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28 23:47

현대적인 군함들의 수명은 대략 몇년일까요 ?


저도 고딩 시절에 한때 해군사관학교 진학이 꿈이라서 관심이 좀 있는 편이었습니다. 그때 들은 이야기가, 당시 우리나라의 주력함인 구축함들은 미군이 2차세계대전 이후 쓰던 것을 60년대에 한국에게 넘겨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중 인상적인 부분이, 그 통로나 선실의 쇠바닥에는 미끄럼 방지용으로 원래 격자 무늬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당시 우리나라 구축함들은 그 격자 무늬가 다 닳아서 매끈매끈 해졌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사관학교 안 갔거든요.

 

네이버 같은 곳을 찾아보니, 돈많은 미국같은 나라는 대개 군함의 수명을 30~40년으로 잡는 모양입니다.  아마 더 오래 쓸 수도 있지만, 유지 보수비도 많이 들고, 또 30~40년전의 무기체계로는 최신예 장비를 갖춘 적군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략 그 정도만 쓰고 퇴역시킨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예외는 매우 많습니다.  가령 미국 항공모함 USS Nimitz는 1972년에 진수되어 1975년에 취역한 뒤 지금까지 현역으로 잘 뛰고 있는데, 기대 수명은 50년으로서 2025년 경에 현역에서 물러날 예정입니다.






(니미츠 클래스 항모의 네임쉽인 USS Nimitz입니다.  할아버지가 타던 배에 손자가 복무합니다.)


 


강철로 만든 군함도 30~40년 정도만 쓰는데, 나무로 만든 목조 군함의 경우 몇년을 썼을까요 ?  신기하게도 역시 대략 30~40년 정도를 썼다고 합니다. 

 

1792년부터 1815년 사이,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 영국 해군의 군함 명부를 보면, 각 군함이 언제 진수되어 언제 퇴역했는지가 나옵니다.  가령 1급함, 즉 포 100문짜리 전열함인 HMS Britania 호의 경우, 1762년에 진수되어 1812년에 St. George 호로 이름을 바꾼 기록이 있습니다.  최소한 50년 이상 현역에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2급함인 HMS Atlas 호의 경우 1782년 진수되어 1814년에 '항구 임무'로 전환됩니다.  32년간 현역에 있었다는 겁니다.  HMS Princess Royal 호의 경우는 1773년 진수되어 1807년에 폐기 처분됩니다.  34년입니다. 






(1670년에 진수된 HMS Prince입니다.  무려 120년간 현역으로 뛰었습니다.  정말 할아버지가 근무하던 군함에서 손자를 거쳐 증손자까지 탈 정도네요.)



 

영국 해군 역사상 최장 기간 동안 현역으로 있었던 군함은 HMS Royal William 호였습니다.  1670년 HMS Prince라는 이름으로 100문 짜리 전열함, 즉 1급함으로 화려하게 군생활을 시작한 이 군함은, 1719년 HMS Royal William이라는 이름의 84문 짜리 3급함으로 개조됩니다.  결국 1790년까지 무려 120년간을 현역에서 복무합니다.  '항구 임무'로 전환된 뒤에도 23년간 더 생존하다가, 1813년 마침내 폐기처분됩니다. 





(목재를 짜맞춰 만든 배에서 어떻게 물이 안 샐 수 있을까요 ?  비결은 간단합니다.  물이 그냥 샜습니다 !  그걸 막기 위해 사진 속에서처럼 그 틈을 저런 뱃밥 oakum을 끌과 망치로 때려 박아 메웠습니다.  그 위에 덧붙여 타르를 칠하기도 했지요.)



 

이렇게 오래된 배들은 당연히 문제가 많았습니다.  원래 나무로 만든 배들은 항상 물이 샜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컴퓨터도 없고 정밀 공작 기계도 없던 시절에 사람이 손으로 톱질을 해서 만든 목재를 이어붙여 만든 선체에서 목판 사이로 물이 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목판 사이의 틈을 매우기 위해서 무엇을 썼을까요 ?  우리 말로는 보통 뱃밥이라고 번역되는, oakum(오컴)이라는 것을 썼습니다.  이 뱃밥이라는 것은 당시 범선에서 많이 쓰이던 밧줄 중에서 낡고 굳어서 못쓰게 된 것을 풀어낸, 그러니까 삼나무 섬유 부스러기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뱃밥이라는 것을 만드는, 즉 오래된 굳은 밧줄을 풀어내는 일은 일일이 손으로 해야하는, 엄청나게 고되고 손끝이 다 부르트는 중노동이었습니다.  당시 이런 뱃밥 만드는 작업은 극빈층의 아동들이나 죄수들이 주로 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밤에 가난한 가족들이 모여 앉아 새끼를 꼬았는데, 영국에서는 새끼를 풀었군요 !)  제가 좋아하는 샤프 시리즈에서도, 주인공 샤프가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이런 밧줄을 매일 2미터 이상 풀어헤쳐야 했다고 회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교화소에 수용된 죄수들이 밧줄을 풀어 뱃밥, 즉 oakum을 만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뱃밥은, 조선소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배의 선체가 만들어지면, 이 뱃밥을 목판 사이사이에 단단히 그리고 촘촘히 박아넣고, 그 위에 뜨거운 타르를 칠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물이 샜지요.  그래서 당시 범선들에는 반드시 앞뒤 갑판에 펌프가 달려있었습니다.  바닥에 고인 물을 퍼내야 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당시 배는 틈 사이로 새들어오는 물의 양이, 선원들이 펌프질해서 퍼내는 물의 양보다 많아지면 침몰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선원이 타고 있지 않은 배, 또는 선원들이 농땡이질하는 배는 결국 언젠가는 침몰하는 것이었지요.  또, 오래된 배일 수록, 뱃밥과 타르가 굳어서 배의 목판 사이에서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삐져나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래된 배일 수록 물이 더 많이 샜던 것입니다.  사정이 이랬기 때문에, 굳이 오래된 배가 아니더라도, 폭풍이 몰아치거나 전투가 한창인 중에도, 담당 사관은 함장에게 '현재 선창에 고인 물의 수위는 3 피트입니다' 라는 식으로 현재의 침수 정도를 주기적으로 보고해야 했습니다.  상황이 나빠지면 전투 중에라도 대포에서 인원을 빼내어 펌프에 충원을 해야 했겠고, 더 손쓸 수 없는 상황까지 가버리면 '전원 권총과 검을 준비하라. 적함을 탈취한다' 라고 명령을 내려야 했을 겁니다.

 

 




(당시의 목재 범선은 어지간한 포격으로는 침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상 전투는 대개 근접 백병전으로 결정이 났습니다.  대포알이 낮게 날아오는 경우도 바다 위를 물수제비처럼 통통 튀어 홀수선 위를 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가끔 흘수선 아래를 강타한다고 해도 물 속에서는 대포알의 속도가 크게 줄었으므로 위력이 강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끔 흘수선 아래를 강하게 때린 대포알 때문에, 목판 사이의 틈이 더 벌어지거나 아예 구멍이 뚫리는 경우도 가끔 발생했습니다. 그런 경우 저런 백병전이 훨씬 더 치열하게 전개되었겠지요.  두 척이 엉겨 붙었는데, 싸움이 끝난 뒤에는 한 척만 떠있을 테니까요.) 




심한 경우, 이렇게 물이 새는 것이 심해져 배가 대양에서 침몰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습니다.  암초에 부딪히거나 해안가에 좌초한 것도 아닌데, 퍼내는 물보다 새어 들어오는 물이 더 많아서 결국 침몰하는 것을 침수 침몰(foundering)이라고 합니다.  대개 이런 침수 침몰은 폭풍을 만난 경우에 발생했습니다.  18세기 ~ 19세기 중반까지의 표준 전열함이라고 할 수 있는 74문짜리 3급 전함은 대개 배수량 약 1700~1800톤 정도의 크기였는데, 나무로 만들고 바람으로 움직이는 범선 구조상 이 정도의 크기가 속도나 항행성, 내구력, 그리고 경제성에서 가장 좋았기 떄문이었습니다.  당시의 함대전은 이런 3급 이상의 전열함들만 전열에 낄 수 있었고, 그 이하의 프리깃함 등은 함대전에서는 깃발 신호 중계기 정도의 역할만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귀한 전열함이 적의 대포가 아닌 바닥에서 샌 물 때문에 침몰한다면 정말 비극이겠지요.  그런 일을 막기 위한 노력 중의 하나로, 이 시대의 군함 바닥은 구리판으로 덮혀 있었습니다.  구리판은 지금도 비싼 물건입니다만, 당시엔 더욱 비싼 자재였습니다.  따라서 국왕의 군함 외에는, 돈 많은 무역 회사가 주문한 비싼 선박에만 이런 구리판을 덮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바닥에 구리판을 덮었다는 것은 바닥 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도 고급 자재를 써서 튼튼하게 만들었으므로 믿을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지금도 copper-bottomed 라는 단어는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이라는 뜻의 형용사로 쓰입니다.  이렇게 목조 군함의 홀수선 아래 부분을 구리로 덮는 것을, 흔히 따깨비나 해초가 달라붙어 군함 속력이 느려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보다는 그런 것들로 인해 뱃바닥의 치명적인 부식 손상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차피 구리판으로 덮건 안 덮건 따깨비와 해초는 달라 붙었거든요.  








(배 바닥에 달라 붙은 따깨비와 해초 등을 걷어내고 바닥재를 손보는 작업을 careening이라고 합니다.  당시엔 드라이독이 없었으므로, 저렇게 적절한 해변가에서 썰물 때 좌초할 위치에 배를 위치시켜 놓았다가 물이 빠져 배가 기울어지면 작업을 했습니다.  이렇게 careening을 할 만한 해변를 가리키는 단어까지 있는데, careenage라고 합니다.  닻을 내릴 만한 곳을 anchorage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도 아마 그런 뜻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3급 이상의 대형 전열함들도 침수 침몰(foundering)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해군 장교 잭 오브리와 군의관인 스티븐 머투어린의 모험을 그린 Patrick O'Brian의 명작 해양 소설 시리즈 중 하나인 Desolation Island 편에 그런 위기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 속에서, 1811년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호주로 향하던 잭 오브리의 전함 HMS Leopard가 한밤중에 빙산에 부딪히는 바람에 물이 거세게 새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깜깜한 밤중에 난리가 났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모든 선원들이 교대로 펌프에 붙어 거세게 물을 퍼내야 했습니다.  보통 이런 육체 노동은 당연히 수병들의 몫이지만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장교고 뭐고, 심지어 작은 체구의 군의관인 머투어린까지도 순번을 정해 온 힘을 다해 펌프질 하는데 동원됩니다.  그 결론이 어떻게 나는지는 스포일러이므로 여기서는 생략...






(HMS Leopard는 실존하는 군함으로서, 50문의 대포를 갖춘 약 1천톤 정도 되는, 프리깃함보다는 크고 전함보다는 작은 제4급함이었습니다.  이 군함이 유명해진 것은 1807년 중립국인 미국 프리깃함 USS Chesapeake를 검문하기 위해 급습하여 항복을 받아낸 뒤, 영국 해군 탈영병 출신인 미해군 수병 4명을 체포한 뒤 교수형에 처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소설 속과는 약간 다르게, 이 배는 결국 1814년 캐나다 해변가에서 좌초되어 파선되었습니다.  위 그림에서 왼쪽이 체셔피크 호이고, 오른쪽에서 기습적인 일제 포격을 퍼붓는 것이 레오파드 호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침수 침몰은 폭풍 등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상황에서 발생했습니다.  목조 범선이 거센 파도에 버티지 못 하고 침수되는 주된 이유는, 못으로 목판을 접합하고 그 틈을 뱃밥과 타르로 틀어막아 놓은 것이 거센 파도 속에서 버티지 못 하고 틈이 벌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워낙 거센 폭풍 속에서는 현대적인 항해 장비를갖춘 강철 화물선도 일년에 몇 척씩 침몰하고 있으므로 당시의 목조 범선으로서는 불가항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가 좀더 튼튼하게 만들어지고 잘 유지 정비되고 있었다면 무사히 견딜 수 있는 경우도 많았겠지요.  그러나 대서양이나 인도양 등, 망망대해에서 소식이 끊긴 전함들이 과연 어떤 상황 속에서 침수 침몰 되었는지, 그것이 배가 부실하게 건조되거나 유지 정비가 불량했던 것이 원인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가령 HMS Blenheim이라는 영국 전열함은 1755년 90문의 포를 갖춘 1800톤의 2급 전열함으로 건조되었다가, 1801~1802년 사이에 74문의 포를 갖춘 3급 전열함으로 개조된 배였습니다.  이 블렌하임 호는 1807년 프리깃함 HMS Java 및 슬룹함 HMS Harrier와 함께 인도 마드라스(Madras)에서 출항했다가 인도양에서 만난 폭풍 속에서 자바 호와 함께 침수 침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블렌하임 호에 승선했던 590명, 그리고 자바 호의 280명의 수병들은 모두 돌아오지 못 했지요.  추측하기로는 블렌하임 호가 무려 52년이나 된 낡은 배라서 폭풍을 견디지 못 하고 침몰하기 시작했는데, 자바 호가 폭풍 속에서 그 수병들을 구조하다가 함께 변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한답니다.






