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보면 온 유럽이 휩쓸리게 되는 1812년 러시아 침공이라는 난리통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를 이간질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벌어지게 되자 오스트리아는 한발짝 물러나는 얌체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당연했는데,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러시아를 두들겨 패는 동안 떨어지는 콩고물, 즉 발칸 반도 분할에서 좀더 많은 땅을 땅을 주워먹으려 했을 뿐 뭔가 숭고하고 원대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것은 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주사위 놀음이라서, 제아무리 나폴레옹이라고 해도 프랑스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체는 애초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측에 가담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의 사위라는 인척 관계로 맺어진 관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초에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를 이간질한 실제 이유, 즉 영토 문제도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좋든싫든 프랑스측에 가담하도록 압박했습니다.  당장 흑해로 흘러가는 도나우강 하류 지역, 그러니까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 중에서 오스트리아가 자기 것이라고 침을 발라놓았던 몰도바-루마니아 방면으로 러시아군이 진격해오자 오스트리아의 입장은 무척 초조해졌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을 위해 편성하는 야전군의 규모가 무려 40만이 넘는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자, 그 정도라면 프랑스군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보고 오스트리아도 1812년 3월 나폴레옹 진영에 합류합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끝까지 얌체처럼 그야말로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정도인 3만의 병력을 제공하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했습니다.  

스웨덴도 끝까지 어느 쪽에 붙을까 저울질을 하며 눈치를 보던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어찌 보면 북구의 스웨덴은 프랑스의 진격로와는 발트해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서 지리상으로 크게 중요하지 않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꽤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당장 러시아령 핀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언제든지 당장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나라였거든요.  게다가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해협, 즉 외레순(Öresund, 영어로는 The Sound) 해협이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다는 점도 중요했습니다.  이미 프랑스 측에 붙은 덴마크의 헬싱고르(Helsingor) 요새와 스웨덴의 헬싱보리(Helsingborg) 요새 사이의 해협은 특히 좁았는데, 거리가 10km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해안포로 사용되던 36파운드 대포의 최대 사거리가 3.7km 정도였고, 유효 사거리는 고작 600~700m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두 요새 사이를 통과하는 영국 수송선이나 전열함이 크게 손상을 입을 염려는 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당시 범선들의 열악한 항행 능력을 생각하면, 특히 스웨덴 군함들이 이 해협을 가로막기라도 한다면 영국 선박들로서는 상당히 부담을 느낄 만한 일이었습니다.  

 

(덴마크 측의 헬싱보르그와 스웨덴 측의 헬싱보리 위치입니다.   저 해협만 틀어막으면 발트해는 사실상 호수가 됩니다.  코펜하겐이 위치한 덴마크의 큰 섬인 젤란트의 반대쪽 해협도 물론 항행은 가능합니다만, 그 쪽은 얕은 바다 등이 많아서 훨씬 항행에 불리하다고 하네요.)

 

(이건 함포로 사용되는 36 파운더 포이긴 합니다만, 해안 요새에서도 주로 이 36 파운드 포를 해안포로 썼습니다.  해안 요새에서는 좀 높은 위치인 성벽 위에 이런 대포를 놓았기 때문에 해수면에 위치한 전열함보다는 조금 더 멀리 포탄을 날려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1812년을 앞두고 스웨덴의 인기는 상종가를 치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노르웨이를 주겠다며 스웨덴을 유혹했고, 나폴레옹은 핀란드를 주겠다며 호객행위를 했습니다.  우스운 점은 이 모든 땅들이 결국 남의 땅이라는 점이었지요.  당시 노르웨이는 프랑스의 굳건한 동맹국인 덴마크의 영토였고, 핀란드는 바로 몇 년 전에 알렉산드르가 스웨덴으로부터 빼앗은 영토였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르나 나폴레옹이나 자기 것은 내주기 싫고 상대편의 땅을 내주겠다는 공수표를 남발한 셈이었으므로, 스웨덴은 국제 외교전에서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무척 냉철하게 판단을 해야 했습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스웨덴은 딱 적임자를 실권자로 두는 행운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스웨덴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국왕 카알 13세(Karl XIII)도 아니요 뿌리 깊은 스웨덴의 귀족 세력 연합체인 의회도 아닌, 바로 나폴레옹의 껄끄러운 친척이자 전직 프랑스군 원수, 현직 스웨덴 왕세자였던 베르나도트(Bernadotte)였습니다.  

 

 

(오늘날 스웨덴 왕가의 시조이신 베르나도트, 아니 카알 15세 전하이십니다.)

 



애초에 스웨덴이 프랑스 장군이자 나폴레옹의 친척인 베르나도트를 굳이 모셔와서 왕세자로 삼은 것은 러시아에게 상실한 옛 영토 핀란드를 나폴레옹의 위세를 등에 업고 되찾아보려는 스웨덴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도 그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웨덴 사람들만 몰랐을 뿐, 베르나도트는 애초에 나폴레옹과 좋은 관계가 아니었고, 그래서인지 아니면 정말 그의 냉철한 두뇌로 주변 정세를 정확히 분석 파악해서인지 스웨덴의 살 길은 러시아와 넓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쪽 핀란드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서쪽 노르웨이를 손에 넣는 것이라고 이미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판단이 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측에 붙느냐 러시아 측에 붙느냐는 고민은 베르나도트로서도 다시 한번 전체 상황을 되짚어 보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때 어느 쪽에 붙느냐 하는 것이 국가 전체의 흥망성쇠를 판가름지을 도박이었으니까요.  그러는 사이에 프랑스도 러시아도 애간장이 탔고, 베르나도트는 이렇게 인기가 급상승한 스웨덴의 위치를 한참 동안이나 즐겼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가 너무 질질 끌어서였는지 아니면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스웨덴의 협조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아서였는지, 베르나도트로 하여금 별다른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엘베(Elbe) 강 일대의 프랑스 동맹군을 지휘하던 다부(Davout)가 러시아 침공을 위한 사전 작전의 일환으로, 1812년 1월 발트해 남쪽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Pomerania)를 침공해버린 것입니다.  애초에 스웨덴은 이 지역을 방어할 능력도 의지도 전혀 없었으므로 프랑스군은 이 지역을 무혈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베르나도트는 운명이라는 듯이 러시아와 동맹을 맺습니다.  

