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02 06:30

1806년, 상황 판단 능력이 떨어지던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가 겁도 없이 나폴레옹에게 도전한 제4차 대불동맹전쟁에서 프로이센은 건국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 했습니다.  특히 10월 14일은 아마 프로이센 역사상 최악의 날이었을 것입니다.  프로이센 전체 야전군이라고 할 수 있는 12만 대군이 예나와 아우어슈타트에서 하루 아침에 산산조각 났거든요.  프로이센에게는 특히 아우어슈테트 전투가 뼈 아픈 상처가 되었습니다.  6만의 프로이센 대군이 불과 2만7천 밖에 안 되는 다부(Louis Nicolas Davout) 원수의 프랑스군 제3 군단에게 박살이 났으니까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박살낸 나폴레옹이 베를린에 입성할 때, 놀랍게도 베를린 시민들은 이 정복자에게 환호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프로이센의 귀족들은 물론, 프랑스군조차도 놀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우어슈테트 전투를 언짢게 생각한 것은 꼭 프로이센 사람들만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날 예나에서 호헨로헤 대공이 지휘한 프로이센군을 격파한 나폴레옹도 이 전투가 내심 불쾌했습니다.  먼저, 나폴레옹은 영광을 부하들과 나눠 갖는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필 같은 날, 자신의 심복인 다부가 더 적은 병력으로 더 빛나는 승리를 거둔 것이 기쁘면서도 그리 상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다부가 1대2의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야 했다는 자체가 자신의 큰 판단 미스를 그대로 드러내보이는 일이다보니, 나폴레옹은 체면이 서지가 않았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의 스타일은 결코 여포처럼 일당백의 용기를 발휘하여 더 적은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때려부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전체 병력 수는 적이 더 많다고 하더라도, 면밀한 정보 수집과 냉철한 상황 판단, 그리고 현란한 풋워크를 통해 정작 실제 전투에 참여하는 병력은 언제나 프랑스군이 조금 더 많도록 만드는 것이 나폴레옹의 장기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그가 지휘하는 전투에서 1대2의 수적 열세를 안고 프랑스군이 전투에 돌입해야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명성에 흠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나 전투를 완승으로 마무리한 그 다음날 새벽까지도, 자신이 호헨로헤 대공의 지원군이 아니라 프로이센군 주력 전체와 맞붙어 싸워이긴 줄 알고 우쭐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아침 다부로부터 온 전령이 빌헬름 3세 본인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 6만을 다부의 제3 군단 혼자서 무찔렀다는 아우어슈테트 전투의 승전보를 가져오자, 나폴레옹은 "자네 원수께서 헛것을 보신 모양"이라고 비웃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곧 사실이 드러나자, 나폴레옹의 입장은 몹시까지는 아니어도 살짝 난처해졌습니다.  부하들에게 체면이 서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곧 그의 실책을 뒤집어 씌울 희생양을 찾아냅니다.  바로 제1 군단장 베르나도트였습니다.  원래 전투 직전, 다부와 베르나도트는 함께 나움부르크(Naumburg) 근처까지 진격해있었습니다.  그때 나폴레옹에게 호헨로헤의 프로이센군이 포착되자, 이를 프로이센군 본대라고 착각했던 나폴레옹은 다부와 베르나도트에게 각각 별도의 명령서를 내립니다.  다부에게 호헨로헤의 퇴로를 끊기 위해 예나의 북서쪽인 아폴다(Apolda)로 내려와 포위망을 틀어막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베르나도트에게 내린 명령이 약간 애매모호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다부와 함께 나움부르크에 있다면 다부와 함께 아폴다로 가되, 만약 도른부르크에 있다면 뮈라와 합류하여 예나 방향으로 내려오라.  내가 선호하는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미 도른부르크에 도달한 상태라서, 예나에서 곧 벌어질 란의 전투를 지원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었지요.  이미 도른부르크에 주둔하고 있던 베르나도트는 성실히 그 명령에 따라 10월 14일 아침에 예나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아우어슈테트 방향에서 맹렬한 포격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베르나도트를 포함한 제1 군단 전체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부의 제3 군단이 적과 조우하여 명렬한 전투에 들어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아마 베르나도트는 약간 고민했을 것입니다.  무선통신이 없던 당시 군대에서는 현장 지휘관의 융통성이 무척 중시되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베르나도트는 전군에게 '뒤로 돌아' 명령을 내린 뒤 포격 소리를 향해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나폴레옹으로부터 '예나로 오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 본대의 위치를 포착했고 이를 포위섬멸하겠다고 무척 흥분한 상태였습니다.  당시로서는 나폴레옹의 판단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또 베르나도트로서는 뒤에서 들리는 포성이 다부와 맞붙어 싸우느라 포성을 울리고 있는 적이 2~3만 정도 규모라서 다부 혼자서도 충분히 싸울 수 있는 상황인지 아니면 다부에게 도움이 절실한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의 판단대로 예나에 있던 적이 10만에 달하는 프로이센 본대가 맞고 따라서 프랑스군도 모든 병력을 다 끌어모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다부의 싸움을 조금 더 쉽게 해주느라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의 명령을 어기고 아우어슈테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면 프랑스군 본대를 위태롭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베르나도트의 입장이라면 어떤 판단을 내리셨겠습니까 ?  더군다나 나폴레옹이 '내가 선호하는 것... 예나의 전투를 지원해주는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인 명령서가 주머니에 들어있는 상황이었는데 말입니다.  아마 대부분은 나폴레옹의 명령대로 그냥 그대로 예나로 진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르나도트도 같은 결정을 내리고는, 등 뒤에서 들리는 맹렬한 포성을 애써 무시하고 예나로 행군을 계속 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이 결정이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  결과적으로 보면 잘못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베르나도트는 아우어슈테트 전투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고, 예나 전투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베르나도트가 결과적으로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를 말아먹을 뻔 한 것은 그가 나폴레옹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베르나도트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은 베르나도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나폴레옹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하들 앞에서 난처한 상황에 빠진 나폴레옹에게 그런 점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원래 그런 면이 다분했습니다만) 특히 황제가 된 이후로 모든 공은 자신의 몫이고, 모든 과오는 부하들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부쩍 강해졌습니다.  그는 다부의 제3 군단이 당한 봉변에 대해 베르나도트를 맹비난했고, 까딱하면 그 자리에서 베르나도트의 지휘권을 박탈할 기세였습니다만,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어쨌건 그는 최초 명령서를 보낸 이후, 곧 새 명령서를 보내서 '상황이 발생하면 그에 따라 다부를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명령서는 대육군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아마 억울해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뭐 어쩌겠습니까 ?  자신의 제1 군단 전체가 예나에서도 아우어슈테트에서도 총 한 방 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상대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었는걸요.  베르나도트가 역사 속에서 두고두고 욕을 먹지만 정작 본인은 세상 억울하게 생각할 일은 이것 하나 뿐이 아니었습니다.  3년 뒤인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재현됩니다.


1809년 도나우 강변 바그람(Wagram)에서 오스트리아 카알 대공과 맞붙은 나폴레옹은 7월 5일 밤 프랑스군의 전선을 짜면서,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을 아더클라(Arderklaa) 마을에 배치했습니다.  이 마을은 고지 위에 위치한 오스트리아군에게 가장 가까운 지점이자 ㄴ자로 꺾어진 전체 전선의 돌출부에 해당하는 전선 중앙부로서 전체 프랑스군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다음날 새벽 공격을 가해온다면 가장 치열한 공격을 받을 곳이 바로 여기였고, 또 절대 무너져서는 안 되는 곳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역시 주요 전투에서 믿을 사람은 인척이자 경험도 많고 침착한 베르나도트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였을까요 ?  그건 확실히 아니었습니다.  당시 베르나도트가 맡고 있던 제9 군단은 프랑스 병사들이 아니라 대부분 작센(Sachen) 출신의 독일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던, 2진급 부대였습니다.  이들은 7월 5일 밤에 감행되었던 야습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큰 피해를 입어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고, 그나마 그 중 가장 정예라고 할 수 있던 뒤파(Pierre-Louis Dupas) 장군의 사단은 뚝 떼어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인 외젠의 이탈리아 방면군에게 배정해놓은 상태라서 도저히 치열한 전투에 투입될 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허약한 군단을 가장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는 아더클라에 배치했다 ?  이건 좀 이상했습니다.  게다가 이 아더클라 마을 전체는 바그람 고지 위에 늘어선 오스트리아군의 중포 사정거리 내에 있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이 배치에 대해서 의혹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에 베르나도트는 이번 원정 시작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2진급 군단인 제9 군단의 지휘를 맡긴 것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그나마 원정 준비를 시작하자 나폴레옹의 심복이자 참모장인 베르티에가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습니다.  원래 원정을 준비하는데는 군수품을 사들이고 보충병을 모집하는 등 엄청난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행정 업무에서 베르티에의 장난질이 분명한 방해 공작이 집요하게 제9 군단을 괴롭히자 베르나도트는 그만 폭발하여 나폴레옹에게 이번 원정에서 빠지겠다는 사임서를 보낼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 사임서에서 '보이지 않는 세력이 제9 군단의 원정 준비를 방해하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라며, 베르티에의 이름만 안 적었을 뿐 베르티에에 대한 노골적인 고자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의 사임 요청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베르티에를 견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그람 전투 전날 밤, 이젠 누가 봐도 '오스트리아 대포알에 맞아 두동강이나 나거라'라는 식의 전선 배치를 당한 것입니다.  




(1809년 7월 5일 밤 ~ 6일 새벽 사이 나폴레옹과 그의 부하 원수들간의 회의 장면입니다.  이 장소에 베르나도트는 없었습니다.  그의 불복종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제9 군단이 몇 시간 전의 야습 작전에서 큰 피해를 입고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베르나도트는 그의 병사들을 재규합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어려운 과제는 회의에 불참한 사람에게 떨어진다더니, 그래서 그의 제9 군단이 아더클라에 배치된 것일까요 ?  설마요.)




베르나도트는 여기서 진짜 거물다운 결정을 내립니다.  아더클라 마을을 사수하라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아예 그 마을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2~3km 물러나버린 것입니다.  베르나도트로서는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지휘였습니다.  7월 5일 밤의 야습 실패로 남쪽 방향으로 뿔뿔이 흩어진 그의 제9 군단 병사들을 재집결시키기 위해서는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유리했고, 또 오스트리아군의 습격이 뻔한 상황에서 차라리 아더클라를 먼저 내준 뒤 반격을 가해 탈취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이 그의 자기 합리화였습니다.  더 최악인 것은 베르나도트가 이 사실을 나폴레옹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나폴레옹의 의도는 두동강 난 자기의 시체를 보는 것인 모양이니, 차라리 알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그런 일탈 행위 덕분에 7월 6일 새벽 바그람 전투는 프랑스군의 대위기로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베르나도트를 비롯한 제9 군단의 작센 병사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후방으로 도주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대노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나폴레옹의 사령부 쪽으로 부하들과 함께 무질서하게 도망쳐 오는 베르나도트를 보고 분통이 터진 나폴레옹이 현장에서 그를 군단장직에서 해임했다고 합니다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베르나도트는 그의 원래 전략(?)처럼 일단 아더클라를 내준 뒤 탈환하기 위해 노력을 했고, 오히려 전투 후에 다시 한번 사임서를 내며 나폴레옹의 부당한 지휘에 대해서 항의까지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의 군단장직 사임서를 승인한 것은 전투 며칠 후였는데, 이유는 베르나도트가 뻔뻔하게도 이번 바그람 전투 승리는 그의 작센 병사들의 활약 덕분이었다고 제멋대로 발표한 성명서를 보고 나폴레옹도 폭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베르나도트와 나폴레옹의 불화는 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심해졌다가, 바그람 전투에서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더 깊은 상처를 받은 것은 베르나도트였습니다.  나폴레옹에 대한 그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가 바그람에서 쫓겨난 직후 지휘를 맡은 벨기에 전선에서 드러납니다.  바그람에서 혈투를 벌이던 오스트리아군을 돕기 위해, 영국군은 오랜만에 몸소 유럽 대륙에 상륙합니다.  장소는 벨기에였고, 영국 측에서는 이 작전을 월체른(Walcheren) 원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력부대가 바그람에 가있어서 속수무책이던 프랑스 측은 마침 실직자로 파리에 와 있던 베르나도트를 현장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2진급 부대를 이끌고 안트베르펜(Antwerpen, 영어로는 Antwerp) 방어에 나서게 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여기서 병사들에게 연설을 할 때 벨기에 해안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영국군에게 유린된 것은 나폴레옹 탓이라며 대역무도스러운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덕분에 그는 급한 불을 끈 뒤에 결국 다시 이 사령관직에서도 물러나야 했지요.  


여기서도 쫓겨난 베르나도트는 스페인 카탈루냐로 발령이 났습니다.  스페인 전선은 당시 아무 전공이나 영광을 기대할 수 없는 진흙탕이 되어 있었고, 그나마 카탈루냐는 스페인 전선 중에서도 비교적 후방으로 대표적 한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물을 먹은 베르나도트는 이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이 발령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아직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나폴레옹에게 소환되었고, 그와 별로 달갑지 않은 면담을 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도 베르나도트에 대해서는 거부감과 동시에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세상 이목도 있으니 그러지 말고 폼도 적당히 나고 지내기도 좋은 로마 총독으로 가라'라고 제안했고, 뭐 더 싸워봐야 얻을 것도 없었던 베르나도트도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는 결국 로마에 갈 수 없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로마에 가지 못한 이유는 다시 시간을 거슬러, 1806년 11월, 베르나도트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온갖 욕을 다 먹고 분루를 삼키며 내달렸던 북부 독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Jena%E2%80%93Auerstedt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gram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L%C3%BCbeck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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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웃자웃어 2018.08.02 08: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차라리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집권하지 않는게 프랑스에겐 차라리 이득이였을 지도 모르겠군요.

  2. ㅇㅇ 2018.08.02 0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우한 남자...ㅠㅠ

  3. 안토 2018.08.02 1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뒤통수 칠 만한 처우였네요...
    그런데 작성자님, 장 란 원수 이야기는
    예전 블로그에 있는 5편으로 마지막인가요?

    • nasica 2018.08.05 2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베르나도트는 뒤통수 안 쳤다니깐요.

      2. 장 란이 전사하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4. pms3278 2018.08.02 1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배신할만 했네요...

  5. 루나미아 2018.08.02 14: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시 생각해보니 다부가 위험한 상황인지 알 수 없는데 황제가 '적 주력은 내 쪽에 있다'고 하면, 굳이 어기고 다부에게 갔는데 별일 아니라면 그 후폭풍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겠네요. 예니-아우어슈테트 편 읽을땐 베르나도트가 너무 몸을 사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글 보니 새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는군요.

  6. 유애경 2018.08.03 0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여러모로 '치사한'나폴레옹 이네요!
    결국 부하들이 자신을 등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건 자업자득 이라고 해야겠죠!

  7. 방랑자 2018.08.04 08: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인트헬레나에서 난 부하들에게 배신당한 게 아니라 버려진 거라고 말했던 게 정말 많이 순화한 거네요. 이러고도 막판에 가서야 배신자가 나왔으니 나폴레옹이 대단한 건지 당시, 의리가 대단했던 건지...


    추신 : 오타 하나 신고. "23년 -> 3년"

  8. reinhardt100 2018.08.04 09: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당시, 다부가 정말 대단했던건 프로이센군이 처음부터 강습으로 나왔는데도 전열이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는겁니다. 특히 포병전력에서 4배 이상의 격차를 보였는데도 말이죠.

    사실, 프로이센군이 저렇게 병력 배치를 한 이유가 두 전투 중 한 곳에서 프랑스군 일부 병력을 격파한 후, 전병력을 끌어모아 프랑스군 잔여병력을 격파한다는 거였습니다. 전열보병 시대 최대의 기동전이었던 로이텐전투를 참고한 건데, 당시 3만 6천의 병력으로 8만의 오스트리아-바이에른 연합군을 기동전으로 대파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하고
    싶었던 겁니다. 1806년은 그 때보다 사정이 훨씬 좋다보니 기동전으로 프랑스군을 격파하겠다는 거였습니다만 문제는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나 바이에른 군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1분당 80보 걷던 군대랑 120보 걷던 군대가 같을리 없었죠.

    • 카를대공 2018.08.07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부는 정말 보면 볼수록 대단한 남자네요.
      오스트리아 전역 때고 그렇고 불리한 상황에서 절대 안 지는 점은 나폴레옹 휘하 원수 중 으뜸인거 같습니다.

    • reinhardt100 2018.08.09 2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부의 경우, 나폴레옹의 26원수 중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정도로만 따지면 가장 높은 축입니다. 그러다보니 나폴레옹 역시 '가장 위험한 전선의 소방수'로써 잘 활용했던 휘하 원수이기도 했습니다.

      마세나, 다부, 슐트, 베르티에가 군사적 능력이 가장 뛰어난 편이었는데 이 중에서도 마세나와 다부가 두각을 나타낸다고 봐도 될 듯 합니다.

  9. 석공 2018.08.04 2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

  10. TheK2017 2018.08.05 07: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정말 사수 잘못 만나 고생이 많았네요.
    다음 편이 기대 됩니다.

  11. 샤르빌 2018.08.05 12: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가족들과 최측근들은 죄다 배신을 때렸는데 피 안섞인 의붓자녀나 군단장, 근위병들은 마지막까지 따랐단게 참 묘합니다..

  12. 카를대공 2018.08.07 2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나도트가 정말 거물은 거물이네요.거기서 깔끔하게 황제의 명령을 씹고 물러난다라;
    괜히 왕이 된게 아닌거 같습니다.

2018.07.30 06:30

1798년은 베르나도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던 해였습니다.  데지레와 결혼하여 나폴레옹의 인척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운도 잘 트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군인에게 관운이 트인다는 것은 전쟁이 났다는 뜻이지요.  그 해 연말 경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과 스위스에서의 시민 혁명이 촉매가 되어 제2차 대불동맹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에 따라 11월, 그는 1개 감시군(l'armée d'observation)의 총사령관이 되어 라인강을 넘어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ürttemberg)의 필립스부르크(Philippsburg)로 진격하라는 임무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드디어 나폴레옹이나 모로, 오슈처럼 1개 군의 총사령관이 될 수 있던 이 기회는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애초에 아무 준비도 없이 시작한 전쟁이다보니 북부 이탈리아와 독일 전선에서 프랑스군은 연전연패를 이어갔기 때문에 베르나도트가 지휘할 감시군은 아예 편성조차 되지 못했고, 라인강을 넘을 기회도 없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1799년 7월, 베르나도트에게 더 큰 기회가 왔습니다.  일개 방면군 사령관보다 훨씬 더 높은 국방부 장관(ministre de la Guerre)이 된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군은 제2차 대불동맹전쟁에서 연전연패하고 있었는데, 이는 주로 형편없는 보급과 병력 충원 때문이었습니다.  제2차 대불동맹전쟁이 시작되면서 스위스 방면 감시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던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이 조사 보고한 바와 같이, 각 방면군들의 상태는 도저히 전쟁을 벌일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제1차 대불동맹전쟁 때 프랑스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의 활약 외에도 국방부 장관으로 있던 카르노(Lazare Carnot)의 뛰어난 활약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군대에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전국 교회의 종을 압류하여 녹이고 화학자들을 불러모아 질산칼륨을 제조하고 새로운 무두질 방법을 개발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여 병력과 물자를 전선으로 보냈고, 덕분에 승리의 조직자(L'Organisateur de la Victoire)라는 칭송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프랑스군이 1798년 말에는 왜 이 모양이 되었느냐고요 ?  나폴레옹과 총재들이 1798년 9월의 프릭튀도르 친위 쿠테타를 일으켜 쫓아낸 인물 중에 카르노도 있었거든요.  