(이 그림은 또다른 영국 전함 HMS Centaur의 침몰 및 생존 선원의 탈출을 그린 것입니다.  이 배는 1782년 캐나다 연안 뉴 펀들랜드에서 허리케인을 만나 침수 침몰했습니다.  400명의 수병이 목숨을 잃었는데, 선장인 존 잉글필드는 11명의 생존 선원을 저런 쪽배에 태우고, 아무런 해도나 나침반 없이 무려 16일 동안 항해하여 대서양 한 가운데인 아조레스 제도에 도착했습니다.  항해를 시작할 때 저 배에 물이라고는 딱 2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제는 굳이 낡은 군함이 아니더라도, 뇌물과 부정행위로 범벅이 된 해군 건조창 탓에, 불과 20~30년된 군함들도 이런 침수 침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Post Captain by Patrick O'Brian (배경: 1803년 영불 해협) ----------------

 

(함장 잭 오브리의 함장실에서 잭과 스티븐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여기 자네가 관심있어할 만 한 것이 있네. 자네 '강도 볼트(robber-bolt)'라는 거 들어본 적 있나 ?"

 

"아니, 없네."

 

"이게 그거라네."  그는 한쪽 끝에 커다란 너트가 달린, 짧고 굵은 구리 봉을 내밀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볼트라는 것은 굵은 목재판을 관통해서 선체 접합에 사용되는 것이라네.  가장 좋은 재료는 구리지.  녹이 슬지 않으니까.  구리는 비싼 물건이라네.  아마 2 파운드의 구리, 즉 짧은 구리 볼트 한 개면 조선소 기술자의 하루 일당은 될 거야.  만약 자네가 아주 나쁜 악당이라면, 볼트의 중간은 잘라내고, 양쪽 끝만 선체에 박아넣어서 마치 멀쩡한 접합부인 것처럼 해놓고, 그 잘라낸 구리 볼트를 팔아서 돈을 챙길 수 있네.  실제로 선체가 벌어지기 전에는 아무도 발견할 수 없어.  그리고 선체가 벌어지는 것은 배가 세상 저 반대편 바다에 나가 있을 때겠지.  게다가 배가 그런 식으로 침수 침몰하면, 아무 흔적이나 형체도 남기지 않는다네."

 

"이 사실을 언제 알았나 ?"

 

"난 처음부터 의심했었네.  힉맨 조선소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는 이 배가 아주 형편없이 만들어졌을 거라는 것을 짐작했었어.  게다가 그 조선소의 역겨운 인간들은 자재를 아주 몰염치하게 다루지.  하지만 확신한 것은 바로 며칠 전이야.  이제 이 폴리크레스트 호가 바다에 나와서 좀 힘을 받으니까, 그 사실이 분명해지더군.  난 이걸 선체에서 내 손가락으로 뽑아낼 수 있었다네."

 

"적절한 기관에 이 사실을 알릴 수 없었나 ?"

 

"할 수 있었지.  조사를 요청한 뒤 한달이나 6주 정도 기다릴 수 있었어.  하지만 그러고난 뒤에 난 어디로 가겠나 ?  이건 조선소의 일이고, 군함 상태가 어떻건 간에 검수를 통과한다거나, 보잘 것 없는 서기들이 그런 일들을 꾸민다는 뭐 그런 음울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네.  아니. 난 그냥 이 배를 몰고 나오고 싶었어.  사실 여태까지는 이 배가 풍랑에도 잘 견뎌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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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해군의 자랑...이 아니라 수치였던 40척의 도적들, 뱅고어 급 전함 중 하나인 HMS Asia 입니다.)




원래, 당시 영국 해군 군함들 중 좋은 것들은 대개 프랑스 해군이나 스페인 해군에서 나포한 것들이었고, 영국 해군 조선창에서 만든 배들은 항행성이나 내구성 면에서 매우 실망스러웠다고 합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인 1806년부터 민간 조선소와 계약을 맺고 1809년부터 진수되기 시작한 뱅고어 급(Vengeur-class) 전열함 40척은, 단일 급으로는 가장 많은 척수가 건조된 최대 규모의 전열함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러나 그 규모에 비례하여 방산 비리도 최대 규모급으로 심각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 전열함들의 품질이나 성능이 그야말로 영국 해군의 수치로 여겨져서, '아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빗대어 '40척의 도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습니다.  당시 해군 인사들은 이 뱅고어급 전함들의 문제를 탐욕스러운 민간 조선소에 무분별하게 위탁 건조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비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40 척의 도적 전열함들 중 침수로 인해 침몰로 최후를 맞은 전함들은 단 1 척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전열함들이 알고 보니 우수한 전열함이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전열함들의 성능과 내구성에 대해 악명이 자자했으므로, 그만큼 해군이 더 조심조심 운용했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전열함들 중 주요 해전에 참여하여 이름을 빛낸 것들은 몇 척 없고, 대부분 호위 등의 평이한 임무를 맡아 조용히 죽어 지내다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가늘고 길게 산다는 말이 딱 맞아서, 이들 중 일부 전함은 증기 기관을 탑재한 부유 포대(floating battery, blockship)으로 개조되어 1850년대의 크림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목조 군함들 중, 놀랍게도 현재도 남아있는 군함이 있습니다.  바로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 해전 때 기함으로 사용했던 HMS Victory 입니다. 1765년 당대 최고의 군함 설계자인 토마스 슬레이드 경에 의해 진수된 이 100문짜리 1급 전함은, 1805년 넬슨과 함께 트라팔가 해전을 치른 뒤, 1822년에 가서야 헐크선으로 전환됩니다.  무려 57년간의 현역 생활이었습니다. 이 상태로 소금물에 바닥을 담근 채 1922년까지 있다가, 그 해에 드라이 독으로 옮겨져서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위 그림은 1925년 드라이독에서 복원 작업이 한창인 HMS Victory의 모습입니다.  빅토리 호는 1812년 현역에서 물러난 뒤 아무 하는 일 없이 항구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는데, 1831년에는 해체 명령이 떨어지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빅토리 호의 해체 명령서에 서명을 하고 왔다는 해군성 장관의 말에 그 장관 부인이 눈물을 터뜨리며 당장 사무실로 돌아가 그 명령을 철회하라고 조른 덕분에 오늘날 빅토리 호는 영국의 주요 관광 자원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 군함들은 모두 오크, 즉 떡갈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군함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떡갈나무의 평균 나이는 대략 80~100년이었습니다.  떡갈나무라고 아무거나 다 배에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배에서 구조역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무릎(knee)'이라고 하는 ㄱ자 곡재는 워낙 힘을 크게 받는 부분이라서 그냥 직선의 나무를 깎아서 만들면 충분한 강도를 낼 수 없었고, 나무의 줄기와 가지가 자연스럽게 원하는 각도로 자란 것을 골라 써야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구하기도 어려웠고, 값도 비쌌겠지요.  영국이 밀림이라서 100년짜리 떡갈나무가 동네마다 빽빽히 들어서 있는 것도 아니었고, 또 영국은 농경지 확장 뿐만 아니라 제철업 때문에 목재가 연료로 많아 소모되어 숲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목재의 공급이 부족했다는 뜻이지요.  결국 군함의 자재 또는 각종 건축 및 가구용 목재는 대개 발트해 지역 국가들, 특히 스웨덴 등으로부터 수입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스웨덴과는 항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나폴레옹이 스웨덴 쪽에 손을 뻗칠 때 영국이 특히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저 지도 상에서 헬싱괴르와 헬싱보리 사이의 좁은 해협을 보십시요.  저 곳에 장거리 포만 배치하면 해협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 시대의 대포로는 사정거리와 화력 문제로 완전 봉쇄는 어려웠지요.)




발트해의 지리적 특성은 목재 수입에 있어 더더욱 스웨덴과 영국의 관계를 특수하게 만들었습니다.  지도를 보면 발트해에서 북해로 빠져 나오려면 덴마크 젤란트 섬과 스웨덴 사이의 외레순 해협을 반드시 통과해야 했습니다.  영국으로 오는 스웨덴 목재 수송선 대부분도 이 해협을 통과했고요.  당시 외레순 해협은 적어도 영국에게는 오늘날 유조선들의 주요 통과 해협인 호르무즈 해협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당연히 저 좁은 해협 양안에는 튼튼한 요새가 들어섰습니다.  그 덴마크 쪽인 헬싱괴르에 있는 크론보르 Kronborg 성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배경이 된 성이지요.)



 

18세기 말, 1척의 3급함, 즉 74문의 대포를 탑재한 전열함을 건조하기 위해서는 대략 5만 파운드의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액수를 현재 피부로 느껴지는 가치로 환산하기 위해, 금 1g의 현재가를 약 4만7천원으로 가정한다면, 5만 파운드는 대략 145억 정도에 해당합니다.  현재 우리 해군의 주력함인 KDX-3의 경우 약 5천억~1조원이 든다고 하지요.  대신 당시 영국 해군은 이런 군함을 100여 척 정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현재 해군은 KDX-2급 함정도 10척 미만일 겁니다.  (구체적인 숫자는 저도 잘 모릅니다 !)  하긴, 예전에 이런 군함 10척이 하던 일을 이런 현대적 군함 1척이 하고도 남겠지요.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ships_of_the_line_of_the_Royal_Navy

https://en.wikipedia.org/wiki/Oakum

https://en.wikipedia.org/wiki/Vengeur-class_ship_of_the_line

https://en.wikipedia.org/wiki/Copper_sheathing

http://dictionary.cambridge.org/dictionary/english/copper-bottomed

https://en.wikipedia.org/wiki/Royal_Charlotte_(1789_ship)

https://en.wikipedia.org/wiki/HMS_Centaur_(1759)

https://en.wikipedia.org/wiki/Chesapeake%E2%80%93Leopard_Affair

https://en.wikipedia.org/wiki/HMS_Leopard_(1790)

https://en.wikipedia.org/wiki/HMS_Blenheim_(1761)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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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게일 2016.10.29 0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읽고갑니다!

  2. 장웅진 2016.10.29 0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구 말마따라 혼이 비정상적인 자들이 생계형 방산비리를 저지르는 데 있어 어느 호빠 과장의 20살 연상 여친이 관꼐하고 있었을... 읍! 읍!

  3. ... 2016.10.29 07: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8세기 ~ 19세기 중반까지의 표준 전함이라고 할 수 있는 74문짜리 3급 전함 을 막기 위한 노력 중의 하나로, 이 시대의 군함 바닥은 구리판으로 덮혀 있었습니다." <--- 뭔가 중간에 문장이 날아갔나 봅니다.

    Leopard는 "레퍼드"겠지요. "레오파드"가 아니고.

  4. 연구자 2016.10.29 1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조선시대에서도 수군이 엄청 고생했다고 하는데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네요.

  5. 정명실 2016.10.29 16: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습니다^^

  6. 최홍락 2016.10.30 1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비교대상이 조금 다르긴한데 상선들의 경우 선령이 보통 30년 넘어가기 어렵습니다. 선박금융 상환, 용선, 연비, 감가상각 등 여러가지 요소를 감안할때 보통 30년 정도 지나면 해체시키게 됩니다. 요새는 배출가스 규제 및 연비 절감을 위한 선사들의 선대 조정 등으로 인해 20년밖에 안 지난 선박들도 해체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지요. 다만 LNG선 또는 크루즈선의 경우 40년 지난 배들이 돌아다니는 케이스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2. 전함의 경우 한국의 경우 기어링급 구축함을 50년이 지나도록 운용했다가 퇴역시킨 바 있고요. 영국해군의 경우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로부터 나포한 테메레르급 전열함 두가이 트루앵호를 테메레르급 전열함 임플라커블 호로 개칭하여 건조된 지 150년이 다 되어가는 제 2차 세계대전 석탄운반선으로 사용 후 되었는데, 1949년에 해체되었다고 합니다.

  7. javaxer 2016.10.30 14: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부실시공 배라...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 최홍락 2016.10.30 2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3년 9000TEU급 (TEU는 20피트 크기 컨테이너를 뜻하는 단위로 컨테이너 9000개 정도 적재할수 있는크기입니다) 컨테이너선이 인도양 한가운데에서 침몰한 적이 있는데요. 이때 배가 한 가운데가 두 동강이 나서 며칠간 표류하다가 결국 침몰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선주는 일본선사인 MOL로 배는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만들어진 배였는데 건조한지 10년 정도 밖에 안된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갈라진 사건이라 업계에서는 충격이 조금 있었지요.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는데 당시 선급이었던 영국 로이드사의 추정으로는 피로파괴가 원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선사들의 용접에 대한 검사가 많이 까다로워졌는데 일부 그리스 선사들은 이미 발주하여 조선소에서 건조중인 선박들이 파이낸싱이나 용선이 안된 경우 배를 가져가는 것을 지연시키거나 계약 취소 및 선가 인하를 유도하기 위해 용접에 대한 검사를 까탈스럽게 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지요.

