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02 06:30

1796년,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18세가 되어 삼촌인 카알 13세의 섭정 통치에서 벗어나 귀족들의 기대를 받으며 정식으로 왕좌에 올랐습니다.  그는 종교상의 이유로 러시아 대공녀를 거부하고 독일 바덴(Baden) 대공의 손녀인 도로테아(Friederike Dorothea)와 결혼했는데, 이는 좋든 싫든 러시아와 협력해야만 했던 스웨덴의 처지에서 좋은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러시아와의 협력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프랑스 때문이었지요.  당시 자코뱅들에 의한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프랑스에 대한 증오심은 구스타프 4세와 러시아의 짜르 파벨 1세(Pavel I)가 함께 가지는 것이었거든요.  




(구스타프 4세와 도로테아의 단란한 신혼 시절... 이들을 결속시킨 것이 애정보다는 권력이었다는 것은 구스타프가 왕위를 잃으면서 금방 드러납니다.)




하지만 구스타프 4세의 내치는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Riksdag)의 기대와는 달리 그다지 잘 흘러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지금은 유럽의 위기 상태로서 자코뱅들의 위협으로부터 유럽 전체를 구원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심했는지 정식 대관식도 몇 년 미루었을 뿐만 아니라 내각 구성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런 건 다 핑계였고, 그는 아버지를 암살한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와 협력할 생각이 애초에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즉위 이후 몇 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잇속 챙기기에 열중이던 귀족들을 상대하기 싫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귀족들로 이루어진 의회가 스웨덴의 실권을 70년 이상 장악하고 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금 문제에 대한 권한이 의회에 있다보니, 국가 재정을 위해서는 결국 의회와의 타협은 불가피했습니다.  특히 구스타프 4세는 등극 이전부터 원죄나 다름없는 재무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구스타프 3세가 1790년 스벤스크순드(Svensksund) 해전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수십년 만에 빛나는 승리를 거둔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전쟁 비용 조달 문제로 심각한 국가 부채가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1798년~99년에 연달아 흉작이 계속되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구스타프 4세는 1800년 초 결국 의회를 소집하게 됩니다.  여기서라도 이야기가 잘 되었으면 좋았겠으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귀족들이 의회에서 국왕을 향해 온갖 시비를 걸어대자 그는 두 번 다시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습니다.




(핀란드 해역에서 벌어진 스벤스크순드 해전의 모습입니다.  이 전투에서 양측은 각각 250여척 씩의 함정을 동원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단순히 함정 수로만 따졌을 때 발트해 최대의 해전이라는 기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스웨덴 측은 6척을, 러시아는 50~80척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구스타프 3세는 이런 승리를 거두고도 추격에 의한 전과 확대를 꾀하지 못해 결국 전쟁 배상금도 받아내지 못했고, 이때의 전쟁 비용은 아들 대에서 큰 재무적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요약하면 당시 스웨덴 왕가를 좌지우지할 세력은 러시아와 스웨덴 의회였는데, 구스타프 4세는 이 둘 모두와 아슬아슬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런 위태로운 상황이 언제까지 평온하게 갈 수는 없었고, 결국 올 것이 온 때는 1805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악운은 처음에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찾아오는 모양입니다.  혁명 프랑스를 혐오하며 반프랑스 연합에 자처하여 뛰어들었던 구스타프 4세에게 1805년 하반기는 기다리던 절호의 기회가 한꺼번에 찾아든 운수 좋은 시기였습니다.  제3차 대불 동맹 전쟁이 벌어졌고, 거기에는 영국과 오스트리아 뿐만 아니라 스웨덴의 이웃인 러시아까지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구스타프 4세는 '드디어 하늘이 스웨덴을 돕는다'라고 외치며 냉큼 거기에 참전했습니다.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1805년 겨울 나폴레옹은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며 유럽의 지배자로 우뚝 섰습니다.  




