 인터넷이 없어서 무척이나 심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분은 여러분과 나폴레옹 시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부분입니다.  즉, 심심하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건 귀족이나 상류층 이야기입니다.  일반 서민들이야 먹고 살기 바빠서 심심하다는 사치스러운 생각을 할 틈이 없었지요.


그렇게 오락거리가 없는 시절에 인간이 탐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이고 말초적인 쾌락이 무엇이겠습니까 ?  당연히 식사입니다.  (다른 걸 생각하신 분들은 반성하세요.)  하루의 일과에서 식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습니다.  당시 귀족들은 공직이나 군에 종사하지 않는 이상 원래 직업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하루 일과를 보면 정말 한가롭기 짝이 없었는데, 그런 무료한 일상을 달래주는 가장 큰 행사가 바로 오찬이었습니다.  친구나 이웃을 손님으로 모셔 놓고 멋진 식사를 대접하면서 환담을 나누고, 이후에 여흥으로 악기 연주나 노래를 듣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지요.  그러니 당시 귀족들 및 부르조아 계급 사람들에게 피아노나 바이올린 등 악기 다루는 것을 배우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했던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엔터테인먼트 역할도 했고, 또 그러면서 인맥을 쌓는 것이 더더욱 중요했거든요.  





(사진은 Sense & Sensibility 중의 한 장면입니다.  따지고 보면 요즘에는 저런 피아노나 바이올린 연주 배우는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데 말입니다...)




물론 이건 귀족 층의 이야기였고, 서민들은 말라비틀어진 빵이건 감자건 그저 배만 채울 수 있어도 감지덕지였습니다.  요즘에는 아주 많지만 당시에는 전혀 없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음식물 쓰레기입니다.  음식을 버리다니,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엔 먹을 것이 부족하여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으니 당연히 남는 음식물 없이 찌꺼기까지 다 먹었습니다.  귀족들은 물론 그러지 않았습니다만, 귀족들 집에 있는 하인들은 당연히 귀족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반갑게 잘 먹었습니다.  그러고도 남는 것들, 가령 감자 껍질이나 양배추 대가리 등은 (가난한 사람들은 직접 먹었고) 살림이 괜찮은 집에서도 집에서 키우는 돼지나 토끼 등이 다 먹어 치웠습니다.   피노키오 원작을 보면, 피노키오는 만들어지자 마자 배가 고프다고 찡얼대는데, 가난했던 제페토 할아버지는 피노키오에게 배를 하나 주지요.  피노키오가 과육만 먹자, 할아버지는 '껍질과 씨도 먹어야지' 라고 권하고, 미식가였던 피노키오는 처음엔 그를 거부하다가, 배가 고픈데 더 먹을 것이 없자 정말 배 껍질과 씨까지 먹어치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서민들의 삶은 팍팍한 것이니까요.



Le Moribund, 모파상 작 (배경 : 19세기 중반) ------------------------------


(늙은 시골 농부가 점심을 먹습니다.)


그는 방을 나와 부엌으로 돌아가, 찬장을 열고 6파운드 짜리 빵을 꺼내 한 조각을 잘랐다.  그는 빵부스러기를 조심스레 긁어모아 손바닥에 올리고는 한조각도 흘리지 않고 입 안에 털어넣었다.  그리고는 그의 칼 끝으로 토기 단지 속에 든 소금친 버터를 조금 긁어내 빵에 바르고는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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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농부들과는 달리 귀족들은,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중산층의 고상한 신사 양반들은 체면 때문에라도 좋은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특히 손님이 있을 때는 약간 무리를 해서라도 화려한 요리를 차려내야 했습니다.  그 결과, 귀족들까지는 몰라도 중산층 신사들의 엥겔 계수, 즉 생활비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에서 약 20년 정도 지난 시대의 이야기인 레미제라블 속에서의 마리우스도 출판 일을 하며 가난한 생활을 할 때 버는 돈 700 프랑의 반이 넘는 액수인 400 프랑을 먹는데 써야 했지요.  엥겔지수가 너무 높은 것 아니냐고요 ?  당당한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 유럽 장교들도 급료의 절반을 장교 식당의 식대로 공제당하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었습니다.  소위 같은 사람들은 급료보다 장교 식당 식대가 더 나갔기 때문에, 군대에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군대에 돈을 내고 군 복무를 해야 했지요.


Sharpe's Waterloo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15년 벨기에 ) -------------------------


(네덜란드 왕자 밑에서 중령으로 복무 중인 샤프가 왕자의 임시 지휘소로 쓰이고 있는 여관에서 식사를 하며 왕자의 정부인 폴레트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령님은 그저 돈 때문에 싸우는 거군요."  폴레트는 마치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는 듯 영악하게 말했다.  "왕자님이 중령 노릇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지불해주세요 ?"