  8. starlight 2016.10.30 17: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나 지금이나 방산비리는 도처에 넘쳐나군요. 나라 안보와 관련해 세금을 삥뜯는 것들은 정말 단죄를 받아야합니다.

  9. mip 2016.11.01 02: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10. 애독자 2016.11.10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고 있는것과 다른 내용이 있어서 몇자 적습니다.
    먼저 동판의 주목적은 해양생물에 의한 배의 손상을 막기 위함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판이 있어도 해양 생물이 달라붙지만 동판이 없으면 해양생물들이 나무를 좀먹어서 선저에 구멍이 뚫려버립니다. 영국해군에서는 18세기 중반까지 배를 건조할 때 강도가 필요한 곳은 나무못을 사용하고 그렇지 않은 곳은 쇠못을 사용했었습니다. 하지만 선저에 동판을 도입하면서 이 나무못을 전부 구리못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만큼 해양생물에 의한 배의 손상은 심각한 문제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이루어졌고 동판과 구리못을 도입해서 어느정도 해결하게 됩니다. 참고로 HMS 빅토리를 건조할 때 2톤 가량의 구리못과 쇠못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2016.10.23 19:10



최근 영국이 노후된 뱅가드급 핵잠수함을 대체할 드레드노트급 핵잠수함의 건조를 발표했습니다.  그 사양을 보다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 중 하나가 130명의 승조원에 1명의 의사와 3명의 요리사(chef)가 포함되어 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쉐프를 3명이나 태우다니 잠수함 승조원들을 정말 잘 먹이려나 보다 싶지만, 그래봐야 영국인 조리병를 태울테니 드레드노트 승조원들은 암울한 식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 시대 때도 영국 요리는 유명했을까요 ?  예, 유명했습니다.  몇가지 관련 부분을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군 장교의 모험담을 그린 서양 무협지 Sharpe 시리즈에서 발췌해 보았습니다.






  

-- Sharpe's Enemy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2년, 포르투갈)  -----------------

 

프랑스군 듀브레통 대령 :

"먼저 토끼의 살을 뼈에서 발라내서 올리브유와 식초, 와인에 하루종일 재워놔야 해. 거기에다 마늘, 소금, 후추, 그리고 혹시 구할 수 있다면 노간주 열매를 한줌 집어넣으면 좋지. 피하고 간은 따로 보관했다가, 갈아서 죽처럼 만들어야 한다네." 

듀브레통 대령의 목소리에는 열정이 묻어났다.  

"하루 지난 뒤에, 발라놓은 고기를 버터와 베이컨 기름에 약하게 익혀서 갈색을 만들어놓지. 팬에다가 밀가루를 조금 넣고, 모든 것을 소스에 집어 넣는거야. 거기에 와인을 좀더 붓고, 거기에 따로 갈아두었던 피와 간을 집어넣어.  그리고나서 끓이는거야. 접시에 내놓기 직전에 올리브유를 한스푼 집어넣으면 더 맛이 좋지."

 

영국군 샤프 소령 :

"우리는 그냥 토끼를 잘라서 물에 끓이고 소금 쳐서 먹는데요."


(이 구절이 나무위키인가에 올라온 것을 봤는데, 물론 원작은 콘월 옹이지만 이렇게 짧게 축약해서 요약 번역한 건 저였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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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셀프 디스와 함께 세계적인 비웃음거리가 되는 영국 요리이지만, 최소한 영국군은 육군이든 해군이든 프랑스군보다는 더 잘 먹었습니다.   


다음은 영국 해군의 규정상 식단입니다.  


일 : 비스킷 1 파운드, 돼지고기 1 파운드, 완두콩 0.5 파인트, 맥주 8 파인트

월 : 비스킷 1 파운드, 오트밀 0.5 파인트, 설탕 2 온스, 버터 2 온스, 치즈 4 온스, 맥주 8 파인트

화 : 비스킷 1 파운드, 쇠고기 2 파운드, 맥주 8파인트 (또는 럼 0.5 파인트)

수 : 비스킷 1 파운드, 온두콩 0.5 파인트, 오트밀 0.5 파인트, 설탕 2 온스, 버터 2 온스, 치즈 4 온스, 맥주 8 파인트

목 : 비스킷 1 파운드, 돼지고기 1 파운드, 완두콩 0.5 파인트, 맥주 8 파인트 (또는 럼 0.5 파인트)

금 : 비스킷 1 파운드, 온두콩 0.5 파인트, 오트밀 0.5 파인트, 설탕 2 온스, 버터 2 온스, 치즈 4 온스, 맥주 8 파인트

토 : 비스킷 1 파운드, 쇠고기 2 파운드, 맥주 8 파인트







(Stephen Biesty의 "Cross-sections : Man-of-War" 라는 책에서 나온 그림입니다.  설탕과 버터는 오트밀에 넣어 먹었고, 치즈는 그냥 고기 대신 베어 먹었나 봅니다.)







(치즈는 어디에 어떻게 보관하냐고요 ?  같은 책에 나오는 저 그림 속에서, 마치 책장처럼 생긴 틀이 치즈 보관틀입니다.  아무리 치즈가 보존 식품이라고 해도, 몇개월 지나면 곰팡이 나고 상해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굳이 영국 해군 뿐 아니라, 프랑스 육군 기록에도 '끔찍한 치즈를 배급받고 아연실색했다'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물론 여기서 배급되는 비스킷은 설탕도 버터도 넣지 않은, 뻑뻑하기 이를 데 없고 이가 부러질 정도로 단단한 물건이었습니다.  고기도 소금을 듬뿍 써서 절여 놓은, 질기고 누린 내 나는 것이었고요.  비스킷이나 고기나, 만든지 최소 3개월, 보통 반 년에서 1년 정도 된 것들이었습니다.  비스킷에는 바구미와 그 애벌레가 득실거렸고, 고기는 너무 짰기 때문에 가뜩이나 부족한 민물 통에 반나절 이상 담가 놓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지독하게 짰습니다. 


맥주도 술 치고는 알코올 도수가 약한 편이라서 쉽게 상했습니다.  따라서 대양에 나가면 곧 맥주는 떨어졌고, 그 후에는 맥주 대신 럼주 0.5 파인트가 배급되었습니다.  이 럼주에는 물을 타서 희석해서 주었는데, 그런 규정을 만든 제독의 이름을 따서 그런 희석 럼주를 그록(grog)이라고 불렀습니다.






(수병들이 진한 럼을 그대로 마시고 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럼에 물을 규정대로 타는 것이 중요했고, 따라서 그록을 배합하고 분배하는 것은 장교의 감독하에 엄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그록 배식은 영국 해군에서 계속 전통으로 이어지다가 1970년에야 폐지되었습니다.  영국 Royal Navy의 Darkest day로 기록된다고 합니다.)

  



이런 식단에 대해 현대인들은 불평할지 몰라도, 당시 해군을 구성했던 서민층들에게는 꽤나 호사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매일 빵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던 대부분의 서민들에게, 거의 매일 고기 1 파운드와 빵 1 파운드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건 대부분의 현대 한국인들에게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술이라니 !  매일 공짜 술을 저렇게 많이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해군의 이 배급량은 영국 육군의 경우보다 다소 열악한 편이었습니다.  규정에 따르면 영국 육군은 요일에 따른 변화 없이 그냥 매일 같은 식재료를 배급했습니다.


빵 또는 밀가루 1.5 파운드 또는 비스킷 1 파운드

쇠고기 1 파운드 또는 돼지고기 0.5 파운드

완두콩 0.25 파인트

버터 또는 치즈 1 온스

쌀 1 온스

약한 맥주 (small beer) 5 파인트 또는 와인 1 파인트 또는 럼 0.5 파인트


육군이나 해군이나, 이런 식단 규정을 보시면 채소에 대한 규정이 전혀 없다는 것을 쉽게 눈치채실 것입니다.  이는 사실 로마 군단 시절부터 내려온 전통으로서, 당시에는 채소를 먹어야 건강하다는 개념 자체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채소는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나 주로 먹었고, 중산층 이상되는 사람들은 주로 지방과 단백질,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를 했습니다.  그래도 육군에서는 양념이나 부재료로 이런저런 채소를 얼마든지 구할 방법이 많았으므로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망망대해에 고립된 해군이었지요.  해군에서는 당연히 비타민 부족으로 인한 괴혈병이 창궐했습니다.  괴혈병의 증상은 전신의 무력감, 잇몸이 퉁퉁붓고 이빨이 빠지는 현상, 고약한 입냄새, 그리고 몇년 전에 완치된 상처가 새롭게 덧나는 현상 등이 있는데, 결국은 다 죽었습니다.  이 치료법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신선한 채소를 먹으면 금방 나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비타민 C의 존재를 몰랐고, 또 신선한 채소의 보존 방법을 몰랐으므로 장기간 대양을 항해하는 수병들의 건강은 크게 좋지 않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긴 대양 항해의 경험상, 영국 선장이나 군의관들은 레몬, 라임이나 오렌지 주스를 매일 선원들에게 공급하면 괴혈병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요법은 나폴레옹 전쟁 후기에 들어서야 해군 전체에 시행되었습니다.  그렇게 영국 해군 수병들이 괴혈병으로 픽픽 쓰러지는 사이 독일 선박에서는 독일식 김치인 사우어크라우트(sauerkraut)를 배식하면 괴혈병이 예방된다는 것을 알고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소세지와 독일 김치 사우어크라우트입니다.  사우어크라우트가 제 입맛에는 꽤 잘 맞던데요.  맛있어요.)




이런 식단 규정에서 또 이상하게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현대적인 군대나 학교 식단이라면 미트로프나 비프스튜 등의 음식 이름이 나와야 하는데, 당시 식단에는 식자재 이름만 나와 있고 그런 재료로 어떤 음식을 만들어 배식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없다는 점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군대에는 취사병이라는 것이 따로 없었습니다.  군대에서의 모든 식사는 그냥 중대 단위로 알아서들 해먹는 것이 상식이었고, 군 지휘부에서는 오직 식재료와 취사도구의 배급만 책임졌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독립 전쟁 때나 나폴레옹 전쟁 때나,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도 군 병력에 대한 식량 보급은 항상 다음과 같이 쇠고기 몇 파운드, 밀가루 몇 파운드 등 재료에 대해서만 기록될 뿐, 점심은 빵과 로스트 비프, 저녁은 파스타와 치킨 등 요리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당번제 식사 준비에 있어서도 영국군은 그 명성이 높았나 봅니다.  맛은 어차피 군대밥이니 그렇다고 쳐도, 조리하는 과정의 효율성은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 웰링턴 공작도 언급할 정도였습니다.  웰링턴 공작은 1812년 11월 28일 내린 명령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원정에서 프랑스군과 비교할 때, 우리 군의 조리 방식은 시설면에서나 신속성에 있어서나 개탄스럽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원인은 다른 점들과 동일하다.  군의 질서, 병사들의 행동에 대해 장교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 결과 병사들에 대해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

향후 각 중대의 일부 병사들은 땔나무를 준비하고, 일부는 물을 긷고, 일부는 고기, 비스킷 등을 받아와 조리를 하도록 할당될 것이다.  이런 조치가 매일 제대로 준수되면 전처럼 식사 준비에 많은 시간을 써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작전의 필요성 때문에 식사할 기회를 빼앗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행군할 시간도 부족한데 병사들이 빠져가지고 저런 목가적인 분위기에서 딩가딩가 밥을 지어 먹다니.... 이것들이 캠핑을 왔나 작전을 왔나 !!  라는 것이 웰링턴 공작의 불만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중대별로 식사 준비를 할 때는 장작을 마련해오는 병사, 불피우는 병사, 물 길어오는 병사, 고기를 받아오는 병사, 빵을 받아오는 병사, 그리고 무기와 배낭을 정리하는 병사 등으로 나뉘어 활동을 했습니다.  이는 프랑스군을 따라 한 것이니, 프랑스군도 이와 비슷하게 움직였나 봅니다. 


