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덩케르크 개봉 기념으로, 영화 보면서 궁금했던 점 몇가지 정리했습니다.  (주의 : 일부 약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1.  톰 하디의 스핏파이어 전투기에는 총알이 몇 발이나 들어 있었을까요 ?


어설프게 만든 전쟁 영화 또는 드라마의 특징이 총에 화수분 탄약이 들어 있는지 총알이 떨어지는 일 없이 아주 무한정 쏟아지는 것입니다.  톰 하디가 몰던 스핏파이어에는 몇 발의 총알이 들어 있었을까요 ?


스핏파이어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만, A wing 타입의 기체에는 0.303 구경 (7.7mm) 브라우닝 마크 2 기관총이 날개당 4정씩, 총 8정 장착되어 있었고, 정당 장탄수는 350발씩이었습니다.  이 브라우닝 마크 2 기관총은 초당 발사 속도가 약 7발 정도이므로, 톰 하디가 쏜 것처럼 약 2초씩 끊어서 쏜다면 총 50초, 즉 25번을 사격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영화 보면서 대충 세어보니 정말 25번 정도 쏘더군요.  놀란 감독 철저합니다.


우리나라 공군이 보유한 F-15 전투기의 경우 6개의 총신으로 구성된 20mm 개틀링 벌칸포가 장착되어 있는데, 총 장탄수는 940발입니다.  이 벌칸포는 초당 발사 속도가 약 100발이므로, 한번에 2초씩 끊어서 쏘면 대략 4~5번 사격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전투기 영화에서 여러번 드르륵 드르륵 긁어대는 것은 알고 보면 다 잘못된 설정인 셈입니다.






2.  왜 톰 하디는 영국군 지역에서 낙하산으로 탈출하지 않고 독일군 지역으로 날아가 불시착을 했을까요 ?


다음 URL은 양키들이 이 덩케르크 영화를 보고 서로 토론하는 레딧 쓰레드인데, 여기서도 왜 톰 하디가 낙하산으로 뛰어내리지 않고 굳이 불시착하여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는 것을 택했는가에 대해 열띤 토론이 있었습니다.


https://www.reddit.com/r/Dunkirk/comments/6ol611/spoilers_discussion_thread_dunkirk/


토론 초반에 세를 얻은 썰은 크게 두가지였습니다.  


(1) 슈투카를 격추시킨 것에 대해 지상군이 환호를 올리는 상황에서, 조종사가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지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2) 그냥 추락시킬 경우 독일군이 부서진 기체를 손에 넣어 군사 기밀인 전투기 정보를 넘겨주게 되므로, 확실히 소각처분하기 위해 불시착한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에 자신이 항공 관계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와 간단히 정리를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3) 고도가 너무 낮으면 낙하산으로 탈출이 불가능하다.  왜 영국군 지역에 불시착하지 않았느냐고 ?  엔진이 멈춘 비행기는 약간만 선회해도 곧장 실속(stalling)하여 땅에 쳐박힌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1941년 6월, 스핏파이어 전투기를 몰다가 구름 속에서 아군기끼리 충돌하여 탈출해야 했던 John Gillespie Magee라는 조종사는 120m 상공에서 탈출했으나 낙하산이 펴지기 전에 땅에 떨어져 즉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3.  콜린스(톰 하디의 동료 조종사)는 왜 바다 위에 불시착을 선택했나요 ?


예나 지금이나, 추락하는 비행기에서의 낙하산 탈출(bailing out)은 매우 위험한 행위입니다.  더군다나 당시 전투기에는 조종석 밑에 로켓이 달린 자동 사출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위험했습니다.  가장 흔한 사고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직후 자기 자신의 비행기의 꼬리 날개에 부딪히거나, 낙하산 줄이 꼬리 날개에 엉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사실상 죽음을 뜻했지요.  바다 위에서 낙하산을 펴는 것은 더욱 위험했습니다.  물 위에 떨어진 다음에 낙하산과 낙하산 줄에 엉키면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도 익사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체 상태가 양호하다면 조종사 개인적으로 바다 위에 불시착(ditching)하는 것을 택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4.  그렇다면 당시 영국 공군 조종사들은 '웬만하면 낙하산 펴지 말고 바다 위에 불시착하라'고 훈련 받았나요 ?


아닙니다.  특히 영화 속에 나오는 스핏파이어(Spitfire) 전투기의 경우 공식 매뉴얼에서 "낙하산 탈출을 권고하며, 바다 위에 ditching하는 것은 불가피한 경우에만 허용"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스핏파이어의 특성, 즉 ditching quality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Ditching quality가 나쁘다는 것은 물 위에 불시착하는 경우, 전투기가 기수를 바다 속으로 쳐박으며 물 속으로 급격히 가라앉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스핏파이어의 매뉴얼에는 불가피하여 ditching할 경우엔 반드시 물결(swell)을 따라 착륙할 것을 권고하며, 절대 파도가 밀려오는 방향으로 불시착을 시도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5.  콜린스는 왜 조종석 덮개 유리창(canopy)을 닫고 불시착했나요 ?  그렇게 덮개를 닫고 불시착하는 것이 당시의 표준 절차였나요 ?


역시 아닙니다.  역시 저 매뉴얼에는 불시착시에는 덮개를 열고 착륙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캐노피라고 불리는 덮개 유리는 (영화 속에서 콜린스가 겪었던 것처럼) 적탄이든 결빙이든 여러가지 이유로 걸림이 발생하여 열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그런 경우 때문인지, 스핏파이어 조종석 옆에는 crowbar(흔히 빠루라고 부르는 쇠지렛대)가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기체에 화재가 발생한 경우에는 최후의 순간까지 열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행 중에 캐노피를 열면 화염이 조종석 안으로 밀려들어올 가능성이 많았으니까요.  






6.  톰 하디는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포로 수용소에 갇혀 있었을 것이고, 대접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톰 하디처럼 전투기 조종사는 그나마 나았는데, 폭격기 조종사와 승무원의 경우는 재수없으면 전쟁 포로가 아닌, 전범 또는 간첩으로 분류되어 SS(나찌 친위대)가 운영하는 별도의 수용소에 갇혀 취조와 고문, 심지어 처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폭격기들의 공격 대상은 군대가 아니라 민간인이 거주하는 도시였거든요.  그래서 Terrorflieger (영어로는 terror flier), 즉 일종의 테러리스트로 분류되었습니다.   라마슨(Phil Lamason)이라는 뉴질랜드 출신의 영국군 조종사는 랭카스터 폭격기로 임무 수행 중 격추되어 포로가 되었는데, SS에게 넘겨져 열악하고 잔인한 SS 수용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라마슨을 포함한 약 168명의 연합군 폭격기 조종사 및 승무원 포로들은 결국 집단 처형될 운명이었는데, 그렇게 되기 직전 어떻게 사정을 전해들은 독일 공군이 '그런 짓을 용납할 수는 없다'라고 개입하여 간신히 일반 전쟁 포로 수용소로 옮겨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 육군도 그랬지만, 독일 공군도 SS라면 영 질색을 했다고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레딧 쓰레드에 톰 하디가 포로 수용소에 간 뒤 탈출하는 속편 영화도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아래와 같은 댓글이 달리더군요.


He gets attacked in the POW camp while protecting a child - no ordinary child.. a child born in hell !

톰 하디는 포로 수용소에서 어떤 아이를 보호하다가 다구리를 맞게 되지 - 그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었어... 지옥에서 태어난 아이였지 !







7.  영어로는 '덩커크'라고 읽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Dunkirk가 프랑스어로 '덩케르크'라고 읽히는 것인지요 ?


간단합니다.  Dunkirk는 영국인들이 이 도시를 가리키는 영어식 이름일 뿐이고, 원래 프랑스어로는 Dunquerque라고 쓰고 '됭께흐끄' 정도로 읽습니다.   일본섬 쓰시마를 한국어로는 대마도라고 표기하고 발음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영국인들은 유럽 곳곳에 현지 사람들이 뭐라고 부르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들 나름대로 엇비슷한 발음의 엉뚱한 이름을 붙인 것이 꽤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베네치아(Venezia)를 베니스(Venice)라고 부른다던가, 피렌체(Firenze)를 플로렌스(Florence)라고 부르는 것 등입니다.  


한국어로는 덩케르크라고 표기되는 이 작은 도시에는 네덜란드어 이름도 있는데 Duinkerke(됭케르커)라고 하고, 원래 뜻은 모래(dun) 교회(kerke)라는 뜻이랍니다.  실제로 이 도시는 원래 네덜란드 땅이었는데, 네덜란드가 통째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하에 들어가면서 영국-프랑스-스페인-네덜란드 독립군 사이에서 이리저리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다 17세기 후반에 영국왕 찰스 2세가 프랑스에게 이 도시를 32만 파운드에 매각하면서 지금처럼 프랑스 땅으로 굳어졌습니다.  지금도 이 도시는 프랑스어권 도시로는 세계 최북단에 있는 도시라고 합니다.






8.  구조되어 구축함에 승선한 병사들에게 주어진 홍차에는 우유와 설탕이 들어 있었을까요, 레몬이 들어 있었을까요, 아니면 그냥 아무 것도 넣지 않은 straight tea였을까요 ?


알 수 없습니다만 우유와 설탕이 들어 있었을 확률이 훨~씬 큽니다.  지금은 좀더 다양해졌다고 합니다만 (저 영국 가 본 적 아직 없습니다), 당시 영국인들이 마시던 차는 대개 우유와 설탕이 든 것이었습니다.  


왜 영국인들이 녹차가 아닌 홍차를 마시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설이 있는데, (1) 홍차의 보존 기간이 좀더 길기 때문에 중국에서 느린 범선으로 실어나르던 차는 일부러 홍차를 골라 실었다는 것  (2) 영국인들은 커피나 코코아에 이미 설탕을 넣어 마시고 있었는데, 설탕을 넣어 마시기에는 녹차보다는 홍차가 좀더 잘 어울리는 맛이었다는 것 등입니다.  아마 2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홍차에 우유를 넣는 것은 고대부터 중국과 거래하여 차를 마셔왔던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들도 흔히 차를 마시던 방법입니다.  심지어 버터를 넣기도 한답니다.  특히 원래 싸구려 독주인 진(gin)을 진탕 마셔 술주정뱅이의 나라로 유명했던 영국이 산업 혁명 시대로 접어들면서 생산성 향상을 위해 공장 노동자들에게 진과 맥주 대신 설탕과 우유를 넣은 차를 마시도록 유도했습니다.  원래 홍차는 전량 중국에서 직수입하던 고급품이었다가, 수입량이 늘어나고 특히 식민지 인도에서 차 플랜테이션이 성공하면서 일반 노동자들도 쉽게 마실 수 있게 된 기호품이었습니다.  노동자들도 그런 고급 기호품을 마시게 되어 기뻐했고, 공장주들은 이제 노동자들이 술을 적게 마셔 생산성이 늘어나니 좋았습니다.  특히 설탕과 우유를 넣은 차, 그리고 잼을 바른 빵 한조각은 고된 노동에 지친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열량을 공급해주는 좋은 새참이었습니다.


따라서 영국군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홍차에도 당연히 설탕과 우유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지급된 인스턴트 홍차 분말 깡통인데, 차와 함께 설탕과 분유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진짜 찻잎이 든 깡통이 배급되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병사들에게 홍차를 공급하느라, 1942년 영국은 유럽 대륙 전체에서 유통되던 홍차를 모조리 사들여 사재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Supermarine_Spitfire

https://www.reddit.com/r/Dunkirk/comments/6ol611/spoilers_discussion_thread_dunkirk/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accidents_and_incidents_involving_military_aircraft_(1940%E2%80%9344)

http://www.armchairgeneral.com/forums/showthread.php?t=77451

http://www.techsupportforum.com/forums/f36/survival-rate-of-shot-down-pilots-during-world-war-ii-366842.html

http://spitfireforums.com/index.php?action=printpage;topic=297.0

http://www.avialogs.com/index.php/en/aircraft/uk/supermarine/spitfire/ap-1565i-pilots-notes-for-spitfire-ixxi-xvi.html

https://en.wikipedia.org/wiki/Dunkirk

https://reprorations.com/Britain%20WW2/WW2-Britain%20page%202.htm

https://www.thevintagenews.com/2017/06/02/during-wwii-the-british-government-bought-the-worlds-entire-supply-of-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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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7.27 0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수비니우스 2017.07.27 0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잠안오는밤 뒤척이다가 이전글 보러왔는대 방금 막 나온 새 꿀잼글을 보네요 ㅎㅎ
    * 대마도는 쓰시마입니다 ㅎㅎ

    • nasica 2017.07.27 05: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새벽에 깼을 떄 갑자기 '엇 ! 다께시마는 독도를 그것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라는 생각과 함께, '어우 하필 그 섬을 틀렸냐' 라는 생각이 들어서 황급히 고치려 와보니, 이미들 보셨군요 ㅋ 창피하지만 고맙습니다.

  3. 식은땀 2017.07.27 23: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어떻게 이렇게 가려운 곳만 싹싹... 엄청나네요. 감사합니다 ㅠㅠ 북마크!

  4. ㅇㅇ 2017.07.28 02: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을 진작에 보고 싶었지만 스포를 우려하여 참고 참다가 심야영화 보고 방금 들어와서 읽었습니다 역시 유익한 꿀잼글ㅋㅋ

  5. 카를대공 2017.07.28 2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나시카님 주 전공(?) 중에 2차 대전도 있었죠 ㅎㅎ

    2차 대전 갤러리 요즘엔 DC 메인에도 안 뜨는거 같더군요.

  6. 쏠부85사단 2017.07.29 0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니 나시카님 예전 포스팅에 코루나 전투 다루신거 생각나더군요. 어쩜 그리 비슷한지.
    동맹군의 희생에 의한 탈출, 병력보존에의 집착, 지휘계통 혼란등등

    그러고보니 반도전쟁때는 프랑스군으로 부터 도망쳤는데, 이번엔 프랑스군이 뒤(앞?)를 봐줘서 영국군이 탈출하네요

  7. 에어메딕 2017.07.29 1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글보고 덩케르크 방금 보고 나오는 길입니다. 이해 안될 법했던 내용들도 보는대로 이해도 되고 더 재밌게 몰입했네요. 감사합니다!

  8. Mavs 2017.07.29 19: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942년의 유럽은 대부분 추축국에 점령되거나 동맹국들이었을 텐데 영국과 무역을 했군요. 역시 돈 앞에서는 적이고 뭐고 없나 봅니다.

  9. 최홍락 2017.08.05 1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은 조종석이 매우 좁고 양손으로 캐노피를 밀어야 열렸기 때문에 비상탈출시 항공기를 뒤집어 중력을 이용해 뛰어내리는게 보통이었다고 하네요. 뒤집지 않고 내리다 기류에 밀려 항공기 뒷날개에 사지가 절단되는 일도 흔했구요.

    수상착륙은 숙련된 조종사가 아니면 어려운 것이 수상에선 좌우 균형이 조금만 안 맞으면 한쪽 날개가 물에 잠겨 물의 표면장력으로 기체가 분해될 정도의 커다란 저항을 받아야 하지요. 수상 착륙이 성공한 사례는 영화 설리의 실제 사건인 US 에어웨이 정도 외엔 찾아보기 힘든데 전투기의 경우는 어땠을지는 모르겠습니다.

    • Mavs 2017.08.06 18:42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얼마 전에 동솔로몬 해전과 산타크루즈 해전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거기서는 연료 떨어지면 무조건 착수하더군요. 함재기들은 착수가 잘 되게 설계했던 모양입니다.

  10. Marlin 2017.08.07 17: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ㅎ
    그런데 대전초기 스핏파이어는 선회성능도 아주 뛰어난 편은 아니었고 프롭기 특성상 무게중심이 가분수인데 엔진이 멈췄는데도 상당히 오랫동안 활공하면서 적기를 한기 더 격추시키기까지 하더군요; 바로 스톨에 들어가면서 지면에 내리꽂는게 맞지 않을까요? 나시카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11. 석공 2017.08.13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12. 2017.08.15 1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nasica 2017.08.15 13: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그 한자 제가 쓴 거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 한자 제대로 안다는 이야기도 아니지요 ㅋ. 저는 아예 한자 표기를 포기했습니다.

  13. kyw0277 2017.09.17 0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에 엔진이 멈추었을 때 선회를 조금만 해도 실속한다는 점은 잘못된 정보입니다. 어떤 비행기이든 엔진이 멈추면 글라이더로서 안정적인 착륙이 되도록 설계가 됩니다. 엔진이 꺼졌다고 선회에서 실속하면 비행기로써의 자격이 없는 것 이지요. (개인적인 조종 경험 입니다.)

    독일군 지역에 착륙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 입니다.

    1. 해변이 너무 붐볐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자칫 비상 착륙시에 희생자가 나올수 있습니다.
    2. 안전지대에 적당한 착륙장소가 없었다.
    당시 잔해들이나 이것저것 방해물들이 해변가에 널려져 있을 때 착륙하기 어려울 것 입니다. 비행을 배울 때 야전에서 착륙하는 법도 가르쳐 주는데 우선 고려 대상이 착륙지점 설정입니다. 당시 안전한 지대에 이런게 없었거나 기회를 놓쳤다면 적지에 가서라도 착륙을 해야지요.

    위의 이유가 합당하다고 보네요. 그래도 당시 정말로 해변에 비상착륙한 비행기도 꽤 있었고 모두 본국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적지에 추락해서 포로가 된 경우도 있었지만요.

    그리고 해변에 착륙할 때 렌딩기어를 내리는 데 모래사장에서는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딱딱한 지반이면 렌딩기어를 내리는 게 좋으나 모레사장 같이 지반이 약한곳에서 렌딩기어로 착륙을 하면 비행기가 전복될 수 있습니다.

    항공 조종 경험이 있는 바탕으로 오류들 몇 개 집어 보았습니다. 비상 착수시 원래 캐노피를 열고 착수해야 하는데 이것을 안 지킨 조종사들도 많았지요. 뭐 아예 현실성이 없는 오류라고 할 수 는 없습니다.

    • aa 2017.11.16 16:29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체 설계를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말씀 중 궁금한 것이 있어 댓글 남겨봅니다.
      항공기의 실속현상은 항공기의 속도가 순항속도 보다 낮을 때 순간적인 양력 손실로 발생한다고 배웠는데, 엔진이 꺼져 속력이 충분히 빠르지 않은 상황에서 선회를 한다면 속력이 더 떨어져 실속 위험에 빠지지 않나요?
      본문 중 레딧에서 지적된 내용은 '선회해서 실속이 발생한다' 가 아니라 '선회로 인해 속력이 더 떨어진다면 실속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토르 라그나로크 - 바이킹들의 빵

잡상 2017. 7. 9. 22:54 Posted by nasica

몇 달 전에 토르 3, 라그나로크(Thor Ragnarok)의 티저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되었습니다.


https://youtu.be/v7MGUNV8MxU




무척 재미있어 보이는 이 티저 영상의 배경 음악은 1970년대의 헤비메탈 그룹인 레드 제펠린(Led Zeppelin)의 히트곡인 '이민자의 노래'(Immigrant Song)입니다.  이민자라고 하니까 뭔가 애달프고 핍박받는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데, 요즘 구미 선진국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이민자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멋진 노래가 묘사하는 이민자 역시 전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바로 바이킹에 대한 노래이거든요.  저 토르 3 티저 영상을 만든 프로듀서가 정말 기가 막히게 영화와 잘 어울리는 음악을 찾아낸 것이지요.


Ah-ah, ah!

Ah-ah, ah!


We come from the land of the ice and snow

우린 얼음과 눈의 땅에서 왔다네

From the midnight sun, where the hot springs flow

한밤에도 해가 떠있고 뜨거운 샘물이 흐르는 땅이지

The hammer of the gods

신들의 망치가

Will drive our ships to new lands

우리의 배를 새로운 땅으로 밀어내

To fight the horde, and sing and cry

적의 대군과 싸우고 이렇게 노래하며 외치게 만들지

Valhalla, I am coming!

발할라여, 내가 간다 !


On we sweep with threshing oar

우리는 힘차게 노를 젔네

Our only goal will be the western shore

유일한 목적지는 서쪽의 해안 뿐 !


Ah-ah, ah!

Ah-ah, ah!


We come from the land of the ice and snow

우린 얼음과 눈의 땅에서 왔다네

From the midnight sun, where the hot springs flow

한밤에도 해가 떠있고 뜨거운 샘물이 흐르는 땅이지


How soft your fields so green

너희의 초록빛 평야는 정말 부드럽구나

Can whisper tales of gore

선혈이 낭자한 이야기를 속삭여주마

Of how we calmed the tides of war

우리가 어떻게 전쟁의 물결을 잠재웠는지 말이야 

We are your overlords

우리가 너희의 주인이다


On we sweep with threshing oar

우리는 힘차게 노를 젔네

Our only goal will be the western shore

유일한 목적지는 서쪽의 해안 뿐 !


So now you'd better stop and rebuild all your ruins

그러니 너희는 이제 저항을 멈추고 너희의 폐허를 다시 짓는게 낫노라

For peace and trust can win the day despite of all your losing

너희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신의가 세상을 지배할테니


Ooh-ooh, ooh-ooh, ooh-ooh

Ooh-ooh, ooh-ooh, ooh-ooh



(레드 제펠린.  70년대 이런 음악을 듣던 사람들이 지금의 60~70대 노인이 되었습니다.)



인상적인 이 노래 가사 중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How soft your fields so green'이라는 부분입니다.  이 가사에서도 암시되듯이, 아마도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에 살던 바이킹들이 굳이 거친 바다와 험한 싸움을 무릅쓰고 다른 나라를 침략한 이유 중 하나는 자기네들 땅이 그다지 살기 좋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8세기 말엽부터 약 300년 동안 맹위를 떨치던 바이킹의 침략 활동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당시 스칸디나비아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세력이 침략 행위를 주도했다고도 하고, 토지가 척박하여 팽창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해외 침탈로 인해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경제에 여유가 생기자 그로 인해 인구가 늘어난 것이지, 인구가 늘어나서 침략이 시작된 것은 아니라고 하네요.  재미있는 설 중 하나는 바이킹이 해외 침략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나 영국이 일찍부터 해외 식민지를 개척한 것이 모두 장자 상속제(primogeniture)와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맏아들이 모든 것을 다 상속받고 차남이나 삼남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뭐라도 해야 했던 차남 삼남들이 목숨을 걸고 해외로 강도질을 나섰다는 것이지요.  미국 역사가 슬로안(Sloan)은 프랑스가 해외 식민지 개척에 소극적이었던 이유가 프랑스는 장자 상속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바이킹의 침략 행위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확실한 것은, 프랑스 노르망디에서도 그랬고 지중해의 시칠리아 섬에서도 그랬고, 심지어 저 멀리 러시아에서도 그랬듯이, 바이킹들은 따뜻한 땅에 정착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환영받지 못한 이민자 바이킹들의 정착 성공 지역)



바이킹들이 초록빛으로 뒤덮힌 부드러운 대지를 찾아 자신들의 고향을 떠난 이유는 누가 생각해도 간단할 것 같습니다.  따뜻한 곳이 좀더 농사 짓기에 좋기 때문이었지요.  흔히 바이킹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그릴 때, 커다란 멧돼지 통구이에 넘치는 벌꿀술과 맥주 등 아주 풍요로운 식탁을 생각합니다.  우락부락한 전사들이 보리죽을 먹는 모습을 그리면 너무 초라해보일테니까 그렇게 고기를 먹는 것으로 묘사했겠지요.  그러나 스칸디나비아가 돼지 먹이를 풍부하게 생산하는 땅도 아니니, 돼지고기는 축제 때나 먹는 특식일 뿐 바이킹들이 365일 먹는 주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과연 바이킹들은 평소에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요 ?  일년의 절반이 얼음과 눈, 그리고 하루 종일 어둠으로 뒤덮힌 나라에서는 대체 무슨 농사를 지었을까요 ?




(노르웨이의 얼음과 눈으로 덮힌... 농촌입니다.)



