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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314

클럽과 스타벅스 - 나폴레옹 시대의 클럽 이야기 영국인과 결혼하신 어떤 40대 한국 여성 이야기를 와이프를 통해 들었습니다. 그 부부는 이태원에 사는데, 저희가 보기엔 특이한 점이 있더군요. 남편은 컨설턴트이고 와이프는 미용사인데, 각자 퇴근하면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태원의 한 맥주 홀로 간다는 거에요. 거기서 맥주 한잔 시켜놓고 앉아서 상대를 기다리고, 또 만난 이후에도 집에 안 가고 그 동네 고정 멤버들 (수십명 된답니다) 외국인 친구들과 이런저런 잡담과 정보 교환을 하다가 밤 11시 정도에 집으로 간다는 거에요. 요즘엔 아주 그 맥주 홀의 별도 공간(직원 only라고 적힌 지하실)에 따로 모인다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예전에 적었던 나폴레옹 시대의 클럽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기업체 임원이라서 회사 비용으로 한남동 고급 빌라를 제공받.. 2018. 5. 10.
위기의 대륙봉쇄 - 설탕과의 전쟁 (1편) 1810년 이제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위가 된 나폴레옹의 권력은 무소불위에 가까운 절정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그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도나우 강변에서 피를 쏟으며 싸운 병사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하고 엘베(Elbe) 강과 베저(Weser) 강 하구 북유럽 해안에 분산 배치되어야 했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영국과의 무역 전쟁인 대륙봉쇄령의 엄격한 집행을 위해 북부 독일의 항구 도시들을 감시하에 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북부 독일 해안에 이런 감시를 집중했을까요 ? 이는 북부 유럽과 남부 유럽의 문화적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농업에 의존해야 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 삶과 문화는 농작물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북부 프랑스 사람들의 생활 문화는 .. 2018. 5. 7.
나폴레옹 시대의 워드 프로세서 - 펜과 연필 Hornblower and the Hot Spur by C.S.Forester (배경 1803년 영국 플리머스 항 외곽) ------ (작은 슬룹선 핫스퍼 호를 끌고 막 플리머스 항에 닻을 내린 혼블로워 함장은 결혼한지 얼마 안된 상태이고, 아내의 얼굴을 본 지도 몇달 된 상태입니다. 프랑스 항구를 봉쇄해야 하는 임무 특성상, 그에게는 육지에 잠깐이라도 상륙하여 아내를 볼 여가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특히 당장은 함대 사령관의 기함에서 점심이나 같이 하자는 전갈이 온 상태라서, 식사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야 하는 상태인데, 저 멀리 부두가에 자신의 아내 마리아가 와서 손수건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듣습니다.) 혼블로워는 지금 이 순간처럼 해군 복무가 노예 생활 같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었다. 그.. 2018. 5. 3.
무기와 장난감 - 나폴레옹과 프랑스 공군 이야기 (마지막편) 기구 중대가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지 1년 후인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설 때 그의 함대에는 이 기구 중대가 필요한 장비와 함께 탑승해 있었습니다. 왜 나폴레옹은 주르당이나 오슈 등이 다 꺼렸던 기구 중대를 특별히 싣고 갔던 것일까요 ? 군사 천재인 그는 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정보 병기로서의 기구의 특성을 대번에 알아본 것이었을까요 ?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기구 중대를 데려간 것은 이들을 선전용 심리전 도구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끌고 출발한 13척의 전함, 7척의 프리깃함, 그리고 300척 이상의 수송선으로 구성된 대함대에는 수병들 외에도 보병 3만, 기병 2천8백, 야포 60문과 공성포 40문, 그리고 공병 2개 중대가 탑승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무척이나 독특.. 2018. 4. 29.
참패와 재기 - 나폴레옹과 프랑스 공군 이야기 (제3편) 프랑스 기구 중대의 역사적 시작이 주르당과 함께였던 것처럼, 그 몰락의 시작에도 주르당이 있었습니다. (주르당 원수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주르당 법 덕분인데, 그게 또 몹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무능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법안이었습니다. 즉, 그가 오스트리아군에게 참패를 겪고 그 책임을 진답시고 군에서 물러난 뒤, 정계에 입문하여 만든 법이 바로 주르당 법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주르당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가 얻은 명성은 프랑스 징병제 법안인 주르당 법(Loi Jourdan de 1798)에 의한 것일 뿐이며, 정작 그가 독일 전선에서 활약할 때 자주 참패를 겪었다고 했지요. 1795년, 프랑스 기구 제1 중대는 주르당이 사령관으로 있던 상브레-뮤즈(Sambre-et-Meuse) 방면군에 배속되었습니.. 2018. 4. 22.
상남자와 그의 여자 - 바그라티온과 예카테리나 * 러시아와 프랑스의 대표 상남자와 그들의 여자 이야기를 각각 1편씩 재업 합니다. (표트르 바그라티온 장군입니다. 약간 매부리 코인데요 ?) 프랑스의 상남자라면 저는 단연 장 란(Jean Lannes)을 뽑습니다만, 러시아에도 상남자로 불릴 만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바로 바그라티온 장군입니다. 동향 사람인 스탈린이 나중에 히틀러에 대한 대반격 작전 이름을 바로 이 장군의 이름으로 붙였었지요. 표트르 바그라티온의 정식 명칭은 Prince Pyotr Ivanovich Bagration, 즉 바그라티온 왕자였습니다. 왕자라니, 바그라티온이 로마노프 왕가의 아들이었나요 ? 아닙니다. 일단 여기서 prince라는 명칭은 왕의 아들이라기 보다는, 공작(duke)보다는 더 높으나 왕(king)보다는 더 낮은 직위를.. 2018. 4. 18.