육군이 이렇게 식사 준비를 한 것과 마찬가지로, 해군도 mess라고 불리는 식사조를 짜서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보통 8명이 한조를 이루었는데, 이들은 고달프고 위험한 바다 생활에서 가족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도둑질이나 거짓말 등의 죄목으로 식사조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는데, 이는 일요일 함장님에게 판결을 받고 보조 포술장에게 채찍질을 당하는 것보다 대단한 불명예와 왕따를 뜻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어떤 곳에서든 소속감을 느낄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잠깐, 해군에는 분명히 cook, 즉 주방장이 있었는데 이는 어찌된 일일까요 ?  당시 군함에서, cook이라는 직위는 요리를 하는 역할이 아니라, 군함 주방(galley)에서 화재를 내지 않고 제대로 요리를 하는지 관리 감독하고, 또 공용으로 쓰는 솥단지 같은 주방용품을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나무로 된 군함이었으므로, 불 관리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상위 장교 식당, 즉 wardroom을 위해서는 장교들이 돈을 모아 고용한 진짜 민간인 요리사가 있었고, 또 대부분의 함장은 개인 전용의 민간인 요리사를 따로 대동했습니다.   주방장의 직위는 warrant officer, 즉 준위였습니다.   통장이(cooper), 범포장(sailmaker), 목공장(carpenter)와 같은 하급 기술 준위(junior petty officer) 신분이었는데, 다른 기술 준위와는 달리 별로 기술이라고 할 만한 것은 필요없는 직책이었지요.  대개 cook의 직위는, 실제 요리 솜씨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오래 복무한 나이 많은 모범 수병, 특히 팔다리를 전투 중에 잃은 수병에게 일종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해적 영화를 보면 요리사는 보통 의족을 한 중년 아저씨쟎습니까 ?  다 그런 이유가 있더라구요.  게다가, cook은 꽤 짭짤한 자리였다고 합니다.  수병들이 염장 고기를 삶을 때 물 위에는 당연히 기름이 뜨쟎습니까 ?  그건 관례상 다 cook의 몫으로 돌아갔다고 하네요.  일부 밧줄과 삭구에 바를 것만 빼고요.  수병들은 딱딱하고 맛없는 건빵을 이런 기름에 튀겨 먹기 위해 이런 기름도 슬쩍슬쩍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런 동물성 유지는 긴 항해를 하다보면 몇통씩 생겼는데, 어떤 항구에서건 이런 동물성 유지 한통에 약 2.5파운드 정도를 주고 샀다고 하니까, 큰 돈은 아니어도 꽤 짭짤했겠지요.  (당시 소위 연봉이 약 90파운드였습니다.)  다만 출신이나 하던 일이 그렇다 보니, 주방장은 진짜 장교들이 식사를 하는 상위 장교 식당(wardroom)이나 사관후보생(midshipman)들과 보조 항법사(master's mate), 보조 군의관(surgeon's mate) 등이 식사를 하는 하급 장교 식당(cockpit 또는 gunroom)에는 끼지 못하고, 그냥 일반 수병들과 함께 식사를 해야 했습니다.  신사 계급의 나으리들과 겸상을 할 처지는 아니었던 것이지요.  






(역시 Stephen Biesty의 "Cross-sections : Man-of-War" 라는 책에서 나온 그림입니다.  아마존에서 중고책으로 파는 것을 샀는데, 저도 잘 몰랐던 부분, 가령 저렇게 배식받은 쇠고기는 식사조 mess별로 금속제 꼬리표를 붙여 삶았다는 것도 상세하게 소개되더군요.  저 해군용 비스킷에 득실거리는 구더기 구경하세요.)




이렇게 배급된 날재료로 병사들은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었을까요 ?  그야 말로 제각각이었습니다.  병사들에게 좋은 오븐이나 화력 좋은 가스 레인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들은 주로 남비에 끓여 먹는 요리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븐 없이 빵을 구워 먹을 수는 없었으므로, 대대에서 일괄적으로 구워서 배급되는 빵이 없다면 이들은 배급된 밀가루를 이용해 밀가루 죽을 쑤어 먹거나 요령껏 마련한 돌판이나 철판에서 얇은 전병을 구워 먹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족적이지만 아마추어적인 배식 제도는 로마 군단 시절부터 무려 제1차 세계대전 초기까지 아무 문제 없이 잘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근대적인 취사병 제도가 생긴 것은, 엄청난 장거리 곡사포들의 포탄이 끊이지 않고 떨어지던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영국군이 맛없는 영국 요리를 먹는다고 해서 프랑스군이 화려한 프랑스 요리를 먹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프랑스군의 식사는 더욱 형편 없었습니다.  흔히 나폴레옹이 '군대는 배 힘으로 행군한다' (An army marches on its stomach)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나폴레옹의 기본 병참 전략은 현지 조달이었으니, 병사들은 대부분의 경우 배가 고플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규정상으로도 병사들에게 배급되는 하루 식량의 품목과 양은 부대가 어느 지역에 배치되느냐에 따라 꽤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하루에 다음과 같은 하루 배급을 받도록 되어 있었고,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영국군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빵 1.5 파운드

고기 1.1 파운드

말린 채소 0.25 파운드

브랜디 0.0625 파인트

와인 0.25 파인트

식초 0.05 파인트


건조 채소가 나온다고 해서 '역시 프랑스는 영국과는 달리 영양의 균형을 생각하는 미식가의 나라'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여기서 건조 채소라는 것은 영국군도 자주 배식하던 말린 콩을 뜻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거든요.  1800년의 제2차 이탈리아 침공 때부터 나폴레옹 밑에서 사병으로 복무했던 쿠아녜(Coignet)의 회고록에도 '아마 천지창조 때 함께 창조된 것처럼 오래된 말린 콩'이 배급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와인과는 별도로 나오는 브랜디 0.0625 (1/16) 파인트에 대해서도 감탄할 수도 있습니다.  실은 저것도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다소 덜 로맨틱한 이유에서 배급되었던 것입니다.  전장에서 마시는 물은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냄새도 나고 탁한 것일 때가 많았으므로, 그런 물을 좀더 정화하기 위해 브랜디 또는 식초를 넣어서 마시라고 준 것이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브랜디의 경우는 대부분 병사들이 그냥 마셔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식초는 그렇게 물에 타서 마셨고, 아예 각 중대별 짐수레에는 그런 용도를 위한 큰 식초통이 실려 있었습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병사 1인당 배급량에는 변화가 컸습니다.  가령 1809년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점령한 뒤에 비엔나 시민들에게 부과한 프랑스군 1인당 배급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빵 1.33 파운드 그리고 추가로 수프에 넣을 빵 0.33 파운드

고기 1 파운드

쌀 0.125 파운드 (2 온스)

말린 채소 0.25 파운드 (4 온스)


그러나 이는 이제 비엔나 시민들의 비용으로 병사들을 먹이게 되었으므로 여태까지 먹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요구한 것이었고, 이 때를 제외하면 실제로는 대부분의 경우 훨씬 더 적은 양의 식량만 배급되었습니다.  1811년 6월, 다른 부대들보다 훨씬 배급 사정이 좋았던 근위대의 실제 하루 배급량은 정말 참혹한 수준이었습니다.  


빵 0.8 파운드 그리고 추가로 밀가루 0.25 파운드

고기 0.6 파운드

쌀 0.0625 파운드 (1 온스)


밀가루가 배급되었던 이유는 빵을 구울 형편이 안 되었기 때문이고, 그나마 스페인처럼 정말 상황이 안 좋았던 곳에서는 아예 가루를 내지도 못하고 그냥 생밀 낟알이 배급되기도 했습니다.  병사들은 이런 낟알을 수프에 넣어 주린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뻔뻔스러운 나폴레옹은 아예 한술 더 떴습니다.  그는 고대 로마 군단병들처럼 병사들은 현지에서 직접 밀 낟알을 배급받고, 그것을 작은 휴대용 맷돌로 갈아 자신이 먹을 빵을 직접 구워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까지 했지요.  


물론 영국군도 규정된 배식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영국군 사병의 급료는 기본 하루 1실링 즉 12펜스였는데, 저런 배식에 대해 무려 그 절반인 6펜스를 공제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보급 상황이 좋지 않아 규정된 배식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도 급여에서 배식 공제는 꼬박꼬박 이루어졌습니다.  또 원래 살코기로 공급되어야 하는 염장 고기가 비계나 연골, 힘줄 등 먹기 싫은 부위로 잔뜩 채워져 공급되는 일도 많았고요.  물론 그 와중에 뇌물이 오가고 누군가는 돈을 벌었겠지요.  


그런 부당함은 프랑스군에도 매우 많았습니다.  나폴레옹의 통치도 결국은 독재 권력인지라 그의 묵인 하에 많은 부정이 동반되었고, 그의 군납업자들은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에 보급되는 빵과 비스킷은 병사용 등급으로 구워져 보급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질이 나쁜 귀리 가루를 잔뜩 섞고, 대충 구워 대충 공급을 하다 보니, 맛이 나쁜 것은 둘째 치고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핀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예 배급되는 빵이 전체적으로 파란 색을 띠기도 했다지요.   위에서 언급한 쿠아녜의 회고록에도 하루 종일 굶은 뒤 겨우 받은 배급 빵이 곰팡이 투성이여서 무척 실망했다는 이갸기가 나옵니다만, 그나마 며칠 뒤에는 아예 빵 배급이 끊겨 버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JE SUIS NÉ À DRUYES LES BELLES FONTAINES EN 1776, LE 16 AOÛT... 

CAPITAINE JEAN-ROCH COIGNET  

나는 1776년 8월 16일 드뤼에-레-벨-퐁텐느에서 태어났다...   대위 장-로끄 쿠아녜

쿠아녜의 회고록이 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병사들이 고생과 부상,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르는 동안 그를 통해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보는 자들이 항상 있습니다.  그런 자들일 수록 자신이나 자신의 아들들은 병역 의무에서 이런저런 수를 써서 빠지거나 아주 편하고 안전한 보직에서 특혜를 보고, 또 그럴 수록 전쟁불사를 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입보수나 방산 비리가 빨리 없어졌으면 합니다.   




출처 : Cross-sections : Man-of-War, Stephen Biesty

http://www.95th-rifles.co.uk/research/rations/

https://collections.nlm.nih.gov/ext/dw/101567907/PDF/101567907.pdf

http://regimentalrogue.tripod.com/blog/index.blog?topic_id=1129008

https://www.scribd.com/document/158382516/Historical-Review-of-the-Load-of-the-Foot-soldier

https://en.wikipedia.org/wiki/Royal_Navy_ranks,_rates,_and_uniforms_of_the_18th_and_19th_centuries

http://navymuseum.co.nz/history-of-the-warrant-officer-rank/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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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게일 2016.10.23 19: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읽고갑니다!

  2. 장웅진 2016.10.23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괴벨스도 만나고 싶어했던 유대인"(다행히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미국으로 도주 성공)이라는 하인리히 야콥 교수의 [빵의 역사]에서는 나폴레옹이 병사들의 빵 배급에 많은 신경을 썼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참... 문득 1996년인가 1997년인가, 정보과 고참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나네요. "서류상으로만 보면 북한 애들이 우리보다 더 잘먹는다"... 헌데 그 당시에 저희 부대 같은 경우 맛이 없어서 그렇지 고기와 생선은 매일 나왔으니 말이지요(당시 할머니께 불고기가 장조림 맛이 난다고 말씀드렸더니 "솥에 넣고 휘젓지를 않고 냅두다시피 했으니 그렇게 되지!"라고 혀를 차시던...). 헌데 북한에서는 "아아 불고기, 장군님의 사랑!" 어쩌고 하는 그림까지 만들어 바친 부대원들이 있다고 하는 판인지라...

  3. 2016.10.23 19: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Mavs 2016.10.23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배은숙 교수님의 '강대국의 비밀'이라는 책을 보면 로마 병사들이 식사 준비 하는 장면이 상세히 묘사됩니다. 맷돌로 밀을 직접 간 것은 맞지만 빵을 구운 게 아니라 수프를 끓이더군요. 화덕이 있어야 빵을 굽든말든....

  5. 석공 2016.10.23 22: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

  6. 프로이센군 2016.10.23 2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크으.. 정말 저때 비스킷과 염장고기는 입맛이 뚝 떨어지게 하네요..

  7. 유애경 2016.10.24 0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구더기비스킷,그림으로만 봐도 우웩...이네요!실제로 배급받은 병사들은 심정이 어땠을까 싶네요...

    국민들에게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 하면서 안에서 병역비리 저지르는 권력자분들
    생각만해도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8. 백구한접시 2016.10.24 10: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티스토리는 추천기능이 없나요?

  9. boribob 2016.10.24 1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천 기능 없는게 정말 안타깝네요 항상 잘보고 갑니다.

  10. 태풍 2016.10.24 1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Cross-sections : Man-of-War"은 국내에도 번역본이 나왔지요.
    "한눈에 펼쳐보는 전함 크로스 섹션 " 이란 이름이었는데 아이에게 사주고
    그림과 내용이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놀라고 그림이 좀 잔인해서 아이에게 보여줘도 되나 했습니다.

  11. 연습장 2016.10.24 2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림속의 cook도 다리 하나가 의족이군요

  12. 피를로 2016.10.25 02: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요즘 포스팅 업데이트가 많고 빠르시네요 넘나 좋은것!!!