(포메라니아는 현재 독일과 폴란드에 걸쳐 있는 지역으로서, 30년 전쟁을 거친 뒤 1648년 브란덴부르크 공국, 즉 프로이센과 스웨덴 왕국이 이 지역을 쪼개어 가졌습니다.  1807년에 나폴레옹이 점령했던 이 지역은 스웨덴이 소금 이외에는 아무것도 수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810년 스웨덴에 반환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스타프 4세는 완전히 절망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아직 건재했고 프로이센은 아직 싸움에 끼지도 않았는데다, 자신의 친척이라고 할 수 있는 덴마크도 건재했으므로 발트해 너머에 있는 스웨덴이 나폴레옹의 먹이감이 될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이 한꺼번에 무너지는데는 불과 2년이 걸렸습니다.  1806년에 시작된 제4차 대불 동맹 전쟁의 결과는 잘 아실 겁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차례로 나폴레옹에게 탈탈 털리고 말았고, 난데없이 영국 해군이 나폴레옹으로부터 덴마크 함대를 보호하겠다는 핑계로 1807년 덴마크 코펜하겐을 습격하는 바람에 덴마크가 나폴레옹 측에 철썩 붙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스웨덴을 멘붕에 빠뜨린 것은 1807년 틸지트(Tilsit) 회담이었습니다.  여기서 러시아의 젊은 차르 알렉산드르는 영웅 나폴레옹의 매력에 흠뻑 빠져 프랑스의 동맹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삽시간에 스웨덴은 차가운 북극인 북쪽을 제외하고는 동서남쪽 모두가 적국으로 둘러싸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당시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영토였거든요.  별 상관도 없는 전쟁에 공연히 끼어들었던 스웨덴은 발트해 너머 가지고 있던 큼직한 영토인 포메라니아(Pomerania)를 잃어야 했습니다.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정식 초상화입니다.  저렇게 칼자루를 쥔 채로 그린 모습을 주문한 것을 보면,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통 꼭 힘도 용기도 없는 사람이 전쟁을 무서워 하지 않는 법입니다.)




스웨덴의 진짜 고난은 바로 다음 해인 1808년에 시작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사주를 받은 러시아가 스웨덴을 침공한 것입니다.  표면적인 대의명분은 나폴레옹이 주도하는 대륙봉쇄령 체제에 스웨덴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지만, 사실 러시아로서는 굳이 나폴레옹의 꼬드김이 없었어도 스웨덴을 침공했을 것입니다.  러시아는 항상 스웨덴의 식민지인 핀란드를 탐내고 있었거든요.  부왕이 남겨둔 부채에다 의회와의 불화로 인해 재정 상태도 엉망이었던 구스타프 4세에게 강력한 군대가 있을리 없었고, 불과 몇 개월만에 핀란드 대부분은 러시아가 점령해버렸습니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러시아 따위가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던 북구의 강자 스웨덴에게는 너무나도 굴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연히 나대다가 이 불필요한 굴욕을 굳이 불러들인 장본인이 바로 구스타프 4세 아돌프 본인이었습니다.  




(1808년 겨울부터 1809년 여름 사이의 핀란드 전쟁 상황도입니다.)




가뜩이나 구스타프 4세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의회의 스웨덴 귀족들은 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불과 17년 전에 그의 아버지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한 선례가 있었으니, 그 아들을 처리하는 것을 망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1809년 3월, 스웨덴의 군항 칼슈타트(Karlstad)에서 반란이 일어나 수도 스톡홀름으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반란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일단의 귀족들이 스톡홀름의 스웨덴 왕궁을 습격하여 구스타프 4세를 그의 가족들과 더불어 체포하고 감금했습니다.  이 귀족들은 그의 섭정이던 카알 공작을 설득해 임시 정부의 수반을 맡도록 했고, 그를 결국 카알 13세(Karl XIII)로 추대합니다.  이와 더불어, 귀족들은 이 취약한 왕정에게 1719년 정부 기구법보다 더 많은 권력을 의회에게 양보하고 언론 자유를 보장하는 1809년 정부 기구법을 강요하여 서명하게 합니다.  1772년 구스타프 3세의 친위 쿠데타로 권력을 빼앗긴 의회가 다시 권력을 되찾아오는 순간이었습니다.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체포 장면입니다.  쿠데타로 잡은 권력은 쿠데타로 잃는다는 아주 좋은 예입니다.)