"일당이 1 파운드, 3 실링 하고도 10 펜스지."  그것이 그가 기병 연대의 임시 중령으로서 받는 급료였는데, 이는 그가 일생 동안 벌어 본 것 중 가장 높은 금액이었다.  이 중 절반은 장교 식당의 식대 및 사령부 하인들 급료로 공제되어 없어졌지만, 그래도 샤프는 자신이 부자라고 느꼈다.  그가 영국군의 무보직 (half-pay) 중위로서 받는 일당 2 실링 9 펜스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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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럽인들의 주식이 곡류가 아닌 육류라고 해도, 왜 이렇게 식비가 많이 들어갔을까요 ?  그냥 자기 식구들끼리 일상적으로 먹을 때야 그렇게까지 비싸게 들지 않았겠습니다만, 손님이나 친구들을 초대할 때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자신이 베푸는 식사는 자신의 체면을 뜻하는 것이었거든요.  요즘 사람들이 괜히 수입 중형차를 타고, 또 괜히 이탈리아제 가죽 가방을 터무니 없는 가격에 사서 들고다니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지요.  특히 당시에는 아직 그럴싸한 고급 식당이라는 것이 별로 없었으므로, 대개의 경우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요리사가 만든 요리를 대접해야 했는데, 그러자니 음식 자체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써서 체면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귀족 집주인이 (우리들의 상식과는 좀 거리가 있는데) 음식의 종류나 조리법, 맛에 대해 세밀하게 신경을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Post Captain by Patrick O'Brian  (배경 : 1803년 프랑스) ------------------------


"오찬을 들어야지." 크리스티-팔리에르 함장이 사형 집행 서류철의 F부터 L까지의 항목을 덮으며 말했다.  "시작은 바니율스 (Banyuls, 유명 포도주 산지 이름) 한잔과 함께 앤초비하고 올리브, 그러니까 검은 올리브를 곁들여 들도록 하지.  그러고 난 다음에 에베르(Hébert)의 생선 수프를 들고, 이어서 쿠르부이용(courtbouillon) 소스를 얹은 간단한 랍스터(langouste)를 먹을 거야.  어쩌면 빵가루를 덮은 양다리 구이(gigot en croüte)를 먹을지도 모르겠는데.  사향초 (thyme) 허브가 꽃이 필 계절이라서 양고기 맛이 아주 좋을 때거든.  그 뒤에는 그냥 치즈와 딸기, 그리고 커피만 조금 들도록 하지.  물론 내 영국산 잼도 한접시 함께 해야지.  팡외, 자네 식의 든든한 식사는 하지 않을걸세.  이렇게 더운 날에는 내 간이 그런 거창한 식사를 견디지 못하거든.  게다가 아니발 (Annibale) 호가 다음주까지 바다에 나가려면 할 일이 엄청나게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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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앙 끄루트(Gigot en croûte)는 글자 그대로 빵가루를 입힌 넓적다리 구이 요리입니다.)




하지만 정작 당대 유럽 최고의 권력자였던 나폴레옹 본인은 무척 간소한 음식을 즐겼습니다.  나폴레옹의 시종(valet)들 중 하나였던 생드니(Louis Étienne Saint-Denis)에 따르면, 나폴레옹의 아침식사는 정말 간소했습니다.  당연히 황제의 요리사들은 훨씬 우아하고 정교한 요리를 내놓을 수 있었지만 그는 그냥 뜨거운 수프와 삶은 쇠고기 한조각을 더 선호했답니다.  때로는 달걀, 양고기, 커틀릿, 양고기나 닭고기와 함께 렌틸콩과 콩을 넣은 샐러드 등을 아침으로 먹기도 했고요.  하지만 먼저 먹는 수프를 빼면 아침에 먹는 요리가 2가지를 넘은 적은 없었답니다.   


그런 나폴레옹조차도 저녁은 부하들이나 다른 궁정 식구들과 함께 먹었으므로 그들을 위해서라도 좀더 풍성한 저녁 식탁을 차리도록 했습니다.  친구들 초대해놓고 닭가슴살과 샐러드, 물만 내놓았다는 호날두와는 달랐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저녁 식탁에서도, 나폴레옹 본인은 굽든지 삶든지 해서 아주 간소하게 요리된 고기와 채소 한 접시씩만을 먹었습니다.  채소라고 해봐야 콩이나 감자 같은 것이었는데, 나폴레옹은 감자를 특히 좋아해서 굽든 삶든 감자라면 다 잘 먹었답니다.  그래도 프랑스인답게 식사의 마무리는 치즈 한조각을 먹었는데, 주로 로크포르(Roquefort) 또는 파머잔(Parmesan) 치즈를 택했습니다.  가끔은 과일도 먹었는데, 과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지 사과나 배 1/4 조각 정도만 먹거나 포도 약간을 먹었답니다.  





(로크포르 치즈입니다.  파머잔도 꽤 짜지만 저것도 상당히 짠 치즈인데...  하긴 대부분 치즈가 다 짜지요.)  




