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03 06:30



몇년 전 영화화되어 많은 패러디의 대상이 되었던 영화 300의 줄거리는 한마디로 '스파르타 인들의 전설적인 용맹'입니다.  물론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오락용으로 만들어진 영화에 불과하며, 많은 허구와 왜곡이 들어가 있습니다만, 기본적인 줄거리 자체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BC 480년 가을, 바닷가의 협로인 테르모필라에(Thermopylae)에서, 그리스 본토를 침공하기 위해 이 곳을 통과하려는 크세륵세스의 수십만 대군을, 수도 훨씬 적고 가난한 스파르타의 용사들이 상당 기간 저지하다가 결국 옥쇄했던 사건이 이 영화의 배경이지요. 




(테르모필라에를 스파르타가 꽉 틀어막는다고 해도, 바다길이 뚫려 있으니까 페르시아 군은 그리스 본토를 유린할 수 있다고요 ?  사실 그렇긴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원시적인 항해술 수준에서는, 바다로 대규모 원정군을 실어나른다는 것은 백만대군과 싸우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었으니, 테르모필라에를 돌파하는 것이 꼭 필요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려진 스파르타 인들의 교육 방식이나 거친 생활상은 거의 대부분 다 사실입니다.  실은 그것보다 더 험악했습니다.  스파르타는 북한을 낙원으로 느껴지게 할 만큼 엄격한 군국주의 국가로서, 가난하고, 문화적으로 피폐했으며, 인권이나 개인의 행복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보낸지 오래된 도시 국가였지요.  영화 속에서는, 곱추로 태어난 어느 스파르타 인이, 자신을 버린 조국에 배신감을 느끼고 페르시아 군에게 우회로를 알려주는 바람에 스파르타 군이 전멸을 하게 된 것으로 그려졌습니다.  (실은 그 지방 농민이 상금을 노리고 알려주었지요.)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곱추로 태어난 스파르타 인이 있었다면 그에게는 그런 배신을 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스파르타는 나치 독일 못지 않은 인권 유린 국가로서, 갓 태어난 모든 아기는 국가에서 검사하여, 만약 불구가 있거나 허약해 보일 경우, 산 속 깊은 구덩이에 내다 버려 죽이는 것이 법제화 되어 있었습니다.  현대 기준으로 보면 천인공로한 야만 국가였지요.




(배신자라고요 ?  아닙니다.  피해자였을 뿐입니다.)




그리스는 원래 남성 우월주의 마초 국가라서 어차피 여자들에게는 투표권이나 발언권, 재산 소유권 등은 물론 올림픽 관람권조차 모두 거부되었는데, 그나마 스파르타의 여성들에게는 재산권도 있고 또 각종 경기에도 참여할 수 있는 등, 다른 그리스 국가보다는 나은 지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스파르타에서도, 여성들에게 연애 같은 것은 절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결혼은 약탈혼이라서,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납치한 뒤 머리를 빡빡 밀어버리고 감금한 뒤, 밤에만 (이제는 와이프가 된) 그 납치 여성을 찾아가는 식의 결혼 생활을 상당 기간 유지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와이프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와이프를 다른 남자에게 내어주기까지 했습니다.  스파르타에 있어서 여자란 튼튼한 아기를 낳기 위한 그릇에 불과했거든요.  따라서 훌륭한 다른 남성 시민의 씨를 받기 위해 와이프를 다른 남자에게 내어주고, 거기서 태어난 아기를 자신의 아기로서 키우는 것이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아기는 일정 나이가 되면 부모의 곁을 떠나 가혹한 공동 생활을 하며 거의 폭행과 학대에 가까운 공동 교육(agoge)을 받았으니, 아기가 꼭 자기 핏줄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레오니다스 왕의 아내, 즉 여왕 고르고(Gorgo)가 원로원을 설득하여 남편에게 증원군을 보내기 위해 부패한 원로원 의원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일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레오니다스가 돌아오지 못할 것이 뻔한 원정 길을 떠날 때, 그 아내인 고르고가 '내가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라고 묻자, 레오니다스는 쿨하게 '훌륭한 남자와 결혼하여 튼튼한 아기를 낳으시오'라고 한마디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고 합니다.  최소한 조선 시대처럼 여자들이 정절을 지키거나 청상과부로 늙을 필요는 없었던 것이지요.




(부도덕한 일이라고요 ?  동성애가 고상한 취미로 인정되던 시절입니다.  뭐 꼭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적인 가치관과는 많이 다르다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남녀가 함께 식사를 하며 데이트를 한다는 것은, 젊은 미혼 남녀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젊은 부부 사이에서 조차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단 남자들은 15명이 한 조를 이루어 모두 공동 식사(syssitia)를 해야 했으니까요.  어느 스파르타의 왕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귀환한 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집에서 와이프와 함께 먹겠다'며 공동 식당에 사람을 보내 자기 몫의 식사를 자기 집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가 '개소리 하지 말라'며 면박을 당할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먹는 것도 맛없기로 유명한 '검은 국'에 부풀지 않은 보리 빵을 먹는 정도라서, 한마디로 정말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테르모필라에 전투 1년 뒤인 BC. 479년, 스파르타가 이끈 연합군이 플라타에아 (Plataea)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잔여 병력을 완전 격파합니다.  이때 스파르타의 왕인 파우사니아스 (Pausanias)는 페르시아 진영에서 페르시아 인들이 차려 놓은 산해진미의 식탁을 발견하고는 '이런 욕심쟁이들, 이런 것을 먹으면서도 우리의 보리 빵을 빼앗으려고 쳐들어왔단 말인가' 하고 한마디 할 정도였습니다.




