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clay de Tolly5

산으로 가려는 프로이센군, 강으로 가려는 러시아군 알렉산드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바클레이의 현 상황 진단과 향후에 대한 계획이 옳으니 바클레이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긴 했지만, 바클레이의 생각대로 모든 것을 진행할 경우 당장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프로이센군은 절대 자국 영토인 슐레지엔을 버리고 러시아군을 따라 오데르 강을 건너 폴란드로 도망치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프로이센군이 연합군 전체 전력의 1/3 이하라고 해도, 러시아는 프로이센 없이 나폴레옹과 싸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르는 또 다시 못된 버릇을 바클레이에게도 시전했습니다. 바클레이의 의도는 브레슬라우로 직행하여 거기서 오데르 강을 건넌다는 것이었으나, 알렉산드르는 그의 팔을 비틀어 무조건 일단 슈바이트니츠로 가도록 강요한 것입니다. 바클레이는 비로.. 2023. 6. 19.
큰 기대 큰 실망 - 비텝스크 (Vitebsk) 전투 러시아 제1군의 뒤를 추격하던 뮈라는 최소한 러시아군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는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뮈라의 보고를 통해 러시아 제1군이 드리사의 방어진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는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쾌재를 올렸습니다. 드디어 러시아군과 결전을 벌일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태까지 빌나에서 여러가지 행정 업무에 발목이 잡혀 있던 그는 제롬의 바보짓 때문에 바그라티온을 놓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직접 군을 지휘하기로 했고, 당장 말에 올라 드리사를 향해 달렸습니다. 나폴레옹의 기본 계획은 퓰과 알렉산드르의 실수를 100%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드리사의 러시아 제1군의 남동쪽으로 우회하여 바그라티온의 러시아 제2군과의 합류를 원천적으로 봉쇄함과 동시에 러시아군의 보급로를 막고 내친 김에 러.. 2020. 1. 20.
1812년 나폴레옹을 기다리는 러시아군의 내부 사정 (제3편) 이미 1811년부터 러시아는 프랑스와 언제 한판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1812년 6월 경 러시아는 거의 1년 넘게 전쟁 준비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나폴레옹을 맞이할 러시아의 준비 상태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요 ? 한줄 요약하자면 머리 수만 따지면 프랑스군의 그랑다르메에 비해 그다지 나쁘지 않았습니다. 원래 1805년 당시 러시아의 징집 제도는 일종의 지역 차출제로서, 지역 농노들 500명 중에서 4명의 장정을 병정으로 차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차출된 운 나쁜 젊은이에게는 25년의 병역 의무가 주어졌는데, 당시엔 전화는 커녕 우편도 변변치 않았는데다 어차피 본인이나 가족이나 모두 문맹인 경우가 많아서 가족과 연락을 주고 받을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 2019. 11. 11.
1812년 나폴레옹을 기다리는 러시아군의 내부 사정 (제2편) 총사령관 바클레이 드 톨리가 러시아 귀족들로 이루어진 부하들로부터 미움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이 양반이 실력파 인물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그의 할아버지가 오늘날 라트비아(Latvia)의 수도인 리가(Riga)의 시장을 보낼 정도로 보통 집안은 아니었지만, 정작 러시아 귀족으로 편입된 것은 군인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최초일 정도로, 러시아 귀족층 입장에서는 그다지 전통있는 명문가는 아니었습니다. 바클레이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입대하여 2년 뒤 소위로 승진했고, 그 이후로 오스만 투르크나 스웨덴 등 전통적인 러시아의 적들과의 전쟁 속에서 직업 군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착실히 쌓았습니다. 그는 똑똑할 뿐만 아니라 전투의 광기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2019. 11. 4.
1812년 나폴레옹을 기다리는 러시아군의 내부 사정 (제1편) 나폴레옹의 수십만 대군이 온갖 말썽과 이야기꺼리 속에 착착 네만 강 서쪽에 집결하는 동안, 알렉산드르와 러시아군은 뭘하고 있었을까요 ? 나폴레옹의 침공에 대비하여 모스크바의 성벽을 강화하고 있었을까요 ? 일단, 로마노프 왕가의 왕궁은 모스크바가 아니라 상트-페체르부르크(Sankt-Peterburg, Санкт-Петербу́рг)에 있었습니다. 1712년 표트르(Pyotr) 대제가 모스크바였던 수도를 상트-페체르부르크로 바꾼 것이었지요. 당시 인구수도 모스크바와 상트-페체르부르크가 각각 30~40만 정도로 비슷비슷했습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최종 목표로 삼은 것은 거기가 러시아의 수도이거나 가장 큰 도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역사적인 지위와 함께 모스크바의 지리적 위치가 러시아 제국의 심장.. 2019. 10.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