나폴레옹도 좋아하는 디저트가 있긴 했는데, 아몬드였답니다.  보통 한 접시를 거의 다 혼자서 비웠다고 하네요.   또 둥글게 말아 크림을 넣은 와플도 좋아했습니다.  이건 설명을 들어보면 이탈리아 시실리 섬의 대표적 간식인 카놀리(Cannoli)가 아닌가 합니다.   또 당시 신사들이 흔히 하듯 코냑 같은 독한 증류주를 마지막 입가심으로 마시지 않고 그냥 커피를 마셨는데 다 마시지 않고 남겼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좋아했다는 둥글게 말아 크림을 넣은 와플이란 바로 이 카놀리(Cannoli)가 아닌가 합니다.  저 겉면을 이루는 과자는 사실 와플처럼 구운 것이라기보다는 도우넛처럼 튀긴 것이라고 합니다.  속에 든 크림에는 보통 리코타 치즈도 들어갑니다.  크기는 손가락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손님이나 친구들을 초대한 식사에서 음식이나 은식기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식탁에서의 흥미진진하고 유쾌한 환담이었습니다. 





The Thirteen Gun Salute by Patrick O'Brian  (배경 : 1813년 대서양의 영국 군함 HMS Diane 함상) -----------


그들은 서로를 쳐다 보고는, 마틴이 말을 이었다.  "불쌍한 친구 같으니, 난 그가 이 배에서 미움살 짓을 이미 많이 한 것 같네.  이 친구가 옥스포드에서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내 생각엔 대학 졸업 이후의 고독과 그 지긋지긋한 교사 생활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네."


"어떤 사람들에겐 그건 독약과도 같지.  성인들의 무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거든."


"그게 그 친구가 느낀 거야.  스스로도 자기가 더 이상 어울리기 괜찮은 사람이 아닌 것으로 여기더라니까.  그 친구 유머 모음집 (jest book)도 한 권 샀더라고.  <내 야심은 식탁을 아주 뒤집어 놓는 거야> 라고 말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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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 위에서 <식탁을 뒤집어 놓는 것>이라는 건 물리적으로 밥상을 뒤엎어 버리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장교들과의 오찬 시간에 뭔가 기발한 농담을 해서 사람들의 배꼽을 빼놓겠다는 뜻입니다.  당시 오찬 (dinner)는 무척이나 중요한 일간 행사였고, 거기 참석하는 사람들 (사실상 모든 사람들)은 단순히 한끼 때우는 것이 아닌, (좋든 싫든)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나눠야 하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자리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사람은 잘생긴 사람이 아니라 유머 감각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웃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거든요.  프랑스 사람들은 식탁에서 사회 문제나 철학, 뉴스거리 등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지만, 영국인들은 식탁에서 정치 이야기나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위 소설에서처럼 같은 군함에 타고 있는 동료 장교들끼리, 갑판 위에서의 일, 즉 업무 수행 중에 벌어졌던 심각한 이야기나 언짢았던 일을 식사 중에 꺼내는 것은 금기시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국인들이 식탁에서 꺼내기 제일 좋았던 것은 뭔가 다들 웃을 만한 농담거리였고, 평소에 다들 뭔가 재미있는 농담거리 없을까 하고 소재를 찾았습니다.  정 소재거리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저렇게 유머 모음집까지 나왔던 것이고요.


자신이 베푸는 오찬에서 손님들이 맛있게 먹고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손님들 중 누군가 빵빵 터지는 유머 감각을 발휘해주도록 주인이 기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또, 게스트가 제대로 터뜨리려면 유재석 같은 사람이 MC를 봐야 하듯이, 손님들이 유머 감각을 발휘하려면 주인이 이런저런 신경을 세심하게 써야 했습니다.



The Letter of Marque by Patrick O'Brian  (배경 : 1813년 영국 런던) -------------------


(조셉 경이 자기 집에서 해군성 및 의회의 중요 인사들 8~9명을 초대하여 오찬을 베풉니다.  이 오찬의 중요 목적은 누명을 쓰고 해군에서 쫓겨난 잭 오브리 함장의 복직 운동을 위해, 잭 오브리를 이 중요 인사들에게 개인적으로 인사를 시키는 것입니다.  조셉 경은 하녀인 발로우 여사에게 이 오찬 준비를 시키는데, 자꾸 소소한 것까지 참견하며 혹시 준비 소홀이 없는지 전전긍긍합니다.)


하지만 조셉 경은 포크와 나이프 위치를 여기저기서 조금 변경한다든지, 요리 접시 위의 덮개가 미리 충분히 뜨겁게 덥혀져 있는지, 푸딩의 양은 충분한지 등등에 대해 안절부절 했다.


"오늘 오실 신사분들은 특별히 푸딩을 좋아한단 말이오.  판뮤어 경도 그렇고."


조셉 경의 잔소리가 이어질 수록 발로우 여사의 대답은 점점 짧아졌다.  결국엔 조셉 경이 이런 말까지 하게 되었다.


"이거 어쩌면 우리가 이 식탁 배치를 전부 바꿔야 할 지도 모르겠소.  그 신사분은 다리에 부상을 입었거든.  정말 그렇지.  서재에 있는 발 받침대 위에 다리를 쭉 펼 수 있으면 좋겠군.  그 신사분이 편안히 그렇게 하자면 그가 식탁 끝에 앉아야 할텐데...  그런데 어느 쪽 다리를 다쳤더라 ?  그리고 식탁의 어느 쪽 끝에 앉혀야 하지 ?"