(전형적인 그리스의 만찬 모습입니다.  술잔이 납작한 것이 특징인데, 굳이 스파르타가 아니더라도 그리스 사람들의 식탁은 그다지 풍성한 편이 못 되었습니다.)




스파르타는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무척 피폐한 나라였습니다.  일단 시민들은 절대 직업을 가져서는 안되었습니다.  즉, 스파르타 시민권을 가진 남자들은 100% 백수였습니다.  이들에게 직업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이들이 항상 신체를 단련하고 무술을 연마하여, 최강의 병사들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다보니, 온나라의 살림살이는 투박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가령 스파르타의 어느 왕이 외국을 방문했다가 어느 집에 들어가 대들보를 올려다보고는 '이 나라에는 네모난 모양으로 자라는 나무가 있는가 ?'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의 집은, 왕궁조차도, 그냥 둥근 통나무를 그대로 대들보로 썼던 것이지요.  또 돈이라는 것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리스를 포함한 동부 지중해는 은화를 매개체로 한 상업 활동이 활발했는데, 스파르타는 예외였습니다.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가인 리쿠르구스 (Lycurgus)의 법에 의해, 스파르타에서는 은화는 못 만들게 했고, 오로지 무쇠 동전을, 그것도 뜨거울 때 식초에 담가 '고철 가격도 안 나가도록 만든' 가치없는 동전만을 쓰도록 했으므로, 상업 활동이 전혀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랬으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Thucydides)는 '먼 훗날 사람들이 스파르타의 유적을 파본 다면 스파르타가 전체 그리스를 호령하는 강대국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라고 그 시대에 이미 썼을 정도였지요.




(투키디데스의 흉상 보다는 그 어록이 더 마음에 드네요.  "행복의 요건은 자유고, 자유의 요건은 용기이다.")




이렇게 지독하게 살았으니 스파르타가 군사 강국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를 하겠습니다만, 이런 군사 강국이 대체 왜 망했을까요 ?  신무기가 개발되어 용기와 체력으로 승부하던 스파르타 인들의 전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던 것일까요 ? 


한 나라가 쇠락하는데는 사실 한두 가지의 이유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교과서에는 '그리스 도시 국가 간의 반목으로 인한 잦은 전쟁과 그에 따른 국력 고갈'을 이야기하지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전쟁이라면 그 전부터도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 해왔던 것이 스파르타입니다.  또, 손바닥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난다고, 스파르타와 전쟁을 하던 다른 도시 국가들, 즉 아테네나 테베, 아르고스 등도 전쟁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스파르타가 결정적인 패배를 맛 본 BC. 371년, 레욱트라 (Leuctra) 전투의 상대는 테베 (Thebes) 군이었는데, 물론 테베 군의 지휘관이 당대의 군사 천재인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 이긴 했습니다만, 스파르타 군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스파르타 군이 그리스 최강을 자랑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항상 이기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스파르타 군의 숫자가 더 많거나 적과 대등할 경우에는 항상 승리했었습니다.  또한, 스파르타의 엄격한 법에 따라, 전투에서 등을 보이고 도주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스파르타 군이 보기 흉하게 패퇴하여 방패를 버리고 도주하는 경우는 절대 없었는데,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 군은 전사한 자신들의 왕 클레옴브로투스(Cleombrotus)의 시신을 내버려두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치는 추태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스파르타는 워낙 시민의 수가 적었으므로, 이들을 다 처형할 경우 국가가 끝장 났으므로 이 도망자 처형에 대한 법률을 시행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레욱트라 전투에서, 테베의 제갈공명 에파미논다스는 당시 그리스 중장 보병 전술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한 사선 방식의 전열을 이용하여 더 적은 병력으로도 무적이라는 스파르타 군을 격파해내는 기염을 토합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는 또다른 비밀이 있었지요.) 




영화 300을 찍었던 테르모필라에 전투와 이 레욱트라 전투 사이의 불과 100년 사이에, 스파르타에 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길래 이렇게 되었을까요 ?


일단 학자들이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스파르타의 인구 감소입니다.  가령 BC. 479년, 플라타에아 (Plataea)로 진격했던 스파르타 인들의 수는 약 5천명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사'를 썼던 헤로도투스의 계산에 따르면, 당시 전체 스파르타의 성인 남자 인구는 8천 정도였지요.  그러나 100년 뒤 레욱트라 전투에서의 스파르타 인들의 숫자는 '영웅전'으로 유명한 플루타르코스 (Plutarchos)에 의하면 고작 700명에 불과했습니다.  동시대 역사가인 크세노폰(Xenophon)의 계산에 따르면 약 1천명 수준이었지요.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파르타는 인구 부족으로 망했다'라고 말할 정도였지요.




