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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9.01.21 고대 그리스의 병사들은 어떤 것을 먹었을까 ? (19)
  2. 2019.01.03 스파르타는 왜 망했을까 ? (44)



고대 그리스의 고전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에는 당시 병사들이 어떤 것을 먹고 마셨는지에 대한 묘사가 매우 상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서사시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BC 3~4세기의 페르시아 전쟁이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까마득한 옛날인 BC 11세기 정도의 청동기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즉 도리아인들의 침공 이후 형성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로 양분되는 그리스 시대보다 훨씬 이전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등장 인물들의 갑옷과 투구, 창 등이 모두 청동으로 되어 있지요.  다만 철기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까지는 아니고, 철이 등장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아직 철기시대 초창기라서 당시의 철(iron)에는 탄소 함량이 너무 많아 단단하기는 하지만 깨지기 쉬운 무쇠(cast iron)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철은 무기가 아니라 주로 농기구나 도끼, 사슬 등에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무기로도 쓰이기는 했는데, 정교한 검이나 창날이 아니라 큼지막한 철퇴 같은 것으로 썼나 봅니다.  가령 파트로클루스의 장례식에서 여흥으로 벌어진 스포츠 경기에서, 아킬레스가 각 경기의 우승자를 위해 내놓은 상품 중에는 다음과 같이 무쇠덩어리가 나옵니다.  


다음으로 아킬레스는 에에티온(Eetion)이 던지던 커다란 쇳덩어리를 상품으로 내걸었다.  아킬레스는 에에티온을 죽인 뒤 그의 다른 소지품들과 함께 그 쇳덩어리를 빼앗아 배에 실어놓았었다.  이제 그는 다음 경기를 발표하며 참가를 유도했다.  "이 경기의 승자는 5년 간 충분히 쓸 만한 양의 무쇠를 갖게 될 것이오.  이 무쇠 덩어리만 있으면 그의 농장이 아주 외딴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쇠를 구하기 위해 쟁기꾼이나 목동을 마을로 보낼 필요가 없을 것이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에 나오는 병사들의 식사는 주로 육류입니다.  물고기를 잡는 모습이나 굴을 따는 것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 것을 보면 생선 등의 해산물을 전혀 먹지 않았던 것 같지는 않은데, 확실히 일리아드 시대의 그리스 사람들은 생선을 즐겨먹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사건들의 배경 무대가 모두 바닷가인데도 불구하고, 장군들과 병사들의 식사 장면에 생선이 나오는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는 거의 언제나 돼지나 소를 잡아 그 고기를 꼬챙이에 꿰어 직화구이로 구워먹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그들은 넓적다리 뼈를 잘라내어 두 겹의 비계로 감싸고는 그 위에 날고기를 몇조각 얹었다.  크리세스가 그것들을 장작불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포도주를 부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근처에는 손에 끝이 5개의 가지로 갈라진 꼬챙이를 든 젊은이들이 서있었다.  넓적다리 뼈가 다 타자 그들은 먼저 안쪽 고기를 맛보고는 나머지를 작게 잘라 꼬챙이에 꿰어 불에 잘 익힌 후 꼬챙이에서 빼냈다.  일을 마치고 잔치가 준비되자, 그들은 그 고기를 먹었고 모두가 배불리 먹도록 충분한 양을 받았다."






원래 적은 고기를 여럿이 나눠먹기 위해서는 주로 고기를 삶아 그 국물까지 먹어야 합니다.  일리아드 내에서 상품으로 주어지는 것들 중에는 큰 솥도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를 삶아먹는 요리도 분명히 했을 것 같기는 한데, 실제로 이렇게 병사들이 식사할 때 솥을 이용하는 국물 요리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오지 않는다고 당시 사람들이 그런 국물 요리를 전혀 먹지 않았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 빵이나 죽 등 곡물로 만든 음식에 대해서도 그다지 많은 묘사가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아킬레스에게 살해될 위험에 놓인 트로이 측의 리카온이 아킬레스의 무릎을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에서, '내가 포로로 잡힌 뒤 처음 빵을 쪼갠 곳이 바로 당신의 장막 안에서였다' 라고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식사를 하는 것을 '빵을 쪼갠다'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당연히 당시 병사들의 주식은 곡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이한 것은 일리아드나 오딧세이에서 고기를 구운 뒤 그 위에 보릿가루를 뿌려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입맛으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지만 별다른 양념이나 향신료가 없던 시절에는 그런 곡식가루도 고기 맛을 내는 조미료 같은 것으로 썼던 모양입니다.


호머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만을 읽은 분들께서는 고전적인 그리스 시대의 생활상이나 전쟁의 양상에 대해 매우 그릇된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헤로도투스의 역사 앞부분에서도 자세히 언급이 되어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헤로도투스 시대에서조차도, 일리아드를 읽으면서 '우리 조상들은 우리와는 정말 다르게 살았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사실 알고보면 헤로도투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호머에 나오는 아킬레스 등의 인물들의 직계 후손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지요.   아무튼 여기서는 음식 부분에 대해서만 말하도록 하지요.


