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폴레옹의 시대395

스톡홀름의 프랑스 왕 (4편) - 오스칼이라는 이름 비록 임무가 보충병력의 인솔이라고는 해도, 한겨울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는 꽤 힘든 일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뛰어난 지휘력이 아니었다면 신병들로 구성된 이 보충병력에서는 아마 탈영이나 부상 등으로 인해 많은 비전투 손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게 이탈리아로 들어온 베르나도트가 향한 곳은 롬바르디아의 주도인 밀라노(Milan)였는데, 여기서 나폴레옹과의 악연이 시작됩니다. 당시 밀라노 주둔 프랑스군 지휘관은 뒤퓌(Dominique Martin Dupuy) 장군이었는데, 당시 나폴레옹이 이끄는 이탈리아 방면군 전체는 기타 방면군의 졸전과 대비된 자신들의 연전연승으로 인해 정말 기고만장한 상태였습니다. 그건 뒤퓌 장군도 마찬가지였고, 풋내기들로 이루어진 보충병들을 끌고 겨울 행.. 2018. 7. 23.
나폴레옹의 식탁 - 나폴레옹 시대의 식도락 이야기 여러분이 나폴레옹 시대로 타임 워프를 한다고 하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까 ?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장 생활 편의품의 부족 때문에 몹시 불편할 것입니다. 냉장고나 에어컨, 수세식 화장실과 형광등 따위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 것 말고도 당장 여러분들은 TV와 인터넷이 없어서 무척이나 심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분은 여러분과 나폴레옹 시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부분입니다. 즉, 심심하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건 귀족이나 상류층 이야기입니다. 일반 서민들이야 먹고 살기 바빠서 심심하다는 사치스러운 생각을 할 틈이 없었지요. 그렇게 오락거리가 없는 시절에 인간이 탐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이고 말초적인 쾌락이 무엇이겠습니까 ? 당연히 식사입니다. (다른 걸 생각하신 분들은 반성하.. 2018. 7. 12.
스톡홀름의 프랑스 왕 (3편) - 젊은 베르나도트의 슬픔 여기서 시간과 장소를 다시 혁명 직전의 프랑스로 되돌려 보겠습니다. 1763년, 소위 남자들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남부 가스코뉴(Gascogne)의 소도시 포(Pau)에서 검사로 일하던 장 알리 베르나도트(Jean Henri Bernadotte)에게 아들이 태어납니다. 당시 52이세이던 베르나도트 검사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마 생각지도 않은 늦둥이였을 것입니다. 이 아이에게는 형과 같은 이름인 장(Jean)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곧 형과 구별하기 위해 장-밥티스트(Jean-Baptiste)라는 이름으로 살짝 바뀌었습니다. 지금도 포 시에는 장-밥티스트 베르나도트가 태어난 집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도심 한복판의 골목 속에 있는 집이라 으리으리한 저택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큼.. 2018. 7. 9.
스톡홀름의 프랑스 왕 (2편) - 북구의 외톨이 1796년,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18세가 되어 삼촌인 카알 13세의 섭정 통치에서 벗어나 귀족들의 기대를 받으며 정식으로 왕좌에 올랐습니다. 그는 종교상의 이유로 러시아 대공녀를 거부하고 독일 바덴(Baden) 대공의 손녀인 도로테아(Friederike Dorothea)와 결혼했는데, 이는 좋든 싫든 러시아와 협력해야만 했던 스웨덴의 처지에서 좋은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러시아와의 협력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프랑스 때문이었지요. 당시 자코뱅들에 의한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프랑스에 대한 증오심은 구스타프 4세와 러시아의 짜르 파벨 1세(Pavel I)가 함께 가지는 것이었거든요. (구스타프 4세와 도로테아의 단란한 신혼 시절... 이들을 결속시킨 것이 애정보다는 권.. 2018. 7. 2.
