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0 06:30

후퇴하는 웰링턴의 뒤를 쫓아 리스본으로 달리던 마세나가 1810년 10월 14일 생각지도 못했던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을 직접 육안으로 보고 그 규모에 경악하는 사이, 웰링턴이 사전에 프랑스군 후방에 미리 풀어놓았던 비밀 병기는 이미 작동을 시작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기아였습니다.  애초에 웰링턴은 마세나와 피투성이가 되어 멱살을 쥐고 구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기본 전략은 리스본 북쪽의 황량한 험지에서 마세나의 진격을 틀어막고 마세나에게 굶어죽든지 돌아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웰링턴은 부사쿠 전투를 전후하여 계속 그 일대의 포르투갈 주민들을 방어선 이남으로 피난가라고 강요했던 것입니다.  


이는 병력은 부족하지만 물자는 풍부하고 기동력은 느리지만 방어에는 탁월한 영국군에게 딱 어울리는 매우 효율적인 전략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웰링턴의 자화자찬에 불과했습니다.  포르투갈 입장에서 보면 이런 작전은 웰링턴이 영국군의 전투 손실을 막기 위해 포르투갈 민간인들을 희생시키자는 수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10월 중순부터 우기가 시작되는데, 식량이나 주택이나 영국군은 아무 것도 책임져주지 않으면서 무조건 집을 떠나 남쪽으로 가라는 것은 사실상 길바닥에서 굶어죽거나 얼어죽으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주민들은 피난 가기를 거부했고 영국군은 집에 남은 주민들에게 '떠나지 않을 경우 무력을 행사하겠다' 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전쟁은 비참한 것입니다.  영국군의 명령에 순종하여 정처없이 길을 떠난 주민들도, 명령을 거부하고 집에 남은 주민들도 모두 전쟁의 참혹함에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프랑스군에게도 인정은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집에 남은 주민들은 그야말로 프랑스군에게 가진 식량과 주택을 모두 빼앗기고 여성들은 성폭행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그에 저항하던 주민들은 가차없이 살해되었습니다.  가령 쿠임브라(Coimbra) 시의 주민들 중 끝내 피난가지 않고 남은 주민들 약 2만명 중 5% 정도인 1천명 정도가 쿠임브라가 함락될 때의 무질서한 약탈 와중에 살해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영국군의 총칼에 떠밀려 길바닥에 나선 주민들의 처지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동맹군이라지만 난폭하기로는 프랑스군 못지 않았던 영국군의 약탈과 폭행, 굶주림과 추위였습니다.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뒤로 후퇴할 때 연합군과 함께 집을 버리고 피난가도록 강요된 포르투갈 주민들의 비참함에 대해서는 로열 스코틀랜드 제1 연대 3대대의 존 더글라스(John Douglas)라는 부사관이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불쌍한 주민들은 가족마다 앞에 어린 것들을 앞세우고 걸었는데, 이 어린 것들은 매일, 아니 거의 매시간 줄어들었다.  그러나 난파선의 선원들이 물 위에 뜬 마지막 나무조각에 매달리듯 이들은 계속 어디론가 걸어가야 했다.  이들을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적이나 아군이나 모두 이들의 소지품을 약탈했다.  결국 이들 대부분은 영국군 포병 진지 뒤편에서 땡전 한푼 없이 참혹한 겨울을 보내야 했다.  이 글을 읽는 영국인들이여, 생각해보라.  내가 여러분에게 이런 사실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고, 또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잠시 동안이라도 그 불쌍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도 쉬운 일이리라.  그러나 전쟁의 참혹한 손아귀로부터 이 축복받은 섬 주민들(영국인들을 지칭: 영국)을 지켜주신 주님께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Los desastres de la guerra, 즉 '전쟁의 참상'이라는 고야(Goya)의 시리즈 판화물 중 'No hay quien los socorra' (그들을 도울 자는 없다)라는 그림입니다.  세 명의 여인이 죽어 쓰러져 있고, 한 명이 서서 울고 있습니다.)




(역시 '전쟁의 참상' 시리즈 중 'De qué sirve una taza?' (컵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라는 그림입니다.  두 명의 굶주린 여인이 쓰러져 있는데 다른 여자 하나가 그 중 죽어가는 한 명에게 뭔가가 담긴 컵을 권하고 있습니다.)




결국 1810년 10월부터 1811년 봄까지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동안 무려 5만명의 포르투갈 주민들이 아사 및 병사, 동사해야 했습니다.  5만이라는 숫자는 당시 포르투갈 전체 인구의 2%로서 정말 막대한 피해였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남한 인구가 약 2천만명이었는데 그 끔찍했던 3년 전쟁 동안 남한 민간인 사망자만 약 38만명으로 약 2%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포르투갈은 약 5개월 동안 전체 인구의 2%가 사망했으니 얼마나 참혹한 광경이었는지 상상이 가실 것입니다.


포르투갈 민간인들에게 이토록 참담한 희생을 강요한 결과 프랑스군도 큰 피해를 입었을까요 ?  예, 당연히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상대적으로 매우 작았습니다.  1810년 9월 기세 좋게 포르투갈 국경을 넘은 프랑스군은 총 6만5천으로 시작했으나 다음해 2월 결국 프랑스군이 철수할 때 살아서 돌아간 것은 4만이었습니다.  그 중 전투에 의한 사상자는 부사쿠 전투 때의 약 4500 정도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굶주림과 그로 인한 합병증에 의해 희생된 것이었습니다.  또 알게 모르게 굶주림에 지쳐 탈영한 프랑스군도 꽤 많았겠지요.  무려 2만이나 되는 적을 총 한방 쏘지 않고 무찔렀으니 웰링턴은 기뻐했을까요 ?


웰링턴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포르투갈 주민들에게 끼친 피해에 대한 자책감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세나는 불과 2~3주도 버티지 못하고 스페인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그때 굶주리고 지친 채 후퇴하는 마세나의 군대를 추격하여 격파할 생각이었습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약 1년 전인 1809년 5월, 포르투(Porto)에서 퇴각하는 술트의 군단을 추격하며 기세를 올렸던 신나던 순간이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놀랍게도 마세나는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바로 코 앞에서 무려 1달을 버텼습니다.  웰링턴의 예상대로 프랑스군의 굶주림은 극심했습니다.  불과 2주만인 11월 초 이미 식량 부족으로 인한 프랑스군의 비전투 병력 손실은 5천에 달했으니까요.  수백 명의 프랑스군이 굶주림에 견디지 못하고 영국군 측에 투항해왔습니다.  그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마세나는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확실히 노련한 적수였습니다.  짙은 안개가 끼었던 11월 14일 밤, 프랑스군은 군복을 입고 군모까지 쓴 허수아비들을  감시 초소에 남겨둔 뒤 조용히 철수해버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10시가 넘어 안개가 다 걷히고도 몇 시간이 더 지나서야 영국군은 프랑스군이 모조리 철수했다는 것을 눈치챌 정도의 기민함이었습니다.  


포르투에서 술트를 결국 놓쳤듯이 마세나도 놓치게 되었다고 생각한 웰링턴이 느림보 영국군을 닥달하여 부랴부랴 그 뒤를 쫓았으나 영국군 전위부대가 프랑스군을 따라잡은 것은 무려 2일이 지난 11월 17일이 되어서였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프랑스군은 기가 죽어 걸음아 날살려라 도망치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쫄쫄 굶은 군대치고는 엄청난 속도인 하루 28km의 행군을 2일간 강행한 프랑스군은 어느 틈에 테주(Tejo) 강 북안에 면한 강변 도시 산타렝(Santarém)에 겨울 숙영지를 마련하고 든든한 방어진지까지 구축해놓은 상태였습니다.  마세나는 식량 부족으로 인해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앞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 식량 사정이 그나마 나았던 이 곳에 진지를 구축한 뒤 포병대와 야전 병원 등 이동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부대부터 미리 이동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산타렝에는 레이니에(Jean Reynier)의 제2 군단이 자리잡았고 나머지 부대들은 역시 먹을 것이 있는 더 북쪽 지역으로 분산되어 있었지만 웰링턴은 감히 프랑스군을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엔 닭쫓던 개 신세가 된 영국군을 프랑스군이 든든한 방어진지 안에서 비웃는 상황이 된 셈이지요.  