먼저, 그리스는 먹을 것 부분에 있어서는 그다지 풍요로운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애초부터 지형이 대규모의 밀 농사에 적합하지도 않았고, 바다에서 엄청난 어획량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흔히 그리스는 해안선이 길기 때문에 수산물이 적지는 않았지만, 사실 어획량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바다의 밀"로 알려졌던 중세의 북해산 청어에 비하면 무척 보잘 것 없는 양의 생선만을 얻을 수 있었지요.  그래서, 그나마 좀 넓은 평야지대이던 펠로폰네소스 반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애초부터 식량을 자급자족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주로 흑해연안의 비옥한 농업지대로부터의 수입 곡물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고대 그리스인들은 먹는 것이 신통치 않았는데, 주로 보리로 만든 마자(maza)라는 이름의, 부풀리지 않은 빵같은 것을 먹었습니다. 이는 빵만드는 방법이 아직 그리스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고, 빵을 만들기에 적합한 밀가루가 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밀가루로 만든 이스트로 부풀린 흰빵은 축제 때나 특식으로 먹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마자는 대개 보리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정확하게 마자는 빵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빵은 가루를 반죽하여 굽는 것인데, 마자는 반대로 보리가루를 불에 볶은 뒤 물로 반죽하여 뭉친 덩어리였거든요.  이건 조금 오래 놓아두면 딱딱하게 굳어 버렸기 때문에, 식사를 할 때는 이걸 포도주나 물 같은 것에 적셔서 거의 죽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 먹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우유를 부어 먹는 일종의 시리얼 같은 거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지요 ?   그러나 이 맛없는 보리빵 마자도 그리스인들은 고맙게 먹어야 했습니다.  맛은 없어도 배를 채울 수 있었거든요.  오죽했으면 페르시아 전쟁 때 플라타에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군 진영에서 그들의 산해진미를 보고 이렇게 한탄했겠습니까 ?


'이런 욕심장이들을 봤나 ?  이런 산해진미를 먹는 놈들이 우리의 보리빵을 빼앗겠다고 쳐들어 오다니 !'




(보기만 해도 식욕이 뚝 떨어지는 보리빵 마자(maza)입니다.)




육류는 정말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육류라는 것은 정말 귀한 것으로, 일반 서민부터 부유층까지,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 아니었고, 축제 때에나 한번 먹어볼까 하는 음식이었습니다. 전에 인기를 끌었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갈리아 인들은 멧돼지 다리를 뜯는 동안 로마인들은 밀가루로 만든 빵과 죽을 선호했다고 씌여있었는데, 정확하게는 로마인들이 고기를 싫어했다기 보다는 없어서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대신 생선 종류는 그래도 좀 나은 편으로, 일상적으로 소비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어로 '맛있는 것, 고기'라고 하면 생선을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 전통은 로마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져서, 로마인들도 육류는 별로 맛보지 못했고, 생선류를 대신 즐겨 먹었습니다. 케사르가 갈리아 원정의 성공을 축하하며 로마 시민들에게 베푼 연회에서 제공된 음식도 주로 빵과 뱀장어 구이였다고 합니다.




(사진 속의 설명대로 입니다.  식사 때마다 소와 양을 호쾌하게 잡아먹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의 식사 장면과는 달리, 실제 그리스인들에게 고기라는 것은 정말 맛보기 어려운 진미였고, 대개는 물고기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어떤 사회이든 주어진 자연 환경에 적응하며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스의 경우가 딱 그랬습니다.  그리스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좋든 싫든 무역을 해서 부족한 곡물을 해외에서 사들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곡물 값을 치를 만한 것이 뭔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민들이 쫄쫄 굶기에 딱 좋은 지형이었지만 그래도 잘 되는 농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올리브와 포도였습니다.  잘 말리면 오랜 기간 보존이 가능한 보리와는 달리 올리브와 포도는 보리보다 맛은 있을지 몰라도 즙이 많고 물러서 장기 보존이 곤란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이것들로 배를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그리스인들은 올리브에서 기름을 짜내고 포도즙을 발효시켜 포도주를 만들어 수출 상품으로 가공했습니다.  이런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 항아리를 실은 무역선이 부지런히 흑해 연안 지대와 시케리아(지금의 시칠리아), 이집트 등을 오가며 소중한 곡물을 수입해왔습니다.  특히 이미 꽤 많은 그리스 식민지가 형성되어 있던 흑해 북쪽 해안지대는 (지금도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농토는 유명합니다만) 지중해 세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로서, 이곳과 교역하기 위해 꼭 통과해야 하는 헬레스폰트 해협(지금의 다다넬스 해협)은 전체 그리스 도시국가들, 특히 아테네의 밥줄을 쥔 지역으로서 이 지역의 패권을 둘러싸고 많은 전쟁이 벌어질 운명이었습니다.  현대의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 못지 않은 전략적 중요성을 가진 곳이었지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주요 경제 활동인 올리브 착유와 포도주 만드는 작업입니다.  'How to survive' 시리즈 그림책을 찍은 거에요.)



(오늘날 우크라이나 땅인... 아, 우크라이나 땅이라고 하면 안되겠구나... 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입니다.  일찍부터 그리스인들은 먹고 살기 어려운 그리스 본토를 벗어나 지중해 곳곳에 식민도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주변 원주민들을 정복했다든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대개 주변 원주민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았습니다.)




지금처럼 비료나 농기계가 없던 시절, 당연히 곡물 생산량은 적었고 가격은 비쌌습니다.  더군다나 증기기관은 커녕 갈레온선도 없던 시절 먼 흑해에서 실어오는 곡물은 더욱 비쌌습니다.  그로 인해 그리스, 특히 아테네에서는 곡물 가격의 안정을 위해 많은 규제를 두었습니다.  아테네와 그 주변 지역에서는 곡물 수출이 절대 금지되었습니다.  또 절대 다량의 곡물이 수입품이니만큼 일부 곡물만 사재기를 하거나 입항을 지연시키기만 해도 큰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상인들에게는 그게 자유시장경제에 따라 아테네에 부를 가져올 '투자'일 수 있었지만 아테네 민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곡물은 국가가 사들여 공공 곡물 창고에 보관했으며, 또 한번에 한 사람이 살 수 있는 곡물은 '50명이 나를 수 있는 분량'으로 엄격하게 제한되었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사형에 처했습니다.  또 이렇게 사들인 곡물을 사적으로 거래하는 것도 엄격하게 제한하여, 어느 누구라도 곡물을 매입한 가격보다 1오볼 이상의 차익을 남기고 되팔수 없도록 했습니다.  당시 가난하고 재주없는 사람들이나 하던 3단 노선의 노젓는 사람이 받는 하루 일당이 2오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어느 누구도 곡물 거래로 큰 돈을 벌 수 없게 만들겠다는 '곡물 공개념' 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마 이런 규제가 없었다면 아테네의 많은 시민들을 먹여 살릴 수 없었을 것이고, 아테네는 지중해의 패권은 커녕 생존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주요 교역로입니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흑토는 그때도 유명했는지, 흑해 북부 해안에서 나는 곡물이 그리스를 먹여 살렸습니다.)




