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유럽 각국은 이 세기의 대결을 놓고 어느 편에 붙을 것인지 판단하느라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면 굳이 힘센 제국들끼리 싸움질을 하는데 굳이 다른 나라들이 꼭 끼어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나쁜 평화가 가장 좋은 전쟁보다 더 낫다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분들이 많겠지만, 그건 편하게 후방에서 입으로 떠들 때나 통하는 거부감입니다.  당장 바로 옆의 전우들이 내장을 쏟아내며 고꾸라지고 나도 바로 다음 순간 언제든지 팔다리가 끊어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특히 그런 희생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 손자일 경우에는  누구나 어떻게든 당장 휴전 조약을 바라는 법입니다.  물론, 1812년 당시 유럽 각국에서 어느 쪽에 붙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람들은 자기나 자기의 아들이 적의 대포알에 노출될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건 현대에서도 대부분 마찬가지네요.

 

애초에 나폴레옹 덕분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주도권 하에서 벗어나 땅도 넓히고 왕국이 될 수 있었던 라인연방(Confédération du Rhin, 독일어로는 Rheinbund) 소속의 독일 소국들은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이들 국가 소속의 독일 시민들은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의 대결, 좀더 근본적으로 보면 프랑스의 부르조아 계급과 영국의 부르조아 계급간의 투쟁에 끼어들어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지배하던 왕과 대공(Fürsten, 영어로는 Prince)들 중 상당수는 나폴레옹 못지 않은 열정을 가지고 러시아 원정에 협조했습니다.  먼저 나폴레옹이 미개한 독일인들에게 프랑스식 입헌 군주국의 모델을 보여주겠다며 만든 베스트팔렌(Westphalen) 왕국의 국왕은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Jerome)이었습니다.  또 베르크(Berg) 공국의 지배자는 나폴레옹의 매제이자 나폴리 왕국 국왕인 뮈라(Murat)였고요.  이런 친인척들 외에도 나폴레옹에게 진정으로 협조적인 독일 소국왕들은 생각보다 꽤 많았습니다.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헤세 등의 국왕들과 대공들은 어쩔 수 없이 나폴레옹에게 굴복한 군주들이 아니라, 스스로 프랑스 계몽주의가 근대화를 위한 옳은 방향이라고 믿고 나폴레옹과의 협력을 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믿음의 배경에는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Grande Armee)가 가진 무력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요. 

 

 

(1812년 당시 라인연방의 소속 국가들입니다.  라인연방의 주요국가는 지도에서의 영토 크기로만 보면 베스트팔렌과 작센, 그리고 바이에른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온나라가 친프랑스-친나폴레옹 정서를 가진 진짜 동맹국은 바이에른과 바덴, 뷔르템베르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두 남부 독일의 카톨릭 국가들이군요.)

 



영국의 경우는 뭐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당연히 러시아와 함께 반프랑스 전선의 최선봉에 나설 의지가 충만했습니다.  원래 영국은 자신은 피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입만 털면서 지갑이나 여는 것으로 전쟁을 대신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로부터 원망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812년 당시에는 영국도 꽤 당당하게 자신도 피를 흘리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전선에 당시 영국으로서는 꽤 큰 야전군인 3만 정도의 병력을 파견하여 그야말로 혈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만이라고 하면 프랑스 그랑다르메(Grande Armee)로서는 고작 1개 군단에 해당하는 소규모 병력이었겠지만, 인구가 많지 않고 육군이 미약했던 영국으로서는 동원 가능한 전체 야전군을 다 동원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국은 이 소중한 병력을 아끼느라 당장 온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있던 스페인 현지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얌체처럼 몸을 사리긴 했습니다.  하지만 1814년 전쟁이 끝난 뒤에 집계를 해보면 영국군의 사망자는 총 3만5천이 넘었습니다.  그러니까 스페인-포르투갈 전장은 부족했던 영국 육군의 인원과 물자를 끊임없이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그 중에서 2만5천은 전투가 아닌 각종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만 이건 당시 위생 상황으로서는 정상적인 수치로서 다른 전장 다른 나라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812년 바다호스 요새 포위전입니다.  이 전투에서 4천5백의 프랑스군이 지키는 바다호스 요새를 2만7천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이 3주간 포위 공격 끝에 함락시켰습니다.  프랑스군은 1천5백의 사상자를 냈고 나머지는 거의 모두 포로로 잡혔는데, 영국-포르투갈 연합군도 거의 5천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함락 후에 영국군은 바다호스 시내를 잔혹하게 약탈하여, 최소 2백명에서 최대 4천명의 스페인 민간인 사상자를 냈습니다.  스페인이 영국의 동맹국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1812년은 영국군이 지나치게 몸을 사린다고 비난하던 스페인 사람들이 입을 다물 정도로 영국군도 공세적으로 나온 첫 해였습니다.  이 해 1월, 웰링턴은 드디어 군수품 창고 및 물자 집적 등을 끝내고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의 진군을 개시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이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쳐들어갈 통로가 뻔했던 것처럼, 역방향의 침공도 루트가 뻔했습니다.  웰링턴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도 1810년 프랑스의 포르투갈 침공 때 마세나가 밟았던 경로를 정확하게 역순으로 밟아야 했습니다.  1812년 1월 시우다드 로드리고(Ciudad Rodrigo) 요새부터 함락시킨 웰링턴은 이어서 4월에는 바다호스(Badajoz)를 엄청난 혈투 끝에 함락시켰습니다.  이 두 요새를 함락시킴으로써 이제 스페인으로의 진격로가 활짝 열린 셈이 된 것이지요.

이때 놀랍게도 나폴레옹으로부터 영국 측에게 평화 협상을 하자는 제안이 날아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영국과의 협상은 불가능하다고 공언하던 나폴레옹으로서는 굉장히 놀라운 입장 변화를 취한 것이었는데, 그만큼 당시 나폴레옹은 러시아 침공을 앞두고 후방 정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원래 러시아 침공을 하게 된 근본 원인이 영국과의 전쟁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어떻게 보면 본말이 전도된 셈이었지요.  어쨌거나 나폴레옹의 평화 협상 조건은 영국으로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미 영국군이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던 포르투갈 왕국을 원래의 왕가인 브라간사(Braganza) 왕정에게 반환하는 대신 스페인은 조제프를 국왕으로 하는 보나파르트 왕가 소유임을 인정해달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거든요.  그 외에 시실리 섬은 부르봉 왕가 출신의 사르데냐 국왕 페르디낭이 계속 보유하되, 나폴리 왕국의 소유권은 현행대로 나폴레옹의 매제 뮈라(Murat)가 계속 유지하게 해달라는 것이 딸려 있었습니다.  혹시 웰링턴이 시우다드 로드리고와 바다호스를 함락시키기 전에 이런 조건의 평화 협정을 제안했다면 영국이 받아들였을까요 ?  아마 영국은 그래도 거부했을 것입니다.  하물며 이제 스페인으로의 침공길이 활짝 열린 마당에 그런 조건을 수용할 이유가 없었지요.  영국은 단칼에 나폴레옹의 평화 제의를 거부하고 스페인으로의 침공 작전을 계속 했습니다.  웰링턴은 7월에 살라망카(Salamanca) 전투에서 마르몽(Marmont)의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8월에 조제프는 수도 마드리드를 내주고 피난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살라망카 전투에서 프랑스 보병들을 공격하는 영국군의 모습입니다.   한창 이기고 있는데 휴전하자고 하면 통할 리가 없지요.) 

 



초지일관 당당했던 영국과는 달리, 프로이센의 입장은 좀 딱했습니다.  나폴레옹으로부터 처음부터 푸대접을 당하던 프로이센은 당연히 처음에는 러시아 측에 붙으려 했습니다.  심지어 전운이 감돌던 1811년에는 국왕 빌헬름이 러시아 자르 알렉산드르에게 밀사를 보내 10만의 프로이센군을 보태줄테니 선제 공격에 나서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러시아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막강 프랑스군과 같은 조건으로 정면 충돌해서는 승산이 전혀 없다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프로이센의 선제 공격 요청을 거절하고, 프랑스군을 러시아 국내로 깊숙이 끌어들여 방어전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건 프로이센처럼 조그마한 나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전략이었지요.  러시아가 저렇게 후퇴 일변도의 희한한 전략을 택한다는 것은, 프로이센으로서는 전국이 프랑스군에게 일방적으로 유린당하게 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게다가 1812년 들어 오스트리아까지 프랑스군에 가담하기로 결정을 내리자, 이제 대세는 기울었다는 체념으로 뒤늦게 프랑스측에 가담하기로 합니다.  사실 이미 때늦은 결정이었습니다.  훨씬 더 일찍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맹세했어도 프로이센에 대한 대접은 신통치 않았을텐데, 이렇게 모든 것이 결정되고 난 뒤에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가담한 프로이센에 대해 나폴레옹이 보내는 시선은 싸늘했습니다.  결국 프로이센은 2만의 야전군을 러시아 침공에 동원해야 했고, 그 외에도 4만2천의 추가 병력을 후방 수비 임무를 위해 프랑스군에 제공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자국 영토를 프랑스군 및 그 동맹군이 자유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그 행군길에 프랑스군이 먹고 마시는데 소비하는 물자는 프로이센 국민들로부터 징발하여 충당했는데, 그 비용은 1806년 패전 당시 부과되었다가 아직 갚지 못하고 있던 전쟁 배상금을 상각해주는 형식으로 처리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냥 공짜로 다 털렸다는 말이지요.

 

...To be continued...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Peninsular_War#Allied_campaign_in_Spain
https://en.wikipedia.org/wiki/Confederation_of_the_Rhine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백군파 2019.07.08 06: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유약한 데가 있어서 그런지 화평을 거부한 영국인들이 이해가 잘 안 가네요.대륙 봉쇄령으로 피폐한 경제상황이 계속되고 있는만큼 돈과 물자,인력을 막대하게 잡아먹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계속 작전을 벌이느니 교전만이라도 중단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것도 방법일 것 같은데요.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 수비니우스 2019.07.08 0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민주주의가 많이 정착된 지금조차 자긴 앞서겠다고 절대 말하지 않고 후방에 있을 예정이면서 북진이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꽤 많은걸 보면, 돈많은 사람만 선거권이 주어지던 당시에는 화평을 주장하면 남자답지 못하고 공동체를 해치려 든다고 취급당했을것 같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아니더라도 나폴레옹 및 프랑스혁명과는 이전 체제들은 공존하기 어렵기도 했고요.

    • 지나가던 2019.07.08 0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영국 부르주아와 프랑스 부르주아간의 경쟁도 있지만 영국이 스페인에서 손 때면 지브롤터를 시작으로 지중해쪽이 위험해지지 않아서 그러지 않았을까요?

    • ??? 2019.07.08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계산기 두들겨 보면 프랑스가 전시경제에 약탈로 지탱되는 생산성 없는 ♬♩♪들이고 곧 병력에 국력 고갈로 이대로 놔두기만 해도 끝날 놈들이니 이 승산이 차고 넘치는 판도가 가속되도록 벡터를 가중시겼다고 이해하십쇼 ^^

  2. 붉은혁명 2019.07.08 1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재인은 미중간 패권경쟁에서 중국이 차세대 헤게모니를 쥐도록 협조해 우리민족끼리 남북통일을 이룩하며 미제국주의의 하수인 ♪♪♪♫를 배격하고 모두가 균등한 절대평등 유토피아를 구현하고자 한다면 중화의 더 큰 역할을 바라야 한다는 입장같던데 나폴레옹 전쟁의 역사적 상황은 어떤교훈을 남기는지 고견을 여쭐수 있겠는지요

    • 0_- 2019.07.08 19: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타리무 쿨타임 끝나셨능가
      시사인 만화 평론에서나 놀다가 거기서도 까여서 다시 여기로 돌아오고 그런거에요?
      https://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34894

    • ??? 2019.07.08 1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잠깐만, 위엣분, 시사인 만화면 그 김선웅인가 하는 고릿적에 이글루스 하던 애가 그리는거 맞죠? 걔는 손으로 그리는 만화랑 입으로 떠드는 말이 다른 이중인격자에다 전형적인 중빠 국까 북뽕 반미 민족주의잔데 그런 저질 저질 만화 보세요?

    • 루나미아 2019.07.08 2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니 얼마나 중국과 공산주의를 사랑하시면 서방세계에 속한 우리나라가 중국의 패권에 협조하길 바라는 건가요?

    • 수비니우스 2019.07.08 2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타리무님이 저번에 굽시니스트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 잘만들었다고 추천하던데

    • 푸른 2019.07.09 14:02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ㅋ알타리무님 덕에 웃고갑니다. 한편 시사인 링크 남겨주신분께도 감사드립니다

    • 웃자웃어 2019.07.09 16:40  댓글주소  수정/삭제

      애초에 문재인이 댁이 그렇게 말하는 친중이면 벌써 일대일로에 참여했겠죠.

    • 수비니우스 2019.07.09 16: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국의 지성인 여러분!

      지난날의 우리 헌정사를 더듬어 볼 때 여러분들은 오늘날의 야당인사들이 얼마나 많은 지성인들의 건설적인 발언을 '매카시즘'적인 수법으로 탄압해 왔는가를 똑똑히 알고 계실것입니다. '참다운 반공'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참다운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의 정치지반인 전근대적인 유제가 위협을 당하면 '용공'이니 '빨갱'이니 하는 상투적인 술어로 상대 세력을 학살시켰던 것이 한국적 '매카시즘'의 아류들이 저질러 온 행적이었습니다.

      전국의 지성인 여러분!

      무슨 일이 있던지 우리는 차제에 한국적 '매카시즘'의 신봉자를 우리사회에서 일소시키기 위해 분연히 궐기하여 과감히 투쟁합시다.

      1963년 10월 5일 동아일보 1면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 기호 3번 박정희

  3. Spitfire 2019.07.09 1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장 나쁜 평화가 가장 좋은 전쟁보다 더 낫다'라는 말은 비겁한 자들이 하는 말이지요. 거부감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그냥 초짜나 약자들이 하는 말일 뿐이지요... '우리의 주권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쟁도 불사한다'라는 말을 한다고 정말 피터지게 싸우자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나 협상의 기본을 아는 사람이라면 후자가 실리를 얻는데 더 유리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사례는 너무 많아서 굳이 나열할 필요도 없겠네요~

    그리고 전쟁이 지도자나 고위급들의 생각없는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전쟁선포야 외교나 정치가 담당하는 것이지만, 실제 전쟁 수행은 국민들의 지지나 도움 없이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전쟁이 발생하면 2차대전때까지만 해도 자원입대하는 자들이 줄을 이었지요. 그때라고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정말 모르고 자원했을까요? 전쟁나면 사람 죽고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는데도 전쟁을 하는 것은, 그들이 바보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싸워서라도 지키고 견지해야할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나서 사람 죽는데만 초점을 맞출거면, 까짓거 군대도 없애고 중국의 속국이 되거나 적화통일이 되어도 그냥 좋은게 좋다고 가만히 있으면 되지요.

    반대로 국민이 반대를 하면,1917년의 러시아, 1918년의 독일, 1970년대의 미국처럼 진행하던 전쟁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세도 아니고 현대사회에서 국민의 의사와 결정권이 갖는 의미와 힘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 최홍락 2019.07.09 16:07  댓글주소  수정/삭제

      '가장 나쁜 평화가 가장 좋은 전쟁보다 더 낫다'라는 말은 비겁한 자 중 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주권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쟁도 불사한다'라는 말을 한다고 정말 피터지게 싸우자는 뜻은 아니겠지만 그건 북한과 같은 정부가 아닌 정상적인 정부라면 정말 최악의 상황이 될 때까지 해서는 안되는 소리같고요. 왜냐하면 그러한 엄포 자체로 긴장을 상승시키면, 그리고 그 긴장이 계산된 범위를 넘어가버리면 그 때는 유리한 위치는 고사하고 통제가 안되는 상황, 즉 선을 넘어가버릴 수 있겠죠. 존 허즈가 얘기하는 안보 딜레마 이론처럼 말이지요.

      일단 전쟁이 벌어졌다, 그래서 싸워서라도 지켜야할 상황이 된다면 사람들의 의지와 아무 상관없이 현대 국가는 전시 동원체제를 발동하게 되고요. 전쟁이 시작되면 초반에는 의지가 드높은 사람이라도 2년, 3년 길어지면 전쟁에 염증을 느끼게 되지요. 국민이 반대를 해서 정부를 멈출 수 있는 상황은 전쟁이 장기화되서 피해가 감당할 수 없을정도로 누적된 이후이겠지요. 베트남 전쟁같은 경우는 반전여론이 소수였다가 대학생까지 징병대상이 되니까 반전운동이 확대된 것처럼 여론주도층이 피해를 입는 수준까지 가야 반전 여론이 커진다는 것도 공정하지 못한 현실이기도 하고요.

      그런 상황에 대한 대응책으로 국가 내부적으로 안보시스템을 만들고 외부적으로는 다자간 안보체계를 구축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진짜 전쟁을 준비하려면 대응 시스템부터 조용히 구축하는게 정부의 역할일 수 밖에 없고요.

    • 웃자웃어 2019.07.09 16: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북진을 하게 되면 중국군이 움직일테고 미군도 움직일텐데 중국-미국과의 대전쟁에서 탱커역할을 맡게 되면 대한민국이 무사할까요?
      좀 대국적으로 생각하시죠.
      중국군의 수준은 더이상 비속어를 써가면서 무시할 수준이 아닙니다. 미군이 올동안 버티는 전투만으로도 대한민국 국군은 회복불가수준의 괴멸적인 타격을 입을겁니다.

    • 백군파 2019.07.09 1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웃자웃어/소총도 없어서 3명이 소총 한 정을 같이 쓰던 시절보다는 확실히 나아지긴 했죠.겉으로만 번지르르하다고 실속이 있는 건 아니긴 하지만 사실은 우리도 그런 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으니..

    • Spitfire 2019.07.10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홍락/ 당연히 정상상황에 정상정부에게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는 일은 없겠지요. 단지 제글의 목적이 Nasica님이 좋은 글에 항상 논란이 될만한 사견을 하나둘 넣으시는 것에 대한 반박이고, 현재 우리나라 정부의 대북정책을 포함한 외교의 실패를 비판하기 위함이다보니, 제 글이 마치 전쟁광이 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지셨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무력을 앞세운 평화' 정책을 추진하더라도 우리가 먼저 전쟁선포를 하거나 북진할 가능성은 0에 가깝습니다. 한국군의 전시작전계획 자체가 방어 후 반격이거든요. 그러니 '순수한' 분들에게는 '전쟁도 불사한다'라는 말이 매우 호전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냥 '최고수준의 협박' 밖에 되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여러 선택의 여지를 남기고 상대방의 선택권을 없애는 것이 협상의 기본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김정은은 문재인 정부의 '나쁜평화론'에 반응하기 보다는 미국의 스텔스기나 항공모함의 접근에 더 경기를 일으키지요. 협상을 하려면 우리가 쓸 수 있는 카드를 모두 써야하는데,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의 패를 까버리면 그냥 질질 끌려다니는 수 밖에 없습니다. 평화를 어떻게 '영속적'으로 지키느냐가 중요한 것인데, '나쁜 평화'로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일시적인 행복감과 안정감을 줄 뿐이지요.

      전쟁의 결정과 부담에 대해서는 정부나 의사결정자가 점점 국민의 눈치를 보는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20세기 이후로는 전쟁선포가 하늘에서 뚝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론 자체가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1차대전 시작 전에 이미 프랑스와 독일은 철천지원수였고, 독일의 팽창에 기존 열강의 경계심은 극에 달했지요. 이게 프로파간다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전쟁을 직접 수행하는 밑바닥 서민들의 반전 여론이 강하다면 정부가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마치 1차대전 당시 프랑스가 동맹인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다면, 프랑스 국민들의 적극적인 전쟁참여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듯이 말이죠. 명분없는 전쟁에는 아무리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해도 도망가거나 저항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리고 다행인건 현대의 전쟁은 직접 무력을 사용하기보다는 경제전쟁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비용도 싸게 먹히고 효과도 만점이니 굳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군대를 없애고 무기를 놓을 수가 없는 것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최악의 상황이 도래하는 것을 막기 위한 최후의 대책은 필요하기 때문이겠지요. '최후의 최악'을 막는 수단이 허접하다면 그건 뭔가 계획 자체가 글러먹은 것일테니까요. 그래서 강한 국방력은 안보시스템의 주요한 축이 될 수 밖에 없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자간 안보체계도 가능하고, 대응시스템도 구축이 가능해질겁니다. 아무것도 안들고 남들에게 도와달라 할 수는 없으니까요.

    • 최홍락 2019.07.10 16: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문제는 '전쟁도 불사한다'라는 말이 실제로는 그냥 '최고수준의 협박'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상대방도 인지할 때는 그 다음에 쓸 수 있는 수단이 있을 때 얘기겠지요.

      가령 진짜 전쟁으로 가는 Action을 취한다는 것을 10으로 두고, 평화 상태를 0으로 봤을 때 10이 우리가 쓸 수 있는 수단인지, 그리고 0과 10 사이에 단계 단계를 어떻게 상정할 것인지를 냉정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입으로 강경책을 외치는 사람들은 (그것이 북한 문제든, 일본 문제든 상관없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수단은 5밖에 안된다는 것을 망각하거나 (정작 10이라는 수단을 쓰려면 외부의 힘을 빌려쓸 수 밖에 없는데도...) 10이라는 수단을 자력으로 쓰기 위해 어떤 Action을 취해야 하는지, 하다못해 6,7,8은 어떤 방식으로 해야하는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경우가 많다보니...그게 System으로 구축이 되어야 하는데, 냉정하게 그런 것이 있는지 의문이 드는거죠.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파월 독트린을 복사해서 갖다붙이기만 해도 외교나 위기 관리에 있어서 이정표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핵심적인 국익의 위협 여부, 비군사적 조치들이 충분히 시도되었는지 여부, 목표의 구체화 정도, 결과에 대한 고려, 위험과 비용에 대한 정확한 분석, 무분별한 연장을 막기 위한 출구 전략, 국민들의 지지, 국제적인 지지)

      1차세계대전 때도 카이저가 한번 동원령을 내렸다가 영국을 통해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한번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징병을 철회할 경우 국가기간 수송망을 중지시켜야 하는 상황이라 도저히 상황을 통제할 수 없어 전쟁까지 갔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만큼 강경한 발언과 강경책은 가능한 억제하고 신뢰받는 외교, 폭넓은 대안을 기초로 한 위기 관리에 더 중점을 둬야한다는 거죠. 한번 세게 나가면 되돌리기가 쉽지 않으니까...

      유화책이랑 군대를 없애고 무기를 놓을 수가 없는 것이 따로 간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한번도 침략당하지도 전투가 벌어지지도 않았던 카빌라 성과 같이 군사력이나 억제력의 극대화를 통해 상대가 전쟁을 일으킬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준비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나 싶습니다.

      말은 부드럽게 하되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다녀라. 라는 얘기로 정리하면 될듯요.

    • Spitfire 2019.07.10 1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홍락/ 원론적으로는 다 맞는 말씀이고, 어쩌면 저랑 같은 이야기를 다른 표현으로 말씀하시는 느낌입니다. 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야기는 '나쁜 평화'를 보충설명하는게 아니라 그냥 '좋은 평화'에 대한 이야기인거 같네요. 저렇게만 된다면 누가 평화를 마다하겠습니까. 하지만 현 정부가 '좋은 평화'를 위해서 시스템을 짜려고 무슨 노력을 한건지, 최소한 큰 몽둥이를 들어보려고 시도라도 한건지 저는 여전히 궁금할 뿐입니다. 북한은 여전히 통미봉남이고, 우리 머리 위엔 핵폭탄이 새로 생겼으니까요.

    • 수비니우스 2019.07.11 15:26  댓글주소  수정/삭제

      Spitfire께 달은 대댓글 모두 삭제했습니다.