아시다시피 덴마크나 스웨덴, 노르웨이가 1년 내내 얼음과 눈으로 덮힌 곳은 아닙니다.  거기서도 여름은 따뜻하고 사람들 반팔 입습니다.  따라서 농사도 활발히 지었는데, 그래도 역시 춥고 척박한 땅이다보니 밀 농사는 어려웠고 주로 보리와 호밀, 귀리를 재배했습니다.  그러니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꿈꾸던 하얀 밀빵은 먹기 어려웠겠지요.  이런 거친 곡식으로는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었을까요 ?  스코틀랜드 사람들처럼 죽을 끓여 먹었을까요 ?  아마 그런 죽도 먹었을 것입니다.  특히 바이킹들은 영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통구이 바베큐가 아니라 주로 고기를 채소와 함께 삶은 스튜를 즐겨 먹었다고 하니까, 죽도 잘 먹었을 것 같습니다.  죽이든 스튜든 대표적인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으로서, 적은 재료로 여러 사람들이 먹기에 딱 좋은 음식이었지요.  그러나 바이킹도 분명히 빵을 만들어 먹었고, 그 특유의 척박한 환경에 따라 나름대로의 개성있는 소박한 빵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90년대 중반, 제가 처음으로 미국에 출장을 가서 뭔가 교육을 받을 일이 있었습니다.  워싱턴 교외에 있는 Xerox Document University라는 시설에서 이루어진 이 교육 과정에는 미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 각국에서 온 직원들 약 20여명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숙식을 다 이 시설에서 제공했습니다.  카페테리아 형태의 식당은 음식의 질이 꽤 훌륭했습니다.  그 때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같이 교육을 받던 덴마크 청년 하나가 있었습니다.  저하고 키가 비슷했으니 덴마크인치고는 꽤 작은 키였던 그 청년은 무척 지적인 이미지였는데, 아침식사를 같은 테이블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 그런 사적인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기억이 안 남는데, 그 청년은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난 귀국하면 지금 같이 사는 그녀에게 청혼할 거야'라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나 그 금발머리 청년의 표정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그때 그 청년이 먹던 음식이었습니다.  뭔가 크래커 비슷한 것이었는데, 색깔과 재질이 보통의 크래커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뭔가 밀겨 같은 것이 촘촘히 박힌 얇은 사각형의 과자 같은 모양이었는데, 그 친구는 거기에 버터를 발라 먹더군요.  저는 (실은 요즘도 그렇습니다만) 그런 부페식 공짜 식당에 가면 체면이고 뭐고 다 버리고 입에 쑤셔 넣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달걀과 베이컨 등등을 잔뜩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와 이 맛있는 것을 놔두고 저런 걸 먹다니'하며 속으로 혀를 끌끌 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 이상한 크래커 같은 음식을 다시 본 것이 거의 20년 뒤의 일이었습니다.  바로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영어 원제 : The Girl with the Dragon Tattoo)이라는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의 영화였지요.  잡지사 일을 하는 마이클 역으로 나온 다니엘 크레이그가 여주인공 리스베트와 한겨울 눈으로 덮힌 오두막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며 뭔가를 심각하게 의논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뭔가를 바삭하고 베어 무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것이 그 덴마크 청년이 먹던 그 크래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찾아 유튜브와 구글을 열심히 뒤져 보았으나 못 찾았습니다.  원작 소설 속에서도 그 아침식사에서 남자 주인공이 무엇을 먹었는지에 대한 묘사는 없더군요.  그러나 그 크래커 같은 빵이 확실하다고 전 생각합니다.





나중에 웹을 뒤져보니, 그건 스웨덴과 덴마크,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많이 먹는 크내커브로(knäckebröd, 덴마크어로는 knækbrød, 영어로는 crispbread)라는 빵이었습니다.  바이킹들이 문헌 자료를 거의 남기지 않았으므로 이 빵이 얼마나 오래 전부터 만들어졌는지는 분명치 않은데, 대략 기원 후 500년 경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답니다.  그러니 바이킹들도 아마 항해시에는 이 빵을 먹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바삭바삭한 빵을 굽기 위해서는 오븐도 필요없고 평평한 돌이나 번철에서 그냥 귀리나 호밀 반죽을 굽기만 하면 되고, 또 수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한번 만들어 놓으면 수개월씩 보관할 수 있었으므로 바이킹들의 항해에 딱 좋았을 것입니다.


그 덴마크 청년이 몸소 보여준 것처럼, 이 크내커브로는 지금도 북부 유럽에서 꽤 먹는 음식입니다.  아마 스웨덴이라는 이국적인 특성을 보여주려고 그 밀레니엄 영화에서도 원작에서는 나오지 않는 크내커브로를 먹는 장면을 굳이 보여준 것 같습니다.  사실 이건 맛이 있을 턱이 없는 음식이므로 전통적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으로 인식되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건강과 전통의 관점에서 각광받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알고 보면 바이킹들도 레드 제펠린의 저 노래에 나온 것 같은 무적의 전사들이라기보다는 먹고 살기 힘들어 목숨을 걸고 부자집 담을 넘어야 했던 강도들 같은 존재였고, 크내커브로도 그런 절박한 이민자의 애환이 깃든 음식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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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홍락 2017.07.09 2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800~1200년까지의 바이킹의 전성기와 관련하여 기후 변화에서 그 원인을 찾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북해의 거친 바다, 무서운 폭풍, 해빙 등으로 인해 바이킹들이 배를 타고 외부로 진출하는 데 많은 제한을 받았는데, 서기 800~1200년 이른바 ‘중세의 온난기’ 또는 ‘제2의 기후최적기’가 도래합니다. 이 기간은 지구가 8000년 만에 처음 맞는 가장 따뜻한 시기였으며 특히 북대서양 지역에서는 과거 2000년 동안 가장 온난한 시대였다고 기후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때 그린란드나 아이슬란드에서는 목축이나 농업이 가능했었고 빙하가 후퇴하였으며 그린란드의 기온이 현재보다 약 4도 더 따뜻했기 때문에 바이킹들이 바다를 건너와 밭을 갈거나 목장을 만들고 마을을 세워 정착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했으며 일부는 아메리카 대륙까지 건너갔다고 하지요.

    북해로 몰아치던 폭풍이 급격히 줄어들고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던 해빙도 현격히 줄어들면서 끔찍한 기상 상태에서도 항해를 하곤 했던 바이킹들에게 빙하가 없는 조용한 바다는 그야말로 자기집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였지요. 이때부터 바이킹의 해양 탐험, 유럽 해안을 약탈하는 등 바이킹의 해적 행위가 왕성해진 이른바 바이킹 시대’가 도래한 것이고요.

    그러던 것이 13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기후 최적기’라 불렸던 온난기가 물러가면서 유럽 북부에서는 저기압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시작했으며 점차 습하고 추워지기 시작합니다. 다시 뱃길에 여기저기 해빙이 나타나고 부둣가가 얼어붙는 등 기후변화로 인해 바이킹의 해적 문명도 다시 원래의 위치로 고립되고 농작물 재배나 바다표범, 해마 감소 등 악재가 겹치면서 바이킹 시대도 쇠퇴하게 되지요.

  2. 카를대공 2017.07.12 12: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헉 들어오자마자 분위기가 달라져서 조금 놀랬습니다;

    저 크내커브로라는 빵 비쥬얼만 봐선 썩 맛나 보이진 않네요 ㅎㅎ

  3. 검불 2017.07.12 1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페북보다 여기 올리는데(사정상 페북에 댓글 달기 좀 피하고 있어서요)

    Nasica님, 후쿠시마 원전은 모든 것에 대비한 적 없습니다. 그 미친 자식들은 원전에서 거의 기본 오브 기본을 죄다 무시하고 지었어요.

    심지어 원자력 내부 온도 감지 시설도 안 달았으니 말 다했죠.

    애초에 "고작" 쓰나미 따위로 원전이 그 꼴 나는 덕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일본애들이라고 건축을 당연히 한국보다 잘 비틀거리는 건 편견이에요. 저도 나중에 알아보다가 뒤집어졌어요

  4. 만남어플 2017.07.12 1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특이하게 생긴 빵이네용 ㅋㅋㅋ

  5. 무장공비 2017.07.14 2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들 아니겠습니까(.....)

    사실 해적이라는게 평소엔 배타고 돌아다니면서 장사하다가 잘 안되거나 상대가 만만해 보인다 싶으면
    칼 물고 뜀뛰기로 지르는거니까요. 척박한 땅때문에 바다로 내몰렸던 고대 그리스인들도 해적으로 악명이 높았지요.

  6. 프룬주스 2017.07.29 15: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블로그 글 읽을때마다 이렇게 나름의 관점에서 음식에 관해 해석해보는 글이 너무 좋더라구요. 오늘도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7. 지나가다 2017.11.03 0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나시카님 글 잘보고 있습니다. 이번에 오슬로 출장 중에 호텔 조식부페에 가니 마침 크내커브로가 있는 것을 보고 나시카님 글이 생각 나서 시식(?)을 해보았는데 비주얼은 약간 호밀이 들어간 비스킷 느낌에 버터나 잼 또는 청어 젓갈(갑자기 이름이 생각 안나네요 ㅜㅜ)에 발라먹어보니 한결 먹을만 하더군요. 나폴레옹 시대도 재밌게 보고 있지만 출장 중에 나시카님 음식 얘기를
    일행들에게 들려주니 다들 님이 대단하다고 감탄을 금치 못하더군요. 음식 얘기도 많이 부탁드려요. ^^

  8. ^^ 2018.06.01 1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
    다시 들어와서 글을 읽어보고 있는데 너무 어려운것은 패스중이나. 재미난 스토리들이 많아서 좋으네요 ^^벙긋

  9. 롤런드 2018.09.05 2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8년 오늘.
    이케아 광명점 갔는데 스웨디시 푸드마켓에
    저 두개가 다 있더군요. 딜보다 저 원통형이 쪼매더 비싼게
    ...둘 다 사올걸.
    일단 크리스피 브렛이라니(대충 맛은 알겠는데^^)
    맛 보 구 후기 올려보겄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인데도 반가워서.

이 글은 뉴욕 타임즈의 아래 기사 중 일부를 번역하고 사진을 옮긴 옛날 글인데, 주말 오전에 읽기 좋을 것 같아 다시 올립니다.


http://www.nytimes.com/interactive/2014/10/08/magazine/eaters-all-over.html?_r=3



1.  일본 도쿄, 사키


사키가 처음으로 나또를 먹었을 때는 이 여자애가 생후 7개월 되었을 때였는데, 먹자마자 토했다.  엄마인 아사까는 아마 냄새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냄새는 마치 깡통제 고양이 사료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츰 이 끈적끈적한 발효콩은 사키의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고, 전통적인 일본식 아침식사에 빠지지 않는 일부가 되었다.  다른 메뉴는 흰쌀밥, 미소된장국, 간장과 청주로 요리한 으깬 호박, 오이 장아찌 (사키가 제일 싫어하는 반찬), 계란말이, 그리고 연어구이이다.




2.  터키 이스탄불, 도가


도가 앞에 펼쳐진 화려한 토요일 아침식사에는 카이막(꿀과 엉긴 크림)을 얹은 토스트, 그린/블랙 올리브, 수쿡이라는 이름의 매운 소시지, 삶은 달걀, 타히니(참깨를 갈은 것)를 얹은 뻑뻑한 포도 시럽 (페크메즈), 양/염소/젖소 우유로 만든 여러가지 종류의 치즈, 모과잼과 블랙베리 잼, 패스트리와 빵, 토마토, 오이, 흰 무와 여러가지 신선 채소, 구운 고추로 만든 페이스트인 kahvaltilik biber salcasi, 그리고 디저트로는 헤이즐넛으로 향을 낸 할바(halvah) 과자가 포함되어 있으며, 우유와 오렌지 쥬스도 있다.  확실히 평일날 아침식사보다는 화려한 편인데, 이 가족은 여러가지를 먹는 터키식 아침식사 전통을 따르고 있다.





3.  프랑스 파리, 나타나엘


나타나엘이 아빠집에 묵을 때의 평일날 아침식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준비해주는데, 항상 키위 한개, 타르틴 (빵위에 고기나 치즈, 채소를 얹은 것), 바게트에 버터와 잼을 바른 것, 그리고 우유와 시리얼, 갓 짠 오렌지 쥬스이다.  나타나엘은 크레페와 코코아를 더 좋아하고, 많은 프랑스 꼬마애들이 이걸 더 좋아하지만 아빠인 세드릭은 건강을 더 생각하는 편이다.  주말에는 크롸상을 먹고, 빠띠쉐인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열정 그대로, 자기가 만든 디저트를 먹는다.





4.  말라위 치텟제, 에밀리


에밀리는 할머니 에텔과 함께 말라위의 수도인 릴롱궤 외곽에 사는데, 할머니가 다른집 파출부를 하기 때문에 이 아홉 식구는 6시 이전에 일어나 아침을 먹는다.  에밀리의 아침식사는 팔라라고 불리는 콩가루와 너트가루를 섞은 밀가루 죽과, 밀가루/양파/양파/고추 반죽 튀김, 그리고 삶은 감자와 호박, 그리고 꽃과 설탕으로 만든 검붉은 색의 쥬스를 마신다.  에밀리는 운이 좋은 편이고, 다른 말라위 어린이들은 영양 실조 상태인 경우가 많다.  가끔은 아침에 에밀리도 설탕을 넣은 홍차를 마신다.





5.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비르타


비르타의 귀리죽은 hafragrautur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아이슬란드의 기본 아침식사이다.  이 귀리죽은 물 또는 우유로 끓이는데, 종종 갈색설탕, 메이플시럽, 버터, 과일, 그리고 신 우유인 surmjolk를 곁들인다.  비르타는 또 lysi라고 부르는, 대구 간 기름을 마신다.  아이슬란드의 긴 겨울에는 햇빛이 부족하여 비타민 D가 부족하기 쉬운데, 이 대구 간 기름에는 비타민 D가 풍부하다.  비르타의 엄마인 스바나는 4명의 아이들에게 생후 6개월부터 이것을 마시게 했는데, 지금은 모두들 불평없이 잘 마신다.  아이슬란드의 많은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는 이 lysi를 아침마다 마시게 한다.





6.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비브


비브에게 아침식사는 우유와 함께, 버터를 바르고 (가장 중요한) 달콤한 스프링클을 뿌린 빵이다.  이 스프링클은 초콜렛, 바닐라, 과일 등 다양한 맛과 크고 작은 다양한 사이즈로 나온다.  정부가 운영하는 관광 관련 사이트에 따르면 네덜란드에서는 매일 75만 조각의 빵이 hagelslag (싸락눈 폭풍)이라고 불리는 초콜렛 스프링클과 함께 소비된다고 한다.  비브는 특히 vruchtenhagel (과일 싸락눈)이라는 이름의 여러가지 혼합맛 스프링클을 좋아한다.





7.  브라질 상 파울루, 아리시아와 하킴


아리시아의 분홍색 컵에는 초콜렛 우유가 담겨 있지만, 동생인 하킴의 컵에는 라떼 커피가 들어있다.  많은 브라질 부모들에게 있어, 아이에게 커피를 주는 것은 문화적 전통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커피가 비타민과 항산화물질이 풍부하며, 우유와 섞어 아침식사로 주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집중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믿는다.  아빠인 헤지날도도 하킴이 그걸 마시고 나면 더 들뜨는 것 같긴 하다고 인정하지만, 적당히 마시면 괜찮다 소아과 의사도 말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빵과 버터와 함께 햄과 치즈도 먹는다.





8.  말라위 치텟제, 필립과 셀린


필립과 그의 쌍동이 여동생인 셀린은 chikondamoyo라는 달콤한 옥수수빵 비슷한 케익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이건 할머니인 도로시가 알루미늄 냄비로 만든 것이다.  이 쌍동이는 아침식사로 그것과 함께 삶은 감자와 설탕을 넣은 홍차도 든다.





9.  일본 토쿄, 코끼


코끼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미국식 아침식사를 더 선호했을 것이다.  가끔은 엄마 후미가 시리얼과 도우넛도 주지만, 엄마는 아이들이 일본식 식사에 더 익숙하기를 바란다.  이 식사에는 간장과 참깨를 넣어 멸치와 함께 볶은 풋고추, 뜨거운 밥에 비빈 간장을 넣고 비빈 날계란, 그리고 연근과 우엉, 당근을 참기름과 간장, 정종으로 조린 반찬, 미소 된장국, 포도, 배 한조각, 우유가 포함되어 있다.





10.  터키 이스탄불, 오이쿠


4학년인 오이쿠의 아침식사의 중심은 갈색 빵이다.  여기에 그린/블랙 올리브와 누텔라 잼, 토마토, 삶은 달걀, 딸기잼과 꿀에 절인 버터, 여러가지 종류의 터키 치즈가 덧붙여진다. 





11.  브라질 상 파울루, 티아고


티아고는 초콜렛 우유를 좋아하고 또 일어나자마자 그걸 달라고 하지만, 그래도 이미 엄마가 직장에 나간 뒤이고 빨리 일어나 유치원에 가야하는 평일날 아침 7시에는 기분이 좋지 않다.  시리얼이 제일 좋아하는 아침식사인데, 여기에 바나나 케익과, 브라질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좋은 달콤한 빵인 bisnaguinha를 requeijão라는 부드러운 크림 치즈와 함께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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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찌 2017.07.01 2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흥미로운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

  2. 프라하밀루유 2017.07.03 17: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한국인 엄마인데도, 사는 곳이 유럽이다보니 아침을 빵을 먹이게 되는 것 같아요. 재밌는 포스팅 감사합니다

  3. 유애경 2017.07.03 2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納豆(낫토우)는 일본사람들 사이에서도 기호가 확연하게 갈리더라구요. 저는,싸고 몸에 좋은 음식이라서 맛을 들일려고 몇번이나 도전 했는데 결국 포기했습니다. 근데 한국분들도 잘 드시는 분이 의외로 많네요.

  4. normal 2017.07.04 14: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에서 2번째 터키 식사는 잔치상 수준이네요. 토요일 아침마다 잔치상을 차려야 하는 어머님이 정말 대단하고 엄청나네요.

  5. 까까님 2017.07.10 16: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 딸은 눈 뜨자마자 간장계란비빔밥 또는 물 말은 밥을 오이지나 물에 씻은 김치랑 해서 인젝션 당하고 유치원에 가네요
    아빠로서 미안하긴 하지만 유치원 가서 죽 먹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전에 EBS에서 해주는 영화를 봤는데, 독특하게도 18세기 덴마크 왕실을 배경을 한 시대극이었습니다.  제목은 로열 어페어 (A Royal Affair. 덴마크 어로는 En kongelig affære)   그래서 왕실 치정극인가 싶었지요.  주인공은 007 카지노 로열에서 악당으로 나왔던 메즈 미켈슨이라고 덴마크 사람이더군요.   알고보니까 이 영화 자체가 덴마크 영화였습니다.   왕비, 즉 여주인공은 제이슨 본 최종편에서 젊고 똑똑한 CIA 사이버전 전문가로 나왔던 알리시아 비칸더(Alicia Vikander)였습니다.  

이 영화 줄거리는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가감없이 그대로 따라 갑니다.  영국의 공주이자, 나중에 나폴레옹 전쟁을 치루어낸 조지 3세의 여동생인 캐롤라인 마틸다 (Caroline Matilda) 가 15세의 나이에 덴마크로 시집을 가서 크리스티안 7세 (Christian VII )의 여왕이 됩니다.  당시 크리스티안 7세도 결혼하던 1766년 1월에야 즉위를 한, 17살의 미성년 왕이었지요.  그런데 이 크리스티안 7세는 정신병이 좀 있어서 제대로 된 왕 노릇을 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와이프인 캐롤라인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다른 여자들과 놀아나곤 했지요.  




(이 양반이 크리스티안 7세...  저는 이 장면은 영화에서 못 봤습니다만, 이렇게 보니까 잘 생겼는데요 ?)



알고 보면 크리스티안 7세와 캐롤라인은 서로 사촌지간이었습니다.  크리스티안의 어머니인 루이즈는 캐롤라인의 이모였거든요.  당시 덴마크 뿐만이 아니라 영국 왕 조지 3세 본인도 정신병을 앓았는데, 이런 병력은 거듭되는 근친혼의 결과라는 주장도 있긴 합니다.  아무튼 어린 캐롤라인은 불행한 결혼 생활과 왕실 사정에 무척 상심이 컸고 인생의 낙도 없었습니다.




(오른쪽에 서있는 여자가 영국 공주 시절의 캐롤라인 공주입니다.  지긋지긋한 외모 지상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여쭙습니다만... 누가 더 예쁜가요 ?  암만 봐도 왼쪽에 앉은 동생 루이자 공주가 훨씬 더 미인인데요 ?  불행히도 병약했던 루이자 공주는 불과 15세의 나이로 병사했습니다.)



이런 덴마크 왕실에 프로이센 출신의 의사 하나가 들어옵니다.  크리스티안 7세가 외국을 순방할 때 그를 모실 주치의를 채용했다가 마음에 들었는지 1769년 1월에 귀국할 때도 데려온 것이지요.  이 의사의 이름은 요한 스트루엔제 (Johann Friedrich Struensee), 왕비보다 14살 연상인 32세의 독신남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의사라는 직업은 글자 그대로 기술직종으로서, 귀족들에게는 하인 정도에 해당하는 위치였습니다.  이 양반은 지식을 쌓은 시민층답게, 당시 유럽 시민 사회에서 떠오르던 계몽사상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스트루엔자와 캐롤라인 왕비의 건전했던 한때)


도도한 영국 공주이자 쓸쓸한 덴마크 왕비였던 캐롤라인은 바보 남편이 총애하던 이 무뚝뚝한 독일인 의사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트루엔제는 크리스티안에게 왕비를 저렇게 내버려두지 말라고 충언하는 등 국왕과 왕비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노력했고, 귀족들이 장악한 왕실에서 외로운 생활에 지친 왕비도 조금씩 이 총명하고 혁신적인 사상을 가진 외국인 의사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둘은 1770년 봄 즈음에는 비밀스러운 연인 관계가 됩니다.




(실제 스트루엔제의 초상화입니다.  매즈 미켈슨도 미남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양반에 비하면 매력남.)



캐롤라인 왕비와 스트루엔제는 낙후된 덴마크 사회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화 중반에 이런 장면이 나오지요.  왕비와 스트루엔제가 아직 연인으로 발전되기 전에, 시골길을 따라 말을 달리다가 울타리에 묶인 채 참혹하게 고문받다 죽은 어떤 농부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스트루엔제는 놀라는 왕비에게 덴마크의 법규상 지주는 세금을 내지 않는다든지 불경죄를 저지른 농노를 이런 식으로 마음대로 처벌할 수 있다고 말해주지요.





(불안한 삼각관계...  국왕은 별 애정도 없는 왕비보다는 스트루엔제를 훨씬 더 총애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왕비는 스트루엔제에게 '네가 국왕에 대해 가지는 영향력을 이용하라'고 조언하지요.  실제로 스트루엔제는 국왕 크리스티안에게 '전하가 훌륭한 업적을 이루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라며 이런저런 사소한 개혁 조치를 권고하지요.  당시 덴마크의 실권은 귀족들의 연합체인 국무회의에 있었고, 왔다갔다 하는 정신병으로 인해 철없는 아이 또는 저능아 취급을 받던 국왕은 회의석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은 스트루엔제에게 등을 떠밀려 떨리는 목소리로 '귀족들이 비용을 부담하여 코펜하겐 거리의 인분 등 오물을 청소하도록 하는 법안을 만들자' 라고 주장을 하고, 귀족들은 '저 병신이 왕 노릇하고 싶은 모양이다' 라고 코웃음을 치며 그 법안을 통과시켜 줍니다.




(영화 내내 크리스티안 7세는 미치광이보다는 주로 약간 천진난만한 저능아스럽게 나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국왕과 스트루엔제는 점점 더 개혁적인 법안들을 하나씩 둘씩 통과시킵니다.  처음에는 멍청이 왕의 장난 정도로 여겼던 귀족들은 이런 법안들이 점점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갉아 먹자, 그 뒤에 스트루엔제가 있음을 마침내 파악하고, 외국인인 그를 원로 회의실에서 내치려 합니다.  하지만 이때 국왕이 용기를 내어 그를 제지하고 국무회의를 해산시킨 뒤, 스트루엔제에게 사실상 권력을 맡겨 버립니다.  사실 제대로 된 정권 이양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요.  이것이 1770년 9월 15일의 일이었고, 이때부터 약 16개월 동안 덴마크 역사상 "스트루엔제의 시대"라고 불리는 기간이 시작됩니다.