(제가 중고등학교 때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고 흠뻑 빠져서, 소년 보수가 되었더랬지요. 아마 당시에도 인터넷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저는 아마 일베의 열성회원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스파르타 인구가 그렇게 급격히 줄어든 것에는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그 사이에 전쟁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불과 100년 사이에 인구가 거의 1/8 수준으로 떨어진 것은 흑사병이 돌아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특히 스파르타처럼 '건강한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하는 나라일 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적어도 스파르타에서는 사교육비가 많이 들지 않았으니까, 국민들이 아이 낳는 것을 꺼릴 이유가 없었지요.  대체 스파르타에 뭐 운석이 떨어졌거나 조류 독감이라도 번진 것이었을까요 ?


실은 운석이나 조류 독감보다 더 무서운 것이 외부로부터 스파르타에 들어오긴 했습니다.  바로 돈이었습니다.





(특히 페르시아의 다릭 Daric 금화가 그리스 전체를 망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300만 보면 최후의 승자가 그리스처럼 보이지만, 사실 전체적인 그림을 놓고 보면 결국 페르시아가 전체 그리스를 쥐고 놀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마케도니아에게 둘다 망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원래 스파르타 인들은 100% 백수에 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사실 이 점은 제가 존경하는 신필 김용 선생의 무협지와도 상통하는 내용입니다.  대체 무림의 고수들은 직업도 없는데 어디서 돈이 나서 먹고 마시고 하는 걸까요 ?  아무리 스파르타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았다고 해도, 매일 먹는 보리 빵이나 검은 국, 영화 300 찍을 때 입었던 빤스 같은 것들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물건들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고 누군가는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활동을 전담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들을 헬로트 (helot)라고 불렀습니다.




(이놈의 세상은 동화나 무협지가 아닌지라, 누군가 영웅 놀이를 하자면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고된 노동을 해서 그들을 먹여살려야 합니다.)




원래 스파르타 인들은 마케도니아 쪽에서 내려온 도리아(Doria) 인이었고, 헬로트들은 라코니아 (Laconia) 지방에 살던 원주민이었습니다.  이 원주민들은 메세니아 (Messenia)라는 국가를 이루어 살고 있었는데, 결국 스파르타 인들에게 패배하고 그들의 노예...라기보다는 농노 같은 예속 신분이 되었습니다.  리쿠르구스의 개혁 때, 이들의 토지는 9천개의 일정한 크기로 분할되어 순수 스파르타 시민들, 즉 Spartiates들에게 주어졌고, 그 토지 (이런 영지를 kleros라고 불렀습니다)에서 헬로트들이 농사를 지어다 바치는 것이 스파르타 인들의 경제적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에는 이렇게 순수 시민권자들, 즉 Spartiates과 그 농노인 헬로트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스파르타 주변에는 100여개 마을이 있었고, 여기에는 자유민들, 즉 Perioekoi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도 순수 스파르타 시민들처럼 도리아 인이었는데,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엄격한 스파르타 식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경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이 페리오이코이들은 비록 순수 시민권자는 아니더라도, 전장에 나갈 때는 스파르타 군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원래 페르시아 전쟁 때까지만 해도 스파르티아테스들과 페리오이코이는 각각 서로 다른 부대로 편성되어 싸웠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는 이미 하나의 부대 속에 서로 섞여 전우로서 싸웠지요.  전에 언급했던 스파르타 출신 용병 대장 클레아르쿠스(Clearchus)도 사실 스파르티아테스 출신이 아니라 페리오이코이 출신이었습니다. 




(클레아르쿠스에 대해서는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Ananbasis) 에 자세히 나옵니다.  저도 저 펭귄 클래식으로 읽었습니다.)




이들의 경제 생활의 기초 구조는 평등주의였습니다.  원래 스파르타의 성인 시민들을 부를 때 "homoioi"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같은 신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즉, 모든 성인 스파르타 시민은 경제적으로 평등해야 했습니다.  모두가 같은 크기의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더 열심히 한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더 부유해지는 것은 아니었고, 또 특별히 부를 모으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금씩 빈부의 차이가 있기는 했습니다.  가령 어떤 가난한 집안의 스파르타 소녀가 시집을 갈 때, '지참금으로 무엇을 가져가는가'라는 질문을 받자, '제 아버지의 상식'이라는 대답을 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스파르타 시민들 사이에서도 빈부의 차이가 있기는 했다는 것입니다.


스파르타 인들은 철학적으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물질적 부에 대해서 초연할 수 있었을까요 ?  글쎄요, 확실한 것은 다른 도시 국가의 화려한 생활로부터 격리되었다는 점이 스파르타 인들의 검소함의 큰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북한 사람들과 스파르타 인들이 닮은 점 중 하나가,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뭔가 임무를 부여받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면, 국경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렇게 용맹함과 고결함으로 칭송이 자자했던 스파르타 인들도, 소수 인원끼리 해외로 나오기만 하면 흥청망청 향락에 빠져서 나라 망신을 시키는 경우가 아주 흔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일시적, 개인적인 일이라서 스파르타의 근간을 흔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조금씩 스파르타 인들을 오염시키던 외국의 돈이 스파르타로 물밀 듯이 몰려들게 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었습니다.




