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8 06:30

웰링턴은 포르투갈에 상륙하자마자 곧 이베리아 반도의 지형적, 그리고 사회적 특수성이 영국은 물론 프랑스나 독일 등 기타 유럽 지역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큰 특징으로, 제대로 된 길이 없었습니다 !  이는 스페인의 침공 위협 때문에라도 스페인과의 교통로를 적극 개발하지 않았던 포르투갈의 특수성에도 기인했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나 모두 산업과 통상의 발달이 부진했다는 점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지역간에 거래를 할 상품이 없다보니 마차가 다닐 일도 없고, 마차가 다닐 일이 없으니 넓직한 길이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스페인은 지역 감정이 꽤 심한 나라여서 지방 간의 인적 왕래도 그다지 많지 않다보니, 더더욱 내륙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교통망에 더해,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건조한 편이라서 농업 생산량이 그렇게 풍요롭지는 않았습니다.  이탈리아나 독일의 농가들은 어지간한 농가의 창고문만 걷어차도 밀과 보리, 달걀이 쏟아져 나왔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포르투갈은 척박한 스페인과 대비했을 때조차도 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원래 현지 조달에 의존했던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도 쫄쫄 굶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온 지역이 이렇게 가난하다보니,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어려웠지요.  




(보시다시피 이베리아 반도의 상당 부분이 산지이거나 메마른 지대라서, 농업에 적절한 곳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지금도 스페인은 올리브유 생산이 매우 활발한 나라입니다만, 그건 반대로 곡물 농사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지대라는 반증입니다.)




현지 조달이 어려우면 본국에서 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베리아 반도의 열악한 내륙 교통망이 발목을 잡습니다.  가뜩이나 프랑스 본토와 스페인 사이에 피레네 산맥이 있는 것도 장애가 되었는데, 해안길을 통해서라도 수송대가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한 뒤부터가 진짜 고생길이었던 것입니다.  세계 지도에서 보면 스페인은 프랑스나 독일에 비하면 별로 큰 땅덩어리처럼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건 메르카토르 도법의 특성상 남쪽에 있는 땅이 좁아보이는 것입니다.  프랑스가 64만 평방 km인 것에 비해 스페인이 50만 평방 km으로서, 스페인은 굉장히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탄한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 높은 산맥과 언덕이 많은 땅이지요.  길도 제대로 없는 그런 땅을 가로질러 20만 대군이 먹을 식량을 마차로 수송한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그런 도전은 스페인의 게릴라들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경우, 이베리아 땅이 반도이니만큼 그냥 해상으로 수송한 뒤 내륙으로 운송하면 훨씬 일이 쉬워질 것입니다.  문제는 영국의 저 망할 로열 네이비 때문에 그게 불가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온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현지 조달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는 수탈당하는 스페인 민중들에게도 큰 비극이었지만 약탈하는 프랑스군에게도 무척 고단한 일이었습니다.  만명 단위의 대군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 그 일대의 식량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게 됩니다.  프랑스군이 먹어치우는 것도 있지만, 그 일대의 농민들이 식량을 감추거나 떠나버리기 때문이었지요.  결국 프랑스군은 한 곳에서 1주일 이상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굶지 않으려고 먹을 것을 찾아 끊임없이 유랑하는 거지떼 내지는 떼강도 신세가 된 것이지요.  군사 작전이라는 것에서 이동이 잦을 수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적을 압박하거나 반대로 피하기 위해서이지 굶지 않기 위해서 이동하는 군대에게는 작전의 유연성이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스페인에 투입된 근 20만에 가까운 프랑스군 대부분은 먹을 것을 찾아 이동 중이거나, 분산되어 먹을 것을 약탈 중이거나, 혹은 신기루 같은 게릴라들의 뒤를 쫓아 산 속을 헤매면서 세월을 낭비해야 했고, 실제로 영국군이나 스페인군과의 전투에 투입되는 프랑스군은 그 1/4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웰링턴은 유능한 지휘관답게, 이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영국군이 10만 단위의 대군으로 되어 있는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군량 조달을 가장 유용한 무기로 삼아야 한다고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조건은 비슷했습니다.  길이 형편 없는 것도 똑같았고, 바닷길을 이용할 수 없는 것도 같았습니다.  스페인의 주요 항구들이 대부분 프랑스군 손아귀에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식량을 수송해올 거리는 영국 측이 훨씬 멀었습니다.  영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거리가 프랑스와 스페인의 거리보다 멀었고, 그나마 영국 본토도 대륙 봉쇄령으로 인해 식량난이 심해져서 밀과 빵값이 오르는 등 난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규모로 식량을 포르투갈에 보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미국과 남미, 오스만 투르크, 심지어 북아프리카 모로코 등지에서 식량을 구매하여 포르투갈로 실어날랐습니다.




(혼블로워 시리즈 중에서 (실제 소설이 씌여진 순서는 아니지만) 첫번째 편인 Mr. Midmanship Hornblower는 혼블러워의 사관후보생 시절을 그린 옴니버스식 소설입니다.  그 중 한 에피소드가, 식량으로 소를 사러 북아프리카 이슬람 지역에 들어갔다가 전염병에 휘말려 격리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영국군 병참부에게 진짜 고난은 포르투갈 해변에 온갖 보급품이 잔뜩 쌓이는 바로 그 순간부터였습니다.  1808년 8월, 당시 쥐노가 점거하고 있던 포르투갈을 탈환하기 위해 웰슬리가 포르투갈 마세이라(Maceira) 만에 상륙했을 때, 전에 언급한 샤우만(August Friedrich Ludolph Schaumann)이라는 이름의 독일 출신 병참 장교에게 주어진 임무는 터무니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조수도 부하도 없이 혼자서, 그저 공책 한권을 주고는 해변 여기저기에 야적된 수많은 보급품 더미를 조사하여 목록을 작성한 뒤 이제 내륙으로 진격할 영국군 부대를 따라 수송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샤우만이 그런 업무에 숙련된 병참 장교였는가 하면 그게 또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랑스군의 하노버 침공 이전에 하노버 군에서 몇년 장교로 복무했다가 퇴역한 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 장부 작성 등의 업무를 좀 해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영국군 소속 독일군 전투 부대인 KGL 제7 연대 소속의 평범한 장교였고, KGL 장교로서는 승진과 연금의 비전이 없다고 보고 일당 7.5 실링(현재 가치로 대략 9만5천원)의 급여를 위해 병참 장교로 자리를 옮긴 아마추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아무런 지침이나 교본이 없었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The British Commissary'(영국 병참부)라는 멋대가리없는 제목의 책이 한권 있었는데, 이는 메서리어(Havilland le Mesurier)라는 이름의 영국인이 쓴 것으로서, 당시 영국군 병참부 직원들에게는 수학의 정석이나 다름없는 책이었습니다.  메서리어는 원래 해외 무역업자였다가 프랑스 혁명정부와 영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1793년부터 네덜란드 방면 영국군 원정대에 딸린 병참 장교 역할을 했습니다.  1794년에서 그 다음해까지 벌어진 이 방면 전투에서 영국군은 형편없는 성과만 냈을 뿐이었지만, 정말 아무 준비도 안 되어있던 영국군 병참부는 이 난리통 속에서 그나마 나름 경험과 수완을 쌓았던 모양입니다.  그 이후에도 메서리어는 병참부 장교직을 사직했다 복직했다 했는데, 영국군 병참부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은 저 'The British Commissary'라는 책을 저술한 것이었습니다.  




(메서리어의 'The British Commissary'입니다.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책입니다만, 저는 못 읽어보았습니다.)




그런 교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포르투갈에서의 영국군 병참부는 초기에 극심한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참부는 힘만 들고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노동일을 하는 부서라는 인식이 강하고 실제로도 그랬던 것만큼, 빛나는 전통이고 뭐고가 없었던 것입니다.  달랑 책 한 권을 손에 든 경험 없는 병참부 장교들도 막대한 보급품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사실은 병참부 소속 장교들은 진짜 장교도 아니었습니다.  병참부는 군의 일부가 아니라, 재무부의 감독과 지시를 받는 파견직 민간인들이었거든요.  따라서 deputy commissary-general이니 assistant deputy commissary-general이니 하는 것들은 진짜 장군이 아닌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말단 사병들이 경례를 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민간인 정부 관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장교들과 엇비슷한, 그러나 분명히 차이가 나는 군복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권총과 군도와 같은 무기도 휴대했습니다.  병사들은 '저것들은 장교 비슷한 군복은 입었지만 장교가 아니며,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와 함께 싸우지 않고 후방으로 도망친다'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전투가 벌어지면 적지 않은 경우 무기를 들고 프랑스군과의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이처럼 아군에게 저평가되었지만, 사실 이들의 업무는 제1선 장교들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우며 개인적인 창의성과 수완, 용기와 기지를 발휘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전투 현장에서 대포알과 머스켓 탄환에 노출된 채 병사들을 이끌고 전진할 때, 멋진 붉은 제복을 입은 장교가 부릴 수 있는 재주는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저 운이 좋은 자는 살아서 전진할 수 있는 것이고, 운이 나쁜 자는 대포알에 두동강이 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흙탕 길에 바퀴가 빠진 무거운 수레를 어떻게 빼낼 것인지, 수송에 3일 걸리는 건빵 자루 더미들을 어떻게 2일 안에 최전방까지 나를 것인지, 가진 돈은 50쉴링 밖에 없는데 일당 1쉴링을 요구하는 노새 30마리를 어떻게 3일 동안 빌릴 것인지 등은 그야말로 담당 직원의 역량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성공과 실패에 따라 전투의 승패가 뒤바뀔 수 있는 일이었지요.  그런데도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밀가루 자루를 실은 노새들을 끌고 최전선 부대에 도착한 병참부 장교에게 주어지는 것은 '왜 이리 늦게 왔냐' '왜 보급품이 이것 밖에 없는가' 등의 핀잔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병참부는 체계화가 꼭 필요한, 나름대로 무척 섬세하고 정밀한 병과입니다.  가령 포르투갈을 통해 상륙하는 영국군 병사들의 행군에 대해 웰링턴이 병참감(Commissary General)인 케네디(Sir Robert Hugh Kennedy)에게 보낸 지시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들어있습니다.


"상륙하는 부대는 각자 4일치의 빵과 2일치의 고기를 휴대한다.  병사들이 휴대하는 빵 외에, 1만 명의 3일치 빵을 수송해야 하는데, 가능하다면 노새를 이용해 날라야 한다.  각 노새에는 2개의 자루, 즉 224파운드의 짐을 실을 수 있으므로 전체를 위해서는 130마리의 노새가 필요하다."


이 계산은 꽤 합리적입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의 배식량은 하루에 빵 1파운드였는데, 1만 명의 3일치라면 3만 파운드입니다.  224파운드를 실을 수 있는 노새를 130마리 동원한다면 224 * 130 = 29,120 파운드이므로, 1인당 0.97 파운드씩의 빵을 3일간 보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계산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노새가 먹을 사료는 계산에 넣지 않았쟎습니까 ?  노새는 하루에 10파운드의 곡물을 먹어야 했고, 병사들이 3일 행군하는 것을 따라 나섰다가 다시 보급품이 쌓여있는 항구로 되돌아오려면 왕복에 6일이 걸렸으므로, 노새 1마리가 싣는 224 파운드 중 최소 60파운드의 곡물은 노새가 먹어치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즉, 130마리의 노새의 실제 수송량은 29,120 파운드가 아니라 21,320 파운드였고, 병사들은 3일간 0.97 파운드가 아닌 0.7 파운드라는 부실한 양의 빵을 받아야 했습니다.




(도로망이 형편없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노새들을 이용한 보급품 수송이 정말 최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미숙하기 짝이 없었던 영국군 병참부도 2년 정도에 걸쳐 노새꾼들과 노새들을 고용하여 운용을 하면서 경험이 쌓여, 그 고용 및 활용, 급여 지급 등 온갖 자질구레한 잡무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실은 총사령관인 웰링턴 장군이 이런 노새 한마리가 몇 파운드의 짐을 싣을 수 있으며 그래서 몇 마리의 노새가 필요한지에 대해 계산하여 병참감에게 보내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한 일이기는 합니다.  이런 편지는 오히려 반대로 병참감이 원정군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형태로 보내는 것이 맞겠지요.  당시 웰링턴은 병참부 장교들과 서기들의 무능력에 대해 짜증이 잔뜩 난 상황이었는데,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샤우만을 포함한 대부분의 병참 장교들이 별다른 병참 업무 경험도 없이 새로 채용된 사람들이다보니 워낙 아는 것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군 병참부는 웰링턴 하에서 혁혁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총사령관 웰링턴이 직접 나서서 '가장 신경써야 하는 부서'라고 지목하면서, 저렇게 노새 몇 마리가 필요하다는 계산까지 세세히 해줄 정도였으니 당연히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특히 1810년 10월부터 다음해 초까지의 대치 끝에 토헤스 베드하스(Torres Vedras) 방어선 앞에 마세나의 프랑스군을 후퇴시킨 승리는 사전에 충분한 군량을 비축해놓은 영국군 병참부가 아니었다면 절대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아무도 병참부의 공로를 알아주지 않았지요.  이 사실은 웰링턴 휘하 어지간한 장군들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 등의 인터넷 사이트에 많은 정보가 있는 것에 비해, 웰링턴 휘하의 전체 병참부 책임자였던 케네디(Sir Robert Hugh Kennedy)에 대해서는 정말 정보가 없다는 것으로도 반증됩니다.  오히려 영국군 병참부의 위력과 중요성을 잘 알고 두려워했던 것은 적군인 프랑스군이었습니다.  1812년 웰링턴과 대치했던 마르몽(Marmont) 원수는 나폴레옹에게 이와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웰링턴은 제게 보급품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광활한 척박함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마르몽은 유난히 영국군의 노새 부대에 대해 넋두리를 많이 늘어놓았습니다.  1811년에도 그는 나폴레옹의 참모장 베르티에에게 편지를 써서 '영국군은 노새 1만2천 마리를 이용하여 너무나 쉽게 이동한다, 그러니 내게 단 1천2백 마리라도 노새를 좀 공급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개성을 가지고 사람과 소통하는 용들이 등장하는 나오미 노빅의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 '테메레르'에 대해 전에 언급했던 적이 있지요.  대포의 시대라고 해도 그런 거대한 용들 수백 마리로 구성된 군대가 있다면 아마 천하무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용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거대한 용들에게 먹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도 일종의 용이었습니다.  그 대군을 일거에 밀어넣으면 스페인 정도야 순식간에 휩쓸어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군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에 대한 답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지요.  영국군이 소수로도 내노라하는 나폴레옹의 부하들을 차례로 꺾고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낸 것은 바로 그 문제를 잘 해결했기 때문이었고, 그 핵심에는 영국의 병참부가 있었습니다.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https://en.wikipedia.org/wiki/Glacis

https://en.wikipedia.org/wiki/Havilland_Le_Mesurier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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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ithel 2019.02.18 0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샤프가 텐트 노새 계산하던게 생각나네요.
    아참, 테메레르의 작가는 나오미 노빅입니다.

  2. TheK2017 2019.02.18 0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하편이네요. 지금 버스에서 내려야 해서 쟁여놓았다 봐야겠네요. ^ㅇ^*

  3. 카를대공 2019.02.18 1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길이 없다,산지,건조한 기후
    이거 남 얘기 같지가 않군요.

    대대로 한반도의 기후나 지형이 풍요로운 땅과는 거리가 멀었죠.
    알면 알수록 왜 옆나라들에 치이고 살았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 Spitfire 2019.02.26 1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반도가 곡창지대에 비하면 살기가 어려웠겠지만 주변국가들에 비해 풍요롭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의 국가들이 자주 침입을 한 것이지요. 도둑은 부잣집을 털지, 거지를 털지 않습니다.ㅎㅎ

  4. TheK2017 2019.02.18 1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랬군요. 영국이 승리한 이유가.
    역시 전쟁에선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끔 알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ㅇ^*

  5. 인간늑대 2019.02.18 1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재미있는 글.
    감사합니다.

  6. 지나가다 2019.02.18 21: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들은 항상 전투의 화려함에 주목하지만 그 뒤에서 스폿 라이트도 받지 못하고 개고생 하면서 물자를 날라주는 보급부대에는 대부분 관심이 없지요.
    사실 어느 회사에서 근무하던지간에 영업과 같은 일선부서 직원들이 평가나 급여 및 상여에서 항상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방면 지원부서는 돈한푼 못벌고 쓰기만 한다며 갈굼당하기 일쑤인 것 같습니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린다고, 유사시를 대비해서 지원부서도 항상 적정한 유지및 관리가 들어가야 될텐데 말이죠...쩝.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7. 인퀴지터 2019.02.18 2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나 한심한 책이라 나폴레옹 매니아께서 거론할줄 예상도 못했습니다. 테메레르는.

  8. 유애경 2019.02.18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뭔가, 식량을 바닥내고 지나가는 프랑스군 에게서 , 머문자리를 초토화 시키고 지나가는 메뚜기떼를 연상하게 되네요.


