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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보로디노 전투 (11) - 기병대 영광의 순간

by nasica 2020. 10. 5.


역사상 기병대가 요새를 점령한 일은 흔치 않습니다.  말이 성벽을 뛰어 넘을 수는 없으니까요.  제 정신을 가진 기병대 지휘관이라면 성벽을 향해 돌격을 감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기병대가 라에프스키 보루를 향해 돌격을 시작한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일라우(Eylau) 전투에서도 그랬고 바그람(Wagram) 전투에서도 그랬습니다만, 위기가 닥치거나 전황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기병대를 냅다 적진에 집어던지곤 했습니다.  이때도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최전선의 원수들이 차례로 전령을 보내 근위대를 투입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거부하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그냥 알아서 어떻게든 이기라고 독촉하는 것도 말이 안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나름대로 다 계획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기병대였습니다.

오전 내내 치열하게 벌어진 전투에서 뮈라의 기병 군단들도 바그라티온의 철각보 일대의 전투에 투입되어 힘겹게 싸웠고, 또 북쪽에서 느닷없이 쳐들어온 러시아 코자크 기병들을 막아내느라 많이 지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보병 사단들에 비하면 전투 투입되는 비율이 적었고, 손실도 더 적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니 나폴레옹이 소중한 근위대 대신 그나마 아직 싸울 여력이 남은 기병대를 활용하여 돌파구를 뚫어보자고 생각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셰바르디노 언덕에서 망원경으로 유심히 관찰해보니, 뜻하지 않게 전투의 중심지가 되어버린 라에프스키 보루는 오전에 워낙 집중 포격을 받아서 흙으로 쌓은 벽이 여기저기 허물어진 상태였습니다.  러시아군은 이 보루 벽 앞에 해자까지 파놓은 상태였습니다만, 어차피 포격으로 무너진 흙벽이 해자를 상당 부분 메워놓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기병대로도 잘만 하면 보루 점령이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라에프스키 보루가 프랑스군에게 골치를 안겨준 것은 바로 그 안에 잔뜩 배치된 대포 때문이었는데, 보병 대오가 느릿느릿 전진하여 공격하면 보루에서 쏟아지는 대포알에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지만 기병대가 바람처럼 달려서 보루 안으로 뛰어든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동생 콜랭쿠르입니다.  그의 형 아르망 콜랭쿠르는 자신이 그토록 말렸으나 나폴레옹이 기어이 일으킨 이 전쟁에서 동생까지 잃어야 했으니 그 심정은 정말 찢어지는 듯 했을 것입니다.)

 



이런 나폴레옹의 지시를 받은 뮈라는 포격에 쓰러진 몽브렁 대신 콜랭쿠르(Auguste-Jean-Gabriel de Caulaincourt)에게 제2 기병군단의 지휘권을 맡기며, 라 투르-모부르의 제4 기병군단과 함께 라에프스키 보루를 점령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콜랭쿠르는 나폴레옹의 마복시이자, 바로 직전까지 러시아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아르망 콜랭쿠르(Armand-Augustin-Louis de Caulaincourt)의 동생이었는데, 당시 35세의 혈기 왕성한 소장(général de division) 계급이었습니다.  35세에 소장까지 진급했으면 상당히 성공한 인생이었지만 그는 나폴레옹의 심복인 4살 위의 형에 비해 자신은 업적도 공훈도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만큼 뭔가 뛰어난 무훈을 세워 형 못지 않은 위대한 인물이 되기를 원했나 봅니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자살 공격 명령을 받자 매우 활기찬 목소리로 '죽든 살든 전하께서는 저 보루 안에서 저를 곧 보시게 될 겁니다' 라며 큰 소리를 쳤습니다.

라에프스키 보루는 돌로 쌓은 높은 성벽이 아니라 흙으로 쌓아올린 낮은 토루로 된 성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해자와 토루는 말이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관측한 것처럼 보루 측면의 일부는 무너져 있었고, 특히 보루 뒷면에는 대포와 탄약, 인원이 출입하기 위한 출입구가 뚫려 있었습니다.  프랑스 기병대 지휘관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누구보다 용감했습니다.  돌격의 선두는 콜랭쿠르가 지휘하는 제2 기병군단이 맡았고, 그 뒤를 라 투르-모부르가 지휘하는 제4 기병군단이 따랐는데, 거기에 포함된 작센 기병대의 미어하임(Franz von Meerheimb) 대령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잘 생긴데다 화려한 군복을 차려 입은 라 투르-모부르 장군은 이런 대기병군단을 이끌기에는 너무 젊어 보였으나 기병대를 이끌고 보루 앞까지 접근한 뒤 침착하게 토루를 우회하여 측면과 후면을 통해 보루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라에프스키 보루로 돌격하는 프랑스 흉갑기병대의 모습입니다.  외젠의 종군화가였던 알브레히트 아담(Albrecht Adam)의 그림입니다.)