  4. 백군파 2019.07.09 14: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폭력과 협박을 이겨낸 수많은 반공포로들의 사례를 보면 인민군이라고 해서 전부 다 공산주의에 찬성하고 국군과 민간인을 학살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즐기는 인간 말종들이었다기보다는 김일성 한 사람의 야욕에 강제로 동원된 불쌍한 이북의 동포들도 많이 섞여있었던 것 같은데요..적이 쳐들어오면 국가와 자유,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데는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만은,휴전선 이남의 국민 한 사람이 죽으면 이북의 국민 백명이 죽어야한다는데는 동의할 수가 없네요.1-4 후퇴때 남한으로 물밀듯이 내려온 피난민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입니까? 북한 정권의 가장 큰 피해자는 북한 주민들입니다.적이 점령한 영토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죄밖에는 없다구요.그들도 우리 국민입니다.
    그나저나 글은 불러전쟁에 대한 글인데 댓글은 이념 논쟁으로 뜨겁네요.

    • 수비니우스 2019.07.09 14:49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거없는 매카시즘으로 언제든 불타오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거든요. 마치 일본 넷우익처럼 말이죠.
      '우리의 주권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쟁도 불사한다'는 자세로 언제든 북진할 준비를 해둬야 협상에서 실리를 얻기 쉽습니다. 이북 사람들은 안타깝습니다만, 북괴 정권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우리가 그들까지 포용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저들이 쳐들어오면 방어하는데에 급급할게 아니라 조그만 도발에도 언제든 북쪽을 쓸어버릴 수 있다는걸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는건 '가장 나쁜 평화'이죠.
      전 개성공단을 훨씬 큰 규모로 확대해서 북한 사람들이 남쪽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체득하게 만들어서 북한 체제가 붕괴되게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초코파이와 라면 같이 우리에게는 저렴하지만 저들에게는 비싼 물품을 마구 풀어주고요. 물론 북괴 정권에게 개성공단을 몇배 키우자고 하면 위험성을 알고 거부하겠죠.

    • 00 2019.07.09 15:39  댓글주소  수정/삭제

      위짝에 붉은혁명이란 닉네임이 쓴 내용은 아무리 봐도 문재인이 친중종북공산주의자에 이념에 매몰돼 나라를 파멸로 몰아간단 조롱같은데 알타리무가 누구길래 저러는지 의문이긴 합니다, 유명한 ㅄ 아니면 트롤로 짐작됩니다만

      하기야 문재인과 친노세력이 정말 주제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다 오로지 한국을 이렇게 부흥시킨 대기업집단을 우선순위마저 뒤지는 재벌개혁을 한답시고 좌파사상으로 파멸로 몰아가 이괄의 북방군을 허공으로 날려버린 상황을 재현한 뒤에 자초한 병자호란에 직면한 조선처럼 일본놈들과의 감당안되는 경제전을 스스로 불사하는 행위를 보면 정말 최순실이 훨씬 더 능력있는 통치자였다는 생각까지 들게 하는 7월입죠 :-)

    • 웃자웃아 2019.07.09 16: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문재인이 좌파사상으로 파멸로 몰고있다고 하는데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경제정책은 기본적으로 신 자유주의입니다. 국민들을 쥐어짜서 기업에 퍼주는 형태로 국가개입을 하는거지요. 이런 정책이 어떻게 좌파랍니까?

    • 최홍락 2019.07.09 16:27  댓글주소  수정/삭제

      신자유주의 얘기가 나와서말인데 한국은 경제정책에 있어서 신자유주의가 제대로 적용된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누가 정부를 잡았던간에 국가의 개입이 과도할 정도로 강했던건 아니었는지ᆢ

      그리고 최근 몇년간 대기업중에서 한꺼번에 날아갔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연쇄부도가 났었던가요? 그게 의문이네요.

    • 수비니우스 2019.07.09 16: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작년에 댓글중에 올해 하반기에 조선쪽에 대규모 부도가 날거라고 했던것 같은데 이제 얼마 안남았군요...

    • 최홍락 2019.07.09 16:33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비니우스/ 원래 산업 예측이라는게 정말 힘들어요. 눈에 보이는 확정된 회계지표도 다음 분기에 뒤집히는 경우도 허다하다보니ᆢ 그리고 외부 변수는 통제안되는게 많아서ᆢ

    • 00 2019.07.09 16:53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비니우스는 딱 보니 정권비판 및 사태책임론을 적나라하게 논한게 듣기 싫다고 비등점 낮게 행동하는게 뭐 말 한대서 알아들을것 같지 않지만 웃자웃어님.

      말씀 잘했습니다, 어브노말의 뉴노멀화가 일상화된 2010년대 초에 그런건 반론이라기엔 힘들지 않겠어요? 알면서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는 것 같지만 독자배려차원에서 논하자면 초엘리티즘 마크롱, 극포퓰리즘 트럼프도 각각 정책실현상 대안우파, 신좌파와의 결합으로 비정통노선을 걷되 본질이 둘다 우파색인건 선명합니다.(박정희 의 극우성향을 변호한다고 아마추어 학자나 지지자들 중 수출중심성장이 국가주도형인 고로 계획경제고 다시말해 좌익경제이념이라며 줏어섬기는 경우를 본다면 이런 정책결합이 반론으로 제공되는건 공허해서 피로감이 오죠) 이 선명하다는 것의 적용이 문재인의 색에 된다면 문재인은 빨간색이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일각에선 친노잔당 파벌에서 어떻게 문재인같은 극좌인물이 나왔는지 노무현의 파멸을 보면 이해가 가면서도 동시에 안간다고 합니다. 97년 아시아 재정위기 이후로 한국이 신자유주의가 아닌적이 없다고 하신 말이 틀리지 않단 말입니다. 한미FTA추진주체가 노무현이란건 말할 필요가 없고 노무현은 친북+반미란 본인의 특색을 제외하곤 경제대통령이었단건 더 중요한 특기사항입니다.

      노무현은 파랗디 파란 경제적 극우주우의자였던건 접근을 해도 피상적이거나 지적이 덜됩니다, 수비니우스는 비꼰답시고 시위를 때려잡네 어쩌네 거론을 했겠지만 노무현 임기를 몇 안되는 서구권 한국 현대사 서적에서, 미국도 아니고 유럽에서 평가하길 폭력과 시위로 얼룩져있었고 사회는 경찰국가화했으며 인권은 유린됐다고 대개들 평가를 해요, 전경폭력으로 죽인 농민만 둘이고 죽은 노동자가 하나에 평택 대추리 사태는 518 이후로 자국내에 경찰력도 아니라 군사력을 투사한 최초의 사건입니다. 노무현은 극우주의잡니다. 일베가 노무현에 그렇게 열광하는 이유는 노무현의 정치외교를 제외한 모든 본성이 자기들과 일치한단걸 알기 때문이라는 판단은 그냥 헛된 망상이 아니고, 웃기지 않어요?

      때문에 노무현은 주요 지지세력인 좌파, 주사파들...박근혜 탄핵헌재에서 해산한 민노당같은 용공세력은 논할 가치도 없고 당시 친노세력에게도 고립되어 지지율 20프로 미만으로 가드칠 방어벽도 없이 비참하게 자살하고 말았고 말입니다.

      노무현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문재인의 현실괴리적 극좌행보 및 대미,대북관을 제외하곤 스스로의 선배와도 판이하게 다른 경제관은 이변이긴 합니다. 극좌파인게 이변이죠. 뭐 물론 노무현이 등신불이 돼서 죽도록 방치하고 박정희를 방불케하는 신격화화 인신숭배를 가속한 친노세력에게는 문재인은 민족의 메시아로 보일듯 합니다.

    • nasica 2019.07.13 17: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00님, 반말이나 욕설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삭제합니다.

  5. 백군파 2019.07.09 15: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러일전쟁에도 관심이 많은데,중간과정이나 뒷배경 다 떼어놓고 단순하게 결과만 놓고 보면 서유럽 전체를 재패한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이긴 러시아 제국이 90년쯤 뒤에 동양의 농업 국가였던 일본에게 패배한게 참 기이하네요.결과만 놓고 보면요.'노랗고 키 작은 동양인'들에게 수모를 당한 직후 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다가 독일제국과 동맹국들에 의해 패망 직전까지 몰리고 시민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겪기도 한 거 보면 니콜라이 2세의 문제려나요.붉은 군대가 가는 곳마다 생사람 많이 잡긴 했지만 왜인들은 잘 잡았죠.

    • 00 2019.07.09 15:55  댓글주소  수정/삭제

      공산주의는 파멸의 지름길이지만 그래도 당시 동유럽 인민들의 사회,문화,인종적 수준이 속된 말로 문명경쟁에서 뒤진 아시아 황둥이들보단 높았단 의미 아닐까 싶습니다, 너무 레이시즘적 발언이긴 하되

    • 수비니우스 2019.07.09 16:12  댓글주소  수정/삭제

      19세기 초에 러시아가 프랑스를 꺽었던건 종심 깊은 국토 덕분이었고 20세기 초 일본과 싸울땐 그걸 살릴수 없었으니까 진거죠. 사실 몇번 전투에서 털리고도 버틸만 했으나 기초경제의 부실함으로 인해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이 일어나는 바람에 경제력 파탄 직전으로 버틸 수 없던 일본이 이긴걸로 쳐준거라... 뭐 00님과 저같은 황둥이들보단 문명경쟁에서 앞서는 흰둥이들의 전문가적 시각을 찾아보시는게 더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 최홍락 2019.07.09 16: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폴레옹 전쟁과 러일전쟁의 과정에서 러시아군이 대차게 두들겨 맞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상대방 역시 더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는 점이 공통적이긴 한데, 전자의 경우 러시아와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도와줄 우군이 많았다는 점, 후자의 경우 철저히 고립되었다는 점이 큰 차이가 아니었나 싶네요.

    • 수비니우스 2019.07.09 16:19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고보니 나폴레옹 전쟁땐 영국이 러시아를 도와줬는데 러일전쟁 땐 영국이 러시아를 조지려고 그레이트 게임을 수십년째 하고 일본한테 돈빌려주고 있었죠. 영국의 돈이란...

    • 백군파 2019.07.09 16:25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비니우스/어이쿠,저 역시 저열한 황둥이에 불과한데 어딜 감히 백인 나으리들에게 말을 걸겠습니까.ㅎ

    • 최홍락 2019.07.09 16:30  댓글주소  수정/삭제

      황인종은 눈이 째져서 조종능력이 후달린다던가 미군은 나약해서 돌격하기만 하면 도망간다고 했던 주장들이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겁니다.

    • 백군파 2019.07.09 16:34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홍락/딴소리지만 일부 백인들은 물론이고 일부 황인들까지 못 살고 어설프다고 멸시하는 흑인들조차 전투,특히 백병전에서는 아주 우수하더군요. 미군 내 흑인 병사들은 우수하다고 인정한 한국전쟁기 중공군의 보고서를 인터넷으로 본 기억이 납니다.인종차별 나빠요.

    • 최홍락 2019.07.09 1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인종차별에 반말까지...가지가지 하네요.ㅉ

    • 기리스 2019.07.13 2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애초 러시아가 전투에서 허구언날 깨지다 보니 항복하고 졌다기보다는, 러시아가 막판에 시베리아 철도로 육군을 수백만 단위로 끌고와 배에 욱여넣어 중간에 몇 명 죽든 말든 일본 본토에 상륙시켜 밀어버리겠다는 계획을 실행하려 들자, 일본 밀어주던 미영이 그쯤 하시죠 하고 중재 들어가 어떻게든 끝낸 거죠.

      덕분에 일본은 명목상 승리자로 조선에 대한 이권을 러시아로부터 넘겨받는 등 이득을 취하긴 했으나, 배상금을 한 푼도 못 받아 경제가 개판이 되는 바람에 국민들이 빡돌아 2차대전까지 가는 후유증 제대로 겪게 되죠.

  6. reinhardt100 2019.07.09 18: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기에 글 쓴 기억 해보니 이렇게 나폴레옹 전쟁사에 댓글이 많이 달렸었나? 싶네요.

    무슨 이유로 댓글이 달렸는지 나중에 봐야겠습니다.

  7. 하이텔슈리 2019.07.09 1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갑자기 왜 이렇게 된건지 모르겠네요. 아무리 봐도 분탕질하는 인간들이 왜이리 몰려든건지...

    • 경제가문제다 2019.07.09 19:40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마 일전에 새신부 어쩌고 PC관련글 나간 뒤부터요, 알음알음 알던 블로근데 마커 붙고 좌표가 생겼을걸요

  8. 경제가문제다 2019.07.09 2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트롤러라 하더라도 위에 한일갈등 이야기가 어쨌든 이미 언급되고 영불간 통상경제전을 포함한 총력전 이야기도 기왕 나왔으니 이야길 피하지 말자면 이번 한일경제전에서 문재인 정부는 균일하게 정면대결을 상정하고 있던것 같던데요, 문재인 정권이 외교적으로는 아주 균일합니다. 위에 트롤들이 말했다지만 친중, 친북, 반일, 그리고 무소불위의 현 미국을 상대로 감히 적성국 말고는 내지도 못하는 다른소리를 계속 내는 한국은 몰라도 현재 정부가 미국에겐 잠재 반미로 구분되리라는건 가능성 차원이 아닙니다. 한미관계 파탄이 그래서 났느냐는 질문을 반론으로 위에서 몇분이 하던데 낙관론으로 보입니다.

    위에서 과격언사들이 오가면서 화해치유재단이나 최무당 아이갸기 나오던데 한참 잘못짚었어요. 이건 맞냐 틀리냐의 문제가 아니거 든요? 틀리면 틀리지 무슨 말인가 싶겠죠, 그리고 틀렸다면 싸워서 고쳐야하고 대일적대도 가능하고 하고. 헌데 맞다 틀리다 개념 자체가 안 생겨요. 차마 직면할 자신이 없어서 국력경쟁 전방참모 기업총수들 제외하곤 전부 쉬쉬하고 있지만 암튼;;
    누가 싸움에서 지기를 바랄까요, 이 한일갈등은 승패가 없습니다. 패자뿐인 싸움이란 말이 아니고 승,패 개념이 생기지 않아요

    싸움 자체가 성립이 안되고 일본정재계는 지금 한국같은거 쳐다도 안보거든요. 중국이 일본은 12년래로 눈에도 관심도 안주는 것처럼.

    최전성기던 이명박 정권 당시 이후로 한국은 피크에서 쇠락일로에 일본은 2020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10년전 금융위기로 소니 파나소닉 등 나라의 기둥뿌리가 입었던 피해는 하나도 남김없이 회복하거나 더 강고해진데다 30년 동안 이만큼 강력하던 적이 없는데, 한국의 적성국가로 일본은 일본하고 중국의 대결이 성립이 안되는 거랑 같대도 과장이 아닙니다

    순시리가 맞냐 틀리냐? 논의의 실익이 없다니까요, 나폴레옹은 포위해오는데 프로이센 참모들이 회의만 9시간 하던거랑 같은 행동으로 보이지 않나요?

    병자호란이요....? 지금 한국 정부는 나폴레옹한테 최후통첩부터 던지고 대사관 계단에 칼갈아대던 프로이센입니다, 나폴레옹이 저런 바보일줄 몰랐다면서 실실 웃은것처럼 일본정부는 한국 비웃고 있을지 그런 생각을 해요. 그리고 나폴레옹에 찌발린 당시 프로이센과 주력산업이라곤 모조리 가사상태고 한국 전투력은 비교도 못하고 말입니다

    국내 선거용으로 아베가 이용한 도발이라고 위에 한분이 그러는데 한국정부가 강경론으로 나가면서도 협상에 나서라는 저자세를 보이는건 화강양면전술이 아니라 자기들도 아베랑 마찬가지라 그런거라는 자기성찰은 안 할 수가 없어요,

    하노버 문제로 참지 못하고 프리드리히 당시의 환상에 젖어서 최후통첩부터 날리며 대사관 계단에 칼 가는등 있는대로 쇼는 다 하다 프로이센은 군대라도 있었지 한국은 일본 상대로 정말 끝까지 가보자고 할수 있는건 하나도 없이 딱 2개 있습니다. 천조국님 바짓가랑이 잡고 살려달라고 빌든가 아니면 중국에 앞으로 미국을 등지고 영혼을 팔게 살려달라고 빌든가.;;;

    미국을 상대로 웅대한 군사력 외교능력, 잠재력을 바탕으로 고난의 행군을 하는 중국, 이란같이 한국은 저 자리에 일본을 대입해도 비슷한 상황은 커녕 몇달만에 옥쇄하고 백기투항하거나 그냥 백기투항하는거 말곤 돌려볼 시뮬레이션이 없을겁니다. 이 외교정책의 핵을 지키는 일부를 제외하고 모르는 각료가 정부에 없지 않을텐데도 이네들도 그걸 못하는 이유는 통첩부터 꺼내고 먼저 돌계단에 칼을 갈아대던 인간들이 자기들이란걸 알고 있고. 국민들도 알고 있고, 몰라도 내년 총선이 내년이니 강경론을 거뒤들일 수가 없단건 한심하면서도 이해가 됩니다.. 예 내년이 총선인건 이 나라도 그렇다고요. 문제는 총선이 아니라 개박살이 나고나서 불어닥칠 정권심판론이나 패전책임을 지고 날아갈 정권도, 그리고 그것보다도 한국이 경제전 다음에 재기할 여력이라는걸 모르지도 않겠지만 저러는 거예요,

    오늘 살아야 다음에 다시 싸운다는 진실을 마주할 담대함을 뒷받침하려면. 프로이센이 나라는 붕괴하고 왕제는 전사하고 왕비는 애걸하다 죽고 포로들은 쇠고랑차고 시내행군하던 그런 개굴욕에 버금갈 치욕을 생각해봐도 좋을텐데. 지금 위정자들은 맨발벗고 달려가 읍소하는 역할은 재벌총수들로 충분타면서 자위하고 의병이니 뭐니 하면서 무슨 국가총동원령을 연상되게 만드는 국내단결을 선동하고 자기들이 도게자해서 밡을 핥으라고 아베가 요구해도 손에 가진걸 지키려면 그래야 한다는 처지인걸 알까요. 그 처지가 한국인걸

    저 재벌 총수들이라도 수치를 모르고 치욕을 모를까요, 아무리 적폐라고 욕을 먹어도 지금만큼은 샤른호스트나 탈레랑처럼 보입니다 정부관리들에 비하면. 그런 의미에서 타국 정상들한테 간도 쓸개도 다 빼주고 핥고 빨아달래도 들어주는 내시상 아베는 정말 자기를 돌보지 않는 책임있는 정치인입니다

    • 수비니우스 2019.07.09 2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경제가문제다님은 현정부 남은3년 이내에 한미관계가 파탄날거라고 보시나요?? 이 한일갈등은 승패가 없는게 아니라 한국의 패배로 귀결될거라는거 아닌가요??

    • 경제가문제다 2019.07.09 2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미 예전과 다릅니다, 그렇죠?

      한국 뿐만이 아니라 미국 자신이 먼저 변해서 전세계 적성국과 우방국을 상대로. 다만 보통의 우방과 차별화된다면 열전하고 냉전을 오가면서 세계 패권을 두고 한국전쟁상 자기가 직접 관여한 혈맹이라는 타이틀인데,

      국제관계에 영원한 우방이 있을거라고 생각하시는지 질문받으면 뭐라고 답할것 같으십니까, 안물어봐도 알것 같은데요

      이미 나있을거 같지 않나요? 그렇게 생각하면 더 현명할거란 생각은 안하세요?

      그리고 승패는 싸움이 있어야 납니다, 한국은 싸움이란 말을 거론하기도 민망합니다

    • 백군파 2019.07.09 2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경제가문제다/중국에 구원을 요청해도 들어주긴 할까요? 미래라면 모를까 현재 중국에 과연 그럴 역량이 있는지는 의문이네요.있다 하더라도 그 힘을 우리를 위해 써줄지도 의문입니다.일본이 첫 카드로 내민 안 팔겠다는 물건이 일본 혼자서 90%를 생산하는 것들인데,후발주자인 중국에서 과연 충분히 구할수 있으려나요.

    • 경제가문제다 2019.07.09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백군파/역설화법이죠. 알면서 왜 물으십니까, 미국의 중재 말고 답은 무조건 항복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절을 받아야 할 입장이 굴욕적으로 항복할 상황까지 누가 사태를 비화시켰냐면 연달아 비화될 책임론이 불가피하고 심판론이 뒤따르면 정치적으로 구상하던 백년 대계가 무너질거란 생각에서 저러고 머뭇거리고 있다면 이 정부는 이적이나 매국은 다양한 형태가 있단걸 남들이 강제로라도 깨우쳐줄 필요가 있고요

      그냥 과격하게 말해볼까요.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민족의 생존자산을 정권을 잡은 지금 이 시기 자기가 아니면 안된단 독재자의 전형적 마인드로 미래세대로부터선 수권도 받지 않은 권리로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민족이 백년 천년 먹을 양식을 파괴하고 있죠,

      국가를 대개조하겠다는 욕망은 마크롱과 같지만 20% 지지율로 온 나라를 상대로 싸우는 그런 역량과 정치력도 찾아볼 수 없고요, 그런 프랑스 대통령은 범국민적 반대를 맞아서 당신들이 옳다고 자기를 굽히면서도 대토론으로 정책추진의 동의를 얻으려는 절차적 시늉을 했지만 추진의 자기독선만큼 굽힐수 없는 최우선 순위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체면하고 자존심입니다. 대통령과 그 선민의식에 흠뻑젖기만 했지 2년간 보여주기론 별 능력도 없는 이너써클은 미국이란 사상최강대국의 아량을 국정운영의 우선순위를 월장한 자기들의 민족판타지로 탕진하다 그 응석을 안받아주는 적성국의 공격에 무대책으로 당하고 있죠, 한심하다 못해서 꼴사납고 세상에 이런 무책임한 종자들이 게 있어서는 안된단 생각까지 듭니다.

      의도 자체가 의문스럽고 과격한 표현은 저기 위 댓글들에서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비난하는 그 내용은 그다지 틀린게 없어요

    • 수비니우스 2019.07.09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 알겠습니다.

  9. reinhardt100 2019.07.09 2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엔간해서는 나폴레옹 전쟁란에는 이런 글 쓰는거 자제했습니다만 개전과 동시에 이미 승패가 결정난 전쟁 아닙니까? 이 지경까지 간 것만으로도 이미 패전 확정인데 말입니다.

    솔직히 프로젝트들하면서 숫자들과 연일 격투를 벌이고 있지만 절망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길 수가 없는 경제전을 벌였다는 겁니다. 국산화가 애들 장난으로 보이는지? 기술격차? 정책금융가능 자금 수준? 볼 때마다 아무리 봐도 절망 그 자체더군요.

    제가 예전에 한미간의 경제전에 관해서 댓글 단 기억이 나는데 그때도 백전백패라고 했지만 이것도 똑같은 결론이 나더군요. 무슨짓을 해도 계전가능기간은 4주. 그 이상가면 후유증은 심각하다는 겁니다.

    • ourfuture 2019.07.10 2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게 차라리 전화 위복의 기회가 최서 친일독재잔당이 대거 말소된 것과 같이 한국 민주세력 내에서 항상 암덩어리 처럼 작용했던 친북 민족주의 공산주의자들이 조금이라도 정화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정말 독재잔당이 드디어 사라지자 이집트 혁명을 변질시킨 이슬람 원리주의자같이 한국에선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은 종북주의자랑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찬탈했어요

    • reinhardt100 2019.07.10 2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내년 선거 중요할 겁니다. 여기서도 정신 못 차리면 진짜 희망 없습니다. 어쨌건 정권 교체는 반쯤 기정사실로 되는 듯 합니다^^^

      그건 그렇고 이미 어떻게 패전할지는 답이 나왔지만 경제전 이후 무조건 항복의 조건이 어떨지 솔직히 겁날 지경입니다. 양국간 격차를 완벽히 벌려버릴 수 있거든요.

      빗나간 이야기지만 이번에 패전 후 일본은 반드시 요구할 것이 있습니다. 일본군 부활과 더불어 헌법 개정을 통한 보통국가화 인정, 일본의 안보리상임이사국 진출 동의. 이 두 가지는 반드시 요구할 것입니다.

    • reinhardt100 2019.07.11 16:11  댓글주소  수정/삭제

      장구벌레) 교육을 건드렸습니다. 이건 북핵보다 정권안보차원에서 더 무서운 건데 대놓고 자사고 조진 겁니다.

