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신문에서 읽었는데, 중국의 CCTV에는 중국 각지의 소수 민족을 찾아다니며 각 민족 고유의 풍습과 생활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에서 꼭 나오는 장면이, 그 소수 민족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취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장면이 꼭 나온다고 하네요.  그 글을 쓴 필자는, 그것이 소수 민족이 흥겹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있지만,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들에게, '소수 민족들은 대개 음주가무에 빠져 지내는 열등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의도도 있는 것 같다고 씁쓸해했습니다.

중국인들이 술에 취하는 것을 좋아하느냐 안하느냐는 일단 생각하지 말고,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정말 음주가무를 즐기는 민족도 드뭅니다.  사실 제가 볼 때는 조금 상황이 심각할 정도로 많이 즐깁니다.  우리 스스로가 못느낄 뿐이지, 우리나라는 음주 문제가 사실 심각한 나라입니다.  제가 카투사 시절에 (당연히 미군들하고 사이가 안좋았지요 !)  미군애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들었는데, 우리나라의 1인당 소주 소비량이 1주일에 1병이던가 2병이던가라면서, 한국인들은 모두 알콜중독자라고 씨부렁거리던 것이 기억납니다.  사실 갓난아기까지 포함한 평균 수치가 정말 그렇다면 큰일이다 싶었는데, 찾아보니까 정말 한 1.8병 정도였습니다.  그것에 추가로 맥주도 한 2.3병 정도 소비하더군요.  대체 이 술을 다 누가 마시는 겁니까 ?   

 

(우리나라는 오른쪽 하단 부분에 있습니다.  순수 알콜의 섭취량인데, 우리나라는 딱 아일랜드와 동일하군요.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단연 탑입니다.)

 



세계적으로는 어떤가 하고 찾아보니까, 우리나라의 1인당 술 소비량은 아시아권에서는 단연 탑이고 세계적으로도 많은 편에 속합니다만, 의외로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고 그냥 유럽 중간 정도 갑니다.  다만 유럽인들보다 우리가 체구가 좀 작은 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꽤 취하도록 마시는 편이라는 점은 이해가 갑니다.  특히 유럽인들은 식사 때마다 맥주나 와인 1~2잔을 항상 곁들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알콜 섭취량이 많은 것이지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나라 음주 문화가 다소 폭음 쪽으로 잘못 형성되었다는 생각은 듭니다.  따지고 보면, 낮에는 멀쩡하게 직장에서 일 잘하고 집에서는 평범한 가장인 사람이, 밤에 만취해서 길바닥에 쓰러져 자는 것이 별로 크게 이상하지 않게 여겨지는 나라가... 적어도 OECD 국가 중에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폭력 행위를 저질렀을 때 경찰이 오기 전에 소주를 벌컥벌컥 마셔두는 것이 변호사를 부르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법적 대응이라는 소리를 어디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 음주에 대해 이렇게 관대한 나라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법 만드는 국회의원들과 사법부 검찰 등에 계신 분들이 술을 좋아하셔서 그런 것일까요 ?  저로서는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서양인들은 술의 맛과 향을 즐기려고 마시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취하기 위해서 마신다고 하지요.  제 생각에는, 경제 수준과도 상관있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 사회에 대한 책에서 읽었는데, 우리나라 유치원에서는 전통적으로 노래 연습을 많이 시키는 것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미술 교육을 많이 시킨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분석해놓은 것이 약간 뜨아하면서도 그럴싸 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만, 노래 교육은 상대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것에 비해, 미술은 소모성 재료가 많이 들어가므로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국민 소득이 낮은 국가일 수록 미술 교육보다는 노래 연습을 많이 시킨다고 하네요.  동의하십니까 ?  아무튼, 비슷한 이유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척박한 사회 환경에서 가장 저비용의 쾌락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술, 그것도 소주이기 때문에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뭐 스포츠를 하려고 해도 돈이 많이 들고, 미국 애들처럼 집에서 뭔가 뚝딱뚝딱 만들어보려고 해도 차고와 각종 연장, 넓은 공간이 필요하쟎아요.  그러다보니 할 게 술마시는 것 외에는 별로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사정은, 지금은 그렇게까지 마셔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18~19세기 영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온 나라가  술에 쩔어 살았습니다.  물론 사회 최고위층 인사들이야 주정뱅이가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소위 상류계층인 군 장교들만 하더라도, 주정뱅이가 많았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군 사병은 하루에 1파인트 (0.56리터)의 포도주나 1/3 파인트의 럼주를 배급받게 되어있다고 했었습니다.  우습게도, 많은 수의 사람들이, 단순히 '매일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군에 입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페인 비토리아(Vittoria)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웰링턴 공작은 부하 병사들의 약탈 행위에 화가 났을 때, 공개적으로 자기 병사들을 '술이나 퍼마시러 입대한 땅거지 색히들'이라고 욕을 해댔다고 하지요.  


 

(1813년의 비토리아 전투입니다.  이 전투로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은 완전히 철수하게 됩니다.  스페인에서 약탈한 온갖 귀중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철수하던 프랑스군을 영국군이 따라잡아 공격한 이 전투는 특히 나폴레옹 전쟁 중의 전투 중에서 가장 많은 액수의 노획물이 발생한 것으로 유명한데, 웰링턴이 화가 났던 이유는 그런 값진 노획물 중 상당수가 병사들의 배낭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 해군 이야기를 그린 Hornblower 시리즈에서도, "Flying Colors" 편을 보면, Hornblower 함장은 긴 항해 끝에 식수가 다 떨어져 가지만, 혼블로워 함장은 물보다도 럼주가 다 떨어져 가는 것을 더 걱정합니다.  수병들은 럼주만 계속 배급이 되면, 식수가 다 떨어져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단, 맥주는 술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챨스 디킨즈의 "Great Expectations"라는 작품을 보더라도, 12살 정도의 어린 주인공에게 식사꺼리가 제공되는데, 물 대신 독한 ale이 주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워낙 식수 사정이 안좋아서, 영국인들은 대개 물은 잘 마시지 않았습니다. 당시 런던의 주 식수원은 템즈 강이었는데, 여기서 물을 길어오면, 인간의 분뇨는 약과이고, 온갖 독성 물질과 가축의 분뇨 등이 다 나왔다고 합니다. 중산층은 샘에서 길어온 물을 사 마셨지만, 대부분의 서민들은 이 강물을 식수로 썼습니다. 서머셋 모옴의 "인간의 굴레"를 보더라도, 템즈강에 투신 자살을 시도한 남자가, 빠져죽지는 않았지만 그때 마시게 된 템즈강 물로인해 장티푸스에 걸려 죽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때는 이미 1900년이었는데요 !   그래서 대신 맥주를 마셨고, 차가 널리 보급된 이후로는, 차를 마셨습니다.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단어가 "영국인이 차와 흰빵을 먹는 동안, 아일랜드인은 물과 감자를 먹었다" 라는 것으로 표현이 됩니다.