엇갈린 평가 - 나폴레옹과 프랑스 공군 이야기 (제2편) 주르당의 어설픈 라임으로 조롱 받으며 파리로 돌아온 쿠텔을 맞이한 것은 서슬퍼런 국민공회 공안위원회(le Comite de salut public)였습니다. 그렇다고 공안위원회가 쿠텔을 단두대로 보낸 것은 아니었고, 정반대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공안위원회는 당시 국내외 반혁명세력과의 투쟁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었으므로, 과학을 통해 구시대의 적을 무찌른다고 하면 뭐든 해줄 기세였습니다. 샤또 드 뫼동(Chateau de Meudon)에서 몇 차례의 기구 기술에 대한 테스트가 이루어진 뒤, 공안위원회는 아예 세계 최초의 공군 무기창인 항공 개발 센터(le centre de developpement aerostatique)를 창설했습니다. 여기서는 나중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도 참여하고.. 2018. 4. 15.
혁명의 날개 - 나폴레옹과 프랑스 공군 이야기 (1편) 탈라베라 전투에서 빅토르의 복장을 터뜨린 주르당 원수에 대해 설명하면서, 주르당 원수의 몇 안되는 빛나는 승리 중 하나인 1794년 플뢰뤼스(Fleurus) 전투에 대해서도 언급했지요. 플뢰뤼스 전투 그 자체는 별 의미도 재미도 없는 전투입니다만, 이 전투는 군사학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세계 최초로 공군이 활약한 전투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왜 다른 나라들보다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의 공군이 탄생했을까요 ? 그 효과는 어땠을까요 ? 무엇보다, 왜 불세출의 군사 천재 나폴레옹은 이런 과학 병기를 활용하지 않았을까요 ? 계몽사상이 싹튼 나라 프랑스에서는 과학자들도 많았고 일찍부터 이런저런 과학 실험들이 많이 수행되었습니다. 열기구 및 수소 기구도 그런 활동 중 하나였습니다. 혁명 전인 1783.. 2018. 4. 8.
앙졸라와 싸운 자들은 누구인가 - 총기 규제와 국민방위군 이야기 미국이 잦은 총기 난사 사건을 겪으면서도 총기 규제를 하지 않는 표면적인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헌법 수정 제2조(The Second Amendment)입니다. 대개 이 조항이 미국 시민이 총기를 소유할 수 있는 불가침적인 권리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준다고 하지요. 그런데 최근 그런 해석은 틀린 것이며, 헌법 수정 제2조는 시민들에게 총기 소유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실린 기사를 읽었습니다. https://www.marketwatch.com/story/what-americas-gun-fanatics-wont-tell-you-2016-06-14 원래 수정 제2조는 아래와 같습니다. "A well regulated Militia, being necessary to the security of.. 2018. 3. 21.
왕과 원수들 - 탈라베라 전투 (2편) 1809년 7월 27일, 탈라베라에 모인 프랑스군의 주요 지휘관들은 제1 군단장 빅토르 원수, 제4 군단장 세바스티아니 장군, 그리고 조제프 국왕을 보좌하는 주르당 원수의 3명이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총사령관은 조제프 국왕 본인이었습니다만, 아무도 그에게서 전략이나 지휘를 기대하지는 않았지요. 세 명의 장군들 중에서 가장 전투 경험이 많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빅토르 원수였습니다. 세바스티아니는 원수가 아니었으므로 계급도 낮았지만, 사실 군인이라기보다는 외교관 및 행정 관료라고 할 수 있었지요. 문제는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 원수였습니다.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주르당은 16살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전했고, 프랑스령 서인도제도에서도 복무하는 등 험한 곳을 돌.. 2018. 3. 4.
아폴로 호는 왜 좌초했나 - 나폴레옹 시대의 GPS 최근 미군 소속 EA-18G 전자전 전투기가 2만5천 피트 상공에서 비행 중 환경제어시스템(environmental control system)의 고장으로 온도가 마이너스 34도까지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답니다. 2명의 조종사들이 얼어죽을 정도로 추웠다는 점 외에도, 당장 문제가 발생한 것이 캐노피 유리의 안쪽은 물론 주요 계기판에 불투명한 얼음막이 잔뜩 끼어 계기 비행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동상으로 인한 부상을 빼면 이 기체는 무사히 기지로 귀환했다고 합니다. 어떻게요 ? 놀랍게도, 조종사들이 손목에 차고 있던 450달러짜리 Garmin Fenix 3 스마트 왓치 덕분었다고 합니다. 물론 지상 관제소도 도움이 되었지요. 이 스마트 왓치는 기압과 고도, 그리고 진행 방.. 2018. 2. 26.
계곡의 연합군 - 탈라베라(Talavera) 전투 (1편) 1809년 5월 16일 폰트 다 미사헬라(Ponte da Mizarela)에서 술트의 프랑스군을 놓친 웰슬리의 영국군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1차 목표인 포르투갈 탈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성공일 뿐이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접경 지역 곳곳에는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 등이 이끄는 프랑스 군단들이 호시탐탐 포르투갈을 위협하고 있었으니, 이들을 격파하기 전에는 포르투갈이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웰슬리는 정말 이들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웰슬리의 영국군은 고작 2만명 수준이었습니다. 영국군에게는 이 정도면 굉장히 큰 규모의 야전군이었지만 스페인 내에서는 그리 인상적인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을 점거 중이던 프랑스군은 최소 7개 .. 2018. 2. 25.