(카르노입니다.  열역학에 나오는 카르노는 이 양반이 아니라 이 양반의 아들인 Sadi Carnot 입니다만, 이 양반도 당대의 저명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습니다.  이 양반은 프릭튀도르 쿠데타로 쫓겨난 바로 그 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la métaphysique du calcul infinitésimal, 즉 무한 미적분의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조차 어려운 수학책을 발표했습니다.  상황이 안 돼서 공부를 못한다는 말을 부끄럽게 만드는 아주 잔인한 양반입니다.)




어찌 보면 베르나도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은 현장에서 용맹과 지략을 발휘하는 현장 지휘관보다는 이런 행정가로서의 역할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의욕을 가지고 프랑스군 보급 및 충원을 위한 조치들을 취해 나가며 카르노의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내지도 않은 사임서가 신문에 게재되었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베르나도트는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진짜 장관직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이는 총재 정부의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ès)와 뒤코(Pierre Roger Ducos)가 꾸민 음모였는데, 궁극적으로는 여기에도 나폴레옹이 간접적으로 관여되어 있었습니다.   사실상 실패한 이집트 원정군을 내팽개치고 나폴레옹이 홀몸으로 프랑스에 귀국하자, 이미 현정권으로는 죽도 밥도 안되겠다고 생각했던 시에예스 등의 총재들은 나폴레옹을 이용하여 다시 한번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면 국방부 장관의 협조도 필요했는데, 파리 정계에서 베르나도트가 어울리는 인물들이 자코뱅파 사람들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열혈 자코뱅이 친위 쿠데타에 협조할 리가 없다'라고 판단을 내리고 베르나도트를 미리 뽑아내 버린 것이었습니다.   





(시에예스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세계사 시간에 프랑스 대혁명 관련하여 이 사람이 지은 다음의 명문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물론 사람 자체는 쓰레기에 가깝습니다만, 쓰레기가 지은 문장이라고 해도 정말 뛰어난 문장입니다.

Qu’est-ce que le Tiers-État ? Tout.   제3 계급은 무엇인가 ?  모든 것이다.

Qu’a-t-il été jusqu’à présent dans l’ordre politique ? Rien.   여태까지 정치 체계에서 그것은 어떤 것이었나 ?  아무 것도 아니었다. 

Que demande-t-il ? À y devenir quelque chose.   그것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  무언가가 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물론 시에예스 따위의 정치 협잡꾼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바지저고리가 아니었습니다.  브뤼메르 쿠데타는 그런 썩어빠진 총재 정부의 잔당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꿈꾸던 나폴레옹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는데, 나폴레옹도 쿠데타를 위해서 직접 베르나도트의 협조를 구했습니다.  그는 브뤼메르 쿠데타가 시작되던 브뤼메르 18일 (1799년 11월 9일) 아침에도 베르나도트를 불러 최소한 중립을 유지해줄 것을 정중하게 부탁했으나, 베르나도트의 답변은 '당신의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겠다... 하지만 의회가 너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난 그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라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습니다.  확실히 베르나도트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코뱅 원칙주의자일 뿐,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와 동서지간이었던 자신의 형 조제프에게 '그와 식사라도 하며 하루 종일 그를 감시해달라'고 부탁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자, 베르나도트와의 관계는 그날 아침의 답변처럼 정말 애매모호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분명히 쿠데타에 협조한 공신록에 이름을 올릴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폴레옹 본인과 혼인 관계로 얽힌 인척인데다 최소한 쿠데타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인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그의 답변처럼 애매모호한 임무를 주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일개 군의 총사령관, 즉 서부 방면군(l' armée de l'Ouest) 사령관으로 임명하되, 너무 참혹한 학살과 보복으로 점철되어 다들 꺼리는 분위기였던 방데(Vendée) 지방 반란 진압의 임무를 준 것이었지요.  그런데 베르나도트는 이 임무를 약 1년에 걸쳐 또 매우 훌륭하게 잘 수행해냈습니다.  하긴 왕당파의 깃발을 올리고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을 잔혹하게 숙청하는 것에 대해, 가슴에 '왕들에게 죽음을(Mort aux rois)'이라는 문신까지 간직한 열혈 자코뱅 베르나도트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을 것 같긴 합니다.  




(이 그림은 1793년 낭트(Nantes)가 함락된 이후 자코뱅 혁명군이 카톨릭을 신봉하는 왕당파 시민들을 물에 빠뜨려 죽이는 장면입니다.  원래는 포로로 잡힌 시민들을 구석에 몰아넣고 그냥 마구잡이 사격으로 사살했는데, 기관총이 아닌 관계로 그 사살 속도가 시원스럽지 않자 대형 보트에 시민들을 잔뜩 싣고 강 한 가운데로 가서 보트들을 통째로 침몰시켰다고 합니다.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도 가리지 않고 학살하기도 했으며, 저 그림에서 묘사된 것처럼 여성들의 옷을 벗기고 다른 남성과 함께 묶은 채 길거리에서 조리돌림을 하다가 죽이기도 하는 등, 방데에서는 그야말로 끔찍한 제노사이드(genocide)의 전쟁 범죄가 횡행했습니다.  이런 야만적 진압은 결국 반작용을 낳아 방데 지방에서는 이후로도 계속 크고 작은 반란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껄끄러운 측근으로 비교적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할 때 임명한 18명의 초대 육군 원수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엄청난 전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폴레옹의 충신도 아닌데 원수로 임명된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18명의 원수들 중에는 그런 어정쩡한 위치의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가령 뚜렷한 전공도 없이 허명만 요란한 주르당의 경우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쿠데타 때 근위대 병사들에게 두들겨 맞으며 생 끌뤼(Saint Cloud)에서 쫓겨난 의원들 중 하나일 정도로 나폴레옹과는 대립각이 있는 사람이었는데도 이 명단에 들어갔습니다.  또 오쥬로(Pierre Augereau)의 경우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침공 당시 마세나와 함께 나폴레옹의 필승 원투펀치로 활약했지만, 정치적으로 철저한 자코뱅이라서 결국 나폴레옹의 심복이 되지는 못한 사람이었는데 그도 명단에 올라갔지요.  반면 나폴레옹의 초창기부터의 심복이자 전공도 많았던 마르몽(Auguste de Marmont)은 1809년에나 원수가 됩니다.  즉, 당시 누가 원수가 되느냐는 단지 얼마나 잘 싸우고 나폴레옹과 얼마나 친하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군과 정계에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 인물인가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독재 권력을 추구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전제군주가 아니라 국민의 지지에 의해 즉위한 황제였으므로 그런 사회 각계 각층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크게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총재정부 시절 나폴레옹 밑에서 크게 활약했던 오쥬로가 정작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은 이후에는 별 활약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오쥬로의 철저한 자코뱅 성향 때문이라고도 하고 그냥 오쥬로의 그릇이 딱 거기까지일 뿐 더 뛰어난 장군들에게 밀린 결과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만 저는 오쥬로가 나폴레옹에게 물을 먹은 것은 이 그림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이 그림은 테브냉 Charles Thevenin이라는 화가가 총재정부의 위임을 받아 그린 '아르콜레 다리에서의 오쥬로'(AUGEREAU AU PONT D’ARCOLE) 라는 그림인데, 이 그림에서는 아르콜레 다리를 앞장 서서 돌파한 사람이 나폴레옹이 아니라 오쥬로로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저렇게 깃발을 들고 자살 공격대의 맨 앞에 서지 않았지요.  이 그림은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은 뒤 그로 및 베르네 등의 더 뛰어난 화가들의 그림으로 신속하게 교체되었습니다.  나폴레옹 같은 거물이 그렇게 치사했겠냐고요 ? 치사했습니다.)




(윗그림은 유명한 그로(Antoine-Jean Gros)의 '아르콜레 다리에서의 나폴레옹'이고 아래 그림은 베르네(Horace Vernet)의 같은 제목의 그림입니다.)




그렇게 나폴레옹 치하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베르나도트는 하노버(Hanover) 등 주로 독일 북부 지방에서 총독으로 근무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평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워낙 뛰어난 행정가였던데다 합리적이고 중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프랑스 제국의 압제 하에 신음하는 처지였던 하노버 지방 사람들은 큰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그의 통치에 순종하는 편이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권위도 그에 따라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또는 데지레 때문인지 그는 1805년 12월의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주로 예비대로 있다가 전투 막판에 투입되어 상대적으로 전공이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폰테 코르보 대공(1st Sovereign Prince of Ponte Corvo)이 되어 드디어 귀족의 반열에 오르는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있어 베르나도트는 여전히 껄끄러운, 상전같은 부하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껄끄러운 관계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곧 벌어집니다.  




** 다음 편은 많이들 짐작하시다시피 과거에 이미 다룬 유명 전투들 이야기가 됩니다.  제 블로그에 처음 오시는 분도 있을 것이고 또 내용 전개상 건너 뛰고 갈 수는 없어서 다루긴 다뤄야 하는데, 아무래도 과거에 썼던 글의 재탕이라고 느끼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해서, 다음 편인 제6편은 원래 재탕글을 올리는 목요일 아침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로서는 다음 편은 날로 먹으려고 했는데 잘 안 되는군요...)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D%C3%A9sir%C3%A9e_Clary

https://fr.wikipedia.org/wiki/Charles_XIV_Jean

https://en.wikipedia.org/wiki/Lazare_Carnot

https://www.napoleon.org/histoire-des-2-empires/iconographie/augereau-au-pont-darcole-15-novembre-1796/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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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ANNES 2018.07.30 1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글 잘읽고 갑니다~
    근데 다음편 아우슈테트 전투 재탕 하실꺼죠? 흑흑..ㅜㅜ
    무더위 조심하세요~~ㅋ

    • nasica 2018.07.30 1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억 어떻게 알았지...?) 말씀하신 대로 써놓고 보니 사실상 재탕이라 저로서는 날로 먹는 겁니다. 그렇다고 내용 흐름상 빼고 갈 수는 없으니, 대신 다음편은 원래 재탕을 올리는 목요일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 한글맨 2018.07.30 1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윽 2등

    애매모호하다는 '모호하다'로 쓰는 게 낫다는 이야기가 있네요
    아랫 글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
    '말이나 태도가 흐리터분해 분명하지 않다'는 뜻으로 쓰는 단어들로 '모호하다''애매하다''애매모호하다'가 있다.

    한자어 '모호(模糊)'와 '애매(曖昧)'는 같은 뜻이며, 우리나라에서는 '분명하지 않음'의 뜻으로 원래 '모호'만 사용하고 '애매'는 쓰지 않았다.

    우리와 달리 일본에서는 '애매'와 '애매모호'도 '모호'와 같은 뜻으로 쓰고 있다. 이것을 다시 우리가 받아들여 사용함으로써 '모호하다' 외에 '애매하다''애매모호하다'가 함께 쓰이고 있으며, 지금은 국어사전에도 모두 올라 있다. 그러나 같은 의미의 단어인데 굳이 일본식인 '애매하다''애매모호하다'를 쓸 필요가 없다. '애매모호'는 더구나 같은 뜻을 가진 단어의 중복 형태다.

    더 큰 문제는 한자어 '애매(曖昧)하다'와 별개로 순 우리말 '애매하다'가 있어 혼란스럽다는 점이다. 순 우리말로서의 '애매하다'는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아 억울하다'는 뜻이다. "애매하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다" "애매한 사람을 죽이려 들지 마라" 등에서처럼 쓰인다.
    출처 : 중앙일보, 우리말 바루기

  3. 유애경 2018.07.30 1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끊임없이 나폴레옹의 경계와 견제를 받았지만 진정한 승리자는 베르나도트 였을것 같다는...

    항상 여러가지 글 잘보고 갑니다.

  4. 찐빵 2018.07.30 18: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랑스인들도 상당히 잔인하네요.방데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했건 잊어서는 안 될 사건 같습니다.

  5. 방랑자 2018.07.30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805년 12월 이후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이라면,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의 말을 따르기만 했다가 짐승이 말도 안되는 공적을 세우게 만든 그거겠군요.

  6. reinhardt100 2018.07.30 2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데가 드디어 나오네요. 이 방데반란이 꽤나 요인이 복잡하죠.

    혁명 초기 의외로 교계는 혁명에 동조적이었습니다. 이들 역시 사회하층민들과 직접 동고동락했으니까요. 교계 재산을 국유화한 재원으로 아시냐 지폐를 발행하는 거도 교계에서 동의한 데 다 이유가 있습니다. 당장 성경에도 이웃을 살피라는데 하물며 교구의 민중들이 다들 굶주리는데 자신들의 재산으로 이를 구원하겠다는데 반대할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요. 방데 지방은 이런 일반적인 프랑스 지역과 달랐다는게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방데 지방은 다른 지방과 달리 자작농 비율이 높았고 교회 재산이라는 것도 '교회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가 공유하는 재산을 교회가 관리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걸 혁명정부가 갑자기 아시냐 만든다고 몰수하겠다고 하니 다들 눈이 돌아버릴 상황이 된 겁니다.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게 혁명전쟁 발발 후 30만 징병령이 내려진겁니다. 그것도 방데에서 가장 먼저 징병이 시작된 겁니다. 가장 후방인데 가장 먼저 징병한다고 하니 주민들이 격분한 건데 이걸 본 혁명정부는 일벌백계로 때려잡으려다보니 방데를 박살내기로 작정했고 진압이 극단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겁니다. 이 당시 방데 인구가 70만 좀 넘었는데 최소 10만 단위로 학살이 이루어졌죠.

    이 때문에 방데는 부르봉 왕정 복고를 가장 열광적으로 지지했고 나폴레옹의 제2제국 시절까지만 해도 대놓고 삼색기를 거부했고 이 때문에 중앙정부와 충돌하는게 다반사였습니다. 보불전쟁이 프랑스에 미친 가장 긍정적인 영향이 무엇이냐고요? 방데지방이 혁명 이후 처음으로 공화국을 지원하면서 어느정도 혁명을 인정했다는 겁니다. 조국 프랑스가 위기에 빠졌고 더 이상 부르봉 왕정복고도 불가능한 현실을 인정하고 공화국과 화해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겁니다. 제3공화국 정부 역시 이즈음부터는 방데에 대하여 지원을 어느 정도 늘려주어 민심을 다독였고요. 방데조차도 삼색기를 인정했으니 이제 다시는 왕정복고 따위는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자신감이 넘치게 된 거니까요. 이 시기부터 혁명기념일이 단지 파리와 혁명에 동조했던 북부 일부만의 축제가 아닌 전국민이 제3공화국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시켜주면서 국민 모두가 즐기는 진정한 국경일이 된 것도 덤입니다.

    • 2/28일 입대 2018.07.31 23: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와 저렇게 긴 내용을 이렇게 짧게 다 커버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방데 내전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봤어도 그 전개과정은 처음 보네요

    • reinhardt100 2018.08.09 2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이제서야 확인했습니다. 답글이 늦었는데 이 방데 문제는 꽤나 복잡합니다. 책으로 보시는게 더 정확할 겁니다.

  7. 투팍아마르 2018.07.30 2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날로 드시든 회쳐 드시든 상관없습니다. 자주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베르나도트 이 양반도 어지간히 꼬장꼬장한 성질인것 같습니다. 이 정도 인물이 살짝만 숙여도 나폴레옹처럼 허세 있는 타입은 입이 헤벌레해서 막 퍼줬지 싶은데 끝까지 긴장관계가 유지된걸로 봐선 한 성미 한다고 봐야겠죠? 그리고 방데지방을 지도에서 찾아보니 주변 도시가 낭트, 라로셀등이 있는데 옛날 위그노의 본거지인 동네더군요. 독립운동가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부류가 일본인보다는 오히려 한국인 앞잡이들이었던 것처럼 방데 역시 위그노의 본진에서 카톨릭으로 전향한 동네라 오히려 카톨릭에 대한 혁명정부의 억압에 더 반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8. ...... 2018.07.31 0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무원 수험 헌법, 사법시험 헌법쪽에서는 시에예스의 국민주권론과 루소의 인민주권론을 죽어라 배웁니다.
    매년 40문제 5지선다 중 최소 한두지문은 나왔거든요.

  9. 메에용 2018.08.01 06: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재밌어요

  10. ㅇㅇ 2018.08.01 18: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부 제대로 하는 사람은 정말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무슨 시련이 오든간에 알아서 하는군요

  11. TheK2017 2018.08.02 06: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네요. 다음 이야기 기대하겠습니다. ^-^0*

  12. 석공 2018.08.04 2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더위 조심 하세요.

2018.07.26 06:30

요즘 기후 온난화의 위기를 다들 온몸으로 느끼시고 계실 겁니다.  전에 제가 조선시대 임금님보다도 요즘 서민이 더 호화로운 삶을 사는 편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미국이나 유럽 사회에서도 1950년대의 서민들에게 19세기 말의 귀족들의 생활을 하게 한다면 불편해서 못 견딜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건 특히 여름철에 그렇습니다.  전기와 냉장고, 에어컨이 정말 대단한 차이를 만들어내거든요.  이렇게 날씨가 더워지면 뭔가 찬 음료수를 찾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전기도 냉장고도 없던 나폴레옹 시대, 유럽인들은 여름철에 어떤 음료를 주로 마셨을까요 ?





Hornblower in the West Indies by C.S. Forester (배경: 1821년 자메이카) -----------------


(혼블로워 제독이 자메이카 함대 사무실 건물에 막 출근해서 비서 및 부관의 인사를 받습니다.)


"아침이구만."  (원문에서는 Good morning 대신 그냥 Morning이라고 했습니다.)

혼블로워가 다소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아직 아침 커피를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가 아니었다면 '아침'이라는 말 앞에 '좋은'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말했을 것이다.


그가 책상에 앉자 부관인 제라드가 아침 보고를 시작했고, 비서 스펜들러브가 서류 뭉치를 들고 그의 어깨 너머로 다가왔다.


(...중략...  혼블로워가 부하들에게 짜증을 부리며 보고를 받습니다.)


그는 어깨너머로 비서를 쳐다보았다.  "자넨 보고거리로 뭘 가지고 있나, 스펜들러브 ?"


스펜들러브는 서둘러 손에 든 서류를 정리했다.  혼블로워의 커피는 이제 막 어느 순간에라도 도착하기 직전이었는데, 스펜들러브는 그의 상사가 최소한 그 커피의 절반 정도를 마시기 전에는 내놓고 싶지 않은 보고거리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여기 석월 (ultimo) 31일자의 조선소 통계 보고서가 있습니다, 남작님." 스펜들러브가 말했다.


"그냥 지난달 (last month) 말일이라고 하면 안되나 ?" 혼블로워는 보고서를 받으며 땍땍거렸다.


"알겠습니다, 남작님." 스펜들러브는 커피가 빨리 도착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말했다.


"이 보고서에 뭐 특별한 내용은 ?" 혼블러워가 서류를 훑어보며 물었다.


"남작님이 특별히 신경쓰셔야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뭐하러 내게 이걸 들이미나 ?  다음은 ?"


"콜린다 호의 새 포술장(gunner)과 조선소 통목장(cooper)의 준위 임명장입니다, 남작님."


"남작님, 커피가 왔습니다." 제라드가 이때 말했는데, 그의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넘쳐 흘렀다.