특이할 만한 점으로, 그리스인들은 포도주에 항상 물을 타서 마셨습니다.  이렇게 포도주에 물을 타마시는 풍습은 특이한 것은 아니고, 중세에도 이렇게 물을 탄 포도주를 많이 마셨습니다.  심지어 나폴레옹도 샹베르텡 와인에 물을 타서 마셨거든요.  물과 포도주의 비율은 사람마다 틀렸지만 그리스 당시엔 대략 50:50의 비율이었습니다.  어떤 프랑스 학자는 그리스의 포도주는 진득진득할 정도로 진했기 때문에 물로 희석시켜 마셨다고 하지만, 그건 프랑스인들의 포도주에 대한 집착을 합리화하기 위한 이야기같고, 실제로는 아껴 마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손님을 초대하여 식사를 제공할 때, 포도주에 물을 얼마나 탈 것인가는 손님 취향에 따라 각자 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정했습니다.  그때 포도주에 물을 너무 많이 타면, 손님들은 주인이 너무 인색하다고 비웃곤 했습니다.  또 그리스인들이 물로 희석한 포도주를 마시는 이유 중 하나는 취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흔히 술을 취하려고 마신다고 하지만, 원래 술에 취하는 것은 매우 볼썽 사나운 일이고 절대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추태입니다.  고대 그리스에는 홍차나 커피, 코카콜라 등 다른 음료가 없었으니 포도주를 자주 마실 수 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포도주 원액 100%를 그대로 마시면 취하는 것도 피할 수 없고 또 건강에도 해로왔습니다.  실제로 스파르타의 어떤 왕은 스키티아인들과 교류하다가 포도주를 물로 희석하지 않고 그대로 마시는 풍습을 배워 그렇게 포도주 원액을 그대로 마시곤 했는데, 결국 미쳐버렸다고 합니다. 




(그리스인들의 향연은 저렇게 모두 비스듬히 누워서 노예들이 따라주는 와인을 마시며 주로 수다를 떠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리스식 향연을 συμπόσιον라고 하는데, 이는 '함께 마신다'라는 뜻으로서 현대 영어에서는 심포지움(symposium)이라고 합니다.)





(저 손가락에 걸고 돌리고 있는 듯한 접시는 kylix라고 하는데, 납작하고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습니다.  포도주를 마신 뒤, 저 손잡이에 손가락을 넣고 빙빙 돌리다가 그 원심력을 이용하여 잔에 약간 남은 포도주 방울을 뿌려 목표물을 맞추는 것이 향연에서의 흔한 게임이었다고 합니다.)




(그리스 항아리에 그려진 그리스인들의 향연 모습입니다.  손님들이 손가락에 납작한 술잔 kylix의 손잡이를 걸고 빙빙 돌리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병사들은 무엇을 먹고 마셨을까요 ?  가장 구체적인 묘사는 크세노폰의 페르시아 원정기(Anabasis)에 나옵니다. 아나바시스는 1만 명에 달하는 그리스 용병들이 페르시아 키루스 왕자에게 고용되어 키루스의 형이자 페르시아의 왕인 아르타크세륵세스에 대한 반란에 참전했다 쿠낙사(Cunaxa) 전투에서 패배한 뒤 오늘날 이라크 중심부에서 흑해 연안으로 탈출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어렵게 어렵게 그리스 접경 지역까지 왔을 때, 당장 먹을 식량이 부족해졌습니다.  여태까지는 어차피 적대 지역이랍시고 약탈로 먹을 것을 구하며 뚫고 왔는데, 이제 페르시아 제국을 빠져 나오니 예전처럼 마구 약탈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용병 중의 한 명이 스스로를 뛰어난 전술가로서 장군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하며, 전체 용병단에 대한 지휘권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병사들은 당장 먹을 것을 마련해준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이 '지휘관 취준생'은 정말 먹을 것을 구해오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식량을 어깨에 짊어진 짐꾼들을 데리고 돌아옵니다.  그때 이 '지휘관 취준생'이 마련해온 식량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무명이 보리가루를, 스무명이 포도주를, 세명이 올리브를, 한명은 마늘, 나머지 한명은 양파를 각기 들 수 있는 만큼씩 들고 왔다'




(흔히 키루스의 1만명이라고 불리던 그리스인 용병단의 진격 및 후퇴로입니다.  이들이 도착한 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도시 트라페주스(Trepezus)는 오늘날의 터키 트라브존(Trabzon)으로서, 유럽 챔피언스 리그에 가끔 등장하는 터키 축구 클럽 트라브존스(Trabzonspor)의 홈 도시입니다.)