(마세나가 원래 대치하던 곳은 토헤스 베드하스가 아니라 소브랄이라는 마을 근처였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산타렝까지는 대략 55km 정도 걸리는 곳이었습니다.  하루에 28km씩 걸었다는 이야기지요.)




이렇게 양군은 지루한 대치 상황에 들어갔습니다.  웰링턴은 프랑스군이 여기서도 굶주리다 결국 몇 주 버티지 못하고 철수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놀랍게도 마세나의 프랑스군은 정말 뛰어난 식량 수집 기술을 발휘하여 다음해 3월까지 무려 3개월이 넘는 기간을 버텼습니다. 


대체 프랑스군은 어떻게 이렇게 먹을 것도 없이 버틸 수 있었을까요 ?  결국 웰링턴의 초토화 작전은 그다지 완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찰스 콕스(Charles Cocks)라는 영국군 정보 장교가 11월 4일 기록한 일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 병참 장교들을 동원해서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앞 10 리그(league, 1리그는 약 5.5km)에 걸친 전 지역에서 모든 식량을 다 사들였더라면 적은 식량 부족으로 훨씬 더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페니슈(Peniche) 지방의 총독인 블런트(Blunt) 장군이 얼마전 포르투갈 민병대장들(Capitao Mors)에게 레이리아(Leiria)와 방어선 사이에 있는 전체 곡물을 다 치우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는지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답변은 6주였으나, 지난 달 우리가 후퇴할 때 실제로 그들에게 통보가 갔을 때는 불과 며칠의 여유 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많은 양의 식량이 적의 손에 떨어졌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니까 원래 계획은 토헤스 베드하스 북쪽 100km 넘게 떨어진 레이리아까지 초토화 작전을 펼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정말 철저히 수행되었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죽어야 했을까요 ?)




그래도 물론 먹을 것은 부족했습니다.  마세나가 그렇게 먹을 것도 별로 없는 곳에서 버틴 이유는 웰링턴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서 서투른 공격을 해오는 것을 역공하든가, 아니면 스페인에서 드루에(Drouet)의 제9 군단이 지원을 위해 이동해오면 합세하여 웰링턴을 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웰링턴의 조심성은 바닥을 몰랐고, 레이니에의 제2 군단이 완전히 고립된 상태로 굶주리고 있었는데도 공격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세나는 다음 해인 1811년 2월, 실패를 인정하고 포르투갈을 떠나 스페인으로 후퇴했습니다.  그 때 즈음에는 먹이찾기의 귀재 프랑스군조차도 더 이상 먹을 것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일대가 탈탈 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웰링턴은 '영국군이라면 한달도 버티지 못할 곳에서 프랑스군은 무려 3달을 버텼다'라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결국 1810년~1811년 봄까지 이어진 마세나의 침공과 그에 맞선 웰링턴의 작전은 수만 명의 무고한 민간인 사망자만 낸 채 양측에게 아무 의미도 없이 끝났습니다.  전쟁, 특히 외국군에게 국토를 맡긴 전쟁이란 이렇게 참혹하고 무의미한 것입니다.  






Source :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massena_portugal.html

https://www.lifeofwellington.co.uk/commentary/chapter-twenty-three-torres-vedras-october-1810-to-february-1811/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peninsular.html

https://en.wikipedia.org/wiki/Lines_of_Torres_Vedras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lines_of_torres_vedras.html

http://samilitaryhistory.org/vol102sm.html

https://www.voakorea.com/a/article----625----124496254/1348359.html

https://en.wikipedia.org/wiki/The_Disasters_of_War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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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밥돌이 2018.12.10 08: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때 프랑스군은 나폴레옹 없어도 웰링턴쯤은 두어달 묶어둘수 있는 역전의 용사들이었는데 말이죠...

  2. 투팍아마르 2018.12.10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말이 가슴에 와 닿는군요. 임진왜란과 청일전쟁 시기, 그리고 한국전쟁때 한반도에 살았던 백성들의 삶이 오버랩되는게 저뿐만이 아니지 싶습니다..

  3. Nasica팬 2018.12.10 1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엇습니다

    참고로 한국전쟁의 민간인 피해는 학자마다 추정치가 다르며 남북한 합쳐 최대 수백만명 단위까지 보는 경우도 잇습니다

    본문의 38만명은 수많은 추정치 중 하나일뿐입니다

  4. franken 2018.12.10 1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앞으로의 전개가 예상되는 게 프랑스군은 몇 번 이런 식으로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 앞까지 왔다가우주방어선을 뚫을 자신이 없어 머뭇거리며 몇달간 머물렀고 웰링턴은 뚝심있게 본국이 뭐라 하든 포르투칼이 뭐라 하든 요지부동... 결국 프랑스군이 재풀에 다시 후퇴... 그러다가 러시아원정으로 스페인의 프랑스군까지 불러들였다 대패하여 자연히 균형이 깨지고 기회를 포착한 웰링턴이 드디어 진격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그림이 보이는군요.

    • 애독자 2018.12.11 0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미 벌어진 일인 역사에서 전개를 예상한다는 말은 좀 이상하긴하네요

  5. reinhardt100 2018.12.10 17: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몇달간의 대치 속에서 양군이 모두 식량 부족에 시달렸군요.

    저번에 한 번 다른 글에서 댓글을 달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나폴레옹이 직접 20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하여 밀어붙였어야 했다고 생각이 더욱 강해집니다. 방어선 자체가 일단 길더라도 20만 대군의 공성포탄 탄막에 단 한군데만 뚫려도 영국군은 리스본까지 후퇴해야 하는데 리스본까지 간다는건 이미 무조건 철수해야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20만 대군의 보급 문제가 있지만 어떻게 해서든 보급이 끊어지지 않게 한다면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을 뚫을 수 있었을 테니까요.

    19세기판 참호전이 되었을수도 있다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보여지는게 5만의 병력으로 솔직히 40km에 육박하는 방어선 전체에 균일한 밀도의 탄막을 펼친다는 건 당시 군사기술상 불가능했습니다. 당장, 웰링턴도 10km 이상은 기존의 성채 및 자연적 장애물을 활용했는데 프랑스군 입장에서는 일부러 저런 지역을 제외하고 나머지 중 아무데나 단 한군데만 집중해서 화력을 투사해버리면 방어선이 돌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18세기 전반 모리스 삭스 원수가 유능한 사령관이 지휘하기에 최적,최대의 병력 규모는 당시 기술상 4만 5천명이 한도라고 했는데 웰링턴은 여기에 20% 정도 더 많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자기 병력의 4배를 동원해서 단번에 밀어붙인다면? 막을 방법따위는 이미 없어진다는 답이 나옵니다.

    • franken 2018.12.10 19:23  댓글주소  수정/삭제

      프랑스가 제해권이 없었다는 게 근본적인 이유죠. 육상으로는 시대한계상 20만 대군을 먹일 보급을 유지한다는 게 불가능했고 북아프리카와 비슷한 건조기후를 지닌 이베리아 반도서 징발로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니 말이죠. 그럼 답은 목표인 리스본이 해안도시이겠다 대서양 연안이나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해군으로 보급 및 공략을 하는 게 답인데 재해권이 영국에게 있으니 천하의 나폴레옹이라고 답이 있을 리가 없지요ㅎㅎㅎ

      평소 나폴레옹이 영국을 "상점주인들의 나라"라고 비웃었다는데 그 상점주인들이 다른 건 몰라도 돈줄 하나는 아주 두둑했으니 얕잡아본 댓가를 톡톡히 치뤘군요

    • reinhardt100 2018.12.11 0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무리를 해서라도 했어야 했다는게 제 솔직한 의견입니다. 일단 프랑스 본토와 이베리아반도는 육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이용해서 융단폭격하듯이 반도 전체를 진압할 가능성은 있으니까요.