      학부모들 입장에서 결코 좋아할 게 아닙니다. 자사고 조지면 외고가 우세해지는데 문제는 진보로 분류되는 교육감 자제분 일부가 외고 출신이라 누가봐도 표적으로 자사고 조진거라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누가 봐도 사심으로 교육, 그것도 수능날 군용기 운용까지 통제하는 나라에서 그걸 건드렸으니 정권이 남아나겠습니까? 노무현 시절에 교육 건드렸다가 정권 뒤집혔죠.

  10. 데카르트 2019.07.09 2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격론으로 말하자면 트롤러에겐 말할 자격이 없지만 수비니우스님은 확실히 세번째 트롤럽니다. 여기서도 그렇고 저기 장세도의 택시썰에서도 그렇고...항상 보면 복어병처럼 예민한 신경, 자동반사적 공격이 습관이 돼 있거든요, 기분나빠도 한번 들어보십쇼. 저기 장세동썰에서 나타난 모습을 보면 이런 자기만족말곤 아무것도 얻을게 없는 블로그 댓글에 자기확신으로 똘똘 차 있는듯한 모습에 비추면 모를수도 있을것 같고, 항상 반응이나 대응책이 그러한걸 보면 그런게 뛰어난 행동이라고 착각하고 있을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루리웹이나 옛날의 엔하위키에서나 통할 말의 기술입니다. 두 사이트는 차일디쉬한 찌질이들하고 말따먹는 궤변론자의 사랑방으로 여겨지고있고 여겨졌죠, 나무 위킨가는 이미 통베나 야갤이 돼버렸던데 이야기를 말자고요

    하지만 여긴 처자식 있는 어른의 개인 블로그입니다. 게시판이 아닙니다, 트롤이 나타났다고 트롤이 뭔가의 정치적 논제를 꺼낸다고 참지 못하고 기어코 트롤에게 먹이를 주는 행동을 자기가 한다는 의식은 들지 않는지? 확증편향적인 부류하고만 어울려서 지적을 안듣는건 아닐거라고 봅니다만 다른데선 그래도 여기서는 정말 유치한 태돕니다. 그냥 무시를 하세요. 어째서 일부 트롤러가 나타났거나 정치논쟁으로 기싸움하면서 남의 블로그에 좌판을 깝니까. 위에 00이란 분탕이 쓴 비등점처럼 쉽게 끓는 사람은 저렴해 보입니다, 그러면 언어의 설득력도 떨어지겠죠. 항상 신경을 건드리는 내용을 보면 매번 자동반사로 대꾸합니다, 수비니스트 님은요, 남의 블로그에서, 매번 그래도 질릴텐데 무시하고 군기반장은 그만해보는게 어떻겠습니까

    • 수비니우스 2019.07.09 23:3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서 한동안 여기서 댓글 안달았었죠. 1년 가까이 안달았던것 같은데... 뭐 저도 트롤러라고 하니 조용히 있겠습니다.

  11. 데카르트 2019.07.09 2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군님, 최홍락님 대응이 제일 좋군요

  12. 중산 2019.07.10 0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글 연재를 보러 왔으면 글만 조용히 구독하고 갑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뒤로 가기를 누르면 될 일을 왜 분탕을 치지 못해 안달인겁니까?

    • reinhardt100 2019.07.10 0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즐겁게 글을 보려고 해도 예의를 안지키면서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인간이 있다보면 법봉을 들고 싶을 때가 있죠.

      저도 저번에 여기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들어봤는데 막말로 진짜 면대면으로 만나면 고개도 못들 인간들이 어디서 버릇없이 함부로 말하는게 아주 기분 더럽더군요. 진짜 법 무서운줄 모르고 명예훼손으로 형사사건으로 입건되서 걸려봐야 정신차릴 분들 여기 몇분 있습니다.

      이번기회에 잘 되었습니다. 명예훼손 걸릴 문장 다시는 못 쓰게 해야 합니다.

    • 수비니우스 2019.07.10 1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reinhardt100님 동감합니다.

  13. 수비니우스 2019.07.10 1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트롤에게 먹이를 주는 행동을 해서 많은 분께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단순 공감 외의 대댓글은 달지 않겠습니다. 괜한 내용 써서 나시카님께 죄송하고 마지막으로 나시카님께 00님이 저에게 반말을 한 댓글을 삭제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 최홍락 2019.07.10 15:24  댓글주소  수정/삭제

      장구벌레 / 짐머만 전보 사건이나 진주만 공격 전까지 미국이 먼저 전쟁 못해서 안달난적은 없었던것 같습니다만...그리고 미국 대통령이 대통령직에 있을때 전시에 전방에 나와야할 일이 있었나요?

    • 최홍락 2019.07.10 18: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대로 서지못하는 사람은 대통령이 되는게 님이 보시기에는 웃기신가 봅니다.

      군통수권자는 전방이 아니라 후방에서 군수계획, 동원계획, 출구전략 등 전체 시스템을 조율하는 것이 전략에 더 부합하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을 바로 박밍아웃이라고 받아치는걸 보니

      헬반도 내지는 2등 시민 운운하시는걸 보니 참 답이 안나옵니다.

    • 최홍락 2019.07.10 19: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부심같은건 없고 굳이 누구처럼 사라지겠다고한 적도 없고 그쪽이 신경쓸 일도 아닌 듯 하네요. 그리고 갖잖다가 아니라 같잖다라고 써야겠고요ㅋ

    • 최홍락 2019.07.10 1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쪽의 그만하렵니다도 도망가렵니다로 알고 저도 그만하렵니다.ㅋ

    • 기리스 2019.07.17 0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부심같은건 없고 굳이 누구처럼 사라지겠다고한 적도 없고 그쪽이 신경쓸 일도 아닌 듯 하네요. 그리고 갖잖다가 아니라 같잖다라고 써야겠고요ㅋ

      남에게 문법 지적하시기 전에 자신의 기초적인 띄어쓰기 오류부터 수정하시는 게 좋겠군요....

  14. 데카르트 2019.07.10 2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푸념성이지만 아이러니한 이야기 하나 해봅시다,
    묵은 농담인데 한국은 지도자를 수입해와야 한다는 그 생각이 지금 듭니다.

    한국의 식자, 식자중에서도 톱티어 식자들은 일본한테서 사과나 뉘우침을 받아내려는 역사적 결의를 한국 국민이 포기해야한다고 합니다. 조선놈들은 조선이 힘없고 하찮은줄 알아야 하고 일본놈들은 까마득하며 가망이 없다는 겁니다.
    일본놈들은 그 족속 대다수마저도 한국의 태도변화가 없으니 협상의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다수인 고로 일본의 비타협은 국민적 지지까지 받고 그 힘센 왜놈들은 세계에 친구마저 많다는 그런 논린데.....

    나시카님 블로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폴레옹 칼럼인데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으로 채용되는 파틉니다
    https://nasica1.tistory.com/180?category=70628

    어째서 외국에서 지도자를 수입해와야 되느냐는 농담을 언급한 이유가 이렇습니다.ㅎㅎ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국민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 즉 러시아로부터 핀란드를 되찾아오는 임무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건 북구의 ♪♩♬♬ 스웨덴 사람들이 국제 사정을 몰라서 가진 소원일 뿐,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웨덴 사람들의 소망을 처리하는데 있어, 자신이 그저 지시받은 목표를 무조건 수행해내는 단순무식한 장군이 아니라 목표 설정 자체부터 재검토하는 진정한 국가 지도자급 인물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증명해보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는 떠오르는 강대국 러시아로부터 핀란드를 되찾아오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설령 나폴레옹의 힘을 빌어 일시적으로 되찾아온다고 해도 그건 일시적인 만족감을 줄 뿐, 결국 반드시 러시아와 끝없는 전쟁을 불러올 뿐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

    나시카님의 칼럼 중 이 부분을 누군가는 마치 지금 한국 상황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고 할 겁니다
    나폴레옹의 힘을 빌었어서 핀란드를 되찾아온다? 저건 마치 오바마가 화해치유재단을 중재한 그 사태를 떠오르게 만듭니다
    일본은 하등 불리한 협상을 할 필요가, 그러니까 현재처럼 다까끼 마사오때 다 끝났다며 쌩까도 하나도 손해볼게 없는데 미국의 강요로 이뤄진 당시 사태에 아주 분노했다 합니다

    전 궁금합니다, 나시카님은 이 한일분쟁에 있어서 저 베르나도트의 판단에 바친게 정확히 꿰뚫어봤단 찬사였던 것처럼 지금의 한일국면에서도 상기 소개한 국내의 시선. 약소국인 한국국민의 사상이 변해야 한단 그 주장과 같이 여기서도 베르나도트의 판단을 옳다고 여기시는지 말입니다

    한국 국민의 반일성향은 위험한 욕망인가요? 베르나도트의 저런 정확한 판단처럼?
    한국 지도층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까요 베르나도트의 저 판단이 정확하다면 그냥 오바마의 딜을 받았어야 한단 말인데..
    모르겠습니다 전, 한국은 당시 스웨덴보다는 아직 등따습고 배부르니까 고민할 여유가 있다고 말해버리면 끝이지만 말입니다 머

    • 데카르트 2019.07.10 2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심지어 베르나도트처럼 협상을 강제했던 검은 히틀러 오바마는 외국인이기까지 하군요!

  15. 2/28일 입대 2019.07.11 0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조리있고 재미있는 글 늘 감사드립니다.

  16. 일반시민 2019.07.11 1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재인은 어제 대기업 경영자들을 불러다가 장기전을 대비해라고 했답니다,
    맙소사

    아, 원숭이들이 대북제제위반을 규제명분으로 삼은덴 막다른 길로 가지 말라고 그랬다네요

    뭔가 자기의 마음 속 민감한 부분을 아베가 건드린것 같습니다 항상 문재인은 북한에 민감했지요

  17. 일반시민 2019.07.11 1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BSCNBC에 오늘 패널로 출연한 국제통상학 교수는 이렇게 말합디다,
    한미일 동맹 삼각공조는 이미 워싱턴이 선택해서 변했고 오사카 G20에서 식민번국 제후 아베는 트럼프 태황제의 윤허를 받고 이번 대한국 공격을 시작한 거라고, 최소 터치는 안하겠단 허락을 받고 한다는 겁니다

    이제 문재인은 과연 뭘 할수 있을까요?

    아베한테 신속히 표정바꾸고 절이라도 할까요?
    아니면 나라가 거덜난 다음에 끌려가서 몸값내고 나올까요?
    그리고 아마 대한민국 굴욕의 날이라면서 비극의 영웅으로 둔갑하고 선동고무전에 써먹을까요? 다음 대선을 위해서?

  18. zizone 2019.07.13 14: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뭐야 이게 댓글들이 나폴레옹 얘기가 아니라 정치얘기 한가득이네...;;;;

  19. 돌격대장 2019.07.14 2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글을보게워된지 6개월 정도 되었지만
    이제서야 덧글을 끄적여봅니다.
    나폴레옹에 대해서 알아보고
    왜인지 관련서적들이 구하기가 어렵더군요
    ㅜㅜ 책이 있어도 제가 좋아하는 전투나
    전쟁부분이 그냥 지명 병력수 결과만
    나열하는 느낌이라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했죠.또 나폴레옹이 천재라고 하면서
    그같은 천재가 왜 극악의 땅인 스페
    침공했는지 그 경위를 알려주지않았는데
    나시카님의 글을보고나서야 비로
    알게 됬지요.이런 유익한글들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리고 혹시 러시아 원정이 끝난
    이후엔 포니아토프스키 특집을
    부탁 드려도될까요 개인적으로 장
    란 원수 만큼 매력적인 인물이라
    생각되서요.이만 줄이겠습니다.ㅎ

  20. 한슬 2019.07.19 22: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글은 역사글로 봐여지 왜 자꾸 문재인 얘기가 나오나요?

    • 육식동물 2019.07.20 0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블로그 소유주께서 평소에 정치지론을 많이 펴시니까 그렇겠죠, 그래서 정치관련글이 댓글로 작성돼도 그걸 수용하시는 원인이 거기 있을 것이고 높은 확률로

      본인이 나폴레옹 역사글에도 가치관 피력 및 역사평가를 함유하시고 이 블로그의 나머지 글은 거진 그런 글이니..

    • 기리스 2019.07.20 1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글에 정치성 코멘트가 팍팍 들어가는데 왜 자꾸 역사글로 봐야지 같은 얘기가 나오나요?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는 독일 출신 할머니와 독일 출신 어머니를 둔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 할머니는 처녀적 이름이 안할트-제릅스트(Anhalt-Zerbst) 출신의 소피(Sophie)로서 나중에 예카테리나(Екатерина) 대제로 알려진 러시아의 여황입니다.  알렉산드르의 어머니는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공주였지요.  다른 유럽 왕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는 이렇게 계속 외국 특히 독일 출신의 공주들을 왕비로 맞아들이다보니 러시아 왕가는 일반 러시아 국민들은 물론 러시아 귀족들에 비해서도 서구의 발전된 문물과 사상에 대해 좀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춥고 먼 동쪽 구석의 러시아를 서구화시키는 노력은 대개 국왕을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혁신이 위주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귀족들과 국민들은 그런 서구 사상의 침투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반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 전통은 알렉산드르에게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스위스 출신의 공화주의자인 라 아르프(Frédéric-César de La Harpe)를 가정교사로 하여 루소 등의 프랑스 계몽사상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당연히 그는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랐습니다.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지독한 전제 군주 집안에 태어난 왕자로서 계몽사상에 젖어든 어린 손자 알렉산드르를 보고 예카테리나 대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꼬마는 자기 모순의 매듭덩어리 같구먼."


(라 아르프입니다.  그는 30대를 러시아에서 알렉산드르의 가정교사로 보낸 뒤, 베른의 귀족 정권에 시달리던 고향 스위스 보(Vaud) 지방을 해방시키고 더 나아가 스위스에 헬베티카 공화국(République Helvétique)을 만들었습니다.  혁명의 폭풍 속에서 그는 추방을 당하는 등 시련을 겪었으나, 나폴레옹이 패망한 이후 그는 옛제자 알렉산드르의 도움으로 그의 고향 보 지방의 권익을 지키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물려받은 전제 군주 짜르의 왕좌는 결코 절대 권력이 보장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그의 할아버지 표트르 3세(Pyotr III )는 그의 홀대에 불만을 품은 근위부대의 반란으로 황비인 예카테리나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결국 암살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파벨 1세(Pavel I) 또한 귀족 출신의 해직 장교들에 의해 아주 간단히 암살되었습니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연이어 암살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만 표트르 3세나 파벨 1세나 모두 농노들의 처지를 향상시키고 귀족들의 권리를 제한한다는 공통적인 개혁 조치를 취한 바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먼 동구의 대국으로서 소수의 전근대적인 귀족들이 노예 상태의 국민들을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가령 표트르 3세의 개혁 이전까지만 해도 귀족들은 자기 농노를 죽여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나름대로의 그런 전통과 특성을 무시하고 귀족들의 이익을 해친다면, 아무리 동로마 제국 황제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주장하는 짜르라고 해도 야밤에 한낱 개처럼 살해될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의 평민 출신 고문 스페란스키입니다.  그는 알렉산드르를 따라 에르푸르트 회담장까지 가서 직접 나폴레옹과 환담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귀족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그는 결국 친프랑스파이자 불온사상을 가진 자로 낙인찍혀 1812년 초에 고문직에서 해직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시베리아에 유배를 간 것은 아니고, 핀란드 대학의 학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비록 알렉산드르가 서구 계몽사상으로 훈련된 개혁적 군주라고 해도 실제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시골 마을 신부의 아들인 스페란스키(Mikhail Speransky)를 고문으로 등용하여 당시 계몽사상가들이 꿈꾸던 입헌 군주국으로 러시아를 탈바꿈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는 짜르가 스스로의 권력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  또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처럼 선진 교육을 받은 귀족 및 시민들이 많아야 한다는 판단으로 당시 그 넓은 러시아에 딱 3개 있던 대학 수를 6개로 늘리는 등 교육 제도 개선에도 힘을 많이 썼습니다.  물론 개혁은 쉽지 않았고 알렉산드르도 주변 왕족 및 귀족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런 개혁에 대한 열의는 점점 옅어져 갔습니다.  가령 스페란스키가 제시했던 의회, 즉 러시아어로 두마(дума, '생각'이라는 뜻)로 불리는 기구는 거의 1백년이 지난 뒤 노일전쟁의 패전 결과로 발생한 1905년 러시아 혁명을 겪고서야 간신히 설립될 지경이었습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러일 전쟁 패배의 여파로 들끓던 사회적 불만이 '피의 일요일' 사건이 계기가 되어 촉발된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포템킨 호의 반란 사건도 이때의 사건입니다.)

 



그렇게 서구 사회에 긍정적이었던 그는 처음에는 프랑스 시민 계급을 대표하는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에 대해 흠모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나폴레옹의 앙기앵 공작 납치 사법 살인이라는 비도덕적 범죄 행위를 보고는 기대만큼 큰 실망을 하여 반-나폴레옹파로 급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제3차 대불동맹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나폴레옹의 손에 참담한 패배의 맛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렉산드르는 젊은 낭만파 몽상가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1807년 틸지트 회담에서 나폴레옹이라는 대인물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보고는 나폴레옹의 매력에 젖어든 정도가 아니라 그 속에 첨벙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역시 낭만파 몽상가이자 지략가였던 나폴레옹이 제시한 프랑스와 러시아가 힘을 합해 유럽을 양분하고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출발하여 인도까지 점령하자는 말도 안되는 소리에도 전율했습니다.  그 결과, 분명히 바로 직전까지 영국의 금융 지원을 받으며 피튀기게 싸우던 적수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엉뚱하게도 여태까지의 돈 줄이자 중요 경제 파트너였던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틸지트 회담에서 알렉산드르는 무엇보다 남쪽의 숙적 오스만 투르크가 차지했던 발칸 반도 등지를 빼앗기를 원했지만, 실질적으로 러시아가 얻은 것은 핀란드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오스만 투르크는 영국의 근동 지방 전략에 저항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동맹이었고 또 나폴레옹이 구워삶아야 하는 다른 강국인 오스트리아도 오스만 투르크의 땅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얻은 것에 비해 영국과 척을 진 대가는 컸습니다.  러시아는 토지 귀족의 나라였고, 토지 귀족의 돈벌이는 자신의 장원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영국에 수출하고 대신 영국제 공산품을 수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호기 있게 맺은 틸지트 조약은 러시아 토지 귀족의 이익에 크게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곧장 여기저기서 볼멘 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물론 불만 세력들은 모양새 없게 '돈벌이가 안된다'라는 것을 나폴레옹과의 동맹 반대 이유로 대지는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나폴레옹은 신이 내려주신 왕위를 뺴앗은 찬탈자이고 불온한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야만인이므로, 동로마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로마노프 왕조는 그 코르시카놈과 동맹을 맺을 것이 아니라 정벌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짜르 알렉산드르의 모후인 마리아 페오도로브나(Maria Feodorovna)까지 나서서 나폴레옹이 소집한 에르푸르트 회담에 출석하지 말라고 종용할 지경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자신을 둘러싼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야밤에 칼로 찔러 죽인 자들이 가득찬 왕궁에서 그들의 불만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옳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알렉산드르도 나폴레옹이 결코 자신과 유럽을 공유할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어디까지나 전제 왕정의 군주였지, 결코 낭만적인 친구들로 둘러싸인 젊은 독일 대학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 기반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그 계기가 된 것은 나폴레옹이 바르샤바 공국을 독립 폴란드 왕국으로 부활시키려고 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건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 오스만 투르크의 분할에 있어서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메테르니히가 빚어낸 가짜 뉴스였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1810년 12월 31일 발표된 짜르의 칙령은 프랑스산 제품에 대해서는 관세를 부과하고, 반대로 영국 상품에 대해서는 입항 허가를 내주는 내용이었고, 이를 계기로 나폴레옹와 알렉산드르 사이의 전쟁은 거의 기정 사실화되었습니다.  사실 이건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제 벌어질 전쟁은 유럽 산업화의 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영국 시민 계급과 프랑스 시민 계급의 싸움이었습니다.  이미 산업 혁명이 시작된데다 강력한 로열 네이비를 보유한 영국과 싸울 방법이 궁했던 프랑스가 꺼내든 대륙 봉쇄령이라는 무역 전쟁은 결국 동방의 대국 러시아를 싸움판에 끌어들였고, 결국 영국 대신 러시아가 프랑스를 상대로 대리전을 치르게 된 것이었지요.  

자신의 전쟁에 제3자를 끌어들인 것은 영국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도 혼자서 러시아와 싸울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가 굴복시킨 독일과 이탈리아 등지의 위성국가들에게 병력과 물자, 자금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유럽 거의 전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 거대한 전쟁에 휩쓸려야 했습니다.  과연 이 전쟁을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시선은 어떠했을까요 ?  물론 대부분은 황제가 또 전쟁을 한다면서 불만이었습니다만, 지식인들 대부분은 이 전쟁을 계기로 유럽의 근대화가 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의 점령군 뒤에는 예외없이 무자비한 병참장교와 세관원들이 따라와 점령지의 고혈을 짜내는 것으로 악명 높았지만, 나폴레옹의 정복지에는 프랑스 대혁명 정신을 계승한 헌법과 나폴레옹 법전도 항상 따라오기 마련이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군이 이례적으로 잔혹하게 난동을 부렸던 스페인에서조차, 지식인들은 나폴레옹이 세운 허수아비 왕 조제프의 정권이 기존 부르봉 왕정보다 스페인을 훨씬 더 근대화시켰다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최소한 헌법이 제정되었고, 중세시절부터 계속 내려오던 고문으로 악명 높은 스페인 종교재판도 폐지되었으니까요.  나중에 나폴레옹이 패망한 뒤 스페인 종교재판은 다시 부활했다가 1834년에야 간신히 폐지되었습니다.  괴테 등 당대의 지성인들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일주의에 대해 분개하면서도 나폴레옹이 동방으로 끌고 갈 그랑다르메(Grande Armee)의 전진과 함께, 신분제 폐지와 천부인권 등의 계몽사상이 저 동방까지 전달될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종교재판 = 이단심문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와 나무가지, 그리고 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Yo, Say Love"를 선창하시는데 이들은 떼창으로 "No Mercy"를 외쳤군요.)

 



이제 유럽은 누가 영국과 러시아 편에 설 것이고 누가 프랑스 편에 설 것인지, 과연 중립이란 것이 가능할지 외교적인 머리를 굴려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I_of_Russia
https://en.wikipedia.org/wiki/Mikhail_Speransky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0_- 2019.07.01 06: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주일의 시작을 새 글과 함께! 매번 포스팅이 월요일 6시 30분이네요.
    주말동안 글 정리 해 놓으시고 월요일 새벽 포스팅 예약 걸어놓으시는 건가 보군요?
    잘 보고 갑니다 :)

  2. 보니666 2019.07.01 1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항상 좋은글 너무 잘 읽고 있습니다. 제가 궁금한 점을 여쭤보고 싶은데, 나시카님께서 보시기에는 결국 나폴레옹의 패망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지난 글에서 1810년의 나폴레옹은 더이상 전쟁을 개인적으로 원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는데...

    1. 그렇다면 나폴레옹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끝까지 회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는 대륙봉쇄령 포기와 영국정복을 완전 포기한다는 뜻이고...유럽 다른 나라들도 프랑스를 만만하게 여기고 부르봉 왕가의 복귀를 위해 다시 침략했을 것 같고...그렇게 되어도 결국 전쟁을 피할 수 없었을 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만약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에서 승리하여 러시아까지 대륙봉쇄령에 강제로 다시 참여시키는 데 성공했더라도...결국에는, 언젠가는, 코르시카 촌놈 출신이자 전쟁의 승리로 권력을 유지했던 황제인 나폴레옹은...전쟁으로 패망할 운명이었는가요?

    3. 결국 전쟁의 승리로 벼락출세한 식민지 코르시카 출신인 나폴레옹이 새로운 왕조를 창시하고 제위를 아들에게 물려주며 죽는...해피엔딩은 애당초 불가능한 이야기인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나시카님의 생각이 정말 궁금합니다. 고견 부탁드려요~^^

    • nasica 2019.07.01 19: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그렇다면 나폴레옹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끝까지 회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러시아와 전쟁 회피는 결국 대륙봉쇄령의 붕괴로 이어졌겠습니다만, 그래도 나폴레옹 정권은 유지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자신은 없습니다.


