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857 WW2 중 항모에서의 야간 작전 (11) - 정찰 없이는 공격도 없다 군사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 그 어떤 화력도 방호력도 막대한 군수물자도 정보만한 가치를 가지지 못함. 타란토 습격 작전 같은 경우, 좌표와 수심, 지형 등의 정보는 수만년 전부터, 그리고 부두 시설 등은 수백년 전부터 고정되어 있는 항구이니 정보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음. 가장 중요한 정보는 타란토에 과연 어떤 군함들이 얼마나,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느 위치에 정박하고 있는지 하는 부분.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대공포와 탐조등, 그리고 어뢰 방어망 등의 방어시설이 어떻게 설치되어 있느냐 하는 것. 특히 군함이란 부동산이 아니라 동산이므로, 공습 바로 직전의 정보가 절실하게 필요. 그런 정보를 알아내는 것에는 간첩 등등의 다양한 수단이 동원되.. 2025. 5. 1.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26) - 나폴레옹의 변덕 나폴레옹이 빋은 편지는 바로 전날인 10월 11일 뮈라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10일에 보르나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러시아군을 무찌르고 전선을 확보했다던 뮈라는 불과 하룻만에 전혀 다른 소식을 전했습니다. 슈바르첸베르크가 후퇴하는 듯 하더니 오히려 더 증강된 병력을 내세워 전진하고 있으며, 중과부적으로 자신은 이미 라이프치히 외곽인 크뢰번(Cröbern)까지 후퇴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건 뷔르첸까지 진격했을 때 이미 예상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불과 5만 정도의 병력을 가진 뮈라가 몇 배의 병력을 거느린 슈바르첸베르크의 북진을 언제까지 막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을 예측했던 나폴레옹은 이미 전군을 작센에서 빼내 엘베강 우안으로 건너가 식량이 풍부한 브란덴부르크에서 작전을 펼치기로 모든 계획.. 2025. 4. 28. WW2 중 항모에서의 야간 작전 (10) - 섶을 지고 불 속으로 타란토 군항을 뇌격기로 습격하는 작전 계획의 명칭은 'Operation Judgement' (심판 작전). 영국해군 일부 장교들은 이 위험한 작전에 대해 '심판 받는 쪽이 과연 이탈리아 해군이냐 영국해군이냐'라며 불안해하기도. 실은 실제 적탄에 노출될 소드피쉬 조종사들의 불안감은 매우 높았음. 한 조종사는 '경기병 여단(Light Brigade)의 돌격 때도 지휘부가 그런 결과를 예측하고도 돌격 시켰겠냐'라며 불만을 터뜨리기도. (여기서 말하는 경기병 여단의 돌격이란 1854년 크리미아 전쟁 때 제7대 카디건 공작(7th Earl of Cardigan)인 제임스 브루드넬(James Brudenell)이 감행했던 발라클라바 (Balaclava) 전투에서의 돌격을 말하는 것. 러시아군 포병들이 완벽한.. 2025. 4. 24.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25) - 집착이 모든 것을 망친다 전장을 작센에서 브란덴부르크로 옮겨버리기 위해 엘베강 우안으로 건너가겠다는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여전히 나폴레옹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정보였습니다. 일단 블뤼허건 베르나도트건 대체 적군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공격을 하든 말든 할텐데, 그들의 행방이 여전히 묘연했습니다. 더욱 혼란스럽게도, 사방으로 풀어놓은 척후들과 간첩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가 제각각이었습니다. 그나마 몇몇 첩보를 종합해본 결과로는, 블뤼허는 강을 건넜던 교두보인 바르텐부르크가 아니라 베르나도트의 교두고가 있는 데사우로 간 것 같았습니다. 특히 모크레나에서 용하게 후퇴했던 자켄도 데사우에서 블뤼허의 본대와 합류했다는 소식도 들어왔습니다. 