  9. reinhardt100 2019.02.19 0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 저번에 한 번 언급했지만 20만 대군을 일거에 쏟아부어서 전선을 정리했어야 했다는 제 개인의 의견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복수의 보급선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프랑스 제국 단독으로 하기는 어려울거고 라인동맹이나 이탈리아 왕국 등의 실질적인 속국의 여력을 모두 동원해야 가능하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또한, 실질적으로 20만 대군을 영국군과의 전장에 투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만한 보급선 경비 병력이 또 필요하다는 것인데 사실 나시카님 말씀대로 이 정도 병력을 이베리아반도에 쏟아붓는 것은 다른 속국들을 방기하다 시피해야 한다는 점에서 도박인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할 건 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승산이 없는건 아니고 하나의 문제만 해결되면 절반 이상의 확률로 전쟁 전체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이베리아 전쟁을 승산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분리독립주의가 강했던 바스크, 아스투리아스, 갈리시아, 카탈루냐등을 전방 보급을 위한 배후지역으로 확보한 후 이 지역들에서 출발하는 간선도로망을 모두 확보합니다. 이후, 카탈루냐에서는 아라곤 및 발렌시아, 바스크-아스투리아스-갈리시아 전역을 석권한 후 카탈루냐-타라코나 및 사라고사-발렌시아 축선에서는 무르시아-카르타헤나를 공략 후, 지브롤터를 고립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카디스 혹은 리스본까지 지중해 연안 및 주변 내륙 전역을 점령해야 한다는 겁니다. 반면, 북부에서 출발하는 프랑스군은 부르고스-바야돌리드-살라망카까지 1차적으로 공략한 후, 마드리드를 고립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후, 메리다를 공략, 메리다-바다호스-리스본 공략을 순차적으로 이어가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점령하는 방식으로 갔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작전에서 전체 총병력은 프랑스군 공격군으로 24만 이상, 보급선 경비병력 최소 12만이며 이외 동맹군인 이탈리아왕국군, 라인동맹군, 스위스군 등을 합쳐 최소 10만 이상을 투입하며 작전 기간은 총3년, 동원 각종 야포 및 공성포 총 2천 문, 각 부대별 상비 비상식량을 최소 한 달분(러시아원정기 나폴레옹이 준비한 비상식량분 기준) 등의 보급역량을 갖추고 임한다는 가정하에 생각해본 겁니다.

  10. Spitfire 2019.02.19 1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베리아 반도의 척박하고 험준함을 들으니 일생의 목표인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고 싶어지네요~ 저길 걸었던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을지 궁금합니다.ㅎㅎ

  11. 웃자웃어 2019.02.19 2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급의 중요성이 입증되는 글이군요.

  12. 리틀락 2019.03.08 11: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은 경제력으로 하는거군요. 그렇게 무역을 중시했던 영국이 브렉시트 하는걸 보면 웃음이 납니다 ㅋㅋㅋ 대영제국의 영광을 되찾자는 자들이 경제관념은 바닥이네요

2019.02.14 06:30



이번 포스팅은 J. Kincaid 라는 이름의 스코틀랜드 출신의 젊은 장교가 쓴 "Adventures in the Rifle Brigade, in the Peninsula, France, and the Netherlands from 1809 to 1815" 라는 책의 일부 중 인상 깊은 장면 몇가지를 발췌해서 적은 것입니다.   5년 전에 적었던 포스팅인데, 목요일이라 재탕으로 올립니다.  이제 다음주에 마무리할 '나폴레옹 시대의 병참부'와도 연계되는 내용입니다.



(참고로, 이 킨케이드 대위가 복무한 부대인 제95 라이플 연대는 Bernard Cornwell의 소설 속에서 리처드 샤프가 소위로 부임한 그 라이플 연대가 맞습니다.)



Episode 1.   영국 장교들의 야전 살림살이


이런 경우 우리 수송대는 언제나 아직 후방에 있었으므로, 각 중대의 장교들은 포르투갈 사내아이 하나를 고용하여 당나귀 한마리를 끌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중대를 따라오도록 했다.   이 당나귀에는 장교들의 야전 생활에 필요한 보잘 것 없는 사치품들이 실려 있었다.  그 짐꾸러미에는 큰 보트용 망토와 담요, 돼지가죽으로 만든 작은 포도주 부대 하나, 럼이나 브랜디 같은 증류주를 담은 수통 하나, 찻잎과 설탕 조금이 실려 있었고, 거기에 당나귀에 묶여 있는 염소 한마리가 있었다.  (염소는 아마 젖을 짜기 위함인듯 ?)  그리고 포르투갈 사내아이의 주머니에는 2~3 달러가 들어있었는데, 이는 그 날 행군을 하다가 운이 좋으면 생기는 기회에 따라 빵이나 버터 같은 사치품을 사라고 넣어준 것이었다.  우리는 그 아이가 구해오는 그런 보급품의 출처를 캐묻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깐깐하게 굴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아이는 빈손으로 나타나지만 않으면 우리들의 역정에 시달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아이들은 무척이나 신의가 있고 똑똑하여, 무척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매일 저녁 어떻게든 우리 중대의 위치를 찾아 오곤 했다.  딱 한번, 마세나(Massena) 원수가 후퇴할 때 우리 중대의 아이가 우리를 찾아오지 못한 밤이 딱 한번 있었다.  이 아이는 그날 밤 내내 영국군의 넓은 야영 캠프 내에 복잡하게 산재된 모닥불들의 미로 속을 헤매고 다니다 결국 포기하고 용기병 부대 옆에서 당나귀와 함께 잠을 잤는데, 일어나보니 우리 중대는 그 용기병 부대에서 20야드 (약 18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Episode 2.   빵이 없어서 고기를 먹다 


5월 20일, 빵 또는 그 비슷한 아무 것도 없이 지낸지 3일 째다.  빵 없이 고기만 며칠 먹다보면 고기가 정말 구역질 날 정도가 된다.  


오늘 새벽에는 평소처럼 매우 이른 새벽에 행군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해가 뜨기 전에 시에라 데스트렐라(Sierra D'Estrella) 앞에 있는 약 2마일 (약 3.2km) 떨어진 한 마을로 출발했다.  그 마을은 프랑스군의 동선 바깥 쪽에 있었으므로, 뭔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도착해보니, 인근 수녀원에서 도망쳐 나온 수녀들이 마을 공동 화덕 건물 바깥 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옥수수 가루(Indian cornmeal)로 만든 빵 반죽을 들고 와 여기서 굽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그 빵을 좀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자, 그들 중 두명이 친절하게도 자신들의 몫을 내게 내주었다.  


난 그녀들에게 키스와 함께 1달러(dollar는 당시 스페인 화폐 단위입니다 미국 달러도 원래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를 보답으로 주었다.  그녀들은 나의 키스를 '무척 특별한 호의'로 받아들였고, 내가 내민 1달러 은화에 대해서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런 말을 하면서 받아 들었다.


"우리 의지가 아니라, 우리의 가난이 거절하기 어렵게 만드네요."


난 이 설구워진 빵덩어리를 들고 이제 막 무장을 하고 있던 동료 장교들에게 달려갔다.




Episode 3.   묘한 분위기의 비공식 휴전선


(포르투갈에서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던 영국군은 협곡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군과 대치하다가, 겨울이 되자 비공식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묘한 휴전에 들어갑니다.)


협곡에 걸린 다리에서, 우리 부대의 보초 자리는 겨울 동안 매우 다양한 사람들에게 정식 응접실 역할을 했다.  


나는 우리 영국 해군 장교들이 마치 6파운드 포처럼 커다란 망원경을 안장 뒤에 매단 노새를 타고 리스본에서 가끔씩 오는 것을 무척 즐겁게 보곤 했다.  이들은 매번 올 때마다 어김없이 처음으로 묻는 것이 바로 코 앞에 있는 프랑스군 보초병을 가리키며 "저기 있는 저 친구는 누구요?" 하고 묻고는, 우리가 프랑스군이라고 대답하면 항상 화들짝 놀라서 "그럼 대체 왜 저 친구를 안 쏩니까 ?"라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이 비공식적인 적대 행위 중단 기간 동안 프랑스군과 우리 사이에는 예의와 호의가 넘치는 행동들이 여러번 반복되었다.  한번은 우리측 어느 장교의 그레이하운드 사냥개들이 토끼를 쫓다가 프랑스군 진영으로 넘어갔는데, 프랑스군은 깍듯한 예의를 갖추어 그들을 돌려 보내기도 했다.


어느날 밤, 다리 끝에 있는 보초 초소 현장에 내가 있을 때였는데, 프랑스군 보초 쪽에서 머스켓 총탄 하나가 날아와 우리 보초들과 내가 둘러싸고 앉아있던 모닥불의 불붙은 장작에 박히는 사건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프랑스군에서는 백기를 든 사절을 보내어 간밤의 사고에 대해 '멍청이 같은 보초가 영국군이 자기 쪽으로 몰려 오고 있다고 착각하고는 총질을 했다' 라며 사과를 해왔다.  우리는 그 총격이 멍청함보다는 악의 때문에 저질러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한번은 쥐노(Junot, 폭풍우라고 불렸던 아브란테스 공작 본인 맞습니다) 장군이 정찰을 하다 우리 보초가 쏜 총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때 프랑스군이 보급 물자 측면에서 무척 곤궁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웰링턴 경은 쥐노 장군에게 사절을 보내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리스본에서라도 구해드리겠다'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쥐노 장군은 너무 정치적인 인물이라, '사실 보급품이 부족한 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사양했다.




(역주 : 실제로 쥐노 장군은 1811년 1월 코에 총탄을 맞고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어지간한 역사 자료에는 어떤 전투에서 그렇게 최고 사령관이 총을 맞을 정도로 악전고투를 벌였는지 나와 있지 않아서 의아해했는데, 그 사정이 이런 것이었군요 !)




Episode  4.  피폐한 포르투갈 상황


이 인근은 하도 오랜 기간 전쟁에 시달렸고, 또 영국군과 프랑스군 양쪽에게 번갈아가며 강제로 보급품을 공급해야 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자신들이 굶어죽게 될까 염려하여 결국 남아 있는 식량을 모두 감추어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영국군이 프랑스군과 싸워주는 것에 대해서 입으로는 칭송과 감사를 늘어놓았지만, 식량은 빵 한덩어리도 내놓지를 않았다.  


결국 우리는 인근 수 마일에 걸쳐, 대로변은 물론 골목길이며 숲길이며 요소요소마다 정찰병들을 매복시켰다가 이웃 마을로 가는 농민들을 잡아세워 놓고 검문검색을 해야 했다.  이렇게 찾은 식량은 병참부 명령서 한장을 주고는 빼앗았는데, 우리는 당시 할머니가 들고 가는 바구니에 든 감자 몇 알조차 빼앗을 정도로 궁한 상황이었다. 




Episode  5.  민간인에 대한 잔악 행위


우리는 피르네스(Pyrnes) 인근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이 작은 마을과, 프랑스 장군들의 믿지 못할 약속에 속아 피난을 떠나지 않았던 그 몇 안되는 주민들의 비참함은 이 야만적이고 자비심 없는 적군이 최근에 다녀간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젊은 여자들은 집 안에서 잔혹하게 성폭행을 당한 채 누워 있었고, 거리에는 부서진 가구들 사이사이에는 살해된 농민들과 노새, 나귀들의 썩어가는 시체가, 역겨운 악취를 풍기는 온갖 종류의 오물과 함께 거리에 널려 있었다.  살아남은 몇 안되는 남자 주민들은 그들의 친지 및 재산의 잔해 속을 멍하니 돌아다녔는데, 마치 복수를 하기 위해 무덤 밖으로 걸어나온 시체들처럼 보였다.  간혹 낙오된 불행한, 혹은 부주의한 프랑스군의 시신도 발견되었는데, 그들의 시신은 하나같이 잔혹하게 난자되어 있어, 그 복수가 얼마나 정성껏 실행되었는지를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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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웃자웃어 2019.02.14 18: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매우 유능한 인물이지만 프랑스군에게 물자를 약탈및 가혹하게 징발당하고, 전쟁에 말려든 사람들에게는 악마이군요. 특히 이베리아 반도와 러시아 사람들 말이죠. 아 물론 아이티 사람들 입장에선 히틀러의 대선배나 다름없는 사람이고.

2019.02.11 06:30



(흔히 단순한 축성 전문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 분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17세기부터 2백년간 요새와 포병, 병참, 병력 운영 등 모든 전쟁 양상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그야말로 위풍당당 보방(Sébastien Le Prestre de Vauban) 백작입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지의 군사 요충지에 일찌기 보지 못했던 묘한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당대 유럽의 군사 작전 행태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보방(Vauban)식 요새의 등장이었습니다.  대포의 발명과 함께 무용지물이 되었던 중세식의 높고 웅장한 성벽과는 달리, 보방식 요새는 낮고 두꺼운 벽으로 된 보루(redoubt)와 쐐기 모양의 옹벽(ravelin), 그리고 대포알을 튕겨내기 위한 경사방벽(glacis) 등을 갖춘, 한마디로 방탄벽을 갖춘 요새였습니다.  이런 별모양의 보방식 요새는 17세기 프랑스의 공병 전문가 보방(Sebastien Le Prestre de Vauban, Seigneur de Vauban)에 의해 획기적으로 개선된 뒤 17세기에 걸쳐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가면서, 군사 작전의 형태가 군사작전의 형태가 대규모 회전보다는 요새를 둘러싼 포위전으로 변질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경사방벽이란 요새방벽을 둘러싼 해자 바로 바깥쪽에 흙으로 두툼하게 쌓아놓은 방벽이었습니다.  포위군이 요새방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쏘아대는 포탄 상당수가 이 경사방벽에 튕겨져 나갔습니다.)


(경사방벽이 포위군의 포병들에게 얼마나 미치고 환장할 방어수단인지 보여주는 구조도입니다.  포위군은 요새방벽을 대포알로 때려 무너뜨리길 원하겠지만, 요새방벽은 깊은 해자와 경사방벽으로 인해 공성포에게는 지극히 작은 표적이 되었고, 맞추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방벽 위의 수비군은 적군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고요.)



(레만 Lehman 호수 서쪽 끝부분에 위치한 제네바 Geneva를 둘러싼 보방식 방벽의 모습입니다.  이 지도는 1841년의 모습인데, 지금 저 방벽은 헐리고 없습니다.)




전쟁의 형태가 장기간의 포위전이 되어버리자, 당장 문제가 발생한 것이 군대의 식량 조달이었습니다.  아무리 종군상인들이 부지런히 왔다갔다 한다고 해도, 종군 상인 몇몇에게 전부대가 먹을 밀가루와 빵을 의존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또 너무 비쌌습니다.  결국 군량 중 상당부분은 주변 농가들로부터 징발을 하거나 약탈을 통해 구해야 했는데, 수만 명의 포위군이 적 요새를 둘러싸고 근처에 몇 달 버티면 그 주변 일대의 식량은 씨가 말라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식량을 더 구할 수 없으면 포위를 유지할 수 없었고, 이는 곧 포위전의 패배를 뜻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제를 개편한 나라는 역시 유럽의 육군 강국이자 가장 많은 침공 전쟁을 치른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가장 많은 보방식 요새를 구축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적 요새를 가장 많이 공격한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17세기 중반에 삼총사에 나오는 유명한 추기경이자 정치인인 마자랭(Jules Mazarin)의 부하인 국방장관 르 틀리에(Michel Le Tellier)는 근대 유럽 세계 거의 최초로 국가 차원에서 병참 업무 개혁을 손보기 시작했니다.  기존에는 각 연대장들의 재량에 따라 그때그때 제멋대로 맺어졌던 종군상인들과의 계약을 표준화하여 좀더 체계적이고 원활하게 보급이 이루어지도록 했고, 여태까지 하찮고 천하게 여기던 수송 업무에도 신경을 써서 짐수레 부대도 상설화했습니다.  무엇보다 전투 지역 인근에 보급창을 세워 군량을 미리 축적하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이 분이 르 틀리에입니다.  이 분은 리셜리외의 뒤를 이은 추기경+재상인 마자랭에게 평생 충성했고, 또 루이 14세를 꼬드겨 프랑스 내의 신교도인 위그노들을 탄압하는데도 앞장섰습니다.  덕분에 프랑스의 국가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는데 꽤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르 틀리에 본인은 끝까지 잘 살았고, 아들인 루부아 Louvois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방장관직에 올랐습니다.)



(르 틀리에의 병참 개혁이 큰 도움이 되었던 1658년 덩케르크 Dinkirk 포위 작전도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고 스페인 및 영국 왕당파 연합군이 점거한 덩케르크를 포위 공격한 전투입니다.  결국 영불 연합군이 덩케르크를 함락시켰습니다.)




