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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상책과 하책 - 두 천재 참모의 작전안

by nasica 2022.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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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잘러 강 서쪽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프로이센군 수뇌부를 걱정시켰다기 보다는 흥분과 전율을 넘어 기대감에 차오르게 했습니다.  가장 흥분한 사람은 블뤼허 본인이었는데, 사실 블뤼허는 이 희대의 괴물과 어떻게 싸워야 하겠다는 작전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프로이센군의 모든 작전은 블뤼허가 아니라 그의 참모들인 샤른호스트와 그나이제나우가 도맡아 짜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렇다고 블뤼허가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샤른호스트는 블뤼허를 매우 존중하고 있었는데, 블뤼허의 진짜 가치는 비상한 머리로 기가 막힌 작전안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적과의 싸움에 임했을 때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 부하들에게 용기와 투지를 불어넣고 사기를 고취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용기와 투지가 넘쳐나는 프로이센군은 다가오는 나폴레옹을 기다리기보다는 더 전진하여 나폴레옹을 공격할 생각에 부풀었습니다.  이렇게 공세로 나갈 생각까지 한 것은 드디어 밀로라도비치가 이끄는 러시아군 본대의 선봉이 드레스덴까지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뒤를 토르마소프의 본대가 뒤따르고 있었으므로, 연합군 좌익인 블뤼허와 우익인 비트겐슈타인은 드레스덴의 다리, 즉 엘베 강을 넘어 탈출할 퇴로 걱정은 그들에게 맡기고 공격에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러시아군 본대는, 좀 더 정확히 말해 쿠투조프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여전히 방어전에 더 중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이 1806년 제4차 대불동맹전쟁 때처럼, 분산된 연합군의 좌익을 파고 들어 그 쪽부터 돌돌 말아올리는 형태로 공격해올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그는 블뤼허와 비트겐슈타인이 각각 켐니츠(Chemnitz)와 보르나(Borna)에 최대한 서로 가까운 위치로 집결하도록 명령하고, 유사시 밀로라도비치의 러시아군을 보내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드레스덴-분츨라우-브레슬라우-칼리쉬로 이어지는 러시아 본토와의 교통로 확보였습니다.  만약 전세가 불리할 경우 러시아군은 언제든 폴란드로 혹은 아예 러시아로 후퇴하여 나폴레옹을 유인할 수 있었고, 설령 나폴레옹이 유인에 속지 않고 추격을 중단하더라도 러시아로서는 손해볼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켐니츠와 보르나의 위치입니다.  왼쪽에 타원으로 표시된 도시들, 즉 예나, 나움부르크, 할러는 모두 잘러 강변에 위치한 도시로서 프랑스군이 막 점령하기 시작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원래부터 나이가 많고 건강이 좋지 않던 쿠투조프는 이때 이미 상당히 병세가 심한 편이었습니다.  4월 18일 쿠투조프와 알렉산드르는 함께 분츨라우에 도착했으나, 4월 21일 드레스덴을 향해 분츨라우를 떠날 때는 알렉산드르 혼자서였고 쿠투조프는 분츨라우에서 본격적으로 병석에 드러눕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물론, 쿠투조프의 부관인 톨(Karl Wilhelm von Toll)도 쿠투조프의 부재를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쿠투조프가 빠지면서 러시아군 수뇌부도 좀 더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고, 그들도 결국 엘베 강 서쪽에서 나폴레옹의 주력과 한판 붙을 것을 결의했습니다.


(쿠투조프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4월 28일 분츨라우에서 그대로 사망합니다.  이제는 폴란드 도시 볼레스와비에츠(Bolesławiec)가 된 분츨라우에 있는 쿠투조프 추모비입니다.  무쇠로 만든 이 추모비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명에 따라 1819년 세워진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신이 난 것은 연합군의 장자방과 제갈공명인 샤른호스트와 그나이제나우였습니다.  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시시각각 들어오는 프랑스군의 정보를 접해가며 모든 경우에 대비한 작전안을 구상했습니다.  그 결과 나온 다소 장황한 작전안을 요약하면 결국 상책과 하책, 2가지였습니다.

