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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인사가 만사 - 쿠투조프의 후임

by nasica 2022.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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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 4월 25일, 러시아군 사령부와 동행 중이던 영국군 윌슨 장군은 일지에 연합군 총사령관 쿠투조프의 병세에 대해 차가운 어조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원수께서는 적군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거리에 당도하자 아주 시의적절하게도 병석에 드러누우셨다.  아마도 이건 카멘스키 전략(Kamenski stratagem)일 것이다."

여기서 카멘스키 전략이라는 것은 제4차 대불동맹전쟁 때인 1806년 12월, 나폴레옹과 대치한 러시아군의 지휘권을 부여받은 뒤 부대를 점검해본 결과 도저히 대책이 서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령관직에서 사임한 카멘스키 백작(Mikhail Fedotovich Kamenski)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마 윌슨 장군은 사흘 뒤에 쿠투조프가 정말 죽어버리자 '어? 꾀병이 아니었어?' 라며 흠칫 놀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카멘스키 백작입니다.  1806년 당시 그의 나이가 68세니까 적은 나이는 아니었지요.  1806년 폴란드에서 나폴레옹과 전쟁이 났을 때 그는 이미 예편한 상태였는데, 상황이 안 좋아지자 적절한 지휘관을 찾지 못한 알렉산드르는 그를 불러다 총사령관직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현지에 부임하여 살펴보니 보급 등에 있어서 도저히 전투를 치를 상황이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임관한지 딱 6일만이자 푸오츠크(Pułtusk) 전투 바로 전날에 무능하기 짝이 없기로 유명한 북스게브덴(Feodor Buxhoeveden) 장군에게 지휘권을 내던지듯 이양하고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튀었습니다.  그는 불과 3년 후인 1809년에 사망했는데 실제로 지병이 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는 원래 농노들을 잔혹하게 다루기로 악명 높았는데 결국 그의 잔인함에 치를 떤 농노 하나가 그를 살해했습니다.  천벌이 딱 어울리는 인간이었지요.)



하지만 쿠투조프에 대해서는 다들 지긋지긋하게 생각해오고 있었으므로 그의 죽음을 정말 아쉬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총사령관이 죽어버리는 것은 모두에게 줄줄이 승진이 예정된 사건인지라 쿠투조프가 오늘 내일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오히려 러시아군 진영에서는 생동감이 감돌았습니다.  쿠투조프의 후임에 대해서는 여태까지 보여준 성과나 능력, 평소 성품 등을 고려할 때 연합군의 좌우익을 맡고 있던 블뤼허와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그런데 정말 조국의 영광 외에는 아무 개인적 욕심이 없던 블뤼허는 '자신은 러시아군의 명령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라며 일찌감치 후보자군에서 자진 사퇴를 해버렸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비트겐슈타인에게 몰렸는데, 알렉산드르는 쿠투조프가 죽기도 전인 4월 27일 정말 비트겐슈타인을 쿠투조프의 후임으로 임명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나폴레옹과 동갑인 44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였고, 작년의 나폴레옹 러시아 침공전 때는 수도인 상트 페체르부르크 앞에서 프랑스군을 막아내어 적어도 상트 페체르부르크 내에서는 평판이 매우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쿠투조프와는 반대의 성격으로서, 무척 부지런하고 용감한 군인이었습니다.  또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발트 해 연안 독일계 귀족 출신으로서 프랑스어는 물론 독일어도 유창하게 구사했으므로 프로이센군까지 통솔할 총사령관으로서는 적절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쿠투조프가 '베를린이 프랑스군 손에 넘어가건 말건 신경쓰지 말고 유사시 러시아군의 후퇴로인 드레스덴-칼리쉬 통로 확보에 모든 작전에서 최우선 순위를 둔다'라고 강요하자 그에 반발하며 베를린 사수를 고집했으므로, 프로이센 사람들도 비트겐슈타인을 무척 좋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사가 만사라고 했는데 이는 인사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으로서, 어떻게 보면 매우 잘 된 인사 처리인 비트겐슈타인의 총사령관 임명에도 말썽이 많았습니다.  먼저 러시아군 본대를 이끌고 이동 중이던 밀로라도비치와 토르마소프는 모두 비트겐슈타인보다 서열에서 앞선 선배였습니다.  임관 연도가 비트겐슈타인보다 2년 앞섰던 밀로라도비치는 그나마 나이에 있어서는 비트겐슈타인보다 2살 어렸지만, 토르마소프는 무려 17살이나 더 연상이었습니다.  당시 71세이던 블뤼허는 대의를 위해 새파란 러시아 장군에게 절대 복종하겠다고 시키지도 않은 편지를 보냈지만, 모두가 그런 대인배는 아니었습니다.  밀로라도비치도 토르마소프도 짜르의 이런 인사에 크게 앙심을 품었고 그런 점은 뤼첸 전투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토르마소프 백작입니다.  정통 러시아 귀족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당시 61세였고, 주로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활약했었습니다.  그는 1812년에도 별다른 활약상이 없었고 뤼첸과 바우첸 등의 패전 이후 비트겐슈타인이 지휘권을 놓고 물러나자 잠시 총지휘관직에 오르기도 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곧 사임했습니다.)