이런 외교전에서 막차를 탄 것은 오스만 투르크였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로에서 멀리 떨어진, 겉으로 봐서는 직접 개입할 여지가 없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야말로 프랑스와 연합할 이유가 충분한 나라였고 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시까지 러시아와 계속 전쟁을 벌어고 있는 교전 국가였거든요.  나폴레옹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나 아일라우 전투를 치를 때에도 러시아군 주력 부대의 상당수는 저 남쪽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장에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비록 지리적 위치 때문에 프랑스군과 합류하여 공동 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지만, 러시아의 남쪽 국경의 전선을 계속 유지하기만 해도 나폴레옹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투르크군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더라도 러시아로서는 그 넓은 전선에 적어도 수 만의 병력을 유지시키고 있어야 했으니까요.  러시아로서는 나폴레옹과의 일전을 앞두고 어떻게 해서든 오스만 투르크와의 교전 상태를 종식시켜야 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라는 뻘짓으로 한동안 프랑스와의 관계가 틀어지긴 했지만, 전통적으로 프랑스편이었고 또 나폴레옹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오스만 투르크는 마지막까지 어느 쪽에 붙는 것이 유리한가를 놓고 고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동안 오스만 투르크가 잃었던 많은 것들, 즉 이집트와 발칸 반도 등의 영토를 모두 회복시켜주겠다며 10만의 군대를 동원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망해가던 오스만 투르크에게 10만군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나폴레옹이 얼마나 허세가 가득한 인간인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에게는 나폴레옹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약속보다는 당장 코 앞에서 대포를 들이대고 협박을 해대는 러시아와 영국이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영국 지중해 함대는 러시아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이스탄불을 폭격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었고, 도나우 강 하류 지역에 집결한 러시아군은 몰도바를 집어삼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1812년 5월, 오스만 투르크는 오늘날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국경인 프루트(Prut) 강을 경계로 하는 평화 협정을 러시아와 맺습니다.  이로써 러시아는 오랫동안 오스만 투르크와의 남쪽 국경에 묶여있던 대군을 북쪽으로 불러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루트 강의 위치입니다.  오늘날 루마니아와 몰도바, 우크라이나 사이를 흐르는 강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외교전에서는 나폴레옹의 완승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온 유럽이 나폴레옹 편에 선 것에 비해, 러시아 편에서 함께 싸워줄 국가는 유럽 전체에서 영국과 스웨덴 정도 밖에 없었는데, 사실 스웨덴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나라였고 영국도 유럽의 반대편인 스페인에서의 공세로도 숨을 헐떡이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 침공을 결코 쉽게 보지 않았습니다.  1807년 폴란드 지역에서의 작전을 통해 광활하고 삭막한 동구의 평원을 침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무나 뼈저리게 잘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보급 문제에 있어 기존에 없던 규모의 준비를 시작합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Prut
https://en.wikipedia.org/wiki/36-pounder_long_gu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국민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 즉 러시아로부터 핀란드를 되찾아오는 임무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건 북구의 촌뜨기 스웨덴 사람들이 국제 사정을 몰라서 가진 소원일 뿐,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웨덴 사람들의 소망을 처리하는데 있어, 자신이 그저 지시받은 목표를 무조건 수행해내는 단순무식한 장군이 아니라 목표 설정 자체부터 재검토하는 진정한 국가 지도자급 인물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증명해보입니다.


그는 떠오르는 강대국 러시아로부터 핀란드를 되찾아오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설령 나폴레옹의 힘을 빌어 일시적으로 되찾아온다고 해도 그건 일시적인 만족감을 줄 뿐, 결국 반드시 러시아와 끝없는 전쟁을 불러올 뿐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러시아는 끊임없이 서방으로 진출하려는 나라였고, 또 핀란드와는 넓은 국경선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핀란드인들은 스웨덴의 통치를 좋아하지도 않았으니 핀란드인들의 지지도 없이 러시아로부터 핀란드를 지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스웨덴 사람들에게 '꿈 깨라, 너희들은 씹지도 못할 고깃덩이를 탐내고 있다'라고 핀잔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이 진정한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핀란드가 아니라 노르웨이를 손에 넣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노르웨이를 보유하고 있는 덴마크는 러시아에 비하면 매우 허약한 상대였고, 또 지정학적으로도 노르웨이만 손에 넣으면 스칸디나비아 반도 내에서 스웨덴은 외적의 침입을 우려하지 않고 단단한 천연 국경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핀란드와 러시아 사이의 국경은 무려 1340km나 됩니다.  지금도 핀란드는 러시아의 간섭과 영향을 끊임없이 받고 있지요.  Finlandization이라는 말이 사전에 실릴 정도니까요.   위 지도에서 붉은색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게 빼앗긴 핀란드 영토입니다.)




(베르나도트의 구상처럼 노르웨이를 손에 넣으면, 스웨덴은 바다에 의해 유럽과 분리되어 국방에 있어 매우 안전한 상태가 됩니다.)




나폴레옹이 베르나도트에게 프랑스에 대한 적대 행위 금지 약속을 받아내려 했던 것처럼, 베르나도트도 나폴레옹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노르웨이였습니다.  아마 자신의 퇴직금조로 생각했던 것일까요 ?  아마 이때가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의 뒤틀린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것입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그에 응하지 않고 그 기회를 뻥 차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눌지도 모르는 스웨덴에게 줄 선물을 프랑스 말을 잘 따르는 착실한 동맹국인 덴마크로부터 뜯어낼 수는 없기 떄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만 놓고 생각해보면 이때 베르나도트에게 노르웨이를 선물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덴마크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노르웨이를 양보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받는다고 해도 프랑스로부터 떨어져 나갈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노르웨이를 선물함으로써 스웨덴을 확실한 프랑스 동맹으로 끌어들였다면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의 패배가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노르웨이를 선물꾸러미에 넣어오지는 못했지만, 베르나도트는 1810년 11월 2일 스톡홀름에 도착하여 엄청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는 여기서 이름을 스웨덴식 카알 요한(Karl Johan)으로 바꾸고 또 스웨덴 법률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종교도 카톨릭에서 개신교인 루터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는 스톡홀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단히 좋은 인상을 주며 재빨리 인기와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심지어 평민인 그가 왕세자로 책봉된 것을 내심 못마땅히 여기고 있던 국왕 카알 13세와 그의 왕비 샤를로타도 베르나도트를 각각 따로 만나보고는 그의 사람됨과 군주로서의 그릇에 크게 호감을 느꼈습니다.  카알 13세는 베르나도트를 처음 만나 본 뒤,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왕세자 책봉에 있어서) 난 꽤 큰 도박을 벌였는데, 결국 내가 이긴 것 같구만."


샤를로타도 베르나도트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신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가 스톡홀름에 도착하자마자 인기를 독차지하며 대세남이 된 것은 결코 그의 사교성이나 예의범절이 훌륭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잘 준비된 군주였는지는 도착 3일 뒤인 1810년 11월 5일 스웨덴 의회(Riksdag)에서 행한 다음 연설 내용을 직접 읽어보시면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간만에 불어 공부하는 셈 치고 불어 원문과 대조 번역했습니다.  물론 구글 번역기 도움을 크게 받았습니다.)



« J'ai vu la guerre de près, j'en connais tous les fléaux ; il n'est point de conquête qui puisse consoler la patrie du sang de ses enfants, versé sur une terre étrangère. J'ai vu le grand Empereur des Français, tant de fois couronné des lauriers de la victoire, entouré de ses armées invincibles, soupirer après l'olivier de la paix. Oui, Messieurs, la paix est le seul but glorieux d'un gouvernement sage et éclairé ; ce n'est point l'étendue d'un Etat qui en constitue la force et l'indépendance : ce sont ses lois, son commerce, son industrie, et par-dessus tout, son esprit national. »


"나는 전쟁을 가까운 거리에서 봐왔습니다.  나는 그 모든 참상을 잘 압니다.  외국 땅에 뿌려진 그 자식들의 피에 대해 조국이 위로받을 정도의 정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토록 많은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또 그 무적의 군대에 둘러싸인 위대한 프랑스 황제가 평화의 올리브 가지 뒤에서 한숨을 내쉬는 것을 봐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평화야말로 현명하고 계몽된 정부의 유일하게 영광스러운 목표입니다.  국력과 독립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국가의 영토 넓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국가의 법과, 통상과, 산업과, 그리고 무엇보다 그 국민 정신입니다."



어떻습니까 ?  어느 현대 국가에서 대통령이 하는 연설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현대적인 명문 아닌가요 ?  제가 베르나도트에 대해 이렇게 따로 긴 시리즈를 쓰게 된 것도 이 연설문을 보고 너무나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군인이었으나 결코 총칼의 힘으로 스웨덴을 부강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고, 나폴레옹의 부하였음에도 나폴레옹의 지시에 따를 생각이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핀란드를 바라는 스웨덴 사람들의 욕망 때문에 스웨덴 왕세자로 선출되었으면서도 결코 그 위험한 욕망을 채워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샤를로타 왕비가 끈질기게 구스타프 왕자를 지지했던 것은 그녀가 속절없는 보수 혈통주의자이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처음 아우구스트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덴마크인도, 러시아인도, 프랑스인도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스웨덴인이고 싶다'라고 말한 바 있었습니다.  즉, 스웨덴은 더 이상 러시아와 같은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독립국가가 되는 것을 무엇보다 바랐던 것입니다.  


