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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449

새벽 2시의 대화 - 나폴레옹과 콜랭쿠르 말로야로슬라베츠를 떠난 나폴레옹은 이틀이 지난 10월 28일에야 모즈하이스크에 도착하여 모르티에 및 쥐노와 합류했습니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서 체포되어 압송되어 온 러시아 유격부대 지휘관 빈칭게로더를 만났는데, 이 사람은 원래 뷔르템베르크(Wurttemberg) 태생이었고 뷔르템베르크는 사실상 나폴레옹의 통치 하에 있는 라인 연방국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러시아 정규군 장군이었던 빈칭게로더에 대해 나폴레옹은 단지 뷔르템베르크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을 배신한 부하 취급을 하며 '당장 총살시켜버리겠다' '스파이로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라며 엄청나게 화를 내며 험악한 말을 쏟아 냈습니다. 더 나아가 여기서 전쟁으로 파괴되지 않고 꽤 상태가 좋은 주택을 하나 만나자 '이 야만인들(Mes.. 2021. 6. 7.
승자의 번민, 패자의 고뇌 - 3개의 선택지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는 분명히 나폴레옹의 승리였으나 나폴레옹은 꼭 웃을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그랑다르메는 약 6천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당시 말로야로슬라베츠 인근에 모인 그랑다르메 병력은 약 7만이었는데, 그 중 10% 정도를 잃은 것이었고 전투에 투입된 2만7천 중 20%를 넘는 사상자를 낸 셈이었습니다. 점점 격렬해지는 전투 양상 때문에 특히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이후로는 승전한 군대의 사상률도 그 정도 나오는 것이 보통이라고 하지만 1806년 프로이센 원정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건 패전할 때나 나오던 사상률이었습니다. 물론 러시아군은 더 큰 피해를 입어 약 8천 정도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계속 증원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러시아군이 이 전투에 동원한 354문이라는 막대.. 2021. 5. 31.
이탈리아 사내들의 열정 -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 말로야로슬라베츠를 선점당한 독투로프는 아차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외젠의 이탈리아 군단 주력 부대는 아직 말로야로슬라베츠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약 2개 대대 정도만이 마을을 점거하고 있었고, 나머지 대부분의 부대는 루즈하 강의 건너편인 북쪽 강변에 캠프를 치고 있었습니다. 루즈하 강은 말로야로슬라베츠에서 북쪽이 열린 반원형을 그리며 크게 휘어 북서쪽을 향해 흐르는 강이었습니다. 말로야로슬라베츠는 그 반원호의 정점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는 마을이었는데, 나폴레옹이 메딘(Medyn)을 거쳐 서쪽 스몰렌스크로 가려면 루즈하 강을 건너야만 했고, 그러기에 가장 좋은 곳이 바로 여기 말로야로슬라베츠에 놓인 다리였습니다. (루즈하 강의 대략적인 지도입니다. 우하단의 만곡부에 말로야로슬라베츠가 있습.. 2021. 5. 24.
상대는 "쿠투조프+나폴레옹" - 말로야로슬라베츠를 향하여 나폴레옹이 10월 18일 저녁부터 모스크바에서 병력을 빼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불과 10시간도 안되어 타루티노의 쿠투조프에게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전달한 것은 볼고프스키(Bolgovsky)라는 이름의 중위였는데, 새벽에 말을 달려온 그는 참모들에 의해 쿠투조프의 침실로 직접 안내되었습니다. 침실에 가보니 자다 일어나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프록코트를 어깨에 걸친 채 침대에 앉은 노친네가 '말해보게 친구'라며 소식을 재촉했는데, 프랑스군이 철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쿠투조프는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흐느끼며 방 한구석의 성상을 향해 "주여 감사합니다, 드디어 저의 기도를 들어주셨군요. 이제 러시아는 구원받았습니다!" 라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쿠투조프와의 착각과는 달리, 나폴레옹은 적.. 2021. 5. 17.
나폴레옹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그 놀라운 유사성 최근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이 나폴레옹을 추모하며 '그의 공과 과를 모두 끌어안아야 한다'라고 했다지요?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지도자들은 나폴레옹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어지간하면 회피합니다. 그만큼 기피 인물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유가 있지요. 나폴레옹은 사실상 당대에는 히틀러급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배웁니다. 그래서 모든 나라의 중요 교과목에는 반드시 역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지요. 실제로 많은 역사가 되풀이되었고, 이는 특히 주식 시장에서 그렇습니다. 에드워드 챈슬러라는 영국 기자가 쓴 "금융투기의 역사" (국일증권경제연구소 펴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정말 놀랍다. 어떻게 똑같은 덫에 한번도 빼먹지 않고 걸.. 2021. 5. 13.
욕망의 무게 - 배낭과 수레 모스크바를 떠나는 그랑다르메의 모습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사람과 말의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병사들의 혈색이 붉그스레 건강해 보이는 것에 비해, 마차와 포가를 끄는 말들의 모습은 눈에 띄게 마르고 병약해보였습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 특히 기병대의 손실이 컸을 뿐만 아니라 원정 내내 고질적이던 사료 부족 문제가 모스크바에서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마차와 수레가 너무 많았습니다. 포병대에 딸린 포가와 탄약 수송차, 그리고 대대마다 딸린 솥단지와 머스켓 탄약포 등의 짐을 실은 마차 등 규정된 군용 마차 외에 어중이떠중이 민간용 마차와 수레가 최저 1만5천대에서 최대 4만대까지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총병력수가 10만도 안되는데 마차와 수레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 2021. 5. 10.
