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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395

교황과 무역 - 포르투갈의 전운 오스트리아 대사 슈바르첸베르크 대공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폴레옹의 아들에게 바친 '로마 왕'(Roi de Rome)이라는 칭호는 단지 신성로마제국의 정통성을 나폴레옹에게 공치사로서만 넘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이미 로마는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넘어온 상태였습니다. 로마 및 그 주변은 원래 세속 군주로서의 로마 교황이 가지는 교황국(the Papal States)에 속하는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지배자 나폴레옹 눈 앞에는 고양이는 커녕 생쥐만도 못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비오 7세(Pius VII)는 1804년 나폴레옹의 대관식에도 참석하는 등 나폴레옹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다 소용없었습니다. 이미 1809년 5월 17일, 나폴레옹은 빈에서 칙령을 내려 로마 교황의 세속 군주로.. 2018. 1. 7.
[재탕] 나폴레옹의 출세 과정 - 툴롱 (Toulon) 포위전 3줄 요약 : 1) 일단 기본 실력은 키우자 - 아주 탄탄히 키우자2) 인맥을 만들자 - 나폴레옹 같은 천재조차 인맥 없이는 아무 것도 될 수 없었다3) 가장 중요한 것은 '출세를 위한 집념과 의지'이다 - 주어진 일만 충실히 하면 충실한 하인이 될 뿐이다 시대가 위인을 만드는가 또는 위인이 시대를 만드는가 하는 것은 영원히 반복되는 떡밥이고, 예전에 '불멸의 이순신'을 연기했던 김명민 본좌는 '시대가 위인을 만드는 것 같다'는 말을 한 적도 있었지요. 제 생각에는 위인될 만한 인물이 시대를 잘 만나야 위인과 시대가 탄생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기회를 만나도 사람 그릇이 그저 그렇다면 말짱 헛것이고 (저 같은 경우는 IMF와 리먼사태를 둘다 겪었습니다만 떼돈을 벌 이 두번의 기회에서 얻은 것이 아.. 2017. 12. 29.
브랜드 가치와 실속 - 나폴레옹의 재혼 성공한 남자가 이혼을 하는 이유는 조강지처와의 성격 차이나 식어버린 애정 문제가 아닙니다. 이유는 단 하나, 새 여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조세핀과의 이혼이 공식 발표되기 한 달 전, 러시아 주재 프랑스 대사인 콜랭쿠르는 본국으로부터 지시문을 받습니다. 나폴레옹과 로마노프 가문과의 혼인을 추진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상은 짜르 알렉산드르의 둘째 여동생, 안나(Anna Pavlovna)였습니다. 안나는 당시 14세로서 사실 결혼하기는 너무 이른 나이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생일이 1월이었으므로 불과 몇 달 뒤면 15세가 되었고, 15세면 당시로서는 혼인이 불가능한 나이도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과 무려 26세 차이가 나는 이 어린 소녀에게 혼인 의사를 밝힌 것이지요. (안나 파블로브나입니다. .. 2017. 12. 17.
사랑과 이별 - 조세핀과의 이혼 오스트리아와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을 기다리는 것은 아스페른-에슬링보다 더 힘든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나폴레옹 본인이 시작한 싸움이었습니다. 바로 이혼이었지요. 보통 남자였다면 나폴레옹이 조세핀과 이혼할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조세핀은 결코 이상적인 배우자가 아니었습니다. 황후에 걸맞은 품위와 교양 대신 허세와 낭비가 심했고, 결정적으로 나폴레옹이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하는 동안 젊은 미남자들과 바람을 피운 적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조세핀은 시댁 식구들과의 사이도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보나파르트 가족들은 처음부터 조세핀을 싫어했습니다. 그건 여러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시댁 식구들이 보기에 이제 막 출세를 시작한 집안의 대들보 나폴레옹이 나이도 많고 애까지 .. 2017. 12. 10.
누가 누굴 봉쇄한 것일까 - 나폴레옹과 영국 해군의 해상 봉쇄 최근 미국이 북한에 대한 해상 봉쇄에 나서겠다고 선언했지요. 해상 봉쇄란 사실 '빨갱이를 때려잡자'라는 구호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가령 유니세프에서 북한 아기들을 위해서 보내주는 백신 등 의약품도 막을까요 ?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요. 또는 태국이 북한으로 수출하는 쌀을 압류할까요 ? 그럼으로써 손해를 보는 태국 곡물 회사의 손해는 누가 보상해주나요 ? 쌀은 식량이니까 봐준다고 쳐도, 가령 몰리브덴(molybdenum)은 어떤가요 ? 이건 대륙간 탄도탄의 탄두 부분(nose cone)에 꼭 필요한 합금 재료이기도 하지만, 공구강 등 일반 산업용으로도 많이 쓰이는 금속입니다. 페루에서 북한에 수출하는 이 금속 자원을 미해군이 마음대로 몰수할 국제법적 근거가 있을까요 ? 이것이 해적 행위와 무엇이 다른.. 2017. 12. 3.
땅과 돈과 피의 평화 - 쇤브룬 (Schönbrunn) 조약 7월 11일 츠나임 휴전이 이루어지자, 전투 현장에 있던 장교들과 병사들은 양측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나, 총알이 날아오지 않는 안전한 곳에서 전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불만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일단 프랑스 측에서는 나폴레옹의 참모들, 특히 참모장 베르티에(Berthier)가 이 휴전에 반대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저 배은망덕한 합스부르크 왕가를 완전히 권좌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지요. 놀랍게도 오스트리아 측, 즉 합스부르크 궁정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직 충분히 싸울 수 있는데 왜 패배를 인정하고 휴전하느냐는 것이었지요. 양측의 불만은 다 근거가 있었습니다. 프랑스로서야 이기고 있는데 왜 그만 하느냐는 불만을 가지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측도 비록 물러서기는 했.. 2017. 11. 18.