물론 이런 개선은 여전히 미흡했고, 전선의 많은 부대들은 계속 약탈과 현지 징발에 의존했으며, 덕분에 프랑스군은 여전히 배가 고팠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여 프랑스군의 병참 능력은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우수해졌고, 이는 결국 나폴레옹의 기동전과 맞물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패하는데 큰 힘이 됩니다.  나폴레옹 기동전의 근원은 식량의 현지 조달이었는데, 이는 유능한 병참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809년 제5차 대불동맹전쟁 때는 오스트리아군도 프랑스군의 흉내를 내어 식량의 현지 조달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 병참부의 역량이 프랑스군보다 훨씬 뒤떨어졌던 것이지요.  '현지 조달'이라는 것이 꼭 약탈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무자비한 약탈로 당장 먹을 것을 손에 쥔 굶주린 병사들이 자기들 몇몇끼리만 배부르게 먹고 마시는 것을 막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수집한 식량을 재빠르게 계량하고 보관하고 수송하여 넓은 곳에 분산된 아군 병력에게 효율적이고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질구레한 실무 능력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마 나폴레옹이 말단 병참부 서기들을 모아놓고 그렇게 밀가루와 와인 항아리를 다루는 법을 일일이 가르쳤겠습니까 ?  프랑스군 병참부는 르 틀리에 시절부터 근 100년 넘게 다른 나라 군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실무 능력을 쌓아왔었고, 나폴레옹이 그 혜택을 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바다 건너 영국은 나폴레옹 시대 100년 전부터 유럽 대륙은 물론 아프리카와 아시아, 북미와 카리브해 등 전세계를 지역구로 활발한 침략 전쟁과 식민지 운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원거리에 걸친 병력과 장비, 식량과 탄약의 수송에 있어 굉장히 전문화된 체계를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해군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육군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그런 병참 업무의 체계화가 보잘 것 없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1808년 포르투갈에 상륙한 웰링턴이 상륙 1주일 후 국방부 장관인 캐슬레이 경(Lord Castlereagh)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장 불평한 것이 병참 업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진격시 제가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은 바로 병참부(Commissariat)의 체계화입니다.  이 부서는 장관님의 심각한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이 병참부는 웰링턴의 사령부에 있던 다른 지원 부서들, 즉 의무부(Medical Department), 조달부(Purveyor's Department, 이름과는 달리 병원기자재와 사망자 처리를 담당), 경리부(Paymaster-General), 자재부(Storekeeper-General, 역시 이름과는 달리 주로 장비와 텐트 등의 수송을 담당) 등과 함께 민간인으로 구성된 부서였습니다.  다만, 병참부는 다른 지원 부서들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이들 부서 중에서 유일하게 그 부서장이 런던의 재무부(His Majesty’s Treasury)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차이는 웰링턴이 보낸 편지에 나오는 것과 같이, 모든 지원 부서 중에서 병참부의 업무가 군사 작전의 성패에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리스본으로 선적된 건빵 한 개가 최전선의 병사의 입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전체 과정을 상세히 보살피고 추적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수행될 수 있는 군사 작전은 하나도 없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이 나폴레옹을 격파하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이 둘의 군사적 역량 차이는 누가 봐도 나폴레옹이 두 단계는 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웰링턴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밀어낼 수 있었던 것은 웰링턴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실속있는' 스타일의 지휘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웰링턴이 이렇게 병참부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랬습니다.  원래 웰링턴이 병참 업무가 주특기였기 떄문에 그랬을까요 ?  웰링턴은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하기 전에는 인도와 덴마크에서 활약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도 이렇게 병참부를 중시했을까요 ?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웰링턴이 뜬금없이 병참부의 열성팬이 된 것은 이베리아 반도의 특수성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그 특수성이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



(이번에는 좀 너무 짧군요.  분량 조절 실패로 병참부 이야기는 3부에 걸쳐 늘어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T T)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https://en.wikipedia.org/wiki/Glac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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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석총 2019.02.11 0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떻게 깨달았을까?

  2. 지나가던 사람 2019.02.11 1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삼총사에 마자랭이 나오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철가면이라면 등장할 시기이긴 합니다만... 삼총사의 악역 비슷한 포지션이면 마자랭의 전임자인 리슐리외 추기경입니다.

  3. 루나 2019.02.11 16: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방식 요새가 전쟁 양상을 변화시키는 데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끼쳤네요

  4. 수비니우스 2019.02.11 17: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덕분에 프랑스의 국가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는데 꽤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에서 뻥터졌습니다 ㅋㅋㅋㅋ

  5. 카를대공 2019.02.11 2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길어져도 생각보다 병참 이야기가 무척 흥미진진한데요?
    역시 나시카님 글빨(?) 덕이 아닐까 합니다ㅎㅎ

    중간에 실무 능력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요즘 들어 이쪽에 대해 많이 생각 합니다.

    언젠가부터 여기저기서 큰 그림에 대해 강조하는데 오히려 실무 능력에 대해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눈 앞에 것만 잘 해결해도 자연히 큰 그림이 잘 그려지는 경우가 많던데 이쪽을 강조하는 사람이 없는건 아쉽더군요.

  6. ㅇㅇ 2019.04.17 1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 점이 몇가지 있습니다.
    1. 현지조달 그러니까 약탈이 병참부의 발전과 어떻게 연관이 있나요?
    2. 보방형 요새가 나폴레옹이 보여준 화려한 야전으로 바뀌어간 이유가 무엇인가요?

2019.02.04 23:38



샤우만(August Friedrich Ludolph Schaumann)이라는 분이 쓴 회고록이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영국군 작전에 대한 귀중한 사료로 곧잘 인용됩니다.  이 샤우만이라는 분은 1778년 독일 하노버(Hanover)에서 태어난 순수 독일인으로서, 귀족 가문 출신의 신사였습니다.  영국 왕의 개인 영지이자 독립국이었던 하노버 공국의 군대에서 16세부터 21세까지 장교로 근무했던 샤우만은 원래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은 모르티에(Adolphe Edouard Casimir Joseph Mortier)의 1803년 하노버 점령을 계기로, 영국군 산하 왕립 독일군(The King's German Legion, KGL)에 가담하여 프랑스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1816년 나폴레옹 전쟁이 완전히 끝난 뒤 고향 하노버로 금의환향하는 KGL 병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분의 회고록을 보면 묘한 부분이 나옵니다.  그는 원래 KGL 제7 대대 소속의 장교였다가 병참부(commissariat)으로 일했습니다.  제7 대대에는 개인 사정으로 일종의 휴가를 낸 상태로요.  병참부에서는 그의 일처리 솜씨가 마음에 들었던지 병참감 대리(Acting Commisary-General)로의 승진을 제시했는데, 샤우만은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제7 대대에 사직서를 내고 정식으로 병참부 소속으로 이직하는 것이 어떨까 하고 고민합니다.  샤우만의 고민은 일종의 외인부대인 KGL 부대 소속의 장교직은 영국군 입장에서는 정규 장교직이 아닌지라, 제대 후에도 영국 정부로부터 연금(half-pay)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직업 군인의 최대 장점은 연금이었던 모양입니다.  친구들도 그렇게 권유했기 때문에, 결국 샤우만은 KGL 제7 대대에 사직서를 내고 영국군 병참부에 정식으로 자리를 얻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운칠기삼이라고, 샤우만의 이 결정은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정식으로 취업을 하고나자, 병참부에서는 말을 바꾸어 전에 제시했던 승진을 걷어들이고 샤우만이 병참감 보조 대리(Deputy-Assistant Commisary-General)라는 말단직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결정 사항을 통보했습니다.  게다가 더 나중의 일이긴 했지만 영국 의회에서는 KGL의 모든 장교들에게 영국 정규 장교들과 동일한 연금을 지급하기로 의결하여, 샤우만으로 하여금 자신의 결정에 땅을 치며 후회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점이 있습니다.  병참부도 군대 아니던가요 ?  왜 KGL이라는 전투부대에서 병참부라는 수송부대로 자리를 옮기는데 사직서를 제출하고 계급이 바뀌는 등의 일이 일어나야 했을까요 ?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현대적인 군대와는 달리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만 해도 병참 장교들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 신분이었습니다.  고대로부터 군의 보급은 군이 직접 수행하지 않았거든요.  정규군 장교가 병참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의 일입니다.  


원래 무기가 없는 군대는 존재해도 군량이 없는 군대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3일 이상 굶으면 모두 탈영해버리거나 죽어버릴테니까요.  이처럼 군대의 식량 보급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는데도 병참은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업무로 취급되어 등한시되었고 상당히 원시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모두들 번쩍이는 갑옷과 날카로운 칼을 들고 깃발을 펄럭이는 일을 하고 싶어했으며, 냄새나는 농부들로부터 밀과 보리를 사들이거나 빼앗고 소와 돼지를 몰고 다니는 것은 창피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업무는 고귀한 귀족 출신 군인들이 하지 않고 천한 장사치들, 즉 민간에게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시적인 화승총(matchlock musket)을 들고 16세기 유럽 전장을 누비던 병사들의 식사 시간은 요즘 군대와는 꽤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군함에서나 육상 부대에서나, 병사들이 조를 짜서 스스로 취사를 했다는 것은 이미 다들 아실 겁니다.  문제는 그 취사 재료로 쓰일 밀가루와 콩, 고기 등을 누구에서 받느냐 하는 것인데, 이걸 민간인 군납업자에게서 샀습니다.  군에서는 병사들에게 급료를 지불할 뿐, 식량은 그 돈으로 알아서 사먹어야 했던 것입니다.  대포알이 날아다니고 기병대가 칼을 꼬나들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전장에 민간인 장사꾼이 따라다녔다고요 ?  예, 돈이 된다면 그 정도의 위험은 얼마든지 감수할 장사꾼들이 많았습니다.  




(종군상인 하면 아마 만화영화 '에어리어 88'의 무기상인 맥코이 영감님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에도 맥코이 영감님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종군상인의 취급 품목은 빵과 술, 군화와 의류, 종이, 잉크 등의 잡다한 생필품류가 대부분이었고, 정작 탄약과 포탄 등 무기류의 보급은 당시에도 민간 병참부가 아니라 정부 기관인 군수위원회(Board of Ordnance)에서 담당했습니다.  빵과 럼주는 그렇다쳐도 대포와 탄약류를 민간인에게 맡길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당시 민간인이 식량을 잔뜩 실은 마차를 끌고 전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은 사자떼 옆에서 돼지가 어슬렁거리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습니다.  가뜩이나 난폭하고 배고픈데다 약탈과 살인을 밥먹듯이 저지르는 병사들이 그 마차 주인에게 공손하게 가격을 흥정한 뒤 돈을 지불하고 먹을 것을 받아갈 확률보다는, 주인을 흠씬 두들겨패고 마차 통째로 빼앗아갈 확률이 훨씬 더 컸습니다.  


그러나 군대에게 식량과 기타 생활용품을 팔고 싶어하는 민간업자들을 그렇게 험하게 다룬다면 그 부대는 머지 않아 굶어죽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어떤 장사꾼도 그 부대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런 일은 실제로 종종 발생했습니다.  가령 제7차 십자군을 이끌고 1249년 이집트에 상륙하여 다이에타(Damietta)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프랑스왕 루이 9세(Louis IX)도 이탈리아나 레반트 등지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상인들의 협조를 받아가며 원정의 보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미에타 점령 이후 불시에 일어난 (사실 예정되어 있었으나 십자군 지휘부의 무지함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나일강의 범람으로 몇 개월간 진격로가 막히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술과 연회를 벌이며 지루함을 달래던 기사들이 원정 초기의 긴장감이 풀리자 상인들을 함부로 학대하고 물건을 갈취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자 하나둘씩 종군 상인들이 십자군 캠프 주변을 빠져나가버렸고, 결국 십자군은 보급에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결국 다음 해에 루이 9세가 이슬람의 포로가 되는 참패로 이어집니다.  




(이집트에서 투르크군의 포로가 된 프랑스왕 루이 9세의 모습입니다.  자고로 상인 세력을 함부로 건드리고 무사한 군주가 없었습니다.  그건 현대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런 종군 상인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는 (비록 소설 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고골리(Nikolai Vasilievich Gogol)의 명작 소설 대장 불리바(Taras Bulba) 속에 나옵니다.  다른 지역의 카자흐 부족이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장터의 카자흐들이 분노하여 소란을 일으키는데, 가장 만만한 것이 장터에서 장사를 하던 유태인들이었습니다.  카자흐들은 저주받은 족속이지만 가진 것이 많은 유태인 장사꾼들을 두들겨패고 물건과 돈을 빼앗고 심지어 죽이기도 하는데, 이때 자신의 형과 친분이 있다고 주장하는 얀켈(Yankel)이라는 이름의 유태인 장사꾼이 불리바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렸고, 불리바는 일단 그를 보호해주었습니다.  아래 장면은 그 소란이 가라앉은 뒤, 그 자리에서 즉각 보복 원정을 결의한 카자흐 부대들이 열을 지어 출정하는 부분입니다.




(대장 불리바는 처음에 출간되었을 때 '너무 우크라이나적인 이야기 아니냐'라며 러시아 당국의 거센 비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덕분에 고골리는 1835년의 초판이 나온지 7년 뒤에 러시아 국민주의를 잔뜩 버무려넣은 개정판을 새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저도 제가 읽은 소설이 1835년판인지 1842년판인지 모르겠네요.)




대장 불리바 by 고골리 (배경 : 17세기 중반 우크라이나) ------------------


불리바가 외곽 지역을 통과할 때, 아까 그가 살려준 얀켈이라는 유태인이 이미 차양까지 갖춘 가판대를 차려놓고 카자흐 기병들에게 부싯돌과 나사 드라이버, 화약 등의 온갖 군용품은 물론 빵까지 팔고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정말 유태인들은 지독하구나 !" 불리바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그에게 말을 몰아 다가갔다.  "이 바보, 자네 여기 앉아서 뭘 하는 건가 ?  까마귀처럼 총에 맞아 죽고 싶은 건가 ?"


얀켈은 대답 대신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 두 손으로 뭔가 손짓을 하며 가까이 왔다.  "고귀하신 나으리, 부디 조용히 해주시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십시요.  저기 카자흐 마차들 중 한대는 사실 제 것입니다요.  저는 카자흐분들께서 필요하신 온갖 물건을 가져가고 있읍지요.  어떤 유태인도 제시한 바 없는 낮은 가격으로, 카자흐분들의 원정길에 필요한 모든 종류의 보급품을 제공해드릴 예정입니다요.  정말입니다, 하늘에 맹세코 진짜에요 !"


타라스 불리바는 유태인들의 장삿속에 질려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캠프를 향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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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역사에서도 전쟁터를 누비며 적이든 아군이든 군대에게 물건을 팔려고 위험을 무릅쓰는 유태인 장사꾼들의 이야기는 꽤 나옵니다.  나폴레옹이 무척 고전했던 1807년 2월 아일라우(Eylau) 전투 직후, 식량과 의약품 부족으로 비참한 상태였던 프랑스군을 구원한 것은 놀랍게도 바르샤바 출신의 어떤 유태인 장사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유태인답게, 돈을 벌려면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를 해야 하며, 또 프랑스군처럼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는 군대를 상대로 돈을 벌려면 빵이 아니라 술을 팔아야 한다고 판단을 했나 봅니다.  전투 바로 다음날인 2월 9일 정오 즈음, 나폴레옹 휘하 프랑스 장군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를 때, 기적처럼 이 유태인 상인이 4통(tun)의 브랜디를 실은 마차들을 몰고 아일라우에 나타났습니다.  Tun이라는 큰 발효통은 대략 252 갤론을 담는다고 하니까, 리터로 환산하면 이날 아일라우에 배달된 브랜디는 무려 3800 리터가 넘었고, 살아남은 병사들이 약 5만5천명이라고 하면 일인당 70ml씩 돌아갈 정도로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이때 이 브랜디가 없었다면 엄동설한에 수천 명의 부상병들이 그대로 얼어죽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상 나폴레옹의 패전이나 다름없었던 아일라우 전투의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다섯번째 남자는 뭔가 짐승 가죽을 안장 밑에 깔고 등을 보인 채 기병도를 뽑아들고 있습니다.  이 쾌남아가 누구이겠습니까 ?  예, 물론 당대 유럽 제1의 기병 뮈라입니다.  당시엔 베르크-클레브스(Berg-Cleves) 대공이었다가 다음 해에 나폴리 국왕에 등극하지요.  이 전투에서 위기에 빠진 프랑스군을 하드캐리로 구해낸 장본인이라고 하면 약간 과장된 말이긴 합니다만 뮈라가 대단한 활약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민간 종군 상인들의 존재는 부대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었으므로, 부대 지휘관은 종군 상인들이 안심하고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뭔가 유인 장치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독점 면허제였습니다.  부대 지휘관은 몇몇 상인들과 독점 계약을 맺고 안전통행증(safe conduct, passport)을 발부했습니다.  그래야 부대 병사들이 으슥한 숲길에서 그런 종군 상인의 짐마차를 만나더라도 그 상인 얼굴 또는 그 상인이 제시하는 안전통행증을 보고 보호해주거나, 최소한 약탈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이는 반대로 다른 문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사방 10리 이내에 먹을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황량한 전장에서 병사들이 먹을 것을 구할 유일한 구매처가 이 독점권을 가진 종군 상인의 수송마차인데, 정상적인 상인이라면 그런 절대적인 이점을 120% 활용하려고 들 것이고, 그런 경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 뻔했거든요.  한여름 설악산 꼭대기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1개에 5천원이 비싼 가격이 아닌 것과도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어떤 선에서 적정 가격이 형성되었을 것 같긴 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전쟁터는 큰 마을이나 도시 근처였으니 먹을 것을 구할 곳이 상인의 수송마차 뿐인 경우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아무리 면허장이 있는 종군 상인이라고 해도 당장 3일을 굶어 살기가 등등한 중무장 병사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 쉽진 않았을 것 같거든요. 




(함락된 마을에서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묘사한 14세기의 그림입니다.  당시 전쟁은 영주들과 용병들의 사업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와중에 불쌍한 농노들과 시민들만 죽어났습니다.)




