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3 06:30


Hornblower and the Atropos by C.S.Forester (배경: 1805년 영국 근해 HMS Atropos 함상) ----------------

(아트로포스 호의 함장인 혼블로워는 밤늦도록 그날 있었던 프랑스 사략선 나포건에 대한 보고서 작성을 막 끝내고 보고서 내용에 나름 흡족해하며 다시 읽어보고 있는 중입니다.)

함장실 문에 노크가 있었다.  대체 방해받지 않을 순간이 전혀 없단 말인가 ?

"들어와."  그가 말했다.

들어온 사람은 선임사관인 존스였다.  그는 혼블로워의 손에 들려져 있는 깃털펜과 테이블에 놓인 잉크병과 종이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실례합니다, 함장님."  존스가 말했다.  "제가 너무 늦게 온 게 아니었으면 합니다."

"무슨 일인가 ?" 혼블로워가 물었다.  그는 존스 중위에 대한 동정심이 별로 없었고, 그의 어정쩡한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군성에 보고서를 보내실 생각이셨다면 말입니다, 그러실 생각이셨던 것 같습니다만, 함장님..."

"그래, 물론 그럴 생각이네."

"혹시 제 이름을 언급하실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함장님... 그러실 것인지 여쭈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함장님... 감히 제멋대로 생각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만약 존스가 해군성에 보낼 보고서에다 자신에 대해 특별히 잘 언급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라면 그런 부탁은 절대 들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가, 미스터 존스 ?"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그저 제 이름이 너무 흔한 것이라서 말입니다, 함장님, 존 존스라는 이름 말입니다.  현재 중위 명부에 오른 것만도 12명의 존 존스가 있습니다, 함장님.  알고 계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9번 존 존스 (John Jones the Ninth)입니다.  해군성에서는 저를 그렇게 지칭합니다, 함장님.  만약 함장님 보고서에 그렇게 씌여있지 않다면, 아마도..."

"잘 알겠네, 미스터 존스.  무슨 말인지 이해하네.  제대로 처리가 될 거라고 믿어도 되네."

"감사합니다, 함장님."

존스가 나간 뒤, 혼블로워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보고서를 들여다 보고는, 새 종이를 한장 꺼냈다.  존스의 이름 뒤에다 '9번 (the Ninth)'이라는 글자를 읽을 만하게 삽입할 방법은 도저히 없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새 종이 위에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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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인용한 소설 한 구절에서 무엇을 느끼시나요 ?  저는 아, 워드 프로세서는 신의 축복 (또는 빌 게이츠의 축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워드 프로세서가 없었던 나폴레옹 시대의 문서 작업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지요.

군인이라는 직업에서 성공하려면, 꼭 적군을 많이 죽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자기가 이러이러한 지휘력을 발휘하여 이러이러한 전과를 올렸다는 것을 상부에 제대로 알리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사실 이건  꼭 군인이라는 직종에서 뿐만 아니라, 조직화 되어 있어서 상관이라는 작자들이 존재하는 모든 직장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이야기지요.  제대로 된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보고서 내용이 가장 중요합니다.  일단 그 보고 내용이 패전보다는 승전 쪽에 가까운 것이 좋을 것이고, 또 문체가 간결하면서도 자연스러워, 읽는 사람이 요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조리있게 쓰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우리 교육에서 영어 교육보다는 국어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문장력 때문입니다.  대학도 나오고 직장생활도 할 만큼 한 사람들이 쓴 보고서나 메일을 읽어보면, 대체 이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뭔지 도통 알 수 없는 경우도 많거든요.  어떤 사람은 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영어도 잘한다고 하던데, 거기에도 동의합니다.  결국 언어라는 것은 의사 소통 수단이고, 의사 소통이 원활하려면 생각과 사실을 언어로 조리있게 정리해서 조합해야 하는 것이쟎습니까 ?  결국 한국말로 또이또이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영어로도 (발음은 둘째치고) 또이또이하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Band of Brothers의 한 장면이지요.  딕 윈터스 대위, 승진을 위해서는 M1 소총보다 타자기를 더 잘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다 !)



보고 내용도 승전보이고, 문장도 조리있게 잘 작성되었다고 하면, 그 다음엔 글씨가 문제가 됩니다.  요즘이야 타자기를 거쳐 워드 프로세서에서 대부분의 보고서가 작성되니까, 작성자는 어떤 폰트를 고를지만 생각하면 됩니다.  (대개의 경우 아예 폰트도 미리 지정해두지요.)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처럼 아직도 이게 보고서인지 문학 작품인지 헷갈려하는 시대에는, 그 내용 못지 않게 우아한 글씨체도 중요했습니다.  우아한 글씨체가 정말 중요한 이유는,  알파벳 문화권에는 인쇄체와 필기체라는 것의 차이가 꽤 컸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아동 문학인 '보물섬'의 한 장면을 보시지요.



보물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작  (배경 : 18세기 후반 영국) ---------------------------------------

그래서 몇 주가 지난 뒤, 마침내 어느날 닥터 리브지께 편지가 한 통 날아들었다.  그 편지에는 '닥터의 부재시에는 톰 레드루쓰 또는 젊은 호킨스가 개봉할 것' 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 조건에 따라 우리는, 사실 우리라기 보다는 나는 -- 왜냐하면 산지기 레드루쓰는 인쇄된 것 외에는 잘 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다음과 같은 중요한 소식을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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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도 산지기 톰 레드루쓰처럼 필기체의 알파벳은 잘 읽지 못합니다.  제가 국민학교 때 저 위 문장을 읽고는, '나는 저런 무식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에, 중학교에 진학하여 영어를 배울 때 필기체 쓰는 연습도 나름 열심히 했었습니다만 (요즘도 학교에서 필기체 읽고쓰는 것을 따로 배우나요 ?) 여전히 필기체 문장은 읽기가 힘들더군요.  그래서 가끔씩 볼 수 있는 나폴레옹 시대의 그림이나 편지에 씌인 글을 읽는데 애를 많이 먹습니다.  글쎄요, 아마 저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 당시 사람들 중에도 (저 레드루쓰처럼) 남이 필기체로 쓴 편지를 읽기 힘들어 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특히 원래 쓴 글씨가 개발새발이라면 더더욱 그랬겠지요.  그래서 글씨를 예쁘고 신속하게 써줄 수 있는 서기(clerk)이라는 직업이 있었지요.  나폴레옹도 자기가 직접 펜대를 굴리며 글을 쓴 경우가 (특히 나중에 황제가 된 이후에는)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대개 몇명의 서기들에게 둘러 싸여 속사포처럼 빠르게 구술을 하면, 서기들이 진땀을 흘리며 받아 적었지요.  

이 시대의 서기들은 글씨를 예쁘게 쓰는 것 외에도 독특한 할 일이 더 있었습니다.  모래질이었습니다.  