이들이 돌격할 때 당연히 보루 안의 러시아 포병들은 미친 듯이 포탄을 날려보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콜랭쿠르였습니다.  결국 콜랭쿠르는 보루 안에는 들어가보지 못하고 그 앞에 쓰러졌으며, 그의 시체는 하얀 기병용 망토를 피로 흠뻑 적신 채 후송되었습니다.  그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기병대의 돌격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보루 안의 러시아군은 프랑스 기병들을 몰아내려고 기를 쓰고 싸웠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전면에서 프랑스군 보병대가 전진해오는 마당에 측면과 후면에서 프랑스 기병대가 쏟아져 들어오니 막을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미어하임 대령은 '양측이 모두 살기등등한 채로 미친 듯이 싸웠다'라고 적었습니다만, 좁은 보루 안에서는 갑옷을 입고 검을 든 채 높은 안장 위에 앉은 기병들이 유리했나 봅니다.  긴 머스켓 소총 또는 긴 장전봉을 휘두르던 러시아군은 곧 모두 쓰러졌습니다.  아무도 항복하지 않았고, 항복을 받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건 분명히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는데, 피가 분수처럼 터져나오는 보루 안에서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라에프스키 보루를 점령하고 환호하는 프랑스 흉갑기병대의 모습입니다.  저기에 널브러진 시체들의 규모를 보면 환호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전진하던 프랑스 보병대의 좌측면을 엄호하던 그루시(Grouchy)의 제3 기병군단 소속 기마 포병대의 그리와(Charles-Pierre-Lubin Griois) 대령은 비교적 후방 쪽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그 장관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대단한 무훈을 보며 우리가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 우리 기병대가 이때 세운 업적은 세계적으로도 비교 대상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지켜보고 있던 우리 모두가 그 성공을 기원하고 있었고 그렇게 빗발처럼 쏟아지는 포도탄 속에서 해자를 뛰어넘고 토루를 넘어들어간 기병대원들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했다.  이윽고 이들이 보루를 점령하자 사방에서 우뢰와 같은 환호 소리가 일어났다."


(그리와 대령입니다.  그는 왕당파 아버지 밑에서 컸으나 정규 포병 장교 학교를 졸업한 쓸모있는 포병 장교였으므로 혁명 정부 치하에서도 별 어려움 없이 군 생활을 했습니다.  일찍부터 이탈리아 방면군에서 복무하다가 뮈라의 나폴리 왕국군에 배속되기도 했으며, 1809년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때부터 이탈리아 방면군 소속으로 유럽 중앙 무대에서 싸웠습니다.  그는 나폴레옹 몰락 이후에도 큰 변화 없이 군 생활에 충실했습니다.)



이제 러시아군 방어선의 핵심인 라에프스키 보루를 점령했으니 전선을 돌파한 셈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러시아군 후방으로 쏟아져 들어가 혼비백산한 러시아군의 측면과 후면을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프랑스 보병들과 그리와 대령이 포함된 그루시의 기병군단도 보루의 왼쪽 측면을 돌아 그 후방으로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수백 미터 뒤에 보병방진으로 정렬한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러시아군의 모습이었습니다.  바클레이였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en.wikipedia.org/wiki/Battle_of_Borodino

napoleonistyka.atspace.com/Borodino_battle.htm

fr.wikipedia.org/wiki/Charles-Pierre-Lubin_Griois

en.wikipedia.org/wiki/Auguste-Jean-Gabriel_de_Caulaincourt

 

 

 

댓글9

  • 벨닷 2020.10.05 09:29

    첫 댓글이네요! 오늘도 너무 생생하게 잘보고갑니다. 역시 전장의 꽃은 기병대인것 같습니다
    답글

  • ㅁㄴㅇㄹ 2020.10.05 15:49

    나폴레옹이 동시기 장군들과 달리 기병을 다시금 충격공격을 위해 썼다고는 하지만, 아일라우, 바그람, 지금의 보르디노에서 하는거 보면 그냥 꼬라박만 하는거 같아요. 측후면 공격이나 포,보병 위협이 아니라 그냥 머릿수로 땜빵하는거요. 이런거보면 전성기때라면 몰라도 전술같은면에서는 다부 같은 부하들보다 딸리는거 같네요.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답글