이런 주먹구구식의 병참이 다소나마 체계화된 형태로 발전한 것은 17세기 들어서면서부터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병참의 발전 원인은 역시 이 시기에 나온 중대한 기술 혁신에 있었습니다.  그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  


(원래 한편으로 끝내려던 포스팅이었는데 분량 조절 실패로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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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늘누리 2019.02.04 2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등! 잘 보고 갑니다.

  2. 용가리 2019.02.05 0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옷 기다리던 글이네요. 다음 화가 엄청나게 기다려집니다.

  3. ㅇㅇ 2019.02.05 14: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시대 글을 읽으면서 상당히 궁금했던 내용인데 설 연휴에도 쉬지 않고 올려주시니 매우 고맙습니다.

    전근대 시절에 상인들의 행렬이 군대와 함께 다닌건 알고 있었는데 따로 병참이 군대의 영역에 들어선것도 오래된 일이 아니군요.

    제 삼촌이 군수특기로 지금은 장군진급까지 하셨지만 사실 보병과 같은 주류특기보다 진급에서 밀려 고생하셨는데 군수분야가 왜 군에서 비주류 특기인지 알것 같기도 합니다.

    • reinhardt100 2019.02.05 2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국시대 말기 도요토미 정권이 의외로 간과되긴 합니다만 군수분야 출신들이 야전분야보다 더 잘 나가서 문제가 된 경우입니다.

      흔히 말하는 세키가하라 전투란게 군수분야 담당인 이시다 미쓰나리와 야전분야를 담당한 오와리 국 출신의 도요토미 가신단의 분쟁적 성격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터진 측면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도요토미 정권은 야전출신들보다 군관료, 그것도 군수담당 관료들의 발언권이 워낙 막강한 특이한 경우라는 점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 최홍락 2019.02.06 09:0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우는 군수담당이 이시다 미쓰나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일이 그지경까지 갔을까 했을 정도로 이시다가 적을 많이 만들어놓는 바람에ᆢ이걸 군수담당 라인 대 야전 라인의 갈등이라기보다는 이시다파와 반 이시다파의 대결이라고 봐야겠지요.

    • 수비니우스 2019.02.10 17: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도요토미 정권의 야전출신들: 도요토미 히데나가(히데요시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츠구(히데요시의 조카), 시즈가타카의 칠본창(주로 오와리 국 출신들), 쿠로다 칸베이(주요 모사)
      도요토미 정권의 군관료(특히 군수담당): 이시다 미츠나리, 오오타니 요시츠구

      히데나가는 도요토미의 일본통일 직후 사망, 히데츠구는 히데요시가 늦둥이한테 정권 물려주겠다고 제거당하고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은 조선침략의 선봉으로 일본을 떠나거나 크게 안키워지고, 칸베이는 히데요시한테 견제당하는 등의 일이 있어서였지 딱히 군수담당의 발언권이 셌던것 같지는 않은데요

      정작 도요토미 이후 도쿠가와도 통일 이후 야전출신보다 군관료를 더 중시했고.

  4. 0_- 2019.02.05 14: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내는 설인가 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뭐 다 아시리라 봅니다만, 고골(Гоголь) 의 불바(Ъульба) 입니다. ь는 묵음이지요.
    고골리(ゴーゴリ, 고-고리)니 불리바(ブーリバ, 부-리바)니는 전부 일어중역에서 온 오류입니다...
    http://minumsa.com/booklife/20572/

    그런데, 북쪽 동네도 저 희한한 표기는 똑같나 봅니다? "문화어: 니꼴라이 고골리"라고 버젓이 씌여 있네요.
    https://ko.wikipedia.org/wiki/%EB%8B%88%EC%BD%9C%EB%9D%BC%EC%9D%B4_%EA%B3%A0%EA%B3%A8

    • reinhardt100 2019.02.05 2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 작품의 원래 배경이 <1594~1596년 셰몬 날레바이코 반란>입니다. 흔히, 1646년 흐미엘니츠키의 코사크 대반란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이 반란도 사실 만만치 않았습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에 소속된 코사크들이 사실상 최초로 연방을 탈퇴하려는 시초로 일어난 날레바이코 반란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휩쓸어 버렸는데 이 반란 당시 연방 입장에서 다행스럽게도 러시아와 터키 제국은 각각 스웨덴과 신성로마제국과 전쟁에 돌입해서 날레바이코 반란을 지원할 수가 없었죠. 이 반란동안 우크라이나는 개판났었죠. 이 반란이 실패한 후 폴란드는 '코사크들이 날뛸 외부 전역'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하게되었고 이 덕분에 코사크들이 대동란시기의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진격해서 엄청난 약탈을 벌입니다.

      불리바 영화가 1962년 헐리우드 판이 있고 2008년 러시아판이 있습니다. 둘다 비교해보시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 nasica 2019.02.06 09: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 !

  5. 칸몬드 2019.02.05 1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6. reinhardt100 2019.02.05 2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도 기해년 신년에 하시는 일 다 잘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좋은 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7. ㅋㅋ 2019.02.05 2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답! 병조림이요!

  8. 맥테비쉬 소프 병장 2019.02.06 0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어리어 88 !!!

  9. 2/28일 입대 2019.02.06 16: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늘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받으십시오! 작년보다 더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기술혁신이라니 두근두근하네요ㅎㅎ17세기 스타일의 엑셀이라도 발명된걸까요

  10. Spitfire 2019.02.07 0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배움으로 가득한 글은 따로 답글을 안쓰는데, 생각해보니 설 인사도 안드렸더군요~ 나시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항상 유익한 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11. 펱로스 2019.02.08 14: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글에서

    정의로운 투쟁이든 교활한 정쟁이든

    결국 우리네 먹고사는 생활에서 멀리 떨어질수 없음을 배워갑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오래 전부터 꿈꿔오시던 일들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12. TheK2017 2019.02.08 2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추천 꾸욱!~ 하고 다음 글을 기다립니다! ^ㅇ^*

  13. 웃자웃어 2019.02.09 17: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작 러시아 원정 당시의 프랑스군은..........

2019.01.31 06:30



시간에 종속된 존재인 주제에, 인간은 항상 미래를 예측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도, 과거를 돌이켜 봄으로써 미래의 일을 조금이라도 예측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만 있다면, 당장 해볼 수 있는 것이 여러가지 있겠지요.  로또를 사도 되고, 선물시장에서 큰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고, 교통사고나 범죄를 미리 막아 소중한 생명들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당장 하고 싶은 것을 생각나는 대로 몇개 늘어놓고 보니 돈과 생명에 관계된 것들이네요.


미래를 예측하려는 실제적인 노력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실제로 많이 있었고, 또 현재 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노력이었고, 또 재산과 인명에 직접 영향이 있고, 지금도 국가적으로 많은 돈과 인력을 퍼붓지만 그다지 신통치 못한 예측을 내는 예언이 있습니다.  바로 일기 예보입니다.




(뉴질랜드 출신의 Bic Runga라는 가수가 직접 지은 'Listening for the weather'라는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So I'm listening for the weather to predict the coming day

Leave all thought of expectation to the weather man

No it doesn't really matter what it is he has to say

'Cause tomorrows keep on blowing in from somewhere


정말 아름다운 가사 아닌가요 ?  멜로디도 좋고, 무엇보다 저 말레이-중국-마오리 혼혈 가수의 목소리가 정말 매혹적입니다.


전체곡 감상은 https://youtu.be/xEM7v-dh1gE 에서 하세요.)




중국이나 이집트나 고대의 달력 제작자들은 천문을 보고 계절의 변화 패턴을 꽤 정확히 측정해서 달력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지구의 공전과 자전에 따른 천체의 운동은 사실 범우주적인 질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계절 변화는 고대에도 상당히 정확한 측정이 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계절의 변화를 정확히 측정하려는 주된 목적은 농업 생산의 극대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집트의 경우 계절의 변화가 나일강의 범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으니까 더욱 중요했겠지요.   




(천문학에는 동서양과 종교에 상관없이 모두들 열심히였습니다.)




계절의 변화에 비해 날씨의 변화는 농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도 못했고 (내일 폭풍이 분다고 해서 농사 짓던 거 뽑아서 옮길 수도 없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정확한 예측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고고한 별들의 움직임이 아니라, 불안정한 대기 현상이 만들어내는 이런저런 징후를 보고 맞춰야 했으니까요.  따라서 달력 만드는 분들은 고대부터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날씨는 주로 나이든 목동들이나 어부들, 혹은 신경통이 있는 노인들이 경험으로 맞춰야 했습니다.


일기예보가 농부들에게는 그저그런 중요성만을 지녔다면, 어부나 선원들에게는 정말 생사를 판가름짓는 중요성을 지녔습니다.  바다에서, 더군다나 거친 바다에서 인간은 한낱 티끌에 불과하거든요.  정확한 일기예보가 가능하다면, 폭풍이 예상될 때 출어를 하지 않으면 되니까 많은 어부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고, 이미 대양을 항해 중인 상선의 경우 폭풍이 예상되는 해역을 피해서 돌아갈 수도 있겠지요.




(보기에는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자기가 직접 저 배위에 올라탔을 경우엔 그렇게 멋있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생사 및 많은 돈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일기예보를 위한 과학적인 노력은 컴퓨터나 인공위성 발명 전부터 계속되어 왔습니다.  나폴레옹 시절 당시 가장 그럴 듯한 방법은 다름 아닌 압력계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그림 다들 기억하시지요 ?)




우리가 중학교에서인가 초등학교에서인가 배웠던 것 중에 토리첼리의 수은 기압계가 있지요.  이 수은 기압계는 토리첼리가 17세기 중반에 기압 연구가 아니라 원래 '진공 상태'의 생성을 위해 고안한 것이었습니다.  그 실험 와중에, 토리첼리가 수은 기둥의 높이가 날마다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기압과 상관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기압계로 사용되게 된 것이지요.


기압과 날씨와의 상관 관계에 대해 누가 정립을 했는지는 명확치 않습니다만, 사람들은 고기압이면 날씨가 좋아지고, 저기압이면 날씨가 나빠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일기예보도, 라디오도 없던 시절, 사람들은 작은 기압계를 가지고 날씨를 비교적 과학적으로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괴테입니다.  최근에 케이블 TV에서 젊은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게 된 배경을 그린 독일 영화를 봤는데 정말 재미있더군요.) 




이것을 널리 보급...이라기보다는, 독일 전역에 널리 알린 사람은 다름아닌 괴테였습니다.  괴테는 문필가, 화가, 과학자, 철학자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한 천재였습니다만, 1820년대 초에는 기압 연구에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래 그림과 같은 작고 예쁜 유리 기압계가 '괴테 기압계' 또는 '괴테 장치'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장치를 만든 것은 괴테가 아닌, 무명씨라고 하네요.) 




(와, 이쁜데요 ?)




이 기압계의 원리는 매우 단순합니다.  이렇게 색깔이 든 물을 집어 넣은 주전자 모양으로 생긴 유리병에서, 외부와 통하는 구멍은 좁은 주전자 부리 끝 뿐입니다.  주전자 몸체에 해당하는 큰 유리방의 위는 공기가 아니라 진공 상태입니다.  외부 기압이 높아지면 주전자 부리에 든 물이 압력을 받아 그 수위가 내려가고, 반대면 올라가지요.


이 기압계에는 보시다시피 눈금도 없고, 또 일정한 규격도 없기 때문에, 지금이 1기압 위인지 밑인지 알 방법은 없습니다.  사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날씨 예측에는 어느 순간의 기압 절대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압이 높아지고 있는지 낮아지고 있는지, 그 변화량이 중요했거든요.  특히 그 변화 속도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만약 주전자 부리 속의 수위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면, 기압이 신속하게 떨어지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는 곧 비나 폭풍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영국 군함의 함장실에도 이런 형태의 기압계가 하나씩 달려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군함의 함장이야말로 그런 날씨 변화에 가장 민감해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요즘도 이런 액체를 이용한 가정용 기압계가 판매되고 있습니다.  토리첼리의 수은 기압계는 당연히 아니고요 (수은의 위험성 때문에 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Amazon 같은 곳에서 weather glass를 검색하면 파는 곳이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괴테 기압계, 또는 weather glass라고 불리는 물건은 실내 장식용으로도 꽤 괜찮거든요.




(이것이 현재 아마존에서 팔고 있는 weather glass 입니다.  52.5 달러에 팔고 있군요.) 




하지만 이런 물이 든 유리 기압계는 건물 안이나 선박에서 사용하기엔 어떨런지 몰라도, 야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휴대하기엔 너무 불편했습니다.  가령 야전에서 작전 중인 장교나 양떼를 모는 양치기에게는 깨지기 쉽고 물이 새나가기 쉬운 이런 기압계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이것이 초기의 아네로이드 기압계입니다.  Aneroid라는 단어는 정말 처음 듣는 단어군요.) 




그러다가 1843년, 루시앙 비디(Lucien Vidie )라는 프랑스 발명가가 내부가 진공 상태인 금속판의 변화와 스프링의 힘을 이용해서 기압을 눈금으로 나타내주는 장치, 즉 아네로이드 기압계(aneroid barometer)를 발명해냅니다.  이 아네로이드라는 말의 뜻은 '액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특히 이 장치의 묘미는 그 눈금 바늘의 움직임을 일부러 뻑뻑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어느 순간의 절대 기압 수치보다는, 그 변화량이 날씨 변화에 중요했거든요.  그런데 매시간마다 이 기압계를 꺼내서 읽고 그 수치를 기록하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압계 바늘의 움직임을 일부러 좀 뻑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실제로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바늘이 당장은 움직이 않다가, 기압계를 꺼내들고 탁탁 한번 치면 비로소 바늘이 움직여서, 그 바늘이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쉽게 볼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집집마다 온도계는 혹시 있을지 몰라도, 기압계는 없으실 겁니다.  하지만 19세기 중후반만 해도, 이 아네로이드 기압계는 미니 기상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쥘 베른느 소설 카르파티아 성.  내용은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카르파티아 성 (Le Cahteau des Carpathes, 쥘 베른느 작, 배경 19세기 중반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지방)  ------------------


(트란실바니아의 어느 산골에서 양치기 노인과 유태인 행상이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거 말입니까 ?"  유태인은 두 손으로 온도계를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이건 날씨가 더운지 추운지 가르쳐주는 기계랍니다."


"흐음, 그거라면 나는 잘 알고 있지.  내가 홑옷만 입고도 땀을 흘리는지, 외투를 입어도 추운지를 보면 돼."


과학 문제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양치기에게는 물론 그것으로 충분할 터였다.


"그럼 바늘이 달린 이 시계는 ?" 그는 아네로이드 기압계를 가리켰다.


"그건 시계가 아니라 내일 비가 올지 날씨가 갤지를 가르쳐주는 도구랍니다."


"정말 ?"


"그럼요."


"그래 ? 하지만 그 값이 1 크로이처 밖에 안 된다 해도 나는 필요없어." 프리크가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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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 노인 프리크는 당연히 아네로이드 기압계가 필요없었습니다.  양치기로 잔뼈가 굵은 노인은 산등성이에 걸린 구름의 모습과 변화만 봐도 날씨를 짐작할 수 있을테니까요.  저 유태인 행상은 사람을 잘못 만난 거지요.


하지만 쥘 베른느(예, 80일간의 세계일주나 해저 2만리를 쓴 그 사람입니다)의 소설 속에서 나오듯이, 당시로서는 유럽의 시골 깡촌이었던 트란실바니아 촌구석까지 행상들이 시계, 온도계와 함께 기압계를 팔고 다닐 정도로, 당시로서는 꽤 인기 상품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일기예보와 관련해서는 주로 이탈리아인이나 독일인, 프랑스인들이 많은 공헌을 한 것 같습니다만, 실제적으로 현대적인 의미에서 일기예보 비스무리한 것을 체계적으로 실시한 것은 영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시 영국 해군이었습니다.


프랜시스 보퍼트(Francis Beaufort) 경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름에서 짐작하듯이 그 선조는 원래 프랑스에서 위그노 탄압 때 아일랜드로 이주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14살 때 동인도 회사의 상선에서 뱃일을 시작해서, 나폴레옹 전쟁 중에 영국 해군에 투신, 미드쉽맨을 거쳐 22살의 나이에 장교로 임관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중에는 "영광의 6월 1일 전투"에 참전하기도 하고, 적 항구에 침투조를 이끌고 작은 보트를 타고 잠입해 들어가 적 군함을 탈취해 오다가 큰 부상을 입는 등, 실전 경험도 많았습니다.




(이 온화해 보이는 신사가 한때 나폴레옹의 프랑스 해군과 혈투를 벌였던 보퍼트 경입니다.)




하지만 이 양반은 기본적으로 (정규 교육을 받은 것이 별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과학 기술에 정진했던 사람으로서, 해군 생활에서 가장 큰 업적은 남미 및 터키 등 여러 지역의 수로도/해도를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왕립 학회, 왕립 천문학회, 왕립 지리학회의 위원직을 맡아 여러 과학자들의 후견인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노년에는 제독의 지위에도 오르고, (당시 영국 해군에서는 함장직에 오른 사람은 결국 일찍 죽지만 않는다면 결국엔 무조건 제독의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배쓰(Bath) 기사 작위도 받는 영예를 누립니다.