뭔가 상당히 빈약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  이 '지휘관 취준생'이 가지고 온 식량은 약 8~9천에 달했던 이 용병단 병사들에게는 1일치 식량도 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지휘관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그 양이 아니고, 목록입니다. 이 병사들은 행군 중에 빵을 구울 화덕을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므로, 이 보리가루로 마자(maza)라는 부풀리지 않은 빵을 만들어 먹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양념으로 올리브와 마늘과 양파를 넣었겠지요.  현대적인 식단에서 보자면 채소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금방 느낄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스 사람들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는 19세기까지도 채소는 별로 먹지 않았답니다.  채소는 어쩔 수 없이 먹어야만 하는 가난한 사람들만 먹었으며,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채소를 싫어했고 건강에도 나쁘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별로 많이 재배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로 지방과 전분 위주의 식사를 했던 것입니다.  로마군의 식량 목록을 보더라도, 주로 밀과 콩, 포도주, 그리고 양념으로 양파와 식초 이야기만 나오고, 채소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나폴레옹 시대는 물론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도 그대로 이어져 병사들은 신선한 채소를 거의 보급받지 못했습니다.  신선한 채소는 병사들이 알아서 '구해서' 먹는 것이지 군대에서 보급하는 것이 아니었지요.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는 당시 병사들의 특별한 식단이 나옵니다.  일종의 해군용 전투 식량이지요.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에서 이탈하려는 미틸레네(Mytilene) 시를 아테네 함대가 무력으로 점령한 뒤, 그 함대 지휘관은 아테네에 미틸레네 시민들에 대해 어떤 처분을 내릴 것인지 묻기 위해 전령선으로 삼단노선(trireme) 한척을 보냅니다.  이 전문을 받은 아테네에서는 민주주의 국가답게 민회에서 미틸레네 주민들의 우명을 결정했는데, 비정한 아테네 시민들은 미틸레네의 남자 시민들을 모조리 처형해버리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리라는 명령을 가결한 뒤 현장으로 전령선을 돌려 보냅니다.  그러나 바로 직후, 그건 너무 심한 결정이었다는 후회가 뒤늦게나마 몰려온 시민들은, 다시 민회를 열어 앞서 내린 명령을 취소한다는 전령선을 새로 보내기로 합니다.  이 두번째 전령선이 도착이 늦으면 미틸레네 시민들은 모조리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아테네 민회에서는 이 뒤쫓아가는 두번째 전령선에게 특별 보너스까지 걸고 쾌속으로 항해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레스보스 섬에 위치한 미틸레네 시와 아테네와의 거리는 345km로서, 아무리 열심히 노를 저어도 최소 48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당시 그리스의 삼단노선은 좁고 가벼운 선체에 노수까지 포함하여 너무 많은 사람이 타는 구조라서 24시간 항해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두어번씩 반드시 근처 해안가에 배를 끌어올려놓고 모닥불을 피워 밥도 지어 먹고 잠도 잤지요.  그래서 항상 해안가에 붙어서 항해했으며 먼 바다로는 어지간해서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텔레네로 향한 두번째 삼단노선은 비상 상황에 따라 식사 시간은 물론 밤에도 배를 해안에 대지 않고 교대로 노를 저었습니다.  또 첫번째 삼단노선의 선원들도 자신들이 들고 가는 잔인한 명령서가 꺼림직하여 별로 열성적인 항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히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기 전에 두번째 삼단노선이 미틸레네에 도착했고, 미틸레네는 몰살의 참극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잠은 그렇다치고, 두번째 삼단노선의 선원들은 어떤 식사를 했을까요 ?  이때 선원들은 배 위에서 보리가루와 올리브유, 포도주를 반죽한 것을 먹으며 노를 저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미숫가루 또는 생식이라고 할 수 있지요 ?  수천 명의 사람 목숨을 구한 매우 거룩한 식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ource :

Iliad by Homeros (Penguin books)

Anabasis by Xenophon (Penguin books)

How would you survive as an ancient Greek ?

빵의 역사 (하인리히 야콥, 우물이 있는 집)

먹거리의 역사 (마귈론 투생-사마, 까치글방)

https://passtheflamingo.com/2017/05/24/ancient-recipe-maza-ancient-greek-ca-2nd-millennium-bce/

https://en.wikipedia.org/wiki/Olbia_(archaeological_site)

http://gluedideas.com/content-collection/cyclopedia-of-knowledge/Ancient-Corn-Trade.html

https://en.wikipedia.org/wiki/Kylix

https://onlinelibrary.wiley.com/doi/full/10.1111/1095-9270.12144



스파르타는 왜 망했을까 ?

잡상 2019.01.03 06:30 Posted by nasica



몇년 전 영화화되어 많은 패러디의 대상이 되었던 영화 300의 줄거리는 한마디로 '스파르타 인들의 전설적인 용맹'입니다.  물론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오락용으로 만들어진 영화에 불과하며, 많은 허구와 왜곡이 들어가 있습니다만, 기본적인 줄거리 자체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BC 480년 가을, 바닷가의 협로인 테르모필라에(Thermopylae)에서, 그리스 본토를 침공하기 위해 이 곳을 통과하려는 크세륵세스의 수십만 대군을, 수도 훨씬 적고 가난한 스파르타의 용사들이 상당 기간 저지하다가 결국 옥쇄했던 사건이 이 영화의 배경이지요. 




(테르모필라에를 스파르타가 꽉 틀어막는다고 해도, 바다길이 뚫려 있으니까 페르시아 군은 그리스 본토를 유린할 수 있다고요 ?  사실 그렇긴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원시적인 항해술 수준에서는, 바다로 대규모 원정군을 실어나른다는 것은 백만대군과 싸우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었으니, 테르모필라에를 돌파하는 것이 꼭 필요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려진 스파르타 인들의 교육 방식이나 거친 생활상은 거의 대부분 다 사실입니다.  실은 그것보다 더 험악했습니다.  스파르타는 북한을 낙원으로 느껴지게 할 만큼 엄격한 군국주의 국가로서, 가난하고, 문화적으로 피폐했으며, 인권이나 개인의 행복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보낸지 오래된 도시 국가였지요.  영화 속에서는, 곱추로 태어난 어느 스파르타 인이, 자신을 버린 조국에 배신감을 느끼고 페르시아 군에게 우회로를 알려주는 바람에 스파르타 군이 전멸을 하게 된 것으로 그려졌습니다.  (실은 그 지방 농민이 상금을 노리고 알려주었지요.)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곱추로 태어난 스파르타 인이 있었다면 그에게는 그런 배신을 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스파르타는 나치 독일 못지 않은 인권 유린 국가로서, 갓 태어난 모든 아기는 국가에서 검사하여, 만약 불구가 있거나 허약해 보일 경우, 산 속 깊은 구덩이에 내다 버려 죽이는 것이 법제화 되어 있었습니다.  현대 기준으로 보면 천인공로한 야만 국가였지요.