상식적으로도 블뤼허가 바우첸에서 바르텐부르크까지 5일간이나 북서쪽으로 강행군한 이유는.. 2025. 4. 21. WW2 중 항모에서의 야간 작전 (9) -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일단 낮이건 밤이건 항구에 정박한 전함들을 공격하는 것에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음. 일단 수심. 항구는 당연히 수심이 대양보다는 무척 얕음. 폭탄으로 공격할 때는 문제가 안될 테지만 어뢰로 공격하자니 이게 심각한 문제였음. 전에도 언급했듯이, 보통 항공어뢰는 투하되면 일단 21m 이상의 깊이로 잠수했다가 목표를 향해 돌진하면서 수심 유지 장치에 의해 미리 정해둔 심도로 조금씩 떠오르게 되어 있음. 그런데 타란토 항구에서도 전함들이 정박하는 계류장의 평균 수심은 15m에 불과. 결국 평소 하던 대로 어뢰를 투하하면 그 어뢰들은 모조리 타란토 항구의 진흙바닥에 쳐박히게 된다는 소리. 이 문제는 1941년 12월 진주만을 습격했던 일본해군 뇌격기들도 직면했던 문제. 흔히 일본해군은 그 문제를 타란.. 2025. 4. 17.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24) - 브란덴부르크로 간다 바트 뒤벤 성(Schloss Schnaditz, 또는 Bad Düben Schloss)에 도착한 나폴레옹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남부 전선에서 보헤미아 방면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던 뮈라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 보고에 따르면 오스트리아군이 페니히(Penig)를 통해 쏟아져 나오고 있고, 비트겐슈타인이 이끄는 러시아군 약 2만5천이 알텐부르크와 자이츠(Zeitz) 사이를 통해 북진하고 있었습니다. 페니히와 자이츠를 잇는 거리는 약 48km로서, 원래 나폴레옹이 뮈라에게 지키라고 지시했던 보르나(Boran)부터 로슐리츠(Rochlitz) 사이의 약 30km 전선보다 훨씬 긴 거리였습니다. 뜻하는 바는 뮈라는 보르나-로슐리츠 전선을 지킬 수 없을 것이므로 결국 라이프치히로 후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 2025. 4. 14. WW2 중 항모에서의 야간 작전 (8) - 해가 빨리 지는 바다 올빼미 같은 특수한 경우를 뺴고는 새는 밤에 날지 않음. 네발 짐승들 중에는 야행성 짐승도 많지만 대부분의 조류는 주행성임. 하늘을 나는 새는 냄새나 소리가 아니라 눈으로 먹이와 위험을 파악해야 하므로, 해가 없는 밤에는 날지 않는 것임. 같은 이유로, WW2 직전까지도 각국의 해군 항공대는 야간 비행은 어지간해서는 하지 않았음. 폭격할 적의 도시도, 그리고 돌아올 아군 기지도 모두 위치가 고정되어 있는 육군과는 달리, 해군 항공대의 목표물은 빠른 속력으로 움직이는 군함이었기 때문. (물론 민간에서는 WW1~WW2 사이에 야간 비행을 곧잘 했음. 그래서 이 책 표지처럼 생뗵쥐뻬리의 '야간비행'이라는 소설까지 있는 것임.) (또한 WW1 기간 중 독일은 쩨펠린 비행선과 Gotha 폭격기를 이용.. 2025. 4. 10.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23) - 보고서를 닥달하는 이유 10월 9일 오전 나폴레옹이 블뤼허를 잡겠다고 멀더강을 따라 바트 뒤벤으로 밀고 올라가는 동안, 랑쥬롱의 러시아 군단과 함께 바트 뒤벤에 있던 블뤼허는 휘하 각 군단들에게 라이프치히로의 진격을 취소한다는 명령문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블뤼허에게 들어온 여러 첩모에 따르면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로 직행하고 있었으므로 서둘러 후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9일 오후가 되면서 여기저기서 그랑다르메 병력이 멀더강 좌우 강변을 따라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날아온 보고서는 그 날 아침 7시경 아일렌부르크 동쪽의 모크레나(Mockrehna)에 있던 자켄(Fabian Gottlieb von der Osten-Sacken) 장군이 보낸 것이었는데, 그때만.. 2025. 4. 7. WW2 중 항모에서의 야간 작전 (7) - 이탈리아의 폭격기 그러던 와중에 WW2가 터졌음. 