    • nasica 2016.10.25 07: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실은 그게... 다음블로그에서 이사하면서 전에 썼던 것 중 좀 상태가 나은 것을 편집해서 조금씩 옮기는 중입니다. 빨리 1809년 비엔나로 로 돌아가겠습니다.

  13. 고양이참치 2016.10.25 2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끔찍하네요. 곰팡이 핀 빵에 벌레가 득실득시한 비스킷이라니.. 전쟁을 치루는 병사에게 제대로 된 음식도 공급해주지 않다니 :(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나폴레옹때 통조림을 발명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를 이용한 보급을 실제로는 매우 적거나 일부 부대만 시행한건가요? 통조림을 이용했다면 어느 나라 부대보다도 밥을 잘 먹었을텐데요.

    • 최홍락 2016.10.26 20:38  댓글주소  수정/삭제

      1810년 피터 듀란트가 주석 도금의 얇은 철판으로 만든 깡통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특허를 받고 듀런드로부터 특허권을 산 브라이언 도어킨과 존 홀이 1813년 통조림 공장을 열었는데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영불 양국군 병사들은 모두 병조림/통조림을 먹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만 납중독의 문제로 인해 이 통조림이 널리 퍼진 것은 좀더 시간이 걸려야 했다고 합니다. 깡통 따개는 남북전쟁이 되서야 발명이 되었다고 하네요.
      사람들의 통조림에 대한 인식도 통조림의 전파를 방해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임팔 작전 당시 굶주림에 시달리던 일본군이 통조림을 기피하여 정작 일선 장병들에게 보급되어야 할 통조림이 후방 장교들의 술안주용으로 쓰였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습니다. 이 사레가 비단 일본군의 이야기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14. 최홍락 2016.10.26 2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미 한참전에 올린글에 대해 선동이네 날조네 민중은 우매하네 하는 꼴을 보니 그냥 한꺼번에 왕창 옮기는게 나을것 같습니다. 귀국하고 오랜만에 들어옵니다.

  15. IserveGodofJew 2017.09.17 07: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복 문제에 대해서 다뤄주실 계획 있으십니까?

2016.10.20 22:35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함대라고 하면  16세기 말의 스페인 무적 함대 또는 20세기 초의 러시아 발틱 함대 정도를 들 수 있겠습니다만, 역시 스페인 무적 함대가 더 유명하겠지요.  결론적으로는 이 두 함대 모두 기대와는 달리 풍비박산이 났습니다만, 사실 당시에도 그 '기대'는 현실감이 없는 지배층의 기대였고, 실제 항해를 떠나는 두 함대 실무자들의 마음은 매우 무거웠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준비 상태가 엉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개럿 매팅리의 '아르마다'입니다.   한글판도 있고, 저는 한글판으로 읽었습니다.  매우 재미있습니다.  퓰리처 상도 받은 명작입니다.)

 


아뭏든, 당시 개박살이 난 스페인 무적 함대의 경과를 그린 개럿 매팅리의 '아르마다'라는 책을 읽어보면, 스페인 함대가 진 이유가 결코 영국군의 대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기 전에는, 단거리포만으로 무장하고 실제 전투의 결판은 전통적 방식인 칼과 피스톨로 끝내려는 스페인 함대에 대해, 영국 함대는 단병접전을 피하고 장거리포로 무장했기 때문에 영국이 이겼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의 장거리포가 스페인 함대를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 포격으로 침몰한 스페인 배는 없었습니다.  심각한 파손을 입은 배도 없었고요.  가장 큰 타격은 영국군의 화공선(fire ship)에서 비롯되었고, 더 큰 타격은 폭풍과 기아 때문이더군요.  당시 영국군 함대가 보유하고 있던 컬버린 포 등으로는, 아무리 명중을 시켜도 나무로 만든 군함을 격침시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영국 함대 지휘관 중의 하나였던 호킨스 경은 '조국을 침공하는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지 못하고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다가' 화약과 포탄이 다 떨어져서 전투조차 불가능해진 영국군 함대를 보고 "이것이 다 우리 탓이지 누굴 탓하겠는가"하면서 한탄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영국 해군도 더 큰 구경의 대포를 매우 근접한 거리에서 쏴야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18세기말, 19세기초의 군함들은 분명히 아르마다 시절인 16세기 군함들에 비해 훨씬 더 날렵한 디자인과 육중한 화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만, 기본적인 무기 체계가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해전에서도, 상호간의 포격의 결과로 침몰하는 군함은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넬슨 제독의 함대입니다.  당시 군함들은 매우 복잡한 밧줄 구조물로 엮어 놓은 아름다운 목공예품 같은 느낌이 듭니다.)





당시 영국 해군은 주로 파도가 아래 방향으로 물결칠때 발포했고, 프랑스나 스페인 해군은 파도가 윗 방향으로 물결칠때 발포하도록 훈련을 받았습니다.  


영국 해군의 목적은, 적함의 본체를 타격하여 적의 포병들을 무력화시키고 갑판 위의 적병들을 쓸어버리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너무 낮게 조준을 하는 경우에도, (마치 돌로 물수제비 뜨는 것처럼) 포탄이 물 위를 퉁퉁 튀겨서 적함을 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좀더 명중률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넬슨 제독의 기함 빅토리 호의 포열 갑판의 모습입니다.  포병들이 가득찬 이 공간에 쇳덩어리 roundshot이 두꺼운 나무 벽을 뚫고 나무 파편들과 함께 날아들어오면 그야말로 끔찍한 피바다가 일어났습니다.)







(저렇게 돛대에 수도 없이 묶여있는 밧줄들은 단순히 선원들이 기어오를 수 있도록 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돛대라는 물건은 배의 용골에 못을 박아 고정한 물건이 아니라, 저 밧줄들에 의해 지탱되는 물건입니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전투 중 돛대가 쓰러지는 것은 대포알에 돛대가 부러지는 경우보다는, 저 밧줄들이 끊겼기 때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 프랑스나 스페인 해군은, 주로 막대기 탄이나 쇠사슬탄 (그림참조)을 발사하여, 적의 마스트나 가로돛대, 돛 등을 망가뜨리는 것에 목표를 두었습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좀 높게 쏘아야 했지요.  사실 이런 방식도 나름대로의 잇점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배는 본체보다도 돛대가 훨씬 면적이 컸기 때문에, 이 부분을 노리고 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습니다.  조준이 다소 낮게 된 경우에도, 갑판 위의 적병들을 쓸어버릴 수도 있었고, 또 돛대나 가로돛대에 명중했다면, 거기에서 떨어지는 나무파편이나 도르레 뭉치에 갑판 위의 적병들을 다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일단 적의 돛대를 망가뜨리고 나면, 적함은 거의 움직일 수도 없고 방향을 바꿀 수도 없었으므로, 적함의 이물이나 고물 방향으로 접근하여 이쪽편의 broadside (옆면의 포문을 통해 퍼붓는 일제 사격)로 적함을 긁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영어식 표현도 rake(긁는다)라고 합니다.  이 rake가 무서운 것은, 당시 군함들의 구조상, 주포는 모두 옆면을 향하고 있고 고물이나 이물에는 변변한 포가 없었으므로, 이쪽은 지근거리에서 적에게 포탄을 마음껏 퍼부울 수 있는데 반해, 상대편은 반격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Raking fire, 즉 종사입니다.  일제 포격 한방으로 많은 적병을 쓸어 버릴 수 있었으므로 갈퀴로 긁는다는 뜻의 rake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당시 전투에 의한 사상자는 (요즘도 그렇지만) 대부분 대포알에 직접 맞은 직격탄보다는 대부분 파편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대포는 폭발탄을 쏘는 것이 아니고 속이 쇠로 꽉 찬 roundshot을 쏘았기 때문에, 파편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병사들의 목숨을 노렸던 파편은 모두 나무 파편이었습니다.  대포알에 맞아 부서지는 돛대나 두꺼운 목판은 날카로운 파편을 수없이 튀게 만들었고, 여기에 맞으면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특히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돛대나 가로대 등도 큰 위협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전투 준비가 시작되면, 꼭 행해지는 작업 중의 하나가, 갑판 위의 병사들 머리 위에 큰 그물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파편들을 막자는 것이었지요.


물론 당시에도 폭발탄은 있었습니다만, 특히 해군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당시 폭발탄은 모두 곡사포로 발사했는데, 움직이는 군함을 출렁이는 파도 위에서 곡사포를 발사하여 명중시키는 것은 당시 기술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는 당시 배 위에서 백병전을 벌이는 임무를 띄고 있던 해병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해병들의 소총은 육군이 사용하는 것보다 오히려 약간 조잡하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고장이 훨씬 적게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육군에서는 종종 사용되는 라이플 소총은 사용할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위아래로 요동치는 배 위에서 적함을 향해서 조준 사격을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일부 해병들은 돛대 위의 망루에 올라가서 거기서 적함을 내려다보며 사격을 했는데, 그렇게 높은 망루는 파도의 움직임에 따른 흔들림이 더욱 심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회전 포(swivel gun)라고 하는, 꼭 오늘날의 탱크 해치에 장착하는 50구경 기관총처럼 생긴 작은 대포를 망루에 장착해두고 거기서 포도탄을 내리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 그림이 swivel gun입니다.)

 



다만, 넬슨 제독은 그렇게 망루에서 총을 쏠 경우, 발사할 때 튀어나오는 wadding(화약 마개)으로 인해 돛에 불이 붙을 수 있다는 이유로 망루에서 총을 쏘는 것은 금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발생한 화재가 보고된 바는 없고, 결국 넬슨 자신은 프랑스군이 아마도 망루에서 쏜 듯한 총탄에 맞아 최후를 맞게 됩니다.

 






(넬슨 피격 장면입니다.  실제 상황은 그림보다 훨씬 더 안 좋아서, 서 있는 수병보다는 쓰러진 수병들이 훨씬 더 많았고, 거의 패배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전투가 벌어지면 가장 위험한 장소는 어디였을까요 ?  바로 갑판 위였습니다.  특히 함장과 고급 장교들, 그리고 조타수가 있는 quarterdeck, 즉 후갑판이 제일 위험했습니다.  앞서 말한 회전포도 그  quarterdeck을 노렸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해병 한명이 하갑판으로 통하는 햇치를 지키고 서있게 되는데, 이유는 겁을 집어먹은 수병들이 갑판 아래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였을까요 ?  Orlop deck이라고 부르는, 즉 가장 배 밑에 있는 수면 아래에 위치한 갑판이었습니다.  당시 포탄 특성상, 수면 아래 깊숙한 부분은 절대 뚫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포탄은 수면을 튕겨나가 물수제비를 뜨게 되거나, 또는 물 속으로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두꺼운 목재를 뚫기에는 힘이 너무 약해졌습니다.  부상병을 치료(...라기보다는 팔다리를 자르는 것이 보통이었던)하기 위한 군위관은 전투가 벌어지면 여기에 자리를 잡고 수술을 진행했습니다.  당시 군함에는 군인들 뿐만 아니라, 해외로 파견나가는 정부 관료나 그 가족같은 민간인이 타고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런 민간인들은, 전투가 벌어져도 사실 목숨 걱정을 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모두 orlop deck이나, forepeak 같은 수면 아래 깊숙한 공간으로 내려갔거든요.  다만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은 그런 구석진 공간에 우글거리는 바퀴벌레 및 쥐떼들과 친하게 지내야 했겠지요.

 


 




(뒤쪽의 다소 높은 갑판이 quarterdeck.  살기를 바라는 자는 전투 중 이 곳을 피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맨 뒤쪽의 가장 높고 작은 갑판은 poop deck이라고 불렸습니다.)


 


요즘 군함이야 레이더 성능이 곧 그 군함의 성능과 맞먹을 정도로, 먼저 적을 탐지하는 것이 중요했고, 또 그에 맞서 스텔스 기능에 대한 연구도 활발합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레이더도 없고, 또 레이더가 있어라도 어차피 장거리 미사일이 없었으므로 별 쓸 모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당시 군함끼리 전투에서 보이지 않는 군함으로부터 급작스럽게 기습을 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군함이라는 것이, 반드시 투명 군함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아군 또는 중립국 군함인 줄 알았다거나, 또는 민간 상선인 줄 알았다가 지근거리에 와서야 적함인 것을 깨닫는다면 그것도 낭패입니다.  당시에는 그러한 점을 이용한 전술이 아주 흔하게 활용되었습니다.  즉, 깃발을 자국기가 아닌, 엉뚱한 국가의 깃발을 내다는 것이지요.