'아르마다', 개럿 매팅리 작, 박상이 옮김, 가지않은 길 출판 (배경 : 1589년 스페인의 무적함대 사건 당시) --------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침착성에 대한 일화입니다.)

그 비서는 익숙하지 않은 일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왕에게 금방 쓴 문서를 받아들자 그것을 모래로 문지르는 대신 그만 잉크병을 쏟아버렸다.  왕이 진노하리라는 생각에 몸을 움찔하던 비서는 이런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것은 잉크라네.  이것이 모래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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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방금 쓴 문서를 모래로 문질렀을까요 ?  짐작하시다시피, 잉크를 말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잉크는 매염제(gall, 일종의 진딧물 벌레집), 검댕, 황산철, 고무질 등을 섞어만든 것으로서, 요즘의 잉크처럼 종이에 잘 흡수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깃털펜에 이런 잉크를 묻혀서 정성껏 쓴 다음에, 곧장 종이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가는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가 종이에 그대로 찍혀 일종의 데칼코마니가 되기 쉽상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잉크를 말리는 작업을 해야 했는데, 불에 종이를 쬐다가는 자칫 불이 붙어버릴 위험도 있었고, 또 종이가 누렇게 말라비틀어질 수도 있었으므로 불로 말리는 것은 그리 좋지 않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바로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 위에 고운 모래를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고운 모래는 잉크를 순식간에 흡수해버릴 수 있는데다가, 고운 모래로 문지른 종이면은, 당시 품질이 그리 좋지 못한 종이면을 곱게 갈아주어 표면의 느낌을 맨질맨질하게 해주는 효과까지 내주었습니다.



(사진 속 편지 위의 작은 후추병 같은 것이 sand shaker 입니다.  저것으로 고운 모래를 편지 위에 뿌렸습니다.)



이렇게 금방 쓴 잉크 위에 모래를 뿌리던 관습과 나폴레옹에게 연관된 이야기도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휘하 장군들 중 가장 일찍부터 나폴레옹을 섬기기 시작했던 사람은 바로 '폭풍우'라는 별명을 가진 쥐노(Jean-Andoche Junot)였습니다.  그는 1795년 툴롱 포위전 때 나폴레옹을 만났는데, 당시 나이가 겨우 2살 많았던 나폴레옹이 이미 대위 계급이었던 것에 비해 일개 하사관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그래도 혁명 전에는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는 미지수...) 법학도였던지라, 나폴레옹의 서기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툴롱 포위전이 한창일 때, 나폴레옹이 전선에서 뭔가를 구술하여 쥐노에게 받아쓰게한 직후였습니다.  바로 옆에 영국군의 포탄이 떨어져 흙먼지가 나폴레옹과 쥐노에게 우수수 떨어졌는데, 쥐노는 전혀 놀라지 않고 나폴레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덕택에 편지에 모래를 뿌리지 않아도 되겠네요."

이 용기와 재치가 넘치는 애드립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폴레옹은 이때부터 쥐노를 진정한 부관으로 생각했고, 그 결과 쥐노의 인생이 확 변하게 되었지요.  

 


(실제 전공에서나 사람들의 비망록에서나, 쥐노는 그다지 능력있는 사람으로 부각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그의 젊은 와이프를 나폴레옹이 무척 좋아했다고...)



나폴레옹 시대에 서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하는 주요 업무는 구술 받은 편지나 문서를 쓰고, 거기에 모래 뿌리는 것 외에도 또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인간 복사기 !  당시에는 타자기는 커녕, 아직 먹지(carbon paper)가 발명되지 않았던 때라서, 편지든 뭐든 문서라는 것을 하나 만든 다음에는 그 복사본을 손으로 일일이 베껴써야 했습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가 인류 문명을 바꾸어 놓기는 했습니다만, 아직 서기의 일상 업무를 바꾸지는 못했거든요.  따라서 나폴레옹의 참모 본부에 있던 서기들은 정말 눈알이 빠져라 열심히 서류들을 써대고, 베껴대야 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처럼 말이 많고 편지도 많이 썼던 사령관 밑에 있던 서기들은 정말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나폴레옹 시대에 이미 복사기가 이미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발발 전이던 1785년 조지 워싱턴과 벤자민 프랭클린 등이 독립선언문을 (손으로) 작성할 때, 이미 복사기를 이용하여 여러 본의 독립선언문을 동시에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복사기는 과연 어떤 물건이고,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을까요 ?

미국인들에게는 자존심 상하게도, 미국 독립선언문을 복사한 복사기는 영국제였습니다.  제조사는 James Watt & Co. 사였습니다.  예, 바로 증기 기관을 발명했던 바로 그 제임스 와트가 맞습니다.  이 복사기는 1780년에 제임스 와트가 특허를 받은 것으로서, 제임스 와트가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서 만들었습니다.  와트는 사업상 하도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는지 일일이 정확히 기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쓸 때마다 최소한 한통씩 복사본을 만들어 두어야 했었는데, 와트는 나폴레옹이 아닌지라 서기들로 둘러 싸이지 않아서, 자기가 직접 베껴야 했었나 봅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바로 습식 복사기였습니다.  



(이건 강릉 경포대 바로 옆에 있는 참소리 박물관이라는 곳에 전시된 진짜 James Watt 의 복사기입니다.  전 세계에 원본이 이거 딱 1대 남았는데, 그것이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이 박물관에 있다고 하네요.  이 박물관은 한마디로 말하면 에디슨 박물관인데, 처음에는 비싼 입장료 (대인 7천원)에 놀라고, 다음에는 전시품들의 알참과 진귀함에 놀라고, 박물관 직원들의 재미있는 해설에 또 놀랐습니다.  한마디로 강릉 관광가실 때 강추.  돈이 별로 아깝지 않았습니다.)



이 습식 복사기의 원리는 나름 간단했습니다.  잉크도 좀더 진하고 특수하게 만들고, 종이를 아주 얇은 종이를 골라서 문서를 쓴 뒤, 그 원본 문서와 복사지를 맑은 물에 적신 뒤 압착 롤러로 눌러서, 원본 문서의 잉크가 복사지에게도 묻어나도록 한 것입니다.  글쎄요, 이렇게 하면 원본 문서의 품질에도 악영향이 좀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이 습식 복사기는 나름 꽤 인기가 있어서, 제임스 와트에게 상업적 성공, 즉 돈다발을 안겨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작은 나무 상자에 쏙 들어가도록 설계된 휴대용 복사기까지 개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습식 복사기는 20세기 초까지도 일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초기의 이 습식 복사기를 이용하여 제대로 복사를 하려면, 종이를 무려 12시간이나 적셔야 했기 때문에, 성질 급한 나폴레옹의 참모부에서는 결코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 형태의 복사기는 문학 작품에서도 나옵니다.  그리고 '원본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까지도 그대로 묘사됩니다.  바로 발자크의 '관료주의'라는 소설에서입니다.