      보급문제 중요하죠. 다만, 보급선을 다양하게 하고 20만 이외에도 보급로 경비병력 확충 및 게릴라 토벌작전 같은 것도 병행해서 아예 저항의 싹을 잘라버리는 식으로 나가는 것도 고려할 수 있겠죠.

  6. 루나미아 2018.12.10 1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레스 베드라스의 위엄을 기대하며 글을 열었다가 민간인들의 희생을 보고 씁쓸해지네요...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에서 이런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폴란드는 굶었을망정 강제 이주나 굶주림으로 사망까지 이르렀단 얘기는 못 들어서;)

    그리고 러시아 원정에 비하면 이건 티저영상 정도밖에 안 되는게 더 안타깝네요

  7. 유애경 2018.12.10 2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여간 전쟁은 만악의 근원 같습니다.

    • 애독자 2018.12.11 0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 마인드로 2차 세계대전을 막은 위대한 위인 네빌 체임벌린에 대해 아십니까?

    • 유애경 2018.12.11 0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2차 세계대전을 막았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 0_- 2018.12.12 2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프로불편러가 유행하더니, 요새는 프로시비러가 유행하나 봅니다?

      전쟁이 만악의 근원이라고 만 했지, 무슨 돈으로 평화를 사자고 하는 투로 이야기 한 적도 없는 분에게 대뜸 체임벌린 수상 이야기를 왜 꺼내고 있는거죠? 뭐 하나 배웠다고 얄랑궂은 지식자랑 하는 겁니까? 거의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수준으로 뜬금없이 뭐시기 저시기를 아느냐고 묻는데, 수준이 딱 외국인 기자회견장에서 질문하랬더니 "두유노 뭐시기저시기" 하는 기레기 수준 내지는,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하는 "도를 아십니까?" 수준이네요.

      이거 하는 꼴 보니 댓글란에 자주 출몰하는 누구누구가 딱 연상되네요. 또 동일인이 아니라 발뺌은 하겠으나 단어선정수준, 문장력이나 논리전개수준이 딱 그꼴이라서 설령 자아가 동일인이 아니더라도 똑같이 취급하면 좋긴 하겠더라고요.

    • 애독자 2018.12.13 1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눈물닦고 침착하게 좀 말해보세요

    • 푸른 2018.12.18 1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애독자님 뼈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센척하는거 너무 웃기네요ㅋㅋㅋㅋ 불쌍하기도하고ㅋㅋ

    • 애독자 2018.12.18 16:1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닥 진지하게 대꾸할 필요를 못느껴서요 글 한줄로 아주 일생이 담긴 소설을 쓰고 자빠졌는데 뭐하러 초를 칩니까

  8. Starlight 2018.12.11 0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통신과 보급. 각 지역을 통제할 병력까지 합해 대육군은
    스페인에서만 평균 20만명이 주둔했었습니다.
    끊임없는 게릴라전으로 통신선 유지조차 어려워
    각 부대가 와해된 상태로 각개격파되며 계속 소모되는데,
    이런 스페인을 배후로 두고 포르투갈에서 일시에 20만명을 동원하려면 이건 군역량을 총동원해야겠죠.
    여전히 오스트리아는 강하고, 프로이센은 부활하고 있고,
    러시아는 꼬장꼬장하니 이때쯤 1810년에는 대외적으로는 최상의 국력이지만 내부적으로는 프랑스의 군사력도 이미 임계점에 다다른 상태라 생각합니다. 나폴레옹이 온전히 이런 시대 흐름을 직관하고 통찰했어도 결국엔 몰락할 운명이란 생각입니다. 서부전선엔 스페인과 포르투갈, 동부전선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북쪽 바다 너머엔 영국.
    북동쪽엔 거인인 러시아. 그리고 베르나도트의 스웨덴까지. 완전히 고립무원입니다. 라인연방과 폴란드.나폴리는 나폴레옹에게 국면을 전환할 큰 도움이 될수는 없었지요.

  9. 먹탱이 2018.12.11 15: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금 심도 있는 글이라 찬찬히 읽었어요^^;; 그리고 과연 의미있는 전쟁이 있었던 적이 있나? 생각해보니 전 잘 모르겠어요. 갖다붙이면 다 대의가 있었다 하겠지만..

  10. 어이가없네요 2018.12.14 0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에 눈물닦고 침착하게 말씀해보시라는분, 체임벌린 운운하신게 어거지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에 대한 지적에 응수하는 태도가 실로 수준떨어지네요. 눈물닦고 천천히 말씀해보라니,참 궁색하기도 합니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때엔 상대방을 무시하라고 어디선가 배웠나보지요?

  11. 인퀴지터 2019.02.22 19: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계절이 지나서 하는 거론입니다만 좋은 본문에 어째서 이렇게 철딱서니없이 머저리같은 댓글들이 빈번히 달리는지는 글쓴이님도 모르지시 않지 않습니까, 글쓴이님은 논쟁성 화두에 급진적인 정치관을 자주 단언조로 표시해서 ♪♩♫들이 꼬이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되도록 하시고 계신다고 여길 부류가 적지 않겠죠, 적어도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

2018.11.26 06:30

9월 27일 오전의 이 부사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500의 전사와 3600의 부상, 거기에 400에 가까운 실종자를 냈는데 비해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은 고작 전사 200에 부상 1000, 그리고 50의 실종자를 냈을 뿐이었습니다.  명백한 프랑스군의 참패였고, 그 원인은 마세나의 잘못된 판단이었지요.  마세나는 자신의 작전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에 대해 꽤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우수한 지휘관은 패전의 충격에서 재빨리 빠져나오는 법이지요.  그는 실패의 원인이 생각보다 웰링턴의 방어선이 훨씬 더 길게 늘어져 있어서, 가파른 능선이라는 강력한 방어선을 충분히 우회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잘 이해했습니다.  원인이 나오면 해법도 있기 마련이고, 해법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훨씬 더 크게 우회하면 되는 것이었지요.


그 날 오후에 패전의 상처를 추스린 마세나는 다음날 아침 기병대를 출격시켰습니다.  능선에 자리잡은 웰링턴의 방어선을 우회할 도로를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병대는 곧 쉽게 우회로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불과 15km 정도 북쪽으로 올라가면 부사쿠 능선이 끝나는 지점이 나오고, 거기서 부사쿠 능선 뒤쪽을 돌아 쿠임브라(Coimbra) 시까지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부사쿠 능선을 넘는 것에 비해 30km 정도를 우회하는 것이니 거의 하루 더 행군해야 한다는 문제는 있었지만, 하루의 행군으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도 적군을 몰아낼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요.  마세나는 '진작 이럴걸'이라는 후회를 마음 한구석에 품은 채 즉시 군을 이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왜 진작 저렇게 간단한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까요 ?  원래 프랑스군의 강점은 화력이 아니라 기동력에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마세나의 3개 군단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부사쿠 능선 위의 영국군에게도 훤히 내려다 보였습니다.  웰링턴에게도 그 의미는 명백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군이 부사쿠 능선 전체를 우회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웰링턴에게는 3가지 옵션이 있었습니다.   첫번째가 추격 및 섬멸, 두번째가 대응 행군, 세번째가 후퇴였습니다.


원래 전투에서 적의 사상자를 극대화하려면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적의 등 뒤에 총알을 박아넣거나 기병대의 군도로 내리찍는 것은 모든 지휘관들이 꿈꾸는 바였지요.  그러나 비록 전날 부사쿠 전투가 연합군의 승리라고 해도, 저 아래 행군을 시작한 프랑스군은 절대 패주하는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 옵션은 선택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경우, 연합군으로서는 프랑스군보다 더 빨리 이동하여 그 우회로의 요지를 장악하고 더 강력한 방어선을 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웰링턴은 이 두번째 옵션 대신 후퇴를 택했습니다.  사실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아무 미련없이 후퇴를 택했지요.  