이야기가 겉돌았는데, 본론으로 돌아와서, 영국군에게 주어지는 술은 거의 100% 럼주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지금도 그렇지만) 포도주로 유명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날씨가... OTL) 그러므로 제일 값싼 술은 gin 이었습니다.  그러나, 호밀로 만드는 증류주인 진 이라는 술은, 그야말로 최하층 빈민들이 마시는 술이라는 인상이 워낙 강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챨스 디킨즈도 "진을 마시는 것은 영국의 큰 해악이다."라고 썼겠습니까 ?  1730~1740년대에 발전한 진 문화는, 거의 현대 미국 도시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는 마약 문제와도 맞먹었을 정도였습다.  진이 하류층에서 크게 유행하고, 또 사회악으로 번진 이유는, 너무 가격이 쌌기 때문이었습니다.  "1페니면 취할 수 있고, 2페니면 죽을 정도"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통계치가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만, 1740년대에 런던 인구가 마시는 진의 평균치가 1주일에 2파인트(1.12 리터)였습니다. 남자, 여자, 갓난아기 다 합해서요. 이 정도면 요즘 우리나라의 소주 소비량은 저리 가라지요 ?   당시 런던 시내 8가구마다 1곳씩 진을 파는 술집이 있었고, 시내 곳곳마다 진에 취해 쓰러진 사람들이 즐비했답니다.  정부에서도 사태가 너무 심각하다고 생각하여 진 금지법을 1743년에 제정하려고 했는데, 폭동이 일어나서 결국 실패했다고 합니다.  극작가인 헨리 필딩은 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진이야말로, 대도시 인구 수십만명을 해치는 해악이다. 이 독한 술에 접한 사람들은, 지독한 주정뱅이가 되어, 이 술을 다시 사기 위한 돈조차 제대로 벌 수 없게 된다. 게다가 모든 수치심과 공포심도 없애버려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죄와 뻔뻔스러움을 낳게 한다."

 

 

(윌리엄 호가쓰(William Horgath)의 유명한 1751년 그림입니다.  'Beer Street & Gin Lane'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음주에 찌든 영국 하층민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는 군대에도 진을 공급하는 것이 적당했겠지만, 정부는 이 지긋지긋한 술을 도저히 군대에 공급할 수가 없었나 봅니다.  다행히, 당시 영국은 카리브해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활발하게 경영하고 있었으므로, 사탕수수 찌꺼기로 만드는 증류주인 럼주의 생산과 유통이 활발했습니다.  그래서, 육군이나 해군이나, 대부분 럼주를 공식 주류로 공급했습니다. 

 



럼주는 도수가 최고 75도까지 갑니다. (저는 한때 이게 알코올 농도를 말하는 것인줄 알았습니다만 그런 건 아니더군요.)  엄청난 독주지요.  당시 공급되었던 럼주가 이렇게까지 정제된 것은 아니었겠습니다만, 아뭏든 너무 독주였으므로, 당시 해군 제독이던 에드워드 버논(Edward Vernon, 별명 Old Grog)은 수병들에게 배급하는 럼주에 물을 절반 섞어서 주도록 했습니다.  이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그록(grog)입니다.  권투에서 말하는 그로기(groggy) 상태라는 단어도, 바로 이 그록을 잔뜩 마신 상태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는 영국 해군 내에서 럼주와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영국 해군에도, 육군과 마찬가지로 채찍질 체벌이 있었습니다만, 이와 비슷한 레벨의 체벌은 바로 'grog 배급 중단'이었습니다.  육군은 육군이라는 특성상, 어떻게든 술을 손에 넣을 방법이 꽤 많았습니다만, 해군에서는 배라는 특성상, 배급되는 것 외에는 술을 구할 방법이 진짜 없었거든요.

 

(그록의 창시자이신 Edward Vernon 제독이십니다.  그는 평상시 그로그램(grogram)이라는 천으로 만들어진 코트를 자주 입어 '늙은 그록(Old Grog)'이라는 별명으로 수병들 사이에서 불렸는데, 그로 인해 럼반-물반의 희석 럼주 이름도 그록으로 굳어버렸습니다.) 



럼주는 Hornblower의 입을 빌리면, 그야말로 영국 육해군의 "Life Blood"였습니다. 어떤 인도 세포이 병사의 회고에 따르면, 영국군은 틀림없이 럼주 속에 뭔가 마법약을 집어넣는 것이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럼주만 마시면 영국군은 매우 사나와져서 두려움을 모르고 싸웠고, 또 심한 부상을 입고 다 죽어가는 병사도 럼주를 조금 마시면 금방 되살아난다고 했습니다.  다만, 그 '마법약'을 너무 많이 집어넣으면 병사들이 너무 흥분해서 제풀에 죽어버린다고도 '아주 잘' 관찰했더군요.

1780년에 런던에서, 로마 교황에 반대하는 군중이 가톨릭 수도원을 습격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고든 폭동이라는 이 사건의 하일라이트는 바로 가톨릭 수도원 부속 진 증류장 습격이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군중들은 수도원보다는 이 진 증류장을 노리고 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폭도들은 재빨리 이 증류장의 문을 부수고, 그 중에서 더욱 생각없는 일부 인간이 불을 질렀는데, 이 불길 속을 목숨을 무릅쓰고 뛰어들어갔다고 합니다.  손에는 양동이와 주전자, 심지어 말구유를 들고서요. 곧 뜨거워진 증류기가 터지면서, 진 원액이 길바닥에 쏟아져 나와 하수 도랑으로 흘러들었는데, 군중들은 술에 만취하여 쓰러질 때까지, 이를 땅에 엎드려서 입을 대고 마셨습니다. 나중에 민병대가 출동해서 상황을 정리했는데, 이때 만취해서 쓰러진 사람들 중 4명의 여자를 포함해서 총 20명의 사람들이 과음으로 즉사했다고 하네요.  이 정도면 막장 인정입니까 ?

 

 

(제 글에서 인용된 영국의 당시 음주 행태 사례는 Mark Adkin이라는 현역 영국군 소령이 지은 'Sharpe Companion'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Sharpe 시리즈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 해설서입니다.)

 

# 목요일에 올리는 과거 재탕글이었습니다...


이제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유럽 각국은 이 세기의 대결을 놓고 어느 편에 붙을 것인지 판단하느라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면 굳이 힘센 제국들끼리 싸움질을 하는데 굳이 다른 나라들이 꼭 끼어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나쁜 평화가 가장 좋은 전쟁보다 더 낫다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분들이 많겠지만, 그건 편하게 후방에서 입으로 떠들 때나 통하는 거부감입니다.  당장 바로 옆의 전우들이 내장을 쏟아내며 고꾸라지고 나도 바로 다음 순간 언제든지 팔다리가 끊어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특히 그런 희생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 손자일 경우에는  누구나 어떻게든 당장 휴전 조약을 바라는 법입니다.  물론, 1812년 당시 유럽 각국에서 어느 쪽에 붙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람들은 자기나 자기의 아들이 적의 대포알에 노출될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건 현대에서도 대부분 마찬가지네요.

 

애초에 나폴레옹 덕분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주도권 하에서 벗어나 땅도 넓히고 왕국이 될 수 있었던 라인연방(Confédération du Rhin, 독일어로는 Rheinbund) 소속의 독일 소국들은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이들 국가 소속의 독일 시민들은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의 대결, 좀더 근본적으로 보면 프랑스의 부르조아 계급과 영국의 부르조아 계급간의 투쟁에 끼어들어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지배하던 왕과 대공(Fürsten, 영어로는 Prince)들 중 상당수는 나폴레옹 못지 않은 열정을 가지고 러시아 원정에 협조했습니다.  먼저 나폴레옹이 미개한 독일인들에게 프랑스식 입헌 군주국의 모델을 보여주겠다며 만든 베스트팔렌(Westphalen) 왕국의 국왕은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Jerome)이었습니다.  또 베르크(Berg) 공국의 지배자는 나폴레옹의 매제이자 나폴리 왕국 국왕인 뮈라(Murat)였고요.  이런 친인척들 외에도 나폴레옹에게 진정으로 협조적인 독일 소국왕들은 생각보다 꽤 많았습니다.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헤세 등의 국왕들과 대공들은 어쩔 수 없이 나폴레옹에게 굴복한 군주들이 아니라, 스스로 프랑스 계몽주의가 근대화를 위한 옳은 방향이라고 믿고 나폴레옹과의 협력을 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믿음의 배경에는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Grande Armee)가 가진 무력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요. 

