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기존 작전들의 특징을 동물에 비유하자면 딱 생각나는 것이 바로 문어입니다.  그는 휘하 군단들을 문어발처럼 넓게 펼친채 전진하다가, 적 주력부대의 존재가 그 촉수 중 하나에 걸려들면 정말 먹잇감을 건드린 문어처럼 다른 촉수들이 벼락같이 그 방향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니 뭔가 멋있어 보이지만, 이런 작전 형태에는 본질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분산된 채 전진하다가 강력한 적을 만날 경우 각개격파 당하기 딱 좋았던 것입니다.  이런 작전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넓게 펼쳐진 촉수들이 정말 재빨리 움츠러들 수 있어야 했습니다.  즉, 각 군단들의 기동력이 매우 좋아야 했지요.  원래 나폴레옹 군단들의 행군 속도는 유럽 최고 수준이었습니다만, 그런 그들에게도 이런 작전은 힘에 겨운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나폴레옹이 대승을 거둔 아우스테를리츠나 예나 등의 전투에서도 주요 부대들이 밤새 행군하여 전투 시작 직전에야 전투 현장에 간신히 도착하는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나폴레옹이 그런 약점을 무릅쓰면서 촉수를 펼친 문어처럼 휘하 병력을 넓게 전개한 채 전진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정찰기가 없는 시대에는 적 주력 부대의 위치를 포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았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식량이었습니다.  나폴레옹처럼 식량을 현지조달에 의존하는 것도 아무나 쉽게 흉내낼 수 있는 전법이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주로 활약했던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비교적 농업 생산성이 좋은 동네라서 식량이 풍부했다고 해도, 10만 대군이 한꺼번에 밀려들면 어지간한 동네는 식량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바로 전날 우디노의 군단이 한 동네의 빵과 밀가루를 탈탈 털어먹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빅토르의 군단이 또 밀어닥쳐서 먹을 것이 없나 뒤진다면, 그건 단순히 그 동네 주민들만의 분노로 끝나지 않고 빅토르 군단의 굶주림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각 부대가 거쳐가는 주요 마을과 도시로부터 비교적 손쉽게 식량을 얻을 수 있도록 군단별로 세심하게 진격로를 설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1812년 여름, 러시아 침공에 나선 나폴레옹의 군단들은 예전과는 달리 상당히 뭉쳐진 모습으로 같은 길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대부분의 주요 군단들은 나폴레옹과 함께 중앙군을 형성한 채 무리를 지어 진격했습니다.  그 외에는 단일 군단으로는 가장 컸던 다부(Davout)의 제1 군단 약 7만2천과,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Jérôme)이 이끈 베스트팔렌, 폴란드, 작센 출신의 병사들로 이루어진 4개 보조 군단 총 7만9천이 서로 다른 길로 남쪽 민스크(Minsk)를 향했습니다.  그나마 이들도 결국은 스몰렌스크(Smolensk)부터는 나폴레옹의 중앙군과 합류하게 됩니다.  그 외에는 주로 프로이센 및 바이에른 병사들로 이루어진 막도날(Macdonald)의 제10 군단 3만2천이 좌측 날개를 맡았고,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3만 정도가 우측 날개를 맡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전과 달리 이렇게 밀집된 형태로 행군하게 된 것은 크게 2가지 이유였습니다.  하나는 상대해야 할 적의 주력이 바클레이 드 톨리(Barclay de Tolly)의 제1 서부군과 바그라티온(Bagration)의 제2 서부군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이미 나폴레옹이 파악하고 있던 대로, 어차피 러시아 평원에서는 아무 식량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에 따라 나폴레옹은 병사들이 먹을 식량을 모두 독일과 폴란드에서 마차로 실어올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정말 유명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 궤멸 과정을 시각화시킨 미니아르의 도표 원본입니다.  이 도표는 1896년에 처음 나온 것이지요.  미니아르는 프랑스의 토목 기사로서 현대적인 인포그래픽스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기에 쓰인 프랑스어를 번역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812~1813년의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군 병력의 연속적인 손실에 대한 산술적 지도
1869년 11월 20일, 파리, 교량 및 도로 감사관(은퇴)인 M. 미니아르(M. Miniard)가 작성.

병력 수는 색칠된 구역선의 폭, 즉 10만명당 1mm로 표시했으며, 구역선 가로질러서도 명기했다.  붉은 색은 러시아에 진입한 병력 수를 뜻하고 검은 색은 빠져나온 수를 뜻한다.  이 지도를 그리는데 사용된 정보는 M. M. Thiers, de Ségur, de Fezensac, de Chambray 및 10월 28일부터 프랑스군 약제사로 일한 야콥(Jacob)의 미출간 일지 등에서 얻었다.   원정군의 궤멸 과정을 눈으로 좀더 잘 파악하기 위해, 제롬(Jérôme) 대공과 다부(Davout) 원수의 병력은 실제로는 민스크(Minsk)와 모길레프(Mogilev)에서 갈라졌다가 오르샤(Orsha)와 비텝스크(Vitebsk) 인근에서 재합류했지만, 항상 주력 부대와 함께 행군한 것으로 가정했다.)

 

(위 지도는 미니아르의 도표와 실제 지도를 합성한 것입니다.  미니아르의 도표도 실제 나폴레옹 원정군의 위도 경도를 반영하여 만든 것이므로 잘 들어맞는 편입니다.) 

 




그러나 이미 전편에서 설명드렸다시피, 나폴레옹의 수송 계획은 기술의 한계와 열악한 도로 사정 때문에 처음부터 빗나갈 운명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수송 엔진은 말이었으므로 그 연료는 사료였는데, 나폴레옹은 도저히 계산이 나오지 않는 말 사료 문제에 대해서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도 러시아의 겨울이 무섭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겨울이 오기 전에 여유있게 작전을 하려면 봄부터 러시아 침공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6월 하순까지 기다렸던 것은 사람이 먹을 곡물 뿐만 아니라 말이 뜯어먹을 풀이 무성하게 자라기를 기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콩이나 곡물도 아니고 그냥 풀이라면 말은 깜짝 놀랄 만큼의 양을 뜯어먹어야 했습니다.  프랑스군 부대가 지나간 자리는 정말 메뚜기떼가 지나간 흔적처럼, 사람이 먹을 것은 물론 말이 먹을 풀도 금세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던 후속 프랑스군의 사람과 말은 정말 그냥 굶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나폴레옹이 예전처럼 병력의 진격로를 좀더 넓게 분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쟎아도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치중부대에 의한 보급이 어려웠는데, 그렇게 병력을 분산시키면 보급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 뻔했습니다.  게다가 집결된 적의 주력 야전군을 바싹 추격하는 마당에 병력을 분산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실패했던 러시아 정복을 너무나 간단히 해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투가 이끈 몽골군이었지요.  믿을 만한 상세한 기록은 부족하지만 당시 몽골군은 대략 4~5만의 순수 기병으로 러시아 전역을 평정했습니다.  이들은 나폴레옹처럼 마차를 주요 운송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고, 식량은 함께 몰고다니는 가축에 의존했습니다.  원정군 전원이 유목민 출신 기병이다보니 넓은 지역에 걸쳐 가축들과 말에게 풀을 뜯게 하면서 장기간 작전을 펼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건 나폴레옹이 흉내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흉내낼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했습니다.  바로 소수 정예로 러시아 원정길에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몽골군이 무서운 이유는 그 활이 강력함보다도 기동력과 보급에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군대가 저런 활동량을 따라할 수 있겠습니까 ?)

 



만약 나폴레옹이 병력의 수를 확 줄여서 러시아 침공을 개시했다면 어땠을까요 ?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는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이후 유럽 최강의 무적 군대로 이름을 날렸지만 어쩔 수 없이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조금씩 질적으로 하향되어갔습니다.  특히 1807년 2월 아일라우 전투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낸 이후로는 그 질적 하향세가 매우 뚜렸했습니다.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는 패배한 오스트리아군 못지 않게 프랑스군의 피해도 엄청나게 컸는데 이것은 오스트리아군의 질적 향상 외에 프랑스군의 질적 저하도 원인이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받고 휘하 병력의 대부분이 어린 신병으로 이루어져 있던 부대 전체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자 분개한 마세나가 '저 풋내기들에게 브랜디를 잔뜩 마시게 하고 군기를 보여줘라' 라고 외친 것은 유명한 일입니다.  겁에 질렸던 신병들이 마세나의 그런 지휘에 결국 혼란을 수습하고 오스트리아군에게 반격을 가해 결국 승리한 것도 정말 대단한 일이었지요.  

이제 40만이 넘는 대군이 된 러시아 침공군은 과연 어떤 병사들로 이루어졌을까요 ?  상당수는 다년간의 경험을 쌓은 노련한 병사들이었지만, 이렇게 많은 대군을 끌어모으다보니 아무래도 신병들의 비율도 매우 높았습니다.  게다가 프랑스 내의 인적 자원도 많이 고갈되어, 키나 건강 상태, 나이 등에서 1805년이라면 탈락시켰을 젊은이들까지도 마구 입대시켜 충당한 신병들에 대해 많은 지휘관들이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무엇보다 이 40만 대군 중에는 많은 수의 외국인들이 섞여 있었는데, 이 중에는 폴란드인처럼 나폴레옹에게 충성하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프로이센인들처럼 죽지 못해 끌려나온 병사들도 많았습니다.  같은 이탈리아인들 중에서도 북부인 이탈리아 왕국 병사들은 상당히 우수한 자원으로 평가받았지만 뮈라의 신민들인 나폴리인들은 프랑스 지휘관들으로부터 '애초에 군인으로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라는 악평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먹을 것과 마실 것만 축낼 뿐 실제 전투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병력은 제외시키고 알짜배기 정예병력만 투입했다면 보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안될 일이었습니다.  일단 바투가 상대해야 했던 러시아는 그야말로 동구의 후진국으로서 인구 8~9백만에 무장 병력도 5만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알고보면 바투도 소수 정예로 다수의 러시아군을 무찌른 것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의 러시아는 인구 4천만이 넘고 20만이 넘는 야전군을 거느린 강대국이었습니다.  바투의 몽골군은 전원이 경기병이라는 특색이라도 있었지만,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는 남들 다 쓰는 머스켓 소총과 그리보발식 야포를 사용하는 평범한 군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총검의 숫자가 승패를 판가름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과거에 거두었던 승리는 거의 언제나 전투 현장에 더 많은 병력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 기기묘묘한 전법을 사용하는 소수 정예로 얻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소수 정예에 의한 결전은 나폴레옹의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폴레옹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러시아의 기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애초에 러시아와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처럼 광활한 영토를 가진 나라는 정복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그런 황량한 나라를 정복해봐야 딱히 얻을 것도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로부터 원하는 것은 딱 하나, 대륙 봉쇄령에 다시 참여하여 영국 상품에 대해 문을 닫아걸라는 것이었지요.  그런 목적을 위해서는 굳이 모스크바를 점령할 필요도 없었고 러시아 야전군과 피투성이 살육전을 벌여 쌍방간에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낼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냥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에게 겁을 먹고 협상을 하도록 강요만 하면 되는 것이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러시아가 상황을 오판하지 않도록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을 한꺼번에 동원하여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훈련이 얼마나 되어있건 충성심이 있건 없건 동원가능한 병력은 다 동원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4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한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은 그런 대군을 먹여살리기에는 자신의 보급망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원정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개전 이후 3주 안에 러시아군을 크게 꺾어놓고 평화 협상을 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원정군에게는 24일치의 식량을 지급하여 3일치는 병사들이 몸에 지니고 나머지 21일치는 마차에 싣고 가도록 하되, 네만 강을 건너기 전에는 절대 그 식량을 먹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와 러시아인들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병참 준비에는 그 중요성에 비해 너무나 완전히 배제되어 있던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됩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pdfs.semanticscholar.org/1d6e/96fd09126a40dca06ef01e8c9b13785e8379.pdf
https://warandsecurity.com/2013/02/11/why-napoleons-1812-russian-campaign-failed/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invasion_of_Russia
https://www.stolenhistory.org/threads/1812-french-invasion-of-russia-vs-logistics.1167/
https://www.bbc.co.uk/news/magazine-16929522
http://www.historyofwar.org/Maps/maps_russia_1812_to_moscow.html
https://www.reddit.com/r/dataisbeautiful/comments/26jy3t/a_rework_of_minards_map_the_first_data/
https://www.awesomestories.com/asset/view/A-Map-of-the-Great-Retreat-from-Russia//1
http://www.historyhome.co.uk/c-eight/france/moscow.htm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Joseph_Minard
https://patrimoine.enpc.fr/document/ENPC01_Fol_10975?image=54#bibnum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Paul Lindsay Daw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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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유민주주의 2019.08.12 06: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 공산주의적 계획경제를 미화한 사회적 경제를 구현하겠답시고 눈감아도 눈꺼풀 위를 뚫고 들어오는 태양빛같은 시장의 완벽함을 무시한채 국가주도로 뭐든 추친하는 선단독재경영을 꿈꾸다 그런 공산독재로 인한 각 경제주체들의 좌절로 실패하지 않았을지

