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케이블 TV로 스팟라이트(Spotlight)라는 2015년 영화를 봤습니다.  마이클 키튼, 마크 러팔로, 레이철 맥아담스 등 캐스팅은 나름 화려한 영화였는데, 저는 사실 아카데미 작품상에 빛나는 이 영화 별로 꼭 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카톨릭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을 보도한 신문 기자들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거든요.  제 수준은 영화든 책이든 주로 재미 위주로 접근하는 것이다 보니, 그런 음울한 주제의 영화를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TV를 켜보니 마침 방영되고 있길래 보게 된' 이 영화는 보자마자 매우 흡입력 있게 저를 사로 잡았습니다.  이 영화에는 기막힌 반전도 없고, 서스펜스나 러브 라인도 없고, 신파조의 감동이나 눈물도 없습니다.  심지어 정의는 승리한다는 그런 메시지조차 없습니다.  이 영화 속에서 주요 타겟으로 삼았던 추기경은 교구직에서 물러났으나, 얼마 안되어 바티칸에서 더 좋은 자리로 영전해 갔거든요.  그러나 매우 재미있고, 매우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모든 장면과 모든 대화가 다 긴장감이 넘쳤고, 대사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명언이었어요.  







그리고 더욱 인상 깊었던 것은 이 영화가 개봉된 이후의 카톨릭 교회의 반응입니다.  카톨릭 교회는 이 영화를 꼭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사건의 현장이었던 보스톤 교구의 추기경인 션 오말리(Sean O'Malley)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여, 이 사건이 교회의 감춰졌던 과오에 대한 반성과 그에 대한 개혁의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또한 바티칸에서도 2015년에 이 영화를 '정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영화라고 평가했고요.  어느 나라 정부와는 매우 비교되는 행동입니다.


여기서 영화 스토리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보다는, 제가 매우 인상 깊게 들었던 대사 몇 개를 여기에 옮겨 놓겠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 우리 사회의 온갖 치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대사들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언론인들도 이 영화를 꼭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 사회가 오늘날 이 모습이 된 것에는 보수측이든 진보측이든, 언론인들의 역할과 책임도 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이요.  특히 아래 첫 인용 구절은,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공중파 방송들과, 재벌들의 입김에 휘둘릴 수 밖에 없는 주요 일간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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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배우 '울버린 형' 슈라이버, 오른쪽이 실제 편집국장 마티 배런입니다.)





(보스톤 글로브지의 새 편집국장으로 부임한, 보스톤 출신이 아닌 외지인인 마티 배런이 보스톤 교구의 추기경 로를 만납니다.)



로 추기경 : 하지만 무엇이든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청하십시요.  이 도시의 번영은 주요 기관들이 협업할 때 가능해지더군요.


마티 : 어, 고맙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신문사가 그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려면 독립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기자들이 수십 명의 신부들이 아동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기사를 가져오지만, 편집국장 마티는 당장 기사화하는 것보다는 더 심층 취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마티 :  그렇게 되면 우린 전에 여러분들이 포터 건에서 치루어야 했던 무의미한 개싸움을 또 다시 겪을 뿐입니다.  그건 소란을 잔뜩 일으켰지만 정작 바뀐 것은 없었지요.  우린 신부 개개인이 아닌 기관에 촛점을 맞춰야 합니다.  관례와 정책이요.  성당이 시스템을 움직여 이 신부들이 기소되지 않도록 했다는 증거를 가져오세요.  바로 그 신부들이 다른 교구 일을 하도록 성당이 반복해서 재배치했다는 증거를 보여줘요.  이것이 아주 조직적으로 이루어졌고, 성당 고위층에서 내려온 조치라는 것을요.


벤 : 우리가 로 추기경을 파헤치는 건가요 ?


마티 : 우린 시스템을 파헤치는 겁니다.





(피해자들을 변호했던 괴짜 변호사 개러비디언이 보스톤 글로브지의 기자 마이크와 대화를 나눕니다.)


개러비디언 : 당신네 신임 편집국장 말이요, 유태인이지요 ?


마이크 : 어, 맞아요.


개러비디언 : 그 사람이 오니까 갑자기 모두들 교회에 관심을 가지는군요.  왜 그런지 아쇼 ?  이런 일에는 외부인이 필요하기 때문이오.  나처럼 말이요.  난 아르메니아인이거든.

(중략)

개러비디언 : 내 말 잘 들으쇼, 레젠데스씨, 아이 하나를 키우는 것에 동네 전체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아이 하나가 학대당한 것에도 동네 전체의 책임이 있는 거요.








(왼쪽이 배우 '버드맨/배트맨' 키튼, 오른쪽이 실제 기자 월터 '로비' 로빈슨입니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카톨릭 자선 위원회에서 일하는 피터 콘리가 '스팟라이트' 팀장인 로비를 회유하려고 합니다.)