웰링턴이 후퇴하기로 결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그는 마세나의 침공에 맞서 그냥 계속 후퇴할 생각이었거든요.  부사쿠 전투가 벌어진 것도, 마세나가 넘으려던 부사쿠 능선이 방어전에 너무 좋은 위치이다보니, 마세나와 한판 붙어보고자 하는 욕망을 이기지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마세나가 부사쿠에 미련을 갖지 않고 우회한다 ?  그러면 웰링턴도 미련을 갖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부사쿠 능선 위에 모닥불을 평소처럼 피워 연합군의 후퇴를 프랑스군이 눈치 못 채도록 하고 거기에 후위대까지 남겨두는 치밀함을 보여주며 후퇴했습니다.


하지만 웰링턴의 결정에 대해 많은 이들, 특히 포르투갈 측에서는 비난이 빗발쳤습니다.  부사쿠를 포기한다는 것은 유서깊은 도시인 쿠임브라를 포기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도 전날 부사코 능선으로부터 들려오는 포성에 불안해 하던 쿠임브라 시민들은 웰링턴의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에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위기가 달아오르기도 전에 '연합군은 남쪽으로 철수하니 쿠임브라 주민들도 남김없이 피난을 가라'는 통보가 날아오자 주민들의 낙심은 그만큼 컸습니다.  




(몬데고 강 북안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도시 쿠임브라입니다.)




실은 웰링턴은 애초에 쿠임브라를 사수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이미 쿠임브라에 대해 강제 주민 소개령을 내린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민들에게 집과 상점, 농장과 창고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나라 625 전쟁 때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때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한국을 지원해주고 있었으니 집과 논밭을 버리고 부산이나 경남으로 피난가더라도 미군이 주는 옥수수가루라도 먹고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810년 오만한 매부리코 영국군 장군의 명령에 따라 고향집을 버리고 떠나는 포르투갈 주민들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에게 맞아죽기 전에 굶어죽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부사쿠 전투가 끝나고 마세나의 군대가 북쪽 우회로로 이동하고 있던 9월 29일 밤에도 아직 쿠임브라 시민 80% 정도는 그대로 시내에 남아 있었습니다.  9월 29일 밤 이 사실을 알게된 웰링턴은 인정사정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장 쿠임브라를 떠나지 않으면 병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쫓아내겠다'라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쿠임브라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앞서 웰링턴이 쿠임브라를 비롯한 각지의 주민들에게 강제 소개령을 내린 이유는 프랑스군에게 식량을 넘겨주지 않기 위함이라고 했지요.  과연 그런 소개령이 효과가 있었을까요 ?  적어도 약간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사쿠 전투 직전인 9월 24일 웰링턴이 마세나에게 프랑스어로 보낸 답장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구글 번역기 썼습니다.  저 프랑스어 잘 모릅니다.)



"Je suis fâché que votre Excellence sent quelques inconvéniens personnels de ce que les Portugais quittent leurs foyers à l'approche de l'armée Française. Il est de mon devoir de faire retirer ceux que je n'ai pas les moyens de défendre ; et j'observe que les ordres que j'ai donné là-dessus n'étaient presque pas nécessaires. Car ceux qui se ressouvenaient de l'invasion de leur pays en 1807, et de l'usurpation du Gouvernement de leur Prince en tems de paix, quand il n'y avait pas un seul Anglais dans le pays, pouvaient à peine croire aux déclarations que vous faites la guerre aux Anglais seuls ; et ils pouvaient à peine trouver la conduite des soldats de l'armée Française, même sous vos ordres, envers leurs propriétés, leurs femmes et eux-mêmes, conformes aux déclarations de votre Excellence."


"프랑스군의 진격을 피해 포르투갈인들이 집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것 때문에 각하께서 개인적인 불편함을 좀 겪고 계신다니 유감입니다.  제가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피난시키는 것이 제 의무인데, 사실 제가 내린 소개령은 거의 불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나라에 영국인이 단 한 명도 없던 1807년에 벌어진 프랑스군의 침략과 선전포고도 없이 왕정을 찬탈당했던 것을 잘 기억하는 주민들은 각하께서 배포한 포고문, 즉 각하께서는 포르투갈이 아니라 영국군만을 적대시한다는 말씀을 거의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민들은 각하께서 내리신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재산과 여인들과 자기 자신들에 대한 프랑스군의 행실이 각하의 포고령과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아마 마세나가 웰링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군이 주민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바람에 식량을 못 구해서 불편하다, 이건 신사들의 통상적인 전쟁 규칙에 어긋난다'라고 불평을 했었나 봅니다.  과연 영국군은 집을 떠나기 싫어하는 포르투갈 주민들에게 총검을 들이대고 피난을 떠나도록 강제했을까요 ?  설마 끝내 소개령에 응하지 않을 경우 민간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을까요 ?  글쎄요.  근거가 무엇이든 간에 최소한 프랑스군은 실제로 그랬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사쿠 전투 약 1주일 전인 9월 20일, 마세나가 나폴레옹의 참모장인 베르시에(Berssier)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Monseigneur, nous ne marchons qu’à travers du désert; pas une âme nulle part; tout est abandonné. Les Anglais poussent la barbarie jusqu’à faire fusiller le malheureux qui resterait chez lui; femmes, enfants, vieillards, tout fuit. Enfin on ne peut trouver nulle part un guide. Nos soldats trouvent des pommes de terre, et d’autres légumes; ils sont fort contents, et ne respirent qu’après le moment de rencontrer l’ennemi. Les marches nous ont fort peu donné de malades”.


"각하, 우리의 행군은 마치 사막을 횡단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버려진 상태입니다.  영국놈들의 야만성은 극에 달하여 자기 집에 남아있던 불행한 주민들에게 총을 쏠 정도입니다.  여자, 아이, 노인, 모두가 도망쳤습니다.  결국 이젠 길잡이를 구할 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 병사들은 감자와 기타 채소류를 찾았습니다.  병사들의 사기는 좋은 편이고 적과 만날 때까지 쉬지 않을 기세입니다.  강행군으로 인한 환자는 매우 적은 편입니다."  




포르투갈인들에 대한 존중이 거의 없었던 웰링턴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영국군 병사들이 그다지 점잖게 굴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은 범죄자까지 포함된 사회 최하류층 출신이 대부분이었거든요.  그런 사실은 부사쿠에서 남쪽의 리스본 쪽으로 후퇴하는 길에서도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곳곳의 마을에서 영국군에 의한 약탈이 벌어졌습니다.  웰링턴이 비록 인정머리 없는 오만한 귀족이지만, 공정하다는 점에서만은 인정받을 만 했습니다.  그는 포르투갈인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병사들, 심지어는 장교들조차 철저히 불신하고 잔혹할 정도로 엄격하게 대했습니다.  그는 약탈 행위를 주도하다 잡힌 병사들을 현장에서 교수형에 처했고 일부 부대, 특히 픽튼(Piction) 장군 휘하의 제3 사단의 경우는 후퇴 길에 마을을 만날 경우 아예 먼길로 빙 돌아가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부대는 부사쿠 전투에서 수훈을 세운 부대였지만 후퇴 길에 일부 마을에서 약탈 행위를 벌였다는 이유로 이런 수모와 불편함을 준 것입니다.  




(마세나의 침공 불과 19년 뒤인 1839년에 그려진 쿠임브라 시 외곽의 전경입니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은 영국군의 이런 부랑자같은 행동들 때문에 웰링턴은 마세나가 우회로를 택했다는 정보를 접하자마자 미련을 두지 않고 후퇴를 했던 것입니다.  1809년 1월 코루냐 철수 작전에서 영국군은 (비록 승리라고 주장했지만) 꽁무니를 바짝 추격해오는 프랑스군 앞에서 후퇴할 때 어떤 식으로 무너지는지 매우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바 있었지요.  웰링턴은 비록 전략적인 철수라고 하더라도 후퇴는 후퇴이므로 코루냐 꼴을 되풀이하는 것에 대해 거의 강박관념 수준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포르투갈에서는 10월 중순부터 우기가 시작되므로 행군하는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지겠지만 무엇보다 도로 사정이 엉망진창이 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군이 부사쿠 능선을 우회하는 동안 연합군을 일찌감치 앞서서 후퇴시킨 것입니다.  