 

 

(1812년 당시 라인연방의 소속 국가들입니다.  라인연방의 주요국가는 지도에서의 영토 크기로만 보면 베스트팔렌과 작센, 그리고 바이에른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온나라가 친프랑스-친나폴레옹 정서를 가진 진짜 동맹국은 바이에른과 바덴, 뷔르템베르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두 남부 독일의 카톨릭 국가들이군요.)

 



영국의 경우는 뭐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당연히 러시아와 함께 반프랑스 전선의 최선봉에 나설 의지가 충만했습니다.  원래 영국은 자신은 피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입만 털면서 지갑이나 여는 것으로 전쟁을 대신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로부터 원망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812년 당시에는 영국도 꽤 당당하게 자신도 피를 흘리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전선에 당시 영국으로서는 꽤 큰 야전군인 3만 정도의 병력을 파견하여 그야말로 혈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만이라고 하면 프랑스 그랑다르메(Grande Armee)로서는 고작 1개 군단에 해당하는 소규모 병력이었겠지만, 인구가 많지 않고 육군이 미약했던 영국으로서는 동원 가능한 전체 야전군을 다 동원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국은 이 소중한 병력을 아끼느라 당장 온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있던 스페인 현지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얌체처럼 몸을 사리긴 했습니다.  하지만 1814년 전쟁이 끝난 뒤에 집계를 해보면 영국군의 사망자는 총 3만5천이 넘었습니다.  그러니까 스페인-포르투갈 전장은 부족했던 영국 육군의 인원과 물자를 끊임없이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그 중에서 2만5천은 전투가 아닌 각종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만 이건 당시 위생 상황으로서는 정상적인 수치로서 다른 전장 다른 나라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812년 바다호스 요새 포위전입니다.  이 전투에서 4천5백의 프랑스군이 지키는 바다호스 요새를 2만7천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이 3주간 포위 공격 끝에 함락시켰습니다.  프랑스군은 1천5백의 사상자를 냈고 나머지는 거의 모두 포로로 잡혔는데, 영국-포르투갈 연합군도 거의 5천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함락 후에 영국군은 바다호스 시내를 잔혹하게 약탈하여, 최소 2백명에서 최대 4천명의 스페인 민간인 사상자를 냈습니다.  스페인이 영국의 동맹국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1812년은 영국군이 지나치게 몸을 사린다고 비난하던 스페인 사람들이 입을 다물 정도로 영국군도 공세적으로 나온 첫 해였습니다.  이 해 1월, 웰링턴은 드디어 군수품 창고 및 물자 집적 등을 끝내고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의 진군을 개시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이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쳐들어갈 통로가 뻔했던 것처럼, 역방향의 침공도 루트가 뻔했습니다.  웰링턴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도 1810년 프랑스의 포르투갈 침공 때 마세나가 밟았던 경로를 정확하게 역순으로 밟아야 했습니다.  1812년 1월 시우다드 로드리고(Ciudad Rodrigo) 요새부터 함락시킨 웰링턴은 이어서 4월에는 바다호스(Badajoz)를 엄청난 혈투 끝에 함락시켰습니다.  이 두 요새를 함락시킴으로써 이제 스페인으로의 진격로가 활짝 열린 셈이 된 것이지요.

이때 놀랍게도 나폴레옹으로부터 영국 측에게 평화 협상을 하자는 제안이 날아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영국과의 협상은 불가능하다고 공언하던 나폴레옹으로서는 굉장히 놀라운 입장 변화를 취한 것이었는데, 그만큼 당시 나폴레옹은 러시아 침공을 앞두고 후방 정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원래 러시아 침공을 하게 된 근본 원인이 영국과의 전쟁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어떻게 보면 본말이 전도된 셈이었지요.  어쨌거나 나폴레옹의 평화 협상 조건은 영국으로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미 영국군이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던 포르투갈 왕국을 원래의 왕가인 브라간사(Braganza) 왕정에게 반환하는 대신 스페인은 조제프를 국왕으로 하는 보나파르트 왕가 소유임을 인정해달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거든요.  그 외에 시실리 섬은 부르봉 왕가 출신의 사르데냐 국왕 페르디낭이 계속 보유하되, 나폴리 왕국의 소유권은 현행대로 나폴레옹의 매제 뮈라(Murat)가 계속 유지하게 해달라는 것이 딸려 있었습니다.  혹시 웰링턴이 시우다드 로드리고와 바다호스를 함락시키기 전에 이런 조건의 평화 협정을 제안했다면 영국이 받아들였을까요 ?  아마 영국은 그래도 거부했을 것입니다.  하물며 이제 스페인으로의 침공길이 활짝 열린 마당에 그런 조건을 수용할 이유가 없었지요.  영국은 단칼에 나폴레옹의 평화 제의를 거부하고 스페인으로의 침공 작전을 계속 했습니다.  웰링턴은 7월에 살라망카(Salamanca) 전투에서 마르몽(Marmont)의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8월에 조제프는 수도 마드리드를 내주고 피난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살라망카 전투에서 프랑스 보병들을 공격하는 영국군의 모습입니다.   한창 이기고 있는데 휴전하자고 하면 통할 리가 없지요.) 

 



초지일관 당당했던 영국과는 달리, 프로이센의 입장은 좀 딱했습니다.  나폴레옹으로부터 처음부터 푸대접을 당하던 프로이센은 당연히 처음에는 러시아 측에 붙으려 했습니다.  심지어 전운이 감돌던 1811년에는 국왕 빌헬름이 러시아 자르 알렉산드르에게 밀사를 보내 10만의 프로이센군을 보태줄테니 선제 공격에 나서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러시아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막강 프랑스군과 같은 조건으로 정면 충돌해서는 승산이 전혀 없다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프로이센의 선제 공격 요청을 거절하고, 프랑스군을 러시아 국내로 깊숙이 끌어들여 방어전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건 프로이센처럼 조그마한 나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전략이었지요.  러시아가 저렇게 후퇴 일변도의 희한한 전략을 택한다는 것은, 프로이센으로서는 전국이 프랑스군에게 일방적으로 유린당하게 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게다가 1812년 들어 오스트리아까지 프랑스군에 가담하기로 결정을 내리자, 이제 대세는 기울었다는 체념으로 뒤늦게 프랑스측에 가담하기로 합니다.  사실 이미 때늦은 결정이었습니다.  훨씬 더 일찍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맹세했어도 프로이센에 대한 대접은 신통치 않았을텐데, 이렇게 모든 것이 결정되고 난 뒤에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가담한 프로이센에 대해 나폴레옹이 보내는 시선은 싸늘했습니다.  결국 프로이센은 2만의 야전군을 러시아 침공에 동원해야 했고, 그 외에도 4만2천의 추가 병력을 후방 수비 임무를 위해 프랑스군에 제공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자국 영토를 프랑스군 및 그 동맹군이 자유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그 행군길에 프랑스군이 먹고 마시는데 소비하는 물자는 프로이센 국민들로부터 징발하여 충당했는데, 그 비용은 1806년 패전 당시 부과되었다가 아직 갚지 못하고 있던 전쟁 배상금을 상각해주는 형식으로 처리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냥 공짜로 다 털렸다는 말이지요.