"아예 안오는 것보다야 늦는 게 낫지." 혼블로워가 쏘아붙였다.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내 주변에서 법석떨지 말게. 내가 따를테니까."


스펜들러브와 제라드는 서둘러 혼블로워의 책상에 커피 쟁반을 내려놓을 공간을 만들고 있었는데, 혼블로워의 말에 스펜들러브는 커피 포트의 손잡이에서 잽싸게 손을 치웠다.


"젠장 너무 뜨겁군." 혼블로워가 한모금 마시며 말했다. "항상 너무 빌어먹게 뜨겁단 말이야."


바로 지난주부터 절차가 새로 바뀌었는데, 그에 따르면 커피는 혼블로워가 사무실에 도착하고 난 뒤에 가져오게 되어 있었다.  그전처럼 혼블로워가 사무실에 오기 전에 먼저 가져다 놓으면, 커피가 식어버려 혼블로워가 그에 대해 불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펜들러브나 제라드 모두 지금 이 상황에서 그 사실을 혼블로워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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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자메이카는 더운 곳입니다.  그런데도 주인공 혼블로워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이건 혼블로워의 개인적인 취향이라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당시 사람들에게는 차가운 음료라는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요 ?  


여기서 잠깐, 그냥 차나 커피를 차갑게 식혀서 마시면 안되었던 것일까요 ?





Sharpe's Waterloo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5년 벨기에) ----------------


(샤프 중령이 워털루 전투 며칠전, 혼자 말을 타고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정찰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도를 조심스럽게 펴고는 탄약주머니에서 몽당연필 하나를 꺼내 적 기병대를 목격한 장소에 X 표시를 했다.  사실 아직 그가 샤를롸(Charleroi)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확실치 않았으므로, 그가 표시한 위치는 대략적인 것이었다.

그는 지도를 치우고, 그의 수통 뚜껑을 열어 차가운 홍차(cold tea)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는 모자를 벗었는데, 그러자 감지 않아 떡진 그의 머리칼에 모자테 자국이 뚜렷이 남았다.  그는 얼굴을 문지르고, 하품을 한 뒤, 다시 모자를 눌러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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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십쇼.  여기서 주인공이 차가운 홍차를 마시고 있쟎습니까 ?  아시다시피 워털루 전투는 6월에 일어났으니까, 이미 저때면 어느 정도 더울 때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인 샤프도 차가운 음료를 마시는 것 같습니다...만 실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 장면에서 샤프가 마시는 차가운 홍차(cold tea)라는 단어에서, cold라는 형용사의 의미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또 제 카투사 시절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미군 식당에 가보면 배급하는 음식마다 다 이름을 친절하게 써놓았더군요.  그런데 사과가 놓인 곳을 보니, 'fresh apples'라고 씌여 있더군요.  저는 그때 속으로 '별로 신선해보이지도 않는구만 뭘 저렇게 신선한 사과라고 생색을 내서 써놓았을까' 라고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누가 vegetable과 salad의 차이를 아냐고 물으면서 알려주더군요.  기본적으로 식당에서 vegetable이라고 하면, 굽거나 삶은 것을 뜻하고, salad라고 하면 그냥 날로 먹는 것을 뜻한다고요.  그러고보니, 사과든 채소든 앞에 'fresh'라고 써놓은 것은, '신선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익히거나 드레싱을 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라는 뜻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건 샐러드가 아닙니다.  베지터블입니다.)




저 위 소설 속에서 샤프가 마시던 'cold' tea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즉 이는 '차갑게 식힌 홍차'가 아니라, 그냥 '식은 홍차'라는 뜻입니다.  이 샤프 시리즈를 읽다보면 흔히 나오는 음식이 'cold chicken'이나 'cold beef' 같은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도 일부러 차갑게 식혔다는 뜻이 아니라, 원래는 뜨거웠지만 식어버린 음식을 뜻합니다.  지금 저 소설 속의 상황을 보면 샤프는 말을 타고 최전선에 나가 정찰을 하고 있거든요.  저 상황에서 우아하게 뜨거운 차를 마실 여유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냥 뜨거운 차를 수통에 넣어왔으나, 그냥 식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일부러 차갑게 서빙하는 고기 요리나 수프도 있긴 합니다.  사진은 대표적인 스페인식 토마토 수프인 가스파초 Gazpacho인데, 차갑게 먹는 수프입니다.  스페인에 여행 갔을 때 꼭 먹어봐야지 하고 벼르다가 어느 식당에서 파는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시켰는데, 저는 윗 사진 같은 것을 기대했는데 어이없게도 아래 사진처럼 플라스틱 컵에 주더군요 !  맛은 뭐 그냥그냥 그랬습니다.)




사실 대표적인 차가운 음료가 있기는 했습니다.  바로 와인과 맥주지요.  좀더 서민적인 찬 음료로는 스몰 비어(Small Beer)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맥주는 주로 영국이나 독일 등 북부 유럽에서나 많이 마시던 술이었고, 또 와인은 그냥 더위를 식히려고 마시기에는 다소 알코올 농도가 높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와인은 가격이 좀 부담이 된다는 문제도 있었지요.




(화이트 와인은 차게 마신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더위 식히려고 마시기에는 알코올이 좀 센 편이지요 ?)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아주 좋은 음료수가 있긴 했습니다.  더운 중동지방에서는 일찍부터 셔벳을 마셨고 17~18세기 경부터 유럽에도 이 음료가 일부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셔벳(sherbet)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중세 아랍어인 sharâb 으로서, 뜻은 그냥 '마실 것(drink)'입니다.  이것이 약간 변형되어 shabât가 되면서 무알콜성 음료수를 뜻하게 되면서, 인도와 페르시아 등지로 펴져 나가면서 sharbat가 되었고, 투르크어에서는 sherbet으로 불리다가, 그 발음 그대로 영어의 sherbet이 된 것입니다.  프랑스어로는 sorbet(소르베)이라고 전해졌지요.  한마디로, 저 위 소설 속에 묘사된 것처럼, 셔벳은 중동의 음료입니다.  더운 지방에서는 뭔가 차갑고 시원한 것이 환영 받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당시 이집트나 투르크 등은 이슬람 국가로서, 알콜성 음료가 (적어도 겉으로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지요.  그래서 다른 종류의 음료, 즉 차나 커피 같은 것들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셔벳입니다.  당시 중동에서 마시던 셔벳에는 우유 등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냥 과일 쥬스 정도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설탕물에 과일즙을 넣고 꽃잎, 허브 등의 추출액으로 향을 더한 마실 것이 바로 셔벳입니다.  당연히 시원하게 만들어서 마셨지요.  




(라임 사르밧, 즉 라임 셔벳입니다.)




중동 출신의 셔벳 말고도, 유럽에서 시작된 차가운 음료가 있지요.  바로 상그리아(sangria)입니다.  역시 추운 북부 유럽이 아니라, 유럽에서는 더운 지방에 속하는 스페인이 원산지입니다.




Blue at the mizzen by Patrick O'Brian (배경: 1815년 지브랄타 영국 해군 기지) ---------


잭은 가끔씩 병사들의 경례를 받으며 조용한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비록 먼 곳에는 아직 화재가 타오르고 있었고 폭도들의 소음이라기보다는 먼 곳의 천둥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고는 있었지만)  고맙게도 이제 지브랄타에 질서가 강림한 것 같았다.  게다가 측량관 사무실의 몇 명의 문지기와 하급 서기들에 따르면 지난 3시간 동안은 상급 관리들이 아무도 건물에 나타나지 않았다니, 거의 완벽했다.  병원도 아주 질서정연한 모습이었다.  잭은 병원 바깥의 벤치에 앉아 차갑게 식힌(iced) 와인과 오렌지 쥬스, 레몬 쥬스를 섞은 음료를 빨대로 마시며 대각성 (Arcturus)이 점점 더 뚜렷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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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대로 음료를 빨아마시는 잭의 모습이 조금 생소하십니까 ?  사실 저시대의 밀짚 빨대는 그다지 낯선 물건이 아닙니다.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의 장군이던 크세노폰의 기록에도, 맥주를 밀짚 빨대로 빨아마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여기서 말하는 와인과 오렌지 쥬스, 레몬 쥬스를 섞은 찬 음료가 바로 상그리아입니다.  지금도 스페인 등지에서 매우 즐겨 마시는 알코올성 음료인 상그리아는 사실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단어인데요, 이유가 미국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음료라서 그렇습니다.  유럽에서는 17세기 이후로 꽤 인기있는 음료여서 파티, 특히 여름철 파티에서 자주 제공되었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엠마' 등에서도 클라레 펀치(Claret Cup Punch) 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클라레 펀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 음료가 주로 클라레 와인, 그러니까 보르도 (Bourdeaux)산 레드 와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인데, 사실 뭐 꼭 보르도산 와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화이트 와인으로도 만들었습니다.  물론 오렌지나 레몬 쥬스 뿐만 아니라 라즈베리나 블루베리, 사과 등의 과일을 넣기도 했고요. 




(솔까말 제인 오스틴 소설은 별로 공감도 가지 않고 재미도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위에서 보면 이 상그리아에 얼음을 넣었다(iced)고 되어 있는데요, 냉장고도 없던 당시에도 과연 여름철에 얼음을 구할 수 있었을까요 ?  사실 있었습니다.  Ice house라고 해서, 우리나라 석빙고 같은 얼음 저장고가 꽤 많았습니다.  페르시아에서는 기원전 4세기부터, 영국에서는 약 17세기부터 이런 ice house가 건설되기 시작했지요.  물론 이런 것은 상당히 많은 비용이 들었고 양도 많지 않았으므로 여름철 얼음은 상당히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조선 시대에 임금이 여름철에 대신들에게 얼음을 하사하기도 할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지요.  하지만 19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는 이런 얼음 산업이 꽤 발전하면서 이런 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업자도 생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Yazd 지방에 아직도 서있는 yakh-chāl 입니다. 이 yakh-chāl은 겨울철 인근 높은 산에서 가져온 얼음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구조물입니다. 기본적으로 얼음은 땅 밑에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저장하되, 그 위에는 진흙과 모래, 계란 흰자위, 석회, 염소털 등 희안한 재료를 섞어만든 sārooj 라는 특수 단열재 벽돌로 원뿔형 탑을 만들어, 그 밑에 있는 얼음이 녹지 않도록 단열을 하고, 또 바람의 힘으로 조금이라도 온도를 낮추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잘 났다는 앵글로 색슨들이 17세기부터 짓기 시작한 것을, 아이큐도 낮고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는 이란 사람들은 기원전 4세기부터 지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 있는 ice house의 모습입니다.)



(1825년에 미국에서 문을 열어 냉장고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 영업을 했던 Jamaica Pond Ice Company의 위엄)




하지만 저 위 소설의 배경인 19세기 초반, 그것도 스페인 반도 남쪽 끝인 지브랄타에서는 윗 장면의 배경인 6~7월달에 얼음을 구할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설마 군사 기지인 지브랄타에서 ice house를 지어놓고 얼음을 저장하고 있지도 않았을테니까요.  이건 제 짐작입니다만, cold라는 단어는 원래는 뜨거운 것이 식은 것을 뜻하는 것이고, 일부러 더 차갑게 식힌 것은 iced라고 부르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요.  생각해보면 미군 식당에 항상 준비되어 있던 음료가 바로 콜라 같은 탄산음료와 함께, 뜻 밖에도 몸에 좋은 아이스 티 (iced tea)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스 티를 담은 투명 용기 (fountain) 속을 보면 정작 얼음은 안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이스 티라고 불렀지요.  같은 맥락인 것 같습니다.




(정말 뜻 밖에도, 미군 식당의 아이스티는 달지 않더군요 !  그래서 저는 콜라만 마셨지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아이스 티 이야기로 끝을 마치지요.  원래 차는 뜨거운 것이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미국에서 1904년 세인트 루이스의 세계 박람회 때, 블레친든(Richard Blechynden)이라는 영국인 홍차 상인이 더운 날씨로 인해 뜨거운 홍차가 잘 팔리지 않자, 얼음을 넣어 차갑게 했더니 불티나듯 팔린 것에서 시작된 것이 아이스 티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이미 19세기 중반에 미국의 가정용 요리책에 티 펀치 (tea punch)라는 이름의 아이스 티 요리법이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초기 아이스 티의 특징은 2가지인데, 하나는 홍차가 아닌 녹차를 베이스로 한다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엄청나게 많은 설탕을 써서 달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원래 미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원래 차보다는 커피를 많이 마시긴 했지만) 홍차만큼 녹차도 많이 마셨다고 하네요.  그런데 2차 세계대전 때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해오던 녹차 공급이 끊기면서, 인도에서 들여오는 홍차가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사실 미국은 커피를 많이 소비하지만 녹차건 홍차건 사실 차는 잘 마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아이스티는 정말 많이 마신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소비되는 차의 80%는 아이스티 형태로 마신다고 하니까, 정말 대단한 불균형이지요.  (제가 미군 식당에서 본 아이스티도 이런 연유로 식당의 터줏대감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현상은 남부에서 특히 더한데, 특히 남부의 아이스티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달게 만든다고 합니다.  미국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아이스티는 무척 인기라서 많이들 마시는데, 정작 차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과 중국에서는 아직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아이스티의 인기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아이스티는 인기가 별로지요 ?




(Bill Waterson의 Calvin & Hobbes 의 한 장면입니다.  이 만화에서는 이렇게 영어 단어를 가지고 말장난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요.)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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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몽골로이드 2018.07.26 1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란인들도 영국인이랑 똑같은 코카소이드 백인들 아닌가요? IQ가 떨어진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에서도 페르시아계 여자의 벽안이 아름다웠다는 언급이 나오지 않습니까.

    • nasica 2018.07.26 1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반적으로 중동지방 사람들의 IQ가 좀 낮은 것으로 나옵니다. 이란은 평균 IQ가 80점대 후반... IQ가 진짜 지능의 척도가 맞냐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아마 교육 문화의 문제 아닐까 싶어요.

  2. 뱀장수 2018.07.26 1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거의 매일 가스파초를 해서 먹거나 마트에서 사서 먹거나 하는데 나시카님이 드신 건 색감이 좀 많이 누렇네요. 조명때문에 그럴까요...
    그리고 말씀대로 원래 그릇에 담아 서빙하는게 보통인데 잘못 걸리신 듯 하네요

    사족이지만 스페인에서 젊은층이 가장 많이 마시는 음료수는 틴토 베라노죠. 상그리아는 거의 관광객들만 마시고 현지인들은 잘 안마십니다.

  3. reinhardt100 2018.07.26 2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cold 관련해서 전 좀 생각이 다릅니다. '납'이 있기 때문이죠.
    대항해시대 초기 포르투갈인들이 인도나 동남아시아 지역에 가서 가장 놀란 것 중 하나가 부유층이나 귀족등 신분 높은 지역 주민들이 히말라야 산맥이나 힌두쿠시 산맥, 파미르고원 지역에서 채취된 만년설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포르투갈인들이 어떻게 구했냐고 물어보자 이들은 '납으로 된 상자에 넣어서 바닷길 혹은 육상 무역을 통해 수입해왔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게 가능한게 납의 특성상, 상자로 만드는게 유리하다는 겁니다 괜히 고대 로마에서 대량의 수도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납을 쓴게 아닙니다. 연성이 뛰어나니까요.

    개인적 생각인데 아마, 지브롤터 같은데 빙고가 없었더라도 납으로 밀폐된 얼음상자 몇 개 정도는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대신, 이런 식으로 저장된 얼음을 계속 먹었다가는 납중독 걸릴 확률을 높아졌을 겁니다.

    • eithel 2018.07.26 2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납 상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납은 그다지 단열이 잘 되는 재료가 아닙니다. 철보다야 낫지만 나무보다는 열전도율이 10배는 높아요.

    • reinhardt100 2018.07.26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그렇군요. 단열 문제 때문에 그래서 수송단가가 미친듯이 비쌌을 수도 있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4. spitfire 2018.07.26 2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우리나라를 제외하곤 상당수의 국가가 cold water라고 하면 우리 기준에서의 식은 물을 주는거 같습니다. with ice라고 해야지 한국인 기준에서 찬물이 나오더라구요. 특히 중국에서는 기본으로 제공하는 물이 뜨거운 물이라 생각없이 마시다 낭패를 본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ㅜㅜ

  5. TheK2017 2018.07.28 0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차가운 아이스티를 즐겨 먹는 저로서는
    상당이 재밌는 이야기 였습니다.
    오늘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6. JPM 2018.07.28 1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국 남부살다와서 sweet tea 이야기 나오니 반갑네요. 미국 남부에선 대개 저 아이스티를 스윗티 달라고 하면 흔히들 생각하는 비쥬얼에 레몬 꽃아서(패스트푸드는 아니구요) 나옵니다. 저 달달한 스윗티에 중독되더라구요. 남부에서만 저걸 sweet tea라고 부르는거 같기도 합니다. 보스턴에서 sweet tea 달라고 했더니, 남부에서 왔냐고 물어보더라구요. 재밌게 읽고 갑니다

  7. 카를대공 2018.07.29 17: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얼음 창고라는게 북송 배경의 <천룡팔부>에도 나와서 놀랐는데 기원전 4세기경까지도 올라가는 물건이군요?놀랍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허죽은 저기서 만리장성도 쌓고 절기도 전수 받는 행운을......ㅎㅎ

    IQ라는 것도 동북아 국가들이 대체로 높게 나온다고 하더군요.
    한국,중국,대만,일본이 대체로 상위권 싹쓸이라나요

  8. 찰싹이 2019.02.24 16: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씀처럼 이슬람 국가 출신 애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게 사실이 아니라는데 공감합니다. 대학시절 터키애들이 술은 안되지만 와인은 괜찮다며 (도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시고 취하는걸 자주 봤었고 이란 유학생들도 술 좋아하는 이들이 꽤 있었으며 그 엄격한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 출신중에도 술 좋아하는 이들이 꽤 있었지요.
    또 그 잘난 앵글로 색슨이라고 하시니 정말 영국에서 늘 느끼는 점이 떠오르네요. 자신들이 가장 깨어있는 민족 또는 국민이란 그 우월감이 너무 뿌리가 깊어서 해외관련된 모든 뉴스는 이런 우월감에 기반하지요. 믿기지 않을정도로 우월감에 기반한 언론기사들이 다른 언론도 아니고 BBC나 FT등에 늘 올라오는걸 보면 참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2018.07.23 06:30

비록 임무가 보충병력의 인솔이라고는 해도, 한겨울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는 꽤 힘든 일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뛰어난 지휘력이 아니었다면 신병들로 구성된 이 보충병력에서는 아마 탈영이나 부상 등으로 인해 많은 비전투 손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게 이탈리아로 들어온 베르나도트가 향한 곳은 롬바르디아의 주도인 밀라노(Milan)였는데, 여기서 나폴레옹과의 악연이 시작됩니다.  당시 밀라노 주둔 프랑스군 지휘관은 뒤퓌(Dominique Martin Dupuy) 장군이었는데, 당시 나폴레옹이 이끄는 이탈리아 방면군 전체는 기타 방면군의 졸전과 대비된 자신들의 연전연승으로 인해 정말 기고만장한 상태였습니다.  그건 뒤퓌 장군도 마찬가지였고, 풋내기들로 이루어진 보충병들을 끌고 겨울 행군을 강행하느라 초라한 행색을 하고 나타난 베르나도트를 대하는 태도가 매우 불손했던 모양입니다.  




