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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두 요새 (1) - 시우다드 로드리고(Ciudad Rodrigo) 공방전

by nasica 2018. 10. 15.

마세나는 나폴레옹으로부터 포르투갈 침공의 명령을 받자, 제대로 된 지휘관답게 지도부터 펼쳤습니다.  원래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스페인으로부터 포르투갈로 진입하기 위한 교통로가 험준한 국경 지형으로 인해 제약되어 있었다는 점이었지요.  기억들하시겠습니다만, 탈라베라(Talavera) 전투 이후 웰링턴이 술트의 측면 기습을 피해 재빨리 포르투갈로 퇴각한 경로가 대표적인 포르투갈로의 진입로였습니다.   그 경로는 아래 지도와 같이, 살라망카에서 알메이다(Almeida)와 쿠임브라(Coimbra)를 차례로 거친 뒤 리스본으로 향하는 길이었지요.




(프랑스-독일에 비하면 스페인-포르투갈은 험준한 산맥이 꽤 많은 편이고, 군대가 대포를 끌고 이동할 수 있는 경로는 꽤 제한적이었습니다.)



(시우다드 로드리고는 저 남쪽의 바다호스(Badajoz)와 함께 포르투갈-스페인 사이의 교통로를 지키는 스페인 측의 양대 관문입니다.)




마세나는 정공법대로 나가기로 했습니다.  포르투갈 침공의 첫 관문은 알메이다(Almeida) 요새가 될 것인데, 그를 위해서는 인근 스페인 국경 내에 있는 시우다드 로드리고(Ciudad Rodrigo)를 쳐야 했습니다.  스페인의 침공에 대비한 포르투갈의 관문이 알메이다 요새라면, 반대로 포르투갈의 침공에 대비한 스페인측 관문이 바로 시우다드 로드리고였거든요.  이 도시는 아직 스페인군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침공하든 반대로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침공하든 하나의 관문을 넘어야 하는 법인데, 마세나의 경우는 두 개의 인접한 관문을 한꺼번에 넘어야 했던 것이지요.


시우다드 로드리고는 비교적 작지만 별 모양으로 축성된 견고한 근대식 요새도시였습니다.  모든 요새는 함락시키기 어려웠지만, 특히 기동성을 중시하는 프랑스군에게는 공성전이 익숙하지도 않았고 즐겨하지도 않았지요.  공성전에 필요한 많은 중포와 탄약, 포탄 등을 수송하는 것도 어려웠고 장기간 대규모 병력이 한 지역에 묶여있어야 하니 식량 조달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세나는 꼼수를 부릴 생각하지 않고 그 어려운 도전에 정석으로 돌입합니다.  마세나군의 선봉에 선 것은 네(Michel Ney) 원수였습니다.  




(현대의 시우다드 로드리고 요새입니다.  이 요새의 남서쪽은 아구에다(Agueda) 강에 접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시우다드 로드리고 북서쪽에 훨씬 더 넓은 신시가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구글맵의 거리 풍경을 통해 현지의 골목골목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정보화 세상은 탈도 많지만 확실히 이로운 면이 더 많습니다.)




네 원수는 자신의 제6군단 전체 뿐만 아니라 다른 3개 보병 사단과 2개 기병 연대를 더해 총 4만2천의 대군과 60문의 대포를 이끌고 4월 26일 시우다드 로드리고 앞에 나타났습니다.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지키고 있던 것은 에라스티(Don Andrés Perez de Herrasti)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군 5천5백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의 병력이 워낙 압도적이었으므로 승산이 없었고 요새 함락은 오로지 시간 문제였으나, 에라스티 장군은 프랑스군의 비교적 관대한 조건의 항복 권유를 거부했습니다.  이유는 나폴레옹이 의심하던 대로 믿는 구석, 즉 영국군의 지원이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전에, 웰링턴은 늘 그렇듯이 스페인 게릴라들이 프랑스 연락장교들을 죽이고 탈취해온 문서들 중에서 술트가 조제프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그 편지를 보고 프랑스군이 곧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들이칠 것이라는 것을 안 웰링턴은 서둘러 병력을 알메이다 쪽으로 전개했고, 특히 크로퍼드(Robert Craufurd) 장군의 경보병 사단 5천을 시우다드 로드리고 인근으로 보내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4월 말이 되어 실제로 몰려온 프랑스군을 보니, 도저히 크로퍼드의 경보병 사단 하나 가지고 뭘 어떻게 해볼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규모를 알게 된 웰링턴은 그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보고, 전형적인 영국인다운 얌체같은 결정을 합니다.  즉,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이고 자신들이 지킬 영역은 포르투갈이지 스페인이 아니므로 시우다드 로드리고는 스페인군에게 맡긴다는 것이었지요.  그런 지시를 받은 크로퍼드의 경보병 사단은 이후 네의 프랑스군과 접촉만 계속 유지할 뿐 적극적으로 싸움을 걸지 않았습니다.