발로우 여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5분만 더 이런 식으로 굴면 차려 놓은 요리를 모조리 창 밖 거리에 집어 던질 거야.  거북이 수프고 바다 가재고 반찬이고 푸딩이고 뭐고 모조리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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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즉 호스트는 이렇게 음식 뿐만 아니라, 자신이 초대한 손님들이 최대한 편안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누구를 어디에 앉힐지, 식사 초대의 목적에 따라 어느 손님이 어느 손님 옆에 앉아야 하는지 또는 손님들 사이의 관계에 따라 어느 손님을 어느 자리에 앉혀야 할 지 등에 대해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호스트로서 가장 바라는 것은 모든 손님들이 디저트까지 싹 다 비울 정도로 음식을 즐기는 것은 물론, 식사 내내 손님들끼리 기분 좋은 농담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경우 dinner가 "a great success"로 기억될 수 있었고, 그래야 손님들 뇌리에 "호스트 누구누구씨 = 기분 좋은 신사" 라는 것이 박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음식은 좋은데 함께 나온 와인이 신맛 나는 싸구려였다든가, 손님 중에 누가 완전 또라이라서 기분 나쁜 주제의 이야기만 계속 했다든가 하면 그 오찬은 완전 망하는 것이었지요.


저 위 소설 속에서 손님들이 푸딩을 좋아한다고 했지요 ?  푸딩이라고 하는 것이 특정한 한가지 형태의 음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영국 상류 사회에서는 디저트를 총칭하여 푸딩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케이크 형태 또는 달콤한 죽 형태, 또는 삶은 떡 형태 등 다양한 형태의 요리가 푸딩으로 총칭되었습니다.


서양 식사 방법 중에 저 개인적으로 참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디저트입니다.  저처럼 먹는 것 좋아하는 사람은 당연히 케이크나 쿠키 같은 단 것도 좋아하는데, 그런 것을 많이 먹으면 당연히 살이 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단 과자를 양껏 먹으면서도 조절하여 적당히 먹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배가 부를 때 먹는 거쟎아요 ?  그런 면에서, 이미 식사를 든든히 한 이후에 디저트로 케익 등을 먹는 것은 참 현명한 음식 문화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본 요리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푸딩 같은 디저트인데, 나폴레옹 시대에 특별히 유명해진 디저트는 불행히도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허 호텔에서 나오는 자허 토르테...  언젠가는 꼭 먹고 말아야G)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 바로 직후에 매우 유명해진 디저트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허 토르테 (Sachertorte) 입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초콜렛 케익인데, 1832년 비엔나에서 프란츠 자허 (Franz Sacher)라는 요리사가 개발한 것입니다.  바로 나폴레옹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또 결국 몰락시킨 오스트리아의 외교관이자 이후 근 20년 동안 유럽의 구시대 질서를 다시 공고히 지켰던 비엔나 체제의 장본인 메테르니히 (Wenzel von Metternich) 대공의 지시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1832년 어느날, 메테르니히 대공은 중요한 손님들을 모시고 오찬을 하게 되었는데, 하필 그날 그의 주방장이 몸이 아파 자리를 비우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날 디저트는 당시 16살 짜리 2년차 견습생이던 프란츠 자허가 맡게 되었는데, 메테르니히는 이 소년 요리 견습생을 불러다 놓고 '오늘 식사에서 내 얼굴에 먹칠을 하면 아주 경을 칠 줄 알아라'며 단단히 협박을 했다는군요.  본 요리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이날 프란츠 자허가 만들어낸 초콜렛 케익은 손님들을 크게 만족시켜, 메테르니히도 기뻐했다고 합니다.





(프란츠 자허의 사진입니다.  메테르니히를 위해 케익을 굽던 소년이 이렇게 사진을 찍다니, 유럽의 기술 발전 속도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나중에 프란츠 자허는 더 수련을 쌓고 여기저기서 주방장 생활을 한 뒤에, 결국 비엔나로 돌아와 식당을 열었고, 이 자허 토르테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덕분인지 그의 아들인 에두아르드 자허 (Eduard Sacher)는 비엔나에 아예 자허 호텔을 세웠고, 지금 비엔나의 명물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자허 호텔이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원조 자허 토르테를 맛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제가 전에 파리 여행을 하면서 먹은 음식들 중에는 맛있는 것도 있었고 맛없는 것도 있었는데, 우리 가족이 가장 기분 좋게 먹었던 식사는 파리 에펠탑 근처 강건너에 있는 사요 궁(Palais de Chaillot) 인근의 윌슨(Le Wilson)이라는 영어 이름의 카페에서였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날 먹었던 음식이 뭐 딱히 그렇게까지 맛있었거나 특별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았나 생각해보니, 바로 디저트 때문이었습니다.  그날이 파리에서의 2번째 날이었나 그랬거든요.  앵밸리드도 보고 에펠탑도 보고 기분도 좋아서 그날 저녁은 돈 걱정하지 말고 먹자라는 정신으로 디저트까지 다들 한 접시씩 시켜 먹었거든요.