(사실 저는 이 책 아직 못 읽어보았고, 이 복사기 이야기가 이 책에 나온다는 사실도 참소리 박물관에 전시된 저 Watt 복사기의 설명판을 보고 알았습니다.)



Bureaucracy by Honore de Balzac  (배경 : 1830년대 파리) ------------------------------------

세바스티앙이 절실한 마음으로 그의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속에는 메모와 함께 그가 마저 베껴쓰지 못한 복사본이 순서대로 들어있었고, 그는 그것들을 라부르뎅이 지시한 대로 즉시 책상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12월말 즈음의 이 사무실들은 아침에도 꽤 어두웠고, 실제로 아침 10시까지도 램프를 켜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결과, 세비스티앙은 종이에 남겨진 복사기의 눌린 자국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9시 30분 경에 라부르뎅이 그의 메모를 보았을 때, 그는 즉각 이 문서에 복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그는 복사 담당 서기들의 일을 이런 수기(手記) 압착식 복사기로 대체할 수 없을까 하고 고려 중이었으므로 더욱 쉽게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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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반에도, 이미 과학 기술이 사람들, 주로 저임금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는 일이 아주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것을 보실 수 있지요 ?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요.  오늘날 프랑스나 영국은 선진국으로서 국민 대부분이 잘 살지 않습니까 ?  확실히 그런 나라들이 실업률이 높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최소한 서류를 베껴쓰는 복사 담당 서기라는 것이 그다지 매력적인 직업은 아닌 것은 확실하지요.

 

** 목요일 재탕글이이었습니다.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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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되니츠 2019.06.14 06: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돈 많이 벌면 저런 거 쟁여다가 자산 보전하고 싶지요.

  2. Eugen 2019.06.14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리가 판화랑 비슷하네요. 초등학생때 비슷한거 해본 적이 있어요.

2019.02.14 06:30



이번 포스팅은 J. Kincaid 라는 이름의 스코틀랜드 출신의 젊은 장교가 쓴 "Adventures in the Rifle Brigade, in the Peninsula, France, and the Netherlands from 1809 to 1815" 라는 책의 일부 중 인상 깊은 장면 몇가지를 발췌해서 적은 것입니다.   5년 전에 적었던 포스팅인데, 목요일이라 재탕으로 올립니다.  이제 다음주에 마무리할 '나폴레옹 시대의 병참부'와도 연계되는 내용입니다.



(참고로, 이 킨케이드 대위가 복무한 부대인 제95 라이플 연대는 Bernard Cornwell의 소설 속에서 리처드 샤프가 소위로 부임한 그 라이플 연대가 맞습니다.)



Episode 1.   영국 장교들의 야전 살림살이


이런 경우 우리 수송대는 언제나 아직 후방에 있었으므로, 각 중대의 장교들은 포르투갈 사내아이 하나를 고용하여 당나귀 한마리를 끌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중대를 따라오도록 했다.   이 당나귀에는 장교들의 야전 생활에 필요한 보잘 것 없는 사치품들이 실려 있었다.  그 짐꾸러미에는 큰 보트용 망토와 담요, 돼지가죽으로 만든 작은 포도주 부대 하나, 럼이나 브랜디 같은 증류주를 담은 수통 하나, 찻잎과 설탕 조금이 실려 있었고, 거기에 당나귀에 묶여 있는 염소 한마리가 있었다.  (염소는 아마 젖을 짜기 위함인듯 ?)  그리고 포르투갈 사내아이의 주머니에는 2~3 달러가 들어있었는데, 이는 그 날 행군을 하다가 운이 좋으면 생기는 기회에 따라 빵이나 버터 같은 사치품을 사라고 넣어준 것이었다.  우리는 그 아이가 구해오는 그런 보급품의 출처를 캐묻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깐깐하게 굴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아이는 빈손으로 나타나지만 않으면 우리들의 역정에 시달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아이들은 무척이나 신의가 있고 똑똑하여, 무척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매일 저녁 어떻게든 우리 중대의 위치를 찾아 오곤 했다.  딱 한번, 마세나(Massena) 원수가 후퇴할 때 우리 중대의 아이가 우리를 찾아오지 못한 밤이 딱 한번 있었다.  이 아이는 그날 밤 내내 영국군의 넓은 야영 캠프 내에 복잡하게 산재된 모닥불들의 미로 속을 헤매고 다니다 결국 포기하고 용기병 부대 옆에서 당나귀와 함께 잠을 잤는데, 일어나보니 우리 중대는 그 용기병 부대에서 20야드 (약 18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Episode 2.   빵이 없어서 고기를 먹다 


5월 20일, 빵 또는 그 비슷한 아무 것도 없이 지낸지 3일 째다.  빵 없이 고기만 며칠 먹다보면 고기가 정말 구역질 날 정도가 된다.  


오늘 새벽에는 평소처럼 매우 이른 새벽에 행군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해가 뜨기 전에 시에라 데스트렐라(Sierra D'Estrella) 앞에 있는 약 2마일 (약 3.2km) 떨어진 한 마을로 출발했다.  그 마을은 프랑스군의 동선 바깥 쪽에 있었으므로, 뭔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도착해보니, 인근 수녀원에서 도망쳐 나온 수녀들이 마을 공동 화덕 건물 바깥 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옥수수 가루(Indian cornmeal)로 만든 빵 반죽을 들고 와 여기서 굽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그 빵을 좀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자, 그들 중 두명이 친절하게도 자신들의 몫을 내게 내주었다.  


난 그녀들에게 키스와 함께 1달러(dollar는 당시 스페인 화폐 단위입니다 미국 달러도 원래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를 보답으로 주었다.  그녀들은 나의 키스를 '무척 특별한 호의'로 받아들였고, 내가 내민 1달러 은화에 대해서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런 말을 하면서 받아 들었다.


"우리 의지가 아니라, 우리의 가난이 거절하기 어렵게 만드네요."


난 이 설구워진 빵덩어리를 들고 이제 막 무장을 하고 있던 동료 장교들에게 달려갔다.




Episode 3.   묘한 분위기의 비공식 휴전선


(포르투갈에서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던 영국군은 협곡을 사이에 두고 프랑스군과 대치하다가, 겨울이 되자 비공식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묘한 휴전에 들어갑니다.)


협곡에 걸린 다리에서, 우리 부대의 보초 자리는 겨울 동안 매우 다양한 사람들에게 정식 응접실 역할을 했다.  


나는 우리 영국 해군 장교들이 마치 6파운드 포처럼 커다란 망원경을 안장 뒤에 매단 노새를 타고 리스본에서 가끔씩 오는 것을 무척 즐겁게 보곤 했다.  이들은 매번 올 때마다 어김없이 처음으로 묻는 것이 바로 코 앞에 있는 프랑스군 보초병을 가리키며 "저기 있는 저 친구는 누구요?" 하고 묻고는, 우리가 프랑스군이라고 대답하면 항상 화들짝 놀라서 "그럼 대체 왜 저 친구를 안 쏩니까 ?"라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이 비공식적인 적대 행위 중단 기간 동안 프랑스군과 우리 사이에는 예의와 호의가 넘치는 행동들이 여러번 반복되었다.  한번은 우리측 어느 장교의 그레이하운드 사냥개들이 토끼를 쫓다가 프랑스군 진영으로 넘어갔는데, 프랑스군은 깍듯한 예의를 갖추어 그들을 돌려 보내기도 했다.