(그 험악하고 엄한 성격 때문에 부하들로부터 검은 밥(Black Bob)으로 불리던 크로퍼드 장군입니다.  오만한 성격이었던 웰링턴은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릴 때 결코 왜 그런 명령을 내리는지 설명하는 법이 없었는데, 오직 베레스포드와 힐, 그리고 이 크로퍼드 장군에게만 자세한 설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존중하고 신뢰하는 부하였던 것이지요.  웰링턴은 특히 크로퍼드 장군에게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건 항상 조언을 구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런 크로퍼드는 이렇게 주변만 맴돌아야 했던 시우다드 로드리고 요새를 2년 후인 1812년 프랑스군의 손에서 빼앗기 위해 포위 공격하던 중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시우다드 로드리고 성벽 바로 바깥에 있는 해자와 방어물 일부입니다.  굉장히 튼튼해 보이지요 ?)




영국군의 지원을 믿고 있던 에라스티의 스페인군은 졸지에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워낙 성이 튼튼하고 비축해놓은 보급품이 충분했으므로 스페인군은 프랑스군의 가열찬 포격에도 잘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집중 공격에 떨어지지 않는 요새는 없는 법입니다.  무려 10주간에 걸친 프랑스군은 별 모양의 보방(Vauban)식 성곽을 공격하는 교과서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그재그로 참호를 파서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로를 만든 뒤, 참호와 토벽으로 보호된 포대를 구축하여 포격을 가하는 것이었지요.  이런 집중 포격에 마침내 성벽 일부가 무너지고 보병들이 돌격 가능한 구멍(이를 전문 용어로 practical breach라고 합니다)이 뚫리자, 더 저항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에라스티 장군은 그 무너진 성벽 아래에 직접 나가, 역시 직접 나온 네 원수를 만나 협상을 했습니다.  그 결과로 맺은 항복 조건은 10주 전의 조건보다는 나빴지만, 여전히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즉, 시우다드 로드리고 시민들의 집과 재산에 대한 약탈은 일체 금지되지만, 수비에 참여했던 군인들과 일종의 자치 정부라고 할 수 있는 명사회(junta, 훈타) 소속의 관료들은 전쟁 포로로서 프랑스로 압송된다는 것이었습니다.  


10주 간에 걸친 시우다드 로드리고 요새 공방전이 마침내 7월 10일 종료되었을 때 스페인군의 인명 피해는 461명 전사에 994명 부상, 그리고 포로 4천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180명 전사에 1천여 명의 부상자를 냈지요.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길고 지루한데다 사상자도 많았던 이 요새 공방전에 짜증이 나있던 프랑스군은 네 원수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시우다드 로드리고 시내에 들어가자마자 약탈을 벌여 스페인 시민들을 경악시켰습니다.  


네 원수도 난감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명예를 알던 군인인 네는 약탈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도 부끄러웠지만, 이 요새 하나를 빼앗는데 무려 10주간이나 걸렸다는 것도 당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쉬운 상대였던 스페인군이 지키던 요새 하나 빼앗는데도 10주가 걸렸다면, 윌리엄 콕스(Willian Cox) 장군의 영국군이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지키고 있을 포르투갈 알메이다 요새를 빼앗는데는 얼마나 걸릴지 눈 앞이 캄캄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시우다드 로드리고 포위전 내내 주변을 알짱거리며 신경을 거스르던 크로퍼드의 영국군 경보병 사단이 알메이다에서는 본격적으로 네의 제6 군단을 괴롭힐테니, 알메이다 요새 포위에 앞서 먼저 영국군 경보병 사단부터 요절을 내놔야 했습니다.  병력 차이가 워낙 컸으니 결국 요절을 내기는 하겠지만 시간이 문제였지요.  


