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3163 바이에른의 배신 (2) - 럼포드 수프를 먹는 나라 바이에른 공국에게 있어 처음에는 강 건너 불구경이던 프랑스 대혁명은 예상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활활 불타올라 밀물처럼 국경을 넘었습니다. 1793년 루이 16세와 앙트와넷을 처형한 프랑스 국민공회는 1795년 불한당 같은 명장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를 앞세워 평소 그렇게 탐을 내던 라인강 서쪽의 바이에른 고립영토(exclave)이자, 당시 바이에른 선제후였던 카알 테오도어(Karl Theodor)의 고향이자 본거지인 팔츠(Pfalz) 선제후령과 율리히(Jülich) 공작령을 점령했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음 해인 1796년 모로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까지 점령했는데, 바이에른군은 거의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대국 프랑.. 2024. 8. 19. 바이에른의 배신 (1) - 고래 싸움에 터지는 새우 등 러시아 원정에서 참패한 뒤 1813년 수세에 몰린 나폴레옹이 오히려 공세로 나아가 작센으로 진출한 이유는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의 침공을 받는 최전선이었던 작센의 이탈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정작 나폴레옹의 등에 가장 먼저 칼을 꽂은 것은 가장 친불적인 성향을 보이던 바이에른 왕국이었습니다. 작센에 비하면 전선 저 멀리 후방에 있던 바이에른은 대체 왜 가장 먼저 나폴레옹을 배신했을까요? 실은 그걸 이해하려면 엄연히 독일권 공국이었던 바이에른은 애초에 왜 가장 친불적인 성향을 보였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1812년 당시의 라인연방 지도입니다. 바이에른 왕국이 Königreich Bayern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보시다시피 프로이센과는 아니지만 오스트리아와는 그대로 국경을 접하고 .. 2024. 8. 12. 덴너비츠 전투 에필로그 - 흔들리는 라인연방 덴너비츠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사에서 그다지 잘 다루어지지 않는 전투이긴 합니다만, 의외로 이 전투는 그 의미가 큰 사건이었습니다. 이 전투가 일어나게 된 원인부터 그 전투 내용, 그리고 그 결과가 가져온 여파 등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먼저, 왜 이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요. 나폴레옹이 격파해야 할 적의 주력부대는 분명히 보헤미아에 있었는데도,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베를린에 집착하여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을 쪼개어 베를린으로 보냈다가 이 사달이 났지요. 그랬던 이유, 즉 오데르 강을 장악하여 러시아군이 스스로 후퇴하게 만든다는 큰 그림에 대해서는 이미 전에 설명드린 바 있으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베를린 점령과 오데르 강 장악이 그렇게 중요한 목표라면, 왜 나폴레옹은 전.. 2024. 8. 5. 덴너비츠 전투 (4) - 습관성 삽질 덴너비츠 전투가 한창 진행되던 오후 3시~4시까지의 전황은, 하나의 경로로 3개 군단을 움직이겠다는 네의 약간 비상식적인 계획이 결과적으로는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했습니다. 후방에서 레이니에의 군단이 조금씩 도착하여 투입되면서 프랑스군은 좌익을 점점 더 넓고 강하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각 군단들이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 움직이다가 이렇게 뜻하지 않게 벌어진 전투에 다른 군단들이 제때 현장에 투입되지 못했다면 상황은 제2의 그로스비어런 전투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오후 4시경이 되어 우디노의 군단이 현장에 다 도착하자, 우디노도 현장에서 상황을 파악하고는 바로 코 앞에 있는 레이니에의 좌익으로 병력을 투입하여 프랑스군의 좌익을 더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중과부적인 .. 2024. 7. 29. 덴너비츠 전투 (3) - 남자가 한을 품으면 잔나(Zahna)를 지나 위터보그(Jüterbog)로 가는 길은 작센과 브란덴부르크 즉 프로이센의 국경 지대였는데, 이 일대는 그야말로 평야 지대로서 간간히 나타나는 낮은 언덕, 시냇물과 습지 외에는 거의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습니다. 원래 군대가 행군할 때는 소규모 정찰대를 앞세워 지형과 함께 적의 출현을 경계하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찰대로 쓰라고 존재하는 것이 바로 기병대였습니다. 그런데 위터보그를 향해 진격하던 네의 베를린 방면군은 희한하게도 그런 정찰기병대를 두지 않고 행군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이유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아마 당시 공포의 대상이었던 코삭 기병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소규모 기병대를 앞세웠다가 혹시라도 코삭들과 마주치.. 2024. 7. 22. 덴너비츠 전투 (2) - 인사가 만사 네가 비텐베르크에 도착하여 확인한 베를린 방면군의 병력과 장비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애초에 그로스베어런에서의 패배는 우디노가 지나치게 각 군단을 분산시킨 채 전진하는 바람에 병력 집결이 제대로 안 된 상태로 전투가 벌어지는 바람에 겪은 것이었고, 베를린 방면군의 사상자 숫자도 3천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후퇴하는 우디노에 대한 추격이 거의 없었던 덕분이었습니다. 원래 프로이센군의 뷜로는 가열찬 추격전을 벌이려 했으나 소심했던 총사령관 베르나도트가 추격을 중지하도록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를린 방면군은 병력도 6~7만으로 크게 줄지 않았고 포병대도 고작 14문의 야포만 상실하여 아직 190문 이상의 야포를 갖춘 상태였습니다. 다만 병사들, 특히 작센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 2024. 7. 