    • 가람이 2020.10.05 18:09

      나폴레옹의 실력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이건 6일전투만 봐도 알 수 있죠.
      다만, 정치논리를 우선시 하고 족벌체제를 강화하는 등 일시적으로 나태해 진 거죠.
      나폴레옹전쟁에서 나폴레옹의 능력도 우수하지만, 휘하 원수들의 능력도 결정적인데,
      원수들이 어느정도 받쳐 주면 정신 똑바로 안 차려도 어떻게든 될거라는 함정에 빠지죠

      만약에 아우슈터리츠 전투에서 다부가 100km를 강행군해서 우익을 막지 않았다면?
      아우슈터리츠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했다면 역설적으로 정신똑바로 차렸을 지도 모릅니다.
      휘하 원수들이 제 때 받쳐주니까 자신의 성공기반인 군사에 소홀해 진 겁니다.
      족벌체제도 그런 맥락이죠. 제롬, 뮈라 이런 놈들이 지휘관이라니 말이 되나요?

    • ㅁㄴㅇㄹ 2020.10.05 23:48

      확실히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이후로는 많이 해이해진 것 같아요. 대육군은 이미 쟁쟁한 부하 원수들이 중추를 이루고 있고 병사들의 수와 질은 잘 갖추어져 있었죠. 더군다나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이 거둔 최고의 걸작이란 평가를 들을 정도로 깔끔한 전술을 보여주었고요. 그러다보니 나폴레옹이 지나치게 방심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나-아우어슈타트에서의 적의 본대를 착각하는 것과 군대 기동에서부터, 아일라우에서 작전 환경에 대한 오판 혹은 방심으로 인해 기동이 평소만큼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것, 바그람에서 기동전보다 화력전으로 나오게 된 것, 그리고 지금 보르디노에서 다부의 측면 우회 공격을 거부하고 정면 공격으로 나온 것이 그 예 같습니다.(바그람 전투..는 화력전으로 나오도록 전장 환경이 변한 것도 원인인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시기의 나폴레옹은 정신적 해이가 전술적인 측면에서 마이너스를 가져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최대 실수는 멈출 때를 몰랐던 것이겠죠. 아우스터리츠 전투가 그냥 대승입니까. 일부러 고지를 내어줘서 전투를 유도하고 우익을 일부러 약화시켜 적의 군대를 끌어들이고, 그렇게 약화된 적의 중앙을 돌파한 뒤 둘로 나뉜 적을 그대로 격파시킨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의 전술은 너무나 완벽합니다. 전쟁사에 기록될 정도로 명전투라 평가된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점에 다다랐으면 더 이상 올라갈 때가 없다는 것인데.. 그래도 부잣집이 망해도 3년은 간다고 가끔 피해도 많이 보고 영 애매하게 이길 때도 많았지만 결국 어찌어찌 4차 대불 동맹을 끝내면서 틸지트 조약으로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은 영토만 보자면 전성기를 누립니다. 여기서 이어진 건 스페인 전역이라는 수렁이었고.. 이때를 틈타 오스트리아는 재도전을 해오고.. 나폴레옹의 제국이 계속해서 전쟁을 반복한 건 불안정한 프랑스의 경제상황과 나폴레옹의 개인적인 야망과 실책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경제적인 면에서는 식견이 짧아 잘 모르겠지만 프랑스가 자체적으로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도록 내정을 힘을 쏟는게 답이었을 것 같습니다. 자신 대에서 이루기 힘들다면 자신의 후계자 대에서라도. 하지만 나폴레옹의 영광은 전쟁과 군사에 기반한 만큼 영 터무니없는 망상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전쟁을 통해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뜯어내는 식으로는 프랑스 제국이 주변국들과 조화를 이루머 지내는 구도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툭하면 지들 돈 없다고 때리고 삥 뜯어가는데 반감에서라도 대들게 되죠... 내정을 다지고 프랑스의 산업혁명을 이룰 기반을 마련하며, 정권을 안정화시켜 자신의 후계자에게 승계시키고 타국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아 프랑스 혁명과 이를 계승한 프랑스 제국의 존재를 인정받는다는 건 지나치게 불가능했을까요? 혹은 황제위에 오르지 않고 공화정 체제 내에서 활약하다 은퇴하여 유종의 미를 거둔... 쓰다보니 무슨 인터넷 대체 역사소설 같네요. 뭐 여하튼 나폴레옹은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세계 원탑 클래스의 명장이라 들었습니다. 누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는 질문을 확답할 수는 없지만 항상 그 이름을 들이미니까요. 칭기즈칸, 알렉산더의 과거의 장군들보다 현대 군대에 영향을 더 많이 미쳐 그 중요성이 큰 것 같습니다.