 

...To be continued...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Peninsular_War#Allied_campaign_in_Spain
https://en.wikipedia.org/wiki/Confederation_of_the_Rhine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는 독일 출신 할머니와 독일 출신 어머니를 둔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 할머니는 처녀적 이름이 안할트-제릅스트(Anhalt-Zerbst) 출신의 소피(Sophie)로서 나중에 예카테리나(Екатерина) 대제로 알려진 러시아의 여황입니다.  알렉산드르의 어머니는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공주였지요.  다른 유럽 왕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는 이렇게 계속 외국 특히 독일 출신의 공주들을 왕비로 맞아들이다보니 러시아 왕가는 일반 러시아 국민들은 물론 러시아 귀족들에 비해서도 서구의 발전된 문물과 사상에 대해 좀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춥고 먼 동쪽 구석의 러시아를 서구화시키는 노력은 대개 국왕을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혁신이 위주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귀족들과 국민들은 그런 서구 사상의 침투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반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 전통은 알렉산드르에게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스위스 출신의 공화주의자인 라 아르프(Frédéric-César de La Harpe)를 가정교사로 하여 루소 등의 프랑스 계몽사상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당연히 그는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랐습니다.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지독한 전제 군주 집안에 태어난 왕자로서 계몽사상에 젖어든 어린 손자 알렉산드르를 보고 예카테리나 대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꼬마는 자기 모순의 매듭덩어리 같구먼."


(라 아르프입니다.  그는 30대를 러시아에서 알렉산드르의 가정교사로 보낸 뒤, 베른의 귀족 정권에 시달리던 고향 스위스 보(Vaud) 지방을 해방시키고 더 나아가 스위스에 헬베티카 공화국(République Helvétique)을 만들었습니다.  혁명의 폭풍 속에서 그는 추방을 당하는 등 시련을 겪었으나, 나폴레옹이 패망한 이후 그는 옛제자 알렉산드르의 도움으로 그의 고향 보 지방의 권익을 지키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물려받은 전제 군주 짜르의 왕좌는 결코 절대 권력이 보장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그의 할아버지 표트르 3세(Pyotr III )는 그의 홀대에 불만을 품은 근위부대의 반란으로 황비인 예카테리나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결국 암살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파벨 1세(Pavel I) 또한 귀족 출신의 해직 장교들에 의해 아주 간단히 암살되었습니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연이어 암살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만 표트르 3세나 파벨 1세나 모두 농노들의 처지를 향상시키고 귀족들의 권리를 제한한다는 공통적인 개혁 조치를 취한 바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먼 동구의 대국으로서 소수의 전근대적인 귀족들이 노예 상태의 국민들을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가령 표트르 3세의 개혁 이전까지만 해도 귀족들은 자기 농노를 죽여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나름대로의 그런 전통과 특성을 무시하고 귀족들의 이익을 해친다면, 아무리 동로마 제국 황제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주장하는 짜르라고 해도 야밤에 한낱 개처럼 살해될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의 평민 출신 고문 스페란스키입니다.  그는 알렉산드르를 따라 에르푸르트 회담장까지 가서 직접 나폴레옹과 환담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귀족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그는 결국 친프랑스파이자 불온사상을 가진 자로 낙인찍혀 1812년 초에 고문직에서 해직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시베리아에 유배를 간 것은 아니고, 핀란드 대학의 학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비록 알렉산드르가 서구 계몽사상으로 훈련된 개혁적 군주라고 해도 실제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시골 마을 신부의 아들인 스페란스키(Mikhail Speransky)를 고문으로 등용하여 당시 계몽사상가들이 꿈꾸던 입헌 군주국으로 러시아를 탈바꿈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는 짜르가 스스로의 권력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  또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처럼 선진 교육을 받은 귀족 및 시민들이 많아야 한다는 판단으로 당시 그 넓은 러시아에 딱 3개 있던 대학 수를 6개로 늘리는 등 교육 제도 개선에도 힘을 많이 썼습니다.  물론 개혁은 쉽지 않았고 알렉산드르도 주변 왕족 및 귀족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런 개혁에 대한 열의는 점점 옅어져 갔습니다.  가령 스페란스키가 제시했던 의회, 즉 러시아어로 두마(дума, '생각'이라는 뜻)로 불리는 기구는 거의 1백년이 지난 뒤 노일전쟁의 패전 결과로 발생한 1905년 러시아 혁명을 겪고서야 간신히 설립될 지경이었습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러일 전쟁 패배의 여파로 들끓던 사회적 불만이 '피의 일요일' 사건이 계기가 되어 촉발된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포템킨 호의 반란 사건도 이때의 사건입니다.)

 



그렇게 서구 사회에 긍정적이었던 그는 처음에는 프랑스 시민 계급을 대표하는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에 대해 흠모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나폴레옹의 앙기앵 공작 납치 사법 살인이라는 비도덕적 범죄 행위를 보고는 기대만큼 큰 실망을 하여 반-나폴레옹파로 급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제3차 대불동맹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나폴레옹의 손에 참담한 패배의 맛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렉산드르는 젊은 낭만파 몽상가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1807년 틸지트 회담에서 나폴레옹이라는 대인물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보고는 나폴레옹의 매력에 젖어든 정도가 아니라 그 속에 첨벙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역시 낭만파 몽상가이자 지략가였던 나폴레옹이 제시한 프랑스와 러시아가 힘을 합해 유럽을 양분하고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출발하여 인도까지 점령하자는 말도 안되는 소리에도 전율했습니다.  그 결과, 분명히 바로 직전까지 영국의 금융 지원을 받으며 피튀기게 싸우던 적수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엉뚱하게도 여태까지의 돈 줄이자 중요 경제 파트너였던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틸지트 회담에서 알렉산드르는 무엇보다 남쪽의 숙적 오스만 투르크가 차지했던 발칸 반도 등지를 빼앗기를 원했지만, 실질적으로 러시아가 얻은 것은 핀란드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오스만 투르크는 영국의 근동 지방 전략에 저항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동맹이었고 또 나폴레옹이 구워삶아야 하는 다른 강국인 오스트리아도 오스만 투르크의 땅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얻은 것에 비해 영국과 척을 진 대가는 컸습니다.  러시아는 토지 귀족의 나라였고, 토지 귀족의 돈벌이는 자신의 장원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영국에 수출하고 대신 영국제 공산품을 수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호기 있게 맺은 틸지트 조약은 러시아 토지 귀족의 이익에 크게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곧장 여기저기서 볼멘 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물론 불만 세력들은 모양새 없게 '돈벌이가 안된다'라는 것을 나폴레옹과의 동맹 반대 이유로 대지는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나폴레옹은 신이 내려주신 왕위를 뺴앗은 찬탈자이고 불온한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야만인이므로, 동로마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로마노프 왕조는 그 코르시카놈과 동맹을 맺을 것이 아니라 정벌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짜르 알렉산드르의 모후인 마리아 페오도로브나(Maria Feodorovna)까지 나서서 나폴레옹이 소집한 에르푸르트 회담에 출석하지 말라고 종용할 지경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자신을 둘러싼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야밤에 칼로 찔러 죽인 자들이 가득찬 왕궁에서 그들의 불만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옳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알렉산드르도 나폴레옹이 결코 자신과 유럽을 공유할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어디까지나 전제 왕정의 군주였지, 결코 낭만적인 친구들로 둘러싸인 젊은 독일 대학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 기반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그 계기가 된 것은 나폴레옹이 바르샤바 공국을 독립 폴란드 왕국으로 부활시키려고 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건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 오스만 투르크의 분할에 있어서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메테르니히가 빚어낸 가짜 뉴스였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1810년 12월 31일 발표된 짜르의 칙령은 프랑스산 제품에 대해서는 관세를 부과하고, 반대로 영국 상품에 대해서는 입항 허가를 내주는 내용이었고, 이를 계기로 나폴레옹와 알렉산드르 사이의 전쟁은 거의 기정 사실화되었습니다.  사실 이건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제 벌어질 전쟁은 유럽 산업화의 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영국 시민 계급과 프랑스 시민 계급의 싸움이었습니다.  이미 산업 혁명이 시작된데다 강력한 로열 네이비를 보유한 영국과 싸울 방법이 궁했던 프랑스가 꺼내든 대륙 봉쇄령이라는 무역 전쟁은 결국 동방의 대국 러시아를 싸움판에 끌어들였고, 결국 영국 대신 러시아가 프랑스를 상대로 대리전을 치르게 된 것이었지요.  