그날 제가 시켰던 디저트는 불어로는 뭔지 모르겠고 (저희에게 준 메뉴판이 아예 영어로 되어 있었거나, 아니면 제가 영어로 된 부분만 읽었나 봅니다) 영어로는 apple pie upside down 뭐 그런 것이었습니다.  나온 파이를 보니 정말 파이 크러스트가 바닥에만 있고 위는 그냥 사과 범벅이 드러나 있더군요.  그 위에 발라 먹으라고 큼직막한 생크림 접시까지 하나 주던데요 ?  이렇게 단 것에 그렇게 느끼한 생크림까지 얹어 먹으면 정말 일찍 죽겠다 싶었는데, 먹어보니 위험한 만큼 정말 맛있더군요.  근데 결국 먹다먹다 배불러서 남긴 것은 에러였습니다.





(이것이 Le Wilson에서 시켜 먹은, 거꾸로 뒤집힌 애플 파이)




그런데 알고 보니 제가 골랐던 '거꾸로 뒤집힌 애플 파이'라는 것이 프랑스에서 꽤 유명한 디저트더군요.  저는 윌슨이라는 영어식 이름의 카페라서 미국스러운 애플 파이를 파나보다 싶었는데, 프랑스에서도 애플 파이는 흔한 디저트이고, 게다가 저 upside down 애플 파이는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유명한 음식이었습니다.  원래 디저트(dessert)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이 desservir(de-service, 즉 서비스를 그만 하다, 식탁을 치우다) 라는 불어에서 나온 것이니까, 당연히 프랑스가 디저트도 더 유명하긴 하겠지요.  이 거꾸로 뒤집힌 애플 파이의 불어식 명칭은 tarte Tatin, 즉 타탱 타르트인데, 이는 파리에서 약 160 km 떨어진, 라모트-뵈브롱(Lamotte-Beuvron)이라는 동네의 타탱(Tatin)이라는 호텔에서 실수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원래 이 작은 호텔은 스테파니와 캐롤린이라는 예쁜 이름을 각각 가진 타탱(Tatin) 아주머니 자매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실수로 이렇게 거꾸로 뒤집힌 애플 파이를 만들어 내놓았다가 그것이 호평을 받으면서 이 호텔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ICI fut creee la celebre tarte TATIN  여기서 그 유명한 타탱 타르트가 창조되었습니다" 라는  타탱 호텔의 광고판입니다.)




그 실수가 어떤 실수였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재미있는 것은 지금도 이 호텔에서는 이 타탱 타르트를 간판으로 광고하고 있지만, 정작 타탱 아주머니 본인들은 한번도 자신들이 이 요상한 파이를 만들었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 타탱 타르트가 유명해진 것은 파리의 유명 레스토랑인 막심 (Maxim)의 주인인 보다블 (Louis Vaudable)이 이 타탱 호텔의 타르트에 얽힌 자신의 모험에 대해 크게 광고를 하면서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타탱 타르트를 팔았기 때문입니다.  이 보다블이라는 양반은 소싯적에 나이든 타탱 자매가 운영하던 타탱 호텔에서 이 타르트를 먹어보고 그 맛에 반해 이 요리법을 배우려고 했으나 거절당하자, 정원사로 위장 취업을 하여 결국 3일 만에 쫓겨나기 전에 그 요리 비법을 알아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보다블의 주장은 말짱 거짓말임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보다블은 1902년 생인데, 타탱 자매는 1906년에 이미 은퇴해서 1911년과 1917년에 각각 사망했거든요.  게다가 막심이라는 레스토랑이 보다블 집안에게 매각된 것은 1932년에 들어서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탱 타르트는 아직도 명성이 자자하여 이렇게 아무 것도 몰랐던 저같은 외국인 관광객조차 주문해 먹게 된 것을 보면, 사실 음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맛일 뿐, 진실이나 정통성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Source : https://shannonselin.com/2015/07/what-did-napoleon-like-to-eat-and-dr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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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ㅇ 2018.07.12 0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예 잘읽었습니다.

  2. 뱀장수 2018.07.12 16: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허토르테 워낙 유명해서 먹어봤는데... 뭐랄까 19세기 벨 에포크 시대에서 전혀 발전이 없는 맛! 이라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 맛이 어떤지 궁금하신 분들에겐 좋은 기회가 되겠지만 전 그돈으로 파리의 MOF나 흘레데쎄르 타이틀이 있는 디저트 가게들을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3. 구와아앍 2018.07.12 18: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간의 말초적이고 일반적인 쾌락하면 누구라도 그게 먼저 떠오를껀데 반성이라니 ㅜㅜ 금수저나 흙수저나 모두 즐길 수 있는 취미인데 넘하네요

  4. 루나미아 2018.07.12 2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몬드 한 접시를 혼자서 뚝딱!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중년에 살이 찐 거네요.

  5. 방랑자 2018.07.12 2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손들고 반성중...)