그러나 전쟁에서는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 법입니다.  상황은 네와 크로퍼드, 콕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시우다드 로드리고로부터 알메이다 요새는 걸어서 하루 거리였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Ciudad_Rodrigo_(1810)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Craufurd

댓글11

  • 투팍아마르 2018.10.15 08:39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첫번째 지도 바로 밑에 오타가 의심스런 글이 있어 올립니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나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서" 가 아니라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서" 가 맞지 않나요? 나시카님께서 쓰신 글은 문맥상 독일을 제외한 세 나라가 험준한 산이 많다는 걸 뜻하는것 같은데 나시카님도 잘 아시다시피 프랑스란 나라는 비유하신 네 나라중 험준한 산과는 가장 담쌓은 나라 아닌가요?. 원래 하시고자 했던 말은 포르투칼과 스페인은 산이 많고 프랑스와 독일은 평야가 많다는 거였던것 같습니다만~~
    답글

    • nasica 2018.10.15 17:58 신고

      아예 제가 그냥 막 쓰다보니 제가 봐도 이상한 표현이 되었네요. "프랑스-독일에 비하면 스페인-포르투갈은" 이라고 고쳤습니다. 고맙습니다.

  • 웃자웃어 2018.10.15 09:42

    게다가 당시에 프랑스군이 현지 징발 위주로 군량을 조달하다 보니 스페인에서는 보급을 하기가 시원찮았던 것도 있지 않나요?
    답글

    • nasica 2018.10.15 17:59 신고

      그렇지요. 나폴레옹이 '군대는 뱃힘으로 행군한다'라고 말한 것은 '그러니 잘 먹여야 한다'라는 뜻의 권고로 말한 것이 아니라 '안 먹이니까 걷질 못하더라'라는, 좀 섬뜩한 실패 경험담인 것이지요.

  • 석총 2018.10.15 13:15

    이제부터 벙커를 지을 차례군요
    답글

    • nasica 2018.10.15 18:00 신고

      벙커+터렛 도배질 라인과 부딪히는 것은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 ㅇㅇㅈ 2018.10.17 09:33

      터렛 벙커도배하니 스타가 생각나는군요. 제기억으론 나폴레옹을 소재로한 맵이 있던걸로 아는데 한때 재밌게 했었는데 말이죠 하하

  • 샤르빌 2018.10.15 16:05 신고

    산악지대+수성전은 정말 최고이면서 최악의 조합이지요.. 수 많은 중국왕조와 북방민족들, 임진왜란때의 일본군이 끝내 한반도를 정복하지 못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물론 이렇게 지형과 요새에 의존하는 전략만 믿다가 병자호란때 처럼 기동력으로 역이용 당하면 그것만큼 답도 없다는게 치명적인 단점이지요..
    답글

  • reinhardt100 2018.10.16 11:05

    보방식 요새가 사진으로 나오네요.