상책, 즉 샤른호스트와 그나이제나우가 권고하는 작전안은 프랑스군이 잘러 강을 넘어올 경우, 절대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아가 나폴레옹의 군단들이 합세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엘스터 강과 묄더(Mulde) 강사이에서 각개격파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전안의 핵심은 '잘러 강 동안 인근에서 공격을 해야지, 절대 엘베 강 서안 인근에서 수비전을 펼쳐서는 안된다'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지리적 이점과 양측 병력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잘러 강 인근에서 싸워야 승리를 한 뒤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주기에도 유리했고 또 만약 패배를 한 뒤 연합군이 후퇴를 하기에도 유리했습니다.  만약 엘베 강 근처에서 강을 등 뒤에 두고 싸운다면, 만약 패배를 할 경우 아무리 드레스덴 등지에 다리를 확보하고 있다고 해도 강을 건너 후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틀림없이 대포 등의 주요 장비를 다 버리고 가야 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리고 양측 병력의 양적 질적 차이를 고려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샤른호스트와 그나이제나우가 파악한 바로는, 잘러 강을 당장 건너올 준비가 된 프랑스군은 거의 13만, 그리고 잘러 강 인근까지 전개할 수 있는 연합군은 거의 9만5천에 가까왔습니다.  수적으로는 프랑스군이 유리했지만, 프랑스군은 징집된지 얼마되지 않은 신병들인데다 특히 기병대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정찰과 추격, 평탄한 지역에서의 병력 전개가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아직 집결을 완료하지 않은 프랑스군으로 하여금 잘러 강을 등지게 한 좁은 지역에서 싸우도록 강요하는 것이 가장 유리했습니다.

그러나 샤른호스트가 보기에 러시아군은 싸우려는 의지가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으므로, 이 상책을 거부할 경우에 대비해 하책도 준비했습니다.  하책이라고는 하지만 이 작전안도 나폴레옹을 괴롭히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즉, 나폴레옹이 잘러 강을 건너오면 그건 내버려 둔 채, 드레스덴에 위치한 밀로라도비치 등의 러시아 중앙군은 아예 엘베 강 동쪽으로 후퇴하고, 대신 블뤼허와 비트겐슈타인은 병력을 합하여 즉각 북쪽으로 진격하여 나폴레옹의 좌익 역할을 하는 외젠의 엘베 방면군을 격파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나폴레옹의 중앙군을 회피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좌익의 외젠을 친다는 점에서 다소 부담이 적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나폴레옹은 어쩔 수 없이 드레스덴에 병력을 떼어 엘베 강 너머의 러시아 중앙군을 견제하게 한 뒤, 외젠을 구하기 위해 주력을 이끌고 블뤼허-비트겐슈타인을 추격할 것이라는 것이 두 프로이센 참모의 예상이었습니다.  드레스덴 방면을 러시아 중앙군에 맡길 수 있다면, 모든 병력, 특히 기병대에 있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모두 우세한 블뤼허-비트겐슈타인의 부대는 외젠을 충분히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외젠을 격파한 뒤, 아이제나흐(Eisenach)-프랑크푸르트(Frankfurt) 방면으로 진격하면 나폴레옹의 후방을 노릴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이 외젠을 버리는 패로 간주하고 그대로 엘베 강을 넘어 러시아 중앙군을 격파할 것을 우려할 수도 있으나, 후방 교통로를 블뤼허-비트겐슈타인의 대군이 위협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절대 엘베 강을 건너는 모험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샤른호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판단했습니다. 


(할러 근처에 주둔해있던 외젠을 격파하고 아이제나흐를 거쳐 프랑크푸르트까지 내달려 나폴레옹의 퇴로를 위협하겠다는 계획은 너무 프랑스군을 평가절하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담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샤른호스트가 이 작전안을 들고 알렉산드르를 설득하기 위해 드레스덴으로 간 뒤, 그나이제나우는 4월 25일 프로이센의 총리인 하르덴베르크에게 이 작전안을 동봉한 편지를 보내며, '이 안이 채택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우리는 정말 최고의 작전안을 짰었다는 것을 후세에 전하고자 이 작전안을 보낸다'라는 다소 불길한 소리를 했습니다.  그런 일말의 불안감은 그 날 아침에 그나이제나우가 러시아군의 참모장이라고 할 수 있는 톨과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별로 좋지 않은 만남이었습니다.  샤른호스트는 알렉산드르를 비롯한 러시아군 거의 모두에게서 높은 평가와 존중을 받는 몸이었으나 그건 샤른호스트의 특출한 명석함에 기인한 예외적 경우였고, 대부분의 프로이센군 장성들, 가령 그나이제나우만 해도 오만한 강대국 행세를 하는 러시아군 장군들로부터 별로 우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나이제나우는 알텐부르크(Altenburg)에 있던 블뤼허와 함께 톨을 만났는데, 무슨 말이 오갔는지 몰라도 그나이제나우는 톨이 군사학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건방지기만 한 인물이라고 혹평을 남겼습니다.  