피터 : 그건 당신도 이 도시를 아끼기 때문이쟎소.  그러기 때문에 당신이 당신의 일을 하는 거고요.  그게 바로 당신이라고요.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교회를 필요로 합니다.  당신도 느끼쟎습니까.  추기경이 완벽한 사람은 아닐 수 있어요.  하지만 그가 몇몇 썪은 사과를 처리한 방식 때문에, 그가 해놓은 모든 것을 다 내다 버릴 수는 없습니다.


(로비는 그저 고개만 끄덕입니다.)


피터 : 제가 이 이야기를 당신께 하는 것은 이것이 배런의 아이디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그 사람의 관심사라고요.  제가 진심으로 말씀드리지만, 그 사람은 우리처럼 이 도시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은 외부인인데 어떻게 그러겠어요 ?


로비 : 그러니까 일이 이렇게 되는 것이군요, 피트 ?


피터 : 그게 뭔데요 ?


로비 :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기대려고 하니까 온 동네가 못 본 체 하는거요.








(왼쪽이 배우 '헐크' 러팔로, 오른쪽이 실제 기자 마이크 레젠데스입니다.)




(기자 마이크 레젠데스가 이 성추문 사건의 진실을 밝혀줄 중요 비공개 문서에 대해 판사에게 공개 허가를 구하고 있습니다.)


볼테라 판사 : 당신이 요청하는 이 증거물들은 말이오, 레젠데스씨, 아주 민감한 기록입니다.


마이크 : 감히 말씀드리지만, 판사님,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 기록들은 공개 기록물입니다.


볼테라 판사 :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말이요, 이런 성격의 기록을 기사화한다면 언론인으로서의 책임감(editorial responsibility)이 없는 것 아닐까요 ?


마이크 : 이걸 기사화하지 않는다면 언론인으로서의 책임감이 없는 것이 아니고요 ?





(기자 맷이 이제는 중년 부인이 된 피해자를 인터뷰합니다.)


더서드 부인 : 조용히 있으라는 압력이 아주 많았어요.


맷 : 교회로부터요 ?


더서드 부인 : 예, 교회로부터요...  근데 꼭 교회만 그랬던 것은 아니에요.  내 친구들이며, 성당 교인들이며...








(왼쪽이 배우 맥아담스, 오른쪽이 실제 기자 사샤 파이퍼입니다.)




(기자 사샤가 중년이 된 남성 피해자를 인터뷰합니다.)


피해자 : 주교가 우리 집에 찾아 왔었어요.  그 양반은 전엔 이런 일이 한번도 없었다면서, 고발하지 말아달라고 했지요.


사샤 : 어머니께서는 뭐라고 하셨나요 ?


피해자 : 우리 어머니요 ?  빌어먹을 쿠키를 내오셨어요 !





(보스톤 글로브지의 탐사 취재팀 '스팟라이트'의 팀장인 로비가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성당측 변호사로 활동하는 짐을 카톨릭 자선회가 주최하는 파티에서 만나 대화합니다.)


로비 : 내 말 좀 들어봐, 지미.  자네도 옳은 편에 서고 싶을 것 아닌가 ?


짐 : 자네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군, 로비.  주변을 돌아봐.  이 사람들은 이 도시를 위해 엄청난 공헌을 해왔다고.  그냥 파티나 즐기게.





(카톨릭 정신 치료 상담사로 일하던 신부였으나, 이젠 파계하고 수녀와 결혼한 리처드 사이프라는 취재원과 기자 마이크가 대화합니다.)


마이크 : 리처드, 아직도 미사에 참석하시나요 ?


사이프 : 아뇨.  성당에 나간지 한참 되었어요.  하지만 전 저 자신을 카톨릭 신자라고 생각합니다.


마이크 : 그게 어떻게 되는 거죠 ?


사이프 : 성당은 그냥 기관이에요, 마이크.  사람이 만든 거죠.  그런 건 그냥 덧없는 거에요.  내 믿음은 영원에 있습니다.  난 그 둘을 서로 분리해서 생각하려고 해요.





(로비가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성당측 변호사로 활동하는 짐에게 진실을 말해달라고 설득합니다.)


로비 : 제발, 이거 우리 동네라고, 지미.  우리 모두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거기에 대해 아무도 아무 일도 안 했쟎아.  우리가 이 일에 종지부를 찍어야 해.


짐 :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마 !  그래, 내가 이 쓰레기들을 변호했어.  하지만 그게 내 직업이야, 로비.  난 내가 할 일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


로비 : 그래, 너도 다른 모든 이들도 그랬지.

(중략...)

짐 : 자네 말이 맞아, 로비.  우리 모두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았지.  그래서 자넨 어디 있었나 ?  여기까지 파헤치는데 왜 이리 오래 걸렸지 ?


(이 말에 로비는 자신의 책임도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 할 말을 잃습니다.)





* 전체 영화 각본은 아래 URL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openroadfilms.com/awards/pdf/Spotlight-Final-Script.pdf


* 사진 출처  http://www.historyvshollywood.com/reelfaces/spot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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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an 2016.10.16 2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네요. 우리 모두 알고있지만 아직도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네요.