(뒤퓌 장군의 흉상입니다.  1798년 10월 카이로 폭동 때 가장 먼저 살해된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는 벼락 출세한 얼치기 정치 장군이 아니었습니다.  차가운 엘리트였던 그는 명령 불복종 죄목으로 현장에서 뒤퓌 장군을 체포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뒤퓌로서는 깜짝 놀랄 일이기도 했으나 몹시 분한 일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뒤퓌가 그렇게 건방진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도 믿는 빽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바로 나폴레옹의 최측근인 참모장 베르티에(Louis-Alexandre Berthier)가 그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첫인상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베르나도트는 바그람 전투 때까지 향후 12년 간 두고두고 베르티에의 견제와 방해를 받게 됩니다.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을 직접 만난 것은 만토바(Mantua)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면접해보고는 소장이라는 그의 지위에 맞게 사단 하나의 지휘를 맡겼는데, 이미 리볼리(Rivoli) 전투 등 주요 전투는 다 정리가 된 상태였지만 이탈리아 북동부인 프리울리(Friuli) 침공 등에서 베르나도트는 선봉장으로서 훌륭히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결국 나폴레옹과 대립각을 세우는 입장이었습니다.  그 해 9월, 총재 정부의 친위 쿠데타였던 프릭튀도르(Fructidor) 사건이 벌어지자 그에 협조하는 입장이었던 나폴레옹은 휘하 사단장들에게 이 쿠데타를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도록 지시했는데, 베르나도트는 전혀 상반된 내용의 성명서를, 그것도 나폴레옹이 아니라 파리의 총재 정부로 곧장 보내버렸던 것입니다.  이로써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의 관계는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프릭튀도르 쿠데타는 왕당파가 세력을 잡아가던 의회에 대해 1797년 총재 정부가 일으킨 친위 쿠데타입니다.  이 사건에는 나폴레옹이 총재 정부에게 파견해준 나폴레옹의 원투 펀치 중 한명인 오쥬로 장군도 활약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곧 행동에 나섰습니다.  10월에 캄포 포르미오(Campo Formio) 조약으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종료되자, 나폴레옹은 곧 베르나도트를 프랑스 본국으로 전출시켜버렸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가 애초에 나폴레옹에게 뻣뻣하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총재 정부의 당시 제1인자였던 폴 바라스(Paul Barras)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라스도 비록 자신이 키워준 인물이긴 하지만 나폴레옹의 인기와 권력이 자신을 넘어선다고 느끼자 불안을 느꼈고, 나폴레옹을 누를 경쟁자로 베르나도트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으로부터 물을 먹고 파리로 돌아오자, 바라스는 오히려 그를 나폴레옹을 대체하여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이미 외무장관 탈레랑(Charles 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을 포섭해놓은 나폴레옹은 선수를 쳐서, 바라스의 의도와는 반대로 베르나도트를 캄포 포르미오 조약으로 인해 새로 신설된  빈(Wien)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로 발령 내버렸습니다.  권력 싸움에서 나폴레옹에게 패배를 거듭한 베르나도트는 분한 마음을 안고 빈으로 향했는데, 그나마 거기서도 오래 있지는 못했습니다.  빈 대사관에 자랑스럽게 혁명의 상징이자 국기인 삼색기를 게양했는데, 최근의 패배로 인한 상처가 아물지 않은 오스트리아인들의 심기를 건드려 소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베르나도트는 결국 파리로 되돌아와 실업자 대열에 동참해야 했습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총재 정부의 상징인 폴 바라스입니다.  그런 그도 젊은 시절 귀족 출신의 군 장교 후보생으로 프랑스령 인도로 가는 길에 난파를 당해 죽을 뻔 하는 등 꽤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총재 정부 시절 부정한 방법으로 많은 돈을 긁어모은 그는 나폴레옹에 의해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거나 로마 등지로 정치적 추방을 당한 상태에서 아주 호화롭게 살았고, 결국 1829년 파리의 사이요(Chailllot, 에펠탑 앞에 있는 그 궁전 맞습니다)에서 잘 먹고 잘 살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에게는 나폴레옹과 만난 1797년이 삼재가 꼈던 마지막 해였나 봅니다.  다음해인 1798년 베르나도트에게는 그의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귀인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데지레 클라리(Eugénie Bernardine Désirée Clary)였습니다.  데지레 클라리는 원래 나폴레옹과 약혼을 했던 여자였는데, 이 둘이 결혼을 한 것은 어느 한 측의 정략적인 의도라기 보다는 그냥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애초에 데지레가 처음 만났던 것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였습니다.  원래 그녀의 집안은 부유한 비단 상인이었는데, 서슬퍼런 대혁명 초기에 그녀의 남동생이 반혁명분자로 몰려 체포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동생을 구하고자 이리저리 줄을 댔는데, 그러다 만난 것이 조제프였습니다.  그러나 조제프는 그녀보다는 그녀의 언니였던 줄리 클라리에게 끌렸고, 결국 조제프와 줄리가 결혼을 합니다.  대신 이러면서 나폴레옹과 데지레가 만나게 되었고, 이 둘도 1795년 약혼을 했지요.   그러나 하필 약혼을 하자마자 나폴레옹은 운명의 여인을 또 만납니다.  바로 조세핀이었지요.  정열의 크레올 여인에게 얌전한 데지레는 상대가 되지 못했고 나폴레옹은 불과 5개월만에 데지레와 파혼을 선언합니다.  생각해보면 데지레는 주로 나이 많은 여자들에게 밀리는 스타일이었나 봅니다.




(비교적 젊은 시절인 1807년의 데지레 클라리입니다.  대단한 미인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나폴레옹은 변치않는 사랑을 간직하는 순정파 남자는 아닐지 몰라도 의리와 체면을 중요시하는 지중해 남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파혼한 데지레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데지레에게 좋은 남편감을 소개해주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었는데, 그 결과 중 하나가 뒤포(Mathurin-Léonard Duphot) 장군과의 약혼이었습니다.  뒤포는 사실 좋은 남편감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애까지 둔 사람이었거든요.  그러나 부잣집 딸 데지레에게는 두둑한 지참금이 있었고 특히 나폴레옹과 동서가 된다는 점은 매우 탐나는 결혼 조건이었기 때문에 뒤포는 그 약혼에 응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뒤포는 1797년 12월, 결혼식 전날 밤에 로마에서 일어난 반프랑스 폭동에 휘말려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남자 복이 없는 여자라고 할 수 있었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나폴레옹은 더더욱 데지레에게 미안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데지레는 언니 줄리와 매우 친하게 지냈으므로 보나파르트 집안에서는 거의 식구나 다름없는 사이였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조세핀을 매우 싫어했던 보나파르트 집안 사람들은 조세핀에 대한 반감 때문에 얌전하고 순진무구한 데지레에게 더욱 친절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이런 식구들 때문에라도 나폴레옹은 데지레에게 빨리 좋은 혼처를 구해줘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러다 나선 것이 나폴레옹의 심복인 폭풍우 쥐노(Jean-Andoche Junot)였습니다.  쥐노도 보나파르트 집안에 자주 들락거리다 데지레에게 반했는지, 아니면 나폴레옹의 인척이 되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서였는지 데지레에게 청혼을 하기는 했는데, 그만 퇴짜를 맞았습니다.  사실 쥐노는 나폴레옹의 초기 심복이었으나 능력치가 많이 떨어지는 편이라서 나폴레옹도 중용하는 편이 아니었는데다, 그나마 남자답게 하트 모양으로 구성한 촛불 진열 속에서 장미꽃을 들고 청혼한 것이 아니라 마르몽(Auguste de Marmont)을 통해서 '저 말이죠, 쥐노가 그러는데 댁과 결혼하고 싶답니다'라고 청혼을 했기 때문이었답니다.   아무래도 쥐노에겐 여러 모로 문제가 있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데지레를 만나 결혼에 성공한 것은 바로 베르나도트였습니다.  생각해보면 베르나도트야말로 데지레에게 있어 최고의 배우자였습니다.  베르나도트도 데지레처럼 부르조아 집안 출신이었고, 지위 뿐만 아니라 교양도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젊은 시절 별명이 '각선미 하사'(Sergeant Belle-Jambe)일 정도로 외모도 준수한 편이었거든요.  게다가 베르나도트와 나폴레옹 두 사람은 서로 화해를 해야 하는 관계였습니다.  화해를 하는데 있어 가장 좋은 것은 결혼을 통해 인척이 되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떠난 직후인 1798년 8월 이 두사람은 모든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바로 다음해 외아들 오스카(Joseph François Oscar Bernadotte)를 낳게 됩니다.  베르나도트의 외아들의 이름이 정해진 과정만 봐도 베르나도트 가족과 보나파르트 가족의 복잡한 관계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앞서 말했듯이 언니 줄리와의 사이가 돈독했던 데지레는 애초에 이 아이의 이름을 형부의 이름을 따서 조제프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데지레의 부탁으로 이 아이의 대부가 된 나폴레옹은 이 아이의 이름으로 자신이 읽던 아일랜드의 음유시인 오시앙(Ossian)의 영웅 서사시 주인공들 중 하나인 프랑수와 오스카(François Oscar)로 정하자고 했고, 그 이름도 그대로 붙여졌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그렇게 긴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아이가 나중에 스웨덴 국왕 오스카 1세(Oscar I)가 되리라고는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상상 못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중무장(?)한 오스카 베르나도트입니다.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세자로 책봉되기 몇 년 전에 그려진 그림이라고 하니까 대략 7~8세 정도에 그려진 그림 아닐까 합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자주 등장하네요.  오스칼이라는 이름은 Oscar를 일본식으로 표기하다보니 잘못 발음되어 전해지는 이름이고, 이 남장 여걸의 이름은 Oscar François de Jarjayes, 즉 오스카 프랑수와 드 자르제입니다.  참고로 오스카라는 이름의 어원은 아일랜드 계통으로서, '사슴을 사랑하는'이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영어 고어로서 '신의 창'이라는 뜻이라고도 합니다.  희한하게도 이 이름은 스웨덴에서 남자 이름으로 3번째로 많이 쓰이는 이름입니다.)




이로써 베르나도트와 나폴레옹의 화해는 완성되었고, 나폴레옹은 향후 그의 야심을 이루는데 베르나도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베르나도트라는 남자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oup_of_18_Fructidor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Oscar_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D%C3%A9sir%C3%A9e_Clary

https://en.wikipedia.org/wiki/Oscar_(given_name)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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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ashorn 2018.07.23 06: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질긴 인연이군요..

  2. 석총 2018.07.23 2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루이 18세의 잔소리 하는 데시데리아왕비 루이 18세에게 곤란한 청을 하였죠 언니를 귀국시키라고

  3. 레미 2018.07.25 2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나도트... 나폴레옹에겐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철천지 원쑤...

  4. 0_- 2018.07.25 2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옛날에 어느 높으신 분이 주어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이래서 주어가 중요합니다.

    젊어서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왕에게 죽음을!
    군인시절: (다른 나라의) 왕에게 죽음을!
    왕이되어: (프랑스 보나파르트) 왕에게 죽음을!
    임종직전: (자기자신이기도 한 스웨덴) 왕에게 죽음을!

    이렇게 놓고보면 그냥 베르나도트가 베르나도트 했을 뿐이네요 ^_-;

  5. reinhardt100 2018.07.25 2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사이유의 장미. 저 만화가 한국에서 정식발매된게 1988년인데 꽤나 사연이 많은 만화라고 합니다. 이케다 리요코의 작품들 중 저 작품이 최대 히트작인데 정작 본인은 만화를 배우는 습작에서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 작품이 원래 1971년에 일본에서 완판된 이후 바로 당시 저작권 개념조차 별로 없던 한국에서 전례없이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고 들여오려고 했던 찰나 그대로 16년동안 수입 및 판매 금지처분을 받았던 희대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왜 저 순정만화가 저런 처분을 받았냐고요? 하필이면 발매시점으로 예정되었던 1972년 10월 당시,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들어섰으니까요. 한창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의 여학생들한테 저딴걸(?) 그대로 정발했다가 학생들이 투사가 되면 골치아프다고 판단했던 문공부,교육부와 관련기관들이 그대로 저작권 계약 엎어버리라고 행정지도를 내려버린 겁니다. 사실, 관련기관들이 걱정했던게 괜한 우려가 아니었던 이유가 하필이면 일본 경시청의 분석때문이었죠.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한창 발매되던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전공투가 과격화되면서 사회불안이 꽤나 심각했었으니까요. 특히 여대생들이 학생운동 하는데 있어서 저 만화가 매우 큰 영향을 발휘한다고 경시청이 분석했고, 실제로 어느 정도 맞는거로 드러났다는 것을 당시 주일대사관이 입수, 본국에 급송했다고 하더군요. 이걸 보고 관련기관들의 입장이 급선회해서 당시 출판업계에서도 말이 꽤나 많았다고 합니다.

    이케다 리요코 여사의 작품중에 오르페우스의 창이란게 있습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비슷하면서도 훨씬 내용이 심각한 게 많이 나오죠. 한 번 두 작품 비교하면서 읽어보시면 아실겁니다.

  6. 웃자웃어 2018.07.26 0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에는 인구대비 어느정도의 비율을 전시에 군인으로 동원했나요?

2018.07.12 06:30

여러분이 나폴레옹 시대로 타임 워프를 한다고 하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까 ?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장 생활 편의품의 부족 때문에 몹시 불편할 것입니다.  냉장고나 에어컨, 수세식 화장실과 형광등 따위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 것 말고도 당장 여러분들은 TV와 인터넷이 없어서 무척이나 심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분은 여러분과 나폴레옹 시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부분입니다.  즉, 심심하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건 귀족이나 상류층 이야기입니다.  일반 서민들이야 먹고 살기 바빠서 심심하다는 사치스러운 생각을 할 틈이 없었지요.


그렇게 오락거리가 없는 시절에 인간이 탐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이고 말초적인 쾌락이 무엇이겠습니까 ?  당연히 식사입니다.  (다른 걸 생각하신 분들은 반성하세요.)  하루의 일과에서 식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습니다.  당시 귀족들은 공직이나 군에 종사하지 않는 이상 원래 직업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하루 일과를 보면 정말 한가롭기 짝이 없었는데, 그런 무료한 일상을 달래주는 가장 큰 행사가 바로 오찬이었습니다.  친구나 이웃을 손님으로 모셔 놓고 멋진 식사를 대접하면서 환담을 나누고, 이후에 여흥으로 악기 연주나 노래를 듣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지요.  그러니 당시 귀족들 및 부르조아 계급 사람들에게 피아노나 바이올린 등 악기 다루는 것을 배우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했던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엔터테인먼트 역할도 했고, 또 그러면서 인맥을 쌓는 것이 더더욱 중요했거든요.  





(사진은 Sense & Sensibility 중의 한 장면입니다.  따지고 보면 요즘에는 저런 피아노나 바이올린 연주 배우는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데 말입니다...)




물론 이건 귀족 층의 이야기였고, 서민들은 말라비틀어진 빵이건 감자건 그저 배만 채울 수 있어도 감지덕지였습니다.  요즘에는 아주 많지만 당시에는 전혀 없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음식물 쓰레기입니다.  음식을 버리다니,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엔 먹을 것이 부족하여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으니 당연히 남는 음식물 없이 찌꺼기까지 다 먹었습니다.  귀족들은 물론 그러지 않았습니다만, 귀족들 집에 있는 하인들은 당연히 귀족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반갑게 잘 먹었습니다.  그러고도 남는 것들, 가령 감자 껍질이나 양배추 대가리 등은 (가난한 사람들은 직접 먹었고) 살림이 괜찮은 집에서도 집에서 키우는 돼지나 토끼 등이 다 먹어 치웠습니다.   피노키오 원작을 보면, 피노키오는 만들어지자 마자 배가 고프다고 찡얼대는데, 가난했던 제페토 할아버지는 피노키오에게 배를 하나 주지요.  피노키오가 과육만 먹자, 할아버지는 '껍질과 씨도 먹어야지' 라고 권하고, 미식가였던 피노키오는 처음엔 그를 거부하다가, 배가 고픈데 더 먹을 것이 없자 정말 배 껍질과 씨까지 먹어치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서민들의 삶은 팍팍한 것이니까요.



Le Moribund, 모파상 작 (배경 : 19세기 중반) ------------------------------


(늙은 시골 농부가 점심을 먹습니다.)


그는 방을 나와 부엌으로 돌아가, 찬장을 열고 6파운드 짜리 빵을 꺼내 한 조각을 잘랐다.  그는 빵부스러기를 조심스레 긁어모아 손바닥에 올리고는 한조각도 흘리지 않고 입 안에 털어넣었다.  그리고는 그의 칼 끝으로 토기 단지 속에 든 소금친 버터를 조금 긁어내 빵에 바르고는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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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농부들과는 달리 귀족들은,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중산층의 고상한 신사 양반들은 체면 때문에라도 좋은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특히 손님이 있을 때는 약간 무리를 해서라도 화려한 요리를 차려내야 했습니다.  그 결과, 귀족들까지는 몰라도 중산층 신사들의 엥겔 계수, 즉 생활비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에서 약 20년 정도 지난 시대의 이야기인 레미제라블 속에서의 마리우스도 출판 일을 하며 가난한 생활을 할 때 버는 돈 700 프랑의 반이 넘는 액수인 400 프랑을 먹는데 써야 했지요.  엥겔지수가 너무 높은 것 아니냐고요 ?  당당한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 유럽 장교들도 급료의 절반을 장교 식당의 식대로 공제당하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었습니다.  소위 같은 사람들은 급료보다 장교 식당 식대가 더 나갔기 때문에, 군대에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군대에 돈을 내고 군 복무를 해야 했지요.


Sharpe's Waterloo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15년 벨기에 ) -------------------------


(네덜란드 왕자 밑에서 중령으로 복무 중인 샤프가 왕자의 임시 지휘소로 쓰이고 있는 여관에서 식사를 하며 왕자의 정부인 폴레트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령님은 그저 돈 때문에 싸우는 거군요."  폴레트는 마치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는 듯 영악하게 말했다.  "왕자님이 중령 노릇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지불해주세요 ?"