모스크바를 떠나며 - 병사들의 환호 타루티노 전투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흥분했습니다. 그는 수여 중이던 레종 도뇌르 훈장들을 거의 뿌리다시피 서둘러 나눠주고는 아직 세부 계획이 진행 중이던 그 다음날 군부대들의 모스크바 철수를 서둘러 지시했습니다. 그는 이 과정 중에 무척 조바심을 내며 안절부절했는데, 최근 뭔가 서류를 들고 마침 이 자리에 있었던 보세 추기경 (Louis-François de Bausset)은 그 모습에 대해 훗날 회고록에서 '여태까지 외면해오던 모든 진실을 한꺼번에 직면한 사람의 모습'이라고 평했습니다. (보세 추기경입니다. 추기경이 뭔 이유로 최전선 모스크바까지 왔었을까 궁금하신가요? 보로디노 전투 직전 나폴레옹이 그의 아들 로마왕의 초상화를 배달받고 무척 기뻐했다는 이.. 2021. 5. 3.
쿠투조프, 두 도시를 뒤흔들다 - 타루티노 전투 타루티노에 주둔한 쿠투조프의 러시아군이 충분한 보급과 병력 보충을 받아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말씀은 이전에 드렸습니다. 타루티노에 약 4만의 패잔병들을 이끌고 도착한 쿠투조프는 직후부터 매일 장비와 보충병을 받아 약 4주 후에는 8만8천의 정규 병력과 함께 1만3천의 돈(Don) 강 유역 출신의 코삭 기병대, 그리고 기타 비정규 기병대 1만5천을 거느리게 되었고, 620문이 넘는 포병대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 병력이면 모스크바로 진격하여 나폴레옹과 다시 한번 자웅을 겨뤄볼만 했습니다. 그러나 물론 쿠투조프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짜르 알렉산드르가 친절하게도 이 부대를 이렇게 저 부대를 저렇게 움직여 나폴레옹을 포위 섬멸하는 상세한 작전 계획서를 작성하여 보내주며 '이대로만 하면 러시아의 승리.. 2021. 4. 26.
오만과 편견 - 모스크바 철수 계획 (3) 나폴레옹은 모스크바 일대에 주둔한 다부와 네, 모르티에 원수의 군단들에게 3개월치의 곡물과 6개월치의 양배추 절임을 준비하도록 지시했습니다. 3개월치의 건빵과 밀가루는 그렇다치고, 6개월치의 양배추 절임은 그야말로 월동준비였습니다. 또한 모스크바 시내의 주요 수도원들과 크레믈린 궁전의 방어시설을 든든히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또한 이젠 말이 없어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던 기존 기병대원들에게 머스켓 소총을 지급하고 나폴레옹의 주력부대가 '원정'을 떠난 사이 모스크바를 지키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개인 궁정 식솔들 중 상당부분도 그의 '원정'에서 제외시키고 크레믈린 궁전에 남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출발 바로 직전인 10월 18일, 그는 포병감이던 라리봐지에르(Jean Ambroise Bast.. 2021. 4. 19.
뻔한 길, 복잡한 길 - 모스크바 철수 계획 (2) 후퇴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디로 후퇴하느냐였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습니다. 스몰렌스크였지요. 그 다음 문제는 '어디까지 후퇴하느냐'였는데, 스몰렌스크에서 겨울을 날지 혹은 빌나까지 아니면 민스크까지 후퇴할지는 일단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스몰렌스크까지 빨리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1차 목적지를 정하고나니 실무적으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어디 길로 가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진격할 때는 이건 문제가 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예카테리나 대제가 닦아놓은 모스크바-스몰렌스크 사이의 대로를 이용하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후퇴를 하려고 보니, 바로 1~2달 전에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 과연 현명한 생각인지가 의심스러웠습니다. 이 길로.. 2021. 4. 12.
Go back ! Go back ! - 모스크바 철수 계획 (1) 흩날리는 첫눈을 보며 갑자기 정신을 차린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두르자. 20일 안에 겨울 숙영지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겨울 숙영지라니, 그게 어디였을까요? 파리와의 연락망을 유지할 수 없는 모스크바가 겨울 숙영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보로디노 전투 이전, 나폴레옹이 생각하던 겨울 숙영지는 크게 3곳이었습니다. 스몰렌스크, 빌나, 그리고 민스크였습니다. 그 중 스몰렌스크는 벨로루시(백러시아)와 러시아의 경계를 이루는 러시아 본토의 관문으로서, 아직 여기에는 겨울 숙영을 위한 물자 비축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만, 모스크바에서 불과 12일 정도만 행군하면 도달할 수 있는 가까운 위치였습니다. 그에 비해 빌나와 민스크는 사실상 원정 출발점에 해당하는 지점으로서, 스몰렌스크부터 다시.. 2021. 4. 5.
끊어져서는 안되는 것 - 나폴레옹의 약점 여태까지 보셨듯이, 모스크바에 주둔한 그랑다르메의 상태는 당장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식량이나 숙소 문제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의 공언대로, 그랑다르메가 모스크바에서 겨울을 편히 지낸 뒤 봄이 되면 상트 페체르부르그로 알렉산드르 사냥을 떠나는 것은 그다지 나쁜 계획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부 부족하거나 불안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장교들이건 병사들이건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나폴레옹이 있었거든요! 기병대 군마들이 픽픽 쓰러지는 모습을 마음 아파하던 제5 폴란드 기마 라이플 연대의 중위 뎀빈스키(Henryk Dembinski)도 자기들끼리 향후 전황에 대해 우울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결론은 언제나 '나폴레옹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신뢰의 확인으로 .. 2021. 3.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