자신의 전쟁에 제3자를 끌어들인 것은 영국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도 혼자서 러시아와 싸울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가 굴복시킨 독일과 이탈리아 등지의 위성국가들에게 병력과 물자, 자금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유럽 거의 전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 거대한 전쟁에 휩쓸려야 했습니다.  과연 이 전쟁을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시선은 어떠했을까요 ?  물론 대부분은 황제가 또 전쟁을 한다면서 불만이었습니다만, 지식인들 대부분은 이 전쟁을 계기로 유럽의 근대화가 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의 점령군 뒤에는 예외없이 무자비한 병참장교와 세관원들이 따라와 점령지의 고혈을 짜내는 것으로 악명 높았지만, 나폴레옹의 정복지에는 프랑스 대혁명 정신을 계승한 헌법과 나폴레옹 법전도 항상 따라오기 마련이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군이 이례적으로 잔혹하게 난동을 부렸던 스페인에서조차, 지식인들은 나폴레옹이 세운 허수아비 왕 조제프의 정권이 기존 부르봉 왕정보다 스페인을 훨씬 더 근대화시켰다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최소한 헌법이 제정되었고, 중세시절부터 계속 내려오던 고문으로 악명 높은 스페인 종교재판도 폐지되었으니까요.  나중에 나폴레옹이 패망한 뒤 스페인 종교재판은 다시 부활했다가 1834년에야 간신히 폐지되었습니다.  괴테 등 당대의 지성인들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일주의에 대해 분개하면서도 나폴레옹이 동방으로 끌고 갈 그랑다르메(Grande Armee)의 전진과 함께, 신분제 폐지와 천부인권 등의 계몽사상이 저 동방까지 전달될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종교재판 = 이단심문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와 나무가지, 그리고 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Yo, Say Love"를 선창하시는데 이들은 떼창으로 "No Mercy"를 외쳤군요.)

 



이제 유럽은 누가 영국과 러시아 편에 설 것이고 누가 프랑스 편에 설 것인지, 과연 중립이란 것이 가능할지 외교적인 머리를 굴려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I_of_Russia
https://en.wikipedia.org/wiki/Mikhail_Speransky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모든 전쟁에는 돈이 아주 많이 들어갑니다.  흔히 미국이 30년대의 대공황에서 빠져나온 것이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 때문이라기 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왜 불황이 생길 때마다 네바다 사막이든 태평양 한가운데든 가상 표적을 세우고 거기에 병력과 함대를 동원해서 맹폭격을 가하지 않겠습니까 ?  결국 그렇게 전쟁하느라 쓴 돈은 누군가 갚아야 하는 법이고, 미국도 전후 20년 정도 최고 세율 90% 정도의 엄청난 소득세를 부과하여 그 비용을 충당해야 했습니다.




(1913-2008 기간 중 미국 소득세 최고 세율의 역사입니다.)




나폴레옹 전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국이든 프랑스든 모두 누군가는, 정확하게는 결국 국민 전체가 전쟁 비용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전쟁 비용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매우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영국은 빚을 더 냈고, 프랑스는 세금을 더 걷었다"



그냥 이렇게만 놓고 보면 프랑스 측이 훨씬 더 건실한 재정 정책을 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도 국채를 발행하여 전쟁 비용을 처리하고 싶었으나 신용불량의 전력 때문에 할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세금만으로 전쟁을 치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쟁에는 돈이 과다하게 많이 들어가는데, 그걸 모조리 세금으로 충당하려면 국민들에 대한 세금 부담이 너무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국민들이라고 해도 세금을 4~5배로 올려버리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거든요.  자동차가 꼭 필요하긴 한데 당장 그럴 돈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  보통 카드 할부로 구입합니다.  말이 좋아서 할부지 사실은 카드사에게 비싼 이자를 내고 빚을 지는 것이지요.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전선의 부대들과 바다 위의 함대들, 그리고 동맹국들이 돈을 달라고 아우성칠 때는 그렇게 빚을 내야 합니다.  


대대로 유럽의 모든 정부들은 전쟁을 위해 빚을 냈습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처음 설립된 중앙은행인 스웨덴 중앙은행 릭스방크(Riksbank)도 러시아와의 전쟁에 들어가는 군자금을 빌리기 위해 만들어진 은행이었고, 나폴레옹 전쟁 기간 전후에 세워진 여러 유럽 국가들의 중앙은행들도 모두 전쟁 자금을 충당하거나 그로 인해 생긴 빚을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인 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도 독립전쟁으로 인한 빚을 처리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이지요.  이렇게 중앙은행이라는 것의 기원은, 정부가 민간으로부터 전쟁 자금을 안정적으로 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럽 각국 중앙은행의 설립과 연관된 전쟁들입니다.)




영국은 이미 100년도 전인 17세기 말에 영란은행(Bank of England)를 설립하여 전쟁 비용을 충당할 정도로 전쟁 금융에 매우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국채 발행이 잘 되었던 것은 금융 관료들의 유능함보다는 기본적으로 영국 정부가 꼬박꼬박 채권 상환을 잘 하여 신용을 쌓아왔던데다, 결정적으로 왕실이 아닌 의회가 국채 발행과 상환을 책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정이야 언제 무슨 정변이 나서 뒤집어질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토지와 무역회사 등 주요 자산을 소유하고 있던 대주주들로 구성된 의회는 글자 그대로 주식회사 영국 그 자체였거든요.  따라서 의회가 책임지고 상환하겠다는 채권은 전쟁치고는 꽤 낮은 이자로도 잘 팔렸습니다.  덕분에 영국은 7년 전쟁의 경우 전체 전비의 51%를, 그리고 패전으로 끝난 미국 독립전쟁의 경우 81%를 국채 발행으로 메꿀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국민들의 세금 부담은 전시에도 급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영국 국채의 신용도가 괜찮았던 것은 영국 재무부에게 결정적인 여유를 주었습니다.  잠정적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여 금본위제에서 벗어남으로써, 채권 뿐만 아니라 지폐도 추가로 찍어내어 자금조달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즉, 일정 수준의 인플레를 유발시킴으로써 기존 국채 가치를 떨어뜨렸던 것입니다.  이걸 인플레 세금(inflation tax)라고 합니다.  국민에게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통화 팽창을 통해 지폐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 비용을 국민들이 부담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Lieutenant Hornblower by C.S. Forester (배경: 1803년 영국) --------------------


(아미앵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 간에 짧은 평화가 있던 시기에, 무일푼이던 혼블로워 중위는 보직 해임 상태가 되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집니다.  결국 혼블로워는 고급 장교들이 드나드는 클럽에서 4명이서 하는 카드 게임 때 부족한 머리 숫자를 채워주는, 일종의 타짜 노릇을 해서 먹고 삽니다.)


그는 혼블로워가 가슴 안주머니로 지폐를 쑤셔 넣는 것을 보았다.


패리 제독이 말했다. "예전 화폐를 다시 부활시킨다면 더 좋지 않겠소 ?  정부가 이런 지저분한 지폐를 없애고 예전의 멋진 기니 금화로 되돌아간다면 말이오."