(이제 그의 독무대가 시작된다)



스트루엔제는 제대로 된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귀족들이 장악한 국무회나 각 부서 장관직을 빼앗아야 한다고 판단하고는 이들 모두를 해직해버립니다.  그리고는 온갖 개혁 법안들을 공표하기 시작합니다.  권력을 잃기까지 약 2년 동안 그가 만들어 공표한 법안은 무려 1069개로서, 하루에 3개 꼴이었습니다.   법안 내용은 사실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가령 고문의 금지, 강제 노역제의 폐지, 언론 검열 폐지, 공직 및 세제에 있어서 귀족 특권의 폐지,  노예제의 폐지, 뇌물의 금지 및 형사 처벌, 농부들에게의 농토 할양, 곡물가 안정을 위한 국가 곡물 창고의 도입 등등이었지요.  이런 조치들은 유럽 사회 전역의 지식인들로부터 찬사를 이끌어 냈습니다.  스트루엔제와 왕비가 국왕에게 올라오는 이런저런 서류들을 처리하다가 그 유명한 볼테르로부터 덴마크의 선진 정치에 대해 '북방의 태양'이라며 찬사하는 편지를 받고는 서로 감격하여 말을 못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국왕에게 정치 참여를 독려하는 스트루엔제)



문제는 귀족들이었습니다.  이런 법안들은 간단히 말해서 귀족들의 부와 권력을 제한하고 빼앗아 국민들에게 돌려준다는 것이었거든요.  당시 귀족들에게는 (당시에는 아직 그런 단어조차 없었겠습니다만) 완전 빨갱이 수작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반격을 준비합니다.  이미 스트루엔제와 왕비의 스캔달은 궁정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였거든요.  왕비가 외국에서 들어온 독일 의사 나부랭이와 붙어먹는다 ?  이건 독일에 대한 국민 감정이 나쁘던 덴마크 국민들에게 아주 잘 먹히는 재료였습니다.  영화 속에는 이렇게 반격 준비를 하던 귀족 하나가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역설적이게도, 스트루엔제를 공격할 아주 좋은 무기를 스트루엔제 본인이 우리들에게 쥐여주었습니다.  바로 검열의 폐지입니다."




(쉴드를 쳐주려고 해도, 뭐 불륜은 불륜이쟎아요 ?)



귀족들은 사람을 풀어 스트루엔제와 왕비의 스캔달을 외설스럽고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비아냥거리는 출판물과 인형극의 형태로 민간에 퍼뜨립니다.  또한 스트루엔제가 외국인이라는 점을 공격하며, '어디서 굴러먹던 독일놈이 기어들어와 아름다운 덴마크의 관습법을 다 훼손하고 있다'며 덴마크의 국민 감정에 호소합니다.   스트루엔제와 그의 동지들은 검열을 다시 부활시킬 수도 없고 해서 속수무책으로 어쩔 줄 몰라합니다.   어쨌거나 스트루엔제와 왕비의 스캔달은 사실로서, 왕비가 낳은 딸인 아우구스타 (Louise Augusta) 공주는 스트루엔자의 딸임을 모두가, 심지어 국왕 크리스티안까지도 공공연히 말하고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또 역사적으로도 스트루엔제의 개혁은 무척 어설픈 면이 꽤 많았습니다.  가령 스트루엔제 본인 자신도 덴마크 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그가 귀족들을 내쫓고 임명한 자신의 심복들도 덴마크 현지 사정은 물론, 자신들이 수립해 갈 계몽주의 사회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인물들이었습니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이때 역사적으로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영화 속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국왕이 보여준 갈등 연기가 아주 일품이었습니다.  처음에 절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스트루엔제가 (비록 별 관심은 없었지만) 자신의 왕비와 놀아났다는 소문에 분노한 왕은 소란을 피우다가 스트루엔제 본인에게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사실 여부를 묻는데,  스트루엔제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크리스티안 국왕도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결국 의심은 의심을 낳아, 궁정 식솔들이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하는 자리에서 광기가 도져 '여기 이 프로이센 왕 (스트루엔제를 지칭)이 공주의 아빠이다' 라고 소리를 지르는 등 추태를 부리지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는가)



이렇게 미쳐 날뛰는 크리스티안을 스트루엔제가 끌어앉고 '내가 실은 거짓말을 했다, 내 딸이 맞다' 라고 고백하자 크리스티안은 반쯤 흐느끼며 '그냥 우리 이렇게 지내자' 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때 국왕이 보여준 모습은 병신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애절한 면이 있는 것이, 아주 좋은 연기였다고 생각해요.


스트루엔제가 벌였던 여러가지 사회 사업, 가령 고아원의 설립이나 빈민 구제 등은 당연히 많은 돈을 필요로 했는데, 그는 귀족들에게 이런 비용을 부담시키다가 결국에는 '어차피 전쟁도 없는데'라며 상비군을 축소하면서까지 예산을 확보합니다.  이런 조치들은 사실 그의 빈약한 정권을 지지해줄 모든 세력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였습니다.  귀족파였던 태왕후 (크리스티안의 어머니)는 이런 점을 이용해, 왕실 경비대장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여 '반 스트루엔제' 폭동을 궁 내부로까지 끌어들이며 스트루엔제를 압박했습니다. 





(박사모 애국지사들이 몰려와서 외국 불륜남은 물러가라고 시위하는데, 왕궁 경비병은 대장의 지시로 문을 열어주고...)



스트루엔제가 덴마크에 처음 왔을 때 그와 매우 친했던 귀족 하나가 이제 정권을 손에 쥔 스트루엔제에게 자신의 빚을 변제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이를 스트루엔제가 거절하면서 사이가 벌어졌는데, 귀족들은 그를 부추겨 스트루엔제가 반역을 모의했다고 누명을 씌우는데 성공합니다.  심약한 국왕 크리스티안은 한밤중에 자신의 침실로 쳐들어와 스트루엔제의 체포 명령서에 서명하라는 귀족들에게 끝까지 저항하지만, 결국 귀족들의 호통 속에 억지로 그의 체포 명령서에 서명을 하게 되지요.  그는 결국 다시 국무회의에서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거기 흑인 꼬마 시종하고나 노시오' 라는 조롱을 귀족들로부터 듣는 신세가 됩니다.


스트루엔제와 그의 동지들은 모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시달립니다.  왕비 캐롤라이나도 공범으로 함께 체포되어 외딴 곳으로 유배됩니다.  스트루엔제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귀족 하나는 스트루엔제가 갇힌 감방에 직접 들어와  스트루엔제가 고문 당하는 모습을 즐기면서 그에게 '이젠 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서 고문이 합법화 되었다' 며 비아냥거리지요. 


오랫동안 고문에 시달린 스트루엔제가 뻗어있는 감방에 성직자 한명이 들어서자 '또 고문하러 왔구나' 라고 생각한 스트루엔제가 겁에 질려 비굴하게 감방 구석에 웅크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 연기도 참 좋았어요.  스트루엔제를 안중근 같은 영웅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육체적 고통에 굴복하는 평범한 인간으로 묘사했거든요.  스트루엔제의 아버지는 원래 목사였는데, 그의 아버지를 잘 안다는 이 성직자는 '모든 것을 시인하면 목숨은 살려주기로 했다'며 그에게 '왕비와의 불륜 및 반역 모의'를 시인하라고 설득하고, 스트루엔제는 결국 그에 동의합니다.  





(매에는 장사가 없지요.  또 굶는데도 장사 없습니다.)



다음 장면에서, 스트루엔제는 깨끗한 셔츠 차림으로, 그의 개혁 동지였던 브란트와 함께 형장으로 가는 마차를 타고 갑니다.  함께 처형 직전에 사면 받기로 되어 있던 브란트는 '대체 왜 이렇게 형 집행 직전에야 사면을 해주는 것인지' 라며 투덜거리고 스트루엔제는 '그것이 덴마크의 전통이라는군' 이라고 설명하지요.  같은 시각, 크리스티안도 귀족들과 히히덕거리며 '내가 마지막 순간에 그를 사면해주면 스트루엔제가 무척 놀라면서 기뻐하겠지 ?' 라며 즐거워 합니다.   하지만 같은 마차를 타고 있던, 아버지의 친구라던 그 성직자가 십자가를 매만지며 안 좋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스트루엔제는 '처형 직전 사면'이라는 것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눈치챕니다.  그러나 브란트에게는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미 국왕의 명령은 안 통하는 세상이었거든요.




(나는 너희들 편이다.... 나는 너희들 편이다 !)



먼저 가벼운 마음으로 마차 밖으로 나가 높이 쌓아올린 단두대 (프랑스 식 길로틴이 아니라, 집행인이 큰 도끼를 든 구식 단두대)로 올라갔던 브란트가 먼저 처형된 후, 스트루엔제도 마차 밖으로 끌려나갑니다.  그가 나가니 단두대 주변을 둘러싼 덴마크 농민들이 그를 향해 돌과 채소 부스러기 등을 던지며 그를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죽음의 공포와 수치심, 배신감 등에 몸을 떨며 스트루엔제가 군중들에게 '나는 너희들 편이다, 나는 너희들 편이다'라고 외쳐보지만, 군중들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는 브란트의 피에 젖은 단두대 계단에서 떨리는 무릎 때문에 넘어지기도 하면서 군중들을 더 즐겁게 해준 뒤, 결국 목이 잘립니다.


영화는 왕비가 이제 10대 청소년이 된 그녀의 자녀인 프레데릭 왕자와 아우구스타 공주에게 쓴 편지를 낭독하는 것을 배경을 끝이 납니다.  영화 속에서는 프레데릭 왕자와 아우구스타 공주가 왕비를 찾아가는 듯이 표현했습니다만, 사실 영화 속에서도 끝내 이들이 왕비와 직접 대면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캐롤라인 왕비는 스트루엔제가 처형된지 3년 후인 1775년 유배지에서 열병으로 사망했거든요.  그러니까 왕비가 그녀의 자녀들에게 쓴 편지는 역사적으로는 실제하지 않는 문서입니다.  아무튼 영화 속 그 편지에서, 왕비는 자신과 스트루엔제가 저지른 불륜에 대해 솔직히 고백하고, 그들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개혁을 위해 가졌던 열정과 꿈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자막을 통해서, 결국 프레데릭 왕자가 쿠데타로 귀족들로부터 정권을 되찾고, 스트루엔제와 캐롤라인 왕비가 만들었던 개혁 법안들을 다시 부활시켰다는 것을 관객에게 알리면서 조용히 끝납니다.





(프레데릭 6세입니다.  스트루엔제가 그의 어린 시절 훈육을 맡았지요. 이 양반이 덴마크 최초로 백신을 맞은 아기였는데, 그것 역시 스트루엔제가 놓아준 것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적으로도, 프레데릭 왕자는 아직 16살이던 1784년, 아직 정신병으로 투병 중이던 크리스티안 7세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감행, 당시 섭정이던 그의 숙부와 할머니로 대표되는 귀족 연합체로부터 정권을 되찾고 섭정이 됩니다.  심약한 국왕이던 크리스티안 7세는 1808년에 5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그때까지는 섭정으로, 그리고 그 이후에는 프레데릭 6세 국왕으로서 덴마크를 다스리지요.  그러니까 1801년의 제1차 코펜하겐 전투, 그리고 1807년 제2차 코펜하겐 전투 모두 이 왕자가 사실상의 국왕으로써 영국군과 싸웠던 것이지요.  그가 코펜하겐 성벽에서 넬슨의 영국 함대와 혈전을 벌이던 자국 해군을 응원하던 모습은 "중립도 힘이 있어야 한다 - 발트해의 포성" 편 http://blog.daum.net/nasica/6862508 을 참조하세요.




(아마 당시 왕세자의 눈에 들어왔을, 코펜하겐 시내에서 본 당시 전투 모습입니다.  포연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아도 아무튼 왕세자를 포함한 코펜하겐 시민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을 겁니다.)


프레데릭 왕자는 스트루엔제조차 없애지 못했던 농노제를 1788년 마침내 폐지하는 등 진보사상으로 덴마크를 당대 제1의 계몽국가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의 폭풍 속에서, 전혀 의도치 않게 그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측에 붙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원래 덴마크 영토이던 노르웨이를 상실하는 등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전후 덴마크 경제가 침체되자,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는지 계몽 사상에 영향에 받은 법안을 다시 폐지하는 등 반동적인 정치를 펴기도 했으나, 다시 경제가 살아나면서 다시 진보적인 제도를 도입하는 등 진보와 보수를 오가는 통치를 했지요.


이 영화를 보고 주연 배우라든가 역사적 배경에 대해 관심이 생겨 이런저런 블로그들도 많이 살펴 보았는데, 많은 분들이 '그래서 진보든 보수든 도덕성부터 닦아야 한다' 라든가 '결국 이거 로맨스 영화인지 뭔지 헷갈린다' 라든가 식으로, 왕실의 불륜 비극 로맨스 영화 정도로 보시는 분들이 많은 것에 놀랐습니다.   그때 이 영화를 와이프하고 같이 봤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와이프가 한마디 하더군요.  "그러게 둘이서 불륜만 안했어도 해피 엔딩이 될 수 있었는데 말이지" 라고요.  그래서 저도 한마디 했지요.  "불륜 안 했으면 저 개혁 성공했을 것 같아 ?"  





(스트루엔제 : "우리 둘의 개인적인 사랑 불륜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개혁은 성공했었을까요 ?" )



스트루엔제의 개혁은 유부녀와 놀아나는 불륜남의 빨갱이 짓에 불과했고, 결국 귀족들이 잘 살아야 일반 서민들도 조금이나마 떨어지는 국물이라도 받아먹으며 연명할 수 있다는 당연한 명제를 거부하는 미치광이 짓이었을까요 ?  스트루엔제가 '난 너희들 편이다'라고 외쳤던 상대인 덴마크 국민들 대다수는 스트루엔제에게 등을 돌렸지요.  스트루엔제가 목이 잘리면서 그런 개혁은 후퇴하는 것이었을까요 ?  글쎄요.  원래 역사의 진보는 한번에 오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진보 측 인사 몇몇의 과오가 진보의 행진을 막지도 못하고요.  전에 인용했던 에밀 졸라의 명언처럼, "La vérité est en marche et rien ne l'arrêtera" 즉 진실은 전진하고 있고 그 어떤 것도 그를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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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석공 2017.05.11 09: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3. 수비니우스 2017.05.11 1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너희 편이다라고 외쳐도 못알아듣는 댓글이 우습게도 좋은 글을 더럽히려 드는군요. 알타리무 같은 경우엔 몇개월동안 저러네요.

    • 수비니우스 2017.05.11 1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래도 그 실체는 이 세계에는 존재하는것 같지 않네요. 그 실체가 존재하는 세상으로 가서 사세요.

      아, 사이비종교자하고 민주주의자하고 겉으로 하는 행동이 비슷하다고 동류라고 하다니 범죄자하고 님하고 숨쉬는게 비슷하니까 동류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다른나라의 역사를 배우고 경제학공부와 철학공부를 도대체 뭘하셨는지 의심스럽네요.

    • 수비니우스 2017.05.11 1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주사파를 비서실장으로 임명한 문재인은 그럼 종북주의자인가보네요. 님은 그걸 속지 않고 알고 있고요. 그럼 국가보안법에 따라서 신고하세요. 정의도 실현하고 포상금도 받을 수 있겠네요. 거기다가 알면서도 신고 안하면 국가보안법 불고지죄에 해당하니 그것도 처벌 대상이에요. 아 물론 승소 못하면 국가보안법 무고죄로 처벌받고요.

    • 최홍락 2017.05.11 11:19  댓글주소  수정/삭제

      경제학과 철학을 제대로 책 읽고 한 건 없을겁니다. 다 정규재 TV에서 다이제스트로 된거 보고 얘기하는거죠. 홍위병들이 모택동의 붉은책 보고 얘기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 수비니우스 2017.05.11 1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타리무님 문재인이 종북이란걸 지금 이미 속지않고 알고있는데 왜 지금 신고를 안하시죠? 이거 이적행위 아닌가요?

    • 수비니우스 2017.05.11 1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니 이미 다 아시는 분이 왜 지금 신고를 안하고 때를 기다리세요? 이적행위하시네요;;; 불고지죄에 해당되는거 아니에요?

      논쟁하기 싫으면 댓글 안쓰시면 되겠네요^^ 환영입니다. 블로그 빨리 만들어서 그 주소 한번 알려주세요. 얼마나 잘쓰시는지 보러 자주 방문할께요~ 근데 언제 만드세요? 작년 말에도 만든다고 했던거 같은데;;;

    • 최홍락 2017.05.11 1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4, 2015년까지 매년 물가 상승률 0퍼센트 대를 기록한 디플레이션 상황이었는데 여전히 전 정부에 대한 미련이 많았었나 봅니다.ㅋ

    • 최홍락 2017.05.11 1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본적인 용어 정의도 헷갈리는 지적수준 가지고 누굴 지적 하시는지...에휴...그걸 여러차례 쓴 걸 보니 단순 실수도 아닌 듯 합니다.

  4. 최홍락 2017.05.11 1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꽤 오래전의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다 쓰셨지만 여전히 관심이 뜨거운 이야기네요.

    전 그때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 글을 접했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이 글을 보니 그 당시의 개혁과 지금의 정권 교체와 큰 연관이 있는 것 같진 않고(물론 정권 교체 그 자체의 의미가 더 크다고 보지만 그게 더 나은 삶을 보장할지 여부는 미지수...)

    http://m.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813

    상기의 링크 기사를 접하면서 꼭 개혁이 비상한 수단으로 해야하는가? 치밀한 계산과 인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다행인 것은 앞으로 법안 하나, 사람 하나 쓰려고 해도 여소야대 국회의 특성상 끊임없이 설득하고 협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우려되는 점은 그런 계산 가능한 사람이 있느냐는 점과 선거운동 기간 중에 확인된 뿌리깊은 갈등이 그 프로세스를 가능하게 할지...

    아뭏든 선거는 끝났고 국민들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투표를 했습니다.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후보가 되지 못했다고 국민의 수준 운운하는 꼴은 우습기도 하고요. 죽음이라도 불사하겠다고 큰 소리치던 사람도 조용히 들어가고...선거가 끝난 후의 조용함을 즐길 시간이네요.

    특히 저 위에서 난 모든 학문을 공부했노라고 설치는 류 치고 공부 제대로 한게 없고 저런 인간들의 식언과 번복은 사이비들의 종특이죠. 저런 주제에 누굴 비난하면 그게 먹힐거라고 믿는지...ㅉㅉ 저러니까 망하지.

    P.S. 메조 미켈슨은 카지노 로얄에서 본드역의 다니엘 크레이그를 고문할 때 남자의 중요 부위를 가격하는 고문을 해서 기억에 남는 듯 해요.

    • 수비니우스 2017.05.11 1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행인 것은 앞으로 법안 하나, 사람 하나 쓰려고 해도 여소야대 국회의 특성상 끊임없이 설득하고 협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우려되는 점은 그런 계산 가능한 사람이 있느냐는 점과 선거운동 기간 중에 확인된 뿌리깊은 갈등이 그 프로세스를 가능하게 할지..."
      "냉소와 체념이 위험한 것은 지금까지 이루어왔던 것에 대한 부정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화 했다더니 뭐가 달라지는게 있어? 이런 식의.) 그리고 그 부정은 혁명과 같은 뭔가 큰 거 한방을 기대하게 만드는데 큰 거 한방은 당연히 카리스마있는 큰 지도자와 연관되고, 그게 바로 독재로 가는 지름길일 수 있어요."
      님 댓글에서 제가 생각 못한걸 배웁니다. 감사히 챙겨보고 있어요 ㅎㅎ

    • 최홍락 2017.05.11 1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그냥 여러가지 잡상들을 여기저기서 모아놓고 조금씩 쓰다보니 이렇게 됬습니다.ㅎ 블로그할 정도로 대단한 지식 있는게 아니라 글만 좀 씁니다.

  5. ㅇㅇ 2017.05.11 1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 정부가 민중의 편이라고 기뻐하며 영화 내용과 동일시하고 싶진 않습니다. 이명박정부때 뉴타운 4대강같은 토건에 세금 쓰는게 토건은 미래 산업이 아니다, 파급 효과가 없다고 비판하던 진보적 경제 지식인들이 달동네 뉴딜정책에는 별 말이 없는데, 이게 뉴타운과 달라서 그렇다면 뭐가 크게 다른지 설명이나 해주면 좋겠습니다.

    • 최홍락 2017.05.11 1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1. 역으로 당시 집권 보수 정당 지지율 좀 올려보려고 뉴타운 사업을 공약하거나 추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도리어 뉴타운 추진과정에서 보수계 정당의 기반인 지역 관변조직이 해체되고 지역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강제적이든 강제적이지 않든간에 흩어지게 되고, 새로 들어오게 된 젊은층들이 압도적으로 중도/진보쪽 성향을 뛴 덕택에 뉴타운으로 지정된 지역이 오히려 이후 반보수계 정당 텃밭으로 변하게 됬다는 분석도 나오긴 합니다. 사람일이란게 참 모르는거죠.

      2. 뉴타운과 뉴딜은 간단히 비교하면 뉴타운은 대규모 주택재개발 사업, 뉴딜은 도시재생 내지는 가로주택정비사업으로 비교될 수 있습니다. 전자는 동네를 싹 갈아 엎어 낙후된 도로 기반 시설 주택을 다시 짓는거고 후자는 기존 기반시설과 도로망 유지하면서 노후 불량 건축물을 대체하는거구요. 양쪽 다 도시정비 사업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둘다 상황과 장소에 따라 일장일단도 있지요.

    • ㅇㅇ 2017.05.11 2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설명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달동네 뉴딜 정책의 경우 집값 상승과 그로 인한 기존 지역주민들이 흩어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나요?

    • 최홍락 2017.05.11 2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존 뉴타운이 낙후된 지역에 거주하던 거주자가 그 지역을 싹 밀어버리고 조성되는 아파트나 주상복합에 꾸준히 거주할 경제력이 되기는 어렵기 때문에 보상금 몇 푼 손에 쥐고, 입주권은 헐값에 넘긴 후 살던 집을 떠나는 사태가 속출하는 문제점이 있었죠. 민간에 의한 개발방식이 주가 되다보니 주민들감의 합의도 어렵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엔 아예 사업이 좌초된 곳도 많고요.

      이에 대해 도시재생 뉴딜정책의 경우 세부사항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뉴타운, 재개발사업이 중단된 구도심을 중심으로 아파트 단지 수준의 기반시설을 건설하고 공공 중심의 소규모 개발사업 위주로 진행하여 상기 개발에 따른 부작용을 막겠다는 정책이네요. 대규모 재개발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 (문제 사례는 http://m.blog.naver.com/rock0907/221003659662 참조요.)을 방지하면서 소규모로 점진적으로 해나가겠다는 방식은 좋아 보이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구도심의 활성화에 뚜렷한 대안도 없이 뉴타운 사업을 다시 추진하겠다고 하는 것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비판은 감수해야하는건 둘째치고

      대규모 개발이 필요한 지역에서 소규모로 기반 시설 없이 개발이 진행될 경우 현실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개발업자와 소유자들에 의한 빌라만 우후죽순 개발되어 난개발이 횡행한다는 점(특히 35층 고도제한 규제같은 것과 맞물려 도시가 갑갑한 성냥갑이 된다는 강한 비판이 존재했지요.)

      사업 주체는 어디까지나 그 지역의 주민들을 중심으로 민간에 의해 시장원리에 따라 추진해야지 정부가 인위적으로 나서면 실패할 수 있지 않느냐라는 점, 그에 대규모 예산을 투입하는 것이 국가 전체적으로 바람직한가 하는 점이죠.

      그래서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 이미 존재하는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제 35조 순환정비방식의 정비사업을 그대로 이행하는 것 외에 크게 달라질게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요새 관심가지기 시작한 주제라 제가 설명드릴 수 있는게 이거 밖에 없네요.

    • ㅇㅇ 2017.05.11 22: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설명 잘 읽었습니다. 청년 일자리 문제를 공공 일자리 중심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나 1년당 10조원을 또 다시 토건업 중심으로 투자하겠다는 점에서 제가 생각하는 한국이 나아가야할 미래상과 많이 달라서 문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고 지금도 걱정스럽긴 합니다. 그러나 민주적 선거를 통해서 큰 차이로 당선된 대통령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전임자와는 비교될 수 없이 좋은 정치인이니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지켜봐야겠지요.

    • 최홍락 2017.05.11 2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다른분을 지지하였지만 정치 권력 교체에만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어떻게 됬건 민주적 절차가 문제없이 지켜졌고 그에 따라 교체된 것이니 존중해야겠지요.

  6. 애독자 2017.05.11 15: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싯점에서 꼭 이런 글이 필요할까요?
    좋은 의도에서 적으셨지만... 댓글을 보니, 감정의 골만 깊어지는 것을 봅니다.

    • 수비니우스 2017.05.11 15: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런 시점에서 이런 글이 문제될게 무엇인가요?
      저런 댓글 다는 사람들은 언제나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는 사람들이니 신경쓸 필요 없습니다. 특히 알타리무님은 몇개월 전부터 말도 안되는 댓글로 유명한 분이었죠.