 

이게 불법 아니냐고요 ?  대개는 아니었습니다.  최소한, 첫번째 발포를 시작하기 전에 진짜 자국기를 내걸기만 하면, 그건 정당한 위장 전술(ruse de guerre)로 인정받았습니다.  보통 해적 영화보면 해적선이 마지막 순간에야 해골이 그려진 해적기를 올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게 다 적법한 (어차피 해적인데 적법 불법을 따지나 ?) 전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군함들은, 단독 항해시에 미확인 선박을 만나면, 어떤 깃발을 올리고 접근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일단 가짜든 진짜든 깃발을 올리고 접근을 합니다.  가령 저쪽이 프랑스 깃발과 펜던트를 날리고 있다면, 일단 이쪽도 프랑스 깃발과 페넌트를 올리고 접근했다고 치지요.  이쪽도 프랑스 군함이라고 선언을 했다면, 그 다음 차례는 저쪽이 'private signal', 즉 비밀 신호를 보냅니다.  물론 깃발 신호로요.  이건 현대 전투기에서의 IFF (If Friendly or Foe, 피아식별) 장치 같은 것이지요.  이 깃발 신호에는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없으므로, 우물쭈물하면서 최대한 접근하다가 결국 영국 깃발을 내걸고 '꽈광' 발포를 하는 것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정확한 정보는 전투에서건 상거래에서건, 엄청난 가치를 지닙니다.  일단 군사 행동에서는 공격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군함이 중요한 연락 문서를 가지고 홀로 인도양을 항해 중인 프랑스 프리깃 함이라면, 저렇게 발견된 미확인 선박이 영국군의 74문짜리 전열함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적이 우리를 발견하기 전에 당장 침로를 변경하여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것이 장땡이겠지요.  또, 상황이 반대라서 이쪽이 공격을 하려는 입장이라고 해도, 가능한한 미리 전투 준비를 해두고 있는 것이 유리합니다. 

 

여기서 전투 준비라 함은, 'clear for action'을 말합니다.  Clear for action 이라고 하는 것은, 나름대로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작업입니다. 

 


1. 먼저 갑판 아래에 있는 선실들을 구분하는 나무 벽들을 모두 떼어내서, 간판 아래를 넓은 하나의 공간으로 변형시킵니다.  이래야 대포 사격 및 통제를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일반 장교들은 물론 함장의 가구나 서류, 소지품같은 것들은 모두 하갑판 창고로 쳐박히게 됩니다.







(선원들을 위한 별도의 선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렇게 선원들이 식사하는 저 공간은 바로 포열 갑판이었고, 그림 왼쪽에 보이는 것처럼 대포 사이사이의 공간의 접이식 식탁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전투 시에는 저런 잡다한 기물들은 모두 떼어내 선창으로 내려보냈습니다.)


 

2. 수병들의 침구인 해먹 말아둔 것을 꺼내어 난간 등에 고정시켜 둡니다.  진지 구축시의 모래주머니 쌓아둔 것과 같은 방탄 효과를 냅니다.  또, 포격에 맞아 떨어질 삭구나 가로활대 등으로부터 갑판 위의 수병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그물막을 펼쳐 고정합니다.

 

3. 주방(galley)의 불을 끕니다.  재수없게 적의 포탄이 주방 아궁이를 때릴 경우 화재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 시간이 있다면 clear for action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염장 쇠고기를 삶아두는 것이 좋겠지요.  치열한 포격전 중에도 수병들이 원기를 찾을 수 있도록 약간의 음식과 물을 준비해두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대개는 찬 음식이었지요.

 

4. 탄약고에서 적절한 숫자의 포탄과 화약을 날라오고, 포격에 필요한 슬로우 맷치 (slow match, 천천히 타는 도화선) 및 포구를 식히는데 쓸 물통 등을 준비합니다.  또 포구를 막아두었던 마개도 뽑고, 핸드 스파이크 등 대포를 운용하는데 필요한 이런저런 도구들을 가져다 둡니다.  또 화재가 날 때에 대비하여 소방용 물통도 채워둡니다.  시간이 충분하면, 대개 벌겋게 녹이 슬어있을 포탄의 표면을 정으로 쪼아서 녹을 벗겨냅니다.  그래야 명중률이 좋아지거든요.






(이건 텍사스 오스틴의 군사 박물관에 전시된 18세기 후반 ~ 19세기 초반 함포의 모습입니다.  저런 나무 물통 하나하나가 포격에 꼭 필요한 주요 장비였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저렇게 깔끔하진 않았겠지요.)



 

5. 이런저런 준비가 다 되면, 각자 지정된 전투 위치로 가서 사격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립니다.  군의관은 선창 바닥 근처의 응급실(cockpit)에 칼과 톱, 붕대 등을 갖다놓고 기다립니다. 

 


이런 준비들은 대개 상대 군함이 사정거리 내로 접근하기 전에 다 마칠 수 있습니다.  한 30분 걸릴까요 ?  어쨌거나 조금이라도 먼저 전투 태세에 들어가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고, 특히 깜깜한 야밤 중이라서, 적함의 접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태라면, 그야말로 앉아서 눈뜨고 당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당시의 전투 양상은 대략 아래와 같았습니다.



1. 양쪽 함대가 서서히 접근합니다.  


이때, 적함대와 안싸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되면 도망을 쳐야 하는데, 이럴 경우 바람을 등지고 있는 함대가 훨씬 유리합니다. 도망을 칠지, 교전을 할지 마음대로 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양쪽이 서로 다른 진영으로 격돌하여 뒤엉킵니다.

 

학익진 같은 것은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 확실합니다만, 이때의 함대 진영은 상황에 따라 제각각이었습니다.  가령,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에서 썼던 전법은 이열 종대로 길게 늘어선 함대가 적 함대를 수직으로 돌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적함대를 양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이열 종대로 쳐들어가면, 적함대를 돌파할 때까지는 적의 broadside 공격을 받으며 고전을 면치 못하지만, 일단 적함의 이물과 고물 사이에 뛰어들면 저항할 수 없는 적함을 '긁어'줄 수 있었으므로 그다지 나쁜 전술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먼거리에서 쏘아대는 broadside는 그리 명중률이나 파괴력이 대단치 않았으므로 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사실 트라팔가에서도, 모든 군함들이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쳐들어간 것이 아니고, 각 함선의 사정에 따라 제각각 전투에 돌입했다고 합니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함대의 제독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각 함의 함장들이 제대로 해주기를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트라팔가 전투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의 횡대에 돌진하는 영국 함대입니다.  2열 종대로 이렇게 들어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3. 상호간에 무자비한 근접 포격을 주고 받습니다.


좀 먼 거리에서는 roundshot이나 chainshot 등을 쏘아대다가, 정말 바로 옆으로 다가오게 되면 grapeshot을 쏘았습니다.  이건 일종의 산탄 같은 것으로, 적함의 갑판 위의 전투원들을 피떡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또 갑판 아래의 대포에서는 계속해서 roundshot을 퍼부어서, 적함의 대포를 무력화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사슬탄의 제대로 된 용도입니다...  끔찍하지요 ?)




4. 해전의 영원한 로망 - boarding


글자 그대로 총칼로 무장한채  적함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미리 적함에 뛰어들 전투원들을 선발해 두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들을 boarding party라고 불렀습니다.  당연히 붉은 코트를 입은 해병들이 선두에 섰고, 원거리 전투에서는 포수 노릇을 하던 선원들도 권총이나 칼(cutlass)로 무장시켜 전투원으로 썼습니다.  보통의 전투는 이렇게 백병전으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함상에서의 백병전입니다.  아무 옷이나 대충 입고 싸우는 수병들 중 마치 육군처럼 머스켓 소총을 들고 군모까지 쓴 병사들은 해병, 즉 marine입니다.  원래 해병대의 기원은 저렇게 함상에서의 백병전 담당 전문병이었습니다.  해병들은 저렇게 멋은 있을지 몰라도 거추장스러운 군복을 입어야 했던 대신, 이런저런 뱃일에서는 면제되었습니다.)




5. 항복 


가끔씩은, 백병전 없이 포격전만으로도 항복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어느 한쪽의 피해가 너무 커서,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면 당시의 함장들은 주저하지 않고 항복을 했습니다.  '침몰하는 군함의 함장은 배와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는 없던 말이었습니다.  일단 나무로 만든 군함은 아무리 구멍이 뚫려도 잘 침몰하지 않았습니다.  또, 정당한 상태에서, 즉 선원들의 사상자가 너무 많은 경우 항복하는 것은 전혀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대체로 사상자가 얼마나 되면 항복하는 것이 보통이었을까요 ?  여기에는 좋은 예가 있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프리깃함 레안더 (HMS Leander) 호는 넬슨 제독의 지휘하에 나일강 전투에도 참전하는 등 맹활약을 하다가, 넬슨의 명령에 따라 지브롤터로 되돌아 가던 중이었습니다.  크레타 섬 부근을 지나갈 때 자신보다 더 큰, 프랑스의 대형 전함 제네로(Le Généreux) 호를 맞닥뜨리게 되어, 전투를 벌입니다.  레안더 호의  톰슨 함장은, 총 300명의 선원 중 92명이 죽거나 다치게 되자, 항복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포로 교환으로 풀려나서 본국에 돌아오자, 항복의 이유에 대해 형식상의 군법 재판을 거친 뒤에, 명예로운 항복이었다는 판결을 받고 무죄 방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리한 상황에서도 영웅적인 전투를 벌였다고 해서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됩니다.  C.S. Forester의 연작 소설 혼블로워 7편 'Flying Colors'는 바로 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레안더 호과 제네로 호의 전투 모습입니다.  전면이 제네로이고, 저 뒤쪽에 박살이 난 전함이 레안더입니다.)



 

항복한 장교들은 적군으로부터도 거의 예외없이 모두 상당히 명예로운 대접을 받았습니다.  승리한 함장은 항복한 적 함장을 당연히 식사에 초대해서 대접해야만 했습니다.  또 항복한 적함에 민간인, 특히 부녀자가 타고 있을 경우 이들은 각별한 보호를 받았고, 또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본국으로 되돌려보내졌습니다.  항복한 장교들조차도, 가석방 문서에 서명만 하면 적함 내부나 적국 시내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고 (물론 돈이 있을 경우에는) 상당히 호화로운 생활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또 많은 경우 포로 교환 조치에 따라 본국으로 귀국할 수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포로 교환에 '가불'도 있었습니다.  즉, 가령 프랑스가 영국군 포로를 많이 잡아두고 있는데, 영국군 측에서는 대신 풀어줄 프랑스군 포로가 없다면, 양쪽 다 난감했습니다.  포로들이야 당연히 난감했을 것이고, 영국측도 자기 장교들을 못 돌려받으니 난감했겠지만, 프랑스측은 왜 난감했을까요 ?  포로들은 하는 일 없이 계속 먹고 마시는데다가, 장교 포로들의 경우는 가끔씩 식사에 초대를 하는 등 상당히 예의를 차려주어야 했습니다.  정말 귀찮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었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적절한 포로 교환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절대 프랑스와의 전쟁에 복무하지 않겠다' 라는 선서를 받고는 그냥 풀어주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포로 '가불'입니다.




출처 : 아르마다 - 개럿 매팅리


Patrick O'Brian's Navy - The illustrated Companion to Jack Aubrey's World - editor Richard O'Neill


British Napoleonic Ship-of-the-Line  - Angus Konstam


http://www.icollector.com/Naval-chain-shot-12-pounder-early-1800s-rare_i17425677

http://www.keyword-suggestions.com/Y2hhaW4gc2hvdA/

http://www.bbc.co.uk/history/interactive/animations/trafalgar/index_embed.shtm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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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ㅁㅇ 2016.10.21 0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류의 해전을 다시 보게 될 날은 없겠지요
    근데 1등.가문의 영광.

  2. 유애경 2016.10.21 0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삽화에 나와있는 사슬탄은 폭발하진 않고 그냥 사람몸을 가르고 지나가기만 하는 건가요?
    그림만으로도 끔찍하네요!

  3. Mavs 2016.10.21 05: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같은 해적질이라도 정식으로 사략선 허가를 받고 하는 경우라면 법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4. 수비니우스 2016.10.22 15: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로'가불'은 나중에 그 값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많은 경우 떼먹었을것 같기도 하네요 ㅎ

  5. 꾸르르 2016.10.23 0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전쟁사를 봐도 그렇고 나폴레옹과 몇몇 명장들을 제외하면 통제된 전투가 거의 없다시피하네요. 프러시아의 참모장교단이 도입되기 전까지 상당히 주먹구구 식으로 싸움을 한 것 같아요.

    이런거 읽으면 읽을수록 좀 충격입니다 ㅋㅋㅋㅋㅋ 조직이 더 조잡했던 고대에는 이런 게 더 심했다는 건데 알렉산더나 한니발 같은 명장도 설마 알고보니 주먹구구식 병력 운용을 했다던가 ㅋㅋㅋ

  6. 프로이센군 2016.10.23 06: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하의 넬슨 제독도 전투 상황에선 자신의 함대를 통제하지 못했군요ㅋㅋㅋ 그나저나 육군도 그렇고 해군까지 죄다 백병전으로 승부를 보네요?