(쿠투조프가 가장 신뢰한 참모장, 톨(Karl Wilhelm von Toll)입니다.  나폴레옹보다 8살 어린 그는 에스토니아 귀족으로서, 그의 조상은 스웨덴에서 왔지만 사실 그 선대는 네덜란드 가문이었습니다.  1815년 파리까지 입성했고, 이후에도 군 생활을 계속하면서 1831년 폴란드 반란도 진압했습니다.  제대 후에는 고향인 에스토니아의 총독을 지냈으니 금의환향한 셈이지요.)



그리고 사실 샤른호스트와 그나이제나우의 작전안이 그다지 완벽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엘베 강에서 멀어질 수록 보급선이 늘어져서 연합군에게 불리하다는 쿠투조프의 판단은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으므로, 엘스터 강을 넘어 잘러 강 가까이 진격하자는 상책은 사실 꼭 상책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특히 블뤼허와 비트겐슈타인이 합세하여 외젠을 먼저 치자는 하책은 글자 그대로 하책이었습니다.  이 작전안에 따르면 블뤼허-비트겐슈타인 군과 러시아 중앙군이 완전히 분리되는데다 그 사이에 나폴레옹의 주력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었습니다.  대적을 앞에 두고 스스로 두 동강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그다지 상식적인 작전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외젠을 잡기도 전에 블뤼허-비트겐슈타인 군이 덜컥 나폴레옹과 외젠에게 남북에서 포위되는 경우도 가능했습니다.  아무리 프랑스군에 기병대가 부족하다고 해도, 상대는 발 빠르기로 유명한 프랑스군이었습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결국 4월 말 나폴레옹이 언제든지 잘러 강을 넘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러시아군과 프로이센군이 작전에 있어 합의한 것은 '나폴레옹을 공격한다'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비트겐슈타인이나 빈칭게로더처럼 프로이센군과 함께 한달 넘게 작전을 펼친 러시아군 장군들은 프로이센 지휘관들과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도 블뤼허처럼 엘베 강 서쪽에서 나폴레옹과 싸운다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세우고 있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바로 남쪽인 알텐부르그에 주둔한 블뤼허와 긴밀히 협조하며 프랑스군의 동태에 주목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이 에르푸르트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상보다 빠른 움직임에 꽤 놀랐습니다.  그는 라이프치히 인근에 자신의 병력을 모두 모으면서, 예나의 프랑스군이 잘러 강을 넘을 경우 그들과의 전투를 피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는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고려하며 프랑스군과의 격돌 후보지들을 골랐는데, 대부분 라이프치히 인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들 중에는 라이프치히 남서쪽의 작은 마을도 있었습니다.  그 마을의 이름은 뤼첸(Lützen)이었습니다.


(뤼첸과 알텐브루크, 라이프치히, 그리고 잘러 강변의 주요 도시들입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Napoleon and the Struggle for Germany, by Leggiere, Michael V

https://en.wikipedia.org/wiki/Karl_Wilhelm_von_Toll
https://en.wikipedia.org/wiki/Boles%C5%82awi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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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4

  • 하이텔슈리 2022.08.08 08:59

    드디어 뤼첸전투의 서막이네요. 전 이 전투가 프랑스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나폴레옹의 괴수급 능력을 보여준 전투라고 생각했는데, 연합군이 생각 이상으로 좋지 못했네요.
    답글

    • 린츠 2022.08.08 09:43 신고

      안녕하세요. 오스트리아 빠돌이 '린츠'에요.
      하이텔슈리님덕분에
      1813년 '뤼첸 전투'를 알게 되었네요.

      저도 나시카님 덕분에 1813년 초반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프로이센군 보급이 상당히 열악했다는 것이 나시카님께서 올해 6월 27일 작성하신 <스페인 모델의 실패- 냉정한 작센 사람들>에 잘 나와 있지요.