    • 말못하는보수 2017.05.21 14:5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골은 누가 팠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메울수 있죠? 그냥 눈감고 귀막고 지나가기만 기다리나요?

      그냥 안건드리면 좋겠다 싶으시면 그런 이야기를 직접 쓰세요. 생각 다른 사람의 입을 막을려고 들지 마시고요.

      주제넘는 꼰대질입니다

  7. 2017.05.11 15: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 글 올라온줄알고 봣더니 이전 글 옮긴거엿내용 ㅠㅠ 시무룩....

  8. 텔리호우 2017.05.12 0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이상한 사람도 많고

    그와중에 꾸준하게 이상한 사람도 있네.
    따듯한 관심이 필요하신가(.....)


    하여튼 주인장님 오늘도 잘 보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갑니다.

  9. Zic 2017.05.13 0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잘 보고 있습니다. 다시 읽어도 먹먹합니다.. 현시대 대한민국과 다를바 없어서..

  10. JACob 2017.05.13 16: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좋은글 잘보고 있습니다. 남의 블로그에서 행패부리는 알머시기가 눈에 거슬리네요 ㅎ; 무식이 벼슬이라고 참 대--단한 분인듯

  11. boribob 2017.05.13 21: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탕이라도 항상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주제넘게 다른분들께 한가지 부탁드리자면
    함부로 먹이주시면 안됩니다 오히려 신나서 자꾸 올뿐이지염

  12. 2017.05.14 06: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이긴 하지만 조금 억지로 현재 한국정치와 얽으신 것 같은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특히 마지막 문단.... 그리고 글쓰신거 쭉 읽어봤는데, 굳이 정치적인 코멘트를 안하셔도 될 부분에 꼭 이런저런 한국정치 비유를 넣으셔서... 정치적인 스탠스에는 상관 없이 읽다가 집중이 깨지거나 흥미를 잃는 일이 많네요. 좀 아쉽습니다. 역사 글에는 가급적 역사위주로만 가시고, 한국 정치에 대한 글은 지나치게 역사속에 얽어넣기 보다는 차라리 따로 글을 하나 쓰시는게 어떨까요? 제 개인적 소감일 뿐이고, 주인장님께서 글을 쓰고 업로드하는 블로그이니, 꼭 이렇게 쓰셔야겠다면 제가 뭐 어쩔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부탁드려봅니다.

    • 수비니우스 2017.05.14 1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를 현실과 무관하게 다뤄야한다면 역사를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일부 사람들의 취미로 충분하겠죠. 그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도 필요가 없고요. 동양에서 역사의 다른 이름으로 거울 감을 쓴 이유는 역사에 현재를 비춰보기 위함입니다. 약 250년전 지구 반대편에서 지금과 어느정도 비슷하게 진행되었던 개혁을 보면서 지금을 비교해보는건 자연스러운것 아닌가요?

    • 최홍락 2017.05.14 1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씀하신 부분에 어느정도 동감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만 덜어내고 보실 수 있으면 그냥 이런 내용이 있구나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여기가 공공기관 사이트도 아니고 논쟁의 대상이 될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사이트는 아니니까요. (그정도였으면 지난 정부에서 이 사이트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네요.)

  13. 유애경 2017.05.15 1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영화는 전에 이 기사를 보고 DVD를 빌려서 감상 했습니다만 나시카님의 포스팅이 너무 재미 있었어 였는지 영화가 조금 싱겁게 느껴졌었네요.
    개인적으로는 두사람의 사랑도 개혁도 해피엔딩 으로 끝났으면 싶었지만 현실은 현실이니까...그나마 아들인 프레데릭 왕자가 개혁을 성공 시킨 부분도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진자들의 이기심과 횡포는 참 어느 나라든 양상이 비슷하네요!

  14. 유애경 2017.05.15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난 너희들 편이다' 가 여기(일본)선 '나도 -너희들과 같은 평민(신분)이다'로 번역 돼 있던데 제가 영어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번역의 차이일 뿐인가요?

    • nasica 2017.05.15 19: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글 자막을 봤을 뿐이고, 덴마크어는 제가 알아들을 리가 없고... (진땀)

    • 수비니우스 2017.05.16 1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번역이 '나도 -너희들과 같은 평민(신분)이다'라고 되있다고 하시니 NHK 2002년 시대극 토시이에와 마츠에서 혼노지의 변 직후 대복귀(오오카에시)하는 히데요시의 군대 보고 농민들이 "드디어 우리와 같은 평민이 천하를 잡는 때가 온다" 하던게 생각나네요 정작 히데요시가 평민을 위해 정책을 한건 없고 다 자기 세력위해서 한것 뿐이지만요... 아 해준게 없는걸 넘어 창조전쟁으로 수많은 평민을 이국에서 죽게만들었죠;;;

  15. 유애경 2017.05.15 19: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알겠습니다.
    근데 댓글에 댓글을 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16. 유애경 2017.05.15 2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폰 인데요.오른쪽에 점세개 땡땡땡을 누르면 「신고」라는 글자만 나오고는 아무런 반응이 없네요...기계음치😣!

  17. 정암 2017.05.17 14: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냥 평화로워보이던 덴마크에도 이런 드라마틱한 역사가 있었군요!!
    소중한 지식 감사합니다^^

  18. line infantry 2017.05.19 15: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뜻깊은 글 잘 읽고갑니다.~~

  19. 매지 2017.05.28 1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즈 미켈슨 잘생기고 멋진 분이거든요!!! 잘 읽었습니다~

  20. 무는개 2017.07.05 0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알타리무 너 친구 없지?

  21. 찰리 2017.07.19 14: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네요. 대통령 바뀌었다고 끝난게 아니라 이제 시작일 뿐이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마크롱이 프랑스 최연소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마크롱이 소속된 정당의 이름은 En Mache ! (앙 마르슈) 라고 합니다.  이는 '행진 중인', '전진 앞으로' 정도의 뜻입니다.   마크롱이 이 정당 이름을 어디서 따온 것인지 조금 구글링 해보았는데, 특별히 무엇에서 따왔다는 정보는 못 찾았습니다.  저는 이 이름을 보고 생각나는 문장이 있었어요.  저는 불어 실력이 고딩 때 2년 정도 배운 게 전부인데, 그래도 인상 깊었거든요.


La vérité est en marche et rien ne l'arrêtera.  

진실은 전진 중이며 누구도 그것을 멈출 수 없다.


이는 에밀 졸라(Émile Zola)가 그 유명한 드레퓌스(Dreyfus) 사건 당시 한 말입니다.  아래 글은 예전 국정원 댓글 사건과 그에 따른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자 사건을 보고 울컥해서 썼던 글인데, 마크롱 대통령 당선을 기념하여 다시 올립니다.  우리나라 현상황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발생한 독일 스파이 사건이며, 이는 프랑스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대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제3 공화국은 혼란 속에서 겨우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870년 보불 전쟁에서의 뼈아픈 참패와 1871년 파리 코뮌 사건으로 인한 쓰라린 기억들, 그리고 특히 1894년 카르노 (Carnot) 대통령이 이탈리아인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된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프랑스 국민들은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정권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새로 구성된 정부는 군부와 카톨릭 등 우파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군부 세력은 아직 나폴레옹 3세 시절의 귀족적인 전통 속에서 살고 있었고, 평민들로 구성된 무능한 공화국 정부를 내심 무시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아직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상류층 출신 군 장교들은 대부분 나폴레옹 1세가 1802년 창건한 생 시르 사관학교 (Ecole Spéciale Militaire de Saint-Cyr) 출신이었는데, 이들은 새롭게 등장하고 있던 실력파 폴리테니크 사관학교 (École polytechnique) 출신들과의 경쟁으로 인해 신경이 거슬리던 상황이었습니다. 

 



(현대의 생-시르 사관학교.  샤를 드 골도 여기 출신입니다.)

 

시절이 어수선하고 살기가 팍팍하면 보통 사람들은 누구 탓할 사람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때 타겟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유태인이었습니다.  반유태주의자인 드루몽 (Édouard Drumont)이 1886년에 출판한 '유태인들의 프랑스'라는 책은 무려 15만부가 넘게 팔려나가는 공전의 대 히트를 기록했고, 주요 언론들도 모두 유태인들이 프랑스 사회에 끼치는 해악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떠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언론의 중심에는 드루몽이 이끄는 '자유 언론' (La Libre Parole) 이라는 신문이 있었습니다만, 그 외에도 많은 신문들이 이런 반유태주의에 공공연히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정부와 카톨릭 교회는 내심 부추기고 있었지요.  누군가 증오할 대상을 던져주면, 정부와 교회 등 사회 지도층에 대한 불만은 상대적으로 더 줄어들고, 또 국민들이 보수화되는 것을 촉진시키게 되었거든요.




 

(드루몽과 그의 신문입니다.  제목은 "반역자 유죄 선고를 받다!"  물론 여기서는 드레퓌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밑에 씌인 A BAS LES JUIFS는 Down with the Jews, 즉 유태인들을 타도하라 뭐 그런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지금 현재 저런 매체를 운영하는 저런 사람들 꽤 있습니다.)

 

그러던 1894년 9월 26일, 프랑스 첩보부를 위해 일하던 독일 대사관 내 청소부 하녀가 쓰레기 통에서 6조각으로 찢겨진 편지 한장을 프랑스 첩보부에 보내 옵니다.  그 내용은 프랑스 육군 참모 본부의 기밀 문서 목록이었습니다.  이 문서는 매우 유명해져서 보통 bordereau (보드로, "명세서")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 군부를 긴장시킵니다.  참모 본부 안의 누군가가 프랑스 기밀 문서들을 독일에게 팔아넘기고 있었다는 증거였으니까요.  그들은 즉각 간첩 색출에 나섭니다.  다만, 단서라고는 이 "명세서" 한 장 뿐이었는데, 워낙 상부의 간첩 색출에 대한 압박이 심했으므로, 이들은 되든대로 억측을 섞어가며 무리한 추정 수사에 나서게 됩니다.   그 결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선정된 사람이 바로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라고 하는 포병 대위였습니다. 

 



 (이 문서가 그 유명한 '명세서' 즉 bodereau 입니다.  필기체라서 저는 거의 못 알아 보겠네요.)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용의자로 지목된 이유는 다소 어이가 없는데, 일단 기밀 문서 목록으로 보아 그 간첩은 아마도 포병 장교일 것이라고 판단이 내려졌고 (나중에 밝혀진 실제 범인 에스테라지 Esterhazy 소령은 보병 장교였습니다), 또 독일하고 친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원래 독일어 계통인데다 최근의 보불 전쟁의 패배로 인해 독일에 빼앗긴 지역인) 알사스 (Alsace) 출신일 것이다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은 헝가리 출신이었지요) 라는 조건에 들어 맞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최근 참모 본부에 배속된 유일한 유태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의 필체는 그 '명세서'의 필체와는 다소 달랐습니다. 





(이 양반이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입니다.  이 양반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역사의 주인공이 됩니다.)

 

증거가 필요했던 참모부는 드레퓌스를 체포하여 자백을 강요했지만 드레퓌스가 결백을 주장하자, 그의 자택에도 압수 수색을 하면서 그 부인에게도 '남편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 이 이야기가 새어나가면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라며 협박했습니다.  결국 별의별 수단을 다 썼으나 증거를 찾을 수 없자, 프랑스 군부는 '드레퓌스가 모든 증거를 다 없애버렸다는 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다' 라는 희한한 이론과 함께, '드레퓌스의 필체가 명세서의 필체와 다소 다른 것은 교활한 드레퓌스가 일부러 방첩부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필체를 쓴 것' 이라는 설명과 함께 비공개 재판을 실시했습니다.

 

드레퓌스의 가족들은 당연히 공개 재판을 요구했으나, 군부는 이 재판이 공개 재판으로 열릴 경우 '독일과 전쟁이 벌어져 국가의 안보가 위태롭게 된다'는 명분으로 끝내 비공개 재판을 실시했습니다.  사실 재판이 비공개일 수 밖에 없던 이유는 군부가 내놓은 증거물 파일이 텅텅 비어있었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것은 군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군부는 '프랑스의 안보가 바로 이 재판에 달려있다.  프랑스 군부를 믿지 않고 저 유태인 간첩의 변명을 믿겠다는 말인가 ?' 라는 호소로 배심원들을 압박했습니다.  이 압박을 좀더 강하게 하기 위해, 군부는 원래 비밀리에 처리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떠들던 드레퓌스의 체포와 재판에 대해 슬쩍 '자유 언론' (La Libre Parole)에 정보를 흘립니다.  당연히 자유 언론의 주필인 반유태주의자 드루몽은 온갖 나팔을 불어대며 이 사건에 대해 연일 대서특필했습니다. 

 

"거 봐라, 유태인들은 뒤통수를 치는 놈들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  이런 위험천만한 작자들이 프랑스 정부와 군대 요직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  이번 기회에 이들을 몰아내자 !"

 




(1894년의 1차 재판입니다.  물론 군법회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법원의 배심원들이 워낙 빈약한 증거 때문에 유죄 선고에 대해 망설이자, 프랑스 군부에서는 이탈리아 대사관 무관이 "D"라는 이니셜로 시작되는 이름을 가진 장교를 범인으로 지목했다는 편지가 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하지만 그 증거물을 보자는 변호인단의 요구는 '국가 보안상의 이유'로 거부되었습니다.

 

결국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프랑스 령 적도 기아나(Guyana)의 '악마의 섬'이라는 곳으로 이송되고 맙니다.  항소를 제기했지만 재판부에 의해 '이유없다'며 기각되고 말았지요.  그리고 프랑스 대중은 '유태인 = 뒤통수'라는 것만을 기억했고 드레퓌스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차츰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강등식은 나폴레옹이 졸업한 파리의 Ecole Militaire에서 벌어졌습니다.  생도들이 도열한 가운데, 차렷자세로 선 그의 제복에서 금단추를 하나씩 거칠게 다 뜯어내고, 그의 계급장도 뜯어낸 뒤, 그의 칼을 빼앗아 부러뜨려 그 앞에 내동댕이치는 의식이었습니다.  이때 드레퓌스는 차렷자세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으나 분노와 수치로 부들부들 몸이 떨리는 것이 모두에게 명백히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드레퓌스가 기아나로 끌려간지 1년이 훨씬 넘은 뒤인 1896년 3월, 또 다른 기밀 편지가 독일 대사관으로 가던 중에 프랑스 첩보부에게 입수됩니다.  그리고 그 필적이 드레퓌스를 유죄로 만든 그 '명세서'의 필적과 동일하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당시 방첩 부대의 책임자였던 피카르 (Georges Picquart) 중령이 이 사건을 수사하던 중, 결국 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은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피카르는 이 사실을 프랑스 참모본부장인 봐드프르 (Raoul Le Mouton de Boisdeffre) 장군에게 알렸습니다.  이제 드레퓌스는 누명을 벗고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





(잊혀질 뻔한 드레퓌스 사건을 다시 되살린 장본인이자 프랑스 육군의 양심인 피카르 중령입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온갖 곤경에 처합니다만, 결국 군에 복직되어 장군까지, 또 최종적으로 전쟁성 장관으로까지 승진하게 됩니다.)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봐드프르 장군 및 프랑스 군 수뇌부에게 '알고보니 우리가 2년전 실수를 저질렀네요'라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군 수뇌부에게 국가 안보보다는 자신들의 체면과 이익이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피카르 중령은 방첩 부대에서 해직되어 일반 연대 지휘관으로 보직 변경되었습니다.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은 1년 뒤에야 '그냥 건강상의 이유로' 조용히 제대하도록 했습니다.  오히려 드레퓌스 사건의 수사 책임자였던 뒤 파티 (Armand du Paty de Clam) 소령이 그를 따로 만나 '반드시 너를 보호해줄테니 입다물고 얌전히 있으라'는 약속과 당부를 할 정도였습니다.




 

(드레퓌스를 체포한 장본인인 뒤 파티 소령)

 

상황은 드레퓌스에게 점점 더 안 좋게 돌아갔습니다.  그는 외딴 열대 섬에서 이미 고생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탈출이 염려된다며 밤에는 감방에서 쇠고랑을 차는 곤욕을 더 하게 되었습니다.  또 참모본부에서는 보수파 신문들에게 슬쩍슬쩍 드레퓌스에게 불리한 이야기를 흘렸고, 그런 신문들에서는 그런 사실들을 보도하며 '역시 믿지 못할 유태인놈들'을 강조했습니다.  심지어 절대 기밀이라던 그 '명세서'의 카피본까지 신문에 그대로 보도될 정도였고, 신문에서는 이것만 보더라도 (사실 뭐 볼 것이 없었는데) 드레퓌스가 명백한 반역자라고 떠들어댔습니다.

 

하지만 드레퓌스의 가족들과 그 변호사는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돕는 지식인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당대의 대문호인 에밀 졸라를 1897년 말 경에 찾아갑니다.  에밀 졸라가 유태인들에 대한 증오와 차별이 위대한 프랑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내용의 글을 썼었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그런 졸라조차도 처음에는 드레퓌스의 무죄에 대해 무척이나 의심했다고 합니다.  그도 접하는 것이 주로 그런 신문들과 여론 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드레퓌스의 변호인들이 보여준 명백한 증거들에 의해 졸라도 결국 드레퓌스 구명 운동에 동참하게 됩니다.





(드디어 졸라 등장.  괜찮아, 졸라님이 다 해결해 주실거야, 그럴거야, 그럴거야.....?)

 

사실 졸라로서는 드레퓌스 구명 운동에 뛰어드는 것은 아무런 이익도 없고, 또 여태까지 쌓아놓은 문학적 업적과 명성을 다 허물어뜨릴 수 있는 모험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워낙 애국주의와 반유태주의가 기세등등한 분위기였거든요.  하지만 그는 이렇게까지 진실이 은폐되고 억울한 사람이 누명을 쓰는 것을 보고 참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나섰던 것입니다.  그는 피가로 (Le Figaro) 지를 통해 드레퓌스 구명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1898년 1월, 드디어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항소심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진실이 이길 수 있었을까요 ?  어림없는 소리였지요.  프랑스 군부는 이번 재판에 대해 철저히 준비를 했습니다.  무려 3명의 필적 전문가가 나와 '명세서'의 필적은 에스테라지 소령의 것이 아니라고 증언을 할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에스테라지 소령에 대한 기소조차 필요없다는 의견이었으나, 오히려 그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서 그에 대한 군법 회의가 열렸고, 바로 그 다음날 만장일치로 그를 무죄 방면하는 쇼우가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소동이 그렇게 얌전히 끝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대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인 피카르 중령에 대해 손을 봐주어야 했지요.   그는 '군 기밀 문서를 민간인에게 유출'시켰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몽 발레리앙 (Mont-Valérien) 군 교도소에 수감시켰습니다.  물론 그보다 더 한 기밀 문서가 우익 신문에게 계속 유출된 것에 대한 수사나 추궁은 전혀 없었지요.





(나는 규탄한다 !)

 

에스타르지 소령이 무죄방면된 다음날인 1월 13일, 훗날 제1차 대전 때 호랑이로 불리게 되는 클레망소(Clemanceau)가 출판하던 오로르 (L'Aurore, 오로라) 지의 제1면에 졸라의 기고문이 실립니다.  엄청나게 큰 활자로 찍힌 제목은 바로 J'accuse !  원래 졸라는 '프랑스 대통령께 보내는 편지'라고 제목을 지으려 했으나, 클레망소가 그것을 좀더 자극적이고 함축적인 J'accuse !로 바꾸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 기사에서 졸라는 강한 언사로 드레퓌스 사건의 부당함과 명백한 증거들을 나열하고, 프랑스 정부가 이런 반유태주의에 대해 방관하고 있는 것을 규탄했습니다.  이 기사의 반향은 엄청났습니다.  에밀 졸라의 열정어린 문장을 보고 프랑스 인들의 양심이 살아났느냐고요 ?

 

천만에 콩떡이었습니다.  그동안 보수 언론과 종교계에 의해 철저히 세뇌된 반유태주의가 오히려 더 폭발했습니다.  파리와 프랑스령 알제리 등에서는 '이런 괘씸한 유태놈들과 그 추종자들(이하 종유세력)이 감히 위대한 프랑스를 모욕해 ?' 라며 폭동이 일어나 유태인들의 가게가 불에 타고 사람이 다쳤습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읽어보니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라며 드레퓌스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그 속도는 느리고 활동은 조용했습니다.  당장 졸라는 명예훼손죄로 기소되었고, 특히 졸라에 의해 거짓말장이가 되어 버린 그 세 명의 필적 감정 전문가들이 따로 졸라를 고소했습니다.  불과 1달 정도 후에, 졸라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법정 최고형인 1년 징역에 3천 프랑의 벌금형에 처해졌습니다.  졸라는 항소를 했고, 결국 항소심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게 되는데, 졸라는 유죄 판결이 나기 직전에 비밀리에 영국 런던으로 도주했습니다. 





(재판장에서 나가는 졸라를 비난하며 달려드는 박사모 보수측 군중들의 모습입니다.)


졸라의 도주는 보수층의 승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주요 언론에서는 '거봐라, 자기가 유죄라는 것을 아니까 야반도주한 거 아니겠냐' 라며 더욱 큰 소리로 졸라를 비난했지요.  특히 주데 (Ernest Judet)가 발행하는 "Le Petit Journal"이라는 신문에서는 졸라의 개인적인 내용, 즉 원래 이탈리아 계였던 그의 아버지가 1830년 대에 프랑스 외인부대의 건설 공사 관련하여 뇌물을 받았다가 결국 쫓겨났다는, 졸라조차도 모르고 있던 가정사까지 들춰내가며 졸라 개인과 그 가족에 대한 비방에 열을 올렸습니다.  한마디로 '그런 아버지니까 저런 아들이 나왔지'라는 비아냥이었지요.  졸라는 많은 팬을 잃었고, 이전에 받았던 레종 도뇌르 훈장도 박탈당했으며, 또한 금전적으로도 많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의 도주에 대해 정부는 그의 재산을 압수하여 헐값에 공매에 붙이는 보복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당시에 출판된 졸라를 비난하는 그림입니다.  돼지 졸라가 프랑스 지도에 '국제적 똥'을 칠하고 있습니다.  좌우측 상단의 큰 글씨는 '혐오의 박물관' '돼지들의 왕'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진실은 승리하는 법입니다.  졸라는 1897년 11월에 "La vérité est en marche et rien ne l'arrêtera." 즉 "진실은 행진하고 있고 그 어떤 것도 그를 막을 수는 없다"라고 쓴 바 있었고, 그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1898년 한해 거의 전 프랑스가 드레퓌스 반대파와 드레퓌스 옹호파로 나뉘어 토론과 논쟁, 심지어 결투 (권총으로 하는 진짜 결투)를 벌였고, 이탈리아 대사관 무관이 썼다는 'D' 이니셜 어쩌고 하는 편지를 위조했던 수사 담당자 앙리 중령 (Hubert-Joseph Henry)은 결국 '그 편지는 자기가 위조해낸 것'이라고 자백하고는 군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면도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La vérité est en marche et rien ne l'arrêtera." par Emile Zola


 

이후로도 진실 규명에는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1899년 좀더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지방인 렌느(Rennes)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다시 한번 드레퓌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때 에스테라지 소령은 이미 외국으로 도망친지 오래 뒤였지요.  하지만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유죄인 드레퓌스를 국민 화합을 위해 사면'해주겠다는 제안을 했지요.  드레퓌스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패배를 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일단 유죄를 인정한다는 뜻이었으니까요.  많은 진보파에서는 그가 그 사면을 거부하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는 진보파 인사들은 매일 맛있는 프랑스 요리를 먹고 포근한 침대에서 자는 사람들이었으나, 당사자인 드레퓌스는 벌써 6년째 적도의 끔찍한 섬에서 쇠고랑을 차고 중노동을 하는 신세였습니다.  더 이상의 육체적 고통을 이기기 힘들었던 그는 그 사면을 받아들입니다.  그가 완전히 누명을 벗은 것은 1906년이나 되어서였습니다.  한편, 졸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1899년의 재심에서도 드레퓌스가 유죄라고 선언하는 프랑스 군사법원) 

 

당대 유럽 제일의 문호이자 대단히 유명한 인사였던 졸라는 의문사를 당했습니다.  그는 1902년 9월 29일, 자택에서 자다가 어이없게도 일산화탄소 중독 (흔히 말하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이미 드레퓌스 사건으로 군부와 교회 등 우파로부터 많은 암살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검사 결과 그의 침실 굴뚝이 매우 부적절하게 막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 굴뚝을 그렇게 막았는지에 대해서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수십년 뒤, 어떤 지붕 공사기술자가 '정치적 이유로 졸라의 굴뚝을 내가 막았다'라고 유언을 남기고 죽었는데, 진실이야 모르지요.  어쨌거나 우파는 그의 죽음에 대해 신이 났습니다.  가령 로슈로프 (Henri Rochefort)는 신문 기고를 통해 '드레퓌스가 진짜 간첩인 것을 뒤늦게 깨달은 졸라가 죄책감에 자살을 한 것'이라며 선전에 열을 올렸지요.