(당연히 이것도 읽었지요.  정말 재미있었는데, 다만 자주 나오는 연설 부분들이 너무 길더군요.  이 당시 아테네 사람들은 대중 선동정치가, 즉 데마고그(demagogue)들에게 휘둘리고 있는 상태였고, 투키디데스도 그런 민회에서 투표 결과 추방당한 몸이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으로 씌여져 있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 보수파였던 것은 다 그리스 로마 고전을 탐독한 덕분이었어요.)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시다시피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권을 두고 벌인 전쟁인데, 전쟁의 양상은 다소 바보스럽게 보일 정도로 단순했습니다.  강력한 육군을 가진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동맹군들을 이끌고 아테네로 쳐들어가면, 아테네는 강력한 성벽 뒤에 숨어서 응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워낙 고대라서, 충차나 운제 같은 공성용 병기도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라서, 이렇게 농성하는 아테네 군을 공략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스파르타 및 그 동맹군이 이렇게 허송세월하는 동안, 아테네 군은 강력한 해군력을 이용하여, 바다를 통해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해안, 즉 스파르타의 앞마당에 상륙하여 여기저기를 불지르고 파괴했습니다.  스파르타 인들은 몰라도 그 동맹군들은 원래 직업이 대부분 농부였으므로, 농번기가 되면 결국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지요. 




(이 지도가 보여주는 양상이 초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아테네와 그 외항인 피라에우스 항구 사이의 긴 회랑은 긴 장벽으로 완전 요새화되어 있어서, 제해권이 없다면 아테네를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특히 아테네의 곡물 수입로인 헬레스폰트 해협, 즉 현재의 이스탄불이 있는 터키 지방의 확보가 매우 중요했지요.  그래서 전쟁은 그쪽 지방에서도 치열하게 벌어집니다. )




이런 식으로 몇년이 무의미하게 흘러가자, 스파르타도 아테네를 제대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결국 해군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산층 집안의 시민들이 각자의 갑옷과 방패 등 무장은 물론, 먹을 것까지 각자 부담했던 육군과는 달리, 해군은 돈이 무진장 많이 들어갔습니다.  아테네는 인근에서 개발된 은광을 이용하여 당시의 주력 군함인 3단 노선(trireme)들을 많이 건조했지만, 일부 부자들이 돈을 내어 개인 부담으로 건조된 군함들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이런 3단 노선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많은 노젓는 노수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노수들은 아테네의 경우 가진 것이 없어서 중장 보병 (hoplites)으로서의 무장을 갖출 수 없는 빈민들이 주로 맡다가, 나중에는 용병으로 채워지게 되었는데, 이들에게는 모두 적게나마 급료가 주어져야 했습니다.  또 거친 바다에 나가면 노나 밧줄 등의 소모품도 무척 많이 필요했습니다.  한마디로, 스파르타의 경제력으로는 도저히 해군 건설이 불가능했습니다.




(당시 그리스의 주력 군함이던 3단 노선 trireme의 구조입니다.  선체 크기에 비해 승무원 수가 너무 많았으므로, 밤에 잘 때나 식사할 때는 바닷가에 정박해야 했고, 또 선체가 가벼워야 했으므로 그만큼 선체 강도가 약하여, 먼 바다를 항해할 때는 사용하기가 곤란했습니다.)




결국 스파르타는 동맹국들로부터 강제로 분담금을 거두어 해군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분담금을 거두고 필요한 자재를 구매하고, 노수들을 고용하고 급료를 지불하는 행위는 사실 스파르타 인들에게는 그다지 어울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과정에서 많은 스파르타 인이 부패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스파르타는 그리스 각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을 지휘 감독하기 위해 '장군' 1명씩을 여기저기로 파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현지에서 뇌물을 받아먹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스파르타의 명성을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었지요.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대전환점이었던,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군을 궤멸시킨 시라쿠사 공방전의 총지휘관이었던 스파르타 인 길리푸스 (Gylippus) 같은 거물급조차도, 동맹국에서 스파르타 본국으로 은화 궤짝을 호송하다가 일부를 착복한 것이 들통나서 외국으로 도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30년 묵은 전쟁을 끝낸 스파르타의 명장이자 정치가인 리산드로스의 두상입니다.)




이런 부패는 그나마 작은 문제에 속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돈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눈을 뜨게 된 스파르타 인들이 부의 축적에 나선 것이 스파르타의 몰락을 부추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비록 작은 빈부 차이는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스파르타 인들은 모두 평등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파르타에 돈 바람이 불면서 결국에는 리쿠르구스 시절부터 내려온 영지(kleros)를 팔아치우는 시민들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원래 인간은 평등하지가 않은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사람들마다 재주와 능력치가 달라서, 어떤 사람들은 돈 버는 재주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런 소수인들에게 스파르타의 전통적인 영지가 집중되는 것은 한 순간의 일이었습니다.  영지를 팔아치운 사람들이 그 돈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영지를 팔아치운 대부분의 시민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몰락한 시민들은 공동 식사 (syssitia)에 필요한 자기 몫의 비용조차 낼 수가 없었고, 또 자신의 아이를 공동 교육 (agoge) 시키는데 들어가는 비용도 낼 수 없었습니다.  이는 곧바로 시민권을 가진 순수 스파르타 인, 즉 Spartiates의 지위를 잃는 것을 뜻했습니다.   즉, 스파르타에 전례없던 빈부 격차가 생기면서 스파르타의 전통적 시민 제도가 무너져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군의 기본 구성 요소는 이 중장보병 hoplites였습니다.  이런 중장보병의 무장은 모두 자비로 마련해야 했는데, 상당히 고가의 물건이었으므로 오직 중산층만이 이런 무장을 감당할 수 있었고, 한 도시 국가의 국력은 도시에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이렇게 스스로 중장보병의 무장을 갖출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고 있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산층이 몰락하여 빈민이 되었다면, 그만큼 도시가 약해졌다고 할 수 있지요.)