베르나도트는 스톡홀름에 오자마자 정말 스웨덴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으며, 자신이 결코 나폴레옹의 강아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핀란드에 대한 스웨덴인들의 욕망이 얼마나 위험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향한 것인지를 설득했고, 대신 노르웨이를 손에 넣는 것이 스웨덴이 영원히 스웨덴으로 남을 수 있는 길이라는 점을 조야에 알렸습니다.  그는 이런 진정성과 뛰어난 식견에 바탕을 둔 리더쉽을 통해서, 비록 강력한 의회에 의해 선출된 외국 태생의 왕세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실질적인 모든 권력을 손에 넣었습니다.  특히 의회는 분열되어 있었고 국왕 카알 13세는 건상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베르나도트의 권력은 자연스럽게 굳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현실론자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곧 스웨덴에 대해 대륙봉쇄령에 참여할 것과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영국과의 교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던 스웨덴 경제에 큰 타격을 주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에 대해 이를 갈면서도, 그의 요구에 마지못해 응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프랑스의 무력에 굴복할 수 밖에 없어서 영국에 선전포고한다는 제스처를 뚜렷히 드러냈기 때문에, 영국도 사실상 스웨덴을 중립국으로 간주했습니다.  비록 교역량은 1/10 수준으로 급감할 수 밖에 없기는 했지만 영국과의 무역도 암암리에 계속 되었습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베르나도트가 오늘날 프랑스에서 배신자 취급을 받는 것은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편이 아니라 동맹국 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베르나도트의 잘못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폴레옹의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차후 러시아 침공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813년 10월의 라이프치히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프랑스어로 Bataille des Nations, 즉 여러 나라들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거의 모든 유럽국가들이 참전한 대전투였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빠졌지만, 이탈리아와 나폴리까지 참전했으니까요.  여기서 패배하면서 나폴레옹의 몰락이 결정됩니다.)




카알 13세가 베르나도트의 왕위 계승에 대해 '도박에서 이겼다'라고 표현한 것은 정말 제대로 된 표현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베르나도트가 운수대통하여 평민 하사관에서 시작하여 왕위에 올랐다고들 이야기하지만, 그의 업적을 보면 로또를 맞은 것은 베르나도트가 아니라 스웨덴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위대한 왕이었다는 점은 오늘날 스웨덴의 중립노선을 확고히 닦았다는 점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과거 17세기 북구의 사자라고 불리며 30년 전쟁에서 맹활약했던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Gustavus Adolphus)는 스웨덴을 강국으로 이끌었다고는 하지만 반면에 스웨덴을 기나긴 전쟁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많은 스웨덴 청년들이 외국 땅에서 싸우지 않아도 될 전쟁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지요.  


그러나 베르나도트는 제6차 대불동맹전쟁에 참전한 것과 스웨덴과의 합병을 반대하는 노르웨이에 대한 군사작전 외에는 전혀 전쟁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무조건 항복을 받아낼 수도 있었던 노르웨이 전쟁에서도 노르웨이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등 매우 관대한 협상 조건을 내걸어 최대한 전쟁을 빨리 끝냈지요.  스웨덴 역사상 이 1814년 노르웨이 작전이 스웨덴이 참전했던 마지막 전쟁이었습니다.  스웨덴의 중립과 그에 따른 안정과 평화가 오늘날 스웨덴의 발전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북구의 사자 구스타프 아돌프입니다.  비록 멋있는 별명을 달아서 폼은 나겠지만, 그런 멋진 별명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스웨덴 병사들이 죽어야 했을까요 ?  나폴레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불멸의 영광을 누리고 있지만, 그의 전쟁으로 상처입은 많은 국가들 중 가장 많은 젊은이들을 잃은 국가가 바로 프랑스입니다.)




또 그는 경제왕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가 국민 경제에 대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와 함께 일했던 스웨덴 귀족인 트롤-바흐트마이스터(Trolle-Wachtmeister)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가 왕세자 시절, 스웨덴 궁정에서 통치에 대한 실무 교육을 받을 때  베르나도트는 다른 것은 몰라도 경제 부분에 대해서만은 자신을 가르칠 사람이 없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스웨덴에 나보다 더 휼륭한 군인이 300명이 있다고 해도 뭐라고 반박하지 않겠네.  하지만 난 경제 부문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 특별한 수업을 거쳤으므로, 그 부문에 대해서만은 내가 스웨덴 내에서 최고 전문가라고 자신하네."   


베르나도트는 말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이 경제왕임을 증명해보였습니다.  그는 내륙 교통 통신망에 투자하고 통상을 장려하며, 민법과 형법을 정비 반포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등 나폴레옹의 프랑스 통치를 상당히 모방하여 내치에 매우 열정적으로 힘을 썼습니다.  그 결과, 그의 26년 통치 기간 동안 인구가 크게 늘었습니다.  그의 노년기에는 노르웨이를 제외한 스웨덴 국내의 인구만 해도 구스타프 4세가 핀란드를 잃기 직전 스웨덴과 핀란드의 인구를 다 합한 것보다 더 많았습니다.  밖에서 잃은 것은 안에서 찾은 셈이지요.   그도 왕위에 오르고 난 뒤 점차 우클릭하여 언론 검열을 하는 등 욕을 먹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로 그는 스웨덴 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국민들로부터도 사랑받는 인기왕이었습니다.  




(그의 검열 정책 등으로 인해 인기가 추락했을 때 일부에서는 그를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는 평생 국민들로부터 상당한 인기를 누리는 행복한 왕이었습니다.  물론 가장 큰 것은 평화와 번영을 목표로 하는 그의 통치가 훌륭했기 때문입니다만, 일개 사병에서 출발하여 나폴레옹 휘하 원수까지 올랐다가 왕이 된 그의 경력에 대해, 국민들이 '어때 우리 왕 쩔지?' 라며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로써 1810년의 주요 사건이었던 베르나도트의 스웨덴 왕세자 책봉건이 끝났습니다.  마무리는 카더라 통신으로 끝내겠습니다.  흔히 베르나도트는 젊은 시절 열혈 자코뱅으로서 가슴에 'Mort aux Rois' (Death to the Kings, 왕들에게 죽음을)라는 문신을 새겼고, 이로 인해 왕이 된 이후 절대 사람들에게 옷을 벗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의 사후에 그의 시신을 검시한 궁정 관료들에 의해 그것이 사실로 드러났다는 이야기를 (기억은 안나지만) 저도 어딘가에서 읽었습니다.  그러나 영어판 Wikipedia에 따르면 그런 문신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는 소문이며, 그런 소문이 나게 된 것은 1833년 공연된 'Le Camarade de lit' (잠자리 친구)라는 프랑스 연극에서 어떤 늙은 척탄병이 '지금은 스웨덴 왕이 된 베르나도트가 그런 문신을 새겨가지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연극 속에서도 나중에 그 문신은 흔히 알려진 대로 'Mort aux Rois'가 아니라 'Vive la république' (공화국 만세)라는 문구인 것으로 나옵니다.  실제로 그런 문신이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된 바가 없다고 합니다만, 확실한 것은 분명히 젊은 시절 베르나도트는 열혈 공화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1797년 남긴 기록에 '원칙과 확신에 의한 공화주의자로서, 나는 왕당파놈들과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다짐하는 문구가 있다고 합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fr.wikipedia.org/wiki/Charles_XIV_Jea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Hedvig_Elisabeth_Charlotte_of_Holstein-Gottorp

https://en.wikipedia.org/wiki/Union_between_Sweden_and_Norway

아우구스트 왕세자와 폰 페르센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도 사태는 험악했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국왕의 역할일텐데, 카알 13세는 정작 거의 아무 역할을 못 했습니다.  이미 1809년 11월 이미 한차례 심장마비를 일으킨 이후 건강 문제로 인해 국정에 거의 참여를 못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스웨덴의 조야는 모두 안정을 원했는데, 이 혼란이 끝나기 위해서는 강력한 후계자를 조속히 선출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했습니다.  