(물론 이 위대한 지성인의 죽음을 안타까와 하며 모인 조문객도 수천명에 달했습니다.  그림은 그의 장례식 모습입니다.)


아까 잠깐 언급한, 이탈리아 대사관 편지를 위조했다가 자살한 앙리 중령의 죽음은 우파에서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  처음에는 드루몽 등 우파는 '이게 어찌된 일이냐 그럼 정말 드레퓌스가 무죄냐' 라고 당혹해했으나, 곧 '자기 자신의 명예와 목숨을 바쳐 조국의 안보를 지키려 했던 영웅'으로 포장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위조가 국가 안보를 위해 수행한 성스러운 작전이었다는 것이지요.  그의 유가족을 위해 우파에서는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펼쳤는데 무려 13만 프랑이 모금되었다고 합니다. 




(앙리 중령이 조작해서 법원에 증거물로 제출한 이탈리아 대사관 무관의 편지입니다.  조작이건 은폐건 모두 조국의 안보를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다~~ 라는 거지요.)

 

프랑스가 위대한 것은 1908년 6월 4일, 처음에는 몽마르트 묘지에 묻혔던 그의 시신을 조국을 빛낸 위인들을 모시는 장소인 팡테옹으로 이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도 '뭐가 어찌 되었건 드레퓌스는 간첩이고 유태놈들은 뒤통수치는 놈들이다'라며 이를 갈던 우파들이 군부나 종교계에 많았으나, 결국 프랑스 대중의 합의된 의지는 '진실을 위해 노력하여 프랑스의 명예를 드높인 지성인'으로서 졸라를 기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의 수치입니다.  아마 드레퓌스가 그대로 기아나에서 죽어 잊혀졌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런 구린 구석이 드러나더라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프랑스 지성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졸라와 그의 동료들은 보여주었고, 비록 때늦은 감은 있으나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팡테옹에 이장함으로써 그에 대한 예의를 표했습니다.   제가 프랑스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Zola au Pantheon !   졸라를 팡테옹으로 !)

 

팡테옹을 나서면서 중앙의 군상 조각상을 유심히 보다보니, 국민공회 (La Convention Nationale)라는 글씨 위에 흐린 색으로 다른 글자도 씌여 있더군요.

 

"VIVRE LIBRE OU MOURIR"





(다시 제가 직접 찍은 사진이에요.)

 

제가 비록 고딩 때 잠깐 배우다 만 불어지만 금방 알아보겠더군요.  "Live free or die", 그러니까 "자유 아니면 죽음을" 이라는 글귀였습니다.  에밀 졸라의 무덤을 보고 나오면서 그 글귀를 보니까 마음이 찡하더군요.   프랑스 인들은 이렇게 많은 투쟁과 희생,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200년에 걸쳐 민주주의를 이룩했는데, 우리는 미국에 의해 너무 쉽게 민주주의를 선물받아서 그 소중함을 잘 모르고, 또 그래서 민주주의의 뿌리가 얕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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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푸른장미 2017.05.09 0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요즘 한국의 정치와 군부를 보면 1차대전의 프랑스처럼 무능한 지휘부에 의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될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 만리 2017.05.09 0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논쟁이 생각납니다. 이런 비슷한
    우리나라에도 있어왔고 있지요.
    광우병광풍과 아직도 다수의 사람들이 믿고있는 천안함괴담들.. 아직도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있지 않죠
    님의 글을 읽으며 이 사건들이 오버랩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진정한 지성이 다수가 되기를

    • 검불 2017.05.10 16:22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나도 비슷한게 없잖습니까.

      본문은 정부의 발표를 대중들이 믿은 거고 님의 언급은 정부의 발표를 대중들이 믿지않아 일어난 사건이잖아요.

      주체와 객체의 입장이 아예 반대인데요.

      차라리 프랑스 혁명 수정주의와 겹친다고 하시면 동의하겠습니다.

  3. jager 2017.05.09 10: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레퓌스 사건의 광적인 반 유태주의가 훗날 이스라엘 건국으로 연결됬다죠

  4. 글쎄요 2017.05.09 11: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쎄요.. 전 이 사건을 보고 딴 사건이 생각나네요

    증거가 차고 넘치고 단 5분만 보여주면 촛불이 횃불이 될 정도로 그렇게 많은 증거가 있다는데도
    증거를 찾을 수사시간이 촉박해서 연장에 연장을 하고
    무당이 만든 오방낭에 난교에 성형수술에 몰래 낳은 딸에다가 인신공양까지 온갖 설을 붙이다가
    (아! 없는 아들 만들어내는 첨단 과학기술도 있군요)
    결국 마지막에 엉뚱한 내용으로 기여코 구속을 만들어내던 다른 사건이 생각나는데요..

    • 타이라 2017.05.09 1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중에 역사가 진실을 기록하겠져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이 알려지는데 걸린 시간을 보세요.

  5. 1234 2017.05.09 1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가 드레퓌스이고 누가 졸라인지..
    아마 죽을때 까지 인정을 못하시겠지만 부디 지옥에서라도 참회하시길..

    • 타이라 2017.05.09 1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1234님 '지옥에서라도 참회하시길' 바로 이런 증오어린 댓글에서 드레퓌스사건에서 그때 대중들이 보인 광기가 연상됩니다.

    • 1234 2017.05.09 1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서로 닮아 가는 것이지요. 이런 증오의 뎃글은 당신들로 부터 배웠답니다.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할것 같습니다. 이번엔 마크롱이지만 다음엔 르펜일지도 모르는 프랑스의 모습 역시 프랑스 좌파들의 업보 아니겠습니까. 지금 모습이 대한민국 보수의 업보이듯..

    • 타이라 2017.05.09 16:39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은 곧 사람입니다. 아무도 이 블로그에서 그런 저주나 악담은 본적이 없습니다. 그냥 님의 수준을 댓글로 드러낸것일뿐 변명조차도..

    • 1234 2017.05.09 2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 수위가 높은 악담과 저주에 자주 노출되어 제 수준도 거기 맞춰 낮아졌나 봅니다. 불괘하게 해서 송구합니다.

    • 검불 2017.05.10 16:12  댓글주소  수정/삭제

      핑계 치고는 황당하네요. 남에게 지옥에서 참회하라고 해놓고는 다른데서 소리들었다?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분풀이한다는 말을 이렇게 정확히 볼 줄 몰랐습니다.

  6. 안티반지성 2017.05.09 14: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숱하던 사법살인들을 역사로 가지고 있는데도 해석은 다양합니다 그려.

  7. 투팍아마르 2017.05.09 17: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통의 나라에선 상상도 못할일이 수십년간 벌어져서 유대출신 장교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위대한 문필가는 쫓겨나다시피 하다가 종국에는 의문스런 죽음을 당했는데 어째든 팡테옹에 안장됐으니 프랑스는 위대하다? 보는 관점 차이겠지만 저는 그 말씀에는 차마 동의하기 힘드는 군요...^^;;

    • fready 2017.05.09 2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통의 나라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애초에 저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나라가 보통의 나라라면, 그런 나라는 이 지구상에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게 제일 좋지만, 그걸 인정하는 나라와 그렇게 하지 않는 나라가 있을 뿐입니다.

    • nasica 2017.05.09 2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금도 난징대학살이나 731부대, 위안부 문제 등을 철저히 부정하는 섬나라나, 광주학살을 북괴의 사주를 받은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전대갈 추종자들을 생각하면 위대한 것 맞습니다.

  8. 김건 2017.05.09 2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Nasica 님. 님의 글을 열독하는 일인으로서 좋은 글에 대해 감사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진실과 지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는데 참 좋았습니다. 오늘 아침에 읽었는데 지금도 여운이 남아서 댓글을 남김니다. 항상 건강+행복하시고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

  9. 나삼 2017.05.10 05: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습니다.. 진실을 부정하고 자신들이 정의 라고 하는 세력들은 어디에나 있지요. 한국에도 아들이 부정취업했음에도 진실을 덮고 추궁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비난하고 공격하던 세력들이 생각나네요..

  10. 타이라 2017.05.10 0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시민이쓴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제가 처음 알게된 드레퓌스사건을 다루신 블로그 주인의 높은 식견의 포스팅에 저마다 정치적 주장이 난무하는 것을 보니, 드레퓌스사건같은 진실을 호도하는 권력과 이에 조종당하는 대중이라는
    이러한 주제는 시대와 국경을 너머 오랫동안 반복할것 같습니다.

  11. 최홍락 2017.05.10 10: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보불전쟁 이후에 등장한 유대인 음모설이나 1차대전후 독일에서 나타난 배후중상설이나 실패의 원인을 면밀히 분석하지 않고 외부에 돌려 더 큰 실패를 부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네요. (둘다 유태인을 대상으로 한...) 패배의 원인을 복기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치유했더라면 양 쪽 모두 또다른 실패를 겪지 않았을텐데...그나마 프랑스는 에밀졸라를 제외한 당사자들 (드레퓌스, 피카르 중령, 클레망소 등)이 대가를 받았다는 것은 있지만 나중에 마타 하리 스캔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그 때 정보부 내지는 체계를 갈아 엎었어야 했던 것 같고...

    2. 한국이 미국에 의해 너무 쉽게 민주주의를 선물받았고, 또 그래서 민주주의의 뿌리가 얕은 것인가 에 대해서는 Totally disagree 입장이라...다들 아시다시피 미국이 거져 줬다고 하기엔 정부 수립 후 70년 동안 경제발전과 절차적 민주주의의 토대를 쌓아온 과정은 드라마틱했고 뿌리가 얕다는 표현이 과연 제대로 된 표현인지도 좀...
    군사독재에서 민주정치로 넘어간 나라들 중 단숨에 군사독재의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는데 성공한 나라가 얼마나 될지요. 칠레나 스페인? 여기는 군부에게 일정 부분 지분을 양보해야 했고, 필리핀은 이후 혼미의 혼미를 거듭하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화 정도가 높은 나라인 대만조차 최근까지 중고등학교에 교관(예비역이 아니라 현역장교)이 남아있었지요. 우산혁명의 홍콩은 아직도 완전한 형태의 선거를 치르지 못하고 있으며, 중국 본토는 그마저도 없고요. 

    냉소와 체념이 위험한 것은 지금까지 이루어왔던 것에 대한 부정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화 했다더니 뭐가 달라지는게 있어? 이런 식의.) 그리고 그 부정은 혁명과 같은 뭔가 큰 거 한방을 기대하게 만드는데 큰 거 한방은 당연히 카리스마있는 큰 지도자와 연관되고, 그게 바로 독재로 가는 지름길일 수 있어요.

  12. 검불 2017.05.10 16: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가지는 알겠네요. 드레퓌스 사건 때 프랑스가 양쪽으로 갈라져서 싸웠다는 게 여기 댓글란의 초초초확장판일 것 같습니다.

  13. 카를대공 2017.05.11 14: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드레퓌스 사건을 볼 때 마다 마크 트웨인이 에밀 졸라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오르더군요.

  14. pang 2017.05.15 18: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친박 냄새나는 일부댓글은 매 포스팅마다 있군요.

  15. 유애경 2017.05.15 21: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레퓌스 사건도 말하자면 정권의 간첩조작에다 여론조작 사건인데 학교 역사 시간때 「잠깐 」배운것 같네요. 그냥 그런 사건이 있었다 정도 였던것 같은데...
    참 무섭습니다. 부패한 정권이 어떤식으로 죄없는 개인을 말살시켜 가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인데 간첩조작은 우리나라도 일가견이 있지않나 싶어서...
    에밀 졸라의 명예가 회복 된것만으로도 프랑스는 우리나라보다 낫다는데 이견 없습니다.

  16. 광기 2017.11.14 0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런 대중의 광기, 소수자 혐오, 왜곡선동 등은 현재의 한국"진보"에게서 많이 보이죠

제가 직접 만들어본 최초의 원두커피는 회사 들어와서 본 종이필터로 거르게 되어 있는(drip brewing) 커피메이커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원두커피가 인스턴트 커피보다 훨씬 맛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미국인들이 마시는 커피는 마치 숭늉처럼 묽구나' 하는 정도였지요.  제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아메리카노를 마셔본 것이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건 확실히 여태까지 마시던 커피와는 달랐습니다.  이걸 마셔보니 전에 마시던 드립 원두 커피의 맛이 형편없게 느껴졌습니다.  전에 존 그리셤의 법정 쓰릴러를 읽다가 변호사가 증인을 만나러 들린 싸구려 식당에서 'bad coffee'를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맛이 어떤 맛인지 마치 알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그 이후로는 (아마 제가 배때지에 기름기가 껴서 그런지도 모르겠는데) 인스턴트 커피나 드립 원두 커피는 거의 마실 일이 없었습니다.  최근에 마셔본 덧치 커피는 또 다른 맛이더군요.





(바로 이런 커피메이커...  이런 전기 드립 커피메이커가 시판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라고 합니다.  2000년대까지도 미국이나 한국이나 많은 회사 사무실에서는 이런 것으로 커피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차에 비해 커피는 볶고 빻고 가는 것도 성가신 일이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내리느냐 하는 방법도 매우 다양하고 또 힘든 과정입니다.  제가 즐겨 읽는 나폴레옹 시대 영국 해군의 모험담인 Aubrey - Maturin 시리즈의 주인공 잭 오브리와 스티븐 머투어린은 커피를 매우 즐기는 캐릭터입니다.  이들이 커피를 볶거나 갈거나 마시는 장면은 제법 자주 나오는데 비해, 커피를 내리는(brew) 장면은 딱 한군데에 나옵니다.  볶은 커피 콩을 갈아서 고운 천 위에 놓고, 뜨거운 물을 부어 내리는 방식으로 나오더군요.  그러니 드립 원두 커피였던 셈입니다.


그러나 커피 만드는 방법은 나라와 시대별로 매우 달라서, 당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식으로 커피를 만들어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가령 1930년대까지만 해도 커피 콩 갈은 것을 직접 물에 넣고 끓이는 것이 미국에서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인 '두 개의 심장을 가진 강'(BIG TWO-HEARTED RIVER) 중에, 1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주인공 닉이 캠핑에서 커피를 끓이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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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은 큰 못을 하나 더 나무에 박고 물이 가득찬 양동이를 거기에 걸었다.  그는 커피 포트를 거기에 담가 절반 정도 물을 채우고 나무조각을 불판 아래의 불에 좀더 집어 넣은 뒤, 그 위에 커피 포트를 올려 놓았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 커피를 만들었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는 홉킨스와 커피 만드는 방법에 대해 논쟁을 벌였던 것은 기억이 났지만, 결국 어느 쪽 방법을 택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그냥 커피가 끓어 오르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러자 비로소 그게 홉킨스의 방식이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그는 한때 모든 면에 있어서 홉킨스와 논쟁을 벌이곤 했다.


(중략)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커피가 끓어올랐다.  뚜껑이 들리더니 커피와 커피찌끼가 포트 옆으로 흘러내렸다.  닉은 커피 포트를 불판에서 꺼내 들었다.  그건 홉킨스를 위한 승리였다.  그는 통조림 살구를 덜어먹던 컵에 설탕을 넣고는 커피를 좀 따른 뒤 식기를 기다렸다.  커피를 따르기엔 너무 뜨거워서 그는 커피 포트 손잡이를 쥐기 위해 모자를 써야 했다.  그는 커피가 포트 안에서 우려지기를 기다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적어도 첫 잔은 아니었다.  그건 제대로 된 홉킨스 방식이어야 했고, 홉킨스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는 매우 진지하게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었다.  그는 닉이 아는 사람 중 가장 진지한 사람이었다.  


(중략)


닉은 커피를 마셨다.  홉킨스 방식에 따른 커피였다.  맛을 보니 썼다.  닉은 웃었다.  그건 이 이야기에 어울리는 훌륭한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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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묘사된 것처럼 간 커피 콩을 직접 물에 넣고 끓이는 방식을 카우보이 커피라고 하는데, 이는 주로 미국이나 중동에서 유행하던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 헤밍웨이 소설 속에서 결말이 나와 있듯이, 커피 콩을 물에 넣고 끓이는 것은 맛이 쓸 수 밖에 없습니다.  원래 커피 특유의 향을 담은 기름 성분은 섭씨 96도에서 커피 콩으로부터 추출되는데, 이건 물의 끓는 점에서 아슬아슬하게 낮은 온도입니다.  문제는 물이 끓는 점 100도에 이르게 되면 커피 콩에서는 그 향유 뿐만이 아니라 쓴 맛을 내는 산 성분까지 추출이 된다는 점이지요.  




(퍼콜레이터입니다.  저도 90년대 후반 회사 사무실에서 저런 거 썼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잭 오브리처럼 뜨거운 물을 간 커피 콩 위에 뿌리는 식의 커피를 즐겨 마셨나 봅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일손이 너무 많이 갔으므로, 퍼콜레이터(percolator, 여과식 커피 포트)라는 독특한 형태의 커피 포트가 만들어졌는데, 최초의 퍼콜레이터는 영국 군인이자 군인인 럼포드 백작(Count Rumford, Sir Benjamin Thompson)이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810년~1814년 사이에 만들었다고 합니다.  현대적인 방식, 즉 커피 포트 가운데에 끓는 물을 뿜어 올리는 금속 관이 내장된 형태의 퍼콜레이터는 1819년 로랑(Laurens)이라는 파리 사람이 만들었고, 이 발명품은 여러 단계를 거쳐 1889년 미국에서 굿리치(Hanson Goodrich)라는 이름의 농부가 특허를 받았습니다.  이 퍼콜레이터는 나중에 전기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대용량화되었고, 1970년대까지 미국의 대형 식당 등에서는 그런 전기 퍼콜레이터를 이용해서 드립 커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1970년대 이후 간편한 종이 필터를 이용하는 가정용 전기 드립 커피 메이커가 도입되면서 퍼콜레이터의 인기가 급격히 내려갔다고 합니다.




(이 화면은 1970년에 General Foods에서 내놓은 Max-Pax 커피 카트리지의 TV 광고입니다.  Max-Pax는 도넛 모양의 필터 속에 그라운드 커피를 일정량 포장한 것으로서, 이걸 퍼콜레이터 안에 넣으면 커피가 만들어지는 형태의 제품입니다.  그라운드 커피 찌꺼기를 긁어낼 필요가 없으니 매우 편리했지요.  그러나 불과 6년 후인 1976년에 전기 드립 커피 메이커에 밀려 생산이 중단되었습니다.  전체 광고 영상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E7m8JJ_7jw  )





(저희 집에서 소비하는 일리 캡슐 커피입니다.  플라스틱 캡슐이 지구를 더럽히는 것은 물론이고, 특히 저 아름다운 알루미늄 깡통을 버릴 때마다 정말 아깝습니다.)


저희 집에서는 일리(Illy) 커피 캡슐 머신으로 커피를 만들어 마십니다.  편리하고 빠르고 게다가 맛도 아주 훌륭한데, 단지 제가 커피를 마실 때마다 낭비되는 이 플라스틱 캡슐 포장들을 보면 지구에게 미안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TV에서 방영되는 알 파치노 -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갱 영화 'Heat'를 보다보니, 평범한 형사 반장인 알 파치노의 작은 집 주방에도 캡슐 커피 머신이 놓여 있는 것이 보이더군요.  이 영화는 1995년 작인데, 이미 당시 미국에서는 캡슐 커피가 일반적이었나 봅니다.  최초의 캡슐 커피는 스위스 회사인 네슬레(Nestlé)에서 근무하던 스위스 엔지니어 에릭 파브르(Eric Favre)가 1976년에 최초로 발명하고 특허도 냈습니다.  그러나 흥행에는 완전히 실패했다가  약 10년 뒤에야 인기를 얻기 시작했지요.  





(남자의 영화, Heat)


캡슐 커피에서 만드는 커피는 한마디로 에스프레소(Espresso)입니다.  에스프레소는 끓는 물과 고압을 이용해 커피를 추출하기 때문에 고형분까지 콜로이드(colloid, 현탁액)의 형태로 일부 뽑아져 나옵니다.  그래서 에스프레소 잔의 바닥에는 일부 찌꺼기가 남고 또 그 콜로이드가 크레마(crema)로 잔 위에 뜨게 되는 것이지요.  이 크레마는 오직 에스프레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인데, 그래서인지 크레마가 없는 커피는 왠지 맛없게 느껴지기조차 합니다.  하지만 이 크레마는 지방 성분 위주이다보니, 콜레스테롤 함유량이 높아 건강에는 좋지 않다고 합니다.





(저 크레마는 에스프레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에스프레소는 커피를 뽑아내는데 필요한 고압을 만들기 위해 특별한 기구가 필요하므로, 그 역사가 비교적 짧은 편입니다.  1884년에 모리온도(Angelo Moriondo)라는 이탈리아인이 최초의 에스프레소 머신에 대한 특허를 냈는데, 그 이후 20세기 전반에 이탈리아에서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에서는 1950년대에야 에스프레소의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고 하고, 미국에 본격적으로 에스프레소가 활성화된 것은 스타벅스 제2의 창업자인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가 1980년대 밀라노 출장 중에 에스프레소 바를 보고 미국 스타벅스 매장에 도입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나마 미국인들 입맛은 에스프레소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에 물이나 우유를 탄 아메리카노나 라떼 같은 것이 많이 팔렸지요.


지금 세계는 이 캡슐 커피 또는 별다방 콩다방 등에서 파는 에스프레소 기반의 커피가 대세인 듯 합니다.  그러나 정작 전세계 통계치를 보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마시는 커피의 형태는 바로... 인스턴트 커피입니다.  그것도 고급 커피에 계속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라운드 커피나 원두 형태로 판매되는 커피보다 훨씬 더 빨리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런 말을 들으시면 '인도나 중국 등 아시아 신흥국의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커피를 안 마시던 그쪽 나라들이 커피를 마시면서 그렇게 되나 보다'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것도 사실이긴 한데, 우아한 유럽인들도 인스턴트 커피를 의외로 많이 마십니다.  특이한 것은 호주인데, 호주는 아시아보다 오히려 더 인스턴트 커피 비율이 더 큽니다.  유럽 내에서도 특이한 것은 또 영국입니다.  영국은 아시아 국가들처럼 인스턴트 커피를 절대적으로 더 많이 마십니다.  영국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즐겨 마시는 것에 대해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오랫동안 미군이 주둔했던 관계로, 그때 미군들이 마시던 인스턴트 커피에 익숙해졌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 못지 않게 미군이 오래 주둔한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는 인스턴트 커피가 그렇게까지 유행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런 설명에 쉽게 납득이 가진 않습니다.




(무섭게 성장하는 인스턴트 커피 시장입니다.  중국 및 인도의 성장과 거의 일치하는 것은 맞네요.)


정작 인스턴트 커피를 발명한 것은 프랑스인이었습니다.  흔히 일본계 미국인인 사토리 가토가 1901년 전미 박람회에서 발표한 것이 최초라고 하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1881년 알레(Alphonse Allais)라는 프랑스인이 이미 프랑스에서 특허를 낸 바 있습니다.  그리고 상업적으로 성공적으로 팔리기 시작한 인스턴트 커피도 유럽인 스위스에서 네스카페(Nescafé) 브랜드로 1938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미국의 인스턴트 커피 대명사인 맥스웰 하우스 인스턴트 커피(Maxwell House Instant Coffee)는 1945년에야 나왔는데, 이는 그 모기업인 제네럴 푸드(General Foods Corporation)가 1942년부터 미군에 납품하기 위한 인스턴트 커피를 만들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맥스웰 하우스 인스턴트 커피의 TV 광고입니다.  바쁜 아침, 남편이 출근하기 전에 줄 커피가 마침 딱 떨어져 당황하는 주부의 모습이 핵심 포인트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토요일인가 일요일에, 월트 디즈니 만화 또는 영화가 했었습니다.  그날 나온 단막 TV용 영화는, 시골 깡촌에서 할아버지와 단둘이서 사는 어떤 꼬마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가난한 가족이었지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연세가 많으셔서, 결국 몸져 누우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꼬마가, 나름대로 다 컸다고 침대에 누운 할아버지에게 아침 식사를 차려 가져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토스트를 먹으려고 보니, 새카맣게 탄 거에요.  꼬마가 미안하다는 듯 조금 태웠다고 말합니다.  할아버지는 입맛을 다시더니 지금은 생각이 없다면서 그 토스트를 내려놓고, 커피만 마시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꼬마가 또 미안하다는 듯이, '진짜 커피를 끓일 줄 몰라서 인스턴트 커피를 끓였다' 고 합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그 커피를 조금 마셔 보고는 다시 내려놓으면서, 나중에 마시겠다고 하는 겁니다 !!!  그때 그 어린 나이에 제가 받은 충격은, 나름대로 컸습니다.  당시 제가 보던 모든 커피는 다 인스턴트 커피였거든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 시골의 가난한 할아버지조차도 '인스턴트 커피는 차라리 안마시고 만다'라고 하다니 !!! 




