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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위기에 처한 쿠데타 - 빅토르 위고의 'Napoleon Le Petit' 중에서 (2편)

by nasica 2016.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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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 이어지는 제롬 보나파르트의 편지 내용입니다.)


"조카여, 프랑스 국민들의 피가 흘렀구나.  그 확산을 멈추기 위해 국민들에게 진지하게 호소하렴.  너의 취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단다.  국민투표에 대해 언급했던 너의 두번째 선언문을 국민들은 보통 선거권의 재확립이라고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공화국 헌법에 기여할 의회가 없다면 자유는 어떤 것도 보장할 수 없단다.  군대가 더 유리한 위치에 있어.  이제야말로 도덕적인 승리로서 실질적 승리를 완성할 순간이다.  패배한 경우엔 할 수 없는 것을 승리했을 때 해야 한다.  과거 정당들을 해체한 뒤에 국민 전체를 복권시키렴.  보통 선거권이 진지하고 자유롭게 행사되어, 공화국을 구할 대통령과 제헌 의회를 선출할 거라고 선포해야 한다.  


내가 이 편지를 너에게 쓰는 것은 내가 형 나폴레옹을 기억하고, 그가 내전을 얼마나 혐오했는지 공감하기 때문이란다.  내 오랜 경험을 믿으렴.  프랑스와 유럽, 그리고 후세가 너의 행동을 평가할 거라는 것을 기억하려무나.


너를 사랑하는 숙부, 제롬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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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Nicolas Fabvier는 나폴레옹 밑에서 복무한 장교로서 페르시아와 오스만 투르크에 사절로 가기도 했습니다.  1851년 쿠데타 당시는 이미 퇴역한 상태였고,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보수파 정당의 일원이었습니다.)

 



마들렌 광장(Place de la Madeleine)에서는 두 대표 파비에(Fabvier)와 크레스텡(Crestin)이 만나 대화했다.  파비에 장군은 크레스텡에게 4문의 대포가 원래와는 반대 방향으로 포구가 돌려져 있는 것을 지적하고는, 즉각 그 대로를 떠나 엘리제 궁으로 말을 달렸다.  "엘리제 궁이 이미 방어 태세에 들어간 것일까 ?" 장군이 말했다.  크레스텡은 레볼뤼시옹 광장(Place de la Revolution, 혁명 광장, 현재의 콩코르드 광장)의 다른 쪽에 있는 의회 의사당의 전면부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장군, 내일이면 우린 저기에 있을 겁니다."  엘리제 궁의 마굿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몇몇 다락방에서는 3대의 여행 마차가 이른 아침부터 짐을 싣고 말들을 정렬시킨 뒤, 좌마기수까지 이미 안장 위에 오른 채로 대기 중인 것이 목격되었다.  





(여기서 레볼뤼시옹 광장으로 불린 콩코르드 광장입니다.  광장 북서쪽에는 저 너머에는 대통령 궁인 엘리제 궁이, 그리고 남쪽의 센느 강 너머에는 프랑스 혁명 이후 의회 의사당이 된 부르봉 궁 Palais Bourbon이 있습니다.)




실제로 충격이 대단했고, 분노와 증오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뭔가 하나만 더 터진다면 루이 보나파르트는 몰락할 판국이었다.  그저 그 날 하루가 그대로 끝난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쿠데타는 절망 상태에 근접해 있었다.  최후의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왔다. 과연 그는 무얼 할 생각이었을까 ?  그는 뭔가 큼직한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것으로 반격을 해야 했다.  그는 이대로 망해버리거나, 공포의 수단을 써서 위기를 벗어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린 상태였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엘리제 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그 자신도 당시 현장에 있었던, 1815년 나폴레옹 1세의 두번째 퇴위가 있었던 웅장한 응접실 근처에 있는 1층 사무실에 있었다.  그는 혼자였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둔 상태였다.  가끔 문이 조금 열리고 그의 부관인 로게(Roguet) 장군이 흰머리칼이 무성한 머리를 들이밀곤 했다.  이 장군이 문을 열도록 허락된 유일한 인물이었다.  장군은 점점 더 경악스러워지는 소식을 들고 왔고, 하던 말을 자주 '제대로 안 되고 있습니다' 또는 '일이 꼬이고 있습니다' 등의 말로 끝맺었다.  그가 말을 마치자, 벽난로를 활활 피워놓고 책상 위에 팔꿈치를, 장착 받침대 위에 발을 올려 놓고 앉아 있던 루이 보나파르트는 의자에서 고개를 반쯤 돌리고는 아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로, 계속 다음과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내 명령대로 실행하라 전하게."  






(Faustin Soulouque는 당시 아이티의 황제였습니다.  1847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장군이었던 그는 이 시건 바로 2년 전인 1849년 스스로 황제로 즉위한 독재자였고, 프랑스에서는 비웃음을 사고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로게 장군이 나쁜 소식을 들고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선 것은 거의 1시 경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로게 장군 자신이, 자기가 모시던 상관의 침착함과 함께 직접 세세히 묘사를 했다.  그는 왕자(Prince President를 공식 호칭으로 썼던 루이 나폴레옹을 가리킴)에게 파리 중심부의 바리케이드들은 여전히 버티고 있고 오히려 사람의 수가 늘고 있으며, 거리마다 '독재자 타도'를 외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감히 실제로 외쳐지던 '술루크(Soulouque) 타도'라는 구호를 보고하진 못했다.  그리고 군 부대가 이동하는 곳마다 힐난하는 고함소리가 그들을 맞았고, 주프롸 회랑(Galerie Jouffroy)에서는 어느 소령 하나가 군중들에게 쫓겨다녔으며, 카디날 카페(Cafe Cardinal)에서는 참모 대위 하나가 말에서 끌어내려졌다고도 보고했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의자에서 반쯤 일어나 장군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네 !  생-타르노(Saint-Arnaud) 장군에게 내 명령을 전하게."








(Galerie Jouffroy는 지금도 유명한 파리 시내의 지붕 덮힌 140m 정도 되는 통로입니다.   쿠데타 6년 전인 1845년에 만들어진 이 길은 최초로 유리와 강철로만 만들어진 지붕 회랑으로 유명합니다.) 




이 명령이란 무엇이었을까 ?  우린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른다.  필자는 고통스럽고 주저하는 마음으로 펜을 내려둔다.  이제 우리는 그 서러운 날, 12월 4일의 혐오스러운 위기에 접근하고 있다.  우리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쿠데타의 성공을 낳은 그 괴물 같은 행위에 다가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 루이 보나파르트가 미리 획책했던 음모 중 가장 무시무시한 것을 밝히려 한다.  12월 2일을 기록했던 모든 사료 편찬자들이 숨겨왔고, 마냥(Magnan) 장군이 보고서에서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것, 파리에서조차도 목격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몰래 속삭이는 것을 두려워하던 그것을 폭로하고, 서술하고, 묘사하려고 한다. 이제 우리는 무시무시한 것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12월 2일은 어둠으로 덮힌 범죄이고, 침묵 속에 뚜껑이 닫힌 관이며, 그 틈 사이로는 피가 솟구치고 있다.  우리는 이제 그 관 뚜껑을 열려고 한다.





(5.18 광주 학살을 연상시키네요...  당시에도 그런 학살 사건을 은폐하고 그걸 밝히려는 노력을 탄압했습니다.  빅토르 위고가 게른제 섬으로 망명가서 쓴 이 '꼬마 나폴레옹'은 몰래 프랑스로 반입되어 숨어서들 읽었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또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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