드디어 10월 1일, 프랑스군이 쿠임브라 외곽에 나타났습니다.  그때까지 주민들은 다 도시를 비웠을까요 ?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유가 있던 상류층 주민 대부분은 이미 도시를 버린 뒤였지만 영국군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주민들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당장 피난 길을 떠나면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가난한 주민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영국군이 소개령에 따르지 않는 주민들에 대해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도 꼭 믿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프랑스놈들이 나타났다'라는 비명소리가 거리 한쪽에서 터져나오자, 맹수같은 프랑스 병사들의 난폭함이 갑자기 무서워진 일부 주민들이 마지막 순간에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은 전염성이 짙은 것입니다.  일부 주민들이 거리를 가로질러 피난길을 서두르는 모습을 보자 나머지 주민들도 공포에 사로잡혀 앞서거니 뒷서거니 무작정 피난길에 나섰습니다.  곧 거리가 가득 찼고 몬데고(Mondego) 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하는 다리는 교통 제층이 생겨 길이 꽉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다행히 아직 우기가 시작되지 않아 몬데고 강에는 1m~1.5m 정도로 얕은 여울이 곳곳에 있어 주민들은 이 여울들을 통해 피난에 나섰습니다.  아무 준비없이 공포에 사로잡혀 떠나는 피난길 광경은 주민들의 비명과 울음소리로 매우 참혹했다고 합니다.  




(현재의 쿠임브라 시와 몬데고 강의 전경입니다.)




이렇게 허둥지둥 나서는 피난이라면 겨우내 먹으려 저장해두었던 곡물과 저장식품 등을 다 싸들고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민들이 남기고 간 식량은 고스란히 프랑스군의 손아귀에 들어가 웰링턴의 혀를 차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쿠임브라는 웰링턴의 후퇴 작전에 나름대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 동안의 고달픈 행군길에 배가 고팠던 프랑스군은 먹을 것이 있는 도시에 들어가자마자 군기가 문란해져 식량, 특히 와인을 약탈하며 행군을 멈춰 버린 것입니다.  마세나로서도 굶주리고 지친 병사들이 좀 쉴 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국군이 일찌감치 총퇴각에 들어가서 어차피 따라잡기도 힘든 마당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지요.  프랑스군 주력은 이 도시에 4일간이나 머물렀고, 10월 5일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추격에 나섰습니다.  마세나는 리스본 정복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10월 5일, 추격에 나섰던 선발 부대가 잡은 영국군 낙오병은 천만뜻밖의 정보를 불었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Bussaco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bussaco.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massena_portugal.html

https://www.napoleon-series.org/research/miscellaneous/c_Tojal8.html

https://www.lifeofwellington.co.uk/commentary/chapter-twenty-three-torres-vedras-october-1810-to-february-1811/

http://www.wtj.com/archives/wellington/1810_09c.htm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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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ㅇ 2018.11.26 0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끊기신공이 너무 절묘하네요...ㅎㅎ

  2. 성북천 2018.11.26 1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구글번역기가 저렇게 좋았나요? ㅎㅎ

    주인장께서 다 하신 것 같은데.ㅎㅎ

    매번 감탄하며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3. 샤르빌 2018.11.26 2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진왜란때도 지원온 명군더러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란 말이 유명하죠.. 존재감 하나와 전투력은 확실했지만 군기는..

    • ㅇㅇ 2018.11.27 06:49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실 명군은 병참문제로 군량을 조선에서 사먹으려고 은자를 잔뜩 가져왔는데 조선이 화폐경제가 아닌 물물교환 사회라 조선인들이 은자를 받으려 하지않고 식량을 팔지않아 쫄쫄굶다 눈이 뒤집힌것이고 뒤늦게 명나라 본토에서 식량을 조달하기 시작했을땐 조선에 쌀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2018.06.14 06:30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로부터 추가적인 영토를 뜯어냅니다.  그러나 이때가 나폴레옹 제국이 최대 영토를 자랑하던 때는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은 1810년에 오는데, 이때 나폴레옹이 우디노의 군단을 동원하여 추가로 타국을 정복했고 그 땅을 아예 프랑스 영토로 편입했거든요.  1810년은 비교적 조용한 한 해로 알려졌는데, 그런 한가한 시기에 나폴레옹의 먹이가 된 나라는 어디였을까요 ?  바로 네덜란드였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침공할 때 당시 네덜란드의 국왕은 용감하게도 병사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며 저항을 지시했는데, 그 국왕은 바로 나폴레옹이 아끼는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였습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  이 복잡한 이야기를 듣고 나시면 왜 네덜란드 축구팀의 상징이 오렌지색인지도 아실 수 있습니다.





(네이버를 뒤져보아도 저 유니폼 색깔과 오렌지공 윌리엄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왜 애초에 네덜란드 귀족이 오렌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잘 안나오더군요.  아무튼 이번 월드컵에서는 오렌지 군단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아쉽게도요.)




유아기에 사망한 형제들을 빼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는 본인 제외하고 모두 7명의 남매가 있었습니다.  맨 위가 조제프 (Joseph), 둘째가 나폴레옹, 세째가 유능했던 루시앙(Lucien), 그 다음이 존재감 없던 엘리자(Elisa), 다섯번째가 오늘의 주인공 루이(Louis), 그 다음이 아름다운 폴린(Pauline), 탐욕스러운 캐롤린(Caroline), 그리고 막내 제롬(Jérôme)입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독립 운동에서 어설프게 정치판에 뛰어들었다가 야반도주하여 프랑스에 정착한 이후, 가족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가부장적 중압감에 시달리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는 툴롱 포위전 이후 신분이 상승하자, 당연히 자신의 식구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닦아주기 바빴고, 특히 남자 형제들에게는 출세길을 열어주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루이와 제롬이었지요.  제롬은 워낙 어렸으므로 일단 학교에 보내 교육을 받게 했지만, 루이 같은 경우는 당시 국방장관이던 카르노(Carnot)에게 청탁을 넣어 포병 부대에 장교로 임관을 시켰습니다.  루이는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원정은 물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집트 원정까지도 따라가 위대한 형의 부관 노릇을 했습니다.  물론 애지중지하는 동생이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배려했던 형 덕분에 전공을 세울 기회는 없었습니다만, 형이 프랑스 제1통령이 되자, 그 여세를 몰아 25살이라는 새파란 나이에 장군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하는 낙하산을 타게 됩니다.  마치 요즘 우리나라 재벌 2세, 3세와도 같은 행보였지요.  다만 우리나라 재벌 2,3세와는 달리, 그는 스스로 '너무 이른 나이에 너무 높은 계급에 부당하게 올랐다' 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다소 주눅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루이 보나파르트입니다.  둘째 형보다는 다소 못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눅이 든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장군으로 승진하기 1년 전인 1802년, 하늘 같은 둘째형인 나폴레옹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나폴레옹의 의붓딸이자 형수 조세핀의 딸, 즉 촌수로 치면 바로 자신의 의붓 조카딸인 오르탕스(Hortense de Beauharnais)와 결혼하라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어떻게든 보나파르트 가문의 후손을 얻어야 했고, 조세핀은 어떻게든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자신의 입지를 굳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정략 결혼을 결정한 것이지요.  그러나 루이는 다른 보나파르트 가문의 사람들처럼 보아르네 가문 사람들을 끔찍하게 싫어했고, 오르탕스도 늘상 우울하고 주눅이 들어보이고 루이를 혐오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르탕스는 당시 다른 남자와 열애 중이었지요.  그러나 지중해성 가부장인 나폴레옹은 눈도 꿈쩍 하지 않았습니다.  이 불행한 결혼은 이 두 젊은 남녀에게는 그야말로 실패작이었습니다만, 나폴레옹과 조세핀에게는 대성공작이었습니다.   아이를 둘이나, 그것도 둘다 아들로 낳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첫 아이의 탄생에 대해 나폴레옹은 너무나 기뻐하며 그 아이에게 나폴레옹(Napoléon Louis Charles Bonaparte)이라는 이름을 선사했습니다.  실은 둘째에게도 Napoléon Louis Bonaparte라는 나폴레옹의 이름을 선사했고, 훨씬 나중인 1808년에 태어난 세째에 대해서도 같은 이름 Louis-Napoléon Bonaparte을 주었습니다.  





