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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여행 (11) - 해협이 막히면 술탄이 죽는다 이스탄불을 굴복시킬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한 덕워쓰 제독의 함대는 철수를 결정했고, 이스탄불 앞바다에 도착한지 9일만인 1807냔 3월 1일 뱃머리를 돌려 다다넬즈 해협쪽으로 향합니다. 영국 함대는 이틀 뒤인 3월 3일, 다다넬즈 해협에 도착하여 그 좁은 수로를 통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을 기다리던 낯익은 손님들이 있었습니다. 2월 19일에도 영국 함대와 뜨겁게 대포알을 주고 받았던 해협 양쪽 해안의 오스만 투르크 요새들과 포대들이었습니다. 2월 19일에 대포알을 주고 받을 때도 영국 함대가 입은 손실은 5명 사망에 51명 부상으로서 무시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가벼웠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오스만 투르크의 포대들은 영국 함대를 맞이할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 2026. 1. 22.
콘그리브 로켓 (2) - 물리보다는 심리 이렇게 비교적 쉽게 만들어진 신병기 콘그리브 로켓에게는 기존 대포 대비 여러가지 장점이 있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가볍다는 점이었습니다. 영국 포병대의 기본 단위인 '포대'(battery)는 6문의 대포로 구성되었습니다. 그 6문의 대포를 운용하기 위해 5명의 장교와 8명의 부사관, 그리고 약 130명의 병사들이 필요했습니다. 너무 많은 인원이 필요한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대포 6문뿐만 아니라 9량의 탄약차, 기타 짐마차와 이동형 대장간 마차를 끌고 다녀야 했기 때문이고, 따라서 엄청난 수의 말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대포는 8마리의 말이 끌었고, 탄약차나 짐마차도 4~6마리의 말이 끌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1개 포대에는 보통 100마리, 기마 포병대(horse artill.. 2026. 1. 19.
이스탄불 여행 (10) - 자신감 결여 덕워쓰 제독의 함대에는 2척의 박격포함(bomb vessel) HMS Meteor와 HMS Lucifer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HMS Meteor는 13인치 박격포와 10인치 박격포를 탑재한 박격포함으로서, 1804년 프랑스의 군항인 르 아브르(Le Havre), 그리고 영국 침공 준비가 한창이던 불로뉴(Boulogne)에 폭발탄 수백 발을 발사하여 항구에 화재를 일으키는데 이미 큰 효과를 본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작 2척을 보낸 것은 확실히 이스탄불을 너무 얕본 것이었습니다. 2척에 장착된 3~4문의 박격포로는, 수병들이 하루종일 쉬지 않고 쏘아댄다고 하더라도 하루에 고작 수백 발의 폭발탄만을 투하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박격포함은 보통 작은 선박이었고 미티어 호의 배수량도 3.. 2026. 1. 15.
콘그리브 로켓 (1) - 인도에서 아스널까지 1813년 라이프치히에 영국군의 로켓 부대가 참전하게 된 계기는 1780년 인도 남동부 첸나이(Chenai) 근처인 풀랄루어(Pullalur)에서 시작됩니다. 이 마을 근처에서 약 4천의 영국 동인도회사(EIC, East India Company) 소속 부대와 인도 마이소르(Mysore) 왕국의 티푸(Tipu) 술탄이 이끄는 1만1천 병력이 충돌했는데, 결과는 영국 동인도회사군의 참패였습니다. 4천의 병력 중 불과 수백 명이 살아서 도망쳤고, 사망자가 2천이 넘었으며 포로도 1천이 넘었습니다. 부대 지휘관인 베일리(William Baillie) 중령을 포함한 유럽계 장교 50여 명도 포로로 잡힌 이 전투는, 이후 1849년 영국-시크 전쟁 때 칠리안왈라(Chillianwala) 전투에서 영국군이 참.. 2026. 1. 12.
이스탄불 여행 (9) - 이스탄불 앞의 영국 함대 2월 20일, 덕워쓰 함대는 아야 소피아가 보이는 이스탄불 앞바다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이후, 허락받지 않은 기독교 세계의 군함이 아야 소피아 앞에 나타난 것은 무려 354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스탄불을 오스만 투르크의 새로운 수도로 정했던 메흐메트 2세는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다다넬즈 해협의 요새들이 영국 함대를 막아세우지 못하자 술탄인 셀림 3세도 무척 당황했습니다. 그런 셀림 3세를 진정시킨 것은 나폴레옹이 파견한 프랑스 대사인 세바스티아니였습니다. 그가 권고한 것은 시간을 끌라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이었던 그는 저 정도 규모의 영국 함대가 이스탄불에 대해 퍼부을 수 있는 화력은 사실 그렇게까지 대.. 2026. 1. 8.
라이프치히 전투 (31) - 거북이인가 여우인가 프랑스 포병대가 테클라 언덕에서 물러나자 러시아군은 환호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프랑스 포병대만 물러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파르터 강변에 버티고 있던 그랑다르메 부대들도 후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프랑스 포병대가 러시아군과의 포병 대결에서 졌기 때문에 물러났다기보다는, 무슨 이유에선지 이 즈음해서 그랑다르메 전체가 파르터 강변에서 후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장의 러시아군 지휘관인 루체비치(Alexandr Rudzevich)도 짐작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이는 베르나도트의 뛰어난 작전지시 덕분이었습니다. 모카우 근처 파르터 강변에서 도하 준비를 하고 있던 러시아군의 뒤편으로 뷜로의 프로이센군이 저 상류의 타우하(Taucha) 쪽으로 행군하는 모습은 그랑다르메 쪽에서도 잘 보였습니다. .. 2026. 1. 5.
