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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프란츠브뢰첸(Franzbrötchen)의 전설 - 함부르크의 프랑스군

by nasica 2022.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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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의 1810년 함부르크 합병은 함부르크 시민들에게 매우 좋지 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대륙봉쇄령에 따른 경제적 몰락과 실업 사태에 덧붙여, 점령군 행세를 하는 프랑스군 병사들을 자신들의 집에 받아들여 먹이는 부담까지도 떠맡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한자 동맹의 중심 도시이자 자유 도시로서 남다른 지위를 누리던 함부르크 시민들에게는 프랑스군이 시내에 주둔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을 크게 갉아먹는 일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함부르크를 지배한 대략 8~-9년 동안 함부르크는 (좋든 나쁘든) 프랑스의 영향을 짧고도 강렬하게 받았습니다. 그런 영향은 몇몇 거리 이름에도 남아있지만 음식에도 남아있습니다. 바로 프란츠브뢰첸(Franzbrötchen)이라는 빵입니다.

(누가 마치 군홧발로 밟아놓은 크롸상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란츠브뢰첸입니다.)



원래 함부르크에서는 브뢰첸(brötchen)이라는 독일 특유의 작은 빵을 즐겨 먹었습니다. 독일어로 빵을 brot라고 하는데 브뢰첸은 작은 brot, 즉 작은 롤빵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프랑스군이 함브루크를 점령했던 10년도 안되는 사이에 프란츠브뢰첸(Franzbrötchen), 즉 프랑스식 작은 롤빵이 생겨났습니다.

(브뢰첸은 영어로 번역하면 그냥 roll, 롤빵입니다. 딱히 특정 모양의 빵을 브뢰첸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 새로운 빵의 탄생에는 몇가지 카더라 썰이 있습니다. 가장 널리 돌아다니는 썰은 함부르크에 주둔한 프랑스군 병사들이 고향에서 먹던 프랑스식 크롸상을 그리워하다 함부르크 제빵사들에게 만드는 법을 말해주며 크롸상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부르크 제빵사들은 솜씨가 떨어져 프랑스 크롸상의 그 얇고도 부드러운 겹겹의 빵결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냥 묵직한 빵반죽이 겹쳐진 빵이 나왔답니다. 이 망작을 어떻게든 수습한답시고 함부르크 제빵사들이 이 크롸상이 되다 만 빵에 설탕과 계피를 잔뜩 뿌려 만들어진 것이 바로 프랑스식 작은 롤빵 프란츠브뢰첸이라는 썰입니다.

이 전설은 함부르크 제빵사들에게는 너무나 모욕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소 애국애향심이 돋보이는 썰도 있습니다. 위와 거의 비슷한데, 다만 함부르크 제빵사들이 프랑스 점령군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크롸상을 잘 만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엉터리로 만든 것이 프란츠브뢰첸이라는 썰입니다.

다만 이 두 전설은 모두 프란츠브뢰첸은 크롸상에 비해 맛이 없고 실패작에 가까운 빵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맛있는 음식은 반드시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갑니다. 가령 스파게티나 피짜가 세계에 널리 퍼진 이유가 이탈리아가 세계를 정복한 초강국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온 세상이 중국을 욕하지만 중국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크롸상은 전세계에서 즐겨먹는 비싼 빵이지만, 함부르크의 프란츠브뢰첸은 간신히 함부르크와 그 일대의 북부 독일에만 퍼져 있을 뿐, 남부 독일에서도 프란츠브뢰첸은 흔한 빵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전설에서도 나오듯이 부드럽고 폭신한 크롸상의 조직에 비해 프란츠브뢰첸은 묵직한 빵 반죽이 그냥 겹쳐진 것에 불과한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크롸상과 프란츠브뢰첸의 차이입니다... 물론 왼쪽이 크롸상, 오른쪽이 프란츠브뢰첸입니다.)



함부르크 사람들도 프란츠브뢰첸의 그런 현실이 너무 안타깝고 분했던지, 어떤 웹페이지에서는 프란츠브뢰첸이 결코 함부르크에서만 먹는 망한 빵이 아니며 잘 찾아보면 독일 내 다른 도시는 물론 유럽, 심지어 아시아나 남미에서도 프란츠브뢰첸을 파는 빵집이 있다면서 그런 빵집들을 조사하여 목록을 올려두는 곳이 있습니다.