이렇게 몰락한 시민들이 어떤 지위를 가졌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아마도 자유인, 즉 페리오이코이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렇게 경제적으로 쇠락하여 시민권을 잃은 자들은 자신의 조국 스파르타에 대해 무척이나 분한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원래 스파르타에는 웅장한 성벽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누군가 도시 방어에 대해 묻자,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가인 리쿠르구스가 '벽돌로 쌓은 벽보다 사람으로 쌓은 벽이 더 튼튼하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어떤 아테네 인이 스파르타 인을 놀리며 '우리들은 에리다노스 (Eridanos, 아테네 인근의 강) 강가에서 너희들을 여러번 무찔렀다' 라고 말하자, 그 스파르타 인은 묵묵히 이렇게 대꾸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에우로타스 (Eurotas, 스파르타 인근의 강) 강가에서 너희들을 무찌른 적이 한번도 없군.'  


또, 리쿠르구스는 방어 전략을 묻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난하게 살고,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 하지 말라."


이는 스파르타의 안보에 있어, 경제적 평등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가르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손들이 돈에 눈을 뜨게 되면서,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요.



 


(리쿠르구스의 법제가 꼭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요.  어차피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거치면서 리쿠르구스 체제의 한계가 보였기 때문에 스파르타도 어쩔 수 없이 변화한 것입니다.  사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스파르타의 승리로 돌아간 것은 알고 보면 결국 페르시아가 스파르타를 금전적으로 후원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체제가 우수했기 때문이 아니지요.  그 한계는 결국 나중에 '안탈키다스의 평화'라는,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에게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 도시들을 팔아넘기는 결과를 낳게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BC. 479년, 플라타에아 (Plataea)로 진격했던 Spartiates 5천명이 BC. 371년, 레욱트라 (Leuctra) 전투에서는 불과 7백명으로 줄어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스파르타의 병력은 훨씬 많았습니다.  레욱트라 전투에서, 동맹군을 합하면 스파르타 측은 무려 1만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대항하는 테베 군은 6천~7천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민 공동체로서의 애국심이 사라진 군대는 백년 전 플라타에아 전투에 참전했던 그 스파르타 군과는 질적으로 너무나 달랐습니다.  이날의 패전 이후, 스파르타는 지속적인 쇠락을 거듭하며 평범한 시골 마을로 변모해버렸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스파르타의 패망은 레욱트라 전투의 결과 때문이 아닙니다.  레욱트라 전투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고, 그 원인은 스파르타에서 심각해진 빈부 격차였던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 군 전법은 매우 단순하여, 중장보병의 밀집 대형, 즉 phalanx들끼리의 충돌에서 어느 쪽이 체력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더 우세한가를 겨루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식 축구의 스크럼 싸움과 비슷했지요.)




세상에 빈부 격차가 없을 수는 없고, 또 적절한 빈부 격차는 경제에 활력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원래 보수 쪽에서 중시하는 대로 경제적 자유를 그대로 풀어놓아 두면, 반드시 빈부 격차는 심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사람들의 능력은 평등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약육강식의 경제 활동 속에서도 빈부 격차를 줄이려는 어느 정도의 조치는 국가 안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PS. 


위에서 언급한 에리다노스 강과 에우로타스 강 이야기처럼, 스파르타 인들은 짧고도 강렬한 경구를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이런 촌철살인의 짧은 경구를 즐겨 사용하는 것을 라코닉 (laconic, 스파르타가 있던 지방의 이름이 라코니아) 하다고 표현하지요.  가령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끝장 낸 스파르타의 장군 리산드로스 (Lysandros)가 아테네를 정복한 뒤 본국의 장로들 (Ephor)에게 보낸 편지에는 딱 한줄, '아테네를 정복했음' 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로원에서는 '말이 너무 길다, 그냥 "정복"이라고만 썼으면 충분했을 것을' 이라고 한탄했을 정도였지요.  하지만 제 생각에, 이런 라코닉한 표현 중에 최고의 것은 스파르타의 몰락 이후에 나왔습니다.  바로 다음의 경우였지요.




(영화 알렉산더에서 발 킬머가 열연했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입니다.  실제로도 그는 애꾸눈에 광폭한 사내였다고 하지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가 스파르타에게 항복을 요구하면서 "만약 내가 라코니아에 들어간다면 스파르타를 평지로 갈아 없애 버리겠다" 라고 협박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에 대해 스파르타 인들이 보낸 답장에는 단 한 단어, "αἴκα (If, 만약에 말이지)" 이라는 단어만 씌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읽은 필립 2세는 스파르타 정복을 포기했고,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스파르타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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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돌로레스 2019.01.03 1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계적 평등이 무너져 망한게 아니라 기계적 평등 자체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걸 보여준 겁니다. 돈과 불평등 때문에 망했다면 돈과 불평등이 먼저 시작된 아테네 등이 훨씬 일찍 폭망했어야죠. 돈과 불평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걸 운영할 수 있는 체제와 문화가 갖춰져 있냐가 핵심입니다. 서구 역사는 그런 점에서 그걸 갖추기위한 역사죠.