(세계 각 지역별 소비되는 커피 형태입니다.  진한 녹색이 인스턴트 커피입니다.)




(국가별로 신선원두를 더 소비하느냐 인스턴트 커피를 더 소비하느냐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언듯 보면 잘 사는 나라는 신선원두를, 못 사는 나라는 인스턴트 커피를 주로 소비하는 것 같지만, 영국과 호주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차를 많이 마시는 일본과 인도가 신선원두를 더 많이 선호하는 것으로 분류되는 것을 보면, 이 나라들은 차를 하도 많이 마셔서 인스턴트 커피를 아예 마실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합니다.)


결국 원래 커피를 마시던 나라들은 신선 원두를 선호하는데 비해, 영국이나 호주, 그리고 나머지 아시아 국가들처럼 차를 더 선호하던 나라들은 인스턴트 커피도 '뭐 나쁘지 않네'하며 잘 마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특이한 것은 바로 미국입니다.  보스턴 차 사건을 겪은 미국은 원래부터 커피를 더 선호하는 나라이긴 합니다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모든 먹을 것을 빨리빨리 대충 간편하게 때우려는 미국인들이 정작 커피에 있어서만큼은 그 편하고 빠른 인스턴트 커피를 극혐한다는 것은 매우 신기한 현상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는데, 누군가 따로 연구 좀 해줬으면 합니다.




(미국내 커피 브랜드 별 판매량입니다.  Keurig 커리그 라는 브랜드는 제게는 듣보잡인데 미국내 독보적인 1위네요.  어느 기계에서나 호환되는 K-cup이라는 캡슐 커피 시스템이 그 비결의 하나라고 합니다.  조지 클루니를 곁들인 네스프레소를 거느린 네스카페는 생각보다 너무 하위네요.)




원본 : 

https://en.wikipedia.org/wiki/Coffee_preparation

https://en.wikipedia.org/wiki/Instant_coffee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wonk/wp/2014/07/14/almost-half-of-the-world-actually-prefers-instant-coffee/?utm_term=.11a5b8733d4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403544&cid=58364&categoryId=58364

https://en.wikipedia.org/wiki/Maxwell_House

https://en.wikipedia.org/wiki/Nespresso

https://en.wikipedia.org/wiki/Coffeemaker

https://en.wikipedia.org/wiki/Espresso

https://en.wikipedia.org/wiki/Espresso_machine

https://en.wikipedia.org/wiki/Starbu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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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occhi 2017.05.06 18: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루에 아메리카노 커피만 여러 잔 마시는 매냐로서 오늘 글 정말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괜찮다면 퍼가도 될까요??

  2. Seb7 2017.05.06 2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부터인가 믹스커피가 빠르게 아메리카노로 대체되고 있어서 신기했습니다. 입맛이라게 웃긴게 해외출장가서도 사무실 믹스커피 보다 인근 스벅매장에 가게 되더군요. 글로벌 커피사의 입맛에 길들여긴 된장이 되버린게 아닌가 합니다.

  3. 카를대공 2017.05.08 0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믹스 커피는 다 좋은데 설탕이 너무 많아요ㅡㅡ;;

    설탕 반에 나머지 성분 반이니 가끔 설탕차를 마시는건지 커피를 마시는건지 모를 지경입니다.

  4. 미켈럽 2017.05.08 1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스턴트 커피가 우리나라에서는 믹스형태가 위주인데 유럽국가들의 전투식량을 보니 커피, 설탕, 크리머를 모두 따로 포장해서 악세서리팩 속에 포함시켜 놨더군요. 개인주의적인 취향을 강조하는 문화적인 차이라서 그런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암튼 좀 번거로워 보였습니다. 유튜브에 전투식량을 시식하는 동영상을 올려놓은 사람들이 좀 있는데 올린 사람들도 세가지 다 넣고 타서 마시던데 그럼 우리식으로 믹스하는게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 nasica 2017.05.09 00: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같은 경우는 기껏 뜯은 MRE 속의 커피에 프림과 설탕까지 다 섞여 있으면 화날 것 같아요. 커피는 웬만하면 블랙이 더 좋거든요.

  5. ian 2017.05.08 14: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Folgers 카투사때 마시던 추억의 커피네요 ㅎㅎ
    그때 입맛이 굳어 저는 아직까지도 드립커피를 매우 좋아합니다.

  6. 연습장 2017.05.08 15: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이먹은 아재들 중엔 같은 가격이어도 아메리카노보단 다방커피나 믹스커피를 더 선호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술자리에서 그 이야길 하다보니 딱히 저만 그런게 아니더군요

  7. 양치기 2017.05.08 2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투식량의 커피,설탕,크리머를 따로 포장하는것은 각개인의 기호에 따라 먹으라고 하는걸로 알고 있어요 저같은 헤비 인스탄트 커피매니아가 보기엔 이해할수 없지만 설탕을 안먹거나 조금 넣고 먹고 크리머는 않넣는 사람도 많더라구요 전 예전엔 프림을 꼭 넣어 먹었지만 몇년전부터 그냥 우유 넣어서 먹어요 물론 맛은 다른사람들이 먹으면 시고 이상하다고 하지만 프림이 정말 건강에 나쁘더라구요 다이어트 도중인데도 살이 쪄서 왜그런가 했더니 커피에 프림을 넣어서 그렇더라구요 의사들이 말하길 커피도 설탕도 괜찮습니다 프림은 먹지 마세요라고 하더라구요 미국포함 유럽의 전투식량에 포함된 크리머엔 '논디어리' 즉 '이건 유제품이 아닙니다' 라고 되어 있어요 말그대로 우리가 먹는 프리마,커피메이트처럼 '팜유'로 만든거죠 버터는 우유로 만들지만 마가린은 기름으로 만든것처럼 진짜 크림은 우유로 만들지만 '논디어리' 크리머,프림은 팜유즉 기름으로 만든거죠

  8. 양치기 2017.05.08 2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 검색해보니 그럼 팜유를 써서 프림을 만드느니 분유 즉 전지분유(반대로 탈지분유는 우유를 건조시키면서 지방을 뺀거죠)를 넣으면 되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실수도 있는데 타먹어본 사람들 얘기로는 전지분유던 탈지분유던 커피가 시커매지고 맛이 없어서 버렸다네요 역시 팜유로 크리머를 만드는 이유가 있었네요

  9. 최홍락 2017.05.09 05: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럽이나 미국인들을 포함한 외국인들과 같이 일해본 경험에 비추었을때 믹스커피 싫어하는 사람은 잘 못봤던 것 같습니다. 매일 자기네 사무실 믹스 커피 떨어졌다고 저희 사무실로 직원들 보내서 몇개씩 가져갔거든요. 사무실 건물 밖에서 항상 믹스커피와 담배를 문 외국인 관리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고요.

    인스턴트 커피가 종이컵에 물을 부어 만들면 맛있는데 이걸 아메리키노마냥 물을 한가득 부어서 만들면 맛이 없어서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 이걸 좋아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https://youtu.be/aCJEmMh7ias

    이걸 보시면 호의적이지 않은 평가를 한 사람들의 경우 유리잔 한잔에 꽉 찰 정도로 물이 굉장히 많이 들어간 반면 호평을 가한 사람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컵이 작거나 물을 적게 넣었지요. 양을 늘리려면 믹스를 2, 3개 정도 더 타야하는데 말이죠.

    사실 윗분들이 믹스커피 까다롭게 드시는 분들이 많아서 늘 커피 만들때마다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직원들이야 매일 만드니까 정확히 만들겠지만 어쩌다 한번 만드는 입장에서 정확히 물을 넣는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파견나온지 6개월이 훨씬 지나서야 이제 물의 양을 맞출 정도라고 하셨으니...커피 좋아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도 물의 양 잘못 맞추면 맛없어진다고 하시는데 처음 먹어보거나 어쩌다 먹는 사람들이 물의 양을 제대로 맞출 리는 없고, 그래서 믹스커피를 선호하지 않게되는 것은 아닌지...

  10. 찰리 2017.07.13 16: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스턴트 커피가 맛이 있다는데 백퍼 동의합니다만 개인적으로 커피 본연의 맛을 알게된 후부터는 드립이나 에스프레소만 마시게 되더군요. 다양한 원산자의 커피콩들을 어떻게 볶는지, 어떻게 갈아내는지, 또 어떻게 추출하는지에 따라 엄청난 조합의 맛들이 나오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얼마 전에는 회사의 터키출신분이 터키식 커피를 회사에서 만들어 맛을 좀 봤는데 이건 또 다른 세계더군요 ㅎ
    물론 번거로움이 수반되는 점을 부인할 수 없으니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두를 갈아 마실것이냐, 아니면 편하고 쉽게 마실것이냐의 문제로 볼 수도 있겠네요.

    커피맛도 모르는 미국애들이 인스턴트를 멀리하는건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죠. 한번에 1,2kg씩 갈린 커피를 사서 집에 오래두고 드립머신으로 만드는 커피를 즐기는(?) 분들인지라 맛은 이유가 아닌듯 하네요. 뭐든 집에서 직접 만드는걸 좋아하고 우대하는 문화 + 과거 미국 잘나가던 때 중산층들이 과시용으로 온갖 전자제품으로 집을 도배하던 시절부터 드립머신을 사용한게 전통내지는 습관화된게 아닐까 개인적으로 추측해봅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이번에 트럼프가 당선될 것이라고 제 직장 내에서 떠들고 다녔고, 다행스럽게도(?) 맞췄습니다.  제가 트럼프 당선을 예측한 것은 사실 별 혜안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라는 영화에서 전쟁으로 고뇌하지만 국가와 전우들을 위해 싸웠던 미국의 전쟁 영웅을 연기했던 브래들리 쿠퍼라는 배우가 민주당 전당 대회에 참석한 것을 두고 벌어진 사건을 보고 '아, 미국에도 돌I들이 많구나'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모든 국민은 자신에게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고 하쟎습니까 ?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미국 공화당원들은 저런 전쟁 영웅을 연기한 배우는 당연히 공화당원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쿠퍼가 저렇게 멋진 수염까지 기르고 민주당 전당 대회에 참석한 모습을 보고 배신감을 느낀 사람들이 떼거지로 그의 페북이나 트위터에 악담과 비난을 퍼부어댔다고 합니다.)




그 아메리칸 스나이퍼라는 영화의 제작과 감독을 맡은 사람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입니다.  요즘 젊은이들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봅니다.  주로 서부 영화와 '더티 해리' 시리즈에 출연해 유명해진 키크고 잘 생긴 배우지요.  그러나 이 배우가 진짜 영화인으로 칭송받기 시작한 것은 이제 남자로서의 매력이 다 쇠락하고 난 노인이 되어서였습니다.  'Unforgiven'이라는 기존의 서부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컨셉의 사실적 서부극을 감독/제작/주연하면서부터 이 사내에 대해 비평가들이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이 영화 극장에서 봤었는데,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불우한 환경의 여성 권투 선수 이야기인 'Million Dollar Baby'를 감독/제작/주연하고는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습니다.







(젊은 시절 클린트 이스트우드입니다.   정말 남자답게, 잘 생긴 배우입니다.  아래는 더티 해리 시리즈에서의 모습입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의 이스트우드입니다.   세월에는 장사 없다고, 이스트우드도 이젠 할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의 내면에는 클래스가 있는 법이고, 그 클래스는 세월이 가면서 더욱 빛나는 법입니다.) 




원래 잘 생기고 똑똑하고 점잖은 사람은 당연히 진보를 지지할 것이라고 착각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흔들림없는 공화당원이고, 놀랍게도 이번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를 열성적으로 지지한 것은 아니고, 힐러리처럼 '정치를 이용해 많은 돈을 버는 부정직한 사람보다는 낫다' 라는 자세였지요.  트럼프의 막말 파동에 대해서는 '그가 바보같은 말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라면서 '그냥 빨리 넘기고 극복합시다.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시대에요' 라고도 했지요.


그런 충성스러운 공화당원인 이스트우드에 대해, 저는 매우 좋은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술가의 작품에는 그 예술가의 가치관이 스며들 수 밖에 없는데, 그의 영화에 나타난 가치관은 저도 매우 존중하고 떠받드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만, 더 뛰어난 사람, 더 열심히 일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으며 '적절한' 빈부격차는 사회 발전의 촉매가 된다라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를 보수파라고 부르셔도 저는 할 말이 없고, 제대로 된 바른 보수라면 저도 쌍수를 들어 환영합니다.  그리고, 이스트우드의 영화 속 대사에서, 저는 올바른 보수가 가져야 할 두 가지 가치관을 보았습니다.


그 영화는 2008년작 그랜 토리노(Gran Torino)라는 영화입니다.  역시 이스트우드가 주연/감독/제작을 했고, 흐멍이라는 라오스계 소수 민족 소년과 어느 6.25 참전 노친네의 우정 이야기입니다.  이스트우드에게 누군가가 이 영화 대본을 주면서 '이야기는 재미있는데, 정치적으로는 올바르지 않은 영화'라고 평을 했답니다.  이스트우드는 밤에 이 대본을 읽어보고는 즉각 영화화하자고 했지요.  그렇게 'politically correct' 하지 않았기 떄문에, 미국내 흐멍족 사회에서는 이 영화에 대해 찬사도 있었으나 비난도 많았습니다.  저는 이 영화 매우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본 이 대사들이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이 영화에는 확실히 politically correct 하지 않은 대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 영화 속에서, 이스트우드는 흐멍족 깡패들에게 M1 소총을 겨누면서 '난 한국 전쟁에서 너희 같은 gook들을 존나 쏴죽였다'라며 으르렁거리는 장면도 나옵니다.  국 gook이라는 멸칭은 동아시아인들을 가리키는, 흑인으로 따지자면 니거 같은 멸칭인데, 이는 한국 전쟁에서 생겨나 널리 퍼진 단어라고 합니다. 믿거나말거나...)




이 영화에서 이스트우드가 맡은 '월트'라는 노인은 카톨릭입니다만 와이프가 죽은 이후 고해 성사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교구 신부는 그 와이프의 유지를 받들어 계속 월트에게 고해 성사를 시키려고 노력합니다만 월트는 전혀 따르지 않았는데, 갑자기 월트가 신부를 찾아와 고해 성사를 하겠다고 나섭니다. 



자노비치 신부 : 마지막으로 고해를 하신 지 얼마나 되었지요 ?


월트 : 백만년 전이요(Forever).  제게 은총을, 신부님.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자노비치 신부 : 성도님의 죄가 무엇입니까 ?


월트 : 1968년, 직장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베티 자블론스키에게 키스를 했습니다.  그때 (자기 와이프인) 도로시는 다른 주부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요.


자노비치 신부 : 예, 계속 말씀하세요.


월트 : 저는 900달러의 이윤을 남기고 모터 보트를 한대 팔았는데, 그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건 도둑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자노비치 신부 : 예, 좋습니다.


월트 : 마지막으로, 저는 한번도 제 두 아들과 가깝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전 걔들을 잘 알지 못했고, 어떻게 가깝게 지내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자노비치 신부 : 그것 뿐인가요 ?


월트 : 그것 뿐이냐니 그게 뭔 소리요 ?  몇 년 동안이나 신경이 쓰였는데.



여기서 이스트우드가 생각하는 진정한 보수적 가치가 보이시나요 ?  올바른 납세와 가족에 대한 진정성, 그 두 가지라고 저 나름대로 판단했습니다.  그 두가지는 저도 매우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쓰던 모터 보트를 남에게 팔아서 이익이 좀 났다고 해서 소득 신고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 생각에는 그에 대한 세금을 안 낸 것이 평생 자신을 괴롭혀 온 죄였던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성인군자가 아닌지라 탈세도 하고 다른 여자와 썸도 타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만, 그건 부끄럽게 생각하고 죄책감을 느낄 일이지 그걸 당연시하고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는거냐' 라고 뻔뻔스럽게 나설 일은 아니지요.


우리나라의 보수들도, (사실 이건 보수 진보 따질 일이 아닌데), 제발 세금 좀 똑바로 내는 것에는 찬성을 해줬으면 합니다.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것은, 진짜배기 보수주의자 이스트우드 형님의 말씀처럼, 나라 창고에서 도둑질을 하는 일입니다.  최소한 탈세하다 걸리면 '잘못 했습니다'라는 말이 나와야지, '기업을 탄압해서 나라가 잘 돌아가겠냐'라며 언론 동원해서 강짜부리는 것은 너무나 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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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an 2017.01.22 17: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나시카님이 말씀하신 보수의 가치에 동의합니다.
    저도 카투사를 나왔는데 다 그런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미군장교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진정한 보수의 가치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2. Edge Basser™ 2017.01.22 19: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나이를 먹나봅니다. 이글 읽고 공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전 우리나라에서 보수는 이런 보수적인 개념보단 기득권적인 성향이 많아 보수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대해 거부감이 많았었는데. 다시생각하게 해봅니다. 이글쓰려고 일부러 로그인 하네요 잘 읽고갑니다.

  3. H_A_N_S 2017.01.23 00: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몇 년전인가 티비에서 해줄 때 정말 재밌게 봤답니다. 좋은 글 공감하며 갑니다.ㅎㅎ

  4. 시닉스 2017.01.23 0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제넘게 말씀드리자면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도! 제대로된 진보나 보수가 자리잡았던 경우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아니 '제대로 된' 이란 표현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나시카님이 말씀하신 유색 인종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도 '제대로 된' 진보나 보수가 정권을 잡아 이룬게 아닙니다. 심지어 정치적 올바름이 때로는- 우리 시대의 소중한 자산인- 개인의 사상 표현의 자유를 저해하기도 합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야기하면 전 정치적 올바름은 기본적으로 지금 우리 시대의 소중한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시카님이 본인의 사회 정치적 희망을 표현하기 위해 '제대로된' 이란 표현을 쓰셨겠지만 지금 전세계에서 '제대로된 보수'도, '제대로된 진보'도 정권을 잡은 나라가 있다면 제 손에 장을 지집니다. 모든 사회 역사적 변화는 '제대로된' 세력이 주도해서 이루는게 아니라 경제, 정치, 사회, 문화 각각의 세력이 얼마나 현명하게 사회의 변화를 놓고 합의를 이루는가에 달려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나름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지만 당시 저질렀던 혁명 세력의 범죄는 - 시골에서 벌인 주민 학살 및 마리 앙투와네트에 대해 어처구니없이 인격 살해에 가까운 누명씌우기- 결코 '제대로된 진보'라면 있을 수 없는 끔찍한 행위였죠. 그럼에도 우리는 훗날 '그럼에도 진보'라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또 시야를 넓혀보면 프랑스 혁명의 유혈로 이후 프랑스는 -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피를 덜 흘리고 민주주의로 이행한- 앵글로 색슨계에게 결국 뒤떨어지게 되었다는 해석도 많이 있습니다. 밤이 늦어 횡설수설이 길었습니다.

  5. 프로이센군 2017.01.23 0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의 주요 당들은 '보수'나 '진보'로 평가하면 안된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의 소위 '보수'당들은 오랜 여당 지위로 고인 물이 썩듯 완전히 부패해서 심한 정경유착에 탈세, 비리가 심한 것으로 세상에 평이 자자하고, 소위 '진보'당들은 다 죽어가는 북한을 살리고 동아시아에 큰 세력 축인 한-미-일 삼각동맹에서 벗어나려는 뭣이 중헌지 모르는 대외정책을 선전하지요. 썩은 돈을 산처럼 쌓아놓고 돈구린내를 물큰물큰 풍기는 것이 어찌 참 보수이며, 무조건 여당 정책에 반대되는 길만 걸으며 자충수를 두는게 어찌 참 진보입니까? 정치인들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맡은 바 임무를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개인적으로 제 정치적 스펙트럼은 보수파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마음에서 저런 '진정한 보수'를 한국 정치계에서 만나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최홍락 2017.01.23 1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브래들리 쿠퍼의 SNS를 들여다볼 정도의 팬은 아니고 그의 SNS에 악담을 퍼부은 유저들의 숫자가 어느정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돌+I의 숫자를 토대로 트럼프가 유리하다., 미국의 유권자의 수준이 이러하다라고 논하는 것은 너무 나이브한 발상입니다. 실제 선거 결과 득표율에서는 힐러리가 앞섰으니, 미국의 선거제도가 한국과 같이 단순 다수결제도였다면 대통령은 힐러리가 되었겠지요. 결과는 맞으셨는지는 몰라도 과정을 살펴보면 제대로 알고 하신 것은 아닌 듯합니다.

    2. 영화 이야기를 하자면 "아메리칸 스나이퍼"와 더불어 같은 메세지를 전달하는 내용의 영화로 "아버지의 깃발"을 들 수 있는데요. 이유는 두 영화 모두 미국의 애국주의 영화라는 포장을 하고 있지만 정작 내면에 담긴 메세지는 전쟁이 어떻게 살아 있는 인간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로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영화에서 크리스 카일의 투철한 애국주의가 전장에서 어떻게 변해가는지,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영웅도 고통의 시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부시 정부의 이라크 전쟁의 민낯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또한 "아버지의 깃발"에서도 공화당 정책에 대한 비판이 있어서 이를 걱정하는 스태프도 있었으나 좋은 영화를 만드는데 개인의 성향을 강요할 수 없다며 넘겼다고 하지요. 사람들이 마초적 보수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과는 별개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반전주의자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앞에서 유권자들의 수준을 언급하셨는데, 진정한 보수주의자로 칭송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브래들리 쿠퍼를 비난한 돌+I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우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그냥 돌+I로 봐야 하는 걸까요? 저는 그것은 좀 아니라고 봅니다.

    3. 한국의 탈세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대해 그냥 관념적으로 우리가 탈세에 대해 관대하다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도 보충이 좀더 필요합니다. 2012년 조세 재정 연구원에서 실시한 납세 의식에 대한 조사 결과 소득 수준으로 본 성실 납세의식도는 연 소득 8,000만원 이상 고소득자의 경우 71.3인 반면 연 소득4,000~8,000만원 수준인 경우 68.3으로 나타났습니다. 1,000만원 이하의 경우 77로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만, 현재 이정도 소득수준의 경우 대부분 면세점에 속한 계층으로 세금 부과 대상에서 벗어나있지요. 결국 연소득 4,000~8,000에 해당하는 대기업 노동자들 및 중소 자영업자들의 성실 납세 의향이 고소득자보다 낮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네요.

    그리고 조세에 대한 이해도 측면에서는 고소득층을 제외하고 50이상 기록한 계층이 없습니다. (연소득 8,000이상의 경우 60.2). 세금에 대해 공식 교육이 없는 나라, 매달 월급에서, 매일 물건마다 세금을 내는 시민에게 결코 세금 교육을 시키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헌법이 자신의 구성원에게 세금을 내라고 ‘의무’를 부여했으면, 공식 교과에서 ‘세금’ 교육을 시켜줘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고소득 전문직종의 탈세가 문제라고 언급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2013년 소득탈루율 조사만 해도 고소득 전문직종인 치과의사, 한의원, 변호사의 소득 탈루율은 30%를 넘지 않는 반면 사우나, 기타 주점, 여관의 경우 소득 탈루율이 85%이상이고 사우나는 98.1%로 나왔습니다. 이는 잘사는 사람들에 비해 중간계층의 탈세 및 조세의식이 그만큼 낮은게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소득층 소득 문제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보셔야 합니다. 이전에 비해 과세인프라는 고소득층에 불리한 방향으로 계속 확충되고 있습니다. 보통 주식투자 이익에 세금 매기지 않는다 알려져 있지만 과거 시가 100억원이었던 비과세 기준이 (50억원으로 내려온 후) 2016년부터 25억으로 낮아졌고, 금융소득종합과세는 2013년 4,000만원에서 2,000만원으로 내려왔습니다. 부동산 임대소득 과세도 국세청, 국토부와 자료를 공유하기 시작했구요. 제한적이지만 종교인 과세도 시행령에 명시되었습니다. 비용공제율이 높지만 근로소득자도 상당히 공제 받고 있고요. 여전히 과거 잣대로 세금 불신을 지나치게 조장하는 언론, 정치권의 태도는 곤란합니다. 부자감세 철회를 말하지만 소득세는 최고세율이 35%에서 38%로 오히려 인상됐습니다. 법인세는 25%로 세율 올려도 세수는 연 5~6조원 정도입니다. 대기업 감면은 줄고 있는 추세이고, 최저한세율도 올랐습니다.