  2. keiway 2019.08.12 1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흥미진진하군요.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주실 때까지 기다리는데 한달은 좀 가혹하긴 합니다만 ㅎㅎ

  3. 바다에산다 2019.08.12 1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상보급이 가능한 구간으로 작전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제해권 탓일까요?
    나팔륜이 생각하기에 불가능하니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은 듭니다만 이유가 궁금하네요.

  4. reinahrdt100 2019.08.12 12: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몽골군의 경우, 유럽 정복을 위한 준비기간이 당장 프랑스군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유럽 정복을 결정한 1235년 경부터 진격로 주변에는 유목행위를 금지했고 1237년과 1238년에 걸쳐 볼가 불가르 족을 격파 이들을 강제징병하였습니다. 이 때 강제로 동원된 볼가 불가르 족과 주변 제민족이 투멘으로 편성된 몽골굴과 거의 비슷한 수였다고 합니다. 즉, 흔히 말하는 10만~12만, 좀 과장되면 20만 몽골군 중에서 몽골 본토에서 파견된 투멘 편제의 몽골군은 약 6만~7만 정도였고 나머지는 진격 도중에 합류시킨 유목민족들이었다고 합니다.

    볼가 불가르 족을 격파한 후, 마침 헝가리에서 볼가 불가르 족을 머저르 평원으로 초빙하기 위해 도착해있던 율리아누스 수도사에서 최후통첩을 했죠. 자신들의 향도 및 병력 지원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유럽 공격에 지원하면 대칸에게 종속된 칸국의 지도적 위치를 보장함과 동시에 전리품의 어느 정도를 할당해주겠다고요

    약간 예전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몽골군은 1235년경부터 계산한다고 해도 1241년까지 약 6년 동안 유럽 공격을 위한 제반 준비를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아무리 길게 잡아도 2년 이상이 아닌 점에서 차원이 달랐죠. 물론, 몽골 본국과의 거리를 계산한다면 비슷하다고 보실 수 있겠지만 그래도 준비의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몽골군이 모두 경기병인 건 아닙니다. 물론 전원이 경기병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몽골군의 편제에서 '중장기병 2:경기병 5' 이상의 비율로 중장기병 편제가 나름 충실했습니다. 이건 금나라와의 전투 경험상 몽골굴의 지속성과 금군의 충격력이 서로를 두려워할 정도로 무서웠다는 경험 때문입니다. 금군이 몽골군을 기병전에서 이긴 경우가 꽤 되는데 대표적으로 완완진화상이 이끈 금나라 최후의 전략부대격인 충효군은 대체적으로 경기병과 중기병 모두를 중시한 편제였다고 합니다. 몽골군 역시, 충효군에게 몇번이나 박살날 정도로 겪어보다보니 초기 칭기즈칸 시절과 달리 나름 중장기병 전력을 충실하게 갖춘 군대로 변모하게 됩니다.

    물론, 몽골군의 경우, 중장기병이든 경기병인든 간에 기병 1기당 평균 5~6필의 마필을 지급했다는 것입니다. 즉, 그 정도면 마필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렵게 되면서 몽골군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 쇠퇴하게 됩니다. 몇몇 예를 들면 1285년~1286년의 몽골-헝가리 전쟁에서 3만의 헝가리 군에 맞서 몽골은 최소 10만이 넘는 기병을 동원했지만 이 시기 몽골군은 예전과 달리 기병 1기당 기껏해야 평균 1~3필 수준의 말을 지급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13세기 중엽과 달리 13세기 중후반 내내 헝가리는 전국을 말 그대로 요새화 했죠. 북한의 4대 군사노선 중 '전 국토의 요새화'를 정말 실천했죠. 막말로 100개 이상의 서유럽식 성채를 전국토에 깔아버린 겁니다. 몽골과 헝가리가 격전을 벌인 결과는? 헝가리군이 압승을 했습니다. 이 전쟁 이후 다시는 몽골은 헝가리나 폴란드는 생각도 못하고 좀 약체라고 생각했던 러시아와 리투아니아를 건드립니다만 그것도 리투아니아가 거대해지면서 계속 두들겨 맞아댔고 보르스쿨라 전투 (제1차 폴타바 전투)에서 겨우 리투아니아의 거센 공세를 꺾어버리는 수준으로 몰리게 됩니다.

    좀 길게 썼습니다만, 당시 몽골군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5. 나무꾼 2019.08.12 14: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
    -> 동계 피복 아닐까요 ?

    전쟁을 빨리 끝내버리면 동계 작전 준비가 필요없을테고...
    실제로는 겨울 추위에 시달렸고...

  6. 루나미아 2019.08.13 15: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니아토프스키가 모스크바 아닌 우크라이나 쪽으로 진군하는 걸 제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나폴레옹은 러시아도 프오처럼 주력을 격파해서 금방 제압될거라 믿었기때문에 안 그랬지만, 그쪽으로 천천히 갔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쪽엔 식량이 풍부했고, 오스만이 이스탄불을 확실히 막아준다면 다뉴브~흑해~드네프르&돈강이란 안정적인 수상보급로도 가능했을 테니까요.

    • 원인 2019.08.13 1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인이니까 폴란드의 세력권이었던 우크라이나를 지나는 쪽을 선택했겠죠. 폴란드 애국주의자의 발상입니다.

      포니아토프스키가 오스트리아군과 대결했을 때에도 최대한 많은 도시를 확보해서 전역이 마무리 될 때 점령지를 폴란드 세력권으로 인정받게 만드는 걸 우선시한 것처럼, 러시아 원정에서도 폴란드 지주들의 영향력이 남아있던 우크라이나를 일단 점령지로 확보하게 만들면 나중에 전선이 고착될 경우 우크라이나를 폴란드의 세력권으로 인정하도록 조약에 넣는다거나 하는 가능성까지 생각했을 겁니다.
      그야말로 나폴레옹의 힘을 빌어서 폴란드를 부활시키는 계략이죠.

      우크라이나로 진군시에 기대되는 지원전력은 오스만투르크, 크림타타르,코사크 총 3가지인데...
      오스만 투르크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동맹이라곤 하지만 이미 슐레이만 이후에 구조적인 한계에 도달해서 술탄의 친정군 조차도 믿을 게 못 되는 상황인데다가, 이미 몇년전에 러시아한테 박살나기도 했으니 그 이전부터 항상 그랬듯이 크림타타르나 코사크를 대타로 내세울 가능성이 높은데,

      우선 크림타타르는 약삭빠르고 기회주의적인 성향이라 전역이 유리하게 돌아갈 경우에는 협조적이지만 전역이 조금만 불리하다 싶으면 즉시 배신하던 전력이 있죠. 그리고 코사크는 근시안적인 이합집산이라는 고질병이 있어서 전부터 그래왔듯이 최소한 2개이상의 세력으로 쪼개져서 러시아편, 폴란드편, 그 외 타타르나 오스만 편 등등으로 나뉘어 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예카쩨리나2세 즈음 가면 이미 러시아의 통치체계가 견고해 져서 자유코사크의 범주에 들어가는 코사크들도 많이 줄어서 그닥 기대할 여지가 없죠.

      돈강으로 북상하면 상대적으로 반러시아성향이 강한 돈 코사크들의 "협조적이지는 않아도 방관적인 태도"에 힘입어서 큰 위협을 당하지 않고 모스크바 아래의 툴라까지 수로로 진격할 수 있긴 한데, 문제는 프랑스에서 돈강까지 가는 길이 확보가 안 되어 있는 게 문제죠.

      발틱해 쪽으로 가는 경우에는 이미 독일과 폴란드가 나폴레옹에게 제압당한 상태이고, 리보니아 지역도 독일,덴마크,스웨덴, 폴란드, 러시아가 돌아가면서 지배하던 곳이라서 현지세력이 배신할 경우에도 큰 문제가 안 되지만...
      프랑스에서 돈강으로 가려면 우선 다뉴브강을 따라서 흑해로 들어가는 게 상책입니다. 문제는 이 다뉴브 강변이 아직도 주로 오스만 세력권이 대부분인 상태인데, 오스만이 꺾였다고는 해도 여전히 강대국이라서 유사시에 러시아와 협정을 맺고 프랑스의 뒤통수를 칠 경우에 문제가 심각해 지죠.
      오스트리아가 오스만을 막아주면 좋겠지만 이 시점에서 오스트리아의 최대적은 프랑스인지라 오히려 둘이 합세해서 발칸반도 지리에 어두운 프랑스군을 협공할 가능성마저 있습니다.
      그래서 수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발틱해-볼가강 경로가 다뉴브강-흑해-돈강 경로보다는 낫다는 거죠.

      무엇보다도 알렉상드르1세를 잡지 못했을 경우에 안전하게 퇴각해서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는 다뉴브강-흑해-돈강 경로는 길이도 길고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 reinhardt100 2019.08.13 1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인) 제가 해 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써 주셨네요.

      볼가강이나 우크라이나 루트로 진격한 사례가 실제로 있긴 있었습니다. 1571년 및 1572년에 오스만 제국군이 드네프르강과 볼가강을 따라 진격했는데 당시 러시아는 이반 뇌제의 원조 대숙청으로 나라가 개판나버린 상태였습니다. 나라 제2, 제3 도시인 노브고르드, 프스코프에서 학살이 벌어진데다가 오프리치니크들의 전횡, 잇따른 황후 교체 및 고두노프, 로마노프, 슈이스키 등 보야르 가문의 점진적인 대두까지 겹치면서 개판이었죠.

      1572년 8월에 오스만 제국군과 모스크바 대공국 군이 모스크바 남쪽 교외인 몰로니에서 격돌했는데 이 때 오스만군이 대패했습니다. 전년에 모스크바를 약탈해서 최소 수만의 노예를 끌고 갈 때와 정반대 결과를 낳았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이 이 전훈을 고려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7. 제이슨 2019.08.13 2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간 집적소가 아니였을까요?
    많은 수의 병사들이 돌아오다 아사했다는데
    실제로 어디까지 가면 음식과 술이있다고 말해 좀비처럼 갔는데
    거기도 텅 비어었다고 하지요
    그럼 희망을 잃은 병사들은 무수히 죽어나가고
    그리고 계속 그런일이 반복되고...

  8. 2019.08.14 1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하고 동맹맺어서 양 방향으로
    진격했으면 승산이있지않았을까 그런
    궁금증도 생깁니다.