쫓겨난 구스타프 4세는 독일로 옮겨졌다 이혼하고 결국 구스타프손(Gustafsson) 대령이라는 이름으로 스위스의 상트 갈렌(St. Gallen)의 작은 호텔에서 고독과 분노 속에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여기서 심장마비로 58세의 나이로 1837년 사망했습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즉위 당시 이미 61세로서 연로했던 카알 13세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젊을 때 2명의 아이를 낳기는 했으나, 모두 어릴 때 병사했던 것입니다.  왕정이란 후손이 없으면 존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교적 고립과 패전에 더해, 쿠데타의 혼란까지 겹쳐진 스웨덴의 사정상, 차기 국왕 후계자를 정할 때 홀슈타인-고톱 왕가와 의회 간의 팽팽한 대립 관계는 물론 프랑스와 러시아 등의 외세까지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카알 13세 본인 뿐만 아니라 스웨덴 의회 전체가 차기 국왕 후계 적임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2명이 곧 물망에 오릅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은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고, 이 사람을 추천한 귀족은 궁정의 분노를 사 체포되는 사태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To be continued...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Instrument_of_Government_(1809)

https://en.wikipedia.org/wiki/Instrument_of_Government_(1719)

https://en.wikipedia.org/wiki/Gustav_IV_Adolf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Gustav_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Finnish_War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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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ms3278 2018.07.02 0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사람이 베르...

  2. Dogswellfish 2018.07.02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나르 베르베르 ㅋㅋㅋ

  3. 웃자웃어 2018.07.02 1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매번 질문에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질문하고픈게 많아서 질문합니다.
    1)나폴레옹에게 전쟁배상금을 요구받은 나라들은 다 갚았나요? 물론 프로이센은 다 못갚은걸로 압니다. 그럼 오스트리아는 다 갚았나요?
    2)배상금을 갚을때 무리하게 물자를 징발하거나 세금을 올려서 갚기도 하나요?
    3)프랑스의 경우는 나폴레옹 전쟁이후에 연합군이 얼마정도의 배상금을 물렸나요?

    • nasica 2018.07.02 20: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저도 모르겠습니다.
      2) 귀금속 외의 상품은 not welcome 이었습니다.
      3) 그건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 reinhardt100 2018.07.02 22:41  댓글주소  수정/삭제

      1. 전쟁배상금 요구받은 국가들 전부 다 결국에는 못 갚았습니다. 아니 결국에는 안 갚은 거죠. 나폴레옹 전쟁 종전 당시, 1차 빈 회의에 의해서 '프랑스에 대하여 전쟁배상금을 부과하지 않은 조건으로 승전국이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등이 프랑스와 그 동맹국이었던 국가들에게 진 전쟁배상금 역시 상계한다.'라고 결정했었거든요.

      2. 배상금 갚을 때 원칙적으로 정화준비금용 귀금속, 그 중에서도 금화를 선호하긴 했습니다. 다만, 전쟁배상금 중에 일부는 '적국에서 현지징발한 물자에 대한 차용증'이 포함되기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자국민에 대한 보상차원에서라도 가능한 한 지불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정 안 되면 군수물자 중 비전투용품을 싸게 불하해 주는 방법까지 동원했습니다.

      3. 패전국 프랑스의 경우, 1차 빈회의에서는 전술한 것을 참고한다면 1792년의 국경으로 돌아가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배상금을 탕감받는데는 성공합니다. 이게 중요한게 프랑스 입장에서는 벨기에 지역, 특히 프랑스에 부족한 석탄자원의 보고였던 리에주 지역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에 루이 18세의 부르봉 왕정에 대한 부르주아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죠. 문제는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백일천하 이후에 개정된 조건이었는데 이때는 혁명 전 프랑스 국경으로 돌아가면서 동시에 7억 프랑의 배상금을 신성동맹 가맹국과 영국에게 지급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게 됩니다. 이 배상금 배분을 두고 영국과 러시아가 엄청나게 싸우게 됩니다. 영국 입장에서는 전비 절반 이상을 보조해준 만큼 당연히 영국이 절반 이상을 분배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데 반해 러시아는 자신들이 나폴레옹군 주력을 격파한 이상 최대지분을 보장해달라고 주장합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역시 러시아측에 동조하였고 이 때문에 영국과 다른 승전국들간에 긴장이 꽤 있었고, 이후 7월 혁명과 빈 체제가 무너지는데 영국이 반쯤 방조해버린 이유가 되긴 합니다.