스톡홀름의 프랑스 왕 (1편) - 왕과 의회 그리고 미트볼 이제 여러분은 약 4~5회의 포스팅에 걸쳐 나폴레옹의 껄끄러운 부하이자 인척이었던 장 베르나도트(Jean-Baptiste Jules Bernadotte)가 어떻게 현대 스웨덴 왕가의 초대 왕인 카알 14세(Karl XIV Johan)이 되었는지를 보시게 됩니다. 여러분들 대부분께서도 평민 하사관 출신의 프랑스 원수인 베르나도트가 프로이센과의 전쟁 때 포로로 잡힌 스웨덴 군인들을 잘 대우해준 덕분에 스웨덴에 좋은 인상을 남겼고, 때마침 스웨덴 왕에게 후사가 없자 후계자로 지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의문이 남습니다. 스웨덴 왕가에 설마 친척이 하나도 없었을 것 같지 않은데, 인척인 덴마크나 독일 귀족도 아니고 대체 왜 뜬금없이 프랑스의 장군을 왕으로 받아들였을까요 ? 그리고 기존 .. 2018. 6. 25.
형제간의 전쟁 - 1810년 네덜란드 합병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로부터 추가적인 영토를 뜯어냅니다. 그러나 이때가 나폴레옹 제국이 최대 영토를 자랑하던 때는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은 1810년에 오는데, 이때 나폴레옹이 우디노의 군단을 동원하여 추가로 타국을 정복했고 그 땅을 아예 프랑스 영토로 편입했거든요. 1810년은 비교적 조용한 한 해로 알려졌는데, 그런 한가한 시기에 나폴레옹의 먹이가 된 나라는 어디였을까요 ? 바로 네덜란드였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침공할 때 당시 네덜란드의 국왕은 용감하게도 병사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며 저항을 지시했는데, 그 국왕은 바로 나폴레옹이 아끼는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였습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 이 복잡한 이야기를 듣고 나시면 왜 네덜란드 축구팀의.. 2018. 6. 14.
머스켓 소총의 경제학 요즘 미국에서 무차별 총격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등장하는 AR15 소총, 즉 M4 소총의 민수용 반자동 버전 가격을 찾아보니 대략 600~700불 정도 합니다. 우리 돈으로 약 60~70만원 하는 셈이지요. 비싸게 느껴지시나요 ? 최저임금으로 일할 때 대략 12일 정도를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니 엄청나게 비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110kg짜리 어른 돼지 1마리의 가격이 대략 45만원 정도한다니까, 돼지 1.5마리 정도의 가격입니다. 하지만 원래 무기라는 것은 이 정도보다는 훨씬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적어도 산업 혁명 이전까지는 말이지요. 일리아드(Illiad)에서 트로이의 편을 든 전쟁의 신 아레스가 그리스군 장수를 때려죽인 뒤 하는 일이 쓰러진 적의 갑옷과 투구를 벗겨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 2018. 6. 7.
하루 일당으로 몇인분의 빵을 살 수 있었나 - 예수님과 영국군의 경우 제 블로그를 오래 출입하신 분들께서는 눈치를 채신 분들이 꽤 있겠습니다만, 저는 원래 역덕이나 밀덕이라기 보다는 돈덕 먹덕에 가깝습니다. 즉, 역사 속의 돈 이야기와 먹을 것 이야기에 굉장히 관심이 많습니다. 최근 군인 연금 편이나 사탕무 설탕 제조법의 선구자 아카르트 편에서도 탈러(thaler)니 펜스(pence)니 하는 먼나라 옛나라의 돈 단위를 적었지요. 저는 그런 옛 화폐 단위를 적을 때 당시 화폐 속의 금이나 은의 함량을 기준으로 저 나름대로 환산을 합니다. 물론 현대의 금값이나 은값도 환율과 국제 투기 세력의 움직임에 따라 하도 변화무쌍하여 정확한 환산은 의미가 없고, 대충 1만원인지 10만원인지 구분하는 수준에서 만족하는 편이지요. 이렇게 제가 기준을 정한 것은 당시 화폐는 그 금화은화 속에.. 2018. 6. 4.