  7. ㅇㅇ 2017.02.23 08: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IFF는 Identification Friend or Foe의 약자입니다.

2016.10.09 18:40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직전이던 1805년 11월, 린츠(Linz)로부터 빈(Wien)을 향해 전진하던 란의 제5 군단은 (전투 현장에서는 언제나 그랬습니다만) 심각한 보급 부족으로 큰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진흙투성이 길로 강행군을 하는데다 추운 늦가을에 노숙을 하는 것도 고달픈데, 먹을 것까지 부족하니 장교들이나 병사들이나 모두 지치고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지요.  그때 란의 개인적인 형편은 더욱 안 좋았습니다.  아팠거든요.  란은 아픈 상태에서도 부하들이 겪고 있던 보급 부족에 대해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내린 명령이 이런 것이었지요.


"어떤 병사 또는 부대라도, 약탈, 사사로운 싸움 및 위협을 하다가 적발되거나 장교를 구타할 경우 즉각 총살될 것이다.  집행 권한은 사단장이 행사한다."


이에 따라 실제로 일부 병사는 총살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약간 혼란에 빠지실 수 있겠습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원래 보급이란 것이 없고 그저 현지 약탈에 의존해서 먹고 사는 것 아니었던가요 ?  그런데 느닷없이 약탈하면 총살을 하겠다니요 ?


여기서 우리는 사사로운 약탈과 징발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약탈은 영어로 pillage, 불어로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pillage(피야쥬)라고 합니다.  징발은 영어로 requisition, 불어로도 역시 réquisition(레퀴지시옹)이라고 하지요.  짐작하시다시피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전해진 말입니다.  약탈이나 징발이나 군대가 주민들의 사유 재산을 강제로 가져가는 행위라서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다릅니다.  약탈은 주민들에 대한 아무 보상 없이 이루어지는 범죄 행위입니다.  그에 비해서 징발은 군대가 필요에 의해 지휘관의 결정에 따라 수행하는 공식 행위이고, 그에 대해 즉각적인, 혹은 향후에 보상이 이루어집니다.



(자신들과 군마들이 먹을 것을 구하고 있는 프랑스 병사들입니다.  나폴레옹 자신도 '감자가 밭에 없는 계절에 작전을 펼치는 것은 병사들에게 매우 힘든 일이다' 라고 할 만큼 프랑스군의 현지 조달 의존도는 높았습니다.)



보상이라고요 ?  설마 주민들에게서 빵이나 밀가루, 와인 같은 것을 가져올 때 돈을 주고 사오는 것인가요 ?  예 맞습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현장에서 즉각 돈을 지불하고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용도로 각 연대에는 민간인 신분인 병참 장교(commissariat)가 할당되어 금화나 은화를 담은 튼튼한 돈 궤짝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할 경우의 이야기였고, 대부분의 부대들은 현금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돈 궤짝 속에 든 돈은 병사들의 급료를 주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거든요. 


결국 대부분의 징발 댓가는 병참 장교가 무성의하게 쓱쓱 휘갈려 써준 징발 영수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에는 액수보다는 주로 징발된 물품이나 서비스의 물량이 적혀 있었습니다.  가령 밀가루 몇백 파운드, 와인 몇 통, 옷감 몇 평방 미터, 구리솥 몇 개 뭐 그런 식이었지요.  이런 영수증은 복잡한 행정 절차를 거쳐 시장 가격으로 징발 대상자에게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아마 제 값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징발 대상이 된 주민들은 그에 대한 원망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이런 징발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본인이 남긴 편지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아-러시아와 제3차 대불동맹전쟁을 준비 중이던 1805년 9월 22일, 북부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으로 있던 양아들 외젠(Eugene)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엄마가 데려온 새 아빠를 만나보니 나폴레옹이었다는 행운의 소년 외젠 보아르네입니다.  그는 나폴레옹 패망 후에도, 나폴레옹 덕에 얻은 장인어른인 바이에른 국왕 덕분에 사랑하는 부인과 함께 잘 살았습니다.)



"한 곳에 집결한 8만 대군을 먹이기 위해서는 지방민들로부터 밀과 와인, 사료, 귀리, 밀짚을 징발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야.  우린 군 편성도 잘 되어 있고 파리로부터의 자금 조달도 용이한 프랑스령 알사스(Alsace)에서도 이 조치를 취해야 했지.  모든 물자의 가격이, 준비해둔 거액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올라버렸거든.  우리가 훨씬 이전부터 물자 집적소를 준비해 둔 곳에서는 징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 밖의 곳에서는 징발은 필수조치였어.  오스트리아군도 독일과 베네치아에서 징발을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면 그런 대군을 먹일 방법이 없었겠지.  그런 징발에 대해 지방민들은 적절한 가격을 지불받을 것이야."


즉, 나폴레옹은 정상적인 군수품 구매 계약이 가능한 경우에도, 때로는 강제로 물품 구매가를 깎기 위해 징발을 택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대규모 작전 수행 준비 중이거나 한창 전쟁 중에는 모든 물자의 가격이 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각 부대들이 장기간 원정에 대비해 미친 듯이 물자를 사모을테니, 공급이 뻔한데 수요가 많아지면 물가가 오르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그래서 그런 가격을 강제로 통제하기 위해 구매보다는 일부러 징발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나중에 보상을 받는다고 해도 징발에 대해서는 주민들이 크게 반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에 대해서도 나폴레옹은 같은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거라.  민중은 툴툴거리기 마련이지만, 그 불평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이런 상황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단다.  오스트리아군도 같은 주민들에게 비슷한 규모로 징발을 했고, 이탈리아 왕국에서는 더 많이 했다.  게다가, 주민들은 만약 징발에 응하지 않을 경우 군대가 무력으로 물자를 빼앗아 갈 것이므로 상황이 더 안 좋아질거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


이런 징발은 자국 영토 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적국 영토에서도 마찬가지 원칙으로 수행되었습니다.  즉, 적국 마을에서 보급품을 조달한다는 것이 산적처럼 무자비하게 주민들로부터 사유 재산을 강탈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참 장교의 꼼꼼한 물품 확인 및 영수증 발행 작업 하에, 나름 조직적으로 징발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단지 신사다운 전쟁을 수행한다는 측면 뿐만 아니라, 군 전체의 효율적인 보급과 작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적국 마을을 점령한 병사들이 장교들의 지휘가 아니라 그냥 자신들의 배고픔 혹은 사사로운 욕심에 따라 주민들을 약탈한다고 하면, 그렇게 빼앗은 빵이며 감자, 와인 등을 옆 부대 병사들과 사이 좋게 나누어 먹겠습니까 ?  절대 그럴 리 없지요.  아마 직접 약탈에 참가한 병사들끼리 배터지게 먹고 취하도록 마실 것입니다.  금화나 은접시 같은 값나가는 물건은 장교들 몰래 배낭 속에 숨겨질 것이고요.  그런 식으로 무질서한 약탈이 일어나면 절대 전체 병력을 먹일 수가 없습니다.  일부 운 좋은 병사들의 무절제한 낭비로 이어져 식량의 균등하고 효율적인 분배가 불가능할테니까요.  또한 그런 약탈은 피점령 주민들의 저항과 반란으로 이어져 괜히 불필요한 유혈 사태만 불러오기 쉽상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징발 활동은 반드시 체계적으로, 장교의 감독 하에 이루어져야 했지요.


그렇다면 과연 그렇게 피같은 곡식과 와인, 말과 수레를 빼앗긴 주민들에게 던져진 프랑스군의 징발 영수증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요 ?  전쟁이 끝난 뒤, 오스트리아 시골 농민들이 손에 그런 영수증을 들고 머나먼 파리의 육군성으로 찾아와 번쩍이는 금화를 받아갔을까요 ?  대부분의 주민들이 자기 마을 반경 10마일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던 19세기 초에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eBay에 올라온 1809년 오스트리아 문서입니다.  가격은 3장 모두 해서 $276.10로서, 생각보다는 비싸지 않네요.  여기 올라온 것은 복제품일까요 ?  그렇다면 생각보다는 너무 비싸고요.)



그런 징발 영수증의 처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문서를 구글링하다가 찾았습니다.  화려한 캘리그래피로 쓰여져 알파벳도 알아보기 힘든 이 독일어 문서는 1809년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이 바그람(Wagram) 전투에 의해 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된 뒤 맺어진 평화 협상 문서 중 일부로 보입니다.  독일어로 된 것을 보면 아마 오스트리아 측에서 작성한 것 같은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Das kaiserliche fraenzoesische Gouvernement hat eine neue Requisition..."   (프랑스 제국 정부는 새로 징발을 한다...)


그 밑으로 나오는 것은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에서 가져가는 물품과 그 물량을 적은 것입니다.  밀, 밀짚, 브랜디, 식초 등등이지요.  이건 다소 뜻 밖입니다.  나폴레옹은 항상 전쟁 비용을 패전국에 막대한 배상금 형태로 전가시켰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일종의 보호무역주의자라서, 전쟁 승리 후 패전국으로부터 상품 형태로 배상금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령 나폴레옹은 1809년 9월, 바그람(Wagram)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오스트리아 쇤브룬(Schonbrunn) 궁전에서 당시 프랑스 내무부 장관이던 푸셰(Fouche)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며 투덜거렸습니다.  "해당 부서에서 일을 제대로 했다면 짐이 비엔나로 밀고 들어온 전과를 활용하여 프랑스의 상인들과 제조업자들이 더 많은 직물과 도자기 등의 상품을 오스트리아에 판매하도록 독려했을 걸세.  이전에 그런 상품들은 오스트리아에게 엄청난 관세를, 가령 직물만 하더라도 무려 60%의 관세를 내고 있었네.  당연히 나의 승리를 이용하여 거의 무관세로 비엔나의 창고들이 터질 정도로 프랑스 상품을 판매해야 하네.  그런데 관련 부서에서는 생각도 없고 행동도 없군."  이렇듯,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현금, 그것도 가능하면 금이나 은으로 된 경화(specie)였습니다.  그런 그가 밀가루나 브랜디 같은 상품을 배상금으로 받아올 리가 없었습니다.


이건 제 추론입니다만, 프랑스군이 전쟁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영내에서 징발 형태로 가져간 그런 보급품 물자에 대해 위의 문서와 같은 형태로 정산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오스트리아 관리들은 전국 곳곳에서 프랑스군이 물자를 가져가고 발행한 징발 영수증을 모아오고, 나폴레옹은 그것들에 대해 전쟁 배상금 일부를 변제해주는 형식으로 정산을 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물자를 강탈당한 주민들에게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어떤 보상을 해주었는지는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패전국에 대해서야 이런 식으로 처리가 될 수 있겠지만, 중립국이나 동맹국은 어땠을까요 ?  비슷한 방법으로 처리가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제4차 동맹전쟁에서나 제5차 동맹전쟁에서나, 나폴레옹은 자신의 편에서 싸운 바이에른 등의 동맹국에게는 새로운 영토나 노획품 공여 등으로 두둑한 보상을 해주었으니, 그런 밀가루와 와인, 식초 등의 사소한 물품 대금은 거기에 묻어 처리했을 것입니다.  


전에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가끔 정말 산골 오지에 남겨진 징발 영수증은 정말 처리가 안 되고 남아 있다가 먼 훗날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바로 스위스 알프스 산골의 작은 마을 부르-생-피에르(Bourg-Saint-Pierre)의 경우입니다.  1984년에 프랑스 미테랑 (Francois Mitterrand) 대통령이 스위스를 국빈으로 방문할 때, 뜻하지 않게 이 마을 대표가 나폴레옹의 180년 묵은 징발 영수증을 들고 미테랑을 찾아온 것이지요.  1800년 5월, 나폴레옹이 제2차 이탈리아 침공을 위해 알프스를 넘을 때 이 마을에서 구리 솥과 수천 그루의 통나무 등 물품과 용역을 징발하면서 남겨둔 영수증이었지요.  당시 금액은 약 4만5천 프랑(지금 가치로 약 6억5천만원)으로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습니다.  가령 당시 하루 노임을 3프랑, 현재 가치로는 약 5만원으로 계산했더군요.  그런데 이것이 180년 동안 차곡차곡 이자에 이자를 붙여 계산하니 2천만 스위스 프랑이라는 엄청난 금액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미테랑의 내각 수석이었던 콜리아르(Jean-Claude Colliard)가 이 마을을 찾아 기념 동판과 함께 원금만 현금으로 지불했다고 합니다.  이자에 대해서는 입을 닦았고요.  




(나폴레옹이 184년 전에 진 빚을 현대 프랑스 정부가 갚았다는 훈훈한 (?) 기사입니다.  그러나 이자는 안 갚았다는 조롱조의 구절로 끝맺는군요.)