    • 흠흠 2020.10.06 13:29

      전쟁에서 전술 우위 만큼 빨리 모방되고 빨리 따라잡히는 게 드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폴레옹의 가장 큰 실수가 전술상의 우위로 전략의 우위를 가져가려 한 점이라고 봐요. 본인 뽕에 너무 취해서 내가 제대로 하기만 하면 무조건 전쟁터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이건 나폴레옹의 선배였던 프리드리히 대왕도 마찬가지였는데, 프리드리히 숭배자였던 나폴레옹은 프리드리히가 전쟁 좋아하다 독약 삼키고 자살할뻔 한 교훈은 다 잊고, 전투의 영광에만 꿈뻑 취해서 퇴위하는 순간까지 강화조건 본인이 다 걷어차버리고 발끈해서 계속 전투만 걸죠. 그 프리드리히도 단순히 운이 좋았을 뿐인데 말이죠.

      러시아 원정 이후 6일 전역만 보더라도 나폴레옹의 전술적 능력이 전성기 대비해서 특별히 흐리멍텅해졌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냥 나폴레옹이라는 지휘관의 한계가 거기까지였다고 보는 게 옳을 듯 합니다. 시대적 한계이기도 하구요. 통신도 안 되는 전근대 시기에 수십만 대군을 평원에 풀어놓고 전투를 벌이는데,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 속에서 총사령관 개개인의 전술역량이 얼마나 큰 영향이 있겠습니다. 전령이 나폴레옹의 명령서 들고 최전선까지 뛰어가면 또 상황이 얼마나 많이 변해 있을 것이구요. 그냥 일선 군당장에게 제때제때 예비군 보내주고, 실수 적게 하고, 평소에 집중력 높고 훈련 잘 되어 있고, 더 끈질기고 참을성 높은 쪽이 이기는거죠.

      원수들이 무능해서 졌다고 변명하기도 하는데, 나폴레옹 원수들은 그래도 지위나 돈 주고 그 자리까지 올라온 타국의 장군들에 비하면, 능력 위주로 올라온거죠.

      그냥 나폴레옹의 한계가 딱 저기까지인데, 사람들이 아우스터리츠의 나폴레옹이라면? 마렝고의 나폴레옹이라면? 이라는 식으로 전성기 나폴레옹과 그랑다르메라는 일종의 환상을 가지는 것 같아요. 사실 그 시절 나폴레옹이 수보로프, 카를, 웰링턴 같은 일류와 붙어본 적도 없고, 상대도 아직 그랑다르메에 적응하기 전이었으니까 가능한 승리들이었겠죠. 비슷한 문명권 내에서 고만고만한 국가끼리 돌아가면서 계속 치고 박는데 언제까지 이기겠습니까.

      칭기즈칸이나 수부타이도 같은 민족 같은 국가랑 계속 돌아가면서 전쟁 했으면 어디선가 졌을 겁니다.

    • hms 2020.10.07 09:00

      다들 동감입니다. 이렇게 전쟁전쟁만을 외친다면 끝은 예상된 바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결국 그루시가 돌아오지 않거나 등등 운에 좌우되는 측면이 큰 거죠

    • 동물원탑갓끼리 2020.10.07 10:21

      흠흠님이 말씀하신 강화조건이라는게 드레스덴 회담에서 메테르니히가 들이민 강화조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오스트리아의 중재라는 것 자체가 참전하기 위해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고, 나폴레옹에게 제시한 라인연방해체라는 조건 역시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었죠. 러시아 원정의 대 실패 이후에 병력보충능력이 극도로 떨어진 상황에서 라인연방을 해체한 다는 것은 너무 큰 도박이라고 봅니다. 애초에 대불동맹국은 관대한 조건으로 평화협상을 하려 했지만 나폴레옹의 고집으로 실패했다는 전제 자체가 사실과 거리가 멀어요 1814년 전역을 앞두고 대불동맹국은 1802년 국경으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나폴레옹에게 협상을 제의했고,나폴레옹도 이를 받아들였지만 나폴레옹이 이를 수락하자 마자 1792년 국경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조건이 변경되었죠. 나폴레옹이 그때 느꼈을 빡침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 동물원탑갓끼리 2020.10.07 10:25

      6일 전투 이후 한번 더 협상이 있었고 뒤늦게 나폴레옹이 이 제안을 수용하지만 그때는 대불동맹국측에서 거절하죠

  • 푸른 2020.10.05 21:10

    기병대의 돌격에 보루가 함락됐을때, 방진을 짜고 기다리던 바클레이는 뭔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군요

    '내가 말했지, 저거 헛짓거리라니까'하고 생각했을지, '에휴 여기서 내가 막야야지'했을지,,,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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