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452 바이에른의 배신 (7) - 외젠의 결혼 (중) 이 혼담의 주인공인 아우구스타 공주는 1804년 하반기부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매우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1805년 4월, 그녀는 꽤 가까운 사이였던 2살 연상의 친오빠 루드비히(Ludwig Karl August von Pfalz-Birkenfeld-Zweibrücken)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시 루드비히는 그 시절 유럽 귀족가문 자제들 사이에 유행이던 소위 '그랜드 투어'(grand tour)를 위해 이탈리아 여행 중이었거든요. "...아빠가 카알과의 약혼을 바라지만, 프랑스를 두려워 하는 것 같아. 내 생각엔 주바이에른 프랑스 대사 오토(Otto)는 나를 외젠 보아르네에게 시집 보내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모양이야. 카알 왕자와의 약혼이 확실히 매듭지어지지 않은 .. 2024. 9. 23. 바이에른의 배신 (6) - 외젠의 결혼 (상) 프랑스가 독일을 프랑스에 위협적이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독일권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두 축으로 자잘하게 분열되어 있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그건 나폴레옹에게도 마찬가지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자잘한 독일 국가들 중 가장 덩치가 컸던 바이에른을 친프랑스 성향으로 굳히는 것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노골적인 친프랑스 정책을 펼치는 몽겔라스가 조종하는 막시밀리안 1세가 바이에른 선제후가 된 것은 나폴레옹에게도 매우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나폴레옹이 가부장적인 지중해성 남자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당시는 이제 막 19세기로 접어든 시대였고 그 시대 유럽에서는 동맹을 굳히는 단단한 수단으로 지배 가문끼리의 정략 결혼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2024. 9. 16. 바이에른의 배신 (5) - 빛은 프랑스로부터 어떻게 보면 몽겔라스의 친프랑스 정책은 구한말 때 청나라와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본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믿었던 김옥균 등의 개화파의 생각보다 오히려 한 발 더 나간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최소한 당시 조선에게 있어 청나라나 러시아나 일본이나 모두 외국어를 쓰는 이민족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와 프로이센은 최소한 바이에른과 같은 독일어로 말하고 같은 음식을 먹고 비슷한 사회적 관습을 가진 게르만 형제국이었고, 프랑스는 과거 샤를마뉴 대제 때부터 게르만족과 대치하며 게르만족끼리 서로 싸우도록 부추긴 적대적 이민족 국가였습니다. 형제 국가들을 격파하려는 이민족 국가와 굴욕적인 동맹을 맺는 것은 독일 민족에 대한 배신 행위로 여겨졌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1세가 즉위하던 .. 2024. 9. 9. 바이에른의 배신 (4) - 모든 것은 계획대로 막시밀리안 조제프에게 1799년 2월 날아든 소식은 바이에른 선제후 카알 테어도어가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막시밀리안 조제프가 바이에른 선제후로 등극하게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전에 이미 언급한 대로, 이는 이미 정해진 일로서, 적자가 없던 카알 테어도어의 후사는 원래부터 또다른 방계인 팔츠-츠바이브뤼컨(Pfalz-Zweibrücken) 공작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후계자는 그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츠바이브뤼컨 공작 카알 2세(Karl II. August Christian)였는데, 카알 2세가 먼저 사망하는 바람에 갑자기 그 동생인 막시밀리안 조제프가 자동으로 지명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카알 테어도어의 사망과 함께, 이제 막시밀리안 조제프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 2024. 9. 2. 바이에른의 배신 (3) - 일루미나티의 그림자 나폴레옹보다 10년 먼저 태어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막시밀리안 칼 조제프 프란츠 드 파울라 히에로니무스 드 가네린 드 라 튈(Maximilian Karl Joseph Franz de Paula Hieronymus de Garnerin de la Thuille)이라는 프랑스어와 독일어가 뒤섞인 매우 긴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는 그 아버지가 사보이(Savoy) 공국 출신으로 바이에른 군대에 자리를 얻고 뮌헨에 정착한 귀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뮌헨에서 태어난 이 청년의 국적은 바이에른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집에서는 프랑스어를 썼고, 나중에 바이에른의 총리가 되어 몽겔라스 백작(Graf von Montgelas)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지게 된 이 청년은 노인이 되어서도 독일어보다는 프랑스어를.. 2024. 8. 26. 바이에른의 배신 (2) - 럼포드 수프를 먹는 나라 바이에른 공국에게 있어 처음에는 강 건너 불구경이던 프랑스 대혁명은 예상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활활 불타올라 밀물처럼 국경을 넘었습니다. 1793년 루이 16세와 앙트와넷을 처형한 프랑스 국민공회는 1795년 불한당 같은 명장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를 앞세워 평소 그렇게 탐을 내던 라인강 서쪽의 바이에른 고립영토(exclave)이자, 당시 바이에른 선제후였던 카알 테오도어(Karl Theodor)의 고향이자 본거지인 팔츠(Pfalz) 선제후령과 율리히(Jülich) 공작령을 점령했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음 해인 1796년 모로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까지 점령했는데, 바이에른군은 거의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대국 프랑.. 2024. 