(밀로라도비치입니다.  그의 가문은 원래 세르비아 귀족이었으나, 그의 증조 할아버지 때 러시아 표트르 1세의 사주를 받아 당시 세르비아를 지배하던 오스만 투르크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실패하고 러시아로 도주하여 귀족 작위를 받은 바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군문에 들어갔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보다 2살 어렸지만 장교로 임관된 서열에서는 오히려 2년 선임이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르가 죽은 뒤 벌어진 뒤 황위 계승권을 두고 벌어진 혼란 속에서 잠시 독재권을 쥐는 등 권력의 중심에 섰습니다만, 데카브리스트 반란 때 반란군을 대화로서 설복해보려다 등에 총에 맞은 뒤 총검에 찔려 살해되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치명상을 입고 군복과 메달, 보석류 등을 약탈 당한 뒤에도 한참동안 의식이 있어서 그를 도우러 온 사람들을 통해 짜르 니콜라이 1세에게 3가지 부탁을 하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 3가지 부탁은 (1) 자기 친척들에게 짜르가 조문을 보내줄 것 (2) 자신의 농노들을 해방시켜줄 것 (3) 자신과 친했던 황실 극장 관리인 마이코프(Maikov)를 잊지 말아줄 것이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건 알렉산드르가 실수를 했다기 보다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작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초반에 러시아군은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대응을 하다 더욱 상황을 악화시킨 바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알렉산드르가 총사령관 바클레이가 있음에도 자신이 군사 작전에 시시콜콜 참견을 하며 사령관 행세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짜르에게 거침없이 직언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던 그의 여동생 예카테리나가 '러시아를 위해 야전군 사령부를 떠나라'고 편지를 보낸 다음에야 알렉산드르는 수도 상트 페체르부르크로 마지못해 돌아오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좋지 않은 전적이 있었던 그는 이후에도 군사 작전에 참견하고 싶어 좀이 쑤셨고, 머나먼 상트 페체르부르크에서도 방구석 제갈공명 행세를 하며 이런 저런 구체적인 작전안을 작성하여 쿠투조프에게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것도 유럽의 대마왕 나폴레옹을 상대하는 전투를 앞두고 게으름뱅이 쿠투조프가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는 알렉산드르에게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기회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쿠투조프처럼 젊은 짜르를 우습게 여기는 명성 높은 노장을 원치 않았고 젊고 부지런하지만 고분고분한 비트겐슈타인을 처음부터 점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보낸 임명장에 그를 '러시아-프로이센 동맹의 통합 야전군 사령관'이라고 적으면서도 본문에서는 '블뤼허와 빈칭게로더의 부대들을 그대의 판단에 따라 적절히 운용할 것'이라고만 적었습니다.  즉, 토르마소프와 밀로라도비치가 이끄는 러시아군 본대에 대해서는 은근슬쩍 언급을 회피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알렉산드르 본인이 사실상의 사령관 노릇을 할 거니까요.  실제로 그는 비트겐슈타인은 물론 토르마소프와 밀로라도비치에게도 직접 명령서를 보내 이러쿵저러쿵 작전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토르마소프와 밀로라도비치도 비트겐슈타인과의 물리적 거리는 물론 알렉산드르의 명령 핑계를 대며 비트겐슈타인의 명령을 재빠르게 이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입장이 난처한 것은 비트겐슈타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단 그는 1812년 내내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군단을 이끌고 역시 비교적 작은 규모인 우디노와 생시르가 이끄는 군단을 맞아 싸웠습니다.  