하지만 보퍼트 경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전해져오는 가장 큰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그 중 하나는 보퍼트 경이 바람의 세기를 표시하는 방법을 최초로 고안해서 널리 쓰이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보퍼트 풍력 계급 (Beaufort Wind Force Scale)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거 중학교 때 배웠는데, 불행히도 학교 교과서에서는 보퍼트라는 이름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음표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바람의 방향과 그 세기를 표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억들 나시는지 ?)




보퍼트 경의 이름을 역사에 남게 한 두번째 이유는 바로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라는 후배를 양성해낸 것입니다.  이 피츠로이라는 사람도 영국 해군 장교였고 (보퍼트와는 달리 태생이 귀족이었습니다) 바로 찰스 다윈을 태우고 갈라파고스 제도로의 항해를 했던 비글(HMS Beagle) 호의 함장이었습니다.  불행히도 피츠로이 함장은 자기가 초청해서 함께 항해한 과학자인 찰스 다윈이 그런 '신성모독적인' 이론을 발표한 것에 대해 크게 침통해했다고 합니다.




(이 따분하게 생긴 양반이 피츠로이입니다.  다윈은 이 사람이 가끔씩 불처럼 화를 내곤 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격이 좀 더러운 편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사람 크기 보면 짐작 가시겠지만 비글호는 유명세에 비해 매우 작은 측량선에 불과했습니다.)




피츠로이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비글 호의 함장이라는 점도 있지만, 이 사람이 일기예보의 기초를 닦았기 때문입니다.  이 삶은 보퍼트의 후원을 받아 1854년 통상 위원회의 기상 통계관(Meteorological Statist to the Board of Trade)이라는 새로운 부서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현대 영국의 기상청이 됩니다.  특히 피츠로이는 비글 호의 항해 도중에 폭풍 기압계(storm glass)라는 독특한 기압계를 고안했다고 합니다.  이 기압계는 당시 영국의 여러 항구에 공식적으로 설치되어, 폭풍이 예상될 때는 어부들이 출어하지 못하도록 하여 많은 어부들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피츠로이의 storm glass입니다만, 그 과학적 원리에 대해서는 좀 미심쩍은 부분이 많습니다.  일단 기압계라는 물건이 완전히 밀봉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좀 의심스럽지요 ?) 




1859년 영국에 몰아닥친 끔찍한 폭풍의 피해를 겪은 후, 피츠로이는 날씨를 예측하는 것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날씨를 예측하는 것을 피츠로이는 "forecasting the weather"라고 불렀고, 이것이 일기예보(weather forecast)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고 하네요.  그는 19세기 중반에 발명된 전보를 통해, 영국 곳곳에 설치된 육상 관측소로부터 수집된 기상 정보를 받아 날씨를 예측하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그 결과 1860년 타임즈(The Times) 지에 최초로 일기예보가 발행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일기예보는 수퍼컴퓨터를 이용한 복잡한 수학적 모델링 계산을 거쳐 발표됩니다.  이런 수학적 모델에 의한 일기예보는 1922년에 루이스 리차드슨(Lewis Fry Richardson)이라는 영국 수학자가 최초로 고안되었으나, 당시에는 컴퓨터가 없었던 관계로 실천되지 못했고, 1955년 이후에야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집에 애들이 있다면, 괴테 기압계 같은 것 하나 정도 걸어놓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애들에게 과학 공부도 시키고, 예쁘기도 하고, 무엇보다 (애쓰시는 기상청 직원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뉴스에 나오는 일기예보도 어차피 그다지 잘 맞지는 않는 것 같으니까요.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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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ithel 2019.01.31 1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톰 글래스는 당시에도 말이 많았고, 지금에 와서는 그야말로 약팔이로 결론난 상태입니다. 뭐,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니까 어부들 설득하는데는 조금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2. reinhardt100 2019.02.01 0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압계 문제라. 꽤 신선하네요.
    이게 재미있는게 2차 세계대전 당시 잠수함 작전에서 심도계와 기압계는 매우 중요했다고 합니다. 특히, 북대서양에서 작전할 때는 기압계 가지고 볼프 전술을 구사할지 여부를 결정했다고 하며 각 잠수함 함장 및 통신사들은 기압 상태를 기록할 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게 의외로 중요한게 잠수함이 선단공격 후 탈출하는 데 있어서 수상탈출을 할 수 있는 경우가 공격 직후 극저기압 상태 정도나 가능하다보니 이 시점을 잡고 공격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요.

    보퍼트 풍력계, 저거 제 중학교 때는 과학 교과서에 실렸던건데 기억 나네요.

    • 내안의댕댕이 2019.02.01 1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잠수함의 공격후 극저기압하 탈출이라는 것이, 해상의 기상상태가 매우 안좋을때에야 공격후 생환한다는 뜻인가요? 당시 잠수함들의 내파성이나 어뢰성능의 신뢰도가 악천후에서 그리 높지 않았다고 알고있는데...

    • reinhardt100 2019.02.01 14:02  댓글주소  수정/삭제

      가능성이 좀 더 높다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수상항해 대신 잠항으로 탈출하면 은닉이 어느 정도 되지만 항속이 지나치게 느려져 폭뢰 맞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기상상태가 안 좋을 때 공격 후 탈출한다면 아무래도 좀 더 발각될 위험이 낮으니 생환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3. redsonia 2019.02.01 12: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리첼리, 아네로이드 기압계...중1 물상시간 생각나네요 ㅋ

  4. 맥테비쉬 소프 병장 2019.02.03 14: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좋은글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재미난 글
    마이마이 부탁드립니다~~
    ^^

  5. Spitfire 2019.02.06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Bic Runga 저 노래가 제가 뉴질랜드 놀러갔을 때 한창 나와서 참 질리게 들었는데.. 여기서 나오니 괜시리 반갑네요~^^

2019.01.28 06:30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있어 드물게 조용한 한 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에서는 계속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지기는 했습니다만, 1809년 바그람 전투 이후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뛰어들 만큼 큰 전쟁은 없었지요.  그리고 1810년은 그의 제국이 최대 규모로 팽창했던 시기였습니다.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 공국들을 병합하여 프랑스의 영토가 사상 최대의 크기로 늘어난 것이지요.  게다가 유서깊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혼인을 맺고 정권의 영속성을 위한 아들까지 얻었으니, 정말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절정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숙적 영국과의 전쟁도 매우 잘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웰링턴을 스페인에서 몰아낸 것에 이어 마세나가 영국의 발판인 포르투갈까지 침공해들어갔고 (물론 이는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싸움인 대륙 봉쇄령으로 인한 영국의 곤경이 슬슬 한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곡물 가격은 대륙 봉쇄령 이후 60%나 치솟았고 이로 인해 영국 국민들의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대륙 봉쇄령에도 불구하고 수출은 표면적으로는 잘 되고 있었습니다.  1805년 5110만 파운드이던 수출액이 1808년에는 4970만으로 떨어지더니 1810년에는 다시 6220만 파운드로 늘어났거든요.  이는 유럽 대륙으로의 수출이 막히자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수출을 크게 늘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밀수 등을 통해 여전히 유럽에도 많은 상품을 팔고 있었지요.  그러나 1810년 중순 이후 나폴레옹의 밀수 단속이 강화된데다,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수출 특성상 대금의 상당 부분을 현금 대신 원자재나 채권을 받아야 했던 것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들어오는 돈은 부족한데 유럽 대륙의 전쟁 자금은 금화나 은화로 된 경화로 지급해야 했으니, 아무리 영국이 부자 나라라고 해도 돈이 마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1809년 한 해에만 무려 4420만 파운드를 전비로 지출해야 했으니까요.  결국 의심쩍은 지폐만 넘쳐날 뿐 경화가 부족해지자 영국에서는 극심한 인플레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사재기가 발생하여 더욱 물가가 오르는 악순환에 빠진데다, 금본위제 재도입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은행들도 재무 안정성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문제로 인해 1811년에는 금융 불안정과 함께 수출액도 4390만 파운드로 뚝 떨어져 버렸습니다.  유럽 대륙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당시 영국처럼 산업과 금융이 발달한 나라가 없었으니, 그 타격은 당연히 영국이 가장 크게 입었습니다.  




('템즈 강에서의 선적'이라는 Samuel Scott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폴레옹에게 승기가 막 보이려는 시기인 1810년 마지막 날, 이 모든 것의 방향을 확 돌려놓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1810년 12월 31일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 1세의 칙령이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영국과의 공공연한 무역 재개 및 나폴레옹에 대한 사실상의 도전장이었거든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


이미 다룬 내용입니다만, 기억 전환을 위해 잠깐 정리를 해보면 이렇습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정복을 위해서는 영국을 먼저 굴복시켜야 한다고 나름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상품들은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큰 유혹인지라 유럽 각국은 대륙 봉쇄령을 위반하고 밀수를 계속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가 다스리는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나폴레옹 본인도 '면허제'라는 이름 하에 몇몇 상인들에게 영국 상품을 공식적으로 수입할 수 있도록 해줄 정도였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 유럽의 주요 해안가를 아예 프랑스 영토로 병합해버렸습니다.  그것이 네덜란드 및 발트해에 면한 함부르크(Hamburg), 브레멘(Bremen), 뤼벡(Lubeck) 등 북서부 독일 소공국들의 병합이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프랑스의 영토는 사상 최대로 확장되었고, 영국의 재정난이 더 심해지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대륙 봉쇄령의 이런 강압적인 실행은 영국 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의 고통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동맹국들의 불신과 반발심도 키웠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의 체면을 무시하고, 알렉산드르가 가장 아끼는 누이동생 예카테리나의 남편이 다스리는 올덴부르크(Oldenburg) 공국까지 병합해버린 것은 당시 유럽 대륙의 양대 세력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싸늘한 적대감을 키우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아, 프랑스가 이토록 크고 아름다운 적이 있었던가 ??)




나폴레옹의 관점에서 이런 병합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동의 적국인 영국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나폴레옹은 올덴부르크의 병합에 대한 충분한 보상도 제시했습니다.  즉, 2년 전 알렉산드르와 아름다운 우정을 쌓았던 회담 장소였던 에르푸르트(Erfurt)를 보상으로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모욕으로 받아들인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의 보상안을 거부했고, 1810년 12월 31일 러시아 황제 칙령(ukase)으로 대응했습니다.  이 칙령은 어쩌면 사소할 수 있는 내용으로서, 크게 2가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1) 프랑스산 비단과 와인에 높은 관세를 부과

2) 중립국 선박의 상품이 "명확히" 영국산이 아닌 경우 러시아 항구에 입항 허용


이는 대표적인 프랑스 상품을 배척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국 상품에 대해 환영하는 초대장을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냥 허술하게라도 가짜 서류만 만들어 제출하면 되었으니까요.  아는 나폴레옹의 패권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장이었고 이는 전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도발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자의식 과잉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라는 것을 알렉산드르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아무리 여동생이 가엾다고 해도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까요 ?


당연히 그런 결정까지는 크고 작은 많은 다른 요소들이 관여했습니다만, 가장 큰 것은 역시 폴란드와 영국이었습니다.


서방 진출을 국가 정책으로 삼는 러시아에게 있어 폴란드는 서쪽에 확보한 소중한 발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르샤바 공국은, 아무리 독립국이 아니라 작센 왕의 개인 영지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러시아에게 눈엣가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조그마한 공국에 불과할지라도 폴란드인들의 독립 정권이 있다는 것은 러시아령 폴란드인들에게 독립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1809년 제5차 대불동맹전쟁시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맞서 꽤 선전했을 뿐만 아니라 바그람 전투의 결과 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혹시라도 폴란드가 정식으로 독립 왕국으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러시아에게 주었습니다.  


러시아의 이런 불안감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영리하게도 부지런히 조장했습니다.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메테르니히는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를 비밀리에 이간질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목표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폴레옹의 패망이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 때문이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와 국경을 접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당시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오스만 투르크의 발칸 반도를 빼앗고 싶어 했는데, 그 강력한 경쟁자가 러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 관계라면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의 맹약인 틸지트(Tilsit) 조약을 깨뜨리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해서 폴란드를 수단으로 정했습니다.  즉,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독립시키려 한다'라는 소문을 빈과 바르샤바에 꾸준히 퍼뜨린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1810년판 가짜 뉴스였던 셈인데, 메테르니히의 비밀 선동에 홀딱 넘어간 순진한 폴란드인들은 독립 열망에 부풀었고, 바르샤바 신문들은 독립이라는 희망찬 뉴스를 꾸준히 찍어댔습니다.  이런 상황은 빈과 바르샤바에 있던 러시아인들에 의해 그대로 알렉산드르에게 들어갔고, 그의 우려와 분노는 파리 주재 러시아 대사 쿠라킨(Alexander Borisovich Kurakin, Александр Борисович Куракин)을 통해 나폴레옹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화려한 옷차림으로 파리 사교계를 사로잡아 '다이아몬드 대공'으로 불렸던 쿠라킨 대사입니다.  그는 음식이 한꺼번에 나오지 않고 코스별로 차례차례 서빙되는 러시아식 정찬 방식(service à la russe)을 프랑스에 전해 오늘날의 프랑스 코스 요리를 완성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을 막아보려 많은 애를 썼습니다.)




나폴레옹은 나폴레옹대로 화를 냈습니다.  나폴레옹이 바로 작년 오스트리아와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었을 때, 틸지트 조약에 따르면 알렉산드르는 즉각 병력을 파견하여 나폴레옹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쳐부수어야 했습니다.  그런 편의를 바라고 나폴레옹은 폴란드 애인의 애원도 뿌리치고 폴란드 독립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핀란드까지 러시아에게 던져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모두 잊고 러시아는 교활하게도 러시아령 폴란드 인근에 병력만 배치해두고 어느 쪽이든 승리하는 쪽에 붙기 위해 눈치만 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군의 공세를 분쇄하자 오스트리아령 폴란드로 침입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건 황제들끼리 우정을 나눈 동맹국의 처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꾹 참고 우방국 대우를 해주었더니 나폴레옹은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던 폴란드 독립에 대해 항의해온다 ?  이런 뻔뻔스럽고 무례한 행동에 대해 공손하게 대응할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처가집인 오스트리아는 메테르니히의 획책 하에 끊임없이 러시아군의 이동 및 요새 강화에 대해 나폴레옹에게 고자질을 하며 이런 위기를 부추겼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과 이런 험악한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알렉산드르는 각지의 요새를 강화하고 군대를 정비하는 등 전쟁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 것은 역시 폴란드 건이 컸습니다.  알렉산드르는 교황을 잡아가둔 나폴레옹의 폭거가 독실한 카톨릭인 폴란드 국민들에게 공분을 샀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좀더 많은 자치권과 좀더 관대한 헌법을 약속하며 폴란드인들에게 18세기때처럼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남는 것이 폴란드에게 유리하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지만, 바르샤바에 그가 심어둔 밀사들은 바르샤바의 분위기를 솔직하게 그대로 전해왔습니다.  폴란드는 나폴레옹이 결국 폴란드에게 자유를 가져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를 접한 알렉산드르는 결국 프랑스와의 전쟁을 결국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폴란드인들에게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것도 역시 메테르니히의 획책이었습니다.  실제로는 나폴레옹은 냄새나는 폴란드인들을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외교관인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Nepomuk Lothar, Prince von Metternich-Winneburg zu Beilstein)입니다.  가짜 뉴스를 정치 외교에 활용하는데 있어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르에게 전쟁을 결심하게 만든 것은 폴란드 외에도 또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전쟁의 근본 원인이었지요.  그것은 물론 영국, 좀더 정확하게는 영국과의 무역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드넓은 평원을 가진 대농업 국가였습니다.  그런 러시아가 홍차와 설탕, 면직물, 비단, 강철 등의 물품을 수입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남아도는 자국산 밀과 아마 등의 농산물을 수출하는 것 뿐이었는데, 원래 그 가장 큰 고객이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 때문에 영국과의 교역이 막히자 러시아의 귀족들은 돈줄이 막혔고, 그 불만은 짜르 알렉산드르의 정권을 위태롭게 할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알렉산드로서는 그런 불만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거기에 뻔뻔스럽기 그지 없는 나폴레옹이 여동생 시댁인 올덴부르크를 제멋대로 병합해버리고 (이건 가짜 뉴스에 의한 오해였지만) 폴란드까지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더 이상 참을 이유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1810년 12월 31일, 그는 나폴레옹의 따귀를 갈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칙령을 발표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1811년 4월 2일자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미 러시아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태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전쟁은 발발할 것이오.  나와 알렉산드르가 아무리 그를 막기 위해 노력하거나 프랑스와 러시아의 국익이 아무리 해를 입는다고 해도 말이오.  난 이런 상황을 자주 보았고, 내 과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전쟁이 발발할 거라는 것은 마치 오페라의 줄거리가 펼쳐지는 것과 같이 뻔한 이야기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바로 영국이오."


이제 나폴레옹의 제국은 몰락을 향한 폭풍 속으로 휘말려들어갑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istory of the Expedition to Russia Undertaken by the Emperor Napoleon  by Philippe-Paul Comte de Segur

https://www.britannica.com/event/Napoleonic-Wars/The-Continental-System-and-the-blockade-1807-11

https://georgianera.wordpress.com/2015/04/16/the-port-of-london-in-the-18th-century/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Kurakin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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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까까님 2019.01.28 0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짜뉴스가 힘을 갖는 건 불신이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빙판길에 출근 잘 하시고 곧 설인데 복 많이 받으시고 건필하십시오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2. 석총 2019.01.28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헬게이트가 열리는 군요

  3. 웃자웃어 2019.01.28 1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나폴레옹도 이미 러시아 본토로 깊숙히 진군하면 패배할수밖에 없단걸 아일라우 전투때 알게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러시아에 쳐들어 갔을까요?