(독일어를 영어로 번역해서 보니까, 아시아에서는 싱가폴의 어느 빵집에서 프란츠브뢰첸이 목격된 바가 있다고 합니다. 저 목격담을 전해준 사람에 따르면, 비록 이 싱가폴 빵집에서 파는 프란츠브뢰첸은 크기가 너무 작고 좀 마른 상태긴 하지만 함부르크 사람인 자신이 먹어보니 100% 확실한 프란츠브뢰첸이 맞답니다. 게다가 빵 바구니에 남은 것이 몇 개 없는 것으로 보아 잘 팔리는 것이 확실하다는 감격적인 증언을 함께 올려 놓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전설들은 그냥 전설일 뿐, 사실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황제인 나폴레옹도 대부분의 작전 기간 동안 감자와 빵조각을 넣은 수프를 먹었을 뿐, 부드러운 흰 빵을 먹는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반 병사들이 밀가루와 버터가 잔뜩 들어가고 만드는데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가는 크롸상을 일상적으로 먹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당시엔 크롸상이라는 빵 자체가 아직 프랑스에 없었습니다.

원래 크롸상은 17세기에 오스트리아 빈을 포위했다가 결국 함락시키지 못한 오스만 투르크를 조롱하기 위해 오스만 투르크의 상징인 초승달 모양으로 만든 오스트리아 빵인 킵펄(kipferl)에서 유래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킵펄이 흘러흘러 파리의 크롸상으로 탄생한 것은 오스트리아 포병 장교 출신인 창(August Zang)이라는 사람이 1839년 파리에 비엔나식 빵집("Boulangerie Viennoise")을 열면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거든요. 따라서 1806년~1814년 동안 함부르크를 점령한 프랑스군이 '파리의 크롸상을 만들어보라'고 요구했을 리가 없습니다.

(크롸상의 원조인 오스트리아 빵 킵펄도 실은 헝가리의 초승달 모양 빵 키플리(Kifli)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훨씬 신빙성이 있는 다른 전설은 원래 독일에서는 바게뜨 비슷하게 긴 빵을 프란츠브로트(franzbrot), 즉 프랑스 빵이라고 불렀는데, 함부르크의 제빵사가 그걸 짧게 자르고는 기름을 채운 팬에 튀겨서 만든 것이 프란츠브뢰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프란츠브뢰첸 전설만 보면 프랑스군의 함부르크 점령은 동화 속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1813년~1814년의 겨울은 무척이나 잔혹했습니다. 전세가 불리해져 함부르크가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프랑스군 다부(Davout) 원수는 1813년 11월 함부르크 시내의 모든 가구가 6개월치의 식량을 준비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당시 함부르크는 북부 독일의 경제권을 주무르는 부유한 도시였지만, 그렇다고 모든 시민들이 다 부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813년 12월부터 연합군이 본격적인 포위에 들어가자, 크리스마스 이브날 프랑스군은 대대적인 가구 검열을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명령받은 대로 충분한 식량을 준비하지 못한 가족들은 모두 교회에 몰아넣었다가 크리스마스와 그 다음날에 걸쳐 모두 도시 밖으로 추방했습니다. 삭막한 겨울에 식량도 없이 쫓겨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죽었습니다.


(이 묘비는 1813년 크리스마스 때 대책없이 성벽 밖으로 내몰렸다 죽은 사람들의 시신 1,138명을 매장한 대규모 묘지에 세워진 것입니다. 이 외에도 1814년 3월말 다부가 항복할 때까지의 포위전에서 3만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Source :
https://de.wikipedia.org/wiki/Kipferl
https://www.atlasobscura.com/foods/franzbrotchen
https://redcurrantbakery.com/franzbrotchen-flaky-german-cinnamon-rolls/
https://dannwoellertthefoodetymologist.wordpress.com/2018/01/02/the-franzbrotchen-a-pastry-of-northern-germany-born-from-napoleonic-occupation/
https://web.archive.org/web/20160218202836/http://www.franzbroetchen.de/ausbreitung.htm
https://www.beyond-history.com/en/english-beyond-history-blog/article/2017/11/19/hamburg-under-napoleon/
https://de.wikipedia.org/wiki/Br%C3%B6tchen
https://en.wikipedia.org/wiki/Franzbr%C3%B6tc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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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5

  • 린츠 2022.07.25 09:39 신고

    나시카님 안녕하세요^^
    제가 첫 댓글이네요

    점령군의 횡포가 음식까지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군요 ㅠ


    그리고 제게 도움이 될만한 "크루아상"에
    대한 조사까지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크루아상의 원본이 될만한 빵이
    헝가리에 있었다는 것 처음 알았어요

    그리고 제가 하고 있는 연구라는 걸
    살짝 밝히자면요
    나폴레옹 전쟁에서
    "헝가리 왕국의 역할"입니다

    특히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군 포위섬멸할때
    연합군 총병력이 50만 정도인데
    50만 병력 먹여살릴 보급품, 말사료
    피복 그리고 군마 수송용 말