"일당이 1 파운드, 3 실링 하고도 10 펜스지."  그것이 그가 기병 연대의 임시 중령으로서 받는 급료였는데, 이는 그가 일생 동안 벌어 본 것 중 가장 높은 금액이었다.  이 중 절반은 장교 식당의 식대 및 사령부 하인들 급료로 공제되어 없어졌지만, 그래도 샤프는 자신이 부자라고 느꼈다.  그가 영국군의 무보직 (half-pay) 중위로서 받는 일당 2 실링 9 펜스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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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럽인들의 주식이 곡류가 아닌 육류라고 해도, 왜 이렇게 식비가 많이 들어갔을까요 ?  그냥 자기 식구들끼리 일상적으로 먹을 때야 그렇게까지 비싸게 들지 않았겠습니다만, 손님이나 친구들을 초대할 때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자신이 베푸는 식사는 자신의 체면을 뜻하는 것이었거든요.  요즘 사람들이 괜히 수입 중형차를 타고, 또 괜히 이탈리아제 가죽 가방을 터무니 없는 가격에 사서 들고다니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지요.  특히 당시에는 아직 그럴싸한 고급 식당이라는 것이 별로 없었으므로, 대개의 경우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요리사가 만든 요리를 대접해야 했는데, 그러자니 음식 자체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써서 체면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귀족 집주인이 (우리들의 상식과는 좀 거리가 있는데) 음식의 종류나 조리법, 맛에 대해 세밀하게 신경을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Post Captain by Patrick O'Brian  (배경 : 1803년 프랑스) ------------------------


"오찬을 들어야지." 크리스티-팔리에르 함장이 사형 집행 서류철의 F부터 L까지의 항목을 덮으며 말했다.  "시작은 바니율스 (Banyuls, 유명 포도주 산지 이름) 한잔과 함께 앤초비하고 올리브, 그러니까 검은 올리브를 곁들여 들도록 하지.  그러고 난 다음에 에베르(Hébert)의 생선 수프를 들고, 이어서 쿠르부이용(courtbouillon) 소스를 얹은 간단한 랍스터(langouste)를 먹을 거야.  어쩌면 빵가루를 덮은 양다리 구이(gigot en croüte)를 먹을지도 모르겠는데.  사향초 (thyme) 허브가 꽃이 필 계절이라서 양고기 맛이 아주 좋을 때거든.  그 뒤에는 그냥 치즈와 딸기, 그리고 커피만 조금 들도록 하지.  물론 내 영국산 잼도 한접시 함께 해야지.  팡외, 자네 식의 든든한 식사는 하지 않을걸세.  이렇게 더운 날에는 내 간이 그런 거창한 식사를 견디지 못하거든.  게다가 아니발 (Annibale) 호가 다음주까지 바다에 나가려면 할 일이 엄청나게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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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앙 끄루트(Gigot en croûte)는 글자 그대로 빵가루를 입힌 넓적다리 구이 요리입니다.)




하지만 정작 당대 유럽 최고의 권력자였던 나폴레옹 본인은 무척 간소한 음식을 즐겼습니다.  나폴레옹의 시종(valet)들 중 하나였던 생드니(Louis Étienne Saint-Denis)에 따르면, 나폴레옹의 아침식사는 정말 간소했습니다.  당연히 황제의 요리사들은 훨씬 우아하고 정교한 요리를 내놓을 수 있었지만 그는 그냥 뜨거운 수프와 삶은 쇠고기 한조각을 더 선호했답니다.  때로는 달걀, 양고기, 커틀릿, 양고기나 닭고기와 함께 렌틸콩과 콩을 넣은 샐러드 등을 아침으로 먹기도 했고요.  하지만 먼저 먹는 수프를 빼면 아침에 먹는 요리가 2가지를 넘은 적은 없었답니다.   


그런 나폴레옹조차도 저녁은 부하들이나 다른 궁정 식구들과 함께 먹었으므로 그들을 위해서라도 좀더 풍성한 저녁 식탁을 차리도록 했습니다.  친구들 초대해놓고 닭가슴살과 샐러드, 물만 내놓았다는 호날두와는 달랐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저녁 식탁에서도, 나폴레옹 본인은 굽든지 삶든지 해서 아주 간소하게 요리된 고기와 채소 한 접시씩만을 먹었습니다.  채소라고 해봐야 콩이나 감자 같은 것이었는데, 나폴레옹은 감자를 특히 좋아해서 굽든 삶든 감자라면 다 잘 먹었답니다.  그래도 프랑스인답게 식사의 마무리는 치즈 한조각을 먹었는데, 주로 로크포르(Roquefort) 또는 파머잔(Parmesan) 치즈를 택했습니다.  가끔은 과일도 먹었는데, 과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지 사과나 배 1/4 조각 정도만 먹거나 포도 약간을 먹었답니다.  





(로크포르 치즈입니다.  파머잔도 꽤 짜지만 저것도 상당히 짠 치즈인데...  하긴 대부분 치즈가 다 짜지요.)  




나폴레옹도 좋아하는 디저트가 있긴 했는데, 아몬드였답니다.  보통 한 접시를 거의 다 혼자서 비웠다고 하네요.   또 둥글게 말아 크림을 넣은 와플도 좋아했습니다.  이건 설명을 들어보면 이탈리아 시실리 섬의 대표적 간식인 카놀리(Cannoli)가 아닌가 합니다.   또 당시 신사들이 흔히 하듯 코냑 같은 독한 증류주를 마지막 입가심으로 마시지 않고 그냥 커피를 마셨는데 다 마시지 않고 남겼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좋아했다는 둥글게 말아 크림을 넣은 와플이란 바로 이 카놀리(Cannoli)가 아닌가 합니다.  저 겉면을 이루는 과자는 사실 와플처럼 구운 것이라기보다는 도우넛처럼 튀긴 것이라고 합니다.  속에 든 크림에는 보통 리코타 치즈도 들어갑니다.  크기는 손가락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손님이나 친구들을 초대한 식사에서 음식이나 은식기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식탁에서의 흥미진진하고 유쾌한 환담이었습니다. 





The Thirteen Gun Salute by Patrick O'Brian  (배경 : 1813년 대서양의 영국 군함 HMS Diane 함상) -----------


그들은 서로를 쳐다 보고는, 마틴이 말을 이었다.  "불쌍한 친구 같으니, 난 그가 이 배에서 미움살 짓을 이미 많이 한 것 같네.  이 친구가 옥스포드에서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내 생각엔 대학 졸업 이후의 고독과 그 지긋지긋한 교사 생활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네."


"어떤 사람들에겐 그건 독약과도 같지.  성인들의 무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거든."


"그게 그 친구가 느낀 거야.  스스로도 자기가 더 이상 어울리기 괜찮은 사람이 아닌 것으로 여기더라니까.  그 친구 유머 모음집 (jest book)도 한 권 샀더라고.  <내 야심은 식탁을 아주 뒤집어 놓는 거야> 라고 말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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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 위에서 <식탁을 뒤집어 놓는 것>이라는 건 물리적으로 밥상을 뒤엎어 버리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장교들과의 오찬 시간에 뭔가 기발한 농담을 해서 사람들의 배꼽을 빼놓겠다는 뜻입니다.  당시 오찬 (dinner)는 무척이나 중요한 일간 행사였고, 거기 참석하는 사람들 (사실상 모든 사람들)은 단순히 한끼 때우는 것이 아닌, (좋든 싫든)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나눠야 하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자리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사람은 잘생긴 사람이 아니라 유머 감각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웃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거든요.  프랑스 사람들은 식탁에서 사회 문제나 철학, 뉴스거리 등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지만, 영국인들은 식탁에서 정치 이야기나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위 소설에서처럼 같은 군함에 타고 있는 동료 장교들끼리, 갑판 위에서의 일, 즉 업무 수행 중에 벌어졌던 심각한 이야기나 언짢았던 일을 식사 중에 꺼내는 것은 금기시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국인들이 식탁에서 꺼내기 제일 좋았던 것은 뭔가 다들 웃을 만한 농담거리였고, 평소에 다들 뭔가 재미있는 농담거리 없을까 하고 소재를 찾았습니다.  정 소재거리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저렇게 유머 모음집까지 나왔던 것이고요.


자신이 베푸는 오찬에서 손님들이 맛있게 먹고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손님들 중 누군가 빵빵 터지는 유머 감각을 발휘해주도록 주인이 기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또, 게스트가 제대로 터뜨리려면 유재석 같은 사람이 MC를 봐야 하듯이, 손님들이 유머 감각을 발휘하려면 주인이 이런저런 신경을 세심하게 써야 했습니다.



The Letter of Marque by Patrick O'Brian  (배경 : 1813년 영국 런던) -------------------


(조셉 경이 자기 집에서 해군성 및 의회의 중요 인사들 8~9명을 초대하여 오찬을 베풉니다.  이 오찬의 중요 목적은 누명을 쓰고 해군에서 쫓겨난 잭 오브리 함장의 복직 운동을 위해, 잭 오브리를 이 중요 인사들에게 개인적으로 인사를 시키는 것입니다.  조셉 경은 하녀인 발로우 여사에게 이 오찬 준비를 시키는데, 자꾸 소소한 것까지 참견하며 혹시 준비 소홀이 없는지 전전긍긍합니다.)


하지만 조셉 경은 포크와 나이프 위치를 여기저기서 조금 변경한다든지, 요리 접시 위의 덮개가 미리 충분히 뜨겁게 덥혀져 있는지, 푸딩의 양은 충분한지 등등에 대해 안절부절 했다.


"오늘 오실 신사분들은 특별히 푸딩을 좋아한단 말이오.  판뮤어 경도 그렇고."


조셉 경의 잔소리가 이어질 수록 발로우 여사의 대답은 점점 짧아졌다.  결국엔 조셉 경이 이런 말까지 하게 되었다.


"이거 어쩌면 우리가 이 식탁 배치를 전부 바꿔야 할 지도 모르겠소.  그 신사분은 다리에 부상을 입었거든.  정말 그렇지.  서재에 있는 발 받침대 위에 다리를 쭉 펼 수 있으면 좋겠군.  그 신사분이 편안히 그렇게 하자면 그가 식탁 끝에 앉아야 할텐데...  그런데 어느 쪽 다리를 다쳤더라 ?  그리고 식탁의 어느 쪽 끝에 앉혀야 하지 ?"


발로우 여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5분만 더 이런 식으로 굴면 차려 놓은 요리를 모조리 창 밖 거리에 집어 던질 거야.  거북이 수프고 바다 가재고 반찬이고 푸딩이고 뭐고 모조리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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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즉 호스트는 이렇게 음식 뿐만 아니라, 자신이 초대한 손님들이 최대한 편안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누구를 어디에 앉힐지, 식사 초대의 목적에 따라 어느 손님이 어느 손님 옆에 앉아야 하는지 또는 손님들 사이의 관계에 따라 어느 손님을 어느 자리에 앉혀야 할 지 등에 대해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호스트로서 가장 바라는 것은 모든 손님들이 디저트까지 싹 다 비울 정도로 음식을 즐기는 것은 물론, 식사 내내 손님들끼리 기분 좋은 농담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경우 dinner가 "a great success"로 기억될 수 있었고, 그래야 손님들 뇌리에 "호스트 누구누구씨 = 기분 좋은 신사" 라는 것이 박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음식은 좋은데 함께 나온 와인이 신맛 나는 싸구려였다든가, 손님 중에 누가 완전 또라이라서 기분 나쁜 주제의 이야기만 계속 했다든가 하면 그 오찬은 완전 망하는 것이었지요.


저 위 소설 속에서 손님들이 푸딩을 좋아한다고 했지요 ?  푸딩이라고 하는 것이 특정한 한가지 형태의 음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영국 상류 사회에서는 디저트를 총칭하여 푸딩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케이크 형태 또는 달콤한 죽 형태, 또는 삶은 떡 형태 등 다양한 형태의 요리가 푸딩으로 총칭되었습니다.


서양 식사 방법 중에 저 개인적으로 참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디저트입니다.  저처럼 먹는 것 좋아하는 사람은 당연히 케이크나 쿠키 같은 단 것도 좋아하는데, 그런 것을 많이 먹으면 당연히 살이 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단 과자를 양껏 먹으면서도 조절하여 적당히 먹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배가 부를 때 먹는 거쟎아요 ?  그런 면에서, 이미 식사를 든든히 한 이후에 디저트로 케익 등을 먹는 것은 참 현명한 음식 문화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본 요리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푸딩 같은 디저트인데, 나폴레옹 시대에 특별히 유명해진 디저트는 불행히도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허 호텔에서 나오는 자허 토르테...  언젠가는 꼭 먹고 말아야G)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 바로 직후에 매우 유명해진 디저트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허 토르테 (Sachertorte) 입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초콜렛 케익인데, 1832년 비엔나에서 프란츠 자허 (Franz Sacher)라는 요리사가 개발한 것입니다.  바로 나폴레옹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또 결국 몰락시킨 오스트리아의 외교관이자 이후 근 20년 동안 유럽의 구시대 질서를 다시 공고히 지켰던 비엔나 체제의 장본인 메테르니히 (Wenzel von Metternich) 대공의 지시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1832년 어느날, 메테르니히 대공은 중요한 손님들을 모시고 오찬을 하게 되었는데, 하필 그날 그의 주방장이 몸이 아파 자리를 비우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날 디저트는 당시 16살 짜리 2년차 견습생이던 프란츠 자허가 맡게 되었는데, 메테르니히는 이 소년 요리 견습생을 불러다 놓고 '오늘 식사에서 내 얼굴에 먹칠을 하면 아주 경을 칠 줄 알아라'며 단단히 협박을 했다는군요.  본 요리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이날 프란츠 자허가 만들어낸 초콜렛 케익은 손님들을 크게 만족시켜, 메테르니히도 기뻐했다고 합니다.





(프란츠 자허의 사진입니다.  메테르니히를 위해 케익을 굽던 소년이 이렇게 사진을 찍다니, 유럽의 기술 발전 속도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나중에 프란츠 자허는 더 수련을 쌓고 여기저기서 주방장 생활을 한 뒤에, 결국 비엔나로 돌아와 식당을 열었고, 이 자허 토르테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덕분인지 그의 아들인 에두아르드 자허 (Eduard Sacher)는 비엔나에 아예 자허 호텔을 세웠고, 지금 비엔나의 명물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자허 호텔이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원조 자허 토르테를 맛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제가 전에 파리 여행을 하면서 먹은 음식들 중에는 맛있는 것도 있었고 맛없는 것도 있었는데, 우리 가족이 가장 기분 좋게 먹었던 식사는 파리 에펠탑 근처 강건너에 있는 사요 궁(Palais de Chaillot) 인근의 윌슨(Le Wilson)이라는 영어 이름의 카페에서였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날 먹었던 음식이 뭐 딱히 그렇게까지 맛있었거나 특별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았나 생각해보니, 바로 디저트 때문이었습니다.  그날이 파리에서의 2번째 날이었나 그랬거든요.  앵밸리드도 보고 에펠탑도 보고 기분도 좋아서 그날 저녁은 돈 걱정하지 말고 먹자라는 정신으로 디저트까지 다들 한 접시씩 시켜 먹었거든요.


그날 제가 시켰던 디저트는 불어로는 뭔지 모르겠고 (저희에게 준 메뉴판이 아예 영어로 되어 있었거나, 아니면 제가 영어로 된 부분만 읽었나 봅니다) 영어로는 apple pie upside down 뭐 그런 것이었습니다.  나온 파이를 보니 정말 파이 크러스트가 바닥에만 있고 위는 그냥 사과 범벅이 드러나 있더군요.  그 위에 발라 먹으라고 큼직막한 생크림 접시까지 하나 주던데요 ?  이렇게 단 것에 그렇게 느끼한 생크림까지 얹어 먹으면 정말 일찍 죽겠다 싶었는데, 먹어보니 위험한 만큼 정말 맛있더군요.  근데 결국 먹다먹다 배불러서 남긴 것은 에러였습니다.





(이것이 Le Wilson에서 시켜 먹은, 거꾸로 뒤집힌 애플 파이)




그런데 알고 보니 제가 골랐던 '거꾸로 뒤집힌 애플 파이'라는 것이 프랑스에서 꽤 유명한 디저트더군요.  저는 윌슨이라는 영어식 이름의 카페라서 미국스러운 애플 파이를 파나보다 싶었는데, 프랑스에서도 애플 파이는 흔한 디저트이고, 게다가 저 upside down 애플 파이는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유명한 음식이었습니다.  원래 디저트(dessert)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이 desservir(de-service, 즉 서비스를 그만 하다, 식탁을 치우다) 라는 불어에서 나온 것이니까, 당연히 프랑스가 디저트도 더 유명하긴 하겠지요.  이 거꾸로 뒤집힌 애플 파이의 불어식 명칭은 tarte Tatin, 즉 타탱 타르트인데, 이는 파리에서 약 160 km 떨어진, 라모트-뵈브롱(Lamotte-Beuvron)이라는 동네의 타탱(Tatin)이라는 호텔에서 실수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원래 이 작은 호텔은 스테파니와 캐롤린이라는 예쁜 이름을 각각 가진 타탱(Tatin) 아주머니 자매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실수로 이렇게 거꾸로 뒤집힌 애플 파이를 만들어 내놓았다가 그것이 호평을 받으면서 이 호텔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ICI fut creee la celebre tarte TATIN  여기서 그 유명한 타탱 타르트가 창조되었습니다" 라는  타탱 호텔의 광고판입니다.)




그 실수가 어떤 실수였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재미있는 것은 지금도 이 호텔에서는 이 타탱 타르트를 간판으로 광고하고 있지만, 정작 타탱 아주머니 본인들은 한번도 자신들이 이 요상한 파이를 만들었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 타탱 타르트가 유명해진 것은 파리의 유명 레스토랑인 막심 (Maxim)의 주인인 보다블 (Louis Vaudable)이 이 타탱 호텔의 타르트에 얽힌 자신의 모험에 대해 크게 광고를 하면서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타탱 타르트를 팔았기 때문입니다.  이 보다블이라는 양반은 소싯적에 나이든 타탱 자매가 운영하던 타탱 호텔에서 이 타르트를 먹어보고 그 맛에 반해 이 요리법을 배우려고 했으나 거절당하자, 정원사로 위장 취업을 하여 결국 3일 만에 쫓겨나기 전에 그 요리 비법을 알아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보다블의 주장은 말짱 거짓말임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보다블은 1902년 생인데, 타탱 자매는 1906년에 이미 은퇴해서 1911년과 1917년에 각각 사망했거든요.  게다가 막심이라는 레스토랑이 보다블 집안에게 매각된 것은 1932년에 들어서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탱 타르트는 아직도 명성이 자자하여 이렇게 아무 것도 몰랐던 저같은 외국인 관광객조차 주문해 먹게 된 것을 보면, 사실 음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맛일 뿐, 진실이나 정통성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Source : https://shannonselin.com/2015/07/what-did-napoleon-like-to-eat-and-drink/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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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ㅇ 2018.07.12 0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예 잘읽었습니다.

  2. 뱀장수 2018.07.12 16: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허토르테 워낙 유명해서 먹어봤는데... 뭐랄까 19세기 벨 에포크 시대에서 전혀 발전이 없는 맛! 이라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 맛이 어떤지 궁금하신 분들에겐 좋은 기회가 되겠지만 전 그돈으로 파리의 MOF나 흘레데쎄르 타이틀이 있는 디저트 가게들을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3. 구와아앍 2018.07.12 18: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간의 말초적이고 일반적인 쾌락하면 누구라도 그게 먼저 떠오를껀데 반성이라니 ㅜㅜ 금수저나 흙수저나 모두 즐길 수 있는 취미인데 넘하네요

  4. 루나미아 2018.07.12 2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몬드 한 접시를 혼자서 뚝딱!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중년에 살이 찐 거네요.

  5. 방랑자 2018.07.12 2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손들고 반성중...)

    영화 워털루에서 전투 당일 아침식사자리에서 "이거 하나."라고 한 게 고증에 맞춘 거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6. 최홍락 2018.07.12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영화 대부에서 돈 비토 콜리오네(말론 브란도)의 최측근인 피터 클레멘자가 배신자가 된 부하를 처리하면서 수하에게 '총은 내버려두고 카놀리를 가져와.'라고 지시하는데, 피터 클레멘자나 나폴레옹이나 출신지(이탈리아)를 속이긴 힘든것 같네요.