어느날 밤, 다리 끝에 있는 보초 초소 현장에 내가 있을 때였는데, 프랑스군 보초 쪽에서 머스켓 총탄 하나가 날아와 우리 보초들과 내가 둘러싸고 앉아있던 모닥불의 불붙은 장작에 박히는 사건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프랑스군에서는 백기를 든 사절을 보내어 간밤의 사고에 대해 '멍청이 같은 보초가 영국군이 자기 쪽으로 몰려 오고 있다고 착각하고는 총질을 했다' 라며 사과를 해왔다.  우리는 그 총격이 멍청함보다는 악의 때문에 저질러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한번은 쥐노(Junot, 폭풍우라고 불렸던 아브란테스 공작 본인 맞습니다) 장군이 정찰을 하다 우리 보초가 쏜 총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때 프랑스군이 보급 물자 측면에서 무척 곤궁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웰링턴 경은 쥐노 장군에게 사절을 보내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리스본에서라도 구해드리겠다'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쥐노 장군은 너무 정치적인 인물이라, '사실 보급품이 부족한 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사양했다.




(역주 : 실제로 쥐노 장군은 1811년 1월 코에 총탄을 맞고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어지간한 역사 자료에는 어떤 전투에서 그렇게 최고 사령관이 총을 맞을 정도로 악전고투를 벌였는지 나와 있지 않아서 의아해했는데, 그 사정이 이런 것이었군요 !)




Episode  4.  피폐한 포르투갈 상황


이 인근은 하도 오랜 기간 전쟁에 시달렸고, 또 영국군과 프랑스군 양쪽에게 번갈아가며 강제로 보급품을 공급해야 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자신들이 굶어죽게 될까 염려하여 결국 남아 있는 식량을 모두 감추어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영국군이 프랑스군과 싸워주는 것에 대해서 입으로는 칭송과 감사를 늘어놓았지만, 식량은 빵 한덩어리도 내놓지를 않았다.  


결국 우리는 인근 수 마일에 걸쳐, 대로변은 물론 골목길이며 숲길이며 요소요소마다 정찰병들을 매복시켰다가 이웃 마을로 가는 농민들을 잡아세워 놓고 검문검색을 해야 했다.  이렇게 찾은 식량은 병참부 명령서 한장을 주고는 빼앗았는데, 우리는 당시 할머니가 들고 가는 바구니에 든 감자 몇 알조차 빼앗을 정도로 궁한 상황이었다. 




Episode  5.  민간인에 대한 잔악 행위


우리는 피르네스(Pyrnes) 인근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이 작은 마을과, 프랑스 장군들의 믿지 못할 약속에 속아 피난을 떠나지 않았던 그 몇 안되는 주민들의 비참함은 이 야만적이고 자비심 없는 적군이 최근에 다녀간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젊은 여자들은 집 안에서 잔혹하게 성폭행을 당한 채 누워 있었고, 거리에는 부서진 가구들 사이사이에는 살해된 농민들과 노새, 나귀들의 썩어가는 시체가, 역겨운 악취를 풍기는 온갖 종류의 오물과 함께 거리에 널려 있었다.  살아남은 몇 안되는 남자 주민들은 그들의 친지 및 재산의 잔해 속을 멍하니 돌아다녔는데, 마치 복수를 하기 위해 무덤 밖으로 걸어나온 시체들처럼 보였다.  간혹 낙오된 불행한, 혹은 부주의한 프랑스군의 시신도 발견되었는데, 그들의 시신은 하나같이 잔혹하게 난자되어 있어, 그 복수가 얼마나 정성껏 실행되었는지를 보여 주었다.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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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웃자웃어 2019.02.14 18: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매우 유능한 인물이지만 프랑스군에게 물자를 약탈및 가혹하게 징발당하고, 전쟁에 말려든 사람들에게는 악마이군요. 특히 이베리아 반도와 러시아 사람들 말이죠. 아 물론 아이티 사람들 입장에선 히틀러의 대선배나 다름없는 사람이고.

2018.09.05 21:26

** 200년 역사를 가진 브라질 박물관의 최근 화재를 애도하며, 쥐노의 포르투갈 침공 사건을 다룬 글을 다시 올립니다.  그 박물관 건물은 이 시건때 브라질로 도주한 포르투갈 왕가가 임시 행궁으로 삼았던 건물입니다. **



1806년, 나폴레옹이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을 격파한 나폴레옹이 베를린에 입성하여 한숨 돌리고 있을 때, 나폴레옹에게 10월 14일 스페인 수상 고도이가 발표한 성명서 내용이 전달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나폴레옹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한 내용이었습니다.  러시아의 협박과 영국의 뇌물을 받아먹은 스페인 수상 고도이가 바로 얼마전에 발표한 이 성명서는 대부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애매모호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결국 그 요점은 프랑스와의 전쟁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독일에서 나폴레옹이 패배라도 한다면 곧장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를 침공하겠다는 의도의, 공공연한 도전에 해당하는 행위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났으나,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전력을 기울여 프로이센 잔존 세력을 추격해야 하는 판국에 그럴 여유도 없었고, 또 고도이 따위의 도발은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제압하기만 하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 부분이 나폴레옹의 명민함과 고도이의 멍청함이 잘 드러나는 대목인데, 하필 고도이가 이 성명서를 발표한 10월 14일은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나폴레옹이 대승을 거두던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승 소식을 접한 고도이는 '아뿔싸'를 외치며 자신이 발표한 성명서를 주워담느라 허둥지둥 거렸으나, 사실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거두기가 어려웠습니다.




(고도이는 단순히 운이 안 좋았던 걸까요, 국제 정세에 대한 판단력이 제로였던 것일까요 ?  하필 나폴레옹이 저렇게 예나에서 대승을 거두던 바로 그 날 나폴레옹에게 도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다니...)