    어디서 난 것인지 연구하고 있거든요

    스페인 포르투갈 프로이센 등은
    나라 상태가 안 좋으니 먼저 배제
    가능하고요

    영국은 어느 정도 해 줄 수 있기는 한데
    북해가 워낙 험한 바다기도 하고
    보급할 수 있는 항구가 한정적이라
    영국이 보급할 수 있는 보급품은
    아무리 계산해도 최대 5만명분
    이상은 안 나옵니다

    스웨덴은 약 15만 대군 동원한 걸로
    알고 있는데 암만 생각해도
    자국 보급품으로는 약 5만명 정도
    먹여살릴 수 있을 것 같구요
    10만 명분의 보급품은
    대륙에서 제공 받아야 할 처지 같아요

    그럼 남는 나라는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뿐인데

    러시아 제국은 자국 군대는 어떻게
    무장시키겠지만 남은 군대까지
    보급지원할 역량은 안 나오고요
    나시카님이 말씀하신대로
    폴란드 지역 도로사정이 너무 열악해서
    러시아 보급품은 다른 나라 나눠줄 분량은
    안 나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남는 오스트리아 제국
    (실질적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
    불러야 할지 모릅니다)

    보급품은 따지고 보면
    대부분 농산품/1차산업 물건이지요
    식량(밀) 말사료(귀리) 의복(리넨)
    군화(피혁) 군마 수송용 말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이런 1차 산업 물건을 생산할 수 있는
    가장 넓은 지역은 헝가리 왕국 입니다
    (트란실바니아, 슬라보니아, 바나트 등
    헝가리 실효지배지역 포함)

    전부해서 30만 제곱킬로되는 광활한
    평원지대고 농경지, 목초지, 심지어 초석 생산지(배설물과 땅 이용해서 초석 생산하는 곳)
    까지 다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보조로 갈리치아 동부(중심지:르비우,당시 이름 Lomberg) 쪽도 곡창지대라
    여기서도 상당한 농산품 생산되고요
    면적은 약 10만 제곱 킬로 되어 보이네요

    이렇게 오스트리아에 남겨진
    40만 제곱킬로미터의 농경지, 목초지라면
    연합군 50만 대군을
    어떻게든 먹여살리고 입히고 군마까지 제공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크루아상 원조가 사실 헝가리라는 것은
    "헝가리의 엄청난 농업생산량"에 대한
    힌트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여튼 나시카님 덕분에 오늘도 많이 배워 가고요
    제 연구에도 도움을 얻은 것 같아
    더욱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번 한 주도 건강하고 건승하세요!
    답글

  • 빛둥 2022.07.25 12:50

    함부르크 포위전이라는 비극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처음 봅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보다 (시대의 차이가 있으니) 규모는 작아도, 끔찍한 비극이었던 건 마찬가지였네요.

    함부르크 포위전은, 정작 나폴레옹이 결정적으로 패한 라이프치히 전투(1813년 10월)도 지나고, 프랑스 본토까지 뺏겨서 완전히 나폴레옹이 물러날때까지 계속됩니다. 끈질기게 버틴 Davout는 1814년 5월 27일이 되어서야 새로운 프랑스 왕 루이18세 명령을 받고 항복하네요. 징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Hamburg

    답글

    • 린츠 2022.07.25 13:34 신고

      와~
      정말 다부 원수의 근성과 충성심은
      정말 대단했군요

      저는 나폴레옹이 1814년 4월 8일 체포된 후
      일어난 전투가
      프랑스 서남부의 툴루즈 전투
      (웰링턴 VS 술트, 1814년 4월 12일)만
      있는 줄 알았는데

      또 있는 걸 보고 놀랍습니다

      빛둥님 좋은 정보 제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스카이리 2022.07.25 20:09

    당시 프랑스군은 2022년도의 러시아군 못지 않은 압제자군요. 물론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에게 비유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정도로 워낙 졸전을 하지만요.
    답글

    • 린츠 2022.07.26 05:55 신고

      1806년 이후의 프랑스군은
      특히 독일 이탈리아 주민에게는
      매우 심각한 압제자입니다

      나폴레옹이 만든 괴뢰국가 라인동맹만 하더라도 20만명을 나폴레옹을 위해 징집당해야 할 의무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슬프게도 러시아 원정에 끌려가
      이런저런 이유로 죽음을 맞게된 사람들은
      사실 절반은 독일인,이탈리아인이랍니다
      러시아 원정에서 사망자가
      약 40만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 약 20만은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
      끌려온 사람으로 추정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