      저는 하이텔슈리님 댓글 달리기 전부터
      (뤼첸 전투의 결과도 몰랐습니다.)
      '내가 샤른호스트라면 프랑스군 이길 생각보다 보급부터 어떻게 해결할 생각을 했겠다.'고 생각했는데, 하이텔슈리님께서 뤼첸 전투를 언급해주신 덕분에
      제 생각에 더 설득력이 생긴 것 같습니다.
      ('샤른호스트가 어떻게 했어야 했는가?'에 대한 제 의견은 나시카님께 보내는 밑 댓글에 적겠습니다.)
      하이텔슈리님, 제 생각에 설득력을 더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주 중부지방은 2차 장마 들어가고,
      남부지방은 폭염인데
      어디 계시든지 건강 조심하시고
      행복한 한 주 되세요!

  • 린츠 2022.08.08 10:49 신고

    안녕하세요, 나시카님. 오스트리아 팬인 '린츠'입니다.

    제가 '하이텔슈리'님께 말씀드린 '샤른호스트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가?'에 대한 제 소견을 여기에 적겠습니다.

    나시카님께서 6월 27일 작성하신 <스페인 모델의 실패-냉정한 작센 사람들>을 보면,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이 군수품 부족으로 작센 귀족 및 시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물자 강제 징발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샤른호스트를 비롯한 연합군 참모부는 '군수 및 병참'의 해결 방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군수품을 어디서 조달하는가의 문제인데, 생각나는 선택지를 하나씩 생각해 보면서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방향으로 해 보겠습니다.

    1. 프로이센 본국: 틸지트 조약으로 영토가 1/3 토막 난데다가, 러시아 원정에 나폴레옹군이 지나갔던 경로라서 1812년 초토화된 후유증이 남아 있어, 조달할 군수품이 사실상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배제
    2. 러시아로부터: 러시아 본국에야 군수품이 있겠지만, 문제는 나시카님께서 수도 없이 언급해주신 중간 폴란드 구간의 매우 열악한 도로 사정이지요. 어느 정도 조달은 되겠지만, 시간도 많이 걸리고(군수품 모두 도달하는데 최소 2달), 그리고 러시아군 보급도 일부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최대 60% 수준)
    3. 영국으로부터: 일단, 당시 프로이센-러시아와 영국은 확실한 동맹도 아닙니다. 게다가 프로이센, 러시아의 주둔지는 전부 독일 내륙지방이라, 영국에서 군수품을 수송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영국이 이용할 수 있는 항구는 사실상 함부르크 하나뿐인데(그것도 다부가 점령 못했을 때만), 함부르크에서 내륙 켐니츠, 보르나까지 어떻게 수송하지요? (함부르크-보르나 중간은 전부 프랑스군 점령지역이에요). 그래서 영국으로부터 군수품을 받는다는 생각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4. 독일 내부에서: 작센에서 물자 징발하듯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물자 조달은 꾸역꾸역 조금씩 되면서, 현지 독일 주민 반발을 심하게 사게 됩니다. 그래서 별로 좋은 선택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위의 1~4를 종합해보면,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은 러시아군 60% 정도의 군수품만 어찌어찌 해결이 가능하고(그것도 늦게 조달됩니다.), 대부분의 병력은 군수품 부족으로 굶주리고, 옷은 헤어지고, 탄약은 부족한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럼 프로이센-러시아군의 군수품 조달 방안이 없었냐고요? 그럼 제가 이 댓글 안 썼습니다.

    프로이센-러시아군의 군수품 조달 방안은
    바로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구입 혹은 외상 거래로 조달했으면 됩니다.
    샤른호스트에 대해 진짜 답답한 점은 "왜 오스트리아 제국은 생각도 안 하는 거야?" 지요.
    (저 린츠는 오스트리아빠니까요)