    • 하이텔슈리 2019.01.28 2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폴레옹은 러시아 본토 깊숙히 진군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쳐들어가서 빨리 러시아 주력을 격파하고 차르를 협상장으로 불러내 굴복시키려는 게 전쟁의 목적이었죠. 문제는 러시아군이 안싸우고 계속 도망치고 이걸 쫓아가다보니 모스크바까지 가버린 것일 뿐이에요. 모스크바 함락 시점에서 이미 나폴레옹의 계획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시점이었던 거죠.

    • 다부 2019.01.30 0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가 러시아를 육로로 직공하는 건 위험하니
      발트해안 도시들을 동원해서 리보니아에 해상보급망을 설치하고
      리보니아의 거점으로부터 모스크바를 노린다는 계책을 나폴레옹에게 건의를 했는데,

      나폴레옹이 "그런 성가시고 시간 걸리는 방법 아니라도 내 작전술로 간단히 쳐 없앨 수 있어"
      라고 판단해서 바로 육로로 직공했죠.

      나폴레옹은 천재지만 자신의 재능을 너무 과신해서 일이 잘 못 되었을 때를 대비하지 않고
      작전술에 너무 의존함으로서 원정에 실패했죠.
      만약에 루이 니콜라 다부의 계책대로 신중하게 러시아를 리보니아에서 압박하는 작전을 썼다면
      당시 러시아도 상황이 어려웠던 만큼 "보급문제가 해결된 대육군"을 상대로 패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보로디노 전투때에도 루이 니콜라 다부가 러시아군의 측면을
      우회기동해서 쳐야 된다고 건의했는데 역시 나폴레옹에게 묵살당했죠.
      이 때에도 나폴레옹이 루이 니콜라 다부의 건의대로 했다면 전투의 결과는 달랐을 수도 있죠.

    • 웃자웃어 2019.01.30 0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이텔슐리님, 애초에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서도 비슷한 전술을 썼는데도 러시아군에게 고전했습니다. 폴란드에서도 크게 고전했는데, 그보다 더 광활한 러시아라면 얼마나 더 고전하겠습니까? 그걸 모를리가 없는데도 러시아를 공격했고, 현지조달을 바탕으로 하는 전술을 유지했다는것 자체가 미친짓이죠.

  4. 카를대공 2019.01.28 2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나폴레옹 전쟁의 절정(?)인 러시아 원정의 길이 시작되는군요.
    예나 전투 때부터 그랬습니다만,전성기에 비해 한물 간 판단력의 나폴레옹이 어떻게 그려질지 흥미진진 합니다.

  5. 안드레이 2019.01.29 1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메테르니히의 활약이 돋보이네요 비스마르크도 그렇고 역시 외교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은 후세에서 보면 어떻게 저런 생각이 가능한가 신기하기만 합니다

  6. nashorn 2019.01.30 0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마지막..

  7. 샤르빌 2019.01.30 2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막연하게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에 비협조적으로 나와서 홧김에 전쟁이 터진줄 알았더니 역시 온갖 원인과 전조로 전운이 감돌고 있었네요.. 메테르니히의 공작과 폴란드 문제..

  8. starlight 2019.02.02 2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러시아 원정은 그 역사가 만약이 없다라는
    명확한 반증이죠. 2000km가 넘는 전역을 보급도 수송도
    병력 충원도 지연되고 끊어지고 소멸되고,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통신도 분절되고 병력 통제도 안되고, 자연사하듯 군마는 끊임없이 고꾸라지고, 병력들은 이탈하고 와해되고 이질에 쓰러지고 전투에서 소모되고,
    눈발에 얼어 동상으로 죽고 탈진과 아사로 학살아닌 학살같은 참상이죠. 아비규환입니다.

  9. 알키비아데스 2019.02.08 15: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헨리 키신저가 메테르니히 숭상할만 하네요

2019.01.17 06:30




Bernard Cornwell이 지은 Sharpe 시리즈는 1799년 영국군이 인도 중부 마이소르(Mysor) 지방을 침공하는 장면부터 시작됩니다.  그로부터 3년 정도의 안정기를 지나, 마이소르 지방의 수도인 셰링가파탐이 영국군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인도 군주 하에서 안정화되자, 영국은 다시 더 북부의 마라타 연합이 지배하는 지역을 노립니다.  이런 식으로 영국이 인도 전체를 식민지화하는데는 무려 100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로버트 클라이브가 7년 전쟁 도중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무찌르고 인도에서 영국의 주도권을 확보한 것이 1757년이었으니까, 정말 오랜 세월에 걸쳐 야금야금 먹어들간 셈이지요.  인도 대륙이 정말 크긴 큰가 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인 무렵, 영국은 아직도 인도 대륙 일부만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영국이 이렇게 인도라는 블루 오션을 아무 경쟁없이 야금야금 파먹어가는 동안, 나폴레옹은 해군이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인도가 영국에게 있어 거저먹기인 블루 오션이었을까요 ?  그렇게 표현한다면 인도 사나이들을 너무 모욕하는 셈이지요.  당시 인도는 정말 수많은 소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각 왕국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 각국의 문물, 특히 군사 기술을 많이 받아들여 유럽식 무장을 상당히 갖춘 편이었습니다.  


영국은 이렇게 잘 무장된 왕국들을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이간질로 차례차례 각개격파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어쨌든 압도적인 숫자의 인도군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무기가 비슷하더라도, 영국군의 훈련 및 전술 전략이 우월했기 때문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훗날 웰링턴 공작이 되는 아더 웰슬리도 군 생활 초기는 인도에서 시작합니다.  아래 묘사되는 전투는 훗날 웰링턴 공작에게 누군가 '공작께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전투는 어느 전투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웰링턴이 망설이지 않고 뽑은 아사예 전투입니다.  여기서 웰슬리가 이끄는 영국 정규군 스코틀랜드 연대와 동인도 회사 소속의 세포이 연대들은 인도 중북부의 마라타(Maratha) 연합군과 혈전을 벌입니다.  이 전투의 묘사를 보면, 당시 보병과 포병이 어떤 식으로 전투를 벌였는지 실감나게 느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Sharpe's Triumph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03년 인도) -------------------------------------


스코틀랜드 연대는 이제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관목 그루터기를 짓밟으며 나아갔고, 이제 곧 언덕 능선을 넘어서면 또 다시 인도군 포병대에 노출되면서 대포 사격을 받게 될 것이었다. 인도 포병대에게 처음으로 관측되는 것은 두 개의 연대 깃발일테고, 다음으로는 말을 탄 장교들, 그리고는 붉은색, 흰색, 검은색으로 치장된 전체 연대들이 머스켓 소총에 장착된 총검을 햇빛에 번쩍이며 인도군의 시야에 들어갈 것이었다.


'그리고는 신의 도움이 필요할테지'라고 샤프는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앞쪽에 있는 망할 놈의 대포들은 그 사이에 모두 재장전을 마쳤을 것이고, 이제 표적물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갑자기 첫번째 대포알이 바로 몇 발자욱 앞에 쾅하고 떨어졌다가 튕겨올라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고 머리 위로 넘어갔다.


"저 자식은 너무 일찍 쐈군." 바클리가 한마디 했다.


"이름을 적어 두지 그러나. (전투 중 잘못을 저지른 병사의 이름을 적어두었다가 체벌하는 관습에 대한 농담임 : 역주)"


샤프는 오른쪽을 보았다. 모두 세포이 용병으로 구성된 그 쪽 4개 연대는 아직 언덕 능선에 가려져서 대포의 포격으로부터는 안전한 사각지대에 있었고, 오록 대령의 초계병력과 제74 연대는 계곡 북쪽의 숲 속으로 들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하니스 대령의 스코틀랜드 연대가 가장 먼저 언덕 능선을 넘을 것이고, 적어도 한순간은 전체 적 포병대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될 것이었다. 몇몇 하이랜더(스코틀랜드인의 별칭 : 역주)는 마치 이왕 맞을 매를 빨리 맞겠다는 듯이 서두르고 있었다.


"천천히 !" 하니스 대령이 고함을 질렀다.


"이게 뭐 술집을 향한 달음박질인 줄 알아 ?  이 빌어먹을 놈들아 !"


엘시.  갑자기 샤프의 머리 속에 자기가 양조장 골목에서 도망친 이후 숨어들었던 웨더비 근처의 술집에서 일하던 여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왜 그 여자 이름이 기억나지 ? 그리고는 그 술집 내부의 광경이 떠올랐다.


'겨울비에 젖은 남자들의 코트에서 김이 올라오고, 엘시를 비롯한 여급들이 쟁반 위에 에일을 나르는 동안, 벽난로에서는 불이 타닥 소리를 내고 있겠지. 눈이 먼 목동은 술에 취했고, 개들이 식탁 밑에서 자고 있는 그 때, 내가 장교의 장식띠를 매고 칼을 찬 모습으로 그 검댕투성이 술집으로 걸어들어가는거야'


이런 상상을 하는 동안 샤프는 요크셔에 대한 것은 모두 잊어버렸고, 그 사이에 제778 연대는 웰슬리 장군의 참모진을 오른쪽에 끼고, 적 포병대의 코 앞의 평지로 올라섰다.


샤프가 우선 놀란 점은 적 포병대가 생각보다 굉장히 가까웠다는 것이었다.  저지대를 통과하는 동안, 제778 연대는 적 포병대로부터 150보 전방까지 접근해 있었다. 샤프가 두번째로 놀란 것은, 인도군이 정말 멋지게 정비가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적 포병대는 마치 검열을 받듯이 정열해 있었고, 그 뒤로는 인도 마라타 연합군의 연대들이 4줄의 밀집 대형으로 깃발 아래 정렬해 있었다.  샤프가 '아마도 죽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생긴 모양이다'라고 생각할 때, 그 멋진 적군의 대형이 한꺼번에 모두 포연 속에 사라져 버렸다. 그 포연은 물결치듯이 밀려나왔는데, 그 속에서 불과 몇 야드 간격으로 포화의 번쩍임이 보였다. 쏟아져 나오는 포연 바로 앞의 곡식들이 포화의 바람에 휩쓸려 넘어지는 동안, 무거운 대포알들이 하이랜더들의 대오를 찢어놓으며 날아왔다.


사방에서 피가 튀었고, 박살이 난 병사들이 대살육 속에서 쓰러지거나 뒤로 휩쓸려 날아갔다. 어디선가 병사 하나가 가쁜 숨을 내쉬었지만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백파이프 연주병 하나가 다리가 날아간 채 쓰러진 병사에게 악기를 내던지고 달려갔다. 몇 야드 간격마다 죽거나 죽어가는 병사들이 뒤엉켜 쓰러져서, 전체 대열 중 어디를 대포알이 휩쓸고 지나갔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한 젊은 장교가 놀라서 눈을 뒤집고 머리를 흔드는 자기의 말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니스 대령은 자기 앞에 창자가 터져나온 채 쓰러져 있는 병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기 말을 그 옆으로 돌아가게 했다.  하사관들은 대열에 빈틈이 생긴 것이 마치 하이랜더들의 잘못이라는 듯이 화를 내며 곳곳에 생겨난 간격을 메꾸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갑자기 어색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웰슬리 장군은 옆을 보며 바클리에게 뭐라고 말을 했지만 샤프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는데, 그제서야 샤프는 적의 포격으로 자기의 귀가 멍멍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웰슬리의 예비마인 디오메드가 샤프의 손아귀로부터 고삐를 당기며 옆으로 가려고 했기 때문에, 샤프는 그 회색말을 다시 자기 쪽으로 당겨야 했다.  피 위로는 온통 파리떼가 들끓었다. 한 하이랜더가 자기를 놔두고 행진해 나가는 동료들을 보며 엄청난 욕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그 병사는 무릎과 팔꿈치를 땅에 댄 채 엎드려 있었는데, 겉보기에는 상처는 전혀 없어 보였지만, 샤프를 한번 쳐다보면서 마지막으로 욕 한마디를 지껄이고는 푹 쓰러져 버렸다.


병사들의 배에서 터져 흘러나온 퍼런 창자 위로 더 많은 파리떼가 모여들었다. 다른 병사 하나는 머스킷 소총을 멜빵으로 질질 끌면서 관목 그루터기 사이를 기어갔다.


"이제 침착하게 !" 하니스 대령이 외쳤다.


"서두르지마 이 자식들아 !  지금 달리기 경주하는 줄 알아 ?  니들 에미를 생각해 !"


"에미 ?"  블래키스턴 소령이 물었다.


"간격을 메워라 !" 하사관 하나가 외쳤다.  "간격을 메워 !"


마라타 포병대는 미친 듯이 재장전을 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보통의 쇠로 된 포탄이 아니고 속에 소총탄이 가득 든 깡통으로 된 산탄을 준비하고 있었다.  포연이 산들바람에 걷히고 있었고, 샤프의 눈에 포구를 쑤시며 화약을 운반하는 적병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른 적병들은 아까의 포격으로 뒤로 밀려갔던 포신들을 지렛대로 다시 스코틀랜드 연대에게 조준하고 있었다.


웰슬리는 그의 숫말이 하이랜더들의 대열 앞에서 너무 멀리 나아가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세포이 용병들은 아직 언덕 능선 밑의 사각지대에 있었고, 우익은 북쪽의 숲과 구릉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 순간에는 하니스 대령의 하이랜더들 600명이 10만 명의 인도 마라타 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상자와 전사자를 뒤에 내버려두고 자기들의 죽음을 장전한 채로 기다리는 적의 대포를 향해 탁 트인 벌판을 걸어갔다.  백파이프 연주병이 다시 연주를 시작했고, 그 사나운 음악이 하이랜더들의 발걸음에 새로운 힘을 주는 듯 했다. 그들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완벽한 대오를 이루고 있었고 아주 평온해 보였다. '사람들이 스코틀랜드인들에 대해 노래를 만든게 거저 만든게 아니군' 하고 샤프는 생각했다.  그때 말발굽 소리가 뒤에서 들려 돌아보니 캠벨 대위가 아까의 전령 임무로부터 돌아오고 있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캠벨 대위는 아메드누거 성벽 위에 맨 처음 기어오른 공으로 1계급 특진하며 웰슬리에게 발탁된 바로 그 실존 인물 캠벨 대위입니다.  : 역주)


대위는 샤프를 보고 씩 웃었다.


"난 내가 너무 늦었나 싶었지."


"시간에 딱 맞게 오셨습니다, 대위님. 정말 딱이요." 샤프는 말했다. 그리고는 황당해했다. '죽을 시간에 딱 ?'


캠벨은 웰슬리 장군에게 다가가서 보고를 했다.  장군은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다시 앞쪽의 대포들이 불을 뿜었는데, 이번에는 아까처럼 일제히 쏘지 않고 재장전을 마친 순서대로 개별적으로 발사했다.


각각의 포성은 끔찍하게 커서 귀를 멍멍하게 울렸고, 산탄은 스코틀랜드군의 바로 앞에서 수많은 먼지 연기와 함께 튀어올라 병사들을 뒤로 낚아채듯 휩쓸어버렸다.


각각의 포탄은 속에 둥근 머스킷 소총탄이나 쇳조각, 돌조각이 가득 든 금속 깡통이었고, 포구를 떠나자마자 깡통이 찢어지며 그 내용물을 마치 거대한 산탄총처럼 쏟아붓는 것이었다.


차례차례 또 다른 대포가 불을 뿜었고, 각각의 포격이 대지를 강타하며 각각에게 할당된 스코틀랜드인을 저승으로 보내거나 혹은 고향 교구에게 부담이 될 불구자로 만들거나, 나중에 군의관의 무자비한 손에 고통을 당하도록 만들었다.  북치는 소년들은, 비록 하나는 다리를 절고 있었고 또 하나는 자기 북에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지만 아직 연주를 계속하고 있었다.  백파이프 연주병들은 적의 대군 속으로의 행진이 마치 뭔가 축하할 일인 것처럼 좀더 쾌활한 음악을 연주했고, 몇몇 하이랜더들은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렇게 서두르지 마라 !" 하니스 대령이 외쳤다.


"그렇게 서두르지 마 !" 그는 큼직한 칼자루가 달린 클레이모어(스코틀랜드 식 대형 검)를 손에 들고 자기 병사들의 바로 뒤에 바짝 붙어서 가고 있었는데, 마치 병사들을 헤치고 말을 달려서 자기 연대를 박살내고 있는 적의 포병들에게 그 거대한 칼날을 들이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산탄에 곰가죽 모자가 날아갔는데, 그걸 쓰고 있던 병사는 멀쩡했다.


"이제 침착해라 !" 소령 하나가 외쳤다.


"간격을 메워라 !  간격을 메워 !"  하사관들이 외쳤다.


"대오의 간격을 메워라 !"