대체 이렇게 병참을 막대한 규모로 세심하게 준비했는데도 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보급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일까요 ?  이것도 흔히 말하는 가짜 뉴스 때문에 나폴레옹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것일까요 ?  일단 지난 편에서 보셨다시피 나폴레옹이 여태까지 해오던 것처럼 보급을 무시하다가 큰 코 다쳤다는 이야기는 억울한 누명이 맞습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준비에 있어서 무엇보다 보급에 정말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다부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필요한 보급품을 모두 다 가져가야 한다."

 

그렇다면 혹시 보급품 쌓아놓을 생각만 했지 운송 수단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한 것이 아니냐고요 ?  여러분도 생각하시는 것을 나폴레옹이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  그는 의붓아들인 외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습니다.

 

"폴란드 전쟁(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제2차 폴란드 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은 오스트리아 전쟁과는 완전히 다르다.  운송 수단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없어진다."

 

그런데 왜 망했냐고요 ?  결국은 기술의 문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단치히에 쌓아놓았다는 식량이 말을 위한 사료를 제외하고도 40만 대군이 50일간 먹을 분량이라고 했지요.  즉 2천만 명분의 식량을 비축해놓은 셈이었는데, 이게 과연 어느 정도의 분량이었을까요 ?  원래 원정 작전에 나선 병사들에게 제대로 보급이 안되는 것은 프랑스군 뿐만 아니라 보급이 잘 된다는 영국군에게조차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1인분에 대해서 규정은 당연히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경우 원래 하루에 건빵 550g, 쌀 30g (또는 건조 채소 60g 여기서 건조 채소란 주로 콩류), 염장 고기 200g, 그리고 포도주 1/4리터 (또는 브랜디 1/6 리터)를 지급받게 되어있었습니다.  요즘 식당 기준으로 삼겹살 1인분이 200g 정도지만 실제로는 어느 누구의 배도 채우지 못해서 결국 1인분 더 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결코 많은 양은 아닙니다.  요즘 식빵 1봉지가 대략 450g이니, 바싹 말린 건빵 550g이면 그걸로 배는 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포도주까지 생각하면 병사 한명이 먹이기 위해서는 대략 하루 1kg의 물자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즉, 단치히 항구에만 2만 톤의 건빵과 밀가루, 염장 고기 및 포도주가 보관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건 미국 남북전쟁 병사들의 모습입니다만, 건빵, 그러니까 비스킷(biscuit)의 모양새나 맛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비스킷을 먹으며 웃고 있는 병사들의 얼굴 표정이 비현실적이네요.  그림 출처는 https://www.artofmanliness.com/articles/how-to-make-civil-war-era-hardtack/ 입니다.  여기 보면 비스킷을 어떻게 굽는지 레시피가 나와있습니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수송하느냐인데, 러시아에 아우토반 같은 고속도로가 포장되어 있고 강력한 디젤 엔진을 갖춘 트럭들이 즐비하다면 별 문제가 안 될 수 있었습니다만, 당연히 당시엔 그러지 못했습니다.  실은 트럭과 고속도로가 있다고 해도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냥 단순 계산을 하면 2만 톤의 식량을 한꺼번에 수송하기 위해서는 현대자동차의 3.5톤 마이티 트럭이 5,714대 필요합니다.  이 트럭의 길이는 대략 6.7m인데 앞뒤 차간 거리를 1.3m씩 유지한 채로 움직인다고 해도 이 트럭들이 주욱 한 줄로 주욱 늘어서면 맨 앞차부터 맨 뒷차까지의 거리는 거의 46km에 달합니다.  당연히 이 트럭들을 위한 디젤 연료 보급도 생각해야 하고 또 당연히 있게 마련인 고장에 대비해서 수리 차량도 끌고 가야 합니다.  현대 기술로도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더군다나 아스팔트 고속도로가 아니라 진흙구덩이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군대에게는 정말 현대 3.5톤 트럭이 있다고 해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현대 마이티 3.5톤 트럭입니다.  디젤 엔진을 장착했습니다.)

 



기술이 없다면 물량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지난 편에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대규모의 치중대를 편성하여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총 20개 치중대대의 7,848대 마차(문헌에 따라서는 26개 대대 약 9,300대)를 편성했습니다.  당시 4마리의 말이 끄는 대형 마차의 경우 대략 1.36톤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이 7~8천대의 마차가 모두 대형은 아니었지만 그냥 모두 4두 대형 마차라고 가정하고, 또 준비된 마차도 7,848대가 아니라 9,300대라고 가정하고 계산하면 이 치중대가 실어나를 수 있는 무게는 총 12,648톤에 이릅니다.  40만 대군이 50일 먹을 식량의 최소치인 2만톤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대략 필요량의 60%에 달하는 막대한 수송량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러시아가 척박한 땅이라고 해도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틀림없이 식량을 일부라도 현지 조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6월 24일에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 침공을 시작한 것에는 날씨에 대한 고려도 있었지만 러시아의 곡물 추수기가 대략 8월~10월이라는 것도 고려된 것입니다.  이 정도면 여전히 프랑스군 병사들은 배가 많이 고팠겠지만 그래도 굶주림으로 궤멸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산에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연료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현대 마이티 3.5톤 트럭의 경우 연료 탱크에 150리터의 경유가 들어가고, 연비는 (적재량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빈 차인 경우 대략 7km/리터이니, 무거운 짐을 실은데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조건이면 대략 4km/리터로 잡겠습니다.  그러니 프랑스군이 쾌속으로 하루 30km씩 진군한다고 하면 하루 8리터의 연료를 써야 합니다.  연료 탱크에 들어있는 연료만으로도 18일간 작전이 가능하고, 나폴레옹이 진격을 시작한지 83일 만에 모스크바에 입성했으니, 5번의 연료 보급를 더 받으면 됩니다. 이 5번의 보급을 위해서는 약 3560톤의 디젤유를 수송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트럭이 1,017대 더 필요합니다.  전체 트럭 5714대의 18%에 해당하는 오버헤드입니다.  생각보다 많기는 해도, 감당이 안 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디젤을 먹는 트럭 대신 풀과 곡물을 먹는 말의 경우로 계산해보면, 화석 연료의 강력함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말은 하루에 대략 9kg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9,300대의 마차에 딱 4마리씩 37,200마리의 말만 필요하다고 가정해보시지요.  (현실적으로는 예비마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의 말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의 치중대에는 4두 마차 외에도 2두 마차가 꽤 있어서 전체 마차 수는 9,336대, 말은 약 32,500마리가 있었고 예비마가 6천마리 더 있었습니다.)  이 말들은 하루에 335톤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83일 동안이라고 생각하면 27,788톤의 사료입니다.  잠깐만요.  이 마차들이 실어나를 보급품의 총량이 얼마라고 했지요 ?  예, 맞습니다.  12,648톤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들은 자신이 실어날라야 하는 무게의 2배가 훨씬 넘는 무게의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이건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는 과제입니다.  게다가 기억하셔야 할 것이, 저 12,648톤의 보급품은 병사들이 필요로 하는 정량의 60%에 불과한 양입니다.  물론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식량이라는 짐은 사람이나 말이나 계속 먹어치우는 것이므로 여행을 가면 갈 수록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현대적인 디젤 엔진으로는 비교적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를 사료를 먹는 말로 해결하려 할 경우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인용했던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 Sharpe 시리즈 중의 한 장면을 읽어보시면 더욱 공감이 가실 겁니다.

 

Sharpe's Honour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3년 스페인) ---------------

하지만 이 뜻하지 않게 사령부에서 도착한 텐트는 쓸데없는 문제거리를 만들어냈다.  대대 전체의 텐트를 움직이려면 노새가 5마리 필요했다.  노새 한마리는 200 파운드의 짐을 싣고, 거기에 추가로 자기가 먹을 6일치 사료 30 파운드를 더 실을 수 있었다.  작년 여름 작전처럼 행군을 한다면 사료가 부족해지니까 추가 사료를 싣기 위해 추가의 노새가 필요했는데, 그 추가된 노새도 먹어야 하니까 그 추가된 노새가 먹을 사료를 실어나를 노새가 또 필요했다.  샤프가 6주간의 행군을 한다면 900 파운드의 추가 사료가 필요했는데, 이 사료를 실은 노새만도 4~5 마리가 필요했고, 이 노새들이 6주간 먹을 사료만도 700 파운드가 필요했으므로 추가로 4마리의 노새가 필요했다.  이 추가된 4마리 노새도 또 사료를 먹어야 했으므로, 이 웃기지만 정확한 계산을 끝마치고나니 5마리의 텐트 수송용 노새를 6주간 먹여살리기 위해 추가로 14마리의 노새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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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나고 말 났지 말 나고 사람 났냐 ?"라며 말 사료는 대폭 줄이고 사람이 먹을 식량을 더 가져가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들 하시겠지만, 그것도 정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강한 짐승입니다.  인간 병사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해도 쉽게 죽지 않고, 원래 걸어야 할 거리의 2배를 무리해서 행군해도 잘 버팁니다.  그러나 말은 먹이 부족과 과로에 견디지 못하고 픽픽 죽어 넘어집니다.  보통 전쟁에 나서는 인간은 지든 이기든 80% 이상이 살아 돌아오지만, 말은 60% 정도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인간과는 달리 말은 그냥 들판에 널린 풀을 뜯어먹으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겨울을 피해 훨씬 이른 시기인 봄에 작전을 시작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풀이 잘 자란 여름에 작전을 해야 말의 사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지요.  또 모든 기병대원에게는 말 먹이 풀을 벨 수 있도록 낫이 지급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은 원래 풀을 뜯어먹는 짐승이니 풀밭에 풀어놓으면 된다는 생각은 말이 하루종일 정말 풀만 뜯을 때나 통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강제로 걷게 하다가 길가의 풀을 약간 뜯게 하는 것은 사람으로 따지면 하루 종일 중노동 시킨 뒤에 얇은 식빵 2조각 던져주고 '사람은 원래 빵을 먹는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일입니다.  그나마 수만 마리의 말이 통과하는 길이라면, 그 길가의 풀은 순식간에 씨가 마르게 됩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네만 강을 건넌지 1달 만에 별다른 큰 전투도 없었는데 나폴레옹은 1만 마리의 말을 잃었습니다.  

 

(프랑스 포병대 소속의 마부 병사와 말입니다.  병사도 불쌍하지만 말은 더 불쌍했습니다.)

 



게다가 그나마 도로 사정이 괜찮은 편이라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도 치중부대는 언제나 진흙탕이나 다름 없는 도로 사정 때문에 보병 부대를 따라잡는데 항상 애를 먹었습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그리고 러시아로 이어지는 광활한 동부 유럽은 사정이 훨씬 나빴습니다.  역사가 리엔(Richard K. Riehn)에 따르면 이런 수준이었답니다.

"24일의 폭풍우는 폭우로 바뀌었다.  덕분에 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리투아니아의 통행로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진창으로 변해버렸다.  짐마차는 진창 속에 너무 깊게 빠져 바퀴 축이 땅에 닿을 정도였고, 말들은 지쳐 쓰러졌으며 병사들은 군화를 잃었다.  이렇게 퍼져버린 짐마차들로 인해 길이 막히자 병사들은 그 둘레를 빙 돌아가야 했고 보급품 마차와 포병대는 아예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날이 개어 해가 나왔는데, 진흙구덩이 속의 바퀴자국들은 햇빛에 바싹 마르자 아주 단단한 계곡으로 변해버렸다.  이런 울퉁불퉁한 도로 때문에 말들의 다리가 부러졌고 짐마차들의 바퀴가 깨졌다."