이런 고도이의 도발 행위에 대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나폴레옹으로부터 아무런 질책이나 항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매우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고도이는 스스로 지은 죄를 알기에, 나폴레옹의 비위를 맞추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긴장 관계를 또 기가 막히게 잘 착취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트라팔가 이후 얼마 남지 않은 스페인의 잔존 해군 함대를 프랑스의 툴롱으로 이동시킬 것을 '부탁'했고, 또 프로이센에서 잡아들인 2만5천명 규모의 포로들을 '공사판에서 부려먹든 농사를 짓게 하든 맘대로 하시라'며 선물하듯 스페인으로 보내왔습니다.  사실상 이들 포로의 숙식 문제에 대한 부담을 스페인 측에 전가한 것이지요.  고도이가 이런 요구에 고분고분 따르자, 한술 더 떠서 스페인 정규 병력 중 A급 사단 1만5천명 정도를 스페인과는 아무 상관없는 저 머나먼 함부르크 지역으로 파견하여 베르나도트 지휘 하에 수비 업무를 맡도록 부탁해왔습니다.  고도이는 이에 대해서도 순순히 따르는 수 밖에 없엇습니다.  이 1만5천의 부대는 스페인에서 '북방 사단' (Division del Norte) 라고 불리는 정말 최정예 부대였고, 그 지휘관은 로마나 후작 (Marquis de la Romana, Pedro Caro y Sureda)이었습니다.  이 부대는 훗날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나름 드라마틱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외에도 대륙 봉쇄령에 따라 스페인의 각 항구를 철저히 폐쇄하라는 경제적 요구에도 굴복해야 했습니다.




(로마나는 반도 전쟁 당시 웰링턴 공작으로부터 가장 존중받던 스페인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Aubrey & Maturin 시리즈에도 등장하는데, 머투어린의 먼 친척으로서 나중에 머투어린에게 엄청난 유산을 남겨 머투어린을 갑부로 만들어줍니다.)




이렇게 멍청한 수상을 둔 덕분에 스페인의 국방력과 경제력은 크게 손상되고 있었으나, 그와는 상관없이 고도이와 카를로스 4세 부부는 자신들만의 방탕하고 화려한 생활을 즐기며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고도이에게 나폴레옹이 의논할 것이 있으니 사절을 보내라는 일이 벌어집니다.  잔뜩 긴장하며 찾아간 고도이의 사절에게 나폴레옹이 내민 것은 엉뚱하게도 포르투갈을 나눠갖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운명의 퐁텐블로 궁전입니다.  왜 운명의 퐁텐블로인지는 다들 아실 겁니다...)




이탈리아 남부의 소왕국인 에트루리아 (Etruria)가 조약을 어기고 영국군을 끌어들였으므로, 나폴레옹은 의붓아들인 외젠의 부대를 동원해 영국군을 쫓아내고 에트루리아를 점령한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에트루리아 왕이 비록 그런 죄를 저질렀지만, 그 왕비가 스페인 왕족인 마리아 루이사 (Maria Louisa)이므로, 스페인 왕가의 체면을 생각하여 에트루리아 왕족에게 에트루리아 대신 다른 영토를 하사하겠다는 것이었지요.  물론 그 영토는 프랑스 땅이 아니라 바로 포르투갈의 일부였습니다.  게다가 썩어빠진 고도이의 인간성을 꿰뚫는 제안도 덧붙였습니다.  포르투갈을 3등분하여, 북부는 마리아 루이사에게 줘서 북부 루시타니아 왕국 (Kingdom of Northern Lusitania)을 만들고, 중부는 프랑스의 통제를 받는 꼭두각시 포르투갈 왕국으로 존속시키되, 나머지 하나는 알가르베스 공국 (Principality of the Algarves)으로 만들어 고도이 개인의 영지로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스페인이 치루어야 할 댓가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통과하여 포르투갈로 쳐들어가도록 길만 내주면 된다는 것이었으니까요.  스페인군도 3개 사단을 동원하는 등 형식적으로 공동 작전을 펼치게 되어 있었습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늉일 뿐, 실제로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프랑스군이 수행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자기 구두 밑창을 혀로 핥으라고 해도 아마 따랐을 고도이로서는 굉장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 제안을 수락합니다.  이것이 1807년 10월의 퐁텐블로 (Fontainebleau) 조약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고도이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포르투갈을 침공하기 위한 프랑스 군단은 조약의 체결 여부에 상관없이 이미 스페인으로 진입한 상태였거든요.  그 부대의 지휘관은 '폭풍우' 쥐노(Jean-Andoche Junot)였습니다.




(퐁텐블로 조약에서 잠재적으로 삼등분된 포르투갈의 상상도입니다.  저 아래 분홍색 부분을 큼직하게 떼어 고도이에게 주게 되어 있었으나, 나폴레옹에게 정말 그럴 의사가 있기는 했는지 상당히 의심스러웠지요.)




원래 인맥으로 따지자면 쥐노가 나폴레옹의 첫번째 부하일 정도로, 나폴레옹과 쥐노의 관계는 무척이나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쥐노는 혁명 발발 이후 군에 입대하기 전에는 파리에서 법률을 공부하던 대학생일 정도로, 뱃 속에 먹물이 좀 들어간 엘리트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지요.  1793년 툴롱 포위전에서 나폴레옹과 처음 만난 쥐노는 당시 계급이 하사관이었는데, 그렇게 나름 배운 사람이었기에 나폴레옹의 서기가 될 수 있었지요.  그리고 그 툴롱 포위전에서의 유명한 잉크와 모래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용감한 인물이었습니다.




('폭풍우' 쥐노 장군입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나폴레옹의 수많은 전투 장면에서, 여러분은 쥐노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거의 보신 적이 없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폴레옹의 인정을 받지 못해, 주요 지휘 보직을 얻지 못했다는 이야기지요.  나폴레옹은, 특히 황제가 되기 이전의 나폴레옹은 인물 평가에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자신보다 2살 어리고 또 아주 오랜 기간 함께 동고동락했던 쥐노에게 주요 보직을 맡기지 않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쥐노에게 뛰어난 재능이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침공 작전 때, 로나토(Lonato) 전투에서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는데, 그때 이후로 성격이 변하여 성급하고 자제력이 떨어지는 불안정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의 말년은 정신 착란 이후 자살로 이어지는 불행한 것이었지요.  그의 별명이 폭풍우, 즉 Junot la Tempête (영어로 Tempest)라고 알려진 것도 그의 폭풍우같은 작전 때문이 아니라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안정한 그의 성질머리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나폴레옹의 고참 측근으로서, 마세나나 마르몽, 란, 다부, 심지어 네 같은 인물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쥐노로서는 속이 그다지 편치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1796년 로나토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른 전투입니다만, 정작 이 전투보다는 바로 같은 날 벌어진 오쥬로의 카스틸리오네 전투가 더 극적이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마침내 일개 군단의 지휘권이 주어진 것입니다.  갑자기 나폴레옹은 왜 그에게 군단 지휘권을 맡겼던 것일까요 ?  가장 큰 이유는 쥐노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직전에 포르투갈 주재 프랑스 대사로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포르투갈 사정에 그래도 좀 익숙한 사람을 파견하는 것이 작전면에서나 정치외교적인 면에서나 더 유리했기 때문이었지요.  또 이렇게 쉬운 작전을 맡기면서 쥐노에게 '이번 작전을 잘 끝내면 원수 (marechal) 계급과 작위까지 주겠다' 라고 나폴레옹이 약속한 것을 보면 약간 뒤쳐지는 친구라도, 역시 옛 전우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쥐노에 대해서는 그 정도로 정리하고, 왜 나폴레옹은 쫓겨난 에트루리아 왕족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뜬금없이 발동한 것인지 살펴보시지요.  물론 나폴레옹은 그런 왕족 나부랭이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머나먼 유럽 서쪽 끄트머리의 포르투갈을 침공하려한 것은 바로 영국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중립국이라고 할 만한 것은 덴마크와 포르투갈 뿐이었습니다.  그 중 덴마크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동 협박에 못이겨 프-러 동맹 쪽으로 사실상 넘어오기 직전이었는데,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덴마크가 프-러 동맹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다 라는 첩보를 접한 영국이 선제 공격을 한 것입니다.   