    • nasica 2019.01.03 20: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말씀하신 바에 동의합니다. 애초에 한계가 있는 체제였고, 그 한계를 벗어나려고 하다가 급격한 적응을 못하고 망한 겁니다. 말씀하신 내용을 저는 본문에 다 썼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

      '돈과 불평등 때문에 망했다면 아테네가 먼저 망했어야...' 라는 말씀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만, 당시 아테네의 빈부 격차가 확대되었다는 기록은 못 봤거든요. 원래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당시 풍조는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를 팔거나 새로 사들이는 것을 매우 기피했습니다. 땅을 팔면 '조상이 물려준 재산을 지키지 못했다'라며 비난받았고, 땅을 사면 '남의 집안 재산을 헐값에 빼앗는다'라고 비난받았거든요.

      어떤 사람이 바닷가에 있는 자기 땅을 팔자, 그는 '포세이돈보다 더 위대하다'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는데, 이유는 '바다도 삼키지 못한 땅을 한순간에 날려먹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3. ㅇㅇ 2019.01.03 1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파르타가 망한 이유는 다른게 아니고 군국주의의 끝을 보여줘서인 것같습니다. 일본제국처럼말이죠.

    • 고로 2019.01.03 18:34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보다 북한을 더 닮았는뎅.. 아~~ 요즘은 이렇게 말하믄 적폐로 몰려 처단받는당..

    • nasica 2019.01.03 2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고로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스파르타는 독재가 아니라는 점만 빼고는 북한이지요. 군국주의 + 공산주의니까요. 북한도 어설프게 개혁개방했다가 다 망할 것이다 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탈북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미 밑바닥은 다 시장경제를 수용하고 있다고 하니,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듯 합니다. 북한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독재지요.

    • 수비니우스 2019.01.03 2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북한이 일제를 따라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라는 책인데요 읽어보면 재밌습니다.

  4. 캐리비안베이의해적 2019.01.03 15: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필하세요!

  5. 성북천 2019.01.03 16: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항상 글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플라타에아 전투를 이끈 파우사니아스는

    스파르타의 왕이 아니라 섭정이었던 걸로 아는데

    다시 확인 부탁드립니다

    새해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 nasica 2019.01.03 2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 저는 이날 이때까지 파우사니아스가 2명의 스파르타 왕 중 한명인 줄 알았습니다. 알고보니 섭정이었군요. 오늘도 댓글에서 배웁니다. 고맙습니다.

    • 최홍락 2019.01.03 2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섭정인 파우사니아스의 손자가 스파르타 왕 파우사니아스인지라 그걸 혼동하신듯 합니다.

  6. 조르바 2019.01.03 17: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빈부격차는 나쁨'

    • raa 2019.01.03 17: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연히 좋은 게 아니죠. 빌게이츠와 워렌버핏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려는게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래야 세상이 좋은 쪽으로 간다는 걸 알 정도의 머리는 있으니까 그러는 거죠. 한국에는 그 정도의 머리도 없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게 어이가 없습니다만.

  7. raa 2019.01.03 17: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로마도 똑같은 매커니즘으로 망할 뻔 했죠. 원로원은 그걸 막으려던 그라쿠스 형제를 죽이고 거의 백년은 죽일놈취급했고요. 역사를 아는 사람이면 납득이 잘 가는 글인데 댓글들은 원로원들 수준이 많네요.

    • nasica 2019.01.03 2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나 댓글 다신 분들이나 결국 다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만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표현이 다를 뿐이지요. 어느 누구도 '지나친 빈부격차가 좋다' '빈부격차가 제법 벌어져야 나라다운 나라지' 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모두가 경제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시는 분도 없으리라 믿습니다.

  8. 유애경 2019.01.04 08: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만약에 말이지' ...스파르타의 포스가 느껴진다고 해야하나,스파르타답다 싶네요! 읽으면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필립2세는 얼마나 그한마디에 허탈(?)했을까...! 문득,필립2세가 어깨를 휘청하는 개그를 연상했네요(웃음).
    영화는 참 재미있게 봤습니다.

  9. 카리우스 2019.01.04 09: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에는 정말 글 쓰신 의도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매반 글에 정치색이 조금씩 있어도 개인의견이니 그러려니하고 넘어갔습니다만 오늘은 좀 과격하신것 같네요 북한 같았던 시기에는 강대국이었는데 돈이 흘러 들어왔더니 망했다 이겁니까?