 

(영어로는 이런 진창 길에 난 바퀴 자국은 rut이라고 하던데, 한자어에 나오는 '전철을 밟는다'라는 단어의 전철(前轍)이 바로 앞서 간 마차의 바퀴 자국을 뜻하는 것이지요.  왠지 130년 뒤에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았던 어떤 오스트리아 화가 지망생 생각이 나는 한자어네요.)

 

 

이런 진흙탕 도로 위에 1.36톤의 짐을 싣는 4두 마차를 끌고 가면 결과는 뻔했습니다.  나폴레옹도 좀더 가벼운 2두 마차를 더 많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두 마차의 수송량은 4두 마차의 절반이 아니라 그보다 크게 더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두당 수송량이 떨어지면 그렇지않아도 답이 안 나오는 사료 문제는 더욱 답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나폴레옹도 이게 답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2두 마차 대신 4두 마차 위주로 마차를 준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의 말과 마차, 사료를 다 끌어모았다고 하더라도 치중부대가 나폴레옹의 배고픈 보병부대에게 건빵을 제때 전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나폴레옹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pdfs.semanticscholar.org/1d6e/96fd09126a40dca06ef01e8c9b13785e8379.pdf
https://warandsecurity.com/2013/02/11/why-napoleons-1812-russian-campaign-failed/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invasion_of_Russia
https://www.stolenhistory.org/threads/1812-french-invasion-of-russia-vs-logistics.1167/
https://www.bbc.co.uk/news/magazine-16929522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Paul Lindsay Daw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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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타카 2019.08.05 0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러시아는 말도 안되는 곳이군요ㅜㅜ 말이 작전하기 이리 어려운 동네에서 도대체 그럼 몽골군은 어떻게 러시아 정벌을 해낸 걸까요??

    • nasica 2019.08.05 07: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 ? 그 이야기는 간단하게라도 다음 편에 나올 예정입니다만... (누가 보면 짜고치는 고스톱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다 ㅋ)

    • reinhardt100 2019.08.05 0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단합니다. 나시카님께서 쓰실테니 이쯤에서 ㅋ

    • 원인 2019.08.05 1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단하죠.
      몽고군은 땅이 굳기 전에 공격해서 라스푸티챠에 당한 것이 아니라 땅이 굳은 뒤인 겨울에 공격해 와서 오히려 러시아를 빠른 속도로 파고들었죠. 추위는 몽고가 더 심하기 때문에 몽고군에게 겨울이 더 알맞은 계절이라고 할 수 있죠.

      라스푸티챠는 몽고군도 두려워 하는 무서운 지리조건이죠.
      몽고군이 헝가리 침공때에도 때마침 다뉴브강이 범람해서 늪지대가 되는 바람에
      헝가리에 결정타를 먹이지 못하고 결국 철수했죠.
      역사책에는 우구데이칸이 죽어서 철수했다고 하지만 다뉴브강 범람의 원인이 큽니다.

      만약에 다뉴브강이 범람하지 않았다면 ? 여전히 몽고군은 기동에 제약이 없었을 것이고..
      설사 우구데이칸이 죽었다고 해도 2선급 부대를 남겨놔서 헝가리를 초토화 시켰겠죠.
      마치 훌레구가 키트부카를 시켜서 맘루크를 공격하게 한 것처럼 행동했겠지만
      현실은 늪지대라는 가혹한 환경에서 더 이상 작전하는 게 무익했던 겁니다.

    • 이타카 2019.08.05 2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독자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이해하시면서 글을 쓰시는군요! 저는 지금 유럽 여행 중인데 내일 파리로 이동합니다ㅎㅎ 나시카님 애독자로서 앵발리드를 다녀오면 느낌이 유별날거 같네요 :)

  2. 고로 2019.08.05 0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 나폴레옹 지시대로 그 많은 보급물자가 진짜로 구축되었을까?? 분명 허수가 많았을거라 본다.. 그리고 러시아 땅이 너무 넓은게 문제지.. 거리만 가까우면 어케든 해결이 되는데..

  3. 2/28일 입대 2019.08.05 1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광복군의 최후의 비밀병기 무다구치 렌야 장군이 떠오르는 이유는 왜일까요ㅎㅎㅎ

  4. 원인 2019.08.05 1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는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다부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 이 대목에 나와 있듯이 나폴레옹은 작전에 있어서 다부와 상담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러시아 원정 건에 있어서도 다부와 함께 할 때
    보급의 중요성은 동의했지만 다부의 건의는 받아들이지 않았죠.

    다부의 작전은 발틱해의 해상운송을 통해서 리보니아에 거점을 만들고
    그 리보니아로부터 상트뻬쩨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공격하는 것인데,
    나폴레옹이 다부의 건의를 무시하고 바로 육로직공을 선택한 것이
    러시아 원정의 패배원인 중 하나입니다.

    • 원인 2019.08.05 1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마도 정서의 차이가 크겠죠.
      다부는 소심하고 걱정이 많아서 사소한 인명,물자 손실에도 민감한 성격인 반면에
      나폴레옹은 대담하고 자신만만해서 상당한 인명, 물자 손실을 아랑곳하지 않았죠.
      그러다 보니 러시아 원정에서 "보급선상의 손실"을 "머리속에서 체감하는 가상적인 고통의 크기"가 달랐을 겁니다.

      다부의 가상체감으로는 사소한 인명,물자손실도 심각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나폴레옹의 가상체감으로는 상당한 인명,물자손실도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겠죠
      전쟁이라는 게 생각외로 수행하는 주체의 정서적인 차이에 따라서도 많이 갈리거든요

    • 빅터 2019.08.05 22:38  댓글주소  수정/삭제

      해상은 영국이 잡고 있지 않나요?

    • 카를대공 2019.08.07 14: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로를 통한 보급,거점을 만든다는 생각은 과연 탁월한 전략안이네요.
      그런데 윗분들 말씀처럼 영국이 해상은 꽉 잡고 있는데 보급이 가능 했을까요?
      2차 대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롬멜한테 물자 대주려다 수많은 배들이 가라앉았었죠.

    • 원인 2019.08.07 15: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빅터, 알타리무,카를대공

      리보니아 해상운송은 복잡한 발틱해 연안을 따라서 항해하는 것이지 넓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가 아닙니다. 그걸 먼저 염두에 두셔야죠. 연안항해를 함으로서 영국해군의 능숙한 기동능력이 상대적으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한적으로만 움직이는 게 전제조건입니다.

      또한 이 지역은 30년 전쟁때부터 이미 무수한 스웨덴 해군력의 침공으로 그 방비에 이골이 난 지역이고 해안지역에는 요새와 해안포로 무장한 도시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죠. 슈트랄준트 같은 것은 단지 그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환경에서 최대한 해안에 바짝 붙어서 요새와 해안포의 엄호를 받으면서 연안항해를 할 경우에 독일,폴란드 지역에서는 영국해군이라도 그렇게 쉽게 공격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문제가 되는 발틱해 동쪽의 리보니아쪽은 경제력이 약하고 해안 방비가 잘 안 된 지역이므로 이 쪽이 약점이긴 한데, 그래서 제가 썼듯이 해안항해 + 해안육로행군을 병행해야 할 겁니다. 아마도 리투아니아 가까운 지역부터는 육상보급의 비중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지만 러시아 내륙을 가르지르는 무모한 경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안전하죠.

  5. 원인 2019.08.05 1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애초에 러시아인들이 몽고인들을 몰아낼 때 자주 사용한 수법이 바로
    수로를 이용한 우회공격이었음을 생각하면 러시아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은 바로 강을 따라서 기동하는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죠.
    공격부대뿐 아니라 보급부대도 강을 따라서 기동시켜야 되는 거죠.
    러시아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생각외로 강이 크고 숫자도 많아서 활용의 여지가 크죠.
    러시아인들이 몽고군을 수로기동으로 후방기습을 자주한 것도 이런 지리적인 유리함 때문입니다.

    수로를 사용한 공격, 수로를 사용한 보급을 1차적으로 고려했어야
    러시아 원정이 성공할 수 있는 겁니다.
    똑같은 러시아 땅에서 러시아인이 침공군을 물리치는 거나 침공군이 러시아인들을 물리치는 거나 원리는 같은 법인데,
    왜 러시아인들이 몽고군을 몰아낼 때 사용한 수단인 수로공격, 수로보급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았던 것일까 싶네요.

  6. 원인 2019.08.05 1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로를 이용한 우회공격으로 유명한 것이 바로 로마제국VS게르만족이죠.
    토이토부르크에서 게르만족의 기습으로 개박살난 로마제국이 보복공격으로
    처음에 육로직공을 선택했으나 늪지대로 변한 게르마니아에서 다시 박살났죠.
    그 다음에는 라인강을 따라 수로공격을 했고 결국 성공했습니다.

    라인강 깊숙히 들어올 때까지 게르만족이 로마군을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급로에서 손실이 전혀 없었고 아울러 기습의 효과까지 누릴 수 있었죠.
    서유럽에서 조차도 이럴진데, 더욱 광대하고 습한 동유럽에서는 당연히 수로를
    위주로 작전을 짜는 게 맞는데, 로마 매니아인 나폴레용이 왜 이건 참고하지 않았을까?

    나폴레옹의 주요 정책, 군략은 로마역사에서 가져온 것이 많은데, 왜 이 대목은 참고하지 않았을까 ? 의문이 듭니다.

  7. 수비니우스 2019.08.05 1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에 사극 엑스트라 알바 했을때 말이 길바닥에 똥을 싸대는걸 자주 봤는데 엄청 많이 싸더군요 ㄷㄷ 그만큼 많이 먹었다는 얘기겠죠

  8. 2019.08.05 14: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삑! 정답!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혹시 아닙니까? 물론 해군을 맨땅에서 건설하는 것도 방법이고, 기술 개발도 방법이고, 길을 닦아도 해결은 가능하고, 방법 자체야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능성, 효율성, 기대 편익, 기대 손실을 고려할 때 뭘 어떻게 해도 그 '한정된 자원'으로 다른 무언가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원래 체면값, 자존심값이라는 게 생각보다 비싸잖습니까? 프랑스 상공인의 이익을 조금 덜 지켜도 나폴레옹의 권좌 자체는 괜찮을 거라고 봅니다. 아마 위신이 떨어지고 참 견디기 힘들 수 있고 이런저런 머리 아픈 문제가 생기겠지요. 하지만 단언컨대 '묻지 마 러시아 원정'보다는 덜 나쁜 선택이었을 거라고 굳게 확신합니다.

    • nasica 2019.08.05 22: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 개돼지조무사 2019.08.06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고, 장구벌레님, nasica님이 아드님한테도 주입한다던 하이쿠를 여기서 들으면 민망하시겠습니다, 그렇게 딱잘라 돌려드리면 너무 뼈아프시지 않겠어요? :-)

  9. 2019.08.05 14: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손자병법을 보면,

    "적이 승리하지 못할 상황은 내게 있다. 내가 승리할 상황은 적에게 있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지지 않을 상황은 직접 만들기 쉬워도, 나폴레옹이 이길 가능성은 실수든 근본적 한계든 다른 무엇이든, 꼭 자의가 아니더라도 러시아 쪽에서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갈량도 북벌의 조건 중 하나를 대강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방 유목민의 침략이든 내분이든 다른 무엇이든)위나라의 상황이 어지러울 때 치고 올라간다."

    아쉽게도 완벽한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지요. 그럭저럭 괜찮았던 기회도 안타깝게 날려 버렸고요. 하지만 정답이 안 보인다고 해서 일부러 오답을 택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폴레옹도 러시아가 기회를 만들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안 만들어 주면 그냥 원정 자체를 때려치워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10. reinhardt100 2019.08.05 2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로를 이용하는건 사실 무리였습니다.

