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20 22:42

요즘 시국에 편승하여, 빅토르 위고의 'Napoleon Le Petit' 즉 '꼬마 나폴레옹' 중 일부를 발췌 번역해 몇 편에 걸쳐 올립니다.  이 책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건 보쥬 광장 거리에 있는 빅토르 위고 기념관에서 제가 찍은 당시 풍자화 사진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 3세를 대통령으로서 지지했으나, 그가 1851년 12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영구 집권을 하자 그에 저항하다가 영국령 게른제 섬으로 망명했습니다.  이 신문 풍자 만화에서 빅토르 위고는 12월에 파리 길바닥에 흐른 피를 나폴레옹 3세가 자세히 보고 냄새 맡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저 만화 제목인 Le Nez Dedans 은 Nose in 으로서, '코를 들이대 !' 정도의 뜻입니다.)




1848년 7월 혁명으로 루이 필립의 오를레앙 왕조가 무너지자, 프랑스는 공화국에 대한 희망, 그리고 그동안 억눌린 각계 각층의 요구 폭발로 인한 대혼란에 빠져 듭니다.  이 와중에, 기존 정치인들의 예상과 달리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좀 덜 떨어진 인물로 보았던 루이 나폴레옹이 위대한 나폴레옹의 후광을 업고 제2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당시 프랑스 헌법은 대통령의 재임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1852년에 루이 나폴레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1851년 말 루이 나폴레옹은 개헌을 통해 자신의 집권 연장을 꾀하지만, 의회를 장악한 자신의 정적들이 그를 좌절시키자, 치밀한 준비 하에, 백부인 나폴레옹 1세가 황제에 등극한 날이자 아우스테를리츠 전투가 벌어졌던 날인 12월 2일, 친위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에 대해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곳곳에서 쿠데타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고,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를 비롯한 지식인들도 이 저항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결국 군대의 무자비한 진압에 수백명의 사망자를 내며 봉기는 실패했고, 1년 후인 1852년 12월 2일, 루이 나폴레옹은 공화국을 폐지하고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합니다.


---------------------





12월 2일의 범죄


"12월 4일"


저항은 예상과는 다른 대규모가 되어 버렸다.  


전투는 매우 위협적으로 진행되었다.  더 이상 소규모 국지전이 아니라, 아예 대규모 전투가 되어 버렸고, 사방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엘리제(Élysée)와 다른 지역구에서, 사람들은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것들을 쌓아 올렸다.


파리 중심부는 임시로 만든 보루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바리케이드를 길을 막은 구역들은 커다란 사다리꼴 모양을 형성했다.  알르(Halles)와 랑뷔토 가(Rue Rambuteau)를 한쪽으로 하고, 대로들을 다른 쪽으로 했으며, 동쪽으로는 탕플 가(Rue du Temple)를, 서쪽으로는 몽마르트르(Rue Montmartre)를 경계로 했다.  그물망처럼 엮인 이 거대한 거리들은 모든 방면에서 보루와 참호로 차단되어 있었고, 매시간이 흘러갈 때마다 점점 더 무시무시한 모습을 띠었고, 요새처럼 변해갔다.  바리케이드의 전투원들은 센느 강 부두까지 전초병들을 내보냈다.  


이 사다리꼴 구역 밖에서는 바리케이드가 포부르 생-마르텡(Faubourg Saint-Martin)과 운하 인근까지 뻗어 있었다.  저항 위원회에서 대표자로 드 플로트(Paul de Flotte)를 보내온 학교 구역은 그 전날 저녁 때보다도 더 보편적으로 봉기에 나선 상태였다.  교외 지역에도 불이 붙고 있었다.  바티뇰(Batignolles)에서는 '무기를 들라'는 북소리가 울려퍼졌고, 마디에 드 몽조(Madier de Montjau)가 벨빌(Belleville) 지역을 일깨우고 있었다.  샤펠-생-드니(Chapelle-Saint-Denis)에서는 엄청난 크기의 바리케이드를 세우는 중이었다.  상업 지구에서 남자들은 머스켓 소총을 날랐고, 여자들은 붕대를 만들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어 !  파리가 봉기했어 !"  B---가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로 저항 위원회에 들어서며 외쳤다.  





(사진 속의 인물은 마디에 드 몽조 Noël Madier de Montjau 입니다.  이 언론인 출신의 정치인도 이 무장 봉기 이후 망명을 해야 했고,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군에게 항복하는 1870년 이전에는 프랑스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항 위원회는 쿠데타가 발생한 12월 2일 밤에 조직된 것으로, Carnot, de Flotte, Jules Favre, Madier de Montjau, Michel de Bourges, Schœlcher, 그리고 Victor Hugo가 대표로 있었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날아들었다.  각기 다른 지역구의 모든 위원회가 우리에게 연락을 해왔다.  저항 위원회의 위원들은 심사숙고하며 사방의 전투에 대해 명령과 지시를 전달했다.   시민들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아직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있던 이 모든 사람들이 열정과 기쁨에 가득차 서로 포옹하기도 했다.  