7월 말, 영국은 덴마크에게 '너희를 프랑스로부터 보호해줄테니 20여척의 전함으로 구성된 너희 함대를 우리에게 넘겨라.  우리가 잘 보관했다가 나폴레옹이 몰락하면 그때 돌려주마' 라는 제안 또는 협박을 했습니다.  거의 동시에, 나폴레옹도 덴마크에게 '영국과 전쟁을 선포하라, 아니면 베르나도트가 덴마크의 남쪽 영토인 홀슈타인 (Holstein)을 들이칠 것이다' 라고 협박을 가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덴마크는 양측 모두를 거절하고 중립을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래들의 싸움 속에서 새우등이 무사할 턱이 없었습니다.  실력행사를 먼저 시작한 것은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은 20여척의 전함과 2만5척의 병력을 동원하여 코펜하겐을 들이쳤고, 지난 1801년 제1차 코펜하겐 전투 때와는 달리, 코펜하겐 시내의 민간인 거주 지역에 무차별 폭격을 퍼붓는 강수를 두었습니다.  1807년 9월 2일부터 3일간 가해진 이 폭격에서, 코펜하겐 시내에서 수천 채의 건물이 불타고 민간인 희생자가 195명 사망, 768명 부상이라는 대참사를 낳았습니다.  결국 덴마크는 조건부 항복을 해야했고, 덴마크 함대는 거의 고스란히 영국 해군의 수중에 넘어갔습니다.




(1807년 제2차 코펜하겐 전투 당시 영국 함대의 폭격을 받던 코펜하겐 시민들의 모습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나 본격적으로 수행된 민간인 구역에 대한 무차별 폭격의 시조가 되는 사건입니다.)



(코펜하겐 폭격에는 박격포함이 동원되어 이런 carcass라는 소이탄을 포함한 각종 포탄과 로켓탄을 수천발 쏘아댔습니다.   이 carcass라는 소이탄은 큰 구멍이 군데군데 뚫린, 속이 빈 철제 케이스로 되어 있었고, 그 속에는 흑색화약, 초석, 유황, 수지, 잘게 부순 유리, 섬유질, 핏치와 송진유 등을 섞어 만든 내용물을 채워넣은 것이었습니다.)




영국은 영국의 해양 안보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었던 덴마크 함대가 나폴레옹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어서 목적을 달성했다고 좋아했겠습니다만, 대신 덴마크 전체는 이제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영국과 원수지간이 되어 나폴레옹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나폴레옹으로서도 손 안 대고 코를 푼 격이 되었지요.  어차피 20여척의 전함으로 영국 해군의 제해권에 도전할 수는 없었거든요.  덴마크가 반영 동맹에 제발로 들어오게 되자, 이제 유럽 대륙에서 남은, 유일하게 영국 선박에게 항구를 개방하는 나라는 포르투갈 딱 하나만 남게 된 것입니다.


원래부터 포르투갈과 영국의 관계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공식 우호조약인 1386년 윈저 조약부터 시작된 것일 정도로 공고하고도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이 관계는 제2차 십자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때 예루살렘으로 가던 영국군이 포르투갈 왕위를 둘러싼 내분에 개입해서 포르투갈 왕가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하지요.  특히 힘센 옆나라인 스페인의 침공 위협에 시달리던 포르투갈로서는 자신을 도와줄 힘센 친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영국과의 우호 관계에 더욱 매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즈음에 이르러서는  포르투갈은 정치 경제적으로 대영국 의존도가 심해졌습니다.  당시 영국을 포함한 유럽 상류층은 대부분 자녀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친 것에 비해, 유독 포르투갈의 귀족층 자녀들은 영어부터 배울 정도였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의 주요 산업 중 하나가 영국으로 포르투갈 특산품인 포트 와인 (Port wine, Porto)을 수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포트 와인의 탄생 자체가 영국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즉, 영국까지 먼 뱃길로 수출할 때 포도주가 상하지 않도록 알코올 성분을 높이기 위해 포도주에다 비숙성 브랜디(포도 증류주)를 첨가했는데, 이것이 술고래인 영국인들의 기호에 딱 맞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포도주가 주로 수출되던 Oporto 항구의 이름을 따서 Porto, 또는 포트 와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네요.  당시 제대로 된 영국식 식사는 로스트 비프 등의 식사를 하고, 파이나 푸딩 등의 디저트를 먹은 후, 포트 와인으로 입가심을 하는 것이 거의 정례처럼 굳어질 정도였습니다.




(영국 신사들의 필수품 포트 와인입니다.)




이런 포르투갈에게, 나폴레옹은 '영국과 단교하고 대륙 봉쇄령에 참여하라'고 강요합니다.  포르투갈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조건이었지요.  가령 중국이 우리나라에게 '미국과 단교하라'라던가, 혹은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중국과의 교역을 중단하라'라고 요구한다면 경제적 안보적으로 우리나라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을 대륙 봉쇄령에 끌여들여 반영국 경제 포위망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포르투갈 침공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프랑스의 요구에 대해서, 실질적인 포르투갈의 지배자였던 당시 섭정이던 조아오 4세 (Dom João VI, 영어로는 그냥 John IV)는 영국과 국교는 단절하겠으나, 영국인들을 체포하고 영국 선박과 상품을 압류할 수는 없다 정도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프랑스는 이에 대해 대사 소환이라는 초강경 대응을 합니다.




(섭정 왕자 시절의 조아오 4세입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반도 서쪽 끝에 붙은 나라였고, 포르투갈 침공을 위해서는 스페인을 통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닷길은 영국 해군이 막고 있었으니까요.  원래 남의 나라를 관통하여 군대를 파병하는 것은 정치외교적으로 굉장히 난처한 일입니다.  아무리 얌전히 통과한다고 해도, 언제 죽을지 모르고 거칠기 짝이 없는 병사들이 도보로 통과하면서 현지인들에게 피해를 안 끼칠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스페인을 사실상 통치하던 인물들이 무골충 카를로스 4세에, 탐욕과 부패로 물든 '평화의 왕자' 고도이였으니 나폴레옹으로서는 일이 이렇게 잘 풀리기도 어려웠던 것이지요.   퐁텐블로 조약을 통해 스페인 내부로의 프랑스군 진입에 대한 동의를 얻은 나폴레옹은 이미 스페인에 진입한 쥐노에게 더욱 행군 속도를 높이라고 재촉을 했습니다.