8. 19. 바이에른의 배신 (1) - 고래 싸움에 터지는 새우 등 러시아 원정에서 참패한 뒤 1813년 수세에 몰린 나폴레옹이 오히려 공세로 나아가 작센으로 진출한 이유는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의 침공을 받는 최전선이었던 작센의 이탈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정작 나폴레옹의 등에 가장 먼저 칼을 꽂은 것은 가장 친불적인 성향을 보이던 바이에른 왕국이었습니다. 작센에 비하면 전선 저 멀리 후방에 있던 바이에른은 대체 왜 가장 먼저 나폴레옹을 배신했을까요? 실은 그걸 이해하려면 엄연히 독일권 공국이었던 바이에른은 애초에 왜 가장 친불적인 성향을 보였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1812년 당시의 라인연방 지도입니다. 바이에른 왕국이 Königreich Bayern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보시다시피 프로이센과는 아니지만 오스트리아와는 그대로 국경을 접하고 .. 2024. 8. 12. 덴너비츠 전투 에필로그 - 흔들리는 라인연방 덴너비츠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사에서 그다지 잘 다루어지지 않는 전투이긴 합니다만, 의외로 이 전투는 그 의미가 큰 사건이었습니다. 이 전투가 일어나게 된 원인부터 그 전투 내용, 그리고 그 결과가 가져온 여파 등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먼저, 왜 이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요. 나폴레옹이 격파해야 할 적의 주력부대는 분명히 보헤미아에 있었는데도,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베를린에 집착하여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을 쪼개어 베를린으로 보냈다가 이 사달이 났지요. 그랬던 이유, 즉 오데르 강을 장악하여 러시아군이 스스로 후퇴하게 만든다는 큰 그림에 대해서는 이미 전에 설명드린 바 있으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베를린 점령과 오데르 강 장악이 그렇게 중요한 목표라면, 왜 나폴레옹은 전.. 2024. 8. 5. 덴너비츠 전투 (4) - 습관성 삽질 덴너비츠 전투가 한창 진행되던 오후 3시~4시까지의 전황은, 하나의 경로로 3개 군단을 움직이겠다는 네의 약간 비상식적인 계획이 결과적으로는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했습니다. 후방에서 레이니에의 군단이 조금씩 도착하여 투입되면서 프랑스군은 좌익을 점점 더 넓고 강하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각 군단들이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 움직이다가 이렇게 뜻하지 않게 벌어진 전투에 다른 군단들이 제때 현장에 투입되지 못했다면 상황은 제2의 그로스비어런 전투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오후 4시경이 되어 우디노의 군단이 현장에 다 도착하자, 우디노도 현장에서 상황을 파악하고는 바로 코 앞에 있는 레이니에의 좌익으로 병력을 투입하여 프랑스군의 좌익을 더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중과부적인 .. 2024. 7. 29. 덴너비츠 전투 (3) - 남자가 한을 품으면 잔나(Zahna)를 지나 위터보그(Jüterbog)로 가는 길은 작센과 브란덴부르크 즉 프로이센의 국경 지대였는데, 이 일대는 그야말로 평야 지대로서 간간히 나타나는 낮은 언덕, 시냇물과 습지 외에는 거의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습니다. 원래 군대가 행군할 때는 소규모 정찰대를 앞세워 지형과 함께 적의 출현을 경계하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찰대로 쓰라고 존재하는 것이 바로 기병대였습니다. 그런데 위터보그를 향해 진격하던 네의 베를린 방면군은 희한하게도 그런 정찰기병대를 두지 않고 행군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이유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아마 당시 공포의 대상이었던 코삭 기병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소규모 기병대를 앞세웠다가 혹시라도 코삭들과 마주치.. 2024. 7. 22. 덴너비츠 전투 (2) - 인사가 만사 네가 비텐베르크에 도착하여 확인한 베를린 방면군의 병력과 장비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애초에 그로스베어런에서의 패배는 우디노가 지나치게 각 군단을 분산시킨 채 전진하는 바람에 병력 집결이 제대로 안 된 상태로 전투가 벌어지는 바람에 겪은 것이었고, 베를린 방면군의 사상자 숫자도 3천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후퇴하는 우디노에 대한 추격이 거의 없었던 덕분이었습니다. 원래 프로이센군의 뷜로는 가열찬 추격전을 벌이려 했으나 소심했던 총사령관 베르나도트가 추격을 중지하도록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를린 방면군은 병력도 6~7만으로 크게 줄지 않았고 포병대도 고작 14문의 야포만 상실하여 아직 190문 이상의 야포를 갖춘 상태였습니다. 다만 병사들, 특히 작센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 2024. 7. 15. 덴너비츠 전투 (1) - 러시아 땅의 마지막 프랑스인 결국 나폴레옹은 베를린으로 향하지 못합니다. 만약 막도날이 바우첸까지도 블뤼허에게 내준다면, 자신이 북쪽 베를린 원정을 간 사이 드레스덴까지도 블뤼허의 위협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의 작전은 도시와 요새에 연연해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적의 주력 부대를 격파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드레스덴은 이야기가 좀 달랐습니다. 이 곳은 연합군의 3개 방면군과 대치하는 중심 거점이자 보급창 역할을 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당장 주전장이 된 주요 동맹국 작센의 수도였습니다. 여기를 잃으면 통신선과 보급선이 모두 끊어질 뿐만 아니라 이 일대에 축적된 많은 군수 물자와 함께 동맹국까지 잃어버릴 가능성이 컸습니다. 9월 2일, 나폴레옹은 자신 대신 그랑 다르메의 2인자.. 2024. 7. 8. 이전 1 2 3 4 5 6 7 ··· 3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