쥴 파브르(Jules Favre)가 말했다.  "자, 이제 정규군 연대 하나만 우리 편으로 넘어오면 루이 보나파르트는 끝장이야."  미쉘 드 부르쥬(Michel de Bourges)도 말했다.  "내일이면 공화국이 시청(Hotel de Ville)을 접수할 걸세."  모든 것이 흥분의 도가니였다.  가장 조용한 지역구에서도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 포고문이 찢겨져 나갔고, 법령 발표문이 훼손되었다.  보부르 가(Rue Beaubourg)에서는 바리케이드를 세우는 남자들에게 여자들이 창문에서 "용기를 내세요 !"라고 소리쳤다.  소요 사태는 포부르 생 제르맹(Faubourg Saint-Germain)까지 퍼졌다.  파리 경찰 조직의 중심부였던 제뤼살렘 가(Rue de Jerusalem)의 경찰청 본부는 전체가 벌벌 떨고 있었다.  공화국이 승리할 것 같은 가능성이 보였으므로, 경찰의 고민은 엄청났다.  경찰청 안마당에서, 사무실에서, 그리고 복도에서, 서기들과 경관들(sergents-de-ville)은 코시디에르(Caussidiere)에 대해 애정어린 후회를 마음에 담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Marc Caussidière는 언론인으로서 1848년 7월 혁명 때 바리케이드에서 싸우다 경찰 본부를 점령한 뒤 임시 정부에 의해 경찰 총장으로 임명된 사람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런 소란 속에서, 경찰 총장인 모파(Charlemagne de Maupas)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쿠데타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봉기에 대해 험악한 태도를 취하고 있던 그가 뒷걸음질치며 꼬리를 내렸다.  아마도 그는 겁에 질려 거리의 소란과 차오르는 반란, 정의의 편이 일으킨 성스럽고 적법한 반란 소식에 귀를 기울였던 모양이었다.  그가 허둥거리며 주저하는 동안 그의 명령도 슬슬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의 전임자이던 카알리에(Carlier)는 그런 그를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  "저 불쌍한 젊은 친구가 배탈이 난 모양이군."





(Charlemagne de Maupas는 당시 루이 보나파르트 대통령 밑에서 경찰 총장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는 쿠데타의 주요 계획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비상 사태 속에서 모파는 모르니(duc de Morny, 당시 내무부 장관)에게 달라 붙었다.  당시 경찰청과 내무부는 전신으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소식을 주고 받고 있었다.  모든 긴박한 소식과 공포와 혼란에 질린 신호들이 경찰청장으로부터 내무부 장관에게 날아들었는데, 모르니는 담대한 인물로서 좀더 침착한 편이었고, 그의 사무실에서 이런 모든 충격적인 소식들을 소화하고 있었다.  이렇게 겁에 질린 소식이 처음 날아들자, 모르니는 그저 '모파가 아픈 모양이군'이라고 말했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전신으로 '잠이나 자시오'라고 답을 했다고 한다.  다시 어쩌면 좋으냐고 질문이 날아오자, 그는 다시 '잠이나 자시오'라고 답을 했고, 세번째로 같은 질문이 오자, 그도 평정심을 잃고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빌어먹을 잠이나 자라니까' 






(Charles de Morny는 탈레랑의 아들과 나폴레옹의 의붓딸 오르탕스 사이에 태어난 혼외자로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동복 형제였습니다.  당시 내무부 장관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정부 요원들의 열의도 아주 빠른 속도로 식어 갔고 편을 바꾸기 시작했다.  포부르 생-마르소(Faubourg Saint-Marceau) 구역을 봉기시키라는 임무를 받고 저항 위원회에서 파견된 어느 용감한 남자가 주머니에 좌익의 선언문과 포고문을 잔뜩 담은 채로 포세-생-빅토르 가(Rue des Fossés-Saint-Victor)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즉각 경찰청 방향으로 끌려갔다.  그는 총살당할 것을 각오했다.  그를 끌고 가던 호송대가 케-생-미쉘(Quai-Saint-Michel)에 있는 시체 안치소를 지나치자, 시테(Cité) 섬 쪽에서 머스켓 소총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호송대를 이끌던 경관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초소로 돌아가게.  이 죄수는 내가 처리하겠네."  병사들이 가버리자, 그는 죄수를 묶은 포승을 끊더니 말했다.  "가게나.  내가 자네 목숨을 살려주지.  자네에게 자유를 준 것이 나라는 것을 잊지 말라구.  날 잘 봐 둬.  다시 날 봐도 알아 볼 수 있게 말일세."







(시테 Cité 섬은 파리 한 가운데 있는 센느 강 속의 섬으로서, 노트르담이 여기에 있고 각종 관공서도 있습니다.)