    영화 워털루에서 전투 당일 아침식사자리에서 "이거 하나."라고 한 게 고증에 맞춘 거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6. 최홍락 2018.07.12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영화 대부에서 돈 비토 콜리오네(말론 브란도)의 최측근인 피터 클레멘자가 배신자가 된 부하를 처리하면서 수하에게 '총은 내버려두고 카놀리를 가져와.'라고 지시하는데, 피터 클레멘자나 나폴레옹이나 출신지(이탈리아)를 속이긴 힘든것 같네요.

    2.자허 토르테는 여행하면서 호텔 자허에 들러서 먹어봤는데요. 먹으면서 느낀 것은 맛이 진짜 달아서 사람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크게 엇갈릴 것 같았다는ᆢ

  7. 웃자웃어 2018.07.12 2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질문있어요, 나폴레옹이 권력자일 당시중 1802~1803년도 당시에는 프랑스가 어느정도의 군비를 소모했나요? 왜냐하면 당시에는 영국과 아주 잠시동안 평화를 유지했던 만큼, 1805~1807년, 1812~1815년 당시보단 군사비가 적을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8. 유애경 2018.07.13 04: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음식-쵸콜렛,케잌,아이스크림등...-은 식사후 배가 부른 상태에서 먹는게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라는 얘기를 들은적 있어요.
    단것 좋아하는 저에게는 저 자허 토르테가 엄청 맛깔나게 보이네요!

    실수로 만들어져 명물이 된 애플파이 일화도 재밌어요!
    잘읽고 갑니다.

여기서 시간과 장소를 다시 혁명 직전의 프랑스로 되돌려 보겠습니다.  1763년, 소위 남자들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남부 가스코뉴(Gascogne)의 소도시 포(Pau)에서 검사로 일하던 장 알리 베르나도트(Jean Henri Bernadotte)에게 아들이 태어납니다.   당시 52이세이던 베르나도트 검사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마 생각지도 않은 늦둥이였을 것입니다.  이 아이에게는 형과 같은 이름인 장(Jean)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곧 형과 구별하기 위해 장-밥티스트(Jean-Baptiste)라는 이름으로 살짝 바뀌었습니다.  지금도 포 시에는 장-밥티스트 베르나도트가 태어난 집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도심 한복판의 골목 속에 있는 집이라 으리으리한 저택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큼직한 기둥과 2개의 박공까지 딸린 중산층의 주택입니다.  





(베르나도트의 생가는 지금은 베르나도트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입장료 3유로입니다.)




어린 장은 꽤 똘똘한 아이였습니다.  거기다 집안 형편도 안정적이었지요.  그는 아버지의 연줄을 이용하여 14세의 나이에 그 소도시의 검사가 되기 위한 수습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이때만 해도 그의 인생은 아름다운 가스코뉴의 소도시에서 똑똑하고 근면한 검사로 평온하고 안정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진로에는 애초부터 내재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디딤돌이 되어줄 아버지의 나이가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결국 장이 17세 되던 해 3월, 그만 아버지가 69세의 나이로 사망해버립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귀족이나 대상인이 아닌 이상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의 죽음은 그 집안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방 소도시 검사라는 직업이 고액 연봉도 아니었거든요.  이렇게 되자 아버지의 연줄로 들어갔던 수습 검사의 자리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당시 가진 것이라고는 건강한 몸과 야망 밖에 없던 젊은이들이 갈 곳은 두 군데 뿐이었습니다.  바다에 나가서 선원이 되거나 군에 입대하는 것이었지요.  그 중에서도 바다보다는 군이 훨씬 더 점잖고 안전한 직업이었고, 3월에 아버지 장례식을 치른 17세의 젊은 베르나도트는 그 해 9월에 왕실 해병 연대(Regiment Royal?La Marine)에 이등병으로 입대합니다.  아마 바다에서 가까운 가스코뉴 지방이라서 그랬나 봅니다.




(1771년~1791년 동안의 왕립 해병연대의 군복입니다.  베르나도트도 이 군복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거친 군에 들어간 베르나도트는 해병대 특성상 얼마 전에 프랑스 땅으로 복속된 코르시카 섬으로 배치되어 거기서 첫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께서는 시가지를 순찰하는 베르나도트 이등병에게 몰래 돌을 던졌다가 붙잡혀 얻어맞은 나폴레옹... 등의 이야기를 기대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때는 그 섬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이 11살이라서 그는 이미 브리엔(Brienne-le-Chateau)에 있는 예비사관학교에 입교해 있을 때였습니다.  점령군 베르나도트 이등병과 프랑스에 대한 반감으로 불타는 열혈 소년 나폴레옹이 멀리서라도 마주칠 일은 없었던 것이지요.  