    우선, 수로의 연속성이 없다는 겁니다. 네만강, 드네프르강, 돈강, 볼가강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거든요. 하천 구간까지는 하천용 선박을 운용하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그 사이가 문제였죠. 18세기 내내 러시아도 인구가 증가하면서 대규모 경작지 확대가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고대와 키예프 루시 시대만 해도 광활하게 펼쳐졌던 늪지와 습지들이 상당부분 개간되어 사라졌죠.

    선박도 문제입니다. 45만 대군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최소 수백척의 상선단 및 그만한 수의 하천용 선박이 필요한데 프랑스군은 그걸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18세기 중엽에 영국과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해 톤수로 전열함급 수준의 상선이 수백척 이상 날아가버리면서 해운력의 기초까지 완벽히 박살난게 이 시대까지 복구가 안 되었습니다. 또한 스웨덴이나 덴마크가 적극적으로 프랑스에 가담했다고 해도 양국의 해운력은 도저히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독소전쟁 당시, 독일 국방군은 24개 대대의 철도 대대를 운용했지만 보급은 항상 부족했습니다. 철도 설비도 심각했지만 더 큰 문제는 보급품 집적지로부터 전선까진 대체적으로 6두 마차로 수송했는데 이게 엄청나게 문제였죠. 소련 파르티잔도 문제였지만 속도가 너무 느렸거든요.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143개 사단에 배속된 수송용 마필이 총 60만두였는데 작전 개시 2달만에 50%이상의 손실이 발생해서 태풍작전과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시간이 안 맞는 사태가 벌어졌죠.

    • 원인 2019.08.05 2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육로운송보다는 수로 운송이 맞는 선택이죠. 러시아 침공에 필요한 건 볼가강 하나뿐이니까 나머지 수로의 연속성은 필요 없습니다. 주요목표는 리보니아와 상트뻬쩨르부르크, 모스크바이지 그 외의 내륙지역이 아니니까요.

      설령 육로로 대군을 들여 보내고 육로보급에 어느정도 의존한다 해도 수로보급은 반드시 해 놔야 원정군의 편의를 보장할 수 있죠.
      2차대전때 미군이 200만대군을 상륙시킨 뒤에 노르망디 보급선에 의존해서 개고생하다가 앤트워프 항구를 확보해서 원정군의 부담을 크게 덜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물론 프랑스군이 2차대전 미군처럼 해운력을 가진 건 아니라 해도 마필운송에 의존하다가 차례차례 죽어가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겁니다. (다부는 원정군 규모 45만은 너무 크고 20만 정도가 적당하다고 봄. )

      스웨덴이 영국과 결탁해서 영국해군을 발틱해로 들여보낼 경우에 영국해군의 위협도 있을 수 있으니 해상운송, 해군력이동은 당연히 연안항해를 해야겠죠. 넬슨이 아부키르 만에서 연안방어태세에 있던 프랑스해군을 격파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니까요. 또한 병력수송은 선박승선과 해안선 행군 이동을 병행합니다.

      단순무식하게 공세만 따져 봤을 때.. 우선 리보니아를 확실하게 장악하는 것에 전력을 집중하고 나서...
      우선 뻬쩨르 부르크는 리보니아로부터 바로 바다에서 접근 가능합니다. 물론 요새화 되어 있으니까 바로 도시에 상륙할 수는 없고 그 옆에 상륙해서 일단 교두보를 구축해서 유리한 위치를 장악한 뒤에 해안선을 따라 육로로 보낸 전력을 증원해서 공략해야 되겠죠.
      해안선을 따라서 육로로 접근하는 것도 허허벌판에 가까운 내륙경로에 비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전합니다. 스웨덴-폴란드 전쟁때도 스웨덴 군이 이런 식으로 습한 해안땅으로 병력을 이동시켜서 폴란드군의 기습을 피했죠. ( 물론 괜히 폴란드군의 도발에 넘어가서 선빵날리다가 결국 털렸지만 )
      그 다음 모스크바가 문제인데,
      발틱-볼가 수로가 나폴레옹 침공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어서 뻬쩨르부르크쪽에서 모스크바 북쪽으로 흐르는 볼가로 진입할 수 있죠. 물론 이 때에도 강을 따라서 하천선박운송과 강기슭을 따라서 행군하기를 병행합니다. 강기슭의 습한 토질로 코사크 기병의 기습에 대한 안전함과 유사시 식량, 목초등의 확보에도 황량한 내륙지역 행군과는 비교가 안 되게 유리하죠
      물론 볼가강으로 들어가는 수로를 토목공사로 파괴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모스크바 방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죠. (이미 만든 운하를 매립해 봐야 주민들 동원해서 다시 파내면 됨 )

      해운선박은 예전 한자동맹 도시가 주류였던 발틱해 연안 도시에서 징발해서 씁니다. 선박 손실율은 그 당시 마비저( 말에 감염되는 박테리아 질명)으로 국경선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 마필손실에 비할 바가 아니죠.
      또한 선박이 부족하다 해도 마필수송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죠. 현대기술로도 열차수송과 선박수송이 말도 안 되게 차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원정이라는 본래 전략 목표에 좀 더 입각해서 고찰하자면...
      리보니아를 해상보급으로 연결하는 것은 단순히 원정군의 최초 공세만을 위한 게 아닙니다.

      로마군단이 원정에서 대부분 성공한 근본 원인이 바로 최전선 바로 뒤에 근거지 구축을 먼저 하고 최초 공세가 실패한 뒤에도 궤멸적인 타격을 받지 않고 재차 공세를 가하거나 퇴각할 경우에도 손실을 최소화 시키고 퇴각했기 때문이죠.
      하물며 리보니아는 로마군 보급진지처럼 허허벌판도 아니고 수백년 동안 독일과 덴마크, 스웨덴의 식민통치로 개발이 된 곳이죠.
      모스크바에서 철퇴하더라도 리보니아에 근거지를 구축해 놨다면 정신없이 쫓기다가 동사,병사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스웨덴이 북방전쟁에서 개털린 이유도 칼 12세가 리보니아에서 재보급하자는 신하의 말을 무시하고 육로직공을 했기 때문이죠.
      실제로 스웨덴이 북방전쟁으로 개털리기 전까지 계속적으로 유럽대륙에 힘을 투사하고 러시아를 통제하는 데 성공한 건 바로 리보니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는 또한 동아시아에서 만주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요동반도를 갖고있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위상입니다.

      물론 나폴레옹의 침공이 무모한 건 맞지만 일단 원정을 성공시키기로 결심했다면 B플랜, C플랜까지도 철저히 준비하는 게 맞죠. 그리고 B플랜의 1순위는 수로운송과 리보니아 확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러시아원정의 진짜 의미가 러시아를 굴복시키지 못했다는 사실 보다는 프랑스제국의 전쟁수행역량 그 자체에 치명타를 주어 결국 대불동맹의 압박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렉산드르1세를 잡지 못했을 때 손실을 최소화 시키고 안전하게 퇴각하는 것이 극히 중요했다는 겁니다.

  11. Spitfire 2019.08.05 2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병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역사의 if가 가능했을까 기대했는데, 말 사료 이야기 나오는 순간 ‘아..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드네요. 돌아보니 표트르 대제의 발트해 진출과 서구화는 어찌보면 유럽의 역사를 바꾸는 업적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정말 대제로 불릴만한거 같아요.

  12. apils 2019.08.07 02: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이 먹는 거 무시하면 안되지요. 예전에 동호회 분들이 말 몰고 다니다 오셨는데, 말 세마리가 수백평 잔디밭을 30분 안에 아작을 내놓더군요. 다행히 뿌리까지 파먹지는 않았지만 왜 말먹이 건초가 필요한 지 생생히 보고 느꼈습니다.

  13. 카를대공 2019.08.07 14: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 건초가 부족했다 <-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 자주 언급되는 구절이긴한데 이렇게 자세하게 써놓으시니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가 새삼 실감이 되네요.
    이래서 화석연료가 짱입니다.

  14. 롬. 2019.08.07 18: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흔히 그냥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해서 몰락했다 책 한줄로만 알았고 우연히 본 화학책에서 단추 소재 때문에 금방 떨어져서 외투를 여밀 수가 없었다 라고만 알았는데.. 정말 철저하게 준비했었군요.

    인터넷인가 다큐멘터리에서 줏어듣기로 러시아원정을 하느냐 마냐도 몇달동안 심각하게 내린 번복을 하며 고민 끝에 결정했다고 들었었는데.. 아 준비과정이 생각보다 굉장히 치밀했고 그럼에도 불구, 그 치밀한 준비로도 안된거였네요. 현대의 트럭 기술로도 아슬아슬한 거였다니... 어마어마했네요...

  15. 롬. 2019.08.07 18: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머니께서 어렸을 때 소에게 먹이를 주셨기에 소도 말이랑 먹는량 비슷하겠지 싶어서 여쭈어봤더니

    소가 풀을 먹는다지만 그건 소를 풀 많은 곳에 아침에 등교하며 풀어두고 나중에 하교하며 찾는등 정말 소가 일도 안하고 하루종일 제발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풀.만. 뜯었을 때나 그렇다 하시더군요...

    또 농번기엔 일을 많이 시키니까 하루종일 풀 뜯도록 놔둘 수가 없어서 여물을 먹이는데 이것도 그냥 지푸라기 막 주는게 아니라, 현대 군인들이 고칼로리 음식으로 식단을 채우듯 콩잎이나 호박잎 등등

    소취향에 맞는+소가 먹고 탈 안나는 종류의 + 그러면서 내가 구하기 쉬운 종류의 + 고칼로리의 풀을 섞어야 하는데다, 소화 되기 쉽게 끓여야 하는등 (그냥 풀이면 막 다먹는게 아니라 의외로 소도 취향이 있다 하시던...하긴 개•고양이도 사료 취향이 있는데 소라고 없을까 싶습니다...)

    말 그대로 고칼로리+소화가 잘되는 쑨 죽은 말그대로 요리 과정이더군요...

    하루종일 노동하는 말이 먹을 고칼로리의 풀을 자연에서 그것도 몇 천 마리가 동시에, 오늘도 먹고 내일도 먹고 모레도 먹을 양을 구하기란 당연히 불가능이고... 싸들고 간다친들 어마어마하겠네요

    한 마리가 말려서 가볍디 가벼운 그 풀을 킬로그램단위로 먹던데.... 무게도 무게지만 가벼운 풀을 킬로, 톤 단위로 모아야 하니 그 부피가 정말...

  16. 샤르빌 2019.08.08 14: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대 보급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하게 다수의 사람들한테 나눠줄 물품이나 먹을것 등등 계획하고 계산하는데도 환장할 정도로 머리아프더라고요.. 변수도 워낙 많아 아주그냥 난리 납니다..

  17. ㅁㄴㅁㄴ 2019.08.10 2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상보급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나 크림반도 깨부시는거 외엔 러시아원정은 당시 기술론 불가능의 영역이군요

  18. PANDA 2019.08.29 1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에 차관을 빌려줘서 포장도로를 깔수 있도록 해 주면 됩니다


1810년 마지막 날에 영국 상품의 입항을 허용하고 반대로 프랑스 상품에 대한 고율의 관세를 부가하는 짜르 알렉산드르의 칙령(ukaz)이 내려지자, 이제 전쟁은 거의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유럽 전체가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폴란드 문제로 1810년 중반부터 아웅다웅하고 있던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는 말로만 툭탁거리지 않았고, 서로 병력을 바르샤바 공국 접경 지역으로 증강 배치하면서 상호간의 긴장감을 키워나갔습니다.  나폴레옹은 1806년 전쟁 때 점령한 뒤 계속 움켜쥐고 있던 슈테틴(Stettin)과 단치히(Danzig) 등 프로이센의 주요 요새들에 병력을 추가 배치하고, 더 나아가 프랑스 내의 병력들도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등 동부 지대로 조금씩 이동시켰습니다.  