      프랑스 입장에서도 7억 프랑을 부과받은데다가 벨기에 지역, 그중에서도 탄전지역이 모조리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산업혁명에 진입하는데 치명타를 받았고 이는 장기적으로 프랑스 중공업 발전에도 큰 악영향을 미칩니다. 로렌 등의 철산지가 있어서 제철용 원철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 석탄 산지는 중앙 마시브 지역 일부, 릴 주변의 북프랑스 탄전 밖에 없었고 하필이면 이들 탄전이 독일이나 벨기에, 영국 등에 비하면 소규모이고 지질상으로도 채굴에 문제가 있는 판이라 제철 및 산업 원료용 석탄 생산에서 늘 뒤쳐지는 상황이 되면서 프랑스 산업구조가 20세기 중반까지 농업국가로 오해받을 정도로 제조업 분야에서 영국과 독일에게 뒤쳐지는 막장 상황이 연출됩니다.

    • nasica 2018.07.02 23: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Reinhardt님 특히 3번 정보 고맙습니다. 그랬군요 !

    • 웃자웃어 2018.07.02 2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변 감사드립니다만 7억프랑이면 어느정도의 금액이죠? 프랑스의 1년치 GDP? 프랑스의 1년치 수입?

    • reinhardt100 2018.07.03 0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는 GDP보다는 GNP로 보는게 타당합니다. 아무래도 전쟁이나 이후 무역형태가 자본이동에 치우친게 있어서요.

      일단, 프랑스같은 경우 당시 화폐제도가 워낙 극심한 혼란이 있어서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7억 프랑이면 당시 프랑스 GNP의 25%정도로 추산됩니다만 문제는 프랑스의 농업생산력이 제대로 측정되지 않은 수치라는 겁니다. 공식적으로 프랑스가 영국보다 GNP에서 뒤쳐진 시점이 1830년대인데 이것도 영국 제조업의 산출액이 과대평가되서 그렇지 실질적으로는 1840년대 후반이 되어야 완전히 역전하였다고 추정됩니다.

      참고할 만한 것으로써 1830년 7월 혁명의 가장 큰 원인은 사실, 선거권보다 혁명 시기 토지를 잃어버린 구 망명 귀족을 위한 대량의 국채발행을 샤를 10세가 의회와 행정부의 반대를 무시하고 무리해서 추진한 것입니다. 이 때 구 망명 귀족층에게 제공될 국채가 총 10억 프랑이었는데 이게 당시 GNP의 25%이상을 차지했습니다. 이거에는 심지어 구 귀족층까지 전부 들고 일어났습니다. 나라 망한다는 수준이었고 실제로 이 정도 물량을 한꺼번에 풀면 정말 금융시장이 붕괴될 수도 있었습니다.

    • 웃자웃어 2018.07.03 1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반대로 생각하면 당시에 1년치 GNP가 1억 4000만 프랑도 안되는 프로이센은 엄청 가난한 거겠군요.

    • reinhardt100 2018.07.03 1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가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0년 전쟁 당시 인구가 가장 격감한 지역이 보헤미아와 북부 독일이었는데 그 중에서 프로이센의 중심부였던 브란덴부르크는 큰 전투가 벌어지지도 않았는데도 인구 절반이 '사라진' 상황이 되었거든요. 후대 연구에는 이런 현상이 '피난민들이 사라졌다가 돌아오면서 상당수 원복해서 실제 인구 감소는 이보다 적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만 그래도 피해가 심각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폴란드 역시 대홍수라는 위기가 터지면서 서폴란드의 슐라흐타나 마그나트들이 대거 브란덴부르크로 이주, 프로이센 장교단의 일원으로 활약할 수 밖에 없었을 정도로 귀족들조차도 군대복무는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였습니다. 이러다보니 귀족이건 평민이건 빈부 격차가 의외로 적었습니다. 가진게 있어야 빈부격차 소리가 나오니까요.