(배신자라고요 ?  아닙니다.  피해자였을 뿐입니다.)




그리스는 원래 남성 우월주의 마초 국가라서 어차피 여자들에게는 투표권이나 발언권, 재산 소유권 등은 물론 올림픽 관람권조차 모두 거부되었는데, 그나마 스파르타의 여성들에게는 재산권도 있고 또 각종 경기에도 참여할 수 있는 등, 다른 그리스 국가보다는 나은 지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스파르타에서도, 여성들에게 연애 같은 것은 절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결혼은 약탈혼이라서,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납치한 뒤 머리를 빡빡 밀어버리고 감금한 뒤, 밤에만 (이제는 와이프가 된) 그 납치 여성을 찾아가는 식의 결혼 생활을 상당 기간 유지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와이프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와이프를 다른 남자에게 내어주기까지 했습니다.  스파르타에 있어서 여자란 튼튼한 아기를 낳기 위한 그릇에 불과했거든요.  따라서 훌륭한 다른 남성 시민의 씨를 받기 위해 와이프를 다른 남자에게 내어주고, 거기서 태어난 아기를 자신의 아기로서 키우는 것이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아기는 일정 나이가 되면 부모의 곁을 떠나 가혹한 공동 생활을 하며 거의 폭행과 학대에 가까운 공동 교육(agoge)을 받았으니, 아기가 꼭 자기 핏줄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레오니다스 왕의 아내, 즉 여왕 고르고(Gorgo)가 원로원을 설득하여 남편에게 증원군을 보내기 위해 부패한 원로원 의원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일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레오니다스가 돌아오지 못할 것이 뻔한 원정 길을 떠날 때, 그 아내인 고르고가 '내가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라고 묻자, 레오니다스는 쿨하게 '훌륭한 남자와 결혼하여 튼튼한 아기를 낳으시오'라고 한마디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고 합니다.  최소한 조선 시대처럼 여자들이 정절을 지키거나 청상과부로 늙을 필요는 없었던 것이지요.




(부도덕한 일이라고요 ?  동성애가 고상한 취미로 인정되던 시절입니다.  뭐 꼭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적인 가치관과는 많이 다르다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남녀가 함께 식사를 하며 데이트를 한다는 것은, 젊은 미혼 남녀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젊은 부부 사이에서 조차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단 남자들은 15명이 한 조를 이루어 모두 공동 식사(syssitia)를 해야 했으니까요.  어느 스파르타의 왕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귀환한 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집에서 와이프와 함께 먹겠다'며 공동 식당에 사람을 보내 자기 몫의 식사를 자기 집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가 '개소리 하지 말라'며 면박을 당할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먹는 것도 맛없기로 유명한 '검은 국'에 부풀지 않은 보리 빵을 먹는 정도라서, 한마디로 정말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테르모필라에 전투 1년 뒤인 BC. 479년, 스파르타가 이끈 연합군이 플라타에아 (Plataea)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잔여 병력을 완전 격파합니다.  이때 스파르타의 왕인 파우사니아스 (Pausanias)는 페르시아 진영에서 페르시아 인들이 차려 놓은 산해진미의 식탁을 발견하고는 '이런 욕심쟁이들, 이런 것을 먹으면서도 우리의 보리 빵을 빼앗으려고 쳐들어왔단 말인가' 하고 한마디 할 정도였습니다.




(전형적인 그리스의 만찬 모습입니다.  술잔이 납작한 것이 특징인데, 굳이 스파르타가 아니더라도 그리스 사람들의 식탁은 그다지 풍성한 편이 못 되었습니다.)




스파르타는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무척 피폐한 나라였습니다.  일단 시민들은 절대 직업을 가져서는 안되었습니다.  즉, 스파르타 시민권을 가진 남자들은 100% 백수였습니다.  이들에게 직업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이들이 항상 신체를 단련하고 무술을 연마하여, 최강의 병사들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다보니, 온나라의 살림살이는 투박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가령 스파르타의 어느 왕이 외국을 방문했다가 어느 집에 들어가 대들보를 올려다보고는 '이 나라에는 네모난 모양으로 자라는 나무가 있는가 ?'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의 집은, 왕궁조차도, 그냥 둥근 통나무를 그대로 대들보로 썼던 것이지요.  또 돈이라는 것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리스를 포함한 동부 지중해는 은화를 매개체로 한 상업 활동이 활발했는데, 스파르타는 예외였습니다.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가인 리쿠르구스 (Lycurgus)의 법에 의해, 스파르타에서는 은화는 못 만들게 했고, 오로지 무쇠 동전을, 그것도 뜨거울 때 식초에 담가 '고철 가격도 안 나가도록 만든' 가치없는 동전만을 쓰도록 했으므로, 상업 활동이 전혀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랬으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Thucydides)는 '먼 훗날 사람들이 스파르타의 유적을 파본 다면 스파르타가 전체 그리스를 호령하는 강대국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라고 그 시대에 이미 썼을 정도였지요.




(투키디데스의 흉상 보다는 그 어록이 더 마음에 드네요.  "행복의 요건은 자유고, 자유의 요건은 용기이다.")




이렇게 지독하게 살았으니 스파르타가 군사 강국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를 하겠습니다만, 이런 군사 강국이 대체 왜 망했을까요 ?  신무기가 개발되어 용기와 체력으로 승부하던 스파르타 인들의 전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던 것일까요 ? 