바그람 전투 (제18편) - 통쾌하지 않은 승리 1809년 7월 6일 밤 바그람 전투의 총성이 잦아든 뒤 나폴레옹은 다른 전투에서처럼 '퇴각하는 적군을 즉각 추격 섬멸하라'고 부하들을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냉혈한인 그도 휘하 병사들이 거의 잠도 못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로 무려 40시간에 걸쳐 힘겨운 싸움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추격을 명하지 않은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비록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전투 이후 프랑스군의 라콩브(Lacombe)라는 장교가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전투 결과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적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그들을 패주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사실이었습.. 2017. 11. 11.
바그람 전투 (제17편) - 요한이 왔다 ! 나폴레옹은 우익에서의 다부의 성공적인 진격을 보면서 '막도날의 기둥'만을 출격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막도날의 기둥이 웅장한 모습으로 적과 충돌한 뒤, 그 뒤를 이어 우디노와 외젠 등 다른 부대들도 일제히 전면 공세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루스바흐 고지 위에서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카알 대공의 심정은 처참 그 자체였습니다. 막도날의 기둥이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진을 들이받고 혼전을 벌이고 있던 오후 2시경, 카알 대공은 다부의 공격에 의해 무너지고 있던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수습하기 위해 호헨촐레른의 오스트리아군 제2 군단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전체 전선에 걸쳐 쇄도해오는 프랑스 그랑다르메의 모습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사령부가 있는 라스도르프(Raasdorf) 마을 인근에 여유있게 집결.. 2017. 10. 21.
검은 나폴레옹 vs. 하얀 나폴레옹 - 백인들에게는 불편했던 영웅 (하편) 지난편에서 르클레르의 원정 함대가 1802년 1월말, 생 도밍그 인근 사마나 만에 집결하는 모습까지를 보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이 원정대의 임무를 다시 살펴보도록 하시지요. 나폴레옹이 르클레르에게 준 임무는 생 도밍그를 다시 프랑스 중앙 정부의 권위 밑으로 복귀시키라는 다소 고상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요 ? 투쌩을 죽이라는 말인가요 ? 왜요 ? 투쌩은 한번도 프랑스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을 하겠다거나, 반항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무슨 명분으로 투쌩을 잡아들이나요 ? 사실 이 원정대의 목적은 생 도밍그의 반란 노예들과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공식적인 임무는 새로운 주지사(Captain general)의 안전한 부임이었지요. 나폴레옹은 투쌩과 구태여 툭탁거리며 싸우고 싶지 않았습.. 2017. 10. 14.
검은 나폴레옹 vs. 하얀 나폴레옹 - 대서양 너머의 사정 (중편) 생 도밍그의 혼란과 살육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아름답고 풍요로운 유럽 대륙으로 잠시 되돌아 오도록 하지요. 나폴레옹은 이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기억들 하실려나 모르겠습닉다만, 1800년 12월의 호헨린덴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적어도 군사적으로는 상당히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 본인은 자신을 향한 암살 음모 등으로 무척 긴장된 나날을 보내고 있긴 했었지요. 아무튼 당시 아직도 프랑스와 군사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던 나라는 영국이 유일했습니다. 그러던 1801년 2월, 영국에서 중요한 사건 하나가 일어납니다. 바로 영국 수상 피트 (William Pitt the Younger)의 사임이었습니다. (피트 수상은 1759년 생으로서 나폴레옹보다는 10살 많았습니다. 그는 .. 2017. 10. 14.
검은 나폴레옹 vs. 하얀 나폴레옹 - 생 도밍그 (Saint Domingue) 원정 (상편) 1492년, 콜럼버스는 서쪽 바다의 끝에서 (사실은 카리브 해였는데) 큰 섬을 하나 발견합니다. 그는 이 섬에 스페인어로 La Isla Espanola (라 이슬라 에스파뇰라)라는, 즉 스페인 섬이라는 멋대가리 없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다 다른 사람들이 좀더 멋나게 Hispaniola 라고 고쳐불렀지요. 이 섬에는 원래 타이노 (Taino)라는 남미 인디오 계통의 부족이 살고 있었으나, 이들은 원래 수자가 적었는데다 스페인 사람들의 공격과 박해,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천연두 등의 전염병에 곧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집니다. 이 섬에는 자연스럽게 스페인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은 라틴 아메리카 지역 최초의 유럽식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산토 도밍고 (Santo Domingo.. 2017. 10. 13.
1834년, 사상 최초의 해킹 사건 발생하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해킹이라는 말의 뜻은 '컴퓨터나 네트워크에 대한 인가되지 않은 침입'을 뜻합니다. 당연히 해킹이라는 범죄는 컴퓨터가 발명된 이후에 나왔을 것 같지만, 실은 최초의 해킹 범죄는 1834년 프랑스에서 벌어졌고, 그로 인해 범인은 꽤 상당한 금전적 이익도 챙겼으며, 결국 체포되어 재판까지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재판 결과는 무죄였고, 이 사건 때문에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는 소동까지 벌어졌지요. 19세기 전반에 해킹이라니 ! 대체 어떤 사건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 때는 17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전화도 무선통신도 없던 시절 가장 확실하면서도 빠른 통신 수단은 촛농으로 봉인한 편지를 쾌마를 탄 전령이 직접 들고 뛰는 파발마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이 빨라도 이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 2017. 10.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