    나머지 위에서 언급되는 이슈는 제기한 사람이 원문과 크게 벗어나 멋대로 제기한 문제이니 굳이 답할 필요는 없을 듯하며, 원문에 기반하여 글을 올립니다.

  7. antikim 2017.01.23 15: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랜토리노는 그렇게 꽉 막힌 할아버지가
    외국인 혐오를 극복하고 이웃사랑을 영웅적으로 실천하는 이야기 아니었던가요?
    정치적으로 매우 올바른 영화 같은데...
    갱생하는 스토리인데 단순히 혐오발언 나온다고 그렇게 평가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번에 나온 이스트우드감독 영화 SULLY도 매우 훌륭합니다.
    세월호 겪은 한국인이 보면 진짜 눈물나요.
    이스트우드 작품을 보면 품격 있는 보수성이 느껴집니다. 한국엔 절대 없는.
    근데 그도 트럼프 찍었다고 하니 좀 그러네요.

    *저도 트럼프 당선 예상했습니다. 한국도 그렇지만
    언제나 혐오로 움직이는 썩은 보수파가 많이 숨어있는 법이니...

  8. Mavs 2017.01.23 17: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들 부시 때문에 얼마나 많은 미국인들이 전쟁터에서 고뇌했는지 생각해보면 민주당을 지지하는게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데요.

  9. 무는개 2017.01.23 1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삼성전자 본사 미국으로 가보라면 가보라죠
    그쪽 동네 국세청이나 노동청하고 엮이면 무슨꼬라지가 나는지 당해봐야 외국으로 본사옮긴다는 개소리가 안나오지

  10. 유애경 2017.01.23 2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랜 토리노,TV에서 남자 연예인이 격찬 하길래 보러 갔었는데 내용이 밋밋해서 지루 하기만 했던 기억이...영화를 볼줄 모르는 모양입니다(웃음).
    댓글들이 어려운 내용이 많아서 따라가기 힘든데 이건 사실 같아요.'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산다' (아,물론 기업주가 다 그렇다는건 아닙니다.)

  11. 석공 2017.01.24 0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랜 토리노 저도 참 감명깊게 본 영화입니다. 오래되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저도 보수주의의 가치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초반의 클린트 이스트우트가 전형적인 보수백인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약자에 대해 부당한 폭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에서 보수주의자의 진정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찌보면 이 것은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닌 인간 본연의 가치라고 봐야겠죠...

  12. 갓널드 갓럼프 2017.01.24 1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미국 영주권도 없지만,트럼프를 지지합니다

    • 에타 2017.01.31 1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5년전에 근혜님을 대통령으로 뽑으셨던 우리 국민 중 한분이실테니, 트럼프를 지지하는게 이해는 갑니다 ㅉㅉ

  13. mip 2017.02.01 04: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페북에 법인세율을 낮추면 고용과 세수가 늘어나고 경제가 살아난는 주장에 대해, 먼저 고용과 효과를 보여주면 세율을 낮춰주겠다는 '딜'을 언급하신 적 있지요. 여기 댓글이 그 언급과 연관이 있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ㅋㅋㅋ

    글은 언제나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4. 갓널드 갓럼프 2017.02.01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감스럽게도 그때 투표 안 했지요,껄껄

  15. 갓널드 갓럼프 2017.02.01 2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지 참 기대되는군요.3차 세계대전이라도 나겠어요 설마?

    • Crack 2017.02.05 0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 독일에 콧수염 아재 당선되었을때도 비슷한 소리 한 사람이 많았죠.

  16. ㅇㅇ 2017.02.04 14: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좀 다른부분에서 고해성사 부분이 인상깊었습니다. 클린트옹이 여타 영화속 참전용사처럼 전쟁에서 사람을 죽인것에 대해 참회한다느니 뭐니하는 뻔한 클리셰를 보이지 않았던것이 인상깊더군요. 영화 초반부에는 흐멍소년을보면서 전쟁때 너같이생긴 중국인소년병하나를 쏴죽였다는 소리를 해서 뻔한 ptsd 복선을 깔았는줄알았지만 저 고해성사에서 전쟁에서는 죄진거 하나 없다는 태도를 보며 역시 클린트옹은 진정한 보수답다는 속시원함까지 느꼈습니다.

  17. 불구경 2017.03.02 2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트럼프가 될거라고 예상했는데,,,공동체룰 피폐시키는 좌파들을 향해 비난하면서 그런 네이버 댓글을 남긴 기억이 있네요. 그러나 작가님과 관점이 좀 다릅니다. 우파의 도덕성, 정직성등을 떠나서 그리고 좌파 우파 구분을 떠나서,,,우파 보수형 사람들이 인간본성을 가장 잘알고 또 잘 이해하는 유형이다...에서 생각을 출발해보면 답이 나오더군요. 오바마 8년은 제가 본 관점의 그 반대였고 미국인들이 그 피로증을 확실히 느꼈다고 보았기 때문에 선거결과를 예측할수 있었지요. 조금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때,,,오마바 Type과 별 차이가 없는 공화당 대선후보들이 모두 탈락한 것도 이 때문이고요. 지나친 이성, 탁상적 사고, 휴먼을 이해한다면서 인간본성을 오히려 제약시키고 약하게 만든곳이 오마바 피로증이죠. 결국 '미국의 힘'까지 약해지게 만들었고 중국, 러시아 간을 키워 놓으며 세계전체가 불안정 해진거죠. 그 시작은 오마바의 이라크 미군철수에서 부터 였고...미국의 우파들은 그때부터 오마바를 참 어리섞구나,,생각했지 싶습니다. 부시나 레이건이 었으면 확실히 단도리 치며 안정화 시켜놓고 철수해야 했을꺼고요. 이는 악한 면의 휴먼을 이해 못한 처사였고 IS 를 불러둘인 원인이라 할수있숩니다. 중국의 남사군도, 러시아의 유럽북방 핵미사일 배치와 친서방국 침공과 유엔제재등,,,다들 이상향적 좌파식 사고의 결과들이고,,, 불안정해졌죠.
    아뭏든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시어 처어칠, 대처, 징기스칸,,,이런 위인들도 작가님 글로 보게 된다면 참 재미나겠습니다.

세비야에는 알카사르 궁전과 세비야 대성당 외에도 특히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명소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김태희 광장입니다.  현지인들은 그 광장을 에스파냐 광장(Plaza de España)라고 부르더군요.  





(왜 에스파냐 광장이 김태희 광장으로 더 유명한지 모르시는 분은... 그 젊음이 부럽습니다 !) 




이 광장은 스페인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1929년 스페인어권 이베리아-아메리카 박람회를 위해 만들어진, 비교적 현대적인 장소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명소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 같은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이 광장에는 양쪽에 2개의 탑이 있는데, 이 탑들의 높이가 세비야 대성당의 유명한 종탑 히랄다(Giralda)와 맞먹을 정도로 높게 설계되자 세비야 전체가 들고 일어나 난리를 피웠다는 것 정도입니다.  결과적으로 히랄다의 높이는 약 100m 넘는 것에 비해, 이 두 탑의 높이는 약 70m 정도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종탑 히랄다입니다.  Giralda는 풍항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원래 이슬람 모스크에 딸린 첨탑 미나렛(minaret)이었던 이 종탑은 독특하게도 종탑 꼭대기로 올라가는 통로가 계단이 아니라 그냥 경사로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에 이 곳을 지배하던 무어인들은 그 꼭대기에 올라갈 때 말을 타고 올라갔다는 믿거나말거나 전설이 있습니다.)





(이건 히랄다 종탑에 올라가 내려다 본 세비야 풍경입니다.  아래에 보이는 것은 세비야 대성당과 그 뒤뜰입니다.  저 배경에 길쭉한 현대적 건물 보이십니까 ?  무슨 건물인지는 못 알아봤는데, 아무튼 저렇게 삐죽 솟은 건물이 있으니 확실히 도시 경관을 확 해치더군요.  아마 저 건물 지은 사업가는 '불합리한 규제 때문에 세비야 경제가 망한다'라며 협박한 끝에 저 건축 허가를 받아내지 않았을까 합니다.  설마 모 반도국가처럼 모종의 불법적 뒷거래를...???)




이 광장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가 없는 대신, 이 광장의 반원형 벽면에 있는 총 48개의 각 지방을 대표하는 알코브(alcove, 벽면으로 움푹 들어간 조그만 공간)에는 해당 지방을 대표하는 역사적 사건을 묘사한 그림이 타일 위에 그려져 있습니다.  어떤 것은 신대륙 탐험을, 어떤 것은 이슬람으로부터 스페인을 되찾은 레콩키스타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대한 투쟁을 그린 것은 5개였습니다.  하엔(Jaen)의 바일렌(Bailen) 전투, 카디즈(Cadiz)의 1812년 헌법 제정, 마드리드(Madrid)의 도스 데 마요 (Dos de Mayo) 봉기, 폰테베드라(Pontevedra) 전투, 그리고 헤로나(Gerona)의 항복입니다.






(에스파냐 광장의 모습들입니다.  맨 마지막 사진에 제가 언급한 48개의 알코브들과 그 벽면의 타일화가 보입니다.)





(위에서부터 하엔, 마드리드, 카디즈,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다호스의 벽화입니다.  제 블로그를 계속 보셨던 분들은 하엔, 마드리드, 카디즈의 그림들은 다 알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의 바다호스의 벽화는 보시다시피 나폴레옹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레콩키스타에 관련된 것입니다.)



바일렌 전투, 카디즈의 헌법 제정, 그리고 도스 데 마요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다룬 바가 있으고 또 폰테베드라 전투는 너무 규모가 작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고, 헤로나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여기서 묘사된 사건은 1808년~1809년에 3차례에 걸친 헤로나의 포위전과 결국 헤로나의 스페인 수비대가 1809년 12월 항복한 일입니다.  보통 승전을 그리는데, 굳이 프랑스군에게 항복한 이 전투를 그린 것은 이 항전이 그만큼 의미있는 것이라는 반증이겠지요.  





(헤로나의 항복, 1809년이라는 제목이 보입니다.  보기 추한 제 그림자가 보이는군요.  모든 사진은 애국 기업 LG의 V20으로 찍었습니다.)




1808년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좌 강탈에 나섭니다.  마침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 아들 페르난도 7세에게서 왕위 양도를 받아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웠습니다.  무능한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에 못지 않게 너절했던 아들 페르난도 7세를 프랑스 바욘으로 유인한 뒤 체포해서, 두둑한 연금과 안락한 궁전을 제공하니 국민이야 어떻게 되건말건 쉽게 왕위 이양에 동의해버린 것이지요.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를 스페인 왕위에 앉히고, 스페인 귀족들과 국민들에게는 근대적인 헌법에 따른 통치와 경제적 번영, 국가적 영광을 약속했습니다.  


1808년 바르셀로나의 요새인 몬주익(Montjuïc) 요새를 지키고 있던 알바레스(Mariano Álvarez de Castro) 장군은 프랑스군이 요새를 점령하려들자 그에 맞서 싸우려 했으나, 그의 상관은 요새를 프랑스군에게 넘겨주라는 명확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어차피 왕 자신이 나라 전체를 팔아먹은 판국에 무의미한 저항은 포기하라는 것이 그 상관의 생각이었겠지요.  알바레스는 군인이었으니,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그의 의무였습니다.  만약 거기에 저항했다면 알바레스는 정당한 군 통수권자에 의한 명령을 거부한 반란군이 되어 처벌받았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프랑스와 가장 가까운 지방인 카탈루냐의 주도인 바르셀로나가 프랑스군 손에 넘어가버렸습니다.





(몬주익 언덕에서 내려다본 바르셀로나 항구입니다.  Montjuïc을 스페인어식으로 읽으면 아마 몬트후익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만, 불어의 영향을 받은 카탈란어로는 몬주익이라고 읽습니다.  "유태인 산"이라는 뜻이지요.  아마 이슬람 시절 유태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나 봅니다.  바르셀로나의 요새 이름이 몬주익입니다만, 헷갈리게도 헤로나의 요새 이름도 몬주익입니다.)




그러나 카탈루냐 사람들도 그냥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마드리드에서 도스 데 마요 봉기가 일어나 프랑스에 대한 투쟁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자, 카탈루냐에서도 활발한 반프랑스 게릴라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스페인에서 프랑스 쪽에 가장 가까운 대도시였던 바르셀로나조차도 당장 프랑스 본국과의 연락이 위태로울 지경이었습니다.  이에 나폴레옹은 새로 병력을 파견하여 바르셀로나와 프랑스 본국과의 교통로를 뚫기로 합니다.  그 타겟이 프랑스 국경과 바르셀로나의 중간 지점에 있는 도시였던 헤로나(카탈란어로는 Gerona, 스페인어로는 Girona)였습니다.  아일랜드인들로 구성된 350명의 정규군과 자원 민병대 약 1600명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수비대는 1,2차에 걸친 프랑스군의 공격을 집요하게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으로서도 상황은 절박했습니다.  헤로나를 굴복시키지 못하면 바르셀로나도 포기해야 했고, 바르셀로나를 포기한다면 스페인 정복 전체를 포기해야 했으니까요.  프랑스군은 생시르(Laurent de Gouvion Saint-Cyr) 장군의 지휘 하에 1만8천의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세번째 포위 공격에 나섰습니다.  이에 대항하는 6천도 안 되는 민병대 위주의 빈약한 헤로나 수비대의 지휘관은 그 사이 반란군에 가담했던 알바레스(Mariano Álvarez de Castro)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본격적인 포위전이 시작되기 직전, '누구든 항복이나 협상 이야기를 꺼내는 자는 처형한다'라고 선언할 정도로 비장한 각오였습니다.




(이 분이 알바레스 장군이십니다.)




1809년 5월부터 시작된 포위전에서 프랑스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헤로나를 포위 공격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무려 2만 발의 폭발탄과 6만발의 대포알(roundshot)을 쏘아댔고, 3개월 만인 8월에는 헤로나의 요새인 몬주익(Montjuïc)을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바레스는 바르셀로나 때처럼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요새를 빼앗긴 뒤에도 길거리마다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참호를 파며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4개월을 더 버틴 뒤, 전염병과 기아, 전투로 헤로나 시내의 사망자가 민간인 포함 1만을 넘어선 뒤, 자신도 병에 걸려 지휘가 불가능해지자 알바레스는 지휘권을 부하에게 넘겼습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수비군은 즉각 항복 협상을 시작했고, 연인원 총 3만5천의 병력을 동원했다가 전염병으로 인해 자신들도 1만5천의 피해를 입은 프랑스군도 더 이상의 약탈을 금하는 조건으로 항복 협상을 체결했습니다.  1809년 12월, 포위전 시작 7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헤로나 포위전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알바레스 장군이 좀더... 이마가 넓게 그려졌네요.  실제로는 대머리셨나 봅니다.)




지휘관이었던 알바레스에 대한 프랑스군의 조치는 가혹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이 전투를 스페인군 대 프랑스군의 정규전으로 보지 않았고, 정당하고 적법한 스페인의 군주 조제프 국왕에 대한 무장 반란으로 보았습니다.  그 지휘관인 알바레스는 반란군의 수괴이자 법에 의한 통치에 대한 배신자였지요.  당시 전쟁에서 항복한 적장은 일종의 손님으로서 예우를 갖춰 대접해야 했는데, 알바레스는 당시 중병을 앓는 몸이었지만 일개 범죄자로 취급되어 재판을 위해 프랑스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1달 만에 죽었습니다.  스페인 측에서는 그의 죽음이 프랑스 측의 독살이라고 주장했고, 프랑스 측에서는 단순 병사라고 주장했지요.  


실제로 당시의 정당한 국제 협약과 스페인 법에 따르면, 스페인의 적법한 국왕은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였습니다.  그에 저항했던 알바레스는 범죄자이자 반란군, 폭도가 맞는 것이었지요.  아마 알바레스가 그냥 당시의 적법한 국왕인 조제프를 섬겼다면, 그와 그의 가족은 그런대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프랑스에 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던 마드리드의 도스 데 마요 사건에서도, 프랑스군이 마드리드 시민들을 학살하던 그 순간 마드리드 시내에 주둔하고 있던 대부분의 스페인 정규군은 동맹군인 프랑스군이 적법한 명령에 따라 폭도들을 척살하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딱 한 부대, 즉 몬텔레온 (Monteleón) 병영에 주둔하고 있던 포병 부대가 다오이스(Luis Daoíz de Torres)와 벨라르데(Pedro Velarde y Santillán)라는 두 열혈 대위의 지휘 하에 시민군과 함께 프랑스군에 대항했습니다.  물론 이들은 압도적인 수의 프랑스군에게 곧 제압되었고, 두 열혈 대위는 전투 중 폭도 중의 일부로 사살되고 말았지요.  기록에서 찾아보지는 못했으나, 그 대위들의 가족들도 범죄자의 가족으로서 무척 험한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드리드에서 질서를 유지하려는 프랑스군의 정당한 치안 활동에 반기를 들고 몬텔레온 병영에서 폭도들과 합류하여 반항한 폭도들의 괴수, 벨라르드 대위입니다.  물론 오늘날 스페인에 가서 그런 개소리를 늘어놓으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 특히 국가와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을 때 그를 바로 잡기 위해 현행법을 어겨가며 실행에 옮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판단입니다.  확실한 것은 어느 나라든지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어렵게 산다는 것은 공통적인 일인가 봅니다.  그러나 그런 값진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스페인의 정체성과 긍지는 없었겠지요.  1929년 박람회를 위해 에스파냐 광장을 만들 때 각 지방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을 고를 때,  스페인에는 화려하고 영광스러웠던 역사가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48개의 지역 중 무려 5개 지역이 반-나폴레옹 항쟁을 선정한 것을 보면 그들의 희생에 대해 스페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이 분명합니다.


저같은 겁장이는 사회적으로 옮은 일을 한답시고 법을 어길 용기를 내기 어렵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도, 특히 제 어린 아들에게는 그런 어려운 일을 권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제 아들을 포함한 다음 세대가 그런 어려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우리 사회를 제대로 만들어 놓고 싶습니다.  부디, 곧 있을 대선에서 여러분들이 올바른 대한민국을 위해 꼭 심사숙고 뒤 후회없는 한표를 행사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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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푸른장미 2017.01.16 0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 1빠네요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저도 제가 독신이라면 법에 저항해서 나서겠지만 아무래도 가족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할 것 같아요
    현 정부가 출산율을 높이려는 목적에는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요?

  2. 최홍락 2017.01.16 04: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등의 아쉬움과 더불어...

    뒤에 보이시는 현대적 건물은 "세비야 타워"라고 하며 스페인어로 "Torre Seville"이라고 하는 40층 건물입니다. 높이가 180미터로 세비야 전체를 넘어 안달루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입니다. 2015년에 완공이 되서 스페인 저축은행의 하나인 Cajasol의 본사로 쓰이고 있고요. 저 건물이 들어선 위치가 92년 세비야 엑스포가 개최된 위치이기도 하고요.

    우려하신 도시 미관 문제와 관련해서는 유네스코에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2012년에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세비야 대성당과 알카사르를 포함시킬 것을 고려한 적이 있으며 이때 공사를 중지시키지 못했던것을 후회한다고는 하네요.

    참고로 유럽의 경우 오랫동안 내려저 온 전통적인 저층 건축물과 그를 통해 생긴 스카이라인을 보존하기 위한 차원에서 인위적으로 고도제한을 강하게 유지해왔지만 예외 케이스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1973년 에펠탑(324m) 인근 동남쪽에 들어선 몽파르나스 타워(231m, 56층)가 좋은 예이지요. 파리나 다른 유럽 도시들이 고도제한을 유지한 원인은 미관 외에 약한 지반이라는 것도 있었지요. 그나마 라데팡스 지역은 상황이 괜찮은 편이고요.

    근래에는 마천루 열풍이 불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고도제한이 서서히 완화되고 있는 추세에요. 최근 파리 시의회가 에펠탑 전망을 해친다는 여론에 밀려 9년여를 끌어온 높이 180m(42층) 규모의 트라이앵글 타워(가칭)에 대한 건축 허가를 최종 승인한 바 있습니다. 파리시가 경관에 대한 자존심을 접고 끝내 트라이앵글 타워를 선택한 주된 원인은 일자리 창출과 경제 살리기를 최우선에 둔 것이었습니다. 총 5억5,500만달러가 투입되는 트라이앵글 타워를 지으면서 약 3,000개의 정규직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최신식 호텔과 7만㎡ 규모의 오피스 공간, 위락시설이 해외 투자자들을 유치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문화재 보호나 도시 미관을 위한 고도 제한 규제가 꼭 그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고도제한이 공항 주변이면 모를까, 특정한 상징물의 과시를 핑계로 고도제한을 묶으면 그만큼 난개발 및 스프롤 현상의 원인이 될 수 있으며, 이는 도시의 스카이라인과 자연경관을 오히려 망칠 수 있지요. 심하면 도심 공동화로도 이어질 수 있기도 하고요. 대표적인 사례가 홍콩 카이탁 공항 시절에 고도 제한으로 인해 슬럼이 되어버린 구룡성채 지역이지요. (아비정전에서 Sin city로도 표현되지요.)

    • Nap 2017.01.16 0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소한 태클(?)을 걸자면, 구룡성채는 고도제한땜에 슬럼가가 된 게 아닙니다. 영국에 조차된 홍콩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받던 동네인데, 청이 망한 뒤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지네 영토임을 포기했죠. 그렇다고 영국령 홍콩이 관리한 것도 아니라서 사실상 삼합회의 영토가 되어버린 거죠. 홍콩정부는 카이탁 공항 주위에 고도제한을 걸었지만 구룡성채는 관리대상이 아니라 단속을 안 했고, 성채는 점점 위로(옆으로 확장할 수는 없었으니까) 올라가게 됩니다. 구룡성채는 오히려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아(혹은 바디지 못해) 슬럼화가 진행되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 최홍락 2017.01.16 13: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그말씀도 맞습니다. 하지만 홍콩 다른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낡고 개축과 증축 위주로 두서없이 되어있던 구룡 성채의 모습을 비교해보면서 공항을 빨리 이전시키고 고도제한을 풀어 고층 건물의 개발이 활성화되었다면 이런식의 난개발이 이뤄졌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프로이센군 2017.01.16 18:48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여기 계신 분들에 비하면 많이 무식하지만, 정말 고도제한 걸린 지역이 점점 낙후되는건 체감이 되더군요.

  3. 유애경 2017.01.16 05: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태희는 아는데 김태희광장은...
    사진으로 보니 김태희가 에스파냐 광장에서 춤을 춘것으로 한국인 들에게 유명해 졌나 보죠?
    스페인 하면 투우랑 플라멩코 정도의 이미지 였는데 사진으로 보니 참 아름다운 곳이네요 .(역사공부도 포함해서)잘보고 갑니다~~(^-^)v

  4. 석공 2017.01.16 05: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17개 광역을 대표할 만한 그림을 그린다면 일제에 대한 항쟁이나 민주화항쟁을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는 광역단체가 몇 개나 될까 궁금하네요..^^*

  5. 정암 2017.01.16 18: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행지 가서 대충 훅 둘러보고 사진만 찍으시는게 아니라 이렇게 꼼꼼하고 깊이있게 보시는 탁월한 지성이 부럽습니다.
    근데 옆에서 가족들이 그만 보고 다른데로 빨리 이동하자고 찡찡거리지 않았나요? ^^

  6. 뱀장수 2017.01.16 19: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 선생님 저 5월 2일 봉기상 보셨는지요... 솔광장에서 왕궁가는 중간 놀이터 근처에 있는데^^ 천사가 쓰러지는 애국자들을 안아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죠.

    그나저나 아주 철저히 답사하고 가시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7. 2017.01.16 2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nasica 2017.01.17 2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별 건 아니고 LG가 독립운동 자금도 대고, 그 대주주 가족들의 병역 이행 상태도 다른 재벌 대비 매우 양호하고, 그래서 그렇습니다.

  8. yoon슬 2017.01.17 12: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보고싶군요~~^^

  9. 샤르빌 2017.01.18 15: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 이 시기에도 힘이 있는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많이들 말하더군요..
    실제로는 자신의 희생도 각오할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이 바꾸죠..