    • 아니..... 2019.01.04 1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스파르타의 초기형태는 스파르타 시민과 페리오이코이 사이의 빈부격차가 많이 안 났다는거죠. 그게 북한처럼 다 가난해서 그런거구요. 반대로 아테나처럼 모두가 부유해도 빈부격차가 크게 나면 스파르타처럼 강대국이었습니다. 근데 스파르타에 자본이 갑자기 몰리면서 자본 컨트롤을 실패했고 그에 따른 급격한 빈부격차로 망했다는 겁니다. 여기 누구도 북한쪽에 긍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 nasica 2019.01.04 20: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카리우스님께서 "빈부격차가 큰 것이 국가 안보에 유리합니다"라고 댓글을 쓰신 것이 아니듯이 저도 "공산주의 군국주의가 좋은 것이다"라고 쓴 것이 아닙니다. 바쁘셔서 그러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많은 분들은 글을 찬찬히 읽지 않으시고 띄엄띄엄 힐끗 본 뒤 자신만의 틀로 이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글의 취지는 "지나친 빈부격차는 국가안보에도 좋지 않다"입니다. 아마 거기에 반대하시는 분은 없으시리라 생각합니다.

  10. 소화 2019.01.04 1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독 이신 분들이 많으네요...

    글쓰신 의도를 모르고 이렇게 편협하고 좁은 사고를 가진,

    자칭 보수 우익 들이 많을 줄 첨알았습니다...

    스파르타가 이래서 망했다는 글쓴이의 의견만 있습니다.

    어디에도 경제적 평등, 기계적 평등, 공산 주의, 이런 것들이 좋다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면, 갈등이 야기 된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내용이니 줉이자는 것이지.
    기계적 평등을 하자는 내용은 없습니다.

    글내용을 잘 읽어보면, 기계적평등, 강제적평등은 언젠가는 망한다 입니다...
    공산주의 찬양글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유 한국당은 보수 우파가 아니라, 독재 잔당 입니다...

  11. Spitfire 2019.01.04 15: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빈부격차를 줄이자는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있다면 정말 그 논리를 한번 들어보고 싶네요~

    문제는 과연 어떻게 빈부격차를 줄일 것인가 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현 정부가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해 정말 왠만한 방법은 다 써본 것 같은데, 오히려 빈부격차가 더 커지는 문제가 생겼지요. 정책을 탓하는게 아니라, 해결방법을 찾는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일례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저의 생각으로는 빈부격차 문제의 초점을 분배와 최빈층에만 두지 말고, 중산층을 육성하는데 좀 더 집중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최하위와 최상위의 격차를 줄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최하위의 부는 0에 수렴하는데 최상위의 부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까요..), 그나마 중산층이라도 두터워지면 여러가지 이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금으로 지원할 빈곤층의 숫자가 줄어들게 되니 그들에 대한 복지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납세자의 숫자와 납세규모가 늘어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부자들한테서만 세금을 거둬서 해결한다는 비난도 잠재울 수 있구요. '너네만 세금내는거 아냐~' 이렇게요. 셋째는 안정적인 지지기반을 확보할 수 있어 정치적 안정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일단 소득이 있고 납세를 하면 사회에 대한 책임감도 가지게 될 것이고, 무작정 정부를 비난하는 수도 줄어들테지요. 부수효과로 '평생지지자'도 만들 수 있을지두요~

    이렇게 중산층을 늘리는 방법은 경제성장밖에는 없습니다. 일단 먹을 게 많아져야 육성도 되고 나눠먹을 거리도 생기는 거니까요. 성장에 중점을 두면 분배에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을 수 있는데, 이건 제도적으로 해결할 방법 밖에 없습니다. 불법 편법을 저지르는 애들은 다시는 사회에 발을 못붙이게 엄벌하고 공정한 경쟁을 하려는 이들이 좀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드는 제도를 구축한다면 지금처럼 빈부차이에 대한 불만과 부자들에 대한 적개심이 좀 누그러들지 않을까 합니다. 분배라는게 일률적으로 동등한 분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능력에 따라 노력한 만큼 합당한 결과물을 받는 것이니, 빈부격차 해소에 대한 논쟁도 좀 수그러 들 수 있을거 같구요.

    성공사례로 미국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미국 인구의 90%는 한국의 중산층보다 절대 잘산다고 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빈부격차는 당연히 어마어마 하구요~ 하지만 미국은 자본주의의 제도가 잘 확립되어 있고 중산층이 튼튼하다보니, 우리나라보다는 빈부격차에 대한 불만이나 부자들에 대한 적개심이 그리 크지는 않지요. 그러니 부자들의 기부나 사회공헌도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많습니다.

    근데 이야기를 하고 보니 현실적으로 과연 우리가 저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긴 합니다. 얼마전에 중국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데 중국인들도 요즘 빈부격차에 분노하고 부자들에 대한 적개심이 상당하다고 합니다. 중국인들과 이야기할수록 한국과 중국의 제도나 사람들의 생각이 정말 유사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어쩌면 우리가 이 모양인건 그냥 아시아 종특일지도 모르겠습니다..ㅠㅠ

  12. ㅇㅇ 2019.01.04 2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 빈부 격차를 어떻게 '자연스러운,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느냐가 그 사회의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파르타는 너무나 강압적이고 통제적인 방식으로 빈부격차를 자연스러운 수준 이하로 두려고 하다보니
    사회의 역량을 키울 시기를 놓쳐버렸고 (덤으로 경제, 기술의 발전까지 놓쳐야했고) 그러다보니 약한 외부 충격에도 뻥 터져버린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걸 현재 사회에 적용하려고 한다면 지금 상황이 너무 과한 빈부격차를 허락한다고 보는 사람도 있겠고
    반대로 지금 너무 강압적으로 억제하려는 움직임이 많은데 역효과를 낸다고 볼 수도 있겠죠