(첫째 아들인 나폴레옹 루이 샤를입니다.  나폴레옹이 하도 이 아이를 각별히 여겨, 항간에는 저 아이가 나폴레옹과 오르탕스의 근친상간으로 나온 아이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이 여자 문제가 난잡하기는 했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날조라는 것이 대체적인 역사가들의 의견입니다.)




그러나 첫째는 5살이 되기 전에 병으로 죽고 말아, 나폴레옹은 물론 전체 보나파르트 가문에게 큰 슬픔을 주었습니다.  둘째인 루이 나폴레옹도 나폴레옹 몰락 이후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그는 동생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압제에 저항하는 북부 이탈리아의 지하 조직 카르보나리(Carbonari) 활동을 하다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는데, 그 와중에 병에 걸려 동생의 팔에 안긴 채 27살의 나이로 죽은 것입니다.  루이와 오르탕스가 잠깐 화해한 1807년 프랑스 툴루즈에서 잉태된 세째는 이탈리아 경찰의 추적을 뿌리치고 어머니 오르탕스와 함께 탈출에 성공하는데, 이 청년이 훗날 나폴레옹 3세가 됩니다.  그 이야기는 훨씬 훗날 다룰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루이-나폴레옹입니다.  어릴 때 그려진 그림 밖에 없네요.  6살의 나이에 1주일 뿐이지만 네덜란드의 왕을 역임한 소년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불행한 결혼에 우울해하던 루이에게 형 나폴레옹은 1806년, 뜻밖의 제안을 하게 됩니다.  네덜란드의 왕으로 즉위하라는 것이었지요.   루이가 네덜란드 왕으로 즉위하게 되기까지는 무척 복잡한 정치외교적인 역사와 사건이 얽혀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중세 이후 왕가들의 결혼에 따라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통치권이 넘어갔다가,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결과로 1581년에 7개 지방의 연합체인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한 부유한 동네였습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수장을 stadtholder, 네덜란드어로는 stadhouder(스타트하우더, stadt는 영어로 city, town 등을 뜻하는 단어)라고 하는데, 이는 부관이나 중위를 뜻하는 불어 단어 및 거기서 파생된 동일 스펠링의 영어 단어 lieutenant(루테넌트, 불어로는 류뜨낭)와 동일한 뜻으로 '왕이 없는 동안 왕을 대리하는 직책'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네덜란드 저지대에는 합스부르크 왕들이 직접 거주하지 않았으므로, 그 지방의 귀족을 대리인으로 지정해 세금 징수 등의 업무를 보게 했는데, 그 명칭이 독립 이후에도 이어진 것이지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지휘한 것도 네덜란드의 스타트하우더인 오라녜-나사우(Oranje-Nassau) 가문의 빌렘( (Willem van Oranje, 영어로는 William of Orange) 1세였습니다.  이 직위는 세습되는 것이었으므로, 외국에서는 이 스타트하우더 관직을 왕이나 뭐 그에 준하는 것인 모양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나폴레옹 패망 이후 실제로 이 가문의 수장을 왕으로 하는 네덜란드 왕국이 성립되었으니, 그 오해가 꼭 틀린 것은 아니었지요.





(이 씩씩하게 생긴 양반이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 나사우의 빌렘 1세입니다.)




참고로, 이 오라녜-나사우는 원래 네덜란드와는 상관없는 곳입니다.  오라녜(네덜란드어로 오라녜이고, 프랑스어로는 오랑쥐)는 프랑스 남부, 아비뇽(Avingon) 인근에 있는 곳이고, 나사우는 독일에 있는 지방입니다.  이 두 지방의 귀족들이 결혼 및 상속을 통해 합쳐진 것이지요.   네덜란드가 이 오라녜-나사우 가문과 연결된 것은 나사우의 엥겔베르트 2세(Engelbert II)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플랑드르의 스타트하우더로 임명되면서부터였습니다.  또, 이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이름과 과일 오렌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에는 오렌지라는 과일이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색깔도 주황색에 대해서는 그저 노란 빨강(yellow-red) 또는 샤프란(saffron) 색 정도로 불려질 뿐, 오렌지 색이라는 색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오렌지는 중국 남부의 감귤류가 조상인 과일이라서, 유럽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식물이었습니다.  그러다 동남아와 인도를 거쳐 아랍 쪽에 전해졌지요.  유럽에까지 이 과일 나무가 전해진 것은 15세기 후반부터였고, 유럽에 오렌지라는 것이 널리 알려진 것은 17세기 중반 경이었습니다.  이 과일의 이름이 오렌지로 정해진 것도 오랑쥐 또는 오라녜와는 전혀 무관한, 이 과일의 아랍 이름인 나랑쥐 (naranj)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기 가문의 영지 이름과 과일 이름이 비슷하여 어리둥절했을 오라녜-나사우 가문에서 이 오렌지 색을 자기 가문의 상징으로 받아들인 것은 네덜란드 독립 전쟁 즈음 해서였다고 합니다.  즉, 네덜란드 국가대표축구팀이 오렌지 색 유니폼을 입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참고로 프랑스 남부의 오랑쥐라는 지명은 과일과는 전혀 무관한, 고대 켈트족의 물의 신인 Araisio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와중에 서민들이나 한다는 직접 찍은 유럽 여행 사진 자랑...  스페인에는 가로수로 오렌지 나무가 많은데, 오렌지 향기를 좋아했던 아랍인들이 스페인을 정복했을 때 심은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사진은 세비야에서 찍은 것입니다.  가봤던 스페인 도시 딱 하나에 다시 가보라고 한다면 저는 세비야를 택하겠습니다.  좋더라구요 !)




아무튼 그 오라녜 공을 수장으로 하던 네덜란드 공화국은 스페인과는 달리 발달된 상공업 덕분에 시민 계급의 성장과 계몽주의 확산이 매우 왕성했습니다.  덕분에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이미 오라녜 가문에 대해 무장 혁명이 일어날 정도였으나, 오라녜 가문과 친척이던 프로이센 왕의 군대가 이를 진압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지요.  그러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자연스럽게 이 네덜란드 자체 혁명 세력은 프랑스 혁명군의 지원을 받아 오라녜 가문을 내쫓고 새로운 정부인 바타비아(Batavia) 공화국을 세웁니다.  그러나 프랑스 자신이 공안 위원회의 공포 정치나 부패한 총재 정부 등 혼란을 겪으면서 네덜란드의 혁명 정부도 많은 혼란과 내부 갈등, 거기에 힘세고 거친 이웃인 프랑스의 간섭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도 네덜란드의 독립성을 유지시켜 주었던 것은 네덜란드의 무력보다는 네덜란드의 은행가들이었습니다.  아시냐 지폐의 혼란 등 재정 붕괴로 고통을 겪던 프랑스 혁명 정부는 부유한 네덜란드에게 차관을 요구했고, 네덜란드에서는 특혜에 가까운 저이율로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프랑스를 지원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일단 중2병 환자였던 나폴레옹은 민주 정권을 쿠데타로 뒤엎은 인간답게, '민주 공화국'이라는 네덜란드를 무척 고깝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뒤 당장 돈이 없어서 쩔쩔 매던 나폴레옹도 전임 총재들처럼 네덜란드 은행가들에게 대출을 요청했습니다.  문제는 그 태도와 조건이 마치 뭐 맡겨 놓은 돈을 인출하는 고객처럼 무이자 대출을 거만한 태도로 요구했다는 것이지요.  네덜란드 은행가들이 이 신용평가가 떨어지는 반란군 수괴에게 대출을 거부하자, 네덜란드의 독립은 이미 반쯤 날아간 것이었지요.  게다가 트라팔가 해전 이후 영국 침공의 꿈이 완전히 좌절되자 네덜란드에서는 당장 '영국 침공 망했으니 그거 한답시고 빌려간 불로뉴의 대형 보트 함대 돌려주세요'라고 눈치도 없고 시의부적절한 반환 요구를 하는 바람에, 나폴레옹의 심기를 크게 자극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불로뉴에 대규모로 집결시켰던 이 대형 평저선들은 알고 보면 네덜란드에서 빌려온 것들....)