한 나라가 쇠락하는데는 사실 한두 가지의 이유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교과서에는 '그리스 도시 국가 간의 반목으로 인한 잦은 전쟁과 그에 따른 국력 고갈'을 이야기하지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전쟁이라면 그 전부터도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 해왔던 것이 스파르타입니다.  또, 손바닥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난다고, 스파르타와 전쟁을 하던 다른 도시 국가들, 즉 아테네나 테베, 아르고스 등도 전쟁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스파르타가 결정적인 패배를 맛 본 BC. 371년, 레욱트라 (Leuctra) 전투의 상대는 테베 (Thebes) 군이었는데, 물론 테베 군의 지휘관이 당대의 군사 천재인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 이긴 했습니다만, 스파르타 군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스파르타 군이 그리스 최강을 자랑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항상 이기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스파르타 군의 숫자가 더 많거나 적과 대등할 경우에는 항상 승리했었습니다.  또한, 스파르타의 엄격한 법에 따라, 전투에서 등을 보이고 도주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스파르타 군이 보기 흉하게 패퇴하여 방패를 버리고 도주하는 경우는 절대 없었는데,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 군은 전사한 자신들의 왕 클레옴브로투스(Cleombrotus)의 시신을 내버려두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치는 추태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스파르타는 워낙 시민의 수가 적었으므로, 이들을 다 처형할 경우 국가가 끝장 났으므로 이 도망자 처형에 대한 법률을 시행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레욱트라 전투에서, 테베의 제갈공명 에파미논다스는 당시 그리스 중장 보병 전술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한 사선 방식의 전열을 이용하여 더 적은 병력으로도 무적이라는 스파르타 군을 격파해내는 기염을 토합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는 또다른 비밀이 있었지요.) 




영화 300을 찍었던 테르모필라에 전투와 이 레욱트라 전투 사이의 불과 100년 사이에, 스파르타에 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길래 이렇게 되었을까요 ?


일단 학자들이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스파르타의 인구 감소입니다.  가령 BC. 479년, 플라타에아 (Plataea)로 진격했던 스파르타 인들의 수는 약 5천명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사'를 썼던 헤로도투스의 계산에 따르면, 당시 전체 스파르타의 성인 남자 인구는 8천 정도였지요.  그러나 100년 뒤 레욱트라 전투에서의 스파르타 인들의 숫자는 '영웅전'으로 유명한 플루타르코스 (Plutarchos)에 의하면 고작 700명에 불과했습니다.  동시대 역사가인 크세노폰(Xenophon)의 계산에 따르면 약 1천명 수준이었지요.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파르타는 인구 부족으로 망했다'라고 말할 정도였지요.




(제가 중고등학교 때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고 흠뻑 빠져서, 소년 보수가 되었더랬지요. 아마 당시에도 인터넷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저는 아마 일베의 열성회원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스파르타 인구가 그렇게 급격히 줄어든 것에는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그 사이에 전쟁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불과 100년 사이에 인구가 거의 1/8 수준으로 떨어진 것은 흑사병이 돌아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특히 스파르타처럼 '건강한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하는 나라일 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적어도 스파르타에서는 사교육비가 많이 들지 않았으니까, 국민들이 아이 낳는 것을 꺼릴 이유가 없었지요.  대체 스파르타에 뭐 운석이 떨어졌거나 조류 독감이라도 번진 것이었을까요 ?


실은 운석이나 조류 독감보다 더 무서운 것이 외부로부터 스파르타에 들어오긴 했습니다.  바로 돈이었습니다.





(특히 페르시아의 다릭 Daric 금화가 그리스 전체를 망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300만 보면 최후의 승자가 그리스처럼 보이지만, 사실 전체적인 그림을 놓고 보면 결국 페르시아가 전체 그리스를 쥐고 놀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마케도니아에게 둘다 망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원래 스파르타 인들은 100% 백수에 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사실 이 점은 제가 존경하는 신필 김용 선생의 무협지와도 상통하는 내용입니다.  대체 무림의 고수들은 직업도 없는데 어디서 돈이 나서 먹고 마시고 하는 걸까요 ?  아무리 스파르타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았다고 해도, 매일 먹는 보리 빵이나 검은 국, 영화 300 찍을 때 입었던 빤스 같은 것들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물건들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고 누군가는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활동을 전담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들을 헬로트 (helot)라고 불렀습니다.




(이놈의 세상은 동화나 무협지가 아닌지라, 누군가 영웅 놀이를 하자면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고된 노동을 해서 그들을 먹여살려야 합니다.)




원래 스파르타 인들은 마케도니아 쪽에서 내려온 도리아(Doria) 인이었고, 헬로트들은 라코니아 (Laconia) 지방에 살던 원주민이었습니다.  이 원주민들은 메세니아 (Messenia)라는 국가를 이루어 살고 있었는데, 결국 스파르타 인들에게 패배하고 그들의 노예...라기보다는 농노 같은 예속 신분이 되었습니다.  리쿠르구스의 개혁 때, 이들의 토지는 9천개의 일정한 크기로 분할되어 순수 스파르타 시민들, 즉 Spartiates들에게 주어졌고, 그 토지 (이런 영지를 kleros라고 불렀습니다)에서 헬로트들이 농사를 지어다 바치는 것이 스파르타 인들의 경제적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에는 이렇게 순수 시민권자들, 즉 Spartiates과 그 농노인 헬로트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스파르타 주변에는 100여개 마을이 있었고, 여기에는 자유민들, 즉 Perioekoi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도 순수 스파르타 시민들처럼 도리아 인이었는데,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엄격한 스파르타 식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경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이 페리오이코이들은 비록 순수 시민권자는 아니더라도, 전장에 나갈 때는 스파르타 군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원래 페르시아 전쟁 때까지만 해도 스파르티아테스들과 페리오이코이는 각각 서로 다른 부대로 편성되어 싸웠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는 이미 하나의 부대 속에 서로 섞여 전우로서 싸웠지요.  전에 언급했던 스파르타 출신 용병 대장 클레아르쿠스(Clearchus)도 사실 스파르티아테스 출신이 아니라 페리오이코이 출신이었습니다. 




(클레아르쿠스에 대해서는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Ananbasis) 에 자세히 나옵니다.  저도 저 펭귄 클래식으로 읽었습니다.)