적국이 아니라 주로 동맹국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작전을 펼쳤던 영국군의 경우는 좀더 문제가 까다로왔습니다.  자기 정부의 말도 믿지 않는 현지 주민들에게 뭐라고 적혀 있는지도 모를 영어로 된 징발 영수증을 줘봐야 순순히 식량을 내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폴레옹과 싸우기 위해서는 현지 주민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므로, 영국군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식량을 징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징발 영수증이 즉각적으로 현금화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보여주기 위해 영국은 나름 애를 많이 썼습니다.  즉, 본국에서 국채 발행으로 돈을 모은 뒤, 그 돈을 인도 등 전세계에서 긁어모은 금화로 바꿔 선박 편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지속적으로 보낸 것입니다.  이렇게 주조된 금화는 아예 군용 기니화(military guinea)라고 불렸는데, 이것이 영국이 주조한 마지막 기니화였습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작업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이어지는 항로에는 영국 화물선을 약탈하려는 프랑스 사략선(privateer)들이 우글거렸으니까요.  이들 중 일부라도 프랑스 사략선에게 나포될 경우 잃어버리는 금화도 아깝지만, 그 액수만큼 프랑스의 군사력을 키워주는 셈이었습니다.  당시 금화 및 은화는 요즘의 석유 못지 않은 필수 전쟁 물자였거든요.




(1813년에 주조된 소위 'Military Guinea' 금화입니다.)



당시 영국군 재무관이었던 헤리즈(John Charles Herries)가 1811년~1815년 사이에 웰링턴의 원정군, 그리고 대륙 동맹국을 위한 보조금으로 지출한 금화 및 은화는 4250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금 1g을 대략 5만원으로 계산하면, 이는 무려 13조원이 넘는 거금입니다.  생산력이나 인구, 금융 규모가 요즘과는 크게 차이나는 당시의 대영제국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습니다.  이때 어쩔 수 없이 영국 정부가 손을 벌렸던 것이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 쪽이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대륙 곳곳에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랑스군과 싸우는 영국군의 군자금을 영국과 말타, 스페인과 시실리 뿐만 아니라 프랑스 은행까지 거치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스페인 현지의 웰링턴에게 공급했습니다.  





(웰링턴의 군자금을 책임지고 있던 병참 총감(Commissary-General)이던 헤리즈 John Charles Herries 입니다.  웰링턴이 한창 반도 전쟁을 수행하던 1810년대에는 기껏 해야 30대 초반이었을텐데... 대단하네요.)



1813년 말이 되어 이제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침공을 시작한 웰링턴은 여태까지와는 좀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고지식하고 배가 불렀던 프랑스 농민들은 낯선 영국 기니 금화를 받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항상 현지 주민의 지지 확보를 중요시했던 웰링턴은 그에 따라 프랑스 농민들에게 징발 댓가로 지불할 프랑스 금화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로스차일드는 그 어려운 요구조건도 훌륭하게 수행해 냈습니다.  네덜란드에 가서 프랑스 금화 및 은화를 사들인 뒤 선박 편으로 스페인으로 보낸 것이지요.  물론 이런 금융 거래에는 막대한 이윤이 따랐고,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 전쟁 금융을 통해 큰 부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웰링턴이 평펑 써대던 징발 영수증 및 군수품 구매 계약서를 로스차일드는 스페인 현지에서 헐값에 대량으로 매입하여 런던으로 가져온 뒤 제값을 받아 냈습니다.   훗날인 1834년 로스차일드는 벅스턴 경(Sir Thomas Powell Buxton)에게 말하길 "그 거래가 자신의 일생 중 최고의 비즈니스였다"라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네이썬 로스차일드 Nathan Mayer Rothschild 입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유태인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거대한 부를 이룬 것은 웰링턴의 전쟁 자금 금융을 사실상 대리하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이렇게 엄청난 돈을 버는 사람들이 꼭 생깁니다.  하지만 전쟁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행위이고, 병사들은 고통과 죽음 속에 신음하게 됩니다.  이렇게 큰 돈이 오가는 와중에도 정작 병사들은 굶기 마련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로 이번 편을 마무리하지요.  


1807년 폴란드 땅에서 러시아군과 싸우던 때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시종인 콩스탕(Louis Constant Wairy)이 남긴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행진하는 병사들 옆을 말을 타고 지나치고 있었답니다.  프랑스 병사들은 현지에서 먹을 것을 구하다보니, 재빨리 폴란드 현지어를 몇 마디씩 배운 상태였는데, 그 중 한명이 용감하게도 황제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Papa, kleba !"  (아빠, 빵이요 !)


그러자 뜻 밖에도 나폴레옹도 폴란드어로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Nie ma !"  (없다 !  There is none !)


이 말에 병사들은 빵 터져서 크게 웃고는 더 이상 배고프다는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콩스탕에게는 약간 쑥스럽게도, 폴란드어로 빵은 클레바 kleba가 아니라 흘렙 chleb이라고 합니다.)





출처 :  


Margaret S. Chrisawn.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Contributions in Military Studies) (Kindle Locations 1698-1704). Kindle Edition.

Heckscher, Eli F.  The Continental System: An Economic Interpretation

http://www.ebay.com/itm/1809-Napoleon-Austria-Napoleonic-France-Requisition-Documents-48901-/371711363946?hash=item568bb94b6a:g:x2kAAOSwHoFXsnoH

http://www.npr.org/sections/thesalt/2015/06/18/414614705/appetite-for-war-what-napoleon-and-his-men-ate-on-the-march

https://books.google.co.kr/books?id=zq8GhdLeK_kC&pg=PA115&lpg=PA115&dq=requisition+napoleon+war&source=bl&ots=4DKmy7f1pY&sig=QpxPMR2WgfRmpe7r8NDbXXYLnNU&hl=ko&sa=X&ved=0ahUKEwicz_T7gMrPAhWCipQKHTVCAT4Q6AEISDAK#v=onepage&q=requisition%20napoleon%20war&f=false

https://books.google.co.kr/books?id=PS4CVCq-70sC&pg=PT56&lpg=PT56&dq=wellington+france+gold+money&source=bl&ots=Y87Pmfkw8V&sig=n0XCX_P2qArtLtgicDcBnyA3hCg&hl=en&sa=X&ved=0ahUKEwjWxZGL8szPAhWCpZQKHWU6BAUQ6AEIJTAA#v=onepage&q=wellington%20france%20gold%20money&f=false

https://en.wikipedia.org/wiki/Nathan_Mayer_Rothschild 

https://www.the-saleroom.com/en-gb/auction-catalogues/spink/catalogue-id-srspi10011/lot-a905b379-2ad3-45f2-900d-a3f800fbadff

https://en.wikipedia.org/wiki/John_Charles_Herries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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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남변 2016.10.11 0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럽에는 이자채권의 소멸시효가 없나보군요. 우리나라 법 같으면 시효에 걸려서 원금 및 이에 대한 몇년분 이자만 지급하도록 판결이 나올 것 입니다. 진짜 유럽 법이 저런거라면 오히려 비합리적이네요. 현실적으로 프랑스 측은 어차피 다 갚을수가 없을테니 징발당한 사람의 후손이 이자를 전혀 받지 못하는 찝찝한 결과가 나와버릴 수밖에...

    • ian 2016.10.12 09:59  댓글주소  수정/삭제

      구소련 붕괴후 러시아가 새로 국채발행시에 과거 재정러시아 발행채권을 상환한 사례가 있습니다.

    • 수비니우스 2016.10.19 15: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전 세대의 일을 왜 후손인 우리가 갚아야 하는가 하고 말이에요. 2007년에 신동아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진짜로 그렇게 인터뷰하던데요. 후손들이 조상들로부터 받은 것이 있으니 저런 빚도 갚아줘야죠.

  3. boribob 2016.10.11 15: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집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추천 버튼 없는건 안타깝네염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4. 연습장 2016.10.11 2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 집에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확실히 전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로스차일드의 모습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물론 현대에까지 유태인과 프리메이슨과 관련된 각종 음모론이 넘쳐나게 된 원인은 확실히 제공한것 같군요

  5. 유애경 2016.10.12 07: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전 축하합니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발판으로하는 것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막대한 부를 거머쥐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잘보고 갑니다.

  6. Mavs 2016.10.12 1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시절과 지금은 국제법이 많이 달라졌는데 제1제정 당시의 부채를 현재의 공화국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지는 의문이군요. 그냥 서비스로 원금만 갚아준거 같은데요.

  7. 정암 2016.10.12 18: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집으로 이사를 축하드립니다^^

  8. feel96 2016.10.12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사 축하드립니다! 늘 잘 보고 있습니다^^

  9. Gale 2016.10.12 2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읽고갑니다!

  10. 오리앙 2016.10.13 1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사 축하드립니다. 지난 몇 년간 좋은 글 감사했습니다.

  11. 뽀또 2016.10.14 16: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집 마련 축하드립니다.
    징발이라...총 칼 든 군대에게 징발시 거부할 배짱은 없겠지요.
    보상은 어느정도로 되었는지 평균치가 궁금해요 ㅎㅎ

  12. 에그-egg 2016.10.16 1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집을 마련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새집 마련하신 기념으로 재미있는 글을 올리셨군요. ㅎㅎ
    앞으로도 자주 찾아뵐께요. :)

  13. 이보트 2016.10.16 1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집이 아주 깔끔하네요. 축하드립니다.

  14. 달마 2016.10.19 2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15. 라인하르트 2016.10.20 0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스트리아 같은 경우, 1806년 프로이센이 처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답이 안 나올 정도로 국가재정에 구멍이 나서 결국 바그람 전투 이후 패전 처리에서 프랑스 군이 징발했던 물자에 대한 처리를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전쟁 피해가 적던 헝가리에서 대량으로 물자을 반 강제로 징발해서 당장 급한 불은 끄는 수준이었지만, 이 때문에 가뜩이나 반 합스부르크 분위기가 강하던 헝가리인들이 반발이 더 심해집니다.

    영국같은 경우에도 대프랑스 동맹국들에게 자금 지원을 하는데 보유하고 있던 경화 상당수를 쏟아부은 결과, 경화준비용 지금(지은) 보유량이 거의 바닥날 지경이 되다 본국에서 한 동안 불태환 지폐를 발행해서 썼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사실, 영란은행이 가장 위험했던 시기는 프랑스 제국 시절이 아니라 1795-1797년, 즉 프랑스 공화국군이 네덜란드, 베네치아 공화국을 멸망시키면서 암스테르담의 은행가와 베네치아의 은행가 전부를 털어 버리면서 이들 은행들에 보관되었던 영국 내 자본 상당수가 묶이면서 일종의 금융공황이 발생했던 시기입니다. 이 때, 스미스와 멜서스, 리카도 사이의 경제학의 석학 중 하나인 헨리 손턴이 크게 활약하기도 합니다.

  16. 까마구 2016.10.20 1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사하셨으니 축하 댓글은 하나 남겨야죠... 티스토리 이사를 축하드립니다... 근데, 이제 노안이라 본문은 그럭저럭 보이는데, 댓글은 너무 작아요...ㅜㅜ

  17. 흉갑 2016.10.23 18: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이해가 안되서 그런데 승리했을때는 징발한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었나요?

  18. 삽질랜드 2016.12.08 0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당시의 현지 징발을 약탈에 가까운 행위로만 생각했는데 저렇게 거래하고 보상도 하는군요. 저는 저렇게 보급 수송도 없이 무계획적인 현지 징발을 하면 정작 중요한 때 식량을 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지 의문이기도 했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군이 최소한의 식량과 은자만 가지고 조선에 들어와 조선 사람들로부터 식량과 은자를 교환하려다 이런 거래 방식 등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 사람들의 거부로 거래가 성사되지 않아 약탈로 겨우 식량을 확보하다가 요동의 상인들을 통해 식량을 수송해 와서 보급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했다고 하는데 상업이 발달한 국가들은 어느 정도 이런 방식이 익숙했나 봅니다.

    그나저나, 그렇다면 이동 중인 군대의 현지 징발 외에는 후방에서는 따로 아무런 보급 물자 지원이라던가, 보급로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은 없었던 것인가요? 아, 뭐 화약이나 예비 화기, 군복 등, 전투나 축조 등에 필요한 건 후방에서 보급될 수밖에 없겠지만 식량 같은 건 결국 무조건 현지 징발이었던 건가요?

  19. 2018.03.25 17: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0. 유수 2018.03.25 2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송하지만; 답신을 주신것 같은데 제가 티스토리 가입이 안되어 있어서인지 비댓덧글로 말씀을 드리고도 정작 저는 답변해주신것을 보지 못합니다;; 링크를 써놔서 홍보가 될까봐 비댓을 했는데 번거로우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21. 유수 2018.03.26 0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양하신다면 안타깝지만 어쩔수가 없네요. ㅠㅠ

    괜찮으시다면 글을 퍼가는 것이라도 허락을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당연히 글의 출처는 밝히겠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