게다가 네덜란드 공화국 내부에서도 갈등이 많았습니다.  가령 세금이 재산세 위주가 아니라 소비세 위주라서 서민들에게 불리했는데, 이를 바로 잡고 빈민들을 구제하자는 개혁 세력과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기존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기득권 세력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이런 내부 갈등 때문에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자 원래 혁명을 지지했던 많은 네덜란드인들도 혁명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나라 전체가 영국과의 교역으로 먹고 살던 네덜란드가 나폴레옹의 지엄하신 대륙 봉쇄령을 몰래 깨고 영국과 밀무역을 계속하자 나폴레옹은 네덜란드를 그냥 정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됩니다.  그렇다고 수십년간 독립 전쟁을 벌이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손아귀로부터 기어코 독립을 쟁취했던 만만치 않은 성깔의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일부로 병합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네덜란드를 꼭두각시 왕이 다스리는 허수아비 왕국으로 만들기로 합니다.  그 적임자로 지명된 것이 루이였습니다.  이미 조제프는 나폴리 왕이었고, 그렇다고 보나파르트 가문 출신이 아닌, 사위일 뿐인 뮈라를 먼저 왕으로 앉힐 수도 없었으니까요.  어차피 나파륜 황제가 결정한 이상 다른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데다 내부 갈등에 지친 네덜란드도 반쯤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타협에 응합니다.  즉, 루이와 그의 후손이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절대 프랑스 왕위와 합쳐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든지, 네덜란드에는 징집제를 도입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현실적인 조건으로 나폴레옹의 명에 따르게 됩니다.





(1807년 루이 치하의 네덜란드 왕국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루이는 네덜란드에 파견된 프랑스 총독 노릇을 바라던 형 나폴레옹의 기대와는 전혀 딴판으로 행동합니다.  루이는 1806년 6월 네덜란드 국왕으로 즉위하자마자, 프랑스식 이름인 루이(Louis)를 네덜란드식으로 로더베익(Lodewijk)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열심히 네덜란드어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형이 붙여준 프랑스 출신 관료들에게도 모두 네덜란드어를 배우게 함은 물론, 프랑스 시민권을 포기하고 네덜란드인으로 거듭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심지어는 왕비인 오르탕스에게까지 프랑스 시민권을 버리도록 강요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이런 노력은 네덜란드 시민들에게 상당한 호감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1807년 라이덴(Leiden)에서 발생한 화약 화물선 폭발 사고와 1809년 홍수 상황에서, 루이는 네덜란드 시민들의 구호에 온 힘을 기울여 국민들의 큰 칭송을 받아 '선량왕 로더베익'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오르탕스는 젊고 아름다운 왕비였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 보아르네와 이혼한 뒤 갈 곳이 없었던 어머니 조세핀을 따라 어머니의 고향인 카리브 해의 마르티니크에서 흑인 노예들의 춤과 노래를 보고 들으며 소울을 키웠기 때문에, 춤과 음악에 무척 재주가 있는 활기찬 아이였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그녀의 그런 점을 높이 보았고, 나폴레옹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히틀러처럼 나폴레옹도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었지요.)




왕비 오르탕스는 처음에는 네덜란드의 왕비가 되라는 지시에 정말 크게 반발하고 실망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친구들과 어머니 조세핀이 있는 아름다운 파리를 떠나기 싫어했고, 또 끔찍하게 싫은 남편인 루이와 함께 가야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네덜란드에 도착해 보니, 시민들이 (이건 루이의 공이 컸는데) 왕비인 자신을 무척 좋아하고 환영하는 것을 보고 그녀도 조금씩 네덜란드에 대해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루이와의 관계는 역시 전혀 좋지 못하여, 이 부부는 될 수 있으면 서로를 피했고 어쩔 수 없이 같이 하는 식사에서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루이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은 오르탕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루이 왕의 그런 통치는 결코 나폴레옹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루이에게 그동안 프랑스가 네덜란드 은행가에서 꿔온 대출금을 1/3 수준으로 일괄 탕감하도록 조치하라고 시켰으나, 독립국가 네덜란드 왕국의 수장으로서 네덜란드 시민들의 이익을 지켜야 했던 루이는 그런 터무니 없는 형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나폴레옹으로서는 정말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네덜란드의 바타비아 공화국을 폐지시켰던 가장 큰 이유인 대륙 봉쇄령의 엄격한 시행이었는데, 사랑하는 네덜란드 국민들의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었던 루이는 그 단속에 대해 열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사고를 칩니다.  1809년 영국이 앤트워프(Antwerp, 네덜란드어로는 안트베르펜 Antwerpen)과 플러싱(Flushing, 네덜란드어로는 블리싱헨 Vlissingen)을 침공한 것입니다.  이 대규모 상륙 작전에 동원된 병력은 총 4만의 대군이었습니다.  당연히 루이는 이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루이의 독립 왕국 네덜란드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한 것은 당시 오스트리아와의 바그람(Wagram) 전투에서 나폴레옹 눈 밖에 나서 프랑스에 와 있던 베르나도트였습니다.  그는 고작 2만명 규모의 병력을 끌고 가서 네덜란드에 상륙한 뒤 네덜란드 저지대 특유의 풍토병으로 끙끙 앓고 있던 영국군을 쓱쓱 밀어내버린 것입니다.





(이 안트워프/플러싱 침공을 영국에서는 왈체런 Walcheren 작전이라고 부릅니다.  그 작전을 지휘했던 캐텀 백작, John Pitt, 2nd Earl of Chatham 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나폴레옹은 말 안 듣는 배은망덕한 동생 루이에게 '자기 왕국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왕'이라며 차라리 퇴위를 명했습니다.  루이는 그를 거부했지만 사실 오래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1810년 여름, 나폴레옹은 우디노를 앞세워 동생의 왕국을 침공할 태세를 취했고, 루이는 감히 무서운 형에 맞서 자신의 네덜란드군에게 저항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무리 루이를 좋아했다고 해도 가망없는 싸움에 헛되이 목숨을 버리기엔 너무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신의 왕위가 보잘 것 없는 허울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루이는 7월 1일 왕위를 아들 나폴레옹 루이에게 넘기고 도주했습니다.  우디노의 부대는 7월 4일 네덜란드를 무혈 침공했고, 당시 6살이던 어린 루이 2세를 잘 타일러 큰 아버지 댁, 즉 나폴레옹의 튈르리 궁으로 데려갔습니다.  이로써, 루이의 네덜란드 왕국은 불과 4년 만에 사라지고, 7월 9일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일부로 병합되어 버립니다.  


왕위를 잃은 루이의 행방은 처음에는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우디노를 비롯한 나폴레옹의 부하들은 루이가 대체 어디로 도망쳤는지 알지 못했고, 동생의 안위가 살짝 걱정되었던 나폴레옹이 행방불명된 루이를 찾아 '잘 타일러 파리로 보내라'고 각지에 편지를 써보낼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다 루이가 뜻 밖에도 오스트리아로 도주하여 망명한 것이 알려져 나폴레옹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장인어른 댁으로 도망친 것이니까요.  아마 무시무시한 사위를 상대하기 껄끄러웠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도 이 망명객이 무척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만, 차마 파리로 압송하지는 못했습니다.  나폴레옹도 차마 장인에게 신병 인도를 요청하지는 못했습니다.


