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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나폴레옹 vs. 하얀 나폴레옹 - 생 도밍그 (Saint Domingue) 원정 (상편) 1492년, 콜럼버스는 서쪽 바다의 끝에서 (사실은 카리브 해였는데) 큰 섬을 하나 발견합니다. 그는 이 섬에 스페인어로 La Isla Espanola (라 이슬라 에스파뇰라)라는, 즉 스페인 섬이라는 멋대가리 없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다 다른 사람들이 좀더 멋나게 Hispaniola 라고 고쳐불렀지요. 이 섬에는 원래 타이노 (Taino)라는 남미 인디오 계통의 부족이 살고 있었으나, 이들은 원래 수자가 적었는데다 스페인 사람들의 공격과 박해,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천연두 등의 전염병에 곧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집니다. 이 섬에는 자연스럽게 스페인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은 라틴 아메리카 지역 최초의 유럽식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산토 도밍고 (Santo Domingo.. 2017. 10. 13.
1834년, 사상 최초의 해킹 사건 발생하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해킹이라는 말의 뜻은 '컴퓨터나 네트워크에 대한 인가되지 않은 침입'을 뜻합니다. 당연히 해킹이라는 범죄는 컴퓨터가 발명된 이후에 나왔을 것 같지만, 실은 최초의 해킹 범죄는 1834년 프랑스에서 벌어졌고, 그로 인해 범인은 꽤 상당한 금전적 이익도 챙겼으며, 결국 체포되어 재판까지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재판 결과는 무죄였고, 이 사건 때문에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는 소동까지 벌어졌지요. 19세기 전반에 해킹이라니 ! 대체 어떤 사건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 때는 17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전화도 무선통신도 없던 시절 가장 확실하면서도 빠른 통신 수단은 촛농으로 봉인한 편지를 쾌마를 탄 전령이 직접 들고 뛰는 파발마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이 빨라도 이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 2017. 10. 7.
바그람 전투 (제16편) - 막도날의 기둥 막도날의 제5 군단에는 원래 완편과는 거리가 먼 허약한 보병 2개 사단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라마르크(Jean Maximilien Lamarque) 장군이, 다른 하나는 브루지에(Jean-Baptiste Broussier) 장군이 지휘했지요. 거기에 나폴레옹이 붙여준 제6 군단 소속 모로 장군이 지휘하는 스라 장군의 사단까지 붙여서 총 1만1천 정도의 병력이 있었는데, 특히 모로 장군의 사단은 방금 지휘권을 받은 것이다보니 아무래도 모로와 그의 사단에 대해서는 믿음이 덜 가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로 장군과 긴밀하게 작전 회의를 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막도날에게는 정답이 적혀있는 문제 풀이집도 없었습니다만, 특히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갑자기 명령을 받은 그가 .. 2017. 10. 4.
바그람 전투 (제15편) - 종과 횡 나폴레옹은 전투 내내 전장 한가운데 위치인 라스도르프(Raasdorf)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위치한 마르히펠트 평원보다 높은 곳인 루스바흐 고원 위에 있는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에서의 전황을 양군의 전열이 뿜어내는 머스켓 소총의 화약 연기를 보며 파악하고 있었지요. 그 연기의 긴 횡대가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 마을의 높은 석탑을 통과하는 보고, 그는 이제 승리의 때가 왔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다부를 돕기 위해 일제히 전체 전선에 걸쳐 총공격을 명했습니다. 마세나는 남쪽 에슬링에서 클레나우를, 우디노는 고원 위의 호헨촐레른을 공격하면 되었지요. 그리고 막도날에게는 특별히 따로 명령서를 보냈습니다. (바그람 전투 현장을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나폴레옹입니다. 무전기가 없던 당시 전투는 현장 지휘관의 재량.. 2017. 10. 1.
코크 형제가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 코크(Koch) 형제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석유 정제법을 발명하여 Koch Industries라는 석유 회사를 일으킨 Fred C. Koch라는 화학자이자 기업가의 아들들인 이 분들은 원래 4형제인데 자기들끼리의 이권 다툼으로 소송전을 벌인 끝에, 지금은 코크 인더스트리즈를 찰스(Charles G. Koch)와 데이빗(David H. Koch)이 각각 절반씩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두 형제를 흔히 코크 형제라고 일컫습니다. 코크 형제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아래 유튜브를 추천합니다. 뉴욕식으로 빠르게 말하는 여성분의 말을 제가 의외로 잘 알아듣길래 '내가 영어 실력이 늘었나'라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영어 캡션이 달려 있어서 제가 무의식 중에 '들은 것이 아니라 읽은 것'이더군요. https://.. 2017. 9. 23.
바그람 전투 (제 14편) -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 양측의 모든 장군들이 다 마찬가지였겠습니다만, 프랑스군의 맨 오른쪽을 담당한 다부(Louis-Nicolas Davout)도 새벽부터 바빴습니다. 사실 바그람 전투 두번째 날 스타트를 끊은 것은 로젠베르크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4 군단이 다부의 프랑스군 제 3군단을 습격한 사건이었지요. 이 공격은 이미 공격에 나설 준비를 해놓았던 다부에 의해 즉각 격퇴되기는 했습니다만, 나폴레옹이 현장에 달려오는 등 일대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왜 나폴레옹은 중앙을 버려두고 맨 동쪽 현장에 직접 달려갔을까요 ? 당시 39세로서 프랑스군 원수 중에서는 가장 어렸던 다부가 못 미더워서였을까요 ? 당연히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부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그 능력에 있어서나 충성심에 있어서나 최고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폴.. 2017. 9. 17.