      2. 만약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에서 승리하여 러시아까지 대륙봉쇄령에 강제로 다시 참여시키는 데 성공했더라도...결국에는, 언젠가는, 코르시카 촌놈 출신이자 전쟁의 승리로 권력을 유지했던 황제인 나폴레옹은...전쟁으로 패망할 운명이었는가요?

      --> 러시아가 굴복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대륙봉쇄령으로 인한 경제적인 불만은 터져나왔을 것이고, 그때문에 전쟁이 반복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총칼은 절대 황금을 이기지 못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3. 결국 전쟁의 승리로 벼락출세한 식민지 코르시카 출신인 나폴레옹이 새로운 왕조를 창시하고 제위를 아들에게 물려주며 죽는...해피엔딩은 애당초 불가능한 이야기인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 저는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습니다. 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요 ? 고매한 왕가의 선조도 따지고 보면 힘깨나 쓰는 조폭단 두목일 뿐입니다.

  3. 푸른 2019.07.01 1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종일관 진지한 글이다가, 마지막에 "yo, say love"하는 예수님과 "No nercy~"하는 사람들을 상상하게 만드시네요ㅋㅋ 그 장면을 상상할수록 웃음이 나오네요ㅋㅋㅋ

  4. 최홍락 2019.07.01 1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서구 사상에 관용적인 왕과 그렇지 못한 귀족들의 구도로 보기에는 당시 18세기 러시아 상류사회의 언어가 프랑스어었다는 사실과는 배치가 되는 듯 합니다. 표트르1세의 친서구정책도 한몫했지만 그래서 성공을 거뒀다”고 말했다. 리슐리외 추기경이 1635년 언어 표준을 만들고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프랑스 아카데미를 창설한 이래 프랑스어는 통일된 표준이라는 개념이 발생한 첫 언어라는 인식이 러시아 상류사회에 널리 퍼졌거든요. 프랑스어가 서서히 라틴어를 몰아내고 외교가에서 널리 쓰인것도 이를 반영한 것이고요. 프랑스 대혁명 직후 프랑스를 탈출한 프랑스 귀족을 불러 과외교사로 삼는 러시아 귀족들 덕분에 프랑스 망명귀족들의 인기가 치솟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나마 러시아의 것을 지키고 러시아어를 쓰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나폴레옹 전쟁 때가 되서야 가능해진 일이라고 합니다. 일반 민중들이 러시아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귀족들을 백안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할정도로 말이지요.

    2. 러시아의 황제와 귀족 간의 대립은 미국의 남북전쟁의 배경과 유사하게 경제적인 갈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8세기 들어 영국과 러시아 간의 자유무역협정 체결 이래 러시아의 대외교역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육박할 정도였습니다. 영국의 해군력을 뒷받침하는 아마, 철광석, 석탄 그리고 러시아의 농노들이 생산하는 밀이 러시아의 주요 수출품이었으며, 영국은 면직물을 포함한 귀족들의 사치품을 수출했죠. 문제는 교역이 확대됨에 따라 러시아의 제조업자들이 성장하면서 이러한 불공정무역이 시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것입니다.

    앨리자베타 여제부터 알렉산드르 2세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황실은 농노제를 없애고 농노들을 공장의 노동자로 변환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지요. 그리고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관세율을 높이고 영국에 치중한 무역루트를 다변화시키려고도 하고요. 물론 농토를 가진 지주 계층들은 반발하게 되는데, 이들은 기존 제도의 유지, 자유무역의 고수를 주장하게 되고요. 마치 남북 전쟁 전의 북부와 남부처럼 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은 북부가 전쟁을 통해 남부를 제압한 반면, 러시아는 황제(파벨1세의 죽음에는 그의 교역 다변화 정책이라는 배경도 존재합니다.)가 암살되는 등 저항이 상당히 거셌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 제품의 수요처로서 영국을 대신할 수 있었다면 대륙봉쇄령이 의외로 오래갔을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고 이는 러시아 왕실과 귀족 모두 프랑스에 적대적으로 변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3. 스페란스키가 평민 출신의 입지전적인 인물이고 황제의 최측근인 것과는 별개로 그의 정책이 러시아에 미친 영향은 그다지ᆢ 앞에서 언급한 교역 다변화 정책의 일환으로 1811년 중립국 무역에 관한 규정을 공포하여 미국과의 교역 확대를 시도했으나 이는 결론적으로 미국을 통해 우회하여 영국과의 무역을 시도한 것으로 해석되어 나폴레옹의 진노를 사서 러시아 원정을 촉발하게 되지요. 그가 친프랑스파가 아니었더라도 이런 외교 상태를 가져온 정책의 책임을 물을 사람이 필요했던 상황이 스페란스키의 고문 해촉이 된 것이고요.

    스페란스키는 나중에 니콜라이1세 (알렉산드르1세의 동생으로 형 다음 왕위를 계승합니다.)에 의해 재기용되는데 이때 러시아의 법전을 재정비하게 됩니다. 이는 일정한 규범 없이 수행 되어온 국가 통치 질서에 명확한 기준과 원칙을 제공함으로써, 법에 의한 국정 운영을 가능케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광무개혁의 러시아 버전. 즉, 그 질서의 목포가 전제정 및 기존 봉건질서를 강화한 것이라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근대적인 기술 투자, 교육제도, 화페 통일 등이 이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강화되 러시아의 군사력은 유럽의 헌병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유럽에서 불거진 각종 혁명을 진압하는데 쓰이고 맙니다.

  5. 궁금한 사람 2019.07.01 1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혹시 알렉산드르의 아버지 파벨 1세의 사망원인은 뭔가요?

    어디서는 목이 졸려 죽었다
    어디서는 칼에 찔려 죽었다
    어디서는 금속상자에 맞아죽었다 하는 데 정확한 사인을 명시한 곳은 없네요

    죽은 건 확실한 거 같은데..

  6. 백군파 2019.07.01 2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통치에 긍정적인 점이 많았다는건 알고 있었지만,스페인 지식인들까지 거기에 동의할줄은 상상도 못했네요.오스트리아군이 나폴레옹 군대에 쓴맛을 본 이후 프랑스식으로 군제개혁을 해 부분적인 성공을 거둔 것처럼,러시아군은 나폴레옹의 침공 전에 정편과 개편을 통한 근대화를 추진한 적이 없나요?

    • 수비니우스 2019.07.01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이부분 관해서 아는게 없는데 추측으로는 웬지 없었을것 같네요. 오스트리아하고 프로이센이 본진을 몇번 탈탈 털리고서야 프랑스식으로 개혁했던걸 생각하면, 러시아 원정 전에는 본진이 당한 적은 없고 원정 때 모스크바는 함락됐지만 이후에 승리를 거듭했으니까 원정 전후로 딱히 개혁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했을것 같습니다. 러시아 근대화 추진이 크림전쟁때 털린 뒤지 않나요?? 언제 들어도 좋은 나시카님의 자세한 설명이 기다려집니다.

    • 최홍락 2019.07.01 2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스페란스키의 개혁이 반쪽짜리라고 평한 것과 연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요. 인적 자원 측면에 있어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귀족과 관리의 자녀들로 제한됐고 법률학교와 기술전문학교 등 중등교육기관은 꽤 늘었으나, 초등학교가 없었던 관계로 농민 내지 농노의 자녀들이 부모와 마찬가지로 문맹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군대나 산업이나 전술 내지 기술을 소화해낼 수 있는 실력있는 하사관이나 초급장교들이 충분한 숫자가 확보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됬던거죠. 시위 진압이나 약탈은 가능했을지 몰라도 동시대의 서구 국가의 정규군과 상대하는건 역부족이지 않았나 싶네요. 여기에 기술력이 뒷받침이 안되다보니 크림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도 도입했던 강선식 야포 대신 청동제 활강포를 쓸 정도였던 것도 한몫을 했고ᆢ

    • nasica 2019.07.02 19: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딱히 뚜렷한 것은 없었다고 저도 알고 있습니다. 1810~1812년 사이 드 톨리(de Tolly)와 볼콘스키(Volkonskii) 등의 주도 하에 프랑스식 편제를 도입했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만, 나폴레옹의 군단 편제처럼 획기적인 것은 없었습니다.

    • 최홍락 2019.07.04 08:1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볼콘스키 공작이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의 안드레이 볼콘스키의 모티브가 된 농민공작 세르게이 볼콘스키가 맞는지요?

    • nasica 2019.07.04 1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홍락// 말씀하시는 세르게이 볼콘스키는 당시 계급이 아직 대위인가 그래서 아닐 것이고, 이 양반이 그 양반일 겁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yotr_Mikhailovich_Volkonsky

  7. 웃자웃어 2019.07.02 0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그런데 나폴레옹이 아일라우 전투를 통해 광활한 동유럽에서는 자신의 전술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는데도 쳐들어간 이유가 뭐죠?

    • nasica 2019.07.02 19: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서 그때 경험을 되살려 엄청난 군수품을 준비하고 치중대를 편성했습니다. 문제는 그 당시 기술로는 그런 대군에게 장기간 군수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지요. 특히 한가지, 꼭 필요하지만 전혀 준비할 수가 없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다다음번에 본편으로 다루겠습니다.

  8. 중산 2019.07.02 2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재밌게 구독하고있습니다. 나시카님 혹시 괜찮다면 나시카님의 글을 퍼가도 될까요? 출저는 꼭 명시해 놓겠습니다

  9. 웃자웃어 2019.07.14 16: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러시아가 절대왕정체제의 전제군주정 이라곤 해도 귀족 여러명 족치는건 가능해도 귀족집단 전체를 족치는건 불가능하단겁니까?

    • nasica 2019.07.14 18: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요, 그게 그때그때 달랐겠지요. 확실한 것은 알렉산드르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귀족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1812년, 그 고통스러운 행군을 향해 출발합니다.  모든 사건은 뭔가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터집니다.  왜 나폴레옹은 자신의 파멸을 향해서 그 춥고 머나먼 땅으로 행군을 해야만 했었을까요 ?  이유는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주된 이유는 두가지, 폴란드와 영국이었지요.  그 두가지 때문에, 지난 편에서 우리는 1810년 12월 31일, 알렉산드르가 프랑스산 비단과 와인에 관세를 부과하고 반대로 영국산 제품의 입항을 실질적으로 허락하는 칙령을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이라는 바보짓을 피할 수 없었을까요 ?  제 블로그를 출입하시는 분들께서는 느끼셨겠습니다만, 나폴레옹은 원래부터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전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일으킨 전쟁은 대부분 방어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과 싸웠던 것도, 바그람에서 오스트리아와 싸웠던 것도 알고보면 모두 상대측이 먼저 선전포고를 한 것이었지요.  1811년 당시의 나폴레옹은 특히나 전쟁을 굳이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제 40대에 접어든 그는 뇌하수체 이상 때문이라는 설이 있듯이 뭔가 건강이 좋지 않아 눈에 띄게 몸이 비대해졌고, 그 때문인지 부하들은 모두 나폴레옹이 전에 비해 결단력이 떨어지고 사람이 유순해진 것을 눈치채고 놀라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들 '로마왕'을 낳고 나서는 이렇게 말할 정도로 기뻐하며 이제 자신이 이룬 제국의 보존을 우선 순위에 두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제국은 칼로 건설되고 상속에 의해 유지된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 기반이 무력보다는 민중의 지지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독수리 깃발을 앞세운 승리의 영광은 단지 그런 민중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격파한 뒤 거기서 빼앗은 영토 등으로 만든 베스트팔렌 왕국의 왕좌에 막내 동생 제롬을 앉히면서 아래와 같은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독일인들이 초조하게 기대하는 것은 귀족 태생이 아니더라도 재능만 있다면 너에게 발탁될 공평한 기회를 갖는 것과, 왕국 내의 가장 비천한 자들과 국왕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신분 장벽과 예속 상태가 철폐되는 거야... 나폴레옹 법전의 혜택, 통치 절차의 투명성, 그리고 배심원 제도가 네 왕정과 기존 왕정을 구별하는 특성이 되어야 해.  너에게 완전히 터놓고 이야기한다면 말이다, 네 왕정의 확장과 통합에는 나의 더 위대한 승리보다는 그런 것들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난 기대하고 있단다.  너의 백성들은 다른 왕정 하의 독일인들이 누리지 못하는 자유와 평등, 복지를 누려야 한다."

귀족들, 심지어 당시 부르조아 계급으로 불리던 시민 계급, 즉 요즘말로 중산층도 가끔은 돈 때문에 전쟁을 환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사회 대부분을 차지하는 민중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적의 총탄과 대포알을 몸으로 받아내며 산산조각 나야하는 것들이 바로 자신들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나폴레옹도 그걸 잘 알고 있었고, 그는 민중이 싫어하는 전쟁을 굳이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보자면,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은 민중의 국가라기보다는 부르조아 계급, 즉 시민 계급이 이끌고 나가던 나라였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즉 구체제를 뒤엎은 시민 계급은 이제 신분이 아니라 재산과 실력에 의해 대우받고 기회가 주어지는 체제를 지지했습니다.  따라서 투표권도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가진 국민에게만 주어졌지요.  나폴레옹도 집권 기간 내내 사회 대부분을 차지하는 민중 세력보다는 교육을 제대로 받고 재산을 갖춘 중산층 소수 엘리트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시민 계급이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 경제적 번영과 그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 안정이었습니다.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에 가장 해로운 것이 전쟁입니다.  그런데도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원정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러시아 원정이 시민 계급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빌렘 Willem이 명예 혁명에 의해 영국왕 윌리엄 3세가 되면서, 그 전에도 좋지 않았던 프랑스와의 관계가 급격히 나빠집니다.  쫓겨난 영국왕 제임스 2세는 카톨릭으로서, 전통적 카톨릭 군주인 프랑스 루이 14세와의 관계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영국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은 제2의 100년 전쟁이라고 지칭되는 시대 속에 있었습니다.  1688년 명예 혁명에 의해 개신교였던 네덜란드의 윌리엄 공이 영국 왕위에 오르면서 시작된 영국과 프랑스의 본격적인 갈등 관계는 처음에는 개신교와 카톨릭의 종교적인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곧 아메리카 및 인도를 둘러싼 식민지 확보 경쟁, 즉 경제적인 갈등으로 전개되었습니다.  1756년부터 시작된 7년 전쟁과 1775년부터 시작된 미국 독립 전쟁에서 서유럽을 주도하던 이 두 나라의 경제적 이해 충돌은 매우 뜨거워졌습니다.  특히 과거의 전쟁처럼 어느 나라가 유럽 내 어느 특정 지역의 영토를 더 많이 차지하느냐 하는 것보다 누가 더 많은 생산 기지와 소비 시장을 확보하느냐로 관점이 옮겨가면서 이 두 나라의 갈등은 거의 공존 불가 수준으로 달아올랐습니다.  

중세 시절이라면 이런 두 나라의 경쟁은 당연히 더 크고 비옥한 영토를 가진 프랑스가 우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백년전쟁에서 영국이 초반에 우세했던 것도 알고 보면 당시엔 영국이 프랑스 내에 꽤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그 영토에서 나온 병력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프랑스에게 밀려 유럽 내의 영토를 다 잃을 수 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대포로 무장한 전열함이 큰 역할을 했던 해외 식민지 경쟁에서는 섬나라 영국이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결국 프랑스는 인도와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를 대부분 잃어야 했지요.

 

(7년 전쟁의 여러 전장의 모습입니다.   7년 전쟁은 가히 세계 전쟁이라 할 수 있어서, 그 전장은 유럽 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 인도, 북부 아프리카, 심지어 필리핀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서로에게 상처만 주었던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뒤 이 두 나라 사이에는 잠깐 공존의 분위기가 무르익기도 했습니다.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을 물먹이느라 재정을 탕진한 프랑스가 당장 농산물을 수출해야 하는 필요성과, 북미 식민지를 상실하는 바람에 자국산 공산품을 위한 새 수출 시장을 급히 찾아야 하는 영국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1786년 이 두 국가 사이에 관세를 대폭 낮추자는 에덴 조약 (Eden Treaty)이 맺어졌던 것입니다.  이때 프랑스 측의 책임자는 중농주의자였던 베르겐 백작(Charles Gravier, comte de Vergennes)이었고, 영국측 책임자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Wealth of Nations, 1776년 출간)에 잔뜩 영향을 받은 오클랜드 남작 에덴(William Eden, 1st Baron Auckland)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영국산 공산품의 프랑스 시장에 대한 진입 장벽이 크게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측에서 보면 이 조약은 프랑스 토지 귀족들의 이익만 대변할 뿐, 주로 부르조아 시민 계급으로 구성된 프랑스의 대형 제조업자 및 상인들에게는 매우 불리한 것이었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에덴 조약으로 손해를 본 프랑스 부르조아 계급의 불만이 결국 프랑스 대혁명으로 분출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신분제 철폐와 천부적 인권이라는 숭고한 이상 뒤에는 프랑스와 영국의 돈 싸움 문제가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베르겐 백작 샤를 그라비에입니다.  이 분은 자신이 뭔 짓을 저지른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1787년에 fat & happy 상태로 편히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경제 전쟁에서 프랑스가 내놓은 회심의 일격이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도 인간인 이상 날아서 도버 해협을 건널 수는 없었고 트라팔가에서 쓴 맛을 볼 수 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나폴레옹이 내놓은 해법이 바로 진짜 무역 전쟁, 즉 대륙 봉쇄령이었습니다.  대륙 봉쇄령이 성공하려면 유럽 전역이 나폴레옹의 직접적인 영향력 하에 있어야 했었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나폴레옹도 서부 유럽의 황제였을 뿐이었지요.  동부 유럽의 황제는 바로 로마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는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 1세였습니다.  대륙 봉쇄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유럽 대륙 서부 뿐만 아니라 동부까지 전체가 영국 상품에 대해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나폴레옹도 그런 사정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처음부터 러시아와는 싸우기 보다는 협력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1807년의 틸지트(Tilsit) 조약이었습니다.  이 조약에서 젋은 알렉산드르를 구워삶은 나폴레옹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던 러시아로 하여금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영국 상품에 대해 문을 닫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입은 패배를 통쾌하게 뒤집는 나폴레옹의 멋진 승리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와는 협력을, 영국과는 전쟁을 원했던 것은 위에서 보셨다시피 궁극적으로는 나폴레옹 개인의 야망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상공업과 무역을 발전시키려는 프랑스 시민 계급의 입장에 있어서 제해권을 장악한데다 산업 혁명을 막 시작한 영국에게는 말살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고, 농업 대국 러시아와는 협력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프랑스 시민 계급의 욕망을 그대로 유럽 권력 세계에 투영해준 것이 바로 나폴레옹이었고요.  따지고 보면 나폴레옹 자신이 토지에 기반을 둔 귀족이 아니라 본인의 실력으로 부를 쌓아가는 시민 계급 출신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귀족 출신이라고는 해도 프랑스에서는 집도 절도 없는 한낱 외국 출신 하급 장교에 불과했으니까요.  실제로 나폴레옹은 패전 국가에게 전쟁 배상금을 뜯어낼 때 항상 토지보다는 정금(specie), 즉 금화와 은화를 요구했고, 비엔나를 점령하고서는 왜 기회에 오스트리아에 프랑스산 비단과 도자기 같은 상품을 무관세로 판매하지 않느냐고 관료들을 닥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황제에 등극할 때 공식 칭호를 과거 부르봉 왕가가 Roi de France (프랑스의 국왕)이라고 했던 것처럼 Empereur de France (프랑스의 황제)라고 하지 않고 Empereur des Français (프랑스인들의 황제)라고 했지요.  이는 프랑스라는 국가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왕이라는 개념보다는,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통치자라는 뜻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속성을 보면 Empereur des Bourgeois Français (프랑스 시민 계급의 황제)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황제라고는 해도 절대 권력자가 아니었듯이, 알렉산드르로 전제군주이긴 했으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는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뒤에 시민 계급이 있었듯이, 짜르 알렉산드르의 뒤에도 서있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농노제에 기반을 둔 러시아의 토지 귀족들이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Second_Hundred_Years%27_War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프리츠 작전 2019.06.24 09: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여러모로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과는 대비되네요.히틀러는 극단적일 정도의 반공주의와 인종주의에 입각한 생존공간(레반스라움) 이론에 사로잡혀있었지 않았습니까.히틀러가 반드시 러시아를 침공하려고 했다면 나폴레옹은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간거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네요.

    • ㅇㅇ 2019.06.24 12:46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요... 1941년 당시 소련 또한 국경선에 병력을 증강시키고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히틀러가 전전긍긍하다 선제공격을 가한게 아닌가 싶은데요? 물론 진실은 본인들만 알겠지만요!

    • 프리츠 작전 2019.06.24 16:41  댓글주소  수정/삭제

      ㅇㅇ님의 말씀도 일리는 있지만,존 키건의 2차 세계대전사에 따르면 1941년 소련 적군의 서진은 독일 침공보다는 그동안 확보한 영토를 굳히려는데 더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고 하더군요.기존의 국경지대에서 서쪽의 새 국경지대로 방어시설들을 급하게 옮기느냐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에는 이도저도 아닌 상태였다고 합니다.제가 히틀러가 처음부터 러시아에 야심을 품고 있었다고 보는 다른 이유는 그의 자서전 '나의 투쟁' 때문입니다.히틀러는 '나의 투쟁'에 독일민족이 동진해서 러시아와 다른 슬라브 민족 국가들을 제압하고 생존공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적어두었더군요.읽은지 워낙 오래되었고,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다 읽어보지도 못했지만 히틀러가 러시아 침공 전부터 반유대/반공산주의,배타적 인종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이러한 이유들로 저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소련의 팽창에 전전긍긍하던 히틀러가 붉은군대의 위협에 대항해 벌인 선제공격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이 즈음 히틀러 본인이 남긴 말들을 보면 소련 적군의 역량을 형편없다고 평가하고,사용하는 장비는 열악하며 전차의 장갑은 약하다고 악평하더군요.히틀러가 진심으로 위협을 느낀 거 같지는 않아요.단순히 독재자의 허세일수도 있지만요.

  2. keiway 2019.06.24 1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나폴레옹 시대사가 끝을 향해 출발하는군요.
    건필을 기원합니다. (건강과 삶도 잘 챙기시면서요)

  3. zolzi 2019.06.24 17: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틀러도 소련을 침공하기 전에 분명히 나폴레옹 전기를 읽었을텐데, 왜 무모하게 소련을 침공하는 선택을 했는지 의문입니다,

    나폴레옹 전기를 읽은게 백퍼라고 느끼는건 41년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한후에 굳이 무리해서 모스크바를 재점령하려고 노력하지 않은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까지 점령했지만 별다른 이익없이 무의미하게 퇴각할 수 밖에 없던걸 알았던게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퇴각하면거 개망하죠.

    어찌되었든, 나폴레옹이는 못한걸 난 할 수 있다 생각을 한건지 의문이네요. 딱히 떠밀려 공격한것도 아니고 실제로 소련은 나찌가 침공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던데다, 전비도 충분하지 않아서 선제공격할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고 하는데... 뭘까요? 히틀러의 근자감은?

    그리고 궁금한건 나찌마냥 '히틀러'란 성도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같은 독일계 국가에서는 금기'성'인가 하네요.

  4. nashorn 2019.06.25 0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첨언하자면 히틀러는소비에트 연방 공격할 당시..
    레닌그라드와 경제중심지인 우크라이나(돈바스) 정복을 원했습니다..
    모스크바를 원하진 안았죠

  5. keiway 2019.06.25 12: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일-소련과의 우호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
    전략적으로 보면 나치 독일의 우크라이나 유전지대 점령은 전쟁 지속 가능성 면에서 타당한 선택이기는 했습니다.
    독소전 개전 시점에서 군대의 준비 상태 역시 독일에 비해 소련이 대단히 약화된 상태였고요.
    소련과 언젠가는 전쟁을 해야만 한다고 판단했다면 (이 판단이 맞는지는 아무도 모르죠) 시점과 목표 모두 전략적으로는 일정부분 타당했다고 생각합니다.
    히틀러의 큰 실책은 전략이 아니라 전술까지 자기가 간여해서 뛰어난 지휘관들을 보유하고도 전술을 망쳐버렸다는 데 있죠.
    히틀러의 근자감은 난 나폴레옹과 달라. 그의 실책을 되풀이 안할거거든! 이런건 아니었을까요? 결과는 모두가 알지만요.