 

(오늘날 폴란드 영토가 된 슈테틴, 폴란드어로는 슈체친입니다.  오데르 강에 접하고 있는 도시로서, 베를린으로부터는 140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도시이며 원래 프로이센 영토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에게 동부 영토를 빼앗긴 폴란드에게 보상 형식으로 주어졌지요.)

 



1811년에 접어들자 본격적인 전쟁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1811년 4월에는 긴 꼬리가 달린 혜성이 관측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혜성은 큰 전쟁과 기아, 전염병 등 좋지 않은 대사건의 전조로 받아들여졌는데, 모스크바부터 마르세이유까지 유럽 전역에서 이 불길한 혜성을 보면서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알렉산드르 본인도 이 혜성에 대해 '어디까지나 과학에 대한 흥미 때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미국 대사와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혜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이, 나폴레옹은 정말 바빴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러시아와의 전쟁이 기존의 전쟁과는 규모와 성격면에서 완전히 다를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만큼 철저한 준비를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이 남긴 편지를 보면, 나폴레옹은 연대 번호만 들어도 그 부대의 지휘관이 누구고 어디에 배치되어있으며 편성된 전력이 어떤 수준인지 또 그 과거 전적이 어땠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이런 세세한 점까지 신경을 쓰면서 새로 병력을 뽑고 새 부대를 편성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로 무척 바빴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을 위해 준비한 병력은 대략 68만, 그 중에서 실제로 네만(Nieman) 강을 건너 러시아로 동진할 인원은 (학자들에 따라 이견이 분분합니다만) 대략 40만에 달헸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런 준비를 하면서 러시아군을 무찌를 신무기나 새로운 전술 등을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신기할 정도로 새로운 군사 기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신 그가 이번 전쟁 준비에 있어서 가장 관심을 둔 것은 바로 병참이었습니다.  그는 1807년 삭막한 폴란드 땅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면서 동부 유럽은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독일이나 이탈리아와는 확연하게 다른 곳이라서 기존처럼 현지 조달에 의존해서 싸우다가는 굶어죽기 딱 좋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역대급의 보급망을 준비했습니다.

먼저, 나폴레옹은 1811년부터 1812년까지 폴란드를 가로지르는 비스툴라(Vistula, 폴란드어로는 Wisła 비스와) 강을 따라 대규모의 보급창을 건설했습니다.   비스툴라 강은 바르샤바는 물론 모들린(Modlin)과 토른(Thorn) 등의 주요 요새 및 도시를 거쳐 항구 도시 단치히(Danzig, 현재의 그단스크 Gdansk)에서 발트 해로 흘러가는 폴란드의 대표적 수로였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영토와 직접 맞닿아 있는 라인 강과 이 비스툴라 강 사이에 총 5개의 수송로를 설정하고 프랑스와 독일 지역에서 긁어모은 물자를 실어날랐습니다.  

 

(유럽 대륙의 주요 하천입니다.  템즈 강 같은 것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지만, 비스툴라 강은 당당히 표시될 정도로 꽤 중요한 강입니다.)

 

(브레슬라우, 즉 보르츠와프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오데르 강에 접한 도시입니다.)

 

 

 

그 결과, 1812년 1월까지 나폴레옹은 단치히에만 40만 명의 병사들과 5만 마리의 말이 50일 간 먹을 식량과 사료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40만 명 x 50일 = 2000만 명분의 식량을 쌓아놓은 것이지요.  이 외에도 오데르(Oder) 강에 접한 프로이센의 도시 퀴스트린(Küstrin, 폴란드어로는 Kostrzyn 코스트신)과 슈테틴(Stettin, 폴란드어로는 Szczecin 슈체친)에도 별도로 수백만 명분의 식량을 축적했습니다.  역시 오데르 강에 접한 프로이센 도시 브레슬라우(Breslau, 폴란드어로는 Wrocław 브로츠와프)와 비스툴라 강에 면한 프오츠크(Płock) 및 비소그루트(Wyszogród) 등에는 거대한 곡물 창고와 제분소가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생산된 밀가루는 비스툴라 강을 통해 배 편으로 토른에 보내져 하루에 6만개씩의 큼직한 야전용 건빵이 구워졌습니다.   그 외에도 각 부대의 뒤를 따라 가도록 걸어다니는 푸줏간인 가축떼를 5만마리나 모아두었습니다.  

 

(베를린과 슈테틴, 즉 슈체친과의 거리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원래 슈테틴은 독일 영토일 때 베를린의 외항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아울러 비스툴라 강변을 따라 늘어선 폴란드의 주요 도시들과의 거리를 봐두시기 바랍니다.)

 

 

(나폴레옹의 주요 물자 수송로 역할을 한 비스툴라 강, 즉 비스와 강입니다.  폴란드의 주요 도시들은 이 강을 따라 늘어서 있습니다.) 

 



이렇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잔뜩 쌓아만 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아니었습니다.  이것들을 쾌속으로 진군하는 부대들의 속도에 맞춰 러시아 내륙으로 수송을 해야 했지요.  나폴레옹은 이를 위해 치중대대(train battalion) 20개를 편성했습니다.  여기에는 7,848대의 마차가 배속되어 배고픈 병사들을 먹일 식량을 실어나르도록 했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의 규모인가하면, 스페인 전역을 위해 나폴레옹이 조직한 치중대대의 규모를 보시면 됩니다.  1810년 10월, 나폴레옹은 총 12개 치중대대를 편성했는데, 여기에 포함된 마차의 수가 1,700대 정도였습니다.  그 중에서 스페인 방면군에는 5개 대대를, 포르투갈 방면군에는 2개 대대를, 그리고 프랑스 국내에서 5개 대대가 배치되었습니다.  1810년 당시에는 스페인에 배치된 프랑스군의 수가 20만을 훌쩍 넘었는데, 거기에 고작 5개 대대 약 710대의 마차가 할당된 것입니다.  그런데 40만의 러시아 방면군을 위해 10배가 넘는 수의 마차를 준비한 것을 보면, 확실히 나폴레옹은 여태까지와는 다른 각오를 가지고 수송에도 매우 신경을 쓴 것입니다.  

 

 

(한번도 하일라이트를 받지 못한 부대가 바로 치중대이지요.  하지만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것은 보병과 포병, 기병일지 몰라도, 전쟁을 이기는 것은 바로 이 치중대였습니다.)

 



나폴레옹이 평소에 등한시하던 식량 문제에도 이렇게 신경을 썼으니 탄약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더욱 철저한 준비가 이루어졌습니다.  현지 조달을 중시하던 나폴레옹조차도 무기와 탄약은 항상 본국으로부터의 수송에 의존했었거든요.  바르샤바에는 큼직한 무기고가 건설되어 각종 탄약과 무기가 집적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된 주요 식량 집적소인 단치히, 슈테틴, 퀴스트린 등에는 식량 뿐만 아니라 각종 야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제3차 대불동맹전쟁 때 동원된 나폴레옹의 7개 군단이 보유했던 대포의 수는 총 300문을 넘지 않았고,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당일날은 훨씬 더 적은 수의 대포가 동원되었습니다.  러시아 원정 이전까지는 유럽 최대의 전투였다는 바그람 전투에 동원된 프랑스군의 전체 대포 수는 488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센의 마그데부르크(Madeburg)에 집결시킨 탄약과 포병대의 규모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이 곳의 무기고에는 135톤의 화약과 함꼐 200만발의 머스켓 탄약포가 축적되었을 뿐만 아니라, 야포 462문과 공성용 중포 100문이 집결되어 있었습니다.  슈테틴에는 263문의 야포, 100만발의 머스켓 탄약포, 90톤의 화약을, 퀴스트린에는 108문의 야포와 100만발의 탄약포를, 그리고 글로가우(Glogau)에도 108문의 야포와 100만발의 탄약포, 45톤의 화약을 축적해놓았습니다.  1812년 5월, 러시아를 향해 출발하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는 806문의 야포와 761,801발의 포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야포 1문당 거의 1,000발에 가까운 포탄을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사상 최대이기도 하고 또 유례없이 격렬한 포병전이었던 바그람 전투 40시간 동안 프랑스군 포병대의 488문은 약 10만발을 발사했는데,  이는 1문당 200발 정도를 쏘아댄 것이었습니다.  이런 격렬하고 대규모였던 전투는 나폴레옹 인생 전체에서도 흔치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정말 충분한 양의 탄약을 준비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막대한 준비를 했지만, 아시다시피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결국 병참 문제로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www.indiana.edu/~psource/PDF/Archive%20Articles/Spring2011/LynchBennettArticle.pdf
https://pdfs.semanticscholar.org/1d6e/96fd09126a40dca06ef01e8c9b13785e8379.pdf
https://warandsecurity.com/2013/02/11/why-napoleons-1812-russian-campaign-failed/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invasion_of_Russia
https://www.stolenhistory.org/threads/1812-french-invasion-of-russia-vs-logistics.1167/
https://www.bbc.co.uk/news/magazine-16929522
Napoleon's Train Troops: 1800-1815. Paul Lindsay Daw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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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웃자웃어 2019.07.29 1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국 육군의 병력대비 전쟁비용이 프랑스군보다 높은 이유가 보급을 직접하거나 현지조달을 해도 현찰로 따박따박 지급해서 라고 알고있습니다. 그렇다면 러시아 원정도 병력대비 전쟁비용이 많이 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러시아 원정의 전쟁비용은 얼마이며 이는 비유적으로 어느정도의 규모인가요?

  2. 동겸좀비 2019.07.29 14: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차대전 독일군의 병참한계선도 드리나-드네프르 강까지 였는데, 나폴레옹이라고 무슨 재주가 있었을까요.
    독일은 침공군의 규모가 400만이었으니 나폴레옹의 러시아 방면군 보다 10배나 많았네요.

  3. 터키는 강하다 2019.07.29 18: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굉장한 양의 화약과 포탄을 저장했군요.아무래도 밀이나 감자랑 다르게 포탄과 화약은 러시아 농촌을 약탈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저리 준비한걸까요.

  4. 웃자웃어 2019.07.29 1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러시아군이 보로디노에서 프랑스군을 고전시킨 이유가 뭘까요?

    • 원인 2019.07.30 2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폴레옹이 몸이 좋지 않아서 적극적으로 지휘를 하지 못했죠.
      다부가 크게 우회기동하자고 건의했는데, 나폴레옹이 각하시킴.
      프랑스군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이 바로 나폴레옹이죠.
      나폴레옹이 몸이 아프면 패하는 경우가 많죠. 보로디노, 워털루 등.

    • reinhardt100 2019.07.30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로디노 전투가 중요한 이유가 소련식 군사학의 특징이라고 해도 좋을 포병전을 쌍방이 한치의 실수 없이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포병전력에서 프랑스군 587문, 러시아군 640문이었는데 쌍방의 공세 상당부분을 포병으로 틀어막아버리면서 격전이 되어 버린 겁니다. 후반부 양군의 포병 화력 밀도에서 프랑스군이 앞서버리면서 전투가 프랑스측으로 전세가 기울어버렸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담이지만 이 때 경험부터 러시아 및 소련은 포병사단, 포병군단 개념을 자신들의 군사학에 도입했고 냉전기 서방권이 가장 무서워한 동구권의 재래식 전력인 포병전력이 적극적으로 확충됩니다. 절대 기갑전력이 아닙니다. 서방권이 MLRS니 통합화력이니 하는 거로 막으려던 건 어디서 쏟아질지 모르는 동구권의 압도적인 포병전력에서 쏟아질 '전선 그 자체를 뭉개버릴 수준의 화력'이었습니다. 그걸 막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이상의 화력으로 맞불 놓는 것이었으니까요.