"그거 정말 좋겠군요." 대령이 말했다.


램버트가 말했다.  "그 놈의 육지 상어(순진한 뱃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들)들은 해외에서 들어오는 배들은 모조리 상대한다오.  1기니당 23실링 6펜스를 주니, 틀림없이 실제로는 그보다 더 받을 수 있을거요."  (원래 1기니는 21실링에 해당합니다: 역주)


패리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에 탁자에 내려놓았다.


"보니(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비칭:역주)는 옛날 프랑스 화폐를 부활시켰소.  보시오." 그는 말했다.  "이 금화를 나폴레옹라고 부른다오. 그 친구가 이제 종신 제1통령이니 말이오.  이 금화 한닢에 20 프랑이라오.  예전에는 우린 이걸 루이 금화(louis d'or)라고 불렀지요."


"나폴레옹, 제1통령," 대령은 호기심을 가지고 금화를 보며 읽고는, 뒷면을 돌려 읽었다. "프랑스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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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남자라면 모양 빠지게 지폐 같은 것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나폴레옹의 얼굴이 새겨진 40 프랑짜리 금화 정도는 누구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 아니겠습니까 ?  무게 12.91g, 순도 90%입니다.  그러나 이런 남자의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눈물을 흘려야 했는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빚으로는 소도 잡아먹는다고 하지만, 모든 빚은 결국 누군가가 갚아야 하는 법입니다.  카드 할부로 자동차를 산 경우에 몇 년에 걸쳐 월급 절약하여 계속 갚아나가야 하는 것과 똑같이, 국가도 세금을 좀 더 걷든가 나라 살림을 좀 줄이든가 해서 국채를 결국 갚아야 합니다.  영국 정부는 감채기금(sinking fund, 장기 채무 상환을 목적으로 별도로 적립해두는 기금)을 설립하여, 전쟁이 끝난 뒤에 세수 잉여분을 여기에 적립함으로써 국채를 꾸준히 상환했습니다.  


영국도 마냥 빚만 낸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세금도 더 걷었습니다.  당시 영국 수상이던 소(小) 피트(William Pitt the Younger)는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근대 역사상 처음으로 소득세(income tax)를 도입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세금이란 사람 머릿수에 따라 내는 인두세와 토지 등의 재산에 따라 내는 재산세, 그리고 관세와 부가세, 소비세 등의 형태였거든요.  사람이 일을 해서 번 소득 자체에 대해 세금을 낸다는 것은 근대 유럽 사회에 없던 개념이었습니다.  소 피트가 도입한 소득세는 누진세(progressive tax)라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 합니다.  즉 소득이 더 많을 수록 더 높은 세율의 세금이 부과되는, 꽤 현대적인 개념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60파운드 이하의 소득에 대해서는 세금이 면제되었고, 60 파운드 이상의 소득에 대해서는 0.83%부터 시작하여, 200 파운드가 넘는 소득에 대해서는 최대 10%까지 세율이 올라갔습니다.   이는 나폴레옹이 국민들에게 부과했던 세금은 모두 단일 세율의 재산세와 소비세 등이었다는 것에 비하면 굉장히 진보적인 조세 정책이었습니다.  




(피트 수상의 소득세에 대한 당시의 풍자 만화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금 좋아하는 국민은 없지요.)




한편, 프랑스에서는 상황이 상당히 달랐습니다.  의회가 권력을 가지고 있고 이미 산업 혁명을 시작했던 영국과는 국가 권력 구조와 산업 구조 뿐만 아니라 역사까지 달랐으니까요.  부르봉 왕정 시절, 아직 중앙은행도 없던 프랑스는 그냥 정부가 민간에게 직접 국채를 판매하는 형태로 7년 전쟁과 미국 독립전쟁을 치렀습니다.  국가 자산 중 상당 부분을 귀족과 교회가 쥐고 있었는데 정작 그들은 면세 혜택을 받았으니 그때 쌓였던 빚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세금을 늘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설프게 삼부회를 소집했다가 터진 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었습니다.  새로 들어선 국민공회는 몰수한 귀족과 교회의 토지 자산을 담보로 1789년 12월 5% 이자의 공채를 발행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아시냐(Assignat) 지폐가 됩니다.  즉, 처음에는 채권이었으나, 나중에는 0% 금리의 지폐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보통 돈은 태환지폐라고 해서, 금과 바꿀 수 있는 증서같은 것이었는데, 금이 없으니 금 대신 토지와 바꿀 수 있는 증서를 발행한 것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대표적인 실패작 아시냐 지폐입니다.)




아시냐라는 저 프랑스어 스펠링을 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저건 정부가 강제로 지정한(assigned) 돈으로서, 태생부터가 자연스러운 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이미 파탄난 경제로 인해 돈이 궁해진 국민회의는 이듬해인 1790년부터는 애당초 몰수된 토지의 총가치를 훨씬 넘어서는 아시냐 지폐를 찍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하이퍼 인플레였습니다.  특히 정부가 인플레를 잡는답시고 생필품 가격 상한제를 강제하자, 생필품이 시장에서 싹 사라지고 암시장에서만 거래되는 등, 역효과에 역효과만 불러일으켰고, 결국 수차례의 폭동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시냐 지폐는 가뜩이나 혁명으로 어수선한 프랑스 사회를 경제적으로 다시 한번 뒤흔들어놓고 7년만에 불명예스럽게 퇴장합니다.  퇴장할 때 정부는 이 지폐를 액면가의 3.33%에 해당하는 토지와 교환해줍니다.  투자 손실율 96.67%...  더군다나 투자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프랑스는 1720년대에도, 존 로 (John Law)라는 스코틀랜드인이 일으킨, 미국의 부동산에 투자하는 미시시피 사(社)라는 대규모 투자 거품 사건으로 인해서 지폐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있었습니다.  미시시피 거품 사건은, 한줄로 요약하면 존 로가 미국 땅을 담보로 프랑스에 지폐 발권력이 있는 금융회사를 차렸다가 거품으로 끝난 것입니다.  이때 프랑스인들은 지폐는 종이 쪼가리일 뿐 결코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었지요.  이 아시냐 지폐 사건은 프랑스에서의 지폐의 위치에 대해, '관 뚜껑에 못질을 한'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국채와 지폐에 대한 국민들의 신용이 이렇게 바닥을 친 상태인지라, 총재정부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으로서는 부르봉 왕가나 국민공회처럼 채권이나 지폐를 찍어 재정난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프랑스 영토였던 루이지애나(이름 자체가 프랑스 왕 '루이의 땅'이지요)를 미국 정부에게 매각하여 돈을 마련하기도 하고, 정권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지는 프랑스 중앙은행(Banque de France)을 설립하는 등 시장의 통화와 정부 재정을 안정화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기본적으로는 금은 복본위제(bimetallic standard)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내 통치 기간 중에는 절대 새로운 지폐를 추가로 발행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한 나폴레옹의 발언으로 대표됩니다.  실제로 1800년 나폴레옹의 통령 정부는 기존 정권에서 발행했던 채권에 대해 (이미 기존 채권의 가치를 크게 절하시킨 뒤이기는 했지만) 이자를, 그것도 금화나 은화로 지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함께 나폴레옹은 영국처럼 감채기금을 마련하여 장기 국채의 상환을 위한 안정성을 갖추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영국처럼 프랑스도 국가 신용을 끌어올려, 전쟁 비용을 빚으로 충당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Bimetallic standard를 보통 복본위제라고 합니다.  금본위제와는 달리 복본위제에서는 은도 지폐의 교환 대상이 되는데, 다만 금과 은의 교환비를 정부가 지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유럽은 금의 많이 나는 대륙이 아니라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전통적으로 은본위제를 사용했었지요.)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국채를 대규모로 발행할 정도로 신용을 끌어올릴 수 없었습니다.  무너지기는 쉬워도 쌓기는 어려운 것이 바로 신용이거든요.  결국 나폴레옹은 전쟁 비용을 세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결코 전제군주가 아니었고 국민들의 지지에 권력의 근거를 둔 황제였습니다.  전비 충당을 위해 세금을 지나치게 올렸다가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잃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 세수 확대를 위해 길거리에서 채소와 생선을 파는 가판대에 대해서도 세금을 부과하자는 제안이 나오자,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광장은 물처럼 무료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소금과 와인에 소비세를 부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  서민들의 가판대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보다는, 곡물 시장을 중흥시키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더 파리에 어울리는 조치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영국과는 달리 돈을 구할 다른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전쟁은 스스로 비용을 충당해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바로 전쟁 배상금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부터,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패전국에게 무거운 전쟁 배상금을 뜯어냈습니다.  1807년 프로이센을 격파한 뒤에는 무려 1억2천만 프랑을 배상금으로 요구하여 프로이센을 나락으로 빠드렸고, 1809년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킨 뒤에는 그나마 좀 양보하여 8천5백만 프랑의 배상금을 뜯어냈습니다.  나폴레옹과 같은 군사 천재에게는 매우 수지맞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좌절을 안겨준 것은 바로 스페인이었습니다.  분명히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모두 무찌르고 거의 모든 영토를 정복했지만, 대체 이것들이 항복을 하지 않으니 배상금을 뜯어낼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스페인에서의 전쟁에 막대한 돈을 퍼부었는데도 그 비용을 충당할 방법이 없다보니 나폴레옹으로서는 무척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또다른 돈줄은 이탈리아와 폴란드, 네덜란드와 독일 소공국 등 위성국가들로부터의 세금이었습니다.  이들은 동네 양아치에게 보호비조로 돈을 바치는 것처럼 나폴레옹에게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과중한 배상금과 세금으로 인해 나폴레옹은 유럽 전체에게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늘어난 전쟁 비용으로 프랑스 국민들까지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게 되어 지지율이 떨어졌으니까요.  결국 1815년 워털루 전투 이후 최종적으로 맺은 파리 조약에서, 프랑스는 무려 7억 프랑의 배상금을 연합국에게 물어내야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이러니컬한 부분은 그 배상금은 연리 5%의 프랑스 국채로 지불했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이 연전연승할 때는 못하던 것을, 패배 후에는 해낸(?) 것입니다.  






