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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10

새로운 전쟁의 준비 (7) - 4만의 사나이 여태까지 보신 연합군 사정 중에서 핵심을 고른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향해 침공을 개시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연합국 모두의 의견이 일치 2) 3개군을 편성하되, 예상되는 나폴레옹의 침공 방향에 따라 그 중 보헤미아 방면군에 주력을 집중 3) 연합국 누구도 단독으로 평화 협정을 맺지 못하도록 3개 방면군 각각을 여러 국가의 혼성 부대로 편성 4) 군복과 장비에는 부족함이 많았지만 야전군 병력은 51만으로 충분했으며, 군량은 비교적 넉넉한 상황 이와 대비하여, 나폴레옹의 준비 상황은 어땠을까요? 먼저, 나폴레옹이 8월 중순까지 끌어모을 수 있었던 병력은 약 44만이었습니다. 여기에는 37만2천의 보병과 3만의 포병 및 공병, 그리고 그토록 애타게 원했던 기병대가 .. 2023. 11. 27.
프란츠브뢰첸(Franzbrötchen)의 전설 - 함부르크의 프랑스군 지난 편에서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의 1810년 함부르크 합병은 함부르크 시민들에게 매우 좋지 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대륙봉쇄령에 따른 경제적 몰락과 실업 사태에 덧붙여, 점령군 행세를 하는 프랑스군 병사들을 자신들의 집에 받아들여 먹이는 부담까지도 떠맡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한자 동맹의 중심 도시이자 자유 도시로서 남다른 지위를 누리던 함부르크 시민들에게는 프랑스군이 시내에 주둔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을 크게 갉아먹는 일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함부르크를 지배한 대략 8~-9년 동안 함부르크는 (좋든 나쁘든) 프랑스의 영향을 짧고도 강렬하게 받았습니다. 그런 영향은 몇몇 거리 이름에도 남아있지만 음식에도 남아있습니다. 바로 프란츠브뢰첸(Franzbrötchen)이라는 빵입니다. (누가 마치 군홧발로.. 2022. 7. 25.
끊어진 다리, 흔들리는 동맹 - 아우구스투스 다리의 의미 이미 베를린이 비트겐슈타인 휘하의 러시아군 손에 들어가고 드레스덴도 곧 빈칭게로더 손에 들어갈 것이 명약관화했던 3월 중순 즈음, 외젠에게는 6만이 채 안되는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다부 지휘 하에 드레스덴에 있던 7천5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단들 중에서도 언제나 병력 3만 이상의 특별히 강력한 군단만을 거느리던 다부가 1개 사단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력만을 이끌고 있던 것은 당시 약화된 그랑다르메의 신세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폴레옹은 다부는 특별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레이니에(Reynier) 장군이 러시아군에 쫓겨 드레스덴에서 철수하는 것은 뭐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에크뮐 대공(prince d'Eckmühl, 즉 다부)이 그런 모욕.. 2022. 6. 20.
러시아의 트라팔가 - 비아즈마(Vyazma) 전투 쿠투조프가 이런저런 욕을 많이 먹지만 나폴레옹 추격 전위대 지휘관으로 밀로라도비치(Mikhail Miloradovich)를 임명한 것은 무척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밀로라도비치는 나폴레옹보다 2살 어린 세르비아 출신의 귀족으로서, 러시아의 명장 수보로프(Alexander Suvorov) 장군이 수행했던 1799년 스위스 원정에도 참여하는 등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었고, 무엇보다 용감하기로 소문난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별명이 러시아의 뮈라(Murat)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운이 무척 좋은 편이라는 점에서도 뮈라를 쏙 빼닮았습니다. 그는 항상 자랑하기를 50번 넘는 전투 속에서 단 한번도 부상은 커녕 생채기도 입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결코 안.. 2021. 7. 5.
위기 일발 - 바그라티온의 탈출 바클레이는 엉망진창이었던 러시아군 지휘 체계 안에서 그래도 거의 유일하게 냉정한 두뇌를 유지하고 있던 용의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6월 26일 허둥지둥 빌나 철수를 하는 와중에도 잔뜩 쌓인 군수품에 불을 질렀을 뿐만 아니라 저멀리 떨어져있던 고집불통 제2군 지휘관 바그라티온에게도 전령을 보내어 후퇴하여 자신의 제1군과 합류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잠깐, '부탁'이라고요 ? 군대에서 군사작전을 벌이면서 '부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 어쨌든 바클레이는 그래야 했습니다. 이 어이없는 일은 모두 알렉산드르의 책임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바클레이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짜르가 바그라티온으로부터 보고를 직접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뜩이나 바클레이를 싫어하던 바그라티온은 바클레이를 자신의 상.. 2019. 12. 9.