  6. 유애경 2019.06.26 08: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날으는 새도 얼어붙어 떨어진다는 러시아의 추위-영하 30도 이하였다죠?-속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생하다가 죽어간 또는 전사한 병사들만 불쌍한것 같아요.

  7. 이웅희 2019.07.04 2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쉽고 알찬 설명 감사드립니다

 


"폴란드는 아침거리일 뿐이다... 러시아가 저녁을 먹을 곳은 어디일까 ?"
-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 이후 당시 영국 의회 의원이었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점점 서쪽을 밀고 나오는 러시아에 대해 한 말

"이 꼬마는 자기 모순의 매듭덩어리 같구먼."
- 전제 군주 집안에 태어난 왕자로서, 스위스 출신 가정교사에게서 계몽사상으로 교육을 받은 어린 손자 알렉산드르를 보고 예카테리나 대제가 평한 말

"난 무책임한 게으름뱅이이고 진실된 생각과 말, 행동을 할 능력이 없다.  난 이기적 사람인데 그 주된 이유는 허영심 때문이다."
- 1789년, 당시 12살이던 알렉산드르가 적은 일기 중에서   

"내 계획은 와이프와 함께 라인 강변에 정착하여, 평범한 사람으로서 친구들과 함께 자연 철학을 공부하며 행복을 찾는 것이다."
- 1796년 당시 19세이던 왕자 알렉산드르가 친구에게 한 말

"이 황태자가 성당에 들어갈 때보니 자기 할아버지를 살해한 자들이 앞장서서 들어가고, 황태자를 둘러싼 자들은 자기 아버지를 시해한 자들이고, 황태자를 시해할 준비가 된 자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가더군요."
- 알렉산드르의 비자발적 묵인 하에 아버지 파벨 1세가 암살된 이후 알렉산드르의 대관식에 참석했던 어느 프랑스 망명 귀족의 편지 중에서

"제 아버지를 암살한 귀족들을 처벌하지 않고 여전히 고위직에 두고 있는 러시아 짜르가 이런 비난을 하다니 매우 희한한 일이다."  
 - 1804년 앙기엥(Enghien) 공작을 납치하여 사법살인한 나폴레옹의 행위를 알렉산드르가 맹비난하자 그에 대해 대외적으로 발표한 프랑스 외무부의 반응.  알렉산드르는 괜히 나섰다며 크게 후회했다고 전해짐.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보다 짜르 알렉산드르 개인이 훨씬 더 철저히 패배했다."   
-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이후 프랑스 외교관 Joseph de Maistre의 편지에서    


"완전히 새로운 체제가 현재까지의 체제를 교체해야 합니다.  만약 내가 나폴레옹 황제와 직접 만나 담판 짓는다면 그런 체제에 대해 매우 쉽게 합의에 도달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 1807년 틸지트(Tilsit) 회담 직전 프랑스 측에 보낸 알렉산드르의 편지 중에서

 



"내가 보나파르트와 단 둘이서 마주 앉아 하루에 몇 시간씩 대화를 하며 며칠을 보냈다는 것을 상상해보거라.  정말 꿈 같은 일이 아니냐 ?"
- 1807년 틸지트 회담 이후 여동생 예카테리나에게 보낸 알렉산드르의 편지 중에서

"폐하, 조심하소서 !  선황 폐하의 전철을 밟을까 두렵사옵니다."  
- 틸지트 회담 이후 어느 알렉산드르의 심복 중 하나가

"폐하와의 동맹, 특히 영국과의 전쟁은 이 나라에서의 자연스러운 사고 방식 자체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이건 마치 완전한 개종과 같은 수준의 일입니다."
- 틸지트 회담의 결과로 러시아의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가 이루어진 뒤 상트 페체르부르그 주재 프랑스 대사가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에서 

"러시아군과 프랑스군, 그리고 일부 오스트리아군으로 이루어진 5만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발하여 아시아로 출정한다면, 단지 유프라테스 강까지만 진격해도 영국은 벌벌 떨며 대륙의 발 밑에 무릎 꿇을 것입니다."
- 1808년 2월 알렉산드르에게 보낸 나폴레옹의 편지 중에서

"이게 바로 틸지트에서 사용되는 언어야 !"
- 위의 나폴레옹의 편지를 읽으며 흥분한 알렉산드르가 내뱉은 찬탄

"알렉산드르, 너의 몰락을 스스로 자초해서는 안 된다 !  백성들의 존경은 잃기는 쉽지만 되찾기는 어렵단다.  그 회의에 참석한다면 넌 그걸 잃을 것이고 결국 제국을 잃고 가족들도 파멸시킬 거란다."
- 1808년 9월 나폴레옹이 소집한 에르푸르트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하려는 알렉산드르에게 보낸 모후의 편지 

"우리가 공공연하게 군비를 확충하고 무장 병력을 과시하거나, 요란하게 나폴레옹를 비난하는 것은 나폴레옹을 몰락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는 오로지 심오한 침묵 속에서만 준비를 해야 합니다."
- 위의 모후의 편지에 대한 알렉산드르의 답장

"나폴레옹은 내가 그저 바보라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웃는 자가 가장 오래 웃는 법이지. (중략) 유럽은 우리 둘이 공존할 수 있을 정도로 넓지 않단다.  둘 중 하나는 조만간 무릎을 꿇어야 할 거야."
- 위의 편지와 함께 따로 여동생 예카테리나에게 보낸 알렉산드르의 답장

 

"두 황제는 서로의 조치에 대해 비교적 만족한 상태로 헤어졌다.  그러나 기저에는 서로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었다."

- 에르푸르트 조약 직후 러시아 주재 프랑스 대사 콜랭쿠르의 관측

"유럽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폐하 뿐입니다.  폐하께서 그러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폴레옹에게 반기를 드시는 것입니다."
- 에르푸르트 조약 기간 중 알렉산드르와 몰래 접촉한 프랑스 전직 외무장관 탈레랑이 알렉산드르에게 한 말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reinhardt100 2019.06.17 0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제국 입장에서는 파벨 1세가 장기집권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습니다. 파벨 1세가 흔히 암군이라고 생각되지만 그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엘리자베타 여제 이후 모순에 가득차던 농노제의 위험성을 가장 먼저 인식하고 급진적으로라도 개혁하려고 했던 군주였죠. 주 7일 중 4~7일을 귀족의 토지에서 일하는 수준의 막장 농노제를 건드려버린 것만으로도 이미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 사람이 죽고 난 후 아들인 알렉산드르 1세는 외치에 집중하여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자로써 죽을 때까지 확실한 권위를 가질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내정은 바뀐거 없었고 제정 러시아와 로마노프 왕조 또한 긴 몰락의 세월을 걷게 됩니다.

  2. 00 2019.06.17 1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귀족들이 천상외교를 하던 당대론 애매하되 현대 기준에서 탈레랑은 매국노가 확실하군요.

  3. 유애경 2019.06.17 14: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9세때 친구에게 한 말과 대관식에 참가한 프랑스 망명귀족의 편지에서 어찌보면 알렉산드르도 시대의 피해자(?) 였을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황가의 후계자로 태어났지만, 후계자로 태어났을뿐 진정으로 그길을 원했을까...

  4. 수비니우스 2019.06.17 18: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가 공공연하게 군비를 확충하고 무장 병력을 과시하거나, 요란하게 나폴레옹를 비난하는 것은 나폴레옹을 몰락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는 오로지 심오한 침묵 속에서만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말이 인상깊네요.

  5. 까까님 2019.07.05 10: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에 웃는 놈이 젤 오래 웃는다
    남들은 내가 찐따인 줄 알지만 어디 두고봐라
    불곰 같이 생긴 여우라고 해야 하려나요

  6. 샤르빌 2019.07.23 10: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의 탈레랑이 한 말이 의미심장하네요.. 원래 나폴레옹 라인이 아니었나..

나폴레옹 시대의 복사기

나폴레옹의 시대 2019.06.13 06:30 Posted by nasica


Hornblower and the Atropos by C.S.Forester (배경: 1805년 영국 근해 HMS Atropos 함상) ----------------

(아트로포스 호의 함장인 혼블로워는 밤늦도록 그날 있었던 프랑스 사략선 나포건에 대한 보고서 작성을 막 끝내고 보고서 내용에 나름 흡족해하며 다시 읽어보고 있는 중입니다.)

함장실 문에 노크가 있었다.  대체 방해받지 않을 순간이 전혀 없단 말인가 ?

"들어와."  그가 말했다.

들어온 사람은 선임사관인 존스였다.  그는 혼블로워의 손에 들려져 있는 깃털펜과 테이블에 놓인 잉크병과 종이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실례합니다, 함장님."  존스가 말했다.  "제가 너무 늦게 온 게 아니었으면 합니다."

"무슨 일인가 ?" 혼블로워가 물었다.  그는 존스 중위에 대한 동정심이 별로 없었고, 그의 어정쩡한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군성에 보고서를 보내실 생각이셨다면 말입니다, 그러실 생각이셨던 것 같습니다만, 함장님..."

"그래, 물론 그럴 생각이네."

"혹시 제 이름을 언급하실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함장님... 그러실 것인지 여쭈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함장님... 감히 제멋대로 생각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만약 존스가 해군성에 보낼 보고서에다 자신에 대해 특별히 잘 언급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라면 그런 부탁은 절대 들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가, 미스터 존스 ?"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그저 제 이름이 너무 흔한 것이라서 말입니다, 함장님, 존 존스라는 이름 말입니다.  현재 중위 명부에 오른 것만도 12명의 존 존스가 있습니다, 함장님.  알고 계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9번 존 존스 (John Jones the Ninth)입니다.  해군성에서는 저를 그렇게 지칭합니다, 함장님.  만약 함장님 보고서에 그렇게 씌여있지 않다면, 아마도..."

"잘 알겠네, 미스터 존스.  무슨 말인지 이해하네.  제대로 처리가 될 거라고 믿어도 되네."

"감사합니다, 함장님."

존스가 나간 뒤, 혼블로워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보고서를 들여다 보고는, 새 종이를 한장 꺼냈다.  존스의 이름 뒤에다 '9번 (the Ninth)'이라는 글자를 읽을 만하게 삽입할 방법은 도저히 없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새 종이 위에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쓰는 것이었다.

 

--------------------------------------------------------------------------------------------------------------

 


위에 인용한 소설 한 구절에서 무엇을 느끼시나요 ?  저는 아, 워드 프로세서는 신의 축복 (또는 빌 게이츠의 축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워드 프로세서가 없었던 나폴레옹 시대의 문서 작업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지요.

군인이라는 직업에서 성공하려면, 꼭 적군을 많이 죽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자기가 이러이러한 지휘력을 발휘하여 이러이러한 전과를 올렸다는 것을 상부에 제대로 알리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사실 이건  꼭 군인이라는 직종에서 뿐만 아니라, 조직화 되어 있어서 상관이라는 작자들이 존재하는 모든 직장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이야기지요.  제대로 된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보고서 내용이 가장 중요합니다.  일단 그 보고 내용이 패전보다는 승전 쪽에 가까운 것이 좋을 것이고, 또 문체가 간결하면서도 자연스러워, 읽는 사람이 요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조리있게 쓰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우리 교육에서 영어 교육보다는 국어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문장력 때문입니다.  대학도 나오고 직장생활도 할 만큼 한 사람들이 쓴 보고서나 메일을 읽어보면, 대체 이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뭔지 도통 알 수 없는 경우도 많거든요.  어떤 사람은 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영어도 잘한다고 하던데, 거기에도 동의합니다.  결국 언어라는 것은 의사 소통 수단이고, 의사 소통이 원활하려면 생각과 사실을 언어로 조리있게 정리해서 조합해야 하는 것이쟎습니까 ?  결국 한국말로 또이또이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영어로도 (발음은 둘째치고) 또이또이하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Band of Brothers의 한 장면이지요.  딕 윈터스 대위, 승진을 위해서는 M1 소총보다 타자기를 더 잘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다 !)



보고 내용도 승전보이고, 문장도 조리있게 잘 작성되었다고 하면, 그 다음엔 글씨가 문제가 됩니다.  요즘이야 타자기를 거쳐 워드 프로세서에서 대부분의 보고서가 작성되니까, 작성자는 어떤 폰트를 고를지만 생각하면 됩니다.  (대개의 경우 아예 폰트도 미리 지정해두지요.)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처럼 아직도 이게 보고서인지 문학 작품인지 헷갈려하는 시대에는, 그 내용 못지 않게 우아한 글씨체도 중요했습니다.  우아한 글씨체가 정말 중요한 이유는,  알파벳 문화권에는 인쇄체와 필기체라는 것의 차이가 꽤 컸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아동 문학인 '보물섬'의 한 장면을 보시지요.



보물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작  (배경 : 18세기 후반 영국) ---------------------------------------

그래서 몇 주가 지난 뒤, 마침내 어느날 닥터 리브지께 편지가 한 통 날아들었다.  그 편지에는 '닥터의 부재시에는 톰 레드루쓰 또는 젊은 호킨스가 개봉할 것' 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 조건에 따라 우리는, 사실 우리라기 보다는 나는 -- 왜냐하면 산지기 레드루쓰는 인쇄된 것 외에는 잘 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다음과 같은 중요한 소식을 읽게 되었다.

-----------------------------------------------------------------------------------------------------------


사실 저도 산지기 톰 레드루쓰처럼 필기체의 알파벳은 잘 읽지 못합니다.  제가 국민학교 때 저 위 문장을 읽고는, '나는 저런 무식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에, 중학교에 진학하여 영어를 배울 때 필기체 쓰는 연습도 나름 열심히 했었습니다만 (요즘도 학교에서 필기체 읽고쓰는 것을 따로 배우나요 ?) 여전히 필기체 문장은 읽기가 힘들더군요.  그래서 가끔씩 볼 수 있는 나폴레옹 시대의 그림이나 편지에 씌인 글을 읽는데 애를 많이 먹습니다.  글쎄요, 아마 저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 당시 사람들 중에도 (저 레드루쓰처럼) 남이 필기체로 쓴 편지를 읽기 힘들어 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특히 원래 쓴 글씨가 개발새발이라면 더더욱 그랬겠지요.  그래서 글씨를 예쁘고 신속하게 써줄 수 있는 서기(clerk)이라는 직업이 있었지요.  나폴레옹도 자기가 직접 펜대를 굴리며 글을 쓴 경우가 (특히 나중에 황제가 된 이후에는)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대개 몇명의 서기들에게 둘러 싸여 속사포처럼 빠르게 구술을 하면, 서기들이 진땀을 흘리며 받아 적었지요.  

이 시대의 서기들은 글씨를 예쁘게 쓰는 것 외에도 독특한 할 일이 더 있었습니다.  모래질이었습니다.  


'아르마다', 개럿 매팅리 작, 박상이 옮김, 가지않은 길 출판 (배경 : 1589년 스페인의 무적함대 사건 당시) --------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침착성에 대한 일화입니다.)

그 비서는 익숙하지 않은 일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왕에게 금방 쓴 문서를 받아들자 그것을 모래로 문지르는 대신 그만 잉크병을 쏟아버렸다.  왕이 진노하리라는 생각에 몸을 움찔하던 비서는 이런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것은 잉크라네.  이것이 모래라네."

--------------------------------------------------------------------------------------------------------------------

대체 왜 방금 쓴 문서를 모래로 문질렀을까요 ?  짐작하시다시피, 잉크를 말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잉크는 매염제(gall, 일종의 진딧물 벌레집), 검댕, 황산철, 고무질 등을 섞어만든 것으로서, 요즘의 잉크처럼 종이에 잘 흡수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깃털펜에 이런 잉크를 묻혀서 정성껏 쓴 다음에, 곧장 종이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가는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가 종이에 그대로 찍혀 일종의 데칼코마니가 되기 쉽상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잉크를 말리는 작업을 해야 했는데, 불에 종이를 쬐다가는 자칫 불이 붙어버릴 위험도 있었고, 또 종이가 누렇게 말라비틀어질 수도 있었으므로 불로 말리는 것은 그리 좋지 않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바로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 위에 고운 모래를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고운 모래는 잉크를 순식간에 흡수해버릴 수 있는데다가, 고운 모래로 문지른 종이면은, 당시 품질이 그리 좋지 못한 종이면을 곱게 갈아주어 표면의 느낌을 맨질맨질하게 해주는 효과까지 내주었습니다.



(사진 속 편지 위의 작은 후추병 같은 것이 sand shaker 입니다.  저것으로 고운 모래를 편지 위에 뿌렸습니다.)



이렇게 금방 쓴 잉크 위에 모래를 뿌리던 관습과 나폴레옹에게 연관된 이야기도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휘하 장군들 중 가장 일찍부터 나폴레옹을 섬기기 시작했던 사람은 바로 '폭풍우'라는 별명을 가진 쥐노(Jean-Andoche Junot)였습니다.  그는 1795년 툴롱 포위전 때 나폴레옹을 만났는데, 당시 나이가 겨우 2살 많았던 나폴레옹이 이미 대위 계급이었던 것에 비해 일개 하사관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그래도 혁명 전에는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는 미지수...) 법학도였던지라, 나폴레옹의 서기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툴롱 포위전이 한창일 때, 나폴레옹이 전선에서 뭔가를 구술하여 쥐노에게 받아쓰게한 직후였습니다.  바로 옆에 영국군의 포탄이 떨어져 흙먼지가 나폴레옹과 쥐노에게 우수수 떨어졌는데, 쥐노는 전혀 놀라지 않고 나폴레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덕택에 편지에 모래를 뿌리지 않아도 되겠네요."

이 용기와 재치가 넘치는 애드립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폴레옹은 이때부터 쥐노를 진정한 부관으로 생각했고, 그 결과 쥐노의 인생이 확 변하게 되었지요.  

 


(실제 전공에서나 사람들의 비망록에서나, 쥐노는 그다지 능력있는 사람으로 부각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그의 젊은 와이프를 나폴레옹이 무척 좋아했다고...)



나폴레옹 시대에 서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하는 주요 업무는 구술 받은 편지나 문서를 쓰고, 거기에 모래 뿌리는 것 외에도 또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인간 복사기 !  당시에는 타자기는 커녕, 아직 먹지(carbon paper)가 발명되지 않았던 때라서, 편지든 뭐든 문서라는 것을 하나 만든 다음에는 그 복사본을 손으로 일일이 베껴써야 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가 인류 문명을 바꾸어 놓기는 했습니다만, 아직 서기의 일상 업무를 바꾸지는 못했거든요.  따라서 나폴레옹의 참모 본부에 있던 서기들은 정말 눈알이 빠져라 열심히 서류들을 써대고, 베껴대야 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처럼 말이 많고 편지도 많이 썼던 사령관 밑에 있던 서기들은 정말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나폴레옹 시대에 이미 복사기가 이미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발발 전이던 1785년 조지 워싱턴과 벤자민 프랭클린 등이 독립선언문을 (손으로) 작성할 때, 이미 복사기를 이용하여 여러 본의 독립선언문을 동시에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복사기는 과연 어떤 물건이고,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을까요 ?

미국인들에게는 자존심 상하게도, 미국 독립선언문을 복사한 복사기는 영국제였습니다.  제조사는 James Watt & Co. 사였습니다.  예, 바로 증기 기관을 발명했던 바로 그 제임스 와트가 맞습니다.  이 복사기는 1780년에 제임스 와트가 특허를 받은 것으로서, 제임스 와트가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서 만들었습니다.  와트는 사업상 하도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는지 일일이 정확히 기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쓸 때마다 최소한 한통씩 복사본을 만들어 두어야 했었는데, 와트는 나폴레옹이 아닌지라 서기들로 둘러 싸이지 않아서, 자기가 직접 베껴야 했었나 봅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바로 습식 복사기였습니다.  



(이건 강릉 경포대 바로 옆에 있는 참소리 박물관이라는 곳에 전시된 진짜 James Watt 의 복사기입니다.  전 세계에 원본이 이거 딱 1대 남았는데, 그것이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이 박물관에 있다고 하네요.  이 박물관은 한마디로 말하면 에디슨 박물관인데, 처음에는 비싼 입장료 (대인 7천원)에 놀라고, 다음에는 전시품들의 알참과 진귀함에 놀라고, 박물관 직원들의 재미있는 해설에 또 놀랐습니다.  한마디로 강릉 관광가실 때 강추.  돈이 별로 아깝지 않았습니다.)



이 습식 복사기의 원리는 나름 간단했습니다.  잉크도 좀더 진하고 특수하게 만들고, 종이를 아주 얇은 종이를 골라서 문서를 쓴 뒤, 그 원본 문서와 복사지를 맑은 물에 적신 뒤 압착 롤러로 눌러서, 원본 문서의 잉크가 복사지에게도 묻어나도록 한 것입니다.  글쎄요, 이렇게 하면 원본 문서의 품질에도 악영향이 좀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이 습식 복사기는 나름 꽤 인기가 있어서, 제임스 와트에게 상업적 성공, 즉 돈다발을 안겨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작은 나무 상자에 쏙 들어가도록 설계된 휴대용 복사기까지 개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습식 복사기는 20세기 초까지도 일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초기의 이 습식 복사기를 이용하여 제대로 복사를 하려면, 종이를 무려 12시간이나 적셔야 했기 때문에, 성질 급한 나폴레옹의 참모부에서는 결코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 형태의 복사기는 문학 작품에서도 나옵니다.  그리고 '원본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까지도 그대로 묘사됩니다.  바로 발자크의 '관료주의'라는 소설에서입니다.



(사실 저는 이 책 아직 못 읽어보았고, 이 복사기 이야기가 이 책에 나온다는 사실도 참소리 박물관에 전시된 저 Watt 복사기의 설명판을 보고 알았습니다.)



Bureaucracy by Honore de Balzac  (배경 : 1830년대 파리) ------------------------------------

세바스티앙이 절실한 마음으로 그의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속에는 메모와 함께 그가 마저 베껴쓰지 못한 복사본이 순서대로 들어있었고, 그는 그것들을 라부르뎅이 지시한 대로 즉시 책상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12월말 즈음의 이 사무실들은 아침에도 꽤 어두웠고, 실제로 아침 10시까지도 램프를 켜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결과, 세비스티앙은 종이에 남겨진 복사기의 눌린 자국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9시 30분 경에 라부르뎅이 그의 메모를 보았을 때, 그는 즉각 이 문서에 복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그는 복사 담당 서기들의 일을 이런 수기(手記) 압착식 복사기로 대체할 수 없을까 하고 고려 중이었으므로 더욱 쉽게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

19세기 초반에도, 이미 과학 기술이 사람들, 주로 저임금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일이 아주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것을 보실 수 있지요 ?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요.  오늘날 프랑스나 영국은 선진국으로서 국민 대부분이 잘 살지 않습니까 ?  확실히 그런 나라들이 실업률이 높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최소한 서류를 베껴쓰는 복사 담당 서기라는 것이 그다지 매력적인 직업은 아닌 것은 확실하지요.

 

** 목요일 재탕글이이었습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되니츠 2019.06.14 06: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돈 많이 벌면 저런 거 쟁여다가 자산 보전하고 싶지요.

  2. Eugen 2019.06.14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리가 판화랑 비슷하네요. 초등학생때 비슷한거 해본 적이 있어요.

이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서전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제가 요즘 다사다난하여 책을 못 읽고 있습니다.  최소 몇 주 간은 C. S. Forester의 Lieutenant Hornblower 중에서 제가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을 발췌 번역해서 올리겠습니다.  개인적으로 혼블로워 시리즈 중에서 최고 역작이라고 생각하는 이 책은 국내 연경사에서 '혼블로워. 2: 스페인요새를 함락하라'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제 발췌 번역본은 여러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준에서 중단될텐데, 재미있다고 생각되시면 영문판이든 한글판이든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linkClass=010310&barcode=9788989369097





Lieutenant Hornblower by C.S. Forester (배경 : 1801년 카리브 해 HMS Renown 선상) --------------


(부시와 혼블로워가 각각 제3, 제5 부관으로 탑승한 영국 해군의 74문짜리 전함 리나운 호(HMS Renown)는 산토 도밍고 섬의 스페인 해군 요새를 파괴하고 그 곳의 스페인 선박들을 나포하거나 격침시키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카리브해에 도착합니다.  항해 도중에 함장이 미쳐버리는 사고가 발생하여 함장은 함장실에 연금되고 제1 부관인 버클랜드가 임시 함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다지 뛰어난 지휘관이 아닌 버클랜드는 별다른 계획없이 그냥 스페인 요새의 항구로 밀고 들어가 일제 포격을 하려 합니다.)