그 이후로도 베르나도트는 브상콩(Besancon), 그르노블(Grenoble), 마르세유(Marseille) 등을 전전하며 군 생활을 계속 했습니다.  당시 부르봉 왕정 하에서의 프랑스군은 채찍질 처벌이 존재하는 등 거친 곳이었고 급여가 많은 곳도 물론 아니었으니, 어린 나이에 군 생활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름 군 생활을 충실하게 잘 했던 것 같습니다.  하긴 당시 프랑스군 졸병들 중에 글을 능숙하게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테니, 어리지만 배운 것도 많고 천성적으로 똘똘한 두뇌를 가졌던 베르나도트는 상관들의 눈에 띌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덕분에 그는 입대 5년 만에 하사(sergeant, 정확하게는 우리나라 병장에 해당)로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미군도 그렇지만 당시 모병제였던 프랑스군에서는 병사가 부사관으로 승진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는데, 베르나도트는 그걸 해냈습니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군대에서도 아는 것 많고 똑똑한 것도 중요했지만, 사실 외모도 꽤 중요합니다.  상관이든 부하든 남에게 호감을 주는 외모가 유리하지요.  또 외모는 타고나는 것 외에도 옷차림이나 청결 측면에서 잘 가꾸는 것이 중요한데, 당시 베르나도트의 별명이 '각선미 하사'(Sergeant Belle-Jambe)였던 것으로 보아, 그는 외모 측면에서도 꽤 신경을 쓰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들 때문에 그는 비록 부사관이었지만 승승장구 승진을 거듭 했습니다.  불과 5년 만인 1790년, 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특무상사(Adjutant-Major)로 승진하는데, 이는 당시 병으로 승진할 수 있는 최고 지위였습니다.  




(그러고보니 베르나도트의 다리가 길고 매끈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젊은 시절 베르나도트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베르나도트는 현재 프랑스에서는 일종의 기피 인물로서, 그와 연관된 기록 등은 별로 정리 발표된 것이 없거든요.  한번은 지금도 가스코뉴 포에서 베르나도트 박물관을 운영 중인 베르나도트 가문 사람이 파리 시장에게 편지를 써서 '왜 베르나도트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은 없는가?' 라고 문의를 하자 짧게 '라이프치히(Leipzig, 1813년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의 적으로 싸운 전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할 정도니까요.  덕분에 그가 언제부터 열렬한 공화주의자 자코뱅이 되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아마 한때 쁘띠-부르조아(petit bourgeois, 소시민 중산층)로서 안락한 삶이 예정되어 있다 서민층인 부사관 계급으로 떨어진 뒤,  자신보다 아는 것도 실력도 별로 없으면서 으시대며 군림하는 귀족 출신 장교들을 보며 그런 신분제 사회의 불합리성에 대해 조용히 분노를 키우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그가 죽을 뻔한 것은 그가 그르노블에 주둔할 당시 거기서 벌어진 '타일의 날'(Journée des Tuiles) 폭동에서 시민들의 손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폭동에서는 3명이 죽고 20여명이 다쳤는데, 그 부상자들 중 하나가 폭동 진압에 동원되었던 해병들 중의 그였습니다.  여기서 부상을 입고 쓰러졌던 그를 살려준 것은 빌라르(Dominique Villars)라는 식물학자 겸 의사였습니다.  나중에 스웨덴의 왕세자가 된 베르나도트는 이 때의 은혜를 갚고자 빌라르를 자신의 어전 의사로 데려가고자 했으나 빌라르가 사양했다고 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1788년 그르노블의 타일의 날 폭동은 바로 그 다음 해인 프랑스 대혁명의 전조 정도였습니다.  그림 속에서 그르노블 시가지에서 시민들의 공격을 받는 흰 군복의 병사들이 보이는데, 그들이 왕립 해병연대입니다.  베르나도트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장교로 임관되었는지도 그 과정이 불분명한데,  당시 흔히 그랬듯이 아마 그가 속했던 연대도 혁명 진행 과정에서 붕괴되어 버리고 국민 공회에 호응하는 새로운 부대들이 조직될 때 동료 병사들에 의해 장교로 선출된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입니다.  어린 시절 법률 공부를 하여 장교들 못지 않은 실력을 가진데다 키도 키고 외모도 멋지며, 게다가 정치적으로도 열혈 자코뱅다웠던 베르나도트가 신분제가 폐지된 사회에서 병사들의 지지를 받아 장교로 선출되는 것은 꽤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같은 가스코뉴 출신의 프랑스 원수 장 란도 원래 사병 출신의 제대 병사였다가 1791년 그런 과정을 거쳐 동료 병사들에 의해 장교로 선출된 바 있었지요.  어쩌면 베르나도트의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는 “Mort aux rois!” (Death to the kings, 왕들에게 죽음을)라는 문신도 이때 즈음 새겼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베르나도트에게 자코뱅 정신이 아주 활활 불타고 있을 때였지요.