대오의 간격을 메우는 임무를 띤 상병들이 대열 뒤에서 바삐 움직이며 병사들을 좌우로 끌어다가 포탄이 휩쓸어간 자리를 메웠다. 이제 그 빈 자리를 더 넓어졌는데, 그 이유는 이전의 보통 대포알은 한번에 한개 열의 병사를 날려버렸지만, 지금의 산탄은 네다섯 열의 병사를 한꺼번에 낚아챘기 때문이었다.


네 문의 대포가 불을 뿜더니 이어서 다섯 번째, 그리고는 나머지 전체 대포들이 연달아 한꺼번에 불을 뿜었다.  샤프 주변의 공기는 거센 포탄이 일으키는 바람으로 갈기갈기 찢어졌고, 하이랜더들의 대열은 그 폭풍 속에서 뒤틀리는 듯 했다.  그 뒤에 피를 흘리고, 토하고, 울부짖고, 동료 혹은 어머니를 부르는 병사들을 남겨두긴 했지만, 그래도 남은 자들은 대오의 간격을 좁히며 굳건하게 계속 전진했다.  더 많은 대포들이 불을 뿜으며 적진을 포연으로 감쌌다.  샤프는 산탄이 연대의 병사들에게 날아와 꽂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병사들이 그렇게 하듯, 하이랜더 병사들은 개머리판이 사타구니를 가리도록 소총을 들고 있었는데, 한방 한방의 포화로부터 수많은 머스킷 총탄이 쏟아져나와 병사들의 소총을 따닥 때리는 소리를 냈다.  이제 병사들의 대오는 처음보다 많이 짧아져 있었지만, 이제 적 대포가 뿜어낸 자욱한 포연의 가장자리까지 거의 도달했다.


"778 연대 !" 하니스 대령이 우렁찬 소리로 외쳤다. "정지 !"


웰슬리 장군은 말의 고삐를 당겼다.  샤프가 오른쪽을 보니, 계곡으로부터 세포이 용병들이 한줄의 긴 붉은 선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는데, 그 선은 세포이들이 관목으로 가득찬 계곡을 통과하면서 조각조각 끊어져 있었다. 연이어 마라타 연합군의 북쪽 대오에서도 포격을 시작했고 세포이들의 대오는 더욱 더 조각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 좌측의 스코틀랜드인들처럼, 세포이들도 포화를 무릅쓰고 전진했다.





(당시 영국군 정규병보다 세포이가 좋았던 점은 2가지 -  채찍질 체벌이 없었다는 것과 반바지)




"조준 !" 하니스의 구령 속에는 약간의 흥분감이 섞여있었다.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머스킷 소총을 들어올려 조준했다. 이제 그들은 적 포병들로부터 겨우 60야드(54m) 떨어진 상태였고 활강총신을 가진 머스킷 소총도 그 정도의 거리에서는 상당히 정확했다.


"높게 쏘지 마라, 이 개새끼들아 !" 하니스가 경고했다.


"높게 쏘는 놈들은 한놈 한놈 채찍질을 할거다.  발사 !"


소총의 일제사격 소리는 거대한 대포 소리에 비하면 빈약하게 들렸지만 그 소리가 주는 안도감은 대단했고, 하이랜더들의 일제사격이 그루터기 너머를 휩쓰는 것을 보며 샤프는 하마트면 환호성을 올릴 뻔 했다.  적 포병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몇몇은 죽었을테지만, 나머지는 그저 큰 포가 뒤에 숨어있었다.


"재장전 !" 하니스가 소리쳤다.


"우물쭈물하지마라 !  재장전 !"


여기서 그동안 하이랜더들이 받았던 훈련이 그 성과를 발휘했다.  머스킷 소총은 재장전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로운 물건이었고, 특히나 17인치(43cm)짜리 총검이 착검된 경우는 더욱 그랬다. 그 삼각형 칼날은 총구에 탄약을 밀대로 밀어넣는 것을 까다롭게 했기 때문에, 몇몇 병사들은 총검을 떼내어 재장전을 쉽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병사들은 고향에서 몇주간 힘들게 훈련받은 그대로, 신속하게 재장전했다.  탄약을 넣고, 밀대로 밀어넣고, 뇌관 화약을 집어넣고, 다시 밀대를 총신 홈에 집어넣었다. 총검을 떼어냈던 병사들은 서둘러 다시 착검했고, 다시 세워총 자세로 돌아갔다.


"지금 장전한 총알은 적 보병을 위해 남겨둔다 !" 하니스 대령이 외쳤다.


"이제 전진이다 ! 저 이교도 개자식들에게 제대로 된 안식일 학살이 뭔지 보여줘라 !"


이건 복수였다.  이건 그 동안의 분노의 고삐를 풀어준 것이었다.  적 대포는 아직 재장전되지 않은 상태였고, 적 포병대는 일제 사격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대포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백병전 거리에 들어올때까지 재장전할 시간이 없을 것이었다.  몇몇 적 포병은 도주했다.  샤프의 눈에 말을 탄 마라타 장교 하나가 도주하는 포병들을 잡아들여 칼등으로 다시 원위치로 몰고 가는 것이 보였다.  또한, 자기 바로 앞에 있는 색칠이 된 거대한 대포를 두 명의 적 포병이 장전을 끝내고 옆으로 돌아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제 우리가 받게 될 것에 대해서도... (뒤에는 '주님께 감사할 수 있도록 하소서 - 당시 일제 사격을 받기 전 병사들이 외우는 일종의 기도 : 역주)" 블래키스턴 소령이 중얼거렸다.  이 공병 장교도 적 포병이 재장전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 대포가 불을 뿜었다.  그 포구로부터 몰아쳐닥친 포연이 장군 일행을 삼켜버렸다. 한순간 샤프는 희미한 연기 속에서 웰슬리 장군의 키 큰 윤곽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순간 보이는 것은 피바다 속에 쓰러지는 장군의 모습이었다.  산탄 조각들이 샤프 주변을 휩쓸고 나서 한 박자 뒤에 그 포격의 열기와 폭풍이 그의 몸을 휘감고 지나갔지만, 그는 웰슬리 장군의 바로 뒤에 있었으므로 포격을 정통으로 맞은 것은 바로 웰슬리였다.


실은 장군이 아니고 그의 말이었다.  그 종마는 십여발의 산탄을 맞았지만 웰슬리는 기적적으로 상처 하나 없었다.  그 큰 말은 땅에 쓰러지기도 전에 이미 숨이 끊어졌다.  말이 쓰러지기 전에 웰슬리가 발을 등자에서 빼면서 안장에 손을 대고 몸을 빼내는 것이 샤프의 눈에 들어왔다.  웰슬리는 오른발이 먼저 땅에 닿자, 종마의 몸무게가 그의 다리 위를 덮치기 전에 비틀거리며 펄쩍 뛰어 몸을 피했다.  캠벨 대위가 장군 쪽을 돌아다 보았지만, 장군은 그에게 그대로 전진하라고 손짓을 했다.  샤프는 타고있는 암말에 박차를 가하며 벨트에서 디오메드의 고삐를 풀어내었다.  먼저 죽은 말에게서 안장을 벗겨야 하나 ?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한 샤프는 먼저 말에서 내렸다.  하지만 죽은 종마에게서 안장을 벗겨내는 동안 암말과 디오메드는 어떻게 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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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ㅇ 2019.01.17 14: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전도 원전이지만, 역시 나시카님이 번역하실때의 그 필력 또한 대단하십니다. 정말 숨도 안 쉬고 읽었습니다 ㅎㅎ

  2. 셰링가파탐 2019.01.17 16: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셰링가파탐의 마이소르 현지식 이름이 스리랑가파트남이고 셰링가파탐은 영국인들 이 발음을 제멋대로 한 느낌이더군요. 가서 신기했습니다. 왕궁 몇 개만 남아있지만 책에서만 읽은 그곳이 눈앞에...

  3. reinhardt100 2019.01.17 2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좀 황당한 내용이긴 한데 저 시절 기준에서는 체벌을 하지 않는다는 건 교화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웃기는 소리가 되기도 합니다.

    19세기 초반 영국의 교육관 및 인간관에서 체벌은 진짜 '사랑의 매'로써 '무지몽매한 하층민들을 교화하는 수단'으로써 받아들여졌죠. 이건 때리지 않으면 인간 대접해줄 필요가 없다는 소리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헛소리가 맞지만 저 당시에는 그게 기본이었습니다. 세포이들이 빠따(?)를 안 맞는다는거? 영국 동인도회사군이나 정규군 입장에서 좋은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써먹고 버리는 소모품이라는 소리입니다.

    참고로 영국이 인도를 정복할 때 의외로 정규군이 많이 투입된 편입니다. 동인도회사가 파산하면서 정부로부터 빌린 구제금융의 대가로 제정된 노스법, 인도통치에 관한 법률 등 같은 각종 압력 때문에 전쟁이 없던 시절에 나름 남아나던 예비역(?)을 인도 정복전에 꽤나 투입시킵니다. 정부 입장에서는 민간사회도 안정시키면서 예비역들 줄 돈 들어가는 걸 회사에 떠넘기는 셈이었고 회사 입장에서도 세포이같은 못 믿을 용병 대신 본국 정규군을 동원해서 싸우는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다보니 꽤나 빈번했습니다. 문제는 이 정규군 출신들이 본국이 아니다보니 군기가 개판이 되는 경향이 있었고 사고도 자주 일어났다고 합니다.

  4. ㅇㅋㅂㄹ 2019.01.18 14: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미가 애미 말하는건가요?

  5. TheK2017 2019.01.18 19: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보다가 만 이 느낌은. ??
    아쉽네요. ^ㅇ^*

  6. ㄷㄷ 2019.01.26 2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 생각하면 좀 이해가 안가는게, 왜 웰링턴이 적 포병에 대해 대포병 사격, 경보병으로 저격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대로 맞으면서 갔는지 의아하네요. 아니면 차라리 적 포병 포탄이 떨어질 때까지 엎드려있는 것도 인명피해를 줄이는 방법일텐데 말이죠.

    • 빵뚜아 2019.02.06 0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 전술을 현대전 기준으로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어려우실꺼에요. 애초에 포격을 정면으로 받으며 밀집대형으로(간격이 벌어지면 메워가면서) 접근하는것 자체가 현대전 기준으로는 넌센스입니다.

    • 찰리 2019.06.28 06: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는 총의 사거리와 정확도가 매우 떨어졌기 때문에 저격은 엄두도 낼 수 없었죠. 포라는 것도 지금처럼 곡사로 떨어져 폭발하며 파편을 마구 쏟아내는게 아니라 직사로 날아가는 쇠덩이였기 때문에 떼로 엎드려있다가는 땅을 통통 튀어오는 포탄에 피죽이 되기 십상이었구요. 게다가 엎드려있으면 총을 장전할 수가 없어 접근한 적 보병의 먹잇감이 될 수 밖에요 ㅎ

  7. 철인18호 2019.04.25 15: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샤프 시리즈 드라마인가 영화인가는 유치해서 못보겟더군요. 걸핏하면 투항병으로 변신해서 적진에 침투하고...

2019.01.14 01:01



모든 전쟁에는 돈이 아주 많이 들어갑니다.  흔히 미국이 30년대의 대공황에서 빠져나온 것이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 때문이라기 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왜 불황이 생길 때마다 네바다 사막이든 태평양 한가운데든 가상 표적을 세우고 거기에 병력과 함대를 동원해서 맹폭격을 가하지 않겠습니까 ?  결국 그렇게 전쟁하느라 쓴 돈은 누군가 갚아야 하는 법이고, 미국도 전후 20년 정도 최고 세율 90% 정도의 엄청난 소득세를 부과하여 그 비용을 충당해야 했습니다.




(1913-2008 기간 중 미국 소득세 최고 세율의 역사입니다.)




나폴레옹 전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국이든 프랑스든 모두 누군가는, 정확하게는 결국 국민 전체가 전쟁 비용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전쟁 비용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매우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영국은 빚을 더 냈고, 프랑스는 세금을 더 걷었다"



그냥 이렇게만 놓고 보면 프랑스 측이 훨씬 더 건실한 재정 정책을 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도 국채를 발행하여 전쟁 비용을 처리하고 싶었으나 신용불량의 전력 때문에 할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세금만으로 전쟁을 치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쟁에는 돈이 과다하게 많이 들어가는데, 그걸 모조리 세금으로 충당하려면 국민들에 대한 세금 부담이 너무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국민들이라고 해도 세금을 4~5배로 올려버리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거든요.  자동차가 꼭 필요하긴 한데 당장 그럴 돈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  보통 카드 할부로 구입합니다.  말이 좋아서 할부지 사실은 카드사에게 비싼 이자를 내고 빚을 지는 것이지요.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전선의 부대들과 바다 위의 함대들, 그리고 동맹국들이 돈을 달라고 아우성칠 때는 그렇게 빚을 내야 합니다.  


대대로 유럽의 모든 정부들은 전쟁을 위해 빚을 냈습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처음 설립된 중앙은행인 스웨덴 중앙은행 릭스방크(Riksbank)도 러시아와의 전쟁에 들어가는 군자금을 빌리기 위해 만들어진 은행이었고, 나폴레옹 전쟁 기간 전후에 세워진 여러 유럽 국가들의 중앙은행들도 모두 전쟁 자금을 충당하거나 그로 인해 생긴 빚을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인 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도 독립전쟁으로 인한 빚을 처리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이지요.  이렇게 중앙은행이라는 것의 기원은, 정부가 민간으로부터 전쟁 자금을 안정적으로 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럽 각국 중앙은행의 설립과 연관된 전쟁들입니다.)




영국은 이미 100년도 전인 17세기 말에 영란은행(Bank of England)를 설립하여 전쟁 비용을 충당할 정도로 전쟁 금융에 매우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국채 발행이 잘 되었던 것은 금융 관료들의 유능함보다는 기본적으로 영국 정부가 꼬박꼬박 채권 상환을 잘 하여 신용을 쌓아왔던데다, 결정적으로 왕실이 아닌 의회가 국채 발행과 상환을 책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정이야 언제 무슨 정변이 나서 뒤집어질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토지와 무역회사 등 주요 자산을 소유하고 있던 대주주들로 구성된 의회는 글자 그대로 주식회사 영국 그 자체였거든요.  따라서 의회가 책임지고 상환하겠다는 채권은 전쟁치고는 꽤 낮은 이자로도 잘 팔렸습니다.  덕분에 영국은 7년 전쟁의 경우 전체 전비의 51%를, 그리고 패전으로 끝난 미국 독립전쟁의 경우 81%를 국채 발행으로 메꿀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국민들의 세금 부담은 전시에도 급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영국 국채의 신용도가 괜찮았던 것은 영국 재무부에게 결정적인 여유를 주었습니다.  잠정적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여 금본위제에서 벗어남으로써, 채권 뿐만 아니라 지폐도 추가로 찍어내어 자금조달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즉, 일정 수준의 인플레를 유발시킴으로써 기존 국채 가치를 떨어뜨렸던 것입니다.  이걸 인플레 세금(inflation tax)라고 합니다.  국민에게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통화 팽창을 통해 지폐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 비용을 국민들이 부담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Lieutenant Hornblower by C.S. Forester (배경: 1803년 영국) --------------------


(아미앵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 간에 짧은 평화가 있던 시기에, 무일푼이던 혼블로워 중위는 보직 해임 상태가 되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집니다.  결국 혼블로워는 고급 장교들이 드나드는 클럽에서 4명이서 하는 카드 게임 때 부족한 머리 숫자를 채워주는, 일종의 타짜 노릇을 해서 먹고 삽니다.)


그는 혼블로워가 가슴 안주머니로 지폐를 쑤셔 넣는 것을 보았다.


패리 제독이 말했다. "예전 화폐를 다시 부활시킨다면 더 좋지 않겠소 ?  정부가 이런 지저분한 지폐를 없애고 예전의 멋진 기니 금화로 되돌아간다면 말이오."


"그거 정말 좋겠군요." 대령이 말했다.


램버트가 말했다.  "그 놈의 육지 상어(순진한 뱃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들)들은 해외에서 들어오는 배들은 모조리 상대한다오.  1기니당 23실링 6펜스를 주니, 틀림없이 실제로는 그보다 더 받을 수 있을거요."  (원래 1기니는 21실링에 해당합니다: 역주)


패리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에 탁자에 내려놓았다.


"보니(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비칭:역주)는 옛날 프랑스 화폐를 부활시켰소.  보시오." 그는 말했다.  "이 금화를 나폴레옹라고 부른다오. 그 친구가 이제 종신 제1통령이니 말이오.  이 금화 한닢에 20 프랑이라오.  예전에는 우린 이걸 루이 금화(louis d'or)라고 불렀지요."


"나폴레옹, 제1통령," 대령은 호기심을 가지고 금화를 보며 읽고는, 뒷면을 돌려 읽었다. "프랑스 공화국."


------------------------------





(진정한 남자라면 모양 빠지게 지폐 같은 것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나폴레옹의 얼굴이 새겨진 40 프랑짜리 금화 정도는 누구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 아니겠습니까 ?  무게 12.91g, 순도 90%입니다.  그러나 이런 남자의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눈물을 흘려야 했는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빚으로는 소도 잡아먹는다고 하지만, 모든 빚은 결국 누군가가 갚아야 하는 법입니다.  카드 할부로 자동차를 산 경우에 몇 년에 걸쳐 월급 절약하여 계속 갚아나가야 하는 것과 똑같이, 국가도 세금을 좀 더 걷든가 나라 살림을 좀 줄이든가 해서 국채를 결국 갚아야 합니다.  영국 정부는 감채기금(sinking fund, 장기 채무 상환을 목적으로 별도로 적립해두는 기금)을 설립하여, 전쟁이 끝난 뒤에 세수 잉여분을 여기에 적립함으로써 국채를 꾸준히 상환했습니다.  