즉 그는 대부분 독립적인 지휘권을 행사했을 뿐이고 짜르와 그의 참모들에게 지척에서 들볶이면서 대군을 지휘한 경험은 없었습니다.  여태까지 비트겐슈타인과 블뤼허가 불만으로 생각했던 것은 러시아군 본대가 왜 더 빨리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지 않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비트겐슈타인이 총사령관이 되었으므로, 러시아군 우익의 지휘관직은 적당한 부하 장군에게 물려주고 본인은 드레스덴의 사령부로 달려가 지휘권을 행사하는 것이 적절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그러지 않고 계속 러시아군 우익을 현장에서 지휘했습니다.  이는 비트겐슈타인도 짜르와 그의 참모들, 그러니까 볼콘스키니 톨이니 하는 인물들과 부대끼는 것이 결코 편치는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기분이 어떨지 뻔한 선임 장군들인 토르마소프와 밀로라도비치를 대면하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베스트팔렌 귀족 가문 출신의 군인이었는데, 러시아의 여황 엘리자베타의 가까운 친척이라는 이유로 짜르로 봉해진 독일 귀족 출신 짜르 표트르 3세가 러시아군으로 스카웃한 많은 독일 장교들 중 하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우크라이나의 키이우 근처에서 태어났고, 귀족답게 장교로 임관된지 10년 만인 30세에 소장으로 진급했습니다.  이후 아우스테를리츠와 프리틀란드 등 주로 패전하는 전투에 참전했는데, 1812년에는 상트 페체르부르크로 진격하는 우디노를 막아서는 폴로츠크(Polotsk) 전투에서 승리하여 영웅시되었습니다.  1813년 봄의 전쟁에서는 아무래도 능력이 딸렸는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는데, 물러난 이후에도 군단장으로서 드레스덴 및 라이프치히 등 여러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투르크군과의 전쟁에서 총사령관을 맡기도 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59세에 전역했습니다.  그럼에도 74세까지 장수했고, 폴란드 귀족 출신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무려 11명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그는 고향 근처인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사망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비록 정치적 음모와 권력 투쟁이 난무하는 총사령부에 적합한 인물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현장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것에는 적합했을까요?  그는 사령관직을 맡자마자 다가오는 나폴레옹의 대군에 맞서 러시아군과 프로이센군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상세한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그에 따라 세부적인 작전 계획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샤른호스트와 그나이제나우가 작성한 작전안에 대해서는 이견이 워낙 많아 채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마련한 작전안을 드레스덴의 알렉산드르와 블뤼허, 밀로라도비치와 토르마소프 등에게 보내자마자 모두로부터 뜨거운 반응이 터져 나왔습니다.  대체 어떤 반응이었을까요?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Napoleon and the Struggle for Germany, by Leggiere, Michael V

https://en.wikipedia.org/wiki/Mikhail_Kamensky
https://en.wikipedia.org/wiki/Peter_Wittgenstein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Tormasov
https://en.wikipedia.org/wiki/Mikhail_Miloradov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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