저녁 당직(dogwatches : 원래 4시간 단위의 교대근무 시간을 4pm~8pm 사이에는 2시간짜리 2개로 쪼개는데 이걸 dogwatch라고 불렀습니다 : 역주) 시간 동안 혼블로워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듯이 머리를 숙인 채 혼자서 갑판을 왔다갔다 걸었다.  등 뒤로 맞잡은 혼블로워의 두 손이 초조하게 꿈틀거리고 배배 꼬이는 것이 부시의 눈에 들어왔다.  부시는 잠깐 의심이 들었다.  이 열정적인 젊은 장교에게 혹시 신체적 용기가 없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  그 표현은 부시의 창작품은 아니었다.  그는 그 표현이 몇 년 전 어디서인가 악담으로 사용되는 것을 들었었다.  혼블로워가 겁장이일 수도 있다고 대놓고 스스로 짐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표현을 지금 쓰는 것이 더 나았다.  부시는 그다지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겁장이라면 그는 그 인간과는 뭐든 더 같이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 절반 정도 흘렀을 때 갑판을 따라 호각들이 길게 울렸다.  해병들의 북이 두두두 소리를 냈다.


"전투 준비를 위해 갑판을 치운다 !  각자 위치로 !  전투 준비 !"  ("Clear the decks for action! Hands to quarters! Clear for action!"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갑판 아래의 선실을 이루는 격벽이나 식탁 등의 가구, 짐짝 등을 모두 치워 선창에 보관합니다.  그래서 전투 준비에 clear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 역주)


부시는 전투시 자신의 위치인 하(下) 포갑판(lower gundeck)으로 내려갔다.  하 포갑판 전체와 우현의 24파운드 포 17문이 그의 지휘 책임 하에 있었고, 좌현의 포들은 그의 밑에 있는 혼블로워가 맡게 되어 있었다.  수병들은 이미 칸막이를 해체하고 방해물들을 치우고 있었다.  갑판을 따라 군의관 조수들 한 무리가 내려왔는데, 그들은 구속복(straight jacket)을 입인 채 널빤지에 묶어놓은 사람 하나를 떠매고 왔다.  구속복과 결박 끈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힘없이 꿈틀거리며 처량하게 울고 있었다.  전투 준비 때문에 함장실을 치우면서 함장을 닻줄 선창(cable tier, 닻줄을 말아두는 맨 바닥 갑판, 대포알이 흘수선 아래를 뚫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므로 선창은 상대적으로 매우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 역주)으로 내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런 북적거림 속에서도 한두 명의 수병들은 그런 함장의 몰골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는데, 부시는 재빨리 그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는 하 포갑판이 전투 준비 완료가 되었다는 보고를 칭찬받을 만한 시간 안에 올리고 싶었다.  혼블로워도 나타나서 부시에게 경례를 하고는 그의 함포들을 감독하며 서있었다.  이 하갑판의 대부분 구역은 석양 무렵의 어둠에 덮혀 있었다.  상갑판으로 통하는 햇치 통로들(hatchways)로 들어오는 굵은 햇빛 줄기들은 진한 빨간색 페인트로 칠해진 갑판의 저 구석까지는 거의 밝혀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군함의 보이들 6명이 모래를 담은 버켓을 들고 와서 갑판 여기저기에 한주먹씩 뿌렸다.  (매끄러운 갑판 위에서 피와 물기로 인해 미끄러지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 역주)  부시는 그들의 작업을 날카로운 눈으로 감독했다.  포수들이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그 모래가 꼭 잘 뿌려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각 함포 옆마다 물을 가득 채운 버켓을 놓아두었는데, 이건 포구를 청소하는 장전봉의 헝겊뭉치를 적시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혹시 화재가 발생할 경우 즉각 진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주돛대의 주변에는 여분의 소화용 물통이 둥글게 놓여 있었다.  군함의 양현에 있는 통에는 화승(slow match)이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어서, 만에 하나 어느 함포의 화승간(火繩桿, linstock, 끝에 화승이 달린 막대기 : 역주)의 불이 꺼질 경우 그 함포 조장이 여기서 다시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불과 물이 준비된 셈이었다.  낮은 천정 들보에 닿을 듯 높은 군모(shako)를 쓰고 선홍색 자켓과 하얀 십자밴드를 맨 해병들이 보초 임무를 위해 갑판 위를 쿵쿵거리며 뛰어왔다.  그린우드 상병은 각 햇치 통로에 장전하고 착검까지 한 보초를 한 명씩 세웠다.  그들의 임무는 겁을 먹고 안전한 흘수선 아래 구역으로 도망치려는 사람이 없도록 인가되지 않은 어떤 사람도 햇치 통로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임시 포술장인 미스터 홉스는 조수들과 함께 잠깐 나타났다가 곧 저 아래의 화약고(magazine)로 사라졌다.  그들은 모두 가장자리 천으로 만든 슬리퍼(list slippers)를 신고 있었는데, 이는 전투가 한창일 때 어쩔 수 없이 바닥에 흩뿌려질 약간의 화약가루가 폭발할 위험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Linstock의 모습입니다.  그냥 화승막대기입니다.  이걸 대포의 점화구 즉 touchhole에 대면 대포가 발사되는 것이지요.)




* PS1 : Dogwatch라는 독특한 2시간 짜리 교대 순번을 만든 이유는 2가지입니다.  하나는 2교대로 돌아가는 군함의 교대 근무에서, 이렇게 2시간 짜리 순번이 없을 경우 어느 한쪽 교대조가 계속 특정 시간대(가령 0시~4시)에 근무를 서야 하는 불공평함을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4시간 중에 모든 수병들이 저녁 식사를 하고 쉴 시간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 PS2 : 저 list slipper라는 단어는 19세기 문학 작품 여기저기에 나오는, 영어권 사람들로서도 약간 신기한 단어인 모양이더라구요.  List라는 것은 천의 가장자리를 뜻하는 것인데, 천의 가장자리는 실이 풀리는 것을 막기 위해 조금 견고하게 처리가 되어 있지요.  그런 두꺼운 천으로 만든 슬리퍼를 list slipper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딱딱한 밑창을 가진 구두를 신었다가 구두 바닥과 갑판 사이에 낀 화약가루가 마찰열로 폭발할 것을 염려하는 것 같습니다.  List slipper라는 단어에 대한 토론은 아래 link를 참조하세요.


http://www.worldwidewords.org/qa/qa-lis1.htm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멍쿠기자 2019.02.25 1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군배는 장전하고 줄을 당겨서 쏘는건줄 알았는데 불을 붙이는거였군요;;;

    • ㅋㅋ 2019.02.25 14: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당시 영국 해군만 플린트락 방아줄 격발식을 썼다고 합니다. 영국 해군이랄지라도 화승식 대포를 쓰는 함선도 많겠죠

  2. 카를대공 2019.02.25 14: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이 경제적 여유가 생기셔서 책 읽고 나폴레옹(및 여러분야) 글만 쓰셨으면ㅋㅋ

    • reinhardt100 2019.02.26 0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담이지만 조지 소로소가 원래 50만 파운드를 장만한 후, 평생 철학연구하면서 살려고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는데 그게 갑자기 생각나네요. ㅎ

      저도 구독자로서 기대하고 있습니다.ㅎ

    • 극우세력 2019.02.27 1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 헷지펀드 수괴들 대비 소로스 영감님은 하시는 행동도 차이가 남다르시지요, 흑막정치가나 국제사상가가 그 인간의 본질이지 투기세력이 과연 본업이신지

  3. 2/28일 입대 2019.02.25 1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침공은 OO위키에서만 읽어도 너무 처절하고 처참하던데 나시카님이 어떻게 풀어주실지 기대가 커요!

    • reinhardt100 2019.02.26 0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러시아 침공보다 사실 진짜 개판이었던 건 이베리아 전쟁이었죠. 오히려 러시아 원정은 천운으로 날씨가 좋아서 그나마 그 정도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입니다. 베레지나강에서 철수할 때 영하 20도까지는 안 갔으니 망정이지 만일 독소전쟁기 모스크바 공방전 수준 날씨 같았으면 그랑 드 아르메 및 동맹군은 싸그리 러시아 벌판의 인간비료지층이 되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 웃자웃어 2019.02.27 0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폴레옹식 핑계를 직장에서 대면 바로 해고당하죠.

  4. dd 2019.03.20 0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절판된 책을 어떻게 봅니까 ㅠㅠ

웰링턴은 포르투갈에 상륙하자마자 곧 이베리아 반도의 지형적, 그리고 사회적 특수성이 영국은 물론 프랑스나 독일 등 기타 유럽 지역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큰 특징으로, 제대로 된 길이 없었습니다 !  이는 스페인의 침공 위협 때문에라도 스페인과의 교통로를 적극 개발하지 않았던 포르투갈의 특수성에도 기인했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나 모두 산업과 통상의 발달이 부진했다는 점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지역간에 거래를 할 상품이 없다보니 마차가 다닐 일도 없고, 마차가 다닐 일이 없으니 넓직한 길이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스페인은 지역 감정이 꽤 심한 나라여서 지방 간의 인적 왕래도 그다지 많지 않다보니, 더더욱 내륙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교통망에 더해,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건조한 편이라서 농업 생산량이 그렇게 풍요롭지는 않았습니다.  이탈리아나 독일의 농가들은 어지간한 농가의 창고문만 걷어차도 밀과 보리, 달걀이 쏟아져 나왔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포르투갈은 척박한 스페인과 대비했을 때조차도 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원래 현지 조달에 의존했던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도 쫄쫄 굶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온 지역이 이렇게 가난하다보니,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어려웠지요.  




(보시다시피 이베리아 반도의 상당 부분이 산지이거나 메마른 지대라서, 농업에 적절한 곳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지금도 스페인은 올리브유 생산이 매우 활발한 나라입니다만, 그건 반대로 곡물 농사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지대라는 반증입니다.)




현지 조달이 어려우면 본국에서 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베리아 반도의 열악한 내륙 교통망이 발목을 잡습니다.  가뜩이나 프랑스 본토와 스페인 사이에 피레네 산맥이 있는 것도 장애가 되었는데, 해안길을 통해서라도 수송대가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한 뒤부터가 진짜 고생길이었던 것입니다.  세계 지도에서 보면 스페인은 프랑스나 독일에 비하면 별로 큰 땅덩어리처럼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건 메르카토르 도법의 특성상 남쪽에 있는 땅이 좁아보이는 것입니다.  프랑스가 64만 평방 km인 것에 비해 스페인이 50만 평방 km으로서, 스페인은 굉장히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탄한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 높은 산맥과 언덕이 많은 땅이지요.  길도 제대로 없는 그런 땅을 가로질러 20만 대군이 먹을 식량을 마차로 수송한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그런 도전은 스페인의 게릴라들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경우, 이베리아 땅이 반도이니만큼 그냥 해상으로 수송한 뒤 내륙으로 운송하면 훨씬 일이 쉬워질 것입니다.  문제는 영국의 저 망할 로열 네이비 때문에 그게 불가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온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현지 조달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는 수탈당하는 스페인 민중들에게도 큰 비극이었지만 약탈하는 프랑스군에게도 무척 고단한 일이었습니다.  만명 단위의 대군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 그 일대의 식량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게 됩니다.  프랑스군이 먹어치우는 것도 있지만, 그 일대의 농민들이 식량을 감추거나 떠나버리기 때문이었지요.  결국 프랑스군은 한 곳에서 1주일 이상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굶지 않으려고 먹을 것을 찾아 끊임없이 유랑하는 거지떼 내지는 떼강도 신세가 된 것이지요.  군사 작전이라는 것에서 이동이 잦을 수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적을 압박하거나 반대로 피하기 위해서이지 굶지 않기 위해서 이동하는 군대에게는 작전의 유연성이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스페인에 투입된 근 20만에 가까운 프랑스군 대부분은 먹을 것을 찾아 이동 중이거나, 분산되어 먹을 것을 약탈 중이거나, 혹은 신기루 같은 게릴라들의 뒤를 쫓아 산 속을 헤매면서 세월을 낭비해야 했고, 실제로 영국군이나 스페인군과의 전투에 투입되는 프랑스군은 그 1/4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웰링턴은 유능한 지휘관답게, 이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영국군이 10만 단위의 대군으로 되어 있는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군량 조달을 가장 유용한 무기로 삼아야 한다고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조건은 비슷했습니다.  길이 형편 없는 것도 똑같았고, 바닷길을 이용할 수 없는 것도 같았습니다.  스페인의 주요 항구들이 대부분 프랑스군 손아귀에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식량을 수송해올 거리는 영국 측이 훨씬 멀었습니다.  영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거리가 프랑스와 스페인의 거리보다 멀었고, 그나마 영국 본토도 대륙 봉쇄령으로 인해 식량난이 심해져서 밀과 빵값이 오르는 등 난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규모로 식량을 포르투갈에 보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미국과 남미, 오스만 투르크, 심지어 북아프리카 모로코 등지에서 식량을 구매하여 포르투갈로 실어날랐습니다.




(혼블로워 시리즈 중에서 (실제 소설이 씌여진 순서는 아니지만) 첫번째 편인 Mr. Midmanship Hornblower는 혼블러워의 사관후보생 시절을 그린 옴니버스식 소설입니다.  그 중 한 에피소드가, 식량으로 소를 사러 북아프리카 이슬람 지역에 들어갔다가 전염병에 휘말려 격리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영국군 병참부에게 진짜 고난은 포르투갈 해변에 온갖 보급품이 잔뜩 쌓이는 바로 그 순간부터였습니다.  1808년 8월, 당시 쥐노가 점거하고 있던 포르투갈을 탈환하기 위해 웰슬리가 포르투갈 마세이라(Maceira) 만에 상륙했을 때, 전에 언급한 샤우만(August Friedrich Ludolph Schaumann)이라는 이름의 독일 출신 병참 장교에게 주어진 임무는 터무니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조수도 부하도 없이 혼자서, 그저 공책 한권을 주고는 해변 여기저기에 야적된 수많은 보급품 더미를 조사하여 목록을 작성한 뒤 이제 내륙으로 진격할 영국군 부대를 따라 수송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샤우만이 그런 업무에 숙련된 병참 장교였는가 하면 그게 또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랑스군의 하노버 침공 이전에 하노버 군에서 몇년 장교로 복무했다가 퇴역한 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 장부 작성 등의 업무를 좀 해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영국군 소속 독일군 전투 부대인 KGL 제7 연대 소속의 평범한 장교였고, KGL 장교로서는 승진과 연금의 비전이 없다고 보고 일당 7.5 실링(현재 가치로 대략 9만5천원)의 급여를 위해 병참 장교로 자리를 옮긴 아마추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아무런 지침이나 교본이 없었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The British Commissary'(영국 병참부)라는 멋대가리없는 제목의 책이 한권 있었는데, 이는 메서리어(Havilland le Mesurier)라는 이름의 영국인이 쓴 것으로서, 당시 영국군 병참부 직원들에게는 수학의 정석이나 다름없는 책이었습니다.  메서리어는 원래 해외 무역업자였다가 프랑스 혁명정부와 영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1793년부터 네덜란드 방면 영국군 원정대에 딸린 병참 장교 역할을 했습니다.  1794년에서 그 다음해까지 벌어진 이 방면 전투에서 영국군은 형편없는 성과만 냈을 뿐이었지만, 정말 아무 준비도 안 되어있던 영국군 병참부는 이 난리통 속에서 그나마 나름 경험과 수완을 쌓았던 모양입니다.  그 이후에도 메서리어는 병참부 장교직을 사직했다 복직했다 했는데, 영국군 병참부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은 저 'The British Commissary'라는 책을 저술한 것이었습니다.  




(메서리어의 'The British Commissary'입니다.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책입니다만, 저는 못 읽어보았습니다.)




그런 교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포르투갈에서의 영국군 병참부는 초기에 극심한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참부는 힘만 들고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노동일을 하는 부서라는 인식이 강하고 실제로도 그랬던 것만큼, 빛나는 전통이고 뭐고가 없었던 것입니다.  달랑 책 한 권을 손에 든 경험 없는 병참부 장교들도 막대한 보급품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사실은 병참부 소속 장교들은 진짜 장교도 아니었습니다.  병참부는 군의 일부가 아니라, 재무부의 감독과 지시를 받는 파견직 민간인들이었거든요.  따라서 deputy commissary-general이니 assistant deputy commissary-general이니 하는 것들은 진짜 장군이 아닌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말단 사병들이 경례를 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민간인 정부 관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장교들과 엇비슷한, 그러나 분명히 차이가 나는 군복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권총과 군도와 같은 무기도 휴대했습니다.  병사들은 '저것들은 장교 비슷한 군복은 입었지만 장교가 아니며,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와 함께 싸우지 않고 후방으로 도망친다'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전투가 벌어지면 적지 않은 경우 무기를 들고 프랑스군과의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이처럼 아군에게 저평가되었지만, 사실 이들의 업무는 제1선 장교들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우며 개인적인 창의성과 수완, 용기와 기지를 발휘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전투 현장에서 대포알과 머스켓 탄환에 노출된 채 병사들을 이끌고 전진할 때, 멋진 붉은 제복을 입은 장교가 부릴 수 있는 재주는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저 운이 좋은 자는 살아서 전진할 수 있는 것이고, 운이 나쁜 자는 대포알에 두동강이 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흙탕 길에 바퀴가 빠진 무거운 수레를 어떻게 빼낼 것인지, 수송에 3일 걸리는 건빵 자루 더미들을 어떻게 2일 안에 최전방까지 나를 것인지, 가진 돈은 50쉴링 밖에 없는데 일당 1쉴링을 요구하는 노새 30마리를 어떻게 3일 동안 빌릴 것인지 등은 그야말로 담당 직원의 역량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성공과 실패에 따라 전투의 승패가 뒤바뀔 수 있는 일이었지요.  그런데도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밀가루 자루를 실은 노새들을 끌고 최전선 부대에 도착한 병참부 장교에게 주어지는 것은 '왜 이리 늦게 왔냐' '왜 보급품이 이것 밖에 없는가' 등의 핀잔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병참부는 체계화가 꼭 필요한, 나름대로 무척 섬세하고 정밀한 병과입니다.  가령 포르투갈을 통해 상륙하는 영국군 병사들의 행군에 대해 웰링턴이 병참감(Commissary General)인 케네디(Sir Robert Hugh Kennedy)에게 보낸 지시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들어있습니다.


"상륙하는 부대는 각자 4일치의 빵과 2일치의 고기를 휴대한다.  병사들이 휴대하는 빵 외에, 1만 명의 3일치 빵을 수송해야 하는데, 가능하다면 노새를 이용해 날라야 한다.  각 노새에는 2개의 자루, 즉 224파운드의 짐을 실을 수 있으므로 전체를 위해서는 130마리의 노새가 필요하다."


이 계산은 꽤 합리적입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의 배식량은 하루에 빵 1파운드였는데, 1만 명의 3일치라면 3만 파운드입니다.  224파운드를 실을 수 있는 노새를 130마리 동원한다면 224 * 130 = 29,120 파운드이므로, 1인당 0.97 파운드씩의 빵을 3일간 보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계산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노새가 먹을 사료는 계산에 넣지 않았쟎습니까 ?  노새는 하루에 10파운드의 곡물을 먹어야 했고, 병사들이 3일 행군하는 것을 따라 나섰다가 다시 보급품이 쌓여있는 항구로 되돌아오려면 왕복에 6일이 걸렸으므로, 노새 1마리가 싣는 224 파운드 중 최소 60파운드의 곡물은 노새가 먹어치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즉, 130마리의 노새의 실제 수송량은 29,120 파운드가 아니라 21,320 파운드였고, 병사들은 3일간 0.97 파운드가 아닌 0.7 파운드라는 부실한 양의 빵을 받아야 했습니다.




(도로망이 형편없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노새들을 이용한 보급품 수송이 정말 최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미숙하기 짝이 없었던 영국군 병참부도 2년 정도에 걸쳐 노새꾼들과 노새들을 고용하여 운용을 하면서 경험이 쌓여, 그 고용 및 활용, 급여 지급 등 온갖 자질구레한 잡무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실은 총사령관인 웰링턴 장군이 이런 노새 한마리가 몇 파운드의 짐을 싣을 수 있으며 그래서 몇 마리의 노새가 필요한지에 대해 계산하여 병참감에게 보내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한 일이기는 합니다.  이런 편지는 오히려 반대로 병참감이 원정군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형태로 보내는 것이 맞겠지요.  당시 웰링턴은 병참부 장교들과 서기들의 무능력에 대해 짜증이 잔뜩 난 상황이었는데,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샤우만을 포함한 대부분의 병참 장교들이 별다른 병참 업무 경험도 없이 새로 채용된 사람들이다보니 워낙 아는 것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군 병참부는 웰링턴 하에서 혁혁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총사령관 웰링턴이 직접 나서서 '가장 신경써야 하는 부서'라고 지목하면서, 저렇게 노새 몇 마리가 필요하다는 계산까지 세세히 해줄 정도였으니 당연히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특히 1810년 10월부터 다음해 초까지의 대치 끝에 토헤스 베드하스(Torres Vedras) 방어선 앞에 마세나의 프랑스군을 후퇴시킨 승리는 사전에 충분한 군량을 비축해놓은 영국군 병참부가 아니었다면 절대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아무도 병참부의 공로를 알아주지 않았지요.  이 사실은 웰링턴 휘하 어지간한 장군들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 등의 인터넷 사이트에 많은 정보가 있는 것에 비해, 웰링턴 휘하의 전체 병참부 책임자였던 케네디(Sir Robert Hugh Kennedy)에 대해서는 정말 정보가 없다는 것으로도 반증됩니다.  오히려 영국군 병참부의 위력과 중요성을 잘 알고 두려워했던 것은 적군인 프랑스군이었습니다.  1812년 웰링턴과 대치했던 마르몽(Marmont) 원수는 나폴레옹에게 이와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웰링턴은 제게 보급품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광활한 척박함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마르몽은 유난히 영국군의 노새 부대에 대해 넋두리를 많이 늘어놓았습니다.  1811년에도 그는 나폴레옹의 참모장 베르티에에게 편지를 써서 '영국군은 노새 1만2천 마리를 이용하여 너무나 쉽게 이동한다, 그러니 내게 단 1천2백 마리라도 노새를 좀 공급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개성을 가지고 사람과 소통하는 용들이 등장하는 나오미 노빅의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 '테메레르'에 대해 전에 언급했던 적이 있지요.  대포의 시대라고 해도 그런 거대한 용들 수백 마리로 구성된 군대가 있다면 아마 천하무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용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거대한 용들에게 먹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도 일종의 용이었습니다.  그 대군을 일거에 밀어넣으면 스페인 정도야 순식간에 휩쓸어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군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에 대한 답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지요.  영국군이 소수로도 내노라하는 나폴레옹의 부하들을 차례로 꺾고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낸 것은 바로 그 문제를 잘 해결했기 때문이었고, 그 핵심에는 영국의 병참부가 있었습니다.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https://en.wikipedia.org/wiki/Glacis

https://en.wikipedia.org/wiki/Havilland_Le_Mesurier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eithel 2019.02.18 0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샤프가 텐트 노새 계산하던게 생각나네요.
    아참, 테메레르의 작가는 나오미 노빅입니다.

  2. TheK2017 2019.02.18 0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하편이네요. 지금 버스에서 내려야 해서 쟁여놓았다 봐야겠네요. ^ㅇ^*

  3. 카를대공 2019.02.18 1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길이 없다,산지,건조한 기후
    이거 남 얘기 같지가 않군요.