영국도 마냥 빚만 낸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세금도 더 걷었습니다.  당시 영국 수상이던 소(小) 피트(William Pitt the Younger)는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근대 역사상 처음으로 소득세(income tax)를 도입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세금이란 사람 머릿수에 따라 내는 인두세와 토지 등의 재산에 따라 내는 재산세, 그리고 관세와 부가세, 소비세 등의 형태였거든요.  사람이 일을 해서 번 소득 자체에 대해 세금을 낸다는 것은 근대 유럽 사회에 없던 개념이었습니다.  소 피트가 도입한 소득세는 누진세(progressive tax)라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 합니다.  즉 소득이 더 많을 수록 더 높은 세율의 세금이 부과되는, 꽤 현대적인 개념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60파운드 이하의 소득에 대해서는 세금이 면제되었고, 60 파운드 이상의 소득에 대해서는 0.83%부터 시작하여, 200 파운드가 넘는 소득에 대해서는 최대 10%까지 세율이 올라갔습니다.   이는 나폴레옹이 국민들에게 부과했던 세금은 모두 단일 세율의 재산세와 소비세 등이었다는 것에 비하면 굉장히 진보적인 조세 정책이었습니다.  




(피트 수상의 소득세에 대한 당시의 풍자 만화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금 좋아하는 국민은 없지요.)




한편, 프랑스에서는 상황이 상당히 달랐습니다.  의회가 권력을 가지고 있고 이미 산업 혁명을 시작했던 영국과는 국가 권력 구조와 산업 구조 뿐만 아니라 역사까지 달랐으니까요.  부르봉 왕정 시절, 아직 중앙은행도 없던 프랑스는 그냥 정부가 민간에게 직접 국채를 판매하는 형태로 7년 전쟁과 미국 독립전쟁을 치렀습니다.  국가 자산 중 상당 부분을 귀족과 교회가 쥐고 있었는데 정작 그들은 면세 혜택을 받았으니 그때 쌓였던 빚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세금을 늘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설프게 삼부회를 소집했다가 터진 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었습니다.  새로 들어선 국민공회는 몰수한 귀족과 교회의 토지 자산을 담보로 1789년 12월 5% 이자의 공채를 발행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아시냐(Assignat) 지폐가 됩니다.  즉, 처음에는 채권이었으나, 나중에는 0% 금리의 지폐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보통 돈은 태환지폐라고 해서, 금과 바꿀 수 있는 증서같은 것이었는데, 금이 없으니 금 대신 토지와 바꿀 수 있는 증서를 발행한 것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대표적인 실패작 아시냐 지폐입니다.)




아시냐라는 저 프랑스어 스펠링을 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저건 정부가 강제로 지정한(assigned) 돈으로서, 태생부터가 자연스러운 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이미 파탄난 경제로 인해 돈이 궁해진 국민회의는 이듬해인 1790년부터는 애당초 몰수된 토지의 총가치를 훨씬 넘어서는 아시냐 지폐를 찍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하이퍼 인플레였습니다.  특히 정부가 인플레를 잡는답시고 생필품 가격 상한제를 강제하자, 생필품이 시장에서 싹 사라지고 암시장에서만 거래되는 등, 역효과에 역효과만 불러일으켰고, 결국 수차례의 폭동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시냐 지폐는 가뜩이나 혁명으로 어수선한 프랑스 사회를 경제적으로 다시 한번 뒤흔들어놓고 7년만에 불명예스럽게 퇴장합니다.  퇴장할 때 정부는 이 지폐를 액면가의 3.33%에 해당하는 토지와 교환해줍니다.  투자 손실율 96.67%...  더군다나 투자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프랑스는 1720년대에도, 존 로 (John Law)라는 스코틀랜드인이 일으킨, 미국의 부동산에 투자하는 미시시피 사(社)라는 대규모 투자 거품 사건으로 인해서 지폐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있었습니다.  미시시피 거품 사건은, 한줄로 요약하면 존 로가 미국 땅을 담보로 프랑스에 지폐 발권력이 있는 금융회사를 차렸다가 거품으로 끝난 것입니다.  이때 프랑스인들은 지폐는 종이 쪼가리일 뿐 결코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었지요.  이 아시냐 지폐 사건은 프랑스에서의 지폐의 위치에 대해, '관 뚜껑에 못질을 한'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국채와 지폐에 대한 국민들의 신용이 이렇게 바닥을 친 상태인지라, 총재정부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으로서는 부르봉 왕가나 국민공회처럼 채권이나 지폐를 찍어 재정난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프랑스 영토였던 루이지애나(이름 자체가 프랑스 왕 '루이의 땅'이지요)를 미국 정부에게 매각하여 돈을 마련하기도 하고, 정권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지는 프랑스 중앙은행(Banque de France)을 설립하는 등 시장의 통화와 정부 재정을 안정화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기본적으로는 금은 복본위제(bimetallic standard)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내 통치 기간 중에는 절대 새로운 지폐를 추가로 발행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한 나폴레옹의 발언으로 대표됩니다.  실제로 1800년 나폴레옹의 통령 정부는 기존 정권에서 발행했던 채권에 대해 (이미 기존 채권의 가치를 크게 절하시킨 뒤이기는 했지만) 이자를, 그것도 금화나 은화로 지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함께 나폴레옹은 영국처럼 감채기금을 마련하여 장기 국채의 상환을 위한 안정성을 갖추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영국처럼 프랑스도 국가 신용을 끌어올려, 전쟁 비용을 빚으로 충당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Bimetallic standard를 보통 복본위제라고 합니다.  금본위제와는 달리 복본위제에서는 은도 지폐의 교환 대상이 되는데, 다만 금과 은의 교환비를 정부가 지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유럽은 금의 많이 나는 대륙이 아니라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전통적으로 은본위제를 사용했었지요.)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국채를 대규모로 발행할 정도로 신용을 끌어올릴 수 없었습니다.  무너지기는 쉬워도 쌓기는 어려운 것이 바로 신용이거든요.  결국 나폴레옹은 전쟁 비용을 세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결코 전제군주가 아니었고 국민들의 지지에 권력의 근거를 둔 황제였습니다.  전비 충당을 위해 세금을 지나치게 올렸다가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잃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 세수 확대를 위해 길거리에서 채소와 생선을 파는 가판대에 대해서도 세금을 부과하자는 제안이 나오자,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광장은 물처럼 무료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소금과 와인에 소비세를 부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  서민들의 가판대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보다는, 곡물 시장을 중흥시키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더 파리에 어울리는 조치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영국과는 달리 돈을 구할 다른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전쟁은 스스로 비용을 충당해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바로 전쟁 배상금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부터,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패전국에게 무거운 전쟁 배상금을 뜯어냈습니다.  1807년 프로이센을 격파한 뒤에는 무려 1억2천만 프랑을 배상금으로 요구하여 프로이센을 나락으로 빠드렸고, 1809년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킨 뒤에는 그나마 좀 양보하여 8천5백만 프랑의 배상금을 뜯어냈습니다.  나폴레옹과 같은 군사 천재에게는 매우 수지맞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좌절을 안겨준 것은 바로 스페인이었습니다.  분명히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모두 무찌르고 거의 모든 영토를 정복했지만, 대체 이것들이 항복을 하지 않으니 배상금을 뜯어낼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스페인에서의 전쟁에 막대한 돈을 퍼부었는데도 그 비용을 충당할 방법이 없다보니 나폴레옹으로서는 무척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또다른 돈줄은 이탈리아와 폴란드, 네덜란드와 독일 소공국 등 위성국가들로부터의 세금이었습니다.  이들은 동네 양아치에게 보호비조로 돈을 바치는 것처럼 나폴레옹에게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과중한 배상금과 세금으로 인해 나폴레옹은 유럽 전체에게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늘어난 전쟁 비용으로 프랑스 국민들까지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게 되어 지지율이 떨어졌으니까요.  결국 1815년 워털루 전투 이후 최종적으로 맺은 파리 조약에서, 프랑스는 무려 7억 프랑의 배상금을 연합국에게 물어내야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이러니컬한 부분은 그 배상금은 연리 5%의 프랑스 국채로 지불했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이 연전연승할 때는 못하던 것을, 패배 후에는 해낸(?) 것입니다.  






Source :  British and French finance during the Napoleonic wars by Michael D. Bordo & Eugene N. White 

https://www.businessinsider.com/history-of-tax-rates

https://en.wikipedia.org/wiki/Progressive_tax

https://fr.wikipedia.org/wiki/Aspects_%C3%A9conomiques_et_logistiques_des_guerres_napol%C3%A9oniennes

https://en.wikipedia.org/wiki/Treaty_of_Paris_(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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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eltro 2019.01.14 05: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등!

  2. 푸른 2019.01.14 1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이 특히 더 재밌는 글이네요ㅋㅋ

  3. 아즈라엘 2019.01.14 17: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국은 국채를 팔아서 전쟁비용을 충당했죠
    퍼스트어벤저스 보면 캡틴이 국채팔려고 쇼하러 다니는 장면이 나오죠

    • reinhardt100 2019.01.14 22: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반은 맞고 반은 맞지 않다고 보는게 좀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총 전비가 3240억 달러였는데 이 중 전시 국공채로 발행하여 충당한 비용이 약 2천억 달러 조금 넘습니다. 나머지는? 그대로 세금으로 충당했습니다.

      그나마 미국은 나았죠. 영국만 해도 국공채 발행할 능력을 이미 상실했고 결국에는 미국의 무기대여법으로 겨우 전쟁을 치르는 판이었고 독일은 전유럽을 쥐어짜서 전쟁을 수행했죠. 일본은 그럴 여건도 안되어서 점령지 각지의 중앙은행의 조폐기 돌린 것과 군표 발행으로 전쟁을 수행하다가 그대로 인플레로 전시경제가 개판났었으니까요.

    • 최홍락 2019.01.15 0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은 러일전쟁때부터 시작하여 태평양전쟁까지 카드빚 돌려막기식으로 전쟁을 벌려놔서 그 분야에 있어서 끝판왕인지도요. 러일전쟁때 채무를 80년대 되서야 다 상환했다고 하니까요.

      태평양 전쟁때 빚이 아직 남아있기도 하죠. 일본 정부의 일반회계의 부채 항목에 구 임시군사비 차입금이라는 명목으로 잡혀있는 금액이 414억엔 정도라는군요. (45년 기준 일본 국가예산이 214억엔.)

      이 방법이 재미있는게 위장거래와 분식회계를 통한 부채라는거죠. 우선 베이징을 중심으로 괴뢰정부인 중화민국임시정부를 수립, 중국연합준비은행권(연은권)을 발행하도록하고 조선은행 베이징지점이 중국연합준비은행과 각각 상대측 은행에 예금계좌를 개설합니다. 관동군이 군사비를 요구해오면, 조선은행 베이징지점은 보유중인 연은 명의의 일본 엔화 예금계좌에 해당 금액을 지출한 것으로 기재하고 이 예금계좌에는 앞에서 얘기한 임시군사비특별회계에서 지출한 엔화 자금이 입금된 것으로 기록하죠. 이를 담보로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조선은행 베이징지점 명의의 연은권 예금계좌에 같은 금액을 지출한 것으로 적은 후 이에 상당하는 연은권을 찍어 군사비로 내주는 방식이죠.

      그러나 당초 이 임시군사비특별회계에서 지출한 엔화 자금은 실제로는 중국으로 송금되지 않은 채 조선은행과 연은의 예금계좌에 금액만 기재될 뿐인 가짜 예금이었습니다. 연은권의 발권 담보가 된 엔화 자금은 모두 조선은행 도쿄지점에 고스란히 남았다가 일본 국채를 구입하는데 사용되서 다시 일본은행의 국고로 되돌아갔다. 그러니까, 일본군의 군사비 지출인데도 일본 엔화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조선은행을 앞세워 무제한으로 현지통화를 발행해 군자금을 충당한 거죠. 414억엔은 그야말로 액면가치일텐데 이를 당시 기준으로 환산했으면 꽤 큰 금액이고요.

    • reinhardt100 2019.01.17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도 일본은 연은권, 남발권, 대은권, 조은권, 일은권, 몽강권,만은국폐 간의 대차거래를 패전 직전에 금으로 청산했다는 겁니다. 단, 제대로 깡(?)을 쳐서 발행고로 최소 당시 금액으로 수백억엔 어치를 단 십수톤의 금으로 했다는게 문제죠.

      특히 조선은행권이 심각했는데 총독부나 조선은행 간부들이 이걸 청산할 때 그냥 금으로라도 변제를 했어야 했는데 이건 제대로 하지도 않고 그냥 발행준비금이었던 일본국채를 더 매입하는 방식으로 조폐기 돌려서 증발하는 바람에 전후 인플레이션이 미친듯이 나타났죠.

  4. 웃자웃어 2019.01.14 1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나폴레옹의 군대가 외국에서 징발한 물자들의 액수로만 따지면 7억프랑은 가볍게 뛰어넘지 않나요? 배상금 액수가 꽤 관대하네요.

    • reinhardt100 2019.01.14 2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1797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하기 직전 프랑스의 이탈리아방면군이 베네치아의 본토 속주에서 징발할 수 있다고 예측한 금액이 매달 평균 100만 프랑 이상이었다고 하고 실제로 캄포포르미오 조약 이후 구 베네치아 공화국령에서 뽑아낸 금액이 정화만 최소 1천만 프랑 단위였다고 합니다.

      7억 프랑으로 집계된 것들 중 일부는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미술품류 등을 반환하는 것이었던데다가 혁명 이전에 프랑스 영토였던 알자스의 란다우같은 도시들의 할양까지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정화로 지불할 부분은 꽤 줄어듭니다. 결정적으로 왜 국채로 받았냐면 각국이 프랑스 정치권에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할 것을 노리고 국채로 수령한 것도 있습니다. 복고된 부르봉 왕정도 이걸 인지하고 있어서 서둘러서 배상금을 변제하죠. 다만, 상당수 배상금으로 지급된 국채는 영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반출되지는 않고 그대로 파리와 리옹의 금융시장에서 거래됩니다.

  5. 웃자웃어 2019.01.14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저는 세금과 배상금 말고도 무지비한 징발또한 유럽에서 미움을 받은 원인이라고 봅니다.

  6. 웃자웃어 2019.01.14 1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꿔말하자면 위의 내용은 프랑스가 국채발행을 하고싶어도 하지 못해 세금을 올렸단 거군요.

  7. 달콤아빠 2019.01.15 1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재미있게 잘읽고 공감드리고 갑니다.

  8. 펱로스 2019.01.15 16: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한테는 이 부분이 제일 무시무시하네요.

    '국민에게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통화 팽창을 통해 지폐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 비용을 국민들이 부담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

    국가가 국민 상대로 할수있는 장난질이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건 완전 조삼모사 네요.

    • raa 2019.01.16 0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몇년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도 고환율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대놓고 하고 있었죠. 약간 다른 건 국민들의 돈을 대기업들에게 퍼주는 방향이었다는거..

  9. 수비니우스 2019.01.15 2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전쟁하느라 쓴 돈은 누군가 갚아야 하는 법 "
    저는 이 부분이 제일 인상 깊네요. 쉽게 외면당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10. TheK2017 2019.01.16 1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선생님의 명 강의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ㅇ^*

  11. Eugen 2019.01.16 1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건 다 좋은데 미국이 왜 전쟁으로 경기부양을 하지 않느냐에 대해선 제가 할 말이 있는데요. 전쟁이란게 생산이 아닌 순수한 소비이기 때문에 전쟁해봤자 정치적,지리적,군사적,외교적 이득이 생기지 않는 이상 하지 않는게 더 낫습니다. 만약에 전쟁해서 불황을 탈출하고 경기를 부양시킬 수 있다면 2008년 경제위기때 오바마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을 철수하려했을까요?그리고 왜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에서 철군을 하려는 것인가 생각해봐요.

    • Eugen 2019.01.16 1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 사람과 달리 저는 전쟁이 비인도적이라서 하지 말아야한다는 사람이 아니고 전쟁을 하면 손해라고 생각해서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병사한명 만드는데 10개월의 임신기간 20년의 양육기간이 있고 사람 한 명 초중고 대학교육을 마치면 1억 이상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귀한 교육받은 병사가 전쟁때문에 불구가 되거나 죽으면 엄청난 손해가 아닐까요?

  12. Eugen 2019.01.16 17: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으로 경기를 부양시킬 수 있다면 세계대전은 몇번이고 더 낫겠죠.

  13. Eugen 2019.01.16 17: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정부부채규모로 볼때 뉴딜로 인한 정부지출액수보다 2차대전으로 발생한 지출이 5배는 더 많다고 본 적이 있습니다. 결론은 뉴딜해서 대공황을 탈출했는지 세계대전때문인지는(세계대전 중 생산을 아예 안한건아니니까) 쉽게 생각가능할 만한 주제가 아닌 것같습니다.

  14. 석총 2019.01.23 13: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영국은 과두정에 가까운 체제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