문제는 카알 13세의 왕비 샤를로타(Hedvig Elisabet Charlotta) 왕비였습니다.  살해된 폰 페르센과 함께 구스타프파의 수장 노릇을 해왔던 여걸이던 그녀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구스타프 왕자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공공연히 구스타프 왕자가 왕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민중의 지지를 받는 아우구스트 왕세자가 의문사를 당한 상황에서 구스타프 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될 경우 폭동이 일어날 것이 뻔했습니다.  아마 민중이 참는다고 하더라도 구스타프 4세를 쿠데타로 몰아냈던 스웨덴 군부가 가만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현실을 직면한 샤를로타 왕비도 한발 물러섰습니다.  그녀는 구스타프 왕자가 정 안 된다면 구스타프 집안의 원류인 홀슈타인(Holstein) 가문의 페터(Peter)가 왕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 없었습니다.  새 왕세자를 선출하는 회의는 외레브로(Örebro) 성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회의가 열리는 동안 샤를로타 왕비는 스트룀스홀름(Strömsholm) 궁에 사실상 연금되었습니다.  그녀의 간섭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스트룀스홀름(Strömsholm) 궁입니다.  노르딕 양식이라 그런지 왕궁치고는 상당히 단촐하네요.)




굳이 샤를로타 왕비를 연금시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전통적으로 스웨덴의 왕위는 의회(Riksdag)와 러시아가 결정하는 자리였거든요.  당시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강국인 프랑스의 눈치도 봐야 했습니다.  물론 이 회의에 러시아 대표나 프랑스 대표가 와 있지는 않았습니다만, 참석자들의 마음 속은 어떤 사람을 왕세자로 뽑아야 주변국들의 위협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인지로 복잡했습니다.  1810년 8월 21알 그 결과로 뽑힌 것이 바로 베르나도트였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이름이 스웨덴에 알려진 것은 뤼벡에서 스웨덴 포로들을 친절하게 대해준 사건이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사람들, 특히 군부에게 매우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지요.  칼 뫼르너가 독단으로 그에게 왕세자 자리를 권유한 것은 스웨덴 왕실의 분노를 살 정도로 처음에는 어처구니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만,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의외로 프랑스 군단장이자 당대 최고의 권력자 나폴레옹 황제의 인척인 베르나도트가 매우 합리적인 선택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도 천하의 나폴레옹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에 불과했고 경쟁 관계이던 덴마크도 나폴레옹의 보호를 받는 처지였으니, 나폴레옹의 친척을 왕세자로 뽑는다면 스웨덴도 자연스럽게 나폴레옹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스트룀스홀름 궁에 연금되어 있던 샤를로타 왕비는 베르나도트가 새 왕세자로 선출되었다는 것을 통보한 사람은 아델스바르드( Fredrik August Adelswärd)라는 관료였는데, 그는 평민이 스웨덴 왕위를 잇게 된 것에 대해 왕비께서 언짢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으나, 왕가의 안정을 위해 부디 기쁜 척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에 대해 왕비도 왕국에 안정만 가져올 수 있다면 누가 왕이 되더라도 환영하겠다고 말하며, 그에게 재능과 선량한 마음이 있다면 혈통이 어떤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매우 진보적인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샤를로타 왕비입니다.  이 분이 쓰신 일기는 자신의 사후 50년 이후에 출간해도 좋다는 취지로 씌여졌고, 실제로 1902년부터 조금씩 스웨덴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지금도 귀중한 스웨덴 왕실 역사 자료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스웨덴 왕비가 쓴 일기를 왜 스웨덴어로 번역하냐고요 ?  이 분은 일기를 프랑스어로 쓰셨거든요.  당시 유럽 상류 사회는 다 프랑스어를 쓰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니, 프랑스 사람인 베르나도트를 왕으로 모셔와도 일반 스웨덴 서민과 직접 이야기할 일이 없는 한 신하들과의 언어 소통 문제는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 말 미국 역사가인 슬로안(William Milligan Sloane)이 쓴 나폴레옹 전기(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에 따르면, 이때 베르나도트가 선출된 것은 프랑스에 대한 스웨덴의 정보망이 사실상 마비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대를 살고 계신 여러분과는 달리, 당시 스웨덴 귀족 사회와 군부에서는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의 미묘하면서도 팽팽한 긴장 관계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의심도 듭니다만, 살해된 폰 페르센이 스웨덴에서 높은 직위를 누렸던 이유 중 하나가 그가 마리 앙트와네트를 통해 프랑스 부르봉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폰 페르센은 스웨덴 귀족이면서도 프랑스군에 복무하며 심지어 미국 독립전쟁까지 따라 갔었지요.  왜 스웨덴 귀족이 그렇게 남의 나라 군대에 복무했을까요 ?  아니, 애초에 스웨덴 국왕이 왜 그런 것을 허용했을까요 ?  폰 페르센은 구스타프 4세의 아버지인 구스타프 3세의 심복이었는데, 그가 우연한 기회에 부르봉 왕가에 줄을 댔다는 것은 폰 페르센 개인 뿐만 아니라 스웨덴 전체를 위해서도 크게 이익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폰 페르센을 통해 당대 유럽의 손꼽히는 강국이었던 프랑스의 고급 정보들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나고 마리 앙트와네트가 처형되고, 이어서 폰 페르센까지 어이없이 죽어버리자 프랑스에 대한 스웨덴의 정보망에 큰 구멍이 뚫려 버리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 사이에 어떤 알력과 갈등이 있는지에 대해서 나폴레옹의 기관지나 다름없었던 르 모니퇴르(Le Moniteur Universel)지에서 상세히 있는 그대로 보도할 리가 없었으므로, 당시 나폴레옹의 측근들이 아니라면 그런 사실에 대해 알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 것입니다.



(르 모니퇴르 신문입니다.  1815년 7월 10일 판이니 워털루 전투 이후에 나온 신문입니다.  그래서 국왕(Le Roi)께서 누구누구를 무엇무엇으로 임명하셨다라는 소리가 나오네요.)




이렇게 순진한 스웨덴 사람들이 멋도 모르고 베르나도트를 자신들의 왕세자로 모셔가겠다고 프랑스에 통보해오자, 속이 뒤틀린 것은 당연히 나폴레옹이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그런 속내를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황제의 체면이 있는 걸요 !  그런데 나폴레옹은 체면이 좀 깎일 각오를 하고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세자가 되는 것에 충분히 초를 칠 수 있었습니다.  바로 베르나도트의 시민권 문제였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시민이자 나폴레옹 황제의 신민이었으므로 그가 스웨덴 왕세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프랑스 시민권을 버려야 했는데, 그렇게 시민권을 버리는 행위는 프랑스의 주권자인 황제 나폴레옹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이를 이용하여 베르나도트와 딜을 하나 성사시키려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시민권 포기 신청서를 들고 온 베르나도트에게 조건을 하나 내걸었습니다.  향후 스웨덴이 절대 프랑스에 대해 적대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베르나도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스웨덴 왕세자가 될 경우 자신의 의무는 프랑스가 아니라 스웨덴을 위한 것이 되므로, 그렇게 스웨덴의 국익에 반할 수 있는 약속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나폴레옹도 나름 당대의 영웅이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더 이상 치사하게 질척거리지 않고 쿨하게 이렇게 말하며 베르나도트의 신청서에 서명을 했다고 합니다.  


"가시오, 이제 당신과 나의 운명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지켜봅시다."    


스웨덴 사람들이 프랑스 내부 사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에 대해 이미 상당한 공부를 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스웨덴이 왜 자신을 왕세자로 택했는지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어떤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스웨덴이 당대 최고 권력자 나폴레옹의 부하이자 인척인 자신을 왕세자로 삼은 이유는 나폴레옹의 힘을 빌어 최근 잃었던 것을 되찾으려 함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핀란드였고, 핀란드는 러시아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과연 베르나도트는 이 어려운 퀘스트를 어떻게 수행했을까요 ?  