15. 덴너비츠 전투 (1) - 러시아 땅의 마지막 프랑스인 결국 나폴레옹은 베를린으로 향하지 못합니다. 만약 막도날이 바우첸까지도 블뤼허에게 내준다면, 자신이 북쪽 베를린 원정을 간 사이 드레스덴까지도 블뤼허의 위협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의 작전은 도시와 요새에 연연해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적의 주력 부대를 격파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드레스덴은 이야기가 좀 달랐습니다. 이 곳은 연합군의 3개 방면군과 대치하는 중심 거점이자 보급창 역할을 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당장 주전장이 된 주요 동맹국 작센의 수도였습니다. 여기를 잃으면 통신선과 보급선이 모두 끊어질 뿐만 아니라 이 일대에 축적된 많은 군수 물자와 함께 동맹국까지 잃어버릴 가능성이 컸습니다. 9월 2일, 나폴레옹은 자신 대신 그랑 다르메의 2인자.. 2024. 7. 8. 나폴레옹의 고민 - 동쪽 남쪽 북쪽 중 어디로? 나폴레옹이 후퇴하는 보헤미아 방면군에 대한 추격을 중단하고 드레스덴으로 돌아가버리는 바람에 쿨름 전투의 참극이 벌어졌다고 나폴레옹을 비난하는 것은 부당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기병대도 부족한데다, 그로스비어런에서 우디노의 베를린 방면군이 패배한 상황에서 별다른 준비도 없이 다짜고짜 보헤미아로 넘어가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8월 28일 나폴레옹이 드레스덴으로 돌아간 것은 전해지는 것처럼 그의 건강 문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제 앞으로 어디를 칠 것인가를 심사숙고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드레스덴에서 나폴레옹은 계속 병상에 드러누워있던 것은 아니었고, 이틀만에 'Note sur la situation générale de mes affaires'(내 문제들에 대한 전.. 2024. 7. 1. 쿨름 전투 에필로그 - 다시 트라헨베르크 흔히 쿨름 전투에 대해, 방담이 무분별하게 연합군의 퇴각을 추격하다 벌어진 패배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당시 드레스덴에 있었던 근위포병대의 노엘(Jean-Nicolas-Auguste Noël) 대령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 군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방담 장군에게만 물어야 할까? 사람들은 원래 그가 산 속에 남아 프로이센군의 후퇴를 저지해야 했는데, 워낙 성격이 과감했던 방담이 러시아군을 추격하여 산 밑까지 내려갔기 때문에 이런 패전을 겪었다고들 했다. 또는 그게 아니라, 방담이 토플리츠(Toplitz)까지 추격전을 벌였던 것은 황제 폐하의 명령에 부합하는 것이었을까?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모든 사태에 대한 비난을 건성으로 추격에 나섰던 구비옹 생시르(.. 2024. 6. 24. 쿨름 전투 (7) - 방담과 짜르 쿨름 전투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방담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요? 방담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최후까지 전방의 러시아군을 막아내던 포병대를 지휘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병사들을 지휘하느라 결국 프로이센군을 뚫고 포위망을 빠져나간 1만여 명의 무리 속에는 끼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국 코삭 기병들에게 사로 잡혀 포로가 되었는데, 프랑스측의 기록에 따르면 짜르 앞에 끌려간 그는 알렉산드르로부터 약탈을 일삼는 불한당이라는 꾸짖음을 듣자, '난 최소한 지 애비를 죽인 자식이라는 비난은 받지 않는다'라고 말대꾸를 했다고 합니다.(쿨름 전투에서 코삭 기병들에게 사로잡히는 방담의 모습입니다.) 이건 거친 성격 탓에 술트와 제롬 보나파르트 등 자신의 상관들과 끊임없이 알력을 빚던 방담의 성격을 생각하면 꽤 그.. 2024. 6. 17. 쿨름 전투 (6) - 구멍을 뚫다 운명의 8월 30일 아침이 떠오르기 전에, 이미 전날 밤 방담은 휘하 사단장 및 참모들을 불러모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작전 회의를 한 바 있었습니다. 모두의 의견은 일치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대군을 이끌고 곧 도착할 것이니, 당장 눈 앞의 적 방어선이 견고하더라도 어떻게든 이를 뚫어야 하며, 이를 해내지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이 쿨름에서 버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드레스덴에 앓아 누워 있고 그들을 도우러 오는 프랑스군은 없다는 것을 모르던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습니다. 좋은 일도 있었습니다. 30일 새벽에 쿨름에는 방담이 그토록 아쉬워하던 예비 포병대 등이 뒤늦게나마 마침내 도착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12파운드 중포 6문과 2문의 곡사포, 그리고 8문의 8파운드 포가 있었고, .. 2024. 6. 10. 쿨름 전투 (5) - 산 속에서는 모두가 혼란하다 적군이 계속 증강되는 가운데, 후발대로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한 나폴레옹의 본대로부터 소식이 없자 아마 방담도 슬슬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8월 30일 오전 6시 30분 경에 나폴레옹에게 보낸 방담의 보고서는 다소 횡설수설하는 내용이었는데, 그의 초조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적군은 테플리츠로 가는 길을 결연한 의지로 방어하고 있습니다. 밤 사이에 적의 병력은 증원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현 위치를 지키고 폐하의 명령을 기다릴 뿐입니다. 저는 병력을 집중시켜 폐하의 명령을 수행하려 했으나, 아직 저의 예비 포병대가 도착하지 않았으며 탄약도 거의 떨어졌습니다. 제23사단을 따라가버린 제 기마포병대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식량도 없습니다. 적군이 (마을들의) 모든.. 2024. 6. 3. 이전 1 2 3 4 5 6 7 ··· 1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