    대대로 한반도의 기후나 지형이 풍요로운 땅과는 거리가 멀었죠.
    알면 알수록 왜 옆나라들에 치이고 살았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 Spitfire 2019.02.26 1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반도가 곡창지대에 비하면 살기가 어려웠겠지만 주변국가들에 비해 풍요롭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의 국가들이 자주 침입을 한 것이지요. 도둑은 부잣집을 털지, 거지를 털지 않습니다.ㅎㅎ

  4. TheK2017 2019.02.18 1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랬군요. 영국이 승리한 이유가.
    역시 전쟁에선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끔 알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ㅇ^*

  5. 인간늑대 2019.02.18 1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재미있는 글.
    감사합니다.

  6. 지나가다 2019.02.18 21: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들은 항상 전투의 화려함에 주목하지만 그 뒤에서 스폿 라이트도 받지 못하고 개고생 하면서 물자를 날라주는 보급부대에는 대부분 관심이 없지요.
    사실 어느 회사에서 근무하던지간에 영업과 같은 일선부서 직원들이 평가나 급여 및 상여에서 항상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방면 지원부서는 돈한푼 못벌고 쓰기만 한다며 갈굼당하기 일쑤인 것 같습니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린다고, 유사시를 대비해서 지원부서도 항상 적정한 유지및 관리가 들어가야 될텐데 말이죠...쩝.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7. 인퀴지터 2019.02.18 2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나 한심한 책이라 나폴레옹 매니아께서 거론할줄 예상도 못했습니다. 테메레르는.

  8. 유애경 2019.02.18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뭔가, 식량을 바닥내고 지나가는 프랑스군 에게서 , 머문자리를 초토화 시키고 지나가는 메뚜기떼를 연상하게 되네요.


  9. reinhardt100 2019.02.19 0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 저번에 한 번 언급했지만 20만 대군을 일거에 쏟아부어서 전선을 정리했어야 했다는 제 개인의 의견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복수의 보급선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프랑스 제국 단독으로 하기는 어려울거고 라인동맹이나 이탈리아 왕국 등의 실질적인 속국의 여력을 모두 동원해야 가능하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또한, 실질적으로 20만 대군을 영국군과의 전장에 투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만한 보급선 경비 병력이 또 필요하다는 것인데 사실 나시카님 말씀대로 이 정도 병력을 이베리아반도에 쏟아붓는 것은 다른 속국들을 방기하다 시피해야 한다는 점에서 도박인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할 건 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승산이 없는건 아니고 하나의 문제만 해결되면 절반 이상의 확률로 전쟁 전체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이베리아 전쟁을 승산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분리독립주의가 강했던 바스크, 아스투리아스, 갈리시아, 카탈루냐등을 전방 보급을 위한 배후지역으로 확보한 후 이 지역들에서 출발하는 간선도로망을 모두 확보합니다. 이후, 카탈루냐에서는 아라곤 및 발렌시아, 바스크-아스투리아스-갈리시아 전역을 석권한 후 카탈루냐-타라코나 및 사라고사-발렌시아 축선에서는 무르시아-카르타헤나를 공략 후, 지브롤터를 고립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카디스 혹은 리스본까지 지중해 연안 및 주변 내륙 전역을 점령해야 한다는 겁니다. 반면, 북부에서 출발하는 프랑스군은 부르고스-바야돌리드-살라망카까지 1차적으로 공략한 후, 마드리드를 고립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후, 메리다를 공략, 메리다-바다호스-리스본 공략을 순차적으로 이어가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점령하는 방식으로 갔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작전에서 전체 총병력은 프랑스군 공격군으로 24만 이상, 보급선 경비병력 최소 12만이며 이외 동맹군인 이탈리아왕국군, 라인동맹군, 스위스군 등을 합쳐 최소 10만 이상을 투입하며 작전 기간은 총3년, 동원 각종 야포 및 공성포 총 2천 문, 각 부대별 상비 비상식량을 최소 한 달분(러시아원정기 나폴레옹이 준비한 비상식량분 기준) 등의 보급역량을 갖추고 임한다는 가정하에 생각해본 겁니다.

  10. Spitfire 2019.02.19 1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베리아 반도의 척박하고 험준함을 들으니 일생의 목표인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고 싶어지네요~ 저길 걸었던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을지 궁금합니다.ㅎㅎ

  11. 웃자웃어 2019.02.19 2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급의 중요성이 입증되는 글이군요.

  12. 리틀락 2019.03.08 11: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은 경제력으로 하는거군요. 그렇게 무역을 중시했던 영국이 브렉시트 하는걸 보면 웃음이 납니다 ㅋㅋㅋ 대영제국의 영광을 되찾자는 자들이 경제관념은 바닥이네요



(흔히 단순한 축성 전문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 분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17세기부터 2백년간 요새와 포병, 병참, 병력 운영 등 모든 전쟁 양상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그야말로 위풍당당 보방(Sébastien Le Prestre de Vauban) 백작입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지의 군사 요충지에 일찌기 보지 못했던 묘한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당대 유럽의 군사 작전 행태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보방(Vauban)식 요새의 등장이었습니다.  대포의 발명과 함께 무용지물이 되었던 중세식의 높고 웅장한 성벽과는 달리, 보방식 요새는 낮고 두꺼운 벽으로 된 보루(redoubt)와 쐐기 모양의 옹벽(ravelin), 그리고 대포알을 튕겨내기 위한 경사방벽(glacis) 등을 갖춘, 한마디로 방탄벽을 갖춘 요새였습니다.  이런 별모양의 보방식 요새는 17세기 프랑스의 공병 전문가 보방(Sebastien Le Prestre de Vauban, Seigneur de Vauban)에 의해 획기적으로 개선된 뒤 17세기에 걸쳐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가면서, 군사 작전의 형태가 군사작전의 형태가 대규모 회전보다는 요새를 둘러싼 포위전으로 변질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경사방벽이란 요새방벽을 둘러싼 해자 바로 바깥쪽에 흙으로 두툼하게 쌓아놓은 방벽이었습니다.  포위군이 요새방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쏘아대는 포탄 상당수가 이 경사방벽에 튕겨져 나갔습니다.)


(경사방벽이 포위군의 포병들에게 얼마나 미치고 환장할 방어수단인지 보여주는 구조도입니다.  포위군은 요새방벽을 대포알로 때려 무너뜨리길 원하겠지만, 요새방벽은 깊은 해자와 경사방벽으로 인해 공성포에게는 지극히 작은 표적이 되었고, 맞추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방벽 위의 수비군은 적군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고요.)



(레만 Lehman 호수 서쪽 끝부분에 위치한 제네바 Geneva를 둘러싼 보방식 방벽의 모습입니다.  이 지도는 1841년의 모습인데, 지금 저 방벽은 헐리고 없습니다.)




전쟁의 형태가 장기간의 포위전이 되어버리자, 당장 문제가 발생한 것이 군대의 식량 조달이었습니다.  아무리 종군상인들이 부지런히 왔다갔다 한다고 해도, 종군 상인 몇몇에게 전부대가 먹을 밀가루와 빵을 의존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또 너무 비쌌습니다.  결국 군량 중 상당부분은 주변 농가들로부터 징발을 하거나 약탈을 통해 구해야 했는데, 수만 명의 포위군이 적 요새를 둘러싸고 근처에 몇 달 버티면 그 주변 일대의 식량은 씨가 말라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식량을 더 구할 수 없으면 포위를 유지할 수 없었고, 이는 곧 포위전의 패배를 뜻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제를 개편한 나라는 역시 유럽의 육군 강국이자 가장 많은 침공 전쟁을 치른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가장 많은 보방식 요새를 구축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적 요새를 가장 많이 공격한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17세기 중반에 삼총사에 나오는 유명한 추기경이자 정치인인 마자랭(Jules Mazarin)의 부하인 국방장관 르 틀리에(Michel Le Tellier)는 근대 유럽 세계 거의 최초로 국가 차원에서 병참 업무 개혁을 손보기 시작했니다.  기존에는 각 연대장들의 재량에 따라 그때그때 제멋대로 맺어졌던 종군상인들과의 계약을 표준화하여 좀더 체계적이고 원활하게 보급이 이루어지도록 했고, 여태까지 하찮고 천하게 여기던 수송 업무에도 신경을 써서 짐수레 부대도 상설화했습니다.  무엇보다 전투 지역 인근에 보급창을 세워 군량을 미리 축적하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이 분이 르 틀리에입니다.  이 분은 리셜리외의 뒤를 이은 추기경+재상인 마자랭에게 평생 충성했고, 또 루이 14세를 꼬드겨 프랑스 내의 신교도인 위그노들을 탄압하는데도 앞장섰습니다.  덕분에 프랑스의 국가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는데 꽤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르 틀리에 본인은 끝까지 잘 살았고, 아들인 루부아 Louvois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방장관직에 올랐습니다.)



(르 틀리에의 병참 개혁이 큰 도움이 되었던 1658년 덩케르크 Dinkirk 포위 작전도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고 스페인 및 영국 왕당파 연합군이 점거한 덩케르크를 포위 공격한 전투입니다.  결국 영불 연합군이 덩케르크를 함락시켰습니다.)




물론 이런 개선은 여전히 미흡했고, 전선의 많은 부대들은 계속 약탈과 현지 징발에 의존했으며, 덕분에 프랑스군은 여전히 배가 고팠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여 프랑스군의 병참 능력은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우수해졌고, 이는 결국 나폴레옹의 기동전과 맞물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패하는데 큰 힘이 됩니다.  나폴레옹 기동전의 근원은 식량의 현지 조달이었는데, 이는 유능한 병참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809년 제5차 대불동맹전쟁 때는 오스트리아군도 프랑스군의 흉내를 내어 식량의 현지 조달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 병참부의 역량이 프랑스군보다 훨씬 뒤떨어졌던 것이지요.  '현지 조달'이라는 것이 꼭 약탈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무자비한 약탈로 당장 먹을 것을 손에 쥔 굶주린 병사들이 자기들 몇몇끼리만 배부르게 먹고 마시는 것을 막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수집한 식량을 재빠르게 계량하고 보관하고 수송하여 넓은 곳에 분산된 아군 병력에게 효율적이고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질구레한 실무 능력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마 나폴레옹이 말단 병참부 서기들을 모아놓고 그렇게 밀가루와 와인 항아리를 다루는 법을 일일이 가르쳤겠습니까 ?  프랑스군 병참부는 르 틀리에 시절부터 근 100년 넘게 다른 나라 군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실무 능력을 쌓아왔었고, 나폴레옹이 그 혜택을 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바다 건너 영국은 나폴레옹 시대 100년 전부터 유럽 대륙은 물론 아프리카와 아시아, 북미와 카리브해 등 전세계를 지역구로 활발한 침략 전쟁과 식민지 운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원거리에 걸친 병력과 장비, 식량과 탄약의 수송에 있어 굉장히 전문화된 체계를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해군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육군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그런 병참 업무의 체계화가 보잘 것 없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1808년 포르투갈에 상륙한 웰링턴이 상륙 1주일 후 국방부 장관인 캐슬레이 경(Lord Castlereagh)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장 불평한 것이 병참 업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진격시 제가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은 바로 병참부(Commissariat)의 체계화입니다.  이 부서는 장관님의 심각한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이 병참부는 웰링턴의 사령부에 있던 다른 지원 부서들, 즉 의무부(Medical Department), 조달부(Purveyor's Department, 이름과는 달리 병원기자재와 사망자 처리를 담당), 경리부(Paymaster-General), 자재부(Storekeeper-General, 역시 이름과는 달리 주로 장비와 텐트 등의 수송을 담당) 등과 함께 민간인으로 구성된 부서였습니다.  다만, 병참부는 다른 지원 부서들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이들 부서 중에서 유일하게 그 부서장이 런던의 재무부(His Majesty’s Treasury)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차이는 웰링턴이 보낸 편지에 나오는 것과 같이, 모든 지원 부서 중에서 병참부의 업무가 군사 작전의 성패에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리스본으로 선적된 건빵 한 개가 최전선의 병사의 입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전체 과정을 상세히 보살피고 추적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수행될 수 있는 군사 작전은 하나도 없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이 나폴레옹을 격파하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이 둘의 군사적 역량 차이는 누가 봐도 나폴레옹이 두 단계는 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웰링턴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밀어낼 수 있었던 것은 웰링턴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실속있는' 스타일의 지휘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웰링턴이 이렇게 병참부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랬습니다.  원래 웰링턴이 병참 업무가 주특기였기 떄문에 그랬을까요 ?  웰링턴은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하기 전에는 인도와 덴마크에서 활약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도 이렇게 병참부를 중시했을까요 ?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웰링턴이 뜬금없이 병참부의 열성팬이 된 것은 이베리아 반도의 특수성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그 특수성이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



(이번에는 좀 너무 짧군요.  분량 조절 실패로 병참부 이야기는 3부에 걸쳐 늘어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T T)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https://en.wikipedia.org/wiki/Glacis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석총 2019.02.11 0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떻게 깨달았을까?

  2. 지나가던 사람 2019.02.11 1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삼총사에 마자랭이 나오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철가면이라면 등장할 시기이긴 합니다만... 삼총사의 악역 비슷한 포지션이면 마자랭의 전임자인 리슐리외 추기경입니다.

  3. 루나 2019.02.11 16: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방식 요새가 전쟁 양상을 변화시키는 데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끼쳤네요

  4. 수비니우스 2019.02.11 17: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덕분에 프랑스의 국가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는데 꽤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에서 뻥터졌습니다 ㅋㅋㅋㅋ

  5. 카를대공 2019.02.11 2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길어져도 생각보다 병참 이야기가 무척 흥미진진한데요?
    역시 나시카님 글빨(?) 덕이 아닐까 합니다ㅎㅎ

    중간에 실무 능력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요즘 들어 이쪽에 대해 많이 생각 합니다.

    언젠가부터 여기저기서 큰 그림에 대해 강조하는데 오히려 실무 능력에 대해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눈 앞에 것만 잘 해결해도 자연히 큰 그림이 잘 그려지는 경우가 많던데 이쪽을 강조하는 사람이 없는건 아쉽더군요.

  6. ㅇㅇ 2019.04.17 1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 점이 몇가지 있습니다.
    1. 현지조달 그러니까 약탈이 병참부의 발전과 어떻게 연관이 있나요?
    2. 보방형 요새가 나폴레옹이 보여준 화려한 야전으로 바뀌어간 이유가 무엇인가요?



샤우만(August Friedrich Ludolph Schaumann)이라는 분이 쓴 회고록이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영국군 작전에 대한 귀중한 사료로 곧잘 인용됩니다.  이 샤우만이라는 분은 1778년 독일 하노버(Hanover)에서 태어난 순수 독일인으로서, 귀족 가문 출신의 신사였습니다.  영국 왕의 개인 영지이자 독립국이었던 하노버 공국의 군대에서 16세부터 21세까지 장교로 근무했던 샤우만은 원래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은 모르티에(Adolphe Edouard Casimir Joseph Mortier)의 1803년 하노버 점령을 계기로, 영국군 산하 왕립 독일군(The King's German Legion, KGL)에 가담하여 프랑스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1816년 나폴레옹 전쟁이 완전히 끝난 뒤 고향 하노버로 금의환향하는 KGL 병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분의 회고록을 보면 묘한 부분이 나옵니다.  그는 원래 KGL 제7 대대 소속의 장교였다가 병참부(commissariat)으로 일했습니다.  제7 대대에는 개인 사정으로 일종의 휴가를 낸 상태로요.  병참부에서는 그의 일처리 솜씨가 마음에 들었던지 병참감 대리(Acting Commisary-General)로의 승진을 제시했는데, 샤우만은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제7 대대에 사직서를 내고 정식으로 병참부 소속으로 이직하는 것이 어떨까 하고 고민합니다.  샤우만의 고민은 일종의 외인부대인 KGL 부대 소속의 장교직은 영국군 입장에서는 정규 장교직이 아닌지라, 제대 후에도 영국 정부로부터 연금(half-pay)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직업 군인의 최대 장점은 연금이었던 모양입니다.  친구들도 그렇게 권유했기 때문에, 결국 샤우만은 KGL 제7 대대에 사직서를 내고 영국군 병참부에 정식으로 자리를 얻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운칠기삼이라고, 샤우만의 이 결정은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정식으로 취업을 하고나자, 병참부에서는 말을 바꾸어 전에 제시했던 승진을 걷어들이고 샤우만이 병참감 보조 대리(Deputy-Assistant Commisary-General)라는 말단직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결정 사항을 통보했습니다.  게다가 더 나중의 일이긴 했지만 영국 의회에서는 KGL의 모든 장교들에게 영국 정규 장교들과 동일한 연금을 지급하기로 의결하여, 샤우만으로 하여금 자신의 결정에 땅을 치며 후회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점이 있습니다.  병참부도 군대 아니던가요 ?  왜 KGL이라는 전투부대에서 병참부라는 수송부대로 자리를 옮기는데 사직서를 제출하고 계급이 바뀌는 등의 일이 일어나야 했을까요 ?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현대적인 군대와는 달리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만 해도 병참 장교들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 신분이었습니다.  고대로부터 군의 보급은 군이 직접 수행하지 않았거든요.  정규군 장교가 병참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의 일입니다.  


원래 무기가 없는 군대는 존재해도 군량이 없는 군대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3일 이상 굶으면 모두 탈영해버리거나 죽어버릴테니까요.  이처럼 군대의 식량 보급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는데도 병참은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업무로 취급되어 등한시되었고 상당히 원시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모두들 번쩍이는 갑옷과 날카로운 칼을 들고 깃발을 펄럭이는 일을 하고 싶어했으며, 냄새나는 농부들로부터 밀과 보리를 사들이거나 빼앗고 소와 돼지를 몰고 다니는 것은 창피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업무는 고귀한 귀족 출신 군인들이 하지 않고 천한 장사치들, 즉 민간에게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시적인 화승총(matchlock musket)을 들고 16세기 유럽 전장을 누비던 병사들의 식사 시간은 요즘 군대와는 꽤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군함에서나 육상 부대에서나, 병사들이 조를 짜서 스스로 취사를 했다는 것은 이미 다들 아실 겁니다.  문제는 그 취사 재료로 쓰일 밀가루와 콩, 고기 등을 누구에서 받느냐 하는 것인데, 이걸 민간인 군납업자에게서 샀습니다.  군에서는 병사들에게 급료를 지불할 뿐, 식량은 그 돈으로 알아서 사먹어야 했던 것입니다.  대포알이 날아다니고 기병대가 칼을 꼬나들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전장에 민간인 장사꾼이 따라다녔다고요 ?  예, 돈이 된다면 그 정도의 위험은 얼마든지 감수할 장사꾼들이 많았습니다.  




(종군상인 하면 아마 만화영화 '에어리어 88'의 무기상인 맥코이 영감님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에도 맥코이 영감님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종군상인의 취급 품목은 빵과 술, 군화와 의류, 종이, 잉크 등의 잡다한 생필품류가 대부분이었고, 정작 탄약과 포탄 등 무기류의 보급은 당시에도 민간 병참부가 아니라 정부 기관인 군수위원회(Board of Ordnance)에서 담당했습니다.  빵과 럼주는 그렇다쳐도 대포와 탄약류를 민간인에게 맡길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당시 민간인이 식량을 잔뜩 실은 마차를 끌고 전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은 사자떼 옆에서 돼지가 어슬렁거리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습니다.  가뜩이나 난폭하고 배고픈데다 약탈과 살인을 밥먹듯이 저지르는 병사들이 그 마차 주인에게 공손하게 가격을 흥정한 뒤 돈을 지불하고 먹을 것을 받아갈 확률보다는, 주인을 흠씬 두들겨패고 마차 통째로 빼앗아갈 확률이 훨씬 더 컸습니다.  


그러나 군대에게 식량과 기타 생활용품을 팔고 싶어하는 민간업자들을 그렇게 험하게 다룬다면 그 부대는 머지 않아 굶어죽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어떤 장사꾼도 그 부대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런 일은 실제로 종종 발생했습니다.  가령 제7차 십자군을 이끌고 1249년 이집트에 상륙하여 다이에타(Damietta)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프랑스왕 루이 9세(Louis IX)도 이탈리아나 레반트 등지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상인들의 협조를 받아가며 원정의 보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미에타 점령 이후 불시에 일어난 (사실 예정되어 있었으나 십자군 지휘부의 무지함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나일강의 범람으로 몇 개월간 진격로가 막히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술과 연회를 벌이며 지루함을 달래던 기사들이 원정 초기의 긴장감이 풀리자 상인들을 함부로 학대하고 물건을 갈취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자 하나둘씩 종군 상인들이 십자군 캠프 주변을 빠져나가버렸고, 결국 십자군은 보급에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결국 다음 해에 루이 9세가 이슬람의 포로가 되는 참패로 이어집니다.  




(이집트에서 투르크군의 포로가 된 프랑스왕 루이 9세의 모습입니다.  자고로 상인 세력을 함부로 건드리고 무사한 군주가 없었습니다.  그건 현대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런 종군 상인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는 (비록 소설 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고골리(Nikolai Vasilievich Gogol)의 명작 소설 대장 불리바(Taras Bulba) 속에 나옵니다.  다른 지역의 카자흐 부족이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장터의 카자흐들이 분노하여 소란을 일으키는데, 가장 만만한 것이 장터에서 장사를 하던 유태인들이었습니다.  카자흐들은 저주받은 족속이지만 가진 것이 많은 유태인 장사꾼들을 두들겨패고 물건과 돈을 빼앗고 심지어 죽이기도 하는데, 이때 자신의 형과 친분이 있다고 주장하는 얀켈(Yankel)이라는 이름의 유태인 장사꾼이 불리바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렸고, 불리바는 일단 그를 보호해주었습니다.  아래 장면은 그 소란이 가라앉은 뒤, 그 자리에서 즉각 보복 원정을 결의한 카자흐 부대들이 열을 지어 출정하는 부분입니다.




(대장 불리바는 처음에 출간되었을 때 '너무 우크라이나적인 이야기 아니냐'라며 러시아 당국의 거센 비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덕분에 고골리는 1835년의 초판이 나온지 7년 뒤에 러시아 국민주의를 잔뜩 버무려넣은 개정판을 새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저도 제가 읽은 소설이 1835년판인지 1842년판인지 모르겠네요.)




대장 불리바 by 고골리 (배경 : 17세기 중반 우크라이나) ------------------


불리바가 외곽 지역을 통과할 때, 아까 그가 살려준 얀켈이라는 유태인이 이미 차양까지 갖춘 가판대를 차려놓고 카자흐 기병들에게 부싯돌과 나사 드라이버, 화약 등의 온갖 군용품은 물론 빵까지 팔고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정말 유태인들은 지독하구나 !" 불리바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그에게 말을 몰아 다가갔다.  "이 바보, 자네 여기 앉아서 뭘 하는 건가 ?  까마귀처럼 총에 맞아 죽고 싶은 건가 ?"


얀켈은 대답 대신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 두 손으로 뭔가 손짓을 하며 가까이 왔다.  "고귀하신 나으리, 부디 조용히 해주시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십시요.  저기 카자흐 마차들 중 한대는 사실 제 것입니다요.  저는 카자흐분들께서 필요하신 온갖 물건을 가져가고 있읍지요.  어떤 유태인도 제시한 바 없는 낮은 가격으로, 카자흐분들의 원정길에 필요한 모든 종류의 보급품을 제공해드릴 예정입니다요.  정말입니다, 하늘에 맹세코 진짜에요 !"


타라스 불리바는 유태인들의 장삿속에 질려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캠프를 향해 떠났다.