** 아마 다음 편이 베르나도트 마지막 편이 될 것 같군요.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Hedvig_Elisabeth_Charlotte_of_Holstein-Gottorp

https://en.wikipedia.org/wiki/Union_between_Sweden_and_Norway

1806년 11월,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다부를 돕지 않았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욕을 먹어야 했던 베르나도트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시 상황이었고, 그야말로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도망치던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기 위해 베르나도트를 포함한 프랑스군은 승리를 만끽할 여유도 없이 강행군을 해야 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군단은 뮈라의 예비 기병대 및 술트의 군단과 함께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장군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고 있었지요.  


프랑스군의 맹추격에 퇴로를 끊긴 블뤼허는 11월 5일, 과거 한자 동맹의 주요 항구 도시인 뤼벡(Lübeck)에 입성했습니다.  당시 뤼벡은 프로이센의 영토가 아닌 중립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프로이센의 패잔군 약 1만7천이 성 앞에 나타나자 입성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블뤼허는 막무가내로 성문을 열고 입성했습니다.  중립이고 나발이고 당장 갈 곳이 없었던 것이지요.  블뤼허는 절대 이 도시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이지는 않겠다는 약속을 하며 도시 의회를 달랬습니다.  이는 사실 말이 안 되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도시에서 프로이센군이 순순히 항복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바닷가에 몰린 프로이센군이 도망칠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블뤼허가 그런 약속을 한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뤼벡 시민들에게서 병사들을 먹일 대량의 술과 음식, 말 사료와 함께 병사들의 밀린 급료를 지불하기 위한 거액의 현금을 순순히 받아내려면 뭔가 약속을 해야 했던 것이지요.  아니나다를까, 당장 다음날 새벽 프랑스군이 뤼벡 앞에 나타나자 블뤼허는 이 도시의 성벽에 의지하여 결사 항전을 선언했습니다.  




(오늘날의 뤼벡시 전경입니다.  덴마크 국경 인근에 있습니다.)



(당시 뤼벡 시의 지도입니다.  강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공격하기가 용이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경악하는 사람들은 뤼벡 시민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뤼벡 시내에는 1천8백의 스웨덴군도 있었던 것입니다.  제4차 대불동맹전쟁에서 전혀 존재감없는 동맹국이었던 스웨덴군은 당시 프로이센군과 함께 하노버 지방의 탈환을 위해 발트해 연안에 와 있었는데, 프로이센이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참패를 당하자 허겁지겁 스웨덴 본국으로 후퇴하던 중이었습니다.  원래 이들은 배편을 구해 스웨덴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10월 31일 중립 도시 뤼벡으로 들어왔던 것인데, 바람 방향이 맞지 않아 출항을 못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생각지도 않게 프로이센군과 프랑스군이 중립을 무시하고 이 도시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겠다고 하니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


뤼벡은 트라베(Trave)라는 강의 만곡부에 위치한 도시였고, 비록 낡았지만 과거에는 꽤 튼튼했던 성벽으로 보호된 도시라서 잘 하면 프랑스군의 공격으로부터 적어도 며칠, 어쩌면 몇 주 정도 버틸 수 있다고 블뤼허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침 6시부터 시작된 실제 전투의 결과는 그 기대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튼튼하다고 믿었던 북문이 베르나도트의 강력한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오후 1시경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전투가 장기화될 것이라고 믿고 사령부인 시내 여관에 머물고 있던 블뤼허는 갑자기 프랑스군이 시내까지 들이닥치자 깜짝 놀라 아들과 함께 간신히 몸을 빼 탈출했으나, 그와 함께 있던 샤른호스트(Gerhard von Scharnhorst) 등 참모진은 고스란히 프랑스군의 포로 신세가 되어야 할 정도로 베르나도트의 공격은 훌륭했습니다.  이 곳에서 대략 병력의 절반 정도만 건져서 도망쳤던 블뤼허도 갈 곳은 없었습니다.  결국 다음날 자존심 강한 블뤼허는 체면을 위해 "빵도 탄약도 다 떨어졌기 때문에 항복한다" 라는 문구를 항복 문서에 집어넣는 것으로 만족하고 베르나도트와 뮈라, 술트에게 항복해야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북해의 괴물'로 재탄생하시게 되는 샤른호스트 장군입니다.  평민 출신으로서 승진과도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나, 나폴레옹에게 탈탈 털린 프로이센이 정신을 차리고 개혁을 하면서 빛을 보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때 포로가 되어 고생한 것도 나름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고 하면 좀 무리수겠지요.)



(뤼벡 시장으로 사용되던 광장에서 벌어진 혈투입니다.  뤼벡 시민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을 것입니다.)




블뤼허는 그렇게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세우고 항복하면 끝이었겠지만, 그의 고집 때문에 정작 불벼락을 맞아야 했던 것은 중립이었던 뤼벡 시민들이었습니다.  당시 전쟁의 불문률에 따르면 항복한 도시에 대해서는 약탈이 일체 허가되지 않았지만 공성전 끝에 성문을 깨뜨리고 탈취한 도시는 적어도 하루 정도는 병사들이 마음껏 약탈할 수 있었습니다.  뤼벡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벌어진 약탈과 강간, 살해 사태의 직접적인 책임은 물론 프랑스군에게 있었지만, 블뤼허도 적어도 일부 책임은 져야 했습니다.  베르나도트를 비롯한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뤼벡이 중립 도시이며, 프랑스군에게 저항한 것은 프로이센군일 뿐 뤼벡 시민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름대로는 미쳐 날뛰는 병사들을 제지하기 위해 노력은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중의 일이긴 하지만 맹장 우디노(Oudinot)도 그렇게 약탈에 광분한 병사들을 제지하다가 병사들에게 살해당할 뻔 한 일이 있었을 정도로, 그런 병사들을 말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장교들도 그냥 적당히 말리는 척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름 신사인 척 하려 노력했던 베르나도트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베르나도트에게 색다른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포로로 잡힌 적군 중에 프로이센군 외에 스웨덴군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웨덴군 1천8백은 원치 않았던 전투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는지 거의 전부가 그대로 항복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들 말고도 프로이센군도 약 4~5천 정도가 포로로 잡혔는데, 이들은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 포로들을 마치 선심쓰는 것처럼 스페인 국왕에게 보내며 '농삿일에 쓰시든 건설 현장에 쓰시든 마음대로 하시라'며 마치 노예처럼 취급할 정도였으니까요.  베르나도트는 그런 양심에 찔리는 살육의 현장에서 만난 이 운 나쁜 외국 군인들을 프로이센군처럼 모질게 대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들을 포로가 아니라 마치 조난 당한 선원들처럼 대해주었고, 특히 그 총지휘관인 뫼르너(Carl Carlsson Mörner) 장군을 비롯한 장교들에게는 상당히 친절하게 마치 손님처럼 대해주었습니다.  오쥬로(Augereau)와 란(Jean Lannes)의 부관으로 일했고 나중에 매우 뛰어난 회고록을 남긴 마르보(Jean Baptiste Antoine Marcellin de Marbot) 장군도 그 회고록에서 '베르나도트는 이 이방인들에게 자신이 가정 교육을 잘 받은 사람으로 보이도록 특별히 애를 썼다'라고 다소 비꼬는 투로 기술한 바 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뤼벡 전투의 상황이 그렇게 다소 양심에 찔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지 이 처음 보는 스웨덴인들, 그것도 꾀죄죄한 포로들로부터 나중에 뭔가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베르나도트는 평생 두 번 다시 이 스웨덴 사람들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처참한 전쟁 범죄가 벌어지던 뤼벡에서 이 별 뜻 없이 행한 작은 선의가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되돌아옵니다.