Source :  British and French finance during the Napoleonic wars by Michael D. Bordo & Eugene N. White 

https://www.businessinsider.com/history-of-tax-rates

https://en.wikipedia.org/wiki/Progressive_tax

https://fr.wikipedia.org/wiki/Aspects_%C3%A9conomiques_et_logistiques_des_guerres_napol%C3%A9oniennes

https://en.wikipedia.org/wiki/Treaty_of_Paris_(1815)



Sharpe's Trafalgar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05년 인도양 무역선 상) -----------------------------


아침식사는 매일 오전 8시였다. 3등실의 승객들은 종종 그룹으로 나뉘어, 각 그룹 내에서 당번을 정해 앞갑판(forecastle) 쪽에 있는 주방으로부터 버구(burgoo) 한단지를 가져왔다. 버구라는 것은 오트밀 죽에 밤새 주방 난로에서 고기를 삶을 때 나온 쇠고기 기름 조각을 섞은 것이었다. 점심은 정오에 있었는데, 이 때의 메뉴도 역시 버구였다. 다만 점심 때의 버구에는 좀 탄데다 덩어리진 오트밀에 좀더 큰 고기 조각 또는 질긴 말린 생선 조각이 섞여 나왔다. 일요일에는 소금에 절인 생선과 돌처럼 딱딱한 건빵이 나왔는데, 건빵은 바구미 투성이어서 탁탁 두들겨 벌레를 빼내야 했다.


비스킷은 끊임없이 씹어야 했는데, 마치 벽돌을 으깨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건빵을 두들길 때 빠져나오지 못한 벌레가 이따금씩 씹혀서 색다른 맛을 내기도 했다. 차는 오후 4시에 제공되었으나, 이는 배 고물 쪽의 1등실 승객들에게만 제공되었고, 3등실 승객들은 저녁 때가 되기를 기다려야 했는데, 그 메뉴도 그저 말린 생선에 비스킷, 그리고 벌레 구멍이 숭숭 뚫린 딱딱한 치즈였다.




The Happy Return by C. S. Forester  (배경 : 1808년, 영국 프리깃함 HMS Lydia 함상) -------------------------------


혼블로워 함장이 갑판 아래로 내려가니, 급사인 폴휠이 아침식사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와 버구입니다, 함장님."  폴휠이 말했다. 


혼블로워는 식탁에 앉았다.  지난 7개월 간 항해를 하다보니, 사품이라고 할만 한 식량은 다 바닥이 난 상태였다.  커피는 까맣게 태운 빵을 우려낸 물에 불과했고, 그 맛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냥 달고 뜨겁다는 것 뿐이었다.  버구라는 것은 해군용 비스킷을 으깬 것과 잘게 썬 염장 쇠고기를 섞어 만든, 맛있기는 하지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모양새의 잡탕죽 같은 것이었다. 


혼블로워는 멍한 마음므로 아무 생각없이 식사를 했다.  왼손으로는 해군용 비스킷을 테이블에 계속 두들겼는데, 그래야 그가 버구를 다 먹을 때 즈음해서는 비스킷 속에 든 바구미들이 다 밖으로 기어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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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hen Biesty의 "Cross-sections : Man-of-War" 라는 책이 여전히 아마존에서 중고품으로 팔리고 있더군요.  아주 반갑게 샀습니다.  저도 잘 몰랐던 부분, 가령 저렇게 배식받은 쇠고기는 식사조 mess별로 금속제 꼬리표를 붙여 삶았다는 것도 상세하게 소개되더군요.)




위에서 나오는 음식인 버구에 대해서는 이미 저 소설 본문에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으므로 더 자세한 설명은 피하겠습니다.  참고로 버구라는 것은 미국 요리에도 있는, 일종의 스튜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주제는 저 버구가 아니고 버구를 만들 때 쓴 곡식인 귀리입니다. 


귀리라는 이름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 귀리 농사를 짓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만, 귀리하면 뭐니뭐니해도 스코틀랜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도 고딩 때 성문종합영어인가 무슨 책에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영국인이 스코틀랜드인을 멸시하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영국에서는 귀리는 말에게나 주는 사료 같은 건데,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그걸 먹고 산다지 ?"


그러자 스코틀랜드인이 이렇게 대꾸합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좋은 말이 나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좋은 사람이 나는 거야."


그런데, 이게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더군요.  실제로 1755년 사뮤엘 존슨 (Samuel Johnson)이라는 사람이 런던에서 발행한 영어 사전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을 보면, 귀리 (oat)에 대해 이렇게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OATS. n.s. [?, Saxon] A grain, which in England is generally given to horses, but in Scotland supports the people.

It is of the grass leaved tribe; the flowers have no petals, and are disposed in a loose panicle: the grain is eatable. The meal makes tolerable good bread.