    2.자허 토르테는 여행하면서 호텔 자허에 들러서 먹어봤는데요. 먹으면서 느낀 것은 맛이 진짜 달아서 사람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크게 엇갈릴 것 같았다는ᆢ

  7. 웃자웃어 2018.07.12 2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질문있어요, 나폴레옹이 권력자일 당시중 1802~1803년도 당시에는 프랑스가 어느정도의 군비를 소모했나요? 왜냐하면 당시에는 영국과 아주 잠시동안 평화를 유지했던 만큼, 1805~1807년, 1812~1815년 당시보단 군사비가 적을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8. 유애경 2018.07.13 04: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음식-쵸콜렛,케잌,아이스크림등...-은 식사후 배가 부른 상태에서 먹는게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라는 얘기를 들은적 있어요.
    단것 좋아하는 저에게는 저 자허 토르테가 엄청 맛깔나게 보이네요!

    실수로 만들어져 명물이 된 애플파이 일화도 재밌어요!
    잘읽고 갑니다.

2018.07.09 06:30

여기서 시간과 장소를 다시 혁명 직전의 프랑스로 되돌려 보겠습니다.  1763년, 소위 남자들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남부 가스코뉴(Gascogne)의 소도시 포(Pau)에서 검사로 일하던 장 알리 베르나도트(Jean Henri Bernadotte)에게 아들이 태어납니다.   당시 52이세이던 베르나도트 검사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마 생각지도 않은 늦둥이였을 것입니다.  이 아이에게는 형과 같은 이름인 장(Jean)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곧 형과 구별하기 위해 장-밥티스트(Jean-Baptiste)라는 이름으로 살짝 바뀌었습니다.  지금도 포 시에는 장-밥티스트 베르나도트가 태어난 집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도심 한복판의 골목 속에 있는 집이라 으리으리한 저택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큼직한 기둥과 2개의 박공까지 딸린 중산층의 주택입니다.  





(베르나도트의 생가는 지금은 베르나도트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입장료 3유로입니다.)




어린 장은 꽤 똘똘한 아이였습니다.  거기다 집안 형편도 안정적이었지요.  그는 아버지의 연줄을 이용하여 14세의 나이에 그 소도시의 검사가 되기 위한 수습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이때만 해도 그의 인생은 아름다운 가스코뉴의 소도시에서 똑똑하고 근면한 검사로 평온하고 안정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진로에는 애초부터 내재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디딤돌이 되어줄 아버지의 나이가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결국 장이 17세 되던 해 3월, 그만 아버지가 69세의 나이로 사망해버립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귀족이나 대상인이 아닌 이상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의 죽음은 그 집안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방 소도시 검사라는 직업이 고액 연봉도 아니었거든요.  이렇게 되자 아버지의 연줄로 들어갔던 수습 검사의 자리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당시 가진 것이라고는 건강한 몸과 야망 밖에 없던 젊은이들이 갈 곳은 두 군데 뿐이었습니다.  바다에 나가서 선원이 되거나 군에 입대하는 것이었지요.  그 중에서도 바다보다는 군이 훨씬 더 점잖고 안전한 직업이었고, 3월에 아버지 장례식을 치른 17세의 젊은 베르나도트는 그 해 9월에 왕실 해병 연대(Regiment Royal?La Marine)에 이등병으로 입대합니다.  아마 바다에서 가까운 가스코뉴 지방이라서 그랬나 봅니다.




(1771년~1791년 동안의 왕립 해병연대의 군복입니다.  베르나도트도 이 군복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거친 군에 들어간 베르나도트는 해병대 특성상 얼마 전에 프랑스 땅으로 복속된 코르시카 섬으로 배치되어 거기서 첫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께서는 시가지를 순찰하는 베르나도트 이등병에게 몰래 돌을 던졌다가 붙잡혀 얻어맞은 나폴레옹... 등의 이야기를 기대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때는 그 섬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이 11살이라서 그는 이미 브리엔(Brienne-le-Chateau)에 있는 예비사관학교에 입교해 있을 때였습니다.  점령군 베르나도트 이등병과 프랑스에 대한 반감으로 불타는 열혈 소년 나폴레옹이 멀리서라도 마주칠 일은 없었던 것이지요.  


그 이후로도 베르나도트는 브상콩(Besancon), 그르노블(Grenoble), 마르세유(Marseille) 등을 전전하며 군 생활을 계속 했습니다.  당시 부르봉 왕정 하에서의 프랑스군은 채찍질 처벌이 존재하는 등 거친 곳이었고 급여가 많은 곳도 물론 아니었으니, 어린 나이에 군 생활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름 군 생활을 충실하게 잘 했던 것 같습니다.  하긴 당시 프랑스군 졸병들 중에 글을 능숙하게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테니, 어리지만 배운 것도 많고 천성적으로 똘똘한 두뇌를 가졌던 베르나도트는 상관들의 눈에 띌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덕분에 그는 입대 5년 만에 하사(sergeant, 정확하게는 우리나라 병장에 해당)로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미군도 그렇지만 당시 모병제였던 프랑스군에서는 병사가 부사관으로 승진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는데, 베르나도트는 그걸 해냈습니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군대에서도 아는 것 많고 똑똑한 것도 중요했지만, 사실 외모도 꽤 중요합니다.  상관이든 부하든 남에게 호감을 주는 외모가 유리하지요.  또 외모는 타고나는 것 외에도 옷차림이나 청결 측면에서 잘 가꾸는 것이 중요한데, 당시 베르나도트의 별명이 '각선미 하사'(Sergeant Belle-Jambe)였던 것으로 보아, 그는 외모 측면에서도 꽤 신경을 쓰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들 때문에 그는 비록 부사관이었지만 승승장구 승진을 거듭 했습니다.  불과 5년 만인 1790년, 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특무상사(Adjutant-Major)로 승진하는데, 이는 당시 병으로 승진할 수 있는 최고 지위였습니다.  




(그러고보니 베르나도트의 다리가 길고 매끈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젊은 시절 베르나도트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베르나도트는 현재 프랑스에서는 일종의 기피 인물로서, 그와 연관된 기록 등은 별로 정리 발표된 것이 없거든요.  한번은 지금도 가스코뉴 포에서 베르나도트 박물관을 운영 중인 베르나도트 가문 사람이 파리 시장에게 편지를 써서 '왜 베르나도트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은 없는가?' 라고 문의를 하자 짧게 '라이프치히(Leipzig, 1813년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의 적으로 싸운 전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할 정도니까요.  덕분에 그가 언제부터 열렬한 공화주의자 자코뱅이 되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아마 한때 쁘띠-부르조아(petit bourgeois, 소시민 중산층)로서 안락한 삶이 예정되어 있다 서민층인 부사관 계급으로 떨어진 뒤,  자신보다 아는 것도 실력도 별로 없으면서 으시대며 군림하는 귀족 출신 장교들을 보며 그런 신분제 사회의 불합리성에 대해 조용히 분노를 키우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그가 죽을 뻔한 것은 그가 그르노블에 주둔할 당시 거기서 벌어진 '타일의 날'(Journée des Tuiles) 폭동에서 시민들의 손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폭동에서는 3명이 죽고 20여명이 다쳤는데, 그 부상자들 중 하나가 폭동 진압에 동원되었던 해병들 중의 그였습니다.  여기서 부상을 입고 쓰러졌던 그를 살려준 것은 빌라르(Dominique Villars)라는 식물학자 겸 의사였습니다.  나중에 스웨덴의 왕세자가 된 베르나도트는 이 때의 은혜를 갚고자 빌라르를 자신의 어전 의사로 데려가고자 했으나 빌라르가 사양했다고 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1788년 그르노블의 타일의 날 폭동은 바로 그 다음 해인 프랑스 대혁명의 전조 정도였습니다.  그림 속에서 그르노블 시가지에서 시민들의 공격을 받는 흰 군복의 병사들이 보이는데, 그들이 왕립 해병연대입니다.  베르나도트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장교로 임관되었는지도 그 과정이 불분명한데,  당시 흔히 그랬듯이 아마 그가 속했던 연대도 혁명 진행 과정에서 붕괴되어 버리고 국민 공회에 호응하는 새로운 부대들이 조직될 때 동료 병사들에 의해 장교로 선출된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입니다.  어린 시절 법률 공부를 하여 장교들 못지 않은 실력을 가진데다 키도 키고 외모도 멋지며, 게다가 정치적으로도 열혈 자코뱅다웠던 베르나도트가 신분제가 폐지된 사회에서 병사들의 지지를 받아 장교로 선출되는 것은 꽤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같은 가스코뉴 출신의 프랑스 원수 장 란도 원래 사병 출신의 제대 병사였다가 1791년 그런 과정을 거쳐 동료 병사들에 의해 장교로 선출된 바 있었지요.  어쩌면 베르나도트의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는 “Mort aux rois!” (Death to the kings, 왕들에게 죽음을)라는 문신도 이때 즈음 새겼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베르나도트에게 자코뱅 정신이 아주 활활 불타고 있을 때였지요.


그런 베르나도트는 혁명 초기의 혼란을 타고 진급에 진급을 거듭했습니다.  27세에 특무상사였던 그가 벨기에 쪽에 주둔했던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 장군의 상브레-므즈(Sambre-et-Meuse) 방면군에서 준장으로 승진한 것이 불과 4년 뒤인 31세였을 때니까요.  같은 해에 관측용 기구가 최초로 작전에 활용된 전투였던 플레뤼스(Fleurus) 전투가 있었고, 이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를 거두자 그도 사단장, 즉 소장으로 한번 더 승진을 했습니다.  1790년~1794년 사이 그의 활약이 어땠길래 이렇게 고속 승진을 했는지는 역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는 나폴레옹 같은 군사적 천재는 아닐지 몰라도 매우 유능한 실무 지휘관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령 2년 뒤인 1796년 9월 주르당이 카알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에게 대패를 당할 때, 상브레-므즈 방면군이 전멸당하지 않고 무사히 라인 강을 건너 철수할 수 있었던 것은 베르나도트의 탁월한 지휘 덕분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벨기에 방면군을 상브레-므즈(Sambre-et-Meuse) 방면군이라고 불렀던 것은 벨기에 한복판에 위치한 이 지역이 상브르 강과 므즈 강이 합류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있는 도시가 위 1838년 그림에 묘사된 나뮈르(Namur)입니다.  당연히 두 강이 합쳐지는 곳이므로 산업과 통상이 발달한 곳입니다.)




이런 활약은 총재 정부에서도 주목받았습니다.  비록 상브레-므즈 방면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주르당은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베르나도트는 몇 개월 뒤인 1797년 1월, 무려 2만 명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새롭게 떠오르던 전선인 이탈리아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가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은 물론 아니었고, 거기서 연전연승을 이어가던 떠오르는 수퍼스타 사령관에게 보충 병력을 끌고 가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아마 이 곳에서 자기보다 더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사단장에 올라 으쓱하던 그보다 무려 6살이나 더 젊은데도 그의 상관으로서 일개 군(armee) 전체를 지휘하던 사람은 물론 다름 아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둘의 만남은 출발이 전혀 상쾌하지 못 했습니다.


To be continued...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histoire.online/index.php/2017/05/05/le-tatouage-de-bernadotte/

https://www.sudouest.fr/2010/08/28/bernadotte-le-roi-republicain-170917-4344.php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www.tripadvisor.co.kr/Attraction_Review-g187087-d6121622-Reviews-Musee_Bernadotte-Pau_Communaute_d_Agglomeration_Pau_Pyrenees_Bearn_Basque_Country.html

https://fr.wikipedia.org/wiki/Dominique_Villars

https://fr.wikipedia.org/wiki/Journ%C3%A9e_des_Tuiles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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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d 2018.07.09 09: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일세의 대영웅 인 것 은 맞지만 한편 약소국 입장에서는 침략자이기도 함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겠죠?
    베르나도트의 배신(?)을 비난하는 프랑스 인 들의 심리가 어떻게 보면 이오지마에서 미국에 항복해서 살아 돌아온 일본군 생존자를 황국을 배신한 자 라고 비난하는 것 과 비슷하게 들립니다

    선진국이고 뭣이고 사람 사는 것은 똑같은 듯

    • 웃자웃어 2018.07.09 2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애초에 그를 스웨덴 왕이 된 시점에서는 배신자라고 욕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스웨덴 왕으로서 스웨덴을 위해 일한것일 뿐이니까요. 게다가 프랑스장군으로서는 프랑스에 충성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2. da 2018.07.09 17: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문과는 상관없는 질문이지만 혹시 탈라베라 전투에서 KGL의 활약에 대해 서술한 글을 혹시 아시나요? 탈라베라 전투 6편은 매우 재밌었습니다만 이때 올리브밭 총격전에 대한 글을 어디선가 본거같은데 불과 한두달만에 기억이 안나서 찾질 못해 질문 드립니다. KGL 여단장인가 연대장이 라피스와 총격전을 벌이다가 세바스티아니군이 들이닥치자 부상당했고 몇시간만에 전사했다는 글이 적혀있었는데 찾기가 매우 어렵네요....도움 부탁드립니다.

  3. da 2018.07.09 1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억이 너무 가물가물해서 탈라베라 전투가 아닐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KGL이 아닐수도...

  4. 뱀장수 2018.07.09 18: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니 저 상브레-므즈 연대의 연대가가 아주 유명하지 않던가요 ㅎㅎㅎ

  5. 웃자웃어 2018.07.10 0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질문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전쟁을 많이 했다고 주장하시던데, 전쟁을 한 해하고 전쟁을 하지 않은 해하고 프랑스의 군비지출이 어느정도 차이가 나죠? 예를들어 1802년~1804년사이에는 어느정도 군사비를 지출했나요?

  6. 석공 2018.07.10 0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7. 안토 2018.07.10 1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템포조절 기막히게 하시네요 ㄷㄷ
    다음 화 엄청 궁금함 ㅠ

  8. Charlie 2018.07.11 14: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책좀 읽었다고 자부해왔지만, 이 정도의 글을 계속 연재 하시는 능력 정말 놀랍습니다. 정말 뭐하시는 분이지, 이런 자료들은 어디서 구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주변에 나름 똑똑하다고 하는 친구들이 있는 회사에 있지만 식견있는 대화를 나눌 동료가 없어 외로울 때가 많습니다. 제 주변에는 자신의 의견을 조리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1도 없습니다. 혹 하시는 모임등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그 모임에 한번 참석하여도 될런지요 ?

  9. TheK2017 2018.07.22 12: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드디어 만났네요 ^ㅇ^*

2018.06.25 06:30

이제 여러분은 약 4~5회의  포스팅에 걸쳐 나폴레옹의 껄끄러운 부하이자 인척이었던 장 베르나도트(Jean-Baptiste Jules Bernadotte)가 어떻게 현대 스웨덴 왕가의 초대 왕인 카알 14세(Karl XIV Johan)이 되었는지를 보시게 됩니다.  여러분들 대부분께서도 평민 하사관 출신의 프랑스 원수인 베르나도트가 프로이센과의 전쟁 때 포로로 잡힌 스웨덴 군인들을 잘 대우해준 덕분에 스웨덴에 좋은 인상을 남겼고, 때마침 스웨덴 왕에게 후사가 없자 후계자로 지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의문이 남습니다.  스웨덴 왕가에 설마 친척이 하나도 없었을 것 같지 않은데, 인척인 덴마크나 독일 귀족도 아니고 대체 왜 뜬금없이 프랑스의 장군을 왕으로 받아들였을까요 ?  그리고 기존 스웨덴 왕가에서는 왕족은 커녕 귀족도 아닌 베르나도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  가스코뉴 출신의 일개 사병에 불과했던 그가 어떻게 프랑스의 원수를 거쳐 뜬금없이 스웨덴의 왕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시작은 뜻 밖에도 18세기 초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됩니다.  


1709년 7월 우크라이나의 폴타바(Poltava)에서 스웨덴의 카알 12세(Karl XII)와 흔히 표트르 대제로 불리는 러시아의 표트르 1세(Pyotr I)가 맞붙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 대륙 북동부의 패권을 쥔 것은 전통의 강자 스웨덴이었고, 러시아는 낙후된 유럽의 변방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쾌승을 거둔 것은 표트르 1세였고, 이 전투를 통해 표트르 1세는 표트르 대제로 향후 추앙받는 미래를 닦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카알 12세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지배하는 몰다비아(Moldavia) 지방으로 도주해야 했고, 거기서 오스만 투르크에게 5년간 억류되었다가 1715년에야 풀려나게 됩니다.  




(폴타바 전투 장면입니다.)



(폴타바 전투 이후, 동맹이었던 우크라이나 카자흐 귀족 마제파(Ivan Mazepa)와 드네프르 강변에서 퇴각로를 논의하는 카알 12세입니다.)




이 폴타바 전투를 계기로 스웨덴은 1700년~1721년 사이에 치러진 대북방전쟁에서 북방의 패권을 러시아에게 빼앗기고 점차 몰락하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스웨덴은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특히 간신히 스웨덴으로 돌아온 카알 12세는 1718년 11월 당시 덴마크 영토이던 노르웨이의 요새를 공격하다가 어디선가 날아온 탄환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고 즉사했는데, 이때 그는 자식은 커녕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빈자리가 된 스웨덴 왕위에 대한 계승권은 그의 여동생 울리카(Ulrika Eleonora) 뿐만 아니라 홀슈타인-고톱(Holstein-Gottorp) 가문의 카알 프레드릭(Karl Fredrik)에게도 있었습니다.  거듭된 패전에 이런 사정까지 있다보니 결국 여왕이 된 울리카는 즉위의 댓가로 스웨덴 의회(Riksdag of the Estates, 스웨덴어로는 Riksens stander)에게 1719년 정부 기구법(Instrument of Government of 1719 스웨덴어로는 1719 ars regeringsform)이라는 문서에 서명을 해줘야 했습니다.  이 법안은 일종의 스웨덴 헌법으로 작용했고, 주된 내용은 그 이전까지 전제적 권력을 쥐고 있던 스웨덴 국왕의 권력을 대폭 제한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르웨이의 전장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카알 12세의 후송 장면입니다.)



(1917년에 이루어진 카알 12세의 부검 때 찍힌 사진입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노르웨이 요새에서 발사된 총알에 의한 것이다 아니다 포도탄이었다 아니다 그의 지휘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이 옆에서 쏜 것이다 등 별의별 소문이 많았습니다.   그런 괴소문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그의 시신은 1746년, 1859년, 1917년에 무려 3번이나 부검되었는데, 그 결과 밝혀진 것은 느린 속도의 탄환에 저격당한 것이고, 따라서 근거리의 부하가 아니라 노르웨이 요새에서 날아온 탄환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스웨덴에게는 잘 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패권은 잃었어도 입헌 군주국으로서 근대화의 길을 닦은 셈이니까요.  또한 카알 12세가 오스만에 머물던 동안 투르크인들에게 배워온 커피와 미트볼은 맛없기로 유명한 스웨덴의 식생활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최근에 스웨덴 정부가 공식적으로 '스웨덴의 대표 음식인 미트볼은 사실 카알 12세가 오스만 투르크에서 배워온 것이다'라고 밝히면서 스웨덴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요.




(스웨덴 정부 공식 트위터 계정에서 발표한, '스웨덴 대표 요리인 미트볼은 카알 12세가 터키에서 가져온 것이다 사실을 직시합시다'라는 트윗은 스웨덴 우익들에게 꽤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저 스웨덴 미트볼은 이케아 매장의 카페테리아에 가시면 드실 수 있습니다.  맛이요 ?  그냥 X뚜기 3분 미트볼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미트볼이 평범한 맛일지 몰라도 이런 딱딱한 호밀빵을 먹고 살던 바이킹의 후예들에게는 '드넓은 드네프르 강변 초원에서 살찐 암소들이 뛰노는 맛'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고양 이케아에 갔다가 이 knackerbrod(비스킷 스타일의 딱딱한 호밀빵)을 파는 것을 보고 찍은 사진입니다.  원래 페북에 올렸었는데, 한 분이 저 왼쪽 표지를 보고 댓글에서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니, 첫줄부터 거짓말 !'이라고 쓰신 것을 보고 빵터졌습니다.  김한솔님 고맙습니다.)