  10. 엘쥥 2017.01.24 2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교롭게 김태희 광장이라는 이명을 만든 CF도 LG의 사이언 CF...........이것은 과학...

  11. 요롱 2017.01.25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nasica님 글을 매우 사랑하는 독자입니다. 이 블로그를 드나든게 아마도 2008년부터인 것 같은데, 9년 사이 처음으로 댓글 달아봅니다. 뱀장수님 말씀대로 솔 광장에 그런 역사적 상징물이 있었군요. 미리 알았으면 보고 가는 건데 아쉽네요. 저는 5년 전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을 했었는데, 마드리드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습니다. 그때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이, 솔 광장을 걷고 있는데 머리 희끗희끗한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면서 외국인들에게 영문으로 된 팜플렛을 나눠 주더라고요. 그 중에는 카탈루냐 깃발을 든 사람도 몇몇 있었습니다. 내용을 보니 프랑코 독재를 비판하면서 그 독재의 기억과 유산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를 기억 투쟁의 차원에서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위를 하는 분에게 어떻게 시위를 하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자기네들은 프랑코 정권의 탄압을 받았던 사람들이나 가족으로, 솔 광장 앞에 있는 건물이 우리로 치면 중앙정보부 또는 보안사에 해당하는 곳으로 지하에서 고문이 이루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예상은 했지만 스페인에서 프랑코는 민감한 문제이긴 하더라고요. 예전에 프라하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만난 스페인 젊은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한국 대통령이 "strong man's daughter"라고 하니까,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면서 프랑코야말로 스패니시 히틀러이자 독재자라고 일갈을 한 것이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기대가 컸던 곳은 알함브라 궁전이었는데, 실제로 본 알함브라는 그 기대치를 100% 충족시켜주었습니다.  알함브라는 약 700년 간 이슬람의 통치를 받았던 스페인의 특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인데, 그 이름은 아랍어인 알-함라(Al-Ḥamra), 영어로 직역하면 The Red 정도로 번역됩니다.  이 궁전은 그냥 연한 황갈색이고, 주변 토양이 붉기는 하지만 이름의 기원은 이 요새를 약 9세기 경 이 장소에 맨 처음 세운 아랍 족장의 별명이 알-함라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알함브라는 10년 20년 사이에 지어진 하나의 건물이 아니고, 여러 채의 궁전과 요새, 정원이 수세기에 9세기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지어진 건물 복합체입니다.  이 건물의 전체적인 구성과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더 좋은 다른 글들이 많을 것이니, 여기서는 두어 가지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만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아랍식 궁전에 분수와 오렌지 나무가 많은 것은, 이슬람 믿음에 '천국에는 샘과 미녀와 과실이 열리는 나무들이 있다'라는 말 때문에 그렇답니다.  정말 지상에 만들어 놓은 낙원이지요.) 




아랍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정복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슬람 통치 기간인 8세기~15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아랍인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정복자는 소수였고, 피지배인인 기존 스페인 주민들은 여전히 그대로 살고 있었지요.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도 했고, 또 그대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이슬람은 세금만 내면 정복민들이 무슨 종교를 가지든 용납해주는, 꽤 너그러운 종교 정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이슬람 교인들에게 주어지는 면세 혜택을 줄이기 위해 개종 활동을 하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뜻 밖의 혜택을 받은 일파가 바로 유태인들이었습니다.  유태인들은 '예수님을 살해한 원수들'이라는 인식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를 신봉하던 유럽 사회에서 탄압과 박해의 대상이었는데, 이슬람이 장악한 스페인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비야나 그라나다 등 이슬람 주요 거점 도시를 가면 꼭 유태인들이 모여 살던 거리가 있고, 세고비아 같은 도시는 유태인들 덕분에 흥하다가 기독교 세력이 다시 세고비아를 탈환한 뒤 유태인 사회가 붕괴되면서 도시 전체가 경제적 활력을 잃기도 했습니다.





(알함브라는 이렇게 정원, 요새, 아랍 궁전, 카톨릭 수도원, 그리고 르네상스식으로 새로 지어진 카를로스 5세 궁전 등이 어우러진 건물 복합체입니다.  그 중의 꽃은 물론 아랍식 궁전인 나스르 궁전입니다.)




정복자 아랍인들이 계속 본국인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활발히 내왕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원래 북아프리카에서 스페인으로 원정을 보냈던 아랍 왕조도 본국에서의 정변으로 교체되었고,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도 얼마가지 않아 독자적 왕국을 세우고 칼리프를 선언하면서 오히려 모로코 본국과는 경쟁 관계에 접어 들었습니다.  스페인의 코르도바 왕조의 왕족들도 자신들의 고향이 아라비아나 북아프리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수백년 간 스페인에 뿌리를 내렸으므로, 자신들의 고향을 스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왕조에 충성하던 이슬람 교인들도 다 아랍 혈통은 아니었고, 그 중 상당수는 스페인 혈통의 이슬람인이었으며,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이 700년 넘게, 반올림해서 천년간 스페인을 지배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슬람 세력끼리의 전쟁도 많았고,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전쟁도 많았으며, 이슬람과 기독교가 합세하여 다른 이슬람 또는 다른 기독교 세력과 싸우는 일도 많았습니다.  가령 스페인의 전설적 영웅 엘 시드(El Cid)도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기독교 왕을 위해 싸우다가 정치적으로 불리해지자 사라고사의 이슬람 왕국으로 건너가 거기서 이슬람 뿐만 아니라 다른 기독교 세력과 싸우는 용병이 될 정도였지요.  


기독교 세력이 진행한 스페인 재정복 전쟁, 즉 레콩키스타(Reconquista)는 이슬람 세력의 분열 덕분에 확실한 성과를 차곡차곡 쌓았고, 13세기가 되면 어느덧 남부 그라나다 왕국을 빼고는 이베리아 반도는 대부분 기독교 세력으로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정복된 영토에서 차출할 수 있는 병력과 자원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으므로, 그라나다 왕국, 정확하게는 그라나다 토후국(Emirate of Granada)의 운명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남쪽에 찌그러진 그라나다 왕국에게, 저렇게 커다란 키스티야-레온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이 결혼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1482년부터 10년 간 이어진 그라나다 전쟁의 결과, 이슬람 에미르(Emir)인 무함마드 12세(Muhammad XII)는 알함브라 궁전을 포함한 그라나다 왕국 전체를 이사벨라 1세와 페르난도 2세 부부에게 넘기고 항복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걸린 67개 항복 조건 중 주요 내용은, 이슬람 교인들은 계속 그 종교와 사유 재산을 유지할 수 있고, 기존의 법과 질서에 따른 보호를 받게 되며, 또 원할 경우 10%의 통행세를 내면 재산을 모두 가지고 북아프리카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이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도, 강요에 의해 다시 기독교로 개종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무함마드 12세 등 왕족들에게는 그라나다 바로 남쪽의 네바다 산맥 너머 지중해 인근 지역에 적절한 영지가 주어져 거기서 살게 되었지요.





(무함마드 12세가 이사벨라-페르난도 부부에게 항복하는 장면입니다.  배경에 알함브라 궁전이 보입니다.)




무함마드 12세는 최후까지 항전할 용기는 없었던 망한 나라의 군주로서 용기가 돋보이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확실히 대단한 여장부였던 모양입니다.  원래 당시 항복할 때의 의례적 절차에 따르면, 패자는 승자의 손에 입을 맞추고 항복하는 도시의 열쇠를 바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함마드 12세의 어머니가 '절대 그런 치욕만은 참을 수 없다'라고 강경하게 버틴 덕분에 무함마드 12세는 그냥 열쇠만 바치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레온(Leon)의 주교가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에 역사적 진실로 내려옵니다.  또 당시 현장에는 인도로의 서쪽 항해 계획에 대해 승인을 받으려 이사벨라 여왕을 쫓아다니던 콜럼부스도 있었다고 합니다.  


알함브라의 항복에 얽힌 이야기 그 다음은 전설입니다.  무함마드 12세가 그에게 배정된 영지로 식솔들과 함께 그라나다 남쪽으로 넘어가는 어느 고개 정상에 이르자, 무함마드 12세는 이제 이 고개를 넘으면 두번 다시 못 볼, 그 아름다운 알함브라 궁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한번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그렇게 그의 눈에 들어온 궁전과 그라나다 시의 애틋한 모습에 그는 끝내 탄식을 뱉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장부이던 그의 어머니가, 요즘 같으면 남녀 성차별이라고 지탄받을 그런 말을 했다고 하네요.



"네가 남자답게 지키지 못한 것을 돌아다 보며 이젠 여자처럼 우는거냐 ?"







무함마드 12세가 이렇게 알함브라를 돌아본 고갯길은 Suspiro del Moro (무어인의 탄식)이라는 로맨틱한 이름이 붙였졌습니다.  이번에 알함브라에 갈 때, 일부러 남쪽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며 그 곳을 찾아가 보았는데, 그냥 도로 위의 한 표지판만 있더군요.  차를 세울 수도 없었습니다.  고갯길에서 일부러 천천히 차를 몰며 바라다 보았지만 시야에 알함브라가 분명히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아쉽더군요.






이 무함마드 12세는 한동안 네바다 산맥 남쪽에서 살다가, 결국 당시 모로코를 통치하던 마라니드 왕조에게 탄원한 뒤 모로코로 넘어가 지금도 관광도시로 유명한 페스(Fes)에서 살다 죽었다고 합니다.  약 100년 뒤, 그의 자손을 페스에서 만난 어떤 스페인 여행가는 그 자손들은 빈곤 속에 살고 있더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런 쓸쓸한 전설 속에 탈환된 알함브라 궁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그라나다의 알함브라나 세비야의 알카사르 등 이슬람 궁전들을 접한 스페인 군주들은 이슬람 건축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들은 이슬람 양식으로 자신의 궁정을 장식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발전된 이슬람 양식을 무데하르(Mudéjar) 양식이라고 합니다.  원래 무데하르는 아랍어로 '길들여진'이라는 뜻인데, 이슬람 축출 이후로도 스페인에 남아 이슬람 신앙을 유지한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알함브라 궁전은 그 매력에 흠뻑 빠진 이사벨라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궁전이 되었고, 그들은 아랍 양식을 살리면서도 일부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보수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양식이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 벽에 '알라 외에 승자는 없다' 등 근본주의 기독교인으로 볼 때 불온한 글귀가 벽면에 새겨진 방들도 많았는데 대부분 그대로 놓아두었다는 것입니다.  하긴 아랍어를 읽을 수 없었으니 상관없을 수도 있었겠네요.  콜럼버스가 마침내 신대륙으로의 항해를 승인 받은 것도 알함브라 궁전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데하르 양식이 발전한 것은 대항해 시대로 스페인에 금은이 쏟아져 들어올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스페인의 국운이 점점 몰락하면서, 옛 이슬람 왕궁들은 점점 잊혀지기 시작했고, 알함브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알함브라는 폐허가 되어 그 아름다운 파티오(patio, 건물로 둘러싸인 안마당)들에는 온갖 쓰레기더미가 가득 쌓이게 되었고, 노숙자들의 쉼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알함브라의 벽 아래에서의 판당고' 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작가는 나폴레옹 직속의 지도 제작가이자 화가 바클레르-달브 Bacler d’Albe 입니다.  아마 달브가 이때는 세바스티아니의 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나 봅니다.)




그런 알함브라가 다시 빛을 본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덕분이었습니다.  1810년 1월 28일, 본격적으로 스페인을 침공하던 프랑스군 중 일부는 마침내 그라나다 시까지 몰아닥쳤고, 그라나다 시는 2년간 프랑스군 점령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 프랑스군 부대를 지휘하던 것은 오라스 세바스티아니(Horace Sebastiani) 장군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원래 오스만 투르크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꽤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인데, 외교관으로서는 능력있는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으나 군 지휘관으로서는 영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군인이라기보다는 교양있는 외교관에 가까웠던 이 사람이 그라나다에 온 것이 알함브라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점령군 지휘관이 아니었지만, 황폐화되어있던 알함브라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대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알함브라를 프랑스군 사령부로 삼고 내부를 청소했으며, 알함브라의 일부인 알카사바(Alcazaba) 요새를 보수했습니다.  그렇다고 세바스티아니가 문화재를 보존하려는 문화 애호가만은 아니었습니다.  알함브라를 군사 요새화하기 위해 일부 건물을 부수고 개조하기도 했으니까요.  게다가 알함브라 내에 자리잡고 있던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convento de San Francisco)은 그 내부 장식물은 물론 청동으로 된 종들까지 모두 징발당하는 곤욕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알함브라 내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나스르 궁전(Palacios Nazaries)은 완전히 보수되어 말끔히 청소가 되어, 다시 그 분수에는 물이 흘렀고 정원에는 꽃이 심겨졌습니다.  알함브라 궁전이 근 200년 만에 다시 아름다움을 되찾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알함브라에 좋은 일만 했던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1812년 9월, 전세 악화로 프랑스군이 그라나다에서 철수하게 되자, 이들은 방어 진지를 고스란히 스페인군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면서 알함브라의 일부 탑을 폭파한 것입니다.  바로 다음날 그라나다에 진입한 스페인군은 알함브라 궁전 내의 감옥에 갇혔던 스페인 포로들을 석방했고, 대신 포로로 잡은 프랑스군 병사들을 쳐넣었습니다.  이 스페인군의 지휘관인 바예스테로스(Francisco Ballesteros) 장군은 이 프랑스군 포로들에게 노역을 시켜 프랑스군이 폭파한 잔해를 치우게 했습니다.  이후 알함브라는 과거 스페인의 황금 시대를 상기시키는 역사적 현장으로 관심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연한 인과응보였는지 역사의 블랙 유머인지 모르겠으나, 징발당했던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의 종들은 1818년 프랑스군으로부터 노획했던 24파운드짜리 대포를 녹여서 새로 주조되었다고 합니다.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알함브라를 훼손했다고 비난하지만, 19세기에 알함브라를 여행하며 그 존재와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렸던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은 프랑스군 덕분에 알함브라가 세상에 알려졌다고 썼던 것입니다.





(포도주의 탑 Torre del vino 꼭대기에서 바라본 네바다 산맥입니다.  알함브라 궁전은 건물 자체도 아름답지만 터도 아주 좋더군요.  부동산 중에서도 최상급입니다.  정말 아름다왔습니다.)





(이 사진은 제가 찍은 것은 아닙니다.  오른쪽의 창문이 많은 유럽식 건물은 후세에 지어진 카를로스 5세 궁전입니다.  나머지 왼쪽에서 중앙, 그리고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긴 건물이 나스르 궁전입니다.)



Source :  http://revistadehistoria.es/la-alhambra-tras-la-ocupacion-napoleonica

https://en.wikipedia.org/wiki/Muhammad_XII_of_Granada

https://en.wikipedia.org/wiki/Treaty_of_Granada_(1491)

https://en.wikipedia.org/wiki/Alhambra

https://en.wikipedia.org/wiki/Granada_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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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홍락 2017.01.08 2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태인 얘기가 나오길래 알함브라 칙령 얘기도 나오겠거니 했는데 안나오네요.

  2. 재영 2017.01.09 19: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를로스5세라면 신성로마제국의 카를5세를 일컫는가요? 당대의 금수저인데 뭘 못했겠습니까만은 마지막 사진에 그 양반이 증축한 건물을 보니 솔직히 기존 궁전과는 형태가 아니라 부피(볼륨감)에서 약간 부조화스런것 같습니다. 물론 개인간에 견해차는 있을 수 있겠죠...^^;;

    • 박종필 2017.01.09 2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카를 5세가 증축한 다음에 후회했다고 하네요.
      '세상 어디에도 볼 수 없던 것을 세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바꿔버렸네' 하고 후회했다네요.

    • 최홍락 2017.01.10 0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증축한 부분(카를 5세 궁전)조차 2014년에 갔을때는 보존 공사 중이라 내부가 대부분 아시바로 도배가 되어 있어 더 흉물이 되버린 듯합니다.

  3. 박종필 2017.01.09 2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때 인류 문명권 중 가장 발달된 문명을 자랑했고, 저렇게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긴 이슬람권이 요즘 불안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것을 보면 참 역사란 무엇인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고민스러워집니다. ㅠㅠㅠ
    (물론 이슬람권도 뭉뚱그려 하나로 통칭할 순 없겠지만요.)

  4. 석공 2017.01.10 0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연스럽게 나폴레옹 이야기로 넘어가서~~ 살짝 기대를 했습니다. ^^*

  5. 프로이센군 2017.01.13 1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살면서 꼭 가보고 싶은 장소 중 하나가 바로 알함브라 궁전입니다! 이베리아의 이슬람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궁전에서 옛 무어인들의 영광과 몰락을 모두 느껴보고 싶네요. 햇빛을 받으면 궁전이 붉게 물들어 상당히 아름답다는데 Nasica님, 정말 그렇던가요??

  6. 청명 2017.05.09 1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작년 겨울에 가족여행으로 갔던 알함브라 궁의
    아름답던 모습이 떠오르네요ᆞ
    저흰 단체 관광이라 아침 일찍 갔었는데
    키높은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우리 일행의 길다란 그림자가 펼쳐진 장면이나
    마악 동이 틀 무렵이라 아들들과 성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발그래한 얼굴로 나왔던거ᆞᆞ
    후궁들의 방 천장에 에머랄드색으로 빛나던 돌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ᆞ
    나시카님 덕분에 알함브라 궁과 무어인들의
    연원에 대해 알게 되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스페인 여행기 (2) - 빌라도, 손을 씻다

잡상 2017. 1. 8. 14:13 Posted by nasica

저는 건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이번에 처음 본 카사 바트요와 카사 미야 등 가우디가 지은 작품에서도 뭔가 해괴하다는 느낌 외에는 사실 별로 받은 느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성가족) 성당, 특히 그 내부를 보니 정말 대단하다 멋있다 굉장하다라는 느낌이 확 들었습니다.  원래 카톨릭 성당이라는 건물은, 과거 기독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농민들에게 경외감을 불어넣고, 또 문맹인 사람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알려주기 위해 많은 조각과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고 하지요.  이번에 느낀 건데, 제가 그런 웅장한 종교적 상징에 약한가 봅니다.  저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부분이, 가우디 사후에 지어진 서쪽 벽면인 고난의 문(Passion Façade) 쪽이었습니다.  이유는 거기에 큰 S자 모양으로 배치된 예수의 고난 이야기 조각상들 때문입니다.






(Passion Facade 입니다.  특히 십자가에 달린 예수 상에서, 십자가가 그냥 건축용 H빔으로 되어 있는 것과, 예수가 완전 나체로 되어 있는 부분에 대해 말이 많으며, 교내의 토론 결과에 따라 이는 나중에 고쳐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래 부분, 골고다 언덕 길에서의 베로니카 성녀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은 바로 가우디의 옆 얼굴입니다.)





여기에는 최후의 만찬부터 예수에게 키스하는 유다, 예수를 3번 부정하는 베드로며, 심지어 예수의 옷을 놓고 도박을 하는 로마 병사들의 모습까지 나옵니다.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빌라도의 심판 부분입니다.  특이하게도, 거기엔 한 장면에 빌라도가 두 번 나옵니다.  한번은 죄가 없어 보이는 예수의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빌라도가 고민하는 모습이고, 다음에는 빌라도가 등을 돌리고 손을 씻는 모습입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분들도 아마 빌라도가 손을 씻는 장면의 의미를 다 이해하실 것입니다.  바로 책임 회피입니다.


http://nocr.net/index.php?document_srl=25614&mid=koreasy 에서 보시지요.



27:23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그러자 사람들은 더 크게 소리쳤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시오!” 


27:24 빌라도는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을 떠다가 사람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 너희가 알아서 해라.” 





여기서 유대인들이 유대인의 종교 재판인 산헤드린 회의에서 예수를 죽이기로 하고도 헤롯 왕에게 끌고 갔다가 다시 굳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간 것은 당시 사형 집행 권한이 오직 로마 총독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쥔 문명국이었던 로마가 각 지방 속주의 자치권을 인정하면서도 로마 제국 내 그 속주민들의 최소한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즉,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는, 만약 예수에게 죄가 없다면 그의 목숨을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떼로 몰려와 '자신들의 종교를 모독한 예수를 처형해달라'고 난동을 부리자,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예수를 위해 굳이 말썽을 무릅쓰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중대한 직무 유기이고, 괜히 손을 씻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런 책임을 지기 싫었다면, 총독 자리를 맡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처럼 평소 온갖 권력의 특혜를 다 누려놓고 정작 중요한 문제가 생기자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알지 못합니다' '저는 책임이 없습니다'라는 고위 공직자들의 책임 회피와 거짓 증언이 난무할 때, 저렇게 빌라도가 뒤돌아서서 손을 씻는 모습의 조각을 보니, 제게 더욱 깊은 인상으로 다가왔던 모양입니다.  아마, 가우디의 뜻을 이어 고난의 문 조각을 담당한 수비락스(Josep Maria Subirachs)가 굳이 빌라도를 두 번 출연시킨 것도 그런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족을 달자면, 문제의 장면은 사실 4대 복음서에 다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주로 해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쓰던 헬라어(그리스어)로 쓰인 마태복음에서는 기독교와 로마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유대 지방에 있는 근본주의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저 윗 구절 바로 뒤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경향이 좀 지나치게 드러납니다.



27:25 사람들이 한결같이 대답했습니다. “그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지겠습니다.” 



이건 제가 어릴 적 성경을 읽으면서도 '세상에 어떤 부모가 그 저주를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식들까지 가져가겠다고 맹세를 한단 말인가, 믿기 어렵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이 구절 때문에 유대민족은 '예수님을 살해한 민족'이라는 저주를 받으며 2천년 동안 유럽에서 갖은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성서도 사람이 쓴 것이고, 당연히 그 작가에 따라 어떤 의도가 들어갔다고 해석하면 이야기가 쉬운데, '성경은 한글자한글자 하나님의 신비한 힘을 받아 씌여진 것이므로 단 한글자도 잘못된 것이 없다'라고 믿는다면, 여전히 유대인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저주받은 운명을 지고 있는 것이 됩니다.  제가 신심이 약해서 그렇겠습니다만, 저는 수긍하기가 어렵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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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홍락 2017.01.08 14: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지겠습니다.” 에 대해 역시나 보증은 특히 가족을 걸고서는 절대로 하면 안되는 것이라는걸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그리고 너무 바르셀로나만 자세히 얘기해주시지 마시고 다른 도시도 자세히 얘기해주셨으면 하는 바렘이 있습니다.

  2. ian 2017.01.08 1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 이렇게 빨리 올려주시다니 감사합니다.

  3. kiww 2017.01.08 19: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옛날 글 보다가 의문이 들어서 여기에 남깁니다. 다음 블로그는 이제 안 쓰신다고 해서...
    http://blog.daum.net/nasica/6460164
    이 글에서 'Leftenant'가 꼬꼬마 장교였던 프라이스를 맥밀란이 놀리는거라고 하셨는데, 제가 알기로는 그냥 영국 발음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ps>몇 년 전 글에 이런 댓글을 남기는 건 조금 웃기긴 한데, 얼마 전에 Leftenant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계속 멤돌아서 찾아보다가 우연히 나시카님 블로그의 글을 다시 보게 됐거든요. 강박증같은데 고쳐지지가 않네요.

    • nasica 2017.01.11 19: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그때 영국 육군에서는 정말 렢테넌트라고 읽는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렇게 썼던 겁니다. 잘못된 정보를 드려 죄송합니다.

  4. 게일 2017.01.09 1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읽고갑니다!

  5. 석공 2017.01.10 02: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올리시는 속도가~~ ^^* 바쁘실텐데 좋은 글 빨리 올려주셔서 더 감사합니다.
    특정종교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담보할 수 없는 것을 말로만 하는 것이라고 손쉽게 담보물로 거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그 사람을 믿을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그렇게 소중한 것이라면 자신의 잘못으로 그 소중한 것을 욕 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 조심스러워야 하는데 너무나 손쉽게 담보로 거는 모습이 오히려 그 대상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봐야겠죠...
    어떠한 맹세든 약속이든 신이나 가족을 들먹거리는 순간 믿음이 반쯤 날아간다고 봅니다. ^^*

  6. 유애경 2017.01.15 15: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래 십자가형이 나체로 못을 박히는 형벌이라죠?
    빌라도나 가룟유다나 신약을 이루기 위해 필연적으로 필요했던 악역이라 어찌보면 그런 무시무시한 악역으로 선택(?)받은 사실이 불쌍하게(?) 느껴질때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