이스탄불 여행 (8) - 해협 속으로 해군은 바다 위를 자유롭게 떠다니는 군함들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바다로 연결된 곳이기만 하면 얼마나 먼 곳이든 상관없이 밀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WW2 때 미해군이 일본 본토를 침공하기 위해 남태평양 섬들과 필리핀, 오키나와 등을 하나씩 차례로 점령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는데, 미국 본토에서 실어와야 하는 탄약과 연료, 각종 자재 등 보급품을 집적해놓을 중간 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4~5만 톤급 거대한 전함과 항공모함으로 구성된 함대도 그럴 정도였으니, 19세기 초의 목조 범선들도 반드시 중간 기지가 필요했습니다. 물과 식량의 조달을 위해서도 중간 기지가 필요했지만, 특히 겨울철 파도가 거세지는 동부 지중해의 특성상 계속 바다에 떠있을 경우 수병들의 피로도.. 2026. 1. 1.
라이프치히 전투 (30) - 오직 스웨덴을 위하여 부브나를 위기에서 구해준 신무기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18일 새벽 베르나도트의 상황부터 보셔야 합니다. 흔히 라이프치히에서의 베르나도트의 행동에 대해 '옛주인이자 군사적 천재인 나폴레옹과 직접 대면하는 것을 너무나 무서워하던 겁장이의 태도'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그건 다소 불공평한 평가라고 생각됩니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 또는 머릿수가 많은 쪽에 의해 쓰여지기 마련이고, 베르나토트에 대해서는 독일이나 영국이나 모두 자기 이익만 챙기는 얌체라고 평각하는데다, 프랑스에서는 배신자라고 낙인 찍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역사책에서는 모두 베르나도트에 대한 욕설만 가득한 것이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을 이 라이프치히로 몰아넣기까지 베르나도트의 공헌이 얼마나 컸는지를 생각하면 그가 겁.. 2025. 12. 29.
이스탄불 여행 (7) - 영국 함대가 보스포러스로 간 이유 18세기 말 ~ 19세기 초, 유럽은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이라는 불세출의 인물로 인해 대혼란의 시기를 거치고 있었습니다. 대륙 전체가 그런 상황인데 그 끄트머리에 있던 이스탄불도 평온할 수는 없었지요. 특히 1798년 나폴레옹이 정말 엉뚱하게도 이집트를 침공하자 오스만 투르크는 그 직격탄을 얻어맞게 됩니다. 당시 이집트는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였지만, 자치령 정도의 위치를 가지고 있었고 그 지배자인 마믈룩(Mameluke) 용병들은 사실상 이스탄불로부터 독립적인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비록 명목상일 뿐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영토인 이집트를 제멋대로 침공한 나폴레옹과 오스만 투르크의 사이는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집트의 마믈룩은 오스만 투르크의 예니체리와 거의 동일한, 기독교 노예 소년들을 훈련시.. 2025. 12. 25.
라이프치히 전투 (29) - 안전제일 베니히센 18일 새벽까지 내렸던 비는 특히 부브나(Bubna)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경보병 사단이 결정적으로 늦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베니히센의 우익을 맡았던 이 경보병 6,500명은 보이하(Beucha) 인근에서 파르터강을 건너야 중간 목표지점인 클라인푀스나(Kleinpösna)로 갈 수 있었는데, 가보니 비로 불어난 파르터의 급류에 의해 다리가 쓸려가 버렸던 것입니다. 깜깜한 밤중에 급류 속 여울목을 찾아 보병과 포병들을 건너게 하는 것은 많은 어려움과 시간 지체가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이 도강을 완료한 것은 바클레이가 공격을 개시하던 오전 8시경이었습니다. 결국 부브나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바클레이의 포성을 들으며 클라인푀스나로, 거기서 다시 북쪽으로 선회하여 엥겔스도르프(Engelsdor.. 2025. 12. 22.
이스탄불 여행 (6) - 마침내 뚫린 보스포러스 모든 문명과 국가는 흥망성쇠를 겪습니다. 약 300년간 온 유럽을 벌벌 떨게 만들던 오스만 투르크도 그 운명을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1683년 시작되어 1699년까지 16년간 이어진 일련의 전쟁은 오스만 투르크 역사에서 '재난의 기간', 독일에서는 투르크 대(大)전쟁(Großer Türkenkrieg)이라고 불리는데, 합스부르크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베니스, 그리고 러시아가 오스만 투르크를 상대로 벌인 것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끝은 1699년의 칼로비츠(Karlowitz) 조약이었는데, 이 조약을 정점으로 하여 오스만 투르크는 더 이상 유럽에게 위협적인 공세를 펼치지 못했고, 이제 수세에 몰려 서서히 허물어지게 됩니다. (이 그림은 지금의 세르비아 영토인 젠타(Zenta)에서 벌어진 합스부.. 2025. 12. 18.
라이프치히 전투 (28) - 오스트리아의 자존심?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의 숨통을 틔워준 슈바르첸베르크의 명령서가 나오게 된 것은, 애초에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를 결전장으로 정하는 순간부터 절반 정도 정해져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라이프치히를 2/3 정도 포위한 연합군의 전선은 거의 20km에 가까운 길이였고, 그렇게 길게 늘어진 대규모 병력이 하나의 시계에 동기화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미 여러 번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주변을 복잡하게 얽혀 흐르는 엘스터-플라이서-파르터 등의 강과 시냇물, 습지를 이용하여 내선이동의 장점을 극대화할 생각으로 라이프치히를 결전장으로 골랐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탁월한 입지선정은 결국 그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슈바르첸베르크의 수준.. 2025. 1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