성서 - 어디까지가 은유이고 어디까지가 fact인가 ? 기독교는 명실상부 현재 전세계 1위 종교로서, 전체 인구의 31%가 믿는 종교입니다. 2위인 이슬람 22%를 훨씬 뛰어넘는 숫자이고, 인구수로 밀어붙이는 힌두교 14%도 가뿐히 제압하는 숫자입니다. 저도 (열심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매주 교회에 나가고 성경도 가끔 읽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부터 기독교, 그 중에서도 개신교는 별의별 희한한 목사님과 신도들 덕분에 세간에 화제도 많이 뿌리고 비웃음도 많이 사는 종교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창조과학이니 요가를 금지해야 하느니 하는 사람들 덕분에 더욱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별 큰 영향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의외로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이슬람이 국내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자는 선동도 있었습니다. 그.. 2017. 9. 10.
바그람 전투 (제13편) - 마세나의 8km 로리스통의 대규모 포병단이 오스트리아 제3 군단을 갈아엎는 동안, 마세나도 쉴 틈 없이 바빴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새벽에 저 남쪽 아스페른 쪽에서 힘들게 행군해 올라온 뒤, 베르나도트가 구멍을 낸 아더클라를 탈환하기 위해 혈투를 벌이고 있었지요. 그런데 불과 몇 시간 만에, 나폴레옹은 그에게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 그 쪽으로 침투해온 클레나우의 오스트리아 제6 군단을 쫓아내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이때가 대략 오전 11시 경이었습니다. 당시 병사들에게 이렇게 의미를 알 수 없는 행군과 애써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역행군이 흔한 일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더 험난한 행군길이 예약되어 있었습니다. 걸아가야 하는 길이 무려 8km 정도로서 정상적인 행군으로는 거의 2시간 거.. 2017. 9. 4.
바그람 전투 (제12편) - 불과 쇠 베시에르, 아니 낭수티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기병집단으로 하여금 포병과 보병, 기병이 고슴도치처럼 대비를 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군 진영으로 돌격하도록 나폴레옹이 명령한 것은 기병대의 위력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시간을 벌 목적 뿐이었지요. 전쟁터에서 시간이란 수천명의 병사들을 희생시키더라도 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과연 무엇을 하기 위한 시간을 벌려고 했던 것일까요 ? 어차피 마세나의 군단을 남쪽 에슬링으로 떠나 보내고나면 당장 무너져내리는 아더클라 방면 전선을 막아줄 병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는 주변에 병력이 있긴 했습니다. 바로 나폴레옹이 최후의 비상 수단으로 아끼고 아끼던 근위대가 있었지요. 그러나 나폴레옹 같은 대인배에게 있어서, 당시.. 2017. 8. 27.
나폴레옹 당시의 포병 나폴레옹이 포병 전술의 귀재라고들 합니다만, 사실 제가 아는 한에서는 나폴레옹이라고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색다른 포병 전술을 썼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프랑스만 뛰어난 성능의 대포를 쓴 것도 아니었고, 나폴레옹이 뭔가 특별한 포병 전술을 직접 개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나폴레옹의 포병들은 집중된 포병대의 기동성 있는 운용을 꽤 중요시했습니다. 많은 대포를 집중시킨 포병단을 신속히 이동시키고 집중적인 화력을 퍼부어 적을 뒤흔들어놓고, 그래서 생긴 틈으로 또 다시 신속하게 이동하는 식이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극적으로 이루어진 전투가 2개의 포병단이 번갈아 가며 러시아군을 향해 돌격한 프리틀란트 전투입니다. 그러나 이건 나폴레옹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세나르몽 (Alexandre-Antoine Hure.. 2017. 8. 22.
두바이 여행기 (2011년) 6년전에 출장으로 두바이에 한달 정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1. 두바이 사람들과 일 휴일에 (여기는 금토가 휴일이랍니다) 두바이 시내를 지하철 및 시내 버스를 타고 그냥 막 돌아다녀 보았습니다. 그런데, 전철이나 버스에서 두바이 사람은 거의 못본 것 같아요. 대부분 인도인 또는 필리핀 사람들이고, 유럽계 사람들이 좀 섞여 있는 정도였습니다. (대부분 인도-파키스탄 내지는 동남아 분들 같았습니다.) 두바이 지사에 출근하고 나서 더 놀랐습니다. 여기서 현지 고위 매니저인 오스트리아 여자분과 그 밑의 하위 매니저인 크로아티아 남자분과 커피 한잔 하면서 미팅을 했는데, 그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여기 두바이 지사에는 두바이 국적인이 전혀 없답니다. 이유는 2가지인데, 하나는 두바이 사람들은 주로 공무원이나 .. 2017. 8. 21.
바그람 전투 (제11편) - 기병대의 궤멸 기세 좋게 달려들어간 낭수티의 제1 중기병사단이 첫번째로 맞이한 난관은 그 지대가 너무 평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병이 달리는데는 평평한 것이 좋지 않냐고요 ?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완만하게 오르내림이 있는 평원이 기병 돌격에는 더 좋았습니다. 여기 아더클라 앞마당처럼 너무 평평하면 저 멀리서 달려오는 기병대가 그대로 적의 시선과 대포에 노출되면 기병대에게 불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낭수티의 기병들이 번쩍이는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동안, 오스트리아 보병들은 침착하게 방진(square)을 구성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기병에 대항하여 보병 방진을 구성한 오스트리아군의 모습입니다. 1788년의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 때의 모습입니다. 머스켓 소총과 함께 총검이 개발되고 대포의 기동성이 향상되면서부터는,.. 2017.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