--------------------------


실제 역사에서도 전쟁터를 누비며 적이든 아군이든 군대에게 물건을 팔려고 위험을 무릅쓰는 유태인 장사꾼들의 이야기는 꽤 나옵니다.  나폴레옹이 무척 고전했던 1807년 2월 아일라우(Eylau) 전투 직후, 식량과 의약품 부족으로 비참한 상태였던 프랑스군을 구원한 것은 놀랍게도 바르샤바 출신의 어떤 유태인 장사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유태인답게, 돈을 벌려면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를 해야 하며, 또 프랑스군처럼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는 군대를 상대로 돈을 벌려면 빵이 아니라 술을 팔아야 한다고 판단을 했나 봅니다.  전투 바로 다음날인 2월 9일 정오 즈음, 나폴레옹 휘하 프랑스 장군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를 때, 기적처럼 이 유태인 상인이 4통(tun)의 브랜디를 실은 마차들을 몰고 아일라우에 나타났습니다.  Tun이라는 큰 발효통은 대략 252 갤론을 담는다고 하니까, 리터로 환산하면 이날 아일라우에 배달된 브랜디는 무려 3800 리터가 넘었고, 살아남은 병사들이 약 5만5천명이라고 하면 일인당 70ml씩 돌아갈 정도로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이때 이 브랜디가 없었다면 엄동설한에 수천 명의 부상병들이 그대로 얼어죽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상 나폴레옹의 패전이나 다름없었던 아일라우 전투의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다섯번째 남자는 뭔가 짐승 가죽을 안장 밑에 깔고 등을 보인 채 기병도를 뽑아들고 있습니다.  이 쾌남아가 누구이겠습니까 ?  예, 물론 당대 유럽 제1의 기병 뮈라입니다.  당시엔 베르크-클레브스(Berg-Cleves) 대공이었다가 다음 해에 나폴리 국왕에 등극하지요.  이 전투에서 위기에 빠진 프랑스군을 하드캐리로 구해낸 장본인이라고 하면 약간 과장된 말이긴 합니다만 뮈라가 대단한 활약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민간 종군 상인들의 존재는 부대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었으므로, 부대 지휘관은 종군 상인들이 안심하고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뭔가 유인 장치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독점 면허제였습니다.  부대 지휘관은 몇몇 상인들과 독점 계약을 맺고 안전통행증(safe conduct, passport)을 발부했습니다.  그래야 부대 병사들이 으슥한 숲길에서 그런 종군 상인의 짐마차를 만나더라도 그 상인 얼굴 또는 그 상인이 제시하는 안전통행증을 보고 보호해주거나, 최소한 약탈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이는 반대로 다른 문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사방 10리 이내에 먹을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황량한 전장에서 병사들이 먹을 것을 구할 유일한 구매처가 이 독점권을 가진 종군 상인의 수송마차인데, 정상적인 상인이라면 그런 절대적인 이점을 120% 활용하려고 들 것이고, 그런 경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 뻔했거든요.  한여름 설악산 꼭대기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1개에 5천원이 비싼 가격이 아닌 것과도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어떤 선에서 적정 가격이 형성되었을 것 같긴 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전쟁터는 큰 마을이나 도시 근처였으니 먹을 것을 구할 곳이 상인의 수송마차 뿐인 경우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아무리 면허장이 있는 종군 상인이라고 해도 당장 3일을 굶어 살기가 등등한 중무장 병사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 쉽진 않았을 것 같거든요. 




(함락된 마을에서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묘사한 14세기의 그림입니다.  당시 전쟁은 영주들과 용병들의 사업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와중에 불쌍한 농노들과 시민들만 죽어났습니다.)




이런 주먹구구식의 병참이 다소나마 체계화된 형태로 발전한 것은 17세기 들어서면서부터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병참의 발전 원인은 역시 이 시기에 나온 중대한 기술 혁신에 있었습니다.  그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  


(원래 한편으로 끝내려던 포스팅이었는데 분량 조절 실패로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하늘누리 2019.02.04 2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등! 잘 보고 갑니다.

  2. 용가리 2019.02.05 0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옷 기다리던 글이네요. 다음 화가 엄청나게 기다려집니다.

  3. ㅇㅇ 2019.02.05 14: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시대 글을 읽으면서 상당히 궁금했던 내용인데 설 연휴에도 쉬지 않고 올려주시니 매우 고맙습니다.

    전근대 시절에 상인들의 행렬이 군대와 함께 다닌건 알고 있었는데 따로 병참이 군대의 영역에 들어선것도 오래된 일이 아니군요.

    제 삼촌이 군수특기로 지금은 장군진급까지 하셨지만 사실 보병과 같은 주류특기보다 진급에서 밀려 고생하셨는데 군수분야가 왜 군에서 비주류 특기인지 알것 같기도 합니다.

    • reinhardt100 2019.02.05 2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국시대 말기 도요토미 정권이 의외로 간과되긴 합니다만 군수분야 출신들이 야전분야보다 더 잘 나가서 문제가 된 경우입니다.

      흔히 말하는 세키가하라 전투란게 군수분야 담당인 이시다 미쓰나리와 야전분야를 담당한 오와리 국 출신의 도요토미 가신단의 분쟁적 성격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터진 측면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도요토미 정권은 야전출신들보다 군관료, 그것도 군수담당 관료들의 발언권이 워낙 막강한 특이한 경우라는 점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 최홍락 2019.02.06 09:0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우는 군수담당이 이시다 미쓰나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일이 그지경까지 갔을까 했을 정도로 이시다가 적을 많이 만들어놓는 바람에ᆢ이걸 군수담당 라인 대 야전 라인의 갈등이라기보다는 이시다파와 반 이시다파의 대결이라고 봐야겠지요.

    • 수비니우스 2019.02.10 17: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도요토미 정권의 야전출신들: 도요토미 히데나가(히데요시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츠구(히데요시의 조카), 시즈가타카의 칠본창(주로 오와리 국 출신들), 쿠로다 칸베이(주요 모사)
      도요토미 정권의 군관료(특히 군수담당): 이시다 미츠나리, 오오타니 요시츠구

      히데나가는 도요토미의 일본통일 직후 사망, 히데츠구는 히데요시가 늦둥이한테 정권 물려주겠다고 제거당하고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은 조선침략의 선봉으로 일본을 떠나거나 크게 안키워지고, 칸베이는 히데요시한테 견제당하는 등의 일이 있어서였지 딱히 군수담당의 발언권이 셌던것 같지는 않은데요

      정작 도요토미 이후 도쿠가와도 통일 이후 야전출신보다 군관료를 더 중시했고.

  4. 0_- 2019.02.05 14: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내는 설인가 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뭐 다 아시리라 봅니다만, 고골(Гоголь) 의 불바(Ъульба) 입니다. ь는 묵음이지요.
    고골리(ゴーゴリ, 고-고리)니 불리바(ブーリバ, 부-리바)니는 전부 일어중역에서 온 오류입니다...
    http://minumsa.com/booklife/20572/

    그런데, 북쪽 동네도 저 희한한 표기는 똑같나 봅니다? "문화어: 니꼴라이 고골리"라고 버젓이 씌여 있네요.
    https://ko.wikipedia.org/wiki/%EB%8B%88%EC%BD%9C%EB%9D%BC%EC%9D%B4_%EA%B3%A0%EA%B3%A8

    • reinhardt100 2019.02.05 2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 작품의 원래 배경이 <1594~1596년 셰몬 날레바이코 반란>입니다. 흔히, 1646년 흐미엘니츠키의 코사크 대반란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이 반란도 사실 만만치 않았습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에 소속된 코사크들이 사실상 최초로 연방을 탈퇴하려는 시초로 일어난 날레바이코 반란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휩쓸어 버렸는데 이 반란 당시 연방 입장에서 다행스럽게도 러시아와 터키 제국은 각각 스웨덴과 신성로마제국과 전쟁에 돌입해서 날레바이코 반란을 지원할 수가 없었죠. 이 반란동안 우크라이나는 개판났었죠. 이 반란이 실패한 후 폴란드는 '코사크들이 날뛸 외부 전역'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하게되었고 이 덕분에 코사크들이 대동란시기의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진격해서 엄청난 약탈을 벌입니다.

      불리바 영화가 1962년 헐리우드 판이 있고 2008년 러시아판이 있습니다. 둘다 비교해보시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 nasica 2019.02.06 09: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 !

  5. 칸몬드 2019.02.05 1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6. reinhardt100 2019.02.05 2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도 기해년 신년에 하시는 일 다 잘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좋은 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7. ㅋㅋ 2019.02.05 2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답! 병조림이요!

  8. 맥테비쉬 소프 병장 2019.02.06 0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어리어 88 !!!

  9. 2/28일 입대 2019.02.06 16: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늘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받으십시오! 작년보다 더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기술혁신이라니 두근두근하네요ㅎㅎ17세기 스타일의 엑셀이라도 발명된걸까요

  10. Spitfire 2019.02.07 0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배움으로 가득한 글은 따로 답글을 안쓰는데, 생각해보니 설 인사도 안드렸더군요~ 나시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항상 유익한 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11. 펱로스 2019.02.08 14: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글에서

    정의로운 투쟁이든 교활한 정쟁이든

    결국 우리네 먹고사는 생활에서 멀리 떨어질수 없음을 배워갑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오래 전부터 꿈꿔오시던 일들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12. TheK2017 2019.02.08 2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추천 꾸욱!~ 하고 다음 글을 기다립니다! ^ㅇ^*

  13. 웃자웃어 2019.02.09 17: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작 러시아 원정 당시의 프랑스군은..........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있어 드물게 조용한 한 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에서는 계속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지기는 했습니다만, 1809년 바그람 전투 이후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뛰어들 만큼 큰 전쟁은 없었지요.  그리고 1810년은 그의 제국이 최대 규모로 팽창했던 시기였습니다.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 공국들을 병합하여 프랑스의 영토가 사상 최대의 크기로 늘어난 것이지요.  게다가 유서깊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혼인을 맺고 정권의 영속성을 위한 아들까지 얻었으니, 정말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절정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숙적 영국과의 전쟁도 매우 잘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웰링턴을 스페인에서 몰아낸 것에 이어 마세나가 영국의 발판인 포르투갈까지 침공해들어갔고 (물론 이는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싸움인 대륙 봉쇄령으로 인한 영국의 곤경이 슬슬 한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곡물 가격은 대륙 봉쇄령 이후 60%나 치솟았고 이로 인해 영국 국민들의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대륙 봉쇄령에도 불구하고 수출은 표면적으로는 잘 되고 있었습니다.  1805년 5110만 파운드이던 수출액이 1808년에는 4970만으로 떨어지더니 1810년에는 다시 6220만 파운드로 늘어났거든요.  이는 유럽 대륙으로의 수출이 막히자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수출을 크게 늘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밀수 등을 통해 여전히 유럽에도 많은 상품을 팔고 있었지요.  그러나 1810년 중순 이후 나폴레옹의 밀수 단속이 강화된데다,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수출 특성상 대금의 상당 부분을 현금 대신 원자재나 채권을 받아야 했던 것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들어오는 돈은 부족한데 유럽 대륙의 전쟁 자금은 금화나 은화로 된 경화로 지급해야 했으니, 아무리 영국이 부자 나라라고 해도 돈이 마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1809년 한 해에만 무려 4420만 파운드를 전비로 지출해야 했으니까요.  결국 의심쩍은 지폐만 넘쳐날 뿐 경화가 부족해지자 영국에서는 극심한 인플레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사재기가 발생하여 더욱 물가가 오르는 악순환에 빠진데다, 금본위제 재도입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은행들도 재무 안정성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문제로 인해 1811년에는 금융 불안정과 함께 수출액도 4390만 파운드로 뚝 떨어져 버렸습니다.  유럽 대륙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당시 영국처럼 산업과 금융이 발달한 나라가 없었으니, 그 타격은 당연히 영국이 가장 크게 입었습니다.  




('템즈 강에서의 선적'이라는 Samuel Scott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폴레옹에게 승기가 막 보이려는 시기인 1810년 마지막 날, 이 모든 것의 방향을 확 돌려놓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1810년 12월 31일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 1세의 칙령이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영국과의 공공연한 무역 재개 및 나폴레옹에 대한 사실상의 도전장이었거든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


이미 다룬 내용입니다만, 기억 전환을 위해 잠깐 정리를 해보면 이렇습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정복을 위해서는 영국을 먼저 굴복시켜야 한다고 나름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상품들은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큰 유혹인지라 유럽 각국은 대륙 봉쇄령을 위반하고 밀수를 계속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가 다스리는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나폴레옹 본인도 '면허제'라는 이름 하에 몇몇 상인들에게 영국 상품을 공식적으로 수입할 수 있도록 해줄 정도였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 유럽의 주요 해안가를 아예 프랑스 영토로 병합해버렸습니다.  그것이 네덜란드 및 발트해에 면한 함부르크(Hamburg), 브레멘(Bremen), 뤼벡(Lubeck) 등 북서부 독일 소공국들의 병합이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프랑스의 영토는 사상 최대로 확장되었고, 영국의 재정난이 더 심해지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대륙 봉쇄령의 이런 강압적인 실행은 영국 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의 고통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동맹국들의 불신과 반발심도 키웠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의 체면을 무시하고, 알렉산드르가 가장 아끼는 누이동생 예카테리나의 남편이 다스리는 올덴부르크(Oldenburg) 공국까지 병합해버린 것은 당시 유럽 대륙의 양대 세력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싸늘한 적대감을 키우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아, 프랑스가 이토록 크고 아름다운 적이 있었던가 ??)




나폴레옹의 관점에서 이런 병합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동의 적국인 영국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나폴레옹은 올덴부르크의 병합에 대한 충분한 보상도 제시했습니다.  즉, 2년 전 알렉산드르와 아름다운 우정을 쌓았던 회담 장소였던 에르푸르트(Erfurt)를 보상으로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모욕으로 받아들인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의 보상안을 거부했고, 1810년 12월 31일 러시아 황제 칙령(ukase)으로 대응했습니다.  이 칙령은 어쩌면 사소할 수 있는 내용으로서, 크게 2가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1) 프랑스산 비단과 와인에 높은 관세를 부과

2) 중립국 선박의 상품이 "명확히" 영국산이 아닌 경우 러시아 항구에 입항 허용


이는 대표적인 프랑스 상품을 배척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국 상품에 대해 환영하는 초대장을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냥 허술하게라도 가짜 서류만 만들어 제출하면 되었으니까요.  아는 나폴레옹의 패권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장이었고 이는 전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도발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자의식 과잉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라는 것을 알렉산드르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아무리 여동생이 가엾다고 해도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까요 ?


당연히 그런 결정까지는 크고 작은 많은 다른 요소들이 관여했습니다만, 가장 큰 것은 역시 폴란드와 영국이었습니다.


서방 진출을 국가 정책으로 삼는 러시아에게 있어 폴란드는 서쪽에 확보한 소중한 발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르샤바 공국은, 아무리 독립국이 아니라 작센 왕의 개인 영지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러시아에게 눈엣가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조그마한 공국에 불과할지라도 폴란드인들의 독립 정권이 있다는 것은 러시아령 폴란드인들에게 독립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1809년 제5차 대불동맹전쟁시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맞서 꽤 선전했을 뿐만 아니라 바그람 전투의 결과 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혹시라도 폴란드가 정식으로 독립 왕국으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러시아에게 주었습니다.  


러시아의 이런 불안감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영리하게도 부지런히 조장했습니다.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메테르니히는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를 비밀리에 이간질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목표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폴레옹의 패망이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 때문이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와 국경을 접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당시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오스만 투르크의 발칸 반도를 빼앗고 싶어 했는데, 그 강력한 경쟁자가 러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 관계라면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의 맹약인 틸지트(Tilsit) 조약을 깨뜨리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해서 폴란드를 수단으로 정했습니다.  즉,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독립시키려 한다'라는 소문을 빈과 바르샤바에 꾸준히 퍼뜨린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1810년판 가짜 뉴스였던 셈인데, 메테르니히의 비밀 선동에 홀딱 넘어간 순진한 폴란드인들은 독립 열망에 부풀었고, 바르샤바 신문들은 독립이라는 희망찬 뉴스를 꾸준히 찍어댔습니다.  이런 상황은 빈과 바르샤바에 있던 러시아인들에 의해 그대로 알렉산드르에게 들어갔고, 그의 우려와 분노는 파리 주재 러시아 대사 쿠라킨(Alexander Borisovich Kurakin, Александр Борисович Куракин)을 통해 나폴레옹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화려한 옷차림으로 파리 사교계를 사로잡아 '다이아몬드 대공'으로 불렸던 쿠라킨 대사입니다.  그는 음식이 한꺼번에 나오지 않고 코스별로 차례차례 서빙되는 러시아식 정찬 방식(service à la russe)을 프랑스에 전해 오늘날의 프랑스 코스 요리를 완성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을 막아보려 많은 애를 썼습니다.)




나폴레옹은 나폴레옹대로 화를 냈습니다.  나폴레옹이 바로 작년 오스트리아와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었을 때, 틸지트 조약에 따르면 알렉산드르는 즉각 병력을 파견하여 나폴레옹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쳐부수어야 했습니다.  그런 편의를 바라고 나폴레옹은 폴란드 애인의 애원도 뿌리치고 폴란드 독립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핀란드까지 러시아에게 던져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모두 잊고 러시아는 교활하게도 러시아령 폴란드 인근에 병력만 배치해두고 어느 쪽이든 승리하는 쪽에 붙기 위해 눈치만 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군의 공세를 분쇄하자 오스트리아령 폴란드로 침입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건 황제들끼리 우정을 나눈 동맹국의 처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꾹 참고 우방국 대우를 해주었더니 나폴레옹은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던 폴란드 독립에 대해 항의해온다 ?  이런 뻔뻔스럽고 무례한 행동에 대해 공손하게 대응할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처가집인 오스트리아는 메테르니히의 획책 하에 끊임없이 러시아군의 이동 및 요새 강화에 대해 나폴레옹에게 고자질을 하며 이런 위기를 부추겼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과 이런 험악한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알렉산드르는 각지의 요새를 강화하고 군대를 정비하는 등 전쟁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 것은 역시 폴란드 건이 컸습니다.  알렉산드르는 교황을 잡아가둔 나폴레옹의 폭거가 독실한 카톨릭인 폴란드 국민들에게 공분을 샀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좀더 많은 자치권과 좀더 관대한 헌법을 약속하며 폴란드인들에게 18세기때처럼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남는 것이 폴란드에게 유리하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지만, 바르샤바에 그가 심어둔 밀사들은 바르샤바의 분위기를 솔직하게 그대로 전해왔습니다.  폴란드는 나폴레옹이 결국 폴란드에게 자유를 가져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를 접한 알렉산드르는 결국 프랑스와의 전쟁을 결국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폴란드인들에게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것도 역시 메테르니히의 획책이었습니다.  실제로는 나폴레옹은 냄새나는 폴란드인들을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외교관인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Nepomuk Lothar, Prince von Metternich-Winneburg zu Beilstein)입니다.  가짜 뉴스를 정치 외교에 활용하는데 있어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르에게 전쟁을 결심하게 만든 것은 폴란드 외에도 또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전쟁의 근본 원인이었지요.  그것은 물론 영국, 좀더 정확하게는 영국과의 무역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드넓은 평원을 가진 대농업 국가였습니다.  그런 러시아가 홍차와 설탕, 면직물, 비단, 강철 등의 물품을 수입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남아도는 자국산 밀과 아마 등의 농산물을 수출하는 것 뿐이었는데, 원래 그 가장 큰 고객이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 때문에 영국과의 교역이 막히자 러시아의 귀족들은 돈줄이 막혔고, 그 불만은 짜르 알렉산드르의 정권을 위태롭게 할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알렉산드로서는 그런 불만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거기에 뻔뻔스럽기 그지 없는 나폴레옹이 여동생 시댁인 올덴부르크를 제멋대로 병합해버리고 (이건 가짜 뉴스에 의한 오해였지만) 폴란드까지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더 이상 참을 이유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1810년 12월 31일, 그는 나폴레옹의 따귀를 갈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칙령을 발표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1811년 4월 2일자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미 러시아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태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전쟁은 발발할 것이오.  나와 알렉산드르가 아무리 그를 막기 위해 노력하거나 프랑스와 러시아의 국익이 아무리 해를 입는다고 해도 말이오.  난 이런 상황을 자주 보았고, 내 과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전쟁이 발발할 거라는 것은 마치 오페라의 줄거리가 펼쳐지는 것과 같이 뻔한 이야기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바로 영국이오."


이제 나폴레옹의 제국은 몰락을 향한 폭풍 속으로 휘말려들어갑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istory of the Expedition to Russia Undertaken by the Emperor Napoleon  by Philippe-Paul Comte de Segur

https://www.britannica.com/event/Napoleonic-Wars/The-Continental-System-and-the-blockade-1807-11

https://georgianera.wordpress.com/2015/04/16/the-port-of-london-in-the-18th-century/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Kurakin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까까님 2019.01.28 0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짜뉴스가 힘을 갖는 건 불신이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빙판길에 출근 잘 하시고 곧 설인데 복 많이 받으시고 건필하십시오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2. 석총 2019.01.28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헬게이트가 열리는 군요

  3. 웃자웃어 2019.01.28 1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나폴레옹도 이미 러시아 본토로 깊숙히 진군하면 패배할수밖에 없단걸 아일라우 전투때 알게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러시아에 쳐들어 갔을까요?

    • 하이텔슈리 2019.01.28 2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폴레옹은 러시아 본토 깊숙히 진군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쳐들어가서 빨리 러시아 주력을 격파하고 차르를 협상장으로 불러내 굴복시키려는 게 전쟁의 목적이었죠. 문제는 러시아군이 안싸우고 계속 도망치고 이걸 쫓아가다보니 모스크바까지 가버린 것일 뿐이에요. 모스크바 함락 시점에서 이미 나폴레옹의 계획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시점이었던 거죠.

    • 다부 2019.01.30 0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가 러시아를 육로로 직공하는 건 위험하니
      발트해안 도시들을 동원해서 리보니아에 해상보급망을 설치하고
      리보니아의 거점으로부터 모스크바를 노린다는 계책을 나폴레옹에게 건의를 했는데,

      나폴레옹이 "그런 성가시고 시간 걸리는 방법 아니라도 내 작전술로 간단히 쳐 없앨 수 있어"
      라고 판단해서 바로 육로로 직공했죠.

      나폴레옹은 천재지만 자신의 재능을 너무 과신해서 일이 잘 못 되었을 때를 대비하지 않고
      작전술에 너무 의존함으로서 원정에 실패했죠.
      만약에 루이 니콜라 다부의 계책대로 신중하게 러시아를 리보니아에서 압박하는 작전을 썼다면
      당시 러시아도 상황이 어려웠던 만큼 "보급문제가 해결된 대육군"을 상대로 패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보로디노 전투때에도 루이 니콜라 다부가 러시아군의 측면을
      우회기동해서 쳐야 된다고 건의했는데 역시 나폴레옹에게 묵살당했죠.
      이 때에도 나폴레옹이 루이 니콜라 다부의 건의대로 했다면 전투의 결과는 달랐을 수도 있죠.

    • 웃자웃어 2019.01.30 0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이텔슐리님, 애초에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서도 비슷한 전술을 썼는데도 러시아군에게 고전했습니다. 폴란드에서도 크게 고전했는데, 그보다 더 광활한 러시아라면 얼마나 더 고전하겠습니까? 그걸 모를리가 없는데도 러시아를 공격했고, 현지조달을 바탕으로 하는 전술을 유지했다는것 자체가 미친짓이죠.

  4. 카를대공 2019.01.28 2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나폴레옹 전쟁의 절정(?)인 러시아 원정의 길이 시작되는군요.
    예나 전투 때부터 그랬습니다만,전성기에 비해 한물 간 판단력의 나폴레옹이 어떻게 그려질지 흥미진진 합니다.

  5. 안드레이 2019.01.29 1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메테르니히의 활약이 돋보이네요 비스마르크도 그렇고 역시 외교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은 후세에서 보면 어떻게 저런 생각이 가능한가 신기하기만 합니다

  6. nashorn 2019.01.30 0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마지막..

  7. 샤르빌 2019.01.30 2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막연하게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에 비협조적으로 나와서 홧김에 전쟁이 터진줄 알았더니 역시 온갖 원인과 전조로 전운이 감돌고 있었네요.. 메테르니히의 공작과 폴란드 문제..

  8. starlight 2019.02.02 2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러시아 원정은 그 역사가 만약이 없다라는
    명확한 반증이죠. 2000km가 넘는 전역을 보급도 수송도
    병력 충원도 지연되고 끊어지고 소멸되고,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통신도 분절되고 병력 통제도 안되고, 자연사하듯 군마는 끊임없이 고꾸라지고, 병력들은 이탈하고 와해되고 이질에 쓰러지고 전투에서 소모되고,
    눈발에 얼어 동상으로 죽고 탈진과 아사로 학살아닌 학살같은 참상이죠. 아비규환입니다.

  9. 알키비아데스 2019.02.08 15: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헨리 키신저가 메테르니히 숭상할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