나폴레옹의 잠수함 노틸러스(Nautilus) 호 이야기 지난 편에서는 나폴레옹이 불로뉴에 약 20만명의 '영국 방면군'과 약 1천여척의 대형 보트들로 구성된 상륙 함대를 집결시키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 소식은 공포심과 상상력이 빚어낸 기발한 형상의 각종 상륙함들과 하늘을 뒤덮으며 기구를 타고 날아올 프랑스군의 모습으로 영국 대중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심지어는 프랑스군이 영불 해협 밑에 지하 터널을 뚫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바다를 통해, 하늘을 통해, 심지어 땅속을 통해 쳐들어오는 프랑스 군의 모습. '지나친 상상력은 국가 안보에 해롭습니다') 물론 영국 정부나 군 지휘관들은 이런 황당무계한 찌라시 기사들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만, 대중들이 공포에 질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프랑스군의 영국 상륙 자체는 전.. 2018. 5. 31.
달콤씁쓸한 결말 - 설탕과의 전쟁 (마지막편) 하지만 본격 산당국(産糖國)의 꿈이 현실화되기 전에 전쟁의 물결이 닥쳤습니다. 아카르트의 든든한 후원자이던 빌헬름 3세가 알고보니 멍청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입만 살았던 강경파의 주장대로 겁도 없이 나폴레옹에게 먼저 싸움을 걸었고, 나폴레옹은 '내가 바로 나폴레옹이다'라는 것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빌헬름 3세에게 혹독하게 교육시켜 주었습니다. 이 전쟁은 아카르트의 농장과 정제소까지 집어 삼켰습니다. 1806년 밀물처럼 쳐들어온 프랑스군은 아카르트의 농장과 공장을 불태워버렸던 것입니다. 아카르트는 모든 것을 잃고 실의에 잠겼습니다. 사탕무 정제소가 사실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프로이센은 온 나라가 탈탈 털렸고, 나폴레옹에게 알짜배기만 골라 영토를 절반이나 빼앗기고 덤으로 막대한 전쟁 배상금까지 물어내.. 2018. 5. 21.
나폴레옹 시대의 군인 연금 이야기 최근에 어느 독자분께서 '나폴레옹 당시 부상당해 불구가 된 병사들에 대한 처우는 어떠했는가'라는 질문을 올리셨습니다. 그에 대해 짧게 댓글은 달았습니다만, 생각난 김에 전에 다음블로그에 썼던 글을 다시 올립니다. 전에 장군님 출신의 개인택시기사분을 만난 썰을 푼 적이 있습니다만, 그 전직 장군님은 결코 먹고 살 길이 없어서 택시 운전을 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분도 하신 말씀이 "군인 좋은 거 하나도 없어요, 딱 하나, 연금이 빵빵하게 나온다는 것 빼고 말이에요" 라고 하시더군요. 그만큼 미국 못지 않게, 우리나라도 군인 연금 자체는 꽤 잘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 시대의 시민 병사들은 상비군이 아니었고, 직업 군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그냥 외국인 용병 .. 2018. 5. 17.
달콤한 프로이센 - 설탕과의 전쟁 (2편) 1776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프로이센 왕립 과학 학회(Königlich-Preuß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의 회원이 된 프로이센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의 이름은 아카르트(Franz Karl Achard)였습니다. 이름을 보면 순수 독일인 같지 않다고 느끼실 수 있는데, 제대로 보신 것입니다. 아카르트라는 집안은 원래 프랑스에서는 아샤르라고 발음되던 위그노(Huguenot, 프랑스 내의 개신교도) 집안으로서, 박해를 피해 독일로 이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이렇게 전도 유망한 이공계 인재는 대기업에 입사를 하든 스타트업 기업을 창업하여 주식으로 대박을 터뜨렸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에는 그런 학회 회원이 되었다는 것이 출세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2018. 5.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