  5. 프로이센 2019.07.29 2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봤습니다. 말이 먹을 건초가 부족했던 걸까요

  6. 동장군 2019.07.30 0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의 수호신인 그 분을 너무 얕본것 아닐가요.
    주석페스트도 있고

    • 비우 2019.08.29 2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표적으로 잘못알려진 사실 입니다 나폴레옹은 겨울이 되기전에 모스크바를 점령하였고 겨울이 되기전에 떠났습니다 이때까지만 봐도 프랑스군의 비전투 손실은 엄청난 규모 였습니다

  7. 돌격대장 2019.07.30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보자면
    보급선이 길어짐에 따라 수송에 어려움이생긴것
    아닐까요.러시아군의 청야전술에 현지조달도
    어려워져서 병참이 터졌을거같군요.

  8. 원인 2019.07.30 0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원정 실패는 몇가지 원인이 있죠.
    (1) 육로보급 그 자체
    (2) 군마의 마비저 박테리아 감염
    (3) 인간의 티푸스 감염
    (3) 주석으로 된 외투단추가 추위에 파쇄

  9. reinhardt100 2019.07.30 23: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평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라스푸티차가 끝나는 5월초부터 9월까지 얼마나 진격하냐?' 입니다. 물론 보급이 더 중요하죠.

    역사상 러시아 평원전에서 유일하게 러시아를 장기전으로 이긴 나라는 폴란드 하나입니다. 대동란 시절, 즉 1605년~1618년 전쟁기인데 이 시기 폴란드군을 나폴레옹이 꽤 참고했다는 알 수 있습니다. 폴란드군은 당시 핵심 전력인 윙드후사르는 보로디노 전투와 같은 수준의 중요한 쿠쉰 전투 같은 전투에서 주력으로 활용했고, 스몰렌스크 공성전 같은 경우는 포병전력이 상대적으로 충실했던 서유럽 출신의 용병대를 주로 활용했습니다. 나폴레옹 역시 보로디노 전투에서 최정예인 제국근위대는 일단 한번 더 쓰기 위해(?) 아꼈지만 그 외 주전력은 모조리 쏟아부었죠. 즉, 폴란드군처럼 단 한번의 결전으로 러시아군 주력을 붕괴, 알렉산드르 1세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보급이 뒷받침되야 이게 가능한데 폴란드군은 가능했지만 프랑스군은 불가능했다는 겁니다. 당시 폴란드 정규군은 모스크바에서 퇴각한 1612년부터 연방 역사상 최대 콘페라데치아(이익을 위한 연맹집단)을 결성해서 세임(연방 의회)와 국왕인 지그문트 3세에게 반란을 일으켰죠. 이 때문에 용병대인 '묵시록의 기사들'인 리소브치치가 국가 방위 및 러시아 침공전을 도맡았죠. 이들은 보급은 '당연히 러시아에서 현지조달한다'였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가 리소브치치는 소수 기병(6개 부대 약 2만)이었다는 점, 러시아 서부 전역을 보급조달지역으로 보고 무차별적인 약탈로 충분한 보급을 할 수 있었다는 거죠.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모스크바 단 하나만 노린 40만 이상의 공격군이 리소브치치처럼 광역 원정을 할 수 없었고 현지조달이 이미 불가능했다는 겁니다.

    후대 독소전쟁이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참고해 3개 집단군으로 분리, 광역 섬멸전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을 진행했지만 이 판국에도 후방 정리가 안 되서 개판된 걸 보면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이미 무리수가 여기저기서 보였던 겁니다.

웰링턴은 포르투갈에 상륙하자마자 곧 이베리아 반도의 지형적, 그리고 사회적 특수성이 영국은 물론 프랑스나 독일 등 기타 유럽 지역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큰 특징으로, 제대로 된 길이 없었습니다 !  이는 스페인의 침공 위협 때문에라도 스페인과의 교통로를 적극 개발하지 않았던 포르투갈의 특수성에도 기인했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나 모두 산업과 통상의 발달이 부진했다는 점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지역간에 거래를 할 상품이 없다보니 마차가 다닐 일도 없고, 마차가 다닐 일이 없으니 넓직한 길이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스페인은 지역 감정이 꽤 심한 나라여서 지방 간의 인적 왕래도 그다지 많지 않다보니, 더더욱 내륙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교통망에 더해,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건조한 편이라서 농업 생산량이 그렇게 풍요롭지는 않았습니다.  이탈리아나 독일의 농가들은 어지간한 농가의 창고문만 걷어차도 밀과 보리, 달걀이 쏟아져 나왔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포르투갈은 척박한 스페인과 대비했을 때조차도 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원래 현지 조달에 의존했던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도 쫄쫄 굶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온 지역이 이렇게 가난하다보니,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어려웠지요.  




(보시다시피 이베리아 반도의 상당 부분이 산지이거나 메마른 지대라서, 농업에 적절한 곳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지금도 스페인은 올리브유 생산이 매우 활발한 나라입니다만, 그건 반대로 곡물 농사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지대라는 반증입니다.)




현지 조달이 어려우면 본국에서 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베리아 반도의 열악한 내륙 교통망이 발목을 잡습니다.  가뜩이나 프랑스 본토와 스페인 사이에 피레네 산맥이 있는 것도 장애가 되었는데, 해안길을 통해서라도 수송대가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한 뒤부터가 진짜 고생길이었던 것입니다.  세계 지도에서 보면 스페인은 프랑스나 독일에 비하면 별로 큰 땅덩어리처럼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건 메르카토르 도법의 특성상 남쪽에 있는 땅이 좁아보이는 것입니다.  프랑스가 64만 평방 km인 것에 비해 스페인이 50만 평방 km으로서, 스페인은 굉장히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탄한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 높은 산맥과 언덕이 많은 땅이지요.  길도 제대로 없는 그런 땅을 가로질러 20만 대군이 먹을 식량을 마차로 수송한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그런 도전은 스페인의 게릴라들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경우, 이베리아 땅이 반도이니만큼 그냥 해상으로 수송한 뒤 내륙으로 운송하면 훨씬 일이 쉬워질 것입니다.  문제는 영국의 저 망할 로열 네이비 때문에 그게 불가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온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현지 조달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는 수탈당하는 스페인 민중들에게도 큰 비극이었지만 약탈하는 프랑스군에게도 무척 고단한 일이었습니다.  만명 단위의 대군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 그 일대의 식량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게 됩니다.  프랑스군이 먹어치우는 것도 있지만, 그 일대의 농민들이 식량을 감추거나 떠나버리기 때문이었지요.  결국 프랑스군은 한 곳에서 1주일 이상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굶지 않으려고 먹을 것을 찾아 끊임없이 유랑하는 거지떼 내지는 떼강도 신세가 된 것이지요.  군사 작전이라는 것에서 이동이 잦을 수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적을 압박하거나 반대로 피하기 위해서이지 굶지 않기 위해서 이동하는 군대에게는 작전의 유연성이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스페인에 투입된 근 20만에 가까운 프랑스군 대부분은 먹을 것을 찾아 이동 중이거나, 분산되어 먹을 것을 약탈 중이거나, 혹은 신기루 같은 게릴라들의 뒤를 쫓아 산 속을 헤매면서 세월을 낭비해야 했고, 실제로 영국군이나 스페인군과의 전투에 투입되는 프랑스군은 그 1/4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웰링턴은 유능한 지휘관답게, 이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영국군이 10만 단위의 대군으로 되어 있는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군량 조달을 가장 유용한 무기로 삼아야 한다고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조건은 비슷했습니다.  길이 형편 없는 것도 똑같았고, 바닷길을 이용할 수 없는 것도 같았습니다.  스페인의 주요 항구들이 대부분 프랑스군 손아귀에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식량을 수송해올 거리는 영국 측이 훨씬 멀었습니다.  영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거리가 프랑스와 스페인의 거리보다 멀었고, 그나마 영국 본토도 대륙 봉쇄령으로 인해 식량난이 심해져서 밀과 빵값이 오르는 등 난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규모로 식량을 포르투갈에 보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미국과 남미, 오스만 투르크, 심지어 북아프리카 모로코 등지에서 식량을 구매하여 포르투갈로 실어날랐습니다.




(혼블로워 시리즈 중에서 (실제 소설이 씌여진 순서는 아니지만) 첫번째 편인 Mr. Midmanship Hornblower는 혼블러워의 사관후보생 시절을 그린 옴니버스식 소설입니다.  그 중 한 에피소드가, 식량으로 소를 사러 북아프리카 이슬람 지역에 들어갔다가 전염병에 휘말려 격리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영국군 병참부에게 진짜 고난은 포르투갈 해변에 온갖 보급품이 잔뜩 쌓이는 바로 그 순간부터였습니다.  1808년 8월, 당시 쥐노가 점거하고 있던 포르투갈을 탈환하기 위해 웰슬리가 포르투갈 마세이라(Maceira) 만에 상륙했을 때, 전에 언급한 샤우만(August Friedrich Ludolph Schaumann)이라는 이름의 독일 출신 병참 장교에게 주어진 임무는 터무니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조수도 부하도 없이 혼자서, 그저 공책 한권을 주고는 해변 여기저기에 야적된 수많은 보급품 더미를 조사하여 목록을 작성한 뒤 이제 내륙으로 진격할 영국군 부대를 따라 수송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샤우만이 그런 업무에 숙련된 병참 장교였는가 하면 그게 또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랑스군의 하노버 침공 이전에 하노버 군에서 몇년 장교로 복무했다가 퇴역한 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 장부 작성 등의 업무를 좀 해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영국군 소속 독일군 전투 부대인 KGL 제7 연대 소속의 평범한 장교였고, KGL 장교로서는 승진과 연금의 비전이 없다고 보고 일당 7.5 실링(현재 가치로 대략 9만5천원)의 급여를 위해 병참 장교로 자리를 옮긴 아마추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아무런 지침이나 교본이 없었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The British Commissary'(영국 병참부)라는 멋대가리없는 제목의 책이 한권 있었는데, 이는 메서리어(Havilland le Mesurier)라는 이름의 영국인이 쓴 것으로서, 당시 영국군 병참부 직원들에게는 수학의 정석이나 다름없는 책이었습니다.  메서리어는 원래 해외 무역업자였다가 프랑스 혁명정부와 영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1793년부터 네덜란드 방면 영국군 원정대에 딸린 병참 장교 역할을 했습니다.  1794년에서 그 다음해까지 벌어진 이 방면 전투에서 영국군은 형편없는 성과만 냈을 뿐이었지만, 정말 아무 준비도 안 되어있던 영국군 병참부는 이 난리통 속에서 그나마 나름 경험과 수완을 쌓았던 모양입니다.  그 이후에도 메서리어는 병참부 장교직을 사직했다 복직했다 했는데, 영국군 병참부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은 저 'The British Commissary'라는 책을 저술한 것이었습니다.  




(메서리어의 'The British Commissary'입니다.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책입니다만, 저는 못 읽어보았습니다.)