울리카 여왕은 처음에는 남편 헤세-카셀 백작(Landgrave of Hesse-Kassel)을 왕으로 승격시키고 남편과의 공동 통치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스웨덴 의회(Riksdag)과의 갈등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결국 1년 뒤인 1720년 남편에게 아예 양위를 해버렸습니다.  이로써 17세기 중반부터 스웨덴을 통치해온 팔라틴-츠바이브뤼켄(Palatinate-Zweibrucken) 왕가의 혈통은 끊어지고 독일계인 헤세-카셀 가문이 스웨덴 왕가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와이프를 잘 둔 덕분에 스웨덴 국왕에 오른 프레드릭 1세(Fredrik I)도 자식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1751년 그의 친척이었던 독일계 홀슈타인-고톱(Holstein-Gottorp) 가문의 아돌프 프리드리히(Adolf Friedrich)가 스웨덴 국왕 아돌프 프레드릭(Adolf Fredrik)이 되어 홀슈타인-고톱 가문의 치세가 시작되었습니다.  


헤세-카셀 가문이 스웨덴 국왕이 된 것도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을 패배시킨 러시아와 1719년 정부 기구법을 강요하여 통과시킨 스웨덴 의회였듯이, 홀슈타인-고톱 가문의 아돌프 프레드릭을 스웨덴 왕위에 올린 것도 결국 러시아와 스웨덴 의회였습니다.  1741–43년의 스웨덴-러시아 전쟁에서 이번에는 러시아의 여걸 엘리자베타(Elizaveta Petrovna) 대제에게 패배한 스웨덴에서는 당시 의회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모자당(the Hats, 스웨덴어로는 Hattarna)이 패전의 책임추궁을 피하기 위해 왕위 계승권 문제를 이슈화시켰습니다.  여기에 러시아 엘리자베타 대제가 끼어들었습니다.  패배한 스웨덴과 종전 협상을 하던 엘리자베타는 과연 여걸답게, 스웨덴으로부터 빼앗은 핀란드 영토 대부분을 되돌려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대신 그녀의 후계자인 표트르 3세(Pyotr III)의 삼촌인 홀슈타인 공 아돌프 프리드리히를 스웨덴 국왕 후계자로 지명하라는 것이었지요.  핀란드 땅을 돌려주는 대신 아예 스웨덴 전체를 쥐고 흔들겠다는 통큰 구상이었습니다.  국가보다는 당장 세금이 나올 영토와 자신들의 특권이 가장 중요했던 스웨덴 의회는 그 미끼를 덜컥 물어버렸습니다.  




(아돌프 프레드릭입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지 20년만인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의 사인은 과식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먹었던 식사는 랍스터, 캐비어, 사우어크라우트, 훈제 청어와 샴페인이었고, 거기에 덧붙여 그가 끔찍하게 좋아했던 스웨덴식 달콤한 푸딩인 셈라(Semla)를 뜨거운 우유에 적신 것을 무려 14인분을 먹었다고 합니다.) 



(아돌프 프레드릭을 사망에 이르게 한 헤트베크(Hetvägg)는 셈라(Semla)에 뜨거운 우유를 부어먹는 디저트입니다.  부먹을 즐기는 것을 보니 스웨덴 사람들 야만인이네요.  찍먹이여 영원하라 !)




이렇게 의회와 러시아 덕분에 왕위에 오른 아돌프 프레드릭은 그들의 기대대로 유약한 왕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권력이 의회에 있고 나라 전체가 러시아 눈치를 보던 상황에서, 허울 뿐인 왕이었던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당시 유행하던 코담배갑(snuffbox)를 만들며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 그도 의회로부터 권력을 다시 가져오려고 간간히 노력을 하긴 했습니다.  그의 왕비인 루이자 울리카(Louisa Ulrika)가 의회에 대적하여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왕비는 폐위되고, 국왕 아돌프 프레드릭은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있을 경우 퇴위하겠다'라는 서약을 해야 했습니다.  1768년에는 아돌프가 의회 권력에 저항하여 칙령에 서명을 거부하는 12월 위기(스웨덴어로 Decemberkrisen)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만, 그 결과로 의회로부터 받아낸 것은 그야말로 용돈 인상 정도였습니다.


그런 권력 없는 스웨덴 국왕이 권력을 되찾은 것은 그의 아들 구스타프 3세(Gustav III)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디저트를 너무 많이 드셔서 돌아가신 1771년 왕위에 오른 구스타프 3세는 바로 다음해인 1772년 과격한 방법으로 다시 전제 군주가 됩니다.  1718년 카알 12세의 전사 이래, 1719년 정부 기구법을 통해 실권을 장악했던 스웨덴 의회의 권력을 친위 쿠데타를 통해 끝장낸 것입니다.  정작 이렇게 귀족들로부터 무력으로 권력을 되찾은 구스타프 3세는 자신이 계몽 군주임을 표방하여, 볼테르와 교류를 가지면서 여러가지 개혁 작업을 실시했습니다.  또한 1790년 쌍방에서 500척의 군함을 동원한 엄청난 규모의 스벤스크순드(Svensksund)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을 대파하는 기염을 토하며 스웨덴이 아직 무시당할 수준으로 찌그러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보였습니다. 



 

(구스타프 3세입니다.  이 양반의 자코뱅에 대한 증오심은 살짝 지나쳤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등장하는 페르젠의 실제 모델인 악셀 폰 페르센이 프랑스군과 함께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었습니다.  폰 페르센이 그 공로로 조지 워싱턴으로부터 훈장을 받자, 구스타프 3세는 폰 페르센에게 '국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준 훈장은 패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대승리로 인해 스웨덴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자칭 계몽 군주였던 그는 이런 위험한 혁명분자들, 즉 자코뱅(jacobin)들에 대한 격렬한 증오에 사로잡혀 자유 언론을 탄압하고 별 직접적인 상관도 없는 프랑스를 적대시하며 유럽 각국의 왕족들과 연합하여 반프랑스 동맹의 열혈 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쿠데타로 권력을 빼앗은 왕을 미워하던 스웨덴 귀족들은 쓸데없이 남의 나라 일에 배놔라 감놔라 하며 국가와 귀족들을 위험에 몰아넣는 구스타프 3세에 대해 더욱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반감은 결국 1792년, 스웨덴 왕립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가장 무도회에 참석했던 구스타프에 대한 암살로 터져나옵니다.  근거리에서 등 뒤에 권총을 맞은 구스타프 3세는 총을 맞는 순간 다음과 같이 완벽한 프랑스어로 외쳤다고 합니다.


Ah! Je suis blessé, tirez-moi d'ici et arrêtez-le  (아 !  난 부상을 입었다, 날 여기서 끌고나가고 저 자를 체포하라 )


그는 이랗게 암살범들을 진압하였으나, 총을 맞은지 13일만에 패혈증으로 결국 사망했는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다행히도 스웨덴어였다고 합니다.


Jag känner mig sömnig, några ögonblicks vila skulle göra mig gott  (졸립구나, 조금 자고 나면 괜찮아질거야)


그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아들 구스타프 4세 아돌프(Gustav IV Adolf)였습니다.  당시 14살로 아직 미성년이었던 그는 삼촌 카알(Karl) 공작의 섭정 하에 성장했는데,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은 그가 숙적이자 무시할 수 없는 힘센 이웃 러시아의 대공녀인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Alexandra Pavlovna)와의 결혼을 거절했던 사건이었습니다.  1796년, 섭정인 카알 공작은 이제 막 성인이 되기 직전이었던 구스타프 4세의 미래를 위해 러시아와의 정략 결혼을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구스타프 4세는 독실한 루터파 개신교 신자였고, 자신의 왕비가 러시아 정교를 버리고 루터파로 개종하지 않는다면 결혼할 수 없다고 버티어 이 혼사를 망쳐놓았습니다.  이것을 본 스웨덴 귀족들은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드디어 스웨덴에 검소하며 신앙심이 독실한 평범한 왕이 왕좌에 앉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To be continued...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Instrument_of_Government_(1809)

https://en.wikipedia.org/wiki/Instrument_of_Government_(1719)

https://en.wikipedia.org/wiki/Gustav_IV_Adolf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Gustav_III_of_Sweden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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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웃자웃어 2018.06.25 08: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질문있습니다. 당시(나폴레옹 전쟁시기)에 전쟁배상금은 어떠한 방식으로 갚나요?
    1)한번에 갚나요? 몇년에 걸쳐서 갚나요?
    2)국채를 발행해서 갚기도 합니까?
    3)국민들에게 걷는 세금을 대폭 인상해서 갚기도 합니까?

    • nasica 2018.06.25 1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당연히 할부입니다.
      2) Yes.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에게서 배상금 일부로 받은 약속어음을 바르샤바 공국에게 할인가에 떠넘기기도 했습니다.
      3)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패전 직후에 설마 세금 대폭 인상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2번에서 나폴레옹이 프로이센 어음을 할인가에 바르샤바에 떠넘긴 것도 사실상 받아내기 어려운 불량 채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웃자웃어 2018.06.25 08: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각해보면 한국도 5호 16국 시기에 중국의 문화가 중국의 난민들을 통해서 많이 유입되었죠.

  3. 2/28일 입대 2018.06.25 14: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매번 좋은 글 과분하게 누리고 갑니다. 문득 궁금해졌는데요, 평민 병사가 아무리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베테랑이라고 해도 그 경험만으로 원수가 된건 아닐 것 같은데요, 저때도 간부후보생(맞나요? 그 병사가 장교가 되는 것) 과정 같은 제도가 있었나요?

    • nasica 2018.06.25 2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혁명 초기 자원병들로 구성된 부대들은 놀랍게도 병사들 중에서 선출로 장교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기다리시면 나옵니다만 베르나도트는 장교가 될 자질과 기초 교육이 충분했습니다.

  4. 석공 2018.06.25 2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찍먹이여 영원하라~~ ^^

  5. 카를대공 2018.06.28 09: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일계 왕족이 동유럽,중부유럽,북유럽까지 광범위하게도 왕자리 해먹었네요.

    그러고보니 지금 영국 왕가도 독일계였죠.

  6. 샤르빌 2018.07.01 01: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야 역시 유럽왕가들은..

  7. 엠마 넬슨 2018.07.01 05: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스트리아와 섞이지 않은 유럽왕가는 있으려나요? ㅋㅋ

  8. TheK2017 2018.07.22 11: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흥미진진합니다. ^^*

  9. 목탁 2019.02.27 1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오~구스타프 3세의 암살에 저런 뒷사정이...참고로 먼 훗날 '메리메'란 프랑스의 소설가가 저 암살 사건을 소재로 단편
    호러 소설 하나를 썼었는데, 정작 소설 주인공은 그보다 훨씬 전 시대 왕인 칼 9세 (사자왕의 아부지)...대략적인 줄거리는 칼 9세가 본인 생일날에 뜬금없이 궁전에서 몇몇 괴기현상들을 겪은 끝에, 급기야
    어느 홀에서 '생전 처음 보는 옷차림의 군중들'이 '목 없는 누군가'의 장례를 치르는 환영과, '어떤 젊은이'가 참수당하는 환영을 보게 되고, 환영 중 1명으로부터 '넌 별 탈 없겠지만, 한 5대쯤 후의 왕한테는 재앙이 닥칠 거야'라는 경고까지 듣는다는 내용입니다. 소설 말미에 저 괴현상들이 구스타프 3세의 암살에 대한 예언일 거라고 추측하는 형식으로 작가가 해설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2018.06.14 06:30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로부터 추가적인 영토를 뜯어냅니다.  그러나 이때가 나폴레옹 제국이 최대 영토를 자랑하던 때는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은 1810년에 오는데, 이때 나폴레옹이 우디노의 군단을 동원하여 추가로 타국을 정복했고 그 땅을 아예 프랑스 영토로 편입했거든요.  1810년은 비교적 조용한 한 해로 알려졌는데, 그런 한가한 시기에 나폴레옹의 먹이가 된 나라는 어디였을까요 ?  바로 네덜란드였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침공할 때 당시 네덜란드의 국왕은 용감하게도 병사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며 저항을 지시했는데, 그 국왕은 바로 나폴레옹이 아끼는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였습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  이 복잡한 이야기를 듣고 나시면 왜 네덜란드 축구팀의 상징이 오렌지색인지도 아실 수 있습니다.





(네이버를 뒤져보아도 저 유니폼 색깔과 오렌지공 윌리엄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왜 애초에 네덜란드 귀족이 오렌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잘 안나오더군요.  아무튼 이번 월드컵에서는 오렌지 군단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아쉽게도요.)




유아기에 사망한 형제들을 빼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는 본인 제외하고 모두 7명의 남매가 있었습니다.  맨 위가 조제프 (Joseph), 둘째가 나폴레옹, 세째가 유능했던 루시앙(Lucien), 그 다음이 존재감 없던 엘리자(Elisa), 다섯번째가 오늘의 주인공 루이(Louis), 그 다음이 아름다운 폴린(Pauline), 탐욕스러운 캐롤린(Caroline), 그리고 막내 제롬(Jérôme)입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독립 운동에서 어설프게 정치판에 뛰어들었다가 야반도주하여 프랑스에 정착한 이후, 가족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가부장적 중압감에 시달리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는 툴롱 포위전 이후 신분이 상승하자, 당연히 자신의 식구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닦아주기 바빴고, 특히 남자 형제들에게는 출세길을 열어주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루이와 제롬이었지요.  제롬은 워낙 어렸으므로 일단 학교에 보내 교육을 받게 했지만, 루이 같은 경우는 당시 국방장관이던 카르노(Carnot)에게 청탁을 넣어 포병 부대에 장교로 임관을 시켰습니다.  루이는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원정은 물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집트 원정까지도 따라가 위대한 형의 부관 노릇을 했습니다.  물론 애지중지하는 동생이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배려했던 형 덕분에 전공을 세울 기회는 없었습니다만, 형이 프랑스 제1통령이 되자, 그 여세를 몰아 25살이라는 새파란 나이에 장군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하는 낙하산을 타게 됩니다.  마치 요즘 우리나라 재벌 2세, 3세와도 같은 행보였지요.  다만 우리나라 재벌 2,3세와는 달리, 그는 스스로 '너무 이른 나이에 너무 높은 계급에 부당하게 올랐다' 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다소 주눅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루이 보나파르트입니다.  둘째 형보다는 다소 못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눅이 든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장군으로 승진하기 1년 전인 1802년, 하늘 같은 둘째형인 나폴레옹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나폴레옹의 의붓딸이자 형수 조세핀의 딸, 즉 촌수로 치면 바로 자신의 의붓 조카딸인 오르탕스(Hortense de Beauharnais)와 결혼하라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어떻게든 보나파르트 가문의 후손을 얻어야 했고, 조세핀은 어떻게든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자신의 입지를 굳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정략 결혼을 결정한 것이지요.  그러나 루이는 다른 보나파르트 가문의 사람들처럼 보아르네 가문 사람들을 끔찍하게 싫어했고, 오르탕스도 늘상 우울하고 주눅이 들어보이고 루이를 혐오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르탕스는 당시 다른 남자와 열애 중이었지요.  그러나 지중해성 가부장인 나폴레옹은 눈도 꿈쩍 하지 않았습니다.  이 불행한 결혼은 이 두 젊은 남녀에게는 그야말로 실패작이었습니다만, 나폴레옹과 조세핀에게는 대성공작이었습니다.   아이를 둘이나, 그것도 둘다 아들로 낳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첫 아이의 탄생에 대해 나폴레옹은 너무나 기뻐하며 그 아이에게 나폴레옹(Napoléon Louis Charles Bonaparte)이라는 이름을 선사했습니다.  실은 둘째에게도 Napoléon Louis Bonaparte라는 나폴레옹의 이름을 선사했고, 훨씬 나중인 1808년에 태어난 세째에 대해서도 같은 이름 Louis-Napoléon Bonaparte을 주었습니다.  





(첫째 아들인 나폴레옹 루이 샤를입니다.  나폴레옹이 하도 이 아이를 각별히 여겨, 항간에는 저 아이가 나폴레옹과 오르탕스의 근친상간으로 나온 아이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이 여자 문제가 난잡하기는 했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날조라는 것이 대체적인 역사가들의 의견입니다.)




그러나 첫째는 5살이 되기 전에 병으로 죽고 말아, 나폴레옹은 물론 전체 보나파르트 가문에게 큰 슬픔을 주었습니다.  둘째인 루이 나폴레옹도 나폴레옹 몰락 이후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그는 동생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압제에 저항하는 북부 이탈리아의 지하 조직 카르보나리(Carbonari) 활동을 하다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는데, 그 와중에 병에 걸려 동생의 팔에 안긴 채 27살의 나이로 죽은 것입니다.  루이와 오르탕스가 잠깐 화해한 1807년 프랑스 툴루즈에서 잉태된 세째는 이탈리아 경찰의 추적을 뿌리치고 어머니 오르탕스와 함께 탈출에 성공하는데, 이 청년이 훗날 나폴레옹 3세가 됩니다.  그 이야기는 훨씬 훗날 다룰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루이-나폴레옹입니다.  어릴 때 그려진 그림 밖에 없네요.  6살의 나이에 1주일 뿐이지만 네덜란드의 왕을 역임한 소년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불행한 결혼에 우울해하던 루이에게 형 나폴레옹은 1806년, 뜻밖의 제안을 하게 됩니다.  네덜란드의 왕으로 즉위하라는 것이었지요.   루이가 네덜란드 왕으로 즉위하게 되기까지는 무척 복잡한 정치외교적인 역사와 사건이 얽혀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중세 이후 왕가들의 결혼에 따라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통치권이 넘어갔다가,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결과로 1581년에 7개 지방의 연합체인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한 부유한 동네였습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수장을 stadtholder, 네덜란드어로는 stadhouder(스타트하우더, stadt는 영어로 city, town 등을 뜻하는 단어)라고 하는데, 이는 부관이나 중위를 뜻하는 불어 단어 및 거기서 파생된 동일 스펠링의 영어 단어 lieutenant(루테넌트, 불어로는 류뜨낭)와 동일한 뜻으로 '왕이 없는 동안 왕을 대리하는 직책'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네덜란드 저지대에는 합스부르크 왕들이 직접 거주하지 않았으므로, 그 지방의 귀족을 대리인으로 지정해 세금 징수 등의 업무를 보게 했는데, 그 명칭이 독립 이후에도 이어진 것이지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지휘한 것도 네덜란드의 스타트하우더인 오라녜-나사우(Oranje-Nassau) 가문의 빌렘( (Willem van Oranje, 영어로는 William of Orange) 1세였습니다.  이 직위는 세습되는 것이었으므로, 외국에서는 이 스타트하우더 관직을 왕이나 뭐 그에 준하는 것인 모양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나폴레옹 패망 이후 실제로 이 가문의 수장을 왕으로 하는 네덜란드 왕국이 성립되었으니, 그 오해가 꼭 틀린 것은 아니었지요.





(이 씩씩하게 생긴 양반이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 나사우의 빌렘 1세입니다.)