    스파르타는 양쪽의 예시가 다 될 수 있는 사례인거 같습니다

  13. 알타리무 2019.01.06 1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꼭 보편복지라던지 사회주의적 방법이 빈부격차를 감소시키는것이 아닙니다. 문재인정부들어서 빈부격차는 도리어 확대되었지요. 사회주의체제가 심화되면 시장의 역동성이 사라져 스태크플례이션이 심화되어 빈부격차가 심해지지요.
    다시말하지만 문재인 정부보세요. 강남좌파들은 남들 평생벌돈 한번에 벌고, 수많은 영세자영업자들과 저임금 노동자는 망해서 절대빈민층으로 몰락했지 않습니까?
    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유시장은 빈부격차를 확대시킨다는 믿음을 고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도리어 역사는 자유시장이 아닐때 빈부격차가 훨씬 심화된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 ㅇㅇ 2019.01.14 1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항상 댓글을 남기지만, 정말 글을 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기계적 분배인 사회주의를 옹호한적 한번없는데 혹시 말을 만들어내시는거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시길 바랍니다. 빈부격차와 그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고, 한번도 사회주의를 옹호한적 없는데 말이지요.
      저번도 그렇고 국어 실력이 여러모로 부족하신것 같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정작 미국조차도 뉴딜이 자유주의에서 개입주의로 바꾸어 살아남았는데 오히려 종교적, 맹목적으로 시장자유주의가 최고야를 외치시는것 아니신지요

    • ㅇㅇ 2019.01.14 1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리고, 말씀에 주장만 가득하시고 근거를 제대로 대시는것을 한번 본적없군요. 그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하시면 제 3자의 눈에서 옳든 그르든 근거와 주장을 제시하는사람과 주장만 제시하는 사람중 누가 더 신용성이 가는지 생각해보시면 좋을듯 합니다.

  14. 카를대공 2019.01.07 15: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혹 나시카님께서 올리신 글 읽다 예전 블로그에도 쓰셨던 글인가?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평등하지가 않은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사람들마다 재주와 능력치가 달라서, 어떤 사람들은 돈 버는 재주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는데......"

    이 문장을 읽으니 확실히 예전 글이라는 기억이 나네요.

    전 나시카님께서 무심한 듯 평범하게(?) 쓰신 문장 중에 오래 기억이 나는게 많습니다.

  15. 소화 2019.01.07 17: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빈부 격차를 줄일 수 없다면.
    빈부 격차는 인정해야 한다면.
    빈부 격차에 따른 불만을 줄여야죠.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고, 어려운 일입니다.

  16. 동우 2019.01.09 0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 빈부격차 때문에 스파르타가 망한건 부수적인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이유는 과거에는 영웅놀이하는 친구들만(소수 시민)으로도 충격을 견딜수 있지만, 썩은부분이 펠로포네스 전쟁의 충격으로 무너진거죠 . 겉보기에는 단단한 요새지만 안에서는 이미 금이 다간 성벽인데 총력전의 충격으로 붕괴된거죠. (물론 스파르타도 계급타파 등의 노력만으로 이미 시대착오적인 구조가 바뀌진않죠.)
    결론적으로 이미 스파르타는 체제적인 한계로 망조인데 펠로포네스가 결정타를 가하면서 생겨난 과속화 현상이 빈부격차라 생각합니다.

  17. 동경좀비 2019.01.13 0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라코닉을 보니 8월의 포성의 한 문장이 떠오르네요.
    프랑스군 총사령관 죠프르가 라코닉 한 문장으로 공격을 요청하자, 대영제국대륙원정군 사령관 프렌치는 루크웜(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
    둘다 귀족적인 성격이라 통역장교없이 글로 작전회의를 했다고 하네요.

  18. 윌라엄 2019.01.17 0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봤어요. 감사합니다.

  19. 만슈타인 2019.01.31 05: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신념은 보수지만 마음에 와 닿는 말이 많네요.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b

  20. 민주시민 2019.02.13 17: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서 빈부격차를 확대시키는 소득주도성장은 폐기해야만 하겠죠.. 한국이 북한보다 더 비참한 스파르타가 되고 결국엔 외세의 자금력에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21. shaind 2019.04.17 0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악명높은 스파르타빠 크세노폰이 이미 펠로폰네소스 전쟁 무렵에 "앞으로도 라케다이몬이 패권자 지위를 유지할지는 알 수 없다. 이제 그들은 신에게도, 리쿠르고스 법에도 복종하지 않으니까"라는 말을 남겼죠.

    아리스토텔레스도 라케다이몬의 몰락은 중장보병 유산시민계급의 급감이 원인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의 분석은 리쿠르고스 법이 시민 토지재산의 매매는 금지했지만 상속, 유증, 양도는 막지 못해서 점점 부가 집중됐다고 쓰더군요. 근데 제가 보기에도 그런 문제보다는 펠로폰네소스 맹주 자리에서 부가 흘러들어온 게 더 큰 문제같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