즉, 귀리라는 곡식에 대한 정의를 "영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말이, 스코틀랜드에서는 사람이 먹는 곡물" 이라고 내린 것입니다.  이런 경멸에 가득찬 묘사가 사전에 버젓이 나오는 것을 보면, 왜 스코틀랜드가 최근 독립하겠다고 난리법석을 피웠는지 이해가 갑니다.  그쪽도 변화를 바라지 않는 노년층의 투표가 상황을 결정지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에서는 왜 밀 대신 귀리를 먹었을까요 ?  아일랜드에서 감자를 주식으로 했던 것은 영국인들의 토지 수탈 때문인 탓이 컸지만, 스코틀랜드의 사정은 그와는 약간 달랐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햇볕이 안 좋고 날씨가 추운 기후에서는 밀 농사가 잘 안되어, 척박한 그런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귀리를 주식으로 삼아야 했던 것입니다.


다만, 저 위에서 영국인과 스코틀랜드인이 나눈 대화에서처럼, 실제로 밀보다 귀리가 훨씬 건강에 좋은 음식이라는 것은 (이제는)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귀리는 10대 수퍼 푸드로 뽑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지요.   특히, 귀리에는 밀이나 보리, 호밀과는 달리 글루텐이 거의 없어 요즘처럼 '글루텐-프리'가 뭔가 멋진 단어로 보이는 시대에 더욱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글루텐이 없다는 점 때문에, 귀리는 과거에는 더욱 천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저 존슨 사전에는 귀리 가루로 tolerable good bread를 만들 수 있다고 했지만, 글루텐이 없는 곡식 가루로는 반죽 모양이 나오지도 않고 발효에 의한 부풀기도 잘 안되므로, 순수 귀리만으로는 빵을 못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귀리는 빵보다는 주로 죽으로 먹어야 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오트밀(oatmeal)이라는 것은 영어 단어 그대로 번역하면 귀리가루라는 뜻입니다.  Meal이라는 단어는 식사라는 뜻 외에 가루라는 뜻이 있거든요.   맛없는 요리로 악명높은 영국인들도 아침 식사만큼은 괜찮은 것을 먹습니다.  베이컨, 달걀 프라이, 소시지, 버섯, 콩 등을 아주 푸짐하게 먹지요.  18~19세기 당시 영국 서민들이 그런 기름진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들은 물론 아닙니다만, 영국인들의 그런 아침 식사와 스코틀랜드인들의 초라한 귀리가루 죽이 비교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뭔가 곡식 이름에 ~meal이라는 것이 붙으면 그 곡식의 가루를 뜻하는 것입니다.   가령 보리가루는 barleymeal이지요.  오트밀은 귀리가루 자체를 뜻하기도 하지만 거칠게 간 귀리 가루를 물이나 우유에 넣고 끓인 요리를 말하기도 합니다.  회색빛이 나고, 맛도 없습니다.  여기에 설탕을 잔뜩 넣으면 좀 먹을 만 해집니다.)




여러분은 죽 좋아하십니까 ?  저는 싫어합니다.  누가 뭐래도, (새우나 전복 같은 비싼 재료를 넣은 것도 있지만) 죽은 그다지 맛이 있는 음식이 아니라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이니까요.  그래서인지, 귀리 죽을 많이 먹는 나라들은 우크라이나나 러시아, 북유럽 등 과거 살림살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나라들입니다.  죽은 더 많은 머릿수를 먹이기 위해서는 그냥 '물만 좀 더 부으면 된다'는 점 외에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편리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제분입니다. 




(러시아군 식사라고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입니다.  진짜 여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빵은 제조 과정이 복잡하고 힘도 많이 들어갑니다.  반죽도 발효도 오븐에서 굽는 것도 모두 만만치 않은 과정입니다.  그러나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곡식으로 가루를, 그것도 아주 고운 가루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갑니다.  집에서 손으로 맷돌을 돌려 빻는 것 정도로는 아주 고운 가루를 내기가 어려웠고, 이렇게 거칠게 간 가루로 만든 빵은 부드럽지 않고 식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중세 어떤 수도사가 쓴 일지를 보면 "이런 거친 가루로 만든 빵을 먹으면 악마라도 방귀를 뀔 수 밖에 없다" 라고 불평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 점을 이용해서 중세 유럽의 영주들은 장원의 물레방아 또는 풍차로 된 제분소를 장악하고 제분 과정에서 짭짤한 세금을 뜯었지요. 


이렇게 모든 곡식을 가루로 만들어야 비로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럽인들의 사고 방식 때문에,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가령 이집트를 침공한 나폴레옹군이 침공 초기에 마을마다 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도 방앗간이 없어서 굶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또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감자 잎마름 병에 의한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필(Sir Robert Peel) 경이 미국으로부터 10만 파운드 상당의 옥수수를 대량 구매하여 구호 식품으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미국산 옥수수는 단단하게 마른 옥수수 알갱이었는데, 아일랜드에서는 이를 가루로 만들 제분소가 충분치 않아서 이를 제분하는 사이 많은 사람들이 또 굶어죽어야 했습니다.  




(아무래도 귀리는 낟알이 너무 길어서, 죽이라도 끓여먹으려면 좀 자르고 빻아서 잘게 부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steel-cut 처리된 귀리 낟알입니다.)



하지만 귀리는 이렇게 곱게 갈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끓여 먹을 거니까요.  요즘 나오는 인스턴트 오트밀을 보면 그 사실이 좀더 명백해집니다.  제가 코스트코에서 가끔 사먹는 Quaker Instant Oatmeal을 보면 거칠게 부순 귀리 낱알을 압착 처리해서, 좀더 쉽게 물이나 우유를 흡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끓이지 않고 차가운 상태에서 완전히 부드럽게 만들어 먹으려면 5분 정도로는 택도 없고 적어도 1시간 이상 물이나 우유를 부어 놓아야 합니다.  저는 전날밤에 우유를 부어 놓습니다.  그러면 다음날 아침 뮤즐리 비슷하게 됩니다.) 





(코스트코에서 파는 인스턴트 오트밀입니다.  역시 오리지널 맛은 좀 그렇고, 단풍나무 시럽이나 갈색 설탕이 든 것은 그나마 먹을만 합니다.  가격은 의외로 무척 비쌉니다.)




영국인들은 귀리를 먹지 않았는가 하면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당연히 먹었고, 저 위 소설에서 언급했듯이, 영국 해군에서도 오트밀을 배식했습니다.  혼블로워나 오브리 시리즈에는 염장 쇠고기 이야기가 하도 많이 나와서 영국 해군은 매일 쇠고기를 먹나 보다 싶습니다만, 사실 정확하게는 쇠고기는 일주일에 딱 두번 나왔습니다.  돼지고기도 두번 나왔고, 나머지 3일, 정확하게 월수금요일에는 아예 고기가 안 나오고 오트밀에 버터, 치즈가 조금 나왔습니다. 




(역시 Stephen Biesty의 "Cross-sections : Man-of-War" 중 일부입니다.  영국 수병들 배식표를 보면, 맛없는 함상 식사 중에서도 월,수,금요일은 특별히 더 우울한 날이었을 것 같습니다.)




요즘 귀리는 그 보습성 때문에 화장품 원료로도 쓰이고, 또 건강식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귀리의 인기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1980년대에 건강식이라는 이유로 큰 인기를 끌어, 귀리겨를 섞은 포테이토칩이 나오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귀리의 꺼끌꺼끌하고 질긴 식감은 인기가 없었는지 불과 5년도 안되어 그 인기는 사그라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FDA나 이런저런 유명 기관에서 '귀리가 건강에 좋다' 라고 발표를 하면 다시 반짝 인기를 얻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고 합니다.


저희집에서도 요즘 밥에 귀리를 섞어 먹는데, 우리 식구들 입맛에는 잘 맞습니다.  가격이 무척 비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캐나다산 수입품이라서 그런지 그냥 쌀과 비슷한 가격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