그런 교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포르투갈에서의 영국군 병참부는 초기에 극심한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참부는 힘만 들고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노동일을 하는 부서라는 인식이 강하고 실제로도 그랬던 것만큼, 빛나는 전통이고 뭐고가 없었던 것입니다.  달랑 책 한 권을 손에 든 경험 없는 병참부 장교들도 막대한 보급품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사실은 병참부 소속 장교들은 진짜 장교도 아니었습니다.  병참부는 군의 일부가 아니라, 재무부의 감독과 지시를 받는 파견직 민간인들이었거든요.  따라서 deputy commissary-general이니 assistant deputy commissary-general이니 하는 것들은 진짜 장군이 아닌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말단 사병들이 경례를 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민간인 정부 관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장교들과 엇비슷한, 그러나 분명히 차이가 나는 군복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권총과 군도와 같은 무기도 휴대했습니다.  병사들은 '저것들은 장교 비슷한 군복은 입었지만 장교가 아니며,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와 함께 싸우지 않고 후방으로 도망친다'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전투가 벌어지면 적지 않은 경우 무기를 들고 프랑스군과의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이처럼 아군에게 저평가되었지만, 사실 이들의 업무는 제1선 장교들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우며 개인적인 창의성과 수완, 용기와 기지를 발휘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전투 현장에서 대포알과 머스켓 탄환에 노출된 채 병사들을 이끌고 전진할 때, 멋진 붉은 제복을 입은 장교가 부릴 수 있는 재주는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저 운이 좋은 자는 살아서 전진할 수 있는 것이고, 운이 나쁜 자는 대포알에 두동강이 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흙탕 길에 바퀴가 빠진 무거운 수레를 어떻게 빼낼 것인지, 수송에 3일 걸리는 건빵 자루 더미들을 어떻게 2일 안에 최전방까지 나를 것인지, 가진 돈은 50쉴링 밖에 없는데 일당 1쉴링을 요구하는 노새 30마리를 어떻게 3일 동안 빌릴 것인지 등은 그야말로 담당 직원의 역량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성공과 실패에 따라 전투의 승패가 뒤바뀔 수 있는 일이었지요.  그런데도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밀가루 자루를 실은 노새들을 끌고 최전선 부대에 도착한 병참부 장교에게 주어지는 것은 '왜 이리 늦게 왔냐' '왜 보급품이 이것 밖에 없는가' 등의 핀잔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병참부는 체계화가 꼭 필요한, 나름대로 무척 섬세하고 정밀한 병과입니다.  가령 포르투갈을 통해 상륙하는 영국군 병사들의 행군에 대해 웰링턴이 병참감(Commissary General)인 케네디(Sir Robert Hugh Kennedy)에게 보낸 지시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들어있습니다.


"상륙하는 부대는 각자 4일치의 빵과 2일치의 고기를 휴대한다.  병사들이 휴대하는 빵 외에, 1만 명의 3일치 빵을 수송해야 하는데, 가능하다면 노새를 이용해 날라야 한다.  각 노새에는 2개의 자루, 즉 224파운드의 짐을 실을 수 있으므로 전체를 위해서는 130마리의 노새가 필요하다."


이 계산은 꽤 합리적입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의 배식량은 하루에 빵 1파운드였는데, 1만 명의 3일치라면 3만 파운드입니다.  224파운드를 실을 수 있는 노새를 130마리 동원한다면 224 * 130 = 29,120 파운드이므로, 1인당 0.97 파운드씩의 빵을 3일간 보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계산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노새가 먹을 사료는 계산에 넣지 않았쟎습니까 ?  노새는 하루에 10파운드의 곡물을 먹어야 했고, 병사들이 3일 행군하는 것을 따라 나섰다가 다시 보급품이 쌓여있는 항구로 되돌아오려면 왕복에 6일이 걸렸으므로, 노새 1마리가 싣는 224 파운드 중 최소 60파운드의 곡물은 노새가 먹어치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즉, 130마리의 노새의 실제 수송량은 29,120 파운드가 아니라 21,320 파운드였고, 병사들은 3일간 0.97 파운드가 아닌 0.7 파운드라는 부실한 양의 빵을 받아야 했습니다.




(도로망이 형편없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노새들을 이용한 보급품 수송이 정말 최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미숙하기 짝이 없었던 영국군 병참부도 2년 정도에 걸쳐 노새꾼들과 노새들을 고용하여 운용을 하면서 경험이 쌓여, 그 고용 및 활용, 급여 지급 등 온갖 자질구레한 잡무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실은 총사령관인 웰링턴 장군이 이런 노새 한마리가 몇 파운드의 짐을 싣을 수 있으며 그래서 몇 마리의 노새가 필요한지에 대해 계산하여 병참감에게 보내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한 일이기는 합니다.  이런 편지는 오히려 반대로 병참감이 원정군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형태로 보내는 것이 맞겠지요.  당시 웰링턴은 병참부 장교들과 서기들의 무능력에 대해 짜증이 잔뜩 난 상황이었는데,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샤우만을 포함한 대부분의 병참 장교들이 별다른 병참 업무 경험도 없이 새로 채용된 사람들이다보니 워낙 아는 것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군 병참부는 웰링턴 하에서 혁혁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총사령관 웰링턴이 직접 나서서 '가장 신경써야 하는 부서'라고 지목하면서, 저렇게 노새 몇 마리가 필요하다는 계산까지 세세히 해줄 정도였으니 당연히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특히 1810년 10월부터 다음해 초까지의 대치 끝에 토헤스 베드하스(Torres Vedras) 방어선 앞에 마세나의 프랑스군을 후퇴시킨 승리는 사전에 충분한 군량을 비축해놓은 영국군 병참부가 아니었다면 절대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아무도 병참부의 공로를 알아주지 않았지요.  이 사실은 웰링턴 휘하 어지간한 장군들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 등의 인터넷 사이트에 많은 정보가 있는 것에 비해, 웰링턴 휘하의 전체 병참부 책임자였던 케네디(Sir Robert Hugh Kennedy)에 대해서는 정말 정보가 없다는 것으로도 반증됩니다.  오히려 영국군 병참부의 위력과 중요성을 잘 알고 두려워했던 것은 적군인 프랑스군이었습니다.  1812년 웰링턴과 대치했던 마르몽(Marmont) 원수는 나폴레옹에게 이와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웰링턴은 제게 보급품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광활한 척박함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마르몽은 유난히 영국군의 노새 부대에 대해 넋두리를 많이 늘어놓았습니다.  1811년에도 그는 나폴레옹의 참모장 베르티에에게 편지를 써서 '영국군은 노새 1만2천 마리를 이용하여 너무나 쉽게 이동한다, 그러니 내게 단 1천2백 마리라도 노새를 좀 공급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개성을 가지고 사람과 소통하는 용들이 등장하는 나오미 노빅의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 '테메레르'에 대해 전에 언급했던 적이 있지요.  대포의 시대라고 해도 그런 거대한 용들 수백 마리로 구성된 군대가 있다면 아마 천하무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용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거대한 용들에게 먹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도 일종의 용이었습니다.  그 대군을 일거에 밀어넣으면 스페인 정도야 순식간에 휩쓸어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군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에 대한 답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지요.  영국군이 소수로도 내노라하는 나폴레옹의 부하들을 차례로 꺾고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낸 것은 바로 그 문제를 잘 해결했기 때문이었고, 그 핵심에는 영국의 병참부가 있었습니다.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https://en.wikipedia.org/wiki/Glacis

https://en.wikipedia.org/wiki/Havilland_Le_Mesur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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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ithel 2019.02.18 0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샤프가 텐트 노새 계산하던게 생각나네요.
    아참, 테메레르의 작가는 나오미 노빅입니다.

  2. TheK의 추천영화 2019.02.18 0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하편이네요. 지금 버스에서 내려야 해서 쟁여놓았다 봐야겠네요. ^ㅇ^*

  3. 카를대공 2019.02.18 1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길이 없다,산지,건조한 기후
    이거 남 얘기 같지가 않군요.

    대대로 한반도의 기후나 지형이 풍요로운 땅과는 거리가 멀었죠.
    알면 알수록 왜 옆나라들에 치이고 살았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 Spitfire 2019.02.26 1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반도가 곡창지대에 비하면 살기가 어려웠겠지만 주변국가들에 비해 풍요롭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의 국가들이 자주 침입을 한 것이지요. 도둑은 부잣집을 털지, 거지를 털지 않습니다.ㅎㅎ

  4. TheK의 추천영화 2019.02.18 1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랬군요. 영국이 승리한 이유가.
    역시 전쟁에선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끔 알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ㅇ^*

  5. 인간늑대 2019.02.18 1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재미있는 글.
    감사합니다.

  6. 지나가다 2019.02.18 21: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들은 항상 전투의 화려함에 주목하지만 그 뒤에서 스폿 라이트도 받지 못하고 개고생 하면서 물자를 날라주는 보급부대에는 대부분 관심이 없지요.
    사실 어느 회사에서 근무하던지간에 영업과 같은 일선부서 직원들이 평가나 급여 및 상여에서 항상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방면 지원부서는 돈한푼 못벌고 쓰기만 한다며 갈굼당하기 일쑤인 것 같습니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린다고, 유사시를 대비해서 지원부서도 항상 적정한 유지및 관리가 들어가야 될텐데 말이죠...쩝.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7. 인퀴지터 2019.02.18 2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나 한심한 책이라 나폴레옹 매니아께서 거론할줄 예상도 못했습니다. 테메레르는.

  8. 유애경 2019.02.18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뭔가, 식량을 바닥내고 지나가는 프랑스군 에게서 , 머문자리를 초토화 시키고 지나가는 메뚜기떼를 연상하게 되네요.


  9. reinhardt100 2019.02.19 0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 저번에 한 번 언급했지만 20만 대군을 일거에 쏟아부어서 전선을 정리했어야 했다는 제 개인의 의견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복수의 보급선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프랑스 제국 단독으로 하기는 어려울거고 라인동맹이나 이탈리아 왕국 등의 실질적인 속국의 여력을 모두 동원해야 가능하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또한, 실질적으로 20만 대군을 영국군과의 전장에 투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만한 보급선 경비 병력이 또 필요하다는 것인데 사실 나시카님 말씀대로 이 정도 병력을 이베리아반도에 쏟아붓는 것은 다른 속국들을 방기하다 시피해야 한다는 점에서 도박인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할 건 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승산이 없는건 아니고 하나의 문제만 해결되면 절반 이상의 확률로 전쟁 전체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이베리아 전쟁을 승산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분리독립주의가 강했던 바스크, 아스투리아스, 갈리시아, 카탈루냐등을 전방 보급을 위한 배후지역으로 확보한 후 이 지역들에서 출발하는 간선도로망을 모두 확보합니다. 이후, 카탈루냐에서는 아라곤 및 발렌시아, 바스크-아스투리아스-갈리시아 전역을 석권한 후 카탈루냐-타라코나 및 사라고사-발렌시아 축선에서는 무르시아-카르타헤나를 공략 후, 지브롤터를 고립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카디스 혹은 리스본까지 지중해 연안 및 주변 내륙 전역을 점령해야 한다는 겁니다. 반면, 북부에서 출발하는 프랑스군은 부르고스-바야돌리드-살라망카까지 1차적으로 공략한 후, 마드리드를 고립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후, 메리다를 공략, 메리다-바다호스-리스본 공략을 순차적으로 이어가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점령하는 방식으로 갔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작전에서 전체 총병력은 프랑스군 공격군으로 24만 이상, 보급선 경비병력 최소 12만이며 이외 동맹군인 이탈리아왕국군, 라인동맹군, 스위스군 등을 합쳐 최소 10만 이상을 투입하며 작전 기간은 총3년, 동원 각종 야포 및 공성포 총 2천 문, 각 부대별 상비 비상식량을 최소 한 달분(러시아원정기 나폴레옹이 준비한 비상식량분 기준) 등의 보급역량을 갖추고 임한다는 가정하에 생각해본 겁니다.

  10. Spitfire 2019.02.19 1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베리아 반도의 척박하고 험준함을 들으니 일생의 목표인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고 싶어지네요~ 저길 걸었던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을지 궁금합니다.ㅎㅎ

  11. 웃자웃어 2019.02.19 2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급의 중요성이 입증되는 글이군요.

  12. 리틀락 2019.03.08 11: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은 경제력으로 하는거군요. 그렇게 무역을 중시했던 영국이 브렉시트 하는걸 보면 웃음이 납니다 ㅋㅋㅋ 대영제국의 영광을 되찾자는 자들이 경제관념은 바닥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