왜 나폴레옹은 무엇보다 행군 속도에 열을 올렸을까요 ?  그리고 애초에 왜 퐁텐블로 조약이 체결되기도 전에 스페인 국내로 병력을 진주시키는 초강수를 두었을까요 ?  이유는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 브라질 때문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애초에 워낙 작은 나라여서, 그 자체로는 프랑스군에게 저항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프랑스군의 침공에 대해 포르투갈 왕정이 택할 수 있는 것은 부질없이 상징적인 저항 이후 항복하는 것이든가, 아니면 바리바리 보따리를 싸서 배를 타고 대서양 건너 식민지인 브라질로 튀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포르투갈이 택할 것은 바로 후자, 즉 브라질로의 도주가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건 나폴레옹으로서는 꼭 막아야 할 일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을 점령하여 유럽 대륙과의 교역항을 모두 폐쇄한다고 하더라도, 영국이 브라질과 교역길을 뚫는다면 대륙 봉쇄령의 효과가 크게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포르투갈 땅덩어리보다도, 포르투갈의 왕정 자체를 사로잡아 영국과의 단교를 강요하는 것을 훨씬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1800년 경의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도입니다.  특히 저 브라질은 영국이 통상길을 열려고 무척 노력하는 땅이었습니다.)




문제는 속도였습니다.  아무리 이삿짐이 많다고 하더라도, 아무래도 리스본에 앉아 있다가 항구로 가 배를 타는 것이, 피레네 산맥을 넘고 드넓은 스페인 평원을 가로질러 포르투갈의 방어진을 돌파하고 리스본을 점령하는 것보다는 훨씬 빠를테니까요.   그래도 일단 최선을 다 해봐야 했는데, 일단 프랑스군의 장기가 빠른 행군이니만큼,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쥐노의 부대가 서부 스페인 살라망카 (Salamanca)에 진입한 것은 11월 12일, 약 480km를 25일만에 주파한 셈이었습니다.  하루에 19km 약간 넘게 이동한 셈인데, 이는 당시 프랑스군의 평균 이동 거리였던 하루 25km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피레네 산맥을 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또 쥐노의 부대는 독일 무대에서 활약했던 정예 그랑 다르메 (Grande Armee)보다는 질이 많이 떨어지는 2선급 부대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습니다.  이런 속도로는 안되겠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으로부터 쥐노가 추가 명령을 전달받은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정상적인 길이었던 알메이다 (Almeida)와 코임브라 (Coimbra)를 통과하는 320km 경로 대신 훨씬 험하지만 대신 훨씬 짧은,  알칸타라 (Alcántara)로부터 타구스 (Tagus) 계곡을 통과하는 190km 경로를 택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특히 이 경로에는 주민들이 별로 없어 현지 식량 조달이 매우 곤란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병사들은 사막에서라도 먹을 것을 찾을 수 있다" 라며 무작정 강행군을 강요했습니다. 




(붉은색 점선이 원래의 정상적인 평탄한 길이고, 검은색 실선이 나폴레옹이 강요한 지름길입니다.  이렇게 보니 뭐 별로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아마 살라망카에서 코임브라로 가는 길이 실제로는 저렇게 직선이 아니고 많이 굽이치는 모양이었나 봅니다.)




결국 이때부터의 행군은 병사들에게는 재난이었습니다.  하필 이때부터는 늦가을의 차가운 비까지 며칠동안 계속 내려 고달픈 병사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병사들의 25%가 낙오하고, 군마의 50%가 죽어버리는 큰 희생을 치뤄야 했습니다.  이런 개고생 끝에 쥐노는 11월 19일, 드디어 포르투갈 국경을 넘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탄탄대로였을까요 ?  천만에 콩떡이었습니다.  스페인 도로 사정도 열악했지만, 스페인보다 더 가난한 나라였던 포르투갈의 도로 사정은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덕분에 쥐노의 부대가 11월 23일 아브란테스(Abrantes)에 진입할 때, 전체 부대의 50%만 대오를 이루고 있었고, 나머지는 낙오했거나 거지꼴로 먹을 것을 찾아 들판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아브란테스와 그 위치입니다.  포르투갈의 딱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폭풍우' 쥐노의 부대는 이렇게 거지꼴로 절뚝거리며 오고 있었으나, 정작 이들을 맞이하는 포르투갈 궁정은 발칵 뒤집혀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설마 공갈이겠지, 그냥 엄포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 전설적인 프랑스군이 정말로 포르투갈을 향하여 스페인을 횡단하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온 것입니다.  당시 섭정이던 조아오 왕자는 10월 20일 등 떠밀려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그래도 쥐노의 부대의 진격이 멈추지 않자 11월 8일에는 포르투갈 국내의 영국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쥐노의 부대는 진격을 계속했고, 포르투갈 궁정이 깜짝 놀랄 속도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애초에 프랑스군과 싸운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포르투갈군은 서류상으로는 2만명이 넘었으므로 쥐노의 2진급 프랑스군 잔존부대 1만5천명과 충분히 싸워볼 만 했으나, 스페인과 별반 차이 안 날 정도로 부패했던 귀족 출신 포르투갈 장교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병사들을 명단에만 올리고 그 보급품과 급여를 착복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리스본 앞바다에 영국 소함대가 나타나 리스본 항구의 봉쇄를 선언했습니다.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으니 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조아오 섭정은 사절을 보내 쥐노의 진격을 늦추려 해보았으나, 이는 역효과를 낼 뿐이었습니다.  굴욕적인 조건에도 OK를 외치는 사절의 태도를 보고 포르투갈에게 저항 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눈치챈 쥐노가, 뭉기적 거리는 본대를 놔두고 약 1500명의 정예병만을 따로 뽑아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침내 11월 30일 리스본에 지친 몸을 이끌고 거지꼴로 나타난 이들에겐 대포 1문조차 없었고, 심지어 연이어 내리는 늦가을비에 탄약포까지 흠뻑 젖어 총 한방 제대로 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상관없었습니다.  리스본 정부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거든요.  결국 프랑스군은 아무 저항 없이 리스본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쥐노의 침공을 피해 리스본 항구를 탈출하는 왕족과 귀족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두려워하던대로, 이미 조아오 섭정을 포함한 포르투갈 궁정은 모두 배편으로 항구를 빠져나간 후였습니다.  쥐노가 리스본에 입성하기 바로 하루 전날, 이들은 15척의 군함과 20여척의 수송선에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영국 함대의 호위 하에 브라질로 출항했던 것입니다.  알고보면, 아무리 포르투갈 국민들이 무기력하다고 해도, 프랑스 침공군에 대해 총 한방 쏘지 않고 완전히 무저항으로 나온 것도 이해가 가는 행동이었습니다.  리스본 시민들은 자신들이 떠받들던 왕족들이 지들만 살겠다고 온나라 국민들을 버려두고 브라질로 탈출해버렸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 대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국민들은 왕족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엇지만, 탈출한 왕족들로서도 이 탈출이 나름 아슬아슬했던 것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스피드에 전력을 기울였던 쥐노의 행군 속도에 놀란 왕족들은 온갖 귀중품이 실린 14대의 짐마차를 항구 부둣가에 내버려 둔 채로 허둥지둥 출항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쥐노는 졸지에 닭쫓던 개 신세가 된 셈이었지요.  이렇게 나폴레옹은 포르투갈 침공의 주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나폴레옹은 으리으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공로를 인정하여 쥐노에게 아브란테스 공작(Duc d'Abrantès)의 작위를 내려줍니다.  다만 절반의 성공이었으니 포상도 절반만 하여 원수직은 내리지 않았지요.  쥐노가 포르투갈 궁정 식구들을 놓친 댓가는 상당했습니다.  조아오 왕자와 함께 무려 1만5천명의 귀족, 대상인, 그리고 그 식솔들이 배를 타고 브라질로 탈출했는데, 이들이 바리바리 싸들고 간 화물의 대부분은 금화와 은화였습니다.  이들이 가져단 금화와 은화는 포르투갈이 보유한 전체 경화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거액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점령한 포르투갈에서도, 다른 점령지에서처럼 돈을, 그것도 1억 프랑을 뜯어낼 것을 지시했는데, 쥐노가 포르투갈을 아무리 박박 긁어도 나폴레옹에게 보낼 돈은 커녕 자신의 부대 병사들에게 급여를 지불할 돈조차 모을 수가 없었습니다.  