-- To be continured



** 갑자기 여기서 마태복음 25장 35절 ~ 40절 부분이 생각나네요.  우리 모두 곤경에 처한 이웃에게 도움을 베풉시다.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L%C3%BCbeck

https://en.wikipedia.org/wiki/Carl_Carlsson_M%C3%B6rner

https://en.wikipedia.org/wiki/Gebhard_Leberecht_von_Bl%C3%BCcher

http://kcm.co.kr/bible/kor/Mat25.html

1796년,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18세가 되어 삼촌인 카알 13세의 섭정 통치에서 벗어나 귀족들의 기대를 받으며 정식으로 왕좌에 올랐습니다.  그는 종교상의 이유로 러시아 대공녀를 거부하고 독일 바덴(Baden) 대공의 손녀인 도로테아(Friederike Dorothea)와 결혼했는데, 이는 좋든 싫든 러시아와 협력해야만 했던 스웨덴의 처지에서 좋은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러시아와의 협력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프랑스 때문이었지요.  당시 자코뱅들에 의한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프랑스에 대한 증오심은 구스타프 4세와 러시아의 짜르 파벨 1세(Pavel I)가 함께 가지는 것이었거든요.  




(구스타프 4세와 도로테아의 단란한 신혼 시절... 이들을 결속시킨 것이 애정보다는 권력이었다는 것은 구스타프가 왕위를 잃으면서 금방 드러납니다.)




하지만 구스타프 4세의 내치는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Riksdag)의 기대와는 달리 그다지 잘 흘러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지금은 유럽의 위기 상태로서 자코뱅들의 위협으로부터 유럽 전체를 구원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심했는지 정식 대관식도 몇 년 미루었을 뿐만 아니라 내각 구성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런 건 다 핑계였고, 그는 아버지를 암살한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와 협력할 생각이 애초에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즉위 이후 몇 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잇속 챙기기에 열중이던 귀족들을 상대하기 싫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귀족들로 이루어진 의회가 스웨덴의 실권을 70년 이상 장악하고 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금 문제에 대한 권한이 의회에 있다보니, 국가 재정을 위해서는 결국 의회와의 타협은 불가피했습니다.  특히 구스타프 4세는 등극 이전부터 원죄나 다름없는 재무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구스타프 3세가 1790년 스벤스크순드(Svensksund) 해전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수십년 만에 빛나는 승리를 거둔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전쟁 비용 조달 문제로 심각한 국가 부채가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1798년~99년에 연달아 흉작이 계속되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구스타프 4세는 1800년 초 결국 의회를 소집하게 됩니다.  여기서라도 이야기가 잘 되었으면 좋았겠으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귀족들이 의회에서 국왕을 향해 온갖 시비를 걸어대자 그는 두 번 다시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습니다.




(핀란드 해역에서 벌어진 스벤스크순드 해전의 모습입니다.  이 전투에서 양측은 각각 250여척 씩의 함정을 동원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단순히 함정 수로만 따졌을 때 발트해 최대의 해전이라는 기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스웨덴 측은 6척을, 러시아는 50~80척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구스타프 3세는 이런 승리를 거두고도 추격에 의한 전과 확대를 꾀하지 못해 결국 전쟁 배상금도 받아내지 못했고, 이때의 전쟁 비용은 아들 대에서 큰 재무적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요약하면 당시 스웨덴 왕가를 좌지우지할 세력은 러시아와 스웨덴 의회였는데, 구스타프 4세는 이 둘 모두와 아슬아슬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런 위태로운 상황이 언제까지 평온하게 갈 수는 없었고, 결국 올 것이 온 때는 1805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악운은 처음에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찾아오는 모양입니다.  혁명 프랑스를 혐오하며 반프랑스 연합에 자처하여 뛰어들었던 구스타프 4세에게 1805년 하반기는 기다리던 절호의 기회가 한꺼번에 찾아든 운수 좋은 시기였습니다.  제3차 대불 동맹 전쟁이 벌어졌고, 거기에는 영국과 오스트리아 뿐만 아니라 스웨덴의 이웃인 러시아까지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구스타프 4세는 '드디어 하늘이 스웨덴을 돕는다'라고 외치며 냉큼 거기에 참전했습니다.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1805년 겨울 나폴레옹은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며 유럽의 지배자로 우뚝 섰습니다.  




(포메라니아는 현재 독일과 폴란드에 걸쳐 있는 지역으로서, 30년 전쟁을 거친 뒤 1648년 브란덴부르크 공국, 즉 프로이센과 스웨덴 왕국이 이 지역을 쪼개어 가졌습니다.  1807년에 나폴레옹이 점령했던 이 지역은 스웨덴이 소금 이외에는 아무것도 수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810년 스웨덴에 반환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스타프 4세는 완전히 절망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아직 건재했고 프로이센은 아직 싸움에 끼지도 않았는데다, 자신의 친척이라고 할 수 있는 덴마크도 건재했으므로 발트해 너머에 있는 스웨덴이 나폴레옹의 먹이감이 될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이 한꺼번에 무너지는데는 불과 2년이 걸렸습니다.  1806년에 시작된 제4차 대불 동맹 전쟁의 결과는 잘 아실 겁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차례로 나폴레옹에게 탈탈 털리고 말았고, 난데없이 영국 해군이 나폴레옹으로부터 덴마크 함대를 보호하겠다는 핑계로 1807년 덴마크 코펜하겐을 습격하는 바람에 덴마크가 나폴레옹 측에 철썩 붙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스웨덴을 멘붕에 빠뜨린 것은 1807년 틸지트(Tilsit) 회담이었습니다.  여기서 러시아의 젊은 차르 알렉산드르는 영웅 나폴레옹의 매력에 흠뻑 빠져 프랑스의 동맹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삽시간에 스웨덴은 차가운 북극인 북쪽을 제외하고는 동서남쪽 모두가 적국으로 둘러싸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당시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영토였거든요.  별 상관도 없는 전쟁에 공연히 끼어들었던 스웨덴은 발트해 너머 가지고 있던 큼직한 영토인 포메라니아(Pomerania)를 잃어야 했습니다.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정식 초상화입니다.  저렇게 칼자루를 쥔 채로 그린 모습을 주문한 것을 보면,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통 꼭 힘도 용기도 없는 사람이 전쟁을 무서워 하지 않는 법입니다.)




스웨덴의 진짜 고난은 바로 다음 해인 1808년에 시작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사주를 받은 러시아가 스웨덴을 침공한 것입니다.  표면적인 대의명분은 나폴레옹이 주도하는 대륙봉쇄령 체제에 스웨덴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지만, 사실 러시아로서는 굳이 나폴레옹의 꼬드김이 없었어도 스웨덴을 침공했을 것입니다.  러시아는 항상 스웨덴의 식민지인 핀란드를 탐내고 있었거든요.  부왕이 남겨둔 부채에다 의회와의 불화로 인해 재정 상태도 엉망이었던 구스타프 4세에게 강력한 군대가 있을리 없었고, 불과 몇 개월만에 핀란드 대부분은 러시아가 점령해버렸습니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러시아 따위가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던 북구의 강자 스웨덴에게는 너무나도 굴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연히 나대다가 이 불필요한 굴욕을 굳이 불러들인 장본인이 바로 구스타프 4세 아돌프 본인이었습니다.  




(1808년 겨울부터 1809년 여름 사이의 핀란드 전쟁 상황도입니다.)




가뜩이나 구스타프 4세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의회의 스웨덴 귀족들은 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불과 17년 전에 그의 아버지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한 선례가 있었으니, 그 아들을 처리하는 것을 망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1809년 3월, 스웨덴의 군항 칼슈타트(Karlstad)에서 반란이 일어나 수도 스톡홀름으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반란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일단의 귀족들이 스톡홀름의 스웨덴 왕궁을 습격하여 구스타프 4세를 그의 가족들과 더불어 체포하고 감금했습니다.  이 귀족들은 그의 섭정이던 카알 공작을 설득해 임시 정부의 수반을 맡도록 했고, 그를 결국 카알 13세(Karl XIII)로 추대합니다.  이와 더불어, 귀족들은 이 취약한 왕정에게 1719년 정부 기구법보다 더 많은 권력을 의회에게 양보하고 언론 자유를 보장하는 1809년 정부 기구법을 강요하여 서명하게 합니다.  1772년 구스타프 3세의 친위 쿠데타로 권력을 빼앗긴 의회가 다시 권력을 되찾아오는 순간이었습니다.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체포 장면입니다.  쿠데타로 잡은 권력은 쿠데타로 잃는다는 아주 좋은 예입니다.)