번외편) 1812년 - 해로를 통한 원정은 어땠을까 ? 오늘은 번외편으로,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 원인 중 하나로 '원인'님께서 작성해주신 아래 댓글과 함께 거기에 대한 제 짧은 의견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은 절대 '원인'님 생각이 틀렸고 제 생각이 맞다는 내용이 아니며, 그냥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점을 먼저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원인'님께서 작성해주신 글 중 핵심 부분은 아래 부분입니다. 다부의 작전은 발틱해의 해상운송을 통해서 리보니아에 거점을 만들고 그 리보니아로부터 상트뻬쩨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공격하는 것인데, 나폴레옹이 다부의 건의를 무시하고 바로 육로직공을 선택한 것이 러시아 원정의 패배원인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 대해 몇몇 분이 영국 해군은 그냥 보고만 있었겠느냐는 댓글을 다셨고, 거기에 대해 다시 '원인'님께서 달.. 2019. 8. 15.
바그람 전투 (제 14편) -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의 탑 양측의 모든 장군들이 다 마찬가지였겠습니다만, 프랑스군의 맨 오른쪽을 담당한 다부(Louis-Nicolas Davout)도 새벽부터 바빴습니다. 사실 바그람 전투 두번째 날 스타트를 끊은 것은 로젠베르크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4 군단이 다부의 프랑스군 제 3군단을 습격한 사건이었지요. 이 공격은 이미 공격에 나설 준비를 해놓았던 다부에 의해 즉각 격퇴되기는 했습니다만, 나폴레옹이 현장에 달려오는 등 일대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왜 나폴레옹은 중앙을 버려두고 맨 동쪽 현장에 직접 달려갔을까요 ? 당시 39세로서 프랑스군 원수 중에서는 가장 어렸던 다부가 못 미더워서였을까요 ? 당연히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부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그 능력에 있어서나 충성심에 있어서나 최고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폴.. 2017. 9. 17.
바그람 전투 (제6편) - 라데츠키의 분전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을 맡고 있던 로젠베르크(Franz Seraph von Orsini-Rosenberg) 대공의 제4 군단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기만을 위한 미끼였습니다. 카알 대공의 주공은 어디까지나 우익, 즉 게라스도르프(Gerasdorf) 쪽의 클레나우의 제6 군단과 콜로브라트(Kollowrat)의 제3 군단이었지요. 그러나 미끼도 너무 작으면 큰 고기를 낚을 수 없는 법이었으므로 로젠베르크의 군단도 총 1만8천의 꽤 큰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저녁 무렵에 만신창이가 되어 합류한 노르드만(Nordmann)의 전위대 6천, 그리고 노스티즈(Nostitz)의 기병대 3천이 합류해 있었으므로 총 2만7천의 강력한 군세였습니다. (로젠베르크는 당시 49세로서, 작위는 Reichsfürst 였습니다. 왕보다는.. 2017. 7. 16.
바그람 전투 (4편) - 모두가 흰색이다 ! 이렇게 7월 5일 저녁 6시 경, 나폴레옹의 군단들이 게라스도르프(Gerasdorf)-바그람(Wagram)-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Markgrafneusiedl) 마을로 이어지는 오스트리아 방어선 앞에 전개하면서 나폴레옹은 이 날의 1차 목표, 즉 도나우 강을 건너 전체 병력을 전개한다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습니다. 마르히펠트에 쓸데없이 포진해있던 오스트리아군을 제때에 포착, 쉴새없이 공격하여 6천이 넘는 피해를 입힌 것도 기분 좋은 시작이었으나, 나폴레옹이 아군과 적군의 전개 모습을 보니 상황이 훨씬 더 좋았습니다. 요한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내부군(Army of Inner Austria)이 접근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프레스부르크(Pressburg, 현재의 슬로바키아 수도인 브라티.. 2017. 6. 25.
아스페른-에슬링 7편 - 고민과 선택 새벽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이른 시각이었던 5월 22일 새벽 3시 경, 이미 나폴레옹은 말 안장에 올라타 있었습니다. 그는 밤 사이에 란의 제2 군단 병사들이 도나우 강을 건너 좌안으로 이동하는 것을 직접 감독하느라 거의 쉬지 못했으나, 별로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이제 몇 시간 뒤면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격파할 생각에 부풀어 있었으니까요. 그의 기본 계획은 그 전날 전투에서 목격한 오스트리아군의 어설픈 배치의 틈을 파고드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아스페른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었고, 에슬링에 대한 공격은 다소 느슨했는데, 그 두 마을 사이의 중앙 평원에 대해서는 병력이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중앙을 돌파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항상 프랑스군의 선봉을 맡았던 란이 다시 한번 그.. 2017. 3.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