(항상 결국 문제는 돈이지요.  18세기 초반 스페인의 은화입니다.)




남아있는 포르투갈 귀족들과 관리들은 프랑스군에 대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포르투갈 민중은 좀 달랐습니다.  최초의 저항은 리스본을 점령한지 얼마 안되어 쥐노가 관공서 건물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하자마자 나왔습니다.  리스본 시민들이 프랑스의 삼색기가 올라간 것을 보고 작은 폭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는 기병대가 출동하여 간단히 제압했습니다만, 쥐노가 나폴레옹에게 보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자, 온 나라의 민중들이 들썩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한가지 다행인 점은 포르투갈의 사회 지도층이라고 할 만한 인간들이 모조리 브라질로 도망쳤기 때문에, 그 민중 봉기를 이끌 인물이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포르투갈이 아니라 동쪽의 스페인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곧 쥐노는 포르투갈에 갇힐 운명이었습니다.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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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오 2018.09.05 2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첫댓글의 영광이라니! 올리시는 글들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2. 올~ 2018.09.05 2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쉽게 1등을 놓쳤네요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3. 유애경 2018.09.06 0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희생을 강요 당하는건 항상 힘없는 서민(민중)들 이군요! 권력을 쥔 자들은 잘난척만 하다가 위급 해지면 언제든지 튀었다가 기회를 엿보면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4. 웃자웃어 2018.09.06 0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똑같은 글을 올리지 않았나요?

  5. 2018.09.06 1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6. 하이텔슈리 2018.09.06 2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십중팔구 이때 싸들고간 물건 중에도 불타버린 물건이 있을거라고 생각되니 이전과 다르게 읽히는 글이네요.

  7. reinhardt100 2018.09.06 2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르투갈이 저렇게 배짱(?)을 부리다가 프랑스군이 밀어닥치자 브라질로 망명하면서 포르투갈 본국을 바라본 식민지의 포르투갈인들은 본국을 아주 우습게 알 정도가 되어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당장, 브라질로 포르투갈 왕실이 망명하자마자 식민지 주민들은 브라질과 포르투갈 본국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1815년에는 '포르투갈-브라질 연합왕국'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터지게 됩니다. 역대 어느 식민제국도 본국과 식민지가 완전 동등, 그것도 식민지가 본국을 합병하는 형식으로 국체가 변형된 적은 전례가 없었으니까요. 거기에 포르투갈 왕실의 내분까지 식민지 주민들이 이용하면서 브라질 자체가 아예 브라질 제국으로 독립하는 사태까지 터지면서 포르투갈은 완벽히 3류 국가로 전락하게 되었고 혁명까지 터지면서 국가가 개판이 나게 됩니다. 그나마, 이 개판난 포르투갈을 살린 정책이 아프리카 식민지 확장정책이었는데 이 때문에 영국과의 관계도 꽤나 악화되었고, 20세기 초중반에는 '에스타도 노부'라는 권위주의적인 독재정권이 살라자르에 의해 설립됩니다. 말 나온김에 PIGS 국가들 중 그나마 포르투갈이 피해가 덜 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이 살라자르인데 평가가 아주 복잡하죠. 장기적인 국가운영의 청사진을 가지고 이를 실천한 유능한 학자 정치인에서 국민 절반을 바보 만든 우민화의 대표주자라고 말입니다.

    나폴레옹이 쥐노에게 택하도록 한 길을 따라 프랑스군이 19세기판 전격전을 실시했는데, 저 때 살라망카에서 리스본까지 1일 평균 10km밖에 안 갔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저 길이 악명 높았는데, 17세기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 당시 포르투갈 독립군은 저 길을 따라 진격하는 에스파냐군을 상대로 치열한 방어전을 전개하여 결국 막아낸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북부 코임브라 등의 요새지역을 돌파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여 이를 우회하는 것이 왕정복고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것이 양측의 공통된 판단이었고, 실제로 1640년부터 곧장 이 길을 중심으로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포르투갈 독립군이 저 길 방어에만 3만에 육박하는 병력을 쏟아부었고, 반대로 에스파냐 역시 공세 및 공세적 방어를 하기 위해 카탈루냐, 아라곤, 나폴리 반란 진압과 30년 전쟁이 종전되자마자 프랑스전을 맡을 병력을 제외한 전 병력을 모조리 이 길에 쏟아부었는데 결국 돌파에 실패하면서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이 포르투갈 재독립으로 이어질 정도로 악명 높았던 겁니다. 저기 일 평균 10km 행군이라 잘 실감이 안나겠지만 평지였다면 최소 일 30km, 심지어 일 40km에 육박하는 속도였다고 보면 됩니다. 이 정도면 정말 쥐노가 강행군 한 겁니다. 19세기 판 전격전 맞은 겁니다.

  8. 석공 2018.09.07 04: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9. TheK2017 2018.09.09 0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전격전과 왕가의 도망, 심지어 댓글까지 흥미진진하니 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ㅇ^*

  10. Starlight 2018.09.22 2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쥐노도 애썼군요. 뭔가 늘 측은한 쥐노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