그런 베르나도트는 혁명 초기의 혼란을 타고 진급에 진급을 거듭했습니다.  27세에 특무상사였던 그가 벨기에 쪽에 주둔했던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 장군의 상브레-므즈(Sambre-et-Meuse) 방면군에서 준장으로 승진한 것이 불과 4년 뒤인 31세였을 때니까요.  같은 해에 관측용 기구가 최초로 작전에 활용된 전투였던 플레뤼스(Fleurus) 전투가 있었고, 이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를 거두자 그도 사단장, 즉 소장으로 한번 더 승진을 했습니다.  1790년~1794년 사이 그의 활약이 어땠길래 이렇게 고속 승진을 했는지는 역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는 나폴레옹 같은 군사적 천재는 아닐지 몰라도 매우 유능한 실무 지휘관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령 2년 뒤인 1796년 9월 주르당이 카알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에게 대패를 당할 때, 상브레-므즈 방면군이 전멸당하지 않고 무사히 라인 강을 건너 철수할 수 있었던 것은 베르나도트의 탁월한 지휘 덕분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벨기에 방면군을 상브레-므즈(Sambre-et-Meuse) 방면군이라고 불렀던 것은 벨기에 한복판에 위치한 이 지역이 상브르 강과 므즈 강이 합류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있는 도시가 위 1838년 그림에 묘사된 나뮈르(Namur)입니다.  당연히 두 강이 합쳐지는 곳이므로 산업과 통상이 발달한 곳입니다.)




이런 활약은 총재 정부에서도 주목받았습니다.  비록 상브레-므즈 방면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주르당은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베르나도트는 몇 개월 뒤인 1797년 1월, 무려 2만 명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새롭게 떠오르던 전선인 이탈리아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가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은 물론 아니었고, 거기서 연전연승을 이어가던 떠오르는 수퍼스타 사령관에게 보충 병력을 끌고 가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아마 이 곳에서 자기보다 더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사단장에 올라 으쓱하던 그보다 무려 6살이나 더 젊은데도 그의 상관으로서 일개 군(armee) 전체를 지휘하던 사람은 물론 다름 아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둘의 만남은 출발이 전혀 상쾌하지 못 했습니다.


To be continued...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histoire.online/index.php/2017/05/05/le-tatouage-de-bernadotte/

https://www.sudouest.fr/2010/08/28/bernadotte-le-roi-republicain-170917-4344.php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www.tripadvisor.co.kr/Attraction_Review-g187087-d6121622-Reviews-Musee_Bernadotte-Pau_Communaute_d_Agglomeration_Pau_Pyrenees_Bearn_Basque_Country.html

https://fr.wikipedia.org/wiki/Dominique_Villars

https://fr.wikipedia.org/wiki/Journ%C3%A9e_des_Tui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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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d 2018.07.09 09: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일세의 대영웅 인 것 은 맞지만 한편 약소국 입장에서는 침략자이기도 함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겠죠?
    베르나도트의 배신(?)을 비난하는 프랑스 인 들의 심리가 어떻게 보면 이오지마에서 미국에 항복해서 살아 돌아온 일본군 생존자를 황국을 배신한 자 라고 비난하는 것 과 비슷하게 들립니다

    선진국이고 뭣이고 사람 사는 것은 똑같은 듯

    • 웃자웃어 2018.07.09 2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애초에 그를 스웨덴 왕이 된 시점에서는 배신자라고 욕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스웨덴 왕으로서 스웨덴을 위해 일한것일 뿐이니까요. 게다가 프랑스장군으로서는 프랑스에 충성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2. da 2018.07.09 17: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문과는 상관없는 질문이지만 혹시 탈라베라 전투에서 KGL의 활약에 대해 서술한 글을 혹시 아시나요? 탈라베라 전투 6편은 매우 재밌었습니다만 이때 올리브밭 총격전에 대한 글을 어디선가 본거같은데 불과 한두달만에 기억이 안나서 찾질 못해 질문 드립니다. KGL 여단장인가 연대장이 라피스와 총격전을 벌이다가 세바스티아니군이 들이닥치자 부상당했고 몇시간만에 전사했다는 글이 적혀있었는데 찾기가 매우 어렵네요....도움 부탁드립니다.

  3. da 2018.07.09 1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억이 너무 가물가물해서 탈라베라 전투가 아닐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KGL이 아닐수도...

  4. 뱀장수 2018.07.09 18: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니 저 상브레-므즈 연대의 연대가가 아주 유명하지 않던가요 ㅎㅎㅎ

  5. 웃자웃어 2018.07.10 0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질문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전쟁을 많이 했다고 주장하시던데, 전쟁을 한 해하고 전쟁을 하지 않은 해하고 프랑스의 군비지출이 어느정도 차이가 나죠? 예를들어 1802년~1804년사이에는 어느정도 군사비를 지출했나요?

  6. 석공 2018.07.10 0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7. 안토 2018.07.10 1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템포조절 기막히게 하시네요 ㄷㄷ
    다음 화 엄청 궁금함 ㅠ

  8. Charlie 2018.07.11 14: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책좀 읽었다고 자부해왔지만, 이 정도의 글을 계속 연재 하시는 능력 정말 놀랍습니다. 정말 뭐하시는 분이지, 이런 자료들은 어디서 구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주변에 나름 똑똑하다고 하는 친구들이 있는 회사에 있지만 식견있는 대화를 나눌 동료가 없어 외로울 때가 많습니다. 제 주변에는 자신의 의견을 조리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1도 없습니다. 혹 하시는 모임등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그 모임에 한번 참석하여도 될런지요 ?

  9. TheK2017 2018.07.22 12: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드디어 만났네요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