    흔히 말하는 보방식 요새. 이건 근대 공성전 및 축성술의 완성가라고 해도 될 보방 후작의 업적이죠. 근대 축성술의 기초는 사실, 콘스탄티노플 공성전과 1463~1477년 터키-베네치아 전쟁 및 1494년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전부터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근대 축성술은 베네치아-네덜란드를 거쳐 프랑스에서 완성되었는데 이 보방식 요새가 얼마나 막강했냐면 에스파냐 왕위 계승전쟁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중후반기 내내 프랑스군은 야전에서 영국의 말버러 공작, 오스트리아의 오이겐 공 등이 이끄는 연합군에게 연전연패를 당하면서 전선이 미친듯이 밀려댈 상황이었음에도 국경선만큼은 끝까지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가 루이 14세가 국고를 말아먹어가면서까지 만든 300개 가까운 보방식 요새들 덕분이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루이 14세가 사치도 심각했고 전쟁도 정말 많이 해서 국고를 거덜냈다는 평가가 있고 일부는 맞지만 정말 심각하게 국고를 거덜낸 정책은 건함정책과 국경선 요새 건축이었거든요. 여기에 비하면 베르사유 궁전 건축은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차라리 베르사유 궁전 건축은 파리의 유휴노동력 활용을 위한 전근대적 공공사업의 성격이라도 강했고 실제로 이 덕분에 파리 및 일 드 프랑스 지역의 경제력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으며, 건함 정책 역시 200년 가까이 뒤쳐져있던 프랑스의 해운력을 단숨에 한때나마 유럽 최강의 해운력으로 만들어 준 기초가 되어 프랑스 해외무역 및 식민지 개척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국경선 전부에 걸친 보방식 요새 라인 건설은 정말로 답이 안 나올 정도로 예산을 잡아먹었다고 합니다. 요새 하나 짓는데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십만 리브르가 들어가는데 이걸 몇 백개씩 지어댔고 거점요새같은 경우는 기본 만 단위의 수성군을 수용해야 했기 때문에 수백만 리브르는 그냥 허공에 날아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이 정도 요새를 지으려면 기술력이 있는 특정 집단에 어느 정도 불하를 주어야 했는데 이게 징세청부업자들이 결성한 조합들에게 상당수 공사가 넘어갔다는 겁니다. 당시, 징세청부업자들이 징세권을 국가로부터 일정기간 대행하기 위해서는 각종 관계 관청에 어느 정도 선납을 했어야 했고, 대신 징수가 어려워지면 정부가 지급 보증을 해주는 체계였습니다. 문제는 17세기가 유례없는 소빙하기가 있다보니 징수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이에 따라 정부는 지급 보증 대신에 이들 요새라인 건설공사권을 어느 정도 넘겨주어 손해를 보전해주는 식으로 정책운용을 했다는 겁니다. 물론 군이 감독을 했고, 루이 14세와 보방 후작이 때때로 직접 검열을 했기 때문에 '태양왕 앞에서 감히 부실공사 할 간 부은 징세청부업자 따위'는 없었지만 대신 공사비용을 최대한 부풀리는 방식 등으로 어느 정도 삥땅(?)을 쳤는데 이 금액이 복마전 수준으로 나갔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징세청부업자들의 세력이 강해졌고 루이 14세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가 기강이 흐트러져있던 앙시엥 레짐 체제의 프랑스에 꽤나 부담이 가게 됩니다.
    답글

    • 최홍락 2018.10.18 23:52

      보방에 의해 건설된 요새의 수는 학자의 시각에 따라 매우 다양한데, 어떤 학자는 60개, 어떤 학자는 100여개, 볼테르의 경우는 150개라고 단정하더군요. 연구가 계속될 수록 추정치는 300개를 넘어가고요. 이는 과거에 이미 존재했던 요새들을 개조한 것까지 다 포함한 개수인데, 실제 보방에 의해 새로 건축된 요새의 수는 많이 잡아도 30여개 정도라고 합니다. 그 요새들 중의 대부분은 지역 민병대와 주민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고요. 또한 보방의 요새 설계들 중에 상당수는 당대에는 설계로만 남아있다가 후대에 들어 착공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계획된 요새들 중에는 전략적인 요충지였던 곳이 상황이 바뀌면서 중요도가 감소하는 바람에 건설이 보류된 곳도 있었고요. 아예 보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그냥 이름만 빌린 요새들도 있었다고 하니까, 그런 여러가지 측면을 감안한다면 300개가 넘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요새의 건설에 들어간 비용과 별개로 말년의 보방은 프랑스 왕정의 고질적인 앙시엥 레짐, 불공평한 조세제도 등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베르사유 건설의 경우 언젠가는 체제 전복으로 이어지고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이러한 태도는 루이14세의 총애를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고요.

      p.s. 보방식 요새를 수직으로 관찰하면 과거 주월 한국군이 구축했던 중대전술기지와 유사함이 나타나는데, 그만큼 보방의 아이디어는 시대를 관통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reinhardt100 2018.10.19 08:09

      네. 보방 후작이 말년에는 체제 비판의 선봉에 선 거는 꽤나 유명하죠. 그 자신이 앙시엠 레짐의 수혜자지만 그만큼 폐해를 직접 보니 이거 아니다 싶었던 겁니다.

      중대전술기지와 보방식 요새 라인의 가장 큰 유사점은 지원병 도착 가능 거리 및 화력 배분을 고려한 축성이었다는 겁니다. 특히, 요새 근처에 지원병이 근처에 있다는 것 자체가 양측에 주는 무게감이 다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