참고로, 이 오라녜-나사우는 원래 네덜란드와는 상관없는 곳입니다.  오라녜(네덜란드어로 오라녜이고, 프랑스어로는 오랑쥐)는 프랑스 남부, 아비뇽(Avingon) 인근에 있는 곳이고, 나사우는 독일에 있는 지방입니다.  이 두 지방의 귀족들이 결혼 및 상속을 통해 합쳐진 것이지요.   네덜란드가 이 오라녜-나사우 가문과 연결된 것은 나사우의 엥겔베르트 2세(Engelbert II)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플랑드르의 스타트하우더로 임명되면서부터였습니다.  또, 이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이름과 과일 오렌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에는 오렌지라는 과일이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색깔도 주황색에 대해서는 그저 노란 빨강(yellow-red) 또는 샤프란(saffron) 색 정도로 불려질 뿐, 오렌지 색이라는 색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오렌지는 중국 남부의 감귤류가 조상인 과일이라서, 유럽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식물이었습니다.  그러다 동남아와 인도를 거쳐 아랍 쪽에 전해졌지요.  유럽에까지 이 과일 나무가 전해진 것은 15세기 후반부터였고, 유럽에 오렌지라는 것이 널리 알려진 것은 17세기 중반 경이었습니다.  이 과일의 이름이 오렌지로 정해진 것도 오랑쥐 또는 오라녜와는 전혀 무관한, 이 과일의 아랍 이름인 나랑쥐 (naranj)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기 가문의 영지 이름과 과일 이름이 비슷하여 어리둥절했을 오라녜-나사우 가문에서 이 오렌지 색을 자기 가문의 상징으로 받아들인 것은 네덜란드 독립 전쟁 즈음 해서였다고 합니다.  즉, 네덜란드 국가대표축구팀이 오렌지 색 유니폼을 입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참고로 프랑스 남부의 오랑쥐라는 지명은 과일과는 전혀 무관한, 고대 켈트족의 물의 신인 Araisio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와중에 서민들이나 한다는 직접 찍은 유럽 여행 사진 자랑...  스페인에는 가로수로 오렌지 나무가 많은데, 오렌지 향기를 좋아했던 아랍인들이 스페인을 정복했을 때 심은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사진은 세비야에서 찍은 것입니다.  가봤던 스페인 도시 딱 하나에 다시 가보라고 한다면 저는 세비야를 택하겠습니다.  좋더라구요 !)




아무튼 그 오라녜 공을 수장으로 하던 네덜란드 공화국은 스페인과는 달리 발달된 상공업 덕분에 시민 계급의 성장과 계몽주의 확산이 매우 왕성했습니다.  덕분에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이미 오라녜 가문에 대해 무장 혁명이 일어날 정도였으나, 오라녜 가문과 친척이던 프로이센 왕의 군대가 이를 진압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지요.  그러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자연스럽게 이 네덜란드 자체 혁명 세력은 프랑스 혁명군의 지원을 받아 오라녜 가문을 내쫓고 새로운 정부인 바타비아(Batavia) 공화국을 세웁니다.  그러나 프랑스 자신이 공안 위원회의 공포 정치나 부패한 총재 정부 등 혼란을 겪으면서 네덜란드의 혁명 정부도 많은 혼란과 내부 갈등, 거기에 힘세고 거친 이웃인 프랑스의 간섭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도 네덜란드의 독립성을 유지시켜 주었던 것은 네덜란드의 무력보다는 네덜란드의 은행가들이었습니다.  아시냐 지폐의 혼란 등 재정 붕괴로 고통을 겪던 프랑스 혁명 정부는 부유한 네덜란드에게 차관을 요구했고, 네덜란드에서는 특혜에 가까운 저이율로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프랑스를 지원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일단 중2병 환자였던 나폴레옹은 민주 정권을 쿠데타로 뒤엎은 인간답게, '민주 공화국'이라는 네덜란드를 무척 고깝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뒤 당장 돈이 없어서 쩔쩔 매던 나폴레옹도 전임 총재들처럼 네덜란드 은행가들에게 대출을 요청했습니다.  문제는 그 태도와 조건이 마치 뭐 맡겨 놓은 돈을 인출하는 고객처럼 무이자 대출을 거만한 태도로 요구했다는 것이지요.  네덜란드 은행가들이 이 신용평가가 떨어지는 반란군 수괴에게 대출을 거부하자, 네덜란드의 독립은 이미 반쯤 날아간 것이었지요.  게다가 트라팔가 해전 이후 영국 침공의 꿈이 완전히 좌절되자 네덜란드에서는 당장 '영국 침공 망했으니 그거 한답시고 빌려간 불로뉴의 대형 보트 함대 돌려주세요'라고 눈치도 없고 시의부적절한 반환 요구를 하는 바람에, 나폴레옹의 심기를 크게 자극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불로뉴에 대규모로 집결시켰던 이 대형 평저선들은 알고 보면 네덜란드에서 빌려온 것들....)




게다가 네덜란드 공화국 내부에서도 갈등이 많았습니다.  가령 세금이 재산세 위주가 아니라 소비세 위주라서 서민들에게 불리했는데, 이를 바로 잡고 빈민들을 구제하자는 개혁 세력과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기존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기득권 세력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이런 내부 갈등 때문에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자 원래 혁명을 지지했던 많은 네덜란드인들도 혁명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나라 전체가 영국과의 교역으로 먹고 살던 네덜란드가 나폴레옹의 지엄하신 대륙 봉쇄령을 몰래 깨고 영국과 밀무역을 계속하자 나폴레옹은 네덜란드를 그냥 정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됩니다.  그렇다고 수십년간 독립 전쟁을 벌이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손아귀로부터 기어코 독립을 쟁취했던 만만치 않은 성깔의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일부로 병합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네덜란드를 꼭두각시 왕이 다스리는 허수아비 왕국으로 만들기로 합니다.  그 적임자로 지명된 것이 루이였습니다.  이미 조제프는 나폴리 왕이었고, 그렇다고 보나파르트 가문 출신이 아닌, 사위일 뿐인 뮈라를 먼저 왕으로 앉힐 수도 없었으니까요.  어차피 나파륜 황제가 결정한 이상 다른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데다 내부 갈등에 지친 네덜란드도 반쯤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타협에 응합니다.  즉, 루이와 그의 후손이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절대 프랑스 왕위와 합쳐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든지, 네덜란드에는 징집제를 도입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현실적인 조건으로 나폴레옹의 명에 따르게 됩니다.





(1807년 루이 치하의 네덜란드 왕국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루이는 네덜란드에 파견된 프랑스 총독 노릇을 바라던 형 나폴레옹의 기대와는 전혀 딴판으로 행동합니다.  루이는 1806년 6월 네덜란드 국왕으로 즉위하자마자, 프랑스식 이름인 루이(Louis)를 네덜란드식으로 로더베익(Lodewijk)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열심히 네덜란드어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형이 붙여준 프랑스 출신 관료들에게도 모두 네덜란드어를 배우게 함은 물론, 프랑스 시민권을 포기하고 네덜란드인으로 거듭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심지어는 왕비인 오르탕스에게까지 프랑스 시민권을 버리도록 강요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이런 노력은 네덜란드 시민들에게 상당한 호감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1807년 라이덴(Leiden)에서 발생한 화약 화물선 폭발 사고와 1809년 홍수 상황에서, 루이는 네덜란드 시민들의 구호에 온 힘을 기울여 국민들의 큰 칭송을 받아 '선량왕 로더베익'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오르탕스는 젊고 아름다운 왕비였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 보아르네와 이혼한 뒤 갈 곳이 없었던 어머니 조세핀을 따라 어머니의 고향인 카리브 해의 마르티니크에서 흑인 노예들의 춤과 노래를 보고 들으며 소울을 키웠기 때문에, 춤과 음악에 무척 재주가 있는 활기찬 아이였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그녀의 그런 점을 높이 보았고, 나폴레옹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히틀러처럼 나폴레옹도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었지요.)




왕비 오르탕스는 처음에는 네덜란드의 왕비가 되라는 지시에 정말 크게 반발하고 실망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친구들과 어머니 조세핀이 있는 아름다운 파리를 떠나기 싫어했고, 또 끔찍하게 싫은 남편인 루이와 함께 가야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네덜란드에 도착해 보니, 시민들이 (이건 루이의 공이 컸는데) 왕비인 자신을 무척 좋아하고 환영하는 것을 보고 그녀도 조금씩 네덜란드에 대해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루이와의 관계는 역시 전혀 좋지 못하여, 이 부부는 될 수 있으면 서로를 피했고 어쩔 수 없이 같이 하는 식사에서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루이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은 오르탕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루이 왕의 그런 통치는 결코 나폴레옹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루이에게 그동안 프랑스가 네덜란드 은행가에서 꿔온 대출금을 1/3 수준으로 일괄 탕감하도록 조치하라고 시켰으나, 독립국가 네덜란드 왕국의 수장으로서 네덜란드 시민들의 이익을 지켜야 했던 루이는 그런 터무니 없는 형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나폴레옹으로서는 정말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네덜란드의 바타비아 공화국을 폐지시켰던 가장 큰 이유인 대륙 봉쇄령의 엄격한 시행이었는데, 사랑하는 네덜란드 국민들의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었던 루이는 그 단속에 대해 열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사고를 칩니다.  1809년 영국이 앤트워프(Antwerp, 네덜란드어로는 안트베르펜 Antwerpen)과 플러싱(Flushing, 네덜란드어로는 블리싱헨 Vlissingen)을 침공한 것입니다.  이 대규모 상륙 작전에 동원된 병력은 총 4만의 대군이었습니다.  당연히 루이는 이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루이의 독립 왕국 네덜란드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한 것은 당시 오스트리아와의 바그람(Wagram) 전투에서 나폴레옹 눈 밖에 나서 프랑스에 와 있던 베르나도트였습니다.  그는 고작 2만명 규모의 병력을 끌고 가서 네덜란드에 상륙한 뒤 네덜란드 저지대 특유의 풍토병으로 끙끙 앓고 있던 영국군을 쓱쓱 밀어내버린 것입니다.





(이 안트워프/플러싱 침공을 영국에서는 왈체런 Walcheren 작전이라고 부릅니다.  그 작전을 지휘했던 캐텀 백작, John Pitt, 2nd Earl of Chatham 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나폴레옹은 말 안 듣는 배은망덕한 동생 루이에게 '자기 왕국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왕'이라며 차라리 퇴위를 명했습니다.  루이는 그를 거부했지만 사실 오래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1810년 여름, 나폴레옹은 우디노를 앞세워 동생의 왕국을 침공할 태세를 취했고, 루이는 감히 무서운 형에 맞서 자신의 네덜란드군에게 저항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무리 루이를 좋아했다고 해도 가망없는 싸움에 헛되이 목숨을 버리기엔 너무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신의 왕위가 보잘 것 없는 허울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루이는 7월 1일 왕위를 아들 나폴레옹 루이에게 넘기고 도주했습니다.  우디노의 부대는 7월 4일 네덜란드를 무혈 침공했고, 당시 6살이던 어린 루이 2세를 잘 타일러 큰 아버지 댁, 즉 나폴레옹의 튈르리 궁으로 데려갔습니다.  이로써, 루이의 네덜란드 왕국은 불과 4년 만에 사라지고, 7월 9일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일부로 병합되어 버립니다.  


왕위를 잃은 루이의 행방은 처음에는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우디노를 비롯한 나폴레옹의 부하들은 루이가 대체 어디로 도망쳤는지 알지 못했고, 동생의 안위가 살짝 걱정되었던 나폴레옹이 행방불명된 루이를 찾아 '잘 타일러 파리로 보내라'고 각지에 편지를 써보낼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다 루이가 뜻 밖에도 오스트리아로 도주하여 망명한 것이 알려져 나폴레옹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장인어른 댁으로 도망친 것이니까요.  아마 무시무시한 사위를 상대하기 껄끄러웠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도 이 망명객이 무척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만, 차마 파리로 압송하지는 못했습니다.  나폴레옹도 차마 장인에게 신병 인도를 요청하지는 못했습니다.


루이나 프란츠, 나폴레옹보다 더 곤란해진 것은 당연히 네덜란드 시민들이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이 네덜란드에 자신의 동생을 왕으로 앉힐 때의 조건은 절대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통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루이가 쫓겨난 지금 네덜란드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네덜란드 시민들은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시작된 하천이 네덜란드의 주요 항구 도시로 흘러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자연적으로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일부로 통합해버렸습니다.  


특히 이건 네덜란드의 상징적 독립성 못지 않게 네덜란드 시민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와 직결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공포의 징집제였지요.  네덜란드에서는 징집제를 적용하지 않겠다는 조건의 나폴레옹의 동생을 국왕으로 받아들였던 것인데, 이젠 아예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일부가 되어 버렸으니 징집제는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결국 1811년부터 네덜란드에도 징집제가 적용되었고, 20세 이상의 청년들이 프랑스군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1812년 러시아로 향했던 나폴레옹의 군대 속에는 약 1만5천의 네덜란드 청년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약소국의 설움이었지요.  


그러나 최소한 1810년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한다는 발표가 났을 때 네덜란드인들은 크게 동요하며 저항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는 주요 전쟁이 나폴레옹의 승리로 다 끝난 뒤인 평화 시기였고, 러시아와의 비극적 전쟁이 예고된 바도 없었거든요.  오히려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되면서 네덜란드 경제를 괴롭히던 불확실성이 제거된데다 프랑스라는 큰 시장에 대한 관세도 사라진 셈이 되어, 많은 네덜란드 상인들은 합병 조치에 씁쓸해하면서도 자신들의 장사에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로 망명한 루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망명 이후 루이는 오스트리아에서 조용한 망명 생활을 하며 문필 활동에 전념합니다.  나폴레옹 퇴위 이후 네덜란드가 결국 오라녜 가문의 빌렘 1세를 왕으로 하는 왕국으로 독립하자, 그는 나름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를 방문하게 해달라고 빌렘 1세에게 여러번 요청했지만 계속 거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왕인 빌렘 2세가 1840년 그의 방문을 '익명으로 여행할 것'을 조건으로 허락합니다.  그가 이렇게 익명으로 네덜란드의 어느 호텔에 묵었을 때, 그래도 그를 알아본 시민들이 그 호텔 방 창문 아래 모여 들었습니다.  거리에서 웅성이는 소리를 듣고 창문으로 나온 그를 맞이한 것은 잠깐이지만 네덜란드를 진심으로 대하며 다스려준 전왕에 대한 네덜란드 시민들의 환호화 갈채였습니다.  그는 이 사건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후, 이탈리아 독립 운동을 벌이던 아들들과는 달리 별다른 정치 활동을 벌이지 않고 조용히 살다가 1846년 평화롭게 죽었습니다.





(하지만 루이가 이 세상에 남긴 가장 큰 결과는 바로 이 남자입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요.)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www.erfskipterpdoarpen.nl/documents/Engels/SoldiersNapoleon/SoldiersNapoleonIntroduction.htm

https://en.wikipedia.org/wiki/Louis_Bonaparte

https://en.wikipedia.org/wiki/Hortense_de_Beauharnais

https://en.wikipedia.org/wiki/William_the_Silent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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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웃자웃어 2018.06.14 1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질문 있습니다. 예전에 나폴레옹시대의 징발편에서 대량으로 물자를 징발했다는 이야기를 봤었는데요,
    1)그러면 나폴레옹이 징발을 한 이유는 돈이 많이 들어서이고,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 적지에서 무자비한 징발을 한 것이겠군요?
    2)그러면 적에게 강요한 전쟁배상금은 액수는 징발을 하지 않았다면 더 늘어날 수도 있겠군요?
    3)적국의 무기고를 턴것도 일종의 징발이라고 봐도 되나요?

    • nasica 2018.06.14 22: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Yes
      2) 그럴 수도 있겠네요
      3) 영수증이 없으므로 징발은 아니겠지만 차후 종전협상시 배상금에 포함되거나 반환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다.

    • 웃자웃어 2018.06.14 2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변 고맙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영국 육군이 돈을 많이 쓴 이유도 사실상 전쟁물자 상당수(예: 식량)등을 징발시 제값을 치뤘기 때문이겠군요.

  2. 웃자웃어 2018.06.14 14: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한민국은 당시 프랑스 사람들을 욕할 자격이 없죠. 2012년 당시의 박근혜 당선만 봐도 말이죠.

    • 알키비아데스 2018.06.15 0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그 다음은 희극으로.

      1870년 프랑스에서 나온 말인데 한국은 146년이 늦었죠.

    • 웃자웃어 2018.06.15 1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밝혀지면서 국민들 상당수가 1848년도 프랑스인들보다 미개했단게 밝혀졌죠.

  3. 김똑딱 2018.06.14 2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타깝게도 루이 나폴레옹, 나폴레옹 3세는 진짜 루이 나폴레옹의 생물학적 아들은 아닙니다.

    나폴레옹과 그 후손들 (제롬 보나파르트의 후손)의 y 염색체 하플로그룹 검사는 하플로그룹 E1b1b였는데 루이 나폴레옹의 머리카락과 후손을 대상으로 한 하플로그룹 검사는 I2a2가 나왔습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아들이라면 나폴레옹 아버지 샤를 보나파르트와 y 염색체가 동일하니까 하플로그룹이 동일하게 E1b1b가 나와야 하는데, 결국 오르탕스가 바람피운 결과물이 루이 나폴레옹이게 된 것이죠.

    어차피 루이 나폴레옹의 가계 역시 보나파르트 가문에서 같은 가문으로 인정하게 되었지만, 그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결과물은 아니네요 ^^

  4. 유애경 2018.06.15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루이 보나파르트, 시대만 잘타고 났다면 (?)아주 훌륭한 왕이 될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원치않는 결혼을 어쩔수없이 받아들인 오르탕스-게다가 루이와 사이도 안좋았기에 더욱 불행했을-의 불륜이 용납 받을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해는 되네요.

  5. 알키비아데스 2018.06.15 0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르크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코미디언이 등장하는군요^^

  6. reinhardt100 2018.06.15 1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랑스 입장에서는 해괴한 논리는 아닙니다. '라인강-쥐라 산맥-알프스 산맥-지중해와 가론 만-비피레네 산맥-비스케이 만과 영불 해협 안의 모든 육지'는 '신이 프랑스에게 내려주신 자연적인 영토'라는 논리가 이미 루이 14세 때부터 있던 것이었으니까요. 실제로 부르봉 왕조 기간 내내 이 국경을 실현하기 위해 몇 차례나 전쟁을 치렀고 식민지 일부를 포기해가면서까지 유럽 대륙 영토의 영속성을 더 중시해왔습니다. 특히 북프랑스-플랑드르-저지대 네덜란드를 연결한 단일경제권을 실현하는 것이 역대 프랑스 지도자들의 꿈이었으니까요. 이 기회가 세 번 있었는데 한 번은 1477년 부르고뉴의 용담공 샤를이 낭시전투에서 패사하면서 루이 11세가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것이고 두번째 기회가 1672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세번째가 프랑스 혁명기였습니다. 앞선 두 번은 최종적으로 실패했지만 후자는 혁명전쟁 승전으로 실현시켰고 프랑스의 네덜란드 합병이 이를 최종적으로 실현시켜주었던 겁니다.

  7. 루나미아 2018.06.15 1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프리슬란트가 홀란트왕국 영역에 있군요. 전엔 프로이센 땅이었는데 즉위 선물로 준 걸까요?

  8. 마스터 2018.09.13 0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둘째 루이 나폴레옹의 그림을 보고 =ㅅ=;
    그림 전공한 이의 한마디 화가가 나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