쫓겨난 구스타프 4세는 독일로 옮겨졌다 이혼하고 결국 구스타프손(Gustafsson) 대령이라는 이름으로 스위스의 상트 갈렌(St. Gallen)의 작은 호텔에서 고독과 분노 속에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여기서 심장마비로 58세의 나이로 1837년 사망했습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즉위 당시 이미 61세로서 연로했던 카알 13세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젊을 때 2명의 아이를 낳기는 했으나, 모두 어릴 때 병사했던 것입니다.  왕정이란 후손이 없으면 존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교적 고립과 패전에 더해, 쿠데타의 혼란까지 겹쳐진 스웨덴의 사정상, 차기 국왕 후계자를 정할 때 홀슈타인-고톱 왕가와 의회 간의 팽팽한 대립 관계는 물론 프랑스와 러시아 등의 외세까지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카알 13세 본인 뿐만 아니라 스웨덴 의회 전체가 차기 국왕 후계 적임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2명이 곧 물망에 오릅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은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고, 이 사람을 추천한 귀족은 궁정의 분노를 사 체포되는 사태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To be continued...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Instrument_of_Government_(1809)

https://en.wikipedia.org/wiki/Instrument_of_Government_(1719)

https://en.wikipedia.org/wiki/Gustav_IV_Adolf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Gustav_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Finnish_War

이제 여러분은 약 4~5회의  포스팅에 걸쳐 나폴레옹의 껄끄러운 부하이자 인척이었던 장 베르나도트(Jean-Baptiste Jules Bernadotte)가 어떻게 현대 스웨덴 왕가의 초대 왕인 카알 14세(Karl XIV Johan)이 되었는지를 보시게 됩니다.  여러분들 대부분께서도 평민 하사관 출신의 프랑스 원수인 베르나도트가 프로이센과의 전쟁 때 포로로 잡힌 스웨덴 군인들을 잘 대우해준 덕분에 스웨덴에 좋은 인상을 남겼고, 때마침 스웨덴 왕에게 후사가 없자 후계자로 지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의문이 남습니다.  스웨덴 왕가에 설마 친척이 하나도 없었을 것 같지 않은데, 인척인 덴마크나 독일 귀족도 아니고 대체 왜 뜬금없이 프랑스의 장군을 왕으로 받아들였을까요 ?  그리고 기존 스웨덴 왕가에서는 왕족은 커녕 귀족도 아닌 베르나도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  가스코뉴 출신의 일개 사병에 불과했던 그가 어떻게 프랑스의 원수를 거쳐 뜬금없이 스웨덴의 왕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시작은 뜻 밖에도 18세기 초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됩니다.  


1709년 7월 우크라이나의 폴타바(Poltava)에서 스웨덴의 카알 12세(Karl XII)와 흔히 표트르 대제로 불리는 러시아의 표트르 1세(Pyotr I)가 맞붙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 대륙 북동부의 패권을 쥔 것은 전통의 강자 스웨덴이었고, 러시아는 낙후된 유럽의 변방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쾌승을 거둔 것은 표트르 1세였고, 이 전투를 통해 표트르 1세는 표트르 대제로 향후 추앙받는 미래를 닦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카알 12세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지배하는 몰다비아(Moldavia) 지방으로 도주해야 했고, 거기서 오스만 투르크에게 5년간 억류되었다가 1715년에야 풀려나게 됩니다.  




(폴타바 전투 장면입니다.)



(폴타바 전투 이후, 동맹이었던 우크라이나 카자흐 귀족 마제파(Ivan Mazepa)와 드네프르 강변에서 퇴각로를 논의하는 카알 12세입니다.)




이 폴타바 전투를 계기로 스웨덴은 1700년~1721년 사이에 치러진 대북방전쟁에서 북방의 패권을 러시아에게 빼앗기고 점차 몰락하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스웨덴은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특히 간신히 스웨덴으로 돌아온 카알 12세는 1718년 11월 당시 덴마크 영토이던 노르웨이의 요새를 공격하다가 어디선가 날아온 탄환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고 즉사했는데, 이때 그는 자식은 커녕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빈자리가 된 스웨덴 왕위에 대한 계승권은 그의 여동생 울리카(Ulrika Eleonora) 뿐만 아니라 홀슈타인-고톱(Holstein-Gottorp) 가문의 카알 프레드릭(Karl Fredrik)에게도 있었습니다.  거듭된 패전에 이런 사정까지 있다보니 결국 여왕이 된 울리카는 즉위의 댓가로 스웨덴 의회(Riksdag of the Estates, 스웨덴어로는 Riksens stander)에게 1719년 정부 기구법(Instrument of Government of 1719 스웨덴어로는 1719 ars regeringsform)이라는 문서에 서명을 해줘야 했습니다.  이 법안은 일종의 스웨덴 헌법으로 작용했고, 주된 내용은 그 이전까지 전제적 권력을 쥐고 있던 스웨덴 국왕의 권력을 대폭 제한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르웨이의 전장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카알 12세의 후송 장면입니다.)



(1917년에 이루어진 카알 12세의 부검 때 찍힌 사진입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노르웨이 요새에서 발사된 총알에 의한 것이다 아니다 포도탄이었다 아니다 그의 지휘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이 옆에서 쏜 것이다 등 별의별 소문이 많았습니다.   그런 괴소문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그의 시신은 1746년, 1859년, 1917년에 무려 3번이나 부검되었는데, 그 결과 밝혀진 것은 느린 속도의 탄환에 저격당한 것이고, 따라서 근거리의 부하가 아니라 노르웨이 요새에서 날아온 탄환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스웨덴에게는 잘 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패권은 잃었어도 입헌 군주국으로서 근대화의 길을 닦은 셈이니까요.  또한 카알 12세가 오스만에 머물던 동안 투르크인들에게 배워온 커피와 미트볼은 맛없기로 유명한 스웨덴의 식생활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최근에 스웨덴 정부가 공식적으로 '스웨덴의 대표 음식인 미트볼은 사실 카알 12세가 오스만 투르크에서 배워온 것이다'라고 밝히면서 스웨덴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요.




(스웨덴 정부 공식 트위터 계정에서 발표한, '스웨덴 대표 요리인 미트볼은 카알 12세가 터키에서 가져온 것이다 사실을 직시합시다'라는 트윗은 스웨덴 우익들에게 꽤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저 스웨덴 미트볼은 이케아 매장의 카페테리아에 가시면 드실 수 있습니다.  맛이요 ?  그냥 X뚜기 3분 미트볼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미트볼이 평범한 맛일지 몰라도 이런 딱딱한 호밀빵을 먹고 살던 바이킹의 후예들에게는 '드넓은 드네프르 강변 초원에서 살찐 암소들이 뛰노는 맛'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고양 이케아에 갔다가 이 knackerbrod(비스킷 스타일의 딱딱한 호밀빵)을 파는 것을 보고 찍은 사진입니다.  원래 페북에 올렸었는데, 한 분이 저 왼쪽 표지를 보고 댓글에서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니, 첫줄부터 거짓말 !'이라고 쓰신 것을 보고 빵터졌습니다.  김한솔님 고맙습니다.)