      이 때문에라도 국가주도, 특히 강력한 상비군육성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안 그러면 경제가 안 돌아가니까요. 흔히 프로이센은 '군대가 국가 전체를 소유한 군국'이라고 표현하지만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있는 표현입니다. 프로이센군은 일종의 직업훈련 및 국민계몽의 기구로도 활동했으니까요. 막 징집된 농민병들에게 문맹퇴치를 위한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을 시행해주었고 제대병사들과 융커계급인 장교들이 각 마을로 환향해서 마을 주민들에게 자신들이 배운 것을 그대로 전수함으로써 척박한 지역의 농노들이 해방되더라도 먹고 살 수단을 주었다는 것이 엄청난 의의가 있었죠. 이걸 체계화한 국왕이 프리드리히 2세의 아버지인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였습니다. 이 시기 인구 200만의 프로이센이 8만의 병력, 7백만 탈러의 국고비축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체계적인 행정 및 정책이 있었던 것입니다.

      프로이센의 경우, 상비군 유지를 위한 국방비가 국가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한때 80%를 넘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7년전쟁 당시가 아니라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시기였습니다. 이 분이 대단한게 각 지역 병영에서 애들 상대로 그것도 남녀 가리지도 않고 의무교육시킨겁니다. 이러니 국가재정이 단순화되면서 관료조직이 매우 간결해지는 효과까지 보게 됩니다.

    • 웃자웃어 2018.07.04 1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면 프랑스의 경우는 GNP의 10프로가 군비면, 프로이센은 GNP의 어느정도가 군비죠?

    • reinhardt100 2018.07.04 2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래도 당시에는 의외로 면세계층이 많아서 그런지 현대의 상식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세율 자체가 같은 국가내의 지방마다 달랐고 또 장비조차도 국가 공창에서 일관작업으로 생산하는 비중이 높은거도 아니었으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추정한다는 전제하, 국가 GNP에서 30%를 넘긴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4. 수비니우스 2018.07.02 2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보통 꼭 힘도 용기도 없는 사람이 전쟁을 무서워 하지 않는 법입니다. " 오늘은 이 말이 인상깊네요.

    • 안타레스 2018.07.03 16:42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투를 앞둔 병사의 멍한 눈을 본 사람은 전쟁을 어렵게 생각한다" - 오토 폰 비스마르크" 갑자기 이 구절이 생각나는군요...

    • 웃자웃어 2018.07.03 1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베트남 전 당시에도 강경파 의원들의 병역면제율이 온건파 의원보다 높았죠.

  5. 모바일 정보창고 2018.07.04 14: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태풍으로 인해 비가 계속 오더니 다시 날씨가 좋아지네요.
    이제 여름이라고 많이 덥기도 하구요.
    항상 건강 주의 하세요~ ^^

  6. msoo 2018.07.04 1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쿠데타로 잡은 권력은 쿠데타로 잃는다' 문재인정권의 말로일것 같아 의미심장하군요. 탄핵으로 잡은 정권은 탄핵으로 잃는다.

    • 박지만 원수 2018.07.04 19: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의 마음이 갸륵하구나

    • 0_- 2018.07.04 1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 님은 선거도 안 치뤘어요? 나는 국외에서 재외국민 선거 치뤘는데?
      아 이제 치매가 오시는 거구나...

    • nasica 2018.07.04 20: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실 님 말씀이 맞습니다. 전혀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만에 하나라도 문재인 정부가 503 정부와 똑같은 짓을 한다면, 같은 최후를 맞을 겁니다. 확실한 반면교사 사례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또 박정희 독재정권의 신화를 완전히 끝장냈다는 점에서, 나름 503도 공로가 있긴 있는 편입니다.

    • 나삼 2018.07.05 06: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문재앙 하는짓 보면 503보다 더 할것 같아 매일 마음 조리면서 삽니다

  7. 석총 2018.07.04 1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르젠백작이 공개적으로 죽임당하겠네요

  8. 안토 2018.07.05 1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토리텔링 실력이 대단하십니다.
    왜 이 블로그를 이제 알았나 후회되네요ㄷㄷ

  9. TheK2017 2018.07.22 12: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윽... 계속. 이네요.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