군의 주요 쿠데타 공모자들은 회합을 가졌다.  주요 의제는 루이 보나파르트가 포부르 생-오노레(Faubourg Saint-Honoré)를 즉각 떠나서 엘리제보다는 방어에 더 용이한 두 전략 요충지인 앵밸리드(Invalides) 또는 뤽상부르 궁(Palais du Luxembourg)으로 이동하는 것이 필요한가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앵밸리드를 선호했고, 다른 이들은 뤽상부르 궁을 선호했다.  이 때문에 두 장군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베스트팔렌(Westphalia) 전(前) 국왕이던 제롬 보나파르트(Jérôme Bonaparte)가 쿠데타가 실패할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다음 날을 걱정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편지를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에게 보내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


나머지는 또 시간 날 때요...

Posted by nasica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ㄴㅇㄴㅇ 2016.11.20 2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순실봇이 나폴레옹 3세만큼의 지능이 있길 바라는건 무리인가 봅니다...

  2. 응딩이 2016.11.21 04: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모르니 공작은 루이 보나파르트와는 동복형제 정도가 아니라 그냥 형제였다죠... 유전자 검사 결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친부가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거든요

  3. 알타리무1 2016.11.21 1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국의 경우는 민주주의체제가 들어선뒤 왕정으로 바뀌거나 역혁명이 일어난사례가 없었는데(남북전쟁은 남부연합은 왕정이 아니고 공화국이였지요)
    프랑스의 경우는 역혁명이 일어나는등 민주주의체제안착에 어려움을 겪는데...

    이유는 무엇일런지. 민주주의라는것이 국민의 힘이 세지고 나서야 오는것인데.
    당시 미국의 시민이 프랑스이 시민보다 경제력이 특별히 세지는 않았고.
    교육수준도 비슷하고..
    단 한가지 차이점이라면 시민들의 무장수준이 미국이 매우 높았다는것인데(총기보유와 민병대결성의 자유)
    이것이 영향을 미친것일까요???

    전에 덧글에 보면 어느분이 매우 유익한 동영상을 소개해주었는데. 요즘 그분 블로그를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과도 연관이 많이 있어서 제가 다시 한번 링크를 걸께요.
    (재미있고 유익합니다. 한글자막이 안나올때는 우측하단의 톱니바퀴모양버튼설정버튼을 툴러서 한글자막을 선택하에요)

    http://blog.naver.com/kyw0277/220847067516
    저근데 곧바로 유튜브 주소를 링크를 걸려니까 안걸어지네요 부득히 다른분 블로그 주소를 겁니다 이글안에 제가 소개하고 싶은 유튜브동영상이 있습니다.

    • 수비니우스 2016.11.21 15: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마 님처럼 헛소리와 거짓말을 반복하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좋은글 읽기전에 설마해서 댓글란 봤더니 눈만 더럽혀졌네요.

    • 알타리무 2016.11.21 17: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남자가 겨우 이런거 가지고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면 어떻합니까.
      배포를 크게 가지세요.
      제가 어떤사람이건 간에 설령 제가 나쁜사람이더라도 저의행동에 일희일비하면 님도 남에게 가벼운 사람으로 비추어집니다.
      자 남자답게 베포를 크게 크게 !!


      ---------
      뭐 제가 할말은 아니긴 하지만..

    • 수비니우스 2016.11.21 2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거 완전 미친 사람이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 알타리무 2016.11.21 2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ㅎㅎㅎㅎ

    • 신들의황혼 2016.11.21 2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프랑스는 왕정의 전통도 있고 왕족들도 살아있으니까 왕정복고가 가능했겠지만 미국은 처음부터 왕정이란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갈 곳도 없었던게 차이 아닐까 합니다

    • 알타리무 2016.11.22 0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그것도 하나의 큰요인이겠군요.

  4. 블랑 2016.11.21 23: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은 인성 논란은 있어도 능력이야 있었는데, 3세는 정말이지.

  5. 안다쏜 2016.11.22 0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나파르트 가계의 대표는 지금 제롬의 후손이 맡고 있지만..

    나팔륜 1세의 직계도 남아있긴 하죠.
    폴란드의 발레프스카 백작부인 사이에서 본 알렉산더 발레프스키의 후손들..

    유전조사에서 나폴레옹 3세는 보나파르트 가문이 아닌걸로 드러났으나, 발레프스키 백작의 후손은 보나파르트 가의 후손인게 증명되었죠. 정작 알렉산더 백작은 평생 자기 아버지가 나팔륜 1세가 아니라 했지만서도..

  6. 무는개 2016.11.22 08: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기도 전에 알타리무가 개소리 싸질러놨을거라 예감햇는데 적중

  7. boribob 2016.11.22 1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예전 디씨에서 부터 관종을 상대할때는 무관심이 답입니다.
    관종은 관심을 먹고 삽니다.
    이 블로그에서 누군가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언급조차 하지 말아주세염ㅋㅋ

  8. 자유행성동맹 2016.11.22 18: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뮤지컬 노스트람 드 파리에 나온 시티섬이 저기여군요 ^0^

  9. ㅇㅇ 2016.12.02 0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