    일단, 오스트리아 제국이 나폴레옹과 겉으로는 사돈 관계지만, 실제로는 우호 관계로 볼 수 없다는 증거는 이미 러시아 원정에서 있었습니다. 바로, 러시아 원정에 나폴레옹 편에서 참여한 부대 중 유일하게 병력을 어느 정도 온전히 보존해서 빠져나간 유일한 부대가 슈바르첸베르크 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20,000명이었던 것입니다. 슈바르첸베르크 공은 진지하게 러시아와 싸울 생각은 1도 없었고, 나폴레옹 눈치 보면서 러시아군과 싸우는 척만 하다가, 나폴레옹이 대륙 깊숙이 모스크바로 들어가서, 자연히 나폴레옹의 감시를 피하게 되니까 적당히 벨라루스 지역에서 돌아다니다가 겨울 오기 전에 폴란드 지역으로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저는 슈바르첸베르크 공의 이러한 행동이 이미 오스트리아 조정 수뇌부, 즉 프란츠 2세 및 메테르니히와 다 "언젠가 나폴레옹과 싸워야 한다."라고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오스트리아 제국은 겉보기에만 프랑스와 동맹이지, 실제로는 나폴레옹의 잠재적 적국이었을 뿐 아니라, 나폴레옹에게 여러 차례 패해서 영토가 그렇게 축소되었음에도 여전히 55만제곱킬로미터 정도 면적을 갖고 있는 '제국'의 위상과 힘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쇤브룬 조약으로 최종적으로 1809년 축소된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는 <땅과 돈과 피의 평화-쇤브룬 조약>(by nasica, 2017.11.18.)을 참고하시면 보실 수 있는데, 여전히 헝가리(Hungary),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 갈리치아(Galicia) 등의 거대한 농업지대는 온전히 남아 있고, 최대 세수가 들어오고, 중공업(무기 산업)이 발달한 보헤미아(Bohemia)도 멀쩡히 제국령으로 남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헝가리+트란실바니아 평원은 유럽 최대의 농업 생산지중 하나이자 목초지이기도 했습니다. 면적이 25만 제곱킬로미터 넘어가면서 최고봉이 183m 밖에 안 되는 평야지대로,
    농업을 천조국식(?)으로 해서 밀, 돼지고기, 유제품 등 각종 식품류,
    아마(Flax) 대량 재배로 리넨 섬유 엄청 뽑아내고,
    말사료(귀리)도 엄청나게 생산했지요. (현재도 헝가리 오트밀(귀리) 꽤 유명합니다.)
    게다가 목초지도 말에 풀을 먹이기 너무 좋은 환경이라, 말 사육에 최상의 조건을 가진 환경입니다.

    보헤미아는 무기 생산지라서 보헤미아제 대포/소총, 탄약 다 구입 가능했고요.

    오스트리아 본토는 아예 계산에서 빼고도 오스트리아 제국의 저력은 이 정도였습니다.

    요약하자면, 오스트리아-헝가리로 가면, 식량(밀과 빵, 고기 및 가공식품), 의복/피복류, 군마 및 수송용 말, 말 사료(귀리), 탄약 및 무기류, 전부 드글드글 풍성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그럼 남은 문제는 그래도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인척관계에 명목상 동맹이라, 프랑스의 적국에 대놓고 지원을 하기는 어렵지 않느냐는 문제가 있지요. 이건 제 생각에는 두 가지 시나라오가 있습니다.

    1. 메테르니히와 프란츠 2세가 칼을 빼버리는 시기를 좀 더 빨리 잡는다.
    프로이센의 군수 지원 요청 사절단이 오자마자, "이렇게 된 김에, 저지르자!"라고 하면서 오스트리아군은 싸우지 않고 후방 지원만 하고, 프랑스군을 괴롭히는 선택지입니다. 프랑스군과 프로이센-러시아군은 서로 싸우면서 힘이 약화되고, 오스트리아는 희생자 없고, 헝가리와 보헤미아는 군수물자 팔아 돈 버니까, 오스트리아 제국 입장에서 이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2. 메테르니히와 프란츠 2세가 '공식적으로는' 프로이센-러시아 지원을 거부한다.
    이건,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연을 끊어버릴 빌미가 아직 없어서, 아직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체면과 법을 중시하는 오스트리아다운 선택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무기류는 프로이센-러시아에 공급이 어려워집니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프로이센 사절이 헝가리 동부 지역, 트란실바니아(개신교, 구체적으로 칼뱅파 다수 분포 지역)으로 가서 자치권을 광범위하게 인정받는 헝가리 귀족들에게 농산품을 직거래로 구입하는 방법이 남아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본토는 헝가리를 완전히 찍어누를 힘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헝가리 귀족들에 대해서는 주로 '유화책, 자치권 부여' 위주로 정책을 썼습니다. (특히 의리있게 마리아 테레지아를 일관성있게 밀어준 1750년 이후) 그래서 "농산품을 외국과 대량 거래" 정도야 헝가리 고위 지주 귀족이라면 당연히 부여되는 자치권인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글이 길었지요? 여튼 요지는 샤른호스트는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군수품 드글드글한 오스트리아-헝가리로 가서 어떻게든 군수-병참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력했어야 한다. "는 것이 저 린츠의 짧은 생각입니다.
    결과론적으로도 타당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괜히 나폴레옹에게 싸움 걸었다가 뤼첸 전투에서 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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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스팅 잘 보고 공감누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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