  2. 푸른장미 2016.10.16 2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순간 언론은 이미 언론이 아니라 기회주의자의 길에 들어선거죠.
    진정한 언론인에게 가장 중요한 단어는 특종도 아니고 대의도 아니고 오직 하나 진실뿐이라고 생각합니다

  3. Doenitz 2016.10.16 2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기들이 그토록 열심히 추종해 온 이념 하나가 간판에 새겨져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들이 그토록 신주단지처럼 모셔 온 가치를 스스로 부정한 모 주간지가 생각나네요. 그러다 기존 독자들에게 열심히 뚜들게 맞고 장사 안되게 생겼으니 광고 열심히 올리며 징징대는 꼬라지 보고 구독 안하길 잘 했다 싶었습니다.

  4. 유애경 2016.10.17 0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문사가 그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려면 독립적으로 있어야 한다' 정말 당연하면서도 아주 뜻깊은 말이네요.
    본문하곤 상관없는 얘기지만 영화 '도가니' ,내용은 얼추 알고 있었는데 DVD빌려 보려다 아는 사람한테서 보는내내 열불나서 못참겠더라는 얘길 듣고 보길 포기한적이 있습니다.대한민국의 현실이라면 현실이겠지만 그 뒤의 분노를 감당 하기가 좀 힘들겠더라구요...
    오늘도 잘보고 갑니다.



  5. 에타 2016.10.17 2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로 기억에 남게 본 영화입니다. 지나치게 분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고 현실에 근거해 끝까지 뚝심있게 밀어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6. 석공 2016.10.17 2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 하나를 키우는 것에 동네 전체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아이 하나가 학대당한 것에도 동네 전체의 책임이 있는 거요." 이 구절이 가장 와 닿네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군가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책임은 아닌가 고민을 해야겠습니다.

  7. 오리앙 2016.10.20 09: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침 저도 주말 낮에 같은 채널에서 본 것 같네요. 인사이동 책자에서 용의자들을 찾아내는 걸 보면서 숨기려는 진실도 의외의 순간에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인 것 같습니다. 수면위로 드러난 사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은 엄혹한 시대를 목격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8. 프로이센군 2016.10.23 06: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언론은 일체의 정치색을 가지지 않고, 외압을 받을 걱정도 없이 오로지 사실만 쓰고,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는게 옳다고 봅니다. 그래도 Chosun일보나 Hangyure신문은 정말로 '언론선동'을 하는 신문이 맞는것 같아요.. 정치색이 흘러넘치죠

    • 수비니우스 2016.10.23 1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게 가능한가요?? 분명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고 실현된다면 정말 좋겠습니다만 몇가지 요소 때문에 이전에도 없었도 이후에도 없을것 같습니다.
      1. 언론의 유지비는 광고와 구독으로 이루어지는데 광고도 일종의 정치색을 띄게 되고(기업가와 정치가가 연결되므로) 구독 또한 특정 취향의 사람들이 중점적으로 해주기 때문에, 정말 정치색이 없는 언론은 정작 광고와 구독이 줄어들어 유지비 충당이 곤란할 것입니다.
      2. 오로지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판단이 들어가지 않은 사실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해도 곤란하겠죠. 그건 기계와도 같고 악의 평범성을 증폭시킬겁니다. 판단은 정치색과 연결됩니다. 또 사실의 어느 부분을 전달하느냐에 판단이 들어가죠. 사실의 모든 부분을 적절하게 전달하는건 매우 어렵습니다. 누가 할 수 있을까요?
      3. 시민들에 의한 자정작용조차 외압으로 포장될 소지가 다분합니다. 어떠한 종류의 외압도 받지 않는 것은 절대권력을 차지할 겁니다. 그 결과는 언론의 권력화가 가속되는 것일 겁니다.

    • 프로이센군 2016.10.23 2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쩝... 말 그대로 이상적인거죠.
      세상에 정말 이상적인 언론은 인간 사회가 무너질때까진 없으리라 봅니다.

    • 제스쳐 2016.10.25 16: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치란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분배" 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가치판단 없는 진실추구는 기자에게던 독자에게던 '별 의미없는', 따분한 껍질벗기기와 가벼훈 흥미정도로 전락합니다. 일이라서 기계적으로 쓰고, 별생각없이 기계적으로 읽는 일이 반복되면, 양쪽은 '정말로 피곤해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합리성?을 원할겁니다.
      이처럼 정치중립은 '가치없는 진실'과 '만성적인 피곤함'을 만들고, 이는 민주주의를 위협할 봉건권력의 성장을 가져올 겁니다. '당연하게 무책임한 권력' 을 '또하나의 가치이자, 다원화의 일각'으로 인정하고, 이를 방관하는 동안, 민주사회를 구성하던 가치들은 하나둘씩 무너져갈 겁니다.

  9. 똘레랑스 2016.11.18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백 포스터인줄 알고 클릭했다는..ㅋㅋ
    근데 여기도 알타리무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