루이나 프란츠, 나폴레옹보다 더 곤란해진 것은 당연히 네덜란드 시민들이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이 네덜란드에 자신의 동생을 왕으로 앉힐 때의 조건은 절대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통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루이가 쫓겨난 지금 네덜란드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네덜란드 시민들은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시작된 하천이 네덜란드의 주요 항구 도시로 흘러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자연적으로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일부로 통합해버렸습니다.  


특히 이건 네덜란드의 상징적 독립성 못지 않게 네덜란드 시민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와 직결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공포의 징집제였지요.  네덜란드에서는 징집제를 적용하지 않겠다는 조건의 나폴레옹의 동생을 국왕으로 받아들였던 것인데, 이젠 아예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일부가 되어 버렸으니 징집제는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결국 1811년부터 네덜란드에도 징집제가 적용되었고, 20세 이상의 청년들이 프랑스군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1812년 러시아로 향했던 나폴레옹의 군대 속에는 약 1만5천의 네덜란드 청년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약소국의 설움이었지요.  


그러나 최소한 1810년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한다는 발표가 났을 때 네덜란드인들은 크게 동요하며 저항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는 주요 전쟁이 나폴레옹의 승리로 다 끝난 뒤인 평화 시기였고, 러시아와의 비극적 전쟁이 예고된 바도 없었거든요.  오히려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되면서 네덜란드 경제를 괴롭히던 불확실성이 제거된데다 프랑스라는 큰 시장에 대한 관세도 사라진 셈이 되어, 많은 네덜란드 상인들은 합병 조치에 씁쓸해하면서도 자신들의 장사에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로 망명한 루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망명 이후 루이는 오스트리아에서 조용한 망명 생활을 하며 문필 활동에 전념합니다.  나폴레옹 퇴위 이후 네덜란드가 결국 오라녜 가문의 빌렘 1세를 왕으로 하는 왕국으로 독립하자, 그는 나름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를 방문하게 해달라고 빌렘 1세에게 여러번 요청했지만 계속 거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왕인 빌렘 2세가 1840년 그의 방문을 '익명으로 여행할 것'을 조건으로 허락합니다.  그가 이렇게 익명으로 네덜란드의 어느 호텔에 묵었을 때, 그래도 그를 알아본 시민들이 그 호텔 방 창문 아래 모여 들었습니다.  거리에서 웅성이는 소리를 듣고 창문으로 나온 그를 맞이한 것은 잠깐이지만 네덜란드를 진심으로 대하며 다스려준 전왕에 대한 네덜란드 시민들의 환호화 갈채였습니다.  그는 이 사건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후, 이탈리아 독립 운동을 벌이던 아들들과는 달리 별다른 정치 활동을 벌이지 않고 조용히 살다가 1846년 평화롭게 죽었습니다.





(하지만 루이가 이 세상에 남긴 가장 큰 결과는 바로 이 남자입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요.)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www.erfskipterpdoarpen.nl/documents/Engels/SoldiersNapoleon/SoldiersNapoleonIntroduction.htm

https://en.wikipedia.org/wiki/Louis_Bonaparte

https://en.wikipedia.org/wiki/Hortense_de_Beauharnais

https://en.wikipedia.org/wiki/William_the_Silent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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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웃자웃어 2018.06.14 1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질문 있습니다. 예전에 나폴레옹시대의 징발편에서 대량으로 물자를 징발했다는 이야기를 봤었는데요,
    1)그러면 나폴레옹이 징발을 한 이유는 돈이 많이 들어서이고,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 적지에서 무자비한 징발을 한 것이겠군요?
    2)그러면 적에게 강요한 전쟁배상금은 액수는 징발을 하지 않았다면 더 늘어날 수도 있겠군요?
    3)적국의 무기고를 턴것도 일종의 징발이라고 봐도 되나요?

    • nasica 2018.06.14 22: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Yes
      2) 그럴 수도 있겠네요
      3) 영수증이 없으므로 징발은 아니겠지만 차후 종전협상시 배상금에 포함되거나 반환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다.

    • 웃자웃어 2018.06.14 2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변 고맙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영국 육군이 돈을 많이 쓴 이유도 사실상 전쟁물자 상당수(예: 식량)등을 징발시 제값을 치뤘기 때문이겠군요.

  2. 웃자웃어 2018.06.14 14: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한민국은 당시 프랑스 사람들을 욕할 자격이 없죠. 2012년 당시의 박근혜 당선만 봐도 말이죠.

    • 알키비아데스 2018.06.15 0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그 다음은 희극으로.

      1870년 프랑스에서 나온 말인데 한국은 146년이 늦었죠.

    • 웃자웃어 2018.06.15 1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밝혀지면서 국민들 상당수가 1848년도 프랑스인들보다 미개했단게 밝혀졌죠.

  3. 김똑딱 2018.06.14 2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타깝게도 루이 나폴레옹, 나폴레옹 3세는 진짜 루이 나폴레옹의 생물학적 아들은 아닙니다.

    나폴레옹과 그 후손들 (제롬 보나파르트의 후손)의 y 염색체 하플로그룹 검사는 하플로그룹 E1b1b였는데 루이 나폴레옹의 머리카락과 후손을 대상으로 한 하플로그룹 검사는 I2a2가 나왔습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아들이라면 나폴레옹 아버지 샤를 보나파르트와 y 염색체가 동일하니까 하플로그룹이 동일하게 E1b1b가 나와야 하는데, 결국 오르탕스가 바람피운 결과물이 루이 나폴레옹이게 된 것이죠.

    어차피 루이 나폴레옹의 가계 역시 보나파르트 가문에서 같은 가문으로 인정하게 되었지만, 그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결과물은 아니네요 ^^

  4. 유애경 2018.06.15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루이 보나파르트, 시대만 잘타고 났다면 (?)아주 훌륭한 왕이 될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원치않는 결혼을 어쩔수없이 받아들인 오르탕스-게다가 루이와 사이도 안좋았기에 더욱 불행했을-의 불륜이 용납 받을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해는 되네요.

  5. 알키비아데스 2018.06.15 0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르크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코미디언이 등장하는군요^^

  6. reinhardt100 2018.06.15 1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랑스 입장에서는 해괴한 논리는 아닙니다. '라인강-쥐라 산맥-알프스 산맥-지중해와 가론 만-비피레네 산맥-비스케이 만과 영불 해협 안의 모든 육지'는 '신이 프랑스에게 내려주신 자연적인 영토'라는 논리가 이미 루이 14세 때부터 있던 것이었으니까요. 실제로 부르봉 왕조 기간 내내 이 국경을 실현하기 위해 몇 차례나 전쟁을 치렀고 식민지 일부를 포기해가면서까지 유럽 대륙 영토의 영속성을 더 중시해왔습니다. 특히 북프랑스-플랑드르-저지대 네덜란드를 연결한 단일경제권을 실현하는 것이 역대 프랑스 지도자들의 꿈이었으니까요. 이 기회가 세 번 있었는데 한 번은 1477년 부르고뉴의 용담공 샤를이 낭시전투에서 패사하면서 루이 11세가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것이고 두번째 기회가 1672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세번째가 프랑스 혁명기였습니다. 앞선 두 번은 최종적으로 실패했지만 후자는 혁명전쟁 승전으로 실현시켰고 프랑스의 네덜란드 합병이 이를 최종적으로 실현시켜주었던 겁니다.

  7. 루나미아 2018.06.15 1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프리슬란트가 홀란트왕국 영역에 있군요. 전엔 프로이센 땅이었는데 즉위 선물로 준 걸까요?

  8. 마스터 2018.09.13 0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둘째 루이 나폴레옹의 그림을 보고 =ㅅ=;
    그림 전공한 이의 한마디 화가가 나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