울리카 여왕은 처음에는 남편 헤세-카셀 백작(Landgrave of Hesse-Kassel)을 왕으로 승격시키고 남편과의 공동 통치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스웨덴 의회(Riksdag)과의 갈등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결국 1년 뒤인 1720년 남편에게 아예 양위를 해버렸습니다.  이로써 17세기 중반부터 스웨덴을 통치해온 팔라틴-츠바이브뤼켄(Palatinate-Zweibrucken) 왕가의 혈통은 끊어지고 독일계인 헤세-카셀 가문이 스웨덴 왕가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와이프를 잘 둔 덕분에 스웨덴 국왕에 오른 프레드릭 1세(Fredrik I)도 자식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1751년 그의 친척이었던 독일계 홀슈타인-고톱(Holstein-Gottorp) 가문의 아돌프 프리드리히(Adolf Friedrich)가 스웨덴 국왕 아돌프 프레드릭(Adolf Fredrik)이 되어 홀슈타인-고톱 가문의 치세가 시작되었습니다.  


헤세-카셀 가문이 스웨덴 국왕이 된 것도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을 패배시킨 러시아와 1719년 정부 기구법을 강요하여 통과시킨 스웨덴 의회였듯이, 홀슈타인-고톱 가문의 아돌프 프레드릭을 스웨덴 왕위에 올린 것도 결국 러시아와 스웨덴 의회였습니다.  1741–43년의 스웨덴-러시아 전쟁에서 이번에는 러시아의 여걸 엘리자베타(Elizaveta Petrovna) 대제에게 패배한 스웨덴에서는 당시 의회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모자당(the Hats, 스웨덴어로는 Hattarna)이 패전의 책임추궁을 피하기 위해 왕위 계승권 문제를 이슈화시켰습니다.  여기에 러시아 엘리자베타 대제가 끼어들었습니다.  패배한 스웨덴과 종전 협상을 하던 엘리자베타는 과연 여걸답게, 스웨덴으로부터 빼앗은 핀란드 영토 대부분을 되돌려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대신 그녀의 후계자인 표트르 3세(Pyotr III)의 삼촌인 홀슈타인 공 아돌프 프리드리히를 스웨덴 국왕 후계자로 지명하라는 것이었지요.  핀란드 땅을 돌려주는 대신 아예 스웨덴 전체를 쥐고 흔들겠다는 통큰 구상이었습니다.  국가보다는 당장 세금이 나올 영토와 자신들의 특권이 가장 중요했던 스웨덴 의회는 그 미끼를 덜컥 물어버렸습니다.  




(아돌프 프레드릭입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지 20년만인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의 사인은 과식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먹었던 식사는 랍스터, 캐비어, 사우어크라우트, 훈제 청어와 샴페인이었고, 거기에 덧붙여 그가 끔찍하게 좋아했던 스웨덴식 달콤한 푸딩인 셈라(Semla)를 뜨거운 우유에 적신 것을 무려 14인분을 먹었다고 합니다.) 



(아돌프 프레드릭을 사망에 이르게 한 헤트베크(Hetvägg)는 셈라(Semla)에 뜨거운 우유를 부어먹는 디저트입니다.  부먹을 즐기는 것을 보니 스웨덴 사람들 야만인이네요.  찍먹이여 영원하라 !)




이렇게 의회와 러시아 덕분에 왕위에 오른 아돌프 프레드릭은 그들의 기대대로 유약한 왕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권력이 의회에 있고 나라 전체가 러시아 눈치를 보던 상황에서, 허울 뿐인 왕이었던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당시 유행하던 코담배갑(snuffbox)를 만들며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 그도 의회로부터 권력을 다시 가져오려고 간간히 노력을 하긴 했습니다.  그의 왕비인 루이자 울리카(Louisa Ulrika)가 의회에 대적하여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왕비는 폐위되고, 국왕 아돌프 프레드릭은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있을 경우 퇴위하겠다'라는 서약을 해야 했습니다.  1768년에는 아돌프가 의회 권력에 저항하여 칙령에 서명을 거부하는 12월 위기(스웨덴어로 Decemberkrisen)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만, 그 결과로 의회로부터 받아낸 것은 그야말로 용돈 인상 정도였습니다.


그런 권력 없는 스웨덴 국왕이 권력을 되찾은 것은 그의 아들 구스타프 3세(Gustav III)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디저트를 너무 많이 드셔서 돌아가신 1771년 왕위에 오른 구스타프 3세는 바로 다음해인 1772년 과격한 방법으로 다시 전제 군주가 됩니다.  1718년 카알 12세의 전사 이래, 1719년 정부 기구법을 통해 실권을 장악했던 스웨덴 의회의 권력을 친위 쿠데타를 통해 끝장낸 것입니다.  정작 이렇게 귀족들로부터 무력으로 권력을 되찾은 구스타프 3세는 자신이 계몽 군주임을 표방하여, 볼테르와 교류를 가지면서 여러가지 개혁 작업을 실시했습니다.  또한 1790년 쌍방에서 500척의 군함을 동원한 엄청난 규모의 스벤스크순드(Svensksund)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을 대파하는 기염을 토하며 스웨덴이 아직 무시당할 수준으로 찌그러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보였습니다. 



 

(구스타프 3세입니다.  이 양반의 자코뱅에 대한 증오심은 살짝 지나쳤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등장하는 페르젠의 실제 모델인 악셀 폰 페르센이 프랑스군과 함께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었습니다.  폰 페르센이 그 공로로 조지 워싱턴으로부터 훈장을 받자, 구스타프 3세는 폰 페르센에게 '국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준 훈장은 패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대승리로 인해 스웨덴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자칭 계몽 군주였던 그는 이런 위험한 혁명분자들, 즉 자코뱅(jacobin)들에 대한 격렬한 증오에 사로잡혀 자유 언론을 탄압하고 별 직접적인 상관도 없는 프랑스를 적대시하며 유럽 각국의 왕족들과 연합하여 반프랑스 동맹의 열혈 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쿠데타로 권력을 빼앗은 왕을 미워하던 스웨덴 귀족들은 쓸데없이 남의 나라 일에 배놔라 감놔라 하며 국가와 귀족들을 위험에 몰아넣는 구스타프 3세에 대해 더욱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반감은 결국 1792년, 스웨덴 왕립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가장 무도회에 참석했던 구스타프에 대한 암살로 터져나옵니다.  근거리에서 등 뒤에 권총을 맞은 구스타프 3세는 총을 맞는 순간 다음과 같이 완벽한 프랑스어로 외쳤다고 합니다.


Ah! Je suis blessé, tirez-moi d'ici et arrêtez-le  (아 !  난 부상을 입었다, 날 여기서 끌고나가고 저 자를 체포하라 )


그는 이랗게 암살범들을 진압하였으나, 총을 맞은지 13일만에 패혈증으로 결국 사망했는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다행히도 스웨덴어였다고 합니다.


Jag känner mig sömnig, några ögonblicks vila skulle göra mig gott  (졸립구나, 조금 자고 나면 괜찮아질거야)


그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아들 구스타프 4세 아돌프(Gustav IV Adolf)였습니다.  당시 14살로 아직 미성년이었던 그는 삼촌 카알(Karl) 공작의 섭정 하에 성장했는데,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은 그가 숙적이자 무시할 수 없는 힘센 이웃 러시아의 대공녀인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Alexandra Pavlovna)와의 결혼을 거절했던 사건이었습니다.  1796년, 섭정인 카알 공작은 이제 막 성인이 되기 직전이었던 구스타프 4세의 미래를 위해 러시아와의 정략 결혼을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구스타프 4세는 독실한 루터파 개신교 신자였고, 자신의 왕비가 러시아 정교를 버리고 루터파로 개종하지 않는다면 결혼할 수 없다고 버티어 이 혼사를 망쳐놓았습니다.  이것을 본 스웨덴 귀족들은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드디어 스웨덴에 검소하며 신앙심이 독실한 평범한 왕이 왕좌에 앉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To be continued...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Instrument_of_Government_(1809)

https://en.wikipedia.org/wiki/Instrument_of_Government_(1719)

https://en.wikipedia.org/wiki/Gustav_IV_Adolf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Gustav_III_of_Swed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