이들의 경제 생활의 기초 구조는 평등주의였습니다.  원래 스파르타의 성인 시민들을 부를 때 "homoioi"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같은 신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즉, 모든 성인 스파르타 시민은 경제적으로 평등해야 했습니다.  모두가 같은 크기의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더 열심히 한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더 부유해지는 것은 아니었고, 또 특별히 부를 모으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금씩 빈부의 차이가 있기는 했습니다.  가령 어떤 가난한 집안의 스파르타 소녀가 시집을 갈 때, '지참금으로 무엇을 가져가는가'라는 질문을 받자, '제 아버지의 상식'이라는 대답을 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스파르타 시민들 사이에서도 빈부의 차이가 있기는 했다는 것입니다.


스파르타 인들은 철학적으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물질적 부에 대해서 초연할 수 있었을까요 ?  글쎄요, 확실한 것은 다른 도시 국가의 화려한 생활로부터 격리되었다는 점이 스파르타 인들의 검소함의 큰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북한 사람들과 스파르타 인들이 닮은 점 중 하나가,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뭔가 임무를 부여받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면, 국경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렇게 용맹함과 고결함으로 칭송이 자자했던 스파르타 인들도, 소수 인원끼리 해외로 나오기만 하면 흥청망청 향락에 빠져서 나라 망신을 시키는 경우가 아주 흔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일시적, 개인적인 일이라서 스파르타의 근간을 흔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조금씩 스파르타 인들을 오염시키던 외국의 돈이 스파르타로 물밀 듯이 몰려들게 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었습니다.




(당연히 이것도 읽었지요.  정말 재미있었는데, 다만 자주 나오는 연설 부분들이 너무 길더군요.  이 당시 아테네 사람들은 대중 선동정치가, 즉 데마고그(demagogue)들에게 휘둘리고 있는 상태였고, 투키디데스도 그런 민회에서 투표 결과 추방당한 몸이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으로 씌여져 있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 보수파였던 것은 다 그리스 로마 고전을 탐독한 덕분이었어요.)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시다시피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권을 두고 벌인 전쟁인데, 전쟁의 양상은 다소 바보스럽게 보일 정도로 단순했습니다.  강력한 육군을 가진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동맹군들을 이끌고 아테네로 쳐들어가면, 아테네는 강력한 성벽 뒤에 숨어서 응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워낙 고대라서, 충차나 운제 같은 공성용 병기도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라서, 이렇게 농성하는 아테네 군을 공략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스파르타 및 그 동맹군이 이렇게 허송세월하는 동안, 아테네 군은 강력한 해군력을 이용하여, 바다를 통해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해안, 즉 스파르타의 앞마당에 상륙하여 여기저기를 불지르고 파괴했습니다.  스파르타 인들은 몰라도 그 동맹군들은 원래 직업이 대부분 농부였으므로, 농번기가 되면 결국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지요. 




(이 지도가 보여주는 양상이 초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아테네와 그 외항인 피라에우스 항구 사이의 긴 회랑은 긴 장벽으로 완전 요새화되어 있어서, 제해권이 없다면 아테네를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특히 아테네의 곡물 수입로인 헬레스폰트 해협, 즉 현재의 이스탄불이 있는 터키 지방의 확보가 매우 중요했지요.  그래서 전쟁은 그쪽 지방에서도 치열하게 벌어집니다. )




이런 식으로 몇년이 무의미하게 흘러가자, 스파르타도 아테네를 제대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결국 해군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산층 집안의 시민들이 각자의 갑옷과 방패 등 무장은 물론, 먹을 것까지 각자 부담했던 육군과는 달리, 해군은 돈이 무진장 많이 들어갔습니다.  아테네는 인근에서 개발된 은광을 이용하여 당시의 주력 군함인 3단 노선(trireme)들을 많이 건조했지만, 일부 부자들이 돈을 내어 개인 부담으로 건조된 군함들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이런 3단 노선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많은 노젓는 노수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노수들은 아테네의 경우 가진 것이 없어서 중장 보병 (hoplites)으로서의 무장을 갖출 수 없는 빈민들이 주로 맡다가, 나중에는 용병으로 채워지게 되었는데, 이들에게는 모두 적게나마 급료가 주어져야 했습니다.  또 거친 바다에 나가면 노나 밧줄 등의 소모품도 무척 많이 필요했습니다.  한마디로, 스파르타의 경제력으로는 도저히 해군 건설이 불가능했습니다.




(당시 그리스의 주력 군함이던 3단 노선 trireme의 구조입니다.  선체 크기에 비해 승무원 수가 너무 많았으므로, 밤에 잘 때나 식사할 때는 바닷가에 정박해야 했고, 또 선체가 가벼워야 했으므로 그만큼 선체 강도가 약하여, 먼 바다를 항해할 때는 사용하기가 곤란했습니다.)




결국 스파르타는 동맹국들로부터 강제로 분담금을 거두어 해군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분담금을 거두고 필요한 자재를 구매하고, 노수들을 고용하고 급료를 지불하는 행위는 사실 스파르타 인들에게는 그다지 어울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과정에서 많은 스파르타 인이 부패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스파르타는 그리스 각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을 지휘 감독하기 위해 '장군' 1명씩을 여기저기로 파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현지에서 뇌물을 받아먹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스파르타의 명성을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었지요.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대전환점이었던,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군을 궤멸시킨 시라쿠사 공방전의 총지휘관이었던 스파르타 인 길리푸스 (Gylippus) 같은 거물급조차도, 동맹국에서 스파르타 본국으로 은화 궤짝을 호송하다가 일부를 착복한 것이 들통나서 외국으로 도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30년 묵은 전쟁을 끝낸 스파르타의 명장이자 정치가인 리산드로스의 두상입니다.)