영국 지중해 함대는 굉장히 난처한 처지에 빠짐. 누가 봐도 우선순위는 영국 본토 방어가 더 중요했으므로 항모 HMS Glorious를 비롯한 주력함들은 모두 본토 함대(Home Fleet)로 소환되고 남은 것은 낡고 작고 느린 항모 HMS Eagle (2만2천톤, 24노트)과 순양함 몇 척 뿐. 심지어 전함은 낡은 석탄 전함 하나도 없었음.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지중해는 1차적으로 프랑스의 책임이었음. 그러나 1940년 5월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지게 됨. (HMS Eagle은 원래 칠레 해군에서 주문한 수퍼 드레드노트급 전함 Almirante Cochrane이었는데, 아직 진수 이전이던 1918년 2월, 당시 WW1을 치르고 있던 영국해.. 2025. 4. 3.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22) - 나폴레옹 버프는 없다 10월 7일 오전, 마이센으로 향하고 있던 나폴레옹에게 도착한 것은 전날 저녁 벤너비츠(Bennewitz)에서 보내온 네의 보고서였습니다. 그 보고서의 내용은 당장이라도 라이프치히에 도착할 것 같아 보이던 블뤼허가 일단 진격을 멈추고 멀더강의 우안에 멈춰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먼저 엘베 강변의 프랑스군 요새인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포위 공격을 마무리하여 후방에 대한 걱정을 덜어낸 뒤에 움직이려는 것 같다는 네의 추측도 함께 적혀 있었습니다. 네는 결단성과 용기 측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용자였으나 결코 지략으로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네의 추측성 보고를 나폴레옹이 100% 믿었다면 이상한 일이겠지만, 희한하게도 이때의 나폴레옹은 자기에게 유리한 보고만 골라서 믿.. 2025. 3. 31. WW2 중 항모에서의 야간 작전 (6) - 글로리어스의 고난 흔히 1941년 12월 일본해군의 진주만 습격은 1940년 11월 영국해군의 타란토(Taranto) 습격에 영감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함.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음. 다만 영국해군이 타란토 습격의 본질인 항구에 정박한 적함을 뇌격기로 기습 공격한다는 개념 자체를 발명한 것은 아니었음. 그런 개념을 처음 공개한 것은 바로 미해군. 아니러니컬하게도 바로 진주만에 대한 워게임에서 나왔음. 아직 해전의 주역은 든든한 장갑과 대구경 주포를 갖춘 전함의 몫이고 항공모함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전함의 작전을 위한 정찰이라는 생각이 주도적이던 1932년 2월, 하와이 방어를 위한 워게임이 벌어짐. 이때 공격군을 맡은 Harry E. Yarnell 제독은 사람들의 고정 관념을 깨버림. 야널 제독의 공격 함.. 2025. 3. 27.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21) - 전진과 철수 나폴레옹에게는 블뤼허와 베르나도트를 이번 전투에서 확실히 괴멸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건 전투에서 이들을 패배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이번에도 이들이 싸우지 않고 도망치면 어쩌나 하는 우려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당장 라이프치히로 무작정 달려가기 보다는, 먼저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상황을 파악한 뒤 먼저 엘스터와 데사우의 다리들, 즉 블뤼허와 베르나도트의 탈출로부터 끊기로 합니다. 이건 너무 낙관적으로 승리를 자신하는 행위 아니었을까요? 나폴레옹은 블뤼허-베르나도트와의 결전에서 패배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세운 1차적인 계획은 먼저 마이센으로 간 뒤, 거기서 정보를 더 획득하여 그에 따라 토르가우로 갈지 뷔르첸으로 갈지 정한다는 것이었.. 2025. 3. 24. 이전 1 2 3 4 ··· 7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