이런 부패는 그나마 작은 문제에 속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돈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눈을 뜨게 된 스파르타 인들이 부의 축적에 나선 것이 스파르타의 몰락을 부추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비록 작은 빈부 차이는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스파르타 인들은 모두 평등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파르타에 돈 바람이 불면서 결국에는 리쿠르구스 시절부터 내려온 영지(kleros)를 팔아치우는 시민들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원래 인간은 평등하지가 않은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사람들마다 재주와 능력치가 달라서, 어떤 사람들은 돈 버는 재주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런 소수인들에게 스파르타의 전통적인 영지가 집중되는 것은 한 순간의 일이었습니다.  영지를 팔아치운 사람들이 그 돈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영지를 팔아치운 대부분의 시민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몰락한 시민들은 공동 식사 (syssitia)에 필요한 자기 몫의 비용조차 낼 수가 없었고, 또 자신의 아이를 공동 교육 (agoge) 시키는데 들어가는 비용도 낼 수 없었습니다.  이는 곧바로 시민권을 가진 순수 스파르타 인, 즉 Spartiates의 지위를 잃는 것을 뜻했습니다.   즉, 스파르타에 전례없던 빈부 격차가 생기면서 스파르타의 전통적 시민 제도가 무너져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군의 기본 구성 요소는 이 중장보병 hoplites였습니다.  이런 중장보병의 무장은 모두 자비로 마련해야 했는데, 상당히 고가의 물건이었으므로 오직 중산층만이 이런 무장을 감당할 수 있었고, 한 도시 국가의 국력은 도시에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이렇게 스스로 중장보병의 무장을 갖출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고 있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산층이 몰락하여 빈민이 되었다면, 그만큼 도시가 약해졌다고 할 수 있지요.)




이렇게 몰락한 시민들이 어떤 지위를 가졌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아마도 자유인, 즉 페리오이코이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렇게 경제적으로 쇠락하여 시민권을 잃은 자들은 자신의 조국 스파르타에 대해 무척이나 분한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원래 스파르타에는 웅장한 성벽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누군가 도시 방어에 대해 묻자,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가인 리쿠르구스가 '벽돌로 쌓은 벽보다 사람으로 쌓은 벽이 더 튼튼하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어떤 아테네 인이 스파르타 인을 놀리며 '우리들은 에리다노스 (Eridanos, 아테네 인근의 강) 강가에서 너희들을 여러번 무찔렀다' 라고 말하자, 그 스파르타 인은 묵묵히 이렇게 대꾸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에우로타스 (Eurotas, 스파르타 인근의 강) 강가에서 너희들을 무찌른 적이 한번도 없군.'  


또, 리쿠르구스는 방어 전략을 묻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난하게 살고,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 하지 말라."


이는 스파르타의 안보에 있어, 경제적 평등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가르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손들이 돈에 눈을 뜨게 되면서,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요.



 


(리쿠르구스의 법제가 꼭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요.  어차피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거치면서 리쿠르구스 체제의 한계가 보였기 때문에 스파르타도 어쩔 수 없이 변화한 것입니다.  사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스파르타의 승리로 돌아간 것은 알고 보면 결국 페르시아가 스파르타를 금전적으로 후원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체제가 우수했기 때문이 아니지요.  그 한계는 결국 나중에 '안탈키다스의 평화'라는,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에게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 도시들을 팔아넘기는 결과를 낳게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BC. 479년, 플라타에아 (Plataea)로 진격했던 Spartiates 5천명이 BC. 371년, 레욱트라 (Leuctra) 전투에서는 불과 7백명으로 줄어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스파르타의 병력은 훨씬 많았습니다.  레욱트라 전투에서, 동맹군을 합하면 스파르타 측은 무려 1만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대항하는 테베 군은 6천~7천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민 공동체로서의 애국심이 사라진 군대는 백년 전 플라타에아 전투에 참전했던 그 스파르타 군과는 질적으로 너무나 달랐습니다.  이날의 패전 이후, 스파르타는 지속적인 쇠락을 거듭하며 평범한 시골 마을로 변모해버렸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스파르타의 패망은 레욱트라 전투의 결과 때문이 아닙니다.  레욱트라 전투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고, 그 원인은 스파르타에서 심각해진 빈부 격차였던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 군 전법은 매우 단순하여, 중장보병의 밀집 대형, 즉 phalanx들끼리의 충돌에서 어느 쪽이 체력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더 우세한가를 겨루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식 축구의 스크럼 싸움과 비슷했지요.)




세상에 빈부 격차가 없을 수는 없고, 또 적절한 빈부 격차는 경제에 활력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원래 보수 쪽에서 중시하는 대로 경제적 자유를 그대로 풀어놓아 두면, 반드시 빈부 격차는 심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사람들의 능력은 평등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약육강식의 경제 활동 속에서도 빈부 격차를 줄이려는 어느 정도의 조치는 국가 안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PS. 


위에서 언급한 에리다노스 강과 에우로타스 강 이야기처럼, 스파르타 인들은 짧고도 강렬한 경구를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이런 촌철살인의 짧은 경구를 즐겨 사용하는 것을 라코닉 (laconic, 스파르타가 있던 지방의 이름이 라코니아) 하다고 표현하지요.  가령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끝장 낸 스파르타의 장군 리산드로스 (Lysandros)가 아테네를 정복한 뒤 본국의 장로들 (Ephor)에게 보낸 편지에는 딱 한줄, '아테네를 정복했음' 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로원에서는 '말이 너무 길다, 그냥 "정복"이라고만 썼으면 충분했을 것을' 이라고 한탄했을 정도였지요.  하지만 제 생각에, 이런 라코닉한 표현 중에 최고의 것은 스파르타의 몰락 이후에 나왔습니다.  바로 다음의 경우였지요.




(영화 알렉산더에서 발 킬머가 열연했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입니다.  실제로도 그는 애꾸눈에 광폭한 사내였다고 하지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가 스파르타에게 항복을 요구하면서 "만약 내가 라코니아에 들어간다면 스파르타를 평지로 갈아 없애 버리겠다" 라고 협박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에 대해 스파르타 인들이 보낸 답장에는 단 한 단어, "αἴκα (If, 만약에 말이지)" 이라는 단어만 씌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읽은 필립 2세는 스파르타 정복을 포기했고,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스파르타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